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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2023-10/ 10.01"창원간첩단, 민노총보다 급 높다 - 10-31 ‘남침용 땅굴’ 계속 찾아야 한다

상림은내고향 2023. 10. 23. 20:05

자주국방 2023-10/

10.01 소풍 오듯 법원 온 지지자들…"창원간첩단, 민노총보다 급 높다"

지난 1월 18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핵심 타깃이 된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엔 경찰 700여 명이 투입됐고, ‘국가정보원’ 조끼를 입은 국정원 직원들은 이례적으로 카메라 앞에 대거 노출됐다. 진입을 막아선 민주노총 측과 수사당국의 잦은 충돌로 현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지난 정부의 남북평화 기조 아래 멈춰있던 간첩 수사의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안보수사당국 관계자)”이었다.

▲지난 1월 '간첩단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마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압수물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뉴시스

이날 압수수색 대상이 됐던 석모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과 김모 전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 양모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위원장(광주 기아차지부), 신모 제주평화쉼터 대표는 모두 ‘민주노총 침투간첩단’으로 묶여 지난 5월 수원지검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조합원 수만 120만명 이상인 거대 조직 민주노총의 전·현직 간부들이 북한 간첩이었다는 의혹은 큰 파장을 낳았다. 정치권과 대북단체 등으로부터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평택미군기지와 오산공군기지 등 군사시설의 기밀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입증이 까다로운 ‘간첩죄’(국가보안법 제4조)까지 적용됐다.

 

신발 사장이 총책…창원간첩단은 누구

이런 민주노총 사건에 비하면, 지난 3월 서울중앙지검이 재판에 넘긴 ‘창원간첩단(자주통일민중전위, 자통)’ 사건은 인지도가 높지 않다.

 ▲'창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경남진보연합 관계자들이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안보수사당국에 따르면 자통은 2016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총책 황모씨, 경남진보연합 정책위원장 성모씨와 교육국장 정모씨 부부, 김모 5·18민족통일학교 상임운영위원장 등 4명이 경남 창원을 중심으로 설립한 조직이다.

 

국정원과 경찰은 내사를 거쳐 지난해 11월 이들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며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수사 결과 자통은 민주노총·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 등에 전국 68개 하부망을 운영해온 대규모 조직이었는데, 그 심각성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서울대 독문과 출신인 총책 황씨의 당시 직업은 창원의 신발제조업체 ‘S상사’ 대표였다

 ▲김영옥 기자

소풍 같은 ‘대기 투쟁’…민주노총 재판은 조용

그러나 최근 재판 현장에서 보이는 두 간첩단의 위상은 인지도와는 크게 다르다. 자통 사건은 비공개 재판에도 지지자가 몰려들고 재판이 계속 지연되는 반면, 민주노총 사건 재판은 별다른 소동 없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자통 사건 3차 공판과 보석 심문이 예정됐던 지난달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서관 입구에선 남녀노소 40여명이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번에도 오셨던 분이죠?” “아유, 내일은 출근이네요” 등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목격됐다. 재판의 공개 여부도 모른 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다리던 재판이 갑자기 취소됐는데도 짜증내는 기색이 없었고, 해산 직전엔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단체 사진도 촬영했다.

 

자통 재판에선 장외 투쟁도 재현되고 있다. 지난 8월 첫 공판 땐 100여 명이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를 열었다. 2차 공판일엔 열댓 명이 비공개 법정 밖 대기석에서 법원 경위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보며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재판을 볼 수 없는데도 법정 주변이 늘 문전성시인 것이다.

 

반면 ‘민주노총 침투간첩단’을 심리 중인 수원지법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민주노총 70여 명이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를 연 공판 첫날(8월 14일)을 제외하면,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국정원 진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재판 내용을 공개하는데도 방청객은 대개 5~6명에 그친다. 자통 재판은 밀리고 중단되길 반복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이달에만 7번의 재판이 열린다.

 

“자통은 수괴급…북한 문화교류국과 직통”

안보수사당국은 이런 분위기 차이가 ‘북한 내 서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안보수사 관계자는 “같은 문화교류국 산하라도 자통(창원간첩단)은 문화교류국과 직통하는 사이고, 민주노총 측은 한 단계 경유가 필요하다”며 “자통이 더 수괴급이니 재판 때마다 장외 투쟁 세력이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교류국은 북한이 운영하는 여러 비합법 대남공작부서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조직으로, 김정은이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통 사건에는 재판을 늦추는 다양한 소송 기술들도 망라되고 있다. 다른 간첩 사건들에도 흔히 쓰이는 국민참여재판 신청에 그치지 않고, 보석 신청과 재판부 기피 신청, 위헌심판 제청 신청 등이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최근엔 담당 판사(강두례 부장판사)를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하기도 했다.

실제 2차 공판 이후 진전이 없는 자통에 비해, 민주노총 사건은 두 달 늦게 기소됐는데도 벌써 7차례 공판이 열렸다. 한 공안검사는 “자통을 맡은 장경욱 변호사는 이미 수차례 간첩 사건을 맡아 같은 소송 기술들을 반복해 왔다”며 “실제 재판이 본격화할 때쯤이면 구속기한이 만료돼 피고인 4명 모두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자통엔 간첩죄 미적용…“증거인멸 기술 차이”

이처럼 서열이 더 높다고 평가받는 자통에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은 것 역시, 더 철저한 관리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안검사 출신 변호사는 “유력 방산업체들과 군사안보시설이 밀집한 창원에 거점을 둔 만큼, 국가기밀 탐지·수집에 대한 수요도 있었을 것”이라며 “자통 쪽의 증거인멸이 철저해 검찰의 증거 수집이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은 간첩 사건에선 이례적으로 형법상 범죄단체활동죄가 적용됐는데, 수사기관이 자통의 조직 성격이나 행위를 중요하게 보고 엄벌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옥 기자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월간조선 10월 호 

●‘中·北 나팔수’ 정율성 ‘기념’하는 광주시의 ‘현충시설’ 현황

광주시장의 ‘친일파 단죄문’… 정율성의 ‘反대한민국’ 행적은 모르쇠?

⊙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정율성의 ‘항일독립운동’의 근거
⊙ 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주 출신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서정우’ 관련 문건은 ‘0건’
⊙ 광주시와 시의회, ‘정율성’ 관련 기록을 각각 123건, 124건 생산
⊙ 광주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 전공비’와 ‘충혼탑’ 주변 팻말 뽑히고, 현수막 버려진 채 방치
⊙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의 희생’ 강조한 역대 광주시장의 ‘언행 불일치’
⊙ 강기정 시장, “정율성 선생은 훌륭한 한·중 연결고리”

 ▲사진=월간조선

대한민국의 광역자치단체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이하 광주시)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으로 번갈아가며 참전해 ‘선전선동꾼’ ‘나팔수’ 역할을 했던 정율성이란 중국인을 추앙한 행태가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광주시가 정율성의 생가터를 사들여 이른바 ‘정율성 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월간조선》이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보도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8월 22일 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정율성 사업’ 타당성 지적으로 촉발됐다. 이후 ‘정율성 논란’은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가 지금은 또 수그러든 상태다.

한창 논쟁이 진행될 당시 ‘사회 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정교모)’은 전국적 비판이 거센 상황에서도 소위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하겠다는 광주시의 행태를 비판했다. 정교모는 8월 29일, “정율성 기념공원, ‘광주’만의 역사 해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살았고, 대한민국의 적으로 살았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광주가 이야기하던 5·18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정율성과 5·18은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끝내 강행된다면 광주는 더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며, 5·18운동은 더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시가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면서도 6·25 당시 중북(中北) 침략 세력에 가담해 전쟁범죄 행위를 선동한 ‘중국인 정율성’을 추앙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란 얘기다.

그런데 5·18 정신에 앞서 ‘정율성 기념’과 병존할 수 없는 ‘정신’이 있다. 6·25 당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바치거나 피땀 흘려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광주 지역 용사들의 ‘애국 애향 정신’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공훈을 알리는 광주 지역 ‘국가 수호 시설’들을 살피고, 중·북 공산 침략 세력의 ‘나팔수’ 정율성에 대한 광주시 ‘추앙’의 문제점을 돌아봤다.


왜 ‘대한민국 광주’가 ‘중국인 정율성’ 추앙하나?

정율성은 북한 노동당과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든 ‘한국계 중국인’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했고, 해방 후엔 북한으로 넘어가 다수의 북한군가를 만들었다.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 중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중국공산당원 자격을 회복하고 다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율성이 대한민국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그 누구든 단 몇 문장만 읽어도 금방 알 수 있다. 반면, 그가 예술적으로 그 무슨 추앙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음악적 성취가 크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기려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자인데도, 광주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정율성’을 ‘선생’이라며 칭송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실제 광주시 직원 업무 분담 내용을 보면 ‘정율성 선생’이란 표현들이 등장한다.

혹자는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는 정율성의 중국인 부인 ‘딩쉐쑹(丁雪松)’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지금까지 정율성의 ‘항일 행적’을 입증하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광주시 동구 벤○○관광호텔 옆 ‘정율성 역사공원’ 예정지에 설치된 ‘정율성 시설물’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정율성은 1933년 형들을 따라 혁명의 땅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학교에서 항일 비밀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면서 항일 전사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돌림노래 같은 주장만 한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정율성 옹호론자’들은 뜬금없이 “정율성 친가와 외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정율성 집안은 호남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이라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다. 그 형제 또는 외가 친척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정율성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논리가 과연 우리 국민에게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공공기관이 이 같은 주장을 하면서 국민 세금을 계속 쓰겠다는 태도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정율성 시설물’엔 “항일의 깃발을 들고 동요, 민요, 군가,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360여 곡을 작곡한 정율성. 한국과 중국에 펼쳐진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이 광주,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선전문구가 있다.

정율성의 ‘항일’은 ‘대한독립’과는 무관한 ‘중국공산당의 항일’이다. 또한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은 한국에서 펼쳐진 일이 없다. 6·25 때 중·북 침략 세력의 ‘나팔수’로 활약한 일을 빼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자의 ‘음악 여정’이 광주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시설물이 광주 도심 속에 버젓이 서 있다.


전사 후 5년 만에 세운 ‘서정우 흉상’

 ▲광주시 남구 봉선동 문성중 교내에는 광주 출신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흉상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9월 9일 오후, 광주시 남구 봉선동 소재 문성중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전사(戰死)한 고(故) 서정우(徐政佑) 하사의 흉상이 있다. 방문 당시, 서정우 하사 흉상은 광주 문성중 측에 의해 비교적 관리가 잘된 것으로 보였다. 높이 1.95m·둘레 0.8m×0.6m 규모의 황토색 흉상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흉상 기단 우측 면에는 서 하사 약력, 좌측 면에는 공적이 기술돼 있었다. 기단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헌시’가 있다.

<조국 수호의 뜨거운 염원을 가슴에 품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젊은 영혼이여! 그대의 숭고한 희생으로 우리가 이곳에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국과 문성중 학우들은 잊지 않을 것이니, 부디 저 하늘에서 평화의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굽어보며 편히 쉬소서.>

1989년생인 서 하사는 문성중 졸업 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2009년 3월 해병대에 입대해 81mm 박격포 사수를 맡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소위 ‘말년휴가’를 나가려고 연평도 부두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기다리다가 서 병장은 북한군 포격 소리를 들었다. 그는 휴가를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다가 북한군 포탄 파편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연평도 포병 사격훈련장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문광욱 이병도 북한군 포탄에 흉부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사망한 서 병장과 문 이병을 전사로 처리했다.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를 했다. 이어서 이들을 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에 안장했다. 또한 서 하사와 문 일병 부조(浮彫·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긴 것)를 연평도 평화공원에 마련해 그들을 추모했다. 해병대 역시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 ‘해병의 집’에 이들의 흉상을 설치했다.

광주 문성중 소재 흉상은 서 하사 전사 후 5년이 지난, 2015년 10월에 설치됐다. 문성중이 부지를 제공하고, 광주지방보훈청과 광주시교육청이 흉상 제작비 일부를 부담했다. 동문도 모금 활동으로 비용을 보탰다. 이에 따라 뒤늦게 서 하사를 기리는 시설물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광주시의 기여도는 확인할 수 없다.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성명은 ‘금기어’?

 ▲9월 14일 기준, 광주시청 온라인 사이트에서 ‘서정우’란 이름으로 자료를 검색했지만, 그 결과는 ‘0건’이었다. 출처=광주광역시청

현재 남아 있는 공식 기록을 보면 광주시나 광주시의회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광주시 홈페이지에서 ‘서정우’란 이름으로 관련 기록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검색어 ‘서정우’에 대한 총 0건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서정우’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어가 올바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란 안내문이 떴다. 이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광주시 내부에서 ‘서정우’란 인물에 대해 그 어떤 논의도 한 일이 없다는 걸 방증한다.

광주시의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정우’란 이름이 한 번이라도 언급된 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검색을 시도했지만, 화면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시스템 오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수차례 같은 작업을 반복한 끝에 ‘오류’가 아닌 걸 확인했다. 결국,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광주시의회 의원 68명(6대: 22명/7대: 23명/8대: 23명) 중 그 누구도 ‘서정우’란 이름을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연평도’란 단어로 검색을 시도했다. 광주시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광주시의회에서는 단 2건을 확인했는데, 이는 옛 민주노동당 소속 시의원의 “정전 60주년을 맞았음에도 한반도는 연평도 포격 때보다 훨씬 위험한 무력충돌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란 발언과 이를 본회의에서 그대로 인용한 행정자치위원장의 ‘보고’ 내용에 불과했다.

2010년 당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우리 영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군(2명 전사·16명 부상)은 물론 민간인(2명 사망·3명 부상)이 피해를 본 사건이다. 가옥 22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 중 1채는 완전히 탔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광주시와 광주시의회 기록만 보면, 이처럼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북한의 만행에 대한 비판을 찾기 어렵다. 이 같은 북한의 만행이 아예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자기 고장 출신 전사 군인에 대한 추모 발언도 찾기 어렵다. 상기 검색 결과에 따르면 마치 ‘금기어’라도 된 듯이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북 침략 부역자’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많다. ‘서정우’란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와는 그 결과가 아주 다르다. 광주시 홈페이지에서 ‘정율성’으로 검색하면 총 123건에 달하는 결과물이 뜬다. 먼저 ‘정율성 선생(기자 주: 광주시 표현)’ 관련 업무를 맡은 광주시청 ‘주무관’이 3명이다. 이 밖에 정율성 관련 검색 결과물은 ▲웹페이지 1건 ▲시정소식 40건 ▲게시판(광주시정 홍보·각종 공고) 22건 ▲첨부문서 32건 ▲멀티미디어(카드뉴스 등) 25건 등이다. 광주시의회도 상황은 광주시와 비슷하다. ▲회의록 7건 ▲부록 124건 등의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광주의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도 ‘중·북 침략 세력’의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광주 출생’이란 이유만으로 과분한 관심과 공적 자원을 투입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방치된 듯한 ‘광주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 소재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기자가 방문 당시 그 일대에서는 관리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팻말은 뽑히고, 현수막은 구겨진 채 방치돼 있었다. 사진=월간조선

문성중에서 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사직공원에는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와 ‘충혼탑’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정율성이 나고 자랐다는 또 다른 고향인 ‘광주시 남구 양림동’ 근처다. 광주시가 정율성 등을 앞세워 관광지로 미는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정율성 옛집’ ‘정율성 음악 산책길’ ‘정율성로’ 등이 모두 사직공원 바로 밑에 있다.

먼저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찾았다. 해가 질 무렵 사직공원 귀퉁이 그늘진 곳에 있는 전공비 앞에 도착했다. 이 시설은 6·25전쟁과 월남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2002년 11월에 건립한 비석이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시 지부에서 세웠다. 관리자는 광주시 푸른도시사업소다.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는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정율성 노래 악보 동판, 정율성 흉상 등이 233m에 걸쳐 전시된 ‘정율성로’가 있다. 사진=월간조선

시설 안내판에는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고, 선진 시민의식으로 주변 청결에 협조하여주시기 바란다”는 당부가 기재돼 있었는데, 주변 풍경은 그 문구가 무색할 정도였다. 안내판 옆에는 ‘금연공원’이란 팻말이 뽑힌 채 나뒹굴었고, 정체불명 현수막이 구겨진 채 방치돼 있었다. 전공비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흙먼지로 가득했다.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중국 내 정율성 인지도 ▲정율성의 ‘옌안송’ 악보 동판 ▲정율성 기록물 ▲정율성 흉상이 233m에 걸쳐 전시된 ‘정율성로’와는 달리 초라했다.

전공비 탑신 정면에는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護國武功受勳者戰功碑)’란 문구가 음각돼 있었다. 후면에는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의 성명이 자음 순으로 기재돼 있었다. 전공비 기단에는 아래와 같은 설립 취지문이 있었다.

<(전략) 자유·평화와 민주의 시대인 새천년을 맞이하여 오늘 이 자리에 전공비를 세우는 것은 우리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원히 보전함으로써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함이다. 서기 2002년 11월 5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

한편, 무공수훈자회는 광주시의 ‘정율성 공원’ 조성 강행에 대해 “정율성은 중국을 위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김일성과 북한 공산당을 위해 ‘조선인민군 행진가’를 작곡해 6·25전쟁을 부추기면서 대한민국과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역적”이라며 “중공군과 북한 김일성 앞잡이를 자처한 정율성을 위해 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광주시장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인가를 묻고 싶다”고 질타했다.


‘친일’은 단죄… ‘친중·친북’은 외면

 ▲광주시가 ‘정율성 역사공원’을 조성할 광주시 동구 불로동의 ‘정율성 옛집’이다. 광주시는 48억원을 들여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적’이었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려고 한다. 사진=월간조선

사직공원의 또 다른 국가수호 시설인 ‘충혼(忠魂)탑’을 찾았다. 충혼탑은 1948년 10월 당시 군내 좌익 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 지역 순국 경찰관 3196명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원래 1956년 과거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전당) 앞 상무관 정원에 건립됐으나, 붕괴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1981년 10월, 현재 위치에 재조성됐다.

경찰충혼탑은 정율성이 대표 인물인 ‘양림역사문화마을’ 근처 양림파출소 뒷산에 있다. 80여 개쯤 되는 계단을 통해 언덕에 올랐다. 충혼탑 앞에는 양파정(楊波亭)이란 건물이 있다. 1914년에 광주 지역 부호인 정낙교가 광주천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지은 정자다. 정낙교의 외손 중 한 명이 월북 후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하다가 ‘김일성 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음악가 정추(1923~2013년)다.

양파정 앞에는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란 제목의 안내문이 있다. 2020년 8월, 광주시장 명의로 설치된 것이다. 당시 광주시장은 노무현 정부 때 ▲국세청장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광주시 광산구 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선을 기록한 이용섭 더불어민주당 조세재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용섭 시장 당시 설치된 이 안내문은 “광주시가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인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양파정 안내문은 “이 누정(양파정)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인사 4명이 쓴 현판(시문)이 있다”로 시작한다. 안내문은 전술한 4인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며 그들의 친일 행적을 고발한다.

이어서 광주시장 명의의 양파정 안내문에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의 ‘단죄문(斷罪文)’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을 ‘단죄’한다는 안내문의 취지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같은 광주시의 행태는 두 가지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 때 불법 남침 세력에 가담해 각종 군가를 짓고, 중국 귀화 후에는 ‘민족 분단의 원흉’이자 ‘전쟁범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정율성의 행적은 광주시 곳곳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에서 왜 볼 수 없느냐는 점이다. 정자 현판을 쓴 이들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는 식으로 ‘역사 정의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광주시는 왜 정율성을 알리는 그 숱한 선전물에 정율성의 ‘전쟁범죄 부역’ 행위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봉현 등 4인의 ‘친일 반민족’은 단죄해야 할 문제이지만, 정율성의 ‘친중·친북 반민족’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인가.

둘째, 강기정 광주시장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정율성 역사공원’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두 가지 색깔, ‘적과 나’로만 보인다”며 “광주의 눈에 그는 뛰어난 음악가”라고 정율성을 옹호했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이는 ‘양파정 안내문’ 설립 취지와 배치된다. 시문(時文)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분야다. 강 시장 논리를 그대로 빌리면, 정봉현 등 4인의 시문은 ‘예술적 완성도’로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친일 여부를 구태여 특기할 필요가 없다. 전임 시장이 위 4인의 과거사를 이유로 ‘단죄문’을 세웠다면, 후임인 강 시장이 철거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강 시장은 이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

모순적인 ‘호국영령 추모’와 ‘정율성 기념’

 ▲광주시 남구 구동의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 지역 전몰 호국용사 1만5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사진=월간조선

충혼탑을 본 뒤 광주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는 현충탑에 갔다. ‘정율성 논란’ 촉발 직후 고 서정우 하사 모친인 김오복 전 광주 대성여고 교장이 “현충탑 정비할 돈은 없다더니 정율성 공원에 48억원을 쓰느냐”며 광주시를 비판할 때 언급한 그 장소다. 당시 그는 “광주 현충탑에 가보면 담배꽁초가 널려 있고 우범 지역처럼 관리가 잘 안 돼 있다. 재정비 좀 해달라”고 호소했다.

광주시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 지역 전몰 호국용사 1만5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방문 시점이 문제 제기(8월 24일) 후 2주가량 지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광주시 현충탑에서 ‘부실 관리’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광주시 현충탑은 원래 1963년에 건립됐다. 당시 탑 명은 ‘우리 위한 영의 탑’인데, 2015년에 ‘영원의 빛’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 “우리는 호국용사들이 목숨과 바꾸어 지킨 이 땅에 살면서 지난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자라나는 후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이곳에 현충탑을 다시 세운다”는 게 재건립 취지다. 이 광주시 현충탑 뒤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6·25전쟁의 역사적 평가’가 음각돼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국제전이면서 내전(內戰)과 같은 성격의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이 유엔참전국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 ‘세계자유수호전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광주시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현충일 추념식’을 개최한다. 역대 광주시장들은 이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護國英靈)’의 희생을 강조했다.

<강운태 전 광주시장: 우리 대한민국은 선열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있었기에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독재 정권의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이다.(2014년 6월 6일)

윤장현 전 광주시장: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그 큰 뜻을 본받아 지금보다 정의롭고,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안으로는 공동체의 통합을 이루어내고, 밖으로는 남북통일의 시대를 여는데 시민의 힘과 역량을 모아나가야 한다.(2017년 6월 6일)

이용섭 전 광주시장: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민주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앞에 부끄럽지 않은 후대가 되고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그 희생이 값지게 하는 길에 앞장서겠다.(2022년 6월 6일)

강기정 현 광주시장: 지금 우리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조국에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 헌신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았고, 전쟁과 독재의 시련을 끝내고 인간 존중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했다.>

상기한 것처럼 전·현 광주시장은 현충탑 앞에서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피·땀·눈물’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길’을 외쳤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동시에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적’이었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사업에 지속적으로 세금을 투입했다. 이 역시 ‘이율배반적 행태’라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광주 출신 학도병 공훈 선양 위해 뭘 했나?

 ▲광주시 북구 운암동 소재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이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순국한 광주·전남 출신 122명을 추모하는 시설이다. 그들이 ‘총도 없고, 군번도 없이, 싸우고 지킨 나라’에서 ‘중·북’ 침략 부역자를 기리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이튿날, 광주시 북구 운암동 소재 중외공원에 갔다. 중외공원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이 있다.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은 광주·전남 출신 6·25참전 학도병 122명의 우국충정과 애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89년에 건립된 현충 시설이다. 매년 6월 광주·전남 호국학도병 동지회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학도병(정식 명칭은 학도의용군)은 6·25 당시 징집 나이인 18세에 미치지 않는 14~17세의 중·고교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한 ‘의용병’을 말한다. 법적으로 이들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되어 1951년 2월 28일 해산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이다. 학도병은 6·25 발발 당시 미성년자였고, 군 복무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중·북’ 공산 침략 세력에 맞서 ‘자유 대한’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2년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호남 지역 학도의용군은 5491명이다.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의 왼쪽에는 헌사(獻詞)를 새긴 비석이 있다.

<(전략) 1950년 6월 25일 통일의 염원은 사라지고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은 이날을 기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잠시 평화를 얻어 투쟁을 멈추고 학업에 전념했던 우리 반공학생들은 펜을 버리고 그 손에 총을 들었다. 군번 없이 무명전사로 참전한 나이 어린 학생들은 오로지 조국과 민족자주와 독립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피어보지 못한 꽃다운 젊음을 이름 모를 산야에서 산화하였다. 이제 그날의 포성은 아스라해졌고 국토에 전흔은 희미해졌다. 40년의 세월은 흘렀어도 외로운 싸움에 꽃다운 나이로 간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을 흠모하며 살아남은 우리가 1989년 이 탑에 새기니 그대들이여 부디 평안히 잠드시라.>


‘정율성 추앙’은 자해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은 한·중 문화 교류와 관광 교류에 훌륭한 연결고리”라고 주장하면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사진=뉴시스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 오른쪽에는 ‘헌시(獻詩)’를 새긴 작은 비석이 있다.

<자유의 횃불 아래 이름 없이 죽은 동지여/이름 없이 죽은 학우여 죽어서 살아 있는 님이여 죽어서 살아 있는 혼이여/총도 없이 군번도 없이 싸우고 지킨 나라 죽어서 지킨 나라에 다시 살아나서 겨레의 힘이 되소서 나라의 빛이 되소서>

70여 년 전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서 산화한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들을 위해 광주시는 그간 뭘 했을까. ‘침략 부역자’ 정율성을 기리는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지난 5년 동안 지원한 12억원만큼이라도 썼을까. 그 1/10 만큼이라도 투자했을까. 《월간조선》이 입수한 광주시의 <2018~2022년 보훈 예산 집행 내역>에서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에 따르면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 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광주시가 기념하는 것은 ‘자해(自害)’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6·25 때 산화한 해당 지역 호국영령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지적을 피하기 쉽지 않다. 전·현 광주시장이 스스로 내뱉은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같은 말의 ‘진의’도 의심받을 수 있다. 기대효과도 불분명하지만, 만일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정율성을 기념한다면, 이는 돈 때문에 선열의 희생과 헌신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할 생각이다. 그는 9월 13일,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라고, 중국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하고, 음악으로 중국 혁명에 이바지한 인물이 정율성 선생”이라며 “다시 시작된 한·중 문화 교류와 관광 교류에 훌륭한 연결고리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늘 사람이 필요하고 국가 간 교류, 도시 간 교류, 민간 교류,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며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에 대한 기존 생각에 변화가 없음을 시사했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영화 〈암살〉 흥행 후 밀양에 들어선 김원봉 관련 시설들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기념관(12억원)·의열체험관(92억원) 조성한 밀양시

⊙ ‘정율성 논란’으로 수세 몰리자 ‘김원봉·윤이상’ 끌어들인 강기정
⊙ 김원봉은 북한 괴뢰 정권 초대 내각 참여한 ‘반국가단체’ 수뇌부… 내각 서열 7위
⊙ 6·25 때 ▲국가검열상 ▲노동상 활약… 전쟁 공훈으로 훈장도 받아
⊙ 빨치산과 남파공작원 통해 남한 경제 파괴·사회 교란·선거 방해 시도
⊙ 영화 〈암살〉이 1270만 명 관객 동원한 후 휘몰아친 ‘김원봉 광풍’
⊙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선택한 대한독립의 영웅!”
⊙ 명목상으로는 ‘의열 기념’이지만, 전시물은 ‘김원봉’ 위주
⊙ 김원봉의 ‘반민족’ ‘대한민국 적대’ 행위 기술·평가는 찾기 어려워

▲밀양시는 2022년, 92억원을 들여 의열기념관 옆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의열체험관’도 개관했다. 사진=월간조선

강기정 광주시장은 경남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사업’과 경남 밀양시의 ‘의열단’을 앞세운 ‘김원봉 추앙’을 끌어들여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강 시장은 “광주의 눈에 정율성은 뛰어난 음악가이고, 그의 삶은 시대적 아픔”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아픔을 감싸고 극복해야 광주건, 대한민국이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며 “이는 150억원을 투자한 밀양의 김원봉 의열 기념공원, 123억원을 투자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공원 등과 결을 같이한다”고 내세운다.

강 시장의 언급은 그의 의도와 달리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가 ‘반국가적 인사’를 추앙하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 측면이 크다. 강 시장은 ▲해방 후 월북해 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노동상 등 요직을 지낸 북한 정권 거물 ▲6·25 때는 불법 남침한 북한군에 대한 후방 보급을 담당한 ‘공로’ 덕분에 김일성에게 훈장을 받은 적군 수뇌부 ▲전쟁 때는 물론 정전 후에도 간첩을 남파해 남한 선거 방해와 경제 혼란을 조장하려 한 대남공작 지휘자였던 김원봉을 기념하는 시설이 경남 밀양시에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강기정의 ‘물귀신 작전’

▲밀양시는 2016년, 김원봉 생가터에 총 12억원을 들여 지상 2층 규모의 의열기념관을 조성했다. 사진=월간조선

또한 줄기차게 북한을 드나들었고, 독일 귀화 이후 공공연하게 ‘친북(親北)’ 활동을 지속하며 후일 ‘이적(利敵)단체’로 규정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해외본부 의장으로 활동했던 윤이상(尹伊桑)을 경남 통영시가 ‘국민 세금’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자칭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는 광주시가 중북(中北) 침략 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한 정율성을 기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지자체인 경남 밀양시가 대한민국에 항적한 김원봉(金元鳳)을 추앙하거나, 김일성을 향해 ‘수령님!’ ‘우리 역사상 최고 영도자’라고 외친 친북 인사를 기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먼저 밀양시의 ‘김원봉 추모’ 실태를 살폈다.

밀양시는 2016년 시내 중심가인 내이동 해천변 일대에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를 조성했다. 밀양 출신 의열단원들의 생가가 있던 구역이다. 거리 조성 이후 밀양시는 이에 관한 보도자료(2016년 11월 24일 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된 무(無)정부주의 성격의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은 단원 중 11명이 밀양 출신으로 그 중심에는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의사가 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 의거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 등 모두 23회에 걸쳐 조선 청년들의 의열 투쟁을 이끌었던 김원봉 의사는 일제엔 무시무시한 무장 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이처럼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밀양시에 ‘독립운동 테마 거리’도 조성됐다. 최근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해천을 따라 만들어진 ‘독립운동 테마 거리’는 영남권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인 ‘3·13밀양만세운동’을 벽화와 조형물들로 꾸며 놓았으며, 해천 주변으로 김원봉 의열단장, 윤세주 열사, 황상규 선생, 을강 전홍표 선생, 이장수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생가지가 자리 잡고 있어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현재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의열기념관, 의열체험관 등이 있다. 의열기념관은 밀양시가 김원봉 생가터에 조성한 시설이다. 밀양시 의열기념관의 ‘시설 소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8년 3월 7일 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가터에 문을 연 ‘의열기념관’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에 앞장선 사람’을 뜻하는 ‘의열’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정신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투사들의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소중한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열기념관은 표면적으로 밀양 출신 의열단원 또는 의열단의 항일 활동을 추념하는 공간이다. 이름만 놓고 봤을 때는 ‘정율성 역사공원’과 달리 ‘반국가적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김원봉’ 위주의 전시 내용을 보면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행적

1898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에서 출생한 김원봉은 1919년부터 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초중반, 국내외에서 폭탄 투척·요인 저격 활동을 주로 했지만, 대개 실패했다. 이를 주도한 이가 김원봉이다. 1920년대 중반, 소련과 중국의 자금 지원이 끊기자 의열단은 사실상 와해됐다. 김원봉과 의열단원 일부는 1926년, 중국 국민당 정권의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들어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 정치부주임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비롯한 중국 인맥을 얻었다. 그해 10월, 김원봉은 중국 국부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듬해에는 중국국민당의 소위 ‘북벌(北伐)’에 참여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중국국민당 정권의 ‘반공(反共)’ 정책에 반발한 저우언라이 등이 중국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 의열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던 중국공산당 군대는 대패했다. 마오쩌둥은 패잔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갔다. 이 폭동 과정에서 단원 대다수를 잃은 의열단은 사실상 와해됐다.

이후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창설,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 등에 관여하다가 만주사변(1931년) 직후 장제스에게 ‘한중 협력 반일(反日)’을 제안했다. 중국국민당 정권은 이를 수락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 덕분에 김원봉은 난징(南京)에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1932~1935년)’ 교장으로 일했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의 전신)을 만들어 ‘임시정부 폐지론’을 주장했다. 중일전쟁(1937년) 발발 후엔 중국국민당 정권이 1938년에 주도해 만든 정치선전대인 조선의용대(부대 규모는 300여 명)의 대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봄, 병력 대다수가 중국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화베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빈 껍데기만 남았다. 당시 중국국민당 정권을 따라 중국 충칭(重慶)에 머물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보다 ‘임정 무용·폐지론’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을 맡았다.

남한 좌익 붕괴하자 월북

김원봉의 임정 합류는 자금 지원과 임정 승인을 조건으로 내건 중국국민당 정권의 요구를 임정이 수용한 결과였다. 김원봉은 임정 참여 후 주류였던 김구(金九) 세력과 대립하며 ‘노선 투쟁’ ‘주도권 다툼’을 지속했다. 1944년에는 자신이 임정 군무부장직을 맡았다. 그런데도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저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임정 주도권을 갖지 못한 데 따른 불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45년에는 ‘임정 해체론’을 주장했다.

해방 후 김원봉은 남한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좌익 활동을 주도하다가 1948년 4월에 월북했다. 일각에서는 김원봉의 월북 배경으로 ‘친일경찰의 모욕’ 등을 꼽는다. 1947년 3월, 좌익 세력의 전국 총파업과 폭동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김원봉이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 치사한 전력이 있는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뺨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봉은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토로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전언’일 뿐이다.

그보다는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1947년 10월)’ 이후 미군정(美軍政)이 공산당 불법 활동에 강하게 대처해 좌익 조직이 와해되고, 우익 세력들에 의해 각종 교란·파괴 공작이 무산되자 월북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월북 이후 김원봉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며, 북한 정권의 초대 내각에 참여했다. 괴뢰 정권의 초대 국가검열상을 맡았다. 대남공작도 자행했다. 독자적으로 인민공화당 조직을 통해 ‘반(反)대한민국 빨치산’을 키우고, 지휘했다.

 

 ‘대한민국의 敵’ 김원봉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김원봉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구성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한반도 안에서 유일 합법성을 가진 대한민국 정부를 없애고 북한 정권으로 흡수하려 한 데 관여한 셈이다. 김원봉은 또 전쟁 당시 소위 ‘공화국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아 북한군 후방 보급을 지원했다. 1952년에는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 노동력 동원 등을 책임졌다. 정전 후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란 이유로 1958년에 숙청됐다. 그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요약하면, 김원봉은 ‘대한민국’을 반대했다. 월북해서 김일성 정권에 가담했다. 북한의 초대 내각에 참여해 ‘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 수립을 주도했다. 우리나라 북반부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정부를 참칭한 반국가단체의 지도부였다는 얘기다. 북한 초대 내각 발표 당시 언급된 순서를 보면, 김원봉은 총 17명 중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부수상 김책 ▲국가기획위원장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등에 이어서 거명된다. 그만큼 요직을 맡은 셈이다.

그토록 ‘민족’을 강조했던, 김원봉은 6·25 당시 김일성의 ‘반(反)민족 전쟁범죄’에 부역했다. 김일성이 남북한 통틀어 약 300만 명이 죽는 비극을 자행하는 동안 그는 후방에서 북한군 보급을 담당했다. 전시물자와 노동력을 동원해 대한민국에 대항했다. 전쟁 전후 빨치산과 남파간첩을 통해 남한 사회·경제를 교란하고, 선거를 방해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김원봉은 대한민국의 ‘적(敵)’이었다. 그의 ‘반국가’ 행적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이 세금으로 그를 기려야 할까.


‘김원봉 기념관’ 오해 자초하는 전시물

▲의열기념관 정문 옆에는 김원봉이 주인공인 모바일 게임의 홍보물이 부착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9월 2일 오후 1시쯤, 경남 밀양시에 도착했다. 시내인 내이동으로 들어갔다. ‘약산로’란 도로명이 눈에 띄었다. ‘약산(若山)’은 김원봉의 호다. 밀양고등학교에서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인근의 도로명을 ‘약산로’라고 명명했다. 해당 도로 연장은 약 570m다. 밀양시 관내 도로명 중 인명이 반영된 경우는 약산을 포함해 백민(白民,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원이었던 황상규의 호)·사명(泗溟, 사명대사 법명)·석정(石正, 의열단원 윤세주의 호)·점필재(佔畢齋, 조선 중기 유학자 김종직의 호) 등 총 5개 도로다.

밀양시는 2016년 11월, 김원봉 생가터를 매입해 총 12억원을 들여 지상 2층 규모의 의열기념관을 조성했다. 2018년에 개관한 기념관의 전시공간 면적은 약 304㎡다. 2022년에는 기념관 옆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의열체험관(건물 면적 1189㎡)’도 개관했다. 체험관 관련 사업비는 92억원이다. 2022년, 밀양시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 등으로 구성된 ‘의열기념공원’ 관리에 약 3억원을 썼다.

방문 당시 의열기념관의 우측 벽면에는 “기억은 산 자의 의무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선택한 대한독립의 영웅!”이란 문구와 함께 김원봉과 안중근·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의 사진이 있는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기념관 정면에도 다수 김원봉 사진이 있었다. 정문 좌측에는 ‘약산 김원봉’이란 제목하에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됨. 1926년 사이에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 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란 소개글이 있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 위에는 ‘XR(확장 현실) 체험형 모바일 게임’인 ‘기억의 사진관’ 홍보물이 게시돼 있었다. 이 게임의 주요 인물 역시 김원봉이다. 그 왼쪽으로는 역시 김원봉의 성명과 함께 그의 얼굴 모자이크, 김원봉의 과거 활동 당시 사진들이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김원봉 북한 관련 행적은 전혀 없어

의열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의 주요 전시물은 ‘의열정신의 본향, 밀양’이란 제목 아래 상영되는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김원봉의 연설 영상이었다. 그 옆에는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 의열단 공약 10조’ ‘의열단 최고이상 4개 항목’ ‘의열단 강령 20개조’ 등 의열단 관련 전시물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 벽면에는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이란 글과 함께 조선의용대 시절 김원봉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2층은 의열단원 소개물이 대다수였는데, 이 역시 ‘김원봉’이 주를 이뤘다. 김원봉 사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 많은 전시물 중 김원봉의 ▲반(反)대한민국 활동상 ▲동족상잔 전쟁에 가담한 일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2019년 3월, 밀양시가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의열기념관 개관 후 1년 동안 이곳을 방문한 이는 총 1만2237명이다. 매주 월요일에 휴관하는 점을 고려하면, 1일 평균 39명이 다녀간 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있었던 까닭에 2020~2022년 방문객 수는 이를 웃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관 후 5년 동안 방문객은 넉넉히 잡아도 채 10만 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많지 않은 인원이라고 해도 이들이 김원봉이란 인물의 ▲양면성 ▲독립운동 관련 공과 ▲북한 시절 행적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의열기념관 전시물을 관람했다면, 김원봉을 그저 애국혼에 불타던 독립투사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 흥행에 기댄 ‘김원봉 장사’?

▲밀양시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 김원봉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차정의 벽화가 있다. 그 위에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의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란 대사가 적혀 있다. 사진=월간조선

그리 넓지 않고, 전시물도 많지 않은 의열기념관 내부를 1시간 이상 관람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의열기념관 정문에서 해천 건너 맞은편을 보니 김원봉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차정(북한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을 그린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의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란 대사가 있었다.

‘항일독립운동 테마 거리’ 조성 시기, 당시의 밀양시 보도자료 내용(의열단은 단원 중 11명이 밀양 출신으로 그 중심에는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의사가 있다) 등을 고려하면, 〈암살〉(2015년), 〈밀정〉(2016년)이란 영화에서 각각 조승우, 이병헌이 연기한 ‘김원봉’이 화제가 된 이후 밀양시가 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조성한 게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암살〉과 〈밀정〉의 관객 수는 각각 1270만 명, 750만 명이다.

그 전까지 김원봉이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 해방 전후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김원봉’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실과 거리가 먼 가상의 얘기를 다룬, 말 그대로 ‘각색’된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등장하고, 해당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김원봉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이는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7월, 뜬금없이 영화 〈암살〉을 보고 나서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운운한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 전 대통령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그 전까지 ‘문재인’이란 인물이 김원봉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일이 없다. 영화 관람 후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원봉’을 얘기했다. 문 전 대통령이 만일 영화 관람 이전부터 김원봉을 존경했다면, 그 숱한 인터뷰·공개발언 또는 사회적 관계망 글을 통해 그 생각을 밝혔을 테지만, 그런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또한 문 전 대통령에게 김원봉에 관한 기초 지식이 있었다면, 〈암살〉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후기를 내놓거나 2019년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란 식의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산 김원봉 잊지 않겠습니다”

▲밀양독립운동박물관 외곽에는 정부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35명 그리고 훈장을 받지 못한 김원봉의 흉상이 함께 있다. 사진=월간조선

경남 밀양시 내이동 소재 의열기념관 맞은편 김원봉·박차정 벽화가 있는 벽면은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있는 타일들로 장식돼 있었다. “김원봉 만세” “김원봉 아리랑” “김원봉 감사해요♡” “약산 김원봉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김원봉 추앙’ 글이 적지 않았다.

 

▲밀양독립운동박물관에도 의열단, 조선의용대와 관련해서 김원봉이 언급된 전시물이 다수다. 사진=월간조선 

의열기념관에서 나와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갔다. 의열기념관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이다. 밀양시립박물관과 함께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에 개관했다. 사업비는 64억5200만원이다. 이곳 역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강조하는 만큼 곳곳에 ‘의열단장’ 또는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관련 전시물이 많다. “부하를 위해 재산을 능히 바치고도 아까와하지 않고, 때로 부하의 궁핍을 들으면 자기가 입은 옷을 전당 잡히는~”이란 식으로 김원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글도 있다.

밀양독립운동관 외곽에는 촛불을 형상화한 듯한, ‘선열의 불꽃(2007년~)’이란 조형물이 있다. 밀양시는 ‘조국해방에 대한 선열들의 염원’을 담아 해당 조형물을 조성했다고 한다. ‘선열의 불꽃’ 주위에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있다. 이 중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는 35명이다. 유일하게 서훈되지 않았는데도 흉상이 설치된 이가 바로 김원봉이다. 이 흉상 기단의 ‘인물 소개’에도 김원봉의 월북 이후 반국가 행위에 대한 기술·평가는 없다. 결국, 밀양시가 만든 각종 시설의 전시물만 보면 김원봉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후손이 길이 떠받들어야 할 ‘애국지사’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통영시는 ‘김일성 찬양’ 윤이상을 왜 기릴까?

‘親北 윤이상’ 기념에 11년 동안 최소 ‘781억원’ 쓴 경남 통영시

⊙ 2002년부터 본격화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사업’
⊙ ▲기념공원 ▲기념관 ▲윤이상 음악여행길 ▲윤이상과 함께 학교 가는 길
⊙ 윤이상 기념관 하루 평균 방문객은 31명 수준(2022년 통영시 결산보고서)
⊙ 윤이상이 의장이었던 ‘범민련 해외본부’… 우리 사법부는 ‘이적단체’ 판시
⊙ 김일성 죽음에 “하늘 무너진 듯한 충격이… 몸이 쪼각 나는 듯”
⊙ 통영국제음악당, “처염상정은 선비의 꼿꼿함으로 일관한 선생의 일생 대변”
⊙ ▲음악제 156억원 ▲윤이상 콩쿠르·동요제 56억원 ▲기념관 운영·관리 23억원
⊙ ▲음악당 운영 지원 483억원 ▲기획 공연 55억원 ▲음악당 식당 지원 8억원
⊙ 2022년 기준 통영시의 재정자립도는 12.3%… 전국 165위

 ▲사진=월간조선

‘정율성 논란’과 관련해서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은 8월 22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광주의 눈에 그(정율성)는 뛰어난 음악가이고, 그의 삶은 시대적 아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아픔을 감싸고 극복해야 광주건, 대한민국이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며 “이는 150억원을 투자한 밀양의 김원봉 의열 기념공원, 123억원을 투자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공원 등과 결을 같이한다”고 내세웠다.

강 시장은 2002년부터 계속 진행된 경남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사업’을 언급하며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사업’ 역시 정당하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하지만 강 시장의 의도와 달리 ‘광주의 정율성 사랑’ ‘밀양의 김원봉 추앙’과 마찬가지로 통영의 ‘윤이상 기념’ 역시 국민적 공감을 얻기 쉽지 않은 사업이다.

줄기차게 북한을 드나들었고, 독일 귀화 이후 공공연하게 ‘친북(親北)’ 활동을 지속하며 후일 ‘이적(利敵)단체’로 규정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해외본부 의장으로 활동했던 윤이상(尹伊桑)을 경남 통영시가 기리는 것은 여러모로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윤이상의 친북 행적이 알려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윤이상 기념사업들이 막대한 세금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월간조선》이 2012년부터 문제 제기한 ‘광주 정율성’에 대해서는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마치 큰 문제가 최근에 발생했다는 듯이 들고일어나면서도, 윤이상에 대해서는 ‘세계적 음악가’란 식으로 치켜세우는 자칭 ‘보수’들 책임이 크다.

윤이상의 친북 행적을 문제 삼으면 ‘냉전적 사고’ 운운하며 마치 자신은 ‘깨어 있는 시민’인 양 “정치와 예술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점잔을 빼는 그들 때문에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사업’은 20년 이상 진행됐다. 그사이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이 투입됐는데,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다. 이에 《월간조선》은 ‘정율성 논란’과 강 시장의 발언을 계기 삼아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사업’ 실상을 확인했다.


통영은 ‘김일성 찬양’ 윤이상 추앙

 ▲통영시는 122억원을 들여 관내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를 비롯한 6414㎡ 규모 부지 위에 ‘윤이상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공원 안에는 윤이상기념관, 윤이상 소장품 전시관, 윤이상 승용차 차고, 공연장 등 각종 기념시설들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경남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은 ‘광주의 정율성 사랑’ ‘밀양의 김원봉 추앙’과 다르지 않다. 윤이상은 김일성이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친북적인 활동을 공공연하게 했던 인물이다. 1950년대부터 북한 측과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독일 귀화 이후 1970년대부터는 노골적인 친북 행각을 벌였다. 윤이상은 ▲민족반역자 ▲전쟁범죄자 ▲민족분단의 원흉인 김일성을 향해 “수령님!” 운운하며 불세출의 영웅이라도 된 듯이 떠받들었다. 북한의 김정은을 추앙하는 이른바 ‘백두칭송위원회’ 같은 자들과 같은 식으로 김일성을 찬양했다.

북한 측 기록에 따르면 윤이상은 김일성 앞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북한 독재 정권의 대남적화 전략인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란 식으로 동조했다.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주체사상’은 인간을 능동적·자율적 주체로 보지 않는다. 피동적 객체로 볼 뿐이다. ‘개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집합’인 인민 대중만이 존재하며, 그 인민 대중은 ‘최고 뇌수’인 수령에 의해 영도될 때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괴상한 주장을 하는 게 바로 ‘주체사상’이다. 북한 노동당은 과거 당 규약을 통해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최종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 정권과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입에 올리는 ‘통일’이 ‘적화통일’이라는 걸 의미한다. 북한 노동당은 지금도 당 규약에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며,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한다”고 명시하는 등 ‘적화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이 같은 ‘대남 적화 망상’에 동조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자가 바로 윤이상인 셈이다.

‘이적단체’ 판정받은 범민련 해외본부의 의장

윤이상은 말년에 북한의 대남적화 전략에 동조하는 범민련 해외본부의 의장(1990~1994년)으로 활동했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1994년 우리 사법부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된 곳이다. 당시 판결문(94도 930, 96도 2673)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과의 접촉에 있어 일관된 조율과 신중한 정책 추진이 필요한 현 실정에서 학생들 또는 재야인사들의 무분별한 북한과의 접촉을 통한 통일논의 및 이를 위한 활동은 현 단계에서 통일을 촉진한다기보다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동조함으로써 오히려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 볼 것이고, 범민련 북측본부의 구성원이 반국가단체의 산하기관인 점, 베를린 3자 실무회담의 공동선언문 중에서 일부 북한의 주장과 같은 한반도의 평화 보장을 위해 외국군 철수, 핵무기 철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제반 악법의 철폐를 포함하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범민련 해외본부는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소위 이적단체)에 해당함은 분명하고…〉

법원이 1990년 11월 범민련의 이른바 남·북·해외 실무 대표들이 만난 ‘베를린 3자 실무회담’ 공동선언문의 이적성을 명시한 점, ‘3자 실무회담’ 이전에 이미 윤이상이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직을 맡고서 4년 이상 활동한 점, 법원이 1994년 7월에 범민련 해외본부를 ‘이적단체’로 판시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윤이상이 자부한 ‘민주·통일 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인 경남 통영시는 2002년부터 윤이상 관련 행사를 매년 개최했다. 윤이상 음악제를 위한 통영국제음악당도 만들었다. 도심 곳곳에 윤이상 관련 공간 또한 조성했다. 윤이상 거리 등을 만들어 지도에 표기하고, 관광객들에게 둘러볼 것을 권했다. 이런 작업들에 투입된 돈은 역시 국민 세금이다. ‘반국가단체’ 수괴 김일성을 찬양하고, 주체사상에 동조하고, 그의 사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적단체’ 판정을 받은 단체를 이끌며 친북 활동을 죽을 때까지 한 ‘독일인’을 기리는 데 막대한 세금이 매년 지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과연 이는 온당한 처사일까.


1958년부터 북한 대사관 출입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산청군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윤이상은 1920년에 가족과 함께 고향인 지금의 경남 통영시로 이주했다. 통영협성농상학원 재학 중 경성으로 상경해 화성학을 배운 그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오사카음악학원에 입학한 윤이상은 첼로 연주와 함께 작곡, 음악이론을 배웠다. 1936년 귀국해 음악교사로 잠시 일한 그는 1939년 다시 일본 도쿄에 가서 작곡을 공부했다. 해방 후에는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부산사범학교 등지에서 다시 음악교사 생활을 했다. 휴전 후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윤이상은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받은 상금에 주변의 후원금을 더해 1956년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1957년에 서독으로 간 윤이상은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 기법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1959년 학교 졸업 직후 발표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등이 현지 음악계의 호평을 받자, 윤이상은 서독에 정착하며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까지는 ‘통영 출신 음악가 윤이상’의 얘기다. 그가 어디서든 음악 활동에 매진하면서 고국과 고향을 빛냈다면, ‘윤이상’이란 이름은 지금처럼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윤이상은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그의 ‘친북’ 성향과 북한 관련 행각 때문이다. 윤이상은 독일 유학 초창기였던 1958년부터 동베를린 소재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에 출입했다. 그가 최초 접촉자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후 다수의 재독 한인 유학생과 장기 체류자가 동베를린에 드나들었다. 26명(이하 중복 포함)은 북한 측으로부터 돈도 받았다. 그 금액은 적게는 100달러, 많게는 1만5000달러다. 12명은 밀입북했고, 17명은 암호 조립 등 특수교육을 이수했다. 12명은 주변 인물 근황을 북한에 제공하거나 대북 접촉을 주선하기도 했다.

재독 한인들의 행각이 드러난 계기가 바로 1967년 ‘동백림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바로 윤이상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서독에 있던 윤이상을 대사관으로 유인해 조사한 뒤 강제로 귀국시켰다. ‘동백림 사건’과 관련해서 윤이상 등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 중 윤이상을 포함한 23명에 대해서는 ‘간첩죄’를 적용했다. 윤이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2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3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단, 최종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동조, 탈출)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현재 ‘동백림 사건’과 관련해서 “윤이상은 무고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도 윤이상의 결백함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백림 사건과 관련해 문제가 된 것은 중정이 불법적으로 해외 교민을 납치하듯이 국내로 송환한 점,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한 점이다. 윤이상의 북한 관련 행적을 조작하거나 왜곡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 당시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하겠다면서 만든 이른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결론도 이와 같다. 2007년 당시 노무현 정부는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란 보고서를 통해 ‘동백림 사건’에 대해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 관련자들의 단순 대북 접촉 및 동조 행위까지 일반 국민들에게 간첩으로 확대, 오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을 뿐 윤이상의 대북 행각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한편,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1969년 윤이상에 대해 ‘형 집행 정지’ 결정을 내렸다. 윤이상 체포 과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특히 서독 정부는 한국 대사 추방, 차관 제공 취소 등의 강수를 뒀다. 부담을 느낀 당시 박정희 정부는 2년 만에 윤이상을 석방하고, 서독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윤이상은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않았다.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 김일성 주석님!”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한 윤이상은 이후 노골적으로 친북 행보를 시작했다. 윤이상은 1995년 11월 사망 때까지 17회에 걸쳐 방북했고, 김일성과 자주 접촉했다. 정부는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입북 자수 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 결과를 통해 “윤이상은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밝혔다. 재독 유학생들에 대한 포섭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김일성은 평양에 인원 150명 규모의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만들고, 윤이상이 머물 저택과 벤츠 승용차를 제공했다. 김정일은 평양 중심가에 ‘600석 규모’ 공연장이 있는 15층 건물을 새로 짓고 ‘윤이상 음악연구소’로 쓰게 했다. 윤이상 관현악단을 구성하고, ‘윤이상 음악제’도 매년 개최했다. 1992년에는 윤이상을 소재로 체제 선전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윤이상은 김일성을 열렬히 찬양했다. 그는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다음과 같은 조전을 보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 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전쟁범죄자’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라고 찬양한 윤이상은, 그 이듬해 7월 김일성이 죽은 지 1년 됐을 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이라고 외치던 윤이상의 부인 역시 같은 날 “위대한 수령님” 운운하는 편지를 썼다.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 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령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사의 원리라고는 하지마는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령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년 7월 8일. 리수자〉

충무공도 옛 충무시에서 못 받는 추앙

 ▲‘안단테 윤이상 음악여행길’로 명명된 윤이상 기념공원 인근 ‘새미골 3길’ 골목에는 윤이상 얼굴과 각종 선전물이 벽화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이런 윤이상을 위해 대한민국의 지자체인 통영시는 2002년부터 기념사업을 본격화했다. 2000년과 2001년, 통영문화재단은 ‘통영현대음악제’란 이름으로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했다. 2002년에는 통영시가 이를 ‘통영국제음악제’로 확대하고, 재단법인 통영국제음악제를 설립했다. 2003년부터는 지금의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인 ‘경남 국제음악 콩쿠르(2009년부터 현 명칭으로 개칭)’를 시작했다.

통영시가 작성·배포한 통영 관광지도 〈통영 여행〉에 따르면 통영의 대표적인 축제가 바로 ‘통영국제음악제’와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다. 통영시는 ‘통영국제음악제’에 대해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 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통영이 세계적인 음악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국제적인 음악 축제”라고 주장한다. 해당 행사 개최 시기는 매년 3월이다.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에 대해서는 “국제문화교류와 전 세계의 재능 있는 음악인을 발굴, 육성하기 위해 창설됐다”고 소개한다. 해당 행사 개최 시기는 매년 11월이다.

 

 ▲2017년 7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동행한 그 부인 김정숙씨는 윤이상 무덤에 가서 동백나무를 심고,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이라는 표지석을 설치했다. 사진=뉴시스

통영시는 또 2013년에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를 위한 부산·경남 지역의 첫 클래식 전문 공연장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했다. 시내 주요 도로를 ‘윤이상 거리(총 연장 800m)’로 명명했다. 윤이상의 얼굴과 각종 선전물을 벽에 그려놓고, ‘안단테 윤이상 음악여행길’이라고 명명했다. 윤이상이 과거 음악교사로 일할 당시 출근하던 길을 ‘윤이상과 함께 학교 가는 길’이라고 명명해 주요 관광지로 소개한다. 또 윤이상 생가터를 포함한 6414㎡ 규모 부지에는 ‘윤이상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통영에서 윤이상 말고 이런 대접을 받는 인물은 사실상 없다. ‘한산도 대첩’의 주인공,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옛 충무시인 통영시에서 이런 대우를 받지 못한다.

9월 3일, 경남 통영시 도천동 소재 ‘윤이상 기념공원’에 갔다. 2010년 3월 개관 당시 이곳의 이름은 ‘도천테마파크’다. 애초 ‘윤이상 기념공원’으로 기획됐으나, 각종 친북 행적과 ‘통영의 딸’ 논란 때문에 ‘윤이상’이 빠졌다. 문재인 정권 시기인 2017년 당시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가 독일 베를린 방문 당시 윤이상 무덤을 찾아가 동백나무를 심어 화제가 된 이후 통영시 일각에서 공원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2018년, 통영시의회는 조례 개정을 통해 공원명을 ‘윤이상 기념공원’으로 바꿨다.


윤이상 기념공원에 122억원

 ▲윤이상 기념공원 안에 있는 윤이상 전신상이다. 이 밖에도 윤이상 생가터 표지석, 착석 시 윤이상 음악이 재생되는 벤치, 윤이상 음악 감상 공중전화 부스 등의 윤이상 기념물이 있다.

윤이상 기념공원’에는 야외공연이 가능한 공연장이 있다. 공원 내 윤이상 기념관(지상 2층, 898㎡)에도 140석 규모의 공연장이 있다. 이 밖에 ▲윤이상 소장품을 전시한 ‘베를린 하우스(136㎡)’ ▲윤이상이 타던 벤츠 승용차 보관소(20㎡) ▲윤이상 전신상 ▲윤이상 생가터 표지석 ▲착석 시 윤이상 음악이 재생되는 벤치 ▲윤이상 음악 감상 공중전화 부스 등이 있다. 이를 조성하는 데 들어간 국민 세금은 ▲국비 41억5100만원 ▲도비(경남) 9억7500만원 ▲시비(통영) 70억3100만원 등 총 121억5700만원이다.

참고로 통영시의 〈2022년 결산서〉에 따르면 이처럼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만든 ‘윤이상 기념관’의 방문객 수는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2022년 기준 9792명에 불과하다. 대관 수입은 375만2000원, 기념품 판매 수입은 245만8000원이다. 해당 시설이 매주 ‘월요일’에 휴관하는 걸 감안하면, 하루 평균 관람객은 31명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윤이상 기념’이란 해당 시설의 조성 목적도 논쟁의 대상이지만, 통영시가 지속적으로 세금을 투입해 ‘윤이상 기념시설’을 운영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윤이상 기념공원’에서 나와 소위 ‘도천음악마을’ 일대를 둘러봤다. 통영시는 현재 해당 지역에 대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윤이상 기념공원’ 인근에 있는 통영시 ‘도천지구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는 정문 위에 “음악이 흐르는 도천, 마을 이야기에 윤이상(음악)을 입히다”란 문구가 있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도시재생 사업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이상 기념공원’에서 통영시립박물관 쪽으로 걷다가 윤이상 벽화들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골목의 이름은 ‘새미골 3길’인데, 졸지에 ‘안단테 윤이상 음악여행길’로 명명됐다. 해당 골목 주민들은 도로명 주소 판 외에 윤이상 이름이 적힌 악보 모양 주소 판을 집 앞에 하나씩 더 내걸고 있다.

소위 ‘안단테 윤이상 음악여행길’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윤이상 관련 벽화는 통영 앞바다와 첼로, 파안대소하는 윤이상 얼굴을 합친 그림이다. 이 벽화의 제목은 ‘고향(2020년 11월)’이다. 그 옆 팻말에는 “항상 통영을 그리워하였고, 끝내 고국 땅을 밟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숭고한 정신은 통영의 등대가 되리라”란 설명이 있다. “뜻이 높고, 품위나 몸가짐이 훌륭하다”는 의미로 ‘숭고한~’이라고 운운한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윤이상의 ‘숭고한 정신’은 무엇일까. 해당 사업 시행기관인 통영시는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그의 ‘정신’이 ‘통영의 등대’가 된다면, 통영시는 과연 어떤 곳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기술이다.


‘윤이상 음악제’ 위한 공연장에 520억원

 ▲통영시는 한려수도를 내려다보는 도남동 해변 언덕에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520억원을 들여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했다. 사진=월간조선

같은 날 오후, 통영시 도남동 해변에 있는 통영국제음악당에 갔다. 이 시설의 건립 사유는 ‘윤이상 음악제 공연’이다. 통영시는 2002년부터 ‘통영국제음악당’ 건립을 추진했지만, 민간자본 유치에 실패해 무산됐다. 그러다가 ‘윤이상 국제음악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국비를 요청했다. ‘윤이상’ ‘송두율’ 등 친북 인사에 호의적이었던 노무현 정부는 국비 240억원을 지원했다. 통영시는 2006년 도남동 소재 충무관광호텔 부지에 국비와 도비, 시비 등 총 480억원을 들여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윤이상 국제음악당’을 짓는다고 밝혔다. 나중에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필적하는 세계적인 명품 음악당을 건립하려면 최소 1500억원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경남도에 각 500억원을 추가로 요청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업 타당성과 타 지자체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이를 거부했다.

2013년 11월, ‘윤이상 국제음악당’이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관했다. 앞서 언급한 친북 행적과 ‘통영의 딸’ 논란 때문에 ‘윤이상’이란 이름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영국제음악당’은 한려수도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3만3058㎡ 규모의 대지 위에 지상 5층 건물(1만4618㎡)로 시공됐다. 1300석 규모 콘서트 홀과 300석 규모 다목적 홀 등을 갖췄다. 최종 사업비는 총 520억원이다. ‘통영국제음악당’은 당시 기준으로 부산·경남 최초이자 국내에서 네 번째로 큰 클래식 전문 공연장이다.

실제로 본 통영국제음악당 규모는 대단했다. 인구 12만 명에 불과한 남해안 소도시, 통영과는 부조화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웅장했다. 경남 최초 관광호텔이 있던 자리여서 입지도 좋았다. 통영국제음악당 왼쪽에는 금호통영마리나리조트, 오른쪽에는 스탠포드호텔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그렇다. 통영국제음악당 정문 앞 기둥에는 해당 시설 건립 취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이를 통해 윤이상을 기념하기 위해 520억원을 투입해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는 뜻에서 건설된 통영국제음악당은 7년간의 준비와 3년간의 시공을 거쳐 2014년 봄에 개관하였다. 통영국제음악당 외관은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통영을 상징하는 갈매기를 모티브로 하여, 한려수도의 상징인 통영 앞바다를 배경으로 갈매기 두 마리가 음악과 자유를 향해, 그리고 통영의 미래를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화하였다.〉


음악당 뒤편 바다 전망 잔디밭에 묻힌 윤이상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는 윤이상 무덤이 있다. 2018년 2월, 통영시가 독일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던 윤이상 유해를 들여와 이곳에 묻고 ‘추모지’를 조성했다. 사진=월간조선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는 ‘윤이상 무덤’이 있다. 1995년 독일에서 사망한 윤이상의 무덤은 원래 베를린 공동묘지인 ‘가토우 공원 묘지’에 있었다. 2017년 7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씨는 윤이상 무덤에 가서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고,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이라는 표지석을 설치했다. 그러면서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의 추모 이후 ‘윤이상 유해 국내 송환’ 활동이 개시됐다. 2018년 2월에 국내로 반입된 윤이상 유해는 한 달 정도 공설 봉안당에 있다가 “통영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는 윤이상의 유언에 따라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 묻혔다.

윤이상 무덤 입구에는 ‘윤이상 선생 약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사전 정보 없이 이를 읽는 사람들은 윤이상에 대해 ‘독재 정권에 의해 핍박받은 ▲천재 음악가 ▲민주화 인사 ▲통일 운동가’란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략) 세계 음악계에서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혀가던 선생은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 때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서울로 강제 납치되어 험한 옥고를 치렀고 (중략) 1988년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하여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한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킨 업적을 비롯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대의에도 수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조국 대한민국으로의 귀국이라는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1995년 11월 3일 먼 이국에서 영면했다. 베를린 가토우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탄생 백주년을 맞아 통영시와 베를린시의 합의에 의해 2018년 3월 20일 생전에 간절히 염원했던 고향 통영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윤이상 무덤 위에는 묘비 역할을 하는 덮개돌이 있다. 그 돌 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글귀가 있다. ‘처염상정’은 ‘탁한 곳에 처해 있어도 물들지 않고, 맑은 본성을 간직한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다. 통영국제음악당 측은 이와 관련해 “선비의 꼿꼿함으로 일관한 선생의 일생을 대변한다”고 방문객들에게 주장한다. 요즘에는 조롱조로 많이 쓰이지만, 본래 ‘선비’란 “학식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온갖 지원금과 각종 특별 대접을 받고, 독재자를 찬양한 윤이상을 가리켜 ‘선비의 삶’이라고 강변하는 이 주장에 공감할 대한민국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통영시 재정자립도 순위는 전국 165위

이처럼 통영시는 막대한 돈을 들여 관내 곳곳에 ‘윤이상’을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을 조성했다. ‘윤이상 기념’ 행사도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그렇다면 통영시가 지금까지 ‘윤이상 기념’에 쓴 세금은 얼마나 될까. 《월간조선》이 입수한 자료와 통영시의 〈2012~2022년 결산 보고서〉를 취합해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11년 동안 통영시가 ‘윤이상 기념’에 쓴 금액은 ▲통영국제음악제 156억원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52억원 ▲윤이상동요제 4억5000만원 ▲윤이상기념관 운영·관리 23억원 등이다. 최소 235억원인 셈이다. 여기에 ‘윤이상을 기리는 뜻에서 건설한’ 통영국제음악당과 관련한 ▲운영 지원 483억원 ▲기획 공연 55억원 ▲레스토랑 지원 8억원을 더하면 781억원이 된다. 인구 12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 재정자립도가 12.3%에 불과해 전국 243개 광역·기초자치단체 중 그 순위가 165위에 머무는 통영시가 ‘윤이상’이란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66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쓴 셈이다. 통영시는 이에 대해 여러모로 적절한 세금 집행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통영시민은 ‘윤이상 기념’에 이 같은 세금이 투입된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 있기는 할까.⊙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홍범도 등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의 선택은 방편에서든 이념에서든 모두 잘못된 것

⊙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휘하 병력 300여 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소련군 대위가 됐지만 더 이상의 항일독립운동은 하지 못해
⊙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
⊙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홍범도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돼
⊙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이들이 공산당 거부하고 결국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왼쪽)와 최진동. 이 회의는 코민테른의 지휘에 따라 열렸다.

일제(日帝) 시대 많은 항일(抗日)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무장 항일투쟁을 한 분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다. 홍범도(洪範圖)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 헌신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과 공적(公的) 모범으로 삼아 기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항일투쟁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내용을 잊고 행위에만 몰두하는 것과도 같다. 독립투쟁은 내용이 중요하다. 어떤 나라를 세우고자 했는지의 내용이다.

많은 한국인은 독립(獨立)과 항일(抗日)을 마치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인 양 여기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본뜻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실제 과정상에서도 범주가 다른 문제다. 결국 연결되어왔지만 본질적 의미의 차원에선 구분되어야 한다. 독립문(獨立門)의 경우를 다시 상기해보자.

독립문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과 조선 왕실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돌기둥이 함께 서 있다. 사진=조선DB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다. 일제 시대가 아니었다. 독립문은 청일(淸日)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결과로 그 책봉(冊封)체제에서 조선이 독립한 기념으로 사대(事大)의 상징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자리에 세운 것이었다. 건립을 주도한 주체는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결성되었는데, 개화파(開化派)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당이라고 불렸다. 개화를 반대한 수구파 유림(儒林)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개화파를 “감히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 독립은 말하자면 반중(反中)독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차원은 아니다. 그때는 아직 그런 개념이 없었다. 핵심은 근대화였다. 개화는 곧 근대화였다. 개화파는 그 첫걸음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보았다. 반중독립이 ‘개화=근대화’의 첫걸음으로 간주된 것은 중국이 바로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가장 큰 족쇄였기 때문이다.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은 당연히 일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독립의 본질적 의의는 그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전근대(前近代)로부터 벗어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 우선 일제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내용도 마땅히 함께해야 한다. 지향해야 할 문명적 노선의 문제다.

 
 

 전제군주국 러시아에 혹한 고종

한반도가 결국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됐었지만, 당시 한반도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가졌던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제정(帝政)러시아도 그랬으며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소련의 경우는 그 야욕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에 지배당할 경우 안게 될 문명적 내용은 더 큰 문제였다. 항일이라는 관점에만 몰두하다 보면 그 문제의 중요성을 놓치게 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여간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은 조선에 대해 각종 이권(利權)을 요구하고 받아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반일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아관파천이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같은 일본의 만행과 압박 때문이었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은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근대화에 대한 수구·반동적 반발이었다. 고종이 러시아에 혹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가 전제군주국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내각 인사들을 모두 죽였다. 고종이 무슨 민중적 존재였던 것도 아니다. 백성을 수탈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정점에 있는 게 고종이었다.

1897년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선포했다. 대한제국 선포를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주권국가 선포이며 대한제국 국제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기괴한 왜곡이다.

대한제국은 근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한국국제는 제2장에서 “만세불변(萬世不變)할 전제(專制)정치”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3장은 “황제는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4장은 “신민(臣民)이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는 이미 행하였건 아직 행하지 않았건”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런 것을 근대라 하는 것은 학문적 논란 이전에 상식에 어긋난다.

손병희가 러일전쟁 때 일본을 지지한 이유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환궁(還宮)한 뒤에도 러시아의 알렉세예프를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했다. 1897년 12월에는 러시아 극동함대가 여순항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남진(南進) 정책을 계속했다.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일본에 대해서도 직접적 침공을 감행해올 수도 있다고 여겼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뒤 한반도는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겼으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했을 게 틀림없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동학(東學)의 3대 교주(敎主)이자 나중에 천도교(天道敎)를 수립하고 3·1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이 점을 우려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가던 무렵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외교 교섭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놀랍게도 한국이 일본과 동맹하여 러시아와 싸우자고 주장했다. 1903년 손병희는 국내 동학지도자들에게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이며, 국내의 동학도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 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라”고 지시했다.

만약 일본을 절대악(絶對惡)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반일(反日)·항일을 절대선(絶對善)으로 간주한다면 손병희부터 비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손병희의 이 같은 지시는 당연했다.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야심은 당시 국제적 상식이었다.

이 같은 야심은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었던 이들은 그 점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역으로 보자면 그것을 헤아릴 수 없기에 낭만적 기대를 품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착오는 독립이 지향해야 할 이념적 노선과 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 모두에서 문제를 야기했다.

 

러시아 혁명과 이동휘의 선택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동휘.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은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로 내걸었다. 러시아 혁명에 들뜬 이들은 때맞춰 나온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에도 감동했다. 세계적으로도 그랬으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동휘(李東輝)도 그런 인물이었다. 이동휘는 1919년 8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런데 이동휘는 그 전에 이미 공산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1918년 5월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한인(韓人)사회당을 결성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직접적 지원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이동휘는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정(臨政)의 많은 인사와 충돌을 거듭했다. 그러다 1921년 임정을 탈퇴했다. 임정 탈퇴 후 이동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1921년 10월에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그라드로 가서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다. 이후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등 러시아의 극동 지역 등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1935년 사망했다.

레닌은 이동휘에 대해 “이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혁명가로서는 훌륭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폄하됐다고 할 것은 아니다. 레닌의 말대로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에 입교하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한일합병 뒤에는 간도 지역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헌신적이었으며 열렬했다.

그러다 1917년 3월 북만주에 숨어 지내던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접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기도 했는데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김 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재미(在美) 교포단체 기관지인 《신한민보》 1917년 10월 4일 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투옥 중에도 성경과 기도로 생활을 하며 충실한 기독교인으로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그는 이듬해 5월 한인사회당이라는 한인 최초 공산당의 창립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동휘가 이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을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했으니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위한 선택이었으니 그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 감상일 수는 있겠지만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공인(公人)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수는 없다. 그가 선택한 공산주의가 나중의 역사적 결과로 잘못됐음이 드러났다는 차원만이 아니다. 당시의 독립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도 이동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경신참변과 일본군의 적백 내전 개입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펑우둥에서 봉오동 전투가 있었다.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의미 있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1920년 10월에는 지린성 허룽현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독립군 부대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그 여파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일어났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1920년 10월~1921년 4월까지 대대적으로 간도 지역의 독립군 토벌을 벌였다. 이 와중에 간도 지역 일대의 민간인 한인들도 대거 학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만주 지역의 항일독립군은 활동 근거지를 다시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이동휘는 만주·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독립군들에게 러시아 극동공화국(현재 러시아의 아무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할 것을 권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한인 독립군들의 통합과 신식 무장을 돕기로 약속한 터였다. 이동휘는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내막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백(赤白) 내전에 돌입해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는 일단 정권을 거머쥐었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에 맞서는 백군(白軍) 세력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극동 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일본이 개입한 것이다.

1918년 8월, 일본은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함께 시베리아 출병(出兵)을 단행했다. 그중 일본의 출병은 192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사실상의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적백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의 군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지 러시아 영토를 직접적으로 노린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최대 위협국으로 간주했지만 직접 침공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점령까지 염두에 두고 시베리아로 출병한 것이다.

 

서로 이해가 맞은 일본과 소련

1920년 9월까지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연합군은 차례로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여전히 시베리아에 그대로 남았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의 점령지를 직접 합병하지 않았다. 다만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백군을 노골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앞세워 괴뢰국을 조직하려 했다. 이 모델이 나중에 만주국(1932~1945) 수립에 적용되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일본군과 전면전쟁을 벌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레닌은 표면적으로는 항일독립운동 지원을 내걸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일본군과의 직접적 전쟁은 피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4월 6일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됐다.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는 완충지대였다. 대신 선택한 방도는 시베리아 한인사회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부추겨 일본군의 엄호를 받는 백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연해주의 한인 등을 상대로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이동휘가 주창한 바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경신참변 이후 새로운 근거지를 모색하던 만주 일대의 항일독립군들도 자유시로 향하게 됐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 적군(赤軍)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맞아가고 있었다. 적군의 목표는 일본군을 만주 지역으로 물러서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의 퇴각도 모색하고 있었다. 자유시로 한인 독립군을 모이도록 한 것은 일본군과의 확전(擴戰)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관계의 암묵적 교차였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의 이 급수탑 근처에서 우리 독립군을 향한 최초의 총격이 시작되었다.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우리 독립군이 사실상 궤멸되었다. 사진=윤상구

이런 가운데 러시아 적군은 자유시로 집결한 한인무장부대를 적군에 편입하려 했다. 하지만 원만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 등 여러 갈등이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적군 편입을 선택했다. 그런데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대한의용군 등이 학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자유시 참변이었다. 1921년 6월 28일이었다.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책임과 관련해 논란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임 여부가 어떻든 자유시 참변 이후 그 일대의 한인 독립군은 결국 소멸의 길로 갔다. 적군에 복속되길 거부한 쪽은 무력으로 제압되어 소멸됐다. 그런데 적군 편입을 선택한 쪽도 항일독립군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 참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적군 편입을 택한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 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그런데 러시아 적군에 편입된 한인들은 더 이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일 수가 없었다. 러시아 적군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 적군은 백군 최후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그러자 일본군도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시베리아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이게 끝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내막과 관련해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물러나는 대신 만주 일대의 한인 무장독립군 세력을 자유시로 집결시켜 일본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막이 어떻든 결과적 귀결은 그렇게 돼버렸다.

이후 홍범도의 운명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유시 참변 다음 해인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 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항일독립투쟁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적군 편입을 선택한 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조직해 운영하며 살아갔다. 스탈린 시절인 1927년 소련공산당에도 정식 입당했다.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홍범도는 이에 순순히 따랐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엿보이는 한인 지식인이나 지도자급 인사들은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조리 총살되던 시절이다. 홍범도는 말년에는 거기서 극장 관리인을 했다. 그는 그렇게 ‘소련인’으로서 살아가다 1943년 76세로 여생을 마감했다.

이동휘나 홍범도가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도 ‘공산당과 적군’이라는 선택을 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은 방편에서든 이념에서든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레닌의 ‘민족테제’의 허구성

▲계급투쟁의 ‘민족테제’를 주장한 레닌.

레닌의 ‘민족테제’는 미국 대통령 윌슨과는 또 다른 차원의 민족자결론을 담고 있었다. 민족해방운동 적극 지원을 천명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의 민족독립운동가들은 감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그러나 레닌의 ‘민족테제’에는 단서가 있었다. “민족자결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독립 후의 국가는 결국 공산국가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의 원칙에 따르면 각 민족별 공산 정권도 개별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단결을 해야 했다. 이것은 결국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지휘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직접적 영향으로 동구권(東歐圈)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명목상 독립국이다. 하지만 위성국(衛星國)이었다. 북한·중공도 마찬가지였다. 모스크바의 지휘에 따라야 했다. 국제적 사회주의 진영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소련은 그들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을 ‘사회주의 형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라는 이름의 종속국이었다.

러시아의 각 독립공화국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야 했다. 말이 연방이지 결국 또 다른 러시아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이라는 새로운 제국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공산주의 국제주의는 소련 제국주의로 귀결되었다.

레닌의 민족해방지원론에 독립운동가들이 호의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손을 잡는 그 순간부터는 운명은 예정된 것이 된다.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그게 어디의 것이건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점차 느끼게 되어도 물들어가면서 수용해버리게 된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공산당과 손잡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김좌진이 그랬고 이승만이 그랬다. 김좌진은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유시로 합류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23년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공산당 당부당(當不當)〉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적으로도 선구자적인 통찰이었다. 그런데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정도를 넘어 찬양까지 해대는 이들이 공산당을 거부하는 고독한 선택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을 해댄다. 그래도 되나?

이동휘와 홍범도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에 대해 “열강들이 외면하는 상황에서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나?”고도 한다. 그렇다. 그 고뇌는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비유하자면 결국 ‘파우스트’ 같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악마는 결코 머리에 뿔을 단 괴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어떤 천사보다도 아름답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등장한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랬다. 거기에 현혹된 것은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해 역사가 증명한 교훈을 헤아리는 것이다. 지난(至難)한 역사의 경험이 말해준다. 우선 공산주의는 등장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등장했어도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만났어도 손잡지는 말았어야 한다.

베트남공산당의 창시자인 호찌민은 1920년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접하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에 대한 회고담을 남겼다. 그 감동이 자신을 더욱 철저한 공산주의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했다. 호찌민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선택이 올바르고 현명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호찌민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긴 역사적 시야에서 보면 베트남의 입장에선 결국은 소모요 낭비였다. 갖은 시시비비를 떠나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성장 발전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소련과 공산권이 몰락한 뒤부터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베트남어로 쇄신)라는 이름의 개혁·개방을 시작했지만 경제 발전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공산권이 아예 몰락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다시 조우하면서부터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 정책을 중단하고 미국 등 서방이 중국에 경제적 기회를 주면서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게 역사적으로 거대한 시간낭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이 아무리 심했다 한들 공산주의만큼은 아니었다. 한일합병 후 일제 35년 동안 아니 그 이전에 을사보호조약 이후 40년간으로 잡아도 일제로 인한 희생자와 공산주의 세력의 침공에 의한 6·25전쟁 3년의 희생자는 수적 비교가 의미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일제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해악(害惡)이 그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과 북한의 운명을 엇갈리게 결정지은 것은 ‘반일투쟁의 정신’이 아니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대한민국은 기적의 길로 나아갔지만,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은 지옥이 되었다.


민족 슬로건의 책략은 반복되고 있다

홍범도 논란이 일자 “철 지난 이념 전쟁” 운운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철없는 소리이거나 아니면 교활한 언사다.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민족’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왔다. “우리 민족끼리”는 그 대표적 상징이다. 그런데 그것은 레닌의 ‘민족테제’가 품고 있는 책략의 또 다른 반복이다. 궁극적으로는 적화(赤化)를 겨냥하면서도 민족이라는 구호로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김원봉(金元鳳)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홍범도의 흉상을 끝끝내 육군사관학교의 교정에 세우게 한 것은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의도적이었다면 불순한 것이고 아니라면 철없는 짓이다.

홍범도에게 분명히 항일무장투쟁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그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공적(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된다. 특히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범적 존재로 기리게 하는 것은 더욱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는 자유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우리 육군의 장교를 육성하는 군(軍)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홍범도 논란’ 계기로 본 항일 문화 콘텐츠 흥망사

⊙ 김원봉 모티브로 한 〈암살〉 〈밀정〉 등 만들어지다가 2019년부터 〈봉오동 전투〉 등 홍범도 모티브로 한 영화·소설로 전환
⊙ 대중문화가 특정 인식 선동한다기보다 당대의 정치·사회 환경과 흐름이 대중문화산업에 포착돼 반영되는 것으로 보아야
⊙ 親中 논란 드라마 〈조선구마사〉 투자했던 중국 자본, 김원봉 소재 드라마 〈이몽〉에 투자
⊙ 2010년대 ‘反日’ 콘텐츠는 박근혜 정권 출범과 함께 등장, 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지다가 가라앉는 분위기
⊙ 항일영화, 해방 이후 ‘흥행 보증수표’였지만, 1960년대 이후 6·25 영화에 밀려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홍범도를 다룬 영화 〈봉오동 전투〉

이른바 ‘홍범도 흉상(胸像) 이전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상당 부분 일본 후쿠시마 원전(原電) 처리수 방류 문제와 시기적으로 정확히 겹치는 통에 ‘친일(親日) 정권’ 프레임이 씌워져 최적(最適)의 정치 공격 환경이 만들어진 탓이라 볼 수 있지만, 이에 대해 또 다른 입장도 종종 등장하고는 한다. 다시 돌아온 ‘대중문화 책임론’이다. 관련 언론미디어 기사 댓글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및 소셜미디어(SNS) 포스팅 등을 살펴봐도 사실상 빠지는 일이 없다 싶을 정도.

논리는 단순하다. 근래 화제가 된 홍범도나 김원봉 등 이른바 ‘문제적 항일(抗日)운동가’들, 그러니까 항일운동 경력 외에 공산주의자 또는 김일성주의자로서의 또 다른 경력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아 대중이 입체적으로 인물을 파악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항일운동가들 경우는 그 대중적 인상이 그간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편향적으로 미화(美化)돼 제시돼온 탓도 크다는 것이다. 주로 김원봉 캐릭터가 등장하는 2015년 영화 〈암살〉과 그에 모티브를 둔 인물이 나오는 2016년 영화 〈밀정〉, 그리고 홍범도 캐릭터가 등장하는 2019년 영화 〈봉오동 전투〉가 거론된다. 그리고 이들 영화는 모두 흥행에 대성공했다. 그만큼 편향된 인상도 성공적으로(?) 대중에 널리 전달됐으리라는 주장이다.


김원봉 띄우기

물론 그 자체로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을 놓고 언론미디어를 통해 쏟아진 수많은 관련 보도 중 유독 대중문화 종사자들이나 대중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던 기사가 있다. 《중앙일보》 2023년 8월 31일 자 기사 〈김원봉 막히자 홍범도… 文정부 목표는 ‘軍뿌리’ 바꾸기〉다. 내용 일부를 발췌(拔萃)해 살펴보자.

〈여권의 고위 인사는 30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전임 정부에서 북한군 창설의 주역이자 김일성 포상을 받은 김원봉이 이끈 항일운동을 국군의 뿌리로 만들기 위해 서훈을 시도하다 반대 여론 때문에 실패하자, 홍범도 장군을 일종의 ‘대체재’로 내세웠던 정황이 확인됐다”며 “문재인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부각한 근본적인 목표는 독립 영웅 추앙보다는 한미동맹에 근간을 둔 군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실제 당시 회의록에는 김원봉을 서훈 대상으로 특정하면서 “남북 대화로 ‘누구를 기릴 것인가’에 대한 토론회가 필요하다”거나 “유공자 발굴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 등 지속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보는 대목이 수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김원봉 서훈 시도가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청와대는 홍범도 장군 띄우기를 동시에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시점은 혁신위가 ‘김원봉 서훈 완료’ 시점으로 제시했던 3·1절이 막 지난 2019년 4월이었다.〉

이 같은 흐름은 2010년대 한국 대중문화계의 항일 콘텐츠 열풍 상황에서 그 아이콘 격 실존 인물의 트렌드 이동과 정확히 일치한다. 2015년 김원봉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 〈암살〉이 무려 1270만 관객을 동원해 영화업계의 꿈이라는 ‘1000만 영화’에 등극하자 곧바로 ‘김원봉 열풍’이 일어났다. 각종 매거진이나 유튜브 등에서 김원봉에 대해 다루는 콘텐츠가 급속도로 불어났고, 이듬해인 2016년 영화 〈밀정〉에서도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캐릭터 정채산이 김원봉을 모티브로 삼기도 했다. 〈밀정〉 역시 대히트해 750만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흐름은 결국 2019년 아예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TV드라마 〈이몽〉이 제작돼 MBC에서 40부작으로 방영되는 단계까지 간다.


김원봉에서 홍범도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1년 8월 18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 참석, 홍범도 장군을 기렸다. 사진=뉴시스

그러다 마치 김원봉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권 측에서 인지하기라도 한 듯 2018년 3월 갑자기 육군사관학교에 홍범도 흉상이 설치되고, 위 기사에 언급된 대로라면, 2019년 4월부터 홍범도 유해(遺骸) 송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송환 행사를 진행하게 된 순서다.

그러자 대중문화계도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간다. 2019년 홍범도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 〈봉오동 전투〉가 8월 개봉돼 479만 관객을 모으며 영화의 손익분기점인 450만 관객을 넘기는 성공을 거두고, 이후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에선 김원봉이 맡고 있던 ‘항일의 아이콘’ 자리가 홍범도로 하나둘 대체되는 흐름이 생성된다.

2020년 장편소설 《나는 홍범도》가 화제 속에 출간되고, 2021년 10월에는 양승동 KBS 사장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홍범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 〈홍범도-총의 노래(가제)〉 제작에 들어가겠다고 밝힌다. 흥미로운 건 같은 시기 홍범도를 주인공 삼은 드라마 기획은 〈홍범도-총의 노래〉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제작사 아이피박스미디어에서도 방송사 편성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또 다른 홍범도 드라마 〈격정시대(Partisan)〉 기획을 발표한다. 갑자기 너도나도 홍범도 콘텐츠를 내놓지 못해 안달이 난 듯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이후 KBS의 〈홍범도-총의 노래〉는 대전 유성구에서 2023년도 본예산에 편성한 ‘홍범도 장군 드라마 제작지원 예산’이 상임위원회 계수조정 시 전액 삭감되면서 제작 자체가 표류(漂流)하게 됐고, 〈격정시대〉의 경우 더 이상 제작 관련 정보가 추가로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급전환이 정권 교체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를 두고 무슨 대단한 음모론이라도 제기하려는 건 아니다. 정치계와 대중문화계 사이 이처럼 ‘같이 가는’ 흐름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 소설 등의 소재로서 역사 인물 선정도 결국은 ‘트렌드’를 따라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 인물의 경우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인물 화제성이 현재 어떤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는지는 언론미디어 보도들만 꼼꼼히 챙겨봐도 훤히 눈에 보인다. 특정 세력에서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목적을 위해 특정 인물을 재조명하며 이름을 한두 번씩 거론하기 시작하고 이슈를 만들어 그 중심에 두기도 하는 등 소위 ‘발전기’를 돌리는 광경은 생각보다 쉽게 포착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문화적으로도 트렌드가 부풀어 오른다.

결국 대중문화가 선도(先導)해 특정 인식들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든 ‘발전기’를 돌린 것이든, 당대의 정치·사회 환경과 흐름 자체가 그 안에서 상업성을 찾으려는 대중문화산업에 포착돼 반영되는 순서라 봐야 한다. 어찌 됐건 문화는 현실의 반영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게 다 대중문화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힘든 이유다.


‘발전기를 돌려 만든 열풍’

 ▲‘항일’을 다룬 흥행작 〈암살〉 〈밀정〉

그런데 이 같은 관점에서 홍범도, 김원봉 등을 넘어 앞서 언급한 ‘2010년대 한국 대중문화계의 항일 콘텐츠 열풍’ 자체를 재해석해 보면 사뭇 주목할 만한 광경이 포착된다. 해당 열풍 역시 김원봉에서 홍범도로 ‘항일의 아이콘’이 이동한 흐름처럼 ‘발전기를 돌려 만들어낸 열풍’에 가깝다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 열풍은 대략 2010년대 초중반, 명확히 가시화된 것은 역시 2015년 〈암살〉 대성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7년에는 이런 기사까지 등장한다.

〈항일 영화 불패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박열〉이 2일 1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항일 영화 흥행 공식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항일 영화의 선전이 돋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최근 3년간 〈암살〉 〈해어화〉 〈대호〉 〈밀정〉 〈귀향〉 〈동주〉 〈덕혜옹주〉 〈아가씨〉 등이 개봉됐다. 이 작품 중 특히 독립운동 등 항일투쟁을 소재로 하거나 당시의 아픔을 그린 영화의 흥행 성적이 두드러진다. (중략) 오랜 시간 잠자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영화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암살〉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치 환경 속에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흥미 있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친일파 청산을 못해 굴곡졌던 현대사의 아쉬움을 해소해주며 대리만족을 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현실이 보수 정권 내내 이어진 시민사회의 저항을 떠올리게 했다.〉(오마이뉴스 2017년 7월 3일 자 기사 〈‘흥행 불패’ 항일 영화… 대중은 여전히 목마르다〉)

 

‘反日 영화’의 종언(?)

‘불패(不敗)’라고 했다. 극장에 걸었다 하면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흥행의 비결은 사실상 ‘지금이 보수 정권이라서’라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 지나 2023년이 되자 아래와 같은 맥락의 분석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영화 흥행을 돕는 재료로 꼽히던 ‘항일(반일)’이 극장가에서 좀처럼 먹히지 않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한산: 용의 출연〉은 726만 관객을 모았지만 전편 〈명량〉 (1761만 명)에 비하면 반 토막도 안 되는 성적으로 퇴장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영웅〉은 개봉한 지 두 달 가까이 됐으나 손익분기점(340만 명)을 여태 못 넘겼다. 설경구·이하늬 주연으로 조선 총독 암살 작전을 그린 〈유령〉, 치매 노인이 60년 만에 친일파에게 복수하는 〈리멤버〉는 참패했다. 항일 영화들이 지난해 여름부터 줄줄이 흥행 부진에 빠진 것이다. (중략) 최근 항일 영화가 잇따라 초라한 성적표를 받자 “극장가에서 ‘무조건 반일’이나 ‘노 재팬(No Japan·일본 불매 운동)’이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조선일보》 2023년 2월 14일 자 기사 〈‘무조건 反日’은 NO… 항일 영화 줄줄이 흥행 부진〉)

TV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허영만 만화를 원작으로 한 2012년 KBS2 〈각시탈〉 이래 2018년 tvN 〈미스터 션샤인〉 등이 큰 성공을 거뒀던 데 반해, 지금 항일 드라마들은 오히려 줄줄이 실패만 연속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2019년 MBC의 ‘김원봉 드라마’ 〈이몽〉부터가 최고 시청률 7.1%(AGB닐슨), 최저 시청률은 2.2%까지 떨어지는 참패를 겪으며 2005년 〈제5공화국〉 기점으로 ‘MBC 주말 특별기획’이 시작된 이래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하게 됐다. 같은 해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을 다룬 SBS 〈녹두꽃〉도 평균 시청률 6.6%에 그쳤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중문화계 항일 콘텐츠의 전성기는 대략 2015년부터 2019년 정도까지라고 볼 만하다. 5년 정도의 짧은 전성기였던 셈이다. 여기에 대작 영화들까지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며 대폭락에 ‘도장’을 찍어버린 게 2022년 하반기부터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앞선 오마이뉴스 기사의 ‘보수 정권이니 항일 영화 흥행론’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된다. 반대로, 보수 정권이 들어서니 갑자기 대중이 홀린 듯 항일 영화나 드라마를 안 보기 시작했다는 식의 논리도 성립 불가능해진다.

박근혜 정권과 ‘반일’ 콘텐츠

그럼 왜일까. 어째서 항일은 대중문화시장에서 20년 넘게 사멸(死滅)되다시피 한 코드로 내려앉았다가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불현듯 대표적 흥행 코드로 올라섰고, 또 불과 5년여 만에 도로 내려앉게 된 걸까 말이다. 결국 앞서 언급했듯 정치·사회적 환경 탓에 항일 또는 반일(反日)이라는 코드가 짧은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언론미디어를 통해 빈도(頻度) 높게 확산되면서 벌어진 일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은 2010년대 등장한 박근혜 정권 또는 박근혜라는 인물 개인의 면면 및 속성과 함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애초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의 창씨명)라는 이름이 방송미디어를 통해 수천 번 이상 불리며 그 공격 방향이 미리 빌드 업(build up)된 정권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로는 훨씬 노골적으로 친일 코드 공격들이 이어졌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교회 강연에서 “이 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고 남북분단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가 결국 낙마(落馬)했고, 한민구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조부의 친일 행적(?)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곧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발행 체제를 검정(檢定)에서 국정(國定)으로 전환하는 ‘국정교과서’ 안을 추진하면서 ‘친일 정권’이라는 낙인이 대대적으로 찍히게 된다. 어차피 친일파들로 구성된 정권이니 온통 일본 미화 내용으로 국정교과서를 만들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밖에도 많다. 심지어 2016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 68주년’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일제 시대와 임시정부를 없던 것으로 만들려는 ‘건국절 세력’이라 비난받은 적까지 있다. 아예 박근혜 정권 시절 자체가 통째로 ‘숨만 쉬어도 친일이라 비난받던 정권’으로 지금껏 회자(膾炙)될 정도다.

이렇게 2010년대, 정확히는 2012년 무렵부터 세상이 온통 ‘친일’ ‘친일파’ ‘임시정부 부정’ 등의 코드로 뒤덮여 관련 소식들이 언론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도배되다시피 하니, 앞서 언급했듯, 상업화된 대중문화계에서 이를 일종의 사회적 트렌드로서 받아들여 콘텐츠에 적극 반영하게 되고 대중 역시 이런 분위기에 젖어들며 문화 소비 측면에서 크게 영향받게 됐다는 것이다.


한풀 꺾인 ‘노 재팬’

 ▲해방 직후인 1946년에 나와 흥행에 성공한 〈자유만세〉

뒤이은 문재인 정권에서도 반일 코드는 계속 언론미디어를 장식했다. ‘제주 국제 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판결’ ‘일본 해상 초계기 저공 위협 사건’, 여기서 다시 ‘한일 무역 분쟁’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문재인 정권 공식 행사에서 뜬금없이 ‘박근혜 친일 정권’ 비난이 읊어지기까지 한다. 2021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광복절을 폐지하고 건국절을 제정하겠다는 세력, 친일 미화 교과서를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겠다는 세력은 대한민국 법통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있다고 믿는 세력”이라 발언한 건이다.

사실 이 정도까지 가면 일시적으로는 모두가 열풍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게 맞지만, 곧 그로부터 되돌아오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특히나 문화 분야에 있어선 더더욱 그렇다. 대중 자체가 극단적 반일 정서 만연(蔓延)에 지치게 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강박증적 수준으로 반일 공세가 펼쳐지다 보면 반(反)문화 경향까지 일어나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청년문화가 이동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일 무역 분쟁’으로 빚어진 이른바 ‘노 재팬(No Japan) 운동’이 극단까지 치달은 2019년이 되자 한창 신나게 달리던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 붐도 한풀 꺾이게 된 것이고,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2023년이 되니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수순을 밟게 된 셈이다.

여기서 이제 ‘그 이전’을 돌아보자.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의 본격적 역사 부분 얘기다. 한국의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는 영화 장르로부터 시작됐다. 최인규 감독의 1946년 작 〈자유만세〉를 항일 영화의 시초로들 본다. 일제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지하공작을 펼치던 독립운동가의 사랑과 거친 운명을 그렸다. 〈자유만세〉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항일 영화는 실질적으로 일종의 흥행 보증수표처럼 인식돼 1940~50년대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된다.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백범 국민장 실기〉(1949), 〈안창남 비행기〉(1949), 〈애국자의 아들〉(1949) 등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1951년 한일 간 국교정상화 회담이 시작된 이후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일본 정부의 북송(北送) 결정 탓에 이승만 정부가 대일(對日) 통상 중단 조치를 내리면서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1959년에 항일 영화는 다시 한 번 불타오른다. 한 해 동안에만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삼일 독립운동〉 〈유관순〉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이름 없는 별들〉 등이 일제히 쏟아졌다. 이 중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과 〈이름 없는 별들〉이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한동안 항일 영화 트렌드를 계속 이끌게 된다.

그러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게 1960년대 중반부터다. 영화계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산업이 활황을 이뤄 상업적 매력이 높은 6·25 전쟁영화 등을 만들 자본과 기술력이 갖춰진 관계로 그리로 유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점에서 영화계 외적 상황이 더 중요했다. 먼저 1965년 14년간에 걸친 조율과 교섭 끝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항일이라는 코드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편 1968년에는 북한 공작원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300m 앞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현실적 위협이자 국가적 분노의 대상으로서 북한이 온전히 설정되며 향후 영화시장도 기존 6·25전쟁 영화들과 함께 북한 간첩이 등장하는 첩보 영화들 중심으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마지막 항일 드라마 성공작은 〈여명의 눈동자〉”

이후 항일 영화는 대부분 B급 프로덕션에 머물게 된다. 일제 시대 만주를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마적단 등이 한데 얽히는 ‘만주 웨스턴’이나 일제 시대 배경 권격(拳擊) 영화 등 다소 싸구려 인상이 드는 장르 영화들 말이다. 그나마도 곧 열기가 식어 항일 코드는 1972년 KBS 일일드라마 〈여로〉처럼 안방극장 소재 정도로 머물거나 1974년 출간된 허영만의 만화 〈각시탈〉 등 서브컬처 계통 소재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다 실질적으로 ‘사라진다’. 특히 영화 부문은 1983년 청산리 전투를 다룬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이 당시로서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음에도 서울 관객 7만 정도에 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자 상업영화로서 항일 코드의 명맥(命脈)이 끊기는 단계에 이른다. 〈장군의 아들〉 같은 일제 시대 협객(俠客) 영화, 〈뽕〉 같은 일제 시대 배경 성애(性愛) 영화를 굳이 항일 영화로 넣지 않는다면 그렇다. TV 드라마 역시 “마지막 항일 드라마 성공작은 1991년 작 〈여명의 눈동자〉”라는 얘기가 이후 20년에 걸쳐 통용되는 수준이 됐다.

 

물론 이후에도 항일 콘텐츠는 간간이 등장했다. 영화계에선 의열단을 소재로 한 2000년 작 〈아나키스트〉, 복거일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모티브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2009년을 맞이하게 된 조선을 그린 대체역사 SF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을사조약 체결 직후 일본군 야구 클럽 팀과 대결하게 된 YMCA 회관 야구팀을 다룬 〈YMCA 야구단〉 등 다양한 소재로 접근했지만 모두 흥행에선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TV 드라마도 SBS 〈야인시대〉나 MBC 〈왕초〉 등 협객 드라마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가장 강렬한 민족주의 정권이었다고 평가되는 김영삼 정권 시절, 정권이 주도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남북한이 힘을 합쳐 개발한 핵미사일로 일본을 응징한다는 내용의 1993년 김진명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일본이 석유 자원을 노리고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자 한국이 이에 맞서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의 1994년 이현세 만화 〈남벌〉 등이 히트하긴 했다. 그러나 이를 전통적 의미에서 항일 콘텐츠라 보기는 어렵다. 그저 반일 감정을 토대로 한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국뽕 판타지’ 정도라고 봐야 한다.

‘항일 영화’가 돌아온 이유는?

결국 알 수 있는 부분은 단순하다. 항일은 사실 1990년대 중반 이후 최소한도 대중문화 콘텐츠의 상업적 소재로선 이미 수명을 다한 코드였다는 것이다. 중·노년층에서 〈암살〉이나 〈밀정〉 〈봉오동 전투〉 같은 영화들이 왜 그토록 인기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 기억 속에서 항일 콘텐츠란 ‘광복절 특집 2부작 TV 드라마’ 정도로 내려앉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23년에 이르러 왜 항일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고 트렌드가 바뀌었는지에 주목하기보다, 정반대로 어째서 20여 년에 걸쳐 자연스럽게 사멸되다시피 한 항일 콘텐츠가 급작스레 되돌아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은 이전 일본 정권과 달라 그렇게 됐다는 반박도 존재하지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 시절부터 과거 일본 정권과의 가지각색 트러블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다. 매일매일 국내를 향해 ‘친일’ ‘친일파’ ‘임시정부 부정’, 그리고 다시 ‘친일’ ‘친일파’ ‘임시정부 부정’ 등이 수없이 반복되는 환경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대중문화 책임론’은 이렇듯 그렇게 대단한 ‘힘’을 지닌 대중문화가 어떤 배경과 환경하에서 움직이고 작동하게 됐는지를 관찰하는 쪽으로 관심이 이동돼야 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저 민족감정과 대중문화 관계에서 이상스러울 정도로 조명받지 못하는 지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앞선 ‘김원봉 드라마’ 〈이몽〉과 관련된 각종 논란을 당시 언론미디어 기사들을 통해 살펴보면 거의 전부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이념 성향에 대한 화두(話頭)들뿐이다. 그를 인정하느냐 아니냐로 친일파냐 아니냐가 갈린다는 식의 막무가내 주장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몽〉의 내부로 들어가 그 제작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놀랍게도 2021년 SBS 〈조선구마사〉 논란 당시 처음 국내 언론미디어의 이목을 집중시킨 중국 자본의 콘텐츠 제작사 쟈핑픽쳐스 유한공사가 나온다. 정확히는 쟈핑픽쳐스 측이 한국 제작사 이몽 스튜디오 문화전문회사와 합작 투자해 만들어진 드라마가 〈이몽〉이다. 그리고 〈조선구마사〉 사건 당시 알려졌듯, 쟈핑픽쳐스의 한국 법인 쟈핑코리아 사무실은 중국 ‘인민일보 문화전매’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고, ‘인민일보 문화전매’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회사다. 쟈핑코리아 대표와 이사는 둘 다 ‘인민일보 한국 대표처’의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창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던 2020년 3월 쟈핑픽쳐스와 ‘인민일보 한국대표처’ 두 회사는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주선으로 함께 성금 1억5000만원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한 바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항일 대중문화 콘텐츠 홍보 과정에서 애용(愛用)되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출처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어찌 됐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오직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등장한다는 특이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중국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과거 중국과의 그 지난(至難)한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는 의미로 이 문구가 등장하지 않고, 애초 그를 잊어선 안 된다는 캠페인 자체도 없다. 〈이몽〉에 대한 논란이 ‘친일파냐 아니냐’ 따위에 천착해 있을 때, 왜 중국공산당 기관지 자회사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중국 자본의 회사가 ‘김원봉 드라마’에 투자한 것인지 궁금해한 측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의 허랑함을 새삼 깨닫는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은 물론 그와 유사한 모습의 앞으로 닥칠 수많은 각종 논란들을 놓고서도 그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시각을 좀 더 넓혀 전체 상황을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권은 ‘국군의 뿌리’를 왜 하필 홍범도에게서 찾았을까?

“3사단장,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명령한다. 38선을 돌파하라! 38선은 없다!”

1950년 10월 1일, 김백일(金白一) 1군단장은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과 논의 끝에 이종찬(李鍾贊) 3사단장에게 38선 돌파를 명령했습니다. 이미 38선에 도달한 일부 국군 장병들은 38선을 넘나들면서 북진(北進)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38선 돌파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작전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국군 수뇌부는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결국 북진을 감행했습니다. 10월 1일이 국군의날로 지정된 것은 이를 기념해서입니다.

‘정규 육사 첫 교장’으로 광복군 출신 선택한 이종찬 장군

이종찬 장군은 1951년 6월 제6대 육군참모총장이 됩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정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엽니다. 종전의 육사는 주로 과거의 군 경력자들을 대상으로 수개월 정도 교육을 하고 장교로 배출했는데,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노력으로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육군의 장성들 가운데는 ‘정규 육사의 첫 교장’이 되고 싶어 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종찬 참모총장이 정규 육사의 첫 교장으로 선택한 인물은 안춘생(安椿生) 준장이었습니다. 안춘생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광복군에 몸담았던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일본군에 몸담았던 것을 항상 죄스러워했던 이종찬 장군은 국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정규 육사의 첫 교장은 광복군 출신이 맡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소좌(少佐)까지 올라갔던 이종찬 장군은 젊은 시절 일본군에 몸담았던 것을 평생 괴로워했습니다. ‘다시는 잘못된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해방 후 국군에 몸담는 것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당시 정부와 군부 인사들의 강권으로 뒤늦게 국군에 참여했습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동원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에 감연히 항거한 것도 ‘다시는 잘못된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지금도 ‘참군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한강방어전의 영웅 김홍일 장군

공교롭게도 안춘생 장군의 전임 육사 교장 두 분도 광복군 출신이었습니다. 이준식(李俊植) 장군과 김홍일(金弘壹) 장군이 그분들입니다.

김홍일 장군은 6·25 개전 초기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붕괴한 국군 부대들을 수습해 한강을 7일간이나 방어했습니다. 중국군 소장 출신인 김 장군은 당시 국군 지휘관들 가운데 사단급 이상 부대를 지휘해본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에서 일주일을 버텨낸 덕분에 유엔군이 참전하고 낙동강 교두보를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을 지도하고 있던 소련군 군사고문조차 “부실하기 짝이 없던 남한군이 불과 일주일 만에 견실한 전투부대로 바뀌었다”며 김홍일 장군의 역량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폭탄을 제공한 분이기도 합니다.

이준식 장군은 낙동강 방어전 당시 3사단장으로 영덕지구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에 들어와 별을 단 분 가운데는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아들 박시창(朴始昌) 장군,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의 아들 박영준(朴英俊) 장군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해방 이후 창군(創軍) 과정에서 국군에 참여한 광복군 출신들이 꽤 있습니다. 현대적 군사 교육을 받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국군에 많이 참여했고, 이후 그들이 군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광복군 출신 또한 국군의 정신적 뿌리를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광복군 출신 중에는 시인이자 군인으로 활약한 장호강(張虎剛) 장군도 있습니다. 광복군 제3지대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장 장군은 6·25 당시 전선을 누비면서 전공(戰功)을 세웠습니다. 장호강 장군은 1950년대 ‘진중(陣中) 문학’을 대표하는 분인데, 저는 그분의 ‘총검부(銃劍賦)’라는 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격전의 날
마침내 최후 승리를 결판 지워야 할
돌격의 신호가 오를 때
총아!
너는 네 몸이 불덩어리로 녹을 때까지
원수들의 피를 마셔라.
검아!
너는 네 몸이 은가루로 부서질 때까지
원수들의 살을 삼켜라.
오! 내 가슴에도 원수의 총알이 쏟아져 오면
내 사랑하는 조국의 제단 앞에
몸소 방울방울 깨끗이 드리오리니.〉

아, 초대(初代)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잊을 뻔했네요. 약관(弱冠)의 나이에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었고, 반생을 만주와 중국 대륙을 떠돌면서 무장항일투쟁을 해오신 분이죠. 광복군 참모장 등을 지내면서 미국 OSS(전략활동국)와 손잡고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던 분입니다. 별을 달지는 못했지만 광복군 출신으로 29세의 나이로 청송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한 ‘대한민국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본명 김병원) 중령 같은 분도 광복군 출신 국군 장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입니다.

왜 하필 홍범도·김원봉인가?

백선엽(白善燁) 장군이나 정일권 장군, 이종찬 장군, 김백일 장군 같은 분들이 아무리 대한민국을 위해 혁혁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만주군이나 일본군에 몸담았다는 젊은 날의 흠결 때문에 적어도 육사 생도들의 모범이 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출신 가운데서 훌륭한 분들을 찾아서 육사 생도들의 사표(師表)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문재인 정권이 하필이면 소련군이 동료 독립군들을 살상하는 데 동조했고 소련공산당원으로 생을 마친 홍범도 같은 이를 골라서 육사에 그 흉상을 세운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월북(越北)해서 김일성 정권의 국가검열상·노동상 등을 지낸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로 내세우려 기를 쓴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문재인 정권은 김홍일 장군, 안춘생 장군, 이준식 장군처럼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에 참여했고, 육사 교장을 지냈고, 6·25 때 몸 바쳐 대한민국을 지키신 분들은 외면한 것일까요? 특히 김홍일 장군은 독립운동가로서나, 군인으로서나,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분인데 그런 분을 제쳐놓고 홍범도나 김원봉을 열심히 띄운 이유가 뭘까요? 혹시 홍범도는 소련공산당원이었고, 김원봉은 북한으로 가서 각료급 지위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저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요? 반면에 육사 교정에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세울 때 김홍일 장군 등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은 대한민국 국군으로 6·25 때 공산군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죄(罪) 아닌 죄’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문재인 정권이 육사 교정에 홍범도 흉상을 들여놓은 것은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대한민국과 국군의 정통성을 변조(變造)하려는 끈질긴 공작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30여 년 전부터 일부 좌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국군의날을 국군이 북괴군을 격파하고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에서 광복군 창건일인 9월 17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여당 의원들이 이러한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여러 차례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보다는 관념적인 ‘민족’을 앞에 놓는 사고 방식의 소산입니다.

하지만 ‘국군(國軍)’은 글자 그대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군대입니다. 장호강 장군이 ‘총검부’에서 노래한 ‘내 사랑하는 조국’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군인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애국자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군에 총을 겨눈 자는 대한민국과 국군의 ‘원수’입니다. 건군(建軍) 75주년을 축하하며, 국군 장병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10.02 서정우 하사 母 “정율성 실체 드러나도 가만있는 광주시에 분노”

▲고(故) 서정우 하사가 전사한 지 2년 뒤인 2012년 서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여사가 대전 현충원에서 아들의 비석을 닦고 있다. /김지호 기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정율성이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전 교장은 “자식을 나라에 바친 전몰 부모유족, 6·25 전쟁 중 북한 공산 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6.25 전사자 유자녀, 정율성 공원 조성철폐 광주 범시민 연대회원들은 강기정 시장에게 공원 조성 중단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이달 4일부터 13일까지 매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5~10명씩 팀을 짜 정율성의 실체를 알리는 전단지도 광주시 곳곳에서 배부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 전 교장 등 이들 단체 관계자들이 요구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6.25 전범 공산당 나팔수 정율성 공원을 당장 중단하라.

-정율성 공원 대신 민주와 호국의 고장 광주 정신을 지키는 대안을 마련하라.

-광주시민 혈세인 공산당 정율성 공원 48억 예산 사용을 중지하라.

-강기정 시장은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보훈단체 집회를 관제 데모라고 깎아내린 독재정권 시절의 운동권식 발언을 사과하라.

 

 ▲지난 8월 27일 오후 전국학생수호연합 광주지부 학생들이 광주 남구 양림동 정율성 동상 앞에서 정율성기념공원을 조성하려는 광주시의 정책에 대해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어 정율성 거리에서 방명록을 작성했다./2023.8.27. 김영근 기자

광주시는 정율성 공원 건립은 중국 관광객 유치 효과 등 여러 이점이 있다며 계획대로 올 연말까지 준공하겠다는 입장이다. 광주 태생인 정율성은 일제 강점기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북한 김일성 정권에 투신, 북한 인민위원회·조선노동당·북한군 등에서 북한 군가를 지어주며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귀화해서는 중국 군가를 지어주며 이름을 날렸다. 6·25 침략 전쟁 때는 북한·중공군과 함께 ‘점령된 서울’에 2차례나 내려와 유물을 약탈한 것으로 ‘정율성 일대기’ 등을 통해 드러났다.

 

 ▲6·25전쟁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정율성은 얼마 뒤 북한에서 서울로 내려와 머물렀던 것으로 조사됐다. 작곡가인 그는 북한 군가를 지었으며 김일성으로부터 포상도 받았다. /조선일보 DB

보훈 단체는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은 단 하나도 없고 철저히 북한 김일성 정권과 중공군에 헌신한 정율성을 광주 태생이라는 이유로 광주시에 혈세 48억원을 들여 기념 공원을 짓는다는 것은 반국가적 행위라면서 광주시에 사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전임 문재인 정부 당시 정율성을 항일 운동지사로 추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보훈처(현 보훈부) 심의 결과 정율성의 항일 활동은 거의 없고 친북·친중공 기록만 있어 서훈 신청을 기각 처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12월 15일 오전 중국 베이징대학교를 방문해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가 정율성 띄우기에 나섰던 것은 한중 우호를 위한 상징적인 인물로 그를 낙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광주 태생 한국인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황해도 선동부장을 맡고 대표적인 군가를 지은 업적이 있는데다 이후 중국으로 귀화해 중국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해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12월 중국 방문 기간 베이징 대학교에서 연설을 하면서 “광주시에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이 ‘정율성로’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고 있다”면서 ‘정율성’을 중국과의 연결고리로 삼으려 했다.

 

문 정부가 문 전 대통령 방중 직후 정율성 유공자 만들기에 발빠르게 움직인 데는 ‘시진핑 답방’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차후 시 주석이 방한했을 때 광주 정율성로나 정율성 기념관 등을 방문시켜 광주와 정율성을 한중 친선의 ‘고장’과 ‘인물’로 삼으려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과 함께 평양 회의장 들어서는 김원봉 - 북한 정권 수립(1948년 9월) 초기 주석단의 모습. 오른쪽부터 북한 김일성 수상, 남로당 당수를 지내다 월북한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 김원봉(붉은 원 표시) 국가검열상이 평양의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문 정부는 2018년 보훈처에서 정율성 포상이 부결로 일단락되자 이듬해인 2019년 6·25 남침 공로로 북에서 훈장을 받은 김원봉 서훈에 나섰다.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은 본명이 정부은인 정율성에게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인물이다. 문 전 대통령은 각종 논란에도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고 공개 발언하며 그를 유공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일부 심의위원이 대한민국을 적화 통일하려 한 김일성 정권의 부역자를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포상할 수는 없다며 저항해 무산됐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10.02 광주 정율성 동상, 1일 밤 강제철거 됐다

▲1일 밤 한 시민단체가 강제 철거한 광주광역시 양림동 ‘정율성로(路)’ 입구에 있는 정율성 동상. 동상의 기단 뒤쪽에 철거되어 놓여있다./유튜브

광주광역시 양림동 정율성거리 입구에 있는 정율성 동상이 강제 철거됐다.

2일 광주에서 활동하는 보수계 전도사 윤영보씨는 “정율성거리에 있는 정율성 동상을 1일 밤 새끼줄을 묶어서 기단에서 뽑아버렸다”고 밝혔다. 이날 현재 정율성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정율성로(路)’ 입구에 있는 정율성 동상./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10.03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

‘제2의 김관진’ 탄생 가능할까?

▲사진=조선DB

아마도 국민들에게 이름 세 글자가 각인된 국방부 장관은 김관진, 김장수 두 명 정도일 것이다.

김관진 전 장관(국방혁신위원회의 부위원장)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다.

북한은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그를 싫어했다. “민족 반역자인 ‘김관진놈’을 향하여 쏴아!”라는 북한군 사격 동영상도 있다. 김 전 장관은 북한이 도발하면 “자동으로 응징한다. 적이 굴복할 때까지”라는 원칙을 표명한 바 있다.

 

그는 말만이 아니라 그 원칙을 지켰다. 2015년 목함지뢰 사건 때 북한군이 고사포를 발사하자 즉각 자주포 29발로 응사했다. 북한은 전면전 불사까지 외쳤지만 결국 유감을 표명했다. 김 전 장관이 옳았다.

노무현 정부 때 김장수 전 장관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을 만나 허리를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악수를 해 ‘꼿꼿 장수’라는 별칭을 얻으며 유명세를 탔다.

윤석열 대통령은 9월 13일 국방부 장관 후보자에 신원식(申源湜·65) 국민의힘 의원을 지명했다. 신 후보자는 국방부 정책기획관,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작전본부장, 합참 차장 등을 거친 예비역 육군 중장이다. 정책과 작전, 야전을 두루 거쳐 현역 시절 육사 37기 선두 주자로 꼽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씨와 육사 37기 동기다. 2020년 21대 총선 때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됐다. 현역 국회의원이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된 사례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천용택 장관 이후 처음이다.

신 후보자를 한 번 만난 적 있었는데 굉장한 달변이었다. 전투력이 역대급이란 평가다. 최근에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이념·역사 논쟁도 객관적 논리로 잠재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이 국군의 뿌리라며 그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 자기 마음대로 세우고 6·25 전사(戰史)와 북한 관련 교과목을 필수과목에서 제외시켰다. 국군의 뿌리까지 빨갛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홍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자유시 참변 전후 그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친러시아 행태를 보인 것은 북한과 공산당이란 주적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육군사관학교의 근본 특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조선일보》 유튜브 ‘배성규·배소빈의 정치펀치’ 中)

그는 지난 대선 경선 당시 유승민 전 의원을 지지했다. 물론 현재는 결별한 상태다.

신 후보자는 “하지만 재작년 대선 경선 이후 최근까지 유 전 대표의 일련의 정치적 행보와 언행을 지켜본 결과 제가 애초부터 사람을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유 전 대표가 변한 건지, 유 전 대표에 대한 제 확신은 강한 의구심으로 바뀌었다”며 “오래전의 ‘개인적 약속’은 2021년 대선 경선에서 이행했기에 지금은 이미 그 시효가 끝난 시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연유로 유 전 대표와 정치적 결별을 이미 했다”고 말했다.

 신 후보자는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된 날 “군인다운 군인,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부족하지만, 국민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국방장관이 된다면 소임을 다하겠다”고 했다.

국민은 ‘제2의 김관진’을 원한다. 과연 신 후보자가 그 염원을 이뤄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10.04 7차 핵실험 실종사건

헌법에 ‘核고도화’ 못박은 北
핵실험 카드 접었을 리 없어
전술핵 양산되면 한국엔 재앙
核안전 우려 큰 中과 협력해야

올해도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연설 소식은 추석 연휴 첫날 전해졌다. 김정은은 ‘공화국은 핵무기 발전을 고도화한다’는 문구를 헌법에 삽입한 의미를 설명하며 “신성한 투쟁의 전취물을 헌법으로 고착시켰다”고 했다. 핵을 신성불가침 반열에 올렸다. 이어 “일단 보유한 핵은 세월이 흐르고 대(代)가 바뀌어도 영원한 전략 자산으로 보존·강화하고 어떤 경우에도 훼손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작년 최고인민회의에선 북이 공격당할 조짐만 보여도 선제 핵 타격에 나서도록 규정한 ‘공화국 핵무력법’을 제정했다. 김정은은 그 당위성을 설명하며 “백 날, 천 날, 십 년, 백 년 제재를 가해 보라.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연설 뒤 김정은은 2주에 걸쳐 한국을 겨냥한 전술핵 공격 훈련을 7차례 지휘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북은 추석 직후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3주 뒤 사거리 590㎞짜리 대남 타격용 ‘미니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올해는 핵무력 법제화를 넘어 헌법화까지 했으니 더한 도발을 할 수 있다. 추석 즈음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대남 무력시위에 나서는 패턴이 3년 연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북의 가을 도발은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을 자축하고 내부 결속을 도모하는 의미도 있다. 내세울 경제 성과가 전무하니 갈수록 군사력 과시에 기댄다. 두 달 전 북은 10월에 군사정찰 위성을 다시 쏘겠다고 예고했다. 3차 발사마저 실패하면 낭패다. 보험 성격의 무력시위도 준비할 것이다.

 

정찰위성보다 중요한 것은 핵실험이다. 북한은 김정은이 2021년 당대회에서 전술핵 개발을 공개 지시한 뒤 핵실험 준비에 돌입했다. 전술핵 탄두를 양산하려면 200~300㎏급 소형 핵탄두 위력을 실제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다. 기이한 것은 작년 상반기까지 무성했던 7차 핵실험 임박설이 요즘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 당국자는 “핵실험으로 바이든 정부로부터 얻어낼 이익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내년 대선 국면에 다시 핵실험 임박설이 분출할 것이란 관측이다.

외교가 일각에선 중국 요인을 거론한다. 중국이 북에 ‘핵실험 절대 불가’ 입장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는 것이다. 핵실험 임박설이 한창이던 작년 5월 방한한 류샤오밍 중국 6자회담 대표도 한국 고위 당국자들과의 만남에서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 군사적 긴장 고조 우려 등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 핵 안전 문제에 둔감한 북한이 중국 국경으로부터 불과 70여㎞ 떨어진 곳에서 위험천만한 핵실험을 하는 게 불안한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화강암 지대지만 6차례 핵실험으로 지반이 약해졌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 이후 40차례 넘는 지진이 발생하며 지반 붕괴가 심각하다. 중국은 추가 핵실험 시 방사능 유출을 비롯한 환경 재앙을 크게 우려한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그 여파가 역사·문화·민족적으로 민감한 동북 3성에 미칠 경우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내상을 입은 시진핑 리더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상당하다”고 했다.

 

김정은은 이번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잠시도 멈춤 없이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급속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핵실험을 전제로 한 얘기다. 시기가 문제일 뿐 결국 강행할 것이다. 7차 핵실험은 한국의 국운을 위태롭게 만들 전술핵 탄두의 양산을 뜻한다. 억제력을 갖출 때까지 핵실험을 최대한 늦추고 가능하다면 좌절시키는 것이 한국 외교의 목표여야 한다.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북 핵실험 저지가 한중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 드문 국면이 기회일 수 있다.

조선일보 이용수 논설위원

 

 

10-04 북핵 압도할 한미 NCG 진전 서두를 때

 

 김숙 前 駐유엔 대

최근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조선반도가 핵전쟁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라고 했고, 김정은은 한·미 양국이 핵전쟁 군사훈련과 핵전략자산 배치를 통해 핵전쟁 위협을 극대화했다고 했다. 북한은 추석 연휴 전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무력 발전 고도화’를 헌법에 명기하는 개헌도 단행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국제사회 목표 앞에서, ‘핵전쟁’이란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핵 공갈을 자행하는 범죄자의 적반하장이 황당무계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독재자의 오판으로 불법적 침략전쟁 가능성은 커졌고 핵 사용 문턱은 낮아졌다는 어두운 교훈을 주었다. 핵무기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사용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핵 위협은 유례없이 거칠고 직접적이며 위험하다. 전략핵이든 전술핵이든, 핵은 일단 사용하게 되면 전략적 게임체인저가 되고 전쟁은 불가피해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던 올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북한의 핵 사용 시 한미동맹의 압도적 대응으로 정권을 종식시키겠다고 공표했다. 지난달 28일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2023 대량파괴무기(WMD) 대응전략’은 북한의 급속한 핵 역량 개발은 물리적 충돌 발생 시 북한에 핵무기 사용의 선택지를 제공하며 미국은 동맹과 협력해 공동 방어 및 승리 역량을 키운다고 기술했다.

전쟁은 첨단무기와 화력, 군대의 훈련 및 사기, 효과적 전술 전략, 군수 및 병참, 지도자 역량, 국민의 단결, 동맹 지원 등 많은 요소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총체적 국력 대결이다. 그런데 김정은은 모든 면에서 열세인데도 오직 핵무기에만 의존하며 위험한 ‘승리론’을 부르짖고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2년 보고서는 북한이 20개의 핵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마저도 실전 배비(配備)된 것은 확인된 바 없다고 했다. 북한의 핵능력 주장이 검증된 바는 없으나, 요즘처럼 핵무기 생산 가속화를 독려하고 전쟁 운운할 때는 그 가능성에 대해 폭넓은 분석과 대응이 필요하다.

가능성의 영역에선 김정은의 광인(狂人) 심리전도 고려하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정도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우선이다. 또한, 불시 공격 대비를 위해 상식의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력도 발휘해야 한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이 허를 찌르는 도발에 대한 대응이다. 북한이 핵무력의 질량적 강화를 외치며 러시아로부터 위성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및 핵잠수함 등과 관련한 첨단 기술 전수를 추구하고, 중·러와 삼각 군사 공조 체제를 심화하며, 한반도 핵전쟁 일촉즉발을 떠드는 엄중한 비상상황이다. 적을 압도하는 대담한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며,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의 구체적 후속 조치에 관한 신속한 진전이 긴요하다.

한편, 평화를 구걸해서는 안 되지만, 힘의 우위 속에 북한의 적대적 대외 인식의 실체와 내부 취약 상황을 분석하면서 접촉과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한 긴 호흡의 입체적 노력도 꼭 필요하다.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을 한마음 속에 품으면서도 밖으로는 원만히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1급 지성이라고 한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을 안보 당국자들에게 전한다.

문화일보 

 

 

10.04 핵 고도화, 러와 무기 거래 의혹…고립 자초하는 북한

김정은 러시아 방문 직후 두만강역 화물 집결

아시안게임 보도에선 한국팀을 ‘괴뢰’ 표기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북한이 러시아와 ‘수상한 거래’에 나서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민간 위성업체인 플래닛 랩스의 위성 사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와 국경 역인 두만강역 일대에 대형 컨테이너와 화물을 집결시키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런 움직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지난달 18일 이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컨테이너나 포장된 화물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고, 북한 역시 공개하지 않고 있어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러 양국의 부인에도 국제사회는 이들의 무기 거래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포탄이나 탄약 등을 제공하는 일환으로, ‘위험한 거래’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려면 양측이 떳떳하게 거래 품목이나 현황을 공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 나아가 장기적으로 더 큰 제재의 고통이 주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은 특히 지난달 26일부터 이틀 동안 진행한 최고인민회의(국회 격)에서 핵무기 발전을 고도화한다는 내용을 헌법에 명기했다고 밝혔다. 1년 전 핵무기의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데 이어 최고 상위법인 헌법에 핵무기 발전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핵 타격 수단의 다종화와 실전 배치”를 강력히 실행하라는 지시도 했다. 국제사회의 우려나 동북아 평화와 안전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만 가겠다는 외곬 행보이자 미국과 한국을 향한 일종의 시위다.

그제 밤 북한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19차 아시안게임 소식을 전하며 한국팀을 ‘괴뢰’라고 칭하는 황당한 상황도 연출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이나 ‘북측’으로 칭했던 한국 기자들에게 “국가 명칭을 제대로 부르라”며 반발했던 북한이 한국을 괴뢰라고 표현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더구나 체제와 이념을 넘어서야 할 국제경기 대회를 정치화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도 없게 됐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의 유니폼엔 인공기 외에 아무런 상표가 붙어 있지 않다. 세계 유명 스포츠용품 회사들이 북한에 대한 후원을 철저히 기피해서다. 스포츠용품 업계에서도 북한이 외톨이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른 나라와의 무기 거래나 무력시위, 법을 통한 위협 고조 등의 일탈 행위를 국제사회가 일일이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스스로를 얽어매는 일일 뿐이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했던 김 위원장의 말대로 국제사회에서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

중앙일보 사설

 

 

10.05 국군의날 시가행진은 ‘병정놀이’가 아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도심에서 건군 75주년을 기념하는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열렸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설 장거리 요격 미사일 L-SAM, 유사시 지하 벙커에 숨은 적 지휘부를 타격할 수 있는 고위력 탄도미사일 등이 이날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주한미군 330여 명도 동참해서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줬다.

이날 시가행진은 10년 만이었다. 2013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원래 5년마다 여는 게 원칙이었다. 매년 시가행진을 치르는 게 번잡하고 예산도 들기 때문에 매 5년으로 정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5년이 돌아온 2018년 건군 70주년 시가행진을 걸렀다. “국군의날 행사 때마다 장병들이 시가행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북·미 비핵화 협상이 한창이었기에 무력시위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속내였다. 싸이와 걸그룹의 공연이 시가행진을 대체했다.

5년마다 개최, 10년 만에 부활
진보진영 “전쟁 연습인가” 비판
민주국가도 전차 등 도심 행진
국민에 대한 충성과 안보 다져

북한 의식해 행사 거른 문 정부

 ▲비가 내렸던 지난달 26일 건군 75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 기계화부대가 서울 도심(덕수궁 앞)을 지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문재인 정부는 아예 ‘시가행진 청산’이라는 대못을 박으려고 했다. 5년 주기로 남대문·광화문 또는 테헤란로에서 도보·기계화부대의 시가행진을 하도록 규정한 부대관리 훈령 제313조(대규모 행사)에서 2019년 4월 관련 조항을 다 들어낸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시가행진을 되살렸다. 그러나 불편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참여연대·녹색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달 26일 시가행진 대열과 멀지 않은 서울시청 앞에서 “무력시위는 또 다른 무력시위를, 전쟁 연습은 또 다른 전쟁 연습을, 군비 경쟁의 악순환과 안보 딜레마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군대의 도심 시가행진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개발도상국이나 하는 병정놀이라고 깎아내린다. 과연 그럴까.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다. ‘Military Parade(군대 행진)’란 표제어에서 52개국이 주기적으로 시가행진을 진행하고 있다고 나왔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리 많이 안 보였기 때문에 실제 시가행진하는 나라가 52개보단 더 있을 것이란 추정이다. 제멋대로 민주주의를 국가로 분류하지 않으려고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를 빌렸다. 이 지수는 매년 167개국을 조사해 만들어진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2022년 기준 세계 23위다.

 

군대의 도심 행진 국가는 민주주의에서부터 권위주의, 공산주의 등 정치체제가 다양했다. 폴란드(공동 46위, 이하 지난해 민주주의 지수)는 8월 15일 폴란드 국군의날이면 수도 바르샤바에서 시가행진을 벌인다. 올해에는 한국이 수출한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전투기가 등장했다. 인도(공동 46위)는 제헌절과 건국절을 겸하는 매년 1월 26일 공화국의 날에 시가행진을 크게 치른다. 초청 외국 정상 앞에서 핵무기까지 자랑한다.

 

한국산 자주포 앞세운 핀란드군

이들 나라가 민주주의 역사가 짧거나(폴란드),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한다(인도)고 치자. 그렇다면 대표적인 민주주의 진영인 서유럽을 보자. 프랑스(22위) 파리의 바스티유 데이(프랑스 혁명기념일, 7월 14일) 시가행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벨기에(36위)도 매년 7월 21일 독립기념일에 수도 브뤼셀에서 전투기와 전차를 동원해 시가행진을 한다.

진보적 인사들이 자주 모델로 삼는 북유럽은 어떤가. 핀란드(5위)와 스웨덴(4위)은 매년 6월 4일 국기게양일과 6월 6일 국경일엔 각각 수도 헬싱키와 스톡홀름에서 퍼레이드를 펼친다. 핀란드에선 2017년부터 한국의 K9 자주포가 등장했다. 스웨덴 육군은 창군 500주년을 맞은 지난 5월 24일엔 스톡홀름에서 무기 시연까지 진행했다.

 

영국(18위)과 네덜란드(9위)는 전차·장갑차 없이 도보 행진만을 진행한다. 미국(30위)에선 독립기념일(7월 4일) 등 주요 기념일이면 현역 장병과 참전 용사, 학군단 등의 도보 행진을 볼 수 있는 지역이 꽤 많다. 일본(16위) 자위대는 정식 군대가 아니지만, 11월 1일 자위대기념일 관열식에 국민을 초청한다.

 

이처럼 시가행진은 군국주의나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시가행진은 북한·중국과 같은 공산주의나 러시아 등 권위주의의 열병식과 본질에서 다르다. 민주주의의 군은 국민의 군이기 때문이다. 당(공산주의)이나 독재자(권위주의)에게 충성하는 군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시가행진은 한마디로 군이 진정한 통수권자인 국민의 사열을 받으며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다. 국민은 군의 준비태세를 살펴본 뒤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군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행사이기도 하다. 지난 3월 국방부와 한국국방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군 장병의 88%가, 일반 시민의 72%가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찬성한 이유다. 실제로 지난달 26일 시가행진 때 교통 통제 때문에 불만이 불거졌지만, 많은 시민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채 늠름한 군 장병에게 박수를 보냈다.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고

시가행진은 대외적 의미도 갖는다. 첨단 무기를 내보이며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면 이를 사용한다는 뜻을 알린다. 특히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에서 중요하다. 북한은 지난달 26~2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무력 고도화’를 헌법에 명시했다. 당장 힘으로 평화를 지키는 게 시급해졌다.

허재영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는 “공격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상대가 주저하게 되는데 이것은 억제(Deterrence)의 작동원리”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북한 정권의 종말’이라고 강조한 게 이런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국민을 안심시키고, 위협도 억제하는 시가행진을 멈춰 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중앙일보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10.06 [단독] “北이 NLL 인정” 文 발언, 사실 아니었다

9·19 협상 회의자료서 드러나

 ▲2018년 9월 18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공식환영식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 연합뉴스

북한이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 협상 과정에서 유엔사가 설정한 동·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비계선’을 끝까지 고집했던 것으로 5일 확인됐다. 9·19 군사합의에서 해상 완충지역 기준으로 NLL이 아닌 ‘덕적도와 초도 사이’라는 구역 개념을 적용한 것도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경비계선 개념을 일부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9·19 합의 발표 직후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이 일관되게 NLL을 인정했다”고 했지만, 군 관계자는 “문 전 대통령이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말했다.

본지가 입수한 당시 협상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2018년 6~9월 9·19 군사합의 협상을 하면서 한국 협상단에 해상 완충구역 설정을 ‘경비계선’ 기준으로 할 것을 시종일관 요구했다. 경비계선 기준 남북으로 수십㎞ 해역에서는 포 사격을 중지하고, 함포·해안포 포신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도 폐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픽=양인성

하지만 한국 협상단은 이런 북측 요구에 별다른 항의도 하지 않고 북측 제안을 합참에 들고 와 검토시켰다. 합참과 서해 도서를 책임지는 해병대 측은 “북측 제안을 받으면 수도권 옆구리인 서해 방어에 치명적인 구멍이 생긴다”면서 수용 절대 불가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가 꾸린 한국 협상단은 북측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협상단은 김도균 당시 국방부 대북정책관을 수석대표로, 청와대 국가안보실 행정관, 통일부·합참 과장 등 5명으로 구성됐다.

 

▲919군사합의 한국 측 수석 대표였던 김도균 전 수방사령관이 지난 6월 7일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입당식을 마치고 역시 군 출신인 민주당 김병주 의원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국제뉴스 제공

이들은 7월 말 협상에서 NLL을 언급했다가 “남측이 그간 경비계선을 얼마나 많이 침범한지 알기는 압니까”라고 북측으로부터 면박을 받기도 했다. NLL을 수차례 침범한 건 북한인데, 북한이 NLL보다 더 남쪽에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비계선을 한국 해군이 넘어온 게 문제라고 적반하장식으로 따졌던 것이다.

이에 한국 대표단이 “4월 판문점 선언에 NLL 언급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북측은 “NLL을 인정한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판문점 선언에 NLL을 언급한 것은 전 세계에 서해가 ‘분쟁의 근원’임을 알리려는 의도였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결국 양측은 서해는 북한 초도~한국 덕적도, 동해는 통천~속초 구역을 완충구역으로 설정했다. 초도에서 덕적도까지는 직선거리 135㎞로 NLL 기준으로는 남측 85㎞, 북측 50㎞로, 남쪽으로 35㎞ 더 내려와 있다. 경비계선을 적용하면 남측 75㎞, 북측 60㎞다. 이 때문에 사실상 문 정부가 경비계선을 수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포병부대가 지난 2020년 3월 김정은 참관하 포사격 대항 경기를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4일에도 북한 강원도 장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80여발의 포병 사격, 서해 해주만 일대에서 장산곶 일대까지 200여 발의 포 사격을 했다. /조선중앙TV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군 관계자는 “한국 대표단은 문제 소지가 있더라도 9·19 합의를 타결 지으려고 무리를 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작년 말 북 선박의 NLL 침범을 단속하는 한국 해군에 “우리 선을 넘지 말라”며 오히려 경고 사격을 하고 NLL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것도 9·19 합의 당시 한국 대표단이 NLL 기준을 ‘사수’하지 못하고 ‘경비계선’에 밀린 영향으로 분석된다.

 

☞경비계선(해상경계선)

1999년 서해 제1연평해전 이후 북한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동·서해 한계선이다. 백령도 코앞까지 선이 내려오는 등 기존 NLL보다 남쪽 수역을 더 차지하고 있다. 북한은 1970년대 이후 해상 전력을 키워가면서 NLL 무력화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서해의 군사적 중요도가 커지자 1999년 전후로 일방적으로 경비계선을 설정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10-06 FA-50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대기록…세계 최강 경전투기로 도약

▲FA-50 경공격기 국산 FA-50 경전투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공군 제공

K-방산 대표 아이콘, 국산전투기 우수성· 안정성 입증…세계 최강 경전투기로 거듭나
2013년 9월16일 첫 비행 후 8·16전투비행단 3개 비행대대 이룬 성과
지구와 달 거리 140배, 지구 둘레 약 1370번 비행 거리'

공군이 운용하는 국산전투기 FA-50 경전투기가 5일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달성했다.

공군은 6일 "공군 제8전투비행단 소속 전투조종사 김남영(36) 소령과 박상원(27) 대위가 탑승한 FA-50이 지난 5일 오후4시 15분경 임무를 마치고 원주기지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 FA-50 단일 기종에 대한 통산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이번 기록은 FA-50을 운용하고 있는 공군 제8전투비행단 제103·203전투비행대대,제16전투비행단 제202전투비행대대가 같이 일궈낸 결과다.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은, FA-50을 최초로 도입한 103대대가 2013년 9월 16일 최초 비행을 나선 이래, 약 10년에 걸쳐 세 대대가 함께 달성했다. 이 기록을 거리로 환산하면 약 5500만km에 달한다. 이는 지구와 달까지 거리의 약 140배에 해당하며, 지구 둘레를 따라 약 1370번 비행할 수 있는 거리다.

FA-50 전투기는 폴란드 수출을 계기로 록히드마틴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가 FA-50 폴란드형(FA-50 PL)레이시온사의 소형 다중위성배열(AESA) 레이더인‘팬텀 스트라이크(Phantom Strike)’탑재를 비롯, 공중급유기능으로 항속거리를 확장하고, 표적 식별, 추적 및 원거리 교전 능력을 향상시킬 주야간 표적식별장비 ‘스나이퍼 ATP 포드’ 탑재를 추진하고 있어 세계 최강 경전투기로 거듭나고 있다. 이에따라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으로 전투기의 우수성과 안정성 입증에 이어 성능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전투기 시장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돼 수출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공군 제8전투비행단 김남영 소령이 5일 FA-50 10만 시간을 달성하는 비행을 마치고 부대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공군 제공

 

◇공군 60여대 FA-50 운용…국산 전투기 우수성 입증

2000년대 초반, 공군의 장기운용 전투기들을 대체할 신규 전투기의 소요가 제기됨에 따라, 이미 개발돼있던 초음속 국산 훈련기 T-50 플랫폼에 전술 능력을 더한 FA-50의 개발이 시작됐다. 2013년 1월 개발 완료된 FA-50은 그해 8월에 공군 8전비로 인도돼 그해 9월 공군에서의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2014년 10월 30일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주관으로 10월 30일 FA-50 전력화 행사를 개최해 국산 항공기 시대의 새 전기를 마련했다.

현재 공군은 60여 대의 FA-50을 운용 중이다. FA-50은 최초도입 이후 약 10년간 대한민국 영공을 굳게 지키며, 국산 항공기의 우수성을 입증해오고 있다.

이번 기록 달성은 한국형 비행교육체계를 통해 배출된 조종사들의 우수한 역량 때문에 가능했다. 공군 조종사들은 국산훈련기 KT-100으로 비행입문교육을 받고 국산 기본훈련기 KT-1으로 기본과정을 수료한다. 그리고 국산 초음속훈련기인 T-50으로 비행하며 고등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다. 순수 국산 항공기를 기반으로 한 ‘한국형 비행교육체계’를 통해 정예조종사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국산 전술입문훈련기 TA-50으로 전투기동과 사격 등 실전기량을 연마하게 된다. 특히, 이렇게 전술입문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이 동일 플랫폼인 FA-50을 조종하게 되면 훨씬 안정적으로 비행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비행 안전을 위한 정비 요원들의 밤낮없는 노력도 한몫했다. 특히, FA-50 계획검사가 지금까지 493대 출고되며 통산 500대 출고를 눈앞에 두고 있을 만큼, 정비요원들의 정비역량이 빛을 발하고 있다.계획검사란 일정 비행시간을 채운 항공기를 대상으로 한 정기적인 기능 점검으로, FA-50은 200시간을 주기로 계획검사가 이뤄진다. 정비 요원들은 계획검사 시 FA-50의 부품을 전부 분해하여 노후된 장치와 부품을 교체 및 수리하고, 다시 조립하여 정상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등 약 8일에 걸쳐 427개에 달하는 항목을 검사하게 된다.

 

▲공군 제8전투비행단 조종사와 정비사들이 5일 국산 FA-50 경전투기 통산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 수립을 자축하고 있다. 공군 제공

이번에 기록을 달성한 FA-50 전투조종사 김남영 소령은 "이번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엔 FA-50 조종사들과 정비사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있다"며 "우리 기술로 만든 전투기를 조종한다는 특별한 자부심으로 우리 영공을 지키는 한 소티 한 소티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FA-50이 도입된 이래로 지금까지 8전비 103정비중대에서 정비 기장을 맡고 있는 조석희(50) 원사는 "지난 10년간 FA-50과 밤낮없이 동고동락하다 보니 내 자식 아픈 것만큼 FA-50에 이상이 있는 것을 빨리 알아챈다"며 " FA-50 전투기가 안전하게 뜨고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더 세밀하게 살피고 정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3년 FA-50 도입 당시 전환창설 대대장이었던 조상환(51·예비역 대령) 항공안전단 항공심리교관은 "앞으로 30년 이상 후배 조종사들이 믿고 비행할 수 있도록 신규 전투기의 항공무장 운용 능력 검증에 최선을 다했다"며 " FA-50이 앞으로도 우리 영공을 수호하는 믿음직한 항공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후배 조종사들의 활약을 응원하겠다"
고 기쁨을 표시했다.

 
 

◇ 수출 효자… FA-50 폴란드 말레이시아 수출, T-50 계열 6개국 140여대 수출

공군은 국산 항공기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방산수출을 지원하고 있다. 공군은 국산 항공기 운영(예정)국들을 대상으로 ‘국산항공기 국제기술협력기구(K-TCG)’와 ‘비행안전 관리자기구(SMG)’를 구성해 매년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항공기 수출지원에 그치지 않고 수출 후 군수지원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필리핀은 2015년부터 FA-50을 운영 중이며, 폴란드도 지난 8월 FA-50GF 1·2호기 도입에 이어 2028년까지 총 48대의 기체를 인도받을 예정이다. 말레이시아 역시 지난 5월 체결한 수출계약을 바탕으로 2026년부터 FA-50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밖에 인도네시아, 태국, 이라크도 T-50 계열 항공기를 운영 중이다. 해외에 납품됐거나 납품 예정된 T-50 계열 항공기는 6개국 140여 대에 달한다.

이밖에 페루, 튀르키예, 세네갈 등이 KT-1 계열 항공기를 운영하며, 총 9개국이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운영 중이거나, 운영할 예정이다. 이처럼 국산 항공기는 K-방산의 호황을 이끌어가는 ’효자 수출품목‘으로서 대내·외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공군은 "국산항공기 T-50B로 구성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 역시 지난해 영국 리아트(RIAT) 국제에어쇼와 올해 호주 애벌론(Avalon) 국제에어쇼 등 다수의 해외에어쇼에 참가해 국산항공기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며 방산수출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10-06 文정부 추진한 종전선언땐 ‘한반도 수호’ 유엔사 해체

日 후방기지 7곳 사용도 종료

문재인 정부는 북한 비핵화 입구라는 시각에서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했지만 결국 북한은 헌법에 핵보유국 지위를 명시해 김정은 정권의 비핵화 위장평화에 보조를 맞추면서 결과적으로 핵개발 고도화 시간만 벌어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반도 안보를 위해 정전체제 유지 및 유엔군사령부(유엔사) 존속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6일 군사안보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문 정부에서 미국에 종전선언·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온 이유는 정전협정 폐지를 통해 눈엣가시인 유엔사 해체를 관철시키려는 저의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종전선언으로 정전체제가 해체되면 유엔사도 해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유엔사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 대북 군사제재 결의 1511호(6월 27일)와 유엔사 설치 결의 1588호(7월 7일)에 따라 창설됐다. 6·25전쟁에서 한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힘의 원천이었고 이후 70여 년 동안 한반도 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유엔사 17개 회원국 가운데 11개국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고 그중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개국은 핵보유국이기도 하다. 북한이 유엔군을 상대로 핵을 쓴다면 이들 국가와 핵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유엔사는 유사시 유엔의 추가 결의 없이 전력제공국들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유엔사가 해체되는 경우 90일 이내에 철수한다고 규정돼 있는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 7곳의 사용권도 종료된다. 주일유엔군지위협정(UN-GOJ SOFA) 제24·25조는 유엔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일본에서 모든 유엔군이 철수할 것과 주일유엔군지위협정은 종료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더구나 종전선언으로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를 규정한 정전협정 제1조 등 군사적 경계선이 모호해져 수교도 하지 못한 군사적인 위협인 북한을 대상으로 북방한계선(NLL) 포함 남북의 경계선 재정립 등 심각한 영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충신 선임기자 csjung@munhwa.com

 
 

10.09 아웅산 테러 40년, 하나도 안 달라진 ‘깡패 국가’ 북한

▲2014년 6월 6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열린 아웅산 순국 사절 추모비 제막식에서 북한 폭탄 테러로 숨진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인 이순자씨가 아들 김한회씨와 함께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이번 9일은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날로 보훈처와 주미얀마 한국대사관 주재로 국립현충원과 아웅산 묘역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로 우리 정부 사절 17명이 희생된 지 40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대통령 일행을 직접 겨냥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정부는 9일 서울 현충원과 아웅산 현지 추모비에서 추모식을 연다.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비극이다.

 

당시 검거된 북한 공작원 2명이 범행을 자백했지만 북은 “남조선 자작극”이라고 우겼다. 결국 국가적 대응도 제대로 못 하고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유야무야 잊혔다. 김대중 정부 때 미얀마에서 복역 중이던 공작원이 범행을 반성하며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햇볕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가 송환돼 범행 전모를 밝혔다면 북이 더 이상 억지 주장을 못 했을 것이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 아웅산 묘역을 찾았지만 조화를 놓고 묵념할 장소도 없었다. 국민 성원과 한·미얀마 정부의 협력으로 2014년 아웅산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31년이 지나서야 국가 차원 추모가 이뤄지고 유족들이 한을 풀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테러 국가’라는 북한의 실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1974년 문세광의 대통령 부인 저격, 1986년 김포공항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2001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사살, 김정남 암살 등 무도하기 짝이 없는 테러와 도발을 일삼고 있다. 그러고도 사과는커녕 범행 자체를 부인하며 온갖 극언으로 협박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좌파 진영과 야권 일부는 북한 소행이란 증거가 없다며 오히려 북을 두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앞으로도 깡패 국가의 본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걸핏하면 국방 장관에게 테러 협박을 하고 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사이버 테러와 해킹은 일상사가 됐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어떤 식으로 테러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 아웅산 테러는 잊힌 과거가 아니다. 되풀이돼선 안 될 미래의 교훈이다.

조선일보 사설

 

 

10.10 원시적 공격에 무력화된 첨단 방어망,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도

세계 최고 정보력과 방어망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이 민병대 수준의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뚫린 것은 북한과 대치한 우리 안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시적 공격이라도 대규모 물량 공세가 불시에 가해지면 첨단 방어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2005년 가자 지구에서 철수하면서 6m 높이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 담장으로 이곳을 완전 봉쇄했다. 감시 카메라와 동작 감시 센서를 촘촘하게 설치하고 2㎞마다 원격 조종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무인 감시탑을 세웠다. 이렇게 수십억 달러를 들여 구축한 ‘스마트 국경 시스템’ 을 하마스는 간단히 무력화했다. 콘크리트 장벽은 폭파하거나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월담했고, 철조망 담장은 불도저로 밀어버리거나 절삭기로 끊어버렸다. 국경 도처에 뚫어놓은 땅굴과 해상 수상정도 침투에 동원됐다. 육·해·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두들기는 재래식 전술에 최첨단 방어 시스템이 무너졌다.

▲팔레스타인 소년이 지난 7일 가자 지구에서 불타는 이스라엘 차량을 배경으로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리 군 역시 최전방 경계 작전에 로봇 등 유·무인 복합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화력 면에서 하마스와 비교도 되지 않는 북한군이 유사시 전선 전역에 걸쳐 파상 공세를 퍼부을 경우 최전방 지역은 물론 수도권 방어도 벅찰 수 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20만명 규모의 특수부대다. 이들이 레이더에 안 잡히는 저공 침투기를 이용해 우리 후방을 교란할 경우 마땅한 대책이 없다.

 

우리 군 역시 최전방 경계 작전에 로봇 등 유·무인 복합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화력 면에서 하마스와 비교도 되지 않는 북한군이 유사시 전선 전역에 걸쳐 파상 공세를 퍼부을 경우 최전방 지역은 물론 수도권 방어도 벅찰 수 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20만명 규모의 특수부대다. 이들이 레이더에 안 잡히는 저공 침투기를 이용해 우리 후방을 교란할 경우 마땅한 대책이 없다.

조선일보 사설

 

 

10.10 정율성이 그냥 작곡가?  6·25 침략군 장교였다

▲6·25전쟁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정율성(작은 사진)은 '점령 서울'을 인민군 소령으로 누비고 다녔다. 그는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침략군 장교였던 것이다. /조선일보 DB·디자인랩 편집

북·중공 군가 작곡가 정율성 논란의 핵심은 그가 대한민국 영토에 혈세로 기념 공원까지 지으면서 기려야 할 대상이 맞느냐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중국 관광객 유치에 필요” “과거 정부도 인정” “한중 우호의 상징” “분단의 산물” 등 말이 많지만 다 곁가지다. 정율성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될 일이다.

 

사실관계는 간단하다. 그는 1914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중국에 넘어가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중국공산당 군가)’을 작곡했다. 북한에는 1945년 12월 넘어갔다. 인민위원회 간부가 됐고, 노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도 됐다. 이듬해 김일성을 대면했다.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당 간부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잘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는 한국군으로 치면 북한의 영관급 장교였다. 정율성은 1947년 북한 인민군 소좌(한국의 소령)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부장이었다. 인민군 정복을 입고 아내와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협주단 단장도 겸하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김일성 정권·북한군 찬양가 30여 곡을 작곡하고 전국을 돌며 200여 차례 공연했다. 그 공로로 1948년 11월 김일성 포상장을 받았다.

 

정율성은 6·25 대남 침략 전쟁에 참전했다. 전범 인사다. 인공기가 휘날리는 ‘점령 서울’에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까지 머물다 중국으로 피신하고 중국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1·4후퇴로 밀리자 정율성은 중공군 장교로 중공군과 함께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시내를 돌며 조선궁정악보 등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과 중공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다 중국에서 1976년 생을 마쳤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12월 당시 보훈처(현 보훈부)는 정율성 서훈 신청을 받아 심사했으나 부결 처분했다. 정율성이 일제 시기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다는 설이 있어서 조사해봤는데 실제는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항일 이력은 없고 왕성한 6·25 침략군 활동만 쏟아져나왔다. 문 전 대통령이 베이징대 연설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서 한껏 띄워놓은터라 친문 일색의 보훈처는 어떻게든 정율성을 추서하려 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 등 과거 정부에선 별 문제가 되지 않다 정율성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반(反)대한민국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광주시도 정율성이 ‘침략군 장교’였다는 무서운 실체를 미처 몰랐기 때문에 그간 기념 사업을 추진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도 ‘정율성 기념 사업’을 강행하는 건 침략 전범을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는 등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우려가 크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10-10 9·19 합의 ‘반역성’ 새삼 확인해준 하마스의 기습 공격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의 방어망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8일 전면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대한민국에 선명한 교훈을 준다. 테러 단체 하마스의 5000여 발 미사일과 1000여 무장요원의 침투로 인구 940만 명의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됐다. 이번 이스라엘 위기의 근본 원인은, 경제 지원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것이란 믿음으로 2021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봉쇄정책을 완화한 데 있다.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식의 위장 전술을 펴며 은밀하게 공격을 준비, 이스라엘 심장부를 때렸다.

이스라엘 위기는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도 될 만큼 닮은꼴이다. ‘이스라엘판 햇볕정책’의 실패는 문재인 정부의 9·19 군사합의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속은 9·19 군사합의로 한국은 육해공 방어가 현저히 어려워졌다. 군사분계선(MDL) 일대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대북 정찰이 중단됐고, 비무장지대(DMZ) GP 11개 철수로 대남 도발 감시도 어려워졌다. 반면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장사정포를 휴전선 부근에 집중 배치했고, 20만 명의 대남 파괴 작전 전담 부대도 보유 중이다. 문 정부 5년간 핵·미사일 무기고를 늘린 김정은은 지난 8월 ‘남반부 영토 점령’ 지시까지 내렸다.

9·19 합의는 한국의 방어력을 묶은 채 북한에 ‘하마스식 도발판’만 깔아줬다는 점에서 반역적이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국회 인사청문회 때 “9·19 합의 폐기는 어렵더라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 효력 정지를 시키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같은 위기를 맞기 전에 자위권 차원에서 합의를 무효화해야 한다. 북한은 그간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무인기 침투 등으로 9·19 합의를 대놓고 위배해왔다. 우선, 휴전선 일대 정찰 정상화와 함께 한미일 공조로 실시간 대북 위성 정찰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또한, 한국형전술지대지미사일(KTSSM), K-9자주포 등으로 북한 장사정포·미사일 기지를 초토화할 수 있는 거부(denial) 능력을 확충해야 한다. 북한의 도발 의지를 사전에 꺾는 게 힘에 의한 평화를 지키는 길이다.

문화일보 사설

 
 
 

10-10 모사드 참담한 실패… 국정원 대북 역량 획기적 강화해야

정보 및 특수작전국이라는 의미의 모사드는 이스라엘 건국 직후인 1949년 설립돼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세계 최고 정보·공작기관으로 손꼽혀 왔다. 실제로 중동지역 적대국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국가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데 이번 하마스의 대대적 공격에 대한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충격적이고 참담한 ‘정보 실패’다. 북한 정권은 하마스보다 몇 백 배 더 막강한 무력과 정보·공작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탐지해야 할 국가정보원의 대공 역량 붕괴는 모사드 상황보다 훨씬 심각하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막강했던 ‘휴민트(인적 정보)’ 역량은 이른바 진보 정권의 햇볕정책을 거치면서 붕괴하다시피 했다.

모사드 상황은 국정원 현주소와 닮은꼴이다. 첩보 활동 수단을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강점이었던 휴민트 역량은 축소했다. 하마스는 이런 점을 간파해 전자기기 사용을 중단하고 민감한 대화는 통신이 잡히지 않는 지하에서 하는 등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최근 네타냐후 정권의 사법부 무력화 법안 강행에 반발해 정보기관 간부들이 사퇴하는 등 정치 외풍에도 시달렸다. 정보기관 사이에 벽이 높아져 정보 협력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안보 불감증이 심각했다. 이집트 정보기관이 모사드 측에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줬지만 과소평가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군사작전을 은닉하면서 경제를 앞세우는 등의 하마스 심리공작에 속아 넘어갔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북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역부족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20년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대공 수사권을 내년 1월 1일부터 폐지하는 국정원법 개정을 강행했다. 국정원을 앞세워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남북협상 및 대북 지원 기관인 양 변질됐다. 수십 년 쌓아 올린 대북 휴민트 정보망은 무너졌다. 더 늦기 전에 대북 역량의 획기적 강화에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10-10 가짜 평화에 속은 이스라엘의 반면교사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외교안보센터 연구위원

이스라엘이 침공당했다. 하마스의 공격은 전격적이었다. 수천 발의 로켓탄 공격에 이어 1000여 명의 무장 대원이 지하 터널과 패러글라이드 등으로 남부 지역에 침투했다. 이틀간 교전의 사상자는 4000명이 넘고, 민간인 집단학살까지 빚어졌다. 이스라엘 본토가 침략당한 것은 제4차 중동전쟁 이래 50년 만이다. 놀라운 것은, 침공한 하마스가 시리아나 이집트 같은 국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이자 정당이란 점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철통 같은 국방을 자랑해 왔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집트·시리아·요르단 등 주변국을 제압했고, 레바논 분쟁에 개입하면서 가자와 서안 지구를 통제 아래에 뒀다.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지속적인 테러에 대응해 무인 포탑으로 무장한 ‘스마트 장벽’을 세웠고, ‘아이언돔’이라는 방어체계로 로켓탄을 요격하면서 첨단 기술에 기반을 둔 국방의 위력을 마음껏 과시해 왔다. 모사드와 신베트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관들로 사전에 위협을 감지하고, 역내 최강의 군대로 하마스의 테러 정도는 쉽게 막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무기가 최첨단이라도 일선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다. 이스라엘군은 가장 빨리 첨단 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가장 풍부한 실전경험을 갖췄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자부심이 독(毒)이 돼 적의 공격 의지와 능력을 평가절하했다가 기습에 뚫린 것이다. 게다가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은 사법개혁 등으로 심각한 정쟁에 휩싸여 있었다. 내부가 혼란할 때가 등 뒤로 비수를 꽂기에 가장 좋은 때임은 전쟁사의 교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1973년 욤키푸르(속죄일)를 맞아 휴일이던 이스라엘을 공격했듯이, 이번 침공일도 수코트(초막절·수확축제) 기간이자 안식일이었다. 이번 공격은 중동판 진주만공습으로 평가되는데, 진주만도 일요일에 공격당했다. 그리고 6·25전쟁도 바로 일요일에 벌어졌다. 게다가 지난 2년간 하마스는 경제에 집중하느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가짜 메시지를 보냈고, 이스라엘은 여기에 속았다. 마치 북한의 가짜 비핵화 협상처럼 적의 선의에 기댄 평화에 한미 양국이 기만당한 것과 닮은꼴이다. 적에 대한 긴장을 늦추는 시기야말로 적으로선 최적의 공격 시기이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지난 정권의 가짜 평화 ‘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9·19 남북군사합의로 여전히 우리의 감시소초(GP)와 함께 무인기에 의한 감시 정찰도 제한된다. 우리와 이스라엘의 안보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북한은 이번 기습을 학습하고 우리의 취약점을 이용해 새로운 남침계획을 구상할 것이다. 아무리 철통 같은 방어체계를 구축해도 동시다발로 기습한다면 무기력화할 수 있음을 하마스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언돔으로 ‘철벽 방어’한다는 환상은 결국 수천 발의 로켓탄 앞에 산산이 무너졌다. 적의 로켓탄과 단거리미사일은 요격에 치중하기보다 초전에 박살 내야 한다. 한 발도 맞지 않고 지킨다는 수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이 감히 싸울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3축 체계도 한국형에서 벗어나 한미 연합 3축 체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강력한 항전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할 전투 기술과 첨단 무기가 삼위일체가 될 때 북한은 감히 도발조차 생각 못할 것이다.

문화일보 

 
 
 

10-10 北 해킹에 대응할 역량 크게 부족하다

 

 이경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원은 최근 지난 8, 9월 북한 해킹 조직이 주요 국내 조선 업체들을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사례를 탐지했다고 밝혔다. 주요 수법은 정보·기술(IT) 유지·보수 업체의 PC를 점거 및 우회 침투하거나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피싱 메일을 유포한 후 악성 코드를 설치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정부 및 주요 정보통신 기반시설에 대한 ‘유의미한’ 사이버 공격은 매일 수십 건씩 발굴·관리된다. 이 중 공공영역에서 탈취하려는 정보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공항·항만·철도 및 도시 기반시설과 방위산업체 등은 항상 사이버 공격에 직면해 있다.

최근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이버 공격은 가상화폐 해킹과 국방 기술 탈취로 구분할 수 있다. 북한은 2006년 유엔 안보리 제1718호 제재에서 시작해 2016년의 유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2270호 대북 제재 등으로 인해 17년간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고립과 단절 속에 식량 위기 등을 겪어 왔다. 특히, 해외 파견 인력이 철수하고 난 이후 마땅한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기 위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부품·재료를 수입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사이버 공격은 가장 저렴한 수단이었고 추적이 어렵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사이버 전력은 북한의 가장 중요한 대외 전략의 기반이다.

한편, 서방 선진국들은 IT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직간접적인 기술적 대응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그중 사이버 작전 역량을 급속도로 향상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국방 영역에서도 최근 사이버 지휘통제 체계 등 사이버 공간과 육해공 영역을 묶는 하이브리드 전쟁 수행이 가능하도록 체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하지만 날마다 몰려드는 무수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대응에는 자원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사이버 대응은 기술 개발만으론 불가능하다. 사이버 방어 체계는 킬체인의 단계별로 수년간 공격해 온 흔적을 축적해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든다. 이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모니터링하면서 불완전한 데이터 중에서도 사이버 공격의 발생을 식별하고 추적하는데, 이를 ‘사이버 위협 인텔리전스’(CTI)라고 한다. 이러한 데이터와 정보는 공공과 민간, 그리고 국제사회와의 협업을 통해 얻고 운영해야 실효적 방어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이버 방어 훈련인 나토(NATO)의 락드실즈 훈련, 한미 을지프리덤실드 훈련에 참여해 이러한 역량을 검증하고 있다.

지난 6월, 대통령실과 백악관은 워싱턴에서 한·미 사이버안보 고위급회의를 개최하고 고위운영그룹을 공식 출범시키면서 지난 4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이버안보 분야 협력 강화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더욱더 전략적이며 가시적인 사이버 분야의 협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이버전의 위력을 간접 경험하면서 우리의 국가 기반시설과 공공영역이 국가가 후원하는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감내하면서 정상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결국, 실제로 구축하고 훈련하면서 편집증적인 시각으로 끊임없이 체계를 정비하는 길만이 우리가 보유한 사이버 공간의 국부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문화일보

 
 
 

10-10 군 초급간부 사기 북돋울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지난달 26일 서울 숭례문∼광화문 일대에서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이 진행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올해 3월 임관한 육군 최우섭 소위(23)는 ‘그날’의 감동이 생생하다. 지난달 26일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10월 1일)을 앞두고 서울 도심에서 시가행진이 진행됐다. 10년 만의 군 시가행진이었다. 최 소위도 행진에 참여했다. 그는 “행진 시작부터 끝까지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를 계속 보내주셨다. 응원이 쏟아졌다”며 “우리 군이 지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힘이 많이 났다. 임관 이후 처음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군인 중엔 시가행진 이후 어깨를 펴게 됐다는 이들이 많다.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 “멋져요” 한마디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A 중령은 “군 전반에 대한 인터넷상의 냉소적인 여론 때문에 군복을 입고 다닐 때 위축될 때가 많았다”며 “그날 행진 경로마다 상인과 시민들이 나와 손을 흔들고 ‘멋지다’면서 박수 쳐주는데 군인이 된 뒤 처음으로 환영받고 예우받는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날 뻔했다”고 했다.

시가행진 당일 시민들이 보여준 ‘제복에 대한 존중’에 감동한 군인이 많은 건 반대로 그간 존중받은 경험을 가진 군인이 그만큼 적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2016년 중고교생 및 성인 124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조사에서 44개 직업 중 군인의 직업존경도 순위는 17위였다. 시기는 다르지만 2021년 미국의 비슷한 조사에서 군인이 28개 직업 중 4위에 오른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2016년 이후 7년이 지났지만 군인은 여전히 존중의 사각지대에 있는 듯하다. 군인을 비하하는 ‘군바리’는 일상적으로 쓰인다. 젠더 갈등이 격화되면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20대 남성들을 향해 “병영캠프에 놀러 간 것”이라며 조롱하는 말까지 나온다.

미국은 현역 군인에게 시민들이 “thank you for your service(당신의 복무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다. 미국 항공사는 군인에게 우선 탑승 서비스를 제공한다.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주거나 희생에 감사하다는 기내 방송도 한다. 유명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무료로 제공해주는 일도 자주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사례가 희소하다 보니 뉴스거리가 될 정도다. 최근 서울 노원구의 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한 육군 병장에게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은 음료를 건네 화제가 됐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미국 영화를 볼 때면 제복 입은 사람들이 어딜 가나 존경과 응원을 받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이 아르바이트생에게 큰 표창이라도 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 미국에서 1년간 교육받았던 B 중령은 “타국 군복을 입고 있는 내게도 미국인들은 항상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며 “최근 H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 차 정비를 받았는데 차에 부착된 부대 출입증을 보고 직원이 ‘제복 입고 일하시는 분 같아 특별히 더 신경 썼다. 나라를 위해 헌신해줘 감사하다’고 하더라. 군 생활을 20년 했지만 국내에선 모르는 분에게 이렇게 예우받는 건 처음이었다”고 했다.

보훈부는 이달부터 다음 달까지 ‘제복근무자 감사 운동’을 진행한다. 공익 광고를 송출하고 이들의 근무지에 푸드 트럭을 보내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실시된다. 제복 존중 문화를 확산시키겠다는 것이 취지다.

박 장관은 “제복은 단순한 근무복이 아니다. 제복에는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희생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며 “우리가 평소 제복 근무자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당장 군은 초급간부 확보에 비상이 걸려 있다. 학사장교는 2018년 경쟁률이 4 대 1이었지만 지난해 2.6 대 1로 떨어졌다. 초급간부를 확보하려면 보수 현실화 등 처우 개선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여기에 군인 존중 문화 확산을 위한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워라밸’과 더 큰 돈을 벌 기회 등을 포기하고 군인의 길을 택하는 청춘은 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평시 국민의 군인에 대한 존중은 시가행진 사례에서 보듯 군인의 자부심을 끌어올린다. 이는 곧 전시 군인의 전투력 향상과 국민을 위한 희생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받았듯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도 북한에 언제 어떤 식으로 공격받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김영곤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국민의 안보 불감증이 해소돼야 군인에 대한 예우도 강화될 것”이라며 “우리 군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보여줄 크고 작은 행사를 여는 것도 군인 존중 문화 확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가행진을 계기로 자부심을 얻은 새내기 장교 최 소위의 바람은 소박했다.

“친한 친구들도 저에게 ‘군인 왜 했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런 질문에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군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많지만 국군은 전후방 각지에서 평화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10.11 미국이 우려한 두 개의 전쟁 현실화

러, 우크라 침공 이어 중동 전쟁… 美가 한반도서 눈 돌릴 때 北 도발
‘利敵 9·19′ 합의 전면 폐기하고 日처럼 ‘선제타격’, 평화 지켜야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지원을 위해 동지중해로 전진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항공모함 제럴드 포드함을 비롯한 항모전단./EPA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가장 경계하던 ‘두 개의 전쟁’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두 개의 주요 전쟁이 동시에 터지는 것을 우려해 왔다.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 지역과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일제히 전쟁이 발발하면 대응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국력이 욱일승천할 때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 승리하는 군사 계획을 유지해 오다가 2012년 이를 수정했다. 세계 정세가 변화하고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자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미군 슬림화’ 계획과 함께 이를 폐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물밑에서는 자국의 위신과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두 개의 전장(戰場)이 생기는 것을 막아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애쓴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로켓포 5000발을 쏘며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 5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노력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일주일이면 승리할 줄 알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가 망신당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중동 전쟁을 호기(好機)로 생각한다. 전 세계의 관심이 중동에 쏠려 있는 사이에 우크라이나를 몰아붙이려 할 수 있다.

 

최근의 국제 정세 기류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을 내려놓은 후 더욱 불안해지는 추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다극화된 세계가 생겨나고 있다”며 “이는 균형의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긴장과 분열이 고조되고 더 나쁜 상황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정학적 질서가 바뀌는 ‘결정적 순간’으로 분석한 보고서도 나왔다.

세상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고 보고 빠르게 움직인 나라가 일본이다. 지난해 일본은 적국의 공격이 확인되면 적의 미사일 발사대 등을 먼저 타격하는 선제타격 개념을 도입했다. ‘3대 안보문서’를 모두 개정, 선제타격 개념을 포함하는 반격 능력을 명시했다. 북한의 대남 도발, 중국의 대만 침공, 러시아의 남하(南下) 가능성에 대비한 것이다.

미 연방 의회도 한반도 관련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4일 미 상원 외교위의 한반도 청문회에서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미트 롬니 의원은 “재래식 무기는 물론 핵무기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핵 보유국(북한) 옆에 있는 한국이 자체 핵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우려된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 산다면 균형이 맞지 않아서 불안해할 것”이라고도 했다. 증인으로 나온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은 커지는 북한의 위협을 지적하며 한국에 핵무기 재배치를 위한 예비 대화와 유사시 선제타격을 포함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이런 움직임이 시사하듯 최근 북한의 위협과 한반도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두 개의 전쟁 현실화를 계기로 우리가 당장 결행해야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의 입맛에 맞게 만든 9·19 군사 합의의 폐기다. 무엇보다 9·19 합의는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으로 북한의 도발 정보를 제대로 탐지 못 하게 하는 이적(利敵) 행위였다.

 

전쟁의 승패는 정보전에서 판가름나는데 눈과 귀를 가리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나. 더욱이 북한은 무인기의 대한민국 영공 침범 등을 통해 합의를 반복적으로 위반하고 있지 않나. 김정은을 미소 짓게 한 합의 문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국과 연대해 확고한 선제 타격 태세를 갖출 때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이하원 논설위원

 

 

10-11 북-하마스 ‘테러 협업’과 국정원 책무

 

 남주홍 前 국정원 1차장

이번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 국가안보가 크게 흔들린 것은 한마디로 정보 실패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민병대 규모인 게릴라 단체가 세계적인 군사 강국의 안보 태세에 쉽게 허를 찌를 수 있었을까? 이는 오직 하마스의 정보 기만(欺瞞)과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정보 교만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모사드는 국가 생존과 자신들의 활동을 동일시해 왔고 국가안보는 총구가 아닌 정보에서 시작된다는 사명 의식으로 무장해 왔기 때문에 이번의 조기경보 실패는 참으로 충격적이다. 또,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그간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 하마스 활동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고도의 디지털 기술을 총동원해 왔지만, 정작 정보 활동의 기본 중 기본인 인적정보(휴민트)를 소홀히 해 온 점이 이번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정보기술(IT)이 좋아도 휴민트가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적(敵)의 전술·전략적 기만에 당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지난날 6·25전쟁과 베트남전 그리고 중동전 및 9·11테러의 공통 교훈이다.

정보는 본질적으로 인간 심리를 읽은 기술이다. 고도의 훈련된 직관과 본능적 감각으로 음지의 그림자 전쟁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양지의 전장에서 밀리기 마련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러시아군이 잘 보여준다. 러시아의 고전이 무엇보다도 적정에 대한 정보기관의 무능과 부패에 기인한 것처럼, 모사드의 무기력한 실책도 극심한 이스라엘 내정 혼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모사드는 전직 수장 파드의 지적대로 지휘부가 정치적 내분에 휩싸이면서 기강이 매우 약해진 데다 하마스의 각종 크고 작은 테러 도발에 익숙해진 탓인지 관성적인 가짜 정보 신드롬인 ‘늑대소년증후군’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 안보에 시사하는 점은 자명하다. 북한이 하마스를 모방해 한반도 모델로 실전화를 시도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십수 년 간 북한은 하마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왔고, 특히 특수 테러전 역량 배양은 직간접적인 관심 대상이었다. 그간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은 이란과 기술적 협업을 해왔고, 하마스는 북한 특수군 게릴라 전법을 모방해 왔다. 한마디로 중동분쟁은 북한의 무기 수출 및 실전 연습장이 돼 온 것이다. 지금 국군은 망국적인 9·19 남북군사합의로 전방에선 손발이 묶여 있고, 후방에서는 자해적인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권 폐지로 고유 기능인 대공 업무가 사실상 마비 상태로 가고 있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지금 핵무력 실전배치 및 선제사용을 공언하면서 최대 강점인 20만 특수군의 하마스식 기습적 벌떼 공격 모의훈련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다. 북핵 공갈의 인질 상태에서 한미 연합작전 체제의 시급한 정보 정찰력 강화를 위해서 반국익적인 9·19 남북군사합의를 반드시 효력정지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제도권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확산돼 가는 종북 반국가세력의 역공작 척결을 위해서는 경찰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국정원 본연의 임무인 대북 휴민트 역량과 대공 수사 기능이 하루빨리 복원돼야 한다. 정부의 비상한 위기관리 능력이 절실하다.

문화일보 

 
 
 

10.12 “죄송한데,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우크라, 이스라엘 다음은
한반도라는 美 전문가
굴종하느니 싸우겠다
결의 가지면 전쟁 막고
‘전쟁이냐, 평화냐’ 구호에
휘둘리면 전쟁 못 막아

 ▲지난 8일 밤(현지 시각) 가자지구 시가지에서 이스라엘의 보복 미사일 공습으로 화염이 번지는 장면. /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스라엘 전쟁이 터지는 것을 보고 전쟁 날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전쟁의 눈’은 정말 놓치는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을 질병이 찾아가듯 전쟁은 터질만한 곳을 어김없이 찾아간다. 공격을 당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모두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근래 우크라이나는 친서방과 친러시아로 분열돼 지독한 내분 상태에 있었다. 분열된 국민이 전쟁을 두려워해 러시아가 영토를 침략해 병합하는데도 보고만 있었다. 극심한 내분은 정치 코미디 주연 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코미디 제작사 간부들이 국가 요직을 맡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이 예상외로 전쟁을 잘 지휘하고는 있지만 전쟁의 눈이 보기에 이곳은 명백한 먹잇감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 파동으로 전례 없는 국민 분열을 겪고 있었다. 군과 경찰의 현역 간부들이 정부에 공개적 반기를 들고 국방 주력인 예비군의 복무 거부 사태까지 일어났다. 도저히 이스라엘답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더니 결국 전쟁의 눈에 띄고 말았다. 군 최전방 초소가 테러리스트 수준의 무장대에게 털려 여군들이 줄줄이 붙잡혀 끌려가고 아기들이 떼로 참수당했다.

 

전쟁의 눈이 지구본을 돌릴 때 한반도에 눈길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조셉 보스코 전 미 국방부 중국 담당 국장은 이스라엘 전쟁이 터지자 다음 순서는 중국·대만이고 그다음이 한반도라고 했다. 그중에서 북한이 가장 악성이라고 했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 삶은 원시 수준으로 팽개친 채 온갖 핵무기 개발에만 혈안이 돼 있다. 공예품이라며 미사일 도자기를 만드는 집단이다. 김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비정상 권력의 비정상 행태는 영원할 수 없으며 그 끝은 대부분 폭력적이었다. 전쟁을 막아야 할 한국은 국민이 심각하게 분열돼 있고 국가 수호의 ‘결의’도 흐트러져 있다.

 

지금 한국에선 북의 도발을 응징한다고 하면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우리가 당해도 전쟁 날지 모르니 그냥 넘어가자는 주장이 인기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한다. 북한 공격에 천안함이 폭침당해 우리 군인과 국민 56명이 떼죽음을 당했을 때 민주당은 대북 반격은 물론이고 경제 제재도 반대하며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거 구호를 내걸었다. 그 선거에서 민주당은 승리했다고 한다. 당시 군에 간 자식들이 부모에게 ‘정부가 전쟁을 하려는데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전화했다. 이런데 북이 도발할 유혹을 느끼지 않겠나. 한반도는 전쟁의 눈이 보기에 전쟁 터지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민주당은 2007년 정권을 잃고 80여 석 소수당으로 전락했을 때 광우병 괴담으로 대성공을 거둔 사례를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담에 매달리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쟁이냐, 평화냐’ 슬로건 성공 사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어떤 양보를 해서라도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전쟁을 사실상 포기한 나라가 조선이다. 그 결과 전쟁도 못 해보고 나라를 뺏겼다. 그때 이완용은 ‘그래도 전쟁한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고 했다.

전쟁 나면 사람이 죽으니 무조건 양보해서 피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로 대중을 겁주고 현혹하는 것은 전 세계 정상배들이 하는 일이다. 이들은 국민과 국가를 병들게 해 결국 전쟁으로 이끈다. 책임 있는 지도자는 ‘전쟁은 막겠지만 주권과 독립이 위협받는다면 피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나라를 나라답게 하고 국민을 국민답게 해야 전쟁을 막는다. 주권과 자존을 지키는 일에 공짜는 없다. 용병을 쓴 나라는 예외 없이 다 망했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이 한순간에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소중한 지금의 일상을 모두가 지키고 싶어 한다. 깡패가 횡행하는 세계에서 일상을 지킬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국민, 대통령, 정당, 기업, 사회가 어떤 경우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 나라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에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외적에게 굴종하며 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둘이 충돌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 굴종을 택하면 전쟁이 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면 전쟁을 막는다. 더 이상 ‘전쟁이냐, 평화냐’는 없어야 하고 휘둘리지도 말아야 한다. 그게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진정으로 지키는 길이다. 누구나 두렵다. 그 두려움을 부추기고 구차함을 유혹해 표를 얻으려는 것은 정상배 행태다. 지도자는 국민의 본능적 두려움을 넘어서서 결의를 모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전쟁의 역사는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 명언 중에서도 정수는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대전의 끔찍한 재앙 속에서 유럽이 신음하고 지식인 사회에 반전주의가 퍼질 때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관심이 없으시다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전쟁의 본질적 속성이 이 말에 담겨 있다. 전쟁은 자신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찾아간다. 올 테면 오라고 하는 사람들은 피한다. “이기는 전쟁보다 더러운 평화가 낫다”고 한 이재명 대표가 깊이 새겨야 할 진리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10-12   ‘6·25 전범’ 정율성 계속 기리겠다는 것은 반역 행태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이 국가보훈부의 시정권고 ‘정율성 기념사업 중단과 기념시설 철거’를 거부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35년간 지속돼온 한중 우호 교류 사업으로 위법 사항이 없다. 종합운영계획을 수립해 지혜롭게 추진하겠다’는 입장문을 11일 발표했다. 중국으로 귀화까지 한 ‘6·25전쟁 전범(戰犯) 정율성’을 계속 기리겠다는 것으로, 반역 행태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이날 시정권고 공문을 보낸 뒤 “정율성은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군가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직접 적군으로 남침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 위협에 앞장선 인물”이라고 거듭 밝힌 이유도 달리 없다. “그 기념사업과 시설물은 헌법 제1조, 국가보훈기본법 제5조 등에 따른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인하고, 대한민국 수호에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과 유족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지적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법적 강제력이 있는 시정명령 발동도 박 장관은 예고했으나, 강 시장이 시정권고부터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전임 시장들이 이어온 사업일지라도 ‘반(反)국가’ 성격이 확연해진 만큼, 이제라도 중단해야 한다. 정율성 흉상, 도로 이름, 생가 표지석 등도 없애야 한다. 정율성이 한때 다녔던 화순군 능주초등학교의 조치나마 강 시장은 주목할 때다. 서재숙 교장은 11일 국회에 출석해, “교내의 정율성 동상과 벽화 철거를 설치 주체인 화순군에 요구했고, 행정절차에 의해 철거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사설

 
 
 

10-12 아이언돔 실패와 킬체인 공세적 전환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MD) 기술 ‘아이언돔’에 구멍이 숭숭하다는 사실이 하마스의 4000발 로켓탄 공격으로 드러났다. MD 기술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전략방위구상(SDI)에서 시작됐다.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 빔을 쏘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파괴하겠다는 전략인데, 발표 그 자체만으로도 경제난에 허덕이던 소련을 무릎 꿇게 했다. 미국의 SDI와 경쟁하려면 엄청난 국가 예산이 필요한데, 당시 소련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군비 경쟁이어서 냉전마저 종식됐다. 당시 소련 외무부 장관도 미국 프린스턴대 초청 강연에서 냉전이 종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SDI 구상이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이후 SDI는 MD로 축소돼 미국과 동맹국들이 상대방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게 하는 것으로 기술 발전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최고의 미사일 요격 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조차도 성공률 80%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MD가 폭우처럼 퍼붓는 재래식 로켓탄을 다 막아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되면서, 한국은 북한의 미사일과 장사정포 공격에 새로운 군사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에 있다는 말이 있다. 북한의 미사일과 장사정포 공격을 막아낼 요격 미사일 능력에 수조 원의 예산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북한이 공격해올 경우 압도적인 공격 능력으로 적의 지휘·군사·통신 시설을 초전에 초토화할 능력을 증강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데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SDI 구상 이후 세계는 상대방 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돈을 쏟아부으며 기술 발전을 이뤄 왔고,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요격률이 90%를 웃도니 SM-6와 패트리엇 등 요격 미사일 기술 개발에 몰두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군사전략을 전면 재검토할 때다. 미국의 미사일 요격 미사일도 100% 막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시간을 끌며 기술 발전에 매달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던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기술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말처럼 북한이 공격해 오면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라는 심리전과 실제로 지금보다 몇 배의 미사일을 확보하는 게 북한의 오판을 막는 최고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걸프전을 일으켰던 사담 후세인과 9·11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도 끝까지 추적해 죽음에 이르게 한 미국이다. 악한 전쟁을 일으키거나 선량한 수많은 민간인을 죽게 한 테러를 지휘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한 미국의 선례는 함부로 미국을 상대로 무력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번에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이 하마스의 소나기식 로켓탄 공격에 큰 피해를 본 것은, 북한이 감히 한국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몇 배의 공격 능력을 보유하는 일이 더 효과적인 군사전략임을 일깨웠다. 다만, 예산 부담을 고려해 10년 계획을 세우고 매년 1000발의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목표로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국가를 수호하는 데는, 적장이 전쟁을 아예 꿈도 꾸지 못하도록 막강한 국력과 군사력을 갖추는 게 최상책이다.
문화일보

 
 

10.12  "北도 기습 가능성"...하마스가 불붙인 9·19 합의 '효력 정지'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은 9.19 군사합의문에 서명했다. 연합뉴스

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여파가 남북 간 9·19 군사합의에 미치고 있다. 하마스가 5000발에 달하는 로켓포로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한 것처럼 북한 역시 언제든 장사정포 등을 활용한 대남 기습 공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경각심이 커지면서다.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만 남았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대통령실과 정부 외교·안보 라인에선 이미 9·19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되는 상황을 전제로 시나리오별 후속조치를 검토 중이다.

군 당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와 잇단 무력 도발로 더 이상 북한과 9·19 군사합의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9.19 군사합의는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맺은 남북 합의이기 때문이다. 핵 무력을 법제화하고, 한국을 노린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북한의 도발 자체가 합의 정신을 무시하는 행태인 셈이다.

 

"효력 정지, 신중한 논의와 결단만 남아

▲북한은 지난해 말 우리 영공을 침범해 무인기를 날렸다. 9.19 군사합의 위반이자 심각한 무력 도발 행위였다. 연합뉴스

9.19 군사합의가 도마에 오른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북한이 소형 무인기 5대를 군사분계선 이남으로 침투시켰을 때 윤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무인기 사태는 재발하지 않았지만, 국방부·통일부 등 각 부처와 대통령실은 합의 효력 정지가 법적으로 가능한지 사전 검토에 착수했다. 현행법상 대통령의 권한으로 남북 간 합의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다는 게 법적 검토 결과였다. 현재 실무적으론 대북 확성기 방송 등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고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정찰기를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도 마무리된 상태라고 한다.

 

최근엔 북한의 추가적인 영토 침범 등 도발 여부와 무관하게 정부가 효력 정지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기자들과 만나 “안보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국가안보상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추가 도발을 전제로 효력 정지를 검토하겠다는 기존 입장에서 한 발 나아간 셈이다.

 

9.19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될 경우 종전선언과 대북전단살포금지법에 이어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핵심 요소들이 폐기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외교 소식통은 “9.19 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시킬 경우 발생할 필요한 후속조치 작업들과 남북 상황 변화는 물론 이같은 판단에 대한 국제사회의 예상되는 반응 등 다각도의 검토 작업이 상당 부분 진행됐다”며 “실제로 합의 효력이 정지될 경우 그에 맞춘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만큼 보다 신중한 논의와 결단만 남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9·19 군사합의는 2018년 남북 정상이 도출한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로 우발적인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20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비무장지대(DMZ) 남북 10~40㎞ 비행 금지 ▶DMZ 감시초소(GP) 시범철수 ▶북방한계선(NLL) 일대 완충구역 설정 ▶군사분계선 5㎞ 이내 포 사격 및 연대급 이상 야외 기동훈련 중단 등이다.

 

北 17차례 위반…사실상의 파기 상태

하지만 북한은 2020년 남측 GP 총격과 지난해 12월 무인기 침투를 비롯해 이미 최소 17차례에 걸쳐 합의를 위배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 11일 국정감사에서 9·19 군사합의와 관련 “합의는 쌍방이 준수해야 의미가 있다. 일방이 그것을 어기고 타방이 일방적으로 준수하는 건 상당히 잘못됐다”고 지적한 이유다.

그러나 북한은 합의 취지를 무색게 하는 무력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합의 파기를 선언하진 않았다. 그 자체가 9·19 합의가 북한에 유리한 쪽으로 설계돼 있다는 방증이란 지적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밥 먹듯 합의를 위배하는데 한국은 합의에 따라 무력 대응은 커녕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 탐지·정찰 역량까지 스스로 제한하는 비대칭적 상황이 수년간 지속됐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10일 국방부 기자실을 방문해 9.19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 필요성을 강조하며 "최대한 빨리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사진은 같은날 국회 국방부 국정감사에 출석한 신 장관. 국회사진기자단

이와 관련,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10일 “9·19 군사합의에 따른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북한의 임박한 전선 지역 도발 징후를 실시간 감시하는 게 굉장히 제한된다”며 “최대한 빨리 9.19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효력 정지"…부담은 여전

다만 북한의 직접적 도발 등 아무런 계기 없이 정부가 선제적인 효력 정지를 선언하는 데 따르는 부담은 여전하다. 물리적으로 국회의 동의 없이도 효력 정지 선언 자체는 가능하지만, 이 경우 상호 약속한 합의를 정부가 먼저 깨버렸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다. 또 이를 빌미로 북한이 무력 도발에 나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야당은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는 데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1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9·19 군사합의는 접경 지역의 우발적 오판에 의한 충돌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화벽이라며 “(효력이 정지될 경우) 남북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10.13 한명숙·유시민에 이어...이번에도 ‘경기동부’에 산소통 달아줄 건가

2012년 한명숙, 유시민 덕에
자연사 모면했던 친북 세력
이들의 내년 총선 의석 확보
李대표 야권 연대에 달려

노무현 정부 때였던 2006년, 주사파에 두 개의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북한의 1차 핵실험이고 또 하나는 ‘일심회’ 간첩단 사건이다. 그때까지 주사파들은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반전 평화 운동’으로 포장했다. 이들은 주한 미군이 한때 한국에 배치했던 전술핵을 문제 삼아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쳤다. 그런데 절대 그럴 리 없다던 북이 핵실험을 하자 ‘반전반핵’이라는 구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반핵이 반북이 되는 자기모순에 빠진 주사파는 내부적으로 크게 동요했다.

‘일심회’ 사건은 주사파들의 의회 전략에 제동을 걸었다. 주사파는 2001년 ‘군자산의 약속’을 결의한 이후 민주노동당 같은 합법 정당을 통해 의회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일심회 수사를 통해 주사파들이 민노당 내부 상황을 북한에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주사파가 장악한 민노당에서 노회찬 같은 이들은 탈당했고 2008년 총선에서 잔류 민노당은 5석을 얻는 데 그치며 존폐 기로에 서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주사파와 민노당 내의 경기 동부는 거의 자연사할 뻔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사망 등 몇 가지 반전의 계기가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의석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산소호흡기를 달아준 인사가 유시민과 한명숙이다. 유시민은 2012년 총선을 몇 달 앞두고 당시 무명의 이정희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만들고 공동 대표에 오른다.

 

한명숙은 총선 한 달 전 통진당에 야권 연대라는 선물을 덥석 안겨줬다. 원칙은 양측의 경선을 통한 야권 후보 단일화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민주당이 아예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통진당 후보들을 야권 단일 후보로 만들어줬다. 한명숙은 이를 위해 통진당이 요구했던 한미 FTA 반대, 제주 강정마을 공사 중단 합의문까지 서명해줬다. 한미 FTA와 강정마을은 노무현 정부 때 추진했던 일이고 한명숙은 그 정부 총리였다. 그런데 통진당을 위해 노무현까지 부정해버렸다.

야권 연대는 결국 민주당에 독이었다.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은 약세 예상을 깨고 단독 과반을 확보했지만, 민주당은 129석에 그쳤다. 종북 논란이 있던 통진당과의 야권 연대가 중도층의 외면을 불러왔다. 반면 고사 위기에 놓였던 통진당은 2004년 민노당보다 많은 13석을 얻었고 그 13명 중 1명이 이석기였다. 민주당이 던져준 산소통으로 명줄을 이어간 통진당이었지만 부정 경선과 내란 음모 사건을 통해 2014년 강제 해산됐다. 총선 2년 만이었다. 한명숙과 유시민처럼 통진당에 산소통을 달아준 야권 인사들은 아직 공개 반성문을 쓴 적이 없다.

통진당은 해산됐지만 잔류 세력은 민주노총과 건설과 택배노조를 중심으로 재기를 노렸고 지난 4월에는 전북 전주을 재선거에서 진보당이라는 이름으로 당선자까지 냈다. 역시 이때도 도우미는 민주당이었다. 호남에서 민주당이 후보를 안 내면서 길을 터준 것이다. 진보당은 이번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1.38% 득표에 그쳤다. 민주당 도움이 없으면 내년 총선에서 의석 확보가 불가능하다.

 

총선이 다가오면 다시 야권에선 후보 단일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백낙청, 함세웅 같은 이들은 원탁회의니 뭐니 하면서 민주당에 정의당, 진보당과의 단일화를 요구할 것이고 경기 동부는 이를 활용할 게 뻔하다. 경기동부가 장악한 민노총과의 연대는 상수다. 이재명 대표 주변에는 과거 경기 동부와 인연이 있었거나 이적 단체였던 한총련 핵심 간부 출신들이 적지 않다. 한명숙, 유시민에 이어 경기 동부에 산소통을 달아줄 다음 인물이 이 대표가 될 것인지, 총선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조선일보 정우상 정치부장

 

 

10-13 [단독] 文 정부, 독립유공자 기준 바꿔 친북 4명에 서훈 줬다

■ ‘포상 심사기준’ 논란

‘광복후 사회주의 활동’ 43명
2018년 기준 개정되며 포상
그 중 4명은 北정권수립 기여

윤한홍 의원 “문정부의 내편 만들기

 

문재인 정부가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을 개정하면서 과거 심사에서 탈락했던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자’ 등 43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최소 4명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는 등 개정된 심사 기준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문 정부가 ‘통계조작’에 이어 ‘공적조작’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자’ 43명 중 최소 4명이 개정된 심사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8년 6월 개정된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는 광복(1945) 이후부터 정부수립(1948) 이전까지 사회주의 활동 참여자도 독립유공자 포상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심사 제외 대상인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및 적극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의원실에 따르면, 2018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A 씨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는 등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여순사건 당시 화양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B 씨는 과거 두 차례 탈락했다가 2019년 서훈을 받았다. 4·3사건 주동자이자,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활동을 했던 C 씨는 과거 5차례 심사에 탈락했다가 2019년 서훈을 받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남로당 활동을 하고 4·3사건에 연루됐던 D 씨는 한 차례 탈락했다가 2019년 서훈을 받았다.

당시 서훈 심사기준 완화 연구용역에 참여한 연구진 6명 중 최소 4명이 진보·민주당 관련 인사로 파악됐다. 2018년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시도했던 보훈혁신위원회 위원 역시 13명 중 12명이 진보·민주당 관련 인사였다. 윤 의원은 “문 정부의 노골적인 내 편 유공자 만들기로 공산주의자를 독립유공자로 둔갑시켰다”며 “보훈부는 심사기준을 재개정해 서훈된 유공자들에 대한 재검증을 실시해 가짜 유공자 논란을 불식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보름 기자 fullmoon@munhwa.com

 
 

10.16 이래진 “국민 목숨보다 북한이 먼저였던 文, 다시 나와선 안 될 통치자”

[김윤덕이 만난 사람] ‘서해일기’ 펴낸 이래진 씨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27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바이오 라이더' 작업실에서 만난 이래진씨는 "각종 공구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기계를 발명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바이오 라이더’라는 매연 저감 장치를 생산해내던 70평 작업실은 2020년 9월 21일 낮 1시 35분에 멈춰섰다.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와 배를 타고, 수산고 졸업 후 원양어선을 누빈 이래진은 각종 공구로 뒤덮인 작업실에서 새로운 기계를 발명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동생 이대준의 실종이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놨다.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싸움, 국가 권력을 향한 싸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3년. 감사원은 이달 5일, “문재인 정부가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을 근거도 없이 자진 월북자로 몰아갔다”는 내용의 감사 보고서를 채택했다.

 

◇슬리퍼가 월북의 증거?

-지난달 이대준 피격 사건 전말을 기록한 ‘서해일기’를 출간했다.

“해경이 사고 현장을 수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단순 실종 사고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일지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중요한 단서들을 놓칠 수 있고, 나중에 재판으로 갈 경우 정황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의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걸 책으로 엮었다.”

 

-왜 단순 실종 사고로 여기지 않았나.

“수색 과정에 헬기를 요청했더니 마지 못해 날아와 대연평도를 한 바퀴 돌고 남쪽으로 내려가더라. 지그재그나 S자 형태로 돌아야 바다를 자세히 훑어볼 수 있는데 그냥 한 바퀴 휙! 수색에 분초를 다퉈야 할 시간에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실종 3일째 되는 날 ‘동생이 북한을 동경했느냐’ ‘불온 서적 읽는 걸 본 적 없느냐’는 전화를 받고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사고 초기엔 우리 해군이 동생을 구조해낼 거라 믿었다고 썼던데.

“조류 예측 시스템이 계속 발전해 왔기 때문에 골든 타임이면 구조도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특히 슬리퍼. 그들은 선미에 나란히 세워져 있던 슬리퍼를 자살 혹은 월북의 단서라고 주장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무슨 뜻인가.

“나는 완도 수산고를 졸업한 뒤 원양선사에서 10년간 근무하며 실종 등 선박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보고 수습했던 사람이다. 선박에서 자살자는 절대 슬리퍼를 그렇게 놓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난간에 한 짝이 엎어져 있거나 난간 위에 있다. 그리고 당직이었던 동생은 복장 규정상 근무복과 안전화를 신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에 있어야 할 슬리퍼를 가지고 나와 세워 놓은 것이다.”

 

-2억6000만원의 빚 때문에 월북을 시도했을 거란 보도도 나왔다.

“얼마나 파렴치한가. 국민의 생명보다 동생을 일단 나쁜 놈으로 몰고 가는 게 그들에겐 더 시급했다. 기사가 나오자 동생의 회생법원 담당 변호사가 연락했더라. 대준이는 짧은 기간 변제가 가능했던 특A 우량자였다고, 필요하면 증언하겠다고. 나중에 밝혀진 동생의 공식 채무는 9500만원으로, 2년 반이면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또 동생이 월북을 결심했다면 고속단정을 내려서 타고 가지 미쳤다고 조류를 거슬러 맨몸으로 헤엄쳐 가겠는가. 조오련도 아닌데.”

 

 ▲서해 피격 공무원 유족 이래진(왼쪽) 씨가 2023년 7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외 1명에 대한 추가 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월북 인정하면 보상한다는 회유

-민주당 황희 의원을 비롯해 해군참모총장 등 6명이 안산 작업실로 찾아와 협박을 했다던데.

“황희는 이 사건의 민주당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사건 발생 일주일만에 ‘월북이 사실로 확인돼가고 있다’고 발표하더니, 다음 날 안산으로 와 ‘동생이 월북 운운했다는 SI(특수정보) 첩보를 듣고 왔다. 어린 조카들 생각해서 월북으로 인정해라. 그러면 보상해 주겠다’고 하더라. ‘같은 호남이니 같은 편 아니냐’고도 했다.”

 

-흔들렸을 것 같다.

“동생의 육성이 아니면 믿지 못 하겠다. SI 첩보를 나도 좀 들려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첩보에는 동생이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흔들렸으면 우리 가족은 월북 낙인이 찍혀 이 땅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유족이 김정은에게 쓴 편지 전달을 거부했더라. 사고 현장을 방문해 동생 위해 소주 한 잔 붓게 해 달라고 쓴 편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는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가 나를 더욱 투쟁적으로 만들었다. 국보법 철폐와 인권을 외쳤던 자들이 동생을 국보법으로 처벌하려 월북몰이 한 것에 가장 분노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고소했다.

“국군통수권자는 국방을 책임져야 한다. 더구나 NLL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김정은과 9·19남북군사합의문까지 작성했고, 늘 ‘사람이 먼저’라고 얘기했던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동생 사건에서는 국민 목숨보다 북한이 먼저였다.”

 

-당시 문 대통령이 어떻게 했어야 하나.

“유엔 연설, 종전 선언을 미뤘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적대 국가에 체포됐으니 구조가 우선이라고 했어야 한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덮기 위해 자국민을 죽게 하고 월북자로 몰아갔다. 두 번 다시 이런 통치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왜 동생을 구조하지 않고 월북으로 몰고 갔을까.

“종전 선언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 쇼를 위해.”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행사에 문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자국민을 지키지 못한 건 반성하지 않고 무엇을 기념한다는 건가. 동생의 피살로 9·19군사합의 의미는 사라졌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조카한테 엄정 수사를 약속해놓고, 책임자인 해경 수사정보국장을 남해청장으로 승진 발령시켰다. 유족을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북의 잘못을 덮기 위해 국민을 월북으로 몰아간 대통령은 반드시 합당한 죄를 받아야 한다.”

 

 ▲서해에서 북한군에게 피격된 해수부 공무원 이대진씨의 부인 권영미(오른쪽)와 맏형 이래진(왼쪽)씨가 작년 6월 17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향후 법적 대응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모자, 선글라스 쓴다고 공격도

-지난 3년간 악성 댓글 등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구토가 나올 만큼 욕설과 악플이 달렸다. 그런데 악플 덕에 서해 사건이 계속 최상위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생 사건이 잊히지 않고 포털에서 매일 이슈가 되려면 견뎌야 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시비 걸더라.

“모자는 머리에 상처가 있어서 쓴다. 선글라스는 바다 태양빛에 망막이 상해 바람만 살짝 불어도 눈물이 나서 쓴다. 이게 왜 공격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조카가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대필이란 의심도 받았다.

“내가 편지를 대신 써줄 시간이 어디 있나. 국방부와 해경, 정치인, 기자들 상대하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살이 52kg까지 빠졌다. 나중엔 심근경색이 왔다.”

 

-동생의 죽음을 팔아 돈벌이한다는 악플도 있었다.

“동생 사건으로 나는 알거지가 될 판인데 돈벌이라니. 내가 특허 낸 바이오 라이더는 자동차, 선박에 장착하는 매연 저감 장치인데 잘 팔릴 땐 하루에 3천(만원), 5천씩 통장에 꽂혔다. 그런데 동생 실종 후 올스톱 됐다.”

 

-고향이 호남이라 문 정권에 맞서는 게 부담스러웠겠다.

“새파란 후배들이 술 먹고 전화해서 욕하더라.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래도 동생 잃은 슬픔을 위로해주는 분들이 더 많았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엔 민주당 지지자였나.

“선거에서 늘 민주당을 찍었다. 그러나 동생 사건을 겪으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당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호남 인맥이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 호남이니 영향을 받는다. 특히 내가 사는 안산은 호남향우회가 세다. 지역민 40%가 호남 출신이라 향우회가 안산시장을 당선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문재인 정부와 싸워 서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자 많은 이들이 돌아왔다. 미안했다면서. 지난 대선에서도 호남 표심에 서해 사건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부수다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을 만났다.

“검찰총장 직무 정지 기간에 동생 사건 전체를 다 검토하고 왔더라. 대통령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제대로 조사해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일주일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박지원 전 국정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첩보 삭제, 피격 은폐로 재판 중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로 가는 건가?

“아직 멀었다.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증인 신문을 7월에 끝낸다고 하더니 12월로 미뤘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루려는 거다. 그래서 재판 속개를 요청했다. 고인과 유족을 2차 가해한 정치인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공무원이 뻘짓하다 사고 당해 죽은 것’이라고 말한 주철현 같은 의원들인가.

“우상호, 주철현 등 민주당 의원들이 막말로 여론을 호도해 내 사업은 거의 망가졌다. 둘째 동생도 항해사인데 직장을 잃었다. 우리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포함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식들한테도 두고두고 부끄러울 것이다.”

 

-3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는지.

“포기하려면 시작도 안 하는 성격이다. 끝장 볼 때까지 파는 스타일이라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다. 수륙양용 자전거도, 바이오 라이더도 수억씩 날려먹고 개발해낸 거다.”

 

-추석 직전이던 9월 22일이 이대준씨 3주기였다.

“제수씨와 조카들이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1주기엔 하태경 의원, 김기윤 변호사와 여기서 배, 사과, 육포 한 개씩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혼자였던 나를 위해 함께 싸워준 분들이다.”

 

-조카들은 잘 지내나.

“대준이 아들은 군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생활한다. 4학년이 된 딸도 이제 아빠의 죽음을 알고 있다.”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더라.

“‘서해일기’는 단순히 내 동생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호소가 아니다. 힘없는 국민이 우리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하고 어떤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길잡이가 돼주려고 쓴 것이다. 국가와 싸워선 안 된다며 다들 만류했지만 가족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쳤는데, 바위가 진짜 깨졌다는 걸 보여준 게 뿌듯하다.”

 

☞이래진

1966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완도수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20년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으로 숨진 이대준의 맏형이다. 수산고 졸업 후 동원산업 항해사로 5년, 동원수산의 선원 담당으로 5년 근무한 뒤 경기도 안산에 정착, 수륙양용자전거와 자동차 매연 저감 장치 등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바이오 라이더’를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10.18 판사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 재판 지연
점점 집요해져 ‘재판 농락’ 수준
제동 장치 있는데 판사들은 방치
권한 행사해 농락 사태 막아야

요즘 간첩단 사건 재판은 재판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청주 지역 노동계 인사들이 북 공작원과 접선한 뒤 반(反)국가 활동을 했다는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 피고인들은 재판 중 위헌 심판을 제청했고 변호인도 4차례나 교체했다. 법관 기피 신청도 2차례 냈는데 신청이 기각되면 항고·재항고를 반복해 최종 기각까지 210일이 걸렸다. 기소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1심이 진행 중이다. 구속됐던 피고인은 이미 다 풀려났다. 현행법은 심급별로 6개월인 구속 기간 안에 재판을 못 끝내면 피고인을 풀어주게 돼 있기 때문이다. 법 절차를 악용한 재판 농락이다.

최근엔 국민참여재판 신청이 ‘신종 수법’으로 등장했다. 국민참여재판 신청 심리 기간은 법관 기피 신청과 달리 구속 기간 산정에도 포함된다. 이를 노리고 간첩 사건 피고인들이 올 들어 일제히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다. 가장 노골적인 사례가 지난 3월 기소된 창원의 ‘자주통일민중전위’ 사건이다. 피고인들은 서울이 아닌 창원에서 재판받겠다며 관할 이전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하자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불허하자 항고·재항고를 계속해 수개월 동안 재판을 지연했다. 그러다 지난 8월 가까스로 재판이 열렸는데 또 법관 기피 신청을 하고 재판장을 고발해 재판이 중단됐다. 나중에 재판이 재개돼도 이들은 며칠 뒤 풀려날 것이다. 재판 농락은 점점 집요해지는데 법은 무르고 판사들은 무력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 뒤엔 민변 변호사 수십 명이 버티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절차도 중요하고 방어권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장하는 것과 재판 농락까지 묵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판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이러면 재판 농락은 무슨 ‘공식’처럼 굳어질 것이다.

이를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통상 법관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다른 재판부에서 심리하고 최종 기각 결정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중단한다. 하지만 현행법엔 소송 지연 의도가 명백한 기피 신청에 대해선 해당 재판부가 바로 기각하고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게 돼 있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의 법관 기피 신청 사유는 “위헌 심판 제청 결정을 신속히 안 했다” “보석을 인용해 주지 않았다” 등 대부분 비합리적인 것이다. 누가 봐도 소송 지연 의도가 명백한데 해당 재판부가 기각하지 않고 판단을 다른 재판부로 넘겨 재판이 지연되는 것이다. 그 배경엔 괜한 구설에 휘말리기 싫고, 재판이 지연되면 해당 재판부로선 선고를 안 해도 되니 좋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사실이라면 무책임한 것이다.

다른 재판부에서 기각 결정이라도 빨리 하면 될 텐데 그것도 안 되고 있다. ‘충북동지회’ 사건은 2차 법관 기피 신청에 대한 최종 기각 결정까지 163일이나 걸렸다. 대법원에서만 84일을 끌었다. ‘민중전위’ 사건 피고인들이 낸 국민참여재판 신청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된 것도 신청 넉 달 만이었다. 이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고압적으로 재판하라는 게 아니다. 명백한 재판 지연에 대해선 판사가 정당한 권한 범위 안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 내란 선동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사건은 1심 유죄 선고가 5개월 만에 나왔다. 당시 재판장은 일주일에 네 차례씩 공판을 진행했고, 변호인이나 검사가 공판과 관련 없는 발언을 하면 법 조항을 언급하며 강력히 제지했다. 그런 의지와 자신감이 있어야 지금의 재판 농락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판사가 허수아비가 돼선 안 된다.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10.18 북한식당 갔다가 女종업원에 홀딱… 7년간 北에 돈 갖다 바친 50대

미얀마·라오스서 20대 여성에 반해
정찰총국 지령 받고 달러·물품 보내

2016년부터 7년간 미얀마와 라오스의 북한 식당에 100차례 이상 드나들며 북한 정찰총국 소속 인물로부터 지령을 받고 식당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미 달러, 마약류 등을 제공한 50대 남성과 그에게 마약을 제공한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경찰청 안보수사과에 따르면 정부와 공공기관 등에 IT프로그램을 납품·유지보수하는 업체 대표인 A(52)씨는 2016년부터 거의 매달 북한식당에 출입했다. A씨가 맨 처음 방문한 북한 식당은 미얀마에 있는 곳이다. 이 식당은 북한 청류관의 해외분점으로, 외화를 벌어 본국으로 보내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성들이 음악 공연을 하는 동남아에서 영업중인 북한식당./서울 경찰청

A씨는 당시 20대였던 여 종업원 김모씨에 반했다고 한다. 이후 해당 북한식당에 꾸준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A씨가 김씨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하자 정찰총국 소속인 식당 부사장이 A씨를 포착하고 그를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A씨는 식당 부사장의 지휘에 따라 온라인에 북한 식당을 홍보하는 게시글을 작성하기도 했고, 미얀마 정부가 북한(부사장)에 의뢰한 ‘미얀마 현 정부 반대 세력의 인터넷 사이트 차단’ 임무를 부사장이 A씨에게 은밀히 지령하는 등 구체적인 IT 임무까지 논의했다.

 

A씨가 미화 4800달러를 북한 식당에 건넨 정황도 포착됐다. 식당은 국가계획에 따라 북한에 송금해야하는 충성자금을 보내야하는데, 이를 A씨에게 대납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A씨가 건넨 미 달러 자금 중 일부는 실제로 북한 본국으로 보낸 것이 확인됐다. A씨는 이밖에도 북한 식당 운영에 필요한 기타와 스피커, 공연복과 속옷, 피부관리용품, 식자재, 마스크, 의약품 등 총 2000만원 상당의 경제적 편의를 제공했다.

 

▲동남아의 한 북한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서울 경찰청

경찰에 따르면 식당 부사장과 A씨는 두 사람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바꿔가며 보안을 철저히 하면서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북한 식당의 중국 단둥 이전, 국가계획 차질 문제, 여성 종업원 신체 사이즈 등 식당 내부 사정까지 알 정도로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워졌다. A씨는 “나는 북한식당의 작은 사장”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경찰은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A씨가 꽃다발을 들고 식당 들어가는 장면, 북한대사관 소속 차량과 동시간대 식당에 머무는 장면 등도 확보했다. 해당 식당이 미얀마에서 라오스로, 이후 중국 단둥으로 옮길 때에도 A씨는 국가를 옮겨다니며 해당 식당을 드나들었다. 부사장의 지령을 받은 A씨는 국내에서도 주요 탈북민단체에 접근하는 등 북한 출신자들에 대한 다양한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A씨의 금품전달을 도운 지인 2명에 대해서도 마약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송치했다. 경찰은 “해외 북한식당은 북한의 외화벌이 창구일뿐 아니라 공작기관의 거점 장소임을 각별히 유념해야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수경 기자

 

 

10.18 민화협 간부, 北인사에 정부 보조금 3500만원 몰래 전달

보조금법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 이어 대북 송금 혐의 추가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는 대북 소금 지원사업을 추진한다며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 약 3500만원을 중국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한테 전달한 당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외협력팀장 엄모씨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해 수사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민화협은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상임의장을 지내던 2019년 대북 소금 지원 사업에 참여하면서 전남도청으로부터 보조금 5억원을 받은 단체다.

경찰은 민화협이 전남도청으로부터 대북 소금 지원 사업 명목으로 받은 보조금 5억원 중 모 소금업체에 4억7000여만원과 함께 실무 진행을 위임해놓고 사업이 중단된 건에 대해 지난 4월 입건 전 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정부의 물품 반출 승인조차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엄씨는 이 과정에서 4억7000여만원 중 환치기 차명 계좌를 이용해 북한 대사관 직원에게 3500만원을 전달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엄씨와 소금업체 간부, 민화협을 피의자로 입건해 기존에 적용한 보조금법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 외에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를 추가해 수사 중이다. 또 엄씨가 돈을 대가로 각종 대북사업의 편의를 봐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고, 북한 대사관 직원이 대북 교류 사업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민화협은 이번 의혹과 관련해 자체적으로 사업 실태 조사에 착수했지만, 소금업체 대표가 지난해 10월 사망하면서 자체 조사는 부진한 있는 상황이다.

조선일보 김예랑 기자

 

 

10.19 월세계약보다 못한 9·19합의… 최소한의 거래 양식도 안갖췄다

얼마 전 사정이 생겨 급히 아파트 월세 계약을 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까다로운 계약 조건에 놀랐다. 두 달 치 월세가 밀리면 임대인이 즉각 계약을 해지하고 퇴거 요청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집 어디에는 못을 박으면 안 되고, 방을 타인에게 세주면 안 되고, 뭐 하면 안 되고, 그럴 경우 어쩔 것이며…. 계약서는 임대인이든 임차인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구체적이다. 각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당연한 것들이었고, 잘 지키면 아무 문제 없는 것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했다.

계약 사항을 어기면 어떻게 할지 정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집 손상 없이 월세를 따박따박 내고 만료일까지 살다 나가려는데, 임대인이 보증금을 안 주겠다고 한다면? 임차인이 제멋대로 방 하나를 대학생에게 별도로 하숙을 준다면? 월세 수개월 치를 안 내놓고도 ‘배 째’라는 식으로 집을 점거한다면? 페널티 조항이 없다면 당하는 쪽은 아무 수도 쓰지 못하고 금전적으로 심정적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이다. 그 상황이 길어지면 임대인 입장에서는 사실상 집을 빼앗긴 신세가 된다. 그래서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계약은 어느 복덕방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 자식 간에도, 선의 가득한 종교 단체에도 이런 부동산 거래를 하지는 않는다. 불법 증여·거래 등 딴 꿍꿍이가 없는 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최소한의 거래 양식도 갖추지 않은 계약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에서 2018년 9·19 남북 군사 합의라는 이름으로 체결됐다. 군사분계선(MDL)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40㎞밖에 되지 않는데 MDL 기준 20㎞까지는 정찰 비행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MDL에서 평양까지는 140㎞로 훨씬 멀다.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 야당 의원은 “우리는 정찰력이 뛰어나고 북한은 능력이 떨어져 9·19 합의로 손해 본 건 북한”이라고 한다. 예비역 육군 대장은 “궤변”이라며 “그러면 북한은 왜 협상 내내 비행금지구역을 MDL 기준 60㎞까지 더 넓게 하자고 했겠나. 북한이 바보인가?”라고 했다. 북한엔 없고 한미엔 있는 전략 정찰기에 족쇄를 달려고 했다는 게 이치에 맞는다.

 

문제는 다른 것도 아닌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는 안보 계약을 ‘어길 시 어떻게 하겠다’는 조항도 없이 3개월 만의 졸속 협상으로 체결했다는 것이다. 수페이지에 달하는 합의서엔 ‘평화’ ‘긴장 완화’ ‘민족’과 같은 허울 좋은 말만 가득할 뿐 ‘페널티 조항’은 물론 위반 시 이전 단계로 돌아간다는 ‘스냅백(Snap back)’ 조항도 없다. 그러니 북한은 9·19로 한미군의 손발에 족쇄를 채운 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등 18차례 합의를 위반하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경험해보니 9·19는 월세 계약보다 못했다. 이런 기준 미달 계약을 왜 체결한 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10.19 “발전기가 전파 차단” 軍 반대에도…文정부, 해상풍력 추진

文 정부, 2020년 공공주도 보령해상풍력 발전단지 추진
군 전파 방해에도 국방부와 협의 없이 추진
해상풍력 사업 허가 80곳 중 64곳 국방부 검토 받지도 않아

 ▲해상풍력 발전소 모습. /뉴스1

전국에서 추진 중인 해상풍력발전단지 사업이 최근 국방부와의 마찰로 지연되고 있다. 발전사업 허가를 받은 후에야 국방부의 군 작전성 검토를 받았는데, 대부분 레이더 전파 차단 등 군 작전 수행 부분에서 문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발전사업 허가로 국가안보까지 위협받게 된 상황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19일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국방부는 현재까지 발전사업 허가를 받은 16곳의 해상풍력 사업에 관해 검토한 결과 3곳은 사업 추진에 동의하지 않았고, 나머지 13개 사업에 대해서는 조건부로 동의했다.

 

특히 2020년 당시 문재인 정부 공공주도로 진행된 보령해상풍력 발전단지도 국방부와 협의 없이 추진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령시가 중부발전과 2025년까지 총 6조원을 투입해 풍력발전기 125개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지 1년이 흐른 2021년 국방부는 그제야 협의 검토 문건을 받았다. 국방부는 해상풍력 발전시설이 들어선다면 레이더가 차폐되는 등 군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예상되므로 발전기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무경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해상풍력 건설로 레이더기지 역할이 상실되면 군 작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사전에 국방부 검토를 받지 않았다”며 “문재인 정부가 국가안보보다 신재생 에너지 확대를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 검토를 받은 통영 욕지 해상풍력에 대해서는 육‧해‧공군 모두가 문제를 제기했다. 국방부가 조건부 동의를 한 13개 사업도 레이더 차폐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사업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국방부 검토를 받은 건수보다 그렇지 않은 풍력발전단지가 더 많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산업부로부터 발전사업 허가를 받은 해상풍력 사업단지 80곳 중 64곳이 국방부와 협의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미국 등에서도 해상풍력 건설이 국가안보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 국방성은 신규풍력 발전을 위해 검토되어 온 대서양 지역 대부분 군사 작전과 충돌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 의원은 “삼면이 바다이면서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국내 여건상 무엇보다 국가 안보 확립이 필요하다”며 “지금의 무분별한 발전사업 허가는 해상풍력 확대에 도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

 

 

10-24 이대용 vs 신영복·정율성

 

 유회경 전국부장

고 이대용 장군은 6·25전쟁 ‘찐’ 영웅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6사단 소속 중대장으로서 전차부대를 앞세워 침공한 북한군의 파죽지세를 꺾는 데 성공했다. 6·25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전투를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그해 10월 26일 그가 이끈 1중대는 평안북도 초산 압록강에 이르렀다. 압록강에 맨 먼저 닿은 국군 부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일화 역시 그의 몫이다.

 

이 장군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주베트남 대사관에서 공사를 지냈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하던 당시 그는 교민 보호를 위해 사이공에 남아 있었다. 미국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리콥터에 오르라는 미국 공사 제의를 마다하고 남은 교민들을 외국 공관에 피란시키려 애쓰다가 월맹군에 붙잡혔다. 날마다 고문을 당했다. 월맹군은 그를 북한으로 이송하려 했다. 이 장군은 북한 공작 요원으로부터 망명 자술서를 강요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고, 억류 5년 만에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이 장군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영웅이다. 그의 장례는 국민적 영웅을 기리는 자리여야 했다.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들을 기리는 전통이 강한 영국, 미국, 호주 등과 같은 나라에선 그런 영웅이 죽으면 반기를 걸고 그의 공적을 기린다. 하지만 2017년 11월 14일 이 장군이 숨졌을 때 우리 사회는 너무 잠잠했다. 적어도 육군장으로 치렀어야 할 그의 장례는 그저 가족장으로 치러졌을 뿐이다.

반면, 북한이 이 장군과 교환을 원했던 사람 중 한 명인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출소 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소주병에 독특한 서체의 ‘처음처럼’ 상표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2016년 1월 15일 사망한 이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딴 추모공원이 생길 정도다. 북한이 경남 밀양 출신인 그를 집요하게 데려가고자 했던 사실은 외교부가 2016년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뒤늦게 밝혀졌다. 신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20년 동안 복역하고 1988년 가석방됐다. 그는 교수를 하면서 동양 고전 풀이 관련 책을 몇 권 냈고, 이른바 신영복 서체를 유행시켰다.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는 “나이를 먹고 사회에 진출해도 과거의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운동권 중 일부가 신영복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신영복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도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은 우리 사회의 신 교수 추앙 흐름 연장 선상에 있다. 강기정 광주시장의 중국인 여행객 유치 발언은 너무 군색하다.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사람은 소 닭 보듯 하고, 국가 전복을 꾀하거나 적군에 속해 사기 진작에 헌신한 사람을 기리는 공동체에 소망이 있을 리 없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를 겪으며 여권 내부에서도 너무 이념 위주로 흐르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문화일보

 

 

10-26 홍범도 논란의 올바른 해법

정충신 정치부 선임기자

홍범도 장군은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노비 신분에서 홀연히 일어나 정규군과 조직적 무장투쟁을 벌인 효웅스러운 독립군 지도자였다. 항일투쟁 과정에서 부인과 장남의 희생, 소련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히 순국한 가슴 저린 인생 역정은 우리 민족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을 만한 위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 독립군 괴멸이란 자유시 참변 한복판에 서고, 이후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에 입당해 광복군 주류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그런 홍 장군이 순국 80년 만에 정치판 진영 대결 한가운데로 소환돼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은 안타깝다.

육사교장 출신 박남수·고성균 예비역 장성 등 취재를 종합하면 육사 교장들은 대체로 홍 장군 흉상 육사 설치를 ‘잘못 끼운 단추’로 간주했다. 박남수 전 교장은 “정치권 진영 대결의 장이 된 역사이념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홍 장군, 두 번째 육사, 세 번째 국민”이라며 “홍 장군은 문재인 정권의 과도한 띄우기와 적합하지 않은 위치에 충분한 공감대 없이 흉상을 건립하면서 그의 가족 희생과 평생의 독립운동 헌신은 사라지고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만 부각되는, 정치적 희생양이 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육사의 홍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첫째, 군사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군사 전략적 능력과 책임 완수라는 군인정신의 결정적 요소 면에서 홍 장군 흉상 육사 설치는 부적합하다. 둘째, 홍 장군은 청산리 포위망 탈출 후 만주와 연해주 국경선 상의 밀산에 독립군이 재집결했을 때 극동지역 볼셰비키들이 요구한 자유시로의 부대 이동에 찬동하는 과오를 범했다. 셋째, 자유시 입성은 한인 독립군을 러시아혁명의 전위대로 탈바꿈시켜 향후 극동지역 볼셰비키 혁명의 선봉에 서게 하려는 의도로, 결국 자유시 이동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몬 결과로 이어졌다. 넷째,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한 홍 장군이 염원한 ‘고려 독립’은 볼셰비키 공산주의 국가로의 독립으로, 대한민국 국가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섯째, 육사에서 홍 장군을 기린다는 것은 사관생도 교육이라는 목적에서 무리다. 육사 교육 목표 중 하나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정예 장교 양성’이다. 육사 흉상 졸속 설치는 홍 장군과 육사, 국민에게 상처를 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하책이 되고 말았다. 홍 장군은 국방부 현관 앞 흉상, 잠수함 홍범도함 존치를 통해 독립영웅으로 기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홍 장군의 흉상과 충무관 내 그의 전시실 철거는 육사 제자리 찾기·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박 전 교장은 “하지만 충무관 내 다른 5인의 독립전쟁영웅실을 폐쇄하고 국난극복실을 만드는 것은 전선을 확대해 국민의 피로감만 키울 뿐이며, 이념 전쟁을 확대하면 국가 안보 대비태세에 전념해야 할 육사와 군이 더 심한 내상을 입게 돼 국민 전체의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야당은 ‘독립영웅 흉상·전시실 철거=친일 정권’ 프레임으로 정쟁 도구로 삼고 있다. 전선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서 논란을 끝낼 솔로몬의 지혜가 아쉽다.
문화일보

 

 

10.30 해안포 열고 ‘남반부 점령’ 외치는데 “북 억압 말라”니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정감사에서 “북한을 계속 억압해야 하느냐”고 했다. 그는 국방장관에게 “질문이 아니라 권고”라고도 했다. 북한의 한 해 총생산량이 우리 국방비에 못 미치는 반면, 우리는 한미 동맹에 세계 6위 군사력으로 북한을 제압할 수 있으니 제재와 압박을 완화하라는 취지였다. 이 대표는 지난해에도 국회에서 “북한 핵을 제외하면 우리 군 전력이 북에 밀리지 않는다”며 비슷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핵을 제외하면 북한에 밀리지 않는다”는 말은 궤변에 가깝다. 핵을 빼놓고 어떻게 전쟁의 승패를 얘기할 수 있나.

지금 북한은 대놓고 남한에 대한 핵 공격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데 이어 지난달 ‘핵무기 고도화’를 헌법에 명시했다. 핵무기의 다종화, 실전 배치도 진행 중이다. 김정은은 우리 계룡대 타격을 상정한 훈련에서 “남반부 영토 점령”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의 군사 지휘 거점과 군항·비행장, 혼란 사태를 연발시킬 수 있는 곳에 대한 동시다발적 타격”을 지시했다.

 

김정은이 비핵화 가면을 벗어던진 이상 우리도 비상한 경각심을 갖고 북한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북한을 억압하지 말라고 한다. 이날 국감에선 북한이 지난 5년간 9·19 합의를 위반하고 백령도·연평도 등을 겨냥한 해안 포문을 총 3400회 개방한 사실도 확인됐다. 포문 개방은 언제라도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2010년 연평도 포격으로 우리 군인과 민간인 4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다. 김정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한다”고 했다. 민주당은 안보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전쟁이냐, 평화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북 미사일에 대응한 한·미·일 연합 훈련에 대해서는 “극단적 친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회 다수당인 나라가 비정상 국가 독재자로부터 안보를 지킬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10-30 대장 7명 전원 파격 교체… 軍 실질 쇄신 출발점 돼야

강한 군대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허물기는 쉽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군은 대적관부터 기강까지 모조리 무너져내렸다. 이렇게 군을 오도한 최고 지휘부를 바꾸지 않고는 강군은 불가능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김명수 해군작전사령관을 내정한 것을 포함해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 대장 7명을 전원 중장에서 진급시켜 임명키로 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 것은 그런 취지일 것이다. 야전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도 지난 7일 취임하면서 “적을 압도하는 국방 태세”를 강조하면서 “적이 도발하면 첫째, 즉각 응징하라. 둘째, 강력히 응징하라. 셋째, 끝까지 응징하라”고 주문했다.

윤 정부 취임 직후인 지난해 5월에도 대장 7명을 교체했지만, 군 수뇌부를 장악한 문 정권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문 정권 5년 동안 군은 ‘군사력이 아닌 대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만성적인 훈련 부족과 정신 전력 해이를 낳았다. 한미동맹과 유엔군사령부도 약화시키려 했다. 새 정권이 들어섰지만, 지난해 12월 26일 북한 무인기가 용산 대통령실·국방부까지 정찰하고 돌아갔는데도 격추에 실패한 사건처럼 침략 대비와 기강 해이를 해소하지 못했다.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망 사고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에서도 논란만 키웠다.

이번 군 수뇌부 인사는 강군을 만들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10년 만에 해군 출신을 합참 의장에 지명한 것도 육해공군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이고, 신임 육해공군 참모총장에 야전 출신 임명만으로 신 장관이 강조한 3대 응징 원칙에 충실한 군대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신 장관은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지난 5년 간 북한이 9·19 군사합의를 어기고 서북 도서를 겨냥해 북한 섬 등에 배치된 해안 포문을 총 3400여 회나 개방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북한이 합의를 지키지 않았는데도 국방위나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교체된 군 수뇌부는 이런 군의 잔재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여기에 훈련 강화는 물론 정신 전력 강화를 위해 대적관 교육을 획기적으로 개선, 싸워서 이기는 군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10-30 “하마스 못 없애면 영원히 위협” 이런 결기가 나라 지킨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인 하마스 격멸을 위한 지상전에 돌입한 가운데,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급급하다. 미국과 일본조차 국내 정치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점치며 어정쩡한 양비론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하마스보다 훨씬 더 잔혹한 북한 정권에 맞서야 하는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 기습 공격으로 민간인 1300여 명을 학살하고, 200여 명을 인질로 납치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하마스가 존속할 수 있다면, 김정은 체제에는 그보다 더한 도발을 부추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마스와 북한의 유사성과 연계성도 이미 드러났다.

하마스에 대한 공격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한 테러 조직이다. 이스라엘이 지난 27일 하마스 본거지인 가자지구에서 작전에 돌입한 것은 정당한 대응이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에 더 강력히 응징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에 하마스를 못 없애면 이스라엘의 안보는 영원히 위협받는다”고 선언했다. 이런 결기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오래 전에 세계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국제정치는 냉혹하다. 테러 기억은 옅어지고 전쟁 자제론이 대세다. 27일 유엔총회에서는 테러 규탄 문구조차 빠진 즉각 휴전 결의안이 120개국 찬성으로 통과됐다. 팔레스타인 주민을 방패 삼아 테러를 자행한 하마스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와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도 기권표를 던졌다.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마스가 ‘리틀 북한 정권’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하마스 없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사설

 

 

10-31 ‘남침용 땅굴’ 계속 찾아야 한다

권태오 前 유엔사 군사정전위 수석 대표, 예비역 육군 중장

하마스 땅굴은 북한 기술 토대
첨단 전투력 무색하게 만들어
베트남 땅굴도 전승에 큰 기여

1974~1990년 땅굴 4개 찾아내
미 해병대는 20개 넘을 것 추정
핵 몰입하고 땅굴 잊으면 위험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기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27일 본격 지상작전을 시작함으로써 대규모 살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마스가 벌인 기습작전은 통상적인 테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공격 초기에 자폭용 드론과 로켓을 집중 운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돔을 무력화했고,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 공중 침투로 8m 높이의 국경 장벽을 뛰어넘었다. 해안으로는 고무보트를 타고 기습 상륙했다. 순식간에 국경 인근 10여 개 도시와 마을을 장악했고, 무방비 상태이던 주민 200여 명을 납치했다. 기습이란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타격해 상대를 마비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말하는데, 하마스의 이번 공격은 완벽하게 이스라엘의 허(虛)를 찌른 작전이었다.

하마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은밀하게 구축해 온 땅굴을 통해 사전에 특수요원들을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 특수요원들을 통해 이스라엘 국경지대의 조기 경보망을 차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초기 기습작전을 여유 있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땅굴이 군사작전에서 사용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평시에는 성 내외부를 연결하는 은밀한 통로로 사용됐지만, 위기 때는 도피로나 피란시설로도 사용됐다. 근대 들어서는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축되기도 했는데, 적군에게 사전에 발각되지 않는다면 작전 성공을 보장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땅굴은 베트남의 꾸찌(Cu Chi) 터널이었다. 총 길이가 250㎞나 되며 그 속에는 병원과 침실·주방까지 마련돼 있어 베트콩들은 기습과 도주를 반복하며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자유 월남을 패망시키는 데 한몫했던 것이다.

현재 주목받는 하마스의 가자(Gaza) 터널은 메트로(metro)라고 불릴 정도로 가자 전역을 연결하는 총연장 500㎞의 땅굴이다. 처음엔 가자지구 주민들이 국경 경비를 피해 생필품을 밀수하기 위한 루트로 건설됐으나, 점차 군사 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해 지금은 하마스 요원들이 이동로, 무기·탄약 보관창고, 은신처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로 연결된 통로는 납치·테러를 위한 특수작전 루트로도 사용된다.

주목할 점은, 이렇게 첨단 전투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땅굴을 뚫는 기술이 북한으로부터 전수됐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에게 완전히 제공권을 뺏긴 상태였다. 계속되는 항공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공호를 구축했는데, 점차 더 깊게 파고 들어갔고 규모도 키워 나갔다. 이 작업은 휴전 후에도 계속됐는데, 김일성이 1960년대에 ‘국방에서의 자위’를 국방정책의 기조로 삼으면서 북한 전역에서는 군사기지의 지하화가 추진됐다. 땅굴 속에 전투기 활주로를 건설했고, 해안 절벽지대에는 잠수함이 발진할 수 있는 은밀한 기지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휴전선 지역에는 암반을 따라 남침용 땅굴을 뚫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우리는 1974년 11월 15일, 연천지역 제25사단의 군사분계선을 순찰하던 병력이 지표면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고, 이것을 계기로 탐색한 끝에 첫 번째 땅굴을 찾아냈다. 이때부터 군은 본격적으로 전 휴전선 지역에서 땅굴 탐색작전을 폈는데, 당시 모든 일반전초(GOP) 상황실에서는 넓은 접시에 물을 담아 혹시라도 진동으로 물결이 이는지를 주시할 정도였다. 이런 정성과 노력 덕분에 그 이듬해인 1975년에 두 번째, 1978년에는 세 번째, 그리고 1990년에는 네 번째 땅굴을 발견했다.

이후 33년이 지나는 동안 추가적인 땅굴 발견은 없었다. 남북 정상의 만남이 경각심을 이완시킨 탓이었는지,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북핵’과 미사일 대응에 몰입했던 때문이었는지 우리에게서 땅굴은 잊혀 갔다. 그러던 중, 이번 이스라엘 전쟁이 우리에게 새삼 북한의 남침용 땅굴에 대한 경종을 울려준다. 1997년, 미 해병대가 제작한 ‘북한 핸드북’은 북한의 남침용 땅굴의 수를 20여 개로 추산했음을 잊지 말고 부디 땅굴 탐색작전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