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모든 것 월간조선
08월 호 2023 08.06
◆인도개황

▲사진=게티이미지
국가명 :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 힌디어 Bharat Ganarajya)
수도 : 뉴델리
인구 : 14억2862만7663명(2023, 세계 1위)
면적 : 328만7263k㎡(세계 7위)
국가(國歌) : ‘모든 국민의 마음’(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작사, 작곡)
역사 :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사이 번영했다. 기원전 1500년경 북서쪽에 거주하던 아리아인이 인도 대륙을 침입했다. 이들은 드라비다인들과 융합되어 고대 인도 문화를 만들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왕 재임 당시 전성기를 맞이하며 남아시아 대부분을 통합했다. 4세기부터 6세기 굽타 왕조는 인도의 과학, 예술,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후 700년에 걸쳐 이슬람교가 인도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0세기와 11세기 튀르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인도를 침략해 델리 술탄국을 세웠다. 16세기 초에는 바부르가 무굴 왕조를 세웠다. 이 시기 유럽 탐험가들이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세기까지 대영제국은 인도 대륙에 지배력을 행사했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며 1947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대규모 집단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인도 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됐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리됐다. 1974년 핵실험을 실시했다. 2008년 11월 파키스탄의 테러리스트들이 인도의 ‘금융 수도’ 뭄바이에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1991년 경제 개혁 이후 인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다. 젊은 노동력과 지정학적 이점은 인도가 지역–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이 됐다.
민족 : 인도–아리아인 72%, 드라비다인 25%, 기타 3%
언어 : 영어(공용어), 힌디어 43.6%, 벵골어 8%, 마라티어 6.9%, 텔루구어 6.7%, 타밀어 5.7%, 구라자트어 4.6%, 우르드어 4.2%, 아삼어 1.3%
종교 : 힌두교 76.8%, 이슬람교 14.2%, 기독교 2.3%, 시크교 1.7%, 기타 2%
세계문화유산 : 타지마할, 붉은 요새 복합단지, 엘로라 석굴 등 40개
평균 연령 : 28.7세(남성 28세, 여성 29.5세)
평균 수명 : 67.69세(남성 65.95세, 여성 69.61세)
주요 질병 : 박테리아성 설사, A형 간염, E형 간염, 장티푸스, 뎅기열, 크림반도–콩고 유행성 출혈열, 일본 뇌염
흡연율 : 27.2%(남성 41.3%, 여성 13%)
정치체제 : 연방의회공화국, 양원제, 의원내각제
총리 : 나렌드라 모디
대통령 : 드라파디 무르무
부통령 : 자그딥 단카르
여당 : 인도인민당(BJP)
사법제도 : 3심제, 힌두교도·무슬림·기독교도에게 각기 다른 법률 적용
위치 : 남아시아에 위치하며 아라비아해와 벵골만에 접해 있다. 방글라데시, 부탄, 미얀마, 중국, 네팔,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리 : 데칸 고원(남부), 갠지스 평원, 사막(서부), 산악(북부)
기후 : 열대 몬순 기후(남부), 온대 기후(북부)
해발고도 : 최고 8586m(칸첸중가), 평균 160m
명목 GDP : 2조4685억 달러(2022년)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 : 9조279억 달러(세계 3위)
1인당 GDP : 6600달러(2021년, 세계 159위)
국가 신용등급 : Baa3(무디스, 2022년), BBB–(S&P, 2023), BBB–(피치, 2023)
물가상승률 : 5.13%(2022년)
실업률 : 5.98%(2021년)
산업 구조 : 1차 산업 15.4%, 2차 산업 23%, 3차 산업 61.5%
수출액 : 6430억 달러(2021년, 세계 13위)
주요 수출국 : 미국(17%), 아랍 에미리트(9%), 사우디아라비아(5%)
수입액 : 7171억 달러(2021년)
주요 수입국 : 중국(15%), 미국(7%), 아랍 에미리트(6%), 사우디아라비아(5%)
주요 지하자원 : 석탄(매장량 세계 4위), 안티몬(합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 철광석, 납, 망간 등
병력 : 육군 125만 명, 해군 6만5000명, 공군 14만 명, 해외 주둔군(콩고민주공화국 1900명, 이스라엘 골란 고원 110명, 레바논 900명, 남수단 2350명, 수단 310명)
※미 〈CIA 월드 팩트 북〉 참조
정리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美 〈CIA 월드 팩트북〉으로 본 인도의 지리·자원·환경
남아시아에 위치하며 아라비아해와 벵골만에 접해 있다. 국토의 총 면적은 328만7263㎢로 세계 7위다. 이는 미국 국토의 1/3보다 약간 더 큰 수준이다. 이 중 육지 면적은 297만3193㎢, 바다 면적은 31만4070㎢이다.
방글라데시, 부탄, 미얀마, 중국, 네팔, 파키스탄 등 6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의 길이 1만3888km)
기후대는 남부의 열대 몬순 기후부터 북부의 온대 기후까지 걸쳐 있다. 국토는 데칸 고원 등 남부의 고원 지대, 갠지스 평원 지대, 서부 사막 지대 그리고 북부의 히말라야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해발고도는 8586m의 칸첸중가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국토의 평균 고도는 160m다. 주요 천연자원으로는 세계에서 네 번째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탄과 안티몬(합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 철광석, 납, 망간, 운모(유리 대용이나 전기 절연체 등에 쓰이는 광물), 보크사이트, 천연가스, 다이아몬드 등이 있다.
토지 이용은 농업용이 60.5%로 가장 많다. 숲은 23.1%, 기타 16.4% 등이다. 대표적인 강에는 브라마푸트라강(3969km), 인더스강(3610km), 갠지스강(2704km), 고다바리강(1465km) 등이 있다. 북서쪽의 사막과 북쪽의 산악 지대를 제외하면 인구 밀도는 모든 도시에서 높은 편이다. 특히 갠지스강 북부와 남부 해안 지역에 인구가 집중돼 있다. 주요 자연재해로는 가뭄과 계절 호우에 따른 홍수, 뇌우와 지진이 있다. 해발고도 354m의 바렌 섬(Barren Island)은 최근 몇 년간 화산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삼림 파괴, 토양 오염, 과도한 방목, 사막화, 산업용 물질과 차량 배기가스에 의한 대기 오염, 농업 및 생활용수에 의한 수질 오염은 환경 문제로 지목된다. 수돗물은 식용이 불가하다. 많은 인구 탓에 자연환경이 훼손됐고, 생태계 다양성이 파괴되고 있다.⊙
정리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10명의 인도인으로 본 인도의 역사
아소카 대왕부터 아마르티아 센까지
⊙ 아소카, 폭력 근절하고 종교의 자유 실현… 불교 발전의 계기 마련
⊙ 아크바르,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공존 바탕으로 무굴제국 중흥시켜
⊙ 간디, 비폭력주의로 독립 쟁취… 네루, 현대 인도 만들어
⊙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헌법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 지내
⊙ 에어 인디아 창립한 JDR 타타,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에 앞장
⊙ 아마르티아 센,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로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

인도는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종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 때문에 현세의 일을 기록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게다가 종이가 아니라 보존이 힘든 나뭇잎에 기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료(史料)가 부족하다.
이런 인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서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대표하는 10명의 인도인을 통해 인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옥순 연세대학 연구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이 교수는 1984년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인도 역사로 석·박사를 받고 지금까지 인도 관련 저서를 펴낸 국내 몇 안 되는 인도 전문가 중 하나다. 이 교수가 선정한 인물들은 고대 2명, 중세 3명, 근현대 5명이다.
1. 아소카 대왕
- ‘비폭력’과 ‘종교의 자유’ 실천
아소카(재위 BC 268~232년경)는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이다. 아소카 왕의 조부(祖父)는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이고, 부친은 빈두사라이다.
아소카 왕은 청년 시절 속주(屬州)의 태수로 힘을 키우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형제들과 싸워 이긴 끝에 왕위를 차지했다. 왕의 비문에 의하면 통치 초기에는 조부 이래의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하고, 재위 8년에 인도반도 북동부의 칼링가국을 정복했다. 당시 그는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인도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소카 왕은 칼링가 전쟁 이후인 BC 261년 불교에 귀의, ‘다르마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선정(善政)을 행했다. 아소카 왕은 불교도였지만, 아지비카교, 브라만교, 자이나교, 바가바트교와 같은 다른 종교들도 허용했다. 아소카 왕은 불교 이념을 통치에 반영하면서 비폭력을 진흥해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찬드라굽타 2세
- 인도의 황금시대를 연 ‘超日王’

▲찬드라굽타 2세
찬드라굽타 2세는 인도 굽타 왕조의 제3대 왕(재위 380~415년)이다. 그에게는 비크라마디티아[무용(武勇)의 태양]라는 별칭이 있는데, 번역하면 ‘초일왕(超日王)’이다. 그는 중앙 인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나가족을 회유하고 데칸 중부의 패자(覇者) 바카타카 왕조의 루드라세나 2세와 동맹을 맺는 한편, 말와에서 카티아와르 반도에 이르는 강대한 샤카족 왕국을 정복했다.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해 서아시아와의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서아시아 문화도 받아들였다. 아잔타와 엘로라의 불교 석굴들과 수많은 불교 스투파와 사원들이 이 시대에 건설됐다.
찬드라굽타 2세 또한 힌두교를 믿었으나 불교 등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유명한 날란다의 불교대학도 왕의 보호 아래 계속 성장했다.
이옥순 교수는 “이 시기 인도를 여행했던 동진(東晉)의 승려 법현(法顯)의 기록을 보면 찬드라굽타 2세 시대를 태평성대였다고 표현했고, 이후 여러 연구 자료를 봐도 인도의 황금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술, 문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했다”면서 “세계적인 문학 작품인 《샤쿤탈라》가 이 시기에 나왔고, 지동설을 주장하고 숫자 영(0)을 만든 아리아바타와 같은 수학자도 이 시대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3. 아크바르
-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공존 추구한 大무굴제국의 중흥주
아크바르(1542~1605년)는 인도의 다섯 번째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의 3대 왕이다. 그는 13세 어린 나이에 등극(登極)한 후 강력한 군사력으로 판도를 부단히 확장하면서 제국을 부흥시켰다.

▲악바르 대제 아크바르
아크바르는 북인도 지역을 석권하고 구자라트·벵골·오리사·카슈미르·신드 등 광활한 지역을 병탄해 인도 이슬람 왕조 사상 최대의 제국, 이른바 ‘대(大)무굴제국’ 시대를 열었다. 아크바르는 소수 지배자인 무슬림과 다수 피지배자인 힌두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일련의 민족융화 정책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엄청난 세수(稅收) 감소를 감내하면서 비무슬림에게만 부과했던 성지순례세와 인두세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아크바르의 민족화해와 문명융합 정책으로 인해 무굴제국은 강대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크리슈나 데바라야
- 포르투갈인들도 감탄한 유능한 군주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크리슈나 데바라야.
크리슈나 데바라야는 1509년부터 1529년까지 남인도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툴루바 왕조의 세 번째 군주인 그는 이슬람계인 델리 술탄국이 몰락한 후 인도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크리슈나 데바라야 왕은 통치 기간 신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혹하게 다뤘지만, 국민을 위해서는 결혼비와 같은 불쾌한 세금을 폐지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폈다. 그는 새로운 경지를 개간하고 비자야나가라 주변의 관개시설을 확충했다. 매년 제국의 광범위한 지역을 순행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악행자를 처벌했다. 서사시를 좋아해서 많은 시인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방문했던 포르투갈인들은 “크리슈나 데바라야 왕은 유능한 행정가이자 훌륭한 장군이며, 최전방에서 전투를 이끌고 친히 부상자를 돌보았다”고 기록했다.
5. 시바지
- 농민들의 지지 얻어 이슬람 물리치고 힌두교 부흥시켜
시바지(1627~1680년)는 마라타 왕국의 창시자이다. 그는 이슬람 왕조인 북쪽의 무굴제국과 남쪽의 비자푸르국의 압제에 저항하는 마라타족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데칸 반도 서부에 소왕국을 건설했다.

▲시바지
이옥순 교수는 “시바지는 힌두교도로서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국시(國是)로 삼았다”면서 “시바지 왕은 무굴제국을 상대로 27년간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마라타 왕국은 결국 패했지만 무굴제국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무굴제국은 마라타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잔존한 마라타 세력은 후일 최후까지 영국 식민 세력에 저항했다.
6. 마하트마 간디
- 인도인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영혼
‘비폭력’주의를 내세워 영국의 식민통치에 맞선 간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 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간디는 18세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했다. 1891년 변호사 면허를 취득한 그는 1893년 남아프리카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간디는 그곳에서 약 7만 명의 인도인들이 백인에게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인종차별 반대투쟁 단체를 조직, 활동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인도에서 벌인 독립운동의 모형이 된다.
1915년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영국의 전쟁 수행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배신했다. 이때부터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했다.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 비폭력 저항을 벌였다. 간디는 이후 여러 차례 투옥됐지만 영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 간디는 힌두·이슬람의 융합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8년 1월 반(反)이슬람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7. 자와할라 네루
- 현대 인도를 만든 초대 총리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인도 최초의 총리였던 자와할라 네루.
자와할라 네루(1889~1964년)는 인도의 독립 이후 1947~1964년 초대 인도 총리를 지냈다. 사회주의 성향을 지녔던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전통은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맞서는 민중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었던 네루는 영국에서 해로스쿨,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하고, 런던에 있는 이너 템플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12년 귀국했다.
네루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19년 벌어진 암리차르 학살이었다. 영국군의 발포로 379명이 살해되고 1200명이 부상을 당한 이 사건을 계기로 네루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 초대 총리가 된 네루는 인도의 기본적 단일성에 바탕을 둔 세속주의를 강조하면서 인도를 현대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했고, 교육 및 과학기술의 진흥, 소외계층의 복지, 여권 증진, 카스트 제도 철폐 등을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소(美蘇) 냉전의 와중에 ‘비동맹’을 표방하며 제3의 길을 모색했다.
8.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앞장선 초대 법무장관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브힘라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상 최하 계급인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출신으로 인도 독립 후 첫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1891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암바바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 신분으로 인한 온갖 차별과 수모를 감수하면서 학업에 정진, 뭄바이대학교 엘핀스톤칼리지를 졸업한 후 사회사업가 켈루스카의 후원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암베드카르는 귀국 후 뭄바이 시드넘대학 교수가 됐지만 신분차별은 여전했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1922년 영국 그레이법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한편, 영국의 런던정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3년 귀국한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힌두사원 입역(入域) 금지 철폐운동을 전개하면서 최하층민들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암베드카르는 헌법기초위원장과 법무장관을 맡아 인도공화국 헌법 제정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그는 인도의 사회적 불평등과 악법을 담은 힌두교 《마누법전》을 폐기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현한 새로운 힌두법전을 제안했지만 좌절되자 바로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옥순 교수는 “암베드카르야말로 불가촉천민의 희망이었다”면서 “우리나라로 치면 백정의 신분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올라간 것”이라고 말했다.
9. J.R.D 타타
- ‘노동 자체를 사랑’했던 혁신적 기업인
J.R.D 타타(1904~1993년)는 비행사 출신의 기업가다. 타타는 인도에서 최초로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에어 인디아(Air India)의 전신인 타타에어서비스(Tata Air Service)를 설립했으며, 1977년까지 회장으로 에어 인디아를 경영했다.

▲J.R.D 타타
에어 인디아는 이후 약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항공사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오늘날 세계 굴지의 항공사로 꼽히는 싱가포르항공, 캐세이퍼시픽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타타 회장은 현장에서 와인 따르는 방법, 승무원의 머리스타일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지저분한 카운터는 직접 세정제로 청소했고, 항공기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대가를 받고 눈에 보이는 일만 한다는 자세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노동 자체를 사랑한다’고 할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인도 정부와의 갈등으로 1977년 에어 인디아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에어 인디아의 경쟁력은 하락, 에어 인디아의 명성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타타 회장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하루 8시간 노동제, 유급 휴가제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보장,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기업인’으로 인도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0. 아마르티아 센
-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

▲아마르티아 센
센 교수는 1933년 지금의 방글라데시 마니쿠간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빈곤과 불평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도 인도 출신이다.
그는 《빈곤과 기아》(1981)에서 1943년 벵골 대기근은 단순히 절대적인 식량 생산의 부족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낮은 임금과 도시 지역의 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밝혔다. 센의 이론은 이후 국제기구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그가 만든 ‘센 지수(指數)’는 빈곤의 정도를 측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센은 이러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직업적 양심’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벵골 대기근을 직접 목격한 인도 출신이라는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센은 인도와 중국의 남녀평등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경제학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을 중시해 온 그는 경제철학 분야에서도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영국 전문가가 본 ‘영국과 인도’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
⊙ 4000여 명의 영국 문관들이 100만 명의 인도 공무원 통해 3억 인도인 다스려…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
⊙ 리시 수낙 총리,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은 인도계… 런던 시장 사딕 칸은 파키스탄계
⊙ 초기에는 민간 회사인 동인도회사가 26만 명의 병력 거느리고 무역권, 징세권 등 행사하며 지배
⊙ 영국, 1858년 〈동인도헌장〉 이후 인도에 자신들의 가치 강요하는 것 포기
⊙ 인도, 영국에 투자하는 나라 2위… 영국에서 10만5000명 고용
⊙ 650명의 하원의원 중 5.5%인 36명이 인도아대륙계
權錫夏
1951년생. 영남대 무역학과 졸업, 前 경북 해외자문위원협의회 회장, 現 보라여행사·아이엠컨설팅 대표 / 저서 《영국인 재발견》(1, 2권), 《유럽문화 탐사》 《두터운 유럽》 《핫하고 힙한 영국》 《영국인 발견》(역서)

▲1930년 간디가 결행한 소금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정점이었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애증(愛憎)의 관계나 은원(恩怨)의 관계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운명적인 관계이다. 정말 특수하다. 양국의 관계는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EIC)를 통해 인도와의 접촉이 시작된 1600년대로부터 1947년 8월 15일(우리와 우연히도 광복의 날이 같다)의 독립까지 거의 300년이 넘는다.
두 나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동인도회사를 빼고는 시작도 할 수 없다.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경영하는 순서는 정해져 있다. 항상 선교사를 먼저 들여보내고, 그러고는 상인, 군인, 정치인, 문화인 순서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국은 인도 지배를 시작할 때 실용주의자들답게 상인, 즉 동인도회사라는 상업회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EIC는 인도를 지배 통치한 회사 국가(The Company-State 또는 Corporate Sovereignty)였다. 어찌 보면 국가보다 더 강력했다. 국가라면 행정부를 통제하는 의회가 있기 마련인데 당시 인도에는 EIC를 견제할 그 어떤 기관도 없었다. 1857년 영국 정부가 EIC로부터 통치권을 박탈할 때까지 거의 101년간 EIC는 전제군주 국가 같았다. 쓸데없이 사상이니 철학이니 하는 정치 술수의 눈가림 없이, 발가벗고 돈만을 목적으로 하는 무자비한 이권(利權) 국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를 반은 무역회사이고 반은 국가(part-trade organization, part-nation-state)라고 학자들은 정의한다.
역사를 바꾼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제군주 국가와 같은 ‘회사국가’였다.
영국의 인도와의 조우는 영국의 영웅 중 하나로 ‘해적왕’으로 불리던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1588년 해전에 참전, 승리를 이끌어 영국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영국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1577~1580년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는데, 이때 동인도(East Indies·지금의 동남아시아 제도), 즉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섬에서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드레이크 일행은 이 덕분에 투자자들에게 투자 금액의 50배를 돌려줄 정도로 이익을 남겼다. 이 결과 영국에서는 동양에서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으려는 광풍이 불었다.
이런 기회를 잡으려는 일단의 투자자들은 1600년 12월 31일 동인도회사를 결성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향후 15년간 희망봉 너머로는 동인도회사 말고는 누구도 갈 수 없고 만일 어기면 선박과 화물을 압류하고 관련자는 감옥에 간다는 독점권의 칙허(charter)까지 내려주었다. 1601년 출발한 5척(도합 1500톤)의 첫 선단이 1603년에 돌아와 투자자들에게 노다지를 안겨주었다. EIC는 이후 274년간 존재하면서 대영제국의 형성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헌을 했다. 주요 원료, 노동력을 인도가 공급하지 않았으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불가능했고 그 뒤에는 바로 EIC가 존재했다.
EIC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 민간 주도의 합자회사였다. 인류 최초의 근대적 다국적(多國籍) 기업이었고,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였다. 26만 명의 자체 병력을 가진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영국군 전체의 두 배 규모였다.
절정기였던 1700년대 중반에서 1800년대 초반 동인도회사는 세계무역 물량의 절반을 취급했다. 주로 목면, 비단, 인디고 염료, 설탕, 소금, 향신료, 초(화약과 비료의 원료), 차, 아편 등이 주교역 품목이었다.
1800년대 인도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권력형 상업 조직이었던 EIC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효율적이고, 강력하고, 가장 무자비했던, 오로지 돈만을 앞세운 중세판 무역 상사였다.
‘벵골소대’
EIC와 영국 정부와의 관계, 즉 인도에서의 조세 정책, 이민 정책 등에 관한 문제로 정권이 바뀔 정도로 당시 영국에 인도는 중요한 곳이었다. EIC 등에서 근무를 하고 돈을 벌어 돌아온 인도 근무 경험이 있는 하원의원이 당시 하원 558명 중 1764년 6명, 1774년 22명, 1784년 36명이나 있었다. 소위 ‘벵골소대’라 불리는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EIC에 손해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섰다. 이들은 단순히 EIC에서의 봉급만이 아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뒤로 사무역(私貿易)을 해 축재(蓄財)를 한 뒤 귀국해 부패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이었다. 이런 의원들을 당시는 네이보브(Nabob)라고 불렀다.
당시 동인도 행정관의 연봉은 1만 파운드(현재 한화로 약 20억7200만원)에 달했다. 동인도회사는 무역은 물론 세금 징수, 보안, 전쟁까지도 담당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무역을 독점했고, 특히 징세권이 있어서 무한(無限)의 권력을 휘둘렀다. 동인도회사의 대표인 총독의 임명권도 정부가 아니라 EIC 이사회에 있었다. 인도군 사령관만 국왕 임명직이었다.
영국에 ‘동인도회사’라는 영감(靈感)을 준 나라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였다. 당시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에 비해 영국 EIC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영세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는 거의 정부 기관이거나 반관반민(半官半民)이었던 데 반해 영국 EIC는 완전한 민간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영국 EIC가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보다 더 오래가고 더 강력했다고 평가된다.
‘인도문관’
혹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오래가고 강력했던 이유를 인도문관(ICS·Indian Civil Service) 양성 제도에서 찾기도 한다. 당시 동인도회사의 인도문관은 중산층 자제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1853년까지는 동인도회사에서 자의로 선출해서 임명했다.
1853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회사의 인도문관은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하라는 법을 제정했다. 국가가 공정한 선발을 감독해야 할 만큼 선망의 직업이었다는 뜻이다. 매년 8월에 런던에서 응시생들이 모여서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반드시 승마 시험이 포함되었다. 인도문관은 이튼칼리지 같은 영국 전통의 명문 사립학교 출신으로 옥스브리지(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온 18~23세 사이의 인재 중에서 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인도로 배치되기 전 2년간의 집중 훈련을 다시 받아야 했다.
EIC는 인도문관 양성 학교(Haileybury and Imperial Service College)를 설립했다. 이 학교 출신이 아니면 인도문관이 될 수 없었다. 대(代)를 이어 이 학교에 들어가 졸업하고 동인도회사에 취직을 해서 ‘앵글로 인디언 패밀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해외 식민지 파견 외교관, 군인, 공무원직을 영국 중산층 자제들이 해야 하는 가장 ‘고상한 직업(respectable job)’이라고 불렀는데 EIC의 인도문관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EIC는 연봉도 다른 직업보다 월등 많았기 때문에 다른 ‘고상한 직업’보다 인재들이 더 몰려들었다. 이렇게 영국의 중산층 인재들이 식민지로 나가 대영제국의 세계 경영에 일조를 했다. 이 제도는 나중에 영국 정부가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직할 통치를 할 때도 제국문관(ICS·Imperial Civil Service) 제도로 이어진다.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
영국 통치가 갖는 특징 중 하나인 소수(少數) 백인에 의한 효율적인 통치 방식은 동인도회사 시대에 확립되었다. EIC 경영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문민 통치였고, 폭동 진압에도 영국 군대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로 인도 군인들을 이용해 보안을 유지하고 영국 군인들은 뒤에서 지시와 통제만 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라고도 한다. 문민 통치의 핵심이 되는 인도 근무 행정관은 제국문관, 경찰, 임업, 교육, 농업, 수의, 엔지니어링, 의료 요원 등으로 4000여 명이었다. 이 당시 인도 인구가 3억 명이었음에 비추어 아주 극소수였다. 1920년경에는 약 500여 명의 인도인 고문관도 있었다.
영국의 직할 통치 기간인 영국령 인도제국 시기(1858~1947년)를 말하기 위해서는 충성심 강하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제국문관들을 포함한 영국인 행정관들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대영제국이 막바지까지 유효하게 유지된 이유가 바로 이 행정관들에 의한 관료 제도와 관료 통치에 있다. 1932년 인도에선 100여만 명의 인도인 공무원이 당시 3억 명의 인구를 관리했다. 그들을 통제하고 지휘한 영국인 행정관의 권위는 거의 무소부재(無所不在), 전지전능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에게 이들은 거의 영국 정부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들은 영국 내의 사회적인 지위가 항상 높았고 봉급도 많은 데다가 신분도 보장되어 있어 인기가 좋았다. 덕분에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런 전통은 아직도 남아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지금도 외교관을 지망한다.
‘분리해서 지배하라’

▲인도대항쟁(세포이의 반란)은 종교와 종족을 넘어선 인도인들의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EIC는 1857~1859년 인도대항쟁(the Indian Rebellion) 이후 영국 정부가 인도를 ‘영국령 인도제국(the British Indian Empire 또는 British Raj)’으로 바꾸어 직할 통치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101년간 인도를 지배했다. 인도대항쟁은 인도 반란(Indian Mutiny),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세포이는 영국군에 속한 인도 사병), 1차 독립전쟁(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 다양하게 불린다.당시 동인도회사의 군대는 6만6000명의 영국군과 인도군 13만 명, 35만 명의 지방 종족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란은 인도군 13만 명 중 일부가 일으켰다.인도대항쟁은 1857년 5월 10일 뉴델리에서 64km 떨어진 군영(軍營)에서 시작되었다. 1858년 6월 20일 진압되었고, 영국 정부는 살인에 관련이 없는 자는 무조건 사면해주었다. 하지만 항쟁은 1859년 7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EIC는 인도 내 국내 치안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가져야 했지만, 본국에서 모두 데려올 수가 없어서 인도인 용병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인도인들이 인구는 많지만 수많은 종족, 언어, 문화, 종교, 신분 등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적절하게 이용, 부대를 철저하게 분리, 편성했다. 이는 일견 인도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하나의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도 다른 부대를 이용해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였다. ‘분리해서 지배(divide and rule)’하는 방법인 셈이었다. 영국은 대항쟁 때에도 반란의 주역인 무슬림과 브라만족 부대를 반대 종족인 시크와 발루치 부대를 이용해 진압했다
‘인도대항쟁’
대항쟁 반란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인도군에게 지급된 신식 엔필드총의 탄약통에 소와 돼지의 기름으로 만들어진 윤활유가 사용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는 절대 행동을 같이 안 하는, 소를 신성시 여기는 힌두교도와 돼지를 금기시하는 무슬림 인도 군인들이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 정부가 자신들을 기독교도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음모가 있다고 믿은 탓이다.
또한 반란 직전에 영국정부가 여인이 남편이 죽어서 화장을 할 때 남편 시신 위에 엎드려 같이 타 죽어야 하는 오랜 관습인 사티(sati)를 불법화하고 과부의 재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또한 전체 인종, 종교, 계급을 막론하고 의심을 사게 만들어 민간인들도 반란에 대거 참여했다.
반란이 시작되자 인도군들에 의해 인도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인 4만 명 중 6000명이 살해되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영국 군인들은 더욱 잔학해졌다. 진압 과정에서 격앙한 영국군의 만행은 필설로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무슬림 군인에게 돼지고기를, 힌두 군인에게 소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먹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경우, 강간을 일삼았다. 이에 인도 군인들도 잔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도대항쟁으로 영국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박탈하고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에 나선다는 결정이었다. 이와 동시에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제1차 인도대항쟁이 일어난 1857년부터 인도가 독립하는 1947년까지 90년간의 영국령 인도제국 시절은 영국의 인도 직할 통치와 인도인의 독립운동이 병존하는 시대가 된다.
영국령 인도제국은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부탄, 몰디브, 미얀마 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당시 영국 여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 인도 여황제(Empress of India)가 되었다. 대영제국 국가 중 가장 면적도 크고 인구도 많은 인도는 이렇게 해서 ‘영국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British crown)’이 되었다. 이 같은 겸직은 현 찰스 3세 왕의 할아버지인 조지 6세 때인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도대항쟁 이후 영국 정부는 인도를 상대로 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영국 정부는 우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 보다 긴밀한 유대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영국군 장교와 인도인 사병 사이만이 아니라 인도 일반인과 영국 일반인 사이까지 아울렀다. 186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 12만500명이 인도에 있었다. 이 중 4만1000여 명이 민간인이었다. 인도제국군은 6만6000명의 영국군과 13만 명의 인도군, 그리고 35만 명의 지방 종족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도대항쟁에 지방 영주들과 대토지 소유주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항쟁 이후 이들에게 영국 정부는 보상을 했고 인도 정치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도 주었다. 인도 지방 토후(土侯)들을 제국 통치의 조력자이자 일종의 공범자(共犯者)로 만든 셈이다. 물론 그들의 영지 또한 보장해주었다.
영국은 인도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리 같은 인도 여인들의 복장을 개선한다든지 결혼 풍습 등에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이런 영국의 노력을 서구의 전통과 풍습을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여기고 저항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서양인으로 세뇌시키려 한다고 오해까지 했다. 이에 영국은 인도 사회개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내놓는다.
‘인도의 대헌장’ 〈동인도선언〉

▲인도인 하인의 시중을 받는 빅토리아 여왕. 영국 여왕이자 인도제국 여제이기도 했다.
인도대항쟁 이후 영국은 인도를 단순한 착취의 대상에서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인도인들은 강자에게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해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1858년 11월 1일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어떤 신민에게도 강요할 권리와 요망을 모두 포기한다(We disclaim alike our Right and Desire to impose Our Convictions on any of Our Subjects)”는 〈동인도선언(the East India Proclamation)〉을 공포했다. 여왕의 선언에 이어 영국 의회는 인도통치법을 통과시켜 동인도회사의 인도 통치권을 박탈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할 통치할 수 있게 바꾸었다. 이와 함께 인도인들을 영국인과 같은 영국왕의 신민으로 인정(same rights as all Our other Subjects)하고 동시에 종교적인 관용과 인도의 관습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promised to support religious toleration, to recognise the Customs of India). 인종차별을 끝내고, 법의 완전한 보호를 어떤 차별도 없이 받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인도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인도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가치와 신념을 인도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는 〈동인도선언〉이 인도인에게는 〈대헌장(Magna Carta)〉 같은 중요한 선언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덕분인지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정말 놀랍도록 지키며 살고 있다. 영국 곳곳에서도 전통 복장인 사리를 입은 인도 여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암리차르 사건
1858년 인도통치법 시행 이후 반세기 동안 영국은 인도에서 중대한 사회개혁 정책을 펼쳐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통신, 교통, 공공사업 등에 치중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도래했다.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로 알려진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무장하지 않은 인도 시위대 군중에게 발포하여 최소 379명에서 최대 1500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위는 경찰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시민을 체포할 권한을 주는 로우라트법에 대한 항의 집회였다.
암리차르 사건은 인도인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무력 사용(minimal force whenever possible)’ 원칙이 파기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도인들의 영국에 대한 신뢰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다. 영국 정부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2019년 ‘깊은 유감(deep regret)’이라는 공식 사과를 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영국과 인도 두 나라 사이에 넘기가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당시 영국 전쟁장관(육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어불성설의 잔혹한 행위’라면서 영국 하원에서 성토했다. 영국 하원은 사령관의 처벌을 247대 37로 승인했다.
이 사건은 간디의 무저항·무협조운동(nonviolent noncooperation movement)의 계기가 되었고, 결국 영국의 인도 통치의 끝과 인도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간디의 저항운동에도 굽히지 않고 직할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에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도인이 과거 자랑스러워하던 영국의 작위와 공훈을 자진 반납했다. 인도 공무원들도 사직하거나 협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민들은 영국산 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제국의 황혼
영국의 인도 직할 통치의 막바지 무렵 제일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고등문관(ICS)에 지원하는 젊은 영국인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도 내에서의 저항운동을 알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도 정부의 토지세, 소금세 징수에 대한 반발이 심각해졌다. 결국 세금 징수에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어 ICS 행정관의 급여 및 근무조건의 악화가 이어졌다. 결국 ICS 행정관의 대다수를 인도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인 행정관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 독립에 대한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령 인도제국에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간디가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5일까지 24일간 벌인 소금세에 대한 항의 도보 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정점이었다. ‘소금행진(The Salt March 또는 Salt Satyagraha)’이라고 불리는데 간디가 지도자 78명과 같이 걷기 시작해 결국 100만 명 이상이 합류했다. 무저항·무협조운동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행진을 마친 후 간디는 직접 바닷물을 떠서 증발 건조해 소금을 만들어 소금법을 어겼다. 이에 간디는 5월 5일 체포되었으나 이미 인도인들은 위법을 자행, 자신들이 직접 소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협상을 제안, 1931년 12월 간디를 런던으로 초청했다.
‘逆식민주의’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 독립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 《힌두스탄 타임스》 1면.
인도는 결국 1947년 8월 15일 독립했다. 인도 독립 이후 인도와 영국의 관계는 1997년까지 50년간 냉랭했다. 냉전 시에도 인도는 항상 영국과 미국의 반대편에 섰다. 양국은 모든 면에서 서로 비협조적이었다. 카슈미르 분쟁에서도 영국은 파키스탄 편을 들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인도는 소련(러시아)으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중도 성향의 인도국민회의(INC·Indian National Congress)는 1991~1996년 수입관세와 각종 세금 인하, 시장 규제 완화 등을 통한 대담한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인도는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영국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 되었다. 인도도 경제개발에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결국 두 나라는 상호협조가 훨씬 이익이라는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인도는 미국 다음으로 영국에 투자를 많이 하는 국가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에 투자하는 나라 중 6위에 불과하다. 2019년 통계로는 인도 회사들이 영국에서 10만5000명을 고용해 480억 파운드(79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인도 최고의 기업 타타 그룹 하나가 영국에서 6만3760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 영감을 준 전 런던 정경대학교 총장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역(逆)식민주의(reverse colonialism)’라고도 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 있어 인도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영국 내에 현재 360만 명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계 인구가 산다. 인도 2.3%, 파키스탄 1.9%, 방글라데시 0.7%, 스리랑카 0.5%로 모두 합치면 영국 인구의 5.4%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국 사회에서 이들의 비중은 인구 비율에 비해 훨씬 크다. 영국 어디서든 인도아대륙인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주로 이들이 런던 같은 대도시에 살기 때문이다.
영국 내에서 2·3세대 인도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영국 사회에서 인도 공동체의 영향력은 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다. 주로 경제계에 인도인들의 진출이 활발하지만,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은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발하게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정계에서도 인도인들의 존재감이 커졌다. 650명의 하원의원 중 5.5%인 36명이 인도아대륙계이다. 정확하게 자신들의 인구 비율만큼 차지한 셈이다. 현 집권당인 보수당 정권의 내각요원 24명 중 총리 리시 수낙과 내각 3인자인 내무부 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 또한 인도계이고, 런던 시장도 파키스탄 이민 2세인 노동당 사딕 칸이 맡고 있다.
영국은 산업혁명 당시 인력이 모자라자 18~19세기에 인도아대륙인의 이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런 이민자들이 당시 영국 중부 지방의 공장에 취업을 해 영국의 방직업을 지탱했다. 이 후손들이 아직도 영국 중부 지방에 남아 있다. 레스터 인구 56만6000명 중 22%에 해당하는 12만6000명이 인도 계열이다. 런던 근교 해로우는 25만1000명 인구 중 29%인 7만4000명, 혼슬로는 인구 29만3000명 중 21%인 6만800명이 인도 계열이다. 이 지방들을 가보면 거의 인도 식민지 같다.
영국의 유산
영국이 인도에 남긴 유산은 근대적인 행정 제도, 교육, 기간산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철도, 도로, 통신, 체신, 교량, 운하 등의 시설과 관리 제도를 만들어 남겼다. 이는 다른 인도 내 지역들이 서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했고, 무역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정치와 법치 제도를 남겨 인도를 세상에서 가장 큰 민주 제도 국가라는 평을 듣게 했다. 또 정비된 교육 제도와 기관을 통해 인재 양성을 해 인도로 하여금 국내 총생산(GDP) 기준으로 영국을 6위로 밀어내고 세계 5위를 달성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큰 유산은 ‘영어’다. 800여 개가 넘는 언어와 2000여 개가 넘는 방언을 가진 인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영어’다. 또 ‘영어’는 인도인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장점이 되고 있다.
영국 지배의 어두운 면은 인력, 자원, 토지 착취다. 인력과 원료를 모두 영국으로 가지고 가는 바람에 인도는 자원과 인력만을 제공하는 기지가 되었다. 인도에서 인도 농부의 손으로 생산되어 영국으로 수출된 면화를 원료로 해서 영국으로 이민 간 인도 노동자들이 값싼 면직물과 면제품 의류를 대량 생산해냈다. 이런 제품들이 다시 인도로 수입되어 소규모 인도 면직물 공장과 수공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인도인들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셈이다. 인도는 그렇게 해서 영국의 종속경제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인도를 영국에 충성하는 인도 지배 계급에만 이득이 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인도의 농업을 순전히 영국의 이해와 관련되게 짜고 운영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재배해야 하는 땅에 영국 면직물 산업의 원료 목화를 심게 해서 대기근이 들었을 때 대량 아사(餓死)가 발생하게 했다. 1800년대 후반에 인도를 휩쓴 대기근으로 인도는 직격탄을 맞았다. 기근은 인도아대륙 역사에서 항상 있어 왔지만 이때의 대기근은 특히 심했다. 이 상처는 아직도 인도·영국의 관계를 해치는 요인으로 남아 있다.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
대기근을 해결하지 못한 대영제국 엘리트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각종 자원을 이용해 식량을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 철도, 도로, 운하 건설을 서둘렀다. 동시에 기후 문제, 식량 생산, 곡식 병충해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 관리하기 시작했다. 몬순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정보 관리에도 집중했다. 이런 모든 절차는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1918년 이후에는 수백 년간 인도를 괴롭히고 황폐화시켰던 기후로 인한 대기근은 사라졌다. 유행병으로 인한 사망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영국 학자들은 영국이 인도에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이라고 자부하고 있고, 인도 학자들도 인정한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영국과 인도를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the world's oldest democracy and its largest)”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은원(恩怨)과 애증(愛憎)이 얽힌 이 두 나라가 21세기에 어떤 관계를 엮어나갈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서문 / ‘세계 제1의 인구 대국’ 인도
간디의 인도는 잊어라. 모디의 인도가 온다

▲사진=조선DB
유엔 경제사회처(DESA)는 지난 4월, 인도 인구가 4월 말 14억2862만7663명이 되면서 중국 본토 인구를 추월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불변(不變)할 것으로만 여겨지던 ‘중국이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상식이 깨진 것입니다. 중국이 세계 제1위의 인구 대국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273년 만이라고 합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7월 10일 ‘인도가 2075년이 되면 중국의 뒤를 이어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14억 명의 인구, 4억 명에 육박하는 중산층, 중위 연령 27.9세, 젊은 소비층을 기반으로 한 세계 7위 수준의 소비 시장”이라는 지표들이 인도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경제뿐이 아닙니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등 인도계 정치인들이 주요국 정계를 꽉 잡고 있습니다. 구글, 페이스북, 스타벅스 등 우리가 일상으로 만나는 글로벌 기업의 CEO들도 인도계입니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안보협의체인 쿼드의 창립 멤버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도 높여가고 있습니다. 발리우드 영화가 금년도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중국의 시대가 거(去)하고 인도의 시대가 래(來)하는 양상입니다. 하지만 인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아직도 불교, 카스트, 간디, 타지마할, 명상과 요가의 나라라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도에 대한 변변한 개설서 하나 찾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아직도 인도는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그래서 《월간조선》은 이번 호에서 모두 225쪽에 달하는 인도 특집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월간조선》이 화보까지 포함해서 총 560페이지임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기획입니다.
이번 특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요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도의 경제입니다. 인도의 어제나 문화적·영적(靈的) 측면보다는 인도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내 경제 전문가들이 보는 인도 경제의 강점과 약점 ▲인도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분투기 등을 49쪽에 걸쳐 집중 분석했습니다. 인도, 아니 세계 IT 산업의 요람인 인도공과대학 탐방기도 실었습니다. 또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인도의 외교·안보적 역할, 모디 인도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전문가들의 기고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재미있는 읽을거리도 많이 담았습니다. 인도를 이해하는 키워드인 인도의 신화·종교·역사, 인도인들의 국민스포츠인 크리켓 이야기, 발리우드 영화의 실체, TV 등을 통해 얼굴이 널리 알려진 인도 출신 귀화인 로이 알록 교수 인터뷰 등이 그것입니다. 분량은 웬만한 단행본 한 권에 맞먹고, 내용도 풍부한, 글자 그대로 ‘총력특집’이라고 자부합니다.
저희는 《월간조선》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시사 월간지가 아직껏 해보지 않은 실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매체들이 인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전체 책의 절반 가까이를 인도 연구에 할애하는 전에 없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일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인도 정치의 변화와 모디 총리
‘카스트 정치’에 뿌리 둔 자유시장주의와 국수주의의 결합
⊙ 모디의 인도인민당 대두는 ‘카스트 정치’와 ‘여타후진계층’의 정치 세력화의 결과
⊙ 1990년대에 다수 하층 카스트의 몰표 얻는 ‘카스트 정치’ 등장… 상층 카스트의 지지받는 국민회의의 과두정치 대체
⊙ 인도인민당(BJP), 간디 암살범 속해 있던 극우 민족자조단의 후신… 모디, 8세 때 민족자조단 가입
⊙ 모디, 정책 실패도 성공으로 포장하는 ‘상징 정치’에 능숙
姜成勇
1968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석사(인도학, 철학, 티베트학), 同 대학교 박사(고전 인도학) / 오스트리아 빈대학 남아시아·티베트·불교학연구소 책임연구원(Research Associate), 現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同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

▲힌두민족주의자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사진=AP/뉴시
인도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카스트’를 떠올리고, 현대 인도의 정치를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모디’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최대로 줄이고 언급되는 정당의 이름을 최대한 제한해서 이 둘의 연관 관계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정치를 정치인 이름 없이, 수없이 바뀌어 온 정당의 이름 없이 외국인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한국인의 입장과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이런 방식이 가진 장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도대체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이름들이 별로 없으니 읽기 쉬울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표면의 물결이 아니라 근저의 해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하간 필자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도전인 것은 사실이다.
인도에 대해 자주 붙는 수식어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다. 제17대 하원(Lok Sabha)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였던 2019년 총선을 기준으로 유권자가 약 9억1200만 명이었는데, 투표율은 67%를 넘어섰다. 이 투표율은 역사상 최고였다. 특히 여성 투표율이 기록을 경신했다.
큰 국토에서 많은 유권자가 투표를 해야 하니, 7단계로 지역을 나누어 서로 다른 시기에 투표가 이루어졌고 4월 11일 시작한 투표는 5월 19일에 마감되었다. 당시 인도인민당(BJP·Bharatiya Janata Party)은 37.36%를 득표했고 19.49%를 득표한 인도국민회의(INC·Indian National Congress)를 압도했다. 인도인민당을 이끌던 모디(Narendra Modi) 총리는 303석의 의석을 차지해 1989년 9대 총선 이래 단일 정당 최대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인도인민당이 이끄는 연정(聯政)인 국민민주동맹(NDA·National Democratic Alliance)까지 따지자면 총 353석을 확보해 반수인 272석을 한참 넘어서는 다수를 확보했다. 이 상황이 바로 지금의 모디 총리가 집권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이고, 이제 2024년의 총선을 앞두고 있는 맥락이기도 하다.
할당제
인도에는 할당제가 있다. 독립 이후 헌법에 명시된 할당제는 사회적 차별을 받는 현실의 약자(弱者)를 돕지 않는 것은 차별의 고착화라고 주장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적극적인 역차별을 일정 기간 실시하고 나면 근대화된 선진 인도에서는 모든 구조적인 차별은 사라질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론을 지닌 사람들의 합의 아래 도입되었다.
고대(古代) 인도의 사제(司祭) 계급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신하면서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네 계급으로 세상 사람 모두를 나누는 허황된 틀이 있다. ‘바르나 체계’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사제, 통치자, 노동자, 노예의 네 집단으로 나눈다. 우리가 ‘카스트’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바르나 구분이 조금씩 사회적 실체가 있는 구분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다. 그 역사의 끝자락에는 이 구분으로 인구 총조사를 실시하고 주민등록을 하고자 했던 영국 식민 권력이 있었다. 이 네 구분 안에 아예 못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정카스트(SCs·Scheduled Castes)라고 하고 이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달리트(Dalit·박살 난 사람)’라고 부른다. 간디는 이들을 ‘신(神)의 자식들(harijan)’이라고 불렀는데, 현실적으로 이 표현은 의도와 다르게 조롱과 조소를 담은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천민(賤民)이면서 ‘종교적으로 부정한 인간들’로 취급을 당해 영어로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untouchable)’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비참한 상황은 인도의 근대화운동 이래로 항상 문제로 지적되어 왔기 때문에, 대학 입학과 공무원 선발에서 이들이 할당제 대상이 되는 것에 큰 논란은 없었다. ‘대입(大入)’과 ‘공시(公試)’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러한 특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이 될 것이다.
‘지정부족’ ‘여타후진계층’
독립 초기부터 이러한 할당제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또 있는데 ‘원시(原始) 부족민’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인도의 주류 사회에 편입된 적이 없던 주로 산악 지역이나 오지(奧地)에 고립되어 사는 인도의 토착 원주민들이다. ‘지정부족(STs·Scheduled Tribes)’이라 하는데, 여기서 ‘지정(Scheduled)’이라는 말은 헌법에서 보호 대상을 정하는데 그 대상자의 목록이 담긴 헌법 부칙(Schedule)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지정카스트 비중이 총인구의 19.7%이고 지정부족민은 8.5%를 차지한다. 힌두교도들만 따지면 지정카스트 22.2%와 지정부족민 9%가 있다.
바르나 체계상 상위 카스트들은 주로 지주(地主)들이어서 전통사회에서 경제 권력과 문화 및 종교 권력을 독점하고 무력(武力)도 독점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비해 차별받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현대에 들어 지정카스트나 지정부족민들과 달리 국가의 할당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여타후진계층(OBCs·Other Backward Classes)’이라고 부른다. 바르나 체계로 말한다면 바로 ‘노예’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상층의 세 바르나 집단은 합쳐서 ‘선진 카스트(Forward Caste)’라고 부른다. 선진 카스트는 인도 총인구 대비 30.8%, 힌두교도 인구 중에는 27%를 차지한다.
‘노예 계급’ 사람들을 ‘노예’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농민이고 수공업자이고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독립 이후에도 상위 카스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위치에 놓인 채 살아왔고, 이것은 사회적 상식으로 관철되었다. 간디도 네루도 모두 최상층 카스트 출신 사람들이다.
달리트(천민)들의 권익을 옹호했던 대표적인 인물 암베드카르(B. R. Ambedkar)는 요즘 ‘인도 헌법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지만, 지역구 선거에서 번번이 낙마했던, 정치인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한 인물이었다. 천민의 권익을 주장하는 데에 동의는 하지만, 막상 내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천민을 뽑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 현실의 벽이었다.
현 대통령은 ‘지정부족’ 출신

▲2022년 7월 21일 대통령에 당선된 드루파디 무르무(오른쪽)에게 축하 인사를 하는 모디 총리. 무르무는 최초의 ‘지정부족’ 출신 대통령이다. 사진=신화/뉴시스
그런데 여타후진계층에 대한 차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인데, 민주주의에서는 머릿수가 권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재 인도에서 여타후진계층의 비중은 최대 약 50~52%로 추정된다. 이 말은 이 사람들이 뭉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선거도 시작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 된다. 2011년 조사 결과로는 여타후진계층이 총인구 대비 41.1%를 차지하고 힌두교도 중에서는 42.8%를 차지한다는데, 논란이 많다.
현재까지 인도의 중앙정부는 정확하게 여타후진계층의 인구 규모를 파악하자는 지방정부들의 요구를 모두 묵살하고 있다. 이들이 정확하게 인구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발표되는 것 자체가 이미 핵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득권 카스트 중심의 중앙 정치 세력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들 중에는 여타후진계층의 표에 기대어 중앙의 집권당을 이길 전략을 세우는 곳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 부질없는 요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하원의 다수당이 집권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인도에서는 하원 총 의석수 545석 중에 대통령이 필요에 따라 영국계 인도인 의원 두 명을 지명하는 의석을 제외한 543석을 둔 승부가 5년마다 벌어진다. 현 정부는 2019년 선거의 결과에 따라 구성된 정부이고, 이제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인도 정치권은 이미 총선체제로 전환된 지 오래다.
인도의 정치 판도를 이해하는 기본 상식은 우선 소선거구제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선거 제도다. 한국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지역구의 승패가 결정되는데, 이것이 누적되어 집권 세력이 정해지는 구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통령은 명예직에 가까운지라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없다고 보면 된다. 현재는 2022년 선출된 드루파디 무르무(Droupadi Murmu)인데, 최초의 지정부족 출신 대통령이다. 그녀가 속하는 산탈(Santhal)은 지정부족 중에서는 세 번째로 큰 집단이다. 힌두국수주의 내지는 힌두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인도인민당이 굳이 부족민 출신 여성을 대통령에 임명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민회의 정권의 ‘허가권 통치’

▲2022년 12월 인도 구자라트주 아마다바드에서 열린 선거 유세. 사진=AP/뉴시스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 인도를 만들어낸 인물들, 간디와 네루의 절대적 권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절 여타후진계층민들은 지주이자 지식인이자 종교적 지도자인 상층 카스트에 순종하며 살았다. 순종하는 지역민들을 표밭(vote bank)으로 확보한 표밭 지배자들은 당연히 대부분 상층 카스트 출신이었고 지주들이었는데, 이들은 후견인-수혜자(Patron-Client) 관계를 형성해서 자기 자신과 지역민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관계망 안에서 공권력이 작동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표밭 지배자가 사적(私的) 무력을 사용하여 표밭을 관리하기 위해 ‘마피아’라거나 ‘사병(私兵)’이라고 불리는 무장 조직을 운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흔적은 최근에도 일어난 정치인이 개입된 이권집단의 총격사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지역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자민다르(zamindar), 탈룩다르(taluqdar) 등 다양한 형태로 식민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지주로서의 지배권을 토지개혁의 시도에 맞서 다양한 형태로 지켜낸 북인도의 라지푸트(Rajput)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독립 이후 인도국민회의의 통치는 표밭 지배자인 지역 정치인과 중앙집권 세력의 연대(連帶)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에 지정부족이나 지정카스트를 표밭으로 가진 지역 정치인까지 가세했는데, 이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이기는 하지만 인도국민회의 단일정당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독립 이후 1970년대까지 북인도의 지역구는 절반 이상을 상위 카스트 출신들이 차지했고, 대략 5%를 중간 카스트가 최대 10%를 여타후진계층 카스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도국민회의 집권 시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만 결합하겠다던 네루의 혼합경제(mixed economy) 구상은 양 체제의 단점만 취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비효율과 총체적인 부정부패의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허가권 통치(License Raj)’라고 불리는 통치체제를 낳았다. 이런 배경 안에서 시장은 작동할 수 없었고, 공적(公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채용에서의 할당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 정치’의 등장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인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향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고, 북인도에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흐름이 생겨난다. 하나는 농민을 묶어내는 운동으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지던 정치적 흐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이끌어내던 카스트 단위의 대중 결집 시도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인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만악(萬惡)의 근원이 카스트라고 믿고 있었던지라 이들은 카스트 단위로 민중을 결집하고 연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농민운동의 흐름은 균질(均質)한 자영소농(自營小農)을 상정한 운동으로서 하층 카스트에 대해 자신들의 통제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카스트 단위 결집 운동은 성격이 아예 달랐다. 하층 카스트들이 단합하여 이익을 관철시키자는 것이었는데, 특히나 중요한 것은 공무원 채용에서의 할당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바로 이 카스트 단위 결집의 흐름이 ‘카스트 정치’를 만들어낸 출발점이 된다. 카스트 단위로 표밭을 재구성하는 경향이 강해지자, 1980년대 후반부터 투표율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하위 카스트의 목소리가 주(州)정부와 중앙정부의 정치무대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카스트 단위가 표밭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각 지역에서 카스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역 정당들이 대두되었다. 카스트 기반의 지역 정당들이 특히나 농촌 지역에서 국민회의당의 공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하위 카스트의 상황이 개선된 것은 실질적으로는 없었다.
만달위원회
카스트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인도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만달위원회가 1979년 구성된다. 위원장의 이름 만달(B. P. Mandal)을 따서 ‘만달위원회’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이 위원회는 여타후진계층이 총 인구의 52%라고 계산해 내고 중앙정부와 공공 분야 채용 인원의 27%를 여타후진계층에게 할당하라고 권하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할당 몫이 전체의 49.5%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에 인도 전역에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난다. 1980년에 제시된 만달위원회 보고서는 1990년에 시행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기득권 타파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념이 투영된 인민당(Janata Dal) 내의 좌익이 주도하여 인민당이 참여하는 국민전선(National Front) 연정이 집권하는 1989~1990년을 맞은 것이었다.
이에 할당제 확대를 반대하는 분신(焚身)까지를 포함한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 결국 대법원에서 할당은 최대 50%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여타후진계층 중에서 연(年)소득이 고소득인 사람들은 제외한다는 조건으로 만달위원회 추천 사항이 관철된다. 결국 여타후진계층이 가진 표의 힘이 상위 카스트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 상황은 더욱 강화되어 1990년대를 사람들은 카스트 정치의 전성기로 간주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카스트에 속하는 정치인에게 몰표를 하는 현상이 자리 잡았다. 다수를 차지하는 하층 카스트의 몰표를 통해 상층 카스트 소수 정치인의 과두(寡頭) 정치는 하층 출신 신인들로 대체되는 흐름이 나타난다. 여타후진계층이 할당 전선에서 단일대오를 형성해 승리를 거둔 즐거움도 잠시였다.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와 맞물려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도 경제는 국가 부도를 맞았고, 뜻하지 않은 경제 개방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공공 부문 일자리는 좋은 사기업의 일자리보다 덜 중요해졌다. 상위 카스트들은 할당 전선에서 별 미련 없이 항복하고 철수했다. 이제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여타후진계층은 승리 이후 만달위원회를 떠나 단일대오를 형성할 전선을 찾아야 했다.
힌두민족주의 인도인민당의 등장

▲간디 암살범 나투람 고드세. 그가 속해 있던 민족자조단은 현 인도 집권당인 인도인민당의 모태이다.
이 상황에서 떠오른 것이 바로 힌두민족주의(Hindutva)의 흐름이었다. 이미 1925년부터 설립되어 활동하던 민족자조단(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을 중심으로 힌두민족주의 준(準)군사조직 활동을 해 오던 이 단체는 네루 집권 시기에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단적으로 1948년 간디를 저격한 저격범이 바로 민족자조단원이었기 때문에 이 단체는 1949년까지 활동 금지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초기 인도의 집권층은 극좌(極左) 세력 견제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대중적 지지가 약해진 극우(極右) 세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역학(力學) 관계의 고착이 사회 저변(底邊)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극우 세력의 대두를 막지 못한 측면이 있다.
현 집권당인 인도인민당은 1951년 민족자조단의 정치 조직으로 창당된 인도인민단체(Bharatiya Jana Sangh)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정당은 인디라 간디 수상이 1975~1977년에 걸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비정상적인 통치를 하던 시기 이후로는 인민당(Janata Party)을 구성하는 데 참여, 인도국민회의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인도인민당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민족자조단 출신이며, 민족자조단의 정치적 이념을 지향한다.
1992년 아요디아(Ayodhya)에 있는 바부르의 모스크(Babri Masjid)에 폭도화한 대규모 힌두교 군중이 침입해 모스크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화(神話)를 근거로 현재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던 이 자리가 ‘라마(힌두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 중 하나-편집자 주)의 출생지’이니 이를 수복하겠다는 운동이었다. 이 사태는 인도 내에서 14.2%(2011년 기준)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기존의 세속주의(世俗主義)를 기초로 인도의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지향해 왔던 흐름을 뒤집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인도인민당의 지지율은 크게 오르기 시작했고, 1996년 처음으로 의회 최대 당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남부에서는 ‘카스트 정치’ 힘 못 써
인도인민당의 대두와 집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질문은 끝없는 논란을 낳을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카스트 정치와 여타후진계층의 정치 세력화라는 흐름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타후진계층이 절대적 다수이기는 하지만 결코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통일된 집단이 아닌 한, 이들이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는 이슈를 잃는 순간 그들의 지향점은 분산되고 정치 세력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예를 들어 현재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앞서 있고 사회적 안정성이 높은 남부는 이러한 여타후진계층의 대두 문제와 동떨어진 정치적 발전 경로를 걸어왔다. 남인도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인 타밀인들이 사는 타밀나두(Tamil Nadu)주의 경우, 사제 계급에 속하는 인구가 3%에 불과해서, 인도 최대의 주이자 북인도에 있는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주의 10%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다 남인도는 북인도와는 다른 토지 소유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남인도에서는 상위 카스트가 정치적 주도권을 이미 오래전부터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타후진계층의 부상(浮上)으로 인한 정치적 지각변동을 따질 사정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도인민당은 남인도의 주정부 장악에 실패하고 있다. 심지어 2023년 5월에는 유일하게 남부에서 장악하고 있던 카르나타카(Karnataka)주 주의회 선거에서 참패했고 인도국민회의가 과반을 차지했다. 이러한 남인도의 정치지형을 따로 논하지는 못하지만, 북인도의 정치지형을 이해하는 선에서 여타후진계층을 중심으로 한 카스트 정치의 맥락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큰 대조를 보인다는 것은 확인이 가능하다.
자유시장주의와 힌두민족주의의 결합
경제자유화 이후로 인도는 시장경제를 도입하게 되었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카스트의 중요성이 줄어들어 가고 있다. 교육 수준의 향상이나 여성의 사회 참여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이제 만달위원회 관련 논쟁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카스트 정치의 강화로 하층 카스트 세력이 강화된 것 외에도, 경제자유화가 불러온 국가의 사회통제가 약화된 영향으로 상위 카스트 중심의 인도국민회의 일당 집권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러자 상위 카스트의 기득권층은 자유시장주의에 영합하고 동시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면서 출생에 따른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역량에 따른 차등(差等) 보상에 근거한 ‘정당한’ 방식으로 확보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물론 그들이 가지는 ‘차별적인 뛰어난 역량’은 바로 교육을 통해서 구현된다. 따라서 이제 상층 카스트의 신분 질서에 기초한 기득권은 교육을 통한 차별화된 역량에 기초한 기득권으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인도의 교육은 신분 상승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신분 유지나 신분 세습의 강력한 방어막이 된다.
이렇게 자유시장주의에 기초한 능력주의는 새롭게 대두된 힌두민족주의 정치 세력과 결합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국수주의(國粹主義)와 자유시장주의의 결합을 낳게 되었다. 즉 현실적 차별을 자유시장주의로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인도의 국가적 정체성과 상하층의 카스트를 아우르는 통합적 이데올로기로서의 힌두민족주의가 함께 작동하는 현재의 정치지형을 이해하는 것이 인도의 정치 현실을 읽어내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층민이라고 할 수 있는 여타후진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도인민당도 실제로 상층 카스트 중심의 정당이 지배하는 상황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만,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좀 더 능력을 갖춘 집단이 지배하는 능력주의 정당으로 포장된 현실 안에서 하층민에 속하는 여러 카스트는 각자의 이익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네루, 군부 억제 위해 노력
인도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수많은 굴곡을 통과하면서도 의회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두 가지 사실을 그 이유로 꼽으려고 한다.
첫째, 네루와 독립 초기 집권층이 문민(文民) 통치에 위협이 될 군부(軍部)의 대두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식민 시기 식민 통치에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 일체감이 강한 부대를 편성했던 영국의 방침과 정반대로 군부 약화를 일관되게 추진했다. 총사령관직 폐지, 특정 집단 쏠림 방지, 다양한 준군사조직 설치 등등의 방법으로 군의 정치 개입이 차단되었다. 결과는 인도는 독립 후 군부 쿠데타와 군사정권이 이어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둘째는 근본적인 소단위 선거구 내에서 이루어지는 협상과 완충 작용을 들 수 있다. 카스트 정치의 풍토에서 지역구마다 지배적 카스트의 후보를 양대 정당이 공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배적 카스트의 양대 후보가 표를 반분한다면 결국 캐스팅 보트는 소수 카스트에게 돌아가고 만다. 후보는 다수자 카스트 출신이지만 선거가 돌아오는 5년에 한 번씩 소수자들의 모든 민원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으니, 5년만 기다리며 버티기만 하면 되는 소수자들에게는 이 체제를 아예 전복시켜야 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작은 돌들이 떠받치면서 완충 작용을 하는 기둥은 지진에 흔들리지 않으니, 그 기둥이 지탱하는 건물은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경주 불국사의 예가 인도 정치의 안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디, ‘상징 정치’에 능숙

▲2022년 12월 2일 구자라트 주의회 선거를 앞두고 공개 연설을 하는 모디 총리. 구자라트주는 모디 총리의 정치적 고향이다. 사진=AP/뉴시스
현재 인도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은 모디 총리이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Gujarat)주 출신으로 1950년생인데 8세에 민족자조단에 입단했으니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힌두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았을지 상상할 수 있다. 18세에 부모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쇼다벤 모디(Jashodaben Modi)와 결혼을 시켰지만 그녀를 두고 가출(家出) 내지는 출가(出家)를 했고 수행자적인 삶을 체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결혼 사실을 모디 총리는 40년간 숨겼는데, 그가 미혼(未婚)의 독신(獨身)으로 국가에 헌신하는 수행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보듯 모디의 정치적 힘은 그의 상징 정치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표어와 행동방식과 상징들은 모두 강력하게 간디의 정치 코드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상징 정치에 균열이 갈 만한 에피소드마저 피하기 때문에 거의 기자회견을 하지 않으며, 불리한 상황에서는 전혀 대중매체에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아주 자주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세대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모디의 이러한 정치 감각은 2016년 고액권 유통 금지의 경제적 실패를 ‘부정부패 타파의 성공’으로 전환시키고, 2019년 파키스탄 영토를 전투기로 폭격했을 때 전투에서 패배한 부담을 ‘위대한 인도 조종사의 승리’로 전환시켜 정치적 성공으로 만들어낸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능력이 인도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이유는 바로 5년 간격의 총선에 보태어 28개 주의 주의회 선거와 8개 직할 지역의 선거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인도는 365일이 모두 선거운동이어야 하는 상시적(常時的) 선거 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이다.
모디는 2001~2014년에 구자라트 주지사를 역임했는데, 이때의 경제개혁을 이끈 업적을 근거로 2014년 총리에 처음 취임하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개혁 조치들을 이끌면서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하고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어서 대중적인 지지가 강한 지도자이지만, 과도한 총리실 중심의 국정운영이나 힌두민족주의를 근거로 한 소수자 차별, 탄압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국뽕 정치’
모디 총리가 보이는 이 양면의 얼굴은 바로 지금의 인도 정치지형이 택한 자유시장경제와 힌두민족주의의 결합을 통한 기득권층의 능력주의 기반의 정당성 확보 논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이 두 기둥을 연결시키는 방식의 정치구호가 동원되어야 하다 보니 산업 정책의 이름이 ‘자립인도(Atmanirbhar Bharat)’가 되어 간디의 ‘자립(swaraj)’을 떠올리게 만든다.
국민들이 공유하는 국가적 자긍심을 만들어내서 국민 통합을 이루었다는 성취의 뒷면에는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위 ‘국뽕 정치’가 과도한 쏠림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중 사이의 줄타기 외교로 보이는 행보를 인도 입장에서는 당연한 3강 외교로 인지하는 외교적 인지부조화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같은 구자라트 출신의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가 소유한 아다니그룹을 중심으로 국가 인프라구축사업을 추동하는 가족기업체제의 재벌을 앞세워 국가통제경제를 유지해 가는 전략에 대한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린다.
통계상으로 인도의 도시화율이 34%(2017년 기준)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숫자가 현실과 괴리된 것임을 지적한다. 이 말은 인도의 대부분 유권자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시골 지역 주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시골 지역 투표율은 대부분 도시 지역을 압도한다. 2023년 카르나타카 선거에서 인도의 실리콘밸리라는 벵갈루루의 한 선거구는 47.4% 투표율을 보였지만, 주(州) 평균 투표율은 72.8%였고 시골 지역 한 곳은 90.9%를 기록했다.
앞서 말한 모든 모디의 능력이자 단점이고 비전이자 퇴행인 측면들은 실제로는 시골 지역의 저소득층 유권자가 대다수이면서도 상시적 선거체제에서 사는 인도의 정치 현실에서는 가장 현명한 생존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인도를 ‘모순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기억이 강하다.⊙
◆인도 과학의 아버지들이 남긴 ‘Made 印 India’
‘0’에서 광섬유까지, 실리콘밸리 움직이는 인도인들이 물려받은 유산
⊙ 위대한 발견, ‘無’를 표기한 아리아바타
⊙ ‘전파를 감지하기 위해 반도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
⊙ 나린더 싱 카파니, 광섬유 발명

▲인도 초등학교 4학년 수학 연구실 수업 모습. 사진=조선DB
“실리콘밸리는 인도인이 지배한다.”
오래전부터 나온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리로선 뒷맛이 씁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0’의 의미를 발견한 이도, 인터넷으로 지구를 연결하는 ‘광(光)섬유’를 발명한 이도 인도인이다. 우리나라도 정보통신 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인도의 내공은 오래전부터 이 분야에서 ‘맞춤형’처럼 쌓여왔기 때문에 이들의 약진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얘기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기적의 연산법’으로 통하며 자녀들 두뇌 발달 수단으로 인기를 끈 ‘베다 수학’도 인도인이 개발했다. 베다(Veda)는 BC 1500년에서 BC 600년까지 구전(口傳)됐던 브라만(힌두교의 가장 높은 계급, 사제)의 경전이다. 베다의 내용에 사칙연산법이 포함돼 있는데, 그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연산을 할 때 자릿수별로 분리해서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덧셈을 예로 들면 96+88의 경우, 십의 자리인 90과 80을 분리한다. 그리고 일의 자리인 6과 8을 덧셈한 14를 다시 10과 4로 분리한다. 이를 모두 합하면 90+80+10+4로, 96+88의 답인 184를 구할 수 있다. 뺄셈의 경우 빼는 수를 10의 배수로 만들면 된다. 예컨대 96-88이면, 88에 2를 더해 10의 배수인 90을 만들어 뺄셈한다. 그럼 96-90으로 6이 나오는데, 빼는 수에 임의로 더했던 2를 여기에 덧셈하면 96-88의 답인 8이 나온다. 곱셈과 나눗셈도 이처럼 자릿수를 분리해서 계산하는 식이다. 자릿수를 요리조리 분리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두뇌 발달에 좋지 않을 수 있을까.
‘無’를 ‘0’으로 표기한 아리아바타
인류의 위대한 발견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건 바로 ‘0(zero)’의 표기이다. 0이 없으면 컴퓨터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古代) 바빌로니아에서도 자릿수를 구분하기 위해 띄어쓰기를 했다. 하지만 ‘무(無)’의 표기가 이보다 많은 의미를 가진다는 건 인도에서 처음 발견했다. ‘0’을 수(數)로 인정한 것이다. 아리아바타(Aryabhata·476~550년)의 저서 《아리아바티야》에 0과 10진수에 해당하는 숫자가 등장한다. 0에 대한 연구를 문서로 남긴 것도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598~665년 추정)다. 그의 저서 《우주의 창조(Brahmasiddhanta)》에서 0은 ‘같은 두 수를 뺄셈하면 얻어지는 수’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에 0을 더하거나 빼도 그 수는 변하지 않지만 0을 곱하면 어떤 수도 0이 된다는 사실이 그 기록에 남아 있다. 물론 현재의 아라비아 숫자 표기로 돼 있던 건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태양을 나타내는 ● 표기가 ○으로, 그리고 지금의 0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삼각함수에서 배우는 사인(sin)의 어원(語源)도 아리아바타와 관련이 있다. 학계에 따르면 아리아바타는 지금의 sin을 ardha-jya 또는 jya-ardha, 줄여서 jya라고 했다. 이후 이 단어는 음역(音譯)돼 jiba로 불리다가 모음을 생략하는 아랍어권의 습관에 따라 jb로 축약됐다. 이어 후대에선 jaib라고 부르다가 같은 뜻을 가진 라틴어 sinus(꼬불꼬불한 길, 움푹 들어간 곳 등을 뜻함)로 번역, 이것이 다시 영어 sine으로 음역됐고 지금은 이를 sin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것이다. 인도는 1975년 자국 최초의 인공위성에 아리아바타의 이름을 붙였다.
‘무선 통신 과학의 아버지’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
지금은 골동품으로 남았지만 통신 기술의 시초를 상징하는 ‘크리스털 라디오(Crystal Radio·광석 라디오)’도 인도와 관련이 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지역인 영국령 인도 출신인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Jagadish Chandra Bose·1858~1937년)는 1894년 마이크로파 실험에서 처음으로 광석 결정(結晶)을 검파기에 사용했다. 이후 1904년 약한 반도체 광물을 이용해 고주파를 소리 신호로 바꾸는 검파기를 만들었다. 이 광석 검파기는 신호가 약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게르마늄과 실리콘을 사용한 다이오드(Diode) 연구의 계기가 됐고, 이는 트랜지스터 발명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물리학자 네빌 모트(Nevill Mott·1905~1996년)는 “보스는 그의 시대보다 적어도 60년은 앞서 있었다”며 “사실 그는 P형과 N형 반도체의 존재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전기·전자, 컴퓨터 및 통신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학회 ‘전기전자공학자협회(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IEEE)’는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를 ‘무선 통신 과학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한편 보스는 업적을 인정받아 1917년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1920년 인도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학회의 과학 연구원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아 특허를 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연구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발명가는 아니다. 다만 학계에선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는 2019년 “보스는 전파를 감지하기 위해 반도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많은 현대적인 마이크로파 부품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광섬유의 아버지’ 카파니

▲‘광섬유의 아버지’ 나린더 싱 카파니.
광케이블에 사용되는 ‘광섬유’가 인도인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계 미국인 물리학자 나린더 싱 카파니(Narinder Singh Kapany·1926~2020년)는 1952년 광섬유를 발명했다. 광섬유는 주로 통신 분야에 쓰이는데, 전기 신호를 빛으로 변환해서 광속(光速)의 3분의 2 수준으로 정보를 보낸다. 구리선보다 빠르고 외부 간섭에 의한 데이터 손실이 거의 없어서 오류가 적은 게 특징이다. 국내에서는 지난달부터 ‘방송통신설비의 기술기준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신축 건물에 광케이블 설치가 의무화됐다. 통신 분야 이외에도 광섬유는 광학 의료기기, 레이저, 태양 에너지 등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하지만 노벨상의 영광은 2009년, 광섬유에서 빛이 전송되는 과정을 규명한 홍콩계 광학자 찰스 카오(Charles Kao·1933~)에게 돌아갔다. 카파니는 노벨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언론 인터뷰에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카파니는 인도 매체 《인디아 투데이(India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은 나를 광섬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며 “카오 교수가 이 분야에서 일을 한 건 저보다 몇 년 뒤라고 알려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기준을 썼든, 결정은 스웨덴 아카데미에 달려 있다”고 했다.
카파니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어릴 적부터였다. 카파니는 1940년대 히말라야 기슭의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며 과학 선생님으로부터 “빛은 직선으로만 이동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박스 카메라를 가지고 놀면서 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굴절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이에 그는 ‘빛을 굴절시키는 방법을 알아내 그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카파니의 업적에 대해 “카파니 박사와 카오 박사의 과학적 공헌을 견주는 데엔 논쟁이 있지만 급성장하는 광섬유 분야에서 그의 과학적 지적(知的) 전도사로서의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인도공대 델리(IITD) 현지 취재
111만 명 중 1만 명만 입학할 수 있는 인도 IT 산업의 요람
⊙ 나빈 가르그 IITD 국제교류학장, “인도 두뇌 유출은 옛말, 인도로 돌아와 자체 창업하는 이들 늘고 있다”
⊙ 인도 전역에 23개 인도공과대학 포진… 정부 보조금 받지만 운영의 자율성 보장
⊙ 한 끼에 300~500원에 식사 제공하는 학생 식당, 자체 병원 갖춘 캠퍼스

▲인도공대 델리 전경. 사진=IITD
인도 델리 도심에서 하우즈 카스(Hauz Khas) 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붐볐다. 어차피 운전이야 우버(Uber) 택시 기사에게 맡겨놓은 참이니 창밖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6차선 도로를 천천히 걸으며 무단횡단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많은 무언가를 잔뜩 싣고 사람까지 서넛 태우고 어디론가 가는 오토바이, 차도 중앙분리대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델리에 며칠 있는 동안 익숙해진 거리 풍경들이다.
4월 11일 하우즈 카스 지역에 있는 인도공대 델리캠퍼스에 가는 길이었다. 하우즈 카스에는 갤러리, 고급 주택가 등이 들어서 있다. 우버 덕분에 인도를 처음 찾아 단 며칠 체류하는 외국인도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에 신용카드를 미리 등록해 놓으면 기사에게 직접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 델리의 택시나 오토릭샤 기사 중에는 간단한 영어도 못 하는 이들도 꽤 있지만, 우버 앱만 있으면 목적지를 묻고 대답할 필요도 없다.
“굿 유니버시티!”
샹그릴라호텔 등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델리 도심이 서울의 광화문쯤에 위치해 있다면 인도공대는 서울대쯤의 위치에 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나 싶은데 도로가 밀린다. 갑자기 뒷자리 창문에 웬 남자가 다가온다. 밀리는 도로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다. 한국으로 치면 밀리는 도로에서 뻥튀기를 파는 상인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장사꾼이 들고 있는 물건에 눈길이 간다. 책이다. 그것도 영어 원서다. 가로로 착착 10권 넘게 쌓은 책더미를 들고 정차해 있는 차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 책의 제목을 보니 하나같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들이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Rich Dad Poor Dad)》,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Sapiens)》가 보인다. 호기심이 생겨 들여다봤더니 창문 쪽으로 더욱더 다가온다. 경적 사이로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린다.
“1권에 160루피!”
한국돈으로 약 2500원이란다. 한 권 사볼까 고민을 하는데, 우버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우버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 생각 하지 말란 뜻이다. 사려고 뒷자리 창문을 내리는 순간 지켜보고 있던 장사꾼 수십 명이 달려올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미안하긴 했지만 정면만 응시했다.
인도공대 델리캠퍼스에 도착했다. 정문의 검문이 까다롭다. 모든 차량을 정차시키고 방문 목적을 묻는다. “교수와 면담 약속이 있다”고 답했다. 교수 이름을 꼼꼼히 적더니 들여보냈다. 캠퍼스는 꽤 넓었다. 학교 공보 담당 직원과 만나기로 한 행정동까지 차로 꽤 이동해야 했다. 우버에서 내리는 기자를 향해 기사가 말했다.
“굿 유니버시티!(Good University!)”
2번만 응시 가능

▲체탄 바갓. 사진=인스타
오후의 대학 풍경은 기자의 기억 속 한국의 대학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넓은 캠퍼스 곳곳에서 혼자 어디론가 걸어가는 학생들, 여러 명이 어울려 웃으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이들, 벤치에 혼자 앉아 무언가 먹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이나 중국계, 일본계의 모습은 거의, 단 1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학생의 모습이 예상보다 꽤 자주 보였다. 평화로워 보이는 바로 이곳이 세계 IT 산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인도 지식 산업의 핵심 요람이다.
인도공과대학(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IIT)은 인도 전역에 23개가 있다. 한꺼번에 23개가 들어선 건 아니고 순차적으로 설립됐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인도의 국부(國父) 판디트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는 인도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IIT 설립을 주도했다.
1951년 최초의 IIT인 IIT 카라그푸르(Kharagpur)가 설립됐다. 이후 뭄바이(1958), 첸나이(1959), 칸푸르(1959), 델리(1963)에 각각 들어섰다. IIT는 인도에서 법령으로 ‘국가 중요 연구소’로 규정되어 있다.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받으면서도,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
초기에 설립된 다섯 곳은 자리를 잡기까지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았다. IIT 측의 설명을 보면, IIT 뭄바이는 소련, IIT 마드라스는 독일, IIT 칸푸르는 미국, IIT 델리는 영국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IIT도 입학성적순으로 서열을 매기는데 이 다섯 곳이 23곳 IIT 중 최상위 명문으로 꼽힌다. 이후 구와하티, 루르키, 로파르 등에 18곳이 추가로 생겼다. 각 IIT는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서로 경쟁한다.
IIT 외에도 최상위 학생들이 가는 고등 과학 교육기관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으로 벵갈루루에 위치한 인도 과학원(IISc·Indian Institute of Science)이다. IISc는 IIT 최상위 캠퍼스와 견주는 수준이라 평가받는다. IIT에는 IISc 출신 교수들이 꽤 있다. 역시 인도 전역에 캠퍼스가 있는 국립공과대학(NITK)도 유명하다. 인도의 대학은 3년제인데 공대는 4년제다.
IITD(인도공대 델리캠퍼스)는 2009년 개봉한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배경이기도 하다. 영화에선 매년 40만 명이 지원해 이 중 200명만 입학할 수 있는 임페리얼 칼리지라는 가상의 공과대로 등장한다. 실제로는 IITD가 배경이다.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체탄 바갓(Chetan Bhagat)은 소설 속 에피소드가 모두 IITD를 배경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 역시 IITD 출신이다.
IITD 출신 인사 중 잘 알려진 이로는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 창업한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전 인도준비은행 총재였던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 등이 있다.
영화와 실제는 어느 정도 유사할까. 숫자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극악한 수준의 경쟁률인 건 같다. IIT에 가려면 공대 공동입학시험(JEE·Joint Entrance Examination)을 치러야 한다. 의대의 경우 의대 공동입학시험(NEET)을 본다. 인도 수험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은 공대와 의대다. 의사와 엔지니어가 대다수 인도인들에겐 ‘꿈의 직업’이란 뜻이다.
공대 공동입학시험은 수학, 물리, 화학, 세 과목을 평가하는데, 1차 시험인 본과 시험(Joint Entrance Examination-Main)과 심화 시험(Joint Entrance Examination-Advanced), 총 두 번을 치른다. 1차 시험을 통과하면 2차 시험을 볼 수 있는데 기회는 총 두 번이다. 이른바 ‘삼수’가 불가능하단 얘기다.
2차 시험의 결과로 전국 단위 순위를 매긴다. 순위 순으로 가고 싶은 대학을 고를 수 있다. 캠퍼스 순으로는 앞서 언급한 5개 대학이 가장 인기 있다. 전공으로 보면 역시 컴퓨터공학과가 가장 인기 있다. 졸업 후 높은 연봉이 약속되어 있어서다.
세계 대학 순위는 낮아

▲2019년 넷플릭스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끈 〈코타공장〉. 인도 입시에 대한 현 상황을 다뤘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물론 사교육이 필수다. JEE 시험의 문항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한국 수학능력시험의 이른바 ‘킬러 문항’ 같은 문제가 수두룩하다고 보면 된다. 고등학생이 혼자 준비할 수 없는 수준이다.
라자스탄주에 있는 코타(Kota)라는 도시는 ‘코타 공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도시 전체가 입시학원이다. 기숙학원에서 먹고 자며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인도 전역에서 수험생들이 몰려든다. 거대한 대치동, 노량진 학원가를 생각하면 된다. 경쟁자들이 모여 사는 만큼 분위기가 매우 치열하다고 한다.
올해 치러진 1차 시험에는 111만 명이 응시했다. 이 중 1만여 명만 IIT에 입학할 수 있다. 100대 1의 경쟁률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수재들이 모이는 대학이지만, IIT의 세계 대학 순위는 낮다. IITD의 2023년 QS 세계대학 순위는 174위. 세 가지 이유에서다. 외국인 학생 비율, 외국인 교원 비율, 국제 연구 네트워크 참여도에서 거의 바닥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다. 매년 똑같다. 사정은 다른 IIT 모두 비슷하다. 어쩐지 IITD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동아시아계나 백인을 거의 한 명도 목격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가 아닌 다음에야 외국인이 공과대학 공동입학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다. 인도 정부 입장에선 자국민도 못 들어가 안달인데 굳이 세금을 들이는 학교에 정원 기준까지 바꾸며 외국인을 입학시킬 이유도 없다. 외국인 학생뿐 아니라 여학생, 여성 교원의 비율도 낮다. IITD 컴퓨터공학과의 경우, 정교수 37명 중 여성은 2명이다.
자체 병원 갖춘 캠퍼스
IITD의 공보 담당자 시브(Shiv) 씨를 만났다. 그는 기자가 인도공대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어떤 점이 알고 싶은 건지 무척 궁금해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학교 내 학생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는지 궁금했다. 식당에 가는데도 한참 걸어야 했다.
IITD의 넓이는 39만 평에 달한다.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약 57만 평이다. IITD가 종합대학이 아닌 공과대학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셈이다. 16개 학과, 11개 연구센터 등 연구기관이 함께 자리해 있다. 캠퍼스 안에는 자체 병원도 있다. 보건소 수준이 아니라 10명이 넘는 의사가 근무하는 큰 병원이다. 교수진과 가족들은 병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기숙사도 있다. 모든 학생이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023년 기준 IITD의 전체 등록 학생은 1만2500여 명이다. 학부생은 물론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다. 이 중 절반가량이 기숙사에서 거주할 수 있다.
걷다 보니 학생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매일 문을 연다. 영업 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다. 가격은 전반적으로 무척 저렴하다. 계란 샌드위치가 22루피(350원), 카레와 야채, 밥, 차파티(납작한 빵의 일종)가 모두 나오는 세트 메뉴도 55루피(870원)다.
위층도 학생 식당이다. 가격대가 좀 더 비싸고 조용하다. 그곳으로 가서 마살라 도사(Masala Dosa)를 주문했다. 도사는 남인도의 전통 음식이다. 쌀과 우라드콩(흑녹두)을 갈아 만든 반죽물을 부침개처럼 얇게 부쳐 만든다. 사실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꽤 맛있어서 절반 이상을 먹었다. 그 덕인지 그 다음 날부터 장염에 시달리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식당에 있는 학생들은 거의 이어폰을 끼고 혼자 책을 보며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신다. 여러 명이 몰려 앉아 떠드는 모습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힌두교와 수학
인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위성발사 산업으로 돈을 벌면서도 인구의 26%가 문맹(CIA 월드팩트북 2018년 기준)이다. 이 독특한 나라가 유독 ‘STEM’, 즉 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 강한 이유는 뭘까. 역사와 종교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다. 힌두교가 융성하면서 제의(祭儀)가 발달했다. 제사를 정확한 시각에 드리기 위해 천문학이 발달했다. 수학도 발달했는데, 제단이나 사원을 설계하기 위해서였다. 힌두교의 오래된 성전(聖典)인 베다에는 기하학이 포함되어 있다. 고대 인도의 수학자들은 힌두교 성직자들이었다. 숫자 ‘0’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도 인도인들이다.
좀 더 실질적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댈 수 있다.
첫째, 인도와 미국은 시간대가 반대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IT 산업의 중심인 실리콘밸리와 인도 IT의 중심인 벵갈루루의 시차는 12시간 차이가 난다. 미국과 시간대가 12시간 차이 나면서 영어를 쓰고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인 덕에 인도는 미국의 IT 일거리를 수주할 수 있었다.
2000년대까지 벵갈루루는 ‘세계의 콜센터’로 역할을 했다. 그 시절 미국 온라인 사이트에서 물건을 사고 환불이나 교환하고 싶어 콜센터에 연락해보면, 죄다 인도 악센트만 들려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현재 인도는 세계의 콜센터에서 벗어나 컨설팅과 IT 글로벌 대기업들의 기술 업무를 대신해주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퇴근하며 오후 18:00시에 인도 벵갈루루에 일거리를 맡기면, 인도의 기술자들은 출근 후 즉시 처리해서 실리콘밸리의 출근시각 전까지 보내줄 수 있다. 그러면 실리콘밸리에선 살펴본 후 피드백을 인도 벵갈루루로 보내는 식이다.
공대 입학은 카스트 넘어서는 길
둘째, 카스트(caste) 제도의 존재다. 힌두교의 카스트는 4대 계급과 불가촉천민으로 인간을 구별 짓는다. 지식과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사제), 전쟁과 통치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귀족), 상업과 농업에 특화된 바이샤(평민), 수공업 위주의 수드라(공인)가 4대 계급이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 안 되는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가 있다.
인도 헌법은 카스트 간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카스트 제도는 공고하다. 브라만 계급의 영향력은 정계뿐 아니라 재계, 학계에서도 강력하다. 카스트를 뛰어넘는 결혼은 지금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애초에 비슷한 계층끼리 어울리니 다른 계층끼리 교우 관계를 맺기도 힘들다. 결국 카스트상 하위 계급에 속한 이들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길은 공부를 잘해 공과대학에 들어간 다음 외국 기업에 취직하는 길 정도다.
물론 아무리 인도공대라도 인도 사회의 공고한 차별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긴 힘들다. 이날 캠퍼스에서 만난 IITD 국제교류 학장 나빈 가르그(Naveen Garg) 교수도 IIT 같은 대학이 인도의 양극화 해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묻자, ‘어려운 질문’이라 답했다.
가르그 교수와 인터뷰를 마치고 IITD 캠퍼스를 다시 둘러봤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한적한 캠퍼스는 쾌적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은 경쟁을 뚫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어디론가 향하는 학생들도 지친 표정이긴 했지만 외모에서 기본적인 여유가 엿보였다.
다시 뉴델리 도심으로 돌아오는 길. 퇴근 시간에 걸려 도로는 꽉 막혀 있다. 약간의 틈만 보여도 치고 들어오는 오토릭샤들 탓에 소음도 굉장하다. 공기도 오전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뉴델리의 대기 오염은 유명하다. 미국 시카고대학 에너지정책연구소(EPIC)가 ‘대기오염 때문에 인도의 평균수명이 5년가량 단축될 것’이라고 분석했을 정도다. 평온한 대학 풍경과 대비되는 도로 풍경을 보며 인도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인터뷰
인도공대 델리(IITD) 국제교류학장 나빈 가르그(Naveen Garg) 교수
“학교는 선발권 없어… 학생들이 학교 선택”

▲나빈 교수
4월 12일 인도 뉴델리 IITD 캠퍼스에서 나빈 가르그(52) 컴퓨터공학과 교수를 만났다. 가르그 교수는 IITD 출신으로, 컴퓨터공학 중에서도 알고리즘 분석과 복잡성 최적화를 전공했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기자에게(사전에 약속을 하긴 했다) 솔직한 대답을 해줬다.
― IITD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할 때 어떤 점에 중점을 두나요.
“단지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국가의 리더,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데 집중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엄격하고 실용적인 학문적 훈련을 거치도록 합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견고한 실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 학생들은 산업 현장에 출근한 첫날부터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교육을 합니까.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 교육도 병행합니다. 다양한 발상을 접할 수 있도록요.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지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합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분야의 선배 기업가들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4년 동안 다양한 역할 모델과 학술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리더십을 배양합니다.”
― 학생들의 출신 소득 수준은 어떤가요? 역시 부유한 집 출신들이 많나요?
“학생들의 출신 배경은 다양합니다. 매우 부유한 가정 출신의 학생들이 있고, 소득 수준이 상당히 낮은 가정에서 온 학생들도 있습니다. 연소득이 100달러(약 13만원) 미만인 가정이지요. 학생들의 대략 10%가량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가정 출신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합니다.”
“구글·페이스북 근무하다 돌아와 창업”
― 학생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나요.
“학교엔 선발권이 없습니다. 학생들이 성적에 맞춰 자신들이 선택하지요.”
― 남녀 비율은 어떤가요.
“약 5대 1입니다. 여학생이 20%가량이지요.”
―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회사는 어디인가요.
“일단 대학원 진학을 많이 합니다. 그런 후 구글, 페이스북 같은 IT 회사에 들어가지요. 액센츄어, 맥킨지 같은 컨설팅 회사에도 입사합니다.”
― 가르쳤던 학생들 중 인상적이었던 경우가 있나요?
“한 여학생이 있었어요. 그 학생의 아버지는 소, 염소 같은 가축을 길렀지요. 그 학생은 졸업 후에 스타트업을 창업했어요. 가축 거래를 중개하는 플랫폼을 만들었지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이 경험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은 거죠. 매우 성공했습니다.”
― 사실 IIT 출신들은 외국에서 더 활약하는 듯합니다. 미국 IT 기업에선 많은 인도인이 일하고 있고요. 결국 인도의 두뇌가 외국으로 유출되는 데 일조하는 것 아닌가요.
“예전엔 그럴지 몰라도 지금은 다릅니다. 저는 IIT를 1991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때 저희 학과 졸업생 24명 중 22명이 미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지요. 지금은 다릅니다. 이번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120명의 학생 중 대학원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학생 수는 5명이 안 됩니다. 나머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구글·페이스북 같은 기업에서 근무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인도로 돌아와 창업을 합니다.”
― 그런 예가 있나요?
“플립카트(Flipkart)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인도의 아마존’이라 부를 수 있는 이커머스 회사입니다. IITD 출신의 학생 둘이 설립한 회사지요. IIT 졸업생들은 이제 인도 경제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만 해도 두뇌 유출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인도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 학생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생기고 있어요.”
“영어 잘하고 숫자 감각 좋아”
― 인도는 국내총생산(GDP)으로 보면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로 올라섰지요.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2021년 기준 2342달러)은 방글라데시(2362달러), 스리랑카(3699달러)보다도 못합니다. IIT 같은 학교가 아무리 생겨도 양극화 해소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기술 발전이 인도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과학 발전이 더 큰 번영을 이끌어내, 사회의 양극화를 완화하길 희망합니다. 기술과 자원에 접근하기 힘든 사람들을 돕는 데 우리 대학이 기여하길 바라고 있고요.”
― 인도공과대 학생들이 세계 IT 업계에서 앞서 나가는 비결은 뭘까요.
“일단 영어를 잘합니다. 그건 분명히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대학에서 소통을 하는 훈련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 숫자에 대한 논리적인 감각도 좋습니다.”
― 챗GPT 같은 초거대 AI 시대에 인도 출신 기술자들이 현재만큼 필요할까요?
“챗GPT와 멋진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엔 컴퓨터 과학이 필요한 다른 많은 분야가 있습니다. 기술 인재가 계속 필요한 이유입니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실리콘밸리의 인도인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인들이 잘나가는 세 가지 이유
⊙ 영어 사용능력과 우수한 공과대학(IIT)의 힘
⊙ 기업인으로서의 소통력과 인내심
⊙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강한 결속력

인도인들이 글로벌 기업에서 수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첫째, 인도의 교육 시스템이다. 구체적으로 ‘영어’와 ‘공과대학’이다. 인도의 공용어는 영어와 힌디어다. 대학에 들어갈 정도면 영어는 능숙하게 구사한다. 영어에 어려움이 없으니 자연히 미국 유학과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한다. 여기에 인도공과대학(IIT) 등 우수한 공과대학에서 매년 만여 명의 기술 인력들을 훈련해 배출한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 비노드 코슬라. 인도공대 델리 출신이다. 사진=James Duncan Davidson/O'Reilly Media, Inc.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 벤처투자기업 코슬라 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 대표는 인도공과대학 델리(IITD) 출신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카네기멜론대와 스탠퍼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10년 이후 미국 《포브스》가 뽑은 미국 400대 부자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사티아 나델라도 인도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경우다. 그는 인도에서 마니팔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위스콘신-밀워키대학과 시카고대학(MBA)에서 학위를 받았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근무하다 1992년 마이크로소프트로 자리를 옮겼다. 2014년 MS CEO에 취임한 후, 지금까지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스타벅스 CEO에 오른 랙스먼 내러시먼도 인도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유학온 경우다.
미국 내 인도인들의 고학력, 고소득 경향은 통계로 입증된다. 2021년 미국 인구조사국 조사 결과를 보면 이렇다.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 중 인도인이 27%로 가장 높다. 그다음으로는 각각 16%를 차지한 중국인과 캘리포니아 출신 미국인이다. 한국인은 3%다. 실리콘밸리에서 사는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 10명 중 3명은 인도 사람이란 뜻이다.
퓨리서치센터 조사를 보면, 2019년 기준 인도계 미국인의 평균 중위 소득은 11만9000달러(약 1억5300만원)다. 미국 전체 가구의 평균 중위 소득인 6만1800달러(약 8000만원)의 2배다.
소통 능력과 인내심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사진=어도비
둘째, 실리콘밸리에서 활약하는 인도인들은 소통 능력과 인내심을 갖춘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구글의 CEO 순다르 피차이다. 피차이는 인도 남부 도시 첸나이 출신이다. 인도공과대학(IIT) 카라푸르 졸업 후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스탠퍼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학위를 받은 후, 2004년 구글에 합류했다. 구글에서 웹 브라우저 ‘크롬’ 개발에 참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5년 구글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 구글 CEO 자리에 올랐다. 평균 근속 기간이 2~3년으로 이직이 잦은 IT계에서 피차이는 12년간 구글에 근속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사티아 나델라는 공감 능력이 강한 CEO로 유명하다.
비단 기업인이 아니라도 평균적인 인도인들은 이야기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 기자도 인도에 며칠 체류하는 동안 마주친 인도인들에게 각종 질문 세례를 받았다. 남북 관계며 출산율 문제, 결혼 풍습까지 그들의 관심사는 다양했다. 길에서 마주친 여성에게 미술 행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 기업이나 정부 행사에서도 인도인들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한국인이나 중국인, 일본인들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한쪽으로 물러서 있는 경우가 잦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홍보하는 미국 문화에서 소통 능력은 업무 능력 평가와 출세 가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인도 정통 지배층인 북부 출신이 아닌 중·남부 출신들이 특히 조직에서 인내심을 발휘한다는 분석도 있다. IBM의 CEO 아르빈느 크리슈나는 남인도에 거주하는 텔루구족 출신이다. 어도비(Adobe)의 CEO 샨타누 나라옌(Shantanu Narayen), 사티아 나델라(MS) 역시 텔루구족 출신이다. 피차이는 타밀족 출신이다.
인도 기업인의 CEO로서의 자질을 설명하며 인도의 주가드(Jugaad) 정신도 주목받는다. ‘예기치 못한 위기 속에서 즉흥적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기자는 인도의 주가드 정신을 뜻밖의 상황에서 체험했다. 인도 현지에서 구두 뒷굽이 약간 부서졌다. 한국에서 수선해도 되지만, 인도의 구두 수선 실력을 보고 싶었다.
주가드 정신
호텔 직원에게 소개받은 곳은 말이 구두수선점이지 노상 점포였다. 구두를 내밀었더니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망설임 없이 이것저것 오려 붙인다. 잠시후 받아보니 뒷굽이 멀쩡하게 살아났다. 수선비로 20루피(314원)를 부르기에 흔쾌히 지불했다. 스무 걸음도 못 가서 굽은 다시 망가졌다. 고쳐놓은 게 아니라 그럴듯하게 재현해놓은 거였다. 그러고 보니 수선 도구함엔 여성 구두용 부속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해결해줄 수 없는 요구를 받자,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즉흥적으로 해결해준 거였다.
세 번째는 인도인들의 강한 결속력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인들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걸로 유명하다. 인도공대(IIT)도 세계 주요 국가에서 동문회를 운영하며 동문들끼리 결속을 다진다. 한국인들도 실리콘밸리에서 ‘BAKG’ 같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지만 인도인들보다는 수적으로 약하다.
다만 인도인들끼리는 카스트 제도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2020년 7월 미 캘리포니아 공정고용주택부는 인도계 직원 A를 대표해, 직장 내 카스트 차별을 한 다른 인도계 직원 2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네트워크 장비 기업 시스코에 다니는 한 인도계 A 직원이 인도계 매니저 밑에서 일을 했는데, 카스트 차별을 받았다고 증언해서였다. 상사는 상위 카스트 출신이고, A는 달리트 계급(불가촉천민) 출신이었다. 둘 다 인도공대를 나왔지만 상사는 A의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했다.
이런 사건은 아니더라도 상위 카스트 출신들이 미국에서도 높은 자리에 오르곤 한다. 피차이(구글), 사티아 나델라(MS),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리시 수낙 영국 총리 모두 브라만 출신이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인도와 이슬람
인도 무슬림, 지배자에서 힌두민족주의의 희생양으로 전락
⊙ 이슬람교도, 총 인구 12억1000만 명 중 1억7220만 명(인구의 14.2%) (2011년 기준)
⊙ 711년부터 이슬람 침략 시작… 가즈나-구르-델리 술탄조 거쳐 무굴 술탄조가 인도 정복
⊙ 1947년 독립과 함께 인도(힌두교)와 파키스탄(이슬람교)으로 분리… 1972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
⊙ 모디 정부, 교묘한 형태의 무슬림 시민권 제한 추진… 코로나19 전파 주범으로 몰기도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학 이슬람연구소 이슬람학 석사, 同 박사과정 수료. 이란 테헤란대학 이슬람학 박사 /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역임. 現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Religion & Peace》 편집장, (사)한-이란협회 학술위원장, 법무부 난민자문위원,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출판위원장

▲2022년 6월 인도 여당인 인도인민당 고위층이 이슬람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대한 무슬림들의 항의 시위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 열렸다. 사진=AP/뉴시스
인도 정부의 가장 최신 종교 인구 통계인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 12억1000만 명 중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은 1억7220만 명으로 14.2%를 차지하였다. 9억6620만 명으로 전 인구 대비 79.8%를 차지한 힌두교인 다음으로 많은 수다. [표]

현재 14억 명이 넘는 인도의 인구 중 무슬림은 14.2%다. 무슬림이 다수인 주(州)는 잠무카슈미르(68.3%)와 락샤드위프(96.58%) 두 곳이다. 종파별로 보면, 수니 무슬림이 85%, 시아 무슬림이 15%다. 인도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가즈나(Ghazna) 술탄조(朝), 구르(Ghur) 술탄조, 델리(Delhi) 술탄조, 무굴 (Mughal) 술탄조 등 무슬림 지배를 받았고, 영국의 진출로 무굴 술탄조가 쇠락할 때까지 인도 고유의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어울린 융합 문화를 일구었다.
이슬람, 711년에 이미 인도 진출 시작
아랍 지리학자들은 인더스강을 미흐란(Mihran)으로 불렀고, 미흐란 하류 지역을 신드(Sind), 즉 인도라고 보았다. 신드는 산스크리트어로 강을 뜻하는 신두(Sindhu) 또는 대추를 뜻하는 드라비다어 킨투(Kintu)나 신투(Cintu)가 어원인데, 그리스어로는 신도스(Sindos), 라틴어로는 신두스(Sindus)라고 하였다.
무슬림이 인도에 진출한 것은 우마야 칼리파조 때인 711년이다. 오늘날 파키스탄 카라치 인근 항구 데왈 통치자 다히르가 무슬림 순례자를 싣고 가던 배를 아랍해에서 공격하였다. 이에 앗사까피가 시리아 지역 아랍군을 이끌고 데왈을 침공하여 3일 넘게 주민을 학살하고, 인더스강 델타 지역으로 들어가 인더스강 하류 지역과 물탄 인근 지역을 장악하며 인도를 이슬람 문화권으로 편입하였다.
우마야 칼리파조가 앗사까피를 소환하면서 정복전은 멈추었다. 우마야 칼리파조는 정복한 지역을 현지 통치자들에게 맡기고 간접 지배 형식을 취하였다. 아랍 무슬림 지배를 받게 된 지역민은 힌두교도보다는 불교도들이 더 적극적으로 지배층에 협력한 것 같다. 그러나 10세기 아랍 지리학자와 여행자들이 신드를 기록한 자료에는 불교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알비루니(?~1048년) 역시 신드를 방문하였을 때 불교도 관련 정보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미 이슬람화가 온전히 진행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힌두교도와 불자들이 강제 개종(改宗) 없이 무슬림 세계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처럼 딤미(Dhimmi)로 간주되어 보호를 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프간 가즈나朝의 침공
무슬림의 본격적인 인도 대륙 진출은 가즈나 술탄조(977~1186년) 때부터다.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Ghzna·현대어 가즈니(Ghzani)]를 수도로 삼아 튀르크인 세뷕티긴이 세운 가즈나 술탄조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부, 인도 북부 펀자브를 장악하였다. 세뷕티긴의 아들 마흐무드(재위 998~1030년)는 수니파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이스마일리(Ismaili) 시아파를 격멸하고자 신드 지역을 공격하였다. 마흐무드의 군대는 갠지스강과 야무나강 사이 도압, 중부 괄리오르뿐 아니라 구자라트까지 진출하였다. 그는 1024년 베라발의 시바 사원 소마나트를 훼손하고 2000만 디나르가 넘는 재물을 탈취하여 가즈나로 귀환하였다. 인도 이슬람 역사가 하빕은 마흐무드 정복의 동인(動因)을 경제적 이익으로 평가하였다.
“침략의 두드러진 특색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 눈에는 원정의 비종교적 특성이 명확히 보일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아니라 영광과 황금을 탐하여 벌인 세속적 약탈이었다. 종교적 동기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가즈나 술탄조 군대는 신앙을 위해 살고 죽는 성스러운 전사(戰士)가 아니라 힌두와 무슬림 모두와 싸우도록 잘 훈련된 직업군인이었다.”
오늘날 인도 무슬림은 마흐무드를 인도에 이슬람을 전파한 정복자로 존경하고 있지만, 강제 개종을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흐무드의 인도 대륙 침공의 주목적은 경제적 이익 실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정복한 곳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고, 전리품으로 국고(國庫)를 채웠다.
아프가니스탄 구르(Ghur)에서 발흥한 구르 술탄조는 원래 무슬림이 아니었으나 가즈나 술탄조의 침략을 받고 복속된 후 이슬람화되었다. 구르 술탄조는 가즈나 술탄조를 멸하고, 인도에 무슬림 세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무이줏딘(재위 1173~1203년)은 고말 산길을 통과하여 1175년 물탄과 우츠를, 1182년 수메라스를 각각 정복했다. 그는 구자라트 정복이 실패하자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1186년 라호르를, 1192년 인도 북부 타라인(오늘날 타라오리)을 점령하였다.
북부 인도가 열리면서 델리, 아즈메르 등 주요 도시가 무슬림 손에 떨어졌고, 무슬림은 벵골까지 진출하였다. 구르 술탄조의 위력을 과시라도 하듯, 1192년 델리에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를, 1200년 아즈메르에 아르하이딘 카 좀프라 모스크를 건설하였다.
무이줏딘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이줏딘의 바람대로 휘하 장수들이 구르 술탄조의 인도령을 나누어 가졌다. 아이박(1150~1210년)은 1206년 델리 술탄조의 술탄이 되었고, 까바차(재위 1203~1228년)는 물탄, 칼지(?~1206년)는 벵골 지역을 통치하였다.
몽골 침략을 물리친 델리 술탄조
가즈나 술탄조에서 시작한 인도의 이슬람화를 더욱 깊고 넓게 한 구르 술탄조를 이어 델리 술탄조(1206~1526년)는 무굴 술탄조가 들어설 때까지 무슬림의 인도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인도로 들어온 무슬림 세력은 인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을 거점으로 삼았고, 지배자는 아랍인이 아니었다. 가즈나 술탄조 통치자는 튀르크 출신이고, 구르 술탄조의 내력은 불분명하며, 델리 술탄조는 튀르크계 맘룩(Mamluk)이다. 맘룩은 노예 신분으로 주군(主君)에 충성을 맹세하며 용맹을 떨치던 군인이다. 델리 술탄조를 연 아이박은 구르 술탄조의 무이줏딘의 튀르크계 맘룩이었다. 그래서 과거 국내 역사교과서는 델리 술탄조를 ‘노예왕조’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구르 술탄조의 무이줏딘 때 병합한 인도의 동쪽 끝 지역인 벵골과 비하라도 델리 술탄조가 총독을 두어 다스렸는데, 종종 이 총독이 독립적인 군주처럼 권력을 행사하였다. 피지배층 인도 주민들은 지배층 델리 술탄조 통치자들을 무슬림으로 보기보다는 “야만인(mleccha), 튀르크인(Turushka), 중앙아시아인(Shaka), 그리스인(Yavana)” 등으로 불렀다. 반면 무슬림 지배층은 비무슬림 피지배층 인도 주민을 불신자(不信者)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힌두교 사원을 보호하고 후원하며 주민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무슬림을 다스려야 하는 상황에서 통치자들은 유화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델리 술탄조 시기에 인도 이슬람은 두 번의 큰 위기를 겪었다. 1258년 바그다드 압바스 칼리파조를 멸망시킨 공포의 몽골군단은 인도 대륙도 노렸다. 하지만 델리 술탄조가 몽골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 몽골은 오늘날 파키스탄 지역과 카슈미르 지역에 머물렀다.
아크바르의 융화 정책

▲무굴제국을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델리 술탄조는 티무르(1336~1405년)의 공세는 막아내지 못하였다. 1398년 9월 티무르는 델리 술탄조가 비무슬림 힌두 주민들을 관대하게 대한다고 하면서 델리를 침공하였다. 12월 파니파트에서 티무르 침략군에 완패하였고, 델리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재건에만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티무르는 물탄 총독이었던 키즈르 한(재위 1414~1421년)을 통치자로 내세웠다. 키즈르 한은 티무르와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1384~1411년)를 주군으로 섬기다가 1414년 델리에 승자로 입성하여 술탄이 되었다. 이후 키즈르 한의 후손이 1451년까지 통치하였다. 키즈르 한 집안은 예언자의 후손(사이드·Sayyid)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통치하던 델리 술탄조를 사이드(Sayyid)조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 부계로는 티무르, 모계로는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부르(재위 1526~1530년)가 이끄는 군대가 1526년 4월 파니파트에서 델리 술탄조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가 이끄는 군대를 무찌르고 델리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의 새로운 통치자로 부상하였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재위 1530~1540년, 1555~1556년)은 1540년부터 15년 동안 수르(Sur)조의 도전을 받아 다소 어려움을 겪기는 하였지만, 1555년 델리를 재정복하여 무굴 술탄조(1526~1858년)의 기틀을 완전하게 다졌다.
후마윤의 아들로 세 번째 술탄이 된 아크바르(재위 1556~1605년)는 통치 10년간 종교적 관용과 화합 정책을 폈다.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던 인두세 지즈야(Jizya)를 폐지하고, 행정관리로 비무슬림을 채용하였으며, 인도 고유의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융합하여 무굴 술탄조 특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비무슬림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중시한 아크바르는 이슬람 법학자들의 법적인 견해 또한 이러한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어하였다.
아우랑제브의 힌두교 탄압
그러나 아크바르의 융화 정책은 후대에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아크바르에 이어 권좌에 오른 아들 자한기르(재위 1605~1628년)는 아버지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였다. 손자 샤 자한(재위 1628~1658년)은 죽은 아내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위한 타지마할 건설에 국고를 낭비하고,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는 유럽의 기세에 눌렸다. 그는 아들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년)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죽을 때까지 무려 8년 동안 아그라의 요새에 유폐되었다.
아버지를 유폐하고 형제들을 죽이며 술탄 자리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1669년 힌두교 학교를 폐쇄하고 사원을 파괴하였다. 1679년에는 아크바르 때 폐지한 지즈야를 되살려 비무슬림에게 부과하였는데, 무슬림 학자들에게 징세 권한을 주었을 뿐 아니라 노령이라도 예외 없이 엄격하게 징수하였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술탄조는 퇴락의 길로 들어섰다. 1739년 페르시아의 나데르 샤의 군대가 델리를 약탈하였고, 벵골 지역에서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무굴 술탄조의 설 땅은 갈수록 사라졌다. 결국 1858년 마지막 술탄이 퇴위당하며 버마(미얀마)의 랑군(양곤)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3세기에 걸친 무굴 술탄조의 인도 지배와 함께 가즈나 술탄조의 마흐무드 때부터 이어진 무슬림의 인도 지배는 끝을 맺었다.
파키스탄의 탄생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 진나.
무굴 술탄조가 무너지면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저항 끝에 독립을 이루긴 하였으나, 무슬림연맹을 이끌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1876~1948년)는 비무슬림이 지배하는 인도에서는 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도하에 무슬림들이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을 건국하면서 과거의 인도는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파키스탄(Pakistan)은 무슬림 독립국가를 꿈꾸던 케임브리지 대학생 초우다리 라마트 알리가 1933년 소책자 《지금 아니면 결코(Now or Never)》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무슬림 거주 지역인 펀자브(Punjab)의 P, 아프간(Afghan, 북서변경주)의 A, 카슈미르(Kashmir)의 K, 신드(Sindh)의 S,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스탄(Stan)’이 합해져 팍스탄(Pakstan)인데, 여기에 I가 더해져 파키스탄(Pakistan)이 됐다. 아울러 페르시아어와 우르두어에서 ‘순결, 청결’을 뜻하는 ‘파크(pak)’와 땅을 가리키는 ‘스탄(stan)’을 붙여 한 단어로 만들 때 연결접사 ‘아이(i)’를 더하면 말 그대로 ‘깨끗한 땅’이라는 뜻의 파키스탄이라는 결합어가 된다. 중의적(重義的)인 말이다.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진나는 세속적 근대국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무슬림 국가’라는 종교적 정체성(正體性)과 감정은 적으로부터도 존경받던 국부(國父)의 비전을 펴기 어렵게 만들었다.
파키스탄은 무슬림의 오랜 인도 지배 역사 때문에 비무슬림이 다수인 인도에 대해 나름의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었다. 정부와 군부의 주류를 장악한 서파키스탄인들은 동파키스탄인들을 차별했다. 이에 분개한 동파키스탄은 1972년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 군부는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파키스탄과 대립해 온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지원했고, 이 바람에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는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로 끝났다. 현재 카슈미르를 두고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이 벌이는 유혈 대립은 영토분쟁을 넘어 종교전쟁으로 번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캐시미어’의 고향 카슈미르
양털로 만든 담요나 옷으로 널리 알려진 캐시미어(cashmere)의 어원으로 유명한 카슈미르는 히말라야 산맥 서쪽에 있는 해발 최저 300m, 최고 7000m, 총 면적 약 22만㎢의 타원형 접시 모양을 띤 고원(高原)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분쟁 지역이다. 북동쪽은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 동쪽은 시장(西藏)자치구(티베트), 남쪽은 인도, 서쪽은 파키스탄, 북서쪽은 아프가니스탄과 각각 맞닿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인도 불교의 성왕(聖王) 아소카가 이곳을 다스렸고, 중국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602~662년)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라고 기록하였다.
역사적으로 불교와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카슈미르를 차지하였고, 높은 산이 인도 북부 지역으로부터 카슈미르를 분리하여 보호한 결과 무슬림 정복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였으나, 1320년 몽골 침략으로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무슬림 술탄조 시대가 열렸다.
무슬림 통치는 1819년 펀자브를 통치하던 시크교도 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장악하면서 끝났다. 1846년 제1차 영국-시크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750만 루피에 잠무 지역 통치자인 도그라족 라자(군주) 굴랍 싱에게 카슈미르를 양도하였다. 시크교도에서 힌두교도로 통치자가 바뀐 것이다. 영국은 1885년 권좌에 오른 프라타프 싱이 당시 영국과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와 접촉한다는 점을 우려하여 1889년 4월 그를 명목상 통치자로만 두고 직접 카슈미르를 다스렸다.
다수 주민 무시하고 인도 택한 힌두교 지배자

▲2022년 8월 7일 인도가 통제하는 카슈미르 스리나가르에서 이슬람 종교 행사에 참여하려는 시아파 무슬림을 연행하는 인도 경찰. 이후 반인도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1947년 6월 3일 인도 독립안을 발표하면서 영국 정부는 550여 개에 달하는 인도 내 여러 소국(小國)에 각기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해 7월 25일 영국의 마지막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 경은 주민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인도나 파키스탄을 선택하라고 권고하였다.
카슈미르 내 무슬림 인구는 1941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77%였다. 주민의 의향을 존중한다면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파키스탄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카슈미르 최후의 통치자 하리 싱은 힌두교도로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령 인도가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으로, 15일 인도로 각각 독립하면서 카슈미르의 정세는 혼란스러워졌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파슈툰족이 침공하자 하리 싱은 10월 26일 인도령 가입문서(Instrument of Accession)에 서명하였다. 이튿날 인도가 지원군을 보내 카슈미르를 장악했다. 이후 국제사회의 중재로 카슈미르의 65%를 인도가, 35%를 파키스탄이 각각 차지하였고, 양자 사이에 통제선이 그어졌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고유 언어인 카슈미르어로 말하고 카슈미르어 문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이지만, 자유와 독립 대신 파키스탄과 인도 중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는 ‘자유의 카슈미르(아자드 카슈미르)’라고 부르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인도령 카슈미르는 인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인도의 철권통치에 억눌려 있는 상황이다.
‘무슬림은 두 발 달린 동물’
2014년 “모두 함께, 모두를 위한 개발”을 선거 구호로 유권자들에게 경제개혁가 이미지를 각인하며 집권한 나렌드라 모디 현 인도 총리는 힌두민족주의자다. 모디의 인도인민당(BJP·Bharatiya Janata Party)은 반(反)무슬림 힌두민족주의 색채가 상당히 강한 당이다. 모디는 2002년 구자라트주(州) 수석장관(총리) 재직 당시 힌두-무슬림 대립으로 800명에 달하는 무슬림이 목숨을 잃었을 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슬림 살해의 배후’라는 의심을 샀지만, 법원에서는 무죄(無罪)판결을 내렸다.
무슬림을 “두 발 달린 동물”이라고 비하하는 힌두민족주의자들이 모디 주변을 채웠다. 힌두민족주의자들은 2019년 상원을 통과한 ‘시민권 개정안(The Citizenship Amendment Act)’에 항의하는 무슬림을 뉴델리에서 거침없이 살해하였다. 무고한 목숨을 너무도 쉽게 앗아간 시민권 개정안은 복잡한 인도 역사의 산물이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인도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세 나라로 쪼개어졌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압도적으로 무슬림이 많은 이슬람 문화권 국가다. 그러나 인도는 힌두가 절대다수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내 인구의 약 15%는 무슬림이다. 모디의 인도인민당이 원하는 대로 힌두인을 위한 인도를 만들고자 한다면 이들 무슬림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해야 할 것이다. 시민권 개정안이 정확히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등 무슬림 국가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2014년 12월 31일 이전에 인도로 와서 불법체류 중인 힌두교인, 불교도, 그리스도인,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등 모두 6개 종교 신도는 인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무슬림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무슬림은 소수 종교인이 아니고 위에 언급한 국가에서 박해를 받고 나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시민권 개정안과 함께 인도인민당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국가시민등록 제도다. 인도 정부는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댄 아삼주의 시민등록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아삼주에는 약 1900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상당수는 동서파키스탄 내전을 거쳐 방글라데시가 1971년 독립할 당시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아삼주로 넘어온 사람들과 이들의 후손이다. 아삼주 무슬림은 1971년 이전에 인도로 이주했다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어야만 시민권 등록을 할 수 있다. 1971년 이후 아삼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부모나 조부가 1971년 이전에 아삼주에 왔다거나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없으면 등록할 수 없다. 인도 정부는 무슬림을 표적으로 삼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라지브 간디 정부 때부터 불법 침입자들을 색출하고자 1971년 3월 25일을 기준으로 국가시민등록 제도 정비를 위해 협정을 체결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모디 총리의 측근인 아미트 샤 내무장관은 2019년 10월 “단 한 명의 망명자도 (인도를) 떠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명의 침입자도 머물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샤 장관이 말한 침입자는 바로 무슬림이다. 그는 무슬림을 ‘흰개미’라고 폄하하면서 “벵골만에 모두 쳐넣어버리겠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독립 이전 무슬림이 인도 문화 발전에 기여한 업적과 공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현 정부 인사들의 생각이다. 그러니 아무리 라지브 간디 정부를 인용하면서 정당화하려고 해도 인도인민당 정부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코로나19 전파 주범으로 몰린 무슬림들

▲2020년 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무슬림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인도 내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 간에 충돌이 발생, 수많은 무슬림이 희생됐다. 사진=AP/뉴시스
2020년 2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폭력적인 힌두민족주의자들이 무슬림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민권법에 항의하는 무슬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 것이다. 수도 뉴델리는 최악의 인종차별과 증오와 살해의 장으로 변하였다. 36명의 무슬림이 죽임을 당하였다. 총으로 칼로, 불로, 집단 구타로 처절하게 목숨을 잃었고 모스크는 파괴되었다. 80세 여성 노인을 불로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가 인도를 덮쳤다. 그러자 무슬림은 코로나19 전파(傳播)의 산실(産室)로 낙인찍혔다. 정말 무슬림이 코로나19 전파의 주원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증오에 눈이 먼 상황에서 무슬림은 반드시 인도를 망치고자 작정한 코로나19 전파자여야만 했다. 2020년 3월 13일에서 15일까지 하나피 법학파에 속하는 이슬람 종교단체 타블리기 자마아트가 뉴델리 니자뭇딘 지역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격히 퍼졌다는 것이 인도 정부의 발표다. 이전에는 확진자 수가 두 배로 증가하는 데 평균 7.4일 걸렸는데, 이 집회 이후 4.1일로 대폭 줄었다고 한다. 인도 정부는 약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행사를 개최한 단체의 본부를 3월 초에 방문한 것으로 추산했다. 시민권 개정과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인도 내 무슬림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엘스트의 부정주의
벨기에 인도학자 엘스트는 1992년에 처음 발간한 저서에서 “나치의 만행을 부정하는 이른바 ‘부정주의’는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나치에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무고한 인도인을 죽인 무슬림의 범죄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부정하는 역사적 시각은 이슬람 호교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 학자들이 선도하였고, 스스로 세속주의자를 자처하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인도 내에서 거스를 수 없는 사관(史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도 내 종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인도 정부의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태도는 이른바 인도식 부정주의가 흔들리지 않는 사관이 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엘스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1992년 처음 그의 책이 출간된 이후 큰 반응이 없다가 2014년 모디의 집권과 함께 부각되기 시작한 점이다. 엘스트의 부정주의는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반 강연에서 엘스트는 이슬람의 본질적인 폭력성을 강조하면서 이슬람 혐오 감정을 부추긴다. 즉 인도의 부정주의는 순수 학문적 의미에서의 역사비평이라기보다 이슬람의 폭력성을 밝히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엘스트의 부정주의는 힌두민족주의가 거세어질수록 학문적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치적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는 711년 앗사까피의 복수전이 힌두식으로 발현되는 데 양분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간추려 본 한국-인도 2000년 교류사
쌀·벼는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말
⊙ K.P.S 메논, 유엔한국위원단 단장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
⊙ 백제에 불교 전래한 마라난타, 화엄사 세운 연기조사, 고려 말 고승 지공선사는 인도 출신 승려
⊙ 시인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 네루는 《세계사편력》을 통해 일제하 조선을 기억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인도 아요디아 출신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인도가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50년 전인 1973년이었다. 그보다 11년 전인 1962년에는 뉴델리에 총영사관을 설치했다. 근대적 외교 관계를 기준으로 양국 간 교류의 역사를 따진다면, 길어야 61년인 셈이다.
하지만 양국 간 교류의 역사는 거의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 태생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허황옥은 원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모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타나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라고 명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허황옥은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비롯해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 가운데 두 명은 어머니를 따라 허씨가 되었으니, 한국의 허씨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한국과 인도는 2019년 허황옥 기념우표를 공동으로 발행했다.
아유타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1351~1767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경우 허황옥 전설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인류학자 김병모 박사는 음성학적 유사성 등을 바탕으로 아유타국을 인도의 아요디아라고 비정(批正)하면서, 아요디아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던 인도계 부족 집단이 양쯔강을 따라 이동하다가 가락국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김해와 인도 아요디아에서 발견되는 쌍어문(雙魚紋)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일각에서는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長游和尙)이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불교 전래 시기를 300년 이상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쌀농사 문화는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벼’는 고대 인도어 ‘브리히’가 어원(語源)이다. 충청 이남에서는 벼를 ‘나락’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인도어 ‘니바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쌀’도 고대 인도어인 ‘사리’가 퉁구스어의 ‘시라’로 변했다가 우리나라에서 ‘쌀’로 단축된 것이라고 한다.
신라에 불교 전래한 묵호자는 인도 출신?
전설이 아닌 역사 속에서 한국과 인도가 만나게 되는 것은 불교(佛敎)를 매개로 해서이다. 백제 침류왕 때인 384년 동진(東晉)에서 건너와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인도 출신 승려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4년 성문사[省門寺·혹은 초문사(肖門寺)라고도 함]와 이불란사(伊弗蘭寺) 등 최초의 사찰을 세운 아도(阿道)도 인도 출신 승려로 추정되고 있다. 눌지왕 때에 신라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 역시 그 이름으로 보아 검은 피부의 인도 출신 승려였을 가능성이 있다. 544년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도 인도 출신 승려이다. 이보다 한참 후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고려 말 3대 화상(나옹선사, 지공선사, 무학대사) 중 한 명인 지공(指空)선사도 인도에서 온 고승(高僧)이다.
반대로 인도로 찾아간 한반도 출신 승려들도 있었다. 백제 승려 겸익(謙益)은 인도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백제 율종(律宗)을 창시했다. 고구려 승려 현유(玄遊)는 인도로 들어가 불교 성지(聖地)들을 두루 돌아보다가 동인도에서 입적(入寂)했다. 현유는 사자국(師子國), 즉 오늘날의 스리랑카에도 갔었다고 한다.
물론 인도를 찾은 한반도 출신 승려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혜초(慧超·704~787년)다. 일찍이 당나라로 건너가 남인도(南印度) 출신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 밑에서 공부했던 혜초는 723년 중국 광주(廣州)를 출발, 바닷길을 통해 인도로 들어갔다. 이후 4년 동안 인도 전역 및 인근 40여 개국을 순례한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초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가 둔황(燉煌) 석굴에서 발견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타고르와 네루

▲‘동방의 등불’을 지은 인도 시인 타고르.
인도는 영국, 한국은 일제(日帝)의 식민 지배하에 있던 시절, 한국을 기억해준 인도인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년)다. 타고르는 1929년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면서 영어로 짧은 시(詩)를 하나 지어주었다. 이것이 많은 한국인이 기억하고 있는 ‘동방의 등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
‘동방의 등불’은 오랫동안 식민 치하에 있는 조선인들을 격려해준 작품으로 기억되어 왔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타고르가 조선에 대해 별다른 이해가 없었고, 오히려 일본 우익 세력의 대아시아주의에 공명(共鳴)한 인물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다른 한 명은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후일 초대(初代) 인도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년)다. 네루는 감옥 생활을 하던 1930~1933년 딸 인디라 간디(1917~1984년)에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도사 및 세계사를 가르치는 196회의 편지를 썼다. 이를 묶은 것이 《세계사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이다. 이 책에서 네루는 을미사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방 등 일제의 조선 침탈 과정을 서술한 후 3·1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선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K.P.S 메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유엔한국위원단 단장 K.P.S 메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도인도 있다. 쿠마라 파트마나바 시바상카라 메논(K.P.S. Menon·1898~1982년)이 그 사람이다.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단장으로 내한(來韓)한 그는 당시 주중대사를 지냈고, 후일 주소대사, 외무장관 등을 역임한 인도의 거물 외교관이었다.
메논은 당초에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보다는 통일 정부 수립에 관심이 있었고, 김규식(金奎植) 등 중도파 정치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이는 시인 모윤숙(毛允淑·1910~1990년)이었다. 모윤숙은 문학을 매개로 메논과 교분을 쌓으면서 이승만(李承晩)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이승만의 주장을 설파했다.
소련이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는 상황에 처한 메논은 결국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라는 방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메논은 후일 회고록에서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언급하면서 “우리 유엔한국위원단은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냉전(冷戰)의 바람은 우리에게 너무 강하였다”고 말했다.
1948년 출간된 《메논박사연설집》 서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메논 박사야말로 한국 문제의 궁극의 전반적 해결이 제일보로서 한인(韓人)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와 또 가능 지역 및 가능 시기에 있어서 민주적 독립 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변설(辨說)하였던 것”이라고 기렸다.
메논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생활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고 술회했다. 이는 그러한 판단에 모윤숙과의 우정이 작용했음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었다. 혹자는 모윤숙의 활동을 일종의 ‘미인계(美人計)’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모윤숙은 두 사람의 교유가 문학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며 메논의 도움을 ‘순박한 우정의 힘’이라고 칭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편지를 계속 나누었고, 모윤숙이 1949년과 1972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만나기도 했다. 최종고 전 서울법대 교수가 지은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2012년, 기파랑 펴냄)에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인도로 간 6·25전쟁 포로들
메논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한국과 인도 관계는 순탄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메논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도는 대한민국을 북쪽의 인민공화국보다 더 승인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인도는 한국의 부자연스러운 분단을 영구 고착화시킬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미소(美蘇) 양 진영 사이에서 연결고리(link)의 역할을 하는 데에 지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중반에 평화가 확보된 것은 대부분 인도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미소 양 진영 사이에서 연결고리의 역할’을 자임한 인도는 38선 이북으로 유엔군이 북진(北進)하는 데 대한 중공(中共)의 경고를 서방세계에 전달하는 등 공산권의 메신저 노릇을 했다. 인도는 또 1950년 12월 아시아·아프리카 13개국과 함께 유엔총회에 한국전쟁 정전(停戰)의 기초 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정전 3인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유엔총회에서 결의 제384호로 채택됐지만 소련과 중공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 제안은 한국전쟁 중 나온 최초의 정전 제안이었다.
인도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중립국포로송환위원회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이 위원회의 의장국을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도를 ‘용공(容共)국가’로 간주, 인도 위원단의 입국에 반대하기도 했다. 인도는 또 자국(自國) 송환을 거부하고 중립국행을 원한 88명의 전쟁포로(북한군 74명, 중공군 12명, 한국군 2명)들을 일시 수용하기도 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나중에 남미(南美)로 이주했지만, 그중 9명은 인도에 남았다. 소설가 최인훈은 《광장》에서 중립국행을 택한 포로들의 고민을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그려냈다.
인도에서 근무했던 한국 외교관들
한국과 인도는 1961년 총영사관을 개설했고, 1973년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인도에 주재했던 외교관 가운데는 유명한 이들이 많다. 임병직(林炳稷) 제3대 총영사는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제2대 외무부 장관을 지낸 거물이었다. 노신영(盧信泳) 제5대 총영사는 후일 외무부 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1983년 미얀마(버마)에서 아웅산묘소 테러 사건으로 순국(殉國)한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은 제2대 인도 대사를 지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10가지 키워드로 읽는 인도
느리지만 큼직한 보폭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차크라(바퀴)
⊙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시바(파괴)의 三神을 중심으로 방대한 ‘神의 가계도’ 형성
⊙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는 인도인의 정신적 토대이자 삶의 지침서
⊙ 다양한 외래문화를 인도문화로 재창조한 ‘용광로 역사’… ‘영국은 떠나도 셰익스피어는 두고 가라’
⊙ 위계적 구분인 ‘바르나’는 오늘날 참고적 구분일 뿐, 보다 실질적인 것은 ‘태생적인 직업의 대물림’을 뜻하는 ‘자띠’
⊙ 유권자 약 9억1200만 명, 투표~개표 기간 6주… 선거 비용은 100억 달러 이상으로 미국 다음
鄭仁采
1978년생. 한국외국어대 졸업 / (주)LG 엔시스·(주)푸른기술에서 인도·중국 업무 담당 / 저서 《인도엔 인도가 없다》 《인도는 다르다!》 《인도는 이야기다》 《인도와 사람》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의 선거 과정은 축제와 같다. 사진=AP/뉴시스
“그래서 인도는 어떤 곳이냐?”는 건 인도와 연을 맺고 일관되게 받아온 질문이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간명히 해달란 주문인데, 한참 말하다가 현타(‘현실자각타임’ 혹은 ‘현실타격’이라는 의미의 유행어)가 오는 원점회귀의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도가 우리에게 먼 이유를 되짚어본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도는 간단할 수 없다. 간단할 리 없는 인도의 키워드를 꼽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개론적 강연의 기본 메뉴일 뿐만 아니라, 탈모를 감수하며 며칠 밤새워 백 가지의 키워드를 쏟아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렵다. 모두 담기엔 넘치고, 줄이면 미진하다. 매번 아쉬움이 남는다. 인도는 반얀나무를 떠올리면 된다. 모든 것이 얽히고설켰다. “인도는 인도다”라고 해야 현답(賢答)이지만, 한 걸음 들어가면 백 가지의 키워드도 부족할 수 있다. 그래도 인도를 이야기할 기회는 늘 반갑다. 부디 이 글의 마침표 뒤에 필자의 소임을 다했길 바라며 시작해본다.
1 답보다 공식(公式)
일단 숫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자료를 보면 셀 수 없는 숫자의 향연이다. 세미나의 ‘개황’이 대표적이다. 인구가 몇억이고 GDP는 얼마며 언어와 종교는 얼마나 다양한지 나열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건 복잡하단 것뿐이다. 과연 이런 곳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팀 쿡도 망설이고, 일론 머스크도 혀를 내두른다. 일목요연하게 보려는 것인데 보는 사람은 피곤함부터 느낀다. 언뜻 함부로 손대지 말란 소리로 들린다. 이래선 실전(實戰)에 무용(無用)하다. 이런 자료는 필자에게 늘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숫자로 드러난 답보다 공식이 먼저다. 공식을 이해하면 답은 계산되어 나오고, 응용도 가능하다.
2 또 하나의 물난리
신화에서부터 출발해야
그렇다면 어떤 공식부터 살펴봐야 할까. 신화(神話)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해제(解題)의 단서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신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흥미 거리로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좀 다르다. 신화도 역사다. 우리는 인도(인디아)라고 부르지만 현지에서 인도는 ‘바라트’다. ‘바라타’에서 유래한 말로 아득한 고대(古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만 봐도 인도가 계보의 시작점을 어디에 두는지 알 수 있다.
인도 탄생 신화 또한 물난리로 시작한다. 마누가 물고기(마치야)의 보은(報恩)으로 방주(方舟)에 올라 대홍수에서 살아남고, 지금의 히말라야에 닿아 현 인류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반쪽인 여성을 빚어내고, 현자(賢者)들과 함께 인류 사회를 재건해 나간다. 여기까지 익숙한 레퍼토리다.
그런데 이때 《마누법전》이 등장한다. 여기서 브라만(사제와 학자), 크샤트리아(왕족과 무사), 바이샤(상인), 수드라(그 외) 등 사성(四姓) 계급으로 나누는데, 때문에 간혹 마누를 카스트의 원흉(元兇)이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엔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 구분이었다. 아무튼 《마누법전》으로 신화는 역사가 된다. 마누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존재로 기억되고,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마누의 후손으로 여긴다.
3 입담의 시작
아리아인들의 이주와 ‘神들의 보직 이동’
인도가 신화부터라면, 어느 시점부터 누군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썰을 풀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아리아인의 이주를 주목할 만하다. 원주민이 점거했던 인도 땅에 그들이 들어왔다. 단기간의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일이었는데, 이때의 단서를 제공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오랜 문헌으로 꼽히는 《리그베다》다. 이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정착(10개 종족, 10명의 왕이 펀자브 일대에 정착해 토착 문명과 투쟁)하는 과정을 역사적 배경으로 당대의 사회·문화적 면모를 종교적 찬가(讚歌)로 표현한 모음집이다. 경전인 동시에 사료(史料)다. 이때 벌써 소(특히 암소)가 귀했고, 옷을 만들거나 금속과 가죽을 가공했다. 마차를 만드는 목수도 존재했다. 소는 일당백의 노동력이었고 소젖은 귀중한 생계의 수단이었으며, 마차의 기동력은 아리아인이 원주민보다 우위에 섰던 기술이다. 마차의 바퀴(차크라)는 오늘날 인도의 상징(국기, 국장)이다.
《리그베다》에 묘사된 신(神)의 ‘보직 이동’은 흥미롭다. 원주민과 투쟁하던 시대엔 바루나(윤리의 신)와 인드라(전쟁의 신, 비의 신)가 다툰 끝에 인드라가 우위에 섰고, 그 시기를 지나 정착하고 농경문화로 무게중심이 넘어가자, 치수(治水)의 중요성과 더불어 인드라가 신들의 왕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그니(불의 신)도 중요하게 여기는데, 자연신이 주를 이룬 것은 인간이 자연의 힘에 크게 좌지우지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직 오늘날의 인격신(人格神)과 화신(化神·아바타르) 사상이 등장하기 전이다. 훗날 점차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며 그 주도권은 자연신에서 인격신으로 옮겨간다.
한편 종교는 소수(少數)의 이주민이 권력을 점하는 수단이었다. 제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제(司祭)와 학자 계급이 이를 독점하며 지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지식은 암송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암기력이 좋고 입담도 세다. 대개 기원전 1500년경 등장한 것으로 보는 《리그베다》가 처음 활자화된 건 15세기 무렵이었다. 이는 인도 종교, 역사, 철학, 문학 등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옥새를 참으로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4 神 세계
신앙은 인기 순이다

▲파괴의 신 시바는 인도의 여러 신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신이다.
그러는 사이 숭배하는 신은 많이 불어났다. 흔히 인도엔 3억의 신이 존재한다는데, 역시 숫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크게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파괴(시바)의 삼신(三神)을 중심으로 보면, 분업화(分業化)된 삼신은 인격신으로 그 처(妻)가 되는 여신들과 자식을 두고 그 자식 또한 숭배한다는 의미다. 또 신은 화신(아바타르)으로 재림하고, 여기에 지역마다 같은 신을 다르게 모시는 것까지 포함해 방대한 ‘신의 가계도(家系圖)’를 이룬다. 마블도 울고 갈 멀티버스의 세계관이다.
워낙 인간적인 신들이라 신화 속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더 위대하다고 싸우는데, 신자들도 각기 여러 종파로 나뉜다. 주목할 점은 신들도 인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는 위대하지만 일단 태어나면 그만이다. 한 번으로 족하다. 반면 파괴는 곧 재생을 의미하니 죽음 뒤 내세를 기원하는 입장에서 파괴의 신(시바)이 인기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신앙은 인기 순이다. 특히 비슈누는 화신 사상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마누의 물고기(마치야)에서 시작해 심지어 붓다까지 비슈누의 화신으로 본다. 워낙 출중한 신이니 여러 시대에 걸쳐 다채로운 연애사로도 회자되는데, 무엇보다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서 활약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인도인들의 삶의 지침이다.
먼저 《라마야나》는 람의 일대기다. 이복(異腹)형제와의 대립을 피해 스스로 유배를 떠난 람이 불의(不義)에 맞서 정의를 구현한 뒤 이상적(理想的)인 왕이 된다는 내용이다. 람은 곧 비슈누의 화신이다. 한편 《마하바라타》는 바라타족의 사촌지간(판두족과 카우라바족)에 분쟁이 일어나는데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정의의 편에서 승리를 돕는 조력자가 크리슈나다. 그 역시 비슈누의 화신이다. 《마하바라타》의 일부이자 그 정수(精髓)로 꼽히는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골육상잔의 비극을 앞두고 갈등하는 주인공 아르주나에게 조언한다. 요약하자면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 마음 아파도 해야 할 일은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서사시는 모든 인도인이 태어나 평생 동안 듣고, 보고, 읽고, 흠모하며 외는 것이다.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삶의 지침서로 삼는다. 지대한 영향력이다. 가령 인도 남성들은 다들 람을 외친다. 그만큼 완벽한 남편, 형제, 군주가 하나로 집약된 이상적 인물상이다. 그런데 람은 하나이자 여럿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대에 걸쳐 등장했는데, 아무리 람이라도 ‘벤자민 버튼’처럼 시간을 거스를 순 없으니 결국 오랜 역사 속 위인을 대체로 람에 수렴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람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인격신들인 만큼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시바신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하나같이 사랑받는 이야기들인데, 그렇게 회자(膾炙)되는 신들은 인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바닥, 벽, 길모퉁이, 하물며 무심코 스치는 나무 밑동에도 신상이 자리해 있다. 그야말로 신의 세계인 것이다.
5 용광로 사(史)
아리아인의 침공에서 영국 식민지배까지
이제 기록된 역사로 넘어간다. 신화를 통해 정신을 보았다면, 역사를 통해 오늘의 인도가 보인다. 오늘날 인도는 거대한 집합체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로 가득하지만 하나다. 긴 역사를 통해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외부의 무수한 자극을 받았음에도 인도라는 큰 솥 안에서 알맞게 버무려진 결과다. 때문에 오늘의 인도를 알고 싶다는 건 용광로와 같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일과 다름없다.
아리아인의 이주가 어떤 기반을 마련했는지는 이미 소개했는데, 인도가 외부로부터 맞이한 ‘충돌’은 그게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인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쪽에 알려졌다. 알렉산더의 꿈이 그곳을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동진(東進)하며 동서가 융합된 문화가 발아했다. 정복은 실패로 끝났고 알렉산더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인도 문화는 더 풍성해졌다. 신상을 즐겨 만드는 버릇도 이때 생겨났다. 또 누군가는 알렉산더처럼 정복과 통일을 꿈꿨다. 그 꿈이 곧 최초의 통일 왕국인 마우리아 왕조로 실현된다.
술탄들도 수시로 인도를 넘봤다. 처음엔 인도의 부(富)를 쫓아왔다가 점차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결국 무굴제국의 시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도를 이슬람화(化)할 순 없었다. 억압과 회유로 개종을 종용했고, 기존 계급 사회에서 탈피하려는 사람들이 호응했지만, 기본적으로 저변에 인도 문화를 공유하는 인도 무슬림이 된다.
식민지 시대도 겪었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서구 문화와 교육이 유입되었고 영어를 쓰게 되었다. 당시엔 영국에서도 문학을 배우진 않았는데, 인도에선 영문학을 가르쳤다. 기독교도 전파되었다. 다만 그 또한 인도라는 우주에 수렴되었다. 가령, 차 재배 기술과 문화가 들어오며 차이 문화가 탄생했으나, 고상한 다도(茶道) 대신 골목에서 탕약처럼 끓여낸 일상 음료이자 ‘바카스’로 진화했다. 영화도 그랬다. 여러 가지 장르가 혼합되고 춤과 노래가 가미된 마살라(향신료) 영화가 되었다. 영국에 대한 인도인의 자세를 잘 표현하는 말이, ‘영국은 떠나도 셰익스피어는 두고 가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응집된 결과물이 지금의 인도다. 특별한 점이라면 뭘 새로 얻었다고 원래의 성격이 바뀌진 않았다. 섞어찌개와 달리 만 개의 레시피가 있으면 만 개의 요리가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인도 문화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신화처럼 파란만장한 역사의 에피소드 또한 풍부하다. 칼링가를 정복하고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 무굴제국의 삼대(시조 바부르, 위태로운 제국을 수성해낸 후마윤, 전성기를 연 아크바르), 이에 대항한 술탄과 라자들, 그리고 그 왕비에 얽힌 무협과 로맨스로 넘친다. 어두운 과거지만, 식민지 시대의 후과(後果)를 돌아보는 것도 현재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6 다양성의 대식가
다양한 언어와 종교, 공존의 시험장
이제 다양성을 말할 차례다. 먼저 인도는 남과 북이 다르다. ‘충돌’의 직접 영향권이었던 북인도와 달리, 남인도는 지리적으로 외부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된 형태로 발전하며 북인도와 구별된 역사를 써내려 왔다. 남쪽으로 갈수록 인종도 확연히 구분된다. 기골이 장대한 북인도와 달리 남인도는 토착민의 모습 그대로다. 겉모습도 그렇지만, 언어야말로 그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과 아리안 계통의 언어가 각기 발전해 지금에 이른다(전체 800여 개 언어로 헌법상 지정 언어 22개, 인구 10만 명 이상 사용 언어는 216개). 하지만 난감해할 만한 일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힌디어와 영어로 통하고, 그다음은 특정 지역에 깊이 접근해야 고민할 일이다.
한편 인도는 종교 공존(共存)의 시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근간이자 주류를 이루는 힌두교(80%), 인도에선 이인자지만 세계적인 신자 수의 이슬람교(14%), 힌두교보다 엄격한 자이나교,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한 시크교, 인도에서 창시되어 세계로 뻗어나간 불교(각 1~2%),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기독교 등이 널리 분포해 있다. 여기에 다신(多神) 숭배의 힌두교가 지역마다 또 얼마나 변화무쌍한 모습일지는 상상에 맡긴다.
인도엔 긴 시간의 흐름이 공존한다. 람이 여기저기 ‘타임 슬립’한 탓인지,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눈앞에 혼란스럽게 펼쳐진다. 혹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구습에 얽매여 변화가 더딘 곳이라지만, 그 말이 반드시 옳진 않다. 과거에 현재를 더해 미래를 모색한다는 면에서 인도는 유연하다. 다만 느리다. 느리지만 큼직한 보폭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차크라(바퀴)다. 내심 좀 서두르면 좋겠지만, 어디든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이처럼 다양성을 취하며 지불한 대가도 만만치 않다. 종교, 종파 간 갈등과 분쟁 등 오늘날 인도가 현재 진행형으로 겪는 문제는, 다양성 폭식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과 같다. 늘 표면에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악용, 악화될 여지가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7 계급 우주관
카스트가 아니라 ‘바르나’와 ‘자띠’다
다음으로 인도는 계급의 우주다. 흔히 카스트라고 부르지만, 카스트는 원래 인도 말이 아니다. ‘카스트’는 포르투갈어로 동식물의 종(種) 내지 사람의 부족, 인종, 계급, 종족을 의미하는 카스타에서 비롯되었다. 그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서구인들이 편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간혹 ‘계급’이라는 말 자체로 이미 그 의미를 속단하는데, 사실 인도엔 우리가 아는 계급이 없다. 그러면 지금 인도의 계급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 고대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구분한 것에서 기원한 것이다.
인도의 계급은 바르나(색, 계급)와 자띠(태생적 직업)로 정의할 수 있다.
바르나는 위계적 구분이다. 곧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사성 계급인데, 바르나 밖에 머무는 것이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다. 다만 오늘날은 참고적 구분일 뿐이다.
보다 실질적인 것은 태생적인 직업의 대물림을 뜻하는 자띠다. 한 마을에 20~30종, 인도 전체적으로 2000~3000종에 이르는데, 이는 현대에 이르러 산업의 변화, 직업의 세분화와 함께 더욱 확장된다. 간단히 비유하면 패밀리 비즈니스다. 가령 인도 영화계에서 ‘카푸르’라는 성씨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배우나 제작자다. 이로 볼 때, 인도의 계급은 ‘14억 인구의 인적(人的) 지도’와도 같다. 상대의 이름만 들어도 어느 지역에서 무엇을 해온 집안 출신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계급 간 이동의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 심부름을 하며 차(茶)를 나르던 소년이 유력 정치인이 되고, 반대로 브라만 출신이라도 경제적으로 몰락해 변변찮은 일을 하기도 한다. 다만 어느 정도 틀 안에 머문다는 의미다. 태생적 환경이 대물림되며 계급 간 이동의 허들이 높은 건 사실이다. 슬럼가의 하층민일 경우, 가난으로 교육의 기회를 버리고 이른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기 마련이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반전(反轉)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또 그러한 환경일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데, 머릿수는 곧 노동력이다.
한편 인도인은 마누의 후손, 본질은 달라져도 그 계급이란 태초부터 사회에 뿌리내린 것이다. 잘못되었다며 당장 타파해야 한다는 논리가 통할 수 없다. 법적인 조치라면, 카스트에 의한 차별은 1947년 이후 이미 금지되었다.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 왔다. 가령 하층 계급에게 주어진 할당제를 들 수 있는데, 보완 장치가 생기면 이를 보완하는 편법도 기승을 부리는 법. 그 혜택을 얻기 위해 스스로 하층 계급임을 자칭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때문에 법과 제도만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천천히 체득해 나갈 일이다. 스스로 희생하고 역할 밖의 일도 돕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라면, 인도인 입장에선 역할 침범이다. 내 일을 뺏는다고 보거나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무직원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면 기피한다. 청소나 짐을 나르는 인부도 각각이다. 자본주의니까 비용을 지불하면 역할에서 벗어난 일을 맡기도 하지만, 그걸 계기로 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파업이 일어날 수도 있다. 메시지의 전달도 적절한 과정을 거치는 편이 좋다. 솔선수범 앞장서는 일은 생각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8 인생 여행자들의 원픽
‘인생 4단계’를 여행하는 순례자

▲갠지스 강변의 성지 바라나시. 한편에서는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이에 다른 한편에서는 화장을 한다. 사진=배진영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좀 편안한 이야기를 해보자. 인도의 다양성은 동시에 카오스다. 모든 걸 빨아들여 혼란하다. 다만 그래서 여행자에게만큼은 인도가 축복의 땅이다. 가자마자 다신 오지 않겠다고 공언하지 않는 이상, 인도는 한 번만 맛볼 수 없다. 전국이 성지(聖地)이자 순례지고, 곳곳에 아름다운 유적이 즐비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을 찾아가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멋진 말이 있지만, 인도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가는 곳마다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쉬운 예로 아그라 타지마할의 정원을 거닐며 이런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무굴제국의 황금기, (많은 왕비 중에)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황제는 많은 이의 희생을 담보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세웠다. 그러나 그 후과로 아들에게 유폐되어 멀찍이 성에 갇힌 채 남은 세월을 무덤만 바라봐야 했다. 알고 갈수록 여행의 풍미는 더한다.
유적 탐방이 다는 아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막론한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한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또 없다. 북쪽과 남쪽이 다르고, 동쪽과 서쪽도 다르다. 고산 지대에서 내려와 사막을 돌아 평야와 강, 바다를 두루 살피는 사이, 세상은 넓고 가본 곳은 적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낯선 풍경 속에 수시로 글자가 바뀌며 다채로운 사람들과 조우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백미다. 모두 섭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평생 다녀도 다 보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여행이야말로 인도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젊으면 젊어서 나이가 있으면 나이가 있어서 빠져든다. 순례자는 순례자라서 의미 깊다.

▲갠지스 강변의 성지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파괴의 신’ 시바의 도시이다. 사진=배진영
인도 사람들 자체가 워낙에 타고난 여행자다. 흔히 인도인의 이상적인 삶은 ‘인생 4단계’로 요약된다. 첫째는 수습기(브라마차르야)로 태어나 배우고 학습하며 성장하는 시기, 둘째는 가주기(가르하스타)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돌보며 세속적인 성취를 이루는 시기, 셋째는 임서기(바나프라스타)로 가업을 물려주고 은퇴해 내면의 자아를 성찰하는 시기, 넷째는 유행기(산야사)로 부부마저 헤어져 득도(得道)의 길을 걸으며 진리를 깨우치는 시기다. 아직 2단계조차 마스터하지 못한 필자의 입장에선 인도인 인생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대개의 삶보다 한두 수 위의 과업이 인도인들의 생에 부여된 셈이다.
인생 여정의 종점이 다시 수행 길로 이어지니, 인도인들은 곧 순례자다.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성지 순례를 꿈꾼다. 스스로 못 가면 대리를 보낸다. 그리고 죽어서라도 그곳에 가 육신을 태운다. 대표적인 성지인 바라나시에 가면, 강가(갠지스)강 한편에 무수한 인파가 모여 몸을 담그는 사이, 다른 한편으로 화장터의 매콤한 연기가 타오른다. 거기서 태운 시신은 강 위를 떠내려간다. 장작은 가진 만큼이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떠내려간다. 놀라지만 말고 마침 파괴의 신을 떠올리면 좋다. 바라나시는 시바의 도시고, 파괴는 곧 재생. 눈앞에서 생의 한 바퀴가 돌아가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이다.
9 춤추는 영상 교재
발리우드 드림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만큼 오늘날 인도의 문화는 풍요롭다. 다만 종교 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그래도 영화만큼은 대중성이 있다. 물론 영화 또한 전통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춤과 노래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제사 의식에서 시작된 전통 무용과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MTV와 할리우드의 영향도 받았다. 그것이 특유의 형태로 발전했다.
인도 영화는 그간 큰 발전을 이뤘다. 언어 지역별로 각기 고유한 시장을 형성했는데, 힌디와 영어권 영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발리우드 영화’로 전국구다. 다른 지역별 영화 시장도 매우 커 전국적으로 연간 1000여 편이 넘게 제작되고 연간 관객 수가 12억 명에 달하는, 세계적인 영화 시장이다. 상업적 성공은 물론, 일찍이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아 왔다. 최근에도 시대 액션극인 〈RRR〉이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소비 능력 등을 고려할 때, 영화는 인도를 대표하는 대중문화다. ‘발리우드 드림’이라고 하듯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는 선망의 대상을 넘어 사회 명사로 영향력을 끼친다. 대중가요 역시 영화의 주제가에 거의 준한다. 개봉에 앞서 음악을 공개해 흥행몰이를 한다. 종교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도인들이 결코 놀 줄 모르는 게 아닌데 그 흥은 영화관에서 제대로 발산된다.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는 관객들을 볼 수 있다.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영화는 인도를 읽을 수 있는 영상 교재다.
10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최대의 민주주의
더디지만 단단한 변화 이끌어낸다
인도의 저력은 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원내각제로 5년마다 직접 선거를 통해 하원의원을 선출하는데, 정말 ‘억’ 소리 나는 규모다. 2019년 총선을 기준으로 약 9억1200만 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투표에서 개표까지 6주에 걸친 장기 레이스다. 선거구는 543개, 등록 정당은 2293개, 후보는 약 8000명으로 관리 인원만 약 1000만 명에 달하는데, 선거 비용은 100억 달러 이상으로 미국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선거를 치른다.
현지에서 느끼는 열기는 더 대단하다. 구름 같은 인파가 유세 현장에 쏟아져 나오고, 곳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결과가 나오면 유권자들이 차량에 매달린 채 승리의 깃발을 휘날린다. 마치 축제와 같다. 열악한 환경에 지쳤다가도 그 광경을 목격하면 새삼 인도라는 곳의 힘을 믿게 된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최대의 민주주의다.
인도의 인구는 중국을 추월했다. 중국은 세계 공장의 지위를 잃을까 봐 걱정이지만, 같은 인구수라도 유권(有權)의 인도인들이 가진 저력은 다르다. 관상으로 치면, 다소 더디지만 단단한 변화를 이끌어낼 상이다.
인도는 삼세번이다
인도는 삼세번이란 말로 글을 맺는다. 처음 가서 감탄하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갔다가 진득한 현실과 마주하고, 그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진면목과 마주한다는 인도 여행자들의 속언이다. 필자는 삼세번을 인생 여정으로 삼아왔다. 우연히 ‘인도’라는 낱말을 본 뒤, 반신반의한 마음에 발을 디딘 것이 계기였다. 배우고 경험하는 사이 깊어진 관심은 생업으로 이어졌는데, 녹록지 않았다. 가능성과 제약 사이를 저울질하다가 물러서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고 인도라는 관념을 실체로 만들었다.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지속은 또 다른 숙제, 계속 인도여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야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인도에 입문한 이후 지금에 이르는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어느덧 25년이 좀 넘었는데, 역시 삼세번이란 생각이다. 대수롭지 않은 한 인간이 성패를 떠나 끊임없이 인도를 지향한 행적이다.
혹자에게 인도는 한 번이다. 가서 된통 당하고 다시는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다 싶으면 서둘러 발을 빼는 것도 방법이다. 다만 그래서는 영영 인도를 알 수 없다.⊙
◆귀화 인도인 로이 알록 쿠마르
“한국 교육, 10차선 20차선 도로 같은 인도식 교육 필요”
어떤 때는 한국 교육이 슬로건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도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흥미로운 게 인도 시골학교에서 10등 하는 아이가 미국 대도시 가서도 10등 안에 들어가요. 이게 인도 교육입니다.”
⊙ “중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전 세계의 연구실’”
⊙ “인도의 강점은 문제 해결력… 전화선도 없던 시절, 위성 쏘는 능력”
⊙ “30년 후 ‘인도의 시대’ 오겠지만 ‘전 세계가 중국 중심!’ 같은 구호의 중국처럼 되길 원치 않아”
⊙ “인도 철학은 자기 경험. 노래방에 가면 노래는 많은데 ‘나의 노래’가 뭐냐?”
⊙ 1980년 26세 때 한국 유학… 대한민국 10만 번째 귀화인
로이 알록 쿠마르(Roy Alok Kumar)
1955년생. 인도 네루대 물리학부, 델리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네루대 대학원 한국어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박사 과정 수료 / 부산외대 인도어과 교수,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 역임. 現 부산외대 명예교수, 부산다문화국제학교 다문화연구원 원장

▲로이 알록 쿠마르 부산다문화국제학교 원장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도인은 간디 아니면 타고르가 아닐까. 하지만 부산 사람들은 다를 것 같다. 아마 로이 알록 쿠마르(68)라 답할지 모르겠다. 부산다문화국제학교 로이 알록 쿠마르 다문화연구원 원장 말이다.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26세던 1980년 3월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입국해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한국이 민주화 열기로 아주 뜨겁던 시절이었다.
1989년부터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인도어를 가르쳤으며 부산시 산하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2005년에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을 힌디어로 번역해 인도에 소개한 일도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뒤 2명의 딸을 낳고 키우며 살아오다가 31년 만인 2011년 1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두부모를 썰 듯 딱 10만 번째 귀화인이었다. 근래에는 MBC 〈대한외국인〉 등의 프로를 통해 ‘한국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내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자는 지난 7월 3일과 4일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라 思考”
― 종교는 없습니까.
“사실 인도에서 태어났으니까 힌두교라고 할 수 있는데 힌두이즘은 무슨 종교가 아니에요. 그냥 인더스강 이쪽에서 태어났으니까 힌두지요. 마치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국인인 것과 같아요.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라) 사고(思考)예요, 사고….”
로이 알록 원장은 기자와 만나자마자 아주 깊이 있는 화두(話頭)를 알려주었다. 한국인인 그가 이제는 힌두교라는 짐을 내려놨는지가 궁금해서 종교를 물어봤을 뿐이었다.
― 힌두교와 불교는 서로 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도는 다른 종교와 달리 ‘오픈한다’는 얘기죠. 믿음 체계가 아니에요. 누가 힌두고 누가 힌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게 힌두는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개종(改宗)도 없지요.”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힌두교는) 불교하고 어떤 관계냐?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스승이 불교의 부처님이었다는 얘기죠. 반대로 병이 고쳐지면 더는 약 먹을 일이 없잖아요. 그러면 신앙이(불교가) 필요 없고, (신앙에) 충성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인도의 기본적인 가르침이 뭐냐? 얼마나(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든, 얼마나(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든 거기에 노예가 돼버리면 아니다(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저것도 충분하지 않다’며 계속 (답을) 풀어가는….”
이 대목에서 문득 통일신라 스님 혜초가 구법(求法)을 위해 인도를 향해 갔던 사실이 떠올랐다.
“자연과학은 실험을 통해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인도 철학은 자기 경험이에요. 노래방에 가면 (부를) 노래는 많은데 ‘나의 노래’가 뭐냐? 그 말이에요.
게다가 그걸(경험을) 말로 하지도, 쓰지도 말라고 했어요. 인도의 불교 교리나 부처님 가르침도 석가(釋迦) 사후(死後) 400년 뒤에 나온 겁니다. 그래도 남는다면(남겨야 한다면) 그게 진리란 말이에요.”
‘경계인이 아니라 여전히 인도인’

▲2011년 1월 24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 회의실에서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10만 번째 귀화 허가자인 인도 출신 로이 알록 쿠마르씨를 비롯한 귀화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는 “인도에 있었다면 몰랐겠지만 한국으로 떠나오니 나름대로 인도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는 한 번도 신(神)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열반이 중요하다’고 했죠. 열반이 뭐죠? 집착에서 탈피하는 겁니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림자란 말입니다. 진실이 아니라 그림자란 말입니다.”
로이 원장의 ‘설법(說法)’을 한참 들었다. 뭔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졌다. 인도인이자 한국인, 인도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원래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는 경계인이 아니라 어쩌면 여전히 인도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국(母國)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 한국과 인도의 오랜 인연에 대해 들어봤나요? 가야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옥(허황후) 일행이 인도에서 왔다는 설(說), 인도 타밀어와 한국어 유사성 등을 두고 요즘 자주 거론되고 있더군요.
실제로 우리말과 타밀어를 비교하면 비슷한 단어가 많다. 하나-아나, 둘-두, 셋-셋, 아파(아프다)-아파, 꼬마-꾸마르, 비[雨]-뻬이, 쌀-사할, 궁둥이-궁디, 와(오라)-와, 봐(보라)-봐, 가(가라)-가, 엄마·아빠-음마·아빠 등등 유사 단어가 수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물론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제가 인도에서 올 땐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젠 거꾸로 인도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있어요. 허황옥 일행이 인도 북부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설, 인도 남쪽 첸나이에서 왔다는 설도 이제는 연구 대상이죠.”
인도 남부 해안 지역에 위치한 첸나이는 인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해양도시다. 첸나이 인근에 현대차, 삼성전자 현지 공장이 들어서 있다. 첸나이는 태평양과 이어지는 벵골만을 접하고 있어 고대부터 해상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길이 6km, 폭 437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긴 백사장과 그 앞에 잔잔한 바다가 펼쳐지는 마리나 비치는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해상 교류의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참조: 《김해뉴스》 2017년 11월 1일 자 〈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23) 첸나이·깐치푸람〉)
使徒 토마스, 그리고 허황옥
“요즘 보니까 인도 첸나이 쪽 연구소들이 그런 조사를 많이 하고 있어요. 또 설득력이 있고요. 그런데 타밀어·한국어 단어가 유사하다는 주장을 독일인 가톨릭 신부님이 처음 하셨는데 그분이 인도에 있다가 한국에 부임하면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됐다지요?”
사실, 인도 남부는 가톨릭과도 인연이 깊다. 이곳에 시리아 동방 전례에 속하는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서기 52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토마스(도마) 사도(使徒)가 인도의 최남단 케랄라에 도착해 복음을 전하면서 인도의 가톨릭 역사가 시작됐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토마스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와 손을 직접 만졌던 ‘의심 많은’ 인물이었다.
“토마스 사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 무렵, 인도 최남단 케랄라에 그리스인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고향 사람을 찾아) 전도하러 인도에 왔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놀랍게도 허황후가 가야로 떠난 시대와 비슷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6~7년 뒤인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맞이해 황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계속된 주장이다.
“당시 인도엔 이미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건조(建造) 기술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큰 배를 타고 (가야에) 왔다는 얘기가 가능합니다. 해안 길로 왔으니 근거는 없지만, 배로 운반할 때 큰 불상이나 석탑을 옮길 수 있다는 거예요. 육로보다 현실적이죠.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해안가에서 발견되는 불상들이 굉장히 커요.”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불리는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알려져 있다.
―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 분야의 연구에 대해 도명 스님(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이 쓰신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저의 학문적 한계입니다. 신화(神話)는 역사 기록보다 강하다는 것을 많은 학자들은 말하죠. 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람들의 역사도 존재하니까요.”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아랍으로…

▲2018년 7월 부산 강서구 김해공항 유라시아 청년 대장정 출정식에 함께한 (왼쪽부터) 로이 알록 쿠마르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와 배수한 동서대 국제관계학 교수. 사진=조선DB
로이 원장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거나 통설로 믿었던 지식들이 깨지거나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현재 인도-유럽 계통의 인도인은 그 선조가 유럽에서 건너온 아리안(아리아인)으로 알려져 왔다. 독일 히틀러도 “게르만족이야말로 위대한 아리아 인종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민족”임을 내세웠고, 영국이 인도를 통치할 때도 인도 상층부 귀족은 원래 순수한 백인 아리안이라며 식민 통치를 정당화했다.
다시 말해 철기문명의 외부 세력인 백인 아리안이 어두운 피부색의 드라비다인을 인도 남부로 몰아내고 현재의 중원을 차지했다는 것이 기존 인도 고고학의 시각이었다.
로이 원장은 “지금 아리안들이 유럽 쪽에서 왔다는 게 다 깨졌다”고 단언했다.
“아리안 문명, 인더스 문명, 하라파 문명이 유럽에서 왔다면 어딘가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도 근거가 없거든요.
반대로 모든 지식의 흐름이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아랍으로 올라갔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는 얘기죠.
옛날 혜초도 인도로 왔지만, 아랍 쪽 기록이나 그리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기록을 보면 맞아떨어지는 게 많아요. 재밌는 게 알렉산더가 B.C 327년에 인도를 정복하러 왔어요.”
알렉산더는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 가르침 덕분에 알렉산더는 고대와 중세 시대의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철학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로이 원장은 기자에게 인도 원정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른바 벌거벗은 철학자들인 짐나소피스트(gymnosophist) 사두(sadhu·고행자)들을 만나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알렉산더와 인도 현자(賢者)의 문답이 일부 실려 있다.
“숲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알렉산더가 ‘기괴하게 생긴 사두’를 발견했다고 해요. 거의 벌거벗은 이 남자는 긴 머리에 헝클어진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흔한 광경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에게는 의아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며칠 동안 계속 관찰했어요. 사두는 나무 밑에 앉아 줄곧 지평선을 바라보았던 겁니다. 어느 날 호기심을 풀기 위해 현지인 도움을 받아 대화를 시작했다고 해요.”
인도 賢者와 알렉산더 대왕의 대화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 사진=조선DB
로이 알록 원장의 말을 대화체로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알렉산더가 이렇게 질문했다.
“매일 나무 아래 앉아 몇 시간 동안 특정한 자세로 지평선을 바라보는 당신을 본다. 정말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건가?”
현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인내심을 잃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당신은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넌, 뭐 하고 있느냐?”
현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힘겹게 분노를 억누르며 사두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매일 몇 시간씩 여기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이번에는 사두가 고개를 들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반문했다.
“나는 알렉산더이며 지구를 지배하기 위해 나섰다.”
“그 후엔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사두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복한 땅의 모든 부와 말과 코끼리를 그리스로 가져갈 것이다.”
“대왕님, 목표를 달성하셨다고 가정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비참한 나라들의 남자들은 모두 내 노예로 삼고 여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보내 우리를 즐겁게 하게 할 것이다.”
“대단한 동기부여군요! 남자들은 모두 노예로, 여자들은 모두 노리개로!”
사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마저도 다 이룬다면 다음엔 무엇을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외향적이고 활기찬 성격과는 달리 알렉산더는 한동안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 후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왕좌에 앉아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게 제가 하고 있는 일”이라 말하며 ‘특이한’ 인도 사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힌두교에 속하는 어떤 브라만 수행자들은 숲속에서 살면서 머리를 깎고 벌거벗은 채로 과일과 우유만을 먹으며 명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로이 원장의 말이다.
“나중에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을 때 이런 일화가 있어요. 관 밖으로 알렉산더의 손이 나와 있었다고 해요. ‘내가 죽으면 들어갈 관의 양쪽 옆에 구멍을 내라, 그러고 내 양손을 관 바깥쪽으로 내놓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겁니다.
천하를 손에 쥐었던 자도 죽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인데, 인도 현자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惡을 없애면, 神도 필요 없어”

▲인도의 갠지스강이 바다와 만나는 ‘강가사가르’에서 사람들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의식을 치르고 있다. 사진=조선DB
인도의 위대한 문명 얘기에 로이 원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국어 구사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게 좀 섭섭했다.
“옛날 ‘로마 여성들 때문에 로마가 망할 것이다’는 말이 있었어요. 로마 문헌에 나오는 말입니다. 왜냐? 로마 여성들 사이에 인도에서 수입한 옷이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인도는 일찌감치 직물 제조술이 뛰어났던 겁니다. 얼마나 얇게 만들었는지 ‘바람으로 짠 옷’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로마의 돈이, 황금이 다 인도로 간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가려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유럽과 인도의 중개인 역할을 튀르키예(터키)가 하면서 부자 나라가 되니까 그걸 막으려 스페인 등이 인도와 직(直)무역을 서둘렀고, 그러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겁니다.”
― 인도인들은 자기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가 봅니다.
“인도 사람들이 그게 좀 부족해요. 현재 모디 정권이 들어선 뒤에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데 그 전에는 국수주의(國粹主義)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냥 조용히 ‘알 사람은 알겠지. 때가 되면 알겠지’ 그런 식이었어요.”
― 인도인의 국민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인도는 생각을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인도 출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이 쓴 책이 《논쟁을 좋아하는 인도인》입니다. 논쟁을 중요하게 여기죠. 인도인이 바라나시를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화장(火葬)을 하는데, 바라나시 같은 곳이 인도에 8군데나 있습니다.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이 매년 큰 논쟁터 같은 역할을 하죠.
여러 학파가 모여 뜨겁게 논쟁하고 ‘이번엔 이것으로 하자!’고 했다가 내일 다시 바뀌는 게 인도입니다. 인도가 참 재미있는 게, 축제를 하면 신상(神像)을 만드는데 보통 두 달 이상이 걸립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면 다시 갠지스강가에 가서 그 신상을 빠뜨려 버립니다.”
―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왜 버립니까.
“저도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재활용하면 되는데 왜 물속에 빠트릴까 하고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선악(善惡)의 갈등에서 신이 나옵니다. (축제를 통해) 악을 없애면, 신도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신상도 이젠 필요 없는 것이죠.
인도 명절의 풍습 중 하나가 한 해 동안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백지(白紙)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요. 이게 인도란 말이에요. 내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신이 등장하는 것이죠.”
― 그렇게 갈등이 해소되면 인도 사람들은 싸울 일도, 살인 사건도 없겠네요.
“사람이 사는 곳인데 왜 살인이 없겠습니까. 다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며칠 전 길을 가는데 한 꼬마가 장난 삼아 흙속 지렁이를 발로 밟더군요. 인도에선 있을 수 없어요. 돌을 던져 개구리를 죽인다? 인도에선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나는 하고 싶은 걸 해 왔다, 이게 나의 자부심”
로이 알록 쿠마르 원장은 네루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방향을 틀어 델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제가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1974년에 인도가 첫 핵실험을 했거든요. 인도 총리가 모라르지 데사이(재임 1977~1979년)였는데, 핵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골 교장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핵이 정말 무시무시한 무기인데, 각국마다 핵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너무 한가한 말씀이셔서 놀랐습니다. 그때 국제정치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죠.”
― 국제정치학 중에서도 동북아 정치를 택했고, 그래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도 학생들은 한·중·일 3국 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갔어요. 스즈키라는 일본 자동차 회사가 1960~1970년대 인도에 처음 들어왔는데, 이에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많은 사람이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어요. 최근에는 중국 정치를 전공하는 경우가 많아요.”
―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당시 주위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가족 중에 외교관이 있었어요. 저도 외교관 시험을 봤고요. 그 무렵 한국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죠. 결정하기 쉽지 않았는데 한국에 간다니까 주위 친구들이 정신 나갔다고 하더군요.
요즘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행 선택 잘했다고 합니다. 자기네들(인도 관료)은 그냥 고급 노예였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때 한국으로 온 것이 잘 한 건지 못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고 싶은 걸 해 왔다, 이게 나의 자부심입니다.”
“딸은 한국 최초의 빌 게이츠 장학생”
―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지만 졸업논문은 쓰지 못했더군요.
“그 얘기는 안 하고 싶은데… 박사시험도 치고 과정도 모두 마쳤어요. 논문을 준비하는데 지도교수가 정년퇴직을 하셨어요. 시간이 흘렀고 장학금도 나오지 않게 되어 인도로 돌아가게 됐는데, 그땐 내 인생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죠. 인도에서 잠시 교편도 잡았는데 한국에서 계속 오라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때 어머니가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했으면 가서 결혼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이후 나를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다시 오게 됐고 나의 선택인지, 선택 자체가 나를 불렀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 시대와 나에 대한 부름이 잘 맞아 이렇게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로이 원장은 얼굴이 밝아지며 딸 이야기를 했다.
“실은 어제 둘째 딸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어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딸의 전화를 받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내가 못 한 일을 제 딸이 해낸 겁니다. 딸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애들이 공부에 소질이 있어요. 뛰어나요.”
― 아빠를 닮아서일까요?
“그것은 모르겠고, 일단 (공부에) 목마름이 있어요. 목마름이 있으니까 열심히 한 것이죠. 난 한 번도 공부시킨 적이 없거든요.”
두 딸은 부산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으며 생활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한다. 큰딸은 도쿄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고, 둘째 딸은 와세다대를 조기 졸업한 뒤 하버드대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큰애는 사회 정책과 다문화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곳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2년간 봉사도 했지요. 아주 뛰어난 아이입니다.
작은애는 세계 지성사(知性史)를 전공했어요. 한국인 최초의 빌 게이츠 장학생이죠. 대학원 졸업 전에 후버연구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버드대 연구소로 오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조건이 ‘후버’가 2~3배는 더 좋았어요.”
로이 원장의 입이 귀밑에 걸릴 정도로 커졌다. 그러다 이내 진지해졌다.
“한국 교육, 지하철과 같아”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 로이 알록 쿠마르 원장.
“나는 ‘다문화가정의 시조(始祖)’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초기 다문화가정에서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죠.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문화학교야말로 오바마(미 대통령)가 나올 수 있는 학교’라고요.”
부산다문화국제학교(부산 동구 중앙대로 303)는 학생이 70명이다. 14개 나라에서 온 아이들과 탈북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중도 입국 학생을 포함해 다문화가정의 자녀 및 다문화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교육과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님 수는 거의 30명. 선생님 1명이 학생 둘을 가르치는 셈이다.
3개 학급이 운영되는데 교과수업(한국어, 영어, 이중언어, 수학 등)은 한국어로 진행한다. 수준별 수업, 각종 활동(특별, 진로, 봉사, 동아리)도 병행한다.
“지금 부산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이만큼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있는 학교가 없을 겁니다.”
― 지금 우리나라 전체를 봤을 때 굉장히 잘 운영되고 있네요. 어떻게 운영을 합니까.
“물론 지원을 받는데 강사 월급 수준입니다. 여기 오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빨리, 짧은 시간 내에 가르쳐야 하는데 지원이 너무 없어가지고…, 그래서 지금 로비하는 데 바빠요.”
기자는 잠깐 학생들을 만나봤는데 어찌나 인사성이 밝은지 놀랄 정도였다. 표정도 밝고 모두 똘똘해 보였다.
“여기 들어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다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오거든요. 그런데 올해 한 학생이 한양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어요.”
― 와!
“아이들 중에 자폐 같은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는데 4년 동안 엎드려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고양이와 개를 그리는데 그림 속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그런 것을 보면 한국 교육이 지하철과 같아요.”
“인도에는 객관식 시험 없어”
―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는….
“터널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교육 말이에요. 정해진 시간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식이죠. 한국 교육도 인도처럼 획일적이지 않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10차선, 20차선 도로 같은 인도식 교육이 필요해요. 유턴, 직진, 좌회전, 우회전도 할 수 있는 교육 말입니다.
어떤 때는 한국 교육이 슬로건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도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흥미로운 게 인도 시골 학교에서 10등 하는 아이가 미국 대도시 가서도 10등 안에 들어가요. 이게 인도 교육입니다.
교육이 미니멈, 맥시멈이 있을 수 있는데 미니멈으로 너무 작게, 너무 낮게 잡으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엘리트를 만드는 과정이 교육이에요.”
― 한국은 전체적으로 평준화 교육을 지향하고 있어요.
“평준화 교육을 해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인도에는 객관식 시험이 없어요. 무조건 주관식 시험을 봅니다. 물론 지금은 객관식 비중이 많이 올라가긴 했어요.
나는 지금도 중학교 시절 시험문제가 떠오릅니다. 뉴턴 법칙의 원리를 묻는 시험이었는데, 두 명의 권투 선수가 링에 올라간 그림을 그려놓고 어떤 법칙이 적용됐는지 써보라는 겁니다.
중·고교 때는 시험시간이 한 과목당 2시간, 대학 때는 3시간입니다. 어떤 과목은 오픈 북이에요. 그러나 정답을 찾아내기가 아주 어려워요. 자기 철학이 없으면 한 줄도 못 씁니다.
몇 해 전 《뉴욕타임스》에 만평 두 컷이 실렸는데 한 컷은 1950년대 미국인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면서 이렇게 다그칩니다. ‘어서 먹어. 중국, 인도 이런 데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라고요. 다른 컷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이렇게 다그쳐요. ‘너희 숙제 잘해야 해. 이제 인도 학생들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30년 후 인도의 시대 도래할 것”
― 요즘 인도의 젊은 20대들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매년 인도에 가서 젊은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는….”
― 아니,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런가요?
“인도 젊은이들의 논쟁 주제들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인도 학생들은 IT 기술, 수학만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세계적인 톱10 기업을 들여다보면 중역 4~5명은 인도 사람이에요. 금융계나 대학도 마찬가지죠.
중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전 세계의 연구실’이에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연구소 대부분이 인도에 들어와 있어요. 인도의 강점은 문제 해결력입니다. 길에 전화선도 깔려 있지 않던 시절, 위성을 쏘는 그런 능력 말이죠.”
― 인도의 미래를 어떻게 봅니까.
“앞으로 30년 이후 인도의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인도가 아주 급성장하는, 경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모범국가가 될 수 있어요. 좀 걱정되는 측면도 있어요. 인도가 중국처럼 되는 걸 원치 않아요. ‘전 세계가 중국 중심!’ 같은 구호처럼 말이죠.”
― 한국과 인도의 미래는 어떻게 봅니까.
“서로가 발전 가능성이 많아요. 한국은 짧은 시간 내에 발전하는 속도감, 그 노하우가 엄청난 재산인데 이걸 외국에 던져줘야 된다고 봅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계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과 인도 관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어요. 무기산업 분야까지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있죠. 그러나 앞으로 나라보다 도시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겁니다. 도시가 모든 발전의 책임을 질 거란 말이에요.
국가는 그냥 안보·외교밖에는 다른 거 할 게 없어질 겁니다. 국적이 아니라 시민, 시티즌이란 개념이 중요해질 겁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인터뷰 | 아밋 쿠마르 인도 대사
“인도는 비동맹 외교 전통 지켜와… 미국과 인도는 전략적 경제적 동맹”
⊙ “인도 경제의 큰 축복은 세계가 글로벌 공급망 다양화의 대안 국가로 선택한다는 사실”
⊙ “인구 세계 최고… 인도의 평균연령 약 29세, 인구 65%가 35세 미만”
⊙ “모디 총리의 ‘인도에서 생산한다(Make in India)와 디지털 대전환(Digital India)’ 정책, 먹혀들어”
⊙ 올 10월 G20 의장국으로 뉴델리에서 G20 행사 주관… 윤 대통령 참석 예정
⊙ “韓印 수교 50주년, 서로 사돈 맺은 불교 나눔 2000년의 인연”
⊙ “인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 지능’과 ‘사회적 지능’이 함께 발달”
柳鐘守
1962년생. 연세대 보건학 박사 / 美뉴욕플러싱 YMCA 이사장, 뉴욕가톨릭재단 부총장, 유엔재단 새천년개발사업 고문, 現 바레인왕국 국가보건의료최고위원회 고문, 남미개발은행(IDB) 남미국가 진단검사역량 강화사업 수석책임역, 서울의과학연구소(SCL) 국제사업 고문, 연세대 보건대학원 초빙교수

▲사진=조준우
한국과 인도가 오는 10월 10일이면 수교 50주년을 맞는다.
인도와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가 세상의 끝이었다. 중화 질서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인도는 천년 이상 서역(西域)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머나먼 나라였다.
통일신라 시절 승려 혜초는 부처님의 고향 인도를 찾아 구도행에 나섰다. 혜초에게 인도는 세계의 끝이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에게 《동아일보》 기자가 조선에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하자, 응하지 못함을 표하며 짤막한 시를 하나 써주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업무량이 유독 많은 공관에서만 일한 거죠”

▲2018년 2월 27일 ‘제2회 한·인도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한 모디 총리와 한국 기업인들이 개회식에 앞서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를 갖고 있다. 모디 총리가 김창범 한화케미칼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한국전쟁이 끝난 후 남북의 전쟁포로들 가운데 일부는 중립국인 인도로 갔다. 1980년대 대학교 학번의 필독서인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은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우리에게 인도는 이념적으로 서먹서먹한 나라였다.
인도는 중국과 함께 비동맹 블록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외교관에게 인도는 상대하기 버거운 국가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은 인도와 1973년 수교했다.
타고르가 100년 전 축복한 대로 한국은 이제 동방의 밝은 등촉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만나본 적이 없다.
이제 인도와 한국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가까운 이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교 5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아밋 쿠마르(50) 주한 인도 대사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분주하게 뛰고 있다”고 한다. 대사를 수행하고 있는 정무 서기관이 전해준 말이다.
아밋 대사는 인도의 칸푸르 공과대학에서 공부했다. 공학과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이 된 후에는 주로 통상 분야, 미국과 동북아 지역에서 근무했다.
주한 외교단 행사에서 아밋 대사를 여러 차례 만났고, 서울의 인도식당에서 가끔 식사를 함께 한 인연이 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요청을 전하자, 대사는 “인터뷰 질문지를 사전에 꼭 보내달라”고 청했다.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답변지를 테이블 앞에 정리하면서 아밋 대사는 “외교관으로서 답변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는 답을 드리지 못하더라도 양해해달라”고 이해를 구했다.
아밋 대사는 온화한 미소와 냉철한 눈빛에, 절제되고 정제된 화법을 구사하는 외교관이었다. 협상장에서 그를 만나 감성적으로 흔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외교관이 된 계기가 있습니까.
“무엇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며 활동하고 싶었습니다. 인도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제 삶에 가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세 번 근무했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일했습니다. 보람 있었고, 젊은 시절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 오기 전 임지가 미국이죠?
“미국 시카고 주재 인도 총영사로 2년 6개월 근무를 마치고, 작년 9월에 한국에 부임했습니다. 한국 음식은 우리 가족의 ‘솔 푸드’입니다. 한국 음식은 오랫동안 즐겼는데, 한국을 방문한 것은 대사로 부임하고서 처음입니다. 토종 한국 음식을 먹게 된 기회가 온 것이지요.”
― 외교가에 ‘온탕 후 냉탕’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생활환경이 좋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번갈아 가면서 일하는 관행을 얘기하죠. 대사님은 미국, 일본, 중국, 대한민국 같은 A급 국가들에서만 계속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결이 있으신가요.
“제가 업무량이 유독 많은 공관에서만 일했다, 이렇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업무를 맡으면 철저하게 해내는 성격입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경제학과 국제 통상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이공계 출신이라 수치에 밝은 편입니다. 그래서 제 부임지에서 늘 통상 관계 업무들을 주로 처리했습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들이고, 인도는 이들 나라와 통상교섭을 가장 잘 해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파견된 것 아닐까요?”
한국과 인도의 인연은 너무나 깊어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6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에서 아밋 쿠마르 주한 인도 대사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 가족들은 한국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아내와 딸은 저와 함께 살고 있고, 아들은 저의 직전 근무지였던 시카고에서 2시간 30분 거리인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캠퍼스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아들 얘기로는 학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한국계나 인도계라고 하더군요. 인도와 한국이 IT 강국인 이유를 알 수 있지요. 서울에 있는 우리 가족은 한국 음식을 즐겨 먹고, 미국에 있는 제 아들도 한국 친구들과 한국 음식을 자주 먹는다고 합니다. 제 취미가 독서와 등산입니다. 한국에는 산이 많아서 좋습니다.”
― 어느 산에 가보셨습니까.
“서울 남산만 겨우 몇 번 다녀왔습니다. 산에 오를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 수교 50주년 관련 행사들을 마무리하면 만사 제쳐두고 한국의 아름다운 산들을 오를 생각입니다. 《월간조선》 독자분들도 혹시 산에서 저를 만나면, 인사 건네주십시오.”
― 인도는 올해 10월 G20 의장국으로 뉴델리에서 G20 행사를 주관합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참석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한-인도 수교 50주년 행사에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까.
“한국과 인도의 인연은 너무나 깊고 인상적입니다. 제가 소설가라면 MZ 세대의 감각에 맞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서기 1세기 때 인도 지역 한 왕국 아유타의 공주 허황옥이 한반도의 남쪽 김해에 위치한 가야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허황옥은 10명의 자식을 낳고, 그중 2명은 자신의 가계를 잇는 김해 허씨 집안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공주와 함께 동행했던 오빠 왕자는 불교 승려로, 가야 불교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불교문화의 씨앗을 뿌린 이가 인도의 왕자였습니다. 사돈 관계 2000년, 불교 나눔 2000년이란 이 긴 세월의 인연, 경축할 만한 일 아닌가요?”
“인도, 글로벌 사우스의 디지털 발전 도울 것”
― 주한 인도 대사로서 G20 준비도 바쁘겠습니다.
“올해는 세계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변환기입니다. G20 멤버 국가들에 주재하는 인도 대사들은 G20 준비를 위해서,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수시로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야 합니다. 모디 총리께서 세계사의 전환기에 적합한 G20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 인도는 G20 의장국으로서 어떤 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모디 총리는 세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해 몇 가지 주요 어젠다를 제안할 계획입니다.
첫 번째는 디지털 혁신입니다. 모디 총리는 인도의 디지털 혁신 사업들의 성과를 소개하고, 데이터 거버넌스, 사이버 보안, 국가 간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촉구하려고 합니다. 모디 총리는 ‘글로벌 사우스(개발도상국)도 디지털 혁신의 수혜국이 되어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디지털 기술 발전을 돕는 것이 인도의 역할’이라고 자주 얘기합니다.
두 번째는 인도의 경제 성장과 투자 유치입니다. 모디 총리는 G20 플랫폼을 활용하여 외국 기업들의 직접 투자를 유치하고, 인도 경제의 성장과 발전 고용 증대를 꾀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로 모디 총리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원하는 선진국들의 실천적인 협력, 기술 공여를 유도하려고 합니다. 기후변화로 자연재해를 당한 저소득 국가들을 돕기 위해 세계적인 기금을 만드는 방안도 제안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공정한 무역 관행과 개혁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무역 장벽을 낮추고 국제 금융 기구를 개혁함으로써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글로벌 무역질서를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중립을 지키는 이유

▲박민식(오른쪽) 국가보훈부 장관이 1월 20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아밋 쿠마르 주한 인도 대사와 환담 후 6·25전쟁 당시 인도 제60야전 병원 지휘관으로 복무한 란가라지 육군 중령의 초상화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란가라지 중령은 국군과 유엔군 전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사진=뉴시스
― 인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 진영과 함께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는 데 대해 미국의 제재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도는 비동맹 외교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도는 국제 갈등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선호합니다. 인도의 비동맹 정책은 많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도의 에너지 수요는 매우 큽니다. 그리고 대부분 러시아 원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인도 경제의 성장은 세계 경제의 지속적 발전에 무척 중요합니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에 대한 제재가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과 인도는 전략적·경제적 동맹입니다. 인도는 경제적인 파트너로서 미국과의 무역 및 투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양국 간의 경제 협력은 양측 모두의 경제적 번영에 중요합니다. 양국은 신뢰 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도, 매력적인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
― 인도의 경제성장률이 중국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고도성장을 견인하는 요인은 무엇인가요.
“모디 총리의 ‘인도에서 생산한다(Make in India)’와 ‘디지털 대전환(Digital India)’ 정책이 먹혀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이 하나씩 결실을 거두면서 고도 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인도는 외국 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제 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외국 기업들의 투자는 인도 경제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신기술 및 기술 이전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공급망의 위기가 초래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가 매력적인 초대형 생산기지가 됐고, 이와 함께 매력적인 소비 시장으로 등장했습니다. 인도는 정보기술, 제조업, 자동차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장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기지입니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해서 높게 유지되는 일은 어려울 것입니다.”
― 인도는 인구수에 있어 이미 중국을 넘어섰습니다. 앞으로 국제 정치·경제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보십니까.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닙니다. 어떤 특징을 가진 인구인가를 잘 분석해야 합니다. 인도의 평균연령은 약 29세로, 인구의 약 65%가 35세 미만입니다. 이는 젊고 건강한 노동 인구에 따른 활발한 생산과 더불어 국내에서의 왕성한 소비와 경제 발전이 증폭할 것이라는 기대로 연결됩니다.
중국은 인구의 20% 이상이 60세 이상으로 고령화에 접어들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평균연령이 40세로 인도보다 11세나 높습니다. 고령 인구의 증가는 노동력 부족과 국내 소비의 감소, 정부가 감당해야 하는 복지 프로그램과 의료비 지출의 부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경제 성장이 완만하게 바뀌고, 국가 세수의 감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글로벌 기업에서 인도인들이 활약하는 이유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4월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아밋 쿠마르 주한 인도 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미국과 중국의 갈등, 그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다양화 추세가 인도에 주는 경제적 혜택을 좀 설명해주시죠.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정치 갈등으로 많은 미국 기업이 생산기지나 판매 시장을 인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문제점을 깨닫게 했습니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만 의존하는 공급망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가 인도를 글로벌 공급망 다양화의 대안 국가로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인도 경제에 있어 큰 축복입니다.”
― 인도가 글로벌 공급망 다양화의 대안으로 떠오른 요인은 뭔가요.
“인도는 과학, 엔지니어링, IT 등 다양한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에서 우수한 기술 인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제약, 섬유 및 의류, 철강, 화학 및 석유 제품 등의 분야에서 저렴한 생산 비용으로 차별화된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인도는 매우 큰 내수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인도로 진출하면 국내 시장과 글로벌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한국의 대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은 이런 인도의 장점을 인지해, 인도에 투자하고 인도와의 협업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 인도인들이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의 경영 CEO와 임원으로 탁월한 성과를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인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을 체험합니다. 다양성에 적응하면서 성장합니다. 인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인도어가 22개이고 지역 방언은 수천 개나 됩니다. 우리 인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다양성에 노출되면서 ‘개인 지능’과 ‘사회적 지능’이 함께 발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인들이 글로벌 기업에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힘은 여기에서 길러진 것 아니겠습니까?
인도인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합니다. 탁월한 IT 기술만으로는 CEO가 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아우를 수 있고, 다양한 문화권과 융합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글로벌 기업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자질이 됩니다.”
뉴델리 인력거꾼까지 디지털로 금융거래
― ‘디지털 인디아(Digital India)’는 모디 총리의 주요 국정 목표 중 하나입니다. 이 정책이 만들어낸 성과는 어떤 게 있습니까.
“‘디지털 인디아’의 대표작은 모든 서민이 사용할 수 있는 인도의 통합 결제 인터페이스(UPI·Unified Payments Interface) 시스템입니다. UPI를 간단히 설명드리면, 사용자들이 하나의 스마트폰 앱에서 여러 은행 계좌를 연결하고, 복잡한 코드나 계좌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실시간으로 안전하게 자금을 이체할 수 있는 결제 시스템입니다.
UPI에는 현재 350개 이상의 은행, 신용카드 회사 및 기타 결제 게이트웨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리에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노점상들과 길거리의 일일 노동자들까지 현금 없이 디지털로 경제활동과 금융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 14억 인구가 하나의 인터넷 시스템으로 금융거래를 하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IT 강국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2022년 UPI가 1조5000억 달러 상당의 거래를 처리했습니다. 이 액수는 한국 GDP의 84%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UPI는 사용자들의 편의와 편리성을 최우선으로 해서 만들어졌기에 대부분의 인도인이 애용합니다. 뉴델리에서 릭샤를 끌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UPI를 사용해 손님들에게서 인력거 운임을 받습니다. 이 플랫폼은 인도 정부와 기업들 사이의 협력 틀인 PPP(Public Private Partnership)를 통해 저렴하게 개발되었습니다. 우리는 최근 UPI 시스템을 싱가포르의 결제 게이트웨이와 연결하여 UPI 앱을 통한 실시간 국제 자금 이체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거리에서 현금거래가 사라진 인도를 보면서, 저는 국가 리더가 가진 비전의 힘을 느낍니다. 이제 인도의 최빈곤층도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는 UPI 플랫폼을 무상으로 네팔 등 주변 개발도상국들에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 ‘인도에서 만들자(Make in India)’는 모디 총리가 제조업의 육성을 위해 제시한 정책입니다. 성과를 설명해주세요.
“지난 5~6년간, 구체적으론 2018~ 2019년부터 올해까지 인도는 3710억 달러(약 419조원)의 외국 기업 직접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이 성과는 인도가 더욱 신뢰받는 글로벌 공급망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할 것입니다.
현대차, 기아차, 삼성전자, LG전자 등과 같은 한국 기업들도 인도에서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작년에 이전과 비교하여 전례 없는 40%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배터리와 충전 인프라를 포함한 전기차 분야에 24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LG와 삼성전자는 올해 인도에서 더욱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 확대를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칩 제조업체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지난 6월 22일 ‘인도에 새로운 칩 조립 및 테스트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총 27억5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영원무역 텔랑가나주에 36만 평 공장 건설
아밋 대사는 ‘인도에서 생산하자(Make in India)’의 성공 사례로 한국의 한 제조업체를 소개했다.
“글로벌 스포츠 의류 브랜드 제조 회사인 한국의 영원무역은 텔랑가나주 와랑갈에 있는 ‘카카티야 메가 텍스타일 파크(Kakatiya Mega Textile Park·이하 KMTP)’의 약 36만 평이 넘는 공장 부지를 2억 9700만 루피(약 46억 6000만원)로 매입해, 여러 개의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영원무역은 KMTP 내에 1단계로 5개 공장, 2단계로 3개 공장을 건설하며 총 8개의 생산 시설을 건립할 계획입니다. 영원무역 관계자들을 만나보니, 텔랑가나주와 인도 연방 정부가 모든 인허가 절차를 간소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주어서 인상 깊었다고 하더군요.”
― 영원무역은 이미 방글라데시에서 종업원 약 7만 명의 생산공장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의 ‘플러그 앤드 플레이(Plug & Play)’ 프로그램이 외국 기업들의 인도 유입에 큰 매력이 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설명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는 인도에 공장을 건설하려는 외국 회사들이 지방정부의 느린 토지 사용 승인 절차,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의 효율적인 협업 결여로 인도 진출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플러그 & 플레이’ 프로그램은 지방정부와 연방정부가 미리 협의해 산업기지의 법적 인허가를 선제적으로 해주고, 전력 및 수도와 산업도로 건설을 완료해 두는 것을 말합니다. 전기를 꽂으면 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듯이 말이죠. 한국의 영원무역도 이러한 신속한 서비스를 받으며 좋은 조건에서 공장 가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국 기업들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인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면 합니다.”
― 재임 중 한국에서 하고 싶은 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외교협력, 경제협력, 투자 유치 활동은 대사가 통상적으로 해내야 하는 업무입니다. 저는 문화교류 활동에 좀 더 집중하려 합니다.
영화산업은 인도 영화인들과 한국 영화인들이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로 보입니다. 올해는 여러 편의 인도 영화가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 〈기생충〉은 2020년 아카데미상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인도와 한국의 영화, 드라마들이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 제작에서 두 나라가 협력할 여지가 많습니다. 저는 올해 인도 영화제를 서울에서 성대하게 개최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한국과 인도 국교 수립 50주년 기념 영화제로, 두 나라의 유명 영화·드라마 제작자, 배우들이 함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영화, 드라마 제작 등에서 협력 여지 많아”
아밋 대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명석함과 기억력, 절제된 대화 능력에 매료됐다. 2030년이 되기 전에 인도를 세계 3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모디 총리와 인도인들의 열정을 내게 설득력 있게 풀어놓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우리의 경제 관료들, 기업인들이 아밋 대사 같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대단한 외교관과의 유쾌한 인터뷰였다.⊙
◆세계를 뒤흔드는 ‘인디언 파워’
美 부통령·英 총리에서 구글·스타벅스 CEO까지
⊙ 마이크로소프트, IBM, 어도비, 트위터, 샤넬 CEO 등… 글로벌 500대 기업 CEO 중 인도계 58명
⊙ “인도의 재능, 서구 세계에 혁명 일으켜”(美 블룸버그)
⊙ 전 세계 인도계 이민자들의 80%가 학사 학위, 49%가 석사 학위 이상 보유
⊙ “공적 가치를 사적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인도인의 태도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과로 문화’와 부합”(BBC)
⊙ “인도계 이민자, 인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만들며 인도에 도움 줘”(조지프 나이 하버드大 교수)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6월 22일(현지시각)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 정상회의를 가졌다. 이날 저녁 백악관에 도착한 모디 총리는 “이 성대한 환영식은 14억 인도인의 영광이자 자부심”이라며 “이것은 또한 미국에 거주하는 400만 명 이상의 인도계 미국인에게도 영광”이라고 말했다.
400만 명이 넘는 인도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으로 꼽힌다. 미국 통계국에 따르면 2021년 인도계 미국인은 연평균 14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미국 내 모든 민족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 국민 연평균 소득의 2배에 달한다. 또 중국계 미국인(9만3000달러)과 한국계 미국인(8만2000달러)의 연평균 소득을 월등히 앞질렀다.
미국 부통령, 영국 총리, 세계은행 총재

▲리시 수낙 영국 총리
인도계 미국인 중에는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인물도 여럿 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니키 헤일리 전 UN 주재 미국 대사 등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선 두 사람이 차기 혹은 차차기 대선에서 맞붙을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백악관과 미국 행정부 요직에도 인도계가 많다. ‘바이든의 입’으로 꼽히는 비나이 레디 백악관 연설담당 국장, 니라 탠던 국내정책위원회 국장, ‘코로나 차르’로 불리는 아시시 자 백악관 코로나19 대응 조정관, 공중보건 정책을 총괄하는 비벡 머시 공중보건서비스단 단장 등이다.
한 세기 가까이 인도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에도 인도계 인재가 많다. 지난해 영국 역사상 최초로 비백인 총리로 선출된 리시 수낙 영국 총리를 비롯해 영국 집권당인 보수당의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 그의 전임자 프리티 파텔 전 내무장관, 알로크 샤르마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의장 등이 대표적이다.
영미권뿐만이 아니다. 안토니우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 리오 버래드커 아일랜드 총리,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의 프라빈드 주그노트 총리 모두 출생의 뿌리를 인도에 두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로 우리에게 친숙한 중남미 국가 수리남의 찬 산토키 대통령, 가이아나의 모하메드 이르판 알리 대통령도 인도계이다.
경제계에서 인도계가 갖는 힘 또한 막강하다.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글로벌 기업의 CEO(최고경영자) 중에는 인도계가 유독 많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아르빈드 크리슈나 IBM CEO,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파라그 아그라왈 트위터 CEO 등이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을 이끌고 있다. 랙스먼 내러시먼 스타벅스 CEO, 리나 나이르 샤넬 CEO, 인드라 누이 전(前) 펩시 CEO 역시 인도계다. 또 아제이 방가 전 마스터카드 CEO는 오는 7월 세계은행 총재에 취임할 예정이다.
미국 《포천》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인도계가 CEO인 기업은 58곳에 달한다. 또 S&P500지수(500개 종목을 대상으로 작성해 발표하는 주가지수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지수)에 편입된 기업 중 25곳의 CEO가 인도계다. 인도계 이민자들의 행보가 이제는 마치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뒤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정계에도 입김을 행사하는 유대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실력을 드러내면서 바야흐로 ‘인디언 파워’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원동력은 충분하다. 2023년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도계 이민자는 1800만 명으로 멕시코계(1120만 명)와 중국계(1050만 명)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다.
교육, 인도 유일의 입신양명 수단
미국 블룸버그는 최근 “인도의 재능이 10~15년 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서구 세계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도 인도계의 약진에 관해 “인도인들이 세계 각지에 이주해 사는 것을 넘어 사회 지도층에 전방위적으로 진출하는 이른바 ‘인도 디아스포라(diaspora·이주)’가 인도의 진정한 ‘소프트파워(soft power)’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인도계 이민자들은 어떻게 이런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갈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엔 교육이 있다. 인도는 과거 카스트(caste)라는 계급 체계가 존재했다. 지금은 법적으로 폐지됐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카스트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기능해 왔다. 이런 까닭에 교육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다리로 자리했다. 인도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헌신적으로 지원한다. 자녀를 영미권의 명문대학으로 유학 보내거나 아예 이민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인도계 이민자들의 교육열이 얼마나 높은지는 통계를 통해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미국 통계국의 2023년도 자료에 따르면 25~55세 사이의 인도계 미국인 중 82%가 학사 학위 이상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내 민족 중 압도적인 1위로 미국 국민 평균인 30%를 크게 웃돈다. 전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인도계 이민자들의 80%가 학사 학위를, 49%가 석사 학위 이상을 보유했을 정도로 이들은 학력 수준이 높다.
예컨대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옥스퍼드대 PPE(철학·정치·경제학)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IT(정보기술) 분야의 CEO들은 인도의 MIT로 불리는 인도공대(IIT) 등 상위권 공과대학을 나와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석·박사를 땄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아르빈드 크리슈나 IBM CEO,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파라그 아그라왈 트위터 CEO 등이 이 코스를 밟은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영국 BBC는 “이들의 성공 배경엔 높은 학력이 있다”고 보도했다.
공학, 국가 중점 교육으로 육성

▲인도계인 안토니우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
인도는 1991년 경제 자유화 조치를 단행해 경제 개방과 개혁에 눈을 떴다. 인도 정부는 공학(工學)을 국가 중점 교육으로 육성하며 IT·소프트웨어 산업에 투자했다.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 만든 나라답게 인도인들은 수학적·논리적 사고에 익숙했다. 이런 역량은 자연스럽게 IT 산업 발전을 일궈냈다. 인도 내 최상위 엘리트 학생들은 공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이후 세계적인 IT 붐이 일면서 인도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영국 등으로 대거 이주해 정착했다. 이들은 건너간 나라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갔다. 특히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인도계 엔지니어가 없으면 실리콘밸리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글로벌 기업에서 고위 직책까지 맡는 경우는 드물었다. 백인 사회에서 인도계라는 편견을 깨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20년 이상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빅테크 기업들은 인도계들을 CEO로 낙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인도인 특유의 총명함과 근면 성실함이 최근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비벡 와드와 미국 카네기멜론대 공대 교수는 “인도인은 지난 수십 년간 부패와 열악한 인프라, 제한된 기회와 싸우면서 생존력·회복력을 길렀으며 인도 가정에선 겸손함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인도계 특유의 문화적 요인이 기업가 정신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BBC는 “공적인 가치를 사적인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인도인의 태도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과로 문화’와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고 짚었다.
한편, 미숙련 노동자들이 이민을 떠났던 과거와 달리 최근엔 전문직 이민자 수가 크게 늘고 있다. IT, 의료업 종사자들이 기회를 찾아 미국 등지로 향했다. 지난해 미국의 전문직 전용 취업 비자인 ‘H-1B’ 취득자 중 73%가 인도계였다.
인도계의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800여 개의 언어, 2000여 개의 방언, 22개의 정부 지정 계획어가 존재하는 인도에선 영어가 사실상 공용어로 쓰인다. 이는 인도인들이 영미권 국가로 이민을 갔을 때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강성용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은 “인도인들은 영어가 유창하다 보니 인도 최고 대학을 나와 장학금 제도를 통해 미국·영국 등에 유학 가서 엔지니어·의사 등 고액 연봉을 받는 직업을 갖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민주주의 정치체제, 시장경제와 매우 친숙하다는 점과 서구권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점도 이들의 성공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인도계, 인도 국력 신장에도 큰 역할
최근 중국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출 제재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의 탈(脫)중국 움직임이 줄을 잇고 있다. 인도는 중국의 역할을 갈음할 매력적인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모디 총리가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의 인도계 CEO들이 총출동해 인도 투자에 힘을 실어줬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모디 총리와 만나 인도 디지털화 기금으로 1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州)에 건설 중인 국제금융기술도시(GIFT CITY)에 구글의 글로벌 핀테크 운용센터를 열겠다고도 밝혔다.
인도계가 CEO를 맡고 있진 않지만, 아마존 또한 오는 2030년까지 인도에만 260억 달러(약 34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테슬라도 인도 공장 설립 검토에 들어갔다. 미국 최대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도 최대 8억2500만 달러를 들여 인도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한편,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1년 해외 거주민들의 모국 송금액 순위에서 인도계는 893억 달러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해외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모국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인도는 자유주의 국가라는 점을 활용해 서방과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며 “이미 이민자들의 네트워크도 탄탄해서 더 쉽게 통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인도계 이민자들이 인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세계 곳곳에 심어주면서 인도에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미국에 정착한 인도계 이민자들 또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가능한 성과”라고 설명했다.⊙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인도 전문가’ 오화석 인도경제연구소장이 보는 2023년의 인도
“사회주의 중국보다 개인 자유 중시하는 인도가 경제 탄탄해”
⊙ “‘유대인을 능가하는 아랍상인, 아랍상인 뺨치는 인도상인’이 원동력”
⊙ “인도 경제 개방 이후 한국이 선점한 시장 일본에 뺏겨”
⊙ “카스트 차별 운운하면 지식인층 사이에서는 오히려 웃어… 미국에서의 흑인 차별과 비슷한 수준”
⊙ “네루대학 한국어학과 정원 30명, 10만 명 몰려… 3300대 1의 경쟁률 기록”
吳華錫
한국외대 스페인어학과 졸업. 한국외대 정치학 석사. 美 하와이대 경제학 석ㆍ박사 / 한국일보 기자, 매일경제 차장, 인도 네루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아시아개발은행(ADB) 인도 컨설턴트 역임. 現 배재대 글로벌교육부 교수ㆍ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 원장ㆍ인도경제연구소 소장 / 저서 《슈퍼 코끼리 인도가 온다》《부자들만 아는 부의 법칙》《사리 속치마를 벗기다》《100년 기업의 힘, 타타에게 배워라》《마르와리 상인》《무너진 정의》 외 다수

“일본은 인도의 여러 분야에 진출해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한때 인도 시장을 먼저 선점했는데 요즘 일본 기업에 뒤처진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오화석(吳華錫) 배재대 글로벌교육부 교수가 말했다. 미중(美中) 갈등으로 인해, 또 중국을 넘어선 인구를 보유하게 된 인도에 전(全) 세계가 주목하는 시점에서 오 교수의 말을 귀담아들을 법하다. 국내에 몇 안 되는 인도 전문가인 오 교수를 7월 10일에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서 만났다. 《매일경제》에서 근무하던 2000년에 ‘인도 IT 사업 발전상’을 국내 언론 최초로 기획 특종 보도한 것이 계기가 돼 인도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인도 네루대 객원교수와 아시아개발은행(ADB) 인도 전문 컨설턴트를 지냈다. 이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 원장, 인도경제연구소 소장을 함께 맡고 있다.
일본 5000개 vs 한국 800개
“201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에 진출한 일본 기업 수는 300여 개, 한국 기업은 350여 개였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돼 2020년을 기준으로 일본은 5000개가 넘는 기업이 인도에 진출했는데 우리는 800여 개뿐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한 사례는 9000개가 넘습니다.”
― 인도가 개방했을 때는 우리가 훨씬 공격적으로 진출했군요.
“인도는 1991년에 본격적으로 경제를 개방했는데 우리 기업은 1990년대 중후반이라는 이른 시기에 진출했습니다. 인도가 주목받는 곳이라고 해서 진출했는데 막상 가보니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고, 길거리에 빈민들이 넘쳐나는 모습이었을 겁니다. 대기업은 이후 지속적으로 인도에 투자했지만 일부 기업은 철수만 하지 않은 채 근근이 인도 사업을 유지한 측면이 있습니다.”
― 일본은 달랐나요.
“일본은 지난 10여 년간 인도 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대탈출했습니다. 2005~2006년 즈음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길거리에 온통 한국 제품이 널려 있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잠재력이 큰 인도 시장에 기업들이 진출해야 한다’며 일본의 게이단련, 기업인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때부터 일본 기업들이 인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기업이 인도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인들이 우리 기업을 부러워할 때였죠. 우리 기업인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는 비즈니스를 하러 온 가족이 함께 인도로 건너온다. 너희(일본)는 혼자 오는데 어떻게 목숨 걸고 인도 시장에서 덤비겠느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도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FDI)를 보면 일본이 우리보다 15배 큽니다. 인도가 한창 뜨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일본 기업이 많이 인도에 진출한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영연방 올림픽 계기로 국가 리노베이션

▲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5월 20일, 히로시마 한 호텔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한·인도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우리는 2010년에 인도와 포괄적경제협정(CEPA)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 시기 이후 교역이 늘었어야 하는데요.
“처음에는 양국 간 기업이 빠르게 늘었다가 2016년 즈음부터 지지부진해졌습니다. 한·인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의 양허 수준이 일본에 비해 불리했던 측면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인도에 대한 우리 기업인들의 부정적 인식이 주효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도가 덥고, 지방분권 국가라 의사 결정이 늦다는 등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동남아는 접근성이 좋은데 인도는 왠지 멀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부분도 작용했을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 굳이 인도까지 가서 사업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오화석 교수는 인도 인프라 개선의 터닝포인트 때를 2010년 인도에서 열린 영연방 올림픽 당시로 꼽았다. 1990년과 1994년의 영연방대회 개최 후보지 경쟁에 나섰다가 연거푸 패배의 잔을 마셨던 인도는 2003년에 자메이카에서 개최된 영연방대회 연합 총회에서 초대 대회 개최지인 캐나다 해밀턴을 제치고, 2010년 개최지로 뽑혔다. 인구 네 명 중 한 명이 빈곤층일 정도로 세계에서 빈곤층이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인 인도는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인도에 대한 대대적 리노베이션에 나섰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 인도를 방문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2010년을 전후해 인도가 바뀌었습니다. 주요 도시 건물, 공항, 인프라가 새롭게 깔렸습니다. 국가 자체가 대거 리모델링이 된 셈이죠. 덕분에 뉴델리공항은 ‘2014년 세계공항서비스 평가’ 중형공항(연간 승객 2500만~4000만 명 이용) 평가에서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 요즘도 여전히 인도의 SOC 사정이 나쁘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선진국 문턱에 오른 우리나라 잣대로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개발도상국인 인도는 매년 많은 예산을 인프라 개선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 수도인 뉴델리 상황이 아직도 열악하다고 하는데, 뉴델리 대부분 지역은 3~4층 이하로 건축해야 한다는 고도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르가온을 비롯한 뉴델리 인근 도시가 빠르게 발전하는 것이죠. 인도의 발전상을 보고 싶다면 아무래도 고층 건물로 스카이라인이 급변하는 경제수도 뭄바이에 가 보아야 맞지 싶습니다.”
마르와리 상인

▲대표적인 마르와르 출신인 아르셀로미탈스틸의 락시미 미탈 회장. 사진=조선DB
― 인도의 성장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하시지요.
“중국을 넘어선 인구, 10년 넘게 6~7%대를 유지하는 경제성장률, 인도 정부의 의지, 스타트업 생태계, 한국에 우호적인 인도인들의 습성 등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는 인도가 가진 상인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기업을 일군 사람들은 과거 카스트 제도에서 세 번째 계급이었던 바이샤(Vaishya·상인) 출신이 많습니다. 인도 20대 대기업 소유주 가운데 바이샤 출신이 15명입니다. 예전부터 가장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유대인이고, 유대인을 능가하는 사람은 아랍상인, 아랍상인을 뺨치는 사람은 인도상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상인들은 본능적으로 숫자에 강하고, 인적 네트워크가 탄탄하며, 밤낮없이 일하고, 장사에 감각이 있습니다. 이들이 인도 경제를 받치는 한, 인도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 인도인들이 그렇게 장사에 능한지 몰랐네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독립한 이후 1991년까지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 수완이 뛰어난 상인들이 마음껏 비즈니스를 할 수 없었고, 유대인의 장사 능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상인 중 마르와리 상인의 영향력은 경쟁자인 구자라티 상인과 더불어 독보적입니다.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스틸, 인도 최대 글로벌 기업인 아디티야비를라, 세계 3위의 정보통신서비스 기업인 바르티에어텔, 인도 최대 신문사인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 최대 TV 방송사인 ZeeTV, 최대 민간항공사인 제트에어웨어 등 상인 카스트 출신이 소유한 15개 대기업 중 마르와리 상인이 소유한 기업이 9개나 됩니다.”
― 어마어마한 세력이군요.
“마르와리는 인도의 황량한 사막 지역인 라자스탄에 있는 작은 마을 마르와르 출신의 상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시장의 흐름을 재빠르게 간파하는 판단력, 야수처럼 저돌적인 투자, 위험을 무릅쓰는 창업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마르와리를 비롯한 이들 상인 출신 기업인의 ‘기업가 정신’이 오늘날 인도 경제를 견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으로서는 이런 상인들이 인도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 굉장한 이점이고, 동시에 인도와 원활히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기업은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
오화석 교수가 쓴 《마르와리 상인》에는 가업(家業)인 양복 제조업을 하다 인도 유통 황제가 된 신생 퓨처 그룹 키쇼르 비야니 회장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비야니 회장은 명문학교 출신도, 외국에서 공부한 적도, 탄탄한 사업 자금도 없이 오늘날 회사를 유통그룹으로 키워냈다. 《월스트리트》가 보도한 그의 ‘혼란 마케팅’ 중 일부다.
〈비야니 회장이 뭄바이의 한 빅바자르 매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매장은 난장판이었다. 비좁은 통로 옆에 상품들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진열대에는 흘러넘친 밀과 콩 등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신선한 야채로 채워져 있어야 할 채소 코너엔 거무튀튀하게 썩은 양파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쇼핑 매장을 이런 식으로 유지하면 경영자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야니 회장의 반응은 달랐다. “지시한 대로 잘하고 있구먼.”〉
처음 매장을 열었을 때는 이런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다. 달콤한 음악이 나오고, 통로 또한 널찍하게 월마트를 인도에 옮겨놓은 것처럼 운영했다. 한데 손님들은 매장 구경만 할 뿐 물건을 사지 않았다. 비야니 회장은 인도 소비자의 55%인 운전사, 가정부, 요리사, 보모 등에 집중했다. 이들은 재래시장 분위기의 속 편한 가게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매장을 뒤죽박죽 섞어버렸다. 매출은 빠르게 늘어났다.
비야니 회장은 2007년 자서전 《인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가는 창조자, 현상유지자, 파괴자가 있다. 내 아버지는 인도의 대다수 기업인이 그렇듯 현상유지자다. 나는 자신을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라고 생각한다. 현상유지란 내 사전에 없다.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이 모든 기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약 기업이 변화하고 발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업이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神은 ‘돈의 神’”
‘인도상인들에게 특유의 DNA라도 있는가’라는 질문에 오화석 교수는 자신의 저서 《100년 기업의 힘, 타타에게 배워라》에 쓴 내용으로 답했다. 인도 최대 기업인 타타그룹 회장 라탄 타타의 일화다. 그는 1991년부터 20여 년간 타타그룹을 이끌고, 2012년에 만 75세로 은퇴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비즈니스 거장의 퇴장이었다. 뭄바이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건축학을 전공하기 위해 미(美) 코넬대로 유학을 떠났다. 인도 대재벌 집안의 자제였지만,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내내 접시 닦기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란다. 그는 1962년에 타타스틸에 발령받았을 때 노동자들과 뒹구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철강 생산 현장에서 그는 철강 노동자와 함께 일하며 철광석을 지어 나르기도 하고 뜨거운 용광로를 관리하기도 했다. 일종의 경영 수업이었지만 그는 블루칼라 노동자와 몸을 부대끼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했다. 보통 후계자 수업은 경영기획실 등 핵심부서에서 일하지만, 그는 맨 밑바닥 노동자와 똑같이 일했다. 이런 경험은 이후 최고 경영자가 돼서도 노동자와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오화석 교수는 “마르와리 공동체는 자식에게 비즈니스를 가르치기 위해 현장에서의 살아 있는 사업 교육과 훈련을 강조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의례적 정규 교육보다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 교육에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인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은 ‘돈의 신(아르트·Arth)’이라는 말이 있다”며 웃었다.
“마르와리 상인을 비롯해 인도의 바이샤 계층이 인도 경제를 떠받치는 것처럼 인도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인도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돈 많이 버는 것,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일 겁니다. 인도에는 3억3000만 명의 신(神)이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단연 ‘돈의 신’이 인기가 좋습니다.”
― 돈, 학벌이 최고인 세상에 카스트 제도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촌스러운 건가요.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대신 1950년대에 차별금지법이 생겨서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금지법이 생겼음에도 1970년대까지 사회의 70~80%가 카스트 차별(불가촉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하층민과 같이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식(式)으로요. 하지만 오늘날은 ‘인도 내에서 카스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는 비율이 과거와 정반대로 20~30%에 불과하다는 설문 결과가 많습니다. 카스트 차별을 운운하면 지식인층 사이에서는 오히려 웃습니다. 이제 인도에서 카스트 차별은 미국에서의 흑인 차별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 라스트네임을 보면, 하층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성(姓)이 워낙 많아서 전부 다 구별할 수는 없고요, 실제로 최근 미국 퓨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하층민들 대부분(약 80%)이 카스트에 의해 차별받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습니다. 카스트와 관련된 중범죄도 많이 줄었지요. 과거에는 제도로 인한 살인 등 중범죄가 빈번했는데, 요즘은 ‘하층민이라고 욕했다’ ‘몸싸움했다’는 등의 범죄가 대부분입니다.”
중국은 싫어해도 한국은 좋아해
오화석 교수는 2000년대 초반에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 있는 네루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 네루대는 대학원 위주의 대학으로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 있는 수십 명 정도의 학생이 대학원 수업을 듣는 수준이었다. 물론 학부과정이 있는 외국어 학부의 한국어과는 인기가 있긴 했지만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나 일부 국가에선 한류(韓流)가 폭풍처럼 몰아닥쳤지만, 인도는 거의 무풍(無風) 지대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는 한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동북쪽 지역에 몽골계가 많이 사는데, 그들의 외모가 한국인과 흡사해 약간 관심이 있는 정도였죠. 인도인은 자기 문화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가 있습니다. 할리우드 인기 영화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인도에서는 인기가 없을 정도입니다. 자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관심이 많고, 자부심이 높은 만큼 다른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요즘은 인도의 중심에서 한국을 외칠 정도입니다.”
네루대학의 외국어 학부에는 한국어과·일본어과·프랑스어과 등 여러 학과가 있다. 2022년 가을학기에 한국어과 정원 30명을 뽑는 데 10만 명이 몰려 33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 경쟁률이 상상 초월인데요.
“어마어마한 겁니다. 드디어 한국의 콘텐츠가 인도 사회에까지 스며든 겁니다. K 팝, K 드라마를 통한 우리나라에 대한 긍정적 감정들이 인도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 인도 사람들이 중국인은 싫어해도 한국인은 좋아한다더군요.
“중국은 역사적으로, 또 국경 분쟁을 거치면서 껄끄러운 사이입니다. 인도에 진출한 중국 기업이 고전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한국인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고, 한류 열풍으로 인해 긍정적 이미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도인들, 굉장히 오픈되어 있어”
― 인도의 국민성은 어떤가요. 날씨가 덥다 보니 게으르다는 선입견이 있는데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굉장히 오픈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은 문화입니다.
인도에 신이 3억3000만 명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유일신(唯一神)이 아니다 보니 내가 믿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남이 믿는 것을 내가 부정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비단 종교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상대방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적 배경과 ‘성공 언어’인 영어에 대한 교육 등으로 인해 웬만큼 교육받은 사람이면 영어 소통이 되지요. 우리 기업 입장에서 직원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CSR)을 보니까, 인도 특유의 문화가 엿보이더군요. 개안(開眼) 보조 활동이랄까, 최하층 국민을 위한 음식 봉사랄까 등이요.
“인도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기업, 기업인이라는 마인드가 강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부(富)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를 버는 맞는 시기, 맞는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죠. 이는 곧 신이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고 신이 그에게 맡긴 부이기 때문에, 바로 국민과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의식과 문화가 아주 강합니다.”
기업 순수익의 2% 사회 환원 의무화

▲2009년 9월 14일 한국을 찾은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회장이 서울 코엑스에서 타타대우상용차의 신형 트럭 앞을 지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의 5t급 이상 중대형 트럭 시장에만 진출해 있지만, 2011년 이후엔 중소형 트럭 시장에도 진출하겠다”고 말했다. 사진=조선DB
오 교수의 저서 《100년 기업의 힘, 타타에게 배워라》에 타타그룹이 창업할 때부터 가진 기업을 경영하는 이유에 대해 적혀 있다. 창업주인 잠셋지 타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업 활동에서 지역사회와 국민은 비즈니스의 이해당사자인 동시에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 그 자체다.”
“우리는 국민을 위해 부를 창출한다. 국민에게서 온 부는 가능한 한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타타그룹 창업주의 말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는다. 타타그룹의 소유 구조에서 엿볼 수 있다. 지주회사인 타타선즈 주식의 65.98%를 자선회사인 타타트러스트와 타타재단이 보유하고 있다. 배당 등 이익금은 기금으로 전환되고, 이 기금의 60%가 자선사업에 쓰인다. 오화석 교수는 “이런 소유 구조를 가진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고 말했다.
인도 기업부는 2019년 7월에 회사법 개정 신설 조항(제135조)을 통해 기업의 순수익 2%를 CSR 활동에 지출할 것을 의무화하는 조항을 추가하고, 위반 시에는 벌금 및 구금을 강화함으로써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업 순익을 의무적으로 사회에 환원토록 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인도가 유일하다. 오화석 원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기업을 이용한다는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도인들은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보다 인도가 지속 성장 가능해”
― 중국의 경제 발전과 비교되는데, 중국과 인도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경제 발전사의 대부분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부(혹은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독재, 권위주의를 펼치면서 성장합니다. 그것을 ‘동원체제’라고 하는데, 동원체제하에서는 경제 발전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쇠락하게 되죠. 결국 부작용으로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죠.
“중국은 1978년, 인도는 1991년 경제 개방을 했습니다. 인도의 경제 개방 시기가 13년이 늦습니다. 가령 중국은 공산주의 정부에서 ‘도로를 깐다’고 하면 바로 철거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인도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중시해서 속도가 좀 느립니다.”
―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진출하고자 할 때 걸림돌이 아닐까요.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단점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경제가 중장기적으로 훨씬 튼튼하고 오래간다고 봅니다. 지속 성장이 가능한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중국보다 인도가 지속 성장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인도 경제의 근간에 개인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도는 자국(自國)으로 기술 이전하는 해외 기업에 대해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이 부분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 베트남과 인도는 어디가 경쟁력이 있나요.
“솔직히 베트남과 인도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구수, 경제성장률, 인건비 등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인도에 진출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베트남이 지리적으로 우리와 인접해 있고 문화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베트남이 유리한 것이 분명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인도가 맞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생각을 바꾸면 인도도 진출하기에 어려운 국가는 아닙니다.”
― 우리의 인도에 대한 인식 변화가 우선이라고 보시는군요.
“혹자는 인도인에 대해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인도인들의 언변이 뛰어나고, 말을 종종 바꾸어 믿을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사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14억이나 되는 엄청난 인구 중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인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유교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이 든 사람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분위기입니다. 자유로운 토론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입장에서는 말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냐는 왜곡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직원으로서 인도인이 최고”
― 거래 방식도 다르다고요.
“시중에는 인도인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문서를 남겨야 한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당연히 중요한 얘기들은 어느 나라 사람하고 거래하든 꼭 문서로 남겨야 하겠지요. 그러나 인도인들은 특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담을 얘기하자면 귀국하느라 물건을 처분할 때 문서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없더군요. 1000만원이나 하는 중고 자동차를 거래할 때도 돈을 먼저 지불한 후 ‘아무런 증명서도 필요없다’며 ‘보름 후 차를 가지러 올게’라고 말만 하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오히려 제가 당황했지요. 이들은 구두로 한 약속이래도 꼭 지켰습니다.
특히 인도 상인들은 신뢰를 무척 중시합니다. 신뢰에 금이 가서 생기는 역효과, 혹은 그로 인한 폐해가 어마어마하니까요. 인도인들이 신뢰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글로벌 기업에 인도 경영자가 그렇게 많을 리가 없겠지요.”
― 미국 실리콘밸리는 인도인이 점령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더운데 살아서 게으르다, 나태하다는 것도 인도인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입니다. 인도에 둥지를 튼 기업의 주재원들에게 무수히 질문한 사항인데, 이들은 자사 인도인 직원들의 생산성이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높다고 한결같이 답하더군요. ‘직원으로서 인도인이 최고’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인도인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 좋고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죠. 잘 아시는 것처럼, 인도공과대학(IIT)은 인도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최고 명문 국립공과대학입니다. 이곳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출세길이 보장되고, 실제로 IIT 출신들은 미국 실리콘밸리, 삼성, LG 등 업체에서 고용하고자 줄을 설 정도입니다.”
― 인도를 중동,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 회사들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충분히 가능한 얘기입니다. 인도와 중동은 실크로드가 있던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중동상인을 만나는 데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친밀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인도를 전략기지로 삼아 아프리카까지 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인도에 진출한 기업들의 얘기로는 여성의 사회 진출도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다. 오화석 원장은 “인도는 여성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중산층 이상에서 여성 파워 막강”
“과거 인도는 여성을 남녀평등의 존재로 여겨 여성의 서비스업 취업을 금지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어느 나라에나 있던 엘리베이터 걸(girl)이 인도에는 없었고, 술집이나 찻집 등에서도 여성이 시중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론 남성 중시라는 시각에서 이런 서비스업 직종도 남자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일부 하층민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몸 쓰는 노동 일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논밭에서 땅 파고 건설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서비스업 취업금지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조치였지만, 오히려 여성이 육체적으로 힘든 남성의 일을 하게 하는 모순이 있었던 거죠. 인도 여성의 불평등 문제가 여전히 많이 지적되지만, 요즘 인도 사회는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중산층 이상에서는 여성의 파워가 막강합니다.”
― 여성의 발언권이 좀 세지고 있나요.
“인도인들이 숭배하는 신 중에 여신(女神)들이 꽤 있고요, 또 정치, 금융 분야에서는 여성이 활약한 예가 많습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선거로 선출된 아시아 최초의, 아마 세계 최초의 여성 최고 권력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4년 방한(訪韓)한 쿠마르 인도 하원의장도 인도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이자, 불가촉천민 출신입니다. 아직 여성 국회의장이 없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죠. 이 밖에도 우리나라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뉴델리시장을 여성이 오래 역임했고, 미국의 주지사에 해당하는 주 총리와 힘있는 실세 연방 장관 등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이 아주 많습니다.”
― 남아(男兒) 선호 사상은 있지요.
“아주 강한 편입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나라처럼 인도 역시 오래 전부터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습니다. 남성은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의 원천이었고, 가문의 성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도는 여성이 결혼할 때 가져가는 지참금이 매우 큽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도 남아를 선호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화석 교수는 얼마 전 《인도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 원고를 탈고하고, 인도 전문가들로부터 감수를 받고 있다고 했다. 최근 급부상한 인도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룬 책인데, 조만간 시중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그는 ‘앞으로도 인도 경제가 계속 상승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인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모디 총리가 화폐 개혁을 할 때와 이번 코로나19 위기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인도 경제가 침체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인도는 여러 조건을 고려했을 때 우리 기업이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지역입니다. 우리처럼 무역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제라도 인도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적극 공략하기를 추천합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경제 전문가들이 분석한 인도
“젊고, 성장 속도 빠르고, 정부 지원 폭발적”
⊙ 미국의 공급망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전기 맞아… 新냉전-脫세계화 시대의 유력한 승자 후보
⊙ 지방분권주의, 중국보다 낮은 도시화율 속도, 재정 적자, 불평등 등이 걸림돌
⊙ 14억 명의 인구, 4억 명에 육박하는 중산층, 중위 연령 27.9세… 젊은 소비층을 기반으로 한 세계 7위 수준의 소비 시장
⊙ 《포천(Fortune)》 선정 500대 기업 중 80% 이상이 인도 활용, 전 세계 IT 아웃소싱 인력의 50% 이상이 인도에 기반
⊙ “2030 세대 인구 4억9000만 명”(2030년)… 상당수는 교육받은 인력
⊙ 모디의 ‘메이크 인 인디아’, 목표 달성은 못 했지만 제조업 기반 강화되고 있어
⊙ 美中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유니콘 기업(총 84개) 보유한 국가
[편집자 註]
최근 인도가 급부상하는 주요 이유는 인도가 가진 어마어마한 잠재력 때문이다. 미중(美中) 갈등으로 인한 어부지리 격 이득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도의 경제가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년 상승하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KB증권, 유진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경제 전문가들이 분석한 인도 경제에 대해 살펴본다.

▲인도 뭄바이의 시장의 모습. UN은 인도가 고령화된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경제 전문가들이 분석한 인도의 가장 큰 경쟁력은 인구, 고(高)성장,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정부의 경제 활성화에 대한 의지로 압축된다. 2023년 인도의 인구는 14억2862만 명으로 중국(14억2567만 명)을 제쳤다. 전문가들은 인도의 인구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중국이 1가구 2자녀 정책으로 전환했음에도 출산율이 올해 1.18명으로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는 202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펼친 대약진운동으로 대기근이 강타한 1961년 이후 처음”이라며 “인도의 인구는 2064년이면 중국 대비 50% 이상 많아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10년 후에도 젊은이들이 넘치는 국가”

▲World Bank에 의하면 인도의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 인구의 7%로 적은 편이다.
인도는 단순히 인구 숫자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인도에는 ‘젊은 사람’이 많다.
인도의 중위 연령(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해당 연령)은 2022년을 기준으로 27.9세다. 같은 기준으로 중국 42.7세, 미국 39.7세, 베트남 35.6세다. 인도는 2030년에는 청년 인구(30.9세)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될 전망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중국은 60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26년 이후에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3억 명에 도달할 예정이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라며 “하지만 인도는 2030년 소비의 주축이 될 2030 인구가 미국 인구를 넘어서는 4억9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젊은 사람이 중심인 사회가 될 전망이다”고 분석했다.
인도의 생산 가능 인구(15~64세)는 2022년을 기준으로 전(全) 세계 생산 가능 인구의 18.6%(9억6080만 명)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은 중국이 전 세계 생산 가능 인구의 19%를 차지해 근소한 우위에 있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2030년에는 인도의 생산 가능 인구가 18.8%를 기록해 중국(17.5%)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들 젊은 인구 중 상당수는 높은 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이다.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인도는 교육 수준의 차이가 있지만, 미국보다 대학 숫자(3216개)가 월등히 많은 5388개다. 《세계대학랭킹(World University Ranking)》에 따르면 세계 톱 1000 대학에 속하는 인도 대학이 15개다.
중국인 1명 쓸 비용으로 인도인 2명 고용

▲IMF에 따르면 인도의 지난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6~7%대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인도의 경제 성장 속도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2022년을 기준으로 인도의 명목 GDP는 전년 대비 9.3% 증가한 2조4685억 달러를 기록해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로 올라섰다. 모건스탠리는 “2027년에는 인도가 일본·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 경제 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인도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6%대의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인도의 GDP 순위는 1992년 15위에서 12위(2002년), 11위(2012년), 5위(2022년)로 껑충 뛰어올랐다. 인도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2년에 1.16%에 불과했으나, 10년간의 연평균 6% 성장으로 인해 3.42%(2021년)로 약 3배가량 늘었다. 모건스탠리는 “2031년 인도의 경제 규모는 2022년 대비 2배 증가한 7조5000억 달러에 도달하고, 이 기간 전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저렴한 인건비는 인도의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전 세계는 인도가 중국을 대신할 생산기지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금융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글로벌 제조공장이 대거 밀집한 인도의 마하라슈트라주(州)의 월 최저임금은 153달러50센트로 중국 광저우시(339달러), 베트남의 일부 지역(하노이·호찌민·하이롱시 등, 198달러) 대비 각각 45%와 77% 수준이다. 인도의 실질임금은 월 404달러로, 중국(1526달러)과 베트남(753달러)보다 훨씬 싸다. 인도의 임금상승률은 지난 10년간 매년 9~10%대로 경쟁국보다 높은 수준이며,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금융경제연구소는 “인도의 임금상승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베트남이 6%대, 중국이 여전히 두 자릿수 대를 기록하고 있어서 경쟁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유진투자증권은 인건비뿐만 아니라, 세금경쟁력, 기업에 유리한 환경 또한 있다고 분석했다. 유진증권은 “인도의 최저임금은 베트남의 3분의 1, 중국의 5분의 1 수준일 뿐만 아니라 신규 법인세율도 15%로 매우 낮다. 주변 국가들의 신규 법인세율은 20~25% 수준”이라며 “인도의 전기료가 주변 지역보다 가장 싼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에 비해 비싼 것도 아니다”고 분석했다.
‘Make in India’로 제조업 변신 꾀해
인도 정부의 경제 부흥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전 세계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과거 인도 경제 정책의 핵심은 ‘1991년 경제 자유화’였다. 주요 내용은 외국인 투자 완화, 관세율 인하, 환율 제도의 변화인데, 인도 경제 정책의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국인 투자 완화는 지금도 인도 경제 정책의 중심이다.
현재 인도 경제 정책의 핵심은 2014년 발표한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다. 오늘날까지도 진행 중인 ‘메이크 인 인디아’는 서비스업 위주인 인도의 경제 시스템을 제조업 기반으로 바꾸겠다는 시도다. 2023년을 기준으로 인도의 산업별 GDP 구성 비중은 농업 17.3%, 산업 27.7%(제조업·건설업 및 전력산업), 서비스업 55% 순이다. 2014년에 야심 차게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비스업의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는 “인도 경제는 제조업이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여타 개도국의 성장모델과 달리 서비스업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제조업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서비스업 주도형 모델로 성장해 왔다”고 분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도 경제는 과거부터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컸고, 따라서 중앙정부 주도하의 경제 발전보다는 사기업 주도의 경제 발전 모델로 성장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주요 주체인 사기업들의 투자 관점에서 보면 노동 법규가 경직돼 고용 유연성이 떨어지고 투자 수익률 및 이익률이 낮은 구조를 가지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의 매력도가 높지 않아서, 굳이 노동집약형 경공업에 자본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 또 인도 정부도 기존의 IT·서비스 산업 주도 성장 전략에서 벗어나 제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국가 산업 포트폴리오의 다변화를 꾀하고는 있으나, 노동집약형 경공업보다는 신재생 에너지·배터리·반도체와 IT 하드웨어 등 비교적 자본집약적 제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동차·정유·화학·제약·철강 등 자본 집약적인 제조업 분야에서는 비교적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많은 신규 고용 인력 창출을 유인해내는 섬유·신발 제조와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발달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도의 산업 구조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이 ‘메이크 인 인디아’였는데,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당시 인도 정부가 제시한 목표는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22년까지 25%, 제조업 성장률은 연간 12~14%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었다. 2022년까지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18%(목표보다 7% 부족)이고, 제조업 성장률 목표치를 달성한 것은 2016년 한 해뿐이다. KB증권 리서치센터는 “명시적인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긍정적 변화들이 관찰되는 중이다. 제조업의 제반여건(외국인 직접 투자 순유입 증가·사업환경 개선)이 갖춰지고 있다”고 했다.
“기술 이전하는 기업에 인센티브 제공”

▲인도는 PLI 원칙에 따라 제조업 분야에 진출한 기업 중 일부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급한다.
인도 정부는 이후에도 ‘메이크 인 인디아’를 뒷받침하는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2020년 3월에 발표한 PLI(생산연계 성과보수 혜택)와 2021년 8월에 발표된 가티 샤크티(Gati shakti) 인프라 개발 계획이 대표적이다. 이들 정책의 핵심은 인프라 개선, 산업을 고도화시키기 위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PLI는 PLI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사업이나 기업들이 설비투자·R&D·기술이전 등 약정한 투자와 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인도 정부가 이에 해당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11월에 인도 통신부가 발표한 PLI 혜택을 받을 42개 기업에 포함됐다. 선정된 기업들은 약 7098억원(411억5000만 루피) 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LG전자는 2022년 6월에 인도 상공부가 선정한 PLI 혜택을 받을 15개 기업에 포함됐다.
가티 샤크티는 인도 독립 100주년을 목표로 삼아 앞으로 25년간의 플랜을 제시한 장기 정책이다. 가티 샤크티의 목표는 인도의 인프라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철도 및 도로를 포함한 16개 부처를 하나로 묶는 디지털 플랫폼 등에 1조3000억 달러를 투자하는 정책이다. KB증권 리서치센터는 “인도 정부의 적극적 정책으로 사업 환경이 개선돼 가고, 해외 기업들의 인도 진출이 늘고 있다. 월드뱅크(World Bank)에서 평가하는 ‘사업환경 점수’는 비교국들 대비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 중”이라며 “실제 해외 기업들의 인도 진출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니콘 기업 84개… 세계 3위

▲인도는 미국,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니콘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인도는 제조업과 함께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그 결과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유니콘 기업(총 84개)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생태계 구축 지수에서도 인도의 벵갈루루(8위), 뉴델리(13위), 뭄바이(17위) 등이 서울(25위)보다 높은 경쟁력 보유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2015년 ‘스타트업 인디아, 스탠드업 인디아(Startup India, Standup India)’라는 슬로건의 스타트업 어젠다를 발표하고 다양한 스타트업 육성 정책을 실시했다. 특허 출원료 20% 인하, 상표 출원료 50% 할인, 지적재산권 보호, 소득세 면제, 창업, 폐업 간소화 등 스타트업 강국으로 만들기 위한 정부의 다양한 지원 정책을 시행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인도가 스타트업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분석했다.
〈인도는 14억 명의 인구와 4억 명에 육박하는 중산층, 중위 연령 27.9세로 젊은 소비층을 기반으로 한 세계 7위 수준의 소비 시장이 있다. 글로벌 IT 기업들의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면서 2022년 인도의 소프트웨어 수출액은 1567억 달러에 육박하며 높은 고학력 엔지니어 비중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포천(Fortune)》 선정 500대 기업 중 80% 이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도를 활용하며, 전 세계 IT 아웃소싱 인력의 50% 이상이 인도에 기반을 둔다. 또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Reliance Industries·인도의 시총 1위 그룹)의 공격적인 4G 투자와 파격적인 통신 요금 책정에 힘입어, 저렴한 통신비가 이점이다.〉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는 “인도중소기업개발은행(SIDBI)을 통해 정부 차원의 스타트업 투자 기금을 지원하고, ‘스타트업 인디아’를 통해 스타트업 기업들의 규제, 재무 관련 문제 등에 대한 법적 자문 및 애로사항 해소 지원 등에 나서고 있다”며 “인도 정부의 육성 정책에 힘입어 인도 스타트업 산업은 투자 유치 건수와 금액 측면에서 코로나19 전후(前後)로 크게 성장했고, 세계 3대 스타트업 메카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對인도 직접 투자 2.8배 늘어
(코로나19 후)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의 보고서를 보면 인도에 대한 해외 직접 투자는 코로나19 이전보다 30% 이상 늘어났다. 싱가포르, 미국, 영국 순으로 인도에 많이 투자했다. 미국의 대(對)인도 직접 투자 규모는 코로나19 이전보다 평균 2.8배 늘었다. 중국은 인도에 대한 해외 직접 투자 규모를 줄였다. 유진증권은 “인도가 과거와는 달리 제조업 기지로서의 매력을 드러냈다. 제약·철강·기계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는 코로나19 이후 3년 평균 50~60% 늘었다”며 “인도가 제조업 강자로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공급망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인도의 대중국 수출과 수입은 모두 감소했지만, 인도의 대미국 수출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 IT 회사인 애플은 2017년부터 인도의 타밀나두 공장에서 아이폰 생산을 시작했다. 2022년 말부터는 인도에서 최신 아이폰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유진투자증권은 “2022년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이폰은 전체의 5%지만, 애플이 2025~2026년까지 글로벌 수요의 25~30%를 중국 이외 지역에서 공급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과 코로나19로 불거진 탈(脫)중국화가 어떤 식으로든 인도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KB증권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키(key)’가 될 국가를 선정해 왔다. KB증권은 “미국은 전쟁, 경제 위기를 겪고 특정 지역 국가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패권 경쟁국을 견제하며 새로운 세계화를 주도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1910~1940년 제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서유럽과 유럽에 집중한 것이다. 두 번째는 1970~1980년 중동전쟁, 오일쇼크로 인해 중국 및 동아시아를 지원하면서 소련을 견제한 것이다. 세 번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금융위기와 코로나19다.
이들 간에는 미국의 ‘세 가지 평행 이론’이 존재한다는 것이 KB증권 리서치센터의 분석이다.

미국이 인도를 낙점한 이유

▲2016년 1월 15일(현지시각), ‘2016 한·인도 비즈니스 서밋’이 열리고 있는 인도 뉴델리 르메르디엥 호텔 ‘한–인도 투자수출상담회’장에서 인도 바이어들이 한국 중소기업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첫 번째는 해당 국가의 지리적 위치다. KB증권에 따르면 미국은 늘 패권 경쟁국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지리적 요인이 있는 국가인가를 고려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서유럽은 당시 소련의 세력권이었던 동유럽 국가들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서유럽을 지원함으로써, 소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1971년부터 미중이 국교 정상화에 나섰는데, 중국은 소련과 지리적으로 맞닿은 국가였다. KB증권은 “미국의 평행 이론을 보면 왜 지금 인도인가를 알 수 있다. 인도는 미국의 동맹국이며, 패권 경쟁국(중국)의 남서쪽에 있다. 중국과 인접한 한국, 일본은 더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 국가이기 때문에 제외이다. 결국 패권 경쟁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인도, 동남아를 지원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KB금융이 인도를 주목한 다른 이유는 패권 경쟁국과의 정치적 대립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련 및 동유럽은 공산주의 이념이 지배한 국가였던 반면, 미국이 지원한 서유럽은 민주주의 국가여서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였다. 현재 인도는 중국과 여러 차례 국경 분쟁을 했던 경험이 있는 국가(1962년·2017년·2020년)로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팽창 의지를 저지하면서도 앞으로 중국과 손잡을 리스크가 없는 국가다.
끝으로 미국 입장에서 인도는 정치·경제적 관점에서도 패권 경쟁국에 뺏기면 안 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KB증권 리서치센터는 보고서에서 “과거 패권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이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미국은 상상하고 싶었을까? 그 얘기는 산업혁명의 주역인 유럽 국가들의 생산 시설이 전부 소련에 넘어가고, 유럽의 수많은 인구, 특히 노동력과 소비자가 소련에 넘어간다는 뜻이다. 인도는 남아시아의 패권국이었으며,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이다. 인도의 거대한 노동력과 소비 시장은 미국의 다음 세계화 시대 준비에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분석했다.
“신냉전과 탈세계화 시대의 승자”
하나금융연구소는 “인도 경제 성장의 배경은 미국 외교 전략의 핵심 국가라는 점”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명분 아래 Quad(미국·일본·인도·호주 협의체)와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라는 동맹체제가 구축됐는데, 참여국 중 규모 면에서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는 인도뿐”이라고 설명했다.
〈인도는 신냉전과 탈세계화 시대의 유력한 승자 후보다. 미중 갈등과 코로나19 이후 미국 공급망으로 베트남·인도·동남아·멕시코가 편입되기 시작했다. 인도는 낮은 인건비, 젊은 인구, 낮은 세율, 정부의 제조업 부양 정책 등 긍정적인 면이 많다. 최근 미국의 대인도 투자는 코로나19 이전 대비 3배가량 늘었다. 과거 부가가치가 낮은 서비스업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투자 산업이 바뀌고 있다. 2000~2010년 중국이 PC, 휴대폰 생산을 통해 세계 공장이 됐던 사례를 인도가 따를 확률이 높아졌다. 2000년대 이후 인도의 주식시장은 미국의 나스닥시장보다 더 올랐다.〉
반면에 인도에는 고질적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는 ▲지방분권 주의 ▲인도의 재정 적자 ▲심각한 빈부격차 등을 꼽고 있다. 유진투자증권의 분석이다.
〈인도 성장의 걸림돌 중 하나는 복잡한 토지 수용이다. 중국이 중앙집권 방식인 것과 달리 인도는 지방분권주의가 강하다. 주별로 세금 및 법체제가 다르다. 이는 기업들과 토지 소유자 간 법적인 다툼이 끊이지 않는 요인이다. 토지 수용을 약속받았으나, 아직 수용되지 못한 토지가 인도 주요 기업별로 상당히 많다. 사회주의 발전 국가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중국, 베트남보다 발전·개발 과정에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인도의 도시화율은 23%(2021년 기준)로 중국의 65.2%(2022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과거 중국의 도시화 수요는 2000년 이후 중국 경제 성장의 동력이었다. 2000년 들어 매 10년 만에 10~13%p 도시화 속도가 이뤄졌던 중국에 비하면 인도의 도시화 속도는 10년 평균 2~3%p에 불과하다. 중국의 고성장 국면을 인도가 그대로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도시화율 속도 중국보다 많이 낮아
보고서를 보면 인도의 고질적인 재정 적자와 경상 적자는 해외 자금 유·출입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다. 인도의 재정 적자는 코로나19 이후 GDP 대비 7~8%대로 늘었다. 다행히 외부 조달 비중은 작아 당장 심각한 외환위기가 발생할 확률은 낮은 상황이다. 인도의 대외 부채는 GDP의 15%로 공공보다는 민간이 많다. 결국 고질적인 무역 적자, 경상 적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치가 필수인 상황이다. 유진투자증권은 “인도는 내수가 좋을수록(성장률이 높을수록) 상품 수지 적자로 인한 경상 적자 규모가 확대되기 때문에 경상 적자를 능가할 만큼의 해외 자금 유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소득 불평등 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에 따르면 인도 소득 하위 50%(13.1%)와 상위 10%의 격차(57.1%)는 중국보다 더 심각하다. 인도의 중산층이 늘어남에도, 빈부격차 확대는 고른 성장과 소비 활력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크다는 소리다. 인도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23%(1995년)에서 33%(2021년)까지 늘어난 반면, 하위 50%의 소득 비중은 동기간 8%에서 6%로 줄었다. 중위 40%의 소득 비중은 37.2%(1995년)에서 29.6%(2021년)로 감소했다.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는 “인도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회계연도 2020년 기준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도 전체 고용인력은 6240만 명”이라며 “인도 제조업은 자본 집약적 기술 산업 위주로 성장이 집중돼 장기적으로 인도 경제 성장에는 이바지하겠지만, 인도 중산층 확대에는 제한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인도의 ‘글로벌 외교’
미국 주도의 쿼드에도, 중국 주도의 SCO에도 참가
⊙ 모디 총리, “미·인도 파트너십은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길조”
⊙ 미국, 국빈 방문한 모디 총리에게 최첨단 무기 제공 등 선물 안겨줘
⊙ 인도, 대면 회의 예정이던 뉴델리 ‘上海정상회의’를 온라인 회의로 개최… ‘중국의 아바타’이기를 거부
⊙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에도 러시아산 원유 수입 10배 늘리고, 러시아 주도의 군사훈련에 참여
⊙ ‘글로벌 사우스의 맏형’ 자임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6월 22일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했다. 사진=AP/뉴시스
“가까운 시일 내에 시진핑(習近平)과 회담에 나설 예정이다.”
지난 6월 22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던진 말이다. ‘가까운 시일’은 11월 중순을 염두에 둔 말이다. 21개국 정상이 참가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샌프란시스코 총회가 미중 정상회담의 무대가 될 것이란 의미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 말을 할 때 옆에는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인도 총리가 있었다. 모디 총리는 6월 21일부터 미국을 국빈(國賓) 방문 중이었다.
바이든 대통령과 모디 총리의 백악관 기자회견을 보면서 필자는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떠올렸다. 바이든의 얼굴 위로 베이징(北京)공항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악수를 나누던 닉슨의 얼굴이 겹쳐졌다. 닉슨은 구(舊)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제3의 칼’로써 중국에 주목했다.
닉슨의 베이징 방문 이후 반세기가 넘은 2023년 여름, 중국은 디커플링(Decoupling) 또는 디리스킹(Derisking) 대상 국가로 전락했다. 닉슨의 전격 방문을 통해 시작됐던 미중(美中) 밀월 관계는 시진핑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그 증거가 6월 22일, 미국-인도 정상(頂上)의 기자회견이다. 인도는 1972년 닉슨 방문 당시의 중국에 비견될 만한 나라다. 당시 구소련에 맞선 새로운 대안이 중국이었다면, 2023년 중국에 맞설 미국의 대안은 인도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투명성이다. 닉슨의 중국 방문 시 미중회담 내용은 특급비밀, 그 자체였다. 구소련을 자극할 수 있는 미중의 생각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도 정상의 생각은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전 세계에 공표됐다.
美, 인도에 최첨단 무인기 제공 약속
모디 방문 때 발표된 미국-인도 공동성명서를 보자. 우주, 반도체, IT, 환경 등과 관련된 두 나라의 협력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핵심은 군사 관련 부문이다. 크게 두 가지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이 인도에서 전투기 엔진을 공동 생산하고 관련 기술을 이전한다는 것과 인도에 최첨단 무인기(無人耭) MQ-9B를 수출한다는 약속이다. 전 세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엄청난 약속이다.
미국은 첨단무기 수출이나 기술 이전을 극도로 제한하는 나라다. 수백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는다. 대만은 첨단 전투기, 한국은 원자력잠수함 구입을 원하고 있지만, 미국은 모른 척하고 있다. 그런 첨단 무기를 대만이나 한국에 팔았다가, 그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인도에 GE 전투기 엔진 공동 생산과 첨단 무인기 MQ-9B 제공을 약속한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도박이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나라로, 특히 군사무기 영역에서 모스크바와의 협력체제를 중시해 왔다. 그래서 미국도 그동안 군사 분야에서 인도를 멀리해 왔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인도에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 제공하지 않았던 첨단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무인기 MQ-9B는 3년 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카셈 술레이만 암살에 동원된 비행기의 업그레이드 모델이다. 항속거리가 8500km, 32시간 비행이 가능한 세계 최고의 정찰기로, 명중률 99.99% 미사일 공격도 가능한 공격용 무인기이기도 하다. 동맹국 한국과 일본도 MQ-9B 도입을 희망했지만, 미국은 이를 외면해 왔다.
그럼 미국은 한국이나 대만, 일본보다 인도를 더 신뢰한다는 것일까? 인도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산(産) 원유 수입량을 10배나 늘린 나라다. 만일 한국이나 일본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늘린다면 어떻게 될까?
바이든 대통령의 인도에 대한 자세는 신뢰나 불신 프레임에 따른 것이 아니다.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 것이다. 숨이 넘어가는데, 약의 유효 기간이나 알레르기 여부를 따질 여유가 없다. 중국의 대만 침략이 초읽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인도를 상대로 초대형 도박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 당시 미국이 중국에 걸었던 기대는 지금 미국이 인도에 걸고 있는 기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모디, “미국은 가장 중요한 방위협력 상대”
역사상 미국 의회에서 두 차례 연설을 한 외국 지도자는 단 두 명뿐이다. 한 명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고 다른 한 명은 바로 모디 인도 총리다. 모디 총리는 지난 2016년에 이어 지난 6월 방미 때에도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모디 총리도 6월 22일 미국 의회 연설을 통해 자신과 인도에 대한 미국의 기대에 화답했다.
“미국은 가장 중요한 방위협력 상대다.… 권위주의와 대립이라는 어두운 구름이 인도-태평양에 드리워져 있다. 자유로 열린 포괄적 인도-태평양에 대한 비전을 믿는다.… 인도-미국의 협력 관계는 양국만이 아니라, 한층 더 큰 목적에 공헌할 것이다. 양국 간 파트너십은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길조(吉兆)라 볼 수 있다….”
‘민주주의, 법, 자유, 인도-태평양’은 2023년 미국 외교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미국 외교의 키워드인 동시에, 중국이 가장 싫어하는 외교 어젠다이기도 하다. 모디 총리의 연설은 친미(親美)인 동시에 반중(反中)이다.
모디 총리는 힌두교 절대주의자로서 이슬람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미 의회 일부에서는 모디 총리에 대해 보이콧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세계 미디어 대부분은 모디 총리를 록 스타처럼 대우했다. 미국에 체류하는 내내 모디는 글로벌 뉴스 메이커로 각광을 받았다.
인도, 중국의 SCO 외교에 브레이크 걸어

▲7월 4일 상하이협력기구(SCO) 제23차 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이 회의는 인도의 주장에 따라 화상회의로 열렸다. 사진=신화/뉴시스
모디 총리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미국의 기대에 부응했다. 7월 4일 뉴델리에서는 상하이(上海)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열렸다. 2001년 중국·러시아·카자흐스탄 등 8개국을 멤버로 출범한 SCO는 시진핑이 가장 중시하는 정상급 국제회의다. 명칭에 ‘상하이’란 중국 지명을 달고 있는 SCO는 미국을 염두에 둔 중국 주도 국제회의다. 정치·경제·군사 모든 영역을 다룬다.
공교롭게도 SCO 회의의 올해 주최국은 인도이다. 팬데믹 기간 중 SCO는 온라인 회의로만 진행됐다. 올해 회의는 당초 4년 만에 대면(對面) 정상회의로 열릴 예정이었다. 또한 올해부터 이란이 신규 멤버로 SCO에 가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SCO의 맹주(盟主)를 자임하는 중국은 이란을 앞세워 한바탕 반미(反美) 행사를 연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기 두 달 전인 5월 초, 인도가 갑자기 올해 회의도 대면이 아닌 온라인 회의로 진행한다고 일방통보를 했다.
인도는 왜 이런 것일까? 인도는 표면적으로는 안전상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4년 만에 대면 회의로 열리는 SCO라는 무대에서 시진핑을 주인공으로 하는 화려한 외교 이벤트를 벌이려는 데 대해 인도가 브레이크를 건 것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미국과 인도가 입을 모아 ‘민주주의, 법, 자유, 인도-태평양’을 부르짖는 판에, 인도에서 열리는 SCO 정상회담에서 반미 이벤트를 연출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적절치 않다.
대면 회의에서 온라인 회의로 대체되면서 금년도 SCO 회의는 식은 피자, 김 빠진 맥주보다도 못한 회의가 되어버렸다. 인도는 SCO에 참여하지만, 중국의 논리와 연출에 동원되는 ‘아바타’가 아니라는 것을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인도가 SCO를 통해 모디 총리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포기했다는 것도 대단하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반응이다. 별다른 이의 없이 인도의 방침에 순응한 것이다. 한국에는 큰소리를 치지만, 인도를 적으로 돌릴 만한 용기도 자신감도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필자가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강하게 대할수록 애교를 떨고, 약하게 대할수록 타 넘고 뭉개려는 것이 ‘7세 어린이 수준’ 중국 외교다.
하여튼 모디 총리의 결정 덕분에 7월 4일 열린 SCO 회의는, 글로벌 변방 뉴스로 처리되어버렸다.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모디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3억3000만 명의 神
한국인이 보는 인도는 영원히 풀 수 없는 ‘킬러 문항’ 그 자체다. 애매하고도 다중적(多重的)이며 복합적인 나라다. 흔히 생각하는 인도의 이미지가 그렇듯, 인도는 뭔가 신성하고도 신기한 분위기로 채워져 있다. 3차원에 익숙한 인간에게 던져진 4차원 세계가 인도다. 필자는 이 같은 4차원 인도의 모습을 ‘인도 신비’라 표현하고 싶다.
‘인도 신비’의 출발점은 종교다. 사실상 국교(國敎)인 힌두교가 ‘인도 신비’의 핵심이다. 힌두교에서 숭배하는 신(神)의 수가 무려 3억3000만 명에 달한다. 원래 33명의 신이 핵심이지만, 인간의 눈에는 3억3000만 명의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힌두교 원리에 의하면, 집에서 기르는 개에서부터, 방금 전 내가 길을 물어본 노인도 신이 될 수 있다. 주변 전부가 신이라 보면 된다.
힌두교의 이런 모습을 생각하면, 모디 총리의 이슬람교 탄압도 이해할 수 있다. 다신교(多神敎) 국가이던 로마가 일신교(一神敎)인 기독교를 탄압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슬람은 알라만 신으로 여길 뿐 다른 신은 전부 무시한다. 이는 힌두교의 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위다.
힌두교의 신은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3억3000만 명의 신 하나하나가 자기 영역과 법리를 갖고 있다. 인도인들에게는 ‘내가 믿는 신만 진짜고, 그 밖의 신은 가짜’라는 식의 세계관 자체가 없다. 잘난 신과 못난 신, 강한 신과 약한 신의 구별도 없다. 3억3000만 명의 신에 대한 인도인의 경외심은 전부 똑같다. 힌두교가 ‘평화의 종교’로 인정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헤드 버블링’
인도인을 만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인도 신비’는 ‘헤드 버블링(Head bobbling)’이다. ‘헤드 버블링’은 ‘머리를 흔들다’는 의미로, 인도인들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인도인은 부정이나 긍정, 나아가 동의나 가능성에 관한 표현을 언어가 아니라 머리로 한다. 이탈리아 나폴리인들의 손을 통한 다양한 표현 방식과 비견된다.
인도는 전 세계에서 머리를 흔들면서 자기 의사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입이나 혀가 아닌, 머리 그 자체가 대화 수단인 셈이다.
인도인들의 ‘헤드 버블링’에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아래위로 흔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묘한 각도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헤드 버블링’의 정석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부정, 긍정, 동의 가능성’ 등에 관해 인도인들이 머리로 답할 경우 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외국인은 제로에 가까울 것 같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 때, 그것이 긍정이나 동의를 의미하는지, 30%의 가능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어내기 어렵다. 인도인이 아닌 이상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필자의 인도 체험은 두 차례의 장기 여행이 전부다.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지만, 그래도 주변 인도인 친구를 통해 나름 이해하려 노력한다. 인도인과의 우정은 오래간다. 한번 맺어질 경우 평생 간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 필자는 한국인이 아닌 인도 친구를 인생 상담역으로 대하고 있다.
그동안 필자가 인도인들을 통해 본 바로는, 인도에는 ‘노(No)’라는 발상 자체가 없다. ‘예스(Yes), 노(No)’ 사이의 벽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노(No)’라는 개념이 미약하다. 사실 인도에는 ‘예스(Yes), 노(No)’로 나눠진 흑백(黑白) 세계관 자체가 없다. 인도인들을 통해 재삼재사 확인한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설령 “노(No)”라 해도 “예스(Yes)”라고 답한다. “아마 50% 정도 가능할 것, 어쩌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신이 도와준다면 그런 결과가 될 것”이란 표현도 전부 ‘예스(Yes)’다. 흑백 세계관과 거리가 먼 인도는 21세기 글로벌 문명·문화의 키워드이자 대세로 떠오른 ‘다양성’의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러시아 주도 군사훈련에도 참여

▲5월 20일 히로시마 G7 정상회담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왼쪽 두 번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 세 번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등 쿼드 참가국 정상들은 별도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AP/뉴시스
이러한 ‘인도 신비’는 국제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도는 지구의 동과 서, 남과 북 모두에 속하는,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묘한 나라다.
일단 2021년부터 정상 간 회의로 격상된 4개국 안보 회담 쿼드(Quad)를 보자. 인도는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쿼드 창립 국가다. 최근 군사훈련도 정례화하고 있지만, ‘자유롭고도 열린 인도-태평양’을 목적으로 하는 쿼드는 사실상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패권주의(覇權主義)에 맞서는 기구이다.
흑백 세계관이 없는 나라답게, 인도는 ‘쿼드=반중전선(反中戰線)’이란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헤드 버블링’이 그러하듯, 모두 알고 있지만 굳이 언어로 명문화해서 상대를 궁지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인도는 쿼드에는 참가하지만, 중국 주도하의 SCO에도 적극 참가하는 나라다. 인도 외교에는 시진핑이 즐겨 사용하는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 같은 조폭 수준의 극단적이고도 천박한 용어나 표현이 아예 없다.
중국에 대해서뿐 아니다. 인도는 2022년 8월 초 ‘보스토크 2022’ 군사훈련에 참가했다. 러시아가 주도한 것으로, 중국과 벨라루스를 비롯한 러시아 우방 10여 개국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가 그런 훈련에 참여한 데 대해 반발했다. 인도는 4년마다 정례적으로 행하는 군사훈련일 뿐, 인도가 서방을 적(敵)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글로벌 사우스’의 맏형 자임
다른 나라가 인도를 불신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인도 신비’는 ‘박쥐 외교’나 ‘양다리 전략’으로도 나타난다. 적인지 동지인지 구별하기조차 힘들다.
예컨대 모디 총리는 지난 6월 말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 파트너십을 강조했지만 사실 ‘중국’이란 단어를 언급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반중(反中)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주어(主語)를 뺀 공동성명이 전부다. 미국이 보면 애매하게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중국이 봐도 인도는 모호하다.
SCO에 이어, 인도는 오는 9월 뉴델리에서 제18회 G20 정상회의도 주재한다. 온라인이 아닌, 직접 대면 회의다. G20은 선진국만이 아니라 러시아·중국 나아가 요즘 국제무대에서 뜨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핵심국까지 참가하는 유엔의 압축판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선진국인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반대편에 선,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을 의미한다. 글로벌 사우스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중국·러시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無)이념·무진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인도는 스스로 글로벌 사우스의 맏형임을 자임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가 중국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인도의 위상을 굳히려는 의도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배경하에 G20에 거는 인도의 정열은 대단하다. 무려 2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부속 회의가 올해 G20 기간 중 열릴 예정이다. 미국이 이를 적극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G20은 공동성명은커녕, 제대로 된 결론 하나도 내기 어려운 조직이다. 서로 간의 입장차만 재확인하는 자리지만, 그래도 동서남북 공기를 읽고 이해할 수는 있다.
중국을 대체할 나라
이번 G20에서의 핵심은 우크라이나와 중국이다. 중국은 대만만이 아니라, 인도도 위협하는 나라다. 유혈 충돌까지 간 양국 간 국경분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카슈미르 지역이 새로운 골칫덩어리로 부상하고 있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자국(自國)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중국은 일대일로의 출발점인 파키스탄을 버릴 수가 없다. 카슈미르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파키스탄에 동조하면서 G20 불참 가능성을 흘리는 중이다. 그러나 인도로서는 글로벌 사우스 맏형 자리를 내놓을 수도 없다. 카슈미르를 이유로 한 중국의 불참 여부는 올해 G20을 읽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지난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경제인 200명과 함께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다. 중국 경제가 추락하면서, 한국 기업 대부분이 베트남에 주력하는 느낌이다. 베트남을 중국을 대체할 국가로 여기는 것이 한국의 대세인 듯하다.
흥미롭게도 7월 4일부터 일본 정부도 주요 기업 대표자 100여 명을 이끌고 ‘중국 대체국가’를 찾았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한 이들의 목적지는 인도였다. 스가 전 총리는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인 동시에, 일본-인도 우호친선단체인 일인협회(日印協會) 대표이기도 하다.
중국 경제가 추락 기미를 보이면서, 한국은 베트남, 일본은 인도에 주력하는 형세다. 일본도 베트남에 힘을 쏟고 있지만, 주된 관심 대상은 인도다.
미국은 어떨까? 미국에 베트남은 군사안보 협력 대상일 뿐, 미국 자본의 베트남 투자는 극히 드물다. 미국 자본의 중심은 인도로 향하고 있다. 미국은 군사안보만이 아니라, 인도와의 경제협력에도 올인하고 있다. 최근 아마존 닷컴이 2030년까지 260억 달러 직접 투자를 약속했듯이, 지금도 미국은 인도 최대 투자국이다. 미국은 인도 전체 투자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도 인도 전체 투자의 6%를 차지하는 등, 인도 진출을 적극화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인도 전체 투자총액의 1%도 안 되는 저조한 상태다. 베트남과 달리, 인도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너무도 미미하다. 한국에서 본 인도는 아직 멀고도 먼 나라다.
‘깡패 외교’ 하지 않는 나라
인도는 동과 서, 남과 북 어디에 서 있는 나라인지 모호하다. 흑백논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다면 동서남북을 오가는, 근본도 없는 ‘박쥐 같은 존재’라 비난하기 십상이다.
사실 인도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중국과 비교할 경우 인도는 너무도 이질적이다. 일 처리가 느리고, 투자 관련 법규도 지방마다 전부 다르다. 중국과 달리 단기간에 이윤을 내기 어려운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보다 우위에 설, 분명한 장점이 인도에는 존재한다. 인도 특유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약속이다. 인도는 남을 지배하거나, 눈을 아래로 깔아 보는 식의 ‘깡패 외교’에 나선 적이 없다. 중국처럼 ‘100년 국치(國恥)’를 씻겠다면서 다른 나라에 역사청산이나 반성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반(反)스파이법을 만들어 외국인을 범죄자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도 없다. 대국(大國)답게 국제무대에서 일단 약속할 경우 반드시 지키는 신뢰할 만한 나라가 인도다.
2023년 국제정치 나아가 경제의 뉴스 메이커는 인도와 모디 총리다.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란 중국의 협박이 일상화될수록, 초읽기에 들어선 대만 위기가 고조될수록, 인도와 모디 총리의 주가(株價)도 올라갈 것이다. ‘인도 신비’ 때문에 오랫동안 주저해 오던 미국과 서방도 ‘마침내’ 인도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1992년 한중수교 직후 중국에 대한 열의가 불타올랐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그런 열의가 재현되길 기대한다.⊙
◆중국의 인태 진출 견제하는 ‘군사 강국’ 인도
자체 개발 미사일로 중국 전역·유럽 일부 지역 타격 가능
⊙ 매년 10% 이상 국방예산 증액… 2023년도 인도 국방예산은 95조원
⊙ 아시아에서 중국 외에 항모·전략원잠 운용하는 나라는 인도가 유일
⊙ 1974년에 최초 핵실험… 연간 핵무기 20개 생산 능력 갖춰

▲사진=뉴시스
미중(美中) 신(新)냉전 구도가 가속화하면서 인도의 안보 전략적 가치가 오르고 있다. 미소(美蘇)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2001년 9·11테러 이후 붕괴하고, 중국이 미국의 대항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군사·안보적 가치 역시 상승했다. 중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진출을 견제하는 미국 주도의 ‘4자 안보회담(Quad)’에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일본, 호주 외에 인도가 참여하는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
애초 미국과 인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인도는 냉전 시기 소련과 가까웠다. 1970년대에는 ‘평화적 핵폭발’이라는 명분 아래 1차 핵실험을 강행해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년)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간 반군 조직인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그 배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인도의 ‘적대국’인 파키스탄과 밀착했다. 파키스탄과 세 차례 전쟁(1947년, 1965년, 1971년)을 치른 인도는 ‘안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이 ‘핵개발’을 시도하고, ‘준(準)동맹’이던 소련이 붕괴하자, 인도는 1998년 두 번째 ‘핵실험’을 하고 ‘핵무장’을 강행했다. 미국은 다시 ▲경제지원 및 금융거래 중단 등의 경제 제재와 ▲핵물질 및 핵기술 이전 봉쇄 ▲무기수출 통제 ▲군수물자 판매 금지 등의 군사 제재를 가했지만, 이는 얼마 가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은 대중(對中) 견제를 위한 상대로 인도를 선택했다. 중국의 핵심 에너지 수송로인 ‘호르무즈-믈라카’를 봉쇄하기 위해서는 그 한가운데 있는 인도의 협력이 필요했다. 소련 붕괴 후 군사적 협력 관계가 절실했고, 중국의 남아시아 팽창 정책이 국가안보의 직접적인 위협이 된 인도와 ‘중국 견제’를 바라던 미국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인도를 ‘전략적 상대’로 규정했다. ‘핵 협력’은 물론 군사훈련, 미사일 방어, 반(反)테러 활동 등의 군사·안보 협력을 강화했다.
국방비 지출 규모 ‘세계 3위’
현재 인도의 전략적 가치는 지정학적 위치뿐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도는 최소 10위권 이내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공신력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글로벌파이어파워(GFP)란 단체의 발표에 따르면 인도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의 군사력을 갖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이른바 ‘굴기(崛起)’를 운운하며 국방력 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중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팽창하는 중국의 위협에 직면한 인도는 군 현대화를 위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인도와 중국은 카슈미르 동부의 라다크를 비롯한 접경 지역에서 군사 대치를 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인도의 ‘주적’인 파키스탄을 비롯한 인도 주변국 항구를 통해 인도양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인도는 매년 10% 이상 국방예산을 증액하고 있다. 인도의 국방비 지출 규모는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2023년도 인도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 3조1760억 달러의 2.3%에 해당하는 726억 달러(95조원)다. 이 중 4분의 1가량이 ▲군용기 ▲미사일 ▲전차 등 신(新)무기 도입에 투입된다.
인도는 세계 1위 무기 수입국이기도 하다. 스웨덴의 국제안보 싱크탱크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PIPRI)가 매년 세계 주요 무기의 수출입 동향을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 내용을 종합(2018~2021년)하면, 전 세계에서 무기 수입을 가장 많이 한 나라가 인도다. 해당 기간, 인도는 세계 무기 수입 시장에서 11%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신규 무기를 도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세계 방산 시장의 ‘큰손’ 사우디아라비아의 점유율이 9.8%인 점을 고려하면 인도의 무기 도입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4세대 전투기 400기 운용

▲인도 공군은 Su-30MKI 260기 등의 4세대 전투기만 400여 기를 보유·운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인도의 상비군은 145만 명이다. 이 중 육군이 125만 명인데, 일각에서는 인도 육군의 전투력을 ‘세계 4위’ 수준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도 육군 실상과 거리가 먼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육군이 1960년대 당시 중국과 치른 졸전, 육군은 물론 인도군 보유 무기체계 대다수가 노후화된 구(舊)소련제 또는 운용 안정성이 뛰어나지 않은 러시아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도 육군의 ▲기갑 전력 ▲포병 전력 ▲항공 전력은 객관적으로 우리 육군보다 떨어진다. 또 한반도 면적(22만㎢)의 15배에 이르는 국토 면적(328만7000㎢), 1만5080km에 달하는 국경선, 전쟁을 치른 중국·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지속하는 현실 등을 고려하면 인도 육군 운용 무기체계 수량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도 육군과 달리 인도 공군과 해군은 충분히 중국을 견제할 전력을 갖추고 있다. 인도 공군은 ▲프랑스제 미라주 2000 44기 ▲러시아 Su-30MKI(Su-30MK의 인도 면허 생산기) 260기 ▲러시아 MiG-29 UPG 65기 ▲프랑스 라팔 36기 등 4세대 전투기만 400여 기를 보유·운용하고 있다. 이들 인도 공군의 주력 전투기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력인 J-11(Su-27의 복제품, 225기)과 그 개량형인 J-16(250기), Su-MKK(Su-30MK의 중국 수출용, 255기)를 상대할 수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이 ‘5세대 스텔스 전투기’라고 선전하며 2017년에 실전 배치한 J-20 역시 Su-30MKI 레이더 또는 인도 공군 방공망에 의해 쉽게 탐지된다. 인도가 최초로 독자 개발한 ‘경전투기’ 테야스의 경우 엔진 성능이 미흡했지만, 최근 미국과 인도가 GE의 제트엔진 인도 생산에 합의해, 앞으로는 전투력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인도 공군은 전투기 외에 재규어 공격기 130기도 운용하는 등 상당한 수준의 공중 지원 전력을 갖추고 있다.
중국 해양 팽창에 맞설 인도 항모·원잠

▲인도는 2022년에 24억2000만 달러(3조1540억원)를 들여 독자적으로 건조한 항공모함 비크란트함(만재배수량 4만5000톤)을 배치했다. 현재 인도가 운용하는 항모는 ‘비크란트’와 ‘비크라마디티야’, 2척이다. 사진=뉴시스
인도 해군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항공모함 운용 경험을 갖고 있다. 인도 해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건조됐다가 종전 이후 방치된 영국의 마제스틱급 항모 허큘리스함을 인수했다. 함명을 ‘비크란트’라고 명명한 뒤, 1961년부터 운용했다. 해당 항모는 인도가 개입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1971년)’ 당시 서(西)파키스탄(현 파키스탄) 후방으로 들어가 본토를 공습하는 활약을 했다. 이후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서파키스탄은 동(東)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인도 해군은 1986년 영국 해군 운용 후 퇴역한 센토어급 항모 허미즈함을 인수해 ‘비라트’라고 명명하고 운용했다.
두 항모는 현재 퇴역했지만, 인도 해군은 여전히 항모 2척을 운용하고 있다. 인도 해군은 2013년 러시아로부터 구소련의 키예프급 고르시코프함을 들여와 ‘비크라마디티야(만재배수량 4만1000톤)’로 명명하고, 실전 배치했다. 2022년에는 24억2000만 달러(3조1540억원)를 들여 독자적으로 건조한 새로운 비크란트함(만재배수량 4만5000톤)을 배치했다. 인도 해군은 현재 6만5000톤급 ‘비샬함’ 건조를 준비하고 있다. 그 계획이 실현될 경우 인도 해군은 항모 3척을 운용하게 된다. 그럴 경우 인도 해군은 상시로 항모 전력을 투입할 수 있다.
인도 해군의 또 다른 강점은 ‘탄도미사일 원자력잠수함(SSBN·전략원잠)’이다. 인도 해군은 현재 아리한트급 잠수함 2척을 배치·운용하고 있다. 3번 함은 현재 진수해 내년에 취역하며, 4번 함은 올해 안으로 진수할 예정이다. 디젤잠수함과 달리 전략원잠은 수개월 동안 수면 부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은밀하게 적 인접 해역에 접근·잠복하다가 불시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어 대표적인 ‘비대칭 전력’으로 꼽힌다. 핵 공방전이 발생해 상호확증파괴(핵 보유 적성국이 선제 핵 공격 감행 시 핵으로 대응해 적을 전멸하는 보복 전략)가 되더라도 수중의 전략원잠은 여전히 기동·공격이 가능하다. 적의 코앞에 들키지 않는 ‘핵미사일 기지’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전략원잠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뿐이다. 결국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외에 전략원잠을 보유한 나라는 인도가 유일하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이 운용 중인 전략원잠은 6척이며, 우리나라는 전략원잠은커녕 적함 탐지·공격용인 ‘공격원잠(SSN)’조차 없다.
중국 전역 핵 공격 가능한 핵·미사일 전력
인도 군사력의 최대 강점은 바로 ‘핵전력’에 있다. 인도는 1962년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 1974년 5월, 인도 북동부 라자스탄에서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당시 소련은 ‘중소분쟁’ 이후 관계가 악화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친소’ 우호국인 인도의 핵개발을 묵인했다. 미국 역시 형식적인 제재만 부과했다.
이후 24년 동안 핵실험을 하지 않던 인도는 냉전 해체 이후 가중되는 ‘안보 불안’, 자신들의 ‘주적’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대응에 따라 1998년 5월에 2차 핵실험을 진행했다. 1998년 2차 핵실험에 대해 미국은 경제·군사 제재를 시행했지만, 상술한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부상하는 중국 견제’ ‘거대한 인도 시장 공략 필요성’ 등의 이유로 이를 금방 해제했다.
‘中 대부분 지역이 印의 핵 사정권’
인도가 보유한 핵무기는 현재 120여 기로 추정된다.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은 ‘핵연료 재처리 공장’ 4개소에서 생산된다. 관련 전문가들은 인도가 연간 생산하는 플루토늄 양이 핵무기 20여 개를 만들 수 있는 255kg에 달할 것으로 짐작한다. 인도는 다양한 핵 투발 수단 또한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Su-30MKI, 미라주 2000, 재규어 공격기 등 항공 전력 외에 자체 개발한 중거리 미사일이 있다.
인도는 1989년부터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지대지 탄도미사일 ‘아그니’를 개발했다. 현재 인도는 아그니-1·2·3·4·5를 실전 배치했고, 아그니-6을 개발하고 있다. 준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사거리 1000~3000km)인 아그니-1과 아그니-2의 사거리는 각각 1500km, 2500km다.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아그니-3의 사거리는 3500km다. 사거리가 4000km인 아그니-4는 인도·중국 접경지에서 발사할 경우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과 경제 중심지 상하이(上海)까지 타격할 수 있다.
중국에서 소위 ‘둥베이(東北) 3성’이라고 하는 지역을 제외한 중국 대부분 지역이 인도의 핵 공격 사정권에 든다는 얘기다. 사거리 5000km인 아그니-5는 2018년 시험발사 성공 후 실전 배치됐다. 아그니-5의 경우 국경 근처에서 쏠 경우 중국 전역을 때릴 수 있다. 현재 인도가 개발 중인 아그니-6은 사거리가 8000km에 달하는 대륙 간 탄도미사일(ICBM, 사거리 5500km 이상)로 3000kg에 달하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아그니-6은 핵탄두 여러 개가 각기 다른 목표를 타격하는 ‘다탄두 각개 목표 설정 재돌입 비행체(MIRV)’로 개발될 가능성도 있다.⊙
◆인도와 중국
“중국, 공자의 공동사회주의… 인도, 베다의 개인주의”
⊙ 양대 하천 중심으로 형성된 유구한 문명 ▲ 북방 유목민의 압력 ▲ 사회주의적 경제 운용 후 개혁·개방이라는 점에서 유사
⊙ 인도, 쿼드 가입국이면서도 親러시아 행보… 서구적 관점으로만 보면 낭패
⊙ 간디·네루, 영국의 근대성 수용한 自治 모색… 라쉬 베하리 보스·수바스 찬드라 보스, 일본 도움받은 독립운동 시도
⊙ 1962년 中印전쟁 이후 인도-러시아,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지정학적 구도 형성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2018년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신화/뉴시스
바야흐로 지정학적(地政學的) 대변동의 시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구 세계의 러시아를 향한 대대적 경제 제재로 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하나가 된 세계는 다시 두 세계로 갈라지려 하고 있다.
한 축에는 하나의 세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 서유럽, 일본이 뭉친 서구 진영이 있다. 이들은 지역 강대국들의 세력권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의 혼란을 빚어낸 1930년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편에는 제국과 문명의 전통을 내세우며 자신의 지역적 권역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진영이 있다. 핵심국인 중국, 러시아, 이란은 유라시아의 대륙적 교역망을 복구하여 바다를 장악한 서구 진영과는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두 세계, ‘서구’과 ‘유라시아’ 진영
‘유라시아 진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다른 제국과 문명 전통을 갖춘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서구가 오만하게 위대한 문명 전통을 지닌 당신들 나라에 모욕 주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의 제국주의적 시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브라질과 같은 지역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 두 진영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대세 속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점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나라가 있다. 인도다. 지난 4월,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에 오른 인도는 세계 문명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 오랜 분열과 혼란, 빈곤의 역사, 감히 다 담을 수 없는 내적 다양성과 그 모든 것을 묶어주는 기이한 통합력이 모두 공존(共存)하는 양면적인 국가다.
외교적으로도 인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더 우호적인 모습을 꾸준히 보이면서,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과 일본의 기획에 동참하는 등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단순히 ‘영성(靈性)을 찾을 수 있는 신비의 대륙’, 아니면 ‘여행조차 고려하면 안 되는 낙후하고 열악한 국가’로 외부인의 환상과 편견을 담아서 인식하기에는, 21세기에 그 중요성과 존재감이 더욱 커질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하여 한국은 여전히 인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인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두 개의 대하천을 중심으로 문명 형성

▲일본의 지식인 오카쿠라 덴신은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가 아시아를 연결하는 문명의 매개”라고 말했다.
한국인 입장에서 인도라는 생소한 코끼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대상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아마 한국의 바로 옆에서 거대한 영토, 14억의 인구, 수천 년의 문명과 역사를 뽐내는 중국만큼 좋은 비교 대상은 없을 것이다. 두 문명은 역사의 시원(始原)부터 탄생하여 전체 인류 문명의 중심에 자리했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세계를 형성했고, 서구 근대의 충격에 와해되었다가 재차 부흥하여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늘날의 세계를 만드는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 인도는 결코 일반화할 수 없는 차이도 많기에, 중국과의 비교는 인도를 더 명확히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두 나라의 위치를 살펴보자. 오늘날의 중국은 황하와 양자강이라는 두 대하천에서 탄생한 문명을 시원으로 하고, 대륙 동안의 계절풍에 따라 작물을 경작하며 농업을 발전시켰다. 인도는 중원(中原) 서쪽의 거대한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다. 인도 또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이라는 두 대하천을 기반으로, 계절풍에 의존하는 농경 문명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제자백가, 인도에서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라는 위대한 사상이 탄생했고, 이 사상들은 두 문명에서 형성된 제국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동시에 두 문명은 고립된 세계가 아니었는데, 특히 북쪽에서 그러했다.
중국은 항상 중원 북쪽의 강력한 유목민(遊牧民)과 투쟁하면서 제국을 지켜야만 했고, 때로는 유목민의 침략에 제국이 무너져 거대한 혼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인도는 중국만큼 넓은 면적에서 유목 세계와 마주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북방의 위협을 항상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카이베르 고개는 중국 북서쪽의 하서주랑(河西柱廊)과 마찬가지로 유목민이 인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목축민들은 고대(古代)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새로운 아리아 문명을 세웠는데, 이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이 오늘날 인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의 근원이다. 중국이 흉노, 돌궐, 거란, 여진, 몽골과 싸워야 했듯이 인도도 그리스인, 월지인, 돌궐인, 무슬림의 침입에 노출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던 중국과 인도를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어주기도 했다. 유목민 이전에도 중국과 인도는 티베트와 버마(미얀마)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으로 향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간헐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원에 펼쳐진 교역과 정복의 길을 통해 중국과 인도의 물산과 사람, 종교가 훨씬 큰 폭으로 오갔다. 특히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아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문명의 매개였다. 이를 간파한 일본의 지식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은 그의 대표작 《동양의 이상》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기도 했다.
“아시아는 하나다. 공자(孔子)의 공동사회주의를 가진 중국 문명과 베다의 개인주의를 가진 인도 문명을 히말라야가 가르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강력한 두 문명을 두드러져 보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눈 덮인 장벽조차도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향한 열망의 드넓은 확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중국의 바다, 인도의 바다
한편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남중국과 남인도는 두 문명의 중심지였던 북중국, 북인도와는 다소 구별되는 문화적 특질을 가졌고,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독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국과 종교는 결국에는 남북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리고 북쪽의 초원과 연결된 두 문명은 남쪽에서는 바다로 연결되었다. 여기서도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통해 동남아시아 전역의 주요 무역항에 접근해서 물산을 교역했다. 인도는 바다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의 바다가 믈라카에서 끝나는 것과 달리, 인도의 바다는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인도네시아까지 펼쳐진 거대한 인도양이었다. 계절에 따라 풍향이 달라지는 계절풍을 통해 인도 상인들은 페르시아 상인과 함께 드넓은 인도양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명의 기초를 제공했다.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이 교차한다는 의미에서 후대에 ‘인도차이나’라고 불릴 정도였다.
북쪽과 남쪽에서의 중요한 변화는 오늘날 두 나라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냈다.
육지에서 온 첫 번째 변화는 몽골 세계 제국의 등장이었다. 중국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에는 유목 세계와 정주(定住) 세계를 결합한 만주인들의 청(淸)제국이 다시금 도래했다.
인도는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북인도는 이미 그 이전부터 튀르크계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몽골의 영향력은 인도에서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와 티무르의 후예인 바부르가 북인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부르는 아예 북인도에 정착하여 몽골인들의 제국, 즉 ‘무굴제국’을 건국했다.
청제국과 무굴제국은 중국과 인도라는 정주 문명과 몽골, 튀르크, 만주의 유목민들이 하나로 융합한 ‘몽골 후계 제국’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두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위대한 건축과 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모든 유목민을 복속시킨 청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무굴제국은 북쪽 아프가니스탄과 남쪽 힌두 왕국들의 반격을 이기지 못하고 더 일찍 무너졌다.
식민 혹은 半식민의 체험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남쪽에서 찾아왔다. 그 이전까지 남쪽의 위협은 북쪽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강력한 대포와 함선을 갖춘 영국인들이 등장하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인들은 상업적 힘과 더 강한 군대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인도로 침투했고, 1세기 뒤에는 중국으로 침투했다.
더 결속력 있는 제국 정부를 지니고 있었고, 영국 및 유럽 열강으로부터 거리가 먼 중국은 그나마 허울뿐인 독립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청제국이 무너지고, 중국에 결속력 있는 통일 정부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중국은 다시금 분열의 수렁으로 빠졌다.
한편 통일된 제국을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언어와 종족, 종교 정체성(正體性)으로 나뉘어 있던 인도는 영국에 각개격파되어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정부가 자리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국과 인도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갔고, 한때 서구인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위대한 제국의 사람들은 생존 한계선에서 허덕이는 거대한 빈곤 인구로 추락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인들에게는 자부심과 오만함을 안겨주었고, 중국인과 인도인에게는 굴욕감, 그리고 자강(自彊)을 해야만 한다는 열망의 원천이 되었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일본의 오카쿠라 덴신이 아시아 연대(連帶)를 호소하며 글을 쓰는 것도 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거둔 승리는 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자강을 한다면 아시아 민족도 서양을 이길 수 있다는 증거였다.
일본 도움을 받으려 한 인도 독립운동가들

▲인도-일본 우애의 상징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
하지만 자강에 대한 태도는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허울뿐이지만 국가가 있던 중국에서는 일본과 같은 근대화를 어떻게 이룰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인도는 ‘민족성이 나약하면 완전한 식민지로 굴러떨어지는’ 반면교사(反面敎師)나 다름없었다. 생명 사상을 전개한 인도의 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24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망국(亡國)의 시인’이라며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식민화의 역사가 오래된 인도에서는 다른 방식의 자강운동도 나타나고 있었다. 영국은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현지 엘리트를 포섭하고, 그들을 제국의 근대 교육 체계로 통합하여 식민지의 안정적 통치를 노린 국가였다. 부유한 상인부터 하층 노무자까지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의 제국 네트워크를 통해 당시 세계 최첨단의 지식과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영국의 식민 통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영국의 근대성(近代性)을 인도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며 자치(自治)운동을 전개했다. 런던에서 공부하여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마하트마 간디,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가 대표적이었다. 간디는 일본에 맞서 싸우던 장제스(蔣介石)와 전쟁 중에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처절한 전투를 지휘하는 장제스가 보기에 간디는 타고르와 마찬가지인 ‘망국의 지식인’이었다.
한편 일본의 팽창은 두 나라에 완전히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유사한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서양으로부터 아시아의 독립을 구호로 내건 일본은 장제스를 중심으로 뭉치는 중국이 그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파괴적인 중일전쟁을 개시했다.
반면 인도에서는, 영국군을 무력(武力)으로 무찌른 일본에 감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며 일본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인도국민군이 결성되었다. 일본이 중국에서 잔인한 학살을 펼치는 동안에 일본의 아시아주의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도쿄(東京)에 망명한 인도의 민족 운동가 라쉬 베하리 보스, 인도국민군의 수장(首長)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도-일본 우애의 상징이 되었다.
독립과 내전, 근대화
하지만 ‘일본의 전쟁’은 어쨌든 두 나라가 제국주의로부터 최종적으로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을 거의 자력(自力)으로 방어해낸 장제스의 중국은 1945년에 국제연합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얻어내며 당당한 승전국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제국을 유지할 수 없음이 드러난 영국은 1947년에 ‘왕관의 보석’인 인도를 독립시켰다. 아시아의 두 거대 국가가 당당한 주권국으로서 세계 지도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외적(外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간 잠재되어 있던 내적 긴장이 폭발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냉전(冷戰)의 소용돌이로 들어간 중국은 항일전쟁 와중에 세력을 확대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과 싸우며 4년간 이어지는 국공내전(國共內戰)에 돌입했다.
인도에서는 무굴제국 말기와 영국식민지 시기에 누적되어 온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독립을 계기로 전면화되었다. 인도는 무슬림 다수 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교 다수 지역인 인도로 분할되었다.
중국의 내전과 인도의 분할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며 비극이 계속되었다. 한편 인도가 갈라지는 가운데 중국은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했으나, 장제스는 대만으로 이동하여 중화민국의 명맥을 잇겠다고 선언하며 ‘중국의 냉전’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도 두 나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어갔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대규모 농업집단화, 국가의 경제 장악, 대량 숙청이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화가 이어졌고, 영국의 통치 기구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기반으로 의회민주주의도 이루어냈다.
방식은 다소 달랐음에도 두 나라의 지도자인 마오쩌둥과 네루는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을 통해 빠른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물론 그 꿈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사회를 장악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시장 원칙을 수용하고 국가를 안정화시키는 데는 그다지 능력이 없었다. 네루는 사회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시장 경제의 도입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세계에 경제를 개방하고, 본격적인 발전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중국과 인도의 충돌

▲2020년 6월 18일 인도 수리야펫에서는 중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사망한 B. 산토시 바부 인도군 대령의 장례식이 열렸다. 사진=AP/뉴시스
한편 마오쩌둥과 네루는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외교적으로 같은 노선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비동맹 운동의 대의는 주권 국가로 독립한 중국과 인도의 국가적 이익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1962년에 중국과 인도는 카슈미르와 히말라야 인근의 국경 문제를 둘러싸고 무력 충돌을 벌였다. 군사적으로는 중국의 승리였으나, 인도는 소련에 접근하여 중국을 견제할 카드로 쓰고자 했고, 이는 중소(中蘇) 관계 악화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소련과 인도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처음에는 파키스탄과 나중에는 미국과 연계하여 지정학적 압박을 해소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 남아시아 지정학의 기본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흐름은 1980년대에 가속화될 더 큰 변화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중국은 더 나아가 아예 서구 자본주의에 합류하여 마오쩌둥식 개발의 실패를 극복하고 빠른 발전을 달성하기를 원했다. 인도에서도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이후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계획 경제를 포기하고 시장 경제로 이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막강한 사회 장악력을 바탕으로 전면적으로 발전을 향해 몰두한 중국에 비해서 인도는 여전히 국가 통합성이 약했고, 인프라도 부족한 상태였다.
힌두민족주의의 등장
인도가 경제 개방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독립 후 50년간 야권(野圈)에 머물러 있었던 힌두민족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했다.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계획 경제를 추구한 네루, 인도국민회의당과 달리, 인도인민당(BJP)은 힌두교를 인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으며, 힌두교와 시장 경제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경제사상도 발전시킨 터였다.
힌두민족주의자들은 마치 만주족을 몰아내고자 한 청말(淸末)의 한족(漢族) 지식인들처럼, 무굴제국과 이슬람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힌두를 중심으로 인도의 정체성을 다시 부여하고자 했다. 1992년 유서 깊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된 아요디아 사건, 2002년 구자라트 무슬림을 향해 벌어진 대규모 폭력 소요는 힌두민족주의 부상(浮上)에 따른 인도의 갈등을 예시하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 개방의 결과로 부상한 도시 중산층(中産層)들이 힌두 정체성을 적극 포용하면서, 힌두민족주의는 부상하는 인도의 미래를 상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들의 힘을 통해 구자라트 주지사로서 경제 개발과 폭력 소요 모두에 연관이 되어 있는 나렌드라 모디가 2014년에 총리로 집권할 수 있었다. 모디는 10년에 가까운 집권기 동안 고도성장을 이끌고, 강력한 권력으로 화폐 개혁을 강행하는 등 ‘민주적 스트롱맨’으로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의 탄생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인도-태평양을 내걸고 인도에 공을 들였다. 사진=AP/뉴시스
모디가 등장한 2010년대는 지정학의 격변기이기도 했다. 2010년 중국은 국내총생산에서 일본을 뛰어넘어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고, 2013년에는 시진핑(習近平)이 집권하면서 더욱 공세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외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고대 실크로드의 연결망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였다. 중국은 인도의 숙적(宿敵) 파키스탄과 유대(紐帶) 관계를 강화하여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프로젝트를 개시하고, 스리랑카에 항만을 개발하고, 미얀마에도 항구와 가스관을 연결하여 미국이 장악한 해상로를 우회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構築)하기를 원했다.
공교롭게도 중국이 일대일로 과정에서 진출한 핵심 지역들은 모두 인도의 지정학적 세력권에 포함되는 곳들이었다. 물론 인도는 건국 이래로 비동맹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에 중국과 같은 외교 노선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움직임이 장차 인도의 목줄을 죌 수 있다는 우려를 체감(體感)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우려를 간파하고 접근한 국가는 역시 중국의 부상에 심대한 우려를 느끼고 있는 국가, 일본이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중국이 보인 힘에 충격을 받은 결과, 여당은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교체되었고 일본은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외교 노선으로 회귀(回歸)했다. 2000년대부터 인도에 공을 들였던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종래의 아시아-태평양 대신 인도-태평양을 강조하며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도록 관점의 전환을 촉구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도 일본의 설득에 응하여 구체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이 부상하고, 호주도 참여하는 안보 협력체인 쿼드(Quad)가 탄생했다.
인도는 일본과 합작하여 고속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오카쿠라 덴신부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포괄하는 근대 양국의 관계를 재조명하며 협력에 박차를 가했다. 인도가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 인도, 일본의 공조(共助)를 가능하게 한 유리한 조건이 되어주었다.
인도의 다양한 얼굴
하지만 이것이 인도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새로운 안보 협력체의 일원으로 완전히 합류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은 인도가 러시아 문제에서 전혀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인도의 장구한 역사와 다양성을 생각하면, 인도의 노선을 무엇이라 하나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인도는 중인(中印)분쟁 당시에 소련의 도움을 받았고, 러시아와 오랜 우호 관계를 만들어온 나라였다. 동시에 인도는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국 중 하나로서,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불만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게다가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모디 입장에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 시장을 고려했을 때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온전히 몰두할 수도 없다. 때로는 개발도상국 클럽인 BRICS(브릭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일원으로서 중국과 공조하여 선진국을 압박하기도 한다. 동시에 부상하는 힌두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인도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얼마나 조화로울 수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되묻는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국가이자, 쿼드로 미국, 일본과 함께하는 인도의 이미지만 생각하면 상상하지 못할 모습들이다.
‘인도는 인도 편’
그래도 확실한 것 몇 가지는 있다. 우선 ‘인도는 인도 편’이라는 것이다. 인도 외무장관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는 인도가 서방이나 중국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인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다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다른 움직임에 오히려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인도를 적대한다면,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이 나라와 완전히 등을 지게 될 수도 있다. 서방, 중국, 일본, 한국을 가리지 않고 인도와 함께하지 않는 나라는 미래에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 낭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이 놀랍도록 거대하고, 다면적이고, 복잡한 나라를 더 차분히, 길고 넓은 시야 속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인도를 그렇게 보듯, 한국도 독자적인 인도관(印度觀)을 갖기를 기대해본다. 나아가 인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인의 심성을 형성한 불교 전통과 근대 아시아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교류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더 잘 비추어줄 것이다.⊙
◇이미지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바라나시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힌두교 최대의 성지다.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물을 성수(聖水)로 여긴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거나 시신을 화장(火葬)한다. 여기서 화장을 하면 아무리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1년 내내 이곳을 찾는 힌두교도들이 줄을 잇는다.
화를 낼 이유도, 서두를 까닭도 없다. 식당에서 숟가락을 안 주면 손으로 먹으면 된다. 기차를 놓치면 다음 차를 타면 된다. 천하태평(天下泰平). 모든 게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이들에겐 태어남도 죽음도 삶의 일부일 뿐, 무엇도 대수롭지 않다. 인도에서의 시간은 그래서 천천히 흐른다. 우리가 ‘빠름’의 경쟁력을 믿는다면, 인도는 1분(分)의 무게를 안다.
느긋하게 이룩한 성장은 놀랍다. 최근엔 세계 1위 인구 대국에 올랐다. 유엔인구기금(UNFPA)의 ‘2023년 세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인도 인구는 14억2862만여 명이다. 14억2567만여 명인 중국을 추월했다.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게 아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구의 대부분이 청년이다. 평균 연령은 고작 28세다. 25세 미만이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젊은 나라다.
▲인도의 봄맞이 축제인 홀리(Holi). 국적, 나이,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색 가루를 뿌리는 양만큼 행복이 온다고 믿으며, 사랑과 평화를 염원하는 축제다.
사람이 많은 인도는 땅도 넓다. 세계에서 7번째로 크다. 규모만큼이나 문화도 다채롭다. 흔히 요가, 명상, 힌두교, 카레를 떠올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만 40개에 달한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도 세계유산일지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거대한 인파와 먼지, 요란한 경적 소리와 불쾌한 악취. 길을 점령한 소와 개 또는 코끼리, 소매를 붙들며 물건을 파는 아이들. 자칫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무질서도 있지만, 다녀온 이들은 입 모아 말한다. 그 속에 묘한 질서와 깨달음이 흐르고 있다고.⊙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