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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17] [끝] 이승만이 남긴 교훈들

상림은내고향 2023. 12. 6. 13:38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소설가 조선일보 2013

 

10.25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적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줄 순 없소” 이승만은 휴전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유엔군 최고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급히 날아온 리지웨이가 김포공항의 간이 건물에서 그에게 압록강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리지웨이의 설명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당신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아이젠하워 만나 태극기 선물 -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가 미군 부대 시찰 도중 이승만에게 태극기를 선물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휴전에 반대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막는 방식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 뒤로 이 대통령은 줄기차게 휴전에 반대했다. 이미 공산군은 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지금 휴전하는 것은 힘이 부친 적군이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중공군이 다시 침입하면, 그때도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구원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얘기했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세계적 대결의 한 부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싸울 뜻이 없었고 미국의 휴전 노력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이 대통령을 성가시게 여겼다. 끈질긴 설득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미국은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반응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8월 14일까지였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는데, 이 대통령이 다시 뽑힐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가 뽑히도록 해서, 이 대통령을 쉽게 축출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미국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장면과 군정에서 줄곧 경찰 책임자를 지낸 조병옥이 유력한 후보들이었다.

 

대통령제에선 직선제가 옳은 방안이었고,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195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제의했다. 이어 그런 개헌의 선행 조치 삼아, 전쟁으로 미루어진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했다. 1952년 4월에 실시된 기초의원(시·읍·면) 선거와 5월에 실시된 도의원 선거에선 그가 이끈 ‘자유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서,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대 대통령 취임 1952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단에 선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서, 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고 대통령 선거는 5월 29일에 치르기로 의결했다. 5월 17일엔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 개헌안을 공고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직선제가 대결하게 된 것이었다. 이 대결에선 야당이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은 국회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막강한 미국 대사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열세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국민 동원이었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국민들은 이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국회는 타락한 지도층을 대변한다고 인식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자유당이 동원한 전국의 시민들이 부산의 국회로 몰려들어 의원들을 성토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들은 낮엔 시위하고 밤엔 벽보들을 붙였다.

 

이처럼 긴장이 높아지던 5월 23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긴장된 정국을 언급하고서 그는 “정치적 마찰이 생기면, 한국에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은 자신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국회 안의 공산주의자 11명을 적발했으며 그들을 체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혐의의 증거로 50달러 신권들이 가득한 가방 두 개를 보여주면서, 북한에서 홍콩을 거쳐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압수되었다고 설명했다.

 

1952년 5월 26일에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5월 24일에 부산 인근 금정산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를 공비들이 습격했는데, 계엄령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계엄군은 곧바로 ‘국제공산당 공작금’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을 체포했다. 다른 의원들은 숨거나 연금되었다.

 

특이하게도,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1916~1983) 소장인데 부산과 경남의 계엄사령관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이었다. 원 소장은 이 대통령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이 참모총장은 계엄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1개 사단을 부산 지역으로 보내라는 신태영 국방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내렸다.

 

격노한 이 대통령이 이 참모총장을 호출하자, 그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혼자 경무대에 갔다가 구금되거나 납치될 가능성을 걱정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나 밴플리트가 “나는 한국의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작전권이 나에게 있는 이상 부산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말해서, 이 문제는 풀렸다.

 

이 일화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당시 미국 대리대사였던 앨런 라이트너는 1973년의 대담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모반 음모를 밝혔다.

 

“어느 늦은 밤 내가 살던 대사관저 문 앞에 지프가 닿더니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들어왔어요. 그는 자신이 다른 (참모)총장들도 대변한다고 말했어요. 군부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지만, 후방 전선(home front)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그가 말했어요. (…) 육군 병사들과 해병 몇 명으로 그의 사람들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가택 연금시킬 수 있다고 말했어요. (…) 그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40 내지 50 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숨어버린 다른 의원들에게 나와서 선거를 치르라고 독려할 것이라고 했죠. (…) 자신이 참모총장인 한국 육군이 유엔군의 지휘를 받으므로,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미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 음모의 주동자들은 아주 동질적이었다. 이종찬 소장(일본 육사 49기),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일본 육사 50기) 등은 충실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고 일본군의 습속을 깊이 받아들였다. 일본군의 독특한 습속들 가운데 하나는 하극상(下剋上)이라는 기괴한 행태였다. 군국주의에 열광한 젊은 장교들이 장군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암살했다. 이런 행태는 흔히 젊은 장교들이 주동한 군부 반란으로 발전했다.

 

1945년 8월에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막고 전쟁을 계속하려고 소좌 1명과 중좌 1명이 일으킨 모반은 대표적이다. 그들은 동참을 거부하는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위조 명령서로 병력을 동원해서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왕의 측근 대신들과 일왕의 육성 녹음판을 수색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진압군이 이르자, 그들은 자결했다. 이렇게 봉기한 장교들에겐 일왕도 폐위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잘 알았으므로, 히로히토는 항복 방송을 하기 전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두 동생으로부터 충성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1952년 5월에 모반을 기도한 한국군 고급 장교들은 그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일본군의 습속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지니는 권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고, 기회가 오면, 군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종찬의 제안은 불법적이었지만, 라이트너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무부에 그 제안을 보고하고 받아들이라고 건의했다. 이어 그는 유엔 한국위원단과도 이 제안을 논의했고 “하늘이 보낸 기회”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라이트너의 경솔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큰 문제였지만,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달포가 지난 뒤, 라이트너는 이종찬과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미국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의원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미국의 지원으로 손쉽게 이승만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버텼던 야당 의원들은 낙심해서 이 대통령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에서 발췌한 몇 개 조항을 넣은 절충안이 국무총리 장택상에 의해 마련되었다. 뒤에 ‘발췌개헌안’이라 불린 이 개헌안은 7월 4일 국회에서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마침내 1952년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이 72%가 넘는 523만여 표를 얻었고, 2위인 이시영이 76만여 표를 얻었다. 이 대통령은 기형적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선거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제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엔 한국위원단의 1953년도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 구조는 대의적(representative)이고 민주적으로 유지된다”고 평가했다.

 

대의(大義)와 소절(小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승만은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젊어서는 막일도 했지만, 주로 연설 사례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박식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잘해서, 그는 늘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그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바삐 움직였다.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부부는 뉴욕에 있어서, 시간이 촉박했다. 이승만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차를 몰았다. 곧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기동경찰 오토바이 두 대가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더 빨리 몰았다.

 

그렇게 빨리 몬 덕분에, 그들은 경찰차에 따라 잡히지 않았고, 이승만은 시간에 맞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열변을 토했고, 청중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그머니 돌아보니, 그들을 쫓아온 기동경찰관 두 사람도 입구에 서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 사이, 경찰관 한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가왔다. “20년 동안 기동경찰을 하면서, 내가 따라잡지 못한 교통 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너무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을 시키시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그 뒤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에게서 운전을 배워서 자신이 차를 몰았다.

 

이 사소한 일화에서도 이승만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늘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에 막히지 않았고, 작은 고려 사항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민족을 이끌고 난세를 헤치면서, 그는 소절(小節)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친 적이 없었다.

 

 

⑫ 6·25 반공 포로 석방

美 반대에도 반공포로 석방… 납북될뻔한 남한 청년 2만명 구했다

 

▲풀려난 반공 포로들, 이승만 초상화 들고 행진 -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태극기와 이승만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6·25전쟁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7000여 명을 석방했다. 반공 포로들이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1951년 4월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그가 한국전쟁을 제한전(limited war)으로 치르려는 트루먼 정권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자탄을 쓰지 않는 제한전을 하기로 미리 방침을 정한 터라, 미군은 풍부한 인적 자원을 지닌 중공군에 이길 수 없었다. 승산이 없기는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내리 다섯 차례의 공세를 폈지만, 중공군은 얻은 것이 없었다. 인해전술로 전선을 돌파해도, 보급 능력 부족으로 공세를 지속할 힘이 없어서 미군의 반격에 큰 손실을 입곤 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서, 1951년 7월에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휴전 조건에 관해서는 합의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산군은 싸움터에서 얻지 못한 것들을 휴전 협상에서 얻으려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들을 내걸고 합의한 사항들을 재해석해서, 유엔군의 양보를 얻으려 했다.

 

게다가 휴전 협상 기간에 나온 소규모 전투들은 공산군이 바라는 전쟁 형태였다. 휴전 협상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양측은 대규모 작전을 피하고 전선을 정리하는 작전들을 수행했다. 자연히, 중요한 고지들을 차지하려는 싸움들이 벌어졌는데, 이런 싸움은 인명 손실이 컸다. ‘피의 능선(Blood Ridge)’,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저격능선(Sniper Ridge)’, ‘불모고지(Old Baldy)’와 같은 슬픈 이름들은 ‘전선을 정리하는’ 소규모 전투들에서 나왔다.

 

인명을 경시하는 공산군은 인명 손실에 민감한 미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실제로, 미군 사상자들의 60%가 이런 제한전에서 나왔다. 중국이 휴전 회담을 지연시키자, 미국은 맥아더가 추천한 대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공산군도 진지하게 협상에 임했다. 마침내 1953년 여름이 되자, 휴전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남은 쟁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공산군 포로들은 처음엔 여러 수용소들에 분산되었다. 그러나 섬이라 관리가 쉬운 거제도에 수용소가 서자, 모두 그곳으로 이송되었다. 북한군 포로 15만명과 중공군 포로 2만명이었다.

 

전선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적군 포로들을 관리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 문제는 수용동들을 서로 가까이 지은 것이었다. 포로들은 철조망 너머로 자유롭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서, 수용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무장 군사 집단이 되었다.

 

북한군 포로들은 북한군처럼 조직되었고, 수용동마다 북한 깃발이 내걸렸다. 포로들은 병원 구역을 중계소로 삼아 휴전 회담 북한 대표 남일 중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북한에 충성하는 친공 포로들은 다수 수용동들을 장악하고서 ‘의용군’으로 징집된 남한 출신 반공 포로들을 박해했다. 날마다 많은 반공 포로들이 인민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런 행태에 유엔군 당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수용소 당국은 유화적 태도를 유지했다.

 

휴전 회담에서 유엔군 측은 포로들의 송환에 앞서 그들의 의사를 물어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군과 중공군 대표들은 무조건 송환을 주장했다. 이 문제로 휴전 회담이 교착되자, 영국은 인도를 통해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3국으로 보내 관리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1952년 2월부터 유엔군은 본국 송환에 대한 공산군 포로들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에 남겠다는 북한군 포로들과 대만으로 가겠다는 중공군 포로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17만가량 되는 포로들 가운데, 북한이나 중공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포로들은 7만뿐이었다. 당황한 북한과 중국은 심사 절차를 거부했고, 친공 포로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용동들에 심사를 위해 수용소 당국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은 대화로 갈등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친공 포로들과 자주 만났다. 친공 포로들은 그런 순진한 행태를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1952년 5월 7일 도드가 포로들을 만나러 오자, 친공 포로들은 그를 유인해서 납치했다.

 

이어 벌어진 포로들과 수용소 당국 사이의 협상에서 친공 포로들은 휴전 회담에서 ‘심사에 따른 송환 방식’을 흠집 내는 데 주력했다. 미군 장교로 하여금 “나는 포로들이 앞으로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다”고 답신에 쓰도록 유도하고, 판문점 회담에서 북한군 대표는 그 구절을 포로들이 비인간적 대우를 받아온 증거라고 주장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서 먼저 새로운 수용동들을 건설했다. 친공 포로들이 이주를 거부하자, 병력을 투입했다. 포로들은 칼과 창을 들고 저항했지만, 전차까지 동원한 유엔군 병력에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묶여 있던 상당수의 반공 포로들이 구출되었다.

 

결국 3만6000명가량 되는 반공 포로들이 본토로 이송되어 8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보다 앞서 민간인들로 판정된 3만8000명은 한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중공군 포로들은 제주도로 이송되었는데, 친공 포로 5911명은 제주시에 수용되고 반공 포로 1만4298명은 모슬포에 수용되었다. 거제도엔 7만 남짓한 북한군 친공 포로들만 남았다.

 

반공포로 석방

휴전의 기운이 익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동의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밝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안전을 보장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최악의 경우 단독 북진할 것이니 한국 국민과 육·해·공군은 정부 명령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전국에 ‘특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대통령은 힘이 부친 적군에게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줄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휴전에 줄기차게 반대했다. 그의 호소에 호응해서, 전국적으로 지지 성명과 시위가 나왔다.

 ▲반공 포로 석방 보도한 본지 지면 -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관련 중대 담화 발표를 보도한 1953년 6월 20일 자 조선일보 1면. ‘내 책임하에 명령했다’는 제목이 보인다.

 

이 사이에 이 대통령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에게 반공포로 석방 작전을 준비시켰다. 원 사령관은 내무장관과 협의하여 탈출한 포로들을 숨기고 보호할 방도를 마련했다. 작전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에 개시되었다. 단전이 된 수용소들에서 철조망이 뚫리고 포로들이 일제히 탈출했다. 기다리던 경찰이 그들을 멀리 도피시켰고 민가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숨겼다.

 

수용소 탈출은 대체로 순조로웠으나, 경북 영천의 수용소에선 문제가 생겼다. 한국 경비대장이 미군 수용소장에게 거사 계획을 밝히고 선처를 부탁한 것이었다. 미군 소장은 즉각 비상령을 내리고 장갑차들을 배치했다.

날이 밝은 뒤, 대구 육군 헌병사령관 앞에서 서울 사령부에서 내려온 장교가 보자기를 풀었다. 긴 칼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대통령 각하의 선물입니다. 영천 포로들을 석방시키지 못하면, 우리 이 칼로 자결합시다.” 사령관은 곧바로 영천 경비대장을 불러 그 칼을 보였다.

 

그날 밤 9시에 약속대로 단전이 되자, 영천 경비대장은 철조망 절단 명령을 내렸다. 경비대원들은 미군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운 뒤, 철조망을 끊었다. 장갑차 공격조는 일제 사격으로 장갑차 전조등을 깨뜨리고 장갑차에 올라 준비한 고춧가루를 미군 승무원들에게 퍼부었다. 그 사이 막사에 잠입했던 요원들이 포로들을 이끌고 철조망을 벗어났다. 다행히, 거사를 막았던 미군 수용소장은 “이것은 정치 문제”라면서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말렸다.

 

이렇게 해서, 3만5698명의 반공 포로들 가운데 2만7388명이 풀려났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에 징집된 남한 출신 장정들이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 포로를 오늘 6월 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온 세계가 경악했다. 모두 그를 성토했다. 미국은 특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휴전 회담에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고 미군 포로들의 귀환도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태연했다. 그는 단숨에 대한민국 국민들인 반공 포로들을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이 반대해온 휴전 협상을 탈선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전쟁 당시 국군 포로 6만5000명… 포병장교 조창호, 1994년 北 극적 탈출

1951년에 포로 교환 협상이 시작되었을 때, 유엔군 사령부는 8만8000명의 한국군이 실종되었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7712명의 한국군만을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이내 반박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이전에 스스로 발표한 한국군 포로 숫자들을 집계하면 6만5000명에 이른다고. 결국 8726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귀환했다.

 

1994년 10월에 조창호 소위가 국군 포로들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연세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그는 자원 입대해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다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4명의 한국군 장교들이 함께 수감되었다. 그들은 모두 영양실조로 병사했다.

 

 ▲조창호 소위

 

조창호 소위의 증언으로, 아직도 북한에 한국군 포로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의 처지가 비참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2000년에 비전향 장기수 공산주의자 63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면서도, 한국 정부는 북한에 한국군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1994년 11월 조창호 소위는 중위로 진급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그의 복무 기간은 44년 3개월이었다. 2006년 그가 서거하자, 한국 정부는 장례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재향군인회가 나서서 ‘향군장’으로 치렀다. 국군장도 육군장도 아니고 향군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역에 참가했던 마지막 노병이 죽었을 때, 호주 전역엔 반기가 내걸리고 중국을 방문한 수상은 노병의 국장을 위해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했다.

 

2017년엔 이대용 장군이 서거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춘천 싸움’에서 6사단 7연대의 선임 중대장으로 공을 세웠다. 국군이 북진했을 때는 압록강에 맨 먼저 닿아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 대통령에게 바쳤다. 1975년 4월 자유 베트남이 공산 베트남에 멸망하자, 주베트남 공사였던 그는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공에 남았다. 미국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리콥터에 오르라는 미국 외교관의 제의를 마다하고, 그는 남아서 교민들을 외국 공관들로 대피시켰다.

 

그 자신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외교관의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생존이 어려운 환경에서 날마다 고문을 받았다. 전향해서 북한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주베트남 대사관의 부책임자였고 6·25전쟁의 영웅인 그는 선전 가치가 큰 인물이었다. 그는 그 시련을 끝내 견디고서 1980년 귀국했다.

이 장군의 장례는 가족장이었다. 심지어 신문에 부고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우리는 늘 진정한 영웅들을 그렇게 보낸다.

 

향군장이면 어떻고 가족장이면 어떠랴. 그들은 괘념치 않으리라. 그들은 스스로 얻은 영예가 있으므로. 중세 서양 시인이 노래한 대로, 영예는 삭지 않으므로.

 

가축들은 죽고,

친척들은 죽고,

자신 또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영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에겐.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조국 수호’ 밀서 들고 美 찾은 지 50년만에… 한미방위조약 맺었다

 

▲포사격 훈련 보는 이승만·아이젠하워·백선엽 - 1952년 12월 4일 경기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이 망원경으로 기갑부대의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오른쪽 끝에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서 있다. 1953년 7월 12일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승만의 휴전 반대에 대한 미국의 반응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한 뒤로, 미국은 그를 제거하는 계획을 다듬었다. 마침내 1953년 5월 24일 UN군 최고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확정했다. 이 대통령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다른 곳으로 유인한 다음, 미군이 부산에 진입해서 이 대통령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이 정부를 통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5월 29일에 열린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의 합동 회의에서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이 논의되었다. 육군 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은 이승만의 제거를 강력히 추천했다. 그는 이승만의 상호방위조약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그를 보호 감금(protective custody) 아래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한 뒤에, 주한 미군을 철수한다는 얘기였다.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가 실은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에 놓는 것 아닙니까?”

 

해군 작전차장 도널드 던컨 제독은 콜린스와 생각이 달랐다. 만일 이승만이 미국과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아군은 재앙적 상황을 맞을 수 있으니, 상호방위조약을 허락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이어 그는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세 해 동안 한반도에서 싸운 터에 갑자기 남한을 포기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 함의들을 품었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담당자들은 이승만의 거세고 끈질긴 휴전 반대 정책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지녔다. 어떤 대응책도 신통치 않았고 아군의 분열과 군사적 패배의 위험을 안았다.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미국의 반응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자, 휴전 회담이 마비되었다. 마지막 쟁점인 포로 교환 문제에 거의 합의한 터였는데, 제3국으로 송환될 북한군 반공포로들이 수용소들에서 풀려나 남한 사회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판문점에선 미군 대표들의 체면이 많이 깎였다. 보다 중요하게, 공산군에 억류된 미군 포로들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에선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료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이 대통령의 일방적 조치에 미국으로선 대응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먼저 떠오르는 방안은 이 대통령의 조치를 비난하고 한국전쟁에서 발을 빼는 길이었다. 이 경우, 한국군은 탄약 부족으로 며칠 못 가서 공산군에 패배할 터였다. 한국군이 전선의 3분의 2를 맡은 상황에선, 전세가 단숨에 적군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미군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게 철수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실은 기세가 오른 공산주의 세력이 남한만을 차지하고 멈추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남한의 공산화가 미칠 영향은 온 세계에 걸쳐 가늠하기 힘들 만큼 크고 오래갈 터였다.

 

보다 온건한 방안은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도 보기보다 위험하고 후유증이 크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궁극적 문제는 이 대통령이 워낙 뛰어난 지도자였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이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국군 장병들의 태도는 부정적일 터였다. 일반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폭발적이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한국군과 미군이 충돌할 수도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위험하고 후유증이 큰 군부 정변보다는 이승만과의 협상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매카시 상원의원의 활약으로 미국에선 공산주의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만일 아이젠하워가 공산주의 세력에 유화적 정책을 편다는 인식이 퍼지면, 그가 입을 정치적 타격은 작지 않을 터였다.

 

마침 신임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반공주의자여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다. 덜레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미국에 와서 협의하라고 초청했다. 이승만은 어려운 시기에 한국을 떠나기 어렵다고 밝히고 덜레스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다. 미국은 덜레스 대신 실무자인 로버트슨을 보냈다.

 

상호방위조약 협상

로버트슨은 1953년 6월 25일 서울에 닿았다. 미국이 조지 마셜 원수를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보내 ‘국공내전’의 휴전을 시도했을 때, 로버트슨은 그를 보좌했었다. 그는 중화민국이 공산당 반군에 패배해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일에선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옮겨간 뒤엔, 대만의 방위를 위해 진력했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관한 견해가 같았고 상대의 어려운 입장을 이해했으므로, 이 대통령과 로버트슨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협상했다. 마침내 7월 12일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으니,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상호방위조약 서명하는 한미 -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변영태(오른쪽) 외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고 있다.

 

이런 합의에 따라, 한국군은 휴전 협정 조인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그리고 12시간 뒤에 700리 휴전선에서 총성이 멎었다.

비참한 전쟁이 멈췄지만, 이 대통령은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날 발표된 성명에서 그의 비통한 마음이 읽힌다.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유엔은 이 목표를 위하여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8월 4일엔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양측의 입장이 상당히 달라서, 합의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장관이 조약을 가조인했다. 이어 10월 1일에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고 1954년 1월 13일에 발효되었다. 조약의 핵심은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킨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미군은 지금까지 70년 동안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을 지켰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 대통령에겐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일이었다. 1904년 겨울에 민영환과 한규설 두 우국 대신으로부터 조국을 지킬 방도를 마련하라는 임무를 받고 제물포에서 기선에 오른 지 반세기 - 그는 조국을 지킬 미국과의 조약을 마련하여 그 임무를 완수했다.

 

매카시, 北이 한국 침공하자 “공산주의에 맞서야”… 미국의 참전 이끌어내

美에 공산주의 위험성 일깨우고 이승만 우호 여론 조성하려 노력

 

매카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첩자들이 끼친 엄청난 해악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미국은 처음으로 안보 체제를 갖추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국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전에 살핀 것처럼, 매카시는 1950년 2월의 휠링 연설로 ‘애치슨선’을 무력화하고 북한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도록 만들었다. 1953년 여름엔 공산주의 세력의 위험을 미국 시민들이 깨닫도록 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 회담에서 공산군에 유화적 정책을 펼 정치적 공간을 줄였다.

 

 ▲매카시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그는 한국을 실질적으로 도우려 애썼다. 그가 큰 관심을 보인 문제는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선 호의적이면서도 자유 세계를 힘겹게 지키는 대한민국에 대해선 늘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1952년 여름 직선제 개헌과 관련된 ‘국제공산당 사건’이 일어났을 때, VOA는 그 사건에 관한 KBS의 발표를 뒤집는 내용을 방송했다. 이 일로 공보처는 VOA의 방송을 보름 동안 중단시켰다. 매카시는 VOA의 정책이사 에드윈 크레츠먼을 청문회에 불러서 상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크레츠먼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런 방송들에서 이승만에 관한 호의적 논평들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까?” 크레츠먼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언론이나 유럽 언론에서 ‘이승만에 관한 호의적 논평’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는 매카시의 공정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공산주의자들의 교활한 행태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나라에 대해서 결점들만을 얘기하고 장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설령 그 얘기들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편향적이 된다. 우세한 무력으로 침공한 공산군과 힘들게 싸우는 나라에 대해선 편향적으로 보도하고 침공한 북한이나 중공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으면, 편향성은 더욱 커진다. 매카시는 “호의적 논평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까?”라는 가벼운 질문 하나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는 미국 공보기관의 문제점을 또렷이 부각시킨 것이었다.

 

매카시의 차석 보좌관 로버트 케네디는 능력이 뛰어났고 매카시에게 끝까지 충성하면서 그를 도왔다. 중서부의 가난한 농장에서 태어난 매카시는 동부의 명문 케네디 가문과 아일랜드계 천주교도라는 공통점 덕분에 가까웠고 대통령이 될 존과 로버트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의회가 중공 정권과의 교역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그런 금지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서 전쟁 물자들이 중공 정권으로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담당 관리는 그 법이 동맹국 정부의 행위들에만 적용되고 개인들의 행위들엔 적용되지 않으므로 미국 정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케네디는 중국과의 교역에 이용되는 선박들이 주로 그리스 선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선주들을 만나서 금지된 품목들을 중국으로 수송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매카시는 상원에서 조지 마셜 원수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위해 일해왔다고 비난했다. 마셜은 2차 대전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마셜의 지휘를 받아 연합군의 작전을 주도했었다. 따라서 매카시의 마셜에 대한 공격은 실질적으로는 아이젠하워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인기가 높은 매카시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리라고 판단해 그를 꺾으려 했다. 같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박해하니, 매카시로선 도와줄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이없는 이유로 상원의 견책을 받았다. 울분과 실의로 건강을 잃은 그는 1957년에 죽었다. 그가 죽자, 그의 적들이 그의 악마화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공작을 주도한 러시아 비밀경찰 NKVD가 만든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말이 뿌리를 내렸다.

 

매카시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소비에트 러시아 첩자들의 실태를 가장 잘 알았을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간명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어떤 종류든지 나라를 전복하려는 사람들(subversives)을 공격하면, 당신은 나올 수 있는 가장 극단적으로 악랄한 비난의 희생자가 되게 마련이다.”

 

 

⑭경제개발 계획 수립

시장경제 씨뿌린 통상·산업정책… 박정희 경제개발 계획으로 이어져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말이 나오기 반 세기 전부터 이승만은 시장경제 신봉자였다. 그가 경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895년에 발간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바깥세상의 상업과 교역을 알게 된 일이었다. 그 뒤로 세계 경제를, 특히 발전하고 융성하는 미국 경제를 공부하고 관찰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제관을 세웠다.

 

1945년 6월 미국에서 그가 주도한 ‘대한민주당’이 창립되었다. 이 정당의 정책 가운데 하나는 “국제 통상을 장려함”이었다. 당시는 온 세계가 전쟁에 휩싸인 때였고, 나라마다 자급자족 경제(autarky)를 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과 그의 동지들은 국제 통상의 근본적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한강철교 개통 시승식 참석한 이승만 - 1952년 7월 22일 한강철교를 개통한 후 기차에 시승해 한강을 건너는 이승만(앞줄 가운데). 한강철교는 6·25 전쟁 직후 폭파됐다가 복구됐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6·25 전쟁으로 무산됐다. 그는 전후에도 경제개발 계획을 만들어 산업화 정책을 밀고 나가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등 기반 시설들을 건설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국제 통상 장려”라는 대한민주당의 정책은 이승만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따르는 명령 경제 체제에선 국제 교역이 들어설 자리가 아주 좁다. 이 점은 이승만의 경제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대조적으로, 중경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에 공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했다. 그래서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를 기본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게 되자, 그는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도록 힘썼다. 귀속 재산을 불하할 때, 그는 둘레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기업들도 민간에 불하하도록 주선했다. 농지 개혁을 할 때도, 그는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삼아 시장경제의 기본인 재산권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지주들의 보상금이 산업에 투자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그는 국민들이 기업가 정신을 지니도록 독려했다. 한국 주재 외국인들이 한국 특색이 있는 성탄 카드와 선물을 고국으로 보내려 해도 마땅한 물건이 없다는 얘기를 듣자, 그는 담화를 발표했다.

 

“작년에 성탄 선물과 성탄 엽서를 많이 만들어서 팔게 하라는 담화를 낸 후에 그 성적이 매우 좋아서 외국인들이 이 엽서와 기념품을 사다가 자기 나라에 많이 보냈던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도 차차 눈이 떠서 1년 동안 틈틈이 만들어 두었다가 때맞춰 팔 것으로 기대했던 바, 금년에 아직도 이런 물건이 장에 나오거나 PX에 진열된 것이 도무지 없다. (…)

 

우리 경제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말하기를, 한국 풍속과 특색을 그린 엽서들이 일본에서 들어온다 하며, 한국에서 난 것이 있으면 이것을 쓰겠는데 부득이 일본 것을 사게 된다 하니 우리 경제 발전을 이런 데까지라도 주의하여 생각하지 못하면 세계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생활 개선이 안 될 것이니, 모두 각성해서 부지런히 무엇이든 만들어 발전케 해야 할 것이다.”

 

경제개발 계획 수립

어렵사리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었지만, 1930년대 중엽에 시작된 중일전쟁 이래 큰 전쟁들을 치르느라 피폐한 한국 사회에서 민간 부문의 역량엔 큰 제약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과 국제연합이 제공한 대규모 원조는 정부 부문의 합리적 계획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선 전략적 분야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긴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했다. 대한민국이 서자, 그는 바로 ‘산업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1) 민수 공업품의 자급자족 2) 수출 공업 진흥 3) 중공업 육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처음 나온 ‘종합적 중기 계획’인 이 멋진 계획은 6·25전쟁으로 무산되었다.

 

▲원자로 기공식 첫 삽 -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 마크 2호' 기공식(1959)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휴전 반대를 철회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큰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제 원조도 함께 얻었다. 그는 전략적 부문마다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해서 원조 자금이 효율적으로 쓰도록 독려했다.

 

이승만 정권이 만든 마지막 경제 계획은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인데, 총량적 목표와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 모범적 경제개발 계획은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의 바탕이 되었다.

 

미국의 경제 원조에서 상당 부분은 미국 국내에서 소비되고 남은 잉여 농산물이었다. 전쟁으로 국민들이 굶주리니, 잉여 농산물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선물이었다. 이런 농산물을 국내 시장에 판매한 대금은 ‘대충(對充) 계정(counterpart fund)’에 예치되고 미국과 협의해 사용되었다. 대충 자금은 미국이 10~20%를 경비로 쓰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에서 썼다.

 

한국 정부가 쓰는 대충 자금 용도를 놓고, 한국과 미국 사이엔 늘 의견 차이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과 일본에서 소비재를 많이 들여오라고 권고했고, 한국 정부는 자금의 큰 부분을 산업 시설에 투자해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꿋꿋이 산업화 정책을 밀고 나가서, 당장 필요한 기반 시설들을 건설했다.

 

1959년에 건설한 충주 비료 공장은 대표적이다. 미국은 한국으로 하여금 자국에서 생산된 비료를 수입하도록 했다. 남는 농산물을 원조해주고 자국 비료를 사 가도록 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렇게 농업 부문이 미국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원조 자금으로 비료 공장을 먼저 세웠다. 이보다 두 해 전엔 문경 시멘트 공장과 인천 판유리 공장을 건설했다.

 

미 군정 시기에 북한이 전기를 끊어서 석탄 수요가 커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서자, 석탄 수송 철도인 삼척탄광선, 영월탄광선, 단양탄광선 부설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모두 부설되었다.

 

에너지 수요의 빠른 증가에 대응하여, 발전소도 여럿이 건설되었다. 화력발전소인 당인리 3호기, 마산 1·2호기, 삼척 1호기와 화천 수력 2호기가 건설되어 전력 12만7000kw를 공급했다

 

세 해가 넘는 전쟁으로 사회의 거의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처럼 효과적인 산업 시설 건설은 경이롭다. 많은 피란민을 받아들여 재우고 먹이는 일에도 벅찬 터에, 앞날을 내다보고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업 기반 시설에 투자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대통령의 인품과 통찰력을 깊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그가 1959년 3월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7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형 연구용 원자로를 기공한 것을 알게 되면, 그런 성찰은 깊이를 더한다. 아직 전란의 상흔이 도처에 남은 시절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먼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었다. 당시 그를 비웃은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지 못해서 앙앙불락한 주한 미국 대사관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경제 부흥에 애쓴 덕분에 우리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전후의 연간 성장률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1954년 9.5%, 1955년 5.6%, 1956년 0.6%, 1957년 9.4%, 1958년 6.6%, 1959년 5.6%였다.

 

이처럼 빠른 경제 발전이 가능하도록 만든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외국에서 많은 원조가 들어오면, 그것을 쓰는 과정에서 부패가 따르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효율적으로 빈민 구호와 산업 개발에 투입되었다.

 

그런 효율적 행정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는 사정이었다. 길고 파괴적인 전쟁은 도덕 수준을 낮추고 법의 엄정한 집행을 방해하고 권력을 쥔 자들의 행패를 부른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서 부패한 고위 관료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10일, 이 대통령은 “정부 관공리가 민간에 나가서 재산이나 물자를 토색(討索)하는 것은 유래(由來)로 다스리는 것이오, 더욱이 민국에 있어서는 이를 엄금하는 법률이 자재(自在)하고 당국에서 엄절(嚴切)히 집행해가는 중인데, 근래에 정령(政令)이 해이해저서 지방에서 토색하는 것이 50~60종류에 이른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감독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 농림부장관 및 내무부 지방국장을 즉각 파면했다.

 

이처럼 단호하게 부패에 대해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통령 자신이 청렴하고 늘 국민을 보살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중공군에 패해서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 빼앗길 급박한 상황이었던 1950년 12월 27일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난중일기’에 기록한 일화는 그의 성품을 전한다.

 

“대통령은 일선으로 시찰 떠나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장갑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내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장갑을 사양하는 그에게 억지로 주어 보냈다고 한다.

 

부상병들을 위문한 후 대통령은 서울역 부근을 돌아보았다. 추위 속에서 대통령이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돌아보는 것을 본 어떤 노인이 불에 데워 (종이와 헝겊으로) 꼭꼭 싸서 손에 쥐고 있던 따뜻한 조약돌을 대통령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대통령은 호주머니에 있던 작은 잣 주머니를 피난 가는 노인에게 선물했다고 김장흥 총경이 말해주었다.”

 

인하공대 설립

1952년 11월 부산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은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했다. “김 장관, 한국의 MIT를 세우도록 하시오.” 전쟁이 끝나면 무너진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 일에 긴요한 요소가 기술 인력이라는 뜻이었다.

 

마침 그해는 하와이 이민 50주년이었다. 1902년 12월에 121명이 일본 여객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조지 존스 목사 부부가 운영하던 안골예배당(내리교회) 신도였다. 그래서 하와이 이민 다수는 기독교 신앙이 깊었고, 이민 사회는 침례교회 중심으로 움직였다. 세 해가 채 못 되는 기간에 7500명가량 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 이민은 조선 역사상 첫 공식 이민이었고 가장 성공적인 집단 이민이었다. 그리고 하와이는 이승만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1913년부터 하와이의 젊은 세대를 가르쳤고 그곳 동포들의 충실한 지지 덕분에 긴 세월을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인천에 좋은 공대를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와이에 설립해서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을 대학 설립의 종잣돈으로 삼았다. 그 돈에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과 국고 보조금을 보태서 대학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대학 이름은 인천의 인(仁)자와 하와이의 하(荷)에서 따서 인하공과대학(IIT)이라 지었다. 두 해 뒤, 금속, 기계, 광산, 전기, 조선, 화학공학 여섯 학과에서 신입생 179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처음 공대 설립을 밝히자, 미국 대사관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비웃었다. 치열한 전쟁을 하느라 생존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웬 공대냐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1958년엔 인하공대와 서울공대에 원자력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듬해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시험용 원자로를 설치하려는 계획에 선행하는 조치였다. 그 뒤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역사다.

 

 

⑮ 이승만의 허물

문제는 사사오입보다 ‘종신 대통령’ 길을 연 개헌이었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제2차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해 보니,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당시 재적 의원은 203명이었다. 따라서 제2차 개헌안은 135.333…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1표가 모자라자, 사회를 맡은 최순주 부의장은 부결을 선언했다.

 

이튿날 갈홍기 공보처장이 “개헌안은 통과된 것으로 본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인체는 소수점으로 나눌 수 없으므로, 소수점 이하는 사사오입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멱살 잡힌 국회 부의장 - 1954년 11월 29일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제2차 개헌안 가결을 선언하자 이철승 의원이 최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11월 29일 최 부의장은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그러자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거칠게 항의하고서 퇴장했다. 자유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회의는 ‘부결된 개헌안이 가결 통과’된 것으로 수정해서 정부로 이송했다.

‘사사오입 개헌’이라 불리게 된 제2차 개헌에서 핵심적 내용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통제를 줄여서 헌법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도록 한 것이었다.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조항과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은 대표적이었다. 제1차 개헌으로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제2차 개헌으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많이 지우면서, 비로소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연임 제한 조항의 우회

제2차 개헌안의 핵심은 실은 본문이 아니라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부칙이었다. 여기서 언급된 제55조 제1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였다. 따라서 제헌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개헌은 재적 의원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는 찬성표를 ‘사사오입’으로 억지스럽게 맞추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형식적 문제였고, 어떤 뜻에선 사소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한 제헌헌법의 규정은 결코 제2차 개헌의 부칙과 같은 편법으로 우회해선 안 되는 본질적 규정이었다. 설령 개헌안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적법하게 통과되었더라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관행은 가장 먼저 그리고 성공적으로 대통령제를 운영해온 미국에서 나왔다. 미국 헌법은 처음엔 대통령 임기를 제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중임한 뒤 물러나고 다른 대통령들도 그를 본받으면서, 중임제가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에서 한창인 전쟁을 이유로 들면서 3선에 나서서 당선되었다. 이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는 사정을 내세워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은 여러 중대한 문제들을 드러냈고, 1947년에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수정 헌법 제22조가 만들어졌다.

 

이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을 숭배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이 낳은 문제들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워싱턴 대신 루스벨트를 따라 종신 대통령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물음이 나온다, ‘왜 이 대통령은 그렇게 연임에 집착했는가?’ 그는 권력 자체에 집착한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1954년엔 연임을 시도했는가?

 

이내 떠오르는 답변은 당시 동아시아의 위태로웠던 정세다. 1953년 7월의 휴전협정엔 ‘협정 발효 뒤 3개월 안에 정치회담(political conference)을 연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1954년 4월에 제네바에서 자유 진영의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이 공산 진영의 북한, 중국, 소비에트 러시아와 회담을 열었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가 중립국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중립국일 수 없다는 한국의 주장을 미국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므로 북한에서만 유엔이 주관하는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중립국들이 선거를 주관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북한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측 다 양보할 뜻이 없었으므로, 회담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영국이 주도해서 ‘참전국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유엔의 주관으로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이 안을 받아들이라고 한국에 강권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참전국 타협안’이 본질적으로 “유엔과 대한민국이 스스로 과거의 결의와 행동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점을 들어 미국의 거센 압박에 맞섰다. 결국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정치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기초를 허물려는 공산 진영의 술책과 그것에 동조한 우방의 압력을 끝내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다.

 

당시 제네바에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제도 다루어졌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 공산군에 항복한 날에 시작된 협상에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삼아 북쪽의 공산주의 지역과 남쪽의 자유주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만가량 되는 북부 사람들이 남부로 탈출했다. 이들은 주로 하이퐁 항을 통해서 미국이 보낸 배들로 탈출했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200만 내지 300만 명이 배를 못 타서 북부에 남았다고 추산했다.

 

1950년 12월 미군의 흥남철수작전 덕분에 탈출한 북한 주민은 10만 가까이 되었다. 당시 배가 부족해서 흥남 부두에 모인 피란민들의 절반만 싣고 나왔다고 철수작전의 보급을 지휘한 제임스 도일 제독은 술회했다. 따라서 하이퐁 철수는 흥남 철수의 10배가 넘는 규모였고 남겨진 사람들은 20 내지 30배가 되었다. 흥남 철수의 비극을 노래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국민 가요가 된 그때, 하이퐁 철수의 비극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었다.

 

 ▲이승만 운구 행렬에 몰린 추모 인파 - 1965년 7월 27일 서울 중구 정동교회에서 거행된 영결식이 끝나고 국립묘지로 향하는 이승만의 운구 행렬. 시청 앞 광장에 추모 인파가 가득 찼다.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에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면, 공산주의 국가들은 틀림없이 제네바 회담을 다시 열자고 할 터이고 미국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새로 총선거를 치르자고 할 것이다. 거의 틀림없이 미국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때 과연 내 후임자가 미국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까?”

 

그 심중한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의 답변에 동의했을 것이다. 당시 그의 후임으로 유력했던 신익희, 장면 및 조병옥은 미국의 뜻을 거스를 의사도 의지도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이퐁 철수의 비극이 막 펼쳐지던 1954년 여름에 이 대통령은 연임 제한 조항의 우회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대의를 위해 소절에 얽매이지 않는 결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추론은 그의 오랜 친구 윌리엄 불리트가 남긴 글에 의해 떠받쳐진다. 첫 소비에트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불리트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외교관으로 1953년 6월에 서울에 와서 이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미국에선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이승만이 거의 공황 상태(hysteria)가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막상 만나보니, 이 대통령은 “차분하고, 기지가 넘치고, 현명하고, 결심이 서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불리트는 그를 “자신의 임무를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감히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 부정

이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꾀하면서, 그의 둘레엔 뛰어난 추종자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고른 후계자는 그의 비서 출신인 이기붕이었다. 이 선택은 연임 결정의 문제점들을 키웠다. 이기붕은 큰 흠이 없고 능력도 상당했지만, 정치 지도자로선 자질과 경험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당선 가능성이 낮았다.

 

1956년 5월 15일의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공천했다.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면을 공천했다.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에 급사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과 조봉암 사이의 대결이 되었는데 이승만이 70%를 얻었고 조봉암이 30%를 얻었다.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이 46%를 얻었고, 이기붕은 44%를 얻었다.

 

선거 당시 이 대통령은 이미 81세였다. 그리고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보다 ‘미래 권력’인 이기붕 둘레로 모였다. 이기붕이 이 대통령의 수석 비서였으므로, 이 대통령의 측근들도 그가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수석 비서 역할을 오래 했다. 이런 사정은 이 대통령 내외에게 올라가는 정보를 이기붕 내외가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를 앞두고, 승산이 작다고 판단한 이기붕과 그의 지지자들은 선거 부정을 획책했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사하면서, 이승만 후보는 자동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선거 부정을 강행했다.

 

선거 부정이 워낙 노골적이었으므로, 민주당은 투표 참관을 포기하고 3·15선거는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 주권에 대한 강도 행위”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발표에 촉발되어, 투표일 저녁에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서, 4월 19일엔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학생 100여 명이 죽었다.

 

이 대통령은 4월 26일에 하야를 선언했다. 그리고 허정을 수석 각료인 외무부 장관에 임명해서 새 내각을 이끌도록 한 뒤, 4월 28일에 경무대를 나왔다. 그 괴로운 과정에서 그는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로선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라는 한마디를. 긴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이 든 것이었다.

 

하와이에서의 말년

속옷 주머니에 틀니비용 넣어온 프란체스카… 며느리 “그곳이 어머님의 스위스 비밀 은행”

 

이화장에서 기거한 지 한 달인 1960년 5월 24일, 이승만 내외는 하와이의 최백렬 한인동지회장으로부터 초청 전보를 받았다. 모든 비용을 부담할 터이니, 하와이에서 한동안 휴양하라는 얘기였다. 허정 내각 수반의 주선으로 5월 29일에 그들은 김포 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이튿날 신문들은 이승만이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재무부 차관이 그가 재임 시에 1700만 달러의 국고금을 유용했다고 발표했다. 한 신문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막대한 금액을 미국과 스위스의 은행에 예금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승만 부부는 그 이자만으로도 여생을 편히 지내리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귀국을 막아 하와이 체류가 길어지자, 주위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다른 이유로 늦어진다고 둘러댔다. 이승만 부부는 옛 친구들과 제자들이 마련한 거처로 옮겼다. 길어야 3주 머물다 갈 생각이었으므로, 노부부는 가져온 것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귀국이 마냥 지연되자,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병상 지키는 프란체스카 여사 - 1962년 하와이에서 병상의 이승만 곁을 지키고 있는 프란체스카. 1960년 4월 하야한 이승만은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간 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눈을 감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귀국을 막는다는 것을 깨닫자, 이승만은 절망했고 그의 건강은 빠르게 나빠졌다. 그는 1965년 7월 19일에 하와이에서 운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장례 뒤에 혼절해서 치료를 받느라, 남편의 관이 서울로 떠난 뒤 하와이에 혼자 남았다. 한국에선 생계를 꾸릴 길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황이 안정된 1970년에야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양아들 내외에게 먼저 틀니를 하겠다고 말했다.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다면서,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며느리가 물었다, “어머님, 왜 기술이 더 좋은 오스트리아에서 틀니를 하시지 않으셨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하실 때는 1달러도 아끼셨는데, 어떻게 몇 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니?”

 

아들과 며느리는 3000달러가 들었던 그 속옷 주머니를 ‘어머님 스위스 비밀은행’이라 불렀다.

 

 

[16] 우남의 후계자

독립운동 세대서 경제 발전 세대로… 이승만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전설적 지도자였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경력과 미국에서 수행한 독립운동은 그의 명성을 한껏 높였다. 그래서 해방 뒤에 나온 모든 정당이 그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주석에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이승만을 올렸다. 덕분에 이승만은 가장 큰 추종 세력을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이승만 서거 후 프란체스카 여사 만난 박정희 - 이승만 서거 후 한국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의 경제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승만이 추진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승만의 실질적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자연히, 당시 남한 정계의 관심은 이승만의 후계자 자리로 쏠렸다. 명망으로 따지면, 어려운 시절에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가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엔 두 가지 난제가 있었다. 하나는 나이였다. 그는 이승만보다 한 살 아래였고 이미 69세였다. 그로선 이승만 다음에 집권한다는 각본을 따를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해외파 임정 요인들이 국내에 뿌리가 없었다는 사정이었다. 김구를 지지하는 우익 세력은 이미 국내파 민족 지도자들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장악한 터였다.

 

마침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가 한반도를 신탁통치 아래 둔다고 결정해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미군정청에서 권력을 단숨에 빼앗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1945년 12월 31일에 서울에 뿌린 임시정부의 포고문은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많은 군정청 직원이 포고문을 따라 임시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이런 움직임은 당연히 미군정청의 강경한 대응을 불렀다.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김구를 불러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온다고 서약하고서 약속을 어겼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그들을 인천의 수용소에 수감한 뒤 중국으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정청의 이런 반응에 김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실책으로 김구는 남한에서 움직일 정치적 공간을 많이 잃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잘 아는 그가 성공할 수 없는 ‘남북 협상’에 매달린 것은 이런 사정에서 연유했다.

 

이승만, 김구와 함께 해외파 우익 지도자로 꼽힌 김규식은 이승만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그는 재능이 이승만에 버금갔지만, 행적이 어지러웠다. 1923년에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세우자고 나섰을 때, 김규식은 그들의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쫓겨났다. 그런 경력 때문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류가 세운 한국독립당에선 추종자가 없었다.

 

 ▲박정희가 보낸 꽃바구니 받은 이승만 -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보낸 꽃바구니를 전달받고 있는 이승만. 그 오른쪽은 박 의장의 의전비서관 조상호.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좌우 합작’을 추진하면서, 하지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발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추종 세력이 약해서 좌우 합작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가 이승만을 밀어내는 데 실패하자, 좌우 합작은 막을 내렸고 김규식의 정치적 꿈도 스러졌다.

 

국내파 지도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송진우였다. 1930년대에 동아일보 사장으로 활약하면서, 그는 이광수와 함께 단군, 세종, 이순신 삼성(三聖)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의 하나로 이광수의 전기 소설 ‘이순신’이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이어 농촌 지역에서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여 한글을 보급했다. 압제적 일본의 통치 아래서 이런 민족적 사업을 벌인 것은 송진우의 인품과 경륜을 잘 보여준다. 그는 뜻이 굳으면서도 현실적 제약을 늘 인식하고 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

 

1945년 12월 29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주재로 신탁통치 반대 대책을 논의했다. 이어진 확대 회의에서 “우리 임시정부에 즉시 주권 행사를 간망(懇望)할 것”이라는 결의가 통과되었다. 그런 결의는 미군정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송진우는 그런 결의가 품은 중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놀랍지 않게도, 그는 비난과 오해를 받았다.

 

이 회의를 마치고 자정 지나 집에 돌아온 송진우는 이른 아침에 한국독립당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김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송진우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송진우는 국내파 지도자들의 중심 인물이었고 미군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였다. 우익인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은 지지 기반이 겹쳤으므로, 국내 기반이 없는 한국독립당이 뿌리를 내리려면 한국민주당을 밀어내야 했다.

 

송진우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승만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비보에 경악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픔과 걱정을 만시(輓詩)를 지으면서 달랬다.

義人自古席終稀(의인은 예부터 자리에 누워 죽는 일이 드물고)

一死尋常視若歸(한번 죽음을 심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가듯 한다)

擧國悲傷妻子哭(온 나라 슬픔에 젖고 처자는 소리 내어 우는데)

臘天憂里雪霏霏(섣달 하늘 망우리에 눈만 푸슬푸슬 내린다)

 

두 해 뒤 김구는 한국민주당의 실질적 지도자 장덕수를 암살했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을 연결하는 고리였으므로, 장덕수의 죽음은 이승만에겐 큰 불행이었다. 장덕수가 살았다면, 이 대통령이 이기붕을 후계자로 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듭된 암살은 김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송진우의 암살은 미군정청이 제대로 수사할 능력이 없었다. 장덕수의 암살은 미군정청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고, 김구는 법정에 불려 나가 피의자로 심문을 받았다. 이 일로 김구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송진우와 장덕수가 갑자기 죽자, 한국민주당은 내세울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적었던 신익희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선거 유세 중 서거했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선 조병옥이 야당 후보로 나섰지만, 신익희처럼 선거일 직전에 병사했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책임제로 바뀌고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을 겪은 터라, 사회는 응집력이 약해졌고 집단적 시위가 잇따랐다. 집권한 민주당까지 신파와 구파로 분열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런 상황에 허약한 장면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침내 1961년 5월에 5·16 군부 정변이 일어났다. 미국은 장면을 다른 지도자들보다 선호했으므로, 주한 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 소장이 이끈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장면 총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장 총리는 수녀원에 숨어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5·16 군부 정변이 성공했다.

 

장면 정권은 9개월 동안 존속했다. 그 짧은 기간에 세 차례나 개각했다는 사실이 가리키듯, 내각이 안정되지 못했고 뚜렷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반면에 군부 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18년 동안 존속하면서 경이적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실질적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후계자 박정희

1961년에 군부 정변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박정희 소장은 나라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집권 세력이 발표한 ‘혁명 공약’은 반공과 친미를 내세웠는데, 그것은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의 전력을 고려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 정책은 없었다.

 

이력이 가리키듯, 박 대통령은 시장경제에 비판적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먼저 처리한 경제 법령이 ‘부정축재처리법’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그는 시장경제를 확신한 이 대통령과 달랐다.

 

그러나 지도자로 나라를 이끌면서, 그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특히 경제에서 차지하는 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업가들과 협력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따랐다. 그리고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경제정책은 이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추구한 경제정책을 충실히 본떴다. 그의 경제정책의 상징이 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 대통령이 마련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 바탕을 두었다.

 

박 대통령의 통치 아래서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큼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자, 그런 성취의 바탕을 놓은 이 대통령의 업적도 따라서 위대해졌다. 그런 뜻에서 박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살필 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박 대통령의 성취는 일본과 수교한 일이다. 그것은 무척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한국의 안전과 경제 발전에 긴요한 요소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지고한 가치를 공유한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협력하고 경제적으로 보완함으로써,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

 

다른 중요한 일과 마찬가지로, 한일 수교 협상도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시작해서 바탕을 마련했다. 1951년에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흔히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라 함)에 한국도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 제국의 영토 분할’로 생긴 국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일본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밝혔다. 그래서 1951년 10월에 도쿄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양측 입장이 너무 달라서 진전이 없었다.

 

어떤 뜻에선, 한국도 일본도 수교에 나설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52년 정초에 이 대통령은 홍진기 법무부 법무국장을 불렀다. 홍 국장은 한일 회담 대표단의 일원이었는데 국제법에 밝아서 어려운 문제 협상을 맡았다. 이 대통령은 난제들의 전망에 관해 듣더니, 홍 국장의 나이를 물었다. 그리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이 나라는 자네들 나라야. 앞으로 한일 관계 역시 자네들 젊은이가 설계하고 발전시켜 나갈 일이야.” 그리고 자신과 같은 독립운동 세대가 이끄는 동안은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기 어려우리라고 전망했다.

 

대표단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회담을 시작했을 때, 이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했다.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런 조치는 오직 이 대통령만이 생각해내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일본 사회는 경악했고 한국의 조치를 거세게 비난했다. 당연히, 회담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평화선’은 단기적으로는 일본 어선들의 남획을 막아 동해 어류 자원을 지키고 장기적으로는 일본과 벌일 협상에서 큰 패가 될 터였다.

 

박 대통령은 평화선을 협상의 패로 삼아 과감하고 끈질긴 외교로 일본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합의가 어려운 문제들을 우회하는 전술로 두 나라는 마침내 1965년에 수교했다. 이 대통령에게 간곡한 당부를 들은 “젊은이” 홍 국장은 1917년생으로 박 대통령과 동갑이었다. 이 대통령의 예언대로, 젊은 세대가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한 셈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평화선’이라는 결정적 패를 마련한 이 대통령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 누가 찬탄하지 않으랴.

 

고귀한 선택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대조적이다. 한 분은 독립운동가로 일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고, 다른 분은 일본 제국의 장교로 젊은 시절을 살았다. 한 분은 세계적 반공 지도자였고, 다른 분은 한때나마 남로당 당원이었다. 다른 면에서도 두 지도자는 서로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중요한 국익이 걸린 상황에선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선뜻 버렸다는 점에선 두 분이 같았다. 이 대통령은 얄타 협정의 비밀 협약 폭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주장, 휴전 반대와 같은 일이 그런 고귀한 성품의 발로였다. 박 대통령은 한일 수교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파멸을 부를 수 있는 길로 망설임 없이 접어들었다.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한일협정에 반대했다. 특히 학생들은 극렬하게 반대했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때 필자는 대학 2학년이었다. 단과대학의 100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과 교수들 가운데 한일 수교가 타당하며 학생들의 반대는 단견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원로 사회학자인 학장 한 분뿐이었다. 물론 학생들은 그분의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았다. 모두 나라를 구한다는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시위가 오래 이어지면서,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차츰 정권 타도 운동으로 바뀌었고 야당 지도자들이 가세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터라서, 박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실제로, 1964년 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이어진 반대 운동은 휴교령과 비상계엄령을 불렀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일본과 맺은 좋은 관계가 한국의 안보와 경제의 바탕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지난 정권 아래서 북한에 호의적인 세력이 ‘토착 왜구’라는 구호로 일본과 맺은 관계를 해치려 시도했지만, 박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 얼마나 고귀한 선택이었나 새삼 일깨워주었을 따름이다.

 

 

[17] [끝] 이승만이 남긴 교훈들

대세 거슬러 지킨 자유민주주의… 이승만 삶을 배워야할 이유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 무대에서 내려온 지 어느덧 60년이 넘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가 하야한 뒤 태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삶은 우리에게 무슨 뜻을 지니는가?

 

▲뉴욕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 -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이 1954년 8월 2일 뉴욕시가 마련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에서 뉴욕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맨 앞 차량 일어선 사람이 이승만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마다 함께했던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위협을 경계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썼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 물음은 “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가?”라는 물음을 부른다. 이 심중한 물음의 모범 답안은 아마도 “교훈을 얻기 위하여”일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얘기는 이런 견해를 대표한다.

 

그러나 방대한 역사에서 자신에게 절실한 교훈을 얻기는 쉽지 않다. 먼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아야, 적절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폴란드 역사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는 지적했다. “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역사에서 배우는 근본적 지식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얘기다.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19세기 중엽에 서양 문명이 밀려오면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치른 서양 문명이 워낙 우세했으므로, 우리의 전통적 문명은 빠르게 서양 문명으로 대치되었다. 이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원한 전통들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몇 백년 전 조선조의 우리 조상들은 우리를 몰라볼 것이다.

 

이승만은 개항 바로 전 해인 1875년에 태어나서 젊을 때부터 조선 역사의 중요한 현장들에 있었고 나이 들어선 나라를 이끌었다. 자연히, 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의 눈에 들어온 사건들을 살피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듬어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주의의 위협

이승만의 마음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러시아를 실제로 경험하고 러시아의 실체를 깨달은 지도자였다.

 

러시아의 기원은 13세기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모스크바 대공국이었다. 둘레의 다른 공국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 제국의 일부인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의 공국들은 공(prince)이 다스리는 사회로 백성들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체제였다.

 

▲카퍼레이드에서 색종이가 흩날리는 가운데 이승만이 모자를 벗어 군중에게 인사하는 모습.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몽골 제국이 약해지자, 모스크바 대공국은 점차 흥기해서 러시아의 맹주가 되었고 끝내 유라시아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안으로 압제적이고 밖으로 팽창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졌다. 러시아는 그런 영향력을 갖가지 이권들을 얻는 데에만 썼고 조선에서 막 시작된 개혁엔 적대적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승만은 안으로는 압제적이고 밖으로는 탐욕스러운 러시아의 전통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 세대 넘게 지난 1933년에 이승만은 협력적 관계를 맺으려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찾았다. 국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중국 대사관의 도움을 얻어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에 닿았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는, 약속과 달리, 접견을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의 동청철도(東淸鐵道)를 중국에 돌려주지 않고 일본에 매각하려 했는데, 그 일로 일본 협상단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의 비위를 맞추느라, 러시아는 이승만을 추방한 것이었다. 이 씁쓸한 경험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에 관해 깊이 깨달았다.

 

이어 1930년대 중엽에 기괴하고 음산한 ‘모스크바 재판’이 열렸다. 스탈린은 정적들을 숙청했을 뿐 아니라 고문과 위협으로 그들의 의지를 꺾어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연출된 재판들’을 세계에 선보였다. 이 재판들은 헝가리 작가 아서 케스틀러의 위대한 정치 소설 ‘일식’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현대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중세적 체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체주의 체제가 덧씌워진 사회임을 이승만은 통찰했다. 이런 통찰이 그의 큰 업적들 가운데 아마도 으뜸일 ‘얄타 협정의 비밀 협약’ 폭로를 가능하게 했다. 우연히 입수한 문서 하나로 그는 스탈린이 얄타 회담에서 꾸민 음모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덕분에 한반도는 조선 사람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통째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병합되는 운명에서 벗어났다.

 

러시아의 본질에 관한 이승만의 통찰을 미국 지도자들은 1940년대 중엽에야 비로소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자, 러시아는 갑자기 서방에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당혹한 미국 국무부는 모스크바 주재 부대사인 조지 케넌에게 이런 변화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46년 2월에 워싱턴에 보낸 ‘긴 전보(Long Telegram)’에서, 케넌은 러시아의 비타협적 팽창주의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기부터 이어진 전통에 바탕을 두었고 공산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과 케넌의 견해는 근년의 러시아 역사의 지지를 받는다. 1990년대 초엽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스로 무너졌다. 그 잔해에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했는데, 주된 상속자는 러시아 공화국이었다. 이들 공화국은 모두 소비에트 러시아의 명령경제를 버리고 시장경제를 택했다. 그렇게 소비에트 체제가 벗겨졌어도, 러시아는 여전히 안으로는 압제적이고 밖으로는 팽창적이다. 러시아의 가장 근본적 지층인 제정 러시아의 중세적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10년 전에 러시아의 크리미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아직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제 러시아는 쇠퇴하는 나라가 되었다.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성기에 스탈린이 세운 위성 국가들인 북한과 중국이 세계의 자유주의 질서를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승만의 삶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슨 교훈을 보여주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들려주는가?”

대한민국의 핵심적 특질은, 즉 정체성은, 인류 역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다. 우리는 1945년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기 시작했고 1948년 이후엔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꾸려왔다.

 

반면에, 북한과 중국의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러시아의 경험은 교훈적이다. 설령 북한과 중국에서 전체주의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중세적 전통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을 어렵게 하고 팽창적 태도를 지니도록 만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정체성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를 외부의 지속적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코와코프스키의 말대로,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진정한 교훈이다.

 

이승만의 삶에서 배우는 교훈들

여기서 물음이 나온다. “우리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 아는데, 왜 굳이 이승만의 삶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살펴야 하는가?” 이 자연스러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는 나름으로 독특한 역사를 지녔고 그 역사의 관성에 따라 진화하리라는 사정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자라온 과정을 살펴야, 앞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 과제인 북한 동포들도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도록 하는 일에선 특히 그러하다.

 

6·25 전쟁에서 나온 감격적 장면들 가운데 하나는 1950년 10월에 이 대통령이 평양을 찾아 시민들에게 연설한 일이다. 그때 그는 북한을 찾기 위해 미군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38선을 넘어 먼저 진격한 것이 한국군이고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워 평양에 먼저 입성한 것도 한국군이었지만, 미국은 북한에 미군 군정을 펴겠다고 고집했다. 북한과 한국은 별개의 국가들이며, 국제연합군이 점령한 북한은 국제연합을 대표한 미군이 군정을 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 북한 동포들도 자유민주주의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는 우리의 간절한 희망이 만날 엄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북한의 압제적 체제가 무너져도, 중국만이 아니라 국제연합이나 미국도 남한과 북한은 별개의 국가라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사례는 한반도를 가로지른 38선·휴전선과 대만 해협이 지정학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정이다. 1949년에 ‘국공내전’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승리로 끝나고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나면서, 동북아시아에선 대만해협으로부터 한반도의 38선·휴전선을 거쳐 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의 소야(宗谷)해협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북쪽엔 중국, 북한, 러시아의 전체주의 세력이 자리 잡고 남쪽엔 중화민국, 한국,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이 자리 잡았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군대를 파견해서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고심 끝에 그 고마운 제안을 사양했다. 중화민국의 참전은 곧바로 중공군의 개입을 부를 터였다. 그처럼 조심스러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공군은 북한군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이 일화는 대만 해협과 한반도의 38선·휴전선이 처음부터 연결되었음을 일깨워준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면, 한반도는 다시 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대만 해협-휴전선-소야 해협으로 이어진 대치선의 북쪽 전체주의 세 나라는 모두 핵무기를 지녔다. 남쪽 자유주의 세 나라는 모두 핵무기가 없다. 지금 핵탄두 보유에서 러시아(5889기), 중국 (410기), 북한(30기)의 합계는 미국(5224기)보다 상당히 우세하다. 그리고 중국은 핵무기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사정이 그렇게 다급한데도,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막는다. 북한군이 많은 전차를 보유한 것을 알면서도 한국군에 대전차 무기조차 제공하지 않고 주한미군이 철수한 1949년의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1952년에 휴전에 반대하면서, 이 대통령은 ‘지금 휴전하면, 지쳐서 먼저 휴전 제의를 한 공산군이 기운을 차려서 다시 공격해올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상황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앞날에 맞을 상황을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서, 이승만의 삶은 소중한 교훈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기리는 일을 넘어 그의 삶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졸고를 읽어 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승만 오디세이’를 통해 이승만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이승만을 미화했다는 평가도 들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위대한 인물의 경우, 실책이나 허물도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을 이룬 요소들이 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이승만이 너무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정 때문에, 그의 인품과 업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찬사로 느껴질 터입니다.

 

졸작 ‘물로 씌어진 이름’이 나온 뒤, ‘왜 그렇게 이승만에 매달렸는가?”라는 물음도 자주 들었습니다. 길 수밖에 없는 답변을 줄이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썼습니다.”

 

이승만은 우리 문단에선 ‘고압선’입니다. 만지면, 어려운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은 이승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모두 이순신이나 안중근이나 남로당처럼 안전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남한 작가들이 단체로 북한에 가서 북한 작가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면서 북한의 선전대로 하면 당장 평화 통일이 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북한에 무슨 작가가 있나? 선전선동 요원들뿐이지. 만일 북한에 진정한 작가가 있다면, 그는 아오지 탄광이나 요덕 수용소에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저는 문단의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친했던 문인들과도 서먹해졌습니다. 덕분에 저는 문단의 기류에 마음 안 쓰고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썼습니다.

 

짧은 글로 이승만의 업적을 살피다 보니, 중세 사회에서 태어나 현대 사회에 자연스럽게 적응한 그의 신비스러운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졸고가 계기가 되어 독자들께서 보다 충실한 글들을 찾아 나선다면, 저로선 보람이겠습니다.

복거일 소설가 2023.12.05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