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1/
01-02(월)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 건가요?” “‘엄마가 큰 실수를 했다’고요.” 199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 모니카 르윈스키의 TV 인터뷰는 시청자 7400만 명을 끌어모을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르윈스키를 어르고 달래며 2시간 동안 속 깊은 얘기를 끌어낸 사람은 미 ABC방송의 전설적인 앵커우먼 바버라 월터스였다.
▷지난해 12월 30일(현지 시간)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2014년 은퇴하기까지 40여 년간 미국 방송계를 휘어잡으며 ‘인터뷰의 여왕’이라 불렸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미국 방송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까지도 카메라 앞에 세웠다. 2008년 펴낸 자서전에서 “평생 딱 2명과 인터뷰 못 해본 게 후회된다”고 했는데,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와 영국의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이다.
▷인터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월터스는 “상대에게 주눅 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늘 새벽 4시부터 방송을 준비했고 인터뷰 대상에 대한 기사를 사전에 모조리 찾아 읽었다. 거침없는 돌직구도 던졌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겐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겐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인터뷰 대상에게서 눈물을 쏙 빼기도 한다. 그는 “2000년에 팝스타 리키 마틴에게 ‘당신 게이냐’고 던졌던 질문은 후회한다”고 했다.
▷그는 여성들의 롤모델이었다. 방송작가로 시작해 1970년대 저녁 뉴스쇼 첫 여성 앵커로 발탁된 이래 맨 먼저 ‘유리천장’을 깼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지적장애를 앓은 언니, 입양한 딸의 일탈 등 개인적 고민도 많았지만 자산으로 삼았다. 자서전에서 “화장실 하나뿐인 집에 살아 소변을 잘 참고, 이 때문에 오랜 생방송도 잘 버텼다”고 했다. ‘푸시 쿠키’(저돌적인 여자)로 불렸지만 “한순간 모든 걸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오디션을 본다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했다. 자서전 제목도 하필 ‘오디션’이다.
▷월터스는 과거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상대를 무장 해제할 수 있을 ‘킬러 질문’을 귀띔한 적이 있다. ‘만약 입원 중이라면 누가 간호해주면 좋겠는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무엇인가’, ‘누구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는가’, ‘가장 최근에 울어본 때는 언제인가’…. 인터뷰 말미엔 늘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늘에 돌아간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03 흉악범 신상공개 사진, “같은 사람 맞나”

요즘 누리꾼 수사대가 주목하는 인물 중 하나가 이기영(31)이다. 경기 파주시에서 전 동거녀와 택시 기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그의 사진이 공개된 후 “실물과 다르다”는 증언이 이어지자 소셜미디어를 털어가며 최근에 찍은 사진들을 찾고 있다. 경찰이 공개한 사진은 단정한 운전면허증 사진인데 안경을 쓰고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의자 전주환도 경찰이 처음 공개했던 선한 눈매의 증명사진과 포토라인에서 찍힌 사진이 달라 “같은 사람 맞느냐”는 말이 나왔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복역 중인 조주빈도 증명사진 속 앳된 얼굴과 실제 모습 간 차이가 컸다. 경찰이 공개하는 사진은 신분증의 증명사진이 대부분이어서 범행 시기와 시차가 나거나 보정 작업을 거친 사진일 경우 실물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경찰이 체포 후 촬영한 식별용 사진(머그샷)이 있지만 피의자가 원하지 않으면 공개할 수 없다. 지금까지 머그샷 공개에 동의한 사람은 2021년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여자친구의 가족을 보복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이석준이 유일하다. 구치소를 오가거나 검찰에 송치되는 과정에서 언론사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전남편을 살해한 고유정처럼 긴 머리로 얼굴을 덮는 ‘커튼 머리’를 하거나, 코로나를 핑계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와 범죄 예방이라는 신상공개제도의 취지를 살리려면 머그샷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5년간 발생한 살인 인신매매 강간 추행 등 특정강력범죄는 2만8822건, 이 중 신상정보공개위원회에 상정된 건수는 49건,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진 건 28건에 불과했다. 신상공개 사례가 전체 흉악범죄의 0.1%도 안 되는데 이마저 실물과 동떨어진 사진을 공개하면 어떻게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재범을 막느냐는 것이다.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는 기본권 침해라는 반론도 만만치 많다. n번방 사건 피의자들 중 일부는 2020년 6월 이 제도 근거법이 무죄추정 원칙에 반한다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2개월 후에는 경찰이 강간·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신상 공개한 ‘강간범’에 대해 검찰이 성폭행은 없었다는 처분을 내리는 일이 발생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엉뚱한 ‘낙인찍기’가 없도록 신상정보공개 심의의 전문성을 높이되 공개 결정이 난 경우라면 “누군지 못 알아보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머그샷 수준의 사진을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04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판결문은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낸 메마른 문장”이라고 판사들은 말한다. 부사나 형용사의 사용을 최대한 제한하고 주어, 목적어, 서술어 위주로 명확하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망하다(속이다)’, ‘불상(알 수 없는)’ 등 법률용어까지 곳곳에 들어간다. 그래서 잘 읽히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들에겐 판결문의 벽이 더욱 높다.
▷보통 행정·민사재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할 때 판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최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가 한 선고는 달랐다. 원고가 청각장애인인 소송에서 선고를 하면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판결문에도 그대로 적혔다. 평상시 잘 쓰이지 않는 ‘기각’이라는 단어를 수어로 통역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원고가 판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배려한 것이다.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챕터가 포함된 것도 이 판결문의 특징이다. “원고와 다른 지원자들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고 판단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쉽게 존댓말로 설명했다. 이 재판의 쟁점은 원고가 취업 면접에서 수어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시간에 손해를 봤는지 여부였는데, 그렇지 않다는 내용이다.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삽화까지 첨부했다. 이처럼 구어체 문장과 그림 등을 이용해 장애인의 이해를 돕는 ‘Easy Read’ 방식의 판결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난해한 판결문은 장애인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법원 예규는 “판결문은 되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짧게 작성하라”고 권고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사(가령)’, ‘불비(못 갖춤)’, ‘경료됐다(마쳤다)’ 같은 낯선 표현이 판결문에서 툭툭 튀어 나온다. A4 용지 한 장이 넘는 긴 문장이 등장하기도 해 ‘판결문 읽다 숨넘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은 판결문을 읽다가 누가 뭘 했다는 것인지, 왜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판결문에는 단 한 글자의 실수도, 오독(誤讀)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계어 판결문’을 계속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판결문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박형남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라고 했다. 재판의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돼야 한다는 취지다. 엄밀하면서도 쉬운 판결문을 쓰는 것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국민에게 다가가는 사법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05 한국의 ‘무역흑자 1위’ 수출시장 베트남

부동산, 기숙사, 준비, 광고…. 베트남 호찌민이나 하노이, 한국 관광객이 몰리는 다낭, 호이안 거리에 걸린 프랑스식 알파벳 간판을 찬찬히 소리 내 읽어 보면 한국말로 뜻이 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어와 베트남어 어휘 가운데 한자어 비중은 양쪽 모두 60% 이상.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보니 발음까지 똑같은 단어가 많은 것이다. 유교 전통이 강한 점도 비슷하다. 이렇게 닮은 데가 많은 두 나라의 경제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있다.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이었던 작년 한국이 가장 많은 무역수지 흑자를 낸 상대국에 처음으로 베트남이 올랐다. 610억 달러어치 상품을 수출하고, 267억 달러어치를 수입해 무역흑자는 343억 달러였다. 재작년 1위(352억 달러)였던 홍콩은 작년 3위(258억 달러), 재작년 3위(243억 달러)였던 중국은 22위(12억5000만 달러)로 내려앉았다. 미중 공급망 갈등,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홍콩을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으로 간 대중 수출이 급격히 준 탓이다.
▷1986년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혁개방정책 ‘도이머이’를 시작한 베트남은 최근 들어 후발국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한 가운데 대체 생산기지로 베트남의 존재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통계청이 내놓은 작년 경제성장률 추정치는 8.0%로 1997년 이후 최고다. 한국 1%대, 중국도 4%대 성장이 예상되는 올해에도 베트남 경제는 6%대의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의 급성장에는 현지에 진출한 9000여 개 한국 기업들의 기여가 컸다. 누적 기준으로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서 한국은 수년째 건수, 금액 모두 압도적 1위다. 재작년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0%는 삼성그룹이 올렸다. 전 세계에서 팔리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절반, LG전자의 많은 가전제품들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인한 ‘지경학 리스크’를 피하려는 애플 등 미국 기업들도 베트남 생산을 늘리려고 한다. 1980, 90년대 선진국 자본이 일본의 높은 인건비 등을 피해 한국 투자를 늘린 것과 닮은꼴이다.
▷1992년 5억 달러로 시작한 한국과 베트남의 교역 규모는 31년간 175배로 성장했다. 한국의 교역대상국 중 중국, 미국에 이은 3위다. 아직 수출품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중간재가 많지만 의류, 화장품, K컬처 상품 수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인구 1억 명, 평균 연령 32.5세의 젊은 나라 베트남은 이미 한국에 없어선 안 될 경제 파트너다. 따져 보면 무척 닮은 두 나라의 인연이 점점 깊어져 간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1-06 “경찰청장도 주말이면 음주할 수 있다”

경찰관은 휴무일 또는 근무시간 외에 2시간 이내로 복귀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소속 경찰기관 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경찰공무원 복무규정에 들어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이태원 참사 당일 밤 충북 제천에서 월악산 등반을 한 뒤 머물렀다는 캠핑장이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네이버 길찾기로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가장 가까운 그 지역 캠핑장을 찍어 봐도 자동차로 평일 오후 1시 기준 2시간 2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이 규정이 경찰 내에 더 이상 상급자가 없는 경찰청장에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규정의 취지로 봐서 경찰청장은 쉴 때도 비상 상황에 대비해 2시간 이내 복귀 지역에 있으려 노력해야 한다. 윤 청장은 자신의 관할 범위는 전국이므로 자신이 근무 지역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장이 업무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등산한다고 먼 곳까지 갔으니 말이 나오는 것이다.
▷윤 청장은 캠핑장에서 지인들과 음주를 하다 참사 발생 시점으로부터 45분이 지난 밤 11시경 참사 사실도 모른 채 잠이 들었고 이후 경찰청 상황실의 전화를 2차례나 놓친 뒤 다음 날 0시 14분에야 참사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제 국회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에서 음주를 추궁하는 의원에게 “청장도 주말 저녁이면 음주할 수 있다”고 답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음주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나 마셨냐는 것이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칙에는 공무원은 근무시간이 아닌 때도 항상 소재 파악이 가능하도록 연락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은 경찰청 상황실이 청장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연락을 받으면 응답 가능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음주로 깊이 잠든 탓에 상식적으로 적절한 시간 범위 내에서 응답하지 못했다. 그 자체로 징계감인데도 그는 아직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미국 국립알코올남용중독연구소(NIAAA)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표준 음주 2잔 이내가 적절한 양이다. 표준 음주 1잔은 맥주로는 340cc로 캔 맥주 1개에 해당하고 양주로는 43cc로 21도 소주 1잔을 약간 넘는다. 2잔 초과는 과음이다. 과음 상태로라도 제때 응답을 했으면 모르겠으나 응답도 못 했으면서 음주할 권리 운운하는 걸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답답하다. 참사 사실을 먼저 안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찾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찰청장은 쉬든 자든 대통령의 전화에 늘 즉시 응답 가능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07(토) “올해도 비둘기는 오지 않는다”

요즘 국내 주식 투자자 가운데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의 이름과 성향까지 꿰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식당에서 “제임스 불러드는 강성 매파니 가려들어라”라는 대화가 오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매년 8차례 FOMC 정례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결정하는데, 여기서 제롬 파월 의장 외에도 11명의 위원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정에 따라 주식·외환시장이 요동치고 대출금리도 오르내린다.
▷지난해 3월부터 숨 가쁘게 금리를 올려온 연준이 속도 조절을 시사한 건 11월 말이다. 파월 의장이 “지나친 긴축은 피하고 싶다”, “금리 인상 속도를 낮추는 게 합리적” 등의 발언을 내놓자 시장에선 피벗(정책 방향 전환) 기대감이 커졌다. 연준이 금리 인상 폭을 축소한 12월에는 “인상이 거의 막바지”라는 전망도 나왔다. 월가 투자은행들은 대체로 연준이 올해 1분기까지 금리를 올린 뒤 2분기 인상을 멈추고 이후 금리를 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FOMC 위원 12명 가운데 파월 의장을 비롯해 기준금리를 최대 7%까지 제시한 불러드 등 6명이 통화 긴축을 선호하는 매파로 분류된다. 절반은 중도파와 비둘기파로 꼽힌다. 취임 때만 해도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중립 성향이었던 파월 의장은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인플레 파이터’로 변신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12월 FOMC 회의 의사록을 보면 올해 금리 인하가 적절하다고 본 비둘기파는 한 명도 없었다. 위원들은 “물가 상승률이 목표치인 2%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제약적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게 적절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12월 FOMC 의사록에는 인플레이션이 103번이나 언급된다. 연준은 41년 만에 최고로 치솟은 물가를 잡기 위해 작년 말 기준금리를 4.25∼4.50%까지 끌어올렸는데, FOMC 위원들이 예측한 올해 말 금리 수준은 5.0∼5.25%로 더 높다. 의사록은 “대중의 오해로 금융 여건이 부적절하게 완화되면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연준의 노력이 복잡해질 것”이라며 시장의 금리 완화 심리에 대한 은근한 경고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시장은 여전히 연준의 경고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다.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중국의 코로나19 확산세도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극심한 경기 침체와 미국의 확고한 긴축 의지 사이에서 올해 첫 기준금리 결정을 앞둔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한은이 정부에서는 독립했지만 연준으로부터는 독립하지 못했다”는 이창용 한은 총재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09(월) “왕개미가 황제의 수레에 깔렸다”

“조조의 연환계가 화공에 실패한 이래 배를 묶어 큰 배를 만든다는 항공모함의 발상이 나오지 않았다.” 2020년 10월 중국의 금융 규제를 ‘전당포 영업’이라 비판하던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는 ‘적벽대전’ 얘기를 꺼내며 당국을 겨냥했다. 이 말은 개인과 기업의 배를 엮어 당국에 맞서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환계는 화공에 무너졌다. 알리바바의 금융 자회사 앤트(ANT)그룹의 기업공개(IPO)는 상장 이틀 전 돌연 취소됐고, 마윈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7일 앤트그룹은 마윈이 보유한 의결권을 50% 이상에서 6.2%로 줄이는 지분 조정 결과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마윈은 자신이 지배권을 가진 다른 법인을 통해 그룹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발휘했지만, 지분 조정으로 이 같은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최근 중국 당국이 앤트그룹의 홍콩증시 상장을 허용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마윈의 부활 가능성이 점쳐졌는데, 결국 한번 박힌 미운털은 뽑히지 않았다.
▷앤트그룹은 마윈의 알리바바 중에서도 핵심 사업으로 꼽힌다. 모바일 결제 플랫폼 ‘알리페이’로 시작해 대출, 보험, 자산관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역대 최대 규모로 예상되던 상장에 성공했다면 마윈은 단숨에 세계 11위 부자에 오를 기세였다. 앤트그룹은 개미(중국명 螞蟻)라는 회사 이름처럼 금융 문턱이 높은 개인과 자영업자들을 공략했다. 하나는 미약하지만 합치면 힘을 낼 수 있는 개미의 비유를 마윈은 자주 들었다. 창업 초기 미국의 유통공룡 이베이와 맞붙었을 때 “개미도 세계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했고, 결국 이베이를 넘어섰다.
▷승승장구하던 앤트그룹은 마윈의 설화 사건 이후 중국 당국의 표적이 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동부유(共同富裕·함께 잘살기)’를 내세워 빅테크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를 시작했다. 알리바바와 앤트그룹은 당국의 강도 높은 감사를 받고 대규모 과징금도 물었다. 왕개미(마윈)가 황제(시 주석)의 수레에 깔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텐센트, 디디추싱, 메이퇀 등도 규제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빅테크 기업에 대한 태도를 바꿔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내수를 살리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빅테크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길들이기’ 작업이 끝났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최근 중국 빅테크들은 모험 투자를 줄이고 기부를 늘리는 등 정부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빅테크 규제를 풀어준다고 해도 정부 한마디에 냉·온탕을 오가는 경영 환경에서 과연 배를 엮어 항모를 만드는 상상력이 나올지는 의문이 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10 매 맞는 남편 위한 보호소 생긴다

가정폭력 실태조사가 전국 단위로 시행된 첫해인 2004년 연구자들은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 ‘최근 1년간 아내의 폭력을 경험’한 남성이 10명 중 3명꼴(32.6%)로 집계된 것이다.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아내는 37.3%였다. 이 조사는 가정폭력방지법에 따라 3년 주기로 하는데 15년 후 조사에선 배우자의 폭력을 경험한 남녀 비율이 26% 대 28.9%로 성별 격차가 더 좁혀졌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하는 가장 빈번한 폭력은 ‘통제’와 ‘정서적 폭력’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귀가 시간을 허락받게 하고, 본가 사람이나 친구와 못 만나게 하고, 누구와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는지 감시하는 행동이 통제의 폭력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 욕을 하고, 남편의 물건을 부수고, 남편이 아끼는 반려동물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행동이 정서적 폭력이다. 가정폭력을 처음 경험하는 시기는 대개 결혼 5년 이후로 여성보다 늦지만, 결혼 전 사귈 때 처음 폭력을 경험하는 비율은 여성보다 높다.
▷성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남편은 100명 중 1명이 넘는다(아내는 100명 중 6명이다).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촬영해 동의 없이 공개하는 식이다. 때리고 밀치고 꼬집고 차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흉기로 위협한다. 어떤 집은 장모까지 가세해 피해를 키운다고 한다. 남자가 왜 약한 여자에게 맞고만 있을까. ‘오죽 남자가 못났으면’ 싶어 수치스럽고, 아이들 생각해서 참는다. 때리는 아내를 말리려다 몸싸움이 나 경찰이 오면 남자가 불리하다. 아내가 때리기 전 남편이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경우도 적지 않다.
▷코로나로 부부가 집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가정폭력도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가정폭력상담소 128곳에 접수된 상담 건수가 2021년 하루 평균 722건이었는데 지난해엔 750건으로 늘었다. 상담 건수 10건 중 3건은 피해자가 남성이다.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온 남성들은 모텔을 전전하거나 노숙자 보호시설을 찾는다고 한다. 여성가족부는 새해 업무보고에서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 남성을 위해 첫 전용 보호시설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배우자 폭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녀 모두 상대방에 극도로 의존적이고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은 부모에게서 신체적 학대를 받은 경우가, 여성은 부모 사이에 심각한 폭력을 목격한 경우가 많다. 이들도 자녀 앞에서 서로 욕하고 때린다. 폭력은 대물림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는 명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거리 유지하기. 아내를, 남편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기.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11 “내 신용 점수 좀 낮춰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친구들에게 선물을 자주 보내는 사람은 단순히 ‘인싸’를 넘어 은행에서 대출받기도 수월한 시대가 됐다. 요즘 인터넷은행과 카드사들이 다양한 비(非)금융정보를 활용해 고객의 신용도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대형서점 회원 기간이 길수록, 여행 앱을 많이 이용할수록 신용도를 올려준다. 전통적인 대출·카드 정보가 담아내지 못한 고객들의 소비 패턴과 빚 갚을 의지를 읽어낸 결과다.
▷과거 1∼10등급으로 매겼던 개인 신용등급은 2년 전부터 1∼1000점의 신용점수로 변경됐다. 점수에 따라 대출 한도와 금리가 천양지차여서 ‘점수 올리는 법’, ‘1000점 달성 비결’이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카드 한도를 최대한 늘려 30∼40%만 사용하고, 신용·체크카드를 함께 쓰고, 아파트 관리비나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는 방법들이다. 대출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보다 대출을 제때 꼬박꼬박 갚아온 사람이 더 유리하다.
▷신용도가 곧 돈인 시대에 신용점수를 되레 낮추는 자영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올해 신설된 ‘소상공인·전통시장 자금’ 신청을 앞두고서다. 정부가 신용점수 744점 이하인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상인에게 연 2%의 낮은 이자로 최대 3000만 원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은행 신용대출 금리가 연 7%를 넘어선 상황에서 5년 만기에, 연 2% 고정금리로 지원되니 신용도를 일부러 떨어뜨려서라도 정책자금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달 중 신청 날짜가 공지될 예정인데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엔 “현금서비스 두 번 받았는데 며칠 지나야 점수 떨어지나”, “저축은행 소액대출 최대한 받으면 100점 정도 떨어진다” 등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이 같은 기현상은 정부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한 뒤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초에도 신용점수 744점 이하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연리 1%, 1000만 원 한도의 ‘희망대출’을 개시하자 자발적 저신용자가 늘었다.
▷고물가, 고금리에 극심한 경기 침체까지 겹쳐 자영업자 10명 중 4명꼴로 폐업을 생각 중이라고 한다. 평년과 달리 새해 들어서도 금융권의 대출 문이 열리지 않으면서 정책자금에 기대보려는 절박한 자영업자는 더 많아졌다. 정부의 금융 지원 조치마저 사라지면 자영업자들이 갚지 못하는 부실 위험 규모가 최대 40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제가 나빠질 때 자영업에 가장 먼저 한파가 닥친다. 저신용자와 고신용자를 나누는 차단막 정책 대신 550만 자영업자를 아우를 수 있는 세밀한 지원이 필요하다. 자영업자 잔혹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12 “우주 쓰레기, 내 머리 위로 떨어질라”

고도 800km 안팎의 지구 저궤도에는 현재 7000개가 넘는 인공위성이 작동하고 있다. 수십 년 전 발사돼 수명이 다했거나 고장 난 채 방치된 위성도 3000개에 육박한다. 쓸모없어진 이들 위성과 그 잔해물은 이른바 ‘우주 쓰레기’가 된다. 최근 한반도 상공을 지날 것으로 예측됐던 미국 지구관측 위성도 이 중 하나였다. 다행히 알래스카 인근 해역에 추락해 피해는 없었지만 한때 경계경보까지 발령되면서 적잖은 이들을 긴장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 쓰레기에 사람이 맞은 첫 사례가 나온 것은 1997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에서였다. 시커먼 운석처럼 생긴 15cm 크기의 금속 물체가 느닷없이 로티 윌리엄스 씨의 어깨를 때렸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이 물체가 델타2로켓의 잔해임을 공식 확인했다. 작은 파편이었기에 망정이지 수 t짜리 대형 위성 잔해가 떨어졌다면 대형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주 쓰레기에 대응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 게 이때다.
▷우주를 떠도는 위성 잔해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파편을 만들어낸다. 2009년 미국의 이리디움 통신위성이 러시아의 위성 쓰레기와 충돌했을 때는 대형 파편만 1800개가 쏟아져 나왔다. 반복된 충돌로 파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케슬러 신드롬(Kessler Syndrome)’ 이론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크기가 1cm보다 작은 우주 쓰레기는 지금도 무려 1억3000만 개에 이른다는 게 유럽우주국의 추산이다.
▷우주 쓰레기의 대부분은 대기권 진입 과정에서 대기와의 마찰로 불타 없어진다. 그래도 스테인리스나 티타늄처럼 고온을 견디는 재질은 지상까지 도달 가능하다. 파편 크기가 작은 경우에도 속도가 붙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주에서 낙하하는 잔해는 최대 초속 7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총알의 10배 속도다. NASA는 “지구로 추락하는 잔해 때문에 사람이 피해를 볼 확률은 9400분의 1 수준”이라고 했지만 하나라도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재앙이 따로 없다.
▷인공위성이 많아지는 만큼 우주 쓰레기의 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중 간 우주 개발 경쟁이 가열되는 때다. 스페이스X가 쏘아올린 스타링크 위성만 이미 3500개, 아마존이 위성통신 사업 ‘카이퍼 프로젝트’를 위해 발사하겠다고 밝힌 위성 수도 3000개가 넘는다. 인공위성의 수명은 15∼20년. 다음 세기에는 우주 쓰레기가 저궤도 상공을 덮을 정도로 불어나 위성 발사가 불가능해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지구 바깥의 환경오염에 대비해 우주 쓰레기 종량제라도 실시해야 할 판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13 “채용 청탁 안 받겠습니다”

“노조 △△한테 얘기하면 된다더라.” “○○ 아들은 벌써 내정이 됐다던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최근 ‘채용 관련 어떠한 불법행위도 근절한다’는 제목의 특이한 보도 자료를 냈다. 올해 700명의 생산직 근로자 채용을 앞두고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채용 과정에 청탁·압력·강요·금품·향응은 있을 수 없다. 비리 연루자는 법적 책임을 묻고 일벌백계하겠다”고 했다.
▷노조가 직원 채용과 관련해 이처럼 이례적인 입장 표명을 한 건 18년 전 현대차·기아 채용비리 사건의 트라우마가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아는 2004년 10월 광주공장 생산계약직 근로자를 뽑으면서 1079명의 채용 인원 중 30%에 대한 ‘추천권’을 노조에 준 사실이 이듬해 초 드러났다. 원래 1000명으로 예정됐던 인원이 늘어난 것도 너무 많은 청탁이 몰렸기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추천권을 행사하는 노조 간부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건네고 입사한 근로자 중에는 나이, 학력을 속인 부적합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기아 노조위원장이 “인사 청탁이 관행화되면서 광주공장 노조 간부처럼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입사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고 없는 응시자는 사실상 입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노조 관계자들이 채용에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5월에는 현대차 쪽까지 사태가 번졌다. 노조 간부, 대의원들이 취업 청탁을 대가로 사례금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일부는 구속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같은 우려가 나오는 건 현대차·기아가 청년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생산직의 2021년 평균 연봉은 9600만 원으로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4024만 원)의 2.4배다. 60세 정년이 보장될 뿐 아니라 퇴직 후 계약직으로 1년 더 다닐 수도 있다. 재직 중에는 30%, 장기근속자는 퇴직 후에도 25%의 할인율이 현대차를 살 때 적용된다. 블루칼라 근로자들에겐 꿈의 직장인 셈이다. 게다가 현대차의 생산직 신입 채용은 2013년 4월 이후 10년 만이다.
▷최근에는 기아 단체협약의 ‘고용세습’ 조항이 문제로 떠올랐다. 노동당국은 작년 말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기아 단협을 고치라는 시정명령을 의결했다. 헌법상 평등권, 채용 때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정책기본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현대차 노사는 2019년 삭제한 조항이지만 기아 노조는 여전히 ‘협약 사수’를 외치고 있다. 좁은 취업문을 넘으려고 애쓰는 MZ세대 청년들의 눈에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지 않은가.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1-14(토) 문 닫는 학생식당… ‘1000원 짜리 아침밥’ 사라지나

여행 중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야 오래됐지만 집에 거주하면서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건 서양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해 개봉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은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돼지가 먹는 감자로 디저트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귀족에 의해 부당한 멸시를 받고 쫓겨나는 일로 시작된다. 돈을 받고 음식을 판다는 생각을 못 해온 요리사가 프랑스 혁명기의 평민을 상대로 식당의 개념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후 2가지 종류의 식당이 발전했다. 하나는 레스토랑이고 다른 하나는 캉틴(cantine)이다. 레스토랑은 음식을 제 가격을 받고 파는 곳인데 반해 캉틴은 무료로 주거나 제 가격보다 훨씬 싸게 판다는 차이가 있다. 캉틴은 수도원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19세기 중엽 이후 집산주의가 확산되면서 학교와 공장으로 번져갔다. 우리나라의 학생식당이나 구내식당은 학교나 기업의 보조를 받아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캉틴에 속한다.
▷학생식당과 구내식당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더니 이번에는 고물가로 다시 어려움에 처했다. 서울대 기숙사 학생식당을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은 봄 학기부터 아침 식사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식자재 가격 상승에 전기료 인상까지 겹치면서 식대를 웬만큼 올려서는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광주테크노파크 구내식당은 지난해 2월 문을 닫은 후 1년 동안 12차례 입찰을 시도했지만 유찰됐다. 입찰가를 낮출 대로 낮춰도 응하는 사람이 없다.
▷NHN 페이코가 ‘페이코 모바일 식권 서비스’를 이용하는 기업 직원의 지난해 3분기 결제데이터를 권역별로 분석한 결과 서울 종로구의 평균 밥값이 비교적 싼 편인데도 8500원이다. 백반 가격이 대개 그 정도다. 가장 비싼 삼성역 인근은 1만5000원이고, 강남역 인근은 1만2000원이다. 가장 싼 구로구가 7000원이다. 그나마 학생식당의 밥값은 평균 5000원 정도이고 구내식당의 밥값은 병원이 6000원 정도다.
▷5000원도 많은 학생들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래서 아침에 한해 ‘1000원 학식’을 제공하는 대학들이 꽤 있다. 학생이 1000원, 농식품부가 1000원, 나머지는 학교가 부담한다. 아침에 긴 줄을 선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점심이다. 수업시간에 맞춰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오거나 바로 돌아가 뒤늦은 점심을 먹는 학생도 적지 않다. 그나마 5000원짜리 점심마저 그 가격으론 운영이 어려워 없어질 판이다. 학생도 학교도 학생식당도 어렵다. 정부가 더 많은 지원을 노력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16(월) 상속세 ‘피상속인’ 아닌 ‘상속인’ 기준으로 물리자

돌아가신 아버지가 30억 원의 재산을 세 자녀에게 남겼을 때 상속세를 매기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려준 30억 원’에 대해 과세한 뒤 자녀들이 이를 3분의 1씩 나눠 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세 자녀가 ‘물려받은 10억 원’에 각각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전자를 유산세, 후자를 유산취득세라고 한다. 우리는 1950년 상속세법이 처음 제정된 이후로 73년째 유산세 방식을 쓰고 있다.
▷뭐가 다를까 싶지만 현행 상속세는 재산이 많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과세 구조여서 과세 대상이 30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낮아지면 세금이 대폭 깎인다. 위 사례의 세 자녀가 현행 유산세 체계에선 1인당 2억7200만 원을 내지만, 유산취득세가 적용되면 1억8400만 원을 부담하면 된다. 자녀공제 같은 각종 공제를 늘려주지 않아도 세금이 30% 정도 감소하는 것이다. 누진세제의 특징 때문에 형제자매가 많을수록 세금이 줄어드는 폭은 더 가팔라진다.
▷상속세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 회원국 중 유산세 방식을 채택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4곳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20개국은 유산취득세를 쓴다. 유산세는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 기준으로 세액이 결정되다 보니 물려받는 자녀들의 세 부담 능력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집과 주식을 팔고 대출까지 받는 국내 상속자들이 그래서 많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일본의 55%보다 낮지만 실효세율이 더 높은 것도 유산세와 유산취득세의 차이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정부가 상속세 과세 방식을 유산세에서 유산취득세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 간담회, 해외 제도 연구 등이 한창이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유산취득세로의 전환이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10% 정도에 그쳤다. 현재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라고 같은 세법에 묶여 있고 세율 체계도 동일한데, 증여세는 유산취득세 방식을 적용하고 상속세는 유산세 방식을 고수하는 건 문제가 있다.
▷과거 상속세는 재벌처럼 유명한 사람이 내서 ‘유명세’, 세금을 내면 바보여서 ‘바보세’로 불렸다. 하지만 요즘은 금수저가 아니어도 어쩌다 보니 상속세를 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시세 10억 원 넘는 집 한 채만 물려줘도 과세 사정권에 들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 후기에 진입하는 2030년이 되면 부(富)의 이전이 본격화된다고 한다. 지금은 ‘어쩌다 상속세’일지 몰라도 몇 년 후 ‘상속세 쓰나미’로 닥칠 수 있는 것이다. 유산취득세 전환과 함께 23년째 그대로인 상속·증여세법을 손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17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 연설 60년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기념일이다. 미국인들은 연방 공휴일인 이날 킹 목사 기념관을 찾고, 그의 연설문을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가르친다. 올해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 60주년이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킹 목사가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주일 연설을 하며 그를 “비폭력의 전사”로 기렸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 노예의 후손들과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 중 하나로 꼽힌다. 학자들이 뽑은 ‘20세기 최고의 미국 정치연설’에 올라 있다. 반복되는 표현의 단순함이 평등을 부르짖는 메시지의 강력함을 증폭시킨 명문장이다. 킹 목사를 두고 “한 문장만으로 제퍼슨과 링컨 같은 역사적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왔다.
▷1963년 8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기념행사에서 킹 목사의 연설 순서는 18명의 초청 연사 중 16번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연설이 막바지에 달할 때쯤 부산하던 뉴스룸이 조용해지고 기자들이 멈춰선 채 TV 속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반면 25만 명이 운집한 현장의 열기는 여름 무더위를 무색하게 할 만큼 뜨거워졌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FBI는 킹 목사를 선동에 앞장설 ‘위험인물’로 지목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년이 지났지만 킹 목사의 연설은 여전히 살아 있다. 2020년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흑인이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전역에서 터져 나오는 인종차별 철폐 외침을 다시 들어야 했다. 흑인이 인구의 13%를 차지하지만 범죄 혐의를 받는 수감자의 비율은 35%로 가장 높은 게 미국의 현실이다. 경찰 체포 과정에서 사망하는 흑인의 수는 백인의 3배에 달한다. 첫 흑인 대통령의 기록을 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마저 “인종 간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했다.
▷불평등 혹은 차별의 문제가 어디 피부색뿐일까. 여성을 짓누르는 유리천장에서부터 종교, 학벌, 가난 등으로 받는 차별의 문제는 국제사회 도처에 존재한다. 그 누구도 이런 조건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지금도 누군가는 계속 싸우고 있다. 현실적 한계의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는 꿈”을 꾸는 우리 옆의 전사들이다. 우리 모두 꾸어야 할, 그리고 실현시켜야 할 꿈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18 민망했던 변협회장 선거…소송전문가들의 이전투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나선 김영훈 후보와 안병희 후보는 선거 1주일을 앞두고 불법 설문조사를 했느니 마느니 고소고발전을 벌였다. 양측은 이미 2년 전 변협 회장 선거 투표 당시의 폭행 사건까지 끌어들여 고소와 맞고소를 주고받은 상황이었다. 변협의 선거 규칙은 까다롭다. 그렇게 꽁꽁 묶어놓아 돈이 안 드는 선거를 만든 측면이 있다. 다만 변호사가 고소고발의 전문가다 보니 까다로운 선거 규칙을 역이용해 상대 후보를 고소고발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한다.
▷김 후보가 16일 3909표(38.5%)를 얻어 3774표(37.2%)를 얻은 안 후보를 누르고 내년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신임 회장으로 뽑혔다. 1.3%포인트의 표 차는 선거가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은 사설 법률플랫폼 로톡이었다. 현 집행부 노선을 계승한 김 후보는 로톡에 비판적인 반면 안 후보는 로톡에 개방적이다. 다만 김 후보는 협회 차원의 법률플랫폼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나왔다.
▷변협은 법무법인 세종의 설립자인 신영무 변호사를 끝으로 명망가 위주의 회장 시대에 작별을 고했다. 2013년 임기를 시작한 위철환 회장부터는 지방변호사회에서 조직 기반을 다져온 회장들이 당선됐다. 2021년 임기를 시작한 현 이종엽 회장에 이르러서는 이미 지방변호사회를 숫자로 장악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변협에도 영향을 미쳐 당선을 좌우했다. 그러나 로톡을 둘러싼 찬반 논란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 간에도 분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업계에서 기반을 잡은 변호사는 로톡에 반대하고 기반을 잡지 못한 변호사는 찬성하는 쪽이다.
▷변협은 공익단체와 영리단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나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한 해 1700명씩 쏟아져 들어오면서 업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변호사가 점점 늘고 있음을 뜻한다. 변협 회장도 이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변협의 영리단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변협은 인권이 위협받을 때는 인권의 수호자가 되고 헌법이 위협받을 때는 헌법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 정당한 영리 추구가 인권과 헌법의 수호와 상치되는 건 아니지만 변협의 영리단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변협 회장 선거가 회원의 영리만 앞세운 선거가 되면 인권과 헌법의 수호에 필요한 권위가 사라질 수 있다. 회장 선거가 치열한 것까지야 뭐라 하겠는가. 다만 한편으로는 경직된 선거 규칙을 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비방을 자제해 변협이 법 기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법 수호자들의 모임임을 보여줬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19 소문난 둔촌주공, 뚜껑 여니 ‘계약 포기’ 쏟아졌다

통상 인기 있는 분양 아파트들은 10만 명이 청약할 수 있다고 해서 ‘10만 청약설’이 돈다. ‘올림픽파크 포레온’ 이름으로 분양에 나선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아파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송파구로 이어지는 준강남권 입지에 1만2000채가 넘는 미니 신도시급 대단지여서 예비 청약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일찌감치 ‘분양시장 최대어’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곳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초라했다. 지난해 12월 청약에서 10만 명은커녕 2만 명이 신청해 경쟁률은 평균 5.45 대 1에 그쳤다. 청약 가점은 84점이 만점인데, 전용면적 49㎡에선 20점으로도 당첨되는 사람이 나왔다. 저조한 청약 성적은 가뜩이나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때 23억 원을 넘었던 인근 대단지 아파트 전용 84㎡의 호가가 16억 원 안팎까지 떨어졌다. 둔촌주공 84㎡ 분양가는 발코니 확장 등을 포함해 14억 원 정도다.
▷미분양 공포를 막아세운 건 ‘1·3 부동산 대책’이었다. 분양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와 중도금 대출 규제를 없애고, 전매제한 기간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들이 대거 담겼다. 소급 적용도 해주기로 했다. 강남·서초·송파·용산구만 남겨 놓고 규제지역도 모두 풀었다. 당장 둔촌주공 청약 당첨자들이 혜택을 보게 되자 이번 대책이 ‘둔촌주공 일병 구하기’라는 얘기가 돌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엔 “둔촌주공 청약 다시 해야 한다”는 글이 이어졌다.
▷하지만 17일 계약이 마감되자 “소문난 잔치에 역시나 먹을 게 없다”는 말이 나온다. 둔촌주공 계약률은 70% 수준으로 일반분양 4786가구 중 1400여 가구가 계약을 포기했다. 특히 전용 29∼49㎡ 초소형에서 계약 포기가 속출했다. 기대 이하의 청약 경쟁률과 공급 물량을 감안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전방위 규제 완화에도 인기 단지에서 이만큼 미계약이 발생한 것은 흥행 참패라 할 만하다. 정부의 규제 대못 뽑기도 집값 하락 우려와 금리 인상의 위력을 넘어서지 못한 셈이다.
▷높은 분양가도 미달 사태에 한몫했다. 비슷한 때 분양한 ‘강동 헤리티지 자이’는 100% 계약을 끝냈는데, 입지는 조금 떨어지지만 분양가가 4억 원 이상 낮다. 둔촌주공의 넓은 원룸, 투룸을 누가 7억∼8억 원 주고 사겠냐는 것이다. 전국에 쌓인 미분양 주택은 7년 만에 6만 채를 넘어섰고, 지난해 수도권에서 생애 처음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은 16만여 명에 그쳤다. 1·3대책으로 숨통이 트이나 싶던 부동산 시장은 열흘 만에 닥친 기준금리 인상에, 둔촌주공의 미달까지 덮쳐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게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20 썰렁한 경기에도 사랑의 온도탑 100℃ 넘었다

설 대목 경기가 썰렁하다지만 서울 달동네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냉골이다. 고물가에 경기 한파까지 덮치면서 한 달에 열흘은 연탄불 없이 시린 냉기를 견딘다. 사회복지 단체에도 불경기에 팔지 못한 식품 기부만 늘었다고 한다. 그래도 매년 연말연시를 맞아 전국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15일 100도를 넘어섰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4040억 원을 목표로 지난해 12월 1일 모금을 시작했는데 어제까지 4201억 원이 모여 기부 실적을 나타내는 온도계가 104도를 기록했다. 모금이 끝나는 이달 말이면 전년도 모금액(4279억 원)을 웃돌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 피해가 심각했던 2021년과 2022년에도 115.6도로 펄펄 끓었던 사랑의 온도탑이다.
▷올해 모금에선 금융권의 기부금 증액이 두드러졌다. 연예인 팬덤기부도 새로운 트렌드다. 큰손들의 통 큰 기부만 있는 게 아니다. 경기 안성의 노신사는 아내가 생전에 모아둔 동전과 장례비용을 합쳐 200만3550원을 내놓았다. 인천의 환경미화원은 지난 1년간 거리를 청소하며 주운 동전과 지폐 약 26만 원을 보탰다. 경로당 어르신들은 용돈을 모아서, 중년 부부는 아들이 무사히 전역했다며 감사 성금을 냈다.
▷팬데믹 이후 경기는 얼어붙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기부 인심은 오히려 후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자선지원재단 CAF가 매년 119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낯선 이를 도와준 적이 있는지 △돈을 기부했는지 △자원봉사를 했는지를 물어 산출하는 세계기부지수는 2022년 40%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부지수 1위의 가장 관대한 국가는 5년째 인도네시아다. 상위 10위권 목록을 보면 미국(3위), 호주(4위), 뉴질랜드(5위), 캐나다(8위)를 제외한 6개국은 경제력이 중하위권인 나라들이다.
▷한국은 대만(91위), 프랑스(100위), 일본(118위)과 함께 88위로 여전히 하위권이다. 2014년 개인 기부금 공제 방식이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뀐 뒤 기부 증가율이 정체 상태다. 기부의 특징은 하는 사람이 계속 한다는 점이다. 마음은 있는데 선뜻 시작을 못 하는 이들에게 전북 익산의 ‘붕어빵 아저씨’ 김남수 씨의 조언을 공유한다. 매일 붕어빵을 구워 번 돈에서 1만 원을 떼어 모아두었다 연말에 365만 원을 내놓는 기부를 10년 넘게 하고 있다. “목돈을 내긴 어려워도 하루 100원, 1000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매일 서랍에 누군가를 위해 1만 원을 넣을 때마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건 덤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21(토) “고향기부에 稅 공제… 앗 2년 뒤부터” 기재부의 황당 실수

2010년 법무부와 국회가 법률 개정 과정에서 특정강력범죄의 적용 범위를 축소하는 실수를 저지른 일이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쉽게 고치는 과정에서 “∼의 죄 및”이란 자구를 빠뜨린 게 화근이었다. 단 세 글자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강간살인, 강간상해죄에 대한 형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수는 법 시행 8개월 뒤 대법원에 의해 발견됐고, 2011년 법률 개정으로 바로잡혔다. 하지만 1년 동안 성범죄자들이 쾌재를 불렀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번엔 정부의 입법 실수로 올해부터 시행하는 고향사랑기부금 세액공제 혜택에 대한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자신이 거주하지 않는 지방자치단체에 일정액을 기부하면 10만 원까지는 전액, 초과분은 16.5%를 정부가 세액공제로 돌려주는 제도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의 입법 실수로 세액공제 적용이 2년 미뤄지게 된 것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지난해 국회에서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을 2025년으로 유예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 과정에서 고향사랑기부제 관련 내용을 제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와 지자체들은 고향 사랑으로 마련된 기부금이 지역 경제를 살릴 것이라며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쳐 왔다. 윤석열 대통령뿐 아니라 방탄소년단(BTS)의 제이홉, 축구선수 손흥민 등 여러 유명인사도 참여했다. 고향도 살리고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에 많은 이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이 같은 열기에 정부가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내년 연말정산 때 예정대로 세액공제를 반영하려면 연내 국회에서 다시 법을 고쳐야 한다.
▷정부는 세액공제 시행 시기를 2023년으로 되돌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뒤늦게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에서 법안이 처리되면 다행이지만 황당한 사고를 부른 책임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재부는 지난해 말에 국회에서 법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발생한 실수라고 했다. 하지만 개정안이 국회로 제출된 건 지난해 9월이었으니 제대로 된 해명이 아니다. 이달 10일 반도체 세액공제 관련 입법예고에 슬쩍 포함시켜 조용히 오류를 수정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도 문제다.
▷더 심각한 건 법률안 처리 과정에서 ‘크로스 체킹’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 입법은 주무 부처와 관계기관의 협의, 법제처 심사를 거치고 차관회의와 국무회의까지 통과해야 한다. 국회에서 전문위원이 검토하고 법사위원회와 본회의도 넘어야 한다. 이처럼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도 누구 하나 오류를 걸러내지 못했다. 신뢰가 법질서에서 갖는 중요성과 법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렇게 건성건성 심사해선 안 될 일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25(수) 13월의 월급은 옛말… 작년 연말정산 393만 명이 토해냈다

많게는 100만 원 넘는 세금을 연초에 돌려줘 ‘13월의 보너스’로 불리던 연말정산. 요즘 다수의 월급쟁이들에게 연말정산이 반갑지 않은 ‘신년 세금폭탄’으로 바뀌고 있다. 2021년 근로소득에 대한 작년 초 연말정산 결과 세금을 조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낸 직장인이 전체 근로소득 신고자의 19.7%인 393만4600명이었다. 1인당 평균 97만5000원, 총 3조8373억 원의 세금을 추가로 납부했다. 세금을 일부라도 돌려받은 근로자는 67.7%다.
▷연말정산 결과 내야 할 근로소득세보다 원천 징수된 세액이 적을 경우 세금을 더 내는 일이 벌어진다. 월급은 올랐는데 이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년 달라지는 소득공제 항목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첫해인 2020년분 정산 때에는 평균임금 상승률이 1.2%로 낮고, 공제 혜택이 일시적으로 커져 세금을 돌려받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021년분 정산에선 임금이 3.9% 오르고, 공제 혜택이 줄면서 추가로 세금 낸 사람이 전년보다 42만 명 증가했다. 다만 소득이 낮은 근로자 35.3%는 근로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
▷막 시작된 2022년분 연말정산 결과도 불안하다. 작년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은 3.8%로 높은 세율 구간에 새로 진입한 근로자가 적지 않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공급망 갈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가 5.1%나 올라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높은 물가 때문에 구매력이 줄었는데도, 화폐로 표시된 ‘명목소득’이 늘어 소득세를 더 내게 되는 전형적인 ‘인플레이션 세금’ 현상이다.
▷같은 직장, 비슷한 월급을 받는 동료가 세금을 돌려받았다면서 좋아하는데 자신은 세금을 더 토해내야 한다면 큰 손해를 본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2015년 초 터진 ‘연말정산 파동’이 그런 경우였다. 출산·다자녀가구, 독신가구의 공제 혜택을 줄인 소득세법 개정으로 동료 근로자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 월급쟁이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과하고, 연봉 5500만 원 이하 근로자 541만 명에게 8만 원씩 세금을 돌려줬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세금 나갈 일은 늘었지만 연말정산 자체는 쉬워졌다. 국세청은 신용·체크카드, 현금영수증 결제 내역, 기부금 액수 등 소득공제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료를 간소화 서비스로 제공한다. 올해는 신용카드·대중교통 결제, 무주택 가구주가 집을 얻느라 대출한 금액 등의 공제 혜택이 늘었다. 꼼꼼히 혜택을 챙겨 한 푼의 세금도 억울하게 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1-26 “중국은 미군 떠난 한반도를 티베트·신장 취급할 것”

“최근 일부 대국마저 미국의 비열한 강박에 굴종하고 서푼짜리 친미 창녀의 구린내 나는 치맛바람에 맞장단을 쳐주는 치사한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2016년 4월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기고문이다. 잇단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하자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중국도 가만있지 않았다. 공산당 기관지까지 나서 “북한이 중국에 점증하는 위협이 됐다”며 골칫덩이 북한을 정면 비판했다.
▷북-중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지만 김정은 집권 이래 양국 간에는 긴장과 마찰이 이어졌다. 김정은이 2013년 대표적인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데 이어 2017년 역시 친중파인 이복형 김정남까지 암살하면서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시진핑 주석이 주최하는 주요 외교 이벤트 때마다 마치 잔칫상에 재를 뿌리듯 도발을 자행해 화를 돋웠고, 김정은은 방북한 시진핑의 특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최근 나온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의 회고록에는 당시의 험악한 북-중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눈에 띈다. 2018년 3월 첫 방북 때 폼페이오는 “중국은 늘 ‘주한미군 철수는 김정은 위원장을 매우 기쁘게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고 김정은을 떠봤다. 그러자 김정은은 웃음을 터뜨리고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중국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나아가 중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주한미군이 필요하고, 중국은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취급하려고 미군 철수를 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군 주둔 용인론은 사실 아버지 김정일도 구사했던 협상 책략이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오래전 미국에 특사를 보내 ‘미군이 계속 남아 남북 간 전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밖의 얘기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털어놨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의 수많은 침략 사례까지 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북한 매체는 미군 철수를 계속 주장하나. 김정일의 답은 이랬다.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정은은 아버지보다 한발 더 나가 미국과의 거래에서 혈맹의 핵심 관심사를 무시하고 그 책임마저 떠넘길 기세였다. 하지만 막상 북-미 대화가 가동되자 김정은은 누구보다 중국과의 단절을 두려워했다. 회담이 이뤄질 때마다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달려가 훈수를 받았다. 폼페이오는 “중국은 북한에 대해 완전에 가까운 통제권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북-미 대화는 좌초했지만, 북-중 관계는 복원됐다. 중국에 대차게 호기를 부리던 김정은. 이제 어느 때보다 중국에 매달리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1-27 의대가 뭐길래, SKY 자퇴생이 1874명이나…

“전국에서 의대 합격생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학교는?” 답을 과학고나 자사고 같은 유명 고교에서 찾으려고 하면 이미 출발부터 틀렸다. 정답은 ‘서울대’라고 한다. 서울대생 가운데 재수나 반수(半修)를 해서 의대에 가는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의 우스갯소리지만 최근 대학에 불고 있는 ‘의대 쏠림’ 현상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종로학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자퇴한 학생이 1874명으로 전년 대비 40% 늘었다. 이들 대학의 입학 정원이 대략 1만2000여 명이니까 6명 중 1명꼴로 어렵게 얻은 학생증을 자진 반납한 셈이다. 이들 자퇴생의 75%는 자연계열로 대부분 수능을 다시 쳐서 의약 계열에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퇴생이 많아지면서 학과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의대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과학·기술 인재를 키울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고, 영재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과학고는 ‘의학 계열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학생만 입학시킨다. 만약 서약을 어기고 의대에 진학하면 장학금·교육비 환수, 대입 추천서 제외 등의 불이익을 준다. 하지만 올해 입시에서 서울과학고는 3학년 정원의 32%인 41명, 경기과학고는 19%인 24명이 의대에 지원했다. 그동안 지원받은 교육비 500만∼600만 원을 토해 내는 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대 선호 현상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됐지만 최근 강도가 더 세졌다. 의대에 목을 매는 이유는 의대 졸업 후 누릴 수 있는 직업적 안정성과 고소득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3070만 원이다. 대기업 평균 연봉 7000만 원의 3배를 웃돈다. 개원의는 더 높아 평균 3억 원에 육박한다. 청년 취업문은 점점 좁아지는데 의대에 입학만 하면 장밋빛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으니 실력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상위권 대학 학생들의 무더기 자퇴로 공백이 생기면 중위권 대학 학생들이 편입을 위해 재수나 반수를 하고, 다시 지방대 학생들을 자극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다. 이처럼 의대가 블랙홀처럼 우수한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것은 대학 교육과 인재 관리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큰 낭비다. 의대 쏠림은 결국 다른 선택지가 불확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로 창업 등에 도전할 만한 환경이 부족하고,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와 적성을 펼치는 데 있어 의대만큼 매력적이고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이 많아야 의대 쏠림이 사라질 수 있다.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하겠지만 정부와 산업계, 교육계가 차근차근 숙제를 풀어가야 한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1-28(토) 승진 탈락에 앙심, 반도체 핵심기술 中에 빼돌렸다

‘뭔가 수상한데….’ 중국 반도체 소재 회사인 D사로 이직한 40대 연구원의 이상 동향이 국내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은 지난해 초였다. 이직 전 회사의 업무용 노트북을 “바이러스에 걸렸다”며 폐기해버린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기존 회사의 서버 등에서 찾아낸 이메일 기록에서는 민감한 기술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이 발견됐다. 그와 비슷한 시기 D사로 옮긴 다른 한국인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었다.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연구원 6명이 최근 재판에 넘겨졌다. 주도적 역할을 한 50대 연구원은 2018년 임원 승진에서 탈락한 뒤 중국 회사로의 이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승진 탈락에 앙심을 품은 상태에서 “연봉의 3배 이상을 주겠다”는 중국 측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는 중국 회사와 동업을 약속하고도 태연히 기존 회사에 근무하며 반년 넘게 기밀자료들을 빼돌렸다. 그 기간에 동종업계 연구원들을 스카우트해 먼저 중국에 들여보냈다. 장시간에 걸친 치밀한 준비 작업이었지만 끝내 덜미가 잡혔다.
▷반도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군사, 항공우주, 바이오 등 타깃이 되는 첨단기술 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반도체 분야에서 빠져나간 주요 기술은 100건을 훌쩍 넘는다. 해킹과 내부자 매수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지만 주된 루트는 결국 인력 자체의 이동이다. 승진 누락자나 퇴직자 등 보안 관리가 느슨해진 이들의 빈틈을 노린다. 기술 유출 사건으로 검거되는 혐의자의 46%가 퇴직 인력이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산업기술 확보전 속에서 특히 중국의 기술 탈취 시도는 집요하다. 반도체 기업 TSMC가 있는 대만은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관련 업계 주요 인사들의 중국 여행을 사전 심사·승인하는 절차까지 만들었다. 중국과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경우 FBI가 추적 중인 기술 탈취 사건만 1000여 건에 이른다.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인 네덜란드 ASML도 실리콘밸리의 자회사를 앞세워 기술을 빼내려 한 중국 회사를 고소했다.
▷첨단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산업을 넘어 국가 이익을 훼손하는 매국적 범죄 행위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적발된 기술 유출 건만 해도 피해 규모가 25조 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막겠다고 연구원 개개인의 애국심이나 도덕성에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핵심 인력을 붙잡을 인센티브와 유출 시 엄벌하는 시스템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해외로 기술을 유출한 산업스파이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 처벌로는 “수백억 원 받고 팔아넘길 만하네” 같은 소리만 나올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1-30(월) ‘억 소리’ 나는 아파트 ‘마피’

빚을 끌어다 패닉바잉에 나설 만큼 주택시장이 들끓었을 때 2030세대 사이에서 ‘청무피사’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청약은 무슨, 피 주고 사’의 줄임말이다. 청약가점이 낮은 20, 30대는 바늘구멍 같은 청약 대신 차라리 프리미엄(웃돈)을 주고 아파트 분양권이나 입주권을 사는 게 낫다는 뜻이다. 청무피사에 나선 청년, 신혼부부 덕에 2, 3년 전 미분양이 쌓였던 수도권 일대 아파트들은 빠르게 남은 물량을 털어내며 최고가를 갈아 치웠다.
▷하지만 청무피사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프리미엄은커녕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분양권·입주권을 내놓는 ‘마피(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가장 먼저 마피가 나온 건 수백 대 1의 청약 경쟁률을 보였던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이다. 분양·대출 규제 같은 겹겹의 주택 규제를 피할 수 있어 틈새 투자처로 각광받던 상품들이다.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도시형생활주택에선 분양가보다 1억∼2억 원씩 낮춘 마피 매물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비(非)아파트와 지방 부동산 시장을 거쳐 서울 아파트에서도 마피가 속출하고 있다. 입주를 1년 남긴 송파구 오금동의 A아파트는 전용면적 65㎡ 매물이 13억 원대에 나와 있다. 분양가보다 1억5000만 원가량 낮다. 지난해 초 2600 대 1의 경쟁률로 청약을 마쳤을 때만 해도 웃돈이 1억 원 넘게 붙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불과 2년 새 마피가 됐다. 서울에서도 입지가 떨어지거나 단지 규모가 작은 아파트는 더 심각하다. 강북구 수유동 B아파트의 59㎡는 초기 분양가보다 2억5000만 원가량 싸게 나왔지만 여전히 거래가 안 된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셋값도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억 소리’ 나는 마피가 쌓이는 추세다. 입주를 앞두고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대출이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집주인들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분양권을 처분하려는 것이다. 고금리 한파로 전세를 찾는 사람이 끊기고, 세입자가 면접 보듯 집주인을 심사하는 역전세난이 마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마피 매물이 안 팔리는데 올해 전국에서 35만 채 넘는 아파트 입주 물량이 쏟아져 역전세난과 마피 증가세가 동반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특히 강남 4구의 입주 물량은 지난해보다 3배 이상 많아 전세계약을 갱신하려면 집주인이 5억 원 안팎의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됐을 때 마피 매물을 브로커를 통해 넘기는 탈법이 성행한 적 있다. 역전세든, 마피든 그 고통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 세심하고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31(화) “전문성보다 책임의식”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 변했다

국내 주요 대기업의 한 센터장은 최근 신년 보고서 작업을 하다 주변을 둘러보곤 격세지감을 느꼈다. 같은 층 사무실의 다른 센터에 센터장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같이 야근을 하고 있던 40대 팀장은 “저라도 남아 있으니 너무 고맙죠?”라며 농담 섞인 생색을 냈다고 한다. 젊은 직원들은 정시 퇴근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팀장급 이상만 남아서 일을 마무리하는 요즘 사무실 풍경이다.
▷국내 100대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의 첫 번째 기준으로 ‘책임의식’을 꼽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5년 단위로 시행하는 인재상의 올해 조사 결과다. 2018년에는 5위에 그쳤던 책임의식이 1위로 올라온 것이 눈에 띈다. ‘도전정신’과 ‘소통·협력’, ‘창의성’, ‘열정’을 모두 제쳤다. 업무 현장에서 책임의식 강화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의미다. 대한상의는 결과를 분석하면서 Z세대를 콕 찍었다. “보상의 공정과 자아실현을 요구하는 Z세대에 기업들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식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상은 시대와 트렌드에 따라 변한다. Z세대가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이들의 특징이 인재상의 조건과 기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Z세대가 받는 만큼만 일하고, ‘워라밸’을 챙기며, 조직 논리를 거부한다는 게 기업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퇴사를 20번 했다는 ‘프로퇴직러’가 소개되는 등 1, 2년 안에 회사를 옮기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개인 역량보다는 근무 태도에 비중이 더 실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Z세대가 가져온 기업 현장의 변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자리를 속속 채우고 있는 Z세대 인력은 향후 10년 안에 지금의 3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해외의 채용 컨설팅 회사들은 ‘Z세대 고용을 위한 10가지 노하우’ 같은 자료들을 쏟아내고 있다. “메뚜기처럼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직장을 옮겨다니고(job hopping)”, “침대 속에서 클릭 한 번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신입 직원들을 보는 기업들의 불안한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런 기업과 그 속에서 일하려는 젊은 직장인의 동행은 만국 공통의 과제인 셈이다.
▷기업의 ‘꼰대 문화’를 거부하는 신세대 직원들의 항변에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바뀐 근무 특징이 업무의 완결성을 해치거나 협업을 저해하는 경우까지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자세로 일하는 것은 기업을 위한다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동력이기도 하다. 기업들이 앞으로 발굴, 투자하고 키워갈 미래 인재를 찾는 기준도 이것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5년 전 2위였던 ‘전문성’은 올해 6위까지 밀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