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9/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3
2023.07.15
<81회>“미국이냐, 중국이냐?” 양다리 중립 외교가 과연 가능한가?

▲1972년 2월 21일, 마오쩌둥 중공 주석과 닉슨 미 대통령. 사진/공공부문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외교 전략으로 제시했다. 중간자로서의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가며 “중견 국가의 위상에 맞는” 적극적 역할을 발휘해 국제 외교를 주도한다는 발상이었다. 반미 성향의 지지자들에겐 감동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한·미 동맹과 자유민주적 질서를 신뢰하는 대한민국 정통 세력에겐 반미·친중 세력의 위장 전술로 보였다.
20년이 지나 동북아 균형자론을 되짚어보면, 세계사적 흐름과 국제정세의 향방을 전혀 잘못 짚은 아마추어 전략가의 엉터리 외교 노선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세계는 한국 같은 중요한 국가가 미·중 사이에서 “펜스에 앉아서(on the fence)”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중립 외교를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 양자택일을 강요
미국이냐, 중국이냐? 세계 여러 나라는 지금 미·중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세계 많은 나라는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어느 한 편에도 쏠리지 않은 채 국익만을 극대화한다는 실용적 외교 노선을 추구해왔지만, 최근 격화된 미·중 갈등의 현실은 더는 애매한 중립 외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트럼프 정권은 세계 주요국에 중국산 5G 화웨이와의 단절을 요구했으며, 바이든 정권은 반도체 기술력의 중국 유입을 막기 위해 한국, 일본, 대만, 네덜란드 등에 대중국 수출 제한을 요구하고 있다. 미·중 사이 양자택일이 불가피해지자 2023년 일본과 네덜란드는 미국 편에 섰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국인 한국 역시 양자택일의 압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중국에 군사기지 건설을 허가했던 아랍 에미리트 연합국은 미국의 압력을 받고 계획을 철회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 될수록 세계 각국에 가해지는 양자택일의 압박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쪽으로 쏠리면 중국이 때리고, 중국의 요구에 따르면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제로섬 게임이 전개되고 있다.
이상은 지난 7월 12일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에 게재된 “중립성의 신화(The Myth of Neutrality)”에 나오는 주장이다. 이 시론의 저자는 존 매케인(John McCain, 1936~2018)의 외교 정책 고문으로 활약했던 리차드 폰테인(Richard Fontaine)이다. 폰테인은 중국의 경제적 보복에도 불구하고 미국 편에 서려는 동맹국과 선린 국가들에 대해서 미국은 현실적인 보상책을 마련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미국이 적극적 외교·안보 전략, 우호적 무역 협정, 지속적 방위 책무의 이행으로 동맹국을 만족시켜야만 미국 주도의 국제 연대가 유지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폰테인의 분석대로 중립 외교는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 주도의 동맹은 더욱 공고해지는 상황이다. 지난 7월 12일 나토 정상회의는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대한 공동의 우려를 표명했다. 이틀 앞서 <포린어페어스>지에 발표한 시론에서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나토 사무총장은 권위주의 정권들이 국제질서와 세계평화를 위협한다며 중국의 책임을 물었다. 그는 나토가 중국을 적국으로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를 규탄하기는커녕 러시아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는 중국을 정면 비판했다. 그의 문장은 신냉전의 수사로 가득 차 있다.

▲2023년 7월 11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 모인 각국 정상들. / AFP 연합뉴스
“갈수록 강화되는 중국의 대외적 강압 행태와 대내적 억압 정책은 나토의 안보, 가치, 이익을 위협한다. 베이징이 이웃들을 협박하고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다.”
러시아, 중국 등의 전제적 정권들이 서로 결탁하는 이 상황에서 그는 “민주와 자유를 믿는” 전 세계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바로 그러한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 나토는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의 정상을 초청했고, 나토의 초빙에 흔쾌히 응함으로써 이들 4개 주요국은 나토와의 반중 연대를 과시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문제가 세계 주요국의 연대를 강화하는 형국이다. 냉전 이래 한동안 지속돼오던 세계 각국의 대중국 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효를 다한 닉슨 패러다임, 미·중 갈등의 기원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중공 주석 마오쩌둥과 만난 미국 대통령 닉슨은 향후 미국의 대중국 외교 전략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멘트를 전달했다. 푹신한 분홍색 의자에 편히 기댄 79세의 마오쩌둥 곁에 59세의 닉슨은 바싹 다가앉아서 입가에 진지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미국은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정치 철학(political philosophy)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념적 차이를 넘어 중국의 대미 정책만을 고려해서 새로운 외교적 관계를 맺겠다는 발언이었다. 닉슨이 말한 정치 철학이란 국가의 기본 가치와 근본 체제를 의미한다.
당시 미국은 공산권의 독재 국가들을 향해선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구미 중심의 견고한 세계 질서를 확장하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소련이 이끄는 공산권과 영원히 안 끝날 듯한 냉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정치 철학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한 닉슨은 1970년대 후반부터 40여 년 지속될 미-중 공조화의 청사진을 펼쳐 보인 역사적 인물이었다. 회담 후 그는 “지금껏 미·중 사이엔 큰 차이점을 보여왔고, 앞으로도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러한 차이점을 가지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는 방법을 반드시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일인 지배의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미국은 중국과 경제적 공생 관계를 맺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한 해 전인 1971년 미국은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을 “차이나(China)”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텄지만, 국교 정상화는 1979년에야 이뤄졌다. 닉슨은 정치 철학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지만, 반제(反帝), 반미(反美), 반(反)자본의 정치 철학을 견지하는 마오쩌둥이 미국에 대해 문호를 활짝 열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고, 한 달이 못 돼 4인방이 체포되면서 “10년 대동란”이라 불리는 문화혁명은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 후 2년에 걸친 정치투쟁과 노선 갈등을 거쳐서 중공 중앙은 덩샤오핑을 최고 영도자로 추대하고 개혁개방을 새로운 국시로 채택했다.
닉슨이 제시한 바로 그 길을 따라 덩샤오핑은 문호를 열고 미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낙후된 경제를 성장시키는 제2의 혁명을 주도했다. 닉슨이 약속했듯 미국은 더는 중국의 정치 철학을 문제 삼지 않은 채로 경제적 공생 관계로 돌입했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은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공산주의를 내걸고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억지로 접붙이고, 일당독재를 인민 민주주의라 선전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되살려 일인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

▲1972년 2월 24일, 중국 만리장성을 방문 중인 닉슨 미 대통령 부부. 사진/ 공공부문
정치 철학이 바뀌어야 중국이 변한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미·중 갈등은 타협 불가능한 서로 다른 정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1979년 초 덩샤오핑은 제5의 현대화 전략으로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민주장(民主牆) 운동의 주동자들을 긴급 체포한 후,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도 중국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공산주의 노선, 인민민주독재, 중공 영도력, 마오쩌둥 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전 세계는 그러한 중국의 자기모순과 이중성을 빤히 보고 있었지만, 중국과의 경제적 공조가 불러올 경제적 실리가 컸기에 닉슨의 전략을 따라 중국의 정치 철학을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는 톈안먼에서 탱크 부대가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음에도 국제사회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그대로 인정했다. 닉슨 패러다임의 밑바탕엔 자본의 유입으로 중국의 경제적 토대가 바뀌면 정치적·제도적 상부구조도 변한다는 낙관이 깔려 있었다.
닉슨의 낙관과는 달리 중국은 정치 체제의 변화 없이 경제적 공룡으로 성장했다. 그 점에서 닉슨 패러다임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 이제 세계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정치 철학을 문제 삼고 있다. 작금의 미·중 갈등 근원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라는 타협 불가능한 정치 철학의 대립이다.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태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거부하는 중국공산당의 자기 모순적인 정치 철학에서 비롯됐음을 나토를 비롯한 세계 주요국이 지적하고 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양자택일에서 나토 31개 회원국과 인도-태평양의 4개 주요국도 미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결정의 밑바탕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자유, 인권, 민주, 법치 등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해온 초강대국이라는 공동 인식이 깔려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이후 국제사회의 전선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인류가 전쟁을 치르지 않고 미·중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가? 중국공산당이 자체적으로 모순된 정치 철학을 교정하여 인류적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길밖엔 없다. 중국이 더욱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법치 국가로 진화한다면,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중국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 중국의 변화가 미·중 갈등 해소의 첩경이라는 얘기다. 중국의 현실이 바뀌려면, 중국공산당의 리더십이 변해야만 한다. 중국공산당의 리더십이 변하려면 그 근본적 이념이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 지식인들이 다시금 국가의 정치 철학을 새로 짜는 치열한 이념 논쟁, 전면적 사상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2013년 4월 둥완(東莞) 농미공 청년들이 거리에서 “민주, 자유, 인권, 헌정”을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당시 중국에선 민주 헌정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진/rfa.org
1911년 이래 중국 지식인들은 1세기 이상 헌정 담론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대 그들은 중국의 전제적 헌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헌정 담론을 전개했다. 2013년 중국공산당은 강압적으로 그 논쟁을 중단시켰지만, 중국 지식계의 헌정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식계의 담론이 탁상공론 같지만, 모든 정치 혁명은 비판적 사유에서 시작된다.
그 점을 잘 알기에 마오쩌둥은 반우파 운동(1957~1959)으로 55만의 지식인들을 오지로 보내 중노동을 시켰다. 현재 일인 지배의 시진핑 정권은 개혁개방 이래 가장 강력하게 비판적 지식인을 탄압하고 있다. 그러한 중국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정치는 생물이고 역사는 급변을 낳는다. 다수 중국 인민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현 체제는 억지와 모순으로 가득 찬 잘못된 정치 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중국이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결코 영원히 참일 수 없다. 전 세계가 중국의 정치 철학을 문제 삼는 바로 지금이 중국을 바꾸는 적기일 수 있다. <계속>
<82회>실제 청년 실업률 46.5%, 시진핑 “고통을 곱씹으라!”

“오늘날 중국의 대학에는 강의실마다 CCTV가 설치돼 있고, 강의 내용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최근엔 강의 중에 미국 경제 데이터를 사용했다고 경고받았다. 교수는 교안을 제출하고, 교안대로 강의해야 하며, 교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학교 당국의 지적을 받고, 다른 교수의 수업을 의무적으로 참관해야 한다. 미국에는 늘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따라붙고,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사상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실제로 청년 실업률은 40~50%에 달한다. 권력 유지만을 신경 쓰는 시진핑이 2~3년 안에 진짜로 대만을 침공할 수도 있다.”
최근 은밀한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해 들은 중국 한 대학 어느 중국인 교수의 발언이다. 다른 모든 포인트는 차치하고 이 교수가 말하는 실제 청년 실업 40~50%는 과연 신빙성이 있는가?
심각한 중국의 청년 실업률
세계 제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이 6월 말까지 석 달 동안 고작 0.8% 성장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이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인민은 체감하는 현실은 정반대이다. 소매 판매 부진, 부동산 투자 침체, 수출 실적 저조, 지방 정부 부채 등 산적한 문제로 중국 경제는 시방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드는 형국이다. 지난 3월 국무원 총리 리창은 5%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중앙은행은 1년 만에 이자율을 다시 낮추는 강수로 소비 진작을 시도했지만, 중국 경제는 여전히 냉기를 못 벗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계속 증가하는 청년 실업률이 시진핑 정권에 짓누르는 골칫거리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발표에 따르면, 16세에서 24세까지 도시 지역 청년 실직률이 21.3%에 달했다. 올해 중국에선 사상 최대 수치인 1천 1백 58만 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쟁에 나선다. 2018년 이래 중국은 청년 실업률을 발표해 왔는데, 올해 중국 정부는 농촌 지역 청년 실업률 발표를 보류하고 있다. 얼핏 보면 청년 실업자들의 총수는 중국 도시 지역 잠재 노동력의 1.4%에 지나지 않지만, 대학 졸업 후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의 존재를 시진핑 정권은 무시할 수가 없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실로 위험해 보인다. 미국의 청년 실업률은 2020년 14.85%에 달했지만, 2021년 9.57%를 거쳐 2023년 현재는 6.5% 정도에 머물고 있다. 스페인, 핀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등 실업률이 높은 나라가 운집한 유럽연합의 평균 청년 실업률도 현재는 14% 이하에 머물러 있다. 한국은 2019년 12%에 육박했으나 현재는 6% 정도이며, 일본은 4% 이하의 안정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5년간 베트남과 필리핀은 5~7%를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경제 사정이 불안한 인도네시아도 13% 정도를 보인다. (macrotrends.net)
직접 선거나 국민투표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공산당은 오직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해 왔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계속 인권과 자유를 제약당하면서도 중국 인민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해온 근본 이유는 경제성장의 결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중국에서 21.3%의 실업률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수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중국 통계국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는 도시 청년 절반이 실업 상태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장단단(張丹丹)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23년 3월 중국의 실제 청년 실업률을 46.5%에 달했다. 당시 정부에서 공표한 19.7%보다 무려 26.8%를 웃도는 수치다.
장단단 교수는 취업 준비생들 외에 상당수의 청년 노동력이 노동 시장을 벗어나 있다는 현실에 주목한다. 취업 시장의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의 노동력은 주변에서 관망하거나 무한정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면 자발적으로 노동력 시장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은 “좌절된 노동력” 혹은 “은둔성 실업 군체(群體)”라 불린다. 장 교수에 따르면, 국가통계국의 통계는 이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정확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실업률을 논하려면 반드시 노동 참여율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023년 중국 국가통계국의 3월 발표를 보면, 16~24세 전국 도시 청년의 수치는 9천 6백만 명이다. 그중 3분의 2에 달하는 6천 4백만 명은 비노동 인력으로 분류되고, 나머지 3천 2백만 명만이 노동 인력이다. 노동 인력 3,200만 명 중에서 2,570만(80.3%)은 취업 인구이며, 630만(19.7%)은 실업인구로 분류된다. 문제는 비노동 인력으로 분류된 6,400만 명 중에서 진짜 학생은 4,800만에 불과하며, 나머지 1,600만은 실질적인 실업자라는 데에 있다.
그 1,600만 명은 현재 “탕핑(躺平, 납작 드러눕기),” “부궁쭤(不工作, 일 안 하기),” “컹라오(啃老, 부모 뜯어먹기)” 등을 하며 지내고 있는 이른바 “전업 자녀들”이다. 현실적으로 이들 1,600만의 비노동 인력은 실업 상태이므로, 중국의 실제 청년 실업률은 “(1600+630)/(1600+630+2570) = 46.5%”가 된다. 쉽게 말해 중국 국가통계국은 “납작 드러눕고, 일 안 하고, 부모를 뜯어먹는 전업 자녀들”을 모두 학생 신분으로 분류해서 지난 3월 청년 실업률을 억지로 19.7%로 축소했다는 지적이다.

“콩이지의 장삼,” 청년 실업자의 한탄
1919년 3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루쉰(魯迅, 1881-1936)은 다섯 쪽짜리 단편소설 “콩이지(孔乙己)”를 집필했다. 그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1900년경 가상 도시 루전(魯鎭)의 한 선술집에는 잊힐만하면 나타나서 훔친 돈으로 따뜻하게 데운 술을 사서 마시면서 경전을 읊어대는 콩이지라 불리는 구시대 서생(書生)이 있었다. 날마다 좀도둑질로 연명하며 여기저기서 얻어터져서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는 절대로 남루한 장삼(長衫)만큼은 벗지 않았고, 외상값은 어김없이 갚았다.
쓸모없는 지식만 잔뜩 머리에 담고 밥버러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지식인의 모습을 술집에서 허드렛일 돕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20세기 초반의 이 이야기가 최근 중국의 인터넷에서 밈(meme)처럼 퍼지고 있다. 대학 졸업장을 갖고도 취업에 실패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서글픈 신세를 콩이지의 비참한 몰골에 빗대서 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력은 못 내려오는 높은 누각이며, 못 벗는 장삼이라네.”
“콩이지가 장삼을 못 벗어 던졌듯, 나 역시 학력을 못 벗어 던지네”
“넌 콩이지가 아냐, 장삼 따윈 신경 쓰지 마!”
“왜 콩이지의 장삼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가?”
학력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밑바닥에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말자는 결의처럼 들리지만, 실은 대졸자 청년 실업자들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최근 7년 사이 대졸자가 736만 명(2015년)에서 1,158만 명(2023년)으로 무려 63%나 급증한 중국의 현실에서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콩이지의 장삼”은 결국 고급 인력을 수용할 수 없는 중국 경제의 현실적 한계를 상징한다.

고학력 실업자, “걸어 다니는 폭탄”
한국의 한 사회학자는 1960년 한국에서 대학 졸업한 후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려야만 했던 청년들 한 명, 한 명을 “걸어 다니는 폭탄”에 비유한 바 있다. 대졸 실업자는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는 비유는 중국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1989년의 경제 상황을 보면 당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그토록 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합세했던 이유가 자명해 보인다.
당시 가격 개혁의 실패로 물가가 급등하고, 도시 실업률이 급증하고 (예: 1988년 상하이 실업률 14~25%), 인플레이션이 전년 대비 18~34%에 달하는 등 총체적 경제난이 중국 전역을 덮치고 있었다. 특히 15년에 40~60%의 증가 속도로 청년 인구가 가파르게 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청년 실업률은 높아지고 있었다. 무섭게 성장하던 경제가 갑자기 침체기에 들어설 때 사회 불만이 고조되어 소외된 청년층이 신속하게 정치화할 수 있었다. (David G. Munro and Claudia Zeisberger, “Demographics: The Ratio of Revolution,” Insead, 2011)
반면 중국공산당이 1989년 베이징 도심에 탱크 부대를 보내서 대학살을 자행한 후에도 일당독재의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지속적인 고도의 경제성장에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이란 본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이기 이전에 경제적 활동을 통해서 이익을 도모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이다. 경제적 풍요는 사회적 안일주의를 낳고, 경제적 궁핍은 정치적 모험주의를 부추긴다. 높은 청년 실업률이 청년의 정치화로 나아가는 계기일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 25일부터 나흘간 중국 17개 주요 도시에서 성난 청년들이 일어나서 손에 흰색 종이를 들고서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물러나라!” 외치며 이른바 “백지 혁명”을 일으켰다. 놀란 시진핑 정권은 예상외로 서둘러 방역 규제를 전면 해제했다. 덕분에 “걸어 다니는 폭탄”은 터지지 않은 채 일단 땅 밑에 묻혔지만, 갈수록 증가하는 실업률은 더 큰 위기를 예시한다. 과연 시진핑 정권은 어떤 묘수를 써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시진핑, “청년들아, 고통을 곱씹으라!”
지난 5월 1일 인민일보는 청년절 기념 시진핑 총서기의 연설을 대서특필했다. 1969년 산시(陕西)성 옌촨(延川)현에 16세 어린 나이로 하방(下放)됐던 신산스러운 과거를 회고하며 그는 청년들을 향해서 다섯 차례나 “스스로 찾아서 고통을 곱씹으라(自找吃苦)!” 촉구했다. 그는 “무수한 인생의 성공 사례가 보여주듯, 청년 시절 고통을 곱씹는 선택은 큰 수확의 선택”이라고도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한국어 속담과 비슷한 말 같지만, 그 속엔 섬뜩한 가시가 박혀 있다. 왜 하필 청년 실업률이 최고조로 달한 시점에서 시진핑은 문혁 체험을 언급하며 청년들의 고통 감내를 요구하고 나섰는가?

문혁 당시 산간벽지에 추방당했던 지식청년(知識靑年)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자신들을 희생시킨 최고 권력자의 음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도시 청년 실업자들은 2천만 명에 달했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농촌으로 보냄으로써 일거에 청년 실업의 문제를 해소했으며, 갈가리 찢겨서 서로 죽고 죽이며 무장투쟁에 나섰던 여러 도시의 홍위병들을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했다. (송재윤, <<슬픈 중국: 문화대반란 1964-1976>> [까치, 2022], 309~310쪽 참조).
그러한 문혁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진핑은 진정 과거의 마오쩌둥처럼 도시의 청년 실업자들을 농촌으로 추방하려 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불만으로 가득 차서 “걸어 다니는 폭탄”처럼 도시를 배회하는 청년들을 향해 섣부른 행동일랑 생각지도 말라는 정치적 협박인가?
그 어떤 경우든 오늘날 중국이 언제든 필요하면 마오쩌둥처럼 청년들을 싸잡아서 산간벽지로 추방할 수 있는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라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콩이지의 장삼”을 입지도 벗지도 못한 채 도시를 방황하는 중국의 청년 실업자들에게 고통을 곱씹으라는 최고 영도자의 요구는 무서운 선제공격이다. 마오쩌둥의 단 한 마디에 산간벽지로 추방당해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청춘을 빼앗겼던 50여 년 전 홍위병의 전설이 다시 현실이 되지 말란 법도 없기 때문이다. <계속>
07.29
〈83〉정전 협정을 “위대한 승리”라 주장하는 중국, 그 근거는?
변방의 중국몽 <1회>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중국, 북한의 대표단이 모여서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공공부문
정전 70년, 한국 전쟁이 안 끝나는 이유
1953년 7월 27일 ‘한국 정전 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70년이 지났건만 한국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 전쟁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미국 안팎의 수정론자들은 미국 책임을 물어가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설명해보려 부단히 애썼지만, 그들의 해석은 요령부득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최근 정전 70주년을 맞아 다시 종전 선언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한국 지난 정권의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초반 그들은 “북한은 핵 개발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서 국제 사회를 향해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평화 의지’를 홍보하고 다녔다. 결국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그들은 황급히 “북핵은 공격용이 아니다”라며 김정일을 변호했다. 북한의 비핵화 사기극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그들은 다시 ‘종전 선언’이 이뤄져야만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설 수 있다며 북한을 피해국처럼 감싸고 돌았다.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이 “절대로 핵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불가역적 핵보유국 선언”을 하는데도 그들은 북한이 비핵화를 원한다고 우겨대고 있다. 현실에 바뀌어도 낡은 신념을 붙들고 있는 광신자의 행태다.
매사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는 복잡한 이론보단 간단한 설명이 정답일 확률이 높다. 철학에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 불리는 ‘검약의 원리(lex parsimoniae)’는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에도 적용된다. 한국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는 가장 간단명료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들이 무도하게 권력 유지를 위해서 주변국을 위협하는 군사 도박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구소련이 해체되었고, 중국은 40년 넘게 개혁개방을 외쳐 왔지만, 오늘날의 러시아, 중국, 북한을 지배하는 전체주의 정권은 본질상 크게 변하지 않았다.
광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고집하다가 결국 우크라이나 침략을 감행한 러시아의 푸틴은 오래전에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부활시켰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대만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시진핑도 마오쩌둥의 권위를 되살려 일인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북한은 오로지 김씨 왕조의 절대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핵무장에 성공한 후 더욱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세 나라는 모두 인권도, 자유도, 민주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 체제로서 반미(反美) 선전에 혈안이 되어있다. 겉으로는 반제국주의 선동이지만, 실은 자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인류의 보편 가치를 파괴하고, 문명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독재의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그 프로파간다의 핵심에 바로 한국 전쟁의 기억이 놓여 있다.
한국 전쟁을 둘러싼 중국공산당의 선전전

▲2021년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가 기획해서 제작된 영화 '장신호'의 홍보 포스터. /위키피디아
2021년 중국 중앙선전부가 2억 달러를 써서 제작한 한국 전쟁 관련 영화 ‘장진호’는 중국 사상 최대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이 영화에 따르면, 한국 전쟁은 의분에 떤 중국의 청년들이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했던’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었다. 그 밑바탕엔 미국은 ‘악의 제국’이고,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한 중국은 ‘선의 국가’라는 중국공산당의 마니교적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반미 의식을 고취하여 내부 결속을 꾀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의도가 읽힌다.
정전 70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의 반미 선전은 더욱 과격해지고 있다. 현재 중국이 직면한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선 더더욱 반미 선동을 증폭시켜야 할 정치적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은 ‘항미원조 전쟁’이 “시공을 초월하여 세월이 갈수록 새로워지는” 중국의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해 왔다. 지난 7월 26일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의 참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 정부는 전 지구 전략과 냉전적 사유에서 출발하여 조선 내전에의 무장간섭을 결정했으며, 아울러 제7함대를 파견하여 대만 해협을 침입했다. 1950년 10월 초 미군은 중국 정부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서슴없이 38선을 넘어서 중·조 변경에 전쟁의 불길을 질렀다. 조선을 침략한 미군의 비행기는 여러 차례 중국 동북 변경 지구를 폭격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에 엄중한 손실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의 안전은 엄중한 위협에 놓였다.··· 항미원조 전쟁은 중국을 파괴하는 침략자를 물리친 신중국의 입국(立國) 전쟁이다. 항미원조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중국 인민이 일어나 세계의 동방에 세운 선언서이며, 중화민족이 가는 위대한 부흥의 길에 놓인 이정표다.”
이 짧은 문구엔 역사 왜곡과 허위 선전이 가득하다. 이미 구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6·25전쟁은 단순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의 공산화 전략에 따라 마오쩌둥의 참전 밀약을 받고서 김일성이 저지른 대남 침략 전쟁이었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한의 무력 침략을 허락했고, 같은 해 3월 마오쩌둥 역시 김일성의 무력 남침을 옹호했다. 요컨대 김일성의 625 대남 침략은 공산권의 사전 계략에 따른 국제전의 시작이었다.
미 공군이 중국의 동북 변경 지대를 폭격했기 때문에 중국이 부득이 국토방위를 위해서 미국에 저항하는 전쟁을 벌였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소련의 참전을 우려한 미국은 ‘제한된 전쟁(limited war)’의 원칙에 따라 공격 대상을 정밀하게 타격하는 신중한 전략을 추구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직접 미 공군 극동 사령부에 북·중, 북·소 국경 지대의 폭격을 금지하는 특별 명령까지 하달했다. 맥아더 장군이 미 공군에 소이탄 사용을 허용한 시점은 1950년 11월 5일이었다. 중공군은 그보다 보름 앞선 10월 19일 이미 북·중 국경을 넘어왔고, 11월 3일에는 평안북도 동부의 운산(雲山)에서 국군 1사단과 미군 제8기병연대를 격파하는 전과까지 올렸다. 미군의 공습 강화는 중공군 개입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Taewoo Kim, “Limited War, Unlimited Targets: U.S. Air Force Bombing of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Critical Asian Studies 44: 3 (2012): 467-492).

▲625 전쟁 당시 부상 상태로 미군 차량 옆을 지나는 피난민들. /공공부문
무엇보다 “항미원조 전쟁이 위대한 승리”라는 대목은 역사의 진상을 왜곡하는 거짓 주장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중국은 한국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1951년 7월 10일 작성된 미 국무부 산하 역사학자 사무소(Office of the Historian)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6월 16일 당시까지 중공군 사상자는 577,000명에 달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학계에선 중국 측 사상자를 대략 92만 명 정도로 파악해 왔다. 중국학자들은 사망자가 114,000명, 부상자가 383,000명 정도라고 파악한다. 그렇게 많은 인명이 이국의 전쟁에서 희생되었는데,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는가?
1950년대 마오쩌둥의 어록을 살펴보면 중국공산당의 궤변이 어렵잖게 설명된다. 중국은 초지일관 “조선 전쟁”이 김일성에 의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38선 분쟁에서 발생한 내전이라 주장해 왔다. 그런 전제 위에서 중국은 미국이 한반도의 내전에 부당하게 개입한 후 중국의 동북 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항미원조 전쟁”은 38선이 아니라 북·중 국경에서 시작되었고, 중공군이 유엔군을 다시 38선 이남으로 격퇴한 다음 정전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을 38선 이남으로 내모는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는 주장이다.

▲1951년 중국의 선전 포스터. “조선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 승리 만세!” 포스터. /chineseposters.net
정전 협정을 미국에 대한 중국의 위대한 승리라 규정한 인물은 마오쩌둥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소식을 접하고서 그는 뛸 듯 기뻐하며 군복을 벗어 던지고 경극(京劇) 가요를 한 곡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마오쩌둥은 여러 자리에서 “항미원조 전쟁”의 의의를 강조했다. 첫째, 38선 이북을 회수하여 북한 정권을 되살렸다는 점, 둘째,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붙어 싸우는 과정에서 중국의 전 병력이 풍부한 실전 경험을 얻었다는 점, 셋째, 중국 인민의 정치의식이 고양되었다는 점, 넷째,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을 지연시켰다는 점, 다섯째, 중·소 동맹을 강화하여 경제 지원과 안전 보장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점 등이었다. (王穎, “抗美援朝戰爭的五大意義,” ‘北京日報', 2020.09.21.)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70년째 중앙선전부는 중국이 세계 최강의 미국을 물리쳤다는 정치 선전만을 이어간다. 미·중 갈등에 봉착한 시진핑 정권으로선 한국 전쟁에서 미국과 싸워 이겼다는 주장보다 더 효과적인 대민 선전은 없기 때문이다. 헐벗고 굶주렸던 70여 년 전에도 미국을 38선 이남으로 패퇴시킬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이 대만을 놓고 미국과 싸운다면 승리는 기정사실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환구시보’ 는 7월 27일 사설에서 미국을 향해 70년 전의 한국 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대만 문제에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라 경고한다.
평화 쇼에 집착하는 한국 친중 세력의 미망
중국의 관점에선 정전 협상은 ‘위대한 승리’의 정표와 같다. 중국으로선 북한이 지금처럼 반미의 철옹성으로 남아 있어야만 항미원조 전쟁의 ‘위업’이 더욱 빛날 수 있다. 중국은 수십만 사상자를 내면서 어렵게 지켜낸 북한 정권이 베트남처럼 문호를 열고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편입되는 사태만큼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중국은 모든 수를 써서 북한을 반미의 전초기지로 남겨두려 한다.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원치 않으며, 고립과 폐쇄로 연명해온 김씨 왕조는 개혁개방의 하중을 견딜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중국공산당과 김씨 왕조의 공생 전략이 나온다. 그러한 북·중 관계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비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파멸적 공조의 양상을 보인다.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걸고 정치 집회를 열고 있는 북한 인민군의 모습. 한국 전쟁 당시 추정. /공공부문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은 개혁개방 없이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 핵무장임을 잘 알고 있다. 중국 역시 북한이 그대로 존속되기 위해선 핵무장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다. 북핵은 체제와 이념이 대동소이한 중국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지난 20여 년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묵인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70여 년처럼 러시아와 중국이 반미 전열을 갖추고 있고, 핵무장에 성공한 북한은 중·러 양국 사이에서 괴뢰(傀儡) 역할을 맡고 있다. 국제정치의 상황이 그렇게 엄중한데, 과연 미국, 중국, 한국, 북한이 모여서 종전 선언을 채택할 수 있는가? 설사 그 비슷한 선언문이 채택되어 잠시 평화의 세리머니(ceremony)가 펼쳐진들 과연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73년 전 침략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정권이 전체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핵무장에 성공한 이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종전이란 있을 수 없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국 전쟁이 끝나긴커녕 다시 비등점으로 치솟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의중을 읽지 못한 채 무조건 고개를 조아리는 친중 세력의 눈엔 물론 그러한 국제정치의 현실이 보일 리 없겠지만... <계속>
<알림> 지난주까지 연재했던 “대륙의 자유인들”을 82회로 일단 마치고, “변방의 중국몽”이란 제목으로 새로운 “슬픈 중국”의 연재를 이어가려 합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변방의 중국몽”은 전체주의 일당 독재의 국가 중국의 위세에 짓눌려 인류의 보편 가치를 저버리는 국내외 친중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입니다. 1970년대 이래 한국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이념적 친중주의의 뿌리를 파헤치고, 외교적 친중 노선의 득실을 따져보고, 친중 세력의 사유 구조와 행동 유형을 분석하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질정을 기대하며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4〉 한국 모화(慕華)사상의 뿌리 주자학(朱子學) 비판
변방의 중국몽<2회>

▲한국의 유교 문화 전통을 보여주는 성균관 문묘(文廟) 일무(佾舞) 장면. /공공 부문
영국 경험론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판 철학 등 서양 근대 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엄격하고 철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반면 20세기 초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에서 급조된 ‘중국철학’은 전통적 사유 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기보다는 동양적 사유의 고유성을 다시 찾아 지키겠다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수세적 자의식(defensive self-consciousness)에서 시작되었다. ‘동양에도 서양 못지않은 위대한 철학이 있다’는 명제가 그 대전제였다. 그 결과 100년 넘게 축적된 중국철학의 연구는 중국적 사유의 독보성과 심오함을 미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오늘날 강단의 철학자들은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방대한 지적 전통에서 역사와 문학은 전면 배제한 채로 오직 과거 몇 명 학자들의 관념적 논의만을 쏙 빼내선 ‘철학’이란 명목 아래 맹목적으로 주해만 하고 있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역사의 선례를 탐구해서 새로운 사회·경제적 제도를 입안하고, 잘못된 정책과 그릇된 관행을 비판하고, 정부의 무능과 관리의 부패를 규탄했던 경세가(經世家)들이었는데, 현대의 ‘중국철학’은 그들을 수도승처럼 마음공부만 하며 우주의 섭리만 궁구하던 관념의 철인들로 왜곡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철학’은 중세 스콜라철학을 방불케 하는 협소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관념 유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렇게 협소하게 정의되고 편협하게 탐구되어 온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1960-70년대 대만에선 국민당 정권의 이른바 유교 파시즘(Confucian Fascism)과 공명했으며, 오늘날 중국에선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화해(和諧)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차차 밝히기로 한다.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악영향과 부작용도 이제 점검할 때가 되었다. ‘관념 일변도의 중국철학’은 한국 사회에서도 중국 문명 자체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을 만들어냈으며,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비판 자체를 막는 낡은 이념의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철학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朱子學) 비판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한국은 지금도 지폐에 주자학자를 두 명이나 싣고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폐 속의 퇴계와 율곡
1975년 이래 대한민국 조폐공사는 1000원권, 5000원권 지폐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李怡, 1536~1584)의 초상화를 실어 왔다. 언젠가 한국에 다녀온 한 미국인 과학자가 그 점이 참 인상적이더라며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화폐(philosophical currency)”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도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철학 사상을 설파했는가?”
외국인으로선 당연한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이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아니라면 지폐에 실릴 이유가 없다. 지폐에 실릴 정도라면 두 사람의 철학은 깊은 통찰과 독특한 사상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국과 달리 다른 나라의 지폐에는 철학자가 아니라 통상 정치 지도자나 근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실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화폐 견본. /IBK기업은행
물론 외국 지폐에도 철학자의 초상화가 실린 사례가 없지는 않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권 아래서 대륙 합리론의 선구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지폐 인물로 잠시 등장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1987년부터 2002년까지 25년 동안 지폐에 실었다. 전 세계 교양인들은 데카르트라 하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프로이트 하면 리비도(libido)와 초자아(superego)를 연상할 정도로 이 두 인물의 영향은 현재도 건재하다.
반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데카르트나 프로이트만큼 깊은 통찰과 독창적 사상을 담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을 이해하는가? 두 사람의 철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이황과 이이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한국 지폐의 특이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일본 지폐 1000엔에는 저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 5000엔엔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 1만엔에는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초상화가 실려있다.
세 사람 모두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여 개인적 성취를 이룬 근대적 지식인들이다. 일본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이다. 일본 사회 어디를 가도 박물관처럼 에도시대의 유적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그 두 역사의 영웅 대신 근대의 지식인들을 지폐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현행 지폐. 2024년부터 일본은 지폐 속 인물들을 모두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계획이다. /공공 부문
에도(江戶) 시대 일본은 270여 번(蕃)으로 나뉘어져 있던 봉건(封建) 사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의 과정을 거쳐서 근대 국가로 재탄생했다. 오늘날 일본은 에도 시대가 아니라 메이지 시대의 연장이며, 현대 일본의 정신사는 메이지 시대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을 흡수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돌입했다.
새 나라의 지폐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새로운 인물들이 실린다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망해버린 왕조의 전근대적 인물들만 실려 있는 한국의 지폐가 특별해 보인다. 왜 한국의 지폐에는 16세기 조선의 철학자들이 실려 있는가? 이황과 이이가 그만큼 한국인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존경받고 있기 때문인가? 한국의 근대에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전혀 없기 때문인가? 아니라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을 부흥시켜 현대 한국인의 도덕성과 윤리 의식을 함양하려는 국가의 의도인가?
이황과 이이는 주자의 제자들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이황과 이이의 철학은 송원(宋元) 시대 중국에서 발흥한 주자학(朱子學) 혹은 성리학(性理學)의 본령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주희(朱熹, 1130~1200)라는 남송(南宋, 1127~1279)의 철인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 큰 스승으로 추앙하면서 오로지 주자(朱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설파하기 위하여 한평생 노력했던 16세기 조선의 주자학자(朱子學者)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주자의 제자임을 자부했고, 오늘날 동아시아 철학사를 정리하는 학자들도 대개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의 연장으로 정의한다.
주자학은 12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보편적 학문으로서 막강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사대부가 주자학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먼 옛날부터 인류는 인종, 지역, 나라에 상관없이 먼 곳에서 발원한 종교, 철학, 사상, 제도, 예술, 복식, 음식까지 무엇이건 유용하고 좋으면 주저 없이 가져다 썼다. 그러한 문화 교류와 상호 침투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사가 전개되었다. 이른바 중화 문명도 예외가 아니다. 일례로 당(唐, 618~907) 제국은 불교, 이슬람, 기독교, 배화교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다. 중세기 유럽 각 지역의 지식인들 역시 그 시대의 보편 철학을 수용하여 라틴어로 사유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본질적 문제는 퇴계와 율곡이 주자학을 통해서 얼마나 심오하고, 독창적이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 사상을 만들었냐이다. 주자학을 수용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인간의 심성(心性)과 우주의 질서에 관한 나름의 독특하고 심오한 철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두 사람의 철학이 조선 고유의 참신하고 독특한 철학이 아니라 주자학의 연장이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두 사람의 문집 어디를 읽어봐도 주자학적 기본 전제의 타당성 여부를 캐묻고 따지는 비판적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16세기 조선에 태어나서 주자학을 배우며 자랐고, 주자학의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 철학 논쟁을 벌였고, 주자학의 확산과 보급에 힘썼던 주자의 제자들일 뿐이었다.

▲중국 남송 주자학의 장시자 주희(朱熹, 1130-1200)의 초상화. /공공 부분
퇴계는 주희의 이기설(理氣說)을 탐구하면서 이(理)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이발설(理發說)을 제창했다. 율곡은 주희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발전시켜 이통기국설(理統器局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정도 언명만으로는 21세기 한국의 지폐에 초상화를 실을 만큼 대단한 철학적 성취라고 할 수가 없다. 기껏 이(理)와 기(氣)라는 주자학의 개념 틀에 갇혀서 주희의 이론을 정교하게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16세기 중세 철인들의 지적 탐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대 데카르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악한 악령이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전개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합리적 사유는 퇴계나 율곡의 주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전제와 가설을 회의하고 검증하는 데카르트적 회의에 빚을 지고 있다 하면 과언일까.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계 철학계의 그 누구도 퇴계와 율곡에 그 정도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주자학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사유 체계
주자학은 개개인의 비판적 사유가 아니라 전통적 사유의 답습을 강요하는 닫힌 이념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은 고대(古代)로부터 성인(聖人), 곧 성스러운 인물들을 통해서 전승되는 도의 계보, 곧 도통(道統)을 전제하고 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까지 이어지다가 천년 넘게 단절된 도의 계보를 성리학의 선구인 북송오자(北宋五子, 북송대 다섯 스승)가 다시 찾아냈고,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남송의 주희가 마침내 세상에 도를 알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주자 이후로는 중국 사상사에서 학파의 분기는 계속 일어났지만, 도통의 담론은 전개되지 않았다. 주자의 권위가 그만큼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논어(論語)’ 구절이 암시하듯, 전근대 유가(儒家) 경학사(經學史)에선 비판하고, 도전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일개인의 지적 모험심은 억압된다. 성인의 말씀에 이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 개인의 독창적 사유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답습하고, 주석하고, 설파하면 그 정도에서 학인의 지적 의무는 완수되기 때문이다. 전통을 넘어서는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은 사특한 망념으로 여겨졌다. 그 점에서 퇴계나 율곡은 물론, 그들을 떠받든 후대 조선의 유학자들 거의 모두가 자발적으로 주자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던 주자의 제자들이었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주자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주자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 퇴계와 율곡의 학문도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전국 시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이미 “책을 다 믿느니 차라리 책이 없는 게 낫다(盡信書不如無書)”며 ‘서경(書經)’의 절대 권위를 부정했다. 비판적 독서만이 지적 계발에 도움을 준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언명이다. 혈연적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퇴계와 율곡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오히려 맹자의 비판 정신에 따라 그들이 숭상했던 주자학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할 때다. 철학으로서 주자학은 과연 어떤 한계를 보이는가? ‘슬픈 중국’에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주자학 비판으로 시작하려 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심리 속에는 여전히 주자학적 사유 방식이 남아서 합리적 사유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계속>
〈85〉조선 사대부는 왜 오직 주자(朱子)만을 존숭했나?
변방의 중국몽 <3회>

▲조선 후기 양반 문화를 보여주는 사진. 사진/공공부문
조선 후기 주자학(朱子學)은 갈수록 더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주자 1인만을 독존의 지위에 올려 숭배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 이후 숭명(崇明)의 광열이 거세지면서 주자의 독존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선 유학의 극단화 경향을 비판하면 국수주의자들은 “식민사관”이나 “자학사관”이라 반발하지만, 비판과 점검 없는 문명은 쇠퇴를 면할 수 없다. 조선 주자학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는 작업은 자학이 아니라 비판적 자기 점검이다. 주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기 점검 없는 인간은 향상될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사상, 모든 철학, 모든 이념은 인간의 뇌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 조선의 주자학 역시 절대 진리의 현현이 아니라 조선 유생들의 뇌 속에서 전개됐던 사유의 산물일 뿐이었다. 인간의 모든 사유는 오류 가능성이 있다. 역사상 인간은 수많은 특정 사상과 이념을 “절대 진리”라고 단정하고 맹신하는 심각한 착오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비판적 사유(critical thinking)의 능력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비판적 사유란 모든 관념, 이념, 사상, 기억, 감정까지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점검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스스로 마음 상태를 관찰하고, 반성을 통해 어그러진 마음을 바로잡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지금은 전통에 대한 맹목적 옹호가 아니라 전통에 대한 체계적 비판과 점검이 필요한 시기다.
관계의 비대칭성, 유용한 개념 틀
2019년 4월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초빙하여 “지식의 비대칭성(asymmetry of knowledge)”에 관한 국제 학회를 개최했다. 학술 용어라서 생소할 수 있겠지만, 비대칭성이란 결코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비대칭성을 보인다. 연인 사이, 친구 사이, 부모 자식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국가와 개인 사이, 기업과 기업 사이 등 이 세상 모든 관계에는 명확한 차등과 격차가 존재한다. 재력, 능력, 기술력, 사교술, 정보력, 홍보력 등등의 격차가 있기에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서로가 필요하여 복잡다단한 여러 형태의 관계를 이룬다.
국제 무역이 대표적이다. 두 나라가 경제적 통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비대칭성이 두 나라의 국익을 증진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은 중동 산유국들에 대해서 비대칭적 열위(劣位)에 놓여 있지만, 최첨단 기술력에선 비대칭적 우위(優位)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 무역은 상호보완적 비대칭성을 보인다.
반면 역사를 돌아보면 적대적 비대칭성의 사례도 부지기수다. 적대적 비대칭성은 흔히 주종관계나 지배관계로 드러난다. 가장 극단적 경우를 꼽으라면, 경제적 파산을 맞은 한 개인이 타인에게 노예로 팔리거나 군사적 약세의 나라가 강한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한 개인의 노예화는 경제력의 비대칭성에서, 한 나라의 식민지화는 국력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2차 원정, 이른바 흑선내항(黑船來航)을 묘사한 히바타 오우스케(樋畑翁輔, 1813-1870)의 작품. 이미지/The British Museum
한·중 관계사와 언어 헤게모니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 학회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여러 재미난 연구를 발표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당시 프라하 카렐 대학의 철학자 요세프 풀카(Josef Fulka) 교수의 논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청인(聽人) 문화(hearing culture)”와 “농인(聾人) 문화(deaf culture)”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성을 수어(手語) 교육의 실례를 들어 분석한 철학 논문이었다. “못 듣는 사람”이 소리에 의존하지 않고 “듣는 사람”의 언어를 수어로 표현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을 그는 직접 익힌 수화를 멋들어지게 써가면서 실감 나게 설명했다.
그 학회에서 나는 “역사책 밀수하기(Smuggling Histories)”라는 제목으로 전통 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했던 역사 지식의 비대칭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북송(北宋, 960~1127)의 수도 개봉(開封)에 간 고려 사신들이 서점가를 돌면서 역사책을 사 모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문호 소식(蘇軾, 소동파, 1037~1101)은 격분하여 모두 다섯 통의 상주문(上奏文)을 황제에게 진상했다. 그는 고려 사신들에게는 절대로 중국의 역사책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 군사상 이유를 들었지만, 실은 변방지식인들의 지식을 유가 경전에만 한정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중국의 민낯이 기록된 역사서가 변방으로 유출되면 중화와 이적의 차이를 강조하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과 중화 우월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찬장에서 풀카 교수와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못 듣는 사람들이 듣는 사람의 언어를 익혀서 수화로 표현하는 과정이 한반도에 살던 고대인이 중원 지방에 가서 한문을 익혀서 한문 문법에 따라 사유를 하며 문장을 짓게 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내가 한국어는 중국-티베트(Sino-Tibetan)어족으로 분류되는 중국어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언어일뿐더러 전통 시대 한국에서 한문을 배울 때는 토를 달아가며 한국식으로 읽었다고 하자 그는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듣는 사람이 수화를 하려면 듣는 사람이 젖먹이 때부터 귀로 배운 단어와 문법을 어떻게든 힘들여서 터득해야만 한다. 전통 시대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 원어민의 구어(口語)를 배우지 않고서 오직 고전의 문장을 익혀서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 과정은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소리 언어의 문법을 따라서 수화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젖먹이 때부터 중국에서 나고 자라 중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이 자연스럽게 고문(古文)을 배우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전근대 한반도 지식인 사이의 지적 활동이 대부분 한문을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중 관계사의 “언어 헤게모니(language hegemony)”가 전적으로 중화 문명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고려와 조선에서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가 널리 애송되었지만, 전통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한문으로 시문을 지었음에도 당시 중국의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한국 출신의 문인이나 학자는 거의 없었다. 바로 언어 헤게모니에서 나오는 전통 시대 한·중 관계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이지만, 전통 시대 한·중 관계사의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특징이다. 중화 문명은 언어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기에 한반도 지식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이 점에 관해선 차후 이어지는 글에서 차차 논할 예정이다.
조선 주자학의 극단화 경향
조선 주자학(혹은 성리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전통 시대 한·중 양국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적 비대칭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 남송(南宋) 시대 크게 일어난 주희의 성리학을 받아들였던 중화 문명의 수용자였다.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를 창출했고, 한반도의 여말선초 지식인들은 서적을 통해서 그 사상 체계를 수용한 후 토착화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에서 전개된 복잡다기한 지적 생산물 중에서 오직 주자학 하나만을 전면적으로, 열광적으로, 일방적으로 흡수했다. 양국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비대칭성이 결국 조선에서 주자학의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중국사에서 성리학이 제창되어 유포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송·원·명 시대 격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서 실로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서 서로 경쟁하고, 길항(拮抗)했으며, 때론 격한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을 거쳐 갔던 거대한 사상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규모 국가주의 개혁의 실패를 체험했고, 외적의 침략으로 중원 지방을 상실했고, 조대(朝代)의 몰락과 사직(社稷)의 붕괴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고, 이민족에 통치받는 굴욕을 당했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격감하는 극심한 내전과 역병까지 겪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당시 지식인들은 그 시대의 근·현대사에 관한 숱한 저술을 남겼고, 더 좋은 사회·경제적 제도를 짜기 위한 고민을 담은 방대한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다양한 경전 주석을 계속했고, 다채로운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어떤 내용이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창출하는 과정은 그만큼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의 실제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의 발흥 과정이 그러했다.

▲최초로 성리학(性理學) 담론이 일어난 11세기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의 상업적 번영을 묘사한 작품 '淸明上河圖'의 일부. 장택단(張擇端, 1085-1145) 작. 그림/공공부문
인구, 영토,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한반도보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의 중국 문명은 그만큼 더 풍부한 지적 창조물을 생산했고, 그중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선 성리학이라는 범선을 띄운 중국 고전학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데, 그러한 항해는 긴 세월, 많은 노동, 큰 자금이 요구되는 지난한 과정이다. 바로 이 점에 양자 사이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그 때문에 여말선초의 지식인들은 방대하고 풍부한 중국 사상사의 성과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만을 집중적으로 수용하고 탐구하는 지적 편향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이국의 지식인이 외국에서 장시간에 걸쳐서 고되고 험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사상운동의 최종 결과물만을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하고, 구체적 경험은 사상한 채로 오로지 관념에 의존하여 이해하려 할 때는 지독한 지적 편향성이 나타나기 쉽다. 비단 조선 주자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들이 지식 생산의 과정과 맥락은 보지 않고서 외래 사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하는 문화 전파의 보편적 문제이다. 그렇게 수용자로서 자족하는 지식인의 고질병은 바로 특정 인물, 특정 사상, 특정 이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종교적 맹신으로 나타난다. 조선 주자학이 바로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교조적 유일사상과 인격 숭배
명·청 교체기 중국의 지식인들은 유가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거쳐 주자학의 영향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났다. 성리학의 시대가 가고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반면 조선에선 오히려 주자에 대한 존숭과 추종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리(理)가 하나도 없다”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말은 이미 조선에서 주자학이 절대 진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명(明, 1368~1644) 중엽 이후 지식인들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적 편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경전 해석과 실증적 탐구로 나아가는데, 같은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직 주자학에 집착하는 이념적 편향성과 지적 편집증을 보였다.

▲1905년 전남 화순에 건립된 주자묘(朱子廟)의 주자상(朱子像). 국운이 기울대로 기운 대한제국 당시에도 지방에 주자묘가 건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사진/전남 화순 주자묘
주자에 관한 존경과 흠모에선 서인-노론계와 소론-남인계의 차이도 없었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尹鑴, 1617~1680)나 실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장유(張維, 1587~1638),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1731~1783)처럼 소극적으로나마 주자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한 사례는 있지만, 그러한 비판이 창조적인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김영식, <중국과 조선, 그리고 중화>, 제4장, “주자 정통론의 심화” 참조)
조선 지식인의 마음속에는 실존적 인물(人物, character)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니라 절대화된 인격(人格, persona)으로서의 주자만이 군림했다. 주자를 존경하는 만큼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왕수인(王守仁, 1472~1529) 등 주희와 다른 주장을 펼친 인물들에 대해선 도가 넘는 혐오와 경계심을 드러냈다.
과연 주자학이 어떤 사상이었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그토록 열광적으로 주자를 우러르고 받들었는가? 주자는 어떻게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했는가? 이제부터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주자학”을 냉철하게 비교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려 한다. 지금도 주자학적 유풍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남아서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유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계속>
〈86〉조선 사대부는 왜 하필 명나라를 숭배했나?
변방의 중국몽 <4회>

▲조선 왕실에서 명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렸던 창덕궁 대보단(大報壇)./공공부문
조선의 숭명 사상, 대체 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명(明, 1368-1644)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숭배했다. 열강에 휩싸여 조선이 망국의 길로 치달을 때까지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음에도 퇴위하는 1907년까지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 대한제국이 명의 적통을 이은 정통의 중화 제국이란 주장이었을까?
반면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만주족에 대해서는 경멸감과 적개심을 표출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심적 보호기제가 작동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만주족에 대한 조선 사대부의 혐오와 경멸에는 오랑캐를 깔보는 한족 특유의 종족적 우월의식이 투사되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 전통의 화이관(華夷觀)에 따르면, 동이족(東夷族)이나 만주족(滿洲族)이나 “중국” 밖에 존재하는 변방의 “이적(夷狄)”이란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한족의 관점에서 중화를 외치면서 변방의 오랑캐를 낮춰보는 정신적 굴절을 보였다. 중화 문명의 중심에서 보면, 동이족이나 만주족이나 초록 동색인데, 만주족은 동이족에 치욕을 안겨주었고, 수모당한 동이족은 스스로 중화를 자처하며 만주족을 오랑캐라 경멸하는 기묘한 심리전이 펼쳐졌다.
‘중화’를 외치며 ‘만주족’을 경멸한 ‘동이족’
고려(高麗) 왕조를 무너뜨린 후 명 태조(太祖, 재위 1368-1398)의 책봉(冊封)을 받아 새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조선은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으로서 중화의 질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번국(藩國), 곧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조선 유생들은 그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를 먼 옛날 주공(周公)이 다스렸던 주(周)나라와 공자(公子)의 고향 노(魯)나라의 관계에 비유하고는 했다.
조선 특유의 소중화 의식에 담겨 있는 이러한 세계관은 일단 중화를 종족이나 지역이 아니라 오직 문화만으로 규정하는 이념적 보편성을 표방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그런 식의 비유가 한반도 밖에선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조선이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주장하고 중화의 복식을 따르며 중국 땅에서 활개 치고 다녀도 중국 정통 엘리트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은 한낱 동이족(東夷族) 오랑캐일 뿐이었다. 물론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샅샅이 구석구석 뒤지면 여기저기 조선을 칭찬하는 구절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서 발굴된 지엽말단의 자료만으로 과거를 서술한다면 역사 왜곡을 면할 수 없다. 지지율 1% 이하의 대선 후보가 지지자의 얘기만 듣고서 당선을 확신하는 오류와 같다.

▲무용총 수렵도. 말 타고 활을 쏘는 ‘동이족’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구려 5세기 중국 길림성 집안현. /공공부문
중화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동이족과 달리 만주족은 이미 북송(北宋, 960-1127)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지배했던 금(金)나라 여진족의 후예였다. 과거 조상의 포부를 되새기며 중원 정복을 꿈꾸던 만주족은 명말(明末) 혼란으로 뜻밖의 기회가 주어지자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북경을 점령한 후 명나라를 통째로 점령했다. 이에 머물지 않고 만주족은 전통적 중원의 영토를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 지역과 통합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어갔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자로서 18세기의 태평성세를 여는 저력을 발휘했다.
중원에 쳐들어가 천하를 제패한 만주족을 비웃고 깔보는 한반도 동이족의 심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소중화’를 외치던 조선 사대부들은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고 지역적으로 중원에 있지 않아도 조선이 유가 정통의 문화를 실현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반면 청나라를 얕보고 깔볼 때는 그들이 오랑캐 정권이라는 종족주의적 편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결국 한족에겐 차별받는 동이족이 한족 특유의 종족적 우월의식에 빠져서 변방의 이적을 야만족으로 여기는 기묘한 자기모순이었다.
그러한 이중성은 과연 어떤 심리의 발로인가? 성리학적 근본주의인가? 문약한 변방 지식인의 허장성세인가? 스스로 중화라 부르짖어도 나라 밖에선 그 어떤 나라도 조선을 중화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유태인 문제에 관한 글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결정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사대부의 중화 의식은 변방 지식인의 자의식에 불과했다.
청 제국의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 근본주의에 기울어서 조선 특유의 전통문화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처녀·총각의 긴 머리 땋기, 성혼한 남자의 상투 틀기, 모계 친척과 외척에 대한 존중 등 조선의 유습을 모두 ‘오랑캐풍’이라며 배격하는 풍조도 나타났다. 예컨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부모의 신주에 현고(顯考)나 현비(顯妣)라 표기하는 풍습도 몽골 원에서 비롯된 오랑캐의 유습이라 비판했으며, 머리 모양도 상투를 버리고 명나라의 화제(華制, 중화 제도)를 따르려 했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조선 사대부는 더더욱 스스로 중화 문명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며 만주족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했다. 물론 조선 왕실이나 사대부나 정치적·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청 제국의 지배자 만주족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두 한반도 내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나 서신을 주고받을 때만 뒤에서 흉보듯 수군거리는 뒷얘기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 조선은 명에 이어 청을 섬기는 제후국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 변방의 모범국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18세기 중후반 이후 청 제국의 현실을 직접 보고 난 조선 사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조선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문장을 더러 남기기도 했다. 학자들은 그 점을 집중 조명하여 조선의 사상사가 복잡하고 다채롭다고 주장하지만, 그 시대의 사상적 대세는 이미 숭명반청에 경도돼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왕실 문서에서는 후기까지도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명나라 조선, ‘유(有)’는 나라 이름 앞에 붙는 허사)이란 국호가 공식적으로 쓰였다. 명나라 황실을 이를 때는 천조(天朝)나 황조(皇朝)라는 극존칭을 붙였고, 명나라의 사신을 천사(天使)라 칭했다. 청조가 들어선 후 명나라 부흥을 외치며 저항하던 남명(南明)이 멸망하여 현실적으로 명조의 부흥이 불가능해지자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은 더더욱 명나라를 드높이고 떠받드는 경향을 보였다.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 약 1390년 추정. 명나라 초기 중화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지도. /공공부문
조선의 숭명 의식에 무슨 보편성이 있는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학자들은 일제 식민사관을 청산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조선 중화주의”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숭명 의식과 모화사상은 단순한 시대착오나 사대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보편주의와 도덕적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1998년에는 “조선 중화주의”가 조선을 문화 중심국으로 만든 이론적 근거였으며, “상호 쟁투하는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상호 평화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에 유효한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칭송한 저명한 국사학자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조선 중화주의가 “민족정체성 회복”과 “남북통일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심각한 문제는 그 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 중화주의의 구체적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논문들을 아무리 뜯어봐도 조선 중화주의의 구체적 콘텐츠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공산주의라 하면, 만민평등, 계급투쟁, 역사적 변증법,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등의 주장이 있고, 자유민주주의라 하면 자유, 인권, 법치, 권력분립, 국민주권론, 선거 민주주의 등의 구체적인 콘텐츠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 중화주의는 과연 어떤 주장, 어떤 내용, 어떤 의제를 담고 있는가?
한반도에 왔다는 전설의 인물 상(尙)나라 기자(箕子)에게 직접 유학을 전해 받았기에 조선이 중화의 적통이라는 주장인가? 오랑캐에 정복당한 중국은 만주식으로 변발하고 전통 의상을 입지 않아 더는 중화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라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유교의 가치가 조선에서만 실현됐다는 주장인가? 맹자가 말하는 왕도 정치가 오직 조선에서 구현되었다는 소리인가? 조선에서만 “위로는 군왕부터 아래로는 서민 자제까지 모두가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 주자학적 이상사회가 실현됐다는 발상인가?
조선 후기가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이며 “도덕 국가”였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인구의 30~40%를 노비 삼은 나라를 어떻게 도덕 국가라 평가할 수가 있는가? 청나라를 다녀온 박지원(朴趾源,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 조선 후기 유생들이 조선은 중국에 비해 빈한하고 궁핍하고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나라라고 증언했다. 그러한 조선을 당대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체 조선 중화주의의 목적, 가치, 지향, 의제가 무엇인가? 조선 중화주의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그 속에 범인류적 보편성이 있는가?
명의 현실엔 눈감고 명을 이상화한 지적 태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중화주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숭명 의식이다. 명나라는 바로 얼마 전 조선이 직접 섬겼던 나라였다. 이미 망해버린 바로 그 명나라를 이상화, 실체화, 절대화했다는 점에서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충성심은 실로 특기할 만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공산 근본주의자들이 구소련 스탈린의 초상화를 사회주의 혁명의 신전에 배향하고 숭배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선에서 숭명 사대를 주도한 노론(老論)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 /공공부문
한 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끌어와선 조선 사대부에게 명나라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픽션(fiction)”이었다는 변론을 펼친다. 모름지기 픽션의 생명은 개연성이다. 개연성을 상실한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지루하고도 뻔한 거짓말이 되고 만다. 개연성을 얻기 위해 작가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탐구하여 정교하게 작품의 플롯을 짠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 픽션이 예술로 승화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 사대부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만들어낸 명나라가 과연 픽션이었나? 다시 말해, 그들이 이상화한 명나라의 형상에 일말의 개연성이라도 있었는가?
만약 명나라가 정의롭고 성스러운 국가였다면 숭명의 보편성이 성립될 수 있다. 문제는 현실의 명나라는 전혀 이상국이 아니었으며, 조선 사대부가 생각하듯 중화의 정통이 구현된 주자학적 질서의 사회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 들어보면, 숭명 사상과 직결된 조선 중화주의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첫째,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 재위 1368-1398)는 조선 유생들이 칭송하듯 지극한 성군(聖君)이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만 명을 도륙한 일면 포악하고 잔인한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낸 명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는 조선 유생들이 극구 찬양하듯 현명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환관에 휘둘리고 여색에 탐닉했으며, 심지어는 조회(朝會)도 거부한 채 국정(國政)을 내팽개친 혼군(昏君)으로 악명이 높았다.
셋째, 조선 유생이 생각하듯 명나라는 주자학적 이상사회가 전혀 아니었다. 명 중엽 이후에는 양명학(陽明學)이 퍼져나가 이미 주자학의 권위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명 말기에는 <금병매(金甁梅)>, <수탑야사(繡榻野史)> 등 에로틱 소설이 널리 읽히고 외설스러운 춘화(春畫) 인쇄물이 범람했다. 명나라가 그렇게 탐욕적이고, 현란하고, 음탕하고, 통속적인 사회였음을 알았다면, “천리(天理) 보존 인욕(人欲) 제거”를 부르짖는 조선의 도학자(道學者)들이 과연 명나라를 그토록 흠모하고 숭배할 수 있었겠는가?
넷째, 16세기 이후 명은 멕시코, 페루, 일본 등지에서 생산된 전 세계의 은(銀)을 거의 다 흡수했을 만큼 상업이 발전하고 무역이 성행하던 그 당시 세계화의 허브였다. 조선 유생들이 생각하듯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공고했던 사회가 아니었으며, 주자학의 고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명청 교체기의 사회경제적 격변과 국제정세의 정황을 제대로 알았다면, 조선 사대부들은 결코 명나라를 숭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10년 경 출판되어 유통되었던 에로틱 소설 “금병매(金甁梅)”의 삽화 한 장면. 그림/공공부문
명나라의 역사적 현실이 그러함에도 대보단과 만동묘에서 해마다 명 황제를 모시는 제사를 올렸다.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300년에 걸쳐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더욱 강고해지기만 했다. 진정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명나라의 실제 역사를 깊이 탐구하지 않은 채 명나라를 관념적으로 이상화했던 까닭이다. 누구나 유용한 학문을 이루려면 경험 세계를 깊이 탐구하여 일반적 원리와 보편적 법칙을 찾아가는 귀납적 연구를 거쳐야만 한다. 자연현상과 인간 현실에 관한 구체적, 경험적, 실증적 탐구는 없이 ‘리(理)’나 ‘기(氣)’ 같은 거대 관념만으로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본성을 논해봐야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벗어날 수 없다.
동서양 구분 없이 중세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관념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변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의 늪에 빠져 있었다. 칸트를 원용하자면,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함이며, 유교(儒敎)의 표현을 빌자면, 격물(格物)도 없이 궁리(窮理)로 넘어가는 ‘엽등의 폐단’(躐等之弊)이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지 않고 멋대로 건너뛰는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계속>
09.08
“한국인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라, 지금 당장!”
‘슬픈 중국’ 3부작 완간한 송재윤 교수 인터뷰 全文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80년대 이래 한국 지식인은 1949년 이후의 중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암묵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며 문화대혁명은 말년의 실수 같은 것이라 치거나 그마저 옹호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다. 그것이 전 정부의 친중사대주의로까지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586세대이면서 “중국은 그렇지 않다”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학자가 나타났습니다. 송재윤(54) 캐나다 맥매스터대 역사학과 교수입니다. 그가 최근 방대한 분량의 저서 ‘슬픈 중국’ 3부작을 완간했습니다. 2020년 1부 ‘인민민주독재 1948-1964′, 2022년 2부 ‘문화대반란 1964-1976′에 이어 3부 ‘대륙의 자유인들 1976-현재’를 낸 것입니다.
3부는 마오쩌둥 사후 중국 정부가 경제 성장을 이루고 화해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 안팎에서 자유를 외치는 인민들의 저항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총력전’이란 미명하에 전개된 최근 3년 동안의 전체주의적 방역 정책의 실태도 기록했습니다. 그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책 완간을 계기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와 인터뷰한 내용은 최근 신문 지면에 기사로 실렸습니다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얘기가 누락됐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전문(全文)을 싣고자 합니다. 대단히 긴 분량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슬픈 중국' 3부작
◇”뭐라고? 작은 산봉우리가 중국몽에 동참하겠다고?”
―'슬픈 중국’ 3부작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2015년에서 2016년까지 1년간 연구년을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19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16년 만이었죠. 그때 서울에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중국 경제가 곧 미국을 꺾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고 전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정치체제가 ‘풀뿌리 민주주의와 엘리트 능력주의를 결합한 합리적 통치 시스템’이라는 평가도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서 급속히 유포되고 있었죠. 인터넷 언론 검색만 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은 다시금 친중 사대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첫 책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였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급기야 2017년 12월 1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이고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몽(中國夢)에 동참하겠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때 그 장면을 캐나다에서 실시간으로 보면서 저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국가원수로서 외교의 프로토콜을 완전히 벗어나는 터무니없는 ‘과공(過恭)의 비례(非禮)’일 뿐만 아니라 ‘중국몽’에 대한 암흑 같은 무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몽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입니다(송 교수는 이것이 중국 우선주의, 인권탄압, 패권주의의 논리가 담긴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인들 앞에서 전 한국을 이끌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가요?
대체 그 원고를 누가 썼을까? 당시 청와대는 무엇을 했나? 외교부는 어떻게 그런 비상식적인 발언이 대통령 연설문에 들어가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그 바로 전날 한국 기자단 10명이 중국 경호원에게 야만적으로 폭행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었습니다. 대통령 수행 기자단이 중국에서 경호원들에게 짓밟히는데, 한국 대통령의 입에서 어떻게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말이 나오는가요? 며칠 후 캐나다 한인 교포들과 모여서 만찬을 하는데, 그중 한 명이 놀랍게도 ‘기자 녀석이 맞을 짓을 했다’며 중국의 폭행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며칠 고민하다가 ‘현대 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어로 써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았고, 현역으로 군 복무를 완수했으며,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외국 생활을 했지만, 저는 아직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관한 역사서는 부지기수지만, 특히 한국 사회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근거해서 현대 중국의 정책 실패와 정치범죄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왜곡된 정보, 그릇된 환상, 허황된 전망을 쏟아내는 언론들이나 소위 중국통 전문가들에 맞서서 중국의 실체를 밝히는 지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자각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해인 2018년 1월부터 한 인터넷 매체에 ‘문혁춘추’란 제목으로 1948년 이래 중국 현대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민의 나라’가 인민들을 학살했다
―책 제목 ‘슬픈 중국’의 ‘슬픈’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원래 마음속에 갖고 있던 제목은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였는데, 제1권 출판 직전에 심상대 작가의 조언에 따라 ‘슬픈 중국’으로 바꿨습니다. 왜 하필 ‘슬픈’이란 형용사가 붙었냐면, 이 3부작에서 낱낱이 밝힌 참혹하고 광포(狂暴)했던 중국 현대사의 전 과정을 살펴보시라 말하고 싶기 떄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했던 중국 인민의 뼈아픈 체험에 공감할 수 있다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중국 인민의 뼈아픈 체험’이라는 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수치를 들자면, 1950년대 초반 숱한 정치 투쟁에서 최소 100만에서 최대 500만 명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서 처형됐고, 반우파 운동 때는 최소 55만 명의 지식인들이 잡혀가서 길게는 20년 걸쳐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1958년~1962년 대기근이 닥쳤을 땐 3000만에서 4500만 명이 주린 배를 잡고 얻어맞으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쓰러져 죽어야만 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밝힌 바로는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1억 11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인민이 정신적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톈안먼 대학살 때는 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30년이 지나도록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소 300명, 최대 1만 명 넘는 인원이 전국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중국은 전국적으로 1억 명 이상이 몇 달씩 집안에 감금당하는 소위 ‘대륙봉쇄령’의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서울·경기 지역과 인구가 비슷한 상하이 지역 2600만 명이 시진핑 1인의 명령에 따라 5개월 동안 집구석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중국입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홍위병들.
―하지만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경제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인민들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된 상황이 아닌가요?
“문제는 그렇게 많은 학정, 폭정, 실정을 거듭했는데도 최근 200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성장이 이뤄지자 중국공산당은 그 모든 성과를 통치 능력이라 선전한다는 사실입니다. 3권 ‘대륙의 자유인들’에서도 썼지만, 중국에서 민간 기업이 GDP의 60%, 혁신의 70%, 도시고용의 80%, 새 일자리의 90%를 담당해 왔습니다. 중국 공산당 ‘덕분’에 중국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니고, 중국 공산당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장 시진핑 ‘일인천하’가 되니까 중국 경제는 봉쇄 이후에도 바닥 아래 바닥을 뚫고 꺼지는 모양새가 펼쳐지지 않습니까?”
―현재 중국이 덩샤오핑이 이룬 것마저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들에게 정치 활동만 포기하면 경제적 번영이 따른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공산당 일당독재가 아니라 민간 경제의 약진 결과 중국식 개혁개방이 성공했습니다. 그 점을 잘 알기에 2001년 7월 장쩌민은 기업가들에게 중국공산당 가입을 허락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일부 중국의 붉은 자본가들(red capitalists)은 글로벌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죠. 시진핑 정권의 권위주의적 정책은 바로 그러한 공적 신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제로-코비드 정책의 결과 중국의 가계와 자영업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투자와 소비를 꺼리고 현금을 붙들고 있게 됐습니다. 그 결과 2022년 12월 제로-코비드 정책이 끝났음에도 극적인 경제적 반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지금 중국 공산당은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암묵적 전제를 깨서 공적 신뢰를 깎아먹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진핑은 중공 내부 규율을 깨고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 역시 덩샤오핑의 지혜를 거슬러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는 시대착오라 할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와 시진핑 시대 모두 중국은 전체주의 국가라는 것입니까?
“오늘날 중국은 14억 인구 개개인의 생체 정보를 빅데이터로 집적하고, 전국에 감시 카메라를 틀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나라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종교의 자유도, 거주이전의 자유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결국 못 견디고 정치적 망명을 하거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저는 1995년 처음 중국에 간 후 30년 가까이 우정을 쌓아 온 중국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크기에 더욱더 나는 현대 중국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슬프게만 느껴집니다.”

▲한국 지식인들의 친중 성향에 큰 영향을 준 리영희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한국 지식인들, 여전히 모화주의(慕華主義)에 빠졌다”
―1980년대 많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중국(중공)은 이상적인 체제인 것처럼 비쳐졌습니다.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이 필독서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마오’는 우상화됐습니다. 그래서 톈안먼 사태 당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대학 시절 중국사 교양 수업을 수강했는데, 20대 후반의 젊은 강사는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 기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1937년에 출판된 공산 게릴라 투사 마오쩌둥의 전기입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40대 중반의 공산주의 혁명가였습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이후부터 1976년까지 27년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시기에 중국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균형 감각이 있는 역사 교사라면 수강생 모두에게 이 책 하나만을 읽고 독후감을 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가 분위기는 그렇게 왼쪽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970~80년대 한국 지식계는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그 환상은 리영희의 ‘이성과 우상’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같은 중국 관련 시사 평론집을 통해서 퍼져 나갔습니다. 리영희의 책이 그만큼 널리 읽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책들이 그 당시 국제 학계는 고사하고, 한국의 학술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거짓, 오류, 과장, 왜곡, 편파적 평가의 언어로 점철돼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중국을 제대로 보며 분석하는 학자가 존재했다는 말씀입니까?
“그 당시 신문 자료를 살펴보면, 1960~70년대 한국 대표 언론들은 외신 보도를 정확하게 받아서 문화혁명을 겪고 있는 중국의 실상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고 충실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이홍영 교수나 안병준 교수처럼 영어권 학계에 문혁 관련 학술서를 발표한 전문가들도 있었으며, 1976년 중반 한국에서 오병헌 교수처럼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적으로 탐구한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리영희라는 비전문가의 시사평론집이 그토록 널리 읽혔을까? 이에 대해선 앞으로 연재할 ‘변방의 중국몽”에서 심층적으로 밝힐 예정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충북 화양동계곡에 있는 만동묘.
―하나씩 말씀해 주시죠.
“첫째, 한국인의 뿌리 깊은 반서구주의와 반미 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화 제국의 조공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일종의 ‘백화론(白禍論·White Peril)’을 갖게 됐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구미 백인들이 황인종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생겨난 황화론(黃禍論·Yellow Peril)에 대비되는 심리적 공포증입니다. 20세기 초부터 범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권 등 일본 지식계에서 만들어낸 아시아 연대론이 중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한 오랜 지적 경향성이 한국 지식계에도 면면이 내려왔다고 사료됩니다. 중국의 현대사의 기본 사실을 왜곡과 과장으로 거침없이 미화한 리영희의 저작들은 역사가 아니라 ‘중국 신화’였습니다. 그런 중국 신화가 반미 성향의 한국인들에게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대체 문명의 판타지를 제공했습니다.
둘째, 한국 지식계의 뿌리 깊은 사회주의 성향입니다. 중국이 사회주의가 된 이유도 비슷한데, 근대 문명이 무엇인지, 구미 자유 민주주의가 어떤 체제인지 잘 알 수 없었던 20세기 초중반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디폴트로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사회주의의 내러티브가 개인의 소유욕, 경제적 자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자유주의의 내러티브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한국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지식인들은 더더욱 중국을 동경하고 흠모했던 듯합니다.
셋째, 한국에서 반(半)천년 이어진 모화(慕華)사상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역사의 유습은 오래도록 남아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문화사에서 소위 망탈리테(Mentalité)라 부르는 공동체의 뿌리 깊은 정신적 관성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들, 특히 노론 권력자들은 병자호란 이후 점점 더 노골적으로 숭명(崇明) 의식을 강화해 갔습니다. 만동묘(萬東廟)를 세워서 명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망해버린 남명(南明)의 역사를 쓰기도 하고…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의 건립을 선포했지만, 스스로 퇴위하던 1905년까지 대보단에서 1년에 네 차례씩 명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실로 역사에 전례가 없는 기막힌 ‘소(小)중화 근본주의’가 한반도 권력층의 의식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유습이 오늘날의 한국에까지 이어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재도 ‘미국이 아니라 옛날처럼 중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전직 대통령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쓴 책 홍보에 나서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16년 언론 인터뷰에서 한 유명 철학자는 ‘미국은 50년 우방이지만, 중국은 5000 년 우방’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제 미국만 죽자 살자 따르지 말고 중국 쪽에 서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중국이 5000년 우방이라는 발언은 역사적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발언은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 깊은 반미친중(反美親中)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표출한 점에서 그 의미가 심장합니다.
한국 지식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을 신뢰한다면 그 이유는 경험적으로 치밀하게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중국을 만든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를 꼼꼼이 들여다보면 절대로 그런 식의 여과되지 않은 친중국 옹호 발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경험적 현실을 떠나 관념으로서의 중국을 존숭하는 태도 역시 편향되고 고립된 조선 사상사의 영향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페이스북
◇”중국을 맹종하기 전에 공부 좀 하라!”
―'중국의 역사가 그렇게 화려하고 숭고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까?
“고대 중국 문명은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입니다. 은허 갑골문에서 그 유래를 확인할 수 있는 한자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기원전 221년 진(秦) 제국의 성립에서 틀이 갖춰진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인류 문명사 최장의 중화 제국을 지탱했던 성공적인 통치 시스템이었습니다. 방대한 영토의 다양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해 장시간에 걸쳐 독특한 문화를 창달해 온 대단한 문명임엔 틀림없습니다. 그 밖에도 눈부시고 화려한 중화 문명의 실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공산당 일당독재를 넘어 시진핑 일인 지배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1949년 이래 중국의 현대사를 이념적으로 미화하고 정치적으로 칭송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유의 신장, 민주의 확대, 인권의 보장, 법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중국은 후진국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저명한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1936~2012)는 중국 학생들을 향해서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말고 스터디(study)를 하라’고 했습니다. 중국을 미화하고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충언하고 싶습니다. ‘중국을 사랑하지 말고 스터디를 하라!’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에는 눈을 감고서 무조건 중국이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면, 맹목이고 맹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배 권력자들이 명나라를 존숭했는데, 과연 그들이 명나라의 역사를 얼마나 공부했습니까? 만력제가 국사도 내팽개치고 향락에 탐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송시열은 만력제를 성군이라 칭송할 수 있었을까요? 명태조 주원장이 집권 후 수만 명을 도륙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개항 이후까지 만동묘에서 명태조를 흠모하며 고두(叩頭)하면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현대 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조금이라도 탐구해본 사람은 절대로 중국을 신봉할 순 없습니다.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중국의 현대사에 그토록 많은 과오와 문제점이 있었다면, 수억의 인구가 1949년 ‘그 체제’를 택한 이유는 뭘까요? 저는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시신을 참배하려고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긴 줄을 선 것을 보고, 그리고 깐수성(甘肅省)의 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여학생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묻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마오쩌둥’이라 대답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고, 서울에서 유학하는 중국인 대학생으로부터 “다른 나라가 왜 민주화를 빌미로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느냐”라는 항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1969년 4월 베이징에서 중공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진행될 때, 중국의 농촌에선 농민들이 모여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고 있다. 초상화 밑의 문구: “경국 당 9차 대회 개최 승리! 새롭게 드높이 철학을 선양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활용하자!”/ 공공부문>
“중국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치열한 내전을 거쳐서 형성된 나라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군사적으로 전 중국의 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에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텐안먼 성루에 올라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중국 공산당이 인민의 지지를 얻었기에 초반의 약세를 극복하고 거대한 국민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중국 공산당의 선전일 뿐입니다. 장제스는 8년간 일본과의 전쟁을 거의 도맡아 치렀기에 일제가 패망했을 무렵 국민당군은 극심한 전쟁 피로를 겪고 있었습니다. ‘슬픈 중국’ 1권 앞부분에서 상세히 밝혔지만,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미 군사적으로 전 중국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정부수립을 승인받는 민주적 절차는 밟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군사적 점령으로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도 군사적 점령을 통해서 명을 세웠고, 만주족 역시 군사적으로 중원을 점령했습니다. 그 점에선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과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1911년 청 제국이 붕괴한 이래 중국은 거의 40년간 극심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군벌 시기 중국에는 1300여 명의 군벌들이 등장해서 140여 차례의 성급(省級) 전쟁을 벌였습니다. 국공내전은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그러한 분열과 내전을 종식한 공로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국 인민 대다수가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마오쩌둥을 존경하게 된 배경을 보면, 중공 중앙선전부의 선전·선동이 먹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픈 중국’ 제3권에서 다루지만, 리훙린이란 중국의 역사가는 공산화 이후 중국 현대사는 끊임없는 ‘사상 운동’의 과정이라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상 운동이란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을 적인(敵人)으로 몰아서 숙청하는. 정부가 주도해서 인민을 동원해 전개되는 정치 숙청의 캠페인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민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은 끊임없이 강화됐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도 ‘반(反)자유화’의 과정은 단계적으로 심화됐습니다. 시진핑 정권 이유엔 더더욱 그러합니다. 중국은 14억 인구를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통제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의 저항도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작년 11월 말 그토록 강력한 정부의 통제를 뚫고서 20여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젊은이들의 백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손에 흰색 A4 종이를 든 청년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시진핑은 물러가라, 공산당은 물러가라!’를 외쳤습니다. 1989년에도 ‘덩샤오핑은 물러가라’는 구호는 있었지만, 공산당 물러가라는 구호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노인들도 거리에 나와서 ‘공산당 국제가’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 첫 소절이 ‘노예들아, 일어나라’입니다.
중국인들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전체주의적 국가 통제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각자도생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을 뿐입니다.”

▲톈안먼 사태 21주년… 홍콩서 민주화운동 탄압 항의 시위… 4일 저녁 홍콩섬 빅토리아 파크에서 대규모 시위대가 톈안먼 사태 21주년를 맞아 중국 정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공산당보다 더 무서운 건 ‘대륙의 자유인’
―이번 ‘슬픈 중국’ 3부의 부제는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1976년부터 오늘날까지 중국 사회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자유화, 민주화의 흐름을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사상을 통해서 추적했습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중국의 지성계에서는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향한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했습니다. 1910년대 이미 중국인들은 톈안먼 광장에 모여서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었습니다. 1919년 5·4 운동의 시대정신은 바로 민주와 과학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자유, 인권, 민주, 법치를 부르짖으며 헌정 담론을 벌였습니다. 중국의 헌법에 들어가야 할 인류적 보편가치를 본격적으로 토론했습니다. 중국 헌정 담론의 역사가 이미 100년을 넘었죠. 중국에는 지금도 분명 자유를 열망하고 민주를 희구하는 자유인들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976년 4월 톈안먼 광장에는 최대 200만 인민이 모여서 문혁의 종식을 외치며 4인방의 체포를 요구했습니다. 그해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채 한 달이 못 돼 4인방이 긴급 체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난 민중의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1978년 12월 중국이 덩샤오핑을 추대하여 전격적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아간 데에도 집단 영농을 탈피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농민들의 저항이 큰 영향을 발휘했습니다. 이후 개혁개방을 이끈 주체도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민간 자본가들과 농촌의 향진(鄕鎭) 기업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1980년대 한국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할 때, 중국에서도 민주를 향한 열망이 끓어올랐습니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일 때, 중국도 세계사적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그 열망이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됐지만, 중국 공산당은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민주화의 열기를 짓밟아 껐습니다. 탱크 부대 앞에서 사람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나 1990년대에도 꾸준히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2008년에는 303인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자유, 인권, 민주, 법치의 이념을 담아서 이른바 ‘08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에서 헌정 담론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보편적 인권 선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정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그 이듬해 08 헌장의 발표를 주도했던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는 2009년 구속됐고, 2010년 감옥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10년대 중국 지식계는 헌정 담론을 이어갔지만, 2013년 시진핑 정권은 공산당 기관지를 동원해서 반자유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019월 2월 시진핑 정권은 전 세계를 향해서 중국은 절대로 입헌주의, 권력분립, 사법부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안팎의 자유주의 세력을 위협했습니다. 권력 집중은 입헌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제주의의 출발점입니다. 시진핑 정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 이상의 찬성률을 이끌어서 중국 헌법의 국가 주석에 관한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말 시진핑 정권 제3기가 출범했지만, 지금 중국은 경제 위기의 조짐을 보입니다. 중국의 민심은 흉흉합니다. 이미 2016년부터 경제 위기가 배태되고 있었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권력이 막강해 보이지만, 역사에서 변화의 물꼬는 예고 없이 터집니다.”
―전망은 어떻게 될까요.
“섣부른 예측은 무모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중국을 냉철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다만 관찰에만 머문다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활약하는 ‘대륙의 자유인들’과의 국제적 연대가 절실합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활동가들은 세계를 향해 국경을 초월한 범인류적 연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대륙의 자유인들, 위구르족, 티베트족 활동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중국 공산당 정부보다 ‘대륙의 자유인들’의 함성이 더 무섭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회견에서 시 주석은 브릭스가 사우디아라비아 등 6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에 대해 "브릭스 확대는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합하고 신흥시장국과 개도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타스 연합뉴스
◇”중국은 세계적 보편 이념을 창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경제 성장을 이룬 뒤 시진핑의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지금의 중국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시진핑 일인 독재가 더 부강한 중국을 만들 수 있다고 바라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습니다. 시진핑 일인 독재가 더 불안한 중국을 초래할 것이라 보는 전문가가 대부분입니다. 불안한 만큼 위험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국 주도의 자유 민주적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중국의 경제적 상황이 불안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반중 정서는 더욱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중국은 세계를 설득할 보편 이념을 창출할 능력도, 의지도, 논리도 없습니다. 다만 비대해진 중국이 무작정 버티기로 나갈 가능성을 상당히 큽니다.
중국 공산당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도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지루한 신냉전의 지구전이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비논리적이고 비정합적 체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요구됩니다.
―저는 동북공정을 오래 취재하면서 ‘중화민국 대가정’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 같은 용어를 수도 없이 접했습니다.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계급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까지 포기한 이념적 빈곤이 드러난다고 책에서 말씀하셨는데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국 내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포함한 56개 민족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서언의 둘째 문장은 ‘중국의 각족(各族) 인민이 공동으로 광휘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 각족이란 한족, 조선족, 만주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등 56개 민족 각각을 이릅니다. 중화민족은 각족 인민 모두를 포함하는 중국 전체의 국민과 해외 거주하는 동포까지 포함하는 실로 광범위한 개념입다.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몽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이 중화민족이라는 단일민족의 국가로 거듭나는 대목입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됩니다. 중화민족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중화국민’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중국 거주 모든 국민과 해외 거주하는 중국인 전체’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이 곧 국민이나 인민의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 공산당은 민족이란 단어의 뜻을 바꿔가면서까지 ‘중화민족’이란 표현에 집착할까요? 정치적 민족주의(political nationalism)를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대만인들과 홍콩인들은 스스로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 홍콩인이라 생각합니다. 중국공산당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중화민족’이라 말하는 셈입니다. ‘중화민족’은 개별 민족의 구분을 초월하는 통합적 민족입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념적으로 요청되는 초월적 집체주의라 할 수가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중화민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계급 갈등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현재 중국에서 계급 모순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드러납니다. 2020년 5월 국무원 총리였던 리커창은 중국에는 한 달 수입이 미화 140달러 이하인 6억 명의 빈곤층이 살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을 강조했습니다. 마오쩌둥 명언록에 ‘계급투쟁, 계급투쟁, 계급투쟁!’이란 구절도 있습니다.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 대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칩니다.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계급으로 갈라쳤다면, 시진핑은 중국 인민 전체를 민족으로 ‘묶어친다’고 할 수 있죠. 이 정도 되면, 계급 정당이 민족 정당으로 둔갑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현재 중국 공산당이 처한 이념적 빈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족 화합을 외친다면 중국공산당의 당명을 ‘중화민족당’으로 바꿔야 하겠지만,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란 당명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오쩌둥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일당독재의 이념적 근거가 바로 공산당이라는 레닌주의 전위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일당독재를 위해서 공산주의를 내걸고는 국민 총동원의 필요 때문에 ‘중화민족’을 강조합니다. 이 정도 되면 이념적 빈곤을 넘어서 논리적 자가당착, 이념적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11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 추도식에서 코로나19 봉쇄 조치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검열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백지 시위'를 펼치고 있다. 지난 24일 북서부 신장 우루무치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 10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당시 방역 강화 차원에서 아파트를 봉쇄하기 위해 가져다 놓았던 설치물이 진화를 막았다는 주장이 소셜미디어(SNS)에 퍼지며 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코로나는 이뤄냈다, 중국을 비판하는 국제 연대를
―코로나19 사태는 중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 합니까?
“코비드 19 팬데믹은 전 세계에 중국이라는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가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일깨우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전 세계 반중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대다수 국가 등 세계는 중국 체제를 비판하는 비중(批中)의 이념 공조와 군사, 외교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억중(抑中)의 국제연대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5년 전엔 그런 조짐이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았었습니다.
중국은 2020년 초부터 2022년 말까지 제로-코비드 정책에 따라 꼬박 3년 동안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사에서 가장 강력한 방역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수도권 인구 2500만 명을 통째로 딱 일주일만 봉쇄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요? 민중 봉기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을까요? 중국 상하이에선 전 인민이 다섯 달 넘게 방구석에 감금됐습니다.
이번 책의 제3부 제목이 ‘대륙봉쇄령’입니다. 3년간 인민전쟁, 총력전이란 미명 아래 광적으로 전개됐던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방역 정책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러한 전체주의적 통제가 정당화된 중국 사회 특유의 역사적 배경을 돌아보았습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한 해도 쉴 틈 없이 전 인민을 동원하는 ‘인민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그 점에서 시진핑 정권은 마오쩌둥 정권의 부활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진정 이성의 마비이며, 독단적 시대착오이며, 광기의 대역진(大逆進)입니다.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지금의 중국은 최근 몇십 년 동안의 모습과 달라 보이는 낯선 얼굴입니다. 향후 중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그리고 한국은 어떤 대처를 해야 하겠습니까?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직후 일어난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을 탄압한 후,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사회주의 노선, 인민민주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반드시 견지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경제적 국제 공조를 강화해 경제 규모 세계 제2위로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이 천명한 ‘4항 기본원칙’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실제적으로는 그 네 항 모두 폐기된 지 오래지만, 이념적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더 이상 중국의 그러한 전체주의적 통치를 묵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번영할 수 있습니다. 시진핑 정부는 근본적 개혁은 미뤄둔 채로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국영 기업의 개혁이 필요할 때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외치다가 약발이 먹히지 않자 소비 확대를 부르짖습니다. 갈팡질팡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중국의 경제가 위험해지자 한국 경제에도 먹구름이 닥칩니다. 중국이 무너지면 한국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급속하게 퍼져 나갑니다. 실제로 중국발 경제 위기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위기에 대처해야 합니다. 우선 과거처럼 미·중 사이에서 애매하게 줄타기하면서 중간자 놀음을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미일 공조와 자유 민주주의 국제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미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잇는 쿼드(Quad)와 미국, 영국, 호주를 결속하는 오커스(AUKUS)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반도체의 80% 이상을 생산하는 한국은 대만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이며, 최첨단의 산업 기지입니다. 한국과 대만은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모범 국가입니다. 바로 그 점을 믿고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지난 정권처럼 어설프게 중국 껴안기를 시도하면, 중국은 오히려 한국을 조롱하고 괴롭힙니다. 어리석은 이념적 방황은 끝을 내고, 대한민국 헌정사가 증명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당당하게 선양해야 합니다.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 외교관들을 만나서 자유, 민주, 인권, 법치라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말할 수 있어야 한국의 대(對)중국 지렛대가 생깁니다. 그것이야말로 외교의 바다에서 고래 틈에서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고래가 되는 정도가 아닐까요?”

▲광주MBC가 주최한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
◇중국은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돼야 한다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광주 출신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광주시의 기념 사업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주MBC가 2014년부터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사 보고 좀 웃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그런 식의 이벤트를 기획할 수 없겠죠.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부정하고 기본 가치를 우롱하는 낡은 세력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 널리 퍼졌던 주사파 운동권의 ‘빨치산’식 역사관이 질기게 남아서 아동 교육에까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빨치산’식 역사관에 따르면, 남북분단의 책임은 ‘미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에 있으며, 김일성의 남침은 ‘반제(反帝) 민족해방’ 전쟁이자 사회주의 건설 운동이 됩니다. 마오쩌둥은 ‘지원군’을 보내서 유엔군에 밀려 패주하던 북한을 되살려준 그야말로 ‘항미원조(抗米援朝)’의 은인으로 인식되겠죠. 그렇게 보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을 ‘14억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는 광주 출신 영웅’이라 기리는 그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뻔히 보입니다.”
―'슬픈 중국’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5년여 전 ‘슬픈 중국’을 처음 기획하고 집필할 때 한국 지식계를 생각하면 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벽을 보고 절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게 다가와서 한국에서 친중은 이미 시대의 대세라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참혹한 현실을 파헤쳐서 글을 쓰다 보니까 점점 주변에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쓴 글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5년 전 세계의 대(對)중국 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이 세상의 기미 혹은 급변의 조짐을 읽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배수진을 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생각해주는 분들은 주변에서 ‘그러면 중국에 못 간다’ ‘한국 학계에서 소외당한다’ ‘미국 편에만 서지 마라’는 등 많은 조언을 해주셨지만, 저는 제가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한 바를 정직하는 말하는 게 학자의 직업윤리라 생각했습니다. 5년이 지나고 나서 그때 제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 밖의 학자들은 중국에 관해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충분히 보복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며,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내용이 학술적으로 엄밀하고 정확하다면 글로 쓰고 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학자의 책임이고 임무니까요
지금까지 중국 정부나 친중 세력이나 제 책에 대해 무대응 전술을 쓰는 듯합니다. 논쟁거리가 되면 오히려 제 글을 홍보하는 효과만 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들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찾아내고 공개한 자료는 중국 공산당의 당안(檔案)이나 중국인 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에 근거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70여 년간 중공 정권이 자행한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의 사례가 세상에 공개돼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나 친중 세력은 쉽게 논쟁을 걸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썼지만,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 오늘날의 중국이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이고, 더 개방적이고, 더 헌정적인 새로운 국가로 진화해가기를…’”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87〉몽골 제국의 주자학(朱子學), 한국 문화를 어떻게 바꿨나?
변방의 중국몽 <5회>

▲성리학(性理學)의 창시자 주희(朱熹, 1130-1200)의 초상화. 작자 미상. 대만 타이베이 국립박물관 소장.
2000년대 초 미국 하버드 대학을 방문 중이던 일본의 한 유명 대학 명망 높은 철학자가 다가와선 무척이나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한참을 머뭇머뭇 주저하면서 가슴에 품어 왔던 듯 긴 질문을 어렵사리 던졌다.
“마······ 에······ 저의 개인적인 견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통 시대 한국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제가 느낀 바로는 한인 지식인들은 어떤 사상이든 한 번 받아들이게 되면 오직 그 사상만을 붙잡고 끝까지 한 방향으로만 밀고 나가는 독특하고도 기이한, 강력하면서도 저돌적인 사상적 경향성이랄까, 이념적 편향성이랄까, 마······, 그런 모습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 저의 이런 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 한 과문한 일본인 학자의 사적인 견해란 점을 감안해서 생각해 주시면, 마·······, 에······,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을 받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의 지적 전통이 지적 편향성을 보인다는 부정적 지적이라 한국인으로서 그리 유쾌할 수는 없었다. 다만 외국인의 고정관념일지라도 왜 그 사람이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는지는 그 이유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 유학사가 오직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지적 편향성을 보였다는 점, 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이 지금도 김일성 수령 유일주의를 고집하는 이념적 극단성을 보인다는 점, 그 두 가지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일본 교수의 지적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말할 순 없을 듯하다.
조선 유생들은 왜 주자에 열광했나?
조선 유생 대다수는 중국 남송(南宋, 1127~1279)의 주희(朱熹, 1130~1200, 朱子)를 정신의 스승으로 우러르고, 떠받들고, 섬기고, 따르고, 그리고, 바라고, 닮으려 했다. 그들은 주자의 주석을 통해서 경서(經書)를 독송하고, 주자의 문장으로 사고력을 배양하고, 주자의 예제(禮制)를 본받았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실학(實學)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아직 널리 퍼져 있지만, 조선의 실학은 주자학의 거부나 지양(止揚)이 아니라 주자학의 울타리 안에서 전개된 사상적 혁신 운동 정도였다.
왜 조선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중화 문명 그 수많은 스승 중에서 유독 주자만이 절대 진리를 설파했다고 굳게 믿었을까? 주자는 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들은 주자를 그토록 숭앙했나? 진정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주자학 자체의 미덕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한당(漢唐) 시대의 유학에 비하면 더 심오하고, 더 정교하고, 더 체계적인 학문이었다. 물론 한당의 유가 경학사에도 성리학 못지않은 강력한 진리 주장과 심오한 사상 체계가 있었지만, 주자학처럼 일목요연,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짚어주는 철학적 정요(精要)함은 없었다. 주자학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대전제 위에서 주자학은 공부(工夫)의 방법과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했다. 주자학은 동아시아 학인들에게 일신의 수양뿐 아니라 집안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원대한 이상을 설파했다.

▲주돈이(周敦頤, 1017-1073) 태극도설(太極圖說, 오른쪽)과 주희(朱熹)의 해설(왼쪽)
주자학에 입문하면 누구나 천지와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한 진리 주장을 접하게 된다. 조선의 유생들은 한결같이 주자학이 우주의 섭리(燮理)와 만물의 천리(天理)를 관통(貫通)하고, 인간의 도리(道理)와 사회의 공리(公理)를 설파하고, 경세(經世)의 실리(實理)와 치국의 대리(大理)를 제시한다고 믿었다. 주자학에 대한 조선 유생의 믿음은 실로 공고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 믿음은 더욱 외곬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주자학이 조선 왕실과 엘리트 집단에 통치의 정당성, 정치적 지배력, 사회적 책무감을 부여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고대 문명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는 국경 수비와 치안 유지로 정치적 지지를 얻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적 신뢰를 얻고, 이념의 설파로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주자학에 따르면, 군주는 만백성을 이롭게 하는 평천하(平天下)의 주체가 되며, 엘리트 집단은 지방 사족으로서 치국(治國)의 임무를 진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주자학은 조선 왕실과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권위를 주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사상적 내용만 짚어서는 여말선초 한반도에서 주자학이 퍼진 이유를 제대로 밝힐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상적 내용보다 당시의 국제 정세가 더 큰 힘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 주자학 확산의 가장 큰 외적 요인은 바로 14세기 초엽 몽골 원(元) 제국에서 이미 주자학이 관학으로서 정통의 지위에 올랐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주자학은 몽골 제국의 ‘보편이념’
1231년에서 1270년에 걸쳐 몽골에 복속된 고려는 주자학이 몽골 원 제국의 정통 이념으로 부상한 후 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그 이념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3세기 후반 몽골 원 제국 수도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은 주자학의 메카로 거듭났다. 연경에 간 고려 유생들은 주자학 서적을 필사하고 주자의 초상화를 구해서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방 스텝 지역에서 일어난 몽골족은 중국의 농토를 다시 갈아서 초원으로 만드는 대신 남송 시대 새롭게 일어난 주자학을 제국의 관학으로 채택하는 통치의 지혜를 발휘했다. 방대한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고루한 관습과 종족적 편견을 버리고 다양한 지역의 여러 종족을 통합할 수 있는 보편 이념을 찾았고, 그들은 다름 아닌 주자학을 발견했다.
연경에 간 고려 유생들은 몽골식 유목 문화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설파하는 주자학을 발견하고 열광했다. 다만 고려 유생들이 각축하는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 중에서 유독 주자학만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몽골 제국의 공식 이념이 된 주자학을 사후적으로 흡수했다는 점은 지적 종속성을 보여준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이미 발달한 중심부의 문화가 주변으로 물밀듯이 스며들어 요원에 번지는 불길처럼 무섭게 퍼져가는 과정을 흔히 본다. 흔히 문화접변(acculturation)의 개념으로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여 일으키는 사회적, 정신적, 문화적 변화를 설명한다. 문화접변이 일어날 때 외래에서 밀려드는 강력한 문물을 접한 주변부의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관과 습속 대신 새로운 사상과 신념을 받아들이는 개종(改宗, 혹은 전향, conversion)을 체험하게 된다.

▲낙타를 탄 몽골 전사. 작자 미상. 몽골 원(1271-1368) 시기 작품. 비단 채색 묵화. 30 cm X 31cm.
특정 집단이나 부족이 외래의 종교나 사상을 받아들여 신념화하는 과정은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 토착 부족의 다신교를 섬기던 사람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유교 전통의 지식인이 기독교 신자로 거듭나고, 20세기 초반 중국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과정을 돌아보면, 개종 혹은 전향이란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가히 내면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내면적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외적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한 집단이 고유의 전통, 관습, 문화를 버리고 외래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학자들은 교차-문화적 개종(cross-cultural conversion)이라 부른다. 때론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압박(pressure)에 못 이겨 외래의 사상, 문화, 종교, 관습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때론 군사적 침략 상태나 경제적 영향 아래에서 장시간에 거쳐 한 집단이 외래문화에 적응(assimilation)하는 사례도 보인다. 때론 지식인들이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외래의 선진 문화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자발적 유대(voluntary association)의 사례도 있다.
고려 유생들이 연경에 가서 주자학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군사적 압박이나 자연스러운 적응 과정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선택에 의한 자발적 유대에 가깝다. 다만 고려로의 주자학 전파는 군사 침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 이후에 전개됐으므로 고려 유생들이 주자학을 수용하는 과정은 자발적 전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당대의 국제 정세 아래서 주자학은 제국의 이념이 되었고, 그 제국의 질서에 복속된 고려의 유생은 역사의 순리에 따라 주자학을 학습하고 수용했다.
고려 유생들이 발견한 주자학은 칭기즈칸의 인격 숭배를 강요하거나 유목민의 고유 전통을 미화하는 고루(固陋)하고 편벽(偏僻)한 이념이 아니라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고 인간의 향상과 인류적 공영을 지향하는 윤리적 보편성과 문화적 개방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주자학은 도덕 수양, 인격 향상, 보편 교육, 마을 공동체 건설, 공평무사, 위민(爲民) 통치 등의 가치를 선양한다. 오늘날 범인류적 관점에서 보아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 보편 가치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이 고려 유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세기 복속된 변방의 번국(藩國)으로서 몽골 원 제국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고려 유생들은 성리학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교차-문화적 전향을 체험한다. 그들은 주자의 문장을 읽으며 가슴 깊이 공감했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그 감명은 그들의 내면에서 자발적인 개종의 체험을 낳았다. 급기야 퇴계와 율곡이 활약하던 16세기에 이르면 주자학을 신념화한 사대부 집단이 사회 엘리트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
지적 편향성과 이념적 극단성
제국의 수도에서 주자학을 접한 고려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주자학으로 전향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조선 개국 이후 주자학이 국가의 공식 이념이 되어 지식계를 통일하는 과정도 세계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장면이다. 문제는 그렇게 그 이후 조선 사상사가 오로지 주자학만을 절대 진리로 강변하는 지적 편향성과 이념적 극단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중국에선 15~16세기를 지나면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양명학(陽明學)이 나오고, 이어서 성리학을 넘어서는 고증학(考證學)이 발흥했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사상사에선 주자학을 “억측에 근거한 망설(妄說)”이라 비판하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가 등장하여 이후 경험과 실증을 강조하는 특유의 미토학(水戶學)을 낳았다.
이와 달리 여섯 세기에 걸친 조선 사상사는 오직 주자학에만 매몰되었다. 여말선초 한반도 학인들의 눈에 비친 주자학은 당대 최고의 선진적 이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때까지 오직 주자학만을 절대 진리라 신봉하는 집단이 있다면, 이념의 교조화란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 대체 왜 조선의 학인들은 그토록 주자학 일변도로 흘렀을까?
세상의 모든 사상, 이념, 종교는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고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 늘어나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14세기에 들여온 주자학을 20세기 초반까지 절대 진리라 믿었다면, 국제 정세에 어둡고 현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의 종교적 맹신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정 사상에의 집착은 지적 편향성을 낳고, 지적 편향성은 이념적 극단성을 불러온다.

▲2014년 북한 평양의 “만수대 대기념비” 김일성, 김정일의 동상 앞에서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공공부문
멀리 볼 필요 없이 한반도의 현대사가 그 점을 웅변한다. 20세기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가 전파됐지만, 북한에선 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극단적이고, 교조적이고,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김일성 수령 유일주의가 만들어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산주의 자체가 전 세계를 향해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교조적 이념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이 북한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문화 선진국으로 도약한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이념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주자학적 사유 방식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요구된다. 주자학적 사유의 관성이 남아서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선 주자학의 논리적 모순과 이론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할 예정이다. <계속>
〈88〉태극기에 담긴 성리학의 우주 생성 이론
09.16 변방의 중국몽 <6회>
태극기(太極旗) 속의 태극 문양은 유가 경전에 제시된 전일적(全一的)인 우주 생성의 원리를 상징한다. 중국 송대(宋代) 성리학의 발흥 과정에서 정립된 태극의 우주 생성론이 조선 유학사 500여 년의 과정을 거쳐 19세기 말엽 조선의 국기 제정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주지하듯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에서 처음 사용된 태극기는 그 이듬해 조선의 국기로 공포되었다.

▲1900년 대한제국 모습을 소개한 프랑스의 일간지. 우측 상단에 태극기가 보인다. /공공부문
유교의 우주관이 담긴 국기는 전 세계에서 태극기가 유일무이할 듯하다. 국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지폐에는 40년 가까이 이황(李滉, 1502-1571), 이이(李珥, 1536-1584) 등 성리학자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서울에 가서 도심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유교의 상징물이 보인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한국은 지금도 성리학의 나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한국인이라면 태극기의 상징적 의미를 한 번쯤 진지하게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외국인 친구에게 태극기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태극기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일장기는 태양을 상징하고, 오성홍기(五星紅旗)는 중국공산당과 4대 계급을 상징하고, 성조기는 50개 주(州) 정부와 수도 워싱턴 디시의 연합체를 상징하는 반면, 태극기 속에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오행의 변화를 거쳐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성리학적 우주 생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 성리학을 모르고선 태극기의 의미도 알 수 없다는 뜻.
“성리학은 종교인가, 철학인가?”
대학에서 전통 시대 중국 사상사나 철학사를 강의할 때면, 영리하고 적극적인 학생들이 종종 성리학이 “철학이냐, 종교냐?”고 묻곤 한다. 엄밀한 논증 체계를 갖춘 철학이라 정의하기에는 성리학은 직관적 언명과 일방적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믿음을 전제하는 종교와는 달리 성리학은 우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인간의 도리에 관한 논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가령 주희(朱熹, 1130-1200)가 생전에 성리학의 입문서로 편찬하여 이후 동아시아 지성계의 필독서로 읽혔던 ‘근사록(近思錄)’ 제1장에 실린 주돈이(周敦頤, 1017-1073)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첫 명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보자.

▲주돈이(周敦頤) 태극도설과 주희의 해의. /공공부문
말 이을 ‘이(而)’ 자를 순접으로 풀면 그 뜻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이고, 역접으로 풀면, 그 뜻은 “무극이지만 태극이다”가 된다. 주희는 여기서 ‘이(而)’자는 역접도, 순접도 아닌 경성(輕聲, 가벼운 소리)이라며, 무극과 태극 사이에는 차서(次序, 차례나 순서)가 없다고 말한다. “무극=태극,” “태극=무극”이라는 의미다. 주희에 따르면 “무극이태극”은 “무극이 곧 태극이다”로 번역해야 할 듯하다.
널리 통용되는 영어 번역은 “Non-polar and yet supreme polar”이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영어권 사람들이 이 번역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다년간 영어권 학생들에게 성리학 개론을 강의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이 문장은 그들에게 다소 종교적이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지만, 불가사의하거나 기괴하게 느껴지진 않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미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unmoved mover)’라는 개념으로 우주에서 발생한 최초 운동 원인을 탐구한 바 있다. 성경 창세기와 물리학의 빅뱅 이론을 익숙하게 듣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없음”과 “있음”이 동시화되는 생성의 모멘트를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다.
“태극도설”에는 태극이 음양오행의 원리로 작용해서 천지가 생겨나고, 남녀가 나뉘어져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난다는 성리학의 우주 생성론이 압축되어 있다. 기독교도가 “태극도설”을 보면, 중국 특유의 천지창조 신화 정도로 여기기 쉽다. 반면 20세기 이래 “중국 철학자”들은 “태극도설”이 단순히 천지창조의 신화가 아니라 축적된 자연학적 지식과 엄밀한 논증 체계를 갖춘 우주 생성론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무극이태극”이라는 구절이 보편타당한 대전제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선 상식을 가진 현대인 중 과연 몇 명이나 선뜻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주적 질서, 세상의 이치에 관한 거대 관념에 근거한 진리 주장이지만, 그 진실성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도, 이성적으로 논증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평생 성리학을 공부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았던 과거의 성리학자들은 우주 생성의 진리와 삼라만상의 실체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성리학적 논증 방식, 과연 철학인가?
12세기 말 남송에서 주희는 제자들을 앞에 두고 “태극도는 오직 하나의 실리이니 하나로써 관통한다(太極圖只是一箇實理,一以貫之)”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쉽게 그 진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태극도설을 읽을 때의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자) 질문: “무극이태극’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問: 無極而太極,如何?)
(주희) 답: “자세히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曰: 子細看,便見得.)
질문: “이미 태극이라 해놓고 다시 무극이 있다고 함은 왜입니까?” (旣曰太極,又有箇無極,如何?)
답: “태극이 본래 무극이다. 핵심을 짚으면 그 의미가 절로 나온다. (太極本無極,要去就中看得這箇意出方得。) (’朱子語類' ‘周子之書·太極圖' 발췌 번역)
주희는 “‘무극이태극’이란 오직 형체는 없지만 리는 있는”(無極而太極,只是無形而有理)” 상태라고 해석한다. 이어서 그는 주돈이가 “사람들이 태극 밖에서 따로 태극을 찾을까 우려되어서 무극이라 말했다(周子恐人於太極之外更尋太極, 故以無極言之.)”고 풀이한다. 이치로서 작용할 뿐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태극은 곧 무극이며, 바로 그 점에서 무극과 태극은 모두 리(理)를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1179-1180년 주희가 중건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정문. 장시성 루산(廬山) 아래 주룽(九龍)에 위치. /공공부문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리(理) 개념은 원리(原理)나 섭리(攝理, 혹은 燮理) 등으로 풀이된다. 우주의 보편법칙으로서의 천리(天理), 인성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성리(性理), 윤리·도덕 규범으로서의 윤리(倫理), 사물 세계의 법칙성을 의미하는 물리(物理) 등으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쉽게 말해 리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근원적 법칙성이나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내재적 주재성(主宰性)을 의미한다.
태극이라는 지상의 원리, 보편의 이치, 만물의 법칙이 존재하기에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질서정연하게 생성되어 조화롭게 돌아간다는 정도의 의미로 새겨도 무방하다. 태극이라는 근본 원리에서 천지 만물이라는 구체적 실체로 나아가는 성리학적 사유는 전형적인 연역적 사변(思辨, speculation)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선 신의 존재 증명에서 출발하는 중세 기독교의 연역적 사유 방식과도 상통한다.
여기서 성리학적 사변 방식과 논증 형식에 관해서 우리는 근원적인 인식론적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성리학자들은 대체 어떻게 “무극이태극”이란 대명제를 도출했는가? 어떤 경험적 근거 위에서? 어떤 논증의 과정을 거쳐서? 그들은 과연 또 어떻게, 무슨 근거로, 어떤 논리 위에서 태극이 음양을 낳고, 오행의 순환을 일으키고, 천지를 생성하고, 남녀의 조화를 통해 온 세상의 생명체를 낳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우리가 갖지 못하는 혜안(慧眼)을 갖고 있어서 순수 직관적으로 이 세상의 진실을 인식했는가? 아니라면, 수도승처럼 묵좌(默坐) 수행을 통해서 우주의 생성과 만물의 생장 원리를 꿰뚫어 보았는가? 그들은 대체 어떻게 “무극이 곧 태극이며, 태극이 곧 리(理)”라는 대전제를 절대 진리로 확신할 수 있었는가?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확신 위에서 그들은 태극의 우주 생성론을 그토록 강력하게 일방적으로 설파했는가?
“무극이태극”이라는 단문은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직관적 언명이나 시적 표현에 가깝다. 한 철인이 이 세상의 우주적 질서를 관조하면서 얻은 직관을 “무극이태극”이라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한 사람의 직관을 절대 진리라 여길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기에 주희의 제자들은 “무극이태극”이 무슨 의미냐 물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자세히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답변하는 주희는 엄밀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신념을 설파하는 종교인에 가깝다. 플라톤의 대화와 비교한다면, 주희의 문답법은 권위적이고, 독단적이고, 일방적이고,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바로 그 점에서 “무극이태극”은 체계적인 논증을 거친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유학자의 신념이 담긴 일방적 주장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희는 대체 무슨 근거로 “태극도설이 하나의 실리이며, 하나로써 관통한다”는 확신에 찬 주장을 서슴없이 개진할 수 있었을까? 또한 주희의 주장에 왜 그토록 많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넘어갔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통 시대 동아시아에서 유가 경전(經典)이 가진 절대적 권위를 이해해야만 한다. 주희의 모든 주장은 일개인의 독창적 사유가 아니라 유가 경전에 근거한 경학적 세계관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순수 철학이 아니라 유가 경학이다.
주희뿐만 아니라 이황, 이이 등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유생들은 경전 속에 불변의 가치와 불멸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경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있었기에 유생들은 평생을 거쳐 경학(經學)을 연구했다. 경학은 망실된 고경(古經)을 복원하고, 경문(經文)의 원의(原意)를 주해(注解)하고, 성현(聖賢)의 훈시(訓示)를 증득(證得)하고, 나아가 문명의 원리를 궁구하는 인문학적 정신활동의 요체였다.

▲주희가 편찬한 '四書章句集注'에 실린 주희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밝힌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 위의 이미지는 1214년 판본. /美 국회도서관
성리학은 유가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중국 중세의 경학(經學)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중국 철학계를 이끌었던 주바이쿤(朱伯昆, 1923-2007)에 따르면, 송에서 명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역사는 곧 “경학(經學) 철학사”였다. 기독교의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듯, 성리학의 가르침은 유가 고경(古經)에 기초하고 있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개신교를 일으켰듯, 주희는 유가 경전 중에서도 특히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이른바 ‘사서(四書)’를 일목요연하게 해석하여 신유학의 길을 열었다. 성경이 없이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성립될 수 없듯이, 유가 경전이 없이는 성리학적 기본 명제가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근거로 믿음을 설파하듯이 성리학자의 진리 주장은 모두 유가 경전에 근거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철학 연구자들은 성리학적 논변을 현대 철학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선험(先驗, a priori), 선의지(善意志), 물자체(物自體) 등 칸트 철학의 개념을 끌어와서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기도 하고,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을 가져다가 양명학의 양지(良知) 개념을 해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희의 철학을 재구성하여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철학의 오류와 한계를 보정(補正)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 경전과 유리된 성리학의 탐구는 모래 위에 누각을 짓는 행위처럼 무모하고 위태롭다. 주희가 “무극이태극”의 의미를 캐묻는 제자들에게 “자세히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며 그토록 확신에 찬 주장을 설파한 근거는 다음 아닌 바로 유가 경전이기 때문이다. 유가 경전의 권위가 무너질 때 성리학은 존립의 기반 자체를 상실하고 만다.
청 제국이 무너지기 전까지도 중국의 유생들은 ‘주례(周禮)’ 등 여러 유가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서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 노력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 이후 등장한 민국 정부는 학교의 정규 커리큘럼에서 유가 경전의 독송(讀誦) 과정을 폐지했다. 유가 경학이 해체되면서 생겨난 이념의 공백을 근대 서구의 다양한 사상이 채웠다. 오늘날 중국의 학자들은 경학이 “봉건 전제 정부”가 채택한 “법정(法定)”의 통치학설(統治學說)일 뿐이라 단언한다. (송재윤, ‘경의 제국’ ‘역사와 현실’ 113, 2019).
다시 태극기 속에 담긴 성리학적 우주 생성론으로 돌아가 보자. 태극이 움직여서 음양을 낳고, 오행의 변화를 일으키고, 하늘과 땅을 갈라서 남녀의 교합으로 천지 만물이 생성됐다는 성리학적 우주 생성론은 유가 경학 중에서도 특히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근거하고 있다. 유가 경학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 성리학적 우주 생성론도 허물어지고 만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조선의 국가 이념은 확고부동 명실상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의 나라가 새로 제정하는 국기에 태극 문양을 넣었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다만 바로 그때가 전 세계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이 산산이 조각나던 때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 중화 대륙에서도 이미 처참하게 붕괴한 성리학적 우주관의의 요체가 태극기에 오롯이 담겨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
〈89〉“설마 그럴 리(理)가!” 퇴계 이황(李滉), 최후의 깨달음
변방의 중국몽 <7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이 소장하며 친필 발문을 남긴 “주문공(朱文公)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주문공은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키며, 무이구곡은 주희가 살았던 무이산의 아홉 개 명승지를 의미한다. 이 그림을 평생 소장했다는 사실에서 주자를 흠모한 퇴계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미지/영남대 박물관
한국어에 남아 있는 성리학의 용어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절박한 순간이 닥치면 흔히 단식을 선언하고 드러눕는 카드를 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주변에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결단”이라 치켜세운다. “살신성인”은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비슷한 취지로 맹자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버려서 의를 얻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통 시대 유교 사회엔 그렇게 자기희생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장시간 지속된 문화의 관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긴 세월 기독교의 훈습을 받은 구미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오, 하나님(oh, my god)”이라 말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날마다 성리학(性理學)의 숙어를 사용한다. “헌신(獻身)에 감사드립니다,” “의리(義理)를 지켜라,” “사람의 도리(道理)가 아니다,” “세상의 이치(理致)다,”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라라,”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챙기지 마라,” “명분(名分)이 없다,” “사리(事理)에 어긋난다,” “천명(天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기미(幾微)가 보인다,” “혈기(血氣)가 왕성하다,” 등등. 이 모든 표현은 모두 성리학의 경전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그럴 리(理)가 없다”나 “설마 그럴 리(理)가·····”와 같은 말이 일상에서 가장 상용되는 성리학적 표현이 아닐까. 합리적 이유도, 타당한 원인도, 부득이한 까닭도 없을뿐더러 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부조리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설마 그럴 리가!”하고 한탄한다. 조선 사상사 500여 년 성리학의 훈습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한국인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그렇다면 대체 리(理)란 과연 무엇인가?

▲1983년 5월 18일 가택 연금 중이던 김영삼의 단식투쟁. /공공부문
이 세상의 리(理), 마음속의 리
대다수 현대인에게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암호처럼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전문 연구자들의 논문은 생경한 한자어투성이라 더더욱 읽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중세기 사람들의 철학 사상이 무턱대고 터무니없이 난해했을 리(理)는 없다. 정규 교육을 통해 인류의 지적 유산을 체계적으로 흡수한 현대의 교양인은 12세기 중세철학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적 훈련을 이미 이수했다. 그저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서 과거의 철인들과 쉽게 대화를 할 수 없을 뿐.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누구나 배우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만 생각해봐도 우리는 성리학의 리(理) 개념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손에 쥔 사과를 허공에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어김없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모든 물체엔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걸음마 할 때부터 넘어지길 반복하며 가까스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기에 우리는 체험적으로 땅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뉴턴처럼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물리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렇기에 누구나 뉴턴의 이론을 공부하며 자연계를 꾸준히 관찰해가다 보면,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에도 지구의 중력이 일반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태양계를 포함한 전 우주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도 훤히 깨닫는 때가 온다.
한편 중력의 작용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다. 이 세상 모든 사물에 중력이 작용하지만, 중력이 가만히 있는 나를 일으켜서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던지게 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고매한 성인(聖人)이나 위대한 지도자라도 절벽 끝에서 몸을 던지면 벼랑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자연 세계에서 중력은 항시적인 법칙으로 작용할 뿐, 변덕스러운 신처럼 인간의 개인사에 의지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중력은 물질세계 모든 사물의 조건이자 존재 원리일 뿐이다.
이상 설명한 중력의 법칙에 빗대보면 주희(朱熹, 1130-1200)가 말하는 리(理)의 의미도 쉽게 알 수 있다. 중력처럼 이 세상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어김없는 법칙, 예외 없는 원칙, 조화로운 원리를 12세기 주희는 리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물론 그는 중력의 법칙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 세상에 항시적으로 작용하는 보편적 원리, 일반적 법칙, 일관된 원리를 직시하고 간파했다.
그는 이 세상의 원리를 직관하기 위해선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에 깃든 리를 하나씩, 하나씩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격물(格物)의 공부다. 중력의 작용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 모든 돌을 던져볼 필요가 없듯, 리의 현현을 확인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들을 다 탐구할 필요는 없다. 주희는 격물의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나 범우주적 자연에 작용하는 리에 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설파한다. 그렇게 하나로 관통되는 확연한 깨달음을 그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 했다.

▲중국 장시성 루산(廬山) 백록동(白鹿洞) 서원의 주자상(朱子像). /공공부문
그러한 깨달음에 따르면, 리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이자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법칙으로서의 리는 변덕스러운 신처럼 인간의 만사에 자의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주희에 따르면, 리는 “감정도 의지도 없고(無情意),” “계산도 헤아림도 없고(無計度),” “만들고 지어냄도 없다(無造作).” 마치 중력이 모든 물질에 일반적으로 작용할 뿐 감정이나 의지를 발휘해서 특정 대상에만 편파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
중력은 자연계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법칙이다. 물질세계가 없는 중력은 있을 수 없다. 중력은 오직 자연계의 물질세계를 통해서만 작용한다.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중력을 가지며, 중력 없는 물체란 있을 수 없다. 물체는 곧 중력을 가지며, 중력은 오직 물체를 통해서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리는 질료와 형상을 갖춘 기(氣)의 세계를 통해서만 현현(顯現)할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相雜).” 리는 오직 기에 깃들어서, 기를 타고, 기를 통해서만 개별 사물과 형체로 구현된다.
물리학자들은 중력의 존재를 규명할 뿐, 중력의 당위를 주장하진 않는다. 반면 주희에 따르면 리는 모든 존재 세계의 원리(所以然)이면서 동시에 당위의 원칙(所當然)이다. 현대인에게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은 별개로 인식된다. 반면 성리학은 리의 개념을 인간의 성리(性理), 개인의 도리(道理), 사회의 윤리(倫理)까지 확장한다. 자연 세계의 일반적 이법(理法)을 근거로 인간 사회의 보편적 율법(律法)을 제정하려는 전일적(holistic) 사유의 산물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듯, 달이 차면 기울듯이, 너희도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너무나 흔한 이 같은 가르침은 윤리적 격언일 순 있지만, 도덕적 합리성에 근거한 실천적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일 수는 없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면, 그것은 자연적 본능의 세계에서 본성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도덕적 추론에 따라 구체적 행위에 관한 실존적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현대 철학자들은 본성에서 도덕률을 유추하거나 존재에서 당위를 끌어내는 윤리학적 논증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 부른다. (존재와 당위를 동일시하는 성리학적 사유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논하기로 한다.)
퇴계의 “리자도설(理自到說),” 오독인가, 독창적 해석인가?
영어권, 중국어권의 철학자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조선 성리학의 특징에 대해 논하면서 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고 기술한다. 조선 성리학의 그러한 특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황은 어려서 한 떨기 난초가 되길 꿈꾸며 수도사와 같은 구도의 삶을 살았다. 그런 이황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비로소 한평생 궁구하던 리의 의미를 되새겨서 소위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그 시점이 임종 50일 전인지, 20여 일 전인지는 지금도 학계의 논란거리다.)
“리자도(理自到)”란 “리가 절로 이르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앞서 보았듯, 주희는 리가 감정도 없고, 작위도 없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황은 과감하게 “리가 절로 이른다”는 명제를 자기 철학의 새로운 테제로 정립했다. “리자도설”을 세우기 위해서 당시 이황은 주희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리도(理到)”의 몇 가지 용례를 꼼꼼히 짚어가며 그 뜻을 재음미했다.
주희 문집에서 “리도”와 관련된 몇 가지 용례를 찾아서 서신으로 보내온 인물은 다름 아닌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기대승은 1558년부터 1566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서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 성리학의 정수라 불리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던 바로 그 인물이다.
기대승은 주자 문집 등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에서 “리가 절로 이르다”로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구절을 찾아내서 이황에게 보냈다. 2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도 안 되는 354자의 실로 소략한 내용의 편지였는데, 바로 그 편지에 적힌 몇 가지 용례에서 이황은 한평생 붙들고 깊은 고민을 해온 리의 자발성과 운동성을 논증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흡사 한평생 찾아 헤매던 금광을 급기야 찾아낸 듯한 긴장과 흥분이 느껴진다.
“이전에 나는 리의 본체가 무작위(無作爲)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리의 묘용(妙用)이 드러나서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해 리를 거의 죽은 것(死物)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진정 도(道)에서 심히도 멀리 벗어나 있었습니다.”
주희는 분명히 “형이상(形而上, 형체 이전)”의 원리로서의 리는 스스로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사물에 다가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오직 형체를 갖춘 형이하(形而下, 형체를 갖춘)의 기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내재적 섭리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주희에 따르면, 리는 오로지 형상과 질료를 갖춘 물질세계의 기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우주적 원리이다. 그러하기에 이황은 리를 “죽은 사물”처럼 취급하고 있었는데, 기대승이 주자 문집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준 “리도(理到)”의 용례를 보고서야 “리가 절로 이른다”는 명제를 주자의 뜻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어에 “뜻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표현이 있듯, 이황은 리도를 “리가 와닿는다”고 새길 수 있다고도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게 뜻을 풀어도 이황이 리가 사물로 나아간다며 리의 활동성, 작용성을 주장했다면, 주희의 원뜻에서 멀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법칙으로서의 중력이 하찮은 미물의 세포핵에까지 엄연하게 작용한다고 해서 우리는 중력이 그리로 다가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력은 물질세계에 디폴트로 작용하는 존재의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희 문집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주희가 말하는 리는 그렇게 감정도, 작위도 없는 형이상의 섭리로 설정되어 있다. 사물이 있다면 이미 그 속에 리가 깃들어 있으며, 리가 없다면 사물이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이황은 지엽적인 일부 용례를 들어서 리의 본뜻을 오독하고 왜곡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주희의 문집에 드물게 나오는 “리도(理到)”의 용례만을 짚어서 “리가 이르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많은 무리가 따른다. 상식적으로 주자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의 문집에서 적어도 수천 번의 비슷한 용례가 발견되어야 정상이다. 그토록 중요한 주장이라면 과연 주희가 평생에 걸쳐 겨우 몇 차례만 언급하겠는가?
기대승은 주자 문집을 통틀어서 불과 대여섯의 비슷한 용례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마저도 전체 맥락에서 문장을 상세히 분석해 보면, “리자도설”의 충분한 증거가 되지도 못한다. 바로 그런 이유를 들어서 율곡(栗谷) 학파는 실제로 퇴계가 주자의 참뜻을 오독하고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퇴계의 오독은 주자학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주체적이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로 볼 여지는 있다. 철학사를 돌아보면, 창의적 오독이 새로운 사유의 돌파구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황은 한평생에 걸쳐서 “리발(理發, 리가 발현하다),” “리동(理動, 리가 움직이다),” “리도(理到, 리가 다가오다)” 등의 주장을 펼친 조선의 대표적 철인이다. 임종을 앞두고서 그는 리도를 더 강조하여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과연 왜 그는 주자의 해석에 배치된다는 비판까지 감내하면서 리의 자발성, 활동성, 작용성을 밝히려 했을까?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농운정사(隴雲精舍). 퇴계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학생들의 공부를 독려하기 위해서 퇴계는 건물을 한자(漢字)의 '工'자 모양으로 짓게 했다. /공공부문
그 점에 대해서 후대 학인들은 흔히 퇴계가 사회 윤리와 개인 도덕의 절대적 표준을 제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 퇴폐적인 사회 풍조를 막고 풍속을 일신하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라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성학(聖學)의 이념을 완수하며 구도의 삶을 살았던 이황 개인의 자기완성에의 의지였다고 푸는 학자도 있다.

▲퇴계 이황의 초상화가 실린 대한민국 1000원권 지폐 견본. /공공부문
안타깝게도 우리는 퇴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퇴계 스스로 리발, 리동, 리도의 거대한 함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년의 이황이 리에 관한 주자의 정설을 과감하게 뒤집는 학문적 스턴트를 시도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과연 오독인지 독창적 해석인지 분명히 가리기는 힘들다. 이와 관련해서 그가 남긴 문장이 너무나 소략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퇴계의 철학은 미완의 프로젝트였다. <계속>
<참고문헌>
奇大升, <<高峯集>> (한국문집총간본, 민족문화추진회, 1988).
李滉, <<退溪集>> (한국문집총간본 민족문화추진회, 1988).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華書局, 1983)
朱熹, <<朱子全書>> (上海古籍出版社, 2002)
강경현, “퇴계 이황의 리발과 리자도에 대한 연속적 이해,” <<철학논집>> 40 (2015): 145-170.
김상현, “이황은 왜 리자도를 말했는가?” <<퇴계학논총>> 23 (2018): 181-219.
김형찬, “퇴계 이황의 리자도설에 관한 연구,” <<퇴계학보>> 152 (2022): 5-46.
김형찬, “도덕감정과 도덕본성의 관계,” <<민족문화연구>> 74 (2017): 327-356.
이승환, <<횡설과 수설: 400년을 이어온 성리 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 (휴머니스트, 2012).
한형조, <<성학십도, 자기 구원의 가이드맵>>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2023.10.07
〈90회〉중세의 사변철학, 성리학적 사유의 모순과 한계
변방의 중국몽 <8회>

▲강희언(姜熙彦, 1710 - ?)의 “사인삼경(士人三境)” 중에서 “사인시음(士人詩吟)>, 지본담채, 26cm x 21cm. /공공부문
13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600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대다수 식자층은 성리학(性理學)에 빠져서 살았다. 아직도 한국 지성계에는 성리학의 유풍이 남아서 지식인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성리학의 영향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과연 성리학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무엇을 남겼나? 성리학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성리학의 퇴조로 20세기 이후 한국인은 어떻게 탈바꿈했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 유학의 최고봉이라 존경받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1)의 이야기를 한 번 더 살펴보자.
퇴계 이황의 존재론적 의문
이황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주희(朱熹, 1130-1200)의 문집을 뒤적이며 “리도(理到)”의 의미를 궁구하고 있었다(변방의 중국몽 7회). 그는 “리도”의 의미를 “리가 이른다, 리가 다가온다, 리가 도달한다”는 의미로 풀어서 스스로 최후의 테제,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이황은 주희의 문집에서 “리도”의 몇몇 용례를 발견하고서야 드디어 리의 활동성, 자발성, 작용성을 확신했다.
주희는 리가 “감정도 의지도 없고, 계산도 헤아림도 없고, 만들고 지어냄도 없는” 보편적 원칙, 일반적 법칙, 자연적 섭리라 정의했다. 주희에 따르면, 형체를 이룬 대우주의 만물은 이미 리를 구현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기(氣)의 세계가 펼쳐지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리의 발현일 뿐, 기(氣)를 떠나 리만 따로 논할 수는 없다.
이에 반해 만년의 퇴계는 “리가 스스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주희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숙지했던 이황은 왜 그 가르침을 거슬러 리의 운동성, 능동성, 작용성을 강조했을까? 만약 리가 운동성을 갖고서 스스로 만물에 다가간다면, 초월적 존재로서의 리가 물질세계로서의 기와 분리된다는 존재론적 이원론(二元論, dualism)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위험을 몰랐을 리 없는 이황은 왜 그토록 리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명제에 집착했을까?
이에 대해서 21세기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황이 주희가 살았던 남송(南宋) 시대 복건(福建) 지방 학자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주희의 원의(原意)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고문만 주로 읽은 조선 유생들의 중국어 실력 부족에서 기인한 단순 오해였다는 지적인데, 크게 설득력이 없다. 물론 고문(古文)으로 사유하고 문장을 지은 이황이 복건 지방 학자들의 고백화(古白話, 초기 백화) 문장에 달통하지 않았을 순 있다. 그렇다 해도 한평생 주자학을 섭렵한 대학자가 주자의 문장을 잘못 해석해서 주자의 이기론 자체를 제대로 오해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고문과 백화를 당시 중국인만큼 잘해서 주희의 문장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해독한다고 해도 탐구심을 가진 학자라면 이황처럼 그런 의문을 제기해야 옳다.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를 캐묻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리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최초의 원인을 궁구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주자학이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맹신하고서 답습하는 자들야말로 지적 예속성을 보인다.
이황이 그토록 리의 운동성을 강조했던 이유는 주자의 제자로 살았던 이황 자신의 학술적 의문 및 실존적 방황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그는 주자의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주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사로잡혔을 수 있다. 세상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도 모든 인간의 의문에 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평생 주자를 정신의 스승으로 섬겼던 이황의 실존적 위기감과 존재론적 의구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인간이 캄캄한 무지 상태로 태어나서 무지에 파묻혀 살다 무지 상태로 죽어 갔다. 제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존적 공포에 휩싸여 풀리지 않는 존재론적 물음을 붙들고 깊은 시름을 할 수밖에 없다. 한평생 유가 경전을 읽고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도 인간이라면 죽음의 두려움과 무지의 공포를 극복할 길은 없다.
비단 이황만이 아니었다. 동시대 제수이트 선교사들을 만나 감화받은 명나라 유생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들이 대체 왜 전통의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갔을까?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중국학자 피터슨(Willard J. Peterson)은 그들이 유교에선 말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라는 개념에 설득되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주자의 이기론으로는 존재론적 의문을 풀 수가 없었던 퇴계는 만년에야 “리도”의 테제를 세워서 그 문제에 답하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200여 년 뒤 정약용이 서학(西學)을 접하고서 천주교(天主敎)에 귀의했던 연유도 다르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청나라 만주의 한 서당에서 유가 경전을 학습하는 아동들. /R. Van Bergen, The Story of China (New York: American Book Company, 1902, 1922)
실제로 유교의 가르침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도리에 관한 당위론만 설파할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삶과 죽음의 근원적 물음에 관해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제자 계로(季路)를 향해 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반문했다. 죽음에 대한 공자의 겸허한 침묵은 유학이 현세간(現世間)의 철학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전파된 불교(佛敎)가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다. 유교와 달리 불교는 겁(劫)의 시간을 거슬러 카르마(karma)의 법칙을 설명하고, 누구나 자기 향상의 노력으로 해탈(解脫)을 이루고 열반(涅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희는 불편부당한 자연적 섭리로서의 리를 깨닫게 되면 보편타당한 인간의 도리도 훤히 알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과연 미욱한 인간의 머리로 대우주의 원리와 자연계의 이치를 일순간 훤히 깨닫는 게 가능한가? 광막한 대우주의 원리가 리와 기라는 관념의 조합으로 밝혀질 수 있는가? 인간의 언어로 대자연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나? 주자가 말하는 활연관통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이 풀릴까?
이러한 근본적 질문들에 대해서 과연 몇 명이나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리학은 기껏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기 수양의 비전일 뿐, 그 가르침을 아무리 답습해 봐야 근원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의구심을 해소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이황은 의도적으로 주자의 일반론을 거슬러 리도(理到)의 테제를 세우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황의 시도 자체가 마치 큰 잘못이나 된다는 듯 주자의 본의를 오해했다고 공격하는 율곡(栗谷) 학파의 태도가 오히려 폐쇄적이고 교조적일 수도 있다.
광대무변한 대우주에 리가 있다는 주희의 주장에 대해 철학자라면 당연히 “리는 대체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소?”하고 물어야 한다. 그렇기에 “리자도설”이야말로 성리학적 사유의 내재적 모순과 이론적 한계를 직시했던 이황의 근원적 문제 제기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성리학적 사유의 모순과 한계는 무엇인가?
주자학은 중세 사변철학의 전형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분류하자면, 주자학은 전형적인 사변철학(思辨哲學, speculative philosophy)이다. 여기서 사변(思辨)이란 선험적인(先驗的, a priori) 직관에 따라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중세적 사유 방식을 이른다. 사변철학은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 경험적 근거를 결핍한 채로, 언어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직관적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중세적 논증 방식이다.
인간의 자연언어를 사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서양의 중세 철학이 사변철학의 전형이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Anselmus, 1033/4-1109)는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신이 존재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 전통이 실로 오래 남아서 18세기에 이르러서도 독일의 철학자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변철학의 한계와 오류를 밝히기 위해서 근세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알고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무엇보다 인식 능력과 한계에 관한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 근세 영국 경험론을 접하면서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났다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본격적인 인식비판(Erkenntniskritik)을 전개했다.

▲비판 철학으로 계몽주의를 주도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초상화. /공공부문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외부 세계와 접촉할 때 인간은 감관(感官)을 통해 자극을 수용한다. 그렇게 형성된 감각이 인식의 출발점이다. 이때 인식은 외부 세계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가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인식 기관에 들어와서 이미 변형된 상태이다.
그렇게 수용된 감각을 인간은 고유의 순수이성으로 분석·처리하여 개념적 인식에 도달한다. 칸트는 인간의 모든 인식이 인간의 주관적 구성물(subjective construct)이라 주장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다만 감관을 통해 수용된 외부 세계의 경험을 인간 고유의 이성으로 처리하여 지식을 형성한다. 인간은 오직 의식 속에서 외부 세계를 주관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 뿐, 자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능력도 없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논증한 철학자였다.
칸트의 인식비판에 비춰보면, 성리학은 정교한 논증을 통해서 확실한 앎에 도달하는 엄밀한 철학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리와 기 개념을 조합해서 우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저 광대한 우주를 관념어로 묘사했을 뿐, 성리학자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밝혔다고 생각할 순 없다.
결국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가 전한 경(經)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라서 배우고 익히면 우리도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전통적 믿음에 근거한 실천적 자기완성의 공부일 뿐이다. 실제로 성리학자들은 인격 수양을 통해서 도(道)를 체인(體認)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인격의 최고 경계(境界) 혹은 경지(境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리학적 진리란 믿음의 대상일 뿐, 확실한 앎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철인들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메타적 반성이 없이, 객관적 경험 세계에 관한 정교한 탐구도 없이, 방구석에 정좌(靜坐)한 채로 내면적 직관에 의존하여 범우주적 진리와 인간의 도리를 증득(證得)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퇴계와 율곡은 그러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활동했던 중세적 사변 철학자들이었다.
주자학의 절대화, 이념적 독단과 지적 편향성 낳아
조선 주자학의 기본 전제는 주자가 진리를 설파했다는 독단적 믿음이었다. 주자가 진리를 밝혔다는 전제 위에서 그들은 주자의 글을 통해서 그 진리를 증험(證驗)하려 했다. 주자의 가르침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주자학은 철학의 외피를 쓴 종교가 되고 만다.
이미 종교화되었기에 조선 사상사는 후기로 갈수록 더더욱 주자학 일변도에 기울었다. 조선 유생들은 유가 경전 속에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고 성리학의 가르침이 그 진리를 터득하는 가장 요긴한 길이라 맹신했다. 인간 이성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인식비판도 없이, 성리학적 사변의 타당성을 정교하게 비판도 없이, 그들은 무조건 주자학을 맹신하는 이념적 경화와 지적 편향성을 보였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1910년 이전. /공공부문 (commons.wikimedia.org)
유가 경전의 권위가 절대화될수록, 유가 경전의 언어로 전개된 철학 논의는 논리적 정합성을 결핍할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유의 부족과 논리적 추론의 결핍은 서구 지적 전통과 대별되는 중화 문명의 지적 특징이다. 반면 중국 지적 전통에서 강점을 꼽으라면 논리적 정합성 대신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시적 정합성(poetic coherence)을 들 수 있다. 중국 문학 특유의 화려한 변려체(騈儷體) 문장처럼 대구를 이루며 끝없이 전개되는 음양(陰陽)과 이기(理氣)의 영구 순환론이 중국적 사유를 지배했다.
그러한 중화 문명 특유의 시적 정합성이 성리학의 외피를 쓰고 조선 사상사를 500년 넘게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방어적으로 성리학을 미화하는 대신 성리학적 사유의 한계와 모순을, 문제점과 부족함을 더 냉철하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