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6]
2022.12.27
[51] 12월 하순 유대인 축제 하누카의 유래와 의미
‘유대인의 크리스마스’ 하누카, 백악관서도 매년 기념행사

▲백악관, 하누카 상징 촛대에 불붙이며 유대인 명절 축하 - 지난 2010년 12월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연례 하누카 축하 행사에서 유대인 소년 벤 레티크가 촛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버락 오바마(오른쪽에서 둘째) 당시 대통령과 부인 미셸 오바마(오른쪽에서 셋째) 여사, 조 바이든(현 대통령·맨 오른쪽) 당시 부통령이 나란히 서서 지켜보고 있다. 촛대에 불을 붙이는 의식은 하누카 풍습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로 꼽힌다. 백악관은 해마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하누카 축하 행사를 개최해왔다. /백악관
한국계 랍비 앤절라 북덜(Angela Buchdahl)은 2014년 12월 백악관에서 열린 하누카 행사에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은 진정으로 종교의 자유와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한 기회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2014년에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랍비’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에서 메노라(촛대)에 불을 붙일 것이라고는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하누카 행사를 시작했다.
헬레니즘에 맞서 히브리즘 지키다
하누카의 유래를 살펴보자. 유대 민족이 역사의 굽이 굽이에서 마주쳤던 역경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마술처럼 그리스 문화에 동화시켰던 헬레니즘의 거센 바람 앞에 히브리즘을 지켜내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속국인 유다를 정복했다. 그 10년 뒤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그의 지휘관들은 제국을 셋으로 분할해 통치했다. 그리스 본토 마케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노스 왕국, 이집트 방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페르시아 중심지에 들어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이다. 그 뒤 더 분열되기도 했지만 크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양강 구도가 정착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은 후 유다를 점령해 자치령으로 삼았다.

▲유대인 명절 하누키를 상징하는 촛대 ‘메노라’. 가운데 기다란 촛불 양옆으로 여덟 개의 촛대가 있는 것은 예루살렘 탈환을 기념해 신전에 밝힌 등불이 8일간 타올랐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 충격을 주었다. 기원전 300년에 이르러서는 헬레니즘 제국 내 유대인들은 우수한 헬레니즘 문화에 푹 빠져 벌써 헬라(그리스)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히브리어는 이미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성경을 못 읽는 유대 젊은인이 많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지 이미 300년이 훨씬 지난 때로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들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시기였다. 이산 유대인들은 생업 때문에 그리스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해,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 없어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원로들은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당시 상업과 무역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 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 지금의 뉴욕 격이었다. 이로써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진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70인역(Septuagint)’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번역 성경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구약성경의 순서도 재배치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순서도 ‘70인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 뒤 기원전 200년에는 셀레우코스가 창건한 시리아 왕국의 안티오쿠스 3세가 유다를 정복했다. 오랜 기간 지배한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유대 지배층들은 헬라어를 자유롭게 사용했고, 부유층과 지식층 특히 사제 계급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히브리즘을 지키고자 하는 율법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토라와 유대교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헬레니즘에 맞서 하시딤이라는 보수적 유대교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활약했다. 훗날 이들이 바리새파가 된다.

▲예루살렘 되찾은 유대인들 묘사한 판화 - 안티오쿠스 4세의 탄압에 맞서 봉기한 유대인들이 격렬한 저항 끝에 예루살렘을 되찾은 이야기는 후대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각광받았다. 사진은 19세기 무렵 활동한 조각가 아돌프 구스만과 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공동 작업한 판화. 마카베오 가문의 지휘를 받는 유대인 군대가 적군을 추격하는 장면을 담았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후 헬라파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티오쿠스 3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1만여 주민을 학살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 시리아 병사들을 주둔시켜,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다. 왕은 차제에 여러 민족을 통합한 광대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 종교를 통일하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제우스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며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
먼저 유대교의 종교의식을 금지시켰다. 그 뒤 이교도를 예루살렘에 이주시켜 유대인과 피를 섞게 하는 혼혈 정책을 폈다. 그는 유대교 말살을 위한 칙령을 선포했다. 내용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율법이 금하는 돼지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에 유대인의 거센 저항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166년 안티오쿠스 4세는 장대한 열병식을 벌여 그의 힘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2만명의 마케도니아군과 4만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기병 8500명과 306기 장갑 코끼리 부대가 뒤따랐다. 장관이었다. 그런데 이때 유대인의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 정신 또한 놀라웠다. 유대인들은 마카베오 가문의 지도로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제우스 신상을 파괴했다. 이것이 역사상 첫 종교전쟁이다.
왕의 토벌군 물리친 마카베오 5형제
마카베오 5형제는 몇 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왕의 토벌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왕은 군사령관 세론을 직접 보냈지만 이번에도 마카베오 형제들이 물리쳤다. 당시 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었지만 5형제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진압군은 보병 5000명과 정예 기병 1000명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마카베오 5형제의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도 예상을 깨고 마카베오 군대가 이겼다.
왕은 이듬해 다시 섬멸 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정예 보병 6만명, 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1년 전보다 10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이에 마카베오는 보병 1만명으로 맞섰다. 하지만 용병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목숨 바쳐 싸우는 유대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2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기원전 164년에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유다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하스모니안 왕조다. 예루살렘은 이후 100년간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다스려졌다. 당시 반유대주의와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은 구약 외경 ‘마카베오 상·하’에 나와 있다. 이들은 제우스 신상이 들어선 지 3년 반 만인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정화하고 희생 제사를 부활시켰다. 이때 성전 반환을 기념하여 하루 분량의 올리브 기름으로 예루살렘 신전에 등불을 켰는데 그 불이 8일 동안 계속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느님의 응답으로 여기고 ‘성전 봉헌일’이라는 명절을 만들어 매년 이 기간에 가정에서 8일 밤 동안 촛대의 촛불을 하루 하나씩 늘려가며 밤을 밝힌다. 그래서 이 축제를 ‘봉헌절’ 또는 성전을 수리했다 하여 ‘수전절’이라 부른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Hanukkah)’라 부른다. 백악관은 매년 유대인들을 불러 함께 하누카 행사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성전 반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하누카는 12월 하순이어서 기독교인들은 하누카를 유대인들의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고 인사말이 바뀐 것도 유대인들을 의식한 배려이다. 하누카 명절은 특히 유대인 아이들이 좋아한다.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하누카 기간 8일 동안 매일 선물을 하나씩 받기 때문이다.
뉴욕의 수석 랍비가 된 한국계 북덜

한국계 랍비 앤절라 북덜은 1972년 서울에서 이대 영문과 출신인 불교도 어머니와 미군 장교 출신 엔지니어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워싱턴주 타코마로 이주했다. 북덜은 예일대 종교학과를 나와 뉴욕 헤브루 유니언 칼리지에서 히브리 음악과 랍비 공부를 7년간 했다. 1999년 유대교 예배에서 찬양을 이끄는 ‘캔토어’가 됐고, 2년 뒤 랍비가 됐다. 그녀의 찬양 인도는 흥겨웠고, 여러 파격을 시도했다. 영국 가수 스티브 윈우드의 히트곡 ‘더 높은 사랑’을 유대 찬송가와 혼합하는 등 전통적 찬양에 흥을 더했다. 그러면서도 예배의 엄숙함을 손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에 부임한 이후, 예배 참석자는 세 배로 늘었다. ‘중앙 유대교 회당’의 신자가 되려는 대기 신자 수도 3000명을 넘었다. 그녀는 2013년에 신자들의 투표를 통해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의 수석 랍비가 되었다. 최초의 여성 수석 랍비이자 최초의 아시아계 수석 랍비가 된 것이다.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의 신자는 7500명인데 북덜이 인도하는 찬양 예배는 온라인으로 더 인기가 있다. 2013년 속죄일의 경우, 20여 개에서 20만명이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 화상 예배에 함께했다. 이젠 유대인들도 특정 회당의 정식 교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예배를 보는 회당을 고르는 ‘부티크 유대교’ 시대가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 5인에 속한다.
2023.01.10
[52] 베스트보다 ‘유니크’… 유대인만의 교육법
“넌 남들과 달라” 믿어준 부모… 외톨이 스필버그가 명감독으로

▲부모의 상상력·호기심 자극 교육 덕에 세계적 거장으로 큰 스필버그 감독 -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2012년 영화 ‘링컨’ 촬영장에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컴퓨터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출신 식당 경영자였다. 어린 시절 외톨이로 지냈던 스필버그가 영화의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상상력과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준 부모의 역할이 컸다. 뛰어난 업적을 일군 유대인 뒤에는 대개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성원해온 부모가 있다. /앰블린 트위터
유대인은 스스로 남과 다른 유니크(unique)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하느님이 사람들 각자에게 각각 다른 달란트(재능)를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 교육도 자녀가 베스트(best)가 아닌 유니크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베스트’는 반에서 단 한 명뿐이지만 ‘유니크’는 모든 학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철학이 실제 유대인들을 각자 자기 분야에서 우뚝 서는 존재로 만든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유니크한 존재로 키워지는지 그들의 사상과 교육 방법을 알아보자.
유대인 자녀 교육의 대원칙은 엄마와 아빠의 ‘공동육아와 공동 교육’이다. 이를 위해 결혼하면 1년간 집안 살림과 경제를 여자가 책임지고, 남자는 히브리 학교에 들어가 유대교와 유대 전통을 배운다. 아빠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배우는 일종의 ‘아빠 학교’다.
또 하나의 원칙은 자녀가 성인식을 행하기 이전인 12살 때까지만 자녀 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자녀가 태어나면 매사에 기도로 아이를 돌본다.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으면 그때부터 율법을 가르친다.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이러한 엄마의 반복된 암송 교육이 훗날 아이의 창의성 발현에 큰 도움이 된다. 엄마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를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이유가 엄마가 아이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부모 욕심 접고 아이 재능 찾아줘라”
아빠 또한 자녀가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미성년인 한 어김없이 일찍 귀가해 밥상머리에서 자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대화를 나눈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다. 또 취침 전 베갯머리에서 반드시 15분 이상 책을 읽어준다. 이를 통해 자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자녀가 호기심을 보이는 곳에 그의 달란트가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부모와 밥상머리 대화와 베갯머리 이야기를 함께 한 아이는 네 살이 되면 일반 아이들이 800~900단어를 알 때 1500단어 이상을 인지한다. 이후 부모와 더불어 하는 독서 습관을 통해 차이는 더 벌어져 몰입도와 이해력에서 성큼 앞서나간다. 나아가 사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유대교 계율 배우는 아이들 - 영국 런던에 있는 브롬리 리폼 시너고그에서 어린이들이 유대교 계율에 대해 배우고 있다. 시너고그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제가 아니라 학자 신분인 랍비가 이끄는 교육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유대인들은 평생 배움으로써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브롬리 리폼 시너고그 홈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대인은 아이를 부모가 바라는 형태로 이끌지 않고 먼저 아이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탈무드’에는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자기 눈에 감긴 수건부터 풀라’는 말이 있다. 아이의 재능과 개성을 무시한 채 부모의 욕심을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유대인 부모들은 하느님이 개개인 각자에게 남과 다른 독특한 달란트를 주신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가 하느님이 주신 독특한 재능을 찾아내어 이를 살려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부단히 자극해 아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보람을 느끼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녀는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어 열정을 갖고 매진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분야에서 우뚝 서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우뚝 선 유대인의 성공 뒤에는 그들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믿어준 부모가 있다. 지진아로 분류되었던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유니크’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 덕분이었다. 외톨이였던 스필버그가 뛰어난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힘도 상상력과 호기심의 세계로 이끈 부모 덕분이었다. 많은 선생님 중에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선생님은 바로 부모다. 부모보다 훌륭한 선생님은 없다. 유대인은 부모가 최고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5000년 역사를 통해 증명한 민족이다.
유대인을 지칭하는 ‘헤브라이’는 강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혼자서 다른 편에 서다’라는 의미도 있다. 유대인에게 거룩함이란 ‘무리와 떨어져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뜻이다. ‘탈무드’에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향하면 세계는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은 자녀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더 성공시키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느님의 선민답게 살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 -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구약성경 창세기 내용을 그린 미켈란젤로의 벽화 ‘아담의 창조’. /위키피디아
우리 교육은 베스트를 지향한다. 줄 세우기다. 하지만 열등생도 그 가능성은 인정했다. 옛날 초등학교 성적표에 ‘수, 우, 미, 양, 가’란 평가가 있었다. 비록 상대평가 등급이었지만 말뜻은 아름다웠다. 수(秀)는 ‘우수하다’는 뜻이다. 우(優)는 ‘넉넉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미(美)는 ‘좋다’는 뜻으로 역시 잘했다는 의미다. 양(良) 역시 ‘좋다, 뛰어나다’는 뜻처럼 괜찮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가(可)는 ‘가능하다’고 할 때의 ‘가’ 자로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아이는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줄 세우기가 아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재능을 키워줄 맞춤 교육이 필요하다.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유대인의 성공은 어디에서 나올까? 유대인의 창의성의 원천은 배움이다. 유대인에게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기도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신앙생활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유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침공에 따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영적 딜레마에 빠졌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데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파괴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종교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성전에 재물을 바치는 것보다 믿음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 여호와를 더 즐겁게 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하느님은 성전에 바치는 1000가지 재물보다 한 시간의 배움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라도 더 배워, 신의 섭리를 하나라도 더 이해해야, 신에게 한 발짝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신만의 가능성을 믿고 노력해야
이렇게 해서 ‘성전’ 중심의 종교가 ‘배움’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한다. 이로써 혁명적인 시너고그(synagogue·회당)가 탄생했다. 사제 없는 시너고그에서 학자인 랍비를 중심으로 평신도끼리 드리는 새로운 예배 의식이 시작됐다. 그래서 시너고그의 주된 용도도 예배보다는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는 학교로서의 기능이 우선되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하나라도 더 이해해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자 평생 공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죄란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능력’을 말한다. 미래에 대한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하느님이 주신 자기 안의 달란트를 찾아 키우지 않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신앙이란 자신에게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과 달란트를 찾아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이다.
[우리 아이 ‘달란트’는 뭘까]
하느님이 선사한 재능… 13세 성인식 이전에 찾을 수 있도록 교육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만들고 마지막에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이때 ‘하느님의 형상대로’란 인간의 외모가 아닌 영혼이라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따라서 유대교는 인간 내면에 신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에 하느님이 인간을 빚은 뒤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은 이 생기가 바로 하느님의 영혼이라고 믿는다. 곧 한 명 한 명 만들 때마다 하느님은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었고 그 영혼이 인간의 몸 안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유대인의 사고에 따르면 결국 실존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혼이다.
하느님은 그 영혼이 세상에서 합당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영혼에 걸맞은 달란트도 같이 줬다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그래서 유대인은 자녀가 자신의 달란트를 13세 성인식 이전에 찾을 수 있도록 부모가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와준다.
[53] ‘하지말라’가 365개, ‘하라’가 248개… 십계명을 삶에 확장하다
유대인의 경전 토라와 탈무드

▲히브리 성경 도입부 처음 다섯 권인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는 모세가 저술했다는 전승에 따라 ‘모세오경’이라 하며, 유대인들은 토라라 부른다. 유대인에게 토라 공부는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이자 평생 공부해야 할 거룩한 대상이다. 지난 2014년 8월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1865~1935)의 예루살렘 생가에서 열린 토라 헌정식에서 참석자들이 두루마리에 적힌 토라의 구절을 보며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레우벤 리블린 당시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국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다. 바로 ‘구약성경(히브리 성경)’이다. 구약성경은 ‘토라(율법서)’를 비롯해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책 한 권이 아니라 여러 책을 모아놓은 것이다. 당신 백성에게 개입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율법서 형태로, 때로는 역사서 형태로, 때로는 교훈적 가르침을 통해서, 때로는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기록되었다. 역사가들은 구약성경이 기원전 1200년경에 시작되어 800년 이상에 걸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히브리 성경 도입부 처음 다섯 권이 모세오경이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한다. 다섯 두루마리라 ‘오경’이라 하며, 모세가 저술했다는 전승에 따라 ‘모세오경’이라 한다. 유대인들은 이 모세오경을 ‘토라’라 부른다. 이 ‘토라’가 유대인들의 경전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 이외의 예언서나 성문서는 토라를 보조하는 ‘보조 경전’으로 보고 있다. 토라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예언서’이고 말씀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게 ‘성문서’다.
유대인에게 토라는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토라는 성서 가운데서도 계시의 핵심이다. 계시(revelation)란 “숨겨져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뜻이다. 유대인은 합리성을 중시함에도 계시가 합리성보다 우선한다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의 토라 연구는 그들이 하느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수단이다. 유대인에게 토라는 지난 과거가 아니라 영원히 현존하는 신비스러운 차원의 이야기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토라 공부는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이자 평생 공부해야 할 거룩한 대상이다. 탈무드에는 토라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 첫째는 토라요, 둘째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요, 셋째는 자선 활동이다.”

▲유대인은 토라를 읽을 때 거룩한 경전에 손을 대지 않기 위해 ‘야드’라고 불리는 도구를 사용한다. /artust
토라에는 창조 이야기를 시작으로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역사와 하느님에게 받은 십계명을 비롯해 유대 민족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상세히 적혀 있다. 토라에 실린 계율은 613가지다. 이 가운데 “하지 말라”가 365가지로 1년의 날 수와 같고 “하라”가 248가지로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1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토라는 특별하게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다. 율법은 ‘이런저런 일은 하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런저런 일은 하지 말라’고 밝히고 있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네거티브 시스템’이다.
유대교에선 토라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래서 유대 회당의 중요한 특징은 예루살렘을 향해 법궤가 놓여 있고, 그 궤 안에는 양피지에 히브리어로 쓰인 ‘모세오경’ 두루마리가 있다. 안식일 아침 예배는 회중이 일어나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뒤 두루마리는 회당 좌석 사이를 돌아간다. 그리고 토라가 낭독된다. 읽기가 끝나면 성경 두루마리는 다시 회중석을 도는데, 이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이나 숄의 끝으로 두루마리 성경에 댄 후에 그 숄 끝에 키스한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토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은 놀랍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토라는 대부분 손으로 쓴 토라다. 특히 회당에서 읽히는 토라는 반드시 손으로 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토라를 옮겨 쓰는 과정이 복잡하다. 토라의 내용 중에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쓰기를 멈추고 목욕한다. 몸과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토라는 해외 거주 유대인들에게도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미국 뉴욕에 있는 한 유대교 회당에서 열린 연례 토라 완독 기념행사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경전 구절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서 있다. /템플 브나이 토라 오브 완타그
유대인에게는 두 가지 율법이 있었다. 하나는 글로 쓴 ‘성문 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 율법’이다. 둘 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받은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성문 율법’인 토라에 기록되어 있고 성전을 짓는 구체적 방법은 ‘구전 율법’에서 설명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해설을 곁들인 ‘구전 율법’은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선대의 구전 설명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교사 역할을 담당했던 랍비들도 시대에 따라 저마다 조금씩 해석 방법이 달랐다. 그 때문에 심지어 해석 방법이 크게 32가지로 분류되기도 했다. 아무리 ‘구전 율법’이 좋다고는 하나 기억력의 한계에 부닥쳤다.
기원전 6세기 에스라에 의해 ‘구전 율법’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후 기록 작업은 후대에 계속 이어졌다. 서기 210년경 랍비 ‘유다 하 나지’는 그간 선배 랍비들이 모아 온 ‘구전 율법’ 편찬에 착수해 6부(농업, 축제, 결혼, 민법과 형법, 제물, 제식) 63편 520장으로 완성했다. 이로써 탈무드의 전신 ‘미쉬나’가 탄생했다. 미쉬나는 오늘날 이스라엘 국법의 뿌리일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유대교는 이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생활의 도리도 함께 가르친다. 이때를 계기로 랍비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의 기본 틀이 세워진다. 랍비란 ‘나의 선생님’이란 뜻이다.
그런데 미쉬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미쉬나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토론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랍비들은 의사, 상인, 무역상 등 보통 유대인들과 똑같은 직업을 갖고 생활고의 중압감을 안고 살아가면서 율법을 생활에 어떻게 접목해 해석해야 할지를 연구했다. 300여 년 동안의 해석을 모은 것이 ‘게마라’다. 이렇게 미쉬나와 그 해석서 게마라를 한데 합친 것이 탈무드다. 흔히 유대 민족을 ‘책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시기에서 찾아진다. 7권짜리 대백과사전 같은 탈무드를 하루 한 페이지씩 공부하면 7년이 지나야 전질을 겨우 읽을 수 있다. 분량도 많지만 내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율법을 연구하는 일은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가며 부지런히 경전을 읽는 것이다.
이렇게 탈무드는 원로 랍비들이 후손을 깨우쳐 주기 위해 기원전 500년부터 1000년 동안 현인들의 말과 글을 모아놓은 지혜서이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위대한 연구’라는 의미다. 구전 토라 곧 미쉬나가 발전한 탈무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침과 민족적 동질성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대인들의 삶에는 미리 정해진 답이 없다. 상황에 따라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탈무드에 기록된 수많은 토론은 바른길을 찾기 위한 훈련의 흔적이다. 탈무드는 책이라기보다는 삶의 바른길을 찾는 ‘학문’이라고 해야 옳다.
구약을 경전으로 삼는 세 종교
유대교 성경 ‘타나크(TANAKH)’는 ‘율법서(Torah), 예언서(Neviim), 성문서(Ketubim)’로 구성되어 총 24권이다. 타나크는 이 세 분류명의 첫 글자를 떼 합성한 이름이다.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톨릭 구약성경보다 권수가 적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는 구약과 예수 이후의 복음서인 ‘신약’을 함께 성서로 믿는다. 이슬람은 여기에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가 쓴 코란이 보태진다. 코란의 내용을 살펴보면 율법은 모세가, 복음은 예수가 선포했으되 진정한 예언자는 무함마드이고 그의 계시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렇듯 세 종교의 뿌리가 구약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들의 새로운 복음을 신약이라 부르고 유대교의 타나크를 구약이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구약이란 말을 싫어한다. 신성모독적인 개념으로 여긴다. 그래서 구약 대신 ‘히브리 성경’이란 말을 선호한다.
[54] 인공지능 세계대전
세상을 바꾸는 AI혁명… 그 뒤에는 유대인 천재 4명 있다
유대인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은 오늘날의 컴퓨터가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곧 멍텅구리 계산기에 인간의 뇌를 모방한 CPU를 부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가 1950년의 ‘에드박’이다. 그래서 현대의 컴퓨터를 ‘노이만식 컴퓨터’라 부른다. 폰 노이만은 1932년에 아인슈타인과 함께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최초의 종신 교수가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는 전공인 수학을 경제학과 물리학, 생물학에 접목해 새로운 이론들을 창시했다. ‘게임이론’을 창안한 경제학자이자 양자역학 발전에 공헌한 물리학자이며, 인공 생명을 연구한 생물학자였다.

▲인공지능 혁명을 이끈 유대인 과학자·기업가
폰 노이만은 1949년 ‘첨단 고등 장치의 이론과 구조’라는 논문에서 사람과 같은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첨단 고등 장치’란 컴퓨터와 로봇을 의미하며, 컴퓨터가 인간의 집단 지성을 뛰어넘는다는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1953년에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폰 노이만이다. 그는 골수암으로 투병하던 말년의 ‘인공지능과 인공 생명’에 관한 연구를 자신의 가장 큰 성과로 간주했다. 노이만은 마지막 책을 병원에서 집필하다 1957년 사망했다. 미완성 원고는 훗날 ‘컴퓨터와 뇌’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레이 커즈와일은 1948년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를 꿈꾸었다. 그는 MIT에 진학해 인공지능 권위자 마빈 민스키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커즈와일은 1982년 ‘커즈와일 뮤직시스템스’를 설립해 세계 최초의 디지털 신시사이저를 개발했고, 이후 이 회사는 우리나라 영창뮤직에 인수되어 커즈와일은 영창의 기술고문을 맡기도 했다. 이 외에도 커즈와일은 회사 9개를 설립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1990년에 쓴 ‘지적 기계 시대’를 통해 휴대폰 출현과 인터넷 유비쿼터스를 예측했고, 2005년 쓴 ‘특이점이 온다’에서는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며, 2045년에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을 예측했다. 그런데 이러한 예측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DALL-E에 의해서 제작된 ‘그림 그리는 로봇손’ 이미지. /샘 올트먼 블로그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도 그의 책에 깊은 인상을 받아 커즈와일은 2012년 구글의 ‘머신러닝과 자연어 이해’ 기술 이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구글은 2014년 영국의 ‘딥마인드’를 인수해 알파고를 개발했으며, AI 기업 30개 이상을 인수해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 인력을 확보했다.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인간 능력을 향상시켜 줄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낙관론만 펼치는 것은 아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발전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특이점 대학’을 설립했다.
유대인 요슈아 벤지오는 1964년생으로 딥러닝(심층 학습)의 대부로 제프리 힌턴, 앤드루 응, 얀 르쾽과 함께 인공지능 4대 천왕으로 불린다. 현재 몬트리올대학 교수로 있으며, 대학 내 ‘몬트리올 학습 알고리즘 연구소(MILA)’를 설립해 이끌고 있다. 벤지오 연구팀은 2014년 ‘이미지 캡셔닝’ 연구에 성공했다. 이미지를 입력하면 그 이미지를 글로 묘사해 주는 것이다. 같은 해 그의 애제자 이언 굿펠로는 텍스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기술의 원천 기술(GAN)을 개발했다. 2016년 그는 제자 이언 굿펠로, 에런 쿠르빌과 함께 책 ‘딥러닝’을 썼다.
2018년에는 제프리 힌턴, 얀 르쾽과 함께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는 AI의 영향에 대해 우려하면서 미 국방연구소와 중국인민군 등에 무기에 인공지능을 이용하지 말라는 항의 편지를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벤지오는 ‘삼성 AI 포럼’의 공동 의장이자 삼성 AI 교수로 삼성과 인연이 깊다. 이재용이 종종 AI 관련으로 그에게 자문을 구하며, 삼성전자는 벤지오 교수와 합작으로 몬트리올에 AI 연구소를 만들어 AI 알고리즘을 개발 중이다.
샘 올트먼은 1985년 시카고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샘이 8살 때 컴퓨터계의 페라리 격인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주었다. 이 컴퓨터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2003년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 2학년 때 중퇴하고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올트먼의 첫 창업은 사용자를 주변 사람들과 이어주는 SNS ‘루프트’였는데, 이를 2012년에 매각한 후 세계 최고 벤처캐피털 ‘와이콤비네이터’에 입사했다. 이후 올트먼은 28세에 와이콤비네이터 대표로 발탁되어 2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이들을 지원했다.
2015년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행사에서 올트먼의 ‘구글의 인공지능 독점 견제론’에 일론 머스크가 크게 공감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인류를 위한 비영리 연구소 ‘오픈AI’를 공동 창업하게 된다. 이러한 취지에 공감해 페이팔 마피아인 ‘페이팔’ 설립자 피터 틸과 ‘링크트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 등도 투자했다.
일론 머스크는 인공지능 발전이 인류에게 부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실제 이스라엘 기업이 2016년 인간의 명령 없이도 알아서 총을 발사하는 살상 로봇을 선보였고, 같은 해 러시아군도 인간의 개입 없이 적을 사살하는 킬러 로봇을 전선에 배치했다. 같은 해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이 인공지능 관련 윤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파트너십 온 AI’라는 비영리 단체를 조직했다. 2017년에는 AI를 위험하다고 여기는 일론 머스크와 낙관적으로 보는 마크 저커버그 간의 논쟁이 이목을 끌었다. 이후 각국 정부와 IT 기업들이 ‘착한 인공지능’을 개발하자는 요지의 규정을 만드는 곳이 늘어났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자 오픈AI는 설립 당시부터 특허와 연구 내용을 무료로 개방했다.
2018년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가 AI를 개발하고 있어 비영리 기관인 오픈AI와 이해관계의 상충이 우려된다”며 이사회를 탈퇴했다. 2019년 3월 올트먼은 와이콤비네이터를 떠나 오픈AI에 집중했다. 같은 해 5월 자금난을 겪던 오픈AI는 방향 수정을 선언했다. “앞으로는 공익 목적을 우선하면서도 수익을 올리는 하이브리드 모델로 변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0억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해,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꾸어주는 ‘DALL-E’를 출시했고, 지난해 11월 말 ‘챗GPT’를 공개했다. 올트먼은 인공지능 이외에도 핵융합 기술에 관심이 많다. 그는 인류에게 초저가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꿈을 갖고 최근 소형 핵융합 발전기 개발 기업 헬리온에 3억7500만달러를 투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크로소프트가 공개한 챗GPT가 개발된 배경에는 2017년 구글이 발표한 학습 모델 ‘트랜스포머(Transformer)’ 기술이 있어 가능했다. 글의 맥락을 잡아내는 기술이다. 이렇듯 인공지능 분야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며,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를 따라갈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 기업들의 선전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인공지능 대전(大戰)이 시작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가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를 공개한 지 두 달 만에 하루 1000만명, 월 1억명이 사용하고 있다. 실로 놀라운 돌풍이다. 가장 당황한 경쟁 기업은 구글이다. 그간 ‘인공지능 윤리’ 등을 의식해 공개를 꺼리던 구글이 다급해졌다. 인공지능의 지식재산권 표절 문제도 아직 해결 못 했지만 구글은 지난 2월 8일 비슷한 서비스 ‘바드(Bard)’를 공개해 맞불을 놓았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들의 검색엔진 ‘Bing’에 챗GPT를 탑재한 후 이를 구글 행사 하루 전에 공개해 구글의 맞대응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는 구글이 주도하는 검색엔진 시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될 전망이다. 이 둘만의 싸움이 아니다. 아마존, 애플, 메타, 중국 바이두, 우리나라 네이버, SKT, 삼성, LG 등도 인공지능 대전에 뛰어들었다. 네이버는 상반기에 ‘서치GPT’를, SKT는 하반기에 ‘에이닷’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로써 인공지능 대전이 인류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 또는 위협이 될 것인지가 현실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인공지능 대전 뒤에는 이를 개발한 유대인 과학자들이 있다.
[55]라스베이거스를 만든 벅시·커코리언·애덜슨
사막 은광촌을 카지노·컨벤션 도시로… 3명의 유대인 ‘잭팟’

▲라스베이거스의 중심가인 스트립(Strip)의 야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대로 변을 따라서 호텔·카지노·공연장·전시장·회의장·놀이시설 등을 아우른 복합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들은 고대 이집트부터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등 다양한 테마로 설계·건축됐으며 연중 세계적 수준의 공연과 전시회가 열린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라스베이거스를 잠들지 않는 도시로 만든 주역은 벅시 시겔, 커크 커코리언, 셸던 애덜슨 등 유대인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 컨벤션·관광국
우리는 일자리가 감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로봇 등 산업 자동화와 비약적으로 발전 중인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이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빼앗아 갈 전망이다. 이에 대처할 고용 창출 계수가 높은 서비스산업 특히 관광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팬데믹이 잦아들면서 관광이 재개되고 있다. 관광산업은 천혜의 환경 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막 위에 건설된 라스베이거스나 습지 위에 세워진 올랜도 디즈니월드를 보라. 이들은 관광산업을 진흥하는 데 인간의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를 증명해 낸 게 유대인들이다.
1946년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 최초의 현대식 카지노 호텔 ‘플라밍고’를 건설한 ‘벅시 시겔’이 유대인이다. 19세기 미국의 마피아는 유대인과 아일랜드파가 주도했다. 그 뒤 이탈리아 마피아가 가세했다. 1930년대 뉴욕 암흑가를 지배하던 유대인 마피아는 서부 장악을 위해 벅시를 LA에 파견하게 된다. 벅시는 1940년 협의차 뉴욕으로 가던 중 사막지대 작은 은광촌 라스베이거스에 들렀다. 광부들을 위한 선술집들과 작은 호텔 2개가 있었다. 당시 라스베이거스 인구는 8000명 남짓이었다. 이때 그는 라스베이거스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다.
이 사막 한복판에 현대식 카지노 호텔을 세우면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큰 사업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사막을 통과하는 차량이 많아 사막의 오아시스 개념이었다. 그는 이 계획에 회의적이던 조직 수뇌부를 설득해 600만 달러를 빌려 플라밍고 호텔을 건설했다. 그런데 개장 후 예상보다 손님이 없었다. 1947년 7월 벅시는 베벌리힐스 저택에서 수십 발의 총격을 받고 즉사했다. 뉴욕 마피아가 그를 살해했다는 소문이었다. 훗날 유대인 영화감독 배리 레빈슨은 그의 일대기로 1991년 ‘벅시’란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사후 벅시의 예견대로 사막의 은광촌이 천지개벽하여 카지노와 컨벤션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를 만든 사람은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커크 커코리언이다. 그는 1947년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6만 달러짜리 비행기를 구입해 항공사를 설립했다. 그는 융자를 얻어 비행 연료와 퇴역 폭격기 등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고 1962년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거리 토지 80에이커를 96만 달러에 매입했다. 이 거리에 로마제국의 상징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들어섰다. 손님을 로마 황제처럼 모시겠다는 뜻이다. 그 뒤 라스베이거스 호텔은 특정 테마를 주제로 건설되었다. 그는 벅시가 세운 플라밍고 호텔을 1250만 달러에 인수해 운영하다 1969년 힐튼호텔 체인에 6000만 달러에 팔아 그 돈으로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인터내셔널 호텔을 건설했다.

▲이 세 명의 유대인이 없었다면, 세계 관광산업의 중심지이자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라스베이거스의 명성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왼쪽부터 카지노 도시의 밑그림을 그렸던 벅시 시겔, 오늘날 라스베이거스의 기틀을 다진 커크 커코리언, 복합리조트 사업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전 세계로 확장했던 셸던 애덜슨. /위키피디아·라스베이거스리뷰저널
그는 호텔 개장 초기에 손님을 끌기 위해 빅쇼를 도입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유대인 여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영입해 매일 공연을 벌였다. 하루에 4200명의 손님이 공연을 보기 위해 한 달 내내 몰렸다. 이것이 라스베이거스 쇼의 효시이다. 호텔이 자리 잡자 곧바로 힐튼호텔 체인에 1억 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는 1968년 항공사를 팔아 MGM 영화사 지분 40%를 사들인 뒤 연면적이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능가하는 MGM호텔을 건설했다. 그 뒤 1981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를 3억8000만 달러에 사들여 5년 뒤 이탈리아계 회사에 13억 달러에 팔았다. 같은 해 MGM호텔을 발리 그룹에 6억 달러에 매각했다. 그 뒤에도 그는 호텔들을 잇달아 건설했다. 벨라지오, MGM 그랜드 리조트 컴플렉스, 뉴욕 뉴욕, 서커스 서커스, 룩소르, 엑스칼리버, 트레저아일랜드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는 그에 의해 탄생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 뒤 라스베이거스를 카지노 도시에서 전시컨벤션 도시로 바꾼 유대인이 셸던 애덜슨이다. 그는 세계 최대 IT 전시회로 유명한 ‘컴덱스(COMDEX)쇼’를 1979년 라스베이거스 MGM그랜드호텔(현 발리호텔)에서 처음 개최했다. 전시회는 뉴욕이나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통념을 깬 유쾌한 전시회였다. 당시 그는 제곱 피트(약 930㎠)당 대관료로 15센트를 내고 전시업체로부터는 50달러를 받아 고수익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컴덱스쇼는 이후 미국 내 다른 도시와 유럽, 일본에서도 개최됐다. 애덜슨은 컴덱스쇼를 1995년 일본의 소프트뱅크에 8억6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애덜슨의 업적은 복합리조트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해 라스베이거스를 ‘마이스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마이스(MICE)는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따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복합리조트란 호텔과 전시장뿐 아니라 대규모 쇼핑몰과 극장·박물관·카지노는 물론 테마파크까지 갖춘 종합 비즈니스·레저 타운이다. 한마디로 모든 걸 한곳에 모아 놓아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개념이다. 복합리조트들 덕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제품 박람회인 CES 등 매년 50개 대형 전시회와 2만 건 내외의 사업 미팅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를 통해 수십만 명의 고용 창출과 내수 진작 효과가 입증되면서 ‘21세기 굴뚝 없는 황금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를 만든 유대인들이 벅시 시겔, 커크 커코리언, 셸던 애덜슨이다.

▲한적한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는 1900년경 라스베이거스 프리몬트 거리의 모습. 라스베이거스는 이후 카지노·공연·전시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후 애덜슨은 해외로 눈을 돌려 2004년 5월 마카오에 샌즈 카지노를 개설했다. 투자금을 불과 10개월 만에 회수하여 ‘샌즈 효과’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이어 2007년 샌즈 호텔 투자금의 10배에 달하는 23억 달러를 들여 세운 세계 최대 복합리조트 ‘베네치안 마카오 리조트’를 오픈하여 일주일 만에 50만 명을 끌어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2009년 말까지 130억 달러의 자금을 쏟아 부었고 마카오는 세계 최대 카지노와 마이스 산업 중심지가 되어 라스베이거스를 추월했다.
애덜슨은 싱가포르에도 진출했다. 싱가포르는 1997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겪으며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제조업과 병행해 서비스산업을 발전시키기로 했다. 특히 일자리 창출과 내수 진작 효과가 큰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2005년 복합리조트를 건설하기로 했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카지노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국 소신을 접었다. 세상이 변해 복합리조트가 없으면 관광산업과 마이스 산업을 성장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토론 끝에 야당도 결국 동의했다. 그 뒤 싱가포르는 2010년 두 개의 대형 복합리조트를 개장했다. 마리나베이 샌즈는 한국의 쌍용건설이 시공을 맡아 완공한 복합리조트로 옥상의 축구장 4배 크기 수영장은 세계적인 명소로 떠올라 하루 방문객이 최대 15만 명에 이른다.
센토사섬에 지은 ‘리조트월드 센토사’ 복합리조트는 호텔 6개와 유명 테마파크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유치해 개장 첫해인 2010년 43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후 관광객 수는 20.2% 늘어났다. 당시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서도 싱가포르 경제 성장률은 14.5%를 기록했고, 세수도 7.75% 증가했다.
한국에서 피지 못한 애덜슨의 꿈
애덜슨은 2009년 마리나베이 샌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마카오와 싱가포르에 이어 아시아의 세 번째 투자처로 보고 있다”면서 “특히 서울이나 영종도가 복합리조트 위치로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카지노를 갖춘 대형 리조트가 25~30개 됩니다. 경쟁이 아주 심하죠. 하지만 아시아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합니다. 마카오에도 도박장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 건물에는 대규모 컨벤션 시설과 각종 전시를 위한 쇼룸과 350개의 상점, 30개의 레스토랑, 의료 관광을 위한 병원이 있지요. 이런 복합리조트는 마카오에서 우리가 유일합니다. 카지노는 전체의 4% 미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델을 통해 라스베이거스를 바꿨고, 지금은 싱가포르를 바꾸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서울·인천·부산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는 중국 부(富)의 60%가 모여 있는 중국 동부 연안을 마주한 한반도 서해안에 마카오를 능가하는 새로운 꿈의 도시를 그리고 있었다. 비행기로 3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구매력 있는 도시 숫자는 영종도가 마카오나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많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몰려 있고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만 51개가 있다. 최적의 입지인 셈이다. 애덜슨은 그의 마지막 꿈을 펼치지 못하고 2021년 초 영면했다.
[56] 70년 석유 수입국서 산유국 된 이스라엘
“영원한 동산의 보물…” 성경대로 파봤더니 석유·가스 나왔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70년 동안 석유 수입에 고생이 많았다. 인근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석유를 안 팔아 멀리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남미 콜롬비아에서, 북유럽 노르웨이 등에서 석유를 구해 오느라 석유 가격과 전기료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스라엘에서 한 지구물리학자가 유전을 발견했다. 2004년 6월 13일 자 BBC뉴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기보트 올람’이라는 이스라엘 회사가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유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영원한 작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기보트 올람’의 창업자인 극정통파 유대인 토비아 러스킨은 성서와 과학 지식을 토대로 유전 탐사에 성공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출생해 지구물리학을 공부하고 여러 메이저 석유사에서 근무하다 1984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러스킨이 호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것은 히브리 성서(구약성경) 신명기의 한 구절과 이 구절에 관한 중세 랍비 라시의 해설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2009년 발견돼 2013년부터 본격 개발된 타마르 가스전의 설비 윗부분이 대형 이스라엘 국기로 장식돼 있다. 이스라엘 북부 ‘타마르’ 해역에서 채굴된 가스는 이스라엘 발전에 필요한 에너지의 40%를 감당하고 있다. 앞서 유전 회사 ‘기보트 올람’의 창업자 토비아 러스킨은 1994년 유전 탐사 시추를 시작해 10년 만인 2004년 경제성 있는 셰펠라 유전을 발견했다. 당시 BBC 뉴스는 “‘기보트 올람’이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유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타마르 페트롤리엄
하느님의 사람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에 복을 빌어 주었다. 신명기 33장 13~15절에서 요셉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땅은 야훼께 복 받은 땅, 위로 하늘에서 더없이 값진 복이 내리고 아래로 지하에 숨어 있는 물줄기로 젖어 오는 땅, 쏟아지는 햇빛에 소담스레 오곡이 여물고 다달이 백과가 탐스럽게 열리는 땅, 태고적 산맥에서 열리는 특산품과 영원한 동산의 보물….”
신명기 33장 18~19절에서 즈불룬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즈불룬아, 즐겨 밖으로 진출하여라. 이싸갈아, 네 천막에서 살며 행복하여라. 민족들을 산으로 불러 모으고 바다에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를 흡수하며….”
신명기 33장 24절에서 아셀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셀은 아들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복을 받아라. 형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귀여움을 받고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요셉 부족에 주어진 지역엔 텔아비브 동북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러스킨은 “태고적 산맥에서 열리는 특산품”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히 여겼다. 중세 현자인 라시의 해설에서 러스킨은 이 구절이 현재의 모양으로 변모되기 이전의 고생대 고원지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자 러스킨은 이 성서 구절을 이해할 것 같았다. 바다의 풍부한 것은 천연가스이고, 모래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는 셰일 석유이며, 특히 ‘기보트 올람(영원한 동산)의 보물’이 원유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러스킨은 1990년 5월 뉴욕으로 가서, 하시디 유다이즘의 지도자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르손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석유 탐사 계획을 축복해 주면서 곧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러스킨은 즉시 시드니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러스킨은 성서의 말씀을 믿고 ‘기보트 올람’ 탐사 회사를 설립하여 1994년부터 유전 탐사 시추를 시작했다. 러스킨은 유전 발굴에 두 번 성공했으나 경제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땅에 석유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탐사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04년에 경제성 있는 셰펠라 유전이 터졌다.

▲이스라엘에서 유전을 발견한 기업 ‘기보트 올람’의 창업자 토비아 러스킨. /더타임스오브이스라엘
그 뒤 이스라엘에 석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석유 탐사 붐이 일었다. 특히 ‘즈불룬 지파’와 ‘아셀 지파’가 차지하고 있던 땅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시추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9년 미국의 노블에너지(Nobel Energy)가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에서 80㎞ 떨어진 지중해 북부 ‘타마르’ 해역에서 매장량 2470억㎥로 추정되는 천연가스전을 발견했다. 이후 타마르 가스전에서 채굴된 가스는 길이 150㎞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남부 아슈도드로 운반되어 이스라엘 전기 발전에 필요한 에너지의 40%를 감당하고 있다. 이 효과로 이스라엘 전기료가 하락했다.
또한 2010년에는 하이파에서 135㎞ 떨어진 지중해 북부 해역에서 천연가스전 3조4600㎥를 발견했는데, 이는 미국 가스 매장량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해저 천연가스전에 ‘레비아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비아탄(Leviathan·고대 히브리어, 영어로는 리바이어던)’은 히브리 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 괴물이다. 욥기에서는 이 괴물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고 묘사했다. 실제 수심 1500m에 자리 잡은 이 가스전에선 진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는 최근 10년 동안 심해에서 발견된 가스전 중에서 최대로 이스라엘이 100년간 쓸 수 있는 양이다. 이후 2011년에는 ‘아프로디테’, 2012년에는 ‘삼손’, 이후에도 ‘마리’ 가스전이 연달아 발견됐다. 2013년 세계에너지협회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북부 셰펠라 지역에서 셰일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매장량은 세계 최고인 사우디아라비아의 2600억배럴에 버금가는 2500억배럴로 세계 2위 수준이라고 한다.
타마르 가스전과는 달리 레비아탄 가스전은 10년 이상 다투어온 레바논과의 영유권 협상 문제로 지난해 1월부터 가스 생산에 착수했다. 이후 협상이 2022년 10월에 타결되어 생산 확대를 위해 가스전에 새로운 부유식 LNG 터미널 공사를 할 계획이다. 현재 연간 약 12bcm(1bcm은 10억㎥)의 가스를 생산하는 레비아탄 가스전은 이 공사가 완성되면 생산량이 연간 21bcm로 늘어난다.

▲이스라엘에서 발견·개발된 주요 가스전
이스라엘은 가스와 석유를 이용해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2017년 초 요르단으로 천연가스를 처녀 수출한 이후 2020년 이집트 등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천연가스는 이집트의 천연가스 액화 시설을 통해 액화가스가 되어 유럽으로 수출된다. 유럽이 천연가스 수입처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터키·이스라엘 해저 파이프라인 건설도 논의되고 있다. 레비아탄 해저 가스전에서 터키까지 500∼550㎞ 길이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터키와 남유럽 국가들에 천연가스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이스라엘과 터키는 10년 이상 소원했던 관계를 해저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한 에너지 협력을 통해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스뿐 아니라 지난해 2월에는 처음으로 초경질유 석유도 수출했다.
2020년 미국 주도로 이스라엘과 인근 아랍국들 간의 ‘아브라함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이 2020년 9월 이 협정에 서명했다. 아브라함 평화협정의 ‘아브라함’은 아랍인과 유대인의 공동 조상으로, 서로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 협정에 바레인이 함께 참여했고, 뒤이어 수단과 모로코도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이스라엘 천연가스의 인근 아랍국 수출과 아브라함 평화협정의 확대가 중동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기를 기원한다.
[성서고고학의 출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니네베 여름 궁전’도 성서 토대로 19세기 발견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성서와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렇게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1840년 티그리스강 유역 모술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섰다. 영사로 의사인 폴 에밀 보타가 취임했다. 그가 성서를 토대로 1843년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근교의 여름 궁전을 발굴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인류의 발상지는 이집트라고 알려져 있었다. 에덴동산은 물론 성서에 무려 152차례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은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니네베’라는 말은 성서에 20군데, ‘아시리아’라는 말은 132군데나 나온다. 유대인에게 니네베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적대 세력 아시리아의 수도였다. 그런데 그 아시리아가 정말 있었다. 무엇보다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보다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흥분했다. 이것이 성서고고학의 효시였다. 이후 성서를 토대로 여러 유적이 잇달아 발견돼 성서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기록되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57]근대 유대교 개혁 이끈 독일 최고 유대인 가문
천재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는 ‘독일의 플라톤’
오늘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이 마지막에 신랑 신부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듣는 음악이 있다. 그때 연주되는 행진곡은 야코프 펠릭스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다.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이후 일반인의 결혼식에서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1809년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1년 나폴레옹이 함부르크를 점령하자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주변에 유대 회당인 시너고그가 없어 교리가 유대교와 가장 비슷한 루터교도가 되었다.
할아버지 멘델스존은 척추장애인
멘델스존은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뤘고, 9세 때 피아노 연주회에 나가 갈채를 받았다. 그는 유대인답게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멘델스존은 10세 때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4중주 작품3′을 괴테에게 헌정하면서 노년의 괴테와 12세의 음악가 멘델스존 사이에 우정이 싹텄고, 괴테는 멘델스존이 모차르트보다 뛰어난 천재라고 단언했다. 멘델스존이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인 ‘제13 교향곡’을 작곡한 때가 15세이었고, 이듬해 그의 최고 걸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현악 8중주’를 작곡했다. 그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으로, 경쾌하고 힘차고 즐거운 이 작품은 17세의 나이에 작곡했다고 믿기 어려운 뛰어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처럼… 손자의 ‘한여름밤의 꿈’ - 보스턴 발레단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들이 군무(群舞)를 선보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은 발레는 물론 연극,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바탕이 됐는데, 작곡가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한 음악극 ‘한여름밤의 꿈’도 그중 하나다. 연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척추 장애를 극복하고 첫눈에 반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를 연상시킨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멘델스존이 유명세를 타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나는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저명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저명한 아버지가 바로 계몽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모세(모제스) 멘델스존이다.
근대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종교적 관용 덕분에 유대인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그때 유럽 유대인 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토에서의 해방이 그 하나요, 나폴레옹에 의한 유대인의 자유 선포가 또 다른 하나였다. 이 모두가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같은 사상가가 주도하는 계몽주의 덕분이었다.
17~18세기 유럽 유대인 공동체의 학문 활동은 미약했다. 유대인 대부분이 게토에 갇혀 있었던 원인도 컸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소수 민족에게도 평등권을 줄 것을 주장했다. 인간 이성의 힘과 진보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외친 계몽주의 정신에 힘입어 서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18세기 말엽에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었다.

▲모제스 멘델스존(왼쪽)과 작곡가인 손자 펠릭스 멘델스존. /위키피디아, 게티이미지코리아
모세 멘델스존은 폐쇄적인 유대교 교리와 전통에 얽매여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보고, 유대인 사회를 서구 사회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교 신앙과 계몽주의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유대인이 바깥 사회와 어떻게 하면 잘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모세 멘델스존은 신동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몸이 허약해 척추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린 멘델스존은 서구 사회의 학문을 익혀 두 세계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몰래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를 배우고 수학, 과학, 철학 등을 익혔다. 베를린 아카데미가 1763년에 ‘형이상학적 진리의 판명성’에 관한 논문을 모집했는데 그가 칸트를 누르고 최고점을 땄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사가 되어 ‘보호 유대인’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든 제한 사항에서 해방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 뒤 1767년 멘델스존은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를 모델로 삼아 ‘파이돈’을 저술했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에 맞서 영혼의 불멸을 옹호한 글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으로 멘델스존은 ‘독일의 플라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모제스 멘델스존(왼쪽)이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서 있는 사람), 스위스의 시인 요하나 카스퍼 라바터(오른쪽)와 토론하는 모습. 당대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던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의 일반 문화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멘델스존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1783년 유대인의 경전 ‘토라’(모세 오경)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당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책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싫어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주변 문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문화유산만을 고집했다. 유대인들은 정신적인 게토를 벗어나 넓은 세계의 일반 문화로 나와야 한다고 멘델스존은 생각했다. 그는 토라의 히브리어 원문 옆에 히브리어 문자로 음역한 독일어 번역문을 나란히 두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쉽게 독일어를 배우도록 했다. 이로써 게토와 바깥세상이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외부인들이 유대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진력했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각 나라에서 유대인의 대우에 대한 법률들이 개정되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바깥 학문을 유대 교육과정으로 채택했다. 멘델스존은 비록 정통파 유대교로부터 배척받았으나, 미래를 위하여 유대인들을 준비시킨 개혁 사상가였다. 멘델스존의 생각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나면서, 율법과 전통 중 많은 것을 현대 사상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포기하는 개혁파 유대인들이 1800년대 초 독일에서 등장했다. 이들이 184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 현대 유대교는 크게 세 분파로 구분된다. 60% 이상이 개혁파이고, 15% 내외가 정통파, 그리고 나머지가 정통파와 개혁파 사이의 중도 격인 보수파이다.
철학 논문서 칸트 누르고 최고점 받아
경제사에서 멘델스존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학자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대인답게 스스로 노력하여 가난의 고리를 끊고 굴지의 금융 가문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고학하며 공부하다 21세 때인 1750년 ‘보호 유대인’ 자격을 가진 부유한 비단 공장 주인 아이작 베른하르트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뒤 모세 멘델스존은 자녀 교육뿐 아니라 1754년부터는 비단 공장의 회계를 도와주다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동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인 1761년에는 독자적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그 뒤에도 그는 경영과 학문의 길을 병행하며 금융가로 우뚝 서 사업과 학문 양쪽 분야에서 모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후에도 멘델스존 가문은 큰 금융 가문으로 성장하면서도 꾸준히 학자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그러면서도 독일의 3대 금융 가문의 하나로 커서 근대 독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청혼]
”저를 꼽추로 만드시고 신부에겐 아름다움을… 신에게 애원했답니다”
모세 멘델스존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푸근한 인성과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척추장애인이었다. 멘델스존이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대 상인인 구겐하임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구겐하임이 그를 초대했다. 구겐하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멘델스존이 쓴 작품에 심취해 그를 직접 만나보기를 고대했었다. 그러나 멘델스존을 직접 만난 딸은 그의 흉측한 외모에 충격받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멘델스존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당신은 결혼할 배우자를 하늘이 정해 준다는 말을 믿나요?” 딸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멘델스존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은 그에게 장차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정해 주지요. 그런데 그녀가 척추장애인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신에게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안 됩니다. 신이시여! 소녀가 혹 등을 갖게 되면, 그 소녀는 슬픔과 불행을 감내하기 힘듭니다. 차라리 저를 척추장애인으로 만드시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제가 척추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훗날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아내가 되었다. 소설 같은 ‘한여름 밤의 꿈’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58]유대교 초정통파 출신 20세기 대표화가 샤갈
세 여인의 사랑이 말더듬이 소년을 색채의 마술사로 만들다
마르크 샤갈은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것도 신실한 초정통파 하시디즘 유대교인이다. 하시디즘(Hasidism)이란 히브리어 ‘하시드’ 곧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율법의 정신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동시에 경건주의의 엄격한 종교적 신념과 전통을 따르는 유대교 초정통파를 일컫기도 한다. 그런 그가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다. 그리고 십자가 좌우로 핍박받는 유대인의 모습을 함께 그렸다. 그는 종교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긍휼하신 사랑 ‘헤세드’를 실행하는 인물로 십자가에 달린 유대인 예수를 발견한 것이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그리스어 ‘아가페’이다. 무조건적인 거룩한 사랑 헤세드는 인간에 대한 신의 희생과 신의 사랑을 뜻한다.

▲마르크 샤갈이 유엔 본부에 있는 자신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서 있다. 이 작품은 1961년 비행기 사고로 숨진 제2대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유대인인 샤갈은 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샤갈은 어머니에게 화가가 되고 싶으니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머니를 졸라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다
어린 시절 샤갈은 랍비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유대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무소유와 청빈을 권하지 않고 오히려 부의 축적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 보니 탈무드에서 가난은 죄라고 가르친다. “만일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모아서 저울 한쪽에 올려놓고 가난을 다른 쪽에 올려놓는다면, 가난이 그 모든 것보다도 더 무겁다.”
샤갈은 가정을 가난하게 이끈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청어를 열심히 날랐지만 한 달 수입은 20루블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생선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은유이다. 반면에 그는 어머니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샤갈은 말더듬이라 친구랑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어린 샤갈을 자연스레 책과 친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린 샤갈은 어느 날 홀연히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화가가 되고 싶으니 미술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아들이 책 속의 삽화를 종일 베끼며 보내는 모습을 보며 동네 미술 교실을 운영하는 화가 ‘유리 펜’에게 데려갔다. 어린 샤갈은 그렇게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샤갈은 유대인이라 입학이 거부돼 스무 살이 되어서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다. 유대인은 통행증이 없으면 다른 도시의 출입이 허가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는 임시 통행증을 얻어와 물품 배달 가는 것처럼 꾸며 샤갈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샤갈의 1912년 작품 ‘골고다’. 어린아이 모습으로 묘사된 십자가 위의 예수는 후광으로 둘러싸여 있고, 유다가 사다리를 들고 도망치고 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샤갈은 자신의 신앙을 초월해 십자가 위의 예수를 그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샤갈은 왕실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러시아 의원 막심 비나베르의 후원으로 24살인 1910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비로소 자유를 만끽했다. 프랑스는 1791년 유대인에게도 똑같은 시민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킨 나라였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자유의 공기는 그의 예술혼도 자유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온종일 루브르 박물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위대한 대가들의 그림을 관찰하며 자신만의 빛과 공간을 탐구했다.
샤갈이 그리는 그림의 주제와 색채의 원천은 바로 하시디즘과 고향이었다. 그의 집안이 독실하게 믿는 하시디즘 유대교는 신의 신성한 빛(불꽃)이 만물 속으로 흘러들어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종파이다. 그들은 신의 본질인 ‘엘로힘’과 사물 속에 내재한 신의 본성 ‘셰키나’를 영원히 결합시키는 것이 구원이며, 이는 세계와 자신을 즐겁게 긍정하고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동물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람과 동물이 영혼을 교류하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샤갈의 그림 속 동물들이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환생해서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파리 정착 초기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린 ‘나의 마을’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독실한 유대교도가 예수와 마리아를 그리다
이 시기에 샤갈은 자신의 신앙을 초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 ‘골고다’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예수를 주제로 삼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벽을 뛰어넘어 샤갈이 추구하는 절대적 사랑 ‘헤세드’를 이 땅에서 구현한 존재에 대한 작품이었다. 어린아이 모습으로 묘사된 십자가 위의 예수는 후광으로 둘러싸여 있고, 겁에 질린 유다가 사다리를 들고 도망치고 있다.
샤갈은 이듬해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그렸다. 아기 예수를 원형의 테두리 안에 넣어 성모의 배 속을 투시한 그림이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 ‘이콘(성화)’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샤갈은 고향에 있는 약혼녀 벨라와 결혼하기 위해 1914년 러시아로 가서 고향 비텝스크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몇 주 뒤 1차 대전이 발발하여 국경이 봉쇄되어 버린다. 이듬해 벨라와 결혼해 첫 딸 이다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그림에는 사랑에 빠진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특히 벨라를 그린 그림이 많았다.

▲샤갈과 그의 부인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 샤갈은 1944년 첫 번째 부인 벨라와 사별한 뒤 1952년 브로드스키와 재혼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샤갈 가족은 1922년 고향을 떠나 베를린을 통해 이듬해 파리로 돌아온다. 이후 강렬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죽은 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화가는 샤갈뿐이다”라며 샤갈의 그림을 극찬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38년에 샤갈은 ‘하얀 십자가 처형’을 그렸다. 그림에서 샤갈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 처형이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렸다. 그 뒤 1941년 2차 대전 때 나치의 탄압을 피해 자신의 작품들을 미처 챙기지도 못한 채 뉴욕으로 피신했다. 1944년 9월 그의 아내 벨라가 감염병으로 죽게 된다.
홀로 남은 그는 1947년 프랑스로 돌아와 지중해 해안가에서 사랑을 담은 그림을 그리며 1950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샤갈의 딸은 아버지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라야 예술혼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여자를 소개했다. 1952년 65세의 샤갈은 딸의 소개로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재혼해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1966년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프랑스 정부는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미술관의 건설을 추진했다. 니스(Nice)시가 미술관 토지를 제공해 1973년 샤갈의 86세 생일날 ‘샤갈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샤갈은 1985년 98세의 나이에 눈을 감아 생폴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 박해에 시달렸던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은 1887년 러시아 벨라루스의 유대인 도시 비텝스크에서 가난한 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도시 인구 6만6000명의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생선 가게 종업원으로 청어를 나르는 일을 했으며 어머니는 집에서 야채를 팔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주시는 대로 모두 받아 9남매를 두었다.
샤갈이 태어난 당시는 러시아의 ‘포그롬(Pogroms·대박해)’ 직후였다. 포그롬이란 ‘아수라장에 분노를 퍼붓다, 폭력적으로 파괴하다’라는 뜻의 러시아어다. 1881년 3월 유대인이 연루된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3년여 동안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를 휩쓴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때 군중은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수십만명이 희생됐다. 그러지 않아도 2등 시민으로 낙인찍혀 남부 러시아에 쫓겨와 살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참화였다. 이후에도 진행된 유대인 박해로 인해 샤갈의 가정이 받았을 끔찍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늠케 하는 시대였다.
〈59〉960명이 로마군단에 맞서 2년 항전… 이스라엘의 저항정신 되다

▲파괴되는 예루살렘 -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된 17세기 프랑스 화가 푸생의 1638년 작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 1차 유대 로마 전쟁 때인 서기 70년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장면이 담겼다. 당시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살육과 약탈을 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당시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중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헤롯 시대에 가나안 지역 유대인 수는 약 2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무렵 로마제국 전역에서 조사된 유대인 수는 694만4000명이었다. 이 수치는 서기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실시한 인구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은 로마제국 인구의 10%가 넘는 큰 민족이었다.
1차 유대 로마 전쟁
서기 66년 여름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체납된 속주세를 받으려 예루살렘 성전에 쳐들어가 17탈렌트(화폐단위)의 금화를 몰수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몰수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성전을 더럽힌 행위에 분노하여 유대인들이 들고일어났다. 폭동은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다. 유일신 신앙을 지키려는 신앙적 가치의 충돌이 원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 병사들이 참살당한 다음, 시리아 주재 로마군이 도착했으나 유대인의 거센 저항에 놀라 퇴각한 것이 결과적으로 패주로 이어지고 만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손에 넣었다.
1년에 딱 하루만 예루살렘 출입 허용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이 전멸당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로마는 4개 군단을 투입하고 당대 최고 명장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해안 지대를 제압하고 예리고를 탈환한 다음 남쪽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리고 지방을 먼저 평정해 예루살렘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전쟁 중인 69년 로마 황제로 추대되어, 그는 아들 티투스(디도)를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떠났다.

▲로마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들은 1차 유대 로마 전쟁 당시 로마군에 끌려간 유대인 노예들이다. /위키피디아
이듬해 봄 티투스는 예루살렘 탈환을 개시했다. 유대 병력 2만3000명에 비해 8만명이 넘는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양상은 치열했다. 티투스는 부하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하지 말라고 했으나 전쟁 중 방화로 소실되었다. 함락된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무차별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전쟁의 참상은 처절했다.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이때 다른 종파는 모두 전멸당하고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 통에 사제 계급이 없어져 유대교는 평신도 종교가 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로마로 끌고 가서 장대한 개선 행렬을 벌였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화폐까지 주조했을 뿐 아니라 로마 역사상 최초로 개선문을 세웠다. 당시 잡혀간 유대인 노예들이 건설한 게 콜로세움이다. 오늘날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쟁이 끝난 뒤 로마제국은 승자의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살며 유대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사다 전투
예루살렘 점령으로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유대인의 봉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열심당원’들은 유대 사막 동쪽 절벽 위 요새 마사다에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960명이 로마제국에 대항했다. 이미 2년 전에 ‘유대 정복기념 주화’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이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72년 10군단이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로마군 9000명과 노역에 동원된 유대인 포로 6000명 등 1만5000명이었다.
그러나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놀랍게도 10군단과 맞서 2년이나 버틴다. 마사다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물, 무기는 그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마사다를 포위한 로마군은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쉽게 이길 수 없었다.
마사다의 서쪽 벼랑에는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10군단 실바 장군은 이곳에 인공 능선을 쌓아 올리도록 지시했다. 6000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공사를 맡았다.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차마 동족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비탈길이 완성되자 투석기에서 날아간 돌들과 불화살은 마사다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마사다 요새 - 제1차 유대 로마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최후의 항전을 펼친 마사다 요새 전경. 예루살렘 점령 이후에도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960명의 유대인은 천혜의 절벽 요새 마사다에서 1만5000명의 로마군에 맞서 2년이나 버텼다. /대니 스턴펠드(Dany Sternfeld), 플리커(Flickr)
그날 밤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남자들을 모아놓고 “자유란 이름으로 수의를 입자”며 자결을 유도하는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 채로 로마군에 잡히면 노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예롭게 자유인으로 죽을 수 있으며, 이 특권을 주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 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먼저 우리의 재물과 요새를 불태웁시다. 그러나 우리의 곡식 창고만은 남겨둡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결한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결의한 바와 같이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토록 합시다. 산 채로 잡힌 청년들이 계속되는 고문에 고통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남편은 거칠게 다루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볼 것입니다.
그는 또 두 손이 묶여서 ‘아빠’ 하고 소리치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의 손이 자유롭게 칼을 들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하직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 손에 죽거나 아니면 항복하여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떠납시다!”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후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들을 죽였다. 먼저 남자들이 가족들을 죽이고 남자 10명 가운데 한 명을 뽑아 그가 나머지를 죽이고 마지막 한 사람 ‘벤 야이르’가 자결하여 서기 73년 4월 15일 마사다에서 저항하던 960여 명 가운데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만이 살아남고 모두 숨졌다. 벤 야이르는 유대 율법에서 엄하게 금하고 있는 자살을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미루지 않고 마지막에 자결하여 죗값을 혼자 감당했다.
유일하게 남은 성전 서쪽 벽에서 통곡
마사다 전투 뒤 로마는 예루살렘을 더욱 철저히 응징했다. 성전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고 땅은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이 뿌려졌다. 1차 유대 반란이 진압된 후 로마 황제는 유대인의 할례를 금지시키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우스 신전을 세웠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마저 진압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유대인들을 아예 예루살렘에서 내쫓아 버린 것이다. 이후 일 년에 딱 하루,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에만 출입을 허용했다. 그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전 서쪽 벽에 머리를 대고 나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통곡했다. 이후 서쪽 벽은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불리었다.
현재 마사다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식을 거행하고, 유대 젊은이라면 정신 무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찾아와 ‘No more Masada(더 이상 마사다는 없다)’를 외치며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곳이다. 해외 유대인들은 이곳의 흙을 병에 담아 가져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그 흙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평신도 종교가 된 유대교]
로마군의 대량학살로 사제 계급 사라지고 평민 종파만 살아남아
예수 당시 유대에는 여러 종류의 종파가 있었다. 최고 정점에 친로마파인 헤롯당과 사두개파가 있었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지지자들이며, 사두개파는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직 토라(모세 5경)만을 성서로 받들어 제사장직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계층은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 율법을 모두 지켰다. 율법 학자들이 이 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반로마적이었지만 무력 사용에는 반대했다. 반면 독립을 무력에 호소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 속세를 버리고 황야와 사해 부근 쿰란에서 금욕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사악한 제사장들 때문에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이자 제사장인 메시아가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신 생활을 했다.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한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였다.
[60]중국인과 유대인… 애증의 역사
동양의 쉰들러 리스트… 中영사, 유대인 4000명 상하이로 대피시켜
중국은 미국과 패권전쟁 중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분야 중 하나가 유대 금융 세력의 중국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공격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금융시장 개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중국은 금융시장 개방을 위해 2020년 적격 외국인 기관투자자에게 파생상품 거래를 허용했다. 지난해 9월에는 원자재, 곡물, 지수옵션 등 41개 파생상품을 추가로 개방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외국인 기관투자자에게 주요 주식지수 관련 파생상품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유대 금융 세력이 1990년 초 파생상품으로 일본 주식시장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 기관투자자들은 닛케이지수에 터무니없는 버블이 끼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닛케이지수 상승에 베팅하는 파생상품을 주로 판 반면 뉴욕과 런던에서는 하락에 베팅하는 파생상품을 많이 팔아 일거에 일본 주식시장을 폭락시켰다. 물론 자산시장의 버블이 폭락의 주원인이지만 폭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유대 금융 세력이었다. 이후 닛케이지수는 20년간 하염없이 추락했다. 1989년 말 3만8915에서 2009년 3월 7054까지 주저앉았다.
미국의 대외정책, 중국과의 패권전쟁을 주도하는 국무장관과 국가정보국장, 재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중국이 미국 유대인의 동향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국 상하이에 몰려온 유대인들
중국인과 유대인 간에는 애증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많이 기여했다. 반면에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당시 유대 기업을 이끈 대표적인 가문이 사순(Sassoon)가와 커두리(Kadoorie)가였다. 이후 1895년부터 10년간 러시아 유대인들이 대박해(포그롬)와 공산혁명을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30년대 말 상하이 유대인 수는 4000명을 넘어섰고 유대 회당이 7곳이나 되었다.

▲20세기 초 상하이 - 중국 상하이 화이하이도로(옛 샤페이도로)의 20세기 초 전경. 중국과 유대인 사이에는 애증의 역사가 존재한다.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 사이의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수가 4000명을 넘어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중국에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1842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까지 107년간이 외세에 시달린 ‘치욕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일본도 대륙 침략에 가세했다.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했다. 이는 1905년 러일전쟁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유대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거의 패전 상황에서 군비 마련이 시급할 때, 뉴욕의 유대인 금융가 야곱 시프가 거액의 전쟁채권 판매를 선뜻 주도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일왕이 야곱 시프를 초청해 최고 훈장을 수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1930년대에 ‘유대 국가’를 만주에 건설하자는 국제적 제의를 했다. 일본은 유대 자본을 활용해 만주를 개발하고 이들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사실 그즈음 만주에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만주 이주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00년대 초 러시아는 뤼순항을 점령하고 만주 개발을 위해 러시아인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했다. 그러자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와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만주로 이주해왔다. 이후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피해 온 유대인들이 합세했다. 그 뒤 철도 건설 붐과 은행 개설로 유대인 숫자는 더 불어났다.
그 무렵 하얼빈이 대표적인 유대인 도시였다. 상업 지역의 80%가 유대인 소유였다고 한다. 하얼빈은 20세기 초 동북아의 대표적인 국제도시였다. 19국의 영사관이 하얼빈에 들어와 있을 정도로 인종 용광로였다. 당시 하얼빈의 외국인 인구는 도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9만 명이었다. 이 중 2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 가문이 하얼빈 출신이다.

▲하얼빈의 유대 회당 - 과거 유대 회당 건물이었던 중국 하얼빈의 한 공연장. 1909년에 지어진 이 유대 회당은 화재 후 1931년에 재건됐다. 20세기 초 동북아의 국제도시였던 하얼빈에는 약 2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러나 정작 중국에 더 많은 유대인이 몰려온 건 히틀러 등장 이후이다. 193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극심한 사회 혼란을 불러왔다. 이 틈을 타 1933년 나치 정권이 탄생했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열등한 인종을 청소해야 한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 차별이 가해졌다. 1938년에는 반유대 폭력이 시작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을 가두는 게토가 다시 만들어지고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홀로코스트 직전의 음습한 기운이 유럽 대륙에 가득했다.
유대인의 탈출을 도운 동양 영사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유대인들은 탄압이 거세지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갈 곳 잃은 유대인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자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 1938년 7월 프랑스 에비앙에 32국 대표들이 모여 유대인 난민 문제 처리를 협의했다. 유대인들의 딱한 사정에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2차 대전 직전 각국의 민감한 국제관계와 국익 앞에 어느 나라도 선뜻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회의는 소득 없이 끝났다. 히틀러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유대인 탄압이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며 고무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유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오히려 동양 외교관들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주재 중화민국(현재 대만) 영사관의 허펑산 영사는 도움을 청한 유대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가장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상하이로 2~3개월 만에 거의 4000명을 도피시켰다. 나치 정권은 영사관에 탄압을 가했다. 이에 허펑산은 근처 임대 아파트에서 비자 발행을 계속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관 ‘스기하라 지우네’ 영사도 이웃 폴란드에서 피신해온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해주어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렸다.
▲오스트리아 주재 중화민국 영사를 지낸 허펑산(왼쪽)과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를 지낸 스기하라 지우네.
이렇게 해서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피란 온 2만여 명 등 2만5000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 일대에 거주했다. 어느 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난민들을 중국은 받아들인 것이다.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그제야 이들을 받아들여 중국 내 유대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으로 떠났다. 지금 상하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2000명 남짓이라 한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1969년 일본 영사에게 훈장을 수여해 고마움을 표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상하이시에 감사를 표하고 2000년에 ‘야드바샴(이스라엘을 도운 의인의 전당)’에 허펑산을 동양인 최초로 등록시켰다. 대만 정부도 2015년 이미 고인이 된 허펑산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그를 기리는 뮤지컬 ‘생명의 도장’이 2019년 대만 전 지역에서 공연되었다. ‘생명의 도장’은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다.
[성경에서 ‘시님’ 땅은?]
세계 각지의 유대인이 귀향할 것이라고 예언… ‘시님’은 차이나 추정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이사야 49장11~12절)
이사야서 언급은 유대인들이 세계만방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메시지이다. 여기서 ‘시님’ 땅이 중국을 일컫는다고 이야기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다.
시님을 중국으로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 시대에는 중국을 ‘세리카’라 불렀다. 비단을 일컫는 ‘세르’에서 유래했다. 로마 시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오는 비단은 ‘세리카’에서 왔으며, 해상을 통해 수입하는 비단은 ‘시나’에서 왔다고 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시나’는 진(秦)나라를 일컫는 ‘China’에서 온 말로, 두 나라는 모두 중국이라고 보았다. 히브리어·영어 사전도 China를 ‘sin’이라 하며 Chinese를 ‘sini’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