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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7/ [221] 순간의 선택 - [240] 차이니즈 레드

상림은내고향 2023. 4. 29. 17:33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

2022.12.09

[221] 순간의 선택

/일러스트=양진경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사람은 늘 착잡하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짧은 시간을 푸념하는 표현이 발달했을 듯하다. 순식(瞬息)이 우선 그렇다. 눈 한 번 깜빡이고[瞬], 숨 한 차례 쉬는[息] 시간이다. ‘순식간(間)’, 또는 줄여서 ‘순간(瞬間)’으로 적는다.

 

눈동자 한 번 굴리는 일은 전순(轉瞬)이자 별안(瞥眼)이다. 우리는 ‘별안간(間)’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손가락 한 차례 튕기는 시간이라는 뜻에서 탄지(彈指)라고 적을 때도 있다. 모두 짧은 시간의 형용이다.

 

가장 짧은 시간은 찰나(刹那)라고 한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의 영향으로 한자(漢字) 권역에 자리를 잡은 음역(音譯) 단어다. 한 차례의 마음이 일었다 사라지는 일념(一念)도 있다. 고대 인도의 시간 기준으로는 찰나가 가장 짧고, 그 다음이 일념, 이어 순간의 순서란다.

 

흰색 말이 휙 지나가는 광경을 문틈으로 보며 적은 성어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다. 마치 섬광처럼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모습이다. 역시 세월의 ‘광속(光速) 주행’을 일컫는다. 구극(駒隙), 극구(隙駒), 구광(駒光) 등이 파생 단어들이다.

 

경각(頃刻), 편각(片刻)도 있다. 후딱 스쳐가는 시각(時刻)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유(須臾)라는 말로도 잘 적었다. 비의 모습에서 유래한 삽시(霎時)라는 단어도 있다. 앞 글자 ‘삽’은 조금 내리다가 곧 그치고 마는 비다. 따라서 ‘삽시’는 역시 길지 않은 시간의 지칭이다. ‘삽시간’이라는 말로 자주 쓴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44년째다. 그에 견주면 최근 1~2년은 ‘삽시’라고 할 만하다. 길지 않은 그 시간에 활력 넘치던 중국이 크게 생기를 잃었다. 개방적인 기조의 후퇴가 큰 원인의 하나다. 흥망(興亡)과 성쇠(盛衰)의 고비 또한 어느 한 ‘순간’의 마음먹기에 달렸을지 모른다.

 

[222] 봄날의 꿈

▲유광종의 차이나별곡-봄날의 꿈

 

나른한 봄에 잠 이루는 일을 한자로 적는다면 춘면(春眠)이나 춘수(春睡)다. 푸릇푸릇한 식생이 돋아나고 날씨 또한 따듯해졌으니 그 잠이 더욱 달콤하다. 무더운 여름, 쌀쌀한 가을, 추운 겨울의 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명한 당시(唐詩)가 있다. “봄잠은 아침도 몰라…, 곳곳에서 들리느니 새 울음. 간밤의 비바람 소리, 꽃은 얼마나 떨어졌을까(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을유문화사).”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다. 달콤한 봄날 잠에 취했다가 새벽녘에야 깬 뒤 지은 작품이다. 늘어지게 잤으나 밤중 꿈결에 들리던 비바람 소리에 아름다운 꽃, 그리고 봄을 또 떠나보내고 만다는 안타까움이 그려져 있다.

 

성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현장에 등장하는 제갈량(諸葛亮)도 있다. 유비(劉備) 등이 기다리는데도 잠을 자다 일어나는 그의 모습을 ‘삼국연의(三國演義)’ 저자 나관중(羅貫中)은 “초가마루에서 실컷 봄잠 자다보니, 창밖에는 해가 뉘엿뉘엿(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이라 적었다. 이렇듯 봄날, 잠, 그리고 꿈 등은 중국인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들이다. 유명한 주희(朱熹)도 근엄한 도학자(道學者)답게 젊은이들의 학문 수련을 권장하면서 봄날을 앞세워 시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젊음은 쉬이 가버려도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다. 뜰 연못에 새 풀 돋을 때 꾼 꿈 깨기도 전, 섬돌 앞 오동나무에는 이미 가을 소리(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중국이 개혁·개방 온기에 묻혀 아득한 ‘중국의 꿈(中國夢)’을 꾼 지 10년. 그러나 이제 중국의 뜨락에는 꽃이 모두 지고 오동잎도 이미 다 떨어졌다. 살을 저미는 겨울의 한기(寒氣)만이 가득하다. 따스한 봄이 온다면 중국은 또 그런 꿈에 젖을까.

 

[223] 공산당과 太陽

/일러스트=김성규

 

빛 드는 곳과 그늘지는 장소를 지칭하는 대표 한자는 양(陽)과 음(陰)이다. 우리는 흔히 양달과 응달로 부른다. ‘양’의 초기 글자꼴은 햇빛이 어딘가를 내리쬐는 모양이다. ‘음’ 역시 구름이나 지형에 가려 어두운 땅의 모습이다.

 

중국의 전통적 사유에서 이 음양(陰陽)은 핵심 개념이다. 대립적인 두 가지가 모아져 조화를 이룬다는 논리의 중국 변증적(辨證的) 사고 토대다. 남녀(男女), 강약(强弱), 한서(寒暑), 군신(君臣) 등의 조어가 다 그 맥락이다.

 

산 남쪽과 물 북쪽을 가리키는 산남수북(山南水北)이라는 성어 표현도 있다. 이 경우는 꼭 ‘양’을 지칭한다. 북반구(北半球)에서는 산의 남쪽과 하천의 북쪽이 양달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강의 북쪽이 양달이라는 주장에는 이론(異論)도 있다.

 

아무튼 그런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또한 서울에 흐르는 한강(漢江)을 기점으로 그 북쪽을 한양(漢陽)으로 적었던 적이 있다. 지금 중국에도 한수(漢水)의 북쪽 지역을 일컬었던 ‘한양’이라는 지명이 아직 존재한다.

 

요즘 중국인들은 이 ‘양’이라는 글자를 대단히 꺼린다. 코로나19 면역 반응에서 ‘양성(陽性)’ 판정을 받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봉쇄와 격리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일관했던 중국 당국이 그 방향을 180도 전환하자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고 있어 더 그렇다.

 

옛 동양에서 ‘양’의 으뜸은 해다. 그래서 해를 ‘크다’ ‘극한’ ‘첫째’라는 뜻의 글자를 붙여 태양(太陽)이라 적었다. 중국을 이끄는 공산당도 곧잘 ‘태양’으로 불린다. 가난하고 헐벗은 중국을 공산당이 구제했다는 논리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대책 없이 코로나 정책이 뒤바뀌어 사망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중국인의 ‘양’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깊어진다. 그에 따라 ‘중국의 태양’이라고 자부했던 집권 공산당의 위상 또한 몹시 흔들거린다.

 
 

12.30

[224] 올해 중국의 除夜(제야)

 

어느 한 곳에서 높이가 다른 지점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에는 계단이 놓인다. 대개는 한 발짝씩 디뎌 오르거나 내린다. 따라서 한 걸음으로 하나의 ‘맺음’을 이룬다. 그런 의미 맥락에서 생겨난 한자가 ‘제(除)’다.

 

글자는 본래 궁중의 계단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각 단(段)을 한 걸음씩 바꿔 딛는 계단 위 동작으로 인해 나중에 ‘바뀜’의 의미를 얻었다. 아울러 이전 것을 뒤로하고 새것을 디딘다고 해서 ‘없애다’는 새김도 획득했다고 본다.

 

이 흐름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가 제야(除夜)다. 한 해 마지막 밤을 일컫는 말이다. 가는 해와 오는 해의 교차점이 걸음 바뀌는 계단처럼 여겨져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제석(除夕)이라고 잘 적는다.

 

제월(除月)이라고 하면 가는 해의 마지막 달, 즉 음력 12월을 일컫는다. ‘제야의 종’을 울리는 그 날은 당연히 제일(除日), 즉 섣달그믐이라고 부르는 한 해 마지막 하루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날이다.

 

옛 벼슬아치가 새 관직을 받을 때도 이 글자가 등장한다. 제수(除授)가 대표적이다. 임금이 옛 자리를 없애고[除] 새 자리를 주는[授] 사례를 일컫는다. 흔히 제배(除拜)라고도 적었다. 벼슬아치에게는 아무래도 경사에 해당한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은 흔히 ‘4칙(則) 계산’으로 부른다. 한자로는 가감승제(加減乘除)다. 때로 곱셈의 ‘승’은 보태고 늘어나는 상황, 나눗셈 ‘제’는 나누고 쪼개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래서 승제(乘除)라고 하면 곱셈과 나눗셈의 뜻 외에 성쇠(盛衰)의 의미도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망자가 폭증한다. 뒤늦은 정책 전환으로 혼란이 더해지면서 중국은 마치 긴 내리막길에 놓인 계단 앞에 다시 선 형국이다. 중국인이 맞이하는 올해 섣달그믐밤, ‘제야’의 정경이 참 스산하겠다.

 

2023.01.06

[225] 쭉정이 정치

 

한자 초기 꼴은 대개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평범하게 물상(物像)을 그리는 글자도 있지만 상당수는 전쟁 등의 끔찍한 경험과 맞물려 있다. 정치(政治)라고 할 때의 ‘정(政)’도 그렇다. 정벌(征伐), 공성(攻城) 등의 그림자가 그 바탕이다.

 

이 글자는 두 요소다. 성(城)을 공격하는 상황[正]과 본래는 무기를 쥐고 누군가를 때리는 모습[攴]의 합성이다. 따라서 이 글자 초기 새김은 완연하게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맥락에서 다시 ‘거둬들이다[徵]’라는 뜻도 얻었다고 본다.

 

남을 공격해 다스리며 재물까지 뺏는 행위 등을 가리켰던 까닭에 이 글자는 결국 ‘정치’의 의미를 획득했을 듯하다. 지배와 복속이 기본적인 틀이었던 옛 사회에서는 더 그랬을 것이다. 일반 삶과 정치는 맞물려 있어 관련 단어도 퍽 많다.

 

정치가 어떤 결과를 부르느냐에 대한 평가가 우선이다. 선정(善政)과 인정(仁政)은 다 훌륭한 정치다. 바르고 어질게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다. 모두 유가(儒家)의 가치관이 중심인 덕정(德政)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만 정치가 이뤄졌을 리 없다. 나쁜 정치를 표현하는 말도 많다. 우선 폭력적인 권력의 행태를 폭정(暴政)으로 적는다. 가정(苛政)은 가혹한 정치를 일컫는다. 학정(虐政)은 포학한 정치의 지칭이다.

 

백성을 괴롭히는 악정(惡政)은 낟알 없는 곡식인 쭉정이[秕]처럼 나쁜 정치라고 해서 흔히 ‘비정(秕政)’으로 곧잘 적었다. 어지러운 정치 난정(亂政), 포악한 정치 패정(悖政) 등도 있다. 소모적인 정쟁으로 일관하는 여의도 정치에는 어떤 말이 어울릴까.

 

코로나 방역 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으로 혼란을 부른 중국 공산당의 정치력도 화제다. 개혁·개방 기간에는 ‘선택과 집중’에 퍽 능했지만 요즘 공산당은 어지럽다. 견고한 통치를 자랑했던 베이징(北京)에도 ‘쭉정이’가 잘 자라나는 모양이다.

 

[226] 불우 이웃

/일러스트=박상훈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상황을 맞는다. 한자 세계에서는 대개 조우(遭遇)라고 적는 일이다. 아예 그런 상황에 닿은 때를 경우(境遇)라고 한다. 인생은 그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우와 경우 등을 겪으면서 흘러가는 법이다.

 

중국은 그 흐름의 단어 용례가 참 많다. 서로 만나는 상우(相遇)와 제우(際遇), 한곳에 모이는 회우(會遇), 기이하게 마주치는 기우(奇遇)나 교우(巧遇) 등이 그렇다. 천 년[載]에 한 번 마주칠 좋은 기회를 일컫는 성어 천재일우(千載一遇)도 있다.

 

여기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글자 우(遇)는 의미가 조금 더 보태져서 마주치는 상황의 좋고 나쁨을 일컬을 때도 있다. 예우(禮遇)는 좋은 대접이다. 대우(待遇)와 처우(處遇)는 그런 대접의 수준 자체를 가리킨다.

 

불우(不遇)는 지닌 뜻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를 지칭한다. 그 단어를 말해주는 고사(故事)가 있다. 말[馬]의 능력을 감별하는 데 천재였던 백락(伯樂)이 ‘불우’의 천리마(千里馬)와 마주치는 스토리다.

 

태항산(太行山)의 깊고 험한 산기슭에서 소금 운반 수레를 끌고 있던 천리마는 길을 지나던 백락과 마주친다. 백락은 천리마가 소금 수레를 끌고 있는 참담함, 명마는 그 점을 알아봐 준 백락의 고마움에 서로 울었다는 내용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는 이 ‘불우’를 곧장 불운이나 불행, 또는 빈곤으로 풀기도 한다. ‘불우 이웃’ ‘불우 청소년’ 등으로 말이다. 그런 우리의 언어 관념으로 볼 때 코로나 방역 정책 전환으로 큰 혼란을 맞은 중국은 지금 ‘불우 이웃’일까.

 

사망자 급증에 시신을 처리할 화장장이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그 경우가 참 불우하다. 중국 당국은 인접 국가에 입국 규제 등 외교적으로 보복하기보다는 자국민의 이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더 골몰해야 한다.

 

[227] 토끼는 달릴까

 

달의 지형 차이로 생기는 그림자가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달과 토끼는 간혹 같은 의미로 쓰인다. 특히 달 속 그림자는 옥토끼가 전설상의 영약(靈藥)을 절구에 찧는 모습이라고 여겨져 곧잘 사람들의 상상력도 자극했다.

 

토끼는 다산(多産)에다가 얌전한 성품을 지녀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의 소심함, 찢어진 입 때문에 때론 경멸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하는 동물의 하나로 일찍 이름을 올렸다.

 

성어와 고사에 등장하는 토끼가 적잖다. 우선 날쌘 토끼가 죽으면 그를 잡던 사냥개는 곧 솥에서 삶긴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참 유명하다. 우연히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죽은 토끼 때문에 늘 그곳에서 다른 토끼를 기다린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도 그렇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서 언젠가 닥칠지 모를 위기에 대응한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의 고사도 잘 알려져 있다. 요즘 중국인들은 “토끼는 제 굴 주변의 풀은 뜯지 않는다”는 속언을 잘 쓴다. ‘제 살 깎아 먹기’를 경계하는 말이다.

 

새해는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다. 토끼의 한자 토(兎)는 다른 글자 요소와 결합해 우리에게 친숙한 글자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우선 ‘덮다’라는 새김을 지닌 멱(冖)을 머리에 올려 ‘원통하다’는 뜻의 원(冤)으로 발전했다.

 

‘달리다’는 새김의 착(辶)이라는 부수와 합쳐지면 일(逸)이라는 글자다. 앞의 ‘원’은 토끼가 어딘가에 꼭 갇혀 있는 모습, 뒤의 ‘일’은 신나게 달리는 토끼의 그림이다. 따라서 앞은 억울함과 원통함, 뒤는 자유와 평안함의 새김을 얻었다고 본다.

 

곧 중국 땅에 찾아들 검은 토끼의 운명은 어떨까. 개혁·개방의 퇴조에 이은 통제 강화로 어딘가에 단단히 갇힐까. 아니면, 그 너른 땅을 마음껏 휘저으며 다닐 수 있을까. 새해 중국 토끼의 향배가 참 궁금하다.

 

[228] 중국인의 품격

/일러스트=박상훈

 

“오래 우러렀다”는 표현을 한자로 적으면 구앙(久仰)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은 ‘제 눈에 문제가 있다’는 뜻의 안졸(眼拙)로 적는다. 때로는 ‘예의를 잃었다’는 뜻의 실경(失敬)으로 “죄송하다”는 표현을 대신한다.

 

중국인들이 자주 썼던 예절과 격식의 용어 흐름이다. 남에게 의견을 구할 때는 ‘가르침을 부탁하다’는 뜻의 청교(請敎)라는 단어를 붙이고, 뭔가를 물을 때도 ‘여쭙다’는 뜻의 청문(請問)이라는 말을 꼭 먼저 올리던 중국인들이다.

 

남의 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할 때는 ‘엎드려 찾아뵙다’는 의미의 배방(拜訪)을 사용하고, 남이 내 집을 찾아올 적에는 ‘영광스럽게 찾아주시다’는 뜻의 광림(光臨)이라는 말을 썼다. 진심에서 우러났든 아니든, 예절에서만큼은 품격이 있었던 중국인들이다.

 

요즘은 이런 예절과 격식이 사라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를 받치던 교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중국인의 자질(資質)’ 문제가 지구촌의 화제다. 세계 도처에서 매너 없는 중국인, 소란 피우는 중국인, 생떼 쓰는 중국인이 주목을 받는다.

 

“한국이 중국의 음력설을 훔쳤다”며 영국 박물관을 댓글로 공격했던 중국 누리꾼들이 화제다. 오랜 문화 현상에 거꾸로 국적(國籍)을 매겨 제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한심하다 못해 가엾기까지 하다.

 

공자(孔子)는 생전에 문질(文質)을 말했다. 앞의 문(文)은 예절이나 문화로 잘 가꿔진 상태, 뒤의 질(質)은 꾸미지 않은 천연의 바탕이나 토대 등을 가리킨다. ‘문화’의 요소로 ‘바탕’을 제대로 다듬지 않으면 공자는 그 상태를 ‘야(野)’라고 했다.

 

공자가 말한 그 ‘야’는 야비(野鄙)와 천박(淺薄)으로 풀어도 좋다. 품격이 있었던 중국의 문화는 이제 그 수준으로 타락했다. 제 좋은 요소를 잇고 발전시키지 못한 ‘실패’를 오늘의 중국은 얼마큼 심각하게 받아들일까.

 

[229] 통제와 감시의 그물

/일러스트=박상훈

 

그물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시선이 착잡하다. 뭔가를 가두거나 잡아들일 때 쓰는 물건인 까닭이다. 그물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망(網)과 라(羅)다. 둘의 생김새는 비슷하다. 굳이 가르자면 ‘망’은 물고기, ‘라’는 새를 잡는 그물이다.

 

둘을 합쳐 ‘모두를 포함하다’는 뜻의 망라(網羅)로 적지만 본래 그 차이는 확연치 않았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성긴 듯해도 놓치지는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는 ‘도덕경(道德經)’ 속 노자(老子)의 유명 언급을 보면 그렇다.

 

노자의 이 말은 자연의 법칙, 사람의 도리(道理) 등을 강조한 내용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에 맞는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요즘 중국인이 잘 쓰는 성어 천라지망(天羅地網)은 통제의 엄격함을 지칭한다.

 

중국어의 그물은 ‘통치와 복속’이라는 정치적 개념이 짙다. 상(商)의 탕왕(湯王)이 그물의 세 면을 열어 사냥 대상을 풀어줬다는 고사가 대표적이다. 관용의 정치를 일컫지만, 한편으로는 제 권력 안으로 남을 널리 끌어들이려는 속셈도 담겨 있다.

 

현대 중국도 그 점을 잘 계승했다. 집권 공산당은 ‘천망(天網) 엔지니어링’을 가동 중이다. 얼굴 식별, 빅 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첨단 기술을 ‘망라’한 감시 시스템의 건설이다. 기차역, 호텔, 버스, 지하철 등 모든 영역에서 펼쳐진다.

 

14억 중국 인구의 동태를 낱낱이 들여다보려는 의도다. 중국의 감시 카메라는 2020년 현재 6억대를 넘었다고 전한다. 여기에 개인의 준법 여부와 신용, 건강 코드 등을 통한 감시 시스템까지 곁들일 계획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통제와 감시의 그물이다. 군중의 소요, 백지(白紙)를 든 항의가 벌어져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통치 권력의 그물 앞에서는 늘 생선과 고기[魚肉] 신세인 중국인들이다.

 

[230] 중국인이 달 그리는 법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달을 중국인들은 공교롭게 다룬다. 달을 바로 묘사하지 않고 그 옆에 희미하게 드리운 구름을 먼저 그린다. 이른바 달무리라고 하는 ‘주변’을 그려 ‘본체’인 달 이미지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주위에 달무리를 퍼뜨려[烘] 달을 드러내다[托]라는 뜻에서 이 전통 회화(繪畵)기법을 보통 홍탁(烘托)이라고 적는다.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성어는 ‘구름을 퍼뜨려 달을 돋보이게 하다’라는 뜻의 홍운탁월(烘雲托月)이다.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퍽 우회적이고 간접적이다. 회화의 이 기법은 주변에 퍼진 구름 모습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오히려 더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새파란 잎사귀를 받쳐 그려 모란꽃을 더 장중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비단 회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매사에 그렇다.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우회와 간접의 가능성을 먼저 엿본다. 메시지를 직접 던지기도 하지만 때론 글 사이에 제 본뜻을 숨겨 은근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글의 줄 사이에 숨어있는 메시지라고 해서 우리도 ‘행간(行間)’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성어로는 글자 속, 그 행의 사이라는 뜻에서 자리행간(字裏行間)이라고 적는다. ‘말 바깥의 뜻’이라는 새김의 언외지의(言外之意)도 마찬가지다.

 

음악에서도 선율이 지나가는 흐름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는 경우가 있다. 보통 현외지음(弦外之音)이라고 한다. 그렇듯 그림 속의 그림, 말 바깥의 말, 소리 외부의 소리가 더 중요한 중국이다. 따라서 남과 싸울 때도 우회와 간접의 은밀한 접근을 중시한다.

 

우회와 간접 방식은 첩보전 영역에 가장 적합하다. 중국이 정보 수집 용도로 띄운 듯한 풍선에 미국이 크게 놀란 모양이다. 은밀한 침투와 접근에서는 미국보다 중국이 한 수 위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써 미국인의 경계감을 최고치로 높였으니 중국으로서는 득일까 실일까.

 

[231] 울지 않는 울보

/일러스트=박상훈

 

우리가 ‘대륙’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너른 땅에는 울음이 참 많았던 모양이다. 그에 걸린 단어가 퍽 풍부하다. 대표적 단어는 곡읍(哭泣)이다. 글자 둘의 뜻은 조금 다르다. 앞은 소리 내는 울음, 뒤는 소리 삼키는 울음이다.

 

통곡(慟哭)은 소리를 아주 높여 우는 행위다. 그저 아픔과 슬픔이 커 우는 울음은 통곡(痛哭)이다. 아예 목을 놓아 큰 소리로 우는 울음은 방성대곡(放聲大哭)이다. 호곡(號哭)도 부르짖음에 가까운 울음이다.

 

그에 비해 ‘읍(泣)’은 소리를 삼키는 듯한 울음이다. 소리가 작아도 슬픔은 더할 수 있다. 눈물이 얼굴에 가득하되 소리는 외려 감아드는 울음이 음읍(飮泣)이다. 훌쩍거리는 울음은 철읍(啜泣), 감동의 울음은 감읍(感泣)이다.

 

눈물을 가리키는 단어는 체루(涕淚)다. 그러나 두 글자의 선후(先後)를 따지자면 앞 글자가 먼저다. 유체(流涕)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이다. 체읍(涕泣)은 훌쩍거리며 우는 일이다. 파체(破涕)는 눈물을 거둔다는 뜻이다.

 

‘루(淚)’의 쓰임은 더 풍부하다. 우선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은 누안(淚眼)이다. 이어 감격할 때의 감루(感淚), 그저 흐르는 낙루(落淚), 나그네가 흘리는 객루(客淚), 헤어짐의 별루(別淚), 피눈물의 혈루(血淚)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풍부한 단어를 보면 중국인들은 울보다. 숱한 전쟁과 각종 재난, 가혹한 왕조의 통치에 짓눌려 뱉고 삼켜야 했던 울음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울음’의 새김이되 속 내용은 퍽 다른 글자가 ‘명(鳴)’이다.

 

우선은 동물 울음소리다. 속뜻은 억울함, 생각 등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일이다. 춘추전국시대 제 주장을 앞 다퉈 내걸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유명하다. 그러나 눈물로 얼룩진 체념과 순종의 중국인들은 어느덧 그 ‘쟁명’을 잊은 지 오래다. 울 때 제대로 울지 않는 울보다.

 

[232] 따지지 않고 그냥 배우기

 

 배우는 일과 생각하는 버릇. 이 둘을 일찍이 보완 관계로 설정한 말이 있다.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나오는 “배우되 생각지 않으면 엉클어지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구절이다.

 

그저 따라 배우는 일과 이리저리 따지거나 헤아리는 작업의 병렬이다. 그래야 올바르게 학문을 이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중국의 학문 전통은 이 같은 조화·균형의 흐름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공자의 ‘논어’ 첫 구절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다. 유교의 으뜸 경전 첫머리를 장식했으니 매우 유명하다. 구절 풀이는 다소 엇갈릴 수 있지만 ‘배우고 익히다’라는 학습(學習)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뚜렷하다.

 

그 후 중국은 이 ‘학습’의 전통에 줄곧 골몰한 듯하다. 그러나 자유롭게 사색하며 분방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키우지 못했다. 공자 스스로 ‘논어’에서 “종일 먹지 않고 뜬눈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배움이 최고더라”라고 실토한 점도 그렇다.

 

중국 전통 학문은 따라서 내내 한쪽으로 기울었다. 자유로운 생각보다는 옛 성현의 말을 배워 익히거나, 그 자구(字句)를 풀어가는 주석(註釋)과 주해(註解)의 영역에 묶였다. 옛것의 고증에 매달리는 훈고(訓詁), 그를 본받는 의고(擬古)의 전통도 그렇다.

 

요즘 공산당은 그 전통을 더 강화하고 있다. ‘학습강국(學習强國)’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공산당의 이론이나 사상을 일방적으로 배우고 익히게끔 하는 방식이다. 공산당 이념이 유교의 가치를 대체했을 뿐 나머지는 ‘학습’의 전통 그대로다.

 

공산당의 통치 기반은 이로써 견고해지겠다. 그러나 배우고 익히는 데만 매달려 자유롭고 분방하게 생각을 펼치지 못하는 국민들의 수준 하락은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통제만을 더 강화하는 공산당의 집요함이 참 돋보인다.

 

[233] 잦아드는 중국의 노래

봄꽃, 가을의 달…. 한자로 표현하면 춘화추월(春花秋月)이다. 이를 멈춘 상태로 읽으면 봄과 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다. 그러나 둘을 동태적으로 풀면 세월의 흐름이다. 봄꽃은 가을 달에, 그 가을 달은 또 봄꽃에 자리를 내준다는 뜻이다.

 

세월은 그래서 시서(時序)라고도 적는다. 시간의 갈마듦이다. 때와 무렵, 즈음 등이 차례로 번을 갈아 들어서고 물러선다는 의미다. 중국은 세월의 흐름이 남기는 결과도 꽤나 주목한다. “때가 지나니 상황도 변한다(時過境遷)”는 식이다.

 

그 변화가 아주 큰 경우를 일컬을 때는 창해상전(滄海桑田) 또는 창상지변(滄桑之變)이다. 우리는 이를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잘 부른다. 파란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모습을 바꾼 경우다. 대단히 커다란 변화를 지칭한다.

 

 

사람이 지닌 권력 또한 그 세월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권력도 멈춘다(人亡政息)”거나 “경물은 그대로되 사람은 간 곳이 없다(物是人非)”고 한다. 긴 흐름 속에서 사람의 흥망(興亡)과 성쇠(盛衰)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세상의 인심은 뜨겁다가도 바로 차가워진다. 염량세태(炎涼世態)가 곧 그 말이다. “사람이 자리를 떠나면 그가 마시던 찻물도 식는다(人走茶凉)”는 중국 속언이 우선 눈길을 끈다. 권세 또한 시간 흐름에 따라 쉬이 사라짐을 알리는 말이다.

 

우리 대중가요 ‘연극이 끝난 후’와 참 비슷한 성어도 있다. ‘노래가 멈추니 사람이 흩어지다’라는 뜻의 곡종인산(曲終人散)이다. 당시(唐詩)에서 나온 말이다. 극성하던 것도 때에 이르면 스러지고 만다는 뜻의 성어로 자리 잡았다.

 

개혁·개방 덕에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했던 중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올해 봄꽃 필 무렵의 중국 노래는 크게 잦아드는 분위기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기 전 중국은 다시 힘찬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234] 태평연월

연기(煙氣)와 달인가, 아니면 구름이나 안개 등의 운무(雲霧)에 곁들인 달일까. 아무튼 한자 시사(詩詞)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이 있다. 연월(煙月)이라는 단어다. 희끄무레한 대기 속에 은은하게 비치는 달의 형용이다.

 

앞의 연(煙)은 달리 연(烟)으로도 적는다. 순우리말 ‘이내’로 옮길 수도 있지만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다. 산이나 수풀에 끼는 옅은 안개나 구름자락 비슷한 기체다. 이 대기현상을 통해 바라다보이는 달의 모습이 ‘연월’이다.

 

모든 것이 고요하게 멈춰 있는 그림이다. 중국인들은 이를 일찌감치 ‘태평(太平)’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성어 강구연월(康衢煙月)에서다. 이 말은 앞서 소개했듯이, 크고 넓은 거리[康衢]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달빛[煙月]이다.

 

 

매우 정태적인 이 풍경에서 중국인들은 평화와 안정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아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시조로 남겼다.

 

그런 문화적 심성의 중국인에게 가장 끔찍스러운 단어가 바로 동탕(動蕩)이다. 본래는 바람 등이 불어와 물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다. 아울러 거센 물결이 땅 위의 것들을 쓸어가는 결과도 지칭한다. 따라서 몹시 불안정한 상태를 일컫는다.

 

센 물결에 흔들리는 요탕(搖蕩), 심하게 흔들리는 격탕(激蕩), 물 위에서 흔들리는 표탕(飄蕩) 등이 비슷한 흐름의 단어다. 그로써 모든 것이 흔들려 엉클어지는 동란(動亂)은 전쟁과 재난이 잦았던 중국인들에게 늘 지워지지 않는 가위눌림이다.

 

요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바람 높고 물결 거세다(風高浪急)’는 말로 형용한다. 그러나 그 바람과 물결은 중국이 불러들인 바 또한 크다. 풍파(風波)의 복판에 선 중국에 ‘연월’은 올해 내내 좀체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겠다.

 

[235] 재상과 총리

재상(宰相)이라는 옛 속칭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제왕을 보필하는 최고위 권력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른바 “한 사람 아래, 모든 이의 위(一人之下, 萬人之上)”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때로는 일정한 직위 이상의 벼슬아치를 가리키기도 했다.

 

승상(丞相)도 한때는 재상과 같은 수준의 권력자를 지칭하는 직함이었다. 우리는 정승(政丞)이라고 잘 적었다. 임금 아래 최고 벼슬의 직함에는 각규(閣揆)도 있다. 정사를 펼치는 곳[閣]에서 많은 일을 돌보다[揆]는 뜻의 구성이다.

 

다른 말로는 수규(首揆)나 규석(揆席)으로도 적었다. 수보(首輔)라는 말은 근세 중국 왕조인 명(明)나라에서 썼던 직함이다. 제왕을 보필하는 신하[輔臣] 중에서 으뜸 자리[首]를 차지한 사람이다. 때로는 같은 의미의 원보(元輔)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서양의 Prime Minister를 번역한 한자어가 수상(首相)이자 총리(總理)다. 입헌군주제에서는 ‘수상’, 그냥 공화정 체제에서는 ‘총리’를 쓴다고 보통 설명한다. 그러나 엄격한 구분이 어려울 경우도 흔하다.

중국 총리는 국무원을 이끌면서 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총서기와 함께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러나 늘 공산당 총서기의 권력에 눌리고 치인다. 따라서 ‘개인기’가 강하지 않으면 끝내 초라함을 면키 어렵다.

 

최근 물러난 리커창(李克强) 전 총리는 요즘 ‘상권욕국(喪權辱國)’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본래는 ‘주권을 상실해 나라를 욕되게 함’이라는 뜻의 성어다. 그러나 여기서는 ‘권한을 잃고 국무원을 욕보였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할 말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판이다. 마침 후임 총리에는 시진핑 총서기의 심복 출신인 리창(李强)이 올랐다. 따라서 중국 국무원은 더 상실감과 욕됨을 감수해야 할 듯하다. 그 나름대로 이어왔던 견제와 균형은 아예 사라질 분위기다.

 

[236] 방관자의 눈길

“게임 사정은 당사자보다 옆 사람이 훨씬 더 잘 헤아린다(當局者迷, 傍觀者淸)”는 중국 속언이 있다. 싸움에 직접 빠져 있는 사람에 비해 곁 사람이 더 크고 넓게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을 따질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이런 ‘방관(傍觀)’의 시선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성어가 ‘강 건너 불 바라보기’의 격안관화(隔岸觀火)다. 앞서 소개했듯 이 말에는 관망과 계산의 눈길이 깊이 숨어 있다. 불길이 잦아든 뒤의 상황에 먼저 주목한다.

 

불을 그저 구경거리로만 여기는 우리와 퍽 다르다. 제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다음 행위를 꼭 염두에 두는 습성이다. “산에 앉아 호랑이 두 마리의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다”라는 말도 그렇다.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다.

 

/일러스트=김성규

 

사나운 호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이긴다. 싸움에 진 호랑이는 죽거나 크게 다친다. 이긴 호랑이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산 위에서 이 두 마리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은 결국 두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속셈이다.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도 유명하다. 조개를 탐내던 도요새는 부리가 그 다문 입에 갇힌다. 실랑이를 벌이다 힘이 빠진 둘은 이를 지켜보던 사람에게 잡힌다. 어부지리(漁夫之利)라고 하는 유명 성어 스토리다.

 

이런 언어 흐름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인은 ‘방관’에 퍽 강하다. 온갖 형태의 전쟁과 싸움에 시달렸던 인문적 환경 때문이다. 다툼의 안팎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병가(兵家)의 모략(謀略) 사고다.

 

요즘 수수방관(袖手傍觀)을 멈춘 중국이 행동에 나섰다. 중동-이란의 갈등에 개입해 미국의 입지를 좁히더니, 이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재할 모양새다. 역시 미국 압박용이다. 견고한 실리(實利) 추구는 늘 돋보이나, 정의(正義)에는 항상 무감해 문제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에게 곧잘 ‘영악한 이웃’으로만 비친다.

 

[237] 至尊의 술자리

아주 높은 자리에 있어 범접하기 힘든 사람을 일컬을 때 흔히 지존(至尊)이라는 말을 쓴다. 보통은 왕조시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임금을 지칭한다. 또는 각 분야에서 꼭대기에 올라 대단한 권위를 지닌 사람에게도 쓴다.

 

여기에 등장하는 존(尊)이라는 글자의 초기 꼴은 명확하다. 두 손으로 술잔을 받들어 누군가에게 올리는 모습이다. 곡식으로 빚은 술은 예전엔 참 귀했다. 그를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니 그 대상은 분명히 범상한 인물은 아닐 테다.

 

그래서 이 글자는 존경(尊敬), 존귀(尊貴), 존대(尊待), 존엄(尊嚴) 등의 숱한 단어로 나타난다. 극상(極上)의 지위에 있는 임금이라는 뜻 외에 이 글자는 ‘아버지’의 의미도 얻었다. 제 또는 남의 아버지를 가존(家尊)이라 했던 사례가 그렇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속화(俗化)한 지칭이 더 많다. 제왕(帝王)을 호칭할 때다. 앞의 ‘지존’이 대표적이고, 달리 극존(極尊)이나 일존(一尊)이라고도 했다. 둘 다 지극히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는 말도 있다.

 

1~9까지의 숫자에서 구(九)가 홀수[陽] 중 가장 높고, 중심에 오(五)가 있다는 설정에서 나왔다. 가장 높은 인물, 세상 한복판의 임금을 지칭한다. 남면지존(南面之尊)도 있다.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는 제왕의 자리를 가리킨다.

 

공산당과 함께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며 국가 운영을 이끌었던 중국 국무원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한다. 최근 선보인 ‘국무원 업무 규칙’은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의 간여 범위를 확장해 그의 국무원 장악을 공식화했다.

 

이미 ‘지존’인 시진핑 총서기의 권력 질주가 거세다. 그러나 극진한 ‘존대’를 받을수록 남이 건네는 ‘술’을 더 마셔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최고 권력자는 늘 술에 취하듯 권력에 도취하는 모양이다. 중국 정치권의 ‘술판’이 오래 이어질 듯하다.

 

[238] 황제(皇帝)의 기원

황제(皇帝)라는 명칭을 처음 쓴 사람은 누굴까. 역사상 ‘첫[始] 황제’라고 해서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렸던 이가 그 주인공이다. 앞에다가 나라 이름을 붙여 우리가 흔히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황제라는 말은 삼황오제(三皇五帝)라는 전설상의 군주들로부터 비롯했다. 그러나 진시황 이전 임금들은 대개 ‘황’이나 ‘제’를 따로 사용했다. 혹은 후(后), 왕(王), 천왕(天王) 등의 직함을 썼다. 황제는 그를 모두 통합한 이름이다.

 

이른바 “덕은 삼황을 넘고, 공은 오제보다 높다(德兼三皇, 功高五帝)”는 의미에서 생긴 극단의 존칭이 바로 황제다. 앞의 황(皇)은 ‘하늘’ ‘빛’ ‘찬란함’의 뜻이라는 점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뒤의 제(帝)는 풀이가 다소 엇갈린다.

 

/일러스트=박상훈

 

혹자는 불 피우는 나무를 얽어 하늘에 제례를 올리는 상황을 그렸다고 풀이한다. 다른 쪽은 꽃받침[蒂]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설명한다. 한자의 토대인 갑골문의 초기 용례를 보면 이 글자는 ‘하늘’이라는 뜻을 얻기 전에 조상신(祖上神)을 가리켰다.

 

꽃받침이 열매를 맺는 부분이라서 ‘생명의 연원=조상’이라는 추정이 그에 따라 붙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후 글자는 ‘하늘’이라는 뜻을 더 보태다가 모든 질서를 아우르는 ‘하늘의 신’, 즉 상제(上帝)와 천제(天帝)라는 의미도 획득했다.

 

진시황 이후 땅의 모든 권력은 늘 황제의 차지였다. 황제는 삼엄(森嚴)하다고 해도 좋을 등급과 위계의 정점(頂點)이자 상징이기도 했다. 그로써 과거에는 늘 황제 권력 중심의 철저한 관본(官本)의 사회가 펼쳐지곤 했다.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의 3연임 뒤 중국은 그 황제 권력을 되살리고 있다. 통치 권력은 무한으로 강해지고 민간의 역량은 끝없이 초라해지는 관강민약(官强民弱) 현상이 더 깊어질 듯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확실히 거둬들인 모양이다.

 

[239] 예절과 속셈

“꽃길은 손님 오신다 하여 쓸어 본 적 없고, 초라한 집 문은 그대 위해 이제 처음 열어 둡니다(花徑不曾緣客掃, 蓬門今始為君開)”라는 시구가 있다. 가난한 시절을 견디게 해준 손님이 찾아온다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적은 내용이다. 비질로 꽃길을 쓸고, 오래 닫았던 문은 활짝 열어 손님을 맞으려는 두보의 정성이 절절하다. 이어 보잘것없는 술, 변변찮은 안주의 박주산채(薄酒山菜)로나마 자기를 도와준 손님을 대접하려는 소박한 마음도 드러낸다.

 

중국인에게 손님은 매우 귀중한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시(關係·관계)’를 지독히도 중시하는 중국인에게 손님은 자신의 네트워크를 바깥으로 뻗는 중요한 길목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토포악발(吐哺握髮)의 고사성어가 우선 그렇다. 주공(周公)이 인재를 얻기 위해 밥을 먹다가도 세 번 토해내고(吐哺), 머리를 감다가도 세 번 머리카락 잡고(握髮) 뛰어나가 손님을 맞았다는 일화에서 나왔다. 전국시대 유력자들이 수천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렸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오례(五禮)에도 ‘손님맞이’가 있다. 국가적 행사인 제사 항목의 길례(吉禮), 장례에 해당하는 흉례(凶禮), 군대를 동원할 때의 군례(軍禮), 혼인과 성인식을 다루는 가례(嘉禮)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린 빈례(賓禮)다.

 

중국의 그 예법은 장중하다. 마치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올려놓고 손님을 홀리는 접객(接客)의 중국 식탁문화와 분위기가 같다. 커다란 이해득실이 걸려 있을수록 더 풍성하고 융숭하다. 현대의 중국 의전(儀典)도 맥락은 같다.

 

그 점을 감안하면 몇 해 전 한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뒤 벌어진 ‘혼밥 사건’은 매우 계산적인 결례였다. 이번에는 방중한 프랑스 대통령을 지극히 환대해 화제다. 모두 다 철저한 타산 끝에 나오는 행위다. 예법 뒤에 숨긴 그 치밀한 속셈을 우리는 늘 잘 읽어야 한다.

 

04.21

[240] 차이니즈 레드

이래저래 빨강이다. 중국의 속내와 겉치레가 모두 그렇다는 얘기다. 생명과 에너지, 기쁨과 행복의 맥락을 빨강에서 찾는 중국 민간의 심성이 우선이다. 아울러 붉은 깃발을 올려 집권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의 상징 색깔 역시 빨강이다.

 

황제(皇帝) 또는 성현(聖賢)을 가리키는 노랑도 큰 자리를 차지한다. 누런 황토(黃土)를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인문의 전통 때문이다. 따라서 빨강(朱, 赤, 紅)과 노랑(黃)은 중국인이 가장 높게 다루는 색조다.

 

 

오늘은 빨강 이야기다. 이 컬러는 고귀함과 부유함을 먼저 상징한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를 비롯해 당대의 출세한 이, 부잣집 등을 두루 일컫는다. 잘사는 집의 대문을 주문(朱門)으로 적는 용례는 두보(杜甫)의 시로 잘 알려졌다. 앞서 소개했던 “높은 사람 집 문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 길에는 얼어 죽은 이 해골(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이라는 구절이다. 전란 속 빈부 격차의 참상을 적었다.

 

옛 황제가 머물던 베이징(北京) 자금성(紫禁城)의 벽도 온통 자줏빛이다. 바로 차이니즈 레드(Chinese red)라고 불리는 주홍(朱紅)이다. ‘자금성’의 자(紫)는 ‘보라색’의 지칭도 있지만 사실 이 주홍에 가깝다. 그래서 주자(朱紫)라는 단어가 나왔다. 다른 뜻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권력을 지닌 높은 벼슬아치의 별칭이었다.

 

그 빨강은 때로 ‘홍(紅)’이 대신한다. 대홍대자(大紅大紫)는 요즘의 중국에서도 자주 쓰는 성어다. ‘크고 대단하게, 높고 우아하게’의 새김이다. 집권 공산당이 벌이는 큰 정치적 행사에 특히 잘 따라붙는 표현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자줏빛은 ‘시퍼렇게 드는 멍(瘀血)’의 색깔이기도 하다. 왕조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며 살았던 백성들 마음속 피멍의 색조다. 통치 권력은 높고 강한데, 민간은 늘 낮고 초라하다. 요즘도 이어지는 중국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