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신비29/
◆북녘의 산
♣금강산
http://www.youtube.com/watch?v=abXWUMhPEfI&feature=player_embedded - 금강산 4계절
♧금강산(金剛山)의 40 비경(秘境)]
♣백두산
♧백두산 천지·12봉우리 이름 어떻게 붙었을까?
서명응 <유백두산기>에 상세 나와… 후세에 ‘한국땅’ 알릴 의도인 듯
1. 명명(命名: 이름을 지어 붙임)
유자(儒者)들이 등산을 하면서 항상 사물에 대해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것에 대해 의미를 붙여 이름을 다는 경우가 많다.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도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 혹 이름이 없는 것은 자신이 이름을 붙이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름이 없어도 새로 지었지만, 이름이 있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고치곤 했다.
이러한 것은 대개 유교의 뜻에 어긋나거나, 지나치게 속된 이름이거나, 혹은 명실이 상부하지 않은 이름 등 여러 이유로 새롭게 짓거나 고치는 일이 많았다. 서명응의 경우에도 백두산에 올라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일을 행했다. 이들은 특히 백두산 정상의 못과 못 가운데 솟아 있는 봉우리, 주위의 열두 봉우리, 소백산과 백두산 사이에 있는 두 봉우리의 산, 그리고 삼지연과 그곳의 섬에 새로 이름을 지었다.
우선 백두산에서 천지와 열두 봉우리에 이름을 붙이게 된 과정을 보기로 한다. 처음에 서명응(徐命膺)이 산과 못에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이 자신들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제안하자, 조엄(趙?)은 자신들이 작명하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레 반대를 했다. 그러나 서명응은 “연지(?脂), 소백(小白), 침봉(枕峰) 등의 이름은 토착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인데, 이 이름이 굳어지면 불행한 일”이라 하면서, “만약 지금 고치지 않으면 후대에 영원히 이름을 고치기 어렵다”고 했다.
내가 조엄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때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기이한 일이오. 이곳에 이르러 병든 몸으로 노숙을 꺼리지 않고 작심하여 이 행차를 하게 된 것도 또한 기이한 일일세. 이 행차 중에 춥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적당한 기후로 풍우가 일어나지 않아 백두산 원근을 다 볼 수 있었던 것이 신통한 일이네. 대개 자연이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일세. 하늘이 아마도 산과 못에 이름이 없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조엄이 대답하기를,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을 가지게 되면 진실로 좋은 일이오. 다만 우리들이 작명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네. 무릇 산을 연지(?脂), 소백(小白), 침봉(枕峰)이라고 한 것은 모두 토착인들이 이름을 붙여 후대에 전해져서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은 것일세. 이제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고 저들의 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니, 우리와 같은 세상의 호사가들이 여기에 발길이 미치는 것은 천백 년이 지나도록 한두 명일 뿐이오. 만약 우리들이 지금 이 산들의 이름을 짓지 아니하면 이 산들의 이름이 끝내 없을 터일세. 하물며 지금 백두산 아래에 사는 토착인들이 사사로이 지은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서 결국 이 산들의 이름으로 정해지게 되면 이 산들에게 불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조엄이 좋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산과 못의 이름을 궁리하여 정했다.
토착민들은 연지·소백·침봉이라 불러
서명응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후와 풍우도 일어나지 않는 좋은 조건에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원근을 조망한 것은 하늘이 뜻이 있어 그렇게 했다고 했다. ‘하늘의 뜻’은 다름 아니라, 백두산의 못과 봉우리에 이름이 없어 자신과 조엄에게 이름을 지으라 했다는 것이다. 서명응은 자신들이 백두산에 이름을 짓는 이유를 하늘의 뜻이라고까지 하며 너무 거창하게 설명하고 있기는 하나, 그가 반드시 백두산 천지와 열두 봉우리에 이름을 새로 짓고자 하는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산에 이름이 없어 짓는다고 했지만, 토착민들이 연지, 소백, 침봉이라 부르는 이름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두면 ‘제대로 된 이름’이 끝내 없게 될 것이라며 이름을 새로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서명응이 이처럼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못과 봉우리의 이름을 새로 붙이고자 했던 뜻은 무엇인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중국에 앞서 백두산의 명칭을 먼저 정하여 우리의 이름을 후대에 고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위의 내용 가운데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고 저들의 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한다고 하며, 이름을 그대로 두면 토착인들이 사사로이 지은 이름이 고착될 것이라 우려하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동해의 명칭 표기 문제로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서명응의 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얼마나 선각자적인 것인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까운 일은 서명응의 이러한 생각과 의도, 그리고 과감한 실천이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곧 서명응이 새로 이름을 붙인 것이 그대로 고착되어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이름을 새로 정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명응은 제일 먼저 오늘날 천지라고 부르는 백두산의 못에 대해 이름을 지어 붙였다. 백두산의 화구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이는 많은 사람이 개인적인 견해로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언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이를 용왕담(龍王潭)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서명응 이전에는 뭐라 불렸는지 당장 확인되지는 않으나, 아마도 뭐라 불리는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서명응은 유자의 식견을 앞세워 다음과 같이 이름을 정했다.
연못의 이름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했다. 이것은 연못의 중심이 동북 산수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동북의 산천이 모두 이 연못에서 근본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극(太極)의 태자와 천일(天一)의 일자를 따다가 그 연못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서명응은 학자답게 상당히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즉 동북의 산천이 모두 이 연못에서 근본된다는 것이다. 비록 조금 현학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훌륭한 이름이라 할 것이다. 청나라 말기인 1908년을 전후해서는 화구호를 대택(大澤), 천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이름도 여기에서 근본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62년 북-중 조약서 ‘백두산 천지’로 명칭 정해
그러나 청나라시대의 중국 지도와 중화민국, 만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1962년 이전 지도에는 ‘천지’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북-중 백두산 국경조약은 ‘백두산 천지’를 공식 명칭으로 정했다. 이후로 중국 지도에도 ‘백두산 천지’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지도 중 ‘장백산 천지’라는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백두산 천지에는 ‘천지’라는 비석과 ‘장백산 천지’라고 표기되어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북-중 백두산 조약 문건에 규정한 ‘백두산 천지’라는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다음은 연못가에 솟아 있는 봉우리와 백두산의 열두 봉우리에 대한 이름이다.
연못가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황중봉(黃中峰)이라고 했다. 이 봉우리는 12봉우리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그 색이 황색이다. 그러므로 주역의 곤(坤)괘 중 둘째 효(爻)의 설명인 ‘황색 가운데서 이치를 통한다’는 말을 따라서 그 봉우리 이름을 정했다.
그 봉우리의 인(寅 : 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옛적부터 대각봉(大角峯)이라고 했다. 하늘에는 대각이라는 별이 있는데 섭제성과 천정성의 가운데 위치하여 청룡좌의 머리를 직향해 있다. 청룡의 머리는 인 방향이므로 대각이라고 칭하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뜻을 취한 듯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다.
묘(卯 : 정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청양봉(靑陽峰)이라고 했다. 오행(五行) 중 목덕(木德)은 동쪽에 있으면 그 색이 푸르고 그 기운이 밝다. 명당성(明堂星) 동쪽의 태묘성(太廟星)이 청양이 되므로 청양봉이라고 했다.
진(辰 : 동남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포덕봉(布德峯)이라고 했다. 목덕이 진방향에 있으면 임금님이 덕을 베풀고 은혜를 행하며 명사를 초빙하고 어진 이를 예로써 대하는 것인데, ‘은혜를 행한다’는 등은 모두 덕을 베푸는 데서 근본하므로 이름을 포덕봉이라 했다.
사(巳 : 동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예악봉(禮樂峰)이라 했다. 사(巳)의 화기(火氣)가 일어나면 곧 임금이 악사에게 명하여 예악을 조화시킨다. 우리나라가 사봉(巳峰) 아래 있으며 예악 문물로써 정치를 빛내고 있으니 예악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오(午 : 정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주명봉(朱明峰)이라고 했다. 오(午)의 화기는 붉고 그 하는 일은 문명이기 때문이다.
미(未 : 남서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황종봉(黃鐘峰)이라고 했다. 황종은 오행의 토(土)에 속하고 흙의 기운은 3월, 6월, 9월, 12월에 왕성하게 되는데, 6월에는 더욱 성하기 때문이다.
신(申 : 서남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실침봉(實沈峰)인데, 하늘의 12차(次)가 실침이며 신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봉우리 중 유(酉 : 정서) 방향에 있는 것은 총장봉(總章峰)이라고 했다. 명당(明堂) 자리의 여덟 별 중에 총장은 서쪽의 한가운데 있는데 12진법(辰法)으로 치면 유(酉)에 해당한다.
술(戌 : 서북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신창봉(神倉峰)이라고 하거나 지경봉(祗敬峰)이라고 하였다. 금덕(金德)이 술 방향에 있으면 임금이 그 백성의 호적을 거두어 신창(神倉)에 보관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신창봉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경봉이라고도 했다.
봉우리가 해(亥 : 북북서) 방향에 있는 것은 일성봉(日星峰)이라고 명명했다. 백두산은 해 방향을 등지고 사 방향으로 향하고 앉아서 우리나라 팔도의 여러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12봉 가운데 해 방향에 있는 것은 해의 해(亥) 방향에 해당한다. 마치 해월(음력 10월)에 태양이 차성(次星)을 돌아 천장(天將 : 견우성)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동지가 오는 것과 같다.
봉우리가 자(子 : 정북) 방향에 있는 것을 현명봉(玄冥峰)이라고 했다. 북방의 신을 현명이라고 하는데 산의 북쪽은 바로 궁색하고 아득한 곳이어서 현현명명(玄玄冥冥)하기 때문이다.
봉우리가 축(丑 : 북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오갈봉(烏碣峰)이라고 했는데, 오갈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갈석(碣石)이 있기 때문에 서경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백두산은 우리 동방의 동북쪽이고 오갈봉은 또 백두산의 동북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았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명응은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 이름을 대부분 새로 명명했다. 그는 열두 봉우리를 열두 방위를 이용해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이들이 명명한 이름이 이전의 이름과 비교해 어떠한지 또 후대에 봉우리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등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열두 봉우리의 이름과는 매우 차이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백두산 정상에는 해발 2,500m의 산봉우리가 27개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인 12봉우리이다. 서명응도 12봉우리에 대해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지금 불리는 이 이름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12봉우리의 이름은 부마천우(제운봉), 낙원봉, 와호봉, 관면봉, 제비봉, 단결봉, 비루봉, 해발봉, 장군봉, 향도봉, 쌍무지개봉, 자암봉 등이다. 서명응이 12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므로, 그가 의도했던 것은 전혀 후대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방위설, 천문학, 오행설 등 과학적으로 명명
서명응은 위에서처럼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 이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을 올라가면서 스치고 지나갔던 삼지연(三池淵)을 내려오면서 다시 들러서 자세히 감상하며, 그곳의 세 못 이름과 섬의 이름까지도 새로 지었다.
조엄은 못가에서 갓을 씻고 나는 그 옆에 앉아 물장난을 했다. 해금과 피리 소리가 숲 속에서 은은하게 서로 화답하니 그 소리와 산수의 정취가 같이 어우러졌다. 원상태가 앞에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는 자는 이 섬에 신령이 있다고 여기고 두려워하여 감히 발걸음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두 공께서 이곳까지 들어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했다. 내가 말하기를, “섬과 못에 정해진 이름이 있는가?” 하니, 원상태가 없다고 했다. 이에 우리들이 상의하여 그 이름을 정했다. 삼지 중에 가운데 것을 상원(上元), 오른쪽 것을 중원(中元), 왼쪽 것을 하원(下元)이라 하고, 섬은 지추(地樞)라고 했다.
대개 침봉에서부터 백두산에 이르는 60여 리가 동북 산하의 중심이 되는데, 마치 북극성의 6도가 하늘이 중심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지추도라 이름한 것이다. 내가 붓을 찾아 삼나무 껍질에 큰 글씨로 “지추도이다. 서명응과 조엄이 이곳을 지나다”라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사진과 무숙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이 이름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칼을 꺼내 새기는데 나무가 단단하여 깊이 파서 돌에 새긴 것처럼 오래 가도록 했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떠난 후에 다시 어떤 사람들이 이 섬에 이르러 새겨 놓은 것을 보겠는가?” 하자, 조엄이 말하기를, “나무가 돌로 변하는 수도 있지 않겠는가?” 했다. 드디어 반나절 동안 시를 읊조리며 즐기다가 해가 설핏 기울기에 자포참 막사로 돌아왔다.
삼지연 세 못의 이름을 상원, 중원, 하원이라 하고, 섬은 지추라 명명했던 과정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삼지연의 이름을 지을 때도 백두산과 이 못의 관계를 북극성과 연관 지어 이름붙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명응이 백두산과 삼지연에 이름을 지어 넣는 일은 모두 방위설, 천문학, 오행설 등 여러 가지 철학적 과학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다.
2. 두 실학자의 등반
서명응의 <유백두산기>에 앞선 것으로는 박종(朴琮)이 지은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의 내용이 상세하다. 이에 대해서 연구한 것은 없지만, 전통문화콘텐츠닷컴에서는 이 글의 번역문을 수록하면서, 앞부분에 이 글이 갖는 의의에 대해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해 놓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것이 함경도 현지에 살던 재야학자의 등산 기록이라는 점이라서 당시의 이 지역 사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둘째, 백두산 등정 당일에도 날씨가 좋아 장시간 정밀하게 관찰하여, 현지 실정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으며, 특히 백두산 일대의 지형이나 정상에서의 경치 묘사는 매우 탁월한 편이다. 셋째, 그는 성리학을 강마(講磨)하던 유학자였기 때문에 자연을 관찰하면서 형이상학적 도의 체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과 다른 점이다. 넷째, 그의 기행문에는 우리의 산하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백두산을 중국 곤륜산(崑崙山)의 적장자(嫡長子)로 인식하고 기타 중국의 여러 산들은 모두 서자나 지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문물을 요순 공자의 정통을 계승한 소중화(小中華)의 문화로 인식했다.
서명응이 지은 <유백두산기>의 내용도 대체로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재야학자는 아니지만 기록이 매우 자세하며, 백두산 등정 때 날씨가 좋았으며, 도의 체득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없지만 모두 학자로서의 깊은 식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곤륜산을 시작으로 하여 백두산을 설명하는 백두산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슷한 점에 비겨 서명응의 유람록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더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먼저 언급한 바 있듯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관련한 논의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문제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이다. 처음에는 빼어난 자연풍광을 구경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지만, 변방의 방비를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여 관료로서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유람을 시작할 때나 유람이 절정에 이른 때 모두 보이는 일관된 생각이었다.
이들은 높은 산에 올라 자신의 위치와 산의 방향 등을 알기 위하여 즉석에서 재목과 목수를 구하여 상한의(象限儀)라는 관측기구를 제작했다. 운총진(雲寵鎭)에서는 “그래서 재목과 목수를 구하여 상한의라는 관측기구를 제작토록 했다. 여기에 도착하여 천구의 별 하나를 관측하니, 별은 땅에서 42도 조금 못 되는 곳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이곳은 심양(瀋陽)과 같은 위도에 있는 것이 된다. 동지에는 태양이 진시(辰時) 초2각(刻) 2분에 떠서 신시(申侍) 정1각 13분에 진다. 낮은 35각 11분이 되고, 60각 4분이 되며, 신혼(晨昏)은 6각 14분으로 나뉜다. 하지에는 태양이 인시(寅時) 정1각 13분에 떠서 술시(戌時) 초2각 2분에 진다. 낮은 60각 4분이고, 밤은 35각 11분이 되어 신혼은 9각 3분으로 나뉜다. 그 나머지 22절기는 이것으로 유추해 알 수 있다”고 했다. 백두산 바로 아래 무지봉 휴게소에서는 “상한의로 천추(天樞 : 북극성)를 측정해 보니 땅과의 각도가 42도 3분이었다. 대개 위도가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는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이로써 측후의 정밀함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산에 올라서 이들이 했던 특별한 일은 북극성을 관측한다고 한 것으로 바로 기구를 통하여 지표조사 혹은 천체관측 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못과 봉우리에 명명할 때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했다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도 잠시 쉬는 동안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여 땅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용(中庸)>에 “아득하고 끝이 없지만 만 가지 형체가 울창하게 갖추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직 그 사용하지 않는 중에도 사용하는 바탕이 있으니, 무궁하게 활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다. 12봉 외에 또 하나의 산맥이 동남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소백산이 된다. 소백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는 작은 봉우리 둘이 있는데, 위쪽은 보라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이다. 흰 봉우리는 둥글고 보라색 봉우리는 뾰족하여 마치 두 산에 각도(閣道 : 아방궁에서 남산으로 통하는 대로)를 놓은 것 같다. 갑산 사람들이 억지로 이름을 붙여 연지봉이라고 하였으나, 연지는 그 뜻이 탐탁지 않으니 지금 고쳐서 자각봉(紫閣峯)이라고 하였다.
날이 정오가 되자 우리들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모두 내려왔다. 몇 사람이 아직도 뒤처져 있다가 검은 안개가 천지의 중심에서 일어나 뭉게뭉게 위로 솟아오르니 두려워서 내려왔다. 모두 자각봉 앞 야영하던 곳에 모여서 조금 쉬었다. 곧 40리를 가서 천수에 도착하여 잤다. 산은 공허하고 밤은 서늘하니 월색은 물빛과 같았다. 피리를 불고 해금을 타게 하였다. 해금을 3, 4곡 연주하자 노래하는 사람들이 화답하니 온전히 속세를 떠난 듯하였다. 천수는 우리가 갈 때 점심을 해 먹은 곳인데, 그때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할 수 없었으나 이날 밤에 측정하니 땅에서의 고도가 42도가 조금 더 되었다.
이상에서처럼 서명응의 <유백두산기>는 백두산의 자연과 생태, 그리고 국경에 관한 문제, 더 나아가 새롭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일 등 특이한 점이 있으며, 방법론적으로는 실학자들답게 상한의와 지남철 등 과학적 기구를 이용하고, 오행설, 방위설 등 여러 가지 학문분야를 동원해 이름을 지었다는 점이 특기할 것이다.
백두산유람록보다 공식 보고서 같아
서명응의 <유백두산기>는 이러한 것들 이외에 더욱 특이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점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이들이 백두산을 유람한 것이 과연 자신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서명응은 홍문관록(弘文館錄)의 관리(管理)를 사양하였다는 이유로, 조엄은 부제학(副提學) 임명을 사양하였다는 이유로 중죄인이 갔던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 귀양을 갔는데, 이는 일반적인 관례에 비추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중죄인 신분으로 적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람을 모의하고, 도착한 직후에 바로 유람을 시작했다는 점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셋째는 이들이 백두산 유람을 할 때, 갑산과 삼수의 부사 이하 모든 관원들이 나서서 이들의 유람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행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점도 이들이 단순히 유람을 한 것이 아니라는 개연성을 높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넷째는 이들이 유람을 끝내고 내려오는 날에 맞추어 두 사람에 대해 공히 사면이 되어 바로 서울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이 유람록은 단순한 유람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보고서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처럼 되어 있는 점도 그렇고, 특히 두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자 혹은 이름을 바로 사용했다는 점은 이러한 개연성을 높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과 정황으로 보아 이들과 영조 사이에는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어떤 일을 위해 은밀히 꾸민 것처럼 보인다. 즉 청나라와 국경문제가 첨예한 가운데 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두 신하에게 백두산의 위치에 대한 정밀한 조사, 정계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 백두산의 봉우리와 못 등에 대한 명칭의 문제 등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라는 밀지를 내리고 귀양을 가장하여 왕복한 것이라 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이들은 모두 조정의 뛰어나고 믿음직한 인물들이었으며, 모두 실학자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글·사진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남명학연구소장
백두산 협곡과 천지
▲ 백두산 금강대협곡의 아름다운 기암괴석이 보이고 있다.
▲ 백두산 서파에서 아름다운 천지가 보이고 있다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계단
▲백두산 금강대협곡
▶백두산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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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설경
♣칠보산
칠보(七寶)’라는 이름의 산은 남한에 4개, 북한 1개 등 모두 5개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각기 다른 산들이지요. 그러나 함경북도 금강(金剛)으로 일컫는 북한의 칠보산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남한의 4개 칠보산은 수원(경기도/높이238m), 정읍(전북/469m)시, 괴산(충북/778m),영덕(경북/810m)군에 소재합니다. 북한은 함북 명천군을 중심으로 어랑, 화성, 화대군등 4개 군 250여 평방km에 걸쳐 있는 예로부터 빼어난 풍경의 기기묘묘한 산세를 자랑하는 산이지요.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백두산이나 금강산보다 이 칠보산(상매봉 1103m)을 제1의 명산으로 손꼽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합니다. 제 2금강산으로 불리는 이 산은 지난 1976년 10월 북 자연보호구(명승지 제 17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산 높이는 책자마다 다르게 소개돼 있어 확인할 수 없지만1000m 짓한 것 같습니다 옛날 탐승객(探勝客)들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청아하고 놀랍기는 금강산이요, 높고 기발하기는 묘향산이며, 겹겹이 들어선 골짜기와 봉우리는 설악산이고,깊고 기이하기는 칠보산이라 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