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3-06/
06.01(목) 딥페이크 선거
올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였던 튀르키예 대선이 끝났다. ‘21세기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며 최소 5년(2028년), 최장 10년(2033년) 더 집권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미 총리로 11년, 대통령으로 9년을 통치한 터다. 외신은 그의 30년 집권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사실상 종신 집권’이라 전했다.
여론조사에선 에르도안의 패색이 짙었다. 튀르키예 역사상 처음 6개 야당이 공동 후보로 추대한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지지율은 50%를 넘나들었다. 살인적인 고물가, 사망자 5만여 명을 낸 대지진 등도 ‘에르도안 심판론’을 부추겼다. 선거 직전, 지지율 3위였던 야권 후보 무하렘 인제가 ‘섹스 비디오’ 스캔들에 휘말려 사퇴하자 클르츠다로을루가 1차에서 과반 득표해 당선 확정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일부 현지 매체는 이변의 원인을 ‘딥페이크(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라 지목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선거에선 가짜 영상이 판을 쳤다. 1차 투표 직전, 에르도안이 공개한 영상이 대표적이다. 해당 영상에선 클르츠다로을루의 유세 장면과 쿠르드노동자당 창립 멤버인 무라트 카라일란의 응원 모습이 이어졌다. 도이체벨레는 “아무 연관 없는 영상 두 개를 이어 붙인 가짜”라 했지만, 클르츠다로을루가 ‘테러리스트’의 지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선거 기간 클르츠다로을루가 “에르도안은 신이 내린 지도자다. 그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호소하는 영상도 화제였다. 하단엔 딥페이크임을 밝히는 한 줄 문구가 적혔지만, 대다수 유권자는 영상에만 주목했다. 인제 후보를 사퇴시킨 ‘섹스 비디오’ 역시 딥페이크라는 주장도 나왔다. 야권에선 선거 기간 내내 “러시아가 AI와 딥페이크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내년엔 한국 총선, 미국 대선이 이어진다. 벌써 바이든 대통령이 등장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확산 중이다. 전문가들은 AI발(發) 가짜 뉴스를 방어할 기술적 방법은 아직 없다고 말한다. 기댈 건 유권자의 역량이다. 최근 “뉴스 신뢰도를 참·거짓이 아닌, 정치성향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가짜 뉴스에 쉽게 낚인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AI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모순의 함정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6.02(금) 재난문자
우리는 언제부터 재난문자를 받았을까. 2002년 기상청이 SKT와 손잡고 호우·폭설 등 기상경보를 재해 다발지역에 시범 서비스한 게 시작이었다. 1년여 뒤 조사에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의 64%가 ‘큰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이에 행정안전부 산하 소방방재청이 나서 2005년 5월 이동통신 3사와 함께 재난문자 서비스 전국 도입을 발표했다. 벌써 18년 됐다.
재난문자는 역할이 컸지만 논란도 적잖았다. ‘꼭 필요한 것만, 꼭 필요할 때 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2016년 정부가 효율적 수·발신을 위해 재난문자를 ‘위급·긴급·안전안내’ 3단계로 구분했다. 최고 단계인 위급 문자만 무조건 울리게 하고 나머지는 개개인이 수신 거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위급은 공습경보·경계경보·화생방경보 등 민방공 상황 때, 긴급은 테러나 방사능물질 유출 예상 때 보낸다. 그 외는 모두 안전안내 문자다.
그런데 코로나·지진·황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최근 수년간 안전안내 문자가 범람하면서 재난문자 피로감이 폭증했다. 2020~2022년 발송된 재난문자가 연평균 5만4402건으로 이전보다 131배가량 늘었다. 중앙정부·각급 지자체·산하기관 등 발송 주체가 겹치면서 검색창에 ‘재난문자’를 치면 연관 검색어로 ‘재난문자 알림 끄기’ ‘재난문자 차단’이 뜬다. 보다 못한 정부가 “불필요한 수신을 대폭 줄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고 지난달 24일 기존 시·군·구 단위였던 발송 범위를 읍·면·동 단위로 세분화했다.
공교롭게 불과 일주일 뒤 사상 첫 ‘위급’ 재난문자 사태가 있었다. 북한 발사체 실험 직후인 지난달 31일 오전 6시 41분 서울시가 전시(戰時)를 알리는 경계경보 재난문자를 보낸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이 곧장 “사고로 인한 추락”임을 밝히면서 또 “과잉 대응” “오발령” 논쟁이 일고 있다.
정치적 책임 공방은 볼썽사납다. 향후 발신 기준과 체계 재정립에 집중하길 기대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0년 보고서에서 설문 응답자의 66.6%가 ‘재난정보 확인에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전히 휴대폰을 꼽았다. 재난문자가 아무리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도 ‘전쟁 알림’은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라는 국가의 원초적 존재 이유에 맞닿아 있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6.05(월) 외국인 노동자
‘한국인=단일민족’ 개념이 등장한 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이다. 1948년 역사학자 손진태가 쓴 『조선민족설화의연구』에서다. ‘한 민족에서 어떤 종족의 혈액이 80~90%를 점유한다면 단일민족’이라고 봤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1300년간 단일민족·단일국가가 전승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선 지나친 단순화라고 지적한다. 막 태동한 정부를 돕기 위한 정무적 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옛 문헌에 외국인이 종종 등장하는데 『삼국유사』가 대표적이다. 서기 42년 김해 김씨 시조인 수로왕은 배필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망산도(진해)에 배 한 척이 정박했다. 배에는 선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그중 아유타국(인도) 공주 허황옥(16세)이 있었다. 국내 첫 국제결혼으로 꼽힌다.
이런 설화도 있다.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875년 동해 용을 위해 절을 세우자 용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인 처용이 지상에 남아 왕을 도와 정사를 돌봤다. 처용의 아내는 아름다웠는데 역신이 이를 흠모해 밤에 몰래 들어와 동침했지만, 처용은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노래를 불렀다. 감복한 역신은 처용의 얼굴 그림이 있는 집은 역병을 퍼트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처용가’를 부르며 건강을 기원하는 관습이 생겼다 한다. ‘처용가’를 부를 때 쓰는 처용탈은 큼직한 코, 짙은 쌍꺼풀, 주걱턱 등 이국적인 느낌인데 학계에선 처용을 귀화한 아랍인으로 본다.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규제를 잇달아 완화하고 있다. 계절 외국인 노동자 체류 기간 연장, 외국인 가사 도우미 시범사업 등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부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다. 내국인의 일자리 감소, 치안 등과 같은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은 이미 한국 사회에 없어서 안 될 존재다. 내국인이 기피하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3D)을 도맡고 있다. 건설현장 인력 70%는 외국인이고 국내 주요 조선소의 외국인 인력 비율도 20%에 이른다. 농촌은 수확기 노동 인력의 90% 이상이 외국인이다. 세계 110곳이 넘는 나라에서 20만 명 넘게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관련 제도는 여전히 미비하고 배척은 강하다. 불과 50여 년 전 파독 간호사·광부로 설움을 겪었던 우리의 아픔을 잊지 말자.
최현주 증권부 기자
06.06 위기의 한국영화
1988년 9월 26일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에 뱀이 나타났다. 미국 영화배급사 UIP의 첫 한국 직접 배급 영화 ‘위험한 정사’ 개봉에 항의한 영화인들이 벌인 일이었다. 이듬해 8월엔 직배 영화를 상영하던 서울시내 영화관 5곳에서 방화 혹은 최루가스 분무 테러가 일어났다. 직배반대투쟁위원장이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직배를 둘러싼 갈등은 그만큼 거셌다.
군부정권의 검열과 통제를 거치며 한국 영화의 경쟁력은 가뜩이나 떨어진 상태였다. 직배 영화는 도입 10년 만인 1997년 73편 개봉에 1000만 관객 규모로 성장했다. 반면 한국영화는 제작 편수가 쪼그라들었다. 대신 충무로에 대기업 자본이 뛰어들면서 편당 관람객 수가 느는 등 질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99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사상 첫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2004년 ‘실미도’가 1000만 스타트를 끊었다. 한국영화 위기론은 1997년 외환위기,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 고비 때마다 나왔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매번 위기를 넘기며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이번엔 코로나19와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의 약진으로 또다시 한국영화 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한국영화 극장 점유율은 31.4%에 그친다. 2004년 집계를 시작한 이래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21년 30.1%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
올 1분기 개봉 영화 중 100만 관객을 넘은 건 ‘교섭’과 ‘드림’뿐이었다. 올해 흥행한 건 ‘스즈메의 문단속’(551만 명), ‘더 퍼스트 슬램덩크’(467만 명) 등 일본 영화와 외화였다. 티켓값은 올랐지만 볼만한 영화는 없다는 관객들의 불만도 높았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범죄도시3’가 개봉 첫날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우고, 6일 만에 500만 명을 모으며 스퍼트를 내고 있다. ‘범죄도시3’의 손익분기점은 180만 관객이다. 한국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긴 건 지난해 11월 개봉한 ‘올빼미’ 이후 처음이다. 4일 기준 총 2566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좌석점유율 76%를 차지해 ‘공정신호등’엔 빨간불이 켜졌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원 펀치’ 액션이 위기의 한국영화에 반전의 계기가 되길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07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꿈
세계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주상복합 아파트가 2027년 서울 서초구에 들어선다. ‘더 팰리스 73’이다. ‘73’은 73세대만 짓는다는 뜻이다. 한 세대당 분양가가 100억~400억 원에 달한다. 지난 4월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 가격 평균이 10억2200만 원이었다. 최근 분양을 시작했는데 광고 문구가 논란이 됐다.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천민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였다.
광고는 대중의 욕망을 겨냥한다. 2001년 광고에서 배우 김정은씨가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다.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그 문구가 덕담으로 사용됐다. 외환위기의 끄트머리였다. 경제적 몰락 뒤에 부자로의 반등을 꿈꿀 때였다. 그 광고를 한 곳이 단기 부채를 권하는 신용카드 회사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으로 2002년 카드 대란이 발생했고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나왔다. 빚으로 부풀려진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의 거품은 곧 꺼졌다.
‘더 팰리스 73’ 광고도 대중 욕망을 겨냥했다. 코로나19로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불평등한 사회의 상단으로 가려는 욕망은 더 커졌다. 유튜브엔 부자들의 집을 소개하는 콘텐트가 넘친다. 한국에서 부자의 일차적 상징은 주택이다. 유럽 상류층이 취향을 통해 다른 계층과 자신들을 구별짓기 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경제학자 케빈 코피 찰스와 에릭 허스트는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재산, 지출 등의 차이를 연구한 적이 있다. 흑인들은 수입이 비슷한 백인보다 더 많은 돈을 자동차에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차별에 대한 반대 작용으로, 보이는 자산에 더 돈을 쓰는 것이다. 한국 부자들이 주택을 과시하는 것은 압축 성장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셜미디어에 쏟아진 비판처럼 ‘더 팰리스 73’ 광고는 불편하다.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20대를 다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고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일까. 정의는 이성이나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가 낳은 결과물이다. 데이비드 흄의 얘기다. 이럴 때면 한국 사회는 퇴행하는 게 아닐까 싶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6.08 사우디와 스포츠 워싱
‘스포츠 워싱(sports washing)’은 스포츠와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눈속임)의 합성어다. 특정 국가 또는 집단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스포츠팀을 운영 또는 후원하거나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구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독재국가 아제르바이잔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 2015년 처음 등장했다. 카스피해 인근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은 막대한 오일 머니를 축적했지만 부와 권력의 편중, 인권 침해 등 각종 논란을 일으키며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갓 출범한 제1회 유러피언 게임을 유치하고 수도 바쿠에서 성대하게 치렀다. 이 대회가 스포츠를 활용한 화이트 워싱의 전형적 사례로 지목받아 ‘스포츠 워싱’이란 표현이 탄생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은 축구, 배구, 태권도, 레이싱 등 여러 종목 국제대회를 꾸준히 개최해 왔다. 영국 BBC는 “검색 엔진에 ‘아제르바이잔’을 입력하면 나오는 결과물은 각종 스포츠 경기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라면서 “부패, 인권 탄압 등의 단어는 어느새 저 멀리 밀려났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스포츠 워싱 논란의 중심에 섰다. 언론인 살해, 반체제 인사 감금, 여성 인권 탄압 등으로 물의를 빚은 가운데 스포츠에 파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는 모양새가 아제르바이잔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명문구단(뉴캐슬)을 인수하고, 글로벌 골프대회(LIV)를 창설하고, 스타 플레이어(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자국 리그에 영입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사우디 국부 펀드는 자국을 스포츠 글로벌 허브로 키운다는 목표 아래 총 378억 달러(49조2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7일 사우디발 스포츠 빅이슈 두 가지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LIV 골프가 그간 대립각을 세우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전격 합병했다. 스페인 프로축구 명가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 공격수 카림 벤제마(프랑스)는 연봉 2억 유로(2800억원)를 받기로 하고 사우디 클럽 알 이티하드 유니폼을 입었다. ‘스포츠로 이미지를 산다’는 비판에도 상상을 뛰어넘는 자금력을 앞세운 사우디의 발걸음이 계속 빨라지고 있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6.09(금) 국회 상임위원장
총선을 치르면서 4년 주기로 바뀌는 국회는 2년마다 전반기와 후반기 원(院) 구성 협상을 한다. 국회의장단을 선출하고 상임위원장을 배분한다. 18개 상임위원장직을 놓고 여야 간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대한민국 국회는 본회의가 아닌 상임위 중심이다. 상임위원장은 회의 진행과 법안 상정 권한을 갖는다. 상임위원장이 ‘국회의원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다.
상임위원장은 교섭단체(20인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 의석 비율에 비례해 배분한다. 국회법 어디에도 정당 간 상임위 배분 방식을 명시한 규정은 없다. 1988년 개원한 13대 국회 때부터 의석수 비율에 따라 상임위를 배분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그 전까진 여당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늘 여당이 다수당이었고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125석)은 1당이었지만 과반을 얻지 못했다.
각 정당에서 상임위원장을 선출할 땐 선수(選數)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상임위원장은 3선부터가 암묵적인 룰이다. 역시 관례에 따른 것이다. 국회법이 유일하게 규정하고 있는 건 상임위원장의 본회의 선출과 2년 임기다. 다선 의원이 많을 땐 2년 임기를 쪼개 1년씩 맡기로 당내 합의하는 경우도 있다. 바꿔 말해 본인이 2년 임기를 채우겠다고 하면 물러나게 할 방법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2019년 7월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직 사퇴를 거부한 박순자 의원에게 당원권 6개월 정지 처분을 내렸다. 박 의원이 국토위원장을 1년만 맡고 홍문표 의원에게 넘기기로 한 합의를 지키지 않아서다.
21대 국회 마지막 민주당 몫 상임위원장 선출을 놓고 당이 시끄럽다. 승자 독식의 저주다. 21대 국회 전반기 원 구성 때 18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가져오면서 장관 출신은 상임위원장을 맡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뜨리고 3명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후반기엔 정청래 의원이 최고위원에 당선되고도 상임위원장을 내려놓지 않아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민주당 지도부는 새로운 원칙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국회법에도 없는 상임위원장 배분과 선출 관례가 대체로 잘 지켜져 온 건 국회가 타협과 합의를 중요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다시 풀고 제대로 끼우면 된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6.12(월) 수신료 합산 청구
“모든 시청자는 공영방송의 주인으로서 재원을 균등하게 부담하고, 공영방송은 균형 있고 보편적인 방송서비스를 통해 수신료를 납부하는 국민에 대한 공적 책임을 수행한다.”
KBS가 밝힌 수신료 징수의 변이다. 수신료가 전기요금 고지서에 합산 청구되기 시작된 것은 1994년 10월 1일부터다. 그 전엔 KBS가 직접 걷었다. 합산 징수는 수신료 징수율이 떨어지자 찾아낸 ‘묘수’였다.
이 방식은 처음부터 반발에 부딪혔다. “수신료 납부를 거부하면 전기가 끊기는지” 문의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KBS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안정적 재원 마련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이후 2006년엔 한 시민단체가 수신료 강제징수는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지만, 결국 각하됐다.
손쉬운 징수는 KBS의 축복이자 저주다. 1981년 정해진 수신료 월 2500원은 당시 한 달치 일간지 구독료에 준해 결정됐다. 신문 구독료가 월 2만원으로 오르는 동안 수신료는 한 번도 인상되지 않았다. 강제 징수라는 불만이 있는 만큼 인상 명분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묶어 두는 나라는 흔치 않다. 그리스·파키스탄·튀르키에·이탈리아 등이 이 방식을 따른다. 공영방송 모델을 만든 영국도 수신료(TV Licence)는 따로 징수한다. 연간 159파운드(약 25만원)로 연 3만원인 한국보다 한참 비싼 것 같지만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수신료엔 BBC를 포함, 모든 지상파 채널의 ‘다시 보기 서비스’ 등이 포함돼 있다. 스마트TV나 PC로 이들이 만든 콘텐트를 보더라도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수신료를 내도 KBS 콘텐트를 다시 보려면 추가 비용이 든다. 지상파 3사가 합작으로 만든 OTT 웨이브의 최저 요금제(7900원)를 택해 본다고 하면 연간 최소 12만4800원이 든다. 게다가 KBS 2TV는 광고도 한다. 가성비가 좋다고 하기 어렵다.
OTT 전성시대에도 공영방송 모델의 장점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KBS의 대응을 보면 그 존재 이유에 대한 철학이 완전히 증발한 것 같다. 지금은 수신료를 걷는 방식으로 싸우기보다 지갑을 열 공영방송의 주인인 시청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설득해야 할 시간이다.
전영선 K엔터팀장
06.13 바가지 요금
15년 전쯤 일이다. 지방에 사는 친구가 서울로 왔다. 서울역에 마중을 갔고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충정로. 걸어도 되는 거리지만 짐이 있어 택시를 선택했다. 친구와 열심히 사투리로 수다를 떠는데 아차, 택시가 가는 방향이 이상했다.
충정로로 꺾지 않고 시청을 지나고 있었다. 충정로는 저 뒤편인데 택시는 앞으로 가기만 했다. 교통 체증도 심했다. 떡하니 서 있는 광화문을 마주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충정로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려는 듯 안국동으로 향하는 택시기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너무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회사가 근처라 밥 먹듯 다니는 거리였다. 사투리를 쓰고 짐이 있으니 서울 초행길이라 여겼나 보다. 택시기사와 실랑이하며 겨우 충정로에 도착했다. 걸어도 20분이 안 걸릴 곳을 1시간 돌아내렸다.
턱없이 비싼 값을 뒤집어씌운다는 뜻으로 ‘바가지’란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즈음이다. 그때도 서울역은 바가지의 온상이었다. 택시만이 아니었다. 냉차를 비싼 가격에 강매하는 서울역전 다방이 많았고, 10배 넘는 가격에 화를 낸 시골 손님에게 구두닦이가 칼부림을 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도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최단 경로가 실시간으로 뜬다. 요금을 미리 확인해 택시를 부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제 가격이 맞는지 클릭 몇 번이면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지난 4일 한 방송에서 지방 시장 상인이 출연진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옛날과자를 파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갔다. 관할 군청에서 하루 만에 사과문을 올릴 만큼 역풍이 셌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건 그 상인 같다. 전국에서 팔리고 있는 옛날과자 가격을 온라인에서 100g 단위로 비교할 수 있는 시절이다.
바닥 경기가 여전히 차다. 요즘 소비자는 짠물 소비에 진심이다. 일본과 비슷한 장기 불황에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도 잡힌다. 일본 요식업계의 전설, ‘장사의 신’으로 통하는 우노 다카시는 “손님이 횡재했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코로나 때 어려웠다는 이유로 한탕을 노리는 상인이 있다면 그 욕심 내려놔야겠다. 옛날과자의 교훈에서 알 수 있듯 세상이 바뀌었다. 서울역이 예전 그 서울역이 아니듯 말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6.14 제약·바이오 사기꾼
의학 세상은 넓고도 깊지만 크게 진단과 치료 둘로 나뉜다. 언뜻 치료가 주인공처럼 보여도 정확한 진단 없이는 좋은 치료도 없다. 그런데 진단이란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경험 많은 의사가 딱 알아봐 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드물다. 조금만 애매해도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수많은 검사가 동원된다. 좀 더 쉽고, 간단한 진단 기술이 의료계의 숙원인 이유다.
피 몇 방울로 250개 질병을 진단한다는 한 스타트업의 등장은 그래서 화젯거리였다. 엘리자베스 홈스가 창업한 테라노스다. 홈스가 2012년 이런 주장을 꺼냈을 때 많은 이가 의문을 표했다. 다수의 병을 진단하려면 혈액량 역시 많아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었다. 혈액 채취 과정에서의 오염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그러니까 신기술 아니냐”며 홈스에게 힘을 실어줬다. 명문대 출신, 탁월한 언변,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하는 터틀넥 패션도 환상을 더했다. 믿음이 생기니 돈이 몰렸다. 루퍼트 머독 같은 큰손이 거액을 투자했고, 대형 약국 체인 월그린스는 아예 동업자가 됐다. 이내 홈스는 자수성가한 여성 억만장자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를 속인 거짓말은 2015년 한 언론의 탐사보도로 막을 내렸다. 애초에 그런 기술 따윈 없었고, 진실을 감추려는 수많은 조작이 드러났다. 테라노스는 퇴출당했고, 홈스 역시 실리콘밸리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임신 등의 이유로 무려 8년을 버티던 그는 지난달 30일에야 교도소에 수감됐다.
사기에 영역이 따로 있겠느냐마는 바이오 업계엔 유독 이런 일이 잦다. 업의 목적 자체가 기존에 없던 걸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 덕에 혁신적인 신약과 기술이 탄생하지만, 환자의 실낱같은 희망을 짓밟는 일도 적지 않다. 20년 전 한국 사회를 뒤흔든 황우석 사태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제약·바이오를 국가전략기술로 격상하고, 100조원대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반도체를 잇는 대표 산업으로 만든다는 의지다. 고령화는 피할 수 없고, 감염병과 기후변화도 갈수록 예측이 어렵다. 바이오만큼 성장이 확실한 산업도 없으니 방향은 옳다. 과감한 지원과 함께 ‘제2의 홈스’를 걸러낼 장치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6.15 생존본능과 저출산
유전자의 가장 강력한 본능은 생존과 번식이다. 생존 본능은 생명을 위협받는 악조건이나 위협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살아남으려는 본성이다. 생존 본능이 자극되면 주의집중력이 활성화하고 장·단기 기억력이 높아진다. 사람이 평판을 중요시하는 것도 생존 본능의 발로다. 소속된 무리에서 내쫓기지 않아야 생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칭찬보다 비난에, 좋은 뉴스보다 부정적 뉴스에 더 눈길이 가는 것 역시 어느 순간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갈지를 판단하기 위한 생존 본능에 따른 반응이다.
번식 본능은 대를 이어 종족을 유지한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사냥을 함께 하고 적의 위협에 공동 대응할 믿을만한 무리를 구축하려는 행동양식이다. 후손은 가장 믿을만한 자신의 아군이며, 이들이 많을수록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생존력이 강한 집단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진화생물학자들은 번식 본능 역시 생존을 위한 개념이며, 생명체는 다음 세대보다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일단 생존 위협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번식 본능은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한다.
생존 본능이 번식 본능을 압도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홍뇌조라는 새를 예로 들어 ‘영역 확보’ 여부가 번식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홍뇌조는 번식기에 들어서면 영역 다툼을 벌이는데, 승자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한 뒤 번식한다. 반면 영역 차지에 실패한 패자는 번식 경쟁에서 도태된 뒤 굶어 죽는 극단적 모습을 보인다. 비단 홍뇌조뿐 아니라 바다표범이나 레밍도 번식에 앞서 ‘밀도가 낮은 자신만의 공간’을 미리 확보한다.
한국은 합계출산율 0.78의 초저출산 국가다. 인구 절벽, 국가소멸 위기라는 말이 현실적인 경고가 됐다. 일부 설문조사에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로 ‘육아 부담’이나 ‘직장 불안’ 등이 1, 2위로 꼽혔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각종 아동 수당과 경력 단절 해소 방안을 쏟아내는 이유다. 하지만 도킨스의 지적대로라면 집값 상승, 수도권 과밀화 등이 원인일 수 있다. 인구학 권위자인 조영태 서울대 교수도 “저출산의 근본 대책은 지역균형 발전일 수 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6.16(금) 민정수석
다시 등장한 전직 민정수석들의 출마 가능성에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남자로 불린 조국 전 민정수석,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시절 자타공인 ‘왕수석’이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다.
두 사람 모두 과거 정권의 총아(寵兒)로 주목받았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란 자리 자체가 대통령의 칼자루를 모아쥐고 관리하는 역할이다. 조국·우병우는 청와대 근무 시절 ‘실세 중 실세’로 활동했다. 부족할 것 없는 학벌(서울법대)이나 재산 같은 배경도 화제였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 ‘예금 20억 현금 부자 조국’(2017년), ‘393억 부동의 1위 우병우’(2016년) 같은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둘은 권력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비슷하다. 사정(査定)을 좌지우지하던 그들 자신이 피의자·피고인이 됐다. 조 전 수석은 법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입시 비리·사모펀드 범죄 등이 불거져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됐다. 부인(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은 수감 생활을, 딸(조민씨)은 의전원 입학 취소 불복 소송을 하고 있다. 우 전 수석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핵심 인물로 지목돼 1년여 옥살이를 했다. 대법원이 국가정보원을 통해 불법 사찰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를 유죄로 인정했다.
‘조용한 퇴장’ 대신 ‘절치부심 부활’을 꿈꾸는 두 사람이 나란히 총선 출마를 저울질하는 걸 본다. 우 전 수석은 지난 9일 본지 인터뷰에서 “평생 공직에 있었으니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뭘까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조 전 수석은 10일 SNS에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역진과 퇴행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적었다. 경력이나 정국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마도 ‘정치 수사의 부당한 희생양이 됐다’는 억울함 해소가 이들의 진짜 목적 아닐까 싶다. “그 전엔 직권남용죄 처벌례가 거의 없었다”(우병우), “제 가족에게 무간지옥의 시련이 닥쳤다”(조국)며 비운(悲運)을 탓하는게 그 방증이다. 출마야 자유지만, 과거 이들이 휘두른 권력으로 더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정치적 친정 격인 양당이 둘의 귀환에 난처한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나.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6.19(월) 소금 포비아
소금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같다. 생명 유지에 물 만큼 중요한 필수요소라서다. 인류가 소금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한 건 고기 중심의 수렵에서 곡류 중심의 정착으로 생활방식이 바뀌면서다. 고기·우유에 함유된 소금이 곡류·채소엔 없다. 별도로 소금을 섭취해야 했고 가치는 커졌다.
소금은 금보다 귀했다. 로마 시대에는 군인에게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는데 월급을 뜻하는 샐러리(Salary)의 어원이 라틴어로 소금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소금으로 노예를 샀는데 노예의 발 크기만 한 소금 판으로 값을 매겼다.
국내에선 삼국시대 전에 이미 소금을 생산했다. 『삼국사기』엔 고구려 미천왕 때 “왕이 젊었을 때 소금 장사를 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엔 국가가 소금 생산을 장악했고 조선시대엔 아예 전매제도를 시행했다.
소비는 느는데 채취량은 부족하자 조선 세종은 소금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의염색(義鹽色)’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소금 생산에 필요한 시간, 바닷물을 가열할 때 사용하는 철분·토분 같은 성분, 노동력까지 비교·실험했다. 1447년 예조 참의 이선제가 올린 상소엔 “가마솥에서 바닷물을 다려 하루 밤낮을 지내면 하얗게 나오는 것이 동해 소금, 진흙 솥에서 하루에 두 번 다려서 짜게 만든 소금이 서남의 소금입니다. 서남에서는 노역이 조금 헐하면서도 수익은 동해보다 갑절이나 됩니다”는 내용이 담겼다.
코로나 포비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소금 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안감이 ‘소금 사재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달 들어 대형마트 천일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 온라인몰은 6배까지 폭등했다. 가격(도매 기준)도 최근 20여 일간 세 배(천일염 20㎏) 치솟았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정치권은 난장판이다. 야당은 전국을 돌며 ‘핵 오염수’ ‘핵 폐수’ 같은 자극적 발언으로 소금 포비아를 부추기고 있다. 여당은 일본에 시찰단을 보내고 일일 브리핑까지 나섰지만,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소금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백성에게 필요한 소금 생산을 확대한 세종의 민본 정치까지는 아니어도 선동 정치의 화두는 아니라는 말이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6.20 코이의 법칙과 한국의 마돈나
‘팝의 여왕’ 마돈나는 여성 뮤지션들의 ‘워너비’다. 싱어송라이터·프로듀서·배우 등 전방위로 활약해온 1958년생 마돈나는 지난 1일 발매한 신곡 ‘파퓰러(Popular)’로 8년 만에 빌보드 핫100에 들었다. 덕분에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매 10년(decade) 빠짐없이 차트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 반세기 마돈나는 이슈 메이커였다. 1984년 발표한 ‘라이크 어 버진’은 선정적인 가사, 전통적 가족관을 깨뜨리는 내용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뒤, 돈 없던 무명 시절 찍은 누드사진이 공개됐어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늘 금기를 깨는 연출로 충격을 줬다. 1990년에 시작한 월드 투어에서 교황이 콘서트 보이콧을 촉구하기도 했지만 마돈나에게 재갈을 물리지는 못했다. 마돈나는 2016년 빌보드 우먼 인 뮤직 시상식에서 기념비적인 선언을 한다. “나는 창녀나 마녀라 불렸다. 자신을 성적 대상화 해 페미니즘을 퇴보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왜 여성은 섹시하면 안 되나. 나는 억압을 비판한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품위 있는 대정부 질문으로 화제가 된 시각장애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코이(비단잉어)를 작은 어항에서 키우면 10㎝를 넘지 않지만, 강물에선 1m가 넘게 자란다”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가능성과 성장을 가로막는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정부가 강물이 돼달라”고 당부했다. 환경에 따라 성장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시사하며 약자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코이의 법칙’처럼 만약 마돈나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김완선·엄정화·이효리 등 시대를 풍미한 섹시 여가수의 공통된 수식어는 ‘한국의 마돈나’다. 김완선은 ‘댄스’나 ‘섹시’라는 표현도 일반화되지 않았던 1980년대 ‘화려한 율동의 비디오형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15일 방송된 tvN ‘댄스 가수 유랑단’에서 “노출을 하나도 안 했는데 (눈빛이) 야하다고 6개월 출연 정지를 당했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한국이 어항처럼 작았던 시절의 일이다. 물그릇이 바다처럼 커져 ‘한국의 마돈나’들이 마돈나처럼 60대가 되어도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6.21 조선의 세계박람회
188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도 세계박람회를 향한 관심은 커졌다. 조선 정부가 신문물을 소개하고 개화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기관지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영향이 컸다. 한성순보의 1884년 기사를 보면 ‘방물(方物)과 토산(土産)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기이한 것을 구경하여 견문을 넓혀준다’며 해외 박람회 소식을 전했다. 기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 정부도 박람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은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처음으로 공식 참여했다.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임명된 정경원을 비롯해 13명이 파견됐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한 달 하고도 닷새를 더 걸려 시카고에 도착했다. 파견된 13명 중 10명은 국악단원이었다. 개막식 날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한국관을 지나갈 때 아악(雅樂)을 연주할 계획으로 고종이 보낸 것이었다. 이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틀 뒤 다시 한 달 넘는 귀국길에 올랐다. 계속 머물면 숙박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서양에서 최초의 국악 공연은 그렇게 끝났다.
남은 세 명은 무명천과 발, 삼태기, 자개장롱 같은 것을 전시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시카고 박람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리는 박람회였다.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을 떨치고, 자신들의 기술·문화 수준을 뽐내는 자리였다. 미국 백인의 인종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인류학 건물’이라는 전시관도 있었다. 일본은 1000평이 넘는 전시관을 꾸미고 미국 관람객의 관심을 사고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의 경연장에서, 그 힘에 휘둘리는 나라의 전시품은 초라하기만 했다. 당시 에모리대학을 막 졸업한 윤치호는 한국관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일기에 썼다.
윤석열 대통령과 가수 싸이는 2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영어로 프레젠테이션(PT)를 했다. 글로벌 기업 총수들이 동행했고, 현대·기아의 전기차가 파리를 돌며 홍보를 한다. 영어를 못해 ‘Korea, Corea 둘 다 틀리지 않지만 Korea로 써주기 바란다’ 등을 글로 써 전시관에 붙여놨던 시카고 박람회 파견단은 130년 후 한국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6.22 유니버시아드
유니버시아드(Universiad)는 전 세계 대학생이 참여하는 종합 스포츠 이벤트다.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주관한다. 지난 1923년 프랑스 파리에서 첫 대회가 열렸으니 올해로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선 세 차례 열렸다. 지난 1997년 무주·전주가 겨울대회를 치렀다. 2003년과 2015년에는 각각 대구와 광주가 여름대회를 개최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매머드급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치를 여력이 안 되는 지자체에 유니버시아드는 꽤 매력적인 국제 대회다. 전 세계 150개국 1만5000여 명의 참가 인원(선수단, 임원진, 미디어 포함)과 교류하며 국제무대에 지역을 알릴 수 있다. 수천억원 대 정부 지원금을 활용해 지역 내 스포츠 인프라를 국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이기도 하다. 대구와 광주는 유니버시아드 관련 시설로 각각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대구)와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광주)도 치렀다.
오는 2027년엔 충청권 4개 시도(대전·세종·충남·충북)가 네 번째 유니버시아드를 치를 예정이다. 그런데 이 대회 준비 과정이 유난히 험난하다. 조직위 구성 단계부터 삐걱댄다. 사무총장직 활용 방안을 놓고 대한체육회와 충청권 지자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체육회는 충청권 지자체 주도로 선임한 사무총장에 대해 “사전 협의 없는 인사는 무효”라며 발끈하고 있다. 충청권 지자체들은 “선임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맞선다.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대회 준비 실무를 담당할 조직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중재에 나선 문화체육관광부도 난감한 표정이다.
사무총장은 조직위 살림을 총괄하는 자리다. 체육회와 지자체의 대립과 관련해 대회 준비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다툼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양측이 똑같이 “대회의 성공 개최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 주장하는데, 정작 실질적 고객이자 소비자인 선수와 팬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원만한 해결을 위해 국무조정실까지 나선 상황이지만 궁극적으로 이번 논란은 당사자인 체육회와 충청권 지자체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한다. 활기 넘쳐야 할 젊은이들의 축제가 어른들이 주도하는 인사 논란에 출발부터 삐걱대는 모습은 보기 불편하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6.23(금) K정치어록
3김 시대 주역들은 오래 기억에 남는 어록을 남겼다. 목포상고 졸업 후 23세에 배 한 척만으로 사업에 뛰어든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서생적(書生的)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꼽았다. DJ가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부터 자주 했던 말이다. 현실에 맞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74년 10월 유신정권 직후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 탄압에도 반독재 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은 승부사적 기질이다. 헌정사상 26세 최연소 나이로 국회에 입성한 YS는 현역 의원으로선 유일하게 제명당한 기록도 갖고 있다.
‘영원한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사자성어를 즐겨 썼는데, 대선이 치러진 1997년엔 신년 휘호로 ‘줄탁동기(啐啄同機)’를 내걸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선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해 대선에서 정권교체의 밑거름이 된 DJP연합(야권단일화)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바둑용어를 끌어들여 YS·DJ·JP를 ‘정치 9단’ 경지로 올려놓은 건 명대변인으로 이름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1988년 13대 국회부터 내리 6선을 하면서 자신 또한 정치 9단으로 불렸던 그는 4년 3개월간 집권당 대변인을 지내면서 숱한 조어를 만들어냈다. 요즘도 회자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총체적 난국’도 그가 만든 말이다. 남다른 정치적 감각과 순발력을 갖춘 명대변인 덕분에 정치판을 관전하는 재미 또한 있었다.
하지만 선 굵은 정치인이 사라지고 대변인도 남발되면서 오늘날의 정치는 여야 당대표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정부를 가리켜 ‘압구정(압수수색·구속기소·정쟁) 정권’이라고 하자,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돈 남 말(사법 리스크·돈 봉투 비리·남 탓 전문·말로만 특권 포기) 정당대표’라고 받아쳤다. 상대의 정곡을 찌르기보다 비난하는 데 남다른 ‘말장난’ 실력을 과시했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려 ‘공격 앞으로’만 질러대는 2023년 6월의 여의도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6.26(월) 전업자녀
‘취안즈얼뉘(全職兒女)’, 의역하면 ‘전업자녀’라는 뜻의 중국 신조어다. 전업주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가정이 잘 굴러가도록 살림을 도맡아 한다. 요리와 청소는 기본, 대리기사, 여행 계획 짜기, 외식 참여 등도 이들의 주요 업무다.
최악의 청년 실업률(5월 기준 20.8%)을 겪고 있는 중국의 소셜미디어에서 시작된 유행어지만,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저성장 사회에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자녀의 등장은 이제 낯설지 않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느라 많은 청년이 장기간 진공 상태로 보내는 한국에서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전업자녀가 되려면 우선 경제력이 있는 부모의 그늘이 필요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외신이 소개한 사례에서 전업 자녀가 매달 받는 돈은 4000~5500위안(73만~100만원) 정도다.
액수만 보면 그리 많진 않다. 하지만 부모와 함께 살면서 숙식이 해결되는 장점이 있다. 또 ‘96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팍팍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한다는 면에서 놀면서 부모의 노후 자산을 축내는 ‘캥거루족’ ‘부메랑 세대’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가족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효도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게 이상하다는 지적도 있다. 부모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을 키웠을 테니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현실을 보면 이런 계약 관계가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부모와 자녀의 교류가 점점 뜸해지는 경우를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인들 사이에서 “효도 받으려면 끝까지 상속하지 말라”는 말은 농담이 아닌 상식으로 통하는 요즘이 아닌가.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물려줄 게 있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다. 한국 65세 노인 인구 중 소득이 중위소득의 50% 이하(상대빈곤선)인 비율이 37.6%(2021년)에 달한다. 노인 10명 중 4명 정도가 가난한 말년을 보낸다는 뜻이다. 노인자살률(인구 10만 명당 46.6명, 2019년)과 함께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월급을 주면서 전업 아들, 전업 딸을 둘 수 있다면 그래도 성공한 노년이 아닐까.
전영선 K엔터팀장
06.27 과거와 입시제도
과거시험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나. 너른 궁궐 돌마당(조정)에 한 명씩 얌전히 줄 맞춰 앉아 정성스레 답지를 써내려가는 유생들 모습이 보통 생각날 거다. 사극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다.
현실은 물론 달랐다. ‘난장판’이란 단어 자체가 과거시험장 모습에서 유래했으니 말 다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린 ‘봄날 새벽의 과거장(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커다란 양산이 여기저기 있고, 그 아래 여러 명이 한 팀으로 뭉쳐 답안지 작성에 여념이 없다. 응시자는 물론 글씨를 잘 쓰는 사수(寫手), 문장을 잘 짓는 거벽(巨擘), 자리와 물품을 지키는 수종(隨從) 등이 얽혀있다. 과거장 자체가 부정의 현장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지금의 수학능력시험, 입사시험, 각종 고시를 합쳐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구 600만~700만 명 시절인데 과거 응시자가 10만 명이 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 해 최종 합격자가 적게는 40~50명에 그쳤다. 양반 입장에선 관직 말고는 마땅한 직장이 없으니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뚫어야 할 좁은 관문이었다.
그때도 선행학습이 있었고 사교육도 성행했다. 유학 서적을 꼼꼼히 익히기보다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골라 외우는 게 당연했다. 기출문제를 모아 놓은 과시, 모범답안을 정리한 초집,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의 답지 모음인 선려 등이 비밀리에 돌았다. 아예 담당 관리를 매수해 문제를 미리 빼내는 혁제란 부정행위도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는 ‘과거론’에서 과거제도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이렇게 짚었다. “모든 길을 다 막아놓고 오직 문 하나만 열어놨다. 한순간의 잘잘못으로 평생의 진퇴를 결정짓는다. 물이나 불 속에서 시험을 본다고 해도 대부분 그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나 지금의 입시 구도나 다를 게 없다.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않는 ‘킬러 문항’을 수능에서 빼라는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이후 안 그래도 아수라장인 입시판이 더 시끄러워졌다. 고작 문제 몇 개 바꾼다고 달라질 난장판이 아니다. 입시 성적 한방으로 인생 경로가 판가름 나는 한국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6.28 라면값
보글보글 끓여 한 젓가락 뜬다. ‘후후’ 불어도 뜨겁지만 참고 먹어야 제맛이다. 국물에 김치 한 조각까지 얹어 먹으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다른 음식과의 궁합도 좋다. 찌개나 볶음 어디든 넣기만 하면 색다른 두 번째 요리가 탄생한다. 단돈 1000원이면 충분하니 이만한 가성비가 없다.
이탈리아 파스타, 베트남 쌀국수처럼 한국에도 냉면과 막국수가 있다. 그래도 라면을 이길 순 없다.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77개로 세계 2위다. 라면 사랑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윗세대는 어려웠던 시절 끼니를 대신했던 습관 때문에 먹고, 젊은 세대는 어떻게 하면 더 맛있을까 연구도 한다. 라면의 라인업이 이례적으로 다양해진 배경이다.
라면은 이제 단순한 ‘로컬 푸드’가 아니다. 지난해 사상 처음 수출 1조원을 넘어섰다. 현지 생산도 급증했다. 농심의 미국 공장 생산액은 2년 새 41.6%나 늘었다. 상승세는 K콘텐트의 성공 덕이다. 어지간한 한국 드라마나 예능에선 라면 먹는 모습이 빠지지 않는다. 그걸 전 세계가 함께 보는 시대가 왔으니 몸값이 뛰는 게 당연하다. 영화 ‘기생충’ 속 짜파구리, 매운맛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점령한 불닭볶음면이 대표적이다. 최근 해외에선 ‘신라면은 있는데 삼양라면은 왜 없느냐’ ‘유재석이 광고하는 배홍동은 어디 파느냐’ 등의 문의가 많아졌다고 한다. 소비자층이 두꺼워진다는 신호다.
국내에선 다른 이유로 시끄럽다. “밀 가격이 내린 만큼 라면값도 내려야 한다. 소비자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는 경제부총리의 발언 때문이다. 원자잿값이 뛸 때 득달같이 오르는 가격이, 내릴 땐 왜 그대로인지 분노했던 걸 떠올리면 공감이 간다. 물가 안정이 중요한 시점인 것도 맞다. 과도한 시장 개입이란 반론 역시 일리가 있다. 해외 소비자에겐 “K푸드를 더 사랑해 달라”(윤석열 대통령)고 세일즈하면서 국내 소비자에겐 라면 회사와 맞서 싸우라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측면도 있다.
예상대로 업계가 백기를 들었다. 국내 1위 농심이 가장 먼저 가격 인하를 발표했다. 봉지당 50원을 낮춘 게 물가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하겠다던 지난 정부와 대체 무엇이 다른지 의문은 남는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6.29 ‘백조의 호수’ 모멘트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대표작이다. 희고 나풀거리는 튀튀 스커트, 우아한 헤어 밴드와 토슈즈 등으로 꾸민 오데트 공주의 청순하고 가냘픈 모습은 ‘발레리나의 전형’으로 꼽힌다. 사악한 저주에 걸려 낮엔 백조, 밤엔 인간으로 살아가는 오데트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맹세를 받는 것. 어느 날 지크프리트 왕자가 백조 사냥에 나섰다 사람으로 변한 오데트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다음날 무도회장에서 청혼하기로 약속한 왕자는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작품의 특징은 여러 버전의 결말이다. 초판에선 오데트와 왕자가 함께 죽음을 택한 뒤 저승에서 재결합한다. 연출자에 따라 오데트와 왕자가 악당을 물리치는 해피엔딩, 왕자의 눈앞에서 오데트가 악당에게 잡혀가는 새드엔딩 등 다양하게 변주됐다. 아예 근육질 남자 무용수를 백조로 등장시키거나, 오데트를 환경운동가로 각색한 작품도 찬사받았다.
러시아에선 ‘백조의 호수’가 특별한 시그널로도 쓰인다.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주네프가 사망하자 국영TV에선 부고 대신 일제히 ‘백조의 호수’ 발레 장면을 송출했다. 84년 유리 안드로포프, 85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사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91년 8월 고르바초프 정권 때 쿠데타가 일어나자 TV에선 또 ‘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왔다. 러시아인에게 이 작품은 최고 지도자의 서거·실각 등 정치적 대격변을 뜻한다.
최근엔 ‘푸틴의 죽음’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개전 직후인 지난해 3월, 러시아 독립방송국 도즈디TV는 정부 탄압에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직원들은 뉴스룸에 모여 “반전”을 외친 뒤 마지막으로 ‘백조의 호수’를 내보냈다. 러시아 독립신문 노바야 가제타는 1면에 ‘버섯구름 앞에 춤추는 4명의 발레리나’ 이미지를 실었다. 우크라이나 폐허 속 발레하는 소녀 벽화도 같은 의미다.
24일(현지시간) 바그너그룹 수장 프리고진의 반란에 서방 언론은 “드디어 푸틴의 ‘백조의 호수’ 모멘트가 도래한 것이냐”라고 전했다. 민간 군사전문가 집단 지오컨펌드는 “러시아TV의 ‘백조의 호수’ 방영은 아직이냐”며 성화였다. 러시아 국영TV가 과연 어떤 결말의 ‘백조의 호수’ 영상을 준비해뒀을지 궁금해진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6.30(금) 여성의 ‘인지노동’
얼마 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는 심리학 용어가 예능 프로에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돈에 인색한 구두쇠처럼, 현대인이 ‘생각’을 아끼며 뇌의 인지 기능에 에너지를 적게 쓰고 산다는 개념이다. 1984년 심리학자 수잔 피스크·셸리 테일러 두 교수가 발표했다. 고정관념·편견 등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인간 비이성성의 원인을 탐구한 결과였다.
뇌과학 전문가인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우리 몸에서 제일 많은 에너지(전체의 23%)를 쓰는 기관이 뇌”라며 “최소 에너지로 생존하기 위해 인지적 에너지를 아껴 쓰는 태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제대로 판단하려면 정보 탐색·수집·추론·결정 등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뇌가 ‘대충 생각하고 빨리 단정 짓는’ 습성을 자연스레 프로그래밍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머리 쓰기를 귀찮아하는 시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혹독한 ‘인지노동(Cognitive labor)’에 시달린다는 주장이 최근 나왔다. 앨리슨 다밍거 위스콘신대 교수가 2019년 발표한 ‘인지적 차원에서 본 가내 노동(The Cognitive Dimension of Household Labor)’ 논문이다. 다밍거 교수는 “가사·육아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큰 정신적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며 겉보기에 집안일의 산술적 분담이 잘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전체를 파악·관리하는 총사령관 역할을 여성이 도맡아 두뇌 피로의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가정을 경영하고 유지하는 데는 예측(anticipate)-규정(identify)-결정(decide)-관찰(monitor) 4단계의 인지 활동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일만 해도 주변 환경을 살피고(예측), 사교육 문제를 꺼내고(규정), 어느 학원에 다닐지 정하고(결정), 지속해서 확인(관찰)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리·청소 등 집안일도 마찬가지인데 35쌍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예측과 관찰 두 영역에서 특히 여성의 부담 가중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 학설에 동의하든 안 하든, 선입견과 비방이 만연하고 저출산·비혼이 느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다 잘 이해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덜 생각하고, 덜 책임져서 잘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도.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