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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1/ 2022-03-04 中콤플렉스 벗고 한반도 노린 日, - 12-09 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하다

상림은내고향 2023. 10. 14. 19:12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1/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2

03-04 中콤플렉스 벗고 한반도 노린 日, ‘삼국 간섭’에 제동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한반도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지만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제동이 걸린다.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동아일보DB

 

《1년 동안 연재해온 ‘한일 역사의 갈림길’이란 제목의 연재를 마치고 오늘부터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란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근현대 한국은 그것에 배우고 저항하며, 그것에 당하고 이겨내며 만들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사는 낯선 대상이다. 밉고 불쾌해서 공부를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이 된 마당에 한국 시민도 20세기 일본을 냉정하게 직시해 볼 때가 되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 시민의 시각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어디까지 성숙했는가를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세기 일본사 연재는 한국 신문상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을 바란다.》

 

문명 실어나른 대한해협

 오늘은 첫 회니 일본사의 전반적인 배경과 20세기 전야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과 중국 대륙의 관계를, 영국과 유럽 대륙 관계와 비교하는 주장이 있다. 사뭇 다르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은 33.3km에 불과한 데 비해 중국 서남해안과 나가사키 사이에는 광활한 동중국해가 가로놓여 있다. 게다가 동중국해는 파도가 거칠어 왕래가 매우 힘들었다. 일본은 겨우 7세기, 8세기나 되어서야 수나라, 당나라에 대규모 사신(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을 파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중국 대륙과의 거리야말로 일본사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틀 지은 제1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만이었다면 일본은 낙후된 거대한 섬으로 남았을 거다. 그러나 동중국해는 광활했지만, 대한해협은 좁았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는 200km 정도인데 중간에 쓰시마라는 큰 섬이 있었다. 게다가 온화한 바다였다. 한반도가 정력적으로 흡수·소화한 중국 문명은 쉽사리 현해탄을 건넜다. 넓은 동중국해는 중국의 침략을 막아주었고, 좁은 대한해협은 중국·조선의 문명을 날라다 줬다.

한반도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일본사에 중요했다. 그것은 일본 열도가 한국사에서 갖는 의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했다. 하나는 방금 말한 문명의 젖줄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대륙발 침략전쟁의 방파제 역할이다. 만리장성이 상징하듯, 한 무제-흉노에서 명-청 전쟁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랫동안 중국과 유목세력이 충돌했다. 그 여파는 늘 한반도에 밀려와 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모두 현해탄을 건너지 못했고, 일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는 13세기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한 일이다.

 

자급자족과 고립 택한 日

이처럼 일본은 중국 대륙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그 문물은 한반도를 통해 ‘안전하지만 큰 시차를 두고’ 흡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일본에는 수준 높지만 고립적이면서도 특수성이 강한 문명이 성장했다. 면적은 19세기 중엽 편입된 홋카이도를 빼도 한반도나 영국보다 훨씬 넓었고, 토양이나 기후도 매우 좋아 농업생산력이 높았다. 나라의 규모나 생산력이 고립적으로 살아가도 별 문제가 없었다. 임진왜란 후 성립한 도쿠가와 시대는 특히 그랬다. 이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은 자급자족과 고립이었다.

18세기까지는 비단, 도자기, 차 등 중국·조선에서 수입하던 상품들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쓰시마의 왜관무역도 비중이 날로 줄어들었다. 또 도쿠가와 시대 250년 동안 일본은 서울이나 베이징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적이 없다. 사절은커녕 부산 왜관을 제외하고 일본인은 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명한 쇄국정책이다. 남서쪽 유구 왕국(현 오키나와)은 규슈 남부의 사쓰마번(薩摩藩)을 통해 간접 지배했고,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직전 유구의 직접지배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나타났으나 막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방에는 광활한 에조지(蝦t地·현 홋카이도)가 있었다. 여기서도 남단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松前藩)을 두었을 뿐, 더 이상의 북진은 시도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노선 전환

▲일본이 청에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담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고 보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국가 전략은 180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부국강병 노선은 도쿠가와 시대에도 있었으나 근대일본은 이를 해외에서 추구했다. 쇄국은 별안간 해외 ‘웅비(雄飛)’로 전환했다. 물론 급격한 노선전환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유신(1868년)부터 청일전쟁(1894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웅비론’의 가부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대 만 침략(1874년), 운요호사건(1875년), 갑신정변(1884년)은 그 과정에서 수면 위로 삐죽 나온 포말(泡沫)이었다. 청일전쟁 발발은 ‘웅비론’ 측이 마침내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너무도 달콤했다. 대청제국을 무찔렀다는 사실은 ‘중국 콤플렉스’가 있던 일본인들을 열광시켰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 적은 전사자로 대만, 랴오둥반도, 막대한 배상금 등 전리품도 두둑이 챙겼다. 무엇보다 청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숙원사업을 달성했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힘을 겨루는 일본과 러시아를 풍자한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기쁨도 잠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랴오둥반도의 반환을 요구해 온 것이다. 청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러시아와 독일 함대는 산둥반도로 모여들었다. 한국에서는 갑오개혁정부·일본에 밀려나 있던 고종·민비가 권토중래를 꾀했다. 당황한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은 민비 시해라는 참극을 벌였고,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에 굴복했다.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었고 한반도에서도 발을 뺐다. 일본 열도는 분노로 들끓었다. 러시아에 굴복한 정부를 비굴한 외교라며 몰아세웠다.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폭주했다.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은 대외강경론이 인기를 끄는 시대가 되었음을 잽싸게 알아챘다. 그러나 영국과 함께 당시 주요 2개국 (G2)이었던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호소했다. 이 말은 삽시간에 국민표어가 되었다. 이때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던, 훗날의 유명한 인물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결같이 ‘와신상담’이란 말을 기억했다. 선생님이 교단에 서더니 칠판에 크게 ‘와신상담’이란 말을 쓰고서는 한참을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더라는…. 일본의 20세기는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04-01 강대국 외교의 중요성, 120년 전 ‘英日동맹’에서 본다

▲1902년 영일동맹 체결 후 일본의 한 백화점에서 제작한 기념엽서(위쪽 사진). 강대국 영국과 동맹을 맺자 일본에서는 자축 분위기가 컸고, 이런 자신감은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이어진다.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사진 출처 나무위키·위키피디아

 

《1899년 겨울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발했다. 5년 전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불러온 것처럼, 이 민중운동은 러일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러시아 군대는 난을 진압하고 나서도 만주에 머물렀다. 10만 대군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은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의견이 갈려 갈팡질팡했고, 1903년의 철수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삼국간섭 이래 ‘와신상담’하며 러시아를 노려보던 일본은 ‘어라, 이거 뭐지?’ 했고, 대한제국은 두 나라가 충돌할까 봐 좌불안석이었다.》

 

청나라인 수천 명 흑룡강 수장

1900년 흑룡강(아무르강)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과 청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벌어지자, 러시아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청나라 민간인 3000명(5000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을 학살하고 흑룡강에 수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은 ‘아무르강의 유혈이여’, ‘우랄의 저편’ 같은 노래를 부르며 반러감정을 선동했다. “서기 1900년, 한없이 긴 아무르여. 러시아인의 횡포에 청나라 백성, 죄 없이 죽은 수 5000명 (중략) 아아, 잔학한 야만족에게 원한을 갚을 때가 되어 (중략) 금빛의 백성이 드디어, 드디어 야마토 민족이 싸울 때가 되었네, 싸울 때가 되었네.”(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금빛(황인종)’의 청나라 사람에 대해 동정을 보이며, 같은 금빛의 야마토(일본)가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인종론으로 전쟁을 선동하고 있다.

백인종의 침탈에 맞서 황인종을 지킨다는 일본의 전쟁논리는 그 후 변화해간다. 러시아와 전쟁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 정계의 지지를 얻어야 했고, 런던과 뉴욕 공채시장에서 돈을 조달해야 했다. 인종전쟁론은 방해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의전(義戰)’으로 프레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인종전쟁론의 설득력은 강력했고,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한국 독립의 약속을 깰 때까지는 한국에서도 그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교 참패 韓, 성과 거둔 日

20세기 들어 일본 국내 정치도 크게 변화했다. 1900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정우회라는 정당을 스스로 만들어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지만 7개월도 안 돼 물러났다. 이토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 뒤를 육군대장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이어받았고 외무대신에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임명되었다. 이들 모두 메이지유신의 원로가 아닌 사람들이다. 원로들은 대외강경책에는 대체로 신중했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된 새 내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을 보호국화하려 했고 방해가 된다면 러시아와도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원로 중 강경파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이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라고 일갈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미적대는 것은 이들의 강경책을 부추겼다.

▲러시아 전함 ‘팔라다’(왼쪽)와 ‘포베다’. 러시아는 일본에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 지역의 중립화, 러시아함대의 자유로운 대한해협 항해 등을 요구했지만 이견을 보였고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러시아와 일본이 한판 붙으면 위험해지는 건 대한제국이었다. 고종은 외교라인을 가동했다. 1900년 방곡령으로 유명한 조병식을 주일공사로 파견해, 일본 정계에 한국의 중립화를 설득했다. 일본은 냉담했다. 고무라 외무대신도, 재야의 거물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마)도 중립국은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은 있어야 되는 거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 대신 한일동맹을 제안했다. 러일전쟁이 나면 중립국 말고 일본 편이 되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종이 전시중립을 선포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에 협력하도록 강제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한일의정서(1904년)다.

 

한국의 외교가 처참하게 실패하는 동안, 일본 외교는 미증유의 성공을 거뒀다. 영일동맹의 체결이다(1902년). 영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여왔다. 한국에 관심은 없었으나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일동맹을 생각해냈고 일본 정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를 방문해 협상하고 있었다. 결국 협상 타결에 실패해 영일동맹 체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위협이 된 영일동맹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이 극동의 신흥국에 불과한 일본과 동맹을 맺자, 일본인들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당시 런던 유학 중이던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인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큰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 같다며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영일동맹하에서 세계 최강국 영국은 한국의 보호국화에도 고종 폐위에도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합병되어도 영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서둘러 정동의 공사관을 떠났다. 강대국에 대한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영일동맹과 1953년 한미동맹은 생생히 보여준다.

영일동맹은 러시아에 위협이었다. 일본도 러시아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양측의 요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해주면,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만주는 일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협상의제를 한국 문제로만 하려는 생각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화할 것,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을 것 등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국을 교환(만한교환론)하려던 일본의 의도는 무산됐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민간에서는 주전론이 비등했다. 전쟁을 말려야 할 언론인, 학자들이 부추겼다. 뭐에 홀렸던 것일까. 일본 젊은이만 20만 명을 희생시킨 이 전쟁을 꼭 해야 할 이유란 무엇이었던가? 한국을 장악하지 못하면 일본의 방위는 정말 위태로웠을까? 시베리아철도도 동청(東淸)철도도 아직 개통되지 않은 마당에 러시아가 정말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을까? 흑룡강에서 죽어간 청나라 사람들을 애도하던 그 마음으로 요동반도 반환을 받아들이고, 일본열도 전수방위(專守防衛)를 전략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아군에 총질하는 자’로 재갈이 물려졌다. 사상과 언론의 세계에서 ‘아군에 총질하는 자’는 언제나 필요한 존재들이며, 이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야말로 이적행위다. 애국의 이름으로 진짜 이적행위를 하는 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마침내 일본 해군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했다.

 

04-29 러일전쟁 승리, 日 국익에 정말 이로웠나

▲러일전쟁 개전 초기인 1904년 4월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게재된 만평. 러시아는 거인으로, 일본은 소인으로 그리며 러시아의 전쟁 우위를 점친 서구의 시각을 담았다(왼쪽 사진).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맺는 러시아와 일본 대표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04년 2월 일본은 뤼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공격했다. 마침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재빨리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해 버렸다. 전 세계는 긴장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응원했다. 비록 극동에서 벌어진 러시아-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양 진영의 대리전 성격이 다분했다. 전 세계의 피식민지인들도 과연 유색인종이 백인종에 맞서 이길 수 있는지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분열된 러, 일치된 日 

청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터였지만, 이번에는 주로 만주가 주 무대였다. 일본은 거국일치로 결사적이었던 데 비해 러시아는 일본만큼 결연하지 않았다. 차르와 정부 요인들에겐 단호함이 결여되어 있었고, 모스크바와 저 멀리 만주 현지 사이 연락도 원활하지 못했다. 일본 국민들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 지지에 나선 데 비해 러시아에서는 병사도 국민도 왜 모스크바에서 3000km나 떨어진 곳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전쟁 협력은커녕 1905년 1월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전쟁 명분’이 국민과 병사의 사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는 지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은 만주의 요충지인 사허(沙河), 펑톈, 뤼순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엄청난 소모전으로 양측 전력은 이미 바닥이 나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미국은 한쪽이 일방적 승리를 거두기 전에 중재에 나섰다. 러시아가 이기는 건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압도적으로 이겨 만주를 독차지하는 것도 싫었다. 결국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으로 한반도 지배권, 랴오둥반도 조차권, 남만주 철도 부설권, 사할린 할양 등을 얻어내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막대한 혈세와 희생 속 승리

러일전쟁은 20세기 총력전의 선구였다. 기관총, 철조망, 참호전이 등장해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 전사자는 10년 전 청일전쟁의 10배였다. 전쟁 비용도 엄청났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1개월 동안 사용한 포탄 200만 발을, 일본은 난산(南山)전투에서 하루에 쏟아부었다. 군비는 20억 엔(당시 재정 규모 3억 엔)에 다다랐는데, 78%는 국내외에서 조달한 빚이었다. 국가 경제력과 국민 지지를 총동원하는 전쟁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런던과 뉴욕에서 막대한 전비를 조달했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와 하버드대 출신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각각 영국과 미국에 파견했다. 국내에서도 비상특별세법을 만들어 엄청난 증세를 했다. 지가의 2.5%였던 지조(地租)는 논밭 5.5%, 시가지 20%로 격증했고, 소득세는 일률적으로 1.7배 증가했다. 비상특별세법이 1904년 4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시행된 결과 일본 국민은 1903년의 납부액과 같은 금액을 한 번 더 납부하게 되었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전쟁은 국민의 혈세로 국민의 피를 만주벌판에 뿌리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상특별세는 폐지되지 않고 일본 군부의 배를 한껏 불려주었다.

일본의 승리는 피압박민족의 엘리트들을 흥분시켰다. 중국의 쑨원, 베트남의 판보이쩌우, 버마 터키 이란 인도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한국의 안중근까지 일본의 승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일본은 유색인종의 리더가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의 공모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을 식물국가로 만든 것이 신호탄이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메이지천황의 선전조칙(1904년) 등에서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과 자주를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처절한 배신이었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일본의 배신에 목 놓아 울었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한국만이 아니었다. 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협조했지만, 랴오둥반도를 되찾지 못했다. 일본은 오히려 남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인도 필리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쫓겨났고, 쑨원도 추방당했다. 중국의 류스페이는 “일본은 아시아에서 조선만의 적이 아니다. 동시에 인도 베트남 중국 필리핀의 공적(公敵)이다”라고 힐난했고, 인도의 네루도 “러일전쟁의 결과는 한 줌의 침략적인 제국주의 집단에 또 다른 한 나라를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며 분노를 표했다(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만주 놓고 경쟁자 돼가는 美日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한 데 이어 만주를 탐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후 일본은 서양 각국과의 외교에서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격상시켰다. 남아있던 불평등조약도 모두 개정을 완료했다. 열강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1910년 보호국화와 병합 사이에서 고민하던 일본은 끝내 한국을 병합해 버리고 말았다. 반대하는 일본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일본 영토로 만들었다는 것은 해양국가 일본이 한반도라는 완충지대를 잃고 대륙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열강이(특히 미국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만주와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차지하고 나니 만주가 탐이 났다. 랴오둥반도에 터를 잡고, 남만주 철도 관리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고(관동군), 거대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세우고 나자 만주 벌판이 손에 잡힐 듯했다. 1899년 미국이 제창한 중국·만주 문호개방 정책(open door policy)이 점점 성가셔졌다. 힘이 약할 때는 나눠 먹자고 하지만, 힘이 세지면 혼자 먹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태평양의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1898년 하와이를 병합한 미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 필리핀 괌을 영유했다. 태평양 너머 먼 나라인 줄 알았던 미국이 지역의 이해당사자로 등장해 있었던 것이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와 필리핀은 상호 인정했지만 만주는 어림없었다. 이런 미국이 만주에서의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은 한국 합병 후 불과 31년 만이다(1941년 진주만 기습). 지금부터 31년 전이면 1991년이다. 그저 한 세대 동안의 ‘환상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사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수백만의 일본 청년들이 죽었고, 한국과 중국 국민들은 일본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30여 년의 ‘영광’은 그에 값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는가. 그건 정말 일본의 ‘국익’에 이로운 것이었을까.

 

05-27 노기의 할복, 가미카제 광풍의 토양 되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 부부가 자살한 당일 아침 자택 거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왼쪽 사진). 노기 장군의 할복 이후 그를 신격화하는 광풍이 불었고, 이는 30년 뒤 일본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가미카제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병합 2년 후인 1912년 7월 30일 60세의 메이지 일왕이 재위 45년 만에 사망했다.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함께 겪은 일왕의 죽음.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마음’에서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일왕에서 시작하여 일왕으로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라고 쓴 대로, 당시 일본인들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석 달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육군대장이자 러일전쟁의 국민적 영웅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이 할복자살한 것이다. 일왕의 뒤를 따라간다며. 순사(殉死)였다. 》

 

일왕 사망하자 부인과 자결

일왕의 장례식 날 저녁 무렵 운구행렬이 궁궐을 빠져 나오던 시각, 노기 마레스케 부부는 자택에 있었다. 당시 63세였던 노기 장군은 육군대장 군복을, 부인은 전통 복을 입고 있었다. 운구가 시작된 걸 확인한 장군은 칼을 빼들어 열십자 모양으로 배를 갈랐다. 부인 시즈코(靜子)도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이 또한 남편의 죽음을 따라간 순사였다. 검시 결과에 따르면 (아마도 남편의 도움으로) 시즈코 부인이 먼저 자결을 감행하고, 이어 노기의 할복이 이뤄진 듯하다. 거실의 사진 속에서 메이지 일왕과 두 명의 아들(모두 러일전쟁에서 전사)이 이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에서 원래 순사는 전사한 주군을 따라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서는 주군이 병들어 죽어도 순사하는 습관이 확산되었다. 예를 들면 1636년 센다이 번주(仙臺藩主)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죽자 15명이 순사했고, 노기 장군의 부인처럼 이 순사자들을 따라 죽은 자도 5명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풍습이었던지 막부는 금지령을 내려 순사하는 자를 오히려 엄벌에 처했다. 그 후 순사는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20세기 초 대명천지에, 세계 5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에서 할복 순사가 다시 벌어진 것이다.

 

유서에 남긴 할복 이유는

노기 장군은 러일전쟁의 승부를 가른 뤼순(旅順)전투를 지휘해 러시아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작전은 5개월이나 걸렸고, 6만 명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를 남겼다. 그의 두 아들도 전사했다. 개선하여 메이지 일왕을 만났을 때, 노기는 대량의 전사자가 난 걸 사죄하며 죽기를 청했다. 메이지 일왕은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며, 정 죽겠다면 내가 죽은 다음이라면 허락하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서에는 다른 할복 이유가 적혀 있다. “제가 이번에 폐하의 뒤를 따라 자살하는 점,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로 시작하는 유서에서, 노기는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사이고 다카모리 지휘하에 사쓰마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던 중, 사쓰마군에게 군기(軍旗)를 빼앗긴 일을 사죄하며, 그 후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일왕의 죽음을 기회로 마음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유서에는 또 두 아들이 전사한 후 주위에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으라고 간청했지만, 자기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노기가(乃木家)를 반드시 폐절(廢絶)시키라고 했다. 의아한 것은 부인 시즈코가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쓴 구절들이다. 재산 처리 문제는 시즈코와 상의하라든가, 시즈코가 살아 있는 동안은 가문을 유지해 달라든가, 노인이 될 시즈코가 살 집을 걱정한다든가 하는 대목들이다. 아마도 유서를 쓸 당시에는 부인이 함께 죽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듯하다.

 

죽음에 열광하며 신격화 나서

▲1923년 건립된 도쿄의 노기 신사. 사진 출처 노기 신사 홈페이지

 

이 충격적인 자살극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충신’, ‘애국’, ‘감동’ 같은 말들이 언론을 장식했다. 전 국민이 마치 무슨 사무라이라도 된 듯 그의 죽음에 열광했다. 과연 그렇게 찬양해도 좋은 죽음인가. 작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는 일기에, “바보 같은 자다. 하녀가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저질렀을 때, 느낀 기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냉소했지만, 일본인들은 이런 사람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전쟁영웅이었던 노기는 점점 신격화되어, 여기저기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세워졌고, 그가 살던 곳은 ‘노기자카(乃木坂·노기고개)’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도쿄 지명에 남아있다. 그를 기리는 우표도 발행되었고, 교과서에도 빈번히 실렸다. 그의 이름은 식민지 어린이들에게도 맹렬히 교육되었던 모양이다. 작고한 필자의 아버지가 어느 날 이런 노래 아느냐며 “노기 다이쇼(乃木大將)∼노기 다이쇼∼” 운운하는 노래를 읊조리신 적이 있다. 1935년생이니 일제 말기에 초등학교를 다니셨을 텐데, 얼마나 주입을 받았으면 70년 후에도 가사가 생각날까 했던 적이 있다.

노기의 죽음에 열광하던 일본은 30년 후 일왕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가미카제(神風)로 내몰았다. 생전에 러일전쟁 유족모임에서 그는 “여러분들의 자제분들을 죽인 노기입니다”라고 한스러운 어조로 자기를 소개했다지만, 그의 순사는 더 많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소설 속에서 “(노기의) 지성(至誠)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우리보다 후세대들에게는 당연히 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했지만, 그의 ‘지성’은 괴물이 되어 대일본제국과 함께 폭주했다.

 

日작가 할복, 일갈한 김지하

1970년 11월 25일, 노기의 정신과 결별했다는 전후 일본에서 또 한 번 충격적인 할복이 벌어졌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45)가 육상자위대 건물에서 할복 자결한 것이다. 그는 자위대 총감을 감금하고 총감실 발코니에서 자위대의 궐기와 일왕 친정(親政), 평화헌법 폐지를 부르짖었다. 그러고는 할복했다. 추종자 한 명도 옆에서 ‘순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젊은 시인 김지하는 일갈했다. ‘별것 아니여/조선 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 말고 처절비장하고/처절한 신풍(神風)도 별것 아니여/조선 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바람이지, 미쳐버린/네 죽음은 식민지에/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역사의 죽음 부르는/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군가여’(‘아주까리 신풍’). 시가 나오야는 김지하 시를 애송했을 것이다.

 

06-24 日, 한 세기 전 꽃핀 ‘다이쇼 민주주의’에서 후퇴

《요즘 일본을 경시하는 풍조(저팬 패싱)가 확산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부진과 한국의 급격한 성장이 맞물린 탓일 것이다. 특히 경제는 아직 몰라도 민주주의는 단연 우리가 낫다는 생각은 꽤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듯하다. 한국 민주주의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일본 시민도 꽤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전후 대부분을 자민당이 집권한 일본 정치는 내가 봐도 뭔가 침침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일본 민주주의는 오랜 전통과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살펴보자.》

 

日의회, 1890년에 생겨

일본에 의회가 생긴 것은 1890년이다. 당시 비유럽 세계에서는 유일한 의회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일본판 민주화 운동, 즉 ‘자유민권운동’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 지도자들은 의회 설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은 천황의 뜻만을 받들 뿐, 의회에는 초연하여 독자적으로 정책결정을 한다는 자세를 고집했다(초연주의·超然主義). 그러니 스스로 정당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5·16군사정변 후 공화당을 만든 김종필과는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의회를 장악한 반대파들은 증세와 예산편성을 둘러싸고 메이지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부정까지 해가면서 선거를 다시 치러도 정부는 의회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려고 할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의회와 정당의 힘이 커지자 메이지 원로 중 개명파에 속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당시 최대 정당 정우회(政友會) 총재에 취임했다. 다만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공화당을 직접 만들다시피 한 데 비해 이토는 기성 정당에 ‘영입’된 편에 가까웠다. 정우회는 “드디어 이토를 사로잡았다”며 쾌재를 불렀다.

  

‘다이쇼 정변’과 서양화 물결

▲1912년 ‘다이쇼 정변’ 이후 약 20년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조가 사회 전반을 휩쓴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이 기간에 보통선거, 언론 자유, 남녀평등을 강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청년층에선 서양문화가 빠르게 퍼졌다.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에 서양식 복장을 한 ‘모던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왼쪽 사진). 1928년 보통선거제에 따라 실시된 첫 총선 투표장에 줄지어 선 유권자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artefactoryimage

 

20세기 들어 메이지정부의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전 인구의 1%에 불과했던 유권자 수는 1919년엔 5.5%에 이르렀다. 이제 의회나 정당을 무시하고는 내각을 구성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토와 함께 메이지정부의 한 축이었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여전히 정당에 대해 고압적이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1911년 야마가타와 연결된 군부가 온건 노선의 사이온지(西園寺) 내각을 무너뜨리고, 육군 대장 출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우리에게는 가쓰라-태프트조약으로 잘 알려진 인물)를 총리로 만들자 민중이 봉기한 것이다. 1912년 2월 10일 가쓰라가 의회를 정회시키려 하자 민중들이 몰려와 국회의사당을 포위했다. 시위대는 친정부 신문사들을 습격하고 86곳의 파출소, 26대의 전차(電車)에 투석·방화했다. 이튿날 가쓰라 내각은 결국 총사직했다(다이쇼 정변). 4·19혁명 49년 전이다.

이로써 번벌정권(藩閥政治·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에 의한 정권)은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군부는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못했으니, 정당의 독무대가 펼쳐졌다. 이때부터 정치테러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1932년까지를 일본사에서는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로 부른다. 정치는 더욱 민주화되어 1925년에는 25세 남성 전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됐다. 총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는 관례도 형성되어, 정우회와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의 거대 양당이 번갈아 정권을 담당했다. 도시에는 서양 문물이 넘쳐났고, 정당조직은 농촌에까지 침투했다. 세련된 서양식 치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카페에서 ‘비-루(beer)’를 마시는 ‘모보(모던 보이)’, ‘모가(모던 걸)’는 이 시대의 상징이었다. 정말 일본의 ‘서양화’가 완전히 달성되는 듯 보였다.

  

군부에 짓밟힌 日민주주의

▲다이쇼 정변 당시 군부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며 의회에 몰려든 민중. 사진 출처 jugyo-jh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다. 그 핵심에는 군부와 농민층이 있었다. 선거 결과가 모든 걸 좌우하다 보니 정당들은 선거에 필사적이었다. 방대한 정치자금을 위해 대기업과 유착했고, 부패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정치운영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번벌 정치가들의 호쾌한(?) 정책 결정에 익숙하던 일본인들에게, 지루한 협상과 주고받기식 거래를 하는 정치 과정은 지리멸렬하게 보였다. 때마침 등장한 나치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식 정치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군부였고 1931년 9월 발생한 만주사변은 그 계기였다. 이때부터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치가에 대한 암살과 군부 쿠데타가 빈발했다. 마침내 1932년 5월 해군 장교들이 정당정치의 거물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당시 총리를 암살했다. 총리 임명권을 갖고 있던 천황은 정당정권을 포기하고, 해군 대장이자 조선총독을 두 번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총리로 임명했다. 정당내각제는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군부가 일방적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정당은 직접 총리를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의회를 거점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40년 10월 나치당 모델을 본뜬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만들어져 정당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런 군국주의하에서도 의회는 폐지되지 않았고, 의원은 여전히 정당 출신들이 다수였다. 많은 의원들은 군부독재에 협조했지만 개중에는 음으로 양으로 이에 저항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국제 정세를 예의 주시하면서 군부독재의 몰락을 기다렸다. 미군의 일본 점령 후 일본이 그토록 신속히 의회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힘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87년 이후 정당·의회 중심의 정치가 이미 35년째다. 국회의원의 힘은 날로 세지는데, 그들을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시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뢰도 역시 늘 바닥이다. 주변에 누가 정당원이라고 하면 도통 멋있어 보이질 않는다. 이러니 국회가 결정한 중요 사안을 민의기관이라고 할 수 없는 헌법재판소가 뒤집어도 국민 누구도 이런 제도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이 나라 최종 결정권자는 헌재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시민들에게 정당정치는 정말 울며 겨자 먹기인 것으로 보인다. 정당과 국회에 대한 이런 극도의 불신이 나는 불안하다. 혹시 어떤 선동가가 이를 대신할 그럴싸한 비전을 들고 한국 민주주의를 한 세기 전 다이쇼 데모크라시처럼 망가뜨리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면 기우일까.

 

07-22 암살하고 ‘천주’ 주장… 日의 왜곡된 정치테러

▲19세기 중반 이후 빈번해진 일본의 정치테러는 1930년대 정치·경제의 혼란상을 틈타 극심해졌다. 극우 장교들이 주축이 된 혈맹단은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암살을 시행했다. 일부 해군 장교들은 1932년 5월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관저에 난입해 총리를 살해했다. 재판을 받는 혈맹단원들(왼쪽 사진)과 피살된 이누카이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자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다다미가 아닌 정치 연설 현장에서 최후를 맞은 게 ‘뼛속까지 정치인’인 아베다운 죽음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었을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외重信)는 얼마나 멋진 죽음이냐며 자신은 다다미 위에서 죽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다. 일본에서는 총 쏘는 사람도, 총 맞은 사람도 ‘가오(かお·체면)’를 챙긴다. 》

 

교토, 한때 ‘테러리스트의 천국’

1930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절정기에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가 도쿄 역에서 총격을 받았다(10개월 후 사망). 범인은 우익 청년. 하마구치 내각이 런던의 해군군축회담에서 미영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군부와 우파는 이를 통수권간범(統帥權干犯)이라고 공격했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국군통수권은 천황에게 있는데, 정부가 천황의 의사와 상관없이 멋대로 병력에 관한 문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히로히토 천황도 이 조약을 지지했고, 외국과의 조약은 군부가 아니라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므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이쇼 데모크라시하에서 정착된 정당내각을 폭력으로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일본의 테러 역사를 살펴보자.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사회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그간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위기를 과장·선동하며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그것이 막히자 테러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사에서 막말유신기(幕末維新期·1850∼70년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막부다이로(大老·총리)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저명한 양학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사쓰마-조슈맹약을 이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암살되었다. 당시 정쟁의 중심이었던 교토는 테러리스트들의 천국이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에도 개화정책을 주장하던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징병제를 도입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비명횡사했고, 급기야 1878년 당시 최고 권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마차로 출근하던 중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1880년대 들어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테러의 기세도 수그러들었지만,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다. 첫머리에 언급한 오쿠마 시게노부(당시 외무대신)가 서양과 조약개정 교섭을 벌이던 중 습격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멋지게 죽을 기회’였지만 그는 살아남아 수상을 두 번 역임하고, 와세다대를 세우고 84세까지 살다 ‘다다미 위에서’ 죽었다. 외국 요인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891년 일본을 친선 방문 중이던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칼을 맞았고(오쓰 사건),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러 일본에 왔던 청나라 이홍장도 테러를 당했다. 둘 다 목숨은 부지했으나 중상을 입었고, 일본 정부는 그 뒷수습에 쩔쩔맸다.

 

관저서 살해당한 이누카이 총리

면면히 이어지던 ‘테러의 전통’은 1930년대 들어 ‘꽃을 피웠다’. 경제대공황과 만주사변으로 정치·외교·경제가 동시에 불안에 빠지자, 다이쇼 데모크라시 체제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고, 군부와 우익세력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1931년 10월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모의가 발각되더니(10월 사건), 우익단체 혈맹단은 1932년 2월에 재무상·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를, 3월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다쿠마(團琢磨)를 총으로 쏴 죽였다. 이윽고 5월 일본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의 관저에 난입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 배우 찰리 채플린이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누카이 총리와 이날 면담하기로 했으나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총리는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77세의 노총리는 난입한 젊은 장교들에게 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으니 일단 내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 중 한 명이 “문답무용(問答無用)! 쏴라!”고 소리치자 총탄이 쏟아졌다. 의식이 남아 있던 총리는 주변에 “젊은이들을 불러오게. 할 말이 있네”, “9발이나 쐈는데 3발밖에 맞지 않았으니 병사들 훈련이 엉망이군”이라고 했다 한다. 이누카이 암살을 계기로 정당 내각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1945년 패전까지 다수당의 총재를 대신해 군인·귀족 등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암살된 아베를 향한 동정과 지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이달 8일 총격을 받기 직전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일본 정치테러의 특징은 테러범들을 흉악범이라기보다는 ‘지사(志士)’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이다. 테러범 스스로도 자신들의 행위를 ‘참간(斬奸·간신을 베어 죽이다)’, ‘천주(天誅·하늘의 벌)’라고 주장했다. 기성세력은 테러에 단호히 대응하기보다는 꼬리를 내리고 전전긍긍했다. 주동자에 대한 처벌도 비교적 가벼웠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젊은이들의 영웅 심리는 더욱 고조되고, 테러는 정당하며 심지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조차 넓게 퍼졌다. 몇 년 전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 ‘우국(憂國)’은 바로 그 테러·쿠데타·할복의 ‘미학’을 다뤘다.

 

테러에 대한 타협과 미화는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1936년 2월 26일 도쿄에 주둔하던 청년 장교 1000여 명이 총리관저·경시청·주요 신문사 등을 습격했다. 테러를 겸한 쿠데타였다. 총리와 조선총독을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등이 살해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기성 정치세력에 염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은 청년 장교들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고,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한층 진행되었다.

아베 전 총리의 암살에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이 해상자위대원 출신이라 순간 전형적인 우익 테러라고 생각했으나, 정치적인 동기는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사람을 ‘지사’로 미화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동정과 지지가 일본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을 깊숙이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일본사회 저변에 광범하게 깔려 있는 정치적 좌절감, 사회적 불만과 만날지도 모른다. 일본 시민들의 경계를 당부한다.

 

08-19 ‘폭발 자작극’ 빌미로 만주 점령… 日 국제 고립 자충수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을 때, 서양 열강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을 일으키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고독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서양 열강은 아무도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중국은 탐욕스러운 서양 열강조차도 감히 혼자 먹으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황금어장인데, 그 일부인 만주를 일본이 독차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본이 무리수를 두기를 바라고 있던 한국의 전략가들은 ‘드디어 때가 오나?’ 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특명전권 수석대표 이승만을 만주사변을 다루고 있던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파견했다.》

 

만주에서 폭주하는 관동군

당시 만주는 중화민국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고, 군벌 장쭤린(張作霖) 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현상 유지를 원했으나, 다롄(大連)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주를 러일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정도로 여겼다. 장씨 군벌과 관동군의 갈등이 심해지자, 관동군은 1927년 장쭤린의 기차가 지나가던 철로를 폭파해 그를 죽여 버렸다. 아들 장쉐량이 일본에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일왕 히로히토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 수상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사실상 경질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도쿄 정부는 관동군의 폭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중국 남만주철도에서 군사 행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관동군.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선양 부근 류탸오후를 지나던 철로를 폭파한 뒤 이를 중국 소행으로 몰아붙이며 만주 전역에 병력을 진주시켰다. 동아일보DB

 

그러나 관동군 참모들의 욕망은 이미 정부 손아귀를 벗어나 넘실대고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선양(瀋陽) 부근 류탸오후(柳條湖)를 지나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획득한 남만주철도 선로였다. 관동군의 자작극이었지만,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며 만주 전역에 병력을 진주시켰다. 관동군은 1만4000명, 장쉐량 병력은 19만 명이었으나,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장쉐량은 휘하 병력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관동군은 삽시간에 만주를 장악했다.

▲관동군이 1931년 류탸오후에서 ‘철로 폭파 자작극’을 벌인 장소.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동아일보DB

 

세계 각국 정부는 경악했다. 즉각 국제연맹이 소집되고 일본군의 자제를 촉구하며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피하고자 관동군은 ‘민족자결’의 논리를 내세웠다. 사변 발발 직후 펑톈(奉天) 자치유지회라는 단체가 독립을 선언했다. 관동군은 만주인들이 스스로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독립선언 자체가 그들의 작품이었다. 관동군은 남만주와 내몽골의 동부 지역을 ‘만몽(滿蒙)’이라 부르며 일본의 세력권으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민족자결 운운은 그야말로 궤변이었다.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이런 행태를 보고는 “일본의 군인은 마치 의화단 같구나”라고 한탄했다(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도쿄 정부도 경악했다. 정부 역시 ‘만몽’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서양 국가와 다른 특수한 권리, 이른바 만몽특수권익(滿蒙特殊權益)이 일본에 있다고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었지만, 국제사회와 충돌할 걸 우려해 신중한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 일왕 주변, 금융자본가, 해군의 조약파(평화파), 중국 거래 무역업자 등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정부와 협의도 없이 관동군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게다가 조선 주둔 일본군은 군 통수권자인 일왕의 명령도 없이, 정부에 대한 통고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진주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관동군의 폭주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추인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6년 후 터진 중일전쟁 역시 현지 일본군의 도발에 도쿄 정부가 끌려가는 형태로 발발하고 말았다. 무책임의 극치다.

 

국제연맹 경고하자 연맹 탈퇴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 철수를 촉구했으나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반발했다. 국제연맹 탈퇴를 계기로 대륙 침략을 지지하는 관제 행사가 일본 내에서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DB

 

중국의 실력자 장제스(蔣介石)가 취약한 권력 기반 및 공산당과의 내전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사이, 관동군은 진저우(錦州)를 폭격하고, 하얼빈(哈爾濱)을 장악한 후 1932년 3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의 진상을 밝힌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요청했으나, 일본군은 오히려 러허(熱河)를 침략하며 국제연맹의 경고를 보란 듯이 무시했다. 그러고는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군인들의 용맹한(?) 도전에 여론은 지지를 보냈다. 러일전쟁 때도 그랬지만 일본 국민들은 대외팽창 노선에 비판적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미와의 협조주의를 천명한 워싱턴 체제에 대한 군부의 반감이 점점 국민 속으로 확산되어 갔다. 반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민주정부는 군부의 도발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국민들도 이런 정부에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전회 칼럼에서 쓴 대로 테러와 쿠데타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더욱 입바른 소리를 내길 꺼리게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전쟁뿐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군부의 입김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사실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주역이라 할 정당, 특히 정우회(政友會)는 거침없이 군부에 영합했다. 이제 군부의 의중에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소련, 커지는 日 경계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일본은 고립을 자초했다.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영국 미국과의 협조를 중시하라는 메이지 원로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충고를 그 후배들은 더 이상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만주를 삼키니 몽골이 필요해졌고, 그마저도 손에 넣자 중국 본토가 탐이 났다. 이미 일본 국력의 한계와 국제 정세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이들 머릿속에 없었다. 그걸 꿰뚫어 보고 있던 일본의 전략가들은 입을 다물었다.

관동군의 참모들이 으스대며 만주벌판을 휘젓고 다니는 사이, 한국과 중국의 전략가 이승만과 쑨커(孫科)는 이 얼치기들의 전쟁놀이를 쓴웃음 지으며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의 입법원장 쑨커는 스탈린이 추진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성되고, 미국이 해군을 보강하면 일본은 열세에 빠지기 때문에 3∼5년 이내에 미국-소련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때 중국에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과 유럽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전략가 이승만도 같은 생각이었다. 시기는 쑨커의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일본은 결국 미국-소련과 개전하는 최악의 선택을 했고, 한국과 중국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기회를 잡았다.

 

09-16 日 팽창주의, 韓 합병후 되레 안보불안 키워

《“지도 위의 조선국에 새까맣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을 듣는다.” 1910년 8월 한국 병합으로 조선이 사라진 직후,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는 쓸쓸한 어조로 단가(短歌)를 읊었다. 고색창연한 왕국 조선의 운명(殞命)이 24세의 젊은 시인에게는 가을바람처럼 처연했나 보다. 그러나 이런 일본인은 예외적이었다. 위로는 정치가로부터 아래로는 밑바닥 서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일본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한 세대를 가지 못했고, 일본 제국은 역사 속에 사라졌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 제국에 과연 무엇이었던가.》

 

근대적 국가로 성장했던 조선

▲1920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이 영국 국기를 찢으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위 사진). 영국은 이듬해 결국 아일랜드와 조약을 맺음으로써 식민지화를 단념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그린 화가 최대섭(1927∼1991)의 민족 기록화(아래 사진)를 보면 조선 민중이 대형 태극기 아래 모인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병합 전부터 독자적인 국가와 국기 개념을 국민들이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처 flickr.com·위키백과

 

‘식민지 조선’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먼저 조선은 일본의 이웃 나라였다. 서양 국가들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지만, 바로 옆 나라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가 예외라고 할 만하나, 그건 수백 년에 걸친 침략의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한국 합병 11년 후인 1921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과 조약을 맺어 이웃 나라의 식민지화를 단념했다. 일본이 아일랜드의 반영투쟁과 독립을 미리 봤다면, 한국 병합이라는 무리수는 피했으려나? 게다가 조선은 천 년 이상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해 온 나라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은 한사군(漢四郡) 이래 중국에 종속되어 온 나라라고 강변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조선을 가리켜 ‘천 년 이상 오래된 왕국’, ‘자존심이 세고 위아래를 모르는 민족’ 운운한 걸 보면 조선이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걸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구한말 사헌부 감찰인 황만수 선생이 국권 사수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로 그린 혈염(血染) 태극기. 동아일보DB

 

게다가 한국 합병 당시 대한제국은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어엿한 국기(태극기)도 갖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한말 정치집회 장면을 보면 갓 쓰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 아래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백성(인민)’이라기보다는 ‘국민’이었다. 대한제국은 1876년 일본,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은 이래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청나라 등 11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896년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차르의 즉위식에는 국가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 미국, 중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에 외교관도 주재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1880년대 이후 약 30년간 한국인들은 본격적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민족’을 얘기하는 수많은 언론과 학교가 생겨났고, ‘국사’나 ‘국어’에 관한 책들도 읽히기 시작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년)’ 저술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년)은 그런 분위기의 정점이다.

  

日, 서구의 ‘비식민지화’에 역행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식민지가 되기 전, 이미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경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인도가 인도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는 영역에 따라 국경이 형성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 긋기에 따라 국경과 ‘나라’가 만들어진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조선은 식민지가 되기 전 20∼30년 동안 민족주의 세례를 듬뿍 받아, 식민지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린’ 상태였다. 일본은 인구와 국토 면적에서 자국의 거의 반이나 되는 오래된 이웃 국가를, 게다가 이미 민족의식이 왕성해져 있는 나라를 병합했던 것이다. 그 후과(後果)를 염려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단견 중의 단견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으로도 한국 병합은 역주행이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서구열강은 이제 더 이상 종래의 식민지 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가지 ‘비식민화(decolonization)’ 조치들을 취해 나간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신생 소련의 식민지 포기 선언은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며, 2차 세계대전 후의 식민지 포기도 길게 보면 그 흐름을 계승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아일랜드는 1922년 영연방 자치령인 아일랜드자유국으로 자치권을 획득했고, 1919년 영국은 인도인의 정치 참여를 확대한 인도통치법을 시행했다. 1922년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획득하였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열강은 워싱턴회의에서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약속하는 9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 의회는 1916년 필리핀의 자치를 인정했고, 1934년에는 10년 후 독립을 약속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홍종욱 ‘3·1운동과 비식민화’ ‘3·1운동 100년’). 한국 병합은 간발의 차로(?) 이 세계적 흐름에 역행한 것이다. 1905년의 통감부 체제(외교권만 박탈하고 한국 국왕의 통치는 인정)를 유지했더라면, 아마 일본도 이 시기 이 국제적 흐름에 올라타기 쉬웠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병합을 하고 동화를 선언한 마당에, 조선총독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문화통치’밖에 없었다. 그 알량한 ‘문화통치’도 세계적인 ‘비식민화’ 조류를 간파한 한국인들이 3·1운동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크게 놀란 일본인들은 그 후에도 혹여 다시 3·1운동 같은 게 일어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다.

 

‘동양 평화’ 구실, 지뢰밭 자초

한국 병합의 구실은 ‘동양의 평화’였다. 한국을 일본이 지배하지 않으면, 한국 정국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외세가 개입하여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동양 평화의 붕괴와 일본 안보의 동요는 한국 병합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을 차지한 일본은 중국의 정세 변화에 더욱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현해탄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본 땅이 된 식민지 조선과 만주 사이에는 압록강밖에 없었다. 중국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조선을 차지하고 나니 만주가 누구 땅이 될까 불안해졌다. 그 불안증이 희대의 정치코미디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낳았다(8월 19일자 본 칼럼 참조). 만주를 차지하고 나니, 소련의 만주 침략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소련과 싸우자니 중국의 풍부한 자원이 탐이 나 산해관마저 넘어서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팔방이 온통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지뢰밭이 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에 한국 병합은 무한 팽창의 자동 페달을 밟아버린 사건이었던 것이다.

 

10-14 日의 중국 경시, ‘제국 침몰’의 단초 되다

《나는 ‘대일본제국’은 중국정책의 실패로 공중분해 됐다고 본다. 러일전쟁 후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은 한국 지배를 확정지었을 뿐 아니라 만주에 교두보를 획득했다. 랴오둥반도 할양과 남만주철도 지배권이다. 애초에 러일전쟁은 한국 지배를 노린 전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남만주 전역에 대한 지배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제국주의가 난무하는 시대에, 국력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확장을 자제할 수 있을까. 아마 그랬다면 그 후 반세기 동안 벌어진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中은 자기 망상 걸린 나라’

▲일본은 중국을 얕잡아보면서도 내심 ‘대국’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의 개입에도 움직이지 않던 일본은 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청 콤플렉스’를 벗고 중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는 일본 공사관 직원들을 묘사한 그림(위쪽 사진). 일본군이 1937년 12월 13일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으로 입성하는 모습. 일본은 승리를 확신했던 중일전쟁에서 패배하며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과 중국은 참으로 기묘한 관계다. 이웃나라면서도 역사상 외교관계를 거의 맺지 않았다.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로 간헐적으로 교류한 고대는 차치하고, 그 후 무려 천 년 동안 국교를 맺은 기간은 150년 정도밖에 안 된다.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에 조공 사절단을 보내고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 받은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때 강화협상을 위해 몇 차례 대면했을 뿐, 도쿠가와 시대에도 사절단 교환은 전무했다. 조선이 수시로 베이징에 사절을 보내고, 일본에도 12차례 통신사를 보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양국이 국교를 튼 건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이다. 그러나 그 관계도 얼마 안 가 청일전쟁으로 틀어지고 말았다.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은 1970년대 중일국교정상화 이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나라 정부의 교제는 그 역사가 매우 일천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의 중국 인식은 묘한 데가 있다. 도쿠가와 시대 내내 중국문물은 대량 유입되었는데, 일본인들은 그것을 숭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중심왕조) 말고, ‘지나(支那)’라고 칭해야 한다며 자기들끼리 논전을 벌였다. 병학자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강희제를 거론하며 청의 무위를 찬양한 뒤, 그런 청이 서양의 무기와 전법을 익히게 되면 일본이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아직 중국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참패했다는 소식에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멸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일본은 한 번도 외세가 들어온 적이 없는데 중국은 걸핏하면 북쪽 오랑캐(유목민족)에게 굴복하는 나라,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만을 모시는 지조 있는 나라인데 중국은 유방(劉邦), 주원장(朱元章)처럼 틈만 나면 임금에 반역하여 역성혁명을 하는 나라라고 흉보곤 했다. 그런데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중화(中華) 운운하며 자기 망상에 걸린 나라라는 것이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나서는 더러운 민족, 게으른 사람들, 애국심 없는 국민 등의 비난이 추가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1871년에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하며 국교를 텄다. 양국 국새와 대사의 서명이 표시된 조약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책 오판이 부른 중일전쟁

그래도 메이지정부의 대(對)중국정책은 신중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서울에 청의 군대가 출동해도 일본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겁이 난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 봉기로 다시 청의 군대가 파견되자 마침내 대규모 군대로 청군을 이겨버렸다. 오랫동안 중국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에게 이만한 쾌거가 없었다. 근대사상의 거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실로 이번 전쟁은 일대쾌사(一大快事)다. 오래 살고 보니 이런 활극을 볼 수 있구나. 나는 나라를 세우는 기초는 단지 서양의 문명에 있을 뿐이라고 오랫동안 떠들어 왔지만…도저히 생애 중에 실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 눈앞에 이런 엄청난 일을 보다니. 지금은 이웃의 지나와 조선도 우리 문명 중에 포섭되려고 하고 있다. 필생의 유쾌, 실로 바라지도 못한 일이다”라며 감격했다.

그래도 아직 중국의 실력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1911년 신해혁명은 “나루호도!(역시)”였다. 일본이 이루지 못한 공화국 건설을 일거에 해내는 걸 보고 일부 지식인들은 기대를 걸었고, 개중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 대열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군벌이 난립하고 부패가 극에 달하는 걸 보자 중국에 대한 태도는 점점 침략적으로 변해갔다. 더 이상 중국인은 없고 ‘시나진(支那人)’과 ‘잔코로(チャンコロ)’로만 남았다.

 

중국인에 대한 멸시와 중국의 실력에 대한 경시는 중국정책의 오판을 불러왔다. 일본 군부가 보기에 ‘흩어진 모래알(散沙)’ 같은 중국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자작극으로 만주를 탈취하더니,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6월 베이징 근교 루거우(蘆溝)다리 부근에서 훈련하던 일본군과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충돌했다. 중국은 물론 일본 정부도 확전을 금지하고 서둘러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얼마 후 상하이와 화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면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 결과를 우려하는 히로히토에게 일본군 사령관은 ‘단기 승리’를 약속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군은 그해 12월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며 기염을 토했다. 기분에 취했는지 난징대학살도 벌였다. 수도를 점령하고 겁을 주면 중국이 손들 줄 알았다.

  

中이란 ‘거대한 늪’에 빠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일본의 도발에 단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흩어진 모래알 같은 중국인들에게 ‘내셔널리즘’을 선물했다. 장제스는 여기에 재빨리 올라탔다. 독일의 무기와 군사지도로 단련된 중국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장제스는 정부를 양쯔강 중류의 우한(武漢)으로 옮겼다. 여기가 또 점령당하자 내지 깊숙이 충칭(重慶)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윈스턴 처칠의 런던만 공습당한 게 아니다. 충칭도 일본 전투기 공습을 처절하게 견뎌냈다.

아무리 쥐어짜내도 일본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장악할 수 없었다. 너무 넓고 너무 많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밥그릇까지 공출하고 조선인을 병사로 동원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진흙탕에 빠져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나라나 혼미할 때가 있고 약해 보일 때가 있다.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보라. 초강대국 미국, 소련도 허우적대다 간신히 빠져나왔다. 푸틴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중국이다. 1941년 일본군은 미국과 동남아시아에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중국의 반격이 두려워 중국 주둔군을 빼내지 못했다. 대일본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11-11 日軍에 몰린 ‘묻지 마 예산’… 對美 전쟁 방아쇠 되다

《요즘 ‘전쟁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세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구가했다. 이제 인류의 이성으로 전쟁 발발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냉전 시대가 더 안전하지 않았나 하는 견해마저 생겨나고 있다. ‘cold war(차가운 전쟁)’가 아니라 ‘cold peace(차가운 평화)’의 시대였다는 얘기다. 이 불안의 한복판에 하필 대만과 우리가 있다.》

 

대중 전쟁 ‘사면초가’ 몰린 日

많은 한국 시민은 ‘설마’할 것이다. ‘이 대명천지에 설마 우리에게 전쟁이 닥칠까?’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 대명천지는 지난 30∼40년 만의 특수한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지금 서울 강남을 활보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방공호에 들어갈 날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는 소비자들이 당신 생애에 배급제를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하면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100년 전 다이쇼 데모크라시(1905∼1931년)를 만끽하던 일본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자유와 소비를 만끽하던 일본인들은 만주사변(1931년)이 시작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방공호와 배급제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1930년대 중반의 세계는 장차 누가 패권국이 될 것인지 가늠키 어려웠다. 미국은 아직 태평양을 제패할 만한 해군력을 갖추지 못했고, 소련의 스탈린이 추진한 2차 5개년 계획은 진행 중이었다. 일본 군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이 이 양국의 국력 신장을 따라갈 수 없을 걸로 보고 그 이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미중 대립도 일각에서는 시간이 중국 편이 아니라는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만주사변 후 중국 내지로 점점 압박해오는 일본에 대해 당대의 지식인 후스(胡適)는 놀라운 구상을 피력한다. 즉, 중국이 일본을 이겨내려면 미국과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두려워 말고 2, 3년간 계속 패배하면서 버텨야 한다. 큰 희생이 나겠지만 중국이 버티면 미소는 결국 대일전(對日戰)을 개시할 것이다. ‘일본은 지금 할복의 길로 가고 있다. 이를 중국이 도와주자’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할복은 혼자 마무리 짓기가 힘들다. 그래서 보통 가이샤쿠(介錯)라는 일종의 ‘할복 도우미’가 옆에 서 있다가 당사자가 할복을 개시한 뒤 마무리를 해주곤 한다. 후스는 일본이 멍청하게도 할복의 길로 접어들려고 하니, 중국이 가이샤쿠가 되어 주자고 한 것이다.

 

美 제친 日 해군 전력

일본 군부가 몇 달이면 끝난다고 호언했던 중일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되어갔다. 때리고 또 때려도 중국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때리는 손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처럼 스스로 지킬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그런 국가에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의 결사항전 의지를 확인한 국제사회도 지원을 시작했다. 소련은 1000대에 가까운 전투기와 소련인 조종사를 보냈고, 미국은 거액의 차관을 제공했다. 1939년 7월에는 미일통상항해조약 폐기를 통고해 일본을 압박했다. 1941년 3월에는 무기대여법을 제정해 아예 중국에 무상으로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베트남 북부와 홍콩을 통해 중국에 물자를 공급했다(이른바 장제스를 지원한다는 뜻의 ‘원장(援蔣) 루트’).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하와이 진주만 기습 당일인 1941년 12월 7일 아침, 항공모함 쇼카쿠(추정)에서 이륙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의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들(위 사진). 이날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3만1800t급 미 구축함 웨스트버지니아(아래 사진)를 비롯한 여러 척의 배가 파괴됐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난국을 타개하고 중일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으로 일본군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했다. 그곳에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당시 프랑스 본국은 이미 히틀러에 점령당한 상태였기에 여기는 무주공산이었다.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미국은 이제 일본을 용납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양측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고,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해 마침내 미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대표적 순양 전함인 하루나. 전장이 222m에 달해 당시 해군에 집중 투입된 군사비 상황을 보여준다. flickr.com

 

일본은 왜 이리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못했을까.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존재하지만 ‘돈’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전쟁이 터지면 특별회계로 임시군사비를 편성하는데 이 예산은 군사기밀이라고 해서 의회도 대장성(大藏省)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임시군사비를 포함한 직접군사비는 1931년에 4억6000만 엔 정도였지만, 1940년에는 약 80억 엔으로 급증했다. 이 막대한 돈이 의회는커녕 정부의 통제도 없이 군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이 엉뚱한 데 쓰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군사비가 편성되었는데, 군부는 이 돈을 중국과의 전쟁 수행에만 쓴 게 아니라, 아무도 승인하지 않은 미국·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빼돌렸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태평양에서의 일본 해군 전력은 미국을 능가한 상태였다. 이러니 전쟁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국가보다 조직 위한 개전 결정

분파주의(sectism)도 원인의 하나였다. 미국을 부담스러워했던 해군은 원래 대미개전(對美開戰)에는 소극적이었다.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은 자연히 영미와의 대립을 촉진할 것이기에, 애초에 해군은 반대였다. 그러나 막상 독일이 동맹 체결을 제의하자 해군은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와 관련해 한 해군 제독은 대미관계의 악화가 예상되면 해군 군비 예산이 늘어날 것을 기대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1939년 육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던 해군의 임시군사비는 1941년 육군의 절반 수준으로 팽창했다. 나라의 운명보다도 자기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어처구니없는 개전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요시다 유타카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떤 사회가 한 세대 정도 그 체제를 유지하면 사람들은 그게 영원할 줄 안다. 하지만 폴란드가 한국 무기를 대규모로 사는 일을 몇 년 전만 해도 과연 상상할 수 있었을까. 종전 후 한 세대 만에 미국과 베트남이 찰떡궁합이 되어 중국을 압박하는 모습을 과연 몇 명이나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고, 바로 앞에 낭떠러지나 갈림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역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전쟁 발발에 대한 감각도 마찬가지다.

 

12-09 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하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휴일을 틈탄 공격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그 비열함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미일 충돌을 애타게 바랐던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으로 조선인들을 격동시켰다. 이 연설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독자분들도 꼭 들어 보시기 바란다. 일본에 처절하게 맞서 온 중국도 환호성을 질렀다. 후스(胡適)의 말대로 일본이 마침내 ‘할복’을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日 패망 임박” 강조

1940년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본토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겼다. 이것으로 일본이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때, 병참선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동남아를 침략하려면 진주만을 동시에 공격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진주만 기지를 무력화시킨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이어 미국과 영국령인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상상치도 못한 전과에 일본 전체가 흥분했다. 서양에 대한 오랜 피해의식에 찌든 일본인들에게 이 초기의 성공은 마약과도 같았다. 멀쩡하던 문인들도 전쟁 찬양에 나섰고, 식민지 조선의 일부 유명 문인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후스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로 시작하는 단파방송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명연설로 유명했던 그답게 조선인들의 가슴을 쳤다. ‘생명의 소식’, ‘불벼락’ 등 기독교 냄새 나는 용어와, 마치 부흥회 목사의 설교를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웅변은 지금 들어도 매우 선동적이다. 오랫동안 대일 무력투쟁 시기상조론과 무용론을 견지했던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전 조선인의 무력투쟁을 촉구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打傷)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그의 연설은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입니다”라며 끝을 맺었다. 이 단파방송 연설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권위와 지명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미드웨이 전투로 승기 잡은 美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를 대표한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1943년 필리핀 마닐라 인근 니콜스 필드 공군기지에 도착해 일본군을 사열하는 모습(위 사진). 이듬해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 30만 명 이상이 사상하는 대패를 당한다. 아래 사진은 1945년 6월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오사카 시내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은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축하 파티에 취했지만, 미국은 일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기술과 자원,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전쟁 지지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국의 생산력과 사기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진주만 기습 반년 만에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고 대패했다. 이걸로 사실상 전세는 기울었고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작전이나 비행기 생산 계획, 자원 분배 등 여러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2’). 심지어는 작전 정보조차도 공유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잘 단결한다’는 속설은 여기서는 예외였다.

일본의 사려 깊은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일부 정치인들은 군부정권을 타도하고 신정권을 수립한 후 미국과 교섭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군부 정권은 전쟁을 고집했다. 그러는 사이 사이판, 필리핀, 이오지마가 차례로 함락되고 일본 여러 도시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격이 시작됐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은 폐허가 될 정도였다. 필리핀 전투에서만 일본군 사상자 수는 30만 명을 넘었다. 이런 패배들의 책임을 지고 도조 히데키는 정권에서 쫓겨났지만, 군부는 본토 결전을 고집했다.

 

천황에 종전 상소 올렸지만…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 협상 권고 상주문을 올린 고노에 후미마로 전 일본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히로히토 천황은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미군의 다음 상륙 목표는 오키나와, 그리고 규슈였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마)는 1945년 2월 히로히토를 만난 자리에서 상주문을 올렸다. 뜻밖에 여기서 고노에는 ‘공산 혁명’에 대한 위기감을 토로했다. 교전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한 글자의 비난도 하지 않고, 오직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이는 ‘적화’ 공작에 대해 우려했다. 원래 중산층 이하 출신이 많은 군 장교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확대하여 마침내 대동아전쟁에까지 오게 된 것은 이 군부 내 일당들이 (국내 혁명을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계획이었던 것이 이제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1억 총옥쇄(總玉碎)’를 부르짖는 자들은 “소위 우익이라고 불리지만 배후에서 이들을 선동하고 국내를 혼란에 빠뜨려 마침내 혁명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공산분자”라고 단언한다. 군부 정권에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연실색할 논리다. 고노에가 볼 때 미국은 타협 가능하고 말이 통하는 상대였지만, 소련과 공산당은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기존 체제를 갈아엎을 진짜 ‘적’이었다. 일본 군부는 그들에 물들어 있으니 천황이 결단하여 그들을 일소하고 전쟁을 끝내 달라는 것이었다. 고노에는 미군 진주 후 자살했지만, 함께 상주문을 만들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 군정하에서 총리를 지내며 전후 일본의 반공노선을 이끌었다. 고노에 상주문에 보이는 세계 정세와 소련 위협에 대한 인식이 해방 후 이승만의 그것과 비슷한 점도 흥미롭다.

고노에 상주 사건이 발각되자 요시다는 헌병에 체포되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이 상륙해 천황을 처형할 것에 대비해 메이지 천황의 후손 중 한 명을 산악지대에 숨겨놓으려는 웃지 못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여자들까지 죽창 훈련을 시켰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참혹한 전투 끝에 양국 군인을 제외하고도 주민 10여 만 명이 죽었다. 그래도 결정을 못 내리던 히로히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야 NHK를 불러들였다. 항복 선언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눈치챈 일부 군인들이 녹음테이프를 빼앗으려 궁궐에 난입했지만 찾지 못했다. 1945년 8월 14일이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