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11/
11-01(수) G8 진입 꿈꿨건만, G7과 격차 더 벌어진 韓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뒤지는 게 뭐냐.” 올해 5월 일본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옵서버 국가로 초청받았을 때 고위 외교당국자들은 공공연히 이런 자신감을 내비쳤다. 친서방 선진국들의 클럽에 한국이 8번째 회원국이 되는 ‘G8 편입’ 가능성이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경제력과 군사력 외에 혁신능력, 영향력 등이 세계 6∼8위권에 든다는 내용의 경제단체 보고서도 나왔다.
▷최근 한국의 경제 성적표는 불과 5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껏 부풀어올랐던 기대감을 무색하게 한다. G7 국가들과의 1인당 국민소득(GNI) 격차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명목 GNI는 3만5900달러. 1위 국가인 미국과는 차이가 두 배를 넘어섰고,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다른 G7 국가들과도 차이가 더 벌어졌다. 2020년 우리가 앞질렀던 G7의 꼴찌 국가 이탈리아에도 2년 연속 추월당했다.
▷달러로 표시되는 GNI는 환율과 물가 변수가 반영되기 때문에 국가 간 순위에서 착시 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한국이 GNI 순위에서 밀려난 것은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유로보다 많이 떨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계산시 변수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듯한 조짐이다. OECD가 추정한 한국의 올해와 내년 잠재성장률은 처음으로 1%대로 추락한 상태다. 전례 없는 저출산 위기로 인구 규모에서도 점차 순위가 밀려나고 있다. G7 국가들의 대체적 공통점인 ‘30-50 클럽’(GNI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기준에서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 한때 추월당했던 이탈리아는 빠른 속도로 G7 회원국의 체급을 회복해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기가 반등하면서 지난해 1인당 GNI가 한국보다 1710달러 이상 많은 3만7700달러까지 올라왔다. ‘인더스트리 4.0’이라고 불리는 경제 구조 개혁과 기업 투자가 일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리던 이탈리아의 변화에 고무된 현지 경제 전문가들은 “개혁은 계속될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국제사회의 규범과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선진국들의 영향력은 경제 규모에 바탕을 둔 강한 국력이 뒷받침한다. 한국 경제의 활력이 이대로 떨어져 버린다면 G8 편입의 기본 조건인 경제력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격 미달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엮여 있는 국제 이슈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막상 목소리를 내야 할 국제무대에서는 점점 밀려나게 될 것이다. “꿈 깨”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지지부진한 ‘3대 개혁’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여전히 높은 중국 의존도와 낮은 생산성 등의 문제 해결에 대해서도 해법 찾기에 나서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02 술고래 남성 줄고 술꾼 여성 늘었다

나라마다 기준이 대동소이하지만, 국내 보건당국은 한 번 술을 마실 때 남성은 소주 7잔(맥주 5캔), 여성은 5잔(맥주 3캔) 이상 마시는 걸 폭음이라고 규정한다. 남녀 간에 2잔이 차이 나는 건 여성의 알코올 분해 능력이 남성보다 떨어져서다. 남성보다 왜소한 여성은 간의 크기도 작아서 간에서 분비되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남성의 30∼50%에 불과하다. 여성호르몬 에스트라디올은 알코올 분해 효소의 활동도 방해한다. 술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치명적인 이유다.
▷그런데 잔뜩 취할 정도로 술을 몰아서 마시는 한국 여성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2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이 최근 10년 동안 남성은 25.1%에서 23.6%로 줄어든 반면 여성은 7.9%에서 8.9%로 늘었다. ‘고위험 음주’에 해당하는 술꾼들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으로 좁혀 봐도 남성은 62%에서 56%로 감소했지만 여성은 31%로 변화가 없었다. 질병관리청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성인의 음주 행태를 분석해 최근 이런 내용의 심층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주 폭음하는 술꾼들이 남성의 경우 40, 50대 중장년층에서 많았지만 여성은 20, 30대 젊은층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30대 여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10년간 11.6%에서 13.2%로 뛰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여성 음주에 대한 사회·문화적 수용성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서른 살 여자 동창 3명이 주구장창 술 마시는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이 큰 인기를 끈 것도 이 같은 현실이 투영된 결과다.
▷도수는 낮추고 맛은 살린 ‘순한 술’ 경쟁이 불붙은 것도 한몫했다. ‘국민의 술’ 소주는 2004년 21도, 2006년 20도, 2014년 18도, 2018년 17도 등으로 도수를 계속 낮추며 남성 중심이던 소비층을 여성으로 넓혔다. 2015년 14도짜리 유자 맛 과일소주가 처음 나왔을 땐 “일반소주는 입에도 못 댔는데 두세 병은 거뜬히 마셨다”는 여성들의 무용담이 쏟아졌다. 최근엔 위스키에 토닉워터나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 당을 뺀 제로슈거 소주가 여성 애주가를 사로잡고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술을 끊었다가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를 ‘육퇴’(육아+퇴근) 후 술 한잔으로 푸는 여성들도 여럿이다. 미국에선 이를 뜻하는 ‘마미주스’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하지만 습관적인 음주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지기까지 남성은 평균 7∼8년, 여성은 5년 걸린다고 한다. 남성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여성은 스트레스와 외로움, 우울감 등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았다가 문제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건강한 음주는 없다’는 말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1-03 “AI 재앙 막게 세계가 협력하자”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블레츨리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의 최첨단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풀었던 장소로 유명하다. 현대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의 시조인 앨런 튜링과 전문가들이 최초의 컴퓨팅기계를 개발해 독일 암호를 90%가량 풀어냈고, 이는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AI의 고향이라 할 만한 블레츨리에서 한국 미국 중국 영국 등 28개국이 모여 제1회 AI 안전 정상회의를 열고 1일 ‘블레츨리 선언’을 발표했다.
▷블레츨리 선언은 AI가 재앙적 피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았다. 세계 각국이 모여 AI 관련 공동 협력을 다짐한 건 처음이다. AI로 인한 피해는 전 지구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국제적 협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 선언은 규범일 뿐 강제성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인간 중심적, 신뢰 높은, 책임감 있는’ AI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공통 인식만큼은 명확히 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말처럼 AI의 위협은 눈앞에 보일 만큼 ‘실존적’이다. 딥페이크를 통한 허위 정보로 선거판이나 전쟁터의 상황을 오도하는 일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공격, 테러리스트들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위험 등도 점쳐지고 있다. 인류가 AI로 인해 절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등은 AI 규제에 서둘러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를 이틀 앞두고 행정명령을 통해 AI 규제에 나섰다. AI 기업은 제품 출시 전 안전 평가 결과를 정부와 공유하게 하고, AI가 생성한 정보는 식별표시를 붙이도록 했다. 2021년 세계 최초로 AI 법의 초안을 내놓았던 EU도 6월 최종안을 마련했고, 올해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엔 안면 인식 시스템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각국의 경쟁은 자국의 AI 상황에 맞게 AI 규범을 선도하겠다는 속내가 담겨 있다. 미국이 6·25전쟁 때 만든 국방물자생산법을 AI 규제 명령의 근거로 삼고, 영국 리시 수낵 총리가 이번 회의를 주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번 회의 기간 중 AI 규제 연구소 설립 계획도 경쟁적으로 발표했을 정도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지난달 정부가 발표한 ‘디지털 권리장전’을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전의 AI 관련 내용은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도 100쪽이 넘는 미국 행정명령처럼 자세하고 특화된 AI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후속 정상회의는 6개월 뒤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이때는 장소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한국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1-04(토) ‘라면 사무관’ ‘빵 과장’ ‘배추 국장’

당연시되던 ‘공깃밥=1000원’의 법칙은 깨졌다. 만만하던 짜장면 한 그릇은 평균 7000원을 돌파했다. 삼겹살 1인분은 2만 원에 육박하고, 여기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한 잔 하면 3만 원이 넘어간다. 안 오른 게 없어 ‘○○인플레이션’에 어떤 품목을 넣어도 다 말이 된다. 석 달 연속 오름폭이 커진 물가에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각 부처 차관을 ‘물가 안정 책임관’으로 삼고 품목별 담당자도 정하기로 했다. ‘빵 과장’ ‘라면 사무관’ ‘배추 국장’ 등을 두는 식이다.
▷정부는 2일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고 각 부처 차관이 소관 품목 물가 안정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각오로 철저히 살피겠다고 밝혔다. 배추, 무 같은 신선식품부터 빵, 과자, 커피, 라면,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까지 서민 체감 물가와 직결되는 주요 품목에 대해선 담당자를 지정하기로 했다. 요즘 장차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 현장으로 향한다. 2일에만 해도 해양수산부 차관과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마트로, 산업부 2차관은 주유소를 찾았다.
▷품목별 물가 담당 공무원은 2012년 1월 이명박 정부가 ‘물가관리 책임실명제’를 도입한 이후 11년 만에 부활하는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지구상에 20달러짜리 배추가 어디 있느냐”며 “물가가 올라가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을 못 봤다”고 질타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내내 52개 집중관리 생필품 리스트를 만들어 ‘MB물가’로 묶어 관리하기도 했다. 실명제 도입 이후 물가 상승이 주춤하긴 했는데, 전담 공무원 효과라기보단 실물경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침체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가안정은 역대 정부마다 최대 숙제였다. 1970∼1980년대에는 부처는 물론이고 관공서를 총동원해 단속반을 꾸려 물가 단속에 나섰다. 짜장면, 설렁탕부터 다방 커피 값, 이발비와 목욕비까지 타깃이 됐다. 1990년대 이후엔 직접적인 가격통제는 사라졌지만 물가인상으로 여론이 나빠지면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까지 동원한 정부의 으름장이 시작됐다. 현 정부 들어서도 부총리가 나서서 술값을 올리지 말라고, 라면 값은 왜 안 내리냐고 압박했다.
▷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에 세계 각국이 기업들을 압박해 가격 통제에 나서는 것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정부의 가격 통제가 단기적으론 통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억지로 누른 가격이 한꺼번에 튀어오를 수 있다. 가격이 오른 품목을 쫓아다니며 ‘두더지 잡기’ 식으로 단속하는 수준을 넘어 근본적인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라면 값이 잡히지 않는다고 ‘라면 사무관’만 닦달할 순 없지 않겠나.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1-06(월) 이스라엘-하마스 하이브리드 전쟁 한 달이 빚은 딜레마

“가자지구를 바다에 잠기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가 한 말이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중동 국가에도 애물이었다. 이집트는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뺏겼지만 1979년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서 시나이반도만 찾고 가자지구는 놔뒀다. 요르단도 서안을 그렇게 내다 버렸다.
▷이슬람 급진주의의 뿌리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에 있다. 헨리 키신저는 최근 저서 ‘리더십’에서 위대한 리더십을 보인 20세기 정치인 6명을 꼽았다. 그중 한 명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다. 이스라엘과의 평화의 이면(裏面)은 무슬림형제단과의 전쟁이었다. 사다트는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사다트의 뜻을 이어갔다.
▷무슬림형제단에서 비롯된 급진주의가 이슬람 신정 국가 건설에 성공한 유일한 곳이 이란이다. 이란은 레바논의 내전 상황을 틈타 헤즈볼라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는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중동전은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내세운 이란과의 싸움이다. 그 대리전의 가장 잔혹한 판이 한 달 전에 벌어졌다.
▷하이브리드 전쟁이라는 말은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헤즈볼라 전투원은 게릴라이면서도 정규군이나 사용하는 첨단 무기를 사용했다. 주민들 사이에 섞여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입는 피해를 이용하는 사이버 심리전을 폈다.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비슷하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까지 뚫은 대량의 동시다발 미사일을 쏘는 한편 병원이나 학교 지하에 기지를 건설해 자신들이 공격을 당할 때는 주민도 피해를 입게 하고 그것을 선전전에 이용했다.
▷시간은 늘 과거보다 현재의 승리다. 한 달 전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잊혀지고 지금 팔레스타인인이 입는 피해만 부각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인심(人心)은 그렇게 흘러간다. 전 지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실시간 연결되는 오늘날에는 힘이 있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이 뜻대로 되기 어렵다. 이스라엘은 과거 중동전에서 마주하지 못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과거 테러 집단의 수장으로 악명 높았지만 결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국가 건설에 나섰다. 아라파트가 세운 파타당의 노선만 따랐어도 가자지구 주민은 지금과 같은 곤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타당은 부패로 얼룩졌다고 기피되고, 가자지구 주민들이 하마스에 표를 던져 집권의 길을 열어준 결과는 가혹한 생사의 위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07 아파도 병원 못 간 한국인, 유럽 주요국의 15~30배

한국인만큼 병원에 자주 가는 나라도 드물다. 미국인이 한 해 평균 3.4회, 일본 사람이 11.1회 병원을 찾는 동안 한국인은 15.7회 병원에 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9회)의 2.7배다. 사람들은 건강보험 덕에 진료비 부담이 크지 않아 병원을 자주 찾고, 병원은 의사 수가 적은 대신 박리다매식 3분 진료로 의료 수요를 감당한다. 이 정도면 의료 접근성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의료 접근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지표로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있다. 최근 1년간 진료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한 비율을 뜻하는데 한국의 경우 11.7%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10명 중 1명 이상이 아파도 의사 얼굴을 못 봤다는 뜻이다. 비교 대상이 된 유럽연합(EU) 회원국 33개국 가운데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가장 낮은 오스트리아(0.4%)의 30배, 네덜란드(0.8%)의 15배 수준이다.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세르비아(11.8%), 에스토니아(18.9%), 알바니아(21.5%)뿐이다(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논문).
▷아파도 병원에 못 간 이유 중 82%는 진료비 부담보다는 ‘돌봄 부족’이나 ‘시간 제약’과 같은 비경제적 요인이었는데 이는 다른 연구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 경향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빠서’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에 병원이 문을 닫아서’ ‘오래 기다리기 싫어서’ ‘참을 수 있는 정도여서’ 못 가거나 안 간다. 출산한 여성들은 ‘출산 후엔 아픈 게 당연한 줄 알고’ ‘아이를 대신 봐줄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무서워서’ ‘의사가 불친절해서’ 못 가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미충족 의료 경험률은 올라간다. 병원 갈 일은 많아지는데 소득은 줄어드는 이중적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병원이 멀어서’ ‘거동이 불편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못 가는 경우도 많다. 요즘 대형병원들은 예약부터 진료까지 무인 단말기를 줄줄이 통과해야 해 디지털 장벽도 높다. 배우자가 없거나 자녀 없이 혼자 사는 경우 병원 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강원의 미충족 경험률(22.9%)이 전남(4.9%)의 4.7배나 되는 등 지역마다 편차도 크다.
▷불필요한 ‘의료 쇼핑’도 문제지만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못 가는 건 더 큰 문제다. 진료를 못 받는 대신 술과 담배로 스트레스를 달래거나, 작은 병을 크게 키우거나, 통증과 우울감에 삶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 일과 육아에 바쁜 사람들을 위해 비대면 진료를 활성화하고, 병원 갈 엄두를 못 내는 고령자와 의료취약계층을 위해 돌봄과 의료 체계를 통합해야 한다. 누구나 아프면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성공한 의료 보장 제도라 할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08 1년 뒤 美 대선… 핵심경합주 판세 바이든에 앞선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왜 인기가 여전할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한 불출마 요구는 왜 힘을 못 받을까. 트럼프 승리를 점치는 여론조사가 미 대선을 1년 앞둔 지금도 계속되면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지난주 뉴욕타임스의 6개 핵심 경합 주(州) 조사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48% 대 44%. 트럼프가 조지아 등 5개 주에서 이겼고, 바이든은 위스콘신 1곳에서 체면을 차렸다. 6개 주는 3년 전 바이든이 모두 이겼던 곳이어서 민주당에 경고음이 더 커졌다.
▷트럼프는 전통적인 민주당 표밭인 흑인 히스패닉 3040 세대에서 지지를 키웠다. 흑인 유권자 22%가 그를 지지했다. 흑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서슴없이 비하하던 트럼프를 떠올린다면 놀라운 수치다. 트럼프는 과거 대선 때 흑인 표를 8%(2020년), 6%(2016년) 얻는 데 그쳤다. 그런 흑인들이 마음을 바꿨다. 4%대 경제 성장의 과실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바이든의 정책 부재를 문제 삼았다. 흑인 39%가 바이든 국정을 비판했다. 3년 전 바이든이 얻은 90% 몰표에 비춰 보면 격세지감이다.
▷트럼프는 안보를 더 잘할 것이란 이미지를 얻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등 2곳에서 전쟁에 개입하는 현실이 유리하게 작동했다. 그가 외교적 해법을 지녔다기보다는 체면 안 차리고 발을 뺌으로써 ‘세금 낭비’를 줄여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바이든 백악관이 우크라이나 재건에 지원할 수십조 원 규모의 예산안을 제출하자 트럼프는 “재건할 곳은 거기가 아니라 미국”이라고 썼다. 찬성한다는 댓글이 끝도 없었다.
▷트럼프는 91개 혐의로 4차례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뉴욕타임스 조사에서 응답자 54%가 “심각한 범죄”라고 답했지만 후보 지위에는 흔들림이 없다. 다른 공화당 후보들이 쓴 ‘트럼프 아류’ 전략 때문에 트럼프 유고(有故) 시 대안이란 느낌을 못 줬다. 트럼프는 바람을 피운 성인 배우에게 뒷돈을 준 혐의로 기소된 것도 “마녀사냥”이라며 이미지 세탁에 활용했다. 도덕적 비난은 가능하지만 과연 형사처벌 대상인지 미국인들이 의심하는 걸 파고들었다.
▷이쯤 되면 바이든을 향한 불출마 요구가 이어질 법도 하건만 움직임이 거의 없다. 신문에 “고령의 바이든은 한쪽 다리를 관(棺)에 걸치고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하는데도 그렇다. 오바마 백악관의 선임고문이 “바이든은 결단하라”고 썼지만 민주당 핵심부에서 반향이 없다. 오히려 공화당 쪽에서 백악관 안주인이었던 미셸 오바마(59) 구원 등판을 예상하고 있다. 변호사인 미셸은 정무직 경험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 견해다. 수수께끼 같은 트럼프의 인기와 백악관의 침묵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1-09 “역사에 남을 몰락”… ‘공유경제 아이콘’ 위워크 파산

큰돈 없이도 도심 속 고층 빌딩에 세련된 사무실을 낼 수 있다. 공간을 빌리면 맥주와 커피가 무제한 제공된다. 유연한 업무공간의 미래라는 찬사를 받으며 글로벌 공유오피스 업체 위워크는 ‘공유경제의 아이콘’으로 치켜세워졌다. 하지만 4년 전 470억 달러(약 62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던 이 회사는 6일 미국 뉴저지주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신화의 막을 내렸다. 블룸버그 통신은 “역사에 남을 몰락”이라고 평했다.
▷2010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건물에서 시작한 위워크는 불과 9년 만에 전 세계 120여 개 도시에 800여 개 지점을 운영하는 세계 최대 공유오피스 업체로 급성장했다. 대형 건물을 층 단위로 장기 임차한 뒤 이를 쪼개 스타트업 등에 단기 재임대하는 사업 방식이었다. 부동산 임대 사업에 공유경제 개념을 더했고,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정보기술(IT) 기업을 표방했다. 든든한 투자 지원군도 있었다. 2016년 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뉴욕의 위워크 본사를 단 12분 둘러본 뒤 44억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 줬다.
▷공동창업자 애덤 뉴먼의 카리스마도 성공에 한몫했다. 어린 시절 이스라엘의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생활하며 공동체와 공유경제를 배웠다는 경험담은 스토리가 됐다. 196cm의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무대에 올라 좌중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는 ‘I’(아이폰)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10년은 ‘We’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TGIM(Thank God, It’s Monday)’을 외치며 일터의 혁신을 주창했다. 월요일을 기다리며 하루빨리 출근하고 싶은 사무실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하지만 2019년 상장을 준비하면서 투자설명서를 공개하자 투자자들은 경악했다. 매출 1달러를 벌기 위해 2달러를 쓰는 빈껍데기였다. 일정 궤도에 오르면 고객이 늘어나도 추가 비용이 늘지 않는 테크 기업들과 달리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부동산 임대비용이 늘어났다. 자가용 비행기를 구매하고 자신의 부동산을 위워크에 임대해 사익을 챙긴 창업자 뉴먼의 방만 경영도 도마에 올랐다. 이 와중에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확산해 공실률이 치솟으면서 사업모델은 치명상을 입었다.
▷위워크의 몰락과 함께 한때 각광받던 공유경제 모델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사실상 전문 임대업으로 변질된 숙박 공유업체 에어비앤비는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받으며 각국의 규제를 받고 있다. 차량, 킥보드, 의류 등의 공유업체들도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혁신의 화려한 포장지에 현혹되지 말고 기업가치의 본질을 보라. 공유경제 아이콘의 퇴장을 통해 우리가 공유해야 할 교훈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1-10 사람이 상자인 줄… 죽음 부른 ‘사람 잡는 로봇’

‘로봇이 공장에서 사람을 죽였다.’ 최근 경남 고성의 한 농산물 선별장에서 산업용 로봇 팔에 40대 작업자가 끼여 숨졌다는 사고 소식은 해외로도 빠르게 보도됐다. 컨베이어 벨트를 세워놓은 채 센서를 점검하던 상황에서 로봇이 사람을 박스로 오인한 결과로 추정되는데, 이를 타전한 외신 제목들은 적나라했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로봇이 급속히 지능화, 고도화되는 시점에 로봇이 일으킨 인간 사망 사건이 그만큼 크게 주목받은 것이다.
▷생산 현장에서 로봇으로 인해 사람이 사망한 첫 사례는 1979년 미국 포드자동차의 생산공장 사고다. 기계가 느려지자 현장에 있던 작업자가 수동으로 이를 손보려다 1t짜리 로봇 팔에 맞아 즉사했다. 2015년 폴크스바겐 공장에서는 로봇 팔이 22세 청년을 잡아올려 강철판 위에서 짓눌렀다. 국내에서도 올해 군산과 대구, 예천 등지의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이어졌다. 산업용 로봇은 무게만 수 t에 달하는 대형 기계여서 한번 사고가 벌어지면 심각한 인명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례들은 모두 로봇의 오작동 결과다. 기계 결함 혹은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엔 없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경우들이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 체스대회에서는 AI 로봇 선수가 7세 소년의 손가락을 잡아 부러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소년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너무 빨리 말을 옮겨버려 로봇이 혼란에 빠졌다는 게 이유였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이런 기계적 결함을 넘어 로봇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공격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계심도 상당하다. ‘아이, 로봇’ 같은 SF 영화에서 진작에 구현된 미래 상황이다.
▷실제 로봇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클라우드 로봇은 스스로 인터넷에 접속해 새로운 과업을 업데이트하고, AI 두뇌를 이용해 제품이나 재료를 조건별로 분류해내는 일도 척척 해낸다.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고무를 이용한 로봇용 인공근육 개발이 한창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여주는 첨단 로봇은 이제 공장의 단순노동뿐 아니라 고난도 설계 작업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산업 현장을 파고드는 추세다. 아마존이 현재 전 세계 물류센터에서 운영하는 로봇만 20만 대가 넘는다.
▷제조업이 발달한 한국은 산업용 로봇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로봇 기술 경쟁력은 세계 5위권 안팎으로 평가받는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개발 경쟁 속에 로봇 활용은 더 늘어날 것이다. 너무 똑똑해진 휴머노이드 로봇이 파업에 나서거나 CEO 자리를 뺏는 반란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상황에 대처할 안전장치 또한 더 정교하고 철저해져야 한다. 인간과 로봇의 팀워크는 예측 가능하고 통제된 환경에서만 작동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11(토) ‘바비’ 케네디 아들의 돌풍… 확인된 정치 브랜드의 힘

바이든-트럼프가 4년 만에 재대결할 공산이 큰 내년 미국 대선에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민주당원으로 출마했다가 불과 1개월 전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다. 변호사이자 환경운동가인 그는 퀴니피액대가 이달 초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22% 지지를 얻었다. 바이든(39%) 트럼프(36%)에는 못 미치지만 만만찮은 숫자다. 18∼34세를 떼어놓으면 38%를 얻어 바이든(32%) 트럼프(27%)를 눌렀다. 최근 3개월 여론조사 평균치가 14.5%이니, 일시적 현상은 아니다.
▷그가 이처럼 돌풍의 주인공이 된 데는 이름의 힘이 크다. 큰아버지가 43세에 대통령이 됐다가 재임 중 살해된 존 F 케네디다. 아버지는 법무장관을 지낸 뒤 ‘바비(Bobby)’란 별명을 얻으며 개혁의 아이콘이 된 로버트 케네디. 두 형제는 1960년대 변화와 희망을 앞세워 기성정치를 흔들다가 5년 간격으로 총탄에 숨졌다. 69세가 되도록 선출직 출마 경험이 없던 케네디 가문의 아들이 단숨에 3위에 오른 이유다.
▷1등에게 주별 선거인단을 몰아주는 미국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로 민주 공화 양당은 케네디가 누구 표를 더 잠식할지 한창 표 계산 중이다. 그의 환경 인권 불평등 개선 주장은 바이든 표를 가져갈 것을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코로나 백신의 위험성을 이유로 접종 반대에 앞장서면서 트럼프 추종자들의 표를 뺏어갈 수도 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그의 출마 선언 직후 “케네디를 지지하면 안 되는 23가지 이유”라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케네디 바람의 실체는 지난주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제3 후보를 찍겠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응답자의 2%만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케네디 이름을 제시하며 물었더니 24%가 “케네디라면 찍겠다”고 답했다(바이든 33%, 트럼프 35%).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는 전망 속에 마음 줄 곳 없던 표심이 케네디라는 향수 짙은 이름을 통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선거에는 정책과 비전을 파는 마케팅 요소가 있으니 브랜드의 힘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1980년 이후 미 대통령 선거에서 가족 출마가 빈번한 것도 이런 인지도가 결정적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부시가 총 3번 당선됐다. 재선 대통령 클린턴의 지명도에 힘입어 아내 힐러리도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오바마 재임 8년 동안 대통령 부인이었던 미셸의 출마 가능성도 끊이지 않는다. 현직 대통령의 막강한 뉴스 장악력과 함께 그 이름이 소환하는 시대의 추억은 묘한 힘을 지닌다. 트럼프 후보가 며칠 전 “나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TV 스타였던) 내 브랜드로 당선됐다”고 한 게 엉뚱한 말이 아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1.13(월) ‘노인대국’ 일본의 ‘간병 대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 2017년 일본에선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일본 NHK가 방영한 ‘간병살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오랜 간병에 지쳐 가족의 목숨을 빼앗는 간병살인은 일본에선 연간 40여 건, 거의 1주에 1번꼴로 발생한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착한 배우자, 효자, 효녀가 결국 가해자가 된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제 이런 참극은 특정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10명 중 3명이 노인인 ‘노인 대국’ 일본은 간병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이달 초 일본 내각부는 2050년에 1인당 평균 간병비가 2019년에 비해 75%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나이가 들수록 간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데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의 인구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2년 뒤부터 거대한 폭풍이 다가온다. 인구 비중이 큰 단카이 세대(1947∼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75세를 넘기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준비하긴 했다. 2000년 개호(介護·돌봄, 간병) 보험제도를 도입해 고령자의 간병을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국민이 간병 서비스를 필요로 할 때 급여의 70∼90%를 지원한다. 하지만 제도를 처음 도입했을 때에 비해 간병비 부담이 4배로 증가해 갈수록 힘에 부치고 있다. 돌봄 비용 급증에 대비해 보험료를 인상하고, 돌봄 인력 확보를 위해 간병인의 급여를 올리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한국도 간병 부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양질의 요양시설이 부족하고 특히 간병은 가족 내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탓에 짐이 무겁다.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老老) 간병을 넘어 병자가 병자를 간병하는 상황도 흔하다. 이를 견디다 못한 간병살인이나 동반자살의 비극도 늘고 있다. 올해 4월 서울에선 폐암과 파킨슨병 등을 앓던 아내를 5년 6개월 동안 돌보던 60대 남성이 아내를 숨지게 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랜 간병은 경제적 파산으로도 이어진다.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경우 간병비가 월 400만∼500만 원까지 든다. 돈을 벌어도 고스란히 간병비로 들어가니 가족 누군가는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베이비부머의 상징인 ‘58년 개띠’가 올해 65세 대열에 들어섰고 내년에는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돌파한다. 이제라도 간병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20여 년 전부터 준비한 일본도 아직 완전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1-14 “반대 의견 듣겠다”… 美 국무부의 ‘반대 채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취임 1주일 만에 이란 시리아 등 7개국 국민에게 발급한 비자를 전격 무효화시켰다. 미 국무부 외교관들은 연판장을 돌려 “국익을 해친다”며 반대했다. 국무부가 외교관들에게 ‘반대 전문(電文·dissent cable)’을 쓰도록 허용하는 공식 제도(‘반대 채널’)를 통한 것이었다. 서명자가 1000명을 넘었다. 국무부 외교관이 7600명이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큰 숫자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최근 중동 주재 외교관 몇몇을 불러모은 것은 반대 정책을 직접 듣는 자리였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반대 전문’을 쓰고 서명한 외교관 23명 중 일부다. 이들의 목소리는 크게 두 가지다. “이-하 전쟁에서 휴전을 독려하라. 이스라엘을 지지하더라도 민간시설을 공격할 때만큼은 비난하라.” 이스라엘에 휴전 요청도 않고, 어떤 비판도 않는 방침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요청이다. 국무장관이 면담에 나서야 할 정도로 국무부가 균열됐다는 뜻이다.
▷외교관들의 ‘반대 전문’ 제도는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진 닉슨 행정부 때인 1971년 시작됐다.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이후 굵직한 군사작전이 비밀리에 부쳐지면서 외교관 266명이 집단 사표를 냈다. 전쟁 문건들이 언론에 유출되기 시작했다. “미 행정부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인 걸 알면서도 확전시켰다”는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그즈음 폭로됐다. 비밀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닉슨 행정부 때 “반대 의견을 듣겠다”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반대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뜻이겠다.
▷50년 남짓 동안 반대 전문은 연평균 4, 5건가량 작성됐다. 이라크 전쟁 반대(2003년), 보스니아 내전 개입 촉구(1993년) 등이 제안됐다. 이렇듯 직업 외교관이 실명으로 대통령과 장관에게 반대하는 제도인 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국무부는 인사상 불이익이 없을 것을 약속했고, ‘건설적 반대상’을 만들어 독려하기까지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실무자의 반대 정책 제안으로 쉽사리 바뀌기는 어렵다. 하지만 외교관들이 집단사고에 휩쓸려 ‘윗사람이 결정한 일’이라며 반론을 삼키지 않아야 한다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국무부의 독특한 제도는 최고위 당국자가 혹시 놓쳤을 반대 논리를 듣는 기회를 더 갖겠다는 뜻이다. 9·11테러 때도 테러 징후를 놓쳤다고 판단한 중앙정보국(CIA)이 레드 셀(Red Cell)을 추가로 설치했고, 미 원자력위원회는 방사능 유출 사고를 겪은 뒤 비슷한 제도를 만들었다. 단 한 차례의 오판일지라도 초래할 위험이 큰 안보와 핵과학 영역에서 먼저 시행된 것이다. 정부 기구건 기업이건 판단 실수와 그에 따른 위험 요소를 줄이고자 한다면 고려해 봄 직하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1-15 “대법관도 부패할 수 있다”… 美 대법원 첫 윤리강령

호화 크루즈 여행과 리조트 숙박, 26회의 개인 제트기 사용, 스포츠 경기 VIP 입장권, 골프 투어…. 클래런스 토머스 미국 대법관이 그동안 공화당 큰손 후원자 등에게서 받아온 향응 리스트는 화려하다. 그가 “친한 이들에게서 받은 ‘개인적 호의’는 신고할 의무가 없다”며 공개하지 않았던 수백만 달러어치 특혜들이다. 최근 언론의 추적 보도를 통해 뒤늦게 공개되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실망과 충격을 안겼다.
▷단 9명만이 존재하는 미국의 연방대법관은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종신직으로, 사법부의 다른 법관들과 달리 이들을 구속하는 명문화된 규범이 없다. 철저히 자기 규율에 따라 외부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하고 정재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사적 이해관계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사건을 기피해야 하지만, 그 판단 또한 대법관 스스로 내린다. 토머스 대법관이 억만장자 클럽에 가입해 수년간 부자 친구와 지인들이 제공하는 ‘호의’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다.
▷불붙는 도덕성 논란과 비판에 직면한 미국 대법원이 처음으로 자체 윤리강령을 채택했다. 14페이지 분량으로 ‘대법관이 사건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게 만들 수 있는 외부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했다. ‘대법관 윤리 규정이 필요하다’는 설문조사 응답이 75%에 이르는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갑부 지인의 전용기를 타고 알래스카로 고급 낚시여행을 다녀온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내가 안 탔으면 어차피 비어 있었을 자리”라는 식으로 반박한 것은 악화한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근엄한 법복 속 대법관도 결국 사람이다. 권력과 부의 달콤함에 맛 들이면 부패와 타락의 함정에 빠지지 말란 법 없다. 불법은 아니지만 오해를 사거나 부적절한 결정을 내릴 위험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토머스 대법관의 경우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 관련 심리에서 9명 중 유일하게 트럼프에게 유리한 의견을 내놓은 게 바로 그였다. 갑부 친구들이 여는 클럽 행사 장소로 대법원을 내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사상 첫 대법관 윤리강령이라는 고육지책에도 법률 전문가들은 “반쪽짜리”라는 혹평을 내놓고 있다. 실제 이행을 강제할 메커니즘도, 대법관 활동을 모니터링할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초고령화하는 일부 대법관들의 업무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와 맞물려 ‘종신직을 폐기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보수 대법관이 잇따라 임명되면서 판결이 너무 한쪽으로 쏠린다는 우려가 반영된 흐름이기도 하다. 정의와 공정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할 대법원이 스스로 신뢰를 지켜내지 못하면 결국 외부에서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11-16 나쁜 엔저, 슬픈 엔저

일본에서 엔저 앞에 ‘와루이’(나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건 지난해 봄이다. 엔화 가치가 이른바 ‘구로다 방어선’이라는 달러당 125엔을 뚫고 내려가면서다. 통상 엔화가 약세일 때 수출 기업의 실적 호조를 앞세워 경기를 회복시켰는데, 이런 경로가 먹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엔저의 긍정적 효과보다 수입가격 상승이 쏘아올린 물가 급등, 무역수지 악화 등 악영향이 크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일본 재무상도 “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나쁜 엔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최근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150엔을 넘어 152엔 수준까지 근접했다. 152엔마저 뚫는다면 엔화 가치는 버블 경제 붕괴 초반이던 1990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 된다. 엔화는 1985년 플라자 합의 때 ‘엔고’를 조건으로 세계 3대 통화가 됐지만, 버블 붕괴와 함께 엔고가 디플레이션을 몰고 오면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에 진입했다.
▷30년여 만에 맞은 초(超)엔저는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한 영향이 크다. 특히 10년간 아베노믹스 집행관으로 있던 ‘엔저론자’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올 4월 떠나고 신임 총재가 들어선 뒤에도 무제한 돈 풀기가 계속되면서 엔저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있다. 그사이 미국은 금리를 더 올려 금리가 낮은 엔화를 팔고 금리가 높은 달러를 사는 ‘엔캐리’ 자금이 엔저를 부추기고 있다.
▷엔저 특수에 힘입어 일본 수출 기업과 관광 산업은 역대급 호황을 맞았다. 엔화를 헐값에 사서 일본 주식을 사려는 외국인 자금이 몰리면서 증시도 훨훨 날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일본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탓에 수출 기업의 실적 개선이 임금 인상과 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는 끊겼다. 오히려 엔저로 엔화 구매력이 바닥으로 추락해 일본 국민은 더 가난해졌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물가 상승에 100엔숍이 사라졌고, 관광객이 넘치는 대로변 쇼핑가와 달리 뒷골목 상점은 눈물의 폐업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나쁜 엔저를 넘어선 ‘가나시이’(슬픈) 엔저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데도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에서 확실히 탈출하기 전까지 엔저에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 주력 제품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거 원-엔 환율이 ‘1 대 10’ 비율보다 하락하면 한국 경제가 감기에 걸렸는데, 지금 100엔당 860원대까지 낮아졌다. 슈퍼 엔저 장기화의 영향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우리 경제 구조를 고도화하고 수출 경쟁력을 더 높여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1-17 인큐베이터 아기마저… “병원이 묘지” 된 가자지구 참상

눈조차 뜨지 못하는 가냘픈 미숙아들이 한 줄로 뉘어진 한 장의 사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전기가 끊기면서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진 가자지구 아기들의 모습이다. 작게는 800그램, 기껏해야 1.5kg밖에 되지 않는 조산아들은 숨쉬기도 힘겨워 보인다. 공습 중에 출산했거나 마취제도 없이 제왕절개를 한 엄마들은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체온 유지와 산소, 영양 공급이 되지 않은 상태에 노출된 39명의 조산아 중 3명이 이미 숨졌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된 지 40일째. 가자지구 내 병원들은 한계 상황에 몰려 있다. 가자지구 내 최대 의료시설인 알시파 병원마저 약품과 연료, 물, 식량이 바닥났다. 의료진은 컴컴한 치료실에서 촛불이나 휴대전화 조명에 의지해 65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복도에 늘어선 이동 침상조차 확보하지 못한 피투성이 소녀는 병원 바닥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원 역내에는 잇단 공습 때문에 매장하지 못한 100여 구의 시체가 쌓여 있고, 일부는 부패하기 시작했다. “병원이 공동묘지”라는 절규가 터져나온다.
▷위태롭게 버텨오던 알시파 병원은 15일 새벽 이스라엘군의 급습으로 아비규환 상태다. 이스라엘은 “병원 지하에 하마스의 작전본부가 있다”며 탱크 6대와 특공대원 100여 명을 투입했다. 병원은 전쟁 중에도 국제법상 보호되는 인도적 시설로, 공격 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이스라엘군은 “병원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하마스의 행위야말로 전쟁범죄”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마스가 병원 내 환자들을 ‘인간방패’로 삼은 채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사망한 가자지구 주민의 수는 1만1200여 명, 이 중 어린이가 4600명으로 40%를 넘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어린이들 앞에 닥친 것은 추위와 두려움, 굶주림이다. 잿더미가 된 길 한복판에서 “이 두 손으로 시체들을 옮겼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년의 눈동자엔 공포가 가득하다. 구호식량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치켜드는 절박한 손길도 상당수가 아이들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체를 장악해 하마스를 궤멸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 완강하다.
▷“아기들이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대로면 알시파 병원 내 미숙아들은 매일매일 더 죽어나갈 것이라고 의료진은 호소하고 있다. 5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자지구 내 임신부들이 전쟁 스트레스로 조산하는 사례마저 늘어나는 상황이다. 소중한 새 생명이 포염 가득한 세상에 나오기 무섭게 꺼지는 비극이 반복될 것이란 의미다.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도 용납이 안 되는 21세기 한복판에서 어린이들의 희생마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18(토) 현실성도 없고 지켜지지도 않는 ‘김영란법 식사비’ 3만원

2016년 9월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시행되자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 등지의 식당에는 2만9000원짜리 ‘김영란 세트’가 등장했다. 가짓수와 양을 줄인 한정식에 맥주 한 병을 끼워 넣는 식이다. 청탁금지법에 규정된 ‘식사비 한도 3만 원’ 때문에 매상이 줄어들 것을 걱정해 음식점 업주들이 내놓은 고육책이었다. 이제는 김영란 세트를 찾아보기 어렵다. 최소한의 구성으로 세트를 내놓으려 해도 가격을 맞추기 어려운 데다 사실상 이 조항이 사문화돼서다.
▷요즘 밖에 나가서 밥 한번 먹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외식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집계 기준으로 2016년 9월 서울의 냉면 가격은 평균 8077원, 삼겹살 1인분은 1만3154원이었는데 지난달에는 냉면 1만1803원, 삼겹살 1만9253원으로 인상됐다. 서울 도심의 어지간한 식당에서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이면 3만 원을 훌쩍 넘고 한우는 엄두도 못 낸다. 그런데 청탁금지법에서 정한 식사비 한도는 7년이 넘도록 3만 원으로 고정돼 있다.
▷이 기준은 2003년 제정된 공무원 행동강령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3000원이던 시절에 만든 기준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16일 “시간과 여건 등을 비춰 봤을 때 현실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 이유다. 이렇다 보니 청탁금지법과 관련해 밥값을 기록하는 경우에는 흔히 참석 인원을 부풀려 1인당 비용을 줄이는 편법을 쓴다. 참석자 중 누군가가 증거를 모아 신고하지 않는 한 적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청탁금지법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벤츠 여검사’ 사건이었다. 내연 관계인 변호사에게서 벤츠 등을 선물 받고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친 혐의로 기소된 여검사가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아 무죄 선고를 받자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대가성 여부와 상관없이 공직자가 금품과 청탁을 받지 못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이 법이다.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초 취지와 달리 대상 범위가 너무 넓어졌고 지키기 어려운 조항이 섞였다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청탁금지법이 적용되는 공직자와 교육기관·언론사 종사자는 25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식사비는 물론 경조사비, 선물값까지 규제를 받는다. 경조사비는 한도가 5만 원으로 정해져 있어서 여러 사람 명의로 봉투를 보내는 ‘봉투 쪼개기’가 횡행한다. 선물은 농축수산물이냐, 명절 전후냐에 따라 상한선이 5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제각각이라 품목과 날짜를 따져 가며 보내야 한다. 애매하고 비현실적인 법은 잠재적 범법자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청탁금지법의 기준을 면밀하게 손볼 때가 됐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20(월) 아파트 고층서 초등학생이 던진 돌에 맞아 숨진 70대

날벼락도 도시에서만 있을 수 있는 날벼락이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 김모 씨(78)가 다리가 불편한 아내를 부축하며 아파트 입구 계단을 오르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주먹만 한 돌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가 10층 높이에서 던진 것이었다.
▷2015년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서 ‘캣맘 벽돌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한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투척한 벽돌에 아래에서 고양이 집을 지어주던 55세 여성과 29세 남성이 맞아 여성은 사망하고 남성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벽돌을 던진 아이는 10세도 되지 않아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보호처분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2007년에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중학생 둘이 장난삼아 벽돌을 투척했다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40대 남자가 사망했다. 중학생들은 14세 미만으로 형사처벌은 면했지만 보호처분을 받았다. 널리 보도된 사건이 이렇다는 것일 뿐이고 상해에 그친 사건이나 다행히 피해를 면한 사건까지 포함하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과거 두 사건은 옥상에서 돌을 던졌다. 소방법에 따르면 아파트 옥상문은 화재 시 고층 가구 거주자들의 안전을 위해 개방하도록 돼 있다. 2015년 사건 이후 신축 아파트의 경우 평상시에는 잠가두고 화재 시에만 자동으로 여는 개폐 장치를 달도록 건축법으로 의무화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에는 이런 장치가 없는 곳도 허다하다. 경찰에서는 투척 사건만이 아니라 추락사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잠가두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소방법과 충돌해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번 사건은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에서 돌을 던졌다. 복도식 아파트를 계단식 아파트로 다 바꾸기 전까지 대책이 난감하다. 계단식 아파트로 다 바꾼다 해도 창문을 열고 던지는 것까지 막을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돌에 누군가 맞아 죽는 황망한 일만은 없어야 한다. 유족은 누굴 탓하기도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고, 아이나 부모에게는 평생 마음의 죄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도시의 속도가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도로 무단횡단을 삼가고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동차에 주의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아파트가 많은 나라임에도 도시의 높이가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그만큼 경각심을 갖고 있지 않다. 건물에서의 추락이나 투척의 위험에 대한 교육을 어릴 때부터 강화해야 한다. 날벼락을 피하려고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고 다녀야 하는 나라가 돼서는 곤란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21 오픈AI 올트먼 퇴출 사건… ‘AI 윤리전쟁’의 서막

“오픈AI는 인공지능(AI)이 삶의 모든 측면을 개선할 것이란 믿음에서 설립됐지만 동시에 심각한 위험도 존재합니다.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중요합니다.” 올해 5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한 발언이다. 생성형 AI 혁명의 주인공인 그는 이렇게 틈만 나면 AI의 위험성,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던 올트먼이 지난주 오픈AI에서 쫓겨났는데, 그 원인이 과도하게 수익성만 좇았기 때문이라니 외부인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오픈AI의 특이한 지배구조를 알아야 한다. 오픈AI는 2015년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안전하게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단체로 출발했다. 지분이 없는 6인 이사회가 모든 결정권을 갖는다. 챗GPT 개발이 외부 입김에 좌우되지 않도록 자본과 경영을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 초기 투자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나중에 130억 달러를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이익은 배분받아도 경영에는 간여할 수 없다.
▷올트먼의 퇴출은 그와 함께 회사를 공동 창업한 수석과학자 일리야 수츠키버가 주도했다. ‘AI의 대부’ ‘딥 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의 수제자로, AI의 급속한 개발이 인류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힌턴 교수 역시 올해 5월 “악의적인 이들이 나쁜 일을 위해 AI를 쓰는 것을 막기 어렵다”고 경고하면서 10여 년간 협력해온 구글과 인연을 끊었다. 퇴출을 주도한 이들의 눈엔 올트먼이 겉으로만 규제를 강조할 뿐 실제로는 AI의 위험을 경시하고 사업만 확장하려는 인물로 비친 모양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1987년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영입한 존 스컬리 CEO 주도로 회사에서 퇴출된 사건을 떠올린 이들이 많다. 잡스의 퇴출 사유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고성능 PC 개발에 과도한 자원을 투입해 회사 수익성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1년 만에 기업 가치를 111조 원으로 키우고도 예고 없이 해임 통보를 받은 올트먼과 많이 다르다.
▷그렇지만 38세 올트먼은 이미 AI 업계의 거인이 됐다. MS 측은 그가 MS에 합류해 새로운 AI 연구팀을 이끌 것이라고 밝혔다. 올트먼의 이적으로 종결되긴 했지만 이번 ‘오픈AI 내전’은 인류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AI가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협요인이 될 것이란 세력과, AI를 활용해 미래의 주도권을 쥐려는 이들이 정면충돌한 ‘AI 윤리전쟁’이기 때문이다. 선두그룹 따라가기에 급급한 AI 후발국으로선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워 더 불안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22 “검사는 자기 손부터 깨끗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수사를 지휘하던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가 갑자기 수사에서 배제됐다. 이 검사에 대해 여러 비위 의혹이 제기되자 20일 서울중앙지검이 관련 장소들을 압수수색하고, 이원석 검찰총장은 이 검사를 인사조치 한 것이다. 이 총장이 예상 밖의 강수를 뒀다는 평가가 검찰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9일 야당이 이 검사와 ‘고발 사주’ 손준성 검사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하자 이 총장은 “나를 탄핵하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검사를 탄핵한 것은 “보복 탄핵”이라는 이유에서다. 9월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마당에 이 검사까지 쌍방울 관련 수사에서 빠지게 되면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현실적 우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총장은 이 검사를 대전고검 검사 직무대리로 발령해 수사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이 총장은 이 조치를 발표하기 전 검찰 간부들에게 “남의 죄를 단죄하는 검사는 자기 손부터 깨끗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탈리아에서 검찰이 주도한 반부패 수사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연상케 한다. 평검사 시절부터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는 이 총장은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당시 특수통 출신 전직 검사장을 구속할 만큼 검찰 출신의 비리에도 엄격했다. 지난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제 식구 감싸기’라는 말이 제일 싫다”며 “(검찰총장) 직분을 할 동안에 ‘감찰총장’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일각에선 사법시험 동기이자 지금은 직속상관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의 관계가 이번 조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한 장관에 가려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는 이 총장이 도덕성, 청렴성을 내세운 것은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야당이 일단 철회한 이 검사에 대한 탄핵안을 다시 발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방안이라는 해석도 있다. 검찰이 자체적으로 강제수사와 인사조치까지 한 만큼 탄핵은 불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 검사에게 쌍방울 수사 지휘를 계속 맡기면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배경이 어떻든 이번 조치로 이 총장이 검사의 비위 문제에 칼을 꺼내 든 모양새가 됐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처남의 부탁으로 골프장 직원의 범죄 기록 조회, 수사 중인 재벌그룹 부회장으로부터 가족모임 접대 등 이 검사에 대해 제기된 의혹들도 가볍지 않다. ‘라임 전주’ 김봉현 씨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들에 대한 이른바 ‘99만 원 불기소’ 등 과거 검찰에서 제 식구 감싸기라는 지적을 받았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과연 ‘이원석 검찰’은 다를지 지켜보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23 11조 원 드는 ‘달빛고속철’… 與野의 포퓰리즘 짬짜미

대구와 광주를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기차보다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기차를 타면 ‘ㅅ’자 형태로 오송역까지 가서 환승해야 하고, 버스와 비교해 시간은 별 차이 없는데 요금은 두세 배 비싸다. 이 때문에 대구와 광주를 바로 잇는 철도를 건설하자는 얘기가 일찌감치 나왔지만 20년 넘게 공회전했다. 광주대구고속도로도 하루 교통량이 전국 고속도로 평균의 절반이 안 될 만큼 한산한데 굳이 철도를 깔아야 하느냐는 거였다.
▷대구∼광주 간 철도 건설은 재작년이 돼서야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됐지만 이마저도 후순위 사업으로 밀렸다. 비용 대비 편익이 1보다 커야 경제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 수치가 절반에 못 미친 탓이다. 당시 198km 길이의 일반철도를 단선으로 놓는 데 4조5000억 원 이상의 사업비가 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대구시와 광주시가 2038년 아시안게임을 공동 유치하겠다며 철도 조기 착공을 밀어붙이더니 올 8월 ‘달빛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대구 옛 지명 ‘달구벌’과 광주의 순우리말 ‘빛고을’의 앞 글자를 딴 고속철 건설을 사업이 타당한지 따져보는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추진하려는 법안이다. 대구가 지역구인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하고 여야 의원 216명이 서명해 헌정 사상 최다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영호남 화합과 국토균형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거대 양당의 텃밭인 대구와 광주 지역의 표심을 사려는 선심성 법안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야는 앞서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과 ‘광주 군공항 이전’을 특별법으로 주고받기 한 전력이 있다.
▷당초 계획과 달리 특별법은 205km 구간에 복선 고속철도를 건설하도록 했다. 최고 시속 300km를 보장하는 선로를 2개 이상 깔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맞추면 사업비가 11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국토교통부는 추산했다. 더군다나 설계 변경으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지만 시간 단축은 고작 2분에 그친다. 일반철도를 깔고 고속 운행하면 86분, 고속철도로 하면 84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미 일반철도 사업비도 물가 상승으로 6조 원을 넘겼는데, 2분 당기려고 5조 원을 더 쓰겠다는 것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 강기정 광주시장을 만나 연내 특별법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힘 소속 홍 시장은 “국회가 결정하면 기획재정부는 따라오게 돼 있다”고 했다. 여야가 정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초대형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2035년 달빛고속철의 수송 인원은 주중 하루 7800명 정도라고 한다. 정치 논리로 탄생해 텅 빈 지방공항들처럼 달빛고속철도 역시 텅 빈 열차가 달릴 수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1-24 고령운전자 사고 나홀로 증가세… 치사율도 최고

해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늘어도 교통사고 건수는 줄고 있다. 자동차 안전 기술이 좋아지고, 교통안전 시설과 정책이 선진화하며, 국민 안전 의식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다. 그런데 유독 65세 이상 고령자들이 내는 사고는 증가 추세다. 22일 새벽에는 강원 춘천에서 82세 남성이 몰던 차가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3명을 덮쳐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운전자는 “신호등과 보행자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6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고는 3만4652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5년간 전체 교통사고는 9.7% 줄었는데 고령자 사고는 29.7% 급증했다.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로 면허 소지자 1만 명당 121건이다. 다음이 65세 이상으로 79건. 하지만 교통사고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고령 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는 전체 사고의 16%인데 사망 사고는 24%였다(2021년 기준).
▷운전은 확인, 예측, 결정, 실행 과정을 거친다. ‘확인’ 단계에선 시력 청력 등 감각능력, ‘예측’과 ‘결정’엔 주의력과 정보 처리 등 인지능력, ‘실행’엔 운동능력이 필요하다. 이 중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젊은 운전자들의 2배로 늘어난다. 교통사고에 영향을 주는 질환은 백내장, 퇴행성 관절염 등 모두 23종인데 70세 전후로 발병률이 증가해 교통사고 위험도도 높아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고령자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이 월등히 높다며 주요 원인으로 허술한 면허 관리를 꼽았다. 현행 면허 갱신 주기는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이다. 80세 이상이 되면 교통사고 위험도가 60대의 2배가 되므로 갱신 주기를 단축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70∼79세는 3년, 80세 이상은 1년이다. 일본은 71세 이상은 3년인데 75세부터는 인지 및 운전 기능 검사를 통과하고 2시간짜리 고령자 강습을 받아야 하며 교통법규 위반 이력이 있으면 실기시험도 봐야 한다.
▷많은 나라가 면허 자진 반납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반납률은 높지 않다. 나이 들수록 건강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이동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생계 활동을 하는 노년도 많다. OECD는 고령자의 이동권을 제한하면 행복도를 떨어뜨려 교통사고 못지않은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고령자를 도로에서 몰아내려 하지만 말고 이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관련 시설을 정비하고, 안전장치 장착을 지원하며, 취약지역의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2040년이면 고령 운전면허 소지자가 1300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25(토) 150년 기술기업 도시바의 쓸쓸한 퇴장

도시바 하면 한국의 60, 70대는 1970년대 안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미닫이문 흑백TV를 떠올릴 것이다. 영문 알파벳 로고가 선명한 노트북이 기억난다면 그 이후 세대라 할 수 있다. 도시바가 가진 최초 기록들만 열거해도 왜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렸는지 알 만하다. 일본 최초의 냉장고, 세탁기, 컬러TV부터 세계 최초의 노트북PC, 낸드플래시 반도체까지 수많은 1호 제품을 양산했다.
▷150년 역사의 일본 대표 기업 도시바가 다음 달 20일이면 도쿄 증시를 떠난다. 도시바는 22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대주주 변경과 함께 자진 상장폐지를 확정했다. 1949년 상장해 시가총액 상위 자리를 지켜온 일본 테크산업의 상징이 74년 만에 증시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2조 엔(약 18조 원)을 들여 지분 전량을 확보한 현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새 주인이 됐다.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 뒤 재상장하겠다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도시바는 ‘일본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다나카 히사시게가 1875년 설립한 다나카제작소에서 출발했다. 재벌기업 미쓰이에 인수돼 시바우라제작소로 바뀌고 일본 최초로 백열전구를 만든 도쿄전기와 합병하면서 도쿄의 도(東), 시바우라의 시바(芝)를 따 도시바가 됐다. 전자회사로 출발했지만 방산·철도·의료기기·중공업까지 손을 뻗치며 8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재계의 거인이자 150년 기술기업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국과 중국 업체의 거센 추격에도 변화에 느렸다. 특히 반도체 사업에선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던 낸드플래시에 추가 투자를 할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기술을 전수해준 삼성전자에 완전히 밀렸다. 2001년 도시바의 합작사업 제안을 거절한 삼성전자는 과감한 투자로 1년 반 만에 도시바를 앞질렀다. 경쟁사들이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인수를 포기한 미국 원전회사 웨스팅하우스를 무리하게 사들인 건 결정적 패착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천문학적 손실을 떠안으면서 인수 11년 만에 웨스팅하우스의 파산을 선언했다.
▷소니, 파나소닉 등이 적자에 허덕일 때도 도시바는 흑자를 이어갔지만 가짜였다. 5년간 2200억 엔의 이익을 부풀린 분식회계가 2015년 들통나 가파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여파로 돈 되는 사업을 모조리 팔아야 했다. 상폐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행동주의 펀드들에서 자금 수혈을 받았지만 경영 정상화는 더 꼬였다. 2017년 발간된 일본 경영서 ‘도시바의 비극’은 경영진의 파벌주의, 연공서열의 경직된 조직 문화, 시장 변화를 읽지 못한 폐쇄적 경영 등을 실패 원인으로 짚었다. 혁신 않고 한눈 팔다가는 어느 기업이라도 도시바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1-27(월) 기시다 최악 지지율과 ‘아오키 법칙’

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지지율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의 1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각 지지율은 21%, 지지하지 않는다는 74%였다. 자민당 지지율도 24%에 그쳤다. 아사히와 요미우리신문 조사에서도 내각 지지율이 25% 이하로 나왔다. 모두 2012년 자민당이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이후 최악의 수치라고 한다. 그러자 여론조사 결과로 일본 정권의 붕괴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아오키 법칙’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오키 법칙은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을 지낸 아오키 미키오 전 의원이 제시한 것으로 3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각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의 합계가 50을 밑돌 때이다. 두 번째는 30 대 50 대 20 법칙으로 자민당 지지율 30%, 무당파 50%, 야당 지지율 20%의 비율이 무너질 때이다. 세 번째는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 비율이 내각 지지율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을 때이다. 마이니치 조사를 보면 내각과 정당 지지율 합계가 50을 밑돌고, 자민당 지지율은 30% 미만이며, 정권 지지율과 비지지율 차이가 50%포인트를 웃돈다. 아오키 법칙이 모두 들어맞는 상황이다.
▷올 5월만 해도 50% 안팎의 지지율로 “선진국 중 가장 안정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자랑했던 기시다 정권의 인기가 급락한 이유는 뭘까. 우선 일종의 디지털 주민증인 ‘마이 넘버 카드’를 서둘러 도입했다가 수많은 행정오류가 발생한 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안에서 불편을 초래한 것이다. 장남 비리 등 가족 문제와 자민당 소속 차관급 인사 3명이 스캔들로 낙마하는 인사 실패도 있었다. 집권 이후 증세를 부르짖다가 지지율이 떨어지자 1인당 4만 엔(약 35만 원)의 감세안을 내놓은 것도 역풍을 맞았다.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불만은 엔저 등으로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는 것이다. 수출 위주의 대기업 실적은 좋아지고, 증시도 활황이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 물가상승률은 거의 매달 전년 대비 3%에 달하고, 실질임금은 18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30년 넘는 장기 저성장으로 물가 상승을 체감하지 못했던 일본인에겐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요즘 여론은 ‘감기가 걸려도 기시다 총리 탓’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고물가를 비롯해 잇단 정책 실패, 가족 비리, 인사 실패 등이 ‘종합세트’처럼 동시에 벌어졌으니 지지율이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신뢰의 위기다. 여론조사에서 정부 경제정책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70%대를 오간다. 정책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비전 없고, 권력 연장만 노리는’ 기시다 총리가 싫다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은 어느 나라든 비슷한 것 같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11-28 “워싱턴이 부서졌다”… 막장 정치에 美 의원 불출마 도미노

미국 정치인의 불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대선 및 상하원 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11월까지 1년 가까이 남았지만 벌써 38명째다. 이 중 절반은 주지사나 상원의원 등 다른 선출직에 도전하겠다지만 절반은 말 그대로 “정치를 떠난다”고 했다. 긴 연말 휴가를 마치는 1월 중에 불출마 선언이 더 나올 전망이다. 2022년과 2018년의 55명 불출마 기록이 깨질 듯하다. 상원 100명, 하원 435명 가운데 10% 정도다.
▷워싱턴에서 현역의원의 정치 포기가 주목받는 것은 손에 쥐다시피 한 재(再)당선을 포기하는 결심이어서 그렇다. 지난 20년간 90% 넘는 선거구에서 ‘재출마는 곧 당선’이었다. 미국에선 물갈이 전략공천이란 제도가 없다. 현역의원에게 별 하자가 없다면 경선에서 승리해 출마한다. 2022년 상원 선거 때 33곳에 출마한 현역의원은 전원 당선됐다. 재출마한 하원의원은 94.5%가 승리해 돌아왔다. 현역 공천 탈락이 30∼40%를 넘나드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된다.
▷현역 재당선은 TV 광고의 역할이 크다는 게 정설이다. 미국 상업 광고에선 자동차건 세탁비누건 경쟁 제품 깎아내리기가 허용된다. TV 선거광고도 마찬가지로 상대 후보 꼬집기가 넘쳐난다. 이런 TV 광고에 방송 횟수 상한선이 대체로 없다. 정치자금이 넉넉한 다선 현역의원이 TV 광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다. 일견 불공정한 이 제도는 미 대법원의 1976년 판례 때문에 고치기도 쉽지 않다. 대법원은 “TV 광고에 상한선을 두는 것은 ‘정치적 발언을 가로막는 것’으로,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불출마 의원들은 막장 정치를 이유로 꼽았다. 5선 하원의원인 켄 벅(64)은 “우리는 길을 잃었다. 트럼프의 대선 패배 부정을 똑바로 다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초강경 노선을 걸었지만 당의 난맥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워싱턴이 부서졌다(broken)”거나 “트럼프 계파의 혐오 정치가 문제”라는 표현이 불출마 선언문에 담겼다. 이런 자조와 무기력이 워싱턴 의사당에 퍼져 가자 공화당의 빌 하이징아 의원(54)은 “이렇게 의원 생활을 한다면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은가 묻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미 의회는 실질적 권한과 국정 참여의 명예가 존중받던 곳이다. 예산발의권도 의회에만 있고, 대통령도 의회 동의 없이는 전쟁을 치르지 못한다. 그런 미 의회가 안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불출마 선언을 한 하원의원은 “어린아이 칭얼거림 같아진 워싱턴 정치는 더 이상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일 만한 곳이 못 된다”고까지 평가했다. 미국 정치의 하향 평준화를 걱정하는 말인데, 우리 여의도 정치에 적용해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 안타깝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1-29 가짜가 판치는 세상… 올해의 단어 ‘authentic’

코로나 팬데믹이 가고 새로운 팬데믹이 시작됐다. 허위 정보의 대유행에 ‘가스라이팅’ 당할까 걱정하다 이젠 진위 구분이 어려워 ‘진짜’가 뭔지 찾아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팬데믹(2020년) 백신(2021년) 가스라이팅(2022년)에 이어 올해의 단어로 ‘진짜’ ‘참된’ ‘진정한’이란 뜻의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인공지능(AI)이 만드는 딥페이크 시대 ‘진짜의 위기’를 반영한 단어다.
▷올해의 단어는 조회수와 검색량으로 선정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막말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체포당하는 가짜 이미지가 확산될 때마다 ‘authentic’ 검색량이 증가했다. 미 국방부가 화염에 휩싸인 가짜 사진이 ‘속보: 펜타곤 근처에서 폭발’이라는 제목으로 유포됐을 때는 검색량뿐만 아니라 미 국채와 금값이 치솟고 뉴욕 증시가 하락했다. 가짜가 진짜 시장을 움직인 것이다.
▷요즘 전쟁은 가짜정보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취재가 통제된 중동전에서 ‘온라인 병사’들의 암약이 활발하다. “이스라엘 총리 병원에 긴급 이송” “하마스가 이스라엘 아기들 참수”라는 속보가 전해졌지만 거짓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축구 스타 호날두, 다섯 아이를 업고 안은 팔레스타인 아버지도 AI 합성물이었다. 이스라엘 기관에 따르면 전쟁 관련 소셜미디어 계정 5개 중 1개가 가짜다.
▷“거짓말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진실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말이 있다(영국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 실제로 자극적인 정보를 선호하는 소셜미디어의 보상 체계 탓에 가짜의 확산 속도가 훨씬 빠르다. 매사추세츠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허위 정보가 트위터 사용자들에게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진짜보다 6배 빨랐다. 트위터를 인수해 회사명을 ‘X’로 바꾼 일론 머스크는 “소셜미디어에선 authentic해야 한다”며 사용자 인증 유료 서비스를 도입했지만 가짜정보 퇴치는 못 하고 ‘authentic’ 조회수만 올려놓았다.
▷거짓말도 인플레 법칙을 따른다. 통용될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진짜가 주목받는다. ‘잔인하도록 진실된’ 영국 왕실 얘기를 담은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가창력과 함께 “살찐 내 모습이 더 좋다”는 진솔함 덕분에 억만장자가 됐다. 65세 여배우가 처지고 주름진 몸으로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가 흥행한 한 해였다. 연출된 이미지 가득한 인스타그램에 질린 청년들이 보정 불가 프랑스 앱 ‘비리얼(Be real)’로 몰리고 있다. 내 눈도 내 귀도 믿을 수 없는 가짜 시대의 역설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30(목) 한국 소비자 ‘호갱’으로 본 샤넬·에르메스·나이키

요즘 MZ세대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이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대중문화 아이템이자 투자 방법 중 하나다. 한정판 스니커즈를 산 뒤 웃돈을 붙여 되파는 리셀은 ‘슈테크’(슈즈+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나이키가 3년 전 명품 브랜드 디올과 협업해 내놓은 운동화는 전 세계 8000명에게만 판매됐는데, 리셀 가격이 판매가의 10배인 3000만 원까지 뛰기도 했다.
▷슈테크보다 앞서 등장한 ‘샤테크’(샤넬+재테크)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백화점 앞에서 밤을 새우는 ‘샤넬 노숙자’와 대신 줄을 서주는 ‘오픈런 아르바이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른바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로 불리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구매 이력이 있는 고객에게만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명품에 갓 입문한 2030세대는 리셀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품 구입보다 중고 거래가 낫다는 거였다. 국내 리셀 시장은 지난해 1조 원대로 커졌고 2025년이면 2조8000억 원대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자 샤넬, 에르메스를 비롯해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 등 운동화 브랜드들이 지난해부터 줄줄이 ‘리셀과의 전쟁’에 나섰다. 재판매 목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면 판매 제한이나 계약 취소, 회원 자격 박탈 같은 불이익을 주는 조항을 약관에 명시하고 사실상 리셀을 금지한 것이다. 회사 가격 정책을 훼손하는 개인 간 거래를 막고 브랜드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도였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선 “내 돈 주고 산 물건 내 맘대로 처분도 못 하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보는 명품 브랜드들의 배짱 장사가 끊이지 않았기에 고객 불만은 더 폭발했다. 명품업체들이 해마다 서너 차례씩 가격을 높이는 건 이제 놀랍지 않은 뉴스다.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때도 아침 일찍부터 번호표를 뽑고 줄서야 하고, 수선된 제품을 받기까지 수개월을 기다리는 건 부지기수다. 제품 불량으로 고객이 교환을 요구할 때도 그 사이 가격 인상분을 받는다고 하니 소비자 기만이 도를 넘었다.
▷한국이 1인당 명품 소비 1위 국가에 올랐지만 이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작년에만 168억 달러(약 21조 원)에 달하는 명품을 구입했고, 1인당 구매액(325달러)은 미국 일본 유럽은 물론이고 명품 사랑으로 유명한 중국을 앞질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리셀은 구매자 권리”라며 샤넬, 에르메스, 나이키를 대상으로 리셀을 금지한 약관을 고치도록 했다. 하지만 기꺼이 호갱이 되려는 소비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명품·수입 브랜드의 ‘갑질’은 계속될 것 같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