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3-04/
04.03(월) 데이터 가축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제시한 개념이다. 10년 전 현대 사회를 ‘피로사회’로 명명한 그는 신작 『정보의 지배』에서 디지털 정보체제(Informationsregime)가 인간을 데이터 가축으로 사육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탐욕스럽게 생산한 정보와 데이터를 착취하면서 지배를 공고히 해 나간다고 말한다.
이 체제에서 인간의 자유는 일종의 망상이다. 플랫폼을 잘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데이터 가축은 각각 색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실상은 해시태크(#)를 타고 유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각종 틱톡 챌린지, 인스타그램 릴스를 몇 시간씩 본 뒤 자신도 모르게 암시된 제품을 사들이는 사이클을 반복한다. 인간은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이 믿음에 기반해 다시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투명한 디지털 감옥에 갇힌다.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구글로 대표되는 정보통신(IT) 플랫폼이 가장 큰 몫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자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두렵다. 데이터 가축은 내면에서 우러난 욕구에 따라 스스로 발가벗는다. 다른 무리를 붙잡을 데이터 생산에 몰두한다. 우유 생산량이 좋은 젖소가 사랑받는 것처럼, 데이터를 많이 만들어 시스템의 보상을 받는 인플루언서는 동경이 대상이 된다. 쏟아지는 ‘좋아요’는 달콤하지만, 이는 함정이다. 내가 나라고, 내 사고가 내 생각이라고 단언하기 힘든 허무한 세계, 자유와 감시가 하나인 세상이다.
철학자의 이런 서늘한 시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생각 거리는 많다. 우선 체제가 배제하는 집단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지배 시스템 안으로 못 들어오거나 들어갈 수 없는 집단은 이미 고초를 겪고 있다. 가령 배달 애플리케이션, 택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지 못하는 노인은 체제가 버려도 좋은 존재다.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를 부정당한다. 코로나19 시대 QR코드를 찍지 못하는 사람이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이는 과장이 아니다.
물론 지난 모든 레짐(체제)이 그렇듯, 빈틈은 있다. 의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균열도 쉽게 전파된다. 인간의 가치가 최신 기술로 쉽게 대체되는 요즘, 존재 증명을 헐값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소중해지는 시점이다.
전영선 K엔터팀장
04.04 워킹푸어
일하고 또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자. 워킹푸어(working poor)의 정의다. 이 단어는 2004년 미국에서 출간된 동명의 책을 통해 알려졌다.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데이비드 쉬플러는 쉴 틈 없이 일해도 더 가난해지는 미국 소시민의 현실을 취재해 『워킹푸어』를 펴냈다.
그는 구멍 난 사회 시스템, 악덕 고용주, 고된 노동으로 인한 질병 등으로 밤낮없이 일해도 가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한국계 이민자 사례도 있다. 근무 장부를 조작해 요리사와 웨이터를 착취하는 한국식당 주인, 박사 학위를 받으러 미국에 유학 왔다가 극빈층으로 전락한 가족 등이다.
‘가난은 게으름의 산물’이란 통념을 뒤집는 그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국가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쏟아졌다. 현재 워킹푸어는 근로빈곤층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지난 2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최저임금 미만율 분석 및 최저임금 수준 국제비교’ 보고서를 내놨다. 통계청 원자료를 분석했더니 한국 임금근로자 중 12.7%인 275만6000명이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5개 회원국 중 한국이 1위 멕시코 바로 다음으로 최저임금 근로자 비율이 높다는 통계도 곁들였다.
경총은 한국의 최저임금이 다른 국가에 비해 높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겠지만, 국내 노동시장의 어두운 면도 함께 조명한 격이 됐다. 지난해 최저임금은 월급 기준으로 191만원 남짓. 1인 가구나 맞벌이가 아닌 2~4인 외벌이 가구라면 월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금액이다. 최저생계비 자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뜻한다. 한국의 워킹푸어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다른 통계도 같은 현실을 가리킨다. 통계청 ‘취업자의 산업 및 직업별 특성’ 자료를 보면 지난해 상반기 임금근로자 2150만6000명 가운데 9.4%가 월 100만원도 못 벌고 있었다. 100만~200만원 사이도 15.9%나 됐다. 임금근로자 4명 중 1명꼴로 최저임금 또는 2~3인 가구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도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워킹푸어』의 20년 전 외침은 한국인에게 여전히 먼 나라 얘기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4.05 ‘무수익 무보수’ 펀드
가치투자는 저평가된 주식을 사서, 오른 뒤 파는 방식이다. 가치 평가 스타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최종 목표는 같다. ‘흙 속의 진주’ 찾기다. ‘가치투자의 아버지’ 벤저민 그레이엄부터 이어진 미국의 가치투자는 뿌리가 깊다.
특히 1970~80년대가 전성기였다. 워런 버핏, 존 네프, 필립 피셔 같은 전설적인 투자자가 다수 탄생했다.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바뀌고, 가치평가가 어려운 무형자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다. 그래도 가치투자의 핵심 원리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시장에 살아 숨 쉰다.
한국은 가치투자가 자리 잡기 어려운 환경이다. 주식시장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다. 외생 변수에 크게 흔들리는 경제 구조도 약점이다. 기업은 배당 등 가치를 높이는 활동에 인색하다. 기껏 키웠다 하면 회사를 분할하는 일도 흔한데 이 과정에서 주주의 권익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도 최준철·김민국 대표는 가치투자를 모토로 대학 시절 창업한 VIP자산운용을 20년 만에 3조원대 회사로 키웠다. 철학을 공유하고, 오랜 기간 동업하는 모습이 가치투자 전설들의 행로와 묘하게 닮았다. 이 자체가 한국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두 사람이 최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수익이 나지 않으면 운용보수를 받지 않는 펀드를 내놓았다. 사모펀드나 자문 시장에선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살 수 있는 공모펀드에 성과를 연동한 건 처음이다. 수익이 없으면 보수도 없다는 건 고객 돈을 책임지고 관리하겠다는 의지다. 일단 직전 1년 수익률이 마이너스면 다음 분기엔 보수를 받지 않는다. 수익이 나면 약 10%를 성과 보수로 받는다. 1년 이하로 투자하면 수익과 관계없이 연 0.8% 보수를 적용한다. 장기 투자를 유도하는 취지다.
이름은 ‘한국형 가치투자 펀드’다. 단기 트렌드에 휘둘리기보다 꾸준히 오래가는 펀드로 키우겠다는 의지다. 테마만 좇고, 일희일비하는 투자가 유난히 판을 치는 시기라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공격적인 보수 정책으로 급격히 쪼그라든 공모펀드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명분까지 담았으니 설계를 참 잘했다.
모든 게 좋아도 중요한 건 실력, 즉 수익률이다. 포부대로 국민의 노후와 함께 가는 펀드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4.06 양곡관리법
한국인에게 쌀과 밥은 각별하다. “밥 먹었어?” “밥 꼭 챙겨 먹어” 등 안부 인사에 밥이 빠지지 않는 나라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을 물러나게 한 것도 밥이었다. 당시 오 시장은 일괄적 무상급식에 반대해 부친 주민투표가 부결되자 자리를 내놨다. 그는 “공교육 강화를 위해선 학교 시설 개선, 원어민 교사 확충, 방과후 프로그램 강화 등에 예산이 필요하니, 선별적 복지를 하자”고 호소했지만 “애들 밥 먹이는 것으로 치졸하게 군다”는 선명한 한 줄 공격을 넘지 못했다.
쌀은 한국인 정체성의 상징이다. 쌀의 차별성은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 당시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UR 협상에서 “쌀 한 톨이라도 개방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며 쌀 예외주의를 내세웠다. 결국 쌀 시장 개방을 10년 유예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자 김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쌀과 밥에 대한 이 같은 각별함에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70년(136.4㎏)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다. 지난해엔 56.7㎏으로 50년 만에 절반 넘게 줄었다. 이미 쌀은 심각한 과잉생산 상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지난해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양곡관리법 개정안(양곡법) 도입 시 2030년 쌀 초과 생산량은 63만톤을 넘어선다.
세계적으로도 쌀은 감산과 개량의 대상이다. 최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쌀농사가 토양 산소를 고갈시키고 메탄 방출 박테리아를 촉진해 기후위기의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또 백미는 빵이나 옥수수보다 사람을 더 살찌게 하고 영양가가 적어 당뇨병·영양실조를 일으킨다고 했다. 벼 품종 개량, 농민 보조금 지급 중단 등 현재의 쌀농사 관행 개선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사법 리스크에 둘러싸인 야당 대표는 1호 법안으로 양곡법을 추진하며 ‘한국인의 영혼’ 같은 쌀과 밥을 건드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호 거부권으로 이를 저지하자, 정치권은 민심·농심 논쟁에 한창이다. 쌀과 밥에 대한 애틋함이 연료가 돼 총선 정국까지 타오를 분위기다.
이미 데이터는 쌀 과잉생산이 기후위기에도, 나라 살림에도, 국민 건강에도 유익하지 않다고 가리키고 있다. 이제 쌀과 밥에 대한 감상을 걷어내고, 숫자와 데이터로 판단할 때가 됐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4.07(금) 혈중알코올농도
지난해 유독 잦았던 연예계 음주운전 사건에 최근 사법부가 하나둘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배우 김새론(23)이 지난 5일 1심에서 벌금 2000만원 형을 선고받았고, 6일에는 검찰이 그룹 신화 멤버 신혜성(본명 정필교·44)에게 징역 2년형을 구형했다. 현행법상 음주운전 처벌 기준은 혈중알코올농도다. 0.03%, 0.08%, 0.2% 세 수치를 기준점으로 행정처분(면허 정지·취소) 및 처벌(벌금 또는 징역형) 수위를 가중한다. 지난해 5월 서울 청담동에서 만취 사고를 낸 배우 김씨의 경우 최고형에 해당하는 0.227%였다.
개인차가 있지만 그 정도면 대체 얼마나 취한 걸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을 지낸 윤중진 박사는 약도·경도·중등도·고도·중증 등 5단계로 나눠 ‘혈중알코올농도에 따른 명정도’를 규정했다. 0.25~0.35%(고도)는 ‘운동실조가 뚜렷해 보행이 곤란하고, 말은 완전히 불명료하며 신체 반사기능 저하, 감각 마비, 의식 혼탁 등이 나타나며 때론 혼수상태’에 이르는 정도다. 한마디로 걷기 힘든 상태에서 운전한 건데, 여기서 더 마시면 ‘체온이 떨어지고 호흡이 느려지며 신체 반사와 의식이 소실되는’ 중증 혼수상태가 온다.
몸도 못 가누는데 굳이 운전대를 잡는 건 ‘전두엽 마비’ 때문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통화에서 “음주는 치매처럼 뇌의 전두엽을 마비시킨다”며 “이때 나타나는 가장 흔한 현상이 사회적 금기에 대한 자기제어 상실”이라고 했다. 음주운전뿐 아니라 평소 ‘해선 안 된다’고 여기는 성추행·폭력 등이 주취 상태에서 쉽게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수 신씨는 2007년 음주운전 처벌 전과가 있는데도 재범했고 현장 측정을 거부한 끝에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측정거부) 및 자동차 불법사용 혐의로 기소됐다.
다행스러운 건 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최근 10년간 높아졌다는 점이다. 기자 초년병 때 “절대 (측정기를) 불지 말고 전화하라”는 민원 공식이 경찰기자 사이에 떠돌았는데, 요즘은 “그랬다간 더 큰일”이라는 게 기정사실이다.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할 때 느긋하고 행복해진다”는 가설을 다룬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결국 비극이었다. 나부터 덜 마시고, 적당히 마시는 미덕을 잊지 말아야겠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4.10(월) 전 국민 1000만원 대출
중국 송나라 때 원숭이를 기르던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늘어가던 원숭이는 어느 순간 지나치게 많아졌고 저공은 원숭이의 먹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고민하던 저공은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씩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은 반발하며 화를 냈다. 저공은 다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하루에 받는 도토리는 7개로 같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놓은 ‘기본대출’ 정책이 논란이다.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원을 최대 20년간 저금리로 빌려주고 정부가 보증을 서겠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국내 성인 3000만 명이 대출을 받으면 원금만 300조원이다. 이 대표는 재원 마련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정부 채무와 지방정부 순채무를 합친 국가채무는 1067조7000억원이다. 2018년 680조5000억원이던 국가채무는 4년 만에 56% 늘었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례적인 수치다. 국회에서 확정한 올해 예산안을 살펴보면 올해 국가채무는 66조7000억원 늘어난 1134조4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1분에 1억3000만원씩 나랏빚이 느는 셈이다. 하루 이자만 608억원꼴이다.
여기에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대해선 정부가 보증을 서겠단다. 개인이 빚을 갚지 않으면 정부가 대신 갚겠다는 것인데 총선을 1년 앞둔 ‘퍼주기’ 공약이라는 비난이 거세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여당은 최근 가스·전기 요금 인상보류를 결정했다. 문재인 정부가 요금 인상을 미뤄서 한국가스·전력공사의 재정이 악화했다고 비판하며 정상화를 선언한 지 불과 두 달 남짓인데 말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9.6%. 사상 최대 수치다. 경제학자들은 ‘제2의 외환위기’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그런데 정작 발등의 불을 꺼야 할 정치권은 국민 호주머니를 털 수밖에 없는 포퓰리즘 행보만 보이고 있다. 국민은 원숭이가 아니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4.11 ‘천마도’ 발굴 50돌
국보 ‘천마도’는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과정에서 출토됐다. 옛 명칭은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 장니(障泥·말다래)는 말안장과 연결해 말 옆구리에 늘어뜨려 흙이 튀지 않도록 막아주는 부속품이다. 천마도 장니는 자작나무 껍질을 겹겹이 붙여 편편하게 하고 둘레에 얇은 가죽 단을 덧대어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힘차게 비상하는 천마를, 주변에는 덩굴무늬 등을 그렸다. 삼국시대 벽화고분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5세기 전후 신라 회화 작품이다.
김정기(1930~2015) 당시 천마총 발굴단장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당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을 지시한 건 천마총이 아니라 황남대총이었다. 황남대총은 높이 22m, 남북 길이 120m에 이르는 대형 쌍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큰 고분을 발굴하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상대적으로 작은(높이 12.7m, 동서 길이 60m) 천마총을 시범적으로 발굴하자고 설득했고, 청와대는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을 시작해 3개월 만에 금귀걸이 등 유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금관·금관모·천마도 등 국보를 포함해 총 1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천마총의 성과에 힘입어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됐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5만8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서봉총 등은 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아 조사 내용이 누락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해방 후 비로소 우리 손으로 조상의 무덤을 파헤쳤으나 1971년 공주 무령왕릉까지만 해도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무령왕릉은 묘실 개방부터 유물 수습까지 17시간 만에 해치워 졸속 발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첫 국책 발굴사업이었던 천마총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큰 전환점이 된다. 유물과 유적의 실측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는 등 신중하게 진행해 총 8개월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고분 발굴 체계를 확립하고 고고학 전문 연구 인력을 양성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9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다음달 ‘천마도’ 실물을 전시하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이 열릴 예정이다. ‘천마도’는 빛에 약한 유물이라 볼 기회가 흔치 않다. 후대에 오래 전하도록 아껴 봐야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4.12 도청과 국익
“오만방자한 새끼들, 대한민국을 얼마나 졸로 봤으면 대통령 책상에다 도청장치를 달아!”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통’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은 청와대 전화기를 내동댕이친다. 미국 CIA가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영화 초반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이 이인자 싸움에서 경호실장(이희준)에 밀리는 계기로 작용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 장면이 지칭하는 때는 1970년대 중후반이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언급, 한국의 핵개발 추진을 두고 한·미가 신경전을 벌일 때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씨를 앞세워 미국 의회에 현금을 뿌렸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가 어떻게 새 나왔을까.
보도 이후 미국 정부가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 제출한 문서를 보면 답이 나온다. 문서엔 ‘대미 로비 활동은 박씨로 일원화한다’고 결정한 청와대 비공개회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 정부가 청와대에서 오간 밀담을 도청했다는 의혹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요한 얘기는 청와대 앞뜰에서 했다고 한다.
도청은 미국이 세계 동향을 살피고 국제 전략을 짜는 기초 자료였다. 1970년대 초중반 미국은 필리핀 동쪽 군도 미크로네시아까지 도청했다. 미크로네시아는 미국 신탁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독립하려는 뜻이 있는 건 아닌지 미국은 정치요인들의 비밀 얘기를 엿들었다. 미크로네시아는 한국·일본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어기지였기 때문이다. 해당 도청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1976년 사설에서 “법과 정부 통제를 초월하는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악습은 끊지 않았다. 전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해 35개국 정상을 도청했다고 2013년 폭로했다.
또 미국의 도청이 논란이다. 최근 소셜미디어에 유출된 미국 기밀 문건에서 한국 국가안보실 사람들 대화를 엿들은 듯한 대목이 발견됐다. 미국 정보기관들도 도청 사실을 딱히 부인하지 않고 있다. 자국 이익 앞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흐려지는 국제 정치의 생리가 새삼 확인됐다. ‘한·미 동맹’을 여러 번 곱씹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국익이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동맹이라는 낭만적 수사(修辭)는 왜소해지는 법이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4.13 돌아온 부산 갈매기
‘지금은 그 어디서 옛 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은 고왔던 순이, 순이야’로 시작하는 대중가요 ‘부산 갈매기’는 김중순이 작사·작곡하고 문성재가 부른 히트곡이다. 1982년 발표돼 4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부산 시민 사이에서 일종의 지역 주제가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연고 구단 롯데 자이언츠 홈 경기에 오랜 기간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며 구도(球都)를 자처하는 부산과 사직야구장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애향심에 뿌리를 둔 지역 연고 시스템과 함께 성장한 프로야구에서 도시 이름이 들어간 이 노래의 흡인력은 엄청났다. 지금은 ‘부산 갈매기’라는 말이 야구단과 선수들, 팬들까지 아우르는 별칭으로 쓰일 정도다. 야구판에서 이 노래에 비견할 만한 애창곡은 남행열차(KIA)와 연안부두(SSG) 정도다.
국민가수 조용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중심으로 홈 경기 응원전을 펼치던 롯데가 부산 갈매기를 응원가로 추가한 건 1990년대 초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경기 도중 한두 번 들리는가 싶던 곡이 어느새 홈 팬들이 한목소리로 ‘떼창’하는 노래가 됐다”는 게 롯데 팬의 증언이다.
부산 갈매기는 ‘마성의 응원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승부처에서 롯데 응원의 트레이드마크인 신문지, 봉다리(봉지의 사투리)의 물결과 함께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면 상대 팀 선수들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약방의 감초 같던 이 노래가 야구장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춘 건 지난 2018년 3월의 일이다. 프로야구 응원가가 저작인격권 침해 논란에 휘말리며 일제히 사용 중지 상태로 바뀌고 말았다. 이후 대부분의 음원이 차차 야구팬들 곁으로 돌아왔지만, 부산 갈매기만큼은 예외였다.
그렇게 훨훨 날아갔던 부산 갈매기가 5년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사직야구장 관중석에 다시 돌아왔다. 롯데와 곡 저작권자가 올 시즌을 앞두고 응원가 사용 재개에 극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롯데 홈 개막전에선 공식 응원가 지정 행사도 열렸다. 롯데는 7회 ‘열광 응원 타임’에 홈 관중들과 한목소리로 이 노래를 열창하며 ‘꽃처럼 어여쁜 순이’의 야구장 컴백을 자축했다. 순이는 비록 ‘나를 잊었’지만 야구팬들의 뜨거운 사랑만큼은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송지훈 스포츠부 차장
04.14(금) 20년 만의 국회 전원위원회
국회 본회의가 열려도 국회의원 300명이 한자리에 다 모이긴 쉽지 않다. 올 1월 임시국회는 9일 시작했지만 본회의는 30일에야 잡혔다. 국회의장과 여야 의원 40여 명이 해외 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워 시일이 늦춰졌다. 1991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평민·민주당의 공동 요구로 임시국회 개회식이 열렸다. 그러나 민자당이 기초의회 선거기간이라는 이유로 개회식 직후 퇴장했다. 30여 년 전에도 사정은 똑같았다.
국회의원 전원이 모여 의안을 심사하도록 한 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국회 전원위원회(전원위)다. 상임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회 특성상 주요 안건이 있을 때 함께 논의하자는 취지다. 1948년 국회법 제정 때 도입돼 다섯 차례나 열렸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들어선 2공화국이 국회법을 전부 개정하면서 폐지됐다. 그러다 2000년 2월 국회법을 개정하며 복원됐다. 심도 있는 안건 심사를 위해 일문일답식 대정부 질의 등이 함께 도입됐다.
부활한 전원위는 16대 국회에서 다시 열렸다. 이라크전 파병 문제로 2003년 3월 28~29일 이틀간 열린 전원위는 당시엔 하루에 2시간으로 회의가 제한됐다. 의원 1인당 질의 시간도 5분 정도에 불과했다. 파병동의안은 결국 통과됐지만, 첫날 13명, 둘째 날 12명이 찬반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국회가 전원위를 통해 고심한 흔적을 보인 만큼 의원들로선 여론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 표결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10일 나흘간 일정으로 소집된 국회 전원위가 13일 막을 내렸다.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편을 논의했다. 20년 만의 개최에 국회 안팎에선 “전체 의원이 모여서 공론화하면 덮어놓고 반대하긴 어려울 것”이란 기대감이 일었다. 그러나 현행 소선거구제 폐단을 개선해야 한다는데 큰 이견이 없었지만, 해법이 제각각이었다. 참여 의원도 100명으로 많아지고 발언 시간도 7분으로 길어졌지만 말 그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에 그쳤다.
아쉬움이 크다. 3가지 개편안을 논의 테이블에 올렸는데 주제별로 발언을 모았다면 어땠을까. 개회 시점에 200명 정도 참석했던 의원들은 끝날 땐 50명 정도만 자리를 지켰다. 의회정치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릴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4.17(월) 국뽕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Philopon·일명 히로뽕)의 합성어로 2010년대 들어 쓰이기 시작했다. 이걸 맞으면 모든 ‘K레이블’의 성공이 내 것인 양 “가슴이 웅장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두유노 클럽’의 활약은 보면 볼수록 중독된다. 두유노(Do You Know) 클럽이란 외국인도 알만한 한국 인재(가령 김연아·손흥민·BTS·봉준호 등) 리스트를 뜻한다.
애국심이나 국수주의와 뉘앙스가 다른 건 이 경험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국뽕의 반대말이자 쌍생아인 ‘국까’(자국혐오)도 눈여겨 볼만하다. 두 현상은 하나로 봐도 좋을 정도로 공생 관계다. 물론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에나 수요가 있다.
한국형 국뽕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외국인의 시선, 그들의 인정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국 최고”를 외치는 다국적 콘텐트, 다국적 크리에이터가 급증하는 이유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국인에게 한국을 소개한다고 하지만, 타깃은 한국인이다. 한국 드라마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손뼉만 쳐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여기까지는 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길을 끌기 위해 보다 자극적인 장치에 손을 대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국뽕 코인’을 타기 위해 외신 보도를 조작하거나 타국과 비교하며 혐오감을 조장한다.
몇 년째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해외에서 한식 팔기 예능에서도 국뽕은 빠지지 않는다. 손님들이 김치 그릇을 비워내며 전하는 한국 예찬이 재미 요소다. 칭찬은 100% 전달되지만, 비판은 대부분 편집되기 때문에 현실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무시된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장사천재 백사장’도 이 장르에 속한다. 요식업계의 거물, 백종원이 모로코에서 72시간 만에 식당을 차려 한식의 우수성을 증명해야 한다. 타 프로그램보다 현실적인 자영업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화 같은 식당차리기 예능에선 한 걸음 나갔다. 하지만 분쟁지역인 서사하라 표기 논란, 기도 장면에 대한 코멘트로 방송 2회 만에 구설에 올랐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엔 예민하지만, 타문화 수용에는 여전히 투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영선 K엔터팀장
04.18 모기지
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 한국말로는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다. 뜻 그대로 단어가 됐으니 복잡할 게 없다. 그런데 영어로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택담보대출은 영어로 모기지(mortgage)다. 정확하게는 집이나 땅 같은 각종 부동산을 담보로 삼고 내주는 대출 모두를 묶어 모기지라고 한다.
이 단어의 어원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모기지는 죽음을 뜻하는 ‘mort’와 약속이란 의미의 ‘gage’가 붙어 탄생했다. 중세 프랑스와 영국 법률에서 쓰이던, 말 그대로 죽음의 계약이란 단어에서 출발했다.
이런 살벌한 용어가 부동산담보대출이란 뜻으로 발전한 원리는 17세기 영국 법률가인 에드워드 코크가 쓴 『영국법 제요』에 상세히 나와 있다. ‘만약 돈을 제때 갚지 않으면 담보로 잡혀있는 땅을 영원히 빼앗겨 채무자의 권리가 소실(dead)되고, 잘 갚으면 채권자의 담보권이 소실(dead)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채권자든 채무자든 누구 하나의 권리가 영원히 사라져야 끝나는 계약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현 제도와 별다를 게 없는 원리지만, 주담대 ‘족쇄’에 묶인 영끌족이라면 간담이 서늘할 뜻풀이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올해 3월 말 주담대 잔액은 800조원을 넘어섰다. 주춤하는 듯하던 주담대가 다시 늘기 시작해, 한 달 새 2조3000억원이 더 쌓였다. 고금리 충격에 지난해 주택가격이 급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자 정부는 정공법 대신 빚을 내 빚을 막는 ‘돌려막기’ 전략을 선택했다.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특례보금자리론을 풀었다. 은행을 압박해 대출금리도 낮췄다. 은행권 대출금리(하단 기준 연 3.6%)가 한은 기준금리(3.5%)와 맞먹는 기묘한 상황까지 연출됐다.
정부 전략은 통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세가 멈췄고, 거래에도 숨통이 트였다. 늘어난 대출이 뒷받침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기지는 언제나 이름값을 했다. 건실한 대출자에겐 집과 땅과 부를 안겼지만, 아닐 때는 모든 걸 앗아갔다.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터진 일본이 그랬고,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도 경험했다. 최악으로 부풀고 있는 한국의 가계 빚이 그냥 사그라들 리 없다. 머지않아 맞닥뜨릴 심판의 날이 너무 혹독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4.19 코스닥의 질주
1996년 7월 개장한 코스닥은 ‘장외거래 주식시장’으로 불렸다. 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을 통해 이루어지던 당시 주식 거래와 달리 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해 매매됐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9년, 벤처 바람에 힘입어 법적으로 ‘장내’ 지위를 획득했지만, 여전히 코스피에 이어 ‘2부 리그’쯤으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거품’ 논란이 이런 인식을 키웠다. IT 광풍이 불던 2000년 3월 코스닥은 최고점인 2834.40을 찍었다. 하지만 불과 8개월 뒤 500선까지 무너졌다. 하나로통신·새롬기술 등 대표 종목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수많은 투자자가 피눈물을 흘렸다. 이후 20년간 박스권에 갇혔던 코스닥은 2018년 1월에야 900선을 회복했다. 당시 ‘코스닥의 엔진’으로 불리던 바이오 업체 덕분이었다. 하지만 엔진은 금방 식었고, 1년 만에 600선까지 밀렸다.
코스닥지수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올해 상승률은 33.9%. 전 세계 최고다. 형님 격인 코스피(15.2%)는 물론이고, 글로벌 성장주가 모인 미국 나스닥(16.2%)도 크게 앞섰다. 최근엔 하루 거래대금이 시가총액 덩치가 5배나 큰 코스피보다 많다. 화끈한 상승을 주도한 건 2차 전지다. 2차 전지의 핵심 소재를 만드는 에코프로비엠과 모회사 에코프로의 주가는 올해 각각 세 배, 여섯 배로 올랐다. 두 회사는 단번에 코스닥 시가총액 1, 2위가 됐다. 엘앤에프·엔켐 등 다른 소재주도 덩달아 뛰었다.
이런 주가 급등이 전혀 실체가 없는 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유럽이 내연기관 규제에 착수하면서 2차전지 수요가 예상보다 빨리 폭발할 거란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코스닥의 숱한 부침을 경험했던 투자자는 불안하다. 일단 ‘빚투(빚내서 투자)’가 급증했다. 코스닥 신용융자 잔액은 지난해 6월 이후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섰다. 사명에 ‘에코’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주가가 덩달아 뛰는 경우마저 생겼다.
코스피는 실적으로 먹고살고, 코스닥은 꿈으로 먹고산다는 증시 격언이 있다. 그래서일까, 코스닥은 ‘대박 꿈’을 꾸는 개인투자자 거래 비중이 80% 이상이다. 아무리 유망한 산업이라도 가치의 계산 과정엔 시차가 존재한다. 투자자가 밝은 면에 집중하는 사이 거품이 형성된다. 그 거품이 고통 없이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4.20 1000원 아침밥과 음마투전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의 유명한 격언이다. 모든 이익엔 상응하는 대가 또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자주 인용하며 유명해졌지만 그가 만든 말은 아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 한 술집의 마케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술집은 술을 일정 한도 이상 마시면 ‘공짜 점심’을 준다는 이벤트를 펼쳤고 이에 혹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공짜 점심을 먹으려면 술을 마셔야 하고, 결국 점심값은 술값에 포함된 셈이었다. 본인의 술값뿐만 아니라, 술만 마시고 점심은 먹지 않은 이들이 지불한 금액에서도 공짜 점심값은 빠져나간다. 누군가 취한 공짜 이득의 대가는 모두의 주머니에서 공동 각출된다는 얘기다.
2000년대 후반 공짜 점심은 미국 실리콘밸리 복지의 상징이었다. 구글·페이스북·트위터 등은 미쉐린(미슐랭) 셰프의 요리, 유명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커피, 최고급 맥주 기계, 스낵바 등을 갖추고 호화로운 먹거리를 직원에게 제공했다. 이에 대해 마틴 맥머한 플로리다대 교수는 “5만 달러 연봉과 연간 2000달러 어치 무료 식사를 제공받은 직원에게, 정부는 5만2000달러에 대한 세금을 매겨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세금 붙은 음식을 사먹은 나같은 사람이 구글 직원에게 공짜 음식을 제공한 셈”이라며 비판했다. 일반 노동자가 지불한 ‘부가세 붙은 식대’로 실리콘밸리 고액 연봉자의 공짜 식대를 메꾼다는 지적이다.
최근 ‘1000원 아침밥’이 화제다. 정치권은 배고픈 대학생의 허기를 달래줘야 한다며 ‘1000원 점심·저녁밥’ 확대를 외친다. 하지만 국가장학금 자료에 나타난 대학생들의 경제력은 ‘고소득층 증가, 저소득층 감소’가 뚜렷하다. 대학엔 경제력 있는 젊은이가 몰리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사회로 진출한다는 얘기다. 고등교육을 포기한 가난한 젊은이가 낸 세금으로, 경제력이 있는 대학생들의 식비를 대고 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공짜 점심은 없다’와 같은 의미의 고사로 음마투전(飮馬投錢)이 있다. 말에게 강물을 먹인 뒤, 물 값을 강물 속에 던진다는 의미다. 주인 없는 강물도 쓴 만큼 값을 치른다는 자세다. 선거를 앞두고 ‘MZ 표심 잡기’에 혈안이 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을 보며 한번쯤 되새겨볼 말이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4.21(금) 밥값과 돈봉투
3년 전, 2018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의 캠프별 지출액을 기획 취재했다.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뷰에서 전현직 의원·보좌진·당직자 등 각 캠프 관계자 대부분이 비공식 회계의 존재를 인정했다. 회계 실무에 관여한 인사는 “캠프 사람들 오가며 쓰는 게 모두 돈”이라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을 합치면 전대 한 번에 3억원이 넘게 든다”고 말했다. 현직 의원은 “회계상 3억 지출이라면 플러스 1억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는 ‘3+1 공식’을 귀띔했다.
눈먼 돈들은 ‘밥값’이란 이름으로 전대판에 손쉽게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여야 간 선거와 달리, 전대는 진영 내에서 누가 더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는가를 겨루는 집안 싸움이다. 자연스레 당원을 모아 밥을 사는 데서 선거운동이 시작되는데, 통상 후보의 지역 방문 3~4일 전 캠프 실무진이 먼저 내려가 “우리 후보를 밀어달라”며 식사를 대접한다. 이 때 많게는 100만원 넘는 식대를 지역 유지·명망가가 대신 계산하는 게 불문율이다. “중앙(서울)에서 돈을 마련해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지역 보좌진), “점조직 형태로 돈이 들어왔다 나가기 때문에 후보 본인이 모르는 새 밥값이 조달되기도 한다”(현역 의원)는 증언이 이어졌다.
지난 취재 내용을 소개하는 건 최근 검찰이 수사 중인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을 두고 나온 ‘밥값 설화’ 때문이다. 장경태 민주당 최고위원이 라디오에서 돈 봉투 금액에 대해 “50만원은 사실 한 달 밥값도 안 되는 돈”이라고 말했다가 해명글을 올렸고, 같은 당 정성호 의원도 “금액이 대개 실무자들의 차비나 기름값, 식대 정도 수준”이라고 언급했다가 사과했다. 실은 그 밥값부터가 문제였는데. 청년·중진 할 것 없이 정치권에 만연한 검은돈 불감증만 더 드러났다.
물론 야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권도 11년 전 떠들석했던 ‘한나라당 2008년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수사 이후 얼마나 나아졌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전당대회 매수행위는 현행법(정당법 50조) 위반이다. 특히 식대의 경우 중앙선관위가 ‘당대표 경선의 경우 선거운동원 30인 이내, 1인당 7000원 이하 범위에서만 식사 제공을 허용한다’(정당사무관리규칙 25조)는 엄격한 예외 규정까지 뒀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4.24(월) 한한령 악몽
6년 전이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출입문 옆에 ‘인위이해 소이등대(因为理解 所以等待)’라는 중국어 포스터가 걸렸다. 이 포스터는 백화점 주요 장소에 배치됐고 잠실 롯데백화점, 명동 세븐일레븐 소공점에도 등장했다. 모두 중국인 관광객이 몰렸던 곳이다. 해당 문구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라는 뜻이다. 당시 롯데는 한국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국내 매장에 홍보물을 부착했다.
2016년 9월 정부는 사드 부지로 경북 성주군에 있는 롯데스카이힐 성주CC를 지정했다. 중국은 즉각 보복에 나섰다. 한류를 금한다는 ‘한한령’(限韓令)이다. 중국은 ‘한국 기업 때리기’에 나섰고, 롯데가 첫 번째 타깃이 됐다. 중국 롯데마트는 1년 내내 소방점검·세무조사 등 불시 단속에 시달렸고, 112개 매장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선양·청두에 짓던 복합단지(연면적 44만평)인 롯데타운 공사도 중단됐다.
당시 정권을 넘겨받은 문재인 정부는 중국의 경제보복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했다가 “지금은 북한 핵 도발로 중국과 협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며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꿨다. ‘국가 간 풀어야 할 숙제’라며 숨죽이고 있던 롯데는 결국 1년 만에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손해액이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이마트, 한국 화장품·식품업체 등도 줄줄이 철수했다. 한한령은 최근까지 계속됐다. 2017년 이후 국내 게임업체는 판호(게임 허가권)를 받지 못해 중국에 신작을 선보이지 못했다. 영화 상영, K팝 공연이 중단된 것은 물론이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만 해협 문제에 대해)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히자 중국 당국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을 향한 표현 수위가 매우 거칠다. 코로나19 족쇄가 풀리면서 게임·드라마·관광 등에서 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상황에서 또 다른 악재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경제계에선 ‘제2의 한한령’마저 걱정하고 있다. 삐걱대는 정치·외교에 경제·문화가 휘청대는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4.25 스프링 피크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어린 동은이 강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던 동네 할머니를 구한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동은 역시 삶의 끈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남이 목숨을 버리는 건 방관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동은에게 말한다. “근데 물이 너무 차다. 어후, 춥다. 우리 봄에 들어가자, 봄에.”
실제로 봄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봄철 자살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1750년대 이후 2010년까지 핀란드와 스웨덴의 260년치 데이터를 연구한 논문에 따르면 5월을 포함한 봄철에 자살률이 느는 현상이 꾸준히 확인됐다. 다국적 연구자들이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의 1986~2016년 데이터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에서도 자살률은 봄에 절정을 이루고 겨울에는 줄어드는 패턴이 발견됐다. 한국처럼 기온 변화가 뚜렷한 나라는 계절에 따른 편차도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다.
이처럼 봄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스프링 피크’라 부른다.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수치는 온도와 일조량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계절 변화가 자살 충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봄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라 사회적 스트레스를 더욱 많이 유발하는 것도 ‘스프링 피크’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청소년들은 봄꽃도 맘껏 즐기지 못한다. 꽃이 피면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2021년 아동·청소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7명으로 2000년(1.2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2~14세 자살률이 2000년 1.1명에서 2021년 5명으로 훌쩍 뛴 것도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최근 10대 소녀가 극단적 선택 과정을 소셜미디어로 생중계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유명 아이돌이 숨진 채 발견되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나쁜 소식이 들린다.
‘더 글로리’에서 동은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곤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또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라며 동은을 되레 걱정한다. 봄에 물에 빠져도 춥긴 매한가지다. 동은이나 할머니처럼 약한 이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회가 되면 봄의 위기도 조금은 수월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4.26 86세대 퇴장 예감
주사파 활동가였던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는 86세대 사이 끈끈함의 심리학적 기원을 『86세대 민주주의』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운동권) 동료들과 투쟁현장에서 느끼는 영적인 느낌”이 있다며 주사파는 기독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86세대 일부는 동문회나 송년회, 결혼식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를 부르며 청년 시절을 집단적으로 회상하며 우정을 나눈다고 한다. 민 대표는 이를 “일종의 제사 행위”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86세대는) 1990, 2000년대를 1980년대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치권에서 그런 86세대의 끈끈함이 자주 목격된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이 86세대 출신 송영길 전 대표를 향하자 그를 감싼 건 한때 86세대 기수였던 김민석 정책위의장이었다. “(송 전 대표가) 물욕이 적은 사람임을 보증한다”고 했다. ‘조국 사태’ ‘안희정 사건’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진보세력이라고 자칭하는 같은 세대들이 그들을 옹호했다. 86세대는 서로 방어막을 쳐줄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사실 86세대가 1990년대부터 권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네트워크가 핵심이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86세대가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기업, 국가 등을 포괄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광범위한 그룹의 ‘문해 시민층’이 유사한 집합적·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조직화된 사례는 역사적으로 드물다.”(『불평등의 세대』) 네트워크의 힘은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2선 후퇴론’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그들은 오래 리더 자리를 뺏기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의 어깨동무’도 이젠 헐거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송 전 대표의 ‘적은 물욕’을 보증한다던 김 의장은 불법정치자금 7억2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2010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추징금 7억2000만원 중 약 6억원을 2020년 총선 때까지도 납부하지 않았다. 파산한 사람이 연대보증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산업화 세대가 물리적 나이 때문에 퇴장했다면, 86세대로 표현되는 민주화 세대는 도덕적 파산 때문에 나이보다 빠르게 역사의 뒤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4.27 마라톤 ‘서브2’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성장한 스포츠다.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을 표방한 고대 올림픽 정신을 구현한 종목으로, 1896년 근대올림픽 출발부터 함께해왔다. 페르시아군에 승리한 소식을 전하려 마라톤 평원을 쉬지 않고 달린 그리스군 전령의 투혼에서 유래했다는 스토리가 덧입혀지며 ‘올림픽의 꽃’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의 공인거리(42.195㎞)를 처음 적용한 건 1908년 런던올림픽부터다. 당시 2시간55분대에서 출발한 최고 기록은 1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2시간 1분대까지 단축됐다. 흔히 ‘마의 벽’이라 표현하는 인간의 한계 또한 같은 기간 동안 점점 앞당겨졌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인간의 신체 능력으로 마라톤에서 달성 가능한 최고 기록은 2시간30분’이라는 생각이 과학 지식처럼 통용됐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2시간29분12초2로 기존 통념을 허문 이후 마의 벽은 2시간10분으로, 다시 2시간으로 조금씩 당겨졌다. 현재 세계기록은 지난해 9월 베를린마라톤에서 엘리우드 킵초게(케냐)가 기록한 2시간1분9초다.
‘서브2’(sub 2·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이내로 주파하는 것)는 마라톤을 넘어 지구촌의 스포츠계 공통의 도전 과제다. 이를 위해 선수들뿐만 아니라 의·과학자,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최적의 주법과 체력 관리법, 식품 및 의약품, 장비(마라톤화) 등을 찾아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엔 ‘서브2’를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실험도 있었다. 킵초게 주위에 7인 1조의 페이스메이커를 배치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레이저 포인터로 2시간 주파에 해당하는 속도를 표시했더니 1시간59분40초라는 경이적인 결과가 나왔다. 인위적 설정 탓에 공인 기록으로 인정받진 못했지만 인간이 신체 능력만으로 2시간 장벽을 허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게 됐다.
지난 24일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왔다. 런던마라톤에 참가한 켈빈 키프텀(케냐)이 2시간1분25초로 우승하며 역대 2위의 기록으로 ‘서브2’의 문턱에 다가섰다. 고독한 도전을 이어가던 킵초게에게 훌륭한 라이벌이 등장한 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인류가 그려온 꿈의 수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4.28(금) 블레임 룩
“블레임 룩이 뭔지 몰라? 사람들 눈을 가리는 거야. 우리가 모시는 오너 일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가 아니라. 뭘 입고, 뭘 신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서 배우 김희애가 재벌가 자제의 검찰 출두를 앞두고 블레임 룩의 활용법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블레임 룩은 ‘비난하다’라는 뜻의 블레임(blame)과 ‘스타일’을 의미하는 룩(look)의 합성어다. 사회적 논란이 된 인물의 패션이 주목받는 현상을 일컫는다.
국내에 블레임 룩 현상을 일으킨 첫 사례는 1999년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티셔츠다. 907일간의 도주 행각보다 그가 입은 ‘미소니’ 모조품 티셔츠가 더 눈길을 끌었다. 2000년엔 로비스트 린다 김이 검찰 출두 때 쓴 ‘에스까다’ 선글라스가 불티나게 팔렸다. 블레임 룩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재벌가라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이라면 대중의 눈과 귀는 더욱 쏠리게 된다. 2016년 국정농단 관련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용한 ‘소프트립스’ 립밤이 1.99달러라는 가격과 함께 화제가 됐다. 당시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이 립밤의 해외 직구 방법을 묻는 글이 잇따랐다.
정치인이 블레임 룩으로 논란을 피해 가려면 어떤 수단이 효과적일까.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4일 파리에서 조기 귀국할 때 왼손에 들고 있던 빨간색 표지의 책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 영어 원서였다. 송 전 대표는 그 책을 들고 온 이유에 대해 “북한의 추가 핵실험이 예상돼 핵 문제를 공부했다”고 대답했다.
2021년 전당대회 당시 돈 봉투 의혹에 책임을 지겠다며 예정보다 두 달 빨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그였다.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듯한 면모를 보여준 그의 모습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따라 한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일었다. 교보문고에서도 한국어 번역본은 과학 분야 100위에 머물러 있다. 화제성·흥행성 모두 실패한 블레임 룩이었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