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소리 2023-10/
월간조선 10월 호
10.01 文 정권의 라임 사태 ‘부실·축소·은폐’ 내막
금감원 발표 자료, 文 정부 3년간 남부지검 기록 창고에
“라임 돈 300억원이 김영홍 개인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 자금이 민노총 장씨, 민주당 강원도당 후원회장 전씨 등에게 건네진 정황과 이들의 인적사항, 자금 흐름도 및 차명계좌 등 증거자료를 모두 제출했지만 전혀 수사가 되지 않았다.”
⊙ “그땐 펀드 구조보다… 김봉현 정치인 수사에 집중했다”(前 라임 수사 검사)
⊙ 금감원, 2000억원 규모 횡령 발표… 2020년 1월 이미 검찰 고소 접수된 사건
⊙ 미공개 ‘실사보고서 원본’ 보니… IIG·라움·쌍방울 등 실사 누락
⊙ 시작부터 끝까지 전방위적 은폐… 부실한 실사보고서 라임 조사 기초자료로
⊙ “검사 계속 교체되고, 공판 검사는 말 바꾸고… 의구심 많이 드는 사건”(법조계 인사)
⊙ “금감원 의지 있다면 잘못된 점 계속 나올 수도”(前 라임 수사 검사)
⊙ 정권 교체 이후 수사 재점화… 답보 상태였던 자금 흐름 및 용처 밝혀질 듯
⊙ “사라진 돈 1조6679억원… 추적 쉽지 않을 것”(前 라임 수사 부장검사)

▲미공개 상태인 라임의 실사보고서 전체본.
라임 사태의 핵심은 사라진 돈 1조6679억원의 행방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동안 이에 대한 수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누군가 거액을 빼돌려 썼는데, 운반 방법을 구상해준 이와 유용(流用) 과정에서 콩고물을 얻은 이들 중 극히 일부만 처벌된 상태다. 이 큰 판을 누가 설계했고, ‘길’을 누가 터줬으며, 이 돈이 결국 어디에 쓰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자금 추적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증권범죄합동수사단(합수단) 해체 이후 라임 수사를 담당했던 전(前) 검사들과 수사관의 말, 사건 당사자의 증언과 법정 기록, 그리고 실사보고서 원본을 통해 그간 정황만으로 제기됐던 ‘부실 수사’ 의혹의 면면(面面)을 짚어봤다. 금감원, 검찰, 법정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허점이 발견됐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실사보고서 원본
시작부터 부실했다. 지난 4년간 라임 사태를 지켜본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전방위(全方位)적인 은폐가 있었다”면서 “자금의 종착지와 용도를 철저히 숨기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시작’은 라임자산운용의 실사(實査)보고서다.
지난 2019년 10월.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가 터지고 한 달 뒤 라임자산운용은 회계법인에 펀드에 대한 실사를 의뢰했다. ‘투자 대상이 실제로 있었는지’ 등을 자체 검증해 보이겠다는 차원이었다. 피해자는 물론, 정치권과 금융권, 학계에서는 일제히 실사 결과에 주목했다. 결과는 2020년 2월에 나왔다. 그러나 공개된 보고서는 ‘요약본’이었다. 국회의 요구에도 전체본은 아직까지 미공개 상태다. 당시 금감원 관계자는 “실사보고서 소유권이 라임에 있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거나 제3자에게 제출하는 것도 라임이 결정할 문제”라며 “국회에서 자료 제출 요청이 와도 요약본은 제공할 수 있지만 전체 보고서는 제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실사보고서의 원본을 소유한 A씨를 어렵게 만나 이를 들여다봤다. 1, 2차로 작성된 실사보고서는 총 494페이지에 달하며, ‘본 보고서에 수신인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회계법인이 제시한 Hold Harmless Letter(면책확인서)에 서명하여 이를 제출하지 아니한 자는, 본 보고서에 접근 권한이 없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확인 결과 실사는 한국예탁결제원에 등록된 펀드의 개수보다 적은 규모로 이뤄졌다. 현재까지 드러난 라임의 자(子)펀드는 173개인데, 157개에 대해서만 실사가 진행됐고,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금 흐름 감지와 라임 사태를 촉발한 ‘IIG펀드 거래 손실’ 배경 또한 누락돼 있었다. 이 밖에도 라임의 아바타운용사인 라움자산운용과 자금 운반 조직도에 속해 있는 쌍방울, 필룩스 등 코스닥 기업 등에 대한 실사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추가 조사 진행 여부도 불분명했다. 참고로 ‘경제공동체’로 지목된 쌍방울 김성태·KH필룩스 배상윤 회장은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변호사비 대납 의혹, 대북송금 의혹 등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이다.
이렇듯 부실한 실사보고서는 라임 조사의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는 라임의 형사소송에서 제출되기도 했다. A씨는 “외부에는 철저히 기밀에 부쳤던 실사보고서가 수사 근거 자료로 쓰인 것”이라면서 “지난 2022년 2월 라임이 파산했음에도 이를 세상에 내놓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자본시장 흐름에 밝은 A씨는 이어 “실사는 부실하지만, 이를 통해 펀드 전체적인 구조는 대략 파악이 가능한데, 라임은 비공개 펀드의 위험을 공개 펀드에 전가(轉嫁)하는 불법성을 띤 구조로, 개별 펀드의 수익률, 환매 가능 여부가 아니라 태생 자체가 특혜”라면서 “이 구조를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당국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자금 이동의 흔적도 보인다. 애초에 자금을 움직이기 위해 설계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실사에서 빠진 사태 촉발 원인 ‘IIG’
라임 사태는 해외로 빠져나간 돈 때문에 발생했다. 촉발이 된 건 미국 사모펀드인 인터내셔널 인베스트먼트그룹(IIG)에 투자된 뒤 종적을 감춘 2억 달러(2438억원)다. 지난 2017년 5월 라임은 신한금융투자와 명의신탁을 맺고 2억 달러를 IIG에 투자했다. 두 차례에 나눠서 IIG의 두 펀드(GTFF·STFF)에 각각 7000만 달러, 1억3000만 달러를 넣었다. 그런데 라임이 투자할 당시 IIG는 이미 부실기업이었고, 2019년 11월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는 증권 사기 혐의로 IIG 등록을 취소하고 펀드 자산을 동결했다. 라임 측은 “우리도 IIG에 사기를 당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SEC의 IIG 기소장에 따르면 IIG는 이미 2007년부터 돌려 막기로 근근이 버티는 회사였다.
기소장에 따르면 STFF의 경우에는 라임과 신한금투가 먼저 IIG에 조성을 제안한 펀드기도 하다. 라임과 신한금투는 또한 2018년 6월 IIG펀드의 기준가 미산출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판매사에 이를 알리지 않고, 오히려 기준가가 매월 0.45%씩 상승하도록 지수를 조작했다.
그해 11월 라임과 신한금투는 IIG가 미국 금융당국에 적발됐다는 메일을 수신했지만, 부실을 다른 정상 펀드에 떠넘기기 위해 펀드 구조를 바꾸고, 싱가포르 로디움 펀드에 수익권을 넘겼다. 그러나 이 역시 깡통이어서 결국 2438억원은 증발했다. 싱가포르는 해외 자산 도피처로 유명한 곳이다.
파나마로 간 돈의 최종 수혜자
SEC는 IIG가 한국에서 돈을 끌어오기 직전에 빼돌릴 창구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주목했다. 라임이 돈을 입금하기 직전에 IIG는 ‘파나마론(Panama Loans)’이라는 상품과 함께 유령회사들을 만들어놨다. 돈이 들어오면 곧장 유령회사들에 흘러가는 구조였다. 자금의 ‘용도’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기소장에는 IIG에서 돈을 빼돌리는 데 관여한 라임의 대리인도 비실명으로 등장한다. ‘직원-1(Employee-1)’인데, 이 인물의 변호사가 법원에 제출한 요청서에는 “‘직원-1’이 수사에 협조했으니 수사 자료에 이 직원의 신원을 노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구절이 있다. 미국 수사당국은 ‘직원-1’ 등의 도움으로 돈의 행방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외 은닉재산 추적·환수·국제소송 전문인 백왕기 변호사는 “파나마의 유령회사들은 라임이 돈을 은닉하기 위해 만든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SEC와 FBI 조사 기록에 따르면 2억 달러 중 IIG의 사기죄는 9500만 달러에 한해서 인정됐다. 나머지 1억500만 달러는 사기죄가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의뢰인(라임)의 요구대로 돈이 사용됐다는 의미다. GTFF에 들어간 돈은 IIG가 돌려 막기로 모두 사용했다고 보이지만, STFF에 들어간 1억3000만 달러 중 1억500만 달러는 추적 및 환수의 여지가 남아 있다. SEC와 FBI는 1억500만 달러가 파나마의 페이퍼컴퍼니 5개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회사 명단과 함께 구체적으로 밝혔다. 모두 파나마에 있는 법인인데, 현지 변호인들과 접촉하면 각각의 법인 GIS(등본·주주명부)를 발급받을 수 있다. 페이퍼컴퍼니일 수도 있고, 페이퍼컴퍼니끼리 감싼 형태일 수도 있지만, 이 관계를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1억500만 달러의 최종 수령자가 나올 수도 있다. 그가 사태의 범인 중 주범일 수 있다.”
이런 내용 모두 애초에 실사되지 않은 거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2019년 10월 14일 환매 지연 사태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 사진=뉴시스
검찰 또한 IIG 펀드와 관련 신한금투 임직원과 이종필 라임 전 부사장을 기소한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지었다. 파나마론으로 빠져나간 자금의 추적은 없었다. 라임을 수사했던 B 전 검사는 파나마론과 관련해 “IIG가 폰지 사기로 돈을 어떻게 돌렸는지까지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었고, 라임에서도 그런 내용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다”면서 “라임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있는 회사(로디움 펀드)에 다시 매각을 하는 절차들이 있었다. 이건 수사 내용에 들어가진 않고 정황으로 들어갔던 건데, 이와 관련해서는 로펌들이 민사적으로 국제 분쟁 차원에서 대응하는 걸로 안다”고 했다.
백왕기 변호사는 “SEC와 FBI 기소 시점이 2019년 11월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련 기소를 하면서 자료들이 축적된 상황이었다”면서 “이들과 공조해 충분히 자금 추적이 가능했지만,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관점에 따라 ‘수사 마무리’의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행위자에 대한 처벌 여부’가 주요 쟁점”이라면서 “이 사건에서 행위자는 라임의 대리인 ‘직원-1’이며, 파나마로 흘러간 돈의 최종 수령자까지 밝혀야 수사가 마무리됐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라임의 IIG 투자가 ‘결과적으로’ 부실했다고 판단했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IIG 펀드 손실과 관련 재판을 받은 이는 신한금투 임직원과 이종필 부사장뿐이다. 그런데 이들의 판결마저도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공개된 라임의 2심 판결문에 따르면 막상 이들이 IIG 투자로 피해자들에게 손실을 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수조작’에 대한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IIG 펀드 손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셈이다. 일반적으로 판결문은 선고로부터 일주일에서 길어도 한 달 이내 열람이 가능한데, 라임의 2심 판결문은 열람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 라임 관련 사건으로 재판에 참석했던 한 법조계 인사의 말이다.
“덩어리가 굉장히 크고, 방대한 사건이긴 하지만, ‘이게 왜 안 밝혀지는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 몇몇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검사는 계속 교체됐고, 공판 검사가 이건 된다고 했다가, 또 안 된다고 하는 등 말을 바꾸고, 여러모로 의구심이 많이 드는 사건이었다.”
2000억원 횡령자금, 검찰은 알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김영홍 회장이 횡령한 라임 돈 300억원으로 인수한 이슬라리조트. 사진=카지노 업자
금감원은 지난 8월 24일 라임이 투자한 5개 회사에서 2000억원 규모의 횡령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처음 발표했다. 이 중 약 300억원은 김영홍 메트로폴리탄 회장이 유용했다고 밝혔다. 유용자금 중 276억원은 2018년 12월 필리핀 이슬라리조트를 차명으로 매입하는 데 썼고, 25억원은 각각 장모씨와 전모씨에게 건네진 정황이 있다고 했다. 장씨는 민노총 출신으로, 이재명의 외곽 조직인 ‘기본경제특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고 전씨는 민주당 강원도당 후원회장을 지냈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2000억원의 횡령 정황을 발견하고 검찰에 통보했다”며 “해당 자금이 어떻게 악용됐는지는 수사당국이 확인해야 할 수사의 영역”이라고 했다.
금감원이 ‘처음 발표’했지만, 사실 검찰은 3년 전부터 이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지난 2020년 1월부터 고소가 접수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슬라리조트와 채권 추심을 벌이던 고소인은 당시 김영홍을 특경법상 횡령·배임과 자본시장법 위반, 도박개장죄, 범죄수익은닉죄 등으로, 장씨와 전씨는 강제집행면탈죄로 수차례 고소했다. 고소인은 “라임 돈 300억원이 김영홍 개인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 자금이 민노총 장씨, 민주당 강원도당 후원회장 전씨 등에게 건네진 정황과 이들의 인적사항, 자금 흐름도 및 차명계좌 등 증거자료를 모두 제출했지만 전혀 수사가 되지 않았다”면서 “이 정부 들어 이제야 계좌를 들여다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김영홍 사건의 경우 2020년 11월 남부지검으로 이관됐는데, 3년간 손을 대지 않아 지난해 5월 참고인 중지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김영홍 못 잡은 이유
부동산 시행사인 메트로폴리탄은 라임이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곳이다. 1조6679억원 중 3500억원(최대 6000억원까지 추산)이 흘러들어 갔고, 이 돈은 메트로폴리탄 20여 개 계열사로 흩어진 뒤 대부분 증발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메트로폴리탄과 관련된 인물은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문재인 정부 당시 라임 관련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이도 있다.
현지 카지노 업자 등에 따르면 김영홍은 현재 필리핀 루손섬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적색수배가 떨어졌음에도 버젓이 아바타 카지노로 도피자금을 벌고 있다. 김영홍의 부친에 따르면 김씨는 2015년 국적이 말소됐다. 김 회장의 ‘오른팔’ 등에 의하면 ‘중국 국적’이 유력하다. 그러나 당시 남부지검은 그가 외국인 신분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홍을 왜 못 잡았느냐’는 질문에 라임을 수사했던 전직 검사 A씨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는 수사 공조가 잘되다가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필리핀 현지 경찰이 멈춰버렸다. 중간에 김영홍 측근 한 명(정모씨)이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돼 들어오고 나서는 (김영홍이) 더 꽁꽁 숨어버렸다. 아바타 카지노의 운영으로 도피자금은 계속 돌고 있으니까 잡으려고 한다면, 쌍방울 김성태 회장처럼 이슈가 되면 잡을 텐데, 사실 (이슈에서) 약간 떠나 있는 감이 있었다.”
고소인에 따르면 현재 금감원에서 발표한 금액은 ‘계좌추적’만 한 규모다. 수표 추적까지 한다면 횡령 금액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해외 은닉자산도 미리 알았다
이번에 금감원에서 처음 발표한 횡령 금액에는 캄보디아 리조트 개발 사업에 투자된 1억 달러(1279억원)도 포함돼 있다. 라임은 지난 2018년 10월 상장사 S사(社)와 공동으로 캄보디아 리조트 개발 사업을 진행했는데, S사 임원 등이 투자금을 조세피난처 소재 법인 등에 이체해 횡령한 정황이 확인됐다. 라임은 이때 자신의 아바타운용사이자, 김영홍이 대주주인 라움자산운용에 주문자위탁생산(OEM) 펀드 설정을 맡겼다.
검찰은 이 자료 또한 3년 전부터 확보하고 있었다. 지난 2020년 10월 해당 사업의 이해관계자가 라임이 캄보디아 부동산 투자 명목으로 홍콩 소재 특별목적회사(SPV)인 위 탈렌트(We Talent)에 1억 달러를 송금한 기록 등 횡령 내역을 제보했기 때문이다.
제보자는 20페이지에 달하는 ‘해외 은닉자산 제보서’에 김영홍, S사 대표이사 등 피제보인 11명의 인적사항과 횡령·배임 혐의에 대한 S사 공시자료 및 위 탈렌트 홍콩 주주명부 등 20개 증거자료도 함께 첨부하며 “위 탈렌트로부터 제3국으로 빠져나간 돈의 흐름을 쫓아가며 조사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까지 썼다.
이 제보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5월 설치한 대검찰청 ‘해외범죄수익환수 합동조사단’에 제출됐지만, 합조단은 이를 서울남부지검에 넘겼고, 제보자에게 3년간 단 한 번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다.
제보자는 “조세 피난처로 돈을 모두 도피시켰고, 신속하게 추적해서 환수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합조단에서 맡아달라고 했었다”면서 “그런데 남부지검으로 이관됐고, 연락도 한 번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3년이 지나 금감원 발표가 나와 의아했다”면서 발표 직후 남부지검 관계자와의 통화 내용을 들려줬다. 통화에서 제보인이 사건 진행 상황을 묻자, 검찰 관계자는 “피제보인인 김영홍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기소 중지 상태가 돼 수사가 재개되지 않았다”면서 “그 자료는 기록 창고에 보관돼 있다”고 했다. 김영홍이 해외로 도피한 건 2019년 10월이다. 제보인은 “결국 이 제보서는 3년 동안 창고에 있었다는 말”이라고 했다.
펀드 구조 들여다보지 않은 검찰
이번 금감원 조사 발표로 ‘전 정권에서 덮었던 것을 제대로 수사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합수단 해체 이후 라임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검사들은 “당시 금감원에서 통보받은 자료는 모두 충실하게 수사했다”면서 ‘전 정권에서 덮었던 것을 재조사·재수사한다’는 분위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말했다. A 전 검사의 말이다.
“그때 라임 펀드 자체에 대해서는 수사팀에서 직접 건드렸다기보다는 금감원과 협조했다. 당시 금감원에 ‘펀드 전체를 전수조사해서 문제 있는 것을 빨리 보내라’ 해서 받았고, 펀드 관련해서는 금감원에서 받은 자료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이번에 문제 된 부분(2000억원 횡령 건)은 (내가 수사할 당시) 금감원에서 넘어온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이어 “물론 그때 금감원과 공조가 잘되긴 했는데, 워낙 사건이 크고 이슈가 되다 보니 문제 있는 걸 다 못 잡아내는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면서 “이번에는 그때 미처 발견 못 했던 부분을 결국 다 들여다본 것이고, 펀드 간 판매 과정에서 구조를 바꾸는 부분(라임의 모자펀드 구조)은 사실 그 당시에는 관심이 뜨거운 주제는 아니었다”고 했다. 참고로 라임은 모자펀드 구조변경을 통해 IIG 등 해외무역펀드의 손실 발생을 숨길 수 있었다. 이를 금감원과 검찰 모두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B 전 검사 또한 “당시 (라임) 수사팀이 3개가 있었는데, 다른 팀에서 수사가 안 끝난 부분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팀에서는 금감원 통보를 받은 내용들을 모두 수사했다”면서 “금감원 1차 조사 후 검찰에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수사하는 게 절차인데, 당시 금감원에서 통보받은 내용에 대한 수사는 다 마무리했다. 지금 금감원에서 의지를 갖고 들여다보면 잘못된 게 더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금감원이 시간 벌어줬다”
검찰은 구체적인 고소, 고발 등에 대해 독자적인 수사를 하지만 자본시장법 관련 사건은 많은 부분 금감원의 통보, 수사의뢰, 고발을 바탕으로 한다. 자본시장에 대해서만큼은 금감원이 더 광범위한 조사권한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수 있다. 당시 금감원에서는 왜 이 자료를 넘기지 않았나.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지난 8월 24일 기자 브리핑을 통해 “2019년 검사의 초점은 펀드 환매 중단 사유, 판매사 부당 권유, 불완전 판매 등이었다”면서 “이번 검사는 피투자기업의 횡령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 검사에서는 (용처 등) 구체적인 자금 추적을 했다”고 했다. 이는 지난 정권에서는 구체적인 자금 추적을 안 했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사태 발발 당시 금감원의 책임론도 안팎에서 제기됐다. 2019년 7월 라임의 수익률 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금감원은 “필요하다면 검사에 나설 것”이라며 느긋한 태도를 취하다, 한 달 뒤인 8월부터 라임운용에 대한 검사에 나섰고 10월 초 조사를 끝냈다. 하지만 라임은 조사가 끝난 직후인 10월 9일 환매 중단을 발표했고, 이미 2달여간의 조사를 마친 터라, 당국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따랐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당시 금감원은 사모펀드 특성상 당국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감원 관계자는 “사모펀드는 운용사와 투자자 간 계약”이라며 “계약서에 명시된 ‘환매 중단’을 당국이 지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라임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던 한 금융사 관계자는 “금감원에서는 환매 중단 사태 훨씬 이전부터 라임의 부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서 “내부에서는 ‘금감원의 소극적 대응이 (라임에게) 시간을 벌어줬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했다. 그 무렵 금감원 출신 청와대 행정관이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에게 돈을 받고 금감원의 라임 관련 문건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
“김봉현 (옥중편지의) 정치인 위주 수사”

▲민주당 정치인들에 대한 라임 로비 의혹이 불거지던 2020년 10월 무렵 김봉현은 옥중편지를 통해 당시 로비가 있었던 건 여권이 아닌 야권(국민의힘) 정치인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은 2020년 4월 검거 후 이송 중인 김봉현. 사진=조선DB
라임 돈은 대부분 문재인 정부 때 움직였다. 보유자금 중 약 절반이 들어온 시기며, 공격적인 투자도 이때 이뤄졌다. 사모펀드 투자자 제한을 대폭 완화한 문 정부는 ‘사모펀드 정부’로도 불렸다. 라임, 옵티머스, VIK, 디스커버리, 조국 펀드 사건 모두 그때 터졌다.
2019년 7월 처음 의혹이 제기된 라임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건 2019년 10월경이다. 당초 라임 수사는 ‘여의도 저승사자’로 불리던 서울남부지검 합수단이 담당했다. 그러나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은 그 직후인 2020년 1월 합수단을 돌연 해체했다. 일부 검사들은 ‘금융비리 사건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반발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을 앞세워 이를 강행했다. 그 여파로 94%(2016~2019년 평균)이던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 처리율은 2020년 14%로 급락했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지난 8월 29일 기자들과 만나 “(합수단 해체가 수사에 미친)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나, 수사의 동력,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움직이는 건 영향이 컸다”고 했다. 그는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합수단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특히 합수단 해체 시점은 금감원에서 라임 조사를 진행하고, 검찰에 이를 통보하기 직전이었다. B 전 검사의 말이다.
“합수단 해체 당시 금감원에서는 라임 펀드 자체에 대한 내용들을 조사 중이었고, 검찰에 통보하기 전이라, 검찰에서는 라임 펀드에 대한 문제점, 이를테면 펀드 환매라든지 이런 부분에 대한 수사는 일절 이뤄지지 않던 상황이었다. 합수단 해체 이후 금감원에서 검사를 마쳤고 검찰에 통보할 예정이라는 내용을 받았다.”
추 장관은 이어 2010년 10월에는 “중앙·남부지검은 윤석열 총장 지휘를 받지 말고 결과만 보고하라”면서 돌연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 김봉현의 옥중편지를 기해서다. 라임과 관련 민주당 인사들의 로비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오던 무렵 김봉현은 옥중편지에서 “라임에 연루된 여권(민주당)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면서 일부 야당(국민의힘) 정치인과 ‘전관 변호사’에게 로비한 정황, 그리고 윤석열 사단 검찰의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라임 사건은 ‘야권(국민의힘) 정치인 및 검찰 게이트’로 탈바꿈했다.
실제로 A 전 검사는 “그 무렵 이미 기소돼 재판 중인 관련자들 공소유지 관리 외에는 김봉현과 관련된(옥중편지에서 언급한) 정치인들을 주로 들여다봤다”고 했다.
드러나지 않은 특혜 펀드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합수단 해체로 수사의 속도가 떨어진데다 김봉현 옥중편지로 인해 수사 인력이 낭비되면서 초동수사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지난 4년간 검찰이 수사한 건 자금 추적이 아닌 라임 관련자들의 리베이트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부당이득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라임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던 한 금융사 관계자는 “추 전 장관이 어떻게든 육탄방어를 한 건 라임의 돈이 (당시) 여권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차녀 가족이 가입했던 비공개 펀드 ‘테티스 11호’의 실체를 밝혀낸 정구집 라임피해자대책위원회 대표는 “대형 금융사들이 신생 운용사인 라임에 2조원 가까운 금액을 맡긴 배경을 조사해야 실세(實勢)와의 네트워크를 밝힐 수 있다”고 했다.
“예컨대 대신증권 1심(양벌규정) 판결문에는 ‘대신증권이 본사 차원에서 특권층(VIP)과 일반 가입자들을 차별 조치했다’는 내용을 명시했고, 2019년 5월경부터는 대신증권 사장이 VIP에 대한 신규 가입 중단 조치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도 있다. 실제로 일반인들이 환매 중단으로 100% 손실을 볼 때 ‘안타레스’ ‘폴라리스 1호’는 환매 가능에다, 수익률도 약 40%를 넘었다. 그러나 라임 사태와 관련 처벌받은 건 일개 금융사 직원들뿐이다. 그간 금감원과 검찰에 금융사의 개입 여부를 조사해달라고 수차례 제보했지만, ‘불법성이 없다’며 종결됐다.”
백왕기 변호사는 “신생 운용사의 펀드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판매될 수 있었던 배경, 사태를 인지하고도 시간을 끌면서 펀드 금액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라임을 방조하고, 이용한 사람들, 무엇보다 1조6000억원이 결국 어디에 쓰였는지에 대한 조사가 추가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서 “피해자들의 금전적 회복에 더해 국가 정의감 회복 차원에서도 라임 사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전 라임 수사 지휘 검사 “추적 쉽지 않을 것”
금감원은 이번 재조사 과정에서 계좌 추적에 더해 FIU를 통한 자금 분석까지 모두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은 FIU를 통한 자금 분석 또한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라임 수사를 담당했던 A 전 검사는 “FIU 정보가 대검 범죄정보과 등을 통해 구체적인 행위자와 혐의점을 포함해 내려오면 일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당시 라임과 관련 그러한 정보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부임 후 ‘1호 지시’로 부활시킨 남부지검 합수단 또한 최근 라임 펀드 재수사를 본격화한 상태다. 합수단은 전체 자금의 흐름은 물론 자금이 어느 지점에서 최종적으로 끊겼는지 등을 살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자금을 왜 주고받았는지와 어느 용도로 사용됐는지도 규명 대상이다. 남부지검 관계자는 “횡령 자금이 사적 유용인지, 영업활동 등의 로비 자금인지 등 돈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따져볼 예정”이라고 했다.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라임 사태가 문제 된 지 4년 가까이 지났으나 아직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구제는 진행 중”이라면서 “오랜 시간 고통받은 피해자들을 위해 추가 혐의가 명백히 드러나 신속한 절차 진행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합수단 해체 이후 라임 수사를 지휘했던 한 전직 검사는 ‘사라진 돈 1조6679억원의 실체와 행방이 이번에 밝혀질 것 같냐’는 질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계좌가 해외에서 끊긴다”고 했다. 재수사 결과가 이 말을 반론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10.02 이종찬 광복회장께 묻는 ‘대한민국의 元年’
“법통의 계승은 어디까지나 ‘정통성’의 계승을 의미”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사진=국가기록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나라 헌법 전문(全文)입니다. 지난달 25일 이종찬 광복회장님께서 신원식 국방부장관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읽어보라며 질타하셨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느냐는 물음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들이미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너무 철학적인 얘길 꺼냈습니다만 통상적인 정의는 이렇습니다. 인구, 영토, 정부, 주권 등이 있어야 국가입니다. 이는 1933년 12월 26일 체결된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에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국제사회의 합의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은 대한민국의 원년(元年)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김영수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2000년 저술한 <한국헌법사> 237 페이지의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에 성립되어 그 오랜 역사과정 중 비록 수십 년의 투쟁을 하였지만 하나의 합법정부로서 승인을 받은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역사적 산물이었고…정신상에 있어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대표한 유일한 임시정부임이 자명한 사실이다.”
작고(作故)하신 헌법학계 최고 권위자, 권영성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1934~2009년)는 1996년 저서 <헌법학원론> 125 페이지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의 계승이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헌주의적·자주독립적·민족자결주의적 성격과 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헌법학자인 성낙인 전 서울대학교 총장도 2019년 <헌법학> 123 페이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적법성’이 구분돼야 함을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어디까지나 정통성의 계승으로 이해되어야지 실정헌법질서상의 적법성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 전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바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통의 계승은 어디까지나 ‘정통성’의 계승을 의미하며 실정헌법질서에서 ‘적법성’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9년 국회입법조사처와 한국헌법학회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과 헌법의 과제” 세미나를 공동 개최하였습니다. 이때 장영수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1919년 건국 주장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장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최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다만, 그로 인하여 불필요한 갈등이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새로운 시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fact)을 외면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의도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등과 유사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1919년을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보는 데 대해선 필연적으로 임시정부의 법적 지위 논란이 따라붙습니다.
물론 광복회장님께선 대한민국의 ‘원년’을 1919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기원전 2333년 건국을 했고, 다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기는 1919년이라며 선을 그으셨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원년’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두 개념을 두부 자르듯 딱 잘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원년의 사전적 뜻부터가 ‘나라를 세운 해(年)’입니다.
지난 7월 광복회장님께서 김순덕 대기자의 칼럼에 반박하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그가 소속한 <동아일보>에 기고하신 ‘편지’였더군요. 저도 감히 사견을 올리고자 합니다.
먼저 역사적 사실입니다.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한일합방 이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연해주의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대동단결선언 등입니다. 3·1운동 전후로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 신한민국정부, 상해(上海)의 임시정부 등 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동해 1940년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임시정부가 향후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실천해야 할 정책대강을 천명하기 위해 ‘건국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의 활동은 건국기(建國期) 이전의 나라를 되찾는 복국기(復國期) 활동으로 규정했지요.
1945년 드디어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38도선 이북에 소련, 이남에는 미국이 진주하는 상태였습니다. 해방은 되었지만 대한제국의 패망으로 빼앗긴 주권을 되찾지 못했지요. 진정한 광복이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주권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에 이어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도 같은 해 9월 9일을 이른바 ‘북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건국’이라고 참칭하고 있습니다.
‘건국’은 국가 구성의 필수요건을 갖춰가는 과정의 완성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의 국가 건립행위는 1919년 3·1 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형태를 갖추고 독립운동을 지휘한 애국지사 단체로 볼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가구성의 필수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임시정부는 해방 이후 귀국할 때도 개인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임시정부의 수립을 건국으로 인정하기는 곤란합니다.
1945년 9월 3일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 가려하는 과도적 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복국(復國)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이다.”
임시정부의 요인 어느 누구도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돌아오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정부와 대통령들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8월 15일을 건국 10주년으로 기념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8월 15일 건국 20주년 행사를 치뤘습니다.
DJ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3·1절 기념식에서 1948년 8월 15일을 ‘제1의 건국’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 각종 행사를 열었고 제2의 건국을 하겠다고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해방 후 4대 성취 업적’에 대해 “건국, 6·25전쟁 극복, 고도성장, 평화적 정권교체”라고 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인정한 셈이지요.
문제는 문재인 정부 때 불거졌습니다. 2015년 11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우리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反)헌법적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反)국가적 주장이며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이다.”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소모적인 논쟁의 불씨를 던진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은 이념이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이종찬 광복회장님, 솔직히 저는 실망스럽습니다. 광복회장님께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내셨던 시절, 저도 한 지붕 아래에 있었습니다. 쓴소리를 꺼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특히 우당(友堂) 선생의 손자이신 광복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은 누구보다도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낸 계기는 황당하리만치 단순했습니다. 너무도 간단한 사실, 대한민국의 원년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것입니다. 국정원 정규과정 1기 대선배님, 새까만 21기 후배가 감히 직언(直言)을 올리오니 귀기울여 주시기를 바라옵습니다.
월간조선 10월 호 글 김석규 한반도안보전략연구원 고문, 행정학박사
10.03 ‘북측’이라 하지말라니 생각나는 5년 전 ‘남쪽 대통령’
“북측이라 말라”는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남쪽 대통령’이라던 문재인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9월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북한 주민 15만명에게 연설했다. 그날 그는 자신을 ‘남쪽 대통령’이라고 했다. “남쪽 대통령으로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소개로 여러분에게 인사말을 하게 되니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남한 대통령이라고 해도 기가 찰 노릇인데 남쪽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날 연설에서 ‘북녘 동포 형제 여러분’이라고 했으니 우리 국민들은 남녁 동포인셈이고, 그러니 남녁 대통령, 남쪽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는 식인 모양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이름 대신 방향으로 불러도 될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5년 전 일을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된 것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 선수단 관계자들이 “북측, 북한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여자 농구 남북 대결에서 패배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 선수단 관계자는 ‘북한’이라고 부르는 기자들에게 “우리는 DPRK다.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부르지 말라.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한다.” DPRK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의 영어 약자다.
다음날 여자 축구 남북대결에서 승리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 리유일 감독은 ‘북측’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북측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라며 “그걸 좀 바로 합시다”라고 했다.
북한 축구 감독은 ‘북측’이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불쾌하다고 한다. 한국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다고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5년 전 스스로 ‘남쪽 대통령’이라고 했다. 북한이 기준이고 그 남쪽에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가 찰 일이다.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 소득이 아프리카의 최빈국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세계 10위로 일어섰다. 월남전 때 허리까지 잠기는 늪에서 젊은 군인들이 베트콩하고 싸워서 받은 전투수당 목숨값, 중동의 찌는 더위 속에서 일하고 받은 돈, 산업역군이라고 했지만 다들 공순이라고 했던 어린 여공들이 가발 만들어 판 돈 악착같이 모아서 만든 나라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의 함보른 탄광에 가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난 일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애국가를 부르다가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울었다. 먼 독일까지 가서 막장 속으로 들어간 광부들, 독일인 간호사들이 꺼리는 힘든 일 도맡았다는 간호사들. 국민들을 그런 힘든 일하라고 떠나보낸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부인도 함께 울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만9000여명의 광부와 1만여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포스코가 지금은 세계 최고로 꼽히지만, 처음 제철소를 만들 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잘못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했던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만든 회사들이 하나 둘 늘어나서 지금 번듯한 나라를 만들었다.
우리보다 살기 좋은 나라도 많다. 땅은 좁고, 천연 자원은 적고, 분단된 나라에서 맨주먹으로 그래도 이만큼 왔으니 대한민국은 세계에 자랑할만한 나라다.
우리가 북한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내세우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출발은 우리가 북한보다 못했다.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는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많았다. 작년 연말에 나온 통계를 보면 우리가 북한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8배나 많다. 북한은 142만3000원이고, 우리는 4048만2000원이다.
통일은 해야된다. 이렇게 갈라져 지낼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남쪽 대통령’이라고 낮춰가면서, 북한 비위 맞춰가며 할 일은 아니다. 지난 세월 우리 피땀 다 바닥에 버리고 할 수는 없다. 자유와 민주주의 다 버리고 통일 먼저 할 일은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5년 전 ‘남쪽 대통령’이라고 한 날 “이번 방문에서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보았다는 놀라운 발전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북한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계마저 삼켜버리고, 세계의 지탄을 받으면서 만들어낸 핵폭탄은 아닐테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초대형방사포도 아닐텐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라고도 했다. 자고 나면 미사일 발사 소식이 들리는 지금이 새로운 미래인가? 문 전 대통령은 아직도 김정은이 찬사와 박수를 받을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평양에 가서 “남쪽 대통령입니다”라고 할 대통령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이진석 경제부 선임기자
10.04 망국으로 가는 길은 거짓말로 포장되어 있다
고용·부동산 정책 실패 감춘
文 정부의 통계조작 뉴스 보며
폴란드의 사례가 떠올랐다
현실과 이데올로기 충돌하면
잘못이 현실에 있다는 건가
공산당 정권은 거짓말 달고 살아
조작된 통계, 언젠간 부메랑
1990년 시장경제를 향해 첫발을 뗀 폴란드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4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로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고, 물가상승률은 700%에 육박했다. 실업률이 치솟고 빈곤층의 처지는 날로 나빠졌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개혁의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은 첫 민주 정부의 부총리이자 재무장관 레셰크 발체로비츠였다.
발체로비츠 계획이라 불리는 그의 개혁은 오늘날 폴란드 경제의 성공 신화의 원동력이 됐다. 1989년부터 2018년까지 폴란드의 국내총생산은 826.96% 성장해 아일랜드를 제치고 유럽에서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폴란드는 호주와 더불어 30년 가까이 경제가 한 번도 뒷걸음질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
사회주의가 남긴 만신창이의 경제를 물려받았지만, 실업률을 4% 이하로 묶어두고 꾸준히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인 폴란드 경제의 성공은 ‘비스와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경이적이다. 유럽연합의 골칫거리인 정치와 비교하면 경제의 성공은 더 두드러진다.
발체로비츠의 개혁이 폴란드 경제의 성공 비결이라는 데에는 국내외의 거의 모든 경제학자가 동의한다.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십 수 개의 유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데서도 경제학자 발체로비츠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 정작 당시에는 그의 실험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많았고 비판도 거셌다. 시장경제에 익숙하지도 않고 적응하기도 힘든 기성세대의 불만이 특히 컸다. 가난해도 안정된 삶을 떠나 요동치는 시장의 흐름에 불안하게 의탁했던 일반 사람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1990년대 내내 폴란드 사회에 대한 참여적 관찰자였던 나도 회의적인 편이었다.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폴란드 사람들의 삶이 너무 안쓰럽고 고돼 보였다. 그러니 43세의 젊은 경제학자 발체로비츠가 짊어져야 했던 부담의 크기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발체로비츠 계획의 핵심은 공산당 정권에서는 ‘투기’라고 범죄시했던 개인들 간의 거래를 합법화하는 시장경제의 도입이었다. 큰 우려에도 불구하고 통계를 잡아 보니, 시장경제 도입 이후 여러 지표가 믿을 수 없이 나아졌다.
실무 담당자들이 이 통계를 자랑스럽게 보고하니, 발체로비츠는 “이제 더는 통계를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그 자신 공산당 정부의 ‘계획과 통계’ 전문가로 통계 조작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또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한 것이다.
나중에야 발체로비츠는 보고받은 통계 지표가 사실임을 깨닫고, 시장경제의 활력이 이렇게까지 좋으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경제 통계에 대한 이 일화는 자기가 만든 개혁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고민하는 양심적 경제학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 청와대의 고용, 부동산, 소득 관련 통계의 왜곡과 조작에 대한 감사원 감사 보도를 접하고 보니 문득 발체로비츠의 그 일화가 다시 생각났다. 자신의 개혁안을 정당화하는 통계 수치마저 의심하고 되짚어보는 경제학자 발체로비츠와 통계청장을 갈아치우면서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통계를 우려낸 문재인 정권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토록 거짓말을 많이 한 정권이 그토록 오래 집권했다는 데 놀랄 때가 많다. 사실과 통계보다 선전과 선동을 중시한 공산당 정권은 거짓말을 달고 살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제국주의의 사주 때문이고 계획경제의 실패는 미국이 수퍼컴퓨터를 수출 금지 품목으로 묶은 탓이라 강변하면서, 군중대회 등의 이벤트로 현실을 호도했다.
문재인 청와대도 경제를 엄중한 현실이 아닌 정치적 이벤트처럼 생각한 것 같다. 특히나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고용 정책과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통계 조작으로 가리려고 했다면, 자신 때문에 더 고단해진 ‘상용직’이나 무주택 서민들을 우롱한 처사다. 현실이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으니 잘못은 현실에 있다며 현실 탓을 한 것이다.
망국으로 가는 길은 이데올로기로 건설되고 거짓말로 포장되어 있다. 짝퉁 진보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사오입’ 개헌 정족수의 조작은 자유당 보수 정권의 몰락 신호였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숫자의 복수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조선일보 임지현 서강대 교수·역사학
10-04 사법적·정치적 엄단 절실한 통계 조작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직전 정권의 청와대와 국토교통부 및 통계청 등이 소득·부동산 가격·고용 등의 3대 주요 통계를 여러 차례 조작했다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 발표가 지난달에 나왔다. 감사원은 전 정권의 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 및 경제수석, 통계청장, 부동산원장 등 22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했다.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는 중벌을 피할 수 없는 대형 범죄다.
경제 통계치를 비롯한 모든 사회 통계치는 작금의 사회 상황을 수치로 표현한 것으로, 정부 정책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정부가 향후 방향을 설정하고 국민이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된다. 검찰 수사를 통해 통계 조작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는 우선 전 정권 관련자들의 지성적 수치와 도덕적 파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책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지력(知力)이 부족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부도덕한 짓이기 때문이다.
정권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가진 수많은 사람의 집합체이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전 정권은 앞뒤가 뒤바뀐 소득주도 성장 정책과 주택 공급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는 주택 정책으로 반복 실험했다. 그리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통계 조작으로 국민을 기만(欺瞞)했다.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는 이를 조작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대학의 실험이나 실증 연구에서 데이터나 결과의 조작은 퇴교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학문적 범죄로 취급된다. 그런 만큼 사회 통계를 조작하는 것은 전 국민을 속이는 조직적인 악성 범죄다.
전 정권의 소득주도 성장과 고용 정책, 그리고 주택 정책은 미래는커녕 현재의 생존도 곤란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만들어 미래로 이어가야 할 전도에 먹구름이 낀 것이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처럼 과거를 조작해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뒤탈만 없다면 이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통계 조작과 은폐를 위해 일부 부처는 진리부와 풍요부로 둔갑했다. 또, 평화부는 북핵 위협은 없고 나라는 안전하다고 속였다.
지성과 도덕성 간의 관계는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는 유의할 만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설계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데도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력 부족이요, 가능한 것처럼 조작하는 것은 부도덕의 극치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념 갈등으로 허덕이고 있는 것도, 언필칭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부족한 지력과 부도덕성 탓이 크다.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회과학은 온갖 아이디어들이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이어가는 패러다임 경쟁으로 특징지어지긴 하지만, 일부 전문가의 몽환이 사회에 미치는 폐해는 크고 끈질기다.
결국, 이런 갈등을 정리하고 사회를 반석 위에 세울 주체는 유권자다. 유권자가 자신을 수준 높게 계몽하지 않는 한, 어리석은 지식을 허망한 이상으로 포장해 유권자를 미혹하게 하고 정권을 탐하는 자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화일보
10-04 ‘금리-물가-킹달러-부채’ 사면초가 몰리는 한국경제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3일 4.81%까지 급등해 2007년 이후 16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추가 인상 움직임에다 고용 시장 과열, 미 역사상 처음으로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해임되는 정국 혼미까지 겹치면서 금리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자극받아 4일 오전 서울 시장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4.286%로 급등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7% 금리도 가능하다”며 고금리 장기화를 예언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도 다시 꿈틀댄다. JP모건은 “국제 유가가 슈퍼 사이클에 진입해 내년 배럴당 90∼110달러, 3년 뒤엔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인플레이션 장기화를 전망했다. 1970년 이후 56개국의 인플레이션 111건을 분석한 결과 “5년 내 인플레이션이 잡힌 경우는 60%도 안 된다”고 했다. 달러 강세도 심각한 역풍을 부른다. 달러 인덱스가 107을 돌파하는 ‘킹달러’로 인해 원·달러 환율은 올 들어 최고인 1360원, 엔화는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50엔을 위협하는 초(超)엔저가 심화한다. 위안화 가치도 16년 만의 최저인 달러당 7.3위안으로 떨어졌다. 중국이 부동산 불안에도 기준금리를 동결할 만큼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한국 경제는 고물가·저성장·환율 불안의 트릴레마(3중 딜레마)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물가와 환율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 침체가 깊어진다. 부채는 발등의 불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지난해 108%로, 5년 전(92%) 대비 16%포인트 급증했다. 기업부채 증가 속도도 아찔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아파트값 폭등이 부른 ‘부채공화국’은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까지 위축시키고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이 바닥을 탈출하고 무역 흑자가 37억 달러로 늘어난 청신호마저 상쇄할 만큼 ‘고금리, 고물가, 킹달러, 과다 부채’가 경제를 사면초가로 몰고 있다. 정교한 입체적 대응이 필요하지만, 당장은 다소 진통을 각오하고 가계부채 연착륙에 집중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10.04 장교와 의사, 그리고 미래

10여 년 전 중앙일보에서 검찰 담당 기자의 수당이 단번에 수십만원(월 기준) 올랐다. 연유는 이랬다. 정기 인사 직전마다 검찰 취재를 맡은 기자 중 다수가 다른 보직으로 바꿔 달라고 부서장에게 요청했다. 걸핏하면 게이트 공화국이 되니 검찰청 출입기자의 하루 15시간 근무, 월화수목금금금 출근이 예삿일이었다. ‘기사 전쟁’ 스트레스도 컸다. 계속 그 일을 하고 싶다는 기자, 부서를 옮겨 그 일을 해보겠다는 기자가 드물었다. 인사를 책임진 당시 편집국 고위 간부가 전격적 수당 인상 카드를 꺼냈다. 검찰청 출입 2년 뒤에는 최대한 원하는 보직으로 이동시켜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수당 인상과 새 인사 규칙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노고를 인정하고 보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회사의 성의가 어느 정도 전달되면서 불만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50% 대학에서 ROTC 정원 미달
의대는 인재 빨아들이는 블랙홀
국가가 부의 배분 방식 고민해야
요즘 우리 사회에서 군 장교를 하겠다고 손드는 사람이 줄었다. 학군 군간부후보생(ROTC)을 육성하는 108개 대학 중 54곳이 정원 미달(7월 기준)이다. 36명이 정원인데, 5명밖에 없는 학교도 있다. 서울대는 정원 47명에 현원 24명, 고려대는 65명에 28명이다. ROTC는 전체 군 장교 수급의 70%를 담당한다. 아직은 ROTC 출신 장교가 군의 필요에 모자라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 추세가 지속하면 그런 날이 머지않다.
원인은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별로 좋은 게 없어서다. ROTC 출신에 대한 기업의 취업 가산점이 사라졌다. 혜택을 주면 차별로 간주한다. 육군 사병 복무 기간은 18개월인데, ROTC 장교 의무복무 기간은 그보다 8개월이 길다. 현재 병장 월급이 130만원(자산 형성 지원금 포함)이다. 초급 장교 월급은 200만원 중반대다.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후년에 병장 월급이 200만원이 된다. 군 급여 체계가 크게 변하지 않으면 병장과 소위 월급의 차가 수십만원 수준으로 준다.
ROTC에서만 장교 수급 차질이 엿보이는 게 아니다. 지난해 육군사관학교에서 63명이 자퇴했다. 그중 절반 이상(32명)이 신입생인 1학년 생도였다. 세상의 변화를 상징한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사관학교에서 지난 5년간 545명이 스스로 떠났다. 우수한 군 지휘관 확보가 위태롭다. 공식적으론 ‘휴전 중’인, 언제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 나라에서 생긴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공부 잘하는 청년들이 몰리는 곳은 단연 의대다. 학원에 초등 의대 입시반이 생기고, 좋은 대학 공대에 다니다가 의대 진학을 노리고 수능시험 다시 보는 학생이 특이 사례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 속출한다.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숭고한 길을 택한 인재가 많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정작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분야에는 전공의 지원자가 모자란다. 소아청소년과는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가 외모 향상에 기여하는 의원으로 대체된다. 의대·한의대·치대가 성적 우수 학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니 공학과 기초과학 은하계가 썰렁해진다.
의대 쏠림은 자유시장에서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의대 정원을 국가가 통제한다. 의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미용 시술에 쓰는 레이저 도구를 들지 못하게 공권력이 막아준다. 의사 고소득을 정부가 보장하는 셈이다. 장교 처우 결정은 온전히 국가 몫이다. 20대가 몰렸던 7·9급 공무원 시험도 경쟁률이 줄었다. 경찰 공무원 쪽도 비슷한 상황이다. 일은 고된데 월급은 적어 평균적인 생활조차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결국 자원과 부를 배분하는 공동체의 방식에 선망하는 직업이 좌우된다. 역사적으로 흥한 나라에서 군인에 대한 보상이 박한 적이 없다. 로마 군인은 20년을 복무하면 13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받았다. 여기에 필요한 재원 때문에 상속세 제도가 생겼다. 의욕 넘치고 유능한, 거기에 사명감까지 갖춘 젊은이가 무엇을 하게 하느냐에 국가의 성쇠가 걸려 있다.
중앙일보 이상언 논설위원
10.05 “이승만 없었으면 가장 가난하고 자유 없는 나라서 살고 있을 것”
배우 이영애씨가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에 5000만원 기부한 것을 해명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씨는 지난달 기부 취지를 담은 서신을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측에 보낸 상태였다. 그런데 야권 지지층이 공격을 퍼붓고 좌파 매체가 “이승만의 과거를 꼼꼼히 보라” “갈등 증폭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비난하자 기부 이유를 다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씨는 “역대 대통령들의 과오는 과오대로 역사에 남기되, 공을 살펴보며 서로 미워하지 말고 화합을 하면 좀 더 평안한 나라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이씨는 이미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단에도 모두 후원했다.

▲배우 이영애./뉴시스
이씨를 비판하는 사람들 주장대로 이 전 대통령은 집권 연장과 독재라는 과오가 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처럼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도 철저하게 잘못만 부각된 지도자도 없다. 이 전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잡고 6·25 남침에서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씨도 “그분께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를 북한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지켜내 북한과 같은 나라가 안 되도록 한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북한 같은) 독재 공산국가가 됐다면 우리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고 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얘기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추진위가 모금을 개시한 지 약 3주 만에 1만9000여 명이 45억원 가까운 돈을 보내왔다고 한다. 올해는 이 전 대통령 서거 58주년이다. 2만 가까운 평범한 시민이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에 공감하고 있다. 최근 4·19 혁명 주역들도 “이승만의 과오뿐 아니라 공을 다시 봐야 한다”며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고 일부는 건립추진위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자체가 국민 통합이다. 그런 대의에 공감했을 뿐인 사람이 봉변을 당하고 해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일보 사설
10-05 광부·간호사 파독 60주년, 산업화 영웅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영웅들이 모처럼 재조명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4일 ‘파독(派獨) 근로 60주년’을 맞아,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출신 240여 명을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로 초청해 기념행사를 가졌다.
“1960∼1970년대 이역만리 독일에서 약 2만 명의 광부와 간호사분이 보내온 외화를 종잣돈 삼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여러분의 땀과 헌신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었다”고 말했다. 그 취지대로, 파독 근로자의 국가 기여를 국민 모두 명확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위다.
파독 근로자는 독일 현지인들이 꺼리는 험한 중노동을 탄광과 병원에서 도맡아 하며 번 돈을 고국에 보내 가족의 생계뿐 아니라, 형제자매의 상급학교 진학도 가능하게 했다. 극한적인 환경과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디며 피땀 흘린 이들의 삶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누구든지 들을 때마다 울컥하게 한다. 당시는 대한민국이 미국 무상 원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후진국이었다. ‘조국 근대화’ 기치 아래 국가를 이끈 박정희 대통령, 열악한 환경을 딛고 산업을 일으켜 세운 기업, 파독 광부·간호사를 포함해 국내외에서 피땀 흘린 근로자 등이 산업화 주역이다.
산업화 바탕 위에서 민주화도 가능했다는 점에서 산업화 영웅은 더 각별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이제는 대한민국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모실 차례다. 국가의 이름으로 예우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밝힌 배경이다. 그것이 1회성에 그쳐선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문화일보 사설
10.06 한 번 잘못된 에너지 정책, 온 국민을 긴 고통 속으로
신임 한전 사장이 전력 생태계 붕괴를 막으려면 추가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누적 적자 47조원, 부채 200조원을 넘어 한계 상황에 왔다는 것이다. 한전은 지난해 이후 5차례에 걸쳐 전기 요금을 ㎾h당 40.4원(39.6%) 인상했다. 그래도 채산이 안 맞아 채권을 발행해 빚으로 적자를 메우고 있다. 한전은 올해 추가로 25.9원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받아들여지면 4인 가구 기준 월평균 8000원의 부담이 더 생긴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내 미루며 다음 정부로 떠넘긴 전기 요금 인상 고지서가 이제 어쩔 수 없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매년 수조 원씩 흑자 내던 우량 기업 한전이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은 문 정부의 잘못된 에너지 정책 때문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한전은 문 정부 5년간 26조원의 추가 비용을 떠안았다(국회 입법조사처). 신규 원전 5기가 제때 가동되지 않고, 월성 1호기는 경제성 평가 조작으로 가동 중단 당했다. 원전 감소분을 단가가 비싼 LNG로 대체하는 바람에 한전의 부담이 가중됐다. 여기에 코로나와 고유가가 겹쳤다. 2021~2022년 2년간 독일·일본 등은 전기료를 2~3배씩 올렸다. 그런데 문 정부는 계속 묶어두었다. 탈원전 부작용에 따른 인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우량 공기업이 부실해지고, 국민은 뒤늦게 요금 연쇄 인상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문 정부가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줄이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한 목표도 현 정부와 산업계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엄청난 양의 피마자콩과 야자를 수입해 석유 기반 나프타를 대체한다는 등의 몽상적 계획이 곳곳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목표를 이행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고 산업 경쟁력이 악화되는 등 엄청난 국가 손실이 불가피하다. 그래도 목표치를 완화할 수가 없다. 국제사회에 공식 약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메르켈 전 총리의 탈원전과 러시아 에너지 의존 정책으로 독일 경제와 산업이 곤경에 처했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올라프 숄츠 현 연립 정부 각료는 “우리 정부는 메르켈이 16년간 실패한 에너지 정책을 불과 몇 달 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했다. 에너지 정책을 ‘100년 대계’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100년 대계를 5년짜리 정권이 취향에 따라 바꾸면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한다.
조선일보 사설
10.06 집값 상승률 낮추려... 文정부, 과거 아파트값까지 조작했다
2019년 부동산원 표본도 손대
한국부동산원이 통계 조작 과정에 집값 상승률을 낮추려고 조사 대상인 부동산 표본을 개편하면서 개별 아파트의 과거 가격까지 마음대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5일 본지가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부동산원의 ‘주택가격 동향조사 표본 보정’ 보고서에 따르면, 부동산원은 통계의 정확도를 높이겠다며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주택가격 동향’ 통계의 표본을 개편했다. 이때 부동산원은 통계 조사원에게 새롭게 표본에 포함된 아파트뿐 아니라, 기존 표본에 있던 아파트의 과거 가격까지 ‘가격 적정성’을 검토해 임의로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예컨대 서울 강남구 대치동 A 아파트는 표본 개편 직전인 2019년 1월 첫 주 조사에선 가격이 23억4000만원, 개편 직후인 2주 차 통계에선 27억원으로 조사됐다. 일주일 사이 가격이 15% 넘게 급등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부동산원은 ‘가격 적정성’ 검토를 거치면서 해당 아파트의 1월 첫 주 조사 가격(23억4000만원)을 임의로 27억원으로 수정했다. 이에 따라 최종 통계에서 이 아파트의 가격 상승률은 0%로 집계되어 공식 발표됐다. 유경준 의원은 “2018년 국정감사에서 부동산원이 조사한 표본 아파트의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이 나오자, 표본 개편 후 집값 조사 때 시세를 올리면서, 과거 가격까지 같이 올려 상승률을 낮춘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부동산원은 전체 표본(2만7502가구)의 절반에 가까운 1만2615가구의 과거 가격을 ‘가격 적정성’을 이유로 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12월 대비 2019년 1월 전국 집값은 실제 12.14% 급등했지만, 과거 가격 조작을 통해 0.41% 떨어진 통계치를 공개했다.
검찰은 5일 통계 조작과 관련해 통계청과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부동산원은 또 통계의 정확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표본 개편 때 조사 대상 가구를 2만6674가구에서 2만7502가구로 늘렸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많고 상승률이 높았던 서울 표본은 오히려 23가구 줄였다. 특히 2018년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던 성동구, 노원구 등이 포함된 동부지사(30가구)와 강남·서초구가 포함된 강남지사(28가구)에서 아파트 표본이 많이 줄었다. 이렇게 표본을 줄이면 개별 아파트 가격을 조금만 수정해도 통계 결과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통계청장 출신인 유경준 의원은 “표본을 개편하더라도 과거 가격을 멋대로 바꾸는 것은 통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국민 관심이 가장 높은 서울 아파트 표본을 줄인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청와대와 국토부의 압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부동산원도 통계 조작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에 대한 검찰 수사도 시작됐다. 대전지검은 통계청과 국토부, 고용노동부, 대구에 있는 부동산원 본사 등을 압수수색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앞서 감사원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정부 부처들이 통계 작성기관을 압박해 주택, 소득, 고용 같은 주요 분야 국가 통계를 조작했다며 장하성·김수현·김상조·이호승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홍장표 전 경제수석, 황덕순 전 일자리수석,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 등 22명을 통계법 위반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조선일보 정순우 기자
10.07 수액 단식 저격한 거침없는 ‘호남 우파’ 의사… “정율성? 끝까지 막겠다”

▲박은식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는 지난 8월까지 본지에 ‘호남 통신’을 연재했다. 그는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실감했다”며 “한 문장, 한 단어까지 고심해 쓰느라 진이 빠질 정도였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이재명 대표님, 일어나세요. 그렇게 누워만 계시면 엉치에 욕창 생깁니다. 대표님께서 맞고 계신 수액이면 아무것도 안 먹어도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단식 중이던 지난달 23일 오전. 한 내과 전문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사진 속 이 대표가 맞는 하얀색 수액에 대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전해질, 심지어 비타민까지 다 들어 있는 TPN(혈관 뷔페)”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급속히 퍼지자 머쓱했던 것일까. 이 대표는 이날 오후 단식을 중단했다.
진실을 폭로한 내과 전문의는 지난 8월까지 본지에서 ‘호남 통신’을 연재한 박은식(39)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젊은 호남 보수 우파’를 자칭하는 그가 호남의 정치 정서, 한국 근현대사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거침없이 쓴 ‘호남 통신’은 매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중에도 그는 굵직한 정치 현안에 앞장서 목소리를 낸다. 지난 대선 때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어떻게 조국 전 장관을 광주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느냐”며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로 화제가 됐다. 요즘에는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 공원 사업에 대해 반대 시위와 연설을 하느라 바쁘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박 대표는 “정율성의 실체를 알게 된 광주 시민들도 기념 공원 반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호남 예외론’에서 이제 벗어나야
달라진 분위기를 의식한 것일까. 2014년부터 ‘정율성 동요제’를 주관한 광주 MBC는 지난달 26일 동요제를 취소한다고 공지했다. 박 대표는 “반대 운동이 거둔 소소한 성과”라며 “정율성 공원이 무산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정율성 기념 공원 반대 운동의 상황은 어떤가.
“광주에서 정파를 초월해 5·18 공법 단체, 4·19 단체, 전국학생수호연합 등이 모였다. 번화가에서 행진을 하다 감격하게 된다. 정율성 거리와 동상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기념 공원이 만들어지는 줄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광주 시민도 대부분도 그랬던 거다. 저희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니 시민들이 휴대폰을 꺼내 ‘정율성이 누구야’며 찾아보더니 ‘왜 우리 세금을 들여 이런 사람을 기념하느냐’고 동조해 주시더라. 이제 호남도 반대 여론이 더 높다.”
-강기정 광주시장이 정율성에 대해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자’고 했다.
“정율성의 공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문재인 정권에서 정율성을 띄우려고 수훈을 추진했는데, 당시 보훈처 심사에서도 ‘행적이 뚜렷하지 않다’며 기각했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강 시장이 ‘광주 정신’까지 언급하며 정율성 논란을 방어하던데, 정말 악랄하다고 본다. 왜 광주 시민과 광주 정신을 들러리로 세우고 방어막을 치는 건가. 광주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좌파 진영은 이승만, 박정희를 평가할 때 공은 공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릴 때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김대중이 했으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나중에 공부해 보니 당시 김대중 공약대로 갔다면 우리나라는 남미처럼 될 뻔했더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지금과 같은 우월한 시장경제와 근대화의 성취는 4분의 3, 5분의 4가 보수 우파 정권에서 일어난 거 아닌가. 이런 사실은 좀 인정하고 갔으면 좋겠다.”
-통영에 윤이상 기념관이 있고, 밀양에 김원봉 공원이 있는데 왜 광주만 문제 삼느냐는 반발도 있었다.
“밀양에 있는 건 김원봉 공원이 아니라 의열단 공원이다. 의열단이 전부 공산주의로 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윤이상 작곡가는 정율성처럼 프로파간다 음악을 한 게 아니고 음악만 떼어놓고 봤을 때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지 않나. 둘 다 정율성과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정율성을 문제 삼는 것을 호남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이는 ‘호남 예외론’ 시각이 여전하다. 이제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남대안포럼이 그래서 형성된 단체인가.
“그렇다. 호남의 특수성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모인 단체다. 회원은 80여 명이다. 저희는 호남이 민주화 업적을 독점하고 성역화하고, 거기에 반대하면 마치 이단처럼 여기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깨려 한다.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있었지만, 부마 항쟁도 그에 못지않게 거센 저항 운동이었다. 4·19 때도, 87 항쟁도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있었는데, 그런 상징을 광주와 호남이 다 가져가는 게 맞느냐는 문제 제기다.”
◇호남·광주 청년들, 더는 허상에 속지 맙시다
평범한 내과 의사는 조국 사태 전후로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젊은 호남 우파 논객’으로 떠올랐다. 그는 “너무 성난 사람들이 나서니 오히려 보는 사람에게 거부감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호남 분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대한 관심을 받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자기들은 회 먹고 일본 삿포로 여행 가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못 누리게 하나요? 그런 악랄한 사람들에게 선동당하지 말자,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우고 독재의 후예가 이끈 나라가 아니라 애국자가 피땀 흘려 일군 기적의 나라라고 쓴 글이 큰 공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언행이 거침없는데 두렵지 않은가.
“내가 광주에서 개업한 의사였으면 못 했을 거 같다(웃음). 연재한 글에도 ‘선생님, 해코지당할까 무섭네요. 항상 조심하세요.‘ 이런 댓글도 있다. 지사 같은 기질이 있는 건 아니다. 군의관 시절부터 스스로 사상, 이념적 공부를 하면서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 논객들의 책을 보니 ‘아, 정말 이 사람들 따라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들이 앉아서 책으로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사상적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조국 사태가 벌어졌을 때, ‘광주가 조국이다’라는 깃발을 보니 더는 참을 수 없더라.”

-어떤 종류의 분노였는지.
“고교 때 선생님이 5·18 주제곡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전교조 설립 활동을 하셨다. 아버지는 천정배 전 의원과 가깝고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대학생 때 운동권 활동에 완전히 빠질 뻔했다. 그러다 스스로 사상이 확고해지면서 ‘그간 내가 겪은 것들이 허상이구나’ 깨달았는데, 그때 큰 배신감을 느꼈다. ‘나를 속였구나!‘라는 배신감. 비상식에 대한 분노보다는 나에게 사기를 친 체계에 대한 복수감에 더 가깝다. 그런 허상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걱정이 크다. 그래서 광주, 호남 청년들에게 ‘너희만큼은 제발 그러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호남, 광주 사람들이 민주당에 이용당하면서 비하받고 욕먹는 것도 너무 싫다.”
-독립이 됐는데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가 됐는데도 아직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역사에서 진실을 배우고 교훈을 얻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건국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역사, 그런 허상에 도취된 사람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홍범도, 김원봉과 동일시하며 ‘부당하게 탄압받는 정의’로 여긴다. 그러니 자신한테 맞서면 다 불의이고 친일파란 식으로 물불 가리지 않게 된다. 단식장 앞에 가서 가위로 경찰을 공격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합리화되는 거 아니겠나.”
◇“호남과 대한민국의 경계 사라지길”
문재인 정권과 조국 사태는 그를 정치적 공론장으로 이끈 발화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라를 잘되게 하려는 욕심과 자기 진영을 잘되게 하려는 욕심이 충돌할 때 나라를 선택했어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한미 FTA, 이라크 파병도 했죠. 제주 강정해군기지도 반대가 심했는데 국가 안보를 위해 밀어붙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걸 존경하고, 우파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지소미아를 파괴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매달려 탈북자를 죽게 내버려 뒀잖아요. 탈원전 정책도 그렇고 자기 진영만 위하는 세력은 절대 집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이 노무현, DJ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지할 건가?
“지금은 이미 사상적으로 우파로 바뀐 상태다(웃음). 노무현 전 대통령과 DJ 모두 대북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분들이 돌아오더라도 그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거 같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 지지 연설을 했는데.
“주변을 보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나는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 않았고 ‘이재명만 막아줘도 생큐’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방향키만 흔들리지 않게 잡고 가도 좋다. 민감한 구조 개혁은 여소야대 국회 지형 때문에 손을 못 대는 상황이다.”
-지금 하고 있는 시민운동의 목표라면.
“호남과 대한민국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호남과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라고 스스로 내세우지도 않고,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지역이 됐으면 한다. 건국을 주도한 김성수, 송진우 같은 호남 정치인들도 재조명되길 바란다.”
-기념 공원 반대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나.
“출구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원 조성하는 곳을 보니 주변을 고르고 자갈밭까지는 깔아놨는데, 거기 생가 한 채만 남아 있더라. 그 근방에서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학교, 병원을 세우고 목숨 걸고 선교한 역사가 있고, 학도 호국단도 호남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그런 기념물들을 넣어 호국 공원, 근대 역사 공원으로 바꾸는 방향이 현실적이다.”
혹시 총선에 출마할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사실 비례의원 등 출마 제의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식이면 그간 해온 제 활동의 진정성이 훼손되잖아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게 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
10.09 文 정부 ‘거짓’의 끝, 남북 정상회담
소주성 등 환상에 기반한 정책 실패하자 ‘거짓 통계’로 덮어
“北, 공짜로 정상회담 한 적 없다” 북 원전·金 답방 등 의혹 밝혀야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4000만명이 굶어 죽었다. ‘철강을 일으켜 단숨에 영·미를 따라잡겠다’는 환상에 기반을 둔 정책이 화근이었다. 조악한 고로(高爐)에 쓸 나무를 베느라 토지가 황폐화했다. 수천만 명이 굶주리는데 공산당 간부는 ‘식량에 문제없다’는 통계를 만들어 선전했다. 중국을 재앙에 빠뜨린 건 ‘환상 기반 정책’에 ‘통계 조작’이 겹쳤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는 평양의 고층 아파트는 훌륭하다. 그런데 뒤에서 보면 페인트칠도 없고 유리창도 없다. 한 외국인이 노동당 간부에게 물었더니 “선생님은 넥타이를 뒤로도 매십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건물 앞만 치장한 것은 아무 문제 없다는 궤변이다. 자유 민주국가에서 권력의 거짓과 가짜 선동은 범죄나 다름없다. 그러나 공산 전체주의에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YONHAP PHOTO-0210> [평양정상회담] 인사하는 문 대통령 (평양=연합뉴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배재만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남북 정상회담 둘째날인 19일 오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장에 입장한 뒤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2018.9.20 scoop@yna.co.kr/2018-09-20 00:40:32/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국내 좌파 운동권 세력도 ‘큰 정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거짓말’쯤은 별것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왔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가격, 소득·분배·고용에 관한 통계 조작이 대표적이다. 마차가 말을 끈다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은 환상에 기반한 것이다. 소득·분배·고용이 모두 악화하자 이를 감추기 위해 가짜 통계를 만들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굶어 죽고 있는데 ‘식량에 문제없다’는 통계를 만든 것과 뭐가 다른가. “자신 있다”던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공무원 팔을 비틀어 ‘비교적 안정’이라는 허구를 창조했다. 온 국민이 부동산 폭등의 고통을 체감했는데도 지금껏 ‘조작은 없었다’고 한다.
최근 감사원은 2020년 서해에서 실종된 공무원을 당시 정권이 근거도 없이 ‘자진 월북자’로 몰아갔다는 내용의 감사 보고서를 채택했다. 문 정부가 임명한 감사위원 대다수도 ‘월북 몰이’ 결론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 정권 인사들은 서해 공무원 사건 정보를 삭제한 데 대해 “삭제가 아니고 첩보 유통망 정비”라고 했다. 월북이 아니라는 증거를 없애 놓고 ‘유통망 정비’라는 궤변을 할 수가 있나. 2017년 ‘사드 3불(不)’ 약속으로 중국에 군사 주권을 내줬던 사건의 흑막도 감사원이 가리고 있으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다.
지난 정부의 거짓과 선동이 하나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베일 속이다. 그해 9·19 남북 군사합의 직후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이 일관되게 서해 NLL(북방 한계선)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협상 문건을 보면 북한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비계선’을 고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문 전 대통령이 판문점 도보 다리에서 김정은과 배석자 없이 44분간 대화할 때 “발전소 문제…”라고 말하는 입 모양이 포착됐다. 이후 산업부는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는 방안을 검토하는 파일을 다수 만들었다가 감사원의 월성 원전 감사 직전 불법으로 삭제했다. 2018년 3월 우리 예술단이 평양으로 갈 때 문 정부가 처음 띄운 전세기가 이스타 항공이었다. 이스타 창업주인 이상직 전 의원은 문 전 대통령 딸 가족의 해외 이주를 도왔다.
전 정권의 국정원 인사는 “김정은 답방을 대비해 동해안 쪽에 별장을 준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무엇보다 1·2차 남북 정상회담에 관여한 인사는 “북이 공짜로 정상회담 등에 응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문 전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연설을 아무 대가 없이 선물했겠느냐”고 했다.
문 정부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대화로 나라 지킨다’ ‘평화가 왔다’는 환상을 바탕으로 안보 정책을 밀어붙였다. 밝혀야 할 문 정부 거짓의 끝은 남북 정상회담일 것이다.
조선일보 안용현 사회정책부장
10.10 문재인 정부 통계 조작이 특히 나쁜 이유

숫자는 무서운 힘을 갖는다. 10은 10이다. 100이 될 수 없다. 평가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도 매출·이익이 저조하면 버티기 힘들다. 성장률이 둔화되거나 실업자가 늘면 정부가 궁지에 몰린다. 그렇다고 숫자가 늘 명료한 건 아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는다.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진실을 가릴 수 있다. 그래서 더 무섭다.
2016년부터 통계 사전 요구는 불법
실무자 일탈 아닌 조직적 개입 의혹
통계 중요성 잘 아는 경제학자 가담
조작 사실이라면 국민을 속인 범죄
올해 30대 그룹의 여성 임원 비중은 6.9%다. 5년 전엔 3.2%였다. 여성 임원 비중이 5년 새 두 배로 늘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여성 임원이 6.9%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삼성이 여성 임원 157명으로 가장 많지만, 비중은 7.5%로 30대 그룹 중간이다. 전체 임원이 많으니 여성 임원도 많았을 뿐이다. 보이는 숫자만 보거나 입맛대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명료한 듯 명료하지 않은 숫자의 맹점을 이용해 눈속임을 하는 ‘숫자놀음’이 여전하다. 실적을 내야 하는 정부와 민간 공히 유혹에 빠진다. 기업설명회(IR) 때 속지 않으려면 비교 시점을 잘 봐야 한다.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줄었는데, 전 분기보다는 늘었으면 기업은 전 분기 대비 증가율을 앞세운다. 지난해보다 이익이 감소한 건 덮어두고, 올해 목표치를 넘어선 점만 강조하기도 한다. ‘최대 50% 할인’. 수많은 품목 중 한두 개만 50% 할인해도 이렇게 선전한다.
정부는 불리한 숫자를 쏙 빼는 방식을 즐겨 쓴다. 1997년 11월 외환보유액이 100억 달러 남짓으로 바닥이었다. 정부는 이를 감추고 ‘펀더멘털에 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2019년 초 기획재정부는 유리한 지표만 골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 17년 만의 최고치인 실업률과 9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설비투자는 넣지 않았다. 나쁜 경제지표의 발표 시기를 선거 후로 늦추거나 불리한 숫자가 나온 보고서를 발표하지 않는다.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조사 방식이나 산출 기준을 유리하게 바꾸기도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게 숫자에 손대는 통계 조작이다. 예전에도 있었다. 90년 일부 시·도가 예산을 더 타려고 인구를 허위로 늘렸다. 시·도가 신고한 인구를 모두 합치니 실제 인구보다 50만명이나 많았다. 2001년 노동부 산하 고용센터는 취업자 수를 부풀렸다. 취업한 근로자를 다시 실적에 포함하거나 아르바이트생을 취업자로 변조하는 수법을 썼다. 2006년 정부는 서울 강남 3구 아파트 실거래가가 3~6월 14.4%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집값이 치솟던 시기여서 뜻밖의 결과였다. 알고 보니 3월에 A, B, C 아파트의 실거래가를 평균하고, 6월엔 C, D 아파트를 평균한 뒤 등락률을 구했다. 다른 아파트의 값을 비교해 마이너스 숫자를 끌어낸 황당한 조작이었다.
감사원이 최근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일각에서 “예전에도 있던 일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과거에 있었으니 지금 해도 된다는 사고는 위험하다. 그보다 더 나쁜 이유가 있다. 첫째, 2016년 이후 통계를 공표 전에 누설하거나 외압을 행사하면 법 위반이다. 당시 신설된 통계법 27조 2항은 누구든 공표 전 통계를 받아보는 것을 불법으로 못박고 있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사람이 김현미 의원이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바로 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한국부동산원에 ‘주중치’와 ‘속보치’를 사전에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 수뇌부가 집권 내내 부동산·소득·고용 통계 조작에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예전처럼 한두 기관이나 일선 실무자의 일탈이 아니라고 한다. “협조하지 않으면 조직과 예산을 다 날린다.” “서울 상승률 0.05%, 안 되면 전주(0.06%)에 맞춰라.” 협박에 가까운 노골적 지시는 군사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린 것이다.
셋째, 감사원이 통계 조작 혐의로 수사 의뢰한 22명 가운데 장하성·김상조·홍장표·황덕순·강신욱 등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경제학은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하는 학문이다. 숫자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경제학자는 통계의 정확성·중립성·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들이 조작을 주도했다면 경제학의 신뢰를 허무는 심각한 일이다.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발표 다음 날 “문재인 정부 고용률이 사상 최고였다”고 주장했다. 통계 조작이 문제가 됐는데, 동문서답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2018~2021년 고용률은 60% 선에 그쳤다. 사상 최고라고 자랑한 2022년(62.1%)은 5월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오롯이 문재인 정부 성과로 볼 수 없다. 그리스는 재정 통계를 속였다가 부도 위기에 몰려 9년간 구제금융을 받았다. 중국 통계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경제가 나빠져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니 처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정부 통계는 정책 결정의 근간이 된다. 유리한 통계만 골라 써도 오판을 부르는데, 통계 자체를 조작했을 때의 부작용은 말해 무엇하랴. 국민을 속이고, 수렁에 빠뜨리는 범죄다.
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10-11 집값 통계 조작 탓에 ‘재건축 부담금’ 폭탄 맞은 국민

▲그래픽=정인성
문재인 정부의 집값 통계 조작 때문에 재건축 아파트 1만4000가구가 재건축 부담금을 1조원 더 많이 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동산원의 집값 통계 조작으로 문 정부 5년간 해당 지역 평균 집값 상승분이 실제보다 낮게 평가돼 현재 가치와의 차액이 그만큼 더 커졌고 이것이 부담금 과중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는 부담금을 산출할 때 쓰인 부동산원의 집값 상승률은 44%인데, KB국민은행 통계로는 집값이 134%나 올랐다. 이 KB통계대로 하면 차액이 적어 분담금은 안 내도 된다. 그런데 조작된 부동산원 통계가 적용되니 부담금을 가구당 3억4700만원이나 내야 한다. 전국에서 24개 아파트 단지, 1만4000여 가구가 이런 문제로 1조원의 부담금을 더 물어야 할 상황이다. 문 정부가 과거 아파트 표본 가격을 상향 조작하거나 새 표본의 가격을 하향 조작하는 식으로 아파트 가격 상승률을 실제보다 낮춘 결과, 국민이 엉뚱한 피해까지 보게 된 것이다.
재건축 부담금은 낡은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주인들이 재건축 추진 여부를 결정할 때 판단 기준으로 삼는 중요한 요소이다. 문 정부가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를 2018년부터 재시행하면서 재건축 부담금 문제가 크게 부각됐다. 집값 통계 조작 탓에 재건축을 추진할 경우 조합원들이 물어야 할 부담금이 예상보다 크게 나왔고, 이것이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재건축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새 아파트 공급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문 정부의 재건축을 억제하려는 정책과 집값 통계 조작이 서울 아파트 공급을 악화시킨 데 이어 정권이 바뀐 뒤에도 개인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국토부는 “검찰 수사 결과를 보고 해법을 찾겠다”고 하면서도 가짜 통계에 기인한 엉터리 재건축 부담금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다. 재건축 조합원들이 정부를 상대로 줄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정부의 통계 조작이 나라를 망칠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직접적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10.11 경악할 기온 상승에도 밤잠 편히 자는 ‘기후 딜레마’
9월 지구 기온 ‘역대 최고’보다 0.5도 높아
10년 상승치의 두 배 반
하지만 세계는 평온
해결책 없다고 아예 체념인가
‘도덕적 혼돈’ 상황

▲유럽 기후관측기구인 코페르니쿠스가 5일 발표한 보도자료에 들어 있는 1940년 이래 매년 일별 기온 그래프. 밝은 빨간색 선이 2023년 기온이다. 암적색은 연평균 역대 최고 기온이었던 2016년. 올 9월 기온은 역대 최고치보다 0.5도 상승했다. 회색 점선으로 표시된 것은 산업혁명기인 1850~1900년 평균치에서 1.5도 높은 선이다.
유럽 기후 모니터링 기구인 코페르니쿠스가 지난달 지구 평균 기온(섭씨 16.83도)이 역대 9월 최고치(2020년)보다 0.5도 높았다고 5일 발표했다. 기후변화는 10년마다 0.2도 올라가는 속도로 움직여왔다. 그에 비해 지난달은 경악할 수준의 널뛰기였다. 엘니뇨 요인만 갖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역대 최고치 경신’은 6월부터 넉 달째다. 미국 민간 기후관측 기구인 버클리어스에 따르면 7월 역대 최고치를 0.26도, 8월엔 0.31도 경신했는데 9월 다시 그 격차를 크게 벌려놨다. 산업혁명기(1850~1900년) 평균에서 1.75도 높았다. 지금 기세면 연간 평균치로도 파리협정 1차 억제 목표인 1.5도를 초과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이쯤 되면 세계가 긴박하게 돌아가야 할 것 같지만 평온하다. 주요 뉴스로 거론도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무관심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선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중대형 승용차를 몰면 1㎞마다 이산화탄소를 200g 정도 뿜어낸다. 1㎞ 주행마다 두루마리 휴지 한 뭉치 정도의 쓰레기를 차창 밖으로 버린다고 생각해보라.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거라면 적어도 양심의 가책은 느낄 것이다. 이산화탄소에는 그런 게 없다.
기후변화는 사람 감각 주기로는 포착하기 힘들게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위협으로 느끼기가 힘들다. 기후변화의 결정적 영향은 수십 년, 또는 그보다 더 뒤에나 나타날지 모른다. 현 세대는 앞 세대들이 100년, 200년간 뿜어온 온실가스 때문에 생긴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위치다. 그런데 우리가 솔선해 어떤 불편이나 규제를 감수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일 때, 그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 혜택은 손주들이나 또는 지금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후손들에게 돌아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런 거라면 우리는 앞 세대로부터는 피해를 입고, 후세대를 위해선 희생해야 하는 존재이다. 가족이나 이웃, 만난 적 있고 아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좀 양보해도 괜찮다. 그렇지만 생면부지의 먼 후세대를 위한 희생이라면 그 선택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기후변화는 수억, 수십억 세계인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기후 윤리학자 중에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있다. “나를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각자 극미한 양을 더한 후 그걸 믹서기에 섞어 갈아버린 다음, 각자가 그중 극히 일부분을 떼어먹을 때 그 주스의 맛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더구나 온실가스를 줄이는 고통은 우리 국민이 온전히 감수해야 하는 반면, 그에 따른 기후변화 억제의 이익은 전 세계로 분산된다. 혜택을 주로 받는 집단은 어디 먼 대륙의 이름도 모르는 나라 사람일 수 있다. 이웃 도시끼리 매립지, 소각로 갈등 하나 해결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200개 나라가 얽힌 세계가 각국 경제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문제에서 원만한 협조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온실가스 감축에 동참하는 것이 보장돼야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죄수의 딜레마다.
기후변화의 인과 흐름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많은 변수가 꼬리물기식으로 상호 엇물려 있다. 비행기 탈 때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수십 년 뒤 해수면 상승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과학 설명은 전문용어, 숫자, 그래프로 혼란스럽다. 정황 증거는 많지만 직접 증거는 드문 가설적 이론이 많다. 기후 얘기는 하도 비슷한 것을 많이 들어 이젠 진부해졌다는 ‘기후 피로증’도 있다. 사람들은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막막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아예 머리를 돌려 회피해버린다.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은데 당장 닥칠 것도 아니라면 뒤로 미룰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미뤄두자는 것이다. 욕망 절제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과연 가능한 대안인지 의문이다. 휴가 때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가는 화제로 들떠 있는데 어느 누군가 비행기 여행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니 절제해야 한다고 말을 꺼내면 분위기는 썰렁해질 것이다.
설문조사를 하면 기후 문제가 중요하다는 대답이 많이 나온다. 그건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누워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걱정일 수 있다. 사실은 기후 문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고 경고하는 기후 과학자들도 밤에는 평화로운 꿈을 꾸며 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후 붕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데다 온실가스는 알면서도 뿜어내는 것이라서 결국 윤리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도덕철학자 스티븐 가디너는 지금 상황을 ‘완전한 도덕적 혼돈(perfect moral storm)’이라고 했다. 기후변화를 ‘사악한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10-11 판치는 중국 서빙로봇과 손 놓은 정부

신보영 경제부장
전세계 AI경제 선점 경쟁 가열
中에 잠식된 韓 서빙로봇 시장
정부는 中 로봇에 보조금 혜택
가격 왜곡과 시장 교란 이중고
신냉전 격화로 자국시장 우선
보조금철폐 및 관세부과 필요
인공지능(AI) 경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챗GPT 출현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에 이어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기업도 뛰어들면서 선점 경쟁이 뜨겁다. 19세기 말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AI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주요국 정부의 표준 경쟁(문화일보 9월 19일자 1면 참조) 역시 달아오른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인권 문제를 포함한 ‘AI 권리장전’ 청사진을 제시한 데 이어 유럽연합(EU)과 영국도 ‘AI 7대 원칙’ 등 규범 마련에 나섰다. 정부도 지난 9월 말 ‘디지털 권리장전’을 발표하면서 선제적 표준 마련 작업에 돌입했다.
규범·표준 경쟁과 함께 AI 경제를 결정지을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묶었던 세계화의 퇴조와 이를 대체하는 신(新)냉전식 경제 구조다. 미·중 공급망 경쟁 속에서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국제정치 혼돈 속에서 경제질서 역시 편 가르기 가속화가 불가피하다. AI 경제는 양분화한 세계에서 잉태된 셈이다. AI 개발·활용을 둘러싼 경쟁 역시 이 틀에서 당분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이처럼 AI를 둘러싼 경제생태계가 복잡하게 펼쳐질 가능성이 큰 가운데, 미래를 미리 가늠하게 해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 바로 국내 ‘서빙로봇’ 시장이다. 낮은 단계의 AI가 적용되는 초기 산업으로, 한국로봇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서빙로봇 매출액 규모는 3701억 원, 약 1만4000대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 보급된 서빙 로봇도 5000여 대에 달한다. 올해는 1만 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시장 규모도 5억3000만 달러에서 2026년에는 10억 달러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문제는 2022년 말 기준 국내 서빙로봇의 70%가 중국산이라는 데 있다. 중국산 서빙로봇은 한 대당 1000만∼3000만 원으로, 한국산에 비해 최대 20% 정도 저렴하다. 한국은 일본·미국·중국 등에서 부품을 수입하지만, 중국은 자국산 부품을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생산 비용이 낮다. 또, 중국은 2015년부터 개시한 ‘중국 제조 2025 계획’에서 로봇을 10대 핵심산업으로 선정, 서빙로봇 구매자는 물론 제조업체에도 투자금의 10%를 환급해주고 매출의 20%를 보조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 중소벤처기업부가 이미 중국 내에서 보조금을 받은 중국산에도 공급가격의 70%, 최대 1500만 원까지 보조금을 또다시 지원해준다. 이를 악용한 중간 유통업체가 구매자에게 일부 리베이트를 돌려주는 등 시장 교란도 심각한 상태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대책이다. 지난 9월 21일 열린 업계 간담회에서 중소벤처기업부는 “국산과 중국산 차별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중국의 직접적 보조금 지급이야말로 WTO 보조금 협정 금지 사항이다. EU는 지난 7월부터 이중 수혜라는 이유로 중국을 겨냥한 역외보조금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산 서빙로봇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지만, 미국은 관세 25%를 부과한다. “한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보다 로봇 보급을 우선시하면서 중국산 서빙로봇이 득세하는 데 한몫했다”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지적이 뼈아프다.
국내산업 보호 장치가 절실하다. 일단 ‘이중’ 보조금 철폐를 통해 국민 세금으로 중국산 서빙로봇 업체를 지원하는 행위부터 중단해야 한다. 역외에서 보조금을 받은 제품은 총액을 고려해 국내 보조금을 차등 지급하는 게 합리적이다. 중국의 무차별적 보조금 지급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서빙로봇에 사용되는 중국산 배터리 원산지를 제한해야 한다. 관세 부과도 필요하다. 동시에 갈수록 분화하는 글로벌 경제구조까지 감안해 AI를 포함한 첨단산업에 대한 포괄적 지원 방안을 다시 고민할 때다. AI를 활용하는 ‘테스트 베드’인 서빙로봇 시장에서부터 주도권을 잃는다면, AI 경제에서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의 글로벌 경제 질서가 부상하는 지금,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첨단산업에서 자국기업 보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화일보
10.12 나라에 큰 손실 끼치고 ‘1박 260만원’ 호화 출장 다닌 탈원전 주역

▲채희봉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 /뉴스1

▲샹그릴라 더 샤드 런던 호텔. 채희봉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2022년 출장 때 1박에 260여만원을 주고 이 호텔 스위트룸에 묵은 것으로 알려졌다./더 샤드 인스타그램
문재인 정부 탈원전의 주역인 채희봉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해외 출장 중 1박에 260여 만원짜리 호텔에 묵은 것으로 감사원 조사에서 드러났다. 지난해 4월 영국 런던 3박5일 출장에서 3박 모두 시내 중심가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보냈다. 장관급 공무원의 해외 숙박비 상한액의 2.7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그는 재직 기간 중 16번 해외 출장을 갔는데 12번을 1박당 100만원이 넘는 곳에서 투숙했다. 회사는 미수금이 쌓여 가고, 가스 요금 인상으로 국민 고통이 가중됐는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사장은 초호화 출장을 다녔던 것이다.
산업부 실장 출신인 그는 청와대 비서관 시절 당시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월성1호기 경제성 조작으로 영구 폐로를 주도했고, 그 뒤 가스공사 사장이 됐다. 당시 산업부는 청와대서 퇴직한 지 얼마 안 되는 그를 위해 1차 최종 후보 2명을 모두 퇴짜 놓고, 10개월간 자리를 비워둔 끝에 자격을 만들어 사장에 앉혔다. 조작까지 해가며 원전 가동을 중단시킨 ‘공로’의 대가였다.
탈원전으로 단가가 비싼 LNG 수입이 급증했지만, 지난해 가스공사는 수요 예측을 잘못해 중국·일본·대만 등 주변국보다 10~30% 비싼 가격에 LNG를 들여왔다. 지난해 수입액이 전년의 2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가스 요금 인상은 지연돼 적자에 해당하는 미수금이 지난해 9조원까지 쌓였다. 올 1분기엔 11.6조원까지 늘었다. 그는 재무 상태와 관계없이 전년보다 43% 오른 2억여 원의 연봉을 지난해 챙겼고, 임원들 연봉도 평균 30% 올려줬다. 가스공사 농구단엔 연봉 1억원이 넘으면서 하는 일은 없는 ‘총감독’과 ‘외부단장’직을 신설해 고교 동문들을 앉혔다. 청와대 비서관 재직 땐 탈원전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을 뿌리째 흔들더니, 알짜 공기업으로 옮겨선 부실을 키우고 회삿돈을 자기 마음대로 썼다.
문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그가 집행한 탈원전의 여파로 경제와 가계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수조원씩 흑자를 내던 한전이 부실 기업으로 전락했고, 가스공사에선 조 단위로 미수금이 쌓여 간다. 국민은 뒤늦게 날아드는 전기료·가스료 인상 고지서에 시달리고 있다. 이 모든 사달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에게서 미안함은커녕 최소한의 도덕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공직자를 뒀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조선일보 사설
10-12 민노총 101건·대진연 15건… 문 정부때 눈감은 ‘불법폭력시위 통계’ 재개
■ 경찰, 최근 6년간의 건수 재집계
쇠파이프 사용·도로점거 등
5가지 유형 중심 자료 수집
경찰 폭행도 포함시킬 방침
총 155건… 매년 증가 추세
보조금 지원 제한 근거될 듯

경찰이 문재인 정부 시절 이후 사실상 관리하지 않은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최근 6년간의 통계를 다시 집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이 기간 가장 많은 불법폭력시위를 개최한 단체는 민주노총, 진보 성향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 3개 단체로 나타났다. 경찰이 불법폭력시위단체에 대한 보조금 지원 제한의 중요 근거가 되는 통계 자료 수집에 속도를 내면서 무분별한 집회, 시위에 대한 정부의 엄정 대응 기조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불법폭력시위 개최 현황’에 따르면, 경찰이 집계한 최근 6년간의 불법폭력시위 건수는 총 15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폭력시위 건수는 2018년 12건, 2019년 29건, 2020년 18건을 기록하고, 문 정부 임기 말인 2021년에는 35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어 윤석열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에는 38건, 올해(1~7월)는 불법폭력시위가 23건이었다. 문 정부에서 윤 정부로 권력이 이양되는 2021년부터 올해까지 약 3년간 발생한 불법시위는 총 96건으로 전체 시위의 약 61%에 달했다. 진보에서 보수 정권으로의 권력 교체기, 그리고 이후에도 ‘반(反)정부 투쟁’ 성격의 과격한 집회·시위 경향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가장 많은 시위를 개최한 단체는 민주노총이었다. 이 기간 민주노총 본부를 비롯해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금속노조 등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이 벌인 시위 건수는 155건 중 101건(약 65%)으로 분석됐다. 이어 한·미연합군사훈련 반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한 대진연이 15건(약 9.68%),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주도한 전장연이 13건(약 8.39%)이었다.
경찰청은 화염병, 투석, 쇠파이프·각목, 시설진입, 도로점거 등 5개 유형을 근거로 불법시위 건수, 단체 현황 등을 수집해 왔는데, 경찰관 폭행이 발생한 시위도 불법폭력시위로 집계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경찰의 통계 자료를 근거로 불법시위 주도 단체에 지급되는 보조금을 제한했지만, 문 정부 출범 초인 2018년 기획재정부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에 명시된 보조금 지원 제한 규정이 삭제됐고, 경찰도 통계를 관리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불법폭력시위에 엄정 대응을 위한 기초자료가 될 통계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지영 기자 goodyoung17@munhwa.com
10-13 원전 수출 영역 더 넓힌 루마니아 ‘원전 리모델링’ 수주
한국의 원전 기술력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이번엔 원자력발전소 리모델링 사업까지 수주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총사업비 약 2조5000억 원인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 1호기 설비 개선에 참여하는 컨소시엄 협약을 체결했다고 12일 발표했다. 한수원과 한전KPS·두산에너빌리티·현대건설·삼성물산 등은 캐나다와 이탈리아의 원전 설계회사와 함께 체르나보다 원전(2026년 설계수명 완료) 30년 추가 운전을 위한 압력관 교체, 방폐물 보관시설 건설 등을 맡게 된다. 우리 측 수주액은 1조 원 수준이다.
이번 수주로 한국은 원전 리모델링에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지난 2009년 월성 1호기 압력관 교체를 단번에 조기(27개월) 성공했던 성과가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길을 텄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족쇄를 푼 이후 한국의 원전 수출은 말 그대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해 8월 3조3000억 원 규모의 이집트 원전 수주에 이어, 폴란드와는 협력 의향서까지 체결했고, 체코·아랍에미리트(UAE)에도 수출이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의 ‘2030년까지 원전 수출 10기’ 목표는 순항 중이다.
한국은 원전의 제작·운영부터 리모델링, 폐기까지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최고 기술력을 갖췄다. 제작보다 시장 규모가 훨씬 큰 리모델링 분야로 영역을 넓인 것은 의미가 크다. 루마니아 원전 삼중수소 제거 설비 수주가 국내 업체에 24종 1000억 원의 일감을 만든 데서 보듯,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기업도 참여하는 분야인 만큼 생태계가 더 확장된다. 한국은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의 경쟁력도 인정받고 있다. 미래 산업인 원전을 선도해 가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10.14 통계 조작, 野의 아전인수
지난달 감사원 발표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통계 조작 혐의를 두고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공방이 뜨거웠다. “통계 조작으로 국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국민의힘 지적에 더불어민주당은 ‘정당한 개입’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통계법의 일부 조항을 인용했는데, 법 조문을 확인해봤다. 한 마디로 본인들에게 유리한 조항만 취사 선택한 ‘아전인수’식 주장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문 정부 청와대가 한국부동산원의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 자료를 공표 전 미리 받아본 것에 대해 “통계법상 근거가 있는, 정당한 지도 감독”이라고 했다. 예외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통계법에선 사전 유출을 금지하지만 ‘경제 위기, 시장 불안 등의 상황에는 공표일 전이라도 통계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다. 하지만 이번 통계 조작의 핵심은 권력자들이 통계 수치를 바꾸도록 실무자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최소 94번이다. 통계법 어디에도 이렇게 노골적인 사전 개입을 허용하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민주당 의원이 인용한 조문 바로 앞부분에 ‘통계 종사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버젓이 있다. 법 조문을 직접 봤다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문재인 정부 재임 기간 서울 아파트 값 상승률은 KB국민은행이 61.7%, 부동산원 19.4%다. 3배 넘는 격차다. 과거 어느 정부에서도 두 통계가 이렇게까지 엇갈린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야권 인사들은 ‘민간 통계가 무조건 옳다는 식의 주장은 시장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며 부동산원 통계를 옹호하고 있다. 그러면서 단골로 인용하는 것이 실거래가와 호가(呼價)다. 부동산원은 실제 거래된 가격 위주로 집계하기 때문에 정확한 반면, KB는 집주인과 공인중개사의 주관이 개입된 가격을 집계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이다. KB와 부동산원 모두 실거래가, 호가를 두루 반영한다. 더욱이 실거래가만 집계하는 ‘실거래가지수’로 서울 아파트 값은 문 정부에서 95% 올랐다. 민주당 주장이 맞는다고 치더라도 KB 통계가 실거래가와 더 비슷했다는 사실이 숫자로 나와있다.
통계 조작으로 국민 재산권을 침해당한 사례도 드러나고 있다. 전국 24개 재건축 단지 주민들이 실제보다 1조원가량 많은 부담금을 부과받았고, 지난 정부에서 이뤄진 부동산 증여 57만건의 증여세가 실제보다 많이 부과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들이 국가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통계 조작으로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도 크게 훼손됐다. 야당 인사들은 ‘통계 조작은 허구’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피해를 본 국민에게 사과부터 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도리일 것이다.
조선일보 정순우 기자
10-18 [단독]‘文정부 통계조작 의혹’ 관여 부동산원 담당처장 5명 모두 승진
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 국토교통부의 압력을 받고 주택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한국부동산원의 담당 부서장들이 조작에 관여한 이후 모두 승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승진은 지난달 감사원이 감사 결과에 따라 검찰에 수사 의뢰한 부동산원 원장의 임기 도중 이뤄졌다.
18일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에 따르면 감사원이 통계조작이 이뤄졌다고 판단한 기간(2017년 6월~2021년 11월) 근무한 5명은 이후 모두 종합직 1급으로 승진했다. 이들은 이 기간 부동산원에서 통계업무를 총괄하는 통계처(구 통계센터) 처장(구 센터장)으로 근무했다. 앞서 감사원은 이 기간 당시 청와대와 국토교통부가 총 94회 이상 부동산원 통계 작성과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통계 수치가 조작됐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부동산원에 대한 지휘선상에 있던 국토부 일반직 공무원 11명 가운데 9명도 승진하거나 공공기관장, 경제 분야 민간 단체장 등으로 영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감사원은 부동산원이나 국토부 간부들의 이런 승진 인사가 통계 조작에 관여한 데 대한 대가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이번 감사에서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부동산원은 강 의원에게 2019년 1월·2020년 1월·2021년 6월 등 주택 통계 표본수 변경이 “공표의 신뢰성 및 안전성 확보” 효과로 이어졌다는 답변도 내놨다. 감사원은 부동산원의 통계 변경 행위가 주택 통계 조작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한 바 있지만 다른 해석을 한 것.
앞서 부동산원은 대표적으로 2019년 1월 월간 주택 통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표본수를 828호 확대한 뒤 시세 반영률이 현저히 낮았던 표본 1만2615호 가격을 시세에 맞춰 올리면서 변동률이 12.14%나 급증하자 과거 가격을 조작해 변동률을 0.41%로 조정한 바 있다.
강 의원은 “통계조작에 대한 부동산원 반응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통계조작의 대가로 승진을 보장받은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10.19 통계 조작 때 기자들이 겪은 일
기자로서 납득할 수 없었던
文 정부 시절 부동산 통계
통계 조작 밝혀지니 이해돼
새빨간 거짓말 드러난 게 다행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정부 부동산 통계조작 게이트 당사자' 피켓을 들고 질의를 하고 있다./뉴시스

기자들은 숙명적으로 거짓말을 듣는다. 취재원이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면 팩트를 가려내기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정부 부처가 그럴듯한 근거로 둘러대면 난관에 부딪히곤 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통계가 그랬다. 같은 집값인데 민간 KB 통계를 보면 시장이 펄펄 끓었고, 정부 공식 채널인 한국부동산원 통계는 미지근했다. 이유를 물으면, 부동산원은 전문 조사자가 실거래가 중심의 ‘거래 가능 가격’을 산출하고, KB부동산은 공인 중개사가 호가를 입력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여기에 부동산원은 기하평균(제본스지수), KB부동산은 산술평균(칼리지수)을 활용한다고 기술적인 얘기까지 보태면 미궁에 빠졌다. 미심쩍었지만 설마 통계까지 조작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감사원 조사 결과, 청와대와 국토부의 압력으로 부동산원은 이미 조사한 상승률을 인위적으로 낮추고, 나중에는 아예 표본 조사도 하지 않고 임의로 숫자를 넣었다. 고도의 통계 기법 차이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통계를 조작했을 뿐이다.
집값을 놓고 다툰 시민 단체 경실련과 문재인 청와대 관계도 미스터리였다. 2021년 6월 문 정부가 지난 4년간 집값이 17% 올랐다고 발표하자, 경실련은 시세 기준 79% 상승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청와대는 더는 국민을 속이지 말고 지금 당장 깜깜이 통계, 조작 왜곡 통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진보 진영 시민 단체라고 하더라도 이런 불경한 주장에는 펄펄 뛰어야 했을 청와대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 미스터리도 감사원 조사에서 풀렸다. 이보다 1년 전, 경실련은 김현미 당시 국토부 장관이 “지난 3년간 서울 집값 상승률이 11%”라고 하자, 이를 반박하며 김 장관 교체를 요구했다. 김상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경실련 본부장이 날뛸 때 강하게 반박하라는 말입니다”라고 국토부 관료를 질책했다. 이 관료가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반박 시 공격받을 수 있다”고 하자, 김 실장은 “그렇게 소극적으로 합니까”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1년 뒤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지만, 김 실장은 자신의 부동산 문제로 경질된 뒤였다. 명분도, 악역을 담당할 인물도 청와대엔 남아 있지 않았다.
2021년 7월엔 부동산원이 아파트 값 표본 통계를 두 배(3만5000건)로 늘리자 수도권 아파트 시세가 순식간에 약 20% 올랐다. 샘플을 늘렸다고 해서 지난 1년간 오른 집값의 4배가 불과 한 달 만에 상승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부동산원은 ‘표본 가격 현실화’ ‘표본 재설계’라고 했다. 말장난일 뿐이었다. 지속적으로 통계를 조작하다보니 현실과 너무 괴리가 커져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털어내는 작업을 이때 한 것이다. 그동안 실무자들이 부동산 통계를 조작하느라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문 정부에서 ‘소득 주도 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분배 악화 통계가 나온 뒤 황수경 통계청장은 경질됐는데, 이임식 내내 울었다. 짐작은 갔으나 내밀한 사연은 취재되지 않았다. 감사원 조사 결과,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통계청 공무원을 청와대로 불러 밤새 통계 조작을 시도했고, 이 자리엔 후임 청장이 된 대학 후배가 함께 있었다. 일부 통계청 직원은 황 청장을 건너뛰고 청와대와 직거래했다.
역대 정부도 조금씩 통계 마사지를 했지만, 문 정부처럼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진 않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정권 수뇌부가 대거 개입하고, 스스로 개정한 통계법을 어겨가며 조작한 사례도 전례가 없다.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이제라도 드러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일보 박종세 논설위원
10-19 [단독]“文 정부, 업무규정 바꾸면서 부동산 통계조작”

▲왼쪽부터 장하성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통계 조작 과정에서 한국부동산원의 검증과 점검 기능을 무력화하기 위해 업무 세칙까지 삭제하는 등 치밀하게 통계조작을 진행했다는 의혹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다.
1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박정하(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부동산원은 문 정부가 아파트 통계 조작을 위해 부동산원을 압박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알려진 2017년 6월로부터 5개월이 지난 11월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업무세칙’에서 가격 검증 등을 위한 규정을 손질했다.
애초 세칙 제14조1은 ‘조사총괄부장은 가격균형 유지, 가격수준의 적정성, 표본 기초 정보의 정확성 제고, 실거래가 반영을 위한 검증을 실시한 후 심사자에게 심사를 요청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11월 개정 세칙에선 이 조항이 ‘주택가격동향조사업무는 3단계의 심사를 거치며 심사단계에 따라 다음 각 호의 자가 수행한다’로 바뀌었다. 검증을 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삭제된 것이다. 제14조2는 ‘거점 지사장은 매월 부동산 시장 점검회의를 주관하고, 거점지사 조사총괄부장은 간사로서 회의 준비 등의 행정사항을 총괄한다’고 규정돼 있었으나, 11월엔 ‘부동산 시장 점검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
박 의원은 “검증 관련 조항이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마자 되살아난 배경을 철저히 파헤치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
10-20 [속보]검찰, ‘통계 조작 의혹’ 관련 문 정부 대통령기록물 압수수색 중
19일부터 이틀째 진행 중…자료 선별해 열람
감사원, 문 정부 핵심 인사들 수사 요청…문 전 대통령은 포함 안돼
문재인 정부가 집값을 비롯한 주요 국가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대통령기록관을 이틀째 압수수색 중인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전지검은 전날(19일)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보내 감사원이 수사를 요청한 통계 조작 의혹 사건과 관련 기록물을 확인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당시 청와대(대통령 비서실) 등에서 만들어진 대통령 기록물 가운데 관련 자료를 선별해 열람하는 방식으로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검찰은 통계 조작 의혹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해 왔다. 이달 초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나서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업무용 PC에 대해 데이터 포렌식 작업을 진행했다. 또, 2017년 당시 통계청 표본 관련 부서에서 근무했던 통계청 과장 A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기도 했다.
감사원은 청와대와 국토부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최소 94차례 이상 한국부동산원 통계 작성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통계 수치를 조작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감사원은 또 집값 뿐 아니라 소득·고용 관련 통계에도 청와대가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왜곡·조작하기 위해 개입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감사원이 수사 요청한 대상에는 전임 정부 정책실장 4명(장하성·김수현·김상조·이호승)이 모두 포함됐다. 감사원은 이들 외에도 홍장표 전 경제수석, 황덕순 전 일자리수석,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 강신욱 전 통계청장, 윤성원 전 국토부 1차관, 김학규·손태락 전 한국부동산원장에 대해서도 수사를 요청했다.
다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수사 요청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문화일보 오남석 기자
10-20 한수원, 文 정부 ‘염전 태양광’ 800억 규모 운영권 민간업체에 넘기고 이사회 보고도 안 해

▲한국수력원자력 연합뉴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 20일 한국수력원자력 자료
한수원, 文 정부 탈원전 정책 대표하던 ‘비금도 주민 태양광 발전사업’
국내 최초 대규모 주민참여형 태양광 사업
한수원, 2022년 3월 정재훈 전 사장 결재로 O&M을 공사업체 LS일렉트릭에 넘기는 ‘변경주주협약’ 체결
추진 과정서 800억 원 규모 운영관리권(O&M) 포기에 따른 수입 감소 예상에도 이사회 보고도 안해
박 의원 "의사 결정 과정에 배임 소지가 있는지 살펴야"
한국수력원자력이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 염전에서 태양광 발전사업을 추진하며 800억 원 규모의 운영관리권(O&M)을 포기하고 민간 업체에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비금도 주민 태양광 발전사업’은 국내 최초의 대규모 (200MW) 주민참여형 태양광 발전사업으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그린 뉴딜 정책을 대표하던 사업이다. 한수원은 태양광 발전 사업 추진 과정에서 공사와 운영관리를 민간 업체에 맡겨 수입이 크게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 예견하고도 사실을 이사회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났는데, 여권에서는 의사결정을 내린 정재훈 전 사장 등 한수원 관계자들에 대한 배임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2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한수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수원은 지난해 3월 전남 비금도 염전에서 ‘비금도 주민 태양광 발전사업’을 진행하던 중 800억 원 규모의 O&M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민간업체에 넘긴 것으로 파악됐다. 한수원은 지난 2019년 3월 주민협동조합 등과 업무협약을 맺은 후 2020년 5월 주주협약을 할 때까지 산업부의 사전협의, 이사회 등에서 한수원의 역할인 한수원의 역할인 ‘O&M 주관’을 진행하며, 주주협약서에는 "O&M은 한수원이 우선적으로 수행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했다. 사업부서가 이사회 등에 제출한 자료에는 "적기의 한수원 출자가 없을 경우 O&M의 주도권 상실이 우려된다"며 신속한 출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착공을 4개월 앞둔 2022년 3월 한수원은 정재훈 전 사장의 결재를 받아 O&M을 공사업체인 LS일렉트릭에 넘기는 ‘변경주주협약’을 체결했다. 박 의원은 "O&M 예상수입은 계약상 최초 연도에 33억 원이었고, 매년 2%씩 증가하게 돼 있어 20년 추산 약 800억 원 규모"라고 밝혔다.
한수원은 정 전 사장의 결재 후 하루 만에 열린 이사회에서 해당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발전사업의 사업비를 증액하는 안건이 심의됐지만, O&M을 LS일렉트릭으로 넘겨 한수원의 예상수입이 크게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을 대해서는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박 의원은 "한수원이 800억 원 규모의 권리를 민간업체에 넘기는 과정에서 결국 공사와 운영관리를 모두 맡은 민간 업체가 사업비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구조"라며 "의사결정과 결재 과정에서 배임 소지가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일보 최지영 기자
10.23 대한민국 탄생의 기적… 내일은 유엔데이다
레닌도 마오쩌둥도 열악한 나라 상황 핑계로 민주주의 버리고 독재 정당화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은 유엔 주도하에 전 국민 투표권, 1948년 제헌의회 꾸려
정작 우리는 잊고 있는 세계 민주주의史의 기적이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인 제헌국회의원선거 투표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직장인들은 매년 말 이듬해 달력을 넘겨보며 ‘빨간 날’을 확인하고 일희일비하지만, 프리랜서 생활을 한 지 오래인 필자는 공휴일에 그리 민감하지 않다. 한창 정신없이 일하다 문득 달력을 보고 ‘오늘이 휴일이었구나’라고 깨닫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감각은 때로 반대로 작동하기도 한다. 공휴일이 아닌지 오래되었기에 다들 잊고 있는 국경일 혹은 기념일을 새삼 달력에서 찾아보곤 하는 것이다.
내일, 10월 24일 국제연합일(國際聯合日)도 그런 날이다. 일명 ‘유엔데이’로 통하는 지난 시절의 국경일이다. 한국에만 있는 날은 아니다. 1945년 유엔 창설을 기리는 세계 공통의 기념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각별한 날이다. 우리나라의 탄생과 국제연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어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에 들어갔다. 문제는 그 후의 역사적 궤적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한 운동권의 현대사는 우리가 일본의 뒤를 이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으로 “납작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것은 국제연합을 통한 국가 창설이라는 초유의 실험을 폄하하는 역사 왜곡일 뿐이다.
스스로의 역사이기 때문일까.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이 얼마나 독특했는지 우리는 그 가치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자유 진영의 대립으로 인해 절반으로 나뉜 어떤 피식민 지역이 있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처럼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임시정부가 있던 것도 아니다. 일본이 북한 지역에 남겨둔 약간의 산업 자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세계 최빈국 수준의 농업 국가다.
그런 나라가 갑자기 온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총선거에 돌입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그것은 역사 발전의 단계를 단번에 뛰어넘는 무모한 도전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의 역사가 그랬다. 산업 기반이 취약한 후진국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도, 그보다 뒤떨어진 농업국 중국의 마오쩌둥도, 모두 자국의 열악한 상황을 핑계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독재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유엔에서 파견된 감시단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투표 종료 후 진행된 개표를 참관하는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한민국은 그런 길을 가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버거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왕이 다스리던 대한제국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도 상당수였다. 이런 나라에서 유엔 주도하에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고 총선거를 통해 제헌의회를 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나라가 태어났다.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탄생한 사실상 최초이자 최선의 민주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75년이 흐른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자 모범적인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기적이었다.
대한민국과 국제연합의 관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 나라가 태어난 후 2년을 겨우 넘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과 함께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대한민국은 국제연합과 함께였다. 남침 개시 직후 안보리 결의를 통해 유엔군 파병이 결정됐고, 16국이 전투병을 보냈으며, 그 외 5국이 의료 등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엔군사령부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중이다.
미합중국은 18세기의 지식인들이 머리를 맞대어 헌법을 만들고 탄생시킨 계몽주의의 나라였다. 대한민국은 20세기의 피식민 백성들이 국제연합의 도움하에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를 뚫고 평화적인 총선거를 통해 이룩해 낸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다. 인류 역사상 어떤 나라가 그렇게 태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이들은 애써 도외시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건국 설화인 것이다.
날씨 좋은 10월, 이미 개천절과 한글날이라는 두 공휴일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 달에 사흘이나 공휴일이면 지나칠 듯하다. 그렇다면 개천절 대신 국제연합일, 유엔데이를 다시 공휴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단군의 자손들끼리 모여 사는 민족국가를 넘어, 전 세계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글로벌 선진 국가로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국제연합의 탄생을 국가적 경사로 삼을 자격과 의무가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드리는 제안이다.
조선일보 사설
10-23 마크롱 뚝심과 솔로몬 지혜 필요한 연금개혁

김충남 사회부장
국민연금 35년간 단 2차례 개혁
저출산 심화로 재정 악화 가속
개혁 늦어 국제 평가 꼴등 수준
정부도 국회도 개혁 의지 실종
이번에 못하면 연금 위기 직면
재정 안정 위한 단일안 내놔야
“나는 인기 없는 쪽에 설 준비가 돼 있다. 여론조사와 국가 이익 사이에서 국익을 택하겠다. 우리가 기다릴수록 (연금) 재정은 더 악화할 것이다.”
지난 3월 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 공약이자 30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연금 개혁에 승부수를 던졌다. 올해부터 18억 유로(약 2조5000억 원) 적자로 돌아선 연금 재정을 개혁하기 위해 2030년까지 정년과 연금 수령 개시 시점을 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안을 내놨다. 야당은 물론 국민 70%가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로 번졌지만, 의회 동의 없이 정부가 단독 입법을 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4월 15일 법에 공식 서명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해 취임 직후 연금 개혁을 3대 개혁 과제로 제시하며 “인기 없는 일이지만, 해내야 한다”고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지난 1988년 출범한 국민연금은 현재 적립금이 1000조 원을 넘었지만, 단 두 차례 개혁에 그쳤다. 1998년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수령액 비율)을 70%에서 60%로 낮췄다. 60세인 연금 수급 연령은 2033년까지 65세로 상향 조정했다. 2007년에는 2028년까지 소득대체율을 점진적으로 40%(올해 42.5%)로 낮추는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월급(기준소득월액) 대비 보험료율은 1998년 9%(고용주 4.5%, 근로자 4.5%)가 25년째 유지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심화로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연금 재정이 악화하고 있지만, 손을 대지 못했다. 지난 3월 발표된 제5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에 따르면 연금 재정은 2041년부터 적자가 발생해 2055년엔 바닥난다. 개혁이 지체되는 사이 우리의 연금 제도에 대한 국제 평가는 꼴등 수준으로 떨어졌다. 최근 미국 연금 전문 자산운용업체 머서 등이 발표한 ‘2023 글로벌 연금지수’에 따르면 한국 연금 제도는 보장성과 지속가능성, 제도 신뢰 등에서 51.2점으로 47개국 중 42위에 머물렀다.
이런데도 연금 개혁은 후퇴 조짐이 뚜렷하다. 지난해 7월 출범한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보험료율 등 모수(母數) 개혁에서 기초연금 등과 연계한 구조개혁으로 방향을 틀더니 성과물 없이 활동 기간만 내년 5월 말까지 또 늦췄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표가 깎일 수 있는 연금 개혁에 사실상 손을 놓겠다는 뜻이다.
지난달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9%인 보험료율 12%, 15%, 18%로 인상 △수급개시 연령(올해 63세) 66세, 67세, 68세로 연장 △기금 수익률 0.5∼1%포인트 인상을 조합한 18개 시나리오에 소득대체율 45%, 50% 인상 안을 추가했다. 보건복지부는 재정계산위의 보고서를 토대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이번 주에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정부가 구체적인 내용 없이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윤 정부에 개혁 의지가 있다면 이번에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단일안을 내놔야 한다. 재정계산위는 보험료율 15%(2025∼2035년 매년 0.6%포인트)로 인상, 연금 수급 연령 68세로 상향, 투자 수익률 1%포인트 상향, 소득대체율 40%가 조합되면 2093년까지 기금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인구 위기와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하면 이 안이 가장 현실적이다. 보험료율 9%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18.2%)의 절반 수준으로 6% 정도 더 올릴 여유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수급 연령도 향후 정년 연장 등을 조건으로 수용이 가능하다. 우리처럼 관대한 공적연금을 운용해온 독일·스웨덴·일본도 저출산·고령화로 위기를 맞자 선제적인 보험료율 인상 등을 단행해 재정 안정에 성공했다. 보험료를 더 내고 더 늦게 받는 개혁안에 반대가 적지 않겠지만, 보험료를 낼 사람은 줄어들고, 받을 사람은 급증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한 개혁 방향이다. 동시에 기초연금 개편, 다층 보장체계, 재정의 역할 등 구조개혁의 분명한 방향도 제시해야 한다.
인기 없는 개혁안을 놓고 어떻게 국민을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국익을 위해 개혁을 밀어붙인 마크롱의 뚝심과 민생고를 겪는 국민 마음을 살피면서도 미래세대를 위해 보험료 인상을 논리적으로 설복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문화일보
10.24 계륵이 된 1100억원짜리 ‘박원순 공중 보행로’
슬럼화된 세운상가의 보행로 통행량 예상의 5~17% 불과
개통 2년 만에 철거 앞둔 박원순식 도심 재생의 실패작
“청계천 보고 충격받았는데 이후엔 아파트만 짓더라” 日 전문가 지적 뼈아파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공중보행교 전경.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다시 걷는 세운, 다시 찾는 세운, 다시 웃는 세운' 3가지를 목표로 건설됐다./뉴스1
얼마 전 서울 도심의 세운상가 공중 보행로에 가봤다. 이 보행로는 종묘 앞 세운상가에서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7개 건물을 잇는 1km 구간이다.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가 1100억원을 쏟아부어 완성한 것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을 법한 점심시간대였는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보행로 건설 당시 하루 통행량이 1만3000명에 이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예상의 5~17%에 불과하다. 또 보행로를 받치는 각종 구조물 탓에 지상 도로와 인도의 동선(動線)이 꼬이고, 세운상가의 슬럼화로 전체 방문자 숫자도 보행로가 생기기 전에 비해 오히려 50%나 줄었다고 한다. 건축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1968년 완공한 세운상가와 주변의 낡은 ‘벌집’ 점포들 사이로 뻗은 새 보행로가 생뚱맞게 보였다.
박원순의 서울시는 이 보행로 건설을 할 때 세운상가 일대를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제조 신기술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다. 목표대로라면 보행로를 따라 설치된 30여 개 사무 공간에는 지금쯤 드론, 반도체 장비, 모빌리티, 스마트 의료 기기 등 첨단 제품의 개발실로 넘쳐나야 하지만 실제로는 텅 빈 공간뿐이었다. 스타트업과 대학의 창업 인큐베이터 시설이 입주하기로 했던 아세아 상가는 아예 재개발을 위해 철거돼 버렸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판교·분당 등 수도권에 새로 지은 창업센터가 즐비한데 낡은 건물에서 일을 하려는 젊은 직원들이 있겠느냐”면서 “쓰러져 가는 건물 앞에 새 육교가 생겼다고 해서 직원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혈세(血稅) 1100억원이 투입된 보행로가 ‘계륵’ 신세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보행로는 완전 개통된 지 2년 만에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세훈 현 시장의 서울시는 세운지구 일대 상가 7개동을 모두 허물고 30~40층짜리 고층 빌딩과 녹지가 들어서는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대규모 개발을 못 하게 171구역으로 쪼갰던 세운지구를 39구역으로 다시 통합하고 고도 제한 등 규제 완화에도 시동을 걸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세운지구 전체(44만㎡)가 순탄하게 재개발된다면 수십 조원이 투자되는 역대 최대 규모의 도심 재개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건축 전문가들은 개발보다는 ‘보존’에 방점을 둔 박원순식 세운상가 재생 사업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실패작”이라고 단언한다. 한국 1세대 대표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라는 상징성이 있긴 하지만 주변까지 급격히 슬럼화되는 것까지 방치하면서 보존해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특히 낡은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공중 보행로 하나로 죽어가는 상권을 되살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유명 건축가는 “박원순 시장 시절엔 건설업체에 개발 특혜를 줘서는 안 된다는 좌파 논리가 회의를 지배했고 세운상가는 도심 개발을 막는 최악의 건축물이 됐다”고 말했다.
세계의 도시들은 지난 10여 년간 박원순의 서울시와는 정반대로 갔다. 골목 살리기 식의 도시 재생보다는 대규모 도심 개발을 통해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들었다. 글로벌 금융 지구로 변신한 일본 황궁 앞 마루노우치, 철도 기지를 고급 주상복합 단지와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뉴욕 허드슨야드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대규모 개발을 통해 경제 활성화와 도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일본 마루노우치를 가보면 옛 건물의 전면부만 보존한 고층 빌딩, 100년 넘은 문화재를 둘러싼 빌딩 등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잠실 롯데월드를 설계했던 일본의 원로 건축가는 취재차 일본을 방문했던 본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도시 전문가들은 청계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심을 흐르는 인공 하천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지요. 청계천은 일본 도심 개발의 모멘텀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이후 아파트를 짓는 것 외에는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더군요.” 뼈를 때리는 지적이다.
조선일보 조형래 부국장 겸 에디터(경제담당)
10-24 1%대 추락 잠재성장률… 개혁 발목 잡는 ‘정치’ 책임 크다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올해 1.9%로 떨어지고, 내년에는 1.7%로 곤두박질할 것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는 한국 경제의 날개 없는 추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내년에는 미국(1.9%)보다도 잠재성장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저성장이 장기적 추세로 굳어지고 있다는 경고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자본·노동력·자원 등의 생산요소를 총동원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성장률 전망치다. OECD는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지목하는 한국 잠재성장률 추락의 가장 큰 원인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다. 그 다음으로는 인구문제를 상쇄할 만한 자본투자나 생산성 혁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좋은 교훈을 얻어야 할 사례는 2010년대 초반 1.4%까지 내려갔던 잠재성장률을 올해 1.8%까지 끌어올린 미국이다. 고부가가치인 신성장산업들을 꾸준히 탄생시킨 데다 연구개발과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빠르게 이뤄냈다. 노동시장 유연성에 힘입어 실업률도 크게 하락했다. 현재 한국 상황은 정반대다. 우선, 이런 청사진부터 안 보인다. 더 이상 노동력과 자본을 추가로 투입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는 무리다. 여기에 미·중 디리스킹으로 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산업군이 유탄을 맞고 있고 인공지능·바이오 등 차세대 산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저성장 극복을 위한 해법은 이미 제시돼 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과 규제 완화·기술 혁신 등이다. 문제는 실행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3대 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려고 해도 거대 야당의 반대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의료·금융 등 서비스산업의 규제 완화는 이익집단의 반발에 막혀 있다. 노동력 부족을 메워줄 여성 인력과 이민 정책·해외 노동자 활용도 결국 입법으로 풀어줘야 할 과제다. 이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다. 경제의 성장판이 닫히면 국가가 발육 부진에 빠지고, 나라 전체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어느 때보다 정치권의 책임이 크고 무겁다. 이런 정치를 바로 세울 최종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문화일보 사설
10-24 정년연장이 고용연장 돼선 안 된다

권혁주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연금 파탄 막을 정년연장 발상
소득 공백을 월급으로 메우면
배보다 배꼽 커지는 현상 발생
60세 이후 생산성 유지가 본질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필수
고용 유연성 확보가 선행 과제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사회로 들어서고 있다. 2022년 기준 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고,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가 곧이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이러한 인구의 초고령화에 따른 심각한 사회문제도 대두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가장 높은 수준이며, 기대수명의 증가로 인해 퇴직자의 연금수급 기간이 장기화해, 공적연금 재정 수지의 급속한 악화도 예견된다. 더 큰 문제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인해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회문제에 대한 정책 대안으로 정년 연장이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미래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이에 앞서 필요한 노동시장의 개혁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최근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키로 한 수급개시 연령을 68세로 더 늦추는 대안을 제시했다. 연금 기여율 인상과 함께 연금 수급개시 연령을 높여 연금의 재정지출을 통제하자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는 법정 정년인 60세부터 8년의 소득 공백이 발생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퇴직자의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는 제도로, 공적연금의 취지에서 볼 때 이 같은 소득 공백은 심각한 결함이 된다. 조기 퇴직연금을 활용해 감액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장기간 보험료를 내고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연금 전액을 못 받는다면 이는 심각한 취약점이다.
연금 수급개시 연령 상향 조정에 대해 가장 적절한 대응 방법은 그에 상응하는 정년 연장이다. 특히, 저출산·고령사회로 넘어가면서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60세 이상 고령인구의 지속적인 경제활동 참여는 노동시장의 수요에 부응하는 적절한 노동 공급 대책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연금 수급개시 연령을 높이는 데 맞춰 정년을 연장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문제가 있다. 퇴직자의 연금 소득 공백을 돈이 훨씬 더 드는 월급으로 메우는 문제 때문이다. 따라서 정년을 연장하려면 60세 이후에도 근로자가 보수에 걸맞은 생산성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도록 노동시장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하나의 대안으로, 정년 연장 이후 고령 근무자의 보수를 이전보다 낮게 책정하는 임금피크제가 시행됐다. 하지만 고령 근무자의 업무 능력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한다는 정책의 취지는 살리지 못한 채 단순히 고용을 연장하는 효과만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대법원이 나이만을 이유로 임금을 차별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판시함으로써 이를 적절한 대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정년 연장에 앞서 다음과 같은 필수적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첫째, 60세 이후 퇴직자 중 필요한 업무를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재고용 제도를 우선 시행할 필요가 있다. 특별한 기능이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무의 경우 해당 업무를 수행할 근로자를 재고용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 민간부문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에서도 본격적으로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 현재의 직무 및 성과 체계에서는 고령자를 재고용해도 그들이 생산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무가 제한적이다. 따라서 고령자 재고용 효과를 광범위하게 실효적으로 창출하기 위해서는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로 개편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연공서열에 따른 위계적 조직 체계를 개혁하는 일이다. 연차에 따라 승진하고 계급에 따라 관리·통제하는 관리자 중심의 조직 체계를 수평적이고 유연한 과업 중심의 팀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능력과 생산성에 따라 승진하고, 저성과자는 퇴출시키는 유연한 고용 체계도 필요하다. 고임금·고위직 고령자의 정년 연장은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긴커녕 동맥경화와 같은 현상을 불러올 뿐이다.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신세대들과 위계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인 동료로서 고령자가 함께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정년 연장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문화일보
10.27 ‘제국의 위안부’ 무죄… 상식 확인하는 데 6년 걸려야 했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 등으로 표현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를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는 26일 형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 교수에게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이날 오전 박 교수가 서울 대법원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 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26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심 무죄 판결, 2심 1000만원 벌금형이었는데 대법원은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이 사건은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만한 사실의 적시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문제를 오래 고민해온 학자로서 연구 결과와 소신을 표명한 책이다. 이런 학문적 성과에 대해 법적 처벌 여부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박 교수 재판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학문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준거(準據)가 되고 한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박 교수가 기소되자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및 위안부 사죄 담화를 주도한 무라야마 전 총리와 고노 전 관방장관을 포함, 50여 명의 일본 지식인들이 비판 성명을 낸 바 있다.
대법원은 명예훼손죄에서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의견 표현을 사실의 적시로 평가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전체적인 맥락에 비춰 보면 박 교수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부인하거나, 자발적 매춘 행위를 했다거나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매춘부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2심 재판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학문의 영역까지 검찰이 헤집고, 법원이 시류에 편승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확인한 것이 뒤늦은 교훈일 것이다.
대법원 판결을 보면 어떤 쟁점도 발견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어야 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박 교수는 2017년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사건의 주심인 노정희 대법관은 2018년 8월 전임자의 퇴임으로 사건을 넘겨받고 5년 2개월 만에 판결을 내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노 대법관은 좌파·진보 성향의 우리법연구회 소속으로 임명권자의 의중에 맞춰서 판결을 내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 판결 역시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에도 충분히 내릴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 박근혜 정부에서 맺은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면서 반일(反日)을 내건 문재인 정권의 기조와 맞지 않아서 미루고 또 미뤘던 것 아닌가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조선일보 사설
10.27 집값 거품 책임자의 엉터리 반성문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 거품을 초래한 장본인이 반성문을 썼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펴낸 『부동산과 정치』란 제목의 책이다. 김 전 실장은 이 책의 맨 앞에 “문재인 정부는 집값을 못 잡았다. 그냥 못 잡은 정도가 아니라 두 배 넘게 뛰어버린 아파트 단지가 허다했다”며 실패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연이어 전세금도 급등했다. 어떠한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책의 나머지 부분은 진솔한 반성보다는 자기변명에 가깝다. 규제 일변도의 무리한 정책을 쏟아내며 부동산 시장을 왜곡한 것에 대한 후회나 성찰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더 일찍, 더 센 규제의 칼을 휘둘러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는 식이다.
김수현의 신간 『부동산과 정치』
“더 세게 규제 못한 게 실패 원인”
잘못된 처방 반성 않고 변명 일관
김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네 가지 책임’의 첫째로 부동산 대출 증가를 꼽았다. 그러면서 “나는 문재인 정부가 적기에 더 강한 대출 규제와 가계부채 관리에 나서지 못했던 것을 가장 중요한 부동산 실패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가 다시 정권을 잡는다면 부동산 대출은 더 세게, 더 확실히 조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 정부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는커녕 더 센 규제의 예고편을 틀고 있다.
김 전 실장은 대출 규제를 더 세게 하지 못했던 책임을 기획재정부와 금융당국에 돌렸다. 그는 “기재부는 효과가 더디고 논란이 많은 세제 강화는 받아들이면서 유동성 축소나 강한 대출 규제에는 부정적이었다”고 썼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는 대출 규제를 더 세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경제 관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언젠가 김 전 실장이 부동산 정책의 총괄 사령탑으로 복귀한다면 기재부와 금융위원회 공무원들은 일제히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동산 세금에 대한 김 전 실장의 남다른 소신도 충격적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종부세(종합부동산세)를 처음 설계하고 도입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고가 주택 보유자나 다주택자에게만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는 주장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김 전 실장은 고가 주택 보유자나 다주택자를 봐주자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1주택자를 포함한 모든 주택 보유자에 대한 세금 인상을 주장한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바로 주택 공시가격 인상이다. 정부가 공시가격을 올리면 주택 보유자의 세금 부담은 저절로 커진다. 세법을 고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국회의 견제도 받지 않는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에선 해마다 공시가격을 큰 폭으로 올렸다. 이렇게 해서 집값을 잡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결국 집값도 못 잡고 인심만 잃었다.
지난 정부의 경제 정책에서 최악의 실책은 부동산이었다. 김 전 실장도 인정했듯이 어떠한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정부는 “반드시 집값을 잡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때 유행했던 ‘벼락거지’란 말은 무주택자들의 절망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부 말대로 집을 사지 않고 기다렸던 사람들만 바보가 됐다. ‘삼호어묵’이란 필명을 쓰는 윤세경 작가는 “나라에 눈뜨고 코 베인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다.
일부 청년들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패닉바잉’(공황 매수)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군사작전 식으로 밀어붙인 임대차법과 그로 인한 전셋값 폭등이 계기가 됐다.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기)로 집을 샀던 이들은 이자 부담 급증으로 또다시 좌절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말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그는 2020년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일본처럼 우리도 곧 집값이 폭락한다던 진보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다 뻥”이라며 “대통령이 참모로부터 과거 잘못된 신화를 학습했구나. 큰일 나겠다 싶었다”고 전했다. 문 전 대통령에게 잘못된 신화를 주입한 참모는 누구였을까. 조 교수는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김 전 실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실패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건 꼭 필요한 작업이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실패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으면 안 된다. 독한 약을 써서 환자의 몸이 망가졌는데 더 독한 약을 썼어야 마땅했다는 식이면 정말 곤란하다. 이미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이나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무주택 서민들이었다. 이런 실패의 책임자가 세 번째로 나서는 일은 없길 바란다.
중앙일보 주정완 논설위원
10-31 김포의 서울 편입 ‘역발상’ 장단점 따져볼 만하다
그동안 서울특별시는 ‘확장과 집중’을 막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돼 왔다. 행정기관의 세종시 이전과 공공기관의 전국 분산, 수많은 개발 규제 등의 배경이다. 그런데 서울을 확장하자는 역발상이 공론화 대상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25일 김동연 경기지사의 경기북부 특별자치도 비전 선포식을 계기로 촉발됐고,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30일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전국적 현안으로 부상했다. 서울 경쟁력과 균형 발전 등을 포괄해 백년대계 차원에서 논의할 만한 주제이지만, 총선 전략 차원에서 졸속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김 대표는 김포뿐만 아니라 다른 서울 인접 도시들도 ‘주민이 원할 경우’ 편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을 더 광역화함으로써 서울 과밀화 등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소속인 김포시장과 많은 김포 시민도 원래 경기북도 대신 서울 편입을 요구한다. 김포 인구의 85%가 서울로 출퇴근하는 상황에서 지옥철로도 불리는 김포골드라인(경전철) 혼잡을 완화할 지하철 5호선 연장 필요성 등도 서울시 편입 주장에 힘을 보탠다. 김포매립지를 대체할 폐기물 매립지 건립에 난항을 겪고 있는 서울시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요인이 있다.
김포의 서울 편입이 추진되면 서울 통근자가 많은 광명 구리 하남 과천은 물론, 양주 남양주 의정부 안양 등에서도 서울 편입 요구가 분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다시 서울 과포화 상태가 빚어지고, 국토 균형 발전에 역행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서울 과밀화를 해소하고 과도한 서울 집값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나타날 수 있다. 광역화를 통해 도시 경쟁력을 키운다는 측면도 있다. 서울 면적은 경쟁 대도시보다 좁은 편이다. 일본이 도쿄에 인근 지역을 통합한 ‘도쿄도(都)’도 참고할 만하다.
‘메가 서울’ 발상이 여당의 수도권 선거 전략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 공청회 등을 통해 전문가와 주민들 의견도 충분히 듣고 차분히 장단점을 따져 추진해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