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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전쟁사] 〈261〉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 - 〈280〉감자 전쟁

상림은내고향 2023. 9. 12. 17:49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3

05-02

〈261〉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제일 가치 있는 노획물은 사람이었다. 젊고 건강한 남녀를 잡아가 노예로 팔았다. 강화가 성립되고 전쟁이 끝나도 잡혀간 사람들을 되찾아 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팔려 간 사람을 찾아오려면 주인에게 값을 지불해야 했다.

고려말 왜구들이 납치해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정몽주는 이들이 잡혀간 것은 나라와 통치자들의 책임이라고 관료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했다. 이 운동은 성공해서 상당수의 고려인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드문 사례다.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은 정부가 못 본 척하자 심양에 있던 소현 세자의 거처에 와서 시위를 했다. 소현 세자는 무역으로 모은 자금으로 이들을 풀어주고, 농장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사람들을 계속 구하자는 구상이었다. 세자의 노력은 포상을 받기는커녕 사병을 키우고 왕위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인조의 의심만 샀다.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 병사 몇 명이 있었다. 미군 군의관에게 절단 수술까지 받은 부상병도 있었다. 미군 측이 조선 정부에 포로 석방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원래 조선의 법에 포로가 된 자는 항복한 것으로 간주한다. 항복한 자는 사형이다. 중국, 일본, 고대에 전쟁의 법칙이 다 이러했지만, 이때는 19세기 말이다. 대학생 시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군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내려주고 떠났다. 조선 정부도 말처럼 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분노는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 전쟁사에서 포로, 끌려간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무조건 지배층의 몰상식을 탓할 일만도 아니다. 잡혀간 자신들의 친인척도 어쩌지를 못했다. 절반의 이유는 나라가 가난하고 능력이 부재했던 탓이다. 이번 수단 내전에서 우리 국민들이 무사 귀환을 했다. 국가의 행동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책임감 못지않게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정글이고 힘없는 정의는 통하지 않는다.

 

〈262〉인류의 시험대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아부이다. 그런데 아부가 나쁜 것일까? 아부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흡족하고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한 부분이고, 행복의 요체이다. 아부는 인간의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양념이다.

누구는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하지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 행복은 진실이 아니라 허상에 달려 있다. 어차피 인간 세상은 변화무쌍해서 제대로 알 수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허상이라도 자기 만족을 주는 결론에 취하면 된다. 그래서 인간이란 애초부터 거짓에 끌리게 만들어져 있는 존재이다.

필자의 주장이 아니다. 15세기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불리는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뒤로 더 끔찍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데, 끔찍해서 못 읽겠다. 왜 좀 더 일찍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 학창 시절에 깨달았더라면 일찌감치 가짜 뉴스의 편에 서서 지금쯤 존경받는 거부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에라스뮈스 자신도 우신의 신도로 살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은 그렇게 해도 진실은 승리한다는 믿음 혹은 희망을 갖기는 했던 모양이다. 에라스뮈스 이후에도 인문주의자들과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교육과 매스미디어가 발달하면 진실이 거짓을 이기고 사기꾼과 선동가는 세상에 발을 붙일 곳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보면 우신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인공지능(AI)에 기대를 거는데, AI도 아부로 채워진 데이터에 점령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끔찍한 가짜 뉴스가 맹위를 떨치며 존중까지 받는 영역이 있다. 전쟁이다. 정치도 전쟁이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 크렘린궁 상공에서 불꽃이 터졌다. 러시아는 보복을 외치며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너무나 허접하고 부실한 공격이었는데, 누구도 명확한 증거가 없고, 증거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믿음을 깨트리지 못할 것이다. 왜 이 전쟁이 점점 인류의 양심과 능력을 시험하는 전쟁처럼 되어 가는 것일까.

 

〈263〉킬러 로봇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 아직은 20세기 전쟁에 드론이라는 신통한 무기가 첨가된 형태이지만 10년 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꿔 버릴 것이 분명하다.

드론도 자체 진화를 하겠지만 이번에 보여준 드론의 활약상은 로봇 병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 틀림없다. 아직은 성능이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지만 드론형 소형 탱크, 소형 로봇들이 이미 개발됐고, 추가 개발도 되고 있다.

지금 드론들은 대다수가 인간의 조종을 받지만 자율형 로봇 무기들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로봇 무기들의 등장을 두고 킬러 로봇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있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로봇 병사, 로봇 전투기들이 인류를 사냥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이미 영화 속에서는 실현됐지만 현실에서 인류는 킬러 로봇의 살인에 대해 동요하고 주저해 왔다.

 

전쟁사를 보면 어떤 무기든 강력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을 때 이런 논란이 있었다. 화승총이 등장했을 때도 대포가 발명됐을 때도 이건 너무나 강력하고 치명적인 무기다, 생산을 금지하거나 전쟁터에 투입하는 수량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합리적 걱정을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현실이었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빨리 적을 해치우고 승리해야 한다는 현실의 이해가 철학적, 윤리적 명상을 이긴다. 이번 전쟁에서는 드론이 그 역할을 했다. 참호에 누워 쉬고 있는 병사, 해치가 열린 탱크 안으로 드론이 수류탄을 떨어뜨린다. 며칠 전에는 드론을 향해 공격하지 말라고 비는 병사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런 광경을 본 사람들은 저 자리에 내 아들 대신 로봇을 투입하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절박한 현실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건 명분이 아니라 이익이다. 최근 전쟁에서 드론의 활약은 킬러 로봇 논쟁을 현실로 꺼내 놓았다. 군에 가기 싫은 젊은이들은 모병제보다도 로봇 징병제를 더 훌륭한 대안으로 지지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영화 속의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 

 

〈264〉쿼드와 대만해협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다. 가이드가 중국은 대만 침공 준비가 다 돼 있다고 말했다. 바닷가에 군대가 대기 중이며 “주석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이라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 뒤로 30년이 지났다. 요즘 자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30년간 그런 질문을 받고 있다.

“아니요. 그런 질문을 30년 동안 들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답이다. 300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어도 내일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도가 높다. 중국은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강해졌고,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미국과는 각을 세우며 대립하고 있고, 제3세계에서 지지를 모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위안화가 이제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만 해도 버겁고, 경제 상태는 위태위태하다.

30년 사이에 대만의 정치 경제도 격동을 겪었다. 군대와 국민들의 국방 의식은 많이 약해졌다. 지금 반성하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쟁 준비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확장과 해양 진출에 대한 우려는 몇 년 전부터 충분히 감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결성한 아니 결성했다기보다는 결성되어 가고 있는 전략이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고 있는 집단 방위동맹인 쿼드다.

쿼드는 처음 탄생할 때부터 한국에 양날의 검이고, 어려운 선택이었다. 미국은 가입을 요구하고, 중국은 눈을 부라린다. 이미 국론은 분열되어 있고,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이 상황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국력은 이미 새우 수준이 아니며, 대만 문제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는 군자의 방법과 치열하게 견제하고 다투며 서로를 억제하는 호랑이와 늑대의 방법이다. 군자의 방법이 최선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식일 뿐 인류 역사에 그런 순간이 있었나 싶다.

 

〈265〉전쟁에서 쉽게 이기는 법

 

손자는 싸우지 않고 아군과 적의 군대를 보존하면서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실천 방법이 쉽지 않다. 중국 고대의 병서 ‘육도’는 주나라 문왕과 태공망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무력을 쓰지 않고 모략으로 적을 정복하는 방법에 관한 토의가 있다.

태공망은 무려 12가지나 되는 방안을 제시한다. 방법이 12가지나 된다는 것은 결정적인 방법이 없고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국가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이란 기반에서 태어난 사회적 생물이다. 그 안에 항상 갈등이란 요소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은 공동의 적을 제시함으로써 이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고통이 커지면, 내부의 균열이 터져 나오고 만다. 상대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전에 어떻게든 상대국의 국가적 균열을 조장하고 확대시켜 놓을수록 유리하다. 태공망이 12가지나 되는 방안을 제시한 배경이다.

그중 5번째 방안이 적국의 충신을 우대해서 군주가 의심하게 하고, 능력이나 충성심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을 요직에 등용하게 하라고 한다. 실제로 사기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방법은 많이 사용되었고, 때로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방법이 먹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변국과 긴장 관계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감정적이 된다. 적국에 대해 증오만 표출하고, 배타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이 애국자로 보이고 화친이나 교류를 주장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보인다.

그 순간 국가 정책의 유연성, 정보력, 성장력이 굳고 경직된다. 모든 병서에서 지적하는 전술의 원칙이 적의 틈에 파고들어 가 적의 허점을 찾고, 적의 장점을 배우고, 우리의 대응 방식은 감추며, 어떤 상황에서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는 것이다. 배는 물에 뜨고 물살을 따라 흘러 내려가지만 돌은 가라앉는다. 나라가 감정적인 애국심이란 표피로 경화되어 버리면 안에서 목소리만 요란할 뿐, 모든 능력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단단한 껍데기에 쌓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보면 껍데기가 깨어지고 적군이 밀려 들어와도 모른다.

 

〈266〉두 사람의 덴마크인

 

튤립의 나라 덴마크는 전쟁과 인연이 먼 나라 같지만, 오랫동안 군사적 강국이었다. 현대 전쟁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2명의 덴마크 장교가 있다. 육사 수석졸업생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독일군에 입대해서 참모본부를 창설하고, 근대 군사조직과 전술의 아버지가 되었다. 마스 요한 부크 리네만은 몰트케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전쟁사에 정말로 귀중한 업적을 남겼다. 19세기에 총과 대포에 강선이 도입되면서 화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것은 야전의 병사들에겐 떼죽음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전장은 인류가 지금껏 보지 못한 살육장으로 변했다.

총과 대포가 죽음의 신으로 군림하자 병사들은 땅속으로 숨는 방법을 찾아냈다. 포화가 작렬하기 시작하면 엎드린 병사들은 손과 숟가락까지 동원해 지면 아래를 향해 나아갔다. 거짓말 같지만 5cm라도 파고 들어가는 병사가 조금이라도 피살상률이 낮았다. 참호는 고대의 전쟁부터 존재했지만, 개인호가 모든 병사의 방탄복이 되었다. 덴마크 중위였던 리네만은 1867년 모든 병사들이 손쉽게 휴대할 수 있는 야전삽을 개발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1870년에 덴마크 육군은 야전삽을 필수장비로 도입했다. 유럽 각국이 그 뒤를 따랐다.

군대에서 병사들의 진짜 친구는 야전삽이다. 군에 있는 동안 총보다 야전삽을 든 시간이 더 많았다라는 유머가 유행하는데, 현대 야전삽의 시조가 리네만의 야전삽이었다. 참호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병사들이 야전삽으로 판 참호는 보병 돌격이 시작되기 전에 가해지는 중포의 포격을 무력화시켰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위시해서 19세기 말부터 행해진 모든 전쟁에서 참호는 엄청난 전술적 병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참호 안의 병사를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드론이다. 이젠 병사들이 숨을 곳이 없어 보인다. 200년간 병사를 지켜준 참호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호는 맹활약 중이며, 아직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드론의 무서운 개발 속도를 감안하면, 이제는 새로운 리네만의 장비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얼까?
 

 

〈267〉악마의 선택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다. 자주 인용되는 문구지만 그럴듯하면서도 애매한 발언이라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이 말의 본의에 제일 가까운 해석은 “말로써 해결할 일을 주먹으로 해결한다” 혹은 그 반대로 “말로 하다가 안 되니 주먹으로 해결한다”이다. 이런 상태가 전쟁이라는 뜻일 것이다.

즉, 국가는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최대한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라는 권고이기도 하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많은 국가들이 그런 노력을 하긴 한다. 강대국이라고 해도 전쟁을 벌이면 피해가 발생하고 손실은 국가에 부담으로 남는다. 패배한 나라도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남는다. 성인은 피로 피를 씻지 말라고 하지만, 핏자국은 피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 것이 인간사의 감정이다.

그래서 손자도 전쟁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며, 만약 시작한다면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끝내야 한다고 했다. 손자가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병서를 저술한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원한은 쌓이고 공포는 누적되면서 지도자부터 지휘관, 일선의 병사들까지 점점 더 비합리적 선택을 하게 되고, 비합리적 선택에 둔감해진다. 군기가 엄정하던 군대도 패주하는 상황이 되면 가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다.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명제이자 합리적인 결론을 수행할 수단, 특히 정상적인 방법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든 비합리적인 수단이 절대명제, 절대 합리적인 명제 앞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결국 전쟁은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로 시작했다고 해도 어떤 수단, 어떤 행위도 가능해지는 비합리의 합리화, 악마의 선택, 모든 사람의 악마화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카호우카 댐 파괴 사건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쟁은 어떤 선택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이제 시작일 수도 있다. 사람은 천사가 되기보다 악마가 되기가 훨씬 쉽다.

 

〈268〉완벽한 지휘관은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정치나 대인관계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실수를 많이 했지만 전투 현장에서는 실수가 없었다.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결국 그 때문에 요절하지만 다른 병사들을 애꿎게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불세출의 명장이라도 단 한 번의 실수와 판단 착오가 없는 경우가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나폴레옹의 말처럼 전쟁은 누가 실수를 적게 하느냐는 싸움이다.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군을 칭송하고, 혹 잘못들을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해도 죽은 병사의 가족, 그의 죽음으로 파괴되고 왜곡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용서가 어렵다. 어느 영화에 이런 대사도 있다. “전쟁에 승자는 없다. 피해자와 죽은 자만 있을 뿐이다.”

전쟁의 경험은 진실되고 정확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분석이 감정적, 정치적 비난의 소재로만 사용되거나 그것이 두려워 궤변과 감추기로 일관한다면 그 피해는 후손들에게 전가될 뿐이다.

6·25전쟁 하면 떠오르는 비극이 있다. 초기 패전, 한강다리 폭파, 이어지는 혼란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슈가 탄생했다. 그중 일부는 과장이거나 가짜 뉴스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하고 정치적 분란의 소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논쟁에 너무 깊이 들어가 심지어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대한 분석도 색안경을 끼고 보고, 감정적인 분노를 앞세운다. 전쟁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해하는 국민의 정서와 능력, 정치인의 마음가짐도 성장은커녕 갈수록 더 유치하고 파괴적이 되어 간다. 그러다 보니 패인의 진실한 원인, 전술적 대비의 부족, 잘못된 인사, 비상사태에 대한 준비 없음, 지휘계통의 혼란, 이런 부분에 대한 진실한 반성과 대비가 휘발해 버린다.

올해가 정전 70주년이다. 한국의 국방력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하지만 휴전선과 서울의 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와 군이 정직하고 합리적인 분석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같은 위기를 초래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269〉6·25전쟁 개전 3일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고, 서울 함락이 공식화됐다. 당초 북한의 목표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성공했다. 서울 주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정설로 믿고 있는 소문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한강 다리 폭파도 전략적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피란민들이 다리에 있는 상태에서 폭파해서 무수한 민간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폭파의 절차, 타이밍, 명령체계가 대혼란이었다.

그럼 이런 대혼란은 왜 벌어졌을까? 3일 만에 전선이 무너지고, 수도가 함락당하는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일군이 처음 전격전이란 구상을 내놓았을 때, 90%의 장군들이 반대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고 너무나 위험한 작전이라고 했다. 지지자들의 반론은 그건 탁상에서 냉정하게 전황을 분석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전쟁은 발발하는 순간 혼란이다. 상대가 빠르고 깊게 찌르고 들어오면 대부분의 지휘관, 조직은 대혼란을 일으킨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전격전 지지자들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쟁이 탄생한다. 독일군을 대상으로 전격전을 시행하면 먹혀들까? 패튼이 프랑스에서 종심으로 파고드는 전술을 구상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까무러쳤다. 그러나 결론은 독일군을 상대로도 먹혔다.

공포와 충격을 이겨내는 군대는 없다. 유일한 대안은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군은 그런 부분에 대한 전술적 대비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든 비난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3일 작전은 실패한다. 서울은 점령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행정력은 붕괴되지 않았다.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던 국군 병사들은 기를 쓰고 탈출해 군으로 복귀했다. 수많은 무명의 장병들이 5분, 10분을 벌어주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우린 그 참전용사들이 다 돌아가실 동안 정치인만 비난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채록하지 못했다. 진정 부끄럽고 반성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07-03

〈270〉진정한 보훈

 

20년쯤 전의 일이다. 교회에서 도움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허약한 노인 한 분이 계셨다. 어느 날 그분이 한국전쟁 참전 용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군인 출신인 교회 장로님이 그분을 도와드리겠다는 마음에 대화를 나누었다. 노인은 “나는 용사가 아니에요, 후방에서 물이나 날랐어요”라는 말씀만 하셨다. 후방에 계셨다고 해서 진짜 후방은 아니다. 그 노인이 속했던 사단은 전쟁 중에 수많은 전투를 겪었던 사단이었다. 얼핏 들은 이야기라 그 뒤에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이 일선에서 전투를 벌인 적이 없고, 전쟁 내내 2선에서 일했다고 하더라도, 전쟁 중에 정말 자신을 부끄러워할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분이 참전용사가 아닐까? 훈장을 받거나 손자에게 들려줄 만한 전공을 세운 적이 없다고 해서 그분이 존중받고 대우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일까?

2차 대전에 참전했던 한 미군 병사가 손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애야 나는 영웅이 아니란다. 영웅들 틈에 있었던 것뿐이지.” 본인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전쟁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의 영예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훈장을 주고, 동상을 세우는 것은 특별한 전공을 기리는 것이다. 전쟁에 참가했던 모든 분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영예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위대한 장군이며 민족의 영웅이다. 그만한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에 비해 장군과 함께 싸웠던 휘하 장수들, 부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드라마, 영화 덕인지 부하 장수들에 대한 조망이 이전보다는 활발하게 되고 있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이런 정도의 존중이 더해지는 것도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부하 장수의 일화, 평판을 적어 놓았던 덕이다.

그 아래 일반 병사들로 가면 어쩌다 한두 명이 이름 정도나 등장한다. 좀 낫다는 장수들의 이야기도 소략하기 그지없다. 이런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전통이 되었다. 덕분에 우린 감사할 대상과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태도와 방법을 잊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한다.

  

07-10

〈271〉전쟁의 진정한 무서움

 

초패왕 항우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유방에게 패배한 이유로 항우가 포로로 잡은 진나라 군사 20만을 살해한 사건을 든다. 20만이란 숫자가 믿을 수 있는 숫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대학살을 벌인 것은 틀림없다. 이들은 진나라의 중심인 관중 지방에서 징병한 병사들이었고, 그들의 유가족들은 항우에게 분노했다.

항우뿐 아니라 고대의 전쟁에서 포로 학살은 곧잘 벌어졌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도 마음속의 가책은 있었다. 조나라 포로 40만을 학살했던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모함을 받아 죽게 되자 이 학살의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의 명장 이광도 자신의 불운이 과거에 저지른 포로 학살의 대가라고 했다.

이처럼 이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몰상식한 일을 저질렀을까? 항우에게 묻는다면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20만이나 되는 포로를 먹이고 관리할 수 없다. 그들을 석방하면 다시 적군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승리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아마 다른 장수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누구는 비장하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내 부하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 책임과 마음의 고통은 나의 평생의 업보로 지고 가겠다.”

전쟁은 비합리가 합리를, 몰상식이 상식을 이기게 만든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넘어서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이 포로들을 죽이면 안 된다. 당신이 이 전쟁을 하는 이유가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포로를 죽이면 전투에서 승리해도 천하를 잃게 된다’는 말로 항우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미국이 우크라이나군에 집속탄을 제공하기로 했다. 러시아군은 이미 백린탄과 집속탄을 사용하고 있다. 자포리자 원전의 폭파 위협이 시작되고, 핵 위협도 계속되고 있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행위들이지만, 합리와 상식의 계단이 하나하나 점거되고 있다. 이것이 전쟁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이성의 마지노선은 어디일까?

 

〈272〉알렉산드로스의 생존 투쟁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전투에서 선두에 서서 싸웠다. 필자는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한 것이 부상 후유증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가슴뼈에 화살이 박힌 마지막 부상은 거의 사망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중상이었다. 이 중상 이전에도 그는 무수한 부상을 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 앞에서 온몸에 나 있는 상처 자국을 보여주며, 나보다 더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토록 선두에서 맹렬하게 전투를 벌이면 전사할 위험보다 더 큰 위험이 있다. 패전의 위험이다. 전황이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선두에서 백병전을 벌이면서도 전투의 전체 상황을 읽고 대응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든 병력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감행하려면 자신이 군을 직접 이끌어야 했다. 다른 이에게 최강의 군대를 맡겼다가 그가 회군하면 감당할 방법이 없다. 전장에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인솔하고 갔어도, 다수의 적과 위험한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지휘관이 자신감을 잃으면 적에게 항복하고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불가사의한 능력은 신이 내린 재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인의 처절한 노력이자 투쟁이었다. 민주화된 사회일수록 힘으로 정부를 파괴할 수 있다고 해도, 통치하기는 힘들다. 전쟁영웅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런 경우도 힘이 아니라 국민의 인기와 신뢰를 통해서이다. 반면 아직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사회에서는 군부의 장기독재가 이어지거나 쿠데타가 끊이지 않는다. 지휘관이 권력을 잡는 순간, 군대, 병사들과의 직접적인 연계가 끊어지고, 그 순간에 권력 기반을 상실한다.

프리고진의 쿠데타 이후 러시아의 동향에 대해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결과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국가의 정체와 정치적 현상은 그 나라 국민의 정치적 민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의 이해에 중대한 지표가 될 것이다. 러시아의 동향이 흥미로운 이유이다.

 

〈273〉정전협정 70주년

 

강원도 철원에 승일교라는 다리가 있다. 1948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이곳이 38도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다리 공사는 중단되었다. 종전 후에 이곳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해서 1958년 12월에 개통되었다. 덕분에 이 다리는 소련의 기술을 받은 북한식 공법과 한국식 공법이 섞여 있다. 승일교라는 이름도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성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20년 전에 이 다리를 답사한 적이 있다. 옛날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에 공업은 북한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고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리에도 그 격차가 반영되어 있을까? 필자는 공학도도 아니고, 단순히 육안으로 당시 공학 기술력의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은 무리다. 다만 겉으로 봐서는 오히려 북한의 흔적이 더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에도 흥남질소비료공장이나 수풍댐 같은 몇몇 특별한 시설들이 북한지역에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공학의 전반적 수준을 판별할 수는 없다. 그 시절에도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은 서울이었고, 전체적으로도 북한보다 남한의 역사, 문화적 깊이가 높았다.

20년 전 승일교 위에서 했던 생각이다.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고, 전문가의 기준에서 봤을 때 오류라고 하더라도 그 이후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물론 북한도 모든 부분이 낙후하지 않다. 우리와 같은 민족이고, 같은 전통과 역량을 가지고 20세기를 맞이했다. 현재도 핵, 미사일, 로켓 등에서 괄목할 기술을 보유하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양측은 초격차로 벌어졌다. 이젠 통일이 되어도 이런 격차를 극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극복할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7월 27일은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통일과 분단, 전쟁에 대한 문답이 오고 간다. 누가 묻는다. 통일을 방해하는 제일의 요인은 무엇인가? 벌어진 남북한의 격차보다 더 나쁜 것이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접근 방식이다. 통일이 민족의 절대 과제라면 냉정하고 과학적인 접근이 유일한 방법이다.

 

〈274〉중동의 봄, 이스라엘의 봄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 유엔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생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차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전쟁과 크고 작은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 많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줄곧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크고 작은 요인이 있다. 그중 중요한 요인이 이스라엘 주변 중동국가들의 정치적 후진성이다. 독재, 정치 불안, 쿠데타 등이 대이스라엘 동맹의 협력과 효율성을 약화시켰다.

군사력 강화라는 부분에서는 더 처참했다. 과거 오랫동안 독재, 군국주의가 군사력을 강화시킨다는 잘못된 믿음이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 쿠데타의 위험이 상존하는 국가에서 군부의 조직과 운영에는 군사적 능력보다 정치적 충성도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독재자는 국민에게 정의로운 인재보다 자신에게 정의로운 인재를 원한다. 6일 전쟁에서 이집트가 무참히 패배하는 데는 6일이 아니라 3일이면 족했다. 이집트군이 좀 더 정의롭게 조직돼 있었더라면 그런 무참한 패배가 아니라 역전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5년 후에 벌어진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군의 괄목상대할 만한 변화는 군부 개혁에 의한 결과였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는데, 그 역시 경직된 사회, 후진적 정치체제의 결과였다. 빠른 기동, 현장 대응, 응용력은 경직된 사회 전체가 넘지 못하는 벽이다. 경직된 사회는 군대에 경직된 전술을 강요한다.

이 반대편에 이스라엘의 성공 요인이 있다. 태생부터 전쟁에 휩쓸렸던 이스라엘은 바로 군국주의화할 위험이 높았지만, 이 위기를 묘하게 극복해냈다. 이스라엘의 정치가와 군부는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전쟁터에서 성장한 강철형 인간 등 다른 나라에서는 절대 공존이 불가능했던 인물들의 집합체였는데, 이 집합이 묘하고도 유연한 협력관계를 이루면서 이스라엘의 생존을 이루어냈다.

네타냐후의 독재 강화는 그 유연함의 위기 또는 종말을 의미한다. 군부와 예비군이 반대의 중심에 선 이유도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철의 국가로 진입할 것인가? 이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접 국가들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275〉진정한 게임체인저

 

1632년 독일 라이프치히 남쪽 뤼첸이란 작은 마을에서 ‘30년 전쟁’(1618∼1648년) 역사상 가장 크고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교의 영웅이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와 구교를 파멸에서 구해낸 용병 대장 발렌슈타인과 용장 파펜하임 백작이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파펜하임이 전사하고 신교 측이 승리했지만, 구스타프도 전사하면서 신교 측도 패배나 다름없는 손실을 입었다.

양측은 병력은 각각 현재의 사단 규모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전투였다. 그러나 당시 구교 측의 대포는 겨우 60문이었다. 신교 측은 더 적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60문은 대단한 양이지만, 당시 대포의 화력이나 발사 속도로 보면 야포 6문 정도를 보유한 현대의 포병 중대의 화력에도 훨씬 못 미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화력으로도 단 하루에 각각 3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사령관까지 전사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20세기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과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발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번의 공세를 반복했다. 하지만 독일군 대대는 단 4문의 88mm 포와 2문의 75mm 돌격포로 단 하루 동안 영국군 전차 40대 이상을 파괴함으로써 영국군 전차 연대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함포의 위력은 더 대단했다. 독일군은 여러 번 성공적인 반격 작전을 펼쳤지만, 연합군을 바다로 밀어내기 전에 해상에 자리 잡고 있던 함선에서 발사하는 함포에 번번이 격퇴당했다. 함포가 엄호하는 연합군 교두보는 난공불락이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용감한 병사도 주변에서 함포가 작렬하기 시작하면 버텨내지 못했다.

드론, 재블린, 하이마스 등 온갖 첨단 무기가 활약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정작 화제가 되고 있는 건 155mm 포탄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연간 생산량의 3배에 달하는 100만 발의 포탄을 소모하고 있다. 러시아는 포탄이 부족해지면서 북한에까지 손을 벌리고 있다. 이러다가 진정한 게임체인저는 포탄, 아니 포탄 생산능력이 될 것 같다. 첨단 무기 못지않게 재래식 무기, 기본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276〉자유의 가치

 

고전의 발견, 개인의 가치와 자유의 존중, 인간 능력의 제한을 부정하는 다재다능한 만능인,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현상들이다. 이런 요소를 집어내고 학술적으로 정착시킨 사람이 스위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중세에는 종교는 자연과 인간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제약했다. 사회는 신분과 직업에 따라 사람의 생각과 행동, 직업과 역할에 제약을 걸었다. 르네상스는 이런 꺼풀을 걷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곳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터져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해석은 당시 이탈리아에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신분제의 제약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서얼 차별도 없었고,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도 국왕이 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이 놀라운 자유의 대가로 이탈리아는 예술의 나라가 된다. 국가 경영, 전쟁까지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여기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예술로서의 국가란 군주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통치방식을 말한다. 물론 그 군주가 추구하는 세상도 다 다르다. 신이 지시하는 세상도 아니고, 국가의 구성원들이 오랜 고민과 경험으로 합의에 이른 체제도 아니다. 공과 사가 얽혀 있고, 수단과 방법에 제한이 없는 체제이다.

예술로서의 전쟁은 어떨까? 14, 15세기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용병대장을 고용해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한 목적과 비열한 방법, 배신, 학살을 가리지 않고 수행되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자유의 결과이고, 예술화된 세계의 경지이다. 물론 이 후유증(?)으로 가장 위대한 예술가와 근대과학과 시대를 만든 능력과 최첨단의 무기와 군사전략도 탄생한다.

부르크하르트의 설명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인간 세상에서 아름다운 가치, 매력적인 단어가 아름답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유로운 세상은 모든 악이 개방된 사회였다. 그렇다면 자유를 다시 봉인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전쟁이 무섭다고 무장해제를 할 수 없듯이, 자유의 가치와 악용을 직시하고, 자유의 가치를 살려야 한다.

 

〈277〉중국은 왜 대만 위기를 조장하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조건은 “절대 침공은 없다”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라고 답하기는 곤란하다. 그 대신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 득이 없을 수도 있다. 중국의 군사력은 실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만큼 강하지 않다. 성공하더라도 희생이 크다.

중국이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무마하고, 시진핑 체제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취지에서 TSMC와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얻으려고 한다는 추측도 있다.

푸틴의 사례를 보면 전쟁으로 정말 푸틴 체제가 더 강고해졌을까? 당장은 더 강고해지고 국가적 단합을 초래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전후에 푸틴 체제는 더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하다. 중국도 피와 희생을 가릴 만한 승리의 영광을 거두기 어렵다. 또한 지금의 중국 사회는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경제는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중국이나 러시아나 강력한 지도체제 같지만, 중국의 경제와 금융, 정치구조는 러시아보다 훨씬 복잡하고, 지역 분권, 지역 갈등 문제도 러시아와 다르다. 이런 내부 구조는 전쟁으로 주의를 돌리고,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최근 중국의 부동산 위기, 금융 위기, 국제 자본의 이탈 등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의 고속성장, 국가주도 성장의 부작용이다. 병에 비유하면 운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났다. 정밀하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시기다.

이런 답변을 하면 바로 다음 날 중국군이 대만을 도발하는 기사가 떠서 사람을 머쓱하게 한다. 왜 중국은 성공 가능성이 약한데도 계속 대만을 위협하고, 국제 사회를 긴장시키려고 할까? 본질은 미국의 제재 완화와 대미 관계에서 파트너십의 회복이다. 중국이 미국 없는 세상을 만들거나 미국의 자리를 대체하려 한다는 기대는 완전한 착각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더 걱정된다.

 

〈278〉가장 무더운 여름

 

기록적인 무더위가 한반도를 덮고 있다. 1950년 8월도 최고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가는 등 상당히 고온이었다고 한다. 이번 여름이나 1994년의 더위에 못 미친다고 해도, 당시 한반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무더울 수 없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8월 한 달 내내 한미 연합군과 북한군은 낙동강 변의 가파른 고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반복했다. 대한민국에는 마지막 방어선이었고, 북한군에겐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 당시 한국의 산은 거의가 민둥산이었다. 고지의 참호에서 적의 총탄은 피할 수 있어도 8월의 땡볕은 피할 수가 없었다. 두꺼운 군복, 철모, 물도 음식도 부족한 상황에서 병사들은 뜨거운 총신을 붙잡고 싸웠다. 일사병으로 쓰러진 병사가 몇 명인지는 통계도 없다. 체력이 바닥나고 정신이 혼미해서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동작이 느려져 죽고 다친 병사는 판정할 수조차 없다.

그 여름의 낙동강 전선, 이 전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보다 더 위태롭고 치열했다. 대구도 함락될 뻔했다. 그때 어떤 이유든 북한군이 시가 진입을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8월 16일에 미군은 B-29 폭격기로 960t의 폭탄을 다부동 전면에 퍼붓는 융단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의 효과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갈리지만, 그만큼 뜨겁고 폭렬하는 전선이었다.

최초에 투입된 미 24, 25사단에 이어 전통의 미1 기병사단, 해병대 등 정예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런 준비가 없었던 한국군은 훈련도 받지 못한 징집병을 투입해야 했다. 이 부분은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는데, 보급선이 길어지고 희생이 늘면서 전투력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8월 하순이 되자 북한군은 이미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기력이 소진되었다. 그때쯤 무더위가 물러가며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쟁이지만, 병사들에게 일단 제일 반가운 건 그 시원함이 아니었을까?

 

〈279〉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란 전쟁 상황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사상자 통계라는 걸 받는다. 전사자가 몇 명, 부상자가 몇 명,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는 사람, 망가진 인생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사람의 수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코로나도 그렇다. 사업이 파산하고, 가게가 문을 닫고, 평생을 빚더미에서 살아가야 하며, 가정과 행복이 파괴된 삶을 우리는 헤아릴 수도 없다.

어이없게도 방역 조치, 예방 조치와 같이 팬데믹을 극복하고 인명을 구하려는 방법이 ‘인생 파괴 조치’도 되었다. 무자비하고, 인정사정없는 정책을 시행한 국가도 있었다.

아마 본질적인 문제는 팬데믹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 속에 수많은 팬데믹이 언급되어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과거 일로 치부했다. 진지하게 과거사를 연구하지도 않고, 과거인의 행동을 비웃고 조롱만 하던 지식인들도 넘쳐난다.

17, 18세기에 유럽을 휩쓴 페스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도주해서 텅 빈 도시지만, 골목마다 시신들이 널려 있다.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해서 시신들의 상태는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처음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사람들은 헛된 저항을 시도한다. 발병자의 집을 못질해서 폐쇄하고 통금, 격리 조치를 한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집단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 역병을 극복할 수단이 없는 국가와 도시의 정부는 무슨 짓이든 한다. 처참하고 잔혹한 광경이 펼쳐진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빈정거렸다. “페스트는 계급관계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면제해 준다.” 물론 부자들에겐 좀 더 많은 옵션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비꼬는 동안 진정한 교훈을 놓친다. 좀 더 진지한 지식인도 ‘오늘날에는 어떤 질병이 와도 그런 광기의 드라마는 재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 지식인이라면 광기와 어리석음은 언제든지 재발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현대인의 장점은 과거의 사례를 분석하고,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다는 것뿐’이라고 가르쳤어야 했다.

 

09.12

〈280〉감자 전쟁

 

1778년 바이에른 공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프리드리히 대제가 이끄는 프로이센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가 맞붙었다. 당시 독일은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바이에른은 독일의 제후국 중에서도 강력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양국은 7년 전쟁(1756∼1763)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여서 본격적인 대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투를 회피하던 양측은 서로 보급대열을 노리며 상대 괴롭히기 전술을 사용했는데, 당시 부족한 국력, 식량 부족으로 전투보다 더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굶주린 병사들이 서로 감자밭을 먼저 점거하고 감자 캐기 경쟁을 벌였다고 해서 감자 전쟁이란 별명이 붙었다.

감자는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졌지만, 독성 때문인지 어디서나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엉뚱하게 이 전쟁이 감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 주는 데는 공헌을 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에 감자를 보급하는 데 앞장서서 감자 대왕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 후로 감자는 독일인에게 아주 중요한 주식이 되었고, 아일랜드에서는 아예 국민을 먹여 살렸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 아일랜드에서 감자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는 바람에 유명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또 이 덕분에 아일랜드인이 신대륙으로 대거 이주했고, 아일랜드 혈통이 들어간 대통령이 17명이 넘게 됐다.

감자 전쟁은 감자 이야기만큼 훈훈하지는 않다. 적의 병사가 아닌 병참을 노리는 전술은 고대부터 사용되었다. 포위되고, 고립되고, 버림받아서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군대의 이야기는 모든 전쟁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장면을 연출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보급과 의료의 부족이 점점 더 극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측의 사상자는 정확히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미 자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런 문제는 갈수록 악화되면 악화되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약 300년 전 감자밭에 있던 병사들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임용한의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