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8/
08-01(화) ‘자율주행차라도 안전 지킬 책임은 운전자에게 있다’

‘저것은 차량인가, 자전거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인가.’ 깜깜한 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는 여성을 발견한 우버의 자율주행차 시스템은 ‘멘붕’에 빠졌다. 정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대응할지 정할 수 있는데, ‘자전거를 끌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예상 범위 내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차량이 제때 멈추지 못해 이 여성은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2018년 3월 18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 템피에서 발생한 이 사고는 자율주행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보행자가 희생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2017년 말까지 로스앤젤레스(LA)에서 뉴욕까지 완전히 자율로 주행하는 차량을 완성할 것이다.” 2016년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호언장담처럼 자율주행차는 곧 현실로 다가올 미래로 여겨졌다. 기대가 커지면서 2010년대 들어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폭스바겐, 혼다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 업체는 물론이고 구글, 인텔 같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자율자동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국의 현대자동차·기아도 자율자동차 개발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완전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율주행 기술 단계는 레벨 0∼5까지 총 6단계로 나뉘는데, 위험 상황에서도 시스템 스스로 대처하는 레벨 4 수준 이상의 차량을 상용화한 업체는 없다. 비상시에만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는 레벨 3 수준에 도달한 기업도 메르세데스벤츠, 혼다, 볼보뿐이다. 예상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포드 등은 자율주행차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면서 기대수준을 낮추는 분위기다.
▷기술적 문제도 있지만 자율주행차가 교통사고를 냈을 경우 누구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난제다. 미국 법원은 2018년 우버의 첫 자율주행차 사망사고와 관련해 최근 당시 시험차량 운전자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로 보호관찰 3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비상 상황에 대처해야 할 운전자가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느라 주의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이유에서다. 미 교통당국은 시스템이 보행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등 우버 측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지만 애리조나주 검찰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우버를 기소하지는 않았다.
▷이번 판결로 자율주행차 사고에 대한 책임 논란이 일단락됐다고 보긴 힘들다. 자율주행 기술의 수준에 따라 교통사고 시 운전자나 차주, 제조사 간에 법적 윤리적 책임의 적정선을 놓고 논쟁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다만 자율주행 기술의 완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진 운전자의 책임이 ‘0’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운전대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는 잠시 뒤로 미루고, 어떤 차를 운전하든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02 “미래가 짧은 분들이 왜 (청년들과) 1대1 표결?”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이 그제 “미래가 짧은 (노인)분들이 왜 (청년들과) 1 대 1 표결을 해야 하느냐”며 평균수명까지 남은 생애에 비례해 투표권에 차등을 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청년 좌담회 자리에서 “중학생이던 아들이 왜 나이 든 사람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며 꺼낸 말이다. 이어 “되게 합리적”이고 “맞는 말”이라고 했다. 청년 유권자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부적절했다. 헌법 원칙에도 안 맞고, “1인 1표로 한다”는 공직선거법 146조와도 충돌한다.
▷숫자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평균연령을 80세로 가정해 보자. 여생이 30년인 50세 유권자에게 1표가 주어진다면 60년 남은 20세 청년은 비율대로 2표를 주자는 것이다. 15년 남은 65세에겐 0.5표만 주어진다. 청년들의 투표 참여를 강조한 것이라 해도 선뜻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재산 성별 종교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1표’ 원칙을 위해 희생을 치른 보통선거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민주당 내에서조차 비판이 나왔다. “나이로 차별 말라는 것이 헌법 정신”(이상민) “지독한 노인 폄하”(조응천)라는 지적이었다. 주로 김 위원장의 ‘친명 행보’를 비판해온 비명계 의원들이 나섰다. 민주당이 걱정하는 데는 연원이 있다. 과거 정동영, 유시민, 김용민처럼 잘 알려진 당내 인사들이 고령층의 정치 참여를 비꼬는 말을 하는 바람에 당은 홍역을 치렀고, 선거에서 손해를 많이 봤다.
▷김 위원장은 이후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데 친명계인 양이원영 의원이 “김 위원장의 말이 맞다”고 가세하는 바람에 논란이 더 커졌다. 그는 SNS에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살아있지도 않을 사람들”이라고 썼다. 김 위원장의 문제적 발언은 고령의 유권자들은 후손들을 위한 긴 안목 없이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동의할 수 없다. 행사장에 온 눈앞의 청년들만 생각했을 뿐 자기 발언의 파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발언 아닌가.
▷정당의 내부 선거는 1인 1표가 아닌 경우가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공직선거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정치 신인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에게는 평당원보다 투표권을 더 주는 경선 제도가 상당 기간 지속돼 왔다. 김은경 혁신위는 내년 총선에 적용할 당내 경선 룰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다. 김 위원장은 청년 민주당원이 고령 당원보다 더 많은 표를 행사하는 ‘되게 합리적’인 경선 룰을 소신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또 당내 토론이 시작됐을 때 양이원영 의원은 SNS 글처럼 고령의 민주당원에게 ‘청년과 달리 1표를 다 드릴 수 없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03 “‘50억 클럽 특검’ 제기되자 망치로 휴대전화 부쉈다”

“특별수사의 출발점이 뭐냐. 바로 ‘휴대전화를 찾으라’는 거다.” 2017년 3월 당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별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25년간 검사로 일한 박 전 특검은 휴대전화가 ‘물증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녹음파일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러 ‘50억 클럽’ 의혹 사건의 피의자로 처지가 바뀐 박 전 특검에게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이제 휴대전화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가 됐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내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누구와 얼마나 자주 통화했는지, 문자메시지나 소셜미디어(SNS)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뭘 검색하고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도 휴대전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렇다 보니 휴대전화 분석이 수사의 핵심 과정이 됐다. 경찰이 휴대전화를 증거 분석한 건수가 2011년 3300여 건에서 2021년에는 5만8000여 건으로 폭증했을 정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검사 출신들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됐을 때 휴대전화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 사례는 많다.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 휴대전화를 바꿨다. ‘라임 전주’ 김봉현 씨에게 술접대를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검사와 검찰 출신 변호사도 압수수색 전 휴대전화를 교체했다. 2020년에는 당시 수사 대상에 오른 한동훈 검사장의 휴대전화를 압수하는 과정에서 수사 검사와 한 검사장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검찰이 최근 대장동 업자들에게 200억 원을 약속받은 혐의 등으로 박 전 특검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그가 올해 ‘2월 16일경’ 망치로 휴대전화를 부쉈다는 내용을 적시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본격적으로 “50억 클럽 특검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날이다. 강이나 바다에 던진 것도 아니고 망치로 부쉈다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치 훼손’이 사실이라면 박 전 특검이 다급하게 움직인 걸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해 본 사람들은 ‘영혼을 털린 것’이라고 말한다. 법원은 휴대전화 압수수색영장에 검색어와 검색 대상 기간을 적도록 해 남용을 막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검찰이 반대하고 있다. 수사 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검사 출신들이 휴대전화 압수에 더 민감해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증거 인멸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한다. 특검을 지낸 고위직 출신 법조인까지 망치로 휴대전화를 폐기했다는 영장 내용에 황당해하는 일반인이 많을 것 같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04 ‘상온 초전도체’가 뭐길래

시속 2만 km의 자기부상열차, 전력 손실 없는 지구적 전력망, 스마트폰 크기의 슈퍼컴퓨터, 꺼지지 않는 인공태양…. 공상과학영화의 꿈이 현실이 되려면 모든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연금술의 ‘현자의 돌’에 비견될 만한 꿈의 소재가 필요하다. 우리 주변 일상 온도와 기압 상태에서도 전기저항이 전혀 없는 ‘상온(常溫)·상압(常壓) 초전도체’가 그것이다. 100년 넘게 매달려 왔지만 풀지 못한 난제다. 이를 국내 연구진이 풀어냈다고 주장해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지난달 22일 국내 민간 연구진인 퀀텀에너지연구소가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공개한 22쪽짜리 논문이 시작이었다. 연구진은 납과 구리, 인회석을 이용해 ‘LK-99’라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었는데, 이 물질이 상온·상압에서 초전도 현상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우연한 기회에 실마리를 얻었다”고 했다. ‘황산화납과 인화구리를 고진공 상태에서 925도로 굽는다’ 등 레시피도 특이하다. 흑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뗐다 하다가 신소재 그래핀이 나왔듯, 위대한 발견도 처음엔 우연이나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제로(0) 상태인 물질이다. 전기에너지를 손실 없이 전달할 수 있다. 자기장을 밀어내 물체가 자석 위에 둥둥 뜨는 ‘마이스너 효과’도 특징이다. 이 때문에 장거리 송전, 자기부상열차 등의 혁신이 가능해진다. 지금도 초전도체 자체는 활용하고 있지만 문제는 극저온과 초고압에서만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11년 초전도 현상이 처음 발견된 이래 수많은 과학자가 상온·상압 초전도체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논문이 발표되자 의심과 흥분이 교차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이 신소재 기술을 바탕으로 초강대국이 될 수도 있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기대도 퍼졌다. 영화 ‘아바타’ 속 바위산처럼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도시, 한국 대기업 총수들에게 초전도체 기술을 배우러 온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애국가 화면에 등장한 초전도체 등의 합성사진이 유행이다. 주식시장에선 이차전지에 이은 테마주로 부상하며 관련 기업 주가가 폭등하기도 했다.
▷국내외 과학계는 검증과 재현 작업에 나섰다. 미국과 중국에선 긍정적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논문과 동영상만 보면 초전도체로 보기 힘들다는 신중론이 아직은 우세하다. 연구소 측이 “공식적인 발표를 준비 중”이라는 말만 남기고 3일 연구소 홈페이지를 폐쇄한 것도 찜찜하다. 과학계의 변방인 한국이 모처럼 판을 뒤흔드는 상황인 만큼 사실이면 좋겠다. 하지만 21세기판 ‘현자의 돌’일지, 실수나 사기일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지켜봐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a.com
08-05(토) 툭하면 수백억 횡령… 은행 믿고 돈 맡길 수 있겠나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은행 횡령 사건이 또 터졌다. 이번엔 BNK경남은행에서 50대 부장급 간부가 7년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자금 562억 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은행의 700억 원대 역대급 횡령 사건이 드러난 지 1년여 만이다. 10년 넘게 한 부서에서 장기 근무한 직원이 서류를 위조해 대출을 받고 가족 계좌로 이체한 수법부터, 은행과 금융당국이 수년간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까지 판박이다.
▷경남은행에서 2007년부터 부동산 PF 업무를 맡아온 이모 부장은 7년 전 PF 대출 상환금을 가족 명의 계좌로 몰래 보내도 적발되지 않자 본격적으로 범죄 행각을 벌였다. 수시로 들어온 대출금 78억 원을 가족 계좌 등으로 옮긴 것이다. 수법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아예 PF 시행사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대출금 326억 원을 가족 법인 계좌로 이체했다. 또 다른 PF 사업에서 상환된 돈을 본인이 담당하던 PF 대출을 갚는 데 쓰기도 했다. 은행 내부통제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아예 시스템이 마비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횡령 사실이 드러난 과정은 더 어이없다. 다른 저축은행 PF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올 4월 이 부장의 금융거래에서 수상한 점을 포착하고 정보 조회를 요청할 때까지 은행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은행은 자체 감사를 거쳐 횡령액이 78억 원이라고 지난달 금융감독원에 보고했다. 하지만 불과 10여 일 만에 금감원은 484억 원의 횡령을 추가로 적발했다. 제 식구를 감싸기 위해 은폐한 게 아니라면 은행 감사 시스템도 고장 난 셈이다.
▷금융당국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당국은 은행 횡령 사고를 막겠다며 지난해 11월 ‘내부통제 혁신 방안’을 내놨다. 오랫동안 같은 업무를 맡을 경우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순환 근무와 명령 휴가 등을 통해 장기 근무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부장은 15년 넘게 PF 업무를 담당했고, 은행은 지난해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당국의 지시를 무시한 은행도 황당하지만 이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금감원도 할 말이 없다.
▷최근 6년여 동안 금융사 임직원들의 횡령액은 22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허술한 내부통제와 뒷북 감독이 문제지만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키우는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한다. 회삿돈 2215억 원을 횡령한 오스템임플란트 전 직원이 얼마 전 1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은행원의 횡령에는 좀 더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야 할 듯하다. 수백억 원대 횡령 사고가 연례행사처럼 터져나오니 어디 은행 믿고 돈을 맡길 수 있겠나.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8-07(월) 장롱 속 ‘신사임당’의 귀환… 숨은 155조 원은 어디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한때 품귀 현상까지 빚었던 5만 원짜리 지폐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한국은행이 올해 상반기에 5만 원권을 약 10조 원어치 발행했는데, 이 중 78%인 약 7조8000억 원이 되돌아왔다. 5만 원권 발행이 시작된 2009년 6월 이후 상반기 기준으로 환수율이 가장 높다. 한은이 화폐를 발행하면 시중에 유통되다가 예금이나 세금 납부 등의 형태로 금융기관을 거쳐 한은으로 돌아온다. 환수율이 높다는 건 화폐가 시중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는 의미다.
▷5만 원권이 돌아온 것은 2021년 8월부터 본격화된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이 크다. 시중금리가 오르면서 현금을 쌓아두기보다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예·적금에 넣는 게 낫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코로나19 방역 규제가 해제되면서 대면 경제활동이 증가하고, 소비심리가 회복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때 숨었던 고액권이 통화 긴축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미국, 유럽 등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5만 원권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21년엔 환수율이 사상 최저인 17%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로 현금 사용이 줄고 온라인 거래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현금, 특히 보관이 편리한 고액권을 확보하려는 심리도 작용했다. 금리가 낮아 은행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것도 현금을 꽁꽁 숨게 만들었다. 시중은행들이 5만 원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동입출금기(ATM)에 ‘5만 원권 인출 불가’ 안내문이 걸리기도 했다.
▷5만 원권이 사라지자 상당 부분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자산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장롱이나 금고에 숨겨 놓거나, 범죄 세력들이 수익 은닉 수단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서 5만 원권 110억 원이 발견된 이래로 비자금이나 로비, 세금 탈루, 은닉 자금으로 악용된 사례가 다수 드러났다. 고액권이 유통 기능은 적고 저장 기능만 있다며 무용론까지 제기됐다.
▷금고를 탈출한 5만 원권의 귀환은 반갑지만, 이 돈이 생산적인 자금으로 흘러갈지, 투기에 활용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동안 5만 원권만 291조8000억 원이 풀렸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155조2000억 원의 행방도 궁금하다.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등 디지털 경제가 본격화되면 과세당국의 추적을 피해 5만 원권이 더 깊숙이 숨어들 것이란 우려도 있다. 5만 원권을 무조건 찍어낼 것만 아니라 음지에 숨어 있는 현금을 어떻게 환수할 것인지도 함께 고민하며 발권 정책을 짜야 할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08 “올 수능 n수생이 34%”… 28년 만에 최고 찍나

요즘 대입 수험생들에게 재수는 필수다. 고교를 ‘4년제’라 하고 사수, 오수생도 많아 삼수생부터는 ‘장수생’으로 묶어 부른다. 대학 1학기만 다니고 수능을 준비하는 ‘반수생’, 군대에서 수능 공부하는 ‘군수생’도 있다. 수능 지원자 중 20%대를 차지하던 n수생 비중이 올해는 34.1%로 28년 만에 최고치를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종로학원 추산에 따르면 11월 16일 치러지는 수능 지원자 49만1700명 중 재학생은 역대 최저인 32만4200명이고, 졸업생은 16만7500명으로 1996학년도(37.3%) 이후 최고 비율이다. 지난해 n수생보다 2만5000명 늘었다. 의대 쏠림 현상에 첨단 학과 신설 및 증원, 킬러 문항 빠진 ‘물수능’ 기대감 때문이다. 통합 수능으로 대학 간판 보고 문과에 갔다 실망한 이과생들, 이과생들에게 밀려난 문과생들도 대거 n수 대열에 합류했다.
▷수능 성적만 보는 정시는 n수생 합격자 비중이 더 높다. 최근 4년간 SKY 3개 대학 정시 합격자 중 n수생이 61.2%였다. 이과생들은 ‘의치한약수’에 들어가려고, 문과생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숭세단, 광명상가…’의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n수를 감수한다. 의대는 더 심하다. 최근 4년간 의대 정시 합격자 가운데 78%가 n수생이다. 합격자의 92%가 n수생인 의대도 있다. 요즘 의대 가려면 고교 3년은 내신에만 매달리고, 재수로 수능 성적 끌어올려 수시 최저기준을 맞추거나 아예 수능으로 진학하는 게 공식이 됐다.
▷일타강사들의 인강으로 재수의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대부분 ‘재종’(재수종합학원)을 다니고 드물게는 ‘독재’(독학재수학원)를 찾는다. 통학형 재종은 월 200만 원, 기숙형 재종은 월 400만 원이다. 9개월간 1800만∼3600만 원이 드는 셈이다. 급식비, 교재비, 모의고사비, 특강비는 별도다. 자녀가 재수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징역 9개월에 벌금 4000만 원 선고받는 심정”이 된다고 한다. 올해 n수생 16만7500명이 1인당 1800만 원씩 들였다면 총 3조 원이 넘는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점까지 감안하면 n수의 사회경제적 비용은 훨씬 늘어나게 된다.
▷n수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외환위기가 오든 코로나가 오든 흔들림 없는 안정된 삶”을 위해 n수를 한다. 의사면 제일 좋고, 비정규직 아닌 정규직, 중소기업 아닌 대기업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 2년이고 3년이고 책상에 붙어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면서 허리와 목 디스크, 섭식장애와 만성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실력이 느는 공부가 아니라 학벌을 위한 공부다. 개인으로도 사회 전체로도 긍정적 가치를 찾기 힘든 사회적 병리 현상이 n수 열풍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8-09 前官 21명 중 1명만 차단… 이런 먹이사슬 LH뿐이겠나

지하 주차장에서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의 감리를 맡은 한 건축사 사무소는 홈페이지에서 임원들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임원 65명 가운데 22명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출신이었고, 국토교통부, 법무부, 지방자치단체, 심지어 군(軍) 출신까지 포함하면 임원 10명 중 8명이 이른바 ‘전관’이었다. 수주의 비결은 설계 능력이 아니라 로비 능력이었던 셈이다. 철근 누락 사태가 터지자 회사의 자랑은 수치가 됐고, 홈페이지는 폐쇄됐다.
▷LH는 2021년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전관 특혜를 막겠다며 재취업 심사 대상을 ‘부장급 이상’(2급·500여 명)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성긴 그물은 유명무실했다. 최근 2년간 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를 받은 LH 출신 21명 가운데 재취업이 막힌 건 단 1명뿐이었다. 직무 연관성이 낮다는 이유로 심사를 통과한 이들이 철근을 빼먹은 감리업체 등에 안착했다. 실무자인 차장급(3급)들이 일찌감치 이직하는 사례도 늘었다.
▷재취업 심사가 허술하지만 아예 피하는 방법도 있다. 공직자윤리법 취업 심사 대상인 ‘자본금 10억 원 이상, 연간 거래액 100억 원 이상’이라는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로 가면 된다. 최근 5년간 LH로부터 감리를 가장 많이 수주한 업체도 이 기준에 해당하지 않을 정도니 사실상 의미 없다. 똘똘한 퇴직자를 잡으면 업계 무명에서 스타로 떠오르는 건 한순간이다. LH 고위직 출신이 합류한 신생 감리업체는 설립 4년 만에 LH에서 160억 원대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건축, 도로, 철도, 항만, 수자원 등의 분야에서 발주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고 발주처와 거래하는 업체는 사실상 없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전관을 영입해 회장, 부회장, 사장, 전무 등의 직책을 준다. 전 직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직급과 연봉이 대략 정해져 있다. 차량, 사무실, 법인카드 등도 준다. 이들에게 떨어진 임무는 오직 수주다. 발주처와 꾸준히 접촉하며 사업 계획을 미리 입수하고, 심사 과정에서 ‘후배’들에게 힘을 발휘한다. 보통 3년 정도는 약발이 먹힌다고 한다.
▷건설 카르텔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까지 총동원해 조사에 나섰다. 제 발이 저린 LH는 ‘반카르텔 공정건설 추진본부’를 신설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LH는 2년 전에도 ‘조직 해체 수준의 혁신’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철근 누락 사태를 통해 공수표였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반카르텔 본부’가 필요한 건 사실 LH만도 아니다. ‘전관’, ‘낙하산’, ‘○피아’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건 부정과 특혜가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10 영상회의 앱으로 대박 난 ‘줌’도 “재택 대신 사무실 출근”

코로나19 재택근무로 가장 득을 본 회사는 영상회의 앱을 만든 줌이다. 1900만 명이던 하루 사용자는 코로나가 터진 뒤 3억 명으로 늘었다. 영상회의를 많이 해 생긴 스트레스를 ‘줌 피로(Zoom fatigue)’라고 부를 정도였다. 줌은 당연히 폭발적 성장의 기반이 된 재택근무를 옹호했다. 창업자인 에릭 위안 최고경영자(CEO)는 2021년 1월 사내 온라인 회의에서 “오늘날 근무는 더 이상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직원들에게 근무지에 대한 유연성과 선택권을 부여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랬던 줌이 최근 ‘사무실에서 50마일(약 80km) 이내의 직원들은 최소 주 2회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동료들과 만나 소통하는 근무가 효율성을 위해 좋다”는 이유를 댔다. 빅테크인 구글 아마존 메타도 최소 주 3회 출근을 강제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같은 은행권이나 백악관 등 정부기관도 마찬가지다. 줌마저 돌아서면서 코로나19로 만개했던 재택근무의 퇴조가 뚜렷해졌다.
▷경영진이 재택근무에 부정적인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낮아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동료와 소통이 부족해진다, 업무나 회사 문화를 배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동기 부여가 어렵다 등 다양한 이유가 거론된다. 숫자로도 입증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연구에 따르면 재택근무자의 생산성이 출근자보다 18% 낮았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5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 담당 직원이 직접 나오길 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재택을 원한다는 건 위선”이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회사의 출근 지시에 대해 직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JP모건 운영위원회는 4월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이란 글을 사내통신망에 올렸다. 임원은 주 5회, 직원은 주 3회 출근 안 하면 평가 시 불이익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직원들은 ‘(회사가) 귀가 먹었나’ 등의 반발 댓글을 달며 제이미 다이먼 CEO를 비판했다. 댓글 창은 하루 만에 폐쇄됐다. 회사의 출근 방침에 맞서 아마존 직원 수백 명은 한 시간여 근무를 중단하는 시위를 벌였고, 애플과 디즈니 직원 수천 명은 재검토를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재택근무를 둘러싼 노사 갈등은 ‘권력 투쟁’에 가까울 정도다. 2년여간 시간과 신체에 대해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린 직원들은 그 달콤함을 포기하기 어렵다. 반면 성과 저하를 체감한 회사 측은 재택, 출근을 섞은 근무라도 시키려고 한다. 코로나 시절 ‘대퇴사(Great Resignation)’ 현상을 막기 위해서 재택근무의 당근을 내밀었던 기업들이 이젠 ‘출근에 반발해 퇴사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재택근무 논쟁은 우리에게 직장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근로계약으로 업무만 수행하는 곳인지, 업무와 함께 사람들끼리 상호작용까지 하는 곳인지 말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8-11 ‘민원 공화국’의 자구책… ‘내 몸의 블랙박스’

공무원이나 경찰을 향한 요즘 민원인들의 폭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 “어디서 ××이야” 같은 욕설이 무뎌질 정도로 난무한다는 것이다. 무례한 생떼는 때로 멱살잡이와 손찌검, 주먹질, 기물 파손 같은 폭력 행위로 이어진다. 포항에서는 민원인이 공무원 얼굴에 제초제로 추정되는 화학약품을 뿌렸고, 경주 시청에서는 손도끼를 치켜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민원인들의 위법 행위는 2021년 5만 건을 넘어섰다.
▷도를 넘은 악성 민원에 시달려온 이들 사이에선 보디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지난달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 이후엔 교사들도 “보디캠이라도 달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지경이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시중에서는 20만, 30만 원대에서 80만 원짜리 고급형까지 다양한 보디캠이 쏟아지고 있다. 네모난 소형 녹음기 모양이 일반적이지만 라이터형, 손목시계형, 보조배터리형, 안경형, 넥타이형, 목밴드형 등도 나와 있다. 업체들은 선명한 화질, 초소형 사이즈 등을 앞세우며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고 홍보한다.
▷‘내 몸의 블랙박스’로 불리는 보디캠의 착용은 책임을 다투거나 법정싸움을 벌일 때 자기를 방어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민원 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오는 한국에서 공복(公僕)에 대한 요구는 많고, 악성 민원인에 대한 처벌은 상대적으로 경미하다. 정당방위 인정 범위는 좁다. 그러니 반복, 악화하는 행패를 영상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언제라도 적반하장의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게 공무원들의 문제 제기다. 보디캠 촬영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는데, 이는 난폭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한다.
▷대리운전 기사, 숙박업 종사자 등도 보디캠을 달기 시작했다. 취객의 폭행과 성추행 등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해외에서는 스포츠 심판들의 보디캠도 등장했다. 선수나 코치는 물론 아마추어 유소년 경기의 경우 부모들의 폭언, 폭행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갑질’ 피해를 볼 수 있는 누구라도 보디캠의 기록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보디캠은 찍히는 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영상 유출 피해와 악용 가능성 등의 문제점도 안고 있다. 경찰청이 아직까지 장비 사용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다. 교사들의 보디캠 착용을 놓고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감옥으로 만들려는 거냐”는 반발이 나온다. 논란 속에서도 보디캠 구매가 늘어나는 것은 한국 사회가 고단한 ‘불신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경고일 것이다. 각자도생의 해법에 앞서 악성 민원인 처벌 강화를 비롯해 ‘을’들을 보호할 근본 예방책 마련이 절실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12(토) “왕의 DNA를 가진 내 아이” “또래 갈등 때 철저히 편들어라”

예부터 남의 자식 고운 데 없고 내 자식 미운 데 없다고 했다. 부모 눈에 제 자식은 다 ‘공주님’이고 ‘왕자님’이다. 그런데 한 학부모가 초등학생 자녀를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며 담임교사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석에서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왕자 대우’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학부모가 5급 교육공무원이라니 더 충격적이다.
▷대전시교육청의 A 사무관은 초3 자녀의 담임교사들에게 ‘갑질’한 의혹이 제기돼 어제 직위 해제됐다. 교사노조에 따르면 A 사무관은 담임이 자녀를 학대한 일이 없는데도 아동학대로 신고했다. 새로 온 담임에게는 자녀를 대할 때 주의사항 9가지를 교육공무원 인증이 필요한 공직자 메일로 보냈다.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므로 왕자에게 말하듯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 듣는다” “고개 숙이는 인사를 강요하지 않는다” “또래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달라”는 내용들이다.
▷A 사무관의 독특한 ‘교육관’은 약 없이도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는 모 연구소의 육아지침과 비슷하다. 그의 아이는 경계성 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9가지 요구사항에는 ‘극우뇌’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 연구소는 자폐나 ADHD 같은 병명 대신 우뇌가 극도로 발달했다는 뜻의 ‘극우뇌인’이라는 용어를 쓰고 이 환자들은 왕의 DNA를 갖고 태어났다고 본다. 극우뇌인은 천재이고 분노조절이 어려우나 상담만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법에는 ‘왕자나 공주라 불러 우월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주기’도 있다. 의학계에선 약물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천재적인 극우뇌인’으로 호도하며 치료를 방해하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본다.
▷내 아이는 진짜 유전자가 다른 왕자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건 천재라서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교사노조에 따르면 A 사무관은 자녀의 특별대우를 요구하며 “나는 담임 교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압박하고, 학급 내 다른 학생들의 행동까지 매일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이라면 교권을 보호해야 할 공무원이 직위를 이용해 교권을 침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교사들이 학부모와 상담할 때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학생의 단점이다. “아이가 쉽게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면 “끈기 있는 영재한테 무슨 소리냐”고 반발하고, “문해력이 떨어지니 독서 습관을 길러주라”고 조언하면 “집에선 활자중독일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며 적개심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제 자식 못난 꼴 못 보는 맹목이 아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교육은 학부모 수준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14(월) 집 300만 채 지어놓고, 부실공사 집계도 못하는 LH

“(아니)꼬우면 니들도 이직하든가.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에 국민의 분노가 들끓던 2021년 3월. 직장인 익명사이트 블라인드에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씀’이란 제목의 글이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LH 측은 현직 아닌 전직 직원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를 요청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년 5개월이 지난 지금 LH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 주차장 건설 중 붕괴사고가 났던 인천 검단 아파트처럼 LH 발주 아파트 가운데 무량판(기둥으로만 천장을 받치는 방식) 구조 아파트가 91곳, 이 중 15곳의 주차장이 부실시공됐다는 지난달 말 발표가 시작이었다. 열흘 뒤인 이달 9일에는 갑자기 무량판 구조 단지 10곳, 철근이 덜 쓰인 5곳이 추가로 확인됐다.
▷집계에 빠졌다가 추가된 과정이 황당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경기 화성시의 LH 단지 감리현장 점검에 나섰는데, 무량판 방식이 아닌 줄 알았던 이 단지 주차장도 같은 방식으로 확인된 거다. “현황조차 취합되지 않는 LH가 존립근거가 있느냐”는 질책 후 찾아낸 게 부실 공사 5곳이다. “철근 빠진 정도가 경미하다”며 실무자들이 보고에서 뺐다고 한다.
▷이한준 LH 사장은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전체 임원 7명의 사직서를 받았고, 자신의 거취도 임명권자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자력으로 조직 내부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에 조사를 요청했다. 1962년 설립된 대한주택공사, 1979년 세워진 한국토지공사가 2009년 통합돼 만들어진 LH 역사상 최대 위기다.
▷LH가 지금까지 국내에 지은 공공주택은 임대 167만 채, 분양 129만 채 등 총 296만 채다. 전국 주택 수 2200만 채 중 13.5%다. 국민 20명 중 1명꼴인 250만 명이 LH 공공임대 주택에 살고, 분양 아파트를 합하면 거주자 수는 더 늘어난다. 올해 3월 LH가 내놓은 새로운 비전이 ‘고품질 주택 80만 채 공급’이었다. 저가 임대주택 이미지를 탈피하는 게 목표였는데, 이번 사태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공염불이 됐다.
▷지난번 땅 투기 부정부패 사건은 관련자 처벌과 임직원 부동산 보유내역 의무공개 등의 조치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입주자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사고다. 불안에 떠는 주민이 남아 있는 한 기억에서 적당히 지워질 가능성은 없다. LH 퇴직자가 일하는 설계, 감리 회사와의 부정한 커넥션도 문제로 꼽힌다. 다닐 때나, 퇴직한 뒤에나 ‘신의 직장’ 소리를 듣는 LH는 이제 조직 해체 수준의 대수술이 불가피해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15 마지막 在日 광복군 “내 나라에서 죽고 싶었다”

오성규 애국지사가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그제 영구 환국했다. 마지막 재일(在日) 광복군이자 독립유공자인 그는 “일본에서 죽을 수는 없다. 자기 나라서 죽어야지”라며 조국행을 선택했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 애국지사는 10대 후반에 중국에서 광복군 제3지대(支隊)에 입대했다. 1945년 미군의 도움으로 한미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진격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생존하는 독립유공자 9명 가운데 1명이다.
▷귀국 소망은 해방 후 조국 땅을 밟지 못했던 아픔에서 시작됐다. 그는 해방 후 중국에 남아 광복군 상하이 특파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일본에 정착해 재일 교포를 위해 일했다. 2018년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환국의 뜻을 더 세웠다고 한다. 그의 귀국 과정은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어른에게 조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기회였다.
▷그가 탄 귀국 항공기는 기내 방송으로 애국지사의 탑승 소식을 알리는 예를 갖췄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로 시작하는 광복군 제3지대 노래를 불렀다. 청년 오성규가 중국 땅에서 배고픔 설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부르고 또 불렀을 노래다. 오 애국지사는 80년 뒤 이런 순간이 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감개무량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 애국지사는 제일 먼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자신의 상관이었던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묘소에서 감격 어린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안부를 전했다. 오 애국지사는 1940년대 베이징에서 광복군 창설 소식을 듣고 충칭까지 2000km를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짚신이 터져 발에서 피가 났다”는 회상도 했다. 그날 묘역에는 뜻깊은 태극기가 걸렸다. 통상의 태극기 옆에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병사가 1946년 이후 간직해 오던 태극기를 그대로 본뜬 것을 게양했다. 태극과 4괘 사이로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백전백승” 등이 씌어 있다. 나라 없는 병사들의 피 끓는 다짐이 눈에 선하다.
▷오늘로 광복 78년을 맞았다. 힘없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딛고 나라를 일으킨 것이 자랑스러운 세월이다. 힘을 되찾았기에 오 애국지사처럼 자기를 버릴 각오를 세운 어른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오 애국지사는 오늘 광복절 경축식에 귀빈으로 참석한다. 100세 나이에 조국의 품을 되찾은 그의 삶에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후대에게 알리고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16 ‘원조 한미동맹’… 광복군-OSS 합동 독수리작전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군사·첩보작전에 주로 새 이름을 붙였다. 한국광복군과 손잡고 일본이 장악 중이던 한반도에 은밀히 침투하려던 ‘독수리 작전(The Eagle Project)’이 그중 하나였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이 작전에 참여했던 로버트 마이어스의 증언에 따르면 “독수리는 가장 매력적인 이름”이었고 “(작전이) 한미 두 나라의 신화로 남기를 바라는 측면”도 있었다.
▷OSS는 당시 ‘불사조 작전’, ‘냅코(NAPKO) 작전’ 등 재외 한국인과 함께 여러 경로로 한반도에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중 1945년 독수리 작전에 참여한 한국광복군이 OSS 교관들로부터 받은 훈련은 강도가 셌다. 중국 시안의 한 사원을 기지 삼아 오전 6시부터 사격술과 폭파술, 무선통신술, 지도 해독, 야전술에 영어 교육까지 이어졌다. 독수리 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는 한국 청년들이 보여준 훈련 성과에 고무돼 워싱턴 OSS 본부의 작전들을 그대로 복사해 진행할 태세였다고 한다.
▷독수리 작전의 훈련 과정과 내용을 기록한 사전트 대위의 회고록이 최근 공개됐다. 참가자들의 증언이나 흑백 기록사진 외에 책임자가 직접 쓴 회고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는 것은 처음이다. 사전트 대위는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고 썼다. 그가 앞서 본부에 보고한 문건에서 광복군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봤던 가장 지적인 군사집단으로, 미국 청년 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은 평가다.
▷사전트 대위와 당시 광복군 제2지대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 장군 등 양국 지휘부가 함께 찍은 사진에는 영어로 ‘첫 번째 한미동맹(FIRST KOREAN AND AMERICAN ALLIANCE)을 기념하며’, 한국말로는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옅은 미소 속에 비장한 결기가 어려 있는 듯한 표정은 양쪽 지휘부가 다르지 않다. 작전이 실행 직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지 않았더라면 함께 피 흘리며 싸웠을 전우들이었다.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 성격을 띤 독수리 작전은 오늘날 한미동맹의 초석을 마련한 원류로 볼 수 있다. 양국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일제에 맞서 손을 맞잡았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국주의, 6·25전쟁 후에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공산주의 확산을 함께 막아낸 혈맹이다. 한미동맹 70주년에 맞이한 올해 광복절은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함께 동맹의 가치도 되새기게 해줬다는 점에서 더 뜻깊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17 삼성전자 해외서 번 돈 22조 국내 투자… 감세의 선순환

삼성전자가 해외에 쌓아뒀던 수익금 가운데 22조 원 가까운 돈이 올해 상반기에 국내로 돌아왔다. 대부분 생산설비 구축에 투입됐다고 한다. 해외에서 국내로 돈이 들어왔으니 투자유치라 할 만하다. 해외 생산시설을 국내로 옮기는 ‘리쇼어링’과 마찬가지다. 역대 최고라는 올해 상반기 외국인 국내 직접투자(FDI) 신고액 22조3500억 원과 맞먹는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로 돌아온 ‘유턴기업’의 투자액 3조 원의 7배가 넘는다.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 해외법인이 본사로 보낸 배당금은 21조8457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상반기 1378억 원의 158배에 이른다. 상반기는 물론 연간 기준으로도 역대 최고치다. 현대자동차그룹도 1분기에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6배 늘어난 7조8000억 원을 국내로 가져왔다. 기업들은 반도체·전기차 공장 증설 등 미래 먹을거리 투자에 배당금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업들이 해외에 묵혀 뒀던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지난해 세법 개정의 효과다. 지난해까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면 현지에서 세금을 내고도 국내로 들여올 때 다시 세금을 내야 해 이중과세라는 지적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해외에서 이미 과세한 배당금을 국내에 들여올 경우 해당 금액의 5%까지만 과세한다. 감세의 나비효과는 크다. 들여온 돈은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마중물이 됐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경상수지와 원화 가치 방어에도 도움이 됐다.
▷해외 자회사의 배당 소득에 비과세하는 건 효과가 검증된 정책이다. 미국 기업들은 2017년까지 약 1조 달러를 해외에 유보금으로 쌓아 두고 있었는데, 과세 체계가 바뀐 2018년에 이 중 77%인 7700억 달러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일본도 2009년 세제 개편으로 해외 자회사의 배당에 대한 ‘익금불산입’ 제도를 도입하자 이듬해 해외 유보액의 95.4%가 국내로 돌아왔다. 이를 넘어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 등을 통해 기업들이 다시 국내로 돌아오도록 세제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일각에선 배당금 비과세로 법인세수가 줄어들고 대기업 배만 불릴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24∼2027년 연평균 1044억 원의 세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국내로 돌아온 돈이 수십조 원에 이르고 향후 국내 투자로 발생할 이익까지 고려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기업에 과도한 세 부담을 지우는 것을 흔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에 비유한다. 당장의 세수 감소만 볼 게 아니다. 감세가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고 다시 세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우리 경제를 살찌게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18 트럼프 네 번째 기소는 마피아 두목 잡는 특별법

202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번째 기소됐다. 3년 전 대선 때 ‘조지아에서는 트럼프가 이겼다’는 허위 발표를 만들어내기 위해 조지아주 국무장관을 압박했다는 등 혐의만 13가지다. 조지아주 검찰은 마피아 소탕을 위해 만들었던 특별법(RICO법)을 꺼내 들었다.
▷이 특별법은 마피아 두목을 잡기 위해 1970년 처음 제정됐다. 범죄를 뒤에서 실제 조종하면서도 증거 부족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범죄단체 두목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을 때였다. 특별법은 정식 범죄조직은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결사체(enterprise)를 만든 1인자를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근년 들어선 내부자 거래 등 금융인 여럿이 연루된 범죄에도 적용됐다. 조지아주 검찰은 트럼프와 그의 백악관 비서실장 등 19명을 조지아 대선에 개입한 결사체로 봤다. 유죄가 확정되면 5∼20년 형이 예상된다.
▷공소장에 따르면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 “내가 1만1779표 차이로 졌다고 집계됐다지만 부정한 표가 많다. 가짜 서명이 수십만 개 나왔다”고 말했다.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국무장관은 “재검표를 3번 했다. 당신은 이기지 못했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결국 지지자들을 선동해 ‘바이든 당선 확정’을 발표하는 날 의사당에 난입하도록 했다.
▷4차례 형사재판에 회부됐지만 트럼프는 공화당 내 1위 후보다. 뉴욕타임스가 의뢰한 7월 조사에서 그가 54%를 얻었을 때 2위 후보는 17%에 그쳤다. 1급 핵 군사기밀 유출(두 번째 기소), 부정선거설 유포 및 부통령 회유·압박(세 번째 기소) 혐의가 심각해 보이지만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당선된다면 첫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기소를 취소하라”고 명령할 것이란 예상이 요지부동 지지율의 배경이다. 하지만 네 번째 기소는 사정이 다르다. 연방 법을 적용한 앞선 기소와 달리 조지아주 법에 따른 것이어서 대통령에겐 사면권이 없다.
▷트럼프는 8월 말 조지아주 법원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니 재판은 이미 시작됐다. 이렇듯 대선 유세지와 법정을 오갈 트럼프가 마주한 혐의들을 떠올리면 착잡하다. 그가 자유 진영의 리더가 다시 될 가능성이 작지 않아 그렇다. 트럼프는 유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쿼드(미국 일본 인도 호주) 등 다자안보 협력체에서 존중받을까. 오늘 시작하는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어떻게 운용될 것이며, ‘마피아 두목’ 꼬리표에 중국 러시아 북한은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의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글로벌 역할을 줄이는 고립주의가 트럼프 1기의 외교 기조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19(토) 간토대지진 100주년에도 추도문 거부한 도쿄도지사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걸친 지역을 파괴했다. 혼란 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전해져 그것을 믿은 민중과 군대·경찰의 손으로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일본 짓쿄(實敎)출판이 발행한 고교 ‘일본사B’ 교과서에 실린 간토(關東)대지진 설명이다. 각주에는 “약 6700명 정도의 조선인 외에 약 700인의 중국인도 살해됐다”고 적혀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그럼에도 채택률이 높은 역사교과서에서 간토대지진에 대한 기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미우리신문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 간토대지진을 기획기사로 다루면서 13일 1면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접하고 각지에서 자경단을 결성해 재일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묶어서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보도했다. 일본도 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가 관심이 가지만 반응의 정도는 실은 일본 교과서 수준이다.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 2008년 보고서를 인용해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약 10만 명이며 이 중 1%에서 수%가 자경단 폭행인 것으로 추계됐다”고 한 부분은 교과서 기술에도 미치지 못한다.
▷간토대지진 희생자 추도식에 역대 도쿄도 지사들은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문을 보냈다. 그러나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가 취임한 이듬해인 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 6000여 명이란 숫자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추도문 발송을 거부했다. 올해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10만 명의 1%인 1000명이라도 추도할 일이고 6000명 이상이라도 추도할 일인데 이 맹랑한 지사에게는 숫자에 따라 그게 되고 안 되고 하는 모양이다.
▷당시의 학살이 일본인의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는 존 마크 램지어 같은 자가 하버드대 교수로 있다. 극우적인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혼란 중에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확산돼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중국인을 살해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비비 꼬아 기술하고 있지만 아무리 정당방위로 만들어보려 해도 글 자체에서 안 되는 건 이 사건이 지닌 반(反)인륜성 때문이다.
▷당시 일본 신문들이 유언비어를 진짜처럼 보도하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주민들이 불안을 느껴 조선인과 중국인을 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의 정당방위가 되는 게 아니다. 일본인이 저지른 학살일 뿐이다. 궤변을 막는 길은 이 사건의 성격을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 학살)로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100주년에 우리가 할 일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21(월) 산불이 할퀸 하와이는 ‘X의 섬’

2주 가까이 불타고 있는 하와이는 ‘X의 섬’이 됐다. 8일 새벽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섬에서 시작된 산불 3개가 휩쓸고 간 마을들을 소방·구조대원 수백 명이 수색하고 있다. 수색을 마친 주택과 건물 벽에 주황색 스프레이로 X 표시를 하나씩 하고 있다. 그 X 표시가 2000개를 넘어서 마을을 뒤덮었다. 20일 현재 사망자는 114명이다.
▷하와이주는 1인당 소득이 5만 달러를 넘는다. 하나의 국가로 간주한다면 독일과 네덜란드 사이쯤 되는 부국(富國)이다. 그런 곳에서 목격된 산불 초기 대응을 보면 미스터리(X)가 하나둘이 아니다. 제주도 크기인 마우이섬은 상주 인구 16만 명에, 고급 리조트를 찾는 관광객이 넘치는 휴양지다. 소방대원은 모두 65명. 소방차가 13대, 사다리차는 2대뿐이었다. 소화전 수압이 낮아 초기 진화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여기가 미국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화재 직후 대피 사이렌도 울리지 않아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악몽 이후 옥외 사이렌을 설치해 왔고, 지금은 80개나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마우이섬 재난·방재 책임자는 “사이렌을 울렸다간 쓰나미 경보로 오인한 주민들이 (불이 난) 산 쪽으로 피할까 걱정해 그랬다”고 말했다가 하루 만에 물러났다. 홈페이지에는 “산불과 쓰나미를 위해 사이렌을 가동한다”고 적혀 있었다. 산불과의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꾼 것도,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후임자 지명을 않는 것도 재난대응의 ABC가 맞는지 의문이다.
▷초기엔 미지수(X)였던 화재 원인은 발화 지역의 조류보호센터 보안 카메라 영상이 공개되면서 윤곽이 잡혔다. 어둠 속에 튄 섬광이 촬영된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허리케인 ‘도라’의 영향으로 시속 100km의 강풍이 불었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쓰러져 송전선을 건드렸거나, 송전선이 바람에 끊기며 불똥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 옮겨붙었을 것이란 추정이 유력해졌다. 매년 봄 우리가 겪는 백두대간 산불과 흡사하다. 더운 여름과 따뜻한 겨울만 존재하는 하와이는 지금(5∼10월)이 건기다.
▷하와이는 탄식의 섬이 됐다. 휴대전화가 되살아나면서 연락이 닿아 실종자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1000∼1200명이나 된다. 불에 탄 시체도 신원 확인에 애를 먹고 있다. 통상 치아나 지문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지만 치과 진료 기록도 불탔고, 시신 훼손이 심해 지문 채취도 어렵다고 한다. 현지에선 불에 탄 마우이를 두고 “9·11테러 직후 같다”고, 잿더미 때문에 “흑백사진 같다”고 말한다. 마우이섬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 마음도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우리가 아는 하와이는 없다. 자연이 만들고 인재(人災)가 키운 재난이 이렇게 무섭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22 빚내 주식 투자 20조… 도박 같은 ‘테마주 狂風’

‘RIP(Rest In Peace·편히 잠드소서).’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20여 일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고인을 추모하는 영정 사진이 돌고 있다. 주인공은 꿈의 물질로 불린 ‘상온·상압 초전도체’. 지난달 22일 국내 연구진이 일상 온도와 기압 상태에서 전기저항이 전혀 없는 물질 ‘LK-99’를 개발했다고 주장하자 주식시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에 따라 하루는 30% 올랐다가 다음 날 30% 떨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지난주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LK-99는 초전도체가 아니다”라고 발표한 후 투심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요즘 한국 주식시장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의 긴축 장기화와 중국의 부동산 위기로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치 활황기인 양 ‘빚투’(빚내서 투자)와 ‘묻지마 투자’가 기승을 부린다. 17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20조5573억 원으로 올 들어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서만 4조 원이 늘었다. 4월 주가조작 사태를 부추긴 원인으로 차액결제거래(CFD)가 지목되면서 빚투가 잠시 잦아드나 했더니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빚투가 늘어난 건 역설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원조 테마주’ 역할을 했던 이차전지 주들이 맥을 못 추고 있기 때문이다. 끝 모를 듯 오르던 주가가 떨어지자 이번엔 저가 매수 기회로 판단한 투자자들이 빚을 내서 올라탔다. 신용거래융자 잔액 상위 10개 종목 가운데 절반이 이차전지 관련주다. 이차전지 산업의 성장성 자체는 인정받고 있지만 빚투는 멀리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주가가 당장 또 한 번 출렁이면 반대매매의 파국을 피하기 어렵다.
▷부나방처럼 테마주를 찾아 달려드는 투자자들은 이차전지, 초전도체를 지나 최근엔 ‘맥신(MXene)’으로 옮겨갔다. 우수한 전도성과 전자파 차폐 능력을 갖춰 미래 신소재로 꼽히는 맥신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확인한 연구 결과가 17일 발표되면서부터다. 한 회사는 관련 연구자가 사외이사로 있다는 이유로, 한 회사는 관련 소재를 생산한다는 이유로 상한가를 쳤다. 테마주로 묶인 회사들의 본업이 연구 결과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이 나와도 투자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최근 주식시장은 크게 한탕 하려는 작전세력, 꼭지 잡기 전에만 털고 나오면 된다는 개미들이 어우러져 난장판이 됐다. 빚을 낸 투자자들은 대출이자 이상의 수익을 거둬야 하니 고위험·고수익 주식만 쳐다본다. 주식리딩방,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온갖 소문과 풍문이 판을 치며 불공정거래와 시장교란 행위의 온상이 됐다. 언제까지 한국 주식시장은 개미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돼야 하나. 미친 도박판이여 이제 제발 RIP.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23 광화문광장 2.5배 넓이에 CCTV 1대… ‘치안 사각’ 도시공원

엄마와 함께 서울 올림픽공원 내 키즈카페에 놀러 간 다섯 살 아이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새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100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카페 근처에 폐쇄회로(CC)TV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는 다음 날 인근 호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CCTV가 있었다면 아이의 행방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2016년 9월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 이후 국회는 도시공원 내 범죄나 안전사고 우려가 있는 지점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도시공원법을 개정했다. 그런데 시행령이나 규칙에 설치 간격이나 장소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고, 설치하지 않았을 때 벌칙 조항도 없다. 유명무실한 법조문이 돼 버린 것이다. 이렇다 보니 최근 여교사 폭행 살인 사건이 발생한 관악산생태공원은 축구장 10개 넓이에 CCTV가 7대뿐이고, 인근 독산자연공원에는 광화문광장 2.5배 면적에 1대만 있다. CCTV를 설치했다는 시늉만 낸 수준이다.
▷범죄는 범인의 성향, 처벌의 강도, 범행 장소의 환경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이 중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춰 범죄를 억제하는 기법을 ‘범죄예방 환경설계(CPTED)’라고 부른다. CCTV 설치는 범행 의지를 꺾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CPTED의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경찰청이 분석해보니 CCTV가 있는 곳 근처에서는 야간에 강도 절도 등 5대 범죄가 11% 정도 감소했다. 이번 사건 범인도 “CCTV가 없는 걸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CCTV가 더 촘촘하게 설치돼 있었다면 범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CCTV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국 정부는 5억 대의 CCTV를 통해 주민의 목소리와 홍채 등 생체 정보까지 광범위하게 수집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악용된다면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 ‘빅 브러더’ 사회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범죄자들이 CCTV가 있는 장소를 피해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뿐 전체 범죄 감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도시공원처럼 치안 확보가 필수적인 곳에 CCTV를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의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7%가 ‘도시공원에 CCTV를 추가 설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흉악범죄가 일어난 뒤에야 늘리겠다고 부산을 떨 게 아니라 법률이나 시행령을 고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상에 지친 시민들이 안전하게 쉬어야 할 공원이 불안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는 일은 막아야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24 ‘50년 만기 주담대’ 막차 쏠림 혼란

“제도 바뀌기 전에 막차 타야 합니다.” “막히기 전에 서두르세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이처럼 대출을 부추기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백 년 대출’로도 불리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얘기다. 지난달부터 상품을 출시했던 시중은행들이 갑자기 가입 연령을 제한하거나 아예 판매 중단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절판 위기에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최근 1주 사이에 1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출시 두 달이 채 안 된 상품이 철퇴를 맞은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으로 50년 만기 주담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4월부터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증가했다. 금융당국은 50년 만기 주담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이 된다고 봤다. DSR 규제에 따라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연소득의 40%를 넘을 수 없는데, 만기가 길어지면 원리금 규모가 줄어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50년 만기 주담대는 사실 현 정부의 작품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검토해 지난해 5월 민생안정 프로젝트의 방안으로 제시했다. 고금리 시기 차주들의 원리금 부담을 덜어주고 대출 규제로 끊어졌던 주거 사다리를 다시 연결한다는 취지였다. 지난해 8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5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을 출시했고, 올해 1월 또 50년 만기 특례보금자리론을 내놨다. 이에 은행들도 정부 기조에 맞춰 초장기 대출 상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가 은행 탓을 하니 은행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정부가 50년 만기 주담대의 가입 연령을 ‘만 34세’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중장년층들은 역차별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생애 최초 주택마련 가구주 연령은 대략 38∼40세다. 해외에서도 50∼60년 초장기 주담대가 많지만 나이로 가입을 제한하는 건 일본, 싱가포르 등을 제외하면 드물다. 50년 만기가 문제라면 40년 만기도 마찬가지다. 40세의 50년 대출은 안 되고, 50세의 40년 대출은 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사실 가계대출을 키운 주범은 정부다. 올해 들어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규제 완화와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 상품 출시가 부동산 매수 심리에 군불을 지폈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출시 반년 만에 31조 원이 몰리며 가계대출 확대를 주도했다. 금융당국은 ‘상생금융’을 내세우며 시중은행에 대출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다. 기준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나선 한국은행과 엇박자를 낸 것이다. 최근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대출 태도가 느슨해진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느슨했던 건 오히려 금융당국이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25 ‘블루스폿’의 기사… 신진서, 14년 만에 응씨배 우승

프로바둑 해설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블루스폿(blue spot)’이다. 보통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해설하는데 인공지능이 다음 ‘최선의 수’를 파란 점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블루스폿에는 이길 확률도 %로 표기되기 때문에 바둑의 유불리를 금방 알 수 있다. 블루스폿과 일치율이 가장 높은 기사로는 신진서 9단이 꼽힌다. 그의 별명이 ‘신공지능’인 이유다.
▷신 9단이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9회 응씨배 결승 2국에서 중국의 셰커 9단에게 승리하며 종합전적 2-0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기사의 우승은 14년 만이다. 원래 2021년 결승전이 열렸어야 했지만 결승만큼은 대면 대국으로 하고 싶다는 주최 측의 바람 때문에 2년여 늦어졌다. 신 9단의 응씨배 우승은 개인적으론 명실상부 세계 1인자의 위치를 굳혔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 바둑계로서도 의미가 깊다. 4년마다 열려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는 한국 바둑계의 발전에 ‘특이점’이 된 사건이었다.
▷응씨배는 대만 기업가 잉창치(應昌期) 씨가 1988년 40만 달러의 파격적 우승 상금을 걸고 출범시킨 세계대회. 당시 전통의 강호 일본과 신흥 강자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들러리 신세였다. 초청기사 16명 중 한국 기사는 조훈현 9단 달랑 1명이었다. 하지만 조 9단은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 올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에 3-2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조 9단이 귀국할 땐 김포공항에서 서울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4회 대회까지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9단이 잇따라 우승했다.
▷한국은 응씨배 7, 8회 대회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 바둑계는 중국에 밀려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이번 우승은 한국 바둑이 신 9단을 필두로 다시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됐다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잘 아는 신 9단은 7월 이후 모든 일정과 생체리듬을 응씨배에 맞췄다. 인터뷰도 사양했다. 9월 열릴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의 국가대표인 그는 진천선수촌 합숙 기간 동안 다른 대표 선수들과 심도 깊게 공동연구를 했다. 체력 보강을 위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각각 3시간인 대국 시간에 맞춰 기상과 식사 시간도 조절했다. ‘이 악물고 준비한’ 결과는 완승이었다.
▷인공지능 바둑이 등장한 뒤 인간 바둑의 인기가 시들해진 측면이 있다. 최고수가 AI인데 인간 바둑을 굳이 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100m 달리기도 자동차가 더 빠른데 인간이 0.1초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바둑도 마찬가지다. 신 9단은 “기사가 정상권에 오르면 뚜렷한 목표가 사라질 수 있는데, 인공지능으로 연구하면서 끝없이 발전하려고 한다”고 했다. 신 9단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간 바둑을 보게 하는 묘미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8-26(토) “절대 굴복 안 해”… 트럼프 ‘분노의 머그샷’ 연출

미국 도박꾼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머그샷(피의자 식별 사진)을 놓고 각종 내기를 걸었다. 그가 입고 나올 옷, 그가 지을 표정 등이 모두 초미의 관심사였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가장 남자답고 잘생긴 머그샷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어제 공개된 실제 머그샷 속 트럼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매서운 눈매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다. 치밀하게 계산해 사전에 연습, 연출한 각도와 표정일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전직 대통령이 형사 기소된 것도 전례가 없거니와 그의 얼굴을 머그샷으로 접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사상 초유의 일이다. 앞서 인공지능(AI)으로 합성한 주황색 죄수복 차림의 가짜 머그샷이 온라인에 퍼졌지만, 실제 사진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그를 2020년 대선 방해 혐의로 기소한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지방검찰의 워터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기소장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시각적 각인 효과가 작용한다. “미국 대통령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한탄이 쏟아졌다.
▷머그샷은 최대한 무표정하게 찍는 것이 재판 전략상 유리하다. 밝은 표정은 진지하지 않다는, 성난 표정은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래도 공인들은 머그샷 공개를 염두에 두고 특정 메시지 발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양복에 성조기 핀을 달았는데, 이는 9·11테러 당시 자신의 위기 대응 활약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분석됐다. 트럼프의 측근으로 함께 기소된 여성 변호사는 립스틱을 바르고 미소 띤 얼굴로 머그샷을 찍었다. 트럼프가 담고자 한 이미지는 그가 SNS에 썼듯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강함이다.
▷머그샷 굴욕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풀턴 카운티 교도소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보다는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른 흉악범들이 많이 수감돼 있는 곳이다. 노후한 시설과 위생 불량으로 악명이 높다. 4월 사망한 수감자의 유가족이 “감방에서 빈대에게 뜯어먹혔다”며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런 교도소 안에서 트럼프는 다른 수감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검찰은 공언했다. 트럼프는 2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20분 만에 석방됐지만, 재판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트럼프의 현재 지지율은 51.6%로 공화당 대선 후보 중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성추행 입막음부터 간첩 혐의까지 4차례 기소 때마다 “정치적 마녀사냥”이라고 주장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의 머그샷을 앞세워 후원금을 모금하고, 티셔츠와 기념품을 만들어 팔려는 시도들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머그샷 활용법이 비판자와 지지자 양쪽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쏠리는 관심도 그만큼 커진다. 차기 대통령 선택을 넘어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까지 함께 걸린 문제여서일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28(월) 빌보드 1위 美 가수 “내 노래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

‘나는 온종일 일하며 영혼을 팔아요, 형편없는 돈을 벌려고 잔업을 하죠.’ 일용직 노동자 출신의 백인 컨트리가수 올리버 앤서니가 부른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Rich Men North Of Richmond)’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 계급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 영상은 유튜브 공개 2주 만에 조회수 4400만 건이 넘었다. 최신 빌보드 차트에선 테일러 스위프트 등 슈퍼스타를 제치고 핫100 1위에 올랐다.
▷이 노래의 인기가 급상승한 건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사 덕분이다. ‘네 돈은 끝없이 세금으로 부과돼’, ‘뚱뚱한 사람들이 착취하는 복지’ 등은 복지를 핑계 삼아 세금을 너무 많이 떼어가는 민주당 비판이라는 것이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잊힌 미국인들의 찬가’ 등의 칭송을 쏟아냈다. 노래가 거론한 이슈들은 모두 공화당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자화자찬까지 나왔다. 최근 공화당의 대선 경선 토론회는 이 노래 영상을 먼저 본 뒤 진행될 정도였다.
▷공화당을 위한 노래라는 해석에다 영웅화 움직임까지 보이자 앤서니가 직접 반박하는 영상을 26일 올렸다. 그는 “내 노래가 정치적 무기화(weaponized)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는 “이 노래는 조 바이든과 관련 없고, 오히려 기업들에 종속된 시스템 전체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파는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좌파는 자신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을 그만두라고 경고했다. 각 진영이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던진 것이다.
▷정치가 엔터테인먼트계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처럼 노래를 정치적 정체성을 알리는 도구로 쓰거나 인기 연예인들의 지지 선언을 통해 이미지 개선을 꾀한다. 하지만 이미지만 빼먹으려는 얄팍한 계산이 오히려 역풍을 맞는 경우도 많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닐 영의 노래 ‘로킹 인 더 프리월드’를 유세송으로 썼다가 동의가 없었다며 고소당했다.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는 2018년 미 테네시주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으나 투표 결과 상대 후보에게 예상보다 더 많은 표 차로 패배했다.
▷미국 매체 더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예인들의 정치적 지지 선언이 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응답이 65%나 됐다. 더욱이 4명 중 1명은 연예인 지지 후보를 더 꺼리게 됐다고 한다. 구체적 어젠다를 제대로 모르는 연예인들의 지지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19대, 20대 대선 모두 연예인 지지 숫자가 줄었다. 지지자도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이어서 주목도도 많이 떨어졌다. 일시적 이미지 조작이나 아전인수격 해석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워졌다. 정치가 승부를 봐야 할 지점은 결국 스스로의 역량과 매력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8-29 “당신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소름 돋는 빅테크 표적광고

‘그들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자동추천 콘텐츠나 광고를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딱 한 번 검색했거나 클릭했을 뿐인데 내 취향을 정확히 저격한 연관 내용들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뜬금없이 당뇨약 광고가 뜨기에 무심히 넘겼는데 며칠 뒤 병원에서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며 혀를 내두른 사람도 있다. 이쯤 되면 사용자들의 반응대로 “소름이 돋는, 무서운 수준”이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추천 알고리즘의 수준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각종 검색과 시청 등을 통해 입력되는 사용자 정보가 그 바탕이 된다. 연령과 성별, 직업, 거주지역 같은 정보는 물론이고 식습관과 패션 스타일, 정치 성향 등까지 세세히 수집, 분석되고 이용된다. 이를 바탕으로 40대 여성에게 “20대처럼 보인대요∼”라며 화장품과 의류 구매, 피부과 추천 광고가 줄줄이 날아드는 식이다. 이 중에는 업체들이 동의 없이 확보해 상업적으로 이용하거나 동의를 사실상 강제해 얻어내는 사적인 정보들도 적잖다. 개인정보 유출과 사생활 침해 등 우려가 커진다.
▷해외에선 이념적 편향성을 강화하는 정치 광고나 증오 연설이 문제가 된다. 불법 이민자 유입, 흑백 인종차별, 선거 때마다 심화하는 정치·사회적 양극화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 확증편향이다. 미국에서는 올해 초 10대 학생들 사이에서 극단적 여성혐오 성향을 가진 극단주의자 앤드루 테이트의 유튜브 영상이 퍼지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주요 플랫폼들의 추천은 집요해서 ‘연관 게시물’ 사이클에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빅테크 기업들의 ‘맞춤형’ 콘텐츠 제공을 제한하는 유럽연합(EU)의 규제법이 2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디지털서비스법(DSA)에 따라 기업들은 앞으로 개인의 종교나 정치 성향에 근거한 맞춤형 광고를 내보내지 못한다. 사용자가 추천 기능을 원하지 않으면 이를 끌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세계 디지털 시장 2위인 유럽의 강력한 규제에 메타와 알파벳 같은 기업들은 부랴부랴 대응에 나선 상황이다. EU 규제에 맞춘 제한조치들이 곧 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서도 적용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맞춤형 게시물 규제가 장점까지 약화시키게 될 것이라는 반발도 없지는 않다. 소비자 욕구는 점점 다양해지고 정보가 범람하면서 효율성도 그만큼 요구되는 시대다.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내용만 취합해 제때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대한 비즈니스 업계의 수요는 늘고 있다. 강점을 살리고자 한다면 정보의 무단 수집과 편식 같은 부작용부터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규제 논의를 시작한 한국에도 던져진 숙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30 서양인도 절레절레 고개 흔드는 ‘팁 문화’ 한국이 왜 배우나

고급 식당이 아닌 일반 식당을 기준으로 유럽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10% 정도를 팁으로 준다. 미국에서는 이제 18%도 적다고 하고 20%가 기준이 됐다. 유럽에서는 팁을 놓고 가지 않는다고 해서 종업원이 쫓아와 왜 팁을 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일은 없지만 미국에서는 일반 식당이라도 팁을 안 주거나 적게 주고 나갔다간 큰일 난다. 팁 액수를 아예 영수증에 적어 넣어 달라는 것도 미국 식이다.
▷팁 문화는 유럽 귀족들로부터 시작됐지만 유럽을 다녀온 미국 부자들이 미국 경제가 유럽을 능가하자 팁을 더 많이 주기 시작했다. 팁의 액수가 커지다 보니 팁이 종업원에게 부수입이 아니라 주 수입의 일부가 됐다. 1960년대 들어와 미 의회는 팁이 있는 업종에서는 고용주가 종업원이 팁으로 얻을 수익까지 고려해 일반적인 최저임금보다 낮게 임금을 책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가 대서양 양안의 팁 문화에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미국의 팁 문화는 부자연스럽고 그악스러워졌다.
▷언제 얼마의 팁을 줘야 할지는 일률적인 규칙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여러 규칙이 작용해 복잡할 뿐이다. 한번은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프랑스 파리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늘 하던 대로 10% 정도의 팁을 놓고 나왔더니 프랑스 친구가 하는 말이 다시 올 식당도 아니고 서비스가 친절했던 것도 아닌데 1유로면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호텔방을 비울 때 1달러를 놓는 걸 신성한 의무처럼 여기지만 룸메이드는 웨이터와 달리 팁을 받는 직종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인 중에서는 안 주는 걸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팁 문화가 시도되고 있다. “서빙 직원이 친절히 응대했다면 테이블당 5000원 정도의 팁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테이블마다 붙여놓은 식당이 있는가 하면 카운터 앞에 팁 박스라고 써붙인 유리병을 놓아두고 ‘우리 가게가 좋았다면 팁(Tips if you like)’이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은 빵집도 있다. 카카오 택시는 친절한 기사를 위한 팁 선택 제도를 시범 도입했다. 반응은 좋지 않다. 물가까지 오르는 판국에 무슨 팁 문화냐는 것이다.
▷팁이 없어 10∼20%의 돈을 더 내지 않으니 좋고 늘 팁 값을 염두에 두고 살 필요가 없으니 좋다. 서양인도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 오면 팁이 없어서 좋다고 한다. 우리가 서양에서 팁 문화를 배울 게 아니라 서양이 한국 등으로부터 팁 없는 문화를 배워가야 한다. 서양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 실패한 팁 문화보다는 팁 문화 없이도 높은 수준의 서비스업을 발전시킨 이웃 나라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31(목) “범인 아닌 희생자가 기억되길” 혜빈씨 유가족의 신원공개

만화 캐릭터 포켓몬을 좋아하던 밝고 장난기 많던 미대생.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으려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해오던 착실하고 책임감 있는 딸…. 길게 땋아내린 머리에 환한 미소를 띤, 영정 사진 속 고 김혜빈 씨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생기가 가득하다. 분당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으로 끝내 스러진 스무 살 청춘이 세상에 각인시킨 마지막 모습이다.
▷‘20대 여성 피해자’로만 보도돼온 혜빈 씨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됐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기억되는 세상이었으면…”이라는 유가족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앞서 사건 당일 숨진 60대 여성 이희남 씨의 유족도 고인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슬픔을 추스를 여력조차 없는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남은 이들의 사생활 공개와 이로 인한 삶의 변화들도 각오해야 한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내린 공개 결심이라 보는 이를 더 숙연하게 한다.
▷흉악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가해자의 신상은 언론에 도배된다. 서현역 흉기난동범인 최원종에 대해서도 범행 동기와 성장 배경, 정신상태 등에 대한 정보와 전문가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묻지 마 칼부림’을 비롯한 잇단 흉악범죄로 가해자 신상 공개에 대한 여론의 요구 또한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점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같은 내용이 의도치 않게 범죄자에게 서사(敍事)를 부여하는 경우마저 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그 시끌벅적함 속에 묻히거나 가려지곤 한다. 억울한 피해를 초래한 문제점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기회를 놓치게 되는 수도 있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던 사건, 사고 피해자의 이름은 이를 딴 법안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윤창호법, 민식이법, 정인이법 등은 각각 음주운전과 스쿨존 과속, 아동학대 처벌 강화와 재발 방지 내용을 담은 법에 희생자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이름과 얼굴은 그 누구라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현실 자각을 하게 만든다. 안타까움과 공분이 제2, 제3의 희생자를 막기 위한 제도 개선을 끌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예쁜 구름을 보면 혜빈 씨가 하늘에서 그렸다고 생각할게요.” “범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인터넷에는 혜빈 씨의 이름과 얼굴을 접한 이들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범죄자 응징 같은 사회적 메시지에 앞서 사랑스러웠던 외동딸, 소중한 친구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함께 추억을 나누고자 하는 게 유가족의 뜻이 아닐까. 더 이상의 희생이 없도록 마음을 모으는 모든 이가 오늘 함께 혜빈 씨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면서 그를 기리고 또 애도할 것이다. 유가족과 지인뿐 아니라 온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고 얼굴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