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마가렛 생어 일·중 방문으로 촉발… 우생학, 여성해방 맞물려 찬반 치열

▲한,중,일을 방문한 1922년 무렵의 마가렛 생어. 간호사 출신으로 산아제한운동에 뛰어든 생어의 방문으로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에서도 산아제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퍼블릭 도메인
‘산아제한이 가(可)하다 부(否)하다 함은 전 세계의 문제가 학자간에 여러가지 토론이 되는 중대문제인 바, 이에 대하야 서울청년회에서는 오는 16일 오후 8시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산아제한에 대하여 남녀 연합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터이라는데, 이것은 원래 문제부터 중대함으로 일반은 많이 와서 듣기를 바란다더라.’(‘산아제한의 남녀연합대토론’, 조선일보 1924년9월11일)
100년전 경성에서 ‘산아제한’을 둘러싼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청년회가 주최한 이 토론회에선 사회주의 논객 신일용이 찬성, 조봉암이 반대입장에서 논쟁을 펼쳤다. 당시 ‘산아제한’이 뜨거운 이슈였다는 사실이 의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 잡지엔 산아제한을 소개하는 기사가 수시로 실리고, 청년, 사회단체마다 찬반 토론회가 열렸다.
산아제한론은 1920~1930년대 세계적인 이슈였다. 인구 증가 속도가 식량 생산 속도를 앞질러 인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맬서스주의, 우등한 인구를 늘리고 열등한 인구를 줄이자는 우생학의 대두,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내세운 여성주의까지 뒤섞이면서 ‘산아제한’이 인화성 높은 주제가 됐다.

▲경성제대 의학부 병리학실의 이재곤은 1935년 산아제한론의 역사와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4차례 조선일보에 실었다. 조선일보 1935년2월23일자 첫회
◇한,중,일 방문한 산아제한론자 마가렛 생어
1922년 3월 산아제한론으로 유명한 미국 사회운동가 마가렛 생어(1879~1966)가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키웠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출산 장려를 국책으로 추진해왔다. 일 당국은 당초 생어의 입국을 거부했으나 여론에 밀려 공개 강연 금지를 조건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그의 방문은 동아시아에 산아제한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생어는 도쿄와 교토, 요코하마에서 의사 및 전문가를 대상으로 산아제한을 주제로 열다섯차례나 강연회를 가졌다. 베이징,상하이, 광저우, 홍콩 등을 찾아가서 ‘산아제한’을 주장했다. 신문화운동 기수였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후스(胡適)의 지원으로 베이징대에서 열린 강연에는 2000명 넘는 청중이 몰렸다. 베이징대 교수 후스가 통역자였다. 생어는 “현재 시급히 과학적 산아제한법을 사용하여 우량한 인종을 양성하고, 양호한 아동을 출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부연락선, 경부선 타고 경성 식당서 강연
생어는 중국 가는 길에 조선에 들렀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넌 생어는 4월 5일 밤 부산 철도호텔에 묵었다. ‘신문기자와 직접 면담하는 게 자유롭지 못하다’면서도 호텔로 찾아간 기자와 인터뷰까지 했다.(’구속많던 일본을 離하야’, 동아일보 1922년4월7일) 매일신보는 생어가 7일 낮 경성식당에서 경성 주재 외국 부인들을 상대로 ‘산아제한강연’을 한다는 기사까지 내보냈다.
◇부유 여성의 향락, 빈민계급의 생활고가 산아제한으로
생어는 이미 이 땅에서도 유명인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정욕, 산아제한의 철학’(조선일보 1921년 6월2일, 4일)이란 글이 실렸다. ‘산아제한’은 신문 사설에도 등장했다. ‘부유계급의 여성들이 산아의 고통과 육아의 번잡을 피키 위하야’ ‘교육비와 생계비에 고통하는 빈민계급이 생계상 불가피의 요구’로 산아제한을 한다면서 ‘인문진화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한 동작계급의 생활고에 수반되는 필연적 욕구요. 필연적 결과라 하지 아니할 수없다’고 썼다.(’산아제한과 산아장려’, 조선일보 1927년7월14일)
이 사설은 산아제한과 산아장려가 아직 조선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선봉사’(祖先奉祀)가 인자(人者)의 가장 중대한 직책이 되고 ‘무후’(無後)가 부녀의 최대 악덕이 되던 전통적 윤리관이 완전히 폐기되고 거대한 외래 재정자본의 지배하에 재래의 가족제도와 사회제도가 급격히 파괴됨에 따라 이 문제는 더욱 더욱 중대화될 것이고…'라고 전망했다.
◇민족 역량 강화와 여성해방 위해 필요
경성제대 병리학실에 있던 이재곤(李在崐)은 민족 역량강화와 여성 해방을 위해 다산(多産)을 막는 산아제한을 주장했다. ‘현금 조선의 경제상태는 극도로 쇠퇴하야 비참한 운명에 이르러있다.대부분의 동포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불량증에 걸리어 있는 듯싶다. 내일 양식이 없는 현실에 있어서 자손만을 자꾸 산출한다 하면 그 말로는 어떻게 되나.’ 이재곤은 ‘생산을 적게하여 우수한 자손을 산출하도록 하고 사망자수를 적게하여 인구의 증가를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산아제한을 내세운다. ‘현대까지 사회는 남성적 독무대이었다. 그러나 이후는 여성문화의 부흥시대인 만큼 여자의 해방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선결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자로 하야 자손만을 많이 낳아서 모든 정력을 육아에 집중시키게 하지 말고 자기의 수양도 하도록 부인의 지위의 향상을 사회적으로 도모하여 주어야 한다.’(이상 ‘산아조절사상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3, 조선일보 1935년2월26일)
우수한 자손을 낳아 잘키우자는 ‘우생학’에 대해 당시 사회가 호의적 분위기였음을 알 수있다. 문제는 이런 우생학적 사고가 유전병, 정신질환자, 장애인에 대한 단종(斷種)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일본 의회는 1939년 단종법을 통과시켰다. 조선에서도 1930년대 한센인에 대한 강제불임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윤치호, 여운형, 이광수, 현상윤 등의 조선우생협회 창립
우생학은 1930년대 조선에서 과학이자 사회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 9월 윤치호, 여운형, 유억겸, 주요한, 김성수, 이광수, 현상윤 등 저명한 지식인 85명이 조선우생협회를 결성하고, 잡지 ‘우생’을 출간했다. 전국 곳곳에서 강연회, 토론회를 열어 결혼과 임신, 출산을 우등한 유전 인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고 통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신병자, 정신박약자, 유전성 맹인, 농인을 도태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나치의 우생학을 연상시키는 논리였다. 우생협회를 이끈 인물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대에서 유학한 이갑수였다. 우생협회 발기인 85명중 25명이 의사였다. 과학을 만능으로 여기던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참고자료
이영아, ‘식민지기 여성의 몸에 대한 우생학적 시선의 중층성’, 사회와 역사 제135집, 2022 가을
유연실, ‘근대 동아시아 마거릿 생어의 산아제한 담론 수용: 1922년 마거릿 생어의 중·일 방문을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109, 2017
01.14 윤치호, 여운형, 이광수는 왜 우생학에 매료됐을까
1933년 9월 조선우생협회 출범, 송진우 방응모 김성수 김활란 신흥우 등 각계 지식인 85명 발기

▲윤치호는 1933년 9월 발족한 조선우생협회 회장을 맡았다. 우생학은 당시 우등한 민족으로 거듭나는데 필요한 '과학'으로 인식됐다.
1933년 9월14일 오후3시 남대문의 양식당 ‘치요다(千代田)그릴’에 내로라할 만한 유명인사들이 모였다. 윤치호의 개회사가 끝나자, 베를린대 의대 출신 이갑수(李甲秀)가 모임 취지를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윤치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사진엔 여운형, 송진우, 방응모, 유억겸, 김성수, 김활란, 오긍선, 신흥우, 구자옥을 선출했다. 교육계와 언론계, 기독교계를 대표한 인사들이었다. 이날 발족한 단체는 ‘조선우생협회’였다.(’우생학협회 발기’, 조선일보 1933년 9월13일)
◇세계적으로 유행한 우생학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리는 우생학은 요즘 입에 올려선 안될 금기어처럼 간주된다. 하지만 20세기 전반 우생학은 세계적으로 유행한 인기 담론이었다. 영국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이 1883년 제창한 우생학은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해 우등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서 유행했다. 20세기 들어 일본과 중국, 조선에서도 소개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하루빨리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이뤄 서구 제국을 따라잡는게 지상 목표였던 동아시아에선 더 환영받았다.식민지, 반(半)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민족을 육성해 노예상태에 해방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발기인 85명중 25명은 의사
조선우생협회는 후대의 육체와 정신을 우생학적으로 개량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케 함을 목적으로 삼았다. 주요활동으로 강연, 토론, 좌담회를 개최했고, 기관지 ‘우생’(통권 3호 발행)을 창간했다.
‘무릇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산물이다. 교육으로써 우리 인류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하는 것을 우경학(優境學)이라 하고, 이와 특이한 점에 있어서 우리 인류의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그 유전적 물질을 개량시키는 것을 우생학이라 한다.’
좌옹 윤치호는 1934년 기관지 ‘우생’ 창간호에 ‘조선 사회에는 이와 같은 운동은 고사하고 사상까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나 한심한 일이다’고 썼다. 좌옹은 구한말 독립협회장, 대한자강회장과 외부협판(차관)을 지내고 YMCA 총무와 회장, 조선체육회장을 지낸 거물급 지식인이었다. 우생협회 발기인 85명 중 25명은 의사였다. 잡지 ‘우생’ 주요 필진도 의사나 과학관련 전문가들이 많았다. 우생학은 당시 ‘과학’으로 신뢰받는 신학문,신사상이었다.

▲영국 학자 프랜시스 골턴(Galton, 1822~1911)은 인류의 질적 개선을 위해 우등한 인간의 출산을 장려하고 열등한 인자를 가진 사람은 도태시킨다는 우생학을 제창했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의 사촌이기도 했다./퍼블릭 도메인
◇우생협회 주도한 베를린의대 출신 이갑수
윤치호 회장 체제에서 협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총무이사 이갑수(1899~1973)였다. 그는 ‘우생’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1920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유학을 떠나 1924년 베를린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베를린대를 정식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26년 귀국한 그는 수송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면서 우생운동을 펼쳤다.
이갑수는 우생협회 발족 전부터 신문, 잡지에 활발하게 기고해 이름을 알렸다. ‘성숙하지 못한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둘 수없다’며 조혼(早婚)의 폐해를 비유를 끌어대 알기 쉽게 지적했다.
‘아직 신체발육이 완전히 성숙치 못하여 결혼하는 것은 그 남녀 자신의 위생상 또는 발육상 극히 해로운 것이니 이는 비유하야 말하자면 마치 성숙치 못한 종자를 심어 장래에 좋은 과실이 맺힐 나무가 되라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바 ‘싹’이 나오기 전에 그 종자는 썩을 것이요 설혹 나온다 할지라도 완전한 나무가 되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는 그 후계자인 자손이 강건치 못하며 체질이 교약(較弱)하여 여러 가지의 악질(惡質)이 많이 발생할것이니 이는 인류우생(人類優生)에 대(對)한 적(敵)이될것이다’(‘의학상 결혼관-早婚은 절대로 유해’,조선일보 1930년 11월26일)
이갑수는 ‘의학상 결혼관’(조선일보 1930년11월26일~12월16일)이란 제목으로 우생학 관점에서 결혼, 임신, 출산, 성교육 지식을 19차례나 연재했다.

▲조선우생협회 발족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3년 9월 13일자 기사
◇'우생학으로 본 산아제한’
우생협회 발족 직후인 1933년 9월 신문에 연재한 ‘우생학상으로 본 산아제한’(조선일보 1933년 9월27일~28일, 10월1일)은 요즘 분위기로 치면 그대로 옮기기도 민망하다. 폐질자나 정신병자 등 유전적 결함이 있는 사람의 결혼과 출산을 법률로 제한하자는 얘기부터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는 일부 우생학자의 주장까지 소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종교와 도덕이 있는 이상에는 절대로 그 주장을 용서할 수없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난치의 폐질을 가진 두 남녀일지라도 정정당당히 결혼하야 보통 사람들과 같이 성욕의 만족을 채우게 하지만 그 부부로 하여금 자손까지 번식케한다는 것은 결코 찬성할 수없다’고 했다.
◇해방 후 초대 보건부차관
우생협회는 1937년 사실상 활동을 정지했지만 이갑수는 광복후인 1947년10월15일 ‘한국민족우생협회’를 발족시켜 활동을 이어갔다. 유억겸을 회장에 추대하고, 이갑수는 총무를 맡았다. 발족식에는 이승만과 이범석이 참석해 각각 ‘민족우생에 대한 정치적 견해’ ‘민족우생과 청년운동’이란 제목의 강연까지 했다. ‘민족 우생’ 슬로건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있는 주제였던 모양이다.
1949년 사회부 보건국이 보건부로 독립하면서 초대 보건부 차관이 됐다. 초대 보건부 장관도 우생협회 발기인이었던 구영숙이었다. 구영숙은 취임과 함께 한센병 박멸을 주요 방침으로 발표하면서 이들을 소록도에 버금가는 외딴 섬들에 격리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갑수는 1950년 12월까지 보건부 차관으로 일했는데, 재임중 우생법령을 제정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고 한다. 우수한 한국인을 만들기 위해선 우생 결혼과 강제적 단종수술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평생 간직한 것이다.
우생학이 옛날 일이라거나 홀로코스트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현행 ‘모자보건법’을 한번 보시길.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본인이나 배우자에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있게 규정했다. 우생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참고자료
신영전, ‘미수 이갑수의 생애와 사상: 우생 관련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의사학28-1, 2019
장성근, ‘1920~1930년대 조선 우생주의자의 유전 담론 연구, 성공회대 석사논문, 2015
이정선, ‘이갑수, ‘세계적 우생운동’, 개념과 소통제18호, 2016,12
이영아, ‘식민지기 여성의 몸에 대한 우생학적 시선의 중층성’, 사회와 역사 제135집, 2022 가을
01.21 ‘넘나드는 옥수(玉手)에 흩어지는 흑발’…여학생 출신 부인 이발사의 탄생
100년 전 한,중,일 이발소의 요금경쟁…'서울미래유산’ 지정된 100년 가게 성우·문화이용원도

▲1962년 서울 중구 방산동의 맘보이발관. 60년 전에 거리에서 흔히 본 이발관 풍경이다./서울의 이용원
‘수표교 다리에서 대관원을 향하여 조금을 나가랴면 서편으로 XX이발관 이라는 간판을 붙은 적은 중에도 아담한 맵시 있는 집이 있으니 그 집이 바로 조선 최초의 여자 이발사인 정(鄭)씨라는 꽃 같은 부인이 그의 남편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직업의 전장(戰場)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세상에도 재미있는 스위-트홈인 것이다.’
1926년 마지막날 밤, 이색 직업을 소개하기 위해 기자가 이발소를 찾았다. ‘조선의 첫 여자 이발사’가 일하는 이발소였다.’대관원’은 1910년대에 개업한 중국 식당으로 비교적 저렴하고 맛있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남편 배씨와 함께 이발소를 운영하는 스물아홉살 정씨는 여학교에 다니다 도중에 학업을 중단하고 결혼한 ‘모던 걸’이었다. 남편을 도우며 이발 기술을 배워 여성 이발사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1927년 신년 기획 ‘색다른 직업 로만스’ 3번째로 실린 이 기사 제목은 ‘넘나드는 옥수(玉手)에 흩어지는 흑발(黑髮)’(조선일보 1927년 1월4일).
당시 일반 요금은 20전, ‘하이카라’는 30전을 받았는데, 하루 평균 수입이 5,6원 정도라고 했다. 설렁텅 한 그릇에 10전씩 하던 시절이었다. 남편 배씨는 아내 자랑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참 사람의 마음이란 우스운 것이야요. 똑 같은 사람이 이발을 해주지만 그 전에는 하루에 불과 10여명밖에 아니되던 것이 지금은 그의 배가 되는 20명이 훨씬 넘습니다, 그려. 아마 여자이발사라는 것이 굉장히 인기를 끄는 모양이에요.’
옆자리에서 손님 머리를 손질하던 정씨는 남편 말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에그머니, 무엇이 그래요’하며 남편을 흘겨보았다.

▲서울 수표교 근처 이용원에서 남편과 함께 이발사로 일하는 아내 정씨. 조선 첫 여성 이발사로 소개됐다. 조선일보 1927년 1월4일자
◇황제 전용이발사는 농상부 주사 출신 안종호
경성의 이발소는 1895년 단발령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상부 주사 출신 안종호(安宗鎬)가 1896년 기술을 배워 황제 전용 이발사가 됐다고 한다. 한국인이 차린 이발소는 1901년 유양호가 인사동 조선극장 터에 개업한 ‘동흥이발소’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후 세종로 네거리 비각(碑閣) 모퉁이로 자리를 옮겨 ‘광화문 이발관’을 개업했다.이어 유양호 친척인 유강호가 두남이발관을 개업해 고위 관료들이 드나드는 고급 이발관으로 키웠다고 한다. 1924년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종로 우미관에서 불이나 근처의 두남이발관이 전부 타버렸다는 기사가 나온다.(’우미관 全燒', 조선일보 1924년5월22일)
안종호도 광화문 근처에 태성이발소를 열었다. 1905년엔 ‘최신이발관’ ‘중앙이발관’이 문을 열었다.

▲밝은 색 양복 재킷을 입고 나비 넥타이 차림으로 머리를 손질하는 이발사들. 일제시대 고급 부민이용원의 모습이다./'서울의 이용원'
◇‘개화당 제작소’로 통하기도
안종호는 1930년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이발사 생활 25년을 회고했다. ‘나는 본시 농상부 주사로 있다가 면관이 된 이후 할 것이 없던 차에 우연히 이발소 하는 친구의 집에 놀러간 것이 시초가 되어 거의 30년 동안이나 이용업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조선에 있는 이발소라고는 서울에 단지 네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전 조선에 약 3000군데의 이발소에 1만4000명의 이용사가 이용영업으로 밥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개화당제조소’, 매일신보 1930년5월2일)
처음에는 머리깎은 사람만 보면 ‘개화당’이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이발소는 자연히 ‘개화당 제조소’로 통했다. 안종호는 초기 이발소 풍경을 회고하면서 ‘머리를 깎으러 와서 상투를 잘리고 엉엉 통곡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를 깎으러 왔다가 완고한 아버지가 쫓아와서 반은 깎고 반은 깎지 않은 머리를 붙들고 도망을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번씩 있었다’고 했다.
안종호는 1913년 ‘이발기술학습회’ 설립에 나선 주도자로 윤양훈 조성원 등과 함께 ‘매일신보’에 나올 만큼, 초기 이발업계 대표주자였다. 1926년 순종 장례식 때 봉도단에 참가할 상민대표단 45개단체 중 경성이발업조합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구한말 농상부 주사출신으로 황제 전용이발사였던 안종호를 인터뷰한 매일신보 1930년 5월2일자 기사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이발소 경쟁
일제 때 조선인 이발소는 일본인과 중국인 이발소와 경쟁했다. 민족별로 조합도 따로 결성했고, 요금도 달리 받았다. 1915년 일본인 이발소는 상등 25전~30전, 중등 20~25전, 조선인 이발소는 상등 20전, 중등 15전, 하등 10전을 받았다. 그러다 중국인 이발소가 더 싼 요금을 받으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손님이 중국인 이발소에 몰렸다. 그러자 요금 인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일본, 중국인 이발소의 요금 경쟁은 1920년대에도 되풀이됐다. 총독부 연감에 따르면, 1919년 당시 전국의 이발소 숫자는 2089개로 조선인 1423개, 일본인 634개, 중국인 32개였다.
이발료는 목욕탕료와 함께 당시에도 물가 통제의 주요 항목이었던 모양이다. 경찰서는 이발료가 치솟을 때마다 개입해서 요금 인하를 유도했다. 이발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당국은 1923년 1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별로 조직된 이발조합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일제 당국은 그해 이발사 자격 시험을 실시하면서 면허가 없으면 이발소를 개업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이용사 자격시험은 조선인은 일본어로 치르고, 중국인은 중국어로 치르게 했다가 192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도 일본어로 시험을 보게했다. 이 때문에 일본어를 모르는 중국인은 자격시험을 치르지 못해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게 됐다. 중국인 이발소가 쇠퇴한 이유다.
◇'이발소 안락의자처럼 불편한 의자는 없다’는 작가
소설가 겸 평론가 엄흥섭(1906~?)은 수필 ‘이발풍정(風情)’(조선일보 1936년7월5일)에 ‘이발소의 안락의자처럼 불편한 의자는 다시 없다’고 썼다. ‘생리적으로나 뼈나 살이 어디에 닿아서 아파서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심히 구속을 받아 따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워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여름의 이발소는 다른 계절보다 훨씬 사람이 많이 들끓는다. 이 의자 저 의자 머리 깎는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이발사의 안내로 한 귀퉁이 의자에 올라 앉으면 어느 틈에 등뒤에서는 선풍기가 쇄-하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발소의 선풍기는 대개 이동식 장치로 되어 새로 들어온 손님에게 써-비쓰를 하는가 하면 등에 땀도 식기 전 벌써 저편짝 의자로 방향을 옮겨버린다.’ 엄흥섭은 ‘이발소의 선풍기는 일종의 장식용에 가깝지 작열(灼熱)에 땀이 끓어오른 손님에게 그다지 흡족한 바람을 내뿜어주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엄흥섭이 소개한 1936년 당시 이발료는 35전이었다.

▲1927년 개업한 성우이용원은 3대째 한 자리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외할아버지 서재덕, 아버지 이성원에 이어 이용원을 지키고 있는 아들 이남열씨. 2019년 개,보수 이전 모습이다. /서울의 이용원
◇서울 미래유산된 성우, 문화이용원
서울시는 2013년 ‘성우이용원’과 ‘문화이용원’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 유산을 모은 것이다. 서울시가 2013년부터 선정해온 미래유산은 올 초 교보문고 광화문점, 명동교자 본점 등 4곳이 추가되면서 모두 505개가 선정됐다. 서울 미래유산 중 이발소는 단 두곳뿐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지난달 펴낸 ‘서울의 이용원’은 이 두 이발소를 조사하고 인터뷰한 기록이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북으로 펼쳐본 옛 이발소 사진과 이발 도구, 간판이 기억의 실타래를 툭 건드린 탓에 꼼짝없이 다 읽고 말았다. 1940년대부터 한 자리를 지킨 혜화동 로터리 근처 문화이용원은 2022년 4월부터 지덕용 이발사가 건강 문제로 휴업중이다. 1927년 개업한 서울 만리재 고개의 ‘성우이용원’은 창업주 서재덕과 사위 이성순을 거쳐 이성순의 다섯째 아들 이남열(74)까지 3대가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서울의 이용원, 서울역사박물관, 2022
01.28 ‘연애의 자유’,舊질서에 얽매인 청년들을 뒤흔들다
스웨덴 여성학자 엘렌 케이 제창, 이광수 ‘무정’ 주인공도 흠모

▲청춘남녀가 공원을 거닐고 있는 모습. 1920년대는 연애의 시대였다.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4월4일자에 그린 '봄1-무언극'
‘21세 청춘 8개월된 임부, 3세여아를 업고 대동강에 자살’(조선일보 1925년8월5일)
석간 1면에 이런 기사가 났다. 을축대홍수가 나던 1925년 8월2일 밤10시, 평양 선교리 99번지에 살던 정애용은 대문을 나섰다. 제목과 달리, 기사엔 세살배기 장손을 업고 나왔다고 썼다. 가족에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밤새 행방이 묘연한 아내와 아들을 기다리던 남편은 모자의 시신이 대동강변에 떠밀려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의문의 죽엄!생활난이냐? 정신의 이상이냐? 가정 불화이냐?’ 기사는 의문을 남기고 끝난다.
죽음을 선택한 스물한살 여성을 놓고 이 기사는 ‘엘렌 케이냐 코론타이냐?’하고 묻는다.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는 연애의 자유를 주창한 스웨덴 여성학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는 ‘붉은 사랑’을 내건 소련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100년 전 신문 기사에 불쑥 등장할 만큼, 이 둘은 당시 지식층 사이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무정’ 주인공 형식의 필독서, 엘렌 케이 전기
한국의 첫 근대소설 ‘무정’에도 엘렌 케이가 등장한다. 춘원 이광수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 남자 주인공 형식의 독서 목록에서다.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형식은 조선에서 가장 진보한 사상을 가진 선각자라고 자부한다. 그런 형식의 독서목록 중 루소 ‘참회록’, 셰익스피어 ‘햄릿’, 괴테 ‘파우스트’와 함께 엘렌 케이 전기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모던 보이, 신여성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상식’으로 엘렌 케이가 간주된 셈이다.

▲엘렌 케이는 20세기 전반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연애의 자유'를 주창했다. 영육일치의 연애관을 내건 엘렌 케이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남녀의 연애로 결혼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1910년의 엘렌 케이./위키피디아
◇동아시아에서 환영받은 엘렌 케이
엘렌 케이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연애(戀愛)의 시대’를 열어젖힌 여성학자다. 존망의 위기속, 생존을 위해 근대화를 모색하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전통적 구질서에서 개인을 해방시켜 근대적 주체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이 엘렌 케이였다. 1903년 출간된 케이의 대표작 ‘연애와 결혼’은 이듬해 독일어본을 시작으로 1911년 영어본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일본에선 1919년 신조(新潮)사에서 영어본을 토대로 한 번역본이 나왔고, 중국도 1923년 영문판에 근거한 번역본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유학생과 신문, 잡지를 통해 케이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연애없는 결혼은 부도덕’
‘연애는 결혼의 중심’’부인운동의 선각자로 유명한 여류사상가’. 조선일보는 1925년 ‘역사상에 이름난 여성’ 26회에서 엘렌 케이를 소개했다. 나이팅게일, 퀴리 부인, 빅토리아 여왕은 물론 맹자 어머니, 마르크스 아내까지 32명을 연재한 기획이었다. ‘그의 나이 오십세 될때까지 교육에 종사하다가 그후로 부인 문제, 사회개조에 입과 붓을 아울러 힘썼으니 근대에 드문 여류사상가로 얻기 어려운 ‘생명의 사도’라 일컬을 만하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조선여성동우회, 근우회 창립에 앞장선 박원희(朴元熙·1897~1928)는 1926년 초 엘렌 케이의 연애관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했다. ‘연애는 결혼의 중심이올시다. 연애없는 결혼은 실로 아무 의미가 없으니 아무리 법률상 수속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진정한 부부가 아니요, 따라서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이와 반대로 하등의 표면적 조건이 없더라도 연애를 중심으로 한 남녀의 공동생활은 훌륭한 도덕적 결혼이라 하겠습니다.’(‘諸家의 연애관’續, 조선일보 1926년1월16일)
남녀 불문, 부모가 배필을 정하는 결혼이 만연하던 시절, ‘연애 없는 결혼은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단정한 케이의 주장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었다. 케이는 조혼(早婚)에 반대했다. 모던 보이들도 대부분 어릴 때 집안 간 약속으로 이뤄진 결혼을 한 경우가 많았다. 케이의 연애론에 남녀 모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에 뛰어든 모자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5년 8월4일자. 아래쪽에 '엘렌 케이'란 이름이 나온다.
◇'영육일치의 연애관’
엘렌 케이의 연애관은 ‘영육(靈肉 )일치의 연애관’으로 요약된다.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것이다. 성적 방종을 하는 자유연애(Free love)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연애의 자유를 주창했다. 자유롭게 연애한 상대와만 결혼할 수있고, 성숙하지 않은 어린 남녀가 지나치게 일찍 결혼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고 했다.
케이는 우수한 아동의 출산과 양육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면서 아동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 모성에 영향을 미치는 결혼을 포함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우수한 아동의 출산에 미치는 양성 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조혼을 반대한 이유중 하나도 아동을 제대로 양육하기에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케이를 모성(母性)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를 찾아 스웨덴에 유학한 최영숙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 '엘렌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
◇엘렌 케이 흠모해 스웨덴 유학
엘렌 케이는 청년의 우상이었다. 케이의 사상에 공감해 스웨덴 유학에 도전한 스무살 신여성까지 있었을 정도다. 이화여고보 출신으로 첫 조선인 스웨덴 경제학사인 최영숙(1906~1932)이 주인공이다. 최영숙은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명덕(明德)여학교를 거쳐 회문(滙文)여자중학을 마친 1926년 스웨덴으로 향했다. 중국 유학 시절 엘렌 케이의 사상에 호응해 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흠모했다. 하지만 그가 1926년9월 스웨덴에 도착하기 직전 엘렌 케이는 세상을 떴다. 엘렌 케이를 만나진 못했지만 그와의 인연은 최영숙을 한국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으로 만들었다. 스웨덴 첫 유학생 최영숙은 세상의 관심거리였다. 그를 소개한 기사 제목은 ‘엘렌 케이 찾아가 서전(瑞典,스웨덴)있는 최영숙양’(조선일보 1928년 4월10일)이었다. 최영숙은 1931년 2월 스톡홀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헌구의 엘렌 케이論
‘엘렌 케이 여사는 근대 여류사상의 선구자요, 또 어머니다. 여사의 아동관, 연애관, 결혼관, 모성관은 현대 여성문제의 핵심이 되고 중추가 되어왔다. 여사는 철저한 자유사상가였다.’(‘엘렌 케이 여사의 생애와 사상’, 조선일보 1933년 12월12일)
문학평론가 이헌구(1905~1983)는 1933년 12월 엘렌 케이 탄생 85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을 세차례 기고했다. 타계 7년이 지난 1933년,’탄생 85주년’이라면서 연재를 할 만큼 엘렌 케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936년 10주기를 맞아 ‘엘렌 케이 사상적 진폭-그 몰후 10주기에 제하야’(조선일보 1936년4월28일~29일, 5월1일)를 연재했다. 필자는 역시 이헌구였다.
이헌구는 ‘여사의 연애관은 영육일치의 완전한 이성간의 결합을 의미한다’면서 ‘위대한 연애는 다만 한 이성이 다른 이성에 대하여 가지는 육적 욕구가 심령에 대한 열망과 일치되는 데서 비로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이 연애라고 하는 두 글자의 의미하는 바가 심히 비인격적으로 비도덕적으로까지 타락되고 남용되는 것은 소위 사회 풍기문란이라는 위정자의 상용적 기우가 아니라 여사의 사상과는 많이 배치되었음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라고 썼다. 연애의 자유를 빙자해 성적 방종으로 이어진 사례가 꽤 있었던 모양이다.
◇우생학의 신봉자?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론은 개인의 행복보다 종족의 진보를 중심에 둔다는 사실이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케이는 ‘생존의 가치가 없는 사람이 후손을 낳지 않는다면 종족의 발달에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나, 성숙한 청년이 모든 측면에서 자녀를 낳기에 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다면 개인과 종족의 생명에 손해와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썼다. 종족의 발전을 연애의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케이 또한 당대의 유력 사상이었던 우생학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사랑에 기반을 둔 결혼, 성적 쾌락의 추구에 대한 죄의식 면제, 사랑 없는 결혼의 해방(이혼의 자유), 모성애의 중시 등 근대적 가족관과 여성의 권리 향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엘렌 케이가 이 땅의 남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유연실, 근대 한·중 연애담론의 형성-엘렌 케이 연애관의 수용을 중심으로,중국사연구 제79집, 2012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3
02.04 ‘연애의 시대’ 휩쓴 베스트셀러 ‘사랑의 불꽃’
1923년 노자영의 연애서한집, 청춘의 욕망 건드린 히트작

▲찰싹 붙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보이 모던 걸'을 그린 '별건곤' 잡지 1927년 2월호 삽화. 1920년대는 '연애의 시대'였다. '연애의 시대'를 겨냥한 기획 상품이 노자영의 베스트셀러 '사랑의 불꽃'이었다.
스무살 김을한이 경부선 기차를 타고 가다 목격한 일이다. 개성의 한 여학교 수학여행단과 우연히 동행했던 모양이다. 얼마후 학생 100여명이 일제히 가방에서 연분홍색 책을 한권씩 꺼내 읽기 시작하더란다. 문학청년이던 김을한이 여학생들이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지 호기심에 가득차 들여다봤다. 제목은 달라도 저자는 노자영, 한 사람이었다.
‘노자영군의 작품답지도 못한 작품으로 인하여 타락의 정정에 빠진 남녀학생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구만리 같은 전도(前途)를 그르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생각만하여도 몸서리가 난다.’ ‘아직 지기( 志 기) 미정한 나이어린 사람에게 노자영군의 작품을 읽히는 것은 마치 광인에게 폭탄을 주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인생잡기4′, 조선일보 1926년 8월12일) 김을한은 베스트셀러 작가 노자영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김을한은 이 ‘인생잡기’가 계기가 돼 그 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옥편은 없어도 이 책은 거의 다 있다’
노자영(盧子泳·1898~1940)이 1923년 출간한 ‘사랑의 불꽃’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1923년 출판계를 정리한 한 기사는 ‘사랑의 불꽃’이 ‘2000권이 팔리고 그 후에 다시 1000권을 박았으나 벌써 거의 반이나 팔린 중에 있어서 금년에 판매된 것으로 최다수를 점령’(‘도서관과 서점에 표현되는 조선 문화의 정도’, 조선일보 1923년 12월25일)했다고 썼다.
연애편지 형식의 이 소설은 ‘연애의 시대’가 열린 1920년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욕망을 건드린 히트작이었다. 첫 고백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를 19편의 편지에 담았다. 연애에 대한 선망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연애편지의 교본으로 쓰일 만큼, 실용적 목적에도 충실했다. 김을한도 ‘시내에 있는 남녀 학생중에 옥편은 한권 없을 망정 노자영군의 작품 한권씩은 거의 다 있다’고 할 만큼 당시 학생층에서 유행처럼 번진 이유다.

▲김을한은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이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을한의 노자영 비판이 실린 조선일보 1926년8월12일자
◇'광인에게 폭탄을 주는 것처럼 위험’
‘사랑의 불꽃’은 열애중인 남자가 보내는 핑크빛 사연부터 멀리 떠나 있는 애인을 그리워하거나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까지 다양한 사례가 들어있다. 이중 이별을 전제로 한 편지가 9편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고독과 애상, 이별의 정조가 강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투신처럼, 1920년대에 유독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단초가 된 정사(情死)가 유행병처럼 번졌다. 이런 분위기를 배경삼아, 또 이런 정조를 이끌어 나가는 데 기여한 것이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이었다. 김을한이 ‘광인에게 폭탄을 주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연애의 시대’겨냥한 기획 상품
‘사랑의 불꽃’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웨덴 여성학자 엘렌 케이의 ‘연애의 자유’사상이 1920년대 조선에 유행하면서 때마침 급증한 학생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은 ‘연애의 시대’를 겨냥한 기획 상품이었다. 이 책을 낸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신문에 ‘사랑의 불꽃’ 광고를 지속적으로 실으면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섰다. ‘이 책은 현대 신진 문사들이 각각 붓을 든 것이니 시 이상의 시이오, 소설 이상의 소설이다.연애를 알고자 하는 자나 다시 청춘과 인생문제를 알고자 하는 자는 한번 읽으라! 피에 살고 눈물에 사는 청춘제군에게 많은 위안을 주리라.’
이 광고는 ‘청춘 남녀의 불타는 가슴을! 그냥 그대로 휘뿌려 놓은! 사랑의 향기가 뛰고 춤추는! 꽃 같은 연애의 웃음과 눈물!’이라는 문안을 내세워 청춘 독자들을 끌어들였다. 대중들이 선망하는 엘리트계층이던 학생들이 너나없이 이 책을 펼치면서 하나의 유행으로 등장한 것이다.
‘사랑의 불꽃’이 히트한 데는 지상논쟁도 한몫했다. 김을한의 노자영 비판이 조선일보에 게재되자 노자영도 같은 신문에 세차례 반박을 기고했다. 방인근, 최서해도 논쟁에 끼어들었다. 지식층의 시끌벅적한 논쟁이 ‘사랑의 불꽃’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노자영은 사방의 적과 싸워야했다. 평론가 조중곤이 기고한 글을 반박한 '욕설만능자 조중곤군의 망론을 박함'. 조선일보 1926년 9월12일자.
◇예쁘장한 이름과 달리 신경질적이고 까무잡잡
노자영은 감상적인 문체나 여성적 이름과 달리 비쩍 마른데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청년이었다. 동년배 소설가 방인근은 ‘얼굴이 삐쩍 마른 데다가 몹시 까맣고 웃고 말할 때 커다란 입이 쭉 벌려지면서 검은 얼굴에 정반대되는 흰 이빨이 총출동을 하는 데는 흑인종을 연상케 하고 언뜻 말 상으로 보여 악감정이 날 만했다’(‘조광’, 1940년 11월호)고 회고할 정도였다.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노자영은 마음이 약한데다 신경질적이라 기자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23년 ‘사랑의 불꽃’이 히트하면서 사직하고 나와 ‘청조사’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사랑의 불꽃’류의 가벼운 책을 몇 권 냈으나 그만한 주목은 끌지 못했다. 게다가 폐결핵으로 7년간 투병하면서 병석을 지켰다. 1937년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출판인’으로서의 역량을 다시 발휘했다. 함께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일한 소설가 함대훈은 ‘춘성은 문필의 재주보다도 오히려 출판에 대한 천재가 있다고 할 만하고 거기에 열성이 있다’면서 ‘조선일보사 출판부의 융성은 오직 춘성의 노력이라고 할 수있고 조선 출판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할 수있다’고 회고했다. 춘성(春城)은 노자영의 호다.
◇대중 독자의 출현
‘사랑의 불꽃’이 몇 권이나 팔렸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서적 판매 현황을 집계하는 기구가 있었던 때도 아니니 그럴 것이다.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처럼 1만부는 넘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올 뿐이다. 노자영은 이 책 한권으로 일년만에 300~400원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그가 받은 기자 월급이 56원일 때다.
‘사랑의 불꽃’은 대중 독자의 출현에 기여한 책인 것만은 틀림없다. 소설인지 편지체를 익히는 실용서인지 분간하긴 어렵지만, 연애와 편지를 매개삼아 그의 책을 탐독하는 독자들이 생겼다.출판계는 이런 독자들을 겨냥해 비슷한 취향의 책을 잇따라 냈다. 그런 면에서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은 근대적 대중 독자의 탄생, 대중 독서의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됐다고 할 수있겠다.
◇참고자료
방인근, ‘춘성교우록’, 조광, 1940년 11월
함대훈, ‘춘성의 인간과 예술’, 조광 1940년 11월
이태숙, ‘1920년대 ‘연애’ 담론과 기획출판-’사랑의 불꽃’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연구 제27집, 2009년4월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푸른 역사,2003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3
02.11 핸들잡던 운전수 조영은, 일약 오페라 가수 발탁
日 전설적 소프라노 미우라가 발탁한 獨學生, 빅터음반사 전속 대중가수로도 활약

▲진남포에서 택시를 몰던 조영은은 1936년10월24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조영은은 일본의 전설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에게 전격 발탁돼 오페라 가수로 활약했다. 조선일보 1936년10월 28일자 기사
택시 운전수로 일하던 스물다섯살 청년 조영은(曺永恩)은 1936년 11월14일 평양공회당을 찾았다. 일본의 전설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三浦環·1884~1946)의 리사이틀을 보기위해서였다. 미우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해 런던, 밀라노, 로마, 피렌체, 나폴리 오페라극장에서 ‘나비부인’ 주역 초초상에 2000회나 출연한 오페라 스타였다. 1935년 시칠리아 팔레르모 극장에서 2000번째 초초상을 부른 그는 그해 말 일본에 영구 귀국했다.
평양 공연이 끝난 후 조영은은 면회를 청했다. 즉석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작곡가 이라디에르(1809~1865)의 ‘라 팔로마’를 부른 조영은의 목소리에 미우라는 ‘오케이’를 연발했다. 미우라는 즉석에서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수락했다. ‘원체가 음악을 좋아하여 핸들을 손에 잡고도 일상 성악연습을 해왔던’ 조영은이 도쿄로 성악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삼포환 부인에게 격찬받은 조영은군’, 조선일보 1936년11월18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쿨에서 택시운전수 출신 조영은은 2위를 차지했다. 가운데 사진은 1936년 10월24일 열린 결선대회 장면. 조선일보 1936년10월28일자
◇진남포에서 택시 몰던 조영은
평양 출신인 조영은은 숭실중학을 다니다 중퇴한 후 진남포에서 택시를 몰고 있었다. 당시로선 수입이 괜찮은 직업이었지만 노래에 대한 꿈은 포기할 수없었던 모양이다. 휴대전화 외판원을 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해 스타로 떠오른 영국 팝페라 가수 폴 포츠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조영은은 무명(無名)은 아니었다. 한달 전인 1936년 10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쿨(전조선남녀음악현상경연회)’에서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3분야에서 펼친 이 콩쿠르는 김영환 홍난파 박경호 계정식 채동선 김원복 정훈모 박태준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심사위원을 맡은 대회였다. 종합 1위는 바이올린 분야 문석준이 차지했다. 2위 입상자는 3명인데, 조영은은 성악 분야에서 남궁요설과 함께 2위를 차지했다.
조영은은 ‘음악공부를 한지 4~5년 밖에 안된다’면서 ‘자동차회사의 일을 보면서 그 여가에 자습을 하다시피 했으니 저의 실력이 변변할 수야 있습니까’라고 입상소감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차부(車部)의 일은 현재 생활을 위한 직무라 갑자기 버릴 수 없지만 이 환경에 있어서도 꾸준한 노력으로 사도에 정진할 각오’(‘독학한 우리에겐 첫째 지도자난’, 조선일보 1936년10월28일)라고 했다. 그의 소망은 음악을 배울 만한 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콩쿠르 입상 한 달도 안돼 세계적 성악가 미우라 문하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1936년 도쿄 긴자의 가부키좌에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한 미우라 다마키와 테너 김영길. 미우라는 '나비부인' 초초상을 2000번 넘게 부른 세계적 소프라노였다. 미우라는 1936년 11월 평양 공연을 왔다가 조영은을 문하생으로 발탁했다. 조영은은 1937년5월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나비부인' 전막 공연에서 미우라 상대역 핀커튼을 불렀다.
◇미우라, “세계적 테너로 만들어 드릴 것”약속
그가 언제 동경으로 건너갔는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조선일보 1936년11월18일자 기사에 ‘근일중 동경에 건너가 삼포환 부인의 문하에서 정식으로 노래를 연구하게 되었다한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 1936년말이나 늦어도 1937년 1월중에는 동경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조영은은 미우라 집 2층 피아노실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아노와 성악 수업을 받았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미우라가 1937년2월8일자로 조선일보에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연습) 일주일이 못되었는데 벌써 놀라운 진경을 보이며 ‘마담 버터플라이’의 상대역인 미국해군사관의 역을 맡게 되었다’고 썼을 정도다.
미우라는 ‘동씨의 성음은 아름답고 굳세며 성량이 풍부한 점에서 제가 들어본 음악가 중에서는 볼 수없이 훌륭한 소질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이 분이 세계적 무대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뛰어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미우라는 작품 상대역을 찾기 어려워 서양 성악가를 데리고 왔는데, ‘저의 가장 이상적인 상대역 조영은씨를 발견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미우라는 ‘공부가 웬만치 된 다음에는 조씨를 키워준 조선의 여러분께 조씨의 핀커튼을 들려드리기 위하야 저와 함께 여러분을 찾을 때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고 썼다. 미우라는 ‘조씨를 세계적 테너를 만들어 드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조선 첫 전막오페라 ‘나비부인’ 남자 주역 맡아
미우라의 칭찬은 빈 말이 아니었다. 조영은은 1937년 3월 29일부터 닷새간 미우라의 시즈오카 방면 연주여행에서 핀커튼역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일본 유학 5개월도 채 안돼 조영은은 금의환향했다. 그해 5월26일과 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핀커튼 역에 김영길과 더블캐스팅으로 무대에 섰다. (’삼포환 내연(三浦環 來演)’,조선일보 1937년5월27일) 미우라는 귀국 직후인 1936년 6월 도쿄 긴자의 가부키좌에서 올린 ‘나비부인’ 전막 공연에서도 김영길과 주연을 맡았다.
부민관 공연 첫날인 26일은 김영길, 27일에 조영은이 핀커튼을 불렀다. 조선 땅에서 열린 첫 전막 오페라에서 당당히 주역을 맡은 것이다. 프리마 돈나는 물론 미우라 다마키였다. 일본 중앙(中央)교향악단(NHK교향악단 전신), 미우라 다마키 합창단 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후원한 이 공연 티켓 최고가 특등석은 5원, 일등석은 3원이었다.
◇빅터사에서 대중가요 취입
조영은은 오페라 데뷔 직전, 메이저 음반사 빅터 소속으로 대중가요 음반을 취입했다. 한국가요사 연구자 박찬호에 따르면, 1937년 3월에 나온 ‘그때를 생각하면’이 데뷔 음반이었다. 김해송이 작사, 사사키가 작곡을 맡았다. 처음부터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두루 맡은 드문 사례였다. 이어 4월 신보에서 ‘달려라 청춘마차’(이부풍 작사, 형석기 작곡)를 불렀다. 그해 4월10일부터 29일까지 조선 북부 지방에서 열린 ‘빅터 대연주회’에도 참가했다. 11월엔 ‘끝없는 방랑’(조용곤 작사, 김송규 작곡)을 냈다.
‘내 가슴을 아느냐’(이부풍 작사, 박용수 작곡), ‘정한(情恨)의 홍사등(紅絲燈)’(박화산 작사, 이기영 작곡)도 잇따라 발표했다. 음악학자 송방송에 따르면, 조영은은 이외에도 ‘청춘비가’, ‘물새야 우지마라’(이기영 작곡) 등 빅터에서만 7곡을 취입했다.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음반 ‘행복지대’(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1938년 11월), ‘다시 만날 때까지’(이부풍 작사, 형석기 작곡, 1939년1월)까지 합하면 9곡이다. 아쉽게도 ‘청춘비가’, ‘물새야 우지마라’ 음원은 확인하지 못했다.
유튜브에선 조영은 음반을 대부분(7곡) 들을 수있다. 고음에 미성인데다, 매우 자연스럽게 대중가요를 소화한다. 하지만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 음원을 찾지 못해 본격적 성악 역량을 확인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한국음악사에서 조영은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대중가요 연구자들이 유행가 음반을 낸 조영은을 간간히 언급할 뿐이다. 조영은의 1940년대 이후 행적은 미스터리다. 한국가요사 연구자 박찬호는 ‘그의 발자취는 알 수가 없다’(‘한국가요사’72쪽)고 했다. 조영은은 한국 음악사에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진 스타였다.
◇참고자료
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년
송방송, 한겨레음악인대사전, 보고사, 2012년
02.18 전화로 부르는 ‘공중택시’ , 경성~광주 정기 항공노선까지
조선 민간항공 개척자 신용욱, 조선인 첫 1등 비행사 겸 2등 항공사

▲신용욱은 조선의 첫 1등비행사 겸 2등항공사였다. 아이스크림 행상까지 하며 일본에서 어렵사리 비행술을 배웠다. 사진은 서른 셋의 신용욱. 1934년 7월 언론사상 최초로 삼남지방 수재 '공중 취재' 당시 신문에 난 사진이다. 조선일보 1934년7월25일자
‘공중(空中) 택시, 반시간 30원’(조선일보 1936년 9월16일)
‘에어 택시’ 등장을 알리는 기사 제목이다. 이 땅에서 운영하는 첨단 운송서비스였다. 조선인 비행사가 운영하는 항공회사가 맡았다.경성을 비롯, 울산, 대구, 이리, 평양, 신의주, 함흥, 청진 등 비행장이 있는 조선 각 도시를 연결했다. 3인승 경비행기의 1인 티켓값은 시간당 60원이었다.
에어택시 사업허가를 받은 이는 신(愼)항공주식회사의 신용욱(愼鏞頊1901~1961). 1등 비행사와 2등 항공사 면허를 가진 민간 조종사였다. 신용욱은 1936년 9월12일자로 경성과 이리를 잇는 정기항공 여객 노선도 따냈다. 조선 최초의 민간 항공운송영업허가였다. 매주 1회 화요일 왕복하는 조건이었다.
비행기종은 와사전식(瓦斯電式)K·R 이형(二型) 조선동포기(同胞機)로서 경비행기(輕飛行機)로 우수한 국산기로 알려졌다.

▲에어 택시'(공중 택시) 등장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6년9월16일자 기사
◇경성上空 일주 5원, 인천 상공 일주는 10원
1936년 10월13일, 경성~이리 정기운항이 시작됐다. 오전 11시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승객 3명을 태우고, 정오에 이리에 도착한 뒤, 다시 승객을 싣고 오후 1시에 출발해 오후2시 경성에 도착했다. 요금은 1인당 15원. 화물료도1Kg당 1원씩 받았다. 매주 화요일 오전 9시40분 장곡천정 (長谷川町·소공동)에서 여의도비행장까지 자동차로 가는 셔틀 서비스도 포함됐다. (‘경성이리정기항공 13일부터 개통’, 조선일보 1936년10월13일)
이날자 기사엔 ‘에어택시’ 서비스도 안내했다. 전보나 전화 주문으로 예약을 받아 승객을 운송하고, 요금은 시간 당 60원으로 소개했다. 왕복 비행편 할인도 등장했다. 돌아오는 비행기표는 반액으로 할인하고, 만약 1박을 체류할 때는 여관비까지 대준다고 했다. ‘에어 택시’ 영업을 위한 특별 프로모션이었다.
신(愼)항공회사는 ‘유람 비행’ 영업도 시작했다. 경성 상공 일주는 1인당 5원, 인천 상공 일주는 10원을 받았다. 웬만한 자동차 요금보다 더 싸다는 말까지 나왔다.항공 대중화를 위한 시도였다.
◇1938년 경성~광주 노선 개설
신항공회사는 1938년5월14일 경성~이리 노선을 연장해 광주 운행을 시작했다. 1937년11월 착수한 10만평 규모 광주비행장이 완공되면서부터다. 운항 횟수도 주3회(화, 목, 토)로 늘렸다. 티켓값도 열차 2등칸 수준으로 인하했다. 경성~이리 구간은 편도 12원으로 내리고, 신설된 이리~광주 구간은 6원, 경성~광주는 18원으로 정했다. 광주 노선 취항을 위해 당시 최신 기종인 미국 비치크래프트사(社)의 경비행기를 구매하기도 했다. 자동차보다 먼저 찾아온 항공 시대의 개막이었다.
◇조선 유일의 민간항공 노선
조선의 항공업은 1929년 일본항공운송㈜이 일본, 조선, 만주를 잇는 화물, 우편 정기 항공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출발했다. 그해 9월 동경-대련(기항지는 오사카, 후쿠오카, 울산, 경성, 평양)을 잇는 정기 여객노선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1939년 기준, 동경-경성-신경, 경성-대련을 연결하는 간선을 비롯, 경성-청진, 경성-광주 노선과 만주국과 연락하는 신경-청진, 신경-중강진, 동경-경성-대련을 포함하는 7개 노선이 운항중이었다. 그 중 경성-광주 노선만 신(愼)항공사업사가 운영하는 조선 유일의 민간항공노선이었다.
◇법학도에서 비행사의 꿈 도전
전북 고창 출신인 신용욱은 원래 법학도였다. 1921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경성법학전수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중학시절부터 꿈꾼 비행가를 포기할 수없었다. ‘창을 여니 하늘이 높기도 하다, 높고도 넓고 깨끗한 저 무변창공으로 새와 같이 훨-훨- 날아봤으면! 이것이 내가 법학전문학교와 휘문학교의 교실에 앉아 늘 공상하던 영상이었다.’(신용욱, ‘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삼천리 제7권 제6호)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자퇴한 스무살 신용욱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처음엔 비행기 공장에 들어가 기름 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까소링’냄새 맡는 것도 낙으로 여기며 직공으로 일했다. ‘누가 잘타더란 소문도 얻어 들으며 아침에 날이 밝기와 같이 비행기 공장에 달려가 일몰할 때에야, 차디찬 하숙에 돌아오곤 하였다.’
신용욱은 1922년3월 오쿠리(小栗)비행학교를 다니면서 3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7년 2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1932년12월 입천(立 川)육군비행학교를 수료해 1등 비행사 면허, 1934년 2등 항공사 면허를 취득했다. 조선인 중 1등 비행사 면허와 2등 항공사 면허를 가장 먼저 취득한 사람이 신용욱이었다.
◇아이스크림 행상으로 학비 충당
비행술을 배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유류비만 시간당 평균 14~15원이 들었다. ‘이리하야 수년 있는 동안 연습 비행기를 사느라고 또는 모든 학용품의 비용에 쓰느라고 내가 소비한 돈이 실로 14~15만원의 거액에 미쳤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비행가 되려는 대가로 들어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집 재산의 대부분은 여기에 기울어 들었다.’(‘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140쪽 삼천리 제7권 제6호)
조부는 ‘노망난 짓을 한다’고 학비와 생활비까지 끊었다. 신용욱은 이튿날부터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1925년의 일이었다. 3원 어치 물건을 떼다가 하루종일 팔면 12~13원은 너끈히 벌었다고 한다. 비행 동료였던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이 병석에 있을 때, 이 아이스크림 판 돈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28년 귀국한 신용욱은 이듬해 5월3일 조선비행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했다. 일제하 일본을 제외하면 유일한 전문비행학교였다. 조선인 스스로 비행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신용욱의 본명은 신용인(愼鏞寅)으로 1930년대초 개명했다고 한다.
◇국경항로 개척
비행학교 설립에 사재를 쏟아부었지만, 곧 재정난에 맞닥뜨렸다. 신용욱은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총독부 항공과 촉탁으로 북조선 국경항로 개척과 위탁비행을 맡았다. 당시 총독부는 만주국과 공동으로 국경 지역의 무장세력을 토벌할 목적으로 북선(北鮮·신의주와 중강진)항로 개설을 추진했다. 신용욱은 1933년8월30일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1933년9월3일 선만 국경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조선군사령부는 신용욱에게 국경 경비비행 업무를 맡기려했으나 신용욱은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 비행학교 동문이자 조선비행학교 동료 교관인 후지타(藤田武明)는 ‘1934년에는 선만(鮮滿) 국경에서는 비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와중에서 신 비행사가 경비비행에 종사하였다. 그는 날을 수 없었다. 아니 날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 독립을 외치는 선비(鮮匪)라 칭하는 일단도 포함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정안기,’대한민국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연구’21쪽 주 51, 2015)

▲신용욱의 애기 살무손 2A2형 프로펠러 경비행기. 1934년 7월24일 이 비행기를 몰고 경성부터 대구까지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수재 항공촬영을 단행해 화제를 모았다. 조선일보 1934년 7월25일자
◇전용기로 신문 空輸
신용욱은 신문사의 긴급 재난보도에 기여했다. 1934년7월 삼남 지역(경상, 호남, 충청)에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이재민이 대거 발생하고, 경부선과 호남선이 끊겼다.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조선일보는 수해 취재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전용기를 투입했다. 신용욱이 그 역할을 맡았다. 7월24일 오후1시53분 신용욱은 살무손 2A2형 경비행기를 몰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사진 담당 후지다 기관사와 동행했다. 추풍령을 넘어 대구 연병장에 착륙한 뒤 수해상황을 신문사에 보고하고, 공중에서 촬영한 수해 사진을 기차 편으로 올려보냈다. 당시 촬영한 사진 4장이 7월26일자 석간 3면(‘機上촬영제1보’)을 장식했다. 범람한 낙동강, 물에 잠긴 소강평야와 함께 자욱한 구름바다를 헤치고 추풍령을 넘어가는 비행기 사진이 실렸다. 국내 언론사상 첫 공중 취재 보도였다. 신용욱은 7월26일 삼랑진 일대를 비행하고 이재민들에게 식빵과 의약품을 투하하고 7월29일 오후5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신용욱 비행사가 1934년 7월24일 후지다 기관사와 함께 촬영한 수재 사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수재 현장 참상 규모는 엄청났다. 조선일보는 1934년 7월27일 호외를 내고 이 항공 사진을 실었다.
비행기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일보는 1935년 국내 언론사 최초로 전용기 살무손2A2형을 구입했다. 조종사는 신용욱이었다. 신용욱의 첫 전용기 운항은 조선일보 1935년 1월3일자(‘본사機서 조감한 元日의 장안風光’)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실렸다. 전용기는 그해 10월 대구를 시작으로 영천과 포항에 신문을 공수했다. 11월엔 호남 지역과 원산, 함흥 등 북선(北鮮)까지 확대하면서 신문의 성가(聲價)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허망한 죽음
신용욱은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회사인 신(愼)항공사업사를 설립했고, 1941년 활공기 제작 전문의 조선경비행기공업과 비행기 수리 전문의 조선항공공업소를 설립했다. 전시 체제하에서 협력했다는 이유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회부됐다. 하지만 ‘죄상이 별로 없고 동정할 여지가 있다’는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 판단에 따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신용욱은 광복 후 첫 민간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Korea National Airline·KNA)를 설립했다. 2,3대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됐다.하지만 운은 여기까지였다. 1958년 항공사 소속 창랑호가 납북됐다. 국내 첫 항공기 피랍사건이었다. 그 여파로 적자가 누적되면서 항공사 운영이 어려워졌고, 196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신용욱이 세운 KNA는 대한항공 전신이 됐다. 그는 ‘민간항공산업의 개척자’(정안기)로 평가받는다.
◇참고자료
신용욱, 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삼천리 제7권 제6호, 1935년7월
정안기,대한민국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연구,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5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 랜덤하우스, 2004
02.25 梨專 글리클럽은 왜 기생취급받으며 ‘방아타령’을 불렀을까
1928년 테너 안기영 부임,민요합창곡집·음반 취입

▲이화여전 음악과 학생들로 이뤄진 합창단 '글리클럽'은 1932년 12월 南鮮 순회 공연에 나섰다.사진은 23일 군산 공연중인 글리클럽합창단. 무릎 부근까지 내려오는 흰 치마와 저고리 차림에 검정 구두를 신은 신여성들의 합창단 공연은 그 자체가 볼 거리였다. 이날 프로그램엔 '놀량' '타령' 등 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내용이 포함됐다. 신문은 조선의 고악(古樂)을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이 청중들에게 자극을 줬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1932년 12월28일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주최와 본사 학예부 후원의 이화 추기(秋期)음악회는 예정과 같이 일기 청쾌하고 월색 명랑한 성추(盛秋)의 좋은 절후를 기약하야 지난 26일 오후8시부터 장곡천정(長谷川町)공회당에서 열렸다. 이화학교는 일찍이 조선 악계에 끼친 바 공헌이 많을 뿐아니라 실로 악단에 패권을 잡은 그만큼 만도(滿都)의 인기는 여기 집중되야 정각전부터 서양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조선사람 할 것없이 과연 국제적으로 떼를 지어 모여들어 장내는 삽시간에 대만원을 이뤘다.’(‘대성황 이룬 이화여전음악회’,조선일보 1928년 10월28일)
◇이화여전 합창단의 ‘방아타령’
최고 엘리트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여전 학생들이 출연한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장은 해외 연주자들이 내한공연할 때마다 단골로 찾는 경성공회당이었다. 1920년 건립된 경성공회당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입장료는 1원50전, 1원, 학생은 50전이었다. 설렁탕 한그릇에 10전쯤 하던 시절이니 꽤 비싼 편이었다.
이날 공연엔 바이올린 독주, 피아노 2중주, 성악과 함께 이화여전 ‘글리클럽’ 합창이 포함됐다. 글리클럽(Glee Club)은 대학 또는 고교 합창단을 가리킨다. 이전(梨專) 글리클럽은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합창단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치마와 저고리에 검은 색 구두 차림으로 당대 유행을 주도한 ‘패셔니스타’였던 이화여전생들이 부르는 합창은 그 자체가 볼 거리였다. 그런데 이날 레퍼토리중 눈길을 끄는 곡이 있었다. 전통 민요 ‘방아타령’이 포함된 것이다.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는 학당시절부터 음악교육과 합창 훈련에 공을 들였다. 이화합창대는 종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성가와 서양음악을 주로 불렀다.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하면서 시작된 전통이었다. “음악은 순수해요. 베토벤 음악을 들을 때 거룩한 공간에 있다고 느껴요. 종교 음악을 배울 수있어서 기뻐요. 슈베르트 음악을 좋아해요.”(김은영, ‘이화여전 글리클럽연구: 1927~1935년의 활동을 중심으로’ 116쪽, 이화음악논집)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안기영 캐리커처. 항상 연미복을 입고 공연한다고 썼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28년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한 안기영은 전통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한 악보집을 내고 글리클럽 음반 출반을 이끈 주역이었다. 조선일보 1931년 2월17일자
◇민요합창 레코드까지 취입
이런 분위기의 이화합창대가 ‘세속적’ ‘토속적’이라할 ‘방아타령’을 부른 건 사건이었다. 글리클럽은 내친 김에 민요 레코드 취입까지 나선다. 1929년 4월 ‘이팔청춘가/도라지타령’ ‘방아타령’을 발매한 데 이어, 1931년 1월 ‘양산도’, ‘농부가’, 그해 9월엔 ‘한양의 봄’, ‘자진산타령’까지 발매했다.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출간한 ‘조선민요합창곡집’제1집(1931년5월)에 수록된 곡 7개 전부를 음반으로 냈다. 저작 겸 발행인은 음악과장인 메리 영(美理英)이었다. 안기영이 편곡한 작품은 ‘자진산타령’ ‘농부가’ ‘한양의 봄’ ‘양산도’ 등 4곡이었고, 메리 영이 ‘도라지타령’ ‘이팔청춘가’ ‘방아타령’ 3곡을 편곡했다. 음반은 모두 콜럼비아 레코드회사에서 나왔다.
음악학자 김은영에 따르면, ‘글리클럽’이 민요를 공연하게 된 데는 선교사들의 의식 변화와 관련 있다. 일부 선교사들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선 한국인의 음악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전통 음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가 민요 수집에 나서면서 지식인들이 서구 중심적 창가 교육을 비판하고 민요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줬다. 192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테너 안기영이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1930년 이전 음악과 교과과정엔 성악 전공 학생들을 중심으로 ‘글리클럽’(합창단)이 신설됐고, ‘동양음악’ 수업이 성악과 교과목으로 편성됐다.

▲1928년 10월2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전음악회. 글리클럽 합창단이 민요 '방아타령'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조선일보 1928년 10월28일자
◇'신여성의 조선 노래는 흥미만점’
‘글리클럽’은 매년 정기 순회 연주회를 다녔다. 1930년 12월27일 오후 7시 평양 백선행기념관 공연에는 1500명이 몰렸다. ‘방아타령’ ‘도라지’ ‘농부가’를 불렀는데, ‘신여성의 조선노래는 실로 흥미만점’이란 기대에 맞게 ‘조선 사람은 결국 조선 민족 고유의 예술이 보다 더 아름답다’(‘梨專순회음악’, 동아일보 1930년 12월29일)는 평가를 받았다. 26일 진남포 공연에서 청중들이 앙코르 요청을 너덧차례나 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1932년12월22일부터 29일·30일까지 이리, 군산, 전주, 광주, 목포와 대구, 부산 등 주로 남부 지방을 훑었다. ‘이화전문학교 음악과에서는 연전(年前) 동기(冬期)에도 합창단을 조직하고 사조선(四朝鮮)방면을 순회하야 일반에 많은 음악열을 고취한 바 있었는데, 금반 동기 휴가를 이용하야 다시 합창력을 조직하고 동교 교수 안기영(安基永)씨의 지휘하에 남조선을 순회하게 되었다.’(‘梨專합창단 南鮮순회’, 조선일보 1932년12월18일) 당시 합창 프로그램에도 ‘놀량’(경기 또는 서도 산타령의 첫째곡)과 ‘타령’을 편곡한 민요가 들어있다. 민요가 포함된 글리클럽 공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23일 군산 조산극장에서 올린 공연에 대해 ‘여자의 최고 학부로서 조선의 고악(古樂)을 시대화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연구한 결과 모든 것이 의의 심장하야 뜻있는 방청자에게 자극을 주었’(‘梨專巡回合唱團 군산에서 성황’, 조선일보 1932년 12월28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상투 있는 신사가 양복 입은 격’
하지만 기독교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미션스쿨인 이화여전 학생들이 속된 민요를 부르는 모습이 기생을 연상시킨다며 난리를 쳤다. 당시 교회는 민요나 전통 문화를 저속하고 불순하게 여기는 서구 우월주의적 시각이 강했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민요를 부르며 순회공연하는 것도 모자라 음반까지 냈으니 반발했던 것이다.
음악계도 끓어올랐다. 조선 민요를 오선지 악보에 옮긴 데 대한 반발이 컸다. ‘조선 민요는 서양음악 기보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으며 조선의 민요곡을 3부 또는 4부합창으로 노래한다면 마치 상투 있는 신사가 양복 입은 격’(‘이전 음악과 간행 민요합창곡집’, 조선일보 1931년 8월10일) 이라는 비판이었다. 이상준(1884~1948)은 ‘조선민요합창곡집’제1권이 자기가 채보한 민요 악보와 가사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면서 저작권 소송까지 제기했다. 안기영의 양악화 시도에 대한 거부감때문이었다.
◇1935년 이후 서양음악 중심으로 회귀
1935년 이후 이화여전 글리클럽의 레퍼토리는 다시 민요 대신 서양 음악의 비중이 높아진다. 메리 영 대신 데머른, 윤성덕 등 새로운 교수들이 글리클럽을 지도하면서 전통적인 서양 합창음악 레퍼토리로 돌아간 것이다. 음악학자 김은영은 ‘이화여전에서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 접목시킨 선진적이고 가치있는 시도와 노력이 중단 또는 폐기되지 않고 지속되었더라면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 및 세계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한국 전통음악의 교회음악과의 접목이 중단 없이 이루어졌더라면 오늘날 한국 교회 음악은 더욱 다양하고 토착화된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충분히 공감가는 지적이다.
◇참고자료
김은영, ‘이화여전 클리클럽연구: 1927~1935년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이화음악논집 제23집 제1호, 2019.3
03.04 ‘순종이 애용하는 고무신’ 대륙고무 사장 이하영의 기막힌 인생유전
알렌 선교사에게 영어배워 주미서리공사, 주일공사,외부, 법부대신…손자는 ‘참군인’ 이종찬

▲찹쌀떡 장수 출신 이하영은 뛰어난 외국어능력과 타고난 처세술로 대한제국 외부, 법부대신까지 지냈다. 1919년 대륙고무 사장으로 변신, 기업인으로 삶을 이어갔다.
1925년 6월 신문에 특이한 기사가 났다. 경성 용산의 대륙고무주식회사가 평양의 고무신공장이 상표권을 위반했다며 고소했다는 내용이었다.
‘대륙고무회사는 대정(大正)11년8월15일에 창립한 이래 그 공장에서 제조하는 작품이 일반 사회로부터 상당한 신용을 얻게 되어 날마다 발전의 상태로 나아가는 중, 작년 7월경 이후로 돌연히 서선(西鮮)지방에는 판매액이 불시에 감소되어감으로 그 원인을 각방으로 조사한 결과, 전기(前記) 이승두씨외 2인이 경영하는 서선(西鮮)고무공장에서 작년 6월경부터 대륙고무회사에서 쓰는 상표와 비슷하게 상표를 만들어서 그 공장 제작품에 그것을 씌워서 대륙회사의 상품보다 비교적 염가로 팔아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대륙회사의 물품으로서 염가로 파는 것처럼 만들어놓았슴이 판명되었음으로….’(‘대륙고무회사장이 상표로 고소제기’, 조선일보 1925년6월5일)
평양 고무신 공장이 대륙고무와 닮은 상표를 고무신에 붙여 싸게 파는 바람에 매출이 뚝 떨어져 검찰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서선고무공장은 대륙고무와 비슷한 ‘대승’(大升)이라는 상표를 썼는데, 디자인이 ‘대륙’과 닮은 꼴이었다. 대륙고무는 대(大)자를 원형으로 하고, 그 속에 육(陸)자를 넣고 좌우에는 경성(京城)을 넣었는데, 서선고무는 대(大)자를 원형으로하고 그 속에 승(升)자를 넣고, 좌우엔 용산(龍山)을 갈라넣고, 그 위에는 대승고무라고 썼다. 대륙고무측은 평양에서 생산했는데, ‘상표에 용산이라고 쓴 것은 변명치 못할 사실이 아닙니까’라고 항의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은 일제시대엔 성공적인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대륙고무는 '조선 고무신의 원조'를 내세울 만큼, 고무신업계의 대표주자였다. 1930년대의 대륙고무 포스터. 경성내 대륙고무신 판매점 위치를 소개하는 약도까지 담았다.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 핫템, 고무신
당시로선 드문 상표권 소송을 제기한 대륙고무 사장은 이하영(李夏榮·1858~1929)이었다. 구한말 주미대리공사, 주일공사와 외부대신, 법부대신을 지낸 고위관료 출신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삼킬 때 기여한 공로로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죽을 때까지 중추원 고문으로 활약한 친일파이기도 했다. 이하영은 처세의 귀재였다. 옛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발빠르게 변신했다. 3.1운동으로 만세 시위가 한창이던 1919년, 이하영은 용산에 고무신을 취급하는 대륙고무를 차렸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산(産) 고무신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극소수 상류층이 신는 가죽신 이외에 대다수 사람들은 짚신을 신을 때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잘 닳는데다 비가 오면 물을 빨아들여 축축해졌다. 물이 스며들지 않는 고무신은 당시로선 최신 핫템이었다. 짚신(25전)에 비해 가격도 40전 안팎으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짚신에 비해 내구성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1920년을 전후해 전국에 고무신공장이 생겨났는데 대륙고무는 ‘고무신의 원조’이자 대표주자였다.

▲조선일보 1921년 12월1일자에 실린 대륙고무 광고. 순종이 애용한다고 선전했다.
◇'순종이 애용하는 고무신’ 왕족 마케팅
이하영은 구한말 고위 관료를 지내면서 만든 네트워크를 철저히 활용했다. 1922년 자본금 50만원 규모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박영효, 이윤용을 주주로 끌어들였다. 마케팅 기술도 뛰어났다. 대한제국과의 연줄을 이용해, ‘왕족 마케팅’을 펼쳤다. ‘순종 임금이 즐겨 신는 고무신’이라는 광고를 앞세워 소비자를 공략했다. 1922년 9월 신문에 실린 광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 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대륙고무는 날로 번창했다. 이하영은 대륙고무 사장으로 재임하던 1929년 세상을 떴다. 윤치호는 이하영의 부고를 듣고 일기(1929년2월28일자)에 이렇게 썼다. ‘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 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1884년 9월 알렌과의 우연한 만남은 이하영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이하영은 알렌의 요리사로 출발해 영어를 배우면서 1886년 외아문 주사로 들어갔다. 2년만인 1888년 주미서리공사가 됐고, 이어 주일공사, 외부대신, 법부대신자링 올랐다.
◇알렌 선교사와의 운명적 만남
어린 시절 찹쌀떡 행상을 할 정도로 가난한데다 일자무식이었던 이하영이 불과 십수년만에 주미대리공사, 주일공사를 거쳐 대한제국 외무장관(외부대신), 법무장관(법부대신), 대륙고무 사장까지 벼락출세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이 개항장이 되자 열여덟살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 점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8년간 일본어와 밑바닥 상술을 익힌 뒤, 1884년 독립해서 무역업을 한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동업자에게 사기당해 장사밑천을 모두 날렸다. 그해 9월 낙담한 채 부산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푸른 눈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만났다. 알렌 역시 1년여 중국 선교 사업에 실패하고 조선으로 사역지를 바꾼 참이었다. 알렌의 처지 역시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의사신분이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지인 하나 없었던 알렌은 붙임성 좋은 이하영을 요리사 명목으로 채용했다. 두 사람은 서로 영어와 조선어를 가르쳐주면서 기회를 노렸다. 석달 째 되던 1884년 12월4일 밤 둘에게는 천운(天運)이라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으로 온 몸에 칼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해 살려낸 것이다. 민영익은 왕비 민씨의 조카이자 고종의 측근이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느라 왕실과 관리들을 상대할 때 통역을 한 사람이 이하영이었다. 석달 배운 영어 실력이 변변할 리 없지만, 이하영은 당시 이 땅에서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조선인에 속했다. 알렌은 일약 고종의 어의(御醫)가 됐고, 이하영은 알렌의 통역으로 궁중에 드나들었다. 고종의 눈에 든 이하영은 외아문 주사로 관직에 나섰다.
◇외교부 말단에서 2년만에 ‘주미 대사’
이하영은 1887년12월 주미 전권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과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2등서기관 신분이었다. 박정양은 1888년 1월17일 청나라의 훼방을 뚫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국서봉정식을 마쳤다. 독자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길길이 날뛰는 원세개를 달래기 위해 고종은 그해 11월 박정양을 소환했다. 박정양은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과 함께 귀국했다. 워싱턴에는 이하영만 남았다. 고종은 이하영을 주미서리공사로 임명했다. 외교부 말단 직원으로 들어간 지 2년여만에 ‘주미대사’가 된 셈이었다.
고종은 박정양 공사 출국전 밀명을 내렸다.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의 관세를 담보로 200만달러 차관을 얻고, 이 돈으로 미군 20만명을 빌려오라는 지시였다. 미국 힘을 빌려 원세개의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꿈이었다. 주미대리공사가 된 이하영은 온 몸을 바쳐 뛰었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고 사교력이 남달랐던 그는 이런 업무에 적격이었다. 마침내 미국 뉴욕은행에서 200만 달러 차관을 얻는 데 성공했다. 정부와 의회를 움직여 지원군을 얻는 일도 거의 성사될 듯했다.
◇'돈을 물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조선에 원병을 바편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이하영이 잡지 ‘신민’(1926년 6월호)에 기고한 회고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국이 당시 군대 20만 명을 조선에 파견할 능력도, 그럴 뜻도 있었을 리 없다. 의회에서 조선 파병안을 표결에 붙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하영이 고종의 명으로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 흥청망청 쓴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호암 문일평은 1934년 조선일보에 ‘대미관계50년사’를 쓰면서 ‘200만달러 차관’설을 소개했다.
‘박공사 일행이 맨처음 본국을 출발할 때부터 청국의 횡포를 응징하기 위하야 미국에 청병(請兵)하려는 밀모가 있었음으로 부산 원산 및 인천 세 항구를 저당하기로 하고 워싱턴에 도착한 이후에 미국 모은행단과 그윽이 교섭을 계속하야 마침내 미화 200만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이로써 군비를 삼아가지고 다시 미국에 청병을 꾀할 새 백방으로 운동한 결과 드디어 미국인 사이에 심후한 동정을 표하는 이가 생겨나게 되었으나 이것이 의회에 제출됨에 미쳐서는 격렬한 반대론을 만나 필경 좌절이 되고 말았으니 그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한미국교를 맺은 이래 아직 이해관계가 옅을 뿐더러 출병원호하는 것은 미국 국헌의 용허하지 않는 바다.’(’대미관계50년사-주미서리공사시대 80′, 조선일보 1934년10월30일)
◇'국가를 위해 사용했으니 탕감해주겠다’
문일평은 차관 200만달러의 후속 처리과정도 소개했다. 이하영의 회고는 물론,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것이다. ‘은행단은 200만달러에 저당잡은 조선 세 항구의 내용을 알아본 즉 빈약하기가 짝이 없어 애초부터 문제가 되지 아니함으로 소비액 16만5000달러를 공제하고 남아있는 183만5000달러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차라리 득책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은행단은) 이하영을 초청하야 호의로 축배를 들어 권하며 가로되 ‘군(君)이 국가를 위해서 사용한 것인즉 소모액을 아주 탕감할 터이니 그리알라’는 미담까지 았다.’
사정을 들은 고종도 이하영에게 ‘안심잉주’(安心仍住)하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이하영은 마음편히 귀국할 수있었다.
◇상투 틀고 구두 신고 무도회 누빈 이하영
이하영의 좌충우돌 활약은 영화나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도 될 것같다. 밤낮으로 연회를 찾아다니며 왕족처럼 돈을 뿌린 이하영은 그 삶 자체를 즐긴 것같다. 그는 곧 워싱턴 사교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상투짜고 조선버선에 구두 신은 서리공사가 무도장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금발여희의 가장 환영하는 표적이 되었다. 홍등녹주사이에 밤새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껴안고 춤을 추고 나면 모든 우분(憂憤)이 다 사라진다.’
이하영은 1000명이 참석하는 초대형 연회를 주최해 워싱턴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 공사 일행이 항상 각부장관과 원로 및 기타 신상(紳商·기업인)의 초대를 받았지만, 우리 공사관측에서 한번도 그네들의 대관(大官)과 사녀(士女)를 초대한 적은 없었음으로 회사(回謝)의 예로 하루는 대연(大宴)을 배설하고 워싱턴 각 방면에 초대장을 발송하야 집회한 빈객이 거의 천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각부 장관과 원로와 각국 공사와 기타 신상은 물론이요,대통령 부인 및 그 영식까지 내참하였다. 대통령 부인의 내참은 워싱턴 건도(建都) 이후 처음 보는 성사라고 그 때 미국 신문에서는 극구 찬송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이 연회가 얼마나 인기의 초점이 되었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대미관계50년사-주미서리공사시대 81′, 조선일보 1934년 10월31일)
◇미국 부호 딸과의 염문도
문일평은 미국 부호 딸과의 염문설도 소개했다. ‘염복이 있는 서리공사는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따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그 새악씨로부터 약혼의 간청이 있었으며 서리공사도 그때까지 미취의 신세이니만치 마음이 없는 바 아니나 외국인과의 결혼은 당시 국법의 엄금이므로 거절하였더니 하루는 새악씨 모친이 서리공사에게 청하기를 자기 맏사위가 이탈리아 현 육군상인즉 그를 시켜 동국(同國·이탈리아) 황제께 이 사의(辭意)를 주상하야 특히 귀국 왕의 칙허를 얻도록 할선할 터이니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하고 조르는 바람에 변설에 능한 서리공사로도 한참동안 대답에 군색하였다 한다.’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할 뻔한 미국 부호 딸과의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을사오적’엔 요행히 이름 빠져
1889년 귀국한 이하영은 한성부 관찰사(서울시장)와 주일 공사를 거쳐 1904년 마침내 외부대신이 됐다. 을사조약 체결당시인 1905년 11월엔 법부대신이었는데, 처음엔 조약 체결에 반대하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도는 바람에 ‘을사오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외부대신 재직 당시 이미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선 주역이었다. 일본이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이하영에게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을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하영은 1929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규원이 작위와 대륙고무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회사는 일제 말까지 번창했다.
◇'참군인’ 이종찬이 ‘친일파’ 이하영 손자
이야기는 하나 더 남아있다. 이하영의 손자는 ‘참군인’으로 존경받는 이종찬(1916~1983) 전 육군참모총장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일제 말기 일본군 소좌로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다 해방을 맞았다. ‘친일파’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종찬이 스스로 습작을 거부한 사실을 밝히자 반민특위는 그를 풀어줬다. 이종찬은 곧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고, 6.25 직전 수도경비사령관, 1951년 6월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종찬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병력동원 지시에 맞서다 해임됐다. 군(軍)의 정치적 독립을 이유로 내세웠다. 유학 형식으로 미국으로 쫓겨난 이종찬은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5.16 직후 이탈리아 대사로 오래 나가있었고, 유정회 국회의원도 지냈다. 만년의 활동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지만 이종찬은 지금도 군(軍)에선 존경 받는 선배다. 찹쌀떡 장수에서 일국의 대신까지 오른 ‘친일파’ 이하영과 그의 손자인 ‘참군인’ 이종찬의 삶은 복잡다단한 현대사의 굴곡을 떠올리게 한다.
◇참고자료
이하영, 한미국교와 海牙사건, 신민 제14호, 1926,6
박승돈, 한국고무공업 50년 小史, 고무기술협회지 제4권제1호, 1969
한철호, 주일 한국공사 이하영의 임면 배경 및 경위(1896~1900), 경주사학 22, 2003
김명환, 모던 씨크 명랑, 문학동네, 2016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
김태수,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황소자리, 2005
03.11 ‘이순신의 백골을 핥고, 정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한다고?’
지식인의 전통 무시 비판한 안재홍, 카프 출신 청년작가 김남천과 치열한 논전

▲1930년대 조선학운동에 앞장선 민세 안재홍은 일부 지식층이 전통을 무시하고, 천대한다고 비판했다. 스물 넷 카프 작가 김남천을 반박하면서 쓴 '천대되는 조선'(조선일보 1935년 10월2일~5일)은 격한 찬반논쟁을 유발했다.
민세 안재홍(1891~1965)이 도발적 제목의 글을 썼다. 1935년 조선일보에 쓴 ‘천대되는 조선’.(10월2일~5일,총3회) 전통문화를 무시하는 일부 지식인의 자기비하를 지적했다.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런 것은 한번 웃음에도 차지않는 듯이 마구 깎는 것이 그들 일부의 태도이다.’(조선일보 1935년10월2일)
조선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민세는 전통 문화를 업신여기는 세간의 풍조와 이를 부추기는 일부 지식인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세 안재홍이 조선일보 1935년10월2일자에 쓴 '천대되는 조선' 첫회. 민세는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 풍조와 이를 부추기는 일부 지식인의 행동을 비판했다.
◇'두루마기 입고 전차 타면 푸대접’
민세는 글 초반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나는 전차를 흔히 탄다. 양복에 넥타이라도 반듯이 매고 앉았으면 차장이 가위를 들고 ‘어디를 가시옵니까’(공손히 묻는다) 언제는 물색이 아니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여전히 점잖은 체하고 안심코 앉았더니 차장이 와서 ‘어데!요??’(한다). 이는 개인이 당하는 천대가 아닌지라 냅다 일어서며 ‘괴안놈’하고 주먹으로 볼치를 우리기로 하였었다. 단 이것은 내 아직껏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민세는 심지어 조선인 거지까지 ‘이까짓 조선 동네에 와서’ 운운하는 것을 보았다며 개탄했다.
◇안재홍, 정인보 등 조선학운동 이끌어
민세가 언급한 ‘조선 천대’는 식민지 시기 ‘근대’와 맞닥뜨린 한국인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낸다. ‘망국을 초래한 조선의 모든 것(전통)’은 일제 식민지배와 함께 맞이한 휘황찬란한 근대와 비교되면서 평가절하됐다. 부정의 대상이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와 전통을 깎아내리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일제와 일본인 관학자들의 주장도 한몫했다. 민세 안재홍, 위당 정인보를 중심으로 1930년대 ‘조선학운동’이 일어난 배경이다.
조선학운동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식민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면서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민족, 전통을 경시하는 일부 공산주의운동을 비판하면서 한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탐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약용과 실학(實學)을 주목했다.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의 가능성을 제시한 전통으로 본 것이다.
◇대대적인 다산 100주기 기념
마침 1935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앞둔 해였다. 당시 신문, 잡지는 100년을 단위로 기념하는 서구식 관습에 따라 괴테, 푸시킨, 헤겔 같은 문호나 학자는 물론 베토벤, 슈베르트, 파가니니 같은 작곡가까지 ‘발굴’해 100주기 특집 기사를 실었다. 도스토옙스키, 입센, 차이콥스키, 비제의 ‘탄생’ 100년까지 기념할 정도였다.
마침 다산 서거 100주기였다.(원래 1936년이 100주기인데, 당시엔 1935년을 100주기로 기념했다). 조선, 동아일보는 약속이나 한듯 1935년7월16일자에 각각 사설 ‘逝世 백년의 다산선생’ ‘丁茶山先生逝世百年을 記念하면서’를 실었다. 다산학의 현대적 의미를 알리는 특집도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두 개면을 펼쳤다. 안재홍은 ‘조선 건설의 총계획자-지금도 후배가 의거할 조선의 태양’이란 제목으로 한 페이지를 썼고, 이훈구, 문일평, 김태준이 각 분야에서 다산학의 의의를 짚었다. 동아일보도 위당 정인보가 ‘다산 선생의 일생’을 소개한 것을 비롯, 현상윤, 백남운이 다산의 사상을 소개했다.
안재홍은 ‘민주적인 합리의 사회’ ‘입헌적인 정치 경륜’ ‘평등과 호조(互助)하는 신시대의 창조’ ‘산업적 민주주의 실현’ 등의 현대적 개념으로 다산 사상을 평가했다. 그는 다산 저작이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 에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황종희의 ‘명이대방록’같은 고전보다 앞서거나 맞먹는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안재홍은 월간지 ‘삼천리’(1936년4월호)에 실은 ‘다산의 사상과 문장’에서도 다산을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자’ ‘근세 자유주의자의 거대한 개조(開祖)’로 높이 평가했다.
◇1930년대 초 충무공 유적 보호, 선양 운동
1931년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유적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충무공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34년 다산 시문을 모은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는 작업에 들어가 1938년 신조선사에서 발행됐다.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에 참여한 ‘여유당전서’가 발간되면서 다산 연구의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전통을 재평가하고 우리 역사의 영웅을 기리는 운동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이들을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라며 비아냥댔다.
◇카프 작가 김남천의 정면 비판
▲카프 작가 김남천은 1935년 스물 넷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김남천은 안재홍의 '천대하는 조선'을 반박하는 글을 조선중앙일보에 8회나 연재했다.
안재홍의 ‘천대하는 조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카프(KAPF) 출신 작가 김남천(1911~1953)이었다. 해방 후 월북해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에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안재홍씨에게 답함’(1935년 10월18일~27일)을 8차례나 연재했다. 횟수도 회수려니와 문장 또한 격했다.
김남천은 한달 전 같은 신문에 새로 나온 ‘이광수전집’을 평하면서, 문제의 구절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을 쓴 장본인이었다. 김남천은 이순신과 다산을 치켜세우는 지식인들을 ‘독일 나치스의 고전 부흥과 고전 예찬’에 견주면서 ‘이네들을(이순신 등) 자기의 국수사상 도취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현금 조선의 ‘애국지사’들과 이른바 문화적 ‘선배’들을 운위하였음에 불과하였다’고 반박했다. 단군,이순신, 정다산, 이광수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이들을 이용해서 국수주의를 고취하는 세력을 공격했을 뿐이라는 반론이었다. 전통에 반항하고, 전통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작가다운 비판이었다.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 1935년10월18일~27일자에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를 여덟차례 실었다. 안재홍의 '천대되는 조선' 을 반박하는 글이었다.
◇서양철학자 전원배의 비판
김남천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1932년 교토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전원배(1903~1984)였다. 서양 철학을 공부한 그는 ‘천대되는 조선에 대한 시비’(동아일보 1935년 11월15일)를 썼다. 그는 안재홍이 스탈린 체제하 소비에트 러시아도 푸시킨 100년제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우리가 다산 100년제를 그렇게 치르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며 다산과 푸시킨을 직접 비교한 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안재홍씨는)역사적 유산의 현대적 계승방법에 대하여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면서 ‘씨가 러시아문호 푸시킨을 예로 들어 정다산의 역사적 가치를 동일시한 점에 대하여는 자못 의문을 갖지 않을 수없다’고 지적했다.
전원배는 ‘정다산의 역사적 의의를 분석, 파악, 비판하는 대신에 ‘싸베트 러시아’의 푸시킨 기념제를 모방하야 축제소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썼다. 역사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지, 무턱대고 기념하고 추앙할 일은 아니라는 문제제기였다.
안재홍과 정인보같은 조선학운동 지도자들이 김남천의 주장처럼 잇속을 차리기 위해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거나’,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 끌고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념에 치우친 스물 넷 문사(文士)의 과격함이 이런 극단적 표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민세와 김남천은 꼭 20년 차이다. 둘의 논쟁은 세대간 논쟁이라는 생각도 든다. 욕설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논쟁이 격화되면서 초점이 흐려진 건 아쉽다. 그래도 ‘천대받는 조선’은 전통의 비판적 계승, 발전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소모적 논쟁만은 아니었다.
◇참고자료
안재홍, 다산의 사상과 문장, 삼천리 제8권제4호, 1936, 4
김미지, 우리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생각의 힘, 2019
03.18 90년 전 진주 출신 작곡가가 쓴 이 노래, ‘호남의 상징’되다
1935년 오케레코드 공모당선작 ‘목포의 눈물’,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로 발매직후 5만장 팔려

▲경남 진주 출신인 손목인은 1935년 여름 일본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음악도였다. 오케레코드는 그해 초 현상공모한 '목포의 노래' 작곡을 손목인에게 맡겼고, 목포 출신 신인 가수 이난영이 노래를 불렀다. 대성공이었다.
1935년 1월28일자 조선일보에 특이한 광고가 실렸다. ‘오케-레코드’가 낸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이었다. 오케레코드는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등 인기 가수들을 거느린 음반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SM급 기획사였을 것이다. 광고는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 등 10개 도시를 소재로 한 노랫말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10대 도시찬가 모집’이란 제목을 크게 달았다. 2월15일자 신문에도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응모 마감은 2월말이었다.
이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일제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불리는 노래가 탄생했다.’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하는 ‘목포의 눈물’이다. 노랫말을 쓴 문일석은 목포 출신 시인이라는 사실만 전할 뿐, 구체적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손목인은 1992년 낸 회고록 ‘못다부른 타향살이’에서 ‘목포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던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과 동향지기’로 ‘아깝게도 일찍 타계했다’만 썼다.

▲1935년 발표한 '목포의 눈물 '홍보 전단. '제1회 국토찬가 당선작'이라는 소개와 함께 이난영의 사진을 실었다.
◇고복수 ‘타향살이’작곡한 신진 작곡가
목포와 호남을 넘어 ‘국민 애창곡’이 된 ‘목포의 눈물’을 진주 출신 작곡가가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쿄 제국음악학교에 다니던 손목인(1913~1999)은 원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정통 클래식 전공자였다. 손목인은 1934년 친척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서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복수의 ‘타향살이’(원제 타향)를 썼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철 오케레코드 사장은 1935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한 손목인에게 ‘목포의 눈물’가사를 내보이며 작곡을 의뢰했다.
가사를 받아든 손목인은 ‘구슬픈 멜로디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별과 한(恨)을 품은 노랫말 때문이었다.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로 시작하는 2절은 원래 ‘삼백년 원한품은’을 대신한 것으로, 임진왜란부터 강제병합까지 망국의 한을 노래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 노래가 인기를 끌자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이철 사장 이하 직원들을 소환, 조사했다. 2절의 첫 대목 가사를 문제삼았다. 음반사측은 ‘원한 품은’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텨서 문제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오케레코드가 1935년초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을 한 조선일보 1935년 1월28일자 광고.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픙, 청진 등 10개 도시찬가를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이난영은 타고난 가수, 히트할 것 같은 예감 들었다’
‘목포의 눈물’의 성공은 이 노래를 부른 이난영의 독특한 음색에 힘입은 바 크다. 손목인은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고 곡을 주면 나름대로 기교를 부릴 줄 아는 것으로 보아 타고난 가수라는 것을 느낄 수있었으며 꼭 히트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손목인은 이난영이 ‘당시 오사카 ‘태양극단’의 막간가수로 활동하던 신인이었는데, 오케레코드 본사측인 일본 데이치쿠(帝蓄) 레코드사에서 발굴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1933년11월13일 이철 오케레코드 ‘지점장’이 가수 등 15명과 함께 오사카로 레코드 취입차 출발하면서 신문사에 인사차 방문했는데, 여기에 열일곱살 이난영의 이름이 나온다.(’오케-일행 14일 취입행’,조선일보 1933년11월17일). 신일선 나품심 박부용 문호월 등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였다. 열일곱살 이난영은 이미 일본에 건너가 음반을 녹음할 만큼 주목받는 신인이었다.이난영은 오케레코드가 그해 12월21일~22일 경성공회당에서 도시 빈민들을 돕기 위해 연 자선음악회에 신일선, 나품심과 함께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 공연엔 명창 임방울, 만담가 신불출 같은 전통 예인들도 출연했다. 특히 손목인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둘은 ‘목포의 눈물’이전에 상대방의 실력을 꽤 알았을 것이다.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 그는 '목포의 눈물'을 비롯, '목포는 항구다' 등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미국에서 활약한 김시스터즈, 김브라더즈가 자녀들이다. 이난영은 마흔 아홉이던 1965년 생을 마감했다
◇연거푸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점점 더 매혹
조선일보 1935년 신년 특집에도 당대의 스타인 레코드 여가수 16명을 꼽으면서 이난영을 포함시켰다. ‘양(孃)의 특장은 애수를 품은 가벼운 유행가도 몇번 연거푸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점점 더 매혹되는 점이외다. 양은 성악에 특재가 있는 위에 다시 피아노, 바이올린 등 기악에 능하며 영롱한 성격, 뛰어난 총명은 양으로 하여금 사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도록 만들었다’(‘레코드 여가수’, 조선일보 1935년 1월3일)고 호평했다. 목포 출신 열아홉살 신인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하나로 가요사에 오래도록 이름을 남긴 인물이 됐다.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5만장 넘게 팔려나갔다.
▲1994년 월간조선과 인터뷰할 당시의 손목인. 5년 뒤 아내와 일본 도쿄에 갔다가 세상을 떠났다.
◇90년 가까이 이어진 유행가 ‘목포의 눈물’
다시 손목인이다. 그는 오케레코드 지원으로 일본 고등음악학교로 진학, 작곡과 편곡, 관현악 등 클래식 음악을 계속 공부했다. 1936년 졸업후 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돌아왔고 오케 전속 C.M.C 밴드를 조선 최초의 스윙밴드로 키웠다.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 ‘아빠의 청춘’ ‘바다의 교향시’ ‘슈샤인 보이’ 등 2000곡 가량을 작곡했다. 광복 후 손목인의 삶도 곡절이 많았다. 1952년 일본에 밀항해 전후 일본의 히트곡 ‘카스바의 여인’을 작곡해 인기를 누리다 불법입국자로 몰려 1957년 귀국했다. 월남전에 위문공연을 다녔고, 미국에 오래 머물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 사이 ‘목포의 눈물’은 호남 연고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응원가로 쓰일 만큼 면면하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증조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를 손주뻘 청년들까지 이어부른 셈이다.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이 숨을 거둔 건 일본 여행길이었다. 1999년1월9일 도쿄에서 숨진 그의 부고 기사 제목은 ‘타향서 떠난 타향살이’였다. 마침 한 달 뒤면(4월23일) 손목인 탄생 110주년이다.
◇참고자료
장유정, 행(幸)과 불행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 2016
최유준, 이난영의 눈물, 한국인물사연구 20, 2013
박찬호, 한국가요사,현암사, 1992
손목인, 못다부른 타향살이-손목인의 인생찬가, HOT WIND, 1992
03.25 식민지 상류층의 인기 메뉴, 조선호텔 2원50전짜리 定食
여운형도 종종 다녀…심훈 소설 ‘불사조’, 김말봉 ‘찔레꽃’에도 등장

▲1935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여운형. 월간 '삼천리'는 손님과 함께 자동차로 조선호텔 식당을 찾는다고 소개했다.
일제시대 제3의 민간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여운형은 점심 때면 손님과 함께 자동차를 몰아 조선호텔 식당 ‘정식’(定食)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월간지 ‘삼천리’(1935년3월호)는 여운형이 식후 ‘로-스까-덴’을 산책하며 신문사 운영의 경륜을 도모하거나 회사를 위한 교제도 한다고 소개했다. 조선중앙일보가 있던 견지동 111번지는 지금도 NH농협은행 지점으로 쓰고 있다.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근대문화재이기도 하다. 조선호텔까지는 1.2㎞쯤 되는 거리다.
1914년 3층짜리 관영 철도호텔로 개업한 조선호텔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었다. 환구단(圜丘壇)을 배경삼아 양식(洋食)을 먹을 수 있는 고급 식당이 있었다. 업무, 관광차 온 외국인이나 일부 부유층이 이용하던 식당이었다.
◇조식 1원50전, 저녁은 3원50전
여운형이 즐긴 조선호텔 ‘정식’은 가격이 얼마쯤이고, 어떤 음식이었을까. 정식은 한상에 음식을 모두 내는 것과 달리, 음식을 하나씩 순서대로 내는 ‘코스요리’를 가리켰다. 상록수 작가 심훈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불사조’에는 조선호텔 식당 음식 가격이 나온다. 바이올리니스트 계훈이 독일인 아내 줄리아와 조선호텔에 한달간 묵으며 경성공회당에서 귀국독주회를 갖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양식이 아니면 먹지 못하니까 아침에 1원50전, 점심에 2원, 저녁에 3원50전 합하면 하루에 식대만 7원이요, 심심해서 여자 혼자는 먹을 재미가 없어하니까 계훈이까지 두 사람에 14원이다.방세(10원)까지 얼르면 하루의 비용이 먹고 자는데만 26원이다.’( ‘불사조’4회, 조선일보 1931년8월19일)
‘코스요리’ 가격은 아침 1원50전, 점심 2원, 저녁 3원50전이었다. 당시 설렁탕 가격이 10전~12전 정도였으니, 여운형이 먹은 정식은 설렁탕 20그릇쯤 먹을 수 있는 비싼 음식이었다. 두명이 조선호텔에 한 달 묵는 비용은 얼추 900원이었다. 계훈의 아버지는 전라도 아전 출신으로 경술국치 전해인 1909년 300석 지기 땅을 바치고 장관 자리를 살 만큼 부자였다. 하지만 이런 재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호텔비였다.

▲김말봉 연재소설 '찔레꽃'에서 조선호텔 식당을 스케치한 웅초 김규택의 삽화. 디저트를 먹고 있는 장면이다. 조선일보 1937년7월21일자
◇콘소메와 로스트비프, 디저트는 샤벳 또는 아이스크림
박현수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식민지의 식탁’ 270쪽), 1936년 조선호텔 코스 요리는 이랬다. 먼저 콘소메와 레터스 샐러드가 에피타이저로 나오고, 메인으로 오리 간 구이와 로스트비프가 나왔다. 디저트로는 자몽 소르베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제공했다. 요즘 기준으로 봐도 훌륭한 정찬(正餐)이다. 1932년 호텔 선전 팸플릿을 보면, 아침식사는 일본식이 1원50전, 서양식이 1원75전, 점심은 2원50전, 저녁은 3원이었다. 모두 코스 요리다. 1년전 ‘불사조’에 비해 아침과 점심 식사가 약간 올랐다. 양식 호텔이지만 일본식 아침을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었다. 홍차나 커피는 40전씩 받았다. 당시 다방, 카페의 홍차, 커피 값이 보통 10전이었으니 네 배 정도 비싼 값이었다. 토스트나 쿠키를 곁들여 내놓았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조선호텔 엽서. 이 호텔 식당은 경성 최고의 양식당으로 소문났다. /서울역사박물관
▲1932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만든 조선호텔 안내팸플릿./서울역사박물관
▲1932년 조선총독부철도국이 발행한 조선호텔 팸플릿. 양식 조식은 1원75전, 점심은 2원50전, 저녁은 3원으로 소개하고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냅킨 무릎에 덮고, 빵에 버터 발라…
조선호텔 식당 풍경을 알려주는 작품이 또있다. 김말봉(1901~1961)이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이다. 생계를 위해 은행장(두취)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정순이 주인공이다. 상류층 가정에서 생활하다 보니 미쓰코시 백화점이나 조선호텔 식당이 등장한다. 당시 사람들이 선망하던 장소였기에 적극적으로 작품속에 끌어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순과 그의 애인 민수, 가정 교사로 있는 집 딸 경애와 경구 남매가 함께 조선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하는 장면이다. 원구단이 있는 후원 테이블에서 대기하다 호텔 직원 안내를 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뽀이가 와서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리고 네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를 보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민수씨가….’ 나푸킨을 무릎위에 올려놓는 정순의 손가락은 테-불 아래서 질서없이 떨리고…민수는 빵을 뚝 떼어 빠다를 바르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두 사람을 경구과 정순을 결혼을 시킨다? 정순이가 경구에게로 갈까?갈까?아니 아니’”( ‘찔레꽃’83회, 조선일보 1937년7월21일) 무릎에 냅킨을 깔고, 빵에 버터를 바르는 양식 정찬의 일부가 소개된다.
◇월급쟁이에겐 ‘넘사벽’
조선호텔 양식당은 화신백화점은 물론 당시 경성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다는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4층 식당의 ‘난찌’(점심)보다도 한 수위였다. 채만식(1902~1950)이 1938년 월간지 ‘조광’에 연재한 ‘태평천하’엔 기생 춘심이 윤직원 영감에게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서 ‘난찌’를 먹자고 조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 미쓰코시 백화점의 ‘난찌’는 1원50전짜리 양식 세트였다. 1930년대 조선인 박흥식이 운영한 백화점은 양식도 팔았지만 70전짜리 한식 정식세트도 인기가 높아 월급쟁이 가장도 가족을 위해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호텔 식당은 20~30원 받는 월급쟁이들은 넘보기 어려운 ‘넘사벽’이었다. 객실과 조식, 수영장을 묶은 ‘호캉스’ 이용기가 소셜미디어마다 넘쳐나는 요즘 세태로 보면, 참 고릿적 얘기다.
◇참고자료
‘신사숙녀 신분조사서’, 삼천리 제7권제3호, 1935년3월호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04.01 “우리, 막간에 ‘산드위치’나 씹을까”
소설 ‘무정’주인공 영채까지 사로잡은 ‘서양의 맛’, 1930년대 가정에서도 유행
▲가족 피크닉용으로 샌드위치를 싸서 가는 가족을 그린 만화. 어머니가 손에 샌드위치를 담은 종이상자를 들고 있다. 조선일보 1936년 2월18일자
1940년 신문 새해 특집에 신극(新劇)운동의 방향을 놓고 문화예술계인사들이 나눈 좌담이 실렸다. ‘신극은 어디로 갔나’(조선일보 1940년1월4일). 임화 김남천 이태준 최재서 등 소설가, 평론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막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토론이 벌어졌다. 당시 극장엔 회전 무대가 없어서 막전환에 시간이 꽤 걸렸던 모양이다. 관객들은 보통 10분에서 길게는 30~40분까지 기다리느라 무료했다.
영화감독 서광제가 일본은 막간에 저녁을 먹기도 한다고 소개하자, 임화는 “담배 먹는게 좋지”라고 했고, 이태준은 “커피나 샌드위치를 팔아서 먹는게 좋아요”라고 했다. 샌드위치는 막간 휴식 시간에 먹을 만한 음식으로 쉽게 떠올릴 만큼, 꽤 알려진 서양 음식이었다.
◇'떡 두조각 사이에 날고기가 끼인 음식’
1910년대까지 샌드위치는 낯선 음식이었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 장편소설 ‘무정’엔 ‘떡 두조각 사이에 날고기가 끼인 음식’이 등장한다. 여주인공 영채가 배학감과 김현수에게 능욕당하고 평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구한 팔자에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같은 기차에 탄 도쿄유학생 병욱이 다가왔다. 영채를 데리고 세면소에 데려가 세수까지 도와준 친절한 병욱은 점심까지 같이 먹자며 ‘종이갑’을 꺼냈다. ‘에키벤’(駅弁),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이었다.
‘”이것 좀 잡수셔요”하고 그 종이갑의 뚜껑을 연다. 영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얇은 날고기가 끼인 것이다…영채는 집었던 것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았다. “자. 어서 잡수셔요”하고 부인이 집어줄 때에야 또 하나를 받아먹었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있는 맛이 있다 하였다.’
▲가족 피크닉용으로 샌드위치를 소개하는 조선일보 1936년2월18일자
◇운치있는 서양 음식
영채는 한동안 이 음식의 이름을 모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샌드위치라는 서양음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도쿄 유학생 출신 이광수가 소개한 샌드위치는 ‘운치있는 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짭짤한 맛의 날고기’는 물론 햄을 가리킨다. 버터 바른 식빵 안에 햄을 넣은 샌드위치가 당시 기차역에서 팔렸다.
‘에키벤’샌드위치는1898년 일본 ‘오후나켄’(大船軒)이라는 회사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해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낯선 서양음식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채와 병욱이 샌드위치를 사먹을 때쯤인 1917년엔 대략 25전 안팎이었다. 커피, 설렁탕이 10전쯤 할 때니, 당시로선 꽤 비싼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국적 서양음식이라는 아우라가 맛 이상의 욕망을 채웠다. 모던 걸, 모던 보이에게 샌드위치는 근대의 맛, 문명의 기호였다.
◇리셉션의 단골 메뉴, ‘싼드윗치’
1920년대가 되면 샌드위치가 리셉션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모양이다. 총독부의 노총 간담회 금지를 비판한 조선일보 사설(’노총(勞總)간담금지’, 1927년6월24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에 정치가 없고 오직 과도형태로서의 정치적인 동작이 있다. 공직자들이 모여서 결의권도 없는 요망(要望)놀이를 하고 초대석에서 ‘정종’과 ‘싼드윗치’에 흥청거리는 것도 일종의 정치형태일런지 모르나….’ ‘싼드윗치’안주 삼아 정종을 홀짝거리는 게 공직자들의 회합 풍경이었음을 알 수있다.
◇비프스테이크, 비프스튜와 같은 가격
그 즈음 경성에 생기기 시작한 카페 메뉴에도 샌드위치가 나온다. 박현수의 ‘식민지의 식탁’(2022,161쪽)엔 1920년대 카페 메뉴판이 실려있다. 커피, 홍차는 10전인데, 샌드위치는 오무라이스, 비프스튜, 비프스테이크와 함께 30전이었다.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1930년대가 되면 가정에서도 샌드위치 만드는 게 유행할 만큼, 인기 메뉴가 됐다.
◇'나들이 점심’으로 소개
벛꽃이 한창인 계절, 피크닉이 유행했다. 산로, 들로 꽃구경 떠날 때 가장 문제는 점심거리였다. 공중위생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길거리 음식을 먹고 배탈나는 경우도 많았다. 나들이 음식으로 샌드위치를 추천하고, 만드는 법을 소개한 신문기사가 실렸다. ‘꽃피고 잎이 피면 부썩 느는 들노리-가족과 손님들에게 내어놓을 만한 풍치있는 점심 만드는 법’(조선일보 1938년3월29일) 먼저 식빵에 버터를 바른 뒤, 계란 흰자위를 섞어 거품을 내고 호두와 건포도를 집어넣어 범벅을 만들어 식빵 사이에 끼워넣으면 ‘호두, 건포도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특이한 것은 초밥 반찬으로나 쓰는 락교를 샌드위치 재료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락교를 땅콩과 섞어서 식빵에 끼워 먹는 ‘락교, 땅콩 샌드위치’다.
1930년대가 되면 가정 주부를 상대로 특색있는 나들이 점심으로 그 제조법을 소개할 만큼 샌드위치는 인기를 누렸다. 샌드위치는 일반 가정 침투에 성공한 ‘근대의 맛’ ‘서양의 맛’이었던 셈이다.
◇참고자료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04.08 밍밍한 설렁탕에 골탕먹은 백암 박은식
파, 소금으로 맛낸 ‘경성의 특산물’, ‘모던 가정’ 배달음식으로도 인기

▲시골에서 온 청년이 '湯'자가 붙은 간판을 보고, 목욕탕으로 알고 들어온 것을 풍자한 웅초 김규택 만화. 설렁탕은 '경성의 특산품'이었다. 조선일보 1934년5월14일자
이승만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출신이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위암 장지연과 함께 필봉을 휘두르며 논설을 썼다. 황성신문 창간을 주도한 석농 유근(石儂 柳瑾, 1861~1921)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얼금얼금’한데다 ‘말소리가 덜덜하며 행동이 설설’했다. 말투가 좀 거칠고 행동이 과감한 호인 스타일이었던 모양이다. 백암과는 일찍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황성신문 시절, 장난기 많은 석농이 주변 사람들과 작당을 했다. 당시 늘 점심으로 2전5리짜리 설렁탕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인 백암은 서울 음식인 설렁탕에 익숙치 않았다. 백암을 곯려주기 위해 소금과 양념 넣는 걸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싱거운 설렁탕을 며칠 계속 먹은 백암은 일행들이 또 설렁탕을 시키려고 하자 “에이, 나는 설렁탕 싫어”라고 했다. 석농이 “왜 그래”하고 물으니 “어이-싱거워, 나는 싫어”하였다. 좌중은 박장대소했다. 자초지종을 알게된 백암은 석농을 툭 치며 “이놈아, 사람을 그렇게 속여, 모두가 네짓이지? 어른을 모르고.”하고 항의했다.
조선어연구회 창립 회원이자 ‘한글맞춤법통일안’ 원안을 만든 국어학자 겸 역사학자 애류 권덕규(1890~1950)가 기고한 회고 ‘석농선생과 역사언어’2(조선일보 1932년3월27일)에 나오는 내용이다.

▲구한말 명망높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백암 박은식. 이승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 ‘경성의 특산물’ 설렁탕
요즘은 설렁탕집이 없는 동네가 없지만, 설렁탕은 서울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다.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다. ‘설렁탕은 고대부터 경성의 명물인 동시에 외국은 고사하고 우리 조선에서도 어떤 지방에던지 볼 수 없는 경성의 특산물’이며 ‘다른 식에 비하면 가액의 저렴한 것으로든지 자양물(滋養物)의 풍부한 것으로든지 우리 돈 없는 사람에게는 유일무이한 진품(珍品)으로 이름이 높다’(‘설렁탕 개량의 要’, 조선일보 1926년 4월21일)고 했다.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1888~1939)도 설렁탕 예찬론자였다. ‘평민음식으로 이처럼 미미(美味)가잇고 자양분(滋養分)이 많은 좋은 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엄동설한에 보이한 설렁탕 육즙(肉汁)을 오전(五錢)이면 너끈히 사먹을 수 있으니 이것이 양식(洋食) ‘수푸’에 비(比)하야 자양(滋養)은 훨씬 앞서고 그 가격(價格)이 아주 저렴(低廉)한것이 아닌가.’(‘소하만필 19-조선인과 음식물’, 조선일보 1936년8월27일)
월간지 ‘별건곤’(1929년12월호)도 ‘설넝탕을 일반 하층계급에서 많이 먹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제 아무리 점잔을 빼는 친구라도 조선 사람으로서는 서울에 사는 이상 설넝탕의 설녕설녕한 맛을 괄세하지 못한다’고 했다. 1920년대 설렁탕은 10전~15전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인기메뉴였다. ‘돈 없는 사람’ ‘서민’의 훌륭한 만찬이기도 했다.
◇ ‘파양념과 고추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훌훌 먹는 맛이란…’
설렁탕을 파는 식당이 언제부터 거리에 등장했는지는 정확치않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00년 이전부터 종로 뒷골목에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일라고 추정한다. 앞의 황성신문 기자들이 점심으로 설렁탕을 자주 시켜먹었던 걸 보면, 1900년 무렵이면 설렁탕집이 상당히 유행했던 것같다.
‘말만 들어도 위선 구수-한 냄새가 코로 물신물신 들어오고 터분한 속이 확 풀리는 것같다...파·양념과 고추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곰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모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월간지 ‘별건곤’(1929년 12월호)에 ‘괄세못할 경성 설넝탕’을 쓴 우이생(牛耳生)은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조선의 명물이 될 수가 있다’고 썼다.
◇하루 두끼, 설렁탕으로 때우는 신식가정도
설렁탕은 당시 대표적인 배달음식이기도 했다. 점잖은 양반체면에 허름한 탁자에 마주 앉아 후루룩 국물을 들이키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스타일 중시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도 볼품없는 식당보다는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집이 많았다.
‘신가정을 이루는 사람은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왜 그러냐 하면 청춘부부가 새로 만나서 달콤한 꿈을 꾸고 돈푼이나 넉넉할 적에는 양식집이나 폴락거리고 드나들지만 어떤 돈이 무제한하고 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만 제공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지 못한 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은 찬물에 손 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넝탕을 주문한답니다.먹고나서 얼굴에 분(粉)쭉이나 부치고 나면 자연이 새로 세시가 되니까 그적에는 손을 마주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가 저녁 늦게나 집에를 들어가게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 없고 또 손쉽게 설넝탕을 사다 먹는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이라는 것인데…'(‘무지의 고통과 설넝湯 신세, 신구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 별건곤 제24호)

▲설렁탕은 냉면, 탕반과 함께 1920년대 대표적인 배달음식이었다. 자전거로 음식을 배달하다 종종 자동차, 전차와 충돌사고를 일으키는 일도 일어났다.
◇빈발하는 자전거 배달 사고
경성 거리가 설렁탕 같은 음식을 배달하는 자전거로 분주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1920~30년대 신문에는 설렁탕 같은 음식을 배달하는 자전거와 전차,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26일 오전7시경 종로통(鍾路通)1정목 청진동(淸進洞) 들어가는 어구에서 서린동(瑞麟洞)139번지 장영배(張英培)(28)가 운전하는이약 95호자동차와 인사동(仁寺洞)168번 설렁탕집 배달부 이중영(李重永·21)의 자전거가 충돌하여 이중영은 일시 인사불성에 이르러 즉시 수송동(壽松洞) 전치의원(全治醫院)에 입원케 하야 응급치료를 베푼 결과 생명에는 벌다른 관계가 없다더라’( ‘자동차 사고 별일은 없었다’, 조선일보 1926년7월27일)
◇수재민에게 설렁탕 대접한 식당 미담
1925년 을축대홍수로 한강이 넘치면서 뚝섬 인근에 수재민이 대거 발생했다. 집도 세간살이도 물에 떠내려보낸 수재민들이 매일 끼니를 해결할 방법도 마땅찮았다. 이때 어떤 설렁탕집 주인이 수재민 2000명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메뉴는 따뜻한 고깃국물 가득한 설렁탕이었을 것이다. 인정 넘치는 설렁탕 한 그릇을 훌훌 마시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수재민들의 마음은 잠시나마 따뜻해졌다.(‘독도이재동포 이천인에게 샌전설넝탕집 설렁탕을 제공’,조선일보 1925년 7월18일)

▲설렁탕, 선술집의 위생 불결을 비판한 조선일보 1939년 6월17일자
◇주방 직원이 火夫처럼 불결해보여
설렁탕집의 불결한 위생은 문제였다. 1920년 요즘의 ‘독자투고’같은 ‘투서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요사이 호열자병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는데 장교 부근의 어떤 설넝탕집은 어떻게 부정시러운지 사람이 견딜 수있더라고. 그런 집은 대청결을 좀 하여야겠던 걸(一過客).’
위생문제는 일제시대 내내 제기됐다. ‘이 선술집과 설넝탕 등의 음식점을 겸영하는 곳도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불결의 쌍주곡이라고 할 만큼 악취가 나며 변소도 완전한 집이 드물어 파리가 들어꾀이고 더욱이 요리인들의 불결하기란 짝이 없다. 그들은 대개 조선 바지저고리나 양복 바지 위에 샤쓰 하나와 앞치마를 걸쳤으나 음식 국물, 땀, 코에 찌들어 그꼴이 화부로는 보일망정 오리인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나이가 많을수록 그 정도가 심하야…’(‘불결! 비위생의 표본, 선술집과 설렁탕집’, 조선일보 1939년6월17일)
◇설렁탕 값 인상 둘러싼 공방전
대중이 자주 먹는 음식이다보니 설렁탕 값을 둘러싼 공방전도 치열했다. 식당들이 설렁탕 값을 올리려고 하면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고, 허가권자인 경찰이나 당국이 끼어드는 일이 되풀이됐다.
‘냉면 탕반 설렁탕 등을 파는 사람으로 조직된 부내 각 음식점조합에서는 한 그릇에 20전하던 것을 25전으로, 25전 하던 것은 30전으로 값을 올리려고 준비중이라 함은 기보(旣報)한 바인데 9일 본정서(本町署)에는 관내 조선인음식점조합인 남부음식점 조합에 이상과 같이 5전가량씩 음식값을 올리겠다고 신청하여왔다. 본정서 보안계에서는 종래 일반대중 음식점의 음식값은 인가제가 아니었으므로 경제계로 돌리어 업자들은 그냥 돌아갔다. 이에 관하여 본정서 경제계에서는 음식의 분량이 줄고 질이 나빠져 사실상 값을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이상 가격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없다. 음식값이 ‘9.18′가격의 제한을 안받는다는 것은 ‘써-비쓰’를 주로 한 카페나 빠의 경우이지 대중식당에서 값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없다고 말하며 경기도 경찰부 경제경찰과에서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음식값 가격 인상은 우선 ‘스톱’을 당하게 되었다.’(‘냉면, 탕반가인상, 경찰은 불허방침’, 조선일보 1940년4월11일)
당시 설렁탕, 냉면 같은 음식값 인상은 경찰서 통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설렁탕 한 그릇에 1만3000원까지 받는 식당도 있다. 냉면 한 그릇에 1만6000원인 세상이니 고깃국물 듬뿍 든 설렁탕이 그정도 받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기값, 가스값에 인건비까지 물가가 오르다보니 음식점 주인인들 견딜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작년 올해 음식 값이 두어 번 오른 곳이 많아 식당 갈 때마다 가격표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됐다. 설렁탕은 더 이상 만만한 서민 음식은 아닌 것같다.
◇참고자료
주영하, 식탁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2013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2022
牛耳生, ‘괄세못할 경성 설넝탕,진품 명품 천하명식 팔도명식물 예찬’,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朴熙, ‘무지의 고통과 설넝湯 신세, 신구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4.15 - 4.29 연재 없음
05.06 日 육사 엘리트 장교 내던지고 어린이운동 나선 조철호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이 동기…‘보이스카웃’ 창시, ‘어린이 날’주도

▲1922년 10월 보이스카웃 전신인 조선소년군을 창설한 조철호. 일본 육사 26기인 그는 3.1운동 직전 출세가 보장된 현역 장교 자리를 내던지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어린이날’ 하면 소파 방정환(1899~1931)을 떠올릴 만큼, 소파는 어린이 운동의 대부다. 하지만 1923년 소파와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한국 보이스카웃 창설을 주도한 관산 조철호(1890~1941)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더구나 그가 일본 정규 육사(제26기)출신으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엘리트 군인의 길을 내던지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철호의 일본 육사 동기로는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지청천(제헌의원, 초대 무임소장관),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대한민국 첫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조선인으로는 최고위 계급인 중장까지 진급해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을 지냈다가 일본 패전과 함께 전범재판에 회부돼 처형당한 홍사익이 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조철호는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2학년 때인 1909년 7월 학교가 문닫으면서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무관학교 2학년 재학생 중 18명, 1학년생 26명이 유학시험을 통과했다. 조철호는 그해 9월3일 경성을 출발, 동기생들과 함께 도쿄 중앙유년학교 예과 3년생으로 입학했다. 육사 예비과정이었다.
이듬해 8월 청천벽력 같은 전갈이 전해졌다. 당시 용어로 합방(合邦), 실은 망국(亡國)이었다. 조국이 아니라 일본 제국을 위한 간성(干城)이 될 판이었다. 이기동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의 책 ‘비극의 군인들’(79쪽)에는 비분강개한 유학생들이 집단 자퇴, 나아가 집단 자결까지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연장자인 지청천의 제안에 따라 이왕 군사 교육을 배우러 왔으니 끝까지 배우고 중위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기로 맹세했다.
이 맹세를 정확히 지킨 사람이 조철호였다. 조철호는 1914년 5월 임관 후 센다이 제2사단 예하 제29연대 3중대에서 근무했다. 1918년 중위로 진급하자 전역해 귀국했다. 남강 이승훈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강제병합 당시의 맹세를 지킨 이로는 3.1운동 직후 망명한 지청천(26기), 이종혁(27기) 등이 있다. 이들보다 선배인 기병장교 김경천(23기)도 3.1운동 직후 중국에 망명했다.
◇100년 전 첫 어린이날 제정 주도
감옥에서 나온 조철호는 1919년 중앙고보 체육교사가 됐다. 보이스카웃 전신인 ‘조선소년군’을 창설한 것은 1922년 10월5일 중앙고보 뒷뜰에서였다.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훈련시켜 미래의 역군을 길러내자는 취지였다. 조선소년군 창설과 함께 소년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조철호는 이듬해 4월 소파 방정환과 ‘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5월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고 어린이 보호를 위해 시위와 행사 개최 등 대대적 선전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소년협회운동 창립과 어린이날 제정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자래(自來)로 조선의 어린이(소년·少年)들은 어른의 밑에 있어 ‘자유’라는 것은 절대로 얻지 못하고 자라났음으로 장년이 되었어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서 모든 일에 장애가 적지 않던 터임으로 이 일에 대하야 여러 가지의 단체가 났으나 전 조선의 통일적 기관이 없어 심히 유감으로 지나오든 바 금번에 이에 대하야 취미를 가지고 있던 몇몇 유지가 지난 18일에 천도교당에 모여 회의한 결과 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동시에 5월1일을「어린이날」로 정하야 당일은 전 조선 각 소년단체에서 오후3시에 선전운동을 일제히 하고 밤에는 강연을 하리라는데 당일에 의결할 것은 아래와 같다더라. 일(一),매년 5월1일을「어린이날」로 정하고 우선 5월1일에 제1회 선전을 하되, 소년문제에 관한 선전지 20만장을 인쇄하야 5월1일 오후3시에 조선 각지에 일제히 배포함. 이(二),5월1일 오후7시반부터 기념소년연예회와 소년문제강연회를 개최하되 연예회는 소년을 위하야, 강연회는 어른을 위하야 개최하기로 함 등의 계획을 정하고 현금 여러 방면으로 진행중이라더라’ (’소년운동협회의 剏起, 조선일보 1923년4월21일)
이어 ‘전 조선에 대선전, 5월1일은 어린이 날이다’(조선일보 1923년4월29일)같은 후속기사가 나가고 소년운동협회 활동을 기대하는 사설까지 실렸다. ‘우리 소년의 구일누습(舊日陋習)을 혁제(革除)하게 하고 우리도 국민의 일분자(一分子)요 사회의 일개인(一個人)이라는 각오을 주입(注入)하는 그 점이 절대로 추허(推許)할 바이라. 그럼으로 아(我)는 이 협회(協會)를 간주(看做)하기를 소년(少年)에게 대하여 무상(無上)한 교육방침(敎育方針)으로 인(認)하노라.’(‘소년운동협회 창립에 대하야’, 조선일보 1923년4월30일)
첫 어린이날 행사는 대대적으로 열렸다. 경성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가두 행진을 하고 선전지를 나눠주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전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1928년 어린이날은 5월 첫번째 일요일인 6일로 정했다. 어린이날을 알리는 포스터와 삐라. 조선일보 1928년 5월6일자
◇6.10 만세운동 참가로 체포
조철호는 1926년 6.10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또다시 교단에서 추방됐다. 북간도로 망명해 간도 용정의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을 쉬지 않아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1930년 8월 귀향한 그는 이듬해 조선소년군 총사령에 다시 추대돼 소년운동을 재정비한다. 항일 전력 때문에 학교로는 쉽게 돌아갈 수없었던 모양이다. 1931년 10월 동아일보 수위로 입사한 그는 발송부장을 거쳐 1939년 10월 퇴사했다. 그는 1937년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시국강연회때 조선소년군이 태극마크와 무궁화가 도안된 복장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일제는 조선소년군을 어용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는 강제해산의 길을 택했다.
1939년부터 보성전문에서 교련을 담당하다가 오십을 갓 넘긴 1941년 3월22일 별세했다. 냉수마찰을 즐기고 절대로 눕는 일조차 없을 만큼 건강했던 그였는데, 입원 9일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는 일을 다 하지 못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 1998년 7월 ‘이달의 문화인물’
일본 육군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 엘리트 장교로 얼마든지 영화를 누릴 수있었던 그였다. 육군 대장 출신이 조선 총독으로 오던 시절이었다. 그가 ‘문지기’로 일하던 시절, 고급 장교로 위세를 떨치던 동기, 선후배들이 수두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소년운동, 민족운동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화관광부는 1998년 7월의 문화인물로 그를 기렸다.(‘한국 보이스카웃 창설자 조철호 선생’ 조선일보 1998년6월27일)
◇조철호의 생애, 부정확한 기록 많아
아쉬운 것은 소년운동, 독립운동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관산 조철호의 생애를 다룬 기록과 논문에 기본적 사실관계가 엇갈리는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일본군 예편과정, 망명 등을 둘러싼 배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사졸업연도를 틀리게 쓴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네이버’에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철호’ 항목은 그가 1913년 졸업했다고 썼고, ‘네이버’ 두산백과는 1910년 중위로 임관했다고 썼다. 이때문인지 최근까지 졸업연도를 1913년으로 쓴 논문들이 나온다. 문화관광부가 1998년 7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발표할 때도 1913년에 졸업한 것으로 썼으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공예, 디자인문화진흥원이 관리하는 ‘전통문화포털’에는 여전히 잘못된 졸업연도를 싣고 있다. 일본 방위성(우리 국방부) 산하 방위연구소 웹사이트에 따르면, 조철호가 포함된 육사 26기는 1914년 5월(28일) 졸업했다.
◇참고자료
이기동, 비극의 군인들,일조각,2020
이병구, 관산 조철호 선생의 민족교육과 체육활동, 한국체육학회지 제60권제6호, 2021.11
조찬석, 관산 조철호에 관한 연구, 경인교대초등교육연구원, 1981
05.13 비행기타고 원정 다닌 기생 출신 가수 김복희
평양기생학교 출신 빅터 레코드 간판가수, 열일곱살 때 ‘애상곡’으로 데뷔

▲김복희가 축음기기념제에 출연한다는 조선일보 1938년6월28일자에 실린 사진.
90년 전 ‘비행기원정’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서울의 부잣집 호사가들이 이름난 평양기생들을 비행기 삯을 내가며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양은 평양산(産)의 가수로서 일찍이 평양기주(妓主)학교를 졸업하고 빅타-전속 가수가 되었는데 얼굴이 예쁘기로 이름이 높거니와 목소리도 얼굴에 지지않게 아름답다. 평양에 있으면서 서울은 취입할 때만 조금씩 들렀다가 간다. 그의 인기가 높아지자 서울의 호사가들이 전화로 김양을 불러올리게 되었으니 여객기의 임금은 물론 팬의 부담이었으나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날아와서 세상이 시끄럽게 구는 비행기원정이란 새로운 술어를 만들었던 것이다.’
‘순정을 노래하는 北國의 歌人’(조선일보 1937년1월6일)이라는 제목을 단 이 기사는 ‘금년 스무살 이 가수는 북국적인 침착과 성량의 풍당(豐當)한 것이 레코드 유행가수중에서는 그 유가 없다하니 빅타가 이 가수를 금(金)간판으로 삼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소개했다. 김복희가 누구길래, 비행기까지 태워가며 서울로 초청했을까.
◇경성~평양 구간 편도 13원
우선 당시 경성~평양 구간을 정기운행하는 항공편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9년 9월 도쿄~대련 구간 운항이 시작됐다. 도쿄~오사카~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신의주~대련을 잇는 여객서비스였다. 각 구간마다 착륙, 이륙을 반복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경성~평양 구간만 해도 기차로 대여섯시간 걸리던 소요시간이 1시간 남짓으로 줄었다. 기차로 오갈 여유는 없지만 비행기는 단숨에 여의도 비행장까지 날아올 수있으니, 호사가들이 비행기 티켓까지 대가며 가수를 초청한 것이다. 경성~평양 편도 티켓은 13원이었는데, 전화교환수 월급이 25원~50원, 백화점 점원이 20원~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샐러리맨 월급에 맞먹는 돈을 교통비로만 쓰면서 가수를 불러들였다는 얘기다.

▲평양기생학교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1930년 출간된 '일본지리풍속대계'에 실렸다. 왕수복, 선우일선같은 평양 기생 출신들이 유행가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다./서울역사박물관
◇평양기생 출신 김복희
김복희는 1938년 신년 좌담회에서 ‘평양서 자라나 기생학교를 다니면서 빅터의 가수로 ‘애상곡’(哀傷曲)을 불러 출세했다’(‘新版새타령’, 조선일보 1938년1월3일)고 이력을 소개했다. 가요연구가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한국근대가수열전’)에 따르면, 김복희는 1917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찍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갔다. 평양기생학교는 당시 우편엽서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기생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 출신 왕수복이 유명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친구 선우일선도 폴리돌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뽑혀 음반을 냈다. 김복희도 이들처럼 돈과 명성을 쌓을 스타를 꿈꿨을 것이다.
열일곱살이던 1934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가수 발굴에 골몰하던 빅터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의 귀에 노래 잘하고 예쁜 김복희가 들어간 것이다. 이기세는 김복희를 경성에 불러올려 노래를 시켰다. 김복희는 가녀린 목소리로 간들어지는 고음을 소화했다. 이기세는 작곡가 전수린과 시인 이하윤에게 김복희에게 맞는 곡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김복희가 속해있던 평양기생학교 모습. 1930년 출간된 '일본지리풍속대계'에 실렸다./서울역사박물관
◇김복희 목소리에 맞춰 작곡, 작사
전수린은 이애수가 불러 히트한 ‘황성옛터’ 작곡가였고, 이하윤도 시인 겸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작가였다. 파인 김동환이 내는 대중 월간지 ‘삼천리’(1935년11월)에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이하윤 증언이 실려있다. ‘처음에 김복희가 노래를 우리 회사에 와서 부르는데 그 노래를 들음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양버들같이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일에 따른 듯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들음에 간드러지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맞는 곡조를 지어본 것입니다.’
김복희의 목소리에 맞춰 곡를 썼다는 것이다. 이하윤도 이 곡조에 맞는 가사를 쓰기 위해 김복희를 테스트했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연약한 여자가 달빛아래 홀로 서서 검푸른 못을 들여다 보는 그 미묘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김복희의 목에 맞춰 몇번이나 수정한 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에 하나이외다.’
1934년 빅터레코드에서 출시된 데뷔곡 ‘애상곡’은 이렇게 나왔다. 작곡가가 노래를 먼저 만들고, 이 곡을 부를 가수를 찾은 게 아니라, 김복희를 스타로 키우기 위해 맞춤곡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데뷔음반은 호평을 받았다. 월간지 ‘개벽’(1934년11월)은 빅터 레코드가 ‘평양기생 김복희양을 전속으로 하고 제 1편으로 ‘애상곡’을 취입발매중인데 대호평’이라고 소개했다. 유튜브에서 이 음반을 들어보면, 상당히 높은 고음을 부드럽게 넘기면서 착착 감기는 목소리의 매력이 있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후렴구 뒷부분은 반주를 없애고, 김복희의 목소리로만 고음을 처리하도록 해 장점을 살렸다. 이별과 한의 정서를 담은 이하윤의 가사도 ‘애상곡’의 인기에 기여했을 것이다.
◇경성방송국에도 출연
열일곱에 데뷔한 김복희는 5년 가깝게 빅터 전속 가수로 활동하면서 87편의 노래를 발표했다. 김복희는 전수린의 작품을 15편, 역시 빅터 전속인 나소운(홍난파)의 작품을 7편 부르는 등 당대 최고 음악인들과 작업했다. 공연도 자주 다녔다. 조선일보가 1938년 6월30일, 7월1일 주최한 축음기기념제에 빅터 소속 가수인 김정구와 함께 출연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가수로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기생을 겸업했다고 한다.
김복희는 1938년 신년좌담회에서 ‘스무살이라고 했으나 나이를 조금 에누리한 것을 자백한다’고 했다. 당시에도 연예인들은 요즘처럼 어리게 보이려고 나이를 줄여 선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모양이다. 1936년 신곡 ‘가시옵소서’를 발표했는데, 매일같이 레코드사로 팬레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은퇴이후 행적 묘연
1939년4월 폴리돌 레코드로 이적한 후에도 5개월간 11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서서히 잊혀졌다. 김복희가 부른 노래 중에 오늘날까지 불리는 곡은 거의 없다. 신민요를 주로 불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요계를 은퇴한 김복희의 이후 행적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1960년대 동아방송에 잠시 출연했다는 정도다. 비행기까지 타고 원정다닌 예전의 명성을 생각하면 쓸쓸한 퇴장이다.
◇참고자료
이동순, 한국 근대가수 열전, 소명출판, 2022
‘거리의 꾀꼬리’인 10대가수를 내보낸 작곡, 작사자의 고심기, 삼천리제7권제10호, 1935년11월
레코-드 라듸오,개벽 신간 제1호, 1934년11월
05.20 오디션대회 ‘3등’ 고복수, ‘타향살이’데뷔곡으로 스타되다
고향떠난 실향민 애창곡…'알뜰한 당신’ 황금심과 부부

▲1934년 '타향살이'로 데뷔한 고복수와 '알뜰한 당신'으로 유명한 황금심 부부.
재일 가요연구자 박찬호는 ‘조선의 가요 황금기는 ‘타향살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한국가요사’316쪽)라고 했다. 1934년 6월 오케레코드사에서 출시된 ‘타향살이’음반은 발매 한달만에 5만장이 모두 팔렸을 정도다. 이 노래를 부른 고복수(1911~1972)는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가수 오디션 대회 3등 출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1934년2월17일 밤 7시, 당시 최고의 공연장 경성공회당에서 유행가수 선발대회가 열렸다.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행사였다. 전국에서 예선을 거쳐 선발된 남녀 19명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신문사가 유행가수 선발대회를 후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의 가요가 고래로 발전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 기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첫째로 노래를 천히 알아서 ‘점잖은 사람은 노래를 몰라야 한다’는 폐풍이 있게된 뒤로…이렇게 조선의 가요가 영원히 잡멸되려 할 때에 ‘레코—드’를 다리로 하고서 외래의 유행가와 가요가 조선 사람의 넋속을 파고 들어 고유한 조선의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거니와 이 상태로는 조선의 가요의 미래, 다시 말하면 조선 사람의 넋에서, 그 입에서 그 피의 소리인 노래가 영원히 사라지고 다만 소리 없는 인간, 시(詩)가 없는 인간, 생의 약동이 없는 인간으로써 살게 되겠으니 이것이 그저 웃어버릴 일이 아니다.’(‘천재가수 선발대회에 등단할 기대되는 후보자들’, 조선일보 1934년2월15일)
조선인의 정신을 지키는 우리 가요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수 선발대회를 후원한다는 취지였다.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전국 유행가수 선발대회를 소개하는 조선일보 1934년2월15일자 기사. 고복수(왼쪽 위에서 5번째)는 2월17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경성방송국이 현장에서 중계할 만큼 관심을 모았던 대회였다.
◇음반 뒷면에 실린 ‘타향’이 히트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이 실황중계한 이 대회에서 경남 대표로 출전한 고복수는 3등을 했다. 전남 출신 정일경, 함북 출신 조금자가 1,2위를 차지했다. 콜럼비아 사는 선발된 3명 모두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영화배우로 캐스팅하기로 했다. 조금자, 정일경은 대회 직후 동경에 날아가 음반을 취입했는데, 고복수는 소식이 없었다. 콜럼비아에는 이미 강홍식, 채규엽 등 간판 가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 가수 데뷔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도 있고,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고복수를 스카우트해버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곡절끝에 오케레코드로 이적한 고복수는 그해 6월 데뷔 음반을 냈다.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의 ‘이원애곡’(梨園哀曲)과 ‘타향’(‘타향살이’)이었다.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노래한 ‘이원애곡’이 앞면에 실렸고, ‘타향’은 뒷면이었다. 고복수를 스타로 만든 것은 ‘타향’이었다.
◇하얼빈, 용정 동포 흐느끼며 따라불러
‘타향살이’는 특히 만주로 이주한 동포 위문 공연에서 빛을 발휘했다. 보따리 짊어지고 살 길을 찾아 쫓기듯 만주로 떠나온 동포들에게 ‘타향살이’는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한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타향살이 몇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런만/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동포들이 많이 사는 하얼빈과 용정(龍井) 공연에선 청중들이 흐느껴울며 따라 불렀고, 극장안은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특히 용정 공연에선 부산 출신 30대 부인이 무대위로 찾아와 고향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달라며 쪽지를 넘겨주곤 며칠 뒤 자살해버렸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 ‘알뜰한 당신’ 황금심과 결혼
고복수는 이듬해 4월 ‘사막의 한’으로 또 한번 히트를 쳤다.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의 한을 노래한 곡이었다. 불후의 히트곡이 된 ‘짝사랑’도 고복수의 이름값을 한층 높였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으악새’가 무슨 새냐는 퀴즈를 낳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억새’라는 얘기도 있지만, 가을에 우는 새 소리가 ‘으악’으로 들리기 때문에 ‘으악새’라고 썼다고 한다. 박영호가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한 노래다.
고복수의 히트곡은 ‘타향살이’ ‘짝사랑’ 등 손목인이 쓴 노래가 많다. 이 때문인지 고복수는 한살 아래인 손목인을 평생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중했다고 한다. 고복수는 1939년을 마지막으로 오케레코드를 떠나 1940년부터 김용환이 주관한 ‘반도 악극좌’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평생 반려자인 황금심(1922~2001)을 만나 결혼했다. 황금심은 열여섯살이던 1937년 ‘알뜰한 당신’으로 데뷔한 이래 1970년대까지 1000곡 넘는 곡을 발표한 가요계 전설이다.

▲1957년8월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고복수 은퇴공연 신문광고. 후배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치른 이 공연은 부산에서도 열렸다.

▲1972년 2월 고복수 타계후 열린 영결식.
◇고향이 죽어버린 시대에 부활한 ‘타향살이’
해방 이후 고복수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6.25때는 인민군에 납치돼 끌려갔다가 탈출,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들어가 활약했다. 1957년 8월 명동 시공관에서 후배들과 함께 은퇴공연을 펼쳤고, 부산에서도 고별무대를 가졌다. 고복수는 은퇴공연 수익으로 택시회사를 운영했으나 실패했고, 1959년 영화 ‘타향살이’ 제작에 투자했다가 흥행실패로 큰 손해를 봤다. 이후 월부서적 판매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72년 2월10일 식도암과 폐농양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가수 고복수씨 사망’, 조선일보 1972년2월11일)
‘이 노가수의 부고(訃告)를 들을 때 문득 오늘의 ‘도시 유목민’들에게도 잃었던 고향이 생각날 지 모른다. 구성진 옛날의 그 유행가 한 가락속에서 ‘타향살이’의 그 의식(意識)조차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만물상’, 조선일보 1972년2월12일) 고복수의 죽음을 추모한 이 칼럼은 산업화,도시화로 고향 잃은 시대의 비감함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향살이’는 부활하고 있다.
1991년 울산엔 ‘타향살이’가 새겨진 고복수 노래비가 섰고,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현천에도 고복수,황금심 부부 노래비도 세워졌다. ‘타향살이’가 750만 재외동포의 심금을 울리는 애창곡 선두에 올라있는 것도 여전하다. 고복수 고향인 울산은 1987년부터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33번째 대회는 6월4일 태화강 국가정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참고자료
박찬호,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
이동순, 한국 근대가수 열전, 소명출판,2022
05.27 ‘끔찍하고 지옥 같은 냄새!’…한달 한번도 목욕 안 하는 조선인
조선인 냉대하는 목욕탕, 공중목욕탕 설치 요구 급증

▲20세기초 조선의 목욕탕은 일본인들이 주로 운영했다. 조선인은 한달에 1번 목욕하는 이도 드물었다. 위생과 청결이 근대문명의 척도인 시대, 목욕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김도원 화백
‘우리 조선 사람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이 큰 폐단이올시다. 공동목욕탕이 시설되지 못한 시골에는 다시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처처에 목욕탕이 완전히 설비된 경성이나 기타 큰 도회지에서도 목욕에 대한 관념이 매우 희박합니다.’(‘목욕과 위생’1, 조선일보 1925년11월18일)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은 한 달에 몇 번이나 목욕을 했을까. 매일 아침, 저녁 샤워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경악할 정도로 목욕은 연례행사였다.
당시 신문은 ‘조선 사람들은 대개 피부에 때가 까맣게 나타나 보이기 전에는 목욕할 생각을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여자들은 열흘이나 보름 만에 한 번씩 하는 것도 오히려 극히 잦은 셈이 되고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여자도 드물다’고 한 뒤, ‘강원도 어떤 여자는 18년동안을 목욕하지 않았다는 듣기에도 가슴이 답답한 이야기를 언제인가 한번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참혹한 이야기이지만은 아마 조선 전도를 통틀어 조사하여 보면 1년에 몇번이라고 목욕한 날자를 헤일 수 있으리 만큼 더디하는 이들은 수두룩하게 많을 것’(이상 목욕과 위생’1)이라고 썼다.

▲종로구 재동에 개업한 파초목욕탕 광고. 조선일보 1923년 9월22일자에 실렸다.
◇독립신문, 이틀에 1번 목욕 권장
‘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차마 맡을 수도 없고, 도저히 견딜 수도 없는 냄새, 끔찍하고 지독한 냄새, 지옥 같은 냄새! 냄새가 심하다고 아버지나 다른 조선인에게 불평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사랑했던 것을 자신도 사랑하기 때문이다.’(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5, 1905년 11월8일)
좌옹 윤치호가 고종에게 귀국 보고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가는 날 쓴 일기다. 하와이,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라 그런지, 좌옹은 냄새에 더 민감했다. 1년에 몇차례 강에서 멱감는 게 전부인 시절이었으니 더러운 몸과 옷에서 나는 악취는 심각했을 것이다.
위생과 청결은 근대 문명의 상징이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무렵, 목욕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문명의 척도가 됐다. 서구, 일본과 접촉한 개화파, 계몽사상가들은 목욕을 근대를 성취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립신문(1896년5월19일)은 ‘몸에 병이 없으려면 정(淨)한 것이 제일이니, 그 정한 일은 곧 선약(仙藥)보다 나은 것이라…몸 정케하기는 목욕이 제일이라’며 목욕을 권장했다. 신문은 구체적으로 이틀에 1번은 목욕할 것을 권장했다.

▲목욕탕에서 조선인 차별을 고발하는 조선일보 1921년7월28일자 기사
◇청결과 위생은 근대 문명의 척도
문제는 목욕할 공간이 마땅찮다는 사실이었다. 100년 전 욕실을 설치한 집은 드물었다. 욕실을 갖춘 ‘문화주택’에 사는 주민은 극소수였다. 일제시대 신문에는 공설목욕탕 설치를 촉구하는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일본인이 주로 사는 용산이나 명동 주변엔 사설 목욕탕이 많은데,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주민 수에 비해 목욕탕 숫자가 태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공설목욕탕을 사회복지, 편의시설처럼 행정 관청이 건립비를 대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요구가 많았다.
‘평양부(府)에서는 부내 일반 빈곤자와 노동자를 위하야 평양부의 공설사업으로 증왕(曾往,이전) 자혜병원 되었던 터에 목욕탕을 개설하는 동시에 공설이발소까지 설치하야 일반에게 반액으로 제공한다는데 이것은 영리의 목적이 아니라 일반의 위생을 위하여 시설함인 고로 부내 인민은 크게 기뻐한다더라.’(‘평양에 공설욕장 개시’, 조선일보 1920년7월12일)
하지만 세금으로 짓는 공설 목욕탕 건립을 주로 조선인들이 사용한다는 이유에서 중단하는 사례도 있었다. 경성부가 조선인이 주로 사는 북촌 계동(桂洞)에 공설욕장을 설치하려다 ‘조선부민에게만 편의를 주는 사업임’으로 중단했다. 이에 ‘조선인도 납세의 의무를 실행하는 시민이 아닌가. 조선부민에게서 징출한 예산을 조선인 시민을 위하여 지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不公한 사회사업’, 조선일보 1924년12월17일자 사설)라고 비판했다. ‘참 너무나 노골적 감정문제가 아닌가’라는 표현까지 썼다. 총독부의 차별이 치졸하다고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소설가 안회남이 목욕을 예찬한 수필 '목욕'상, 조선일보 1937년 3월21일자.
◇日 목욕탕 주인, 조선인 차별 사례 빈발
결국 사설목욕탕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목욕탕에서까지 민족차별을 겪는 사례가 빈발했다. 일본인 업주들이 주로 목욕탕을 운영하다보니, 조선인은 더럽다는 이유로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목욕탕에서는 일본 사람만 들이고 우리 조선 사람은 못들어오게 아주 거절하는 목욕탕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 사람들을 못들어오게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은 모두 더럽다고 한가지로 목욕할 수없다는 이유이다.’(‘동서남북’, 조선일보 1921년2월17일)
▲해주의 어느 일인의 목간(목욕탕)에서는 조선인이 목욕가면 일인도 물이 부족하여 못하는데 조선 사람은 아니된다고 한다▲돈은 조선 사람의 돈이나 일본 사람의 돈이나 동일할 터이지’라면서도 ‘조선 사람으로서 목욕간 하나도 깨끗이 못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외국인 욕할 것없이 목욕간 하나라도 사회적 사업으로 경영하여 보자’(이상 ‘휘파람’, 조선일보 1926년3월24일)
일제시대 내내 목욕탕을 둘러싼 조선인 차별 기사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탕안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이용객
목욕탕 출입이 많지 않다보니 위생 수칙도 엉망인데다 공중예절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일본 사람의 경영하는 목욕탕에서 흔히 조선 사람을 차별하야 목욕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떠드는 말을 들을 때에 분한 생각이 돌발하야 어찌하면 ▲이런 버르장머리를 못하게 할까하고 그의 불친절한 것을 통매(痛罵)하였었다. 그러나 일전에 어느 일본 사람 목욕탕에를 가서 목욕을 하는 중에▲어느 시골 사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목욕탕 문을 드르르 열고 들어오더니 발도 씻지 않고 또는 뒤수도 하지 아니하고 목욕탕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몸의 때를 함부로 딲아서▲같이 목욕하는 사람의 비위를 거슬이는지라. 나는 황연이 깨닫기를 이러한 까닭으로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의심이 나서 ‘인필자모(人必自侮) 이후에 인이모지(人以侮之)’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또 그뿐 아니라▲조금 있더니 외마디 소리로 한간 두간 열두간이라고 신이냐 넉시냐하며 고성대호하는지라「한간,두간,열두간」이라는 말은 불경(佛經)에 일관음 이관음 십이관음 (一觀音 二觀音 十二觀音)인데 ‘이것은 그 뜨거운 기운을 잊어버리자는 방법인 듯하다’ ▲한 사람의 소리로도 귀가 아프고 졍신이 삭막한 중에 어떤 작자 하나가 또 따라서 병창을 한 즉 목욕탕이 떠나갈 지경이요, 목욕하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쌀을 찌푸리고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평양말본으로 이런 쌍화가 있나하고 목욕도 못하고 도로 와서 생각한 즉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이만한 것도 남만 같지 못하여 남에게 모욕을 당하니 어느날 어느때에나 각성들을 하여 차별을 당하지 아니할까(분탄생,憤歎生)’(‘사령탑’,조선일보 1923년5월3일)
◇'목욕탕 예찬론자’ 안회남
소설가 겸 평론가 안회남(1901~?)은 목욕예찬론자였다. ‘나는 목욕하기를 대단히 좋아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오전9시를 맞춰 수건과 비누를 들고 나선다…내가 어느 상사회사를 사퇴하고 나오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한 가지도 출근시간을 어기고 오전중에 목욕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 ‘목욕’ 상(조선일보 1937년3월21일)에 고백한 내용이다.
안회남은 한여름에도 피서 대신 목욕탕을 고집할 만큼 목욕 마니아였다. ‘나는 피서를 안 간다. 오히려 목욕탕안으로 더위를 찾아든다. 한 두어시간만 얼굴과 머리를 수증기로 서리게 하고 온 몸을 열한으로 뒤집어쓰게 한 다음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나의 피서 안 가는 辯’, 조선일보 1938년8월16일) 그는 적당히 운동하고 목욕탕을 다니는 게 번잡한 피서지에 가서 땀 안흘리고 뚱뚱해지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번 목욕탕에 가는 게 고작이었다.지금은 하루 두번 샤워하는 게 일상이 됐다. 원룸 자취방까지 온수 나오는 욕실을 갖추고 사는 세상이다. 문명의 척도가 청결이라면 최고의 문명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박윤재, 때를 밀자-식민지 시기 목욕 문화의 형성과 때에 대한 인식, 도시를 보호하라, 역사비평, 2021
이인혜, 목욕탕, 국립민속박물관, 2019
06.03 만주벌판 달리던 日 육사 출신 독립운동가, 조선인 밀고에 날개꺾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다니다 유학한 이종혁, 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약하다 옥고치른 뒤 타계

▲일본 육사 출신 독립운동가 이종혁의 타계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5년12월 19일자 기사.
1935년 겨울 부고 기사 하나가 신문 사회면에 났다. ‘남북 만주로 달리든 이종혁 별세’(조선일보 1935년12월19일). 평북 선천의 한 여관에서 가족도 없이 임종을 맞았다는 부고 소식이었다. ‘지난 12월14일 오후5시반에 평북 선천읍 동일여관 쓸쓸한 방 한구석에서 이 세상을 길이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영원히 가버린 가석(可惜·몹시 아깝다는 뜻)한 인물이 하나 있으니 그는 지금으로부터 44년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한 이종혁씨로 어려서 현해탄을 건너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이종혁(李種赫,1892~1935)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그는 1909년9월 학교가 폐교당하자 동료, 선배 41명과 함께 관비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을 떠난 인물이다. 도일(渡日) 당시만 하더라도 약소국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골간이 되려고 작심한 터였다. 그런데 지킬 나라가 없어졌다. 육사 예비과정인 도쿄 중앙유년학교 재학중이던 1910년8월 경술국치를 맞은 것이다. 집단 자퇴는 물론 집단 자결까지 거론하던 중, 이왕 군사 교육을 배우러 왔으니 배울 것은 다 배운 뒤 중위로 진급하는 날, 다 함께 군복을 벗고 조국 독립에 헌신하자고 뜻을 모았다.

▲이종혁은 1908년 11월25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지원해 선발됐다. 학교는 이듬해 9월 군부폐지와 함께 문을 닫았다. 무관학교가 있던 서울 신문로 1가 238 신문로빌딩 앞엔 표지석이 있다./김기철기자
◇선우휘 소설 ‘대인 마덕창’의 모델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졸업한 이종혁은 엘리트 장교로서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다. 일본군이 1918년 시베리아로 출병할 때 파견돼 상훈(賞勳)을 받기도 했다. 이종혁은 연해주 일대에 주둔할 때, 소련 스파이 혐의로 붙잡혀온 조선인을 심문하는 자리에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이종혁은 “너는 어떻게 돼서 이런 북새판에 끼어들었느냐”라고 물었다. 이 조선인은 “당신은 어떻게 돼서 그런 왜놈 군관의 복장을 하구 이런데까지 와서 어정거리고 있는 거요?”라고 되물으며 이종혁을 쏘아보았다고 한다. 소설가 선우휘가 이종혁 친구였던 독립운동가 유봉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5년 발표한 소설 ‘대인 마덕창’에 나오는 얘기다.
이 항일운동가와의 만남이 이종혁의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 1965년 5월호에 이종혁을 모델로 단편 '대인 마덕창'을 발표한 소설가 선우휘. 이종혁 지우인 유봉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
◇중위 진급 후 만주로 망명
중위로 진급한 후 나고야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병을 내세워 예비역으로 편입됐다. 1920년 전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참의부에 들어가기까지 이종혁의 행적은 모호하다. 군벌 마점산 부대의 교관으로 일했고, 장개석의 국민군에 가세한 풍옥상 군대의 참모로도 있었다고도 한다. 1925년초엔 참의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먼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육사 선배 지청천, 유동열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종혁은 19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육군 참의부 군사위원장에 오르면서 독립운동 일선을 지켰다. 하지만 1928년 9월17일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선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이종혁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당시 마덕창(馬德昌)이라는 가명을 썼다.(‘참의부 군사장 마덕창 피착’, 조선일보 1928년 11월8일)
◇지청천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관여
참의부 군사위원장(1927년 3월) 취임 이전 시기 이종혁의 활동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마점산 부대 교관이나 풍옥상 군대 참모로 일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 활동 내용도 불확실하다. 흥미로운 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1925년10월5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보고서(‘鮮匪團 正義府對 新民府 妥協進行 狀況에 關한 件’, 高警제3543호)다. 이종혁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신민부 통합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다. 정의부 군사위원장 지청천(일본 육사 26기)이 1925년9월5일 신민부와의 통합 협상대표로 하얼빈에 왔을 때 이종혁(마덕창으로 기재)과 만났고 이종혁은 신민부와의 교섭을 중개한 사람으로 보고했다. 둘은 무관학교 시절부터 일본 육사 졸업까지 함께 수학한 선후배인데다, 비슷한 시기 망명했기 때문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장개석 국민군에 참가
일본 제국의 첨병인 육군사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이종혁의 재판은 신문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조선일보만 해도 ‘참의부 군사장 이종혁 공판’(1929년2월7일), ‘참의부 군사장 원심대로 5년 언도’(1929년5월23일), ‘일본군으로 시베리아에 출전, 중국군으로 북벌에 가담’(조선일보 1929년10월8일) ‘통의군사장 이중위 奪位’(1929년 12월22일)처럼 속보를 쏟아냈다. 동아일보, 중외일보는 물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까지 이종혁 공판을 다룰 만큼, 당시로선 충격적 사건이었다.
신문은 공판 보도를 통해 이종혁의 활약을 소개했다. ‘일본군으로 시베리아에 출전, 중국군으로 북벌에 가담’ 기사는 장개석 국민군에 가담한 이종혁이 군벌 장작림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장작림 군대에 포로가 돼 고문을 당한 끝에 1927년 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독립군에 투신했다고 적었다. 이종혁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받은 상훈 덕분에 비교적 가벼운 징역 5년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종혁과 일본 육사 동기인 김석원이 남긴 회고록 ‘노병의 한’에는 이종혁이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석방시켜준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다 만기출소했다고 적었다. 이종혁은 옥중에서 늑막염을 앓다가 쇠잔한 몸으로 1934년 4월 1일 평양에서 출소했다. 그의 만기 출옥을 알리는 기사는 ‘그는 고향에나 어디에나 일가 친척 한 사람도 없고 오직 혈혈단신으로 감옥에서 얻은 중병으로 방금 몹시 신고하고 있다 한다’(조선일보 1934년4월7일)로 마무리됐다. `

▲이종혁 재판 상황을 알리는 조선일보 1929년2월7일자 기사. 출세가 보장된 일본 육사 출신 엘리트 장교가 무장 독립투쟁 지도자로 활약하다 체포됐다는 소식은 당시 언론에서 크게 다룰 만큼 주목을 받았다.
◇이종혁 돌본 독립운동가 유봉영
병약한 몸으로 출소한 이종혁을 돌본 이가 독립운동가 유봉영(1897~1985)이었다. 이종혁은 평양 감옥에서 출감한 당일인 1934년4월1일 밤 경성역에 도착했다.역까지 마중나가 이종혁을 맞은 사람이 유봉영이었다. ‘저녁 후 8시반 경 역으로 나가 9시25분 도착 기차로 온 이종혁 군을 만나 같이 이문식당으로 해서 집으로 오다.이군은 오늘 평양 형무소로부터 출감하였다. 이군과 지난 이야기를 하노라고 오전 1시 지나 취침하였다.’ 유봉영은 4월1일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종혁의 석방 소식을 신문사에 알린 이도 유봉영이었다. 유봉영은 4월 6일 오후 조선일보사에 들러 홍종인(1903~1998)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에게 이종혁 근황을 얘기했다. 같은 날 일기엔 ‘종혁군의 기사가 동아, 조선 양지(兩紙)에 기재되다’라고 썼다.
김석원 회고록 ‘노병의 한’에는 어느 날 유봉영이 집으로 찾아와 이종혁을 아느냐고 물어, 그를 따라 이종혁을 위문하러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석원은 일제말 일본군 대좌까지 진급했다.
‘생각하면 한국무관학교 시절부터 일본 육사까지 만 8년 동안이나 한솥의 밥을 먹으며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를 같이 한 이종혁과 나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한쪽은 우리 나라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 장교요, 또 한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가로막는 일본군의 장교였다. 묘한 사이였다. 따져보면 극과 극의 사이랄까.’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김석원은 문병을 마친 뒤, 지인들의 후원을 얻어 치료비로 약 500원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썼다. 웬만한 월급쟁이 연봉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친척 동생이 하던 종로 전동여관에 거처를 마련해줘 이종혁은 몇달간 이곳에 머물렀다. 광복이 한참 지난 시점에 출간된 회고록이라 기억을 미화하거나 윤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김석원이 이종혁을 도운 것만은 분명하다. 유봉영 일기에도 그해 5월4일 김석원 주선으로 전동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내용이 있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유해
이종혁은 경성에서 유봉영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르다 평북 선천으로 옮겨 요양했으나 결국 출소 1년 8개월여만에 타계했다.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종혁은 선천에 묻혔다. 이듬해 4월 신문에 이종혁 유해를 고향인 충남 당진 선영으로 옮기려 하나 가세가 빈궁해 사회의 지원을 바란다는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이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김석원이 몇 년 후 선천에 강연갔다가 친구 이종혁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무명순국열사’의 무덤이란 묘비만 달랑 있는 무덤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다고 한다.
이종혁은 1980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국가유공자를 관리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이종혁이 1941년 병사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생몰년대 정도는 제대로 확인해서 바로잡는 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에 대한 후손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현충일을 맞아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참고자료
일본 외무성, ‘鮮匪團 正義府對 新民府 妥協進行 狀況에 關한 件’, 高警제3543호
유봉영 일기(미공개), 1934년, 1935년
선우휘, 대인 마덕창, 현대문학 125, 1965년5월, ‘신한국문학전집’ 24 재수록, 어문각,1974
김석원, 노병(老兵)의 한(恨), 육법사, 1977
이기동, 비극의 군인들,일조각,2020
김주용, 제국주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李種赫의 생애와 활동 : 굴종, 협력, 저항의 인생사, 동국사학71, 2021
06.10 1930년대 ‘차당(茶黨)의 여왕’이 꼽은 커피 맛집은 어디?
9인회 아지트 충무로 2가 명치제과 끽다부…3층은 음악회, 전람회, 출판기념회 등 ‘문화살롱’

▲김남천 소설 '사랑의 수족관' 등장인물이 본정 2정목(현 충무로 2가) 명치제과 2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의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삽화. 삽화가 정현웅 작품이다. 조선일보 1939년 12월8일자
‘아직 열한 점(오전11시), 그러나 낙랑(樂浪)이나 명치제과쯤 가면, 사무적 소속을 갖지 않은 이상이나 구보 같은 이는 혹 나보다 더 무성한 수염으로 코피-잔을 앞에 놓고 무료히 앉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면 마치 나를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가이 맞아 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즘 자기들이 읽은 작품중에서 어느 하나를 나에게 읽기를 권하는 것을 비롯하야 나의 곰팡이 슨 창작욕을 자극해주는 이야기까지 해줄런지도 모른다.’
소설가 이태준이 1936년 월간지 ‘조광’ 10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장마’의 한 대목이다. 이상, 박태원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이태준은 아내와 말다툼한 뒤, 집을 나선다. 구인회는 화가 이순석이 운영한 카페 ‘낙랑파라’와 함께 명치제과를 아지트삼아 드나들었다.

▲석영 안석주가 쓰고 그린 모던 걸 '차당의 여왕'. 아는 남자를 만나면 낙랑파라나 명치제과로 끌고 다니면서 유성기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조선일보 1934년1월3일자
◇ ‘난파 트리오’ 데뷔연주회
명치제과는 당시 신문에 자주 등장한다. 홍난파가 이끄는 현악3중주단 첫 공연도 1933년 6월4일 밤 8시반 명치제과 3층에서 열렸다. ‘실내악(室內樂)연구의 목적으로 홍난파(洪蘭坡) 홍성유(洪盛裕) 양 씨와 및 금춘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이영세(李永世)씨 등이 조직한 제금삼중주단(提琴三重奏團)에서는 그동안 연습을 거듭하던 중 륙월사일(일요)밤 팔시반부터 본정이정목 명치제과회사 삼층에서 피로연주회(披露演奏會)를 열게 되었는데 참석할 분은 초대장에 한한다고 한다.’ ‘제금삼중주단(提琴三重奏團) 피로연주회(披露演奏會), 륙월 사일 명치제과에서’(조선일보 1933년6월2일)
난파 트리오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홍난파가 시작한 국내 첫 실내악단이다. 바이올린만으로 구성된 3중주단이란 점이 이채롭다. 연주회 티켓은 따로 팔지 않았지만, 다과비 35전을 받는다는 기사(동아일보 1933년6월1일)도 보인다. 커피 한잔에 10전쯤 하던 시절이니, 커피 3잔값을 받고 다과를 제공하는 콘서트를 연 셈이다. 게오르그 위츨(Georg Wichtl)의 ‘트리오 G장조’, ‘트리오 C장조’, 프리드리히 헤르만(Fridrich Hermann)의 ‘카프리치오’ 등 비교적 낯선 곡이었다.(‘대망의 6월 악단’하. 조선일보 1933년6월4일)

▲1930년 10월1일 문 연 충무로 2가 명치제과 매점 개업광고. 1,2층은 커피숍, 3층은 음악회, 전시회,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문화살롱'이었다.
◇'차당(茶黨)의 여왕’이 꼽은 커피 명소
일본에서 명치제과는 1916년 설립됐는데, 캐러멜, 비스킷 등을 생산하다가 1921년 대표상품인 ‘명치 메리밀크’를 팔기 시작했다. 이어 아이스크림, 밀크초콜릿, 명치우유 등을 생산하면서 일본의 대표적 제과회사로 떠올랐다. 명치제과의 또 다른 인기 상품은 커피였다. 명치제과는 1930년 10월1일 본정 2정목(本町 2丁目·충무로2가)에 자사 제품을 판매하는 판매점을 열었다. 이 곳에는 끽다부(喫茶部)가 있어서 과자, 빵과 함께 커피,코코아, 레몬티 같은 음료를 팔았다. 그런데 이곳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인지 당시 세태 소설속에 명치제과가 자주 등장한다.
안석주 작 ‘아스팔트의 딸’(조선일보 1934년1월3일)에는 아는 남자를 만나면 낙랑파라나 명치제과로 끌고 다니면서 유성기 소리에 찻잔 쥔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커피를 마시곤 하는 여성이 나온다. 그녀 별명이 ‘차당(茶黨)의 여왕’이다. 코코아, 레몬차, 홍차, 커피 같은 각종 차를 즐기는 이 모던 걸이 명치제과를 손꼽을 정도였다. 최독견 소설 ‘명일’에는 등장인물 신철이 “커피 맛이 좋다”며 명치제과를 가는 대목이 나온다.
커피 맛 좋다고 소문난 명치제과 1층은 테이블이 있는 박스석이고 2층은 사방 트인 공간에 테이블이 여럿 있는 자리였다. 평일 점심엔 35전짜리 미국식 ‘라이트 런치’를 팔기도 했다. 커피가 포함된 세트 메뉴였다. 크리스마스때도 특별 세트메뉴를 팔기도 했다.
이 제과점 3층엔 음악회, 미술전, 출판기념회 등을 열 수 있는 작은 홀이 있었다. 이 명치제과 3층이 낙랑파라와 함께 경성 예술가들의 ‘문화살롱’역을 한 것이다.

▲명치제과 매점에선 미국식 '라이트 런치'도 팔았다. 커피 포함, 35전이었다. 일본어 신문 '朝鮮新聞' 1931년 11월22일자 광고
◇申鴻休 개인전, 탁구대회까지 열려
도쿄 유학생 출신 서양화가 신홍휴가 개인전을 한 곳도 명치제과였다. ‘동경에서 다년간 양화(洋畵)를 연구하던 청년화가 신홍휴씨(申鴻休氏)는 6월28일부터 7월1일까지 시내 본정통 명치제과누상에서 개인전람회를 개최한다는데 총 작품총수가 36점이다.’ (‘신홍휴씨 양화개인전’,조선일보 1934년6월28일)
영화 포스터, 사진전이나 칠(漆)공예작품전은 물론 탁구대회까지 열렸다. ‘경성학생연맹군(京城學生聯盟軍)대 실업군(實業軍)과의 제9회 대항탁구전은 내24일오전9시부터 본정 명치제과 삼층홀에서 거행하기로 되었다한다.’(‘京城學生聯盟軍과 實業軍 탁구대항전’,조선일보 1936년5월22일)
◇괴테의 100주기 기념회
1932년은 독일 문호 괴테 100주기였다. 문화예술인들이 괴테 10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을 가진 곳이 명치제과였다. ‘오는 3월22일이 시성 괴테의 사후 백주년 기념임으로 세계 각국에서 이날에 기념회합이 있을 모양인데, 조선에서도 해외문학인 제씨의 발기로 당일 오후7시반에 본정 명치제과 3층에서 기념회합을 개최하리라는 바 문단 제씨와 일반 유지의 다수 참석을 바란다고 한다.’( ‘괴테의 밤’ 사후 백년기념회합, 조선일보 1932년3월21일)
시집 ‘성북동 비둘기’로 이름난 시인 김광섭(1905~1977)의 첫 시집 ‘동경’(憧憬) 출판기념회도 1938년 7월18일 오후5시 명치제과 3층에서 열렸다. 회비는 1원이었다. 와세다대 영문과 출신인 김광섭은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나랴’(1970)를 낳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환기는 여덟살 위 시인 김광섭을 존경했는데, 1970년 그가 타계했다는 ‘가짜 부고’를 듣고 뉴욕에서 그린 그림이 이 작품이다.
임화 시집 ‘현해탄’, 이태준 소설집 ‘황진이’, 엄흥섭 소설집 ‘길’ 출판 기념회도 1938년 3월26일 오후5시반 명치제과 3층에서 열렸다. 회비는 1원이었다. 명치제과 끽다부는 문화예술인들의 살롱이자 충무로 일대 카페와 식당, 서점을 산책하며 모던을 즐기던 ‘혼부라’당(黨)의 아지트 역을 했던 셈이다.
◇참고자료
이태준, 장마, 조광, 1936년10월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06.17 ‘이순신의 백골을 혀끝으로 핥는다’는 毒舌, ‘이순신 신드롬’에 무릎꿇다
구한말·일제 때 신채호, 이윤재, 이광수의 이순신 소설, 전기 붐,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 인기

▲2014년 개봉해 관객 1761만명을 동원, 국내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운 영화 '명량' 포스터./빅스톤픽쳐스
파인(巴人) 김동환이 주재한 대중 월간지 ‘삼천리’는 1935년 중반 ‘이광수 전집’을 낸다면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스물다섯살인 1917년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을 내놓은 이래, ‘흙’ ‘유정’ ‘혁명가의 아내’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등을 잇따라 발표한 당대 최고 작가였다.근대 작가 중 첫번째 전집 발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인 춘원의 대표작을 모아 10권으로 발간한다는 계획은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었다.
‘삼천리사에서는 춘원 이광수전집을 간행하기로 되야 제1회 배본 장편소설 ‘그여자의 일생’은 벌써 금일(今日)부터 발매를 개시하였다는데 이 전집(全集)은 전 십권(全十卷)으로 되야 문예작품은 물론 씨(氏)가 이십년래(二十年來) 써온 모든 정치,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저술을 전부 수집하리라 하니 춘원 저작(春園 著作)의 집대성이 이에 실현(實現)될 것이라 한다’( ‘춘원전집 간행’, 조선일보 1935년8월17일)
삼천리가 밝힌 편집위원 면면도 화려했다. 만해 한용운, 염상섭, 이태준, 김안서, 현진건, 김동인, 주요한 등 10명에 삼천리 발행인 김동환도 이름을 올렸다.
‘삼천리’는 편집후기(1935년9월호)에서 ‘「春園全集」 제1회 배본「그 女子의 一生」은 실로 열렬한 환영을 받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판매도 순조로웠던 것같다.

▲아산 충무공 유적이 빚때문에 넘어갈 위험에 처했다며 유적 보호에 나설 것을 주장한 조선일보 1931년 5월20일자 사설
◇카프 작가 김남천의 거친 춘원 비판
당대 거물 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가 스물넷 청년 문사(文士) 김남천(1911~1953)이었다. 계급 의식으로 무장한 카프(KAPF) 작가 김남천은 당시 여운형이 발행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였다. 그는 ‘이광수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조선중앙일보 1935년9월5일~7일)란 제목의 문예시평으로 사흘 연속 춘원을 거칠게 비판했다.
‘이순신의 백골(白骨)을 땅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장백산맥과 한라산의 울울한 산속에서 조선 반만년 얼을 가져다가 소독수처럼 뿌리는 사람, 춘원문학과 그의 사상을 ‘민족개조론’에서 다시 찾는 사람’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괴테, 헤겔을 추앙하는 독일 나치의 모방자로 몰아부쳤다.
‘삼천리’에 대해서도 ‘영리적인 창자를 불리기 위하여는 여하한 비열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것을 상투로 하는 자(者)’로서 ‘비양심적인 출판사’로 낙인찍었다.
김남천의 비판은 당시 논란을 일으킨 춘원의 ‘민족개조론’탓도 있지만, 전근대 역사와 문화, 전통을 ‘반동(反動)’으로 여기는 사회주의 작가 특유의 반감과 적개심이 녹아있다. ‘흥사단적인 고린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하자는 심사’식의 표현에 그런 감정이 묻어있다. 조선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민세 안재홍(1892~1965)은 이에 대해 ‘천대되는 조선’이란 칼럼으로 반박한 바 있다.

▲카프 작가 김남천이 이광수전집 출간을 비판하는 글을 쓴 조선중앙일보 1935년9월7일자. 김남천은 이순신, 정약용, 단군을 기념하는 민족운동 진영을 싸잡아 비판했다.
◇신채호, 박은식, 이윤재, 이광수의 ‘이순신’
김남천은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을 맨먼저 불러냈다. 여기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이순신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소환’한 인물이다. 신채호가 대표적이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6월11일~10월24일)에 연재한 신채호 ‘이순신전’은 국난의 시기 ‘이순신 신드롬’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왕 일본과 대적함에 족히 우리나라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거룩한 인물을 구하건대, 고대에는 두 사람이니 고구려 광개토왕이오, 둘째는 신라 태종왕이오, 근대에는세 사람이니 첫째는 김방경이오, 둘째는 정디(지)오, 셋째는 이순신이니, 모두 다섯 사람이라. 그러나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소상하여 후인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11일) 신채호는 시시각각 조선에 마수를 뻗쳐오는 일본을 대적할 민족 영웅으로 이순신을 불러낸 것이다.
박은식도 1923년 상해에서 ‘이순신전’을 펴냈다. 장도빈 ‘이순신전’(고려관,1924), 최찬식 ‘이순신실기’(박문서관, 1925),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한성도서, 1931), 이광수 ‘이순신’(문성서림, 1932) 등이 쏟아져나왔다. 이윤재, 이광수의 ‘이순신’은 신문 연재 후 출간돼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아산 충무공 유적 경매 위기로 대대적 모금운동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1931년 5월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와 위토(位土·문중 제사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임야)가 은행에 저당잡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 충무공의 묘소 위토’(5월13일자) 기사를 처음 내보냈고, 조선일보 등 한글 민간지등이 뜻을 합쳐 충무공 유적 지키기에 나섰다. 충무공유적보존회가 설립되고 대대적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현재 2400원의 잔존한 채무로 인하야 이 위인(偉人)의 위토가 오유(烏有·없어진다는 뜻)에 돌아가고 그 탄생 및 종언을 해마다 기념하는 자원이 전혀 끊이게 되는 것은 민족적 수치인 것은 물론이오 여기 있어 조선인이 민족인으로서 너무 무혈성(無血性)하고 또 무성력(無誠力)하다는 것을 여실히 표명하는 것이다’(‘이충무공의 위토와 묘지’, 조선일보 1931년5월20일) 조선일보는 사설로 빚 때문에 충무공 유적이 은행에 넘어간다는 건 ‘민족적 수치’라며 대책을 촉구했다. ‘이충무공유적보존회 有終의 미를 기함’(1931년 5월25일). ‘이충무공과 유적보존, 금후 노력이 긴절’(6월15일) 등 사태 진전에 따라 사설을 내보냈다.
신문에는 매일같이 누가 얼마를 기부했다는 성금 내역이 실렸다. 10개월간 지속된 모금운동에 개인 2만명과 단체 400곳이 참여해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이 성금으로 채무를 갚는 것은 물론, 현충사를 새로 중건해 이듬해 6월5일 전국에서 약 3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과 영정봉안식이 열렸다(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충무공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민세 안재홍은 1934년 9월 위당 정인보와 함께 충무공 유적을 답사한 기획 '충무유적'을 15차례나 신문에 연재했다. 사진은 첫회가 실린 조선일보 1934년 9월11일자
◇민세 안재홍의 충무유적 답사
이순신은 역사 인물로 신문에 종종 등장했다. 조선일보는 1923년7월7일~10일 4차례에 걸쳐 ‘조선고금인물’ 기획의 하나로 이순신을 소개했고, 1928년 4월27일~5월4일엔 ‘조선 역사상 위인의 추억기’로 이순신을 7차례 다루며 ‘넬슨 제갈량을 능가할 才略, 조선이 낳은 최대 위인’으로 평가했다. 민세 안재홍도 1934년 이순신 장군 유적을 답사한 ‘충무유적’(1934년9월11일~28일)을 15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위당 정인보와 함께 여수 전라좌수영부터 명량대첩의 현장인 진도 울돌목(명량) 등을 돌아본 민세는 충무공을 ‘조선심(朝鮮心)의 이상적 구현자(具現者)’로 평가했다. ‘이순신 신드롬’이라 할 만한 열기가 계속됐다.
◇'인간 이순신’의 고뇌에 공감
이순신을 박정희 정부 시절의 ‘관제(官製) 영웅’쯤으로 치부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기 들어 더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같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 나오는 족족 성공했다. 김훈 ‘칼의 노래’ 김탁환의 ‘불멸’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104부작)도 최고 시청률 32.2%를 기록했다. 1761만명이 본 국내 최대 관객동원 영화 ‘명량’(2014)은 물론 후속작 ‘한산’(2022)도 726만명이나 봤다.
김남천은 ‘이순신 신드롬’을 깎아내렸지만, 이순신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식을 줄 모른다. ‘영웅’ ‘성웅’보다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주목해 요즘 사람들의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낸다는 게 예전과 다른 점이다.
◇참고자료
정두희, 이순신론에 대한 역사학적 반성, 향토서울 71호, 2008,2
장경남, 이순신의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통시적 연구, 민족문학사연구 35, 2007, 12
김경남, 근대 이후 이순신 인물 서사 변화 과정의 의미 연구,한민족어문학 61,한민족어문학회, 2012
06.24 ‘美男기자’현진건의 미스터리
1920년 조선일보 입사, 신문 1면 연재소설 맡아…조선·동아·시대일보 사회부장 10년 넘게 한 베테랑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현진건 초상.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활약하느라 발표하는 작품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일보 1927년10월29일자
◇남구(南歐)의 시인같이 다정한 문인
‘빈처’ ‘운수좋은 날’ 등 교과서에 실린 소설로 이름난 빙허 현진건(1900~1943)의 별명은 ‘미남 기자’다. 만문만화가로 이름난 석영 안석주는 1927년 빙허를 이렇게 묘사했다. ‘씨(氏)는 본래 미남자이지만 ‘타락자’라는 소설 재료를 구하러 다녔을 때같이 아름다웠던 때는 없으리라.’(’만문자가 본 문인1-愛酒家 빙허), 조선일보 1927년10월29일)
‘타락자’는 1922년 월간지 ‘개벽’에 실린 빙허의 초기 대표작중 하나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타락과 좌절을 다룬 작품이다. 그런데 석영은 글과 함께 빙허의 인물 스케치를 실었다. 양복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배를 내민 ‘아저씨’다. 스물 일곱살 때의 빙허인데, 요즘 미남 기준과는 좀 다른 듯하다.
같은 해 빙허를 미남으로 소개한 기사는 또 있다. 소제목이 아예 ‘미남자 현진건씨’다. ‘빙허 현진건씨는 세상이 다 아는 미남자요, 미문가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체격이 고운 만큼 행동과 사상과 필치가 고운 것이니 씨는 과연 남구(南歐)의 시인같이 다정한 문인입니다.’(‘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매일신보 1927년4월17일) 낯간지러운 여성지 기사같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미남으로 치는 건 비슷하다. 이 기사는 빙허의 취미가 바둑이라고 소개한다.
▲현진건을 '미남자'로 소개한 매일신보 1927년4월17일자 기사.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었다.
◇현역 기자 때 발표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을 근대문학 초기 단편 소설 거장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빙허는 16년 가까이 신문·잡지 기자생활을 한 언론인이다. 대표작 ‘빈처’(‘개벽’ 1921년 1월) ‘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년 11월) ‘운수 좋은 날’(‘개벽’ 1924년6월) 모두 현역 기자 초창기 때 쓴 작품이다.
빙허는 1920년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주간지 동명과 시대일보·동아일보를 거쳐 1936년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사직당했다. 조선·동아·시대일보를 통틀어 사회부장만 10년 넘게 할 만큼 정통파 기자였다. 이 때문에 ‘그가 한번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처세하기 비롯한 때부터는 그에게서 작품이 귀하게 나왔다’(’만문자가 본 문인1-愛酒家 빙허)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1면 소설 '로 빙허 현진건의 창작소설 '효무'를 연재한다고 알리는 조선일보 1921년 4월27일자 사고. '진정한 창작이 드물고 표절작품이 성행하는 오늘날 이 신진 작가의 번뇌를 짜고 심혈을 뿌려 적막한 우리 문단에 심는 한송이 꽃'을 기대한다며 호기롭게 밝혔다.
◇첫 신문 창작소설, 1면에 연재
현진건 초기 단편소설이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잡지 ‘개벽’을 통해 나온 것은 앞서 본 것과 같다. 하지만 빙허가 ‘개벽’에 초기 대표작 ‘빈처’를 발표하기 직전인 1920년 11월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와 소설을 연재한 사실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빙허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신문 1면에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번역한 ‘초련’(12월2일~1월23일,총 44회), 역시 투르게네프 소설을 번역한 ‘부운’(1월24일~4월30일, 총 86회)을 썼고, 영국 작가 마리 코렐리의 ‘복수’를 번안한 ‘백발’(5월14일~9월30일)을 4면에 연재했다.
학계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현진건의 초기 번역·번안소설을 주목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백발’ 원작은 그간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막연히 추정돼왔다. 2012년에야 영국 작가 마리 코렐리 원작 ‘복수’(1886)가 원작이고 일본 작가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 ‘백발귀’(1893)를 저본삼아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황정현, 현진건 장편번역소설 ‘백발’연구, 한국학연구 42, 2012.9)
빙허의 첫 신문 창작 소설은 1921년5월1일부터 30일까지 조선일보 1면에 연재한 ‘효무’(曉霧)였다. 빙허는 1면에 창작 소설을 연재하면서, 동시에 4면에 번안소설을 실을 만큼 강행군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그의 첫 신문 창작소설 ‘효무’는 ‘작가 사정’으로 중도하차했다. 이 작품 연재는 2년 후 ‘개벽’에 속개됐다가 1925년 단행본 ‘지새는 안개’(박문서관)로 출간됐다.
▲근대극 선구자 현철. '개벽' 학예부장을 맡은 현철은 오촌 조카인 현진건이 개벽에 작품을 발표하도록 도와주고, 조선일보 입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숙인 ‘개벽’ 학예부장 玄哲 지원 받아
현진건은 1920년 ‘개벽’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단했다. 번역소설 ‘행복’(개벽 3호, 1920,8), ‘석죽화’(개벽 4호, 1920,9)에 이어 창작 단편 ‘희생화’를 발표했다.(개벽 5호, 1920,10) 변변한 경력이 없는 빙허가 개벽에 매번 글을 싣게 된 데는 당시 ‘개벽’ 학예부장을 맡았던 당숙 현철(玄哲)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메이지대법과에 유학하던 현철은 1913년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가 이끌던 극단 예술좌(藝術座) 부속 연극학교에 들어가 4년간 연극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1920년부터 ‘개벽’에서 일했다.
빙허의 학력은 일본 도쿄 세이조(生城)중학 4학년 중퇴에 상하이 호강(滬江)대에서 독일어를 배웠다는 게 전부다. 이런 경력의 빙허가 신문사에 어떻게 입사했을까. 현철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보는 의견이 강하다. 현철은 ‘개벽’을 중심으로 당대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조선일보에도 ‘현당극담’(1월24일~4월 21일·총 77회)이라는 연극 평론을 매일같이 쓴 주요 필자였다.
◇첫 월급 60원, 고향 보내고 책 사
현진건은 조선일보 입사후 첫 월급 받은 소감을 1927년 월간지 ‘별건곤’에 회고한 적 있다. ‘내가 스무살 나던 때 겨울에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간 것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나의 첫 취직인 동시에 그 때 그 수입이 첫 수입입니다. 즉 11월말일인가 봅니다. 봉투를 한 장 내주기에 월급인가 보다 하고 돌아서 뜯어 보니까 10원짜리 여섯 장이 들었습니다. 초급하고는 꽤 많았습니다. 어찌도 기쁘던지요. 그래 그 돈을 가지고 나와 20원인가 얼만가 시골집에 보내고, 책 10원어치 사고, 그리고 기쁜 김에 동무들과 같이 한잔 톡톡히 한 듯합니다.’
여기서 1920년 11월에 조선일보에 입사한 사실과 당시 첫 월급으론 꽤 많은 60원을 받아 기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있다. 1920년 당시 초봉 60원은 웬만한 샐러리맨 월급 2배일 만큼 꽤 많은 액수였다.
◇빙허의 조선일보 재입사는 1926년 4월 이전
현진건의 유학과 이후 경력 중엔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대목이 있다. 1921년말 조선일보를 떠나 최남선이 주재한 주간지 ‘동명’과 시대일보에서 일한 것은 사실이다. 학계에선 대부분 빙허가 1926년 8월 시대일보가 폐간된 이후 동아일보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왔다. 동아일보로 옮기기 전, 조선일보에서 다시 근무했다는 언급도 있지만 근무한 시기나 그 근거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박현수, 문인-기자로서의 현진건, 299쪽, 반교어문연구 42, 2016) 박현수는 동아일보사사원록 약력을 근거로 빙허가 1926년 시대일보를 그만두고 같은 해 조선일보사로 옮겨간 후 1927년 8월 사직했다면서 시대일보가 폐간된 1926년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조선일보에 1년 정도 근무한 것으로 봤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에 ‘현진건’을 키워드로검색하면, 늦어도 1926년 4월엔 이미 조선일보에 재직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1926년 4월18일자 조선일보에 빙허 조모상 부고가 조선일보 에 실렸는데, 그를 ‘본사 기자’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빙허는 사회부 기자를 거쳐 그해 후반 사회부장을 맡았다. 기사 제목을 잘 뽑는 명편집자로 소문났다. 매일신보(’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1927년4월17일)를 통해서도 빙허가 1927년 사회부장을 맡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일장기 말소사건과 죽음
빙허는 1927년 10월 동아일보로 옮겼다가 1936년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16년 가까운 기자 생활을 강제로 마감한 것이다. 그는 조선, 동아, 시대일보 민간지 3사의 사회부장을 거친 민완기자였다. 하지만 신문사를 떠난 이후 빙허의 작품 활동과 인생은 순조롭지 않았다. 양계장을 운영하며 미두(米豆)에 투자했다가 가산을 탕진했고, 폭음끝에 1943년 폐결핵으로 숨졌다.
◇참고자료
현진건, ‘첫 수입받든 때 이약이’, 별건곤 제4호,1927,2
‘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 매일신보 1927년4월17일
박현수, 문인-기자로서의 현진건, 반교어문연구 42, 2016
박현수, 1920년대 전반기 조선일보와 현진건, 대동문화연구 88, 2014,12
최성윤, 조선일보 초창기 연재 번역·번안소설과 현진건, 어문논집 65, 2012
황정현, 현진건 장편번역소설 ‘백발’연구, 한국학연구 42, 2012,9
박현수, ‘효무’ 해제: 새벽안개, 서광을 가린 혼돈의 세계, 민족문학사연구 45,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