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2022.11.02
321. 백성을 무시하고 권력만 좇았던 오군(汚君) 인조
인조 정권 1년 만에 창경, 창덕궁은 세 번 불탔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창경궁 명정문과 본전인 명정전. ‘동궐’이라 불리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백성에 의해, 1623년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 무리에 의해, 1624년 인조를 몰아내려는 이괄 세력과 인조에 실망한 백성에 의해 세 차례 방화됐다. 세 번 모두 권력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반정세력은 권력에 빠져 개혁을 외면했고, 그 결과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달아나는 인조를 조선 백성은 외면했다./박종인 기자
1592년 음력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선 수도 한성에 있던 궁궐들이 불탔다. 경복궁이 불탔고 창덕궁, 창경궁이 불탔다. 방화였다. 방화 원인 제공자는 중국 망명길을 떠난 국왕 선조였고 방화범은 백성이었다. 전후에 갈 곳 없는 선조는 성종 큰형 월산대군이 살던 정동집을 궁궐로 개조해 들어갔다. 아들 광해군은 창덕궁에 살았다. 경복궁 동쪽에 있는 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한다.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이 된 인조 정권 때 동궐은 두 번 더 불탔다. 그것도 정권을 빼앗고 만 1년도 안 돼서. 한 번은 인조반정 무리 실화(失火), 한 번은 ‘새 세상을 만들겠다’며 정권을 찬탈한 인조 정권을 혐오한 이괄 반군과 백성에 의해. 권력욕에 눈멀어 서로 다툼을 벌이다 백성에게 외면당하고 애꿎은 궁궐만 태워 먹은 인조 정권 이야기.
첫 방화, 1592년 4월 임진왜란
임진년 음력 4월 13일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해 20일 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일본군 진입 전 선조는 왕비와 후궁 5명, 아들 7명, 딸 2명, 며느리 5명, 사위 1명 등 21명과 두 형을 경복궁에 모아놓은 상태였다.(신명호, ‘임진왜란 중 선조 직계 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호, 군사편찬연구소, 2011) 전황이 비극적으로 불리해지자 선조는 4월 30일 폭우 속에 임진강을 건너 명나라를 향해 북진했다. 모래재를 넘을 무렵 선조를 호종한 류성룡이 한성 쪽을 보니 이미 도성이 불타고 있었다.(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주, 아카넷, 2013, p207)
방화범은 백성이었다. 이들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진 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창고를 노략한 뒤 불을 질렀다. 경복·창경·창덕궁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재물 많기로 소문난 선조 맏아들 임해군과 병조판서 홍여순 집도 전소됐다. 한성임시수비대장인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난민 몇 목을 벴지만 역부족이었다. 각종 서적과 ‘고려사’ 초고(草稿), 그때까지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불구덩이에 사라졌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짐을 꾸리는 순간에도 “한성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거짓말한 국왕에 대한 분노가 낳은 참극이었다.(같은 날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의 허황된 토목공사
전쟁 와중인 1593년 10월, 중국 망명을 포기하고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남산 소나무를 베서 경복궁에 작은 전각을 지으라 명했다.(1593년 10월 25일 ‘선조실록’) 다음 날 사헌부는 “굶주린 백성을 고달프게 한다”며 이를 반대했고, 선조는 바로 계획을 포기했다. 선조는 1608년 죽을 때까지 월산대군 집, 정동행궁에 살았다.
그리고 전쟁 동안 선조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던 세자 광해가 왕위를 계승했다. 전란 위기 관리는 물론, 명·청 중립외교를 포함해 광해군은 외치(外治)에는 능했다. 그런데 내치가 문제였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대군 생모인 선조 왕비 김씨(인목왕후)를 정동행궁에 유폐시키며 권력을 강화했다. 권력 기반은 대북파였고, 대북파는 그때까지 권력 집단이었던 서인과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누렸다.
그 권력의 상징으로 광해군은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 자수궁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광해군은 풍수에 능하다고 소문났던 임란 파병 명나라 병사 시문룡(施文龍)을 불러 이들 궁궐 터를 골랐다.(1616년 3월 24일 ‘광해군일기’) 경덕궁 터는 또 다른 이복동생 정원군이 살던 곳이었다. 정원군 아들인 능창군 이전은 1615년 광해군에 의해 역모 혐의로 목을 매고 죽었다.(1615년 11월 17일 ‘광해군일기’)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한 조치는 모조리 반군 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가 됐다. 반군을 주도한 사람은 경덕궁 터에 살던 정원군의 맏아들이자 능창군 이전의 형, 능양군 이종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1623년 능양군 이종이 지휘한 반군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권력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은 반란군 실화(失火)로 많은 전각이 불탔다./박종인 기자
두 번째 방화, 1623년 3월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집안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능양군과 권력 탈환을 노리던 서인은 마침내 서울 인왕산 아래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義(의)’자를 적은 천을 가슴팍에 붙여놓았듯, 이들은 명에 배신하고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를 처단한다고 했다. 며칠째 술에 취해 있던 광해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궁궐을 탈출했다. 광해군은 후원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 의관 안국신 집에 있다가 검거됐다.
광해군이 사라진 창덕궁에 반군이 뒤늦게 뛰어들었다. 이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궐에 불이 붙었다. 함께 들어왔던 능양군 이종이 화재 진화를 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본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궐내 건물이 몽땅 불 속에 사라졌다. 화재 진압 후 잿더미 속에서 은 4만냥이 튀어나왔다. 광해군이 가죽 주머니에 싸서 침실에 숨겨뒀던 돈이었다.(이상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일기’) 다음 날 광해군이 검거된 직후 능양군은 경운궁(옛 월산대군집)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 가서 반정을 정식 허가받았다. 그리고 능양군이 광해군에 이어 왕에 즉위했다.
창덕궁이 전소된 탓에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벌어졌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여러 날 이어지고 인조가 선언했다. “부정한 재물은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이후 이를 경계로 삼겠다.”(1623년 3월 15일 ‘인조실록’) 부정한 광해 시대를 청산하고 개혁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권력, 권력, 오직 권력
“금수(禽獸)의 땅이 다시 사람 세상이 되었다.”(1623년 3월 17일 ‘인조실록’)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반정 세력 공언은 허언이었다. ‘조정의 사대부가 하는 행위는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1623년 7월 27일 ‘인조실록’), ‘하는 짓이 광해군 때보다 심하고 부역이 날로 더 늘어 원망이 자자하니 역모를 꾸릴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1623년 10월 1일 ‘인조실록’)
반정 세력 내부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도 나왔다. 반정 당일 반군을 지휘해 앞장서서 궁궐로 진군한 이괄이 그랬다. 당연히 1등 공신이 되리라 생각했던 이괄은 정적 김류에 의해 2등 공신으로 격하됐다. 무장(武將)인 이괄은 평안병사로 임명돼 서울을 떠났다. 평안도로 떠나던 날 인조가 칼을 채워주고 수레바퀴를 밀어주었다. 위로하는 1등 공신 신경진에게 이괄이 말했다.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은 속이지 마시오.”(‘연려실기술’ 24 인조조고사본말 ‘이괄의 변’)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사람 살게 만들겠다’던 공약과 달리 백성은 살기 힘들고 권력은 아귀다툼에 빠진 금수의 세상이 돌아와 있었다.

▲서울 청운동 창의문에 걸려 있는 계해거의(癸亥擧義) 정사공신(靖社功臣) 현판.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공신 명단이다. 당연히 1등 공신이리라 여겼던 이괄은 경쟁자들에 의해 저평가를 받아 2등 공신으로 책록됐고, 이에 대한 불만과 정적들 시기심이 융합돼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1743년 정조 명으로 만든 이 현판에는 ‘역적’ 이괄 이름이 빠져 있다./박종인 기자
세 번째 방화, 1624년 1월 이괄의 난
해가 바뀌었다. 서울에 있던 반정세력 사이에서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를 꾸민다’는 말이 나왔다. 인조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역모 고발은 이어졌다. 1월 21일 평안도로 감찰을 나간 조정 관리 눈앞에서 조선 팔도 최정예병인 이괄 부대 1만2000 병력과 임진왜란 때 투항했던 베테랑 일본 병사 130명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연려실기술’, 앞 부분) 이괄은 찾아온 관리들에게 “아들이 죽게 생긴 판에 내가 어찌 온전하겠는가”라며 대놓고 반역을 선언했다.
그리되었다. 사흘 뒤 이괄은 파견된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괄 목에 신분과 상관없이 1등공신과 1품 품계를 내걸었다.(1624년 1월 24일 ‘인조실록’)
이괄 부대는 파죽지세로 무악재(모래재)를 넘어 한성에 입성한 뒤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내세웠다. “도성 안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 그러자 반군에 동조한 군사 수천 명이 무악재에서 이들을 영접하며 길을 인도했고 관청 서리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 맞이했다. 한성 백성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아 이들을 맞았다. 한성에 입성한 이괄은 경복궁 옛터에 병영을 차렸다.(이상 ‘연려실기술’ 앞 부분)
그사이 인조는 공주로 달아났다. 일행이 한강에 이르자 강 건너에 배가 보였다. 호종 무사 우상중이 헤엄쳐 배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전라병사 이경직이 칼을 빼내 인조를 겨우 배에 태웠다. 강 한가운데에서 뒤를 돌아보니 궁궐이 난민(亂民)에게 불태워져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다.(1624년 2월 8일 ‘인조실록’) 창덕궁에 난입한 반군과 ‘나쁜 무리’들이 노략질을 하고 불을 질렀다. (’궁궐지’2-창경궁지, 서울학연구소, 1996, p33. ‘창경궁’,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2008, p48, 재인용) 죽을 뻔했던 인조가 다음 날 양재역에 도착했다. 김이라는 유생이 팥죽을 인조에게 올렸다. 인조는 그를 의금부도사에 임명했다.(1624년 2월 9일, 12일 ‘인조실록’) 난이 평정되고 공주에서 환도한 인조는 자기 옛집 터에 광해군이 세운 경덕궁(경희궁)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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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창경궁, 창덕궁 두 궁궐이 화재를 맞았던 이야기다. 그런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양재에서 팥죽을 얻어먹은 다음 날, 인조에게 관리들이 이렇게 권했다. “동래 왜관에 일본인 1000명이 있다는데, 이들을 병사로 쓰면 반군을 물리칠 수 있나이다.” 인조는 “즉시 청왜사(請倭使)를 보내라”고 명했다. 청왜사로 임명된 사람은 한강에서 인조를 배에 태웠던 이경직이다. 그가 동래로 출발 직전 물었다. “일이 지연되면 어떡하고 일본 본국에서 군사가 오면 어떡할까요.” 인조가 답했다. “그건 그렇다. 가지 말라.”(1624년 2월 10일 ‘인조실록’) 나라와 백성을 하찮게 여기고, 외국군을 부르는 이 행태. 망국(亡國)으로 가는 전형적인 패턴 아닌가.
322.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①
함께 신세계를 봤으되, 너무나도 달랐던 그들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 일행. 윗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역관 고영철, 수행원 변수. 아랫줄은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과 미국인 고문관 퍼시벌 로웰. 보빙사는 구체제를 유지하고 서구 기술을 도입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근대화 작업이었다. 이 가운데 현흥택은 민비 암살사건을 목격한 뒤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려는 춘생문 사건에 개입했다. 최경석은 미국으로부터 근대 농법을 도입해 뚝섬 일원에서 농장을 시험하다가 요절했다.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고영철은 지방관을 두루 역임했다. 변수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대학 졸업 조선인 1호’가 됐다. 기차 사고로 죽었다. 홍영식과 서광범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 실패로 홍영식은 거리에서 처형됐고 서광범은 망명을 떠났다. 수구파로 변신한 민영익은 갑신정변 때 정변파에 의해 난자당했다가 살아나 훗날 중국 상해에서 죽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들이었다./미국의회도서관
근대화라는 폭풍우 그리고 기회
19세기 후반은 지구 곳곳에 근대화라는 폭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과학혁명(16세기)과 시민혁명(17~18세기)에 이어 산업혁명(18~19세기 초)이라는 세 가지 대전환을 이뤄낸 유럽이 순식간에 아시아를 압도하던 때였다. 아시아에서는 서구화가 곧 근대화라는 등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변신하던 중이었다.
청나라와 조선 또한 근대화 폭풍 속 생존 방법을 모색한다.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는 서구 문물 도입 작업에 착수했다. 옛 체제는 그대로 두고 서구 기술을 도입해 개혁을 이루겠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식 개혁작업이었다. 조선 또한 일본(1876)에 이어 미국(1882)과 수교하고 서구 문물 도입을 통한 개혁 작업에 들어갔다. 이 또한 구체제를 유지하는 동도서기 근대화였다.
그 가운데 핵심 작업이 바로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다. 조미수호 이후 미국에서는 조선에 공사관을 개설했고 조선은 상설공사관 대신 사신을 파견했다. 문을 닫고 살던 조선 왕국에 500년 만에 굴러온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좌절과 변신 이야기.
태평양으로 떠난 그들
1883년 5월 19일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Foote)가 조선에 부임했다. 신분은 특명전권공사, 그러니까 영사나 총영사보다 높은 지위였다. 조선을 끝까지 ‘속방(屬邦)’으로 묶어두려는 청나라를 견제하고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과시한 신분이었다. 서울 정동 현 미대사관저 부지에 공사관을 개설한 푸트는 사절단 파견을 조선 정부에 제의했다. 7월 9일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해 사절단장인 전권대신에 민영익(関泳翊), 부대신에 홍영식(洪英植), 종사관에 서광범(徐光範)을 임명했다.(1883년 음6월 5일, 6일 ‘승정원일기’)
속속 임명된 사절단원은 이러했다. 수행원 유길준(俞吉濬)과 변수(邊燧), 무관 최경석(崔景錫)과 현흥택(玄興澤), 역관 고영철(高永喆). 그리고 중국어 통역관 오례당(吳禮堂), 미국인 고문 퍼시벌 로웰(Lowell)과 로웰의 일본어 통역관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 그리고 미국 현지에서는 조선과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미해군 소위 조지 포크(Foulk)가 안내를 맡았다.
7월 16일 이들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공격했던 미 해군 함정 모노카시(Monocacy)호를 타고 제물포에서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15일 이들은 2년 전 영국 리버풀에서 진수한 증기 여객선 아라빅(Arabic)호로 갈아타고 동쪽 망망대해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500년 동안 숨어 살던 조선인이, 태평양을 건너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3년 9월 29일자 주간지 ‘레슬리 일러스트’ 표지(왼쪽). 9월 18일 보빙사 일행이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를 예방하면서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을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보빙사 일행은 문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정사 민영익이 인사말과 고종 친서를 읽었다. 함께 절을 한 사람은 민영익(정사), 홍영식(부사), 서광범(종사관)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운명은 이듬해 극적으로 달라진다./미국의회도서관
미국 도착부터 귀국까지
1883년 9월 2일 500년 먹은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독립한 지 100년이 갓 넘은 나라,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워싱턴을 거쳐 일행은 9월 17일 뉴욕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이 호텔 대접견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를 만났다. 화려한 비단 관복을 입은 일행은 접견실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로 예를 표한 뒤 방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절을 했다.(1883년 9월 29일 ‘레슬리 일러스트’지) 국서 제정 의례가 이어지고 이후 이들은 보스턴을 위시한 동부 산업단지와 뉴욕 공장,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우체국을 견학했다. 유길준이 “악마(devil)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던” 전깃불도 그때 처음 목격했다.(1883년 10월 15일 ‘뉴욕타임스’. 김원모, ‘개화기 한미교섭관계사’, 단국대출판부, 2003, p528 재인용) 홍영식은 우체국에, 최경석은 농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해 말 부사 홍영식을 포함한 1진이 먼저 귀국하고 1884년 6월 2일 정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했다. 먼저 귀국한 홍영식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신 빛 속에 있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성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이듬해 귀국한 2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1884년 6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정사 민영익이었다. 왕비 민씨 친족으로 실세 가운데 실세. 그 실세가 광명 속에서 발견한 충격. 두 가지가 결합하면 이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는 시간 문제였다.

▲보빙사 일행이 아서 대통령을 만났던 뉴욕 5번가호텔(The Fifth Avenue Hotel). /뉴욕시립도서관
귀국한 그들, 엇갈린 운명
수행원 유길준은 정사 민영익이 배려해 상투를 자르고 미국에 남아서 공부했다. 국비 유학생으로는 조선인 1호였다.
무관 현흥택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까지 무관으로 일했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 암살 사건 때 현흥택은 경복궁에서 왕실 친위 부대인 시위대 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중상을 입었다. 이 을미사변을 계기로 현흥택은 근왕파로 변신했다. 11월 28일 벌어진 춘생문 사건에도 간여했다. 춘생문 사건은 미국인 선교사, 친러·친미 관료와 군인들이 을미사변으로 공포에 싸인 고종을 경복궁 외부로 빼내려던 사건이다.(1895년 양11월 15일 ‘고종실록’)
무관 최경석은 미국 보스턴에서 여러 농장을 견학한 뒤 미국 농무부로부터 각종 신품종 종자와 농기술 서적을 선물받았다. 1883년 1진으로 귀국한 최경석은 정부로부터 망우리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농지로 허가받고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했다. 시험장에서는 재래종과 도입종을 비교해서 재배하며 근대 농법을 연구했다.(‘신편한국사’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농무목축시험장과 농무학당’) 미국에 연장 체류 중이던 민영익은 각종 근대 농기구를 수입해 시험장에 보냈다. 1885년에는 소와 말 같은 가축도 미국 품종이 제물포를 통해 시험장에 수입됐다. 암말 2필, 종마 1필, 젖소 2필, 황소 1필과 돼지, 양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1886년 의욕 넘치던 농장 관리자 최경석이 갑자기 죽었다. 이후 농장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폐쇄됐다.(김원모, ‘견미 조선보빙사 수원 최경석, 오례당, 로우엘 연구’, 동양학 27집, 건국대동양학연구소, 1997)
역관 고영철은 이후 외국어와 상관없는 지방 군수직을 다수 맡으며 살았다. 대대로 역관 집안인 고영철에게는 형제가 셋 더 있었는데 모두 역관이었다. 그 가운데 둘째형 고영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공사와 연을 맺었다. 이후 승승장구한 고영희는 1910년 탁지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부사 홍영식은 귀국 이듬해 우정총판(郵征總辦)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그해 12월 본인이 주관한 우정국 개원 기념 파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도 가세했다. 수행원 변수도 가담했다.
갑신정변은 외부로는 대청(對淸) 사대 청산과 자주, 내부로는 전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목표였다. 그때까지 고종 정권이 추진하던 ‘동도서기’식 근대화, 그러니까 옛 체제에 대한 개혁 없이 서구 기술만 도입하겠다는 근대화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홍영식은 1883년 보빙사로 떠날 때 도쿄에 한 달 체류하면서 김옥균과 만나 정치 개혁을 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옥균은 차관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고, 홍영식은 정사 민영익 눈을 피해 김옥균과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다.(‘유길준전서’5, 일조각, 1971, pp. 264~265.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문학과지성사, 2004, p76 재인용)
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홍영식은 무당 진령군이 살던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됐다.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집 또한 피칠갑이 된 채 흉가로 남았다. 훗날 고종의 정치고문이 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고종 윤허 속에 그 집에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했다.
서광범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귀국해 갑오개혁정부 대신이 됐다. 이어지는 파행 정국 속에 서광범은 주미특명전권공사로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수행원 변수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메릴랜드대 농과대에 입학했다. 1891년 변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모교 앞에서 열차사고로 죽었다. 모교에는 그를 기리는 ‘변수 룸’이 있다.
개혁의 키맨, 민영익의 변신
‘구체제 타도’라는 정변 목적을 달성하려면 구체제 실세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민영익이었다. 정변 기획자들은 민영익을 우정국 개원 잔치에 초대한 뒤 칼로 난자했다. 사망 위기까지 갔던 민영익을 대수술로 살려준 사람이 미국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이었다. 광혜원은 이 왕비 민씨 조카를 살려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누구는 훗날 근왕파로 변신했고 누구는 급진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구는 민생을 위한 농업 혁신을 준비하다가 황망히 죽었다. 그리고 민영익, 그 모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는 이렇게 처단의 대상이 돼 버렸다. 어쩌면 조선 망국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다음 주 계속>
323.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 기회② 피라미드 앞 사무라이와 민영익
그러나 조선 사절 민영익은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았다

▲1864년 2월 일본 막부가 파견한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이 이집트 스핑크스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본으로 밀려드는 세계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 개항 시기를 늦추려고 프랑스로 떠난 사절단이다. 협상은 실패했지만 사절로 파견된 이들 35명 사무라이들은 일본 근대화 일원으로 활약했다. 20년 뒤 미 해군 군함을 타고 피라미드를 찾은 조선 보빙사들은 동행했던 미 해군 소위 포크의 등반 제안을 거부했다. 포크는 “정사 민영익은 일정 내내 견문 넓히기를 거부하고 유교 경전을 읽으며 소일했다”고 기록했다./일본 요코하마미술관
세계로 떠난 보빙사
1883년 10월 12일 미 대통령 아서 예방과 함께 조선 최초로 서방세계를 찾았던 보빙사 공식 방미 일정이 끝났다. 이날 아서는 정사 민영익에게 세계여행을 제안했다. 모든 것이 파격이었다. 배는 미 해군 함정 트랜튼호였고 모든 경비는 미 해군부 예산으로 지출했다. 해군 소위 포크(Foulk)가 대통령 명으로 이들을 수행했다. 부사 홍영식이 이끄는 1진이 귀국하고, 12월 1일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는 장장 6개월 동안 세계를 주유하고 이듬해 5월 31일 제물포로 귀국했다. 대서양 아조레스(Azores·포르투갈령)에서 로마와 런던, 파리, 카이로와 뭄바이, 싱가포르에 이르는 대장정. 모든 것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고 모든 경험이 처음 겪는 문물이었다. 그런데 그 여정 가운데 상당 일정이 이보다 20년 전 일본을 떠난 사무라이들 여행과 겹쳐 있었다.
피라미드의 사무라이들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일본은 4년 뒤인 1858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잇달아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본이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力國條約)이라 부르는 불평등조약들이다. 1864년 이들 조약에 규정된 요코하마 개항 의무 조항을 철폐하기 위해 막부는 협상단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들을 ‘요코하마 쇄항 담판사절단(横浜鎖港談判使節團·이하 요코하마 사절단)’ 혹은 ‘제2회 유럽 파견 사절’이라 부른다. 단장인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 이름을 따서 ‘이케다 사절단’이라고도 한다. 이미 2년 전인 1862년 일본은 포르투갈, 러시아 등과 맺은 조약 가운데 일부 조항 이행을 연기하기 위해 1차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요코하마 사절단은 1864년 2월 6일 프랑스 군함 르 몬제호에 올라 청나라 상하이, 인도,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나폴레옹 3세를 예방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이들은 수에즈 운하를 앞두고 이집트에서 11일을 체류하며 ‘관광’을 했다. 2월 28일 일행 35명 가운데 몸 상태가 나쁜 7명을 제외한 28명이 기자 피라미드에 오른 뒤 스핑크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촬영자는 근대 사진 선구자인 이탈리아계 영국인 안토니오 비아토였다. 사절단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교역항인 요코하마 폐쇄를 프랑스 정부는 결사반대했다. 대신 스핑크스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온 사무라이라는 모순적인 요소가 만든 기이한 풍경이 탄생했다.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찬 사무라이들이 피라미드 앞에서!
실패한 협상가, 근대의 아버지
27세였던 단장 이케다는 압도적인 서구 문명을 몸으로 목격하고 ‘해외에서 국욕(國辱)을 초래하기보다 조정에 쇄항의 잘못을 호소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뒤 교섭을 포기했다.(한철호, ‘메이지 초기 일본 외무성 관리 다나베 다이치의 울릉도·독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19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 대신 이케다는 물리학, 생물학, 섬유, 농업, 양조 분야 서적을 구입해 귀국했다. 이후 이케다는 큰 공식 활동 없이 1879년 죽었다.
그런데 저 스핑크스 앞 사무라이들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이케다와 함께 100일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던 다나베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영토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871년 메이지정부가 미국과 유럽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에도 1등 서기관으로 참여해 견문을 쌓았다. 1876년 조선 수신사 김기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변태일(田邊太一)도 전에 외무대승으로 있었는데, 외국 학문을 잘 알고 세계에 가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다고 하였다.’(김기수, ‘일동기유’ 2권, 결식 34칙) 다나베는 훗날 한·일 독도 분쟁에 일본 측 논리 메이커가 됐다. 그리고 마스다 다카시(益田孝).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을 실질적으로 창업하고 ‘일본경제신문’ 전신인 ‘중외상업신보’를 창간했다. 근대 세계와 마주친 충격이 실패한 협상가들을 근대적 프로페셔널로 변신시킨 것이다.

▲1864년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단장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파리에서 촬영). 파리에서 근대문명을 목격한 뒤 쇄국 담판을 포기하고 근대화를 택했다. 27세였다. /위키피디아
조선 사절단, 피라미드에 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한 지 만 8년 만인 1884년, 그 조선 사절단이 이집트로 갔다. 일본 요코하마 사절단 또한 1854년 개항 후 10년 만에 피라미드를 봤다. 개항에서 목격까지 불과 2년 차이지만 충격은 조선보다 덜했다. 이미 임진왜란(1592년) 전 일본은 포르투갈 신부를 통해 유럽과 교류를 시작했다. 1582년에는 신부들을 따라 10대 청소년 4명이 왕복 8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렇기에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19세기 일본이 서구문명을 대하는 자세에는 여유가 있었다.
미국 정부 호의로 세계를 여행한 최초의 조선인,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는 어땠을까. 12월 1일 뉴욕을 떠난 트랜든호는 대서양에서 풍랑을 만났다. 이들을 수행했던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극도로 공포에 질려 자거나 먹거나 누우려 하지 않았다.’ 민영익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면 배를 갈아타고 속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29권, 한국사상사학회, 2007) 이에 대해 포크는 “친구에게서 받았던 담배를 던져버리는 행위”라며 대통령 호의를 저버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유럽 대륙에 상륙한 일행은 파리와 런던, 로마를 둘러보고 2월 29일 이집트 수에즈에 도착했다. 이때 이들이 카이로에서 피라미드를 보았다. 이집트 고대 문명을 처음으로 목격한 조선인 3명이다.
이들은 세계여행에 대해 단 한 글자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동행한 미국인 포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들은 고대인이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직접 올라가거나 들어가 구경하는 것은 거부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거대 구조물을 대면하고도 너무나도 성리학적인 예법으로 호기심을 누르고 애써 외면한 것이다. 이런 태도를 ‘뉴욕타임스’는 “마치 놀라운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무엇을 보든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1883년 11월 8일 ‘뉴욕타임스’. 홍사중, ‘상투 틀고 미국에 가다’, 홍익사, 1983, p169) 1897년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인은 놀라움과 함께 실행해 보겠다는 야심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글을 쓰기도 했다.(홍사중, 앞 책, p169)
대신 민영익은 인도 뭄바이를 거쳐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 현지 소승불교와 조선 대승불교를 두고 승려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고 포크는 기록했다.

▲1883년 조선 보빙사 정사 민영익. 미국 상업사진관에서 서양식으로 팔짱을 끼고 포즈를 취한 민영익은 귀국 후 수구파로 변신했다. 23세였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서광범의 예언 “그는 돌아서리라”
미국에 상륙해서 세계를 주유하고 조선으로 복귀할 때까지 8개월 동안 이들을 밀착해서 관찰한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이 세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다. 민영익은 자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오래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는 소심하고 변덕이 심하다. 슬프게도 그는 견문과 각성이라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기회를 외면하고서 여행 내내 조선에서 가져온 유교 책들을 붙잡고 읽고 있었다. 반면 서광범과 변수는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사와 진보에 대해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노트하는 데 지칠 줄 모르도록 열심이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1884년 5월 마침내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한성으로 올라가면서 서광범이 포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민영익이 무엇을 했고 무슨 대접을 받았든 정확하게 그 반대로 행동하리라고 본다. 유교적 교육과 가문의 신분적 본능(hereditary instinct)이 가르쳐준 바대로, 그는 틀림없이 중국 방식을 좇아 반(反)서구 근대화로 나아가리라.”(포크, 앞 편지)
포크의 관찰과 서광범의 예언이 맞았다. 귀국 반년 만에 보빙사 부사 홍영식이 주최한 우정국 개국 잔치에서 정사 민영익이 개혁의 적으로 난자당한 것이다. 왜?<다음 주 계속>
324.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 기회③/끝 민영익의 변절과 갑신정변
수구파 민영익을 칼로 쳤으나 혁명은 좌절됐다

▲서울 종로에 있는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주최한 우정국 낙성 축하연이 벌어졌다. 개화파 인사로는 총판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가 참석했고 수구파로는 민영익과 한규직, 이조연, 민병석이 참석했다.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은 각각 친군영의 우영사, 전영사, 좌영사로 고종 친위대인 친군영의 핵심 사령관들이었다. 개화파는 이 파티장에서 정변을 일으켜 개화에서 수구로 변신한 민영익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쳤다. 도주한 한규직과 이조연은 그날 밤 궁궐에서 살해됐다. 미국을 함께 방문했던 보빙사 일행이 귀국하고 7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건물 앞 느티나무는 그날 밤 현장을 목격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박종인 기자
<지난 줄거리: 1884년 5월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한 보빙사 정사 민영익은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수행한 미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세계일주 내내 공자와 맹자 서적을 읽으며 문명세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귀국하던 날 서광범은 “민영익은 반(反)근대화로 간다”고 예언했다. 예언은 피바람 속에 실현됐다. 1884년 12월 4일 밤 서울 우정국 낙성식에서 보빙사 부사였던 홍영식과 그 무리들은 정사였던 민영익을 장검으로 난자했다.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민영익, 분열의 징조
공식 방미 일정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1883년 11월 두 팀으로 나뉘어 부사 홍영식 일행이 먼저 귀국하고 이듬해 5월 정사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가 세계 일주 후 귀국했다. 미국 대통령 아서는 전원에게 해군 함정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3명만 이를 수용했다. 왜 이들은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까.
전(前)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 윤효정이 쓴 ‘풍운한말비사’(1946)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 사촌형 민영소와 이규환, 지석영 등이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가 “홍영식이 죽어서 참 아쉽다”라고 했다. 그러자 민영소가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민영익한테 들었는데, 홍영식은 참으로 도량이 좁은 사람이다. 미국에서 민영익이 모피 옷을 고종에게 주려고 고르고 있는데 홍영식이 ‘왕실 인척이 그따위 상납 폐습을 못 벗다니!’하며 면박을 줘서 사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귀국해서 민영익이 궁궐에 들어가니 고종이 바로 그 옷을 입고서 ‘홍영식이 선물했다’고 자랑하면서 ‘너는 이런 진귀한 선물 없느냐’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때 홍영식 인간성을 다시 봤다고 한다.”(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풍운한말비사’)’, 다산초당, 2010, pp70~72)
민영익 사촌이 전한 말이니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던 사실은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홍영식과 민영익은 ‘워싱턴 체류 중 민영익이 사대를 고집하는 데 대해 홍영식은 독립 자주를 역설한 결과 정견의 충돌을 보았고, 마침내 동서로 길을 나눠 고국에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홍영식은 독립당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다.’(민태원, ‘김옥균 전기’, 을유문화사, 1969, p73)
왕실 실세가 사신단 정사(正使)로 떠나는 전근대적 시스템에 따라 젊은 여흥 민씨 실세 민영익은 보빙사 단장이 됐다. 한계는 명확했다. 권력은 고종·민씨 척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 권력을 분산시키고 구체제를 엎겠다는 서구적 근대화는 민영익 개인은 물론 ‘진영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미래였다.

▲보빙사 정사 민영익(앞줄 왼쪽)과 부사 홍영식(앞줄 오른쪽), 그리고 종사관 서광범(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서광범 오른쪽은 이들을 미국에서부터 수행했던 미해군 소위 조지 포크, 왼쪽은 일본~미국~조선 전 일정을 수행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 민영익은 홍영식과 서광범을 위시한 갑신정변 개혁파에 의해 처단 대상으로 낙인이 찍혔다. 포크는 조선에서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했고 로웰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저서를 남긴 뒤 세계적인 천문학자가 됐다./미국 밀워키대 미국지리학회 컬렉션
누란(累卵), 계란이 쌓이다
징조는 현실로 변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에 의해 청나라식 근대화를 시도하던 고종 정권은 민영익 귀국과 함께 본격적인 청나라식 개혁에 착수했다. 봉건체제를 그대로 두고 서구식 기술을 도입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개혁이다. ‘환장(換腸)’, 막부를 갈아엎고 창자까지 갈아끼우는 일본 메이지유신과 질적으로 다른 길이었다.
1884년 음력 5월 2일 민영익은 귀국 보고를 하기도 전에 이조참판에 임명됐다. 인사권을 장악한 것이다. 7월 2일 민영익은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금위영 대장에 임명된 데 이어 8월 26일 새로 개편된 고종 친위부대 친군영 우영사(사령관)에 임명됐다. 개화파가 이좌녕(李左侫, 왼쪽 아첨꾼)이라 부르는 이조연이 좌영사에, 윤우호(尹右狐, 오른쪽 여우)라고 부르는 윤태준이 후영사에 임명됐고 또 다른 수구파 한규직이 전영사에 임명됐다.
(1884년 음8월 26일 ‘고종실록’, 1883년 11월 2일 ‘윤치호일기’) 우영사가 된 민영익은 이틀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10월 2일 기기국 총판에 겸직 임명됐다. 바야흐로 군부 실세요 청나라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핵심이며 청나라식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 핵심이 되었다. 미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한 조지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1884년 9월 민영익은 개화파와 완전히 절연했다. 때로는 면전에서 서양인을 경멸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8월에는 한 고위 관리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기도 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No.128) 실현돼 가는 서광범의 예언에 개화파는 몸서리를 쳤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계란더미처럼, 개화파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다가오는 위기, 무르익은 기회
1년 반 전 제물포를 떠난 보빙사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홍영식은 차관 교섭을 위해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과 “군사 양성과 외국군 철군을 이루고 5년 뒤 거사하자”고 약속했다.(‘유길준전서’ 5권, 서조충정공(書趙忠定公), 일조각, 1971, pp. 263~265.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서울대 박사논문, 2015, 재인용)
그런데 보빙사가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883년 4월 한성판윤으로 활동하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됐다.
(1883년 음3월 17일 ‘고종실록’) 박영효는 광주 남한산성에서 일본식 군사 500명으로 ‘교련소’ 부대를 양성하다가 그해 11월 6일 유수직에서 해임됐다.(같은 해 음10월 7일 ‘승정원일기’) 교련소는 즉각 친군영 전영에 강제 배속됐다. 애써 만든 군사력을 수구파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민비의 한마디에 나는 파면되고 양성했던 군병은 수구파 영솔하에 돌아가고 말았다.’(박영효, 1926년 6월 ‘신민’ 14, ‘갑신정변’. 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갑신정변, 재인용)
쿠데타에 필요한 무력이 급속도로 축소되는 와중에 청불전쟁이 터졌다. 1884년 8월 5일 오랜 영토 분쟁 끝에 프랑스 극동함대가 대만 기륭포대를 포격한 것이다. 이보다 석 달 전인 5월 청나라는 개전을 대비해 조선 주둔 병력 3000명 가운데 1500명을 봉천성(奉天城)으로 이동시켰다. 무력 개화 쿠데타를 진압할 군사력이 절반으로 감축됐다는 뜻이었다.
수구파가 던져놓은 위기감과 지옥문과 청불전쟁이 열어준 기회. “5년 뒤에”라고 일본에서 김옥균과 홍영식이 다짐했던 거사 시기는 자연스럽게 앞당겨졌다. 그리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 운명의 겨울밤이 도래했다.
지옥의 파티
미국에서 본 바대로, 보빙사 부사 출신 홍영식은 1884년 4월 우정총국 설립을 고종으로부터 윤허받고 책임자인 우정 총판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11월 19일 홍영식이 미국공사 푸트에게 말했다. “빛을 가리는 물건은 깨뜨려서 사방을 밝혀야 한다.”(1884년 11월 19일 ‘윤치호일기’) 파천황(破天荒)의 밤이 왔다.
1884년 12월 4일 서울 종로 우정국에서 낙성 기념 파티가 열렸다. 실내에 마련된 연회석에는 여러 외국 공사와 통역, 조선 정부 세무사 묄렌도르프가 초청됐다.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가 개화파로 참석했고 수구파로는 한규직과 민영익, 이조연이 참석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고종 친위대인 친군영 전-좌-우 영사, 바로 수구파 군사력을 장악한 군부 실세들이었다. 윤치호가 ‘여우’라고 비난했던 후영사 윤태준 또한 초청됐지만 마침 궁궐 당직이라 불참했다. 궁궐 동향 파악은 보빙사 수행원 변수가 담당했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은 우정국 바깥에서 대기했다.(김옥균, ‘갑신일록’ 1884년 12월 4일) 수구파에 징발당했던 광주 교습소 병력 일부가 쿠데타에 가담했다. 김옥균이 일본 도야마학교에서 길렀던 사관들은 ‘무슨 일이 닥치든 책임을 이행할 결심’으로 가담했다.(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갑신정변 회고록’, 신복룡 등 역, 건국대출판부, 2006, p235)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당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배치도.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들은 각국 공사들과 고종 정권 군부 실세인 민영익(친군영 우영사)과 이조연(좌영사), 한규직(전영사)을 초청해 제거를 시도했다. 민영익은 중상을 입고 살아났고 이조연과 한규직은 달아났다가 그날 밤 궁궐에서 살해됐다. 궁궐 당직으로 불참했던 후영사 윤태준도 함께 살해됐다.
안국동 민가 방화를 신호로 거사가 시작됐다. 개화파는 ‘물고기가 강이나 바다로 들어가듯 새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듯, 같은 성(姓) 가진 자들이 바글대는 쪽에 붙어버린’ 민영익을 칼로 난자했다.(서재필, 앞 책, p237) 그 겨울밤 우정국 주변은 피바다로 변했다. 그날 밤 고종을 찾아 창덕궁으로 간 정변 주도자들은 우정국에서 도주한 전영사 한규직과 좌영사 이조연, 뒤늦게 입궐한 후영사 윤태준을 고종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일찌감치 수구파로 전향한 내시 유재현도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1884년 음10월 18일 ‘고종실록’)
위기감에 쫓기고 기회에 대한 긍정적 확증편향 속에 실행한 쿠데타였다. 혁명은 실패했다. 개화파는 모두 죽었고, 산 자는 망명했다. 개화는 물거품이 됐다. 실세 민영익은 구사일생했다. 민영익은 고위직을 두루 섭렵한 뒤 을사조약(1905) 직후 중국으로 갔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914년 민영익이 상해에서 죽었다. 그 어느 언저리에서 아쉬운 순간이 잠깐 조선을 스쳐갔다.
325. 순흥 피끝마을과 금성대군 신단
단종 복위 운동 벌어진 죽계천에는 핏물이 흘렀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세종 여섯째아들 금성대군 이유(李瑜)를 기리는 제단이 있다. 금성대군 신단이라고 한다. 이유는 1457년 형 수양대군이 벌인 쿠데타 계유정난(1453년)에 반대해 단종 복위를 기획하다가 탄로나 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순흥부사를 포함한 순흥 일대 반 계유정난 세력이 떼죽음을 당했다. 훗날 1742년 영조 때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그가 유배됐던 자리에 제단이 설치됐다. 순흥에 흐르는 죽계천을 따라 죽은자들 피가 15리를 갔는데, 그곳에 있던 마을을 ‘피가 멈춘 마을’이라고 해서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박종인 기자
임금이 된 조카와 권력자 삼촌 수양
문종이 죽고 왕이 된 어린 단종이 종친을 불러 모았다. 즉위하고 다섯 달이 지난 1452년 음력 윤9월 2일이다. 할아버지 효령대군은 물론 수양대군 이유 이하 모든 삼촌들이 집합했다. 수양 아래 동생 안평대군 이용은 불참했다. 단종은 삼촌들에게 표범가죽 방석 아닷개[豹皮阿多叱介·표피아닷개]를 일일이 선물했다. 모인 삼촌은 모두 15명이었다. 이제는 조카로 하대하지 못하게 된 왕을 알현한 뒤 삼촌 수양이 이리 말했다. “내 오늘 한 말씀 아뢰고자 했으나 성상께서 말을 하지 않으셔서 감히 못하였다. 훗날 반드시 아뢰겠다.”(1452년 윤9월 2일 ‘단종실록’)
이들 조카와 삼촌들은 이미 할아버지 세종 생전에 모인 적이 있었다. 1442년 세종이 팔도에 흩어져 있던 자기 아들들 태실(胎室)을 경상도 성주에 모아 집단 태실을 조성했다. 문종을 제외한 둘째 수양부터 손자 단종까지 직계 왕손 19명 태항아리를 모아서 성주 태봉에 묻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 왕이 된 그 손자가 삼촌들을 궁궐로 부른 것이다. 회합에 불참했던 안평대군은 이듬해 10월 18일 역모 혐의로 조카가 내린 사약을 먹고 죽었다. 열두 살 먹은 조카 단종은 거듭 거부했지만 이미 8일 전 수양이 주도해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 쿠데타 세력 기세는 꺾지 못했다. 이틀 전 “지친(至親)에게 사사(賜死)할 수는 없다”고 울면서 반대했던 안평대군 형 수양대군은 “개인적으로는 죽일 수 없지만 공론을 저지하지는 않겠다”라며 ‘점잖게’ 사약을 방조했다.(1453년 10월 16일, 18일 ‘단종실록’)
이후 쿠데타 여진 속에 좁은 조선 땅이 몇 번씩 뒤집어졌다. 1455년 여름 수양이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 바로 그날 동생 금성대군 이유는 경기도 삭녕(현 연천~철원 일대)으로 유배당했다. 시작이었다.(1455년 윤6월 11일 ‘세조실록’)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왕자태실. 세종 직계 왕자와 단종 태항아리를 모은 곳이다. 계유정난 후 쿠데타 세력은 이곳에 있던 반 쿠데타 왕족 태실을 파괴했다. 가운데 기단만 남은 태실이 금성대군 이유 태실이다. 맨 위쪽 난간에 붙어 있는 태실은 세종 원손 단종 태실이다. /박종인 기자
수양의 권력 찬탈, 금성의 유배
안평대군에게 씐 혐의는 역모였다. 단종을 끄집어 내리고 본인이 왕이 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였다. 훗날 사육신으로 추앙받는 집현전 소장 학자들도 안평대군 처리에 관해서는 수양대군과 같은 편이었다. 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반수양대군파가 속속, 은밀히 세를 규합해나갔다. 그 핵심에 금성대군이 있었다.
단종 등극 3년째인 1455년 금성대군 집에서 몇몇 인사가 활쏘기를 하면서 잔치를 벌였다는 제보가 입수됐다. 이들을 처리해 달라는 수양대군파 관료들 요구에 단종은 ‘그대로 따랐다[從之·종지]’.(1455년 2월 27일 ‘단종실록’) 금성대군은 관직을 내놓고 유배당했다. 며칠 뒤 누명은 풀리고 금성대군은 관직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또 며칠 뒤 쿠데타 세력은 금성대군이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같은 해 3월 21일 ‘단종실록’)
넉 달 뒤 어전회의에서 수양대군이 이렇게 선언했다.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따위를 유배 보내야 한다.” 셋은 모두 자기 아우들이다. 이 꼴을 보고 있던 조카 단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나이가 어리니 간사한 무리들이 발동하는구나.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한다.” ‘대임(大任)’은 왕위다. 그리고 어전회의에 참석해 있는 삼촌 수양대군이 바로 그 ‘영의정’이다.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삼촌을 물리치고 단종은 마침 와 있던 명나라 사신에게 이를 전격 통보했다. 수양이 그날로 왕이 되었다. 삭령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이듬해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1455년 윤6월 11일, 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모반, 그리고 피바다
1456년 반수양대군으로 돌아선 집현전 학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됐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던 김질이 고자질해서 실패로 돌아간 일이었다. 금성대군은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사육신 사건은 엄청난 피바람 속에 마무리됐다. 1년 뒤 이동이라는 안동 관노가 한성까지 올라와 이렇게 밀고했다. “이유가 순흥에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해 불의한 짓을 도모한다.”(1457년 6월 27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 유생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거병해 다시 조카 복위를 모의 중이라는 것이다.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순흥부사 이보흠도 정식으로 금성대군 모반을 보고했는데, 알고 보니 이보흠 또한 가담한 대규모 역모였다. 그해 10월 합동수사본부에 세조가 물었다. “누가 괴수인가.” “예전이라면 노산군인데, 지금은 금성대군 이유입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죽이소서.”(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은 사약을 받으면서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같은 날 ‘세조실록’)
1457년 7월 복위 운동이 제압됐다. 7월 16일 세조는 대사헌 김순을 순흥으로 내려보냈다. 명분은 “큰 옥사를 멀리서 지시할 수 없다”였다. 이미 세조는 7월 10일 ‘칼을 채워 설득하다가 안동으로 옮겨서 계속 수사하라’고 김순에게 지시해 놓은 터였다.(같은 해 7월 10일, 16일 ‘세조실록’) 열흘 뒤 실록에는 ‘대사헌 김순이 금성대군 옥사를 처리하고 안동에서 돌아왔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순흥에서는 그 한 달 남짓한 수사 과정을 ‘참극’으로 기억한다. 1822년 이황 후손 이야순이 쓴 ‘태평서당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순흥 일대 65가구 혼령을 위로해 제사를 지냈다’.(이야순, ‘태평서당기’) 그러니까 수백 명이 수사 과정에서 실록이 기록하지 않은 고문과 비공식적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박찬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순흥 의거’, 민족문화 34권, 한국고전번역원, 2010) 결국 공식 사료에는 은폐됐거나 기록되지 않은 참극이 모반의 땅 순흥에서 벌어졌다는 뜻이고, 순흥 사람들은 이를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부른다.

▲순흥에 흐르는 죽계천을 따라 죽은자들 피가 15리를 갔는데, 그곳에 있던 마을을 ‘피가 멈춘 마을’이라고 해서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핏물이 멈춘 피끝마을
그 참극을 상징하는 곳이 있다. ‘피끝마을’이다.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순흥에 죽계천이 흐른다. 정축년 수사 과정에서 최소 65가구 수백 명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 넘게 흘렀다. 핏물이 정화되고 다시 개울물이 맑게 변한 지점에 있는 우음리(雨陰里) 마을은 이후 지금까지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핏물이 멈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1711년 피끝마을 뒷산 미궐봉에 고씨 성을 가진 무녀(巫女)가 성황당을 짓고 당제를 올렸다. 정축지변 때 희생된 사람들 혼을 달래는 제사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성황당에 당제를 지낸다.
피끝마을 남쪽에 합도마을이 있다. 조개 합[蛤]자를 쓴다.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형세가 조개처럼 보인다. 이곳 또한 계유정난에 즈음해 뜻있는 사람들이 낙향한 마을이다. 그런데 도로 건너 논 한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작은 둔덕이 있다. 사람들은 이 둔덕을 ‘조개섬’이라고 부른다. ‘조것도 섬이냐’하는 ‘조게 섬’의 변형이다.

▲피끝마을’ 뒷산에 있는 성황당. 금성대군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711년 고씨 성을 가진 무당이 만든 성황당이다. 지금도 당제를 지낸다. /박종인 기자
권력자의 뒤끝
1458년 예조에서 세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성주에 있는 태봉에 주상과 여타 동생, 특히 난신(亂臣) 이유 태실이 섞여 있으니 이들을 옮기고 이유와 노산군(단종)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1458년 7월 8일 ‘세조실록’) 세조는 즉시 보고에 응했다. 그리하여 금성대군 태항아리는 파괴돼 사라지고, 단종 태항아리는 텅 비게 되었다. 일찌감치 제거됐던 안평대군 태항아리, 금성대군 편을 들었던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태항아리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예조에서 “주상 태실을 다른 장소로 옮기게 하소서”라고 권했다. 세조는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다”며 반대했다. 예조는 이에 따라 태실 앞에 귀부를 세우고 비석에 이렇게 새겨넣었다.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나네.’(1462년 9월 14일 ‘세조실록’)
수사가 마무리된 직후 순흥은 풍기군 밑으로 들어가고 도호부 이름을 빼앗겼다. 창고와 관사는 파괴됐다.(1457년 8월 2일 ‘세조실록’) 숙종 때 순흥부가 다시 설치됐지만(1682년 1월 13일 ‘숙종실록’) 지금도 순흥은 영주시 순흥면이다. 금성대군은 숙종 때인 1698년 복권됐다. 1742년 영조 때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자리에 제단이 정식으로 설치됐다. 그게 지금 있는 금성대군 신단이다. 담대했고, 허망했고, 살벌했던 15세기 풍경이었다.

▲산등성이에 형성된 영주 동촌2리는 형태가 조개처럼 보여서 ‘합도(蛤島)’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또한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들어왔던 마을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마을 앞 논 작은 둔덕은 마을 상징이다. 이름은 ‘조개섬’. ‘조개처럼 생긴 섬’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로 “저것도 섬이냐”라는 뜻의 ‘조게 섬’이다. /박종인 기자
326.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성판윤은 무엇을 했나
고종 43년간 한성판윤은 429명... 평균 한 달 엿새 근무했다

▲경복궁 근정전. 매서운 겨울이지만 한복 입은 관광객이 고궁 나들이에 한창이다. 조선전기 ‘경국대전’을 비롯해 각종 성문법을 완비한 조선왕국은 그 법에 의거해 백성을 통치했다. 하지만 법은 수시로 권력에 의해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백성은 부패한 관리로부터 피해를 입어야 했다. 한성판윤을 비롯해 대민 행정을 책임지는 관리들의 법정 임기도 무시당했다. 조선시대 한성판윤 평균 재직 기간은 석달에 불과했다. /박종인 기자
흔히 한양이라 부르는 조선 왕국 수도 공식 명칭은 한성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고려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한성판윤이다. 황희(태종), 맹사성(세종), 서거정(예종), 이덕형(선조)과 채제공, 박문수(영조)에서 민영환(고종)까지 숱한 명망가들이 한성판윤 자리를 거쳐갔다. 그런데 그 쟁쟁한 인물들이 거쳐간 한성판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조선 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p25)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p23)
한성판윤은 품계가 정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 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본질적 질문을 해본다. 숫자에 답이 있다.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몇 명이었고, 임기는 몇 년이었나?”
답은 이렇다.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서울역사편찬원,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 서울역사편찬원, 2017: 류시원, 앞 책) 행정 실적 기록이 있었다면 오히려 기이한 숫자가 아닌가.
후기는 어떤가. 1864년부터 1907년까지 고종 시대 43년만 따지면 1864년 음력 4월 16일 임명된 이우(李㘾)부터 1907년 양력 3월 11일 임명된 마지막 한성부윤 박의병까지 모두 429명이었다.(장경호, ‘고종대 한성판윤의 특징과 변화(1863~1907)’, 서울학연구 65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고종 시대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한 달 6일이었다.
그러니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꽉 조여 있었어야 할 나사들이 다 달아나고 없는 조선 시대 서울시장 이야기.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首善全圖). ‘수선(首善)’은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 즉 서울을 뜻한다. 그런데 그 서울을 관장하는 시장(판윤)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심각할 정도로 자주 바뀌어 행정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 서울시장, 2073대 판윤
위에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512년 동안 모두 2012명에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불완전하다. 1차 사료가 부족하다. 공무원 임면 관계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와 각종 사료들이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불타버렸거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선조 때까지 공무원 임면 기록은 실록을 일일이 들춰봐야 한다.
해방 후 역대 한성판윤에 대한 통계는 1957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성판윤선생안’이 처음이다. 그리고 2017년 그 후신인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참고해 새로운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1905년 양력 1월 임명된 박의병이 제2010대 한성판윤이다. 박의병은 다른 직을 맡았다가 그해 말 다시 한성판윤에 임명됐고 이듬해 경성부윤에 임명됐다. 연구자에 따라 총 판윤 숫자는 차이가 나지만 현재 2010명 안팎으로 정리돼 있다. 식민시대 경성부윤을 합쳐서 현 대한민국 서울시장 오세훈은 1395년 1대 한성판윤 이래 2073대째 서울시장이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처럼 장관급이다. 이 글은 ‘서울역사편찬원’이 편찬한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의 명단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성판윤이 하는 일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이 해야 할 일은 대개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등에 관한 사무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시장 업무와 다를 바 없는 종합적인 행정가였다. 그런데 여기에 민간 빚 문제(負債·부채)와 폭력(鬪毆·투구), 살인사건 검시권까지 가진 강력한 사법권자이기도 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한성부)
바로 판윤이 이 모든 사무의 최종 결정권자다. 여기에다 한성판윤은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대중국 외교에도 관여하는 막강한 벼슬이었다.
그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윤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 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박경룡, 앞 책, p45)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坐起·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1538년 8월 18일 ‘중종실록’)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市政)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 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기네스북에 기록될 재임 기간
헌종 때인 1848년 음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1848년 음11월 30일 ‘승정원일기’) 1799년 음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
(1799년 음9월 27, 28일 ‘승정원일기’)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한성판윤은 매일 궁궐에 들어가 국왕 및 판서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래서 ‘말단 행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적었다. 그렇다 보니 앞에 언급했듯 중종 때 ‘판윤이 출근하지 않아서 하급 관리들 업무가 마비된다’는 보고가 올라간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 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九卿)’을 두루 거치는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박경룡, 앞 책, p45) 9경은 정2품인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久任官)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판윤 자리는 파리 목숨이기도 했다. 1762년 944대 판윤 홍상한이 “소나무 가지가 말라 죽으니 군에서 감시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자 영조는 “아침 식사 자리에 나뭇가지 이야기를!” 하며 홍상한을 파면했다. 임명된 지 한 달이 안 된 판윤이었다.(1762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1790년 12월 1214대 판윤 구익은 창경궁 홍화문 앞 정조 행차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고 파면됐다. 재직 기간은 한 달 11일이었다.(1790년 음11월 4일, 음12월 15일 ‘정조실록’)
상상 초월, 지방 수령
한성 판윤만 봐도 조선왕국 행정은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 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 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은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아졌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 임기 만료 전 교체 이유가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그러니까 업무 보는 도중에 신임 부사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다. 또 신구 수령 사이에 한 달 이상 텅 빈 공백 기간이 있는 인사도 많았다. 인사행정이 법전을 무시한 채 무절제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원균, ‘조선시대의 수령직 교체 실태’, 역사와세계 3권, 효원사학회, 1979)
수령이 교체되면 지역민은 닷새에 걸쳐 신임 수령을 맞는 의전을 벌여야 했으니, 이 또한 위민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번 수령을 거치면 전답을 사고 집을 새로 짓는 자가 열 가운데 6, 7은 되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수령으로서 짐바리가 없는 자가 없다.’(1728년 음1월 11일 ‘영조실록’)

▲국왕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부분. 19세기 추정). 경복궁과 창덕궁, 경운궁(덕수궁) 용상 뒤에 세워서 왕권을 상징했다. 그런데 그 왕권은 왕권을 제한하는 법규를 초월해 자의적으로 행사되기 일쑤였다. /국립고궁박물관
매관매직과 부실인사의 극, 고종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12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 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행정을 책임질 수 있었을까. 1886년 좌의정 김병시가 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은 갖추어져 있으나 꼭 시행되지는 않고 수령 교체가 빈번해 영접과 전송에 곤경을 치른다. 가난한 백성이 가렴주구에 시달린다.”(1886년 음8월 16일 ‘고종실록’) 대한제국시대 황실 고문을 지냈던 전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윌리엄 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 임대업자는 뇌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12%나 받았다. 신임 지방관은 어떡하면 돈을 거둘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 관리들은 프랑스혁명 이전 세금 청부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W.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Whittlesey house, McGraw-Hill book company,1930, p118) 법은 완비됐으되 지키지 않았고, 시장이 별처럼 많았으되 시장이 아니었던 조선조 한성 판윤 이야기였다.
327. 경부고속도로와 대한민국 - 달래내 고개 비석 이야기
“우리의 적은 달래내 고개다, 무조건 길을 뚫어라.”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성남시 달래내 고개 옛길 고개 마루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달래내 구간 공사 때 순직한 육군 1201건설공병단 소속 병장 한기영 순직비다.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져 상공업을 천시했던 조선왕조는 왕조 초기 건설했던 대로(大路)들을 방치했다. 물류 인프라 부재로 상공업은 발전 기회를 상실했다. 대한민국이 성립하면서 한반도에 본격적인 도로 건설 작업이 진행됐고 그 상징이 경부고속도로다. “길은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저절로 닦이게 된다”며 도로 건설을 주장했던 18세기 북학파 박지원의 꿈은 200년이 더 지나 이뤄졌다./박종인 기자
달래내고개에 서 있는 작은 비석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달래내고개 옛길 고개마루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 주인 이름은 한기영이다. 비석 주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달래내로343이다. 제1201건설공병단 소속 사병 한기영은 1968년 2월 23일 이곳 달래내고개에서 죽었다. 비석 몸통과 아래 석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고 병장 한기영 순직비.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목숨 바친 공병의 얼 고속도로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 1968년 3월 23일 순직’
순직 당시 상병이었던 한기영은 병장으로 추서되고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묘역 비석에는 생전 계급 상병으로 표시돼 있다. 이 글은 한기영에게 바치는 글이며 그와 대한국인 모두가 만든 나라에 바치는 글이다.
한강의 기적? 500년 만의 기적!
1967년 한국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42달러였고 수출은 3억2000만달러였다. 그해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과 가리봉동에 구로공단이 들어섰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 판자촌과 야산, 미8군 탄약창고 터에 만든 이 공단에서 사람들은 섬유와 봉제, OEM으로 계약한 전기, 전자제품과 가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71년 대한민국 수출액은 10억6만7000 달러로 치솟았다.(한국무역협회 통계)
숫자를 수직 상승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도로가 있다. 공단에서 생산한 물건을 항구까지 운반하는 물류 기반이 도로다. 한반도에, 유사 이래 처음으로, 상공업을 위한 도로가 그때 생겨났다. 바로 경부고속도로다. 사람들은 식민 시대와 전흔을 싹 지워버린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기적은 500년의 기적이다. 500년 동안 조선 왕조가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져 방치하고 억압했던 상업과 공업을 대한국인들이 부활시킨 것이다. 그 드라마 주인공이 바로 ‘길’이다.

▲개통 당시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는 미친 정부와 미친 시공사와 미친 노동자들이 이뤄낸 미친 고속도로였다. /조선일보db
조선의 길, 폭 1m
조선은 법이 완비된 국가였다. 수도 한성은 물론 한성 외곽과 지방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설치와 유지, 보수에 관해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예컨대 한성 내부도로 폭은 대로(大路) 56척, 중로 16척, 소로 11척으로 닦도록 규정했다. 정해진 거리마다 이정표(堠·후)를 세워 거리와 지명을 표시하도록 규정했다.(‘경국대전’, 공전, 교로(橋路)) 그리고 고려시대까지 형성돼 있던 길들을 정비해 한성에 이르는 9개 도로망을 구축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현대 도로원표에 해당하는 거리 시작점을 창덕궁 돈화문으로 잡았다.
법규상으로는 세련되고 완비된 도로망이지만 실제는 매우 많이 달랐다. 한성에서 가장 넓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는 56척(17m)이라야 하지만 육조거리를 발굴한 결과 그 폭은 자그마치 50m가 넘었다.(이용욱, ‘고려~조선시대의 도로 및 수레 연구’, 한국상고사학보 116권, 한국상고사학회, 2022)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외방도로라 불리는 지방도도 마찬가지였다. 명확한 규정이 있었지만 현장 지형지물에 따라 그 폭이 들쑥날쑥이었다. 영조 때 학자 유형원에 따르면 지방도는 큰길은 12보(步)요 가장 좁은 소로(小路)는 폭이 6보였다.(유형원, ‘반계수록’ 25, 속편上, 도로교량) 그런데 지켜지지 않았다. 예컨대 영남대로에서 가장 좁은 문경새재 남쪽 토끼비리는 폭이 1m가 되지 않은 낭떠러지길이었다. 영남대로가 한성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고개 또한 1m가 되지 않았고 경사도 급했다.(‘한국도로사’, 한국도로공사, 1981, p129)
수레는 고사하고 사람도 비켜가기 힘든 길이 ‘대로(大路)’를 막은 것이다. 토끼비리는 그 협소한 폭으로 말미암아 ‘견훤을 피해 달아나던 왕건을 토끼가 안내했던 길’이라는 전설까지 붙어 있다. 그런 길마저 주용도는 정치, 군사적 기능에 있었을 뿐 민간 상업이나 여행 따위는 조선왕조 도로 쓰임이 아니었다.(최영준, ‘조선시대의 영남로 연구’, 지리학 10권2호, 대한지리학회, 1975)
세종이 없앴던 달래내 고개
사람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던, 한성 남쪽 마지막 고갯길이 바로 맨 처음 말한 한기영 병장 순직비가 서 있는 달래내 고개다. 그런데 그나마 그 좁아터진 고개 또한 한때 풍수론자에 의해 흙과 바위로 메꿔져 사라질 뻔했다. 세종 때다.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태종릉 헌릉이 달래내고개 때문에 기가 눌린다고 하자 세종이 논의 끝에 이를 승인하고 달래내고개를 폐쇄한 것이다.(1430년 음7월 7일, 1438년 음4월 15일 ‘세종실록’) 우여곡절 끝에 26년 뒤 세조 때 다시 통행이 허용되긴 했지만 영남대로는 불구로 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쓸데없는 상공업과 쓸데없는 수레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이익된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을 제거한다(務本抑末 興利除害·무본억말 흥리제해).” 이렇게 인간의 탐욕을 유도하는 상공업을 억제하라고 명을 내린 사람은 정조다.(1783년 음1월 1일 ‘정조실록’) 더 한 지도자도 있었다. 성종 때는 전라관찰사 보고에 따라 ‘매월 두 차례 열리는 장(場)을 열어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는(捨本逐末·사본축말) 행위’를 금지했다.(1472년 음7월 27일 성종실록) 중종 때는 ‘상업은 도둑질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금해야 한다’고 영의정 정광필이 보고했다.(1518년 음5월 28일 중종실록)
상업이 이토록 억제되니 상업을 팔도로 실어 나를 도로와 수레는 필요가 없었다. 산세가 험하다는 사실도 도로 건설을 후순위에 두는 데 좋은 핑계였다. 세종 때 명승 황희가 이렇게 세종에게 답한다. “수레가 운반하는 데는 편리하나 길이 험하면 쓸 수 없고 바닷가 모랫길에서 또한 쓰기가 어렵다. 기껏 수레를 만들어봤자 다 쓸모가 없게 되니 왜 만드는가.”(1435년 음4월 11일 ‘세종실록’)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
1644년 인조 때 실용적인 북인(北人) 당색 관료 김육이 209년 전 명승 황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길이 험해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나, 수레가 왕성한 중국이라고 어찌 길이 다 평탄하겠는가. 평안도에도 없는 험준한 재들을 물품을 싣고 넘나든다. 어찌 수레를 사용하지 못할 리가.”(1644년 음9월 1일 ‘인조실록’) 대사성 김육이 올린 상소는 먹히지 않았다.
1783년 정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북학파(北學派) 태두 박지원이 똑같은 논의를 했다. 이러했다. ‘중국에도 위태한 고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니.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랴.’(박지원, ‘열하일기’, 일신수필, 거제(車制))
박지원 제자 박제가 또한 정조에게 ‘북학의’라는 책까지 지어올리며 도로를 만들고 수레를 제작하자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개화파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 있던 1882년 “도로를 닦고 오물을 없애자”는 동료 김옥균의 ‘치도약론’에 따라 도로 정비를 했지만 수구파의 견제로 박영효는 석 달 만에 광주 유수로 좌천되고 도로 사업은 오물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가 성(城)을 허물고 길을 택했을 때 조선은 끝까지 성에 안주했다.

▲경부고속도로 최난도 구간이었던 충북 영동 당재터널. 개통 예정일을 열흘 앞두고 상행과 하행이 마침내 연결된 장면이다. 당재터널은 공사기간 내내 낙석과 함락 사고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마의 구간이었다./조선일보db
1968년 1월 25일 길이 열리다
식민지가 되고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졌고 전흔(戰痕)이 깊게 남았다. 그리고 길이 생겼다. 1968년 1월 25일 서울~수원을 잇는 경수고속도로 달래내 구간 3㎞ 공사가 시작됐다. 투입된 인력에는 육군 제1201건설공병단 220대대도 포함됐다. 1중대장 대위 노부웅이 선언했다. “우리의 적은 저 달래내 고개다.”(‘땀과 눈물의 대서사시-고속도로 건설 비화’, 한국도로공사, 1980, p92)
얼어붙은 논밭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평토화했다. 서낭당 우주목으로 마을 주민들이 숭배하던 노거수 한 그루도 고사를 지내고 밑동에 도화선을 감아 폭파했다. 며칠 뒤 불도저 한 대가 후진 도중 전복했다. 사람들은 신목의 저주라고 수군댔다. 위 회고록에는 없지만, 바로 이 사고에 상병 한기영이 순직한 듯하다. 한기영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달래내 고개 마루 작은 비석이 더 눈에 박힌다.
충북 영동 당재터널은 사고가 난무한 최악, 최후의 구간이었다. 걸핏하면 천장이 무너지고 바위가 굴러 사람이 죽었다. 당재터널은 개통일로 예정됐던 1970년 7월 7일을 열흘 앞두고야 겨우 완공됐다.
전쟁을 벌이듯, 500년 동안 동맥경화를 앓던 한반도에 그렇게 길을 뚫었다. 정부도 미쳤고 시공사 현대건설도 미쳤고 투입된 모든 인력이 다 미친듯이 만든 미친 고속도로였다. 350년 전 대사성 김육, 그리고 200년 전 북학파 박지원이 꿨던 꿈이 그제야 이뤄졌다. 수레가 다녀야 하니까 길을 뚫었고 길을 뚫으니 더 많은 수레가 부(富)를 싣고 달리지 않는가. 대한민국이 바로 역사다

▲1970년 7월 7일 대구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직후 당재터널 근처에 건립된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에 참배한 당시 대통령 박정희 내외./조선일보db
2023;01.04
328. 대한제국 황제 고종 외국인 용병 고용 미수사건
“탐학한 정부가 외국 용병까지 고용해 멸망을 자초하는구나”

▲1907년 9월 14일 영국 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대한제국 황실 사진. 제목은 ‘한국에서 벌어진 쿠데타: 신구 황제’로 돼 있지만 이 사진은 1907년 6월 11일 당시 경운궁(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일본군 대포 진헌식 장면이다.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일본군은 이날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에게 속사포 4문과 기관포 2문을 진헌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러일전쟁(1904)까지 고종은 끝없이 외국 공사관으로 파천을 시도했다. 1896년 아관파천은 여덟 차례 시도 가운데 유일한 성공작이었다. 고종은 허약해진 군사력을 파천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심지어 대한제국 설립 후 외국인 용병 30명을 극비리에 고용했다가 여론에 밀려 취소하기도 했다. 일신 안녕을 위해 보낸 세월은 결국 총 한 방 쏘지 못한 망국으로 귀결됐다./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여덟 번 도망가려던 군주
을미사변 넉 달 뒤인 1896년 2월 11일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타국 영역으로 달아나려던 시도는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갑신정변 한 달 전인 1884년 11월 2일 고종은 “공식 의뢰가 있으면 공사관은 물론 일본으로 피하도록 돕겠다”는 일본변리공사 다케조에 제의에 “명심해서 잊지 않겠다”고 화답한 적도 있었다.(1884년 11월 9일 ‘다케조에 공사 내신’, 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김종학 역, 일조각, 2013, p819, 재인용. 김옥균, ‘갑신일록’)
고종은 ‘잊지 않았다.’ 이후 청일전쟁(1894)과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같은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 고종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공사관 문을 두드렸다. 모두 8회에 걸친 공사관 도피, 팔관파천(八館播遷) 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파천이 아관파천이다. 한 나라가 그 나라 원수의 안녕을 보장하지 못할 지경으로 지속적으로 군사와 안보가 엉망진창이었고 정치가 난장판이었다는 뜻이다. 가만히 있는 나라가 혼자서 추락할 리 만무하다. 안보를 맡아야 할 지방군사를 궁궐 친위대로 만든 사람이 고종이었고 여흥 민씨 척족과 함께 나라와 백성 곳간을 거덜낸 주체도 고종이었다. 허약한 군사력과 치안력은 그 고종으로 하여금 변고가 있을 때마다 외국, 외국인을 찾게 만들었다. 오늘은 그가 시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매몰차고 거친 저항을 받고 없던 일이 돼버린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외국 용병 고용 미수 사건’ 이야기다.
‘밀덕’ 고종, “쏜 적 없으니 압수는 좀...”
‘밀덕’은 ‘밀리터리 덕후’를 줄인 말이다. 군사 혹은 무기 애호가를 뜻하는 신조어다. 고종은 밀덕이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을 때 일본은 개틀링 기관포 1문과 탄약 2000발을 선물했다. 개틀링은 분당 400발을 발사하는 속사 기관총이다. ‘탄알 수를 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한다’는 전권대신 신헌의 보고에(1876년 2월 6일 ‘승정원일기’) 고종은 이후 세월을 두고 개틀링포를 수입했다. 188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 선교사 길모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국왕은 개틀링포를 몇 문 구입하고 이 포를 수시로 훈련에 투입했다. 개틀링포 사격 소리를 왕이 즐겼기 때문이다.’(G. 길모어, ‘Korea From Its Capital’,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92, p235) 외국인 눈에 고종이 군사력에 매달린 이유는 국방이 아니었다. ‘즐겼다’는 단어에 많은 역사적 의미가 숨어 있다.
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인 시위대 500명이 격전을 벌였다. 독일제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조선 제일인 평양군으로 구성돼 있었다. 싸우겠다는 사기도 충만했다.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오전 5시 30분쯤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1894년 음6월 21일 ‘고종실록’) 투항하라는 것이다. 그 어명에 시위대는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황현, ‘매천야록’2 1894년③ 14.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국사편찬위) 일본군은 개틀링포 8문과 크루프 기관포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고종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그 무기들은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p64~65, 재인용) 이듬해 서울을 방문했던 러시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목조 헛간에는 개틀링 기관총 10문과 7.5cm 구경 크루프 포 6문이 망가진 채 뒹굴고 있었다. 남의 나라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산하게 망가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카르네프 외 4인, ‘내가 본 조선, 조선인’(1896), 가야넷, 2003, p106) 수집한 무기와 위기에 빠진 나라 사이에서 그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1907년 6월 11일 당시 경운궁(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일본군 대포 진헌식 장면.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일본군은 이날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에게 속사포 4문과 기관포 2문을 진헌했다./‘日本之朝鮮’(1910)
아관파천과 러시아 궁궐수비대 200명
1895년 10월 8일 왕비 민씨가 일본인이 주도한 암살단에게 살해됐다. 넉 달 뒤 1896년 2월 11일 남편 고종은 경복궁에서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무기고에는 대량살상무기 개틀링포가 쌓여 있는데 이를 사용할 군사가 전무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월 9일 고종은 중추원 1등의관(一等議官)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1896년 3월 11일 ‘고종실록’) 4월 1일 제물포에서 러시아 군함 그레먀치 호에 오른 일행은 여섯 달이 지난 10월 21일 궁궐에 복귀했다.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겠다는 큰 그림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고종이 내린 미션은 고종다웠다.
6월 5일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외부대신 로바노프를 만났다. 황제 알현을 신청한 뒤 민영환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5개조 밀지를 공개했다. 첫 두 개 조가 이러했다. ‘국왕 보호를 위한 경비병 제공’ ‘군사교관 제공’. 각종 고문관과 전문가 및 대일부채 청산용 차관 300만엔 제공도 있었다. 이미 5개조 요구사항은 다른 경로를 통해 로바노프에게 전달된 상태였지만, 로바노프는 마치 처음 들은 듯이 “서면으로 제출해달라”고 답했다. 민영환이 재촉했다. “우리 왕후가 친러파라 죽음을 맞았다. 러시아는 조선이 도움을 바라는 유일한 나라다.”
다음날 민영환은 황제를 알현하고 ‘외부대신에게 읽은 메모를 그대로 두 번 반복했다’.(‘윤치호일기’)
6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로바노프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궁궐 주둔 병력 200명’이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덧붙였다. 로바노프는 “다른 나라와 마찰이 생긴다”고 거부했다. 화답을 받지 못한 민영환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사흘 뒤인 6월 16일 러시아 외부(外部)를 방문한 민영환은 주무관인 백작 카파니스트에게 “다섯 가지 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비병”이라고 강조했다. 카파니스트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대답했다. 민영환이 재차 물었다. “그러면 유사시 러시아공사관 경비병이 궁궐 진입을 할 수 있는가?” “약속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군 왕궁 주둔에 반대했다. 왜 러시아가 그걸 해야 하지?”(이상 1896년 6월 5일, 6일, 13일, 16일 ‘윤치호일기’, 민영환, ‘해천추범’(1896))
시종일관, 황제부터 실무 관리까지 조선국 전권대사가 요구한 사항은 “우리 궁궐에 귀국 병사를 주둔시켜달라”였다. 오로지 국왕 개인 신변 보호가 전권대사가 받은 미션이었을 뿐, 1880년대 내내 청나라 군사가 한성에 주둔할 때, 1894년 일본군이 궁궐을 공격했을 때 나라가 겪었던 참담한 경험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요구는 거부됐다. 대신 러시아는 귀국하는 민영환에게 참모본부 육군대좌 푸차타, 군의관 체르빈스키를 포함한 고문단 13명을 딸려보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3.기밀본성왕래1,2 (60) 러시아 육군무관 내한 건, 1896년 10월 31일) 200명 대 13명. 외국에 기대려만 했을 뿐, 고종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조선을 관찰하는 러시아 제국을 전혀 읽지 못했다.

▲1907년 6월 11일 돈덕전 일본군 대포 진헌식을 관람 중인 고종 가족. 왼쪽에서 둘째가 영친왕 이은, 오른쪽에서 둘째가 고종, 그 왼쪽이 순종 이척이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실질적으로 사라졌지만 황제는 웃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환궁, 제국 선포 그리고 군사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파천을 끝내고 조선 땅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1898년 3월 방한했던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철수했다. 그해 6월 광무제 고종은 본인은 대원수, 황태자 이척은 원수로 육해군을 총괄한다고 선언했다. 1899년 6월에는 황제가 군권을 행사하는 조직 원수부를 창설하고 ‘원수부관제’를 발표해 이를 입법화했다. 실질적으로 궁궐을 경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원수부 청사는 현 덕수궁 대한문 오른쪽 매표소 부근에 있었다.
그렇게 제국 선포 후 군사력 강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느닷없이 고종이 극비리에 외국인 용병부대를 창설해 국왕 경호병으로 삼겠다는 계획이 폭로된 것이다.
용병 고용 미수사건
‘황제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궁궐경호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미국인 고문 그레이트하우스가 상해에서 고용한 무직자들이 도착했다. 워낙 서둘러서 몇몇을 제외하면 엘리트가 없다. 서로 다른 5개국 용병 규율을 잡으려면 강건한 인물이 필요한데, 황제 대리인인 그레이트하우스는 그런 장교급을 찾지 못했다. 경호대는 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프랑스인 5명, 독일인 5명, 러시아인 2명이다. 지휘관이 될 만한 사람은 없다.’(한국근대사자료집성18 ‘프랑스외무부문서’8 129.황제의 외국인 친위대 구성 계획 추진 보고, 1898년 9월 20일)
이미 황제 용병 고용 소문을 취재중이던 ‘독립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법부 고문관 그레이트하우스가 궁내부 장봉환과 함께 상해에서 구미 각국 30인을 고빙해 황실을 보호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정부와 순사와 군사들은 무엇을 하는가. 대한(大韓)은 전국이 모두 사람 없는 지경으로 정부에서 자처하니 이런 수치와 욕이 어디 있으리오.’(1898년 9월 20일 ‘독립신문’)
이승만이 주필로 일하던 ‘제국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 사람을 청하여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로 어디 있으리오. 탐학만 주장삼아 다 잡아먹었으니, 이제 멸망하기를 자초하는구나. 결단코 시행이 못 되도록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다.’(1898년 9월 19일 ‘제국신문’) ‘독립신문’ 영문판은 ‘치외법권을 보유한 외국 용병부대는 대한제국 정부가 관리 불가능하며, 결국 황민이 황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9월 14일 그레이트하우스, 장봉환, 주석면 3명과 함께 상해에서 제물포로 들어온 용병은 모두 30명이었다. 이는 러시아 고문단 철수를 핑계로 황제 환심을 사려는 일부 인사들이 고종에게 허가를 받은 계획이었다. 비밀계획이 상해 현지에서 들통이 나자 고종은 상해에 망명 중이던 민영익을 통해 계획 취소를 통보했다. 하지만 용병은 예정대로 제물포에 도착했고, 각국 공사관과 언론 안테나에 걸린 것이다. 이를 취재하는 ‘독립신문’ 기자에게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외부대신 박제순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위 날짜 ‘독립신문’)
독립협회와 각국 공사관의 거친 항의에 고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장봉환 무리가 짐을 팔아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12, 10.기밀본성왕신 (33)30명의 고용 외국인 순사 배척의 건, 1898년 10월 5일) 프랑스 기록에는 ‘딱 잡아떼는 버릇대로’라고 덧붙어 있다.
결국 열흘을 서울에서 빈둥대던 용병들은 10개월치 봉급 2만1000원과 체류시 봉급 4200원 따위를 합쳐 총 3만원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받고 9월 26일 제물포를 떠났다. 참고로 1898년도 대한제국 세출예산은 452만5530원으로, 용병들이 받아간 돈은 제국 예산의 0.66%였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아관파천 중인 1897년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에 상복을 입고 공사관 현관에 나와 아들 이척(가운데),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서 있는 모습. 일본을 피해 숨어든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이 보인 풍경이다.
수시로 외국 공관을 기웃거리고, 대사를 보내 궁궐 주둔병을 요청한 군주였다. 황제가 된 그가 벌인 일이 용병 고용이었고, 이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책임 전가였다. 겉으로는 군을 통솔하는 대원수 시스템을 만들면서 뒤로는 용병을 찾던 군주, 고종이었다. 그 고종을 미국인 최측근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평가했다.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다를 바 없이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축낸 지도자.’(F. 해링턴, ‘God, Mammon, and the Japanese: 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 위스콘신대 출판부, 1944, p326)
329. 조선 최고 국립학교장 성균관 대사성
성리학 국가 조선의 성균관 대사성 평균 임기는 석 달이었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는 중종 때 윤탁(尹倬)이라는 인물이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거대하게 서 있다. 그 앞에 성균관 강의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성리학 국가인 조선왕국 최고 교육기관인 이 성균관 관장 대사성(大司成)은 왕조 518년 동안 자그마치 2101명이었다. 평균 재임기간은 3개월. 사림이 득세하고 전국에 서원(書院) 설립이 시작된 중종 전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급감했다. 가장 대사성이 가장 자주 바뀐 시기는 정조 때로 재임기간은 평균 1.2개월이었다. 이때는 하루에 세 번 대사성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정조 다음으로 짧았던 때는 고종시대로 1.3개월이었다. /박종인 기자
소년 대사성 민영익
고종 왕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은 성균관 학생이던 1877년 음력 3월 5일 춘계 시험인 삼일제(三日製)를 무사히 치렀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이 시험에서 고모부인 고종은 민영익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이 사실을 그 조상인 민유중과 할아버지인 민치록과 아버지 민승호 사당에 제사해 알리라고 명했다.(1877년 음3월 5일 ‘고종실록’) ‘직부전시’는 중간 시험을 다 생략하고 곧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로 통과시키는 명이다. 그리고 1년 5개월이 지난 1878년 음력 8월 11일 민영익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때 나이는 만 18세. 소년등과에 이어 소년 대사성이 탄생한 것이다.

▲건국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성균관 대사성 재임기간은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 때 급감한 뒤 회복됐지만 사림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한 중종 이후 망국 때까지 계속 급감했다. *‘성균관대학교 육백년사(1398~1998)’(성균관대학교, 1998)에 수록된 ‘역대 대사성 및 성균관장 명단’을 참고로 작성했다. *순종 때는 성균관장 1명이 37개월 재임했으나 이 기간은 무의미해 그래프에서 생략했다.
518년 동안 대사성 2101명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명이 아니다. 이천백한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조선왕국에서 성균관은 국가가 설립한 최고 성리학 교육 및 인력 충원 기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오는 것인가. 성리학을 위해 명예와 책임을 과연 다할 수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이 글에 나오는 숫자들은 ‘성균관대학교 육백년사-人’(성균관대학교, 1998)의 ‘역대 대사성 및 성균관장 명단’을 근거로 분석했다.
1395년 조선, 성균관을 만들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성 천도 이듬해인 1395년 성리학 교육기관인 성균관 공사를 시작했다. 3년 뒤 완공된 성균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明人倫 成人才·명인륜 성인재).’(정도전, ‘조선경국전’ 上 예전)

▲성균관 명륜당 입구에 걸려 있는 ‘閒人勿入(한인물입)’ 팻말. ‘잡인 출입 금지’라는 뜻이다. 성균관은 성리학 국가인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에는 공자를 위시한 역대 중국 성인을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이 설치됐다. 현재 명륜당에 걸려 있는 ‘明倫堂’ 현판은 1606년 선조 때 파견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실내에 걸린 또 다른 ‘明倫堂’ 현판은 성리학 창시자 주희(朱熹)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 A부터 Z까지 명륜당 교육 과목은 일관되게 성리학이었다.
한성 천도 전인 1392년 첫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사람은 유경(劉敬)이다. 1392년 음8월 20일에 임명돼 1395년까지 3년 동안 성균관 기틀을 닦았다. 유경은 고려 성균관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좨주(祭酒)로 일했다. 조선 성균관은 고려 학제를 이어받은 학교였다.
학문의 최고 수장, 대사성
성균관은 성리학을 교육받은 학생들이 과거를 통해 공무원으로 진출하도록 하는 인력 양성 기관이었다. 그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은 법적으로 ‘유학(儒學)의 교육에 관한 일을 관장하도록’ 규정됐다. 법정 임기는 없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성균관’) 대사성을 임명하는 기준은 대체로 ‘경학에 정통하고’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학문과 인격과 연령이 고려됐다.(정낙찬,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의 자격 및 자질, 임명, 임기, 대우’, 인문연구 제17권 제1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5) 천거를 받고도 학문이 부족하고 덕망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한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일단 임명되면 대사성은 장기간 성균관을 책임졌다.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세종은 1418년 9월부터 1450년 3월까지 재임했는데, 윤달을 포함해 이 390개월 동안 대사성에 뽑힌 사람은 14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27.9개월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사육신이 속한 집현전을 폐지시켰던 세조 때 대사성 임기는 8.2개월로 급감했다. 하지만 그 손자 성종 때는 12.9개월로 회복됐다.
폭군 연산군 때도 143개월 동안 대사성은 8명으로 평균 17.9개월을 근무했다. 물론 성균관이 활쏘기 경연장과 기생파티장이 되었고(1504년 8월 17일 ‘연산군일기’), 대사성은 이를 떨면서 구경해야 했지만.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고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명예의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 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이었다.
도살장 혹은 공무원입시학원, 성균관
‘하인들이 동서재(東西齋) 근처에서 항시 소를 도살하고 있었는데 이달 12일에 말가죽과 소뼈 등을 찾아내게 되었다고 했다. 학궁(學宮·성균관)이 도살장이 됐으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운 일이다.’(1542년 1월 19일 ‘중종실록’)
때는 폭군을 끌어내리고 왕족 이역(李懌)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한 사림(士林) 시대, 중종 때였다. 중종은 반정 당일에도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왕비 신씨의 폐위와 복위의 본말’) 왕위에 오른 뒤 실질적인 권력은 사림 반정 세력에게 있었다. 연산군 때 ‘도의(道義)’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1470년 11월 8일 ‘성종실록’) 그 무늬만 학교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개국 초 조선왕조 야심작 성균관은 그렇게 조락했고,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육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1543년 사립학교 ‘서원(書院)’ 탄생
도살장 보고 이듬해인 1543년 어느 날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남송 때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뜬 최초의 서원이다. 선비 교육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지역 사림으로 바뀌었다. 서원에서 유교 교육과 선현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주요 서원이 설립되면 왕이 이름을 내리는 ‘사액(賜額)’을 통해 권위를 씌워줬다. 부진 일로를 걷고 있던 관학을 복구하느니 서원을 독려하는 편이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다.(최완기, ‘조선 서원 일고’, 역사교육 18, 역사교육연구회, 1975) 성균관 대사성이 수행하던 ‘명예와 책임’을 서원에서 집단으로 수행하게 된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은 그저 명예직 혹은 국왕 하사품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발에 채는 숫자, 대사성
중종 때 7.5개월이던 대사성 임기는 선조 때 5.1개월로 줄었다. 사림 가운데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 때도 5.1개월이었다. 효종 때 서인 세력은 아예 대사성보다 권위에서 앞서는 ‘좨주(祭酒)’라는 직제를 만들어 서인만을 천거해 임용했다. 첫 번째 좨주는 서인 태두 송준길, 두 번째 좨주는 또 다른 태두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두 송(宋)씨와 그 후손은 모두 8명이었다.(정구선, ‘조선후기 천거제와 산림의 정계 진출’, 국사관논총43, 국사편찬위원회, 1993)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 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제대로 된 교육을 표방한 서원이 그만큼 폐해가 많았다.
대사성 권위 또한 자유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평균 임기는 2.7개월이었다. 탕평책을 통해 각 당을 견제하던 영조 때는 637개월 동안 272명, 평균 임기 2.3개월이었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만 갈래 강을 비추는 밝은 달의 늙은 주인)’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1787년 11월 4일 ‘정조실록’) 성균관 교육은 당연히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대사성 직임은 매우 중요하다”고 왕에게 보고하면서도 왜 이렇게 비정상적인 인사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매우 드문드문 몇 곳만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도 없다.(장재천, ‘정조 때의 성균관 대사성 교체 논고’, 한국사상과 문화 82권0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16년)
성균관보다 역사가 긴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808년 동안 총장 145명이 5.6년씩 재임했다.(‘British History Online’) 799년 역사 옥스퍼드대 총장은 187명으로 임기는 평균 4.3년이었다.(‘British History Online’) 1637년에 설립된 미국 하버드대는 386년 동안 총장이 30명이었고 평균 임기는 13년이었다.(하버드대 홈페이지, ‘History of the Presidency’) 1644년 순치제부터 1799년 건륭제까지 155년 동안 조선 성균관 대사성과 같은 청나라 국자감 한족 좨주는 64명이었다. 평균 임기는 2.4년이었다. 청나라 국자감은 만주족과 한족 좨주가 동시에 임명됐다.(중국위키피디아, ‘청조국자감좨주(淸朝國子監祭酒)’)
고종 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종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27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털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정덕희, ‘조선시대 성균관 대사성의 출신배경 실태’, 조선시대사학보 45권0호, 조선시대사학회, 2008)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성리학 국가요 선비의 나라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대사성 이야기 같은가.

▲역대 국왕별 성균관 대사성 인원 및 재임기간. * 왕 재위 개월은 윤달을 포함했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실록 부실로 차이가 있다.
330. 동학농민전쟁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의 일생
농민을 분노하게 한 조병갑, 공주 山中에 잠들어 있다

▲충남 공주시 신풍면 한 산속에 있는 조병갑 무덤. 1894년 동학농민전쟁 후 조병갑은 고향인 산 너머 예산 대흥면으로 숨었다가 이곳 신풍면에서 생을 마쳤다.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묘가 있다. 두 사람 묘가 있는 이 능선 전체는 지금도 그 후손 소유다. 동학란이 진압되면서 조병갑은 전남 고금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음력 7월 다른 동학 관련 탐관오리 278명과 함께 사면되고 이후 법부 민사국장, 한성재판소 재판관, 황실 비서원 주임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조규순 공덕비 비각을 만들며 돈을 착복한 행위는 개인적인 비리였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을 촉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하나가 망국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정읍에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과 조규순 공덕비, 그리고 공주 산기슭 상석도 비석도 없는 조병갑 무덤이 129년 전 흑역사를 보여준다./박종인 기자
역사 흐름을 바꾼 탐관오리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趙秉甲)은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관리였다. 얼마나 탐욕스럽고 더러웠나. 탐관오리들로 인해 조선팔도에 민란이 들끓던 그때, 고종도 “조병갑이 형편없이 수령 노릇을 했다’(1894년 음4월 24일(이하 음력) ‘고종실록’)고 힐난하고 그가 저지른 일을 조사한 현지 조사관이 “이전에 듣지 못한 일[事未前聞·사미전문]”(1894년 7월 17일 ‘고종실록’)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조병갑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 흐름을 역류시킨 사람이다. 조선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따진다면 이 조병갑을 능가할 개인이 없다. 그저 개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만석보를 만들고 아비 공덕비 비각을 세웠다. 물세를 뜯고 비각 건축비를 착취했다. 착취당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그 죽창을 꺾기 위해 정부에서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외국군끼리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전쟁 결과 조선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간 역사를 조병갑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조병갑이 충남 공주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무덤도 있다. 동진강에는 만석보 흔적이 남아 있다. 옛 고부 땅에는 조규순 선정비가 여태 서 있다. 그리고 역사 흐름을 바꾼 장본인, 조병갑이 저기 잠들어 있다.
동학의 시작, 1893년 최제우 신원
1800년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하고 죽었다. 김조순 사위이자 23대 국왕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왕실 외척이 국정을 농단한 소년왕(少年王) 시대를 세도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정은 농단당하고, 그 와중에 400년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물 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얌전하던 조선 백성이 죽창을 들기 시작한 민란 시대이기도 했다.
1893년 3월 충북 보은에 동학교도 수만명이 집합했다. 1864년 처형당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급파해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민원을 접수했다. 그해 11월 어윤중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조병식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이후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하였다.’(1893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 ‘조병식 탐학 장계’) ‘공주 백성 오덕근’을 비롯해 땅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간음했다’고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한겨울에 집과 땅을 차지했다. 아산 백성 김상준은 관아로 끌고와 죄를 자백하라며 주리를 틀었다. 자백할 죄도, 돈도 없던 김상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조병식에게 돈을 뜯긴 사람들 명단과 액수가 워낙 많아서 보고서에는 부록이 따로 붙어 있었다.
이 조병식은 이듬해 7월 15일 충남 면천에 구금된 뒤 19일 의정부 요청에 의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30일 고종은 조병식 석방을 명했다. 9월 23일 고종은 조병식을 사면하고 관직에 복귀시키라고 명했다.(이상 해당 날짜 ‘고종실록’)
그리고 4개월 뒤 전라도 고부에서 또다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병식 4촌(8촌이라고도 한다) 동생,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였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고종정권 ‘빽’
1892년 4월 28일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마치 양떼목장에 들어온 늑대처럼 악행을 즐겼다. 악행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 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조병갑은 익산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 24일 신임 고부군수 이은용이 황해도 안악군수로 발령이 되더니 1894년 1월 2일까지 신좌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계속 신임 고부군수가 바뀌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일곱명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조(吏曹)에서는 “조병갑이 세금 징수에 문제가 많았지만 새로 군수를 뽑으면 일을 더 못하리라 본다”며 익산으로 갈 조병갑을 고부에 눌러 앉혔다.(1893년 11월 30일~1894년 1월 9일 ‘승정원일기’)
왜 일곱명이나 후임이 갈려나가고, 왜 조병갑이 명령에 불복하고 자리를 지켰는지 이 난해한 인사 대행진에 힌트가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된 뒤 전라관찰사 김문현이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의정부 정승들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칭찬한다고 연임시키더니[始也褒仍·시야포잉] 지금은 잡아오겠다고?’(1894년 2월 15일 ‘고종실록’) 관찰사 ‘빽’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앙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고부군수 부임 직전인 1892년 4월 영동현감이던 조병갑은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전임됐다. 그 무렵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관직) 외에는 나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민비 편지, ‘고궁 1178′) 일단 다른 직책에 임명한 뒤 상황을 보겠다는 뜻이다. 조병갑은 기기국 위원 재임 19일 만인 4월 28일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고부군수 조병갑’ 뒤에 고종-민씨 척족 세력의 강력한 ‘빽’이 작용했다는 증거다.

▲전북 정읍 동진강 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 조병갑은 기존에 있는 보(洑)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만들고 물세를 징수해 농민 분노를 촉발했다./박종인 기자
역사적인 악행, 만석보와 공덕비
이러구러한 경로로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을 이끌었던 전봉준에 따르면, 조병갑이 군수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는 이러했다.
‘첫째, 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 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民洑) 아래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 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 부자들에게 불효, 음행 따위 죄목으로 걷어낸 돈이 2만 냥이 넘고 다섯째, 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천냥을 뜯고 여섯째, 나라 세금 낸다고 고급 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은 횡령한 죄.’(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 1895년 2월 9일 ‘전봉준 공초’, ‘초초문목(初招問目)’) 전봉준은 이 모두를 “수령이 홀로 행했다”고 답했다.
여러 죄상 가운데 만석보가 가장 컸다. 고부에 흐르는 동진강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아 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조병갑이 민력을 강제 동원하고 남의 산 소나무를 강제로 징발해 또 둑을 쌓고 물세를 신설해 챙겼다는 것이다. 악행은 부임하자마자 ‘처음부터 행했고’, 그 모든 악행 이득을 ‘혼자서 다 챙겼다’는 것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 농민이 죽창을 들었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동학군은 고부관아 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다. 그리고 1월 17일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했다.(국사편찬위,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정읍 피향정에 있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 조병갑은 이 선정비 비각 건축비를 주민에게 뜯어내며 자기 배를 채웠다. 일개 지방 탐관오리에게는 개인 비리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이후 조선 근대사 흐름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박종인 기자
되돌리지 못한 흐름
동진강은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한번 역류를 시작한 역사는 되돌리지 못했다. 2월 15일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 탄압으로 일관했다. 농민 반란은 더욱 확대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황토현에서 동학군에 패한 관군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원병 요청을 건의했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인 민영휘와 함께 국내 주둔 중이던 청군사령관 원세개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공식 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조선 파병은 공동으로 한다’는 1885년 ‘천진조약’ 조항을 내밀고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작전에 궤멸됐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 종전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1조에 일본은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 개인 비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일개 관리 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충남 공주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 있는 아버지 조규순 부부묘. 비석은 1970년 후손이 세웠다./박종인 기자
조병갑의 평화로운 말로
실록에 따르면 조병갑은 1894년 5월 4일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12일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고종에게 조병갑 재수사를 요청하고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음력 5월 4일 고종은 개혁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고 선언했다.(‘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 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그리고 음력 7월 3일 동학과 관련돼 유배형을 받은 인물 279명이 일괄 석방됐다. 그 가운데 민영휘,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같은 척족 여흥 민씨들이 있었고 동학의 먼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동학을 폭발시킨 집안 동생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6개월 뒤인 7월 2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고공판이 있었다. 최시형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 배석판사 2명 가운데 한 명이 조병갑이었다. 1904년 6월 20일 조병갑은 황실 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에 임명됐다.(같은 날 ‘황성신문’) 1907년 현재 조병갑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충청도 청양에 살았다.(1907년 7월 3일 ‘황성신문’) 청양 북쪽 예산 대흥면은 양주 조씨 집성촌이다. 조병갑 숙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 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대흥향토지편찬위원회, ‘대흥향토지’, 2017, p527)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85년에 죽었는데, 부인 이씨와 함께 산 너머 공주 신풍면 사랑골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조규순 묘비석’) 1970년 그 후손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공식 기록에서 종적이 끊긴 조병갑은 바로 그 아버지 옆 능선에 묻혀 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물(石物) 하나 없지만 땅은 양지바르다. 두 무덤이 있는 산기슭과 마을 앞쪽 임야는 모두 양주 조씨 조규순 후손 명의로 등기돼 있다. 주인을 알리는 석물은 없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해마다 봄이면 답사 단체가 무덤을 찾는다. 평화롭게, 근대사 물줄기를 바꾼 관리 하나가 그렇게 잠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