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3-05/
05.01(월) 넷플릭스 오리지널
넷플릭스 첫 오리지널은 ‘하우스 오브 카드’(2013~2018)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대의 끝자락에서 영감을 받은 4편짜리 BBC 동명 정치 드라마(소설)의 판권을 확보한 미디어 라이트 캐피털(MRC)이 제작했다. 이 기획에 넷플릭스만 눈독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물밑 협상은 뜨거웠고, ‘드라마 왕국’ HBO를 포함해 주요 네트워크가 탐냈다. 이때 넷플릭스는 두 개의 시즌(총 26회)을 선주문하는 파격을 선보인다. 편당 500만 달러를 들였고, 첫 두 시즌에만 약 1억 달러를 썼다. 미국 기준으로도 고액 쇼핑이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넷플릭스 14년 역사에서 가장 큰 모험”이라고 평했다.
탄탄한 대본과 스타 배우가 있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기에 파일럿 에피소드로 ‘간을 보거나’, 진짜 자신 있을 경우 6회 정도 선주문하던 시절이었다. 주인공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문으로 시즌6에서 멈추긴 했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는 넷플릭스가 DVD 배달 서비스에서 콘텐트 스트리밍으로 사업 방향을 바꾼 것만큼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제 세계 드라마 등 영상 콘텐트 소비는 넷플릭스가 주도한다. 이렇게 되는 데 딱 10년이 걸렸다.
넷플릭스가 한국 오리지널 콘텐트에 4년간 25억 달러(약 3조30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전해진 이 소식은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희소식인 동시에 한국 영상 콘텐트 제작, 유통 현장이 더욱 치열해질 것을 알리는 예고편이다. 넷플릭스는 한국 작품이 세계로 나가는 창구다. 국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나 지상파·케이블 채널이 제공할 수 없는 특장점이다.
실제로 히트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넷플릭스로 쏠리는 현상은 몇 년째 계속돼 왔다. OTT와 기타 채널의 창작 형평성 문제도 꾸준히 제기된다. OTT에선 성인영화 배우가 출연해도, 학생이 칼로 동급생의 목을 찌르는 장면이 나와도 제재 대상이 아니다. 현행 방송법은 변화를 반영하기엔 역부족이다.
넷플릭스 투자 계획을 놓고 ‘원래 예정된 금액인가 아닌가’로 요약되는 말싸움이 뜨겁다. 한데 진짜 중요한 것은 업계 전반에 골고루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챙겨보는 일이다. 10년 뒤, 또 넷플릭스만 웃고 있을 수도 있다.
전영선 K엔터팀장
05.02 ‘작전주’ 세력
한국 주식시장에 ‘작전’이란 용어가 등장한 건 1990년 전후다. 하지만 작전이라 부를 수 있는 주가 조작의 시작은 그보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경제에 산업화 바람이 불고, 강남이 대규모로 개발되던 1970년대. 부동산 투기와 기업 대상 사채놀이로 큰돈을 번 세력은 증시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주식·채권과 단기어음을 중개하는 증권·단자회사를 사들이거나 직접 설립해 돈놀이에 나섰다.
많게는 수백억원을 굴렸던 이들 큰손에게 이제 막 태동한 국내 증시는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을 통틀어 1년 매출이 1000억원이 넘는 회사가 30개 남짓(1979년 기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사면 주가가 올랐고 팔면 내렸다. 건설·제조·식품 등 분야를 넘나들며 주가를 움직였고 막대한 시세 차익을 냈다. 큰손 투자가가 ‘명동 백할머니’나 ‘광화문 곰’ 같은 별칭으로 불리며 증권가에서 이름을 날린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 자본시장이 해외에 개방되기 전이었기에 견제 세력도 없었다.
합법과 불법, 투자와 범죄의 경계는 모호했다. 서로 미리 가격을 정해놓고 사고팔거나(통정매매), 거짓 정보를 흘려 주식을 띄우는 건 당시 증권거래법(현 자본시장법)에서도 금지했지만, 실제 처벌 사례는 미미했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주가 조작 세력의 담합을 잡아낼 정도로 금융당국의 감시망이 촘촘하지 않았다.
극소수 큰손의 전유물이었던 시세 조종 범죄는 1990년대 들어 널리 퍼졌다. 한국 증시의 성장과 맞물려서다. ‘작전주’란 은어가 생겨날 만큼 주가 조작이 빈번해졌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달 24일 외국계 증권사인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이 쏟아낸 매물에 8개 종목 주가가 무너졌다. 며칠 새 수조원 시가총액이 증발하며 개미투자자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 배경에 금융·IT업계 큰손과 연예인, 정·관계 인사 등 대규모 주가 조작 세력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부가 허용한 차액거래결제(CFD)는 사태를 키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문제가 된 종목을 둘러싸고 지난해부터 작전설이 돌았는데도, 금융당국은 이제야 뒷북 대응이다. 허술한 당국의 감시망은 지금이나 수십 년 전이나 다를 게 없다. 그들만의 작전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5.03 테트라포드 주의보
테트라포드(Tetrapod, 네발 방파석)는 방파제에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이다. 파도나 해일을 막는 용도로 1949년 프랑스의 한 회사가 개발했다. 중심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4개의 뿔이 뻗어져 나온 형태로, 하나의 무게는 10~20t 정도다. 수십, 수백개를 넓게 쌓아 배치하면 그 자체로 방파제 역할을 한다. 테트라포드끼리 서로 얽히는 구조여서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수심이 깊거나 경사가 있어도 시공이 쉽다. 가격도 싼 편이라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됐다.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니지만 낚시하는 이들에겐 이만한 유혹이 없다. 바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서다. 사진 한장 찍겠다며 올라서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테트라포드는 보통 기울어져 있다.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둥근 데다 늘 젖어 있거나 이끼가 낀 곳도 많다. 당연히 미끄러지기 쉽다. 테트라포드 하나의 높이는 보통 5m 이상이다. 틈새 사이로 빠지면 크게 다칠 뿐만 아니라, 동반자가 없을 경우 구조 요청 자체가 쉽지 않다. 지난 2월 제주 서귀포시 새섬 방파제 테트라포드에서 마지막으로 휴대전화 위성 신호가 포착된 실종자는 약 3주가 지나서야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근 5년 동안 테트라포드 주변에서 발생한 인명사고는 371건, 사망자는 49명에 이른다. 사고 건수에 비해 사망자가 유독 많다. 2020년 7월부터 테트라포드 출입을 통제하고 어길 경우 1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통제 구역을 대형 항구나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국 8만5000개에 달하는 방파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테트라포드를 해경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쫓아다니며 수시 단속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올해도 사고는 계속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강원도 강릉시 사천진항 인근 테트라포드에서 한 명이 실족사했다. 지난달 1일엔 속초시 한 곳에서만 두 건의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둘 다 크게 다쳤다. 곧 여름이다. 바다 근처엔 사람이 더욱 몰릴 것이다. ‘잠깐인데 어때’, ‘나는 괜찮을 것’이란 방심이 화를 자초하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게 필요하다. 고기 한 마리, 인증샷 한장에 소중한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나.
장원석 증권부 기자
05.04 ‘바퀴벌레’가 된다면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최근 이 질문이 10대들 사이에 대유행 중이다. 느닷없이 부모에게 “내가 자고 일어났더니 1m 넘는 바퀴벌레가 됐어. 근데 영혼은 나야. 엄마(아빠)의 반응은?”이란 기습 카톡을 보내고 답을 채근한다. “왜 그러냐”는 반문에도 “그냥”이라며 막무가내로 대답을 보채고, 답변을 받아내면 온라인에 공유해 또래들과 함께 ‘부모의 정체’를 분석한다.
“파리채부터 찾겠다” “세스코에 문의한다” 등 ‘농담을 다큐’로 받아친 부모는 ‘서운함 유발자’로, “예쁜 케이지에 넣고 애지중지 키우겠다”는 ‘감동 선사형’으로 분류한다. “일단 징그러우니 방에 가두겠다”는 감금형, “어떻게든 사람으로 되돌리겠다”는 복원형 등은 현실파 부모로 나눈다. 부모의 답변을 ‘아무 말 대잔치’ 유희 거리로도 소비하지만, 이를 통해 ‘부모에게 난 어떤 존재인가’를 진지하게 확인하고자 한다.
이 질문의 원조는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다. 소설 『변신』에는 자고 나니 커다랗고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등장한다. 영업사원으로 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벌레가 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도 출근부터 걱정하는 고달픈 인생이다. 하지만 가족은 그를 벌레로 취급하며 감금한다. 소설 말미, 그레고르가 죽음을 선택하자 가족들이 홀가분하게 피크닉을 떠나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다.
한국 10대의 삶 역시 고달프다.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2021년, 한국방정환재단)고, 자살률(통계청)은 전 연령대 중 유일하게 증가세다. 음주와 우울감, 스트레스 지수도 매년 높아진다. 고 이어령 박사는 『변신』을 “지극한 리얼리즘”이라 표현하며 “누구나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 즉 버러지로 여기는 순간을 경험하며, 이때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가치를 복원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부모를 향해 ‘카프카적 질문’을 던지는 10대들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을까. 한 맘카페에선 “엄마가 벌레가 되면”이란 질문에, 8살 아이가 “나도 벌레가 될래”라 답했단 내용이 회자했다. 어떤 상황에도 같은 모습이 돼 곁에 있겠단 의미다. 그레고르의 부모가 이런 마음이었다면 소설의 결말도 상당히 달라졌을 터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5.05(금) 박은빈의 눈물
“여러분의 사랑이 없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는데… 흐흑….”
지난달 28일 59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이날 하이라이트인 TV대상을 받은 박은빈(31)은 수상 소감을 말한 12분 내내 울었다. 그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천재 변호사를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1996년 아동복 모델로 데뷔한 지 27년 만이다. 그는 호명 순간부터 눈물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대상을 받을 수도 있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에서 거의 오열했다. 긴 터널 끝에서 맞은 그의 ‘별의 순간’에 박수가 터졌다.
사흘 뒤 ‘여배우의 품격’ 논란이 일었다. 문화평론가 김갑수(67)씨가 유튜브 방송에서 “울고불고 코 흘리면서”라며 “시상식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 앞에서 감정을 격발해서는 안 된다”고 쓴소리를 했다. 김씨는 박씨를 두고 “품격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며 “심지어 30살이나 먹었으면 송혜교씨한테 배워라. 가장 우아한 모습이 송혜교였다”라고도 했다.
‘공인이라면 감정을 절제·관리하는 게 성숙한 자세’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연예인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의 감정 자제를 강요받는 공직자·정치인조차 솔직한 감정 표현이 종종 도움된다. 2020년 남편의 미국 호화 요트 구매 여행으로 궁지에 몰렸던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국정감사장에서 “남편은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다. 송구스럽다”고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내 상황을 반전시켰다.
김씨의 평가에 대해서도 ‘개인의 감정 관리를 타인이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월권’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우느라 말을 전혀 못 한 것도 아니고, 10분 넘게 스피치를 했는데 무엇이 문제냐”며 “반대로 안 울면 분명 ‘건방지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했다. 재밌는 건 관련 논란 덕에 백상예술대상 유튜브의 피날레 영상 조회 수가 닷새간 555만회를 돌파했다는 점이다. 댓글 대부분이 “진정성이 느껴지는 수상 소감이었다”고 박씨를 옹호했다. 이번에도 역시, 솔직함의 승리 같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5.08(월) 전세 사기
전세가 제도로 자리 잡은 건 1970년대다. 산업화로 한 해 평균 35만 명이 서울로 몰렸지만, 새집은 3만~5만 가구에 그쳤다. 집은 부족했고 값은 치솟았다.
당시 정부는 수출에 집중했다. 은행은 주로 기업에 돈을 빌려줬고 개인은 대출이 어려웠다.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이라는 목돈을 보태 집을 사 시세차익을 기대했고 세입자는 안정적인 거주지를 확보했다.
1980년대 ‘3저 호황’으로 유동자금이 넘쳐나며 전셋값이 뛰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며 전세계약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확대했고 집주인은 전셋값을 앞당겨 올렸다. 서울 전셋값은 1989년 29.6%, 1990년 23.7% 뛰며 유례없이 폭등했다. 1990년 두 달간 17명의 세입자가 전셋값 급등을 비관해 자살하는 ‘전세 파동’이 일었다.
전세는 1998년 외환위기(IMF) 때 다시 사회 문제로 불거졌다. 전셋값이 급락해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발생했다. 2004년 출범한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전세자금대출 보증을 섰고 2005년 금융권 전체가 전세대출을 다뤘다.
‘전세 파동’은 2020년 ‘임대차 3법’ 여파로 재연됐다. 문재인 정부도 세입자 보호를 앞세워 전세거주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전세대출 한도를 집값의 100%로 확대했다. 집주인은 전셋값을 올렸고 세입자는 오른 전셋값을 대출로 충당했다. 전셋값이 떨어지자 다시 역전세난이 왔고 이번엔 전세 사기 피해로 번졌다.
정부가 지난 27일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을 내놨지만, 뒷말이 무성하다. 전세 사기를 사회적 재난으로 본 것도, 지원 여부를 결정할 ‘사기 의도’ 판단 기준도 논란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예방’은 없고 ‘수습’만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세 사기의 가장 흔한 수법인 ‘대출 먹튀’는 여전히 대처 방법이 없다. 세입자는 계약일에 계약금(10%)을 낸 후 실제 이삿날 잔금(90%)을 치를 때까지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도 알 방법이 없다.
유일한 보증금 안전장치인 전세보증보험도 효력이 전입신고일 다음 날 0시부터 생긴다. 이 사이 근저당·압류 등이 진행되거나 집주인이 바뀌면 보증금을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세입자가 원하는 건 사후약방문이 아니라 예방 장치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5.09 후광효과 사기
종교 미술에서 후광(halo)은 성인의 머리를 둘러싼 원형의 빛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에서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로마의 황제에게 후광이 나타났다. 기독교 미술에서 4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에게 둥근 원반 형태의 후광이 표현되기 시작했고, 6세기부터는 성모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에게까지 사용됐다. 불교미술에서 후광은 광배라 한다. 3세기 후반 인도의 불교 미술에 등장한 이후 머리를 둘러싼 두광뿐 아니라 온몸을 둘러싼 전신광에 화염·연화·당초 등 문양이 추가되며 다양하게 발전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후광은 성인들의 몫이었으나 오늘날엔 실생활에 고루 스며들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대에서 상관이 부하를 평가하는 태도를 연구했다. 장교들은 인상이 좋고 품행이 바른 군인은 사격 실력도 뛰어나고 군화도 잘 닦으며 하모니카도 잘 부는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여겼다. 손다이크는 이렇게 하나의 장점을 근거로 모든 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걸 ‘후광효과(Halo effect)’라 정의했다. 여러 가지 특성을 독립적으로 측정하는 대신 일반적인 인상을 기준으로 뭉뚱그리는 심리적 현상이다.
인간은 후광효과에 기대어 평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 지지도가 올라가면 외교·안보·경제 등 분야를 막론하고 평가점수가 고루 상승하는 것도 후광효과다. 명문대 출신은 창업해도 성공 가능성이 더 클 것처럼 보이는 것, 매출이 성장하는 기업은 일하기 좋은 기업 문화까지 갖춘 직장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후광효과로 설명된다.
이미지가 좋은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건 후광효과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전형적 사례다. 후광효과는 사기에도 쓰인다. 가수 임창정씨가 라덕연 R&K 투자자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주가 시세조작단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다 수십억원을 날리고 빚까지 졌다. 임씨는 10분 만에 통장에 25억원을 이체한 라씨의 자금력에 현혹됐다고 한다. 가수는 투자전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투자자 모임에서 라 대표를 “종교”라 추켜세운 임씨의 후광효과에 넘어간 이들이 적잖을 듯하다. 마음 편한 대로 생각하기보다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후광효과에 덜 휘둘릴 터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10 미군 위안부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이 사라진 계기를 이렇게 말한다. “제 딸을 양갈보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쟁 중이었다. 어머니는 맏딸이었던 주인공을 유흥업소로 등떠밀었다. “우리 식군 다 굶어죽었다, 죽었다. 이 독살스러운 년아”라고 외치며.
일본군 위안부만 있었던 건 아니다. 미군 위안부도 있었다. 양공주·양색시·양갈보로 불렸다. 1950년 성매매 여성 수는 15만 명을 넘었고 이 중 절반은 미군을 상대했다. 기지촌(camp town)의 시작이다. 가족부양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던 전란 때와 사정이 달랐다. 정부의 성매매 정당화와 조장 속에서 운영됐다. 과장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이 정부의 기지촌 운영을 그렇게 판단했다. 왜 그랬을까.
미군 위안부는 가난한 나라의 달러벌이 첨병 중 한 무리였고, 미군 철수를 시사하는 닉슨 독트린이 나왔을 때 주한미군을 묶어둔 병참이어서다.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에게 영어도 가르쳤다. 강사는 위안부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의실 밖에선 힘없는 말이었다. 한때 최대 기지촌이 있었던 파주 용주골 주민을 인터뷰한 논문 ‘왜 미군 위안부는 잊혀야 했는가’를 보면, 주민들은 위안부로 오해받기 싫어 그들을 피해 주로 이른 아침 목욕탕에 갔다고 한다. 위안부들은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후에 목욕탕을 와서다. ‘애국자’라는 호칭과, 그들이 받았던 암묵적 괄시의 간극은 컸다.
지난 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미군 위안부를 다뤘다. 신문사 홈페이지엔 “국가가 후원하는 성노예제가 오래 지속됐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댓글이 달렸다. 외부 시선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한국인에게 미군 위안부는 여전히 낯선 단어다. “자발적 성매매 아니었냐”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론 일자리 소개소를 찾았다가 인신매매된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엔 핏대를 세운다.
한국 정부 책임이 큰 미군 위안부 문제엔 조용하다. 암묵적 괄시는 계속되고 있는 것만 같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5.11 GOAT의 몸값
GOAT는 ‘역대 최고의 인물’을 일컫는 영어 표현(The Greatest of All Time)의 약자다. 염소를 의미하는 영어단어와 일치해 염소 사진이나 그림으로 대체해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스포츠 종목에서 압도적인 발자취를 남긴 선수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사용한다.
GOAT는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를 지칭하는 수식어로 1990년대 미국에서 처음 사용됐다. 알리의 가족이 초상권 등 알리의 지적재산권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의 명칭이 ‘G.O.A.T 주식회사’다. 이 표현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건 지난 2000년 래퍼 겸 배우 LL 쿨 J가 발표한 곡 ‘The G.O.A.T’가 흥행한 이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이후 종목별로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선수들이 GOAT로 불리기 시작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농구)을 비롯해 ‘전설의 쿼터백’ 톰 브래디(미식축구), ‘빙판의 영웅’ 웨인 그레츠키(아이스하키), ‘홈런왕’ 베이브 루스(야구),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골프) 등이 대표적이다.
축구에선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GOAT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축구선수 최고의 영예인 발롱도르상 수상 횟수부터 각종 국제대회 성적, 통산 기록, 심지어 기부 액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선의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10여 년 넘게 이어진 두 선수의 경쟁은 지난해 카타르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메시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축구 GOAT’ 자리를 꿰찬 메시가 최근 이적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제시받은 연봉은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클럽 알힐랄이 2년간 총액 6억 유로(약 8700억원)를 부르며 러브콜을 보냈다.
라이벌 호날두가 앞서 또 다른 사우디 클럽 알나스르에 입단하며 보장받은 금액(4억 유로, 5800억원)을 3000억원 가까이 뛰어넘은 거액이다. 이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외신 보도를 메시 측이 부정하며 관련 이슈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추후 재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돈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겠으나 드러난 숫자만으로도 ‘GOAT 메시’의 가치와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5.12(금) 국회의원 재산공개
17억7822만6070원.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자신과 직계가족의 재산을 자진 공개했다. YS는 대선 기간에 국회의원과 1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도 약속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총리와 부총리, 감사원장도 뒤이어 재산을 공개했다. 여당인 민자당도 소속 의원 등의 재산공개를 결의했다. 사달은 국가 의전서열 순위 2위인 국회의장에게서 났다. 박준규 국회의장은 41억원을 신고했다. 그러나 아들이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아들 이름으로 여러 차례 토지를 구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그는 결국 민자당을 탈당했다. 국회의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가 YS에게 서운함을 전하며 남긴 사자성어가 유명하다. 신발을 신은 채 발바닥 가려운 데를 긁는다는 뜻의 ‘격화소양(隔靴搔痒)’이다.
YS 취임 직후 불거진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은 1981년 제정된 공직자윤리법의 전면 개정으로 이어졌다. 여야는 만장일치로 정무직 공무원의 재산공개와 4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했다. 같은 해 9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부의 1급 이상 고위공직자 1167명의 재산이 고시됐다. 후폭풍은 계속됐다. 각각 27억원과 19억원을 신고한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이 투기 의혹을 받아 사흘 간격으로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르는 동안 공직자윤리법이 규정하는 공직자의 등록대상 재산 항목은 꾸준히 정비됐다. 부동산과 현금, 예금뿐만 아니라 주식·보석류·골동품·회원권 등 10여 가지에 이른다. 조만간 가상자산도 추가될 전망이다. 여야는 11일 암호화폐를 공직자 재산등록 대상에 추가하는 법안 심사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에게 제기된 최대 60억원어치의 암호화폐 보유 논란 때문이다. 김 의원이 해명에 나섰지만 과거 검소함을 강조하던 발언과 대비되며 ‘서민 코스프레’라는 야유가 쏟아진다.
“지난날 왜 우리 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까. 국민은 겉과 속이 다른 정당과 정치인을 믿지 않습니다.”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이 한창이던 1993년 4월 YS가 한 말이다. 30년이 흘러도 정치의 속성은 나아진 것이 없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5.15(월) 소주 한 잔
‘소주 한 잔’은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발 폭락 사태에 연루된 임창정의 대표곡이다. 임창정 10집 ‘바이’의 타이틀 곡으로 지난 20년간 사랑받아왔다.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라는 애절한 가사를 그가 썼다. 임창정은 걸그룹 제작 등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서라면서 2018년 이 곡의 권리 일부를 저작권 거래 플랫폼 뮤직카우에 넘겼다. 뮤직카우에 따르면 이 노래의 저작권 한 조각(총 5100조각 발행)을 갖고 있으면, 연간 2599원(지난 1년 기준)을 받을 수 있다. 단순 계산하면, 이 한 곡이 지난 12개월 뮤직카우를 통해 거둬들인 저작권료는 약 1325만원에 이른다.
SG사태에서 임창정의 진짜 역할이 의심받는 만큼 ‘소주 한 잔’이 계속 사랑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저작권료가 연금처럼 꾸준히 입금될 것이라고 믿고 투자했던 이들에겐 비보다. 불미스러운 사건 공개 전 좋은 가격(정확한 액수는 비공개)에 저작권을 처분한 임창정은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권리를 다양하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창작물 무단 이용을 막는 것은 창작 동기를 부여하고, 예술을 발달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임창정처럼 창작물을 통째로 넘겨 목돈을 확보하는 사례가 흔하다. 음악 산업이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저작권 활용 방법이 많아진 덕이다. 올 초에도 미국 팝스타 저스틴 비버가 음악 저작권 290개 이상을 음악 판권 업체에 무려 2억 달러(약 2467억원)에 넘겨 화제가 됐다.
저작권의 가치 상승은 창작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옥죄기도 한다. 최근 영국 가수 에드 시런은 히트곡 ‘싱킹 아웃 라우드’(2014)가 미국 소울 가수 마빈 게이의 ‘렛츠 겟 잇 온’(1973)을 베끼지 않았다는 판결을 6년 만에 받아냈다. 이 소송은 게이와 곡을 공동 제작한 에드 타운젠드의 저작권 상속자인 딸 등이 시런에게 수익 분배를 요구하면 시작됐다.
천문학적 저작권료가 걸린 팝 업계에서 이런 다툼은 자주 발생한다. 진짜 음악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표절 시비도 태반이라 창작자들 사이 우려도 나오지만, 큰돈이 걸려 있으니 소송이 줄어들 가능성은 적다. 음악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도, 곧 경험할 미래다.
전영선 K엔터팀장
05.16 전기세와 전기요금
한국전력공사나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단번에 발끈하게 만들 수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전기세다. 이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요금이다. 세금이 아니다”란 답이 돌아올 거다.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그렇다고 전기세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당당히 등재된 정식 용어다. ‘전기료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뜻풀이와 함께다. 전기를 사용한 만큼 한전에 내는 요금일 뿐인데 나라에서 거두는 세금 비슷한 반열에 올랐다. 이유가 있다.
‘전력통계월보’를 보면 올 3월 기준 주택용 전기를 쓰는 곳은 1583만 호에 이른다. 상점이나 사무실, 공장에서 쓰는 일반용(350만 호)·산업용(44만 호)에 농사용·교육용·심야 전기까지 더하면 부과 대상은 전 국민이나 다름없다. 세목 중 납부 인원이 가장 많은 종합소득세(2021년 911만 명)도 못 따라갈 수준이다.
요금 산정 방식도 세금 못지않다. 생활과 산업 전반에 필수인 전기는 공기업인 한전이 독점해 공급한다. 이런 특징 탓에 요금을 바꾸려면 법에서 정한 원칙을 따라야 한다. 기획재정부와 논의해야 하고 산업부 인가도 필요하다. 법에도 없는 중요한 절차는 또 있다. 여당과의 협의다.
15일 한전과 산업부는 전기요금을 ㎾h당 8원 올린다고 의결했다. 그런데 하루 전인 14일 여당인 국민의힘 관계자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이 먼저 공개됐다. 전기요금 ‘칼자루’가 누구 손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 정부나 현 정부 때나 정치권 행태는 크게 다를 게 없다. 원가(연료비)에 못 미치는 요금에 ‘묻지 마’식 신재생에너지 투자 등으로 한전 적자는 수십조 단위로 불어났지만, 내년 총선 표를 의식해 찔끔 인상을 허락했을 뿐이다. 한전 적자를 불리는 데 큰 몫을 한 정부도 못 이긴 척 따라가는 중이다. 민간회사라면 이미 망하고도 남을 규모의 빚을 진 한전은 공기업이란 방패 뒤에 숨어 생색내기 자구책만 내고 있다.
한전 재무구조가 파탄 나면 결국 ‘진짜’ 세금을 내서 메워야 한다. 수십조 적자를 낸 한전이 멀쩡히 채권을 발행하고 있는 것도 국가가 보증한 덕이다. 전기세나 전기요금이나 다를 게 없는 국민만 여러모로 덤터기를 쓰게 됐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5.17 청빈 호소인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학문이 뛰어났지만 지독한 가난으로도 유명했다. 워낙 가진 게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이 허다했는데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논어』 옹야편엔 공자가 이런 안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살면 다른 이는 근심을 견디지 못할 진데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으니 참으로 어질다.” 청빈한 선비를 이르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이 여기서 나왔다.
공직자 재산공개 첫해였던 1993년 조무제 전 대법관은 신고 대상 고위법관 103명 중 꼴찌를 했다. 당시 그의 재산은 2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포함해 겨우 6400만원이었다. 5년 뒤 대법관에 임명될 때도 7200만원에 불과했다. 퇴임 후엔 ‘전관’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교수직을 택했다. 법원조정위원으로 근무할 때는 일에 비해 수당이 너무 많다며 삭감을 요청한 적도 있다.
꼭 가난해야 청빈한 것은 아니다. 김장하 전 진주 남성당한약방 원장은 부자여도 재물이 목적이 아닌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그는 한약방을 하며 번 100억원 넘는 돈을 수십 년에 걸쳐 아낌없이 나눴다. 지역사회 고학생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을 도왔고, 차별과 불평등이 있는 곳엔 어디든 나섰다. 자신을 위해 남긴 건 작은 집과 허름한 양복 몇 벌이었다.
청빈의 형태는 다양해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있다.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길 뿐, 절대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족한 환경조차 충분하다 여겼던 안회는 결국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 대법관은 ‘딸깍발이 판사’란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법관이 그런 식으로 포장되는 걸 경계해서다. 김 원장은 자신을 알리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 연초 김 원장의 일생을 다룬 책이 출간됐는데 제목부터 『줬으면 그만이지』다.
청빈 호소인의 등장은 그래서 생경하다. 매일 라면을 먹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20년 동안 같은 안경을 쓰고, 아버지가 물려준 차를 탈 만큼 아끼고 살았다던 한 국회의원이 가상화폐 투자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 됐다. 현대판 단사표음인 줄 알았는데 계좌에 수십억을 쌓아둔 걸 보면 돈이 없어 라면을 먹은 건 아닌 듯하다. 사법적 판단은 둘째 치고 가난을 모독한 죄는 형량이 꽤 길 것 같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5.18 닐리와 페니
조던 닐리(30)는 뉴욕의 유명인사였다. 타임스퀘어 근처에서 마이클 잭슨처럼 차려입고 춤추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춤 실력보다 지하철 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2016년엔 지하철 여직원이 혼자 일하던 사무실 문을 내리치며 “죽이겠다”고 위협한 뒤 사라졌다. 2021년엔 하차하던 67세 여성을 이유 없이 주먹으로 때려 코뼈를 부러뜨렸다.
닐리는 정신질환이 있는 노숙자로, 10년간 마약·구타 등으로 40번 넘게 체포된 적이 있어 뉴욕시의 ‘긴급 지원이 필요한 노숙인 50인’ 명단에도 올랐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뉴욕 거리와 지하철을 배회하는 전형적인 정신질환자”라 전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닐리는 여느 때처럼 지하철에서 소란을 피웠다. “배가 고프다. 감옥에서 종신형을 받아도 좋고 죽을 준비도 됐다”며 소리 질렀다. 승객들은 불안해했지만 닐리를 말릴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닐리의 목을 누르고 제압했다. 해병대 출신의 백인 청년 다니엘 페니(24)였다. 그는 군에서 모범 메달 등 여러 번 상을 받았고, 전역 후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 중이었다. 페니가 제압한 지 2분여 만에 닐리는 사망했고 페니는 2급 살인으로 기소됐다.
페니는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려던 의인일까, ‘배고픈 취약계층’에 과잉 반응한 살인자일까. 미국 진보 진영은 페니를 “살인자”라며, 그의 옹호자들을 “역겹다”고 일갈했다. ‘백인의 흑인 살해’라는 인종차별 논란도 불붙었다. 반면 보수는 그를 “지하철 영웅”이라 치켜세우며 “그가 처벌받으면, 앞으로 미국에선 누구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거나 범죄 행위를 막으려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뉴욕타임스는 ‘법치의 실패’라 지적했다. 정신질환자를 보호조치 없이 지하철에 탑승하게 두고, 소란을 피워도 저지하지 않았으며, 승객 안전 확보에도 소홀한 ‘제도적 구멍’이 페니 같은 시민의 개입을 불렀다는 의미다.
뉴욕시엔 조현병·우울·양극성 장애 등 중증 정신질환자가 20만 명이 넘고, 이 중 5%가 노숙자다. 대다수 뉴욕 시민은 지하철 등에서 이들이 던진 주스병에 맞거나 머리채를 잡히는 등 괴롭힘을 당한 경험을 호소한다. ‘닐리의 죽음’을 통해 시민이 원한 건 페니의 악마화도 영웅화도 아닌 ‘공공의 역할’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5.19(금) 코인 읍참마속
김남국 무소속 의원은 지난 2021년 민주당 대선 순회 경선장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웬 젊은 남성이 일찌감치 영상 송출 장비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 시설과 음향을 일일이 체크하길래 ‘어느 캠프 실무진인가’ 하고 봤더니 당시 이재명 캠프 수행실장이던 김 의원이었다. ‘현역 의원이 뭘 저렇게까지’ 싶어 주변에 물었는데, “이재명이 가장 편하게 일을 맡기는 의원이 김남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날 김 의원은 후보의 연설 자료 파워포인트(ppt) 영상을 한장 한장 손수 클릭해 넘겼다.
이듬해 들어선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김 의원은 당 주류로 승승장구했다. 1982년생 초선 신분으로 지난해 9월 중앙당 요직 중 하나인 당 제3사무부총장(미래부총장)에 발탁됐다. 원조 친명계로 불리는 ‘7인회’ 중 몇몇이 이 대표와 소원해졌다는 평가를 받을 때도 김 의원만은 건재했다. 지지층에서 ‘바보 형’으로 불린 그는 지난해 말 당내에 퍼진 ‘이재명계 분열설’을 이렇게 앞장서 무마했다. “저녁때 갑자기 (친명계) 번개 하자고 해서 모였는데 많이 모여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었다.”
그랬던 김 의원이 최근 거액의 코인 투자로 이 대표에게 메가톤급 악재를 투척했다. 성실하고 순진한 이미지를 뒤로하고 상임위 회의 도중 치밀하게 코인을 거래, 투기성 부를 축적한 정황에 국민적 분노가 일고 있다. 본인 해명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코인 투자 열풍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직장인들은 “바보 형의 탈을 쓴 ‘코인 천재 형’이었다”고 김 의원을 조소한다. 야권 일각에서는 겉과 속이 달랐다는 점에서 ‘내로남불’ 조국사태의 재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 의원을 적기에 읍참마속(泣斬馬謖)하지 못한 이 대표가 정치적 책임론에 휩싸이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다. 이미 진영 내에서조차 “처음부터 대응이 너무 안일했다”(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 “읍참을 하려면 단칼에 해야 한다”(조응천 민주당 의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김 의원은 수행실장 시절 야권 강성 지지층 성지인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방송에 나가 “유세 일정 내내 단 한 번도 내게 화내거나 짜증 낸 적 없다”고 이 대표를 추켜세웠다. 최측근에게 화내지 않는 제1야당 대표가, 되레 국민의 화를 돋워 위기를 맞은 형국 같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5.22(월) 신용 위임의 덫
신용은 일정 기간 지급을 연기하고 재화·서비스를 살 수 있는 능력이다. 현대 사회에선 쌀·금 같은 현물이 아닌 신용으로 거래한다. 예컨대 음식점에서 값을 치르기 전에 가게 주인이 음식을 먼저 내오는 데는 손님에 대한 믿음이 깔렸다.
신용의 역사는 화폐보다 길다. 그 옛날 신석기 시대, 파종기에 씨앗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그보다 많은 씨앗을 돌려받기도 했다.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론 제1왕조 제6대왕인 함무라비의 성문 법전엔 곡식과 은의 대출 연간 최고 이자율이 각각 33.33%, 20%로 적혀 있다. 신용 거래에 대한 이자 규제다.
SG(소시에테제네랄) 증권발 무더기 하한가 사태 파문이 계속되고 있다. SG증권이 주가를 조작한 것으로 알려진 8개 종목의 시가총액은 20여일 만에 13조원이 증발했다.
증권업계는 납작 엎드려있다. 금융당국이 차액결제거래(CFD) 등 최근 10년간 증권사 거래 전수 조사, 압수 수색까지 나서면서다. 투자자들은 증권사를 대상으로 집단 소송에 나섰다. 주가 조작에 쓰인 CFD를 본인 확인 없이 개설했다는 이유다.
그런데 증권사만 조르는 상황이 석연찮다. 우선 이번 사태의 판은 2019년 금융당국이 깔았다. 전문투자자만 만들 수 있는 CFD 개설 요건을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금융투자상품 잔액 기준 5억원→5000만원, 재산가액(순자산) 10억원→5억원 이상 등으로 대폭 완화했다. 2017년 1219명이었던 개인 전문투자자는 2021년 2만4365명으로 20배 증가했다.
더구나 주가 조작의 중심에는 ‘신용 위임’이 있다. 투자자들은 대박에 대한 기대로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SG증권에 건넸다. “(CFD를 통한) 주가 조작에 쓰일 줄 몰랐다”고 하지만 ‘대포폰’ ‘대포통장’을 넘겨준 셈이다. 내 신용이 주가 조작뿐 아니라 ‘어디에든’ 쓰일 수 있었다. ‘본인 확인 수단’을 모두 증권사에 건네고 ‘본인 확인을 하지 않았다’며 탓하는 모양새다. 최악의 주가 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2007년 루보 사태 때도 9만 명이 2조원의 피해를 보았다. 당시 다단계 기업인 제이유는 700개의 차명 계좌를 주가 조작에 사용했다. 금융당국도, 증권사도 보호막일 수 없다. 내 신용, 내 자산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5.23 가짜뉴스
미국에서 낙태는 첨예한 이슈다. 지난해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금지법은 위헌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후 공화당이 강한 주에서 낙태금지 강화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병원 밖의 낙태 시술로 숨지는 산모는 전체 산모 사망의 약 4.7~13.2%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어떤 언론사가 ‘낙태가 산모 죽인다- 산모 사망 최대 13.2%가 낙태 탓’이라고 부풀리는 기사를 썼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 뉴스를 참이라고 생각할까, 거짓이라고 생각할까.
미국 보스턴대 등의 연구진들은 이런 식으로 과학적 사실과 왜곡된 기사를 함께 제시한 뒤 언론사 출처를 임의로 달아 피험자들이 이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조사했다. 똑같은 뉴스를 두고도 본인과 정치적 관점이 다른 매체라고 표기했을 때 거짓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진짜 가짜를 판단하는 데에도 개인의 편견이나 정치적 성향이 개입한다는 의미다.
가짜뉴스(fake news)가 전 세계적 문제가 된 건 2016년 미국 대선 때부터다. 진짜 언론사 뉴스처럼 꾸민 후보 비방 정보물이 SNS 등에서 대량 유통되면서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대선전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 비판적인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공격했다. 가짜뉴스의 프레임을 기성 언론에 씌운 것이다.
국제연합(UN) 등 4개 국제기구는 2017년 “가짜뉴스라는 모호한 개념에 근거한 규제는 표현의 자유 제한에 대한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018년 유럽위원회도 ‘허위정보에 대한 다차원적 접근’이라는 보고서에서 ‘가짜뉴스’ 대신 ‘허위정보(disinformation)’라는 용어를 쓰도록 권고했다. 이미지·동영상 등 허위정보의 유형은 다양하다. 유럽위원회는 가짜뉴스라는 용어는 거짓 정보가 뉴스에 국한된 것으로 오인하게 할 소지가 있고, 여러 정치인이 자신에 불리한 보도를 가짜뉴스라 공격하며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최근 가짜뉴스 피해신고 상담센터가 설치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4·19 기념식에서 “가짜뉴스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언급한 지 하루 만에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가짜뉴스 퇴치 총력전’의 일환이다. 가짜뉴스 정의부터 다시 하길 바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5.24 여든의 열정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1990년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을 때 이런 소감을 남겼다. “내가 영화의 본질을 아직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부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영화를 만들면서 본질을 이해해보겠다.”
‘지금부터’라니. 당시 그의 나이 여든이었다. 노감독은 자신이 가장 빛났던 때를 곱씹는 것으로 여생을 채우는 대신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해 공개된 ‘꿈’은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는 패기와 저무는 것의 처연한 아름다움이 함께 담긴 영화였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최근 ‘데드라인’과 인터뷰에서 당시 기억을 언급했다. 구로사와가 “나는 이제야 영화의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코세이지는 “지금에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했다. 그의 나이 여든하나. 그는 ‘여전히 다음 작품을 찍을 열정이 남아 있나’라는 질문에 “그렇다.
8주 동안 쉬면서 동시에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라며 “(영화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이제야 이해한 여든 구로사와의 ‘늦었다’는 마음은 체념이 아니라 갈급이었다. 스코세이지의 새 영화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지난 20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구로사와에게 평생공로상을 건넨 시상자 스티븐 스필버그·조지 루카스 감독도 곧 여든이다. 그래도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 둘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을 제작했다. 마지막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다.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 시리즈 첫 주연을 맡았을 때가 서른아홉이었는데 여든하나가 됐다. “총도 아홉 번이나 맞았어. 그러면서도 난 평생 이걸 찾아 헤맸어.” 예고편 대사다. 산수(傘壽)를 넘어서도 자신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영화를 찾았던 포드 그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
지난 19일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포드는 “나이가 드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여전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몸은 시간 앞에 무너지겠지만 마음도 그러리란 법 있나. 열정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든이 넘어도 ‘영광의 시대’는 바로 지금일 수 있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5.25 ‘언더독’ 너기츠
미국 중서부 콜로라도주(州)의 주도인 덴버는 뉴욕이나 LA처럼 국내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선 도로 및 항공 교통의 요지로 유명하다. 요즘엔 프로 스포츠팀의 연고지로 이름이 났다.
덴버라는 지명은 1858년 시 출범 당시 속해 있던 캔자스주의 주지사 이름(제임스 덴버)에서 따왔다. 하지만 덴버 주지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재임 기간 중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덴버는 로키산맥 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해발고도 1600m의 고산 도시다. ‘마일 하이(mile-high) 시티’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금강산 꼭대기쯤에 도시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부 개척시대에는 금광업이 성행해 골드러시의 주요 근거지로도 주목받았다.
물 맑고 공기 깨끗한 산악 도시인만큼 각종 겨울 스포츠 및 클라이밍 시설뿐만 아니라 노인과 환자들을 위한 요양 관련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미국 사회에서 덴버는 ‘깨끗하고 조용한 산속 도시’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렇듯 평온한 덴버를 뜨겁게 달구는 콘텐트는 다름 아닌 스포츠다. 3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바탕으로 미식축구(덴버 브롱코스), 야구(콜로라도 로키스), 아이스하키(콜로라도 에벌랜치), 농구(덴버 너기츠) 등 북미 4대 프로 스포츠팀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미식 축구팀이 지역 스포츠 붐을 주도하는데, 올해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농구팀 너기츠가 창단 이후 최초로 올 시즌 미국프로농구(NBA) 파이널에 진출하며 농구 열풍을 몰고 왔다. 너기츠는 1967년 창단해 1976년 NBA 무대에 합류했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흘렀지만 단 한 번도 래리 오브라이언(NBA 우승 트로피의 별칭)을 품어보지 못했다.
올 시즌은 첫 우승의 호기다. 결승 진출 문턱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은 농구 명가 LA레이커스를 서부 콘퍼런스 파이널에서 4전 전승으로 제압하며 기세를 높였다. 당초 너기츠를 레이커스의 들러리쯤으로 여기던 미국 언론도 비로소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을 정도다.
덴버는 보스턴 셀틱스와 마이애미 히트가 맞붙은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 승자와 우승을 다툰다. 미국 사회의 ‘언더독’인 덴버, 그 덴버의 프로 스포츠 중 ‘언더독’인 너기츠에 해 뜰 날이 다가오고 있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5.26(금) 수박 논쟁
수박은 예부터 ‘자손만대(子孫萬代)’의 의미를 지녔다. 씨가 많은 것은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만대는 덩굴의 한자어 만대(蔓帶)와 발음이 같다. 만대(萬代)에 이르도록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8폭짜리 ‘초충도(草蟲圖)’ 병풍 한 폭에 수박을 그려 넣었다. 신사임당은 상징적인 의미가 큰 식물·곤충·동물을 소재로 한 ‘초충도’를 여러 점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수박과 들쥐’ 그림에서 자손만대를 축원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다.
귀하고 값비싼 수박은 조선시대 임금님 진상품 중 하나였다. 진초록색 껍질에 줄무늬가 없는 무등산 수박은 보통 수박보다 두세 배 크고 단맛이 풍부해 진상품으로 이름을 날렸다. 경남 함안과 전북 고창은 오늘날 대표적 수박 산지다. 계절 따라 봄 수박은 함안, 여름 수박은 고창 수박이 유명하다.
함안 지역은 1800년대부터 수박 재배를 시작했다.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일조량이 어우러져 수박의 당도가 높다. 고창은 1970년대 산지를 개간한 곳에 수박을 심었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인 고창은 야트막한 산들이 많다. 물이 잘 빠지는 토양으로 바꿔 배수가 중요한 수박 농사에 성공했다. 고창에선 “물 대신 수박을 먹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수박의 과육은 90%가 수분이다. 『동의보감』은 수박이 입 안이 허는 구내염에 좋다고 소개했다. 그 방법은 “수박 속의 물을 천천히 마시라”다.
맛도 좋고 쓰임새도 많은 수박이지만 정치권에선 찬밥 대접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선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자들이 비이재명계 의원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이들은 비명계 의원들의 지역구까지 찾아가 수박 깨기 퍼포먼스를 벌인다. ‘전국수박생산연합회’ 이름으로 비명계 의원들의 생일 축하 현수막을 국회 앞에 내걸기도 한다. 이재명 대표가 24일 유튜브 방송에서 “‘수박, 수박’ 하지 말자니까요”라고 호소했지만 두고 볼 일이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바야흐로 수박 철이 다가오고 있다. 민주당 내에선 당 혁신방안을 놓고 계파 간 신경전도 고조되고 있다. 과일은 제철 과일이 최고다. 철 지난 과일은 맛이 없다. 수박 논쟁도 한철이어야 한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5.29(월) 중소돌의 기적
‘중소돌의 기적’은 K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4인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가 얻은 수식어다. 지난해 11월 데뷔한 이 팀이 주목받은 가장 큰 이유는 4대 기획사(하이브·SM·JYP·YG) 쏠림 현상 속에서 오랜만에 나온 중소업체 성공 모델이기 때문이다. 4대 기획사 아니면 연습생 구하기조차 힘들다는 요즘, 음악 중소기업이 취할 수 있는 차별화된 전략을 제시한다.
무결점 비주얼과 완벽한 스타일링, 숨 쉴 틈 없는 춤을 보여주는 K팝은 ‘비싼 장르’다. 완성도를 위해 좋은 자원을 아낌없이 투입한다. 이렇게 해야 팬덤이 모이고, 핵심 팬덤이 단단할수록 안정적인 음반 매출과 상품 판매를 기대할 수 있다. 데뷔 전 오랜 연습 기간도 모두 비용이다. 돈 써야 할 곳은 많고, 잘 될 확률은 매우 낮아 더 큰 비용을 쓰면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구조로 진화해 왔다. 이렇게 준비해도 이른바 ‘망돌’이 되는 것은 순간이다. 이럴 경우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피프티 피프티’는 처음부터 이 게임에서 빠져버렸다. 1990년대 한국 발라드 전성기에 일을 시작한 환갑의 경영진이 세운 신생 기획사 어트랙트는 현재 유행하는 K팝 문법으로 말하지 않는다. 여러 장르를 혼합하지도 않고, 오래전 나온 음악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행가스럽다’. 결과적으로 진입 장벽 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특징이 생겼다. ‘큐피드-쌍둥이 버전’(영어버전)이 틱톡 유행을 타고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한 뒤 9주 연속 머무르는 기록을 써 가는 중이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영상 등에선 기존 K팝 팬이 아닌 일반 청자의 반응을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K팝은 몰랐는데 딸이 소개해줘 잘 듣고 있다’는 내용이 다수다. 피프티 피프티는 국내에서 성공을 증명한 걸그룹만이 해외로 갈 수 있다는 상식도 깼다. 해외에서의 인기로 국내 음원 차트에 역수입돼 상위권에 올라있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이들이 다음 앨범에도 똑같이 성공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대중음악 산업에서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 좋은 사례라 의미 있다. 앞선 K팝 그룹의 성공 공식은 참조 대상일 뿐, 각자 가야 할 길은 어차피 모두 다르다는 교훈도 남겼다.
전영선 K엔터팀장
05.30 출산 파업과 외국인 가사근로자
한국 사람은 ‘출산 파업’ 중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이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아이 수를 말하는데, 남녀 20명이 다음 세대엔 7~8명이 된다는 의미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만이 세운 대기록이다.
아직 최악은 오지 않았다. 올해 1~3월 합계출산율이 0.81명으로 반등했지만 같은 기간만 놓고 보면 역시 최저다. 연말보다 연초에 아이를 낳길 선호하는 문화 탓이다. 연간 합계출산율은 지난해보다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재앙이다.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통계를 낼 때 가임 여성은 15세에서 49세 사이로 본다. 올해 4월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기준으로 1127만 명 정도다. 그런데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를 보면 10년 안에 1000만 명 선이 깨지고 2040년 850만 명, 2060년 535만 명으로 내려앉는다. 지금 출산율을 유지하더라도 엄마 수가 반 토막이라 태어나는 아이 수도 절반이다. 출산율이 더 떨어진다면 출생아 수도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난 28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한국 경제 성장을 가로막을 최대 위험으로 인구 문제를 지목한 이유다. 고용노동부가 이르면 올해 하반기 ‘외국인 가사근로자’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한국인과 중국 교포(조선족),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만 가능했던 돌봄·가사 취업 문호가 크게 열린다. 필리핀에서 온 돌봄 선생님, 베트남 국적의 가사관리사를 곧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고용부는 25일 관련 토론회를 열었는데 역시나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내국인 일자리 잠식, 처우와 임금 문제, 인권 침해 등 부작용이 예상됐다. 이를 예방할 대책은 아직 공란이다.
오랜 기간 외국인 가사근로자를 허용한 홍콩·싱가포르에서 출산율이나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도 걱정을 키운다. 이민정책 대수술이란 정공법은 피한 채 저출생 대책 ‘포장’만 씌운 설익은 정책 티가 풀풀 난다.
시험 시간 내내 딴짓을 하다 종이 울리니 오답인 줄 알면서도 급하게 써내는 수험생이나 다를 게 없다. 미국 문학평론가 헨리 루이스 멩켄이 한 말을 되새겨볼 때다. “모든 문제엔 쉬운 해결책이 있다. 단순하고 그럴듯하지만 잘못된.”
조현숙 기자
05.31(수) 부산의 기세
‘기세(氣勢)’는 기운차게 뻗치는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 스포츠에서 경기 흐름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인다. 이 단어가 올해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응원 문구가 됐다. 이런저런 설명 없이 백지 위에 큼지막하게 쓴 ‘기세’ 두 글자를 관중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출발점은 구단 유튜브에 올라온 한 영상이었다. “마운드에서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을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한 신인 투수의 질문에 베테랑 투수 김상수는 “기세”라고 간단히 답했다. 이어 “홈런 맞는다고 안 죽는다. 두려워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이언츠는 야구를 ‘잘’하는 팀이 아니다. 10개 구단 중 우승한 지 가장 오래된 팀이지만 이름 자체가 비효율 야구를 뜻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홈런 치고 부산갈매기 한 번 부른 뒤 역전당하는 야구’라는 말이 있을까. 그랬던 자이언츠가 올해는 강팀 SSG·LG와 1위 경쟁을 하고 있다. 6월이 됐으니 봄에만 잘한다는 ‘봄데’란 조롱도 이번엔 안 통한다.
뜯어보면 더 신기하다. 팀 타율은 중간이고, 홈런은 가장 적은데 득점권 타율이 2위다. 기회 때 집중했다는 의미다. 실책 역시 10개 구단 중 가장 적다. 화끈하지만 이기는 야구와 거리가 멀었던 팀이 이례적인 효율 야구를 선보이고 있다. 적어도 현재까진 그렇다.
자이언츠의 최근 5년 성적은 7위-10위-7위-8위-8위였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이대호라는 수퍼스타가 은퇴했지만, 그의 대체재는 없었다. 대신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핵심 포지션을 보강했고, 다른 팀이 재계약을 꺼린 노장 선수를 대거 영입해 빈틈을 메웠다. 오히려 이게 한두 명의 스타만이 아니라 대체로 잘하는 팀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자이언츠의 성적이 좋으니 ‘구도(球都)’ 부산도 들썩이는 모양이다. 부산은 올해 야구보다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11월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가 결정되는데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2파전이다. 사우디의 막강한 자본력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승부였지만, 많이 추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객관적인 전력이 앞서는 팀과 싸울 때 필요한 건 기세, 상대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기세다. 엑스포 유치전에서도 역전승이 나올 수 있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