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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7/ 07-01(월) 추미애의 변심 - 07-31(월) 아프리카 살리는 통일벼

상림은내고향 2023. 7. 27. 11:37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7/

07-01(월) 추미애의 변심

 

이현종 논설위원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당선돼 정계 입문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최초’ 기록이 많다. 최초의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판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서울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등이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 사상 최초의 TK 여성 당 대표, 첫 여성 집권 여당 대표, 최초로 임기를 채운 당 대표 등 이력을 보면 어느 정치인보다 화려하다. 5선에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이력을 보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젠 상대 당에 의해 ‘추나땡’이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다. 추 전 장관만 등판하면 ‘땡큐’라는 것이다. 그만큼 추 전 장관이 자기 당에는 해가 되고 상대 당에는 이익이 되는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장관 시절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노골적인 친정권 검사 인사,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 총장 징계, 한동훈 좌천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소설을 쓰시네” “장관 말을 겸허히 들었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지휘랍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명을 거역하고” 등의 권위주의적 발언들이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을 만든 ‘1등 공신’ 반열에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한 것이 ‘원죄’가 됐고, 당 대표 시절 인터넷 댓글 수사 요청이 ‘드루킹 특검’을 잉태시켜 결국,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낙마케 하는 단초도 마련했다.

한동안 2선 후퇴해 있던 추 전 장관이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하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추 전 장관은 라디오 방송에서 이 대표에 대해 “어떤 보호 장치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무저항 정신”이라며 “참 눈물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행자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했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것’이냐고 묻자 “네”라고 답했다. 반면 한 유튜브에 출연,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저에게 물러나 달라고 했다”고 비화를 공개했다. 노무현에 이어 문재인도 밟고 이 대표를 업고 내년 총선에서 6선에 도전하려는 포석일까.

 
 

07-04 과학의 정치화

 

이철호 논설고문

일본 오염처리수 방류를 놓고 정치권 입씨름이 어지럽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는 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는 과학보다는 일본 맞춤형 정치 보고서”라고 ‘선빵’을 날렸다. 귀에 익은 소리다. 2년 전 원희룡 제주지사(현 국토교통부 장관)도 “일본 입김이 센 IAEA의 주장을 넙죽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오염수 방류에 찬성했다는 국민의힘 주장은 ‘과장’이다. 2021년 정의용 전 외교부 장관이 “정부 간 협의와 과학적 근거 등이 충족되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직전 문 전 대통령이 주한 일본대사를 접견해 우려를 전달하고, 국제해양법재판소 제소를 지시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제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염 입증 책임이 한국 정부에 있고, 자칫 패소하면 일본 측 명분만 세워줄 수 있었다. 따라서 ‘입으로만 반대했다’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말 뒤집기는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2년 전 주호영 당 대표 권한대행은 “일본 따위에 오염수 방출을 합리화할 어떤 빌미도 제공해선 안 된다”며 각을 세웠다.

눈여겨볼 대목은 과학자들은 일관된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문 정부 때 전문가 의견을 종합한 한국원자력학회 보고서는 ‘△일본 다핵종제거설비(ALPS) 성능에 문제가 없다 △삼중수소는 생체에 농축되기 어렵다 △수산물 섭취로 인한 피폭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중수소가 해류에 따라 확산·희석되면 국내 수역에 유의미한 영향은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원자력연구원 황모 박사는 상부 승인 없이 보고서를 공개했다며 징계 처분을 받았지만, 학자적 신념을 지켰다. 당초 ‘견책’ 처분은 장관 표창을 받았다는 이유로 ‘경고’로 낮아졌다.

민주당 집권 시절에 유난히 과학자 탄압이 많았다. 문 정부는 탈원전으로 전기료가 오를 것이란 보고서를 쓴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 직원 5명 전원에게 징계를 먹였다. 탈원전을 흠집 낸 죄로 연구소장은 지방으로 좌천됐다.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원자력 전문가에게 ‘돌팔이’라며 돌팔매질을 했다. 낡은 이념에 과학이 포박당하는 ‘과학의 정치화’가 어른거린다. 진실보다는 자기 진영에서 예쁨 받는 게 우선이고, 지지자들도 믿고 싶은 것만 사실이라 여기는 시대다.

 

07-05 아부의 수준

 

김세동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수능 킬러 문항 출제를 비판하자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뜬금없다’는 지적과 함께 ‘교육 비전문가가 아무 데나 나선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여권이 방어에 나섰는데,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의 발언이 압권이었다. 그는 SNS 등을 통해 윤 대통령이 “조국 일가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도 해박한 전문가”라고 추어올렸다. 그는 “윤 대통령은 검찰 초년생인 시보 때부터 수십 년 검사 생활을 하며 입시 부정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뤘다”며 “입시 부정이 갖는 사회악적 의미를 포함해 대학 입시 제도 전반의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평가했다. 교육 전문가인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저도 전문가지만 특히 입시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수사를 하면서 깊이 고민하고 연구도 하면서, 저도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동조했다.

이에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비판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을 옹호해도 어느 정도껏 해야 하는데, 이건 거의 북한이나 구소련에서 ‘세상만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천재적 전략가 수령님’을 찬양하던 수준이라는 것이다. 검사가 대기업 배임·횡령 사건을 수사하면 경제 전문가, 병역 및 군수산업 비리를 수사하면 국방 전문가, 영화·음악·연예계 비리를 파헤치면 문화 전문가가 되느냐는 비아냥이 바로 나왔다.

권력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게 동서고금 정치인·관료들의 속성이겠지만, 듣는 사람 기함하게 하는 노골적인 아부는 외려 권력자에게 누를 끼친다. ‘저런 수준 낮은 아부를 할 수 있어야 살아남는구나’, 또는 ‘저 정도로 형편없는 아부를 좋아하는구나’ 같은 비난이 자신이 띄우려던 권력자에게 화살이 돼 날아간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6월 8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대사관저로 초청해 면전에서 우리 정부를 무례하게 공격하는 와중에 ‘시진핑 황제’에 대한 아첨을 슬쩍 끼워 넣었다. 그는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잘못된 베팅’을 하는 사람들은 “중국 인민들이 시진핑 주석님의 지도 아래 중국몽이란 위대한 꿈을 한결같이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도 모르며 그저 탁상공론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시 주석과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07-06 신구 연극 ‘라스트 세션’

 

김종호 논설고문

‘대상 인물에 대한 뛰어난 해석력, 독특한 화술, 완벽한 발성법 등을 바탕으로 작품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연기의 장인(匠人).’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원로 신구(87)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로 주변 인물·상황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 몸에 밴 배우’ ‘평범하면서 대체 불가능할 만큼 비범한 연기자’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연극·영화·TV 드라마 등을 넘나들어 온 그에겐 TV 예능·여행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 출연 후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배우’라는 수식어도 따라붙는다.

1972년 TV 드라마 ‘허생전’을 통해 탤런트로도 데뷔했으나, 그가 처음 연기를 시작한 것은 연극이다. 첫 작품이 1962년 연극 ‘소’였다. 극작가 유치진이 1934년에 쓴 희곡의 아버지 역할이었다. 이에 앞서 신구는 군 복무를 마치고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려고 준비했다. 그러던 중에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 1기생 모집 공고를 본 그는 “남이 써준 원고를 읽는 일보다 배우가 더 좋겠다”고 여겨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서울예술대학교 전신인 드라마센터에서 그가 만난 스승이 그 학교 설립자이기도 했던 유치진이었다. 본명이 신순기인 그의 예명도 유치진이 지어줬다. 그는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연극은 일종의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좋아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도 같다.”

그가 2020년 초연과 2022년 재연 무대에 섰던 연극 ‘라스트 세션(Last Session)’의 세 번째 공연에 나선다. 미국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실화를 바탕으로 희곡을 쓴 2인극이다.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 20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무신론자였다가 유신론자로 돌아선 C S 루이스. 그 두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39년 9월 3일 ‘신의 존재’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한다. 프로이트 배역의 신구는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죽음이 가까워져서 이게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다. 죽기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제대로 한번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다. 힘을 남겨 놓고 죽을 바에야 여기에 다 쏟고 죽자는 생각도 있다.” 서울 대학로 티오엠 극장에서 오는 8일 시작해 9월 10일까지 이어진다.

 

07-07(금) 中 기업의 ‘국적 세탁’ 꼼수

 

문희수 논설위원

미국 2위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빌 포드 회장은 얼마 전 “전기차 시장에서 미국은 아직 중국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 전기차의 미국 상륙에 대비하려면 중국 배터리 기업인 CATL과 손잡고 가격을 낮추는 등 준비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포드가 CATL과 기술제휴로 미시간주에 배터리 공장을 지으면서 지분 100%를 갖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규제를 우회하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발언이다.

테슬라 역시 중국 기업에 IRA 규제 우회로를 열어줬다는 논란을 빚고 있다. 이 회사 전기차(모델3)는 CATL의 배터리를 장착했지만, 미 에너지부가 보조금 100% 지급을 결정했다. 테슬라는 일부 광물과 부품을 미국 등에서 자체 조달해 CATL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산 배터리를 견제하려고 만든 IRA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사례에서 보듯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규제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 4대 배터리 업체(고션하이테크)는 미국에 24억 달러의 부품 공장을 추진하면서 사실상 ‘국적 세탁’까지 했다. 이 회사는 중국에 본사가 있지만, 스위스에 상장했고, 독일 폭스바겐이 최대 주주로 변경돼 중국 회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산업을 확대하면 더 심하다. 중국의 패스트패션 앱 쉬인은 중국 난징(南京) 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했다. 이 회사와 1, 2위를 다투는 앱 티무는 본사를 미국 보스턴에 설립했고, 이 회사의 모기업도 상하이(上海) 본사를 아일랜드로 옮겼다. 기업 경영자들이 홍콩·캐나다·일본 등의 영주권이나 시민권 취득을 시도한다는 보도도 나온다.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미국이 경쟁력이 뒤진 탓에 어쩔 수 없이 중국에 편법으로 우회로를 열어주는 측면도 있다. 첨단 반도체도 미국의 약점으로 꼽힌다. 미 반도체산업협회장은 최근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독자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대만·일본 등과의 연대 강화에 무게를 둔 발언이지만, 중국에 ‘뒷문’을 열어 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려고 줄을 선 세계 각국의 회사가 400개를 넘어 모두에 지원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 업체로선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늘어 간다.

 

07-10(월) 복날의 보양식

 

박민 논설위원

내일은 초복(初伏)이다.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夏至)로부터 세 번째 경일이 초복이다. 경일이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등 천간(십간) 가운데 ‘경’이 들어가는 날로 10일에 한 번씩 돌아온다. 중복(中伏·7월 21일)은 하지로부터 네 번째 경일이다. 그러나 말복(末伏·8월 10일)은 입추(立秋) 후 첫 번째 경일이어서 중복과 말복 사이는 20일 만에 오기도 한다.

경일을 복날로 삼은 것은 가을을 상징하는 경일을 복날로 정해 더위를 극복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의 복(伏) 자를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철 서늘한 기운이 여름의 더운 기운에 제압당해 세 번 복종한다는 뜻으로 삼복(三伏)이 정해졌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일 년 중 가장 더운 때를 ‘개의 날(Dog days)’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북반구의 한여름에 큰개자리 시리우스성이 태양에 근접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秦) 덕공 2년(기원전 676년) 처음 복날을 만들어 개를 잡아 열독(熱毒)을 다스렸다. 이열치열이다. 동의보감도 개고기를 화(火)의 기운이 가장 강한 음식으로 꼽았다. 다음이 닭고기인데, 화의 기운이 개고기에 미치지 못해 화의 기운이 가장 강한 인삼을 더해 삼계탕을 만들었다. 마늘도 화 기운이 강해 닭고기와 어울린다. 그러나 개고기와는 합이 맞지 않는다. 보신탕집에서 마늘 대신 양파를 주는 이유다. 일본에서도 토용축일(土用丑日)이라는 풍습이 있다. 토용이란 계절이 바뀌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직전 18일간을 의미한다. 입추 전 토용에는 장어를 먹는다.

올해는 이른 폭염으로 닭고기 등 보양식 매출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고물가로 집에서 보양식을 즐기려는 소비자가 늘어 한 전자상거래 업체의 생닭 판매는 무려 1489%나 증가했고 또 다른 업체의 삼계탕 간편식 매출도 289%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신체 활동이 많이 줄었고 영양 과잉이 문제가 되는 만큼 여전히 동물 단백질과 지방 섭취가 필요한지 생각해 볼 때가 됐다. 더구나 지난 6월 기준 닭고기 소매 가격과 삼계탕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고 하니 올해부터 복날 보양식으로 저지방 고단백의 생선과 제철 과일을 선택해 보는 것은 어떨까.

 

07-11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진실

 

오승훈 논설위원


얼마 전 전시가 끝난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의 ‘화가의 벗: 시대공감’전에서 작은 공간이 오래 발길을 붙들었다. ‘은지화의 방’. 동시대의 화가 윤중식, 박수근과 함께 이중섭(1916∼1956)이 담뱃갑 은박지(銀箔紙)에 새긴, 아니 그린, 손바닥보다 작은 8×15㎝ 안팎의 작품들이 걸렸다. 비극과 궁핍의 시대였던 6·25전쟁 피란기인데, 천진무구한 아이와 피안(彼岸)의 가족을 그렸다. “은종이에 송곳으로 선을 북북 그은 위에 암비(엄버·갈색 안료)색을 칠한 뒤 헝겊으로 닦아내면 송곳 자국의 암비 색깔이 남고 여백은 광휘로운 은색 위에 이끼 낀 듯 은은한 세피아(짙은 갈색)가 아롱지는 중섭 형의 그림은 가장 창의적이요, 독보적 마티에르(재질감)다”(화가 박고석·1917∼2002).

1952년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다시 부산에 온 뒤 일본인 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무척 외로웠다. 그걸 안고 시대의 고통을 넘게 해준 건 오직 그리는 것뿐이었나 보다. 주요 작품들이 이 시기 전후에 그려졌다. 40세에 무연고 사망자로 방치된 이중섭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준 오랜 벗, 시인 구상(1919∼2004)은 “중섭은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고 했다.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표랑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박고석의 판잣집에서도 그렸다. 미군 부대 쓰레기장에서 수거한 담배 은박지가 캔버스였다. 배고픈 밤이면 박고석의 아내가 수제비를 끓였다. 땔감이 귀했고, 돌돌 만 은박지가 불쏘시개였다. 이중섭의 은지화들이 활활 타들어 갔다. “그땐 몰랐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럽고 값비싼 수제비였다”(미술 평론가 황인).

남아 있는 이중섭의 은지화는 300점 정도인데,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도 3점이 있다. ‘낙원의 가족(Family in Paradise)’ ‘요정의 나라(Fairyland)’ ‘신문 읽는 사람들(People Reading the Newspaper)’이란 제목이 붙여졌다. 1955년 전시회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아서 맥타가트가 인상 깊게 보고 구입해 기증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라고 했다. 은지화가 그러하다. 

 

07-12 폴란드의 미국 사랑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카에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폴란드는 제일 먼저 추모 촛불 집회를 열고 부상 미국인들을 위한 헌혈을 제안했다. 2001년 9·11테러 당시 주폴란드 미국대사였던 크리스토퍼 힐은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에서 ‘9·11테러는 유럽 시간으로 오후 3시에 발생했는데 4시부터 대사관 정문 앞 거리에 시민들이 손에 촛불과 꽃을 들고 모여 추모행사를 지속했고, 폴란드 정부는 뉴욕시에 혈액 제공을 제안하며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돕겠다고 밝혔다’고 썼다. 미국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애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폴란드는 2003년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며 자유이라크군(FIF)을 훈련시킬 때 기지를 제공한 나라다. 이라크 침공 직후 해양 원유시설 장악 작전 때엔 특공 대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름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한 뒤엔 더 적극적으로 대미 구애를 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에는 ‘미군 주둔을 위해 돈을 낼 수도 있다’며 유혹 작전을 펴기도 했다. 폴란드의 열망은 지난 2월 현실화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부 최전선인 포즈난에 첫 미군 영구 주둔기지 캠프 코시치우슈코가 문을 열었다. 미 육군 제5군단의 폴란드 본부인 이 기지는 폴란드에서 순환 근무하는 1만여 미군에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작지만 중요한 군 사령부가 설치됨으로써 꿈이 실현된 것이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폴란드인의 대미 호감도는 93%로 조사 대상인 주요 23개국 중 1위다. 폴란드는 지난해에도 퓨리서치 조사에서 대미 호감도 91%로 1위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폴란드의 미국 사랑은 더 강해진 것이다. 한국과 폴란드에서 대사로 활동했던 힐은 “국가 생존을 위해선 영토 야욕이 없는 멀리 떨어진 강대국과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보인 오만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중국을 받들지만, 폴란드는 초당파적으로 미국 편이다. 주변 강대국에 분할되며 국권까지 잃었던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13∼14일 방문하는 폴란드는 그래서 연구 대상이다.
 

 

07-13 TV 수신료 흑역사

 

이현종 논설위원

어릴 적 필자 살던 마을엔 TV 수상기가 4∼5대 있었다. 경찰 파출소, 면사무소에 각각 한 대가 있었고, 동네 유지 2∼3 집에 여닫이문이 있는 흑백 TV 수상기가 있었다. 저녁이면 TV가 있는 집 마당에는 동네 남녀노소 20∼30명 몰려 극장을 방불케 했다. 인기드라마 ‘여로’(1972년)나 김일의 프로레슬링, 홍수환의 복싱을 방송할 때면 마당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만 해도 월 시청료가 100원 정도였는데, TV가 있는 집은 부자여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월 시청료는 2500원으로 인상됐고, 흑백 TV 시청료는 1984년 폐지됐다. 이후 시청료는 1989년 ‘수신료’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신료 거부운동은 1982년 전라남도 농촌에서 처음 시작됐다. 농촌이 황폐화하는데 마치 풍요한 것처럼 KBS에서 표현하는 데 대해 농민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됐고, 난시청이 해결되지 않는 것도 큰 이유였다.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주축으로 확산했고, 1986년 1월 종교단체 주관하에 범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다. 9시 메인 뉴스는 시보가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라고 시작한다고 해서 ‘땡전 뉴스’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당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도 KBS 안 보기 운동을 전개했고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수신료 거부운동의 결과, 1984년 1256억 원까지 늘어났던 수입은 1985년 1196억 원, 1986년 1012억 원, 1989년에는 790억 원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4년 당시 홍두표 KBS 사장 시절 수신료 징수를 전기료에 합산할 수 있도록 하는 방송법 시행령이 통과되면서 안정적인 수신료 수입이 보장됐다. 현재는 연 6900억 원대의 수신료를 거두고, 한전은 6.15%의 대행수수료를 챙기는 구조다. 그러나 정권의 영향을 많이 받는 KBS는 늘 수신료 거부운동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정권이 KBS를 장악하고 있다 보니 이뤄지지 않다가 윤석열 정부 들어 12일 시행령 개정으로 29년 만에 통합 징수가 끝나게 됐다.

국민의 압도적인 찬성 여론에 야당도 예전에 분리 징수를 주장한 바 있어 반대할 명분이 없다. 1억 원대 연봉에 보직이 없는 직원이 1500여 명에 달하는 등 구조조정과 개혁을 외면하고 ‘철밥통’을 자신했던 KBS의 자업자득이다.

 

07-14(금) “일본 부활, 중국 침몰”

 

이철호 논설고문

주가지수는 올 들어 30% 올라 주요국 중 1위다. 1분기 경제 성장률은 0.7%로 한국을 압도하고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2%나 된다. 경기 회복을 알리는 일본 경제 지표들이다. 일본 정부는 신중하다. 반짝 반등에 속아 오랜만에 잡은 디플레이션 탈출 기회를 놓칠까 긴장을 풀지 않는다.

일본이 요즘 신경을 곤두세우는 지표는 서비스 물가지수다. 3% 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국제 고유가에다 엔화 약세 등 비용 상승에 따른 착시현상이라며 선을 긋는다.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인 서비스 물가지수가 올라야 임금 상승→소득 증가→수요 증가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신호라는 것.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6년 ‘임금을 올리자’는 관제 캠페인을 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드디어 올해 봄부터 주요 노동조합 평균 임금인상률이 3.8%를 웃돌자 일본 열도가 환호하고 있다. 화려한 부활이다.

중국 경제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다. 6월 생산자 물가지수가 -5.4%로 추락하면서 더블딥(이중 침체) 공포가 커졌다. 성장 엔진인 수출은 5월 -7.5%에 이어 6월에는 -12.4%로 곤두박질했다. 국내총생산(GDP)의 297%나 되는 총부채도 위기의 뇌관이다. 두 달 전까지 ‘피크 차이나’가 유행어였다면 지금은 “침몰” “추락” 같은 섬뜩한 표현마저 등장한다. 서방 언론들은 “중국의 미래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는 비관적 보도 일색이다.

한국은 ‘슈퍼 엔저’와 ‘대중 무역 감소’의 이중고를 안게 됐다. 그나마 다행은 기존 상식이 연일 뒤집히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엔 약세에도 무역 적자가 확대일로다. 수출이 느는 것보다 고유가와 엔 약세로 수입이 더 많이 늘어나 ‘슈퍼 엔저’의 부담이 커진 것이다. 미·중 갈등도 미묘한 기류다. 최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중국을 방문해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한국은 이런 불확실성의 바다 속을 다시 한번 헤쳐 나가야 한다. “항구에 머물러 있는 배는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정박해 있는 배는 배가 아니다”는 운명론을 믿으며…. 다행히 얼마 전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은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큰 물고기(big fish)’”라며 자신감을 북돋워 주었다.

  

07-17(월) 탈·복당, 민주당 트렌드

 

김세동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의석을 언급할 땐 꼭 국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야 한다. 국회의원의 탈당과 복당이 수시로 일어나 의석수가 자주 변하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 의석은 168석이다. 얼마 전까지 167석이었는데, 김홍걸 의원이 이달 7일 복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인 김 의원은 재산 축소 신고와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2020년 9월 제명됐다가 복당했다. 비례대표라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는 김 의원을 살리기 위해 당이 출당시킨 것으로 당시에도 ‘특혜 꼼수’ 논란이 있었는데, 의혹이 해소된 게 없고 심지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2021년 벌금 80만 원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았는데, 총선을 9개월 앞두고 복당시켜 당 안팎의 비난이 쇄도했다. 특히, 김 의원의 복당은 당 혁신위원회가 의원 불체포특권 포기에 이어 꼼수 탈당 방지 대책을 준비 중인 가운데 이뤄졌는데도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이에 대해 언급도 않아 존재 이유를 스스로 몰각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적 비난이 이는 대형 사건에 연루된 의원을 탈당(비례대표면 출당)시켰다가 여론이 잠잠해지면 복당해주는 일이 민주당에서 쉽게 반복되고 있다. 정당 최고의 징계가 편의적으로 장난처럼 일어나고 있다. 가상화폐 논란과 관련해 김남국 의원이 지난 5월 14일 탈당하면서 당 차원의 진상 조사와 윤리 감찰은 사실상 중단됐다.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에 연루된 송영길 전 대표와 윤관석·이성만 의원도 5월 3일 탈당했다. 검수완박 법안의 법사위 단독처리 과정에서 안건조정위 무소속 몫을 노려 민형배 의원이 지난해 4월 탈당했다가 올해 4월 복당한 것은 꼼수의 결정판이었다.

2021년 6월 국민권익위로부터 부동산 투기 의심을 지적받은 지역구 의원 5명은 송영길 대표의 ‘탈당 권유’를 거부했고, 5명은 탈당계를 냈으나 수리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비례대표인 윤미향·양이원영 의원은 제명돼 의원직을 유지했다. 양이 의원은 4개월 뒤 복당했다. 제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을 탈당하거나 출당당한 의원은 11명(박완주·양정숙·양향자·이상직 등)이나 된다. 문제가 터지면 일단 탈·출당했다가 슬그머니 복당시키는 게 민주당의 트렌드가 됐다. ‘회전문정당’ ‘들락날락당’ 비아냥이 나와도 개의치 않는다.

 

07-18 ‘라이브 황제’ 이승철

 

김종호 논설고문

“일류 가수는 무심하게 노래하지만, 듣는 사람이 감동한다. 이류는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같이 감동한다. 삼류는 부르는 사람이 저 혼자 감동한다.” 발라드부터 록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보컬의 신(神)’ ‘라이브 공연의 황제’ ‘평범한 노래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의 목소리’ ‘발성의 교과서’ 등으로 불려온 가수 이승철(57)의 말이다. 김태원이 이끄는 록 밴드 부활의 제2대 보컬로 1985년 데뷔해, 이듬해에 나온 부활 제1집부터 참여한 그와 부활을 동시에 대표하는 명곡 중 하나는 ‘Never Ending Story’다. 김태원 작사·작곡인 2002년 부활 제8집 ‘새, 벽’의 타이틀 곡으로, 시작은 이렇다. ‘손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 오늘도 넌 숨 쉬고 있지만/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 위엔/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그 8집은 1989년 솔로 가수로 독립했던 그가 부활과 재결합하며 냈다.

그와 그 노래는 2011년 문화일보의 ‘지난 20년간 최고의 가수·노래’ 설문 조사에서 1위 조용필과 조용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이어 각각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의 명곡은 많다. 2000년 개봉된 김영준 감독의 영화 ‘비천무’ OST인 이근상 작사·작곡 ‘말리꽃’도 있다.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짙은 어둠을 헤매고 있어/ 내가 바란 꿈이라는 건 없는 걸까’ 하고 시작하는 노래다. 그가 작사하고 윤일상이 작곡한, 2004년 MBC 드라마 ‘불새’ OST인 ‘인연’도 있다. 박광현 작사·작곡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는 ‘소리 내지 마/ 우리 사랑이 날아가 버려/ 움직이지 마/ 우리 사랑이 약해지잖아/ 얘기하지 마/ 우리 사랑을 누가 듣잖아’ 한다. ‘희야’ ‘사랑하고 싶은 날’ ‘소녀시대’ ‘서쪽 하늘’ 등도 아름답고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가 그의 음색에 실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노래다.

그가 전국 20개 도시 순회공연 ‘Retro Night’를 지난 6월 17일 시작했다. 3년 만이다. 서울 공연은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오는 22일 열린다. 음악 외적인 의미도 큰 공연이다. 수익금 전액을 그가 13년째 이어온 ‘아프리카 학교 건립사업’에 기부한다고 한다. 환경이 열악한 현지에 10년간 학교 10개를 짓기로 했으나, 6개 건립 후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던 것을 계속하기 위한 공연인 셈이다.
 

 

07-19 성큼 다가온 SMR 시대

 

문희수 논설위원

차세대 소형원전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소형모듈원자로(SMR)다. 얼마 전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상반기에 확정될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에서 추진할 신규 원전으로 SMR을 유력한 대안으로 시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다. 이와 함께 정부는 지난 10일 2030년대 수출을 목표로 공기업과 민간기업이 대거 참여하는 한국형 SMR 사업단도 출범시켰다.

SMR은 기존 원전보다 장점이 많다. 우선 중대사고율이 기존 원전은 10만 년의 1∼2회꼴인 데 비해 최소 10억 년의 1회꼴, 최장 30억 년의 1회꼴에 불과하다. 크기도 100분의 1이어서 필요한 공간이 반경 230m로, 대형 원전(반경 30㎞)보다 훨씬 작다. 대형 원전은 부품이 100만 개여서 짓는 데 5년 걸리지만, SMR은 부품이 1만 개여서 2년 6개월이면 된다.

현재 SMR 건설을 논의 중인 국가는 20곳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지만 SMR 업체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설립자가 세운 테라파워,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로부터 2020년 유일하게 설계 인증을 받은 뉴스케일파워 등이 꼽힐 정도다. 테라파워는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기간에 한국수력원자력 등과 업무협정(MOU)을 체결했다. 뉴스케일파워는 이보다 진도가 빠르다. 지난 5월 경북 울진군과 2030년까지 SMR 6기를 완공하는 내용의 MOU를 체결했다. 이 원전은 4인 가족 기준 9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SMR은 국제적으로 안전성 검증이 진행 중이어서 상용화된 것은 없다.

사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2012년 한국형 SMR인 스마트를 개발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에 막혀 허송세월했다. 원전은 가장 싼 청정에너지다. 탄소 배출도 제로(0)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의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은 최근 “AI 시스템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해 원자력 발전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 SMR 개발 스타트업(오클로)의 대주주이자 이사회 의장이기도 하다. 광우병·사드·오염수와 함께 원전은 과학적 접근이 필수다. 미국과 영국·프랑스·폴란드 등 유럽이 무지해서 원전을 짓겠는가. SMR은 2035년 600조 원 이상으로 커질 거대 유망 시장이다. 원전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07-20 고속도로 제한속도

 

박민 논설위원

요즘 승용차 계기판의 최고속도는 시속 250㎞를 넘는다. 반면, 국내 도로에서 법적으로 허용되는 최고속도는 120㎞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고속도로 제한속도는 편도 1차로의 경우 80㎞, 편도 2차로의 경우 100㎞다. 경찰청장이 지정·고시한 노선과 구간에서는 120㎞지만, 시행되는 곳은 없다. 110㎞도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중부고속도로의 경우 전 구간에서 허용되지만 총 길이가 416㎞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천안 IC∼양재 IC에서만 가능하다. 유럽의 제한속도는 대부분 120㎞ 이상이다. 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 등이 120㎞, 프랑스·그리스·네덜란드·체코 등은 130㎞고 폴란드와 불가리아는 140㎞에 달한다. 독일의 경우 일부 구간에서는 속도 제한이 없지만, 130㎞를 권장하고 있다.

제한속도가 낮은 것은 산이 많은 지형 때문이다. 제한속도의 기준이 되는 설계속도는 도로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조건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운전 실력을 지닌 운전자가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는 ‘특정 구간 최대속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전체 국토의 63%는 산림이다. 이는 알프스 산맥으로 유명한 스위스보다 높은 수치다. 상대적으로 직선 구간이 적고 곡선 구간도 완만하게 건설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설계속도는 1979년 국토교통부령으로 120㎞로 규정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모든 운전자가 최상의 조건에서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만큼 제한속도는 설계속도보다 10∼20㎞ 낮게 설정된다. 따라서 자동차 성능이 좋아져도 기존 고속도로의 인프라를 개선하지 않으면 제한속도를 높이기 어렵다. 실제로 1970년 서울∼부산 전 구간이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설계속도가 100∼110㎞에 불과했다.

2025년 완공 예정인 서울∼세종 고속도로는 안성∼용인 구간(34.1㎞) 제한속도를 140㎞로 높이기로 해 관심을 모았다. 국토부가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한국도로공사는 원래 계획을 밀어붙였다. 최근 감사원은 해당 구간 감사 결과,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도 공사를 강행해 도로공사가 297억 원의 예산을 낭비했다’고 밝혔다. 자동차 성능과 도로 여건 간의 괴리를 좁히는 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07-21(금) 미국의 K-뷰티 바람

 

이미숙 논설위원

“요즘 서울은 경제·기술·문화적으로 발전돼 미래로 가는 도시인 듯합니다.” “맞아요, 서울에서의 일상은 짜릿하고 생생한 비디오게임 같습니다.” 서울시 홍보 광고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 대화는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프로그램 온 포인트(On Point)가 최근 방송한 ‘어떻게 한국은 아름다움(美)의 세계 중심이 됐나’는 토크쇼의 한 대목이다. 진행자가 “서울은 파리-뉴욕-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세계 뷰티 산업의 중심”이라고 하자, 출연자인 NPR 서울 특파원 출신 엘리스 휴 기자가 서울 체험을 비디오게임에 비유한 것이다.

이 토크쇼에서는 K-드라마와 K-무비, K-팝 덕분에 한국 스타와 아이돌은 아름다움의 새 기준이 됐고, 이들처럼 날씬하고 예쁘게 되길 꿈꾸는 사람들은 한국산 화장품을 산다는 내용이 다뤄졌다. 우리나라 화장품은 한류 붐과 더불어 2012년 수출액이 수입액을 넘어선 이후 무역 흑자 품목이다.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을 중심으로 한 화장품 수출액은 2021년 기준 91억 달러를 기록해 프랑스(170억 달러)와 미국(95억 달러)에 이어 3대 화장품 수출국이 됐다. 한중 관계 악화 이후 중국 시장은 쪼그라들고 있지만, 미국·캐나다·일본에 이어 중동, 남미 등지로 수출이 확장되며 화장품은 한류를 대표하는 상품이 됐다. 인기도 스마트폰에 버금간다.

한국 화장품의 매력은, 달팽이 점액이나 인삼 등 혁신적인 원료 사용은 기본이고, 클렌징-스킨-에센스-로션-주름 예방 크림-BB크림-색조 화장으로 이어지는 얼굴 용품에 두피·보디 등 신체 부위별로 특화된 다양한 가격대의 스킨 케어 제품이 있다는 점이다. 휴 기자는 최근 저서 ‘결점 없이 완벽한(Flawless):K-미용산업, 소비주의, 무결점에 대한 열망’에서 “한국인들은 여드름 자국과 주근깨까지 없애며 흰 도자기 같은 얼굴을 만들고, 몸매 관리를 위해 보톡스 시술과 성형 수술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썼다. 미국 저널리스트의 한국 예찬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K-드라마, K-무비, K-팝, K-푸드, K-뷰티 덕분에, K브랜드는 최상급으로 격상되는 기류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행동해 나라 망신을 자초하는 의원들이 바뀌면 K-정치도 가능할 텐데 내년 4월 총선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07-24(월) ‘맞수 정치’ 실종

 

오승훈 논설위원

여야 정치 원로 11인이 지난 17일 한국 정치 복원을 촉구하면서 ‘3월회’라는 모임을 발족했다. 신영균 국민의힘 상임고문과 권노갑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필두로 강창희·김원기·김형오·문희상·박희태·임채정·정세균·정의화 등 전직 국회의장 8명과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참여했다. 정치권의 살풍경이 오죽했으면 원로들이 나섰을까. 정대철 회장은 “정치가 실종됐다”면서 독선, 힘과 진영 논리 고착, 팬덤 극단화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문희상 전 의장은 흥미로운 요인을 짚은 적이 있다. “요즘 정치인들은 공천을 받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정치를 한다. 그러니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 난 거다. 정당 관계라는 건 죽여야 하는 적이 되면 안 된다. 이상적인 것은 라이벌 관계여야 한다.” 정치 맞수는 사라지고, 정적(政敵) 관계만 남았음을 지적한 것이다.

맞수는 경쟁하면서도 상대를 인정하는 관계다. 맞수 중의 맞수가 정립(鼎立)했던 YS·DJ·JP의 ‘3김(金) 시대’에 늘 화제가 됐던 또 다른 맞수는 박희태 전 의장과 박상천(1938∼2015) 전 민주당 대표다. 갑장에 같은 대학 동기로 사법고시(13회)·국회 입성(13대)·주요 당직은 물론 법무부 장관 이력까지 똑같았는데 출신 지역과 소속 정당, 생각, 스타일, 성격이 달랐다. 1997년 각기 한나라당과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를 맡아 협상하던 시절, 박 전 대표가 법전을 들고 담배를 퍽퍽 피워대는 날엔 박 전 의장은 늦도록 폭탄주를 마셨다. 자주 “동기라 부르지 말라”면서 반말 섞어 말다툼을 벌였지만 둘은 서로 추켜세워줬다. 건곤일척의 대선 구도에서 후보 앞에서 대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의정을 이끌었다. 정계 은퇴도 같은 해, 2012년에 했다. 2015년 박 전 대표가 세상을 뜨자 박 전 의장은 “나는 한 마리 짝 잃은 거위” “우린 공격적 맞수가 아닌 협력적 맞수였다”고 했다.

그때도 모략과 비방, 숱한 몸싸움과 날치기, 장외투쟁이 벌어졌으나 그 와중에도 협상과 타협이 있었다. 그래서 맞수끼리의 담판, 결단이 벼랑에서 정치를 구했다. 취임 4개월이 넘은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아직 술, 밥 타령 속에 회동하지 못하고 있다. 맞수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내인지는 모르지만, 그건 정치인으로서 직무유기다. 

 

07-25 YS와 김남국

 

이현종 논설위원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가 선택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1979년 9월 16일 자 뉴욕타임스(NYT)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인터뷰가 실렸다. 유신 독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이 인터뷰는 박정희 대통령과 민주공화당을 크게 자극했다. “김일성을 만날 수 있다”는 YS의 발언으로 박 대통령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해 10월 3일 여당인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합동조정회의에서 YS 인터뷰를 문제 삼아 반민족적 사대주의, 매국적 발언 등 9개 조항을 이유로 의원직 제명안을 상정시키기로 하고, 이튿날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막은 채 국회 별실에서 양당 의원 159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지명할 수 있었다. 전체 의석 231명 중 대통령이 지명한 유신정우회 의원이 77명, 여당인 공화당 의원이 68명이었기 때문에 여당과 무소속을 합쳐 의원 3분의 2 찬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YS 의원직 제명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YS는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라고 말했고, 유명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제명에 대한 반발로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는데, 공화당은 선별적 수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가 인근 마산·창원으로 이어지면서 ‘부마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지금까지 헌정사에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YS의 의원직 제명 사례를 무소속 김남국 의원이 깰지 주목된다. 그동안 일부 의원의 제명 징계안이 올라가긴 했지만, 자진 사퇴해 표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임위와 본회의 중 코인 투자 혐의로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가 제명(재적 3분의 2 찬성)을 권고한 김 의원은 자진 사퇴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독재에 저항하다 제명된 YS와 코인 투자하다가 제명될 처지에 놓인 김 의원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국회의 수치다. YS와 달리 만약 김 의원을 제명하지 않으면 이젠 국민이 들고일어날 태세다.

 

07-26 빅테크 삼일천하

 

이철호 논설고문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살얼음판이다. 지난해 11월 나온 인공지능(AI) 챗GPT는 2개월 만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지난달 트래픽이 전월보다 9.7% 하락하고 이용자의 사용 시간도 8.5% 줄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서 AI로 숙제하는 수요가 감소한 이유가 크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도 설계도와 수율 등 민감한 내용이 유출되자 즉각 챗GPT 접속을 차단했다. 여기에 구글이 바드, 마이크로소프트가 빙, 메타가 라마2 같은 대항마를 내놓았고, 애플·아마존·테슬라도 AI를 자체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상위 7개 빅테크가 모두 참전하면서 챗GPT 독주는 7개월 만에 발목이 잡혔다.

스레드는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최고경영자(CEO)들끼리 “한판 붙자”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출시 5일 만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으나 열흘 만에 끝물 조짐이다. 일일활성사용자(DAU)는 70% 급감해 1300만 명으로 곤두박질했다. 평균 사용 시간도 19분에서 4분으로 반의반 토막이 났다. 스레드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게 회원을 끌어모은 무기였지만, 그냥 인스타그램 부계정 느낌의 서비스가 돼 버렸다. “게시물을 찾거나 주제별로 검색할 수 없다” “알림도 엉망이고, DM(다이렉트 메시지)도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뒤늦게 마크 저커버그 CEO는 “DM 기능 도입 등 기본기를 다지겠다”며 수습에 나섰다.

야심 찬 IT 서비스가 언제 삼일천하로 끝날지 모를 전국시대다. 챗GPT가 인터넷 시장을 송두리째 뒤바꿀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지난달 구글 검색 엔진 시장 점유율은 92%로 오히려 올라갔다. 스레드의 반짝 흥행도 성장통인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지 지켜볼 일이다.

더 이상 선발 주자가 시장을 장악하는 승자 독식의 시대가 아니다. 여기에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구글은 한때 구글 플러스로 1억 명을 돌파했지만, 50만 명의 개인 정보가 유출되자 2019년 서비스를 접는 끔찍한 실패로 끝났다. 진짜 승자는 초기의 참신함을 넘어 장기적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다음 달 네이버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의 AI가 앞다투어 공개를 예고하고 있다. 서두르기보다 완성도를 높이는 게 중요할 듯싶다.

 

07-27 정치인 골프 참사

 

김세동 논설위원

전국에 물난리가 난 지난 15일 ‘용감하게’ 골프장을 찾았던 홍준표 대구시장에게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가 26일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황정근 윤리위원장은 “국민 정서에 동떨어진 행위와 언행을 하고, 민심에 맞서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해당(害黨) 행위”라고 했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속출하는 참사 속에 골프를 친 자체보다 “대구는 피해도 없는데, 휴일에 골프 친 게 뭐가 문제냐”고 신경질적으로 뻗댄 게 ‘중형’이 내려진 배경으로 보인다. 홍 시장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9일 “재난 대응 매뉴얼에 위배되는 일도 없었지만, 전국적으로 수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부적절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절반쯤 사과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는데, 20일 밤 아무 설명 없이 ‘과하지욕(跨下之辱·큰 뜻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는 싸움을 피한다)’이란 4자를 덜렁 SNS에 올렸다가 8시간 만에 지운 게 미운털이 박혔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골프 때문에 망가진 경우가 여럿 있었다. 여러모로 홍 시장과 대척점에 선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무현 정부 총리 시절이던 2005년 식목일에 속초와 양양 일대에 대형 산불이 나 천년고찰 낙산사가 불탈 때 골프를 쳤고, 7월엔 전국적으로 호우경보·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적지 않은 피해가 난 제주도에서 골프를 쳤다가 구설에 올랐다. 다음 해에도 3·1절이자 철도파업 첫날 관련 공무원들이 비상근무하는 가운데 골프를 친 것이 알려지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3김 중에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골프광이었다. DJ는 고관절을 다쳐 골프를 아예 할 수가 없었고, YS는 한국에 골프클럽이 1개 있을 때 회원일 정도로 일찍 입문했으나 “골프 즐기다 정치인생을 망칠 것 같아서”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끊었지만, 여론에 크게 개의치 않던 JP는 가능한 한 열심히 골프장에 나갔다. 그런 JP도 2000년 7월 비 피해를 크게 본 용인 지역에서 골프를 즐겼다가 여론 질타를 받고 “오래전에 약속된 것이어서 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정치생명에 치명타가 되는 골프 참사는 주로 홍수, 산불 시즌에 골프를 치다 발생한다. 골프 약속이 몇 달 전에 잡히는 만큼 라운드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때 과감하게 포기해야 정치인으로 오래 산다.

 

07-28(금) ‘천재 화가’ 변월룡

 

김종호 논설고문

“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쫓아 연해주를 유랑했지만, 너만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이 어린 시절에, 이주민 사냥꾼이던 할아버지에게 들어 가슴에 각인된 말이라고 한다. 러시아 미술계 거목(巨木)으로 활동하면서 ‘한글 이름’을 평생 고집하고, 모든 작품에 표시하며, 묘비에도 새기라는 유언을 남긴 그가 국내에 처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2년이다. 러시아 유학 중에 그의 작품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미술평론가로 전업한 문영대 전 경남대 미술교육과 겸임교수가 그의 삶과 예술을 깊이 연구해, 그해에 펴낸 책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 화가, 변월룡’ 덕분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서 표현하고, 6·25전쟁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도 그린 그의 작품에는 한국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며 소개한 문 전 교수의 끈질긴 노력으로 국내 첫 변월룡 전시회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다. 소련 체제에서 휴전협정 직전에 파견된 북한에서 1년3개월을 보내며 현대 미술을 이식하고 평양미술대 학장 등으로 활동했지만, 이질 치료를 위해 ‘잠시’로 예정하고 가족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간 뒤로는 북한도 다시 갈 수 없었다. 귀화를 거부한 그를 북한은 영구 추방했다. 그는 ‘햇빛 찬란한 금강산’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등과 함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 소설 ‘닥터 지바고’를 쓴 소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근원(近園)수필’을 쓴 소설가 김용준 등의 초상화도 남겼다.

그의 그림 ‘어머니’를 본 박명림 연세대 교수 표현은 이렇다.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생각을 정지시킨다. 윤동주의 시 ‘어머니’, 박경리와 박노해의 시 ‘어머니’를 읽었을 때처럼 그 어머니의 두 손과 표정, 한복 옷깃과 눈빛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다. 안쓰러움, 죄송, 감사, 설움과 사무침이 뒤엉켜 솟아오르게 한다.” 서울올림픽 35주년 기념으로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지난 4월 6일 시작한 ‘다시 보다-한국 근현대 미술전’에서, 그의 작품 ‘자화상’ ‘긴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노인’ ‘분노하는 인민’ 등 6점을 오는 8월 27일까지 볼 수 있다.

 

07-31(월) 아프리카 살리는 통일벼

 

문희수 논설위원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다. 전년에 수확한 쌀 등이 다 떨어지면 보리 수확기까지 먹을 양식이 부족한 춘궁기를 겪어야 했다. 이런 보릿고개를 없앤 것이 바로 통일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도로 수년간의 개발을 거쳐 수확량이 뛰어난 통일벼 종자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면서 1975년엔 쌀 자급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이런 통일벼도 밥맛이 떨어진다는 불만 속에 점차 밀려나 1992년 정부의 구매 중단을 계기로 역사적 유물이 돼버렸다. 지금은 토종 특등급 쌀이 전국 곳곳에서 생산된다. 밥맛이 좋기로 유명한 일본 종자인 아키바레 쌀조차 밀어낼 정도다. 그나마도 쌀 소비가 급감해 역대 정부마다 남아도는 쌀이 넘쳐 관리에 애를 먹는 게 현실이다.

통일벼가 식량난이 심각한 아프리카의 희망으로 재탄생했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가 K-라이스벨트 사업을 통해 아프리카 8개국에 통일벼 종자와 영농 기술을 전파하기로 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프리카는 식량 위기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쌀 소비량은 5487.7만t이지만, 생산량은 3620.2만t에 그친다. 농식품부는 2027년까지 이들 8개국에 서울 면적의 7배인 43만㏊ 규모의 농지를 만들어 연간 벼 종자 1만t을 보급·생산토록 할 계획이다. 3000만 명의 1년 치 식량에 해당하니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실제 현지에 맞게 개량한 통일벼 종자를 시험 재배한 결과, 기존 품종보다 4배가량이나 수확량이 많았다고 한다. 해당 국가들은 만족도가 높아 식량자급률 100%까지 목표로 삼는 정도다. 역시 물고기를 잡으려면 잡는 법을 아는 것이 최선이다.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게 바로 북한이다. 김일성은 생전에 주민들에게 고깃국에 흰 쌀밥을 약속했다고 하지만, 정전 70년인 지금도 주민들은 식량난이 극심해 매년 굶주림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김정은 정권은 먹고사는 기초생활조차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모한 핵·미사일 도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발사비용만 대당 60억∼200억 원이라니 이제까지 수천억, 수조 원을 날렸을 것이다. 통일벼를 들여와 식량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북한 주민들만 희망도 없이 삶을 위협받는 참담한 상황이 빨리 종식돼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