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 2023-1/ 01-24 태영호 아내 “한국행 후회 안해 - 03-30 “북한, 정치범수용소 5곳 운용… 아동 공개처형”

상림은내고향 2023. 3. 30. 20:14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 2023-1/

01-24 태영호 아내 “한국행 후회 안해...‘배신자’ 오명 벗기려 책 썼다”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낸 오혜선씨

北 최고 금수저 ‘항일 빨치산’ 가문 출신
두 아들 때문에 ‘충성’보다는 ‘자유’ 택해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강남구갑 태구민(태영호) 미래통합당 당선자가 16일 새벽 서울 강남구 선거사무소에서 부인 오혜선(오른쪽)씨와 기뻐하고 있다. 2020.04.16./뉴시스

 

◇”남편 별명은 ‘미스터 솔루션’… 내가 원하는 건 다 이뤄줬다”

일견 수줍어하는 듯 보였지만 오씨는 쾌활한 달변가였다. “오래간만에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만나니 ‘터진 팥자루처럼’ 말이 쏟아진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외향적이고 열정적인 그였지만, 막상 한국에 오니 딱히 낄 데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로웠던 그는 대학원에서 만난 이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면서 “자식뻘 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고, ‘으쌰으쌰’ 해주니 고맙다”고 했다.

 

-남편이 국회의원 나간다고 했을 때 반대하진 않았나.

“반대했다. 망신만 당한다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통화하는 걸 들으니 정말 나가긴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미스터 솔루션(Mr. Solution)’이라고 부른다. 원하는 걸 남편에게 말하면 다 이루어졌으니까. 큰아이 살려야 하니 해외에 나가자고 했던 것도, 아이들 위해 북한을 떠나자 했던 것도. 그런 남편을 남들도 믿는데 내가 왜 못 믿어?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남편을 응원하게 됐다. 처음엔 서툰 나 때문에 남편에게 감점만 될까봐 나서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역구 여성회장님들과 밥도 먹고, 재미나게 하고 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남편에겐 소년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평양 사는 일반 백성이 똑똑한 머리 덕에 권세가의 자녀들과 경쟁하며 새로운 세상을 본 거다. 그래서인지 휴식할 줄 모르고 놀면 불안해 한다. 경호팀 사람들도 ‘의원님은 대체 언제 쉬냐. 저런 사람 처음 봤다’고 하더라. 아프고 힘들어도 쉬는 법이 없다. 남편에게 종종 말한다. ‘당신 몸은 당신 원망 많이 할 거야.’ 내가 이때까지 ‘옳은 건 옳은 거야’ 우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는 아버지 그늘 아래 자랐고, 결혼해서는 남편 뒤에 숨어 남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부부 맞냐. 당신이 훨씬 젊어보인다’ 하는데 우리 남편이 옆에서 세상 풍파를 막아준 덕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우리 혜선이 왜 이렇게 순진할까. 젊어보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냐’라고 한다.(웃음)”

 

-이번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던가.

“남편에게 초고를 보여줬더니 바쁘다며 계속 미루더라. 최근 남편이 어깨 수술을 받아 집에서 이틀 쉬었는데 내가 ‘남들 글은 잘 봐주면서 내가 꾸역꾸역 쓰는 걸 보면서도 한 번도 안 볼 수 있냐’고 한 소리 했다. 남편이 ‘잘못했다. 당신 책에 하루를 바치겠다’며 집 근처 카페에 나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읽고 들어오더니 ‘잔잔하게 잘 쓴 것 같다’고 하더라. 애들에게도 읽히면서 읽기 불편하거나 보탤 점이 있으면 이야기해달라고 했는데 ‘엄마, 잘 썼어요’라면서 힘을 줬다.”

 

-책을 쓰는 일이 힘들진 않았나.

“논문 쓰기 전에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이번 책을 쓰면서 열 번도 넘게 구성을 뒤집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닥치는대로 읽었는데 추리소설이나 에세이나 다 쓰는 법이 비슷하더라.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어떤 독자를 상대로 뭘 이야기할지가 확실해야 하며, 주제를 명확히 하려면 버리고 싶은 걸 대담하게 잘라버려야 한다고. 내가 쓴 글을 보니 뼈대는 ‘요만큼’인데 달린 건 ‘이만큼’이라 가지를 많이 쳐 냈다.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 덕에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것이 도움이 됐다. 대학 공부를 어려워하던 아이들에게 늙은 엄마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을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북한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 이번 책을 쓰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북에 있는 친지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소설을 쓰면 좀 더 자유롭게 내가 살면서 보고 느꼈던 일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의 반대로 마지막에 바꿨지만, 오씨가 처음 생각했던 책 제목은 ‘고마운 대한민국’이었다.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에서 받은 게 정말 많다. 열심히 살아서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다. 미안하고, 죄스럽고, 안타깝기만 한 북한의 가족, 친척들에게도 꿈과 힘이 되고 싶다.”

 ▲오혜선씨의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더미라클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

 

 01-25 ‘러시아 탈출 국내입국’ 북한노동자 9명 중 2명은 현역군인

러, ‘대북제재 위반’ 논란

러시아에 파견됐다가 탈출해 국내로 입국한 북한 노동자 9명 중 2명은 현역 군인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정은 정권은 현역 군인들을 해외로 송출해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5일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 북한 노동자는 지난해 11~12월에 걸쳐 집단으로 이탈,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거쳐 현재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서 적응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은 모두 9명으로 러시아에서 벌목·건설 현장 등에 투입됐다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도심 외곽의 소규모 건설 현장이나 농장 등에서 일해왔다. 최근 일감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려 온 이들은 현재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주·루한스크주) 지역의 재건 공사 현장에 투입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겹치며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원 남성인 이들의 연령대는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0대인 2명은 인민군 의무복무 중 노동자로 해외 송출된 현역 군인 신분으로, 국내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내 안전가옥에서 신변 보호를 받다가 국내에 입국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 이후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폐쇄하면서 탈북민 수가 급감했지만, 대신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탈북 사례가 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 정권은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전까지 외화벌이를 위해 약 10만 명의 노동자를 중국·러시아 등 해외로 파견했고, 연간 약 5억 달러(약 6173억 원)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2017년 12월 채택된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97호는 유엔 회원국이 자국 내 모든 북한 노동자를 2019년 12월까지 송환토록 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02.01(수) 태영호 아내와 댓글부대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쓴 오혜선씨. 오씨는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김지호 기자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아내 오혜선씨를 최근 인터뷰했다(1월 25일 자 A23면). 오씨는 지난달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냈다. 인터뷰 기사에 댓글이 2000개 넘게 달렸다. 오씨의 탈북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 비난하는 댓글이 넘쳐났다. 북 정권에 호의적인 이들이 대한민국에 이토록 많을 줄 몰랐다.

 

오씨는 ‘내가 정말 배신자인가?’ 수없이 되물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록에 썼다. “‘배신’이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다. 살인자에게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자기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법적 절차도 없이 3대를 멸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북한 김씨 일가의 편에 선다면 ‘배신’이고 북한 주민들의 편에 선다면 ‘자유’일 것이다.”

 

북한에 대해선 사회주의 나라 국민조차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2017년 쿠바 여행을 갔을 때 체감했다. 쿠바는 이른바 북한의 ‘형제 나라’. 쿠바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피델 카스트로가 2016년 타계했을 때 김정은은 평양 주재 쿠바 대사관을 찾아 조의록에 ‘위대한 동지, 위대한 전우를 잃은 아픔을 안고’라고 썼다. 그런데 쿠바 사람들의 시선은 북한에 대해 싸늘했다. 아바나 시내에서 시가를 팔던 남성은 말했다. “쿠바 사람들은 김정은이 TV에 나오면 ‘저 독재자는 대체 어느 이발소에 다니길래 헤어 스타일이 저 모양이냐’라며 비웃는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기자가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라고 했더니 “북한이 ‘독재 국가’지, 어떻게 ‘공산주의 국가’냐”며 흥분했다. “공산주의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뜻한다. 북한이 그런 곳인가?”

 

오혜선씨는 한때 ‘평등한’ 북한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오씨는 대학생 때 평양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태국 의사에게 북한의 무상 의료·교육 제도를 설명하며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금 없는 나라”라고 자랑했다. 의사는 의아해하며 “세금을 받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운영되는 거냐” 물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오씨가 의문을 풀었던 건 남편 따라 해외 생활을 하면서였다. 신장증을 앓던 큰아들이 덴마크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걸 보면서 그는 세금을 거둬야 복지 제도가 작동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오씨는 지난 정권 때 북한학대학원서 만난 이들이 “북한의 무상 복지제도가 우리보다 더 좋다”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며 말했다. “말뿐인 복지가 실천되지 않아 느끼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오씨는 사선(死線)을 넘었고, 댓글부대는 선(線)을 넘었다. 오씨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운 이들은 북한의 실상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보다 못한 어느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

 

02-03 북한군 위생병 9년, 한국에선 간호사로 7년

지난해 11월 통일부 주최 정착사례 발표 대회에서 강해룡 씨(왼쪽)가 정인성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원산항에 한국 쌀이 들어오면 며칠 동안 항구 정문 앞에 화물차량들이 길게 늘어섰다. 대다수가 군용 트럭들이지만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군용 차량 번호를 대충 뻑뻑 지우고 그 위에 민간 번호를 썼다.

그렇게 눈속임을 해도 쌀을 접수하러 온 사람들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비록 사복 차림이긴 했지만 운전사도, 호송원도 머리를 빡빡 깎은 20대 청년들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엔 쌀이 참 많이도 들어왔다. 원산 갈마역전 앞에 주둔해 있던 강해룡 씨의 운수대대는 대북 지원 쌀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출동하는 부대였다.

강 씨는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는 40㎏ 포대에서 처음 쌀을 꺼내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건 쌀이 아니라 하얀 눈덩이였다. 그렇게 하얀 쌀은 처음 봤다.

도정이 잘 안돼 누런 북한 쌀은 쌀함박(이남박)으로 일고 또 일어도 꼭 돌이 남았다. 그래서 북한 쌀밥은 조심스럽게 씹어야 한다. 잘못 씹었다가 이가 부서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 쌀은 돌이 전혀 없었다. 밥을 안심하고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한국 쌀밥을 먹을 때마다 강 씨는 생각했다.

“아, 한국은 정말 발전했구나.”

 

# 잘사는 부대

강 씨가 군 복무를 한 부대는 원산에 주둔한 1지구사령부(군단급)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였다. 군단으로 공급되는 거의 모든 물자가 그의 부대 차량에 싣고 오갔다. 떡 주무르는 놈이 콩고물도 많이 먹게 되는 법이다. 그의 대대는 북한군 전체에서도 상위 1% 안에 들어갈 만큼 복무 환경이 좋았다.

원래 강원도는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곳이다. 북한에선 강원도에 가장 많은 세 가지가 ‘돌, 바람, 군대’라는 말이 있다. 돌을 열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험한 산들이 많아 환경은 척박한데 군인들만 많다는 뜻이다.

훔쳐 먹으려고 해도 민가가 많지 않아 훔칠 곳도 없다. 그래서 강원도는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군 복무하려 가는 곳이자 군에 갔다가 영양실조로 제대되는 병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 씨의 운수대대는 훈련도 별로 세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했다. 주변에는 삐쩍 마른 군인들이 많지만 그의 부대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쌀 지원이 오면 쌀을 싣고 오다가 슬쩍 ‘조절’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훔쳐온다는 말을 듣기 좋게 ‘조절해온다’고 표현한다.

쌀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들여오는 각종 약도 그의 운수대대가 날랐다. 대다수 탈북민이 북에 살 때 구경도 못했던 소고기도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2001년 유럽에서 광우병 파동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독일에 도살된 40만 마리를 무료로 줄 것을 요구했고, 독일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만t 정도 실제로 북에 보냈다. 그 소고기를 군단에 싣고 올 때 강 씨는 질릴 정도로 많이 먹었다.

이렇게 좋은 부대인지라 북한에서 힘깨나 좀 쓴다는 간부들은 자식들이나 친척들을 운수부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강 씨가 부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대장의 첫 질문이 “넌 누구 부탁자냐”였다. “누구의 빽이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부탁을 한다고 해서 또 누구나 이 부대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곳에 오려면 군 운전사양성소에서 2년 동안 차량 관련 각종 교육을 이수한 뒤에야 올 수 있었다. 운전사양성소를 졸업해도 일선 부대 포차 운전병으로 간다면 힘들게 군 복무를 해야 했다.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는 운전병 훈련생 중에서도 빽 좋은 사람만 골라 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강 씨는 운전 교육을 받지 않고 신병으로 입대해 바로 온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운수대대이긴 하지만 모두가 운전병일 수는 없는 법이다. 경비나 통신병 등은 일반 신병 중에서 뽑았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엔 강 씨가 북한에서 엄청나게 힘 있는 간부집 자식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은 아니었다.

 

# 행운의 병사

강 씨는 1982년 함북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범한 철도 건설 노동자였는데, 그가 15세였던 1997년에 사고로 사망했다. 군에 가기 전 그의 삶은 남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대다수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군에 가야 하는 정해진 수순대로 살았다.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아 대학에 갈 꿈도 꾸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자 그의 집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마는 배낭에 공업품을 메고 황해도로 나가 쌀과 바꾸어왔다. 이렇게 지역을 오가며 물건을 바꾸어 차익을 버는 사람을 북한에선 ‘달리기’ 또는 ‘행방’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죽도 먹기 힘든 때도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해 군대에 갈 때쯤 되니 학급 동창들의 운명도 갈렸다. 제일 살이 찐 간부집 자식들은 대학에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영양실조 오기 전의 삐쩍 마른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군에 가야 했다. 강 씨가 졸업해 군에 가던 2000년에만 해도 군에 가면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말이 만연해 있던 때였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피 지역이었다. 강 씨도 실제로 강원도에 갔다가 실조차 없어 쇠줄로 군복을 꿰매 입고 집으로 돌아온 영양실조 환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강원도로 갈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결정적인 ‘빽’은 있었다. 군사동원부(병무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많이 힘을 썼다고 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강원도로 배치됐다. 하지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최전방 1군단이나 5군단은 피하고 원산에 주둔하고 있는 1지구사령부 신병연대로 가게 된 것이다.

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배고픈 고생이 뭔지 알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가 2000년 8월 강원도 덕원에 위치한 신병훈련소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배고프지 않게 먹여주었다. 알고 보니 바로 한 달 전인 7월 4일에 김정일이 부대를 시찰했다. 그 덕분에 현지시찰 ‘뽕’으로 적어도 몇 달은 부대에 대한 공급이 좋아졌다.

신병훈련 기간에 그는 또 훈련소 정치부장(상좌)의 눈에 들었다. 학교에 다닐 때 강 씨는 아코디언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때 예술학원에 입학하려고도 했지만 예술을 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배웠던 아코디언이 신병훈련소에서 준비하는 예술소조 공연 때 빛을 발휘한 것이다. 정치부장은 아코디언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강 씨를 눈여겨 보았다. 그가 힘을 써주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영문도 모르고 부탁자들만 간다는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로 배치됐다.

  

강해룡 씨가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어렸을 때 아코디언을 했던 경험이 있어 한국에 와서 피아노 연주도 열심히 배웠다.

 

# 배부른 병사

운수대대는 일반 부대와 구성이 좀 달랐다. 대대 전체 인원이라고 해봐야 초기복무(부사관) 군인까지 포함해 120명 정도로 대다수가 운전병이었다. 차량은 러시아제 신형 지르와 중국제 둥팡(東方) 트럭이 대부분이었다.

운수중대는 지구사령부 각 부대에 후방 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지만 물자 이송 명령이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병들은 쉬는 날이면 부대 간부들의 묵인 아래 차를 끌고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 물건이나 건설 자재를 날라주고 돈을 받은 뒤 간부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잘 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강 씨가 부대에 갔을 때 마침 2중대의 위생지도원(위생병)이 제대돼 자리가 비었다. 그는 신병에서 바로 위생지도원으로 발탁됐다. 위생지도원을 하려면 위생지도원 강습소를 6개월 마쳐야 했다. 주사를 놓는 법, 붕대를 감는 법 등 응급 치료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특별 직종에 대한 강습을 6개월 받게 되면 나름 ‘전문직 군인’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다.

강 씨는 2009년 제대할 때까지 부대 위생지도원으로 있었다. 위생지도원은 알고 보니 매우 편한 자리였다. 훈련병은 정기 훈련에도 잘 참가하지 않았다. 또 젊은 군인들인 데다 잘 먹는 부대라 환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끔 군관 또는 부사관 가족들이 밤중에 아프면 달려가 주사를 놔주는 일 정도가 약간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운수부대 약품 창고도 유엔약 등으로 빵빵하게 차있었다.

운수대대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나름 번화가인 갈마역 앞 소도시 가운데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부대 주변에 ‘사택’이라고 부르는 가족처럼 다니는 민가 하나씩은 꼭 끼고 있었다. 식량 등을 가져다주는 대신 밥을 얻어 먹거나 휴식을 취한다.

하도 군인들이 계속 민가에 몰래 드나드니 부대 간부들은 담장을 2m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유리를 박거나 인분을 뿌리는 등 외출 방지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런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젊은 군인들은 2m 높이 담장 쯤은 쉽게 타고 넘어갔다. 강 씨 역시 짬만 나면 자신의 ‘아지트’로 갔다. 배불리 먹고 필터 담배를 피우며 한국 드라마를 봤다. 당시 ‘줄리엣의 남자’ 등이 원산에 많이 퍼졌다.

한국 드라마를 보았지만 화면 속 세상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희한한 세상이구나 싶었지 자신이 그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병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도 한국 노래들이었다. 대개는 그것이 한국 노래인지도 모르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울에 오고 나서야 그게 한국 노래인줄 알았다.

강 씨는 약을 민가에 갖다 주어 편의를 제공받긴 했지만 제일 많이 가져다 준 것은 식량이었다. 가을이면 편한 보직인 위생병은 후배 5명 정도를 거느리고 정기적으로 안변에 있는 오리목장에 옥수수밭 경비로 차출됐다. 37정보(1정보=0.99헥타르)의 대규모 옥수수밭이었는데, 이때가 대목이었다. 밤에 옥수수를 따 자신이 다니는 사택에 수백㎏씩 날라줬다. 도둑을 막으라고 보냈는데, 경비병이 사실상 도둑인 셈이다.

간부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타 부대 도둑들보단 자기 부대 병사들이 몰래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경비를 나가 옥수수를 따다 날라주면 그 대가로 1년은 언제든지 그 집에 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옥수수 경비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으면 제일 행복했다. 배불리 먹고, 옥수수를 팔아 필요한 것도 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군대에 나오길 참 잘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군에 나오면 집에 있을 때보다 먹지 못해 늘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이웃에 주둔한 정예부대라는 ‘108훈련소(군단급)’만 해도 ‘배고파훈련소’라고 무시를 당했다. 하도 병사들이 먹지 못해 구걸을 다닌다고 해서 ‘백공팔’을 ‘배고파’로 바꿔서 부른 것이다.

하지만 강 씨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집에 있을 때는 죽을 먹으며 배고프게 지냈는데, 군에 나와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같은 북한군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다.

강 씨는 경비에 차출돼 나갔다가 본 후방사령부 오리목장 지배인의 집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투명한 고강도 유리로 덮은 큰 수족관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안변 산골에 있는 후방사령부 소속 지배인조차 오리고기와 식량을 물 쓰듯이 뿌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 “돈만 잘 벌면 된다”

어느덧 군 복무 7년쯤 지나자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입당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북한에서 군에 가서 남자들이 받아올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이 노동당 입당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도 입당도 하지 못하고 오면 사회에 나와서도 모자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입당 추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등 부대 간부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위생지도원이라 수시로 호출할 때마다 달려가 성심성의껏 돌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비슷한 또래는 입당하는데 그는 부르는 데가 없었다. 친한 간부가 그에게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너는 엄마와 남동생이 행방불명이 돼서 입당이 어려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군에 나온 지 4년차인 2004년에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이 인민군대도 두부콩 농사를 지어 병사들이 허약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대에선 콩 종자 30㎏을 가져오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는 자원해서 집에 갔다. 그 때만 해도 엄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친척집을 다니다가 작은 고모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그에게 가만히 이야기했다.


“고모는 남조선에 갔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냥 고모의 일이니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줄 알았다. 2005년에 다시 핑계를 대고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없었다. 친척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지금 엄마가 중국에 갔는데 돈을 벌어 돌아올 거야. 기다려봐.”

부대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07년이 돼도 엄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고향에선 엄마를 행방불명자로 문서에 등록했다. 이것이 신원조회 과정을 거치며 부대까지 통보된 것이다.

가족 문제로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밀고했는지 가끔 부대 간부들이 찾아왔다. 군단 보위부장은 그를 불러 “장군님은 네 부모가 미국이나 중국에 가도 상관없이 너를 품어주실 것이니 딴 생각하지 말고 부대 생활 열심히 하라. 너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어느새 그는 고민하다 사고를 칠 수 있는 요시찰 인물로 등록된 것이다.

▲강 씨가 동네 산책 중에 잠시 쉬고 있는 모습.

 


제대를 몇 달 앞둔 2009년 집에 갔을 때 예전의 그 친척이 또 귀띔해주었다.

“해룡아, 네 엄마와 동생은 지금 남조선에 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입당을 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당규약집을 다 외워야 입당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외우기를 죽어라 싫어하니 그 두꺼운 당규약을 어차피 다 외우지도 못할 건데 차라리 잘 됐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제대 후 진로도 어렵지 않게 결정됐다. 사회에 나가서 손가락질 받을 바에는 엄마를 따라 남조선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며 강 씨는 “입당을 했었다면 한국에 오길 망설였을 것인데, 노동당에도 받아주지 않으니 ‘여기 남아 뭐해’라는 오기가 생겨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위 당간부 자식이 그에게 위안이랍시고 건넨 말도 진짜로 위안이 됐다.


“입당은 무슨 입당이냐. 해룡아, 사회에 나가선 돈만 잘 벌면 네가 인생 승리자야.”

 

# 탈북

2009년 5월 마침내 그는 제대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무리배치자’에 포함됐다. 무리배치란 당국이 딱 정해준 힘든 탄광이나 농촌 등에 제대군인들을 집단적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노동당은 그를 어랑천발전소 건설장에 갈 것을 명령했다. 어랑은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에 있는 곳이다.

어랑천발전소란 말을 듣자 그는 놀랐다. 분명 인민학교 때부터 어랑에 발전소를 짓는다고 돈을 걷어가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가 제대될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한국에 와서야 어랑천발전소가 1981년에 건설이 시작됐고, 그가 한국에 온지 13년 뒤인 2022년 8월에 완공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를 하나 짓는데 무려 41년이나 걸린 것이다. 거기에 갔으면 젊음이 증발될 뻔 했다.

제대된 뒤 그는 어랑에는 가지도 않았다. 집에서 좀 쉬다가 직장에 간다는 핑계를 내걸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얻어먹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날 건데 눈치 볼 것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쭉 돌아보니 놀랍게도 많은 친척들이 그새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은 고모와 엄마는 물론이고, 외삼촌 가족, 이모 가족 등이 다 슬금슬금 사라져 줄을 타고 남쪽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모부는 첫째 아들만 한국으로 오는 데 성공했고, 이모와 둘째 아들은 탈북 과정에 체포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한국으로 간 친척이 많으니 엄마와 연락하는 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국경까지 와서 산에 올라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다.

 

“엄마는 돈을 지금 벌지 못해 동사무소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산다. 네게 보내줄 돈이 없으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여기 와라.”

“엥? 거긴 나라에서 먹고 살라고 돈도 준다고? 정말 좋은 나라네.”

2009년 11월 마침내 그는 한국을 향해 떠났다. 국경 도시인 무산까지 와서 밤에 강을 넘겨줄 선을 찾아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도강하기로 한 날 이틀 전에 현지에서 12명을 한꺼번에 공개 총살하는 일이 있었다. 대개가 불법 월경 연관자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가다가 잡히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어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엄마를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공포를 눌렀다. 마침내 강을 건너기로 한 날이 왔다. 브로커가 그를 찾아와 집에 데리고 갔다. 그날 그와 함께 강을 건널 사람 6명이 그곳에 모였다.

브로커의 집에는 김일성과 함께 찍은 소위 ‘1호 사진’이 5~6장이나 벽에 걸려있었다. 지방에서 김일성과 그렇게 많이 사진 찍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브로커는 먼저 “내가 무슨 사람인지 묻지 마”라고 선수를 쳐 입을 막았다. 브로커는 얼음(필로폰)을 뻐끔뻐끔 빨아대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이렇게 위험한 도강을 주선해 번 돈으로 마약을 사서 탕진하는 것 같았다.

일행은 그날 밤 무사히 강을 넘었다. 여러 명이 함께 강을 건너니 어차피 잡혀 죽어도 혼자 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조금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강을 건너 캄캄한 북한 땅을 건네다 보니 마음이 아팠다


“총을 들고 9년을 지킨 저 땅에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연길에 들어오니 무서웠던 마음도 싹 가라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밝은 도시가 있을 수가 있구나.”

음식들도 너무 맛이 있었다. TV를 보니 채널이 너무 많아 끝도 없어 넘겨야 했다. 점점 북한을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탈북할 루트를 잘 연결해준 덕에 그는 11월 7일 두만강을 건너 한 달 만인 12월 10일 한국에 도착했다. 탈북민 사이엔 이런 경우를 ‘초고속 직행’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오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보는 모든 게 새롭고 황홀했다.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내 생애에 비행기를 다 타보는구나”싶어 너무 기뻤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반들거리는 대리석을 보고 “여기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나, 벗고 들어가야 하냐”며 고민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는 “내가 여기에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 다시 시작된 간호사의 삶

2010년 5월 마침내 하나원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그는 김포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지역을 배정받았다. 6년 만에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동생은 소년단 넥타이를 메고 있을 때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강해룡 씨.


사회에 나왔지만 여기는 북한처럼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한국 사회를 더 많이 체험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인력사무소에 나가 건설판도 다니고, 각종 아르바이트도 전전했다. 한국에 와서 기뻤던 마음이 힘든 일을 하면서 점점 지쳐갔다.


“여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지? 여긴 왜 일이 이렇게 힘들지?”

1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피곤에 찌든 몸으로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그날도 피곤한 몰골과 무표정한 눈빛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밖에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판이 보였다. 간호조무사학원 간판이었다.

“아, 내가 6개월 양성소를 졸업한 인민군 위생지도원이었지. 간호사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자 학원에선 국비로 학비의 80%까지 지원된다고 설명해줬다.


“그래, 여기서도 한번 간호사를 해보자.”

한국에 와서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더 오랜 시간 허둥대며 더 높은 곳을 보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힘든 육체 노동을 1년 동안 하니 그제야 간호사라는 직업도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즉시 학원에 등록해 1년 동안 다녔다. 조무사학원을 다니다보니 그제야 간호대학이 있다는 것도, 간호사와 조무사가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왕 시작했던 바에야 간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조무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을 준비해 2012년 가천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4년제 정규과정을 밟게 됐다.

처음엔 나이 30세가 넘어 대학에 과연 잘 다닐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정작 가보니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40세 후반 학생들도 있었다. 또 “남자가 간호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대학을 다니며 떨쳐냈다. 알고 보니 응급실 등 특수파트에는 남자 간호사가 태반이었다.

간호학과 공부는 쉽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북한에선 의사가 되고도 남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입학했다는 생각 때문에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를 따라갔다. 각고의 노력 결과 한 번의 휴학도 없이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한 뒤 김포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도 쉽게 됐다. 그 곳에서 4년 동안 일하다가 결혼 직후엔 2020년에 신혼집과 출퇴근 등을 감안해 양지병원으로 옮겼다. 김포에서 처음 들어간 것이 수술실 간호사였는데, 지금도 수술실에서 일한다.

“수술실은 남자 간호사가 많아서 편해요. 그리고 말투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좋고요. 다른 간호사들은 환자들과 많이 해야 하지만, 수술 환자들은 마취를 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요.”

2019년 그는 9살 연하의 탈북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부인의 직업도 간호사다. 각자 병원도 다르고, 통근거리도 멀며, 교대 시간도 어긋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지난해엔 신축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간호사를 택한 것은 잘한 결정 같아요. 너무 만족합니다.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 어랑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늘은 뭘 훔쳐올까’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통일되면 뭘 할지 이런 거창한 고민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어쨌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지난해 강 씨는 통일부가 주최하고 남북하나재단이 후원한 ‘제9회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북한군 위생병으로 9년, 한국에선 종합병원 간호사로 7년을 산 그는 시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7년차 간호사로 모든 수술실의 방장을 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를 끌어안고 함께 가려 했던 팀장님들과 수술실 동료들의 관심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지만, 그걸 통해 간절함과 절실함은 어떤 벽도 가로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통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체제가 다른 삶을 살다가 와서 이 땅에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작지만 큰 의미가 있는 진정한 통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02-20 “태영호처럼 탈출하라” 탈북민 시위에 주영 북한 대사의 반응

▲영국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있는 최일 주영북한대사. 김주일 국제탈북민연대 사무총장 페이스북 캡처 

 

 해외 최대 탈북자 사회 형성된 영국서 탈북민들 북한 대사관 앞 시위
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였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영상 메시지도
대사관 문 앞 시위대에 항의하다 영국 경찰에 저지당해

영국 런던에 있는 주영 북한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탈북자들의 시위에 항의하던 주영 북한 대사가 영국 경찰들에게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20일 국제탈북민연대에 따르면 ‘국제탈북민연대(INKAHRD)’와 ‘재영 탈북민 총연합회’, ‘평양 복음 찬양 선교단’ 등 단체 대표들은 지난 16일 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2월 16일) 81주년을 맞아 런던 서쪽 주택 지구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 앞에서 북한 독재 정권을 규탄하고 인권 문제 개선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영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해외에서 가장 큰 탈북민 사회가 조성된 곳으로 런던 남서쪽의 한인타운 뉴몰든 인근에 모여 있으며 총 700~1000 명의 탈북민이 정착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영국에 정착한 이들 탈북민들은 이날 북한 대사관 앞에서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피켓을 든 채 북한 정권의 인권유린과 탈북민 고문 등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 탈북민 수기 낭독, 김정은 집권 이후 숙청 사례 등을 설명했다.

김주일 국제탈북민연대 대표는 성명에서 “국제사회의 전략적 인내를 조롱하듯 최근 북한 정권의 군사적 도발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북한은 비핵화란 없고, 핵은 국체며 공화국의 절대적 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 정권은 주민 생활고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오직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수천 달러 미사일을 쏴대며 국제사회 안보를 위협하는 김정은 정권을 규탄한다”고 말했다.

탈북민 단체들은 대사관을 향해 “북한 외교관들은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을 본받아 김정은의 하수인으로 살지 말고 자유세계로 탈출하라”며 “독재 정권과의 결별을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2016년 탈북 당시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전 공사였던 태영호 국회의원도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런던의 주영북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탈북민들. 자유아시아방송(RFA)캡처

 

대사관 밖으로 나와 탈북민 시위자들에게 항의하다가 영국 경찰에게 저지당하고 있는 최일 주영 북한 대사. 김주일 국제탈북민연대 사무총장 페이스북 캡처

 

시위에 참여한 탈북민 한송이 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에 “김정일 생일을 맞아 북한 대사관은 친북 인사들을 대거 불러놓고 독재자의 사망을 추모하고 있다”면서 “유엔 북한인권위원회 출범 10주년이 되는 올해 북한 주민 인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재조명하면서 김정은 정권을 향해 북한 주민 인권 개선을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일보 박세영 기자

 

02-28 추석 연휴 전날인 음력 8월 13일 ‘이산가족의 날’지정 …이산가족 의견 반영

▲지난 2018년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지막 날인 8월 26일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 및 공동오찬 행사가 끝난 직후 북측 유재숙(왼쪽) 할머니와 남측 사촌동생 유애숙 할머니가 헤어지기 서러운 듯 손목을 붙잡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민간 이산가족 단체들이 제각각 기념해오던 ‘이산가족의 날’이 추석 연휴 전날인 음력 8월 13일로 지정됐다.

28일 통일부에 따르면 국회는 전날 본회의에서 음력 8월 13일을 이산가족의 날로 지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취지에 맞는 기념행사와 홍보를 할 수 있도록 한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통일부는 국회 논의 결과 이산가족의 희망을 최대한 반영하자는 취지에서 추석 연휴 전날이 ‘이산가족의 날’로 정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 발의한 개정법률안에 따르면 이산가족들이 설문조사에서 상봉일로 가장 많이 희망한 날짜가 바로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통일부는 ‘이산가족의 날’이 통일부가 주관하는 법정 기념일로 지정됨에 따라 올해 음력 8월 13일 첫 이산가족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산가족의 날은 통일부가 주관하는 유일한 법정 기념일"이라며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통일부에 따르면 현재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3675명 가운데 생존자는 31.9%에 불과한 4만2624명에 불과하다.
문화일보 조재연 기자

 

월간조선 03월 호

 北 보위성의 탈북자 공작

北 인권단체 대표 암살하려 옛 연인을 간첩으로 보내

⊙ 탈북민, 북한 가족에게 전화 연락 받고 충격… 북한 보위부의 공작
⊙ 휴대폰으로 가족 영상 보내 탈북민 단체 대표들 협박하기도
⊙ “협박과 강요로 보위부 돕는 탈북민은 北에 남겨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
⊙ 탈북 여성을 간첩으로 암약시켜 한국행 준비 탈북민 밀고하게 해

▲북한이 탈북민 가족들을 내세워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민을 다시 북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는 영상.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진향아 여기 있는 분들이 네가 탈북자 100명의 전화번호나 신상정보를 주면 우리가 전화하는 것에 대해서 눈감아 준다고 하니 네가 이분들의 부탁을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

최근 탈북민 최진향(가명)씨가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 그의 어머니가 최씨에게 한 말이다. 최씨는 어머니의 이런 황당한 부탁이 북한 국가보위성(국정원 격)에서 어머니에게 시킨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또 보위지도원들이 옆에 앉아 통화 내용을 다 듣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최씨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알았다고 한 뒤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최씨뿐만 아니다. 탈북민 김은별(가명)씨도 지난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어느 날 갑자기 추방된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에서 모두 용서해준다고 하니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北 보위부, 고차원적으로 변하는 탈북민 공작

▲북한 보위부 소속 보위지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검열원’ 완장을 차고 누군가를 감시 중인 모습.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최씨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북한 보위부(국가보위성 산하 시·군 단위 조직)의 공작임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몇 달 전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의 얘기는 이랬다.

“얼마 전부터 담당 보위지도원이 나를 찾아와서 너(최진향)의 행방에 대해 묻더구나. 우리는 당연히 고난의 행군 때 집을 나간 뒤로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최씨와 통화를 하던 중 보위부에 붙잡히게 됐다. 물론 현장에서 체포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씨의 증언에 의하면 누군가 신고를 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최씨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씨는 “그때 언니의 소식을 듣게 됐다. 평소와 달리 어머니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면서 “그러면서 한다는 얘기가 탈북자 정보를 넘기면 언니의 죄도 덮어주고 전화하는 것에 대해 눈감아 주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은별씨는 해외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탈출했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해외로 나왔다. 그의 탈출 소식이 북한에 전해지자 김정은은 그의 일가족 모두 다른 지역 산골로 추방시켰다. 남한에 정착한 김씨는 소식통을 통해 가족이 추방된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에서 전화가 왔다. 김씨의 어머니였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얘기하는 과정에서 김씨는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누군가 옆에서 감시하듯 기계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씨는 이상함을 눈치채고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김씨 어머니는 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며칠을 설득해도 김씨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옆에 있던 보위지도원이 전화를 바꿔 협박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김씨는 당시 보위지도원이 한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김씨에게 전한 보위지도원의 말이다.

“니레(니가) 조국을 배반하고 남조선에 간 거이(간 것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갔어. 니 에미, 애비 다 니 때문에 죽는 기야 알간?”


‘가족 살리고 싶으면 쥐 죽은 듯 살라’

그 뒤로 김씨는 가족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전해 듣기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골로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그곳에선 외부 세계와 전화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 김씨의 어머니는 어떻게 딸에게 전화를 했을까. 당시 상황은 이랬다. 해당 지역 보위부가 김씨의 어머니를 데리고 수백 km 떨어진 국경 지역까지 간 것이다. 보위지도원들이 김씨의 어머니를 이용해 김씨를 다시 재입북시켜 자신들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다.

이러한 북한 보위부의 탈북민 공작은 최근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과거에도 탈북민들을 이용한 공작을 해왔다. 그런데 이 시점에 다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그 수법이 더욱 고차원적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북한 보위부는 여러 방법으로 중국과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협박하며 재입북을 강요했지만, 최근처럼 가족을 전면에 내세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변하면서 가족을 통한 협박까지 행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북한 보위부가 탈북자를 협박 또는 회유할 경우 보위지도원들이 직접 남한에 있는 탈북민에게 전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 과거에는 어떤 형태로 탈북민들을 협박·회유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과거 북한 국가보위성의 표적은 한국에 사는 탈북민 북한 인권 활동가 또는 북한 정권과 김정은을 비방하면서 북한 인권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이들이었다. 북한은 이들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공작을 벌였다. 북한의 공식 홈페이지에 갖은 악선전이 담긴 영상물을 공개해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거나 이들에게 직접 전화로 협박하거나 간첩들을 이용해 위협성 우편물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먹히지 않자 북한 인권 활동가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탈북민으로 가장한 간첩들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 북한은 한 탈북민 북한인권단체 대표를 암살할 목적으로 탈북민으로 위장한 간첩을 내려보냈지만, 국가정보원의 심문 과정에서 적발됐다. 해당 간첩은 과거 해당 북한인권단체 대표가 북한에 있을 당시 연인이었던 여성이었다.


행복한 모습 담긴 가족 영상 보내 협박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사진=김성민 대표

 

 

 또 다른 사례는 북한에 남아 있는 북한 인권 활동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개인 메일로 보내기도 했다. 이 활동가는 탈북 당시 부인과 자식을 북한에 남겨두고 떠났다. 해당 메일에는 영상과 ‘가족을 살리고 싶으면 쥐 죽은 듯 조용히 살라’는 내용의 협박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한 탈북민은 “현재 한국에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북한인권단체 대표가 과거 연인이었던 여성이 자신을 죽이러 올 거라는 상상을 했겠느냐”면서 “북한이 가족을 인질로 협박을 해오면 어쩔 수 없이 이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철(가명)씨는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 북한 국경 경비대 장교들을 여럿 매수했다. 김씨는 매수한 장교들에게 북한 내부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 다양한 영상을 찍어 전 세계에 공개했다. 이를 눈치챈 북한 국가보위성은 김씨의 가족을 다른 곳으로 추방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김씨를 협박했다. 이로 인해 김씨는 끝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현재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해 살고 있다.

북한 보위부는 이뿐만 아니라 탈북민 북한인권단체 대표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가족을 거론하며 협박을 한 경우도 있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나에게도 여러 차례 북한 보위부에서 전화가 왔었다”며 “나 같은 경우 부모님들은 돌아가셨지만, 누님들이 아직 북한에 남아 있다. 이들은 이를 이용해 나를 협박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뿐만 아니라 익명을 요구한 여러 탈북단체 대표도 북한으로부터 비슷한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한 탈북민 단체장은 “그런데 놀랍게도 보위부가 탈북민 단체장 대상으로 벌인 이 같은 공작이 먹혔다”면서 “실제 이런 협박을 받은 몇몇 이는 당시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北, 탈북민 정보와 돈 가져오면 용서해줄 것이라 회유

 ▲남한에 정착했던 탈북민들이 북한 보위부의 협박과 회유에 다시 북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북한 보위부는 이 같은 방법이 통하자 북한 인권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탈북민 개인들에게도 비슷한 공작을 진행했다. 북한 보위부는 재입북 탈북민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을 통해 돈과 다른 탈북민들의 정보를 빼내는 등의 공작을 펼쳤다.

실제 수년간 탈북민의 인적 사항을 북한 보위부에 넘기고, 재입북을 시도한 탈북민이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한모씨는 2013년부터 북한 보위부 소속 보위지도원에게 “가족이 무사하려면 돈과 탈북민에 대한 정보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았다.

한씨는 그 뒤로 수차례 탈북민 정보를 넘겼다. 이후 북한 보위지도원으로부터 돈을 가지고 다시 재입북하라는 지시를 받은 한씨는 8000만원을 마련해 중국으로 갔다. 한씨는 3000만원은 자신이 북한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으로 사용하고 5000만원만 보위부에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보위지도원은 8000만원 모두를 요구했다. 그러자 한씨는 마음을 바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씨는 이 사건으로 2020년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한씨의 사회적 지위, 지식 정도, 나이를 고려하면, 한씨는 자신이 제공한 정보들이 북한이탈주민과 가족들을 상대로 한 재입북 회유 및 협박, 테러, 대남선전, 북한 공작원의 대남침투에 이용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면서 “한씨의 행위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즉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한씨의 탈출 범행이 미수에 그친 점, 한씨에게 범죄 전력이 없는 점, 가족을 빌미로 한 회유에 어쩔 수 없이 범행에 이르게 된 점을 유리한 양형 요소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런 사례는 한씨뿐만이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로부터 이 같은 협박성 전화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은 다수였다. 물론 대개는 북한 보위부의 요구를 무시했다고 한다.

북한 보위부가 표적으로 삼는 이들을 살펴보면 가족 대부분을 북한에 남겨두고 홀로 정착한, 한국에 연고(緣故)가 없는 탈북민들이다.


“文 정권 탈북민 휴민트 말살해… 北 보위부 확인 전화까지 해”

김성민 대표는 “탈북민들 입장에서 보면 보위부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면서 “부모형제를 버리고 한국에서 혼자 잘살고 있다는 죄책감을 가진 이들에게 부모를 인질로 협박한다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또 “만약 보위부를 돕는 탈북민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라며 “보위부는 가족이라는 족쇄로 탈북민을 옥죄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이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고, 한국 사람들에게는 탈북민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 서로 의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끝내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북한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잠재적 탈북민을 막기 위한 북한 보위부의 큰 그림”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보위성은 북한 내부 정보를 입수해 국내외 정보기관들에 넘기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방법으로 협박해 활동을 못 하도록 한 사실도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도와 탈북민 휴민트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부 탈북민은 북한 내부의 협력자를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빼내 국정원과 해외 정보기관에 넘기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활동도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입장에서 이들은 눈엣가시다. 이들은 북한 내부 협력자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외화벌이로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과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북한 보위부는 이를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공작을 해오고 있지만,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제일 먼저 국정원에서 탈북민 정보원들을 차단했다. 실제 정보 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탈북민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정보 활동을 하는 한 탈북민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탈북민 휴민트를 말살했다”면서 “문 정부는 이들이 북한 정보를 가져와도 쓸모없게 만들어 더는 정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탈북민 휴민트들의 활동을 차단하고 북한에서 정보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전화해 실제 국정원과의 정보 거래 여부를 확인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北 보위성 김정은 집권 이후 ‘제로 탈북자’ 목표

북한 보위부는 2000년 중반 대량 탈북을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김정은이 집권하고 나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막기 위한 공작이 시작됐다.

북한 국가보위성은 김정은 집권 이후 탈북민이 더는 생기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즉 제로(Zero) 탈북이 목표였다. 과거 탈북민 문제 관련해서는 평양에 있는 보위성에서 모두 관장했다. 하지만 2012년부터 국경 연선(沿線·접경지대) 보위부 반탐(反探) 부서는 물론 각 지역의 시·군 보위부 반탐과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주민들의 탈북을 막아내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실제 2012년 말쯤 국가보위성은 국경 지역 보위국에 새로운 간첩을 침투시킬 방법을 모색해 중국과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라는 임무를 하달했다고 한다. 이후 국가보위성은 분기별, 연간 사업 총화에서 간첩 침투 사업 실적을 보고하라고 독촉했다. 중앙 기관의 독촉에 지방 보위국들은 난감한 표정들이었다고 한다.

 

북한 보위부에서 근무하다 2017년 가족과 함께 탈북한 A씨는 “당시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면서 “어떤 보위원들은 탈북했다 붙잡혀 나온 사람들에게 간첩 교육을 해 다시 중국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 국경 지역의 대부분의 보위부에서는 여성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중국으로 다시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유는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사는 탈북민의 90%가 여성인 조건을 이용한 것이다. 이들이 중국인들에게 시집가면 중국 사회에 발붙이기 유리하다고 보고 여성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했다.

A씨는 여성 선발 과정에 대해 “중국으로 몰래 건너갔다가 잡혀온 여성들의 신상정보를 살펴보고 누군가에 의해 팔려갔거나 당과 조직에 충실할 수 있는 가정환경이나 토대를 가졌거나 조금만 사상교육을 하면 정보원으로 활동할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 여성을 선발한다”고 말했다.


간첩 여성 생명력 다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

A씨에 따르면 이렇게 선발된 여성들은 북한 보위부의 특별관리 대상이 된다. 이들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정도 도내 휴양소나 초대소에 들어가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다. 이들은 그곳에서 사람들의 동향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대화법, 상부와의 연계 방법, 중국 내 탈북민의 한국행 시도 움직임의 감시·관리·보고체계 이론 학습과 지역별 중국어 교육 등을 받아 통과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여성들은 보위부 정보원으로 임무를 받아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의 중국으로 가는 방법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인신매매당해 중국으로 넘어가 중국 남성과 결혼한다.

이렇게 결혼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보위부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중국 내 탈북민들을 감시하고 관리한다. 이들은 중국에 나와 있는 보위부와 협력해 탈북민들을 유인·납치해 북한으로 데려간다.

중국에서 보위부 정보원으로 일하면서 6개월간 40명의 탈북민을 북한으로 강제로 보낸 여성이 있었다. 해당 여성은 김명신(가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위부 정보원이었다. 김씨는 단기간 내에 최고의 실적을 올려 북한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씨는 탈북민으로 위장해 여러 모바일 메신저나 안면을 튼 탈북민들을 통해 인맥을 쌓아가면서 해당 지역 탈북민들의 인적 사항과 동향을 보위부에 보고하는 일을 했다”면서 “특히 한국행을 시도하거나 한국에 있는 이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탈북민들을 밀고했고, 보위부 지시에 따라 여성들을 유인해 보위부가 해당 여성을 납치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했다.

이어 “김씨는 한 지역에서 임무를 마치게 되면 몰래 야반도주해 다른 지역으로 은신처를 옮겨 다른 남성과 결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정보원 임무를 수행했다”며 “김씨가 목적지로 정한 곳은 탈북민 여성들이 많은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씨는 자신의 청춘을 바쳐 북한 보위부를 위해 정보원으로 일하다 2020년 건강 악화로 보위부의 소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갔다. 한때 보위부 최고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귀국한 김씨의 최후는 암담했다.

귀국 후 그는 보위부 산하 비밀 장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다 그해 말 비밀사업 정보를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로 정신질환자로 몰려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49호 병원(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월간조선 03월 호

MBC 조작방송과의 싸움

나는 MBC란 악마를 보았다!

⊙ MBC 기자, “증거요? 우린 증거보다 방송 가치를 더 중시합니다”
⊙ “우리 MBC에서 노이즈마케팅을 해준 면도 있잖아요?”(MBC 기자)
⊙ 법원, “피고 A(MBC 기자), 비상식적 진술 내용이나, 피고 B-피고 C 간의 비상식적 관계에 관하여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을 것”
⊙ “장진성이 국가보위성하고 연결해 서부전선 4군단에서 포를 쏘는 공작을 진행” 주장(제보자 C)
⊙ 아내는 우울증 앓고, 아들은 “나쁜 아빠의 아들인 것이 창피하다”며 울어

 ▲사진=MBC 유튜브 캡처

 

 

 한국의 ‘문화방송’? 아니다. MBC가 나에 대해 조작방송을 할 때 나는 그 TV 앞에서 공영방송의 탈을 쓰고 전파(傳播)라는 흉기(凶器)를 휘두르는 악마를 보았다. ‘시사기획’이란 타이틀로 나 하나를 두고 무려 40분 넘게 ‘살인유희’를 즐기는 조작과 거짓선동의 괴물 집단인 진짜 MBC를 본 것이다.

북한체제를 경험한 탈북자들이라면 누구나 ‘악마 공포증’을 갖고 있다. 그 공포는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뇌리에 박힌 절대적 고통이다.

지금의 나에겐 김정은과 MBC는 동일한 세 글자의 악마이다. 북한 정권이 공화국 역사상 인민보안성 첫 대남(對南)성명으로 나를 제거하겠다고 공언했는데, 북한의 그 끈질긴 협박을 인격테러로 직접 실행한 것이 MBC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MBC의 조작은 유독 나에게 심한 듯싶었다. 언론의 기본 상식인 양측 반론(反論) 원칙이나 중립성을 거부한 그야말로 날조의 방송이었다. 아마 소송비용도 제대로 감당 못 할 탈북자로 우습게 본 것 같다. 그 덕에 오로지 법에만 의존해 거대 언론 재벌과 맞섰는데, 1심에서 가볍게 승소(勝訴)할 수 있었다.

1심 판결문은 MBC가 공영방송의 특권과 전파 독재로 어떻게 사회와 인간을 제멋대로 왜곡하는가에 대한 고발장이기도 하다. (관련자들의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한다.)


MBC 기자의 전화

 ▲B는 어느 날 새벽 C가 자신을 협박한다며 도와달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필자에게 보내왔다.

 

 A가 자신을 MBC 〈스트레이트〉 기자라고 소개하며 나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온 것은 2020년 12월경이다. 상대방에게서 B, C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정상적인 커플사기단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말하는 ‘MBC 기자’라는 호칭이 마치도 돈키호테와 산초를 연상시켜서였다.

탈북 여성인 B는 원래 MBC에서 ‘성공한 탈북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인터넷 매체 ‘미디어포커스’를 운영하던 나는 그 방송을 보고 B를 찾아 소개하려 했지만, 취재해본 결과 사실과 많이 달라서 보도를 하지 않았다. C는 탈북자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이로 모(某)커피회사를 창업, 운영하고 있었다. 나를 통해 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바로 동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C는 정신병 약을 매일 복용하는 정신질환자였다. 자기 스스로도 과거 주식 실패와 영등포 노숙자로 방황했던 삶의 굴곡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와 한때 사업 파트너였던 한 일본인은 초면인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C는 사이코패스예요. 어느 정도인 줄 아세요? 첫 대면 인사말을 나눌 때부터 몰래 녹취해서 나중에 수개월 수집한 그 녹취록들로 협박하는 완전히 사이코패스예요.”

현재 C는 커피회사 공동대표 대외 직함을 동생에게 떠넘기고 최대 주주의 권한으로 회사 경영에 개입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나에 대한 C의 병적 집착이 시작된 계기도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C와 동거하던 탈북 여성 B로부터 새벽 1시에 불쑥 전화가 걸려왔다. C가 걸핏하면 자기를 죽인다고 했는데 이제는 칼로 협박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C가 동거 중 자기 나체사진을 찍었으니 혼인빙자 및 나체사진 촬영으로 고소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북한 정권의 테러협박 때문에 24시간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마침 옆에 있던 경찰관들이 나 대신 B에게 직접 조언을 해주었다. “C는 회사도 구멍가게 수준인데 중견기업 오너인 양 너를 속이는 것이니 미련 갖지 말고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꽃제비 출신이었던 B는 당시에도 딱히 거주할 집이나 안정적 직장이 없었다. 그녀는 당장 몸을 둘 곳이 동거남의 집밖에 없고 자신의 안전을 담보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지, 나와 주고받은 통화 녹취록을 C에게 전송했다.


스토킹의 시작

 ▲C는 필자 자식을 토막 내 죽이겠다면서 자기 카톡 공개 메인 사진을 토막 난 사람 시체 사진으로 바꾸었다.

 

 

 그날부터 C는 나에게 온갖 증오와 저주를 쏟아냈다. “네 자식을 산 채로 잡아 12조각으로 썰어버리겠다”는 말도 내뱉었다. C는 그 실행의 암시로 곧바로 자기 카톡 공개 메인 사진을 토막 난 사람 시체 사진으로 바꾸고 나와 가족을 반드시 처단한다는 문구까지 적어놓았다.

공중전화를 이용해 하루종일 나를 스토킹하는 바람에 나는 신변보호 경찰의 권유로 10년 넘게 사용했던 전화번호를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런 설명을 주위 사람들을 통해 다 들었는데도 MBC 기자 A는 방송에서 내가 마치 인터뷰를 피할 목적으로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적한 죄인처럼 언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C의 분노와 집착에는 B라는 존재가 아예 없었다. B가 갑자기 나에게 성(性)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은 C가 “똑같이 되갚아줄게, 너를 매장시킬게”라고 말한 뒤였다. ‘똑같이 되갚아준다’의 의미는 C로부터 약물에 의한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 탈북 피해 여성이 고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를 부추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때부터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킬 목적으로 C는 옆에서 증거사진이라는 것을 찍고, B는 반듯이 누워 있는 자살 쇼를 무려 4번이나 연출했다. B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언대로 시신 기증도 마쳤다는 문자를 사방에 뿌리기도 했다.

증거는 전혀 없이 너무 자극적이고 신파적인 B의 성폭행 피해 주장에 어느 언론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C와 B의 자작극 내막이 탈북자 사회에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많은 탈북민이 상습적으로 막말을 일삼는 C에게 분노했고, 그를 고소 고발하기도 했다. B가 C에게 당한 또 다른 피해 여성을 공개적으로 매춘부라는 식으로 조롱한 사건도 있었다. 그 통에 탈북자 사회 여기저기서 거꾸로 B의 문란했던 과거에 대한 폭로가 잇따랐다. 상황이 이런데 MBC 〈스트레이트〉는 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B의 ‘거짓 미투’ 주장을 들고 ‘기획취재’라는 명목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아내의 대성통곡

내가 인터뷰를 거절하자 MBC A기자는 나의 신변보호 관할 경찰서까지 찾아왔다.


“장진성씨가 인터뷰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의 이 말을 전달한 경찰들도 A기자를 형편없이 이상한 여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내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경찰은 C의 끈질긴 살해협박과 B의 자작극 동기와 진행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상부에 보고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름이 지나 내가 미국 출장을 가 있을 때였다.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는 당장 네이버를 열어보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유명 탈북작가 장진성, 그에게 당했다. 나는 그의 성노예였다.”

내 얼굴 사진과 함께 제목부터가 명백한 명예훼손인 MBC 〈스트레이트〉의 광고기사가 네이버 메인에 걸려 있었다. 그것도 3회나 한다는 것이었다.

첫 방송이 나가는 날 나는 미국의 지인들을 TV 앞으로 불렀다. 객관적 물증은 전혀 없이 마치 개인 다큐멘터리마냥 시종일관 B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나를 범죄인시한 MBC 〈스트레이트〉를 보며 지인들은 “저게 한국의 공영방송 수준이냐?”며 혀를 찼다.


“너는 왜 화를 내지 않느냐?”

지인의 이 질문에 나는 그냥 웃었다. “탈북자 신분으로 MBC란 한국의 거대 언론과 싸워 이길 일만 남았는데 왜 화를 내?”

이렇게 자기 위안을 하면서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공허함을 안고 책상 앞에 앉았다. 방송을 본 지 5분 만에 반박 성명의 글을 작성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미국 현지에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제보자 B와 C, MBC를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명예훼손에 대한 배상으로는 10억원을 요구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게 있다면 감히 이럴 수 없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피해자’가 먼저 고소해야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내가 먼저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MBC가 당했어요”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MBC 〈스트레이트〉 A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방송 잘 봤어요.”

나의 이런 반응에 A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로 몰랐던 것인지 아님 모르는 척한 것인지 “누구세요?”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나는 A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조금씩 섞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그 방송으로 내가 당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리고 MBC가 당했어요. 제보자라는 그 사람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시죠? 그런 비정상인들에게 MBC가 농락당한 셈이에요. 당신도 그들과 같이 법의 처벌을 받으세요.”

A는 나와 통화하면서 B와 C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알려주는 내용들을 취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MBC는 이런 내용들은 전혀 방송하지 않았다. MBC가 의도적으로 감춘 그 증거들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렇게 명시했다.

〈피고 A는 2021. 1. 15 이전에(방송 이전의 시점을 말함)… 피고 B가 주고받은 내용을 이미 확인했고,(갑 제4호 중의 3 참조), 그 내용 안에는… C가 B를 죽이려고 한다.(사주 협박) 그렇게 하면서 뭐 사람 눈알을 빼가지고 담근 술을 먹였다는 취지의 내용도 기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며, 피고 A는 이와 같은 비상식적 진술 내용이나, 피고 B-피고 C 간의 비상식적 관계에 관하여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B, C 진술의 전반적인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정황이며 피고 문화방송, A로서는 이를 알게 되었다면, 이 사건 제1 보도 이전에 피고 B, C의 진술을 객관적 증거와 비교해 보는 등 더욱더 철저한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쳤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 간첩이자 CIA 간첩

또한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C가 경찰청 보안국, 국정원 직원 사칭 육성과 함께 “장진성이 죽일 비리 하나만 알려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남자친구에게 죽는다. 네가 장진성 비리를 알려주지 않으면 과거 임신했던 사실을 부인에게 말하겠다. 내 남자친구가 중국에서 살인도 한 사람이다”며 나의 지인에게 협박하는 B의 녹취록 증거를 전제로 이렇게 못 박았다.

“그 외에 피고 문화방송과 A가 피고 B, C의 주변 인물 등에 대한 광범위한 검증 작업을 거쳤다고 볼 만한 사정도 찾을 수 없다.”

A에게 제공된 그 녹취록, 그리고 현재까지 나의 MBC 고발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에는 누구나 C의 비정상적 사고를 알 수 있게 하는 이런 육성 내용도 있다.

“장진성이 건이 일이 커요, 보위성, 지금 국가보위성하고 연결해가지고, 국지도발 그니깐 서부전선 4군단에서 포를 쏘는 이런, 그런 공작을 진행하는 건이 있거든요. 더 이상은 자세하게 말하기는 그렇고요, 여긴 보안국이 아니라 정보국이거든요.”

내가 북한 서부전선 4군단과 짜고 남한에 포사격을 준비한다? 상식적으로 가당키나 한 말인가? C는 한 발 더 나아가 나를 북한 간첩, 미국 CIA 간첩이라고 국정원에 신고했다.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서는 ‘국가기밀 누설’이니 ‘2중 간첩 신고’니 하면서 대사 면담을 요청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내 친구에게는 나의 비리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단 비리 및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미국 FBI에 신고하겠다는 황당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증거를 의도적으로 외면

 ▲C는 자신이 MBC 〈스트레이트〉와 긴밀히 협력 취재 중에 있다며 MBC 기자 A와 나눈 카톡 메시지를 필자의 지인에게 보내왔다.

 

 

 위에서 얘기한 내용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C가 5000만원으로 조선족을 고용하여 나와 요덕수용소 최초 고발자 강철환씨를 테러하라고 직원에게 지시하는 내용이나, 내 지인에게 B의 자필 협박 편지와 함께 보낸 저질스러운 배달 박스, 수많은 녹취록, 사진 증거물이 1회 방송 이전에 MBC A기자에게 전해졌다.

그런데도 MBC 기자 A는 그 진실의 증거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오히려 B를 미투 고발자로, 당시 탈북 여성 강간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던 C를 탈북 여성 인권 옹호자로 미화했다. 내 유튜브를 보면 “방송 이전에 그 모든 증거를 확인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MBC 기자 A가 제 입으로 “취재 과정에 다 제보받았고, 직접 보았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다. 이것들은 사실상 내가 아니라 B와 C, 그리고 MBC 〈스트레이트〉의 거짓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첫 방송이 나가고 나서 보름 정도 지나 MBC A기자로부터 만나자는 제안이 왔다. 카메라 촬영, 녹음을 서로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당연히 거짓 방송국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순진하게 믿을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 필요한 사전준비와 함께 내가 원하는 장소로 불렀다. A기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MBC의 실체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A기자가 인사말처럼 나에게 꺼낸 첫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저도 장진성 작가님이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하실 줄 몰랐습니다. 취재 과정에 검색해보고 ‘아, 이런 분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MBC에서 노이즈마케팅을 해준 면도 있잖아요?”

한 인간이 평생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명예를 한순간에 조작과 음해로 무너뜨리고도, 내 가정과 주변의 정상적인 삶까지 뿌리째 망가뜨려놓고도, 그걸 “‘노이즈마케팅’을 해주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 아니냐”는 투로 말하는 MBC 기자! 사회의 잘못을 파헤친다는 자가 정작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MBC식 패륜(悖倫)을 마주하고 있자니 함께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정말 우리 MBC를 고소하셨습니까?”

A의 직업적 무지와 몽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리에 마주 앉기 바쁘게 나는 다그쳐 물었다.


“방송을 보니 제보자의 주장만 있고, 증거는 하나도 없던데 도대체 MBC는 무슨 배짱과 근거로 방송을 했어요?”


이 질문에 A는 이렇게 대답했다.


“증거요? 우린 증거보다 방송 가치를 더 중시합니다.”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나서 다시 물었다.


“아니, 정말 어이가 없네, 그럼 내가 거꾸로 물어볼게요. 세상에 증거가 없는 가치가 어디 있어요?”

뭔가 다른 변명을 찾느라 동공이 흔들리는 A의 얼굴에 대고 나는 쏘아붙였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방송 가치 기준이 뭐예요? 증거는 일절 필요 없고, MBC 논조대로 세상을 우선 조작부터 하고 보겠다는 그런 건가요?”

그날 A가 나에게 거듭 확인을 요청하는 질문이 있었다.


“장 작가님은 정말 우리 MBC를 고소하셨습니까? 정말 10억으로 고소하셨다고요?”

나의 흔들림 없는 고소 의지를 거듭 확인한 MBC는 나를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고 싶었는지 며칠 후 1회 방송을 재탕하는 수준의 2회 방송을 내보냈다.


경찰, “성폭행 장소라던 호텔은 존재하지도 않아”

네이버 실검 1위에 오를 만큼 전 국민의 증오 대상이 된 나는 서울경찰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MBC가 총 80분에 달하는 2회 방송으로 이른바 나의 성범죄(?)를 집중 고발한 까닭에 특별히 구성된 수사팀으로부터 엄격한 조사를 받은 것이다.


“휴대폰 포렌식 조사에 수락할 용의가 있습니까?”

“제발 해주세요, 제가 나체사진 갖고 강간하고 협박했다는데, 포렌식 좀 잘 해서 누명 좀 벗겨주세요.”
“개인카드, 회사카드 내역서 제출할 용의가 있습니까?”
“무엇이든 요구해주세요. 내 가족 카드 내역서까지 다 갖다 드리겠습니다.”

 

피해자가 방송에서 내가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 기간의 해외 출입국 자료를 조회해보니 무려 20회였다. 최소 일주일에서 한 달짜리 해외 출장도 있었다. 도대체 언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인지?

피해자가 주장하는 날짜와 시간을 여유 있게 앞뒤로 보름씩 잡아도 그 분초를 추적하는 차량 GPS, CCTV, 개인카드 내역서를 보면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휴대폰 포렌식 결과로 드러난 통화 내역과 문자들은 B의 거짓들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날짜, 장소, 통화, 문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일치되지 않는 B의 위증이 얄미웠던지 수사관은 몇 달 만에 끝나는 마지막 조사에서 지장을 날인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고소인이 처음부터 성폭행 장소라고 주장했던 쿠쿠호텔이요? 세상에 그런 호텔은 있지도 않아요. 앞으로 오지랖 넓게 남 도우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 정말 많으니까.”


B가 MBC 방송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하면서 피해를 호소했던 대국민 미투 사기극은 이렇게 경찰 수사 단계에서 허무하게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내가 나체사진으로 협박하며 머리채 잡고 끌고 다니며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MBC 〈스트레이트〉 방송 내용대로라면 나는 종신형을 받았어야 마땅하다. 경찰이 무혐의 처리를 하자 그들은 검찰과 법원에 호소했지만 사기꾼들의 공허한 주장은 여지없이 기각됐다.


가족의 고통

 ▲MBC 방송이 나간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아내에게 9세 난 아들이 보낸 편지.

 

 

 나는 죄가 없었지만 가족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다. 친구들이나 주변과의 사이가 돈독했던 아내는 바깥세상과 단절한 시간을 견디다 못해 우울증을 앓았다. 9세 난 아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네덜란드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세계가 아는 나쁜 아빠의 아들인 것이 창피하다”며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날부터 웃음을 잃은 동심을 매일 지켜봐야 하는 아빠의 죄책감과 분노를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MBC란 악마의 소굴을 직접 찾아가 분신자살을 해서라도 항의하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날을 샌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MBC의 피해자이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영방송, 문화방송을 자처하는 MBC를 이렇게 규탄하고 싶다. “MBC의 공영은 거짓의 번영이고, MBC의 문화는 조작의 상습”이라고!

나를 인격테러했던 MBC는 지금도 2차 가해를 하고 있다. 법원이 나에 대한 방송 2회 분을 허위로 판결하고 전부 폐기하라고 명령했는데도 MBC는 1심 선고에 불복해 항소를 했다. 아마 한국 언론 역사상 방송사가 이렇게 변명의 여지없이 패소(敗訴)한 적은 거의 없을 텐데도 MBC는 그에 대한 수치감마저 상실한 것 같다. 해임해야 마땅한 A기자에게 MBC 완장을 채워 여전히 1선 현장에서 뛰게 하고 있는 것도 MBC에 반성과 책임의식이 없다는 방증(傍證)이다. 사법부의 판결로 거짓임이 드러난 보도를 한 MBC기자 A의 생얼굴이야말로 사회고발이 아닌 MBC 자기고발이다.⊙

글 : 장진성 탈북작가

 

03.08 대북전단 살포하는 탈북민의 불안

대북전단을 풍선에 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대북풍선 원조’ 격인 이민복(65)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이 요즘 불안 속에 밤을 보내고 있다. 3개월여 전인 지난해 11월 12일 오전 1시 20분쯤 경기 북부 접경지역 모처 자신의 집 마당에 주차해둔 5톤 트럭이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전소했기 때문이다.

 

탈북민 출신인 이 단장은 본격적으로 대북풍선을 날리기 시작한 2008년부터 경찰로부터 24시간 밀착 신변 보호 조치를 받고 있다. 그는 트럭 화재 후 3개월 이상 지나도록 용의자가 특정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하고 불안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 트럭은 이 단장이 대북전단을 날릴 때 주력으로 사용했다. 트럭 하부 연료통 부근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화염을 내뿜으며 차량 전체로 옮겨붙어 트럭이 전소했다. 당시 트럭 화재로 인근 야산으로까지 불이 옮겨붙었고, 이 단장은 오전 7시쯤 산불 진화를 위해 소방 당국이 출동한 후에야 잠에서 깨어 트럭 화재를 발견했다.

 

▲지난해 11월 12일 오전 1시 20분쯤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의 트럭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 트럭이 탔다. [사진 이민복씨]

 

경찰은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다. 폐쇄회로(CC) TV에서 화재 직후 배낭을 멘 남성이 황급히 현장을 떠나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 관계자는 “현장 CCTV 분석 등을 토대로 볼 때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라며 “대공 용의점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방화 혐의자를 찾고 있지만, 현재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 단장은 대북풍선 활동에 불만을 가진 간첩이나 종북주의자의 방화로 인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단장은 그러면서 괴한이 나를 해치려 집안에 들어오려다 집에서 키우던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서 실패하고 차에 불을 지른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우려감을 표하고 있다.

 

경찰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집 앞에서 대북풍선 살포용 트럭 등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한 만큼 이 단장에 대한 신변 보호를 더욱 단단히 하고 있고, 보안 시설을 보강하는 한편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한변)은 지난달 말 당시 이 단장에 대한 신변 보호조치를 하고 있던 경찰의 과실을 물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한변은 “화재를 당해 대북풍선 활동에 불만을 가진 간첩이나 종북주의자 위협에 시달리던 피해자에게 큰 정신적 피해를 주었다”고 했다.

 

그동안 북한의 대북전단 살포자들에 대한 위협은 북한방송 등을 통해 공공연하게 있었고, 북한은 실제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지난 2020년엔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기도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 없도록 대북전단 살포 탈북민들에 대한 각별한 신변 보호가 중요해 보인다.

중앙일보 전익진 사회부 기자

 

03.20 탈북 美대학원생 유엔서 “북핵, 중 겨냥할 수도” 일침

탈북민 이서현씨, 안보리 발언
中 겨냥 “北 인권 개선 도움될 것”
10대 때 탈북… 첫 웜비어 장학생

17일(현지 시각) 유엔 안보리 북한 인권 비공식 논의에서 중국을 향해 문제 제기한 탈북민 이서현씨. /조선일보DB

 

“중국 대표 발언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김정은이 비이성적이고 불안정한 독재자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기가 언젠가 중국을 겨냥하지 않을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지난 17일(현지 시각)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비공식 회의에서 이서현(32)씨가 입을 열었다. 유엔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탈북민들이 나와 북한의 실상에 대해 증언하는 자리였는데, 국제 사회에서 북한 문제 논의에 소극적인 중국을 저격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북한이 안보리 결의 위반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포함 수십 차례 도발을 했지만, 그때마다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에 관련 논의에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씨는 이날 안보리 이사국 등 회의장에 있는 모든 회원국의 대표단을 향해 “모든 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북한의 입장을 두둔한 중국 대표를 겨냥해 “대화 추진이 절대로 인권에 침묵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북한의 인권 개선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안보리 이사국들도 어찌 못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북한 감싸기 속 회의에 초청된 탈북민이 정면 반박에 나선 것이다.

 

이날 증언에 나선 이씨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통치 자금 관리와 외화 벌이 무역을 담당하는 노동당 39호실 고위 관리 리정호의 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종합외국어대 외국어문학부에 재학했고, 20대 중반 탈북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다. 이날도 “중국에서 유학하던 2013년 북한의 장성택 일파 숙청 당시 가장 친한 친구를 비롯해 무고한 사람들이 북한으로 끌려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고 고발했다.

 

이씨는 유튜브 등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인권 운동을 해왔고 지난해에는 미국 송환 직후 숨진 미국인 대학생 고(故) 오토 웜비어씨를 기리기 위한 ‘오토 웜비어 재단’의 첫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됐다. 현재 컬럼비아대 국제행정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씨는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남한 사람들이 단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처럼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어 낼 발판을 설계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김은중 기자

 

03.24 “北 구금시설서 임신 8개월 강제낙태…굶기기 고문에 한달만에 60㎏→37㎏”

영국의 북한인권단체코리아퓨처(한미래)가 북한 구금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기록을 담은 두 번째 보고서를 24일 발간했다. 이는 올해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출범 1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3월 코리아퓨처가 발간한 첫 보고서 DB를 업데이트해 작성한 것이다.

 

보고서는 2021년 3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탈북민 269명을 면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가해자, 피해자, 구금시설의 특징과 인권침해 건수를 규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 소속 30대 여성 A씨는 임신 2개월 때 중국에서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됐다. 불법적인 국경 출입 혐의로 기소된 그는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병원에서 임신 7∼8개월에 강제 낙태를 당했다. 이후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리에 있는 전거리교화소로 옮겨져 3년간 재교육을 받았다.

 

또 노동당원이던 40대 북한 남성 B씨는 주민들의 탈북을 돕고 밀수에도 관여했다. 양강도 혜산시 인민보안성 구치소에 18개월 동안 구금됐으며, 이후 재판을 거쳐 평안남도 개천시의 재교육 캠프로 옮겨졌다. 음식을 주지 않는 등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 그의 체중은 한 달 만에 60㎏에서 37㎏으로 급감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 북한 구금시설에서 발생한 고문·강제노동·강간 등 인권침해 사례 가운데 코리아퓨처가 인지한 것은 7200여 건이었다.

 

집계된 피해자는 1156명, 가해자는 919명이었으며 소재가 파악된 구금시설은 206곳이었다.

 

인권침해 유형별로는 위생·영양을 포함한 건강과 보건의료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형태가 1589건으로 가장 많았고, 표현의 자유 박탈(1353건)·고문이나 비인간적 대우(1187건)가 뒤를 이었다.

 

가해자 소속기관은 한국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성(현 사회안전성) 소속이 502명, 강제노동 수용소 관할 기관인 국가보위성 소속이 321명 등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피해자는 여성(816명)이 남성(331명)보다 많았다.

 

보고서는 이번 조사 결과가 북한 노동당이 구금시설에서 행해지는 고문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가진 국가기관임을 확인시켜준다고 지적했다.

 

▲북한 구금시설을 3차원(3D) 모델로 제작한 화면. 사진 유튜브 화면 캡처

 

 

보고서는 피해자들과 심층면담을 통해 북한 구금시설을 3차원(3D) 모델로 제작해 보여주면서 ”북한 내 일반 구금시설에 수감된 수감자들은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과 비슷하게 높은 수준의 고문 및 비인도적 대우에 노출되고 있기에 정치범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원 코리아퓨처 조사관은 “북한 내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침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피해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책임규명은 요원한 상태”라며 “코리아퓨처의 조사활동 결과 식별된 핵심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선별적인 제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 배재성 기자

 

03.27 눈물 호소 옛말... 北감싸던 中대사에 중국어로 한방 먹인 MZ 탈북민

치밀한 논리·체계적 자료 제시… 유엔 안보리 등서 관심 쏟아져

北실상 알린 영상으로 '100만 구독자' 확보 - 탈북민 박연미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보이스 오브 노스 코리아'로 받은 골드 버튼(유튜브가 구독자 100만명을 넘긴 채널에 주는 상)을 들고 있다. /유튜브

 

탈북민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양식이 바뀌고 있다. 눈물로 북한 인권 실상을 폭로하며 감성에 호소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탈피해 치밀한 논리, 체계적인 자료 등 강화된 역량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의 이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언어 실력과 높은 교육 수준, 국제적인 네트워크 같은 ‘스펙’들로 무장한 이른바 ‘MZ세대’ 탈북민들이 있다.

 

탈북민인 조셉 김(33) 조지 W. 부시센터 연구원은 지난 17일(현지 시각)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리 비공식 회의에서 유창한 영어로 북한 실상에 대해 증언하며 안보리 이사국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김씨는 북한 내 최하층민인 ‘꽃제비’ 출신으로 2006년 탈북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바드칼리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탈북민 이서현(32)씨는 이날 회의에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한 중국 측 외교관을 향해 중국어로 반박했다. 이씨는 “중국어로 중국 측 입장을 반박하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당황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며 “통역 없이 영어와 중국어로 얘기하다보니 현장의 호응도 남달랐다”고 했다. 2014년 북한 고위 관리 출신인 부친과 탈북한 이씨는 중국 유학 경험이 있고, 현재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두 사람을 섭외한 주유엔대표부의 황준국 대사는 “영어가 유창하니 전달이 확실하고, 분석과 전망까지 다 얘기할 수 있어 임팩트(영향력)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탈북민으로 미 컬럼비아대 석사 과정에 재학중인 이서현씨. /인스타그램

 

MZ세대답게 소셜미디어(SNS)를 적극 활용해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는 탈북민들도 있다. 박연미(30)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보이스 오브 노스 코리아’는 구독자가 100만명, 누적 조회수가 1억회가 넘는다. 박씨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북한 내 인권 실상 등을 고발한 영상들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미국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루이스 샤르버노 휴먼라이츠워치 국장은 VOA(미국의 소리)에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앞당기기 위해 역량 있는 탈북민들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은중 기자

 

03-28 추석 연휴 전날인 음력 8월 13일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로 지정

▲게티이미지 뱅크

 

민간 이산가족 단체들이 저마다 기념해오던 ‘이산가족의 날’이 추석 연휴 전날인 음력 8월 13일로 지정됐다

통일부는 28일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공포됨에 따라, 이산가족의 날(음력 8월 13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산가족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이산의 고통을 위로하고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확산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음력 8월 13일인 올해 9월 27일에 제1회 이산가족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이산가족을 위로하고 국민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이산가족의 날’이 음력 8월 13일로 지정된 것은 이산가족들의 희망을 최대한 반영한 결과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 발의한 개정법률안에 따르면 이산가족들이 설문조사에서 상봉일로 가장 많이 희망한 날짜가 바로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문화일보 조재연 기자

 

03-30 탈북민 2075명 1대1 설문조사… 508명 1600개 인권침해 사례 수집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는 북한인권기록센터가 하나원에 입소한 모든 탈북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1대1 대면 방식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지난해까지 문답서를 작성한 2075명 탈북민 중 시의성을 고려해 2017년 이후 북한의 인권 상황을 진술한 508명이 경험한 1600여 개 인권침해 사례를 기준으로 했다.

508명 가운데 여성은 53.1%, 남성은 46.9%였다. 탈북 전 거주지는 양강도(59.1%), 함경북도(17.3%) 등 접경지역이 많은 편이었고, 30대 이하가 67.1%에 달했다. 탈북연도는 2019년이 49.4%로 가장 많았고, 2018년이 30.7%였다. 응답자 중 2021년과 2022년 탈북자는 코로나19에 따른 북한의 국경 폐쇄 영향으로 3.8%였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03-30 北, 국군포로 ‘43호’ 지칭 따로 관리… 가족들은 탄광 등 배치돼 노동

자녀들 대학입학 등 불이익 받기도
남한에 가족 있는 월북자도 감시받아

북한은 국내외에서 송환 요청 중인 국군포로와 납북자 등을 별도로 관리하며 감시를 강화해 온 것으로 30일 나타났다. 이산가족의 경우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가족이 감시와 차별을 당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국군포로를 ‘43호’로 지칭해 따로 관리하고 있다. 국군포로와 그 직계가족들은 북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 상급학교 진학과 직장 배치, 승진, 입당, 군입대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녀들은 학업 성적이 우수해도 대학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 직업을 대물림해야 해 탄광이나 농장에 배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군포로들이 일하는 함경북도 새별군과 무산군, 함경남도 단천시 등 탄광 지역, 함경북도 온성군과 함경남도 단천시 등 농장은 일이 힘들어 북한 주민들이 기피하는 직장이다. 탄광에 배치된 국군포로들은 막장 안에서 일을 하는 등 기피업무를 맡는 경우가 다수인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 당국은 이들이 탈북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여행·이동을 위해 허가를 받았더라도 거주지 담당보위원 등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등 감시를 더 심하게 하고 있다. 국방부는 귀환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2016년 말 기준 국군포로 50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후 195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납북자 또한 국군포로처럼 탄광이나 광산 등에 배치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대다수는 동해안 및 서해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다 나포된 어업종사자들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자진해서 북한행을 택한 월북자들도 한국에 가족이 있는 경우 차별받고 있다. 월북자 자녀라는 이유로 김일성종합대학 추천을 받고 시험을 치러 합격했지만 입학이 거부되고, 지방 농업대학 졸업 후 이산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일꾼이 되지 못한 사례가 조사됐다. 또 월북자가 이산가족행사를 통해 남측 가족과 만났다가 자녀가 직장에서 해임되거나 보위부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03-30 “한국 드라마·성경 봤다고 총살… 수용소 병원선 생체실험 자행”

■ 7년만에 첫 北인권보고서

김씨 일가 권위훼손 등 이유
정치범수용소 수용 강제노동

김일성 초상화 가리켰다고
임신 6개월 임신부도 처형

중국서 강제송환된 여성이
출산하자 아기 살해하기도

7년 만에 처음 공개된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의 ‘2023 북한인권보고서’에는 북한 내 인권탄압의 상징적 존재인 정치범수용소의 수와 위치를 비롯해 주민들의 열악한 인권 상황이 낱낱이 나타났다. 나라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수용소로 전락해 버린 북한에서 공개처형과 고문·생체실험·강제노동은 물론 감시와 차별, 자의적 처벌이 만연한 참상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30일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기록센터 조사로 파악된 정치범수용소는 총 11곳으로, 그중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는 5개의 시설은 평안남도 개천시의 14호와 18호, 함경북도 화성군의 16호와 청진시의 25호, 함경남도 요덕군의 15호 등이다. 이곳에 수용된 ‘정치범’의 수용 이유는 일제강점기 자산계급이었다거나 전쟁 당시 국군을 조력했다는 등 성분 문제 외에도 ‘말반동’ 등 김일성·김정일 권위 훼손 관련 문제, 간첩 행위, 종교활동, 북한 내 권력다툼이나 기관원의 횡령 등 비위 문제, 가족의 탈북이나 본인의 한국행 시도, 인신매매나 한국 거주자와 통화 등 다양했다. 한 증언자는 “어머니가 2014년 보위부 보위원에게 집에서 체포됐다. 체포된 이유는 남한 사람과 손전화로 통화하고 돈을 이관받았다는 것이었다”며 “소식이 끊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고, 나중에 외할머니가 사람을 통해 알아본 결과 요덕관리소로 갔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수용소 내에선 공개처형이나 비밀처형이 이뤄지고, 이주민(수용 후 사면되지 않은 사람)과 해제민(사면된 사람)은 광산 등에 배치돼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 북한 내에선 임산부나 청소년에 대한 처형은 물론, 한국 드라마 시청·유포나 성경 소지·지하교회 운영 등의 이유로 당국에 의한 자의적 처형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민 증언에 따르면 2018년 평안남도 평성에서 열린 공개재판에서 1명이 성경을 소지하고 기독교를 전파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공개 총살당했고, 2019년 평양에서 지하교회를 운영하던 단체가 붙잡혀 운영자 5명이 공개처형됐다. 2017년 집에서 춤추는 한 여성의 동영상이 시중에 유포됐는데, 영상에서 손가락으로 김일성 초상화를 가리키는 동작이 문제가 돼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이유로 임신 6개월이던 해당 여성이 처형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일부 구금시설에서는 피구금자에 대한 비밀처형이 벌어지고, 중국에서 임신한 채 강제송환돼 온 피구금자가 출산한 아기를 기관원이 살해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구금시설 내 고문과 생체실험 등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83호’로 불리는 병원 또는 관리소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 등 생체실험이 대상자 동의 없이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83호에 수용된 대상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거나 지적장애인으로, 마약·도박중독 등을 이유로 가족에 의해 수용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03-30 “북한, 정치범수용소 5곳 운용… 아동 공개처형”

■ ‘북한 인권보고서’ 7년만 첫 공개

간첩행위·체제비판 빌미 수용
국군포로 가족 등 탄광서 노동

여성들 인신매매·강제낙태 등
탈북민들의 생생한 증언 담겨

한인권법 시행 후 7년 만에 정부가 북한 주민들이 당하는 각종 인권침해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북한인권보고서를 처음 공개했다. 보고서는 북한이 정치범수용소 11곳 가운데 5곳을 현재 운용 중이며, 북한 주민의 기본적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음을 명시했다.

통일부는 30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23 북한인권보고서’ 원문을 공개했다. 그간 북한 내 인권 실태에 관해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비롯해 국제사회와 시민사회의 고발이 축적돼 왔지만, 우리 정부 차원의 보고서는 2016년 북한인권법 제정 이후 정부 내에서 비공개로만 작성돼 왔고 공개 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44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는 2017년 이후 국내 정착한 탈북민 508명의 문답서를 토대로 작성됐다. 북한이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기록센터 조사로 파악된 정치범수용소는 총 11곳”이라며 “현재까지 운영되는 것으로 보이는 시설은 5곳으로 평안남도 2곳, 함경북도 2곳, 함경남도 1곳”이라고 밝혔다. 수용 이유는 출신 성분과 간첩 행위, 종교활동, 탈북 시도 등 다양했고 2010년 이후에도 말반동(정부·체제 비판)과 관련된 사례가 있었다.

이번 보고서에선 북한이 존재를 부인하는 국군포로와 직계 가족들이 함경남·북도 등에 다수 거주하며 탄광과 농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을 당하고 있는 사실도 다뤄졌다. 북한은 국군포로를 ‘43호’로 분류해 본인은 물론, 직계 가족까지 감시하며 여행·이동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보고서는 취약계층인 여성·아동·장애인의 인권 침해 상황도 담았다. 탈북 과정에서 많은 여성이 인신매매를 경험하고, 중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임신해 강제송환될 경우 강제낙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보호 대상인 아동도 공개처형이나 폭력·성착취·노동 동원 등을 당하고 있고, 왜소증 장애인에 대한 불임 수술이 강제로 시행됐다는 증언도 다수 나왔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