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소리 2023-03/
03-02 행안부 주관 3·1절 기념식 이승만 배제 논란 확산…“보훈부와 이원화,교통정리 필요”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 사진이 담긴 현수막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빠져 있다. 뉴시스
보훈처가 광화문 공개 15명 AI 재현 컬러 사진·영상엔 이승만 포함
3·1절, 광복절 등 독립 관련 행사 보훈부 주관 ‘교통정리’ 주장도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3·1절 기념식에 행정안전부가 내건 11명의 독립운동가 현수막에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사진이 배제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 전 대통령 사진이 빠진 사실이 확인된 직후 대통령실에는 경위를 묻는 질문이 빗발친 것으로 2일 전해졌다.
3·1절 주관은 행안부 의정국이 진행한다. 행안부는 행사 배경으로 대표적 독립운동가 11명의 사진을 내걸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배제된 것과 관련 “의도적으로 배제한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여권에서 치밀한 검토 없이 문재인 정부의 ‘이승만 지우기’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란 평가가 지적이 제기됐다.
행안부와 달리 독립운동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은 3·1절을 맞아 지난달 28일 독립운동가 15인의 흑백 사진을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컬러 사진·영상을 복원해 광화문 광장 대형 전광판을 통해 송출했는데 여기에는 이 전 대통령이 포함됐다. 행안부는 11명 독립운동가 선정 당시 국가보훈처 관리감독을 받는 광복회 등의 자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11명 최종 결정은 행안부 의정국이 담당한다. 독립·민주 관련 행사가 행안부와 보훈부와 2원화돼 있어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3·1절 행사는 행안부 소관이지만 이 전 대통령이 빠진 건 솔직히 아쉽다”며 “훈격으로 보나,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위상으로 보나 독립운동에서 이 전 대통령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전 대통령 지우기 논란으로 인해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는 오는 6월부터 3·1절과 8·15 광복절 행사 등 대통령이 참가하는 정부기념을 등 국가주요 행사를 국가보훈부가 주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국가보훈처는 현충일,6·25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호국·민주 관련 14개 정부기념일을 주관하고 있다. 행안부는 3·1절, 8·15광복절을 비롯해 개천절, 4·3희생자 추념일, 6·10민주항생, 부마민주항쟁, 경찰의 날, 지방자치의 날 등 을 주관하고 있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3.02 법원은 법을 어겨도 되나
민사소송법 199조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는 내용이다. 2·3심은 기록을 받은 날로부터 5개월 이내에 선고하도록 돼 있다.
우리 법은 ‘~할 수 있다’는 재량과 ‘~한다’는 의무를 명확히 구분한다. 그런 면에서 ‘5월 이내 선고’는 재량이 아닌 의무 사항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999년 이 규정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훈시 규정’으로 해석했다.
면죄부를 받은 ‘재판 지체’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더욱 심해졌다. 민사 1심은 5개월을 넘긴 사건이 3년 연속 50%를 넘어섰다. 선고는커녕 첫 재판조차 열리지 않는 사례도 많다. 1년 넘게 재판일을 통지받지 못한 한 변호사는 “두 번이나 기일지정 신청서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법원에 찍힐까 봐 더 채근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사이 그의 의뢰인은 사채를 써가며 회사를 운영했다.
판결 선고를 앞두고 재판부가 도망치다시피 하는 경우도 속출한다. 작년 12월에 선고 예정이던 한 사건은 갑자기 2월로 선고일이 연기됐다. 막상 2월이 되자 재판부는 인사이동으로 떠나버렸다. 새 재판부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변호사는 “2월까지 선고 예정인 사건이 13건이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그 지경”이라고 했다. 판결문 쓰기 싫은 사건들은 인사이동 때까지 미루다 떠나는 게 일상화된 것이다.
직무유기에 가까운 재판 지체는 최근 2~3년간 더욱 심해졌다. 승진제 폐지로 근무 평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법정 기간 5개월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심지어 선거 재판은 공직선거법에 ‘강행규정’이란 제목하에 1~3심까지 각 6개월 내에 ‘반드시 하여야 한다’고 돼 있지만, 1심만 3년 2개월째 하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처럼 해당 울산시장이 임기를 채우고 퇴임하는 일도 생겨났다.
일반인들이 법에 정한 기간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거액의 빚이나 이미 결혼한 사실을 속인 ‘사기 결혼’을 당한 경우라도 이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이 단 하루라도 지나 소송을 내면 재판은 시작하지도 못하고 소송이 각하된다. 억울하게 해고된 근로자가 ‘해고일로부터 3개월’이 지나 구제 신청을 하거나, 평생을 해로한 부부가 ‘혼인 해소일로부터 2년’이 지나서 재산 분할 청구를 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법원이 국민에게는 법을 엄격히 해석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너그럽다면 사법 신뢰는 추락한다. 법정 기간 5개월이 지나치게 짧다면 그 기간을 현실화해서라도 강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일부 판사들의 직무 유기에 가까운 행태에 대해서는 인사 불이익을 줘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말해 온 ‘좋은 재판’이 재판 뭉개다 인사 때 도망가는 판사들이 속출하고, 재판 지체로 사채 빚 얻어 쓰는 국민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조치들이다.
조선일보 사설
03.02 “보수 쪽에 편향적이다”… YTN 라디오 상무, 진행자에 음주폭언
YTN 라디오 측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회사가 입장 내는 것은 부적절”
YTN 라디오 ‘뉴스정면승부’ 이재윤 진행자가 2일 개인 성명서를 통해 지난달 22일 보수 편향을 이유로 YTN 라디오 A 상무에게 음주폭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재윤 진행자는 성명서에서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에 대해 “출연 패널은 좌파 인사들로 가득했고 방송 내용은 좌파에서 들고 나오는 이슈로 넘쳤다”며 “이재명 관련 범죄혐의 수사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청담동 술자리’ 같은 ‘지라시’ 수준의 의혹에는 눈에 불을 켜는 식이다. 한창 문재인 전 대통령의 풍산개 파양이 화제였을 때는, 이를 이슈로 다루지 않으려 해 진행하면서 이에 대한 질문을 추가해야 했다”고 했다.
이재윤 진행자는 “진행자의 균형감이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여권 또는 여권성향 인사가 나오면 여권에 불편한 질문을 했고, 야권 또는 야권성향 인사가 나오면 그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질문을 했다”며 “균형을 잡는다고 그렇게 했지만, 그동안 YTN이 보여준 편파적인 보도행태 때문에 무엇을 해도 양쪽 모두로부터 편파적이라는 오해가 이어졌다”고 했다.
이어 “YTN 라디오 상무라는 자가 진행자에게 대낮에 술 먹고 고성으로 ‘진행이 보수 쪽에 편향적이다’라는 망발을 했다”며 “이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균형을 찾으려는 그간의 노력이 사내에 확산하기는커녕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라고 했다.
이재윤 진행자는 “그동안 수많은 편파방송 지적에 눈감아 온 자가 갑자기 나를 편향적이라며 행패를 부리니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온다”며 “대선 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YTN은 공정성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그 편파성으로 보면 언론사가 아니라 특정 정당의 선전 선동 조직이라 부를 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조직에 쌓아놓은 해악이 산더미여서 눈물로 석고대죄하는 것 외에는 ‘편파방송’의 딱지를 떼어낼 길이 없다”며 “우장균이 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YTN을 공정한 언론사로 볼 사람은 없다”고 했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통해 “그동안 민주당 편파적인 방송내용으로 수많은 문제가 제기됐을 때는 침묵을 지켰던 A 상무가 편파방송 시정 노력을 계속해온 진행자에게는 왜 근거 없는 시비를 거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어딜 봐서 YTN이 공익을 위한 방송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YTN이 지금까지 주장해오던 공공성을 구성원 스스로가 해치고 있으니 국민께 신뢰를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박정하 대변인은 “공영방송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언론의 자유를 넘어 방종에 빠진 특정 언론들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YTN의 기둥이 썩어 흔들리게 만든 우장균 사장은 국민께서 직접 심판하기 전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YTN 라디오 측은 조선닷컴에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인데 회사가 입장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명일 기자
03.06 전문가 영입도 어려운 900조 국민 노후 자금, 예견된 최악 운용 실적
지난해 국민연금기금의 운용 수익률이 -8.22%로,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래 가장 낮았다. 작년 1년 새 79조6000억원이 날아가 적립금이 900조원이 못 되는 890조5000억원이다. 물론 이 돈은 금융시장이 회복되면 복구도 가능하다. 지난해는 글로벌 금융시장이 위축돼 국민연금보다 수익률이 더 나쁜 해외 연기금들도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900조원 국민 노후 자금을 지금 이대로 굴려서 되겠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국민연금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4.7%로, 캐나다(10%), 노르웨이(6.7%), 일본(5.7%)에 뒤진다. 세계 최고 투자 전문가들을 모셔와서 국민연금기금을 잘 굴려 수익률을 1%포인트라도 높인다면 그만큼 기금 고갈 시기를 늦출 수 있어 나라 전체에 도움 된다.
그러나 우리 연금 기금은 이런 금융시장 논리와 동떨어져 있다. 2017년 기금운용본부를 전주로 이전한 것부터가 황당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이뤄졌다. 900조원의 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를 유치하면 지역에 뭔가 엄청난 혜택이 돌아갈 것처럼 정치인들이 부풀렸다. 기금 운용직은 국내외 금융시장 관계자들을 만나 깊이 있게 투자 동향도 파악하고 투자 기회도 모색해야 한다. 금융 중심지인 서울과 멀리 떨어져서는 인재 영입도, 정보 수집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력 있는 투자 전문가를 채용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다. 작년 4분기 말 기준 기금운용본부 운용직은 319명으로 정원의 84%에 불과하다. 2021년 말보다도 줄었다.
국민연금 운용 방침을 최종 결정하는 기금운용위원회는 단 한 명의 투자 전문가도 없이 금융 문외한들로만 채워져 있다. 위원회 20명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연금 이사장 등 정부 대표와 시민 단체, 노조·사용자 대표 등이 참여한다. 정권마다 대놓고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낸다. 김성주 전 이사장의 경우, 국민연금 본사가 있는 전주에서 20대 총선에 낙선하자 이사장으로 기용됐다. 이런 황당한 운용 및 지배 구조를 유지하면서 운용 실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조선일보 사설
03-06 [단독] 법원 “‘채널A 사건’ 한동훈 무혐의는 정당”…MBC·前정권 ‘권언유착’ 의혹 재점화
서울고법, 이철 전 VIK 대표 측의 재정신청 기각
검찰에 이어 법원도 “한 장관 무혐의 정당” 판단
MBC·前정권 ‘권언유착’ 의혹 수사 목소리 커져
법원이 이철 전 밸류인베스트코리아(VIK) 대표가 ‘채널A 사건’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해 제기한 재정신청을 기각하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 무혐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에 이어 법원도 한 장관 무혐의는 정당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당초 제기된 한 장관과 이동재 전 채널A 기자 간 ‘검언유착’이 아닌 이를 보도한 MBC와 더불어민주당 간 ‘권언유착’ 논란이 재점화될 전망이다.
6일 문화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형사30부는 지난달 28일 이 전 대표가 제기한 한 장관 무혐의에 대한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수사 기록을 살펴봐도 검찰 불기소 처분은 정당하고, 이 전 대표가 제출한 자료들을 봐도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재정신청을 기각했다고 한다.
지난해 7월 이 전 대표는 서울중앙지검이 같은 해 4월 처분한 한 장관 무혐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서울고법을 재정신청을 제기했다. 서울고법은 8개월 간 각종 자료 등을 검토한 끝에 검찰의 무혐의 처분은 정당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에 이어 법원도 채널A 사건에 대한 한 장관의 혐의가 없다고 결정한 만큼, MBC·민주당의 ‘권언유착’ 논란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채널A 사건은 2020년 3월 MBC가 ‘검언유착’이라고 첫 보도를 했지만, 실상은 한 장관을 ‘찍어내기’ 위해 제보자X와 MBC, 당시 여권(현 야권) 인사들이 공모한 것 아니냐는 권언유착 의혹을 받았던 사안이다. 당시 제보자X가 이동재 전 채널A 기자를 회유하기 위해 언급한 신라젠의 정관계 인사 비리 장부, 계좌 파일은 존재하지 않는 등 대부분 허위로 드러났다. 또 MBC가 보도하기 전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방송인 김어준 씨, 최강욱 민주당 의원 등 당시 여권 인사들이 이 전 기자와 제보자X 간 대화 내용을 공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법원은 한 장관과 함께 고발돼 검찰 수사를 받고 기소된 이 전 기자의 강요미수 의혹에 대해서도 무죄를 확정했다.
법조계에선 중앙지검이 수사 중인 MBC·민주당 간 권언유착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서울고검은 한 장관을 찍어내기 위해 제보자X와 MBC, 당시 여권 인사들이 공모했다는 권언유착 의혹을 받은 MBC 기자들의 명예훼손·업무방해 혐의에 대해 재수사를 지시했다. 해당 사건은 중앙지검 형사2부(부장 권유식)에 배당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지난해 4월 중앙지검이 한 장관에 대한 무혐의 처분을 내리자 민주당 등은 검찰이 한 장관에 대해 봐주기식 무혐의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법원도 불기소가 정당하다고 판단을 내렸다”며 “이젠 MBC·더불어민주당의 권언유착 의혹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친문재인’ 검찰 간부에 의해 이뤄진 한 장관에 대한 무리한 수사도 규명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20년 7월 중앙지검은 한 장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다가 그를 폭행해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혔다. 또 같은 해 7월 한 장관이 중앙지검에 출석해 소환 조사를 받을 당시 검찰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엘리베이터 CCTV로 감시해 비밀번호 해제 방법을 확인하기도 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중앙지검장은 이성윤 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였다.
당시 중앙지검 3차장을 지냈던 신성식 법무연수원 연구위원도 KBS에 한 장관에 대한 허위 사실을 제보·보도해 명예훼손 혐의로 최근 기소됐다. 지난 정부에서 독직 폭행 등 각종 논란에 새롭게 꾸려진 중앙지검 수사팀이 한 장관에 대한 무혐의 결재를 11번이나 올렸지만 친문 성향 중앙지검장은 결재를 거부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권언유착 의혹 문제점을 제대로 짚고, 진실을 규명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문화일보 염유섭 기자
03.10 ‘문재인 공대’ 강행 과정 밝히고 출구 전략 찾아야
감사원이 문재인 정부의 한전공대(한국에너지공대) 설립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한국전력, 산업부, 교육부, 나주시 등 4곳을 대상으로 한전공대 설립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불법, 강요, 특혜 등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 억지의 책임자를 찾고 정부 차원에서 해법도 모색해야 한다.
한전공대는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호남용 대선 공약으로 채택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밀어붙였다.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5년 내에 대학의 4분의 1이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고, 지방 대학과 지역 소재 과학 특성화 대학에 에너지 관련 학과가 이미 많이 있는데 왜 한전공대를 신설하느냐는 지적이 수없이 제기됐지만, 문 정부는 모조리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탈원전과 고유가 탓에 한전은 한 해 32조원의 적자를 내는 참혹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전은 향후 10년간 1조6000억원을 한전공대에 지원해야 한다. 문 정권은 이런 대못까지 박아놨다. 한전공대의 실질적 이름은 ‘문재인 공대’나 마찬가지다.
문 정부는 작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호남 득표용으로 한전공대를 한 번 더 이용하기 위해 텅 빈 골프장 한가운데 4층짜리 건물 1개 동만 지은 상태에서 개교를 강행했다. 세계에 이런 개교는 없을 것이다. 대선 일정에 맞춰 대학 문을 열기 위해 6년 걸릴 대학 설립 과정을 최대한 단축하는 편법을 동원하고, 부족한 한전공대 설립·운영 자금을 전 국민이 낸 전기료로 조성된 전력기금에서 당겨 쓸 수 있도록 법도 뜯어고쳤다. 한전공대 설립을 돕겠다며 골프장 일부를 기증한 건설사는 나머지 골프장 부지에 아파트를 짓겠다며 땅 용도변경 신청을 냈다. 당시 민주당과 지자체가 한전공대 부지 기증을 유도하기 위해 ‘특혜’를 약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한전공대는 교수들에게 국립대 교수 연봉의 2배에 달하는 연봉을 지급하고, 학생들에겐 등록금·기숙사비를 면제해 주고 있다. 적자 기업 한전을 쥐어짜고, 국민이 낸 전기료로 특혜를 주는 것이다. 한전은 지난해 32조원 적자에 이어 올해도 20조원에 가까운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한전은 올해도 한전공대에 1588억원을 지원해야 한다. 말이 되는가.
감사원은 ‘문재인 공대’가 추진, 강행된 과정을 철저히 파헤쳐 이를 주도한 정치인, 한전 경영진, 산업부·교육부 관련자 등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치권·정부 관계자의 강요, 한전 경영진의 배임, 특혜 제공 등 형사범죄 혐의도 밝혀야 한다. 불법이 드러나면 법의 심판대에 올려 다시는 대통령이 이런 선거용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 한전공대 설립·운영 자금은 국민이 내는 전기료에서 충당된다. 새 정부는 국민과 한전 49% 지분을 보유한 민간 투자자들을 위해 한전공대 대못을 뽑을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설
03-10 비대한 KBS 대폭 축소하고 수신료 폐지하는 게 옳다
오랜 논란 속의 ‘공영방송 KBS 수신료’에 대한 공식적 국민 토론의 장(場)이 열렸다. 대통령실은 9일 ‘TV 수신료와 전기요금 통합 징수 개선, 국민 의견을 듣습니다’ 제목의 글을 국민제안 홈페이지에 올렸다. ‘수신료 통합 징수를 둘러싸고 소비자 선택권 및 납부 거부권 행사가 제한된다는 지적 등이 꾸준히 제기됐다’고 밝혔다. ‘전기요금과 함께 부과되는 현행 방식은 시대에 맞지 않고 불합리한 제도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양한 민영방송과 뉴미디어까지 활성화한 상황에서 공영방송 자체가 이젠 시대착오다. 설령 국가기간방송으로 존속하더라도 비대할 이유는 없다. ‘정권 나팔수’ 오명까지 자초해온 KBS는 지상파 TV만 해도 2개다. 2TV로는 상업광고도 방송한다. 조직도 방만하다. 채널 한 개로 줄이며, 대폭 축소해야 한다. 방송법을 개정해, 수신료는 폐지하는 게 옳다. 광고 수입도 얻으면서 수신료까지 받아선 안 된다. 전기요금과 통합 징수는 더 어불성설이다.
KBS를 시청하지 않는데도, TV 수상기 보유 사실만으로 시청료를 강제징수하는 것은 부당한 차원을 넘어 ‘국민 착취’다. 심지어 TV 수상기가 없어도 강제징수한 뒤, 사후적으로 ‘TV가 없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내지 않을 수 있게 한다. 기막힌 현실이다. 1994년부터 한국전력에 통합 징수를 위탁한 것은 국민 권익을 도외시한 행정편의주의이기도 하다. 2024년 말 만료될 3년 단위 통합 징수 계약을 더는 연장하지 말아야 한다. 방송법이 개정될 때까지 계속 부과하더라도 KBS를 시청하는 시민에 한해, 그것도 ‘다른 공과금과는 분리 징수’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문화일보 사설
월간조선 03월 호 03.12
현대사 인식의 틀을 바꾸는 ‘戰後 70년 운동’의 의미
‘화려한 시절’ 1980년대의 명예회복부터!
시위대의 함성과 최루탄의 눈물 속에서 10년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시대. 정보화, 민주화, 세계화, 克日, 공산권 붕괴의 계기까지 만들었던 1980년대의 주인공들, 특히 全斗煥에 대한 작금의 홀대는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소란스러웠지만 화려했던 1980년대를 암울한 시대로 가르치는 어둠의 세력을 지우는 방법이 ‘戰後 70년 운동’이다. 1980년대를 긍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부정하게 되어 있다!

▲88 서울올림픽은 戰後 한국의 성취를 세계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사진=조선DB
《월간조선》 지난 호에서 내가 ‘전후(戰後) 70년’이란 시대 구분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자고 했더니 의외로 호응이 뜨거웠다. 개항기, 개화기, 일제식민지, 해방 전후로 시대를 구분하여 생각하면 좌절과 갈등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반일(反日)종족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피해의식을 좌익이 이용, 국민들을 속이고, 정권을 잡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말했듯이 “과거를 지배하면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한국전을, 세계가 이긴 전쟁으로 정확히 개념 규정하고, 휴전 이후 진행 중인 70년의 전후사(戰後史)를 새로운 시대 구분으로 설정하면 자연히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피, 땀, 눈물로 써온 70여 년의 한국 현대사는 누가 뭐래도 우리가 착하게 살아왔음을 증명한다. 이제는 부채의식도, 열등의식도, 노예근성도 필요 없다. 국력에 맞는 생각을 하게 되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데 “전후(戰後) 70년, 이제는 자유통일이다”로 귀결된다.
개화기, 식민지, 해방, 건국, 전쟁의 격동기를 거친 뒤 얻은 자유와 평화의 전후(戰後) 70년! 우리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복지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는 여세를 몰아 세계시민들과 손잡고 자유통일로 직진하자!〉
戰後 70년이라는 화두
예컨대 ‘전후(戰後) 70년’을 화두(話頭)로 던졌을 때 생각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전후 70년, 한 손에 망치 들고 다른 손에 총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전후 70년, 아쉬운 점도 많았다. 이승만을 잊고 박정희를 미워한 것!
*전후 70년,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이뤘다!
*전후 70년, 우리는 선택했다.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을!
*전후 70년, 당신의 가장 감동적 순간은?
*전후 70년, 가장 슬펐던 때는?
*전후 70년, 가장 위대한 인물은?
*전후 70년, 가장 고마운 사람은?
*전후 70년, 최고의 가수는?
*전후 70년, 최고의 선수는?
*전후 70년, 나는, 우리는, 회사는 무엇을 했나?
*전후 70년,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전후 70년, 자유의 방파제는 이제 그만, 자유의 파도가 되자!
*전후 70년, 국가건설, 민주발전, 자유수호, 법치정착, 다음은 자유통일!
*전후 70년,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
*전후 70년, 4대 재발견-해양정신, 기업가정신, 자주정신, 상무(尙武)정신!
이런 식으로 생각이 이어지다가 보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어 나라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일종의 연호(年號)를 바꾸는 의미이다. 그래서 올해는 ‘전후(戰後) 70년 운동’을 벌이려 한다. 회고록 쓰기 운동, 조직이나 회사에서 지난 70년의 기록을 정리하는 운동, ‘전후사(戰後史) 70년 퀴즈 대회’ 등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를 국민적 기록으로 모아놓으면 여기에 적힌 삶의 무게가 종북(從北) 좌익들의 빛바랜 이론과 관념을 쓰레기통으로 처넣게 만들 것이다. 이는 역사전쟁의 최종 승리를 예약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나의 戰後 70년

▲필자는 199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사진=조선DB
1945년생인 나는 1970년 6월 말 공군으로 복무, 제대한 후 대학으로 복학하지 않고 부산에 있던 《국제신보》 수습기자 시험을 쳐서 1971년 2월 1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올해는 기자 생활 53년째 되는 해이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때 한 번,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 두 번 해직되었으나 그때마다 복귀하여 현대사의 기록자 역할을 했다. 중금속 오염, 포항 석유 개발, 부마사태, 10·26 사건, 12·12 사건, 5·18, KAL007 피격 사건, 김현희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북한 인권 문제, 김대중 대북(對北) 불법송금 사건, 미국 내 김대중 비자금 의혹 사건, 맥아더의 실수 등에 대하여 집중 취재하여 책이나 기사로 남겼다. 1995년 11월 이스라엘 라빈 수상이 암살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되었으며, 작년에 암살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수상을 단독 인터뷰한 유일한 한국 기자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기 13권과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을 상대로 한 수십 회의 인터뷰는 나중에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다. 전후사(戰後史) 70년 중 약 50년을 직업적으로 관찰한 행운을 누린 셈이다.
1. 기자로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 1979년 10월 27일 새벽, 박정희 대통령 시해 소식을 부산의 살인 사건 취재 현장에서 들었을 때. 전날 궁정동 암살작전의 지휘자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그 3년 전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서 나를 조사했던 이였다. 포항 석유 시추를 정보부가 위장회사를 만들어 했는데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 석유 발견 발표를 한 이후 그 석유가 경제성이 없다는 논문을 썼다가 다시 정보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신문사에서 추방된 적이 있다. 10·26은 전후 70년 중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시대를 마감하고 12년에 걸친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시대를 연 날이다.
2. 가장 벅찼던 순간: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벽을 넘어서’. 그 전날은 폭우, 그날 날씨는 끝내주었다.
3. 가장 아슬아슬했던 순간: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 개표 날. 가장 안도한 날이기도 했다.
4. 가장 황당했던 순간: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탄핵 결정.
5. 가장 한심했던 순간: 2020년 4월 15일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아직 개표가 진행 중인데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 퇴진을 선언하고 사라졌다가 1년 반 침묵한 뒤 느닷없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6. 가장 불가사의한 일: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압사 사고. 길이 40m, 너비 3m인 골목에서 159명이 죽다니!
7. 가장 분노했던 순간: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평양 연설. 남쪽 대통령 문재인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소개로 운운.
8. 가장 인상적인 연설: 1965년 8월 박정희가 한일회담 반대 학생들을 꾸짖다! 1971년 4월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
9. 가장 감동적인 글: 1950년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쓴 편지.

▲필자가 생각하는 ‘戰後 70년 가장 고마운 분’.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
10. 가장 고마운 분: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
11. 가장 나쁜 인간상: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문재인, 이재명.
12. 가장 미안한 두 분: 전두환, 노태우.
13. 기성세대의 가장 큰 실수: 한자(漢字) 포기. 한글 전용(專用)에 의한 한국어 파괴로 국민 교양의 약화와 국가 엘리트 실종 사태를 불렀다.
14. 가장 위험했던 순간: 1950년 7월 경북 청송의 고향집이 유엔군의 오폭(誤爆)으로 불타는데 질식사할 뻔했다.
15. 가장 선명한 기억: 다섯 살 때이던 1950년 7월 인민군이 청송의 우리 마을로 줄지어 들어오던 순간.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 밭의 익어가는 오이를 따서 가져갔다. 그때부터 나는 반공(反共)소년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군요”
▲1995년 《월간조선》 1월호 부록 《한국인의 성적표》.
1995년 1월호 《월간조선》은 별책부록으로 《한국인의 성적표》를 냈다. 해방 5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성취를 확인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편집장이던 나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썼다.
〈민족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월간조선》 편집진의 머리에 남는 이미지어(語)는 ‘대폭발’이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반세기 동안 이 나라의 기성세대가 얼마나 위대한 성취를 했는지 우리가 먼저 놀랐다. 편집을 지휘한 해방둥이 기성세대로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이 작업을 도와준 서울대학교 대학원생의 한마디였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군요.”
분단·전란·정변 속을 헤치고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 나라를 끌어올린 그들의 성취는 20세기 세계사의 최우등상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족 에너지가 대폭발할 수 있도록 그 뇌관을 터뜨리는 역할을 한 것은 분단과 전쟁이었음을 이 책은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분단과 전쟁은 한국인들을 속박하고 있던 위선적 명분론과 낡은 제도까지도 폐허화해버렸다. 전란은 우리를 벌거벗기면서 공리공론이 아닌 자신의 삶에 정직하고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절망의 끝에는 희망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생존에의 의지로 돌려놓는 위대한 국가 지도자들을 만났다. 민군(民軍), 민관(民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조선조의 봉건적 지배이데올로기를 걷어차고 통일신라 이후 잠들어 있던 민족의 야성을 흔들어 깨워 정신없이 달려온 해방 50년!〉
나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썼다. 해방 50년의 기적은 미완성이다. 그 기적은 좌익·수구 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통일에 다다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야 한국 기성세대의 평가도 완결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디까지나 그 중간평가일 뿐이란 주장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후(戰後) 70년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1980년대의 復權
▲1987년 6월 시위 모습. 전두환·노태우는 6·29선언을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다. 사진=조선DB
‘전후(戰後) 70년’을 재조명할 때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시기는 좌익들이 암울한 시대라고 폄하하는 1980년대이다. 신군부 집권, 5·18, 서울올림픽 유치, 이를 막기 위한 북한 정권의 아웅산 테러, 김현희의 대한항공기 폭파, 소련 붕괴의 신호탄이 된 KAL007 격추 사건, 민주화의 분수령 2·12 총선,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 이 가운데서도 10년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 앞을 내다본 정보화 인프라 투자, 이병철의 반도체, 정주영·정세영 형제의 자동차 산업 승부수, 최초의 무역흑자, 낮은 물가, 중산층 70%, 노동 및 대학 운동권의 좌경화, 6월 대시위, 전두환·노태우 합작의 6·29 선언, 이에 따른 직선제 개헌, 노태우 당선, 총선에서 여소야대, 노무현을 미래의 대통령으로 예약시킨 5공 청문회, 언론자유의 만개(滿開), 문무(文武)합일의 서울올림픽 개회식,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획기적으로 넓힌 북방 정책(한중수교 등), 올림픽이 단초가 되었던 동구 공산권 붕괴 등등.
최고의 경제성장과 최대 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일본을 따라잡는 기반까지 마련했다. 전두환·노태우는 서울올림픽을 국가대전략의 중심에 놓고 공산권 붕괴와 민주화의 2중 전환기에 단순한 위기관리가 아니라 적극적 기회 활용으로 나아가, 그 뒤 한국인이 먹고사는 기반을 확충하고 강화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건설이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을 넘게 했다면 1980년대의 소용돌이 속 발전은 그 길을 확장, 질주하게 만들었다. 《월간조선》 기자로서 그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나는 이 기간에 두 번 해직되고 두 번 복직했는데,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순간을 기록자로 경험하면서 그 기록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흥분을 느꼈다. 지금은 나를 두 번 해직시켰던 전두환 세력을 열심히 변호한다.
최소한의 인명손실
1980년대가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이런 대격변이 최소한의 인명손실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18년간 수많은 폭력시위와 마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별도로 다뤄야 할 5·18을 빼면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시위 진압은 온건했다. 오히려 시위대가 죽인 경찰관 수가 더 많지 않을까(동의대 사태 때 7명 사망).
시위대의 함성과 최루탄의 눈물 속에서 10년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시대. 정보화, 민주화, 세계화, 극일(克日), 공산권 붕괴의 계기까지 만들었던 1980년대의 주인공들, 특히 전두환에 대한 작금의 홀대는 저주를 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게 만든다. 소란스러웠지만 화려했던 1980년대를 암울한 시대로 가르치는 어둠의 세력을 지우는 방법이 ‘전후(戰後) 70년 운동’이다. 1980년대를 긍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부정하게 된다!
이 시대의 위대성은 피를 손에 묻히며 집권했던 전두환을 순화시켜 퇴임할 때는 직선제 개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도록 한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임 약속’을 지킨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2021년 가을에 서거했을 때 문재인 정권과 언론이 보여준 냉소적 태도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을 넘어 역사에 대한 모독이고, 이런 성향이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는 낙관할 수 없다.
5·18의 책임을 두 사람에게 추궁하는 것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전두환은 신군부의 집권에 책임이 있지 유혈진압은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의 몫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발포명령, 암매장, 헬기사격의 누명을 씌우려 했지만 실패, 세 가지가 낭설임을 증명했다(국방부 특조위가 헬기사격에 의한 양민학살을 주장했으나 명백한 거짓말임을 모순덩어리 보고서가 증명한다). 1980년대의 재조명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평가를 결과하게 될 것이다. 좌익이 둘을 극도로 미워하는 것도 그렇게 해야 ‘1980년대’를 ‘암흑시대’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우파적 관점에서도, 좌파적 관점에서도 평가할 점들이 무척 많은데 좌익은 우파적 성취를 지우는 데 집착하다가 민주화의 성취까지도 날려버린다.
“서울올림픽이 동서 대립을 끝내게 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사회주의 동구권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퍼블릭도메인
40년 이상 서울 특파원을 지낸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객원 논설위원은 몇 년 전 펴낸 취재기 《날씨는 맑지만 파고(波高)는 높다》(조갑제닷컴 출판)에서 전두환의 작품인 서울올림픽을 높게 평가하였다.
〈북한은 오지 않았지만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가 참가하여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후 소련 및 공산권의 붕괴, 동서 대립과 냉전 시대의 종언(終焉)이라는 세계사적인 대변화가 일어난다. 서울올림픽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울올림픽이 동서 대립을 끝내게 했다!”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 인식’의 문제인데, 서울올림픽의 유치에서부터 개최까지 현장에서 취재한 나로서는 전적으로 동의(同意)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은 우선 1990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그해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한소(韓蘇)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한 다음, 9월에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나도 노태우 대통령과 동행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취재를 갔는데, “반공국가 한국이 여기까지 오다니…” 하며 실로 감개무량했다.〉
박정희 못지않은 전두환의 경제성적표
전두환·노태우 시절 한미일(韓美日) 관계가 좋았던 것이 북한의 도발을 막고 서울올림픽과 민주화를 평화 속에서 추진할 수 있었던 기본 조건이었다. 두 대통령의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의 기반이 이뤄졌다.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1981~2015년의 35년간 성장률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해는 한국이 외환(外換)위기를 겪던 1998년 한 해뿐이었다.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공이다. 당시 강만수(姜萬洙)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 위기만 잘 넘기면 한국은 경쟁국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적중하였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의 경제통계를 비교하면 1980년대의 놀라운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1. 1979년 1인당 GDP: 1546달러
2. 1988년 1인당 GDP: 3728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 개 국가 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70년대엔 외채 망국론이 강했지만,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대외(對外)자산 253억 달러로 개선되었다가 1989년에는 순(純)채권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는 0.39, 19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중산층이 민주화의 주력부대
이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였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 성향이 6·29 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평화적 민주화의 엔진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 사회의 바닥에 깔린 덕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실로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정치는 상당 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가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전두환 대통령의 단임(單任) 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전두환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일성에게 무력(武力)보복을 하지 않고(그랬다면 서울올림픽이 날아갔을지 모른다) 외교, 경제 등 다른 대전략으로 대응하여 북한을 고립시켰다. 김일성이 서울올림픽에 대응한다면서 1989년에 개최한 평양축전은 준비하는 데 50억 달러가 들어갔고 이게 재정파탄으로 이어져 망조가 든다. 성경대로 악(惡)을 악으로 갚지 않고 만인 앞에서 선(善)을 행하여 악을 이긴 전두환의 유골(遺骨)은 지금도 장지(葬地)를 찾지 못하고 자택에 있다.
‘벽을 넘어서’란 시대정신
1980년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전 이후 이 나라가 가장 널리 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선 민주화의 시대, 국제적으론 공산권 붕괴라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담은 구호가 ‘벽을 넘어서’였다.
원래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좀 딱딱한 이 개념을 개폐회식의 기본철학으로 구체화시키면서 아주 역동적인 ‘벽을 넘어서’란 말로 풀어놓은 이는 개폐회식 상임위원 이어령(李御寧) 교수였다.
역대 올림픽 개회식 가운데서도 최고로 꼽히는 서울올림픽은 ‘벽을 넘어서’란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모든 공연과 상징과 동작을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기 때문에 그토록 힘찼고 예언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란 것을 실감케 한 구호였다.
베를린 장벽과 동구권 붕괴를 부른 시위 현장에서 데모 송으로 울려 퍼진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였다.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있는 ‘브레이킹 다운 더 월(Breaking down the wall)’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그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룹 코리아나가 불러 유명해진 노래, 당시 동양인이 부른 곡 가운데서 가장 많이 팔린 노래가 되었다. 1990년 4월 체코 무용단이 김일성 생일에 맞추어 평양에 가서 공연할 때 배경음악으로 연주되었고, 김일성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주제가는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주제가를 작곡했던 조지오 모로더가 작곡하고 토머스 R. 휘틀록이 작사했다. 국내에선 한국인 작곡가가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이 ‘우리 취향이 아니라 손님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세계 일류 작곡가와 작사가를 고른 것이다.
질경이꽃 하나의 의미
2021년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문재인 정부는 마지못한 듯 국가장(國家葬)으로 모시면서도 홀대를 했다. 대통령 조문도 없었고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 유족을 훈계하기도 했다. 병중(病中)이던 이어령 선생은 조시(弔詩)를 적어 유족에게 보냈다.
“몸이 성치 않아서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 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했다. 이 시(詩)는 개발연대의 지도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문화 부문을 챙겨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감사를 깔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고인이) 군사독재와 문민독선의 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굳어진 정치 풍토에서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싸우시면서 질기고 질긴 질경이꽃을 피우셨다”며 “보통 사람의 시대, 북방외교 시대, 그리고 문화부를 처음 신설해 문화를 여신 업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회고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꽃 하나의 의미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 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 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꽃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가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 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 사람과 함께
손잡고 가자고 사립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 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민주화가 삶 속으로 스며드는 1990년대 이후의 일이고 문화 올림픽이기도 했던 1988년 대축제가 계기가 되었다. 군인 출신 박세직과 문인 출신 이어령이 문무(文武)합일로 이룩한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감동! 이게 동구 공산권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게 뭐냐”는 문제의식을 심어 그 이듬해 거리로 몰려나와 공산정권을 차례로 타도했다. 1980년대의 명예회복이 요구되는 한 이유이다.
1980년대의 마지막 날 기억
▲1980년대는 전두환 청문회의 씁쓸함과 함께 막을 내렸다. 사진=조선DB
1989년 12월 31일, 1980년대를 청산하는 마지막 통과의례의 희생양처럼 국회의 5공(共)비리-광주특위 연석회의장에 불려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다 받아야 했다. 나도 현장에 있었다. 국회 참의원 회의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전직 대통령의 증언을 듣기 위해 2층 방청석에 자리 잡았다. 여야(與野)의 약속대로 한 시대의 아픔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그 역사적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은, 기자의 개인적 삶의 궤적도 전두환과 유관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기자는 전두환 시절에 두 번 해직되었다). 기자의 다소 감상적 기대는 구역질 나는 정치 쇼에 의해 능욕되고 말았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은 전두환을 상대로 엄정한 질문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누가 전직 대통령에게 더 많은 창피를 줄 것인가 하는 경쟁을 벌였다. 전두환의 답변서 낭독을 다 듣고 질문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답변서 낭독 도중 도중에 야당 의원들이 뛰쳐나와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는 바람에 일곱 차례나 정회(停會)가 되었다. 밤늦게 증언대를 향해 노무현(盧武鉉) 의원(민주당)이 명패를 던지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전두환은 밤 12시 직전 기자들을 대기실로 불러 다 못 한 답변서 낭독을 15분 정도 더 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평민당 의원 및 보좌관들이 몰려나와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그를 1990년대로 보내버렸다.
나는 연출자의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저질연극을 구경하면서 1980년대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는 것이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국회를 나오는 길로 옆에 있는 순복음교회로 직행하여 새해맞이 예배에 참석, 1980년대 마지막 날의 잡친 기분을 달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돌아가면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이 국회 증언을 끝으로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화려했던 시대’의 종언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선언했고, 김영삼(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도 “5공 청산을 통해 심화되었던 사회 각 부문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다짐하였다. 1월 4일 자 《조선일보》 사설도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5공 문제에 매달리기엔 90년대의 과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이런 국가적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궁지에 몰리자 김영삼 대통령은 소급입법을 통해서, 5년 전 역사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12·12 사건, 광주사태 등을 법적으로 단죄할 것을 선언,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태풍이 분다. 부관참시(剖棺斬屍)의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되니 ‘화려했던’ 1980년대도 ‘암울한 시대’로 검게 칠해졌다. 1980년대의 마지막 날 가졌던 나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적중하고 말았던 것이다.
1995년 1월호 《월간조선》이 선정했던 해방 50년의 50대 성취 목록을 먼저 소개한다. ‘전후(戰後) 70년 운동’에 동참할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올해 창사 70주년이 되는 회사도 이런 표를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해방 50년 한국인의 50대 성취’ 목록과 필자
*1945년 신탁통치 반대: 항일(抗日)·반탁(反託)·반공(反共)은 건국의 원동력_이철승(李哲承)
*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무(武)를 경시해온 조상들을 원망하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_이형근(李亨根)
*1947년 해방 후 최초의 미국(美國) 유학생: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_동덕모(董德模)
*1948년 5·10선거와 정부수립: 이승만(李承晩)의 대미(對美) 외교와 우익 청년들의 피로 이룬 건국(建國)_손진(孫塡)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인민혁명을 막은 이승만의 승부수_김성호(金聖昊)
*1950년 낙동강 전선 방어전의 무명 전사들: 학생·노무자·부녀자들이 총동원된 총력전의 승리_채한국(蔡漢國)
*1951년 전시(戰時) 대학: 피란 시절 향학의 불씨를 피운 전시 대학_한말숙(韓末淑)
*1952년 평화선 선포: 한일(韓日) 외교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평화선’ 선포_최보식(崔普植)
*1953년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 조인: 남한이 경제 건설에 주력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조약_김용식(金溶植)
*1954년 독도수비대 창설: 일본에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충의(忠義)로 독도를 지켰다_김병열(金秉烈)
*19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起工): 화학비료 자급과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시초_최지현(崔志弦)
*1956년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 식량난 해소와 경제도약에 중요한 역할 수행_김용삼(金容三)
*1957년 ‘큰사전’ 완간: 16만4000단어 수록한, 명실상부한 국어대사전_안병희(安秉禧)
*1958년 원자력법 제정: 오늘의 원자력 대국(大國) 있게 한 이승만의 혜안_한영성(韓榮成)
*1959년 《경향신문》 폐간과 언론자유 투쟁: 최초로 제기된 언론자유의 소중함_송원영(宋元英)
*1960년 4·19 의거: 실패한 혁명(革命)이 아니라 미완성의 혁명_이수정(李秀正)
*1961년 행정 근대화: 선진화된 군(軍)의 제도 도입해 국가 행정 근대화 시동(始動)_이석제(李錫濟)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목표 성장률 7.1% 초과 달성_이형구(李炯九)
*1963년 섬유 수출 쿼터제: ‘수출하면 부자 된다’는 인식 심어줘_안영철(安永哲)
*1964년 울산 정유공장 본격 가동: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 수행_정의우(鄭義友)
*1965년 한일(韓日) 국교(國交) 정상화: 한일 경제 교류를 ‘조국 근대화’로 승화시켜_오재희(吳在熙)
*1966년 KIST 발족: 과학 불모(不毛)의 땅에 과학기술의 불을 붙인 선구적 역할_최형섭(崔亨燮)
*1967년 석탄 생산 1200만t 돌파: 에너지 자급자족과 산림(山林)녹화에 기여_김두영(金斗榮)
*1968년 향토예비군 창설: 후방을 담당하는 제2의 국군 450만_구본중(具本重)
*1969년 마산 수출자유지역 조성: 해외자본 적극 유치를 통한 수출 전진기지의 시초_박세진(朴世鎭)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세계 최단시간 내 완성한 고속도로_정주영(鄭周永)
*1971년 새마을운동: ‘하면 된다’는 자신감 얻은 게 가장 큰 성과_박진환(朴振煥)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방어적 통일 정책에서 적극적 대북(對北) 정책으로_정홍진(鄭洪鎭)
*1973년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준공: 민족의 에너지에 불을 붙였다_박태준(朴泰俊)
*1974년 중동 건설시장 진출: 지속적 경제개발을 가능케 한 텃밭 개척_최종환(崔鍾煥)
*1975년 조총련계 재일(在日)동포 고국 방문: 중앙정보부의 공세적이고도 인도적인 정책 전환_조일제(趙一濟)
*1976년 가족계획 성공: 전통을 거스른 선각자적 결단의 성과_이시백(李時伯)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한국 경제의 분수령(分水嶺)_최각규(崔珏圭)
*1978년 고리 원전(原電) 1호기 준공: 시운(時運)을 잘 탄 탈유전원(脫油電源)의 선택_정보헌(鄭甫憲)
*1979년 부마(釜馬)사태: 유신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기게 하다_조갑제(趙甲濟)
*1980년 컬러 텔레비전 방영: 21세기 문명(文明)의 발전틀을 구축한 대사건_이원홍(李元洪)
*1981년 해외여행 자유화: 외무부의 적극 대응, 전(全) 대통령의 의지로 규제 풀어_안세훈(安世勳)
*1982년 통행금지 해제: 후진적 분위기를 벗고 안정된 사회상황 과시_유흥수(柳興洙)
*1983년 64KD램 개발 성공: 세계 세 번째로 개발, 반도체 산업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_이종길(李鍾吉)
*1984년 TDX개발: 통신의 기술주권을 확보하려는 역사적 소명_서정욱(徐廷旭)
*1985년 2·12 총선: 창당 25일 만에 사상 최대 야당을 만들었다_김상현(金相賢)
*1986년 무역흑자 원년(元年): ‘안정 기조 위의 성장책’으로 3저(低)의 호기(好機)를 잡았다_김만제(金滿堤)
*1987년 6·29 선언: 군사정권이 민주주의를 맹세한 항복조약_이상철(李相哲)
*1988년 서울올림픽: 동양의 예절, 독일의 조직력, 미국의 자본주의 감각을 모두 발휘한 21세기 한국의 이정표_박세직(朴世直)
*1989년 수도권 신도시 건설: 천정부지의 집값을 하락세로 돌렸다_문희갑(文熹甲)
*1990년 유행성출혈열 백신 개발: 세계 모든 백신이 국산(國産) 기준을 따르고 있다_안창남(安昌男)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동구권 붕괴와 서울올림픽이 계기_이상옥(李相玉)
*1992년 황영조(黃永祚)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 손기정(孫基禎) 이후 56년 만에 이룩한 민족의 쾌거_김종열(金鍾烈)
*1993년 금융실명제: 부정(不正)추방·공평과세(公平課稅)의 기반 마련_이경식(李經植)
*1994년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 조세수입의 19%(10조원)를 차지하는 효자산업_정세영(鄭世永)
이하는 필자가 그 뒤의 대표적 업적을 추가한 것이다.
*1995년: 신생아 마지막 70만 명(이 뒤론 줄기 시작)
*1996년: OECD 가입, 세계 29번째, 아시아에선 일본 다음
*1997년: 우(右)에서 좌(左)로 평화적 정권교체
*1998년: 대일(對日)문화개방, 한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 한류(韓流)로 증명
*1999년: 일반전화(2125만 대)보다 많은 휴대전화, 2300만 대 돌파
*2000년: IMF 관리체제 극복 노력
*2001년: 인천공항 개항
*2002년: 한일(韓日)월드컵 4위
*2003년: 검찰, 대선(大選)자금 수사로 부패의 고리를 끊다.
*2004년: KTX 개통,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 계획에 위헌 판결
*2005년: 청계천 복원
*2006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타결
*2007년: 좌(左)에서 우(右)로 평화적 정권교체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극복
*2009년: 스마트폰 시대 개막
*2010년: 김연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 금메달
*2011년: 아덴만 인질 구출작전 성공
*2012년: 신라 이후 처음으로 여성 최고권력자 등장
*2013년: 싸이 ‘강남 스타일’, 말춤이 세계를 흔들다!
*2014년: 헌법재판소, 통진당 해산 결정
*2015년: BTS, 본격적 해외 활동 시작
*2016년: 없음(‘박근혜 탄핵소추 가결’을 성취로 볼 순 없다.)
*2017년: 이재용 구속 중에도 삼성전자 분투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전회(前回) 우승팀 독일을 2-0으로 격파
*2019년: 사상 최대 규모의 광화문 문재인 규탄집회
*2020년: 〈미스터트롯〉 선풍(TV조선)
*2021년: 언론의 대장동 비리 보도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당선⊙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03.13 金 대법원장의 ‘실패한 재판’
31년 넘게 재판만 했다더니
민사 1심 4개월 더 늦어지고…
법원전산망 마비 사태까지 터져
“사법 행정과 사건 관리에 실패”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8월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날 취재진과 만나 “나는 31년 5개월 동안 재판만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신을 ‘재판의 달인’으로 소개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어떤 수준인지 보여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달 뒤 취임식에서 김 대법원장은 “‘좋은 재판’의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효율적이며 신속한 재판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성심을 다한 충실한 재판을 통해 국민들이 절차와 결과 모두에 수긍할 수 있는 사법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의 임기(6년)는 앞으로 6개월 남았다. 그가 취임 전후로 약속한 대로 됐다면 지금 법원의 재판은 신속하면서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재판 지연’의 심각성은 통계로 확인된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한 2017년 전국 법원에서 민사 합의부 1심 재판은 평균 293일 만에 끝났는데 갈수록 처리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특히 2020년(309일), 2021년(364일)과 2022년(420일)에는 해마다 50일 넘게 재판이 늦어졌다. 1심이 늘어지면서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도 줄줄이 처졌다. 형사 재판도 비슷한 추세로 지체됐다. 재판이 늦어지면 재판받는 국민의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다. 김 대법원장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작년 9월 법원의 날 기념사에서 “재판을 받는 당사자는 재판이 지연될수록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며 “재판 지연에 대한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제는 김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최근 언론 기고에서 김 대법원장을 향해 “법원의 재판 현황을 알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대책은 수립했는지 의문이 든다”면서 “제때 논의해 대책을 마련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판사는 현재 사법부 상황을 ‘재판의 실패’로 진단하면서 그 원인은 ‘법원장 추천제의 무리한 추진, 시기에 맞는 적절한 사법 행정 부재와 사건 관리 실패’로 파악했다.
김 대법원장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재판’도 약속했지만 역시 지키지 못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0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 취지로 뒤집히는 판결을 받을 무렵 대장동 일당 김만배씨가 권순일 당시 대법관을 8차례나 찾아가 만났다는 ‘재판 거래’ 의혹은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김 대법원장은 자체 조사도 하지 않고 사실상 손을 놓았다.
‘김명수 법원’에서는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일이 잇따라 터졌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낼 것”이라고 해놓고 후배 판사를 민주당이 강행한 ‘억지 탄핵’에 희생양으로 보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를 같은 법원에 붙박이로 두고 ‘조국 재판’ ‘울산시장 선거 재판’을 뭉개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이 2020년 대법관 후보에 자신이 원하는 판사를 넣으려고 추천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법원 전산망 전체가 마비돼 재판 일부가 연기되고 전자 소송, 사건 검색 등 대국민 서비스가 전면 중단되는 초유 사태도 터졌다.
김 대법원장은 오는 9월 퇴임하기 전에 국민 앞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사법부를 다시 바로 세우는 일은 다음 대법원장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금원섭 사회부 차장
03.15 57년을 퇴행한 판결, 그 판사만의 생각인가
“목적 정당하면 위법도 무죄” 판결
57년 전 ‘미란다 판결’과 배치
김명수 사법부 주류도 절차 무시
그게 ‘퇴행 판결’ 낳은 것 아닌가
사법의 역사는 인권과 절차를 중시하며 발전해왔다. 미국 대법원이 흑인과 백인 강제 분리가 합법이라는 원칙을 깨고 ‘흑백의 생활 터전을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 1954년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묵비권 등을 미리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이 연쇄 성폭행범 어니스트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한 ‘미란다 판결’이 나왔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 시도를 불법으로 금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차규근 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왼쪽),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관련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나와 발언을 하고 있다. 2023.2.15/뉴스1
적법 절차를 강조한 이 판결은 당시 큰 논란을 불렀다. 앞으로 수사가 어려워지고 흉악범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날 것이란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우였다는 걸 역사는 입증했다. 실제 미란다부터 풀려나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 후 검찰은 목격자 진술 등을 증거로 미란다를 다시 기소했고,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을 복역했다. 성폭행범이 역설적으로 위대한 판결을 이끌어내 적법 절차를 지키면서도 사법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사법에서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흉악범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력한 국가권력에 정의라는 명목으로 위법 수단까지 허용하면 언제든 절차를 무시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치주의 핵심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적법 절차라고 하는 것이다. 체포나 구속 같은 강제 처분은 반드시 법관의 영장을 받도록 하고(영장주의), 악인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도 위법한 절차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것(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 점에서 얼마 전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에 관여한 이들에게 1심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은 역사적 퇴행이다. 성 접대 등의 혐의를 받던 김 전 차관은 출국하려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긴급 출금됐다. 그런데 1심 법원은 긴급 출금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김씨에 대한 재수사가 임박한 상황이어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돼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했다. 목적이 정당하면 어느 정도의 절차적 위법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김 전 차관 경우는 무고한 일반인의 출국을 저지한 것과 달리 봐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단죄하는 과정에 적법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법의 대원칙과 배치되는 판결이다. 사법의 시계를 미란다 판결이 나온 1966년 이전으로 되돌려버린 것이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진 판사가 한 사람뿐이냐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초반인 2018년 ‘김명수 사법부’가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전임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한다며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로 개봉했다. 영장 없이 판사 사무실 서랍을 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찰도 검사 비위를 감찰하다 컴퓨터 등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면 수사로 전환해 영장을 받는데 판사들이 그런 절차를 무시한 것이다. 선의로 해석하면 그들도 ‘정당한 목적’을 위해선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대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이젠 정당한 목적이라고 우길 명분도 사라졌다.
당시 조사위원회 주축 판사들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이라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이 연구회 회장 출신이고, 이 연구회 출신들이 김명수 사법부에서 요직을 독차지했다. ‘불법 출금 무죄’ 판결을 한 판사가 이 연구회 출신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절차를 깃털처럼 여기는 김명수 사법부 주류들의 인식이 그 판사에게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판결을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조선일보 사설
03-15 전모 밝혀내야 할 文정부 ‘통계 조작’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1인당 국민소득 수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소프트파워인 정부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정부가 하는 일과 발표하는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라 하겠다. 국민이 정부를 믿고 정부의 설명에 기초해 의사결정(public choice)을 해 나가는 정치 행위가 선순환한다면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감사원의 통계 왜곡 의혹에 대한 감사가 해를 넘긴 데 이어 조사 기간을 또 연장한다고 한다. 이제는 노동·자본·기술에 이어 데이터의 양과 질이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가져다주는 빅데이터 시대인 만큼 통계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의혹은 한 점 빈틈없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정부가 시장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일을 하지만, 정부가 실패하는 대표적인 경우로 부당한 의도적 개입 내지는 조작이 꼽힌다. 선거와 투표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연장하는 정치권으로서는 소득·고용·부동산 가격 등의 통계를 입맛에 맞게 고치고 싶은 유혹을 쉽게 받는다. 중국의 통계를 잘 안 믿는 이유도 이런 통제사회의 불투명성에 있다.
통계청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공보처에 통계국을 둔 것을 시작으로 경제기획원 산하 통계국을 거쳐 이제는 기획재정부 외청으로 발전했다. 지위가 격상되면서 통계의 질 제고와 독립성 및 신뢰성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정상황실을 중심으로 공식 발표 전 통계 검토의 빈도가 그 전 정부에 비해 4배나 늘었다. 의도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분배를 개선해 소득을 창출한다는 소득주도성장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분배 통계가 나오자 임기제 청장을 급거 교체했다. 이후 표본 수정을 통해 빈곤층 분배 상태가 17%나 나아진 것으로 발표됐는데, 그전에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기초해 생산하던 분배 통계를 주택공시가격 기준으로 바꿔서 그렇다고 했다. 기준을 바꾸려면 정해진 절차와 위원회 등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역시 감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사안이다.
이런 사례는 소득 통계만이 아니다. 문 정부에서는 공공기관을 비롯해 사회 전역에서 비정규직을 없애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오히려 비정규직이 늘어난 것으로 고용 통계가 나오자 사전 점검을 통해 통계를 고쳤다. 기간제 근로자와 비정규직의 개념이 다르며, 재정 지원을 통해 노인 일자리 사업 등이 크게 늘고, 최저임금이 급상승하면서 시장의 대응으로 나타난 고용 통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값 통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문 정부 시절에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다주택자 전체를 적폐 투기세력으로 규정하고 세금폭탄 수준으로 부동산 세제를 강화했다. 이와 함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한국부동산원에서는 표본을 변경해 국민은행이 발표하는 KB부동산통계와는 5배나 차이가 나는 집값 통계를 만들어 이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발표했을 때 국민은 냉소했다.
통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성과를 비교해 계획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객관적이고 일관된 비교 가능성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수단이다. 감사원은 적정 절차(due process)와 정부 통계의 신뢰성이 정치 선택의 근간임을 감안, 철저히 감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문화일보
03.16 ‘사드괴담’, ‘청담동 술자리’ 믿는 사람이 아직도 30% 넘는다니
가짜 뉴스를 감시·검증하기 위해 만든 시민단체 ‘바른언론시민행동’이 여론조사를 해보니 ‘사드 전자파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가짜 뉴스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아직도 37%에 달했다고 한다. ‘청담동 술자리’가 실제 있었을 것이라는 사람, 김건희 여사가 유흥업소 출신이라고 믿는 사람도 30%가 넘었다. 대장동 사건을 여전히 ‘윤석열 게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31%에 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고 생각과 다른 정보는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부정하는 성향이 있다. 실제 그런 실험 결과도 있다. 사람들의 이런 속성을 가짜 뉴스 만드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지난 대선 기간 가짜 뉴스 생산자의 77.5%가 정치인·정당·후보 진영이었다는 서울대 SNU팩트체크센터의 분석 결과도 있었다. 일부는 가짜 뉴스로 돈까지 번다.

▲가짜 뉴스에 대한 인식도(트루스가디언 제공)
국방부가 2018년부터 4년간 측정한 사드 레이더 전자파는 유해 기준치의 2만분의 1이었다. 휴대전화 기지국의 1000분의 1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알리지 않고 감췄다. 민주당과 좌파 단체에서 “사드 전자파에 내 몸이 튀겨진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짜 뉴스를 방조한 것이다.
청담동 술자리도 문제의 첼리스트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해 가짜로 드러났다. 하지만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은 후원금을 가득 채웠고, 그와 협업했다는 유튜버들은 ‘슈퍼챗’ 돈벌이를 톡톡히 했다. 유시민씨는 한동훈 법무장관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추적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번 조사에서 ‘검찰이 노무현재단을 내사했다’는 가짜 뉴스를 여전히 사실로 믿는 사람(43%)이 거짓이라는 사람(31%)보다 많았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내 편에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사실 판단의 잣대가 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현상이다.
조선일보 사설
03-16 공수처 실험 2년, 처참하게 실패했다

김종민 변호사, 前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1호 기소 사건부터 1심서 무죄
자체 인지와 체포.구속은 제로
수사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여
출범부터 인력 부족 탓했지만
비슷한 규모 지청과 천양지차
처장 책임 묻고 존폐 검토할 때
문재인 정권 검찰개혁의 상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한 지 2년이 넘었다. ‘건국 이래 수십 년간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온 체계를 허물고 형사사법 시스템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헌정사적 사건’ ‘국민 모두에게 균등하고 기회가 보장되는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위해 설치되었다’는 자화자찬과 달리 2년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지난해 12월까지 공수처가 입건한 고위공직자 사건은 24건이다. 자체 인지(認知) 사건은 한 건도 없고 대부분이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 고소·고발했거나 다른 수사기관에서 이첩받은 것이다. 출범 후 1호 기소 사건인 김형준 전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수단장 사건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2년간 체포·구속 실적은 한 건도 없다. 수사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처참한 공수처의 지난 2년간 성적표는 2021년 232억 원, 2022년 200억 원 가까운 예산을 쓰면서 검사 25명, 수사관 40명, 행정인력 20명이 만들어낸 것이다. 25명의 검사가 근무하는 비슷한 규모의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22억 원의 예산을 쓰면서도 2021년 2만4639건의 사건을 접수해 1만904건을 기소했다. 예산의 편성과 집행도 주먹구구식이다. 2022년 공수처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총괄명세서에 따르면 2021년 예산 232억 원 중 60%인 139억 원만 사용했다. 2억5000만 원이 편성된 수사팀 여비는 3600만 원만 사용한 반면, 특수활동비 1억 원은 전액 사용했다. 수사를 하지 않는데 무슨 특수활동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가 제출한 예산안 181억 원으로는 부족하다며 18억 원을 늘려 200억 원 가까이로 증액했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출범 초기부터 “인력이 부족하다”며 수사 성과가 없음을 인원 탓으로 돌렸지만, 근본 원인은 조직 구성과 운영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검사 정원이 23명인데 수사부 검사가 12명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무능하다는 자백이다. 특별수사검찰청 성격의 공수처라면 적어도 투입 가능한 수사 인력의 80% 이상을 직접 수사 부서에 배치해야 하는데, 인권감찰관·인권수사정책관·수사기획관 조직을 두며 전력을 분산시켰다. 특히, 부장검사 1명과 검사 1명이 배치된 인권수사정책관실은 인권 친화적 수사와 적법 절차 준수 등을 위한 중·장기 제도 연구 및 교육을 담당한다는데 이는 법무부가 할 일이다. 지난 2년간 수사 실적이 없는 공수처의 조직 운영이 너무 한가롭다.
공수처는 한국정책능력진흥원에 의뢰한 ‘공수처 조직역량 강화 방안 마련 정책연구’ 보고서를 통해 정원을 현재 85명에서 170명으로 2배가량 확대해야 수사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 기동민, 권인숙 의원은 위 내용을 반영해 공수처 검사를 현재의 25명에서 40명으로, 수사관은 40명에서 80명으로, 행정직원을 20명에서 50명으로 늘리는 공수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서는 향후 5년간 569억 원의 소요 예산을 예상했지만, 국회 예산정책처는 인건비 등 기본 경비만으로도 약 750억 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했다. 예산 먹는 하마가 따로 없다. 지난 2월에는 공수처에 검찰 특수부와 유사한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추진한다는 보도가 있었고 독립청사 신축도 계획 중이라 하는데 언제까지 인력과 조직 타령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년간 4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쓰고도 고위공직자 범죄 체포나 구속 실적이 한 건도 없다면 공수처의 존재 이유와 공수처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 처장의 임기는 3년이다. 임기를 다 채운다면 2024년 1월 퇴임한다. “초대 처장으로서 공수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끝까지 소임을 다할 생각”이라며 임기 완수를 공언했지만, 공수처의 진짜 ‘소임’은 고위공직자 수사와 처벌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자 법칙이다. 새해 첫 브리핑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원문을 호기롭게 인용했지만, 공수처장의 ‘소임’은 어느 세월에 다하려는가. 믿음의 합리성 같은 것은 없다. 행동의 합리성만 있을 뿐이다. 올해 공수처 예산은 176억 원이다.
문화일보
03.17 가짜뉴스 퍼나르는 패널들
“일본에서 학수고대하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지금은 연장 조치를 중단한 상태인데 우리가 먼저 철회하는, 연장을 재개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 국내에서 북한 미사일 정보 수집이 안 된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우리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받아볼 수 있으니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죠.”
지난 10일 KBS 라디오를 들으니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패널이 이렇게 말했다.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다. 한일이 북한 핵·미사일 정보 공유를 위해 2016년 11월 체결한 GSOMIA는 중단 없이 1년 단위로 6차례 갱신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선 고위 당국자가 “정상화란 표현은 굳이 필요 없다”고 말할 정도로 궤도에 올랐다. 단지 전 정부에서 있었던 ‘종료 통보와 유예’라는 소동을 정리하는 형식적 절차만 남아있을 뿐이다.
‘한일 관계 개선은 일본에만 좋은 일 해주는 것’이란 프레임에 갇히다 보니 판단이 흐려질 때가 많다. 13일 MBC 라디오에선 한 패널이 대통령 방일과 관련, “우리는 국빈 방문이라 홍보했는데 (일본에선) 실무 회담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번 방일은 12년 만에 재개되는 ‘셔틀 외교’의 첫 단추를 채우는 1박 2일 짧은 일정이다. 패널은 4월 있을 미국 방문과 착각한 것인데 끝내 이를 바로잡지 않고 대통령 비판을 이어갔다. 지난해 11월 MBC에선 진행자가 ‘한일 정상 통화에 주한 미국 대사가 배석했다’는 가짜 뉴스가 사실인 양 출연자에게 질문하는 일도 있었다.
방통위의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를 보면 지난해 라디오를 필수 매체로 인식하는 비율은 2% 미만에 그쳤다. 그야말로 ‘올드 미디어’가 됐지만 정치권에선 정치부 기자의 하루 일과가 라디오 프로를 훑는 것으로 시작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 특히 ‘보이는 라디오’가 표준이 된 요즘엔 가공된 콘텐츠들이 유튜브에서 수백만 조회 수를 거뜬히 기록한다. 잘못된 정보로 청취자들을 선동·호도하는 내용이 많다. 자칭 보수라는 패널들도 “비판했다가 용산에서 전화 온다” “올해 명절 선물 못 받을 수 있다”며 스스로의 평론을 희화화하기도 한다.
일부 진행자나 패널의 편파성을 새삼 탓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정부·여당이 미디어 전장(戰場)에서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선 장차관들이 매일 아침마다 김어준씨 라디오에 출연해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정책을 홍보하고 메시지를 발신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나가 알리고, 반박 논리를 개발해 부딪치고 가짜 뉴스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나. 괜찮은 정책을 만들어놓고도 미디어전을 방기하면 정권 내내 ‘주 69시간제 소동’ 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홍보 실패도 정책 실패라고 하지 않았나.
조선일보 김은중 기자
03-21 마크롱 명운 걸고 연금개혁, 한국도 이런 결기 필요하다
프랑스가 천신만고 끝에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확정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상 비상권한을 동원해 ‘하원 패싱’을 감수했고, 이에 반발한 야당의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불신임안이 20일 하원 표결에서 가까스로 부결됐기 때문이다. 의회를 건너뛰는 절차에 대해서는 쉽게 찬성하기 어렵지만, 프랑스 연금개혁이 주는 교훈은 선명하다. 국가와 미래를 위해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필요한 악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 잘못된 포퓰리즘 정책을 시정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 눈앞의 유불리만 앞세운 여론과 정치권에 휘둘리면 국가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개혁안은 62세인 정년을 64세로 올려 연금지급 연령도 2년 늦추는 것이 골자다. 헌법 제49조 3항에 따라 정부가 예산안이나 사회보장 법안 등을 의회 표결 없이 입법할 수 있지만,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면 해당 법률은 무효가 된다. 여소야대 하원에서 9명만 더 총리 불신임안에 찬성(278명)했으면 연금개혁은 물 건너가고 마크롱의 정치 생명도 끝날 뻔했지만, 마크롱의 결기가 통했다.
한국의 국민연금 사정은 프랑스보다 더 심각하다. 그런데 국회 연금개혁특위는 4월에 개혁안을 내기로 했던 입장을 철회하고 보험료율 인상 등 ‘모수개혁’을 정부로 떠넘기는 식으로 손을 뗐다. 윤석열 대통령은 3대 개혁의 하나로 추진 일정을 밝혔지만 앞길은 험난하다. 프랑스처럼 국회를 건너뛸 권한도 없다. 대통령도 정치권도 국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청년세대의 연금 거부 사태부터 발생하고, 국가의 존재 이유도 그만큼 훼손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03.24 남북한의 또 다른 비대칭 전력, 말(言)
북에서 우리말 가르치면 최고 사형인데
남에서는 북한 말이 표현의 자유로 보호
야당 정치인은 ‘견결’ ‘총화’ 북 단어 남발
평양은 ‘퇴진이 추모다’ 투쟁 구호까지 하달
미사일 아닌 말로 붙으면 北이 이길 것 같다
16세기 독일 수도사 그레고르 라이시가 당시 학문을 알레고리로 형상화한 그림 중 ‘수사학의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서 말의 학문인 수사학은 입에 칼과 꽃을 동시에 물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말은 꽃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전쟁의 무기처럼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그림이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우연이 아니다. 거짓말은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위험물이기 때문이다.
말의 힘에 일찍 눈뜬 서양 사람들은 말을 잘 쓰면 집을 따듯하게 덥히지만 잘못 다루면 집을 태우는, 불[火]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위험물을 제법 잘 다룬 서양인들은 수사학을 지렛대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일구었고, 말을 통해 민주주의를 꽃피웠으며, 논쟁의 규칙을 세워 갈등 해결의 도구로 삼았다.
이에 비해 ‘숭문어눌(崇文語訥)’의 전통이 있는 동양에서는 예부터 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나, 북한만은 예외인 것 같다. 각종 구호로 도배된 북한의 거리는 레토릭 낙원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사상 교육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입이 풀려있어 대적하기 부담스럽다. 나는 달변의 태영호 의원을 포함해 TV에 출연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거침없는 말발을 접할 때마다, 만약에 남과 북이 미사일 대포가 아닌 말로만 붙는다면 북이 이길 것이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말의 가공할 위력을 먼저 감지한 북한이 전열을 가다듬고 대대적인 단속과 함께 ‘억세게 싸울 기세’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올해 초 최고인민회의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만들어 ‘괴뢰말’인 한국식 말투를 쓰면 6년 이상 징역, 가르치거나 인쇄물을 제작 유포하면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게 했다. 남측 영상물을 유포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이 3년 전이다. 새 법은 여기에 게임 ID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들의 표현대로 ‘근본을 알 수 없는 잡탕 말이자 쓰레기 말’로부터 자신들의 언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평양발 혁명의 언어들을 우리나라로 계속 흘려보내 사회를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핼러윈 참사 때 ‘퇴진이 추모다’ 같은 투쟁 구호까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는가 하면,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댓글이나 만평을 올려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역공작을 펼치라는 지시도 내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윤석열 후보 대망론에 적극 대응하라”고 지시하고, “댓글 팀들이 태극기 부대를 사칭해 윤석열의 (당시) 야권 후보 대망설은 보수 난립을 노린 집권 여당(민주당)의 술책이라는 괴담을 널리 유포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정권 퇴진 운동과 반미 투쟁을 지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 내려온 댓글과 시위 구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원되고 놀아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찜찜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가 어떻게 미국 사회 여론에 침투하는가 하는 탐사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에 위장 회사를 차려놓고 댓글 공작을 하는데, 주로 미국 내 인종차별 이슈를 부추기고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 이런 댓글 조작 회사의 운영자가 고액의 수입을 올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사이트 깊숙이 러시아어가 발견되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보도였다.
다른 대륙(아프리카)에 회사까지 차려 모국어도 아닌 언어(영어)로 미국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러시아의 힘겨운 노력에 비하면, 북한의 대한민국 개입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우선 생김새가 같으니 섞여도 모르고, 같은 언어를 쓰니 사투리 배우듯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공론장에서 ‘활약’이 가능하다. 왕래가 자유로운 조선족들을 잠재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생적인 북한 추종 세력들이 충실하게 지령을 수행하니 이보다 쉬운 장사가 없다. 얼마 전 간첩단 혐의로 기소된 경남 창원의 ‘자주통일 민중전위’가 한 일을 보면 북한의 지령보다 그걸 떠받드는 남쪽 사람들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한 언어를 조기에 학습한 운동권 세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상과 언어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고, 국회에서는 야당 정치인이 북한의 낯선 언어인 ‘견결’ ‘총화’ 같은 단어를 서슴없이 발언한다. 민노총 홈페이지에는 북한조선직업총동맹이 보낸 글이 버젓이 올라있는데도 우리 방송통신심의원회는 ‘표현의 자유 보호’ ‘다양한 사상과 주장을 인정할 필요성’ 등을 근거로 손대지 못하고(않고) 있다.
그뿐인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정치인들, 그에 대한 무뇌아적 추종 글들,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하)는 외교 문제에도 남의 나라 헐뜯듯 난도질하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헷갈리는 논객과 정객들, 어떤 괴담과 가짜 뉴스가 올라와도 30% 정도는 진짜로 받아들이는 혼탁한 공론장. 그 속으로 자유와 독이 적당히 섞인 칵테일 같은 북한발 메시지가 해커들의 활약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다.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에 따르면 거짓 불량 정보는 시장에서 걸러져야 하는데, 우리의 공론장이 과연 그 정도로 자정 능력과 복원력이 있는가? 북에서는 남한 말을 쓰면 사형인데, 남에서는 북한 말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보호되며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사회를 움직인다. 심각하고 위험한 전력의 비대칭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정신없고 대책 없는 노릇이다.
조선일보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03.27 文이 해체하려던 4대강 보, 가뭄 극복 도움 주고 있다

▲충남 서북부 지역의 식수원 역할을 하는 보령댐 상류가 계속된 가뭄으로 일부 바닥을 드러낸 채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보령댐이 가뭄 '경계' 단계에 진입함에 따라 지난 3일부터 금강에서 하루 최대 11만5천t의 물을 보령댐으로 보내주고 있다. 보령댐은 서산·보령·홍성 등 충남 서북부의 유일한 수원이다. /신현종 기자
호남 일대는 1년 가까이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는 바람에 극도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산강과 금강에 세운 5개의 보(洑) 덕에 그나마 최악 고통은 피하고 있다. 영산강에선 최근 광주광역시 구간에 임시 취수 시설을 설치해 하루 3만t씩 수돗물 원수(原水)를 공급하고 있다. 금강에선 지난 3일부터 21㎞ 도수로를 통해 보령댐 상류로 물을 공급해 충남 서북부의 가뭄 극복을 돕고 있다. 영산강은 승천보·죽산보, 금강은 세종보·공주보·백제보가 있어 최소 수위(水位)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이다.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의 국가물관리위원회는 금강의 세종보·공주보, 영산강의 죽산보를 해체하고 금강 백제보와 영산강 승촌보는 상시 개방하기로 의결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뒤집은 것이다. 단 실행 시기는 지역 주민 의견을 모아 정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보 해체는 농업용수 고갈을 우려하는 지역 주민들 반발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심으론 보 해체를 포기했으면서도 환경단체 등 지지 세력 눈치를 보느라 보 해체 결정을 한 듯한 모양새를 유지한 것이다.
4대강 사업 이후 가뭄과 홍수 피해가 급감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94년과 2015년 혹독한 가뭄을 겪었다. 그런데 1994년에는 농경지 피해 면적이 19만㏊에 달했지만 2015년엔 1만㏊에도 못 미쳤다. 2009~2012년의 4대강 사업이 2015년 가뭄 피해를 줄이는 데 역할을 한 것이다. 2002년 태풍 루사로 213명이 희생되고 5조여원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4대강 사업 이후엔 그 같은 대형 홍수 피해를 겪지 않고 있다. 전국 규모 수해의연금 모금 행사가 최근 10여 년 사이 사라진 걸 봐도 알 수 있다.
4대강 사업에서 무리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더라도 효과를 본 부분은 그것대로 평가해줘야 마땅하지만 지난 정부에선 자기들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 들었다.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건설한 보를 다시 세금을 들여 해체하자는 억지 발상까지 나왔다. 4대강 보 해체 시도는 문 정부의 황당한 정책 폭주 중 대표적 사례로 두고두고 지적될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3.27 ‘자유 대한민국’ 연 이승만 기릴 기념관 만시지탄이다
공(功)이 과(過)를 압도하는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재인식·재조명이 윤석열 정부 차원에서도 본격화했다. 국가보훈처는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인 26일 “초대 대통령을 기리는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라며 “부지 선정 등 사전조사 작업을 최근 착수했고, 조만간 구체적 성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 대한민국’을 연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은 만시지탄이다. 진보 좌파 등이 폄훼해온 이 전 대통령을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하고 기리는 것은 국가적 당위다.
생전 사저(私邸)인 서울 종로구 이화장(梨花莊)에서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날 기념식에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등 윤 정부 장관급 인사 3명이 참석한 취지도 달리 없다. 문재인 전 정부가 집권 5년 내내 보훈처장 참석조차 기피한 사실과도 대비된다. 박 처장은 이 자리 축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대통령이 만든 토대 위에서 이뤄졌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과도 있지만, 자유 대한민국 초석을 마련했다는 너무나 큰 공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역사의 패륜아로 오랜 시간 낙인찍혀왔다”며 개탄했다.
이 전 대통령 하야·망명을 부른 4·19혁명의 주역 50여 명이 이날 국립서울현충원의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처음으로 참배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이영일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만 알고 있었으나, 세계 각국 정치를 지켜보며 오해를 파악하게 됐다”고 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지향의 정부 수립을 주도한 점, 6·25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경제 발전이 가능한 안보 토대를 마련한 점 등은 분명한 공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도 “자유나 자치를 외쳐본 적 없는 군주제 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해낸 것은 역사적 큰 성취”라고 평가했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더 확고히 다지며, 국민 자긍심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북돋는 일이기도 하다.
문화일보 사설
03.28 4·19 주역들의 이승만 재평가, 나라에 희망 주는 화해와 통합
4·19 혁명 주역 50여 명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148번째 생일을 맞아 국립서울현충원 묘소를 참배했다. 63년 전 “이승만 하야”를 외치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은 이들은 “이 전 대통령의 과오뿐 아니라 공을 다시 봐야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잡고, 김일성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고, 거부하던 미국을 이끌어 한미동맹을 맺었다. 어느 하나라도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전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결단을 내리고, 지금의 교육제도를 정착시켰으며, 황무지 같던 나라에 원자력 연구소를 세웠다.
역대 모든 한국 대통령에겐 공과가 있다. 이 전 대통령에겐 집권 연장과 독재라는 큰 과오가 있다. 말기엔 고령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처럼 거대한 공적을 세우고도 철저하게 과오만 부각된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전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당선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혼자였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것은 이기붕 부통령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일(反日)주의자였다. 미국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승만 라인’을 그어 독도를 한국 땅으로 지킨 사람이다. 일본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대놓고 반대했다. 심지어 재일동포들의 모국 방문조차 막기도 했다.

▲4·19 혁명의 주역 50여명이 지난 26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148번째 생일을 맞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이 전 대통령의 반일은 너무 심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지만 한국에선 엉뚱하게 ‘친일’이란 딱지가 붙게 됐다. 일제 때 관료들을 일부 기용했다고 하지만 4·19 후 민주당 정권은 일제 관료들을 더 많이 기용했다. 국내 반대파들은 사사건건 미국과 대립한 이 전 대통령을 친미주의자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몇 권의 책과 일부 세력의 집요한 선전 공세는 반일주의자를 ‘친일’로, 용미주의자를 ‘친미’로 둔갑시켰다. 이들에게 이승만의 ‘죄과’는 소련과 김일성을 막은 것이겠지만, 한국에서 ‘이승만 죽이기’는 ‘독재’ ‘친일’ ‘친미’가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있지도 않은 ‘불륜설’까지 지어냈다. 반이승만 가짜뉴스가 가장 판친 곳은 수십년간 학교 교실이었다. 지금 청년들은 이승만의 본모습을 전혀 모르는 지경이다. 문재인 정부는 아예 이 전 대통령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담당 공무원들조차 이승만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건국 대통령이 역사의 패륜아로 낙인찍혔다”고 한 보훈처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정부가 어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아직도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는 김일성 족벌 아래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누가 부정하겠나. 4·19 주역들의 이승만 재평가는 모처럼 나라에 희망을 주는 화해와 통합의 길이라고 평가한다.
조선일보 사설
03.28 운동대회 나간다고, 이혼했다고… 판사들 “3개월간 재판 못하겠다”
일 안하려는 배석판사
법원내부도 “기가 막혀”
일선 법원 판사 중에는 재판을 제때 처리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다수다. 평일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판사실도 많고 주말에도 사건 기록을 검토하려고 법원에 나오는 판사들도 많다. 하지만 일을 안 하거나 적게 하려는 판사들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부장판사가 일을 많이 시킨다며 배석판사가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법원 내에서도 “기막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법원에는 ‘벙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벙키는 벙커(bunker·골프장 모래 구덩이)와 루키(rookie·신인)의 합성어다. 일을 맡겨도 제대로 결과를 내놓지 않는 젊은 판사를 뜻한다. 부장판사들이 함께 근무하기 싫은 후배 배석판사를 가리킬 때 이 말을 쓴다.

/일러스트=이철원
과거 법원에서는 부당하게 일을 많이 시키고 권위적으로 재판부를 운영하는 부장판사가 ‘벙커’로 불렸다. 배석판사의 기피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판사는 “법원마다 나타나는 ‘벙키’ 배석판사 사례들은 황당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작년 한 지방법원에선 배석판사가 소속 부장판사에게 “실연(失戀)을 당했으니 앞으로 적어도 한 달간은 판결 선고를 못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지방법원에서는 “이혼하면서 받은 충격이 심각해 3개월 동안은 판결문을 못 쓰겠다”는 배석판사도 나왔다고 한다. 또 “스포츠 대회에 나가기 위해 몸 만들기를 해야 하니 내가 맡은 사건의 판결 선고는 석 달간 날짜를 잡지 말아 달라”고 한 배석판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3인 재판부에서 판사 1명이 재판을 안 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른 판사 2명에게 넘어가고 재판도 늦어지게 된다. 판사 출신인 변호사는 “개인 사정으로 재판을 못 하겠다면 휴가나 병가를 내야지, 판사 월급은 받으면서 사실상 재판은 거부하겠다고 하는 식의 행동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부장판사들이 ‘벙키’ 배석판사들을 견디다 못해 법원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건을 맡은 배석판사가 판결문 초안을 만들면 재판장인 부장판사가 사실 관계와 법적 논리를 검토해 판결문을 확정하게 된다. 그런데 한 지방법원에서는 배석판사가 출퇴근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판결문도 부실하게 쓰면서 부장판사가 아예 판결문을 대신 써주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부장판사가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건강이 상해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해당 배석판사는 업무 시간에 재테크 등 개인 업무에 몰두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지방법원에서는 새로 부임한 부장판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지시를 거스르는 식으로 ‘길들이기’ 하려는 배석판사들 때문에 부장판사가 스트레스를 받아 질병을 이유로 휴직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부장판사가 잘못된 판결문을 바로잡아 주면 ‘왜 내가 쓴 판결문을 마음대로 고치느냐’며 항의하는 배석판사도 있다는데, 이런 경우는 아예 판결문을 쓰지 않으려는 배석판사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라고 말했다.
‘벙키’ 배석판사들을 피하려고 부장판사들로만 구성되는 대등 재판부 근무를 자원하는 부장판사도 느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등 재판부에서는 부장판사 세 명이 같은 비율로 사건을 나눠 맡아 모든 판결문을 직접 써야 해 업무 부담이 크지만, 배석판사들 때문에 골치 아플 일은 없다는 것이다.
‘벙키’ 배석판사 문제가 심각한 상태이지만 이들에 대한 제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일로 징계에 회부된 경우도 없었다. 헌법상 판사는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으면 파면되지 않게 돼 있다. 판사들도 근무 평정을 받게 돼 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법조인은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들어 법원의 인사 제도가 완전히 거꾸로 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취임 이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폐지하고 판사 투표를 통한 지방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해 “실력과 업적을 통한 승진 시스템을 없애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법조인은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되더라도 쉽게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까지 와 있다”고 했다.
☞배석판사
법원은 소송 금액이나 범죄 경중에 따라 사건을 단독 재판부와 합의부에 나눠 맡긴다. 단독 재판부에는 판사 1명만 있지만, 합의부는 부장판사 1명과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된다. 배석판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판결문 초안을 써오면 부장판사가 사실 관계와 법적 논리를 확인한 뒤 판결문을 확정한다.
조선일보 양은경 기자
03-28 “실연당해 재판 못 해”…김명수 사법부 6년 참담한 실상
재판 지연은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 회사나 개인이 파산할 수 있고 억울한 옥살이가 연장되거나 끔찍한 범죄가 재발할 수도 있다. 공정과 함께 신속을 재판의 두 기둥으로 꼽는 이유다. 그런데 판사들이 1주일에 3건만 선고를 하겠다고 암묵적 합의를 하는가 하면, 실연 당했다고 선고를 않겠다는 판사도 있다고 한다.
한 지방법원 배석판사는 최근 소속 재판부 부장판사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부터 1심 배석판사들이 주 3회 선고에 합의했는데 부장판사가 간단한 재판은 예외로 하자고 했다는 게 이유라는 것이다. 지난해 한 배석판사는 실연을 당했으니 한 달 간 선고를 못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는가 하면, 이혼 충격으로 3개월간 판결문을 못 쓰겠다는 판사도 있고, 스포츠 대회 출전을 위해 몸을 만들어야 하니 3개월간 선고 기일을 잡지 말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재할 방법도 없다.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으면 파면할 수 없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고법부장 승진제를 폐지하면서 열심히 재판할 동기가 사라졌고, 법원장 추천제를 도입하면서 일선 판사 발언권이 세졌다. 이런 와중에 김 대법원장이 취임한 2017년 293일이었던 민사 합의부 1심 재판 기간이 5년 만인 2022년에는 420일로 늘어났다. 2년 내 1심 판결이 나오지 않는 장기 미제 사건이 민사재판에선 3배, 형사재판에선 2배로 급증했다.
김명수 사법부의 편향 인사·판결로 재판 공정성을 훼손했고 재판 지연으로 국민 권리를 침해했다. 망가진 사법부 신뢰 회복을 위해 차기 대법원장 인선이 더 중요해졌다.
문화일보 사설
03.29 반도체, 일본의 자존심 외교가 낳은 참극
전세계 반도체 호령하던 1980년대 일본의 패착
소니 창업주와 이시하라 신타로 “No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
이후 일 반도체는 역사 뒤안길로
반도체 지렛대론 주장하는 한국의 자칭 진보들은
20세기 日 극우 실패 반복하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5월 20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생산 시설을 둘러본 후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은 전 세계 제조업 5위, 반도체·배터리 생산 1~2위, 대규모 군대와 방위산업을 가진 국가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기술 공급망을 재편하는 등 전략 목표를 실현하려면 한국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런 한국의 역량을 최대한 지렛대로 삼아 동맹에 쓴소리도 하고 치열하게 협상하고 주고받아야만 한국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소위 진보 성향 일간지 <한겨레>의 박민희 논설위원이 지난 17일 쓴 칼럼의 한 대목이다. 이 글을 읽고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2020년대 한국에서 스스로를 ‘진보’로 여기는 이들이, 수십 년 전 일본 극우 정치인을 연상케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1980년대,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마쓰시타(현 파나소닉) 등 일본 5대 메이커가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고 있었다. D램 시장 일본 기업 총 점유율은 80%에 근접했다. 빛나는 성취에 스스로 눈이 멀었던지, 패전의 설움을 잊고 살던 일본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올바른 경영 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소설가이자 극우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저했다.
이시하라는 마치 OPEC 회원국들이 석유 수출 통제를 무기 삼듯, 일본은 반도체 수출을 무기 삼아 미국을 상대로 일본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포부를 내비치고 있었다. “중거리 핵무기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건, 그러한 무기의 정확성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아주 작고 고도로 정밀한 컴퓨터에 의해 판가름 난다. 만일 일본제 반도체가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정확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 일본 없이 첨단 무기를 만들 수 없으니 미국도 일본에 무릎을 꿇거나, 적어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소리다. 이시하라는 당차게 선언했다. 첨단 반도체는 “군사력의 핵심이며 따라서 일본의 힘의 핵심이다. … 어떤 면에서 일본은 아주 중요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시하라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미국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는 모리타 아키오의 이름이 공저자로 박혀 있었다. 워싱턴 정가가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 정보기관의 내부 회람용으로 만들어진 축약본이 서점에서 알음알음 유통될 지경이었다. 그 후의 전개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 합의가 이어지면서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 기업들이 그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결과 오늘날의 세계경제 지도가 완성됐다.
미 터프츠대 교수 크리스 밀러는 ‘칩 워(Chip War)’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대해 인상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미국이 ‘적의 적은 친구’라는 판단하에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인텔은 당시만 해도 기술력이 부족했던 삼성의 메모리칩에 인텔 브랜드를 붙여서 팔 수 있도록 했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미국 기업 마이크론은 삼성에 64K D램의 설계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생산을 허용했다.
이런 협력이 가능했던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가 축적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한국으로 넘어올 때 워싱턴 정가는 제동을 걸지 않았다. 후방 지원에 머물렀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때로 미국보다 많은 병력을 보내며 베트남에서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슬슬 자존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보다 좀 더 충실한 동맹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가져가는 편이 낫다는 인식을 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반도체의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자랑한다. 미국이 제3국의 반도체 생산을 막으려면 일본의 협력을 얻어야 할 정도다. 그런 일본조차 미국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극우 정치 특유의 필부지용(匹夫之勇)이 낳은 쓰라린 결과다. 21세기 한국의 자칭 진보는 20세기 일본 극우와 같은 함정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을 이기려면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 미국은 미래 지향적 한일 화해를 원한다. 일본에 ‘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일본을 이기기 위한 첫 단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역사만이 아닌 듯하다.
조선일보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03-30 대법원장 임명권 제한은 헌법에 일탈

김상겸 동국대 명예교수·헌법학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대법원장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해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하는 규정을 신설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대법원장의 임명 절차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 임명 절차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고 사법기관의 독립성 및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헌법은 대통령에게 대법원장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있다.
대법원은 헌법에 규정된 사법부의 최고기관이며,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이다. 사법부는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국가권력으로 법적 분쟁을 재판으로 해결하는 국가권력이다. 이런 이유로 사법부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그 독립성을 보장받는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선거로 선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은 제104조 제1항에서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 대법원장의 임명에 있어 국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임명이란 방법을 채택한 것은 대법원장의 민주적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회의 견제를 통해 대통령의 독단적 임명권 행사를 차단함으로써 권력분립 원칙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이번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대법원장 임명권을 제한하고 있다. 헌법은 국회의 동의라는 견제 장치를 두고 있지만, 대법원장의 임명권은 대통령의 권한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으로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임명권이 제한된다면, 법률로 헌법의 내용을 변경할 수 있는지가 문제 된다.
개정안의 제안 이유에는 대법원장후보추천위를 구성해 대법원장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은 과거에도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즉, 역사적으로 1972년 유신헌법 전에는 법관의 자격을 가진 자로 조직된 선거인단이나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이란 방법으로 대법원장 후보를 선출해 임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헌법의 명문 규정에 따라 대법원장을 임명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 헌법을 보면 의원내각제를 정부 형태로 채택했던 제2공화국 헌법에서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써 조직되는 선거인단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선거하고 대통령이 확인토록 했다. 그리고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대법원장에 대해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토록 했다. 그런데 1972년 헌법 이후에는 현행 헌법까지 국회의 동의와 대통령 임명이란 방식을 채택해 오고 있다.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대법관임명제청권,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3인의 지명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중 3인의 지명권 등 헌법기관 구성에 있어 중요한 권한을 갖는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권에 대해 법률로 이를 축소하거나 박탈하는 등의 제한을 가하는 것은 헌법의 내용을 법률로 변경해 헌법의 최고 규범성을 침해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헌법은 이미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권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에 동의권을 부여하고 있어서, 개정안은 헌법이 요구하는 견제를 넘어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임명권을 형해화함으로써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본다.
문화일보
03-31 이승만 대통령 공적 폄훼한 교과서 재검정해 걸러내야
초·중·고 교과서가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공적을 폄훼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國定)에서 검정(檢定) 체제로 지난해 전환돼, 올해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초등 5·6학년용 ‘사회’ 검정 교과서도 11종 모두 이 전 대통령의 공(功)보다 과(過)에 초점을 맞춰 기술한 사실이 31일 보도됐다. ‘자유 대한민국’의 안보 초석을 놓은 이 전 대통령의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조차 의미를 제대로 소개한 교과서는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학생들의 역사 인식과 국가관을 오도(誤導)할 교과서들을 문재인 전 정권이 부추긴 결과다.
11종 대부분은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거의 기술하지 않으면서, 남북 분단 책임을 덮어씌우기까지 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도 “(당시 분단은) 국내외 정세를 종합해야 하는 내용인데, 배경 설명 없이 이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 발언만 교과서에 싣는 것은 초등 단계에 맞지 않는다. 교과서만 보면 학생들이 이 전 대통령을 ‘분단 원흉’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개탄한 이유다.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는 이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을 3·15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정치를 한 것으로만 채웠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만든 초대 대통령의 역사적 공적은 아예 없던 일로 둔갑시킨 것과 다름없다.
좌 편향의 문 정부가 검정을 통과시켜 2020년부터 사용 중인 중학교 ‘역사’ 교과서 7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도 다르지 않다. 일부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 북에서 소련이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이 전 대통령의 1946년 6월 ‘(전북) 정읍 발언’을 1946년 2월 사실상 북한 정부인 김일성의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 사실보다 먼저 서술함으로써, 분단 책임을 뒤바꾸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교육부는 재검정해서 걸러내야 한다. 이런 반(反)역사·반사회 교과서로 미래 세대를 더 망칠 순 없다.
문화일보 사설
03.31 베트남·폴란드의 과거사에서 배우는 교훈
20C 지도서 사라졌던 폴란드, 800만명 숨진 베트남… 현재 두 나라의 발전을 보라
가장 위대한 과거사 극복은 부국강병과 경제발전… 잊지 않되, 실력 키워야
극소수 강대국을 제외한 현존하는 국가 대부분은 외세 침략과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를 겪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제국주의 시대엔 더욱 그랬다.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중동에서 극동에 이르는 아시아 대륙 전체에 온전한 독립국은 일본과 태국 두 나라뿐이었다. 당시엔 국가의 무력행사가 합법적 주권행위로 간주되었고, 어떤 국제법도 무력을 통한 영토 합병이나 식민 지배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법화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시기 가장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겪은 나라는 단연 아시아의 베트남과 유럽의 폴란드였다. 베트남은 1883년 프랑스 식민 통치, 1940년 일본군 진주, 1950년 대프랑스 독립전쟁, 10년간의 대미 전쟁 등으로 전체 국민의 10%인 800만 명을 잃었다. 폴란드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전 국토가 분할돼 123년간 지도에서 사라졌다가 1918년 독립을 회복했다. 그 후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다시 분할 합병되었다가 1945년 회생했는데, 그 6년간 유대계 300만 포함, 560만 국민이 나치 독일 손에 목숨을 잃었고, 군장교, 경찰, 지식인 등 지도층 인사 2만2000명이 소련군에게 집단 학살되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는 “과거를 잊은 국가에 미래는 없다”는 유럽의 오랜 격언과도 일맥상통한다. 과거 역사를 교훈 삼아 다시는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간 관계에 있어 그런 역사의 교훈은 주로 미래의 도전과 재앙에 대비한 부국강병, 즉 부유한 나라와 강력한 군사력의 건설을 의미한다. 과거의 역사적 원한을 잊지 말고 길이 기억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폴란드, 독일 전차 우크라에 첫 인도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인 지난 24일(현지 시각) 데니스 슈미할(왼쪽에서 둘째) 우크라이나 총리와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왼쪽에서 셋째·뒷모습) 폴란드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독일제 주력 전차 레오파르트2 앞에서 전차 운용 요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이날 서방 국가 중 처음으로 레오파르트2 전차 4대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며“가능한 한 빨리 러시아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로이터 뉴스1
베트남은 과거의 모든 가해국을 향해 “과거를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경제 발전을 통한 부국강병이 최우선 국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의혹’에 대한 공동 조사와 보상 용의를 전달했을 때, 베트남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일체의 논의에 반대한다”며 이를 즉각 거부했다. 과거 두 차례 국가 소멸을 겪었던 폴란드는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냉전 종식 후 가장 먼저 NATO에 가입해 민족의 오랜 숙적인 독일과 안보 협력을 강화해 왔고,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악몽으로 대대적 군비 증강을 서두르고 있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후세에 전하려던 영의정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치욕적 역사를 덮으려던 조선에서 곧 잊혀졌지만, 일본은 수백년간 이들을 연구해 전쟁의 교훈을 되새겼다. 1905년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출전에 앞서 이순신에게 승전기원제를 올렸고, 승전 후 축하연에서 자신은 이순신에 비하면 하사관만도 못한 존재라 말한 것으로 일본 사료는 전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조선은 왜란을 겪은 후에도 아무 대책 없이 친명사대와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다 30년 만에 다시 정묘, 병자호란을 맞았고, 그러고도 다시 대책 없이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공을 맞아 무너졌다.
식민 지배 종식 후 80년이나 지난 현재도 한국에선 그 시절에 대한 추가 사과‧보상 요구가 큰 화두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참혹한 과거사를 겪은 나라도 다들 미래를 위해 더불어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만 홀로 과거사에 매몰돼 살 수는 없다. 케냐, 인도네시아, 나미비아 등도 식민 지배국에 사과‧보상을 요구했다 하나, 이는 특정 대량 학살 사건에 국한된 요구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과거사 논의를 계속하려면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북한‧중국과의 과거사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 역사로부터 배울 교훈은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게 부국강병을 확고히 하는 일이다. 일제 36년의 기억은 지워질 수 없지만, 그것이 미래의 안보와 번영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양국이 과거사를 넘어 미래로 나갈 구체적 길을 제시한 용기 있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한일 관계가 가야 할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명확하다. 단지 과거사의 강을 건너기 위한 정부와 국민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조선일보 이용준 前 외교부 북핵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