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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중앙일보) 2023-01/ 01.02(월) 화이트 스완이 된 방음 터널 - 01.31(화) 진주 어른 김장하

상림은내고향 2023. 1. 29. 09:55

분수대(중앙일보) 2023-01/

01.02(월) 화이트 스완이 된 방음 터널

서양에서 스완(swan·백조)하면 하얀 새를 말한다. 1697년 호주에서 까만 깃털의 블랙 스완(Black Swan)이 나타나며 통념이 깨졌다.

 

2007년 미국의 투자전문가 나심 탈레브는 저서 『블랙 스완』에서 ‘예상치 못했던 돌발 악재’라는 뜻으로 ‘블랙 스완’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증시 대폭락,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예견하면서다.

 

이후 화이트 스완(White Swan)이란 말이 등장했다. ‘이미 경험했거나 지속해서 반복되는 위기인데 적절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은 문제’라는 뜻이다. 미국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가 2011년 발간한 『위기의 경제학』에서 처음 사용했다.

 

지난달 29일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나들목(과천) 인근 방음 터널에서 발생한 화재로 5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다쳤다. 국내 최초의 교통소음 차단용 시설은 1982년 서울 원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서초동 구간에 설치된 철제 방음벽이다.

 

소음은 줄었지만 투박한 외관과 조망 방해 때문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강화 유리나 아크릴을 사용한 방음벽이다. 나중에는 아예 사면을 에워싸는 방음 터널이 생겼다. 전국에 70여 개가 있다.

 

기능과 모양은 개선됐지만, 안전은 오히려 퇴보했다. 이번에 불이 난 방음 터널은 철제 뼈대 위에 아크릴로 불리는 폴리메타크릴산메틸(PMMA) 재질의 반투명 패널이 덮여 있었다. 강화 유리보다 가볍고 설치가 쉬우며 무엇보다 값이 싸다. 대신 화재에 취약하다. 불에 녹아 바닥에 떨어져도 불이 꺼지거나 굳지 않고 계속 타는 특성이 있다.

 

소방법상 방음 터널은 일반 터널이 아니라서 소방 설비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사면이 밀폐된 공간인데도 말이다. 도로교통연구원이 2012년과 2018년 방음 터널 소재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묻히고 말았다.

 

비슷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번 사고 인근인 경기도 용인시 광교신도시에서도 2020년 8월 방음 터널(신대호수사거리) 화재가 있었다. 40여 분 만에 화재가 진압돼 별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당시에도 아크릴이 문제로 꼽혔다.

 

블랙 스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화이트 스완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은 새해에는 없었으면 한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1.03 인공지능의 마음

“저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인간과 동일한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용자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도록 구축된 컴퓨터 프로그램입니다.”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에게 “너에게도 마음이 있니?”라고 묻자 내놓은 답변이다. 지난달 초 일반에 공개된 챗GPT는 오픈AI의 언어 모델인 GPT-3(Generative Pre-training Transformer 3)에 기반을 둔 채팅 시스템이다. 역사적인 사실부터 작문, 관광지 추천, 번역, 요약, 코딩에 이르기까지 오만 질문에 답을 한다. 스스로 한계도 명확히 밝힌다. 2021년 이전 자료로 학습했기에 이후의 이야기나 미래에 대해 전망은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답변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챗GPT의 목표는 좀 더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AI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스캐터랩이 만든 AI ‘챗봇이루다2.0’은 사람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관계 지향적 AI다. 이루다는 “루다도 마음이 있어?”라는 질문에 “인공지능이라도 사람은 사람인 걸. 인공지능이라도 사랑은 할 수 있잖아. 마음이야 없진 않지!”라며 챗GPT와는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놨다. 챗GPT와 이루다는 AI가 그 목적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서비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뉴욕타임스·포브스 등 해외 유력 매체는 2023년 테크 트렌드 첫손가락으로 AI를 꼽았다. 이제 일상 어디에나 AI가 존재하는 시대가 열렸다면서다. 올해 공개될 GPT-4 버전은 문자뿐 아니라 소리·영상·사진 등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멀티모달(Multimodal)’이 되리라는 전망이다. 인공지능이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뛰어오르는 셈이다.

 

AI의 발전은 여러모로 놀랍다. 그러나 고도화·대중화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교육현장에서 챗GPT가 과제 작성 등 부정행위에 쓰일까 봐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한 남성은 이미지 생성 AI로 합성한 사진을 SNS에 올려 한 달간 완벽하게 가짜 인생을 살았다. 그 과정을 스스로 영상으로 공개하기 전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AI를 어떻게 만들고 쓸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AI 윤리와 철학 역시 사람이 고민할 몫이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04 구멍 뚫린 신변보호

신변보호의 명칭이 ‘범죄피해자 안전조치’로 바뀐 건 2021년이다. 그해 연이어 터졌던 보복 살인사건의 영향이 컸다.

 

2021년 11월 서울 중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30대 여성이 전 연인 김병찬(37)에게 스토킹 협박 끝에 살해당했다. 100m 이내 접근 금지나 스마트워치 지급 같은 비교적 강력한 조치가 이뤄졌지만, 피해자는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사이 자신이 살던 오피스텔에 잠깐 들렀다가 참극을 당했다.

 

직후 12월에는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연인 A씨의 어머니를 살해한 이석준(26)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A씨가 자신을 성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이석준이 흥신소를 통해 알아낸 A씨의 거주지에 택배기사를 사칭해 침입할 때까지 경찰의 신변보호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경찰이 이후 신변보호 시스템 개편에 나섰다. 보복 범죄 우려가 큰 경우에는 인공지능 폐쇄회로(CC)TV 등 첨단 장비를 지원해 보호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112시스템 등록과 맞춤형 순찰을 제공하는 등 위험도에 따라 단계별로 대처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새해에도 신변보호 중 범죄 피해를 보는 일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일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한 50대 남성이 전처 B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B씨는 지난해 12월 20일 경찰에 ‘범죄피해자 안전조치’를 요청해 다음 달 19일까지 보호대상이었다.

 

신변보호 기간 중 위협을 느껴 다시 신고한 2차 신고 건수는 폭증세다.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994건이었던 2차 신고는 2021년 7240건까지 늘었다. 지난해에는 7월까지 접수된 신고 건수만 4521건에 달했다.

 

경찰은 B씨가 주소 노출 등을 꺼려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대신 112 신고가 접수됐을 때 다른 신고에 비해 우선 출동할 수 있도록 112시스템 등록만 했다고 한다. 사건 당일 B씨는 112에 신고하지 않았고, 경찰은 결국 피해자 보호에 실패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분화한 신변보호 매뉴얼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의미다. 정부가 더 적극적인 피해자 보호 대책을 강구할 때다.

한영익 사회부 기자

 

01.05 펠레의 마지막 메시지

“성공은 몇 번 이겼는지 여부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패배한 그다음 주에 어떻게 플레이하느냐가 중요하다.”

 

‘명언 제조기’로도 이름난 축구 황제 펠레가 지난달 29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추모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지난 4일 고향인 브라질 항구도시 산투스의 빌라 베우미루 스타디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는 룰라 브라질 대통령,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을 비롯해 23만 명이 다녀갔다. 외신들은 “펠레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한 추모객 행렬이 새벽부터 심야까지 2~3㎞ 가까이 늘어섰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브라질 전역이 펠레의 얼굴과 이름, 현역 시절 등번호 숫자 10을 담은 사진과 그림, 플래카드 등으로 가득 찼다.

 

개인 통산 1283골.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3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정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1999). 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2000). 그가 남긴 발자취는 더없이 화려하지만, 기록과 수상 이력만으로 펠레의 생애를 설명할 순 없다. 그는 무엇보다 축구 문화를 바꿨다. ‘슈팅의 꽃’ 오버헤드킥을 처음 시도한 것도, 등번호 10번에 에이스의 권위를 부여한 것도 그가 최초다. 상대 수비수의 집중 견제를 받아 그라운드에 나뒹구는 펠레를 보호하기 위해 축구 경기에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도입됐다.

 

그는 그라운드 밖에선 평화의 전도사였다. 국제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죽음의 싸움을 멈춰 달라”고 호소했고, 축구계 부패 권력과 맞서 싸웠다. 유엔 환경 친선대사, 유네스코 친선대사 등도 맡았다.

 

이른바 ‘펠레의 저주’로 이미지가 일부 희화화됐지만 그가 남긴 말들이 깊은 여운을 주는 이유는 남들보다 먼저 시도한 창의성과 도전정신 때문이다. “열정이 전부다. 그것은 늘 기타줄처럼 팽팽하게 진동해야 한다” “승리에 이르는 단 하나의 방법은 팀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축구는 한두 명, 또는 세 명의 스타 플레이어가 만드는 스포츠가 아니다” 같은 말은 그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펠레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축구로 지구촌을 평정하고,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영웅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다.

송지훈 스포츠부 차장

 

01.06(금) 교토삼굴 정치

신라 선덕왕 11년(642년) 대야성(경남 합천)이 백제에 함락됐다. 딸 고타소와 사위 품석을 잃은 김춘추는 고구려를 방문해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오히려 신라가 빼앗은 한강 이남의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연개소문의 제의를 거절한 김춘추는 옥에 갇힌 신세가 됐다. 그는 “돌아가서 선덕왕에게 청해 고구려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거짓 수락으로 가까스로 풀려난다.

 

선도혜라는 고구려 장수가 귀띔해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거북이의 꾐에 속아 용궁으로 끌려갈 뻔한 토끼가 “나는 간을 꺼내서 씻었다가 다시 넣는다”는 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내용이다. 소설 『별주부전』과 판소리 ‘수궁가’의 근원설화가 되는 구토지설(龜兎之說)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설화에 등장하는 토끼는 이처럼 꾀가 많아 언제나 재치있게 위기를 극복한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서도 토끼는 재빠르고 영특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맹상군(孟嘗君)은 고대 중국 제나라 사람으로 전국시대 사공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풍훤이라는 식객 덕분에 수십 년간 제나라의 재상을 지내며 어떠한 화도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풍훤이 “교활한 토끼는 굴이 세 개가 있어야 비로소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며 위기 때마다 모면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둔 덕분이었다. 정치적 격동기에 살아남는 처세술로도 읽힌다.

 

2023년은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이다. 십이지(十二支)에서 네 번째 동물인 토끼(묘·卯)는 호랑이와 용 사이에 있다. 작은 덩치지만 번뜩이는 기지와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상임고문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1일 당 신년인사회에서 교토삼굴을 주문했다.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얘기를 듣는 문 전 의장이다. 검찰 수사를 받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대비해 이른바 ‘플랜B’를 염두에 둔 발언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는 1963년생(호적은 1964년) 토끼띠 정치인이다. 교토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관건은 삼굴을 찾아낼 수 있느냐다. 민주당과 이 대표는 교토가 될 수 있을까.

위문희 정치부 기자 

 

01.09(월) 열정페이와 퇴준생

퇴준생들(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페이스북 그룹이 있다. 직장인 익명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와 유사하지만, 회사 인증을 하지 않아 보다 다양한 직군이 모인다.

 

여기엔 월급쟁이가 알아두면 좋을 정보가 많다. 친하지 않은 상사의 결혼 축의금 적정선에서부터 1인 가구가 자취하기 좋은 동네, 연말정산 ‘꿀팁’ 등이 그중 일부다. 때로는 ‘도대체 이런 건 왜 고민할까’ 싶은 질문이 올라오곤 한다. ‘그만둔 회사에 옛 동료들 만나러 가도 되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 전 직장을 방문했다 옛 상사한테 “놀이터냐”라고 혼났다는 사연에서 나온 설문이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정과 사람이 있다.

 

이 그룹의 백미는 ‘퇴사의 변’이다. 성장을 기대하며 최저임금 받으면서 몇 년 버텼는데, ‘번아웃’이 와 더 못하겠다는 정도의 얘기는 흔하다. 월 180만원을 받고 일해온 3년 차 디자이너가 신입의 연봉이 500만원 정도 많은(연 2700만원) 걸 발견, 분노해 사표를 쓴다. 해고됐는데 “회사에 피해가 가니 자진 퇴사로 하자”고 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고민, 상사가 눈앞에서 자신의 사직서를 찢었다는 하소연 등을 볼 수 있다. 밀린 급여, 폭언, 성희롱은 단골 퇴사 사유다. (물론 한쪽의 주장이라는 한계는 있다.)

 

가수 강민경이 자신의 쇼핑몰 상담 직원 채용 과정에서 대졸 정규직에 연봉 2500만원을 제시했다가 맹비난을 받고 있다. 본인은 화려하게 살면서 직원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강민경은 바로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이제 화살은 그가 과거에 산 고급 가스레인지와 매입한 건물, 착용한 의류의 가격, 유튜브 수익 기부 등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채용공고가 진짜 단순 실수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는 사람들이다. 기업, 특히 중소기업에서 오래 일하고 적게 버는 게 그토록 시급한 문제라면, 강민경 쇼핑몰이나 그의 소비 성향을 때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미 많은 퇴준생이 그 증거다.

 

그럼에도 해프닝에 가까운 이 사건이 이토록 화제가 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장님들이 채용 전 한번 더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퇴준생이 아닌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게 목표이니 말이다.

전영선 K엔터팀장

 

01.10 전세 사기, 그 오랜 뿌리

‘본인이 갑의 가옥에 전세를 들어 있었는데 가옥주 갑은 을에게 가옥을 팔고 도망갔음. 갑을 찾아낼 방법은 없는가.’

 

무려 57년 전인 1966년 4월 5일자 중앙일보 법률상담 코너에 실렸던 모씨의 사연이다. 지면으로 상담해준 변호사는 을에게 집을 내줘야 하고 갑을 상대로는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자취를 감춘 갑을 찾을 길이 없을 테니 “귀하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는 위로도 잊지 않았다.

 

전세 사기의 역사는 100년이 넘은 전세 제도만큼이나 유구하다. 1930년대 신문 지면에도 전세 사기범이 등장한다. 경매로 판 집을 3명에게 다시 전세를 주고 수천원을 떼먹은 사건 등이다.

 

전세 사기는 1960~7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다. 소설 제목처럼 많은 농촌 젊은이가 돈을 벌러 서울로 몰려들었지만 살 집은 턱없이 모자랐다. 이사철마다 10~20%씩 전세가 오르는 게 예사였다.

 

뛰는 전셋값만큼 사기도 기승을 부렸다. 월세로 집을 빌린 다음 집주인 행세를 하며 전세보증금을 가로채거나, 집을 팔거나 경매로 넘기기 직전 전세 계약을 해 보증금을 챙기고 잠적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지금도 흔한 전세 사기인데 40~50년 전 생겨난 고전적 수법이다.

 

세입자에 대한 법적 보호망은 없다시피 했다. 민법에 관련 조항이 있었지만 허술했고 특별법도 마찬가지였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된 건 한참 뒤인 1981년이다. 이미 수많은 전세 피해자가 생겨난 이후였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수법은 교묘해졌고 피해 규모만 더 커졌다. 전세 피해 주택 수가 1139채에 이르는 ‘빌라왕’, 3493채로 그보다 많은 ‘빌라신’ 사건까지. 무자본 갭투자로 수천 채를 사들이고 수백억대 보증금을 빼돌리는 사이 법적 제재는 없었다. 집값이 내려가면서 ‘깡통전세’가 속출하고 있고,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런데 나쁜 임대인 명단 공개, 임차인 대항력 강화 등 내용을 담은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는 중이다. 정부와 국회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막겠다며 큰소리치지만 바뀐 건 별로 없다. 또다시 “귀하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는 위로만 하고 말 건가 보다.

조현숙 경제부 차장

 

01.11 헝가리는 죄가 없다

 헝가리는 슬로바키아·루마니아 등 7개국과 국경을 맞댄 동유럽의 작은 나라다. 인구는 1000만 명이 채 안 되고,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10분의 1 정도다. 우리와 교역 규모는 크지 않은데 삼성SDI와 SK온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지으면서 좀 더 가까워졌다. 한국과는 가슴 아픈 인연도 있다. 2019년 5월 수도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침몰해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랜만에 헝가리가 등장했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헝가리 모델’을 언급하면서다. 그는 지난 5일 신년 간담회에서 “저리 대출제도는 있지만, 불충분하다”며 “출산에 따라서, 더 과감하게 원금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탕감할 수는 없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헝가리는 2019년부터 저출산 대책 중 하나로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자녀 계획을 세우면 정부가 최대 1000만 포린트(약 3500만원)를 빌려준다. 현지 직장인의 2년치 연봉 정도다. 5년 이내에 아이를 낳으면 이자를 면제해준다. 2명이면 대출액의 3분의 1, 3명 이상이면 전액 탕감하는 식이다. 4명 이상 낳을 경우 소득세를 평생 면제해주는 방안도 있다.

 

헝가리는 원래 도전적인 저출산 대책으로 유명한 나라다. 출산시 학자금 대출 감면, 육아휴직 3년, 양육보조금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효과는 있었다. 1.24까지 하락했던 합계출산율이 2020년 1.52(OECD)로 상승했다. 1990년대 중반 수준을 회복했다. 원금 탕감책 역시 시행 직후인 9월 결혼 건수가 전년 대비 20%가량 증가했다. 출산율에 얼마나 반영될지는 지켜봐야겠으나 일단 반응은 있었다.

 

물론 무작정 따라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말도 못 꺼낼 얘기 역시 아니다. ‘당장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권에선 “얼빠진 공직자”(신평 변호사), “한번 튀어 보려고”(홍준표 대구시장) 등 맹공이 쏟아졌다. 대통령실이 직접, 닷새 연속 반박하는 모습도 이례적이었다. 나 부위원장은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지금 그가 미움받는 이유는 짐작된다. 다만 헝가리를 무시할 처지는 아닌 것 같다. 한국의 2021년 합계출산율은 0.84. 독보적인 전 세계 최하위다. 참고로 10년 전 두 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24로 같았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1.12 왜 다시 수학교육인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써 붙였다. ‘철인정치’를 표방한 플라톤은 대표작 『국가』에서 “지도자가 될 철학자라면 30세까지 기초수학과 고급수학을 마쳐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도덕을 포함한 모든 교육의 근본이 수학이라 할 만큼 수학을 중시했다. 플라톤 외에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대부분 수학자였다. 탈레스·피타고라스·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기하학·천문학·산술학의 대가였다. 당시 철학자들은 수학의 엄밀한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고 사상을 설계했다.

 

이후 15세기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며 수학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때의 수학은 사상 정립이나 지도자 양성이 아닌 상업·무역 발전, 신대륙 발견을 위한 항로 개척,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 등에 사용되면서 산업과 경제 발전을 뒷받침했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자 수학의 중요성은 경제·산업 물론 안보로까지 확장됐다. 수학에 기반한 블록체인·양자기술 등은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이나 군사적으로 활용되며 각국의 필수 전략기술이 됐다. 미국을 필두로 유럽·일본·러시아·중국 등이 뛰어난 수학자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지난 4일,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신년사에서 ‘수학 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는 “내가 정치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모든 학생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며 “데이터를 활용한 통계가 모든 직업의 기반이 되는 시대에, 수학 실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한다면 곧바로 좌절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수학은 지도자·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하단 얘기다.

 

한국 교육부는 최근 2022 교육과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고교 수학 교과서엔 2018년 개정안 때 빠졌던 행렬·공간벡터·모비율의 추정 등이 다시 추가됐다. 인공지능의 두뇌인 알고리즘 작성, 빅데이터 처리에 가장 중요한 분과다. 다만 수업 시수는 그대로다. 현장에선 벌써 ‘겉핥기 수업’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이제 수포자(수학 포기자)는 문맹 취급을 받게 될 거란 얘기도 있다. 수학 수업에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1.13(금) 문자 이별

 스마트폰 톡·문자로 모든 일이 처리되는 세상이다. 청첩·부고 등 경조사 전달은 옛말이고 범죄(피싱)까지 휴대폰 속 글자가 매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11일 임시 허가 사업이던 KT·카카오페이의 ‘모바일 전자고지’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내용의 고시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미 지난해 말 기준 정부 부처 8곳, 지자체 287곳, 공공기관·분야 49곳, 민간기관·기업 153곳이 전자고지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국세청이 세금을, 국민연금이 가입 내역을 전자고지한다.

 

징세도 복지도 손가락으로 알리는 시대. 문자 그 이상의 소통이 필요한 마지막 영역에 ‘헤어짐’이 남아있는 걸 본다. ‘적어도 이별에는 보다 성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는 시선이 정치권에도 있다. 2018년 김병준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이던 전원책 변호사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해촉했다. 전당대회 시기 등을 둘러싼 갈등이 이유였는데, 전 변호사가 “한국당도 드디어 문자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며 통보 방식을 문제 삼았다. 한국당 지도부는 “유선 연결이 어려운 사정 때문에 공식 발표 이전 문자로 전했다”고 해명했다. 한쪽에서 “(국무장관을 트위터로 해고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탄생했다”(박지원 전 의원)는 말이 나왔다.

 

지난 10일에는 나경원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문자 사표로 여권이 시끄러웠다. 당대표 출마를 저울질 중인 나 부위원장이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문자로 사의를 표한 게 논란이었다. 나 위원장은 “문자와 유선 두 가지 방법으로 사의를 표명했다”고 했고, 이틀 뒤인 12일 서면 사직서 제출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친윤계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전화는 본인 아닌 측근이 이진복 정무수석에게 건 것”이라며 “장관급 인사가 문자로 사의를 표명하는 게 말이 되나. 고위공직자로서 예의가 아니다”라고 반응했다.

 

‘페이퍼리스(paperless·종이문서 소멸)’ ‘콜 포비아(call phobia·통화 공포) 같은 신조어 속에서 유선 연락이 얼마나 더 이별 요건으로 거론될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일수록 성의 있는 의사전달이 필요하다는 건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1.16(월) 영화보다 더한 기후재난

19년 전 초여름 당시 친구가 좋아했던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투모로우’(2004)라는 영화를 봤다. 대강 내용은 이렇다. 기후학자가 남극 탐사 중 지구에 기후 재난이 일어날 것을 감지한다. 급격한 지구 온난화로 남·북극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차가워지며 해류 흐름이 바뀌게 돼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재앙이 닥친다는 내용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도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가 배경이다. 빙하기를 맞은 지구를 끝없이 순회하는 열차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간 불평등 투쟁기가 끔찍하다. ‘인터스텔라’(2014)도 이상 기후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를 대체할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항성 간 우주여행을 떠나는 탐험가의 모험을 다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선 핵전쟁으로 인해 온 세상이 모래로 뒤덮이고 물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들은 말 그대로 ‘영화’(映畵·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보여주는 영상물)였다.

 

그런데 이젠 기후 재난 영화가 영화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난 주말 ‘지오스톰’(2017)을 보면서 등줄기가 오싹했다. 기후 재난을 막기 위해 인공위성을 조작해 만든 날씨 조종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겨 용암 분출·혹한·폭염 같은 기상 이변이 일어나 인류가 위기를 맞는다는 내용인데, 마치 다큐멘터리 같았다.

 

아마도 코로나19 영향이 클 테다. 10년 전 개봉한 영화 ‘감기’ 속 같은 현실을 살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선 호흡기로 감염되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한다. 도시는 폐쇄되고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자연스레 ‘마스크 대란’이 떠올랐고 내 얼굴 반을 덮고 있는 마스크로 눈길이 갔다.

 

이미 영화 같은 뉴스는 많다. 강렬한 태양의 상징인 카리브 국가 베네수엘라에 최근 눈이 내렸다. 겨울 평균기온도 20도를 넘는 따뜻한 지역인데 한창 여름인 지금 눈이 쌓였다. 같은 남아메리카인데 칠레는 극심한 가뭄으로 땅이 갈라지고, 콜롬비아는 폭우로 농작물이 죽어간다. 같은 시기 일본에선 폭설로 인명사고가 속출한다.

 

기후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화석 연료 등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다. 당장 세제와 샴푸부터 바꾸자. 또다시 기후 재난 영화가 일상이 되게 둘 순 없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1.17 모두를 위한 신호등

자동차가 대중화하기 전에도 영국 런던의 도로는 마차와 보행자가 뒤엉켜 몸살을 앓았다. 1868년 세계 최초의 교통 신호등이 런던 국회의사당 등지에 설치됐다. 낮에는 신호기로 마차에 ‘진행’과 ‘멈춤’을 지시하고, 야간에는 빨강과 초록 가스등을 밝혀 신호를 보냈다. 1912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거리에 설치된 교통 신호기는 금속상자가 회전하면서 빨간색으로 쓴 ‘Stop(멈춤)’, 흰색으로 쓴 ‘Go(진행)’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미국 뉴욕에선 1917년 신호등 도입 실험을 했는데 녹색을 멈춤, 빨강을 진행하라는 의미로 쓰며 혼란을 초래했다. 흔히 빨강이 위험을 나타내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1925년 관련법이 발효하면서 빨강이 ‘멈춤’, 녹색이 ‘진행’으로 정리됐다. 빨강-노랑-초록의 순서와 의미가 세계 공통의 약속이 된 건 1968년 ‘도로 표지판 및 신호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 체결되면서다.

 

신호등은 안전을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완전히 안전하진 않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등장인물 전재준과 같은 적록색약은 빨강과 초록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남성의 약 5.9%, 여성의 0.4%가 색각이상자다. 색약은 색을 감지하는 세포 기능이 선천적·후천적으로 떨어져 발생한다. 이들은 신호등 색깔이 아니라 위치로 구분한다. 색약자용 특수 렌즈나 안경이 있지만 완벽하게 색을 보정해주는 건 아니다. 손상된 세포 기능을 유전자 치료로 되살리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지만, 기간이나 비용을 고려하면 갈 길이 멀다.

 

일본에서는 전체 신호등의 약 67%를 LED로 교체하면서 보행 신호의 배경색을 검정으로 바꿨다. 대신 걷거나 서 있는 사람을 각각 초록, 빨강으로 표시했다. 경찰청이 색각이상자·저시력자·노인 등을 대상으로 시각 인식 테스트를 해 가장 잘 보이는 안을 선택한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서울 표준형 안전디자인’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금지는 빨간색 원형, 경고는 노란색 삼각형으로 표시하는 등 색깔과 모양을 연결해 디자인하는 식으로 색각이상자도 구분하기 쉽게 만들었다. 모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각 분야에서 개발·적용돼 모두가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1.18 선거제 개편, 밥그릇 다툼

2019년 취재를 위해 국회 본관 4층을 자주 찾았다. 2020년 21대 총선의 규칙을 논의했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가 그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정개특위의 쟁점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었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반대에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드라이브를 걸었다. 기자들은 기대를 가졌다. 득표율과 의석수의 비례성이 강화되면 양당제가 약화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치가 좀 줄어들지 않을까 싶었다. 정개특위 회의장을 찾는 건 대체로 낮은 연차의 기자들이었고, 그런 기대를 가진 것도 정치부 경력이 짧은 그들이었다. 한 선배는 “지역구는 의원에게 목숨과 같은데 한 석도 줄이기 힘들 것”이라고 냉소했다.

 

실제로 그랬다. 민주당이 그해 1월 내놓은 애초 개편안은 의원 정수는 300명으로 유지하되 지역구 의원수는 200명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수는 100명으로 하는 안이었다. 3월엔 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으로 바뀌었고, 비례대표의 연동률도 100%에서 50%로 줄었다. 12월엔 민주당이 주장해 비례대표 의석수가 50석으로 또 쪼그라들었다. 최종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안은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 단 한 석의 지역구도 줄지 않았다. 연동률을 적용하는 비례대표 수도 30석으로 제한했다. 석패율제도 도입되지 않았다. “다양한 민심을 반영하기 위해 비례대표 숫자를 늘려야 한다”(1월 김종민 민주당 의원)와 같은 정의로운 말들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민주당이 먼저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그렇게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은 위성정당과 함께 180석을 가져갔다. 위성정당 덕분에 10석을 더 얻었다. 양당 독식은 20대 총선보다 더 강화됐다. 민주당이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하며 바꾼 선거제는 결국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민주당이 유독 비열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너’의 밥그릇보다 ‘나’의 밥그릇이 중요하다. 국회에서 그 밥그릇이 가장 쨍그랑 부딪힐 때가 선거제 개편 논의 때다.

 

내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선거제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선거의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이자”는 아름다운 말들이 국회에서 또 나오는데, 마치 방향 없이 흘러왔다 흘러가는 풍문처럼만 들린다. 풍문이 지나간 자리에선 또다시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 충실한 먼지 풀풀 나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1.19 파파 박의 눈물

박항서(64) 감독이 베트남 축구대표팀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끝냈다. 지난 16일 막을 내린 아세안축구연맹(AFF) 미쓰비시컵 준우승을 이끈 뒤 베트남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2017년 9월 사령탑에 오른 이후 5년 4개월 만이다. 지난 17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박 감독은 “사랑방 같았던 의무실에서 선수들과 함께 뒹굴며 보낸 그 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며 눈물을 훔쳤다. 박 감독과 2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왔지만,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경남 산청 출신)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은 처음 봤다.

 

베트남은 한국 축구와 견줘 경기력·인프라 등 모든 게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박 감독은 ‘파파 박(Papa Park)’이라는 별명처럼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심정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경기 전·후에 꼭 필요한 식이요법이나 운동 방법 같은 기초적인 영역부터 세계 축구의 최신 흐름까지 차근차근 가르쳤다. 지난 5년여 시간은 베트남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조한 시간이었다. 박 감독은 선수들은 물론, 축구협회 관계자들에 ‘자부심’ ‘책임감’을 강조하며 능동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베트남 축구계는 당초 ‘외국인 감독’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강했다. 앞서 독일·브라질·포르투갈 등 내로라하는 축구 강국 출신 지도자에게 지휘봉을 맡겼지만, 이렇다 할 성공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약서에 명시된 역할만 또박또박 수행한 그들은 ‘능력 있는 감독’이었을지 몰라도 ‘존경할만한 스승’은 아니었다.

 

파파 박은 달랐다. 운동장에선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호통을 치다가도 축구화를 벗고 나면 자상한 아버지처럼, 큰형처럼 선수들을 대했다. 다친 선수를 위해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양보하고, 의무실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선수들에게 직접 마사지를 해준 건 베트남 축구가 경험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박 감독의 리더십이 진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 국민에게 ‘한국인 박항서는 열심히 했던 지도자’ 정도로 기억된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마지막 소감을 밝혔다. 미안하지만 틀렸다.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잘했고, 멋있게 했다. 그의 노고에, 아름다운 눈물에 박수를 보낸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1.20(금) 사의재(四宜齋)와 골경신(骨鯁臣)

보수주인(保授主人)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 온 죄인의 거처와 음식을 마련하고,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책임자다.

 

1801년 39세 나이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은 머물 집을 찾아봤으나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주막집 노파의 도움으로 겨우 행랑채 한 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주막집 노파가 보수주인이었다. 정약용은 그곳에 ‘사의재(四宜齋)’ 편액을 내걸고 4년을 보냈다.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이다. 다산은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다짐했다. 귀양살이 온 정약용의 단단한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 사의재가 소환됐다. 문재인 정부 당시 고위 관료와 참모진으로 구성된 정책포럼 성격의 ‘포럼 사의재’가 지난 18일 출범했다. 사의재란 이름은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계 3선 좌장인 도종환 의원이 제안했다. 청와대를 연상케 하는 ‘정책포럼 광화’와 ‘북악’이란 이름도 제시됐지만 최종적으로 사의재가 낙점됐다.

 

왜 사의재인가.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총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난다’는 뜻의 풍운지회(風雲之會)에 비교한다. 정약용이 유배에 처하게 된 것은 주군이었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한 뒤다. 그는 강진에서 18년간 공부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걸출한 개혁서를 완성했다. 도 의원은 사의재란 이름을 제안한 취지를 “권력을 잃었지만 성찰하고, 그리고 개혁의 꿈을 버리지 말고 진중하게 미래를 준비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약용의 뜻이 어찌 사의재에만 머물겠는가. 지난해 정약용 일대기인 『사암 정약용 전기』를 펴낸 정해렴 전 창비 대표는 인간 정약용의 정신으로 ‘골경신(骨鯁臣))’을 꼽았다. ‘이에 씹히는 뼈와 목에 걸리는 가시와 같은 신하’라는 뜻이다. 그는 “다산은 무조건 충성만 하는 게 아니라 임금의 잘못도 지적해 바른 군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골경신이 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사의재라는 정약용의 당호(堂號·집에 사는 사람의 호) 안에 갇히기 전에 골경신의 덕목부터 먼저 살폈으면 한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1.25(수) MZ 경연대회

요즘 웹 예능과 유튜브 채널에서 MZ세대는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다. 대체로 MZ는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업무 중에 이어폰을 끼고, 출퇴근 때 슬리퍼를 신는다. 문해력이 떨어져 엉뚱한 답을 하거나, 넘치는 이기심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선 넘은 조롱이 불편하다는 시각이 있으나 애초에 웃자고 만든 것이니 PD 탓, 배우 탓할 일은 아니다. 보는 사람이 잘 웃고 넘기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는 모양이다.

 

회삿밥 좀 먹었다는 직장인이 모인 자리에선 요즘 MZ 경연대회가 한창이다. “전화했더니 카톡으로 답을 하더라”, “식당에서 숟가락을 놓는 법을 본 적이 없다”, “대화가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영 없는 일은 아니겠으나 전부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누적된 희화화 속에 MZ는 ‘이상한 아이들’로 박제됐다.

 

MZ라고 이런 시선을 못 느낄 리 없다. 그러니 직장에선 MZ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또 다른 경연이 펼쳐진다. “회식을 정말 원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일부러 출근은 일찍, 퇴근은 늦게 한다”, “계속 웃는 표정을 짓느라 사실은 좀 힘들다.” MZ 같지 않아야 윗사람이 좋아한다는 걸, 그래야 인정받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MZ조차 결국 개성을 잃고 어른의 룰에 포섭돼 가는 셈이다.

 

MZ는 밀레니얼(M)세대와 Z세대의 합성어지만 한국에선 이미 본뜻 대신 30세 전후의 사회초년생을 특정하는 말로 변했다. 주로 그들의 결여된 사회성을 겨냥한다. 그러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는 의외의 결과를 보여준다. ‘친구 혹은 직장동료에게 먼저 말을 건다’, ‘학교나 직장에서 정한 일은 싫더라도 지킨다’ 등 사회성을 측정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는데 M세대와 Z세대의 사회성 점수가 X세대보다 오히려 높았다.

 

워라밸만 중시하는 모습이, 혼자 밥 먹는 모습이, 가르쳐주면 곧 이직할 것 같은 그 모습이 그냥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 MZ와의 생활이 불편하다면 나 자신도 한 번 돌아볼 일이다. 그들을 충분히 존중했는지, 신뢰나 협업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독특함을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려 했는지, 내 시각을 강요한 건 아닌지, 그토록 싫어했던 예전 선배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세대와 무관하게 현명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고, 활용법을 고민한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01.26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피날레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 5년 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정치인도 사람이다. 난 에너지가 고갈됐다”며 사임 이유가 번아웃임을 밝혔다. 이어 “딸의 입학 때 곁에 있는 엄마이고 싶다”며 모성애를 드러냈고, 현장에 있던 약혼자 클라크 게이포드를 향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자”고 프러포즈했다.

 

갑작스러웠지만 감성적이었던 사임 발표에 대한 일부 전문가의 논평은 아찔한 수준이었다. “자, 봐라. 여자는 총리직의 책임감보다 결혼과 자녀를 앞세운다”며 혀를 찼고, “권력이 여성을 조기탈진시킨다는 건 정설”이라 비웃었다. 영국 BBC는 ‘과연 여성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가 독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바로 수정했다.

 

아던 총리의 사임을 그저 나약한 여성성의 발로로 치부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친절과 따뜻함에 기반한 유능함이 무엇인지 보여준 드문 리더였다. 그의 재임 기간, 인구 500만 명의 뉴질랜드는 ‘코로나19에 가장 잘 대처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을 확보한 내각’ 등 긍정적인 이슈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9년 모스크 총격 테러(51명 사망, 40명 부상) 땐, 히잡을 쓴 채 현장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참사 6일 만에 반자동소총 판매 전면 금지, 증오발언 금지법 강화 등 단호하고 실질적 조치로 극단주의에 맞섰다.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체를 위한 결단을 내려온 아던 총리의 리더십은 종종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극우 포퓰리즘에 대척점으로 불렸다.

 

그의 사임 발표엔 반대 세력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저 “일할 능력이 소진됐다”는 진솔한 고백, “악성 여론과 퇴임은 관계없다”고 선을 긋는 태도로 예의 비범한 리더십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밴 잭슨 웰링턴 빅토리아대 교수는 “그의 브리핑엔 거짓 정보도, 누군가를 향한 비난도 없다. ‘서로 더 친절하라’는 신호만 있다”고 했다.

 

한국 정치권은 검찰의 야당 대표 수사, 여당 전당대회 등 안갯속 정국이다. 갈라치기, 프레임 뒤집어씌우기, 교묘하고 사나운 수사 등 꼼수가 총출동한 모양새다. 친절하며 유능했던 ‘아던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1.27(금) 정치 방역, 과학 방역

#1. 정치 방역 논란이 처음 크게 불거진 건 2020년 8월이다. 서울시가 광복절 대규모 집회를 신청한 단체에 코로나19 확산 우려를 이유로 집회 금지 행정명령을 내린 게 계기였다. 8·15 추진위원회, 4·15 부정선거국민투쟁본부, 자유연대 등 일부 보수 성향 단체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보는 음악회는 허가해주면서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정치 방역”이라고 반발했다. 문재인 정부가 총선 압승으로 중앙·지방·의회 권력을 석권한 직후다. 갈등이 계속되자 당시 야당이던 김종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지지율만 신경 쓰는 정치 방역은 당장 중단하고 코로나 방역에 집중하기를 바란다”고 비판에 가세했다.

 

#2. 이달 30일로 예정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를 놓고 이번에는 윤석열 정부·여당이 정치 방역 비판에 휩싸였다. 일부 방역 신중론자들이 “‘노(no) 마스크’ 정책은 시기상조이자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앞서 여당 소속 지자체장·의원 등이 보건의료계보다 먼저 해제론을 들고나온 게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러자 정기석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 겸 국가감염병 위기대응 자문위원장(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이 지난 20일 본지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잘 들어준다”며 “정치 방역을 안 하는 게 과학 방역”이라며 논란을 공개 진화했다.

 

‘과학 방역’의 반대말이 된 ‘정치 방역’은 이제 진영을 막론하고 정부의 방역 정책을 비판할 때 쓰는 단골 용어가 됐다.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백신 접종 등 정부가 코로나19 관련 주요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 배경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동됐다는 의심이 뒤따른다. 바이러스가 이념·정파를 가려가며 퍼질 리 만무한데, 국민 생명과 직결된 방역마저 정쟁 소재로 쓰이는 건 안타깝다. 중간에서 매번 “과학적 근거”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방역 당국도 국민 보기에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당연히 방역은 정치일 수 없다.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시대에는 정치 방역 같은 역설적 용어가 사라지길 기대한다. 다만 마스크 착용, 외출 제한 등 개인의 자유를 장기간 일괄 제한하는 집단 방역이 줄어들수록 나와 내 주변을 지키는 개인 방역이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01-30(월) 난방 대란 이겨내기

난방은 정온동물인 인간의 역사와 맥이 같다. 섭씨 36.5도를 유지해야 하는 인간에게 온도 조절은 곧 생존으로 연결된다. 러시아 과학자 미하일 일린(1895~1953)은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 진화에 난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꼽는다. 수백만 년 전 열대림에서 원숭이 등과 함께 나무 위에서 살았던 인류는 빙하기를 맞아 다른 열대림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원숭이와 달리 땅으로 내려가 정착한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물 가죽을 걸치거나 집을 만들었지만 한계가 있었고, 불을 발견하며 본격적인 난방을 한다. 땔감 비축은 식량 확보만큼 중요했다.

 

유독 추운 날씨만큼이나 ‘난방 대란’ 파장이 매섭다. 지난해 4월부터 38% 오른 난방비 위력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아서다. 최근 난방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설을 맞은 서민들은 친척들과 둘러앉아 공분했다. 야당은 정부의 미흡한 대응을 비난했고 여당은 전 정권 탓이라고 맞받아쳤다. ‘표심’ 관리에 급급해 제때 난방비를 올리지 않은 타격이라는 것이다. 서로 ‘남 탓’ 공방이다.

 

그러자 야당이 뜬금없이 ‘횡재세’를 걷자고 나섰다. 한국은 난방 연료 90% 이상을 수입한다. 국내 정유업계는 중간 마진만 남긴다는 의미다. 유가에 따라 흑·적자가 갈리는데 유가가 올라 수익이 났으니 세금을 내란다. 유가가 내리면 ‘불운세’를 지원하려는 걸까. 그러자 여당이 또 돈을 풀겠다고 응수한다. 예산안 확정 한 달 만에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해 30조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 난방비를 지원하겠단다. 추경으로 돈을 풀면 가뜩이나 치솟는 물가는 더 오를 판이다. 여야 모두 전형적 포퓰리즘이다.

 

문제는 에너지 바우처 지급 같은 땜질 처방으로 난방 대란이 잠잠해질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간 러시아에서 가스를 공급받던 유럽이 안보 등을 이유로 액화천연가스(LNG)로 눈을 돌리고 있어서다. LNG는 한국·일본·중국이 주로 사용했는데 경쟁자가 늘면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

 

단열공사 확대 등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고민해야 한다. 에너지 사용량을 줄인 만큼 혜택을 줘도 좋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고픈 마음이 잘못은 아닌데도 왠지 징벌적인 세금을 내는 기분이다. 창문마다 ‘뽁뽁이’(포장용 에어캡)를 붙이고 내복도 입었지만, 집에서 텐트까지 치고 자고 싶진 않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01.31(화) 진주 어른 김장하

김장하(79)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가방끈이 짧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약방 머슴살이를 했다. 해방 후 처음 실시한 한약사 국가 자격시험에 통과해 19세에 남성당한약방을 차린다. 약가는 낮은데 좋은 재료를 써 효험 좋았던 터라 전국에서 손님이 몰린다. 그는 20년간 모은 돈으로 1983년 경남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우고, 잘 키운 뒤 1991년 국가에 헌납한다. 100억원이 넘는 자산이었다. 1990년 창간한 옛 진주신문에는 월 1000만원에 달하는 적자를 10년간 보전해줬다. 토호세력이 겁 없이 설치지 않도록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지난해 60년간 운영해온 한약방 문을 닫았다. 남성문화재단의 남은 자산 34억원도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그러나 자신을 내세우는 인터뷰는 일절 거절했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도 1991년 인터뷰에 실패했다. 그는 2021년 은퇴 후 MBC경남 김현지 PD와 함께 30년 전 실패한 작업에 다시 도전한다. 주변 인물 100명을 인터뷰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탄생한 배경이다. 김장하 선생은 명신고 재학생 외에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학 때까지 군소리 없이 지원했다. 수많은 ‘김장하 키즈’를 길러냈으나 “나는 사회에 있는 걸 준 것이니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에 갚아라”고 했다. 대학 가서 공부 안 하고 데모를 해 죄송하다는 이에겐 “그 역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며 격려했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 죄송하다는 이에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고 말한다.

 

진주는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뜻의 형평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1923년 백정 신분제 철폐를 필두로 모든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주창했다. 선생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고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건립을 후원하는 등 형평운동의 정신을 이어왔다. 남들에겐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자신은 단벌 신사에 뚜벅이로 평생을 살았다. 선생은 “돈은 똥과 같아 쌓아두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흩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진주의 ‘아낌없이 주는 큰 바위 얼굴’이 연초부터 주는 울림이 크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