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3-02/
02.01(수) 열 손가락 지문
국가인권위원회는 원격 얼굴인식 기술을 관계 법률이 마련되기 전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지난달 정부에 권고했다. 법무부의 공항 출입국관리시스템이나 경찰청의 범죄 피의자 3차원 얼굴 인식 시스템 등에서 이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인권위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침해할 위험성이 있다”고 권고 이유를 설명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2020년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감시 기술을 거부했던 나라에서도 대량 감시 도구가 일상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에서도 일상화될 조짐을 보이는 국가 감시에 인권위가 제동을 걸었다.
인권위의 결정은 국가의 개인 생체정보 대량 수집·활용이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도 던진다. 권위주의 정부는 국민 통제의 한 수단으로 개인 정보를 수집·활용해왔다. 얼굴인식 기술이 가장 활발히 활용되는 나라는 중국이다. 한국도 오랜 역사가 있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68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 좌우 엄지손가락 지문을 날인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그해 1월 북한 특수부대원 12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사건이 계기가 됐다. 1975년부터는 17세 이상 국민이라면 열 개 모든 손가락 지문 정보를 국가에 제공해야 한다.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이 헌법상 자기정보 통제권 등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제기됐었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과 2015년 두 차례 판단을 내렸다. 모두 합헌이었다. “지문 수집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범죄 수사 등 공익목적에 비해 크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둘 다 헌법재판관 6대 3의 결론이었다. 소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행정의 편의성을 국민의 기본권보다 앞세운 발상”(2005년),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2015년)며 위헌 의견을 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다수의 공익보다 소수의 인권에 마음을 썼던 재판관들의 의견에 더 눈길이 간다.
인권 감수성이 예민해졌다. 인권위는 2019년 초등학생 지문인식 출입시스템에 대해서도 “아동의 기본권을 최소한으로 제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권고했다. 이런 시대다. 범죄자를 잡기 위해 모든 국민이 여전히 지문 정보를 제공해야 할까. 헌재가 십지(十指) 날인을 다시 판단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2.02 우크라 전쟁과 올림픽 정신
놀이나 게임, 운동경기를 할 때 ‘올림픽 정신’을 들먹이는 사람 치고 잘하거나 제대로 하는 이를 본 기억이 없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정신은 기록이나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참가에 의의를 둔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근대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의 이상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게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며, 성공하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라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공식 설명 또한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 평화의 증진’이다. 금메달이나 세계신기록, 종합우승 등과 거리가 멀다.
최근에 IOC가 스스로 선언한 ‘올림픽 정신’으로 구설에 올랐다. “올림픽 정신에 따라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내년 파리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발표한 게 논란이 됐다. 두 나라는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들이다. IOC는 “어떤 선수도 러시아나 벨라루스의 여권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출전이 금지되어선 안 된다”면서 “‘중립선수’ 자격으로 파리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설명했다.
언뜻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경기장 밖 상황을 고려하지 말고 모두 한데 모이자’는 올림픽 정신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판단된다. 그런데도 유럽 각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건 IOC가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갈팡질팡한 데 원인이 있다.
지난해 이맘때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IOC는 국제사회의 제재 분위기에 발 빠르게 동참했다. 모든 종목에서 두 나라 선수들을 퇴출했고, 국제대회 개최권도 박탈했다. 회의나 행사 참석도 제한해 국제 스포츠계에서 철저히 고립시켰다.
전쟁 양상은 달라진 게 없는데, 불과 1년 사이에 IOC의 입장이 180도 바뀐 게 논란의 원인이다. ‘예상외로 전쟁이 길어져 선수들만이라도 구제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라는 해석도 마뜩잖다. 전쟁 기간에 따라 올림픽 정신이 달라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선수 구제라는 IOC의 의지가 순수하다면 1년 만에 결정을 번복한 이유부터 제대로 해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사과도 해야 한다. 올림픽 정신이라는 숭고한 명제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식으로 적용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2-03(금) 대변인
2015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시절 상근부대변인은 7명이었다. 각 최고위원들이 자기 사람을 내정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는 친문과 비문 간 분열 양상이 극심해 ‘봉숭아 학당’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2021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캠프는 대변인만 30명이 넘었다. 경선 당시 각 캠프 대변인단을 전부 대변인으로 임명하면서다. 내부에서도 “통제가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한때 대변인을 해촉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나중에 공보단장과 3명의 수석대변인만 논평과 브리핑을 발표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2023년 민주당의 대변인단은 12명이다. 수석대변인 1명과 당대변인, 원외대변인, 상근부대변인 3명씩, 원내대변인 2명을 합쳐서다. 각 수석대변인, 원내대변인 2명씩과 원외대변인 1명, 4명의 부대변인을 두고 있는 국민의힘보다 많다. 민주당은 당대표와 원내대표 일정을 공개하면서 당번 대변인도 공지한다. 민주당에서 당과 선거캠프 대변인만 8번 역임한 우상호(4선) 의원조차 “대변인을 논공행상식으로 남발하는 건 잘못됐다”고 말한다. 정치가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대변인 자리를 선호하게 된 분위기 탓이다. 특히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는 비례대표 의원들 사이에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대변인 자리 쟁탈이 치열하다.
대변인은 주요 회의에 배석해 결정권자인 당대표와 지도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핵심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의 박수현 초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을 적은 수첩을 잃어버릴까 봐 양복에 실로 매달기까지 했다. 대통령 입의 무게와 책무였다. 민주당 대변인 사이에서도 “요일별로 정해놓고 일을 하니 현안에 대한 밀착도가 떨어진다”는 소리가 나온다. 원로 정객들은 “옛날엔 대변인이 1명이라 말의 통로가 딱 일원화되고, 딴말이 서로 안 나왔다. 대변인의 권위가 있었다”고 말한다.
대변인을 부처 공보실장 수준으로 여겨도 문제다. 용산 대통령실의 대변인은 5개월 넘게 공석이다. 정치권에서 역대 명대변인으로는 민주자유당 박희태 대변인과 평화민주당 박상천 대변인 콤비가 꼽힌다. 그들이 주고받은 촌철살인(寸鐵殺人) 논평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은 대변인 정치의 실종 상태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2.06(월) 적정 기술
기술의 진보가 불편할 때가 있다. 일자리 감소 우려와 같은 거시적인 고민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했던 발전은 무선 이어폰이다.
나의 ‘결함’이 원인이긴 하다. 자타 공인 ‘호갱님’답게 줄 서서 에어팟 프로2(당시 거의 30만원)를 살 때만 해도 “인류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감격스러웠다. 문제는 내 왼쪽 외이도. 희한하게 그 어떤 에어팟 팁(이어폰에 씌우는 고무 캡, 3종류가 제공됐다)과도 맞질 않는다. 이걸 끼고 유선의 한계를 넘어 날아다녀야 하는데, 현실은 빨리 걷기만 해도 빠져 보도블록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광고에서처럼 멋지게 활용하려면, 왼쪽 귀 성형이 필요하다.
폰에서 스테레오 단자가 사라져 이젠 유선 이어폰으로 회귀도 어렵다. 애플의 끝없는 가격 인상에 정이 떨어진 지난해 말, 갤럭시로 돌아서면서 장만한 버즈2프로(쿠폰을 총동원해 20만원대)도 비슷하게 불편하다. 왼쪽이 잘 빠지는 것에 더해, 미세한 동작으로도 연결이 자주 중단된다.
무선 이어폰이 적어도 내겐 불필요한 진보였다는 말을 길게 했다. 내겐 과다한 기술이었지만, 제조사엔 매출 증대를 안겨준 따뜻한 기술이다. 과학의 발전은 어쨌든 밝은 미래와 연결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지만, 나와 무관하거나 불필요하거나 때로는 피해를 줄 수 있다.
빅테크 기업의 알고리즘 고도화가 귀신같이 사용자 마음을 잡아내 소비를 촉진하는 것 외에 인류의 삶에 어떤 구체적 기여를 할지, 챗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 돌풍이 누구 좋은 일을 할지 따지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은 경이로운 도전이지만, 빌 게이츠의 눈에는 ‘돈 낭비’인 것처럼 말이다.
소설가 김초엽과 변호사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는 언젠가 극복될 수 있다’는 기술의 약속, 그 의미를 탐구한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인간의 한계를 넘는 사이보그는 기술을 통한 장애의 종식을 약속한다. 현실에선 ‘계단 오르는 휠체어’가 개발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보급되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지하철역 경사로 설치조차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 인류에게도 적정 기술이 무엇인지, 그 고민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전영선 K엔터팀장
02-07 디스인플레이션
지난 1일(현지시간) 나스닥 지수를 단번에 2% 끌어올린 마법의 단어가 있다.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다. 이날 기준금리 결정 회의를 마치고 나온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45분간 회견에서 이 단어를 15번 말했다. “가장 환영할 만한”, “좋은”, “대단한” 같은 요란한 수식어와 함께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도, 디플레이션(물가 하락)도 아니고, 도대체 뭐길래 ‘세계 경제 대통령’ 파월을 흥분하게 한 걸까. 디스인플레이션은 디플레이션과 비슷하게 읽히지만 뜻은 엄연히 다르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오르긴 하지만 그 폭이 점차 줄어드는 걸 말한다. 예컨대 전년 대비 5%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 3%로 내려가면 디스인플레이션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물가 상승률이 -1%, -2%로 추락하면 디플레이션이다. 디스인플레이션과 달리 임금과 물건값 모두 내려가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뜻한다.
미국에서 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때는 1980년 후반과 2000년대 사이다. 폴 볼커 전 Fed 의장이 ‘인플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다. 볼커가 금리를 연 20%까지 끌어올리는 극약 처방을 한 덕에 물가는 진정됐다. 중앙은행은 여유롭게 통화정책을 펼쳤고, 미 경제는 황금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지난해 6월 9.1%에 달했던 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월 6.5%로 내려앉았다. 여전히 높지만 상승 속도는 더뎌졌다. 파월이 이런 디스인플레이션 조짐에 흥분하는 건 당연하다. 물가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여서다. 금리 인상 행진이 끝을 향해 간다는 기대에 시장은 환호했다.
하지만 안도할 때는 아니다. 주춤한 물가지표에 금리를 섣불리 내렸다가 초고물가 역풍을 불러온 아서 번즈 전 Fed 의장(1970~78년 재임), 거품을 꺼뜨리겠다며 금리를 지나치게 올렸다 ‘잃어버린 20년’을 불러온 미에노 야스시 전 일본은행 총재(1989~94년 재임) 등 디스인플레이션 가면에 속아 잘못된 선택을 한 사례는 무수하다.
저 멀리 언덕에 서 있는 게 개(디스인플레이션)인지, 늑대(인플레이션)인지, 더 무서운 호랑이(디플레이션)인지 아직은 결론 내기 이른 시간이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2.08 힌덴버그 리서치
1937년 5월 독일에서 출발한 비행선이 미국 뉴저지 해군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고래를 닮은 이 거대한 비행선을 보러 구경꾼이 몰렸다. 착륙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화염에 휩싸인 채 서서히 내려앉았고,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하기 힘든 헬륨 대신 가격이 싼 수소로 비행선을 띄운 게 원인이었다. 예고된 참극인 셈이다. 이 비행선이 바로 힌덴버그(Hindenburg)다.
힌덴버그 리서치는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다. 일반적인 행동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배당이나 기업 가치 제고엔 관심이 없다. 회계 부정이나 미공개 거래 등 기업의 비리를 공개한 뒤, 공매도로 돈을 번다. 이들은 ‘힌덴버그 참사와 같은 인재가 시장에서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기 전에 찾아낼 것’이라고 소개한다.
힌덴버그가 이름을 널리 알린 건 2020년이다. 혁신기업으로 칭송받던 니콜라가 사실 창업자 트레버 밀턴의 거짓말로 만든 회사라는 보고서를 냈는데 진실 여부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힌덴버그가 맞았다. 트레버는 회사를 떠났고, 사기 혐의도 유죄를 받았다. 한때 60달러를 넘어섰던 니콜라 주가는 현재 2달러대다.
새 공격 대상은 인도 아다니 그룹이다. 물류·에너지·유통 등 인도 경제의 동맥을 틀어쥔 인프라 회사다. 지난달 25일 힌덴버그는 아다니가 횡령·돈세탁·탈세 등 수많은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충격은 상당했다. 약 열흘 동안 아다니 그룹 7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이 150조원가량 증발했고, 신용등급은 강등됐다. 대출해준 은행은 물론 인도 증시 전체로 불똥이 튀어, 많은 외국인 투자자가 빠져나갔다.
힌덴버그를 정의의 탈을 쓴 악당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시장 정화를 내세우지만 결국은 돈을 목적으로 기업을 파괴한다는 지적이다. 실체 없는 공격이라면 동의하겠으나, 부정이 명백히 존재한다면 공매도꾼으로 몰아붙일 명분도 사라진다.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에 지친 다수의 개인투자자는 힌덴버그를 응원한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활발하다. 개인투자자의 급증과 궤를 같이한다. 주주 환원만 강조하고, 투자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주주 가치 제고는 국내 증시의 해묵은 과제이기도 하다. 기업이 적응해야 한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2.09 확증편향
# 분수대 옆에 선 남녀. 격앙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여자가 옷을 훌훌 벗어 속옷 바람으로 물속에 뛰어든다.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소녀. 여자의 어린 동생이다. 소녀는 남자가 언니를 괴롭혀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이라 오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어톤먼트』의 한 장면으로, 여기서 모든 갈등이 출발한다. 소설은 ‘속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잘못된 행동에 이르는 첫 단계가 ‘무지로 인한 오해’와 ‘확증편향’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녀의 작은 오해는 주변 정보를 왜곡한다. 남자가 “언니에게 전해달라”며 건넨 편지에 적힌 음담패설, 서재에서 목격한 남자와 언니의 애정행각 등을 오해의 프리즘으로 바라보며 그를 범죄자로 결론 내린다. 결국 남자에게 강간범이란 누명을 씌워 감옥과 전쟁터로 내몬다. ‘옳은 일’이라 믿으면서.
진실은 뭘까. 언니와 남자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소녀의 행동이 두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거다. 소설가를 꿈꿨던 소녀는 진실과 직면한 뒤 간호사로 일하며 속죄의 글을 쓴다.
소녀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 간 확증편향은 심리학 용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골라 믿고 반대되는 정보는 외면한 채 아집을 키워가는 현상이다.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오해를 검증 없이 신념으로 삼을 때 죄의식 없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고 소설은 경고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시간·돈·노력을 많이 투입할수록 확증편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한다. 오래도록 정성을 쏟으며 지켜온 믿음일수록 오류를 인정하기 어렵고 결국 끝까지 밀어붙이게 된단 얘기다.
지난 3일, 법원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1심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며 “죄질이 불량하고 죄책이 무겁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특히 “객관적 증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며 자신의 잘못에 눈을 감은 채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많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면서 항소할 뜻을 밝혔고, 그가 저지른 입시 비리의 수혜자인 딸은 유튜브에 등장해 “떳떳하다”며 웃었다. 법의 판결에도 뉘우침이 없는 부녀의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잘못된 믿음에 충실했을지, 그 과거를 짐작게 한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2.10(금) 시리아의 슬픔
시리아는 원래 축복받은 땅이었다. 나라를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 인근은 선사시대부터 풍요로웠다. 1916년 미국 고고학자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원지인 이 지역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로 이름 붙였다. 긴 역사 동안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비잔틴 제국, 프랑스 등이 시리아를 차례로 탐하고 통치했다.
이후 시리아의 현대사는 비극으로 점철됐다. 한국의 1.8배 크기 나라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운영되는 와중에 쿠데타, 장기 독재 등 내정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부터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 수 년간 옥토를 덮쳤다. 이슬람 무장단체(IS) 결성 등의 영향으로 2011년 내전이 터졌고, 국민은 14년째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은 지난해 6월 발간한 난민보고서에서 시리아 난민 규모가 680만 명으로 세계 1위라고 집계했다. 2위 베네수엘라(460만 명), 3위 아프가니스탄(270만 명) 등 다른 난민국보다 월등히 많다. 시리아인(2300만 명) 열 명 중 세 명이 타국을 떠돌고, 그나마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 거주지 불명 상태로 살아간다.
이 참혹한 삶에 지난 6일(이하 현지시간) 금세기 최악 수준의 연쇄 강진이 찾아왔다. 국경을 맞댄 튀르키예·시리아 두 나라의 지진 피해를 두고 국제사회가 벌써 공개적으로 ‘구호 소외’ 우려를 보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아델하이트 마르샹 비상대책관은 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이사회 회의에서 “튀르키예의 경우 위기에 대응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시리아에서는 인도주의적 지원 필요성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인적·물적 지원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튀르키예에 집중된다는 소식이다. 시리아는 유일한 민간 구호물자 공급로였던 북부 국경 일대 도로마저 이번 지진으로 다 잃은 상태다. 이 와중에 “정부를 통한 구호 승인”만을 고집 중인 시리아 독재정부의 태도가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재난도 온정도 국적과 빈부를 가리지 않기에, 국제사회의 빠르고 지혜로운 대처를 재촉해본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2.13(월) 특별함을 잃은 특별 공급
1960년대 급속한 산업화가 시작되며 도시는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년 40만 명씩 서울로 몰려왔는데 새 주택 공급은 3만~5만 가구 수준이었다. ‘살 곳’이 부족했고 좁은 땅에 여러 명이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주택난 해소를 위한 단비였다.
새 아파트를 원하는 수요는 많았고 정부는 가격 폭등을 우려해 값을 제한(분양가 상한제)했다. 대신 부양가족 수, 무주택 기간, 주택청약통장 가입 기간을 따져 점수(84점 만점)가 높은 순으로 당첨자를 가리는 방식(주택청약제도)을 도입했다. 건사해야 할 가족이 많고 오랫동안 집 없이 세를 살았다면 당첨에 유리했다.
여기에 특별 공급 제도가 더해졌다. 사회적·정책적으로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게 청약 우선권을 주자는 배려가 담긴 제도다. 일반 청약자보다 먼저 당첨 기회를 얻었는데 80년대만 해도 전체 공급 물량의 10% 정도였다.
그런데 특별 공급에 정치적 입김이 끼기 시작했다. 대상이 정권마다 빈번히 바뀌었다. 국가 유공자·재해민·철거민에서 외국 박사학위 취득자·영주귀국 과학자·공무원에 세계선수권대회 입상자, 영구불임 시술자 등까지 포함됐다. 현재는 신혼부부·다자녀·노부모부양·생애 최초 가구 등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공공분양주택인 ‘뉴홈’의 사전청약 특별공급 성적표가 나왔다. 지난 6~10일 접수 결과 평균 1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선방했다. 특히 이번 정부가 처음 시도한 ‘미혼 청년 특별공급’ 경쟁률은 50대 1을 넘었다. 그런데 어째 주객이 뒤바뀐 모양새다. 공공분양 물량(50만 가구)의 80%인 39만5000가구가 특별 공급이다. 일반 공급은 10만5000가구에 불과하다.
사회적 배려 대상에 대한 의구심도 든다. 정부는 그간 청약제도에서 배제됐던 미혼(1인 가구)에 대한 배려를 담았다. 그런데 모든 미혼이 대상이 아니다. 만 19~39세라는 제약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의 연령대별 비중은 20대(19.1%), 30대(16.8%), 50대(15.6%), 60대(15.6%), 40대(13.6%) 순이다. 이번 미혼 특공의 대상은 전체 1인 가구의 35.9%뿐이다. 미혼 청년이 기혼 청년이나 미혼 중장년보다 사회적으로 배려해야 할 대상인지 의문이다. 특별 공급은 정치적 계산에 따른 ‘표심’ 몰이 수단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특별할 수 있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2.14 다시, 몸의 시대
고대 그리스에서 신체 단련은 시민의 의무였다. 이상적인 몸은 조화롭게 발달한 심신의 표상이었다. 몸을 만드는 건 전쟁에 나가 승리할 확률을 높이는 훈련이기도 했다.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 신을 위한 제전이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올림픽 출전 선수뿐 아니라 일반인에도 신체 단련이 권장됐다. 그리스 시민은 체육관에서 벗은 몸으로 운동했다. 근육질 선수들이 나신으로 경기하는 모습은 그림과 조각 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대인도 탄탄한 몸을 갈구한다. ‘몸짱 아줌마’ 정다연씨가 등장했던 게 20년 전이다. 30대 후반의 평범한 주부가 운동으로 몸짱이 됐다는 스토리에 대중은 열광했다. 이후 20년, 근육으로 다져진 몸에 대한 선망은 점점 커진 듯하다. 스타나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바디 프로필’ 촬영 붐이 대표적인 예다. 몇 달씩 고강도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근육을 조각하듯 몸매를 만든다. ‘사진빨’을 위해 제모와 태닝을 하고, 전문 스튜디오에서 의상·헤어·메이크업까지 갖춰 촬영한다. 인스타그램에 ‘바디프로필’ 태그가 달린 게시물은 430만 건에 달한다. ‘오늘의 운동 완료’라는 뜻의 ‘오운완’ 태그는 460만 건을 넘어섰다.
MBC가 만든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은 이런 트렌드를 영리하게 포착했다. 상금 3억원을 두고 참가자 100명이 최고의 몸을 겨루는 서바이벌이다. 격투기 선수 추성훈을 비롯해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몸을 지닌 이들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참가자들의 몸과 근육의 움직임, 땀방울에 집중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로 돌아간 듯 육체와 육체가 맞붙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승부는 글로벌 시청자도 사로잡았다. 지난주, 한국 예능으론 처음으로 전 세계 넷플릭스 TV쇼 부문 1위를 찍었다.
잘 가꾼 몸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어낸 전리품이기도 하다. 첫 회에서 제작진은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내놨다. 그러나 프로그램 바깥에선 약물로 근육을 키운 ‘로이드’ 참가자 논란 등으로 시끄럽다. 건강을 위한 몸이 아니라, 전시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데는 돈이 들고 부작용도 따른다. 다시 돌아온 몸의 시대, 윤리적이고 정직한 몸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구해야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2.15 “명백한 불법행위”
일제 식민공간 속 조선인은 희생자이기만 했을까. 완바오산(萬寶山) 사건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1931년 4월 만주 완바오산 인근에서 황무지 개간을 위한 수로 공사를 두고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갈등이 있었다. 조선 농민은 일본의 무력을 등에 업어 사건을 유리하게 풀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결됐다. 그런데 그해 7월 2일 조선 농민이 중국인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가짜 뉴스가 보도됐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은 한반도로 번졌다. 이후 3일부터 30일까지 서울·평양·개성 등에서 조선인이 화교를 학살·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 조사에 따르면 이 기간 화교 127명이 숨지고, 393명이 다쳤다. 실제 피해는 더 컸다고 한다. ‘식민 지배 피해자’인 조선인 1000여 명이 ‘학살 가해자’로서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어떤 역사는 피해와 가해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지만 희생자로서의 기억은 가해의 기억을 압도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가짜 뉴스로 재일 조선인이 학살당한 간토 대지진 사건은 한국에서 중요하게 기술된다. 그러나 완바오산 사건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포로감시원 등으로서 이웃 국가에 혹독했던 조선인에 대한 기술은 역사서 밖으로 밀려나 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이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자기 민족의 희생만 절대화하는 인식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양성하고, 가해의 기억을 탈색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희생자 의식은 팔레스타인 공격의 정당성으로 작동하고, 일본의 원자폭탄 경험은 식민 지배 때 악행의 기억을 희석한다.
한국은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가해자이기도 했다. 지난 7일 한국 법원은 베트남 전쟁 당시 퐁니 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의 민간인 74명 학살에 대해 정부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법원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아직 베트남 희생자에게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엔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는 댓글도 보인다. 한국이 식민 지배 등 여러 희생의 역사를 겪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건에서 ‘집합적 무죄’(collective innocence)가 인정되는 건 아니다. ‘나’의 희생이 ‘너’의 희생보다 숭고한 건 아니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2.16 황제에게 박수를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8)는 골프 대중화를 이끈 주인공으로 첫 손에 꼽힌다. 1996년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 데뷔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헬로 월드(Hello world)!”를 외친 이후 골프의 정체성이 확 바뀌었다. 우즈와 손잡은 골프는 ‘부의 상징이자 특권층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스포츠로 거듭났다.
우즈의 전성기와 맞물려 골프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변화를 이끈 키워드는 ‘우즈처럼’이었다. 전 세계 골퍼 사이에 ‘비거리’와 ‘정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맞춤형 근육 단련에서 출발해 장비 개량, 코스 개선에 이르기까지 양적·질적 성장이 휘몰아쳤다.
‘수퍼스타’의 등장과 함께 PGA 투어에도 단비가 내렸다. 우즈가 데뷔할 때 7000만 달러(900억원) 수준이던 연간 총상금 액수는 2000년에 1억6500만 달러(2117억원)로, 2010년에는 3억 달러(3850억원)로 껑충 뛰었다. 많은 이들이 ‘골프’ 하면 여전히 우즈의 얼굴과 이름을, 빨강 셔츠와 검정 바지를, 그리고 2005년 마스터스 16번홀에서 그가 보여준 기적 같은 어프로치 샷을 먼저 떠올린다.
워낙 압도적인 인물이었기에 좌절의 골짜기도 깊었다. 연이은 스캔들과 부상, 그에 따른 부진이 심각했다. 2021년엔 끔찍한 자동차사고도 겪었다. 자신이 세운 재단 주최로 열린 골프대회(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했다가 돌아가던 중 전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와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한때 “골프 생명이 끝났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우즈는 1년 넘는 재활 끝에 기적처럼 부활했다.
영웅의 재기담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스토리다. 2년 만에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에 다시 나서는 우즈도 “참가에 의의를 두고자 나온 게 아니다. 목표는 우승”이라고 선언했다. 우즈의 도전정신을 일깨운 인물은 미국프로농구(NBA) 최고 스타인 ‘킹’ 르브론 제임스(38)다. 현역 선수로는 황혼기인 그가 지난 8일 NBA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장면이 우즈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황제’ 우즈 또한 PGA 투어에서 1승을 추가하면 샘 스니드(82승)를 넘어 최다 우승 신기록을 쓰게 된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2.17(금) 국회의원의 특권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은 국회의원이 누리는 대표적인 특권이다. 한국은 1948년 제헌헌법부터 국회의원의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을 보장해왔다.
면책특권(헌법 45조)은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한 발언과 표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권리다. 국회의원의 자유 발언과 소신 표결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면책특권의 역사는 1689년 영국 의회가 윌리엄 3세에게 헌정한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리장전은 13개 조항으로 이뤄졌다. ‘의회 안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의논한 내용은 의회 아닌 어떤 곳에서도 고발당하거나 심문당하지 않는다’는 9조는 의회 권력을 보호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럽의 여러 나라가 면책특권 엄격하게 해석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독일은 국회 안에서 직무상 한 발언이라고 해도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면책특권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 면책특권은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아니면 말고 식’ 폭로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체포특권에 대해선 영국은 1967년 의회특권특별위원회가 아예 폐지를 권고했다. 1603년 의회 특권법(Privilege of Parliament Act)을 제정하며 불체포특권을 처음 명문화한 나라도 영국이었다. 국왕이 의원을 구금해 의회를 무산시키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였다.
한국은 헌법 44조에서 국회의원은 현행범이 아닌 이상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되지 않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선거철이 되면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폐지에 대한 공약이 쏟아진다. 본래 취지와 달리 비리 의원 개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오·남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지금까지 국회에 제출된 체포·구속동의안 61건 중 16건만이 가결됐다.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 국민투표로 과반의 찬성을 얻도록 하는 개헌 사항이라 논의는 흐지부지 끝나고 마는 게 현실이다.
검찰이 16일 구속영장을 청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2월 대선 과정에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했다. 같은 해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선 면책특권 내려놓기를 선언했다. 이 대표가 스스로 영장실질심사에 나가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결단을 기대해본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2.20(월) 이수만의 퇴장
모두 잘못한 ‘진흙탕 싸움’이라고 말하기 전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SM엔터테인먼트 분쟁 사태에서 그래도 누구의 잘못이 가장 큰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보기는 4개다. ①쫓겨나자 지분을 경쟁사에 넘긴 이수만(71) 전 총괄프로듀서 ②더는 이수만에 복종할 수 없다며 입장 바꾼 SM 현 경영진 ③지배구조 개선으로 주가를 띄우겠다는 행동주의펀드 얼라인파트너스 ④이참에 SM이 갖고 싶은 하이브·카카오.
아무리 들여다봐도 ①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가 ‘아름다운 퇴장’을 실천할 기회를 여러 번 놓쳤기 때문이다. 그에겐 얼라인 개입 전인 지난 2019년에도 무난한 은퇴 기회가 있었다. SM주주인 KB자산운영(5.12%)은 당시 주주서한을 보내고 SM의 가장 큰 경영리스크인 라이크기획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SM은 “문화산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일축했다. 지난해 얼라인에 두 손 들기 전, SM 현 임원진은 같은 논리를 반복했다. “SM은 이수만 없으면 안 된다”고 답한 이성수 대표는 이제서야 “이수만이 무섭고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과연 상장사 대표로 적합한 말인가 싶긴 하지만, 그를 주범으로 모는 것도 무리다.
1대 주주 지분이 시장에 나온 뒤 매각 협상 테이블에서도 이수만은 타이밍을 놓쳤다. CJ ENM과 카카오를 오가며 벌인 3년의 줄다리기에선 믿기 힘든 요구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실은 SM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분석이 나왔던 이유다.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이수만이 SM 등기이사에서 물러났을 때가 개혁의 적기였다.
결국 기회를 다 놓친 뒤에 둔 수로 이수만 본인을 포함, 여럿이 다치게 됐다. 이성수 대표는 이수만의 여자친구 실명까지 적시하며 전선 확대를 시사하고 있다. 이수만을 찌르면 동시에 SM에도 상처가 나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이 싸움에서 가장 크게 훼손되는 건 SM 소속 가수라는 브랜드다. 에스파의 노래 가사 속 지구 생태계에 대한 우려가 이수만의 부동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폭로가 대표의 입을 통해 나온 마당이다. SM의 다른 음악에도 이런 불편한 진실이 내재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심기에 충분했다.
전영선 K엔터팀장
02.21 ‘조한제상서’ 기억납니까
1990년대 중반 은행은 대학 졸업생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한국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던 때다. 돈줄을 쥐고 있던 은행은 다른 업계를 압도하는 고액 연봉을 자랑했다.
1996년 11월 채용정보업체 리크루트가 초임을 조사했더니 금융계 대졸 신입사원이 1위였다. 연봉 평균이 1996만원이었다. 2위 화학·의약(1695만원), 3위 전자·통신(1668만원)을 크게 따돌렸다. 그런 금융계에서도 은행이 최상위였다. 그해 신입사원에게 연 2500만원 넘게 준 회사는 단 3개였는데, 그중 2개가 은행이었다.
퇴직금 격차는 더했다. 같은 해 12월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30년 근속 기준으로 금융업이 평균 1억6193만원에 달했다. 제조업(5800만원)의 3배에 육박했다.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30평(101㎡)이 1억7000만원 하던 시절이다. 은행원 퇴직금으로만 서울 강남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당시 은행의 주 수입은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차이로 얻는 수익)이었다. 전체 수익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은행의 황금기는 곧 막을 내렸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이자 장사에 의존했던 은행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조한제상서’로 불릴 만큼 기세등등했던 1~5위 조흥·한일·제일·상업·서울은행 모두 쓰러졌다.
최근 은행권 ‘돈 잔치’가 논란이다. 고금리로 벌어들인 수십조원 이익을 직원들 성과급·퇴직금으로 퍼주는 데 쓴다는 비판이다. 과점 은행들이 ‘안방(국내)’ 이자 장사에만 몰두하고, 내실을 쌓기보다 버는 만큼 쓰기 바쁘다. 20~30년 전과 그리 달라진 게 없다. 은행 이익에서 예대마진이 차지하는 비율도 여전히 80%를 웃돈다. 아직도 ‘천수답’ 장사다. 그런데 여기저기 위기 신호다. 고물가·고금리 장기화에 위기 때나 보이던 달러당 1300원 환율이 다시 등장했다.
1998년 제일은행은 대규모 명예퇴직을 단행했다. 홍보실은 떠나는 여러 직원의 모습을 25분짜리 ‘눈물의 비디오’(원제는 ‘내일을 준비하며’)에 담았다. “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변해야 한다, 어느 부서가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자신이 변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25년 전 비디오 속 선배 은행원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2.22 마일리지의 주인
동네 정육점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도 포인트를 쌓아준다. 또 와 달라는 사장님의 당근책이다. 이런 리워드 시스템이 전 산업에 걸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은 덴 항공 마일리지가 큰 역할을 했다. 1980년 미국 웨스턴항공은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구간 승객에게 50달러 쿠폰을 줬다. 다시 타면 여기서 요금을 깎아줬는데 이듬해부터 전 세계 항공사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최근 마일리지 제도 개편에 나선 대한항공이 뭇매를 맞고 있다.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거리’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현재 동남아는 동일하게 편도 2만 마일리지를 공제하는데 앞으로는 다낭 1만7500, 발리 2만7500 식으로 차이를 두겠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갈 땐 이득, 멀리 갈 땐 손해인 셈인데 대한항공은 다수 고객이 단거리 노선에서 마일리지를 쓰기 때문에 혜택이 커졌다고 설명한다.
모을 땐 신이 나도 마일리지 사용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단 좌석이 없다. 마일리지 좌석은 전체의 5%밖에 안 된다. 뉴욕 같은 인기 취항지는 대략 1년 전부터 예약 전쟁이 벌어진다. 단거리가 좋아서 많이 쓰는 게 아니란 얘기다. 힘들게 구해도 세금은 따로 낸다. 뉴욕을 오간다면 7만 마일리지를 쓰고도 대략 50만원을 추가로 결제해야 한다.
사용처를 늘리겠다며 요금 일부를 마일리지로 내는 복합결제를 시행하고, 자체 몰도 확대했지만 불만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게 제주 호텔은 주말 최대 3만6000 마일리지를 공제한다. 미국행 편도 항공권 가치다. A380 모형 비행기는 8000, 500㎖ 생수 30병은 3000 마일리지다. 포인트를 열심히 모았는데 정육점 사장이 고기 살 때는 안 되고, 파채나 사 먹으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회계상 마일리지는 부채인데 정작 항공사는 ‘보너스 항공권’이라 부른다. 뭔가 한참 잘못됐다. “진짜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무 장관의 압박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대한항공은 경쟁사보다 마일리지 공제율은 낮고, 적립률은 높다고 항변한다. 억울하겠으나 기껏 모아도 제대로 쓸 수 없는 고객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리지 못하는 듯하다. 대한항공은 독보적인 국내 1위다.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이 성사되면 당분간 경쟁자조차 없을 터다. 마일리지의 주인이 지금, 1등의 자격을 묻고 있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2.23 챗GPT 시대의 교육
최근 핀란드와 관련해 나토(NATO) 가입 여부가 가장 뜨거운 이슈지만, 한국인에게 이 나라는 예전부터 ‘교육 강국’으로 통했다. 2000년 OECD가 처음 실시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가 종합평가 1위를 차지하면서다. 3년 간격으로 시행하는 이 시험에서 핀란드는 2003년, 2006년 연속 종합 1위였다.
이후 강력한 사교육에 기반한 한국·싱가포르·중국 등에 밀려 핀란드 순위가 10위 정도로 뒤처졌지만, 세계인의 뇌리엔 공교육만으로 빼어난 성과를 이룬 핀란드가 ‘교육 천국’으로 각인됐다. 특히 과도한 경쟁과 사교육 열기로 종종 ‘압력밥솥’에 비유되는 우리 교육계엔 핀란드가 선망의 대상이다.
요사이 핀란드 교육이 다시 화제다. 지난해 불가리아의 ‘오픈 소사이어티 연구소’가 발표한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를 통한 정보 취득 능력과 이해력) 지수’에서 핀란드가 5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이 지수는 유럽 41개국을 대상으로, 국가별 언론 신뢰도와 평가자의 읽기·과학·수학 능력 등을 종합해 산출한다.
이 지수가 높은 이들은 콘텐트 속에서 허위 정보를 걸러낼 수 있어 가짜뉴스에 함몰되지 않으며 팩트(fact)를 찾아내는 회복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핀란드는 2013년부터 유치원과 학교는 물론 도서관 등에서 청·장년과 노년층에게도 미디어 속 ‘가짜 정보’ 식별법을 가르쳐왔다.
이는 챗GPT와 맞물려 주목받는다. 일각에선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콘텐트를 만들어내는 챗GPT가 지금의 소셜미디어를 대체할 가짜뉴스의 새 플랫폼이 될 거라 우려한다. 얼마 전 중국판 챗GPT 등장에, 대만이 “중국의 입장만을 대변할 테니, 대만판을 만들어 대응하겠다”고 했다. 챗GPT에 ‘의도된 데이터’만을 학습시켜 편향된 정보를 퍼뜨리는 스피커로 삼는 게 가능하단 얘기다.
한국은 챗GPT판 가짜뉴스에 대응할 준비가 됐을까. 2018년 PISA 결과, 읽은 내용 중 사실과 의견을 구별해낸 한국 학생은 25.6%였다. OECD 평균치의 절반 수준으로, 사실상 꼴찌다.
“나토 가입을 앞두고 러시아가 가짜뉴스를 대량 쏟아내지만, 우린 교육의 효과를 믿는다.” 핀란드 교육부 담당자의 말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데, 이들의 선구안과 자신감이 어느 때보다 부럽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2.24(금) 명예라는 이름
명예는 때로 명예롭기만 하다. 실질의 부재를 점잖게 포장할 때 우리는 종종 명예의 후광을 차용한다. 2002년 탄생한 한국 첫 ‘명예국민’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은 네덜란드인이다. 한때 대검찰청이 배우·교수·기업인에 검사복을 입혀 홍보 사진을 찍는 ‘명예검사’ 제도가 있었다. 명예직은 유급직의 대응 개념이다. 명예교수는 대학을 퇴직한 사람 중 선정한다.(교육부령 1호) 기업에서는 주로 경영 2선으로 물러난 전직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부른다.
정치권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 ‘명예총재’가 존재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얘기다. 퇴임 즈음 차기 대선 후보가 여당의 새 총재가 되면 임기 말 대통령이 명예총재로 밀려났다. 간혹 이 시기를 앞당기려는 도발적 시도가 있었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임기 중반이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당대회 뒤 총재는 내가 맡고 노 대통령은 명예총재를 맡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고(故) 김종필 전 총리가 생전 본지 회고록(2015년 10월 7일자)에서 밝힌 일화다.
그로부터 12년 뒤 당권과 당무에서 대통령을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당정분리가 본격화했다. 참여정부 출범 전후 여야가 당권·대권 분리와 원내대표제 등 이전보다 진일보한 민주정당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한쪽에서 “당청간 정책 소통 부족” 등 부작용을 지적하는 우려가 적잖았다. 그래서 10년 후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당청 원팀” “단합이 곧 유능” 같은 구호 세뇌로 이 부작용을 해소하려 했다. 임기 내내 민주당 지지율을 너끈히 상회한 문 대통령의 진영 영향력이 역할을 했다.
최근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명예 당 대표에 추대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치 입문 1년 8개월차. 여의도 정치에 뿌리가 깊지 않은 대통령을 위해 20년 전 사라진 ‘명예’ 포장을 되살려 씌우자는 주장이다. 효율적 당정 운영 회복이 절실하고, 총선 공천이 코앞인데 당내 비윤·비주류가 곳곳에서 득세하니 고민이 깊을 만도 하다. 다만 명예가 실질의 부재를 위안하면 그로 족하다. 대통령의 당무, 특히 공천 개입에 따른 파국이 유독 잦았던 보수 불명예사를 윤 대통령과 정권 핵심들이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2.27(월) 술값의 절반 넘는 세금
고려 중기의 풍류객 이규보가 쓴 가전체 설화 『국선생전』엔 이화주·자주·파파주 등 수십 가지 술이 등장한다. 한국의 술 문화는 집에서 담근 가양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빚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과 향이 달랐다.
술에 세금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부터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은 직접 술을 제조해 막대한 이익을 얻기 위해 1909년 최초의 ‘주세법’을 제정한다. 주종별(제조장별)로 설비·제조법·원료·수량 등 요건을 갖춰 면허를 받아야 술을 만들 수 있었다. 1916년 가양주 말살을 목표로 ‘주세령’을 반포했다.
‘자가용 술은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판매할 수 없다’ ‘자가용 술의 제조자가 사망했을 경우 상속인은 절대로 주류를 제조할 수 없다’ 등을 명시했다. 조항을 위반하면 2000원 이하 벌금을 물렸다. 당시 쌀 한 가마니(80㎏) 가격이 10원이었다. 1916년 36만 곳이었던 가양주 제조장은 1932년 1곳으로 줄었다. 대신 일본에서 들여온 ‘주정’이라 불리는 에탄올을 희석한 ‘일본식 청주’가 유통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일본의 주세법을 이어받은 종량제 기반의 주세법을 제정했고 한국전쟁이 터지며 ‘양곡보호령’을 선포했다. 일본식 청주를 제외한 쌀로 빚은 모든 술은 불법이 됐다. 1967년 11월 과세체계도 종가세로 전환됐는데 술의 양이 아니라 종류에 따라 세금을 매겼다.
현재 국내 주세 제도는 여전히 일본이 만든 주세법이 기반이다. 소주를 비롯해 위스키·브랜디·리큐르 같은 증류주는 출고원가의 72%가 세금이다. 여기에 주세액의 30%를 교육세로, 10%를 부가가치세로 내야 한다. 제조원가가 500원인 소주 한 병의 출고가가 1111원이 되는 이유다. 세계 대부분 국가는 에탄올 함유 비율에 따라 세금을 매긴다. 같은 양이라도 도수가 높은 술일수록 세율이 높다.
정부가 4월부터 주세를 올린다. 소주와 함께 ‘서민술’로 불리는 맥주에 붙는 세금이 3.57% 오른다. 주류업계에서 출고가를 올릴 조짐을 보이자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세금 좀 올랐다고 주류 가격을 그만큼 올려야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의문이다. 주세를 올릴 때 술값이 오를 것을 생각 못 했는지. “어쨌든 내 수익(세금)은 늘어야 하니 너희(주류업체) 수익을 줄여”라는 얘기인지.
최현주 증권부 기자
02.28(화) 법기술자의 자녀교육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 연진이가 주인공을 괴롭힌 이유다. 학폭에 아이의 힘만이 아니라 부모 배경까지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사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57) 변호사는 아들의 고교 재학시절 학폭 문제가 불거지자 하루 만에 자진 사퇴했다. 그는 사과문에서 "부모로서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려고 했지만 미흡한 점이 없었는지 다시 돌이켜 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학 처분을 막기 위해 사건을 대법원까지 가져가면서 1년 넘게 시간을 끌고, 아들이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도록 적극 개입했다는 사실이 판결문 등을 통해 알려졌다.
강도 높은 학교폭력이 생활기록부에 남으면 수시전형으로 명문대에 진학하기 쉽지 않다. 강제 전학은 퇴학 다음으로 높은 징계다. 결국 그의 아들은 수능 100%로만 뽑는 정시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반면 피해자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한다. 정씨가 임명직에서 즉각 사퇴하고도 후폭풍이 계속되는 이유다. 대입에서 수시 비중은 줄고 정시는 확대되는 추세다. 조국 전 장관 가족 등 사회지도층 입시 비리가 불거지면서 공정성이 최고의 가치로 떠올라서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든 수능 성적만 보고 선발하는 게 과연 공정하고 교육적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장서진은 잘 나가는 로펌 변호사다. 아들이 살인 용의자로 긴급체포되자 수사 과정에서 경찰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만 집중 공격한다. 막상 아들에게는 “너는 입 다물고 있어”라며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는 자식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는 부모가 아닌, ‘법기술자’로 실력을 발휘한다. 씁쓸하지만 현실에서 더 극적으로 목격되는 장면이다.
교육기본법 제 1장 제2조에선 교육의 목적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이라 정의한다. 사회지도층으로 군림하는 법기술자들이 과정이 어떠하든 간판을 획득하는 게 교육의 목적인양 전력질주하는 건 꼴사납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