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11/
11-01(수) 서울의 ‘김포’공항

이현종 논설위원
김포국제공항의 주소는 김포시가 아니라 서울시 강서구 하늘길(공항동)이다. 1939년 일본군이 이곳에 김포비행장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김포공항이 개항할 때는 주소가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이었는데, 1963년 양서면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에 있게 됐다. 1914년에 지금의 김포군과 서울 양천·강서구가 모두 김포군이었지만, 1963년 양천·강서구가 서울에 편입됐고, 1998년엔 김포군도 시로 승격됐다.
김포시는 서울에 인접한 농촌 지역으로 KBS가 1990년 9월 첫 방송을 내보낸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98년까지 방송된 내용의 주요 무대는 김포 고촌면 신곡리 이야기로 이후엔 강화 등지에서 촬영됐다. TV 드라마 사상 최장수 프로인 MBC ‘전원일기’의 극 중 배경이 양촌리로 나오면서 김포 양촌읍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 촬영됐다.
총선을 앞두고 김포시를 서울시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홍철호 국민의힘 김포을 당협위원장이 지난달 도심 곳곳에 ‘경기북도? 나빠요. 서울특별시! 좋아요’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경기도가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설치 관련 절차를 본격화하면서 경기북도의 범위에 김포시를 포함하지 않은 채, 시에 편입 여부를 선택하도록 했다. 김포시 측은 경기도의 방침에 따라 이달 경기북도 편입 여부와 관련한 주민 여론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달 30일 김포시를 방문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당론으로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추진키로 약속하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긍정 검토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인구수가 48만 명인 김포시는 신규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다. 김포시가 서울에 편입되면 26번째 구가 된다.
오 시장은 적극 환영이다. 서울시의 현 인구가 940만 명인데 김포시를 합하면 1000만 명에 근접하고, 김포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고 포구가 있어 ‘해상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다. 주민투표와 서울, 경기, 김포 의회의 표결, 특별법 제정 등 복잡한 절차가 남아 있고, 구리·광명·하남·고양·과천 등 인근 지역의 요구도 나올 수 있다. 이런 이슈가 나오는 것을 보니 선거가 다가온 모양이다.
11-02 尹대통령의 18분 vs 27분

오승훈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5일 국회 본회장에서 예산안 시정연설을 총 18분 28초 동안 했다. 올해 10월 31일 시정연설은 27분 20초였다. 시간 차는 9분쯤인데, 내용과 형식, 어조의 차이는 같은 대통령이 한 연설인가 싶을 정도였다.
시정연설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잘 심사해서 제때 통과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자리다. 대통령이 을(乙)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시정연설에서 국회 협조를 요청한 발언은 딱 세 번이다. 그것도 간접 화법이었다. “협조를 부탁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다” “국회의 협력이 절실하다” “법정기한 내 예산안을 확정해주시길 기대한다”가 전부였다.
올해는 여야 의원들을 향해 직접 화법으로 “부탁드립니다” 5회, “당부드립니다” 1회, ‘협력’ 8회, ‘협조’ 5회에다 “감사드리는 바입니다”라는 표현도 있었다. 지난해엔 야당이 시정연설 자체를 보이콧 했고, 올해는 일부 비례(非禮)와 신사협정 위반 논란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달라진 대통령’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이다. ‘경청’이란 단어도 등장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 상임위원장들과 간담회에서 “많은 말씀을 잘 경청하고 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1시간 회의를 한다 치면 59분 동안 얘기한다는 대통령이다. 영장을 쓰듯이 조목조목 따지고 격노하는 일도 잦았던 대통령이다. 이날 3시간 이상 국회에서 머무르며 ‘웃는 얼굴’로 공을 들인 건 대변신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30일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국민은 정부 고위직과 국민 사이에 원자탄이 터져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 벽에 작은 틈이라도 열어줘 국민 목소리가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다. “국민이 좋아하는데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고 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 부수기의 첫 현장이 국회였던 셈이다. 다음 날엔 “모든 건 내 책임, 내가 잘 하겠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취임 이후 1년 반 동안 93개국과 142회의 정상회담을 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시정연설에서는 “1년 동안 야당 대표와 93회 회담, 당정대 회의를 142회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국민은 더 반가울 듯하다.
11-03(금) 테너 이용훈의 앙코르

이미숙 논설위원
오페라는 성악가와 코러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빚어내는 종합 공연예술이다. 마에스트로가 공연을 총괄 지휘하기 때문에 주역을 맡은 스타 성악가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성악가들이 개별 콘서트에선 관객의 앙코르에 응하지만, 오페라에선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요즘 인기 절정의 독일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지난 2016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자코모 푸치니의 ‘토스카’ 공연 때 카바라도시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2번 부른 게 예외로 꼽히는 이유다. 새벽 사형을 앞둔 카바라도시가 사랑하는 토스카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을 절규하듯 노래한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박수가 그치지 않자 카우프만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은 뒤 아리아를 다시 불렀다. 유튜브에 올려진 당시의 명장면은 조회 수가 20만 회를 넘겼다.
테너 이용훈(50)이 지난달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 공연 중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를 2번 불러 화제다. 이용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월드클래스 성악가지만, 국내에서는 개인 콘서트는 물론이고 오페라 출연도 한 적이 없다. 사실상 데뷔 무대라고 볼 수 있는 서울시립오페라단 주최 공연에 이용훈은 2회 출연했는데, 두 번째 공연 때 앙코르에 응하는 과감한 팬서비스를 한 것이다. ‘아무도 잠들지 마라’는 1990년 로마월드컵 전야 콘서트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불러 세계적 인기를 얻는 아리아다.
빈 공연 때 앙코르에 응하기 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던 카우프만과 달리, 이용훈은 객석의 환호에 거침없이 아리아의 첫 소절 ‘네순 도르마’를 시작함으로써 관객을 열광시켰다. 서정적이면서도 맑고 힘 있는 고음으로 아리아의 마지막 소절 “빈체로(나는 이기리라), 빈체로”를 부르는 모습은 전성기의 파바로티를 연상시켰다. 투란도트 공주가 던진 3개의 수수께끼를 풀고, 사랑을 쟁취한 칼라프 왕자처럼, 한국인들도 안팎의 역경을 결국 이겨낼 것이라는 응원의 노래 같았다. 국내 오페라 시장은 5000억 원대의 뮤지컬 시장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티켓 완판을 이끈 이용훈의 스타 파워를 잘 활용하면 K-오페라 시대도 열릴 수 있을 듯하다.
11-06(월) 커지는 차이나 리스크

이철호 논설고문
요즘 중국은 경제 지표가 좋으면 증시가 하락한다. 지난달 18일 전년 동기 대비 4.9%나 증가했다는 ‘3분기 성장률 서프라이즈’에, 상하이종합지수는 이틀간 2.5% 넘게 빠졌다. 이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가 좋아지면 정부의 부양책 강도가 약해질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10월 제조업 구매자관리지수(PMI)는 49.5로 50을 밑돌았다. 한 달 만에 제조업 경기가 다시 위축된 것이다. 부동산 사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헝다(恒大) 그룹은 만기가 돌아온 52조 원의 채무를 갚지 못했고, 비구이위안(碧桂園)도 외화표시채권의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올 들어 중국 은행들의 부동산 대출은 23년 만에 처음 감소했다. 온 사방이 지뢰밭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달 30일 직접 중앙금융공작회의를 주재해 부동산 위기와 금융 문제를 논의했다. 중국 CCTV에 따르면 시 주석은 “당 중앙이 반드시 금융업무를 집중·통일적으로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국무원은 곧바로 1조 위안(약 180조 원)의 적자 국채를 발행해 경기 부양에 들어갔다. 이제 금융·부동산은 총리나 런민은행이 아니라 시 주석이 직접 챙기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당 중앙의 강력한 의지에도 시장의 시큰둥한 반응이다.
요즘 중국엔 ‘3M(My car, My home, Mobile) 끝물’ 공포가 지배한다. 주택은 이미 공급 과잉으로 1억 채가 빈집이고, 4∼5년 전부터 자동차와 스마트폰 시장도 포화 상태다. 주택과 소비 거품이 꺼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출신의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의 부동산과 사회간접자본은 심각한 과잉 건설 상태”라며 “성장률이 곧 3% 내외로 둔화할 것”이라 경고했다. 시장에 비관적 정서가 넘치면 어떤 경기 부양책도 안 먹힌다. 정책 함정에 빠진다.
9월 들어 우리의 생산·소비·투자 지표가 ‘트리플 증가’로 돌아섰다. 10월 수출도 13개월 만에 플러스가 됐다. 반도체 시황 개선과 대중 수출의 반짝 효과 때문이다. 하지만 앞길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중국 경제 지표는 언제 다시 고꾸라질지 모른다. 미·중 디커플링도 멈출 기미가 없다. 대중 의존도가 심했던 독일은 ‘유럽의 병자’ 신세다. 차이나 리스크의 경계감을 누그러뜨릴 때가 아니다.
11-07 시간제 일자리 활용 방법

문희수 논설위원
고용 통계를 보면 늘 안쓰럽다. 일자리를 간절히 원하는 청년층 취업자는 매번 줄어드는 반면, 5060 세대만 증가하는 패턴이 굳어진 탓이다. 그런데 최근 통계에선 주목할 변화가 보인다. 통계청이 발표한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 형태별 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가 812만2000명으로, 지난해 8월보다 3만4000명 줄었지만, 그중 시간제 근로자는 오히려 18만6000명 증가했다. 특히, 20대인 대졸 이상 시간제 근로자가 115만 명으로 역대 최대였다.
이에 대해 통계청은 여성의 참가 확대가 두드러지며, 특히 과외·학원 강사 등의 교육, 트레이너 등 예술·스포츠 분야, 숙박·음식업 등에서 취업자가 늘었다고 한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적으로 쓰려는 인식 변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자발적으로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한 비율이 지난해(55.6%)보다 높은 59.8%로 역대 최고치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물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일제 일자리다. 그렇지만 시간제 일자리를 저질의 비정규직으로 무시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수요자 시각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독일은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때 하르츠 노동개혁을 통해 실업문제를 해결했다. 주 5일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3시간 미만 일하는 미니잡과 이보다 보수가 많은 미디잡을 허용해 돌파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4년 64.3%였던 고용률은 하르츠 개혁 이후인 2008년 70%를 넘었고 2012년엔 72.8%로 올라갔다.
한국도 이제 시간제 일자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공부 외의 여유 시간을 이용하려는 학생과 취업준비생, 자녀를 키우며 남는 시간에 일을 원하는 부모 세대, 소득이 필요한 고령층 등엔 전일제보다 더 적합하다. 정년 연장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정년 연장은 국민연금 크레바스를 메우자는 취지로 제기되지만, 기업 부담 확대와 함께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시간제 일자리도 휴가·복지 등을 근로시간에 비례해서 쓰도록 하는 등 보완하면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다. 고용이 최대 복지다. 시간제라면 무조건 나쁜 비정규직으로 규정하는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1-08 한국화가 유근택

김종호 논설고문
“1980년대의 거대 담론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일상(日常)’이라는 소소한 질문에, 나는 관심을 가졌다. 만나는 사물이나 사건이 때로는 엄청난 에너지를 동반하고 있다는 지점을 인지(認知)하면서, 그림의 방향을 바꿨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상은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지만, 예술가는 바늘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것 같은 견고한 일상에 틈을 만들고 뒤집으면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성신여대 교수인 한국화가 유근택(58)의 말이다. 이런 말도 했다. “작가가 대나무를 칠 때는 색이나 형태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의 호흡과 몸과 정신을 대나무를 통해 드러내는 미학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는 대상과 작가의 하나 되기를 지향한다. 그래서 사군자(四君子)를 ‘그린다’고 않고, ‘친다’고 한다.”
그에게 화두인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 아니다. 그 속에서 잊힌 감각을 깨우치게 해주는 또 다른 세계다. 그는 전통적인 먹과 붓으로, 거칠면서 긴 호흡으로, 굵고 선명하게 화폭을 툭툭 건드리는 담백함으로 전환해갈 때도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서사(敍事)가 응축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정신성이 자칫 관념적·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다”며, 자신의 절대적 명제인 ‘리얼리티’의 진정성과 조우(遭遇)하는 작업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화단에서 ‘뉴 웨이브(New Wave)의 상징’이던 그는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않는,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던 시기에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이라는 말로 표현되던 시대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한다. 한국화의 전복(顚覆)을 꿈꾸며, 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그가 6년 만의 개인전 ‘반영’을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지난 10월 25일 시작했다. 오는 12월 3일까지다. ‘창문’ ‘거울’ ‘이사’ ‘봄-세상의 시작’ ‘말하는 정원’ ‘반영’ ‘분수’ 연작 등 대표작 40점을 선보인다. 그 전시 작품들을, 베이시스트이면서 작곡가인 정수민이 음악 언어로 풀어낸 앨범의 음원 5곡이 8일 공개되기도 했다. 그 LP 앨범은 12월에 나올 예정이다. 그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그가 “일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나의 관계성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11-09 이준석과 인성 파탄

김세동 논설위원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4일 자신을 만나러 부산 토크 콘서트 행사장으로 찾아온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을 “미스터 린튼”이라고 부르며 영어로 “우리의 일원이 됐지만, 우리와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한 데 대해 당 안팎이 들끓고 있다. 대척점에 있던 친윤석열계는 물론이고 우호적이었던 쪽에서도 ‘인종차별’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 ‘인성이 문제’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성 상납 증거인멸교사 의혹과 윤석열 대통령 원색적 비난으로 당원권 정지를 당한 것보다 더 큰 정치적 위기로 보는 시각도 많다.
파문이 커지자 이 전 대표는 ‘(인 위원장의) 언어 능숙치를 생각해서 미묘한 뉘앙스를 포함한 정확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영어로 응대했다’는 식으로 해명했는데, 이게 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인 위원장 집안은 구한말에 선교·의료 사업을 위해 들어온 외증조부 때부터 4대째 한국서 살아왔고, 할머니와 부친은 물론 본인도 전라도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유창한 귀화 한국인이다. 이 전 대표의 행태는 인 위원장을 이방인 취급한 것으로, 남의 나라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달 29일 핼러윈 추모대회 일부 참석자가 인 위원장에게 한 “한국놈도 아니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와” 등의 거친 욕설 장면과 오버랩 되면서 인종차별엔 좌우가 따로 없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미국 예일대 나종호 교수는 “미국 같으면 인종차별로 그날로 퇴출될 것”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했다.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 ‘새로운선택’의 곽대중(필명 봉달호) 대변인은 “국민의 일원이 된, 한국어가 능숙한 사람에게 영어를 쓴 것은 ‘너는 우리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저열한 혐오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주체사상을 껴안고 사는 북한의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고 체류 외국인이 올해 9월 기준 251만4159명으로, 전체 인구(5137만 명)의 4.89%나 되는 다민족국가 한국에서도 외국인 혐오가 노골적이라는 건 문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했고, 장래가 촉망되던 영향력 큰 정치인이 이런 사고를 치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더 심각하다.
11-10(금) ‘프리 철수 리’의 유재건

이미숙 논설위원
50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총격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사형을 당할 뻔한 재미동포 이철수(1952∼2014)는 한인 커뮤니티의 적극적인 구명운동 덕분에 수감 10년 만에 극적으로 석방됐다. 이철수는 6·25전쟁 때 미군 병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간 엄마를 따라 소년 시절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성폭행을 당해 낳은 아들을 새로운 땅에서 잘 키우려던 엄마의 꿈은 차이나타운 사건으로 깨져버렸지만, 이철수는 한인 기자와 변호사 등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지역 신문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이경원 기자와 새크라멘토 법률구조회 소속 변호사였던 유재건(1937∼2022) 전 의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최근 국내 개봉된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Free Cholsoo Lee)’에서 이경원은 “한국계 청년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탐사 보도를 시작했다”면서 “미 주류 언론의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1978년 1월 첫 보도 후 ‘철수는 우리의 철수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재건은 법정 변호사 역할을 하면서 이철수 석방 운동을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아시안 연대 운동으로 전환시켜 이끌었다. “아시안에 대한 미국인들의 편견이 철수를 감옥으로 보낸 것”이라면서 재판 때마다 부인 김성수와 한인 시위를 주도했다. 이철수는 1973년 수감 후 교도소 내 폭력 사건에 휘말려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기도 했지만, 아시안 커뮤니티의 헌신적 지원 덕분에 1983년 풀려났다.
‘프리 철수 리’를 만든 하줄리·이성민 감독은 한인 2세다. 2014년 이철수 장례식 때 만난 원로 이경원(95)의 회고담을 듣고 다음 세대를 위해 얘기를 남겨야겠다는 마음에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고 한다. 유재건은 미주 한인의 이철수 구명운동사를 기록한 ‘함께 부르는 노래’(2009)를 펴낸 바 있다. 6년에 걸친 법정투쟁을 통해 이철수의 무죄를 입증해낸 그는 책에서 “난쟁이 나라가 거인국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이철수가 출소 후 “내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며 제일 먼저 “유 변호사께 감사한다”고 말한 배경이다. 영화가 끝난 뒤 흐르는 엔딩크레디트에는 ‘유재건을 기억하며’라는 문구가 나온다. 오는 12월 1일은 그의 1주기다.
11-13(월) 대통령의 인간성

오승훈 논설위원
#1. 1989년 가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조세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강연자였는데 실무진 실수로 30분이나 늦었다. 김 총재는 미동도 않은 채 기다리다 발표 내용을 경청했다. 김 총재는 “부가가치세를 없애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소상공인들의 반발을 알고 있었다. 교수가 “대체 세수입 없이 폐지는 불가능하다”고 잘랐다. 30대 교수의 단호한 태도에 김 총재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점심 자리에서도 유머를 섞어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한번 만나면 왜 그의 사람이 되는지 알게 됐다.
#2. 19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이 기획예산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다. 외환위기 극복이 당면과제였다. 교수의 눈길을 끈 것은 대통령이 직접 정리해 놓은 빽빽한 메모지였다. 거기에 줄을 그으면서 회의를 진행했다. 구체적으로 묻고 지시했다. 일부 고위공직자는 진땀을 흘렸다. KT&G 관계자가 담배 수출액을 몰라 머뭇거리자 김 대통령이 일러주기도 했다.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과 치열한 학습을 직감했다.
#3. 2000년 11월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서울대에서 강연했다. 저녁 9시쯤 강의가 끝나 배웅하는데 학생들이 차에 타려는 노 장관을 둘러싸고 얘기를 시작했다. 1시간 넘게 대화가 이어졌다. 의례적 내용이 아닌 토론이었다. 다음 날 교수는 장관 비서관에게서 “장관님이 학생들과 학교 인근에서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눈높이를 맞추는 특유의 포용력을 갖고 있었다.
오연천 울산대 총장이 최근 펴낸 ‘국정 리더의 길’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40년간 교수, 정부 기구 위원, 서울대 총장으로 일하면서 이명박·박근혜·문재인까지 6명의 대통령과 직접 대면한 경험을 회고한 기록이자, 리더십 측면에서 분석한 국가 지도자론이다. 오 총장은 “인간적 특성들이 대통령에 당선된 동력원이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했다”고 했다. 그는 다만, “인간적 면모가 국민 기대에 부응하는 국정 책임자의 역할 수행과 직결되는지는 별개의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적 장점이 취임 후 약점이 되기 쉽고, 평소 취약했던 것으로 보이던 과단성 결여가 실제 국정 운영에서는 신중함과 절제가 될 수 있어서다. 인간성과 통치력의 관계가 무척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11-14 조국과 ‘위선의 눈물’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운영하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평산 책방’에 옷과 신발 모두 파란색으로 차려입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나타났다. 출간한 ‘디케의 눈물’ 사인회를 열었는데, 조 전 장관은 문 전 대통령과 포옹도 나눴다. 더불어민주당의 당 색이 파란색인 것을 고려하면 조 전 장관이 옷 색깔을 맞춘 것은 그가 언급한 ‘비법률적인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부인 정경심 교수는 징역 4년형이 확정돼 복역하다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자신도 1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돼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딸 조민 씨도 기소됐다. 이렇게 법원에서도 유죄를 인정한 마당에 법학자인 조 전 장관이 비법률적 방식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그는 “민정수석이기 이전에 법을 공부하고 가르쳐온 법학자”라고 했다. 2021년 5월 출간한 책에서 “법학자로서 전직 법무부 장관으로서 기소된 혐의에 대해 최종 판결이 나면 나는 승복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엔 딴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인 디케를 차용, 책 이름을 ‘디케의 눈물’이라고 했는데, 디케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오용된 것을 알았다면 소송을 했을 것이다.
중세의 종교재판이나 독재시대일 땐 ‘양심의 법정’ ‘역사의 법정’이 설득력이 있었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양심은 내적 법정, 즉 우리 마음속에 있는 도덕의 재판소”라고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3심 제도가 확립된 지금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지난 2015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된 한명숙 전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나는 무죄”라고 하자, 당시 야당 대표이던 문 전 대통령은 “한 전 총리는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고 맞장구쳤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드루킹 여론조작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받고 “법원을 통한 진실 찾기는 더 이상 진행할 방법이 없어졌다”고 했다.
검찰 조사 때는 묵비권, 법정에서도 제대로 증언하지 않다가 양심 운운하는 조 전 장관의 행태는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멍석을 깔아준 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법원 위에 있는 ‘양심의 법정’은 어느 곳에 있을까.
11-15 이재명의 ‘횡재세’ 정치

이철호 논설고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일 은행과 정유사에 횡재세(windfall tax)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4일에는 직전 5년 평균 이자 수익의 120%를 넘는 금융업체에 대해 이익의 40% 이내에서 상생 기여금을 내게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중·과잉 과세 논란을 피하기 위해 부담금 형식을 취했다. 고금리와 고유가에 ‘그들만의 잔치’라는 대중적 불만에 편승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엿보인다. 문제는 그 밑에 깔린 빗나간 신념이다. 그는 2년 전 서울대에서 “부자는 저금리, 가난하면 고금리는 정의롭지 않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에 따라 가산금리가 달라지는 원리를 무시하면 금융시장은 붕괴한다.
횡재세는 “혁신의 결과물은 존중하지만, 독점의 횡포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이 대표의 발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기업의 혁신 동기는 독점이 아니라 초과이윤에 있다. 독점을 핑계로 초과이윤마저 부인하면 혁신은 죽는다. 최근의 ‘재정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는 “건전재정에 집착하는 윤석열 정부는 기본적 경제논리에 무지하다”며 “가계와 기업이 어려울 때 정부가 더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때는 “정부의 코로나 지원이 충분치 않아 가계 부채가 쌓인다”며 문재인 정부까지 공격했다.
이 대표는 정부가 화폐를 계속 찍어내서라도 경기를 띄워야 한다는 비주류 현대통화이론(MMT)을 믿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아직은 정반대가 정설이다. 경제원론에 따르면 물가 상승 때는 재정 긴축이 정답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물가 안정을 위해 한국의 내년 긴축 예산안은 적절한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경제상식에 무지한 쪽은 오히려 이 대표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지난 8월 “최저임금을 급하게 올린 게 대선 실패 원인”이라며 “불평등과 양극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했다. 문 정부의 ‘듣보잡’ 소득주도성장을 당 강령에서 지워버렸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불쑥불쑥 “우리도 곧 기축통화국 된다” “음식점 총량제 필요하다” “경제는 과학 같지만 실은 정치” 같은 ‘얼치기’ 주장을 들고나온다. 민주당은 1978년 나온 박현채의 자급자족을 외치는 ‘민족경제론’에서 45년 넘게 맴도는 분위기다. 군사 정부 시절 운동권이 그토록 비난하던 ‘정부 주도 성장’을 ‘큰 정부’로 포장해 우상처럼 떠받든다.
11-16 험지 출마와 당선 가능성

김세동 논설위원
이준석 끌어안기, 국회의원 10% 감축, 구속 의원 세비 박탈 등의 제안으로 국민의힘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인요한 혁신위원회가 영남 중진 수도권 험지 출마 촉구에 대한 당사자들의 ‘무시’로 난처해졌다. 인 위원장은 “영남의 스타들, 굉장히 경쟁력 있는 사람들은 서울 험지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텃밭인 영남에서 세 번 이상 당선한 의원 중에 스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스타가 아니더라도 수도권에서 출마해 당선될 경쟁력 있는 이가 있는지 의문이다.
인 위원장은 ‘영남 중진 험지 출마론’이 반향을 얻지 못하자 대상을 ‘친윤’ 등으로 더 좁히고 선택지에 ‘불출마’까지 확대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남권에서 십수 년 이상 쉽게 정치해온 사람들이 당선 가능성이 없는 수도권에 출마하느니 불출마가 차라리 낫겠지만, 쉬운 선택은 아니다. 안방에서 선수는 쌓았지만, 전국적 명망이 없는 정치인으로선 불출마는 정계 은퇴나 다름없다.
원조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지역구 산악회 회원 4200명이 동원된 행사를 공개하는 등 무력시위에 나선 이유도 달리 없다. 장 의원은 “알량한 정치 인생 연장하면서 서울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문제는 서울에 출마해선 당선이 어렵다는 데 있다. 서울과 부산에서 낙선을 거듭하다 대통령 당선까지 이룬 노무현 사례도 언급되지만, 그는 부산이 고향이고 민주당 후보에게 서울이 딱히 험지도 아니어서 국민의힘 정치인의 서울 출마와는 비교가 안 된다.
2000년 총선 때 미래통합당이 경쟁력 없는 현역 의원들을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 돌려막기를 했다가 무참하게 낙선했다. 원래 지역구는 민주당에 뺏기고, 해당 지역에서 오래 준비해온 신인 정치인들의 출마 기회도 박탈하는 등 이중삼중의 실패를 맛보지 않았나. 중진이 빠진 영남 지역구에 윤석열 대통령 주변 인사들이 출마한다면 역풍이 불 것이다. 수도권 험지엔 지역에 특화한 신진 기예를 찾아 공천하는 게 낫다. 3선 이상이 몰살되면 다음 국회 의장단·상임위원장을 초·재선으로 세울 건가. 물갈이를 위한 물갈이가 아니라, 당선 가능성 위주로 공천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과감한 인적 교체는 필요하다. 중도층과 젊은 층을 잡지 못하면 총선 결과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의 전국화가 될 것이다.
11-17(금) 손민수와 임윤찬

김종호 논설고문
“음악은 미지의 세계에 있는 생명체와 같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가는 과정이다. 수많은 연습과 연주,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것을 통해 생명을 계속 살리고 호흡을 불어넣는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저 멀리 어떤 것을 늘 추구하고, 호기심을 잃어선 안 된다. 그게 숙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 명문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으로 이번 가을 학기부터 옮긴 피아니스트 손민수(47)가 한 말이다. 그가 아끼는 한예종 제자로, 뒤따라 옮겨간 임윤찬(19)이 지난해 제16회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한 직후에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윤찬이는 내가 평소 하는 말을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말없이 듣고 피식 웃고 넘기는데, 나중에 보면 실행한다. 단테의 ‘신곡’도 그랬다.”
그런 스승을 두고, 임윤찬은 “음악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제 인생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셨다”고 한다. 난해한 철학적 작품인 단테 ‘신곡’을 거의 다 외울 만큼 거듭해서 읽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준결승 연주곡이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었다. 고난도 기교를 구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기절 곡’으로도 불리는 음악을 완벽하게 소화해, 경연 무대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눈물까지 훔쳤다. 결선 연주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이었다. 그 연주도 세계 음악계에서 찬사가 쏟아졌고,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가 1200만에 이르렀다. 그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뉴욕 필하모닉의 1978년 녹음을 1000번 넘게 듣고, 피나게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아티스트로 정의하긴 아직 어렵다. 후배들은 저를 롤 모델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곤 “우주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손민수 피아노 리사이틀이 오는 28일 서울 올림픽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맞아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을 연주한다. 임윤찬은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베토벤 교향곡 3번’ 등을 정명훈이 지휘하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한다. 관객 가슴을 벅차게 할 공연들이다.
11-20(월) 100년 기업 디즈니의 수난

문희수 논설위원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월트 디즈니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디즈니는 지난달 16일이 창사 100주년이었다. 당시 22세인 월트 디즈니가 형 로이와 공동으로 1923년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라는 작은 영화사를 세운 게 디즈니의 출발이다.
디즈니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캐릭터 왕국이다. 간판인 미키 마우스를 비롯해 구피·도널드 덕·백설공주·피노키오·신데렐라·피터팬 등 수많은 월드 스타를 배출했다. 이런 디즈니는 코로나 이후에도 실적 부진에 고전 중이다. 아이언맨·헐크 등 어벤저스로 유명한 마블까지 인수했는데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플러스조차 올 3분기에도 5억 달러 넘는 손실을 봤다. 지난 2021년 상륙한 한국에서도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언론의 시선도 싸늘하다. 지난달 100주년 축하 이벤트 행사도 페이스북이나 X(옛 트위터) 등 미국 업체를 제치고 공급망 재편 등에서 정면 충돌하고 있는 중국 소유의 틱톡과 손잡아 비판을 받았다. 틱톡은 미국의 백악관, 육군, 뉴욕시 등 공공기관이 사이버 안보를 위협한다며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 리스크까지 더 키웠다. 가뜩이나 디즈니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주의에 비판이 제기돼 왔던 터다. 수년 전부터 뮬란 등 만화영화에 중국 등 유색 인종 주인공을 세우고,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에서 식민지 시대 등을 상징하는 놀이기구를 철거하면서 디즈니의 PC주의는 논란을 불러왔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자존심인 미키 마우스의 디즈니이기에 기대보다는 실망이 큰 모양새다.
디즈니는 경영위기를 타개하려고 퇴임했던 CEO를 재기용했지만, 7000명 규모의 정리해고를 예정하고 있는 등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디즈니의 총수입 중 40%가 디즈니랜드에서 나온다. 디즈니 측은 새 테마구역이 홍콩(11월), 상하이(12월)에서 개장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미키 마우스는 지난 18일이 95번째 생일이었다. 디즈니에겐 미키 마우스가 그동안 다양한 변신과 업그레이드를 통해 보여줬던 맹활약이 그리울 게다. 100년 기업도 지속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이 비즈니스 세계다.
11-21 네이버 1784

오승훈 논설위원
세계 최초 로봇 친화형 빌딩, 최첨단 기술융합의 테스트베드, 세계 유일의 로봇 엘리베이터…. 말만으로는 실감 나지 않는 ‘네이버 1784’, 얼마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신사옥 방문은 신묘한 경험이었다. SF영화처럼 경이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라우드·자율주행·AI 등과 같은 기술력이 우리의 일상 공간과 의식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느끼기엔 충분했다. 건물명 1784는 빌딩 주소이자, 1차 산업혁명의 시작 연도다. 28층 빌딩의 2층에 올라가자 커피점 앞에 배달로봇 ‘루키’들이 줄지어 움직였다. 100여 대가 빌딩 내 어느 곳이든 심부름을 간다.
이 로봇엔 두뇌가 없다. 모든 지시는 클라우드 프로그램이 내린다. 실물 빌딩을 똑같이 매핑(mapping)한 가상의 3차원 쌍둥이 빌딩(디지털 트윈)을 기반으로 길을 안내해준다. 클라우드와 로봇 사이 통신 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해 독립적인 5G 통신망도 구축됐다. 로봇이 수령인의 얼굴을 알아보는 건 안면인식 기술 덕분이다. 인간들 사이에 섞인 로봇들의 풍경이 낯설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로봇들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층간을 수직 이동한다. 클라우드의 명령과 센서에 의지해 탑승하고 내리는 모습이 로봇 시대의 상징적 장면 같았다.
이 기술은 도시로 확장할 수 있다. 예컨대, 한 지역을 정밀하게 복제한 디지털 트윈을 기반으로 자율주행 이동수단을 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 설계, 모니터링과 통제, 부동산 관리, 홍수 예측 등에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시티 조성에 디지털 트윈 플랫폼 구축이 필수 인프라가 됐고, 네이버 1784는 시제품인 셈이다. 미래형 신도시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사우디아라비아 관계자들이 지난 1년 새 이 빌딩을 9번이나 방문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중동 순방 기간 중 네이버는 사우디와 1억 달러(약 1345억 원) 규모의 디지털 트윈 구축 사업을 계약했다.
네이버는 향후 5년간 5개 도시에서 사업을 진행한다. 융합과 확장성을 고려하면 다양한 첨단 기술을 중동 지역에 수출하는 교두보다. 지난 9일에는 아랍에미리트(UAE)에서도 네이버 1784를 방문했다고 한다. 로봇 길을 만들려던 기술이 이제는 수출 상품이 된 것이다. 디지털 강국에서 발생한 정부 행정 전산망 마비 사태가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11-22 英 데뷔 바리톤 김기훈

이미숙 논설위원
영국 BBC 카디프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자인 바리톤 김기훈(32)이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을 집중 선보였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다. 국내외에서 자주 연주되는 그의 피아노협주곡이나 교향곡과 달리, 가곡은 빼어난 서정성과 아름다운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의 높은 장벽 탓에 대중적으로 사랑받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김기훈이 이번 음악회에서 ‘꿈’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오’ ‘이제 우리는 만났네’ 등 라흐마니노프의 가곡 9곡을 부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롤 모델이었던 러시아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1962∼2017)에게 헌정하는 무대다. 음악회 타이틀을 ‘흐보로스톱스키에 대한 오마주’로 정한 배경이다. 김기훈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의 우상과 한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6년 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흐보로스톱스키가 잘 불렀던 곡을 부름으로써 ‘음악적 만남’을 한 셈이다. 두 사람은 폭발적인 성량에 벨벳 같은 음색을 지닌 카디프 콩쿠르 우승 바리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김기훈은 자칭 ‘곡성 촌놈’인데, 흐보로스톱스키도 변방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이어서 ‘시베리아의 호랑이’란 별명이 따라 다녔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네긴’이 흐보로스톱스키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김기훈도 이 오페라 아리아를 유려하게 부른다.
김기훈은 오는 26일 영국 무대에 데뷔한다. 흐보로스톱스키가 1989년 카디프 콩쿠르 우승 후 런던 최고의 위그모어홀에서 첫 음악회를 가짐으로써 오페라가수의 길에 접어든 것처럼, 그도 2021년 카디프 콩쿠르 우승 후 처음으로 라흐마니노프 가곡으로 위그모어홀 무대에 선다. 영국인들에게 ‘제2의 흐보로스톱스키’로 인식될 만하다.
더구나, 이 음악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20∼23일 영국 국빈방문 뒤 열린다는 점에서 김기훈은 영국의 K-클래식 붐 주역이 될 수도 있다. 카디프 콩쿠르 후 흐보로스톱스키가 30년 가까이 영국과 러시아의 예술적 가교 역할을 했듯, 김기훈도 찰스 3세 시대 한·영 관계를 음악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길 기대해 본다.
11-23 민주당의 막말 DNA

이현종 논설위원
1980∼90년대 정치권을 좌지우지했던 3김씨(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를 취재하면서 그들의 입에서 막말이나 욕설을 들어본 적이 없다. 화가 나면 “몹쓸 사람” “기본이 안 돼 있네” 등의 말을 했을 뿐 지금 정치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막말은 듣기 어려웠다. 예전에도 여야 가릴 것 없이 막말이 있었지만, 총선을 4개월여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매일 한 건 이상씩 막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청년, 노인, 여성을 가릴 것 없다. ‘어린놈’ ‘암컷’ ‘빈곤 포르노’ ‘금수’ ‘GSGG(개××)’와 같은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김연주 전 국민의힘 부대변인이 SNS에 올린 ‘어느 슬픈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는 글이 최근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 나라의 젊은이들은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른다. 오로지 돈이 많기를 바랄 뿐. 그 나라의 60이 넘은 고령층은 미래가 짧을뿐더러 뇌도 썩은 상태란다. 그 나라의 여성은 나와서 설치는 암컷에 불과하다. 그 나라의 유권자는 선거제도와 표 계산을 위한 산식을 알 필요가 없다. 그냥 투표만 하면 될 뿐.’ 2030을 비하하는 현수막 파동, 김은경 전 혁신위원장과 유시민 작가의 노인 폄하와 최강욱 전 의원의 ‘설치는 암컷’ 발언, 그리고 민주당 측 정개특위 위원인 허영 의원이 ‘의석 배분 산식은 국민이 몰라도 된다’고 한 발언 등이다.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막말이 터져 나오면서 민주당 내에선 총선 위기론도 나온다. 그러자 이재명 대표는 특정인을 언급하지 않고 당내 설화(舌禍)와 관련해 “국민의 공복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서는 관용 없이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지만, 그 역시 막말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문제가 됐지만, 형수에 대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은 역대급이다. 다른 의원들이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정식 사무총장으로부터 공개 경고와 당원권 정지 6개월을 받은 ‘처럼회’ 멤버인 최 전 의원은 사과는커녕 SNS에 ‘It’s Democracy, stupid!(이건 민주주의야, 멍청아!)’라는 글을 올려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최 전 의원은 여성을, 그것도 대통령 부인을 ‘암컷’이라고 모욕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라고 배운 모양이다. 정말 답이 없다.
11-24 오픈 AI 쿠데타

이철호 논설고문
오픈AI의 쿠데타는 5일 천하로 끝났다. 샘 올트먼이 다시 CEO로 돌아왔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겉으론 경영권 분쟁이지만, 실은 거대한 세계관 다툼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은 두 진영으로 쫙 갈라져 있다. ‘부머(boomer·개발론자)’와 ‘두머(doomer·비관론자)’다. 부머의 간판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AI가 인류의 미래”라며 낙관한다. 두머의 얼굴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AI의 대부’ 제프리 힌턴 교수는 “AI는 핵폭탄급 재앙”이라고 경계한다. 올트먼 축출에 앞장선 오픈AI 공동 창업자이자 수석개발자 일리야 수츠케버는 힌턴의 수제자다.
올트먼과 수츠케버는 2015년 ‘착한 AI로 인류를 돕자’며 비영리 기업 오픈AI를 세웠다. 종잣돈은 머스크가 댔다. 문제는 대용량언어모델(LLM)을 훈련하면서 들어간 엄청난 돈이다. 결국, 올트먼 주도로 2019년 영리 자회사를 따로 만들어 MS에서 거액을 투자받았다. 역설적으로, 내부 균열은 챗GPT의 대성공으로 비롯됐다. 올트먼은 MS와 손잡고 AI 칩 개발, AI 장터 구축에 나서는 등 수익성에 치중했다.
반면, 수츠케버에겐 ‘효율적 이타주의’가 소중했다. 영리를 위해 AI의 안전성까지 소홀해선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오픈AI의 지배구조는 독특하다. 비영리 모기업의 이사 6명이 결정 권한을 독점했다. 최대 물주였던 MS조차 이사 한 자리 차지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수츠케버와 사외이사 3명이 몰래 의견을 모아 올트먼을 내쫓았다. 뿌리를 따지면 올트먼이 벤처 투자업계 출신인 반면, 오픈AI의 기술 주역은 딥 러닝으로 알파고 개발을 주도했던 수츠케버였다.
올트먼의 금의환향으로 오픈AI에는 제동 장치가 사라졌다. MS와 거침없이 돈벌이에 나설 전망이다. 그렇다고 쫓겨난 사외이사들도 비참한 표정이 아니다. 패배는커녕 “AI의 위험성을 널리 알렸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순교로 여긴다. 이들이 AI 공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는 머스크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만든 ‘뉴럴링크’는 2030년까지 2만 명의 뇌에 첨단 칩을 이식하겠다며 임상시험자를 모집 중이다. 인류의 지적 능력을 강화해 진화하는 AI에 맞서 싸우겠다는 공상과학 같은 사업이다.
11-27(월) “암컷”과 민주당 수준

김세동 논설위원
실수 자체보다 이후의 사과나 해명하는 태도가 더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을 “암컷”이라고 부른 최강욱 전 의원이나 더불어민주당의 대응이 딱 그 모양이다. 조국 전 장관 수호 등에 앞장서온 민주당 초선 강경파 ‘처럼회’를 주도해온 최 전 의원이 ‘검수완박’ 법안 처리 과정에서 ‘위장 탈당’이란 기상천외한 꼼수에 자청 동원된 민형배 의원 출판기념회에서 “동물농장(조지 오웰의 소설)에도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고 이러는 건 없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연단에 있던 민 의원과 김용민 의원은 웃음을 터트렸고, 객석에 있던 여성 의원 강민정·양정숙은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말이 거친 편인 최 전 의원도 실언이라고 느꼈는지 곧바로 “암컷을 비하하는 말씀은 아니고, 설치는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라고 나름 해명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문제다. 제대로 말하려면 “여성을 비하하는 말은 아니고, 설치는 여성을 암컷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문맥에도 안 맞게 ‘암컷’을 남발한 것으로, 평소의 저급한 여성관을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치는 여성은 암컷으로 불러도 된다는 것인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봉건시대 속담에나 어울릴, 여성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인식 수준을 드러냈다.
이후 민주당 내의 반응은 가관이다. 최 전 의원의 당원자격 6개월 정지 징계가 결정된 뒤 당 전국여성위원회 이름으로 비판 성명을 냈을 뿐 여성 의원 중에 누구도 암컷 발언을 공개 비판하지 않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자 극단적 선택을 한 뒤 피해 여성을 ‘피해 호소인’으로 부르면서 2차 가해에 나섰던 여성 의원들이니 기대 자체가 난망이다.
이재명 대표가 “부적절한 언행은 관용 없이 엄정히 대처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친명계 의원과 개딸은 “(김건희 여사에게) 암컷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최 전 의원이 할 말을 했다”는 등 계속 폭주하고 있다. 이 대표의 속뜻은 다르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최 전 의원이 대형 사고를 치고도 아무런 유감 표명도 않고 외려 페이스북에 ‘It’s Democracy, stupid!(이건 민주주의야, 멍청아!)’라는 글을 올린 것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의 상태와 수준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11-28 베이스 연광철의 가곡

김종호 논설고문
“독일어 노래를 내가 부를 때는 독일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다니던 술집,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가 살던 동네 등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한국 가곡을 부를 땐 그냥 나 자신이면 된다. 소월의 시로 만든 노래 ‘산유화’를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하고 부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베이스 성악가’ 연광철(58)이 한국 가곡만 부른 첫 음반 ‘고향의 봄’을 지난 3일 내놓기에 앞서,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나흘에 걸쳐 18곡 녹음을 마친 직후에 한 말이다. “충북 충주 산골에서 산을 3개 넘어 초등학교 다니던 고갯길, 이슬 때문에 신발이 젖던 일 등 구체적 장면과 정서를 마음속에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얼마나 큰 내 자산인가”라고도 했다.
그 음반에는 박목월 ‘달무리’, 김남조 ‘그대 있음에’, 이은상 ‘사랑’, 나희덕 ‘산속에서’ 등의 시에 각각 윤이상·김순애·홍난파·김택수가 곡을 붙인 가곡도 담겼다. ‘달무리’는 ‘달무리 뜨는/ 달무리 뜨는/ 외줄기 길을 홀로 가노라’ 하고 시작한다. 마지막은 ‘울며 가노라/ 옛날에도 이런 밤엔/ 울며 갔노라’ 한다. ‘그대 있음에’ 시작은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이다. ‘사랑’ 시작은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한다. ‘산속에서’ 맨 앞 대목은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이다. 마지막엔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한다.
연광철은 세계 3대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창설한 국제 콩쿠르의 1993년 첫 대회에서 우승했다. 2018년에는 독일 정부의 ‘궁정(宮廷) 가수’ 칭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취임한 키릴 페트렌코가 첫 무대에 설 성악가로 연광철을 선택했다. 그의 가곡 독창회가 오는 12월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성악가는 언어와 문화를 전달하며, 문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진면목을 거듭 확인하게 될 무대다.
11-29 바둑 ‘신기록 제조기’ 신진서

문희수 논설위원
신진서 9단은 세계 프로 바둑에서 절대 1강으로 꼽힌다. 신 9단은 지난주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대마에 가일수를 안 하는 바람에 탈락해 옥에 티를 남겼지만, 올해 내내 각종 신기록을 쏟아내며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실 지난 8월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기전인 응씨배를 품에 안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에 오른 것만으로도 올해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한국으로선 14년 만의 우승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난 10월까지 13억3218만 원의 상금을 획득해 자신이 지난해 세운 연간 최다 상금액(14억4000만 원)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특히, 지난 3일에는 1954년 한국기원 출범 이후 첫 연간 100승을 달성했다. 종전 최다승은 지난해 김은지 7단이 세운 94승이었다.
바둑계의 관심은 그가 과연 꿈의 ‘승률 90%’를 달성할지에 쏠려 있다. 그의 승률은 현재 89%를 넘는데, 연말까지 남은 10번 안팎의 대국에서 전승하면 승률 90%가 가능하다. 현재 최고 승률 기록은 역시 그가 2020년 한국 바둑의 전설 이창호 9단(88.24%, 75승)을 제치고 세운 88.37%(76승)다. 연내 대국은 내달 4일까지 진행되는 제25회 농심 신라면배 단체전, 제28회 LG배 8강전과 4강전(내달 11∼13일), 제46기 명인전 결승 3번기(내달 15∼18일) 등이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큰 승부들이지만, 지금 같은 기세라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 세계 기록은 일본 사카다 에이오 9단의 93.8%(30승, 1964년)지만, 당시는 대국 수가 적었던 때여서 단순 비교는 별로 의미 없다.
신진서는 이미 프로 바둑에서 최연소(18세 8개월) 국내 랭킹 1위를 시작으로, 4년째 세계 1위, 단일 선수권 최다연패(GS칼텍스배 5연패) 등 많은 기록을 세웠다. 말 그대로 신기록 제조기다. 신진서는 인공지능(AI)이 예상하는 다음의 한 수를 누구보다 잘 맞혀 ‘신공지능’이란 애칭을 갖고 있다. 그의 질주에 이창호 9단조차 “성적이 비정상적으로 너무 좋다”고 혀를 내두른다. 특히, 중국이 한국 축구를 넘지 못해 공한증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처럼 그는 한국 바둑의 최종 수문장으로 중국엔 공포의 대상이다. 23세인 신진서는 항저우아시안게임 남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부담도 덜었다. 신기록을 계속 세우며 ‘롱런’하길 바란다.
11-30(목) 남북 재외공관 경쟁의 종언

이미숙 논설위원
재외공관은 국제법상 외교적 특권을 가지며 치외법권 지역으로 설정돼 사실상 본국 영토로 간주된다. 해외에 대사관이 많이 설치될수록 우리나라가 커지고 넓어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엔회원국 193개국 중 북한과 시리아, 쿠바를 제외한 189개국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다. 유엔회원국이 아닌 교황청, 니우에, 쿡 제도까지 합치면 수교국은 192개다. 이 가운데 116개국에 대사관이 설치됐고, 대표부도 5개다. 사실상 세계 모든 나라와 수교를 했고, 60% 이상 국가에 상주 대사관을 유지하는 셈이다.
내년엔 재외공관이 12개 신설된다. 외교부에 따르면 보츠와나와 수리남에는 대사관의 전 단계 격인 분관, 나머지는 정식 대사관이 설치된다. 자메이카와 조지아는 기존에 설치됐던 분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는 것이고, 잠비아, 시에라리온, 자메이카, 수리남의 경우 공관을 재개설하는 것이다. 정부가 공관을 두 자릿수로 늘린 것은 남북한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 그리고 외환위기 회복 후인 2007년에 이어 3번째다. 3번째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활동을 하게 된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외교 지평을 더 확장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수교한 나라는 150개국이 넘지만, 재외공관 설치국은 30% 수준이다. 그나마 김정은 시대 들어 축소 기류다. 지난 10월 우간다·앙골라·스페인 대사관과 홍콩 총영사관을 닫았고, 방글라데시 대사관도 지난 21일 폐쇄했다. 네팔과 콩고민주공화국에서도 곧 철수한다. 핵 개발에 따른 유엔 제재 지속으로 외화벌이가 어려워지자 공관 폐쇄에 나선 것이다. 실속 없는 공관은 줄이겠다는 김정은식(式) 외교 구조조정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간 외교관 면책특권을 악용해 탈법·불법 거래를 해왔고, 재외공관은 주류·담배 등을 팔아 운영 경비를 자체 조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주재국 정부가 북한 외교관들의 일탈을 문제 삼는 사례가 늘자 공관 폐쇄 결정을 한 것이다. 로이터 통신은 올해 북한이 최대 12개 공관을 폐쇄할 것이라고 관측했는데 벌써 7개국에서 철수했다. 이제 북한의 재외공관은 40개 미만이다. 남북한 체제 경쟁이 끝났다는 것은 양측의 대사관 숫자에서도 재확인되는 셈이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