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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3/ [21회]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 - [24회] 에필로그 - 잊혀서는 안되는 6·25

상림은내고향 2023. 9. 2. 18:21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3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동아일보 2023

08-18

[21회]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

▲1호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탈북 후 43년 만에 부대 복귀 신고를 했다.

 
 

1994년 10월 23일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해상을 표류하던 60대 초반의 남성이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 1호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소위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 다수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북한은 숨기고 남한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죽어서도 이름 없는 탈북국군포로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여명, 이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나머지는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북한 내 국군포로는 2014년 56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된 후에는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창호 소위 이후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다. 고령으로 일부만이 생존해 있다. 탈북국군포로는 북한에도 가족이 있어 살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 부고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탈북국군포로들의 수기집.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억류한 뒤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해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국군포로로 강제노역 건설대가 조직됐다는 사실은 2000년 7월 탈북한 유영복 씨의 증언과 수기집 ‘운명의 두 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탄광에서 임금은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사실이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에서 “국군포로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안전교육도 시키지 않고 바로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일 낮은 막장에서는 기온이 40도까지 올라 숨쉬기도 힘겹고 땀을 비 오듯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허재석, 34쪽)

더욱이 국군포로는 본인이 평생 ‘43호’라는 낙인이 찍혀 차별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자식들도 ‘43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진학이나 군입대, 취업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 ‘국군포로’는 북한 사회에서 영원한 반동분자로 남아있다.(유영복, 195쪽)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납북자 가족들은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납북자와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인도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북한의 부인, 남한의 무관심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 별다른 송환 노력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 군사정전위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사실상 손을 놨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 후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거론되지도 않았고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 17명을 귀환시키기 위해 북일 접촉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1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귀국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서도 3명의 미국 국적 억류자가 돌아왔다.

유영복 씨는 “북한이 (북한 억류 국군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니까 대화가 전혀 안 돼 하나도 안 데려왔다”며 “그럼 과연 유사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나가라 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이혜민, 87쪽)

▲탈북국군포로 김성태 씨(오른쪽)가 북한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는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

● 탈북국군포로, 김정은 상대 재판 잇단 승소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5월 김성태(91) 씨 등 5명의 탈북국군포로가 북한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위자료 5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했다. 북한은 김 씨 등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며 억류한 반국가 단체로 북한의 행위는 고통을 준 불법행위라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김 씨 등은 2020년 9월 소송을 함께 냈으나 소송이 오래 지연돼 3명은 작고하고 유영복 씨는 거동이 불편해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2020년 7월 한재복 씨 등 2명이 낸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원도 2021년 2월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해 23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나포 당시 고문, 가혹행위 등에 대해서 승조원, 승조원 가족, 유족 171명에게 배상하도록 했다. 워싱턴DC 연방법원은 2018년 12월에도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가족들에게 약 5억113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 풀려난 뒤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부모.

● 미국은 선박 몰수, 한국은 안면몰수?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북한을 상대로 한 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오고 있지만 판결 집행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한재복 씨 등은 승소 금액을 받기 위해 국내 매체들이 북한 방송 영상 등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를 걷어 온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법원의 추심명령도 받아냈다. 그런데 서울동부지법은 2022년 1월 “경문협이 공탁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작가 등의 소유”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법적으로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능력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다 고등법원은 경문협이 저작권료 지급에 관한 내용을 북한 측과 합의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심 명령 집행을 신청한 한재복 씨 등의 신청을 각하했다.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구충서 변호사는 “북한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기관은 정부 기관이고, 이 기관이 경문협과 계약으로 권한을 위임해 사실상 북한 정부의 소유인 저작권료를 배상금으로 할 수 있다”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추심 집행 명령 소송은 대법원에 올라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북한이 억류한 국군포로에 대한 강제 노역 등 행위에 대한 북한 당국이나 김정은의 배상에 대해 국내 법원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법정에서 복잡한 법리 논쟁을 벌이는 사이 고령의 탈북국군포로 사망자는 늘어 2023년 8월 현재 80명의 탈북국군포로 중 12명만 남아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대상으로 한 배상 판결에서 승소한 뒤 배상 집행을 위해 북한 선박을 몰수했다.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2019년 7월 법원에 북한 선박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 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몰수 소송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 선박은 북한이 보유한 두 번째로 큰 대형 화물선으로 고철값만도 300만 달러에 이른다. 그해 10월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해당 선박에 대한 몰수 판결을 내렸다.

대학 3학년이던 웜비어는 2016년 1월 북한 여행 중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웜비어가 이듬해 6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귀국 6일 만에 사망하자 웜비어의 유족은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앞의 납북 재현 조형물. 파주 = 홍진환 기자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입구에 납북된 가족들이 사진이 원형 조형물에 전시되어 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 ‘6·25 기획 납북’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사에 6·25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강제 납북’의 사연이 그대로 담겨있다.

북한은 전쟁 중 모든 점령 지역에서 남한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에 대한 납치 계획을 세웠다가 조직적으로 납치하는 ‘기획 납치’를 자행했다.

납치 대상은 ‘저명인사’, 북한에 적대적인 ‘우익인사’, 남한 사회 요직에서 활동하던 ‘지식인 계층’ 등 크게 세 부류였다. 저명인사들은 납치된 뒤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동원됐다. 당시 언론에는 각급 법원 판사 38명이 행방불명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2일 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민족대표로 참가했던 김규식, 손진태 서울대 문리대학장, 미군정청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안재홍,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기자로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국학자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었다.

북한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병력 손실이 커지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청장년을 강제 징집했다. 북한의 인재 납치는 북한 체제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 남한에는 인력 활용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납북 피해자는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6·25 전쟁 당시 북한의 기획 납북 실태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적대세력’으로 분류되는 인근 주민 4명에 대한 조사 보고서. 좌익들의 활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납북을 실행한 증거다.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전시. 파주 = 홍진환 기자

● ‘전후(戰後) 납북자’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이산(離散)의 아픔에 그치지 않는다. 납북 가족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고 일부는 간첩으로 남파되는 등의 공작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도 생겨났다. 심지어 납북이 월북으로 오인되는 일까지 있어 사회적 불명예와 차별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납북자기념관, 78쪽)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어 납북자 구출을 위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납북, 납치가 6·25 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에도 계속됐다. 북한은 협정 이후 어선 비행기 납치와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500여명의 ‘전후 납북자’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어선 납치가 대부분이지만 백주 대낮 여객기 납치도 있었다.(납북자기념관, 146쪽)

1987년에는 ‘동진 27호’ 어선이 납북됐다. 가족 일부는 몇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최연소 선원 임국재 씨는 3차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1969년 12월 12일 자 동아일보 1면. 51명을 태운 KAL 여객기가 강릉에서 이륙한 뒤 납북돼 선덕에 강제 착륙했다고 보도했다.

● KAL 납치 ‘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

그간 정부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섰던 국군포로 송환에 손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 납북자’ 중 대한민국 상공에서 납치해 간 여객기의 승무원과 승객들도 사실상 방치했다.

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권총을 소지한 채 탑승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에 의해 납북됐다. 64인승 쌍발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1970년 2월 14일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 KAL 승무원 성 모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부는 ‘납북자 대책반’을 운영하기로 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관심이다.

● 尹 정부, ‘납북자 대책반’

윤석열 정부는 통일부에 납북자와 국군 포로, 억류자 문제 담당 기구를 장관 직속으로 신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에 납북자 전담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가 나온 지 사흘 후 신임 김영호 장관이 취임하면서 통일부가 내놓은 방안이다. 납북자 전담 기구에 대해 “통일부 조직의 어젠다이자 장관의 어젠다로 챙기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전 70년을 맞으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남았던 납북자 및 가족들의 인도적 비극과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로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는 가운데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에서 어떤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다.

 
 

[22회] ‘자유의 수호자들’(上)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자유의 수호자들’.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선엽 클라크 장군 등 양국의 장군들을 함께 모았다. 구자룡 기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 전시실에는 ‘자유의 수호자들’과 ‘새벽의 침략자들’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수호자는 한미의 대통령과 장군들, 침략자는 북-중-소의 최고 지도자와 군사령관들이다.

6·25 전쟁이 3년 넘게 계속되면서 정치 및 전쟁 지도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1952년 11월 대선에서 당선돼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의 20년 집권이 끝났다. 31년 철권통치를 해온 소련 스탈린도 1953년 3월 75세로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의 정치 파동속에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북한 김일성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6·25 전쟁을 지휘한 유엔군사령관은 맥아더 해임 뒤 리지웨이와 클라크가 뒤를 이었다. 미 육군과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병력, 그리고 작전권을 이양한 한국군을 지휘했던 미 8군 사령관은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그리고 테일러 등 4명이었다.

 

‘자유의 수호자’ 정치 지도자와 군 사령관들은 공산측 불법 침략 격퇴 목표는 같았으나 방법론과 군사 작전의 범위, 작전 성향 등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전쟁 수행과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과 맥아더의 상호불신과 불화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의 <17회>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 편에서 다룬 바 있다. 두 사람의 충돌에는 개인적 성장 배경과 직업적 경험 차이, 군인과 정치인, 정치 진영의 차이, 대통령과 전쟁 영웅으로서 각자가 가진 대중적 지지 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두 사람의 긴장과 갈등은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됐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대통령과 전쟁 지휘관이라는 상하 관계에서 나타난 커다란 이견과 갈등은 6·25 전쟁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는 인천상륙작전, 북진, 만주 폭격, 원폭 사용, 대만 국민당 군대의 참전 허용 여부 그리고 휴전회담까지 주요 고비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사안을 관통하는 것은 ‘전쟁에 승리 외에는 없다’며 필요하면 핵사용과 만주 폭격을 주장하는 확전론(맥아더)과 소련의 개입 등 제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막는 등 ‘전장의 승리보다 전략적 정치적 판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제한론(트루먼)의 차이였다. 여기에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우선 순위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도 변수로 작용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정확히 예측, 대비하지 못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다시 밀려 내려왔다. 한 때 37도선까지도 밀렸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이른 뒤 휴전론이 높아질 때 맥아더는 물러났다.

● 퇴임 후 ‘사라지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는 의회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고 했으나 그는 퇴임 후 사라지지 않았다. 1년 간 미국을 종횡무진하며 미국의 위기를 역설하고 다녔다. 군복에 훈장을 모두 매달고 전국을 다니며 때로는 변덕스런 정치적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가 트루먼을 맹렬히 비난할 때마다 그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렸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과 조금씩 멀어졌기 때문이다.(맨체스터, 561쪽)

그의 연설 중에는 ‘서유럽 방어의 제1선은 엘베 강도 아니고 라인강도 아니다. 그것은 압록강이다’라며 아시아 우선주의를 견지했다. 자신의 해임을 두고 트루먼과 논쟁을 벌이는 등 ‘평생 군인’에서 우익의 신념을 대변하는 당파적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반 트루먼 행정부’ 유세에 트루먼은 “맥아더는 가짜클럽이 있다면 출마도 필요없이 회장이 되었을 것” “진실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역공했다. 트루먼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점령군사령관으로서 전후 일본을 창설한 맥아더를 제외하는 것으로 뒷끝을 보였다.

맥아더는 1952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를 반대하고 태프트와 손잡고 대권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크고 하얀 집’(백악관)에 대한 정치적 희망이 무너진 뒤 민간 기업 ‘스페리 랜드’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주주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때론 자신을 ‘원로 정치가’로 언급하기도 했다.(맨체스터, 587쪽)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를 ‘숭앙’해 자주 백악관으로 초청, 조언을 들었다. 맥아더는 “아시아 땅 위에서 미군 병사가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1964년 4월 뉴욕 월도프의 호텔에서 급성신부전 등으로 생을 마감해 ‘노병은 사라졌다’.

 경기 파주 임진간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파주 = 홍진환 기자

● 사후 재평가 받은 트루먼

2021년 미국 정치전문매체 C-SPAN의 조사에서 트루먼은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6위에 올랐다. 링컨 워싱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아이젠하워에 이은 것이다. 6·25 전쟁 기간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이 모두 40여명 미국 대통령 중 5,6위를 차지했다.

트루먼은 ‘우연히 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에 오르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재선 임기를 마친 뒤에도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는 사망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비로소 냉전시대의 초석을 닦았던 많은 업적이 새삼 부각됐다. 영국 처칠 수상이 그에게 “서양 문명을 구했다”고 한 말에 걸맞는 평가를 뒤늦게 받았다.(강성학, 8쪽)

트루먼은 1945년 4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두 차례 임기 동안 많은 결단을 내렸다. 유엔 창설, 포츠담 회담, 일본 원자탄 투하, 마샬 플랜, 이스라엘 건국 산파,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 NATO 창설, 수소탄 개발 결정 그리고 한국전 참전과 유엔군 결성 등.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 사진제공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북한의 침략에 신속한 미군 투입 등으로 6·25 전쟁에서 한국을 구한 것에 비하면 한국내의 평가는 높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의 동상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한 켠 미군 참전비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보며 랜드마크가 된 맥아더 동상과도 차이가 있었다. 정전 협정 70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표: 전쟁 3년간 유엔군 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변화>

유엔군 사령관 주한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

이름 재임 기간 이름 재임 기간
더글라스 맥아더 1950년 7월〜1951년 4월 월튼 H. 워커 1948년〜1950년 12월
매슈 B. 리지웨이 1951년 4월〜1952년 5월 매슈 B. 리지웨이 1950년 12월 25일〜1951년 4월 12일
마크 W. 클라크
1952년 5월〜1953년 10월 제임스 A. 밴 플리트 1951년 4월 14일〜1953년 2월 11일
  맥스엘 D. 테일러 1953년 2월 11일〜1955년 4월 1일

※미 8군 사령관은 1957년 이후 유엔군 사령관이 겸임

 

 한국전쟁 중의 맥아더와 워커

● 낙동강방어선을 지킨 ‘불독 장군 워커’

워커(1889〜1950)는 1950년 7월 14일 전황이 최악일 때 도쿄에서 부임했다. ‘죽느냐 지키느냐(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방어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지켜냈다. ‘워커 라인’이 무너지지 않아 인천상륙작전 및 북진 반격이 가능했다. 번쩍거리는 철모와 강한 인상처럼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초기 급박한 전황을 지켜낸 ‘불독 장군’이었다.

하지만 워커는 주변에서 두루 신뢰를 받지 못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때 미 육군은 8월 초 리지웨이 중장을 한반도에 파견해 워커의 지휘 방식을 조사했는데 워커의 참모들이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데 놀랐다고 한다. 일부 연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병사들은 투혼을 발휘하던 2차 대전 때와 달랐다. 워커 파면 얘기까지 나올 만큼 맥아더나 참모들은 워커를 신뢰하지 않았다.(핼버스탬, 219쪽)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미국 기지의 워커 동상.

 

워커는 낙동강이 급박하다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맥아더는 알몬드 소장의 미 10군단 지휘권을 워커에게서 분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국군은 왜 잘 싸우지 못하냐며 내놓고 불평을 한데다 매너가 고분고분하지 않아 심기를 건드릴 때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따금 “버릇없는 친구였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워커와 후임인 리지웨이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잘된 것은 미군 탓, 잘못된 것은 국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백선엽, 2009, 175쪽)

 경기도 양평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장군. 지평리 전투는 그의 부임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퇴하고 유엔군이 자신감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 공중증(恐中症) 극복한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

리지웨이(1895〜1993)는 워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12월 27일 한국에 왔다. 그는 오른쪽 가슴 멜빵에 수류탄을 차고 있어 별명이 ‘철의 가슴(Old Iron Tits)’이란 별명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 후방에서 공수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맥아더가 육사 교장시절 체육 교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선택과 천거로 워커 후임으로 왔다고 했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1월호, 124쪽)

그가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때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북진했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밀려 내려오던 때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6일 중공군은 38선을 돌파해 내려왔다.

그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침체되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전황에 따라서는 한반도에서 철수를 검토하는 상황에 부임한 것이다. 그는 유엔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중공군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위력(威力) 수색’은 섬멸을 위한 전초전격이다. 화력을 갖춘 수색 부대를 적진 깊숙이 투입해 적의 반응을 보고 직접 타격도 가하는 수색 및 기동타격전이다.

‘울프 하운드 작전’으로 불린 수도권 위력 수색에 이어 한강 이남까지 범위를 넓힌 ‘썬더 볼트’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때는 직접 헬기로 현장을 순시하면서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자신감을 되찾게 했다. (백선엽 3권, 172쪽)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유리하면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고 불리하면 빠르게 물러나 는 리지웨이의 전술을 중공군이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아 놓는 ‘자석 전술’이라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중공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공격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맞춰 대응하게 했다.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한 장군’이었다.(훙쉐즈, 215쪽)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자서전.

● 맥아더와 다른 길을 간 리지웨이

트루먼 대통령과 확전론, 휴전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맥아더가 해임돼 후임으로 임명된 리지웨이가 워싱턴의 뜻에 맞춰 맥아더와 다른 지휘 노선을 보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리지웨이는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권한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리지웨이, 228쪽) 리지웨이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반격을 가해 섬멸작전으로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중공군과 대치 상황으로 변한 뒤 유엔군사령관이 되었을 때는 전략적 중점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백선엽 장군은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리더십 덕분에 1·4 후퇴로 내주었던 서울을 되찾고 남쪽으로 밀려가던 전세를 뒤집어 반격해 올라가게 됐다고 했다. 다만 유엔군사령관으로 옮겨간 뒤에는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한반도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고 평가했다.(백선엽 1권, 169쪽).

그의 수세적이고 제한전쟁에 머무는 전략으로 예성강 너머의 개성이나 동부 전선에서 금강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작전에 모두 반대했다고 백선엽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이던 1950년 10월 평양∼원산 선까지는 못가도 예성강까지는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가 과거 통일국가로서 전통을 갖고 있어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과거에도 마한 진한 변한 3국의 세 갈래로 나눠진 적이 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공격적인 전선 끌어올리기 작전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백선엽, 2009, 253쪽)

특히 1951년 6월 경 미군이 가진 제7함대 등 전력이라면 동부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압박할 수 있다며 밴플리트 8군 사령관도 적극 관심을 보인 고저(庫底) 상륙작전을 불허했다. 이는 한미 4개 군단이 참가해 원산 동남쪽 30km 고저를 점령하는 등 동부 전선을 훅 끌어올리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양구군 해안면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하는 적군을 포위 섬멸해 동해안 북위 39도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리지웨이는 미 합참에 올리지도 않고 자신의 선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런 리지웨이는 북진 통일까지 꿈꾸던 이승만과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에는 반대 신념이 확고했다. 공군이 만주 지역을 공격하면 공군의 자연적 소모와 전투 손실로 유럽의 미군이 약 2년동안 적의 공군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설사 확전으로 맥아더가 추구하는 승리가 한국에서 달성돼도 다른 곳에서는 균형을 깨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아시아에서 무너지면 유럽도 위험하다며 아시아를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리지웨이, 207쪽)

전사한 장군과 장군의 아들

6·25 전쟁 3년 중 많은 장병들이 희생됐다. 고위 장성들은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거나 부대 시찰을 위해 이동 중 자동차나 항공기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장군의 아들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전시지 표지석. 구자룡 기자

● 워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를 나와 도봉로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면 대로변 검은 돌 위에 4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미 육군 대장 월튼 해리스 워커 전사지’ 표지판이다. 표지석 윗면에는 실제 전사한 곳 주소가 ‘도봉 1동 596-5 번지’로 안내되어 있다. 표지석에서 100여m 떨어진 이면 왕복 2차로길인 ‘도봉로 169나길 55’의 건물에 낯익은 워커 장군의 사진이 2층 벽에 새겨져 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며 했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는 말이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곳에 걸려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실제 사망 지점에 있는 건물 2층에 워커 사진이 새겨져 있다. 구자룡 기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의정부 남쪽에서 손수 지프를 운전했다. 이날 미 24사단 소속 외아들 샘 워커 대위 등에게 북진 전공으로 사령관 표창장을 줄 예정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아들에게 줄 표창장이 있었다. 그는 중앙선을 넘어온 국군 6사단 2연대 소속의 민간인 수리공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에 측면을 받혀 차가 뒤집어지면서 차체에 깔려 야전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관 등 동승자는 중상을 입었다. 워커는 사후 대장에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도 1977년 최연소 육군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 사상 처음으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

 워커 장군의 이름을 띠 지어진 서울 워커힐 호텔의 한 켠에 워커장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洪學之)는 ‘워커가 후퇴하던 길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는데 상대의 후퇴길이 어느 정도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전사를 기록하기보다 적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자신들 편의에 맞게 꾸민 것이다.(훙쉐즈, 174쪽) 심지어 북한중앙통신은 2년여가 지난 기사에서 워커가 인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 날조했다.

● 헬기 사고, 작전 중 사망 미국 장교들

 경기도 여주의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1894〜1951)은 1951년 1월 31일 제9 군단장으로 부임해 3주만인 2월 24일 ‘킬러 작전’을 전개하며 ‘남한강 도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여주 북쪽 한강변에서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킬러 작전’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고 반격의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2월 13〜15일) 이후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공세작전이었다. 사고 현장인 경기도 여주에는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와 ‘무어 장군길’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장성은 워커 중장과 무어 소장 두 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아들은 모두 142명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은 부자(父子) 모두 함께 전장에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미 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미군 고위 장성의 자녀 중 사상자는 35명이었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50년 졸업 기수 전사자 추모비. 6·25 전쟁이 나던 해 졸업해 투입돼 초급 장교로 근무하다 숨진 것이다. 구자룡 기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49년 졸업생 전사자 추모비. 동기생들이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구자룡 기자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아버지의 항공 지원하에 육상에서 장진호를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클라크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을 입어 제대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129일의 전쟁’, 414쪽)

장진호 전투에서 호수 동쪽을 맡았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매클린 연대장은 적군을 아군으로 오인해 접근하다 붙잡힌 뒤 사망했다. 그는 중공군 80사단에 포위돼 철수 작전을 벌이던 1950년 11월 29일 장진호 동쪽 풍류리강 안곡에서 남쪽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보고 후방에서 오는 예하 2대대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며 접근했다. 그는 중공군 병사들에게 끌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 그는 포로가 되어 이동하다 12월 초 부상당한 상처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뒤에 알려졌다. 동료들은 그를 도로 옆에 묻어주었고 실종 8개월 후 그에게 수훈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애플먼, 189쪽)

 경기도 오산 미공군 기지의 밴플리트 중위의 흉상.

● 밴 플리트 2세의 마지막 편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중위는 아버지가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B-26 폭격기를 몰고 압록강 남쪽 80km 지점의 북한 순천 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포를 맞고 실종됐다.

그는 밴 플리트가 결혼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밴플리트 중위는 2년 전 결혼한 부인과 사이에서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을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며 적지에서의 수색 작업 중단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

밴 플리트는 자신의 아들을 잃은 뒤 자신처럼 한국전선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남정옥, 105쪽)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가족에게 자주 편지를 썼던 밴 플리트 중위는 실종 보름 전 역시 어머니에게 ‘군인의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어 주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승무원(항공사, 폭격수, 기관총사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남정옥, 101쪽)

밴 플리트 2세처럼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미군 조종사는 1920명에 달했다. 한미동맹친선협회가 밴 플리트 대위(사후 대위 추서)의 흉상을 오산 공군기지에 건립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2022년 9월 정부세종청사 내 보훈처 건물 5층 회의실 명칭을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의 채병덕 장군 전사비.

● 백의종군하다 전사한 채병덕 장군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육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인 6월 30일 해임됐다. 채 소장은 백의종군을 자청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임무인 경남지구 편성군사령관이 됐다.

그는 7월 23일 호남을 통해 영남으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오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24일 부산과 마산의 병원에서 모은 가벼운 부상병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해 떠났다. 그 때 갓 태어난 아들 이름을 ‘영광의 진격’이라는 뜻의 영진으로 짓고 하동으로 떠났다. 채병덕은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 7월 27일 전사했다. 아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한 북한군을 검문하기 위해 접근해 “적인가 아군인가?” 라며 묻자 바로 총격을 가했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에는 전사비가 세워졌다.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경남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옆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 거제 = 구자룡 기자

 

1951년 3월 27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여주 미 8군 전진 지휘소에서 한미 양국의 사단장과 군단장을 전원 소집했다. 이날 여주회의를 마치고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으로 귀환하던 김백일 1군단장(소장)이 악천후로 탑승기가 대관령 산중에 추락했다. 유해는 5월 9일에나 발견됐다.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문 준장.

 

이용문 준장(1916〜1953)은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때 6·25가 터졌다. 서울에서 부대가 와해되자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폈고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뒤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다 이듬해 6월 준장으로 군에 복귀했다. 1953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정전 협정 체결을 한 달여 앞둔 그해 6월 24일 남원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검사장 출신 전 자민련 소속 이건개 전 국회의원의 부친이다.

<참고 문헌>

강성학 지음, 『대한민국의 대부, 해리 S. 트루먼』, 박영사, 2021.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3권, 2020.
윌링엄 R. 맨체스터 지음, 박광호 옮김, 『맥아더 2』, 미래사, 2016.
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향군』 1991년 1~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23회] ‘자유의 수호자들’(下)

밴플리트(1892〜1992)는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해 자신의 상관이 된 리지웨이에 비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다. 두 사람은 2차 대전 중에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투입된 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공산게릴라 소탕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마셜 국방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트루먼 대통령이 수용했다.

 

● 그리스 공산 게릴라 토벌한 밴플리트

밴플리트가 부임한 1951년 4월은 공산측과 휴전이 모색되던 때였다. 7월부터는 정전 협상이 시작됐다. 그가 1953년 2월 떠날 때까지 약 2년간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런 분위기는 ‘승리말고는 대안은 없다’는 맥아더와 소신이 같았던 밴플리트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휴전 정책이 군사적 승리를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남정욱, 11쪽) 그는 휴전 협상중에도 전선의 북상을 원했다.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폈으나 격퇴된 것도 밴플리트의 ‘공산 게릴라 토벌’ 같은 단호한 대응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부임 직후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155mm와 105mm 야포 400문을 세워 놓고 밤낮없이 포격을 가했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말이 있다. 좌표를 찍어 적정량을 쏘는 것이 아니라 물량 공세를 펴는 것이다. ‘400문 야포’ 시위도 그 중 하나였다.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한 대규모 중공군 공세 앞에서 서울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미 의회 등에서 탄약 소모량이 너무 많다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밴플리트의 2년 재임 기간에는 다시는 펼쳐지지 않았다. 다만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수세적인 리지웨이가 1년간 유엔군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그의 공격적인 계획은 종종 제동이 걸렸다. 리지웨이가 소극적이고 수세적으로 대응한 대표적인 조치가 밴 플리트가 최북단 통제선으로 설정한 와이오밍선(연천∼고대산∼화천) 이북으로 진격할 때는 도쿄 사령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밴플리트의 탈롱스 작전(맹금 발톱작전), 랭글러 계획(대타격 작전) 등은 동부 전선의 방어선을 밀어올리거나, 평강〜금성〜고지 선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모두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작전 제약 속에서도 휴전선이 지금과 비슷한 위치로 형성된 것은 밴플리트의 공세작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토벌의 경험은 1951년 말 백선엽 지휘하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도 적극 나서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사령관.

● 밴 플리트,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던 미 사령관

한국을 관할하는 미국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은 서로 껄끄러운 일이 많았다.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서로의 지위와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워커는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려만 가는 것에 이승만은 불만을 나타냈다. 북진과 통일에 모두 거부감을 가졌던 리지웨이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밴플리트는 한국에 부임해 처음 이승만을 알게 됐지만 애국과 열정을 존경해 자국의 국가지도자처럼, 이승만은 친자식처럼 대할 정도로 친밀했다.(남정욱, 89쪽) 그는 지휘 계통상 작전 활동 제약으로 군사적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이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밴플리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8군 사령관을 마치고 떠날 때는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밴플리트는 1953년 3월 전역 후 아이젠하워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바로 거절했다. 부임하면 직책상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야 했고 휴전을 반대하는 그의 소신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플리트 사령관

● 한국 국방과 한미 우호의 초석닦은 은인(恩人)

밴플리트는 6·25 전쟁 3년간 6명의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긴 2년간 근무했다. 중공군의 2차례 춘계 대공세를 격퇴한 후에는 휴전회담속에 지리한 고지전을 이어가던 때였다. 밴플리트는 향후 분계선이 될 대치 전선을 밀어올리는 공세를 펴면서도 한국군 전력을 증강하는 많은 조치들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초급 장교 육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전환하고 국군 20개 사단의 증편, 국군 장교들의 미 군사학교 유학 등이 대표적이다. 백선엽은 105mm 포 밖에 없었던 한국군이 1952년 4월 한국군 포병으로 이뤄진 155mm 포 4개 대대를 보유한 2군단의 재창설은 한국군 현대화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88쪽)

한국에서 38년의 군경력을 마친 밴플리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고 여기며 한국과 한국군의 발전,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 한국을 지원하고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2년부터는 한미우호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밴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미국의 카터와 아버지 부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키신저, 이건희 정몽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밴 플리트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1960년 미 사령관으로는 유일하게 동상이 건립됐다.

 ▲마크 클라크 사령관.

● 이승만 제어하면서 존경한 클라크 사령관

클라크 사령관(1896∼1984)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1952년 5월 7일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포로로 잡는 폭동이 일어났다. 휴전협상의 마무리를 위해 파견된 그의 임무가 얼마나 험난한 지 첫날부터 잘 보여주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이 휴전 회담 기간에 땅굴을 파는 등 방위선 구축을 위해 이용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회담은 결국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회담 중 수풍댐이나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크는 휴전 회담을 위해 넘어서야 할 장애가 한국의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단호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일한 무기는 힘’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했다. 미 정부의 지휘를 받는 신분이자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정전 협정에 끝내 협조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우고 이승만이 협정의 조건으로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반대했지만 이승만의 반공 신념에는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경을 나타냈다.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사령관. 그는 ‘승리하지 못한 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에 대해 패배감을 느낀다고 회고록에서 소회를 밝혔다.

● ‘맥아더 확전론’에 공감한 클라크

클라크는 부친이 참모학교 소령일 때 맥아더가 중위로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친교가 있는 사이. 1951년 2월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맥아더는 압록강 이북 중공군 기지 공격을 막는 워싱턴 합참을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다. 훗날 1974년 출판된 자서전 ‘댜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압록강 이북에 적의 안전지대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했고, 그후에도 견해를 바꾼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전임자인 리지웨이와 동기로 밀접한 관계라고 했지만 한국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클라크, 65쪽)

클라크는 자신이 미 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역사는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이승만이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훗날 자서전에서 극찬했다.(클라크, 19쪽). 그가 유럽 전선 ‘다뉴브’에서 겪은 공산주의자의 경험 때문이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도 ‘승리없는 휴전에 서명한 첫 미군 사령관’이라며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 출처 영문 위키

● ‘휴전을 위한 군정가 테일러’

테일러(1901∼1987)는 휴전 협상 막판인 1953년 1월 부임했다. 2차 대전 중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베를린 봉쇄 사태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맹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포병 출신으로 7개 언어가 가능한 명석한 인물로 군정가로도 손꼽혀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317쪽)

군의 경제적 운용을 강조해 탄약과 물자의 소모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테일러는 중공군 격퇴를 위해 적정량을 따지지 않고 포탄을 퍼부었던 ‘밴플리트 탄약’과는 달랐다.

 ▲경기 오산의 ‘초전기념관’에 전시된 딘 소장 사진. 오산 = 구자룡 기자

● 포로 교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딘 24사단장

딘 소장은 북한군과의 초전인 죽미령 전투에 투입된 미 24사단 사단장으로 한국에 왔다가 대전 전투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 포로가 됐다. 그는 “전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있어 2차 대전에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포로가 적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에서 자신이 포로가 됐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미군 장성이다.(최상진, 41쪽)

딘은 부대가 대전에서 북한군에 3면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직접 3.5인치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에 맞서기도 했으나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처음 고립될 때는 17명의 미군 병사와 함께 있었지만 부상한 병사에게 물을 구해주러 나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진 뒤 혼자가 됐다.

지리를 모르는 딘 소장은 60km 떨어진 무주까지 이동했다. 그는 완주군에서 주민 한 모씨에게 돈을 주고 대구로 가는 길 안내를 맡겼는데 그가 북한군에 밀고해 포로가 됐다. 한 씨는 전쟁 후 체포돼 5년형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 형무소에 갇혔다가 나중에는 평양, 압록강 인근의 만포진 포로수용소, 심지어는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 포로 생활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휴전 후 돌아왔다. 그는 만포진 수용소에게서 안흥만이라는 북한군 장교에게 몰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백선엽이 부산에서 5연대장을 할 때 부하였으나 전쟁 직후 북한군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백선엽 2권, 217쪽)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1953년 9월 4일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진 뒤 투항한 북한군 중좌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다. 미 의회는 1951년 1월 그에게 미군에 최고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최상진, 45쪽). 그는 포로 경험 등을 담은 자서전 ‘General Dean’s Story’(1954)를 남겼다.

6·25 전쟁을 함께 한 종군기자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 주한 미국 대사관 기자실. 한국 부임 11개월 가량된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는 ‘인민군이 올해 가을까지는 공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격임박설이 끊이지 않아 그날 새벽에도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때 대사관 복도에서 황급히 오가는 한 정보관과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망할 놈들, 8사단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38선을 넘어온 모양이야?”

제임스는 기자실에서 1시간 반 가량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당시는 실제 싸움이 없는데 과장된 보고들도 많았다. 그는 아시아에서 오래 근무한데다 평소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아 대사관에서 긴급히 열린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한 장교가 (개전 소식을) 워싱턴에 급히 알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제임스는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 긴급으로 송고했다. 6·25 전쟁 첫 외신 보도였다.(굴든, 55쪽)

냉전이 열전(熱戰)으로 전환되고 2차 대전 후 5년 만에 미국 소련 중공 등 강대국이 참전한 가운데 3년 여 계속된 6·25 전쟁의 현장에는 때로는 목숨을 건 많은 종군 기자가 있었고 특종도 쏟아졌다.

 ▲신화봉 기자의 ‘휴전선이 열리는 날’

 

● 맥아더 동행 기자보다 빨리 인천상륙 특종

AP통신의 신화봉 기자는 부산에 있으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특종 보도했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1시 50분 ‘유엔군이 오늘 아침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맥아더 사령부가 공식 발표하기 9시간 전 부산발로 보도했다. 맥아더의 상륙작전에는 도쿄 사령부 출입기자들이 동행해 현장에도 있었으나 이들보다 부산에 있던 신 기자가 먼저 보도한 것이다.

정일권 소장은 후일 회고록 ‘전쟁과 휴전’(1986)에서 상륙작전 이틀 전 신 기자가 보도해 북한이 사전에 알았을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신은 미 제5 해병연대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사전보도하면 ‘이적행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때문에 실행된 후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작전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환자를 인터뷰하고 해군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으며 정일권 소장 명의를 빌려 보도하기 위한 노력 등을 기울였다고 자세히 소개했다.(신화봉, 132쪽)

정일권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뒤 회의에 참석했던 K모 소령과 늦게까지 신 기자가 술자리를 하다 내용을 듣게 됐다고 했다. 정 총장 이름으로 발표한 것도 임의로 이름을 쓴 것이라며 옆에 있었으면 총을 빼들었을 것이라고 했다.(정일권, 131쪽) 하지만 신 기자는 2000년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 총장을 설득해 정 총장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항구의 벽을 올라가고 있다. 사다리는 일본에서 제작해 가져온 것이다.

● 인천상륙작전 알고 보도 안한 기자들

인천상륙작전에서 9m 높이의 인천항 벽을 올라가는 것이 큰 과제였다. 사령부가 일본의 여러 공장에 200개의 알루미늄 사다리를 주문했다. 도쿄 사령부의 기자들은 인천에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외부로 누설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맥아더의 대변인이었던 로우니는 밝혔다.(로우니, 71쪽)

맥아더 사령부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피란민들이 아슬아슬하게 넘어오고 있다. 일부는 추운 겨울 강으로 빠져 떠내려갔다.

●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 특종

6·25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는 ‘폭파된 대동강 철교’다. 이 사진을 촬영한 AP통신의 막스 데스포 기자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데스포는 전쟁이 터진 1주일 후 급파돼 3년 동안 줄곧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는 1950년 11월 말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미군과 함께 움직일 때 수천 명의 피난민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넘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이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2월 4일 다리를 폭파한 이후 남은 구조물로 아슬아슬하게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떠내려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글쓰는 기자는 몇 명 있었지만 사진 기자는 자신 혼자였다고 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적의 추격으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잠깐 동안 찍은 8장의 사진 중 한 장이 부서진 철교 사진이었다.

 ▲경기도 오산의 ‘초전기념관’에 전시된 마가렛 히긴스의 사진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면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구절이 쓰여있다

●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 마거릿 히긴스

종군 여성 기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는 개전 직후 도쿄에서 건너와 1950년 말까지 취재했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가는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호에 동승해 맥아더로부터 ‘미 지상군 파병’ 얘기를 듣고 특종을 낚았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을 취재한 뒤 돌아가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을 집필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 병력을 섬멸하고 경남 통영을 탈환하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기사를 써서 지금도 해병대 애칭으로 쓰인다.(‘1129일간의 전쟁’, 533쪽).

히긴스는 한국전쟁 보도에 대해 “준비 안 된 군대가 겪은 절망과 공포의 순간들을 사실 그대로 전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을 미국내에 조성하는 것”이라고 했다.(히긴스, 135쪽)

6·25 개전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장이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남자 야전복을 입은 히긴스 기자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김백일 군단장을 통해 한국군 전선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를 하게 됐다. 히긴스를 대대본부로 데려갔더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일선을 보고 싶지 대대본부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500m 이상 전방 능선까지 가서 소대 병사들이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곳으로 갔다. 히긴스는 병사에게 요즈음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하루 세 끼 주먹밥 한 개씩을 먹는데 반찬은 소금이라고 대답했다. 더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묻자 “임무가 적을 격퇴시키는 것인데 개인적인 소원이 있겠느냐”고 해서 강 전 총리는 통역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강영훈, 151쪽)

히긴스는 은퇴한 뒤 1965년 베트남을 여행하던 중 풍토병에 감염돼 치료받다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히긴스의 딸 린다 밴더블릿씨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군인도 아닌 그를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해 예우했다.
 

● 반공포로 석방 특종

UP 통신 이상규 기자는 1953년 6월 18일 새벽 부산 동래에서 일을 보고 부산으로 나오다 포로들의 탈출 광경을 목격했다. 서울 취재본부인 내자아파트에 전화를 기사를 불러 5시 40분 경 1보가 타전됐다. 이날 부산 마산 광주 논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석방이 개시된 것은 오전 2시경이어서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첫 보도가 나갔다.(이용호, 117쪽)

● 아이젠하워 극비 방한 스토리로 퓰리처상

1952년 11월 한국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그해 12월 2일부터 5일까지 극비 보안속에 한국에 왔다. 수행 기자는 6명이었는데 기자들은 가족들에게도 출장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기사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떠난 후 보도하도록 했다.

동행 기자 중 AP통신의 돈 화이트헤드 기자는 아이젠하워의 극비 방한 기사 ‘거대한 속임수(the great deception)’로 1953년 국내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2년 11월 29일 새벽 5시 30분, 두 사나이가 뉴욕의 모닝 사이드 드라이브 60번지 저택문을 통해 별이 총총한 차가운 밤거리로 급히 걸어나왔다. 추위를 막으려는 듯 코트깃을 세운 그들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재빨리 오르자 차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비밀경호원 에드워드 그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 ‘평화 열차(peace train)’ 휴전협상 취재

판문점 휴전회담을 위해 유엔군 대표단 숙소 및 지원시설을 갖춘 전방기지가 문산역 인근에 설치돼 ‘문산 베이스 캠프’라고 불렀다. 문산역 구내에는 11개의 객차 침대차 식당차 조리실로 구성된 유엔측 기자들의 전방취재 공간이 마련됐는데 이를 ‘평화 열차’라고 불렀다. 서울 내자(內資) 아파트에는 각 외신 언론사의 사무실이 있어 두 곳이 휴전회담 취재의 두 포스트였다. 한국 전쟁 중 이 두 곳을 거친 외신기자는 500명 이상이었다.

내외신 기자들은 서울에서 문산까지는 각 자의 지프차, 문산에서 판문점은 헬기를 타고 다녔는데 회담 초기에는 평화열차에서 숙식을 하다, 회담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관심이 많이 줄었다.(이용호, 109쪽)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의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파주 = 홍진환 기자

 

● 6·25 전쟁 순직 종군기자 18명

한국기자협회는 6·25 전쟁을 취재하다 순직한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 등 국내외 기자 18명(국내 1명, 외국 17명)의 추념비를 건립했다. 전국 일선기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 지원을 받아 1977년 4월 27일 파주 통일공원 내에 추념비를 마련하고 매년 추도식을 갖고 있다.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설계한 추념비는 타자기 모양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 위에 저널리스트의 머리글 ‘J’자를 본 딴 텔리타이프 종이가 높이 솟은 형상이다. 추념비 윗부분에는 승리의 월계수와 기자정신을 상징하는 펜을 쥔 손, 한국전쟁을 뜻하는 지구가 조각돼 있다.

한규호 기자는 개전 직후 북한군이 국군 복장과 견장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서울에 남아있던 한 기자는 신문 보도로 이름이 알려져 북한군에 체포돼 피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 문헌>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

 

08.30 에필로그

 [24회]잊혀서는 안되는 6·25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의 ‘연희 104고지’ 안내판. 구자룡 기자

 

서울 신촌을 오가는 버스에서 ‘연희 104고지’ 정거장을 문득 본 적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5월 초 지인 2명과 함께 찾아가 보니 주택가 뒤편으로 단 비탈길 입구에 빨간 글씨로 ‘해병대수도서울 탈환 104고지 전적비’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면 작지 않은 공터 한 켠에 전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탈환을 위한 해병대의 경인지구 작전 지도가 소개되어 있다.

인천상륙 이후 13일만에 서울을 탈환할 때 두 번 뺏고 뺏기는 육탄전속에 최후의 고비였던 연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기자가 근무하는 서대문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전 70년’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니고 연희고지 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미국에서 6·25 전쟁은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전쟁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시리즈는 정전 70년을 맞은 올해 ‘6·25가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틈틈이 현장을 다니며 주 2회씩 마감을 하다보니 어언 시리즈를 마쳤다. 6·25가 잊혀지지 않고 나아가 ‘북핵 위협’ 시대에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시리즈의 보람으로 삼으려 한다.

● 공간이 주는 영감과 상상력

▲경기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시계 조형물. 미군이 북한군과 맞섰던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반이 표시되어 있다. 오산 = 구자룡 기자

 

전국에 흩어져 있는 6·25 전투 현장의 전적비 위령비 충혼탑 충혼비 기념관 박물관 등 흔적을 찾아다녔다. 처음 찾아간 곳은 6·25 발발 후 한국에 첫 파병된 미 보병 24사단 선발대 ‘스미스 특임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벌인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평화공원’. ‘초전기념관’이 있다는 이곳에 가면서 ‘70여년 전 전투가 있었던 곳의 돌덩이(기념비 충혼비 등)를 본들 당시의 복잡했던 전황을 이해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자료를 하나라도 더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념공원의 시계탑 조형물을 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1,2차 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군이 이름도 잘 안 알려진 한반도 북쪽의 ‘공산 괴뢰 집단’의 군대와 만나 첫 전투에서 버틴 시간이 불과 6시간 반이었다니! 시계탑 조형물 등을 세워놓은 죽미령 평화공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영감과 상상력이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때 이후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충전된 기운이 조금은 무모하게 시작한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긴 여정’을 지탱해 준 에너지가 됐다.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국가수호 현충시설’은 1312건이다. 독자들이 가까이에 있는 어느 곳이라도 한 곳에 들러 6·25에 대한 관심을 갖는 실마리를 찾기를 기대한다.


▲강원도 인제의 현리전투 위령비. 현리전투에서 숨진 장병들을 화장한 곳에 세워졌다. 인제 = 구자룡 기자

 

● 현리 위령비의 서늘함

전투과 상처의 흔적을 찾아 하나 하나 현장을 갈 때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대표적인 곳이 ‘현리 전투 위령비’였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 듯 산길을 따라 올라 현리전투 위령비를 찾아갔을 때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현리전투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전사한 장병들을 화장한 곳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는데 영령들이 주위에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경기도 가평의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새겨진 벽화. 영국 글로스터 대대원중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난 병사는 극소수였다. 가평 = 구자룡 기자

 

경기도 가평의 설마리 전투에서는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사실상 옥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추모공원에 귀환한 병사가 부인과 딸을 만나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추모공원에 새겨진 벽화처럼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난 병사는 사실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국군은 용감했다

6·25 전쟁 3년의 전황을 분석하는 많은 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미군에 비해 한국군이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군의 기강도 엉망이었다. 실전 경험과 지도력을 갖춘 장교가 거의 없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공중증(恐中症)’으로 중공군만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미군이 제공한 고가의 무기와 장비도 내팽개쳐 중공군 손에 넘어가게 했다. 중공군은 미군이 아닌 중동부 전선의 한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등등.

경기도 의정부 축석령에 세워진 ‘포병용사 김풍익전투기념비’. 의정부 = 구자룡 기자

 

이번 시리즈 취재를 위해 현장을 다니면서 그게 다는 아니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의정부 축석령을 지키던 2사단과 육군포병학교 교도대 등은 북한 전차와 만나 50m까지 전차가 근접해 포격을 가한 뒤 적의 전차포 사격으로 전사했다. 근접 포사격은 육탄 돌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전 직후 홍천 전투에서 6사단 19연대 11명의 육탄돌격대는 수류탄만 들고 적의 전차를 타고 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집어 넣었다. 휴전 협상 중 고지전 혈전이 벌어지던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 30연대의 삼용사는 수류탄을 들고 적의 기관총 진지에 들어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잘 된 것은 미군탓, 안되면 한국군 탓’하는 미 8군 사령관이 있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한국군이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한국군만을 탓할 것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열악한 상황속에서 분투했던 국군에 대해 애틋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도 됐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한미원조기념관. 중공군 13병단의 포병지휘소 자리에 세워져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새삼 다시 본 ‘단둥의 6·25’

베이징특파원 시절 김정일의 방중이나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북중 관계에 변화 조짐이 보일 때 접경 도시 단둥에 종종 갔다. 단둥 시가지 뒤편의 항미원조기념관에도 종종 들렀다. 그런데 이번에 시리즈를 위해 단둥에 가서 ‘단둥의 6·25’를 새롭게 보았다. 과거 단둥에 갔을 때는 현재의 북한을 보기에 바빴다. 북중 교류, 제재를 피하는 밀수, 탈북자, 달러벌이 일꾼 등을 수소문하고 다니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 위에 펑더화이가 중공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그런데 단둥은 현재는 북중 교역의 최대 관문일 뿐만 아니라 6·25 전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미국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압록강 단교(斷橋)’ 위에 중공군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하는 장면의 조각상이 생생했다. 압록강 상류에는 중공군이 도하하기 위해 부교를 놓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6·25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끝나지 못한 데는 단둥에서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중공군의 참전과 무관지 않다. 한중 교류 30년이 지났으나 중공군의 ‘정의롭지 못한’ 6·25 참전의 업보는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 ‘6·25 국제연대의 힘 살려야’


경기도 양평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전시된 세계 지도에 전투병, 의료, 물자지원국들이 표시되어 있다. 양평 = 구자룡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요일 새벽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 같은 무도한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세계 많은 국가가 불법적인 침략이라고 규탄한다. 그럼에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 등이 무기를 지원하고 군수 물자나 의료 장비 등을 지원하지만 전투 병력을 직접 파견한 국가는 없다.

6·25 전쟁 때는 어땠나. 발발 24시간만에 유안안보리가 ‘북한의 남침은 평화의 파괴’ ‘북한군의 침략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 등을 요구했고, 이틀 후 회원국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미국 178만 9000여명, 영국 5만6000여명 등 연인원 195만 여명이 참전했다. 전사자만 3만7900여명이다. 6·25 당시 한국 지원은 ‘16+6+38=60’이다. 전투병 파병 16개국 외에 의료지원 인원 파견 6개국, 물자지원국이 38개국이다.

캐나다 총리는 파병을 결정하면서 “특정 국가와의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다수의 국가가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하나로 뭉친 것은 유사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금은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마비된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소련이 침략국인데다 중국이 편을 들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올해 정전 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행사는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행사로 열렸다. 70년 전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리고,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던 국가들은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한국이 그들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연대의 끈을 굳게 할 공통의 유산이 있는 귀중한 우호 우방국가들이다. 한 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는 이제 한국과 세계 각 국을 잇는 귀중한 자산으로 만드는 것은 피로 지켜낸 이 땅을 물려받은 우리의 몫이다.

참고문헌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각 장의 뒤에 참고문헌을 소개했다. 6·25 전쟁의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주요 문헌을 분야별로 소개한다.


◇ 6·25 전쟁의 정책 결정자, 지휘관, 직접 참관자가 쓴 자서전 회고록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3권, 책밭, 2020.
신화봉 지음, 『휴전선이 열리는 날』, 한국논단, 1993.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정일권 지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광명출판사, 1996.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
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해 쓰다』, 앨피, 2018.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지문각, 196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 6·25를 학술적이고 논쟁적으로 분석하기보다 대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책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미디어, 2017.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남시욱 지음, 『6·25 전쟁과 미국』, 청미디어, 2015.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바브 드러리 & 톰 클라빈 지음, 배대균 옮김, 『장진호 전투』, 진한엠앤비, 2017.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 지음, 최필영 윤상용 옮김, 『이런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9.
윌링엄 R. 맨체스터 지음, 박광호 옮김, 『맥아더 2』, 미래사, 2016.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조셉 굴든 지음, 김병조 발췌 번역, 『한국전쟁 비화』, 청문각, 2002.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