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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전쟁 이야기2/ 미·소 곡물전쟁으로 본 미·중 무역전쟁 - 중국과 전쟁하면 승리한다 -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법 - 저격수 이야기 - 38선 분단, 6·25 발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 목..

상림은내고향 2023. 1. 3. 17:50

사진으로 보는 전쟁 이야기2/

◆미·소 곡물전쟁으로 본 미·중 무역전쟁 

2018.09.03 주간조선 2524 

◇美 발칵 뒤집은 ‘곡물 대탈취 사건’의 교훈

1973년 미·소 정상회담 중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미 닉슨 대통령(오른쪽)과 소련의 브레즈네프photo The Indipendent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거의 자존심을 건 치킨게임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마저 피해를 입지 않을지 우려될 정도다.
   
   미·중의 대두(메주콩)를 비롯한 곡물 관련 분쟁을 보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곡물 대탈취 사건’(Great Grain Robbery, 혹은 소련발 곡물파동)이 떠올랐다. 1972년 벌어졌던 이 사건은 1855년 영국에서 일어난 금괴 탈취 사건인 ‘그레이트 트레인 로버리(Great Train Robbery)’에서 이름을 따온 사건이다. 사건 전개는 지금의 미·중 무역전쟁과는 분명 다르지만 미·소 두 나라 사이의 분쟁으로 세계가 분란에 휘말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곡물 대탈취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개요는 다음과 같다. 당시 사상 최악의 가뭄과 냉해로 곡물 작황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른 소련은 1972 7 1000t의 밀과 옥수수를 미국으로부터 저가에 일시에 사들였다. 더군다나 미국이 제공하는 자금을 이용해서 말이다. 당시 소련이 곡물을 사들이는 데 쓴 금액은 총 7억달러, 사들인 양은 미국의 1971년 곡물 전체 수출량보다 더 많았다. 미국 1년 곡물 생산의 30%, 미국 내 1년 소비량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수량이었다.
   
   냉전의 최정점에서 적국인 소련 정부기관과 미국 소재 곡물 메이저들 사이에 그런 계약이 맺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는 사전에 전혀 몰랐다. 곡물 메이저들이 계약을 맺은 뒤 시카고 곡물시장 가격이 갑자기 요동을 치고 나서야 미국 정부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다. 이 사태 직후 세계 곡물 가격은 걷잡을 수 없이 올랐다. 대두의 경우 부셸(28) 3.31달러였던 가격이 10개월 뒤에는 거의 4배인 12.90달러로 올랐을 정도로 폐해가 컸다. 결국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1년 뒤에는 전 세계 소비자 식료품 가격이 50% 정도 올랐고 시카고 곡물 시장 가격도 12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973년과 1975년 사이 미국발 전 세계 불황이 이 사건 때문에 생겼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세계인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치고는 실상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두 가격 10개월 만에 4배 폭등 

이 곡물 대탈취 사건은 인공위성을 우주로 먼저 쏘아 올린 1957년 ‘스푸트닉 사건’과 미국 코앞인 쿠바에 원자폭탄 미사일을 배치한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와 함께 소련이 미국의 뒤통수를 친 3대 사건 중 하나라고 일컫는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미국 정부는 펄펄 뛰면서 일정 이상 수량의 곡물 수출 계약은 사전에 농무부와 협약을 해야 한다는 둥 대책을 마련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당시에만 몰랐을 뿐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은 미국이 소련에 마당을 만들어주면서 생긴 일이었다. 1972 5 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의 역사적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감축 말고도 곡물거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닉슨은 작황이 나빠져 미국의 곡물이 없으면 도저히 나라살림을 꾸려 갈 수 없던 소련을 곡물을 이용해 길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곡물 수출에 합의했다. 닉슨은 곡물을 이용하면 소련을 우방은 아니더라도 최소 협력자(partner) 정도로 만들 수 있다고 봤다.
   
   소련이 식량문제로 미국에 멱살이 잡힌 원인은 농업정책과 사회구조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서였다. 소련은 10월 볼셰비키혁명 이전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곡물 수출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혁명 직후인 1920년부터 집단농장화가 실시되면서 작황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소련이 곡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뀐 데는 보통 농업정책의 처참한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월급이 나오는 제도하에서 누구도 굳이 일을 하려 않는 사회구조가 더 큰 원인이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거의 10년간 소련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상사 주재원으로, 나중에는 무역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소련의 실상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 당시 소련의 상황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예컨대 추수철이 되면 소련 언론에는 군인과 학생들이 농장에서 추수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농장은 생산만 하면 그만이었다. 법에 의하면 비가 오면 농민들은 추수를 하러 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됐다. 소련에는 가을철에 유난히 비가 많이 온다. 곡식이 그냥 밭에서 썩어가자 답답한 소련 정부는 군인이나 학생들을 동원했다. 하지만 추수된 곡식도 운반과정에서 다시 썩었고(운송회사는 물리적으로 장소만 옮겨주면 되고 운송 중 곡식 부패 여부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운반된 곡식 역시 도시 인근 보관창고에서 썩었다. 연간 3000t의 밀이 이렇게 없어졌으니 곡식은 물론 채소 등이 근본적으로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비해 2배나 큰 경작지에 6배나 많은 농부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미국의 2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뒤통수 맞은 미국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곡물거래 합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미·소 양측의 이해가 절묘한 시점에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미국은 오일쇼크로 사상 최초의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어서 곡물 수출이 절실했다. 그래서 모스크바 정상회담 전에 국내 곡물가보다 낮은 수출가를 농민들에게 보상해주는 계획이 이미 세워졌었다. 1972 5월 정상회담에 앞서 4월 미국 농무장관 얼 부츠가 모스크바를 먼저 방문해 모든 협의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곡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방문에서 돌아온 닉슨은 1972 7 8일 향후 3년간 러시아로 75000만달러어치의 곡물을 수출한다는 예산안에 서명했다. 재선에 도움이 되는 농부들을 기쁘게 해서 정권을 제대로 안정시키겠다는 정치적인 수였다. 이 덕분인지 닉슨은 1972 11월 재선 투표에서 49개 주에서 승리하면서 압승했다. 소련으로서도 닉슨의 이런 정치적 상황을 이용한 셈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미·소 양국 누구도 손해 나는 일이 없는 거래인 듯싶었다.
   
   그런데 소련이 미국의 뒤통수를 치는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소련은 닉슨이 서명을 하자마자 닉슨이 허용한 7억달러 전액을 한꺼번에 내지르는 곡물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정부 간 거래가 아닌 중개인을 이용한 곡물메이저와의 계약이었다. 향후 3년에 걸쳐 사용되어야 할 금액을 한꺼번에, 그것도 비밀리에 지불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협약에는 돈을 일시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한조건이 없었기에 사실 미국 정부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양측 전문가들이 따지고 또 따졌을 엄청난 금액의 협약에 사용기간 제한조건이 빠진 건 실수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해서 미국의 의도적인 방조 혹은 소련과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사실 계약금액은 7억달러라고 해도 실제 미국 농민들의 수입은 10억달러였다. 1922년에 제정된 농장 수입 안정화 제도에 따라 국내가와의 차이 3억달러를 정부가 보전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국제가에서 할인된 가격에 곡물을 수입하여 이듬해를 대비한 곡물 비축을 했고 위성국이던 동구권에 곡물 원조를 하는 선심도 썼다. 결국 미국의 야당과 언론이 난리를 쳤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은 이행됐고, 미국 농무장관도 자리를 지켰다. 사건은 누구도 손해 나지 않고 처벌받지도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 정부 어느 쪽이 곡물거래 합의 성사에 더 열을 올렸는지도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 여기저기가 의문 투성이다. 인터넷에 ‘Great Grain Robbery’라고 치면 자료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미국 감사원이 조사해서 감사원장 이름으로 미국 상·하원에 보고한 보고서도 있다. 또 당시 곡물중개상과 곡물메이저 회사 직원 이름까지 들먹이며 그럴듯하게 사건을 설명하는 미국 유수 언론의 소설 같은 기사까지 별별 내용들이 다 있다. 그런데 그런 자료를 살펴보면 가장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이 어떻게 소련이 미국 연 생산량의 30%, 미국 내 소비량의 80%에 해당하는 엄청난 곡물을 시장을 폭등시키지 않고 구입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그것도 감사원 보고서에 나오듯이 ‘할인된 가격(discounted price)’으로, ‘수개월에 걸쳐서’ 말이다.   


   군사작전하듯 곡물 매입

   필자는 이런 의문을 풀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들은 적이 있다. 과거 필자가 다니던 한국 회사는 대규모의 소련산 원자재를 레닌그라드 경매시장으로부터 구매하고 있었다. 많이 살 때는 경매시장에 올라오는 전체 물량의 50% 이상을 구매할 때도 있어서 한·소 수교가 맺어지기 전에도 소련 출입국 시 항상 VIP 대접을 받았었다. 그런데 필자는 영국에 주재하던 소련 상무대표부 플레트뇨프 대표와도 과거 알고 지냈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이 날 때 미국에 주재하던 소련 상무대표부 대표여서 역사적인 구매의 당사자로 작전을 직접 기획, 지휘했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 이후 미국의 미움을 사서 영구 입국 거부 인물이 되었다. 그가 필자에게 국가기밀과도 같은 얘기를 사석에서 털어놓은 건 사건이 벌어진 지 거의 30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는 이미 소련이 해체된 후였고 필자는 파트너로 있던 소련 최초의 민간스포츠 에이전트 회사의 고문으로 있을 때였다.
   
   플레트뇨프의 후일담에 따르면 사건은 이렇게 진행됐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 당시 갑자기 본부에서 모스크바로 빨리 들어오되 바로 소련으로 들어오지 말고 외국 몇 군데를 둘러서 오라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그는 외국 정부기관, 특히 미국 정부기관을 따돌리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3개국인가를 거쳐서 소련에 들어가보니 바로 곡물 대탈취 작전 지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구매팀을 7개 구성해 미국과 곡물 구입 계약을 하라는 지시였다. 요령은 7개 팀이 미국의 ‘7대 곡물 메이저(석유 메이저 7자매(Seven Sisters)와 같은 식의 별명)’와 동일한 시간에 방문 미팅을 잡아 각각 150t 구입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시였다. 사전에 시비가 걸릴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 계약서를 꼼꼼히 준비하고 중개상과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서 현장에서 바로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시도 포함돼 있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상대 계약 당사자, 즉 메이저 측이 협상장에서 못 나가게 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다른 메이저에게 비밀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비밀 유지를 해야 한다며 이유를 둘러대라는 지시도 따라붙었다.
   
   메이저 측으로 봐서는 150t 정도는 특별히 큰 물량이 아니어서 자기네들하고만 계약한다는 소련 측의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미·소 정부 간 거액의 곡물 거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계약을 했다. 메이저 회사들은 각각 계약을 마친 후 또 다른 물량을 확보하려고 시장 상황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시장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련이 자신들하고만 구매 계약을 한 줄 알았는데 다른 모든 메이저와도 같은 계약을 일시에 다른 장소에서 한,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소련이 곡물 구매를 왜 군사작전처럼 전광석화식으로 해치웠는지에 대해서도 플레트뇨프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소련 각 농장에 뿌려진 종자가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중앙에서 배분해 파종한 씨앗이 제대로 발아되지 않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곡물증산을 위해 육종에 전력을 기울인 끝에 신품종 종자를 전국에 분배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그때가 늦봄이었는데, 한창 작물이 자라 결실이 맺어지는 8월이 되어 이런 작물 상황이 외국에 알려지면 아무리 정보통제를 한다 해도 결국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음을 당시 소련 정부는 깨닫고 있었다. 5월 모스크바 정상회담 당시에는 소련 정부가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 마련에 허둥지둥할 때였다
   
   더군다나 1972년은 미국 농무부와 항공우주국(NASA), 그리고 CIA가 곡물메이저 후원 아래 소련 지상 정찰을 위한 랜드샛(LandSat) 위성을 본격 가동하기로 한 해였다. 숨길 것이 유별나게 많아진 소련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U2스파이 항공기를 띄워 소련 국토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 해독으로는 늦은 봄 들판의 곡식 상태까지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국 관세 폭탄으로 중국 측 보복관세 대상이 된 미국산 콩을 주로 생산하는 미네소타주의 콩 생산 농장의 농부가 시름에 잠겨 있다photo AP·뉴시스 

 

소련 외교와 국물작황의 함수 

   본래 소련의 외교정책은 곡물작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어왔다. 소련에 풍년이 들면 다음 해는 세상이 시끄럽고, 흉년이 들면 조용해진다는 말이 있었다. 풍년이 들면 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을 안 해도 되니 자신들 마음대로 공산 혁명수출 같은 외교정책을 펼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소련 곡물 수입의 78%에 이르는 1500t(2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곡물이 소련으로 수출되던 1979년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미·소 간의 사이가 가장 평온했던 냉전시절이었다.
   
   
곡물부족 때문에 미국에 멱살이 잡혀 큰소리를 못 치던 러시아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곡물수입국이 아니다. 러시아는 2000년 이후 미국과 1, 2위를 다투는 곡물 수출국가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크림반도 강제합병, 영국에서의 스파이 독극물 사건 등으로 구미 각국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이유 역시 독립국가로서 가장 중요한 식량의 자급자족을 넘어 초대형 곡물 수출국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작년 기준 세계 곡물거래량의 15.7%에 이르는 61억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미국에 이어 러시아도 58억달러어치(전 세계 거래량의14.8%)의 곡물을 수출한다. 2020년에는 미국을 따라잡아 1위에 오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단기간에 놀라운 곡물 증산에 성공한 이유는 러시아가 1990년대 후반 평소 ‘자본주의의 주구’라고 부르며 기피하던 곡물 메이저들에게 러시아 곡물 생산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직접 경영까지 허용한 적극적인 개방 정책 덕분이다.
   
   
거의 반 백년이 되어가는 미·소 간 곡물 대탈취 사건을 지금 들추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꿈 같은 이론을 국가 정책으로 도입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순수이론학자에 불과한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이 ‘각자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누린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였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감안하지 않은 이 이론을 끝까지 믿어 아집으로 밀어붙인 결과 소련 곡물 생산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는 공산주의 실험 실패로까지 이어졌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소련이 집단농장화를 강행하지 않았다면 곡물수입국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소련이라는 국가도 해체되지 않고 지금도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지금처럼 안하무인식의 무역전쟁을 벌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역사는 오늘도 많은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지 말아야 역사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중국과 전쟁하면 승리한다...베트남이 중국을 다루는 법

1979년 중월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해방군 노병.

 

1979 2 17일 쉬스요우(許世友)와 양더즈(楊得志) 장군이 지휘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병력이 중국과 베트남 국경 지대를 2개 방향에서 남하해 침공했다. 탱크도 200여대 동원됐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실전(實戰)에 나선 것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해 1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그만 친구가 말을 안 듣는다. 아무래도 엉덩이를 좀 때려줘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屁股了)


불과 엿새 전인 1978 12 25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은 베트남군은 1979 1 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고, 중국이 지원하는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국외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남의 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침공에 나서기 직전인 2 15, 중국은 1950년 체결된 소련과의 우호협력 조약을 폐기한다고 선포했다.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베이징(北京)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세기의 회담을 한 이후 국제정세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급변했다. 중국과 소련이 동맹관계를 청산하는가 하면, 마침내 사회주의 중국이 사회주의 베트남에 ‘교훈을 주기 위한 제한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침공을 받은 베트남은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캄보디아로 보냈던 병력의 주력부대를 빼고, 베트남 중부와 남부에 있던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급파했다.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은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경 근처의 몇 개 도시를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개전 후 27일 만인 3 16, 중국 인민해방군은 돌연 “베트남 수도 하노이로 통하는 관문을 열어놓았으며, 베트남을 벌주기 위한 임무는 이미 완수했으므로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선포했다. 중국군 당국은 이 전쟁에서 모두 62500명의 사상자와 550대의 군용차량, 115문의 포가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군은 공식 희생자 수 발표를 하지 않았다. 중국군 추정에 따르면 베트남군은 57000명의 사상자와 7만명의 민병이 희생됐다.


27일간의 전쟁이 끝난 후 중국과 베트남 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고 중국군이 나선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는데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주둔은 1989년까지 계속됐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중국이 “엉덩이를 때려주고 교훈을 주겠다”고 나선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온 세계가 알게 됐다. 중국이 투입한 병력도 당초 발표된 20만명이 아니라 정규군 9개 군단, 30개 사단의 60만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기갑부대도 탱크 수백 대 규모가 아니라 수천 대의 탱크와 장갑차가 투입됐다고 베트남 측은 주장하고 있다.


中越전쟁은 철저한 실패의 전쟁

1979년의 중국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대표적인 중국 지식인들의 블로그인 ‘철혈망(鐵血網)’은 2013년 “중월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중국이 철저히 실패한 전쟁은 아니었던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철혈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전쟁은 유혈의 정치요, 정치는 피가 흐르지 않는 전쟁이다. 1979년의 중월전쟁은 사회주의 중국과 사회주의 베트남이 벌인 전쟁으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미국이 보는 가운데 일으킨 전쟁이었다. 철저한 실패의 전쟁이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가르치기 위해 침공했다가 창피를 당한 경우는 190년 전 청나라 때도 있었다. 당시 베트남 왕인 완혜(阮惠·1753~1792) 1788 11 25일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광중(光中)이라 했다. 청의 건륭(乾隆)제는 당시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그때도 1979년과 비슷한 결과가 빚어졌다. 청은 광둥(廣東),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등의 4개 성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3개의 방향으로 나눠 베트남을 침공했다. 청군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접경지대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베트남 왕 완혜는 곧바로 수륙 양면에서 대군을 동원해 북진했다. 접경지대에 이르는 동안 전력을 증강해 10만 군사에 전투용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 그는 엄청난 속도전을 펼쳐 청군을 기습했다. 당시 20만 청군은 거의 전멸하며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패전 소식을 접한 건륭제는 즉시 내각관(內閣官) 복강안(福康安)을 양광(兩廣) 총독으로 임명하고 7개 성의 병마를 동원해 다시 베트남을 평정하도록 했다. 광시에 도착한 복강안이 사람을 베트남에 보내 먼저 사죄를 요구하자 완혜는 즉시 그에게 금은을 보내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조카 2명을 청조에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미 금은으로 매수된 복강안 등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완혜 황제의 직접적인 알현을 약속받고 그를 안남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완혜 황제는 신하 중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가짜를 내세워 건륭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가짜 안남 국왕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청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무력으로 베트남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가짜 안남 국왕의 알현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베트남은 939년 중국 대륙이 5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독립한 이후 명나라 때 일시적으로 식민지가 됐던 20년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줄곧 독립을 지켰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에도 송, , , 청 등 중국 역대 왕조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으나 그때마다 마치 고양이 같은 앙칼진 성깔을 보여 중국 역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중국의 체면을 구겨놓곤 했다.

▲ 중월전쟁을 지휘한 인민해방군 쉬스요우 장군.  

 

청군 20만명 전멸, 치욕의 패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중국해에서 중국 외교를 사면초가에 빠뜨리고 있는 골칫거리는 베트남의 반()중국 움직임이다. 베트남은 그동안 남중국해 일원의 해저 천연가스 개발과 영해 설정을 두고 중국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2011 6 13일에는 베트남 총리가 나서서 전쟁을 대비한 동원령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즉각적인 동원령은 아니었지만, 베트남이 동원령을 준비하고 나선 건 1979년 중국과의 국경 분쟁 이후 32년 만이라는 점에서 중국을 긴장시켰다.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 정부는 18~45세 국민에 대한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인구 8600만의 베트남은 45만명의 현역과 500만명 규모의 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지난 2011 5월 베트남의 자원조사선이 난사군도에서 작업 도중 중국 해양감시선의 방해로 작업용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빚어졌다. 베트남 정부는 이후 “중국이 도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미 항모의 베트남 기항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해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베트남보다 중국의 신경을 더 건드리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 자위대는 2011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재개입(re-engagement) 전략이 발표되고 일본과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해 갈등이 본격화되자 이른바 자위대 최강이라는 제7사단 병력 5400, 1500대의 전차를 동원해서 원래의 주둔지이던 홋카이도(北海道) 지역을 떠나 일본 서남부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일본 자위대 제7사단의 기동훈련은 일본과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일본 오키나와를 침공한 상황을 가상해 실시한 훈련이라는 점이 중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훈련은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제1의 적으로 가상하던 일본이 주적을 중국으로 가상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일본의 이번 군사훈련은 미국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최근 일본은 새로 수정한 방위대강(防衛大綱)을 통과시켰다. 이 대강에는 ‘동태적 방어(動態防禦)’라는 구상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동태방어 구상은 일본의 서남 해역에 대한 방어를 강조한 구상이며,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전의 방위대강은 러시아와 북한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번 방위대강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의 동맹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훈련은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훈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인 자위대 제7사단의 남부 기동훈련 실시 이외에도, 내년 초에 인도와 해상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양국 국방장관 사이에 이미 합의를 해놓았다. 또 필리핀과도 중국을 겨냥한 해상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회담을 진행해서 중국 외교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인도와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한 일본의 움직임은 일본과 중국의 동중국해 분쟁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TV 등 전자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稀土類·rare earth)의 일본 수출을 금지시키자, 일본이 또 다른 희토류 생산국인 인도와 수출 협상에 나서면서 시작된 것이어서 중국 외교부의 속을 끓게 하고 있다.


일본도 베트남도 중국의 군사적 침공과 외교적 공세에 대응할 수순을 갖추어 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사드(THAAD) 배치 반대 공세에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사드 반대 제재 위협에 매에 놀란 닭처럼 뒤로 숨기만 할 것인가.

 

출처 | 주간조선 2441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법

▲공중전 - 14.7.10 이스라엘 중심지 상공에 가자지구에서 날아오는 로켓탄을 요격하기 위한 아이언돔이 발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밤하늘

 

 

▲이스라엘의 공격 - 14.7.21 양측 교전으로 7.8 이후 팔레스타인 556명 이스라엘인 27명이 사망

 

▲이스라엘의 폭격 - 14.7.29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이스라엘의 폭격 - 14.7.29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저격수 이야기

 [저격수의 기원]

 저격수(sniper)는 군사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다. 한 발의 총알로 적을 무력화하고, 적 부대에 공포심을 심어주며, 넓은 적진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소설, 영화, 게임 등에서 저격수를 소재로 다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격수는 사전적으로는 “일반 보병보다 표적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격소총 등 총기로 적을 정밀 조준해 무력화하도록 훈련을 받은 전문화한 요원”을 가리킨다.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지만 실전에서의 위력은 다원적이고 위력적이다.

 

저격수는 효율적이다. 단순히 적의 병력 숫자를 줄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적의 작전에 당장 지장을 줄 수 있는 지휘관이나 통신병, 기관총 등 위력적인 무기체계를 다루는 요원, 적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야전 의무병 등 전술적 가치가 높은 적은 찾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저격수가 쏘는 한 발의 총탄은 한 명의 적을 무력화하는 수준을 넘어 질적으로 그 몇 배의 전술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저격수는 고도의 심리전도 수행한다. 저격수는 통상 은폐·엄폐된 위치에 몸을 숨기고 사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장소, 발견하기 힘든 곳에 숨어서 필살의 총탄을 날리는 저격수는 상대측 군인들에게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행동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대단한 압박을 준다.

 

저격수는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현재 저격수가 사용하는 총기는 정확성과 살상력, 내구력이 뛰어난 첨단 과학기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망원조준경이 부착돼 조준을 용이하게 해준다. 레이저거리측정기를 비롯한 다양한 군사과학 기술이 접목된다. 이 때문에 저격수는 그 탄생과 발전 과정에서 인류 과학기술의 발달과 궤를 함께해왔다. 탄생 과정을 포함한 저격수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은 인류 과학기술 발달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과 일맥상통할 수밖에 없다.

 

저격수는 통상 은폐·엄폐된 위치에서 사격을 한다. 저격수가 사용하는 총기에는 대개의 경우 망원조준경이 부착돼 조준을 용이하게 해준다. 저격수는 크게 군사조직·준군사조직 등 군사 분야나 경찰·보안기관 등 법 집행기관에 소속된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국제안보지원군 저격팀. 저격수 옆의 관측수는 레이저거리측정기로 거리를 계측하고 있다. <출처: 프랑스 국방부>

 

저격수는 사격술과 함께 정찰 기술, 엄폐 및 개인위장술, 야전 전투 기술, 전장 첩보 수집을 위한 지역 수색, 군사적 위장술, 침투술 등을 훈련받는다. 저격수는 저격과 관측 효율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통상 사수(shooter)와 관측수(spotter) 2 1팀인 경우가 많다.

 

스나이퍼의 어원은 도요새

영어로 저격수를 의미하는 ‘스나이퍼(sniper)’라는 단어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을 살펴보면 저격수의 역사가 보인다. 단어의 기원은 17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도 주둔 영국군 병사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스나이프하다(to snipe)’라는 동사가 그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내용 중 가장 오래된 스나이퍼 기원으로 통한다. 이 동사는 당시 “명사수(marksman)들이 도전적인 표적을 맞추려고 사격을 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어원은 야생조류인 도요새(snipe)라는 명사에서 비롯한다. 도요새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에 위장 능력도 뛰어나 사냥꾼에게 잘 발각되지 않는다. 깃털 중 햇빛에 노출된 부분은 어두운 색,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밝은색의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은폐가 잘 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간의 기척을 눈치 채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비행 패턴이 상당히 불규칙하고 변화무쌍하다. 이 때문에 사냥꾼이 총기를 조준해서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영어에서 ‘도요새 사냥을 가다(Going on a snipe hunt)’라는 관용구는 ‘쓸데없는 심부름’이나 ’불가능한 임무‘를 뜻한다. 미국에서는 여름 캠프나 보이 스카우트(Boy Scout) 같은 그룹에서 요구하는 ’통과의례‘를 가리키기도 한다. 도요새 사냥만큼이나 ‘하기 힘들거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18세기 당시 수준의 수렵용 총기로는 도요새를 제대로 사냥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다른 조류 사냥과 구분되는 ‘도요새 사냥(snipe shooting)’이라는 용어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 약칭이 ‘스나이핑(sniping)’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요새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을 ‘스나이퍼(sniper)’로 부르게 된 것이라는 추론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스나이퍼(sniper)는 ‘사격술(marksmanship)과 위장술(camouflaging)에 대단히 뛰어나며 고도로 숙련된 사냥꾼’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했다. 이는 나중에 ‘사격의 명수(sharpshooter)' '숨겨진 곳에서 저격을 하는 사수'를 가리키는 용어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스나이퍼’라는 단어가 영어권에서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20년대다. 1822년 ‘사격의 명수’를 가리키는 ‘샤프슈터(sharpshooter)’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용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샤프슈터라는 단어는 19세기 영어권에서 “활이나 총 등 뭔가를 발사하는 무기를 잘 다뤄 정밀 사격이 가능한 사격의 명수”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1801년 영국 신문에 ‘샤프 슈터(sharp shooter)’라는 형태로 등장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는 독일에서 ‘뛰어난 사수’ 또는 ‘저격수’라는 의미로 1781년에 처음 사용되었던 ‘샤르프쉬체(Scharfschütze))라는 단어를 그대로 번역해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용하는 스나이퍼(sniper)라는 단어는 1822년 처음 사용되었지만 명사수나 저격수를 가리키는 ‘샤프슈터(sharpshooter)', '마크스맨(marksman)’ 등의 단어와 상당 기간 함께 사용되었다. 스나이퍼라는 용어가 널리 정착해 일반화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다.

 

저격수와 관측수는 23

군대나 경찰에서 저격 임무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담당하게 된다. 저격이 이뤄지는 상황은 상당히 다양하나, 공통적인 것은 저격수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적절한 위치로 이동해서 매복하고 조준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적은 총탄으로 목표물인 범죄자나 적을 확실하게 무력화하는 것이 저격이다.

 

▲저격수와 관측수는 23각으로 함께 움직인다. 사진은 독일에서 훈련 중인 미 공군 저격팀이다. <출처: 미 국방부>

 

저격수는 기본적으로 관측수를 동반해서 함께 움직인다. 저격수가 저격에 전념할 수 있도록 관측수[영어로는 스포터(spotter), 포스트(post), 또는 옵서버(observer)]가 한 팀을 이뤄 활동하는 것이다. 관측수의 기본 임무는 장거리 사격에서 탄착점을 관측하고 사수에게 수정을 지시하는 것이다. 관측수는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전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처리하기도 한다. 관측수는 저격수의 기술을 지닌 인력이 담당한다. 그래야 의사소통이 잘 이뤄질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서로 역할을 교대로 맡아 부담을 나눌 수 있다. 관측수는 경험이 많은 저격수가 담당하며 저격수에게 사격을 지시하고 탄착점을 살펴 조준 수정 정도를 계산한다.

 

변칙적인 경우로 저격수에 범용기관총 사수와 소총 사수가 3 1조로 활동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의 사례가 있다. 이는 저격수가 주의력을 유지하는 부담을 줄이는 것은 물론, 저격용 소총의 부족한 화력을 보완해주는 측면도 있다. 저격용 소총은 대개 장전한 실탄이 한 발 또는 몇 발에 지나지 않은 데다 연발사격 능력도 없는 경우가 많아 화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3 1조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전술로 평가된다.

 

▲2010 10월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에서 열린 제10회 국제 스나이퍼 경연대회에 참가한 미 육군팀 <출처: 미 국방부>

 

 저격수와 관측수는 은밀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이동 흔적이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이를 활용해 이들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할 수도 있다. 적 배후를 은밀하게 이동하며 적정을 파악해 본부에 전달하는 한편, 목표물을 무력화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항공 지원이나 포격을 요청할 수 있으며 심지어 순항미사일을 비롯한 정밀유도무기체계의 표적 설정이나 유도 임무도 맡을 수 있다.

 

일발필살의 저격용 소총

저격용 소총은 통상 군용이나 민수용 라이플(rifle) 양산품에서 정밀도가 좋은 것을 골라서 망원조준경을 추가 장비로 부착한 것을 사용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처음부터 저격 전문 총기로 개발된 제품도 존재한다. 정밀도 문제 때문에 종래에는 일발필살(一發必殺)을 노린 볼트액션(bolt-action) 방식의 라이플이 주로 이용되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사격 정밀도를 희생하고라도 제2탄을 신속하게

 

▲미군이 사용했던 M24 저격총은 민수용 레밍턴 M700 볼트액션 소총에 바탕한다. <출처: Public Domain>

 

▲반자동 방식의 M110 저격소총 <출처: Knight's Armament Company>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사이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부 국가에서 자동소총을 저격용으로 사용하는 구상을 한 적도 있다. 연속적으로 지근탄을 쏘는 것으로 제압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에서 소총수에게도 다양한 자동화기를 지급하면서 이런 구상은 폐지되었다.

 

나의 존재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위장은 저격수의 생명

군사작전에 나선 저격수는 몸을 숨기기 위해 고도의 위장 기술이 요구된다. 눈에 띄기 어려운 색깔의 옷이나 위장복을 입고 그 위에 더해서 식물을 잔뜩 붙인 길리 수트(ghillie suit)를 추가로 걸치거나 아예 식물을 온몸에 감는 등의 방법을 활용한다. 길리 수트는 나뭇잎이나 줄기, 모래, 눈 등 주변 환경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든 위장복의 하나다. 주로 올이 굵은 삼베, 직물, 노끈 등으로 만들며 잔가지나 나뭇잎 등을 겉에 덧붙여 주변 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게 해 적 경계병의 눈을 피하는 효과가 있다. 군이나 경찰의 저격수는 물론 민간 사냥꾼이나 자연 전문 사진작가, 영상작가가 사격이나 촬영 목표물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려고 착용한다.

 

▲길리 수트를 입은 미 해병 저격수 <출처: 미 국방부>

 

 길리 수트는 저격수를 입체적으로 감싸 관측자가 주변 환경과 구분하기 힘들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제대로 제작한 길리 수트의 가장자리는 바람이 불 때 주변의 풀잎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관측자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일부 길리 수트는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소재로 만들기도 하며, 반대로 착용자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람을 막아주는 털실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복장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면 적에게 ‘언제 어디서 저격수가 갑자기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효과도 있다. 길리 수트는 주로 군에서 사용하며 경찰이나 경비 분야에서는 위장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참호전에서 머리 부분만을 위장한 영국군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길리 수트는 스코틀랜드의 사냥터 관리인들이 휴대용 은닉도구로 개발한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졌다. 이를 처음 사용한 부대는 영국군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 소속의 기마의용병 부대였던 로뱃 정찰대(Lovat Scouts). 1899 10~1902 5월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 과정에서 편성된 로뱃 정찰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영국군의 첫 정규 스나이퍼 부대로 개편되었다.

 

저격수의 전술적 가치

군 작전을 수행할 때 저격수의 기본 임무는 아군을 위협하는 고위험 목표를 무력화하는 일이다. 아군을 노리는 적 저격수의 존재를 사전에 탐지하고 무력화하는 ‘카운터 스나이퍼(counter sniper)’ 임무를 비롯해 아군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대전차무기나 기관총 사수를 제거하는 임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가 어려운 고급 지휘관을 제거해 적의 지휘계통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현장과 본부 간의 소통을 담당하는 통신병을 무력화해 통신계통을 마비시키고, 의무병을 사살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 등도 저격수의 주요 임무에 포함된다.

 

▲저격수는 고위험 목표를 무력화하는 정밀타격수단이 된다. 사진은 1944년 이탈리아 전선의 미군 저격수가 M1903A4 저격총을 장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저격수가 장교나 통신병, 위생병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에서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저격수가 부대원의 상하관계를 아예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작전 중 장교와 사병이 서로 같은 제복을 입는다든지 상급자에 대한 경계를 생략하는 등의 기만작전이 흔하게 벌어진다. 과거 장교의 특성이던 쌍안경, 권총, 지도 등 고유의 소지품이나 장비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도 한다. 베트남전 이후 미군은 군 계급장의 재질을 장교와 병사의 구분 없이 동일하게 통일해 저격수가 멀리서 쉽게 계급을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저격수는 적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강력하게 압박해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적의 공격 진행을 늦추는 효과가 있다. 단 한 명의 저격수 때문에 1개 부대의 작전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이를 노려 적을 사살하기보다 부상을 입혀 다른 부대원들의 심리적인 공포를 극대화하고 부상병 부축과 운송에 귀중한 자원을 쓰게 하는 등의 작전을 펼칠 수도 있다.

 

▲저격수는 시가지 등 폭격이 곤란한 곳에 은신하므로 제거하기 어렵다. 사진은 시가지에서 저격 중인 캐나다군 저격수의 모습이다. <출처: Public Domain>

 

이 때문에 저격 공격을 받은 부대는 신속하게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격수는 강력한 위장으로 위치를 숨기고 있어 위치를 알아내기가 곤란하다. 이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보다 대략적인 위치를 짐작해 그 주변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 박격포나 야포의 포격, 또는 공중 폭격을 대규모로 가해 저격수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군사용어로 ‘점 공격’이 아닌 ‘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저격수가 시가지 등 폭격이 곤란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경우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저격수 제거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부대의 작전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저격수는 적의 적개심이나 혐오감의 대상이 될 수 있어 포로가 된 경우 학대나 즉결처분 대상이 되기가 쉽다.

 

소총 기술의 발달이 저격수 탄생 이끌어

저격수 운용에는 정확도가 높은 총기가 필수적이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술 발전에 따라 이런 총기나 나타나면서 비로소 저격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강선총포인 라이플(소총)이 개발되기 전의 화기는 총신 내부에 강선이 없는 활강총포(滑腔銃砲, smoothbore)였다. 활강총포는 장거리에서 명중률이 낮았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가장 인기 높았던 활강총포인 샤를빌(Charleville) 머스킷 1776년 모델 <출처: Public Domain>

 

 총기의 높은 명중률은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강선총포는 총열 안쪽에 나선형의 강선(rifling)이 파여 있어 이로 인한 요철 때문에 발사되는 총알이나 포탄에 회전이 생기게 된다. 총구나 포구를 벗어난 총탄이나 포탄은 이 회전 덕분에 요동 없이 안정적으로 비행해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게 된다.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명중률이 높아져 저격도 가능하게 되었다. <출처: MatthiasKabel at German wikipedia>

 

 게다가 머스킷 소총을 비롯한 활강총포에는 둥근 탄환만 장착할 수 있었지만, 라이플에는 탄도 궤도의 안정성 덕분에 뾰족한 탄환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라이플의 사거리와 명중률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강선총포가 발명되었지만 당시에는 단지 대형 포에만 적용되었다. 강선총포를 적용한 라이플은 18세기 전반에 등장했다. 라이플이 더욱 발달해 명중률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저격수가 등장했다.

 

초기 형태 저격수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미국 독립전쟁

초기 형태의 저격수가 등장한 최초의 전쟁은 18세기 후반인 1775~1783년에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이다. 1777 9~10월 벌어진 뉴욕 주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군(식민지 민병대) 500명 이상의 저격수를 동원했다. 지휘관인 대니얼 모건(Daniel Morgan)의 이름을 따서 ‘모건 소총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사격 솜씨가 좋은 병사를 뽑아 구성했으며 전술적으로 영국군 장교와 포병을 골라서 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건 소총부대는 저격 임무를 수행하여 독립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사진의 중앙 오른쪽에 흰색 제복을 입은 것이 지휘관인 모건 대령이다. 그림은 영국군 존 버고인(John Burgoyne) 장군의 항복 장면을 묘사한 존 트럼벌(John Trumbull) 1821년 작품이다. <출처: Public Domain>

 

 이를 통해 영국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뜨리고 포병들이 제대로 작전에 임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효과를 노렸다. 저격수들은 정밀 사격을 위해 라이플에 총검을 부착하지 않아 적의 공격에 취약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총검을 부착한 머스킷을 운용하는 부대와 함께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저격수들은 나무 뒤에 숨어 초기 모델의 라이플로 200야드( 182.88m) 이상 떨어진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대륙군 저격수 티모시 머피(Timothy Murphy)는 이 전투에서 300야드( 274.32m)[400야드( 365.76m)라는 기록도 있다] 거리에서 영국군 지휘관인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장군을 사살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륙군의 전설적인 영웅이자 저격수인 티모시 머피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당시에는 등 뒤에서 적을 사살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1777 9 11일에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 브랜디와인 전투(Battle of Brandywine)에서 영국군 장교 패트릭 퍼거슨(Patrick Ferguson)은 훤칠한 키에 위엄 있는 외모를 지닌 대륙군 장교가 자신의 라이플 조준선에 들어왔음에도 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이유로 총을 쏘지 않았다. 나중에 퍼거슨은 그 키 크고 위엄 있는 외모의 대륙군 사령관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적인 저격수의 한 순간의 선택이 역사를 바꾼 것이었다.

 

나폴레옹에 맞선 영국군 저격수들

19세기 초반인 1803~1815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영국군은 명사수로 이뤄진 특수부대를 구성해 운용했다. 당시 대부분의 군대가 명중률이 낮은 활공총기인 머스킷을 사용했지만, 눈에 띄는 녹색 제복을 입은 영국군 ‘그린 재킷츠(Green Jackets)’ 부대는 라이플의 역사에서 유명한 베이커 라이플(Baker rifle)을 사용했다.

 

▲19세기 저격수들이 사용했던 베이커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스나이퍼라는 용어에 앞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샤프 슈터(sharp shooter)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당시 영국군 부대의 활약을 보도한 1801 6 23일자 《에딘버러 애드버타이저(Edinburgh Advertiser)》의 기사였다. 샤프 슈터는 1781년 독일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샤르프쉬체(Scharfschütze)’라는 단어의 영어 번역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남북전쟁은 저격수의 전쟁

최초의 장거리 저격용 소총은 19세기 중반에 디자인되었다. 영국의 엔지니어이자 기업인인 조지프 휘트워스 경(Sir Joseph Whitworth, 1803~1887) 1854~1857년에 설계한 휘트워스 라이플이 그것이다. 유효사거리가 800~900야드( 731.52~822.96m), 최대사거리가 1,500야드(1,371.6m)에 이르렀다. 당시로서는 사거리가 대단히 긴 저격용 소총이었다.

 

▲하지만 휘트워스 라이플은 비용 문제로 영국군에는 팔리지 못하고 프랑스군과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남부연맹 측 군대, 즉 남군에 납품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 모두에서 저격수를 운용했다. 남북전쟁은 저격수의 전쟁이었다. 당시 1864 5 9일 스포트실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Battle of Spotsylvania Court House)에서 북군의 존 세지위크(John Sedgwick) 장군이 1,000야드( 914.4m)의 거리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세지위크 장군은 “이 정도 거리라면 코끼리도 제대로 맞힐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직후 총탄을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북군의 주력인 포토맥군 소속의 저격수를 그린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1862년 작품 <출처: Public Domain>

 

 비슷한 시기인 1853~1856년 벌어졌던 크림 전쟁(Crimean War) 당시 소총에 부착할 수 있는 광학조준경이 설계되었다. 이 덕분에 저격수들은 과거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게 되었다. 광학기술을 이용한 망원조준경의 등장은 저격 전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탁 트인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에 최초의 저격수 부대 등장

1899~1902년에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계 보어인 양측 모두 탄창과 무연화약을 쓰는 최신형 라이플을 사용했다. 영국군은 리-메트퍼드(LeeMetford) 라이플을, 보어인들은 독일제 마우저(Mauser) 라이플을 사용했다. 탁 트인 대지가 많은 남아프리카의 지형 특성상 저격수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이 사용한 리-메트퍼드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이 전쟁에서 1899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 산하에 설치된 영국군 최초의 저격수 부대인 로뱃 정찰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제2차 보어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뱃 경이 이 부대를 조직해 미국 출신의 영국군 정찰부대 지휘관이던 프레더릭 러셀 버넘(Frederick Russell Burnham)에게 맡겼다. 버넘은 로뱃 정찰대를 “절반은 여우이고 절반은 산토끼”라고 표현했다. 영국군 저격수들은 보어인 상대와 마찬가지로 사격과 야전 활동, 독도, 감시, 그리고 군사 전술에 뛰어났다. 이들은 저격수들이 최초로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전투력과 전술을 강화한 군 부대 소속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캐나다에서 산악훈련 중인 로뱃 정찰대원들 <출처: Public Domain>

 

 그들은 “저격하고 곧바로 달아난다. 살아남아 다른 날에 또 저격하기 위해서다”를 모토로 삼았다. 그들은 위장 능력이 뛰어난 길리 수트를 착용한 최초의 군 부대였다. 2차 보어 전쟁이 끝난 뒤 이 부대는 최초의 저격수 부대로 공식 편제되었다. 당시 저격수는 스나이퍼(sniper)가 아닌 샤프슈터(sharpshoote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실, 강선총구를 지닌 라이플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고 저격수라는 보직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에도 ‘요인 저격’이라는 군사 임무는 존재했다. 일본에서는 1598년 벌어졌던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사가 저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작전 지휘관이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조총 사수가 배 뒤에 숨어 이순신 장군을 노려 저격했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교전 중 날아온 유탄에 맞았다는 조선측 기록과는 다른 주장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선총포가 도입되기 전 활공총포를 이용한 저격 활동이 된다. 조총은 당시 일본에서는 ‘다네가시마 댓포(種子島鐵砲)’로 불렸는데 1543년 포르투갈인이 일본 남부 다네가시마(種子島)를 통해 전래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불이 붙은 화승을 점화구에 갖다 댐으로써 총알을 발사하는 화승식 전장 소총이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말기인 16세기 1527 5월 부르봉 공작 샤를 3(Charles III, Duke of Bourbon)가 로마 성벽에서 저격을 당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Charles V, Holy Roman Emperor)는 교황 클레멘스 7(Pope Clement VII)가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국을 지원하자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에게 군대를 맡겨 교황령인 로마로 진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하얀 망토를 걸쳤던 부르봉 공작은 5 6일 로마 성벽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금세공인, 군인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자신이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강선총포가 없어활공총포인 아쿼버스(arquebus)가 사용되었다. 아쿼버스도 조총처럼 화승총이다. 화승총은 1470년 무렵 독일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부르봉 공작은 화승식 활공총포를 이용한 저격으로 목숨을 잃은 드문 경우로 볼 수 있다. 조총도 아쿼버스급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서양에서는 화승식을 거쳐 부싯돌을 이용하는 수발총(燧發銃, flint lock) 방식이 등장했다.

 

당시 지휘관의 전사로 규율이 무너진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로마에 들어가 약탈을 했으며 교황청을 경비하던 스위스 근위병 500명을 전멸시켰다. 스위스 근위병은 ‘총성의 서약’을 어길 수 없다며 최후까지 싸웠다. 그 뒤 교황청은 지금까지도 스위스 근위병에게 경비 업무를 맡기고 있다. 교황청 스위스 근위병들은 이를 기려 매년 5 6일 신입 근위병의 충성 서약을 실시한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잉글랜드의 의회파와 왕당파가 1642~1651년에 벌였던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 당시 의회파 군사지도자인 2대 브루크 남작 로버트 그리빌(Robert Greville, 2nd Baron Brooke, 1607~1643)이 스나이퍼의 의도적인 총격에 숨진 최초의 인물로 통한다. 그리빌은 스트래트퍼드셔(Staffordshire) 리치필드(Lichfield)에 있는 리치필드 성당(Lichfield Cathedral)에서 숨어서 그를 노린 한 남자의 총격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의회파가 구성한 신모델군(New Model Army)은 전장식 활공총포인 머스킷을 사용했다. 머스킷 총구로부터 화약과 총알을 차례로 넣고 조준·발사한 뒤 총신 내부를 소제하고 다시 장전·발사하는 과정을 그림 등으로 교육하는 자료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그리빌은 머스킷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여명기를 거친 뒤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저격수는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저격수는 이처럼 인류사와 과학기술사, 그리고 군의 역사와 보폭을 함께해왔다.

 

▲ 미국의 최고 저격수 중 한 명인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사진=조선DB)

 

저격수를 뜻하는 스나이퍼(sniper)는 야생 도요새 스나이프(snipe)에서 나왔다. 18세기 인도의 영국군 장교 사이에 이 새를 쏘아 잡는 경쟁이 벌어졌다. 도요새는 워낙 작고 동작이 날래어 맞히기 어려웠다. 스나이프를 떨어뜨릴 만큼 총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그때부터 스나이퍼라고 불렀다


저격수는 총알을 허비하지 않는다. ‘일발필중(one shot one kill)’이 모토다. 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이라크전을 거치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차대전 때 적 1명을 제거하는 데 들어간 탄약은 7000, 2차대전 때는 25000발이었다. 저격수들은 평균 1.7발을 사용했다. 저격수 한 명이 1개 중대(100)만큼의 효과를 낸 셈이다.


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수의 한 발은 치명적인 위협이다. 철학자 볼테르가 “신은 많은 병력 편이 아니라 정확한 사수의 편에 선다”고 말한 대로다. 사람의 목숨을 앗는 저격수의 세계에도 기록이 남는다. 그렇다면

 

◇역사상 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백색 죽음’ 시모 해이해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사진=조선DB)

 

 대부분의 군사사() 전문가들은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


평범한 농민이자 사냥꾼이었던 그는 겨울전쟁(1939. 12~1940. 3)에서 라이플총으로 542명을 저격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만이다. 기관단총으로 2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최소한 700명이 넘는다. 참전 일수가 90일 남짓하니, 하루 9~10명의 적군을 사살한 셈이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서 하얀색 옷을 입고 위장한 채 구식 총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히는 이 인간 사냥꾼은 소련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당황한 소련군 지휘부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가 쏜 것으로 보이는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대규모 포격과 폭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해이해는 턱과 왼쪽 뺨이 모두 날아가는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지만, 목숨은 구했다. 핀란드의 영웅으로 제대한 그가 개발한 전술은 지금도 전 세계 저격수들이 배우고 있다

 

●바실리 자이체프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였던 바실리 자이체프.(사진=조선DB)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는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신나강(M1891/30) 소총이 전시돼 있다. 총을 설명한 곳에는 “오른뺨에 총을 밀착, 스코프 십자가에 목표물이 메워지면 방아쇠를 …”이라고 적혀 있다


1915
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이체프는 우랄산맥 일대에서 자라며 사냥 사격술을 배웠다. 태평양 함대에서 근무하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그는 1942 10월부터 한 달여간 242명을 저격해 죽였다. 사용한 총알은 243. 100% 가까운 명중률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엄청나게 활약한 그는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저격부대 책임자가 되어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세 곳의 지점을 옮겨가며 넓은 목표 지역 내의 적들을 저격하는 전술을 전수했다. 자이체프가 양성한 저격수들은 2차대전 동안 6000명의 적을 사살했고 그의 저격 전술은 현대전의 교범으로 자리 잡았다.


종전 뒤 자이체프는 키예프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다 1991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얄궂게도 소련 해체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자이체프를 모델로 한 영화도 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년 작). 독일군을 적으로 돌리는 내용임에도 200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자이체프 역은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남으로 꼽히는 주드 로가 맡았다

 

●크리스 카일

▲2012년 전쟁 경험담을 엮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저격수)》출간 직후 촬영한 크리스 카일의 생전 모습. (사진=조선DB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특수전부대 네이비실의 저격수로 복무하며 이라크전을 통해 미군 역사상 최다 저격 기록(공식 160, 비공식 255)을 수립한 스나이퍼다. 그가 이라크 전쟁에서 세운 ‘군공’은 경이로울 정도다. 2100야드(1.9) 거리 밖에서 저격에 성공하는가 하면 총 한 자루로 도로에 고립된 아군 해병부대를 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벌어진 근접전에서 반군을 권총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카일을 두려워한 이라크 반군들은 그에게 ‘악마’라는 뜻의 ‘알-샤이탄(al-Shaitan)’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다. 전투 파병이 끝난 후 해군 특수전 저격수 및 대() 저격수 팀 훈련과정 수석 교관으로 일하면서 최초의 네이비실 저격수 교본인 《해군 특수전 저격수 교리집》을 집필했다.


이런 활약 덕분에 카일은 은성훈장 2, 동성훈장 5, 해군과 해병대 근무유공훈장 2, 그리고 해군과 해병대 공로표창을 받았다. 국가안보문제 유대연구소가 수여하는 ‘위대한 조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일은 2013 2 2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미 해병대 저격수 출신 레이 라우스의 치료를 위해 텍사스주에 있는 사격장을 방문했다가 그에게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라우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극장에서만 2 5000만 달러( 2755억 원)의 수입을 거둬, 전쟁영화 역사상 미국 내 최고 수입 기록을 깼다. 이전까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2 1600만 달러)가 최고였다.

아직도 카일이 묻힌 텍사스 주립 묘지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병(老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항상 성조기와 꽃이 에워싸고 있다. 참전 용사나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카일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를 지킨 수호자로 받아들여진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린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유튜브 캡처)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 중에는 여성도 있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키예프 대학 역사학도였던 그는 1941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병으로 자원입대해 소련군 25사단에 배속돼 저격 훈련을 받았다. 파블리첸코는 오데사 전투에 투입돼 약 두 달 반 동안 무려 187명을 사살한 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가담했다.

1942 6월 박격포에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날 때까지 그는 소련군 공식 집계로 309명을 저격했고, 그중 36명이 적의 저격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렸지만, 아군에게는 상대 저격병을 사살한 구원의 천사이기도 했다

국제적 영웅이던 파블리첸코는 캐나다와 미국, 영국 등지에 초대받아 대중 강연 등을 했고, 백악관에 초대받아 루스벨트와 그의 부인을 예방하기도 했다. 파블리첸코는 1943년 소련 영웅금성훈장을 탔고 소령 예편 전까지 저격 교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 학위를 받은 뒤로는 사학자로 일했다. 1916 7 12일 태어나 1974 10 10일 별세했다. 그녀의 시신은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16세기에 건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에 안장됐다. 파블리첸코의 일대기 역시 2015년 영화로 개봉됐다. 제목은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한 독일 최고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유튜브 캡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독일 최고의 저격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최다 기록이다. 당시 제3산악사단장은 소련군 2개 중대의 공력을 헤체나우어의 저격만으로 물리쳤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헤체나우어는 특별한 지원 없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은폐된 진지에서 소련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아군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날 밤,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했지만 우리수적으로 열세했고 탄약도 부족해 오히려 적의 대포병 사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적 지휘관과 포병만을 골라 장거리 저격을 가했다. 결국 적은 잠잠해졌고 아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헤체나우어는 동료에게 “두뇌가 우수한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고 한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스나이퍼 아부 타신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한 아부 타신.(사진=조선DB)

 

 최근 활동 중인 저격수 중에서는 아부 타신이 첫손에 꼽힌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이 스나이퍼는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그는 2017 5월 시아파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지금까지 저격수로 활동 중이다. 타신이 최고의 저격 실력을 갖춘 것은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제4차 중동전쟁과 이란-이라크전 등 총 5차례의 굵직한 전쟁에 참전했다고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타신은 “전쟁 후 은퇴해 지내다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다시 총을 잡았다”면서 “IS의 누구도 우리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하겠다고 신께 약속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고향이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밝혔다.

 

●카를로스 해스콕

 

베트남전 영웅인 미국의 카를로스 해스콕 상사 같은 뛰어난 저격수는 그 존재만으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 6월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해스콕은 코끼리 계곡에서 잠복하던 중 개활지를 향해 일렬로 전진해오는 월맹군을 발견한다.

 

800m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해스콕 상사가 적의 선두 지휘관과 후미에 있던 부사관을 동시에 사살하자 월맹군은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 후 총알이 날아오는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든 월맹군은 모두 머리통이 날아가고 만다. 월맹군은 꼼짝 못 하고 더위와 갈증을 참으며 밤을 지새우고 저격수들은 교대로 조명탄을 쏘아 적군을 사살했다. 저격은 이렇게 5일 동안 지속됐고, 월맹군은 결국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이후 해스콕은 짐승을 뛰어넘는 ‘인내자’라고 불렸다. 해스콕은 미군의 저격학교 시스템을 정립하다시피 했다. 미 해병대 저격학교의 모토인 ‘One shot, One kill’을 만든 것이 해스콕이다

 

해스콕은 가장 먼 거리(2286m)를 저격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기록은 2002년 아프간전쟁에서 캐나다군의 롭 펄롱이 2430m에서 적군을 저격함으로써 비로소 깨졌고, 이 기록 역시 2009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그 해리슨이 아프간에서 2475m의 저격에 성공하면서 깨졌다.

 

2017 6 23 CNN은 캐나다 특수부대 사령부를 인용해 이 사령부 소속의 한 스나이퍼는 3540m 거리에서 목표 대상을 사격해 명중했다고 보도했다. 이 스나이퍼는 모술 전선 후방에서 이라크군을 도와 수니파 급진 무장세력 IS와 싸우는 캐나다 최정예 특수부대 JTF-2 소속이다. JTF-2 측은 군 보안상의 이유로 언제, 어떻게 저격이 성공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JTF-2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종전 세계 신기록을 크게 뛰어넘는다 

 

천부적 자질과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

저격수는 천부적인 사격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틀 동안 꼼짝하지 않고 사격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영화나 게임에서처럼 뛰어다니며 저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전증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셔도 안 되고 완벽한 매복을 위해 담배도 금물이다. 눈도 아주 좋아야 한다. 위장을 구별하기 위해 색맹이 없어야 하고 나안시력도 2.0 이상이어야 한다. 한국 정규군에 스나이퍼가 필요하다고 최초로 주장한 저격수 전문가 황광한 예비역 준장은 “모기가 물어도 꿈쩍 않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며 “전설의 스나이퍼 해스콕은 엎드린 자세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속옷도 안 입었다”고 했다.

최우석 조선뉴스프레스 기 출처톱클래스 2018 4월호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

◇38선 분단, 6·25 발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 목격자

⊙ 한반도 분할 당시 러스크 등은 39도선 주장했으나, 전략정책실장 에이브 링컨 준장이 38도선 고집
6·25 발발 당시 당직 장교로 맥아더에게 북한 남침 사실 보고
⊙ 인천상륙작전 기획 참여, 한강 도하 작전시 舟橋 건설 지휘… 장진호 전투 등 참전
⊙ 카터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에 반대해 예편… 레이건, “미국의 ‘힘을 통한 평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

▲한국과 인연이 깊은 로우니 장군(왼쪽에서 두 번째) 1970~1971년 한미1군단장으로 서부전선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조선DB

        

  38선 획정,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흥남철수….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 순간들을 모두 지켜본 미국인이 있다. 2017 12 17일 타계(他界)한 에드워드 L. 로우니(Edward L. Rowny)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
 
  에드워드 로우니는 1917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태생의 목수였다. 1939년 명문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 1941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가 다시 육사로 진학한 것은 그해 9월 아버지의 고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패망(敗亡)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일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공학 및 국제문제(international affairs) 석사 학위를,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관계(international studies)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경력은 공학과 국제관계학이라는 학문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로우니는 육사 졸업 후 ‘노래하는 공병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41공병연대에 배속되어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다. 로우니는 이때 만난 연대장 존 E. 우드 대령(육군 준장 예편)을 평생 멘토로 여겼다.


  운명의 1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로우니는 육군부 작전과에 근무하면서 일본 본토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다. 그가 38선 획정 과정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책 《운명의 1도》에 의하면, 일본 패망을 며칠 앞두고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참모들에게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얻어낼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에이브 링컨 장군(준장)에게 한반도를 어느 곳에서 분할할 것인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링컨은 전략정책단(Strategy and policy Group)을 소집했다. 딘 러스크 대령(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 역임)은 북위 39도선을 제안했다. 한반도에서 동서간 폭이 가장 좁은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방어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링컨 장군은 “아니야”라면서 지도 위에 북위 38도선을 따라 선을 그었다. 앤디 굿패스터 대령이 물었다. 


  39도선이 가장 적당한 해결책인데, 1도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까?

  링컨은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니컬러스 스파이크만은 《평화의 지리학》이라는 책을 쓴 당대의 유명한 지정학자였다. 그는 “림랜드(유라시아대륙 주변부)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세계 최고의 문학과 발명품 중 90% 38도선 북쪽에서 탄생했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스파이크만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링컨은 그 자리에 모인 부하들에게 “모든 사람이 38도선에 대해 알고 있지만 39도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38도선은 링컨 장군의 현학(衒學) 취향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로우니는 “하지만 몇몇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파이크만의 책을 읽어보기는커녕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면서 이렇게 술회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큰 실수였다.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방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미군의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영원한 운명이 될 38선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북한 남침 가능성 보고

10군단장 앨먼드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로우니. 앨먼드는 공병인 로우니가 보병으로 轉科하는 것을 도왔다.

 

  1949년 예일대에서 학업을 마친 로우니는 일본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는 본격적인 근무에 들어가기 전 한 달에 걸쳐 일본 전역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의 관찰을 바탕으로 그는 구()일본군의 위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미군은 다른 곳에서의 군사활동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캠프로 되돌아가야 하며, 일본 내 치안유지와 자연재해 등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의 주()방위군을 본뜬 자위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로우니는 “당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다른 곳은 바로 한국이었다”고 회상했다.
 
  1950 6월 초 로우니는 기밀 전보를 읽고 상관인 드위트 암스트롱 대령에게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암스트롱 대령은 참모장 에드워드 M. 앨먼드 장군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앨먼드 장군은 이 보고서를 정보국장 찰스 A. 윌로비 장군에게 보냈다. 하지만 정보국 외부에서 자신의 업무에 간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윌로비는 이 보고서를 묵살했다. 윌로비는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0 6 25일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맥아더사령부의 당직장교는 바로 로우니였다. 로우니는 참모장 앨먼드 장군과 함께 맥아더 원수의 관저로 달려갔다. 맥아더 원수는 로우니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나에게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려는 건가?"

맥아더는 북한 남침을 예견하는 보고서를 올렸던 로우니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로우니는 맥아더의 대변인(공보장교)으로 임명됐다. 맥아더가 내린 지침은 “귀관은 기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였다. 


  맥아더, “우리의 목표는 서울"

  낙동강 방어전이 한창이던 맥아더는 북한군의 후방을 치는 상륙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50 7 21일 미 육군 7사단과 해병 1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됐다. 맥아더는 린 스미스 대령, 제인드 랜드럼 대령, 로우니 중령 등 세 사람에게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 모두 서해안에 상륙해야 한다는 점에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상륙지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스미스 대령은 고전적인 상륙작전 개념에 충실하게 접적(接敵) 지역 바로 위에 상륙하자고 주장했다. 랜드럼 대령은 최전선 북쪽 10km 후방 상륙을 주장했다. 로우니는 적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는 최전선 북방 20km 지점에 상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앨먼드 참모장은 맥아더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했다. 최전선에서 가장 북쪽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은 로우니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질책을 받을 것 같아 긴장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참석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도 앞으로 다가간 맥아더는 색연필로 최전선에서 350km 떨어진 지점, 즉 인천을 관통하는 커다란 화살표를 그렸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목표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서울이다!
 
  맥아더는 상륙작전 계획을 입안한 장교들에게 “자네들은 너무 신중한 것 같군”이라면서 이렇게 물었다.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에 대해 고려해 봤는가?
 
  로우니가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장군님, 그곳으로 가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천은 서울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 틀림없이 적군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할 것입니다.
 
  둘째로, 인천은 상륙하기 매우 어려운 장소입니다. 조수(潮水)차가 너무 큽니다. 인천의 조수간만 차는 32피트(9.7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곳입니다. 다음 밀물에 맞춰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먼저 상륙한 부대가 단독으로 전투를 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맥아더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냥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떤가? 조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여러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네. 앤드루 잭슨(미 제7대 대통령)의 말처럼 절대 두려움과 타협하지 말게.  


  “인천은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높은 조수간만의 차이와 함께 항구 주변에 있는 30피트(9m) 높이의 방파제(防波堤) 때문에 상륙 자체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합참 회의에 참석한 각군 참모총장들은 잇달아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맥아더는 6시간에 걸쳐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쟁사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후일 나토군사령관·미 국무장관 역임) 소위가 샌드위치를 갖고 들어왔지만 맥아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맥아더는 미군 최고 지휘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맥아더는 로우니에게 말했다.
 
  “인천은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로 남을 걸세.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크리시는 마라톤전투에서 워털루전투에 이르는 15개의 전투를 ‘세계 15대 전투’로 꼽은 바 있다. 그 결과가 달라졌을 경우 서구 문명이 종말을 맞게 됐을 수도 있는 전투를 말한다. 그 후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크리시가 말한 전투에 5개의 전투를 더해 ‘세계 20대 전투’를 꼽았는데,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궁금해진 로우니가 물었다.
 
  21번째 전투는 무엇인가요?
 
  맥아더가 대답했다.
 
  1920년의 바르샤바 전투라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 원수 유제프 피우스트스키는 볼셰비키군의 바르샤바 점령을 막았다네. 그때 바르샤바가 함락됐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서유럽까지 점령하려고 했을걸세.
 
  폴란드계인 로우니는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강 도하

  로우니는 스미스 대령, 랜드럼 대령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들은 9 15일이 상륙작전에 가장 적합한 날짜라고 보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조수간만의 차이 못지않게 9m에 달하는 인천의 방파제도 상륙작전의 장애물이었다. 이를 극복하는 숙제는 공병 출신인 로우니에게 떨어졌다. 일본의 여러 공장들에 조립식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을 주문했다. 기자들이 이 사실을 포착했다. 미군이 인천상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맥아더는 서울을 공산군에게 빼앗긴 지 3개월이 되는 9 29, 자신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한강을 건너 서울에 입성하기를 원했다. 홍보효과에 민감했던 맥아더는 헬리콥터나 상륙주정(上陸舟艇)으로 한강을 건널 경우 서울수복의 상징성이 반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량 편으로 한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강교는 국군에 의해 폭파됐고, 한강철교도 북한군이 폭파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맥아더의 뜻대로 하려면 한강에 주교(舟橋)를 가설해야 했다. 맥아더는 이 임무를 로우니에게 맡기면서 중령이던 그를 임시준장(臨時准將)으로 승진시켜 10군단 공병여단장으로 임명했다.
 
  한강 도하를 앞두고 미 해병대 장교들은 로우니에게 이렇게 호소해 왔다.
 
  “퀀티코(미 해병대 장교훈련소)에서 저희는 해안을 공격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강을 건너 공격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습니다.
 
  로우니는 김포비행장에 해병대 대대장과 중대장들을 모아 놓고 도하작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맥아더가 주문한 다리를 한강에 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북한군은 다리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박격포와 야포 포격을 가해 왔다. 여러 명의 장병들이 희생됐다. 로우니 휘하 5명의 공병 대령 가운데 한 명도 주교 설치 작업을 진두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9 28일에는 갑자기 돌풍이 불어 주교 일부가 한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장갑차를 이용해 주교를 회수해 왔지만, 다리를 완공하려면 5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두 시간 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강을 건너겠다고 알려왔다. 공병들은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가까스로 다리를 완성했다. 1시간 후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태운 44대의 승용차 및 지프차 행렬이 한강을 건넜다. 로우니는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 기념식에 참석했다.
  

  장진호 전투

  1950 10월 말 앨먼드 장군 예하 10군단(미 해병 제1사단, 육군 7보병사단, 육군 3보병사단)은 개마고원 깊숙이 진격했다. 이때는 이미 중공군이 비밀리에 북한지역으로 들어와 있었지만, 유엔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1월 말 동서 양 전선에서 중공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9병단이 공격해 들어왔다. 서부전선이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으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동부전선에서도 미 육군 7사단과 3사단이 패주하는 상황에서 미 해병 1사단만이 영웅적으로 항전했다. 이것이 유명한 ‘장진호(長津湖) 전투’였다.
 
  로우니의 공병여단은 영하 30~35도의 혹한 속에서 미군의 철수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군에게 보급품을 공수(空輸)하기 위해 임시 야전 활주로를 건설해야 했다. 공병대는 활주로 건설 부지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난로를 피워 땅을 녹인 후 불도저로 땅을 다듬었다. 이렇게 만든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편으로 수백 명의 부상자들이 후송될 수 있었다.
 
  로우니의 다음 과제는 폭이 9~30m에 이르는 고토리의 여러 협곡들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알 윌더 소령이 다리 부품들을 C-119 수송기로 공수해 와 협곡 가장자리에 투하한 후 조립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로우니의 공병여단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미 해병대는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적지에 버려두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흥남철수

흥남 부두가 폭파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로우니(오른쪽 끝). 그는 흥남철수작전의 기획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장진호를 비롯한 북한 동부지역에서 철수한 미군들은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10군단장 앨먼드 장군은 미 3사단에 방어선을 구축,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로우니는 병력 및 물자의 철수 및 흥남부두 폭파 임무를 맡았다.
 
  이때 해병대의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이 로우니를 찾아왔다. 포니 대령은 피란민 10만명을 미군 함정 편으로 철수시키자는 현봉학 박사의 호소를 그에게 전달했다. 로우니는 포니와 함께 앨먼드 10군단장을 찾아가 설득했다. 앨먼드도 동의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크리스마스 카고’ 작전이 시작됐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비롯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98000여 명의 피란민이 자유를 찾았다. 그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우니는 피란민들과 물자들이 수송선에 들어가는 작업을 감독했다. 그러고도 미처 싣지 못한 물자들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폭파해 버렸다. 부두 시설도 함께 폭파됐다.
 
  로우니는 무전병·운전병과 함께 마지막 보트를 타고 항구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태우러 오던 보트가 해안에서 90m 지점에서 갑자기 폭발해 버렸다. 로우니는 아마 승조원 중 한 명이 버린 담배꽁초가 화약에 떨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이들이 타고갈 예정이었던 USS 마운트 매킨리함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들이 가진 것은 권총 한 자루와 카빈 소총 두 자루가 전부였다. 무전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운전병은 해안에 버려진 여러 통의 전지분유를 가지고 인근 비행장 아스팔트에 SOS-USA라고 썼다. 지나가던 미군 비행기가 이걸 보고 착륙, 이들을 구출해 주었다. 비행기는 그 길로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로우니는 이곳에서 가족과 만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보병연대장이 되다

  한국으로 돌아온 로우니는 10군단 군수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6월 앨먼드 장군은 1년 더 한국에서 근무하면 보병연대장으로 기용하겠다고 제안했다. 로우니는 이미 공병여단장을 지냈지만, 그건 임시준장 계급으로 그랬던 것이었다. 공병으로서는 승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로우니는 보병으로의 전과(轉科)를 원하고 있었다.
 
  로우니는 연대장이 되기 전인 1951 9월 제2보병사단 38연대 부연대장으로 연대장을 대리해 펀치볼 인근 1234고지 점령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면서 요한 크리스티안손 소령의 네덜란드군 대대가 선봉에 섰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북한군은 200여 명의 전사자, 6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로우니의 부대는 20여 명의 부상자만을 냈다. 요한 크리스티안손 소령은 후일 네덜란드군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그해 10월 로우니는 병력을 10대의 헬리콥터에 태워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를 기습하는 ‘수직포위작전’을 입안, 성공시켰다.
 
  1951 12월 로우니는 2사단 38연대장이 됐다. 당시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상부에서는 소대 규모 이상의 작전은 벌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3월 로우니는 전방의 적군이 새로운 전초(前哨)기지를 세운 것을 확인했다. 사단장은 적정(敵情) 파악을 위해 적군을 생포해 오라고 닦달하고 있었다. 로우니는 1개 소대를 투입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작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포격을 받으면서 고립되었다. 포위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로우니는 중대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덕분에 포위되어 있던 소대를 구출하고 적군 두 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전사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 날 사단장 대행이던 보트너 장군이 찾아왔다. 그는 로우니를 연대장직에서 해임하라는 워싱턴의 명령을 전했다. 1개 소대 이상을 작전에 투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황을 조사한 보트너 장군은 로우니의 판단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보트너는 워싱턴으로 전보를 보냈다.
 
  “만약 누군가를 해임해야 한다면, 저를 해임하십시오. 이곳의 지휘관은 바로 접니다.
 
  덕분에 로우니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로우니는 “이 사건은 내게 도덕적 용기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로우니는 1955 ~1958년 유럽연합군최고사령부(SHAPE) 합동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67년 드골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를 선언한 후, 그는 프랑스 주둔 미군과 물자들을 철수하는 작전을 입안, 집행했다.
 
  1960년대 초 로우니는 사이러스 밴스 육군장관(후일 국무장관 역임)의 지시를 받아 베트남전쟁에서 무장헬기를 활용한 강습(降襲)작전을 연구, 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6·25 당시 그런 작전을 해 보았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영화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에서 보는 것처럼 미군이 무장헬기를 타고 기동(機動)하는 것은 이후 베트남전의 상징적인 모습이 됐다.
 
  이후 로우니는 제24보병사단장, 미국 유럽사령부 참모장 등을 역임한 후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휘하게 된 부대는 한미1군단이었다. 한국군 6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으로 구성된 한미1군단은 한국의 서부전선을 책임지는 부대였다. 당시 부군단장은 10·26사태 당시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李在田) 장군이었다. 1971년 닉슨독트린에 따라 미 7사단 병력 2만명이 철수하는 상황 속에서 한미1군단은 한반도 방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 한미1군단은 1980년 한미야전군으로 개편되었다가 평시 작전권 환수에 따라 1992년 해체됐다.
 

  SALT Ⅱ에 반대해 예편

 로우니는 1971년 북대서양조약기구 군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3~1979년 미소(美蘇) 2차전략무기제한협정(SALT ) 협상에 미 합참 대표로 참석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SALT Ⅱ를 자신의 외교적 업적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로우니는 이 협정이 미국의 안보를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1979 6월 육군 중장을 끝으로 예편했다. 이후 그는 의회와 시민사회를 상대로 SALT Ⅱ의 부당함을 알리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소련과의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의 선임대사로 기용한 것이다. 1984년 전략무기감축협상이 타결됐다. 닉슨-포드-카터-레이건을 거치면서 10년 이상 대소(對蘇) 협상에 참여한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그가 회담에 참석한 시간만 2000시간에 달했다. 그 후에도 로우니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아래서 군비통제특별자문관으로 일했다.
 
  1989년 레이건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로우니에게 대통령시민훈장(Presidential Citizen Medal·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두 번째 등급의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에드워드 L. 로우니는 미국의 ‘힘을 통한 평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군사문제 협상가이자 대통령 자문관으로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기와 능력을 훌륭하게 발휘했다.

 
  행복한 말년

2014 7 27 61주년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정홍원 국무총리(왼쪽)는 대통령을 대신해 로우니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사진=조선DB

 

  1989년은 로우니에게 행복한 해였다. 동구 및 소련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인 로우니는 아버지의 고국인 폴란드를 위해 할 일이 많았다. 1992년 그는 피아노곡 ‘소녀의 기도’로 유명한 폴란드의 음악가이자 정치가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유해를 폴란드로 송환하는 사업을 성사시켰다. 2003년 이후에는 미-폴란드자문협의회(APAC) 부총재 및 총재로 양국 친선을 위해 노력했다. 2004년에는 조지타운대학에 폴란드 대학생들에게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교육하기 위한 파데레프스키기금을 설립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5년 공산주의피해자기념재단으로부터 트루먼-레이건 메달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도 2014년 그에게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로우니는 2017 12 17 10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꽉 차게 살다간 100년의 인생이었다.

 

현대사 발굴 - 월간조선 2019.01월 호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