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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중앙일보) 2023-03/ 03.01(수) ‘개딸’과 발췌개헌 - 03.31(금) 실리콘밸리은행과 나파밸리

상림은내고향 2023. 3. 28. 20:25

분수대(중앙일보) 2023-03/

03.01(수) ‘개딸’과 발췌개헌

건국 초기 국회 회의록을 보면 놀랄 때가 많다. 식민지배에서 막 벗어난 때인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수준 높은 고민이 담겨 있다. 1948년 6월 23일 회의록을 보자. 김약수 의원은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불란서(프랑스)보다도 남미의 혁명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 대통령제의 결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권력과 권한은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한 항거 태도는 혁명으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1952년 9월 10일 회의에선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인 투표 방식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회 의원들은 거수나 기립으로 찬성 의사를 표현했다. 무기명투표는 국회의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했는데, 잡음이 생길 것을 우려해 의장이 무기명투표를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헌법개정안을 비롯해 인사관계결의안 등은 무기명투표로 결정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제출됐다. 그런 사안은 눈치 보지 않는 투표가 중요하다고 봐서다. 당시 곽상훈 의원은 “기립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또는 표결하는 방식에서 각자의 절대적인 자유보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정됐다.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라는 이념은 국회법 112조에 남아있다. 지난 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것도 ‘인사에 관한 안건은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들은 체포동의안 반대표가 예상보다 적게 나오자 색출 작업에 돌입했다. 찬성표나 무효·기권표를 던졌을 것 같은 비명계 의원들 명단을 만들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의원들의 전화번호도 적어 전화·문자 공격을 유도했다. 의원들에게 어떤 표를 던졌는지 묻고 그 답을 담은 ‘검증글’도 올라온다.

 

1952년 9월 개정된 국회법의 무기명투표 대상에 개헌안이 포함된 건 그해 7월 이승만 정부의 ‘발췌개헌’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려 했다. 군대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개헌안 표결이 이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찬성, 앉아 있으면 반대였다. 찬반이 훤히 보이는 투표였다. 재석 163명 중 163명이 일어났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개딸들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윤성민 정치에디터

 

03.02 축구선수 클린스만, 감독 클린스만

독일축구 레전드 위르겐 클린스만(59)이 한국축구대표팀 새 사령탑이 됐다. 2026년 북중미 3국(미국·캐나다·멕시코) 공동 개최로 열리는 월드컵 본선까지 3년 5개월간 지휘봉을 잡는다.

 

현역 시절 클린스만은 금발을 휘날리며 멋진 골을 터뜨리는 미남 골잡이였다. 경기력과 스타성을 겸비하며 1980년 후반부터 1990년 초반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 마르코 판바스턴(네덜란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아르헨티나), 로베르토 바조(이탈리아) 등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전차군단’ 독일의 우승을 이끌어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4년 뒤 미국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독일 3-2승)에선 2골을 몰아넣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지도자 생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화끈한 공격 축구로 ‘전차군단’ 독일의 3위 등정을 이끌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선 축구 변방이었던 미국대표팀을 16강에 올려놓았다. 상대적으로 클럽팀에선 부진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헤르타 베를린(이상 독일) 지휘봉을 잡았지만, 나란히 한 시즌을 넘기지 못했다.

 

전임자 파울루 벤투(54·포르투갈) 감독이 카타르월드컵에서 원정 16강을 달성한 직후여서인지 클린스만에 대한 국내 평가는 박한 편이다. 대체로 기대보다 우려가 크다. 전술을 코치에게 일임하는 팀 운영 방식, 짧지 않은 휴지 기간(2020년 이후 3년 만의 현장 복귀) 등이 불안요소다.

 

하지만 기대할 만한 대목도 적지 않다. 앞서 두 차례 대표팀을 맡아 이끄는 동안 클린스만 감독은 새 얼굴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세대교체를 완성했다. 선수들의 빅 리그 및 빅 클럽 진출을 독려하고 직접 연결고리 역할까지 자임했다.

 

종목과 팀을 막론하고 감독의 수백 가지 책임 중 결국 신경 써야 할 것은 단 하나, 결과뿐이다. 부임할 때 기세등등하던 지도자가 성적 부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물러나는 상황을 우리는 흔히 본다. 반대로 ‘욕받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감독이 결과를 보여준 뒤 단숨에 ‘명장’으로 거듭나는 케이스도 있다. 제74대 한국축구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클린스만 감독의 시대는 어떤 결말을 남길까.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3.03(금) 인사검증

고위공직자 인선 작업은 추천과 검증으로 나뉜다. 문재인 정부에선 인사수석실에서 후보를 추천하고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검증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민정수석은 교수 출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었고 초대 공직기강비서관은 감사원 출신이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인사청문회도 안 치른 장관 후보자들이 각종 의혹에 휘말리자 민정수석의 경험 부족이 지적됐다. 검찰·변호사 등 법조 경험이 없는 조 전 장관이 인사 검증을 총괄하기에 역부족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2017년 6월 첫 장관 후보자 낙마 사태가 벌어졌다.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명 닷새 만에 물러났다. 20대 시절 사귀던 여성과 몰래 혼인신고했다가 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은 사실이 장관 지명 이후에 드러나 논란이 됐다. 조 전 장관은 안 후보자가 서울대 법대 교수로 일할 때 조교였고,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함께했다.

 

지난달 25일 검사 출신 정순신 변호사가 경찰 수사전담기구인 국가수사본부 2대 본부장에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아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로 전학처분을 받자 대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갔지만 최종 패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수본부장 자격 논란이 불거졌다.

 

민정수석실 폐지를 공약한 윤석열 정부에선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실이 추천한 고위공직자 후보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사전 검증하고,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 공직기강비서관실이 2차 검증한다. 인사기획관은 대검찰청 사무국장 출신이고, 공직기강비서관은 검사 출신이다. 법조계 출신이 인사 검증의 주축으로 바뀌었지만 부실 검증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어느 정부에서나 끼리끼리 인사가 검증 라인의 실력을 뛰어넘는 모양새다. 정 변호사는 윤 대통령과 대검, 서울중앙지검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사법연수원 동기다.

 

한비자(韓非子)는 중국 전국시대 말 법가사상의 주창자다. 그가 지은 『한비자』 난삼편(難三扁)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공자를 만난 노나라 애공이 정치의 도리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신하를 뽑는 데 있다”고 답했다. 아홉번 탈이 없어도 한번 삐끗하면 참사로 번지는 게 인사 문제다. 봐주기 논란까지 보태지면 그것만큼 뼈아픈 게 없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3.06(월) 호칭 범죄, 호칭 인플레

난 아줌마라는 소리가 듣기 싫은가.

지난 3일 오후 수인분당선 열차 안에서 30대 여성이 ‘아줌마’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서 흉기를 휘둘러 3명을 다치게 했다는 기사를 보고 든 생각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고작 호칭 때문에, 혹은 호칭이 도화선이 돼 발생했다. 30대면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릴 수도 있는 나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아줌마를 멸칭(蔑稱)으로 받아들여 큰 죄를 범했다. 사회적 호칭이 삐걱거릴 때 만들어진 균열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넘어 물리적 위험이 된 경우다.

 

호칭 스트레스는 오용에서 시작된다. 노인이 많이 찾는 정형외과나 한방병원에선 환자를 아예 ‘어머님’ ‘아버님’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존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일부는 좋아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OOO씨’ 혹은 ‘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식당 등에서 영혼 없이 남용하는 ‘이모’ ‘삼촌’ ‘언니’도 듣는 사람에 따라 기분 나쁠 수 있다. 누가 봐도 연장자로 보이는 손님이 자신보다 어린 종업원에게 이모라고 부르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비하적 호칭, 틀린 호칭도 기분 나쁘지만, 과한 호칭도 부담스럽다. 멸칭 범람과 호칭 인플레가 동시에 벌어지는 희한한 시대다. ‘손님’도 충분한데 ‘고객님’이 훨씬 많이 쓰이고 있다. 이젠 일부 정부 기관까지 ‘민원인’ 대신 고객님을 쓴다. ‘당선자’와 ‘당선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당선자에서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놈 자(者)가 비하적이라는 이유로 당선인으로 바꿔 쓰고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기자’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가수’는 얕잡아보는 말이라 ‘아티스트’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에선 헛웃음이 나온다.

 

호칭 스트레스 없애기 첫걸음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다. 옆집 아이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반갑지만, 공공장소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른이 아줌마라고 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아무 데서나 유사 가족 관계로 엮는 언어 습관만 덜어내도 개선될 것으로 믿는다. 이름을 모르면 어쩌냐고 할 수 있다. 그 불편함, 물론 안다. 그렇다고 그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럴 때를 위한 마법의 말이 있다. 바로 “저기요”다.

전영선 K엔터팀장

 

03.07 돌아온 벚꽃 엔딩

벚꽃 엔딩의 계절이 돌아왔다. 2012년 그룹 ‘버스커 버스커’가 1집 타이틀곡으로 내놓은 이 노래는 10년 넘게 봄 테마곡으로 인기다. 거리에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들려온다.

 

이 노래 제목이 다른 뜻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3~4년 전부터다.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는, 지방대 몰락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대학의 존망을 가를 신입생 충원율이 나오는 시기도 벚꽃이 한창 날리는 봄이니 여러 가지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올해도 벚꽃 엔딩이 대학가에 울리는 중이다. 신입생 추가 모집 최종 마감일인 지난달 28일까지도 60개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준다는 곳까지 나왔지만 미달 사태가 났다. 학과 통폐합과 정원 축소에도 신입생이 줄어드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직 전초전에 불과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24만9000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지난해 수능 응시 인원(45만477명)의 절반 수준이다. 앞으로 20년 안에 대학 2개 중 1개꼴로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최근 수치는 더 암울하다. 지난해 12월 출생아 수는 1만6803명, 역대 최저다. 월 출생아 2만 명이 2020년 12월 처음 무너졌는데 단 2년 만에 1만5000명도 붕괴할 위기다. 인구 감소의 무서움은 속도에 있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되돌리기 어렵고 가속만 붙을 뿐이다. 다음 세대를 낳을 엄마 수가 빠르게 줄어서다.

 

지금 속도면 매달 태어나는 아이 수가 1만 명에도 못 미칠 날이 머지않다. 대학 신입생이 10만 명 남짓한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얘기다. 현 수도권 대학 전체 모집 정원(약 13만 명)과 겨우 맞먹는 살벌한 숫자다.

 

연간 출생아가 70만~100만 명을 오갔던 1970~80년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북적북적한 학교에서 유년을 보낸 지금 30~40대가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신입생을 못 채워 전전긍긍하는 대학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다. 급증할 고령 인구와 부양 부담, 활력을 잃을 산업 현장과 식어갈 경제. 벚꽃 엔딩은 더 무서운 방식으로 변주될 예정이다. 남 일이 아니다. 바로 당신이 중년 또는 노년에 맞이할 현실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3.08 공개매수

공개매수는 언론 등을 통해 주식을 사겠다고 알린 뒤 기존 주주와 장외에서 거래하는 걸 말한다. 얼마에, 얼마나 샀는지 공개하지 않는 일반 거래와 다르다. 매수인의 필요에 의한 것이니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쳐준다. 굳이 비싼 가격에 장외 거래까지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적대적 인수합병(M&A)에서 등장한다. 건곤일척의 순간에 쓰는 카드니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최근 3년간 딱 세 차례 있었는데 올해는 벌써 세 번을 채웠다. 1월 유니슨캐피탈코리아가 오스템임플란트 공개매수에 나선 게 시작이었다. 전체 지분의 65%나 참여했는데 국내 공개매수 역사상 가장 많은 지분을 확보한 사례다. SM엔터테인먼트에선 공개매수 공방전이 치열하다. 하이브의 실패에 카카오가 가격을 높여 도전에 나섰다.

 

지난 2일엔 한샘 대주주인 IMM프라이빗에쿼티가 공개매수를 발표했다. 당일에만 주가가 19.7% 급등했다. IMM은 지난해 기존 대주주 지분을 주당 22만원에 인수했는데 주가는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주가 하락에 분노한 일반 주주를 달래려는 것이든, 쌀 때 지분율을 높여 두려는 취지든 경영권 분쟁과 무관한 대주주의 추가 매입은 꽤 이례적이다. 한 행동주의 펀드가 일반 주주 지분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이라고 특정 기업에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유달리 활발한 공개매수는 당국의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25년 만에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다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상장사 지분 25% 이상을 취득해 대주주가 될 때는 일정 비율 이상을 의무적으로 더 매수하도록 하는 제도다. 국내 M&A의 약 80%는 기존 대주주로부터 지분을 사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보통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여 비싸게 사는데 일반 주주는 딱히 득이 없다. 오히려 인수 이슈로 주가가 하락하면 손해를 본다. 금융위 안은 ‘50%+1주’다. 예를 들어 인수자가 대주주 지분 30%를 살 경우, 같은 가격에 최소 ‘20%+1주’를 추가로 공개매수하라는 것이다. 자연히 일반 주주에게도 프리미엄이 돌아가게 된다. 시장이 환호할 만하다.

 

대주주가 가진 1주와 일반 주주가 가진 1주의 가치는 다르겠지만, 값이 다른 건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된다. M&A 시장을 냉각시킬 거란 우려가 있으나, 이상한 건 빨리 고치는 게 맞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3.09 엄석대 찾기

1987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이문열의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때아닌 ‘역주행’ 중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유튜브 채널에 무료 공개된 동명 영화의 댓글창엔 ‘현실판 엄석대’가 누군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사실 작가는 자신이 풍자한 엄석대의 실체를 작품에 드러냈다. ‘자유당 독재가 아직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해’ ‘석대가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4·19 혁명이 있었다’는 표현 등을 통해 ‘엄석대=이승만 독재’임을 밝혔다. 다만 악역인 엄석대를 엄청난 카리스마와 매력을 뿜어내는 마성의 캐릭터로 그려내, 출간 당시 “독재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희대의 악역 엄석대,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한병태로 선악 구도가 선명한 얘기 같지만, 사실 이 소설 속 진짜 빌런(악당)은 따로 있다. 교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장기나 두며 소일하다, 자습 관리나 청소 검사는 물론 급우들의 시험지 채점까지 엄석대에게 일임하는 무기력한 5학년 담임 교사가 대표적이다. 그가 학생 관리와 지도라는 교사의 의무를 방기한 만큼 엄석대의 권력은 커지고 정당화됐다.

 

6학년 담임을 맡은 젊은 교사는 영웅을 가장한 빌런이다. 엄석대의 비리를 잡아내 모질게 매질하고, 그의 악행에 동조한 우등생들을 줄줄이 벌세운다. 1번부터 차례로 엄석대의 악행을 잘못을 발표하게 시킨 뒤 “다 똑같은 놈들”이라 호통치고 전원 손바닥을 때린다.

 

젊은 교사는 자신만이 진실과 자유의 고결한 화신인 양 행동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훈육·계도하는 대신 괴물로 낙인찍는다. 오랜 기간 엄석대에게 괴롭힘을 당해온 학생들을 “똑같은 놈들”이라 모욕하는 것 역시 교육적 처사라 보기 어렵다. 동명 영화의 말미에, 이 교사는 권력자에 아부하는 타락한 국회의원으로 등장해 반전 충격을 안긴다.

 

고작 초6인 엄석대는 두 교사의 나태와 위선 사이에서, 영웅에서 괴물로 추락해 학교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교실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사건에 책임지는 것은 엄석대가 아닌 교사의 몫이다. 젊은 교사의 호통과 매질은 아이들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향했어야 옳다. 현실의 사건에서도 ‘엄석대 찾기’보단 ‘두 교사 찾기’가 본질 파악에 더 유용할 것이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3.10(금) ‘레미제라블’ OST

“야, 이 노래 참 좋다. 한번 들어봐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시절, 후배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영화 OST 동영상을 틀어준 적이 있다고 한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나/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민중의 음악이네.’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zerables)’ 삽입곡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다. 상급자의 음악 취향에 누군가는 영화를 봤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집에 돌아가 ‘레미제라블 OST’를 검색해봤을 것이다.

 

유혈을 암시하는 이 혁명가는 근 10년간 세계 주요 시위 현장의 단골 음악이었다. 부당한 지배에의 저항, 핍박받는 민중의 분노가 듣는 이의 심장을 두드린다. 2012년 전 세계적 영화 흥행 직후 터키·미얀마·대만(2013), 홍콩(2014) 민주화 시위에서 각국어로 번역된 노래가 거리의 열기를 달궜다. 지난해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공산당 퇴진 시위에도 쓰였다.

 

국내에서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운동 때 서울·대구 등지에서 이 곡을 반복 재생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으로 일한 윤 대통령이 정확히 언제, 왜 이 곡에 처음 매료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혁명 정신 중 하나인 ‘자유’를 강조하는 그가 검사 시절부터 즐겨 들은 건 분명하다. 대선 후보 때는 방송사 스튜디오 출연 입장곡으로 틀고 “영화와 뮤지컬을 여러 번 봤다. 1832년 자유와 민주의 외침이라는 주제, OST 음악 자체를 좋아해 자주 듣는다”고 직접 설명했다.

 

지난 3·8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통령 입장곡 선정은 이런 취향의 반영으로 보인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대통령 입장 음악으로 이걸 고른 사람은 윤리위 가야 할 듯”이라지만, 정작 행사 관계자들 사이에선 “대통령이 직접 고른 노래” “당연한 곡 선정”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역대급 흥행을 기록한 이번 전대는 친윤계의 전폭적 지지를 업은 김기현 대표의 과반 득표 승리로 끝났다. 내년 총선을 앞둔 윤 대통령과 김 대표 앞에 ‘체제 전복’ 대신 ‘민생 회복’ 목표가 뚜렷하다. 심장 박동 소리가/북소리와 공명할 때/내일이 오면 시작될/새로운 삶이 있네! 190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 나은 삶에 목마른 민초의 목소리가 역사의 동력임을 다시 새겨둘 때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3.13(월) 저녁 있는 삶, 저녁밥 없는 삶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근로시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1996년 OECD 가입 후 선두권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연간 1915시간, 5위였는데 여전히 OECD 평균보다 199시간 오래 일한다. 이 때문에 ‘노동 지옥’이라는 오명을 입었지만, 사실 한국은 일찌감치 근로 환경에 대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예로 1953년 최초의 근로기준법을 제정했다. 근로자에 연·월차는 물론 공휴일 휴무, 주휴일, 생리휴가까지 보장했고 모두 유급이었다. 현재 생리휴가는 무급이다. 이때부터 ‘주 단위’ 근로시간을 따졌다.

 

근로법이 확 달라진 건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태 이후다. 당시 여당이 야당에 알리지 않고 새벽에 몰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전의 근로법을 무시하고 아예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도입된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공짜 야근’의 빌미가 됐다.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일정한 임금을 보장하는 제도다. 야근이 공식적으로 허용됐고 ‘근로시간=업무성과’라는 인식은 아직도 여기저기에 깔려있다.

 

윤석열 정부의 근로법 개정안이 논란이다. ‘주 단위’ 근로시간을 ‘월 단위’로 확대하고 야근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린다. 현재 주 최대 52시간(40시간+연장 12시간)에서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일주일에 6일을 하루 11시간씩 일할 수 있고 야근한 만큼 휴가를 갈 수 있어 주4일 근무가 가능하다.

 

근로자 간에도 찬반이 갈린다. 대개 업종·규모로 나뉜다. 반도체·기계·철강·게임 같이 납품 마감이 있는 업종 종사자는 찬성이다. 당장 마감이 코앞인데 주 52시간 지켜가며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다. 반면 중소기업 종사자는 대체 인력이 없어 휴가로 보상받지 못할 공짜 야근의 부활을 우려한다. 입장은 다르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바람은 하나다. 휴가든, 수당이든 야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2018년 주 52시간제가 도입될 때도 제조업을 중심으로 줄어들 야근만큼 줄어들 수당에 대한 걱정이 컸다. ‘저녁 있는 삶’도 좋지만, ‘저녁밥 없는 삶’은 곤란해서다. 근로시간 규제가 획일적일 필요는 없다. 업종·규모별로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일해야 할 사람은 일할 수 있게 하고 쉴 사람은 쉬게 하자. 다만 야근에 대한 보상은 분명해야 한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3.14 검정 고무신 100년

식민지 시기 고무신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신문물의 상징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신던 갖신이나 짚신보다 방수가 잘 되고 질겨서 실용적이었다. 구한말에 외부대신을 지낸 친일파 이하영은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회사인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고무신은 ‘호모화(護謨靴)’라고도 불렸다.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다. 검정 고무신 초창기엔 고무신을 신으면 발이 썩거나 중독이 심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도 한다는 ‘호모화 중독설’이 돌았다. 그러나 대륙고무의 적극적인 반론, 조선왕실에서도 신는다는 마케팅 등에 힘입어 순식간에 조선인의 생필품이 됐다.

 

1921년부터 1년여간 경성(서울)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는데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조선에서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일본은 고무신 수출에 혈안이 됐고, 조선에서도 공장 수십 개가 난립하며 경쟁이 붙었다. 분쟁도 일어났다. 대륙고무가 자신의 것과 유사한 상표를 고무신에 붙여 판 평양서선고무공장을 1925년 상표법 위반으로 고소한 것이다. 결국 서선고무공장은 1927년 고무신 2000켤레와 소송비용을 부담하고 여러 신문에 사죄광고까지 냈다.

 

그러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원료 기근과 일제의 배급통제 때문에 고무공장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 고무 원료 공급이 재개돼 고무신은 다시금 전성기를 맞는다. 1992~2006년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의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을 엄마 몰래 엿 바꿔먹던 부모 세대의 어린 시절을 꾸밈없이 그려 사랑을 받았다.

 

‘검정 고무신’ 만화 원작자 이우영 작가가 최근 세상을 등졌다. 애니메이션 저작권을 둘러싸고 제작업체 측과 오랜 법적 분쟁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원작자임에도 ‘검정 고무신’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피소됐다. 애니메이션 등 부가사업으로 인한 수익 배분도 미미했다고 한다. 사업추진 편의 명목으로 저작권을 포괄적·배타적으로 업체에 양도하는 불공정 계약을 맺은 게 화근이었다. 고무신의 시대는 끝났다. 원작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불공정 계약도 사라질 때가 됐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15 휴가 갈 용기

영국에도 정치권의 ‘세대 팔이’가 있나 보다. 조너선 화이트 런던정경대(LSE) 정치학 교수는 2013년 논문 「세대를 생각하다」에서 좌우 정치 집단이 세대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정치적 거대 서사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파는 복지 감축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좌파는 사회 저항을 끌어내는 언어로 세대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권도 세대 불평등, 반값 등록금 등의 바람이 불 때 재빠르게 88만원 세대, 3포 세대 같은 세대론을 끌어왔다. 청년 당사자들의 ‘청년 팔이’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청년세대론은 최근 MZ세대론에 이르기까지 자가번식해왔다.

 

청년세대론 활용의 용례를 작성한다면 맨 끄트머리엔 이정식 고용부 장관의 발언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 장관은 지난 6일 주 최대 69시간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발표하며 “요즘 MZ세대들은 ‘부회장 나와라’, ‘회장 나와라’(해서) ‘성과급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됐냐’(할 수 있을 정도로) 권리의식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말했다. MZ세대는 권리의식이 높아서 연장 노동에 따른 ‘한 달 살기’ 같은 보상 휴가 혜택을 잘 누릴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장관은 최근 SK이노베이션 일부 직원들이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를 보내 성과급 불만을 호소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에서 일주일 넘게 휴가를 떠나는 일은 큰 도전이다. “요즈음 대학생들처럼(…) 불만을 노골적으로 서슴없이 표현했던 세대는 없었던 것 같다.” MZ세대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1979년 월간 ‘뿌리 깊은 나무’에 실린 글이다. ‘노골적으로 서슴없이 표현했던’ 베이비붐 세대도 그랬듯, 회장에게 DM을 보내는 MZ세대에게도 휴가는 회사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다.

 

바비 더피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는 책 『세대 감각』에서 세대론이 출생 시점에만 집중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집단 간 차이’를 부각해 정작 중요한 신호를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하는 시간만 늘고 휴가, 야근수당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MZ세대의 불안감이 ‘정작 중요한 신호’가 아니었을까. 청년층이 이 장관에게 기대한 답변은 그래서 ‘MZ세대의 권리의식’이 아니라 늘어난 노동시간에 따른 보상을 보장할 법·제도에 대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3.16 경우의 수

국어사전은 경우의 수에 대해 ‘어떤 시행에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가짓수’로 정의한다. 수학의 주요 뼈대 중 하나인 확률론의 핵심으로 확률과 통계, 수열, 함수 등을 활용해 발달한 개념이다.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면 꽤 복잡하지만, 경우의 수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 대표적인 게 로또다. 45가지 숫자 중에서 6가지 특정한 숫자를 조합해 당첨자를 가리는데, 1등에 당첨될 수학적 확률은 814만5060분의 1(0.00000012277)에 불과하다. ‘실낱같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 희박한 경우의 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적지 않다. 가위바위보나 주사위, 동전 던지기, 윷놀이 같은 것들도 생활과 가까운 경우의 수다.

 

자주 접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스포츠다. 월드컵이나 WBC 같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 경우의 수는 단골 레퍼토리다. 이기면 무조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토너먼트와 달리 여러 팀이 함께 경쟁하는 조별리그에선 우리 팀 성적 못지않게 경쟁 팀의 경기 결과도 중요하다. 조별리그 일정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게 일종의 통과의례가 됐다.

 

지난해 카타르월드컵에서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을 앞두고 한국이 16강에 오르기 위한 경우의 수는 ▶포르투갈전 승리 ▶같은 조 우루과이-가나전에서 우루과이 승리였다. 실현 가능성이 9%에 불과하다던 이 어려운 조건들이 모두 맞아 떨어지며 한국은 16강에 올랐다. 포르투갈전 막바지에 손흥민의 스루패스를 받아 황희찬이 넣은 기적 같은 결승 골이 없었다면 한국이 조 최하위로 탈락했을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축구 팬들은 거의 없다.

 

반대로 WBC에선 경우의 수 때문에 울었다. 중국전을 앞두고 ▶중국전 승리 ▶같은 조 체코-호주전에서 체코가 4실점 이상 기록하며 승리, 이 두 가지가 한국의 본선 2라운드 진출 전제였다. 첫 번째는 충족했지만 두 번째에 발목이 잡혔다.

 

월드컵이나 WBC에서 매 경기 기분 좋게 이겨 경우의 수 따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앞으로도 경우의 수를 열심히 계산하며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저 기대했던 결과가 나와주기만 바라면서.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3.17(금) K 변천사

한국은 고려시대 때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서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원나라와 무역하던 아라비아 상인은 고려의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 하구 벽란도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엔 ‘Corea’로 불렸다. 지금도 프랑스어로 한국을 ‘Coree Du Sud’, 스페인어로 ‘Corea Del Sur’라고 한다. 고려를 기점으로 유럽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재 한국의 공식적인 로마자 표기는 Korea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Japan의 J보다 Corea의 C가 앞에 온다는 이유로 한국의 영어 표기를 바꿔버렸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어·스페인어 등 로망스어군 언어가 C를 주로 사용하고, 영어·독일어 등 게르만어파 언어가 K를 선호하는 경향 때문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1950년대 주한 미군 장교들 사이에서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 유행했다. 약속에 자주 지각하는 한국인을 보며 지어낸 단어라고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란 개념이 해외 주식시장에 등장했다. 한국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 기업의 주가보다 낮게 형성된 현상을 가리킨다. 분단국가라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주요 원인이었다.

 

코리아에 담긴 부정적 뉘앙스를 긍정적으로 바꿔놓은 건 201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한류 열풍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012년 9월 한국 가수 처음으로 빌보드 메인차트 순위권에 진입한 게 신호탄이었다. 이후 Korea를 줄여 K를 붙인 K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등의 신조어가 잇따랐다. 2021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은 한국어 단어 26개를 올리면서 ‘K-’를 한국 또는 그 문화와 관련된 명사를 형성하는 복합어로 소개했다.

 

이제는 K수식어가 지겹지 않으냐는 질문까지 들을 정도다. 스페인 매체 엘 파이스(El Pais)는 지난 12일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과의 인터뷰에서 “K라벨이 지겹냐”는 질문을 던졌다. RM은 오히려 “그건 프리미엄 라벨”이라며 “우리 조상들이 싸워서 쟁취하려고 한 품질 보증과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K수식어를 마구잡이로 갖다 붙여서도 안 되지만 스스로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3.20(월) 팬 플랫폼

기자는 뉴진스 멤버들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진짜 번호는 아니고, 이들의 팬 플랫폼 ‘포닝’을 통해 연결 가능하다는 의미다. 콜 기능을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채팅하면서 지금 어디인지,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물론 다 답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 일정과 막 찍은듯한 사진을 볼 수 있다. 진짜 친구보다 더 많은 시시콜콜 개인사를 알게 된다. 단, 친구와는 달리 돈(월 9900원)이 든다.

 

K팝이 음악 시장에서 선보인 발명품·사업 모델이 여럿인데 그 중 요즘 가장 주목받는 것은 이런 팬 플랫폼이다. 인터넷 팬 카페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젠 팬덤의 엄청난 에너지가 K팝 기획사가 주도하는 팬 플랫폼으로 모인다.

 

팬 플랫폼에선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측이 주도권을 쥐고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하이브는 2019년 팬 플랫폼 위버스를 내고 80여개 팀(개인)을 입점시켰고, 누적 가입자를 6000만 명 가까이 모았다. 유·무료 소통을 제공하고, 굿즈와 콘서트 티켓을 파는 상점, 특별 콘텐트를 제공한다.

 

지난달엔 방탄소년단(BTS) 정국이 팔로워 5000만 명의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한 뒤 위버스에서 “안 하게 돼 지웠다. 종종 위버스 라이브나 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인스타그램 운영사 메타 입장에선 무척 아까운 가입자 이탈이었을 것이다. SM도 2020년부터 유료 대화형 메시지 서비스 버블을 운영하고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좋아하는 스타와 친밀한 교류를 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에스파 윈터의 어린 시절 추억담, 아이브 장원영의 응원을 받아 볼 수 있다.

 

SM 인수를 포기한 하이브는 “대신 카카오와 플랫폼 협력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양측 모두 어떤 플랫폼에서 어떤 협력인지 말을 아끼고 있다. 실제로 하이브와 카카오·SM의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팬 플랫폼에서의 협력일 가능성이 크다. SM 소속 연예인이 하이브의 위버스를 이용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상상 가능하다. SM의 대주주가 된 카카오의 핵심 서비스인 카카오톡을 활용한 팬 서비스가 나올 수도 있다. 1990년대 삐삐 시절부터 스타의 음성을 서비스 해 온 K팝 팬덤 사업이 이제 더 큰돈을 버는 구조로 진화 중이다.

전영선 K엔터팀장

 

03.21 경제위기의 이름

미국 경제사에서 최악의 위기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벌어진 주가 폭락이 신호탄이었다. 금융시장이 붕괴했고 뒤이어 기업들이 쓰러졌다. 불과 3~4년 만에 산업생산이 반 토막 나며 1000만 명 넘는 실업자가 쏟아졌다. 대공황은 이후 10년간 계속되면서 미국 경제를 무너뜨렸다.

 

지금도 미국에선 위기 조짐 때마다 대공황이 소환된다. 한국인에게 트라우마로 박힌 IMF 외환위기와 비슷하다. 미 경제지표가 나빠질 때마다 ‘대공황 이후 얼마 만에’란 수식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대공황이란 말을 대중에 널리 알린 건 미국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다. 대공황 초기에 대통령을 지냈다. 후버는 그전까지 경제가 어려울 때 흔히 쓰이던 위기(crisis)나 공포(panic)란 단어를 피했다. 대신 우울(depression)이란 용어를 연설에 주로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덜 위협적으로, 덜 두렵게 느껴지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시장의 과도한 불안감을 진정시키려는 전략이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미국에 닥친 위기의 강도를 오판한 탓이었다. 이렇게 위기의 이름은 우연에 필연이 더해져 탄생해왔다.

 

15년 전에도 그랬다. 시작은 2007년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였다. 그 여파로 2008년 미국 5대 은행 중 베어스턴스·메릴린치·리먼브라더스가 차례로 무너지며 금융위기로 진화했다. 미국에서 출발한 위기는 전 세계로 번졌다. 현재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은 글로벌 금융위기(The Global Financial Crisis)란 용어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대공황과 금융위기에 이어 올해 위기의 그림자가 다시 세계 경제에 드리웠다. 미국 중소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가 발단이었다. 벼랑 끝에 선 유럽 대형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를 UBS가 인수하기로 하며 한고비 넘겼지만 조짐은 여전히 좋지 않다. SVB 사태가 터진 지 2주도 안 됐는데 벌써 은행위기(Banking Crisis)란 용어가 등장했다.

 

이번 사태가 초대형 위기로 확산하는 걸 막으려는 각국 금융 당국과 대형 금융사의 분투가 한창이다. 하지만 위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늘 탐욕의 패배였다. 그래서 아직 오지 않은 결말이 더욱 걱정스럽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3.22 코코본드

연일 고조되던 은행 발(發) 위기가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로 일단 진정됐다. 파산설이 흘러나오고, 딱 5일 만에 도장을 찍었다. 역사상 가장 신속한 인수합병(M&A)으로 꼽힌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자산 750조 원짜리 은행의 파산이 금융시장 전체의 시스템 위기로 확산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각론은 간단치 않다. 인수 계약에 따라 CS의 주주는 22.48주당 UBS 1주를 받는다. 이것도 헐값이지만 더한 피해자도 있다. 약 23조원에 달하는 신종자본증권(AT1)을 전부 상각하면서다. 한마디로 가지고 있던 CS의 AT1 채권이 휴짓조각이 됐다는 뜻이다.

 

신종자본증권은 회사채의 일종이다.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잡히기 때문에 자기자본비율에 민감한 은행이나 보험사가 주로 발행한다. 코코본드라고도 불리는데 귀여운 별명과 달리 내용은 살벌하다. 유사시 이자 지급을 제한하거나 더 심하면 상각 또는 주식으로 강제 전환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경우나 CS처럼 파산에 직면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코코본드는 예전엔 기관 투자자나 헤지펀드가 주로 샀지만, 요즘엔 개인에게도 인기가 많다. 일단 예금이나 일반 채권보다 금리가 높다. 기간별로 이자를 지급하는데 정기적인 현금 흐름이 필요한 투자자에겐 특히 좋은 대안이다. 만기가 없지만 발행한 쪽에서 채권을 되사는 콜옵션(통상 5년)을 걸기 때문에 중도 상환도 가능하다. 이런 매력에 올해 국내 4대 금융지주가 발행한 코코본드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금융사가 주로 발행하니 안정적이란 평가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지난해 흥국생명은 2017년 발행한 코코본드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콜옵션 시점이 오면 일단 정리하고, 다시 발행하는 게 불문율인데 당장 자금이 쪼들린다는 걸 자인한 것이다. 뒤늦게 수습했으나 당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로 흔들리던 채권시장이 크게 휘청거렸다.

 

파산하면 사라진다는 조건에도 돈이 몰리는 데에는 ‘설마 금융사가 망하겠느냐’는 믿음이 깔렸다. 하지만 세계 10대 투자은행(IB)이 불과 일주일 만에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15년 전 ‘리먼의 악몽’도 소환됐다. 또 한 번 되새기지만, 투자의 세계에 ‘무조건’이란 없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3.23 피로스의 승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관철했다.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을 현재 62세에게 64세로 2년 늦추고, 보험료 납입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린 게 골자다. 마크롱 정부는 올 9월부터 정년을 3개월씩 늘려, 2030년까지 64세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연금개혁은 ‘화약통에 불붙이는 일’에 비유된다. 특히 직종과 관계없이 연금을 받고, 연금만으로도 퇴직 전과 비슷한 생활이 보장되는 프랑스인에게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보험료를 내고, 연금은 더 늦게 받아가라’는 개혁안은 역린을 건드리는 꼴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첫 집권기인 2019년에도 유류세 인상과 연금개혁을 꺼내 들었다가 ‘노란 조끼’ 시위로 물러난 바 있다. 이후 코로나19와 맞물려 논의가 흐지부지되는가 싶더니,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직후 연금개혁이란 화약고를 다시 건드렸다.

 

여소야대의 불리한 정국, ‘노란 조끼’ 시위의 트라우마가 겹친 탓일까.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엔 헌법 제49조 제3항(정부가 긴급하다고 판단한 상황에 직권으로 법안 처리)을 발동하는 초강수를 뒀다. 의회 입법 절차마저 건너뛰자 시민들을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고 야당은 일제히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불신임안이 모두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하자, 도리어 연금개혁안이 사실상 의회를 통과한 효력까지 얻게 됐다.

 

프랑스 역대 정부가 한 번도 성공 못 한 연금개혁을 재수 끝에 통과시켰지만, 평가는 엇갈린다. 로이터통신은 이를 ‘피로스의 승리’에 비유하며 폄훼했다. 고대 그리스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지만, 유능한 장수를 잃는 치명적 희생을 거듭한 탓에 결국 최후 전쟁에선 패망했단 일화에서 나온 말로, ‘실속 없는 승리’ ‘상처뿐인 영광’을 뜻한다.

 

반면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매년 100억 유로(약 14조원)의 재정 적자가 뻔히 예상되는, 소위 거덜 난 연금 곳간을 방치하고 퍼주는 대신 “맑은 정신을 가졌다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더 오래 일해야 한다”며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국민을 속여 달콤한 지옥으로 이끄는 쉬운 방법보다 가시밭길을 택했단 평가다. 연금개혁은 당장 우리의 급선무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권이 제시할 “가야 할 길”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박형수 국제부 기자

 

03.24(금) 검사의 회고록

비사(秘史)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회고록은 종종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다. 2005년 박철언 전 의원이 제기한 ‘3당 합당 40억 수수설’이 대표적이다. 회고록 제목부터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6공·3김시대의 정치비사』였다. 박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전후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40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전달받았다”고 폭로했다. 김 전 대통령은 “금시초문”이라며 “정치적 음해”라고 반발했다.

 

야권에서는 2016년 나온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도 논란이 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한국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했는데, 그 배경에 북한 정권과의 사전 소통이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송 전 장관은 “김만복 국정원장이 ‘북한에 먼저 물어보자’고 제안했고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문을 구했다”고 적었다. 이듬해 대선을 앞둔 여의도가 발칵 뒤집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인터뷰에서 “송 전 장관 주장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다”라며 “왜곡된 주장”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검사의 회고록이 예전 논란을 재점화하고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이인규 변호사가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를 출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관련 뇌물 혐의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사직한 이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야권은 격렬하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유튜브 방송에서 “이 변호사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악역) 박연진이랑 비슷하다”며 “비평을 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호사의 친정 격인 검찰에서도 이번 회고록을 불편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중수부 출신 전직 고검장은 통화에서 “역사적 수사의 진실이 개인 이름으로 공표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며 “‘오직 수사로만 말한다’는 게 특수 검사들의 철칙이자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진실의 문을 여는 회고는 필요하다. 다만 “수치스러운 점을 밝힐 때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조지 오웰의 격언도 잊지 말자.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3.27(월) 식량 안보

딱 10개월 전이다. 유명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햄버거 세트를 시켰는데 감자튀김 대신 치즈스틱이 나왔다. 당시 주요 감자 수출국이 기후 이상으로 수확량이 줄었다며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하다”고 수출을 금했다. 식용유를 만들 콩, 빵·국수 재료인 밀은 물론 옥수수 등 사료비가 오르면서 고깃값도 함께 올랐다.

 

어렵게 물량을 구해도 코로나19에 따른 해상·항공 물류난 때문에 한국으로 들여오지 못했다. 식량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반짝 높아졌고 정부는 곡물 자급률을 높이겠다고 나섰다. 0.7%인 밀 자급률을 2025년까지 3년 만에 5%로 높이겠다는 식이다. 논을 밭으로 바꾸겠다는 얘기였는데 식품업계에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비웃었다.

 

식량 안보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엔 쌀 문제다. 남는 쌀을 정부가 사들이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거대 야당의 주도로 강행 처리됐다. 쌀 초과 생산량이 예상치의 3~5%를 넘거나 쌀값이 평년 대비 5~8% 이상 하락하면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한다는 내용이다. 현재는 정부 ‘재량’에 따른다.

 

야당은 주식인 쌀 보호는 식량 안보를 위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여당은 초과 생산되는 쌀 매입에 연평균 1조원이 든다며 나랏돈 낭비라고 반발한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2021년 기준)은 44.4%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바닥권이다. 쌀(84.6%)을 제외하면 밀(0.7%), 옥수수(0.8%), 콩(5.9%) 등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세계 식량안보지수(GFSI)는 113개 국가 중 39위다.

 

식량 안보 시대에 먹거리 확보는 중요하다. 그런데 자급률이 높은 쌀만 챙기면 될까. 2005년 80.7㎏이었던 1인당 쌀 소비량은 올해 55.6㎏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루에 밥 한 공기(155g)만 먹는다는 얘기다. 서구화한 식단으로 고기·빵 소비가 늘어난 데다 먹거리가 다양해진 까닭이다. 되레 고기가 주식이 됐다. 1인당 고기(돼지·소·닭고기) 소비량은 58.4㎏으로, 쌀보다 많다.

 

정작 정치권에서 식량 수입 다변화, 농업 조세특례 연장, 스마트 농업기술 개발 같은 논의는 없다. 이번엔 220만 농민 표를 노린 ‘전형적인 포퓰리즘 행정’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이전투구 대상이 되면 되겠는가.

최현주 증권부 기자

 

03.28 얼룩말 ‘세로’의 행복

얼룩말은 원래 아프리카 대륙에 무리 지어 서식하는 동물이다. 말이나 당나귀와 달리 가축으로 길들지 않았다. 도심에서 활보하는 얼룩말을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이유다. 지난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탈출 3시간여 만에 붙잡힌 얼룩말 ‘세로’ 이야기다.

 

동물원 탈출사건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보고된다. 2005년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코끼리 6마리는 4시간여 도심을 활보했다. 2010년엔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말레이곰 ‘꼬마’가 청계산으로 달아나 9일 만에 포획되기도 했다. 2018년 대전 오월드의 퓨마 ‘뽀롱이’는 헬기까지 동원한 대규모 수색 끝에 사살됐다.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오랑우탄 켄은 이 분야의 전설로 남아 있다. 1985년 이래 세 번이나 사육장에서 탈출한 켄은 마치 관람객인 양 산책하며 다른 동물을 구경했다고 한다.

 

애초에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동물을 수집해 과시하는 건 왕실과 귀족의 고급 취미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스트리아 쇤부른 동물원은 1752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설립했다. 전 세계에서 동물을 포획해 자국으로 들여오는 건 제국주의 열강이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여러 종을 한데 모아둔 덕에 동물원은 과학연구의 산실이자 교육의 장으로 기능한다. 오늘날엔 멸종위기종을 보호하고 복원하며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동물원 사육 환경은 자연 서식지를 재현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에선 공영 동물원조차도 주요 선진국에선 20세기 중반에 이미 사라진 감옥형 전시관을 사용한다.

 

환경부가 2019년 국내 공립·민간 동물원 110곳을 조사한 결과 동물복지·공중보건·안전·서식환경·생물종상태 등 모든 항목이 평균 ‘나쁨’으로 평가됐다. 체험형 민간 동물원은 더 열악하다.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은 2016년에야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수립된 ‘제1차 동물원 관리 종합 계획(2021~2025)’의 비전은 ‘사람과 동물 모두가 행복한 동물원’이다. 어린이대공원 측은 얼룩말 세로가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된 뒤부터 반항아가 됐다고 설명한다. 동물원 환경이 개선되고, 얼룩말 세로도 행복해질 날이 오길 기대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3.29 노량진 고시촌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자습실의 자그마한 책상에 앉아 코피 쏟으며 열중했던 자만이 합격할 수 있다.’ 1986년 11월 11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시험학원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기자는 “고등고시처럼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고행하는 사람들보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소시민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조그마한 직분에 만족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썼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 사람으로, 소시민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지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79년 학원의 사대문 밖 분산 계획에 따라 각종 임용시험 학원이 노량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며 취업문이 좁아질수록 공시생들은 노량진으로 모여들었다. 노량진역에 내리면 학원광고 속 강사들은 “때론 온화하게 혹은 공격적으로, 어느 때는 굉장히 진지하게, 어느 때는 ‘걱정 마, 아무 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그들에게 손짓했다. 저녁이면 근처 수산시장에서 얼큰하게 취한 직장인들이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고, 공시생들은 3000원 남짓 컵밥으로 시장기를 해소하며 그들처럼 ‘보통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되새겼다.

 

꿈이 소박하다고 사소한 건 아니다. “시장한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 백여명이 컵밥 노점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명 정도가 9급 시험에 합격했다.”(김훈 ‘영자’) 2013년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74.8대 1이었다. 노량진은 노량도(島)라고 불렸다. 노량진에 올 때만 해도 한때의 거처 정도로 여겼던 이들 중 다수가 오래 노량진에 머물렀다.

 

KBS ‘다큐 3일’이 노량진 공시생을 다룬 적이 있다. 엔딩곡이 가수 사이의 ‘힘내요 노량진 박’이었다. ‘나는 왜 고향을 떠나와 차가운 주먹밥을 먹나’ ‘네버 네버 기브업’ 가사에 공시생들이 눈물을 지었다.

 

공무원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올 9급 시험 경쟁률은 22.8대 1. 정점을 찍은 2011년(93.3대 1)의 4분의 1 수준이다. 공무원이 돼도 ‘보통 사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건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다른 길이 많아진 건지 가늠이 안 된다. 취업난은 여전하다는데 ‘노량진 박’들은 어디로 갔을까.

윤성민 정치에디터

 

03.30 승부조작 선수 사면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축구대표팀과 우루과이의 A매치 맞대결에 쏠린 지난 28일 오후, 대한축구협회가 징계 중인 축구인 100명에 대해 사면 조치를 전격 단행했다. 각종 비위 행위로 인해 징계 처분을 받은 전·현직 선수와 지도자, 심판, 각종 단체 임원 등이 대상자다. 이들 중에는 지난 2011년 국내 프로 스포츠를 뒤흔든 프로축구 승부조작에 가담해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선수 48명도 포함돼 있다.

 

축구협회는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을 자축하고 축구계의 화합과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기 위해 이번 사면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무기한 자격 정지 대상자는 효력 발생일로부터 5년 이상, 유기한 자격 정지 대상자는 처분 기간이 절반 이상 경과한 자들 중 충분히 반성했다고 판단되는 이에 한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사면은 선고의 효력 또는 공소권 상실, 형 집행을 면제하는 최고 집행권자의 고유 권한이다. 해당 규정을 도입한 취지는 생계형 범죄자나 도로교통법 위반자 등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해당 징계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에 제약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 있다.

 

긍정적인 기능이 존재함에도 우리가 ‘사면’이라는 단어에 좀처럼 호감을 갖지 못 하는 이유는 이 제도를 오·남용한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면 대상자 명단에 비리 정치인·고위 공직자·경제인 등을 포함하며 절대 가볍지 않은 범죄를 눈감아 준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축구협회는 이번 결정이 정치권에서 종종 발생하는 사면권 오·남용 케이스와 닮은꼴이 아닌지 돌아보기를 바란다. 한 번의 실수가 축구인 한 명의 인생을 영원히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승부조작처럼 종목 자체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비위를 저지른 이들의 죄를 사하는 명분이 ‘월드컵 16강 진출’이어선 곤란하다.

 

이번 사면이 암암리에 승부 조작 기회를 엿보는 스포츠계 검은 세력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선수나 감독, 심판을 매수해 경기 결과를 뒤집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적발돼도 10년쯤 버티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것 아니냐”는 지적에 축구협회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3.31(금) 실리콘밸리은행과 나파밸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분교인 UC 데이비스(UC Davis)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나파밸리 근처에 있다. 이 대학교는 1880년대부터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캘리포니아주 포도 재배지역을 세분화해 어떤 기후에는 어떤 포도 품종이 적합한지 등을 분류표로 만들었다. 미국 등으로 대표되는 신대륙 와인은 과학적인 접근이 특징이다.

 

와이너리 투어와 블라인드 테이스팅도 미국 와인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요소다. 로버트 몬다비는 ‘나파밸리 와인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대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캘리포니아 스타일로 재해석한 와인으로 미국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와이너리 투어를 여행상품화한 것도 몬다비가 처음이다.

미국 와인의 위상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라는 사건이다. 1976년 와인 수입업을 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파리에서 어떤 와인인지 모르고 맛보는 대회를 열었다. 심사위원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이었다. 레드와 화이트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1등을 차지했다. 좋은 와인은 반드시 구대륙에서 탄생한다는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세계 와인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은 미국 와인업계가 이달 초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SVB는 1994년 와인사업부를 설립하고 나파밸리의 와이너리 400여 곳을 대출 고객으로 유치했다. SVB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IT 업계에 특화된 은행이다. 외부 투자를 많이 받은 스타트업들은 SVB에 예금은 유치했지만 대출을 받아가진 않았다. SVB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나파밸리로 눈을 돌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27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주 소재 중소은행 퍼스트시티즌스가 SVB 인수를 확정 지었다고 한다. 새 인수자가 와이너리 대출 부문 비용을 어떻게 평가할지 관심사다. 대출부담이 커진 와이너리들이 와인값을 올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나비효과 이론은 나비의 미세한 날갯짓 한번이 지구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SVB 파산 사태가 태평양 건너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 지갑도 열고 닫게 할 수 있는 시대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