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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主國防 2023-02/ 02.01(수) 육해공군 기강에 구멍…북한 핵 우려보다 더 심각 - 02.27 “참외 오염시킨다”던 사드 전자파, 기준치의 2600분의 1

상림은내고향 2023. 2. 27. 18:45

自主國防 2023-02/

02.01(수) 육해공군 기강에 구멍…북한 핵 우려보다 더 심각

전남함 고장 허위 보고, 상관 이취임식 ‘눈도장’

핵우산 강화 급하지만 우리 군 기강부터 잡아야

 

육군과 공군에 이어 해군까지 군 기강의 붕괴 현상이 심각하다. 북한 무인기 도발에 구멍 뚫린 육군(1군단·수도방위사령부·지상작전사령부)과 공군(공군작전사령부)에 이어 이번엔 해군에서 황당한 군 기강 해이 사례가 폭로됐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우리 군이 국민을 안심시켜 주지는 못할망정 불안감을 키우는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말문이 막힌다.

 

이번에 드러난 기강 해이 사례는 바다에서 발생했다. 남방 해역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1500t급 해군 호위함인 전남함 함장(중령)과 실무자 4명은 지난해 6월 군함 장비가 고장났다며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다. 가까운 제주기지로 입항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고장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전남함이 제주기지에 입항하고 3시간여 뒤 함장은 직속상관의 이취임식에 참석한 혐의가 포착돼 조사를 받고 있다. 함장이 직속상관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고장났다는 허위 공문을 보내고 군함을 자가용 이용하듯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혐의로 조사 중이라니 어이가 없다. 전남함이 현장을 이탈하면서 대기 중이던 다른 함정이 경비 임무에 투입됐다지만, 만에 하나 북한의 도발이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다.

 

FF-957 전남함이 어떤 군함인가. 1988년 취역한 전남함은 해군 2함대 소속으로 1999년 제1 연평해전과 2009년 대청해전에 참전해 승리했다. 2018년 해군 3함대로 배속돼 남방 해역을 지켜 오다 지난해 12월 퇴역했다. 빛나는 전남함의 전통을 문제의 함장이 퇴색시켰다면 그보다 더 큰 불명예가 없을 것이다.

 

지난해 6월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정권 교체기에 북한의 국지 도발 우려가 있던 시점에 바다의 최일선에서 이런 군기 문란이 벌어졌다니 엄중한 문책이 뒤따라야 한다. 얼마 전 김승겸 합참의장은 전군 주요 지휘관들에게 “장군은 폼 잡는 자리가 아니다”고 질타했다. 군 서열 1위로서 지난 5년 군 기강이 이 지경이 된 데 대해 책임이 작지 않을 텐데 부하들 호통으로만 끝낼 일인지 모를 일이다.

 

어제 한·미 국방부 장관 회담이 열렸다. 6·25전쟁 정전체제 70주년,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열린 회담이라 더 주목받았다. 북한의 도발 시 ‘찢어진 핵우산’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우리 국민의 76.6%가 독자 핵무장에 동의한다는 여론조사(최종현학술원)가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이종섭 국방장관은 미군의 확장 억지 실행력 강화 방안을 로이드 오스틴 장관에게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찢어진 핵우산’ 가능성을 걱정하기 전에 우리 육해공군 현장의 무너진 기강을 다잡고 사기를 진작하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해 보인다.

중앙일보 사설

 

02.01 [단독] "해외서 北공작원 만났다"…전북민중행동 대표 檢기소

▲2020년 4월 15일 전북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전북민중행동이 주관하는 세월호 8주기 추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 전북민중행동 하연호 공동상임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달 20일 불구속 기소됐다. 연합뉴스

 

전주지검, 하연호 전북민중행동 대표 기소

수년간 해외에서 북측 인사들과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아 온 전북 지역 시민단체 원로가 재판에 넘겨졌다.

 

전주지검은 1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회합·통신 등)로 전북민중행동 하연호(70) 공동상임대표를 지난달 20일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위원장 등을 지낸 하 대표는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등과 베트남 하노이와 중국 북경 등에서 회합(여럿이 모이는 일)하고, 회합 일정 조율 등 보고를 위해 e메일을 이용한 기타 통신으로 북측과 연락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가보안법 8조에 따르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황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한 자는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다.

 

서울경찰청은 국가정보원 수사 자료를 넘겨받아 지난해 12월 28일 하 대표를 전주지검에 송치했다. 하 대표는 줄곧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은 관련 증거를 바탕으로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시민단체 "정권 위기 모면용" 반발…檢 "탄압과 무관"

앞서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해 11월 9일 하 대표 자택·차량·휴대전화 등을 압수수색했다. 같은 날 제주·경남 등에서 진보·통일 인사 7명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좌파 성향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이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기획 수사를 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전북민중행동은 지난해 11월 28일 하 대표 출석 조사를 앞두고 국정원 전북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는 전형적인 정권 위기 모면용 시민사회활동가 공안 수사"라며 "입만 열면 자유를 외치면서 정작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현 정권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전주지검 관계자는 "검찰은 국정원 자료를 받아 사실관계 확인 후 법과 원칙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을 뿐 탄압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02-02 ‘간첩 활개’ 누구 책임인가

정충신 정치부 선임기자

21세기 초일류국가로 진전하는 대한민국에 새해 벽두부터 연일 간첩단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사방에 간첩이 득시글거리는 취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국회, 정당, 노동계, 시민사회, 종교계 등 각계각층 가리지 않고 간첩들이 독버섯처럼 암약하는 대한민국 현주소에 ‘북한과 체제 경쟁은 끝났다’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 보좌관이 현직에 있을 당시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회합했다는 전직 국가정보원장 증언도 나왔다. 민노총 핵심 간부까지 해외로 나가 대남공작원 돈을 받고 남대문에서 환전한 사실이 적발됐다. 제2·제3의 간첩망과 거미줄 하부망을 고려하면 최근 적발된 간첩망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지난달 31일 창원에 거점을 둔 전국 규모 ‘창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자주통일민중전위(자통)’ 관계자 4명이 구속됐다. ‘자통’ 조직원 4명은 2016∼2019년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북한 ‘김명성 공작조’와 접선·회합한 정황이 포착됐다. 문재인 정부 기간 북한 눈치 보느라 제대로 수사도 못한 간첩단 사건에 이어 정권이 바뀌고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면서 베일에 가렸던 전국망 간첩단들이 무수히 드러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제주간첩단 총책 역시 2017년 캄보디아에서 김명성과 접선 후 지하조직 ‘ㅎㄱㅎ’을 결성했다. ‘민노총 침투 간첩단’ 역시 총책격인 민노총 조직국장 등 전·현직 민노총 간부 4명이 2016∼2020년 10회에 걸쳐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에서 ‘리광진 공작조’와 접선했다. 조직국장은 북한 공작금 수수 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목사와 지난해 말 9차례 통화, 문자메시지로 접촉했다고 한다.

최근 간첩단 공통점은, ‘직접 침투’ 대신 제3국 ‘우회침투’ 방식을 쓴다. 간첩공작부서 문화교류국 소속인 김명성·리광진 공작조 모두 중국·동남아에 거점을 마련하고 포섭 인사들을 해외로 소환해 충성 서약식과 간첩교육을 해오고 있다. 문화교류국은 포섭한 종북 세력 핵심 인사를 대남 혁명 전위대로 키워 반정부·반미·반보수 투쟁 등 한국 사회 교란을 획책하고 있다. 2021년 적발된 청주간첩단, 2015년 북 연계 목사 지하망을 비롯해 최근 드러난 간첩망은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북한 공작조와 접선·회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동남아를 선호한 것은, 북한 공관이 상주해 비상시 지원·협조가 용이하고 관광객으로 위장 출국하기 편하며, 북한 복귀가 쉽기 때문이다. 청주간첩단 혐의자들은 구속 기소됐으나 재판 지연 전술 등으로 구속 기간 만료와 보석으로 모두 풀려나 거리를 당당히 활보하고 있다.

대공전문가인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내년부터 대공수사권을 단독 행사하는 경찰에 의존하는 것은 북한 간첩공작에 비단길을 깔아주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경찰은 해외 연계 간첩 수사 역량이 열악한데 해외 대공망 없이 간첩 검거는 불가능해져 대한민국은 ‘간첩천국’이 될 판이다. 북한 핵·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간첩 암세포들이다. ‘간첩과의 전쟁’을 위해 문 정부 기간 약화된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 등의 대공수사권 복원이 시급하다.

문화일보

 
 

월간조선 02월 호

한국인의 戰後 70년 -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한국인은 빚을 다 갚았다! 김정은·문재인·이재명 세력만 정리하면 자유통일로 가는 문이 열린다.

⊙ 한국인은 南侵抗戰과 서울올림픽으로 공산제국을 무너뜨리고 자유세계를 구했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세 악당은 한국전에서 한국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나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다
⊙ 북한 공무원 출신으로 흥남철수 때 월남한 문재인의 아버지,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 세계시민으로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를 실천한 1950년의 미국인들은 ‘가장 위대한 세대’였다
⊙ “미국이 한국에서 버텨낸 덕분에 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빌 클린턴)
⊙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美 국방부 刊 《전쟁의 시련》)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협정 조인식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의 비겁한 기습남침으로 국토가 난장판이 되고 3년 1개월간 피 터지게 싸운 결과는 거의 원위치로의 복귀였다. 대통령은 다 이긴 전쟁을 미국이 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휴전협정 조인식을 보도한 1953년 7월 29일 자 《조선일보》의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오고야 만 휴전의 날. 통일쟁취는 이제부터’였다. 판문점에 특파되었던 최병우(崔秉宇) 기자는 그 뒤 《한국일보》로 옮겨 대만해협 위기를 취재하던 중 타고 있던 함정이 침몰해 순직했다.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하여도 약 백 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이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27일 상오 10시 정각 동편 입구로부터 유엔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편 입구로부터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南日)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目禮)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終幕)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중략)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疆土)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自答)하였다. (중략) 관례적인 합동기념 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지난 70년간 우리는 빚을 다 갚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식. 이후 70년간의 역사는 대한민국이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올해는 1953년 한국전 휴전으로부터 7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미국 등 유엔 회원국들과 손잡고, 스탈린·마오쩌둥(毛澤東)·김일성 세 악당(惡黨)의 침략과 맞서 싸운 한국전은 무승부(無勝負)로 끝나는 듯했지만 그해 7월 27일부터 새로운 형태의 체제경쟁이 시작되었고 이기고 있다.

우리가 한미(韓美) 양국의 최고사령관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의 영도하에 세계시민으로서 싸운 덕분에 자유세계가 냉전(冷戰)에서 최종 승리했다. 우리의 정의로운 항전(抗戰)으로 대만이 살았고, 일본이 경제부흥했으며, 서독은 재무장하고, NATO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미국은 군사비를 4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경쟁을 시작했고, 한국은 폐허 위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남침 40년 뒤 소련(동구) 공산제국은 군비경쟁으로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고 주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니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핵무기를 껴안은 채 무너졌다.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우리가 주최한 88서울올림픽이었다. 소련과 동독이 메달 수에서 1, 2등을 하고 선전매체들이 경기뿐 아니라 한국의 발전상을 열광적으로 중계방송을 한 것이 오히려 주민들에게 “우리는 뭐냐?”는 문제의식을 심어 1989년의 공산권 대붕괴로 이어졌다. 우리는 사생결단의 저항과 평화의 올림픽 주최로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자유세계를 구했다. 아시아에서 공산당과 싸워 자유를 지킨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괴물과 싸우되 괴물을 닮지 않았다

지난 70년 한국인의 가장 위대한 결단은 괴물과 싸우되 괴물을 닮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희생시키지 않고 키우면서 공산주의와 싸웠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재임 18년간 수많은 폭력 시위에 직면했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총 맞아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그런 점에서 진짜 노벨평화상감이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

미국의 한 매체는 연초 한국이 ‘강력한 나라 랭킹’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6위가 되었다고 했다. 인구 5000만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큰 나라 중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한국·이탈리아뿐이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은, “아무에게도 악(惡)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善)한 일을 도모하라.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는데 한국인이 걸어온 길이 바로 이 가르침대로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건국기념 연설에서 “종국에 가서는 선(善)이 악(惡)을 이긴다고 믿고 더디지만 민주주의를 밀고 나가야 합니다”라고 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 때도 언론검열을 폐지했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선거를 진행했으며 특히 직선제 개헌을 했다. 한국인은 직선제 쟁취를 말하면서 최초의 직선 대통령을 독재자로 몰았다. 한국전은 세계사적 관점에선 자유를 지켜낸 정의로운 전쟁으로 평가받지만 한반도에서만은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작금의 국제정세와 나라의 분위기는 올해 자유통일의 문이 열릴 것이란 예감을 갖게 한다. 피, 땀, 눈물로 써온 70여 년의 한국 현대사는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기억, 기록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착하게 살아왔다. 올해 한국인은 세계 앞에서 당당해져야 한다.


“그냥 상식을 따랐을 뿐”(앨먼드)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앨먼드 장군(맨 오른쪽). 맥아더의 참모장을 거쳐 10군단장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했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단결하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교(邪敎) 집단인 국제 공산당 세력에 승리하도록 만든 1950년의 위대한 저항과 1988년의 위대한 평화를 관통하고 있는 가치관은 세계시민 정신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 명문(銘文)은, 구호가 아니라 연(延)인원 180만 명의 참전, 5만4000명의 전사, 10만 명 부상으로 실천되었다.

아무런 영토적 이해관계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전쟁에 이런 대규모 병력을 보낸 일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이는 한국전 기간 한미 두 나라 지도층의 수준이 최고의 진정한 엘리트였다는 점을 실증(實證)한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맥아더, 마셜, 애치슨, 덜레스, 브레들리, 리지웨이, 워커, 앨먼드, 이승만, 조병옥, 백선엽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한민족뿐 아니라 세계의 행운이었다. 두 나라의 가장 위대한 세대가 만난 것이다.

에드워드 앨먼드 미 10군단장은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의 지휘관임에도 맥아더의 위광(威光)에 눌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흥남철수작전 때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3·7사단 및 한국군 1군단(3사단, 수도사단)을 지휘했다. 총병력 10만 명.

당시 나이 58세, 역전의 용사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소령으로 프랑스 전선에 참전, 부상당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최초의 흑인 사단인 제92 보병사단장으로서 3년간 이탈리아 전선에서 고전(苦戰)했다. 전후(戰後) 맥아더 원수에게 발탁되어 일본 점령군, 즉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10군단 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 지휘관이 되었고 서울을 탈환한 후 원산에 상륙, 북진 중 중공군의 역습을 받았었다.

그는 철수 후 전열을 재정비, 1951년 중공군 공세에 대한 반격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해 2월 중장으로 승진했고, 7월 미 육군 전쟁대학(워 칼리지)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에 전역했고, 1979년 86세로 사망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誤判)과 무리한 공격명령 등에 대한 비판도 받는다. 워커 8군 사령관과의 협조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는 흥남철수와 관련해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피란민들은) 공산주의가 싫어 자발적으로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부두에 몰려와서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냥 상식을 따랐을 뿐이다.”

후퇴하는 군대가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전쟁 역사상 유례가 드문 작전을 펼친 사람이 82세 때 외손자인 토머스 퍼거슨 예비역 대령에게 남긴 말이다. 1943년에 태어난 퍼거슨 대령은 외할아버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퍼거슨의 아버지, 즉 앨먼드 장군의 사위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전사(戰死)했다. 앨먼드 장군의 외아들도 장교였는데 1945년 3월 종전 두 달 전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남편을 잃은 앨먼드 장군의 딸은 아기 퍼거슨을 데리고 아버지가 극동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도쿄로 가서 함께 살다가 남편의 친구와 재혼했다. 유일한 아들과 사위를 전장에서 다 잃은 그런 사람이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북한 주민들을 살린 것이다.


문재인의 背恩忘德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좌익적 역사관을 드러냈다. 사진=TV조선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의 부모는, 앨먼드 장군 덕분에 흥남철수선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와 미래의 대통령을 낳았다. 이 부모와 자식들은 평생 미군에 감사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런 문재인은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고마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할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이 된 직후인 2017년 가을 유엔총회 참석이었다. 여기서 그는 은인(恩人)들에게 침을 뱉었다. 용서할 수 없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반역적 연설을 했지만 한국에선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이게 더 문제다).

유엔군 파병은 유엔 출범 이후 최초였고 지금까지도 최대 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유엔총회장에서 문재인은 한국전의 본질인 김일성의 남침을 덮고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인 내전론(內戰論)을 피력했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란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를 찾아’ 미군 철수선을 탔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중공군과 북한 정권의 책임인데 이를 ‘전쟁’ 탓으로 돌렸다. 그가 말하는 ‘국제전’이 ‘내전’과 함께 쓰일 때는 ‘유엔군이 한민족의 내전에 개입, 국제전으로 확대시켰다’는 뜻을 품는다.

문재인의 좌익적 역사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일성의 남침을 은폐하기 위하여 전쟁의 원인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아니라 ‘냉전구조’에 전가(轉嫁)한 것이다.

<세계적 냉전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후략)>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그 자리에서 유엔군의 도움에 감사하고 헌법정신에 따라 자유통일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했어야 하는데, 그는 침략자 북한을 비호하더니 통일 포기를 선언한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물론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위반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제66조는 대통령의 책무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 및 헌법수호,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규정하였다. 대통령에게 인위적 통일을 명령한 것이다.


문재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문재인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북한노동당 정권에 복무한 관료였다고 한다. 흥남시 농업계장과 과장을 지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의 엘리트였던 그가 부인과 딸을 데리고 미군 철수선을 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을 은인(恩人)으로 여기고 공짜로 얻은 자유를 소중히 활용, 성공적 삶을 이어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않았다. 북한 엘리트로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경우로 보인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문재인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그의 회고록이나 대담록에 편린(片鱗)이 드러나 있다.

“말이 없으셨던 아버진데, 세상이나 시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주 어릴 때 한일회담에 대해 반대하시던 말씀, 그 이후에 자유당 독재나 박정희 시절 독재와 민정이양 약속 위반에 대한 비판들, 그런 말씀들이었어요.”《대한민국이 묻는다》(문재인, 2017)

아버지가 비판해야 할 첫째 대상은 김일성일 텐데 이승만·박정희 비판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한일회담 반대는 한·미·일 동맹의 정상적인 작동을 반대하는 것으로 본질이 반미적(反美的)이다.

“이웃집에 대학생이 있었는데, 한일회담 때 데모도 하고 그랬던 형이었어요. 그 형이 한 번씩 제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형한테 왜 우리가 한일회담을 반대해야 하는지, 주욱 설명해주기도 했죠.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이 왜 잘못됐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요.”《대한민국이 묻는다》

아버지는 대학생에게 완전히 틀린 정보를 심어준 것이다. 한일국교 정상화도, 경제개발도 성공했는데 학생에게 이를 반대하라고 선동한 셈이다. 김일성 세상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박정희 근대화를 지지했는데 그는 참 특이하다.

“(아버지가)… 드물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사회의식이 깊은 분이었다. 한일회담 때 이웃 대학생에게 왜 한일회담에 반대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는 농촌을 살리는 중농(重農)주의적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데, 박정희 정권이 거꾸로 저곡가로 농촌을 죽이는 정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게 어린 내게 강하게 와닿았다.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사상계》 잡지를 때때로 읽기도 하셨는데, 그 시절 주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문재인의 운명》(문재인, 2022)
 

 

농촌을 살린 박정희

박정희가 좁은 국토에서 수출입국을 위한 공업화 정책을 펴지 않고 중농 정책을 추진했다면 오늘의 번영이 있었을까? 박정희는 농촌 출신으로서 한시도 농민들의 고통을 잊은 적이 없다. 그리하여 농촌의 가난을 없앤 지도자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인물인데, 북한에서 농업과장을 했다는 사람이 그런 위인을, 농촌 죽이는 정치인으로 가르쳤으니 이때부터 문재인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잘사는 농민들이 이 대목을 읽으면 실소(失笑)할 것이다. 저곡가 정책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유지되었는데 농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물가상승과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인을 줄여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박정희는 농민소득 향상을 통해 저곡가로 손해 본 것의 몇 배를 보상, 가난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곡가 정책에만 집착, 박정희를 비판했다는데 북한 농업을 망치고 ‘이밥에 고깃국’ 타령만 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없었단 말인가?

한국은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켜 본격적인 산업화에 착수하기 전엔 국민의 과반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사실상 농업국가였다.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ha(헥타르·100아르. 1아르는 100㎡)당 쌀 수확량이다.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日帝) 시대가 끝나는 시기까지 한국은 ha당 쌀 수확량이 1.14t에서 1.63t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 일본은 면적당 쌀 수확량이 늘 한국의 두 배가량이었다.

한국의 쌀 수확량이 급증(急增)한 것은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촌진흥 정책을 쓴 1960년대 중반부터이다. 1966~1970년 평균 ha당 쌀 수확량은 3.14t으로 일제 시대의 두 배로 늘었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해당하는 1975~1979년 평균 ha당 쌀 수확량은 4.46t으로 같은 시기 일본의 4.25t을 능가하였다. 이는 한국 농업 사상 최초의 개가(凱歌)였다.

좌익들은 문재인 아버지처럼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화 정책에 집중,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거짓말한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960년대 말의 농촌은 절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고,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79페이지)


탈북자 집안 문재인의 탈북자 간접살인

▲중앙대 로스쿨 제성호 교수.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형식상으론 탈북가족 출신이다. 그런 그가 2019년 말 목숨을 걸고 귀순해온 탈북어민 두 사람을 확인되지 않은 살인 혐의를 적용, 조폭적 방식으로 북송시켜 국제 인권단체의 규탄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유대인을 붙잡아 게슈타포에 넘겨준 것 같은 행위를 한 자가 인권변호사로 불렸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9월 학술지 《통일과 법률》에 실은 <귀순 의사를 표시한 북한 범죄 혐의자의 강제북송에 관한 법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강제북송을 “행정부의 간접살인”으로 규정하고 관련자의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사실상 문재인의 사법처리를 요구한 셈이다.

제 교수는 헌법의 영토·국민 조항에 비춰볼 때 “자의로 북한의 지배력을 벗어난 주민은 국민으로 보호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헌법과 통일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거 서독 연방헌법재판소가 동독 탈출 주민에 대해 ‘모든 독일인은 서독의 보호 영역 안에 들어오면 그가 보호신청 의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권리가 인정된다’고 한 판례를 인용하면서 “귀순의사 표시를 대한민국 국적 인정 요건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해 7월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합신(합동신문)에는 여러 부처와 경험·역량 있는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이런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뒤집힐 수는 없다”며 탈북어민들의 살인 혐의가 입증돼 북송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제 교수는 관계기관 합동 조사 결과에 어떤 법적 증거 능력도 없다면서 조사팀의 자의적 유죄 판단과 이를 근거로 한 북송은 위법하다고 했다. 그는 “합동 조사는 북한에서의 행적을 조사하는 등 행정 절차”일 뿐이라며 “영장주의, 변호인 조력권, 불리한 진술 거부권 사전 고지 등 적법 절차가 준수되지 않는 등 범죄수사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이어 “수사기관이 살인 혐의자들을 수사·기소하고, 법원이 재판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도 (어민들을 강제북송해) 이를 원천 차단한 것은 권력분립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일종의 사법방해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행법상 우리 국민이 북한에 들어가는 행위에 대한 법적 규율은 남북교류협력법상 ‘북한 방문’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점거 지역으로의 ‘탈출’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강제북송된) 탈북어민의 경우 북한 방문 승인 절차를 밟지 않았고, 인도적 송환 때처럼 북한 귀환 의사를 밝히지도 않아 강제북송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며 “관련 당국자들은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의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

사법부가 해야 할 유죄 판단을 행정부가 하고, 북송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국민을 납치 감금하듯 사지(死地)로 보낸 행위는 ‘사법방해’와 ‘간접살인’에 해당한다는 논리이다. 문재인은 2020년엔 해수부 공무원이 북한 수역으로 표류해갔다가 붙들려 사살된 사건에서 김정은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줄여주려는 의도인 듯, 피살된 공무원을 월북자로 조작·발표하도록 했다.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 또는 충직한 부하로서 국익, 국민, 국군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은 주요 연설 때마다 ‘세계시민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강조한다. 정치인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말이다. 이런 가치를 입으로써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던져 행동화하는 일은 별개이다. 예수도 율법의 모든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에 다 들어가 있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1950~1953년 미국의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몸을 던져 이 정신을 구현하였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을 수원까지 밀어낸 절망적 상황에서 매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은 장병들에게 “우리는 왜 싸우는가”라는 글을 훈령 형식으로 내려보낸다. 그는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전쟁의 본질을 요약했는데 성경을 읽는 듯하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 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보는 민주 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타인(他人)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자위(自衛) 행동이었다.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우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도록 할 것인가이다. 일찍이 그 어떤 군 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지금의 미국은 역대 최고의 도덕적 수준에 이른 나라이다”

▲미국 언론인 드류 피어슨.

 

미국의 언론인 드류 피어슨(1897~1969년)은 당대의 대표적 칼럼니스트였다. 1932년부터 1969년까지 ‘메리고라운드(Merry-Go-Round·회전목마)’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고 이를 신문사 등에 판매했다. 정치인과 정부의 부정을 가차 없이 폭로한 반골기자였다. 그는 북한군의 공세로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이 위협을 받고 있던 1950년 7월 17일, 17세 아들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빌려 한국전 참전을 권유하였다.

그는 1950년이 한국전으로 인해 획기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8000마일 떨어진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위험하게 싸우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1950년이라는 해가 한국전쟁이라는 이유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이 전쟁이, 미래의 전쟁을 막고 화합과 평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1950년의 미국은 도덕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른 국가라고 했다.

<우리는 마셜플랜 등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을 줬단다. 나는 미국이,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내린 위대한 가르침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이를 실천적으로 이행하는 수준에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낙관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나는 우리나라가 지금 이 순간 이상주의와 이타(利他)주의, 그리고 힘에서 정점(頂點)에 도달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단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지. 우리는 이런 수준에 도달했지만 그런 덕목을 곧 잃게 될 수도 있어. 위대한 제국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했지. 너무 유약해졌거나, 너무 멍청해졌거나,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힘을 물질주의적인 정복에 사용했고, 무장력에만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몰락했단다.>

그는 또한 이런 미국은 이웃나라들이 자유를 침범당할 때 그 힘을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한 국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신조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상대로 무장을 하고, 그리고 침략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자유세계는 존재할 수 없단다. 특히 너를 비롯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유인의 짐, 즉 세상을 자유롭게 유지해야 할 자유인의 의무야. 이 한국전쟁은 비록 멀고, 힘들며, 반갑지 않은 전쟁이지만 이 세기의 정중앙인 1950년이라는 해에 위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단다. 우리가 국제경찰력과 국제적 권위를 구축해 미래의 모든 전쟁을 막을 수 있도록 한다면 말이지. 너희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니 우리가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던지기도 어려운데 미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180만 명의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보냈다. 이보다 더한 규모의 고귀한 희생은 성경에도 없다.


最惡과 最高의 대결

1950년 남침전쟁을 일으킨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은 역대 최악의 독재자들이었고 그들이 건드린 이승만과 트루먼 등 한국과 미국의 지도층은 역대 최고였다. 악마와 천사의 대결이었다. 이게 승부를 결정지었고 역사를 바꾸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애용하는 ‘세계시민’이란 말을 처음 쓴 정치인은 이승만 대통령이다. 1950년 7월 19일 이승만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이 영문(英文) 편지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맞먹는 명문(名文)이라고 생각한다.

<친애하는 대통령께: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약자(弱者)를 지켜주려고 이 땅에 와서 잔인한 침략자들을 상대로 해방과 자유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생명을 내걸고 싸우고 피 흘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편지를 쓴 그날, 즉 1950년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은 라디오 텔레비전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답장처럼 느껴진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에게도 중요합니다. 공산군의 공격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독립국가를 정복하기 위하여 군사적 침략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침략 행위는 모든 자유국가의 안전에 심각한 위험이 됩니다. 이는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자유국가의 노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정면으로 그런 도발을 하였으므로 우리도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This challenge has been presented squarely. We must meet it squarely).>


오바마·클린턴, “한국전은 우리가 이긴 전쟁”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韓國戰)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행사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하여,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冷戰)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다.

“한국전은 이긴 전쟁입니다.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 명의 한국인은 활력(活力)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遺産)입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우리 동맹국들은 우리가 지난 60년간 지속적으로 한국에서 증명한 대로 미국이 평화·안정·번영의 힘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한국전은 이긴 전쟁이고, 우리의 유산입니다.

다가올 여러 세대 동안 역사는 그 긴 냉전 시대에 자유 진영이 어떻게 뭉쳤으며 어떻게 냉전에서 이겼는가를 회고하면서 한국전이 그 첫 전투였고, 여기서 우리는 자유를 지켜냈고, 자유민들이 굴복하지 않았음을 기록하게 될 것이니 한국전은 승리였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2000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포성(砲聲)이 멈추었을 때 상당수 사람은 한국에 간 우리 군대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38도선에서 시작되어 38도선에서 끝났으니까요. 나는 오늘 감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하여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텨낸 덕분에 냉전(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소련은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얻게 된 것입니다.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10년 전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전은 2차 세계대전만큼 세계를 바꿨다”

왜 미국 정부는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가? 미 국방부 장관실 공간사(公刊史)인 《전쟁의 시련(1950~19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전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할 만하다. 세계를 두 무장(武裝) 진영으로 나눈 점,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막는 데 있어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의 증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장기 주둔, 거대해진 미국의 군산(軍産) 복합체-이런 현상들은 한국전에 의하여 만들어졌거나 강화되었다.

전쟁 기간(1950~1953)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지도국의 역할을 완벽히 떠맡게 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이 북한과 중국의 공격을 사주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은 유럽의 NATO 맹방(盟邦)들을 지키는 데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재고(在庫)에 대응하여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평화시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회원국조차도 NATO를 서류상의 존재로 인식하였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뉴욕타임스》 월남 특파원 시절, 월남과 미국 지도부를 혹독하게 비판하여 반전(反戰) 기자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유작(遺作)이 된 《가장 추운 겨울》의 결론 부분에서 한국의 전후(戰後) 발전에 대하여 최상급의 찬사를 보낸다. 읽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의 칭찬인데 물론 사실과 부합한다. 그는 한국의 발전은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보다 더한 성공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재건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독일, 프랑스 등 이미 산업적 전통의 기반이 있는 나라에 준 것이었다. 한국은 정치적, 문화적, 산업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전란(戰亂)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기에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그는 개화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잠재력을 간파한 점에 주목하였다. 교육에 대한 유교적 존중심, 잘살아 보려는 열망, 제한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 그리고 일본인에 못지않은 근로 윤리. 하지만 이런 잠재력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으로 구현될 수가 없었다. 해방과 전쟁으로 미국이 한반도에 등장함으로써 이 숙명은 깨진다.

한국을 괴롭혔던 주변 국가와 미국은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오히려 이 점이 도움이 되었다고 핼버스탬은 평한다. 미국은 한국 땅에서 기꺼이 자국(自國)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정복자로 온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지도하에서 한국은 처음엔 군사적으로, 다음엔 기술적으로, 그다음엔 산업적으로 근대화되기 시작하다가 민주화까지 이르게 되었다.

핼버스탬은 한국전을 계기로 커진 장교단이 이런 놀라운 속도감으로 전개된, 혁명과 진화가 혼합된 한국형 근대화의 주체 세력이었음을 높게 평가한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한국의 사관학교 교육이, 젊은이들을 모아서 능력 위주로 가르치고, 사회적 제약을 돌파할 수 있는 개혁 세력으로 키워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장교단이 새롭고 현대화된 사회를 만들어낸 요람이었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선 새로운 한국을 이끈 새로운 계급이기도 하였다.

그는 <1960, 70년대 한국의 발전은 역경(逆境)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위대한 교훈을 남긴 경이로운 인간 드라마>라고 표현하였다. 한국 현대사의 발전 속도는 너무나 빨라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까지 퇴장시키고 달려갔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만 박사를 존경하지만 역사가 그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 사태 발전을 지켜본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서울 도심의 年末年始 풍경

2022년 12월 30일 밤 서울 한복판을 걸었다. 청계천, 롯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 서울시청 광장,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경로였다. 화려한 전광판 쇼, 광고탑, 전시물 속을 두 시간 동안 걸었다. 황홀했다. 예년과 다른 것은 평화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정의니 하는 말장난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좌파 냄새가 빠진 연말연시(年末年始)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흥겨웠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정권교체로 국가가 정상화되어가는 시국(時局) 분위기를 반영, 유달리 크리스마스 캐럴이 많이 들리고 백화점 전광판 쇼는 더 화려했고, 명동·광화문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나왔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종북좌익들의 위선적 문화행사가 주는 불편함에서 벗어나니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서울시청 광장의 스케이트장이 붐볐다. 광화문 광장의 코끼리보다 더 큰 토끼도 정겨웠고, 거북선이 노를 젓는 영상은 밤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청계천을 거닐 때마다 감옥에 있는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자택으로 돌아왔으니 홀가분하게 야광(夜光) 산책을 하면서 “역시 세계적 대기업 경영자 출신의 안목은 다르다”고 중얼거렸다.

이게 다 피를 흘리지 않고 선거를 통해서 자유를 되찾은 덕분이다.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옷을 입으면 자유통일로 직진할 것이다.


문재인의 반역과 이재명의 부패를 치면 김정은도 간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이승만의 편지엔 대전략이 숨어 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외부 세력이 훈련시키고 조종하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은 그들의 조국에 충성합니다. 이 전쟁은 남(南)과 북(北)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

한반도의 대결구도를 ‘김일성 세력 vs 한민족’으로 단순화시킨 것인데 국민행동본부의 1월 초 성명서는, 김정은·문재인·이재명을 한민족(韓民族)의 공적(公敵)으로 규정했다.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韓民族) 8000만의 자유를 위협하는 주적(主敵)은 김정은·문재인·이재명 세력이다. 헌법과 국제법에 의거, 이들을 단죄, 한반도 전체를 진정한 반공(反共)자유민주국가로 통일하는 것은 남북한으로 갈려 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명이다.

*김일성주의자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하는 문재인은 집권 5년간 사실상 민족 반역자 김정은의 부하 노릇을 하면서 대한민국·한미동맹·국군·국민들을 해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의 후계자 이재명은 온갖 부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문재인 반역과 이재명 부패를 사법처리하는 것을 막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당적(黨籍)만 있고 국적(國籍)이 없는 패거리이고 헌법 제8조의 정당해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문재인 5년간 탈탈 털렸지만 살아남은 대한민국 세력은 가장 깨끗하고 민주당 기득권 세력은 가장 부패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원수, 행정부 수반, 국군통수권자로서의 막강한 공권력을 공정하게 행사, 문재인 반역과 이재명 부패를 단죄, 김정은의 남한 내 반역기지를 일소하고 자유통일로 가는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법대로만 하면 된다.

*한반도의 3대(大) 위해 조직인 ‘김·문·이(김정은-문재인-이재명) 세력’은 김일성 악령에 영혼을 판, 민족반역의 운명공동체이다. 문재인·이재명 반역 부패 세력을 먼저 사법처리, 김정은을 한민족 사이에서 고립시키면 이들은 한꺼번에 가게 되어 있다. 한반도의 대결 구도를 ‘김·문·이 세력 대(對) 8000만 한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대로만 하면 자유통일도 앞당길 수 있다. 법 앞에선 좌우(左右), 경상도, 전라도가 없고 오로지 ‘법 지키는 사람’과 ‘법 어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법의 힘으로 선량한 국민들은 보호하고, ‘김·문·이 세력’을 업고 법을 짓밟는 자들은 혼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올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세 가지를 요청한다. 홈페이지에 북한노동당 선동문을 6개월째 게시, ‘날 잡아가라’는 식으로 국가보안법에 도전하고 있는 민노총 지도부를 수사하고, 매달 한 번씩 핵미사일 민방위 훈련을 실시, 북핵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지도하라! 오는 8월 15일을 건국 75주년으로 기념하자!

*2023년 올해 국민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도하에 ‘김정은·문재인·이재명 세력’을 제거, 북핵 문제까지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을 향하여 질주하고 싶다. 국제정세도 유리하니 천하대세(天下大勢)가 우리 편이다.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자유통일 만세!>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 김정은·문재인·이재명 세력을 정리해야 진정으로 빚을 다 갚는 것이 된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월간조선 02월 호

특집 | 우크라이나 전쟁 1년, 한국군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나?

허세 대신 실질적 대응력 갖춘 軍으로 바꿔야

⊙ 軍, 5년 동안 무사안일 습성화되어 말만 앞설 뿐 근본적인 변혁 미흡
⊙ 국방부 추진 사업 중에서 북한과 “일전불사”하거나 “북한 정권 종말”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북한, 2020년에 이미 67~116개의 핵무기 보유, 매년 12~18개 생산 가능
⊙ 兵 복무기간 단축 및 봉급 인상으로 우수인력의 장교·부사관 지원 어려워
⊙ “民軍 관계의 핵심은 軍의 직분에 대한 정치의 간섭을 방지하는 것”(새뮤얼 헌팅턴)

朴輝洛
1956년생. 육사(34기) 졸업, 연세대·美 국방대 석사, 경기대 국제정치학 박사 / 국방부 대북정책과장, 국방대학교 교수, 국민대 교수, 국민대 정치대학원장 역임. 예비역 육군 대령, 現 한반도선진화재단 북핵대응연구회장 / 저서 《북핵외통수》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7월 6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사진=뉴시스

 

필자는 교수였지만 그 이전에 육군 대령이었다. 군(軍)의 미흡함을 지적하면 후배들은 반발한다.

“선배님은 잘했느냐?”

우리 때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처럼 말만 앞세우거나 정치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필자도 국방부 대북정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햇볕정책’에 순응하지 못해 보직해임되었고, 그래서 장군으로의 진급도 포기해야 했다. 군은 현 수뇌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계속 발전시켜나가야 할 국민의 군대이다. 선배와 국민의 입장에서 군의 변화를 촉구하고자 한다.


결기의 남발

북한은 2022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하여 남한을 “의심할 바 없는 우리의 명백한 적”이라고 규정한 뒤 ‘2023년도 핵무력 및 국방발전의 변혁적 전략’을 천명하였다. 김정은은 남한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제2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남한 공격용 전술핵무기의 대량 생산을 발표하였다. 특히 그는 “핵무력의 제2의 사명은 분명 방어가 아닌 다른 것”이라고 하여 핵무기의 선제적(先制的) 사용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9월 8일 김정은이 결심만 하면 언제든 핵무기 사용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김정은은 2022년 마지막 날과 2023년 새해 첫날에 저고도로 남한 전역에 대한 핵공격이 가능한 대형 방사포(放射砲) 3발과 1발을 발사함으로써 남한에 경고하였다. 그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하여 남한 쪽으로 향할 경우 한국은 마땅한 방어책이 없다.

그러자 2023년 1일 1일 윤석열 대통령은 군 수뇌부와의 화상통화를 통하여 “일전(一戰)을 불사(不辭)한다는 결기로 적의 어떠한 도발도 확실하게 응징”할 것을 주문했다. 국방부는 “북한이 만일 핵사용을 기도한다면 김정은 정권은 종말에 처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에 묻고자 한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의 일전은 핵전쟁을 의미하는데, 핵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군은 북한 정권을 절멸시킬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북한의 핵위협은 실체가 있지만, 우리 군의 대응 태세는 아직 실체가 없는 말뿐이다. 5년 동안 정부의 눈치만 보면서 아무런 대비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 수뇌부들은 “예의주시” “단호한 대응” “철저한 응징”과 같은 용감한 수사(修辭)로 당시 상황을 모면하는 데 치중했었고, 이 행태는 아직도 바뀌고 있지 않다.

군대의 가장 근본적 임무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사나 과장된 결기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북한의 ‘7일 전쟁’ 개념

북핵 위협은 너무나 심각해졌다.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아무도 북의 핵 규모를 제대로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한국의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의 랜드연구소가 공동으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은 2020년에 이미 67~116개의 핵무기를 보유했고, 매년 12~18개를 생산할 수 있으며, 2027년에는 151~242개까지 증산할 것이라고 한다. 북한은 미국 본토 공격이 가능한 화성-15·16·17 등의 대륙간탄도탄(ICBM)과 북극성-3·4·5 등의 잠수함발사탄도탄(SLBM)을 만들었고, 이것들을 계속 개량해나가고 있다.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다.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고자 약속된 핵확장억제(nuclear extended deterrence)-다른 말로는 핵우산(nuclear umbrella)- 개념에 근거하여 핵보복을 시도하면,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수 개 도시를 핵무기로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 자신의 초토화와 미국 뉴욕의 초토화를 바꾸자고 위협할 경우 잃을 것이 많은 미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이것이 김정은이 말하는 ‘제1의 사명’이다.

북한은 미국의 핵우산만 무력화(無力化)되면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결합하여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한국을 금방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7일 전쟁’의 개념이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을 위하여 북한은 미사일방어망을 회피하면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KN-23·24·25와 저고도 대형 방사포 등을 개발하였다. 김정은은 지난해 9~10월 대남 핵공격 임무를 부여받은 미사일부대의 훈련을 직접 지도했고, 그중 한 발을 울릉도 코앞에 낙하시키기도 했다. 12월에는 무인기를 보내어 서울과 서부 지역 상공을 정찰하기도 했다.


强軍을 순한 양으로 만든 軍 수뇌부

▲문재인 정부 시절 송영무 국방장관이 9·19군사합의문을 들고 있다. 사진=조선DB

 

북핵 위협보다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군의 미흡한 대비 태세이다. 아직도 2013년 수립된 ‘한국형 3축(軸) 체계’, 즉 선제타격(Kill Chain), 미사일방어(KAMD), 대량 응징보복(KMPR)만을 되뇔 뿐 강화된 북핵 위협에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복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설명해보라. 우리 군의 북핵 대응 전략은 무엇인가? ‘한미연합’이라는 말은 미군에만 의존하겠다는 것 아닌가? 북한의 KN-23·24·25, 대형 방사포를 무엇으로 대응한다는 것인가? ‘참수(斬首)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하는데, 김정은의 동선(動線)을 실시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이 있는가? 핵전쟁 상황하에서도 전투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전 정부 동안 군은 북한에 대한 굴종과 외교적 비핵화(非核化)를 주창하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북핵에 대한 대비를 미뤄왔다. 북핵을 북핵이라고 하지 못하고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대량살상무기)’라고 영어로 불렀다. 북한이 수십 개의 핵무기를 만든 상황임에도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이 “플루토늄 50여 kg… 고농축 우라늄(HEU)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반복하고 있다. 북핵 위협은 미군이 담당하는 양 행동했다.

북핵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군은 정치권의 요구에 순응하여 한미연합사의 해체 또는 무력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전시(戰時) 작전통제권 환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휴전선 근처에서의 군사 활동이나 정찰 활동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내용의 군사합의를 곧 교체될 국방장관이 평양까지 가서 천연덕스럽게 서명하고 왔다. 그 결과 유해 발굴 명분으로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에 1.9km에 걸쳐 12m 폭의 도로까지 개설하여 북한에 접근로를 개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핵 위협 대응에는 별로 기여하지도 못하지만 천문학적인 국방예산을 소모할 경항모와 핵잠수함 건조 사업을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추진하였다.

이전 정부의 군 수뇌부들은 확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정예의 군대라면서 미군도 부러워했던 한국군을 순한 양으로 만들었다. 훈련보다는 병사들의 복지에만 신경을 썼고, 간부들은 군인정신이나 전투의지를 강조하기보다는 부대관리 및 사고예방에만 몰두하였다. ‘선(先)조치 후(後)보고’라는 군대의 원칙이 사라지고, “쏠까요, 말까요?” 물어보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전력을 강화해왔고, 따라서 북핵 수준과 한국군의 대비 태세에는 상당한 격차가 발생하고 말았다.

 

자체 응징보복(KMPR)에 집중해야

다행히 현 정부는 물론이고 현재의 군 수뇌부들은 북핵의 심각성은 물론이고, 국민의 걱정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5년 동안 무사안일(無事安逸)이 습성화된 군대라서 마음과 말만 앞설 뿐이다. 북핵 대응을 중심으로 근본적인 변혁을 추진해야 할 상황이지만, 여전히 점잖게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대통령이 지시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고, 간부들은 사명감이 아닌 ‘진급’이라는 개인적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군의 문제점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첫째, 한국의 명운(命運)을 위협하고 있는 북핵 위협에 대하여 한국군 나름의 북핵 대응 전략과 노력이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한국의 핵무장, 미국 핵무기의 전진배치와 공유, ‘4축 체계+α’와 같은 방안을 제안하고 있으나, 군은 이를 경청하거나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미국의 핵우산만 보장되면 된다면서 미 측으로부터 “적시적이고 조율된 미 전략자산 전개”라는 합의를 도출한 것을 자랑만 할 뿐이다. 군 수뇌부는 “한미연합 대응”만 금과옥조처럼 되뇌고, 미국 항공모함에 올라가서 북한에 경고한다.

북한이 고체연료, 요격 회피기술, 저고도 미사일들을 확보함에 따라서 선제타격과 미사일 방어의 효과가 급격히 저하되었다면, 자체 응징보복(KMPR)에 집중하면서 ‘4축’으로 제안된 사이버전 및 전자전 능력을 강화하는 등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군은 기존의 ‘3축’ 역량 강화 차원에서 F-35 20대 추가 증강이나 미사일 전력 강화에만 치중하고 있다.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에 대한 참수 작전 보장에 필수적인 고성능의 정찰 능력 강화, 첨단 신무기 개발, 사이버전 능력 보강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군 수뇌부가 북핵 대응에 필요한 새로운 지침을 내리기보다 결기만 강조하고 있으니, 실무자들은 관행대로 예산을 편성할 뿐이다. 현재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에서 북한과 “일전불사”하거나 “북한 정권의 종말”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것인가?


핵 상황 전투 준비해야

▲진해 교육사령부에서 훈련 중인 해군 훈련병들. 저출산에 따른 병력자원 확보가 숙제가 되고 있다. 사진=조선DB

 

둘째, 군인들의 전투의지와 사명감도 제대로 강화되고 있지 않다. 얼마 전 북한 무인기 침투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군의 경계 및 대비 태세는 불안하다. 북핵 문제를 활발하게 토론하거나 군사서적을 탐독하는 간부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군사학교에서조차 핵전략을 제대로 학습시키고 있지 않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지만 군의 전투준비 태세는 높아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북한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한국의 전방부대를 조기에 돌파한 후 수도 서울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다. 이후에 협상을 제의하여 시간을 끌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한 사례처럼 형식적인 투표 후 서울을 병합했다고 발표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전방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따라서 한국군의 전방부대 진지들은 핵과 화학무기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보강되어야 하고, 한국군은 핵상황에서도 전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군이 이러한 상황까지 가정하여 대비하고 있는가?

셋째, 북핵 위협 이외에도 군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현 군 수뇌부들이 충분히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예를 들면, 당장 급격한 인구감소와 출산율 저하(2021년 합계출산율 0.81, 2022년의 경우 0.75로 예상)로 50만 명 수준의 한국군 상비 병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 20세 남성 인구는 2025년 23만7000여 명이고, 2041년에는 12만8000여 명 수준으로 감소한다는 예상이다. 병사들의 복무기간을 18개월로 줄이고, 봉급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있는 상황이라 우수인력이 ROTC를 비롯한 장교 및 부사관을 지원하기 어렵다. 군 수뇌부들은 복무기간의 연장을 건의하든가, 예비군제도를 확충하든가 등의 조치를 시급하게 강구해야 하는데 아직 이러한 조치는 없다. 이 외에도 군은 군의 미래지향적 발전방향 정립,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작전술과 전술의 발전, 현대적 기술의 적극적 군사적 활용, 군 경영의 합리화 및 효율화, 권위주의적 군대 문화의 개선, 간부들의 전문성 강화, 병사들의 실전적 훈련 강화 등 이전 정부에서 소홀했던 모든 분야를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현 군 수뇌부들이 이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자지 못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軍 수뇌부, 정치권 눈치 보지 말아야

군 수뇌부들은 말할 것이다. 단기간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자신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전 정부의 적폐 중에서 단기간에 고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현 수뇌부들이 노력을 시작하면 다음 수뇌부들도 그렇게 하여 결국 우리 군은 강군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우선 군 수뇌부부터 국방, 선배, 국민에 대한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국방에 대한 미흡함을 지적받을 경우 변명하는 대신에 잘못이 있으면 인정하고 시정해나가는 자세를 보여라. 선배들이나 민간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고 경청하여 수렴해나가라. 국민들이 불안해하면 안심하라고 말하지만 말고, 그 근원을 살펴 해소시키고자 노력하라. 오로지 강군 육성에 매진하라. 그것을 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보전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유능한 사람의 군 개혁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군 수뇌부가 달라지면 간부들과 병사들도 달라질 것이다. 간부들은 군사학 서적과 교범을 탐독하게 될 것이고, 적과 싸워 이기는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는 데 매진할 것이며, 실전 같은 훈련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병사들도 생활에 대한 불평불만 대신에 전술전기 연마에 노력할 것이고, 특급용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상하 모두가 확고한 군인정신과 임전무퇴의 전투의지로 무장하게 될 것이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이 있을 수 없다.

군 수뇌부들은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민군(民軍) 관계의 핵심은 군의 직분에 대한 정치의 간섭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정치권이 왈가왈부하지 않도록 모든 군간부는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충분한 전문성을 가져야 하고, 그러한 요원들을 영전 및 진급시켜야 한다. 북핵 대응을 위한 최선의 전략 개념, 긴급하게 보강되어야 할 능력들, 그에 따른 무기와 장비 구입의 우선순위에 대한 격렬한 토의를 군의 일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허세 대신에 실질적인 대응력을 구비하는 군으로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


韓美 미사일 방어체계 통합해야

▲경북 성주에 배치된 미군 사드포대. 한미 양국 미사일방어체제 통합이 필요하다. 사진=조선DB

 

군 수뇌부들은 ‘4축+α’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과 능력의 확보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 징후를 발견한 이후 수분 내에 선제타격이 가능하도록 ‘킬 체인’의 시간을 단축하는 결심체계를 효율화해야 한다. L-SAM이나 M-SAM 등 자체 요격미사일을 조기에 개발 및 전력화(戰力化)하면서 한미 양국군의 미사일 방어체계를 통합하고, 필요하다면 사드(THAAD)의 추가 배치도 제안해야 한다. 북한 지도부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정보 역량을 강화하고, 첨단의 참수 작전 무기들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북한의 핵지휘통제체계를 마비시킬 수 있는 사이버 및 전자전 능력을 적극 개발해나가야 한다. 북한 민주화를 위한 지원도 적극 고민해나가야 한다.

미국의 확장억제, 즉 핵우산이 약속대로 이행되도록 한미 양국군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되, 미국의 입장을 전달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항을 ‘고집’하여 구현시킨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과거 선배들은 고집하여 한미동맹조약을 맺었고, 이미 결정된 주한미군 철수도 고집하여 무산시켰으며, 유엔사령부의 해체가 우려되자 고집하여 한미연합사를 창설시켰다. 한국군의 끈기를 미국이 끝내 거절한 사례는 별로 없다.

미 핵우산에 대한 적극적 상의나 공동의 작전계획 수립과 같은 애매한 약속에 의존하는 대신에, 미 핵잠수함을 동해에 상시 배치시키거나, 잠수함 내 핵미사일을 한미 양국이 협의 사용하는 등 실질적인 핵우산 강화책을 고집하여 구현시켜야 한다. 미국의 서태평양상 영토인 괌에 핵폭탄과 중거리미사일을 배치시킨 후 한국의 전폭기가 함께 핵공격 훈련을 하도록 유럽의 나토(NATO)에서 시행되는 핵공유체제를 동북아시아에 이식하도록 ‘고집’해야 한다.


필요하면 복무기간 연장해야

군의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개혁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군인’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바꾼다는 각오로 전반적인 구조, 교리, 훈련, 문화 등을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서 근본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나 ‘국방개혁 4.0’과 같은 미사여구(美辭麗句)나 장기적인 비전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기적인 북핵 위협 대응과 군의 장기적인 발전의 조화 방안을 고민하여, 제한되는 예산, 시간, 관심에 대한 최선의 우선순위를 고민해야 한다.

저출산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매우 근본적인 사항이다. 필요로 하는 튼튼한 병사와 우수한 간부 충원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어떠한 강군 육성 노력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군의 복무기간을 연장해야 할 것이고, 전투 이외 분야에는 예비역이나 민간인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현역 소요를 최소화해야 한다. 상급 및 행정부서의 규모는 줄이는 대신에 전투부대를 보강해야 할 것이다. 지휘관들을 보좌하는 인원을 최소화하고, 불요불급한 부대와 기관은 과감하게 해체시켜야 할 것이다.

 

더욱 근본적인 사항으로서 군 수뇌부들은 장병들의 무형(無形) 전력 또는 정신 전력의 강화에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극단의 전투의지가 없는 군대는 허수아비 군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군 수뇌부부터 국토방위를 위한 확고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고, 모든 간부와 병사들은 확고한 군인정신을 함양해나가야 한다. 모든 작전부대에서는 상시 전투 준비와 ‘선조치 후보고’를 생활화하고, 간부들이 모이면 북핵 대응을 비롯한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도록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군 수뇌부들은 수시로 자문해야 한다. ‘내가 북핵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고. 당연히 모든 장병도 그러해야 한다. 북핵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최후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은 군대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공격은 남북한 모두의 공멸을 자초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군의 역할이 민족사를 통틀어 지금보다 더욱 중요한 시기가 없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헌법 제66조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이라는 책무를 감당해야 하고, 그래서 ‘국군통수권자’의 직위를 보장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서 군대를 적극적으로 통할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군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고, 전문적인 자문을 받아서라도 군대로 하여금 국토방위, 특히 북핵 대응에 철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은 군대의 미흡함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질책하면서 철저한 시정을 지도 및 감독해야 한다. 국방부, 합참, 한미연합사, 야전부대들을 수시로 방문하여 현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지침을 내리고, 건의를 받으면 조치해주어야 한다. 군대가 잘못되면 국군통수권자로서 대통령도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현재는 전시보다 더욱 적극적인 국군통수권자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기일 수 있다.

군의 환골탈태를 위한 더욱 근본적인 요소는 국방에 대한 국민들의 자세이다. 평화만을 주창하면서 국방이나 군대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국민 속에서 강군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민부터 북핵 위협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강군 육성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군의 발전을 적극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평범한 격언을 국민들이 명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강군 육성의 조건은 없다.⊙
 

 

02-06 북핵 맞설 획기적 ‘안보 自强’ 나설 때

박휘락 前 국민대 정치대학원장

북한은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주민, 엄청난 무기와 장비를 동원해 오는 8일 인민군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이전에 과시하던 핵미사일들은 물론이고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공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ICBM은 고체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어디서든 기습 발사가 가능하고,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핵탄두를 탑재해 미사일방어(MD)망을 회피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의 핵전력은 위협적인 수준이다. 미국 랜드연구소와 한국 아산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북한은 2020년에 이미 67∼116개의 핵무기를 보유했고, 매년 12∼18개를 생산하고 있어 2027년쯤에는 151∼242개를 보유할 것이라 한다. 북한은 이 핵무기들을 ICBM에 탑재해 뉴욕 등 미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또는 핵우산)를 차단한다는 전략이다. 북한은 이를 ‘제1의 사명’이라 했는데 어느 정도 완성됐다는 판단 아래, 이제는 대남 공격을 의미하는 ‘제2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단거리 공격용 핵무기의 대량생산을 공언한 상태다.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군은 선제타격과 미사일 방어 및 응징보복으로 구성된 ‘3축 체계’ 역량 확보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고, 핵공격에 대비해 작전계획을 수정하며,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상황 악화 시 미국 핵무기의 전진배치나 자체 핵무장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76.6%가 핵무장을 지지했을 만큼 국민도 특단의 조치를 요구한다.

다만, 확장억제를 약속한 미국의 상황 인식은 한국만큼 절박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비판하면서 미 확장억제를 신뢰하고 비핵화 원칙을 준수할 것을 강조할 뿐이다. 미 핵무기 전진배치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급거 방한했던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도 확장억제의 공고함만 강조하고 떠났다. 윤 대통령이 “국민 우려를 불식시킬 실효적이고 강력한 한·미 확장억제 체계”를 요구했지만, B-1B 전략폭격기를 포함한 한차례 전력 과시로 안심시켰을 뿐이다. 한국에서 핵무장이나 미 핵무기 전진배치가 제기되는 근본적 원인과 그 해결책에는 무관심한 채 구두 약속만 반복하는 미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도 괜찮을까? 1975년 월남이나 2022년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재현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북한이 ‘제2의 사명’이라며 대남 핵공격 의사를 공언한 만큼 우리는 지금 ‘북핵 억제를 위한 전쟁’ 중이다. 북핵을 억제하지 못해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남한은 물론 민족이 파멸하게 될 것이다. 한미동맹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정부·군대·국민이 삼위일체가 돼 어떻게든 북한의 핵공격을 억제해야 한다.

대통령실에는 북핵 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을 보강해 전반적 북핵 대응 전략을 수립한 후 관련 부서들의 북핵 억제 조치들을 독려 및 감독해야 한다. 군은 참수작전 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면서 ‘3축 체계’를 ‘4축+α’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국민도 좌우(左右)와 여야(與野) 없이 북핵 대응에 일치단결해야 한다. 집중적인 자강(自强) 노력을 통해 ‘북핵 억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문화일보

 

02-06 대공합동수사단 운영 왜?…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고육지책, 효과는 의문

국정원이 단장…“상설 안보수사협의체와는 무관”
경찰로 대공수사권 넘어간 뒤 수사력 약화 방지

국가정보원과 검찰 경찰이 6일부터 올해 연말까지 대공합동수사단을 운영하기로 한 것은 내년 1월1일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을 앞둔 고육지책이지만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국정원은 6일 “국정원은 경찰청·검찰청과 함께 오늘부터 올해 12월 31일까지 ‘대공 합동수사단’을 상설 운영하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함께 내·수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무실은 서초구 내곡동의 국정원에 마련되며 경찰에서 총경급을 포함해 20여명, 검찰에서 10명 미만의 검사가 참여할 것으로 전해졌다.단장은 국정원이 맡게 된다. 국정원과 경찰은 그간 개별 간첩사건에 대한 협의를 진행해왔지만, 협의체를 상설로 가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은 다층적 국내 간첩수사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해외와 연계한 간첩수사에서는 아직 역량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국정원은 “대공 합동수사단을 통해 국정원의 대공수사 기법을 경찰에 공유하고 파견 검사는 법리 검토와 자문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3년 유예기간에 관련 인력과 조직 등을 보강하고 있지만, 해외 방첩망의 경우 특히 미흡하다는 것이 정부·여당의 공통된 인식이다. 대공수사에 필수적인 해외 정보기관과의 네트워크나 휴민트(인적 정보망) 부분에서 국정원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최근 집중 수사 중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들이 지난 수년간 캄보디아, 베트남 등 해외에서 북측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하지만 대공 합동수사단에 행정요원을 제외한 실제 경찰 안보수사 파견 인력 15명을 1년여 교육시킨다고 경찰의 안보수사 역량이 단기간에 커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다. 안보수사 경찰 약 2000명 중 절반인 1000명 정도는 교육시켜야 실질적 대공 수사 역량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특히 해외 대공수사 역량 강화와 관련해 초등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친다고 수학 실력이 금방 느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며 “많은 경찰 인력이 여러 사건을 경험하고, 사례가 늘어나야 해외 대공수사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번 대공합동수사단 출범은 상설 안보수사협의체 본격 가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보수사협의체는 2021년 3월 박지원 전 국정원장 때 설치돼 사안이 생길 때마다 가동되는 비상근 협의체였다. 하지만 이번 대공합동수사단과 안보수사협의체 상설화와는 다른 차원으로 경찰 안보수사 역량 강화를 위한 고육지책 성격이 강하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2.07 실패가 만든 이스라엘 무인기

2016년 이스라엘 무인기(드론) 부대를 취재하러 갔다. 이스라엘 공군기지 격납고에 들어서니 16 길이 날개를 펼친 정찰 무인기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스라엘 공군 중령이 말했다. “이거면 평양에서 김정은이 뭘 하는지도 정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기지에는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엘리트 장교들이 이스라엘의 무인기 운용력 등을 배우기 위해 파견 근무 중이었다. 인구 900만명인 이스라엘은 내수 시장이 작아 제조업이 약하다. 차는 물론 웬만한 장비는 직접 만들지 않고 수입한다. 그런 나라가 무인기 강국 반열에 올랐다니 놀라웠다.

 ▲이스라엘 유비전사의 히어로30 자폭형 무인기./이스라엘 유비전사

 

이스라엘이 무인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발에 사활을 건 건 전쟁에서 뼈아픈 실패를 겪으면서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며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빼앗았다. 그런데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 본토보다도 3배 가까이 컸다. 언제 또다시 이집트가 쳐들어올지 시나이 반도에서 대비하기 어려웠다. 일반 항공기를 띄워 이집트 상공에 넘어가 정찰을 하자니 최신 소련제 방공 무기에 격추될 우려가 컸다. 한 장교가 TV에서 ‘바르 미츠바(유대인 성인식)’ 선물로 원격 조종 비행기를 주는 모습을 본 것에 착안해 정찰 무인기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개발팀은 군에서 엉뚱한 짓이라는 비아냥을 받다 얼마 가지 못하고 1969년 해체됐다.

 

군은 4년 뒤인 1973년 10월 이집트의 기습적인 전쟁 개시 공격에 치명타를 입었다. 정찰 실패였다. 가까스로 전세를 뒤집어 판정승을 거뒀지만 진 것과 다름없었다. 사망 병력이 2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컸다. 1~3차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사상자였다. 군에서는 “무인기 프로젝트가 폐기되지 않았으면 무인 정찰기로 이집트 전쟁 준비 상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나왔다. 군은 무인기 개발팀을 급히 부활시켰다. 6년 뒤인 1979년 첫 무인기인 ‘스카우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 무인기 ‘송골매’가 2000년 나온 것보다 20여 년 앞선다. 실패를 분발의 계기로 만든 이스라엘은 현재 ‘자폭 드론’ ‘공격형 드론’ ‘안티 드론’ 등 각종 무인기 무기를 종합 세트로 갖춘 강군이 됐다.

 

얼마 전 북한 무인기 침투 사태로 우리 군의 대비태세 허점이 드러났다. 2~3m 소형 무인기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법을 몰라 허둥댔고, 용산 비행금지구역(P-73) 침투를 허용했다. 군 수뇌부가 북 무인기 P-73 침투 사실을 사후 검열로 알게 되고도 국민에 제때 알리지 않고 하루·이틀 묵히다 ‘용산구(區)까진 못 들어왔다’ ‘P-73에 살짝 스쳤을 뿐이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실책을 모면하려는, 군인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실패에서 무얼 얻느냐가 아닐까.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02-07 대공 합수단 임시기구…간첩 천국 막을 근본 대책 급하다

내년 1월 1일부터 대공(對共)수사를 할 수 없게 된 국가정보원이 경찰·검찰과 함께 ‘대공 합동 수사단’을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앞으로 10개월 간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을 함께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대공수사 기법 등을 공유·전수하기 위해 고육책으로 이런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국정원이 중앙정보부 때부터 60여 년에 걸쳐 축적해온 유무형의 대공수사 자산과 역량이 이 기간 내에 경찰로 이전될 순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수사 공백을 최소화하겠다는 절박함은 읽힌다.

그러나 대공 합수단은 경찰 20명, 검사 2명으로 구성된 소조직인 데다, 가동도 새 국정원법 시행 전까지로 돼 있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대공수사의 핵심은 보안과 전문성인데 이것이 단시간 내 경찰로 이전되기는 어렵다. 더구나 요즘 간첩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베트남 등 제3국을 통해 들어온다. 해외 첩보망도, 휴민트 자산도 없는 경찰이 대공수사를 전담한다는 것은 ‘간첩 천국’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더불어민주당이 한사코 개정한 국정원법 내용을 보면, 대공수사 업무를 경찰로 이관하거나 별도 조직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폐지’하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가 “두 눈 가리고 도둑 잡는 식이 될 것”이라고 개탄하는데, 충분히 근거가 있는 우려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내내 대북 수사를 사실상 방치하거나 방해한 정황이 뚜렷하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야 한동안 묻어 두었던 간첩단 수사가 재개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청주, 제주, 창원에서처럼 애국과 자주를 내걸고 버젓이 북측과 접선해온 이들이 부지기수다. 민노총 핵심 인사들도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들과 접촉하며 지령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국정원법의 대공수사권을 원상회복하려면 내년 총선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때까지 안보수사 공백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절박하다.

문화일보 사설

 
 

02-09 합수단으론 ‘21세기 간첩’ 못 잡는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국가정보원은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을 앞두고 연말까지 검·경과 함께 대공합동수사단을 상설 운영하기로 했다. 합수단 운영은 문재인 정부 때이던 2020년 말에 개정된 국가정보원법에 따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는 대신 내년 1월 1일부터 경찰로 넘어가는 데 대비한다는 취지다. 국정원은 “이를 통해 대공수사 기법을 경찰과 공유하고 파견 검사는 법리 검토와 자문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임시기구인 합수단을 구성하더라도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임시조직의 구성에 상관없이 내년이면 간첩이 활개 치는 세상이 올 것이다. 평양 통일전선부에서 환영할 만한 조치로서, 국가안보를 지키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간첩의 활동 행태를 간파하지 못한 대응책이다. 2000년대 이후 간첩은 더는 평양에서 장기간 훈련을 받고 내려온 직파(直派) 공작원이 아니다. 북한 통전부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선 대한민국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남한 출신의 자생 및 토착형 인물이 평양 남파 간첩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좌경화하고 반정부 성향이면서도 노조, 비정부기구(NGO) 및 정치권 등의 공식 명함을 가진 인사들을 예의주시하다가 중국, 베트남 등 제3국으로 불러내서 충성 서약 및 공작금 제공 등의 수단으로 충성스러운 간첩으로 변신시켰다. 활동 무대가 한반도를 넘어섬에 따라 간첩 내사 및 수사는 반드시 글로벌 협력 기반이 있어야 한다. 전 세계 정보기관은 정보기관끼리 유유상종의 정보 협력을 한다. 전 세계 7개 재외공관에 근무하는 경찰 영사들은 교민 보호만도 일이 벅차다. 간첩 수사 여력도, 국제 공조 네트워크도 부재하다.

다음은,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은 간첩 수사의 고충을 외면한 졸속 대책이다. 지금은 ‘산에서 이슬 맞고 새벽에 내려오는 사람’을 간첩으로 체포하던 1960∼1990년대가 아니다. 요즘 간첩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움직인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채증하는 데 최소 5년이 걸린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동안 인내심을 갖고 수사할 조직은 국정원밖에 없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태생적 기조 때문에 가능했다.

끝으로, 윤희근 경찰청장은 “과도기적으로 경찰과 국정원이 합수단 형태의 수사단을 만들어 주요 사건 몇 개를 같이 해 볼 계획”이라며 “수사 역량 또는 정보 수집과 관련된 기법 등을 국정원으로부터 이관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수사 몇 건 같이한다고 역량이 생긴다고 판단하면 21세기 간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휴민트(인적정보) 등 수십 년간 축적된 무형의 정보 자산이 하루아침에 이동할 수는 없다.

수사 보안과 전문성은 분단과 함께 시작된 북한의 대남 공작 기법을 간파하고 대응한 유구한 역사에서 비롯됐다. 임시방편의 합수단 구성은 ‘간첩천국’으로 가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대공수사권 이관은 경찰이 요구한 사항이 아니고 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내년 4월 총선 이후에 국정원법은 다시 개정돼야 한다. 국가안보 수사에 공백을 메울 특단의 조치가 한시적으로 필요하다.

문화일보 

 

02-10 尹 국빈 방미 때 ‘자체 핵’ 담판 필요하다

이미숙 논설위원

尹 ‘핵’ 발언은 역사적 전환점
美 핵우산에 韓 핵능력 더하면
북한과도 핵 균형 이룰 수 있어

우라늄 농축은 NPT 틀內 가능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긴요
농축 통해 잠재 핵능력 키워야


윤석열 대통령이 연초 ‘자체 핵(核) 보유’를 언급한 데 대해 대통령실의 새가슴 참모들은 곧바로 “북한 핵 위협에 대한 원론적 대응 방침을 밝힌 것”이라며 톤다운 모드로 들어갔지만, 국제적 파장은 상당하다. 윤 대통령의 핵폭탄급 발언에 대해 미국 조야에서는 ‘올 것이 왔다’며 무겁게 받아들이는 기류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북한의 핵 협박을 좌시하지 않고, 핵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역사적 선언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윤 대통령의 독자 핵 개발 발언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역사적 전환점(Zeitenwende)’ 선언과 같은 무게로 본다. 숄츠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독일 의회에서 역사적 전환점에 섰다며 기존 대러 협력 정책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작년 말 3대 안보문서를 개정하며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명시한 것처럼, 윤 대통령이 안보 대전환을 시작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북한이 2006년 이후 6차례 핵실험을 했지만, 어느 대통령도 북핵에 맞대응하는 구상을 밝힌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윤 대통령 발언 후 미국의 움직임도 긴박해졌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유사시 한국에 제공할 핵우산을 최대한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31일 서울을 방문, 확장억제 강화를 재차 다짐했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박진 외교부 장관과의 워싱턴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전략폭격기 B-1B와 스텔스 전투기 F-22 등 전략자산이 대거 동원된 훈련이 서해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전술핵 재배치를 검토할 때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와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 등은 이 보고서에서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문이 한국에서 제기되는 것을 무겁게 봐야 한다면서 “한국에 전술핵을 재배치할 가능성에 대비한 준비작업을 시작하라”고 권고했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가 관훈토론회에서 “전술핵 재배치 주장은 무책임하고 위험하다”고 해 논란이 됐던 게 불과 4개월 전이다. 윤 대통령 발언 후 미국 여론이 전술핵 배치 검토로까지 급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의지해 북핵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커지는 상태다. 최근 최종현학술원 여론조사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핵 억지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는가에 대해 51.3%는 ‘그렇다’, 48.6%는 ‘그렇지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자체 핵 개발 지지는 76.6%로, 사실상 국민 명령으로 볼 만한 수준이다. 미국이 아무리 강력하게 확장억제를 약속해도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불확실해지니 이제 우리 스스로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인 것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밑도는 것은 핵우산 불신층의 지지 유보 탓도 크다.

윤 대통령은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 때 독자 핵무장을 공론화했던 것과 달리,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는 미 확장억제 신뢰와 ‘핵확산금지조약(NPT) 준수’만 말했다. 독자적인 핵능력 확보가 NPT 체제 위배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NPT를 벗어나지 않고도 할 방법이 있다. NPT 틀 안에서 우라늄 농축부터 하면 된다. 한·미 원자력협정엔 ‘20% 미만 우라늄 농축은 고위급회의에서 논의한다’는 조항도 있다. 원전 연료인 저농축 우라늄을 러시아 등에서 전량 수입하는 만큼, 비용이 들더라도 에너지 안보를 위해 우라늄 농축을 스스로 할 때가 왔다. 미국 제공 핵우산에 우라늄 농축으로 무기화 직전 단계의 핵능력을 갖게 되면 북한과 핵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우라늄 농축 기술은 어떤 나라도 이전해주지 않는다. 농축 기술을 가지면 언제든 고농축으로 갈 수 있다. 우라늄 농축 개시가 곧 잠재적 핵능력을 갖추는 첫 관문이다. 잠재적 핵능력은 유사시 곧바로 핵무기 제조로 전환할 수 있다. 관건은 윤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을 기념해 오는 4월 윤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하는 만큼 우라늄 농축 문제를 바이든 대통령과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잠재적 핵능력의 길을 연다면 그것만으로 최대 업적이 될 수 있다.

문화일보 사설

 
 

02.11 "박근혜 탄핵까진 달렸는데…" 北공작원에 보낸 그의 메일엔

▲2017년 3월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김현동 기자

 

北 공작원과 비밀 이메일로 연락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는 쉼 없이 달려왔는데 주춤하네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회합·통신 및 편의 제공)로 재판에 넘겨진 전북민중행동 하연호(70) 공동상임대표가 2016년 12월 20일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대남 공작원 A씨(60대)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하 대표는 "지금의 주 구호는 박근혜 정부 정책 폐기(사드·위안부·국정교과서·성과연봉제 등)와 내각 총사퇴로 압박하는 게 좋다는 거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2017년 4월 4일에는 "담(다음)은 정말 제대로 된 정부를 세워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진보 진영이 분열돼 안타깝네요"라며 "4월 6일엔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응원하러 가요. 남북 경기인데 북을 응원해야겠지요"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작성했다. 이 메일 내용은 검찰 공소장에 나와 있다.

 

 ▲전북민중행동이 지난해 11월 28일 하연호 공동상임대표 출석 조사를 앞두고 국가정보원 전북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권 위기 모면용 공안 수사를 규탄한다"며 "공안 탄압을 중단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연호 "北 공작원인 줄 몰랐다"

전주지검은 지난달 20일 하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다. 하 대표는 2013년 3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북한 공작원 A씨와 베트남 하노이와 중국 베이징·창사(장사)·장자제(장가계) 등에서 최소 5차례 이상 만나고, 이메일 등으로 80여 차례 회합 일정을 조율하고 국내 주요 정세·동향 등을 보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해 11월 9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하 대표 자택·차량·휴대전화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불거졌다. 같은 날 제주·경남 등에서 활동하는 진보·통일 인사 7명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전북민중행동은 "정권 위기 모면용 공안 수사"라고 반발했다. 하 대표는 "A씨를 만난 건 맞지만, 북한 공작원인 줄 몰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선중앙TV는 9일, 전날 밤 열린 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 기념 열병식을 녹화 중계했다. 사진은 열병식 본행사에서 딸 김주애가 아버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얼굴을 만지자 흡족해 하는 모습. 연합뉴스

 

"겉으론 회사 대표…실체는 대남 공작원"

11일 국민의힘 조수진 국회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공소장에 따르면 A씨는 표면적으로는 모 회사 베트남 지사 대표지만, 실상은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는 거물 공작원이다.

 

1970년대 후반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A씨는 1980년대 초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1998년 중국인 명의로 위조 여권을 발급받아 1998년 11월부터 2006년 5월까지 15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A씨가 속한 문화교류국은 한국 정·관계 등 각계각층 인사를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 조직이다. 국가 기밀 탐지·수집, 북한 체제 우월성 선전, 요인 암살·테러 등이 임무다.

 

"하연호, 정보력·영향력 상당…北 9차례 방문"

하 대표가 속한 전북민중행동은 적폐 청산 등을 내세우며 전북 지역 27개 진보 단체가 2019년 5월 결성했다.

검찰에 따르면 하 대표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을 반대하는 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1993년 10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4년과 2008년 국회의원 선거 때 김제·완주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연거푸 낙선했다. 2010년 전북지사 선거도 떨어졌다.

 

하 대표는 북한도 9차례 방문했다. 2003년 8월부터 2008년 9월까지 한미FTA저지 전북도민운동본부 상임대표와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자격으로다.

 

▲'정권 위기 탈출용 공안 탄압 저지 국가보안법 폐지 경남대책위원회'가 지난달 30일 경남 창원시 국가정보원 경남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체포된 '창원 간첩단 사건' 관련자 4명에 대해 석방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성대국 건설 믿어" 김정은에 축전 보내기도

하 대표가 A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건 2007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소장엔 두 사람 교신 방법이 나온다. 하 대표는 A씨가 한국인 명의를 도용해 만든 이메일 계정과 외국계 이메일 등을 활용해 A씨와 연락했다.

이른바 인터넷상 비밀 매설지를 뜻하는 '사이버 드보크(Cyber Dvok)'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 교신하는 신종 연락 수단이다.

 

A씨는 '사이버 드보크'를 통해 하 대표에게 국내 정세와 시민사회단체 동향 등을 물었다. 하 대표는 그때마다 "국정원 문제를 전북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간담회(를) 하기로 했네요"(2013년 6월), "어제는 오전에 한미군사훈련(UFG) 반대 기자회견을 전북도청 앞에서 하고"(2013년 8월) 등의 이메일을 남겼다.

 

하 대표는 2012년 11월 21일 A씨에게 김정은 집권 1주년 축전 작성 요청을 받고 '강성대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라고 썼다. 앞서 2010년 전북지사 선거에 출마한 하 대표는 그해 4월 친동생을 중국에 보내 A씨로부터 선거 승리 전략과 상부 격려 내용 등이 담긴 USB(이동형 데이터 저장 장치)를 받아 오게 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사드)체계 잔여 발사대 4기 추가 배치가 시작된 2017년 9월 7일 관련 장비를 실은 미군 차량이 사드 기지로 이동하기 위해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을 지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하 대표 "미국은 가치 없는 나라"

미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드러냈다. 하 대표는 2013년 5월 "제국주의 세력들은 언제나 이 땅에서 물러갈지", 2016년 7월 "사드 배치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왔다. 미국, 정말 있어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등의 이메일을 작성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직전인 2016년 11월엔 "전주뿐 아니라 익산·군산·김제·정읍·남원에서도 촛불이 켜지고 있고, 검찰청을 포클레인으로 부순 사람도 전북 임실(사람)이고 시내버스 경적으로 함께한 전주 시내버스 노동자들도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들"이라며 "텔레그램에 사진을 올리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해외 접선 일정도 '사이버 드보크'로 조율했다. 하 대표가 '농번기에 보면 좋겠네요'라고 이메일을 작성하면, A씨가 '피서 가야죠. 베트남도 괜찮다네요' '제가 마중할게요'라고 다시 이메일을 남기는 식이다.

 

해외 회합 일정도 이메일로 조율…007 작전 방불

이런 식으로 하 대표는 2013년 8월 26일~27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호텔 등에서 A씨와 접선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만남은 첩보 영화에 나오는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 대표는 베트남 입국 첫날 오후 1시9분쯤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발견한 A씨를 따라 이동하다 택시 승강장 인근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후 오후 1시14분쯤 택시에 혼자 탄 뒤 하노이 시내 한 마트에서 내려 정체불명의 남성을 만났다. 하 대표와 A씨는 비슷한 시각 같은 호텔, 다른 객실로 들어갔다가 오후 9시11분쯤 호텔 후문으로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다른 호텔로 갔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문'을 교환한 뒤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방첩 당국 "공작원인 줄 알고 정보 줘"

하 대표는 비슷한 방식으로 2016년 5월 12일~13일, 2017년 8월 28일~29일 중국 여러 도시에서 A씨를 비밀리에 만났다. 2019년 11월 4일~8일엔 부인과 함께 중국을 여행하면서 6일과 7일 가무(歌舞)극장 인근과 식당에서 A씨를 따로 접선했다.

 

방첩 당국은 하 대표가 A씨가 대남 공작원인 줄 알면서도 북한의 대남 전략 수립과 공작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줬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하 대표가 작성한 이메일은 반미·자주, 평화협정 체결 등 북한 주장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에 부합하거나 공작금 수수 방법, 스테가노그래피(암호화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보안 기술) 암호화 방법, 개인 홈페이지 내 비밀 댓글 작성 방법, 회합 후 귀국 보고 등에 관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

 

02-13 육사 ‘6·25전쟁사’ 필수과목 복원…4학년엔 임관전 보충수업

▲지난 2022년 2월 진행된 육사 82기 입학 및 재교생도 진학식. 육사 제공

 

육군사관학교가 공통필수 과목에서 빠져 논란이 됐던 ‘6·25전쟁사’ 등 3과목을 필수과목으로 4년 만에 복원한다.

육사는 ‘2024 교육과정’에 ‘6·25전쟁사’, ‘군사전략’, ‘북한’ 등 3개 ‘전공필수’ 과정을 ‘공통필수’ 과정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13일 밝혔다. 1~3학년 생도와 올해 입학생까지는 ‘2019 교육과정’이 적용되지만 이들 3과목을 미리 공통필수로 전환해 교육할 계획이다. 다음 달 임관을 앞둔 4학년(79기) 중 6·25전쟁사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생도를 대상으로 보충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육사는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을 내재화하고 ‘과학기술 강군’을 이끌어갈 융합형 핵심인재 양성을 위해 미래 지향적인 ‘24 교과과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육사는 "2019 교과과정으로 교육을 받은 현재 4학년 중 6·25전쟁사 과목을 미수강한 생도를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중순 핵심 강의에 이어 이달 초 동계교육 기간에 사례 토의와 전적지 답사까지 총 30시간의 집중 보충교육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2-13 전북시민단체대표, 北 ‘리광진 공작조’ 전지선과 12년여 접촉…9회 방북

민노총 조직국장과 상부선 ‘리광진 공작조’로 같아
당국 "창원거점 ‘자통’ 전북지역과 총책 연계 추적"
모 정당 최고위원 자격 방북 등 총 9차례 방북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는 전북 지역 시민단체 대표 겸 정치인 A 씨가 2007년 이후 지속적으로 북한 공작원 전지선과 접촉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A씨는 2005년 모 정당 최고위원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등 총 9회에 걸쳐 방북한 것으로 확인됐다.

방첩당국은 A 씨가 경남 창원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단체 ‘자주통일민중전위(자통)’로 알려진 이른바 창원간첩단의 전북 지역 총책을 맡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전지선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조직국장 B 씨와 과거 베트남에서 접선했던 인물이다. A 씨와 B 씨의 상부선이 북한 ‘리광진 공작조’로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당국은 두 사람이 활동했던 간첩단 조직의 연관성을 살피고 있다.

13일 문화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 씨는 2007년 4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외국계 이메일 계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사이버드보크’ 방식으로 전지선과 꾸준히 연락했다. 주로 A 씨가 국내 정치 이슈를 요약하고,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반미 반보수 기자회견 등을 진행한 사실을 정리해 전지선에게 보고하는 식이었다.

민주노동당 전북도당위원장을 지냈던 A 씨는 2010년 전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선거 운동 당시 A 씨는 동생을 중국으로 보낸 뒤 전지선과 만나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국은 A 씨가 이때 전지선으로부터 ‘지방선거 승리 전략, 상부 격려 내용’이란 제목의 파일이 담긴 휴대용저장장치(USB)를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A 씨는 2011년 4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총 5차례 중국과 베트남에서 전지선을 직접 만나 북한의 지령 등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전지선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 부부장(차관보)급 공작원인 리광진의 공작조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공작원으로 활동해 온 전지선은 위조여권 등을 사용해 1998년 11월부터 2006년 5월까지 총 15차례에 걸쳐 국내를 출입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북한 공작원들이 해외에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이용하는 한 회사의 베트남 지부 대표로도 알려져 있다.

당국은 전지선이 2016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민노총 조직국장 B 씨를 만났다는 증거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지선의 아들이 베이징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접선 장소에 도착해 B 씨에게 검은색 물건을 전달하는 모습이 당국에 포착됐다. B 씨가 귀국 후 남대문 달러환전소 등 국내에서 1만 달러를 여러 차례에 나눠 환전한 사실을 파악한 당국은 그가 베이징에서 전지선 측으로부터 공작금을 건네받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하고 있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2-16 ‘북한정권·군=적’ 6년만에 부활… 미국 확장억제 실행력 강조

 

■ 윤정부 첫 국방백서 발간

“북, 핵 포기않고 지속적 위협”
미 전략자산 전개증가 등 반영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발간되는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6년 만에 부활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면서 미국의 확장억제 실행력을 강조하는 내용도 대폭 반영됐다.

16일 국방부에 따르면 ‘2022 국방백서’에는 “북한은 2021년 개정된 노동당 규약 전문에 한반도 전역의 공산주의화를 명시하고, 202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우리를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였으며, 핵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해오고 있기 때문에, 그 수행 주체인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됐다.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8년과 2020년 국방백서에서는 북한군에 대한 적 규정 대신 ‘대한민국의 주권·국토·국민·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모호한 내용만 담겼었다.

2022 국방백서에는 한·미 정상회담과 제54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통해 합의된 확장억제 실행력 제고 성과도 상세히 기술됐다. 확장억제 협의체 운영 성과와 SCM 공동성명 중 확장억제 관련 내용이 포함됐고, 맞춤형 억제전략 개정 방향과 추진 계획, 확장억제수단 운용연습(DSC TTX) 정례화 합의 등도 담겼다. 미국 전략자산의 전개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는 내용 역시 2020년 국방백서에는 없던 내용이다. 국방백서는 2년마다 발간된다.

일본에 대해서는 ‘가치 공유’ ‘가까운 이웃’ 등 우호·협력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 되살아났다. 이번 국방백서는 “한·일 양국은 가치를 공유하며, 일본은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미래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 가까운 이웃 국가”라고 표현했다.

2020년 국방백서에서는 ‘가치 공유’나 ‘가까운 이웃’이라는 표현이 자취를 감추고 ‘양국 관계뿐 아니라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도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할 이웃 국가’라는 문구가 쓰였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02.18 핏빛 조국 하늘 지켜낸 96세 노장… “폭탄이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튼, 주말-허윤희 기자의 발굴]

공군 최초 100회 출격 조종사
‘6·25전쟁 영웅’ 김두만 장군

'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 장군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F-51D 전투기 앞에 섰다. 6·25 전쟁 당시 그가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운 전투기와 같은 기종이다. 96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그는 "하늘 위에선 무념무상,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했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김 중위, 폭탄 10발을 갖고 가서 문산철교를 폭파시키고 오라!”

1950년 6월 27일 오전 10시. 김두만 공군 중위가 T-6 훈련기를 몰고 여의도 기지를 이륙했다. 비행기 날개 밑에 폭탄 걸이를 장착하고, 15㎏짜리 소형 폭탄 10발을 매단 채였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 그에게 부여된 첫 임무였다. 날이 좋지 않았다. 1500피트 상공에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항공기가 균형을 잃고 회전하며 곤두박질쳤다.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비행기가 구름 밖으로 튀어나왔고, 폭탄이 분리돼 항공기와 함께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스핀 정지 조작을 하는 순간, 폭탄이 땅에 떨어져 폭발했어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죠. 나중에 귀환해서 항공기를 살펴보니 날개 밑이 온통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 파여 있었습니다.”

김두만(96) 전 공군참모총장은 마치 며칠 전 일을 떠올리듯 73년 전 그날을 얘기했다. 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엔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었다. 당시 공군이 보유한 항공 전력은 T-6 훈련기 10대, L-5 4대, L-4 8대가 전부. 반면 북한은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항공기 226대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공군은 가용 전력을 총동원해 맨손 폭격을 감행했다. 김 장군은 “무기 장착이 불가능한 항공기는 후방석에 탄 조종사가 폭탄을 안고 가서 맨손으로 투하했다”고 했다.

 

김두만은 6·25 때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한 ‘전설’이다. 1950년 10월 여의도 기지 작전에 참가해 개전 초기 우리 군의 서울 탈환과 평양 입성에 기여했고,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대동강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도 출격해 전공(戰功)을 세웠다. 1952년 1월 11일 F-51D 전투기로 대한민국 최초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웠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일 침착할 때가 출격하는 순간입니다. 조종복을 입고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무념무상(無念無想)입니다.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합니다.” 이후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을 거쳐 1970년 공군 최고 수장인 11대 참모총장에 올랐다. 2015년에는 88세 나이로 최초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후배 조종사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최근 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일본에서 자란 유년 시절과 ‘공짜로 비행기 탈 수 있다’는 광고에 속아 가미카제(자살 특공대) 대원으로 뽑힌 이야기, 전쟁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까지, 영화보다 박진감 넘치는 노병의 백년사가 펼쳐졌다.

 

 ▲김두만 장군이 1952년 1월 11일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워 동료들에게 축하받는 모습. /공군 제공

 

◇목숨을 건 비행

-6·25 발발 당일을 기억하십니까.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고 동료들과 영화 보러 외출을 나갔지요. 눈에 익숙하지 않은 전투기 2대가 굉음을 내며 김포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제 야크기였죠.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장병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고 했어요. 당시 T-6 10대가 여의도 기지 격납고에 있었는데, 북한군들이 격납고에 기관총을 퍼부어서 1대가 파손됐어요. T-6 항공기 10대는 6·25 직전 국민 성금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입한 대한민국 공군의 보물이었습니다. 연쇄 폭발로 다 날아갈 뻔했는데, 다행히 연료를 빼고 격납고에 넣은 덕분에 9대는 무사했어요.”

 

-전투기가 한 대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네요.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됐는데 미국에 T-6 훈련기 판매를 요청했지만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된다고 퇴짜를 맞았어요. 예산도 없어서 1950년 5월 국민 성금 3억5000만원으로 캐나다산 T-6 10대를 구입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속제 T-6 훈련기를 ‘건국기’라고 명명했어요. 캐나다가 파견한 교관 1명이 조종사 요원 10명에게 T-6 훈련기 교육을 하는 도중에 전쟁이 터진 겁니다.”

 

-첫 임무가 문산철교 폭파였죠?

“맥아더 사령부가 급하게 한국군에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제공하기로 해서, 선배 조종사 10명이 전투기를 인수하러 일본 규슈 비행장으로 떠난 직후였어요. 그때 중위였던 저는 T-6는 조종간도 못 만져본 상태였죠. 6월 26일 저녁,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저를 불렀어요. ‘T-6를 전투에 투입해야겠는데 탈 수 있겠나?’ ‘타야죠, 타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1시간 연습하고 여의도에 착륙하니 바로 출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공군 전사(戰史)에 ‘스핀(통제 불능 상태) 폭격’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폭탄이 항공기에 매달려 있었다면 낙하 속도가 빨라져 항공기가 추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나중에 김정렬 총장께 보고했더니, ‘세계 항공 역사상 스핀 폭격을 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걸세!’라며 위로해 주더군요(웃음).”

 

-이후에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죠?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 있던 트럭을 폭격했을 땐, 폭탄을 투하하고 항공기를 트는 순간 ‘꽝’ 소리가 났어요. 대공포에 직통으로 맞아서 충격으로 비행기가 뒤집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구멍이 커다랗게 나있어요. 탄흔이 조금만 위로 올라왔으면 내 다리가 날아갔고, 조금만 내려갔으면 좌측 연료 탱크가 완전히 폭발했겠죠.”

 

-그런 일을 겪으면 다음 출격할 때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 공군이 연이어 전사하자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가 많았어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냐’며 대성통곡한 조종사도 있었죠.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대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어요. 근데 난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과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의 북한군 보급 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산악 지대인 창도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윙맨(보조 조종사)이었던 후배 이일영 중위가 폭격할 때 대공포탄이 날아들었어요.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고,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지요. 잔해를 찾으려고 계곡을 헤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에서 강릉 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어요. 비행 생활 중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입니다.”

 

-이틀 뒤 한국군 최초로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는데요.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쳐줬는데,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어요. 100회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그걸 세면서 출격한 것도 아니니까요.”

 

 ▲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김두만 장군은 “핵 위협뿐 아니라 미사일도 성능이 점점 강화돼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결판날 것”이라며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왼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이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공군이 가장 큰 전과로 꼽는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도 이끌었습니다.

“승호리철교는 중국에서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 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 보급로의 요충지였어요. 첫날은 실패했고, 13일 다시 출격했는데 일대가 구름에 덮여 있어서 2차 목표인 황해도 이천의 교량만 부수고 돌아왔어요. 1월 15일 ‘사천으로 내려가 후배 조종사를 양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남 사천 기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철교 폭파는 후배들이 성공한 겁니다.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F-51D 6대가 적의 대공 포화를 뚫고 정확하게 표적에 투하해 철교를 폭파했죠.”

 

◇자살 특공대 투입 직전 살아남은 소년

김두만은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 교토에 살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소학교 4학년 때 경비행기를 처음 봤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행기 한 대가 학교 상공을 선회하며 재주를 부렸다”며 “조종사 목에 맨 마후라(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며 넋이 나갔다”고 했다.

 

-조종사 되는 길은 순탄했나요?

“밥벌이를 위해 기술자가 되려고 했어요. 교토에서 정밀기계 생산 업체로 유명한 시마즈 제작소를 찾아가니 반도인(조선인)은 안 된대요. 오사카로 건너가서 공장에 취직했죠. 그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요. 우연히 길에서 ‘육군 소년 비행병 모집’ 포스터를 봤습니다. 모든 교육비가 공짜래요. 저기만 들어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니 꿈만 같았죠. 필기시험, 신체검사, 비행 적성검사까지 통과하고 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6개월 동안 지상 교육을 받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가서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살 특공대라는 걸 알았습니까.

“지상 교육 받을 때 조교들이 ‘야, 소모품들이 들어왔구나!’라며 환영했어요.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1945년 7월 싱가포르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와요. 동남아 여러 곳에서 훈련받고 있는 학생 조종사들이 전부 모였는데, ‘너희들은 오늘부터 가미카제 요원으로 편입됐다’고 하더군요. 소모품이 자살 특공대원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네요.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서 폭격 훈련을 받다가 8월 초 일본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동해서 수송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거기서 광복을 맞았어요 하지만 당시 일본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졸지에 연합군 포로가 됐죠. 베트남으로 옮겨 가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김두만은 1946년 4월이 돼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으로 함께 귀국한 일본군 출신 한국인 40~50명 가운데는 김정렬 제1대 공군참모총장도 있었다. 부산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김 총장은 “대한민국이 독립됐으니 곧 정부가 설 것이고, 군에 비행 부대도 생길 것”이라며 “그때 같이 모이자”고 했다. 김 초대 총장은 이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해 1949년 10월 한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고 1987년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귀국 이후 생활은 어땠습니까.

“김 장군 주소를 들고 서울 돈암동 집에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주셨죠. 마침 매부가 서울 안암동에 병원을 차려서 조수로 취직했습니다. 월남하는 이북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많이 왔는데, 그들을 통해 들은 북한 공산당과 소련군의 비인간성에 분노를 느꼈지요. 1년간 병원 근무를 하면서 공산주의 실체를 엿봤달까요. 광복 이후 정부 수립까지 3년간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김 장군 집은 꽤 넓어서 타향살이하는 항공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9월 초 김포 기지에 육군 항공대가 창설됐을 때 항공인 105명이 빠르게 모일 수 있었어요.”

 

그는 김영환 장군과의 마지막 비행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눈물을 흘렸다. 김정렬 총장의 동생인 김영환은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6·25 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장군이다. 그가 형수의 붉은 치맛단 자투리 천으로 만들었던 ‘빨간 마후라’가 오늘날 조종사들의 상징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3월 5일, 김영환 장군은 제10전투비행단 창설 기념 행사차 F-51D 전투기를 몰고 사천에서 강릉으로 이동하던 중 교신 두절과 함께 실종됐다.

 

-어떤 상황이었나요.

“김 장군이 탑승한 1기는 보조연료탱크를 달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탄 2기에는 200갤런짜리 연료탱크 2개가 날개 밑에 장착돼 있었어요. 그 안에 비행단에 전달할 낙하산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이게 또 둘의 생사를 갈랐습니다. 사천을 이륙해 포항까지 갈 때는 하늘이 무척 맑았어요. 포항에 접어드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삼척 상공을 지나니 고도가 150피트까지 내려갔어요. 김 장군이 콜로 ‘야, 다 왔다. 힘내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폭설이 밀려왔습니다. 그가 좌측으로 급선회를 시도했는데, 나는 탱크 무게 때문에 그 속도를 못 따라갔어요. 장군의 비행기는 폭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사라졌습니다. 끝내 유해는 찾지 못했어요. 전시(戰時)가 아니라도 이런 일을 당하는 게 조종사들의 숙명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딴 게 없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백선엽 장군과는 생전에 만나신 적 있나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타군이지만, 존경하는 진짜 군인입니다.”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매도하는 시각이 있는데요.

“지금의 시각으로 그 시절을 재단해선 안 돼요. 장군도 생전에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어요. 제가 일본 육군소년비행병학교를 졸업하고 특공대원이 된 것도 공짜로 비행술을 가르쳐준다는 곳이 있다기에 입학했을 뿐입니다. 내가 조국의 영공 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일제 치하에서 모욕을 견뎌가며 조종술을 배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일본을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용일(用日)’이란 표현을 쓰고 싶어요.”

 

 ▲'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 장군이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메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전쟁을 막는 건 결국 사람”

김두만 장군은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내며 겪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전략가였다”고 했다. 1966년 그가 베트남 주월 한국군 부대와 우리 군의 작전 지역을 시찰한 후 청와대에서 방문 보고회가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군을 따로 불렀다. “베트남에 우리 공군 조종사를 파견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가 “보내야 한다”고 답하자, 이유를 물었다. 장군은 “첫째, 공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고, 둘째, 베트남은 최고의 실전 훈련장이자 절호의 교육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희생시키면 안 되잖소? 정예화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보내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야지.”

 

그러나 미 존슨 행정부 입장에서 절실했던 것은 육군의 추가 파병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에 우리 공군은 파병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차지철 공화당 의원이 우리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했어요. 봐라, 내가 국내외 비판 여론을 잠재우며 어렵게 파병 결정을 했으니, 당신들도 군사원조와 경제협력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구하는 고도의 전략이었죠.”

 

▲1970년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는 김두만 장군(왼쪽)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 /공군 제공

 

-2015년 6월엔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고 하늘을 날았습니다. 기분이 어땠습니까.

“국산 전투기를 꼭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토빛이었고,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는데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어요.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떠십니까.

“아내가 8년 전 세상을 떠난 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큰딸과 삽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스트레칭 한 시간 하고, 신문 3종을 정독해요. 일주일에 2~3회 골프 치는 게 낙이라 하체를 단련하려고 매일 걷습니다. 운전도 직접 해요. 치매 검사를 받았더니 100점 만점이 나왔어요.”

 

-가족들에겐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였나요.

“현역 시절에는 비행기만 타느라 가족들을 못 챙겼어요. 2남 2녀 키우고 집안 대소사까지 아내가 도맡아했죠. 잔정을 듬뿍 주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품고 삽니다.”

 

-전투기 추락 사고 등 요즘 뉴스를 보면서 국민들은 불안해합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훈련을 제대로 못 한 건 사실인데 그건 한미 합동 훈련이고, 공군은 자체적으로 기본 훈련을 계속해 왔어요. 추락 사고가 훈련 부족 때문은 아닐 겁니다. 중요한 건 정신력이에요. 미군이 넘겨준 최신식 항공기와 전략무기를 갖고 있던 베트남군이, 열악한 무기로 대항한 월맹군에 패한 이유가 뭡니까. 바로 내부 갈등, 그리고 정신력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에요.”

 

-공군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앞으로 다가오는 위협은 과거와는 다를 겁니다. 핵 위협뿐 아니라 미사일도 성능이 점점 강화되고 있죠.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결판 난다는 얘기에요.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죠. 좋은 인재 뽑고 잘 훈련해 최고의 조종사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즘 ‘헤이트 조선’이라고들 하는데, 바깥에선 대한민국을 기적이라고 불러요. 6·25 때 전투기 하나 없었던 공군이 지금 최첨단 전투기로 무장해 국산 전투기를 수출까지 합니다.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 자꾸 폄하하고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에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윤석열 정부의 국방 정책을 조언해 주신다면요.

“결국 전쟁을 억제하는 기본은 사람이에요. 최고의 장비를 갖춰도 운영하는 사람이 멍텅구리면 시스템 자체가 멍텅구리가 돼요. 북한 실정이야 우리가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모부를 총살하고, 이복형을 독살한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한쪽에서 득세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북한은 자멸하게 돼있어요. 지난 정권 5년 동안 엉망이 된 걸 정리만 잘해도 성공할 겁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2.20 北, 동해로 단거리탄도미사일 2발 발사…이틀만에 또 도발

평안남도 숙천서 발사
김여정 “美 전략타격수단 움직임 따져 대응”
북핵 대비 한미 훈련 핑계삼아 한반도 긴장감 고조시켜
“작년 9~12월 연쇄 도발 재현될 가능성”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장면.북한이 20일 동해상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2발을 발사했다. 지난 18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15형을 동해상으로 고각 발사한 지 이틀만이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전 7시쯤부터 7시 11분쯤까지 북한 평안남도 숙천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발사한 단거리탄도미사일 2발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군은 감시 및 경계를 강화한 가운데, 한미 간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만반의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지난 1월 1일 단거리탄도미사일, 지난 1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이어 올해 세 번다. 이날 북한의 도발은 한미 공군이 지난 18일 북 ICBM 발사에 대응해 19일 연합공중훈련을 펼친 데 대한 반발 성격으로 분석된다.

 

▲미국 전역을 사정권에 넣는 북한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이동식발사대에서 불을 뿜으며 발사되고 있다(위 사진). 북한 매체들은 이 미사일을 18일 오후 평양국제비행장에서 동해 공해상을 향해 고각 발사했다고 19일 보도했다. 북한의 도발 하루 뒤인 19일 한미 공군은 괌 기지에 있던 미 전략폭격기 B-1B와 전투기 10여 대를 한반도 상공에 띄우며 예정에 없던 연합 공중 훈련으로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아래 사진).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합동참모본부

 

한미는 지난 19일 미측의 B-1B 폭격기 등 전략 자산과 한국 공군의 F-35A 스텔스 전투기 등을 동원해 서해에서 한반도 남부를 통과해 동해 한국방공식별구역으로 비행하는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펼쳤다.

 

군은 비행거리, 고도, 속도 등 제원을 분석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지난 17일 광명성절(2월16일)을 기념하여 진행된 내각과 국방성 직원들 사이의 체육경기를 딸 김주애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함께 관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8일 보도했다. 김정은 딸 김주애는 중앙석 김 위원장 옆자리에,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은 뒷줄 가장자리에 앉았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부부장은 이날 미사일 발사 직후 담화를 내고 “태평양을 우리(북한)의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빈도수는 미군의 행동 성격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한미가 올해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훈련과 연습을 계획한 상황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북 도발의 명분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해 9월 한미 연합연습을 계기로 12월까지 탄도미사일, 동·서해 포병 사격, 군용기 위협 비행 등 육·해·공 도발을 집중적으로 벌이고 긴장감을 고조시킨 상황이 재현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여정은 이날 담화에서 “최근 조선반도(한반도) 지역에서의 미군의 전략적 타격 수단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며 “우리는 그것이 우리 국가의 안전에 미치는 영향 관계를 치밀하게 따져보고 있으며 직간접적인 그 어떤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상응한 대응에 나설 것임을 이 기회에 다시금 기정사실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육군제2작전사령부 제1117공병단과 한미연합사단 제11공병대대 장병들이 작년 8월26일 '을지 자유의 방패'(UFS·을지프리덤실드) 연습의 일환으로 경북 경산 일대에서 '한미 연합 공병 상용교량 구축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육군 제공

 

한미 군 당국은 오는 22일에는 미 펜타곤(국방부 청사)과 조지아주(州) 킹스베이 전략 핵잠수함 기지에서 ‘핵우산’ 운용 훈련(DSC TTX)을 실시한다. 이 기간 미 측이 핵잠수함 기지에서 ‘트라이던트2′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시험 발사하며 대북 경고 메시지를 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미는 다음 달 중순부터는 한미 연합 연습인 ‘자유의 방패(FS)’를 실시할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핵 탄도미사일 전력을 고도화할수록 연합 훈련도 강화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02.20 ICBM 실전 배치 끝낸 北,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뭔가

북한이 3개월 만에 동해 방향으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최고 고도 5700여㎞로, 900여㎞를 날아간 뒤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역에 떨어졌다. 정상 각도로 발사했다면 사거리가 1만4000㎞에 달한다. 미국 전역을 타격하고도 남는다. 이번에 쏜 화성-15형은 이미 몇 차례 시험 발사에 성공한 액체 연료 미사일이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화성-17형이나 고체 연료 ICBM 대신 이 미사일을 택한 것은 화성-15형이 개발과 양산을 마치고 실전 배치됐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동안 미국 등 국제사회는 북이 탄두 대기권 재진입 같은 고난도 기술을 확보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전 배치가 사실이라면 이 같은 기술적 난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일본이 포착한 화면엔 화성-15형 탄두로 추정되는 물체가 대기권 진입 후에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낙하하는 장면이 담겼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분명한 건 김정은이 모든 역량과 자원을 핵·미사일 개발에 집중 투입하고 있으며, 그 결과 놀라운 속도로 기술 진전을 이뤘다는 점이다.

 

북은 이번 발사가 불시에 이뤄진 기습 훈련임을 강조했다. 사전 계획 없이 오전 8시 하달된 김정은의 명령에 따라 실시됐으며, 명령에서 발사까지 9시간 22분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 시간도 현재 개발 중인 ICBM용 고체 연료 엔진이 완성되면 획기적으로 단축될 것이다. 북의 계획은 모든 미사일에 고체 연료 엔진을 탑재하는 것이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사전 탐지에서 시작되는 한미의 북 미사일 방어 계획이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 북은 김정은이 2021년 1월 공개 지시한 ‘전략무기 5대 과업’을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 5대 과업이란 극초음속 미사일, 다탄두 유도 기술, 고체 연료 ICBM, 핵 추진 잠수함, 정찰위성 개발을 가리킨다. 이 중 3개를 완성했거나 완성 직전까지 갔다. 북은 2026년 차기 당 대회 전까지 완수한다는 목표를 걸었지만 당장 올해 또는 내년 ‘조기 달성’ 발표가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북이 핵 무력 완성을 향해 폭주하고 있지만 한미의 대응은 더디다. 19일 미국은 전략폭격기 B-1B 편대를 출격시켜 우리 공군과 연합 훈련을 실시했다. B-1B가 북에 위협적이긴 하지만 핵 도발 야욕을 원천적으로 꺾진 못한다. 한국 정부는 북에 ‘혹독한 대가’를 경고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북핵의 효용성을 한순간에 ‘0′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체 핵 보유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가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2-20 北 “南 비행장에 전술핵 4발씩”…韓 ‘자체 핵’ 더 급해졌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20일 미국을 향해선 “태평양 사격장”, 한국을 향해선 “전술핵 공격” 협박을 했다.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도발도 자행했다. 북한의 이런 행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더욱 실효성 있는 맞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탓에 유엔의 대북 제재결의안은 북한 조롱을 받는 종잇조각이 됐다. 한·미·일 3국의 군사적 연합 대응이 그만큼 절실해졌다. 나아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거론한 ‘자체 핵 보유’를 위한 구체적 조치에도 나설 때다. 오는 4월 미국 국빈방문 때 조 바이든 대통령과 담판해야 할 과제의 하나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일 “395㎞와 337㎞ 사거리의 가상표적을 설정해 동해상으로 2발의 600㎜ 방사포탄 사격을 했다”면서 “최신형 다연발 정밀공격 무기체계로서 적의 작전비행장당 1문, 4발 할당”이라면서 “4발이면 적의 작전 비행장을 초토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주의 F-35A 기지와 오산·군산 미 공군기지 등이 사거리에 내에 위치해 타격 목표임을 보여준다. 앞서 지난 18일 북한이 고각 발사한 화성-15형 ICBM을 정상 각도로 발사하면 1만4000㎞ 정도 비행해 미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아직 재진입 기술이나 정밀 타격 능력을 완비하진 못했지만, 상당한 기술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정교한 탄착 기술이 없더라도 미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북한 김여정이 20일 “태평양을 사격장으로 활용할 빈도는 미국에 달렸다”는 식으로 대놓고 미국을 협박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대응 방향은 이제 자명해졌다. 당장 압도적 위력으로 북한 도발을 응징하고, 핵 역량 보유를 추구하며, 북·중·러 ‘악의 축’에 한·미·일 협력과 미사일방어(MD) 체계 등으로 맞서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1월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이란 전제를 달았지만 “전술핵 배치나 우리가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바람직하다. 전략자산 전개 등의 확장억제로 대응할 때는 지났다.

문화일보 사설

 
 

02.20 통일부 “北 식량난 심각, 굶어죽는 주민 속출...지원 바라는 듯”

통일부는 20일 북한 일부 지역에 아사자가 쏟아져 나오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라고 밝혔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현안 관련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 구병삼 대변인은 북한 식량난 관련 질문에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뉴시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례브리핑을 열고 “관계기관 간에 북한 식량 사정 평가를 긴밀히 공유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지난 1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고 한 발언에 대해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만큼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취지로 답변하신 것”이라고 통일부는 설명했다.

 

북한의 세계식량계획(WFP)에 대한 원조 요청 여부를 두고 권 장관과 WFP 발언이 엇갈린 것과 관련해서도 해명했다.

 

구 대변인은 “장관과 국제기구 수장과의 면담과 관련해서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다만, WFP 사무총장과의 면담 과정에서 비록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요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북한 측이 WFP의 지원을 희망하는 정황을 확인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관이 국회 답변 시에 북한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02.21 민주당 정권들 ‘북핵은 대남용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나

북한이 ICBM 발사 이틀 만인 20일 초대형 방사포 2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은 방사포에 전술핵까지 탑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적의 작전 비행장당 방사포 1문, 포탄 4발을 할당했다”고도 했다. 북이 핵을 방사포에 쓸 수 있을 만큼 소형화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직 이를 위한 핵실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 문제일 것이다. 심각한 것은 북의 대남 핵공격 공언이 반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술핵은 순전히 한국을 겨냥한 것이다. 북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부터 초대형 방사포 등 ‘신종 무기 4종 세트’로 불리는 전술핵 무기 실험을 시작했다. 김정은은 2021년 1월 노동당 대회에서 전술핵 개발을 공개 지시했고, 김여정은 2022년 4월 전술핵을 거론하며 “남조선군 전멸”을 협박했다. 그 직후 북은 신형 전술핵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문 정부는 임기 내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의 핵개발은 처음부터 한국을 노린 것이었다. 미국까지 날아가는 ICBM을 개발하는 것은 미군의 한국 지원을 막고 유엔 제재를 풀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다. 실제 군사적으로 사용할 상대는 한국뿐이다. 하지만 역대 민주당 정권은 북핵의 실상을 외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핵을 공격용이라고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고, 정세현 전 통일장관도 “북핵은 남(南) 공격용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협상용으로 핵탄두를 수 백개나 만드는 나라가 있나. 북핵 개발 초기 김대중 정부는 “북은 핵을 개발할 능력도 없다”고 했고, 노무현 정부는 “북이 반드시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북에게 매년 쌀과 비료 수십만톤을 퍼주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통해 달러도 공급했다. 그래놓고도 단 한번도 반성한 적이 없다. 북한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탓을 해왔다.

 

북은 이날 방사포탄 2발이 우리 공군 F-35 전투기가 있는 청주 기지와 주한미군 군산 공군기지를 겨냥했음을 시사했다. 실제 북한이 방사포 세례만 퍼부어도 한미 최신예 전투기들은 떠보지도 못하고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한미는 북 방사포에 대한 뚜렷한 요격 수단이 없다. 북의 핵 미사일 폭주를 변호하고 방치한 대가는 이제부터 치러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2.21 “10년 넘게 추적하는 간첩 수사, 국정원 손 떼면 끝장”

〈간첩 잡던 전 국정원 직원들 격정 토로〉

지난 15일 오후 5시쯤 국립대전현충원에 들어서 왼편으로 올라가니 소방공무원묘역이 나온다. 대구·남양주·창원 등지에서 순직했다는 글씨 가운데 특이한 내용이 눈에 띈다.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직’.


소방교·소방장 같은 소방 공무원 직위가 새겨진 주변 묘비들과 달리 ‘이사관’이라고 씌어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집 앞에서 독침 등으로 살해당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해외파트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소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비.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침 등에 살해된 그는 소방관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강주안 기자

 

임무 중 순직 '이름 없는 별' 19개 추모석

국정원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임무 수행 중 숨진 요원을 기리는 추모석이다. 2021년에도 별이 추가돼 모두 19개다. 이 중 하나가 최 영사다. 유일하게 신원이 공개된 최 영사는 나머지 18명의 동료와 함께 영면하지 못한다. 경찰·군인 등은 같은 묘역에 안장하지만, 국정원의 별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모든 내용이 기밀이다.

 

국정원 대공 수사 간부 출신으로 최 영사 추모를 주도해온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은 “소방관 사이에 자리한 최 영사 묘비를 볼 때마다 북한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위험한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 간첩 수사에 평생을 바친 전직 대공수사 요원들은 요즘 근심이 많다. 올해 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기 때문이다. 2020년 더불어민주당의 국정원법 강행처리로 국정원은 내년부터 간첩 수사를 못 하게 된다. 관련 기능은 경찰로 이관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등의 여파다. 윤봉한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원장은 “경찰은 지금도 간첩을 얼마든 수사할 권한이 있다”며 “대공수사권을 이관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조 필수 해외 수사는 국정원 특기"

국민 입장에선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간첩만 잡으면 된다. 그런데 전문가 사이에선 “간첩을 못 잡게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대공 수사를 오래 한 검찰·경찰 출신도 같은 얘기를 한다.

 

국정원의 간첩 수사 과정은 ‘이름 없는 별’ 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졌다. 간첩을 잡으면 공작망을 이용해 다른 간첩도 추적하기 때문에 극도의 보안이 몸에 뱄다. 이 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전직 요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수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국정원 수사권 폐지가 곧 간첩 수사 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전직 요원 A씨는 친북 국가에 들어가 북한 정보기관 간부를 대상으로 벌였던 아찔한 수사를 잊지 못한다. 북측 요원이 즐비한 상황에서 현지 폭력배(갱)의 보호를 받으며 북한 간부를 모처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위태로운 담판을 거쳐 정보를 확보했다. 이를 단서로 남한에서 암약한 간첩들을 검거했다.


북한 공작원과 남한 간첩의 해외 활동을 좇는 과정에서 해당국 수사 기관에 체포되기도 한다. 전직 요원 B씨는 “정보 당국 간 피 말리는 협상이 벌어지며 제3국의 도움을 받는 등 해외 정보 역량을 총동원하게 된다”고 밝혔다. 신언 전 파키스탄 대사는 “해외 파트 공조가 필수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아니면 간첩 수사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단서 포착부터 판결까지 10년 소요

간첩 한 명을 잡으려 10년 이상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다. 전직 수사관 C씨는 간첩 신문 도중 해외에서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의 정체를 파악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해당국의 국민으로 돼 있는 인물인데 북한 공작원이라며 이름까지 적시하더군요.” 즉각 해외 파트와 공조가 시작됐다. 다각도로 추적해 북한 사람이라는 단서를 잡아내는 데만 몇 년 걸렸다. 그가 남한 내 간첩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에 수년이 소요됐다.

 

남한 간첩의 신원을 확인한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된다. 결정적인 물증이 없으면, 재판에서 무죄가 나올 수 있다. 극비의 수사 기법을 통해 그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장면을 잡았다. 첫 단서를 포착한 때부터 간첩죄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한번 발령을 받으면 대공수사국에 뼈를 묻는 국정원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수사다. 공안통인 전직 검찰 간부는 “간첩을 잡으려면 10년 이상 사명감으로 지속해야 하는데, 경찰은 승진하면 인사이동을 통해 편한 보직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국정원 수사권 폐지는 간첩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평생 한 분야에 집중하며 축적한 전문성은 간첩 설득에 긴요하다. 남파 간첩 ‘은하수’를 신문했던 D씨는 “조사 도중 요덕수용소 주변 약도를 그리길래 ‘여기 방앗간이 있지 않으냐’고 지적하자 놀라며 태도가 변하더라”고 회상했다.

 

"20년은 근무해야 제대로 수사 가능"

간첩은 수사가 가장 힘든 상대로 꼽힌다. 황흥익 단국대 겸임교수는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기에 죄책감이 없고 사상무장이 철저한 간첩을 신문하려면 국정원의 전문적인 기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A씨는 “요즘 간첩은 수사 요원을 법적으로 역공하는 기법도 엄청나다”며 “20년 정도는 대공 업무를 해야 간첩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간첩의 주도면밀함은 수사관들을 아찔한 순간으로 몬다. 1997년 부부 간첩 사건 당시 체포된 강연정이 독약 앰풀(1회용 용기)로 자살했다. 28살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도 놀랍지만, 철저한 몸수색에도 발견되지 않도록 앰풀을 숨긴 기법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C씨는 안가의 한 방에서 숙식해온 간첩이 며칠 뒤 “함께 죽으려 했는데 너무 인간적으로 대해줘 마음이 바뀌었다”며 어디선가 면도날을 꺼내 머리가 쭈뼛했던 기억이 있다.


무수한 성공과 실패 경험이 국정원 요원을 단련시킨다. 한 전직 경찰 대공수사 간부의 견해다. “오래전엔 경찰이 대공수사를 가장 잘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대공수사를 강화하고 해외 공작이 중요해지면서 국정원이 주도하게 됐다. 경찰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 고문치사’가 벌어진 뒤 수사 역량이 위축됐다. 과거로 돌아가겠다면 조직과 인력을 대폭 늘리고 최소 5년은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그래도 해외 수사는 국정원이 맡아야 한다. 올해 말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면 간첩은 이제 못 잡는다고 보면 된다.”

 

경찰 "대공 수사 기관은 원래 우리"

경찰에선 자신감을 표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6일 “1945년 이후로 경찰은 대공 수사의 본래적이고 1차적인 수사기관”이라며 “경찰의 대공수사 역량이 높아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출신인 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개정 국정원법상 국정원은 수사권만 사라졌지 정보 수집이나 조사 권한은 보유한다”며 경찰과 정보 공유만 잘하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사무총장과 함께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 자리를 돌아봤다. 정치인·언론인이 끌려왔다는 설명이 붙은 ‘제6별관’이 보인다. 터널을 지나자 나타난 중부공원여가센터 건물이 간첩 수사를 하던 ‘제5별관’이다. 장 총장이 일하던 2층엔 ‘민생사법경찰단’이 들어왔다. 간첩 조사실이 있던 지하는 구내식당이 됐다.

 

그는 안기부가 1995년 내곡동으로 이전한 뒤 처음으로 건물에 들어와 봤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 시절 주변을 단장했다기에 아내와 와봤는데 온통 부정적 얘기들만 여기저기 써놓아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대공수사 요원들은 간첩 잡기에만 전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 파트에서 주로 근무한 국정원 간부는 “입사 초기 일이 힘들다고 선배에게 하소연하면 ‘우리보다 몇 배 힘든 대공수사 쪽을 생각하라’며 달래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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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찰총국 간부 “국정원 수사권 폐지 북한서 좋아할 것”

몇 년 전 탈북한 전 북한 정찰총국 간부는 지난 14일 기자와 통화에서 “북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정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북한) 요원들에게 ‘국정원 놈들을 절대로 믿지 말고 100% 경계하라’고 교육한다”고 소개했다.

 

인터넷 시대에 북한이 간첩을 보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엔 “남한은 여러 번 정권이 교체됐지만, 북한은 80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대남 전략을 계속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면 북에선 아주 좋아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강주안 논설위원

 

02-21 北 겁먹을 ‘진짜 응징’ 의지 보일 때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북한 ICBM에 미국은 시큰둥
화성-17형과 고체연료 미완성
한국 의식해 적당한 무력시위

600밀리 방사포 심각한 위협
군산·청주기지 상응 거리 탄착
한미연합군이 핵 공격 받은 셈

북한이 지난 8일 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이후 갑자기 도발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의 대응도 신속하고 긴밀하게 이뤄지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여론과 조금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먼저, 북한은 아직도 자신감이 부족해 보인다. 북한은 인민군 창건일(건군절) 기념 열병식에서 ‘개별목표 공격 다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MIRV)’로 인식되는 화성-17형 발사 차량을 무려 12대나 보여 주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대량 전력화를 과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신형 미사일을 과시하면서 고체연료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도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그러나 북한이 열병식 이후 처음 발사한 장거리미사일은 화성-17형이 아닌 화성-15형이었다. 무려 5768㎞의 높은 고도로 상승했으며, 989㎞ 거리의 동해상에 탄착했다. ICBM의 실거리 사격은 통상 고도가 1200∼2000㎞ 사이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고각 사격임을 알 수 있고, 미국 동부까지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치 못하게 했다. 하지만 미국 당국은 ‘통상적’이라는 시큰둥한 평가를 내놨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미지근한 반응은 이유가 있다. 북한은 열병식을 통해 요격이 어려운 다탄두 미사일인 화성-17형이나 고체연료 ICBM 시험발사를 할 것처럼 과시했지만, 실제 발사한 미사일은 화성-15형이었기 때문이다. 화성-17형과 고체연료 ICBM은 아직 성공할 자신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그날 김정은의 명령 이후 9시간 22분 만에 발사가 이뤄졌다. 이를 통해, 그만큼 대형 액체연료 ICBM은 발사 준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탐지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거리 1000㎞도 안 되는 스커드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액체연료와 산화제 주입에 4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화성-15형 같은 대형 미사일은 얼마나 오랫동안 연료를 주입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미국의 시큰둥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불고 있는 확장억제 의지의 신뢰성으로 인한 핵 개발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즉시 괌에 주둔하고 있는 B-1B 폭격기를 보내 무력시위에 나섰다. 언론들은 B-1B 폭격기와 한국 공군의 무력시위를 보며 한미동맹의 의지를 찬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B-1B는 한마디로 ‘설렁설렁 대응’한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타자가 타격 직전에 정신 집중하고 스윙해 보는 정도 수준도 아니고, 그냥 손 한 번 흔들어 보는 수준이었다. 지난 1월 1일 무력시위 때는 B-1B 폭격기 2대와 F-22 전투기까지 동원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번에는 비행 경로상의 주한미군 군산기지에서 F-16 전투기가 참가했을 뿐이다. 폭격기도 절반, 전투기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 그냥 가만히 있기는 뭐하니 대충 서비스하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북한이 겁을 먹지 않고 감히 F-16을 출격시킨 주한미군 군산기지와 F-35를 출격시킨 한국 공군 청주기지를 ‘공격’하는 무력시위를 했다. 북한이 지난 20일 아침에 발사한 600㎜ 방사포는 각각 395㎞와 337㎞를 비행했다는데, 이는 발사 지점에서 정확히 군산기지와 청주기지까지의 거리다. 북한은 그러면서 ‘전술핵 타격 수단’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군산기지와 청주기지를 전술핵으로 공격하는 훈련을 했다는 말이다. 한미연합군은 핵 공격을 받은 것이다. 가만 있어서 될 일인가?

정부는 미국에 더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런 미지근한 대응으론 북한이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강한 외교적 제재와 더 강한 군사적 압박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타자가 타격 전 진짜 정신 집중해서 투수를 노려보며 스윙하는 정도의 자세, 그러다가 공이 날아오면 진짜 칠 수도 있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북한 핵을 억제할 수 있다. 비록 북한은 아직 미국을 공격하는 ICBM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단거리 전술핵무기는 완성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ICBM은 미국의 관심사다. 미국의 시큰둥한 반응에 덩달아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우리 국민은 600㎜ 방사포가 정확한 거리를 비행했다는 데 집중해야 한다.

문화일보

 
 

02-22 이젠 핵전쟁 대비한 국방전략 세울 때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022 국방백서’가 지난주에 공개됐다. 문재인 정권의 국방백서는 판문점 선언과 9·19 군사합의를 과대 포장하며 북한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국군의 대적관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처음 출간된 국방백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임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북핵 위협에 대응할 한국형 3축 체계를 부활시켰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포함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했다. 새 백서는 우리 국방이 정상화하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국방은 정상화하는데 북핵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8일 열병식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차량 15대 이상을 동원해 대대적인 대미 협박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한·미 양국의 반응이 별로 없자, 열병식 열흘 만에 ICBM을 기습 발사했다. 한미동맹은 미국의 B-1B 폭격기와 한국의 F-35 스텔스전투기가 한 팀으로 비행하면서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 날 아침에 KN-25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했다. 이 방사포에 전술핵탄두를 장착해 한·미 연합의 공군 기지들을 초토화하겠다는 협박도 덧붙였다.

그런데 북한의 협박 내용은 공허하다. 열병식에 10대 이상 동원했던 화성-17형은 간데없고 낮은 성능의 화성-15형을 동원했다. 김정은의 명령에 따라 기습 발사했다는데 9시간여 뒤에 이뤄졌다. 전문가들이 기술적 한계를 지적하자 김여정은 발작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방사포탄에 핵탄두를 장착하겠다는데, 정작 KN-23에 장착할 핵탄두도 못 만들었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협박만 남발하는 북한 모습에서 김정은의 초조함을 읽을 수 있다.

최악의 식량난에도 민생 챙기기보다는 성대한 열병식을 중요시하는 게 북한이다. 군사적 성과 외엔 인민들에게 보여줄 게 없기 때문이다. 잔혹함이 미덕인 독재자의 자리를 딸이 물려받을 가능성은 작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북한이 왕정국가로 후대를 이어 계속 핵과 미사일을 부여잡고 우리를 압박할 것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핵과 미사일만큼은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강한 의지는 언젠가는 현실로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생 핵을 이고 살아야 하는 미래를 후대에 물려줄 순 없다. 북핵을 없애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핵 협박에 대한민국의 존망이 좌우돼선 안 된다. 우리에겐 한미동맹이 있다. 미국의 확장억제, 그중에서도 핵우산이 중요하다. 문제는, 미국의 핵전력이 여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전술핵 사용을 억제할 미국의 전술핵은 여유로운 편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확장억제를 우려하는 것이고, 일본이 반격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도 확장억제에 대한 우려가 그 배경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 좀 더 전향적인 국방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다. 한국형 3축 체계를 넘어, 북핵 위협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의 핵공유 단계까지 제안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전력을 달라는 게 아니라, 미국 핵전략의 한 축으로 들어가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외교적 노력과 예산 준비 사항 등을 철저히 계산해 둬야 한다. 독자적인 핵무장을 얘기해도 더는 미국이 냉소하지 않을 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평화를 원한다면 핵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문화일보

 

02.23  6·25때 좌익의 학살....부자·경찰 가족이라고 죽이고 아기까지 水葬

진실화해위원회 6·25 가족 집단학살보고서

▲2017년 신안 임자면 진리 백산들에 세워진 순교기념비 제막식. 6·25 당시인 1950년 10월 4일 밤 이판일 장로 일가 12명은 집에서 수요 예배를 드리다 끌려 나와 다음날 새벽 이곳에서 좌익들이 휘두른 몽둥이와 죽창, 삽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판일 장로 아들인 이인재 목사는 가족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용서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진리교회

 

전남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에 살던 김기순(당시 48세) 일가 36명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초 지방 좌익에 끌려가 몰살당했다. 인민군이 퇴각하던 무렵이었다. ‘부유하다’는 게 빌미가 됐다. 김기순 부부와 아들, 동생 부부, 조카 등 35명은 동네 앞바다에 수장됐다. 시신은 옹암리 앞바다 갯벌에서 발견되거나 바닷가에 떠밀려 왔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신입생이던 김씨 장남 김수현은 고향 마을로 돌아오다 같은 동네 출신인 좌익들을 만났다. ‘다 아는 사람들인데 설마 우리를 죽이겠어’라고 했지만, 김수현은 이들에게 맞아 죽었다. 10남매 중 타지에 있던 남동생 둘만 겨우 살아남았다. 희생자 36명 중 10세 미만이 10명이나 됐다. ‘아기들을 수장하려고 가마니에 넣어서 가는데, 장난치는 줄 알고 웃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좌익의 가족 집단학살 사례

 

◇주민 모아놓고 죽창으로 가족 몰살

전남 영광 백수면에 살던 김진원(당시 68세)씨 일가 20명도 1950년 10월 3일 동네 저수지 인근 정자나무 아래로 끌려 나갔다. 지방 좌익이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부유하다’ ‘기독교인이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식구가 있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김진원은 이 동네 백수교회 장로였고, 가족 모두 교회 신자였다. 희생된 가족 중에는 여섯 살 손녀를 비롯, 미성년자도 여럿이었다. 이날 박모씨 가족 7명, 임모씨 가족 10명도 함께 희생됐다.

 

본지가 입수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말까지 진실 규명을 마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1039명 중 김기순 일가처럼 좌익·빨치산 등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경우는 308명이었다.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의 윤형수 일가 18명, 학산면 상월리의 김윤찬 일가 17명, 장흥군 대덕읍 연정리의 강주삼 일가 16명, 전남 화순군 북면의 김상규 일가 14명 등 10명 이상 떼죽음당한 사례도 많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22년 말 펴낸 보고서 중 일부다. 전남 신안 임자면 진리교회, 영광 백수면, 장흥 대덕읍, 영암 학산면에서 좌익 등 적대세력이 죽인 민간인 희생사건을 다뤘다.

 

◇'軍警이 가해자’ 신청 사건이 좌익보다 2.5배

진실화해위는 가족이 7명 이상 희생당한 사건을 집단적 가족 희생 사건으로 분류했다. 군경·우익 단체에 의해 가족이 집단 학살된 경우는 40명이었다. 7명 이상 희생은 없었고, 3명 이상으로 기준을 내려 얻은 숫자다. 좌익의 민간인 학살은 가족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이번 가족 집단 학살 통계는 위원회가 지난 1년 6개월간 진상 규명을 마친 사건(1039명)만 기준으로 했다. 위원회에 접수된 6·25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 우익을 가해 주체로 지목한 사건(9957건·1만256명)이 좌익·인민군을 지목한 사건(3885건·4032명)보다 2.5배쯤 많다. 민간인 희생 사건 진상조사가 끝나면, 군경, 우익 단체가 가해 주체인 사건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위원회는 “전체 조사 기간 절반쯤 지난 상태에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면서 “좌익의 민간인 학살은 가족을 몰살시키는 경우가 많고, 여성, 어린이, 고령자의 희생 비율이 높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경찰 가족의 집단 희생 많아

진실화해위의 민간인 희생 사건 보고서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경찰·공무원 가족’ ‘기독교인’이라거나 ‘잘산다’는 이유로 좌익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가족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영암 학산면 일대에선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상월리 김동진·김윤제(19명), 김윤찬(17명) 일가, 묵동리 고승환(11명) 일가, 독천리 박정안(7명) 일가, 용소리 곽사원(7명) 일가 등이다. 김동진의 사촌은 경찰이었는데, 빨치산들이 토벌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 앞산, 냇가에서 일가족 19명을 죽창으로 찔러 몰살시켰다고 한다. 김윤찬 일가도 아들이 경찰이라는 이유로 마을 뒷산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당했다. 좌우 대결의 선두에 있던 경찰을 가족으로 뒀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6·25당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좌익에게 목숨을 잃은 임자 진리교회 신자 48명을 추모하면서 세운 기념탑(1990년). 진리교회 입구에 있다.

 

◇임자 진리교회 신자 48명 집단 학살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 일가 12명은 1950년 10월 4일 밤 집에서 수요 예배를 드리던 중 습격을 받았다. 지방 좌익이 예배당을 폐쇄했기 때문에 집에 몰래 모였다. 일가는 포승줄에 묶여 근처 대기리 백산들로 끌려갔다. 좌익들은 이들을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한 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매장했다. 진리교회 신자 35명도 이판일 일가 피살을 전후해 희생됐다. 임자 진리교회는 당시 희생당한 신자 48명을 순교자로 기념하고 있다.

 

이판일 일가 희생자 중 일곱 살 조카 이완순을 비롯, 19세 미만 미성년자는 7명이다. 이완순은 그날 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가족이 끌려가는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이판일 일가를 죽이고 돌아오던 좌익에게 발견돼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다른 가족은 시신을 수습했지만 갯벌에 버려진 이완순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가 작년 말까지 조사를 마친 전남 영암 학산면, 장흥 대덕읍, 영광 백수면, 신안군 임자면(진리교회), 화순, 함평 등 여섯 지역에서 벌어진 좌익·인민군 학살의 공통점은 희생자 중 10세 이하 어린이가 많다는 점이다. 학산면(32명·24%), 대덕읍(21명·17%), 백수면(11명·17.7%), 임자면(10명·16%), 화순(10명·20%), 함평(3명·15%) 등이다. 살아남은 유족의 고통도 컸다. 위원회 보고서엔 ‘부모가 죽창에 찔려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평생 힘들게 살다가 사망했다’ ‘일가족 14명이 희생된 후 평생 악몽에 시달렸다’는 증언이 실려있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교과서에서 보도연맹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을 부각하고 좌익·인민군의 학살은 얼버무리기 때문에 6·25 당시 민간인 희생은 우리 군경이 주된 가해 주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번 조사는 좌익의 학살이 어린이와 여성, 고령자를 가리지 않는 비(非)인도적 가족 집단 학살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왜 식구 학살당한 교회에 돌아왔을까…

 

“아버지는 해군이 상륙할 때 부역자 색출 위원장으로 함께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을 죽인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이들을 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거예요.”

 

이성균(60·사진)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목사는 1950년 10월 초 지방 좌익에게 희생당한 이 교회 이판일 장로의 손자다. 장남인 이 목사의 아버지(이인재·1922~2009)는 결혼 후 분가해 목포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부모, 동생, 숙부·숙모와 사촌 등 일가 13명을 잃었다.

 

이 목사는 작년 3월 할아버지 등 일가 13명과 교회 신자 35명이 6·25 당시 희생당한 사건 진상을 밝혀달라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했다. 위원회는 작년 11월 29일 진리교회 신자 48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지방 좌익이 휘두른 몽둥이, 죽창, 삽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냈다.

 

이 목사는 “아버지가 혹시 가해자들이 피해를 볼까 봐 광목천에 태극기를 그린 완장을 만들어 나눠주면서 일종의 신원 보증을 해주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에도 ‘이인재가 좌익 가해자의 아들을 살려줬다’는 증언이 나온다. 원래 목수였던 아버지는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 마흔 무렵 목사가 됐다. 1956년 전도사로 진리교회에서 3년쯤 일했고, 1983년 다시 이 교회 담임 목사로 돌아와 10년 가까이 목회했다. “아버지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가해자의 아들 주례도 서줬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성균 목사는 2016년부터 진리교회 담임 목사로 일하고 있다. “생전에 아버지께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부모님과 동생 등 가족을 몰살한 가해자를 용서한 것까지는 그렇다쳐요. 그런데 왜 두 번이나 이 교회에 와서 가해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섬겼는지…. 저도 목사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진실규명결정서

진실화해위원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6·25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시기에 일어난 인권침해 등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설립한 독립적 조사 기관. 1기 (2005년~2010년)에 이어 2020년 12월 2기 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는 접수된 사건을 조사한 뒤, 위원회 의결을 거처 ‘진실규명’을 결정한다. 진실규명결정서는 위원회 조사 과정과 사실 확인 내용, 피해자 및 유가족에 대한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해 국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는다.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02.24 한국의 핵무장론을 두고 벌어지는 혼돈과 불신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월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져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북핵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한국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 지위 및 비확산 체제 지지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한국 대통령이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워싱턴 정가는 이 발언에 상당히 주목했다. 한국의 핵무장 심사숙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 헤드라인에 ‘악몽’이나 ‘재앙적’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내 관점은 한국의 핵무장 추진에 대한 찬반 여부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핵무장을 둘러싼 대화가 한미 언론에서 많이 다뤄지고 전문가들의 주요 토론 주제가 됐음에도, 혼돈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은 예전에는 강경 보수 진영에서만 논의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주류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돌아온 동료 학자가 “이런 대화는 과거에는 3차 정도 술자리를 가진 뒤 늦은 밤에나 나오곤 하는데, 이제는 아침에도 이런 대화가 나온다”고 했다.

 

왜 지금처럼 특별한 시기에 한국 주류에서 핵무장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일까? 첫째, 유럽에서의 전쟁이 세계를 더욱 불확실한 곳으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와 지구 건너편에 있는 한국 같은 나라들조차 외부 환경이 더욱 불안해졌다. 둘째, 중국은 2020년대 말까지 1500개의 핵탄두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서해, 한국 영공에서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하면서 안보 전문가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셋째,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고, 미사일 시험과 전술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걱정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마지막으로 ‘미국 제일주의’를 부르짖으며 동맹에 대한 안보 공약 철회를 꾀했던 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복귀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의 핵무장론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신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 비확산 문제에 정통한 많은 미국인은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핵무기 제조를 염두에 두고 핵분열 물질의 재처리 기술을 찾아내기 위해 은밀히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정책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백번도 말할 수 있지만, 비확산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반면 한국이 핵무장으로 갈 수 있다고 딱 한 번 이야기하면, 마치 한국의 진짜 의도인 것처럼 널리 인식될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론 논쟁을 둘러싼 혼돈 속에서 불신이 켜켜이 쌓여왔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한국인 71%가 핵무기 보유에 찬성한다는 시카고 국제문제협의회(CCGA)의 통계를 폭넓게 언급하고 있다. 내가 참석한 거의 모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여지없이 한국이 핵무장 도미노로 빠져들고 있다는 근거로 이 통계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건 말이 안 된다. 첫째, 일반적으로 핵무장에 대한 높은 대중적 여론이 있으면, 이는 미국의 안보나 핵우산 정책이 불확실하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당 조사에서 미국이 한국의 방위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확신하는지를 묻자 한국인 대다수(61%)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는 한국의 핵무장 찬성이 미국과의 동맹 관계나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신뢰의 결여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둘째, 한국의 핵무기에 대한 관심을 설명하는 다른 가능성은 북한의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 북한 정권의 침략 야욕을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북한이 비핵화할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압도적인 82%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셋째, 이 문제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위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세계 6위 군사 강국이자 10위 경제 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인류의 최신·최강 무기로 알려진 핵무기를 추구할 권리가 있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에서의 위신 때문에 핵무장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명망 있는 학술단체와 연구진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보고서의 설문조사가 보이는 것처럼 한국에서의 핵무장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혼돈되고 근거가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짚고 싶은 것이다.

 

한국이 핵무장으로 갈 것이라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기 전에, 이 현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체계적인 여론조사가 필요하다. 특히 일반 대중의 의견뿐 아니라 전략적 전문가·지식인층의 의견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적인 지도자들은 외교정책을 예측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여론이 아닌 해당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지식인들과의 교감과 안목을 중시해왔다. 만일 우리가 혼돈을 줄이고, 투명성을 증진시키며, 한국의 핵무기 선택과 관련한 동맹 간 불신을 줄이려면, 이 현안에 대해 전문가·지식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일보 빅터 차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

 

02.25 민노총 간부, 간첩단 연락책에 “대우조선서 역량 구축중” 보고

파업이후 손해배상 상황도 넘겨… 노조원 대상 정치성향 파악 정황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 23일 민노총 금속노조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회장 A(55)씨, 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부장 B(53)씨의 사무실과 자택, 차량 등을 압수수색했다. 당국은 작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을 주도·지원했던 두 사람을 경남 창원의 ‘자주통일 민중전위(자통)’ 조직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간첩단 혐의를 받는 ‘자통’은 조직원들이 줄줄이 구속돼 있다.

 

24일 본지 취재 결과, 국정원이 압수수색 당시 제시한 영장에는 대우조선해양과 관련된 자통 조직원들의 활동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재된 것으로 전해졌다. 자통의 총책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황모씨는 지난 2019년 7월쯤 다른 조직원 성모씨에게 ‘A씨는 대우조선해양 노동사업에 집중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황씨와 성씨는 캄보디아 등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촉한 뒤 2016년쯤 자통을 결성해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혐의 등으로 지난 1일 구속됐다.

 

이후 A씨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관련 활동을 하며 ‘대우조선해양에서 역량을 구축하고 있다’는 내용 등을 성씨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특히 A씨는 작년 6~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옥포조선소 무단 점거 농성을 주도한 뒤, 파업 이후 손해배상 상황 등을 정리해 성씨에게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A·B씨가 경남 지역 진보 성향 노동조합의 조합원 규모와 그들 중 일부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A·B씨가 작년 8~10월 작성한 ‘지역 보고’에는 ‘자통 관련 의식화·조직화 사업은 OO시민모임이 담당’ ‘핵심 활동가를 반드시 육성해야 조직지도체계를 갖출 수 있음’과 같은 조직화 계획 수립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됐다고 한다.

 

방첩 당국은 A·B씨가 연락책인 성씨에게 보고한 자료 중 일부가 성씨를 통해 북한으로 넘어간 정황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은 A씨가 자통 상부를 통해 북한 지령을 전달받고 대우조선해양 파업을 주도했는지를 집중 수사 중이다.

조선일보 이세영 기자

 

02.27 박정희 사단장도 거쳐갔다…중공군 이긴 첫 부대, 7사단 77년사

국군 창설의 발자취를 따라 6·25 전쟁의 시작과 끝을 눈에 담다보면 77년에 걸친 이 부대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칠성부대로 불리는 제7보병사단과 그 예하 여단들 이야기다.

 

▲육군 7사단 장병들이 훈련하고 있다. 7사단

 

7사단 연승여단의 77번째 생일

육군에 따르면 7사단 예하 연승여단은 26일로 창설 77주년을 맞이했다. 국방경비대 시절이었던 1946년 2월 26일 전북 익산에서 창설된 보병 연대가 모태다. 1949년에는 지리산에서 공비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국군 최초로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애칭과 함께 표창을 받았다. ‘연승부대’라는 여단 애칭은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지었다.

 

▲육군 7사단 장병들이 훈련하고 있다. 7사단

 

지금 7사단을 구성하는 독수리·상승불사조여단도 국방경비대와 뿌리를 함께 한다. 독수리여단의 전신은 1946년 1월 29일 부산에서, 상승불사조여단의 전신은 4월 1일 춘천에서 각각 창설됐다. 국방경비대는 이들 연대와 함께 미 군정기인 46년 모습을 갖춘 뒤 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규군의 밑바탕이 됐다. 이 때문에 이들 3개 연대는 국군의 모태다.

 

그리고 이들 여단을 품은 7사단은 창군 멤버인 메이커 사단(단대호가 한 자릿수인 사단)이다.

 

낙동강 전선 지킨 뒤 평양 입성의 주역

연승여단은 49년 6월 창설된 7사단의 예비대였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기 10일 전 50년 6월 15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됐다. 이후 전쟁 첫날 38선의 경비를 맡던 7사단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지원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의정부 전투에서 패하고 낙동강까지 밀려난 연승여단은 재정비를 거쳐 같은 해 8월 20일 독수리·상승불사조여단과 함께 7사단 예하로 다시 창설됐다.

 

당시 구성은 지금도 7사단의 주축인데 재창설된 직후부터 전과를 올렸다. 7사단은 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치러진 영천 대회전(大會戰)에서 적 3000여 명을 사살한 전공으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육군 7사단 장병들이 훈련하고 있다. 7사단

 

7사단은 평양 입성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국군이 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뒤 7사단은 같은 달 18일 김일성 종합대학교 옥상에 태극기를 올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평양을 작전 영역으로 삼는 1사단뿐 아니라 7사단도 가세해 평양 탈환 작전을 펼친 것이다.

 

중공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한 부대도 7사단이었다. 7사단은 50년 11월 1일부터 일주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평안남도 개천군 비호산 전투에서 중공군을 무찔렀다. 7사단 측은 “아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칠 수 있게 했다”고 당시 전투를 평가했다.

 

영화 속 '고지전'처럼…피로 이뤄낸 최후의 승리

영화 ‘고지전’을 보면 신병이 작품 속 가상 부대인 ‘악어중대’로 향한다. 악어중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루한 고지전을 이어간다.

 

영화의 실제 모델인 7사단은 정전 직전인 53년 7월 20일부터 7월 24일까지 강원도 김화군의 425·406고지 전투에서 적과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곳 화천발전소를 뺏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화철발전소는 당시 한국에서 사용하는 전기 30%를 생산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425·406고지 전투는 6·25 전쟁의 국군 최후 승전으로 기록됐다. 해당 승리로 7사단은 화천발전소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38선을 35㎞ 북상시킨 상태로 휴전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자칫 현재 강원도 내 철원과 화천이 북한으로 넘어갈 뻔한 장면이었다.

 

7사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단장을 맡은 부대로도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57년에 부임해 사단에 ‘상승칠성’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싸우면 항상 이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7사단 장병들이 감시등이 켜진 철책선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중앙포토

 

2015년 7월 제1야전군 GOP에 과학화경계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사단도 7사단이다. 7사단이 지키는 구역은 유사시 북한의 주요 침공로 중 하나다. 그만큼 막중한 임무가 7사단에게 주어졌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02.27 “참외 오염시킨다”던 사드 전자파, 기준치의 2600분의 1

▲18일 오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기지. 2022.8.18/뉴스1

 

경북 성주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기지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초안이 공개됐다. 핵심이었던 사드 레이더 전자파 수치는 ㎡당 0.003845W로 기준치인 ㎡당 10W의 2600분의 1 수준이었다.

 

애초부터 이런 결과는 예상된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해발 400m에 있는 사드 레이더가 하늘을 향하기 때문에 땅에 전자파 영향이 적다”고 했다. 전파는 직진하니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2017년 임시 배치 직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과 좌파 단체들은 전자파 괴담을 퍼뜨렸고, 그에 빠진 일부 주민들이 사드 장비와 물품 반입을 막으며 반발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사드 반대 집회에서 “전자파 밑에서 내 몸이 튀겨질 것 같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다. 사드 반대 단체 등은 “사드 전자파가 참외까지 오염시킨다”며 성주 참외를 ‘전자레인지 참외’라고 불렀다. 이들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는 이미 괌의 미군 기지에서 사드 레이더 전자파를 측정해 인체 보호 기준치의 0.007%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였다.

 

민주당은 정권을 잡고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 박근혜 정부는 6개월 정도 걸리는 소규모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사드를 정식 배치할 계획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1년 이상 걸리는 일반 환경평가를 받도록 방침을 바꿨다. 주민 반발을 이유로 환경평가 첫 단계인 평가협의회 구성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이를 본격화해 임시 배치 5년 만인 작년 8월 평가 절차를 시작했고, 그 결과가 이제야 나온 것이다.

 

환경평가는 사드 기지 정상화의 마지막 절차다. 평가가 종료되면 2017년 4월부터 임시 배치된 상태인 사드 기지가 6년 만에 정상 작전 배치 상태로 전환된다. 사드는 북한 미사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체계다. 대한민국 생존이 걸린 방어 시설을 제대로 설치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황당무계한 괴담을 퍼뜨려 혼란과 갈등만 유발한 정치인들과 일부 세력은 모두 공개 사과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