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08/
08.01(화) 21세기 ‘빅 브러더’ 머스크

▲일러스트=이철원
동서고금 역사에서 최고 권력자는 대개 황제나 장군, 종교 지도자였지만, 예외도 있었다. 주로 거부들이었다. 15세기 유럽에서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이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이후 300년 가까이 서유럽의 권력 실세였다. 금융업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4명의 교황과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며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등 ‘문화 권력’ 기능도 했다.
▶16세기 중부 유럽에선 야코프 푸거 가문이 권력 실세였다. 푸거 가문은 독일 지역 ‘면죄부’ 판매 대금을 로마로 운송하는 금융업으로 부를 쌓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정경유착을 통해 광산 개발권을 독점, 유럽의 금(金), 은(銀) 최대 공급자가 됐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확장 전쟁 배후엔 항상 푸거 가문의 재정 지원이 있었다.
▶19세기엔 유대인 혈통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정치와 금융을 좌지우지했다. 로스차일드 5형제는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에 둥지를 틀고, 긴밀한 정보 교환과 다국적 투자로 부를 쌓았다. 영국 웰링턴 장군이 나폴레옹 프랑스군과 워털루에서 싸울 때, 프랑스의 봉쇄령을 뚫고 군자금용 금을 몰래 영국군에 전달해 영국의 승리를 도왔다. 막강한 정보 네트워크 덕에 영국군 승리 정보를 먼저 이용, 헐값이 된 영국 국채를 매집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기도 했다.
▶19세기 미국 월가에선 JP모건이 ‘금융 황제’로 군림하며 세계 금융을 지배했다. 그는 남북전쟁 무기 거래, 철도 건설, 은행업으로 거부가 됐다. JP모건 은행은 1907년 공황으로 은행이 대거 파산할 때 구제 자금을 풀어 위기를 진화하는 등 수십년간 미국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유럽 각국 정부는 재건 자금 조달을 위해 앞다퉈 JP모건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로스차일드, JP모건을 능가하는 초국가 권력자로 부상하고 있다. 전기차로 세계 자동차 시장을 뒤엎더니, 스타링크 사업으로 전 세계 인공위성의 40%를 가진 ‘우주 권력자’가 됐다. 그가 미 정부의 요청을 묵살하고 스타링크 지원을 거절하는 통에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이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 007 시리즈 ‘스펙터’에선 세계 통신망을 장악해 미·소 핵전쟁을 유발한 다음 무주공산이 된 세계를 장악하려는 희대의 악당이 등장한다. 머스크가 조지 오웰이 경고한 ‘빅 브러더’ 같은 통제불능 괴물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08.02 독일인의 낮잠

▲일러스트=박상훈
스페인 사람들이 즐기는 낮잠 ‘시에스타’는 ‘여섯 번째 시간’이란 뜻의 라틴어 ‘hora sexta’에서 왔다. 가톨릭에서 하루 중 여섯 번째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대략 정오라는 데서 비롯됐다. 포르투갈 남부에서 시작돼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부 유럽으로 퍼졌다. 여름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나라들이다. 대신 습도가 낮아 그늘에 들어가면 에어컨 없이도 쉽게 잠들 수 있다.
▶오후 2~3시쯤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는 몸의 변화를 ‘애프터눈 슬럼프’라 한다. 졸음운전 사고 비율이 가장 높은 시간대이기도 하다. 시에스타는 이런 사고를 줄여주는 기능도 있다. 깨어 있는 동안 뇌에는 피로 유발 물질인 아데노신이 쌓이는데 낮잠은 이 농도를 낮춰 줘 사고 위험을 줄이고 오후를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북유럽엔 시에스타 문화가 드물다. 독일은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시에스타를 남유럽인이 게으른 증거로 본다. 독일인은 기상 시간도 전 유럽에서 가장 이르다. 오전 6시 23분에 일어나 밤 10시 47분에 잠든다는 통계도 있다. 2010년대 국가 부도 위기에 빠진 그리스가 독일에 채무를 못 갚겠다고 버틴 적이 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이 뉴스를 전하며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 춤추며 노는 장면을 표지 그림으로 썼다. 놀고먹으며 낮잠이나 자는 조르바처럼 굴다가 빚쟁이가 됐다고 지적했다.
▶독일 남부의 광활한 구릉지대인 흑림(黑林)은 여름 최고기온 평균이 섭씨 25도에 불과하다. ‘독일엔 여름이 없으니 낮잠도 필요 없다’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독일에서 “남유럽처럼 시에스타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32~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여름마다 반복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독일 정부도 “더위에 낮잠을 자는 것은 나쁜 제안이 아니다”라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메르켈 전 총리가 재작년 퇴임하며 “독서와 낮잠을 즐기겠다”고 한 것에도 낮잠에 대한 독일인의 인식 변화가 깔려 있다.
▶다만, 독일인답게 낮잠의 효용을 강조한다. 한 의대 연구팀은 낮잠을 자면 밤에만 잘 때보다 기억력이 5배 높아진다며 두뇌를 쓰는 전문직일수록 낮잠을 즐기라고 권했다. ‘게으름의 즐거움에 대하여’라는 책도 나왔는데 낮잠이 건강에 미치는 좋은 영향을 강조한 의학자의 저서다. 긴 낮잠이 중요한 밤잠을 방해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도 많지만 기후변화는 낮잠에 적대적이었던 독일인의 생각마저 바꾸고 있는 것 같다.
08.03 서울 거리 ‘히잡 소녀’들

▲일러스트=이철원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가 쓴 장편 ‘눈’은 히잡을 벗기려는 세속주의 정부와 종교적 전통을 지키려는 무슬림의 충돌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여학교에서 히잡을 못 쓰게 하는 교장 지시에 반발해 소녀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에 나선다. 알고 보니 이 소녀는 이슬람식 조혼을 강요받고 반발해 죽었다. 그걸 마을의 무슬림들이 국가의 히잡 금지 때문에 죽었다고 조작했다. 무슬림 악습 탓에 목숨을 버린 소녀가 순교자로 둔갑한 것이다. 작가는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그렸다”고 했다.
▶지금도 이런 여성 억압이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선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길을 걷던 여성이 탈레반 남자들에게 붙잡혀 즉결 처형을 당했다. 유튜브로 이 장면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란에서도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검거된 20대 여성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 여성이 오히려 가족 손에 죽는 명예 살인도 여전히 남아 있다.
▶종교에 짓눌려 살아온 무슬림 여성들에게 한국이 숨통을 트는 문화적 해방구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젊은 여성이 히잡을 쓰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들은 부모 아닌 또래들과 방한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관광공사 2020년 자료를 보니 가족·친척과의 방한은 58%였고, 나머지는 혼자 여행하거나 친구·동료와 동행했다.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이슬람 국가의 한국 방문자 중 20~30대 여성은 2021년 8%에서 2022년 17%로 급증했다. 올해는 6월 말 현재 21%다. 많은 중동 국가에서 여성 외출은 남성이 동행해야 가능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동남아 이슬람 국가에서 온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던 코로나 이전과 달리 요즘엔 넷 중 한 명은 여성 억압이 심한 사우디와 이란 등 중동 출신이다. 서구 젊은이들처럼 K팝과 K뷰티, 넷플릭스 드라마에 매료돼 한국을 찾는다. 가족 단위로 여행 오는 이들도 대개 딸들이 한국행을 조른 경우고, 국내 여행 동선도 그들이 짠다.
▶서울처럼 밤 11시 넘어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계 대도시는 흔치 않다. 젊은 외국인 여성이 심야에 한강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한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친구들이 걱정하자 “여기는 서울이야!” 했더니 안심하더라는 얘기도 있다. 히잡 소녀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젊음을 누리는 날이 오기 바란다. 40년 전 테헤란과 카불에선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거리를 활보했었다.
08.04 초전도체 연금술

▲일러스트=이철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동시에 연금술사였다. 만물이 물·불·공기·흙 4가지 원소로 구성됐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근거해 납의 성질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수학 교수로 일하던 케임브리지 대학 지하실에서 하루 17시간씩 30년 넘게 연금술을 탐구했다. 결혼도 안 했다. 과학 발전으로 ‘원자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확산해 연금술이 폐기되기까지 2500여 년간 뉴턴 같은 사람들이 꿈의 기술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한 번 힘을 주면 추가 에너지 공급 없이 영원히 움직이는 ‘무한동력’도 고대 사람들이 꿈꾸던 기술이다.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이 연구했지만 19세기 중반 열역학이 정립되며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오랜 기간 무한동력에 대해 연구하고, “불가능한 인류의 망상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꿈의 기술, 꿈의 물질 개발이 항상 실패하는 건 아니다. 미래 신소재 중 하나인 그래핀이 대표적이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로만 이뤄진 얇은 막으로, 두께가 원자 1개 크기인 0.2나노미터에 불과하지만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하다. 이 존재는 1947년 이론적으로 입증됐지만 갖은 연구에도 만들어지지 못하다가 2004년 의외로 간단한 방법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탄소 뭉치인 연필심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가 떼고, 그 테이프를 다른 셀로판테이프에 붙였다가 떼는 방식을 반복해 얇은 그래핀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연구자들이 꿈의 물질로 불리는 상온 초전도체를 개발했다는 주장이 나오며 전 세계 과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전기 저항이 아예 없는 초전도체 물질은 그동안 수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지만 영하 200도 이하 극저온이나 초고압 환경에서만 구현됐을 뿐이었다. 실제로 상온 작동 초전도체가 나온다면 손실 없는 전력 공급이 가능해져 전 세계 전력 인프라 문제가 해결되고, 컴퓨터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는 혁명적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연구팀은 납·구리·인 등 구하기 쉬운 물질을 수차례 가공해 초전도체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대판 연금술과 같다. 다만 실제로 상온에서 전기 저항 제로(0)가 구현되는지는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관련 주가가 폭등하고 세계적인 초전도체 열풍에 불을 당겼지만 아직 흥분하기는 이른 것 같다. 인류의 삶을 바꿔 놓을 기술 혁명인지, 제2의 ‘황우석 사태’가 될지 차분히 전 세계 학자들의 검증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08.05(토) 사람보다 비싼 개·고양이 진료비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경기도의 한 유료 주차장에서 바닥에 엎드려 있던 대형견 골든 리트리버가 진입하던 승용차에 치여 부상을 입었다. 갈비뼈 8대 골절, 기흉에 양쪽 대퇴골이 다 빠지고 금이 간 중상이어서 5차례 수술 받느라 치료비가 4000만원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 차량 보험사가 몇 백만 원밖에 보상을 못 해준다고 하자 견주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반려견 치료비 4000만원을 놓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운전자 책임이 크다”는 주장과 “개를 방치한 견주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소형견 몰티즈 3마리를 14년간 키워온 지인은 각각 방광암, 심장판막 비대증 등을 앓던 반려견들 병원비로 그간 지출한 돈이 1억원을 훌쩍 넘는다고 했다. 방광암 수술 받고 중환자실에 열흘간 입원한 비용이 1000만원, 빈혈로 수혈받는 데 1회 90만원 등 동물 병원 진료비가 생각 외로 비싸기 때문이다. 통장이 그야말로 ‘텅장’(텅빈 통장)이 됐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가장 큰 부담이 동물 병원 진료비다. 지난해 기준 한 마리 월평균 양육 비용이 약 15만원인데 그중 71.8%가 동물 병원 진료비로 나갔다는 통계도 있다. 반려동물의 동물 병원 방문 횟수가 연평균 4.6회다. 암, 심장병, 결석, 치매 등 반려동물도 나이 들면 병치레가 잦아져 병원 갈 일이 많아진다. 개나 고양이는 증상을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니 진단하느라 갖은 검사를 하다 보면 1회 진료비가 수십만 원 나오기는 예사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전국의 동물 병원 1008곳 진료비를 조사했더니 ‘엿장수 맘대로’ 가격이었다. 지역별로 편차도 커서 세종시 초진료는 7280원, 충남은 2배 가까이 되는 1만3772원이었다. 같은 지역에서도 초진 진찰료가 3300원인 곳이 있는가 하면 5만5000원으로 16배 넘게 비싼 곳도 있었다. 입원비는 고양이가 최고 50만원, 대형견은 35만5000원인 곳도 있었다. 서울의 주요 대학 병원 1인실이 하루 45만~46만원인데 그보다도 고양이 입원비가 더 비싸다.
▶우리나라는 서너 가구에 한 집꼴로 개나 고양이를 키워 반려견·반려묘가 800만마리쯤 된다. 이 중 100마리에 1~2마리꼴로 주인에게 버림받아 연간 유기 동물 숫자가 12만마리나 된다. 진료비 표준화 등을 통해 동물 병원의 황당한 바가지 요금이 사라지고, 펫 보험 가입이 늘어나는 등 반려동물을 책임 있게 키울 환경이 정착되어야만 병들고 나이 들었다고 반려동물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행태도 줄어들 것이다.
08.07(월) 4만년 만의 부활

▲일러스트=이철원
‘아기공룡 둘리’는 1억년 전 빙하기에 냉동됐다가 얼음이 녹는 바람에 현대에서 깨어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선 과학자들이 중생대 때 호박에 갇힌 모기에서 공룡 피를 추출, 공룡 DNA를 복제한다. 현대 과학자들은 두 모델을 합친 방법으로 매머드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창업한 바이오 스타트업은 동토층에서 발굴된 매머드 사체에서 DNA를 추출, 아시아 코끼리 난자에 넣어 수정란을 만드는 방법으로 메머드의 부활을 추진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한 물리학자가 불치병 치료, 인간 수명 연장의 해법으로 ‘냉동 인간’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시신을 냉동 보존해 두었다가 먼 미래에 깨워 다시 살게 하자는 것이다. 미국 한 기업이 아이디어를 사업화했고,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첫 냉동 인간이 됐다. 전신 냉동 가격은 20만달러, 머리만 냉동은 8만 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냉동 인간은 600여 명에 이르고 대기자가 3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영화 ‘아바타’에선 우주인들이 냉동 수면에 들어가 4.37광년 떨어진 행성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체를 냉동시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언젠가 올 우주 개척 시대에 꼭 필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기술적 난도가 높다. 물이 얼음이 되면 부피가 증가해 세포막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난자 냉동은 초급속 냉동으로 얼음 특유의 육각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게 해 세포막 손상을 막는다. 하지만 사람 신체 구석구석까지 동시에 균일하게 급속 냉동시키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시베리아 동토층에서 4만6000년간 잠들어 있던 벌레를 부활시켜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앞서 프랑스 마르세유대학 연구팀은 동토층에서 3만년 동안 냉동돼 있던 바이러스 7종을 찾아낸 바 있다. 잠에서 깬 바이러스는 아메바를 감염시켜 세포막을 파괴하는 등 강한 번식력을 보였다고 한다. 다양한 사례와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 멸종 동물의 부활이나 냉동 인간도 가능해질지 모른다.
▶고대 생명체는 인간 면역체계가 접해 보지 못한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코로나 사태 같은 팬데믹(대량 감염)을 촉발할 수 있다. 2016년 폭염 탓에 시베리아 동토층에서 노출된 사슴 사체와 접촉한 사람들이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탄저균에 감염돼 1명이 사망한 일도 있다. 1979년 지구에서 박멸된 것으로 선언된 천연두 바이러스가 동토층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지구온난화와 자원 개발로 동토층 파괴가 확산되면 미지의 위험도 더 커질 수 있다.
08.08 우리가 잘 모르는 미국, 스몰 타운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서 가족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렌터카로 다녀오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 대낮에 30분이 지나도록 사람은 물론 지나가는 자동차 하나 보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날 무렵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2층짜리 상점 몇 채가 중심지에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식당, 카페 앞을 지나는 주민들이 여유롭게 소일하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금세 인적을 보기 어려운 산과 강이 나타났다.
▶동북부·서부·남부·중서부로 나뉘는 미국에서 스몰 타운 분위기가 강한 곳이 중서부(Midwest)다. 대도시를 제외하면 문도 잠그지 않고 산다. 집집마다 총기를 보유하는 것이 보통이다. 노동자들은 강한 햇빛에 목이 붉게 타 ‘레드 넥(red neck)’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외국인, 유색 인종이 동·서부에 비해 많지 않다 보니 ‘미국 우선주의자들’이 많다. 트럼프의 절대적인 지지 기반이기도 하다. 뉴욕, LA등 대도시만 주로 다녀본 한국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미국의 모습이 이 스몰 타운 속에 있다.
▶미국에서 스몰 타운 주민들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노래가 컨트리 음악이다. 20세기 초부터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으로 옮겨 온 이민자들이 주로 유럽 음악을 바탕으로 발전시켰다. 청바지에 가죽 조끼를 입은 백인이 부르는 음악으로 인식돼 미국의 상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컨트리 음악은 80년대 초까지 돌리 파튼, 케니 로저스 등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후 마이클 잭슨, 신디 로퍼 등의 팝 음악에 밀려났다.
▶미 빌보드의 주간 ‘핫 100′에서 1~3위를 모두 컨트리 음악이 차지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1958년 이후 처음으로 컨트리 음악이 상위 3위를 모두 장악했다. 1위 곡은 ‘스몰 타운에서 그런 짓 한번 해봐(Try That in a Small Town)’다. ‘경찰에게 막말하고 얼굴에 침을 뱉어봐.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해봐. 얼마나 가나 한번 봐’가 주요 내용이다. 할아버지가 선물해 준 총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위 진보의 PC(정치적 올바름) 주의에 대항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노래라는 평가도 받는다.
▶'인종차별’로 비판받던 이 노래는 재선을 꿈꾸는 트럼프가 응원하면서 음반이 팔리고 방송 횟수가 크게 늘었다. 보수·진보 문화 전쟁 와중에 컨트리 음악도 정치화되는 분위기다. 존 덴버는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에서 자연을 예찬하고 목가(牧歌)적인 삶을 노래했는데, 그런 미국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08.09 ‘글로벌 마당발’ 류진 회장

▲일러스트=박상훈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은 ‘글로벌 마당발’로 통한다. 바탕엔 뛰어난 외국어 실력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제학교를 다녔다. 영어, 일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구사한다. 자발적으로 배운 프랑스어에 대해선 “굉장히 로맨틱해서 배우면 활용할 곳이 많다”고 했다. 그는 1년의 절반은 해외 출장으로 보낸다. 비행기 조종사보다 마일리지가 많다고 한다.
▶역대 한미정상회담 뒤에는 류 회장 인맥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들 부시 전 대통령은 류 회장을 ‘소중한 벗’으로 부르며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 1992년 풍산 아이오와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부인 바버라 여사는 그를 만날 때마다 “아이오와의 내 공장 잘 돌아가는가”라고 묻곤 했다고 한다. 부시 일가와의 인연엔 장인인 고(故) 노신영 총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류 회장을 아들처럼 대했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과도 막역해 류 회장은 그의 자서전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노 전 총리의 둘째 딸인 아내 노혜경씨도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국제통이다. 노씨는 미국 필라델피아 헌법박물관 사외이사를 20년간 하면서 이사회 의장을 맡았던 당시 바이든 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류 회장 부부의 국제 인맥은 자주 주위를 놀라게 한다.
▶류 회장은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이다. ‘가문을 욕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사업을 하면서도 ‘서애 할배’의 겸손함을 본받으려 했다고 한다. 최근 류성룡 평전을 영어로 펴냈다. 하지만 집안에서 서애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것엔 반대했다. “자신을 낮췄던 서애 할배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요”.
▶일본 유학 때 꿈은 야구선수였다. 변화구를 잘 때리지 못해 야구보다 농구를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지금은 골프계의 큰 후원자다. 2015년 프레지던츠컵 골프 대회 인천 송도 유치의 주역도 류 회장이다. 당시 인터내셔널팀 선수들이 한 개씩 선물한 골프채로 한 세트가 완성된 골프채가 사무실 한편에 있다. 어려움에 처한 국내 골프 선수들을 뒤에서 조용히 돕고 있기도 하다.
▶지금 전경련은 변신을 꾀하고 있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반도체법 등으로 경제가 안보와 지정학의 압박을 받는 어려운 시기에 류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재계 리더를 맡게 됐다. 막강한 국제 인맥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많다. 그는 30년 만에 피아노를 다시 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재계의 화음도 되돌아왔으면 한다.
08.10 어린이 이용하는 정치

▲일러스트=이철원
러시아가 납치한 우크라이나 어린이와 청소년이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수십만 명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러시아 가정에 강제 입양되거나 수련원을 가장한 집단 캠프에서 재교육을 받는다. ‘전쟁 위험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친(親)러시아 사상을 주입해 ‘푸틴 전위대’로 키우려는 것이다. 세뇌에 취약한 아이들을 이용하려는 전쟁 범죄다.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를 대표하는 홍위병 역시 소년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마오쩌둥 한마디에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기관 책임자들 목에 ‘우귀(牛鬼)’ ‘주자파(走資派)’란 목걸이를 채운 채 끌고 다녔다. 사람들 배를 가르고 간장을 붓기도 했다. 나치 독일은 14~18세 청소년을 ‘히틀러 유겐트’로 양성했다. 히틀러를 위해서라면 부모도 고발하도록 세뇌당했다. 나치 전위대가 돼 죄의식 없이 살인을 일삼았다. 이들은 독일이 항복한 뒤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과거사 반성에서 독일은 일본과는 차원이 다른 나라다. 어떻게든 과거를 분식·은폐하려는 일본과 달리 독일은 나치의 만행을 기록하고 교육한다. 다만 14세 미만 아동들에겐 끔찍한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아우슈비츠 없는 아우슈비츠’ 원칙이 적용된다. 참혹한 유대인 말살 범죄는 빼고 그 전 유대인 차별 등만 가르친다. 강제수용소 견학 프로그램 대상도 14세 이상으로 정했다. 어린이가 이런 사실을 접했을 때 부작용이 더 크다는 뜻이다.
▶지난 8일 국회에서 ‘핵 오염수 저지를 위한 아동·청소년·양육자 간담회’가 열렸다. 참석한 어린이 ‘활동가’ 7명 전원이 10세 이하였다. 6세도 있었다. ‘정치하는엄마들’이란 단체가 주최한 행사였다. 어린이들은 “내가 제일 싫은 건 대통령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걸 찬성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다. “핵 발전을 당장 멈추자”고도 했는데 이들이 원전을 알 리가 없었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의원 5명이 참석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맞는다고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모를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를 보고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유모차 부대가 시위대 맨 앞에 섰던 광우병 소동이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진보적 성향이다. 가톨릭이 금기시하는 동성애, 낙태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다. 그런 사람이지만 과거 대교구장 시절 성소수자 단체들이 집회에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자 발끈했다. 그는 “청소년 한 명의 정서가 입법보다 중요하다”며 “아이들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 말 그대로다.
08.11 엔비디아

▲일러스트=이철원
미 실리콘밸리에는 옷차림으로 상징되는 세 사람이 있다. 검은 터틀넥의 스티브 잡스, 검은색 가죽 재킷의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그리고 회색 티셔츠의 마크 저커버그다. 그중 젠슨 황은 여름에도 공식 석상에선 가죽 재킷을 벗지 않는다. 올 5월 섭씨 30도가 넘는 대만에서 기자가 “덥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난 항상 쿨해요(I’m always cool)”라고 답했다. 그의 가죽 재킷은 엔비디아의 진취적, 도전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젠슨 황의 엔비디아가 내년에 차세대 AI 칩인 그레이스 호퍼 200을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또 하나의 혁신이다.
▶엔비디아는 1993년 실리콘밸리에 있는 식당 체인 ‘데니스’에서 시작됐다. 대만에서 9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간 황은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다. 그는 다른 엔지니어 2명과 커피만 4~5잔 시켜 마시며 데니스 식당 구석에서 사업 계획을 짰다. ‘넥스트 버전(NV)’에 라틴어로 부러움이라는 뜻의 인비디아를 합쳐 회사명을 지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던 황은 게임 그래픽을 개선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주력 제품으로 삼았다. 그 GPU가 다량의 연산이 필요한 인공지능(AI) 학습에 활용되며 엔비디아의 수직 성장을 이끌고 있다. 엔비디아는 최근 1년 사이 시가총액이 3배가 됐다.
▶엔비디아는 반도체 세계의 대만 파워를 보여준다. 세계 파운드리 업체 1위 TSMC을 세운 모리스 창은 젠슨 황의 우상이다. 황은 창에게 “당신은 나의 영웅”이라고 했다. 엔비디아는 삼성 파운드리에도 일부 주문을 하지만 최고급 제품은 최우선으로 TSMC에 맡긴다.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 이상이다. 황은 다른 미국 반도체 업체인 AMD의 리사 수 CEO와도 5촌 친척 관계로 알려졌다.
▶최근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중국 IT 기업이 엔비디아의 GPU A800을 6조6000억원어치 선주문했다. 미국이 엔비디아의 최고 사양 제품인 A100 수출을 통제하자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A800에 일단 돈부터 낸 것이다. 바이두 측은 “엔비디아 반도체 없이는 AI 개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엔비디아 GPU는 전 세계 시장 점유율 90%를 차지한다. 엔비디아가 그 이름처럼 선망의 대상이 됐다.
▶엔비디아도 고민이 크다. 황은 최근 “중국 시장은 대체 불가능하다”며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를 살 수 없다면 그들은 스스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격화하는 미·중 갈등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을 어디로 몰아갈지 궁금하다.
08.12(토) 잼버리도 책임진 K팝

▲일러스트=김성규
미국 최고 인기 배우 겸 가수 매릴린 먼로가 휴전 후 한국에 남은 유엔군 장병을 위문하려고 1954년 2월 방한했다. 혹한 속 야외 무대에서 어깨를 다 드러내고 히트곡 ‘섬바디 러브스 미’를 열창하는 모습, 미 보병 2사단 천막식당에서 장병에게 배식하는 장면 등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나흘 머물며 열 번 공연했다. 무대를 끝낸 뒤엔 “야외 공연은 추웠지만 그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는 인사로 낯선 나라에 파병된 젊은 장병들 마음까지 다독였다. 먼로의 방한은 요즘 말로 대중 스타가 사회에 주는 ‘선한 영향력’을 확인케 한 이벤트였다.
▶우리 가수들의 무대 확장도 처음엔 장병 위문으로 시작됐다. 베트남전 파병 군인을 위한 공연 무대에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인 이미자·김세레나·윤항기·남진·나훈아 등이 섰다. 위험도 무릅썼다. 장미화씨는 “공연을 마치고 헬기를 타는데 총탄이 날아오더라”고 했다.
▶K팝 시대가 열리며 아이돌의 영향력은 전방위로 확장되고 있다. K팝은 우리 말과 글을 세계에 퍼뜨리는 일등 공신이다. 세계 각국 K팝 팬들이 알파벳으로 한국어 가사를 적는 ‘돌민정음’ 유행을 일으켰다. ‘한국언니’ ‘반둥오빠’ 등 K팝 가사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는 유튜브는 조회 수가 수십만에서 백만을 넘나든다. 팝송과 일본 가요 따라 부르려고 영어와 일어를 배우던 세대가 상상도 못 했던 반전을 K팝이 만들어 냈다.
▶K팝은 정치인들에게도 매력적인 협업 파트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중국 국빈 방문 때 당시 최고 인기 보이 그룹인 엑소와 동행했다. 재작년엔 BTS를 문화 특사로 임명하고 유엔총회에 함께 참석했다. 2030 부산 세계엑스포 유치 홍보대사도 BTS가 맡고 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걸그룹 블랙핑크와 미국 인기 여가수 레이디 가가의 합동 공연이 추진되기도 했다.
▶K팝이 어제 끝난 잼버리의 ‘유종의 미’까지 책임졌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 구장에 선 뉴진스·NCT드림·마마무·아이브 등 19팀은 한국을 대표하는 K팝 스타들이다. 이들의 앨범 판매량을 합하면 1000만 장에 육박한다. “150여 나라 틴에이저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K팝 아티스트들에게도 흔치 않은 기회”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참가가 무산된 BTS는 대신 멤버들 모습을 담은 포토 카드 세트를 선물했다. 아미(BTS 팬클럽)도 갖고 싶어 하는 최고 인기 굿즈를 받아들고 귀국길에 오르는 스카우트 대원들 입이 한껏 벌어졌다. K팝의 활약이 무궁무진하다.
08.14(월) ‘태평양 지상 낙원’의 재난

▲일러스트=이철원
할리우드 영화 ‘임파서블’ 무대는 태국의 유명 해변 관광지 카오락이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러 갔다가 쓰나미에 휩쓸린 가족의 탈출기를 그렸다. 행복을 꿈꾸며 떠난 여행이 처절한 생존 투쟁으로 바뀌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우리 재난 영화 ‘해운대’의 무대도 피서객이 몰리는 부산 해운대와 광안리 일대였다. 많은 재난 영화가 휴양지와 관광지를 배경으로 택한다. 가장 행복한 시간에 닥친 불행이 재난의 난폭함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장면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많은 재난이 휴양지에서 발생한다. ‘임파서블’은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생해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나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지중해 관광지인 크레타 섬은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맡은 앤서니 퀸이 해변에서 춤추는 장면 덕에 더욱 유명해졌다. 2021년 섭씨 45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함께 시작된 산불이 이 섬 곳곳에 번졌다. 관광객 수천 명은 짐도 제대로 못 챙기고 탈출했다. 다른 관광지에선 해안으로 대피하다가 불과 물 사이에 갇혀 사망한 이도 있다.
▶태평양 섬들도 재난 피해를 자주 겪는다. 지난 5월 괌을 찾은 관광객들이 시간당 50㎜씩 쏟아지는 폭우와 시속 240㎞를 넘는 강풍을 동반한 수퍼 태풍에 갇혔다. 커다란 야자수가 뿌리째 뽑히고 SUV처럼 덩치 큰 차량이 맥없이 뒤집혀 굴러가는 장면이 TV로 중계됐다. 한국인 관광객 3000명도 발이 묶였다. 먹을 물도 음식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소셜미디어엔 “여행을 와서 전쟁을 겪었다”는 탄식이 돌았다.
▶하와이 제도에서 둘째로 큰 섬 마우이에서 시작된 산불이 ‘태평양의 지상 낙원’으로 불리던 곳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온통 잿빛으로 변한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때마침 불어온 태풍은 비보다 바람을 싣고 오면서 바로 옆 하와이 섬까지 불씨를 퍼뜨렸다. 주민과 관광객 포함,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재난을 지켜보면 자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재난은 예고 없이 닥친다는 사실도 곱씹는다. 그러나 숭고한 인간애도 확인하게 된다. 지난 5월 괌 태풍 때 현재 주민과 관광객들은 물과 음식을 나누며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다. 공항이 다시 열려서 한국행 비행기를 먼저 타게 된 이들은 “컵라면, 생수, 휴지가 좀 남았다. 다음번 귀국하는 분에게 드리고 싶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남겼다. 하와이 화재로 인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대하다. 하와이가 재난을 이겨내고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때다.
08.15 홀인원 미사일

▲일러스트=이철원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우주 공간까지 올라갔다가 엄청난 속도로 목표물에 떨어지는 최초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 반색한 히틀러가 직접 보복 병기(Vergeltungswaffe)란 뜻의 ‘V-2 로켓’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최대 사거리 300㎞의 V-2는 자이로스코프와 무선 지령 등을 통해 종전 로켓보다 정확도를 높였지만 명중 오차가 최소 2㎞에서 최대 수십㎞에 이를 정도로 컸다. V-2는 종전 후 미국과 소련에 넘어가 각종 지대지미사일과 우주 발사체의 원조가 됐다.
▶미사일의 정확도는 전문 용어로 CEP(Circular Error Probability·원형 공산 오차)라 부른다. CEP가 100m라면, 목표점 중심 반경 100m 내에 50발이, 그 외곽 지역에 나머지 50발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위력 경쟁을 벌이다 CEP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CEP를 절반으로 줄이는 게 핵탄두 숫자를 4배, 탄두 위력을 8배로 높인 것과 비슷한 위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과거 북한 탄도미사일은 정확도가 떨어지기로 유명했다. 주력이었던 스커드(최대 사거리 300~500㎞)의 정확도는 450m~2㎞, 노동(최대 사거리 1300㎞)의 정확도는 2~3㎞에 달했다. 어디 떨어질지 몰라 더 겁난다는 농담으로 조롱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2020년 이후 KN-23 ‘북한판 이스칸데르’ 등 신형 탄도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가 등장하면서 환골탈태했다. 미 전문가들도 “북 미사일이 외과 수술식 타격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했다”며 놀라워하고 있다.
▶최근 수도권을 위협하는 북한 장사정포 위협에 대응해 군 당국이 개발한 한국형전술지대지미사일(KTSSM) 2발이 표적에 연달아 정확히 명중하는 영상이 공개돼 화제다. 첫 번째 미사일이 표적에서 불과 1~2m 떨어진 지점에 떨어져 구멍이 생겼는데 두 번째 미사일이 이 구멍에 정확히 떨어지는 이른바 ‘홀인원’을 기록한 것이다. 세계 탄도미사일 개발사상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라고 한다.
▶탄도미사일은 보통 순항미사일보다 정확도가 떨어지는데 KTSSM의 정확도는 1~2m에 불과하다. KTSSM은 2020년에도 해상 표적 한가운데에 명중하며 ‘홀인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우리 양궁 선수들이 먼저 쏜 10점 화살 뒤에 또다시 화살을 꽂는 신기(神技)를 뽐낸 것과 마찬가지다. 고도의 정확도를 갖는 홀인원 미사일들은 핵을 갖고 있는 북한에 우리가 그나마 큰소리칠 수 있는 ‘한국형 비대칭 무기’라 할만하다.
08.16 수상자 200명 넘은 LG 의인상

▲일러스트=김성규
2015년 1월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에 시민 여럿이 갇히자 한 남자가 밧줄을 타고 내려가 불길 속에서 열 명을 구해냈다. 사람들은 ‘동아줄 의인‘이라고 했다. 뉴스를 보고 감동한 생전의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보냈지만 의인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구 회장은 이런 의인을 공적으로 포상하고 사회적으로도 ‘선행의 선순환’ 기풍을 진작하고 싶었다. ‘LG 의인상’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해 9월 나온 첫 수상자는 교통사고로 다친 이를 길에서 보고 응급처치하다가 자신도 트럭에 치여 사망한 특전사 소속 정연승 상사였다. 평소 장애인 시설과 양로원을 찾아 다니며 목욕과 청소 봉사를 하고 소년소녀가장을 도운 사실이 알려지며 의인상을 받았다. 그다음 달엔 정년을 앞두고 순직한 경찰관이, 12월엔 화재 현장에서 쓰러진 소방관이 받았다. 군인·경찰·소방관의 잇단 수상은 ‘제복 입은 이’들의 헌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숨어서 의를 행하거나 위급한 현장에 용감하게 뛰어든 시민들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창원에서 50년 넘게 예식장을 운영하며 형편 어려운 1만4000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지원한 백낙삼씨, 50년 넘게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 6억원을 어려운 이웃에 쓰라며 기부한 박춘자 할머니가 그들이다. 신장 투석 병원 간호사 현은경씨는 화재가 나자 마지막까지 남아 환자를 대피시키다가 쓰러지는 모습이 병원 CCTV에 찍혔다. 그 숭고한 희생도 기렸다.
▶기업이 시민의 선행을 포상하는 대표적인 상으로 자리 잡은 LG 의인상이 198~201번째 수상자를 배출하며 8년 만에 200명을 돌파했다. 많은 의인이 수상에 그치지 않고 또다른 가슴 훈훈한 사연을 피워냈다. 25년간 헌혈하고 헌혈증까지 백혈병 어린이에게 모두 기부한 권재준 경위는 그 사실이 알려져 받은 상금까지 소아암과 혈액암을 앓는 이들 치료비로 기부했다. 수상자 5명 중 한 명이 상금을 다시 세상에 내놨다.
▶구 전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G뿐 아니다. SK는 “나라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달렸다”는 고(故) 최종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50년 넘게 장학퀴즈를 지원하는 등 인재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을 그의 타계 후 ‘국민 컬렉션’으로 사회에 기증했다. 금호문화재단은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을 키워냈다. 좋은 물건 만들어 파는 것을 넘어 기업의 힘으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한다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이 이런 것이다.
08.17 대통령의 아버지

▲일러스트=이철원
20세기 초 미국 동부 재력가로 주영국 대사를 지낸 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장남 조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정치가로 대성하길 바라며 “최고 중의 최고가 되라”고 가르쳤다. 조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장남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가 차남인 존에게 말했다. “형이 없으니 이제 하원의원 입후보는 네 몫이다.” 형의 대타로 정계에 입문한 JFK는 아버지가 깔아 놓은 정·재계 인맥을 타고 1960년 대선에서 압승했다. 6대 존 퀸시 애덤스, 43대 조지 W 부시도 대통령이었던 아버지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치인 수업을 받고 부자(父子) 대통령이 됐다.
▶미국의 모든 대통령이 아버지 도움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빌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나 주정뱅이 계부 밑에서 자랐다. 새아버지가 술에 취해 어머니와 이부(異父) 동생을 때릴 때 클린턴이 이들을 보호하며 자랐다.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오바마는 케냐의 해외 장학생으로 뽑혀 하와이에 유학 온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가 3살 때 부모가 이혼, 아버지가 케냐로 돌아간 후 인연이 끊겼다.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원장은 한국 대통령 중 박정희·전두환·김대중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를 반드시 앞지르겠다’는 의지를 품는데 박정희·김대중이 이에 해당한다고 봤다. 반대로 아버지가 무기력했을 경우엔 노무현·이명박처럼 아버지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고 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 아버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 부친 김홍조옹일 것이다. 거제도의 재력가였던 그는 YS가 20대에 정치를 시작한 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옹이 서울로 올려보낸 ‘YS 멸치’를 받아야 ‘YS 사람’으로 인정받던 때도 있었다. “영샘이는 서울에서 정치 잘하고, 내는 거제에서 사업하면 된다”며 아들의 집권 중 한 번도 청와대를 찾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고의 인생 멘토였다. 아버지가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가치관을 확고히 했다. 미래 지향적 한일 협력을 신념화한 것도 일본에서 유학한 윤 교수 덕분이었다. 15일 별세한 윤 교수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잘 자라줘서 고맙다”였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눈감을 때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08.18 버려지는 꽁초 年320억 개

▲일러스트=이철원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은 생전에 담배를 하루 100개비 넘게 피워 ‘꽁초’로도 불렸다. ‘나와 시와 담배’라는 시에선 ‘나와 시와 담배는/ 이음동곡(異音同曲)의 삼위일체’라 찬미했다. 김소월도 애연가였다.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라고 시에 썼다. 담배의 해로움에 무지했던 시절의 세태가 글에 남긴 흔적들이다. 건강에 미치는 해악이 알려지면서 이제 흡연을 미화하는 작품은 드물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꽁초 공해는 여전히 큰 사회적 골칫거리다 . 우리나라에서 길에 버려지는 꽁초가 한 해 320억개에 이른다는 뉴스가 나왔다. 연간 소비되는 담배의 절반이라고 한다. 나라 밖도 다르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집계해보니 전 세계 한 해 생산되는 담배 6조개비 가운데 4조5000억개비가 함부로 버려진다.
▶담배꽁초는 도시 미관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안전까지 위협한다. 화재를 일으키고 거리의 빗물받이에 쌓여 홍수 피해도 가중시킨다. 해안과 바다를 더럽히는 대표적 쓰레기도 꽁초다. 미국의 한 환경단체가 지난 30년간 해변 쓰레기를 수거했더니 1위가 꽁초였다. 우리나라 해안 쓰레기도 담배꽁초가 21%로 가장 많다. 꽁초 주성분인 플라스틱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생선에 쌓였다가 인간의 식탁에 오른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꽁초 투기를 막기 위한 대책이 쏟아진다. 서울시는 현행 5만원인 꽁초 투기 과태료를 20만원으로 올리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꽁초를 모아오면 1g당 20원씩 현금으로 주는 보상 제도를 도입했다. 꽁초 20개를 모아 와야 새 담배를 살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담배를 팔아 돈 버는 담배 제조사나 담뱃값의 73%를 세금으로 걷는 정부가 책임지고 꽁초를 회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근본적 대책은 결국 흡연자의 인식이 바뀌는 것뿐이다. 한국에선 외면당하는 휴대용 재떨이가 일본에선 정착했다. 규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회 분위기의 힘이다. 심리학에선 꽁초 투기를 막기 위해 ‘깨진 유리창 법칙’을 이용하자고 한다. 멀쩡한 유리창에는 돌을 던지지 않지만 깨진 유리창을 보면 자기도 돌을 던지고 싶어지는데, 뒷골목 등 꽁초 상습 투기 지역에 화단을 조성하면 방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때 꽁초만큼 흉물스러웠던 것이 길바닥에 널린 ‘껌딱지’였다. 그런데 껌을 아무 데나 뱉지 않는 패턴이 정착되며 자연스레 퇴출됐다. 꽁초 투기도 그렇게 사라지게 해야 한다.
08.19(토) 서울까지 닥친 ‘폐교의 재탄생’

▲일러스트=양진경
학생 수 부족으로 올 3월 문 닫은 서울 화양초교와 내년 4월 폐교 예정인 도봉고교를 외국인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시립 유스호스텔로 개발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중국이 한국 단체 관광을 전면 허용하면서 중국인 유커(관광객)가 대거 방한할 것으로 예상되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이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저출산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에는 폐교를 활용한 숙박 시설이 꽤 있다. 일본 오키나와 북부의 아이아이팜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3성급 호텔 겸 체험형 농장이다. 교실을 객실로 단장해 16개 객실을 운영한다. 교무실은 레스토랑이 됐는데 유기농 식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제공한다. 일본 지바현의 초등학교도 1층 교실을 식당과 어린이 놀이 공간, 2층을 숙박 시설, 체육관을 농산물 판매 공간으로 개조해 2015년 오픈 이후 연 방문객이 60만명에 이르는 명소가 됐다.
▶제주 한림읍에는 1993년 폐교한 ‘명월국민학교’가 명칭은 그대로인 채 카페 겸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교실은 ‘1학년 1반’ ‘2학년 1반’ 대신 ‘커피반’ ‘갤러리반’으로 바뀌었다. 폐교 후 한동안 마을 행사나 경조사에 사용되다가 청년회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폐교 재활용에 나선 우수 사례다. 제주의 김영갑갤러리, 충남 당진의 아미미술관처럼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도 있고, 캠핑장이나 청소년 체험 시설도 있다. 전국의 3800여 개 폐교 중 66%는 민간에 팔렸다. 매각, 임대를 합해 폐교의 81%가 민간 손에 맡겨졌는데 성공적인 운영 사례도 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시·도 교육청이나 마을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는 곳도 상당수다. 350여 개는 매각도 임대도 안 된 채 방치 상태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 폐교도 방치하면 금방 흉물이 된다. 모기업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2005년 폐교한 대전의 한 실업계 고교는 담력 과시하는 폐가 체험단들 사이에서 ‘공포 체험 성지’로 꼽히고 있다. 창가에는 부적이 휘날리고 교실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화재 흔적도 있으며 지하에는 물이 들어차 대낮에도 음산한 분위기다. 몇 년 전 심야에 혼자 폐교 체험을 나섰던 30대 남성이 인근 저수조에 빠져 실족사한 사고까지 있었다.
▶서울도 학생 수 240명 이하의 미니 초등학교가 작년 42곳에서 4년 후면 80곳으로 늘 것이라고 한다. 초·중·고뿐만 아니라 전국에 문 닫는 대학교도 속출하게 된다. 시·도 교육청에만 맡겨두지 말고 폐교를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지역 공간으로 재생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08.21(월) 새만금 용도 요지경

▲태풍 '카눈'이 지나간 11일, 잼버리가 열렸던 새만금 야영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잼버리 유치 후 배수로를 충분히 조성하지 않고 낮게 매립했기 때문에 진흙탕 잼버리가 됐다. / 연합뉴스

▲태풍 '카눈'이 전북을 지난 하루 뒤인 11일,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가 열린 부안군 잼버리장 숙영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2023.8.11/연합뉴스
새만금 잼버리 유치는 2017년 8월 16일 확정됐다. 그 석 달 뒤인 11월 23일, 전북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K 의원은 “원래 잼버리 목적은 공항 같은 거, SOC 사업 해결을 위해 유치했던 건데…”라며 질의했다. 전북도 기획조정실장은 “도로, 철도, 항만 등 국가예산으로 추진한다”고 했다. K 의원은 “100% 다 국비?”라고 물어 재확인했다. L 의원도 “(잼버리 유치는) 항만, 철도, 공항 명분을 위에다 주기 위해, 예산을 빼기 위해 아니겠습니까. 그거 굉장히 잘했다고 보는데…”라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13일 뒤인 12월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새만금위원회가 개최됐다. 장관급 10명, 위촉직 민간위원 13명으로 구성되는 심의위원회다. 이 총리는 관광·레저용지인 잼버리 부지를 농업용지로 용도 변경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 농지기금을 활용해 매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잼버리 부지를 행사 후엔 가축사료단지 등으로 활용하다가 (용도를 다시 바꿔) 매각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유치 후 개최까지 6년이나 있었는데 준비가 부족했던 건 매립이 2022년 12월에야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제야 본격 시설 조성에 들어갔다.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은 지난 13일 기자 설명회에서 “매립 후 10년 이상 지나 나무가 자랄 정도로 안정화된 부지가 여럿 있었는데, 아직 메우지 않은 생갯벌을 개최지로 정했다”고 했다. 잼버리 사업비가 1171억원인데 부지 매립비는 1846억원 들었다.
▶잼버리 조직위원회는 2022년 3월 세계스카우트연맹에 프레잼버리와 본 대회를 1년씩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댔지만 실은 준비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 기반 시설 공정률이 37%밖에 안 됐다. 정 의원은 잼버리를 명분으로 끌어간 SOC 예산이 무려 11조원이라고 주장했다. 새만금 국제공항 8000억원, 신항만 3조2000억원,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1조9000억원, 새만금 지역 간 연결도로 1조1000억원 등이다. 대부분 잼버리와는 관계없는 사업들이다.
▶새만금위원회가 열렸던 2017년 12월 6일, 새만금개발청은 잼버리 부지가 포함된 새만금 관광·레저 1지구에 PGA나 LPGA 같은 메이저급 골프대회를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리조트 등 숙박시설과 조정경기장, 승마장 등도 조성하겠다고 했다. 같은 날 한쪽에선 용도를 관광·레저용지에서 농업용지로 바꾸고, 한쪽에선 레저 시설을 짓겠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08.22 골칫덩이 팁 문화, 한국 상륙?
얼마 전 뉴욕 맨해튼 코리아타운에서 직원 12명과 회식한 기업인은 계산서를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한국식으로 고기 먹고 소주와 맥주를 마셨는데, 1인당 우리 돈으로 약 22만원씩 청구됐다. 여기에 20%를 팁으로 내니 팁 값으로만 54만원이 나갔다. 기자가 뉴욕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5년 전엔 음식 값의 10~15% 정도를 팁으로 놓고 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간혹 18%를 팁으로 주면 홀 서빙 종업원에겐 최고의 날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18% 팁을 준 손님에게 웨이트리스가 따져 물었다. “내 서비스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서 팁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맥도널드·서브웨이 같은 패스트푸드점을 찾곤 했다. 하지만 이제 무인 셀프 계산대에서도 팁을 강요받는다. 계산대에 서 있으면 점원이 마지막 단계에서 모니터 혹은 태블릿을 손님 쪽으로 돌린다. ‘15%, 20%, 25%, 스스로 결정’ 그리고 ‘노 팁(No tip)’ 중 고르도록 돼있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점원, 뒷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 눈치 때문에 ‘노 팁’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 기간 고생하는 종업원, 배달 종사자에 대한 배려로 오른 미국의 ‘팁 인플레’가 고착됐다. 여기에 배달 앱과 태블릿 결제 시스템에 자동적으로 팁 결제 과정을 심어 놓으면서 팁은 더 이상 호의가 아닌 가격의 일부가 됐다. 팁 거품이 심해지면서 같은 식당 내에서도 팁을 받는 홀과 못 받는 주방 종사자 간에 수입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팁은 영국 튜더왕조 시절 귀족 문화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것이 런던의 커피하우스로 번졌고, 한 커피숍에서 ‘신속한 서비스를 위해서(To Insure Promptitude)’라고 적힌 박스에 동전을 넣은 데서 머리글자를 따와 팁(tip)이란 말이 탄생했다고 한다. 남북전쟁 후 미국인들이 영국을 여행한 뒤 돌아와 뽐내면서 이를 퍼뜨렸다. 엘리너 루스벨트 미 대통령 부인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무분별하게 팁을 주는 것은 미국인의 저속한 습관”이라고 했다.
▶모빌리티 플랫폼 카카오T가 택시 기사에게 팁을 주는 시범 서비스를 도입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부정적인 반응이 월등히 높다. 의무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사실상 가격이 될까 우려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골프장에도 전 세계에 없을 무분별한 팁이 번지고 있다. ‘호의에 바탕을 둔 작은 성의’라는 기본을 벗어나고 있다. 골칫덩이가 된 미국의 팁 문화를 우리가 수입해야 할 이유는 없다.
08.23 한국민의 敵 정율성 공원

▲일러스트=이철원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당일 청와대가 마련한 만찬 메뉴 중에 통영산 문어 냉채가 있었다. 청와대는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 특산물이라고 소개하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애쓴 분들의 뜻을 담았다”고 했다. 윤이상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고, 범민련 등 6개 이적 단체에서 활동했다. 김일성을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라 불렀고 김일성 생일 땐 곡을 만들어 바쳤다.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을 적으로 삼았다. 사망한 뒤엔 그 아내가 방북해 방명록에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한다’고 적었다.
▶김원봉은 일제 때 중국에서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한 공이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월북해 김일성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요직을 맡았다.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훈장을 받았다. 한국민을 죽이고 한국 국토를 파괴한 공로다. 그런 김원봉에 대해 지난 정부는 집요하게 서훈을 추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칭송했다.
▶정율성은 의열단 활동을 하다 중공 당원이 됐다. 훗날 중공 인민해방군 군가가 되는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해방 후 북한에 가 인민군 구락부장, 인민군 협주단장을 지내며 ‘조선 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해 김일성에게 바쳤다. 6·25 때는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6·25 때 국군과 유엔군 77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민간인 사망·부상·실종자도 100만명에 육박한다. 대부분이 중공군 소행이다. 조선인이었지만 적장의 역관(譯官)이 돼 병자호란 때 우리 산하를 짓밟은 정명수가 떠오른다. 정율성은 1956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중국으로 귀화했다. 1976년 중국 혁명열사 묘에 묻혔고, 2009년 ‘신중국 수립 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문 정부 주중 한국 대사는 광복절 경축 행사에 정율성의 딸을 초청했다. 문 전 대통령은 베이징대 강연에서 “한국 광주시에는 중국 인민 해방 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고 말했다. 정율성은 광주 출신이라고 한다.
▶광주시가 국민 세금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기념 공원을 조성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으로 광주에 ‘정율성로’가 있다는 사실도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광주시장은 “정율성의 업적 덕에 광주에는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며 “광주는 정율성 선생을 광주의 역사문화자원으로 발굴하고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를 죽이고 짓밟은 ‘업적’인가. 마치 정신분열증을 보는 것 같다.
08.24 북한 경제 말아 먹은 분

▲일러스트=이철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침수 피해 지역 현지 지도 과정에서 “건달뱅이들이 무책임한 일본새(일하는 태도)로 국가 경제 사업을 다 말아먹고 있다”면서 김덕훈 내각 총리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총리의 해이함’을 비난한 김 위원장은 “정치적 미숙아들, 지적 저능아들, 책무에 불성실한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 대대적 숙청을 예고했다. 자신이 잘못 해 놓고 다른 희생양을 만드는 것은 김정은이 자주 쓰는 통치술이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후계자 역할을 하던 2009년, 김정은은 돈주(신흥 부자)들이 장롱에 숨겨둔 돈을 끌어 낸다며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현금을 100대1로 교환해 주면서, 1가구당 15만원으로 한도를 묶었다. 설익은 정책은 대참사를 낳았다. 전국 장 마당이 마비되고, 기업, 국가기관 운영이 줄줄이 중단됐다. 민심이 험악해지자 노동당 재정계획부장 박남기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지주의 외손자 출신으로 자본주의를 이식하려 한 간첩이었다”면서 그를 공개 처형했다.
▶김정은의 무자비한 제왕학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 수십만 명의 아사자가 생기자, 미제의 간첩으로 포섭된 노동당 농업비서 서관희의 농단 탓이라면서 그를 공개 처형했다. 또 6·25전쟁 때 행적을 조사해보니 간첩 혐의가 있다며 당 간부 등 2000여 명을 숙청했다. 희생자가 너무 많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간첩단 사건을 조사한 간부들을 “당과 대중을 이간시켰다”면서 또 처형했다.
▶김정은이 국정 실패를 인정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2021년 조선노동당 8차 대회에서 김정은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이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유엔의 고강도 제재, 코로나 사태 과잉 대응에 따른 북·중 무역 중단, 여름철 수해 등 3중고가 겹쳐 비참한 현실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3년 김정은이 ‘핵·경제 병진 노선’을 표방한 순간, 북한 경제의 추락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북한이 핵 개발에 쓴 비용만 185억달러(약 24조원)에 이른다. 15억달러는 핵 실험·탄두 개발 등 직접 비용, 170억달러는 그 돈을 경제 분야에 투자했으면 얻을 수 있었던 소득, 즉 기회비용이다. 둘을 합하면 북한의 한 해 GDP에 육박한다. 외화가 바닥난 북한은 핵 개발 자금을 구하느라 가상 화폐 해킹에 목을 매는 현대판 해적 국가로 전락했다. 북한 경제를 말아먹은 장본인이 누군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08.25 두 얼굴의 인도

▲일러스트=이철원
5년 전 찾았던 인도 수도 뉴델리는 냄새로 기억된다. 도시 곳곳에서 무언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급 호텔 화장실 수돗물에선 역한 하수도 냄새가 올라왔다. 난생처음 생수 물로 이를 닦았다. 얼마 전 인도에 여행 갔던 유튜버가 현지 경찰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뜯겼다는 뉴스가 나왔다.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현지에서 못 느낀 인도의 저력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봤다.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 학원가엔 대만계·한국계와 함께 인도계가 몰린다. 인도에서 천재 소리 듣다가 실리콘밸리의 IT 기업들에 취직한 인도계 엔지니어들은 자식도 최고의 교육을 받아 유망한 테크 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구글·애플 직원 중 30% 이상이 인도계다. 실리콘밸리 특파원 시절 만났던 한 엔지니어는 “아직도 사실상 카스트 제도가 살아있는 인도에선 교육만이 신분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고 했다.
▶테크 분야만이 아니다. 영국 총리 리시 수낙, 미 공화당 대선 후보 비벡 라마스와미와 니키 헤일리가 인도계다. 인도계는 생존력과 적응력, 문제 해결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14억 명이라는 막대한 인구 속에서 살아남고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 같은 능력을 습득했다는 분석이 많다. 특히 많은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은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같은 인물을 CEO 자리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다. 최근 미국은 인도를 ‘절친’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인도의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가 달 남극 착륙에 성공했다. 옛 소련, 미국, 중국이 달에 탐사선을 내렸지만, 태양빛이 들지 않는 달 남극에 착륙한 건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이번 착륙을 이끈 인도 우주연구기구(ISRO)의 연간 예산은 약 15억달러로, 미 NASA 예산의 6% 수준이다. 더 적은 돈으로 며칠 전 러시아가 실패한 도전을 성공시켰다. 국민의 삶 수준이 형편없기로 유명한 나라가 강대국과 어깨를 겨루는 우주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애플은 공산당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중국 대신 인도에서 아이폰 생산을 늘렸다. 테슬라도 인도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다. 지금까지 인도는 막대한 인구나 해외에 나가 성공한 인도계의 영향력 정도가 인상적인 나라였다. 인도의 국내 정치, 경제, 종족, 지역, 신분, 관료, 각종 사회 문제 등은 너무 심각해 도저히 해결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달 남극 착륙 같은 놀라운 업적도 만들어낸다. 두 얼굴의 인도가 어떤 미래로 나아갈지 궁금하다.
08.26(토) ‘재택’이 몰락시킨 ‘위워크’

▲일러스트=이철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016년 말 신생 스타트업 ‘위워크’의 창업자 애덤 뉴먼을 뉴욕 오피스에서 단 12분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기로 돼 있었는데 교통 체증에 걸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뉴먼을 자기 차에 태운 손정의는 물었다. “스마트한 사람과 미친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뉴먼이 “미친 사람”이라고 답하자, 손 회장은 거액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손정의는 위워크에 모두 169억달러(약 22조원)를 쏟아부었다.
▶이스라엘 출신 뉴먼은 어렸을 때 집단 농업 공동체인 ‘키부츠’에서 자랐다. 그때 경험을 살려 공유 오피스를 다양한 사람이 네트워크를 나누는 장소로 정의했다. ‘TGIM(Thank God, It’s Monday)’을 외치며 즐겁게 사무실에 출근한다는 마케팅이 먹혔다. 회원 17명으로 시작해서 51만 회원으로 성장했다.
▶그 위워크가 이제 문 닫을 처지가 됐다. 주가는 12센트까지 폭락했고 상장폐지 절차를 밟고 있다. 그 스토리를 다룬 8부작 미국 드라마의 제목은 ‘우리는 폭망했다(We Crashed)’이다. 위워크의 몰락엔 고금리와 함께 코로나 이후 자리 잡은 재택근무가 큰 요인이 됐다. 근로자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미국 상업용 부동산은 공실로 허덕이고 있다. 뉴욕 맨해튼의 랜드마크 ‘허드슨야드’는 완공 4년이 지나도록 절반이 비어 있다. 뉴욕시 사무실 전체 공실률은 22.7%까지 치솟았다. 세계 주요 도시의 상업용 부동산 수요가 2030년 최대 38%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재택근무를 놓고 고용주와 근로자 간 힘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고용주는 원격 근무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우려한다. 반면 출퇴근의 낭비와 피로를 피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근로자는 재택근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지난 5월 아마존에선 사무실 복귀 정책에 반발해 직원 300명이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 근로자 10명 중 6명이 재택근무 실시 여부로 취업·이직할 회사를 결정하겠다고 응답했다는 조사도 있다.
▶세계 10국 3만여 명 대상 한 조사에선 선호하는 재택근무 일수로 주 5일 중 ‘하루’를 선택한 비율이 가장 많았다. 이 조사에서 CEO의 87%가 직원들의 근무 장소, 시간, 방식에 유연성을 갖겠다고 응답했다. 결국 재택과 사무실 근무를 절충한 하이브리드 근무 방식이 앞으로 대세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하이브리드 근무 시대의 사무실을 겨냥한 또 다른 위워크 같은 기업이 등장해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08.28(월) 개념을 알 수 없는 ‘개념 연예인’

▲일러스트=양진경
가수 김윤아가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던 날 목소리를 냈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있다” “영화적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고” “방사능 비가 그치지 않아” “지옥에 대해 생각한다” 등이다. ‘분노’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한참 선을 넘은 발언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말이다. 인간이 절대 살기 힘든 곳이다. 방류수는 ‘방사능 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게다가 ‘지옥’이라니.
▶정치적 소신 발언을 하는 연예인은 어느 나라에든 있다. 정치 참여도 하고 출마도 한다. 그러나 때만 되면 ‘괴담 선동’이 마치 옥수수 밭을 뭉개는 메뚜기 떼처럼 인터넷 공간을 휩쓰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김윤아) 같은 꽤 알려진 사람이 비과학적 비유나 과장을 퍼뜨리면 너무 위험해진다. 대중의 공포 심리를 부풀리고, 경제·사회·문화의 특정 영역을 갉아먹는다.
▶7년 전 탄핵 국면 때는 한 무대 행사에서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외친 유명 배우가 있었다. 어떤 가수는 자신의 빌딩에 ‘박근혜는 하야하라’라고 쓴 큰 플래카드를 걸기도 했다. 촛불 집회 무대에 오른 개그맨 출신 방송인은 헌법을 해설(?)해가며 반정부 강연을 했다. 한 개그우먼이 코미디 코너 ‘쓰리랑 부부’에 나왔던 말을 인용해서 “무조건 방 빼!”라고 외치자 군중이 그 말을 세 번 따라했다. 청와대에서 나오라는 뜻이었다.
▶한참 전 ‘소셜테이너’라는 책은 사회 참여 연예인 19명의 인터뷰를 실었다. 저자는 “작은 실천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인권, 여성, 반전(反戰), 동물보호, 환경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하자”는 주장을 소개했다. 좌우를 떠나 탓할 것 없는 말이다. 그 뒤로도 “코로나 입국 제한을 두자”, “독도는 한국땅”(외국인 연예인), “성형 광고를 규제하자”, “밤샘 촬영 현장의 노동 문제를 개선하자”는 연예인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좌파 세력의 입맛에 맞는 정치적 발언이 대세가 돼버렸다.
▶가장 극적인 케이스가 광우병 사태 때 ‘청산가리’ 발언이다. 당시 스물아홉이던 배우는 “차라리 입에 청산가리를 털어넣겠다”고 했다. 그녀가 LA에서 쇠고기 햄버거를 먹었던 장면과 윤미향과 박원순을 지지 추모하는 게시글이 논란이 됐다. 김윤아도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오사카 맛집 순례 TV영상이 있다. 전여옥 전 의원은 “‘제2의 청산규리’가 롤모델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무슨 개념인지 알 수 없는 ‘개념 발언’은 몇 발짝 못 가는 것 같다./
08.29 “꾸준히 하면 언젠가 뜻깊은 날이 온다”

▲한국 배드민턴 '간판' 안세영(1위·삼성생명)이 27일(현지시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2023 세계개인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카롤리나 마린(6위·스페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뒤 환호하고 있다. 2023.08.28/신화 연합뉴스
2021년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8강전에서 당시 19세였던 안세영이 중국 천위페이에게 0대2로 졌다. “엄마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셨는데…”라며 눈물을 쏟았다. 안세영은 네 살 많은 천위페이와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맞붙어 1회전 탈락의 쓴맛을 봤는데, 도쿄올림픽에서 또 그에게 가로막혔다. 5전 전패였다.

▲일러스트=이철원
▶중3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안세영은 어린 나이에도 당대 최강자들을 차례로 꺾어봤다. 그러나 빠른 발과 강한 힘을 두루 갖춘 천위페이를 넘기는 어려웠다. 인내심과 집중력에서 천위페이에게 밀린 것 같다고 스스로 돌아본 그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이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 봐요”라고 했다.
▶안세영은 코칭 스태프가 말릴 정도로 지독하게 훈련했다. 100kg 이상 무게로 스쿼트와 데드리프트 등 하체 근력 운동을 했고, 코로나 사태로 운동시설을 이용할 수 없을 땐 아파트 45층까지 하루 7번씩 걸어 올라갔다. 강약과 완급 조절을 익혔고 공격 기술을 다양화했다. 상대를 철저히 분석해 맞춤형 전략을 짰다.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 마스터스 결승에서 안세영은 ‘천적’ 천위페이를 처음 꺾었다. 4년 동안 7연패 한 끝에 마침내 따낸 승리였다. “이제 한 번도 못 이겨본 선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안세영을 더욱 밀어올렸다.
▶올해 들어서는 천위페이와 7번 맞붙어 안세영이 5번 이겼다. 가장 최근 맞대결이 지난 26일 세계선수권대회 준결승전이었다. 안세영은 대각 스매싱 공격을 앞세워 빈 공간을 노렸고, 몸을 날리는 끈질긴 수비로 상대 범실을 끌어냈다. 천위페이를 2대0으로 누르고 한국 선수로는 30년 만에 결승에 오른 그는 한국 사상 첫 배드민턴 세계선수권 단식 챔피언이 됐다. 김학균 대표팀 감독은 “상대 선수가 누구든 세영이가 압도해 끌고 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천위페이와의 상대 전적은 이제 6승 10패. 더 이상 ‘천적’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이번 세계선수권에 나선 서승재-채유정 조도 세계 랭킹 1위 중국 조를 꺾고 20년 만에 한국에 이 대회 혼합 복식 금메달을 안겼다. 2018년부터 9번 내리 패한 상대를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다시 만나 극적으로 ‘9전 10기’를 이뤘다. 채유정은 “묵묵하게 자기 자리에서 꾸준히 준비한다면 언젠가는 이렇게 뜻깊은 날이 온다”고 했다. 안세영과 서승재, 채유정이 그 말이 가진 깊은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08.30 저위험 권총

▲일러스트=양진경
2018년 9월 부산역 내 한 건물에서 50대 남성이 60대 여성 청소 근로자를 흉기로 위협하는 인질극이 벌어졌다. 범인의 저항은 격렬했다. 경찰이 범인을 테이저건으로 제압하고 검거했지만 테이저건으론 부족하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나 기존의 38구경(탄두 지름이 0.38인치라는 의미) 리볼버 권총은 범인 검거를 넘어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점이 문제였다. “범인을 부작용 없이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개량된 총기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졌다.
▶그 용도로 2020년 ‘저위험 권총’이 개발됐다. 저위험 권총은 비살상 무기(Non-Lethal Weapon)의 일종이기도 하다. 비살상 무기는 공격 대상을 죽거나 크게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무력화하는 무기를 말한다. 탄환이 플라스틱 재질이어서 기존 권총에 비해 위력은 10분의 1, 살상력은 그보다 더 떨어지는 것이었다. 플라스틱탄은 해외에서 시위 진압용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돼왔다. 허벅지는 최대 7㎝까지 박힌다고 한다. 38구경 권총에 비해 약 25~30% 더 가볍게 만들어졌다. 손잡이 쪽에 전자 장치가 탑재돼 있어 사격 시간·장소·각도·발수 등 여러 정보가 저장돼 ‘스마트 권총’으로도 불린다.
▶인질 구출 등을 위한 대테러 작전에서도 저위험 총기와 탄환은 필수적이다. 테러범의 몸을 관통한 탄환이 잘못하면 인질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 등에서 특수부대가 관통력이 뛰어난 탄환을 발사해 인질까지 희생됐다. 탄환의 위력은 장약(화약)의 양으로 결정되는데 대테러 작전에는 구경 5.56㎜ 소총보다 9㎜ 기관단총이 많이 쓰인다. 장약이 적고 탄두가 뭉툭해 관통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전의 특성상 적 병력이나 시설을 무조건 죽이거나 파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에 비살상 무기는 경찰뿐 아니라 군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소리로 상대방을 무력화하는 미군의 음향 무기 LRAD는 이미 개발돼 실전에서 사용되고 있다. LRAD는 적군의 접근을 막거나 적대적인 군중 또는 위협 세력을 효과적으로 해산시키기 위해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을 낸다. 소리 외에도 비살상 무기는 전자파, 초강력 접착제, 섬광, 전기 충격 등 다양해지고 있다. 인명 살상에 날로 민감해지는 현실 속에서 본격적인 비살상 무기 시대가 다가온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모든 현장 경찰에게 저위험 권총을 보급하겠다”고 말했다. 장비 보급과 함께 안전 수칙도 철저히 교육해 부작용 없이 시민 안전을 지켰으면 한다.
08.31(목) 사형 제도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29일, 검찰에 ‘사형 집행 지침’이 내려갔다는 얘기를 어느 법조 기자가 들었다. 당시 법무장관에게 확인차 전화를 걸었더니 장관이 펄펄 뛰었다고 한다. “먼저 보도하면 교도소 난리 난다. 사형수들이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가족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겠냐. 기자도 사람 아니냐”고 했다. 결국 기자는 ‘사형 예고 기사’를 못 썼고, 다음 날 새벽 23명 사형이 집행됐다.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
▶그때부터 13년 후인 2010년 3월 다시 사형 집행이 논란이 됐다. 아내와 장모 등 여성 10명을 살해한 강호순이 기소된 이듬해였다. 당시 이귀남 법무장관은 청송교도소를 찾아 사형 집행 시설 설치 검토를 지시했다. 사형 집행 예고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결국 반대에 부딪혀 집행 시설 설치는 무산됐다.
▶다시 13년 뒤인 최근 한동훈 법무장관이 사형 시설을 갖춘 교정 기관 4곳에 “집행 시설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최근 흉악 범죄가 잇따르는 상황을 감안했을 것이다. 한 장관은 사형 집행 여부에 대해 “기본적으로 주권적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형제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 집행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원래 사형제는 국가가 피해자 가족을 대신해 살인범에게 공적(公的)으로 보복하는 제도다. 그게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철학자 칸트는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형을 집행해야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권 의식이 높아지면서 반대론이 거세졌다. 법원이 오판(誤判)할 수 있고, 사형제가 범죄 예방에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가 했다. 오래된 논쟁인데 여전히 평행선이다. 이미 두 차례 사형제 합헌 결정을 내린 우리 헌법재판소도 세 번째 사건을 심리 중이다.
▶현재 국내 사형수는 59명이다. 노인과 부녀자 21명을 연쇄 살해하고 “장기 일부를 먹었다”는 말까지 한 유영철, 노인과 부녀자 9명을 살해한 정두영 등 연쇄 살인범도 포함돼 있다. 이 중엔 사형 외에 합당한 벌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유영철은 오심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에게 사형 외에 무엇이 합당한 처벌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가에 의한 살인’인 사형이 정당하냐는 주장 또한 여전하다. 개인적으로는 국민투표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