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신비27/
◆대한민국의 산1
[全國 山行 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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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4] | 자 [104] | 1,266 산 |
♣가야산
1,430m 경남 합천 가야면, 거창, 경북 성주 [국립공원]
♣강천산
584m 전북 순창 북흥면, 전남 담양 용면[군립공원]
♣계룡산
845m 충남 공주 반포 계룡면, 논산 두마,상월면 [국립공원]
♣관악산
632m 서울 관악, 금천, 경기 과천, 안양
▲신선대
♣금산
705m 경남 남해, 이동면 삼동면
▲보리암
♣금월봉 제천과 충주호 사이
♣금오산
♣금정산
801m 부산 북구, 동래구, 경남 양산 동면
●상계봉의 바위들
금정산의 금정봉(金井峰)은 높이 약 400m 이며, 불웅령(佛熊嶺)은 약 340m이나 상계봉 (上鷄峰)은 하늘을 향하여 송곳처럼 솟아오른 높이 628m의 영봉(靈峰)이다. 정상에 바위 가 병풍처럼 둘러져서 쭉쭉 뻗고 있다. 상계봉(上鷄峰)은 학(鶴)의 모습을 하였다 하여 상학봉(上鶴峰)이라고도 불리며 콩등바위, 베틀굴, 영감바위, 할멈바위 등의 여러 바위가 있어 여러가지의 전설을 안고 있다. 상계봉이라는 산봉우리 이름은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인지라 먼저 밝아오는 봉우리라 하여 東·新·曙의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며, 이런 뜻에서 산 이름에 계(鷄)자가 붙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면 금정산의 북봉인 계명산 (鷄鳴山)이 그렇고, 계룡산(鷄龍山)과 계반산(鷄畔山), 계봉산(鷄鳳山) 등이 그것이다. 이 곳에는 금정산성의 일부가 쌓여져 있다.
사기마을 아래쪽은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으로 알려진 곳인데 헛뫼를 만들어 놓았더니 이곳에서 닭이 우는소리가 났다고 전한다. 이는 상계봉과 관련된 흥미로운 설화이다. 또한 이 곳에는 모시바위 또는 뫼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역시 상계봉의 닭과 관련된 바위 이름이다. 이처럼 만덕동에는 바위가 많다. 특히, 사기마을은 바위가 무수히 널려 있으며 그 바위들이 둥글고 매끄럽게 수마되어 온화감을 자아내게 한다. 만덕동 사기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금정산 병풍암(屛風庵)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상사바위 또는 장사바위라는 매우 큰 바 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바위의 한쪽 끝이 꼭 뱀대가리 같아서 상사바위라고 한다는 이도 있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즉, 옛날 장수가 이 바위 위에서 건너편 금정봉 꼭대기에 있는 상사 바위로 뛰어 건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사바위 위에는 장수의 발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산천에 장수의 발자국에 관한 전설은 많으며 이곳의 전설도 같은 유형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덕동 사기마을과 상리(上里)마을과의 사이에는 좁은 계곡평야가 있는데 이 일대를 북설 이라고 부른다. 북설의 대략 중앙지점에 끝이 잘린 원추형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는 북바 위이며, 사기마을 바로 앞을 막아 내려온 세장(細長)한 능선은 긴등(長丘, 마을에서는 진 등이라고 함) 또는 북채라고 부르는데, 이 북채로 북바위를 친다는 전설이 있다. 만덕사와 관계된 풍수설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이 밖에도 바위의 모양을 따라서 사갓바위, 수 박바위, 할배바위, 할매바위 등이 있다. 현재의 만덕터널 입구 조금 못가서 다리가 가설된 지점에 속칭 거지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큰 바위 밑에 수십인이 앉을 수 있는 굴이 되어 있 었는데 이곳에 집없는 걸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하며 지금은 도 로 개설로 없어졌다.
●암벽과 암굴
금정산에는 우리 나라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금정산성이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이 금정산성의 성곽을 따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직벽 단애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직벽들 은 클라이머들이 기술등반을 익히는 요람으로 많은 기여를 해오고 있다. 금정산성은 정상 인 고당봉에서 남쪽의 상계봉에 이르는 주능선과 낙동강으로 빠지는 대천(大川)을 차단하 는 양쪽 능선을 이용해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쌓은 석성이다. 이 산성의 제1망루 바로 남쪽 이 상계봉인데, 수십길 직벽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제1망루에서 남문을 지나 다시 제 2망루를 돌아 북쪽으로 성곽을 따라가면 대륙봉이 나타난다. 이 봉우리 또한 직벽의 단애 가 아찔하다. 이곳에서 부산의 전통있는 산악단체인 대륙산악회원들이 암벽훈련을 한 것을 기려 대륙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성고개에서 동문을 지나 성곽을 한동안 따라 가면 나비바위가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이 반겨준다. 능선 위로 드러난 거대한 바위의 형상은 나비의 모습이지만, 동쪽으로 길게 뿌 리를 내린 직벽의 규모는 아주 대단하다. 부산의 산악인들이 록 클라이밍 입문과정에서 반 드시 거치게 되는 암장이다. 부채바위 바로 동쪽에 금정산성 제3망루가 있는데 직벽의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제3망루는 산성은 성채와 같고 산릉은 성곽과 같다는 금정산의 지 형 특성을 잘 활용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3망루에서 성곽을 따라 나지막한 능선을 넘어 가면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맥이 흘러내리는데, 그 지맥이 온통 바위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비바위와 쌍벽을 이루면서 산 악인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부채바위이다. 마치 부채를 펼쳐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수십m의 직벽이 날카롭기만 하다. 이 부채바위에서 북쪽의 성 곽을 건너다보면 제4망루 뒤로 마치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은 형 상의 암봉이 있다. 금정산 주능선상에 솟아있는 의상봉이다. 의상봉에서 동쪽으로 지맥이 흘러내리는데, 지맥 전체가 거대한 암장을 이루고 있다. 금정산에서 최대 규모인 이 암장 은 이름이 없다하여 무명암이라고 일컫는다. 의상봉에서 북문을 거쳐 서쪽으로 잠시 나아가면 미륵암이 있고, 미륵암 뒤편으로 고당봉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정산성이 있다. 미륵 봉 전체가 거대한 직벽이다. 미륵암 남쪽에는 작은 규모의 암장이 있는데, 이 암장은 금정 산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가운데 한 명이었던 부산산악인 고 송준행씨를 기려 준행암으로 명명되었다.
금정산에 거대한 직벽 단애가 많은 것처럼 이 산에는 암굴(岩窟)이 또한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암굴은 거대한 바위 아래 위치하여 그 신비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으며, 금정산의 이름난 암굴은 이미 사찰 소유 암자가 되어 있거나, 무속신앙의 본거지로 이용되 고 있다. 금정산의 암굴들은 대부분이 소규모이지만, 베틀굴·은동굴과 같이 꽤 큰 규모의 것들도 있다. 이 베틀굴·은동굴은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위란 때 인근 주민들이 왜적의 침입을 피해 피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정산에는 베틀굴로 불리는 곳이 둘이나 있다 . 쇠미산(일명 금용산) 능선 부근에 위치한 베틀굴과 상계봉 직벽 아래편의 베틀굴이 그것 이다. 상계봉 직벽 아래의 베틀굴은 현재 무속신앙을 경배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고, 쇠미산의 베틀굴은 그대로 버려져 있다.
그러나 규모는 쇠미산의 베틀굴이 훨씬 크고, 임진 왜란 당시에 주민들이 피란 장소로 활용했던 곳도 성지곡 동편의 이 쇠미산 암굴이었다. 또 베틀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옛부터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산은 옛날 주물〔쇠물〕이 나왔다고 하여 금용산(金湧山=金井 峰))이라 하며, 쇠뫼라고 한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세미사란 사찰이 있어 그 앞에 는 장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장군들이 놀던 자취가 있고, 바둑판도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금정산의 북부를 이루고 있는 장군봉 북쪽 능선 아래에는 은동굴이 있다. 이 암굴 역시 임 진왜란 때 여섯 성바지가 8년간 숨어 살았던 피란굴이었다. 현재는 금륜사란 작은 사찰이 이 은동굴과 함께 자리한다. 금정산에는 이처럼 직벽, 또는 거대한 바위들이 산재하면서 그 아래 크고 작은 암굴들은 예로부터 인근 주민들에게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고, 또는 불교나 무속신앙을 경배하는 장소로 활용되어 왔다. 금정산의 신비로움은 이들 암굴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병풍암 석불사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만덕고개에서 백양산으로 연결되는 금정산맥이 얌전하게 버티고 있다. 이 금정산맥은 백양산과 별도로 남쪽 끝에 금용산(일명 새미산, 쇠 미산)이란 봉우리 하나를 불쑥 치켜세워 놓았다.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곳에도 작 은 바위 구멍마다 기도 장소를 만들어 두었다. 고당봉 북사면의 유명 무명 기도처들도 암 굴 또는 암굴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들에 주로 집중돼 있다. 바위가 움푹 패어들기만한 곳, 또는 샘물이 솟는 곳이라면 거의 기도처로 붐비고 있는 것이다. 금정산 암굴 가운데 불교 의 성역으로 자리하는 것은 장군봉 북쪽의 은동굴이다.
은동굴의 존재가 금륜사(金輪寺)란 암자까지 탄생시킨 것이다. 이 은동굴도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들이 대피하여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은동굴은 장군봉의 북쪽 지릉 8부 능선에 위 치한 20평 가량의 자연 암굴이다. 임진왜란 때 여섯 성바지가 8년 동안 숨어살았다는 유명 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앞에 금륜사 암자가 세워져 있다. 은동굴 입구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처음에는 입구가 턱이 진 것으로 보여지나 지금은 사람 이 선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깎아냈다. 입구 양쪽에는 빗장을 지을 수 있도록 파놓은 홈이 4개 있다. 또한 굴 안에는 흐르는 물을 받을 수 있게 해놓았다.
금륜사는 원래 동굴 안에 법당을 지어 놓았으나 불법 주거물 철거 때 함께 철거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암자가 건립된 연륜은 짧다. 그러나 이 은동굴은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오는 다소 색다른 곳이기도 하다. 은동굴이란 이름은 은을 채굴했다는 데서 연유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약수가 나오는 암굴이라고 하여 약수굴이라고도 불렀고, 주민들이 피란한 곳이라고 하여 피란굴이라고도 불렸다.
♧금정산의 비경
1. 금정산 8경 금정산 8경(金井山八景)은 곧 범어사 8경이나 다름없다. 의상대사가 화엄 10찰의 하나로 창건한 범어사는 금정산 최고의 명당에 그 터를 잡았다.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 기 위해 세워진 이 사찰은 僧軍作隊를 조직하여 금정산 방어 등의 힘든 일을 해오기도 했으나, 현재는 선찰대본산으로 명당에 터를 세운 만큼 주변의 자연 경관이 무척 빼어나다. 더구나 1천수백년의 세월을 지켜오는 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면서 그들의 얼이 깃들어 이 사찰만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1) 의상망해(義相望海)
범어사 입구 양쪽에『금정산』『범어사』라 음각된 표시석이 말해주듯 범어사는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의 명패를 지닌 거찰답게 1,600여년의 세월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면면히 담당해온 한국 불교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사찰로서 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천년 노송과 비석들이 서 있는 길을 따라가면 일주문이 다가선다.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길을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천황문을 보고 왼쪽으로 따라 가면 대성암이 나온 다. 여기서『의상대』까지 11km 이다. 고당봉에서 흘러 내려온 범어천의 물은 많은 바위 틈으로 흘러 더욱 물소리가 유난히도 아름답고 맑았다. 산자락을 따라 10여분 올라가서 왼 편을 보면 화강암 큰 바위무리가 어울려 하늘로 치솟고 산천을 덮고 있다.
이 바위를 타고 50m쯤 올라가면 6평 정도의 너럭바위에 다다른다 여기서 왼편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 다. 그 옆에 가로 20m 10㎝, 세로 1m인 10여도 경사진 타원형 화강암에『의상대』라고 행 서로 음각되어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사방이 트인 이곳의 전망은 남으로는 총총히 건물이 들어선 시가지, 그 너머 넘실거리는 푸는 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동쪽으로는 계명 봉이 우뚝 솟아 있고 바로 밑에는 범어사가 품에 안길듯이 산자락에 싸여 있으며, 멀리 오륜대가 있었던 회동 수원지가 호수처럼 둘러서 있다. 서쪽으로는 원효봉, 그리고 암석이 매우 기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원효석대』가 그 옛날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體有 心造)를 깨달은 기상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였다. 북쪽으로는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이『의 상대』를 지켜보아 마음이 확트인 최고의 전망대이다.
여기『의상대』는 꽤나 넓은 반석이 널려 있고, 바로 밑에는 천길의 벼랑을 이룬 요새에 듬성듬성 서 있는 곰솔로 둘러싸인 절벽이다. 맑은 날 이곳에서 저 멀리 보이는 남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자연이 빚은 천하의 절경이다. 의상대사가 금정산에서 수도하시던 석대가 바로 이곳『의상대』이고 이 대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절경을 사람들은 의상망해라고 먼 옛날부터 불렀다. 의상대사에 올라 묵객들이 읊은 글은 많으나 오희창(吳喜昌)의 7언시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길이나 되는 높은 대가 속세와 떨어졌으니 / 절영도 높은 산봉우리는 성 밑에 있는 창이 요 / 先神의 외로운 섬은 바다 속의 무덤이라 / 바람 맑고 잎 푸르니 삼산의 풀이요 / 물이 靑薺를 깨물었으니 만리의 구름이라 / 천지의 장관을 이제 비로소 얻었으니 / 휘호는 응당 그대의 긴 글이 있으리라"
고 말하고 있다. 그 당시『의상대』는 속세와 떨어진 금정산에 있어 신선이 살다가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천지의 장관인 절승지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이 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명당 지, 하늘, 산, 바다가 어우러진 곳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화엄대종사로서 의상은 이 대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수도를 하시면서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여기서 그 너머 보이는 남해를 보면서『의상대』에 얽힌 아름답고 숭고한 전설을 하나 소개한다.
의상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위해 등주해안에 이르러 유리걸식 하던 중, 마침 어떤 청신사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그 주인집에는 얼굴이 예쁜 선묘(善妙)아가씨가 있었다. 선묘는 스 님을 보고 단번에 사랑을 하여 의상스님을 사모하게 되어 마음속에 정의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상의 구도심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더욱 굳어져 갔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짐하는 한편으로 선묘녀의 정념을 불제자로서의 계를 잃지 않고 어떻게 승화시키 느냐 하는 것에 고심하였다. 선묘도 의상의 마음이 그토록 굳은 것을 알고 사랑을 갈구하 는 자기의 마음이 출가사문의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의상 앞에 나아가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참회하고 '불제자가 되어 세세생생 태어날 때마다 스님을 통해서 최상의 불법을 배워 공부를 성취하려 하오니, 스님께서는 하루 속히 거짓없는 깨달음을 이룩하여 불쌍한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라는 서원을 올렸다.
의상은 이 청을 받은 후 장안 종남산의 지엄을 찾아 화엄경의 높고 깊은 뜻을 전수 받았다. 그때 마침 신라의 승상(承相) 김인문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오자, 고종이 그를 가두고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보이므로 급히 의상을 통해 본국에 알려 이 위기의 수습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은 급히 귀국하기는 하지만 자기를 위해 십여 년동안 뒷바라지 해 온 선묘녀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묘녀는 때를 맞추어 해변으로 나왔으나 스님이 탄 배는 멀리 떠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저의 이 한 몸 당장 죽는다 하여도 후회없이 의상대를 따르렵니다.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스님을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에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도운다더니, 그녀는 소원대로 용이되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해 무사히 신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의상은 귀국하여 부처님 법을 펼칠 큰 원을 세우고, 선묘의 서원을 가상히 여겨 금정산 절경이 석대위에 천년 전 의상대사가 섰다. 여기가 바로『의상대』라고 불리는 천고의 경승지인 곳이다. 여기 절벽 석대 위에서 솔바람 마시며 자거나 먹지도 않고 대자대비 부처님께 발원을 피워 올리며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곳이라. 이곳은 금정산 불국 정토의 유서깊은 곳이다.
2) 어산노송(魚山老松)
팔송에서 범어사로 들어가는 아스팔트의 산길은 꼬불꼬불한 46곡각을 이루며 양쪽으로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다. 한껏 청량함을 맛보며 산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올라간다. 금정산 동쪽을 朝陽이라 하면 서쪽을 夕陽이라 할까. 겨울이라도 그다지 차갑지 않은 아침, 막 잠을 깬 조양을 등에 지고 범어사 동쪽 계곡에 들어서면 차츰 소나무 숲이 촘촘해진다. 이제는 썩어서 밤색으로 변한 송화가 땅바닥에 소복이 떨어져 있다. 솔방울이 달린 솔 가지에 조각조각 찢어진 하늘이 파랗게 걸려있다. 적막을 깨고 흘러가는 맑은 냇물을 가로 질러 놓인 돌다리 어산교를 지나 비스듬히 숲속 길을 오르면 화엄도량인 범어사 입구 13줄 의 석판이 깔린 길 양쪽에 울창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서있어 한층 산사의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는데 옛 사람들은 이를『어산노송』이라 불렀다.
어산교에 얽힌 낭백스님의 일화를 소개하면 조선 때 사찰에 부여된 부역수가 36종에나 이르러서 수많은 불자들은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부역을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부처님께 서원을 다하였다.
원력을 짓기 위해 기찰부근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식수 제공하고 밭을 개간하여 과 일, 채소 등을 심어 행인에게 무한정 나누어주고 짚신도 삼아서 보시하였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스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불자들 앞에서 3가지 과제를 던져 주셨는데, 그중 셋번째가 내가 죽어 다시 환생하여 나라의 고급관리가 된다면, 모든 관리가 다 일주 문까지 와서 말에서 내리는 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뒤 스님은 열 반에 들고 그 제자들은 늙었으나 낭백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 손꼽아 기다 리고 있던 어느날, 마침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닌 사람이 온다는 전 갈을 받자, 범어사 스님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오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순상국 조공은 낭백스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었다.
소나무는 한자로는 '松'자를 쓰는데 이 자의 오른편 公은 이 나무가 모든 나무의 윗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한다. ≪본초강목≫에 "소나무는 모든 나무의 어른(長)"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松'자는 중국 전설시대에 황제의 신하 창힐이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의 상징은 목재로 이용하고 맑은 공기, 수리조절, 보건휴양 등나무로 존재함으로써 제공하는 가치가 있으며, 붉은 비늘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으로 보고 용의 상태에 적어들어 씩씩함, 굳은 절개, 깊은 부부의 사랑 등의 상징성을 말할 수 있다.
또 오래 사는 나무로 장수는 인 간의 간절한 희구이고 보면 이 나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천년을 사는 학이 집을 짓고 오 래 사는 거북이 엎드린다는 소나무는 초로와 같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간의 동 경 대상이 되었다. 오래 사는 물체에 인간은 영성 또는 신성을 부여했고 그 장엄에 굴복하 고 그 위력의 그늘아래에서 평안하게 살것을 바랐다. 소나무 가운데는 서낭당 나무로서 치 성을 올리는 대상이 된 것이 많다.
예로부터 부정을 막기 위해 문위에 건너 질러매는 금줄에는 소나무와 숯과 고추를 꼽았고 또 집안에 있는 부정을 빼기 위해 솔잎에 물을 묻혀 사방을 뿌리는 민간의 습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어산교의 낙락장송도 그냥 단순한 큰 소나무가 아니라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사바세계의 부정을 막는 또 하나의 수호신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이름난 사 찰의 입구에는 대개 큰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그러한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3) 대성은수(大聖隱水)
범어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왼쪽으로 걷다보면 대성암이 나온다. 이곳은 범어사 계곡, 바위와 물이 어우러져 지표수보다 지하수로 흐르는 물소리가 자연적 화음을 이루어 아름답게 들리는 곳이다. 어느 고고학자에 의하면, 이 골짜기 바위들이 1천5백만년전에 생겼고 바위의 모양으로 보아 주거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대성암에서 주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 고 관조의 세계, 무아의 경지에 물의 화음을 음미할 수 있어 어느 누구가『대성은수』하였 을까?
원주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면 구들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들리는 물소리는 더욱 선의 경지에 도달하게끔 불심을 자극하였다'고 한다. 위로 쳐다보니『각해선림(覺海禪林)』이란 현판을 붙인 선방이 지금부터 10여년전에 새로 불사를 시작하여 건립된 건물이라 오늘날에는 화음을 이룬 물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담장 밖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선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대성암은 유명한 만성스님이 지도한 비구니 선원 중 전통있는 암자로 이름이 나 있다. 비구니계 큰스님으로 알려졌던 만성스님은 포교도 불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깨달음을 위한 자기 공부라 하시며 오로지 참선 수행만을 강조하였다 . 그분의 가풍을 이어받아 절제있는 생활로 지금의 도감스님 또한 늘 근검 절약을 강조하 시며 일꾼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불사에 임하시면서도 '이 뭣꼬(是甚摩)'의 하두를 놓지 않으시는 수행의 모습은 곁에 있는 스님들에게 생활철학의 가르침이 된다.
선가에서는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석달씩 용맹 정진을 계속하는데 여름 선가는 4월 15일에 서 7월 15일까지이고 겨울 선가는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이다. 이때 전국에서 중진 비구니 스님 70여명이 정진하는 자리를 같이하여 일심으로 수행에 임한다. "우리가 가야 할 해탈의 길은 멀고 험한 길이다. 때로는 게을러지고 혹은 견딜 수 없는 역경에 시달리기도 한다. 쉼 없는 노력만이 나의 자세를 가다듬고 양약이 될 수 있다. 흐리멍덩한 마음가짐 과 산란한 마음을 바로 잡고 끊임없이 열반을 추구하는 자세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전환시켜야 한다. 바른 진리를 남에게 전해주어 고해에서 허덕이는 무명중생을 깨우치는 일은 부처님의 원력에서 비롯된 하염없는 자기반성의 채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마음의 허리띠를 조이며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 대성은수와 함께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곳이고 한다.
4) 청련야우(靑蓮夜雨)
범어사 매표소를 지나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예불드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오른쪽 숲 속 연화교를 지나면『지장대도량』이란 큰 바위 탑이 우뚝 눈앞에 다가선다. 언제나 청정 한 마음으로 세속의 티끌을 이내 씻겨가는 아축교는 실개천〔絲川〕을 이루었는데 문자 그대로 가람으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해탈의 문이다. 또 들어가는 입구 4곳에 부처님의 원 력의 가피로 석탑을 조성하였다. 금정산 고당봉에서 발원한 정화수는 상류 계곡에서 운반 해 온 수많은 크고 작은 자갈들과 가닥 사천으로 갈라진 삼각주 지형이 마치 푸른 연꽃을 이룬 곳이라 하여 청련암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금정산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이 하나같이 유난히도 맑고 깨끗한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이겠 지만 또한 법당 앞을 흐르는 법수이기에 더욱 맑은 물일는지도 모른다. 계곡을 이루는 이 맑은 법수는 그 천연의 지형과 더불어 無量光佛로서의 한 송이 또 하나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끊임없이 흘러 왔으리라. 아마도 물조차도 지장대도량으로 그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오직 불심으로 참고 견디면서 만들어 낸 것이 저 유명한『청련야우』가 아니였을까? 청련 암 주위의 울창한 대숲, 사천의 맑은 물소리가 이룬 화음이 아름답다. 그 숲위에 내리는 빗 소리도 계속 사천에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아무리 밤에 많은 비가 온다해도 빗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심오한 조화이리라. 지장대도량이라 법당에 지장보살을 모셨다는 경위를 선승 양익스님으로부터 들었다. 돌로 만든 불상을 금물로 옷을 갈아 입혔을 당시『지장보살』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불상은 그 유명한 보관을 쓴 지장보살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 내력을 전한다.
이곳은 또 하나의 영험한 지장대도량의 구세주이신 토신(土神)이 오묘한 천지 조화의 수호로 씨를 맺게 하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을 베풀었기에 스님은 법당의 보살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법당 밖에 청동으로 된 높이 7m의 동양 최고의 불상 지장 보살을 주조했다. 평소 불심이 깊기로 널리 알려진 양익스님의 일념이 결국 열매를 맺어 불상이 이루어졌으니 자비스런 보살을 우러러보니, 밝은 광명과 따뜻한 미소,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와 그만 보는 이로 하여금 합장하고 그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 부산에서는 그 봉기의 횃불을 처음 밝힌 곳이 이곳 동래다. 3월 18일인 동래 장날에는 때 마침 범어사에 있던 금정학당 학생, 승려들에 의해 동 래읍에서 다시 커다란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월 17일, 저녁 청련암의 기숙사에서 금정학당 졸업생 송별회에 모인 40여명의학생들이 결 사적으로 거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에 독립선언서 1천매 태극기 큰것 1개와 작은 것 1천매를 준비하여 18일부터 19일까지 동래시장통에서 군중들과 시위를 하였는데, 마침 내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오고 주동인물 허영호외 33명이 검거 되었다. 이것이 유명 한『범어사 학생의거 사건』이다 동래의 3·1운동 진원지가 범어사 청련암이었으며 이곳 금정산 기슭 호국의 암자, 지장대도량에서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한 것은 거룩한 위국 충절의 발로라 할 것이다.
5) 계명추월(鷄鳴秋月)
범어사 어산교를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이내 연화교가 나타나고 계명암으로 오르는 비탈진 길이 앞에 다가온다『계명암』이란 입간판 왼쪽에는 안내하듯 관세음보살 석상이 다소곳이 서 있다. 그 가파른 오솔길 중앙 계단을 33곡간을 지나면 일주문이 눈에 들어 온다. 숨이차 심호흡을 가다듬고 산아래를 보면 33천에 龍이 승천하는 모습을 실감케 하여 용을 타고 극락세계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다. 적당히 속가와 떨어져 있고 또 숨이 찰만큼 오 르는 산길이 있고 서어나무 숲과 낙엽, 그늘과 샘물, 향내어린 바람이 있는 해발 500m에 위치한게 계명암이다.
범어사 동편 산록에 계명봉(601.5m)이라 불리는 삼각형의 가파른 산봉우리가 있다. 가을 이면 금정산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풍이 드는 곳, 범어사 산내암자의 하나인 계명암 앞에 서면 멀리 또 다른 동해 바다 검푸른 물결이 펼쳐진다. 범어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계명암 문틀에 기대어 계명이란 이름을 생각해 본다. 鷄鳴이란『닭울음』이란 뜻이다. 전설 에 의하면 옛날 의상대사가 이 부근에서 절터를 물색하던 중 한 밤중에 느닷없이 닭울음을 들었기에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또 이 암자에서 정진하던 납자들이 새벽 예불 때마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닭울음소리를 들었고 그것은 시간을 가늠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계명이란 고유어는『새울이』를 한자의 訓을 빌어 借字表記한 것이다. 계명봉의 본 이름이『새울이뫼』이다. 새울이란 동쪽에 있는 새우물〔新井〕이란 뜻이다. 계명이나 금정, 나아가서 동래란 지명도 모두 새울이의 차자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새는 날이 새는 동쪽이며 새롭게 하루가 시작됨을 뜻하면서 때로는 새(鳥)와 쇠(金)와는 동음어의 관계가 있다. 한편, 현대어 우물(井)은 본래 울(井) 혹은 천(川)에 물(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새울이라고 할때『울』은 운다는 뜻의 한자이름을 취하여 계명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계명은 '날이 새는 동쪽이며 새롭게 하루가 시작됨에 닭이 운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보덕굴은 지나 북극보전 앞으로 올라가면 기암괴석과 잡목이 어우러져 산세가 수려하고 5층석탑과 숫닭의 모습 바위가 있는 곳, 앞이 확트인 전망대라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일출·월출의 광경이 그야말로 천혜의 절경이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아름다운 풍치를 보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풍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신선이 될 것같은 착각에 빠졌으리라.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멀리 동해바다가 내려다 뵈는 계명암에서 청사포 앞바다에서 선남선녀에 의해 달님을 수평선 위로 떠받쳐 올려보내는 가을밤 하얀달을 바라보는 운치야 말로 속세를 떠난 천상의 극락을 연상케 한다. 이『계명추월』이 아니어도 닭의 울음소리에 미망(迷妄)을 끼친다는 말 그대로 이 계명암은 오래 오래 중생 모두에게 지혜를 밝혀줄 영험한 기도도량이 되리라 믿는다.
6) 내원모종(內院暮鍾)
금정산 기슭에는 범어사에 딸린 12암자가 곳곳에 진좌(鎭座)하고 있다. 청련암을 지나 좁다란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세속의 번뇌를 계곡물에 씻어 말끔히 흘려 보내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라는 듯 속삭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돌다리를 지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은 내원암에 이른다. 내원이란 암자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곳 안집 또는 안방이란 뜻을 지녀 듣기만 해도 편안한 곳이며, 또한 부처님이 도솔천, 내원궁에 기거했으므로 마땅히 내원암이란 큰스님, 대득 스님이 상주하는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내원암은 선도량으로 여기에는 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달린 선방이 있다. '한국불교의 얼을 새로이 심고 새로운 불교 이념의 선풍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신 겸허, 용성, 만해선사가 내원암에서 선의 생활화를 모색하였다'고 인각(仁覺)스님은 전한다.
'정진수행으로 마음을 충전하면 저절로 戒(참선), 定(안정), 慧(지혜)의 三學이 충만해진다. 미혹해서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그 때가『戒』이고 그렇게 되어 편안해진 마음이『定』이 있고, 정이 있을 때에『慧』가 살아나는 것이다. 수도자적인 보살행의 실천은 마음을 한데모아 부처님께 서원하면 염파(念跛)작용으로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고 스님은 힘주어 말씀한다.
법당에는『대자비전』의 편액으로 관세음보살이 흰 연꽃 위에 서 흰옷을 입고 한 손에 불사의 감로수를 담은 감로병을 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에 나타난 것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자비의 손길로 끝없는 평온으로 인도하는 천수관음이 구세주로 모신 사찰의 전각이다. 내원암의 저녁 예불 때 느껴오는 상큼한 공기는 법당을 향하는 참배객의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게 한다. 이즈음 "쾅더응―" 멧부리를 울리는 28번의 종소리가 울려온다.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며 "더웅덩―" 긴여운을 남기면서 계곡을 따라 멀리 멀리 퍼져가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어두운 마음을 열어 지혜로 밝히소서… 멀리 멀리 하늘 저 끝까지 울려 퍼지고 깊이 깊이 땅속 도산지옥까지 스며드는 듯한 그 종소리, 산으로 둘러싼 내원암의 저녁 종소리는 계곡을 따라 메아리를 이루며, 은은히 울려오는 바, 이 범종소리는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안내하는 이름할 수 없는 신묘한 운치를 자아내 옛 사람들은 이를 특별히『내원모종』이라 하여 귀히여겼다. 오늘도 이 종소리는 탐욕과 질시와 어둠으로 가득 찬 세속의 때묻은 마음을 밝히기 위해 중생계 속으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7) 금강만풍(金剛晩楓)
범어사 계곡의 물이 줄기차게 흐르는 것처럼 산 또한 첩첩하게 쌓여 골을 이룬다. 비록 밀생하였을 망정 제 줄기가 아주 곧게 쭉쭉 잘 뻗어 올라서 자연경관으로는 소나무 의장대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범어사 입구 왼쪽 골짜기를 따라 500m 남짓 올라가면 천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암괴석들의 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隱水는 아니더라도 천갈내 만 갈래 오묘한 자연의 음악인 선율을 이루면서 흐르고 있다. '성불하세요' 라고 새겨진 금강암 입구의 표지판를 보고 오른쪽으로 바윗길로 나서면 동자스님상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일주문의 주련에는 '즐거움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라고 써 있다.
이 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 주련의 글귀를 한번 더 음미하면서 문을 들어섰다. "파괴되지 않는 지극한 보배의 모습이여/ 그 본성은 항상 사물을 파괴할 수 있네/ 이로써 반야는 셋이면서 셋이 아닌데 비유하여/ 통(通), 별(別) 모두 다함이 제도합니다"는 금강에 비유이며,『반야 바라밀』은 법이다. 금강은 그 가운데 가장 존귀하기 때문에 금이 강한 성품이라는 뜻에서 금강이라 말한다. 1899년 10월 1일 처음으로 임시선회를 금강암에 세워 임시선사를 조성하고 이때 모인 대중은 수옹혜윤, 성월일전 등화상 4분과 휴진 등 세 수좌와 더불어 일곱 분이었다고 한다. 금강암은 독특한 지형 위에 놓여 있는데 법당은 주변의 건물보다 3m높은 석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을 중생의 갈망을 좇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닦아 가는 곳,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기도가 금강삼매 다시 말하면 최후에 일체의 번뇌를 끊고 궁극의 마음 상태에 이르는데 있는 것이다. 현판 옆기둥 들보에 한 쌍의 용조각 수법은 생동감이 흘러 넘친다. 내부의 목조 보개 및 불단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되어 있다. 석가모니, 지장, 신중정화 조각, 단청의 보상화문, 연화문의 그림, 내벽에 채워진 벽화, 하나 같이 격조 높은 옛 사람의 슬기와 불심이 어우러진 수작이었으며, 건물의 짜임새와 탱화가 풍기는 독특한 무늬로 하여 과연 이곳은『금강만풍』의 아름다운 경관을 절로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늦가을 이곳에서 보는 풍치가 바로 금강만풍 진미를 보여 주는데, 금강암에서 남쪽의 능선 계곡, 동쪽의 계명봉은 소나무뿐이 아니라 미모의 참나무과의 낙엽수들이 이루어 만산홍엽으로 불타올라, 그 비장한 경치는 범어사 계곡물에 비치고 그 물도 단풍이 들어 붉게 타올라 붉은 계곡을 이루는데, 천하의 절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자연의 위대한 破産을 보여주다. 그냥 파산하지 않고 모든 녹음은 불바다로 불타오르는 최후로서 파산을 한다. 네로가 로마를, 진시황이 수천만권의 책을 불질렀던 그 장절한 광태(狂態), 아무리 불바다로 어우러진 장관이라고 한들 자연의 파산에 비교할 수 있으랴! 늦가을 단풍속의 천연 도량 금강암에서 사방을 보면 울울창창한 밀림지대인 것이다. 노송과 잡목 넝쿨이 단풍나무들과 어우러져 빨강, 노랑, 파랑 3원색의 조화를 이루는 장엄한 자연의 큰잔치가 단풍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와! 어머를 연발하면서 탄성을 지른 것은 또한 불법이 자아낸 또 하나의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금정산 안내에 관한 옛 문헌에 금정제일이라고 예찬한『금강만풍』은 신선의 선남선녀만이 단풍놀이를 했다는 전설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8) 고당귀운(高幢歸雲)
해동 제일의 부산의 진산 금정산을 빼곤 부산을 생각할 수 없고 고당봉(高幢峰)없는 금정산은 말할 수가 없다.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은 범어사의 배산이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을 바라보고 있으면, 봉긋한 연꽃송이 봉머리에 걸려 있는 흰구름이 흘러가면서 하늘문이 열리는 듯하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도 구름이 덮였다 걷혔다 하는 그 경치를 그대로 오래도록 볼 수 없다. 방금까지 보이던 까마득한 골짜기에 문득 안개구름이 불끈 솟아올라 어느새 골안을 덮고, 고당봉을 스치어 싸고돌면 마치 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속에 뜬 섬과 같이 그만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느새 구름이 흩어지면 정상도 보이고 짚은 안개속에 파묻힌 골짜기도 드러내는 기상천외의 자연조화는『고당귀운』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등마루를 따라 오르막길로 가면 용호굴이 있고 그 위에 정상이 있다. 거기에는『금정산 고당봉』을 새긴 석주가 우뚝서 있다. 주위에는 기묘한 큰 바위들이 모여 있는 불쑥 높아진 곳, 금정산의 최고 전망대이다. 북으로 장군봉, 남으로 상계봉, 동으로 계명봉, 서로는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바라보이고 수많은 골짜기들, 동해바다까지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어 참으로 웅대하고 장쾌하다. 산꼭대기에 위태로운 바위들이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떨어지고 무너지고 부러질 것 같건만 바위 벼랑을 후리는 바람에도 윙~윙~소리를 낼 뿐 끄떡하지 않는다. 중향성(衆香城)의 바위 경치는 보석이 반짝이는 듯 유난히도 빛나는 화강암류이다.≪梵魚寺創建事蹟≫중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득 꿈속에 神人이 나타나,
"대왕이시며 태백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한 화상이 있는데 항상 3천명의 대풍을 거느리고 화엄법문을 연설하고 화엄신중과 40법체 그리고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한다.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차고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가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아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을 독경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하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여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에 제신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고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오게했다. 의상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7日 7夜를 일심으로 독경했다는 곳이 고당봉이다.『高幢』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님의 화엄일승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 는 의미로 금정산 제일 높은 봉우리, 범어사 배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뜻이다.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다는 의상대사(625∼702)의 뜻에 따라 붙은 명칭이『高幢峰』이다.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산성 북문과 동문으로 가는 산성길
≪범어사서체유전≫ 산령축(1920)에 의하면, 밀양 박씨가 많은 보시로 화루보살이 되어 불가에 귀의하고 절 살림을 맞아왔다. 어느날 보살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 주면 고당봉의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켜 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씩(1월 15일, 5월 5일)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번성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고당 박씨 할매는 고모영신의 인격신이 되어 부산의 호국 영산 진호산에 생산과 풍요를 안겨주는 선신께 원력을 받기 위해 기도를 밤낮 올리고 있다.
♧금정산의 봉우리
●고당봉
고당봉(姑堂 峰, 801.5m)은 금정산의 주봉으로 부산시가와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당봉은 우리나라 10대사찰 중 하나인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 정상의 이름이 왜 고당봉이며, 그 이름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금정산의 주봉 이름이 여러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쓰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당봉의 이름은 지금까지 무려 7가지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씌어져 왔다. 1740년 편찬된 《동래부지》에 나오는 지도에는 '고암(姑岩)'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마다 그 이름 을 고암(姑岩), 고당봉(姑堂峰), 고담봉(高潭峰), 고당봉(高壇峰), 고당봉(高堂峰), 고당봉 (姑黨峰), 고당봉(高幢峰)이라 하여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당봉의 정확한 명칭을 찾기 위해 금정구청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 원회'를 구성하여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에게 의뢰하여 그 이름 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도 의견이 여러가지 나왔으나, 토론과 검정을 거쳐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高 幢峰)'의 두 가지 의견이 나왔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우리 나라는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 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도 할미신이므로 할미 고(姑), 집 당(堂)의 고당봉(姑堂峰)이 옳다"는 丁仲煥博士(전 동아대교수)의 주장이 있었다.
또한 이에 맞선 朱永澤씨(향토사학자)의 주장도 그 타당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는 금정산 8경에 '고당귀운(高幢歸雲)'이 있는 사실 등을 근거로 금정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의상 대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高幢峰)으로 명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당봉이란 이름이 있 기에 그 아래 범어사를 창건하게 되었음을 '고당(高幢) 주령은 一山의 靈을 진하여 諸佛의 도장을 스스로 지었으며····' 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기도 하였다. 또 다른 근거로는 ≪범어 사 창건사적≫에 의상대사가 대왕과 함께 금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 7日 7夜를 독경한 곳이 바로 금정산 고당봉이며,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 다는 뜻을 보더라도 '고당봉(高幢峰)이라는 명칭이 옳다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1902년 발간된 ≪궤범어사서기궤유전≫ 산령축에 의하면,
"지금부터 40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 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 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어느날 스님께서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姑母靈神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지켜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이에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번의 제사를 지내니 아주 번 창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고당의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할미당집이다. 이러한 영험을 알 고 전국 무당과 보살들이 밤낮 기도를 올리는 거점으로 사람들에 의해 영험한 금정산의 정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고당이 고당봉으로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정중환 박사는 우리 고유의 샤마니즘의 민속신앙속에서‘고당봉(姑堂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신라·고려시대의 불교는 호국의 뜻이 더 위에 있음을 지적, 범어사도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설화가 전해오는 것과 같이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호국정신의 발로였음을 지적하였다. 금정구청에서는 이러한 토론과 격론을 거쳐 대부분의 역사(민속)학자 및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공식적으로 고당봉 정상에는 고당봉(姑堂 峰)으로 확정되어 표석비를 세웠다.
●계명봉
계명봉은 금정산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어사의 맞은편 동쪽으로 뾰족하게 돌출해 있는 봉우리의 높이는 601.5m로 불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이 봉 우리가 독립된 산으로서 계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이 봉우리는 금정산의 지맥이 장 군봉에서 동남쪽으로 급격히 쏟아지다가 범어사 부근에서 다시 불끈 치솟는 다소 독특한 형세를 하고 있어 범어사의 앞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계명봉에는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계명암(鷄鳴庵)이 있고, 이 암자에는 범어 3기의 하나인 자웅석계(雌雄石鷄)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형상이 수탉의 형상만 남아 있을 뿐 암탉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또한 계명봉에는 금정 8경의 하나인 계명추월(鷄明秋月)로도 유명하다. 계명봉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역사가 오래된 계명봉수대(鷄鳴烽遂臺)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약간의 석축과 불을 피울 수 있었던 터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약간 낮은 지대지만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먼 곳까지 전망할 수 있다.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는지를 일반인도 금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보아 鷄鳴이란 이름이 금정산의 원명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기도 하다. 鷄鳴이라는 명칭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즉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으로 이것은 밤기도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에 정진을 하 던 납자(衲子)들이 새벽 2시쯤이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던 그때 맑은 하늘 날씨에 총총한 별을 보고 가늠했지만 흐린날이 되면 하늘에서 닭울음소리가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와 예불시간을 알려 주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계명봉(鷄 鳴峰)이라 했다고 한다.
●상계봉
금정산의 주봉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은 제2망루에서 서쪽방향으로 한참을 올 라가면 제1망루 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상계봉이다. 이 봉우리는 638m의 금정산 남부를 대 표하는 봉우리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부산의 산악운동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의 직벽과 기기묘묘한 거대한 암석들로 이루어진 상계봉은 산악미의 극치를 이루면서, 부산 산악인들에게 최초의 기술적인 암반 등반을 시도한 곳으로 전체가 바위산처럼 보이며, 이곳에는 병풍바위, 콩동바위, 영감바위, 할멈바위 등으로 불리는 기암들이 서로 자태를 다투기라도 하듯이 서 있다. 이들 바위가 빚어놓고 있는 그 형상이 자연의 신비로움이자 금정산의 또 다른 매력으로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다.
상계봉(上鷄峰)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에도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산정 형상이 마치 닭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상계봉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일설로는 이 부근 의 봉우리중 가장 높이 있다고 하여 새벽이 다른 곳보다 빨리 온다는 데서 '닭 계(鷄)'자를 붙였다고 한다. 상계봉은 그 형상의 기묘함이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고당봉 주변과 같이 오랜 세월 무속신앙의 본거지로서 이 암봉의 주위에는 무속신앙 경배자들이 몰려들고 있고, 토굴 생활을 하면서 도를 닦거나 장기간 기도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상계봉 직벽 아래에는 한때 암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 는 지난 1960년대까지 암자를 지어 놓고 한 남자가 기거하면서 등산객들에게 호의를 베풀 기도 하였다. 상계봉 암벽 아래에는 베틀굴로 불리는 암굴이 있는데 넓이가 10평 가량의 큰 굴과 3평 정도의 작은 굴이 있어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금정봉(=금용산,쇠미산)
금정산맥중에서 동래구에 소재하고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산으로서 해발 408m이다. 태백산맥의 말단인 포항구조분지에서 남서방향으로 진로를 바꿔 달리다가 금정산에서 줄기가 갈라져 한 쪽은 백양산, 구덕산, 다대포 몰운대까지 이어진다. 또 한쪽은 이곳 금정봉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뻗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금정봉은 바다를 향해 있는 쪽은 매우 가파르고 금정산쪽으로는 능선이 곱게 뻗어있다. 금정봉에 대한 옛 기록을《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보면, "금용산은 동래부 서쪽 5리에 있 다"라고 했다. 금용산의 "金"자는 신라에서『쇠』라 훈차(訓借)하여 많이 쓰여진 것으로 "金川, 金惱"는 다같이『쇠내』로 읽으며,『금정』을 『쇠잣』으로 읽는 것 따위가 모두 그런 유례인 것이다.『용』자는 솟는다는 뜻이나 『솥』으로 읽어 마땅하다. 新羅古歌『 균여전미찬여래가(均如傳彌讚如來歌)』에『일념악중용출거량(一念惡中涌出去良)』이란 구절은『일념악해솟나가라』로 읽지만 ≪계림유사≫에 보면『은왈한세』라 했다.
즉, 漢은 백색이며 歲는『쇠』를 말한 것이며『심일급흔(深日及欣)』이라 했고 또 박인을 朴紗賢이라 기록했을 뿐 아니라, 吉語에『屈自』는 大城의 뜻이며 『莫阿』는 마을의 뜻 이 된다. 신라대의 우리 말에 대한 한자 빌림은 상상외로 황당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이『쇠솥이뫼』의 관계로 고려 의종조와 조선초기에 들어『富山浦』라 기록했지만『富』 자는『釜』와 동음인데다가 '訓'도 거의 같은데서 오기한 것에 불과하며 이런 예는 그 시 대에는 허다했던 것이다. 이 금용산을 일러 '쇠미산'이라 호칭하는데 그 이유는『쇠솥이뫼 』가『쇠뫼』로『쇠모』가 다시『쇠미』로 와전된 것이다. 쇠미산 산정을 金井峰이라고 도 불리는데 산정상 바로 밑에는 넓이가 80여 평이나 되는 특이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덕석바위'라고 부르며 이 위 아래에는 약 25m의 동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여인들이 피난해서 군포를 짜서 전장에 나가 있는 낭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 동굴은 '베틀굴'이라고 불려 오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시 주민들이 왜군이 올 때마다 피 신한 곳이며 굴입구에 항상 거미줄을 쳐주었기 때문에 왜군들도 속았다고 해서 그 뒤로부 터 이 산을 '생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옛날 이산에 쇠물〔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쇠미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장군봉
금정산에서 가장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군봉이다. 해발 727m인 이 장군봉은 양산군 외송마을에서 은동굴을 거쳐 고당봉이나 범어사로 산행을 할 때 반드시 거쳐오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장군봉은 고당봉 북쪽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산시내에서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장군봉은 주변 일대가 억새밭 천국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한여름철의 파란 억새 물결, 그리고 가을의 억새꽃 군무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천여 년 유구한 세월동안 그 푸름을 자랑해 오고 있는 키가 작은 소나무를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러 왔다. 김유신은 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인 '적국이 자주 침범하여 죄없는 백성은 피를 흘리게 되오니 저는 소동이 오나 적을 소탕할 뜻을 품었사오니 천지신명이시어 굽어 살피시사 저에게 힘을 주소'라고 솔바위에서 기도 를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화랑단의 낭도들을 이끌고 낙동강을 굽 어보면서 청소년들의 호연지기와 무예를 연마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등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았다. 이곳엔 장군의 얼이 서려있어 '장군봉'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파리봉
금정산성 제1망루 남쪽에 상계봉이 자리하고 있듯이 제1망루에서 북쪽에는 파리봉이란 또 하나의 준봉이 서있다. 이 파리봉 또한 그 위치가 절묘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금정산성 의 통과지점이면서 산성마을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과 도 같아 봉우리 자체가 망루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금정산성은 고당봉에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금정산의 여 러 봉우리들은 산성의 동쪽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파리봉만은 유독 서쪽에 오직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서있어 색다른 느낌이 앞서는 것이다.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파리봉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산에 세워 놓은 이정표에도 파리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주영택씨는 파리봉에 대하여, "금정산 정기에 계시는 부처님과 그 자취는 그 대로 부산 사람들의 기록이요, 역사다. 부산민중의 마음·바람·서원의 형상화가 불적이다 . 이 불국 정토의 지명도 불명이 되었다. 화엄 천년 고찰 범어사와 딸린 암자, 그리고 옛 이름이 유래되고 있는 지명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특별히 많다. 금정산 주봉인 고당 봉을 비롯하여 원효봉·의상봉·파리봉을 들 수 있으며···· 그는 또 '파리봉'이 곧 원효봉 의상 봉과 함께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말 사전에는 파리가 유리·수정(水晶)이라는 뜻도 있으며, 불교에서 이르는 七寶의 하 나라고 되어 있다. 파리봉은 불교의 칠보 중의 하나인 수정이다. 산정의 바위는 기암괴석 이 수정같이 생겨 아침 햇살을 받으면 영롱한 유리알처럼 빛나는 기적을 이룬다. 수정처럼 빛나는 산정의 바위 생김새가 코끼리가 낙동강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산봉우 리를 佛名으로 파리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사는 산성마을 사람들도 그 이름을 거의 모두 '파리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파리봉으로 이름이 굳 어진 듯한 이 봉우리의 이름을 유일하게 '파류봉'이라고 기술한 책(《항도부산》제7호, 1969)에는, "죽전마을 전방 산봉이 파류봉이며, 별장(別將)이 파군(派軍)하였던 곳이다. 지 금은 망미루(望美樓)누각은 없으나 조각기와가 있으며···"라는 이 짧은 기록에서도 우리들 은 산성마을 앞산에는 지난날 별장을 파군하였던 망미루가 세워져 있었고, 그 산봉우리의 이름은 별장을 파군하였기 때문에 파류봉이라 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佛名인 파리봉으로 보아야 옳을 것으로 보인다.
●원효·의상봉
금정산의 의상봉은 제4망루에서 100m쯤 남쪽으로 가는 원효봉(687m)과의 중간에 있는 봉 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있는 상징적인 의 미의 봉우리이다. 원효와 의상은 A.D 650년 입당구도하러 요동땅에 이르러 한밤중 산속에 서 노숙을 하다가 원효가 문득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 옆에 있던 바가지의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밤에 먹었던 물은 해골에 고인 송장썩은 물임을 알고 구역질을 해된다. 그때 원효는 순간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나 의상은 구도를 위해 입당하게 된다. 이러한 연유에서 인지는 모르지 만 해골바가지 형상을 한 바위가 붙은 봉우리가 원효봉이며,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의상봉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의상봉에는 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하기 전에 시찰을 하던중 명당으로 표시한 곳이라는 의상대가 있다. 원효봉에는 원효암이 있으며, 여기에는 동·서 3층석탑이 있어 원효봉과의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장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 놓는다.
예로부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동녘, 서녘, 밝음, 광명 즉 신선한 아침 풍정의 산봉우리 의 명칭을 '으뜸의 새벽' 원효봉이라 불렀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금정산에서 높은 교화력과 깊은 감화력인 신술로 5만 왜구를 호리병으로 물리친 호국의 주인공이었다. 원효의 본체, 발심, 일미, 부정과 초월, 절대 등 현재적 의미 등을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원효의 위대한 사상을 밝히려는 상징의 이름으로 불리어진 것이리라.
●기타
이 밖에는 미륵봉, 장골봉, 대륙봉 등이 있다. 미륵봉은 금정산성 북쪽에서 0.9㎞ 떨어진 최고 봉인 고당봉에서 제5망루가 있는 남서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미륵사가 있는 봉우리가 있다. 미륵봉은 미륵사 염화전 뒤에있는 바위 모습이 스님이 좌선하는 상이고 도솔천에 올라가 중생을 천도하기 위해 그 위에 서 있는 두 체의 바위모습이 흡사 미륵존불(彌勒尊 佛)과 같다 하여 미륵사라 하고 그 뒤 봉우리를 '미륵봉'이라 이름하였다. 장골봉은 금정산 성의 고당봉에서 서남쪽으로 5㎞쯤 내려가면 멀리는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온 다. 오른쪽에 성벽과 나란히 내려가는 숲속의 길은 한이 없다. 미륵사에서 나오는 길, 또 서쪽으로 금곡·호포로 내려가는 야문이 2개소가 있다. 왼쪽으로 임야를 이룬 제2금샘을 지 나면 門里재가 나온다. 여기서 산 능선으로 따라가면 장골봉에 이른다. 이 봉우리는 골이 길다 하여 '장골봉'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제6망루가 동해 바다를 보고 제1·4망루에 신호를 막 올릴 석문만 옛날을 말하는 듯 금정산성을 지키고 있다. 대륙 봉은 산성고개와 제2망루사이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일컫는 말이다.
♣내장산
763m 전북 정읍, 순창 복흥면, 전남 장성북하면 [국립공원]
▲누워있는 여인 형상
♣대둔산
879m 전북 완주, 충남 금산, 논산 [도립공원]
▲설경
♣덕유산
1,614m 전북 무주, 장수, 경남 거창, 함양 [국립공원]
▶설경
▶여름
▶가을
▶겨울
♣도봉산
740m 서울 도봉, 경기 의정부, 양주 장흥면
▲선인봉
▲만장봉
▲신선대
▲여성봉
▲자운봉
▲오봉
♣마이산
680m 전북 진안 마령
▲부부마이산 왼쪽 숫마이봉 오른쪽 암마이봉
▲숫마이봉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타포니(바위의 군데군데 포탄을 맞은 것처럼 구멍이 있는 것)
♣무등산
1187m 광주 담양 남면 화순
▲정상
▲규봉암 - 신라고찰
▲원효사
▲입석대
▲증심사
♣민둥산
1119m 강원도 정선
♣발왕산
해발 1459m 평창 환상적 설경
♣백봉산
남양주시 해발 590m
♣백암산 - 울진
100m 울진 온정 영양
♣북한산
837m 서울 도봉 은평 종로 경기 고양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정상 백운대(836m)를 비롯하여 모두 3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 백운대에 서면 사방이 확 트여 전망이 아주 뛰어나다. 동북쪽으로는 산줄기가 서로 통하는 도봉산의 연봉이 이어져 있고, 남쪽은 한강 저 너머 남한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서남쪽으로는 관악산과 인천 앞바다도 맑은 날이면 눈에 들어온다.
백운대 동북쪽에 우뚝 솟은 인수봉은 바위 하나가 하늘로 치솟아 기이한 경관을 이룬다. 동남쪽에 만경봉은 일명 국망봉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산하의 만경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붙여졌다. 만경봉 서남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노적더미로 의심했다는 전설이 있는 노적봉이 우뚝 솟아 함께 절경을 이룬다.
▲북한산 봉우리에 올라서면 첩첩산중 봉우리로 둘러싸여져 있다.
북한산 세 봉우리 북쪽으로 영봉과 상장봉이, 남쪽으로는 석가봉․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 등이 솟아 있다. 문수봉 북서쪽으로 나한봉․나월봉․증취봉(증봉)․용혈봉․용출봉․의상봉 등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영취봉(일명 염초봉)․원효봉 줄기와 대서문의 수구에서 만난다. 승가봉․비봉․향로봉은 문수봉에서 또 하나 서남쪽으로 뻗은 곁줄기에 솟아있다. 그 중 보현봉은 남쪽으로 두 줄기를 뻗어내리고 있다. 남서쪽으로 뻗은 사자능선이 있고, 남동쪽으로는 형제봉이 있는 형제봉능선이 북악으로 이어져 북악의 주맥이 된다.
이들 봉우리가 이루고 있는 능선은 상장봉이 있는 상장능선, 영봉이 있는 영봉능선, 원효봉과 염초봉을 연결하는 원효봉능선, 산성주능선, 백운대에서 북서쪽에 있는 숨은벽능선, 강북구 수유리로 뻗어나간 진달래능선, 도봉산 우이암과 연결하는 우이능선, 정릉으로 연결되는 칼바위능선, 나한봉~나월봉~용혈봉~의상봉을 하나로 잇는 의상봉능선, 보현봉의 사자능선과 형제봉능선, 대성능선, 승가봉~비봉~향로봉~족두리봉(수리봉)을 잇는 비봉능선, 응봉이 있는 응봉능선, 탕춘대가 있는 탕춘대능선 등 15개가 있다.
▲북한산은 도봉산과도 연결되어 큰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각 능선 사이로 흐르는 대표적인 계곡으로는 정릉계곡․구천계곡․소귀천계곡․육모정계곡․효자리계곡․삼천사계곡․세검정계곡․진관사계곡․구기계곡․평창계곡․산성계곡 등이 있다. 이들 북한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중랑천․창릉천․모래내․불광천 등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한다.
북한산에는 서울의 진산인 만큼 유적지와 명소도 많다. 고려시대 이래로 20여개의 절터와 군사시설․북한산성 행궁터와 비석 등이 있다.
▲비봉과 진흥왕 순수비
▲백운대
▲백운대 인수봉과 족두리봉에서 바라 본 비봉능선
▲이수봉
♣불암산
510m 서울 도봉 경기 남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