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01/
01.02(월) 철거되는 힐튼호텔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긴급 방한한 IMF 협상단과 우리 정부의 비밀 협상이 힐튼호텔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본지가 먼저 알아내 동료 기자와 달려갔다. 20층도 넘는 호텔 어디에서 협상이 열리는지 찾을 길이 막막해 서성이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협상장에서 내려오던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관료와 딱 마주쳤다. 깜짝 놀라던 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협상장이 알려진 이후 힐튼호텔은 IMF 협상 내내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필자에게 힐튼호텔은 외환 위기 당시의 춥고 무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건축사에선 기념비적 공간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 철학을 한국 건축가가 한국 땅에 재해석한 건축물로 꼽힌다. 미스 반데어로에에게 수학하고 그의 건축 사무실에서 10년간 일한 ‘1세대 건축가’ 김종성씨가 설계했다. 일리노이 공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세계적 호텔을 지어달라”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요청을 받고 미국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국해서 힐튼호텔을 설계했다. 산을 등지는 배산(背山)이 아니라 남산 쪽으로 출입구를 내고 남산을 감싸안은 것처럼 살짝 꺾인 모양이다.
▶꼭대기층인 23층의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유명했다. 또 다른 반대편 끝에 대공포대가 있어 김 회장, 객실 손님, 군인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외국 귀빈 등을 펜트하우스로 초청해 식사 대접을 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초대받았다.
▶호텔을 완공하고 경영한 사람은 부인 정희자씨였다. 미국 힐튼 본사에서 ‘터프 마담’으로 통했다. 힐튼이 1년에 경영 수수료를 25%씩이나 떼가는 것에 딴지를 걸고 저돌적으로 협상해 수수료를 깎은 여장부였다. 호텔 개관 때 조각가 헨리 무어의 ‘여인상’을 설치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호텔에 문화 예술을 접목한 선구자였다. 이런 남다른 경영 덕에 전 세계 500개 힐튼호텔 가운데 최고의 호텔로까지 선정됐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1999년 싱가포르계 호텔 운영사에 팔렸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국내 자산 운용사에 재매각됐다. 신규 인수자가 힐튼호텔을 부수고 호텔·오피스·상업시설을 갖춘 복합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신라 범종을 녹여서 가마솥 만드는 일”이라며 건축계에서 비판이 거셌는데도 끝내 헐리게 됐다. 모기업 대우그룹에 이어 힐튼호텔까지 사라진다니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짓누른다.
01.03 책상 위 팻말 ‘The Buck Stops Here’
중국 제나라 환공은 늘 의자 오른편에 희한한 술독을 놔뒀다. 술이 비면 비스듬히 누웠다가 절반쯤 차면 똑바로 서고 가득 차면 다시 누웠다. 죽은 환공을 조문한 공자가 술독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다 배웠다고 교만하면 반드시 화를 부른다.” 공자는 같은 술독을 만들어 옆자리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

▶중국 후한의 학자 최원은 형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원수를 갚은 뒤 오래 도피 생활을 했다. 겨우 사면을 받아 돌아온 그는 과오를 뉘우치며 언행의 경계를 삼는 글을 지어 책상(座) 오른쪽(右)에 새겨넣었다(銘). ‘남의 허물 말하지 말고/자기 자랑 하지 마라/남에게 베푼 것 마음에 두지 말고/은혜를 받았으면 잊지 마라…’ 청나라 옹정제는 ‘위군난(爲君難·군주가 되는 길은 어렵다)’이란 좌우명(座右銘)을 새겼다.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 선발 면접에서 “졸업 성적이 몇 등이냐”는 질문에 “820명 중 59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해군 제독은 “그게 최선이었나”라고 반문했다. 충격을 받은 카터는 이를 성찰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의 자서전 제목도 ‘Why not the best’였다. 미국 독립 주역인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받은 편지 한 통이 평생의 십계명이 됐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마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에 항상 ‘The Buck Stops Here’라는 팻말을 뒀다. ‘책임을 떠넘길 곳이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의미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에 원폭 투하나 6·25 파병 결정 때도 이 문구를 보았다. 원래 ‘Buck’은 숫사슴이란 뜻인데 카드 게임 때 딜러에게 사슴뿔 칼을 넘겨주는 전통에서 ‘책임’이란 뜻이 생겼다. 영어로 ‘Pass the buck’은 책임을 전가한다는 뜻이다.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윤석열 대통령 사진을 보니 집무실 책상 위에 ‘The Buck Stops here’ 팻말이 놓여 있었다. 그는 대선 때 ‘집무실 책상에 두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내 책임을 잊지 않고 일깨워 줄 트루먼의 문구가 좋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말을 바이든 미 대통령이 들었는지 방한 때 그 팻말을 선물로 가져왔다고 한다. 당선인 때는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다. 많은 사람과 의논하겠지만 결정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팻말에 새긴 초심을 끝까지 지키길 바란다.
01.04 ‘외계어’가 된 한국 아파트 이름

▲3일 서울 중구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의 아파트 단지 모습. 2023.1.3/뉴스1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전남 나주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1차’와 2차로 25자다. 동탄의 ‘동탄시범타운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처럼 20자 넘는 곳은 여럿이다. 2019년 전국 아파트 단지명의 글자 수를 조사했더니 평균 9.84자였다. 1990년대엔 4.2자였다. 아파트 브랜드 ‘고급화’와 맞물려 길어지는 추세라 한다.
▶이름이 길면서 어렵기도 하다. 이탈리아어 루체(luce·빛)와 독일어 하임(heim·집)을 합친 ‘루체하임’, 영어 그레이스(grace·우아함)와 라틴어 움(um·공간)을 결합한 ‘그라시움’, 불어 오트(haute·고급)에 테르(terre·땅)를 합친 ‘오티에르’ 등 온갖 외국어가 동원된다. 아파트 이름을 이렇게 짓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나 싶다. 오죽하면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일부러 어렵게 지었다’는 우스개가 생겼겠나. ‘시어머니 못 오게 했더니 시누이 앞세워 오더라’ 같은 속편도 돈다.

▶한국식 아파트 작명법엔 ‘세련된 이름 짓자’는 취지 이상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한마디로 ‘돈’이다. 한강변에 짓는 아파트엔 ‘리버’를 꼭 넣는다. 단순히 강 옆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값이 오른다”며 주민이 요구해서다. 공원 근처이면 파크뷰, 숲이 있으면 포레, 학군이 좋거나 학원이 많으면 에듀, 주변에 4차로 이상 대로가 있으면 센트럴, 고가 인테리어를 썼으면 더퍼스트·베스트·노블 등으로 표현한다.
▶서울시가 난해하고 외국어 위주인 아파트 이름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짓도록 아파트 작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재건축·재개발을 추진 중인 시내 아파트 600여 곳에 권고할 방침이라고 한다. 취지는 좋지만 돈 앞에서 이런 지침이 먹힐까 싶다. 1970년대 아파트 이름을 힐탑·타워·렉스 등 영어로 짓는 게 유행하자 정부가 “우리말로 지으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장미·미주·은하·수정·개나리 등이 그때 생겨났다. 당시에도 아파트명을 강제할 법규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정부 시절이라 가능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팔 때 한국산임을 숨겼다. 그래야 유리했다. 그런데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며 일부 제품은 포장지에 한글을 넣어 한국산임을 알려야 오히려 잘 팔린다고 한다. 한국의 아파트 건축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파트가 돈 버는 투기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공간이란 인식이 확산되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 아파트 이름이 퍼질 것 같다.
01.05 비혼 선언

30대 직장인이 “결혼하지 않겠다”며 찍은 비혼식(非婚式)을 유튜브에서 봤다. 예복을 잘 차려입은 청년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고 쓴 비혼 선언문을 낭독하자 또래인 하객들이 박수로 축하했다. 청첩장 대신 비혼식 초대장을 받아 든 기혼 친구들은 “축의금을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못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했다.
▶결혼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연예·오락·일상·언어 등 곳곳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K팝에선 ‘걸그룹=사랑노래’ 공식이 이미 깨졌다. 얼마 전 새 앨범을 낸 걸그룹 ‘드림캐쳐’는 신곡 ‘비전’에서 ‘사막보다 메마른 이곳의/(중략)/ 그 갈라진 땅 위 그 틈에/ 깃발을 세우고 맞서 싸워’라고 노래했다. 사랑 노래에서 독립적인 삶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젊은 여성 팬의 취향 변화를 반영했다고 한다. 비혼 남녀의 일상을 관찰하는 TV 예능, 비혼으로 사는 노하우를 담은 유튜브 영상도 인기다.
▶변화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말 통계청 발표에서 19~34세 청년 중 연애 경험 있다는 응답은 65%였는데, 이 중 70%가 자발적으로 ‘솔로’를 택했다고 했다. 청춘남녀의 이성교제 비율은 1991년 53%에서 2021년 29%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결혼 건수는 지난 10년간 41%가 줄어 거의 반 토막 났다. 그사이 ‘노총각’ ‘노처녀’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사어(死語)가 됐다.
▶기업 복지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5대 그룹 중 처음으로 지난해 비혼 지원금 제도를 도입한 LG에서 2일 첫 비혼 선언 직원이 나왔다. 이튿날엔 2·3호 선언도 이어졌다. 이들은 결혼 축하금과 같은 금액의 지원금과 5일의 유급휴가를 받는다. 기업이 비혼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 복지 형평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기업들도 비혼자를 위한 복지를 속속 내놓고 있다. 무료 건강검진 대상을 ‘본인과 배우자’에서 ‘본인과 가족 1인’으로 바꾸고 반려동물 수당을 신설한 곳도 있다. 우수 인재를 확보하거나 유출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한다.
▶비혼 확산이 자기애 강한 젊은이들의 쿨한 선택인 것만은 아니다. 통계청 조사에서 비혼을 택한 이유를 봤더니 ‘결혼자금 부족’과 ‘고용 상태 불안’ 등 경제적 어려움이 40%를 넘었다. ‘혼자 사는 게 좋아서’는 20%에 불과했다. 직장 못 구해 좌절하고 월급으론 내 집 마련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청년들이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고 한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01.06 세브란스병원

▲서울 세브란스 병원./전기병 기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면 뽀송뽀송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환자복을 받는다. 병원이 최적 온도와 습도를 계산해 제공한다. 24시간 돌아가는 병원에서 환자 잠을 해치는 주범은 소음이다. 각종 상자 테이프를 뜯고 싸매는 과정에 소음이 많아 무소음 테이프로 바꿨다. 상자 작업은 별도 밀실에서 한다. 병실 화장실 변기 뚜껑에 소음 방지기를 달아 닫을 때 조용하다. 안대와 귀마개도 무상으로 제공한다.
▶병원 생활에 불만을 제기하는 환자 목소리를 세브란스는 복음(福音)이라고 부른다. 병원 발전에 도움 되는 금쪽같은 의견이라는 의미다. 일주일에 불만 260여 건, 칭찬 270여 건 정도 복음이 들어온다. 모든 불만 사안은 어떻게 개선됐는지 매주 병원장에게 보고한다. 연간 10만명이 넘는 퇴원 환자에게 휴대폰으로 병원 생활에 관한 설문을 보낸다. 병실 게시판에 질문을 적어 놓으면 회진할 때 의사가 답해준다.

▶요즘 웬만한 대학 병원 서비스는 환자 중심이다. 한 대학 병원은 처음 방문한 암 환자에게 경험 많은 간호사가 일대일로 붙어서 치료 과정을 같이하는 ‘환자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피검사에서 위험한 징후가 발견되면 집에 있는 환자에게 응급 문자를 보내준다. 의사 진료 장면을 녹화해 시선을 컴퓨터 모니터보다는 환자 눈에 맞추도록 교육한다. 10여 년 전 병원 기능이 큐어(cure·치료)에서 케어(care·돌봄)로 확대되면서 대학 병원마다 서비스 혁신 센터가 들어섰다.
▶국가고객만족도(NCSI) 조사는 기업과 기관의 품질 경쟁력 향상과 국민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한국생산성본부가 실시하는 대규모 고객 만족 측정 지표다. 최근 발표한 2022년 NCSI 순위에서 세브란스병원이 전체 1등에 올랐다. 2년 연속이다. 10위 안에 삼성서울, 서울성모, 서울아산, 고대안암, 서울대 등 병원이 무려 7곳이나 올랐다. 10년 전에는 롯데, 조선, 신라 등 호텔이 상위를 차지했는데, 이번에 호텔은 32~267위로 떨어졌다. 서비스 대명사인 특급 호텔은 이제 병원에서 배워야 한다.
▶병원 고객은 다들 몸과 마음이 다급한 응급 상태다. 환자들은 자기 목숨 건져줄 곳을 찾아 병원을 선택한다. 가장 불만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곳이 병원이다. 한때 대학 병원은 불친절, 권위적, 불통의 대명사였다. 그랬던 병원이 이제 고객 만족도 최고가 됐다. 최대 약점을 극복해 최대 강점으로 바꿔놓았다.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혁신하고 헌신하면 바뀐다. 세브란스 병원이 2년 연속으로 입증했다.
김철중 논설위원·의학전문기자
01.07(토) ‘이태원 참사’ 아닌 ‘핼러윈 참사’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 시민분향소 인근에 걸린 현수막들./연합뉴스
요즘 서울 이태원 광장 풍경은 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희생자 영정을 놓은 분향소 주위를 현수막들이 감싸고 있다. “국민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 “남의 죽음 위에 숟가락을 올려 정치 선동질 하지 말라”는 내용들이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사고 희생자 수를 나열한 현수막도 걸려 있다. “이재명 구속 수사하라”처럼 사고와 상관없는 정치 구호도 여럿이다. 여기서 “파이팅”을 외치면서 갈등을 조장한 정치인도 있었다.
▶참사 현장은 500m 떨어진 곳에 따로 있다. 추모가 어려울 만큼 참배객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유가족과 시민단체 일부가 이태원 서쪽 입구 광장에 분향소를 세웠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이를 비난하는 현수막이 대거 내걸린 것이다. 녹사평역 쪽에서 이태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탄식한다. 사고 현장이 가장 척박하고 살벌한 정치 갈등의 현장이 됐다.

▲/일러스트=박상훈
▶누구보다 이태원 상인들이 고통스럽다. 분향소 옆 한 건물은 1층 매장 전체가 문을 닫았다. 상점이든 주점이든 이런 곳에서 어떻게 영업이 가능하겠나. 참사가 일어난 곳도 아닌데 날벼락을 맞았다. 사고 후 두 달이 지났고, 해까지 넘겼는데 이태원 상인들은 반쪽 난 매출 그대로라고 한다. 주민들은 매일 갈등의 장면을 보면서 고통을 받는다. 갈등 주도 세력은 세월호 때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주민과 상인에게 이곳은 삶의 공간이다.
▶참사는 핼러윈 날 18㎡의 좁은 골목에서 일어났다. 이태원 1·2동은 1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1.43㎢ 넓이의 공간이다. 참사 현장은 이태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사건을 ‘이태원 참사’라고 한다. 국회는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라고 한다. ‘이태원 참사’는 일방적인 언어다. 주민과 상인에겐 삶의 공간에 부정적 족쇄를 영구히 채우는 폭력적인 말이기도 하다.
▶이번 사고는 핼러윈 축제 때 인원 과밀과 안전 관리 실패로 발생했다. 이태원은 사고가 일어난 곳의 거리 이름일 뿐 본질이 아니다. 지역을 고려해 영광 원전과 울진 원전 이름을 한빛과 한울 원전으로 바꾼 게 10년 전이다. 지역의 일부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고 그 지역 전체의 이름을 붙여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고는 ‘핼러윈 압사 사고’ 또는 ‘핼러윈 참사’라고 해야 한다. 이태원 주민과 상인들이 하루빨리 일상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01.09(월) ‘위스키 런’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양조장을 방문한 뒤 ‘위스키 성지 여행’이란 책을 썼다. “한 모금 마시면 ‘이게 대체 뭐지?’, 두 모금째는 ‘좀 색다른걸’ 하고, 세 모금 마시면 싱글 몰트의 팬이 되고 만다”고 했다. 싱글 몰트란 동일 증류소에서 100% 보리로 만든, 개성이 뚜렷한 위스키를 말한다. 한국 소설가 은희경도 ‘중국식 룰렛’에서 “위스키가 영혼이라면 싱글 몰트야말로 가장 정제된 형태”라고 극찬했다.

▲6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위스키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뉴스1
▶지난 주말 한 대형 마트가 스코틀랜드산 싱글 몰트, 발베니를 포함한 인기 위스키 1만 병을 할인 판매하자, 개점 전부터 위스키 런(whiskey-run)이 이어지며 순식간에 동이 났다. 남다른 소비를 원하는 2030세대 사이에 싱글 몰트가 핫 아이템으로 부상했다. 코로나 사태로 확산된 혼술·홈술 트렌드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됐다. 서울 성수동·한남동·용리단길 등 상권마다 위스키바가 넘쳐난다.
▶현재 위스키 생산 국가는 영국,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일본 등 5국 정도다. 일본이 위스키 강국이 된 것은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스물네 살 때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유학을 갔던 다케쓰루 마사타카 덕분이다. 와인 수입상 출신으로 산토리를 창업한 도리이 신지로가 다케쓰루와 합작, 결별, 경쟁하는 과정에서 일본 위스키 명품 야마자키, 히비키가 탄생했다.

/일러스트=김성규
▶위스키는 투자 대상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10년간 위스키 수익률(428%)은 자동차(164%), 와인(137%), 시계(108%)를 압도한다. 블록체인 기반 NFT(대체 불가 토큰) 기술이 진위 증명서 기능을 하며 위스키 투자 대중화 시대를 열고 있다. 최근 영국 글렌피딕은 1973년산 위스키 15병에 NFT 증명서를 부착해 병당 1만8000달러에 팔았다. 위스키 대량 공급을 위한 신기술도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한 벤처기업은 갓 생산된 증류주 원액과 나뭇조각(oak chip)을 스테인리스 통에 함께 넣고 특정 온도, 압력을 가해 닷새 만에 21년산 고급 위스키 맛을 낸다는 ‘초속성 위스키’를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 역사에선 1882년 한성순보의 수입품 관세를 다루는 뉴스에 ‘유사길(惟斯吉)’이란 이름으로 위스키가 처음 등장한다. 뭐든 빠르게 따라잡는 한국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국산 위스키가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산 싱글 몰트 만들기에 도전하는 사업가가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위스키 런이 대세라면 국산이 그 수혜를 누렸으면 한다.
01.10 ‘커피 공화국’
1898년 덕수궁, 고종은 저녁 식사 후 올라온 커피를 한모금 마시곤 맛이 이상해 내려놨다. 공금 횡령 혐의로 유배형을 받은 친러파 통역관이 앙심을 품고 궁중 요리사를 사주해 커피에 아편을 넣은 것이다. 커피를 많이 마신 세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시름시름 앓았다. 이 사건 후 척화파 대신 최익현은 “산해진미라 하더라도 외국 음식은 일절 먹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지난해 말 국내 커피·음료 점포는 전년 말보다 17.4% 증가한 9만9천개로 역대 최대, 1~11월 커피 수입액은 11억9천35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45.1% 늘었다. 2023.1.9/연합뉴스
▶하지만 한 세기 만에 커피는 한국인의 국민 음료가 됐다. 커피믹스가 대세였던 한국에 ‘원두커피’ 문화를 확산시킨 일등 공신은 스타벅스다. 1999년 이화여대 앞에서 1호점을 연 스타벅스는 스세권(스타벅스가 자리 잡은 상권)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커피 산업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스타벅스의 성공에 자극받은 국내 자본들이 앞다퉈 토종 브랜드를 선보이며 커피 브랜드 백가쟁명 시대를 열었다.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난하다. 연간 커피 소비량(2020년 기준)이 프랑스(551잔)에 이어 2위(367잔)로, 세계 평균(161잔)의 2배 이상 커피를 즐기고 있다. 인구 100만명당 커피점 수도 한국이 1384개로 일본(529개), 미국(185개)보다 훨씬 많다. 4개 편의점 체인에서만 연간 5억잔 이상 분량의 원두커피를 판매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 커피 원두 시장에서 무시 못할 큰손이 됐을 것 같다.

▶적은 창업 비용과 낮은 기술 장벽 덕에 커피점은 인기 있는 창업 아이템이다. 하지만 대박을 기대하긴 어렵다. 스타벅스 기준 5000원짜리 커피 한잔 값은 대개 원두 값 1000원, 인건비 1500원, 임차료 1100원, 세금 750원과 마진 650원으로 구성된다. 저가 커피점 경우 원두 1㎏으로 커피 50잔을 뽑아내 잔당 2000원 정도에 판매한다. 인건비, 임차료를 최대한 낮추면 잔당 300원 정도(마진율 15%)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2021년 프랜차이즈 통계에 따르면, 커피점 평균 연매출은 1억7900만원이다. 마진율 15%를 적용하면 연수익은 2700만원 정도다.
▶커피의 국민음료화와 더불어 한국형 카페 문화도 생성되고 있다. 스터디 카페, 애견 카페, 북 카페, 빵 카페 등 ‘카페화’한 신종 업종이 생기고, 카공족(카페에서 공부), 카페 맘, 홈 카페족(에스프레소 머신, 로스터 등을 갖춘 커피 마니아) 등 새로운 도시인 유형까지 만들어낸다. 지난해엔 커피 수입액이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전년 대비 45%나 급증했다. 이런 고성장 업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01.11 전기밥솥 ‘아, 옛날이여’
1965년 금성사(현 LG)가 국내 처음으로 전기밥솥을 출시했다. 주부들은 끼니마다 밥 짓는 수고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며 반색했다. 1980년대 초까지 일본 조지루시사(社)의 일명 ‘코끼리 밥솥’이 최고 인기였다. 1983년, 주부 17명이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를 돌며 코끼리 밥솥을 무더기로 사재기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코끼리밥솥 사건’이라 했다.

▶코끼리 밥솥은 용량이 컸다. 8인용은 기본이고 15인용 점보 사이즈까지 나왔다. 당시 사진을 보면 작은 쌀독만 한 솥에 밥이 가득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밥을 많이 먹던 시절이었다. 밥을 맛있게 짓기 위한 한·일 양국의 기술 경쟁도 치열했다. 일본 3대 전기밥솥 제조사인 파나소닉이 1988년 바닥만 눌지 않도록 내솥 전체를 가열하는 밥솥을 선보이자, 4년 뒤 우리 업체는 압력 전기밥솥으로 맞섰다. 그 후 한국 시장에서 일제 밥솥의 우위는 끝났다. 2000년대 초엔 중국인들이 한국제 밥솥을 사재기했다. 한국 전기밥솥 전성기였다.
▶그런데 전기밥솥이 어느새 과거의 유물이 돼가고 있다. 한·일 양국이 같은 처지다. 파나소닉이 일본 내 전기밥솥 생산을 중단하고 올 상반기 중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일본 내에선 더 이상 전기밥솥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 감소, 노령화도 있지만 쌀 소비 급감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한국 가구의 연간 쌀 소비도 1970년 1인당 136㎏에서 2021년 56㎏으로 줄었다.
▶1973년 서울시가 발표한 표준 식단엔 밥그릇 크기 규정이 포함돼 있었다. 쌀이 많이 들어가는 돌솥 대신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쓰라며 밥공기 크기를 내면 지름 11.5㎝, 높이 7.5㎝로 제한했다. 지금은 강제하지 않는데도 밥그릇이 작아지고 있다. 2012년 이후 시중엔 내면 지름 9.5㎝, 높이 5.5㎝ 밥공기가 쓰인다. 전기밥솥 크기도 함께 작아지는 추세다. 6인분이 기본이지만 2000년대 들어 3~4인용이, 2010년 이후엔 1인용이 나왔다.
▶식품 업계에선 지난해 한국 식탁에서 고기 소비가 처음으로 쌀 소비를 앞질렀을 것으로 본다. 전기밥솥에 해 둔 밥을 며칠이 가도 다 먹지 못해 버리기 일쑤다. 신혼부부 혼수 목록에서 밥솥이 빠지고 있다. 가끔 밥이 생각나면 햇반을 꺼낸다고 한다. 이제 전기밥솥은 식혜·갈비찜·감자·고구마·피자 요리 기능을 탑재한 종합 요리 기구로 탈바꿈하고 있다. 구한말 서양인들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한국인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 조상들이 요즘 우리를 보면 경악할 것 같다.
01.12 AI 중매쟁이

결혼 정보 업체가 없던 시절, ‘마담뚜’가 그 역할을 했다. 주로 상류사회 결혼 적령기 남녀의 만남을 중개했다. 마담뚜가 애용했던 정보 소스는 여대 졸업 앨범이었다. 미모의 여성을 선별한 다음, 졸업 앨범 뒤에 수록된 전화번호를 통해 집안 배경을 파악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와 신붓감 집안에서 원하는 신랑감 스펙 등을 기준 삼아 남녀 만남을 알선했다.
▶1990년대 결혼 정보 회사가 대거 등장, 중매 시장의 산업화가 이뤄졌다. 수요자로선 선택지가 넓어진 셈이지만 직업, 자산, 외모 등을 기준으로 철저히 등급을 나눠 욕을 먹기도 했다. 천리안, 하이텔 같은 PC통신의 등장은 ‘만남의 광장’ 확장을 의미했다. 1997년 대박을 터트린 영화 ‘접속’은 PC통신을 통한 불특정 다수 비대면 미팅이 새 풍속도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의 발전은 ‘짝짓기’ 세계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키고 있다. AI가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답을 하면, 성격, 가치관, 호감을 갖는 이성 유형 등 본인 속마음까지 읽어내 걸맞은 짝을 찾아준다. 저출산 문제로 고민 중인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AI 중매를 도입했는데,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한 소도시에선 5년간 845쌍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다른 소도시에선 그해 결혼한 38쌍 중 21쌍이 AI 커플이었다. 우리나라도 경남 하동군에서 AI 중매 서비스를 도입했다. AI가 남녀 성향을 파악한 다음 하동군을 포함한 인근 시군 10곳의 처녀 총각 중에서 적절한 상대를 찾아준다. AI 중매에 적용되는 매칭 기술은 구인·구직, 과외 선생, 돌보미 등을 찾는 데도 적용되며 쓰임새가 확장되고 있다.
▶과학계에선 올해가 AI 기술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개발 중인 세계 최고 딥러닝 AI 모델(GPT4)이 1조개가 넘는 신경망 회로를 통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AI 알고리즘이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내밀한 욕구, 선호를 파악해 딱 맞는 상대를 찍어줄지 모른다. 길을 가다 그런 배우자감을 만나면 스마트폰에서 경보가 울릴 수도 있겠다.
▶몇 년 전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는 미래의 짝짓기 모습을 보여준다. AI가 짝지어준 남녀가 가상현실에서 먼저 만나 아바타(가상 세계 대리인)를 통한 데이트를 해본 뒤 실제 세계에서 만나는 수순이다. 가슴 뛰지만 불안한 연애냐, 가상 세계의 실패 확률 제로(0) 연애냐. 미래 세대는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 같다.
01.13 “우리 세대가 제일 불행해”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이 며칠 전 “취업 잘될 때 사회에 나간 아빠는 운 좋은 세대”라고 했다. 팔순 넘긴 아버지에게 ‘너희가 부럽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너희는 밥은 굶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취업을, 아버지는 가난을 기준으로 그들 사이에 낀 50대를 평가했다. 50대도 할 말은 있다. 베이비붐 끝자락인 50대는 사람에 치여 사는 게 힘들었다. 2부제, 3부제 수업을 들었고 일부는 100명 넘는 콩나물 교실을 경험했다. 끔찍한 입시 경쟁도 치렀다. 대학 시절 거의 매일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서 지냈다.
▶통일과나눔재단이 서울대와 함께 2030 청년에게 ‘시대를 가장 잘못 타고난 불운한 세대’가 누구냐 물었더니 67%가 자기 세대를 꼽았다고 한다. ‘누가 시대를 가장 잘 타고 태어났냐’는 질문엔 50대라 했다. 50대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1980년대 3저(저유가·저물가·저환율)와 12% 넘는 경이적 성장률을 맛봤다. 지난 10년, 9%대 청년 실업률로 고통받은 2030 눈엔 운수 대통 세대일 수밖에 없다.
▶2030은 ‘우리는 해방 후 부모보다 못살게 된 첫 번째 세대’라고 한다. 어느 조사에선 ‘부모보다 잘살 수 있다’는 대답이 11%에 불과했다. 경제성장률 하락, 좁은 취업문,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 부모 세대에 유리하게 설계된 연금 등을 이유로 꼽는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몇 해 전 폴란드 출장 가서 읽은 현지 신문 1면 톱 제목이 ‘폴란드 젊은이, 잃어버린 세대’였다. 미국 사정도 비슷하다.
▶심리학에서는 “모든 세대가 기본적으로 세대 이기주의 성향을 보이고 자기 세대가 고생을 가장 많이 했다고 느낀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으로 타인과 다른 세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내도 ‘50대 여성 불행론’을 편다. “시부모 용돈 드리고 제사도 지내지만 훗날 자식과 며느리에겐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는 세대”라는 것이다.
▶'센세대, 낀세대, 신세대’라는 책에 따르면 모든 세대는 각자 나름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세대가 제일 불행하다’는 인식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려면 서로의 서사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한 대학생은 2030이 불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나 자신도 더 많은 것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 의지가 약하다고 할 일이 아니다. 희망을 꿈꾸고 싶어하는 그들을 어른 세대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려면 귀부터 열어야 한다.
01.14(토) 조폭도 기업화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해외 도피 8개월 만에 태국에서 체포돼 송환된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 대북 송금 등 온갖 비리 의혹의 중심 인물이다. 김성태와 ‘경제 공동체’로 알려진 배상윤 KH그룹 회장은 아직 해외 체류 중이다.
▶1997년 11월 18일 자 본지 사회면에 ‘채무의 30% 받고 납치 고문, 청부 폭력 조직 대거 적발’ 기사가 보도됐다. 유흥업소 돈벌이가 줄자 조폭들이 채무가 있는 중소기업인 등을 납치해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물고문하면서 대신 돈을 받아내는 청부 폭력을 벌였다. 여섯 파 26명이 검찰에 검거됐다. ‘신영광파 부두목 배상윤’이 거기 있었다. ‘전주 나이트파’ 출신 김성태는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불법 대부업을 하다 적발됐다.
▶김성태는 2010년 쌍방울을 인수하면서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출발부터 불법이었다. 김성태와 배상윤 둘 다 쌍방울 주가조작에 관여했다. 유죄였지만 집행유예로 감옥도 안 갔고 시세 차익도 추징당하지 않았다. 이 허술한 단죄가 날개를 달아줬다. 배상윤은 자본금 1억원짜리 회사를 세우고 몇 단계를 거쳐 무자본 M&A(기업 인수합병)로 코스닥 상장기업 필룩스를 인수했다. 필룩스는 엔지니어 창업자가 40년간 적자 한 번 안 내고 건실하게 일군 조명회사였다. 2세에 물려주지 않고 매물로 내놨는데 기업 사냥꾼에게 넘어간 뒤 전환사채(CB)를 대거 찍어내고 속 빈 강정이 됐다.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은 미국 대통령이 방한 때 묵던 명소다. 이 하얏트가 매물로 나왔고 국내 업체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하얏트는 외국계에 매각하기를 원했다. 2019년 12월 하얏트가 홍콩계 사모펀드 PAG에 팔렸다는 발표가 났다. 그런데 이듬해 조폭 10여 명이 이 호텔 로비에 쳐들어가 “KH 회장은 60억원을 갚으라”고 난동을 부렸다. 최고급 호텔서 일어날 수 없는 변고였다. 알고 보니 하얏트의 실제 인수자가 KH 배상윤이 주도한 자금이었다. 쌍방울이 인수한 나노스(현 SBW생명과학)는 한때 코스닥 시가총액 2위에 올랐다. 나노스가 북한 광물 사업권을 약정받았다는 테마로 주가가 급등했다. 나노스의 CB 200억원을 인수한 쌍방울측은 1500억원 넘게 번 것으로 알려졌다.
▶머니게임엔 공식이 있다. 전주(錢主)가 누구인지 모르는 투자 조합이 여럿 등장한다. 기업을 공동 사냥한 뒤 이익을 나눠 갖는다. 김성태, 배상윤 외에 다른 전주들도 있다.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 발행으로 자금을 뽑아내 또 다른 기업 사냥에 나선다. 온갖 테마로 주가를 띄워 차익을 챙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01.16(월) 14년째 연봉 묶인 교수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4년제 일반대학의 실질 등록금 평균 액수는 2020년 물가 기준으로 632만6000원이었다. 이는 정부가 등록금 동결·인하 정책을 펼치기 이전인 2008년 823만7000원과 비교해 23.2%(191만1000원) 감소한 수준이다. /뉴스1
지난달 서울의 S대학 J 교수 정년퇴임식에 참석했다. 행사를 보면서 부러웠다. 150명쯤 될까, 동료 교수와 제자들이 함께 자리했다. 지인과 동료들이 그와의 추억을 회고하고 지나간 세월을 담은 사진들이 열람됐다. 본인도 인생 역정을 펼쳐놨다. 편안하게 인생을 되돌아보는 만족한 얼굴을 보면서 참 좋은 직업을 누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교수는 선망의 직업이다. 강의와 연구만 제대로 하면 간섭이 없다. 출퇴근 따지는 사람 없고, 방학·안식년 있고, 좋아하는 공부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회적 지위도 남부러울 게 없다. 자기 관리 잘하고 인정을 받으면 고위직에 발탁될 수 있다. 혼자만의 공간을 가진 것도 장점이다. 몇 년 전 J 교수 연구실을 가봤는데 아담한 진공관 앰프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요즘 대학 분위기는 좀 달라졌다. 서울의 K대학 R 교수에게 들었다. 학부생 한 학년이 70명인데 외국인 학생 수는 80명이라고 했다. 대부분 중국 학생이라고 했다. 대학 측이 정원 규제를 받지 않는 외국 학생 유치에 열심이라는 것이다. 2009년 이후 14년째 등록금이 동결된 탓이 크다. 외국 학생 등록금으로 겨우겨우 학교를 유지하고 있다. 교수 급여는 당연히 올릴 수 없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고 있으니 월급이 깎이는 셈이다.
▶학위 따느라 5년 이상 사회 진입이 늦은데도 교수 초봉은 요즘 은행, 대기업과 겨우 비슷하거나 되레 밀린다고 한다. 아이 교육비까지 대려면 허덕댈 수밖에 없다. 지방대 교수 연봉이 중고교 교사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급여가 비교적 세다는 서울의 다른 K대 H 교수는 “과 후배 교수 두 명이 거의 원룸 수준에서 사는 걸 보고 놀랐다”고 했다. 다른 직종에서 14년간 월급이 동결됐다면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것이다. 등록금 동결은 정책으로 강요되는 것이어서 대학 당국에 항의할 수도 없다. 그러니 외국 학생 뽑게 된다.
▶지방대들은 임계점을 지난 지 한참이다. 실험 기자재 살 돈은 고사하고 승강기와 냉·난방기 돌릴 여유도 없다. 2019년 기준 대학생 1명에게 투입되는 연간 공교육비가 1626만원이었다(OECD 통계). 초등학생(1922만원)보다 적고, 중·고교생(2461만원)의 3분의 2밖에 안 된다. 정부가 초·중고생에게 돌아가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작년 76조원) 가운데 3조원을 대학에 지원하려 했는데 교육감과 야당의 반대가 심해 1조5000억원으로 줄였다. 대학이 쓰러지고 나면 나라는 버틸까.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01.17 애인의 과거
한 여성 변호사가 ‘유학생 출신’이라는 남편 말이 거짓인 것을 알고 이혼했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았고 자녀가 있었으며 부부 사이에 큰 문제도 없었지만 “믿을 수 없는 남자와 더는 살 수 없었다”고 했다. 과거 남녀가 갈라서는 이유로 주로 꼽힌 것은 이처럼 학력을 속이거나 범죄 전과 등을 감추는 행위, 상대의 부정(不貞), 경제적 무능, 가정 폭력 등이었다.

▲학교폭력 이미지./뉴시스
▶남녀의 헤어짐을 다루는 대중가요나 소설·영화도 이로 인한 파국에 초점을 맞춘 게 많았다. 박상민 노래 ‘무기여 잘 있거라’는 약혼식 날 애인의 숨겨둔 아내가 아이를 안고 식장에 들이닥치자 충격받은 여자가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우린 서로가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기로 했지만/ 우리 약혼하던 그날에 (중략) 웬 아이를 떡 안고서 나타나게 되었던 거야.’ 영화 ‘화차’의 여주인공은 다른 여자를 살해한 뒤 그 여자로 신분을 위장해 결혼하려다가 파국을 맞는다.
▶그런데 연인의 결별 사유에 최근 들어 학폭(學暴)이 추가됐다. 배우자 될 사람의 폭력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학교 생활기록부를 조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혼전 건강진단서나 졸업증명서 교환은 전에도 있었지만 생활기록부 확인은 전에 없던 세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처럼 학폭을 다룬 작품이 인기를 끄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교육부가 지난해 초·중·고 학생 387만명을 대상으로 한 학폭 실태 조사에서 5만4000명이 피해를 호소했다. 코로나로 대면 수업이 축소됐던 2020년 줄었다가 다시 늘었다. 폭력 양상도 흉포화하는 추세다. 집단 구타에 물고문 불고문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은 독신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한 결혼 정보 회사가 미혼 남녀에게 물었더니 ‘연인이 학폭 가해자라면 헤어진다’는 응답이 70%를 넘었다. 폭력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큰 여성 쪽은 더 단호해서 ‘결혼할 수 없다’는 반응이 84%나 됐다.
▶김동인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은 총각 시절 불임 진단을 받았다. 결혼 후 뜻밖에도 아내가 임신하자 기뻐했는데 태어난 아기가 자신을 닮지 않았다. 아내를 믿고 싶었던 남자는 아이에게서 어떻게든 자기와 닮은 부분을 찾아 결혼을 지속하려 애쓴다. 결혼의 첫 조건은 서로를 향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조건에 ‘학교 폭력을 쓰지 않았던 배우자’도 포함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폭 전력은 아이돌 가수나 배우·운동선수처럼 세인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됐다. 이젠 학교 때 주먹 휘두르면 결혼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01.18 “한국은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를 따낸 현대건설은 공기 단축을 위해 무게 500t, 10층 건물 높이의 철골 구조물을 울산 조선소에서 만들어, 바지선에 태워 1만2000km를 실어나르는 도전을 감행했다. 바지선에 고정돼 사우디로 가는 주베일 항만 공사 구조물.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전에서 한국이 승리하자 프랑스는 충격을 받았다. 패인을 분석하는 보도가 잇따랐다. 한 프랑스 신문은 “한국 수주팀이 주말에도 일하며 반칙을 했다”고 썼다. 프랑스는 ‘주 35시간 근무’를 철저히 지켰는데, 한국은 워룸(전시 상황실)까지 만들고, 발주처의 온갖 자료 요청에 24시간 즉각 응답하는 등 불공정 경쟁을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중동 건설 신화 중엔 공기(工期)를 지키기 위한 기상천외한 도전이 적지 않다. 주베일 항만 공사를 따낸 현대건설은 공기 단축을 위해 무게 500t, 10층 높이 철골 구조물 89개를 울산에서 제작, 바지선으로 1만2000㎞ 바다를 건넜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땐 동아건설이 엄청난 수압을 견디는 직경 4m, 무게 75t 콘크리트 관(管)을 고안했다. 한국 도자기 제조법이 응용됐다고 했다. 이 공사를 이어받은 외국 건설사들은 이 관을 만들지 못해 누수·파열 문제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러스트=박상훈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선 서로 무차별로 미사일을 쏘았다. 외국 건설사들은 모두 철수했는데 한국 건설사는 이란 항만 공사를 계속하다 이라크 전투기 공격을 받아 근로자 13명이 사망했다. 나중에 이란은 한국에 대형 프로젝트를 대거 발주했다. 리비아 내전 당시 반군 거점도시 벵가지가 정부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는데, 화력발전소와 병원을 짓던 한국 건설사는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 내전 종료 후 새 정부 수반이 한국 건설사를 찾아 감사 인사를 했다.
▶중동 전문가 이희수 전 한양대 교수는 “아랍에선 ‘공동체적 약속’과 ‘신뢰’를 가장 중시한다”고 했다. 바라카 원전을 수주한 한국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1·2기는 이미 가동 중이며, 3호기는 올해 가동을 시작하고, 4호기는 내년 준공된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가 수주한 핀란드 원전은 공기가 10년 늦춰지고, 공사비도 2배로 늘었다. UAE 무함마드 대통령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약속 이행은 기적과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르다”며 이웃 나라에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UAE의 300억달러 투자 약속으로 제2 중동 붐 기대가 일고 있다. 과거 중동 붐이 사막 땡볕 아래서 근로자들이 피땀으로 만들어낸 성과라면, 향후 중동 붐은 에너지, 방산, 바이오, 메타버스 등 첨단 산업이 주역이 될 전망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열린 국제전자박람회(CES)에서 한국 기업들이 ‘최고혁신상’ 20개 중 9개를 받았다. “한국은 다르다”는 감탄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01.19 남극점에 선 韓 여성

▲산악인 김영미(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소속) 대장이 어떤 보급도 받지 않고 홀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무보급 단독 원정 남극점 도달'은 한국인 최초다. 김영미 대장은 16일(현지 시각)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극점 도전) 51일째인 마지막 날 27.43㎞를 걸어 오후 8시 55분에 남위 90도에 도달했다. 전체 누적 거리는 1186.5㎞, 운행 중 낮의 기온은 섭씨 영하 31도였다"고 남극점 도달을 알렸다. /연합뉴스
지구의 가장 남쪽, 남극점은 남위 90도 지점이다. 평균 기온이 여름에는 -28도, 겨울에는 -60도이고 해발 2840m에 있어서 끊임없는 오르막길이다. 남극점엔 장대에 은도금한 공을 얹어 놓은 구조물이 있고 남극조약에 최초 조인한 12개 국가 국기가 둘러싸고 있다. 구조물 등은 가혹한 남극 날씨에 오래 버티지 못해 주기적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 남극점 도착 인증샷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 여성 산악인 김영미(43)씨가 지난해 11월 27일 남극 대륙 서쪽 허큘리스 인렛을 출발한 지 51일 만에 1186㎞를 혼자 걸어 남극점에 도달했다. 중간 보급 없이 단독으로 남극점 완주에 성공한 것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으로도 처음이다.

▶1911년 남극점 최초 도달을 놓고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스콧 팀이 경쟁을 벌였다. 스콧 팀이 천신만고 끝에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문센 팀이 한 달 전인 1911년 12월 14일에 다녀간 뒤였다. 낙담한 스콧 일행은 돌아오다 추위에 식량 고갈로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909년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위 88도 23분 지점까지 접근했다. 남극점을 155㎞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러나 식량 등을 계산한 섀클턴은 전진 대신 귀로를 택했다. 이 결단으로 혹한 속에서도 대원 28명이 모두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위대한 실패’라고 불렀다.
▶김영미의 도전도 사투였다. 그는 “화이트아웃(눈보라 등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최대 훼방꾼이었다”고 했다. 추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잠시 겉장갑을 벗었다가 손가락 끝 뼈마디가 조각나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김씨가 두려워한 것은 손발 동상보다 허벅지 동상이었다. 바지 안쪽에 패딩 반바지를 넣고 패딩 치마를 덧입어도 부족했다고 한다. 극점 자기장 영향으로 나침반이 이상 작동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일도 많았다. 김씨는 태양과 그림자 위치, 풍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남극에서는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었다.
▶김씨는 ‘세계 7대륙 최고봉 한국 최연소 완등’으로 유명한 산악인이다. 그는 남극점에서 “부상(동상) 없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짝 맞춰서 데려간다”며 “50여 일 여정이 하룻밤 꿈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씨의 성공을 보며 이 순간 역경 속의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한 줌의 온기도 없는 51일’을 홀로 견뎌낸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
01.20 은둔 청년
작년 5월 국내 어느 4층짜리 건물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건물 원룸의 냄새가 너무 지독하다는 것이었다. 20대 청년이 1년여 전부터 월세로 살던 곳이었다. 강제로 문을 여니 방 전체가 쓰레기였다. 침대 위만 빼고 음식물과 비닐봉지가 가득했다. 청년은 8년 전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던 외톨이였다. 청년의 부모는 “아이가 열다섯 살 때부터 방에서 게임만 했다”고 했다.

▲은둔 청년 일러스트./박상훈
▶이런 은둔 청년들의 도피처는 게임과 잠이다. 1년 반 은둔 생활을 했다는 어느 청년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게임 하는 게 괴로워서 기절할 정도가 되면 고꾸라지듯 잠들었다”고 했다. 최근엔 ‘은둔 청년 고독사’까지 발생했다. 2년 전 대전의 한 원룸에서 32세 여성이 숨졌는데 방에는 성인 남성 허리 높이만큼의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청년들이 은둔에 빠지는 계기는 취업 실패가 많다. 대전 원룸에서 숨진 여성 방에도 책장엔 ‘2주 완성 면접 대비’ 같은 취업 관련 서적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전문가들은 “초경쟁 사회에서 좋은 직장을 갖지 않으면 루저(패배자)로 낙인찍는 문화 때문에 청년들이 실패 경험을 견디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이런 은둔 청년의 전(前) 단계가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백수다. 코로나로 세계적으로 니트족이 증가하면서 은둔 청년도 덩달아 늘고 있다고 한다. 국내 니트족은 2020년 43만여 명으로 전년보다 24% 늘었다.
▶니트족 장기화가 부정적 영향을 준 대표 사례가 일본이다. 1990년대 장기 불황이 시작되면서 취업 적기를 놓친 청년들이 집에 틀어박히면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됐다. 니트족이 병적 증세까지 보이는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다. 당시 20~30대였던 히키코모리는 이제 40~50대 중장년이 됐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40~64세 히키코모리 인구가 61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4년 전엔 도쿄에서 농림수산성 차관까지 지낸 70대 아버지가 게임에 빠져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히키코모리 40대 아들을 살해한 일도 있었다.
▶서울시가 19~39세 서울 청년 중 4.5%인 13만명이 고립·은둔 상태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이 중 55%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서만 생활하는 기간이 5년 이상 장기화한 청년도 28%에 달했다. 이 은둔 청년은 니트족과 히키코모리의 중간쯤으로 보인다.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세상의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있었으면 한다.
01.21(토) 윤정희와 작별하며

▲만물상-윤정희와 작별하며
특파원으로 파리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윤정희씨가 만나자고 했다. 길모퉁이 카페였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서 온 주간지 한 부를 내밀었다. 선정적 기사로 가득 찬 잡지에는 특종(?)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60년대부터 톱스타였던 윤정희가 사실은 권력자 사이에 딸을 낳았으며, 도미니코 수녀회에 있다고 했다. 윤정희는 한숨을 쉬며 “어떡해야 좋겠냐”고 했다. 마치 ‘가짜 뉴스 대응팀장’을 대하듯 물었다. 대답했다. “어설프게 맞서면 후속 기사만 커집니다.”
▶그 뒤로 친해져 자주 교유했다. 개선문 근처 살르 플레옐에서 남편 백건우의 독주회가 열리던 밤이 떠오른다. 이미 ‘대한민국 레전드’인 윤정희가 연주홀 입구에서 가랑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젊은 유학생 관객들을 맞으며 허리 굽혀 절을 했다. 백 번도 더 했을 것이다. 객석에 앉은 윤정희는 박수가 끊이려 하면 더 크게 박수를 선도하면서 남편을 응원했다. 백건우가 지금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데는 분명히 그의 덕도 있다.
▶파리 남동부 뱅센에 부부가 살았다. 연주 여행이 없을 때 백건우는 집에서 피아노 연습만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귀 호사’를 한 값으로 현관에 꽃을 갖다놓곤 했다. 그 집 저녁밥은 참 따뜻했다. 어제 윤정희씨의 별세 소식에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국민 여배우’로서 별이 된 사람이지만 피아니스트의 아내이자 매니저였던 모습이 더 생각난다. 윤정희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1977년 부부는 유고에서 북한에 납치될 뻔한 적이 있다. 끌려가기 직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미국 영사관에 도움을 청하면서 위험을 모면했다. 윤정희는 재불 화가였던 다른 부부를 의심했다. 그들이 북한의 끄나풀 역할을 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 때 삼청동에 있는 한 스파게티 집에서 와인 한 잔을 곁들이자 윤정희는 유고에서 겪은 긴박했던 순간들을 영화처럼 회상했다. 피아니스트와 여배우 아내, 화가 부부, 북한 간첩 등 영화로 만들어도 될 얘기였다.
▶파리 특파원들은 윤정희·백건우를 가장 모범적인 예술인 부부로 꼽았다. 둘 다 정상에 올랐고,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는 윤정희 말처럼 끝까지 현역이었다. 따뜻하고 겸손했다. 지난 몇 년 치매를 앓았고, 남편과 친정 식구들이 불화를 겪었지만 프랑스 법정은 남편 손을 들어줬다. 윤정희의 마지막 영화 ‘시(詩)’의 끝부분에 이런 시가 흘러 나온다.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01.25(수) 음력설
30여 년 전 군 복무 때 미군에게서 영어로 된 새해 달력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달력 겉장에 ‘Year of Horse(말띠 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한국에선 새해가 두 번 시작하는데 음력으로는 아직 말의 해가 안 됐다”고 알려줬더니 신기해했다. 1997년 1월생으로, 설 전에 태어난 필자의 아들은 ‘소띠 해에 태어난 쥐띠’다. 이 또한 양력과 음력으로 새해를 두 번 시작하는 데서 비롯된 혼란이다.

▲/일러스트=박상훈
▶영국 박물관이 올 음력설을 앞두고 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공연단의 설맞이 축하 공연 소식을 트위터로 전했다. 그런데 ‘Korean Lunar New Year(한국 음력설)’ ‘Seollal(설날)’이라고 썼다가 중국 네티즌들의 비난이 폭주하자 게시물을 삭제했다고 한다. 대신 토끼를 품에 안은 중국 여성 그림을 올리며 ‘Chinese New Year(중국 새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영국 박물관은 언론에 밝힌 입장문에서 ‘세계적으로 중국 새해를 기념한다’고 해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화교가 많이 진출한 유럽과 미국 지역 사회 등에선 이날을 ‘중국 새해’라고 부르며 축하 행사를 연다. 역사적으로도 지금의 음력 새해 첫날 기준은 청나라 때인 1644년 반포된 시헌력(時憲曆)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동남아 대부분 국가의 설날 날짜가 시헌력을 따라 정해진다.
▶중국 네티즌들이 영국 박물관 트위터에 올린 어느 댓글은 한국을 ‘달력도 없던 나라’라고 했다. 중국 황제가 정한 시간에 맞춰 살던 나라라는 비아냥이다. 그때는 맞았는지 몰라도 이젠 시대착오적인 인식일 뿐이다. 중국에서 비롯됐지만 오늘날 음력설은 나라마다 다르게 기념한다. 명칭만 해도 춘제(중국), 설(한국), 뗏(베트남)으로 다르다. 12간지(干支)도 한국과 중국에선 올해가 토끼 해지만 베트남은 토끼 아닌 ‘고양이 해’라고 한다.
▶영국 박물관의 음력설 해프닝을 보면서 ‘우리가 언제까지 중국식 새해를 쇠어야 하나’ 묻게 된다.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이후 태양력을 도입하고 음력설을 없앴다. 우리도 1896년부터 태양력을 썼다. 그런데 1985년 음력설이 ‘민속의 날’이란 이름으로 부활하고 이후 사흘짜리 법정 공휴일로 정해지며 옛날로 돌아갔다. 기념일은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지금 모든 국가 운영과 개인의 삶은 태양력을 따라 돌아가고 있다. 설뿐 아니라 추석도 시대 변화에 맞추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언제까지 해마다 두 번씩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며 어색해해야 하나.
01.26 독일 탱크

탱크(tank)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호 돌파용으로 영국이 처음 개발했다. 신병기 개발을 숨기기 위해 급수차(탱크)로 거짓 선전하며 붙인 암호명이 진짜 이름이 됐다. 당시 전선은 철조망과 참호, 기관총이라는 ‘악마의 3형제’로 짜여 있어 서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솜 전투에 처음 투입된 탱크는 철조망을 부수고 기관총 사격을 버티며 적진을 돌파했다. 하지만 갯벌 같은 전장에선 기동성이 떨어지고 고장도 잦았다.
▶당시 탱크를 두려워했던 독일은 2차 대전 때는 탱크를 게임 체인저로 만들었다. 탱크에 무전기를 달고 집단을 이뤄 연합 돌격전을 펼쳤다. 1939년 대규모 탱크 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에 폴란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노르웨이·덴마크·벨기에·네덜란드도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가 자랑했던 마지노선도 맥 없이 무너졌다. 이른바 ‘전격전’이다.
▶독일 탱크의 꽃은 ‘티거(Tiger·타이거)였다. 독일은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소련엔 T-34 탱크가 있었다. 내구성이 강한 T-34는 독일 탱크에 맞서 분전했다. T-34에 충격받은 독일은 1942년 ‘괴물 티거’를 개발했다. 대전차포에도 끄떡없었고 포 명중률은 압도적이었다. 티거 한 대가 연합군 탱크 10여 대를 부수기도 했다. 티거 전차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오늘날 독일 축구 대표팀을 ‘전차 군단’이라 부를 정도로 당시 위력이 컸다.
▶전쟁에 졌지만 냉전이 오자 독일 전차는 부활했다. 소련의 위협에 맞서 레오파르트 전차를 개발했다. 수천 대가 제작됐다. 그런데 소련 붕괴와 독일 통일 후 전차 필요성이 줄었다. 독일은 이 전차를 유럽 각국에 넘겼다. 그 레오파르트 전차가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 T-72, T-80 탱크에 대적할 무기로 재조명받고 있다. 나토 진영은 한목소리로 레오파르트를 우크라이나에 넘기라고 독일을 압박했다. 결국 독일도 동의했다.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맞붙게 된 레오파르트(A4형)와 T-72는 냉전 시대의 낡은 전차들이다. T-72는 이미 체면을 구길 대로 구겼다. 그런데 레오파르트도 이 꼴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독일 전차 군단의 명성은 이미 퇴색했다. 전차 부대를 너무 줄여 정상 작동 전차가 몇 대인지 모르는 지경이라고 한다. 전차 생산성도 형편없다. 반면 우리 K-2 전차는 최신형 레오파르트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면서 값은 훨씬 싸다. 생산성은 비교도 할 수 없다. 지금 서방세계 전차 군단은 오히려 한국일지도 모르겠다.
01.27 ‘수율’의 세계

▲지난해 7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나노 파운드리 양산을 시작했지만, 수율을 올리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임원들이 3나노 양산라인에서 3나노 웨이퍼를 보여주는 장면
경제학자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식량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면서 대기근을 경고했다. 과학 기술 발전을 간과한 예측이었다. 농업 기술 혁신, 통일벼를 탄생시킨 종자 개량, 농약·비료를 만들어낸 유기화학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같은 면적 경작지에서 더 많은 농산물을 수확하는 수율(收率) 혁명이 대기근 위험을 제거했다.
▶축산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젖소를 계속 임신 상태로 만들어 더 많은 젖을 생산하는 기술 덕에 요즘 수퍼 젖소는 평생 200㎖ 우유 80만개 분량의 우유를 생산한다. 육우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등 사육 기술 발달 덕에 한우 한 마리당 정육량(머리, 내장을 뺀 고기)이 20년 새 80㎏ 이상 늘어났다. 수율을 높인 것이다.

▶커피 산업에선 원두에서 얼마의 커피 성분을 뽑아내느냐는 ‘추출 수율’이 중요하다. ‘고수율’은 수익과 직결되고, ‘일정한 수율’은 커피 마니아들이 중시하는 ‘맛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모발 이식 세계에선 옮겨 심은 머리의 생존 수율이 만족도를 좌우한다. 사람 손보다 더 정확한 깊이와 간격으로 옮겨 심는 로봇의 등장으로 모발 이식 수율이 95%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시대가 열린 이후 공장에서 불량품을 줄이는 수율 관리가 제조업의 핵심 경쟁력 요소가 됐다. 1879년 에디슨이 대나무 숯을 활용해 백열등을 발명했지만, 백열등 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은 10년 뒤 텅스텐 필라멘트가 등장하면서부터다. 헨리 포드는 부품 표준화와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해 자동차 생산 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1980년대 미국 모토롤라는 제품 100만개당 3~4개의 불량품만 허용한다는 ‘6시그마 운동’으로 수율 관리의 표준을 제시했다.
▶삼성전자가 작년 7월 세계 최초로 3나노(nm·10억분의 1m) 파운드리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지만 50%대 낮은 수율 탓에 고전하고 있다. 반도체 수율은 웨이퍼 한 장에서 만들어내는 최대 칩 수 대비 정상 칩의 비율을 말한다. 수율 50%면 절반은 불량품이란 뜻이다. 10억분의 1m 너비의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과정은 초미세, 초고순도, 초정밀의 세계다. 순금 순도는 99.99%이지만, 반도체 소재의 순도는 9가 12개씩 붙는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2%로 치솟은 휴대폰 불량률을 잡기 위해 ‘애니콜 화형식’이란 충격요법을 썼다. 나노 세계에서도 무슨 특단의 방법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01.28(토) 놀랍고 두려운 ‘챗GPT’
1998년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창업한 구글은 검색 알고리즘 하나로 인터넷 지배자가 됐다. 구글 본사에는 이들의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여주는 직원 연례행사 사진이 있다. 스키장에서 열던 단출한 모임을 나중에는 디즈니랜드를 통째로 빌려 해야 했다. 그런 구글이 지난 20일 1만2000명을 한꺼번에 해고했다. 세계 최고 직장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넘치던 직원들 사이에서 ‘피의 금요일’이라는 말이 나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구글은 경쟁자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아예 ‘구글링’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해 인공지능(AI) 회사 오픈AI가 채팅 로봇(챗봇) ‘챗GPT’를 공개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챗GPT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질문에 답하고 소설·시·논문도 써준다. 검색 결과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찾아야 하는 구글과 단번에 답을 알려주는 챗GPT 가운데 어느 쪽이 편할까. 구글은 은퇴한 두 창업자까지 불러들여 연일 대책 회의를 열고 있다.
▶공개 두 달 만에 1000만명 이상이 챗GPT로 수많은 실험을 했다. 의학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주고 요약하게 했더니 과학자들도 사람이 쓴 것과 구별하지 못했다. 표절 검사는 100% 통과했다. 미국 대학 로스쿨 입학 시험, 경영대학원 기말시험, 의사 면허 시험도 합격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사람이 치르는 시험을 통과하는 AI 개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행간에 숨은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챗GPT는 그 장벽도 뛰어넘었다.
▶사람 뇌는 신경세포 연결부인 시냅스가 100조개 수준이다. 챗GPT는 이 시냅스에 해당하는 매개 변수가 1750억개다. 올 상반기 매개 변수가 조 단위를 넘는 다음 버전이 나온다고 한다. 사람과 같지는 않겠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윈도의 몰락으로 고전하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12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기로 했다. 부활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구글과 아마존이 어떻게 반격할지도 관심이다.
▶뉴욕시는 중고교 학생들이 챗GPT를 쓰지 못하도록 접속을 차단했다. 미국 대학들은 집에서 해 오는 숙제를 없애고 있다. 누가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챗GPT를 연구 논문의 저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AI는 논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픈AI 설립자가 일론 머스크다. 그는 ‘인류를 위한 AI 연구’를 하겠다고 했다. 회사 이름 ‘오픈’도 개방과 비영리를 뜻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놀랍고도 두려운 챗GPT다.
01.30(월) 못난이 농산물

▲2022년 12월 1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의 한 김치제조 공장에서 직원들이 '못난이 김치'를 제조하고 있다. 이 김치는 최근 배추생산량 증가에 따른 가격 급락으로 제때 수확하지 못한 배추를 활용해 만들어졌다. /연합뉴스
십수 년 전 고향 집에서 참외를 재배할 때 주말에 가서 몇 번 도운 적이 있다. 신기한 것은 달고 잘 익은 참외일수록 벌레가 일부를 파먹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벌레 먹은 부분을 제거하고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벌레 먹은 과일이 더 맛있다’는 옛말은 그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흠 있는 참외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팔 수 없었다.
▶사람들은 예쁘게 보이는 음식이 몸에도 좋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도 있을 것이다. 과일·채소는 외형이 중요한 가격 결정 요인이다. 농가와 유통업체는 모양이 이상하거나 흠집이 있거나 크기가 균일하지 않은 농산물은 솎아낸다. 못난이 농산물은 모양·크기 때문에 소비자를 만날 기회조차 잃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지는 채소와 과일이 전체 생산액의 3분의 1에 가깝다고 한다. 연간 최대 5조원어치라는 추정이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최근 가성비를 중시하는 합리적인 소비자들이 늘면서 못난이 농산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뛰는 물가가 이런 소비를 부채질하고 있다. 온라인몰은 관련 코너를 확대 중이고 못난이 상품만 취급하는 쇼핑몰과 정기 배송 서비스도 성업하고 있다. 대형마트들도 이를 ‘집객 카드’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 못난이 감자, 고구마, 무, 토마토 등이 대표적이다. 못난이 농산물에 ‘맛난이 농산물’ 상표를 달거나 외관에 흠이 있는 과일을 ‘반전 과일’이란 이름을 붙여 저렴하게 파는 것도 재치 있다.
▶못난이 농산품은 기존 판매 농산품보다 작거나 못생겼지만 맛과 영양까지 별로인 건 아니다. 최소한 차이가 없거나 더 좋은 경우가 많다. 건강에도 더 좋을 가능성이 높다. 제각기 다른 사연으로 버려질 위기에 있는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친환경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얼마 전 소비자 설문조사에서 61%가 못난이 농산물을 구매한 경험이 있고 96%가 재구매 의사를 밝힌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충북도가 시작한 겉모양이 못생긴 배추를 김치로 만들어 파는 사업이 계약 물량만 200t을 넘길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김영환 충북지사가 4년 전 고향 괴산에서 농사를 지을 때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의 절반 이상을 버리는 것을 보고 이 ‘못난이 김치’ 사업을 고안했다. 일본·미국·베트남 등에 수출도 시작했다고 한다. 김 지사는 “이 김치가 저가로 파고드는 중국산 김치에 맞서는 ‘김치 의병’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01.31(화) 장군의 道

지난 2015년 1월 강원도 인제에서 모 군단장이 병사들과 똑같이 무게 20㎏이 넘는 완전 군장을 메고 20㎞ 행군을 해 화제가 됐다. 별 셋을 단 고위 장성이 장병들 맨 앞에 서서 행군을 한 사진이 SNS에 올라오자 하루 만에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유하며 1만개 넘는 ‘좋아요’가 달렸다. ‘미군 장군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한국군에도 이런 장군이 있었나”라며 놀랐다는 반응이 많았다.
▶우리 국민들에게 군인이 장군이 된다는 것은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비치고 있다. 실제로 “장군이 되면 100가지가 바뀐다”는 얘기가 나온다. 고급 승용차와 운전병이 제공되고, 한때 장군용 식당과 목욕탕을 따로 둔 부대도 많았다. 행사 때 장군이 참석하면 계급에 따라 일성곡(一星曲)부터 사성곡까지 연주된다. 한동안 장군의 공식 명칭은 ‘장관급(將官級) 장교’였다. 필자의 초년 국방부 취재 때 “장군은 장관과 같은 급인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현재 의전상 대장만 장관급 예우를 받는다.
▶문민 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뒤 장군의 권위와 위상은 계속 떨어져왔다. 특히 2017년 공관병 갑질 의혹 사건은 장군들의 일상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공관병이 사라지면서 ‘지휘관의 꽃’으로 불리는 사단장들도 주말엔 직접 관사 청소를 한다. 운전병이 있어도 일과 이후엔 장군들이 직접 운전하는 경우도 많다. 430여 명에 달했던 장군 숫자도 한동안 손대기 힘들었던 성역이었지만 지난 5년간 60여 명이 줄어 370여 명이 됐다.
▶지난 27일 김승겸 합참의장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폼 잡는 게 장군이 아니다”라며 지휘관들의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 의장은 “이런 방식으로 하면 실전에서 여러분들 또 당한다”고 했다.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이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으로 장시간 질타한 것은 전례가 없다. 군 일각에선 “연대장이 대대장 가르치듯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고 한다.
▶장군이 ‘제너럴(general)’인 것은 모든 병과에 통달해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세계 장군들 중 최고는 2차 대전 때는 독일, 지금은 미군이다. 미군 장군들의 경험, 지식, 노력, 작전 능력과 비견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군은 몇 명인가. 훈련과 작전이 아니라 다음 보직과 진급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군 훈련이 미군식 실전이 아니라 형식적인 겉치레가 된 지 오래인데 어떤 장군이 직을 걸고 충언을 했나. 북 무인기 사건은 우리 장군들의 실상도 드러냈다.
유용원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