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03/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3.04.09
[21] 대규모 운하 건설하다
◇1609년 유대 자본으로 대규모 운하 건설이 시작되다

▲암스테르담 운하.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에게 1609년은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그들은 교역이 발달하여 기존 운하와 항구의 기능이 한계치에 다다르자 1609년 ‘도시확장계획’을 결정했다. 이후 암스테르담 서남쪽 중심지에는 3개의 새로운 운하들 ‘헤렌그라흐트(Herengracht, 귀족의 운하), 카이저르그라흐르트(Keizersgracht, 황제의 운하), 프린센그라흐트(Prinsengracht, 왕자의 운하)’가 건설되었다. 이 운하들은 도시 주위를 동심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서쪽에는 ‘요르단’(Jordaan)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생겨났다. 요르단 지역 도로는 새로운 3개의 운하들과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있다. 1620년대 초에 운하가 만들어졌고, 바둑판 모양의 블록들도 이때 만들어졌다. 도시확장계획은 2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새로운 동심원의 운하를 따라 위치한 반면에 운하의 물을 오염시키는 수공업자들은 외곽으로 쫓겨났다. 부유한 상인들을 위한 신도시가 건설된 셈이었다. 오늘날의 암스테르담은 이때 만들어졌다. 총길이 100㎞가 넘는 암스테르담 운하는 90개 섬과 1500여 개의 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닷길을 아예 내륙 깊숙이 연결키로 하고 몇 갈래의 대규모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그들은 거의 자연적인 기존의 수운 시스템에 주요 해안 도시들을 연계한 견인통로식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는 거대 자본이 필요했다. 당시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으로 정정이 불안했음에도 이를 유대 자본이 4~5%의 저리로 지원했다. 1610년부터 1640년 사이에 1천만 길더가 배수 프로젝트에 투자되었다. 유대인들이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자금 645만 길더보다도 훨씬 더 큰돈이었다. 1618~1648년 스페인과의 30년 전쟁 중에도 공사는 강행되었다. (책 ‘부의 탄생’ 290쪽, 윌리엄 번스타인)
◇암스테르담 인구가 5만에서 20만 명으로 급격히 불어나다
네덜란드에 수로와 운하들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깔렸다. 물길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육상 운송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수로와 운하를 이용한 수운은 육로 운송에 비해 값이 쌀뿐 아니라 운반 기간도 단축했다. 처음에 네덜란드 운하 수송은 통행세를 징수했는데 1631년 주요 도시들이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통행세를 폐지해 운하 운송 붐이 일어나 네덜란드 경제가 급격히 발전했다. 암스테르담 인구는 1610년 5만 명에서 운하가 거의 완성된 1650년에는 20만 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후에도 광범위한 운하망이 건설되어 1665년에 거의 640㎞에 달하는 견인통로 식 운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당시 유럽에서 제일 발달한 수상 교통망을 갖게 되어 네덜란드가 유럽의 새로운 상품집산지로서의 여건을 갖추었다. 현재 총연장 6800㎞의 운하를 가진 네덜란드는 지금의 중요 운하 대부분이 그때 뼈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자부심이 ‘지구는 신이 창조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창조했다’라는 유명한 말에 잘 담겨져 있다.
그 뒤 운하를 따라 대형선박의 운송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대형 물류창고를 이용해 발트해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을 모아 독점 수출했다. 이어 설탕, 목재, 담배,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넓혀 나갔다. 이후에도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교역을 점차 증대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는 내륙으로 통하는 수로의 길목과 북해로 통하는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중계무역과 더불어 운송업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토탄 채취하다 만들어져
이러한 대규모 운하 건설 이전의 수로와 운하 역시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여기에도 생존을 위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물과 싸운 역사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 이상이 해수면과 강의 수위보다 낮다. 네덜란드(Nether+Land)라는 이름 자체도 ‘낮은 땅’ 곧 바다보다 낮은 저지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네덜란드 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이 지역을 보통 저지대(Low Country)라 불렀다. 그러니 실제로 저지대나 네덜란드는 의미상 같은 말이다.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는 항상 물과 싸워야 했다.
왜 사람들이 이런 힘든 땅에 구태여 살면서 물과의 억척스러운 싸움을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토탄이었다. 옛날에 연료는 무척 귀한 존재였다. 음식을 요리하고 집안 보온을 통해 겨울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나무와 석탄 그리고 토탄이 있어서 가능했다. 네덜란드의 해수면보다 낮은 땅들은 대부분 토탄을 채취하다 만들어진 땅이다. 옛날부터 네덜란드인들은 늪지 바닥에서 연료로 이용될 토탄을 얻기 위해 늪지의 땅을 깊이 파냈다. 이때 얻어진 토사로 저지대 늪지를 매립해 농토를 얻었다. 또 이때 땅을 제방으로 둘러싼 후 고인 물을 빼기 위해 배수 시설용으로 만든 운하는 이후 시민과 상인의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수로와 운하가 만들어졌다.
◇갑문을 탄생시켜 견인통로식 운하 건설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운하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뱃길로는 바다와 내륙 운하를 연결하기 힘든 곳도 많았다. 네덜란드 면적의 13%는 해수면과 1m 이상 차이가 난다. 네덜란드는 이런 핸디캡을 이겨 낼 기술을 개발했다. 1373년경 네덜란드인은 운하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장치인 ‘갑문’을 탄생시켰다. 갑문을 닫고 갑실의 물을 채우거나 빼면 그 안에 있는 배는 올라가거나 내려가 수면의 높이가 서로 다른 두 수역 사이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이전에는 높이나 기울기가 서로 달라 운하 건설이 어려웠거나 불가능했던 지형에도 갑문을 설치하여 ‘견인통로식’ 운하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견인통로식’이란 배를 갑실 통로에 가두고 양옆에서 줄을 매달아 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파나마 운하. /위키피디아
이 기술은 훗날 파나마 운하 건설에 사용되었다. 놀랍게도 해수면은 지구 전체가 일정한 것은 아니다. 파나마 운하의 경우,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약 30㎝ 높다. 게다가 산 중턱의 호수를 관통해야 했다. 그래서 파나마 운하도 일부 구간은 견인통로식이다. 배가 갑실에 들어가면 수위를 맞춘 후 양옆에서 대형 크레인이 선박을 끌어 준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임에도 수로와 운하들이 서로 연결되어 그물처럼 촘촘하게 깔렸다.
◇네덜란드, 생존과 번영을 위해 물과 싸우다
토탄을 캐내고 물을 빼내면 문제도 있었다. 땅이 가라앉아 해수면 보다 낮은 저지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물도 더 퍼내야 했다.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과 끝없는 싸움을 하면서 자연스레 힘을 합치는 과정에서 ‘물관리위원회’와 같은 지역 공동체 조직들이 생겨나 공동체가 개간한 땅은 소속 개인들에게 분배되어 자기 소유의 땅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주나 주교의 봉건제 사회 곧 수직적 사회 구조가 아닌 수평적 사회의 자유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문제는 900년대부터 진흙과 토탄으로 구성된 저지대의 지반이 꾸준히 내려앉아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 1500년대부터는 아예 육지가 해수면보다 낮아졌다. 또한 라인강 등 3개의 강과 하천의 하류에 있다 보니 육지가 하천 수위보다도 낮아져 계속 제방의 높이를 올려 쌓아야 했다. 이러니 저지대 사람들은 홍수에 대한 우려를 항상 안고 살았다. 이렇게 홍수와 북해의 폭풍과 해수의 범람이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해, 살기 위해서는 물을 밖으로 밀어내고 넘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풍차. /위키피디아
그러니 수시로 땅에 스며든 물을 빼내야 하는데 그 장치가 바로 풍차였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풍차를 돌려 그 힘으로 물을 퍼내는 일종의 펌프 장치다. 원래 풍차는 처음에 방앗간에서 밀을 빻는 데 쓰였지만 1414년부터는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로 사용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유럽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증에서도 곡물 가격이 가장 많이 올랐다. 곡물 가격이 오르다 보니 곡물을 생산하는 농지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농지를 개간하는 토목 기술이 발전했다. 바닷가에 둑을 쌓아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다음 풍차를 이용해 둑 안의 물을 빼내 땅을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농부들은 ‘바우벤크라이어’라는 새로운 풍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풍차는 구조 전체가 아니라 꼭대기 부분만 돌아도 작동했다. 게다가 1624년에는 직렬로 작동하는 풍차가 개발되어 이전에는 30㎝ 깊이까지의 물만 퍼내던 풍차가 4.5m 깊이까지의 물을 퍼낼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풍차 이용의 절정기에 총 9천 대의 풍차가 있었다. 그리고 풍차의 동력을 여러모로 활용했다. 벨트를 연결해 방앗간이나 철공소에 필요한 동력뿐 아니라 기계톱의 가동이나, 광산에서 광석을 끌어 올리는 데도 사용했다.
이렇듯 네덜란드 사람들은 범람하는 바닷물과 강물을 막기 위해 수문과 제방을 쌓고 풍차를 만들어 물과 싸웠다. 네덜란드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물과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방 쌓는 기술, 갑문 만드는 기술, 운하를 파고 수로를 연결하여 사람과 물건을 운송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2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맨해튼에 식민지를 세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9년 맨해튼을 탐사하다

유대인들이 척박한 북부 저지대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하여 절임청어 산업을 주도한 이래 채 100년도 안되어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암스테르담 은행 등 자본주의 씨앗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던 1609년에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무역을 위해 북극 항로를 개척하려고 노력하던 중 동인도회사의 ‘반달(Half Moon)’ 호를 이끌던 헨리 허드슨 선장에게 북극 항로 탐험 임무를 맡겼다. 그는 1609년 9월 아메리카 동부 연안에서 대구가 많이 잡히는 ‘케이프 콧’(Cape Cod)을 발견하고 그 아래 맨해튼 섬 옆의 서쪽 강이 혹시 북극으로 가는 항로일지 몰라 강을 따라 올버니까지 올라갔다. 맨해튼 서쪽을 끼고 흐르는 허드슨강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퍼(Upper) 뉴욕만이 발견된 것은 1524년이나, 공식적으로 맨해튼 일대를 처음 탐험한 사람은 허드슨이었다.
그가 동인도회사에 보낸 보고서에서 ‘푸른 언덕으로 둘러싸인 훌륭한 항만과 위도상 아열대쯤에 속할 것 같은 이곳에 농경지로 이용될 수 있는 무한한 땅이 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명품 모피의 대명사 비버

▲최고급 모피, 비버. /위키피디아
이듬해 7월 네덜란드로 돌아온 반달 호는 비버 모피 등 아메리카 대륙 특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 그 무렵 비버 모피는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비버는 일찍부터 유럽 사냥꾼의 목표물이 되었다. 비버 가죽은 질기고 따뜻한 솜털이 달려 있어 좋은 모피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비버 가죽 모자는 당시 유럽의 대히트 상품이었다. 거기에다 비버로부터 귀한 해리향도 얻었다. 이는 비버가 봄에 짝짓기할 때 상대를 유인하려고 분비하는 강한 향을 지닌 물질로 고급 향수의 재료나 약재로 쓰였다. 담비가 시베리아 개척의 동인(動因)이었던 것처럼 비버는 서부 개척의 동인이 되었다. 비버에 눈독 들인 네덜란드 상인 중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619년 서인도회사에 독점 면허권을 주다
네덜란드 정부는 허드슨의 보고에 따라 함대를 보내 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탐험했고, 1619년 ‘서인도회사’(The Dutch West India Company)에게 북위 40~ 45도 사이의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에 대한 독점 면허권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에 동인도회사라는 식민회사를 둔 것처럼, 신대륙에는 서인도회사라는 식민기업을 두어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동인도회사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의 대주주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에 본거지를 둔 유대 상인이었다. 그리고 1621년에는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서아프리카를 포함한 서반구에서의 ‘운송과 무역에 관한 권리’ 곧 무역 독점권, 항해, 정복, 상업에 대한 특허를 인정받았다.
◇비버 모피 교역 위에 세워진 뉴암스테르담
그 무렵 맨해튼은 인디언들이 사는 숲으로 덮인 섬이었다. 서인도회사는 이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1625년에는 비버 모피 수집을 위해 ‘가죽거래교역소’를 세우고, 항구 ‘포트 암스테르담(Port Amsterdam)’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때를 뉴욕이 탄생한 연도로 본다.

▲맨해튼 구입 장면을 기록한 그림. /위키피디아
이듬해 서인도회사 총독 피터 미누이트는 인디언들로부터 조가비 구슬, 장식용 유리구슬, 옷감, 주전자, 단검 등 불과 60길더 곧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아예 맨해튼을 사 버렸다. 옮겨 다니며 사는 인디언들 생각에는 땅이란 누구나 자유로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소유권을 갖겠다는 백인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러 유용한 물건을 주니 그냥 좋았다. 이 역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장소가 맨해튼 남단의 배터리 파크이다.
이후 서인도회사의 무역은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네덜란드에서 실려 온 모직 천을 맨해튼에 사는 인디언들의 화폐인 조가비 구슬과 바꾸었다. 이 구슬을 가지고 허드슨강을 거슬러 올라가 포트 오렌지 지역 인디언들의 비버 가죽과 교환했다. 1626년 경우, 청색과 회색 모직 천 200매를 조가비 구슬로 바꿔 포트 오렌지로 올려보내면 비버 모피 1만 장과 바꿀 수 있었다.
가죽거래소가 세워지고 3년 뒤 1628년 거래소 성채 안 인구는 고작 270명이었다. 하지만 1624년부터 1632년까지 초기 8년 동안 서인도회사가 네덜란드로 선적한 목록을 보면, 비버 가죽은 첫해 1,500장에서 1만 5천장으로 열 배나 늘었다. 시가총액으로도 2만 8천 길드에서 14만 3천 길드로 거의 매년 64%씩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의 유래

▲1660년 로어 맨해튼 초기 모습.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은 고향의 수도를 기리며 이 섬을 네덜란드풍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배터리 파크를 중심으로 한 맨해튼 남단은 지금도 풍차나 벽돌로 만든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네덜란드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배터리 파크를 중심으로 한 맨해튼 남단은 지금도 풍차나 벽돌로 만든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네덜란드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 섬 남단에 위치한 그들의 식민지를 계획도시로 건설했다. 먼저 접안 시설을 갖춘 항구를 건설했으며 암스테르담처럼 항구와 연결된 운하를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 침략을 막기 위해 북쪽과 서쪽에 성벽을 쌓았으며 남쪽 끝에 해안방어를 위해 거대한 규모의 대포 포대(砲臺)를 구축했다. 지금의 ‘배터리 파크’ 명칭은 이때 만든 포대(Battery)에서 유래한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디언들이 사용했던 넓은(Broad) 도로 브로드웨이는 그대로 썼다. 한편 인디언과의 싸움도 치열했다. 교회나 도로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인디언 습격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 목책(wall)을 쌓았다. 1653년에는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맨해튼 남단에도 나무 목책을 세웠고, 1673년에는 인디언들의 습격이 계속되자 허드슨강에서 이스트까지 나무 목책으로 울타리를 쳐서 방어막을 넓혔다. 그 뒤 나무 목책이 세워진 거리와 인접한 거리를 ‘월스트리트’(Wall Street)라 불렀다.
◇조가비 구슬 화폐
당시 맨해튼의 인디언들은 비버 모피 대금을 칼, 도끼, 낚시바늘, 솥, 술, 총과 바꾸거나, 금은이 아닌 자신들 세계의 화폐인 조가비로 만든 구슬로 받았다. 금과 은은 유럽 사람들 눈에나 귀금속으로 보였을 뿐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금속조각이었다. 조가비 구슬은 동부의 강과 호수에서 자생하던 조가비 조개로 만들었다. 그 세공은 맨해튼 인근에 있는 지금의 뉴저지,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조개껍질을 여러 조각으로 부수어 그 조각들을 손으로 비비면 나중에는 매끈하고 윤이 났다. 특히 검은색을 띠는 구슬이 귀해 더 가치가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구슬은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왐품. /위키피디아
부족에 따라 구슬은 추장의 위세품이거나 신부의 결혼예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더 특수한 용도가 있었다. 바로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기록의 매체로 쓰였다. 낱개로는 의미가 없고, 끈에 특정 패턴대로 꿰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이렇게 끈에 꿴 것을 왐품(wampum)이라 한다. 보통 360알을 꿰어 만든 것이 1왐품이다. 특정 재질과 색상의 염주를 특정 패턴으로 연결하면, 왐품은 스토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부족 간의 동맹 기록이라든지, 전쟁의 구전역사를 왐품에 담았다. 이후 부족장이 왐품의 순서나 표면의 특정 흔적 등을 통해 기록들을 재생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왐품을 매개체로 한 인디언들과 미국 정부 사이의 조약이나 계약이 법적 효력을 발휘한 판례가 있다. 지금도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보면 ‘왐품’이 진열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 인디언들은 비버 가죽을 팔아 총과 화약을 사들였다. /위키피디아
변변한 자체 화폐가 없었던 식민지에서 조가비 구슬 화폐는 독립전쟁 전까지 스페인 은화 등 여러 종류의 주화와 어울려 비교적 오랜 기간 통용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조가비 구슬은 초창기에 강세통화였다. 흑색 구슬 한 줄(왐품)로 비버 가죽 다섯 장을 살 수 있었다. 곧 1626년 교환 비율은 ‘1흑색 왐품 = 2흰색 왐품 = 10길더 = 5비버 가죽’ 정도였다. 나중에는 짝퉁 구슬이 많이 유통되어 가치가 하락했다. 일부 인디언들은 비버 가죽을 팔아 총과 화약을 사들였다. 처음에 이 총은 비버 사냥에 사용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대량의 모피가 수집되었다.
◇북아메리카의 모피 사냥

▲허드슨강 초기 지도, 비버 분포지가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모피 사냥은 백인들이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모피 무역은 인디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역의 대가로 백인들로부터 받은 술과 무기는 생활을 변화시켰다. 인디언들끼리도 모피를 팔아 산 총으로 부족들 간에 모피 쟁탈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유행했던 비버가죽 모자; 장교와 웃는 소녀, 1657년. /위키피디아
모피 무역 덕분에 유럽 상인과 사냥꾼들이 인디언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냥감은 비버였다. 158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비버 가죽 모자가 대유행이었다. 한때 북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번성하던 비버는 극성스러운 사냥으로 1630년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상류사회 사람들은 반드시 비버 가죽 모자를 써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대륙 전체가 비버 가죽 붐이었다. 18세기 말 유럽이 북아메리카에서 수입한 비버 모피는 연평균 26만마리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다.
[23] 사실상의 전쟁기업,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설립 과정, ‘뭉쳐야 산다.’
사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이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서양 진출이 늦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서양 해상권 장악 때문이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이 격파한 이후인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네덜란드 상선들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간의 대서양 해운과 무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20년이 채 되지 않아 네덜란드 상선들은 대서양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북부 저지대 홀란트와 질란트 주의 5개 항구도시 상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금과 상아 그리고 북미에서 모피 수입을 위해 작은 무역 회사들을 설립해 운영했다. 또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들여오던 소금 수입이 막히자 개인 선주들은 소금과 염료를 찾아 남미 해안과 카리브해 섬으로 배를 보내 이를 수입했다.

▲암스테르담 운하에 있는 서인도회사 본부. /위키피디아
이렇게 대서양 무역이 확장됨에 따라, 해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소규모 무역 회사와 개인 선주들은 대서양 항해 중에 만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단의 적대적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어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다. 게다가 상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이윤이 점점 박해졌다. 홀란트 주 정부는 상인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때처럼 경쟁 대신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곧 여러 무역 회사와 개인 선주들을 모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하나로 통폐합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홀란트와 질란트 주 간의 경쟁과 갈등으로 서인도회사 설립 계획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12년 휴전(1609~1621년) 동안 새로운 계획이 세워졌고 오랜 논의와 시행착오 끝에 5개 항구도시의 상인연합(Chamber)들이 이사회를 이끄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대주주가 많은 암스테르담 상인연합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 장치였다. 마침내 1621년 6월 3일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 WIC)가 구성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세계를 분할하여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소유와 지배, 조약협상, 전쟁 수행에 최고권을 행사하는 국가적 권한의 기업이 되었다. 한마디로 무역과 식민지 개척 활동 곧 무역과 무력 침략을 동시에 수행하는 특권회사였다. 26척의 배와 3300명의 선원으로 출범한 서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후 약 100척의 배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많은 무역 거점과 식민지를 대서양 지역에 수립했다.
◇서인도회사가 나포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 수만 545척

▲뉴네덜란드 인장.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먼저 본거지를 넓혔다. 뉴암스테르담을 포함하는 뉴네덜란드는 오늘날의 뉴욕 일부와 코네티컷, 델라웨어, 뉴저지주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커졌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막강한 무력을 갖추어 은을 싣고 가는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는 해적질은 물론 인근 나라들에 대한 침략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상의 전쟁기업이었다. 1621년에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의 휴전이 끝나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을 공격하는 것은 속개된 전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특히 1628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중남미에서 막대한 은을 싣고 가던 스페인 상선을 쿠바 근처에서 나포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1623년에서 1638년 사이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선대(船隊)에 의해 나포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 수가 무려 545척에 달했다.
◇서인도회사, 식민지를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넓혀가다
이 회사는 해상 전투뿐 아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공격했다. 카리브해 앤틸리스제도, 베네수엘라 연안 군도, 수리남, 가이아나를 침략해 무역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황금해안 (현재의 가나)와 앙골라에 무역기지가 세워졌다. 그들은 원주민과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 열대작물 거래에 중점을 두었다. 지금도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해에는 쿠라사오(퀴라소) 등 네덜란드령 섬들이 있다.
서인도회사 설립에는 포르투갈에 살았던 개종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서인도회사와 손잡고 대규모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사탕수수 농장과 원목 벌채사업에 뛰어들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의 이베리아반도 지배 시절 남부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 등 따뜻한 곳에서만 사탕수수가 재배되어 설탕이 아주 귀했다. 17세기 초까지 설탕은 약국에서 취급될 만큼 귀중한 약재이기도 했다. 당시 설탕이 하도 귀해 같은 무게의 금값과 같았다.

▲키가 4미터가 넘게 자라는 사탕수수 농장. /위키피디아
이런 귀한 상품을 유대인들이 놓칠 리 없었다. 포르투갈에 살았던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1625년에 최초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섬에 사탕수수를 가져와 경작에 성공했다. 당시 스페인 왕의 지배 아래 있던 페르남부쿠주는 따뜻한 기후, 풍부한 강우량, 완만한 경사지, 비옥하며 고운 흙 등 사탕수수 재배에 유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탕수수 재배지가 되어 121개의 제당 공장이 세워졌다. 헤시페(레시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활발한 항구가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브라질산 설탕에 매료되었다. 당시 브라질산 설탕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정제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카리브해를 거쳐 남미 공략을 시작했다. 특히 설탕 생산이 활발한 브라질에 눈독을 들였다.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서 생산할 수 있는 상품목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서인도회사가 조속히 스페인 왕으로부터 브라질을 빼앗아야 하는 이유”를 적시했다. 설탕 때문에 전운이 감돌았다.

▲자료=위키피디아
1630년 2월 서인도회사의 깃발을 단 65척의 함대가 브라질 헤시페 앞 바다에 나타났다. 함대들은 짧은 전투 끝에 헤시페를 무역기지로 삼았다. 이후 그들은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을 거래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어찌나 컸던지 헤시페 상업 중심지 거리 이름이 ‘Rua dos Judeus’(유대인의 거리)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동양의 후추 등 향신료 교역은 물론 설탕과 목재 교역에서 유대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들의 활발한 대외교역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세계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 브라질에서 서인도제도로

▲자료=위키피디아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1630년 헤시페에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했다. 헤시페로 건너간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자로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본래의 유대교로 회복하고 시나고그를 세우고 랍비를 초청하여 당당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40년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 주앙 4세가 브라질 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헤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했다. 그러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1500명은 카리브해 서인도제도(West Indies)로 옮겨갔고 일부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삼각무역이 시작되다
이로써 서인도제도에서 유대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 대규모로 시작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잘 자라고 이윤을 꽤 남길 수 있는 산업적 전망이 보이자,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다가 이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실려 가는 설탕과 럼주의 원료인 당밀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유럽에서 홍차와 커피, 초콜릿 음료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설탕 수요도 급증했다. 마침내 유럽 전체가 설탕의 단맛에 빠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주식의 연간 수익은 200~300%까지 치솟았다.
[24] 향신료 전쟁 ①
후추·육두구·정향, 향신료가 바다의 주인을 바꿔버렸다
후추 등 향신료(香辛料, Spice)는 경제사에서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근대의 막을 연 항해 시대와 식민지 획득 경쟁은 바로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 자체가 향신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육류의 맛을 내는데 동양의 향신료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향신료는 전염병 예방과 악취를 없애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인도의 후추, 동인도 제도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 대표적이었다.
◇실크로드가 막히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하다

▲동방무역을 가로막은 오스만제국의 발흥. /위키피디아
그런데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여 유럽과 동방의 무역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유럽에서 후추 등 동방상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생산지 가격의 100배는 보통이었고 육두구(nutmeg)의 경우 600배까지 치솟았다. 동양의 향신료만 얻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중국보다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동방견문록에는 이렇듯 과장되거나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나, 그는 베네치아의 상인답게 향신료의 산지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정확했다. 이렇게 되자 신항로 개척의 필요성은 한층 절실해졌다. 1492년 콜럼버스는 후추와 금을 찾아 인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찾은 곳은 서인도제도와 신대륙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찾은 곳이 인도인줄 알았다. 그래서 원주민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이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이 콜럼버스를 기려 그가 최초로 찾은 섬들을 ‘인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서인도제도라 명명했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항로 발견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렀다. 그가 북극성이 안 보이는 적도 이남을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 랍비이자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만든 위도 계산기 ‘천측력’이 있어 가능했다. 바스쿠 다 가마가 도착한 아프리카 동해안에는 많은 이슬람 상선들이 입항해 있었다. 그곳에서 계절풍을 타고 인도양을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뱃길 안내자 덕분이었다. 이렇게 그는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진짜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경로. /위키피디아
그 무렵의 인도는 유럽보다 훨씬 풍요로운 국가였다. 향신료 이외에도 갖가지 수공업이 발전되어 있었다. 캘리컷의 무명은 고급품이어서 유럽인들이 한눈에 반했다. 이때 유럽인들은 이 직물에 ‘캘리코’(calico)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표백된 상태가 옥처럼 깨끗한 서양 포(布)라 하여 ‘옥양목’(玉洋木)이라 불렀다. 이후 영국이 이 캘리코에 자극받아 면직물 산업부터 시작한 게 산업혁명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일행은 향신료와 캘리코 등 귀한 동양 산물을 가득 싣고 귀국했다. 리스본에 2년여 만에 도착했을 때 처음 170명 가운데 생환자는 겨우 55명뿐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가져온 상품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때 60배 곧 6000%의 이득을 남겼다. 중세 말 지중해 향신료 무역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이윤율 40%에 비하면 놀라운 이윤율이었다.
그 뒤 동방 산물이 이슬람 상인이나 이탈리아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에 들어오면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후추, 인도 정향, 설탕, 무명, 비단, 약초, 생강, 계피, 건포도, 상아, 면화, 곡물, 카페트 등이 거래되었는데 특히 후추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후추는 향신료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치료제나 방부제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 무렵 유럽에서 후추는 지참금, 세금, 집세 등으로 화폐 대신 쓰이기도 했다.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식민지. /위키피디아
이러한 인도항로와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인들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때부터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에 인도 고아(Goa)에 총독을 두고 이곳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1511년 실론과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도 정복했다. 그리고 1515년 페르시아만의 무역 거점도시이자 항구인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로써 본국까지 가지 않고도 여기서 아랍 상인들과 거래하여 선적 상품을 처분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에는 중국에 진출해 마카오를 선점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이 남지나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해서 호감을 가졌다. 마카오는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어 중계무역 기지로는 최적의 입지였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 후추 등 향신료와 비단 등 동방무역을 독점해 거대한 부를 얻었다. 당시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남중국해는 포르투갈의 바다였다.
◇탐험의 시대를 마무리한 마젤란의 세계 일주
그런데 이때 경쟁국이 등장한다. 1519년부터 3년여에 걸쳐 스페인이 지원한 마젤란 함대가 남미 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동남아시아에 갔다가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유럽으로 되돌아오는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엄청나게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 /위키피디아
후추 외에 소중한 향신료는 또 있었다. 바로 육두구와 정향이다. 육두구와 정향은 후추보다 더 귀했다. 육두구 나무는 반다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제도는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2500킬로미터 떨어진 반다해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일곱여 개의 화산섬들이다. 반다제도의 섬들은 작았다. 가장 큰 섬의 길이가 10킬로미터가 되지 않고 작은 섬들의 길이는 겨우 2~3킬로미터이다. 크기는 다 합쳐도 제주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180㎢에 불과했다. 반다제도의 섬들과 비슷한 크기의 섬이 몰루카제도 북쪽에도 있는데 테르나테섬과 티도레섬이다. 이 두 섬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향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수 세기 동안 몰루카제도 주민들은 육두구와 정향을 재배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아랍, 말레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로써 육두구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육두구와 정향은 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데 12단계의 유통경로를 거쳐야 했다. 각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향신료의 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스페인도 향료무역에 눈독을 들였다. 1518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자신의 탐험계획이 조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페인 왕실을 찾아갔다. 그는 서쪽으로 가면 향료제도에 도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해기간도 단축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스페인은 마젤란의 계획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동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가 개척되면 스페인 선박들은 포르투갈 항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경유하는 동쪽 항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칙령을 살펴보자. 아프리카 대륙 가장 서쪽에 있는 카보 베르데 제도 서쪽에서 100리그(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상의 경계선이 있다. 1493년 교황의 칙령에 의해, 이 경계선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이런 모순된 칙령이 나올 수 있던 것은 당시 교황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스페인이 서쪽으로 가서 향신료 제도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스페인은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마젤란은 스페인 왕실에 자신이 서쪽으로 항해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할 지식과 견문을 갖추고 있음을 확신시켰다. 1519년 9월 마젤란은 스페인을 떠나 남서쪽으로 내려가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라플라타 강어귀를 만나자 마젤란은 드디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어귀를 따라 200여 킬로미터를 나아갔을 때 나타난 것은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마젤란의 실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젤란은 실망할 때마다 다음 곶만 돌면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하며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다섯 척의 작은 배와 265명의 선원으로 시작된 항해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의 길이는 더 짧아지고 강풍은 더 세차게 불었다. 갑작스러운 조수로 인한 위험한 해안, 거대한 파도, 끊임없는 우박과 진눈깨비 등 항해의 어려움은 더해만 갔다. 항해 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마침내 발견하고 이를 무사히 통과했다.
항해 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남위 50도에 이르러서도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이 보이지 않자 겨울의 나머지를 그곳에서 보냈다. 다시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은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마침내 발견하고 이를 무사히 통과했다.
1520년 10월, 마젤란 선단의 배 네 척이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지만 보급품이 떨어지자 일부 선원들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향신료 무역이 가져올 부와 영광 때문에 마젤란은 항해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젤란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대한 너비의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1521년 3월 6일 탐험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괌에 상륙하면서 선원들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났다. 10일 뒤 마젤란은 필리핀 제도의 조그마한 섬, 막탄에 상륙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주민들과 충돌로 마젤란이 살해된 것이다.
마젤란 본인은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의 배와 선원들은 정향의 원산지, 테르나테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떠난 지 3년, 18명으로 줄어든 생존 선원들은 마젤란 선단의 마지막 배, 빅토리아호에 26톤의 향신료를 싣고 세비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티모르, 중국, 일본 등지로 세력을 팽창해나갔고,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바다의 주인이 바뀌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가 그간 우습게 보던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패한 것이다. 이로써 바다의 주인이 바뀌었고, 인도항로의 주인공 역시 바뀌었다. 16세기 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고 보면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 초기에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거래했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위주로 교역했다. 이후 유럽의 상권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규모가 영국에 비해 월등하게 컸던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이 활발했다.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 17세기 중엽에는 말레이반도에서 시작해 자바, 수마트라 등 향신료 섬들을 비롯해 대만, 일본과 독점적 무역권을 수중에 넣어 동남아 해상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최초의 주식회사는 한 손에는 무역, 다른 한 손에는 총을 갖고 시작했다.
[25] 향신료 전쟁 ②
황금보다 비쌌던 ‘육두구’의 땅, 야만적 침탈도 서슴지 않았다
◇네덜란드, 향신료 생산지 인도네시아로 직행하다
1588년 무적함대가 격파된 뒤에도 스페인은 신대륙 무역에서는 여전히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향신료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쥐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해 인도네시아 동부의 몰루카스(Moluccas) 섬들이 향신료의 섬들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서양인들에게 알려지자 네덜란드인들은 직접 그 원산지를 찾아 나섰다.

▲동부의 몰루카스(Moluccas) 섬들
네덜란드인들은 1591년 첫 동양 탐험에 이어 1595년 동양으로 함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바로 향신료 무역 중심지로 직행하여 지금의 자카르타에 근거지를 세우고 포르투갈 사람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는 길목의 실론과 케이프타운에 중간 통상거점을 세우고 거대한 아시아 무역망을 발전시켰다.
◇육두구와 정향을 독점 거래하다
그 뒤 이들의 주요 거래 물품은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향신료였다. 당시 후추는 금값이었다. 이런 후추보다 더 비싼 게 육두구였다. 영어 이름인 ‘너트메그’(nutmeg)란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이다. 그 무렵 향신료는 부피가 적고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매우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었다. 정향을 실은 네덜란드의 첫 상선은 무려 2500%의 순익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경쟁이 심한 인도의 후추를 피해 인도네시아 향신료 섬들과 수마트라ㆍ자바를 비롯한 동남아 각지의 지배권 확립하고 육두구와 메시스 그리고 정향 등을 독점 거래했다.

▲육두구.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은 이렇게 향신료의 산출뿐만 아니라 판매까지 일괄하는 독점 체제를 완성하여 동인도에서의 구입 가격과 유럽에서의 판매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생산지 가격은 최저로 억제하고 유럽에서의 판매 가격은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며 독점이윤을 실현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헐값에 산 향신료들을 가득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보통 100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선장과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됐고, 항해에 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이렇게 향신료 무역은 성공하면 대박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비용과 희생도 따랐다. 향신료 구입에 필요한 자금 외에도 대포가 장착된 배와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원들을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위험도 많았다. 1600년을 전후해 세 번에 걸쳐 동인도로 파견된 약 1200명의 영국 선원들 가운데 무려 800명이 항해 도중 괴혈병과 장티푸스로 죽었다. 풍랑과 암초를 만나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또 현지에서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향신료를 싣고 오던 배가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의 무장 범선을 만나 약탈당하고 심지어 잔인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힘든 항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오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연유로 해상무역을 하는 회사는 무엇보다도 군사적으로 적들보다 강해야 했다. 그리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용해야 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아예 ‘주식회사와 국가가 결합된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에 주어진 권한은 정부 권한에 버금갔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동인도회사, 막강 권력을 갖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 네덜란드 국기를 차용했는데 가운데가 동인도회사 로고이고 바탕색 빨강은 용기, 하양은 신앙, 파랑은 충성심을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중상주의를 기치로 내건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유대인들이 대주주로 있는 동인도회사에 인도 항로를 포함한 아시아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해상교역권 이외에도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도 주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협상의 권리와 교역 상대국 안에서 독립적인 주권도 보장해 주었다. 아울러 식민지 개척을 위해 회사가 군대를 가질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동인도회사는 관리 임명권은 물론 식민지 개척과 운영에 필요한 치외법권과 전쟁선포권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조약체결권과 화폐발행권도 주어졌다. 그밖에 식민지 건설권, 요새 축조권, 자금 조달권 등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경쟁자와 싸울 때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동인도회사는 한 나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동인도회사의 대주주들에게 자유 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위임되었다. 한 마디로 유대인 대주주들이 동인도회사의 교역정책과 식민지 정책을 주도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의 기선을 제압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역 독점권’을 얻는 것을 지상목표로 했기 때문에 무력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스페인과 한패인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를 공격해 약탈하거나 아예 근거지를 빼앗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수집한 향신료를 유럽에 수송하는 항로에 포르투갈의 식민지 말루카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말라카에 대한 첫 공격은 1606년 8월에 전개되었다. 동인도회사 소속 함선 11척이 말라카의 포르투갈 요새를 포위하고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포르투갈군도 맞대응했지만 네덜란드군의 포화가 훨씬 우세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함대는 뭍에 상륙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3일 만에 철수해 요새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포르투갈의 기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 수마트라와 자바섬의 술탄국들에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이길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현지 부족 국가들의 지원을 얻는 계기를 마련했다.
◇육두구 산지 반다제도에서의 야만적 행위
당시는 교역과 약탈이 혼재된 야만적 침탈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일예로 당시 향신료 거래 중에서 가장 큰 이익을 내는 것이 육두구였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반다해의 반다제도에서만 자랐다. 원래 인도네시아라는 국명 자체가 그리스어로 인도라는 의미의 ‘인도스(Indos)’와 섬이라는 뜻의 ‘네오소스(Neosos)’가 합쳐진 말이다. 이처럼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를 당시 향신료 교역의 중심지인 인도의 연장선상에서 보았다.

육두구는 당시 흑사병의 치료제로 알려져 있었다. 영국의 한 외과 의사가 흑사병에 육두구만이 유일한 치료제라고 주장한 이후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두구를 찾았다. 때문에 육두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때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인들은 당시 포르투갈 군이 지배하던 반다제도의 토착민 족장으로부터 육두구 향료무역의 독점권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토착민들의 반포르투갈 정서가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반다제도에는 수천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사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오기 90년 전인 1512년부터 이 섬에 나타나서 횡포를 부린 포르투갈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토착민 족장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양측은 다른 유럽인들을 섬 밖으로 몰아내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어 벌어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예상외로 힘없이 물러갔다. 한 달 후 네덜란드인들은 반다 섬에 요새를 지었다.
그 뒤 이들은 야욕을 드러냈다. 무자비한 군사작전으로 토착민 족장과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반다 섬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비신사적인 야만적 행위였다. 이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최초의 식민지였다. 7년 후인 1609년 반전이 일어났다. 현지 원주민들은 복수전을 펼쳐 모든 네덜란드인들을 살육하고 섬을 탈환했다. 이후 1916년에는 영국군이 이 섬을 정복했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은 곳곳에서 부딪쳤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9년 일본 히라토에 무역관을 세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까지 해상교역을 넓혀 나갔다. 1609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히라토(平戶)에 최초의 네덜란드 무역관(상관)을 설치했는데 그 조건은 막부(幕府)의 엄격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일본에서는 도자기, 비단, 차와 더불어 은과 구리도 수입했다. 당시 일본에서 네덜란드와 경쟁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일본 무역선단 사령관 ‘로푸 드 카르발류’(Lopo Sarmento de Carvalho)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끼리의 각축이었다. 이후 일본의 난학(네덜란드 학문) 도입과 조선의 기술에 힘입은 일본 도자기와 은의 대량 수출은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11년 자바에 식민도시 바타비아를 건설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암스테르담 운하를 본떠 만든 바타비아 식민도시. /위키피디아
아시아 식민지 초대 총독이자 동인도회사 제4대 총독인 유대인 얀 피터스존 코엔(Jan Piterszoon Coen)은 1611년 자바에 식민지 기지 바타비아를 건설했다. 코헨이나 코엔은 전통적인 유대인 사제의 성이다. 그는 자바의 반탐과 마타람 두 왕국의 왕위 계승 분란을 미끼로 점차 침략의 마각을 드러냈다.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인과 반탐인을 자카르타에서 물리치고, 1616년에 지금의 자카르타를 네덜란드의 옛 이름인 ‘바타비아’로 명명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군의 잔인한 행동은 자바의 섬들을 공격할 때 드러났다. 2500명의 반탐인들이 굶어 죽거나 칼에 찔려 죽었고, 3000명은 섬에서 쫓겨났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19년에 인도네시아 전체를 점령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와 영국은 아시아에서 향신료 전쟁을 중단하기로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인도에 집중하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05.14
[26] 향신료 전쟁 ③
약탈과 살육으로 마련된 자본주의 종잣돈
◇만행으로 점철된 반다 학살

▲반다제도 모습. /위키피디아
그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수입의 56%는 후추가, 18%는 나머지 항신료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향신료가 주 수입원이었다. 이들은 쫓겨난 반다제도의 육두구를 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육두구는 후추 가격의 10배 이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반다제도를 장악하려는데 사활을 걸었다.

▲반다제도 네이라 섬에 건설된 네덜란드 나소 요새.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인들이 반다제도 원주민들에게 탄약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결국 네덜란드의 무력 앞에 굴복한 원주민들은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다제도 중심 지역인 네이라 섬에는 네덜란드 식민 지배의 상징인 ‘나소 요새’(Fort Nassau)가 건설되었다. 네이라 섬을 평정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북쪽 테르나테 섬을 시작으로 말루쿠제도 일대 향신료 산지들을 차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테르나테 섬에 두 번째 요새인 ‘오란제 요새’(Fort Oranje)가 건설되어 1619년 바타비아가 만들어질 때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 역할을 했다.

▲반다 학살. /위키피디아
1616년 아이(Ai) 섬 점령 땐 네덜란드 군 외 일본인 용병 24명도 참여했다. 이때 학살된 400명 원주민 중엔 여성과 어린이가 상당했다.

▲현지 박물관에 걸려 있는 반다 학살 사건, 일본 사무라이 용병들의 원주민 살해 모습. /위키피디아
1616년부터 4년간 계속된 룬 섬 공방전은 처절했다. 영국군이 장악한 룬 섬은 무려 1540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점령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군의 재침범을 막기 위해 룬 섬의 모든 향신료 나무를 베어버렸다. 일종의 청야작전이었다. 1621년 2월 네덜란드인들은 1655명에 이르는 군인들과 19척의 전함을 이끌고 반다제도의 가장 큰섬인 반다베사르 섬으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용병으로 고용된 286명의 일본인 사무라이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영국군을 물리치고 5000여 원주민 대부분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야만적 침탈로 육두구를 독점 매매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향신료에는 피의 역사가 함께 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곧 자본주의 종잣돈은 이렇게 대항해 시대의 무수한 약탈과 살육으로 마련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삼각무역에 주력하다
1619년에 자바섬에 첫 번째 식민거점 바타비아를 세운 네덜란드는 자바섬 서쪽의 수마트라섬을 침략했다. 바타비아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이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동쪽 향료섬 말루쿠제도를 빼앗은 후, 말라카와 실론까지 점령했다. 실론은 오늘날의 스리랑카이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인 점령으로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그곳에 무역관을 개설했다. 무역관들은 1607년 시암의 아유티아를 시발로 1609년 일본의 히라도(平戶), 1624년 대만의 포트 젤란디아, 1636년에 베트남, 1641년 데시마, 1644년 실론 등 약20 여 곳에 이르렀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삼각무역에 주력했다. 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인도의 후추, 무명 및 다이아몬드를 본국에 실어다 팔아 은을 마련했다. 그 무렵 은은 국제 화폐였다. 그 은으로 인도네시아 가는 길에 인도에 들러 후추와 무명을 샀다. 당시 인도 께랄라에서는 6세기 이후 그곳에서 설립된 유대인 상인 조직에 있어 그들에 의해 보석류 등 각종 진기한 물건들의 외부 교역이 행해졌다. 유대인들은 인도에서 산 후추와 무명을 갖고 인도네시아에 가 향신료와 바꾸고 일본에 가서 은과 구리와 바꾸었다. 그리고 일본 은을 중국에 가서 금과 비단으로 바꿨다. 한 행차에 몇 번의 거래를 하여 수익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 삼각무역 구조는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호르무즈 활용으로 일년내내 교역이 가능해지다

▲호르무즈 해협. /위키피디아
이러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중요한 전기가 도래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아시아의 귀중한 상품이 직접 거래되던 페르시아만 어귀 호르무즈 해협의 호르무즈 항구를 1515년 포르투갈이 선점하면서 그들이 동인도 무역을 본격적으로 독점할 수 있었다. 호르무즈가 고대로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배들이 이곳까지만 오면 아라비아 대상들이 물건을 받아 서양에 넘겼다.
그 무렵 유대인을 추방해 버린 포르투갈은 그 대타로 독일의 유대인 거상 푸거 가문과 손을 잡았다. 포르투갈 왕실은 스페인의 압력으로 부득이 포르투갈 내 유대인을 추방하게 되자 동방무역의 특권을 독일 푸거 가문에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푸거 가문이 동방무역에 대한 자금을 댔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인도 및 말레이 군도에서 모아들인 귀금속과 향료 등 동양 상품을 가득 실은 포르투갈 배가 동인도 무역을 독점적으로 주도했다. 인도에서 돌아오는 포르투갈 배가 호르무즈에 도착할 즈음 중동 지역에서 1000-4000여 마리의 낙타로 이루어진 대상들이 은과 금, 그리고 상품을 가득 싣고 호르무즈에 모여 거래가 이루어진다. 푸거 가문의 매니저들은 이 거래를 통해 돈을 벌어 리스본에서 자금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유럽으로 보낼 향료를 적기에 다시 구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박이 인도양 남단을 멀리 횡단하여 아프리카를 돌아 포르투갈까지 가야할 필요가 없어지자 계절풍(몬순)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는 연안 항로를 이용해 일 년 내내 교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원거리 해양 무역을 결정하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계절풍이었다. 무역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계절풍은 여름과 겨울에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로 인해서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을 향해 불고, 여름에는 대양에서 대륙을 향해 불어, 반년 주기로 풍향이 바뀌는 바람이다. 이렇게 바람의 방향이 1년에 한 번 바뀌면서 아시아 해양 지역 곧 광둥에서 인도양을 거쳐 홍해 입구 모카까지의 모든 선박의 교역 일정을 결정했다. 바람이 몇 달 동안 한 방향으로만 불다가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부는 마당에 계절풍에 맞서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무역상은 한 방향으로 될 수 있는 한 멀리 갔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렇게 해상무역 상인들의 행동반경이 제약되고, 그다음 일은 중개 상인들의 몫이 된다.
포르투갈은 호르무즈의 지배로 계절풍이 뚜렷이 나타나는 인도양을 항해하지 않고도 동방 물품을 대상들에게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본국까지 갈 필요가 없어지자 선박의 운행 기간이 대폭 단축되어 거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왕복에 2년 이상 걸리던 뱃길을 6개월 미만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본격화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는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호르무즈 활용으로 날개를 활짝 펴다
이후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과 연합한 페르시아가 1622년에 호르무즈를 다시 탈환함으로써 아시아에서 독점적인 포르투갈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호르무즈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유 교역이 허용되었다. 그 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미 기항지로 점령했던 중국의 팽호에서 물러나 중국의 영토가 아닌 대만을 점령하였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62년 명나라의 정성공에 의하여 쫓겨나기까지 대만에서 인력수출 및 사슴 사냥 등의 사업을 영위했다. 이어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 문제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쫓겨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39년부터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했다.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후 아시아 교역에서 네덜란드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41년 말라카에 향료항구를 건설하고 남반부 아래로 탐험을 계속했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네덜란드 항해사 아벨타즈만은 1642년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섬이 자기 고향인 네덜란드의 주 질란드(Zealand)와 닮았다 해서 ‘New Zealand’라고 불렀다. 그 뒤 그는 호주를 탐험하여 시드니 앞 바다와 섬이 그의 이름을 본 따게 되었다. 그 뒤 네덜란드인들은 1650년 스리랑카에 향료항구를 건설한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을 빼앗고,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 브라질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이번에는 미주 대륙을 공략하기 위해 서인도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1630년부터 1654년까지 브라질 동북부를 점령해 유대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설탕 산업을 본격적으로 키웠다. 설탕 또한 당대 최고의 부가가치 상품이었다. 그 뒤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1696년 인도네시아에 세계 최초의 커피 농장을 만들었다. 이후 오랜 기간 커피 수출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돈 되는 곳의 돈 되는 사업은 모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손아귀에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통해 글로벌 경제를 이룬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

▲정향. /위키피디아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말루쿠제도를 접수한 네덜란드인들은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이 섬에서만 정향을 생산하도록 했다. 정향은 늘 푸른 큰키나무로 분홍 꽃이 피는데, 이 꽃이 정향의 원료다. 꽃이 피기 바로 직전에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린다.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丁香)이라 하며, 영어 이름인 클로브(clove) 역시 클루(clou, 못)에서 유래되었다. 정향은 고대부터 대표적인 묘약의 하나였다. 게다가 정향은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향료 가운데 부패방지와 살균력이 가장 뛰어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은 이후에도 무력으로 향신료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량공급은 정향의 가격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향신료에 다른 품종을 첨가하는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비자의 불신을 초래하여 가격이 곤두박질하며 폭락했다. 1760년 암스테르담에서는 향료 가격을 인상할 야욕으로 산더미 같은 향료 재고를 불태워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향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수송하려는 의도가 가격 폭락을 초래하게 되자 네덜란드인들은 암보아나와 테르내이트 지역의 극히 일부만을 제외한 모든 향료의 섬들에 자라는 모든 정향나무를 뽑아냈다. 그 뒤 향료를 불법적으로 재배하거나 거래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했다. 원주민들의 수입원은 오랫동안 정향에 의존해 왔었으나 이러한 조치에 의해 지역경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애기를 출산한 기념으로 정향나무를 심던 원주민들의 전통마저도 큰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정향나무의 죽음은 곧 어린이들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원주민들은 믿었다.
1770년 모리셔스의 프랑스인 총독은 말루쿠로부터 어렵게 정향나무 씨앗을 훔쳐 동아프리카의의 농장에서 재배했다. 이후 광범위한 향신료 산지로부터 향료 공급이 증가되자 향료 독점권은 무너지고 가격이 하락하여 일반 서민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은 세계 정향의 9할을 공급한다.
반면에 정향나무 원산지였던 인도네시아는 오히려 정향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역사의 반전이다. 인도네시아가 가장 많은 정향을 소비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후반에 인도네시아인들은 담배와 정향을 혼합해 ‘크레텍(kretek)’이라는 정향 담배를 최초로 생산했는데 담배를 피울 때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나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7만명의 노동자가 이것의 생산에 종사할 정도로 크레텍의 수요는 엄청나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은 세계 정향의 절반을 연기로 날리고 있다.
[27]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품교역보다 환차익거래로 큰돈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 히라타에 1609년부터 무역관(상관)을 개설했다. 그 뒤 일본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기독교 선교 문제로 쫓겨난 이후 1855년까지 두 나라 간의 독점적 무역 관계가 지속되었다. 네덜란드가 이 기간 218년 동안 일본의 유럽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 경제부흥의 토대가 되다
원래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표류해 온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서구와 교역을 시작했다. 이때 포르투갈의 조총이 일본에 전래되었다. ‘나는 새도 능히 맞힐 수 있다’는 뜻에서 ‘鳥銃'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본은 이 총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으로부터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제조술과 인쇄술, 신유학에서 의학까지 조선의 지식을 사람 채로 노획해 갔다. 당시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를 1300도 이상 높이는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년) 7년 동안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왜놈들이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끌고 간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도공들을 많이 잡아갔다. 일본 학자들은 7년 전란 중 끌려간 조선인이 적게는 2만, 많게는 5만 정도로 추정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6만 또는 10만으로 본다.
피랍된 조선의 도공들은 토기 등을 구워내다가 20년 만에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고령토를 이삼평이 1616년 사가현 아리타에서 찾아냈다. 이후 아리타 도자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2000만점 이상이 수출되어 일본에 큰 부를 안기게 된다.
그리고 퇴계의 빼어난 문하인 강항(姜沆)도 임란 때 피랍되어 일본인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근세 초기 일본 유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임진왜란은 장기간의 난세로 부진했던 일본의 경제부흥과 학문 발전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유대인 덕분에 살아남은 일본의 네덜란드 무역관
이즈음 일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했다. 기독교인이 늘어났다. 막부는 신자가 70만 명에 이르자 위협을 느껴 1612년에 전교 금지령을 내리고 교회를 파괴했다. 이어 선교사나 신자들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또한 무역항을 축소하는 등 무역 활동을 통제하고 1639년에 쇄국령을 내려 포르투갈 사람들을 추방하고 스페인과는 단교까지 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유대인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전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는 다른 민족에게는 전교하지 않는 종교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무역관만 그대로 남겨 두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드디어 중국의 문턱을 넘다
그 무렵 중국은 해금 정책으로 오랑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중국을 네덜란드인들이 뚫었다. 1656년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순치황제에게 삼배구고(三拜九叩)의 수치를 마다하지 않고 무역의 길을 튼 것이다. 삼배구고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또 이것을 3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청나라는 이것을 외국 사절에게도 강요했다. 어렵게 튼 중국과의 거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중국 거래는 일본의 은과 연계되어 ‘대박’을 치게 된다.
이어 1663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향료와 노예무역 항구들을 연달아 건설했다. 당시 전성기의 네덜란드는 1만 6천 척에 달하는 상선을 보유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4개국 상선의 4분의 3 수준이었다.
◇일본, 은 수출로 경제 부흥하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동인도회사 무역관, 가운데 네모난 인공섬이 데지마. /위키피디아
히라타에 있던 네덜란드 무역관은 1641년 나가사키 데지마로 옮겨져 독점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며 거의 200년 동안 존속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은(銀) 수출국이었다. 은을 얻기 위해 1641년부터 약 200년간 나가사키에 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은 606척에 달했다. 당시 일본의 은 제련 기술도 조선에서 유출된 것이었다. 그 무렵 일본 은은 유럽에 비해 아주 쌌을 뿐 아니라 중국에 비해서도 많이 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에 파는 물건은 중국의 생사, 비단, 양모, 면 등의 직물류와 유럽의 피혁류, 염류, 설탕, 약품, 잡화 등이었다. 사들이는 물품은 은과 구리를 비롯하여 장뇌, 잡화, 지금(地金)과 화폐, 도자기, 칠기, 병풍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은이 주종을 이루었다. 당시 은은 상품이자 통화였다. 대량의 은 수출로 일본 경제가 부흥의 토대를 쌓았다.
◇유대인, 상품교역보다 환차익거래로 큰돈 벌어
17세기 유대인들이 주도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된 수익원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향료와 비단이 아니라 금과 은 등 귀금속 화폐의 거래였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 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당시 금과 은의 국제간 시세 차익을 이용한 차익거래(Arbitrage)를 통해 돈을 번 것이다. 벌써 무위험 차익거래에 눈뜬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당시 서양과 동양의 ‘금은 교환 비율’은 너무 차이가 컸다.
서양은 수메르 문명 이래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대략 1대12.5 내외였다. 원래 이것은 수메르 천문학에 기초한 양력과 음력의 비율이었다. 금이 태양이요 은이 달이었다. 태양이 한번 변할 때 달이 ‘12번 반’ 변한다는 이유에서 1대12.5였다. 곧 태양력 1년이 음력으로 12개월 반이라는 것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로마제국에서도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2.5대 1이거나 13대 1이었다.
17세기 초 유럽의 금은 교환 비율도 크게 변하지 않아 바로 1대12 내외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1대6 정도였다. 딱 두 배 차이였다. 중국에서는 은이 금에 비해 유럽보다 거의 두 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싼 은을 구입하여 중국에 가져가면 그것만으로 100% 환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먼저 중국과 교역을 했던 포르투갈이 1600년부터 1630년까지 환차익 재미를 흠뻑 보았다. 이후 포르투갈을 대체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그 뒤를 이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 교환 비율은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그래도 중국은 1대10, 유럽은 1대15 내외였다.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의 차익 마진이 100%에서 50%로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오랜 기간 유대인들은 이 환차익을 즐길 수 있었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정은. /위키피디아
그 무렵 일본에서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은이 풍부해지자 금에 비해 저평가 되었다.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구입하여 은의 가치가 높은 중국에 팔았다. 중국이 그토록 은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우선 중국 화폐제도의 변화 때문이었다. 중국은 다른 어느 문명권에서보다 일찍 지폐를 발행했다. 그런데 명대에 들어와서 지폐를 초과 발행하자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결국 지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를 대신하는 지불수단으로서 은이 유통되었다.
특히 은의 대규모 유통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은 1560년대에 시행된 일조편법(一條鞭法)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가 모든 조세 수입을 은으로 통일한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이제 은은 공식 화폐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중국은 모든 조세를 은으로 통일하여 받을 때였다. 따라서 세금을 내야 하는 국민들이 대량의 은을 필요로 했다. 수요가 공급을 웃돌자 당연히 은값은 상승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일본의 은과 구리를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는 은에 비해 저평가된 금을 구매했다. 이렇게 각국 간의 ‘금은 교환 비율’의 차이 곧 환시세 차이를 이용한 귀금속거래가 상품거래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은수저로 식사를 하는 등 은을 좋아하여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 이래 유럽의 은이 계속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중국은 부유한 문명국으로서 유럽에서 들여오고 싶은 물품이 특별히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비단 등 중국 상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은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대로부터 중국과 유럽의 교역은 일방적인 유럽의 무역적자로 진행되어왔다. 게다가 16세기 중국의 일조편법 시행과 동서양의 금은 교환 비율 차이로 전 세계의 은이 이후 4세기간 계속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1500~1800년 사이에만 중국이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약 6만8000톤에 달했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오랫동안 은이 중심 화폐 구실을 해왔기 때문에 ‘은행(銀行)’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본디 ‘항(行)’은 점포를 가리키는 글자이므로 은행은 은을 취급하는 점포라는 뜻이다. 만일 중국이 금을 중심 화폐로 썼다면 ‘은행’ 대신 ‘금행’이라는 말이 쓰였을 것이다.
◇유대인, 돈을 상품으로 본 최초의 민족
유대인들은 고대 이래로 돈을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닌 ‘상품’으로 본 최초의 민족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농업에서 퇴출당하자 먹고 살기 위하여 대부업을 시작했다. 그 뒤 유대인들은 단지 돈이라는 자원을 이곳에서 다른 곳, 혹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줌으로써 사회 전체의 경제적 부를 더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대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 덕분에 유대인들은 여러 나라의 환시세는 물론, 이러한 자산 가격의 시세 산정과 그 차익의 활용에 특출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메카니즘 자체를 이해도 못 할 때였다.
유대인들은 금융업이란 것이 돈을 낮은 수익률에서 더 높은 수익률의 투자처로 옮겨다 주어 사회 전체적으로 부를 더 늘리도록 해주는 ‘정보사업’이란 것도 일찍부터 알았다. 유대인들은 고대 이래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대 커뮤니티 간의 정보 교환으로 특히 금융정보에 밝았다. 곧 지역 간 환시세 차이 등의 비대칭정보를 활용해 큰돈을 벌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을 가장 잘 꿰뚫어 보고 이를 활용한 존재가 유대인이다.
◇유대인, 중국-일본 간 중계무역으로 큰돈 벌다
당시 유럽은 신대륙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된 은으로 주조된 은화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동양 무역을 확대하려면 그 은화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게다가 은은 유럽에서 잘 생산되지 않는 귀중품이어서 중상주의 나라들은 원칙적으로 은의 반출을 금지했다. 이렇게 중상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들은 모두 귀금속의 유출을 막았지만, 독특하게도 네덜란드 의회가 귀금속의 자유로운 수출입을 허가했다. 유대인들이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의 대금 지불에 필요한 경화를 암스테르담에서 구입함으로써 영국 의회의 경화 수출금지령을 피해 나갔다.
16세기에 중국과 일본은 서로 거래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먼저 일본과의 교역을 엄격히 제한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중국 남쪽의 해상 세력이 남방 세력이나 왜구하고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의 교환가치가 일본보다 중국에서 갑절 가까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무역이 성행했고, 이 밀무역을 주도한 집단이 왜구였다. 왜구의 본업은 해적이라기보다는 무장 밀수단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마카오와 일본 사이를 운항하며 이 무역의 상당 부분을 도맡았다. 1630년대까지 계속된 이 무역선은 가장 수익성이 높았다.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덜란드인들이 포르투갈인의 역할을 넘겨받게 된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는 여전히 은에 비해 금이 쌌다. 때마침 일본은 은이 대량으로 채굴되어 당시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대량으로 사서 이를 중국에서 금과 바꾸었다. 또 중국에서 바꾼 금을 일본에 가져다 은과 바꾸었다. 이러한 무위험 차익거래로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유대인, 은을 매개로 삼각무역에 주력하다
또 유대인들은 삼각무역에도 은을 매개로 이용했다. 일본에서 산 대량의 은과 구리로 중국에서 비단과 금을 샀다. 비단을 다시 일본에 팔고 금과 구리는 인도에 팔아 후추와 무명을 샀다. 인도는 당시 구리가 비쌌다. 인도에서 산 후추와 무명은 유럽에 팔았다. 되돌아가는 길에도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인도에 들러 산 후추와 무명을 일본에 팔아 은을 구입했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는 이런 식으로 상품 수출입으로 이득을 본 것보다 이러한 귀금속 환시세를 이용한 환차익 수익이 훨씬 더 많았다. 지역적으로도 유럽 대륙과 신대륙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동양에서의 수익이 훨씬 많았다. 고대로부터 환시세의 산정과 환차익거래는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일본의 해금(海禁)정책 덕분이었다. 중국과 일본 양국 간에 공식적으로는 서로 왕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부터 왜구의 창궐로 일본과의 교역을 엄격히 금했다. 한때 명나라는 민간무역을 인정해 해금정책을 완화하는 듯 보였으나 1644년 청나라가 들어서며 또다시 바다를 막았다.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꾸준히 늘어나자 결국 쇄국정책을 쓰기는 명나라 때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도 1640년경부터 해금 정책이 강화되어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이 틈에 양국의 해금정책으로 제약받는 중일 간 무역을 중계하면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번영기와 일본의 은 수출 전성기가 일치한다. 이때 일본도 막대한 은 수출로 거대한 국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커지는 첫걸음이었다. 일본은 은을 팔아 서양 상품을 수입했고 특히 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난학(蘭學)’이란 네덜란드 학문을 뜻하나 실제로는 서양학문 전체를 의미한다. 이후 매년 20만㎏에 달하는 대량의 은이 유출되자 마침내 일본의 은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에도막부는 무역에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는데 마침내 1685년에 은 3000관으로 네덜란드와의 무역 금액을 제한했다.
[28]난학(蘭學)이 일본을 깨우다
◇조선의 기술이 일본의 경제 성장을 돕다
일본은 문화뿐 아니라 경제의 초석이 되는 기술의 뿌리도 조선이었다. 일본 경제는 16와 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것이 수출 대국의 초석이 되었다. 이 초석의 밑바탕에는 우리 조선의 앞선 기술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은 제련술과 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더불어 이때부터 교역에 눈을 뜬 일본은 동남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 등으로 넓혀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난학은 의술로부터 시작되었다
▲의술로부터 시작된 난학, 네덜란드 의사와 일본 의학자의 토론 장면.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213년 동안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 붐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본에서 환대받는 네덜란드 무역업자들. /위키피디아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레 일본 청년들과 사귀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난학은 이렇게 화란어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오란다 통사(阿蘭陀 通詞)’라는 직업 통역관 겸 상무관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무역관을 출입하면서 네덜란드 의사를 통해 서구의학을 접하며 그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이 시기에 서양의학 서적이 충격을 주었다. 기존 의학이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을 네덜란드 의학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난학은 이렇게 데지마에 파견되어 있었던 네덜란드 의사의 의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시간이 갈수록 서구 문물 전체를 포함했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키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틀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키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 5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동경대의 전신이 바로 이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탈아론’이 주창되다
그 뒤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천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뒤 명칭도 ‘난학→양학→서학’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풍설서’를 통해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일본 최고액권 1만엔 지폐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 /위키피디아
19세기 메이지 시대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장래는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대학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렇듯 ‘탈아론’은 훗날의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재평가되는 16~18세기 아시아 경제
15세기 명나라의 해금정책과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동서양의 경제 위상을 바꾸었다는 것이 그간 세계 경제사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당시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15세기 전후 명나라 해금정책은 왜구와 중국 남쪽 토호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런데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말레이시아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점령하고 동남아 상업 패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포르투갈 함대는 중국 해안에 출현했다. 1517년 포르투갈은 중국에 함대와 특사를 보내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무역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법규를 지키지 않고, 무력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중국 관원들을 매수하여 1535년 마카오가 개방되었다. 명나라 정부는 마카오라는 작은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제한하면서 무역행위도 통제했다.
포르투갈 이후에 출현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의 상인들도 포르투갈 상인의 행동 방식을 반복했다. 심지어 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수만 명의 현지 중국인을 살해했다. 이런 야만적 행동으로 중국 정부는 외국인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무역을 금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해적 활동이 날로 극성을 부렸다. 이후 명나라 정부가 해적을 소탕한 후 무역 금지를 풀어주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인들이 도착한 신대륙 등은 대부분 군사 점령과 현지인들의 노예화가 뒤따랐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큰돈을 벌어갔다. 오로지 서양의 야만을 막아낸 곳은 무역을 거절한 중국뿐이었다. 서양인들이 돈을 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들이 서양으로부터 큰돈을 벌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무역역조로 인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났다. 그 가운데 중국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양에다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8000~9000톤, 멕시코와의 교역에 의한 1천 톤을 합쳐 약 6만8000톤에 달했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중국 인구는 1억2500만명에서 2억5000만명으로 두 배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명에서 370만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 높았다. 이는 대량의 은이 들어와 중국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경작지가 증가하고 2모작 도입으로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 견직물 산업이 크게 번창했고 자기, 담배, 인디고 염료, 종이 산업 등도 발전했다.
이에 따라 점차 상업화되고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당시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8세기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특히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사실 18세기 인도는 영국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고, 중국은 농업생산성, 산업 및 시장의 다양성, 소비수준에서 세계 최고였다. 유럽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유럽인들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후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이 산업혁명으로 힘이 급격히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긴 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야 아시아가 뒤처졌다는 이야기이다. (참고: 프레시안,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등)
◇일본의 경제발전으로 에도가 18세기 최대 도시의 하나가 되다
▲상업이 번창하고 도시가 번영하는 17세기 에도의 분위기. /위키피디아
일본은 경제발전으로 인구가 1500년 1600만명에서 1750년 3200만명으로 급증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 도시화하며 18세기에 벌써 도시인구 비율은 오히려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았다. 1800년 무렵 인구 10만명 이상 도시는 45개뿐이었다. 그 가운데 유럽 도시는 절반도 안 되었으나, 당시 아시아 지역은 전 세계 도시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에도(지금의 도쿄)가 인구 140만명으로 18세기 최대 도시의 하나였다. 그 규모는 전성기의 로마와 비잔티움을 능가했다. 19세기 오사카와 교토 인구도 40~50만명에 이르렀다.
[29]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도했던 커피 재배와 유통의 역사
▲커피. /위키피디아
경제사에서 소금, 후추, 설탕 등이 끼친 영향은 역사를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이들 상품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유통되었다는 공통점 또한 같다. 커피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커피는 원유 다음으로 물동량이 크다. 현재 커피의 연간 거래량이 750만톤(t)으로 하루 소비량은 27억잔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럽에 선보인 초기에는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마시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딸의 커피 값으로 요즘 돈으로 한 해 1만5000달러(약 1982만원)를 치렀을 정도다. 커피가 경제사에 등장한 과정을 보자.
525년 에티오피아가 예멘 지방을 침략한 시기에 아프리카가 원산인 커피가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커피라는 이름 자체가 에티오피아 커피 산지인 카파(Kaffa)라는 지역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설(說)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졸음을 이기려 애쓸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주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주었다는 비약이 바로 카베(혹은 카와)였다.
◇처음에는 각성제 약으로 쓰인 커피
▲커피콩. /위키피디아
9세기에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커피를 먹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등장한다. 당시 커피는 음료로 마셨던 것이 아니라 밤 기도 시간 동안 졸음을 쫓아내는 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커피 열매나 씨앗을 볶지 않은 상태에서 씹어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약으로 쓰인 귀한 열매인 까닭에 이슬람권은 커피 씨앗의 유출을 막았다. 아랍인들은 그들의 커피를 지키기 위해 싹이 터서 발아할 수 있는 종자의 반출은 막고, 대신 씨앗을 끓이거나 볶아서 유럽행 배에 선적했다. 이는 커피의 가공법이 발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후 커피 열매를 씹어 먹는 대신, 그 씨앗을 볶아서 그것을 갈아 마시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 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밤늦게까지 기도하며 신과 합일을 이루고자 ‘각성제’인 커피를 마셨다. 이슬람 사원에 한정되던 커피는 11세기 일반 민중에게까지 널리 애용되었다. 이렇게 커피가 마시는 음료로 발전한 곳이 아라비아 지역이다.
◇양대 종교를 대표하는 커피와 와인
커피와 와인은 인류의 역사를 이끈 쌍두마차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 어디서나 포도농장을 볼 수 있었던 반면,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곳에는 어디서나 커피향이 가득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멋진 선물로 여겨진다. 심지어 와인은 예수의 피로 상징된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와인을 혐오했다. 이성과 절제를 추구하는 이슬람들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애호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커피는 종교였다. 무함마드가 졸음의 고통을 이기려 애쓸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해 준 음료가 커피였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커피가 처음 들어왔으나 기독교도들은 커피가 이슬람교도의 음료라 하여 배척했다.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는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커피가 소개되어 1475년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이렇게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이슬람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부터이다. 그 무렵 이슬람권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이를 밀무역으로 이탈리아에 반입했다. 그 뒤 커피를 마셔본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교 사제들이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칭하며 커피 음용을 금지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유럽에서 커피 음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랍 지역 유대인, 커피 수출을 모카 항구 한 곳으로 제한
▲모카 항구. /위키피디아
15세기에 이르러 커피의 수요가 늘어나자, 예멘에 사는 유대 상인들은 이를 독점 공급하기 위해 커피의 수출 항구를 모카로 한정하여 다른 지역에서의 반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모카에서 수출했다. 그 무렵 예멘을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반도에는 약 3만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당시 커피는 매우 비싼 상품이었다. 그 뒤 모카의 유대인들은 17세기 말까지 무려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 독점을 이어갔다. 이렇게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다 보니 유럽 사람들이 커피를 ‘모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커피를 담은 부대 자루에 ‘Mocha’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유대 무역상이 커피를 독점 수입하다
아랍은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황금알을 낳는’ 커피나무의 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커피는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없었음에도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나 기후조건 때문에 아라비아 땅 이외에는 커피가 자라지 않았다. 그 무렵 서구의 커피의 독점 교역을 주도한 것도 유대인들로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예멘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로 커피 교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초 카페는 1629년 커피가 처음 들어온 관문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다. 이어 1650년 유대인 제이콥(야곱)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옥스퍼드 대학 도시에 열었고 1652년에는 런던에 ‘파스카 로제’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 뒤 ‘커피하우스’는 대영제국을 지배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술을 즐긴 영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덕분에 카페 수가 선술집을 넘어섰다. 런던 사람들이 ‘동전 대학’(Penny Universities)이라 부르면서 카페는 싼값에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커피 농장 세우다
▲커피 묘목. /위키피디아
그 뒤 커피의 대량 재배에 성공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1600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에 들러 그곳 커피 농장에서 종자 몇 개를 몰래 갖고 인도로 돌아왔다. 이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카나타가에 뿌려 농장 재배에 성공하였다. ‘인도판 문익점’이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황금알을 놓칠 리 없었다. 1616년 인도에 커피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인도회사는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인도로 밀파한다. 스파이는 인도에서 커피 원두와 묘목을 본국으로 밀반출했고, 네덜란드로 건너 온 커피 묘목은 식물원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커피는 특성상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서 자란다. 이를 ‘커피벨트’라 부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58년 온실 재배에 성공한 커피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가서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1670년에 커피나무는 해충에 의해 몰살당해 실패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재배 장소를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본거지인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마침내 1696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바타비아에서 해충을 이겨내는 대규모 커피 농장을 일구었다. 이렇게 커피가 최초로 대량 재배되기 시작한 곳은 남미가 아닌 아시아였다.
그 뒤 70년 동안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를 대규모로 재배했다. 커피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음료가 되었다. 마침내 유대인들이 커피 재배와 교역을 주도한 것이다.
1800년대 들어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도 커피, 설탕, 인디고(藍)를 강제 경작케 하고 이를 거둬들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그 수익은 1850년대 네덜란드 재정 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정부는 부채를 갚고 운하와 도로를 건설하는 데 썼다. 반면 커피 재배의 특성상 땅은 7~8년이 지나면 죽은 땅이 된다. 원주민들은 당장 돈이 되는 커피 재배에만 힘을 쏟다 식량 재배를 못 해 결국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카페 문화를 선도한 프랑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 /위키피디아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카페 문화는 프랑스가 선도했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혁명 사상과 예술혼이 카페에서 무르익었다. 1880년 무렵 파리에만 카페가 약 4만5000곳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쌌던 인도네시아 루왁 커피
▲루왁 커피의 재료가 되는 야생 사향고양이 배설물(위쪽)과 사향고양이. /위키피디아
여담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는 야생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걸러낸 커피다. 인도네시아의 ‘루왁’(luwak) 커피가 그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살고 있는 긴 꼬리 사향고양이 루왁이 커피 열매를 먹으면 껍질만 소화되고 씨앗은 배설된다. 이 씨앗을 어렵게 모아 깨끗이 닦아낸 뒤 햇볕에 말려 만든 것이 루왁 커피다. 독특한 향기와 깊고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채취 가능한 양이 매우 적다. 1년에 500~800㎏의 원두만 생산되어 ㎏당 1000달러 이상을 호가한다. 일반 소매점에서는 잔당 5~10만원을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향고양이를 가둬두고 사료 대신 커피 열매만 먹여서 채취한 인공 루왁 커피가 생산되어 동물애호단체가 동물 학대를 문제 삼아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제 루왁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커피가 아니다. 최근에는 코끼리 똥 커피인 ‘블랙 아이보리’가 루왁보다 더 비싸다. 더 비싼 이유는 코끼리가 커피콩만 먹어서는 영양부족으로 생존이 안되기 때문에 코끼리에게 매일 100㎏ 이상의 식량과 함께 커피콩을 추가로 먹인다. 코끼리는 하루 50㎏ 이상 배설하는데 그 배설물에서 커피콩을 인력으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루왁커피 보다 훨씬 적다.
◇중남미로 퍼져 나간 커피 플랜테이션
커피 생산의 선두주자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했다. 1715년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 묘목을 수리남과 카리브 해의 식민지로 옮겨 심어 커피 재배에 성공했다. 수리남에서 자라던 커피는 이후 브라질로 들어갔다.
한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사연은 로맨틱하다. 프랑스령 기아나의 총독 부인이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나갔다. 브라질과 콜롬비아로 보내진 커피는 최상의 재배 조건 위에서 잘 자라 두 나라를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주변 남미 국가에 퍼지게 되었다.
◇‘착한 가격’이 거론되는 커피
네덜란드의 커피 교역은 처음부터 국제성을 띠었다. 이른바 ‘커피 벨트’를 형성하는 커피 산출국이 주로 적도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커피 소비국은 대부분 북반구에 위치한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커피 생산지와 소비지를 이어주기 위해 커피를 실은 네덜란드의 배들이 세계의 바다를 오갔다. 유대인들은 커피의 공급서부터 중간 유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독과점체제를 구축하여 엄청난 마진을 챙겼다. 시장이 오픈된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다.
▲‘네슬레’의 설립자 앙리 네슬레(왼쪽)와 스타벅스 성공 신화를 이끈 경영자 하워드 슐츠. /위키피디아
이렇듯 커피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네슬레를 유대인 앙리 네슬레가, 스타벅스를 유대인 하워드 슐츠가, 3세대 커피라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테리젠시아와 스텀프타운은 유대인 요한 아담 벤키저가 탄생시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서 팔리는 커피의 소비자 가격은 생산지 가격의 200배에 가깝다고 한다. 근래 들어 스타벅스 등 고급 커피 체인점들이 생긴 뒤로 더 차이가 벌어졌다. 에티오피아에서 300원에 구입한 원두 1㎏로 스타벅스는 소비자들에게 25만원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쯤 되면 엄연한 착취이다. 직거래 공정무역에 의한 커피의 ‘착한 가격’이 거론되는 이유이다.
06.11
[30] 유대인, 중국차 밀반출해 자바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하다
두 번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중국차 이야기
1600년대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국차를 본격적으로 수입하여 유럽에 차 바람이 불었다. 특히 영국에 불어닥친 차 바람은 두 번의 전쟁을 불러왔다. 그리고 유대인은 중국차를 밀반출해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하여 차 지형도를 넓혀버렸다. 그 이야기를 알아보자.
◇중국 차의 역사

▲중국 쓰촨(四川)성과 티베트 경계의 산악지대. /위키피디아
차(茶)는 원래 중국 쓰촨(四川)성과 티베트 경계의 산악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소수민족들이 널리 애용한 음료였다. 기원전 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차는 사천에서 중국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중국 강남지방에서 유행하던 차 풍속은 7세기 초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로 북방지역까지 확대되었다. 그 무렵 상류층 사람들은 병차(餠茶, 덩이차 또는 단차)를 만들어 마셨다. 둥그런 형태의 병차는 찻잎을 찌고, 찐 찻잎을 절구에다 찧은 후에 일정한 틀에 넣고 말려 만든 고체 형태의 차다. 필요할 때마다 병차 덩어리를 조금씩 부숴 ‘덖어’(roast, 볶아) 마셨다. 참고로 ‘덖다’라는 말은 ‘물기가 조금 있는 고기나 약재, 곡식 등에 물을 더 붓지 않고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힌다.’는 뜻이다.

▲병차. /위키피디아
당시 차는 절에서 많이 마셨다. 차는 처음에 음용보다는 약용 또는 제사용으로 이용되었다. 당나라 때 선(禪) 사상이 유행했는데, 참선할 때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약으로 차를 마셨다. 이렇게 차를 약으로 마실 때는 덖기보다는 가루로 빻아 그대로 마셨다.
당나라 이전에는 차를 ‘도(荼)’나 ‘명(茗)’이라 불렀다. 당나라 이후 차가 대량 재배되면서 도(荼)자에서 ‘一’획을 없애 ‘차(茶)’라 부르게 되었다. 중국 차 문화는 779년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차경(茶經)>을 집필한 덕분에 차 문화가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다.
◇차(茶)와 티(Tea)
차(茶)를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러시아, 이란, 티베트와 같은 국가에서는 ‘cha’로 부른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차 수출항구가 그 지방 사투리로 테이(Tei)였다. 여기서 티(Tea)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곧 차를 육로로 수입한 나라들은 광동성 발음인 ‘cha’로 불렀고, 해로를 통해 차를 수입한 유럽 국가들은 테이(Tei)의 복건성 방언 발음인 ‘ti’로 불렀다. 그중 포르투갈은 그 식민지령인 마카오가 광동성에 있었기 때문에 ‘Cha’라고 발음되어 전해졌다. 현재 세계 어디를 가나 차를 나타내는 말은 광동어 계통의 ‘Cha’와 복건어 계통의 ‘Tea’ 두 가지뿐이다.
◇중국이 독점했던 차 재배
차가 국가 전매산업으로 거듭난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차 문화는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런 차를 ‘말차’라 불렀다. 정작 본고장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말차의 맥이 끊겼는데 흥미롭게도 일본에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차에 물을 부어 ‘우려 마시는’ 방법을 포다법(泡茶法)이라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차 마시는 방법인 포다법은 명나라 초부터 법제화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라며 스님의 차 심부름을 도맡아 해, 복잡한 차 문화 폐단을 깊이 체험했던 명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자마자 1391년 9월 칙령으로 차 문화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송나라 시절의 제조과정이 복잡한 병차 곧 단차(團茶) 제조를 폐지하고 채취한 차를 솥에서 간단히 ‘덖어’(roast) 만든 엽차(葉茶)를 물로 우려내어 마시는 포다법으로 차를 마시게 했다. 그 무렵 차 재배는 중국이 독점하고 있었고, 중국은 차나무 묘목 반출을 엄히 금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격적으로 차를 유럽으로 수입하다
중국차를 유럽에 최초로 전한 사람은 1560년 포르투갈의 예수회 수도사였다. 그 뒤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차를 유럽에 수입했다. 처음에는 일본 녹차를 인도네시아 자바를 경유해 유럽에 수출했다. 얼마 뒤 차 무역은 중국차로 바뀌었다. 그들은 차를 신비의 음료라 하여 귀족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이후 차가 인기를 끌자 다른 유럽 나라들에도 팔기 시작했다.
영국에 차가 처음으로 수입되어 한 런던 상인이 1658년 신문에 광고를 냈다. “모든 의사가 추천하는 중국의 신비한 음료를 커피하우스에서 팝니다.” 차의 효능은 두통, 소화불량, 감기, 간염, 수종, 학질, 괴혈병에 효과가 있다고 광고했다. 당시 차 500g이 2.5파운드에 팔렸는데, 그 무렵 하인의 연봉이 2~6파운드였으니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알 수 있다.
처음 유럽인들이 마시던 차는 녹차였는데, 중국 차가 유럽으로 수출될 때 적도를 지나면서 찻잎에 산화 과정이 일어나 홍차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녹차보다 홍차가 유행하게 된 배경은 유럽의 물이 대부분 경수이기 때문에 녹차보다 홍차가 향과 풍미가 더 잘 우러나기 때문이었다. 이후 18세기에 보이차라는 발효차가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차 가격은 커피의 10배 수준이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이 차를 즐겨 수입량이 부쩍 늘었다. 1770년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450만파운드 찻잎을 수입할 때 영국 동인도회사는 600만파운드어치를 수입했다. 차 무역은 이익이 많아 서로 빨리 수입하려고 경쟁하는 통에 이 시기에 속도가 빠른 쾌속 범선이 제작되었다.

▲‘티타임’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차 문화. /위키피디아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하는 이유
산업혁명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영국인들은 물 대신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 무렵 물이 이질균 등 수인성 질병과 전염병을 자주 옮기던 때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물은 집에서 끓여 마셔야 했다.
하지만 기계 일을 하는 노동자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때 나타난 것이 홍차였다. 차에는 항균 성분이 있어 팔팔 끓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질병을 예방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더구나 카페인이 든 홍차는 졸음을 예방해주어 산재사고도 줄어들었다. 이처럼 홍차가 근로 효율을 향상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장 노동자들에게 크게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다. (출처: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미나가키 히데히로, 2019)
◇차가 불러온 첫 번째 역사적 전쟁
유럽에 차 문화가 뿌리를 내리면서, 차는 주요한 교역상품이 되었다. 그 무렵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량은 중국이 소극적인 탓에 많지 않았다. 1793년 무역 확대를 위해 처음으로 중국을 찾은 영국 사절단에게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다. 단지 중국산의 차, 도자기, 비단 등은 서양 여러 나라의 필수품이므로, 광동에서 무역을 허가하고 필수품을 주어 천조(天朝)의 은덕을 베풀 뿐이다.” 이렇듯 차는 ‘중국이 오랑캐에게 베푸는 은덕’이었다.
이러한 소리를 들어가며까지 차를 마셔대던 영국은 후에 차를 둘러싼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첫 번째 사건은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것은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배에 실려 있던 342개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이다.
영국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1774년 해군함대를 동원해 보스턴 항을 폐쇄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고 보스턴에서 잃은 손실액을 매사추세츠 자치령에서 변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에서의 모든 활동도 금지시켜 버렸다. 이는 미국인들을 격분케 하여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영국에 반감이 생긴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입맛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라 홍차 맛과 비슷하도록 연하게 볶은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셨다.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한 맛의 유럽 커피와 대조되는 이유이다.
◇유대인, 자바에서 차 재배 성공
중국은 이러한 차 수출산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차나무 종자의 유출을 막고, 재배기술과 차를 발효시키는 방법까지 모두 비밀에 부쳤다. 때문에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차나무가 중국에서만 자라는 신비의 식물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네덜란드계 유대인 야콥센(’야곱의 아들’이라는 뜻)이 목숨 걸고 차 묘목을 마카오를 통해 몰래 빼내면서 달라졌다.
▲자바 차밭. /위키피디아
그는 1828~1833년간 5차례에 걸쳐 중국에 잠입해서 묘목을 반출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재배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를 맛봤다. 그러다 마침내 1833년에 차의 종자·직인(職人)·재배인·도구 일습을 광둥(廣東)으로부터 실어 내어 자바에 도착했다. 차나무 씨앗 700만개와 15명의 중국인 차 재배 기술자들도 같이 데려왔다. 이후 자바에서 마침내 차 경작에 성공하여 차 시장의 새로운 전기가 열렸다.
◇차가 불러온 두 번째 역사적 전쟁
차가 일으킨 두 번째 전쟁은 1839년의 아편전쟁이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를 비롯해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는데, 수출품이라고는 모직물 정도였다. 당연히 무역적자가 날로 커졌다. 적자 규모가 늘어나 아편전쟁 직전에는 4067만파운드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어 유럽에서는 은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아편이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차 대금으로 인도에서 기른 아편을 밀수로 중국에 팔아 지불하고자 했다. 그러한 영국의 몰상식한 선택에 대해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몰수하는 것으로 응대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1839~1842년)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중국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동, 하문, 북주, 영파, 상해 등 5개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아편전쟁, 이 굵직한 두 전쟁의 계기가 모두 차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차가 얼마나 중요한 상품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스리랑카(실론) 차 재배로 중국의 독점이 깨지고 대중화되다
▲스리랑카 농장. /위키피디아
한편 유대인들은 1670년 병충해로 몰살당한 스리랑카의 커피농장에 다시 커피나무를 심어 재배를 시도했지만 1869년에 또다시 병충해로 커피나무가 전멸해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 그곳 커피 농장주의 한 사람이었던 제임스 테일러에 의해 커피를 대신할 작물로 등장한 것이 차나무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스리랑카에서는 저렴하고 품질 좋은 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 덕에 당시 차 시장을 독점하던 중국의 녹차산업은 무너지고, 차가 대중화되었다. 지금도 실론 홍차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