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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331. 광대가 된 하멜과 사무라이가 된 애덤스, - 340. 근대로 가는 길목⑤

상림은내고향 2023. 4. 16. 17:42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2023.02.01

331. 광대가 된 하멜과 사무라이가 된 애덤스, 영국에 있는 17세기 일본갑옷

400년 전 일본은 유럽인을 외교고문으로 썼고 조선은 광대로 부렸다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는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묘가 있다. 미우라 본명은 윌리엄 애덤스다. 42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리프데호가 난파하며 애덤스는 일본에 정착했다. 에도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외교 고문으로 고용하고 사무라이 신분도 줬다. 1613년 영국 동인도회사 클로브호가 일본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애덤스는 막부와 동인도회사를 중재해 히라도에 영국 상관 개설을 도왔다. 클로브호 선장 존 새리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갑옷 2벌을 비롯한 선물을 받아와 잉글랜드 왕 제임스1세에게 헌상했다. 애덤스는 1620년 히라도에서 죽었다. 갑옷도 애덤스 무덤도 모두 교류의 상징이다./히라도=박종인 기자

갑옷과 400년 전 일본 히라도

2023년 1월 11일 영국 총리 리시 수낙(Sunak)과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영국 런던타워에서 일본 갑옷 하나를 관람했다. 갑옷은 410년 전인 1613년 9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셋째 아들인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秀忠)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에게 준 선물이다. ‘410년 전’이다. 선물을 받아온 사람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소속 클로브(Clove) 호 선장 존 새리스(Saris)다. 새리스는 1613년 일본 나가사키 히라도(平戸)에 무역대표부 격인 영국상관을 개설했다.

 

상관 개설에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사무라이의 힘이 컸다. 미우라 안진은 영국인이다. 영국 이름은 윌리엄 애덤스(Adams)다. 이보다 13년 전인 1600년 4월 12일 일본 해안에 난파됐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리프데호 항해사였다.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 고문이 됐다. 사무라이 신분도 받았고 이름도 받았다. 받은 그 이름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다. ‘안진(按針)’은 도선사라는 뜻이다.

 

영국상관이 설립되고 53년 뒤인 1666년 9월 6일 이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8명이 히라도에 상륙했다. 13년 전인 1653년 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나가사키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사라진 사람들이다. 행방이 묘연했던 선원들이 무사귀환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훗날 이들 가운데 항해사가 13년 동안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13년 28일 동안 우리는 광대처럼 춤을 췄고 땔감을 구했고 풀을 벴고 담장을 만들었고 논에 물길을 만들었다.’ 그들이 억류됐던 나라는 조선이었고, 이 보고서 제목은 ‘하멜 표류기’다. 자, 2023년 런던타워에서 영·일 두 나라 총리가 마주한 갑옷과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과 네덜란드인 광대 헨드릭 하멜 이야기.

 

 ▲2023년 1월 11일 영국 런던타워에서 410년 전 에도막부가 영국왕실에 보낸 일본 갑옷을 감상 중인 영일 총리들. 영국총리 리시 수낵은 이 갑옷을 “새 시대 안보와 번영의 상징”이라고 했다./영국총리실 트위터

17세기, 교류의 시대

지난 1월 11일 영국 총리실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은 흥미롭다. 영일 양국 총리가 런던타워에서 일본 갑옷을 감상하는 사진인데 설명이 이렇다. ‘1613년 첫 번째 잉글랜드 통상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영국 총리 수낙은 일본 ‘닛케이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 ‘우리는 미래를 보고 있지만 영일 관계는 과거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400년 전 제임스 1세가 받은 이 갑옷과 교류는 새 시대 영일 관계 중심에 있는 안보와 번영을 상징한다.’(2023년 1월 12일 ‘닛케이 아시아’)

 

15세기 포르투갈이 문을 연 대항해시대는 ‘평면 지구에 고립돼 있는’ 동과 서를 이어 붙였다. 1543년 극동에 있는 일본에 포르투갈인이 화승총을 전하고 이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신부, 상인들이 일본에 진입했다. 일본은 1582년 ‘견구소년사절단’이라는 소년 4명을 바티칸으로 보냈다. 새로운 시장을 찾아 유럽인이 아시아로 밀려들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끼어들었다.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표류

1567년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개전과 함께 공화국을 선포한 네덜란드는 유럽 각국에 의해 독립이 실질적으로 인정되면서 통상 전쟁에도 뛰어들었다. 1602년 영국에 이어 무역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유럽 각국에 선원 모집 공고를 내걸었다. 그 공고를 보고 런던 빈민가 출신 사내 윌리엄 애덤스가 항해사로 지원했다. 1598년 6월 24일 로테르담을 출항한 선단 5척 가운데 두 척은 스페인 해적에 나포됐고 한 척은 돌아갔다. 한 척은 태평양에서 침몰했다. 애덤스가 탄 리프데호는 태평양을 헤매다 2년이 지난 1600년 4월 12일 일본 동쪽 가마쿠라 해변에 표착했다.(가일스 밀턴, ‘사무라이 윌리엄’, 조성숙 역, 생각의 나무, 2003, p11) 무기 가득한 배에서 피골이 상접한 거렁뱅이 24명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음식을 준 뒤 이들을 최고 권력자가 있는 오사카로 보냈다. 권력자 이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이미 일본에 우글거리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신부들은 ‘신학의 화약통’인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보고 경악했다. 예수회 신부들이 이에야스에게 단단하게 일렀다. “일본에 해악을 끼치는 신교도 악마다. 죽여라.” 쇼군은 듣지 않았다. 며칠 애덤스를 감옥에 가뒀지만 곧 석방했다. 이에야스와 애덤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지구를 도는 여러 항로와 선박에 대해 한밤중까지 얘기했다. 영국과 전쟁과 평화와 모든 종류의 짐승과 천국에 대해 물었고 개신교도 악마는 소상하게 대답했다. 애덤스는 목숨을 건졌다.

애덤스가 활짝 연 일본의 교류

1603년 도쿠가와가 내전에서 승리했다. 도쿠가와는 쇼군에 취임했다. 에도(江戶·도쿄)에 있는 도쿠가와 막부는 애덤스를 막부 외교 고문에 임명했다. 영국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과 쇼군 알현권을 가진 상급무사 하타모토 신분과 영지와 농노를 받았다. 가난한 영국 선원이, 말하자면, 귀족이 되었다.

 

동남아에 식민지를 만든 네덜란드와 영국이 ‘영국인 애덤스가 죽지도 않고 사무라이가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우라 안진을 통해 네덜란드, 영국과 통상하게 됐다. 1604년 애덤스는 이에야스 명으로 80톤짜리 유럽식 선박을 건조했다. 1609년 120톤짜리도 건조해 성공리에 진수시켰다. ‘산 부에나 벤투라(San Buena Ventura)’로 명명된 이 배는 1610년 일본에 난파된 스페인 함대에 임대돼 태평양을 건너 뉴멕시코에 도착했다.(가일스 밀턴, 앞 책, p149) 배에는 이에야스가 고른 일본인 22명이 타고 있었다.

 

1613년 이에야스가 은퇴하고 아들 히데타다가 쇼군에 올랐다. 그해 센다이번 상급무사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가 자체 제작한 500톤짜리 범선 ‘다테마루(伊達丸·스페인명 산 후안 바우티스타)’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하세쿠라 사절단 180명은 도쿠가와 막부의 교역 요청 친서를 휴대했다. 사절단은 멕시코에 이어 스페인과 바티칸까지 방문한 뒤 1620년 귀국했다. 일본과 세계의 ‘교류(交流)’.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에게 무역과 조선 자문을 맡긴 결과였다.

 

 ▲런던타워에 소장된 도쿠가와 히데타다 갑옷. /영국왕실컬렉션

히데타다의 갑옷과 불쌍한 하멜

1611년 4월 18일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클로브호가 런던을 떠났다. 배에는 아시아 제국 군주에게 보낼 국왕 제임스 1세의 통상 요청서와 선물이 실려 있었다. 일본 국왕에게 줄 선물은 망원경이었다. 1612년 10월 바타비아 반탐에 도착했을 때 선장 새리스는 ‘일본에 영국인이 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영국인이 반탐 지역으로 보낸 편지에는 “내가 잘 산다, 영향력이 있다, 일본은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따위 내용이 가득했다. 그리고 해를 넘긴 1613년 6월 10일 클로브호가 나가사키 히라도섬에 나타났다. 7월 어느 날 소문만 무성하던 영국인 사무라이 애덤스가 히라도에 나타났다.

 

9월 8일 애덤스 안내를 받으며 이들은 에도 부근 시즈오카에서 은퇴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에야스 보좌관이 바로 애덤스였다. 그리고 9월 17일 새리스는 에도에서 쇼군 히데타다를 만났다. 새리스는 쇼군에게 망원경과 제임스 1세 통상 요청서를 바쳤다. 9월 19일 저녁 히데타다가 제임스 1세에게 보내는 답서와 갑옷 두 벌과 장검(長劍) 한 자루를 답례품으로 새리스 숙소로 보내왔다.(J. Saris, ‘The voyage of Captain John Saris to Japan, 1613′, the Hakluyt Society, London, 1900, pp. 129~134 ) 이에야스가 애덤스에게 “이제 클로브호를 타고 귀향해도 좋다”고 했지만 ‘일본인 미우라 안진’은 고민 끝에 일본 잔류를 택했다. 애덤스는 막부를 떠나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히라도 영국상관 개설에 참여했다. 런던 빈민가 사내 윌리엄 애덤스는 영향력과 재력이 있는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으로 1620년 히라도에서 죽었다. 무덤도 히라도에 있다.

 

함께 일본에 정착한 동료 얀 요스텐(Jan Joosten)은 1609년 히라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개설했다. 네덜란드 상관은 1641년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상관을 옮겼다. 데지마는 이후 일본 근대화의 근원지가 됐다. 얀 요스텐은 1623년 네덜란드로 복귀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떠났다가 입항이 거부되자 일본 귀환 도중 익사했다.

 

임무를 완수한 새리스는 일본을 떠나 이듬해 9월 런던에서 제임스 1세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하고 갑옷 2벌을 헌상했다. 그 갑옷을 한 달 전인 21세기 1월 영국과 일본 총리가 나란히 서서 구경했다. 저 두 리더가 갑옷 앞에 서기까지 미우라 안진, 윌리엄 애덤스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근대화의 길목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일본 메이지유신 지사들은 바로 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를 목격했다. 교류가 가진 힘이 이렇게 묵직하고 강하다.

 

▲전남 강진 병영마을 돌담.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됐던 하멜 일행이 전수한 돌 쌓기 방식이라고 전한다./박종인 기자

 

짤막하게 우리네 하멜 사연을 들어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 항해사인 하멜은 1653년 8월 16일 조선 제주도에 표착했다. 13년 먼저 표착했던 벨테브레이 박연에게서 하멜은 “이 나라는 한번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못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 하멜을 비롯한 생존자 8명은 양반집에 불려가 광대춤을 추고 땔감을 줍고 잡초를 베고 무너진 담장을 수선하고 논에 댈 물길을 만들면서 이를 갈았다. 그러다 1666년 9월 4일 전남 여수에서 미리 사둔 어선을 타고 탈출했다. 이틀 만인 9월 6일, 조선 억류 13년 28일 만에 뭍이 보여서 상륙해 보니 그게 66년 전 애덤스가, 53년 전 새리스가 상륙했던 그 히라도가 아닌가.(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김태진 역, 서해문집, 2003, p76)조선 정부는 그 13년 동안 이들을 외교 고문으로 고용하기는커녕 중국 사신에게 들킬까 봐 전남 강진, 여수 등지로 쫓아 은폐하고 망각해 버렸다. 하멜이 불쌍하고 조선이 불쌍하고 대한민국이 기적이다. 무엇이 기적을 만들었는가. 간단하다. 교류가 힘이고 내공이다.

 

332. 교과서에는 감춰져 있는 고종의 反근대적 친일 행각

“동학 농민 진압해달라”...고종, 철수하려는 일본군 붙잡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돼 있는 동학 관련 공문서들. 맨 왼쪽은 주한일본공사관에서 보관 중이던 ‘일본군 철군에 반대한다’는 고종의 문서. 가운데와 오른쪽은 조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이 ‘동학 민란 토벌에 일본군이 필요하다’고 적은 편지./국사편찬위원회

고종을 버린다

‘왜 조선은 근대화가 지체됐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명확하다. 학문과 지성은 교조적인 성리학에 질식되고 상공업과 통상은 억압돼 그저 생존 가능한 만큼 경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각종 외국인 견문록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부터 망국 때까지 가난과 쇄국과 학문 통제에 대한 기록이 넘쳐난다. 지식과 정보 통제는 가난을 증폭시켰다. 증폭된 가난은 부를 창출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할 기회를 차단해버렸다. 그렇게 조선은 전 지구대적인 근대화 시대, 19세기를 맞았다.

 

거기에 고종(高宗·재위 1864~1907)이 있다. 고종 시대는 지구 동쪽과 서쪽이 서로 고립돼 있던 지난 시대와 달랐다. 전 지구에 관한 정보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유입 중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불세출의 자질을 가진 군왕’(황현, ‘매천야록’1, 1894년 이전 11.조헌과 김집의 문묘배향, 국사편찬위)이었다 할지라도 조선 근대화는 쉽지 않았다. 400년 이상 쌓인 모순은 고종이 책임지기에는 너무 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은 방치하기에는 중증이었다. 시대는 엄혹했다. 도처에서 민란이 벌어지고 있었고 세계는 경쟁을 넘어 서로를 집어삼키는 제국주의적 야수로 탈바꿈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불세출’까지는 아니어도 정상적인 국가 경영인이라면 외세에 잡아먹힐 위기를 기회로 바꿀 시도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은 그러지 않았다. 백성에게는 모진 지도자였다. 세계에는 무지했다. 국가 경영에는 무능력했다.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보여준 모습은 처가 여흥 민씨 세력과 연합한 이기적인 권력가였다. 백성과 세계와 국가는 상관하지 않고 민씨 척족 세력과 함께 ‘권력 유지’라는 단일 방향으로 조선을 경영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젊은 밀사 이위종은 만국 기자들 앞에서 그 정권을 이렇게 말했다.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쳤던 우리 조선인들[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이위종, ‘A Plea for Korea’, 1907년 8월 22일 ‘The Independent’)

 

서기 2023년, 21세기다.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을 재설계할 시점이다. 그 고종을 버려야 한다. 고종이 자주독립을 염원한 비운의 개명군주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맥락과 맞지 않는다. 고종을 버려야 19세기 말 근대화 경쟁에서 100대0으로 패배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고종 정권이 근대화 과정을 어떤 경로로 저지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를 마지막으로 살펴본다. 국사 교과서가 감춰놓은 고종 마지막 이야기 첫 장을 연다.

 

고종(재위기간 1864~1907) /국립고궁박물관

은폐된 진실, ‘고종이 막은 일본군 철군’

20세기를 6년 앞둔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고종·민씨 척족 연합 정권 탐학이 낳은 사건이었다. 1893년 어전회의에서 “민란은 외국군을 불러서 진압하자”고 제안했던 고종은 격렬한 관료들 저항에 부딪혀 이를 철회했다.(1893년 음3월 25일 ‘고종실록’) 이듬해 동학이 터졌다. 고종은 여흥 민씨 영준(민영휘)과 함께 청나라 군사를 불렀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국사 교과서들은 대부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청나라 군사가 출병하자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군이 동시 출병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이 죽창을 내리고 해산했다. 청일 양국 군사가 필요 없어진 조선 정부는 양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군은 철군을 거부했다. 그해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난입해 고종을 협박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아산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후 동학은 일본군과 관군(정부군)에 무자비하게 진압됐다.’(‘고등학교 한국사’, 미래엔, 2020, p112 등)

 

그런데 교과서들이 은폐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해 12월 한 유력 인사가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이 중도에서 철수한다면 망할 위험이 곧 다가오게 될 터이니[若中途調回危亡立至·약중도조회위망립지]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철군하려는 일본군을 가지 말라고 소매를 붙잡는 발언이다. 아래 사진이 이 말이 기록된 문서다. 이 문서는 당시 조선국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협판 김윤식이 1894년 12월 4일(음력 11월 초8일)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공문이다. 문서는 현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영인돼 있다. 문서 이름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6. 내정리혁(內政釐革)의 건1, (6) 조선 정황 보고에 관한 건>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고종이다.

 

그러니까 우금치에서 동학군이 궤멸되고 청일전쟁 전선도 대륙으로 넘어가고 일본 승리가 확실시되던 그 겨울,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공사에게 “남아서 민란을 진압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는 고종 육성이다. 공사 이노우에는 며칠 줄다리기 끝에 고종 청을 수용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은 이후 조선 식민지화 작업에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고종은 일본에 시달린 비운의 군주라기보다는 떠나겠다는 외국군을 눌러앉힌 반(反)시대적 지도자로 행동했다. 그 어느 교과서에도 이 발언과 주인공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옆 나라 군사로 요상한 기운을 일소하고 새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중도에서 철수한다면[若中途調回] 망할 위험이 곧 다가오게 될 터이니[危亡立至]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1894년 12월 4일 조선 국왕 고종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7월 23일 경복궁 점령과 고종

동학전쟁이 터진 와중에 고종이 믿는 무력은 청군과 조선관군이었다. 그런데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 친위대를 무장해제했다. 30분 만에 끝난 전투 직후 고종이 “조선군이 사용하지 않은 무기들은 압수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p64~65, 재인용) 서울 시내 각 부대도 기습 공격에 무기를 탈취당했다.(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한국사료총서 제11집)’ 1894년 음6월 21일)

 

그리고 8월 고종은 측근인 여흥 민씨 민상호를 비밀리에 청나라로 보냈다. 민상호가 소지한 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십수년 병기고에 소장한 무기를 모두 빼앗겼다. 천조(天朝)에서 구원을 내려 주시기를 단단한 충성과 정성으로 애걸(哀乞).’(‘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16, 1308, p9, 광서20년 7월 초5일. 유바다, ‘청일전쟁기 조청항일 연합전선의 구축과 동학농민군’, 동학학보 51권, 동학학회, 2019, 재인용)

 

고종 뜻과 무관하게 일본에 의해 들어선 갑오개혁정부는 곧바로 ‘의안(議案)’이라 불리는 각종 개혁안 200여 개를 공포하고 근대 개혁작업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는 그때까지 고종이 마음대로 행사하던 전제 군주권(君主權)을 제한하는 개혁안이 들어 있었다.

동학토벌대 ‘양호도순무영’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그해 10월 초 동학군이 재봉기했다. 동학에 대한 고종 시각은 확고했다. ‘모든 법을 활용해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말라.’(1893년 음2월 26일 ‘승정원일기’) 10월 24일 고종은 수도권 잔여 병력을 모아 동학 토벌대를 창설했다. 토벌대 이름은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이다. 사령관인 순무사는 신정희(申正熙)다. 신정희는 강화도조약(1876) 조선 측 대표 신헌의 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무장이다. 수도권 병력인 경군(京軍)에서 투입된 순무영 병력은 526명이었다. 여기에 토벌에 투입된 지방군까지 합하면 양호도순무영 병력은 2000명이 넘었다.(신영우, ‘양호도순무영과 갑오군정실기’, 동학과 청일전쟁 120주년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동북아역사재단, 2014)

 

화승총으로 무장한 이 병력은 ‘주술과 죽창’이 전부인 동학군은 충분히 토벌 가능한 병력이다. 그런데 사령관인 신정희가 문제였다. 신정희는 토벌 과정에서 동학군 목적이 ‘지방정치 개량이지 세상 사람들 말처럼 요상한 술법이 아니며’ 따라서 ‘풍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동학당을 진멸해도 소용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 군인이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2권, 3.제방기밀신1, (22)東學黨에 관한 두 大將의 직접 대화) 고종이 원했던 ‘비적 대토벌’은 신정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민란 원인 박멸은 일본 측이 원하던 바였다.

 

일본과 손잡은 개혁 정부 또한 근대적 개혁 작업을 위해 동학 진압을 원했다. 개혁 정부 총리대신 김홍집은 양호도순무영 공식 창설 직전인 10월 7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군의 동학 진압을 희망했다.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가 신중하여 많이 파병하지 않았다. 일청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10만 일본 육군이 개선하는 날 도적 떼도 두려워 흩어지리라.’(아래 사진·김홍집, ‘금영래찰’ 1894년 10월 7일) 일본군 기세에 눌려 민란이 자동으로 해산된다고 했지만, 결국 조선 정부 수장이 원한 것은 일본군 투입이었다. 국내 개혁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군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 눈을 감은 것이다.

 

"10만 일본 육군이 개선하는 날[陸兵十萬凱旋之日] 도적 떼도 두려워 흩어지리라[匪徒亦當望風消散].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공사가 신중하여 많이 파병하지 않았다. 일청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이다."<1894년 10월 7일 조선 총리 김홍집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

일본군을 택한 고종

10월 26일 일본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다. 명목상 임무는 조선 내정개혁이었다. 11월 4일 이노우에는 고종과 왕비 민씨를 알현하고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이노우에가 내놓은 내정개혁안 20개 조는 대부분 군주권 제한과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고종 부부는 “군주가 백성을 군주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탈여하는 권한이 바로 군주권”이라며 납득하지 않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5. 기밀제방왕2 (12)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그런데 11월 20일 공주 우금치에서 2000여 순무영 병력과 일본군 200여 병력이 동학군을 궤멸시켰다. 일본군이 합세하고 지휘하면서 미진하던 토벌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병참부대로 전락한 순무영 지휘부와 일본군 지휘부는 끝없이 갈등을 일으키며 작전 혼란을 초래했다.(신영우, ‘양호도순무영 지휘부와 일본군 간의 갈등’, 군사 81, 군사편찬연구소, 2011)

 

고종이 앓던 이 하나를 제거해준 이노우에가 이제 갑(甲)이 되었고 고종은 을(乙)이 되었다. 이노우에게 개혁안 수용을 촉구하자 고종이 군주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이노우에는 12월 3일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동학 토벌을 위해 파견한 일본군을 즉각 철수하겠다.’ 이노우에는 말미에 “나머지는 귀 정부에서 알아서 하라”고 토를 달았다.

 

단 하루 만에 고종이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협판 김윤식을 통해 답을 보내왔다.

 

‘개혁안은 어제 각 관아에 반포했다. 그리고 이웃 나라 병력을 빌어 난을 일소하고 새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만일 중도에서 (일본군이) 철수한다면 망할 위험이 곧 닥치지 않겠는가. 일본공사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짐의 간곡한 뜻을 공사에게 알려 충직한 도리를 다하기 바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5, 6. 내정리혁(內政釐革)의 건1, (6) 조선 정황 보고에 관한 건)

 

이 문서가 맨 위쪽 사진이다. 4개월 전 청 황실에 “일본을 쫓아달라”고 애걸하던 고종에게 왜 일본군 철군이 ‘협박’이 됐는지는 자명하다. 우월한 화력과 전투경험, 작전능력을 가진 일본군이 양호도순무영보다 본인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했고, 군주권을 법적으로 제한받아도 이는 곧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는 ‘임무 완수’라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고 이듬해 1월 22일 양호도순무영은 고종 명에 의해 해체됐다. 일본군이 지휘한 조선 관군은 동학 잔당을 소탕했다. 자, 근대화 길목에서 고종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 것인가.

 

333. 근대로 가는 길목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인 사건

1896년 2월 11일 조선 경찰이 조선 총리대신을 살해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무덤이 있다. 1894년 이래 갑오개혁 정부를 이끌던 김홍집은 을미사변(1895) 넉 달 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한 1896년 2월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육조거리에 있던 경무청에 구금됐다가 경무청 경무관 안환(安桓)을 비롯한 고종이 보낸 경무청 순검들에 의해 살해됐다. 시신은 함께 살해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시신과 함께 새끼줄에 묶여 종로거리를 끌려다니다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돌팔매질을 당했다. 거리에 방치됐던 시신들은 “외국인 눈에 민망하다”는 신하들 조언에 따라 고종이 가족에게 인수시키라 명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유해는 그래서 지금 대자동에 영면해 있다./박종인 기자

대한제국과 다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주체는 ‘우리[吾等·오등]’다. 시민 혹은 국민이다. 황제 고종이나 순종, 대한제국이나 황실, 황민(皇民) 같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령 제1호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는 만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임을 선포한 법령이다.

 

대한제국 전주 이씨 황실은 다만 ‘우대한다’라고만 규정했다.(동 법령 제8조) 그해 9월 1차 개정과정에서 이 조항 폐지를 주장했던 여운형은 “황실을 벌하자 함은 아니나 집정자의 은혜를 운운함은 어리석은 말”이라고 주장했다.(오향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헌주의’, 국제정치논총 제49집 제1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9) 1925년 임시정부 개정헌법은 이 황실 우대 조항을 삭제했다.

 

임시헌장 1조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도 동일하게 규정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1세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찬란하다. 식민시대와 전쟁을 겪은 나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찬란한 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이 땅은 격랑을 헤쳐나왔다. ‘근대화(近代化)’라는 격랑이다. 일목요연한 설계도에 따라 국가 지도자들이 거국일치적으로 근대화 경로를 밟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부정하고 버린’ 대한제국 권력층은 숱한 반(反)근대적인 수구적 정책과 행동으로 그 근대화 진행 과정을 방해했다. 1910년 아니 실질적으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질 때까지, 근대와 전근대가 충돌했던 구체적인 장면을 하나씩 구경해보자. 첫 이야기는 ‘1896년 2월 11일 종로 조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인 사건’이다.

 

내각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과 왕명

정확한 시각이 밝혀지지 않은 그날 아침, 조선 정부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청(警務廳)에 러시아 병사 4명이 들이닥쳤다. 경무청은 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자리에 있었다. 무장한 이들 군인들은 사무실에 있던 부관(副官) 안환(安桓)을 정동에 있는 자기네 러시아공사관으로 끌고갔다. 부관은 경무사에 이은 경무청 2인자다.(윤치호, ‘국역 윤치호일기’(한국사료총서 번역서3), 1896년 2월 11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8) 1896년 2월 13일 ‘조선국 대군주 및 세자궁 러시아 공사관에 입어한 전말보고’)

 

안환이 영문도 모르고 아관에 들어가보니 경복궁에 있어야 할 고종이 앉아 있었다. 이미 러시아공사관은 군부대와 순검에 의해 육중하게 경호 중이었다. 안환이 공사관에 들어오자 고종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고종은 안환에게 또 조령을 내렸다.

 

“급히 가서 두 사람을 목을 베라[急往斬之·급왕참지].”(정교, ‘대한계년사’(한국사료총서 제5집) 上, 1896년 2월 11일)

첫 번째 포고령, ‘목을 베 바쳐라’

왕명을 받든 안환이 서둘러 직속 부하인 총순(摠巡) 소흥문(蘇興文)과 함께 육조거리로 갔을 때, 이른 아침인데도 광화문 앞은 보부상들이 가득했다. 며칠 뒤 일본공사관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아관파천을 주도한 박정양과 이윤용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입경시킨 사람들이었다. 경기도 보부상 전원과 충청, 황해도 보부상 절반이 이들 명에 의해 사대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앞 문서)

 

거리에는 포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포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운이 불행하여 난신적자가 해마다 화를 일으켜 변을 낳게 하였다. 짐은 러시아공사관에 이어하였으니 안심하라. (왕비를 죽인) 역적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영진은 시기 장단을 불문하고 즉시 목을 베 바쳐라[卽刻斬首來獻·즉각참수래헌].’(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9, 353. ‘조선대군주 및 세자궁 아관 입어 전말’, 부속서1 ‘조칙 사본’)

개혁 총리 김홍집의 결기

김홍집이 이끌었던 갑오개혁정부는 200가지가 넘은 개혁안을 공포했다. 신분제, 문무차별, 연좌제를 폐지하고 과부 재혼을 허가하고 노비를 철폐하며 국가 예산제도를 도입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기득권자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했던 제도들이 한꺼번에 부정됐다. 수구세력 반발을 예상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은 각료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들이 이미 구시대 제도를 바꿔버린 소인(小人)이 됐으니 청직한 여론에는 죄를 지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라를 그르친 소인으로 후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일시의 부귀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노력하기 바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2, 1894년 ④ 10. ‘과거제도 폐지’, 국사편찬위)

 

개혁정부에 참여했던 개화파 유길준은 이렇게 회고했다. ‘스스로 개혁을 행하지 못해 일본의 권유와 협박을 받았으니 조선인에게 부끄럽고 세계만방에 부끄럽고 후세에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실효를 거둬 보국안민하게 되면 허물을 벗어나리라.’(유길준, ‘유길준전서’ 4, 일조각, 1971, pp.376~77.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문학과지성사, 2004, pp.91, 92, 재인용)

 

이들은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 무엇인지, 그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 탈출과 근대로 진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김홍집은 개혁을 밀고 나갔다. 결국 개혁이 봉건 군주권 제한에까지 이르자 고종은 개혁정부와 이를 지원한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를 택했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자 고종은 이들 개혁정부 각료들을 그 끄나풀 나아가 핵심자로 규정한 것이다.

살해되는 조선 총리 김홍집

고종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김홍집은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 붙어 있는 조방(朝房·아침회의 대기실)에서 들었다. 김홍집이 말했다.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일신을 돌볼 때가 아니다. 내가 먼저 러시아 공사관에 가서 폐하를 알현하고 충간(忠諫)하겠다.” 내부대신 유길준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김홍집이 재차 말했다. “폐하가 마음을 돌리시길 촉구하고 성사가 되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 하는 길밖에 없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8) 1896년 2월 13일 ‘조선국 대군주 및 세자궁 러시아 공사관에 입어한 전말보고’)

 

김홍집은 영국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친척과 동행하기 위해 궐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미 경무청 안환 무리가 궐내에 들이닥쳐 김홍집을 체포했다. 또 다른 팀이 농상대신 정병하 집으로 가서 정병하를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을 경무청(현 서울 교보빌딩 부근)으로 끌고가 구금했다.

 

총리와 대신을 끌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인파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가득했다. 그러자 경찰들이 칼을 뽑아들고 사람들을 쫓아낸 뒤 김홍집을 차서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여러 경찰이 일제히 난도질을 해 김홍집을 죽였다. 이어 정병하를 끌어내 한 칼에 그를 죽였다.(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9, 353)

 

경찰이 이들 시신에 ‘大逆無道(대역무도)’라 써붙이고 새끼줄로 다리를 묶어 종로에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과 기와조각을 그 시신에 던져 살이 터지고 찢어졌다. 시신를 베어 그대로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황현, 앞 책, 앞부분) 경찰 가운데 소흥문은 김홍집 신낭(腎囊·고환)을 베어버렸다.(황현, 앞 책 5, 34. ‘경무관 소흥문의 면직’) 정병하 시신에서 살점을 잘라 씹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경무사에 임명된 안경수가 그 풍경을 보았다. 안경수가 고종에게 이리 말했다. “외국인 이목이 많으니 이들이 이 나라 야만 정도를 평가할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오늘 밤중에 가족들이 치우게 하라”고 명했다.(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수문사, 1948, pp.119, 200)

 

‘외국인 이목’. 이게 지금 경기도 고양 대자동 양지바른 곳에 김홍집이 편히 잠들 수 있었던 연유다. 달아났던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용인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소식을 들은 새 내각 내부대신 이완용이 애석하게 생각하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약속 이행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11) ‘신정부의 현황 보고’, 1896년 2월 24일) 훗날 어윤중을 죽인 사람들이 기소됐다. 법부에서는 주모자 정원로와 공모자 임녹길은 교수형, 옆에서 방조한 안관현은 종신형을 결정하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이들을 각각 5년과 2년, 1년 유배형으로 감형했다.(1896년 6월 13일 ‘고종실록’)

고종 “내가 언제 죽이라고 했나”

야만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고종은 감옥에 있는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라 명했고(2월 11일 ‘고종실록’), 갑오경장(1894년) 전까지 백성이 미납한 세금을 전액 탕감해줬다.(2월 13일) ‘대원군 존봉의절’도 공포해 혼란을 틈타 정계 복귀를 노릴지도 모를 늙은 아비 흥선대원군을 다시 한번 외부와 단절시켰다.(2월 13일)

2월 15일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이 회의를 주재했다. 병신년 정월 초사흗날이었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공평한 재판을 하려 했는데 분격한 백성이 살해했다. 맡은 직책도 없는 사람이 우둔하고 쓸데없는 방문(榜文)을 만들어 내걸었다고 하니 조사하여 처리하라.”(1896년 2월 15일 ‘고종실록’)

 

자기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김홍집과 정병하 살인범에 대한 조사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고종 행동 방식이다. 11년 뒤 1907년 7월 7일 ‘헤이그 밀사’ 사건 때 통감 이토가 밀사 파견 이유를 추궁했다.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짐과 아무 관련이 없다.”(‘통감부문서’ 5권 1. (9))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해 사건 전말이다.

 

334. 근대로 가는 길목② 갑신정변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근대를 꿈꾸다 두 번 죽은 홍영식, 그가 여주에 잠들어 있다

 

▲경기도 여주 문장마을에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홍영식 무덤이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민비와 고종 부부 측근인 무당 진령군의 북묘(北廟)로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살해됐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홍영식은 살해된 뒤 다시 한번 토막이 나고, 가족이 수습한 그 시신 또한 부관참시됐다. 근대를 지향했던 한 지식인에게 닥친 가장 전 근대적인 죽음이었다./박종인 기자

야만(野蠻)의 전사(前史)

1885년 여름, 3년 전인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수괴로 낙인찍혀 청나라로 끌려간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민씨 척족정권은 최고 실권자 민영익을 비롯해 여러 사신을 보내 귀국 저지를 시도했다. 문의사(問議使)로 천진에 파견된 김명규는 “대원군이 귀국하면 반드시 화란이 일 것”이라며 결정 번복을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민씨들이 변을 도모하여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런 일 없다”고 반박했다.(‘청계외교사료’, ‘1885년 음 7월 15일 이홍장과 김명규 필담록’.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1, 현음사, 2005, p627) 8월 27일 대원군이 귀국했다. 아들 고종은 남대문까지 나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 40명 호위 속에 옛집 운현궁으로 돌아갔다.(1885년 음 8월 27일(이하 음력) ‘고종실록’)

 

바로 다음 날 고종 정권은 임오군란을 주도했던 김춘영과 이영식을 능지처사형에 처했다. 두 사람은 3년째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공범 이름을 자백해왔던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지금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군기시에서 토막 나 죽었다.(1885년 8월 28일 ‘일성록’ 등) 토막들은 며칠 동안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공사 포크(Foulk)가 본국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이 형이 집행된 날짜는 양력 10월 5일, 즉 음력 8월 17일이다.(1885년 10월 14일 ‘조지 포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Korean-American Relations’ vol 1, no.237, p237.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3, 에이치프레스, 2020, p710, 재인용) 어느 쪽이든, 남대문에서 아들을 만나고 운현궁으로 돌아간 대원군 코에 그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는 뜻이다. 대원군을 귀국시켰던 이홍장은 “충효를 모두 저버리는 소행”이라고 평했다. 대원군을 수행했던 사람들 10여 명은 공포 속에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9월 1일 대원군은 운현궁 대문을 잠그고 바깥 출입을 멈췄다.(‘청광서조중일교섭사료’ 407. 이홍장 서신. 앞 ‘사료휘편’, pp.680, 683) 9월 10일 고종 정권은 ‘대원군 존봉 의절’을 만들어 대원군을 운현궁에 유폐시켜버렸다.(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서울 조계사 옆 우정총국 체신박물관에 있는 홍영식 흉상./박종인 기자

근대인(近代人) 홍영식과 갑신정변(1884)

동서를 막론하고 전(前)근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법치보다 덕치(德治)’ ‘시스템보다 사람’을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였다. 사람과 덕망. 부드럽고 유연한 개념이지만, 현실에서는 시스템과 법을 초월한 권력은 대개 야만스러웠다.

 

약체 국가 남송 때 나온 성리학으로 도덕 정치를 한 조선도 그랬다. 500년 도학 정치 결과가 가난과 부패였고 교류하는 외국이라곤 오직 역대 중국밖에 없었다. 17세기 조선에서 13년을 살았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은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하멜표류기’, 서해문집, 김태진 역, 2003, p134)

 

그 가난과 부패를 끊고 사대 본국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가 갑신정변이다. 정변 목적은 안으로는 가난의 진앙인 부패 민씨 정권 타도, 밖으로는 그 민씨 정권을 받쳐주는 사대 본국과 절연이었다. 이를 위해 준비한 정령 14개조에서 중국과 속국 관계 절연이 그 첫째 강령이었다. ‘조공하는 허례는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토지법을 개혁하고 내시부를 혁파하며 탐학한 관리를 처벌하고 경찰 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제도를 혁신하며 국가 재정을 단일화하고 정승 회의를 정례화하고 그 법령은 반드시 공포할 것, 그리고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없앨 것.’

 

서울 북촌에 살던 홍영식은 이웃집에 사는 개화파 지식인 박규수로부터 근대와 개화를 배웠다. 갑신정변 주역들은 모두 연암 박지원 손자인 박규수 문하생이다. 박규수 집터는 지금 헌법재판소이고 홍영식 집은 그 북쪽에 붙어 있었다. 훗날 신채호는 그 수업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박규수가 지구의를 한 번 돌리더니 김옥균에게 가로되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된다.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그 말에 크게 깨닫고 김옥균이 무릎을 치고 일어섰더라.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신채호, ‘지동설의 효력’, ‘룡과 룡의 대격전’, 기별미디어, 2016)

 

1881년 고종이 일본으로 보낸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이 소화해낸 근대를 목격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3년 홍영식은 보빙사 부사(副使)로 정사 민영익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기절초풍할 근대 국가를 목격했다.

 

1884년 초 귀국한 홍영식은 그해 겨울 곧바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타깃은 함께 보빙사로 갔다가 수구파로 돌아선 민영익이었고 목표는 개화와 독립이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1872년 1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진관에서 촬영한 이와쿠라 사절단 수뇌부(왼쪽). 가운데 대표인 이와쿠라 도모미는 서양 구두에 일본 전통 의상과 상투를 하고 있다. 한 달 뒤인 2월 26일 시카고에 도착한 이와쿠라는 상투와 전통 복장을 버렸다(오른쪽). 근대가 던진 충격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12개국을 순방하며 부국강병의 각론(各論)을 배웠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변군(童便軍)’

매년 4월 22일은 ‘정보통신의 날’이다. 1884년 양력 4월 22일(음력 3월 27일) 귀국한 보빙사 홍영식이 제안해 근대 우편제도 관할 관청인 ‘우정총국’ 설립을 고종이 명한 날이다. 낙성식은 그해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로 결정됐다. 2주 전인 양력 11월 19일 홍영식이 미국 공사 푸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빛을 가리는 물건은 깨뜨려서 사방을 밝혀야 한다.”(1884년 11월 19일 ‘윤치호일기’) 낙성식 날 정변이 터졌다. 정변은 실패하고 10월 21일 홍영식이 맡았던 우정총국은 폐쇄됐다.

 

그가 깨뜨리려던 물건은 이런 것이었다.

 

13년 전인 1871년 양력 12월 23일 일본 메이지 정부 수뇌급 관리 46명이 미국과 유럽을 향해 떠났다. 단장인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이라 한다. 이들은 1년 10개월 동안 서양을 돌며 근대를 몸과 눈과 두뇌로 목격했다. 그들이 본 근대, 그들이 배워야 할 근대는 보고서 ‘미구회람실기’ 100권에 낱낱이 기록됐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항하기 2개월 전인 1871년 양력 10월 4일(음8월 20일) 고종이 주치의 격인 내의원(內醫院) 도제조 이유원에게 묻는다. “내가 열이 조금 있다. ‘동변(童便)’을 복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동의를 얻고 고종은 그날 밤부터 동변을 먹었다. 닷새 뒤 고종이 말했다. “동변을 닷새 먹으니 효과가 있다. 이제 이틀에 한 번씩 먹었으면 한다.”(1871년 8월 20일, 25일 ‘승정원일기’)

 

국왕이 복용한 이 구급약 ‘동변’은 내의원에 상설돼 있는 ‘동변군(童便軍)’에게서 나왔다. 동변군은 약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다. 내의원에 고용돼 매달 쌀 4두를 받고 국왕 행차 시에도 동행하는 ‘아이들’이다.(’육전조례’ 6, 예전 내의원 수가(隨駕) 등) 그러니까 ‘동변’은 조제약이 아니라 ‘아이 오줌’이다. 조선 왕실은 이를 제공하는 아이들을 법전에 규정된 ‘법정 관원’ 동변군으로 고용해 왔다.

 

근대 이전, 동서를 막론하고 똥오줌 약재와 잔혹한 형벌을 가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때는 온 지구가 근대를 다투던 19세기 후반이었다. 더군다나 이웃 일본이 그 근대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던 시대에 조선 지도부는 똥오줌을 기꺼이 권하고 기꺼이 먹었다. 박규수에게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근대를 목격한 홍영식에게는 두려운 풍경 아닌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홍영식은 목숨을 걸었다. 고종은 기꺼이 그 목숨을 빼앗았다.

홍영식 두 번 죽던 날

동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북묘(北廟)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해 피살됐다. 북묘에는 고종과 민비가 총애하는 무당 진령군이 살고 있었다.

 

역모 조사가 마무리되던 1884년 음11월 26일 영동에 사는 선비 김병희가 상소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비록 죄를 인정하여 신속히 형을 더하여 시행하였으니[亟施加律·극시가율] 도망간 역적들 또한 끝까지 쫓아 체포하소서.”(1884년 11월 26일 ‘승정원일기’)

 

노천에 버려진 시신에 추가 형을 집행했다는 뜻이다. 기록이 맞는다면 죽은 홍영식은 이날(양력 1885년 1월 11일) 이전 시신 능지형을 당했다는 말이다. 이는 1759년 영조가 정한 ‘역률(逆律) 추시(追施) 금지령’(1759년 8월 19일 ‘영조실록’)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위였다. 역률 추시 금지는 역적이라도 이미 죽은 자는 소급해서 벌하지 못한다는 명이다. 영조는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경고했고, 이 율법은 ‘대전통편’에 공식 규정됐다.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한 달 뒤 대사헌과 대사간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흉악한 자들은 모두 풀을 베듯 짐승을 잡듯이 죽여 근원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1884년 음12월 13일 ‘승정원일기’) 그러자 바로 그날 고종은 홍영식 가족들 또한 연좌해서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미 죽은 역적에 대한 연좌 처벌 또한 108년 전인 1776년 정조가 즉위와 함께 금지한 형벌이다.(1776년 9월 1일 ‘정조실록’) 고종은 이마저도 무시했다.

 

그리고 의금부는 두 번 죽임당한 홍영식에게 재차 능지처사 형률을 가하겠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이를 윤허했다. 함께 붙잡혔다가 살해된 동료 최영식 가족에게 연좌 처벌 또한 허가했다.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가족에 대한 연좌 처벌도 모두 허가했다.(1884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10년 세월이 갔다. 1894년 양력 4월 14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이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그해 12월 27일, 양력으로는 1895년 1월 22일 고종은 갑오개혁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과 능지처사형 폐지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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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홍영식은 지금 경기도 여주에 잠들어 있다. 딱 30년 살고 죽었다. 연좌법에 얽힌 후손들이 어렵게 경기도 광주에 유해를 모셨다가 이곳 여주로 이장했다. 비석도 없던 묘에는 1977년 당시 체신공무원 훈련소장 정규석이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 무덤 가는 산길에는 철쭉이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다. 봄이면 찬란하리라.

 

335. 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사진 한 장에 숨어 있는 식민시대 괴담들

 

▲1945년 9월 8일 조선에 진주한 미군은 서울 일대를 항공사진으로 남겼다. 그해 창간된 사진보도잡지 ‘국제보도’도 해방 정국을 사진으로 보도했다. 이들 사진에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몇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우선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사진으로 퍼져 있는 아래 사진 촬영 날짜와 장소는 하루가 지난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아래 삼거리다. 항공사진 확대 사진과 해당 사진 속에 무악재가 보이고 건물 지붕들(파란 네모)이 동일하다. 대략적인 장소는 현재 서대문독립공원 안쪽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부근이다. 또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사형장 미루나무는 해방 이후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국사편찬위원회

 

‘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는 때에 도둑같이 왔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일우사, 1962, p359)

그렇다. 아무도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당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옥음(玉音) 방송으로 태평양전쟁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과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조선 사람들은 뭔 말인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은 해방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35년 만에 들이닥친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감격은 8월 15일 당일이 아니라 하루가 지난 8월 16일에 폭발했다. 그해 말 발간된 영문판 사진 잡지 ‘국제보도’ 창간호는 서울역 앞에 모인 인파를 뒤늦게 싣고 이렇게 썼다. ‘일본이 연합군에 공식 항복한 다음 날(the next day after Japan officially surrendered to the Allies) 자유를 경축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모인 거대한 군중’.(서울역사박물관, ‘2020 서울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전시도록, p12)

 

▲<사진①> 감격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촬영 장소, 촬영자, 촬영 시간은 매체마다 중구난방이다.

정체불명의 사진 한 장

<사진①>은 바로 그 감격적인 해방을 만끽하는 군중을 찍은 사진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70년의 기록, 대한민국 새로운 시작’에는 이 사진이 ‘광복을 맞아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인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정체가 불명이다.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를 찾아보면 촬영 날짜가 해방 당일이나 8월 16일, 장소는 마포형무소(맞는 명칭은 ‘경성형무소’다), 서대문형무소 심지어 천안이라는 설명도 따라다닌다. 해방이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 탓이다. 구체적인 정보가 어찌됐건, 이 사진은 1945년 광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으로 때만 되면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언제 촬영됐고, 어디서 촬영됐고, 촬영된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이 사진 정체는 이렇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삼거리에서 형무소 출소 독립운동가들과 군중을 찍은 사진’.

 

근거는 바로 해방 24일 뒤인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대문형무소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사진②>과 앞에 나온 ‘국제보도’ 창간호 화보다. 이들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어이없는 괴담도 하나 튀어나온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독립투사들이 부여잡고 통곡했다’는 서대문형무소 ‘통곡의 미루나무’ 괴담. 알고 보니 이 미루나무는 식민시대 끝나고 해방 이후 심은 나무였다.

사회주의계열이 선점했던 해방정국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이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함석헌, 앞 책, p356) 식민시대가 끝났다. 총독부는 국내 독립운동세력 가운데 사회주의계열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권력 이양 파트너로 택했다. 재조일본인 안전 보장과 건준의 건국 작업 주도권을 맞교환한 것이다.

 

8월 15일 여운형은 기존 건국동맹 조직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에게 정치범과 경제범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격 석방됐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군중은 출옥한 사상범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석방된 정치범들은 상당수 여운형의 건준으로 흡수됐다. 그리고 진주군이 소련군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회주의계열은 조직적으로 ‘소련군 환영’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서울역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진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임이 밝혀지면서 기세등등했던 사회주의계열은 우익계열과 건국을 다투는 험악한 투쟁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사진②>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촬영한 서대문 일대 항공사진. <사진③>은 이 가운데 형무소 입구 갈래길과 사형장 부분에 표시를 한 사진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진③> 미군 촬영사진에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왼쪽)과 형무소 입구 갈래길을 표시했다.

사진이 말해주는 그날 그곳

사회주의 계열 사상범을 포함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지사들은 군중의 환영 속에 무악재 아래로 내려가 기념촬영을 했다.<사진①>

 

사진 속에는 세 갈래 길이 보인다. 멀리 무악재가 능선 사이 열려 있다. 사람들 왼쪽 뒤로 전차가, 그 뒤로 지붕 세 채가 찍혀 있다. 왼쪽 오르막길에도 군중이 가득하다.

 

23일 뒤인 9월 8일 미군 정찰기가 인천~서울 일대를 촬영했다. 그 가운데 한 컷에 서울 서부 지역이 찍혀 있다.<사진②> 무악재 서쪽에 서대문형무소가 보인다. 동쪽으로 작은 샛길이 형무소와 무악재를 연결해 작은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출옥 기념사진’ 촬영 장소는 명확하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앞 샛길이 무악재로 연결되는 삼거리다. 항공사진을 확대한 아래 사진 속 지붕들(파란 동그라미들)과 세 갈래 길, 출옥 기념사진 왼쪽 파란 동그라미 속 지붕 세 채와 인파 가득한 양쪽 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사진④>

 

 ▲<사진④> 항공사진 확대부분과 출옥기념사진 비교. 위는 항공사진이고 아래는 기념사진이다. 파란 동그라미 부분 지붕들과 세 갈래 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국사편찬위원회

 

사진들을 분석해 촬영장소를 밝혀낸 박물관연구소 소장 박찬희가 말했다.

 

‘증거가 사진 자체에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항공사진과 이 사진에 등장하는 길, 선로, 집들이 일치했다. 촬영 위치는 서대문독립공원 안쪽 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부근이다.’

 

‘국제보도’ 창간호에 실린 다른 사진에는 출옥 사진 속 인물과 동일 인물(추정) 세 명이 찍혀 있다.<사진⑤,⑥> 흰 양복을 입은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 그리고 중절모와 안경을 쓴 사람이다(붉은 네모). 사진 설명은 이렇다. ‘조선 애국지사들이 다시 한번 중심가에서(once more in the metropolitan street).’(서울역사박물관, 앞 책)

 

▲<사진⑤> 1945년 사진잡지 '국제보도'에 실린 '시가지에서 다시 한번 환호하는 애국지사' 사진. 표시된 세 사람이 아래 <사진⑥> 속 인물들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사진⑥> 출옥기념사진 등장인물들. 붉은 네모 속 세 인물은 '국제보도' 잡지 화보사진(사진⑤) 속 인물들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파란 네모 속 인물은 독립유공자 성기석이다.

 

기념촬영 후 도심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또 촬영했다는 뜻이다. 식민 시대 조선일보와 경성일보 사진기자였던 최희연(작고)은 “‘국제보도’에 실린 화보는 8월 16일 내가 찍은 것”이라고 구술한 바가 있다.(2020년 1월 12일 뉴시스, ‘해방정국 3년’)

 

<사진⑥>의 파란 네모 속 인물은 ‘단파방송 사건’ 주역인 독립유공자 성기석(1990년 작고)이다. ‘단파방송 사건’은 경성방송 조선인 직원들이 미국 방송을 통해 접한 이승만 육성과 일본 패전 뉴스를 전파하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소했다.

 

▲<사진⑦> 2015년 촬영된 서대문형무소 '통곡의 미루나무'. 식민시대 독립투사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독립의 한을 품고 부여잡고 통곡했다'는 나무다. 2020년 고사해 쓰러졌다. /국가문화유산포털

괴담(怪談)으로 밝혀진 ‘통곡의 미루나무’

군이 찍은 사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던 드라마틱한 사실 하나가 괴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사진⑦>은 식민 시대 처형을 앞둔 독립투사들이 독립의 한(恨)을 담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다. 형무소역사관 남서쪽에 남아 있는 사형장 모퉁이에 서 있다가 2020년 고사해 쓰러졌다. 안내판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출판됐다. 형무소역사관은 쓰러진 통나무를 그 자리에 눕혀놨고 여러 시민단체는 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서울시장 오세훈이 나무를 찾아 묵념을 했다. 서울시는 메타버스 가상공간에 이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8일 항공사진을 보면 형무소 남서쪽 담장에 사형장이 찍혀 있다. 이를 확대해보면<사진⑧> 사형장 주변에 나무가 없다! 식민 시대가 아니라 해방된 이후 어느 시점에 심은 나무라는 뜻이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이 부여잡고 통곡할 나무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괴담이다. 독립투쟁 선양과정에서 허구로 창조한 괴담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운영됐고 1992년에 독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은폐됐던 공간에 ‘독립투사들의 한이 담긴 통곡의 나무’가 생겨버린 것이다.

 

▲<사진⑧>1945년 9월 8일 미군 항공사진에 나온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확대 부분. 담장 모퉁이에 있어야 할 소위 '통곡의 미루나무'가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원래 사형장, 즉 ‘교죄장(絞罪場)’은 형무소 한가운데 옥사(獄舍) 사이에 있었다. 교죄장은 1922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고 옛터는 연못으로 변했다.

 

1945년까지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은 독립투사, 잡범 모두 포함해 493명이다.(이승윤, ‘1908~1945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의 실제와 성격’, ‘서울과 역사’ 108호, 서울역사편찬원, 2021) 이 가운데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은 92명이다. 92명 가운데 1922년 이후 ‘통곡의 미루나무 옆 사형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18명이다. ‘연못 교죄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74명이다. 연못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자, 사진 한 장 덕분에 해방의 감격을 얻었고 괴담을 버리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사이에 있는 연못. 대한제국시대인 1908년부터 1921년 식민시대 서대문감옥 때까지 사형장이 있던 자리다. 그때까지 독립지사 74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박종인 기자

 

336. ‘역사 복원’ 상관없이 재건축 중인 조선 궁궐

‘원칙 무시’ 문화재청이 테마공원으로 전락시킨 궁궐들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에워쌌던 담장은 식민시대 때 철거됐다. 애초에 네 담장을 모두 복원하고 전망대를 설치하려던 문화재청은 동쪽과 북쪽 담장만 복원했다. 이유는 ‘관람객 편의’. 경복궁 동쪽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인 건물인데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문화재청이 설정한 경복궁 복원 기준연도는 1888년이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덕수궁 돈덕전은 2층이던 건물을 3층으로 증축했다. 3층 용도는 덕수궁관리소 사무실이다. 대한문 앞에는 원래 규모에서 축소된 형태로 월대를 공사 중이다. 축소한 이유는 ‘보행자 편의’.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을 ‘재현’이라고 부르며 자체 원칙을 파괴하는 중이다. 유독 광화문 월대 공사만은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한다./박종인 기자

 

문화재청의 ‘복원 원칙’과 광화문 월대

문화재청은 지난 7일 서울 경복궁 앞 광화문 월대 복원조사 과정에서 식민시대 전차 철로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일제가 월대와 삼군부 등 주요 시설물을 훼손하고 그 위에 철로를 깔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철로가 깔린 월대 주변은 서울시, 월대 구역은 문화재청이 발굴조사 중이다. 문화재청은 월대 유구가 확인됐고, 전차 궤도에 의한 훼손이 확인된 만큼 이를 토대로 ‘일제가 훼손한 월대’를 복원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철로는 1917년에 설치됐다. 월대가 설치된 때는 1866년 음력 3월 3일(이하 음력)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서울역사편찬원, 2019, p404) 문화재청 분석이 맞는다면 이번에 발견된 월대는 51년 동안 있다가 철거됐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 월대는 조선 초기 세종이 “민력(民力)을 동원한 월대 공사는 금지한다”고 명했다는 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1431년 3월 29일부터 1886년 3월 3일까지 공식적으로 광화문 앞에 월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1866년 이전 ‘광화문 월대’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을 방침이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 고고학적으로 ‘명확한 유적이 있을 경우 그 아래 지층에 대한 발굴은 최소화한다’는 원칙이다. 호기심이나 궁금증 해소를 위해 기존 월대 유적을 부술 수 없다는 논리다. 둘째,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다.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보고서’는 경복궁 복원 기준을 경복궁 중건이 완료된 1888년으로 설정했다. 각종 전각이 가장 많았던 시점이다. 따라서 광화문 월대 또한 그 시점을 기준으로 복원할 뿐, 그 이전 월대 존재 여부를 위한 조사는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그래?

 

원칙이 그렇다면 아쉬워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일주일에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나고 시민들 통행 불편도 참을 수밖에 없다. 원칙이니까.

 

그렇다면 문화재청이 주관해 역사 복원이 한창인 사대문 안 조선시대 역사 현장들을 본다. 원칙은 얼마나 잘 준수되고 있고, 역사는 얼마나 잘 복원되고 있는지 똑똑히 본다.

 

담장 사라진 경복궁 경회루

조선 개국 20년이 지나고 1412년 태종 12년에 경복궁 안에 거대한 누각이 신축됐다. 공사 감독은 공조판서 박자청이었다. 원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종이 크게 또 지으라 명한 건물이다. 지금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이면 모두 감탄하듯,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그 사치스러움이 마음에 걸렸는지, 건축주인 태종은 이를 “중국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로 삼겠다”고 밝혔다.(1412년 4월 2일, 5월 16일 ‘태종실록’) 이듬해에도 태종은 “그 사치스러움이 내 본의가 아니었음”이라고 거듭 변명했다.(1413년 12월 14일 ‘태종실록’)

 

그 경회루에는 연못 사방으로 담장이 있었다. 고종 시대 이전은 자료 부족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1888년 6월 24일 ‘경회루 서쪽 담장 바깥 소나무가 바람에 넘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해당 날짜 ‘승정원일기’) 1907년 만들어진 실측도 ‘북궐도형’을 보면 명확하다. 경회루 연못 사방으로 담이 그려져 있다.

 

 ▲북궐도형(1907). 붉은 원 속은 경회루다. /문화재청

 

나라가 사라지고 총독부가 경복궁 전각을 철거하면서 경회루 담장 또한 철거됐다. 경복궁은 유료 공원으로 변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경복궁 복원이 결정됐다. 그때 원칙은 ‘공원이 아닌 조선 정궁(正宮) 제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역사적 공간 복원’이었고 복원 기준 연도는 1888년이었다.(앞 문화재청 보고서, p196) 이에 따라 경회루 주변은 담장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대신 경회루 관람을 위한 전망 시설 설치를 ‘고려한다’고 규정했다.(앞 보고서, p312) 경관은 희생하더라도 역사 복원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 전망 시설과 그 담장과 복원하려 한 역사는 지금 어디 갔나. 2009년까지 북쪽과 동쪽 담장은 복원됐지만 ‘제일 경치가 좋은’ 남쪽과 서쪽 담장은 식민 시대 그대로다. 경회루 주변은 문화재청이 배제하려고 했던 ‘공원’이다. ‘역사적 공간 복원’ 원칙은 어디로 갔나.

 

▲북궐도형 경회루 세부. 연못 사방에 담장이 둘러쳐 있다./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쓰는 총독부박물관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5년이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는 소위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었다. 자기네 통치를 정당화하고 피식민 조선이 자기들로 인해 변화한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때 총독부는 경복궁 경내 건춘문 북쪽에 총독부박물관을 설치했다. 본관과 사무동을 포함해 근대 건물 2개 동으로 구성된 이 박물관에는 조선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21세기 경복궁 건춘문 북쪽에는 잘생긴 2층 건물이 하나 보인다. 숲에 숨어서 관람객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게 1915년 당시 총독부가 건축한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다. 이 건물이 현재 경복궁관리소 사무실이다.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는 1888년이다. 복원 원칙은 ‘1888년을 기준으로 일제 만행으로 훼손된 경복궁 복원’이다. 그런데 ‘1915년’ ‘일제가 만든’ 이 건물은 왜 저기 숨어 있는가. 게다가 용도 또한 대중에게 공개된 시설이 아니라 자체 사무실이다. 여기에 적용한 원칙은 무엇인가. 아니 원칙을 적용하긴 했는가.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때 총독부가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건물. 경복궁 복원 원칙에 따르면 철거 대상인데, 현재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중이다./박종인 기자

‘촬영세트장’ 공사, 덕수궁 월대

덕수궁 앞에는 ‘대한제국 황궁 정문의 면모를 되찾기 위해’ 대한문 앞 월대 재현 공사가 한창이다. 이 월대는 1899년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1899년 양력3월 3일 ‘독립신문’ 등) 그리고 1912년 이전 총독부에 의해 철거된 듯하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덕수궁 대한문 월대 재현 설계 보고서’, 2020, p12)

 

해방 후 1968년 덕수궁 앞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덕수궁은 담장이 현재 담장 위치로 축소됐다. 대한문은 현재 태평로 횡단보도 자리에 섬처럼 남아 있었다. 1970년 대한문은 지금 위치로 33m 동쪽으로 이전했다. 이때 대한문은 위치에 관한 한 역사성을 잃었다.

 

53년 전 이전한 대한문 앞에 110년 전 사라진 월대를 현재 ‘재현’ 중이다. 무엇을 재현하겠다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옛 대한문 앞에 10년 남짓 존재했던 월대는 재현할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고 어떻게 재현하겠다는 것인가. 땅을 파도 옛 월대 흔적은 나올 턱이 없었고 따라서 나오지 않았다. 재현하겠다는 월대 규모 추정 근거는 모두 옛날 사진들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 촬영한 그 사진들은 지형지물이 ‘33m’ 변형된 현재 위치에서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또 현 대한문 앞은 추정 규모를 가진 월대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그래서 ‘시민 보행, 교통 상황 등 현실적 조건을 감안하여 복원이 아닌 재현으로’(‘2021년 문화재위원회 제1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공사 중이다. 곧 대한문 앞에는 촬영세트장 같이 원형에서 축소된 정체불명의 구조물이 나올 판이다. 여기 적용된 원칙은 또 무엇인가.

 

 ▲재현’ 공사가 끝나가는 덕수궁 돈덕전. 사진 한 장, 1층 평면 개략도와 상상력을 토대로 공사 중이다. 건축재료는 벽돌 대신 철근콘크리트 기법을 적용했다. 수령 600년 된 Y자형 회화나무는 건물 신축을 위해 5m 앞으로 옮겨심었다. 2층이던 건물은 3층으로 증축했다. 3층은 덕수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할 예정이다./박종인 기자

사무실로 쓰려고 증축한 돈덕전

덕수궁 북서쪽 구석에는 고종시대 서양식 건물 돈덕전이 있었다. 돈덕전은 고종이 외국 VIP를 접견하고 연회를 열었던 2층 건물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된 뒤 순종이 여기에서 즉위했다. 돈덕전은 1920년대에 철거됐다.

 

돈덕전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사진 몇 점과 1층 평면도, 땅에서 나온 유적이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 ‘재현’ 공사가 완료 직전이다. 외관은 물론 1·2층 실내 공사도 마무리 단계다.

 

처음부터 복원은 불가능했다. 1층 평면 배치를 제외한 모든 실내 구조는 출발이 상상(想像)이다. 건축 골격도, 설계도 21세기에 창작된 신축이다. 자문회의에서도 ‘원형 논란을 불식시키고 활용도를 제고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했다.(문화재청, ‘덕수궁 돈덕전 복원조사 연구’, 2016, p19) 또 자문회의는 활용을 위해 ‘철골보 보강 방법’을 고려하라고 충고했다. 벽돌건물인 돈덕전을 ‘실용적 용도’를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만들라고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재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덕전 원형은 2층이다. 그런데 신축 돈덕전은 3층으로 증축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덕수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증축했다. 증축도 용도도 외부 전문가 자문 없이 궁릉유적본부 내부에서 결정했다.

 

이게 복원인가? 양보해서, 재현인가? 누구를 위한 복원이고 재현이고 신축인가. 여기 적용한 원칙은 무엇인가. 원형을 복원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원형 대신 활용도 제고’를 들이댄 자문위원은 또 뭔가.

 

2021년에는 600년 넘도록 살고 있던 회화나무 한 그루를 5m 전방으로 옮겨 심었다. 철근콘크리트 건물 신축을 위해 살아 있는 역사가 역사를 옮겼다. 자문위원들은 돈덕전이 ‘대한제국의 개방화와 국제화’를 상징한다고 해서 ‘순종 즉위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역사이므로 이를 표방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앞 보고서, p19)

 

임진왜란 때 심은 노거수를 옮기고 역사를 이렇게 은폐하면서까지 대한제국 건물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무원칙의 원칙을 모아보니 온통 대한제국이고 고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민은 ‘간악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탁 트인 경회루 경치를 감상한 뒤, ‘총독부박물관’ 건물에 상주한 경복궁관리소 관할 경복궁을 떠나, 촬영세트장으로 변한 덕수궁 월대를 넘어서 ‘순종황제가 즉위한 장소임을 절대로 알리면 안 되는’ 덕수궁관리소가 상주한 3층짜리 신축건물 돈덕전에서 끝나는 테마공원 조선 궁궐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무원칙과 편의의 원칙 사이에 광화문 월대의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고.

 

337. 근대로 가는 길목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김옥균이 죽었다고 역적 허리와 목을 그냥 붙여두겠는가”

▲충청남도 아산에 김옥균 무덤이 있다. 도로명 주소 또한 김옥균 호를 따서 고균길이다. 1912년 당시 아산군수였던 양자 김영진이 일본에 있던 김옥균 묘에서 머리카락을 가져와 이장한 묘다. 1894년 상해에서 암살된 뒤 조선으로 끌려온 김옥균 시신은 4월 14일 밤 온몸을 토막내고 칼집을 내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을 받고 팔도에 뿌려졌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 김병태는 아들 시신이 추가형을 받은 다음날 천안 감옥서에서 처형됐다. 역적이 죽은 뒤 그 시신에 처벌을 가하는 ‘역률 추시’는 영조 때, 가족을 연좌해 처벌하는 ‘노륙형’은 정조 때 법으로 금지된 형벌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복수를 완성한 고종은 “10년 동안이나 형벌을 적용하지 못한 것이 통분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 묘 동쪽에 아들 김영진 묘가 있다. 비석이나 석물은 없다. 식민시대 여러 군데 군수를 지낸 아들 김영진은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박종인 기자

 

근대로 가던 길목, 그 끔찍한 경로

1896년 2월 11일 조선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날 아침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바로 그 국왕이 보낸 경찰들에게 노천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내린 명령은 ‘급히 가서 두 사람 목을 베라[急往斬之·급왕참지]’(정교, ‘대한계년사’(한국사료총서 제5집) 上, 1896년 2월 11일)였다. 경찰이 종로에 팽개친 두 시신을 행인들이 처참하게 훼손한 뒤 고종이 한 말은 이러했다. “귀신과 사람 울분을 시원히 풀었다.” 고종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즉시 석방해주라고 명했다. 죄 경중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 2년 전인 1894년 봄날에도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풍경 속 주인공은 갑신정변(1884) 주역 김옥균이다. 그해 봄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에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이 집행됐다. 이를 기념하는 대사면령도 내렸다. 그리고 고종이 말했다. “요망한 역적 허리와 목을 그대로 붙여 둬서야 되겠는가.”(1894년 음력 4월 27일 ‘고종실록’)

명쾌하고 일관됐던 김옥균의 삶

김옥균은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894년 3월 27일 청나라 상하이에서 죽었다. 마흔세 살이었다. 1884년 부패한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을 일신하며 대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김옥균은 다섯 살 때 안동 김씨 권세가인 당숙 김병기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살았다. 1872년 2월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탁월한 봉건적 인재였다. 사람이 영민하고 집안 배경도 좋으니 세도정치 프레임에 안주하면 편히 살다 죽을 인생이었다.

 

그런데 북촌 고개 아래에 사는 개화파 관료 박규수를 만나며 근대를 알게 됐고 나라가 부패했음을 알게 됐고 청나라 바깥에 일본이 있고 그 바깥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천하(天下) 대신 어느 나라든 힘만 있으면 중심이 될 수 있는 ‘세계(世界)’가 있음을 알게 됐다. 더 이상 봉건질서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김옥균처럼 북촌에서 박규수로부터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개화와 근대의 결과를 목격한 청년들이 만들려 했던 개혁의 비상구였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자객 위협에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방탕한 생활도 했다.(구스 겐타쿠, ‘김옥균’, 윤상현 역, 인문사, 2014, p77)

 

그 방탕했던 김옥균이 1894년 3월 ‘민씨 잔당 세력을 타도하고 개화당의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나러 상하이로 갔고, 죽었다.(김흥수, ‘김옥균의 최후’, 한국학연구68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23) 죽을 때까지 김옥균에게는 근대와 개화가 화두였다.

 

▲충남 공주 정안에 있는 김옥균 생가터. 1990년 공주 사람들이 이 들판에 기념비를 세웠다. 공주가 아니라 천안이라는 주장도 있다./박종인 기자

복수의 불꽃, 반(反)근대 ‘역률 추시’

1894년 4월 13일 김옥균 시신을 태운 청나라 군함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자객 홍종우는 김옥균 관을 작은 배에 싣고 한성 남쪽 양화진에 도착했다. 시신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내각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고종실록’은 이 시신을 살점을 도려내는 ‘능지형’ 방식으로 부관참시하자고 내각이 연명상소했다고 기록했다.(1894년 음3월 9일 ‘고종실록’) 이 가운데는 훗날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김홍집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재 외교관들 정보에 따르면 ‘민씨 일파는 강력하게 부관참시를 요구했고’ ‘이에 김홍집 등 개화파는 극구 반대했다’.(’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서울대 독일학연구소 역, 신원문화사, 1992, p152)

 

이 소식을 접한 각국 외교관들이 14일 일본공사관에서 회합했다. 이들은 고종 정부에 시신 훼손 불가 조언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들 의견을 취합한 때는 이미 조선 정부가 시신 훼손을 결정한 뒤였다. 조선 정부는 시신 도착 하루 만인 그날 밤 오후 9시 양화진으로 형 집행인들을 보내 김옥균 시신을 조각 내 버렸다.(국사편찬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 3-1-(10) 김옥균의 유해와 홍종우의 한국 도착 및 김옥균의 유해 처분의 건)

 

시신은 ‘지루한 톱질 끝에 머리가 잘려나갔고, 오른손은 관절이, 왼손은 관절과 팔꿈치 중간에서 절단됐다. 발은 도끼로 잘려나갔다. 등은 7인치 길이에 1인치 깊이로 세 군데 칼집이 났다. 손과 발과 머리는 삼발이에 내걸렸고 나머지 몸과 팔 다리는 땅바닥에 그냥 버려졌다. 집행 완료까지 이틀 걸렸다.’(앞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pp.152~153)

 

김옥균 시신 처리 방식은 1759년 영조가 ‘역적이 죽고 나서 반역죄를 소급 적용한 처벌은 금지’라고 한 ‘역률 추시 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파괴한 형 집행이었다.(1759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영조가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경고한 뒤 법전에 명시한 금지 원칙이다.

 

영조가 세운 원칙을 135년 만에 처음으로 어긴 지도자가 이 고종이다. 1884년 거리에서 죽은 갑신정변 주역 홍영식 시신을 훼손하고 두 번째 위반 사례였다.“(1884년 음11월 26일 ‘승정원일기’) 김옥균 시신을 토막 내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894년 5월 31일 고종이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 그리고 김옥균 처형 소감을 만방에 밝혔다. “반역죄는 절차를 따지지 않고 바로 처단하는 법이다. 죽었다고 하여 그 요망한 허리와 머리를 그냥 놔둬서는 아니되느니라.”(1894년 음4월 27일 ‘고종실록’) 근대로 향하는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고종은 왕국 법치(法治)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통쾌한 반(反)근대적 복수를 택하고야 말았다.

또 다른 반근대 형벌, 연좌 처형

김옥균 시신이 산산조각 나고 한 달 나흘이 지난 5월 19일, 전형적이되 잔혹한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의금부에서 김옥균 친아버지 김병태를 처형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천안에 살면서 권력과 무관하게 지냈던 김병태는 갑신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6일 체포돼 10년째 천안옥사에 수감 중이었다. 김옥균이 암살된 1894년 김병태 나이는 73세였다. 의금부는 “규례대로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 연좌하여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알았다”고 전교했다.(1894년 음4월 15일 ‘승정원일기’) 혁명가 아들을 둔 탓에, 일흔을 넘긴 노인은 그렇게 목이 매달려 죽었다.

 

연좌 처벌. 이 또한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 처분이었다. 고종보다 100년 이상 앞선 봉건군주들이 세운 원칙을 근대를 코앞에 둔 지도자가 깨뜨리는, 이 기이하고 허망한 역류(逆流).

 

▲1912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김옥균 양자인 아산군수 김영진이 일본 도교 아오야마 공동묘지에서 아버지 묘를 발견한 경위, 12월 3일 그 머리카락을 가져와 아산에 이장할 때 풍경이 기록돼 있다./국립중앙박물관

1912년, 돌아온 김옥균과 딸을 얻은 고종

1894년 12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치르던 일본 장교가 충북 옥천에서 김옥균 아내와 딸을 발견했다. 갑오개혁정부가 출범한 이후라 이들은 연좌 처형이나 노비 전락을 면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5, 6-(14) 박영효 복작과 갑신죄범사면 및 김옥균의 처·딸 발견의 건)

 

그리고 나라가 사라지고 1912년 11월 당시 아산군수였던 김옥균 양자 김영진이 일본 도쿄에서 부친 시신 일부가 매장된 김옥균 묘를 발견했다. 양화진 참사를 지켜보던 일본인 친구들이 유해 일부를 빼돌려 일본에 묻은 것이다. 김영진은 그 일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충남 아산에서 성대한 이장식이 열렸다. 살아 있는 정변 동지들과 일본 편으로 돌아선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했다.(1912년 12월 6일 ‘매일신보’)

 

‘덕수궁 찬시실일기’에 따르면 하늘이 맑던 12월 3일 화요일 덕수궁에 있던 고종은 새벽 2시 아들 순종이 사는 창덕궁에 전화를 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10시 25분 기상한 고종은 차를 마시고 주치의로부터 건강을 체크받았다. 이어 왕실 위패를 모신 각 전각 담당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오후 1시 5분 점심을 먹었다. 각종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후 7시 10분 저녁을 먹었다. 그해 5월 25일 고종에게는 막내딸이 태어났다. 한 해 전인 1911년 7월 20일 엄비가 죽고 고종이 가까이 했던 궁녀 양씨가 임신한 딸이었다. 다른 때도 아닌 엄비 상중에 잉태된 딸이다. 아이가 잉태됐을 때 고종은 쉰아홉, 훗날 복녕당 당호를 받은 양씨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름은 아직 짓기 전이라 그저 ‘아기씨’라 불렸던 이 여자아이는 훗날 덕혜라는 이름을 얻었다.(이상 ‘덕수궁 찬시실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너무나도 끔찍한 방식으로 근대를 팽개친 망국의 군주 일상 같은가. 시중을 받으며 제사를 챙기고 식사를 하고 자식을 챙기는 평이한 일상 아닌가.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에게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편안한 일상’(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331) 아닌가.

 

338. 근대로 가는 길목④
조선 식민지 정책이 결정된 1894년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

“향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기로 결정한다”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1894년 7월 23일 새벽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 혼성여단이 건춘문과 서쪽 영추문(迎秋門)을 부수고 경복궁을 공격했다.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던 경복궁 수비대는 고종 명에 의해 무장해제하고 퇴각했다. 이틀 뒤 일본이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운명의 8월 17일 일본 내각은 조선 문제 처리를 안건으로 올리고 독립국화, 보호국화, 분단화, 중립화 4개안 가운데 보호국화를 향후 대조선 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에 앞서 고종이 미국에게 일본군 철병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 클리블랜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훗날 35년 식민지의 씨앗은 바로 그날 뿌려졌다./박종인 기자 

숨막혔던 1894년

1894년은 조선 근대기에 가장 긴박한 해였다. 2월 동학농민전쟁이 발화됐다. 3월 27일 김옥균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됐다. 4월 14일 김옥균 시신이 조선 정부에 의해 강변에서 토막토막 절단됐다. 이어 5월 19일 갑신정변과 무관함에도 10년째 수감 중이던 김옥균 아버지 김병태가 처형됐다. 그리고 5월 31일 조선국왕 고종은 김옥균 부관참시 축하 기념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바로 그날 전주 이씨 왕실 성지(聖地) 전주성이 농민군에 함락됐다. 야만적 광시곡에 조정이 환호하던 날 종말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왕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6월 3일 고종은 척족이자 농민군 타도 대상 1호였던 민영준(민영휘)을 통해 청나라 군사를 공식 요청했다.(‘이홍장전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9) G20-05-00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110) 청군이 출병했다. 청일 양국 간 톈진조약(1885)에 규정한 ‘조선 출병 시 동시 출병’ 조항을 앞세워 일본군 또한 조선에 출병했다. 7월 25일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이 청나라 함대를 포격하면서 조선 땅에서 청일 두 나라 전쟁이 개전했다.

 

예컨대 1880년에 한성 성곽 바깥 성저십리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두 살에 임오군란을 겪고 네 살에 북촌 사대부들이 행한 갑신정변을 목격하고 이어 온갖 가렴주구를 겪은 끝에 학정에 맞서서 죽창을 든 농민들을 보았고, 외국군끼리 싸우는 전쟁통에 참담한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나이 서른이 되던 1910년 가을, 조선은 이름만 남고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자, 그렇다면 이 복잡다기하고 숨막히는 역사 과정에서, 과연 어느 시점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겠다고 결정했을까. 그 운명의 결정은 장소와 시각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1894년 양력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다.

 

▲부관참시된 김옥균을 묘사한 일본 판화. 조선정부가 김옥균 시신을 훼손하고 이를 기념하는 대사면령을 내리던 5월 31일, 전주 이씨 왕실 성지(聖地)인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함락됐다./영국박물관

영국의 큰 그림, 그레이트 게임

청일전쟁은 단순히 청과 일본이 쟁패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전 지구를 무대로 영국과 러시아가 싸워온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있었다. 남하하는 러시아와 동진하는 영국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과정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명칭부터 제국주의 냄새가 확 풍기는 이 경쟁은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전선이 전 지구로 확대됐다. 1885년 영국 해군이 조선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조선 영토 내에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1886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은 고종에게 이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천하 형세가 하루하루 변하고 바뀌는데 거문도는 이미 영국에 약탈당했다. 조선에서 영국 이름을 아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폐하는 이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김옥균, ‘지운영사건 규탄상소문’(1886))

 

그 영국이 일본을 대(對)러시아 파트너로 선택했다. 청-일과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정책에서 ‘강력한 군사국가로 떠오른’ 일본을 단일 파트너로 택한 것이다.(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p247) 영국에게는 손 안 대고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일본에게는 대륙 진출에 대한 자유를 얻은 선택이었다. 7월 16일 영국과 일본이 통상항해조약을 맺었다. 불평등했던 기존 조약을 개정한 조약이었고, 영국이 일본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9일 뒤인 7월 25일 일본 해군이 조선 풍도 앞바다에서 영국 상선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영국 정부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 8월 1일 일본은 청에 공식 선전포고했다.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점령 사건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는 건춘문과 영추문을 부수고 난입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궁내 북동쪽 함화당에서 고종 신병을 확보했고 전투는 종료됐다. 당시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에 따르면 경복궁 습격은 전쟁 개전을 위해 ‘강압적으로 조선 조정을 밀어붙여 굴종시켜’ 조선을 묶어두려는 계획이었다.(무쓰 무네미쓰, ‘건건록(蹇蹇錄·1941)’, 이용수 역, 논형, 2021, p141)

 

외국군이 자행한 이 사건이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누적된 모순을 해소하려는 갑오개혁 정부의 모태가 된 것도 아이러니다. 수구파 여흥 민씨가 장악한 권력, 갑신정변 이후 멸절당한 개화파 그리고 산적한 모순. 그 벼랑 끝 상황에서 구성된 갑오개혁 정부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함도 아니지만 병 고치려고 쓰는 약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모순된 근대화 지휘자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2권 1894년 ② 7.일본군의 남산 포진과 오토리 게이스케의 알현)

지도자 고종의 나약한 대응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조선국 지도자 고종은 나약했다. 경복궁 점령 전, 고종은 주미공사 이승수에게 미국 정부에 일본군 철병 중재 요청을 하라고 훈령을 보냈다. 7월 5일 미 국무부에 접수된 훈령에는 ‘이 난관을 조정해달라고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요청해달라(ask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o adjust the difficulty)’라고 적혀 있었다.(Korean Minister to Gresham, July 5, 1894, Notes from the Korean Legation in the United States to the Department of State, Vol. 1, NA, RG 59. 제프리 도워트(Dorwart), ‘The Pigtail war:the American response to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매사추세츠대출판부, 1971, p19, 재인용)

 

7월 7일 국무장관 그레셤은 주일미국공사 에드윈 던(Dun)에게 전문을 보내 아래 내용을 일본 내각에 전하라고 통보했다. ‘일본이 나약하고 힘없는(feeble and defenceless) 이웃을 부도덕한 전쟁에 빠뜨린다면 미국 대통령은 고통스러운 실망을 느낄 것이다.’(도워트, 앞 책, p20)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바로 그날 그레셤은 일본공사 다테노 고조(建野鄕三)와 면담을 갖고 일본의 전쟁 의지를 확인했다. 이틀이 지난 7월 9일 그레셤이 조선공사 이승수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공명하고도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한다.”(최문형, 앞 책, p253)

 

고종 요청에 대한 거절 통보였다. 당시 조선과 교역량은 미국 전체 교역량의 0.01%도 되지 않았다. 미국은 이해관계가 비교할 수 없이 큰 일본을 택한 것이다.(석화정,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and Russia’s East Asian Polic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Korea Journal vol 50, no 3,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한 후세 사가(史家)의 분석

‘일본은 랴오둥반도에 대륙 진출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이때 이미 조선을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포위, 압박했지만, 다행히 국왕(고종)은 미국의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 대통령에게 ‘선의의 중재’를 요청하여 보호국으로 전락할 화를 면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친서를 보내 계획이 철회됐다.’

 

이 글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이 지난 3월 11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일부다. 이 필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공감’ 41호(2022년 7월)에도 ‘한미수교 140주년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청일전쟁 때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이때 군주 고종은 재미 공사(이승수)에 긴급히 연락해 조미조약 제1조를 근거로 들며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했으며’ ‘결국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보낸 친서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조선과 미국, 일본을 오간 위 대화들과 맥락은 물론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 고종이 중재를 요청한 시점은 경복궁 공격 전이다. 그리고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확보한 시기는 1894년 11월 이후다. 그런데 위 글을 읽으면 마치 ‘일본군에 포위된 고종이 기지를 발휘해’ ‘우방인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고’ ‘그 요청이 통해서’ ‘미국 중재로’ ‘일본이 조선 보호국화를 포기했다’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클리블랜드 정부는 조선에 대해 ‘중립’을 견지했다. 뒤에서 보듯 일본은 랴오둥반도 공격 훨씬 이전 이미 조선 보호국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경복궁 공격 시기와 청일전쟁 말기 미국, 일본, 조선 외교문서를 뒤졌지만 나는 ‘일본군이 조선 왕궁을 포위·압박한’ 때 이와 같은 요청과 ‘친서’가 오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식민의 순간, 1894년 8월 17일

7월 9일 외무대신 무쓰는 미국공사 던으로부터 그레셤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의 간청이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의사도 없었음이 분명했다.’(무쓰, 앞 책, p101) 7월 23일 경복궁 공격으로 전쟁은 현실화됐고 8월 1일 공식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그리고 8월 17일, 외세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던 그날이 왔다.

 

‘나(무쓰 무네미쓰)는 4개 문제를 각의에 제출해 국가 방침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방안은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놔둔다(‘독립국’) 2.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영구히 또는 장기간 그 독립을 돕는다(‘보호국’) 3.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전한다(‘공동통치’) 4. 이도저도 안되면 강국(强國)이 담보하는 ‘중립국’으로 만든다.’

무쓰가 4개안에 일일이 장단점을 열거해 토의에 부친 결과 내각은 ‘당분간 2번안(보호국안)을 목표로 하기로 하고 후일 다시 국가 방침을 확정하기로’ 의결했다.(이상 무쓰, 앞 책, pp165~167)

 

조선을 일본 보호국으로 만들고 향후 재론하겠다는, 식민의 시작이었다. 포성도 살인극도 없었다. 그런데 1894년 여러 날 가운데 가장 숨막히는 날이었다. 그 숨막히는 사춘기를 맞았던 아이가 커서 나이 서른이 되던 1910년 늦여름, 조선은 이름만 남고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1894년 7월 23일 당시 고종이 머물렀던 경복궁 함화당. 일본군 혼성여단은 함화당에 난입해 고종에게 내정 개혁을 요구했다./박종인 기자

 

339. 식민시대에서 공화국까지 모란공원에 얽힌 땅의 역사

박영효 손녀가 만든 공동묘지,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문안산 북쪽 기슭에는 흥선대원군 묘가 있다. 공식 명칭은 흥원(興園)이다. 그 옆에는 흥선대원군 장남인 흥친왕 이재면과 그 가족 납골묘, 서장자 이재선 묘가 있다.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이재면의 양손자이자 운현궁 궁주였던 이우가 일본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이곳에 묻혔다. 1966년 이우 아내이자 박영효 손녀 박찬주는 운현궁 소유지인 문안산 주변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이 묘지가 모란공원이다. 부산에 있던 박영효 묘도 이곳 모란공원에 이장돼 있다. 운현궁 후손들은 흥원과 가족묘 일대 토지를 경기도에 기증했다./박종인 기자

한 군인의 장례식과 모란공원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경성운동장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원래 오후 1시에 예정돼 있었지만 천황 항복 선언 탓에 연기됐다. 장례식 주인은 그달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망한 일본 육군 중좌(중령). 조선인이다.

 

패전을 눈앞에 두고도 일본 육군은 이 군인을 최고의 예우로 떠나보냈다. 8월 7일 오전 5시 5분 육군요양소에서 사망 선고가 떨어지자 일본 육군은 다음 날 그 유해를 항공기로 경성으로 운구했다.(신조 미치히코(新城道彦), ‘朝鮮王公族’, 中央公論新社(도쿄), 2015, p208) 사망 선고를 확인한 보좌 무관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중좌는 요양소 앞 잔디밭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이기동, ‘비극의 군인들(증보판)’, 일조각, 2020, p672)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조선군관구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와 천황을 대리한 일본 황실 식부차장 보조 도시나가가 참석했다. 이 군인에게는 대좌 계급과 대훈위 훈장이 추서됐다.

 

8월 10일 일본 궁내성은 관보에 그 사망 소식을 이렇게 게재했다. ‘이우공(李鍝公) 전하가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공습 폭격으로 부상을 입고 7일 전사.’(‘李鍝公殿下薨去の件昭和20年’,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 문서번호 26490)

 

이우(李鍝). 고종 형 이재면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의 당시 궁주(宮主)며 일본 천황이 책립한 조선 공족(公族)이다. 항복 직후임에도 일본 황실과 육군이 예우를 갖춰 떠나보낸 전주 이씨 왕실 사내다. 그 이우가 잠든 곳은 당시 주소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다. 운현궁이 가지고 있던 땅이며 흥선대원군과 장남 일가가 묻힌 땅이다. 그 산 너머에도 운현궁 소유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1966년 이우의 아내이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가 그 땅에 대한민국 최초 사설 공동묘지를 건설했다. 그 공동묘지가 모란공원이다. 복잡다기한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그 땅 이야기.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 1면. 이우가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왕공족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신분을 조선 왕족과 공족으로 격하시켰다. 황제였던 순종은 왕(王)이 됐지만 실질은 신분 유지였다. 나라는 사라졌는데 전주 이씨 왕실은 변함이 없었다. 왕실을 없애고 순종에게 대공(大公) 지위를 주려 했던 계획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王) 지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 이완용에 의해 좌절됐다.(고마쓰 미도리(小松緑·전 통감부 외사국장),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도쿄), 1976, p283) 이 같은 조치는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과 함께 발표된 일본 천황 책립조서로 공포됐다.(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부록’)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천황의 명이었다.

 

고종과 순종 부부,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 4명은 일본 황실에 의해 왕족으로, 순종 동생인 이강 부부와 고종 형 이재면(이희로 개명) 부부는 공족으로 책립됐다. 이에 따라 순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이 됐고 고종은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 되었다. 이강과 이희는 공가(公家)를 창설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보장받았다.

 

병합 첫해 이들 왕공족 8명이 총독부로부터 받은 세비는 50만엔이었다.(1910년 10월 10일 ‘순종실록부록’) 이후 이들에게는 매년 150만엔이 세비로 지급됐다. 참고로 1914년 일본 제국의회가 편성한 조선총독부 세입예산은 3710만엔이었고 이 가운데 총독부 자체 경비는 339만3109엔이었다. 이왕가가 받은 세비 150만엔은 총독부 자체 경비 절반에 달했다.(‘다이쇼3년 각 특별회계 세입세출예산’, 일본국립공문서관) 왕공족은 결혼과 출생으로 숫자가 증가했다. 해방 때까지 왕공족으로 산 사람은 모두 26명이다.

이우, 박찬주 그리고 박영효

이우는 이희(이재면)의 작위를 이어받은 이희 공가 주인이었다. 원래 이우는 이강의 아들이지만 이희에게 후사가 없어서 이희 공가로 입적됐다. 그러니까 운현궁의 주인이다.

 

1935년 5월 3일 이우가 스물두 살에 결혼했다. 일본이 만든 ‘왕공가궤범’에 따르면 조선 왕공족은 일본 황족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이우가 결혼한 여자는 일본 황족이 아니라 박영효 손녀 박찬주였다. 조선 왕공족 결혼은 일본 천황 재가 사항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인 박영효는 도쿄로 가서 고위직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고, 결국 1935년 4월 17일 일본 황실은 이를 천황 명에 따라 허락했다.(이기동, 앞 책, pp. 655~656)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우 부부는 다음 날 천황 쇼와를 알현하고 결혼을 알리는 조견(朝見) 의식을 행했다.(요코타 모토코(橫田素子), ‘일본 자료로 보는 이우공 전하의 생애’, 아시아민족조형학보, 아시아민족조형학회, 2015)

이우의 죽음, 그리고 모란공원

이우는 왕공가궤범에 따라 일본 육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천황이 책립한 이 운현궁의 주인이 죽었다. 항복 선언에 결정타가 된 히로시마 원폭으로, 군인 신분인 이우가 전사(戰死)한 것이다. 앞에서 봤듯, 일본은 이 준황족을 최고의 예우를 갖춰 떠나보냈다. 보좌관은 자기를 탓하며 자결했다. 육군은 폐허가 된 일본에서 비행기를 띄워 유해를 운구했고 항복 선언 잔향이 가시기도 전에 육군장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2년 뒤 태어나 식민시대와 함께 죽은 이우에게 그 융숭한 대접을 탓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우는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이 강했고 반일 의식 또한 거셌다.(이기동, 앞 책, p647)

 

해방 이후 운현궁은 이우의 아들 이청이 물려받았다. 대한민국 건국 후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전주이씨 왕실 소유물은 모두 국유화됐다. 운현궁에 살던 이우 아내 박찬주는 운현궁이 황실 재산이 아니라 흥친왕 이희 문중 소유임을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추계예술대학교와 중앙여고가 박찬주가 설립한 학교다.

 그리고 1966년 박찬주는 남양주에 있는 문안산 기슭에 대규모 공동묘지 겸 공원을 기공했다. 문안산 일대는 역사적으로 운현궁 소유 토지였다. 운현궁은 여러 세월에 걸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운현궁 사람들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1921년에 흥친왕 이희 묘가 이곳으로 이장됐다. 1945년 이희의 공족 계승자인 이우가 묻혔다. 서울 마포에 있던 흥선대원군 묘도 1966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흥선대원군 묘를 제외한 나머지 묘는 모두 납골묘로 바꿨다. 흥친왕 이희 가족묘에는 ‘황실 가족묘’가 주는 이미지와 달리 납골묘들이 줄지어 서 있다.

 

1966년 박찬주는 다른 사람과 함께 ‘운현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주소지는 운니동 114번지, 운현궁이다.(1966년 7월 12일 ‘매일경제’) 그리고 그해 9월 24일 모란공원묘역 기공식이 열렸다. 공동묘지 개발지역은 이 가족묘 산 너머 남쪽 기슭 100만평 부지였다. ‘모란’은 흥선대원군묘가 있는 봉우리 모란봉에서 따왔다.

 

1년이 지난 1967년 12월 운현궁은 운현궁 북서쪽 부지 930평을 일본대사관에 매각했다. 모란공원 개발을 위해 빌린 돈 4000만원을 갚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정 시가는 1억4000만원이었다.(1968년 2월 13일 ‘조선일보’) 일본대사관이 매입한 이 땅에는 지금 일본문화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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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 북쪽 산너머 흥선대원군 묘

그날 이후

2019년 이우 부부의 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와 흥친왕 이희 가족묘 지역을 경기도에 기증했다. 이곳에 있던 각종 석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부했다. 해방 직후 묻힌 이우 신도비도 박물관 뒤뜰에 서 있다. 혼란상을 반영하듯,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다.

 

 ▲서울 경희궁 옆 서울역사박물관 뜰에 서 있는 이우 신도비.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장례를 치른 뒤 혼란 와중에 글을 새기지 못한 듯하다./박종인 기자

 

공원이 문을 열고 박찬주의 할아버지 박영효 묘도 원래 묫자리였던 부산에서 이곳으로 이장됐다. 원래 있던 비석은 납골묘 위에 눕혀져 있고 옆에는 ‘태극기를 만든 사람’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지금 모란공원 주인은 운현궁에서 한국공원개발로 바뀌었다.

 

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만든 이 모란공원에 숱한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살다 간 사람들도 많다. 온갖 역사가 두루 섞여 있다. 전임 서울시장 박원순 묘 이장으로 논란이 벌어진 터에, 그 땅의 역사를 훑어보았다.

 

 ▲모란공원에 있는 박영효 묘. 원 비석은 납골묘 위에 눕혀져 있다. 서 있는 비석에는 ‘태극기를 만든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박종인 기자

 

2023.04.12

340. 근대로 가는 길목⑤

“역적 처벌 위해 참수형 부활”...독립협회 해산과 공포의 3년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권력 장악을 위해 근대를 포기하고 정치 파트너였던 독립협회를 강제로 와해시켰다. 개혁세력은 권력 분산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고종은 1899년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킨 ‘대한국 국제’를 통해 반근대적 입법독재를 완성했다. 이듬해 1900년 고종은 갑오개혁 때 폐지했던 참수형을 부활시키고 이를 국사범에게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10년 뒤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독립협회가 야심차게 건설했던 독립문은 일본 사진엽서에 ‘도쿠리추몬’이라는 볼거리로 전락했다./부산광역시립박물관

 

<근대로 가는 길목> 목차

① 총리대신 김홍집 살인사건

②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④ 1894년 8월 일본내각회의

⑤ 독립협회 강제해산과 공포의 3년

⑥/끝 을사조약과 김구 이상설 이승만

 

지난 이야기

1884년 갑신정변으로 시작된 조선 엘리트들의 근대화 작업은 고비마다 고종과 저항 세력에 의해 좌절됐다. 정변 주도자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거나 망명했다. 홍영식은 거리에서 죽었다. 연좌 처형을 두려워한 가족은 자살했다. 망명한 사람들 가족도 처형됐다. 1894년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은 상해에서 암살됐고 시신은 고종 명에 의해 토막 훼손됐다. 1896년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고종 명에 의해 경찰에게 난자당해 처형됐다. 경찰이 종로에 방치한 시신은 행인들에 의해 훼손됐다.

대한제국 선포와 독립협회

그리고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3년 전 못 이룬 근대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종과 손을 잡았다. 독립협회가 탄생했다. 하지만 반(反)근대적 권력에 대한 고종의 집착은 서재필 상상을 초월했다. 시대정신을 완전히 역행해버린 공포정치(恐怖政治)가 시작됐다.

 

1895년 12월 25일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갑오개혁 정부가 강력하게 요청한 탓도 있지만 ‘민중의 무지몰각으로 실패한 정변’(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갑신정변회고록, 건국대출판부, p238)에 대한 아쉬움도 귀국 동기였다. 오만이 아니었다. 근대화에 대해 대중을 각성시키는 선행 작업 없이 서둘러 일으킨 정변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반성이었다.

 

하여 귀국한 그가 만든 조직이 독립협회였고, 협회가 한 작업이 독립신문 창간과 만민공동회 개최였다. 독립은 500년 조공관계였던 대청(對淸) 자주독립을 뜻했다. 협회 창설에 앞서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에게 근대정신을 깨우기 위한 매체였다. 문자는 순한글이었다. 석 달 뒤인 7월 2일 서울 광화문 외부(外部: 외교부) 건물에서 독립협회가 창립됐다. 11월 독립협회는 굴종의 상징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에 도주해 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그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독립신문’은 이를 ‘조선 사기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이라고 묘사했다. 13년 전 목숨을 걸었던 반역자와 죽음을 요구했던 군주가 손을 잡고 미래를 함께 설계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서울 광화문광장 옆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안내판.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이 이곳에 있던 대한제국 외부(外部: 외교부) 건물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박종인 기자

만민공동회와 친러 황제의 반발

제국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그런데 제국을 선포한 황제는 러시아를 택했다. 1898년 1월 러시아는 고종 신변 보호 대가로 부산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며 부산에 군함을 입항시켰다. 얼지 않는 항구를 찾는 러시아 전통적인 부동항(不凍港) 정책이다.

 

이미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왔다. 이를 보고 달려드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은 물론 일본에도 이권을 하나둘씩 넘겨주는 상황에서 이는 대한제국을 군사를 동원한 러시아 영향력하에 안주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수시로 대중 토론회를 주관해온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러시아 문제를 안건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20만명 안팎이던 서울 주민 가운데 1만명이 참석했다. 500년 동안 사농공상 네 신분 가운데 최하급으로 살던 ‘쌀장수’ 현덕호가 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참석자들은 절박했다. 토론회는 그해 말까지 거의 매일 열렸다. 외국인 눈에 나라는 이미 ‘수려한 자연을 제외하고는 가난밖에 볼 게 없고, 부패한 관리들 착취를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재산 없는 사람’인 비참한 상황으로 추락해 있었다.(1898년 1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교보고서 ‘조선의 정세’, 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 서울대독일학연구소 역, 신원문화사, 1992, pp.352~355) 그 상황 탈출을 위해 만민공동회가 요구한 사항은 세 가지였다. 자주독립과 자유민권 그리고 자강개혁.

 

당시 친러 성향을 보이던 황제로서는 어느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왜? 황제 권력과 황실 재정 일정 부분을 황민(皇民)과 공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반동, 대반동이 시작됐다.

참수형을 부활시키다

1898년 11월 21일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가 이끄는 황국협회가 경운궁 앞 만민공동회를 공격했다. 황실 수비대인 시위대가 몽둥이를 든 황국협회를 인도했다. 다음 날 고종은 ‘외국에 의뢰하여 국체(國體)를 훼손시킨 자를 처단하는 예’라는 법률을 반포했다. 1조는 ‘외국인에 의탁해 국체를 훼손한 자는 대명률 도적편 모반조에 의거 처단’이라고 규정했다. 대명률에 따르면 모반죄 형벌은 참수형이다.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일환으로 폐지했던(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야만적 참수형을 역적에게 부활시킨 것이다. 그 대상은 망명한 정객, 국적이 외국인 정치가들이었다.

 

보름이 지난 12월 6일 마지막 만민공동회가 시작됐다. 12월 16일 토론회에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복귀시키자는 논의가 나왔다. 요구한 사람은 이승만과 최정덕이었다.(1898년 12월 27일 ‘윤치호일기’) 12월 22일 시위대 2대대 소속 군인 2명이 만취한 채 고등재판소 앞 토론장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시위대 부대가 토론장을 포위했다.(1898년 12월 26일 ‘황성신문’) 토론회는 위기감 속에 뿔뿔이 흩어졌다. 군부대신 민병석과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자금 2000원을 들여 독립협회 파괴를 선동했다.(1898년 12월 24일 ‘고종실록’) 여기에는 “메이지유신 때도 용맹한 병사들이 민회를 제압했다”며 독립협회 해산을 권유한 특명전권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역할도 컸다.(정교, ‘대한계년사’4, 1898년 12월 18일)

 

12월 25일 고종은 일체의 집회 금지 조령을 내렸다. “우둔한 무리들이 모임을 연다면 경찰이 철저히 규찰해 금지시키라.”(1898년 12월 25일 ‘고종실록’) 거리는 무장경찰이 점령했고, 집회는 금지됐다. 독립협회는 해산됐다. 독립협회 간부들은 체포됐다. 이들은 6년이 지난 1904년에야 석방됐다.

 

1898년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돼 종로 한성감옥에 수감됐던 독립협회 간부들. 앞줄 오른쪽부터 이정식, 이상재, 홍재기, 강원달, 뒤쪽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왼쪽 끝에 따로 서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다. 이들은 1904년에 출옥했다. 사진은 디지털 컬러링 작업을 거쳐 컬러로 복원했다./이승만기념관

‘수많은 영효와 재필을 죽이라’

서재필이 희구했던 근대는 거기에서 좌절됐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실질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서 집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899년 1월 4일 황제 자문기관인 중추원 전 의관 노수학이 상소했다. ‘박영효가 한 명 있어도 위험한데 지금은 몇 명의 박영효, 몇 명의 서재필, 몇 명의 안경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협회 괴수들을 보이는 대로 붙잡아 남김없이 죽이시라.’ 고종은 “공분하고 있다”고 답했다.(1898년 음11월 23일 ‘승정원일기’)

 

1899년 8월 17일 고종 명에 의해 ‘대한국 국제’라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9조까지 있는 이 법률에는 대한국은 전제군주국이며 오로지 황제가 모든 권력과 권리를 가지며 신민은 복종의 의무만 있다고 규정돼 있었다.(1899년 8월 17일 ‘고종실록’) 법적으로 완벽한 고종 1인 독재 체제의 완성이었다. 그 어떤 집회도 없는 황도(皇都)에서 고종은 자기 등극 40주년을 기리는 각종 연회와 기념물 조성을 위해 국고와 황실비를 끝없이 사용했다.

 

이듬해 9월 29일 고종은 당시 형법에 해당하는 ‘형률명례’를 개정, 반포했다. 개정안에는 ‘황실범과 국사범 즉 역적은 참수형에 처하고 그 재산은 압수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외국과 연계 여부를 막론하고 황제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이도 목을 베서 처형하겠다는 법률이었다.(1900년 9월 29일 ‘고종실록’) 근대인들이 만들어가던 근대(近代)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라졌다.

고종이 민권주의자라는 주장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태황제(고종)가 1909년 3월 서북간도민에게 내린 교유서 내용이 남아 있다. 거기서 고종은 ‘대한은 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 백성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민이 쌓여서(積民·적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라고 했다. 이게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다. 고종이 사실상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다.”(‘고종 근대화업적 재평가해야’, 2019년 1월 21일 ‘동아일보’)

 

‘민이 쌓여서 나라가 된다’고 이 교수가 말한 원문은 ‘國迺積民(국내적민)이오 民能善群(민능선군)이니라’이다.(1909년 3월 15일 ‘서북간도 및 부근 각지 백성 등에 내리는 칙유’, 宮中秘書, 이왕직실록편찬소) 이 교수는 ‘고종시대 民國 이념의 전개’(‘진단학보’ 124호, 진단학회, 2015)라는 논문에서는 이를 ‘나라는 곧 民이 쌓인 것(積民)이오 민은 선량한 무리(善群)이다’라고도 해석했다.

 

두 해석 모두 명백하게 틀렸다. 이 문장을 한문 문법에 맞게 해석하면 ‘나라가 이에 백성을 모아야 백성이 능히 무리를 지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國迺積民’은 ‘나라가 이내 백성을 모은다’는 뜻이다. ‘백성이 쌓여서 나라가 된다’라는 해석은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해석이다. ‘能善群’은 ‘선량한 무리다’가 아니라 ‘백성이 능히 무리짓기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라가 부강해야 백성이 모인다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문구다. 사료를 잘못 읽으면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주게 된다. 지금까지 봤듯, 고종이 민중에게 보인 행태는 주권재민 따위와 거리가 멀다.

 

‘대한국 국제’ 선포 넉 달 전, 20세기를 8개월 남긴 시점에 고종은 자기 실체를 스스로 밝혀놓았다. “우리나라 종교는 공부자(孔夫子·공자)의 도가 아닌가. 모든 환란은 종교가 밝지 못해서 비롯됐다. 짐은 유교의 종주로 공자의 도를 밝히겠다.”(1899년 4월 27일 ‘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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