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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談8/2023-1/ 01.02 대전쟁으로 사람 죽는다? 노스트라다무스 끔찍한 2023년 예언 - 03.28 어느 시어머니의 주례사

상림은내고향 2023. 3. 29. 19:49

餘談8/2023-1/

​01.02 대전쟁으로 사람 죽는다? 노스트라다무스 끔찍한 2023년 예언

‘1999년 지구멸망설’로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2023년은 이런 모습일 것”이라며 했던 예언이 새해를 맞아 주목받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1일(현지시간) 프랑스의 의사 겸 점성가인 노스트라다무스(본명 미셸드노스트라담)의 예언서에 담긴 2023년 관련 내용들을 정리해 공개했다. 노스트라다무스 사후인 1568년에 완간된 이 예언서에는 1555년부터 3797년까지의 역사적 사건과 대규모 재난 등을 예언하는 내용이 담겼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책에서 예언한 2023년의 모습은 크게 ▶‘악의 세력’이 벌이는 큰 전쟁 ▶화성의 빛이 꺼짐 ▶밀이 솟아올라 이웃을 먹어치우는 ‘식인 풍습’ ▶마른 땅은 더욱 메마르고, 무지개가 보일 때 큰 홍수가 날 것 ▶나팔이 큰 불화로 흔들림 등 다섯 가지다.

 

먼저 노스트라다무스는 2023년 ‘대전쟁’을 예언했다. 특히 ‘7개월간의 큰 전쟁, 악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두고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있는데 노스트라다무스가 이를 예견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데일리메일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언급한 ‘전쟁’은 중국의 대만 침공 또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인한 미국과의 대결, 핵 강대국인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쟁 등일 수도 있다”며 “다만 ‘7개월’이라는 예언서 속 숫자로 보아 몇 시간 안에 결말이 나는 핵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서에서 “화성의 빛이 꺼질 때 천상의 불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인류가 가장 유력한 우주 식민지로 꼽는 화성에 대한 개발이 2023년 중단될 수 있다고 예언했다.

아울러 예언서엔 “식량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식인 풍습이 생겨날 것”이란 내용도 담겼다.

노스트라다무스는 ‘2023년 기후변화로 인한 큰 타격이 발생한다’는 내용도 예언했다.

 

예언서에는 ’마른 땅은 더욱 메마르고, 무지개가 보일 때 큰 홍수가 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미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과 이에 대한 우려는 인류 전체로 번졌다.

 

끝으로 노스트라다무스는 “2023년 나팔이 큰 불화로 흔들리며, 합의가 파기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에 대해선 “더 많은 사회적인 격변과 혁명, 반란이 발생할 것”이란 분석이 존재한다.

 

데일리메일은 “코로나 19팬데믹이 전 세계 인구의 다수를 더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범유행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부를 키워 온 슈퍼 부자에 대한 경멸이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지난해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대생이 의문사한 뒤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는 이란을 포함해 여러 잠재적 시위를 목격했다”고 덧붙였다.

하수영 기자 ha.suyoung@joongang.co.kr

 

01.03 월터스의 조언 “행복을 따르세요”

세밑에 ‘인터뷰의 전설’ ‘저널리즘 개척자’로 불린 미국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가 세상을 떠났다. 언론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쿠바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수많은 인터뷰를 성공시켰지만, 그를 대중에게 각인한 걸작은 1999년 모니카 르윈스키 인터뷰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하원 탄핵으로 몰고 간 섹스 스캔들 주인공 르윈스키는 당시 세간의 화제였다.

 

월터스는 분위기가 어색하거나 불편해질까 봐 꺼리는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 거로 유명했다. 르윈스키 앞에서도 “일부러 재킷을 들어 올려 대통령에게 끈 팬티를 보인 게 맞느냐”고 확인했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르윈스키는 이 인터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딸 첼시에게 사과했다. 7400만 명이 시청해 뉴스 프로그램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국에서 저녁 뉴스를 진행한 최초의 여성 앵커인 바버라 월터스(오른쪽)가 1980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74년 미국 첫 여성 뉴스 앵커로 유리천장을 깨뜨린 월터스는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태어나 93년을 살았다. 그중 언론인으로 지낸 시간은 약 52년. 85세였던 2014년 공식 은퇴했지만, 마지막 인터뷰는 2015년 12월 도널드 트럼프였다. 구순을 앞두고도 현역으로 뛸 수 있는 비결은 재능과 노력이 기본이지만, 장수 비결은 자신이 행복한 일을 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배 방송인 케이티 쿠릭이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를 모은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2011)을 펴낸다고 하자 월터스는 이런 글을 보내왔다.

 

“대학 때 유명한 교수님의 조언은 ‘네 행복을 따르라’였다. 실생활엔 이렇게 적용한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결정해라.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 (물론 돈은 받아야 함) 해당 업계나 기업에 일자리를 얻어라. 직위를 따지지 말고 시작해라. 아침에 가장 먼저 출근해라. 밤에 마지막으로 퇴근해라. 커피 심부름을 해라. 행복을 따르라. 단, 상사와 자지 마라.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방송사 홍보담당, 뉴스 작가에서 늦깎이 기자·프로듀서·앵커가 된 자신의 이야기였다.

 

하버드대 연설에서는 언론인에게 중요한 자질로 호기심을 꼽았다. ABC뉴스 다큐멘터리 ‘우리의 바버라’에서 인터뷰 대상보다 더 그를 깊이 연구하고, 질문은 수백 개 준비하고, 질문지를 버려야 하면 그럴 수 있도록 완전히 숙지했다고 준비 과정을 털어놨다. “우린 죽을 때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이라고 후회하지 않는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한 조언도 기억에 남는다. 새해다. 새로운 결심, 새 출발 하는 시기다. 월터스처럼, 행복을 좇으면 나머진 따라올 것으로 믿어보자.

중앙일보 박현영 워싱턴 특파원

 

01.10 아버지와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기도 없이 살던 25년 전, 치통 견디다 금니하러 병원 가던 날
치료비 마련 못한 아버지 “며칠만 있다 와도 되냐고 여쭤볼래?”
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좀 지켜보고 금니 씌우는 게 낫겠대

/일러스트=이철원

 

고3 여름, 집에 전기가 끊긴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집에서 한 달이 넘게 전기 없이 살았다. 원래도 집이 어려웠지만 때마침 아이엠에프(IMF) 외환 위기였다.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켤 때마다 아이엠에프를 얘기했다. 때마침 촛불이 환해서 아버지 얼굴이 잘 보였다. 아이엠에프를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늘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는 게 어색해서 나도 늘 아이엠에프를 얘기했다. 같은 동네 누구는 이사를 갔고, 같은 반 누구는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래도 나는 아직 집에 살고 있고, 아르바이트를 안 해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도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기 어색했는지, 말없이 촛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침묵이 쑥스러워서, 나도 말없이 촛불을 지켜보았다.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꽤 컸다. 다행히도 그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침묵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내 이빨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어색하지 않게 계절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필 아이엠에프 시기에, 하필 전기가 끊겨서 촛불을 켜던 시기에, 너무나도 야속하게 한쪽 어금니가 썩고 있었다. 이빨은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렸다. 다른 때는 그나마 참겠는데 밥을 먹을 때 그쪽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필 여름방학이었고, 아버지랑 집에서 단둘이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쳐야 했다.

 

입속에서 어금니가 내 신경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있어도, 태연한 표정으로 밥을 씹어야 했다. 때때로 티가 안 나게 찬물로 입을 헹구며, 조금이라도 진통이 가시기를 빌었다. 조금만 견디면 개학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더 이상 아버지 앞에서 어색하게 연기할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내 어금니는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신경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너무 아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찬물을 입에 물고 있어도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치약을 한가득 발라도 마찬가지였다. 침대에 엎드려 양손으로 턱을 주무르며 밤새 끙끙 앓았다.

 

다음 날, 내 한쪽 볼은 붕어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내 손을 붙들고 치과에 데리고 갔다. 의사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차며 엄청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냐고 물었다. 하루라도 빨리 금니를 씌워야 한다고, 아마도 견적이 꽤 나올 거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토록 화난 표정의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값은 신경 쓰지 말고 당장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어금니의 썩은 부분을 한참 갈아냈다. 이빨 본을 뜨고 며칠 후에 금니를 씌우러 오라고 했다. 금니 계산은 그때 해도 된다는 얘기와 함께.

 

갈려진 어금니 때문에 밥을 먹을 때마다 한쪽으로만 씹기가 어색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제 금니를 씌우면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다며, 그때까지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생각해 놓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번쩍이는 금니를 씌우고,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이것저것 씹어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치과에 다시 가는 날은 개학 며칠 후였다. 점심시간에 아버지가 학교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는 표정으로 일부러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아버지의 표정이 그날 따라 어색했다. 치과로 함께 걸어가는 내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병원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한동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올라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며칠만 더 있다가 와도 되냐고 여쭤볼래?” 홀로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의 표정이 왜 그토록 어색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었다. 치과 입구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내려갔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좀 더 상태를 지켜보고 금니를 씌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길을 나섰다. 나도 헛기침을 하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이엠에프였고, 때마침 나 혼자 병원에 올라갔고, 때마침 아버지가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비록 한쪽 어금니는 시커먼 구멍처럼 사라졌지만, 아직 촛불을 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꽤 클 테니,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어색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조선일보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01-13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캬~

 

‘맛의 말’과 ‘말의 맛’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학교 홍보실을 경유해 들어온 한 기자의 질문, 왜 맥주를 마시고는 ‘캬∼’라고 소리를 내는지를 밝혀 달란다. 그것도 어원, 과학적 근거, 규범에 맞는 표기 등등까지 포함해서. 다소 엉뚱한 질문이지만 이 땅의 모든 말은 이유가 있다고 말해 왔으니 답을 찾아야 한다.

독한 것, 시원하게 톡 쏘는 것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고통이나 청량감 때문에 저절로 무엇인가 터질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터져야 하는 소리이니 파열음, 한글로 치자면 ‘ㅂ, ㄷ, ㄱ’ 중 하나의 소리여야 한다. 이왕이면 크게 터져야 하니 공기가 입 밖으로 많이 나오는 거센소리인 ‘ㅍ, ㅌ, ㅋ’이 더 좋다. 그래서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팡, 탕, 쾅’ 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터져야 하는가? ‘ㅍ’은 입술에서 터지는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면 ‘푸하하’라고 표현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ㅌ’은 혀끝과 이의 뒤에서 터지는데 가장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여서 기관총 소리를 ‘타타타’로 묘사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ㅋ’은 혀뿌리와 여린입천장 사이에서 터지는데 폐에서 나온 공기를 제일 먼저 터트릴 수 있으니 목을 넘어간 즉시 다시 터지는 소리는 ‘ㅋ’일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카’를 넘어 ‘캬’인가? ‘아’는 입을 가장 많이 벌려서 내는 소리이니 ‘카’라고 하면 가장 시원하게 터트릴 수 있다. 그런데 ‘야’는 입을 최소로 좁혔다 벌려야 하니 소리를 참고 또 참았다 극적으로 터트릴 수 있다. 독한 술을 마시면 차마 입을 벌리지 못하고 ‘크’ 소리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높은 알코올 도수, 탄산 등에 의한 통증 때문에 나는 소리다.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는 음료보다는 부드러운 목 넘김을 즐길 음료가 더 좋지 않을까?
문화일보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01.16 고독사(孤獨死)에 대하여

고독사(孤獨死)하는 사람의 50%가량이 50~60대 남자라는 통계가 있었다. 포인트는 나이 든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이 고독사를 한다는 사실이다. 왜 늙어가는 남자가 많이 할까? 동물 다큐에서 본 수사자의 말로와 비슷한 것 같다. 대부분의 수사자는 고독사를 한다. 암사자를 포함하여 대략 10여 마리 정도의 사자 무리를 거느린다. 평상시 사냥은 주로 암사자들이 하고 수사자는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 깔고 누워있다가 암사자들이 힘들게 사냥해온 먹잇감을 뺏어 먹는 행태를 보인다.

 

수사자가 밥값을 할 때는? 하이에나 암놈 대장을 잡아 죽일 때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드물게 하이에나는 암놈이 ‘오야붕’이다. 암사자는 하이에나 암놈 대장을 잘 못죽이는 것 같다. 수사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갈기를 휘날리며 수백m를 쫓아가 하이에나 대장의 목을 물어뜯어 버린다. 키가 큰 기린을 사냥할 때도 수사자가 기린의 뒤꽁무니를 물어뜯는 역할을 맡는다. 하이에나와 기린 잡을 때 수사자는 암사자에게 밀리터리 파워를 과시하지 않나 싶다.

 

이렇게 4~5년 살다가 외부에서 들어온 젊은 사자의 도전을 받고 패배하면 혼자 광야를 떠돌게 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 늙은 수사자 혼자서는 사냥도 힘들다. 못 먹어서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상태로 혼자 떠돌다가 숨을 헐떡거리며 결국 고독사로 끝을 맺는다. 수사자는 대부분 고독사이다. 하이에나가 이 고독사한 수사자를 발견하고 뜯어 먹는 것이다. 이것이 수컷의 숙명이란 말인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고독사한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결국 고독사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부설거사가 인생의 철리(哲理)를 갈파한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그 한 가지가 혼자 죽는 고독사에 대해서이다. ‘처자 권속이 대나무숲처럼 무성하고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였어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외로운 혼이 되어 떠나간다(臨終獨自孤魂逝).’ 수백조의 돈을 가지고 있고 수십만 명의 종업원을 부리는 재벌 오너라도 죽을 때는 ‘고혼서(孤魂逝)’라는 것이 우주의 철리이다.

 

서민이나 재벌이나 죽을 때는 똑같다. 돈 없어도 고독사이고 돈 있어도 고독사이다. 단지 고통 없이, 후회 없이 죽는 것이 고종명(考終命)이다. 근래에 고종명한 사례는 장관을 지냈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민관식(1918~2006)이다. 오전에 한 게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와인 한잔하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하였다. 88세였다. 거의 신선급의 죽음으로 기억한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01.19 세계 각국의 신기하고 별난 법률들

▲일러스트=최정진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고 했다. 그런데, 일부 국가에는 따라하기 힘든 특이하고 당황스러운 법(bizarre and baffling laws)도 있다.

 

스위스에선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화장실 물을 내려서는(flush the toilet) 안 된다. 잠자는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 소음 공해(noise pollution)로 간주된다. 명문화된 전면 금지(blanket ban stipulated in the text) 사항은 아니지만, 불문률(unwritten law)로 여겨진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욕을 하다가 적발되면(be caught swearing) 벌금, 징역형 또는 추방에 처해진다(face a fine, jail or deportation). 이 나라 형법(penal code)은 욕설을 개인 명예를 모욕하는(disgrace the honor of a person) 행위로 규정하고, 말(spoken word)뿐 아니라 문자 메시지(text message), 소셜 미디어, 상스러운 이모티콘(indecent emoticon)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스페인 일부 해변에선 모래성 쌓는(build sandcastle) 것이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 불법이다(be illegal for children and adults alike). 최고 150유로(약 21만원) 벌금형에 처해질(face a fine of up to €150) 수 있다. 꼭 쌓아야 할 이유가 있으면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신청해야(be required to apply for a municipal permit) 한다.

 

이탈리아 토리노시(市)에서 개를 기르는 시민은 하루에 최소한 세 번 산책을 시켜줘야(walk their dogs at least three times a day) 한다. 두 번만 했으면, 500유로(약 67만원) 벌금을 내야 한다. 애완 동물을 학대하거나 버리는(mistreat or abandon their pets) 행위는 1만 유로(약 1335만원) 벌금이나 1년 징역형에 처해진다.

 

볼리비아에선 기혼 여성(married woman)에게 술을 한 잔 초과해 팔 수 없다. 술기운에(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도덕적으로 흐트러져(get morally lax) 다른 남성들과 시시덕거릴(flirt with other men)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집 밖에서 한 잔을 초과해 마시면 남편에게 이혼 소송 권리(right to file for divorce)가 주어진다. 이 법은 기혼 남성들에겐 적용되지(apply to married men) 않는다.

 

태국에서 속옷을 입지(wear underwear) 않은 채 외출하면 외설죄에 관한 법률(law on public indecency) 위반으로 걸린다. 속옷 안 입은(go commando) 걸 경찰이 어찌 알고 단속을 하고(clamp down on it) 법을 집행하는지(enforce the law)는 불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포르투갈은 바닷속에서 오줌을 누는(pee in the sea) 행위를 엄벌에 처하고(throw the book at it), 싱가포르에선 공중화장실에서 물을 내리지 않고 가면(leave without flushing) 약 15만원 벌금형에 처한다. 그러나 태국의 속옷과 마찬가지로 현행범으로 적발됐다는(be caught red-handed) 실제 단속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1.23 황무지에 경제대국 세운 韓민족이 지켜야 할 진짜 전통

 영화 ‘잉글리쉬 맨’과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

1917년 6월의 어느 일요일, 서로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정도로 작은 웨일스의 한 변두리 마을. 그 마을에 작지만 큰 소동이 벌어졌다. 잉글랜드에서 온 측량사 레지날드 앤슨(휴 그랜트) 일행 때문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마을 뒷산 ‘피넌가루’의 높이를 재야 한다는 것이다. 피넌가루는 웨일스의 첫 번째 산이며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자랑거리다. 그런데 측정을 마치고 돌아온 영국인 측량사들이 내뱉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 “984피트(300미터)에요. 결과는 언덕입니다.”

 

당시 영국은 1000피트(305미터) 이상의 고도를 가진 지형을 산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웨일스의 첫 번째 산은 갑자기 언덕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 존스 목사는 ‘멘붕’에 빠진 사람들을 불러 런던으로 청원서를 보내자고 한다. 하지만 주점을 운영하는 호색한 모건의 생각은 다르다. “1000피트가 돼야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언덕을 16피트만 쌓으면 산이 돼요.” 어느새 설득된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삽과 양동이를 들고 피넌가루로 향한다. 크리스토퍼 몬거 감독의 1995년작 <잉글리쉬 맨>의 내용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야기의 화자 역할을 하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설명해주는 바에 따르면 이렇다. 웨일스는 현재 잉글랜드와 한 나라가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웨일스는 늘 함락되지 않는 독립국이었다. 로마, 앵글로색슨, 바이킹, 노르만족을 모두 물리쳤다. 어째서일까? 웨일스 인들이 먼 옛날부터 자랑스럽게 여기던 산 덕분이다. 산은 웨일스의 민족적 자존심의 근거인 셈이다.

 

게다가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사지가 멀쩡한 남자라면 전쟁터의 참호로, 혹은 광산의 갱도로 떠밀려가, 폭탄에 맞아 죽거나 석탄에 깔려 죽던 시절이었다. 친밀했던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인 측량사가 올라가서 우리의 산을 빼앗고 언덕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 답은 단 하나 뿐. 자동차를 고장 내고 기차가 안 다니는 척 하면서 저 영국인 측량사 일행의 발을 묶어두고, 재빨리 언덕 위에 흙을 쌓아 피넌가루를 명실상부한 산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잉글리쉬 맨>은 실화가 아니다. 하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실을 바꾸거나 전통을 창조하는 일은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동료 학자 다섯 명과 함께 쓴 책 <만들어진 전통>을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 홉스봄에 따르면,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여기서 홉스봄이 말하는 ‘최근’은 언제일까? 유럽의 경우 ‘전통’은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만들어졌다. 이유는 두 가지,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이전까지 부족, 가문, 마을 단위로 생각하던 이들을 국가라는 새로운 단위로 포섭했다. 민주주의는 그 국가를 다스릴 지도자를 평범한 이들의 투표로 뽑는 정치 체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가 단위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홉스봄은 19세기 이탈리아 온건파 정치가인 다젤리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이탈리아 인들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

 

이탈리아인의 자부심인 식문화만 해도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토마토를 요리에 사용한 문헌 기록은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처럼 널리 먹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남자도 치마를 입고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마치 수백 년 넘게 사랑받은 전통 같지만 그렇지 않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통합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구하기 전까지 그러한 ‘하이랜더’의 풍속은 오히려 저급하고 꺼림칙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전통이 그렇다. 실은 ‘만들어진 전통’인 것이다.

 

설 명절을 하루 앞둔 오늘 독자 여러분께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전통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더 잘 가꿔나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매년 설과 추석을 앞두고 언론에 등장하는 ‘올바른 상차림’ 등도 그렇지만, 설날을 정하는 ‘전통 달력’ 역시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그리 먼 과거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음력 자체가 1653년에 시행된 시헌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시헌력은 청나라에 온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이 기존 음력에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만들어낸 달력이니 말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음력을 철폐하고 모든 명절을 양력에 맞췄다. 그러나 한일 양국을 비교하자면 일본은 명절을 기존의 형식 그대로 고수하는 편에 가깝고, 우리는 좀 더 유연하다. 가령 요즘 차례나 제사상에서 알록달록하고 단단한 옛날 사탕인 옥춘당(玉春糖)을 보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한국화된 마카롱인 ‘뚱카롱’을 올렸다는 인증샷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과거에 얽매이고 짓눌려 있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전통이 만들어진 것이라 한탄하는 대신, 더 좋은 전통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짜 전통’ 아닐까.

 

<잉글리쉬 맨>으로 돌아가 보자. 앤슨은 월요일에 떠나야만 한다. 피넌가루를 높이려면 거룩한 안식일인 일요일에 삽을 들고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의 전통과 교회의 율법이 충돌하는 상황. 존스 목사는 교회에 모인 이들에게 설교한다. “이것은 기도입니다. 흙으로 빚은 기도죠. 흙더미를 쌓을 때 분명히 주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겁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오길 바랍니다. 위에서 봅시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정한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인은 언덕도 아닌 황무지를 물려받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손색없는 민주국가라는 높은 산을 쌓아올렸다. 평범한 사람 모두가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우리의 경제적 전통이라면, 아무리 큰 권력을 쥔 사람이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민주적 전통일 것이다. 설 명절을 맞아 우리가 되새겨보아야 할 ‘진짜’ 전통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이어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조선일보 노정태·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01.26 아흔 아버지 요양병원 보냈지만 결국...효도보다 힘든 돈감당

 

“환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에서 한마디도 안 해주는 거죠?”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보호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스테이션(간호사 업무 공간)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지만 현실에서는 더 흔하다.

 

“주 보호자인 첫째 아드님에게 지난번 말씀드렸어요. 환자분 폐에 물이 많이 찼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전화로 설명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열심히 투석해서 잠깐 좋아지셨지만 워낙 고령이라 다시 폐가 안 좋아지신 거고요.”

 

수간호사 선생님의 설명이 부족했던 건지, 더 높은 사람을 찾았던 건지 결국 병원 부원장님까지 전화를 이어받았다.

 

“그래도 병원에서 다시 저한테 말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 어떡하실 거예요?”

 

환자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은 건지 우리야말로 묻고 싶었다.

 

“저희가 지난번에 적극적인 치료를 원하시면 대학병원에 갈 수 있도록 진료의뢰서를 써드린다고 했지만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환자분 연세가 아흔이 넘었고 몸무게가 40㎏ 안 돼서 기력이 없으세요. 일주일에 3~4번씩 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오시는 것 자체가 힘드실 거고 낙상의 위험도 큽니다. 이곳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대처하기도 어렵고요.”

 

“그럼 여기서 치료를 못 해주겠다는 건가요?”

“대학병원이 싫으시면 투석이 가능한 요양병원이라도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라는 건가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보호자는 환자를 큰 병원으로 보내겠다며 진료의뢰서를 받아 갔지만 결국 요양병원으로 보냈다. 그것도 잠시, 환자는 한 달 만에 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다시 왔다. “요양병원 입원비가 생각보다 부담스럽더라고요.” 보호자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환자가 돌아온 것이다. 간호사로 일을 시작하고부터 이런 일은 정말 많이 겪었다.

 

환자들의 노후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은 두 가지다. 나는 부모님의 노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 한 가지, 내 노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나는 부모님이 아프시면 잘해야지’ ‘부모님이 잘 키워주셨으니 병원비 걱정은 안 하시게끔 해야지’라는 생각은 늘 한다. 하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처음에야 부모님을 걱정하는 마음이 크겠지만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진상 보호자들을 보고 있으면 속상하지만 마냥 비난할 순 없다. 가족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를 나는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노후를 생각해 보자.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너무 오래 살까봐 걱정이다. 통계청 자료를 기준으로 2021년도 여자의 기대수명은 86.6세이다. 이 정도라면 내 기대수명이 100살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60대에 은퇴한 다음, 돈을 벌지 않고 40년 정도 더 살아야 하는 것이 무섭기까지 하다. 일단 은퇴하기 전에 노후자금을 열심히 모으는 수밖에. 그 환자는 본인의 노후자금을 열심히 모으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 그것보다는 자식을 부족함 없이 키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이도 젊은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하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매일 출근하면 마주하는 문제라 어쩔 수 없다. 간호사이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남들보다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너무 빨리 알아서 가끔 피로감이 들 때도 있지만 늦게 안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부모님의 노후를 잘 보살피고 나의 노후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좋은 방법?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매일같이 고민하고 있지만 남들보다 먼저 정답을 찾긴 어려울 것 같다.

조선일보 박소진 간호사

 

01.27 돌고 도는 돈의 역사

미국 돈인 달러화(貨)와 한국 돈인 원화가 원래는 같은 단위였다고 하면 놀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이 달러화를 자국 화폐 단위로 사용하게 된 것은 ‘스페인 달러’의 영향이다. 스페인 달러란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에서 주조한 8레알(real)짜리 은화를 말한다. 독자 화폐가 없었던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와중에 스페인 달러가 내국 통화처럼 대량 유통되었고, 이 영향으로 독립 후에 달러가 공식 화폐 단위로 채택되었다. 막대한 발행량을 자랑하는 스페인 달러는 17세기 이후 세계 각지에서 통용되었는데, 특히 아시아 무역에서는 ‘trade dollar’(무역은·貿易銀)로 불리며 기축통화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 3국의 화폐 단위가 ‘圓(원·엔·위안)’이 된 배경에는 ‘홍콩 빅토리아 은화’의 존재가 있다. 홍콩을 조차한 영국이 1866년 홍콩에서 발행한 이 은화에는 영어 ‘HONG KONG ONE DOLLAR’와 중국어 ‘香港一圓’이 병기되어 있다. 즉 ‘1dollar=1圓’으로 등치시킨 것인데, 남중국에서 스페인 달러를 원전(圓錢)으로 부르던 관습에 착안하여 이러한 단위를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1871년 근대식 화폐 제도 도입을 위해 신화조례(新貨條例)를 제정하는데, 이때 홍콩 은화를 모델로 삼으면서 ‘圓(yen)’이 공식 화폐 단위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圓은 円으로 약자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1889년 광동성에서 圓(yuan) 단위의 은화가 최초로 발행되었고, 1903년부터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공식 화폐 단위로 공인되었다. 중국에서 圓은 元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한국에선 1901년 화폐조례나 1953년 화폐개혁으로 ‘환(圜)’이 통화 단위로 사용된 적이 있으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圓(won)이 화폐 단위로 정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돌고 돌기에 돈이라는 말이 있듯 돈의 이름에도 돌고 도는 역사가 있다. 새해는 모두에게 돈이 잘 도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02.02 뮌헨에서 시작된 기적의 드라마, 김재관 이야기

한강의 기적은 대통령, 기업인의 리더십만으론 불가능
그들 뒤에서 구체적 밑그림을 그린 영웅들이 있었다

한국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돼 유럽에 전투기, 탱크, 자주포를 수출하는 전무후무할 나라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거인들이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도 분명히 기적의 한 요인일 것이다. 광개토대왕 같은 사람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과 기술 문외한이었다. 구체적인 산업 전망과 그 설계도를 그릴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대통령과 기업 회장의 리더십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없던 1960~1970년대에 고도 공업국가의 기반이 닦였는지 늘 의문이었다. 한 분이 보내준 책에서 그 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기적의 역사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또 절감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표준연구소를 방문할 당시 설명을 하고있는 김재관 박사 (1979.2.22.)/(사)김재관 박사 기념관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홍하상·백년동안)’이라는 책으로 김재관(1933~2017)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김재관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산업은행과 서독 유학생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그런데 산업은행에서 유학 기간에도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였다. 이 대통령은 과학을 몰랐지만 미국에서 MIT를 둘러보며 여기에 나라가 죽고 사는 게 달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산은은 김재관에게 출국 때까지 국내 산업 현장을 둘러보라고 알선까지 해줬다. 전쟁 직후 형편없는 시절이었지만 한국은 싹수가 있는 나라였다.

 

김재관은 부산 피란 시절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미군 무기들이 모두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뮌헨공대에서 그의 전공은 이때 이미 금속학으로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적 제철소인 데마크 종합기획실에 들어갔다.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을 얻으려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에 돈 벌러 간 광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의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한 그 방문이다.

 

박 대통령은 유학생들을 초청해 조찬 모임을 했다. 박 대통령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한 명이 걸어나왔다. 김재관이었다. 박정희와 김재관의 첫 만남이자 한국 산업사에 기록될 순간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국 철강 공업 육성방안’이라는 두툼한 논문을 전달했다.

 

1964년 김재관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뮌헨에서 전달한 한국 최초 종합제철 계획안./(사)김재관 박사 기념관

 

김재관은 유학과 직장 생활 내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짓는 문제에 골몰했다. 제철소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국가적 과제였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제철과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아는 한국인 자체가 없었다. 금속학을 공부하고 세계 굴지의 제철소 종합기획실에서 일한 김재관은 한국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김재관을 눈여겨보았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첫 번째 해외 유치 과학자 18명중 한 명으로 그를 불러 제1연구부장을 맡겼다. 박정희는 제철소 건설을 일본에서 받아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일본은 그 돈을 타당하게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그 임무를 김재관이 맡았다. 중대한 기로였다. 협상은 도쿄에서 열렸다.

 

놀라운 것은 30대 중반인 그가 그때 이미 10년, 20년 뒤 우리 산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동차와 조선에 쓰이는 특수강까지 만드는 제철소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 같은 김재관의 제철소 방안에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제철소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결국 일본은 김재관 방안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포항종합제철(포스코) 신화의 시작이다. 그가 그린 포스코 공장 배치도는 20년 뒤 생산 규모가 9배로 커졌는데도 조금도 변경없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 후 김재관은 KIST에서 ‘한국 기계공업 육성 방안’을 보고하고 박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다.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골간이 선철, 특수강, 중기계, 조선이었다. 선철과 특수강은 산업의 쌀인 동시에 대포 등 무기를 만드는 재료였다. 김재관은 뮌헨공대에서 독일군 함포와 대포의 금속 조성을 공부해놓고 있었다. 중기계는 탱크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조선은 유조선과 동시에 군함도 만들었다.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로 임명했다. 김 차관보는 일부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해 ‘한국형 승용차 양산화’ 계획을 채택시킨다. 조선과 자동차 모두 당시 기업인들은 손을 저었으나 유일하게 정주영 회장이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신화의 시작이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ADD(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 임명한다. 임명된 날 당시 심문택 소장, 김재관, KIST 조선 담당 김훈철 세 사람은 남해 한산도 충무공 사당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전무퇴로 국방기술을 완성한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ADD에서 미사일까지 나왔다. 당시 박 대통령이 KIST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면 그 자리에서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의 이 나라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결과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기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웅이 있다. 그들을 알고 기리는 것 이상의 후세 교육이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02-03 ‘지옥철’ 이야기

 

현대인에게 불평은 생활의 일부다. 나도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주 불평을 늘어놓는다. 특히 이미 정착된 것들의 불합리성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을 때 그렇다. 이 불만이 분한 마음과 맹목적인 분노로 이어지면 무척 해로워진다.

서울의 지하철은 그런 점에서 불평할 게 하나도 없는 시설이다. 도쿄의 지하철은 한 손으로 루빅큐브를 푸는 것 같고, 파리의 지하철은 혼잡해서 뚜껑을 닫는 순간 항상 미끄러져 들어가는 정어리들로 채워진 통조림 같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심지어 열차 내에서 맥주 마시는 게 허용되는 베를린 지하철은 비음주자에겐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세계 지하철 중에서도 으뜸은 뉴욕 지하철이다. 마치 오래된 감옥처럼 그 자체의 불문율과 모든 종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970년대 도시의 파산 후 뉴욕의 지하철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 되어버린 이 시설에 시민들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가끔 무척 따분할 때 어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들어가 본다. 이 계정에는 뉴욕 퀸스와 브루클린, 맨해튼, 롱아일랜드, 브롱크스를 연결하는 노선들에서 찍은 영상이 나오는데, 예를 들자면 반려동물을 데리고 열차에 탑승하는 승객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반려동물은 강아지나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게 아니라 집채만 한 뱀이나 앵무새, 거미, 메뚜기 같은 동물이다. 쥐로 말할 것 같으면 승강장에 한 무리의 쥐 가족이 나타나 열차에까지 들어간다고 해도 모두 태연한 모습이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외계인이나 식인종으로 변장한 사람들의 영상, 폭행이나 사망과 같이 지나친 장난을 꾸며내는 틱토커(‘틱톡’ 인플루언서)나 유튜버의 영상, ‘방귀학(Fartology)’ 따위의 제목이 적힌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사진, 투명 비닐봉지에서 거대한 게 다리를 꺼내 먹으며 국물이 옷에 다 흘러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영상, 어깨에 사람 크기의 십자가를 지고 타는 사람이나 시동 걸린 오토바이를 타고 승차하는 사람들의 영상들이다.

나도 몇 년 전, 뉴욕의 지하철에서 황당한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다. 3월의 어느 목요일 오후 8시, 아내와 함께 23번가에서 브루클린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고 있었다. 야간 막차도 아니었다. 평범한 시간에, 변두리도 아닌 평범한 상업 지구를 지나고 있었다.

 

23번가 역에서 열차에 탑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연주였다.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기 전까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원인을 발견했다. 다 쓴 기저귀 하나가 문 근처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물론 주변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 문을 통해 탑승하는 사람들도 빠르게 다른 열차나 자리로 피해 앉았다. 당연했다.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남자는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 강줄기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고서는 저토록 고통에 찬 눈물을 흘릴 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색소폰 연주자는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을 연주했다. 이 모든 일이 열차 한 칸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뉴욕 지하철에는 총 6418대의 열차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지하철을 도시 주민들의 정신 건강을 측정하는 사회적 실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서울의 지하철 요금이 오른다는 소식에 마냥 불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예전에 서울의 지하철에서 보았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70대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홍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홍색 모자에 별 모양 렌즈의 선글라스도 쓰고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에서 그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한국계 뉴요커인가?’ 그러나 그는 뉴욕의 ‘민폐’ 승객들보다 훨씬 건전한 방식으로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었다. 앞으로 안전성과 쾌적함을 더 높인다면 서울 지하철에 굳이 더 필요한 것은 아마 나처럼 따분한 승객들을 위한 소소한 개성과 재미 정도가 아닐까.
동아일보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02.05 ‘야바위 얼굴’만 즐비한 시대, 3만원권도 만들자는 발상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
3만원권 발행 소동을 보며

 

오두막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년 어니스트는 아버지가 없었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는 학교도 가지 못했다. 착하고 영특한 소년의 자질을 알아보고 따로 챙겨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이름 그대로 정직하고 선량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저 먼 산의 큰 바위 얼굴이 언제나 고개를 들면 어니스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유현호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 옛날 이 골짜기에 살던 원주민들의 전설에 따르면 언젠가 이 골짜기에 저 바위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 실로 고귀하고 바람직한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니스트는 어머니가 말해준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너는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이 말을 마음에 새긴 어니스트는 힘겨운 노동으로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누군가를 만날 그날을 고대하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갔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 발표한 소설 <큰 바위 얼굴>의 내용이다. 그 마을 출신 부자, 군인, 정치가가 큰 도시로 나가 성공을 거둔 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라는 환호성 속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기대를 품고 찾아간 어니스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실망한다. “전혀, 조금도 닮지 않았어.” 그렇게 노인이 된 어니스트를 본 시인이 외친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한평생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던 어니스트는 결국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됐다.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아 스스로의 인격을 키워나간 것이다. 역할 모델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표현이지만 엄연히 누군가 만들어낸 학술적 개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Robert Merton)이 바로 그 저작권자다.

 

1910년 필라델피아 남부 빈민촌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소년 메이어 로버트 스콜니크. 취미가 마술이었던 영특한 소년은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기 위해 열네 살 어린 나이부터 마술 무대에 올랐다. 그는 전설적인 탈출 마술사 로버트 후딘에게서 ‘로버트’를, 아서 왕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으로부터 멀린(Merlin)’을 따와 ‘로버트 멀린’이라는 무대명을 지었고, ‘멀린’이 다소 낯설게 들린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로버트 머턴’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서 공부하여 현대 사회학의 거목이 된 것이다.

 

역할 모델이란 무엇일까? 인류에게는 모방 본능이 있다. 눈앞의 누군가와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며 보고 듣고 따라 하는 대상을 머턴은 ‘준거적 개인’(reference individual)으로 정의한다. ‘선배님은 제 롤 모델이에요’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여기서 쓰이는 ‘롤 모델’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역할 모델이 아니라 준거적 개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역할 모델은 추상화된 개념이다. 우리는 역할 모델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역할 모델이 표상하는 몇몇 요소를 추상화, 동일시, 모사한다. 가까운 예로 로버트 머턴의 역할 모델이었던 마법사 멀린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가난한 유대인 소년이 스스로를 멀린이라 소개했던 것은 멀린의 지혜와 용기를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본인이 전설 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큰 바위 얼굴>도 마찬가지다. 어니스트는 아버지가 없다. 학교를 가지 못했으니 선생님도 없다. 준거적 개인을 갖지 못한 불우한 소년이다. 대신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큰 바위 얼굴처럼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강인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른 이들을 바른길로 이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큰 바위 얼굴은 우연히 만들어진 바윗덩어리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로 삼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니스트는 돌멩이가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볼 때다.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지폐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왜일까? 인류는 수백만 년간 모여 살면서 다른 인간의 얼굴과 표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도록 진화해 왔다. 사람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최선의 위조 방지 도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듯 화폐 속 인물을 자주 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라가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역할 모델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갑을 열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종은 훌륭한 군주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무관한 유학자 두 명도 의아하지만, 조선시대의 ‘현모양처’를 여성 인물로 제시한 것은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데 지갑 속에는 여전히 조선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불거진 3만원권 발행 논란을 보면 그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지난 2022년 6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1년 경제주체별 현금사용행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가구의 전체 지출액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1.6%에 불과한 반면, 58.3%의 지출이 신용‧체크카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카들 세뱃돈 주는데 5만원은 부담스럽고 1만원은 부족하니 3만원권이 필요하다는 한 아티스트의 자유분방한 발언에 정치권 일각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정치인이 범국민적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정치에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좋은 롤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요즘은 정반대다. 온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을 큰 바위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본인이 했던 일도 안 했다고 우기며 피해자 행세를 하는 ‘야바위 얼굴’만 즐비하다. 역할 모델은 고사하고 반면교사도 못 될 사람들. 어니스트가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뭘 보고 배울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가난한 소년 어니스트도 자수성가할 수 있는 그런 나라의 역할 모델, 우리의 큰 바위 얼굴은 어디에 있는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02.11 감동을 주는 양형

▲일러스트=김영석

 

얼마 전 인천지방법원 형사 재판부는 38년간 돌본 중증 장애인 딸을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을 선고하여 구속을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몸이 아픈 딸을 돌보았고, 딸이 대장암 진단 후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모습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관대하게 처분한 것입니다. 재판부로서도 살인죄에 대해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형을 선고하는 데에 고민이 많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재판 며칠 후 검사도 항소를 포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소식을 전해오기 마련인 법원과 검찰이 보내온 훈훈한 소식이었습니다.

 

형사재판을 할 때 범죄 사실의 인정 여부가 애매하여 고민스러운 경우도 많지만, 유죄의 경우라도 형을 얼마로 정할 것인지, 즉 양형(量刑)이 괴로울 정도로 고민스러운 경우도 많습니다. 또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의 주관에 따라서 양형에 차이가 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형 기준을 미리 정하여 놓고 이를 참고하도록 하고 있지만, 그 기준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도 정해진 양형 기준을 어떻게 이해하여 적용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젊은 판사 시절 경험했던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사건입니다.

 

15세 소년 피고인은 부모와 동생과 살면서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어 사실상 가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노동을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소년과 어머니의 돈을 빼앗아 술을 마시고, 취하면 가족을 때리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려 집주인이 셋방을 비워달라고 요구한 상태입니다.

 

사건 당일 소년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있고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와 동생을 피신시켜 놓았습니다. 소년이 어렵사리 아버지를 방으로 끌어넣자 아버지는 지쳐 잠이 듭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피고인은 “차라리 아버지가 없으면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이르고, 그만 허리띠로 아버지 목을 졸라 살해합니다. 소년은 아버지 시신 곁에서 울면서 밤을 새웁니다. 새벽에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와 그 광경을 목격합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학교에 보내놓고 소년과 함께 그 곁에서 울다가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를 합니다.

 

법정은 울음바다였습니다. 소년은 아버지를 죽인 자기를 죽여달라고 소리치며 웁니다. 어머니는 이 아들이 없으면 자기는 살아갈 수 없다고 웁니다. 동네 사람들도 소년에 대한 관용을 탄원합니다.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년을 어머니 품에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형법은 단순 살인죄와 달리 부모 등 존속을 살해하는 것은 더 무겁게 처벌하도록 하고 있어서(살인죄는 법정형 최소한이 5년이나 존속살인은 무기징역임), 존속살인의 경우 살인과 달리 사실상 집행유예가 불가능합니다. 법률상 허용되는 감경(減輕)을 두 번을 해도 선고형이 집행유예가 가능한 징역 3년 이하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법원 소년부로의 송치나 자수에 따른 형 면제까지도 생각해보았지만, 존속살인이라는 죄명과 거역하기 어려운 인습의 무게에 짓눌려 자수를 이유로 법률상 감경을 하고, 다시 정상을 참작한 감경을 한번 더 하여 징역 5년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더 지혜롭고 용기 있는 고등법원 재판부를 만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가끔 소년과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지금도 그 사건의 정답이라 할 만한 형량은 얼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감동을 주는 양형은 고뇌의 수고가 필요한 예술 작업과 흡사합니다.

조선일보 김황식 전 국무총리

 

02.15 치즈

웬만한 나라와 민족에게는 건국신화가 있다. 거기에는 여성이 빠질 수 없다. 한민족에게는 웅녀(熊女)가 있고, 중국인들에게는 서왕모(西王母)가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게는 이자나미(伊邪那美)가 있다.

 

네덜란드 건국신화의 주인공은 홀란디아(Hollandia)라는 여성이다. 두툼한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상황에 따라 투구를 쓰기도 하고, 망치나 부지깽이를 쥐기도 한다. 홀란디아는, 모든 면에서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네덜란드가 건국신화에도 실용성을 발휘한 결과다. 16세기 후반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던 네덜란드는 일상 속의 평범한 아줌마를 건국신화에 주입했다.

 

네덜란드가 거대한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80년간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를 바다에 띄우고 국제무역을 선도했다. 그 시기를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는 남자들이 드물었다. 세계로 흩어져 식민지를 개척하고 장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내에 남은 여자들이 남자들의 험한 일까지 도맡았다.

 

황금시대의 특징은 청결이다. 네덜란드 가정의 부엌은 유난히 깨끗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여자들은 깔끔한 것으로 유명했다. 현대 경제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그 깔끔함의 근원을 낙농업에서 찾았다. 네덜란드 여자들은, 치즈와 버터를 비싸게 팔려면 소젖을 짤 때부터 박테리아 번식을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밖에서 힘든 일을 끝마친 아줌마들은 집에 와서 손부터 씻은 뒤 억척같이 쓸고, 닦고, 삶고, 빨래질했다. 그들 모두가 홀란디아였다.

 

덕분에 ‘네덜란드 하녀’는 가성비 높은 노동자라는 정평이 났다. 프랑스와 스위스가 그녀들을 수입해서 청결의 비결을 터득했다. 불순한 박테리아가 통제되면서 코망베르, 브리, 그뤼예르, 에멘탈 같은 명품 치즈들이 탄생했다. 청결이 새로운 맛의 세계를 열었다.

조선일보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02.17 진주성 함락 직전 마지막 음식…남편·자식 향한 절절한 마음

임진왜란과 진주비빔밥

몇 해 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미국서 귀국한 일이 있다. 그때 옆자리에 미국인이 앉았는데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나온다는 이유로 우리 국적기를 탄다는 말을 듣고 적지 아니 놀랐다. 지금은 비빔밥이 미국인의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잘 잡아 더 놀랄 일은 아니다.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위해 한국식당을 즐겨 찾는 미국인을 현지에서 곧잘 발견한다. 비빔밥이 미국인의 구미에 맞아서인데 건강식품으로 자리 잡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과체중에 시달리는 미국인에게 날씬한 한국인은 부러움의 대상으로 이런 날씬함의 비결을 미국인은 비빔밥과 같은 건강식품에서 찾는다.

전주와 진주, 비빔밥 원조는 어디?

▲경남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진주성 전경. 성 둘레가 1760m에 이른다. 사진 가운데서 오른쪽으로 남강 벼랑 위에 세운 촉석루가 보인다. [사진 진주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비빔밥의 원조는 어디일까. 대부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북 전주를 꼽는다. 그래서 전주비빔밥은 우리에게 고유명사로 각인된 지 이미 오래다. 그렇지만 경남 진주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 금세 굳어진다. 진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비빔밥의 탄생지로 알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그래서 비빔밥의 원조를 두고 전주와 진주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면 쉽게 그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런 논쟁을 자주 경험했는데 어머니 고향이 전주이고, 아버지 고향이 진주 생활권에 속하는 산청이어서다.

 

내 아버지는 고향에 갈 때마다 진주 중앙시장 안에 있는 제일식당을 늘 찾았다. 이 식당은 시장 안에 있어 허름해도 진주비빔밥의 전통을 지닌 유명한 곳이다. 이 허름한 식당에 LG그룹 구자경 선대회장도 자주 들렸다. 그의 고향이 진주여서지만 이 식당 비빔밥이 그의 입맛을 사로잡아서다. 그런데 구씨 집안은 우리나라 재벌 중에서 입맛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LG그룹이 서울 테헤란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운영했을 때 이 호텔 식당에서 전경련 회의가 열렸던 건 구씨 집안의 탁월한 미각 때문이다. 중앙시장 입구에도 천황식당이란 비빔밥 전문식당이 있는데, 여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들려서 유명해진 곳이다.

김시민의 진주대첩 쾌거서 한몫
빨리 먹고 소화 잘되는 전투식량

병사들 먹기 쉽게 나물 숨 다 죽여
원기 채우려 육회 얹는 것도 특징

2차대첩서 패하며 6만여명 희생
400년 전 전투의 뜨거운 감동이…

 

전주비빔밥은 육회 대신 익힌 고기

▲임진왜란의 기억이 담긴 제일식당 진주비빔밥 과 해장국. [사진 김정탁]

 

진주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의 차이는 언뜻 봐도 잘 드러난다. 가장 큰 차이는 비빔밥을 구성하는 나물 상태이다. 진주비빔밥은 나물을 삶고 나서 숨을 다 죽이는 데 반해 전주비빔밥은 나물을 삶았는데도 여전히 숨이 살아 있다. 진주비빔밥에서 나물의 숨이 죽은 건 나물을 무칠 때 많이 치대어 비벼서다. 그런 탓인지 진주비빔밥은 잘 치대지는 호박나물·숙주나물·고사리나물을 주로 사용한다. 이에 반해 전주비빔밥은 나물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래서 나물의 갖가지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 비빔밥 모양이 제법 화려하다. 이런 화려함이 미각에 앞서 우리 시각을 자극하는 요인이지 않을까.

 

진주비빔밥이 나물의 숨을 죽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진주대첩 때 병사들에게 제공되던 일종의 전투식량이어서다.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산성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데 이 싸움에서 아군이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이 승리에 비빔밥이 한몫했다. 좋은 전투식량이 되려면 병사들이 빨리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소화도 잘돼야 한다. 진주비빔밥은 이런 요건을 갖추기 위해 나물의 숨을 최대한 죽였다. 여기에 육회를 얹은 건 잘 싸우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다. 한편 전주비빔밥은 육회 대신 익힌 쇠고기를 채 썰 듯 썰어서 놓는다. 지금은 진주비빔밥을 흉내 내선지 전주 돌솥비빔밥에는 육회를 얹는다.

 

▲김시민 장군 영정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인 1592년 10월에 있었다.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2만여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와 최경회 군대는 진주성 바깥에서 일본군 배후를 공격해 아군의 공격력을 높였다. 한양이 함락되고 왕도 멀리 도망갔으니 항복을 권유했어도 김시민은 결연히 싸움을 택했다. 이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는데 그의 명성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한동안 일본인에게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다. 목사가 일본어 발음으로 ‘모쿠소(木曾)’인데 두렵다는 의미로 자리 잡아서다. 이 싸움의 승리로 호남의 곡창지대가 지켜졌다.

 

▲조선시대 ‘진주성도’ 중 촉석루 부분. [사진 문화재청]

 

그런데 진주성 싸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1년도 채 안 돼 1593년 6월에 다시 벌어졌다. 싸움이 다시 벌어진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 싸움이 있기 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진행돼 일본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돼 있었다. 이에 한양에 머물던 고니시 군과 함경도로 진출했던 가토 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진주대첩 패배로 자존심이 크게 상한 도요토미가 남해안으로 내려가던 일본군에게 총동원령을 발동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니 한풀이로 싸움을 걸었다. 명나라는 휴전협정 위반으로 이 싸움을 말려야 했는데도 협상 타결에 급급한 나머지 도요토미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 방치했다.

 

의병장 최경회와 논개의 최후

▲진주성의 중심인 촉석루 가을 정경. [사진 진주시]

 

아군 측에서도 싸움의 재개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한쪽은 진주성이 이미 고립되었으니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다른 한쪽은 진주성이 험준한 곳에 있어 사수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적군을 상대하기에 버거우므로 전략적으로는 진주성을 비우고 주위 산성 등으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를 두고 청야(淸野)작전이라 한다. 의병장 곽재우도 이 방책을 지지해서 진주성에 함께 들어가 싸우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군은 함양 황석산성 전투 등에서 청야작전을 벌여 일본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대처한 바 있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와 달리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지 못했던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논개가 왜군 장수를 껴안은 채 몸을 던진 의암과 의암사. [사진 진주시]

 

▲논개 영정

 

2차 진주대첩 때는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진주목사 서예원을 대신해 전투의 총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9만여 군사를 진주성 바깥에 집결시킨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일간 쉬지 않고 공격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3500여 조선 병사와 6만여 백성은 성안에서 장렬히 싸우다 죽거나 포로가 되어 학살되었다. 죽은 장수로는 충남 금산 이치전투의 영웅 황진(黃進)도 있었고, 호남 의병장 출신 최경회(崔慶會)도 있었다. 이들의 죽음은 사실상 예고된 거나 다름없었기에 아무리 장렬한 죽음이라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논개의 의로운 죽음도 이로써 생겨났다. 첫 부인과 사별한 최경회가 논개를 내실로 삼았기에 논개도 남편의 길을 주저 없이 따라서다.

 

치열한 충정이 담긴 비빔밥 한 그릇

▲진주대첩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려 진주성 안에 세운 추모단. [사진 진주시]

 

야사에 따르면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날 성안에 있던 모든 병사와 백성들은 다음날 성이 함락될 것을 미리 알고 함께 식사했다. 이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모든 식자재를 한꺼번에 모아서 비볐다. 그러니 마지막 식사도 비빔밥이었던 셈이다.

 

이 비빔밥을 함께 먹을 때 이들이 지녔던 비장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음날 동문이 뚫리면서 여기로 일본군이 몰려들어 오자 전투는 끝이 났다. 동문이 뚫린 건 경상감사 김수(金睟)가 성의 규모가 작다고 해 동쪽의 낮은 평지를 확장해서 다시 성을 쌓아서다. 일본군은 여기를 노렸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동문에 이르면 40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죽은 이들의 비통함이 여전히 가슴에 전해진다.

 

전주비빔밥이 호남의 풍부한 물산과 멋에서 비롯되었다면 진주비빔밥은 치열한 전투의 소산이다. 이 때문에 전주비빔밥에선 부잣집 며느리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고, 진주비빔밥에선 내 자식 내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뜨거운 모성애가 느껴진다. 어떤 비빔밥을 선택할지는 먹는 사람의 몫이다. 그렇지만 비빔밥에 스토리가 얹히면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이런 점에서 진주비빔밥의 스토리가 훨씬 가슴으로 와 닿는다. 이 감동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퇴역군인 샌더스 대령 스토리나 ‘바바리코트’의 전투용 비옷 스토리와 비교될 수 없다. 거기에 더해 남편 최경회를 위해 논개가 정성껏 마련한 비빔밥이라면 더욱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02.18 유해인간을 포획하라

최고령 생존자의 장수 비결
“유해한 인간을 멀리하라”
국민 건강 좀먹는 유해인간
이제는 작정하고 퇴치해야

▲/미드저니

 

‘유해인간’(有害人間)은 발암 물질 1급에 준한다. 오래된 생각이다.

현재 생존 최고령 인간은 116세 마리아 브라냐스 모레라 할머니다. 지난달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에는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해 ‘최고령 코로나 생존자’에 등극했고 여전히 건강하시다. “늙었지만 어리석지는 않다”며 밝힌 그만의 장수 비결이 있다. 유해인간(les persones tòxiques)을 피하라는 것. 누군가 극도의 울화를 유발하면, 그냥 의식에서 지우라는 조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최소한 지금 한국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유해한 놈일수록 무자비한 먹성으로 더 크게 생장하고, 해당 생태계를 접수하며, 명줄까지 길어 오랫동안 시야에서 알짱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만만한 동네에서 먹이사슬을 찢어놓는 공포의 잡어(雜魚) 블루길이나 큰입배스처럼, 왕성한 활동량으로 일상의 수면을 끊임없이 뒤집어놓는다. 심지어 TV에도 자주 나온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다.

 

아르헨티나 작가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가 쓴 책이 있으니 제목이 ‘유해인간’이다. 언어폭력자, 사이코패스, 조종자 등 13종의 유해인간을 일별한 뒤 “후회나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로 이들을 정의한다. 남의 인생을 곧잘 파탄 내지만 결코 사과하지 않으며 “자신의 본모습을 들켰다고 느끼면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속칭 ‘진실의 주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진실은 자기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다.”

 

며느리도 모를 진실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들은 대체로 성공한다. 늘 궁금하곤 했다. 왜 유독할수록 잘나가는가. 중국 고전 ‘채근담’에 그 답이 적혀 있다. “저들과 다투면 대개는 군자가 패한다.” 지독하니까. 어렵잖게 몇몇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의 입신양명이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오랜 세월 구축돼온 도덕적 생태계 교란, 세태 문란이다. 능숙한 의태와 파렴치에 기반한 끈질긴 생존력. 작정하고 막지 않으면 모두가 이 섭식 활동을 답습하려 들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이미 그렇게 됐다.

 

자신의 유해성을 무료 검진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 ‘유해인간 테스트’(The toxic person test)가 있다. 지난 한 달간 126만명이 설문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홈페이지 대문에 “당신은 어느 유형의 유해인간인가, 우리는 모두 때때로 고약하지만 자기 인식이 해결의 첫발이 될 수 있다”고 적혀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타인에게 유해하다. 그래서 보통은 스스로 살피고 서로 조심한다. 진정한 유해인간은 그러나 끝내 자신의 무해성을 주장한다. 올바른 의사와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들의 자정(自淨)을 기다리다간 잡아먹힌다.

 

이맘때 각 지자체는 유해조수(鳥獸) 포획을 시작한다. 포수 등으로 특별 기동대를 구성한다. 까치·까마귀는 마리당 5000원, 뉴트리아는 2만원, 멧돼지는 20만원 수준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꿩이나 직박구리, 고라니·청설모·두더지에게 무슨 악의가 있겠는가.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쳤고, 그러다 숫자가 너무 커졌을 따름이다. 배를 채우려 야음을 틈타 논밭을 털고, 가축을 물어 죽이고, 불가피하게 병균과 분변을 날렸을 뿐. 사정은 딱하지만 수렵에도 악의는 없다. 단지 마을의 법도를 지키려는 것뿐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모레라 할머니께는 송구하지만, 고로 회피는 지금 한국에서 최선이 아니다. 오물은 더러워 피하는 것이라는 냉소, 이것이 유해인간의 번식을 오래 방치해왔다. 국민의 수명, 생명권과 직결되는 문제다. 치워야 한다.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02.21 시대적 죽음에 관하여

백쉰아홉의 죽음은 이제 삼백넷의 죽음처럼 진열되고 유통된다
‘예견된 참사’ 같은 공허한 말 늘어놓으며 분노·증오를 파는 이들
축제판에서 장송곡 후렴이 반복된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일러스트=이철원

 
 

정치와 결합한 죽음은 재화로서 가치를 지닌다. 대량생산에 따른 공급 과잉이 시장 확대를 위한 전쟁으로 해소됐듯, 대형 참사로 벌어진 집단적 죽음이 의석 확대를 위한 정쟁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이 땅의 죽음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이제 죽음은 소비재로서 포장되고 유통되며 진열되고 있다. 본질을 겹겹이 둘러싼 채 그 부피만 키워가는 것은 대체로 진실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다. 단 하나의 죽음도, 백쉰아홉의 죽음도 진실은 결국 하나다. 그러나 백쉰아홉의 죽음은 마치 백쉰아홉의 진실을 요구하는 듯 끊임없이 탈피를 거듭하며 죽음을 영원한 동면 안에 가둔다. 귀천해야 할 죽음이 진실에 갇혀 울고 있다. 그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건 웃고 있는 산 자다.

 

유통 과정을 주도하는 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지성인 집단이다. 이 사회가 그동안 쏟아낸 숱한 죽음 앞에 무관심했던 그들이 한날한시에 벌어진 대형 참사로 마치 성찰이라도 한 듯, 말과 글을 놀려 애도를 갈구하고 처벌을 촉구하는 모양새는 제법 비장해 보인다. 그러나 국가의 개입과 방임이 아닌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된 죽음은 그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 ‘예견된 참사’ 같은 공허한 말을 늘어놓고, 사망자를 ‘희생자’로 치환하는 기지를 발휘해 핏빛 대지 위로 선명한 그들의 고귀한 발자국을 지워내려 애쓴다. 그렇게 죽음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책임으로 완성돼 진열대에 오른다.

 

진열된 죽음들 앞에, 열성적으로 호객 행위에 임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광인에 가깝다. 비대한 몸뚱이를 고급 양복으로 감싼 그는 한 손에는 성경과 목탁과 묵주를 동시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주판을 거머쥔 꼴이다. 손목엔 ‘혁명가가 사랑한 자본주의의 상징−롤렉스’가 반짝이는데, 특이한 점은 구두는 낡고 해져 볼품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율하는 감동으로 증오와 애도를 외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은 소비될 것이다. 최종 소비자는 대중이다. 고결한 대중은 언제나 분노를 원한다. 정치는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죽음으로 인해 거대한 분노가 물결치고, 거대한 의혹이 발굴되며 거대한 추적과 수사가 진행되는 사이, 산개한 각자의 여린 죽음은 철저히 소외되고 잊히게 된다. 국가의 부재로 어른 손에 죽어간 한 아이, 국가의 온정으로 방면된 살인 전과자의 손에 죽어간 한 여인, 국가의 강제로 군부대에서 죽어간 한 청년, 국가의 방임으로 냉골에서 죽어간 한 노인.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매대 위에 없다. 정치가 원하는 죽음의 형식은 언제나 박리다매를 위한 복수형일 뿐, 피해자 A씨, 사망자 B씨로 표기되는 단수형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죽음이라 하여 국가의 책임이 없겠는가. 이런 의문과는 무관하게도 나는 죽음의 축제 한복판에 서 있다. 늘어선 죽음들 앞에, 다시 호객 행위에 열중인 정치인 모습이 보인다. 그의 목에 걸린 소형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트로트 박자로 리믹스한 장송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로 반복되는 후렴구가 인상 깊다. 내가 다가서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위선과 위악에 사로잡혀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 너의 모습을 보라. 너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인간은 그토록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그 거대한 죽음 앞에서 당신이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듯 말입니다.”

나의 대답에 정치인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삼백넷의 죽음이, 아이들의 영혼이, 노란 리본과 함께 그가 떠난 자리에 버려져 흩어지고 있다.

 

축제 저편에서, 죽음에 책임을 진 자들이 재판대 위로 올려져 꿇어앉아 있다. 삽시간에 몰려든 군중이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예견된 참사였다면서 예견하는 기사 한번 쓴 적 없는 언론인들이 돌을 던지고, 당일 경찰력 대부분을 차지한 시위꾼들이 돌을 던지고, 설렁탕을 즐겨 먹고 뒷짐을 지고 걷는 노인들도 돌을 던진다.

 

술에 취해 춤을 추던 군중이 ‘증오와 애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성난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놀랍게도 나는 군중은 언제나 옳고 선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인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리로 가자. 웃으며 딸아이를 이끄는 나의 손에도 어느새 돌 하나가 쥐여 있다.

조선일보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

 

02.28 아주까리가 어때서

 

정치인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일일이 곱씹는 건 바보짓이지만 “아주까리기름 먹느냐. 왜 이렇게 깐족대느냐”는 말은 대관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너무 궁금했다. 무지와 경솔을 만천하에 스스로 까발리는 헛소리는 여럿 들어봤지만 이 말은 구체적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면서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까리기름을 먹으면 깐족대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주까리는 응원가로 부르는 노래 ‘아리랑 목동’에 등장한다.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 아무리 고와도”다. 어깨동무하고 이 노래 부르는 젊은 관중 가운데 아주까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후렴의 ‘아리아리’와 운율 맞춘 의태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1955년 발표한 이 노래는 느닷없이 응원가로 불리면서 가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겼다. “동네방네 생각나는/ 내 사랑만 하오리까”가 그것이다. 내 사랑이 동네방네 소문나거나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생각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 가사인 “몽매간(夢寐間)에 생각 사 자(思字)”가 입에 붙기엔 너무 어려웠던 탓에 변형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차라리 “꿈에서도 생각나는”으로 개사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강원도 아리랑에도 아주까리가 나온다.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다. 여기에서도 아주까리와 동백은 붙어 있다. 두 식물의 씨앗을 짠 기름은 예부터 여자들이 머리에 바르는 미용 기름이었다. 그래서 곱다고 한다. 민요에서 둘이 붙어다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강원도 아리랑은 온다더니 소식 없는 임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임이 안 오시는데 아주까리 열려봐야 곱게 단장할 일 없다는 말이다. 아주까리기름은 사랑의 상징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아/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 난다” 하는 영천 아리랑을 봐도 그렇다.

 

아주까리기름은 등잔불 밝히는 데 썼다. 그 불빛은 밝지 않고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 ‘정주성(定州城)’에서 읊었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터는 허물어지고 왁자지껄하던 곳엔 인적 없는데 아주까리 등불 희미하다. 시인은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삶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송해의 애창곡이었던 1941년 작 ‘아주까리 등불’도 애처롭다.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저 멀리 개울 건너/ 손짓을 한다.” 엄마는 언젠가 올 것이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간신히 손짓하는 등불을 보고 개울 건너 집으로 올 것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판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다. 비탄 속에서도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아주까리기름은 먹고사는 일이었고 고단하되 끈질긴 삶의 향료였다.

 

피마자유라고도 하는 아주까리기름은 윤활유로도 쓰인다. 영어로 아주까리기름은 캐스터 오일(castor oil)인데 영국 자동차 윤활유 회사 캐스트롤(Castrol)은 20세기 초 아주까리기름을 첨가한 윤활유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 제품이 잘 팔리자 ‘웨이크필드’였던 회사명을 아예 캐스트롤로 바꿨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벌인 뒤 전투기 윤활유를 대기 위해 조선의 아주까리를 싹 다 훑어 갔다. 이 악랄한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은 조선 아낙네들이었다.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자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했을 때 김지하는 시 ‘아주까리 신풍(新風)–미시마 유키오에게’를 썼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처절한 신풍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아주까리엔 민족의 사랑과 그리움과 고단한 삶이 묻어있다. 일제를 겪은 세대에겐 분노와 한이 함께 맺혀있다. 어딜 들쳐봐도 아주까리는 먹고 깐족거리는 풀이 아니다. 특히 아주까리기름은 냄새가 역하고 설사와 복통을 일으키기에 고문할 때 썼다. 맛으로 먹는 기름이 아니다.

 

다만 이런 속담은 있다.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뒤질쏘냐’란 뜻이다. 다음엔 어떤 아주까리가 무슨 막말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03.02 어머니와 딸의 마지막 전화통화

코로나로 임종 앞둔 할머니의 딸
“엄마와 통화하고 싶어요. 부탁해요”
환자 귀에 수화기 댔지만…

“다 듣고 떠나셨어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코로나 감염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했다. 집에서 지내던 고령의 할머니였다. 의식이 있었으나 가쁜 숨을 내쉬느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고열과 기침까지 동반해 코로나 감염의 전형적인 악화 양상이었다. 몸이 전반적으로 말라 평소에도 거동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하얀 방역복을 입고 보안 고글을 쓴 채 환자를 격리 치료실로 넣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호흡하는 모습이 나쁜 예후를 짐작게 했다.

 

할머니는 혼자 삶을 건사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하지만 응급실에 온 건 할머니뿐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딸도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사흘 전 가족 한 명이 확진된 이후 할머니를 포함한 온 가족이 확진되어 자가격리중이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코로나 격리 중에는 병원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나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아, 약도 직접 드실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으나, 점차 숨을 가쁘게 쉬셔서 신고했다고 했다. 또 모두 격리 중이라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일러스트=이철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정이었다. 팬데믹 이후 숱하게 겪었던 일이기도 했다. 나는 안심하고 집에 계셔도 된다고 답했다. 일단 기본적인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고 상태가 악화되거나 중요한 검사 결과가 나오면 유선상으로 연락하기로 했다. 보호자는 필요한 처치를 전부 부탁했고 늦은 시간이라도 전화를 즉시 받을 것이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가족이 돌보던 할머니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의료진의 손에 맡겨졌다.

 

할머니는 맥이 빠르고 호흡이 거칠었다. 엑스레이부터 전형적인 폐렴으로 뿌옇게 보였다. 마스크로 산소를 투여해도 산소 포화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해열제에도 반응이 없고 동맥혈 검사도 좋지 않았다. 흉부 CT는 더 심각한 소견이었다. 그야말로 바이러스가 양쪽 폐를 전부 점령한 것 같았다. 결과를 확인한 나는 방역복을 입고 집중 치료실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의식이 악화되어 이제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병세의 진행이 빨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차례 악화 소식을 전한 뒤 두 번째의 통화였다. “최선의 의학적 처치를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심정지가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삽관과 기계호흡, 에크모 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았지만 고령이라 힘들어 보입니다. 솔직히 공격적인 치료를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분들의 의견을 모아 연락을 주시지요.” 전화를 받은 딸은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하며 끊었다. 그리고 10분 뒤에 전화가 왔다. “가족들이 상의를 마쳤습니다. 심폐소생술을 받지 않겠습니다. 편하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납득이 가는 결정이었다. 누구도 가족이 무의미하게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지 않았다. 이미 처치는 대부분 마친 상태였다. 집중 치료실에서 코로나 병상을 기다리다가 혹시나 심정지가 발생하면 사망 선언을 해야 했다. 한동안 할머니는 마스크로 쏟아지는 산소를 마시며 집중 치료실에 누워있었고 나는 새벽의 다른 환자를 진료했다. 문득 할머니의 심박수가 떨어져갔다. 창 너머로 본 할머니는 거의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스테이션에서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과를 설명했다.

“사망이 임박했습니다. 곧 돌아가실 겁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정적이 흘렀다. 슬픔이 전달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내가 바라보는 모니터의 심박이 멈춰 평행선을 그렸다.

 

“느낌상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아 밤을 새워서 기다렸어요. 선생님. 상황은 이해하지만 부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곧 돌아가신다면, 아직 안 돌아가신 거니까, 마지막으로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할머니의 심장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나는 사망 선언을 해야 했다. 창 너머의 할머니는 직관적인 망자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들을 상태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제가 방역복을 입고 들어가야 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집중 치료실에는 전화번호가 따로 있습니다. 일 분 뒤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주세요.”

 

나는 방역복을 챙겨 입었다. 집중치료실에는 외부와 연결되는 유선 전화기가 한 대 있다. 할머니는 그 전화기를 사용하는 첫 환자가 되는 것이었다. 치료실에 들어가자 전화가 울렸다.

 

“아까 통화했던 의사입니다. 잠시 뒤부터 말씀하세요. 삼 분쯤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화기를 테이블 앞으로 당긴 뒤 동그랗게 말린 전화선을 길게 늘렸다. 수화기는 다행히 어느 정도 할머니의 귓가에 닿았다. 나는 무거운 물건으로 수화기를 고정했다. 수화기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았다. 그 말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하얗고 두꺼운 방역복과 김서린 고글 차림으로 치료실 구석에 서 있었다. 방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심전도는 평행선을 그려서 지나치게 고요했고 먼 수화기의 음성만이 방역복을 뚫고 불분명하게 들렸다. 죽음을 많이 보았음에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핏기 없는 얼굴이 수화기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격한 음성에도 얼굴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고, 다만, 고요하게 듣기만 했다. 오 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말씀을 전부 전달하셨습니까?”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멈춘 사람의 목소리였다.

 

“네. 이제 되었습니다.”

“환자분은 방금 막 떠나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시신을 정리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선생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답해 주세요. 방금 보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제 말을 분명히 들으셨지요? 모두 듣고 떠나셨지요?”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답했다.

“… 네. 들으셨습니다. 모두 잘 듣고 떠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려해주셔서...”

 

전화가 끊겼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가 떠나보낸 이들 중에 목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망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평행인 심전도에서 돌아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에 무용한 일이라고는 없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전달해야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랑의 감정과 그것이 쏟아져 나오는 마지막 순간,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숨을 거두고, 또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 숨이 막히는 질병과 아득한 공간이 가로놓여도 그 사실은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것이면 모든 게 충분하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03.04 “뛰어서 죄송합니다” 윗집 꼬마들 편지에 노부부가 쓴 답장 

▲윗집 아이들의 사과 편지에 아랫집 할아버지가 쓴 답장. /연합뉴스

“할머니 할아버지가 꼭 부탁할게. 조심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야 한다.”

노부부는 이렇게 쓴 편지 한 통을 들고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다녀도 된다는, 아랫집 사람이 쓰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내용의 글. 며칠 전 윗집 꼬마들이 “시끄럽게 해 죄송하다”며 쓴 반성의 손편지에 전하는 답장이었다.

 

각박한 세상 속 훈훈함을 전한 이 사연은 최근 인천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작은 14층에 사는 윗집 A씨의 결심이었다. 그는 지난달 25일 저녁쯤 딸 2명과 조카 2명을 데리고 아랫집을 찾았다. 여럿이 모인 아이들 소리에 아랫집 노부부가 시끄럽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들 손에는 각자 이름으로 쓴 편지 4장이 들렸다. 떠들며 뛰어놀아 죄송하다는 사과와,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인사가 담긴 편지였다. 내용은 길지 않았지만 정성스레 그림을 그렸고 맛있는 롤케이크도 선물로 준비했다. 그렇게 방문한 아래층에는 노부부가 집을 비운 상황이었고, A씨는 그들의 아들에게 진심을 대신 전했다.

 

A씨 집 초인종이 울린 건 나흘이 뒤인 지난 1일이었다. 현관문을 여니 그날 만나지 못했던 13층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정성스레 적은 손편지와 5만원이 담긴 봉투를 A씨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A씨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지만, 끝내 할아버지는 준비한 답장과 용돈을 A씨 손에 쥐여준 채 아래층으로 향했다.

 

A씨가 연합뉴스에 제공한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는 편지 첫머리에 아이들 이름을 부른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먼저 마음을 담아서 보내준 편지 고마워. 할머니 할아버지는 편지를 받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단다. 너무나 착하고 반듯하게 자라고 있구나. 할아버지가 꼭 부탁할게. 지금처럼 그대로 해도 된다. 조심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야 한다. 할아버지 손녀도 초등 6학년, 3학년이야. 낮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처럼 놀아.”

 

이후 A씨는 “이런 따뜻한 마음은 너무 오랜만”이라며 지역 맘카페에 해당 사연을 공유했다. 그는 “TV나 SNS에 층간소음으로 안 좋은 일이 많은 걸 보니 저도 계속 마음이 쓰였다”며 “주말에 조카들이 놀러 오면 목소리도 커지고 쿵쿵거리기도 해 다 같이 조용히 앉아서 반성하며 편지를 쓰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가 편지와 함께 아이들 통닭 사 먹이라며 돈을 주셨다. 눈물 날 뻔했다”고 덧붙였다.

 

이웃 간 따뜻한 이야기에 네티즌들도 “서로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복이다” “A씨도 노부부도 사려 깊은 마음씨가 느껴진다” “이런 소식만 있으면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03.20 풍수 종교

 유교는 종교가 아닌 것 같아도 종교였다. 사회규범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규범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걸 어기면 박살났다. 종교로서의 유교가 지닌 약점이랄까 독특한 특징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공자가 말한 ‘미지생(未知生)인데 언지사(焉知死)!’ 내가 아직 생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겠는가! 합리주의자에게는 공자의 이 같은 점이 참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와 허무감을 달래주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조선 시대 유교가 커버하지 못하는 사후 세계 분야를 ‘땜빵’했던 것이 풍수였다. 명당에다가 묘를 쓰면 본인도 명당에 묻히니까 안심이 되고 자식들에게도 발복이 되니까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풍수는 죽음이 풍기는 ‘절대무(絶對無)’의 공포를 달래줄 수 있는 비공식의 종교였다. 내가 30대 중반에 만났던 충북 괴산의 80대 어느 풍수 마니아. 10대 후반부터 풍수를 공부해 왔던 이 양반이 새파란 젊은이였던 필자를 앞에 놓고 담담하게 들려주었던 신앙고백이 지금도 참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내가 들어갈 신후지지(身後之地·묫자리)가 복호혈(伏虎穴)이네. 이걸 잡아 놓고 나니까 참 기분이 좋아. 나 요즘 아파도 약도 안 먹네. 빨리 죽어서 명당에 들어가면 나도 좋고 자식들도 잘될 생각을 하니 죽음이 기다려져!” 종교 신앙이 현실주의자를 위한 현세적 기복의 차원으로 축소되면 묫자리 파괴 내지는 쟁탈전이라는 전투가 벌어진다. 중국 공산당의 린뱌오(林彪)가 마오쩌둥에게 도전하는 기미를 보이자 마오쩌둥은 사전 정지 작업을 하였다.

 

우선 린뱌오의 고향 선산에 있었던 린뱌오 조상 묘의 입수맥(入首脈·기가 들어오는 맥)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뜸을 뜨듯이 묘 곳곳에 철근을 박아 넣었다.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묫자리의 발복은 경쟁자의 정치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몽골 국경을 넘어 도망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도 같은 맥락이다. 땅속에 묻혀 있는 죄인의 유골을 파괴함으로써 당사자 집안을 멸문시킨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이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은 이런 기복적 풍수신앙이 없다. 한국, 중국은 아직까지 밑바닥 저층에 이 신앙이 멸종되지 않고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03.28 어느 시어머니의 주례사

며늘아, 친정에 주로 가고 용돈만 부쳐라, 경제력이 곧 말발이다
아들아, 집안일 살살해라, 사랑도 좋지만 골병들면 너만 손해다
시련 앞에서 서로의 편 돼야, 모든 걸음 함께 걸으며 승리하라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랑 김보통군의 어머니 나목자라고 합니다. 꽃구경 가기 딱 좋은 계절에 귀한 시간 쪼개어 이 자리에 와주신 하객 여러분께 큰절을 올립니다. 더불어 신부 최으뜸양을 서른두 해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길러주신 사돈 내외분의 열정과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주제 넘게도 제가 오늘 단상에 오른 것은, 요즘 트렌드가 주례 선생을 따로 모시지 않고 양가 혼주가 축사를 하는 것으로 바뀐 시대의 요청 때문이요, MBTI가 왕소심형인 제 남편 김삼식님이 혼사를 무르면 물렀지 죽었다 깨도 축사는 못 한다 우기는 통에, 나이 먹어 느는 건 뱃살이요, 맷집일 뿐인 제가 용기를 내본 것입니다.

 

가방끈 짧고, 글이라고는 학창 시절 반성문 써본 게 전부라 곳곳이 지뢰밭일 터이나, 적당히 헤아려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더러 타 부모님들 주례사를 베낀 부분도 있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으뜸아, 이제부터 내 아들 김보통은 공식적으로 너의 것이다. 중딩 때부터 누나, 동생 하며 십수년을 보아온 사이이니 안팎으로 품질 검증은 마쳤으리라 본다. 김연아의 고우림만큼은 아니어도 세 살 연하면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 아니더냐. 혹시 살다가 하자가 있더라도 중고라서 반품은 어려우니,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네가 잘 닦고 조이고 수리하여 사용하길 바란다.

 

너 역시 시진핑의 시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시금치·시래기·시오야끼는 입에도 안 대는 MZ세대 며느리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친정은 한 번이라도 더 가고 시댁은 웬만한 일 아니면 오지 말아라. 1년에 다섯 번 조상님 제사 치르다 고관절 내려앉은 내가 시어머님 운명하시자마자 내린 결단이니 빈말이 아니다. 정 와야겠다면 시어미 손에 물 묻힐 생각 말고 너희 먹을 건 알아서 사오너라. 당일치기로 오되 해지기 전에 올라가라. 생일에도 올 필요 없다. 너희 시아버지 계좌번호를 찍어줄 터이니 용돈이나 두둑히 입금해라. 아들보다 연봉 높은 며느리 덕에 그 양반 평생 소원인 캠핑카라도 사게 될지 누가 아느냐.

 

/일러스트=김성규

 

혹 2세를 낳을 계획이거든 가사 육아 분담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라면 하나 못 끓이는 제 아버지 전철을 밟을라, 내 아들은 초딩 때부터 붙잡고 가르친 덕에 돌판 위에서도 달걀말이를 똑 떨어지게 부칠 줄 안다. 차돌박이 넣고 끓이는 김보통표 청국장은 백종원도 울고 갈 맛이다. 결국 너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일은 절대 놓지 말거라. 여자의 말발은 경제력에서 나오는 법. 유리 천장까지 뚫으란 소리는 아니다. 그저 얇고 길게 가는 게 워라밸엔 최고다.

 

아, 너는 시금치가 싫겠지만 우리 아들은 시금치바나나 주스를 제일 좋아한다. 뽀빠이라고 들어봤지. 내 아들만 튼실해지는 게 아니라 너의 밤도 행복해질 것이다. 진짜다.

 

내 아들 보통아, 드디어 널 떠나보낼 때가 됐구나. 훌쩍~ 눈물 아니고 콧물이다. 남자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 사는 길은 보증 서지 않고 주식 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는 것이다. 술을 먹어도 열두 시 전에는 반드시 귀가해라. 자신의 과오를 나이 육십에 깨닫고 땅을 치는 너희 아버지 절규이니 믿어도 좋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아들은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 및 분리 수거도 하겠지만, 허리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퇴근해 집안일 도맡아 하다가 허리 나간 내 친구 아들들 여럿 봤다. 사랑은 그저 퍼주는 게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 골병 들면 너만 손해다.

 

가까운 미래에 하늘이 점지할 귀한 선물은 사돈댁에 드려도 우리는 섭섭하지 않겠다. 다만, 자식은 막 키우는 게 정답이다. 너의 경우에서도 증명되었듯, 절대 부모 뜻대로 자라지 않는다.

 

삶이 서러우면 전방으로 끌려가던 군용 열차 안에서 차디찬 도시락을 눈물에 말아 먹던 날을 기억하라. 허리까지 쌓인 눈 치워가며 철책선을 지키던 혹한의 밤들을 소환하라. 흔들림의 나날들을 바위처럼 지켜낸 너희들의 우정과 연대를 나라가 줬다 뺏은 가산점에 비하겠느냐.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두 남녀가 만난 건 우주의 기운이 아니면 불가했을 일. 모쪼록 시련이 닥칠 때 손 꼭 잡고 서로의 편이 되어주거라. 사랑보다 믿음을 귀히 여겨라. 모든 걸음을 함께 걸으며 세상 풍파와 싸워 이겨라.

 

부러우면 진다는데, 오늘 너희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도록 백년해락 하되, 남는 깨는 택배로 보내주기 바란다. 중국산 말고 국산으로. 사랑하고 축복한다. 끝!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