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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1/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上) - [10회]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

상림은내고향 2023. 7. 17. 17:12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1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2023-06-05

격전의 현장부터 역사 고증까지, 6·25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시작한다.

전쟁 당시 최고 정책 결정자와 장군들의 회고록, 구소련 문서 공개 이후 드러난 공산권 자료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한다.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관련 전적비 추모비 동상 등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을 재구성한다. 북한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쪽 절반만 파괴된 채 보존되어 있는 압록강단교(斷橋)도 찾아간다.

이번 기획은 현충일인 6일부터 주 2회 동아닷컴에서 연재된다. ‘미국 불개입 오판이 부른 6·25 전쟁’을 시작으로, ‘애치슨 라인이 전쟁 불렀나’ ‘한국전쟁이 대만 살렸다’ ‘휴전 반대한 이승만 하야 계획 세운 미국’ 등 전쟁 시작부터 정전협정 체결까지를 20여 개 주제로 나눠 새롭게 정리한다. 또 ‘한강 다리 폭파 논란’ ‘맥아더 고별 연설’ ‘장진호의 동쪽’ ‘중공군의 땅굴 만리장성’ ‘카투사’ 등 핵심 키워드 약 20개에 대한 분석도 추가된다.

북핵 위협 고조 속에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과거의 적대와 증오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삼자는 여정이다.

※참고로 지금은 ‘하나의 중국’이지만 6·25 전쟁 당시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대만)이 있었다. 기사 속 전쟁 당시 중국의 표기는 중공, 자유중국은 대만으로 표기한다.
 

 

6·25 정전 70년,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여정

[프롤로그]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형제의 상’이 있다.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던 상대가 알고 보니 헤어진 형제인 것을 형상화했다. 동생이 형의 품에 안겨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생함과 절절함이 절로 느껴진다. 실제로 북한군은 전쟁 중 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징발했다. 전투에서 부자, 형제가 총을 쏘다 친혈육인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국군 형의 품에 안긴 북한군 복장 동생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이 상은 국군 8사단 16연대의 형과 북한군 8사단 83연대의 동생이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홍진환기자 jean@donga.com

 

 6·25 전쟁 ‘동족상잔’과 비교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오랜 기간 피와 역사, 문화를 공유했던 땅과 사람에 대한 침략인 점에서 6·25를 닮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후 처리가 ‘전쟁 중 분할된 상태로 정전 체제가 유지되는’ 한반도 모델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한반도 모델’은 따라와서는 안 될 매우 안 좋은 사례다. 오히려 국토와 민족이 갈라진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요일 새벽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 같은 무도한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웠다. 더욱이 북한은 소련제 T-34 탱크와 앵앵거리는 야크기를 몰고 왔다가 미군의 막강한 공군과 화력 앞에 굴복했던 당시와 다르다. 핵무기,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사거리 1만2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개발해 남한을 ‘핵 볼모’로 삼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점차 높아지는 한반도의 안보 불안과 지정학적 단층지대의 숙명의 뿌리에는 분단과 6·25 전쟁이 있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전쟁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의 대변인이자 인천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로우니는 ‘운명의 1도’ 서문에서 “한국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한국인이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북핵 위협 속 6·25 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몇 가지는 기억하고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다. 

 

<6·25 전쟁 참여국의 착오와 실패>

  착오와 실패
미국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해 공산 세력 침략 자극
-전쟁 초기 북한군 과소평가
-중공군 개입 전후 중공군 과소평가
-중공군 불참 오산으로 압록강 돌진
소련 -미국 불참 오판
-미중 적대화 음모
중국 -미국 불참 오판
-압록강 도하 후 능력 과신해 38선 넘어 남진
-소련의 지원 받지 못하고 향후 중소 분쟁에 영향
-참전으로 미국 대만 지원으로 전환
-유엔 가입 늦어지고 국제사회에서 고립
남한 -김일성의 남침 경각심 부족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이 미국 오도
-좌우익 대립과 혼란으로 안보 체제 취약
-미군 철수 요구 여론이 안보 약화 초래
북한 -미국 불참 오판
-남침 후 남한 20만 명 봉기 호응 오산
-전쟁으로 고립, 피폐, 침체

 

2023-06-06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上)

“남한군은 북한에 남침할 용기를 줬다” 맥아더의 비판

공격개시 = 전화음어 ‘폭풍’ / 무전 ‘224’
발포개시 = 전화음어 ‘폭풍’ / 조명탄 ‘적색’ / 무전 ‘333’

6·25 전쟁 개전 후 입수한 북한 ‘전투명령 1호’에서 드러난 작전명은 ‘폭풍’이었다. 북한군은 암호처럼 전격적으로 옹진반도~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을 잇는 38선에서 새벽 4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비슷한 시각 강릉 남쪽 정동진과 동해 남쪽 임원진에서는 북한군 육전대와 유격대가 ’순조롭게 상륙’해 동부 전선 8사단의 퇴로를 막았다. (소련 스티코프의 6월 26일자 전문). 하루 전날 평양방송이 “내일 오전 중 중대 방송이 있다”고 남침을 예고한 것처럼 25일 오전 11시 “북침을 해왔다”고 허위 선전을 했다. 북한은 6월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고 평화공세를 폈는데 이는 전쟁 개시 직전 연말술이었다.

휴전까지 1129일 동안 민족과 국토에 길고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아일보 1950년 6월 26일 1면

 

동아일보가 1950년 6월 26일 1면 머릿기사로 ‘북괴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5일 당일에는 전쟁 발발을 알리는 호외를 수차례 뿌렸고, 27일자까지 발행한 뒤 잠시 휴간했다.

 

● 비상해제 휴가 외출 외박으로 최전방 구멍 숭숭

분단 이후 산발적으로 무장 충돌이 계속되어 왔지만 그해 상반기에는 유난히 전군 비상 경계령이 잦았다. 4월 11일, 5월 8일에 이어 6월 11일 세 번째 내려졌던 비상 경계령은 24일 0시 해제됐다. 장기간 경계령 발령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누적과 농번기까지 겹쳤다. 춘궁기를 맞아 군부대 알곡이 거의 떨어진 것도 한 요인이었다. 중부전선 6사단은 3월에 비상식량이 하루치였다고 한다. (남도현, 85쪽).

6월 10일 군인사로 전후방 전체 8개 육군 사단 중 5개 사단장이 바뀌었는데 전방 4개 사단장은 모두 교체됐다. 비상 경계령 해제로 전방부대 휴가 외출 외박 병력이 전체의 30%에 달했다. 북한군 주력 1군단이 내려온 의정부와 포천을 담당하는 국군 7사단은 더 높아 비율이 40%였다. 북한군 1군단의 3사단과 4사단, 105전차여단과 국군 7사단만을 보면 병력 차이는 7 대 1, 화력까지 계산하면 18대 1 정도로 열세였다. 전방 4개 사단 중 7사단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당시 유재흥 7사단장은 부임 후 철원 쪽에 적의 신예 전차 부대가 집결 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부대에는 대전차 지뢰도 없었다. 육군본부에 호소했으나 미 고문관들은 “한국 지형은 전차가 활동할 수 없으니 겁낼 것 없다. 2.36인치 로켓포가 어떤 무기냐”고 일축했다. 북한이 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내려왔을 때 2.36인치 로켓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유재흥, 113쪽).

 

 

의정부시 자일동의 옛 축석령 고개길에 있는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는 몸을 던져 북한 전차를 막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축석령 고갯길은 지금은 43번 국도에서 벗어나야 갈 수 있는 승용차 2대가 비켜가기에도 좁은 길이다. 7사단이 붕괴된 후 긴급 투입된 포병학교 교도2대대(김풍익 대대)의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등은 곡사포를 직접 조준해 발사하기 위해 북한군 전차 50m까지 접근했다. 이어 전차 캐터필러를 파괴해 주저앉힌 뒤 두 번째 포격을 하려다 적 후속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됐으나 김풍익 소령처럼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조금이나마 진격속도를 늦췄다.

 

경기 의정부시 자일동 옛 축석령 고갯길에 1988년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 앞에는 김풍익 중령부터 이종현 일병까지 결사대 11명의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50년 6월 24일 밤 용산 육군참모학교 구내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가 열렸다. 50여명의 고위 장성이 참석했고 밤 10시경 끝났다. 10여명의 육군본부 및 미 군사고문단 장교는 명동 카바레로 2차를 가서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김인철, 110쪽).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24일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해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토록 했다. 그만큼 북한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던 때였다. 하지만 정작 채 총장은 용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에 참석해 이튿날 새벽 2시에 귀가했다. (백선엽 2권, 175쪽)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조형물 ‘멈춰진 시계’가 개전 시각을 알리듯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멈춰있다. 구자룡 기 

 

● 미국, 한국의 전략적 가치 저평가

미국 전쟁부는 1947년 4월 미국 국가안보의 중요성에서 한국이 원조 대상 16개국 중 13위라며 국무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했다. 미 합참도 그해 9월 국무부에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통보했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1948년 3월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산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하면서 한국은 방어선 밖에 두었다. 일본 방어에 필요한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호, 146쪽).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8 문서는 1948년 4월 베를린 사태 등 유럽의 상황 악화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필요하다며 그해 12월 31일로 제시했다. (김철수, 51쪽). 미국은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그해 6월부터 공수작전을 시작하는 등 유럽의 냉전도 점차 긴박해졌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년가량이 지나 병력과 군비를 대폭 축소한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은 한국에 병력을 주둔하며 강한 방어 의지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미 육군 병력(명) 미 극동군사령부 병력(명)
1945년 830만 1947년 30만
1950년 60만 1950년 10만 8

 

● 주한 미군 철수

주한 미군 철수는 소련이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를 완료한 뒤 압박하고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런데다 미국과 한국 국내에서는 철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1948년 8월 시작된 미군 철수 작전명은 ‘크래버플 플랜(crabapple plan)’. 당초 시한은 그해 12월이었다. 그런데 그해 하반기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고착화한 데다 여순 사건, 북한의 잦아진 38선 도발 등으로 연기돼 이듬해 6월 30일 완료됐다. 한국에는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았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공산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미군 철수를 승인한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 정부는 책임 일부를 돌렸다. 맥아더는 전쟁이 끝난 후에 반박했다.

“내가 동의한 것은 한국군 10개 사단을 현대식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대체한다는 조건하에서 워싱턴 당국의 검토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나의 동의 조건은 이뤄지지 않고 철수만 이뤄졌다. 그 책임은 국무성이 져야 할 것이다”(‘정보’ 6호, 125쪽)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8년 4월 27일 자로 작성한 주한 미군 철수 계획서 ‘크래바플’

 

● “북한군에 남침 기회와 용기를 북돋은 한국군 수준”

미국은 한국군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개전 시 규모 10만3800명)하고 공군 창설에 반대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은 6만5천명 유지에 필요한 지원뿐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영향을 미쳤다. 미군 철수 이후 북진을 견제한다며 방어무기만 제공했다. 소련제 T-34 탱크와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에 맞서 전차, 155mm 곡사포 등을 요청했으나 산악이 많은 한국의 지형, 도로와 교량 조건상 탱크는 필요 없다고 KMAG는 판단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은 전선에 배치된 군 병력이 아니라 경찰대원이다. 무기는 경화기뿐이고 공군이나 해군은 아예 없으며 전차, 대포 또는 기타 전투부대에 필수적인 무기는 없었다. 한국의 북한 공격을 방지하는 조치라지만 북한군에 남침할 기회와 용기를 돋워준 것이다.”(맥아더, 165쪽)


<2차 대전 후 미군 병력 변화>

  국군 북한군
육군 병력 8개 사단
94,974명
10개 사단
175,200명
무기와 장비 전차(탱크) 0대
장갑차 27대
57mm 대전차포 140문
T-34 전차 242대
장갑차 59대
대전차포 552문
모터싸이클 500대
해군 병력 6,956(해병대 포함) 10,297(육전대 포함)
무기와 장비 함정 36척 소형경비정 3척, 어뢰정 3척
공군 병력 1,897명 2,800명
무기와 장비 항공기 22대 전투기 84대 등 226대
총병력 103,827명 188,297명

 

● ‘정보 실패’가 문을 열어 준 북한군 남침

그날의 도발을 막지 못한 것은 적색 조명탄이 올라갈 때까지 잇단 적색 경고등을 무시한 데도 책임이 크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봄 중앙정보국(CIA)은 북괴가 산발적인 습격을 바꿔 언제 전면 공격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언제인지 단서를 제공해주는 정보는 없었다. 더욱이 한국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서 소련측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반복해서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트루먼, 308쪽)

북한군 10개 사단 18만여 명이 공격 개시 3일 전 전방 배치를 마쳤다. 대규모 적병력의 이동이 이뤄져 동향에 대한 첩보와 정보가 쏟아졌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이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경각심이 부족하거나 흘려듣고 과소평가하고 무시했다.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6월 19일 방한해 전방 7사단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북한의 공격을 받더라도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덜레스가 전술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으며 정확한 정보도 없어 한국군이 38선 북쪽 부대에 비해 얼마나 열세인지 알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맥아더는 북한이 한국 측에 공격 준비 사실을 속이기 위해 38선 부근에는 한국군과 거의 같은 정도의 경무장한 병력을 배치하는 기만술도 폈다고 했다. (맥아더, 165쪽).

맥아더가 이렇게 덜레스를 비판했지만 6·25 전쟁이 터질 때 극동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전체를 관할하는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보 실패’가 더 치명적이다.

 

●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 G-2의 ‘정보 실패’

맥아더는 2차 대전 당시 CIA(1947년 창설)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이나 CIA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전투지역에 CIA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맥아더는 OSS를 좌지우지했던 소위 ‘동부 주류파’(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정재계 핵심 인맥)를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OSS나 CIA의 정보를 소홀히 하고 G-2로 불리는 자체 정보팀을 가동했다. (핼버스탬, 84쪽)

G-2에 1950년 5월 하순 북한군이 탱크 여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중(重) 경(輕) 탱크 180대와 장병 1만명으로 구성되고 대전차포, 야포, 오토바이 등도 포함됐다. G-2 책임자 윌로비는 5월 25일 자 ‘일일정보요약’에서 이런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실정에서 경제적 군사적 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모터사이클 1개 연대와 500대의 모터사이클이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앞서 5월 초 38선에서 2마일(3.2km) 이내 주민을 모두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으나 무시됐다. G-2는 농민들이 지뢰를 피해 자발적으로 피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개전 수개월 내 황해도 사리원에서 38선까지 모든 철도를 폐쇄하고 군사용으로만 사용케 했다. 통신 및 간호를 위한 여성 징집, 10대 소년과 일본군 경험이 있는 자들의 황급한 징발 등 정보도 들어왔다. G-2는 ‘전쟁형 편성’으로 2차대전 전 독일이 한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굴든, 44~46쪽)

OSS 시절 이미 38선 너머로 보낸 요원들이 ‘정예부대를 38선으로 이동시키고 전방의 교량과 철로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보내왔다. 그런데 G-2는 정보원의 신뢰성은 ‘F-6’(A∼F 6단계) 등급, 정보의 신뢰성은 6등급(1∼6등급)으로 최하위 평가를 내리며 깔아뭉갰다.

 

● 이승만의 항의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전까지 “한반도는 냉전이 아니라, 실제 총격전을 벌이는 전쟁상태다”고 남침 임박을 경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이 오면 즉시 철수할 수 있도록 한 발은 한반도에, 다른 발은 밖에 내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미군은 전쟁 중 불리할 때마다 철수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남침 소식을 보고 받고 26일 새벽 3시 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도 항의했다.프란체스카, 1950년 6월 26일 자)
 

 

[2회]‘애치슨 라인’이 6·25 전쟁 불렀나

방어선에선 한반도 뺐던 미국, 어느 때보다 빠르게 참전했다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로 연장되는 선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이들 지역을 제외한 태평양의 여타 지역은 외세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 공격이 있으면 초기 대응은 공격받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강연에서 했던 이 한 구절이 한반도에 ‘북한의 남침’을 불러온 초대장처럼 인식됐다. 6·25 전쟁은 애치슨 강연이 나온 뒤 5개월여 지난 뒤 터졌다. ‘애치슨 라인’이 빌미를 제공한 것은 맞지만 과도하게 낙인을 찍어 애치슨은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6·25 전쟁 당시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1893∼1971)

 

● ‘방어선 제외가 방어 제외는 아니었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을 무장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 방어를 강조하면서 나왔다. 애치슨 라인이 논란을 일으킨 건 ‘라인’ 언급 이후 ‘태평양 다른 지역의 안보는 아무도 군사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구절이다.

하지만 연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격받은 국가가 저항한) 다음에는 유엔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유엔이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애치슨은 “유엔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조직으로 ‘약한 갈대’가 아니다”고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유엔의 신속한 움직임은 애치슨의 말처럼 유엔이 ‘약한 갈대’가 아님을 증명했다.

 

   

● “한국에서 미국의 책임은 더 직접적”

애치슨의 연설 주제는 ‘아시아의 위기 : 미국 정책의 한 시험대’였다.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이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밝히는 것으로 많은 공을 들여 작성한 연설이었다.

애치슨은 아시아를 태평양의 남과 북으로 나누고 북쪽에 미국의 책임과 기회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극동군사령부가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은 ‘미국이 직접 책임을 지며 직접적인 행동의 기회를 지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도는 낮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국은 미국이 군사점령을 끝내고 세계가 인정하는 주권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책임은 더 직접적이고 기회는 더 분명하다’고 했다.

애치슨 연설에서 ‘책임’을 강조한 뒷부분만 알려졌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 전문’을 보냈다.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 포함된 필리핀보다 더 중요시됐다는 한국 언론 보도도 있었다.(도진순, 195쪽) 그만큼 애치슨 연설에서 한국은 방어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어도 방어 의지는 작지 않았다.

애치슨은 연설에서 대만 국민당과 장제스(蔣介石)에 대해 ‘중공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나 국민의 지지 철회로 군대가 녹아내렸고, 섬의 난민이 되었다’고 한 것과 대조된다.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과 1주일 뒤 애치슨 연설은 대만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팽(烹)’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대만에 대한 ‘침공의 초대장’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침공의 초대장을 6·25 전쟁을 통해 한국이 받은 꼴이 됐다.

 

● 스탈린과 김일성이 본 ‘애치슨 라인’

소련은 애치슨 라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스탈린은 ‘조선반도 같은 작은 전쟁에 개입할 리는 없을 것’이라는 북한의 말을 확인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선즈화, 334쪽).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국가 간 침략이라기보다 중공에서 막 끝난 국공내전처럼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승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에서도 판세가 결정되면 이를 뒤집으면서까지 희생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애치슨 연설을 이해했을 수 있다.(핼버스탬, 84쪽)

김일성은 좀 달랐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가 남침에서 속전속결 승리를 장담하며 지원을 요청할 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이유로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방어선에서 제외돼 김일성의 남침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유엔군 참전 기념 

 

● 애치슨 연설은 마오쩌둥 겨냥

트루먼(1월 5일)과 애치슨(1월 12일)이 잇따라 연설을 한 때는 마오가 신중공을 선포한 뒤 처음 모스크바에 찾아와 스탈린과 회담을 하던 때였다. 미국이 국공 내전에서 지지하던 국민당과 장제스를 버리고 마오의 공산 정권과 관계를 정상화해 중소 간에 틈을 벌리기 위한 ‘쐐기 전략’을 펴던 때였다. 애치슨의 연설은 사실은 모스크바의 마오를 겨냥한 것이었다. 소련이 제정 시절에 연해주 땅을 뺏어간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영토를 탐내고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폭로하면서 양국을 갈라놓으려고 한 것이다. 몰로토프 외상은 연설이 나온 며칠 후 마오에게 “애치슨 연설의 목적은 소련과 중공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중상모략의 연막전술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소련이 발끈해 마오에게 같이 외무장관 명의의 반박 성명을 내자고 요구했다. 마오는 난처했다. 소련은 ‘애치슨 연설’이 중상모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중소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마오는 결국 수위를 낮춰 신화사 통신 사장 명의로 격을 낮춰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키신저, 158쪽)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 1975년 세워진 미국군 참전 기념비.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단합해 침략을 물리쳤다는 것을 형상화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경기 파주시 임진각의 미국군 참전 기념비 주위로는 미국 각 지방정부와 지역 출신의 장병이 참전했음을 나타내는 동판이 있다. 사진은 캘리포니아주.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중소동맹 체결이 가져온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

애치슨이 중소 간 간격 벌리기, 이른바 쐐기 작전을 폈지만 연설 한 달여 만인 1950년 2월 14일 중소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애치슨은 “중소 조약은 제국주의 출현을 알리는 위험한 징조 중 하나”라며 중공 지도부가 중공을 소련에 팔아먹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렇게 되자 대만을 버리면서 중소를 갈라치게 하려던 미국의 대만 정책도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했다.(선즈화, 269쪽)

중소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미 정부는 1949년 12월 채택한 NSC-48/2는 ‘선택적 봉쇄’로 소련을 봉쇄하면서 중소 간에 사이를 벌리기 위해서 중공에게 대만이라는 먹잇감까지 던진 것이었다. 이제 소련 봉쇄를 위해 중공 봉쇄도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전환했다.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던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평가됐다.

1950년 5월 20일 맥아더는 참모장 회의에서 “중공의 대만 점령은 소련의 점령과 같다. 이 경우 미국의 태평양 주변 방어선은 무너진다. 대만은 대소 전략의 이상적 위치에 있는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했다.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대만의 중요성은 처음에는 중공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소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맥아더 장군

 

● 중소 동맹 체결은 ‘애치슨 연설’의 역효과

흥미로운 점은 애치슨이 중소 거리 벌리기를 위해 했던 강연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마오가 조약 개정으로 요구했던 사항을 모두 수용하면서 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바꾼 데는 애치슨 연설도 한 요인이었다.

미국은 대만을 버리면서까지 중공과 관계 정상화 사인을 보내자 스탈린은 12월 16일 첫 회담에서는 완고했던 중소조약 재협상 불가 입장을 바꿨다. 기존 조약을 폐기하고 새 동맹조약을 맺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당초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오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내세우며 스탈린을 압박했는데 미국이 마오의 전략에 맞장구를 쳐준 격이 됐다.

스탈린이 ‘미중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과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김일성의 ‘남침’ 승인 지원 요청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은 미중을 적대관계로 몰아넣는 쐐기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도 중공이 대만을 정복하기 전에 해야 했다.

 

● ‘애치슨 라인’은 1년 전 ‘맥아더 방어선’

1948년 3월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샨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했다. 도서방위선 설정은 일본과 필리핀 등 미국 안보에 직결되는 지역에 대한 안전 보장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전략적 측면에서 한국은 일본의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나타난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구상을 정치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이상호, 146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맥아더 자신도 후일 회고록에서 “애치슨의 극동 문제에 대한 오판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자신이 구상했던 방위선과 유사한 것을 애치슨이 다른 아시아 정책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것인데 전쟁을 유발한 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맥아더로서는 자기모순적인 것이다. 애치슨과 맥아더가 불편했던 관계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애치슨은 1950년 10월 트루먼과 맥아더 간의 웨이크섬 회담 이후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는 등 결례를 범했다며 해임을 건의했고 1951년 4월 해임 때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 이승만의 ‘방어선 붙들기’ 노력

“불행한 과거사 싸움 대신 일본이 우리와 같이 위기를 깨닫고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협조할 수 있다면, 양국 사이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도진순, 199쪽)

북한 핵 능력이 높아지면서 한일 안보협력이 높아지는 2023년 한일 관계에 그대로 적용될 것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195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에 맥아더를 만나러 갔을 때 한 말이다. 이승만은 6·25 전쟁 후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북한 남침의 빌미를 줬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전 극동방어선의 주요 거점에 있는 일본과 한국을 연결시키고자 분투했다.

 

※참고 문헌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공 이야기』, 민음사, 2012.
도진순, ‘1950년 1월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과 하나의 전쟁 논리’, 『한국사연구』, vol. 119, 185∼231쪽, 2002.

 

[3회] 소련, 왜 유엔군 파병 막지 않았나

스탈린은 한반도 전쟁에서 무엇을 노렸을까

6·25 전쟁 발발 사흘째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던 1950년 6월 27일 정오(현지시간) 뉴욕 롱아일랜드 ‘스톡홀름 호텔’의 한 식당.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미국 대표 그로스와 소련 대표 말리크의 중간에 앉아 점심을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트뤼그베 리 총장은 말리크에게 오후 안보리에서 한국전쟁 관련 회의를 한다고 알리면서 “귀국의 이익을 위해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스 대표는 탁자 밑에서 발로 트뤼그베 리를 툭툭쳤다. 말리크에게 굳이 회의 참석을 권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엔회원국들에게 한국전 참전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예정인데 소련 대표가 참석하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리크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전 가지 않겠습니다”고 거절했다.(선즈화, 360쪽)

 

말리크는 이틀 전 ‘북한의 남침은 평화 파괴’라며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한 안보리 결의안 표결에도 불참했다. 7월 7일 유엔 설립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낼 때도 방관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

 

말리크 주유엔 소련 대사

 

소련은 북한의 남침에 대응한 유엔의 초기 3차례 결의안에 모두 불참했다. 그해 1월 안보리를 탈퇴하면서 내세운 명분처럼 자유중국(대만)이 유엔 회원국으로 남아있는 것에 대한 항의이자 유엔의 합법성에 흠집을 내고자 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이 유엔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몽니를 부리기보다 오히려 길을 터주자 유엔을 한국전쟁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이 작동되는 무대로 활용했다. 스탈린은 왜 유엔이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6·25 전쟁 초기 유엔의 6·25 전쟁 관련 결의안>

※현지시간 기준. 안보리 회원국은 11개국 6월 25일 안보리 첫 회의는 6·25 발발 24시간 만에 개최. 7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에 작전지휘관 이양

일자 내용 표결 비고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은 평화의 파괴’ ‘북한군의 침략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 찬성 9, 반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 소련 불참 안보리 1차 결의안
〃 27일 유엔 회원국의 군사원조 제공 결의 찬성 7, 반대 1(유고), 기권 2(인도 이집트), 소련 불참 안보리 2차 결의안. 통과 후 소련 정부, ‘무효’ 주장
7월 7일 유엔군사령부 창설 소련 불참 안보리 3차 결의안
10월 7일 유엔군 한반도 전체 점령 허가 8월 1일 소련 안보리 복귀 엔총회 결의안
 

●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 보낸 한 통의 편지

스탈린이 6·25 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을 저지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흥미로운 문건이 뒤에 공개됐다. 러시아 학자 라도프스키는 크렘린궁 문서보관서에서 찾아냈다며 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체코의 클레멘트 가트왈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2005년 공개했다. 소련이 왜 안보리에 불참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네 가지 목적이다. 첫째, 소련과 신중국의 일치단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부를 중국 대표로 인정하는 정책이 터무니없고 어리석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안보리에 소련 중국 두 강대국이 참석하지 않아 안보리 결정은 불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넷째, 미국의 손발을 자유롭게 해줘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해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했다. 미국의 참모습을 세계 여론에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전쟁 발발 24시간 가량 만에 나온 유엔 안보리의 1차 결의안. 북한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 ‘안보리 불참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

라도프스키는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방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무장 개입을 예견했지만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빠져 힘이 약화되면 유럽에서 지위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학자 판초프에 따르면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도 스탈린이 미국을 중국과의 충돌에 끌여들였다고 인정했다. 흐루쇼프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한에 미국을 끌어들인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말했다.(판초프, 536쪽)


소련의 안보리 불참이 스탈린의 신중한 고려와 세밀한 계산을 거친 책략이었으며 목적은 미국을 전쟁의 늪에 빠뜨리고 중국도 출병시켜 미국과 충돌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스탈린 음모설’이다. 음모설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후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약 5개월을 거슬러 그해 1월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할 때와도 관련이 있다.

 

 마오쩌둥(왼쪽)이 1949년 12월 21일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계기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함께 발레공연을 관람하던 모습. 

 

● 소련의 1월 안보리 탈퇴, 왜 그때

1월 6일 소련의 비신스키 외상은 모스크바에 와 있던 마오쩌둥에게 ‘유엔 안보리에 대만 대표가 계속 남아있는 것은 비합법으로 대만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성명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소련과 중공의 ‘대만 탈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련은 13일 기다렸다는 듯이 안보리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미국 주도의 유엔에서 소련과 중공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이런 행동에 나선 것은 다른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 ‘스탈린 음모론’의 분석이다. 명분은 ‘대만을 몰아내고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내는 명분 만큼 중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기간에 일어난 일>

날짜  
1949년 12월 16일 스탈린과 마오쩌둥 첫 만남
21일 스탈린 70회 생일
30일 미국 NSC-48/2 채택
1950년 1월 5일 트루먼 연설, ‘대만 포기’
12일 애치슨 연설, ‘극동방어선 대만 한국 제외’
13일 소련의 안보리 탈퇴
17일 김일성의 주중 북한대사 송별연, ‘남침 상의 스탈린 면담 요청’
19일 김일성, 국공내전 가담 조선군 2만3천명 귀국 요청, 마오쩌둥 승인
30일 스탈린, 김일성 모스크바 방문 수락, ‘남침 승인 첫 사인’ 의미
1950년 2월 4일 김일성, 3개 사단 증강 지원 및 차관 1년 앞당겨 제공 요청. 북한은 금 은으로 대금 지불
14일 중소 동맹 체결

 

●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개정’ 기싸움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중소 조약을 체결했다. 창춘(長春) 철도, 다롄(大連), 뤼순(旅順)항 등에 관한 소련의 이권을 인정하는 것이 골자다. 소련은 이 조약으로 러일 전쟁 패배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잃었던 이권 대부분을 회복했다.


마오쩌둥이 1949년 12월 16일 처음 스탈린과의 6시간 가량 회담에서 주요 관심은 조약 개정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조약은 얄타협정에 근거한 체결한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오는 참여하지 않은 얄타체제, 미국 영국과의 공조체제를 들어 마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협상 신경전 바탕에는 국익에 대한 첨예한 갈등도 있지만 스탈린의 마오에 대한 견제 심리, 즉 마오가 ‘아시아의 티토’라는 의구심도 바탕에 깔려있었다. 스탈린이 보는 마오는 자기가 이룬 업적과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이었다. 혁명의 승리는 곧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유고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나치 독일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뤘으나 소련의 개입을 거부해 위성국이 되지 않고 비동맹외교 노선을 걸었다.

 

내전에서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스탈린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없이 혁명을 달성했으니 소련의 위상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국민당 정부와 맺은 ‘침략적인 성격’의 많은 이권이 담긴 중소조약이 유지되기 어려울 가능성도 많았다.(손튼, 28쪽). 스탈린은 마오와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동지라는 등의 명분 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벌여 얻어 낸 이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해 전 변절한 티토를 생각해서라도 중국이 국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은 거의 없었다.(키신저, 152쪽). 마오가 내전을 일단락짓고 신중국을 선포한 뒤 모스크바로 가서 가진 스탈린과의 첫 회동도 몇 차례 무산된 끝에 이뤄졌다.

 

● 서풍(西風)이 도와준 마오의 조약 협상

중소가 조약 협상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서방 국가들이 마오쩌둥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줬다. 먼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이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장기간 만나고 있는 것을 본 미국은 중소가 밀착하는 시그널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부심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1월 5일과 12일 연설에서 잇따라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스탈린에 경각심을 주었다. 스탈린은 미중 관계 정상화는 미소 대결에서 최악으로 보았다. 처음 마오를 만났을 때 냉랭했던 태로를 바꿔 조약 개정이 아닌 조약을 아예 새로 체결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기세가 오른 마오를 견제하기 위해 김일성이 들고 온 전쟁을 통해 중국과 서구의 대립을 유도하려고 했다.


마오도 스탈린과의 협상에서 서방국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활용했다. 마오는 영국이 곧 신중국을 승인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이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중소조약 개정을 얄타체제를 들어가며 거부했던 스탈린은 태도를 바꿨다. 소련은 1945년 조약이 ‘시대착오적’이라며 개정 아닌 폐기를 들고 나왔다. 불과 한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의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게시되 있는 유엔군 참전 규모. 16개국에서 전투병을 파병했다. 구자룡 기자 .

 

● ‘안보리 탈퇴도 불참도 중국 고립이 목표’ 스탈린의 더 큰 음모

‘음모론’은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한 것도 유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막았다고 보았다. 당시 유엔에 중국을 가입시키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 11개국 중 7개국이 찬성하면 되는데 인도 노르웨이 소련 유고 및 영국이 중국 정부를 인정했다. 프랑스와 이집트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소련대표 말리크가 항의 퇴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를 유엔에 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져 마오의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려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련은 8월 1일에야 안보리에 복귀했다. 그 전까지 미국이 북한의 남침에 자유롭게 유엔을 동원하도록 했고, 중국에는 유엔 가입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중공이 소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손튼, 103쪽). 이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해 중국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손튼 교수 등은 분석했다.


선즈화 교수는 소련으로서는 말리크가 6·25 전쟁 안보리 결의안에 참가하면 진퇴양난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북한과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북한의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두 달 가량이 지난 8월 1일 소련은 복구했다. 유엔 회원국들의 안보리 결의안 집행에 소련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한국전쟁에 대한 핵심적인 결의안이 모두 통과된 후여서 설득력은 떨어져 보인다.
 

 

 

대소련 봉쇄 마스터 플랜, NSC-68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NSC)의 정책 보고서인 NSC-68은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과 10월 중국 공산화 그리고 1950년 2월 중소 동맹체결이라는 거대한 지각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대공산권 대응 전략이다. 특히 갓 출범한 중국보다는 소련이 대담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1948년 11월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정책을 담은 NSC-20을 채택했으나 이를 아시아로 확대한 것이다. 그후 20여년간 대 공산권 정책의 기조가 됐다. 트루먼은 1950년 4월 이 정책을 보고받았으나 9월 정식 승인했다. 6·25 전쟁이 이 정책에 힘을 실었다. 1975년 2월 기밀문서에서 해제될 만큼 비밀에 부쳐졌다.


트루먼 대통령과 에치슨 국무장관은 중소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이른바 ‘쐐기 전략’을 추진했다. 1949년 1월 나온 NSC-34는 미국의 주요 정책 목표로 ‘중국이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1949년 12월 NSC-48/2나 애치슨의 1950년 1월 ‘극동 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등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변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중소 양국을 같이 견제하는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생겨서 나온 것이 NSC-68이었다.


NSC-68은 형세 진단에서 지구상 도처에서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봤다. 가장 취약한 곳은 아시아. 국가안보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주는 수단은 군사력이란 논리에 따라 미국의 재무장을 정당화했다. 4,5년 동안 매년 40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과 비교해 소련이 국가예산 중 높은 비율을 군의 하드웨어에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는 과장도 있었다.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경제력을 지나치게 부풀리기도 했다.


소련이 1950년 중반 10개에서 20개, 1954년 중반 2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산화된 중국은 이곳을 발판으로 공산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진단 하에 미국의 방어선에서 대만은 장제스의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우호적인 국가로 유지해야 했다. 한반도는 중국 소련 미국 같은 강대국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위치다. 미국이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로 소련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 두었다.(손튼, 171쪽)

 

[4회] 대만의 운명을 가른 순간들

6·25 전쟁이 대만 살렸다

‘1950년 4월 16일 밤, 중국 제4집단군 린뱌오(林彪) 휘하 40군과 43군은 4백 척 소형 선박과 동력선을 타고 대륙에서 15마일 거리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향했다. 해상 및 공중 화력지원을 받는 상륙작전이 아닌 게릴라 침투처럼 접근했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저항에 중공군 1만 명가량이 희생됐지만 5월 1일 하이난섬 전역을 점령했다.’(손튼, 151쪽).

중공군이 이용한 선박은 노획한 자동차 엔진을 떼어내 목선에 설치한 ‘돛이 달린 기선’으로 포 2문을 장착해 ‘토포정(土砲艇)’이라 불렀다. 크기가 작아 은폐하기가 좋고 제작 비용이 싼 것도 장점이다. 하이난섬 전투를 현장 지휘한 한센추는 6·25 전쟁 발발 후에는 펑더화이(彭德懷) 휘하 3명의 부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한 순간에도 서남부와 일부 섬 등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 70여만명이 대만으로 철수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특히 하이난섬과 덩부섬(登步島)은 눈엣가시였다. 대륙을 장악한 마오로서는 혁명 완수를 위해서 대만섬을 평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였다.

하이난섬 점령은 대만섬 평정의 분수령이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공산군이 차지하지 못했던 저우산(周山)군도의 덩부섬 등을 하이난섬 이후 비교적 손쉽게 점령하는 등 국민당군이 점거 중이던 다른 군소 도서를 차례로 접수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에서 신중국 성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주석. 이 당시 대만섬 외에 국민당군이 차지하고 있던 섬이 많아 마오는 대만섬 평정이 과제였다.

 

● 대만 점령 목전에 두었던 중국

중공군이 하이난섬을 점령한 것은 6·25 전쟁 불과 2개월여 전이다. 장제스가 대륙에서 밀려나고 주변 섬들마저 하나씩 뺏겨 대만섬으로 조여오는 형국이었다. 대만섬도 중공의 점령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국면이 전환된 데는 국민당 군대의 부패 등 내전 패배가 요인이지만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도 한 요인이다.

미국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극동 방어선’ 연설에서 대만을 제외했다. 2월 중소 동맹조약으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국민당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군사 지원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어 대만섬으로 가는 길목의 진먼도(金門島)와 마주(馬祖)열도 등을 제외한 곳에서 군사력을 철수했다. 그야말로 중국의 대만 점령은 턱밑까지 갔다. 장제스는 진먼도 등에 ‘물망재거(勿忘在莒)’라는 제나라의 고사를 돌에 새겨 대륙 수복 의지를 다졌다. 이게 6·25 전쟁 발발 불과 한 달을 앞둔 상황이다.

스트롱 대만 주재 대리대사는 5월 17일 “대만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며 “6월 15일에서 7월 말 사이 공산당이 대만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6월 15일 이전까지 대만에서 철수할 미국 공공기관의 명단도 확정할 것”이라고 했다.

 

 장제스가 본토수복 의지를 새기며 진먼도 등에 새겨놓은 ‘물망재거’. 제나라의 고사로 ‘어려울 때를 잊지 말라’는 뜻. 출처: 중문 위키피디아 

 

앞서 마오는 대만 침공을 전담할 지휘관으로 리위(粟裕) 대장을 임명했다. 리위는 1950년 1월 ‘대만 해방과 군사력 건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만 정복의 마스터 플랜이다. 마오는 2월 이 보고서 등을 토대로 대만 침공을 위한 공수부대도 창설했다. 중국은 대만 주변의 병력도 4만 명에서 15만 6000명으로 증강해 침공 준비를 마쳤다.(김계동 23쪽)

 

● 미국, 대만 장제스 4번 버리다

1948년 하반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군의 패배가 뚜렷해지자 미국과 영국은 대륙을 실질적으로 장악해가는 공산당과의 관계 재설정에 들어갔다. 1949년 10월 신중국이 선포되기 이전에 이미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다. 1950년 1월 트루먼의 기자회견과 12일 애치슨의 강연에서 대만을 포기하고 공산당 정부와의 관계 정상화를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표> 미국의 ‘대만 포기’ 일지

1949년

3월

도쿄 연설, “대만과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선 밖”



8월

미 정부, “국민당은 부패 무능한 반동 정당” 백서 발표



12월

NSC-48/2,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은 군사행동을 할 정도 아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 “군대를 사용해 분쟁에 개입할 의도 전혀 없다”



12일

애치슨, “한반도와 대만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3월

애치슨, “대만의 조기 공산화는 불가피하다”



5월

대만 주재 미국 영사, 3개월 이내 공산군 침략 예상하고 모든 미국인 대만 떠나야 한다는 권고를 본국 정부에 보고

 

● 애치슨 강연은 ‘대만 포기’ 시그널

“대만을 놓고 벌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애치슨 강연 중 ‘극동방위선’에 관한 언급은 한국보다는 ‘대만 포기’ 의사를 마오쩌둥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마오에게 ‘대만도 포기할 테니 소련과 멀어지고 미국과 관계를 맺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미국에 협조하면 중국의 대만 정복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손튼, 80쪽). 키신저도 애치슨 연설에 담긴 강조점은 중국에게 유고의 티토가 택했던 옵션을 노골적으로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키신저, 157쪽)

“국민당 장제스 정부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직면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졌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생겼나. 그의 군대가 녹아 없어졌다. 그에 대한 지지도 녹아내렸다.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되었다.”(애치슨 연설문 일부)

 

 애치슨 미 국무장관 

 

대만 정복 전투를 총지휘하던 리위는 “미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임을 인정했다.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애치슨 선언을 이해했다. (선즈화, 262쪽).

애치슨 라인 선언 때문에 전쟁이 터진다면 대만이 상황에 더 맞았다. 중국이 대만 점령을 준비하고 공언한 데다 무력행사에 미국까지 불개입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대만을 향하던 총부리를 급히 한반도로 가져와야 했다. 마오는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시기상 중국이 대만 문제를 해결한 이후 돕고자 했다.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도 ‘기습’이었지만 마오에게도 대만 침공을 목적에 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마오는 6·25 전쟁 발생을 외신 뉴스를 보고 알았다.

북한이 38선 부근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던 6월 12일 마오는 리위 장군과 군에 보낸 전문에서 “대만을 신속히 점령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경쟁적으로 전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북한에 선수를 뺏겨 대만 침공의 타이밍을 놓친 중국은 6·25 정전 7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대만에 대한 무력 공격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대만 주변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 등 무력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 한국 전쟁이 바꾼 대만 운명

6·25 직전까지 중국은 대만 주변 섬을 대부분 점령했고 대만섬 공격 날짜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만에 대한 정책은 180도 선회한다. 필리핀 해역의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이동해 중공이 대만에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항모 이동은 장제스가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막는 것도 포함됐다.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1월 5일 선언했던 중국 내전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정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대만 정책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대만을 공격할 여유가 없어졌다. 6·25가 대만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이 혁명의 완성으로 대만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대만 문제가 해결된 뒤 북한을 돕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김일성에게는 남침을 서두르게 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북한에 ‘(남침의) 인센티브’를 준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두 차례나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군사적 정복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거라고 김일성은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기 전에 남한에 대한 행동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키신저, 161쪽). 미국은 6·25 전쟁이 터지자 대만해협으로 미 7함대 파견을 결정했다.

 

 6·25 전쟁을 외신 뉴스로 안 마오쩌둥은 전쟁 발발 불과 10여일 전에도 대만 침공을 지시했다.

 

● 대만 학자의 ‘빈약한’ 반론

대만학자 장수야(張淑雅)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인식은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토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고 했다. 중국 본토 학자들도 한국전쟁이 장제스가 회생할 기회를 주었다고 본다고 소개했다.(장수야, 24쪽). 한국전쟁으로 ‘장제스의 운수가 대통하게 되었다’고 보는 미국 학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 7함대 파견만으로 중공군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고, 중공은 6·25 전쟁 전에 대만에 대한 공격 준비를 늦추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 때문에 대만이 침공 위기를 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대만 국민당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 대륙에 접수되지 않도록 한층 노력한 것이 대만의 생존에 주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명의(미국)와 환자(대만)의 비유를 들었다. 명의가 훌륭한 약을 주어도 병을 극복하는 것은 환자 스스로 나으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공의 대만 점령이 목전에까지 와있던 상황에서 한국전쟁 때문에 중공이 말머리를 돌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의 생존에서 내부적인 노력이 중요하지만 6·25 전쟁 이후 동북아에서 본격화한 냉전 질서가 각 진영 안보의 울타리가 된 것이 대만의 안보에도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대만을 보호하는 미국의 안보 울타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었다. 국공 내전의 패장인 장제스의 집권 여부도 따지지 않았다.

 

● 소련의 늑장 지원, 해공군 지원 거부

중국의 대만 침공 결행이 늦어진 데는 소련이 큰 변수였다. 중국은 1949년 10월 진먼다오(金門島)와 덩부다오(登步島)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대만섬이 본토에서 149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데다 대만은 400대 이상의 항공기, 70척 이상의 함정을 보유해 중공에는 거의 없었던 해·공군력이 만만치 않았다. 중국은 소련에 해공군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거절되거나 약속을 하고도 인도를 지연하거나 해서 예상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1949년 7월 5일 마오는 스탈린에 보낸 전보에서 “대만 공격은 공군부대가 조직된 후에나 가능하다”며 공군 지원을 호소했다. 마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6개월에서 1년 안에, 모스크바에서 1천명의 비행사와 300명의 공항 근무 요원들을 훈련시켜 줄 것, 100~200대의 전투기와 40~70대의 폭격기를 중국에 판매할 것 등이었다. 마오는 해군함대 창설도 요청하면서 1950년 하반기 대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대만상륙작전을 지원하면 미국과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며 즉각 거절했다.(선즈화, 260쪽)

1949년 12월 마오가 모스크바에 갈 때는 공군력 지원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대만 공격이나 연해 도서 해방을 위한 군사행동에 필요한 비행기와 군함 및 주요 설비와 기재는 전혀 중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119대를 받은 것은 6·25 전쟁 이후인 1950년 10월이 처음이었다.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해공군력 지원을 거절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지 못하고 중국이 유엔에도 가입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오가 미국의 위협 속에서 자신에게 계속 의존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미중 군사 충돌도 이런 목적에서 잘 수행됐다.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1971년보다 훨씬 일찍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대만 문제도 일찍 해결될 수 있었다.(쑤이, 344쪽). 스탈린이 6·25 전쟁에서 미중 대결을 유도함으로써 신생 중국과 마오를 견제하려 했다는 ‘스탈린 음모론’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반공(反共) 동맹

 

장제스(蔣介石)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 홍군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난 뒤에도 본토 수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구상 실현을 위해 한국과 군사동맹 체결을 희망했다. 한국의 군사기지를 이용해 만주 및 화북 지역의 공업지역을 폭격하고 중국 서해안 봉쇄에도 활용하려고 했다.

6·25 발발 3일 후 장제스는 군대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다. 한국지원병사령관도 내정하고 3개 사단 3만 3000명과 1개 기갑여단, 20대의 수송기를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당시 대만은 육해공 68만 명(육군 48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맥아더와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의 개입을 불러오고 대만 방어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다.(이상호, 169〜170쪽)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장제스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호의적이었으나 자신은 반대했다고 했다. 한국보다는 대만을 방위하는데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애치슨, 537쪽). 애치슨이 반대한 데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제스가 원하는 것(중국 공산주의자를 끌어들이는 확전)과 미국이 원하는 것(중국을 개입시키지 않는 제한 전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장제스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낱낱이 알고 있어 장제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핼버스탬, 141쪽). 기본적으로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장제스의 군대는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애치슨에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확전을 불러온 빌미를 장제스에게 줄 리가 없었다.



● 이승만과 맥아더의 대만 군대 참전 환영 전환

이승만 대통령도 주한 대만 대사가 2만〜2만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반공국가인데 왜 거절하느냐는 프란체스카의 질문에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라고 했다. 중국 참전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프란체스카 1950년 7월 11일의 일기)

이승만은 막상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는 대만 군대도 받아들이는 데 찬성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병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애로사항을 털어놓자 ‘맥아더 장군에게 장제스 총통이 지원해 줄 5만 또는 그 이상의 군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무초 대사를 통해 보냈다.(프란체스카의 일기, 1951년 1월 5일).

맥아더도 1951년 11월 28일 합참에 장제스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그 후 맥아더는 장제스 군대의 대륙 공격 및 한국전쟁 개입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이견과 갈등을 빚어 전격 해임되는 주요 이유가 됐다.

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청문회에서도 대만군 활용에 대한 소신을 유지했다. 대만을 위협하던 중국군 제3, 제4 야전군이 한반도로 전환됐기 때문에 대만군을 한국전쟁에 이용하거나 중국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한다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압력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이상호, 332쪽)

 


● 이승만과 장제스의 셔틀 방문 외교

1949년 8월 6〜8일 장제스가 김해를 방문했다. ‘대한민국 제1호 정상외교’로 불리는 이장(李蔣) 회담이 7일 열렸다. 장제스가 부인의 이름을 딴 전용기 ‘미령호’ 타고 도착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진해 비행장에서 영접했다.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영빈관에 투숙했다. 둘은 회담 후 “국제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을 확인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1949년 8월 8일, 9일 보도).

전쟁이 끝난 뒤 1953년 11월 27∼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답방해 ‘반공통일전선 결성‘을 발표했고 이는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발족으로 이어졌다.

 

[5회]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서울에서 3일 허송했나

“북괴군의 ‘서울 3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당 지하조직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는 ‘붉은 반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 있다.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밀어붙였다면 미 지상군 참전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정일권, 29쪽)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 뒤 3일 만인 28일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7월 1일 한강을 넘을 때까지 3일간 서울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군 서울 3일’ 체류가 왜 발생했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남침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전격전’을 주장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전쟁의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서울 영등포에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서울 3일’이 미 지상군 파병 앞당겼다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 머무르는 3일간 국군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강 이남에 수도사단, 2사단, 7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해 시간을 벌었다. ‘북한군 서울 3일’ 기간 중인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린 뒤 이승만과 만난 뒤 곧바로 한강 방어선까지 왔다.

북한군이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mm 박격포탄을 퍼붓는 가운데 맥아더는 영등포의 한 방어선 개인호에서 일등중사에게 묻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

“철수 명령이 없었다. 명령이 내려지든가, 죽는 순간까지 참호를 지킨다.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다. 무기와 탄약을 달라”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미 지상군 2개 사단 파병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일 일본 주둔 미 24사단을 긴급 투입했다. ‘북한 서울 3일’이 미 지상군의 신속한 파병에 도움이 됐다며 전사(戰史)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다.

1951년 5월 15일 자 미군 정보지에는 “(북한이 신속히 남하하지 않아)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데는 서울 점령 뒤 한강 도하를 지체한 것 때문”이라는 김일성의 탄식이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는 약 45km. 국군의 산발적인 저 항속에 북한군은 하루 15km씩 진군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에 머문 3일이면 7월 1일 수원, 7월 4일에는 조치원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군 서울 3일’은 남쪽으로의 진격이 며칠 늦어진 이상의 6·25 전쟁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왜 3일을 한강 이북에서 머물렀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 ‘한강 다리 끊어져서 넘지 못했나’

북한군은 6월 27일 4시 창동 방어선, 28일 1시에는 미아리 방어선을 넘었다. 국군은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뜨려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를 끊고 광진교는 4시에 폭파했다. 한강철교는 일부만 파손됐다. 북한군이 서울 중심을 점령하기 전 한강 다리가 끊어져 신속히 도하를 못 했다는 시각이 있다.

당시 한강은 수심 3m, 강폭 700〜1500m가량이었다.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에는 마포나루 등 6개 나루터에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1개 소대 병력도 탈 수 있는 ‘늘배’라는 목재 운반선도 있었다. 길이가 12m가량이다.

한강에는 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진교 한강 인도교 경인 철교는 파괴됐으나 한강철교는 일부 철로 레일과 침목만 손상됐다. 레일과 침목 교체는 수 시간이면 가능했다. 낮 공습을 피해 북한군은 야간 보수 작업을 거쳐 이틀 만에 철로를 보수해 3일 새벽 전차도 건너게 했다. 한강 이남에서 국군이 방어선을 펴고 있었지만 3일간 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저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강 이북의 주력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부서져 중장비, 차량, 곡사포와 박격포, 기관총 등을 대부분 버리고 한강을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서울에 들어온 뒤 한강 다리 장악에 소홀한 것도 초기 작전의 실책으로 지적된다. 27일 서울로 진입한 105 전차여단은 한강 다리보다는 중앙청, 서대문형무소, 방송국, 신문사 등을 최우선으로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은 김일성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아주 불리했을 것인데 천행으로 김일성이 주춤거리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1권, 294쪽)

 

●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 끝으로 오판?’

북한군 서울 3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서울 제한점령론’도 제기됐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 목표가 서울을 점령하는 것에 제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점령한 뒤 뭔가를 기다리며 지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1949년 1월 〜 1953년 7월 소련 외교문서 중 김일성과 스탈린 간에 오간 서한에는 서울 제한점령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박헌영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을 만났을 때 “북한이 남침했을 때 20만 명이 봉기하고 남한 내 빨치산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는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 숫자는 2500여명까지 크게 줄었다가 그 후 다시 늘어나기도 했으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1950년 초에는 지리산의 빨치산이 대부분 토벌됐다. (KBS 역사스페셜 1999년 6월 22일).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무르며 빨치산의 호응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7월 1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대사 스티코프에게 보낸 전문에서 “조선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남한을 빨리 ‘해방’시킬수록 미국이 참전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1992년 8월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한 ‘조선인민군 제1 타격계획 작전지도’. 중부 전선의 북한군이 서울 남쪽에서 국군 퇴로를 차단한 뒤 포위 공격하는 작전이 표시되어 있다. 

 

● 무산된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의 남침 구상을 볼 필요가 있다. 남침 개시 직전인 6월 22일 작성된 것으로 개전 후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문서 ‘북한군 정보계획’에 따르면 남침은 3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2단계 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

3단계 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

핵심은 1단계로 서울을 점령한 주력군과 춘천 원주 등을 점령하고 국군의 후방으로 온 북한군이 수원 이북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그 후 남해안까지 3개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북한군 1군단 등 주력 부대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 전선의 북한 2사단과 7사단은 원주와 홍천을 점령한 뒤 남쪽 후방에서 한강 이남 지역을 봉쇄 포위해야 한다. 계획대로 진행돼 수도권에서 국군 주력을 섬멸하면 1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은 생각했다. 미국이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작전이 차질을 빚은 것은 작전상 주공(主攻)이 아닌 조공(助攻)을 맡은 중부 전선에서 발단이 됐다.

 

● 국군 6사단의 서전(瑞戰), 춘천 홍천 전투

북한은 서부전선에서 1군단 등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중부 전선인 춘천〜홍천에서는 조공 부대를 우회 남진시켜 수도권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이다. 춘천 홍천 지구는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이 맡고 있었는데 북한 정예 2군단을 맞아 선전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남도현, 47쪽)

6사단이 춘천에서 사흘, 홍천에서 이틀을 버텨 30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한 뒤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북한군은 ‘수도권 섬멸 작전’에 투입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됐다.

중부 전선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2군단 예하 2사단과 12사단이었다. 6사단은 7연대가 옥산포, 19연대가 홍천 말고개에서 육탄돌격까지 감행하며 적의 자주포를 막아냈다. 사단의 제16포병대대는 춘천과 홍천을 오가며 맹활약했다.
 

 

● 휴가도 줄이고 평소에도 철저한 훈련

6월 24일 0시 전군 비상경계령이 해제돼 25일 전방 부대의 외출 외박 휴가 장병이 많았다. 하지만 6사단은 전쟁 직전 귀순한 북한군 자주포 부대 병사가 ‘곧 북한군이 내려올 것’이라고 증언해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16포병 대대는 적의 예상 주요 접근로에 화력을 집중하는 연습을 반복했는데 실제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해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를 봤다.

북한군의 주공은 홍천의 12사단, 조공은 춘천의 2사단이었다. 먼저 제동이 걸린 것은 춘천이었다. 춘천의 국군 7연대는 1개월 전 고등학생과 주민들의 도움까지 받아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 2사단은 개전 직후 지금은 수몰된 춘천의 첫 관문 모진교를 계획대로 돌파했다. 문제는 옥산포. 북한군이 집중 타격을 받은 옥산포는 논밭 평지로 이곳을 내려다보는 우두산 8부 능선에 참호를 파두었다. 심일 소위는 5명의 결사대와 함께 대전차포와 화염병,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해 창군 이래 처음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북한군은 26일 16포병 대대가 평소 주 침공로로 예상하고 사격훈련을 해왔던 북한강 하천 부지로 내려와 포병대대의 포격 효율을 높였다. 포병대대의 집요하고 정교한 포격으로 북한군이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북한군 포로가 진술했다고 한다. 북한군 2사단은 이곳에서 50%가량의 전력 손실을 봤다. 7연대는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다 소양교로 옮겨 춘천의 관문인 소양교에서 다시 격전을 벌였다. 소양교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춘천 전투에서 타격을 입자 홍천까지 내려갔던 주공 12사단의 2개 연대와 603모터싸이클 연대를 춘천으로 ‘회군’시켰다. 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은 춘천의 7연대를 후퇴시키고 19연대와 16포병 대대도 홍천으로 이동시켰다.

 

 춘천지구 전적비.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11명의 육탄 돌격대’

일부 부대를 춘천으로 보낸 12사단 역시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하지 못했다.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던 북한군이 말고개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곳을 지키던 19연대의 11명 육탄돌격대는 굽은 지형을 이용해 숨어있다가 허리에 휴대한 대전차포를 발사하거나 SU-76 자주포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던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돌격대원 대부분이 희생됐다. 전투 현장에는 ‘11용사 육탄부대 전적비’가 세워졌다. 고갯길에서 길이 막혀 고립된 북한 12사단 병력은 춘천에서 내려온 16포병 대대가 집중 타격했다.

 

 홍천 말고개 육탄용사 전적비. 군 부대내에 위치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말고개 전투의 선전은 춘천에서 철수하던 7연대의 철수로를 확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25일 새벽 동해안으로 북한 766부대가 상륙해 후방이 차단됐던 국군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 제천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 했다. 6사단과 8사단이 전력을 보존한 것은 이후 전황에도 영향을 미쳤다.(남도현, 66쪽). 후퇴하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지연 작전’에 가담하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도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춘천 홍천 전투에서 1개 연대급 손실을 입은 북한군은 2군단장, 2사단장을 전격 교체했다. 전쟁 초기 조치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군 지도부도 큰 실책이라고 판단한 것을 보여준다.

6사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점령되고 동부전선의 8사단도 후퇴하면서 6월 30일 충주로 이동했다. 북한군의 중부전선 주력을 5일간 저지한 뒤였다.

 

 강원도 홍천의 말고개는 당시의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왕복 6차로로 바뀌었다. 하지만 도로 우측의 낭떠러지는 여전했다. 육탄용사의 공격을 받은 북한 자주포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홍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북한군 3일 늦은 한강 도하 남진

춘천 홍천 전투에서 5일을 묶인 북한군 2사단과 뒤에 전투에 가세한 7사단이 양평에서 한강을 넘은 것이 7월 1일이었다. 이날 서울을 점령한 뒤 3일을 지체하고 있던 북한군 주력 3,4사단도 한강을 건넜다. 마치 중부 전선의 2군단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내려가는 모양새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것은 7월 5일로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해 전력을 보강한 뒤였다. 미군 제24사단은 7월 1일 투입돼 5일 오산까지 내려온 북한군과 죽미령에서 첫 교전을 하게 됐다. 춘천에서 시간을 지체한 북한군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후퇴하는 국군을 차단하지 못했고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박태균, 192쪽)


<표> 국군 6사단과 북한군 2군단의 전력 및 인명 피해

  국군 북한군
참가 부대 6사단 2연대, 7연대, 19연대, 제16포병대대 2군단 2사단, 5사단, 12사단, 제603모터싸이클 연대
병력 수 약 1만 명 약 3만5천명
주요 장비 57mm 대전차포 122mm 곡사포, 76mm 야포, 45mm 대전차포
전사상자 405명(사망 52명) 6천792명, 포로 122명
무기 장비 손실 박격포 16문, 57mm 대전자포 1문 SU-76 자주포 18문, BA-64 장갑차 2대, 45mm 대전차포 2문, 박격포 8문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 게시된 춘천 홍천 전투의 주요 지휘관들과 공적.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지연 작전’을 빛낸 한국군의 투혼

북한이 T-34 전차를 앞세워 부산까지 전격적으로 공격해 왔다면 미국의 참전을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로 진격해 서울에서 3일 가량을 남진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은 부산으로 남진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기뢰 부설, 공중 또는 해상 공격 등으로 부산항에 대한 미군의 접근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지 않았다. 부산항을 점령하거나 고립시키지 않아 미군의 교두보가 되게 한 것은 공산측의 결정적인 실수로 지적된다.(손튼, 250쪽)

북한의 기습 남침 이후 국군은 물론 미군이 투입된 뒤에도 8월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일방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 작전’을 폈다. 미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지연 작전’을 이렇게 풀이했다. “천안 조치원 금강 대전 영동 등에서 우리가 당한 패배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한국에서 끔찍한 날들을 실제 목격한 사람 모두의 탄원이다.” 맥아더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몇 주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라고 보았다. 미군이 북한을 과소평가한 것 만큼, 북한은 미군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히긴스, 98쪽)

초기 전투는 일방적인 후퇴였고 미군이 투입된 후에도 당분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이 투입되기 전 중부 전선에서 6사단의 분투는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3년간 치러진 많은 전투들 중에서 춘천과 홍천 전투를 다시 돌아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군 6사단과 김종오 사단장의 영욕

6·25 전쟁이 3년 가량 이어지면서 전쟁에 참가한 부대와 지휘관들은 숱한 전투 속에 승패가 엇갈리고 영욕이 교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전 초기 춘천 홍천의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6사단이다. 미군은 군우리 전투의 참패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한 육군 제2사단이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6사단은 개전 초기 춘천과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을 맞아 사흘 이상 저지함으로써 서울 함락 이후 북한군 남진의 발목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6사단이 홍천에서 철수해서 후퇴한 것도 다른 전선이 밀리면서 불가피한 후퇴 작전이었다.

그런데다 후퇴해 가면서도 7월 5일∼8일 동락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둬 6사단 7연대의 연대장부터 사병까지 장병 전체가 1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시기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는 미국 24사단의 스미스 특임부대가 준비되지 않은 오만함으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받고 있던 때여서 더욱 대비가 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한 뒤 10월 26일 평안북도 초산에서 미군과 국군을 통틀어 처음 압록강에 도달한 것도 6사단의 한 특공수색대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압록강에서 수통에 물을 받는 병사가 6사단 7연대 소속이다. 백선엽 장군은 이같은 6사단의 활약에는 다른 국군 사단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강원도의 영월 일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광산개발 붐이 일어 광석을 실어 나르는 중소형 트럭이 전국 어느 지역에 비해 많았다는 얘기다. 6사단은 전쟁 발발 뒤 그 광물회사의 트럭을 징용할 수 있어 기동력이 아주 탁월했다는 것이다. (백선엽 2권, 219쪽)

 

 

그런데 ‘압록강 수통’은 ‘북진 과속’의 큰 대가를 치렀다. 중공군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다가 포위 공격을 해 연대장이 권총도 잃어버릴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후퇴해야 했다. 당시 미군과 국군 모두 압록강 진격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공군 대부대를 맞은 것이지만 김종오 사단장으로서는 큰 작전상 실책으로 남게 됐다.

6사단 사단장이 김종오에서 장도영으로 바뀐 1951년 4월 22〜24일 사창리 전투에서 부대의 50% 가량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과 벌인 방어 전투다. 중과부적의 상황이긴 했으나 방어선을 줄여 버티면서 아군의 화력 지원을 받는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사실상 전투를 포기한 데다 무질서한 도주로 피해가 컸다. 하지만 6사단은 5월에는 사단 단위로는 6·25 전쟁 최대의 성과로도 불리는 용문산 전투에서 승리한다. 장도영 사단장으로서도 개인적인 설욕의 기회가 됐다.

김종오 장군은 1952년 10월에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장으로서 큰 성과를 올려 초산 전투에서 패배를 되갚았다.

 

 

[6회]낙동강 방어전선

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지연작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시계 조형물’에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15분까지 전투가 벌어진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오산=구자룡 기자

 

경기 오산시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투가 벌어진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15분까지를 표시한 시계 조형물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과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 괴뢰 집단’간 첫 전투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더욱이 미군은 북한군에 겨우 반나절 가량 버틴 패배였다. 9월 초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를 거듭한 ‘지연작전’의 시작이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구 ‘유엔 초전 기념비’. 스미스 부대원 숫자인 약 450개의 돌을 쌓은 모습이다. 오산 =구자룡 기자 

 

● 한나절 전투에 병력 3분의 1 손실된 대패

맥아더는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바로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한국군의 방위 능력은 이미 소멸해 북한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맥아더, 169쪽). 맥아더가 처음 투입한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구마모토에 있던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첫 미 지상군으로 긴급 투입됐다.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시민환영대회를 받은 후 2일 대전을 거쳐 오산 북쪽 5km 지점의 죽미령에 도착한 것은 5일 오전 3시였다. 도로는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들로 가득 차 인파를 역류하면서 올라갔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유엔군 초전기념비’. ‘초전’은 6·25 전쟁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 장소라는 의미다. 오산=구자룡 기자

 

 오전 8시 후방에 배치된 52포병 대대가 북한군 선두의 T-34 탱크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전위부대는 대전차포와 무반동총을 발사했다. 탱크 4대가 파괴되었지만 다른 29대는 방어선을 돌파해 줄지어 내려왔다. 스미스 대대는 후방의 사단 본대와 통신망도 구축하지 못한 채 전투를 벌였다. 기상 상태가 안 좋아 공중 지원도 받지 못했다. 결국 전투 시작 6시간 여 만에 퇴각, 철수했다. 병력이 분산돼 포위 공격을 받았다. 모든 공용화기는 챙길 틈도 없었다. 부대원이 천안에 집결했을 때 전사 부상 실종 등 인원 손실이 150여 명으로 450여명 스미스 부대원의 3분의 1에 달했다.


죽미령 전투 전사자 중에는 나이 어린 10대 소년 형제도 있었다. 랜섬과 버질 월포드는 각각 14살과 16살에 군에 입대해 죽미령 전투 때는 16살과 18살이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해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미군은 이들 형제를 되돌려 보내려 하던 중 죽미령 전투에 참전했다가 형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 세워진 스미스 부대원 450여명의 이름을 새긴 ‘워터 커튼’. 오산 = 구자룡 기자

 

● 서로를 모르며 벌였던 초전(初戰)

정일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를 처음 보고 실망했다. 북한 T-34 탱크를 제압할 대전차 무기가 없는데다 실전 경험자도 부대원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T-34 탱크는 미군이 발사한 대전차 포탄을 ‘고무공을 튕겨내듯’ 했다.(정일권, 1986, 54쪽).


미 24사단은 3개 연대 중 한 개 연대는 일본에 남겨두고 왔다. 부대원들은 여름용 군복을 준비하라고 했다. 초전에 북한군을 격파한 뒤 서울에서 개선 행진을 하려면 여름용 군복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북한군을 얕보고 준비가 안이했다.(핼버스탬, 208쪽) 

 

<죽미령 전투 당시 피해 비교>

부대 스미스 특임부대 (1대대와 52포병대대) 북한군 4사단
피해 전사 120명 사망 42명
포로 및 실종 36명
부상 150여명 부상 85명
중화기 : 완전 유기 전차 4대 파손

 

미 지상군이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벌였던 죽미령에 세워진 ‘유엔군 초전(初戰) 기념관’ . 유치원 아이들이 견학을 왔다. 오산 = 구자룡 기자 

 

● 미 육군 사례로 연구되는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는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전사 교육에서 연구 사례라고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없이 얕잡아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하는 전투로 꼽힌다.(남도현, 106쪽). 미군은 자신들이 참전한 것을 알면 겁먹고 전투를 포기할 것이라는 자만도 있었다.

북한은 미군과의 첫 전투에 대해 ‘조선인민군 불패의 위력을 온 세상에 시위하였으며 이른바 세계 최강을 자랑해 온 미제 침략군의 거만한 콧대를 꺾었다’고 자평했다. (이상호, 171〜3쪽)


죽미령 전투는 패배했지만 북한군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 주력 부대의 남진 속도를 늦춰 미군 후속 부대를 전개하는 시간을 확보하게 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한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기 전에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소규모라도 신속하게 지상군 부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적 사령관이 조심하게 될 것이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봤다.(맥아더, 173쪽)


낙동간 전선에서 포로가 된 한 북한군 장교는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들은 바 없었는데 오산에 미군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우리로서는 충격이었다”고 진술했다.(‘1129일간의 전쟁’, 541쪽). 비록 기습 남침을 받아 밀리면서도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줄이는 ‘지연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자료 : ‘6·25 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 

 

● 연대장 사망, 사단장 피랍, 대전전투 패배

죽미령 패배 후 미 24사단은 천안에서 34연대장을 로버트 마틴으로 교체 투입했는데 그는 2.36인치 로켓포를 들고 직접 T-34 탱크로 달려갔다가 탱크 총격에 사망했다. 미 24사단이 19일 대전까지 밀려왔을 때는 북한군 3,4사단과 105전차사단이 3개 방면에서 공격해 왔다. 윌리엄 딘 사단장은 직접 3.5인치 대전차포를 들고 전차사냥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틀 만에 대전을 북한군에 내줬다. 딘은 철수 과정에서 야간에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산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는 부대와 헤어진 뒤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는 휴전 후 포로 교환으로 돌아왔다. 24사단은 7월 21일 후퇴하면서 옥천 전투에서도 패배해 첫 전투 이후 보름여 만에 1만6000명 병력 중 약 7000명을 잃었다.

 

 윌리엄 딘 미 24 사단 

 

●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

 자료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7월 26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8월 1일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29일 상주 미 제25사단 사령부에서는 ‘버티느냐 죽느냐’의 전선사수 명령으로 유명한 훈시를 했다. “우리 뒤에는 후퇴할 곳이 남아있지 않다. 덩케르크의 참패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미군은 8월 1일 마산〜왜관〜낙동리〜청송〜영덕을 잇는 약 240km의 최초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했다가 11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180km로 축소했다. 부대간 거리를 좁혀 적의 우회 돌파를 막고 방어선을 단축해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긴스는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큰 반원형으로 군을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워커 장군의 공로”라고 평가했다.(히긴스, 160쪽)

 

 ▲'호국의 다리’로 불리며 보행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칠곡 왜관철교 . 중간에 아치가 없는 곳이 6·25 전쟁 당시 8월 3일 미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기 위해 파괴한 곳이다. 칠곡 = 구자룡 기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을 분기점으로 마산에서 왜관까지 서부 120km의 방어선(X선)은 미군 4개 사단, 왜관부터 포항까지 80km(Y선)는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했다.

북한은 8월 초중순까지는 대구와 마산을 집중 공격하다, 중하순에는 모든 전선을 공략했다.한 곳이라도 뚫리면 대구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낙동강은 둑이 가파르고 강폭이 400〜800m로 공격보다 방어자에게 유리한 천혜의 방어선이었다.(백선엽 2권, 249쪽) 8월 16일 미 8군은 B-29 98대가 융단폭격으로 폭탄 960t을 쏟아부었다. 폭격을 지휘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폭격 작전이었다. 왜관 서북쪽 가로 3.5마일, 세로 7.5마일 지역에 투하했다. 육안 폭격이 가능해 10시 50분 시작해 13시 종료했다”고 기록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8월 16일자 일기)

 

 칠곡 호국평화탑 뒷벽에 새겨진 미군의 낙동강 방어선 외곽 융단폭격 장면 부조물.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8월 29일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7여단이 들어왔다. 16개 전투병 참전국 중 미국에 이어 영국이 참여하면서 ‘다국적 유엔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 구멍많은 낙동강 방어선

 칠곡지구 전적비. 칠곡 = 구자룡 기자 

 

융단포격 이틀 후인 18일 대구 북방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발사해 7발이 대구역에 떨어져 역무원 1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도쿄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가 거절당했다. “대통령이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적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오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프란체스카 7월 29일 일기)

프라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는 낙동강 방어선의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낙동강 전선 17개 지점에서 적군이 아군 저지선을 돌파했다는 나쁜 소식이 파우치로 전해졌다. 적이 왜관에 침입했다고도 한다’(9월 2일 일기). ‘북괴군 유격대가 대구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자유지역(방어선 내의 지역) 어느 곳에나 퍼지고만 것이다’(9월 5일 일기)

 

● 시산혈하(屍山血河) 다부동 전투

탱크 모양 외관의 다부동 전적기념관. 연중무휴 문을 열어놓고 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미군과 국군이 접하는 왜관의 다부동은 백선엽의 제1사단이 맡았다. 1사단의 3개 연대는 북한군 3개 사단을 맞아 숫적으로는 연대와 사단의 싸움이었다. 소대장이 보충되는 신병을 밤에 전선에서 처음 보고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며 “내가 소대장이다”고 소개한 뒤 전투를 벌였다. 전사하면 이름이라도 확인하려고 신병 이름을 화랑 담배값 쪽지에 적었다. 하지만 전선에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은 신병의 이름은 확인이 쉽지 않았다.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부동 전투의 무명용사들은 그런 병사들이었다.(백선엽 2권, 258쪽)

 


다부동 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유학산 중턱의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 지역 안내 표지판. 무명용사의 유해 발굴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칠곡 = 구자룡 기자

 

유학산 정상의 유학정 앞에 해발 839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유학산은 국군이 탈환하기 위해 올랐던 남쪽 사면은 경사도가 매우 커서 전투 당시 마치 공성전을 펴는 것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북한군 3개 사단은 대구 점령 목표를 세우고 관문인 다부동 돌파를 시도했다. 328고지와 839고지 유학산도 점령했다. 미국은 미 25사단 27연대를 1사단에 배속했다. 미군을 한국군에 배속시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다부동 상황이 그만큼 심상치 않았다. 양측간에 피바다의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졌다. 낙동강에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전사자의 시체가 떠내려갔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고지의 주인이 15번 바뀐 328고지 전투와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유학산 전투 등이 당시의 처절한 전투 상황을 보여준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 내부의 주요 전투 안내. 짧은 기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음을 보여준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다부동 전적 기념관 입구의 ‘55’는 8월 1일부터 9월 25일까지를 다부동 전투 기간으로 잡은 것이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동양의 베르됭 전투’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에서 아군은 1만 여명, 북한군은 3만 여명이 전사했다. 특히 유학산 전투에서만 아군 2300명이 전사하고 적군 5690명이 사살돼 다부동 최대의 격전지였다. 그야말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만들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 최전선에 나섰던 병력의 상당수는 북한군이 남한에서 징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북한은 그들을 총알받이로 앞에 세웠다. 안타까웠지만 국군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눌 수 밖에 없었다.(백선엽 2권, 236쪽)

 


다부동 전적기념관 외벽에 새겨진 전투에 참가한 장병의 이름. 우측에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보인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다부동 전투가 한창인 8월 21일 한 미 8군 장교가 한국군이 전선에서 물러나면 미군도 철수하겠다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11연대 1대대가 방어하는 천평동 계곡으로 달려갔다. 그는 고지를 버리고 물러서는 부대에 “앞장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며 병사들을 독전했다. 적은 후퇴했던 병력이 다시 쏟아져 올라오자 증원 병력이 왔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천평동 계곡을 두고 남북 양쪽에서 미군의 철갑탄과 북한군의 포탄이 교차하며 날아다녔다. 5시간 가량 지속된 이 장면을 두고 외신 종군기자들이 ‘볼링 앨리(Bowling Alley)’라고 불러 치열한 다부동 전투의 대명사가 됐다.(백선엽 2권, 290쪽)

 

다부동의 미군 전승비. 국군 1사단과 함께 싸운 미 보병 27연대의 무훈을 기리는 전승비에 영문으로 ‘볼링 앨리 승리’로 표기되어 있다. 예비기동부대로 운영된 미 27연대는 낙동강 방어선 곳곳을 지원하며 구멍 뚫리는 것을 막아 ‘소방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군 담당 X선의 남단인 마산에서의 전투는 다부동 전투나 영천전투 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산까지의 거리가 50km에 불과한 이곳이 뚫렸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지 못하는 등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미 25사단은 38선을 넘은 뒤 호남을 거쳐 낙동강 전선으로 밀고 온 방호산 사단장의 북한 6사단을 맞아 국군 해병대와 함께 2개월 가량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산을 지켜냈다. 마산전투는 ‘60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웠고, 아군은 1천명, 적군은 4천명이 죽은 대혈전이었다’.(배대균, 10쪽).

 

● 낙동강 최후 결전 영천 전투와 ‘링크업 작전’

영천지구 전적비. 피를 흘리며 사망한 전우를 무릎에 안고 있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다. 영천 = 구자룡 기자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의 결전은 인천상륙 이틀전인 13일까지 열흘간 치러진 영천전투였다. 국군 2군단이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끝에 지켜냈다. 영천 전투 승리로 유엔군이 한 때 고려했던 한반도 전면철수 계획은 백지화됐다. 영천에서 패배해 낙동강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면 인천상륙작전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군은 끝내 영천을 탈환해 버텨주면서 상륙작전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영천 탈환 전이 계속되고 있는 7일 하양의 2군단 사령부를 찾아 격려했다.

 

영천지구 전승비. 인천상륙직전 금오강변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는 등 반격 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둟리지 않도록 했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미 8군의 총반격 작전 과제는 상륙한 부대가 고립되지 않도록 밑에서 치고 올라가 협공하는 것이다. 일명 ‘링크 업(link up)’ 작전으로 상륙부대와 지원부대의 랑데뷰 작전이었다. 개전 이래 방어에 주력하던 아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미 제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해 올라온 미 8군이 경기도 오산에서 9월 26일 합류했다.

 

● 초전에 패했던 오산에서의 미군 ‘랑데뷰’

9월 16일 총반격에 나선 미 제1기병사단이 20일 왜관을 탈환해 낙동강 방어선을 막고 있던 북한군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북한군은 급속도로 붕괴되어 도주했다. 아군은 북한군이 재편성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 40km 이상을 전진하며 몰아쳤다. 9월 26일 오산에서 인천상륙작전 부대와 랑데뷰하고 30일에는 원주까지 밀고 올라갔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일패도지(一敗塗地)하던 북한군의 모습은 한심했다고 한다. 주둔했던 진지와 부대 지휘소에는 중화기와 탄약, 보급품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사기가 꺽일까 두려워 알려주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후퇴하거나, 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것을 알고 혼이 나간 모습 등 다양했다. 북한군 기관총 사수들은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 도망가지 못하고 최후의 저항을 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순순히 항복을 했다.(백선엽 1권, 314쪽).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북한군 7만 여명 중 38선 이북으로 철수한 병력은 2만5천∼3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사망, 포로 혹은 산속으로 피신해 무장 공비가 되었다.(‘1129일 전쟁’, 122쪽).

 

가뭄의 단비같은 두 승리, 동락리와 화령장


 

북한군 병력 수가 많고 장비면에서 우세한 데다 기습 공격을 당해 국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진했다. 북한군 6사단은 별다른 저항없이 호남을 쓸고 내려갔다. 서울〜대전∼대구의 중심축에서도 북한의 주력 부대가 기세를 올렸다. 다만 동부전선에서는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 쾌거가 있었다.

 


 

춘천전투에서 선전했던 6사단 7연대는 충북 음성군 무극리와 동락리에서 벌인 동락리 전투(7월 5~8일)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했다. 동락초등학교 김재옥(당시 19세) 교사는 국군이 후방으로 떠났다고 거짓으로 알려주어 북한군 15사단 48연대 병력은 경계를 풀고 교정에서 휴식을 취했다. 학교를 빠져나온 김재옥은 인근 부용산으로 올라가 4시간 가량 국군 7연대 병력을 찾아 헤맨 끝에 적 정보를 제공했다. 7연대는 기습공격으로 적 1개 연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2000여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22mm 야포 6문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했다.(김철수, 119쪽). 김재옥 교사의 활약상은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 만들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을 주었다.

 

김재옥 교사의 활약을 담은 영화 ‘전장과 여교사’ 포스터

 

동락리에서 괴멸당한 북한군 15사단의 48연대 잔여 병력과 49연대는 경북 상주의 화령장 전투(7월 17∼21일)에서도 국군 2군단 소속 17연대에 3개 대대 병력이 섬멸당했다. 국군은 지역 주민과 피난민들로부터 적 부대의 진행 방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타격했다.(온창일, 50쪽). 동락리 전투의 7연대에 이어 화령장 전투의 17연대도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다. 17연대는 개전 시 옹진반도에서 북한군에 밀려 서둘러 철수했던 패배를 되갚았다.(‘1129일간의 전쟁’, 234쪽). 17연대는 미 7사단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한다.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배대균 번역, 『마산방어전투』, 청미디어, 2020.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온창일 등 지음,『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이중근 편저, 『6·25 전쟁 1129일』, 우정문고, 2014.
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1129일간의 전쟁 6·25』,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7회]파병 16개국의 사연

“그들은 왜 낯선 땅에서 피를 뿌렸나”

경기 파주의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새겨진 벽화. 집에 돌아온 장병이 가족과 만나는 모습이 애틋하다. 파주=구자룡 기자

 

경기 파주군 적성면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의 벽면 부조물에는 무사히 귀환한 남편를 꼭 안고 안도하는 아내의 표정과 뒤에서 아빠의 바지를 잡고 기뻐하는 딸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 병사처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6·25 전쟁 기간 영국군은 전사 1078명, 실종자도 179명이었다.

 

경기 파주의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새겨진 글로스터 대대원들. 설마리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던 이들 중 일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을 것이다. 파주=구자룡 기자

 

옆 부조물에는 이곳 전투에 참가한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원들 12명이 활짝 웃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6·25 전쟁 3년간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장병 3만7886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로 길게는 한 달 가량 배를 타고 와 낯설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인적도 드문 파주의 감악산 자락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고 세워놓은 추모와 감사의 비석만으로는 그들의 희생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파주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참전 용사에게 바치는 문구가 쓰여있다. 왼쪽 베레모는 이 전투에 참가한 글로스터 대대가 과거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것을 기념한다. 파주=구자룡 기자

 

● “미국과 공동 책임” 의식한 영국

영국은 1950년 1월 가장 먼저 신중국을 승인하고 중공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이 총독 통치를 하고 있던 홍콩 때문이었다. 영국은 중공의 대만 점령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중국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확전’에 영국은 가장 반대했다. 그렇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 병력을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한반도에 투입했다. 육군 파병 규모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고 해군도 항모 1척을 포함 17척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희생자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주변의 돌을 쌓아 4개의 비를 부착했다. 위쪽 두 개는 유엔기와 영국군 부대 표지, 아래는 한글과 영문으로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파주=구자룡 기자

 

영국은 18개월이던 군복무 기간을 2년으로 늘려 연인원 5만6000여명을 보냈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영연방군을 편성해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영국은 1951년 7월 ‘영연방 1사단’을 창설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가한 것으로 ‘다국적 사단’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다.(UN군지원사, 176쪽).

미국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유럽부흥계획에 따라 28억5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영국은 한국 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미국의 영국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지 않기를 원했다.(김계동, 100쪽)

 

● 참전 동기와 계기는 달라도 명분과 목적은 하나 ‘평화유지’

6·25 전쟁에 전투와 의료 지원을 위해 파병한 각 국가의 목적과 경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불법 침략 세력의 격퇴라는 목적은 같았다. 각 국은 낯설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전투병을 보내기 위해 부대를 새로 만들고 병력을 모집했다. 의무 복무 기간을 늘려 병력을 충원했다. 많은 국가에서는 참가하겠다는 자원병이 넘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한국과 북한 지원 국가

지원 항목 한국 북한
전투지원 미국 영국 등 16개국 중국 소련 2개국
의료지원 6개국 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서독 6개국 체코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물자지원 일본 쿠바 베트남 이스라엘 등 38개국 몽골 1개국
총계 60개국 8개국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국군 참전기념비. 파주=홍진환 기자 

 

● 16개국 파병, 4개국은 육해공 모두 보내

유엔 안보리는 6·25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7일에는 유엔군사령부도 창설됐다. 파병 결의안이 통과되고 유엔군 사령부 창설 1주일이 지났지만 미국 외에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국가가 없었다. 트뤼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7월 14일 52개 회원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미국은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이 평양까지 공습을 시작됐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임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미국 다음으로 육군이 도착한 것은 영국으로 8월 28일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때다. 당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자유중국(대만)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3만3000명의 지상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3년간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는 미국 호주 캐나다 태국 4개국이다.

6·25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0개국이 전투, 의료, 물자지원 등으로 참여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연합군으로 한 나라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규모로는 최대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부산의 유엔공원묘지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매년 11월 11일 11시에 1분 동안 부산 향한 묵념 행사 ‘turn toward Busan’이 진행된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6·25 전쟁 전투병 파병 16개국 (참전 병력 숫자 순)

  국가 참전병력(명) 사망(명) 한국 도착
1 미국 1,789,100 33,686 7월 1일
2 영국 56,000 1,078 8월 28일
3 캐나다 26,791 516 12월 18일
4 튀르키예 21,212 966 10월 17일
5 호주 17,164 340 9월 27일
6 필리핀 7,420 112 9월 19일
7 태국 6,326 129 11월 7일
8 네덜란드 5,322 120 11월 23일
9 콜롬비아 5,100 213 6월 15일(1951년)
10 그리스 4,992 192 12월 9일
11 뉴질랜드 3,794 23 12월 31일
12 에티오피아 3,518 112 5월 6일(1951년)
13 벨기에 3,498 99 1월 31일(1951년)
14 프랑스 3,421 262 11월 29일
15 남아공 826 36 11월 12일
16 룩셈부르크 100 2 1월 31일(1951년)

 

※참전병력은 육해공 해병대를 포함한 연인원 기준. 미국 영국은 사망 외 실종자 3,737명과 179명 추가.
※도착은 육군 기준, 육군 없는 남아공은 공군
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프랑스, 전후 복구와 혼란 속 대대 규모 파견

 경기 양평군 지평면의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앞 좌우에 프랑스군과 미군의 전승충혼비가 좌우에 있다.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주축이 됐음을 보여준다. 지평리 전투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 교재에 전술 토론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양평=구자룡 기자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괴뢰 정부의 통치를 받는 등 전쟁의 폐허상태에서 겨우 회복되고 있는 때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군예산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유엔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였지만 걸맞는 책임을 떠안을 여유가 없었다.(베르고, 38쪽) 프랑스는 2차 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예비역들로 대대 단위 부대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1950년 8월 창설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를 이끈 몽클라르 중령. 실제 계급은 별 셋의 중장이었으나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계급을 낮췄다. 출처 지평리 전투기념관 

 

프랑스의 참전 부대를 이끌고 온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1차 대전의 영웅’ 칭호까지 받은 3성 장군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망명 자유 프랑스군’을 이끈 레지스탕스 지휘관이었다. 몽클라르는 가명이었다. 몽클라르는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계급을 낮춰 중령급이 맡는 대대장을 자원했다.

 

● 참전 계기로 나토 가입한 튀르키예와 그리스

6·25 전쟁이 발생하자 튀르키예에서는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났으니 돕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1만5천여명이 자원했는데 고등학생들도 참가시켜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튀르키예는 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전쟁은 전공을 세워 나토 가입의 명분을 내세울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전쟁 중인 1951년 9월 20일 나토 창설 멤버 12개 국가 외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함께 가입됐다.

그리스 참전 부대 이름은 ‘스파르타 대대’.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 세력과 6년간 내전을 치르고 있어 공산군의 침입을 받은 한국에 동질감을 느꼈다. 참전비 좌우의 기둥과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잎이 고대 문명국가 그리스가 우리와 생사를 함께 하며 싸웠음을 보여준다.

 

 경기 여주 시내 공원에 있는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는 좌우 기둥이 그리스 신전 기둥으로 낯익어 멀리서도 그리스 기념비임을 알 수 있다. 여주=구자룡 기자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 앞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와 투구. 여주=구자룡 기자 

 

● 영연방 국가들 :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 전투 기념비. 태극기 유엔기와 함께 영연방 4개국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호주는 유엔 결의안 직후인 6월 30일 마침 일본 극동군사령부에 파견 중인 2척의 함정과 1개 보병대대가 있어 파견을 유엔에 통보했다. 호주 국내에서도 자원병을 모집했는데 정규군의 98%가 지원 의사를 밝혀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참전사’, 136쪽)

1951년 10월 경기도 연천의 ‘마량산 전투’에서는 ‘능선 방향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능선 을 달리며 공격하는 것은 적에게 노출이 쉬워 위험하지만 신속한 기동이 가능하다. 산악 기동에 장점이 있다는 중공군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호주는 가평 전투에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여했는데 자국 현충일인 4월 25일(1차 대전 당시인 1915년 뉴질랜드와의 연합군이 튀르키예 해안에 상륙했던 날)의 하루 전날을 ‘가평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1129일의 전쟁’, 342쪽)

 

 뉴질랜드 참전 기념비. 출처 국가보훈부 

 

뉴질랜드 육군은 7월 27일부터 부대 명칭을 ‘한국부대(K-Force)’로 명명하고 파병부대원을 모집했다. 모집 9일 만에 다수의 원주민 마오리족을 포함, 전국에서 5천982명이 지원했다. 캐나다는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과 서로 대표부도 설치되지 않은 관계였지만 의회가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했다. 생 로랑 총리는 “참전은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밝혔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26쪽)

 

● 아시아의 우방국 태국과 필리핀

태국은 2차 대전 시 추축국인 독일 일본과 같은 진영에서 싸워 6·25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빨리 파병했고 가장 오래 머물러 1972년 철수했다. 파병 당시와 철수할 때의 부대장이 부자간이어서 화제가 됐다.

 

 소총 개머리판 모양의 참전비와 군인 민간인이 함께 걷는 동상이 인상적이다. 출처 국가보훈부 

 

필리핀은 6·25 전쟁 4년 전 독립한 뒤 공산 반란군과 교전 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중 한 개 대대를 빼내 한국에 보냈다.(‘UN군 지원사’, 295쪽)

 

 필리핀군 항전 기념비 기단에는 50명이 부조되어 있는데 이는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한국 국민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국가보훈부 

 

● 자국 상비군도 부족한 유럽 국가도 파병

 네덜란드군이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피해도 컸던 강원도 횡성에 풍차 모양의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출처 국가보훈부 

 

네덜란드는 보유중인 지상군이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1951년 5월 귀국할 예정이어서 정부는 파병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내 참전지원자와 언론이 ‘한국참전 지원병 임시위원회’까지 결성해 정부에 참전을 강도높게 요구했다.(UN군 지원사, 217쪽). 국민 여론에 따라 지상군 파병이 이뤄졌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두 나라가 한 개 대대를 구성해 참전기념비도 두 나라의 부대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출처 국가보훈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1949년 영세중립국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했다. 변변한 상비군도 없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통합 대대를 편성했다. 벨기에가 엄격한 기준과 적성검사를 통해 선발한 장병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도 포함됐다. 벨기에 6·25 전쟁 박물관이 있는 제3공수 대대에는 ‘임진강’ ‘학당리’ ‘잣골’ 등 벨기에 부대가 전투를 벌였던 지명을 딴 건물들이 있다고 한다.(황인희, 96쪽).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견했는데 당시 룩셈부르크 인구는 20만 명가량이었다.

 

● 왕실 근위대를 보낸 에티오피아와 공군 정예 보낸 남아공

춘천 에티오피아 전적비 옆에 에티오피아의 전투 상황과 인명 피해 상황이 표시되어 있다. 춘천=구자룡 기자

 

에티오피아는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에 무장해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황실근위대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천200명을 선발해 수도 인근 한국의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훈련을 시켜 파병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사한 영웅들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한다’는 전통이 있어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붙잡힌 동료도 반드시 구해내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황인희, 25쪽)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도로 건너편에 있는 전통 가옥 형태의 참전기념관. 춘천=구자룡 기자

 

강원도 춘천 이디오피아길 1번지에 있는 참전기념비는 1968년 하이레 세라시에 1세 황제가 친히 제막하였다.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에티오피아 대사들은 이곳부터 찾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은 206명의 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되 먼 거리 수송 문제로 항공기나 장비는 없이 병력만 보냈다. 대대 병력은 40일간의 항해 끝에 요코하마에 도착해 무스탕(F-51기) 전투기와 장비를 인수했다.

 

경기도 평택시 용이동에 있는 남아공 공군 비행대대 참전기념비에 3대의 비행기가 날아 오르는 모습이다. 전면 동물은 남아공의 상징 동물인 영양의 일종인 스프링복. 출처 국가보훈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콜롬비아는 1948년 4월 공산분자들에 의한 최악의 폭력사건으로 참변을 겪었다. 공산 반정부 게릴라 활동으로 내부 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유엔의 결정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콜롬비아 참전비와 병사. 출처 국가보훈부

 

● 의료지원 6개국

전쟁 기간 중 의료지원을 한 5개국과 독일도 포함돼 6·25 전쟁 의료지원국은 6개국이 됐다. 독일은 1953년 5월 6·25 참전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한 야전병원 설립 의사를 유엔본부에 전달했고, 이듬해 80여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으나,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이후 의료지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6·25 전쟁 의료지원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방부는 2018년 6월 독일이 1954년 5월부터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해 의료지원 활동을 펼친 것을 인정했다.

  

 1990년 6월 덴마크 코펜하겐에 세워진 참전기념비. 출처 영문 위키피디 


의료 지원 6개국

국가 의료 지원 형태 참전 연인원
스웨덴 적십자 병원(SRCH) 1,124
인도 제60 야전병원 627
덴마크 병원선(Jutlandia) 630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NORMASH) 623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 128
독일 부산에 적십자병원 설립 80

 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4

 

※참고 문헌

  •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 황인희 지음,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양문, 2022.
  • 에드완 베르고 지음, 김병일 이해방 공역, 『6·25 전란의 프랑스 대대』, 동아일보사, 1983.
  • 『UN軍支援史』, 국방군사연구소, 1998.
  • 『6·25전쟁 참전사』, 국가보훈처, 2015.
  •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 『6·25전쟁 참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4.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국가보훈처, 2016.

 

2023-07-05

[8회]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

인천 옹진군 영흥도의 해군 전적비에 해군과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전사자 1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 9월 14일과 15일 전사했다. 영흥도 = 구자룡 기자

 

대부도와 선재도를 지나 도착하는 영흥도는 시화방조제로 직선 도로가 뚫렸어도 인천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 가량 걸리는 곳. 여기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아래에는 임병래 중위 등 해군 8명과 대한청년단방위대원 6명 전사자 명단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의 사망 날짜. 1950년 9월 14일과 15일, 인천상륙작전 전날과 당일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 10군단 주도의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진데는 한국 해군과 민간인 청년 대원들이 희생을 무릎쓰고 인천 앞바다 길을 열어 놓은 것도 큰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인천 웅진군 영흥도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영흥도 = 구자룡 기자

 

 

● 상륙전 인천 앞바다 정지 작업과 양동 작전

영흥도는 인천항으로 가는 유일한 해로인 비어수로(飛魚水路)의 입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상륙작전을 앞두고 해군은 8월 18일과 20일 덕적도와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했다. 적 40명을 사살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과정에 아군도 4명이 전사했다. 이중 박동진 중사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정도 진수됐다.


미군 유진 클라크 대위가 이끄는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일부터 영흥도를 거점으로 청년단을 조직하고 켈로(KLO) 부대와 함께 월미도, 인천 및 서울 시내까지 대원을 파견해 북한군의 해안포대 수량 및 배치, 북한군 병력 상황 등을 파악하는 ‘x-ray 작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상륙작전 직전인 14일 북한군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했다. 소수만 지키고 있다가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다른 대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퇴각하지 않고 남아 적과 맞섰다. 둘만 남은 뒤 포로로 잡힐 경우 상륙작전 비밀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겨 두었던 총알로 자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였던 인천 팔미도 등대로 오르는 길.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 군함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팔미도 = 구자룡 기자

 

클라크 첩보대와 KLO 부대는 상륙작전 전날 비어수로를 비추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무난히 수행해 15일 0시 30분 등대를 점화했다. 상륙작전을 시작하라는 ‘봉화’를 올렸다.

 

 190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왼쪽), 100주년인 2003년 퇴역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상륙함대가 진입하는 비어수로를 비췄다. 우측은 신축 등대. 팔미도 = 구자룡 기자.

 

맥아더는 상륙 사흘전인 12일 미영(美英) 혼성 부대가 군산에서 소규모 상륙작전을 벌이도록 했다. 하루 전날에는 삼척에서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상륙 당일에는 포항 북쪽 낙동강 방어선의 북한군 뒤편 장사동에서 ‘명작전’으로 불리는 학도병 주도의 상륙 양동작전을 벌였다.

 

 하늘에서 드론 촬영한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멀리 인천항과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인천 = 홍진환 기자

 

  

● 상륙작전보다 더 어려웠던 내부 설득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전략회의가 열렸다. 맥아더는 콜린즈 육군참모총장 등 다른 참석자들은 “토의가 아니라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맥아더, 189쪽)

해군은 조수와 지형이 상륙에 위험하다, 썰물 때는 과거 수백년간 황해에서 밀려와 쌓인 진흙이 부두에서 2마일까지 뻗쳐 있다. 비어수로는 조수가 6노트 속력으로 드나든다. 기뢰를 부설하기 좋고, 취약 지점에 배가 침몰하면 다른 배가 통과하기 힘들다. 수륙양용부대가 월미도를 2시간 이내에 무력화해야 한다. 오후 밀물 이후에는 밤을 보낼 교두보를 확보해 다음날까지 견뎌야 한다. 반대하는 이유가 끝이 없었다.


육군은 현재 전투지역에서 너무 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제1 해병 여단을 빼면 방어선이 위태로워진다. 서울을 탈환해도 미 8군과 연계되기 어려워 상륙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 차라리 군산으로 상륙하자. 맥아더는 “인천으로 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라”고 버텼다.

 

 인천 연수구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입구. 왼쪽 나무는 ‘맥아더 장군 나무’로 명명됐다. 인천 = 구자룡 기자

 

맥아더의 비서 로우니는 “맥아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벌어졌던 세계 역사상의 주요 전쟁에 대해 6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며 인천상륙 작전의 필요와 성공 가능성을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는 회의 후 참모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22번째 위대한 전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로우니, 58쪽)

맥아더는 “북한도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습을 해야 한다. 군산은 상륙해도 방어선 좌측에 병력을 조금 보태는 의미밖에 없다. 인천을 거쳐 서울을 점령해야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고 주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면 희생을 내는 전투를 무한정 계속해야 한다. 여러분은 장병들을 도살장 소처럼 피비린내나는 방위선에 두기 원하는가? 이 순간에도 운명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하고, 10만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맥아더, 195쪽)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자유 수호의 탑’. 인천 = 구자룡 기자

 

● 인천, 상륙에 불리한 요소 다 갖춰 ‘성공 확률 5000분의 1’

인천 앞바다 조수 간만의 차는 9m로 캐나다 펀디만의 20m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간조시 개펄이 최대 4km여서 때를 못맞추면 개펄 수렁에 빠진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없고 오히려 높은 방파제로 둘러져 있다. 해안 상륙이라지만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공성전’ 같아서 인천은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상륙작전을 위해 ‘적색해안’으로 이름붙인 인천항에 상륙하는 해병대가 일본에서 제작해 가지고 온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모습이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해벽을 넘어 상륙하는 미 해병대’ 조각상. 인천 = 구자룡 기자

 

인천항으로 접근하는 해로는 비어수로 한 곳이어서 해안포나 기뢰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 2만 명 가량이 주둔해 있던 서울에서 인천은 30km 가량에 불과해 5,6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밀물은 12시간 간격이 있어 후속 부대가 오기전까지 첫 상륙 부대는 홀로 버터야 한다. 미 극동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제독은 “해군 작전상 모든 지리적 핸디캡을 갖추고 있어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이라며 인천 상륙에 반대했다.

 

 인천 월미도 진입로에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인천 = 구자룡 기자

  

 월미도로 가는 진입로에 세워진 ‘맥아더 길’ 표지석 . 인천 = 구자룡 기자

 

● 상륙작전의 맹장 맥아더,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는 보안을 위해 군사 작전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크롬 광석에서 따왔다. 상륙작전으로 ‘100-A’(낙동강 반격 후 군산 상륙), ‘100-B’(인천), ‘100-C’(군산), ‘100-D’(인천 상륙 후 주문진 추가 상륙) 등이 검토되었으나 맥아더의 집념과 판단으로 ‘100-B’로 결정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서 상륙이 가능한 날짜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세 날을 전후한 2,3일. 낙동강 방어선 전황이 급박해 가급적 빨리 결행해야 했던 것도 9월 15일로 낙점한 이유 중 하나다. 7월 21일 미 육군 7사단과 제1 해병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돼 10군단이 구성됐다. 한국군은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각각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에 배속돼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상륙작전 참가 부대

  함정(척) 상륙부대
미군 226 10군단(제1 해병사단과 7사단)
국군 15 제1 해병 연대, 국군 제 17연대
연합함대 20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참가
합계 261 약 4만명 (해공군 포함시 7만5000명)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 = 홍진환 기자 

 

맥아더는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7월 4일 사령부에 인천상륙을 위한 ‘블루하츠(BLUE HEARTS)’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7월 22일 상륙 예정으로 검토됐다. 그런데 북한군 남진 속도가 너무 빨라 7월 8일 중단을 지시했다.(이상호, 180쪽)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많은 섬들을 공략하면서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섬 건너뛰기)’ 방식으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이 50여회에 이르는 ‘상륙작전의 귀재’였다. 방어가 강한 섬은 건너 뛰고 방어가 약한 섬을 공략해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 올 때도 대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 경험이 있다. 1950년 봄에는 주일 미군에 대해 일본 열도에서 대대급까지 상륙훈련을 시킨 적도 있다. 이런 다양한 상륙작전 지휘 경험이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치밀한 육상과 항공 정찰을 통한 북한군의 동향 파악도 있었다.

9월 15일 ‘그날 하루’

00:30 팔미도 등대 점화
02:00 유엔군 함포사격
06:33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150명 월미도 상륙
06:55 월미산 정상 탈환
08:00 월미도 장악
17:30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1연대, 인천항 적색해안과 녹색해안 상륙
20:00 인천 탈환

 

● “월미산 높이가 2~3m 낮아졌다” 맹폭 후 전격적인 상륙

해발 108m 월미도는 인천항을 둘로 나누며 내려다보고 있어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월미도에는 북한 제226 육전대 소속 1개 대대 500명 가량이 월미산 정상 송신소 인근에 주둔해 있었다.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 월미산 공원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에서 살아남은 나무 중 7그루를 ‘평화의 나무’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 인천 = 구자룡 기자

 

 

팔미도 등대가 켜진 뒤 새벽 2시 미군은 월미도에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5일 오전 6시 33분 함포 사격이 멈춘 뒤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대원 150명이 월미도 북쪽 ‘녹색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순간부터는 피아가 섞여 포격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휴대 장비와 무기만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같이 상륙한 M-26 전차 9대의 지원하에 월미산 정상을 점령한 것은 상륙 20여분 만인 6시 55분이었다. 이어 오전 8시 월미도를 완전 장악했다.

 

인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돌아온 월미산 정상. 작은 안내판만이 이곳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핵심 고지였음을 알게 한다. 인천 = 구자룡 기자

 

같은 날 오후 5시 반 밀물 시간에 미 해병대가 현재 대한제분 앞 방파제 부근 ‘적색 해안’과 남쪽의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인천 시내를 남북으로 진격하면서 참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이날 오후 8시 인천을 탈환했고 이튿날 오전 일찍 대부분의 북한군은 투항하거나 인천에서 철수했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단 하루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아군 인명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예상의 20% 수준이었다고 한다. 15일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한 다음날부터 미 7사단이 뭍으로 올라왔다.

앞서 인천상륙을 위해 모두 261척의 군함이 일본 요코하마 사세보 고베 그리고 부산 등에서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 해병 17연대 장교는 출발할 때까지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뒤에 맥아더가 상륙작전 당시 바닷물에 첨벙 들어가 육지로 오던 장면을 재현하는 부조물이 세워져 있다. 인천 = 구자룡 기자

 
 

● 인천 탈환에는 하루, 서울 탈환에는 13

 

북한군은 인천을 하루 만에 내주었으나 서울 방어에는 총력을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이 경인 남쪽 공격에 투입됐다. 인천에서 허를 찔린 사실은 낙동강의 북한군에도 전해져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38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9월 26일 상륙부대 미 10군단과 낙동강에서 올라온 미 8군이 ‘초전 죽미령 전투’가 있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랑데뷰했다.

 

 서울 마포구 연희동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서울 시내에서는 드문 전투 전적비다. 구자룡 기자 

 

서울 방어에 인민군은 2만 여명이 투입됐는데 연희 104고지 전투가 고비였다. 하루 밤에도 2,3차례 뺏고 뺏기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연희 104고지’는 서울 시내에서는 드물게 6·25 전적비가 세워진 곳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은 기습 남침으로 뺏긴지 3개월 여 만이었다.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정오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돌려드린다”는 연설을 했다.

 

● 북한, 몰랐나 알고도 당했나

북한군에는 8월 26일 상륙작전 대비 지시가 내려왔다. ‘인천 방어지구 사령부’가 마련돼 9월 15일까지 방어 준비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월미도와 인천 항구에 포대도 설치됐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는데다 보급선도 길어져 다른 지역 상륙작전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개전 초기부터 후방 상륙작전을 경계하도록 북한에 조언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지목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서 레이잉푸(雷英夫)는 8월 초 일본에 파견돼 상륙작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미군 부대가 상륙작전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본 항구마다 미국과 세계 각 지에서 온 선박들로 붐빈다는 것을 확인했다. 레이잉푸가 맥아더가 인천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보고한 것이 8월 23일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도 전달했으나 인천항 폭파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핼버스탬, 462쪽)

북한의 ‘조국해방 전쟁사’에서 김일성은 인천을 점령했을 때부터 상륙작전을 예상하고 7월에는 방어를 강화하라고 했으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책임을 밑에 떠넘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이상호, 187〜9쪽)

 

● 인천상륙작전은 얼마나 공개된 작전인가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제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프란체스카 여사는 상륙작전 보안이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미 8군에 들어갔던 우리 경관 한 명이 미군 병사와 대화했는데 글쎄 이 병사 말이 ‘전쟁에 대해선 걱정 말아라. 2주일 내에 우리가 상륙작전을 벌여 공수부대로 적의 배후를 치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프란체스카 일기, 9월 6일자)

애치슨 국무장관은 “인천상륙작전이 일본에서는 ‘상식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사전에 정보가 누출됐는데 다행히 북한에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했다.(애치슨, 580쪽).

“비밀이 유지된 것은 새로운 병력배치를 목격하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던 일선 종군기자들과 고국에 있는 편집자들이 군의 전략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도쿄의 기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보도하지 않고 도와줬다고 했다. 공격 개시 1주일전 마스터 플랜의 세부가 완성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상륙작전에서 사용된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 의뢰만 보고도 인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보안을 지켰다고 한다.(맥아더, 195쪽)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지를 두고 북한 군부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서 각각 논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공통점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을 고집하는 목적이 대선 출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속 북한군 인천지구사령관은 “미제는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생각하지만, 확률이 적은 인천으로 왜 오나. 바로 맥아더 그 늙은이가 영웅으로 남고 싶어서다.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모인 미 고위 인사들도 인천상륙 작전을 반대하면서 맥아더의 대선 출마를 거론한다. “맥아더는 사다리와 등대가 있으니 상륙작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인천을 노르망디 삼아서 대권에 도전하려는 거요!”

‘사다리’는 인천항구가 절벽이 높아 사다리가 필요했는데 일본에서 제작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된다고 한 것을 비꼰 것이다.


맥아더는 1944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민주당 출신 루즈벨트 대통령을 싫어한 공화당 일부에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공화당 의원 아서 밀러와 주고 받은 편지가 밀러에 의해 공개되면서 경선에서 중도 하차했다. 편지에는 아서가 “미국에서 자행되는 독재가 사람들의 권리를 파괴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의원님의 현실 인식이 진정한 애국자들을 일깨우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현직 육군대장이 군 최고통수권자를 향해 ‘독재’라고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앞서 맥아더는 필리핀 근무 시절 자신의 참모를 지냈던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 1946년 5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에게 차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에게 출마를 권유하자 “나이가 많다”고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1947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오면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86쪽)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작전 실패에도 대선 출마가 거론된다.


1950년 11월 ‘그리스마스 때까지 귀국!’이라는 구호가 맥아더라는 개인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됐다는 것이다. 미 대선(1952년 11월)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웨인트라웁, 37쪽)


1950년 10월 트루먼과의 웨이크섬 회담 중에도 트루먼이 대선 출마 의향을 물었다. 맥아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각하에 대항할 장군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이젠하워지 맥아더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랜트(남북전쟁 시의 북부군 총사령관)도 완전무결한 대통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맥아더, 215쪽). 트루먼이 아이젠하워에 대해 낮게 평가했지만 2년 후 차기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 20년 민주당 집권을 끝냈다.


참고 문헌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9회]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

 ‘1950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인민군 복장으로 바꿔입은 6사단 20여명 특공수색대가 소련제 소형트럭을 타고 압록강을 향했다. 북한군 검문소를 만나면 104 탱크부대 소속 장교들이라고 속이고 통과했다. 고장(古場)에서는 북한군 소장 계급의 고사포여단장을 생포해 앞세우고 갔다. 압록강이 있는 초산에 도착한 뒤 주민들에게 국군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국군 만세’를 외쳤다.(정일권, 209쪽)


정일권 당시 육참총장이 후에 6사단장을 맡은 장도영 장군에게 들은 것이라며 소개한 압록강 첫 도달 장면이었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였다.

국군 6사단 7연대 장병들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경.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병사의 사진 한 장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상징했다. 그날 밤 장병들은 초산에서 밤을 지내며 ‘가거라 38선’ 등 노래를 불렀다. 6사단은 매년 ‘압록강 진격 기념식’도 갖는다. 하지만 ‘압록강 수통’의 기쁨은 다음날부터 참혹한 패전과 후퇴로 이어졌다. 중공군은 깊숙이 들어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내달은 맥아더의 유엔군은 중국 만주폭격까지 고민했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꽁무니를 빼듯 후퇴해야 했다.

 

 

● ‘인천상륙 성공 여세 몰아 38선 돌파’

“미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군 패망이지 단순히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부터 이런 결의로 한국에 온 맥아더에게 서울 탈환 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김계동 132쪽). 맥아더와 많은 부분 견해를 달리했던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8월 하순 상륙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을지 말지 논란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했다. 군대 움직임은 측량사가 설정한 선을 따라 진격하고 정지할 수 없으며 실제 군사 상황에 맞게 목표는 다시 설정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애치슨, 577쪽)


미 합참은 서울 탈환 하루 전인 9월 27일 “‘38선 이북에서 지상작전을 해도 좋다. 단 어떤 부대도 중국과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다. 한국군 이외의 군대를 만주 국경에 진격시켜서도 안된다”고 했다. 맥아더는 38선을 넘은 뒤 작전 반경에 많은 제한을 두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 이승만 “북진하라!” 국군에 친필 명령

 “대한민국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라”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부산 경무대에서 군 지휘관을 소집, 비록 작전지휘권은 7월 유엔군에 넘겼지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친필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북진 논란에 “도둑을 쫓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만두라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정일권, 156쪽)


김백일 1군단장은 10월 1일 오전 북진명령을 내렸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은 국군의 날로 정해졌다.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이 38선을 넘은 뒤 원산 입성을 두고 선두 경쟁을 벌여 10일 오전 거의 동시에 원산을 탈환했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올라온 미 8군을 오산에서 랑데뷰한 미 10군단은 다시 인천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한반도를 돌아 원산에 상륙하도록 했다.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은 멀리 남해안을 돌아온데다 원산 앞바다에 부설해 놓은 3천여기의 기뢰를 제거하느라 1주일 가량을 원산과 울릉도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전투없이 행정처리 하듯 상륙)’했다. 미군들은 원산 앞바다에서 요요작전을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러스, 38쪽) 미 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지 않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10월 28일 이원에 상륙했다.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 187공수연대 한국전쟁 참전비. 1950년 10월 20일과 21일 순천 석천에서 전투 낙하했다고 기록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1950년 10월 20일 평양 북쪽 순천 숙천 하늘은 낙하하는 미 187공수연대 낙하산으로 덮혔다. 미군은 낙하산으로 병력 뿐 아니라 중화기도 투하해 사용했다. 

 

● 지형 고려 안한 북진 목표 ‘신 맥아더 라인’

백선엽의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입성 경쟁을 벌였다. 차량을 이용한 미군이 하루 18km 진격한 반면, 1사단은 도보로 하루 25km를 올라가 10월 19일 정오 1사단이 먼저 평양 시내에 들어갔다. 백선엽은 당초 평양 진공 계획에 유엔군만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평양이 고향이다’며 밀번 미 1군단장을 설득해 평양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평양 진입 다음날 평양 북쪽 숙천, 순천 등에 미 187공수연대 4000여명을 투입하는 공수작전이 실시됐다. 하늘이 낙하산으로 시꺼멓게 덮였다. 퇴로를 차단한 뒤 포로와 납치 인사 구출, 도주하는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 포획 등이 작전 목표였다. 1만5천명으로 예상했던 북한군은 이미 청천강을 건너 38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김일성은 1주일 여 전 빠져나간 뒤였다.


공수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비행기를 타고 낙하 현장 상공에서 지켜봤다. 맥아더를 수행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맥아더의 대담함과 용기, 작전의 시의적절함, 조직력, 행동 등 다시 한 번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10월 20일자 일기).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인파가 모인 평양시민환영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 점령 후 맥아더 사령관은 새로운 북진 목표로 가까운 곳은 압록강까지 60km 가량 남겨놓은 선천~성진을 잇는 ‘뉴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38선을 넘은 직후 제시한 정주~영원~함흥을 잇는 ‘맥아더 라인’보다 30~110km 위다. 문제는 지형 검토없이 북진 목표만 올린 것이다. 한반도 지형에서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방어 폭은 270km 가량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에 가까워지면 방어 폭은 765km로 3배 이상 길어진다.(백선엽 1권, 107쪽)

 

 ▲유엔군의 평양 점령 직후인 1950년 10월 27일 열린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문구가 걸려 있다. 

 

● 전황 낙관과 오판

평양 탈환 이후 미 제1 기병사단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약 반납 지시도 있었다. 평양 탈환 사흘 후인 10월 22일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에게 “20일 이후 한국에 도착하는 탄약 수송선을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105mm와 155mm 포탄을 심은 함선 6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했다. 미 2사단장은 10월 25일 참모 회의에서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귀국길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핼버스탬, 34쪽).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가 얼마나 전황을 (터무니없이) 낙관했는지 기록없이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저항은 추수감사절까지 분쇄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다. 미 2개 사단과 유엔군 다른 부대들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한국에 주둔시키겠다. 빠르면 이듬해(1951년) 1월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트루먼, 342쪽). 낙동강 방어선에서 쫓겨 올라온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을 못하고 중공군 참전이 확인되기 직전 ‘폭풍 전야’ 같은 시기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었다.

 

  

● 지휘권 2원화로 동서부 전선 ‘80km 빈틈’

“시속 125마일 속도로 상륙함대 쪽으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가 동쪽으로 비켜가 운명의 여신은 맥아더의 편이었다. 인천에서는 큰 행운이 있었지만 압록강으로의 진격이라는 불가능한 기회로 나아가게 됐다.”


애치슨은 인천 상륙이후 맥아더의 ‘과속 북진’ 우려를 이렇게 나타냈다. 실제로 38선을 넘은 맥아더는 전략 전술 작전 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실책 혹은 아쉬움을 남기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특히 북진 작전 지휘권 2원화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서부전선은 워커의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은 상륙작전을 수행한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으로 나눴다. 10군단은 도쿄사령부 직속으로 두었다. 상륙작전을 반대한 워커에게서 10군단을 떼어내 지휘권을 둘로 나누고 북진 경쟁을 유도했다.


워커는 전선 시찰을 나온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같은 전선에 두 명의 지휘관이 있을 수 없다. 나를 택하든 아몬드를 택하든 하라”고 사실상 항명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12월 3일의 일이다.(정일권 143쪽). 미 10군단은 장진호 전투 이후 리지웨이가 8군 예하로 통합했다.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야외에 6·25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장비와 같은 기종을 전시해 놓고 있다. 앞쪽에 ‘중국인민지원군’ 표시가 보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지휘가 2원화돼 동서부 전선에 약 80〜100km의 틈이 벌어졌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쪽 지형 때문에 통신도 안되는 등 서로 경쟁적으로 북진하던 8군과 10군단 사이에 소통이 안됐다. 애치슨은 “중간에 큰 공간이 생겨 측면이 적군에게 노출됐는데 도쿄 사령부는 30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수되는 정보를 기초로 조정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애치슨, 603쪽).


심각한 것은 중공군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이징(北京)이 10월 21일 지원군사령부에 보낸 전보에서 “미국과 국군은 지원군(중공군 의미)이 참전하리라 생각을 못하고 감히 동서 두 길로 나뉘어 마음 놓고 전진하고 있다”며 전선 사이를 파고들어 적을 나누어 포위한 뒤 각개 격파할 좋은 기회라고 지시했다.(훙쉐즈, 80쪽)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야외에 6·25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장비. 단둥 = 홍진환 기자 

 

● 정보부족, 위험신호 무시, 안일한 자세

평양 탈환 후 북진하던 제1기병사단 8연대의 허버트 밀러 중사는 운산에서 늙은 농부를 만났다. “중공군 수천 명이 있으며 상당수가 말을 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농부를 대대까지 데려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공군과 아군의 첫 전투인 운산 전투(10월 25일〜11월 3일) 직전의 일이다.(핼버스탬, 37쪽).
미군과 국군은 초산과 운산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대규모 참전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소홀히 취급하고 무시했다.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후 모습을 감췄는데 치고 빠지는 중공군의 전술을 알지 못한 것도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대한 오판에 영향을 주었다. 워싱턴 지도부도 중공군이 참전한다해도 압록강 연안의 수력 발전소 등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확보 목적이라고 봤다. 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유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북진했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도 정보부재 속에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압록강 건너 중공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총력을 기울여 참전하기로 한 것인지 물어도 워싱턴은 회답이 없었다고 주장했다.(맥아더, 227쪽)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맥아더 흉상. 밑에 영문과 중국어 표기가 병기되어 있다. 인천 = 구자룡 기자 

 

● 맥아더, 중공에 대한 무지와 오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빛을 바래게 하는 맥아더의 잇단 중공군 대응 부실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먼저 무지와 오만이다. 워커 후임 8군 사령관 리지웨이나 마셜 장군 등은 중국 근무 경험이 있어 중공군에 대한 이해가 있었지만 맥아더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 필리핀 등에서 오래 머문 그의 머릿속 중국 대륙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어떤 방법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과신했다. 공습을 받으면 발이 묶이고 기동성이 떨어진 일본군과 달리 야간에 엄청난 속도로 기동하는 중공군은 상황이 달랐다. 이런 중공군에 대한 무지가 맥아더의 오판과 실수를 불렀다는 것이다.(핼버스탬, 567쪽).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다. 중국은 만주에 30만, 그중 압록강을 따라 10만〜12만 5천 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중 5만 내지 6만 명 정도가 넘어올 수 있지만 그들은 공군이 없다. 밀고 내려오면 대살육이 벌어질 것이다”고 자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을 만났을 당시 중공군 2개 야전군(18개 사단)이 이미 만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중공군이 참전한다고 하면 미국내 반전 여론을 부추길 수 있고, 참전 가능성을 부인해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정일권, 223쪽)


하지만 맥아더는 후에 회고록에서 자신의 정보부가 만주와 압록강 연안에 대부대가 집결되어 있는 것은 파악했으나 그들의 저의는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맥아더, 214쪽). 이승만은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아직 한반도에 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한 것이 다행이라고 봤다.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까지 했다. 철수한 뒤 참전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다.(프란체스카, 11월 29일자)

 

 ▲북한 공군 주력 기종 야크-9. 소련은 전쟁 당시 100여대를 제공했다. 

 

● 맥아더, 공군력 제한에 대한 불만

맥아더는 공군력 제한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가 적 병력의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변해 적이 아무리 괴롭혀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문제라고 불만을 나타냈다.(맥아더, 218쪽)


맥아더는 11월 7일자 전문에서 “작전 제한으로 한만국경을 넘나드는 적 공군기에 완전한 성역을 마련하여 주고 있다. 이래서는 아군의 사기와 전투능률에 미치는 영향은 중대하다” 고 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군사적 판단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군사적인 판단 이상의 것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회신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시아의 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해 유럽에 눈을 돌릴 틈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트루먼, 354쪽)


맥아더의 북진 실패에 대해 인천상륙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에 도달하는 신속한 북진이 이뤄졌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의 한 명이 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38선 돌파를 머뭇거려 공군지원이나 포병 화력도 없는 농민군(중공군 지칭)에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것이다.(러스, 284쪽)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넘은 뒤 미군은 9일에야 넘었다.

● 맥아더의 북진과 후퇴에 대한 해명

“우리의 북진으로 적들은 시간이 어긋나서 예정보다 일찍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그 결과 봄까지 대병력을 집결시켜 일거에 우리를 괴멸시키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북진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섬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규모 중공군 참전이 확인된 후 후퇴한 것에 대해 “중공군에 대항하려면 아군 병력을 적어도 3배로 늘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속하게 후퇴해 적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해 공격하기 쉽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맥아더, 228쪽)


미국의 핵무기 사용 논란

경기 파주 임진각의 트루먼 동상. 뒤는 미군 참전 기념비. 파주 = 홍진환 기자

 

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한 뒤 중국 동북 지방 등에 대한 핵무기 사용 여부가 논란이 됐다.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해 1950년 11월 24일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던 때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발언으로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는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자들이 핵무기 사용도 고려중이냐고 묻자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 (active consideration)’를 항상 해왔으며 이러한 무기의 사용에 대한 권한은 전투사령관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핵무기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한 듯한 인상을 줬다.(러스, 357쪽)

 

트루먼(왼쪽)과 애틀리가 1950년 12월 4일 백악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쪽에는 애치슨 국무장관(왼쪽)과 마셜 국방장관.

 

트루먼의 기자 회견 내용이 영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영국 하원에서 애틀리 수상을 불러 따졌다. 애틀리 수상은 급히 워싱턴으로 날아와 12월 4일 트루먼을 만났다. 트루먼과 애틀리의 회담이 끝난 뒤 백악관은 황급히 해명성명을 내놨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이 보유한 모든 무기에 대해서 그 사용 가능성을 검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아직 그런 허가는 아무에게도 나간 일이 없다. 그런 허가가 있을 경우 현지 사령관은 그 무기의 전술적 운반책임을 지게 된다”고 밝혔다. 트루먼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른바 중공군의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로 미 2사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퇴로가 막힌 동부 전선의 미 10군단은 흥남을 통해 해상 철수하는 등 중공군에 밀리는 상황에서 ‘핵무기 카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맥아더 뿐 아니라 미 행정부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빚어진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12월 24일 트루먼에게 핵무기 투하 지역을 망라한 리스트를 제출하면서 26개의 원자탄 투하를 권고했다. 여기에는 북한 뿐 아니라 만주의 중공군 및 북한군 보급선도 포함됐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핵무기는 아군에게도 피해를 주고, 정치적 파급효과도 크기 때문에 신중했고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


핵무기 사용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전 다시 검토됐다. 공산측이 미국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면서 협정에 조인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핵무기를 사용한 ‘대량보복 전략’을 구상하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제출하고 미 합참이 검토했다. 하지만 북한이 유엔군측의 휴전 협상 관련 내용을 대폭 수용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박태균, 233쪽)

 

중국 베이징 인민혁명군사박물관 1층 홀 중앙에 세워진 마오쩌둥 동상. 베이징 = 홍진환 기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설령 원자폭탄을 사용한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인도 네루 수상 앞에서 원자폭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인구가 얼만데, 원자폭탄으로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죠. 누군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대응해줄 겁니다. 1천만 명이나 2천만 명 정도의 인명 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요.”(핼버스탬, 540쪽)


<참고문헌>

김계동 지음,『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맥아더 회고록』,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
박태균 지음,『한국전쟁』, 책과 함께, 2005.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1권. 2020.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정일권 지음,『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196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10회]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관람객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북중 접경 도시 단둥을 보려온 관광객들이 기념관도 찾는다. 인원 제한을 위해 미리 등록을 받으며 관람료는 무료. 단둥 = 홍진환 기자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구구절절 참전을 요청하는 편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이 편지를 통해 중국은 북한에 “이런 요청을 받고 도와준 것을 잊지 말라”고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적들이 오늘 우리가 처한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북한 신의주 압록강 건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연명으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긴급 파병 요청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자다. 박헌영은 이 편지를 직접 들고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갔다. 이날 스탈린도 마오에게 참전을 강력히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물론 중공군의 참전이 김일성의 ‘구명 요청’ 편지 한 장으로 결정될 것은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과 마오 나름대로의 계산에 따라 이뤄졌다. 그럼에도 6·25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꾼 중공군 개입의 분기점에 이 편지가 있다.

 

● 마오의 ‘파병 의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국 지도부의 6·25 전쟁 참전 논의 장면. 중공군 참전은 한반도가 분단 상태로 머물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따라서 참전을 결정한 이 장면을 보는 한국인의 심정은 불편하고 착잡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은 6·25 발생 10여일 후인 7월 7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25만의 병력을 배치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압록강을 넘은 파병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베이징(北京) 지도부내에 반대가 많았고 스탈린이 ‘항공 지원’을 해줄지도 변수였다.

1일 김일성의 편지와 스탈린의 전문을 받은 마오는 이튿날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참전을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마오는 “당분간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3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 넘으면 중국은 관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내부 전시관 초입에 있는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가 악수를 하는 대형 동상. 뒤로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중공이 내세운 참전 명분이 적혀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마오의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5일 “중소의 연합세력은 미국보다 강하다”며 참전을 독려했다. 중공이 참전을 머뭇거리면 북한에 파견한 소련 인원을 철수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며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마오의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5일 “중소의 연합세력은 미국보다 강하다”며 참전을 독려했다. 중공이 참전을 머뭇거리면 북한에 파견한 소련 인원을 철수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며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파병 의지가 있었던 마오가 꺼낸 카드는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지방에서 마오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올라온 펑은 “미국은 호랑이다. 결국은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언제가 잡아야 한다면 빨리 잡는 것이 좋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펑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 지명되자 “설령 전쟁으로 우리 국토가 황폐해지더라도 국공내전 승리가 몇 년 지연됐다고 여기면 된다”고 했다. 8일 마오는 군에 참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이날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휴양중인 스탈린에게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를 보내 자신의 결심을 전달했다.

 

<1950년 10월 긴박했던 한달>

1일 3사단 23연대 38선 첫 돌파
맥아더, 김일성에 항복 요구
김일성 박헌영, 마오에 참전 지원 요청 편지
스탈린, 마오에 참전 독려 전문
2일 마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더화이 사령관 지명
7일 유엔, 유엔군 38선 북진 승인
8일 미군, 38선 돌파 북진
마오, 동북변방군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
10일 수도사단, 3사단 원산 입성
15일 트루먼-맥아더 웨이크섬 회담
16일 중공군 선발대 압록강 도강
김일성 평양 탈출
19일 중공군 본대 압록강 도하
1사단, 미 제1기병사단 평양 입성
20일 미군, 평양 이북 ‘공수 낙하’ 작전
22일 국군, 청천강변 도착
25일 1사단, 운산전투에서 중공군 첫 교전
26일 6사단, 자강도 초산 압록강 도착
이승만 원산 시민환영대회 연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30일 이승만, 평양시민환영대회 10만 인파 앞 연설

 

▲중국 단둥의 ‘끊어진 압록강 다리’위에 설치된 대형 석조 달력. 1950년 5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관)’ 펑더화이가 압록강 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항공 지원 거절’에도 ‘반기(反旗)’ 접은 마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을 면담한 다음날인 10일 뜻밖의 소식이 마오에게 전해졌다.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공동 명의로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당분한 출동할 수 없다. 중소 모두 당분간 조선에 출병하지 않는다.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토록 할 것이다”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소련 공군 지원은 2개월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공군이 미미해 막강한 미군의 공군 화력에 제물이 되면서 파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스탈린은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소련은 항공기 파견을 서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오는 분노했다.(판초프, 547쪽)


마오는 12일 스탈린에게 북한에 파병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군에도 8일 명령을 철회했다. 스탈린에 대한 반기이자 ‘티토’ 유령이 나타난 격이었다. 그런데 마오는 하루 만에 파병으로 돌아서 꼬리를 내렸다. 마오는 “김일성이 동북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 단둥 기념관 내부에 걸린 깃발들. 북한에서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한다며 중조 우의를 굳게 다지자는 내용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동북의 북한 망명정부’ 왜 마오의 아킬레스건인가

마오가 ‘동북의 조선 망명정부’를 막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도 참전하도록 결정하게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인 것은 무엇일까. 1월 소련과 맺은 동맹조약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중국 동북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전쟁은 동북 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럴 경우 스탈린은 중소동맹조약에 따라 중공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소련 극동군을 동북에 파병할 근거를 갖게 된다.(선즈화, 485쪽)

스탈린은 5일 마오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전보에서도 이러한 뜻을 밝혔다. 일본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은 일본과의 전투를 구실로 동북에 출병했다.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중국 주권을 훼손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6·25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돼 소련이 출병하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장제스 정부 때처럼 소련군이 주둔하며 동북의 주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오의 고민이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고 ‘북한 동북 망명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의 동북 출병을 거부하면 중소동맹조약도 난파될 우려가 있다. 마오가 신중국 건설에 필요한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은 어려워진다. 전쟁으로 미국과도 적대 관계가 된 상황에서 소련까지 돌아서면 공산당 정권도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선즈화, 488쪽)

동북에 군대를 보유한 북한 망명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마오로서는 이것은 국경 너머에 미군이 주둔해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었다. 마오가 내부의 반대 의견과 스탈린이 항공 지원 약속도 받지 못했음에도 파병을 결정한 속사정 중의 하나다.(키신저, 182쪽)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이제 인민지원군이 도강해 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 출동 시기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스탈린과의 풍파가 일단락된 10월 18일 마오는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단호하게 이같은 파병 명령을 전달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항미원조기념탑’. 동쪽으로 압록강 너머 북한을 향하고 있다. 기념관 자리는 한반도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13병단의 포병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공 참전의 다양한 이유들

마오의 한국전쟁 참전 이유 중에는 국공 내전 기간 받았던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빚을 갚는 것도 있다. 1946∼9년 2차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 군대를 우회하는 두 개의 수송 및 보급로가 북한 지역을 지났다. 북한은 중공군의 전략적 후방 기지로도 활용됐다. 부상자와 부대원 가족 1만5000명이 피해 있었고 물자와 무기 장비도 제공받았다.

스탈린은 마오에 대해 “마치 빨간 껍질에 하얀 속살이 있는 순무와도 같다”며 ‘제2의 마셜 티토’라고 의심했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스탈린이 참전을 원할 때 참전해야 했다. 소련의 무기 도입으로 중국군을 현대화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에 도움을 받는 등 스탈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의혹 해소는 꼭 필요했다.(쑤이, 30쪽)

1949년 8월 장제스가 남한을 방문해 이승만과 반공 동맹을 도모한 것도 김일성을 돕기 위해 참전한 한 요인이다. 국민당군이 미군 지원 아래 한국에 공군기지를 건설한 뒤 중국 대륙 공중 폭격에 활용하려는 것을 마오는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쑤이, 55쪽)

중국은 북한이 38선을 넘은 이후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한 것을 보고 마오는 미국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마오의 필생의 과업인 중국 통일의 꿈을 수포로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키며 결의를 보였다.(선즈화, 481쪽)

 

 ▲중국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첨단 스텔스 전투기 젠-20 모형과 중국군 병사들. 베이징 = 홍진환 기자

● 소련은 중공군의 조기 파병 꺼렸다?

시기의 문제일 뿐 중공군의 파병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왜 개전 후 4개월 가량 지난 시기에 파병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유엔군이 북진해서 산악지대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전 효과를 높일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웨이크섬 회담 때 중공군 참전에 부정적이라고 트루먼에게 얘기할 때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했다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올 때가 더 적기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했다. 히긴스는 “중공이 1950년 6월과 9월 사이 개입했다면 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마오가 왜 미국이 화력이 증강될 때까지 기다렸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히긴스, 232쪽).

소련이 중공의 조기 참전을 반기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10월에는 스탈린이 마오에게 참전을 압박했으나 초기에는 오히려 파병을 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전쟁을 통해 노리는 목표와도 관련이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뒤 전쟁이 쉽게 승리로 끝나면 적화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중공의 공(功)이 커서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보다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미국과의 전투에서 힘이 빠지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커지게 하기 위해 마오를 참전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는 ‘스탈린 음모론’측의 주장이다.

초기와 달리 10월 스탈린이 마오에게 파병을 압박한 것은 유엔군이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이후 38선을 넘어와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세력 범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도 중국의 출병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선즈화, 414쪽). 중국이 조기에 참전해 승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스탈린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해 적대관계가 되게 하려는 스탈린의 목적은 달성됐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악수 사진.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국 발전이 50년 후퇴해도 참전한다”

참전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 전에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참전 의지를 밝혔다. 8월 4일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더라도 최후까지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참전 방침을 정했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조선은 중국의 이웃이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는 처음 암시했다.

녜룽전( 聂荣臻) 중공군 참모총장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해도, 저항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며 참전 의지를 밝혔다. 녜룽전의 말처럼 참전 이후 중국은 약 30년간 국제사회 단절된 채 죽(竹)의 장막 너머에서 고립됐다. 스탈린이 중공군의 참전을 종용한 의도대로 미-중 관계는 적대적이 됐다. 중소간에도 분쟁이 계속됐다. 중공이 1979년 미중 수교까지 ‘30년의 고립과 쇠락’을 겪은데는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이 있었다.

 

 ▲6·25 전쟁에 대한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의 책략과 계산을 분석한 손튼 교수의 책. ‘마오쩌둥만 왕따됐다’는 것이 결론이다.

 

● 마오, ‘서방-소(蘇) 사이 양다리’, 결과는 ‘왕따’

마오는 2차 대전이후 세계 질서가 냉전으로 양극화하는 과정에서 소련과는 이념적인 동질성을 같이하면서 서구 국가와도 실리적인 관계를 맺는 ‘양다리 전략’을 구상했다. 국공 내전 시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유사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 모두 중국을 상대국과 떼어 놓기 위해 고심했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까지 승인해 미중을 적대관계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대만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쟁이란 선수(先手)를 쳤다. 그러면서 중국이 너무 빨리 참전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중국에게 공이 돌아가지 않도록 고심했다.

6·25 전쟁에서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관계가 됐다. 서구 사회로부터는 죽의 장막으로 단절돼 투자와 개발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서구와 다시 손을 잡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퇴보를 면치 못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가한 댓가로 마오쩌둥만 ‘왕따’가 됐다는 것이 손튼 교수의 시각이다.(손튼, 535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 병사 조각상. ‘어깨를 나란히 한 작전’이라고 밑에 쓰여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마오와 스탈린 누가 패자(敗者)인가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의 한 대학 교수가 2023년 5월 수업 중 “중국은 6·25 전쟁에서 하나를 얻고 아홉 개를 잃었다(一得九失·일득구실)”고 말해 누리꾼들이 항의했다. 이 교수가 언급한 9개의 ‘실(失)’ 중 미국과 대립 관계, 서방과 결별, 한국과 적대시 등 외부와의 고립이 3가지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유발은 중국의 퇴보를 불렀다고 했다. 이밖에 소련 의존, 수십만 군인 사망, 북한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북한의 핵위협 직면 등이다.

마오쩌둥도 후에 6·25 전쟁 참전을 후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국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년 제12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년 9월 23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의 회동에서 “조선전쟁(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7월 5일 다시 미코얀과 만났을 때도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전쟁 개시 시기와 작전 계획을 고의로 감췄다. 중국은 피동적으로 연루됐다.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년 6월 2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부주석 시절부터 줄곧 “중국군의 6·25 참전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한국 전쟁 최대의 패자는 스탈린이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스탈린이 부추겼던 중미 관계의 간격두기는 중소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중국이 티토주의로 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다. 전후 10년이 되지 않아 소련과 중국은 첫 번째 적수로 변한 반면 다시 10년이 지나기 전에 동맹 관계의 역전(미중 데탕트)이 이뤄졌다는 것이다.(키신저, 189쪽)하지만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다시 서방 세계와 나오기까지 치렀던 안팎에서 치렀던 댓가의 원인에 한국전 참전도 한 요인이라는 것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미 ‘제 2사단’과 한국의 오랜 인연

▲미 2사단 ‘인대언 부대’ 마크

 

미 육군 제2사단은 한국군 6사단 만큼이나 6·25 전쟁 중 영욕이 극명했던 사단이다. 참전 1년도 안돼 적에게 네 번 포위돼 참패와 설욕전을 주고 받았다. 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이라고 불릴 만큼 참패를 당했으나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했다. 이어 벙커고지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차 대전 당시인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브루몽에서 창설됐고 2차 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사단 번호가 ‘2’인 것처럼 조기에 창설된 전통있는 부대다.

6·25 전쟁 때는 주둔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를 떠나 선도 부대가 1950년 7월 23일 부산에 상륙했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고 있을 때였다. 미 제 2사단은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맥아더가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회담을 할 때 맥아더가 “전황이 좋아지면 철수시켜 유럽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 부대다.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 2사단 참전비. ‘자유를 위하여 전사한 용사들을 위하여’라는 문구와 함께 1950년부터 한국에 주둔하고 있음을 표기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인디언이 부대기에 표시된 것처럼 별명이 ‘인디어 헤드’다. 2사단은 휴전 후인 1954년 9월 철수했다가 1965년 주둔지 교환으로 제1기병사단 대신 재배치됐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해 있고 사단 본부도 한국에 있다. 한국전 당시 한국에 왔던 9개 사단 중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창설 이래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했고, 절반 이상을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군 부대다. 2018년 평택으로 사령부가 옮기기 전까지 휴전선 최전방에 배치돼 ‘인계 철선’ 역할을 해왔다.

1976년 7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2명도 2사단 장병이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두 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도 2사단 훈련 장갑차에 치인 것이다.

※참고문헌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