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이야기24/ 2023.
박근혜대통령 불법탄핵 "위대한침묵" 제1부.제2부.제3부.제4부.제5부(우종창 기자의 거짓과 진실)
많은 시청과 홍보바라며 이것또한 자유대한민국의 무너진법치와 자유민주주의수호 및 애국활동하는 길입니다.
■"불법탄핵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1부(22분)
https://youtu.be/uSA8FEsZv4I
●불법탄핵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2부(24분)
https://youtu.be/UZfFbZWIRBs
●불법탄핵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제3부(21분)
https://youtu.be/CRCYJffxFBQ
●불법탄핵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제4부(22분)
https://youtu.be/A6DvNpVAh3s
●불법탄핵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제5부(22분)
https://youtu.be/qGeIio2myDs
역사에 기억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 제작을 위해 몸을 던진 우종창대기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07.21 김영호 “박근혜 탄핵 당할 만큼 큰 잘못 안 해”
21일 국회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서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큼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뉴스1
김 후보자는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가”라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김 후보자가 과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시킨 국회의원들이 ‘체제 전복 세력’이라고 했었다. 김 후보자는 “그런 우려가 있다는 걸 학자로서 말씀을 드린 것”이라며 “그럴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저는 의회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의원들이 거리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이라며 “그럼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는데 잘못하신 건가. 체제 전복한 건가”라고 물었다. 김 후보자는 “윤 대통령은 검사로서 자기의 직무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 후보자는 이날 ‘탄핵이 정당하냐고 생각하느냐’는 민주당 이용선 의원 질의에는 “그런 과정이 결국은 북한의 전복 전략에 역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학자로서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탄핵 과정과 관련해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견해를 표현의 자유에 따라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의견 개진을 막는 것은 다수의 폭정”이라고도 말했다. 김 후보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존중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민주당 황희 의원이 ‘헌재 판결이 잘못됐다는 것 아니냐’고 묻자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했다.
김 후보자는 이날 후보자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지금처럼 국제정치 질서가 자유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는 상황에선 분명한 자유의 가치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극우’라는 야당 지적에 대해서는 “’극우 유튜버’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후보자는 유튜브 등에서 ‘김정은 정권 붕괴’, ‘북한 전체주의체제 파괴’, ‘북한과 대화·협력은 사기극’ 등의 주장을 했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북한인권 중시하고 대북제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 극우냐”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09.23 영부인 대신 여고생 박근혜 방일, '해운 한국' 첫걸음 떼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⑤ 파란만장 청와대 시절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신동식 회장이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걸프오일 경영진을 만난 결과 걸프에서 발주한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무상으로 받아냈다. 당시 5만~6만t급 유조선을 주로 운영하던 걸프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원유 수송량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일본에 발주한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이듬해 명명식을 앞두고 일본 정부와 걸프오일로부터 “영부인이 일본을 방문해 인수해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국교 정상화 초기 한일 양국간 우호 관계를 다지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와 이왕 유조선을 제공하는 김에 한국 정부의 호의를 재확인하려는 걸프 측의 속내가 일치한 결과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퍼스트 레이디’가 일본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영애인 박근혜 양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박근혜가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라

▲1969년 6월 유조선 명명식 참석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영애 박근혜(사진 왼쪽)양과 신동식(왼쪽에서 둘째) 회장. [사진 신동식]
“당시 청와대에는 1층에 집무실, 2층에 관저가 있었지요. 하루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층으로 내려오시며 ‘아직 고등학생인 근혜가 해외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잘 돌보고, 외삼촌인 육인수 의원의 동갑내기 딸과 함께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했지요. 결국 육 여사 대신 근혜 양이 명명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어요.”
군인 출신 정치인과 관료가 대부분이던 당시 청와대에서 젊고 해외 경험이 많은 민간 출신 전문가인 신 회장은 독특한 캐릭터였다. 덕분에 박 대통령 가족과 편하게 지냈다. 박근혜 양이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을 정도였다. 69년 6월 신 회장은 명명식 참석을 위해 박근혜 양과 도쿄로 출발했다. 선박 건조 후 최초로 물에 띄울때 주빈이 이름을 붙이고 배를 묶은 밧줄을 도끼로 자른다. 19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후 주빈은 여성이 맡는 것이 관례다. 명명식 후에는 인도 서류에 서명해 소유권이 선주에게 넘어간다.
도쿄에 도착한 신 회장은 엄민영 주일대사의 부인에게 명명식 준비를 부탁했다. 긴자를 방문해 구두와 옷을 사서 단장하고, 미용실에서 머리와 화장을 했다. 신 회장이 “굽이 있는 구두를 처음 신어본다는 근혜 양에게 명명식에서 영어 연설까지 맡기려니 내심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숙소인 오쿠라 호텔에는 일본 경시청이 특별 경비본부를 세우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조총련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6월 21일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열린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 명명식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됐다. 박근혜 양은 짧은 영어 연설을 모두 외워서 무난히 진행했다. 작은 배조차 없던 우리나라가 대형 유조선단을 운용하게 된 순간이었다.
“자칫 영부인 방일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질뻔한 일이 ‘해운 한국’의 초석을 세우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명명식 후 근혜 양은 소니 박물관에서 휴대용 라디오와 막 개발한 컬러 TV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를 관람했어요. 그때 받은 인상이 깊었는지 대학 진학할 때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선택하더군. 44년 뒤인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했어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밧줄을 자른 것은 처음이라고 기사가 났지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생애 두번째 명명식인 셈이지요.”
신 회장의 청와대 생활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숨가쁘게 돌아갔다.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일이 터져서 전쟁을 치르듯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68년 1월 21일 일요일 오후, 당직 비서관으로 청와대를 지키던 신 회장은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에 크게 놀랐다. 난데없이 청와대 코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경호실과 수도경비사령부에 비상연락을 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진 장소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 북한 무장 침투조와 우연히 마주친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군이 비상 대응에 나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 “전방부터 서울 외곽까지 수십 겹의 방어선을 치고 순조롭게 공비들을 소탕하고 있다”는 국방부 장관의 보고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경호실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보안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한 시간 이상 닿지 않았다. 오후 늦게야 책임자들이 한명씩 청와대에 나타났다. 뒤늦게 나타난 이들을 보자 원망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신 회장은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합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훗날 “미국물 먹고 오더니 육군 대장들한테도 무서운 줄 모르고 큰소리를 치더라”는 악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청와대를 나섰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서울에는 군 작전 차량과 특수지 근무 차량만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요소요소를 지키는 헌병과 경찰은 ‘수상한 자는 신분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한일·한중 열차 페리, 박근혜 대선 공약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중앙포토]
1·21 사태는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31명의 북한 침투조가 세검정에서 정체가 발각되자 시가전을 벌인 것이다. 이들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투항했다. 우리도 민간인 7명을 포함해 32명이 숨지는 피해를 입었다. 신 회장은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자하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며 “이들이 북악산을 타고 공격했다면 대통령이 어이없이 당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 우이동을 잇는 ‘김신조 루트’는 41년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예비군과 주민등록제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도입했다.
이 사건은 신 회장에게 개인적인 아픔도 남겼다. 자하문 초소에서 “특수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방첩부대(CIC) 소속”이라고 버티던 북한 무장공비를 막아섰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최 서장은 신 회장과 춘천고등학교 동창으로 어릴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나중에 ‘최구식 경무관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아 동상을 세우고 일대기를 조명한 『한알의 밀알이 되어』를 냈다. 신 회장은 “지금도 자하문 앞 최 서장의 동상 앞을 지날 때마다 친구의 희생정신과 당시의 아찔한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고 말했다.
71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해사기술 대표 등으로 민간 조선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던 신 회장은 79년 10월 27일 오전 4시에 가까이 지내던 신문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 변고가 나서 박 대통령이 사망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어두운 길을 달렸다. 문득 5년 전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 생각났다. 미국 출장길에 뉴욕 호텔에서 TV를 보다가 비보를 접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귀국해 묘를 참배한 일이 생생한데 비극이 되풀이되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2013년 8월 13일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중앙포토]
청와대에 도착해 길을 막는 헌병 장교에게 신분을 밝히니 뜻밖에 문을 열어줬다. 본관에 들어서니 낯익은 경호관이 달려 나와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대통령, 경호실장, 경호처장이 모두 죽고 명령을 내릴 사람도, 지켜야 할 사람도 없어진 공백 상태였다. 청와대 소속이 아니기에 지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빈소 준비를 도왔다. 시신도 없이 사진과 꽃만 겨우 준비한 엉성한 빈소를 마련하자 소복 차림의 박근혜가 내려왔다. 부모를 모두 잃은 모습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싸안고 오열했다. 이 모습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혀 신문에 보도됐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정·재계 거물들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왜 쓸모없어진 사람을 붙들고 우느냐”고 다그쳤다.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혜택을 본 사람일수록 더 매몰차게 돌아섰다. 이후 치열한 권력다툼을 지켜보면서 신 회장은 정치인들에게 깊은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원래 골프를 좋아했는데 한동안 끊었어요. 그 사람들과 같이 밥 먹고 목욕탕에 들어가기 싫어서.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과 대화한 것이 73년 옥포조선소 착공식 때입니다. 당시 조선공사 해외담당사장이던 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훌륭한 일을 시작했으니 잘해달라’고 격려했지요. 내 기억 속의 박 대통령은 희망과 신념을 가득 담고 미소 짓는 모습이었는데….”
이후 박근혜와의 특별한 접점은 없었다. 신 회장은 98년 한일터널, 한중터널을 통해 암스테르담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당장 터널 건설이 어려우면 한일·한중 열차 페리를 통한 물류 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박근혜 캠프에서 이 구상을 접했는지 박 후보가 대련~천진 열차 페리를 타보고 공약으로 내놨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14년 편지를 보냈더니 비서실을 통해 경제수석과 국토교통부 장관 면담 일정을 잡아줬다. 아쉽게도 열차 페리에 큰 열정은 없었는지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이 구술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들어본다.
중앙일보 ※정리: 김창우 기자
09.26 [단독] 박근혜 "정치적 친박 없다…출마, 나와 연관짓지 않았으면"

▲박근혜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탄핵과 관련해 국민에게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해서 맡겨 주신 직분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많은 실망과 걱정을 드렸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 비선실세로 불린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사익편취ㆍ국정농단에 대해서도 “검찰 조사에서 듣고 정말 너무 놀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2021년 12월 31일 특별사면된 이후에 줄곧 침묵하던 박 전 대통령이 중앙일보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갖고 재임 시 공과와 옥중생활 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씨의 비위를 알지는 못했지만 탄핵 사태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며 회한(悔恨)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그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임기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인다”면서도 “‘정책적으로 실패한 정부’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정책이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위안부 합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체결 등 재임 시 외교안보 분야의 주요 결정에 대해 “안보를 위해서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정말 하늘이 도우셨는지 다 하고 감옥에 들어가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총선 때 친박계 인사들의 출마설에 대해 “(출마가) 저와 연관된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국정농단 특검팀의 윤석열 수사팀장이 보수 진영의 대선후보가 돼 정권교체를 한 데 대해 “좌파 정권이 연장되지 않고 보수 정권으로 교체된 것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10월 4일부터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에 자신의 재임 시 활동을 반추하는 회고록을 연재할 예정이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오후 박 전 대통령의 대구시 달성군 사저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 인터뷰 풀영상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
▷특사 이후에 공식 인터뷰는 처음이다. 국민들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
“먼저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해서 맡겨 주신 직분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많은 실망과 걱정을 드렸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제가 힘들고 어려웠던 오랜 기간 전국 각지에서 변함없이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출마, 나와 연관짓지 않았으면”

▲박근혜 전 대통령
“저의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유명을 달리하신 다섯 분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죄송함을 느낀다.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께 진심 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탄핵사태는 최서원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떻게 인연을 맺었고 역할은 무엇이었나.
“최서원 원장(최씨가 과거 유치원 원장을 지내 평소 ‘최 원장’으로 호칭)은 최태민 목사의 딸이라서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1998년에 제가 대구시 달성군 보궐선거에 나오면서 최 원장의 어머니가 달성에 와서 저를 도와주었고, 또 그때 최 원장의 남편인 정윤회 실장도 함께 와서 도와줬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청와대로 들어오면서 사적인 심부름을 할 사람이 없었다. 제가 여성이니까 (남성) 비서관들한테 시키기 어려운 것들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최 원장이 청와대에 드나들면서 심부름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 번도 최 원장이 저를 이용해 사적인 잇속을 챙긴다거나, 이권에 개입하거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심 없이 저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최서원씨는 미르, K스포츠 재단 운영에 개입했다. 당시 이런 사실 인지하지 못했나.
“K스포츠재단, 미르재단 이사진을 최 원장으로부터 추천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검증을 거쳤고, 그 분야에서 전문성이 탁월한 분들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 최 원장이 ‘재단 이사진으로 좋은 사람들을 소개할까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은 것을 정말 많이 후회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며 들으니까 최 원장이 재단 실무진의 면접도 보고 운영도 관여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미르, 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롯데ㆍSK가 낸 출연금이 뇌물로 인정됐다. 대기업 총수들과 개별 면담을 통해 기금 지원을 요청했나.
“롯데가 K스포츠재단에 기부했다가 돌려받은 돈, (K스포츠재단이) SK로부터 지원받기로 했다가 포기한 것에 대해 법원이 제3자 뇌물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 판결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 죄는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롯데나 SK가 저한테 어떤 청탁도 한 적이 없다. 대통령 면담이니 기업의 애로사항이나 현안에 대해 말을 했겠지만, 저는 하나도 들어준 것이 없다. 대기업이 체육 진흥을 위해 후원했다면 그것이 국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대가성을 가지고 후원하는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룹 회장들에게 제가 구체적으로 후원 금액을 요구한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최 원장이 재단을 통해 사적 이익을 챙기려고 했었다면 그것을 알지 못한 제 책임이고, 사람을 잘못 본 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2013년 5월부터 2016년 9월까지 남재준·이병기·이병호 등 전 국정원장들에게 특활비 36억5000만원을 받은 걸로 확인됐다. 왜 받았고, 그 돈은 어떻게 쓰였나.
“취임 초 보좌진으로부터 국정원에서 청와대 운영과 관련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돈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고, 또 ‘역대 정부에서도 (국정원이) 그런 지원을 해왔다’길래 그러면 ‘지원받아서 일하는 데 쓰라’고 했다. 다만 어디에 썼는지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특활비를 제 사적 용도로 쓴 것은 전혀 없다. 2016년 9월께 당시 이병호 원장이 2억원을 보내와 정호성 비서관이 관저로 와서 저한테 전달해 줬다. 제가 그것을 청와대 직원들 추석 격려금으로 사용한 것은 맞다. 이유야 어찌됐건 제 지시로 청와대에 지원한 것 때문에 세 분의 국정원장이 많은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다. (특활비에 대해) 법적 검토를 받지 않았던 것은 정말 후회스럽다. 이 모든 것은 제 책임이지 이 세 분한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안보에 꼭 필요한 사드·지소미아…다 하고 감옥 가 다행”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 불법 개입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이 선고됐다. 당시 유승민 의원 등 비박계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친박계를 공천하기 위해 청와대가 ‘친박 리스트’를 관리하고 불법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혐의다.
“‘대통령이 총선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 정말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가 몇몇 사람에 대해서는 말했겠지만, 구체적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당에 전달하면서 ‘이 사람들은 꼭 공천하라’고 한 기억은 전혀 없다.
수석비서관회의 때 정무수석이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게 당에서 (조사를) 해서 청와대에 전달한 걸로 생각했다. 그리고 ‘진박 감별사’라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친박계에) 주의를 줬는데, 정말 그때 강하게 주의를 줬어야 한다는 후회는 있다. 그리고 제가 명시적으로 유승민 의원 공천을 주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진이 제가 유 의원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공천 파동은) 제 책임이다. 당시 김무성 대표가 공천과 관련해 저한테 면담 요청도 했고, 전화 연결도 부탁했는데 그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 얘기를 제가 구치소에 들어와서야 전해 들었다. 당시에 저는 전혀 몰랐던 일이고 그래서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나’ 하고 분노했지만 누구를 탓하겠나. 그것도 대통령인 제 책임이라고 본다.”
▷2017년 10월 일체의 재판을 거부하고 이후 법정에 안 나온 이유는.
“국정 운영을 하면서 제가 일부 실수는 있었겠지만 뇌물죄로 기소되고 탄핵당할 정도의 잘못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네 번의 재판도 감수하면서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어도 법원을 믿고 버틴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법원이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면서 ‘공정한 재판이나 결론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판 포기를 통보했다. 어떤 형량이 나오든 결국은 나중에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국회 탄핵 표결 때 일부 친박계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진 걸로 알려졌는데.
“소위 ‘친박’이라는 의원 중에 탄핵에 찬성한 의원도 있었고, 저의 오랜 수감 기간 동안 한 번도 안부를 물은 적이 없는 의원이 대부분이다. 동생(박지만 EG 회장)의 친구인 의원도, 원내대표였던 의원도 탄핵에 찬성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사람의 신뢰와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2015년 목함지뢰 도발 사태 땐 남북 간 긴장이 준전시 상태에 달할 만큼 남북관계가 요동쳤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유화 대신 원칙적 자세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북 정책은 ‘우리의 안보는 확실하게 지킨다’는 원칙에 충실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비록 물밑 접촉은 없었지만, 북한이 전향적 자세를 보여주면 얼마든지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혀 왔고, 그런 기조하에서 ‘드레스덴 선언’도 나온 것이다. 실제로 2015년까지는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을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2016년 들어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로 도발하면서 잠정적으로 교류가 중단됐다. (이후) 강력한 한·미 동맹, 국제사회와의 공조 체제를 구축해 ‘국제사회 대 북한’의 구도가 정착됐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당시 위안부 합의는 한·일 양국에서 모두 환영받기 어려운 외교적 난제였고, 정치적 이득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추진한 이유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당시 24년간 한·일 간의 과거사 핵심 현안이었다. 미래 세대까지 계속 이렇게 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합의서를 만들 때 당사자분들의 의견을 들어서 합의서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한 3대 핵심 요구사항도 바로 피해자분들의 요구였다. 물론 한·일 양국이 많은 노력과 협의를 했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경주한 결과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됐는데.
“국제적으로 공감대를 얻어가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만든 재단을 이렇게 깨버리면 한국의 신뢰성이 어떻게 되겠나. 이 재단이 해산된 후에 무슨 다른 대안이 있는지, 또 더 나은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2016년 하반기에 국회에서 탄핵 추진 얘기가 나올 때였는데도 외교적 난제였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체결을 강행해 당시 야당이 격렬히 반발했다.
“북한이 2016년에 두 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하고 24차례나 탄도미사일 발사로 도발했다. 정말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 군은 정보 능력 강화를 위해 지소미아 협정이 체결되기를 바랐고, 미국도 한·일 양국이 원활한 정보 소통이 안 돼 상당히 힘들어 했다. 그래서 국회에서 탄핵을 논의 중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안보를 위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해야만 할 일’이란 생각으로 추진했다. 그게 되지 않고 감옥에 갔다면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란 생각을 하면 다행스럽고 위로도 됐다.”
▷2016년 사드 배치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드는 급증하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위적 방어 조치였다. 중국이 반대했지만 국민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어디 있겠냐는 인식으로 원칙을 지켜나갔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에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했는데 유엔 안보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조치가 들어 있는 결의안을 채택할 때 중국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 정도로 (한·중 협력은) 지속이 됐다. 사드 부지를 결정하는 데 여러 반대가 있었는데 롯데가 중국 사업의 손실을 감수하고 골프장 부지를 제공했다. 롯데그룹의 애국심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문재인 정부의 탄생을 지켜봤는데 어떤 심정이었나.
“대선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참 착잡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 북핵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든가, 동맹국들과의 불협화음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나라 안보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됐다.”
▷2020년 총선 당시 옥중 서신을 통해 “기존의 거대 야당(미래통합당, 현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고 했는데 당시 어떤 생각이었나.
“총선에서 (보수가) 다수당이 돼야 문재인 정부를 견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에서 우선은 일단 단결해 선거에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여러 불편함이 있었지만 다 제쳐놓고 우선은 ‘보수 세력이 단결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실패한 정부’라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제가 임기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가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실패한 정부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정책이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통진당 해산’이라든가 ‘공무원 연금개혁’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등은 국운이 달린 문제라 어떤 것을 무릅쓰고라도 꼭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창조경제 혁신센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기대하면서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정책이다. 제가 탄핵되기 전부터 벌써 상당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해 보람을 많이 느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결국 정치적 부담이 돼서 2016년 총선 패배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공무원연금개혁을 총선 이후로 늦춰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런 게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오랫동안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못 댔다. 시한폭탄같이 터질 것을 뻔히 알면서 그냥 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결심하고 나서지 않으면 이것은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국민들께 공무원 연금 적자 때문에 하루에 80억원씩 세금이 들어가고, 올해 개혁하지 못하면 내년부터는 하루 100억원이 들어간다는 것을 많이 알렸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합의 기구를 만들어 많은 논의를 한 끝에 결정 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총선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부담이 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개혁을) 안 했다면 오히려 자책을 더 많이 했을 것 같다.”
▷국정농단 사건 특검의 팀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 보수 진영의 대선후보로 정권 교체를 이뤘다. 현 정부의 방향성과 국정 운영은 어떻게 보나.
“우선은 좌파 정권이 연장되지 않고 보수 정권으로 교체됐다는 데 안도했다. 당시 수사팀에 참여했던 검사 중에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이라든가 요직에 여러 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인사는 인사권자가 선택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4개월 정도 됐는데, 정부의 방향ㆍ정책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좀 성급한 감이 있다. 더군다나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런 문제에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과거 친박계 인사들이 출마해 재기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내년 총선에 별 계획이 없다. ‘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과거에 정치를 했던 분이 다시 정치를 시작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제가 언급할 일이 못 된다. 다만 정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이것이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고, 저와 연관된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
▷우리공화당은 지금도 ‘탄핵 무효’를 주장한다. 만약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내년 총선 후보를 낸다면.
“우리공화당이 탄핵 무효를 주장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의 입장과 정치인의 입장은 순수성에 있어서 다르다고 본다. 내년 총선에서 정치인은 자기 정치를 하면 된다. 선거에 나서면서 제 사진을 내걸고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란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지난 몇 년간 저를 위해 고생하신 많은 국민께는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이제 71세가 됐다.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삶보다는 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그것도 운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 일선은 떠났지만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려고 한다. 그것이 국민들이 보내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전문과 영상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터뷰 전문(1만3000여 자)과 전체 인터뷰 영상(36분 분량)은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인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왼쪽 QR코드를 휴대폰으로 찍으면 연결됩니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
회고록은 10월 4일부터 ‘더중앙플러스’에 연재
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추석 연휴 직후인 10월 4일부터 ‘더중앙플러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1회는 ‘북한 3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위기’입니다. 매주 3회씩 연재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4월부터 중앙일보 회고록팀과 대구시 달성군 사저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회고록 집필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맡았을 때부터 2021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할 때까지의 약 10년이 배경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사태’의 전말과 특검 수사·재판을 비롯해 북한 4·5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 공무원연금 개혁, 세월호 참사,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당청 갈등, 창조경제, 인사 실패 등 재임 중 벌어졌던 주요 이슈들을 돌아보면서 당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느꼈던 소회를 진솔하게 밝힐 예정입니다.
그동안 전직 대통령 회고록은 과거 참모들이 중심이 돼 제작·발간했던 게 관행이어서 공적은 상세히 기술하지만 과오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고록은 박 전 대통령의 구술을 언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방식이어서 공과 과를 균형있게 다루고, 독자들이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별취재팀=김정하 논설위원, 유성운·손국희 기자, 사진·영상 권혁재·김태호 기자
1737일간의 옥중 생활을 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처음부터 형량에 대해서는 무덤덤했기 때문에 ‘언제 자유의 몸이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뇌물을 받거나 아는 사람의 사익을 챙겨줄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며 “나 자신에게 떳떳했기 때문에 어려운 수감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많은 실망을 드렸는데도 국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보내주신 많은 편지가 (옥중 생활을) 버텨나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다만 건강이 악화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그는 “밤이 오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온몸에 통증이 있었다”며 “칼로 베는 것 같은,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잘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서울성모병원과 삼성서울병원에서 성심껏 치료해 줘서 많이 회복됐고, 사면 뒤에는 재활 치료와 운동을 병행하면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고 덧붙였다.
구치소에서 마음을 다스린 방법은 독서였다. 그는 “유영하 변호사가 다양한 책을 넣어줘서 독서를 많이 했다”며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박경리 선생의 『토지』, 박지향 교수의 『제국의 품격』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고 말했다. 이어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김상근)라는 책도 기억에 남는데, 미술이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구치소 음식과 관련한 일화도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은 “평균적으로 간을 맞춘 구치소 음식은 심심하게 간을 맞추는 내게 짤 수밖에 없었다”며 “구치소 측에서 음식에 대한 질문지를 돌릴 때마다 ‘조금 짜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의견을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옥중생활이라는 것이 모든 구성원의 입맛을 맞출 수 없고, 너무 간을 심심하게 하면 다른 수용인이 불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11.08 尹 “우리가 누나 동생 같다네요” 박근혜 “하하”

▲활짝 웃는 尹대통령과 박 前대통령 -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후 대구 달성군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찾아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44주기 추도식’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만나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한 지 12일 만의 방문이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대구 엑스포에서 열린 바르게살기운동 전국회원대회에 참석하고 칠성시장을 찾았다. 바르게살기운동은 1989년 출범한 법정 사회 단체다. 현직 대통령이 전국회원대회에 참석하기는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두 번째다. 윤 대통령은 이날 박근혜 전 대통령 달성 사저를 찾아 환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배울 점을 국정에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 통합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이날 행사 연설에서 “바르게살기운동은 진실, 질서, 화합이라는 3대 정신을 중심으로 따뜻한 사회와 국민 통합을 이루어냈다”며 “부정과 부패를 추방하고 정직하고 건강한, 따뜻한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윤 대통령은 “바르게살기운동이 가짜 뉴스 추방에도 앞장서고 있다”면서 “정부는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칠성시장을 찾았다. 윤 대통령은 시장을 돌며 청도 한재미나리, 생강·파래·고구마 과자, 두부, 청국장, 새우젓 등을 직접 구입했다. 윤 대통령은 “윤석열”을 외치는 상인들에게 “아주 힘이 나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긴다”며 “상인들이 잘되셔야 한다. 따뜻한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지난 4월 서문시장 방문 이후 7달 만에 대구를 찾은 윤 대통령은 상인 등과 함께 소곰탕, 대구식 생고기(일명 ‘뭉티기’) 등으로 점심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대구 북구 칠성종합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이후 달성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를 찾았다. 지난달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제44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지 12일 만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집 현관 계단 앞에서 윤 대통령을 맞았다. 윤 대통령이 “지난번 왔을 때보다 정원이 잘 갖춰진 느낌”이라고 인사하자 박 전 대통령은 “오신다고 해 잔디를 깨끗이 정리했다. 이발까지 한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집 현관 진열대에는 지난달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후 두 사람이 현충원 오솔길을 함께 걸어내려 오는 사진도 진열돼 있었다. 윤 대통령이 사진을 언급하면서 “누가 (우리 두 사람이) 누나와 남동생 같더라고 얘기하더라”고 말해 박 전 대통령이 웃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1시간 정도 환담하면서 감과 배, 밀크티를 대접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사저 뒤편 비슬산(琵瑟山)을 가리키며 “(검사 때) 대구 근무 시절 비슬산 자연이 질병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산에서 새들이 날아와 정원에서 놀다 가곤 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후 대구 달성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인사하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국정 운영을 되돌아보면서 배울 점은 지금 국정에도 반영하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이 주재한 수출진흥회의 자료를 읽어보니 재미도 있고 당시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어떻게 그걸 다 읽으셨냐”면서 수소차 산업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대화를 마치고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했고 헤어지면서 서로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에게 “지난번에 뵀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최경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