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2-12/
12.01(목) 국가 제창 보이콧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동방의 태양. 정의를 믿는 자들의 눈과 같이 빛난다… 인내하며 이어나가며 영원하리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여.’ 이란의 국가(國歌) 가사 일부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이 국가가 논란거리가 됐다. 이란 대표팀은 조별예선 1차전에서 조국의 국가가 울려 퍼지자 운동장 한가운데서 어깨동무를 한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했다. 국제 스포츠 경기에 출전한 대표팀의 ‘국가 제창 보이콧’은 흔치 않은 장면이다.
이란 대표팀은 2차전에서 ‘유럽의 복병’ 웨일스를 만나 2대 0으로 승리하며 ‘언더독(Underdog·스포츠에서 우승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 돌풍’의 주인공이 됐다. 미국과의 3차전에선 비기기만 해도 조별 예선을 통과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가장 먼저 16강 고지를 밟을 아시아 국가”라는 기대를 받았다.
강팀을 꺾고 고국에 예상치 못한 승리를 안긴 선수들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꺾자, 정부가 경기 다음 날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빈 살만 왕세자는 경기 중 부상당한 선수 이송을 위해 개인 제트기를 제공하며 파격 대우를 한 것이 좋은 예다.
이란 대표팀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3차전을 앞두고, 국가 제창을 또 거부할 경우 가족에게 폭력·고문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이란 정부의 협박이 대표팀에게 전해졌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영국 매체 ‘더 선’은 대표팀의 처형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이란은 결국 3차전에서 패배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대표팀이 국가 제창을 보이콧한 건, 자국의 반정부 시위에 지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란에선 지난 9월, 22세 여대생 마흐사 아마니의 의문사로 촉발된 시위가 석달 째 이어지고 있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지금까지 시위대 450여 명이 숨졌다. (이란 인권단체)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위험한 용기’를 통해 자국의 반(反) 인권적 실태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표팀의 목적은 달성된 듯하다. 대표팀이 국가 제창을 거부했을 때, TV 카메라는 관객석에서 울먹이며 박수 치는 여성의 모습을 비췄다. ‘정의를 믿는 자들의 눈동자가 태양처럼 빛난다’는 국가의 가사는 누구보다 이들에게 잘 어울린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12.02(금) 업무개시명령
업무개시명령은 정부가 파업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법적 수단이다. ‘국가경제에 심대한 위기를 초래하거나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때’에 발령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첫해인 지난 2003년 12월 22일 여야가 16대 국회에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업무개시명령 조항을 신설했다. 2주일간의 화물운송 거부로 5400억원어치 산업피해가 발생한 그해 5월 화물연대 파업이 계기였다.
당시 파업은 전국 항만과 내륙컨테이너기지(ICD)를 마비시켰다. 국내 컨테이너 화물의 80%를 처리하는 부산항에 정부가 군(軍) 수송 차량까지 투입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수출대란이 현실화했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막대한 경제적 피해는 물론 국제 신인도까지 하락하고 있다”며 강도 높은 처벌이 포함된 법 개정을 추진한 이유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동의했다. 국회 회의록을 살펴보니 재석 177인 중 찬성 167인, 반대 7인, 기권 3인으로 법안 개정안이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한나라당이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을 제치고 과반 의석수를 차지했던 여소야대 시절이다. 그래도 찬성률 94.4%. 이견 없는 합의 처리였다.
화물차주의 업무개시명령 거부 시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 화물운송 종사자격과 운수사업등록 취소·정지 처분을 내리는 현행법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극소수 반대·기권표 중 대부분(반대 5표, 기권 2표)을 야당이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냈다.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여권에서는 3인을 제외한 재석의원 전원이 화물차 업무개시명령제에 찬성했다. “대화로 문제를 풀되 위법 행위에 대해 법 집행을 엄정히 하라”는 게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 지시였다.
19년이 지난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 정부는 파업을 실시할 수 있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한다. 그렇지만 불법은 안 된다”며 국무회의에서 시멘트 분야 운송 거부자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을 심의·의결했다. “업무개시명령은 내용과 절차가 모호하고 위헌성이 높아 2004년 도입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다. 위헌성이 큰 업무개시명령을 철회하라”는 더불어민주당 논평이 과거를 잊은 자기 부정으로 들린다.
심새롬 정치부 기자
12.05(월) 최고금리 인하 역설
1990년대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미아리 텍사스촌’은 대표적인 홍등가였다. 짙은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취객들을 끄는 풍경이 일상인 곳이었다. 2000년 1월 김강자 서울 종암서장은 ‘미성년 매매춘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 일대 집중 단속에 나섰다.
2004년 9월엔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지역별 대표 홍등가 단속이 이뤄졌다. 홍등가는 슬럼화하거나 재개발됐다. 그런데 되레 집창촌과 주택·업무지역의 경계는 무너졌다. 내쫓긴 성매매 종사자들이 주택가나 업무 지역으로 침투했다.
수법은 더 은밀하고 대담해졌다. 오피스텔을 임대해 성매매 장소로 쓰는 속칭 ‘오피’가 대표적이다. 상가를 마사지숍으로 꾸미는 ‘샤워실’부터 ‘안마방’까지 은밀한 성매매 형태가 등장했다. 단속은 더 어려워졌다.
오피스텔이나 상가에서 성매매 업소를 찾아내려면 고객인 척 위장하지 않으면 사실상 단속할 방법이 없다. 찾아내도 처벌이 쉽지 않다. ‘오피’에서 성매매 남녀를 적발해도 애인이라고 주장하면 단속 명분이 없다. 결국 홍등가는 사라졌지만, 성매매는 없애지 못했다.
요즘 ‘제3금융’ 시장이 그렇다. 제도권 금융에서는 대출이 막힌 저소득·저신용자에겐 대부업체나 전당포 같은 이른바 제3금융이 마지노선이다. 이곳에서마저 대출을 받지 못하면 ‘신체 포기 각서’를 쓰고 돈을 빌린다는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대출 난민’이라 불리는 금융 취약계층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려는 정부 조치가 되레 이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2002년 66%였던 법정 최고 금리는 2016년 27.9%에서 현재 20%까지 내렸다. 대부업체 이용자(개인)는 4년 새 23% 감소해 지난해 9만7000명 선이다. 그러나 금감원에 들어온 불법 사금융 피해 신고는 2년 사이 두 배 늘었다. 수익이 없어진 대부업체는 문을 닫고 있다. 결국 제3금융 시장은 고사하고 있지만, 대출 난민의 이자 부담은 줄지 않았다.
금융당국도 부작용을 알고, 지난달 ‘우수 대부업자’ 자격 유지 조건을 완화하는 등 대책에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금융 전문가들은 ‘최고 금리 인하의 역설’을 막기 위해 최고금리를 기준금리와 연동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책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금융당국이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때다.
최현주 경제부 기자
12.06 브라질 이민 60주년
60년 전인 1962년 12월 18일. 제1차 브라질 이민단 103명이 부산항을 떠난다. 1962년 3월 해외이주법 제정 이후 첫 공식 이민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인구 과밀과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 정책을 폈다. 농업인구가 부족했던 브라질은 이민으로 농토를 개간하려 했다. 양국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1966년까지 4차례 더 이민단이 파견됐다. 그러나 농업이민은 실패로 돌아갔다. 배를 타고 두달여 만에 도착한 한인에게 배정된 외딴 농장엔 기반시설이 없었다. 이민자들은 제대로 된 숙소나 농기구도 없이 개미떼와 독충과 싸우며 살 곳과 끼니를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했다. 토지 소유권도 불명확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민자는 퇴역군인, 상인 출신의 중산층이었다. 이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결국 대부분 상파울루 같은 대도시로 재이주했다.
일본 이민 1세대에게 파친코가 있었다면, 브라질 이민 1세대에는 의류산업이 있었다. 도시에서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한인 여성들은 옷가지를 파는 방문 행상에 뛰어들었다. 이민 보따리에서 꺼낸 옷은 브라질 서민들의 옷보다 질이 좋아 인기가 있었다. 1971년엔 동대문시장 등지에서 의류업에 종사했던 기술자들이 이민자로 합류했다. 재봉틀을 몇 대 두고 봉제 하청 일을 하거나 천을 떼다 옷을 만들어 팔았다. 행상과 봉제업이 시너지를 내며 한인들은 자체 생산 및 판매망을 갖추게 됐다. 1980년대 후반 브라질 패션의 메카인 상파울루 봉헤찌로 중심부에 한인 종합의류센터가 들어선 건 상징적 사건이었다. 2010년엔 봉헤찌로 지역이 아예 한인타운으로 공식 지정됐다.
국가기록원이 2016년 펴낸 『기록으로 보는 재외 한인의 역사』 아메리카 편에 따르면 한인들은 브라질 중·고가 의류 생산의 50%를 차지하면서 브라질이 세계 패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한인 의류업 종사자는 3만여 명에 그치지만 직·간접적으로 고용하는 현지 인력은 20만 명에 달했다. 브라질 이민이 성공적인 역사로 불리는 이유다. 한때 브라질 재외동포의 90%가 의류업에 종사했지만, 이제는 직업군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브라질 이민 60주년, 이민 1.5세대와 2세대들이 써 가는 새로운 성공의 역사를 응원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2.07 빌드업 축구
빌드업(Build-up)을 직역하면 건축물 같은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을 뜻한다. 축구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우리 진영 최후방에서부터 팀 동료에게 공을 정확히 연결하며 적진으로 나아가는 공격의 기초 단계를 뜻한다. 공을 침착하게 차근차근 전진시킨다는 점에서 원래 뜻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반면에 빌드업 과정 없이 공을 단순히 멀리 걷어내기만 하면 공 소유권을 지키기 어렵고, 경기를 주도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강팀들은 후방에서부터 치밀하게 빌드업을 해나가는 게 기본 전술이다. 빌드업 축구의 원조 격으로 불리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브라질·독일 같은 전통적인 강팀 대다수가 안정적인 빌드업을 바탕으로 공격에 착수한다. 골키퍼들조차 수 미터 앞에서 상대 공격수의 압박을 받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공을 걷어내지 않고 가까이 있는 동료를 찾아 정확하게 패스하는 식이다.
‘빌드업 축구’가 정식 전술용어는 아니다. 빌드업이 현대축구 전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한국으로 데려온 김판곤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전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 선임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공격 전개(빌드업)라는 표현이 어떻게 그 감독의 전술이라고 할 수 있겠나”라며 “빌드업 축구로 전술을 못 박는 건 감독의 철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빌드업 축구’라고 지칭하며 찬사를 보낸 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기 내용 때문이다. 하프라인 아래에 진을 친 채 온몸을 던져 상대의 슛을 육탄방어하는 대신, 브라질·포르투갈·우루과이 같은 강팀을 만나서도 물러서지 않고 주도권 대결을 펼치는 모습은 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6일 새벽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서 4대1로 크게 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과정에 집중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 국민이 적지 않았다. 결과 이상으로 과정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 프로게이머 김혁규의 한 마디는 이번 월드컵 기간 부상을 딛고 싸운 한국 대표팀의 투혼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과정을 향한, 빌드업을 향한 한국 축구의 진심이 꺾이지 않길 바란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12.08 벤투 놀라운 과거...'2002년 한국' 축하해준 포르투갈 유일 선수
파울루 벤투(53·포르투갈)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어린 시절 레스토랑을 운영한 부모님을 도와 서빙 일을 종종 했다. 자국 포르투갈 언론과 인터뷰하며 밝힌 바에 따르면 꽤 싹싹하고 친절해 곧잘 팁을 챙기는 웨이터였다고 한다.
선수 시절에도 비슷했던 것 같다. 포르투갈이 2002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에 0대 1로 패해 조기 탈락했을 때 벤투는 주전 미드필더로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패배의 충격 탓에 선수 대부분이 경기 후 인터뷰를 거부했는데, 유일하게 벤투가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괴롭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16강에 오른) 한국과 미국을 축하해주는 일뿐”이라며 “두 나라 모두 우리보다 강했다”고 패배를 겸허히 인정했다.
지도자로 새 출발 한 이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가슴 속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 놓지 않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언론과도 줄곧 대립각을 세웠다. 선수 시절 뛰었던 스포르팅(포르투갈)에서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포르투갈 대표팀, 크루제이루(브라질), 올림피아코스(그리스), 충칭 리판(중국)을 거쳐 지난 2018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는 곳마다 ‘폐쇄적’ ‘독선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전술과 선수 기용에 대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10년 전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던 시절, 똑같은 비판에 시달리자 벤투 감독은 “나는 선수들에게 4-3-3 포메이션이 좋은지, 또는 4-4-2가 나을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스테이크 주문을 받는 건 가능하다. 선수들에게 웰던 또는 미디엄-레어를 마음대로 고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에 빗대 ‘감독은 전술을 세우고 선수는 실행한다’는 역할론을 강조했다. 감독은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까지 지는 자리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달은 결과일 것이다.
카타르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벤투 감독은 안팎으로 지도력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벤투 감독이 이끈 한국은 2010년 남아공 대회 이후 12년 만의 원정 16강행을 이뤄내며 지난 시간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벤투가 옳았다. 결과로 입증하고 멋있게 떠나는 그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송지훈 스포츠부 차장
12.09(금) 경찰관기동대
서울경찰청 산하에는 65개 경찰관기동대가 있다. 1개 부대는 3개 제대로 편제된다. 경찰관기동대장은 11개 경찰 계급에서 6번째인 경정급이 맡는다. 제대장은 바로 아래인 경감급이다.
순경으로 들어온 신임 경찰관은 1~2년간 기동대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 경위로 임관하는 경찰관도 근무 순위 명부에 따라 1년간 의무복무한다. 기동대가 기피 부서로 인식되면서 근무 희망자만으로는 기동대를 채울 수 없어서다. 서울의 경우 과거엔 인사 때마다 60~70명씩 차출됐지만 최근엔 200명을 넘어서고 있다. 경찰관기동대 운영규칙에 따르면 각 기동대는 총 96명이 정원이다. 서울은 현원이 80명 선이다.
기동대를 꺼리는 건 근무 자체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7일 서울에서 8개 부대가 충북 단양에 내려갔다. 민주노총 화물연대가 시멘트 공장이 몰려있는 단양에서 총력 투쟁에 나서면서다. 경찰청이 하루 전 내린 결정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8도를 오가는 게 기동대다. 기동대 생활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기동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주말에 주로 열리는) 집회·시위 관리다. 경찰관기동대 운영규칙상 ‘지역 내 다중운집 행사 관련 혼잡 교통 및 안전 관리’를 지원근무하기도 한다. 지난 10월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세계불꽃축제와 이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월드컵 거리 응원전에도 기동대가 투입된 배경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지역의 대학 축제부터 유명 가수 콘서트장까지 기동대 배치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주최가 있는 행사의 안전관리는 수익자 부담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기동대는 한정된 공공 자원이다. 모든 다중 인파 운집 장소에 경찰이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년에 군 복무를 대체하는 의경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면 전체 기동대 숫자도 변동이 불가피하다. 의경 3명을 경찰관 1명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2001년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벌어진 불꽃놀이 압사 사건(11명 사망, 247명 부상)을 계기로 경비업법을 개정해 각종 행사에서 민간 경비원과 경찰, 공무원이 함께 안전을 유지하고 있다. 경찰청도 앞으로 민간 경비원을 육성하는 경비업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한다. 기동대는 수퍼맨이 아니다.
위문희 사회부 기자
12.12(월) 한국 나이
신문에선 한 인물을 표기할 때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뺀 나이, ‘신문 나이’를 쓴다. ‘연 나이’라고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고 1월 1일 떡국 한 그릇과 함께 나이를 먹는 한국식 ‘세는 나이’나 태어난 월까지 고려한 ‘만 나이’와는 다르다.
왜 정확한 나이나 아예 한국 나이가 아닌 신문 나이를 쓰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추정해 보면, 출생연도를 알면 어느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지, 유명 인사라면 누구와 동기인지 등을 계산하는 데 편리하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생’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생일까지 따져 묻는 것보다는 덜 미안했다.
나이 사용을 명확하게 규정한 민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내년 6월부터 모두가 한 살 줄여 말할 수 있게 됐다. 이를 계기로 새삼 한국식 나이에 대한 고찰이 이어지고 있다. 정리해 보면, 그동안 총 세 종류의 나이를 써왔다. 해외에서 신기해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복잡하긴 하다.
사실 지금도 공식 문서에서 한국 나이를 쓸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선 그 누구도 만 나이를 쓰지 않는다. 10대 K팝 아이돌도 자기소개할 때 대체로 한국 나이로 말한다. 해외 멤버까지 언니·오빠·막내 등으로 서열을 정리하고, 그룹의 최연장자가 리더를 맡는 건 관행이다. 해외 팬들이 한국식 나이 계산기까지 만드는 배경이다.
우리는 왜 이리 불편한 나이 관습법을 고집해 왔을까. 아마 사회에 팽배한 나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나이는 권한을 주거나 임무를 부여하는 근거가 돼 왔다. ‘나잇값을 못한다’와 같은 표현은 나이를 먹으면 지혜로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다. “너 몇 살이야” 공격을 “나이가 벼슬이냐”로 받아 싸우는 곳은 지구상에 대한민국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나이를 확인하지 못하면, 관계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또 사적 모임에선 여전히 나이 많은 것이 유리하다. 연장자는 상석에 앉고, 막내는 수저를 세팅한다.
만 나이로 통일했다고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내년 1월 1일에도 ‘한 살 더 먹었다’는 한탄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이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는 되는 것 같다. 우선 나부터 나이 좀 그만 캐물어야겠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12.13 셧다운
2013년 10월 1일 미국 연방정부가 멈춰섰다. 예산안 처리 기한인 전날 자정까지 미 의회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다. ‘오바마 케어(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건강보험 개혁)’를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이 불러온 재정 참사였다.
17년 만의 ‘셧다운(shutdown·정부 폐쇄)’에 80만 명 연방 공무원이 강제 무급휴가에 들어갔다. 국방·치안 등을 뺀 대부분 정부 업무가 중단됐다. 부채 한도 증액 논의마저 중단되면서 국가부도(디폴트) 가능성까지 불거졌다. 결국 디폴트 선언 직전인 10월 17일 민주당과 공화당은 잠정 예산안에 합의했다. 셧다운 기간은 17일에 불과했지만 피해는 컸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경제 피해 규모를 240억 달러(약 30조원)로 추산했다. 그해 미국 4분기 경제성장률을 0.6%포인트 주저앉히는 충격이었다.
한국판 셧다운은 준예산이다. 얌전한 명칭과 달리 파괴력은 셧다운 못지않다. 준예산 체제가 되면 정부 재량지출 대부분이 묶이게 된다. 공무원 월급이 나간다는 것 말고는 미국 셧다운과 별 차이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준예산에 필요한 경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이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조항 자체가 없다. 국채 발행, 차입 모두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의원내각제였던 1960년 내각 총사퇴, 의회 해산에 대비해 만든 제도라 대통령제에 맞지 않는다. 시행한 적도 없어 제도적 구멍이 커도 너무 크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준예산 가능성을 두고 “경제위기를 초래할 단초”라고 경고한 이유다.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여전히 힘겨루기 중이다. 과반 의석을 무기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감액 예산안을 단독 처리하겠다 선언했다. 여당인 국민의힘과 정부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중이다. 올해를 넘기면 바로 준예산이다. 예산 집행의 책임을 진 정부와 집권 여당을 굴복시키겠다는 야당의 오만, 절반도 안 되는 115석을 가지고 예산안을 그대로 밀어붙이겠다는 여당의 오기, 모두 문제다.
미국 정가에서 셧다운은 국가부도를 상징하는 공포의 단어다. 한국의 준예산도 마찬가지다. 경험한 적 없다고 해서 그 위험을 가볍게 봐선 안 된다. 경제가 벼랑 끝에 있는 지금은 더 그렇다.
조현숙 경제부 차장
12.14 호날두
호날두는 설명이 필요 없는 수퍼스타다. 메시와 함께 21세기 축구를 양분했다. 한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만 5번 받았으니 그가 이룬 성취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스타도 여러 부류가 있는데 호날두는 소위 제 잘난 맛에 사는 유형이다. 행동만 봐도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본인이 주목받아야 한다. 잘하니까 파울을 많이 당하는데 본인도 많이 한다. 상대 선수를 조롱하는 일이 잦고,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사도 없이 떠난다. 올해 4월 리그 경기 후엔 사인을 요청하는 소년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 소년의 손엔 멍이 들었고, 휴대전화가 부서졌다.
팬만큼 안티도 많은 이유다. 한국에선 특히 그렇다. 별명부터 ‘날강두’다. 2019년 당시 소속팀이던 유벤투스와 K리그 올스타팀의 친선 경기가 있었다. 호날두 한 번 보겠다고 수만 명이 기다렸는데 그는 그라운드에 나서지 않았다. 45분 출전 조항이 계약에 포함돼 있었지만 끝내 외면했다.
분노의 핵심은 ‘노쇼’가 아니라 ‘노사과’였다. 그는 끝내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떠났다.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기다려준 한국 팬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가까운 시기에 꼭 다시 찾겠다.” 만약 호날두가 이렇게 말했다면 공을 잡을 때마다 ‘메시’를 외치는 관중의 비아냥까진 없었을 터다. 소년팬 폭행 사건 때는 사과를 하긴 했으나 사과문의 시작부터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였다. 소년의 부모에겐 “나는 끔찍한 가정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를 잃었다”는 황당한 변명도 늘어놨다.
묘하게 누군가가 오버랩된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했다가 1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김의겸 의원이다. 물증도, 검증도 없는 무차별 폭로를 던져놓고 ‘뭘 잘못했느냐’며 되레 따진다. 심지어 제보자가 거짓을 시인했음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질문은 국회의원의 의무’ ‘몸값을 높게 매긴다’ 같이 핵심을 비켜난 변명까지 똑 닮았다.
상식을 벗어난 뻔뻔함에 보는 사람은 피곤하고, 불쾌하다. 그래도 호날두나 김 의원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사과할 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과하기 싫은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12.15 올해의 단어
매년 연말이면 사전 출판사·학회 등에서 ‘올해의 단어’를 발표한다. 인터넷에서 사용된 빈도, 대중 투표,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력 등을 고려해 선정한다. 그해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키워드가 뽑힌다.
올해는 팬데믹과 전쟁,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고조된 핵위협, 북한 미사일 도발 등 녹록지 않은 사건들로 어느 때보다 암울한 단어가 선정됐다.
영국 콜린스사전은 ‘퍼머크라이시스’(permanent+crisis, 영구적 위기)를 뽑았다. 장기간에 걸친 불안정과 불안이란 의미다. 콜린스는 “2022년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끔찍한 해였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사회 지도층의 뻔뻔함과 이기심을 지적한 용어도 선정됐다. 미국 미리엄웹스터사전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제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선동하는 행위’라는 뜻의 ‘가스라이팅’을 골랐다. 의사들이 여성이나 소수인종의 질병을 무시하는 행위,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없이 “기분 나빴다면 유감”이라 표현하는 것 등을 가스라이팅의 한 예라 설명했다.
한국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과이불개(過而不改·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잘못)’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정형화된 언행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영국 옥스퍼드사전은 불안과 피로에 지친 일상을 묘사한 단어를 골랐다. 사회 규범이나 기대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나태하고 방종한 행동 유형을 의미하는 ‘고블린(Goblin·덩치가 작고 사악한 도깨비) 모드’다. 성취를 위해 열정을 쏟는 대신 ‘포기하면 편해’ 식의 무기력한 태도를 말한다.
올해의 단어들로 되돌아본 2022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위기 속에 이기적인 지도층의 뻔뻔함을 보다 지친 우리’쯤으로 요약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내년 역시 위기가 이어져 경기침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이코노미스트, ‘2023 대전망’)
긴 위기에 맞설 힘은 어디서 얻을까. 지난 10월 광산 지하갱도에 갇혔다가 221시간 만에 생환한 박정하 광부는 “‘죽지 않는다, 구조대가 올 거다’ 믿었더니 버틸 힘이 생겼고 기적이 일어났다”며 “끝까지 희망을 붙잡는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연말연시, 모두가 희망으로 버티며 기적을 맞이했으면 한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12.16(금) 유포리아
‘유포리아(Euphoria)’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마약·성·범죄 등 일탈에 물든 10대 청소년들의 사랑과 우정을 적나라하게 다룬 히트작이다. 2019년 시즌1 방영 이후 ‘케이블 채널 HBO 내 시청자 수 역대 2위’ ‘2020년대 트위터 언급 1위’ 등의 기록을 세웠다. 동명의 이스라엘 드라마가 원작인데, 제목인 유포리아는 ‘행복감, 다행감’을 뜻하는 정신분석학 용어다.
전문가들은 마약이 주는 일시적 쾌락처럼 어딘가 불안하거나 어긋난 맥락에서의 인위적 행복감이 유포리아라고 설명한다. 미국정신분석학회는 유포리아를 ‘더 이상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 행복감이나 기쁨의 경험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인한 결과’로 정의했다. 시쳇말로 ‘뽕 맞은’ 기분. 유쾌하고 의기양양하지만, 결코 편안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환희가 바로 유포리아다.
최근에는 한국 정치에서 진영 극단주의 매몰을 비판하는 말로 유포리아가 쓰였다. 지난 9일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지층 환호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유포리아 상태에 가 있다”며 “엄청나게 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고 지금 뭔가 꿈속에서 헤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엮은 ‘청담동 술자리 의혹’이 허위로 드러났는데도, 의혹 제기자인 김의겸 의원이 사과는커녕 “계엄령 상태”를 운운한 걸 비판한 말이다.
유포리아의 끝은 뭘까. 경제학 이론이 힌트일 수 있다. 앞서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필립 민스키(Hyman Philip Minsky)가 투기적 투자 거품과 금융 위기 간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유포리아 개념을 차용했다. 버블 붕괴 직전 가장 위험한 과열 순간에 사람들의 투기적 행복감이 절정에 달한다는 ‘민스키 모델’이다. 민스키는 ‘열광-탐욕’의 상승 곡선 끝에 광적 행복인 유포리아가 온다고 봤다.
이후 출렁이며 곤두박질치는 하락선 위에 ‘현실 부정-공포-좌절’을 차례로 배치했다. 10대 일탈이나 팬덤 정치의 후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방탄소년단(BTS) 정국은 솔로곡 ‘유포리아’ 말미에 ‘꿈을 건너서 수풀 너머로 선명해지는 그 곳으로 가’자고 노래했다. 유포리아 대신, 정상 행복을 뜻하는 ‘유사이미아(Euthymia)’가 절실한 때다.
심새롬 정치부 기자
12.19(월) LTV·DSR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왕 영공은 평소 총애하는 여인에게 남장을 시키고 감상하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왕이 남장 여인을 좋아하자 이를 질투한 궁중 여인들이 너도나도 남장했고 소문이 퍼지자 일반 백성 중에서도 남장 여인이 늘어났다. 이에 놀란 영공이 ‘궁 밖 남장 여인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사정은 여전했다. 영공이 노하자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재상 안영이 진언했다. “궁 안의 여인에겐 남장을 허용하며 궁 밖의 여인에게는 못하게 하니 ‘밖에는 양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으니 궁 안부터 단속해야 한다.” 겉은 훌륭해 보이지만, 속은 변변찮다는 뜻의 양두구육(羊頭狗肉) 유래다.
정부의 대출 규제 완화가 속도를 내고 있다. 규제지역 해제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은 최대 70%, 총부채상환비율(DTI)도 60%까지 확대됐다. 이달 1일부터 15억원 초과 아파트도 주택담보대출(무주택자·1주택자)을 받을 수 있고, 전 정권에서 적폐 대상으로 봤던 다주택자·임대사업자에 대한 대출 규제 완화도 검토하고 있다.
잇따른 대출 한도 완화 조치에 숨통이 트일 법도 한데 시장 반응은 시큰둥하다. 대출 규제 중심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가 있어서다. LTV가 집값을 기준으로 대출 한도를 정한다면 DSR은 소득이 기준이다. DTI도 소득을 기준 삼지만, DSR이 더 엄격하다. 이들 규제는 소득을 기준으로 빚의 상한선을 정한다.
이때 빚은 크게 담보대출 원리금과 기타대출(학자금·마이너스·자동차 할부·카드론 등)로 나뉜다. DTI는 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액과 기타 대출 이자 상환액을 빚으로 본다. DSR은 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액은 물론 기타 대출의 원리금까지 모두 빚으로 본다. 소득이 기준인 만큼 적게 벌수록 불리하다. 연 소득이 1억원인 고소득자가 14억원에 아파트를 산다면 이전에는 4억6000만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지만, 이달부터 LTV 50%를 적용하면 7억원까지 받을 수 있다. 같은 조건으로 연 소득 5000만원이라면 LTV 50%를 적용해도 4억6000만원뿐이다. 이미 DSR 40% 한도가 꽉 차서다.
번 만큼만 빚을 지라는 취지는 맞다. 다만 대출 규제 푼다며 생색을 내고 실제로는 DSR로 발목 잡는 양두구육 정책은 정부에 대한 신뢰에 흠집을 낸다.
최현주 경제부 기자
12.20 포괄적 성교육
포괄적 성교육은 성에 대한 인지·감성·신체·사회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이다. 유네스코 ‘국제 성교육 가이드’(2018)의 포괄적 성교육 커리큘럼에는 관계, 가치관·권리·문화·섹슈얼리티, 젠더의 이해, 폭력과 안전, 건강과 복지, 인체와 발달, 성적 행동, 건강한 성과 생식 등이 포함된다. 순결 교육이나 낙태 예방 교육처럼 성행위의 부정적 결과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건강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삶의 기술과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이다. 과학과 팩트에 기반을 둔 내용을 연령과 발달수준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이자 표준이기도 하다. 실제로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한 곳에서 성행위 시작 연령이 늦춰지고, 위험한 성적 행동이 줄어드는 등 성과가 나타났다.(유네스코, 2016)
한국에서는 이달 초 작고한 노옥희 울산광역시교육감이 지난해 국내 최초로 공교육 과정에 도입했다. 2020년 울산의 한 초등교사가 1학년 학생에게 속옷 빨래를 과제로 내고, 과제 인증 사진에 성희롱 댓글을 단 사건이 도입 계기가 됐다. 울산의 포괄적 성교육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노 교육감은 학부모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올해 재선에 성공했다.
최근엔 포괄적 성교육 커리큘럼이 반영된 책 『배정원 교수의 십 대를 위한 자존감 성교육』도 출간됐다. 사춘기 신체에 대한 변화나 임신·피임뿐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법, 이별하는 법, 성평등과 성소수자, 또래 압력이나 성폭력에 맞서 자신을 존중하는 법까지 두루 담겼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제대로 된 성교육은 결국 인권·자존감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성에 대해 잘 알면 타인과 관계를 잘 맺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국제적 흐름과는 반대로 갈 모양이다.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는 최근 ‘성평등’과 ‘성소수자’ ‘섹슈얼리티’ 용어가 삭제된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본을 통과시켰다.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이 다른 소수자들을 배제한 셈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처럼 “내년부터 청년(18~25세) 콘돔 무료”라 선언하진 않더라도,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성교육은 받도록 해주는 게 국가의 책무 아닐까.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2.21 메시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쥔 리오넬 메시(35)의 ‘축구 황제’ 대관식은 수십 년에 걸친 인간드라마 속 절정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메시가 가진 천부적 재능만큼이나, 그가 극복해온 역경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는 11살 때 성장호르몬 결핍증 진단을 받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철강노동자와 파트타임 청소부로 일하던 그의 부모에게 월 100달러가 넘는 호르몬 주사 치료비는 벅찼다. 메시가 뛰던 유소년팀도 치료비 부담에 난색을 보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팀이 FC 바르셀로나였다. 약값을 대는 조건으로 2000년 그를 영입했다. 당시 메시의 재능에 매료된 구단 스카우터가 즉석에서 냅킨에 서명해 계약서를 꾸몄다. ‘냅킨 계약서’의 도박은 성공이었다. 꾸준한 치료로 170㎝까지 자란 메시는 2004년 1군에 데뷔해 17년간 뛰며 말 그대로 전설이 됐다.
국가대표팀 경력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네 번의 월드컵과 코파아메리카에서 번번이 우승을 놓치자, 극성팬들은 메시가 아르헨티나보다 바르셀로나를 더 사랑한다고 비난했다. 메시의 외할아버지조차 2014년 월드컵 직후 방송에서 “스페인에서 보여주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2016년 코파아메리카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메시는 결국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전 국민의 광적인 만류에 2개월 만에 은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그런 메시에게 이번 월드컵은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대표팀에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자신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운 ‘메시 키즈’가 적지 않았다. 사우디 전의 충격적 패배로 출발도 나빴다. 그러나 메시는 동료들을 하나로 묶어 아르헨티나를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왜소한 몸에 질병을 앓던 가난한 소년에서 ‘축구의 신(神)’이 된 그를 향해 아르헨티나 국민은 “메시 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10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 40%에 이르는 빈곤율 등 경제난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메시가 준 선물이 우리 대표팀이 그랬던 것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이길 바란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12.22 FIFA컵
아르헨티나가 1986년 이후 36년 만에 되찾아온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우승 트로피의 명칭은 FIFA컵이다. 1930년 우루과이 초대 월드컵부터 1970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40년간 활용한 쥘리메컵에 이은 두 번째 우승 트로피다. 1974년 독일 월드컵부터 시작해 오는 2038년 대회까지 사용 기한이 정해져 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축구 트로피답게 한 세기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며 다채로운 스토리를 쌓았다. 전신인 쥘리메컵은 프랑스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가 디자인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가 성찬배를 떠받치는 형상으로, 월드컵 창시자인 쥘 리메 전 FIFA 회장의 이름을 땄다. 8각형 받침대는 2㎏ 청금석으로, 성찬배를 포함한 상단부는 1.8㎏ 순금으로 제작했다. 높이는 38㎝다.
1938년 프랑스 대회 우승 이후 이탈리아축구협회가 나치로부터 지키기 위해 낡은 구두 상자에 숨겨 보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66년 런던 대회를 앞두고는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전시하던 중 도난당해 일주일 만에 되찾은 해프닝도 있었다. 브라질이 1970년 대회에서 통산 3회 우승을 달성하며 영구 보관할 권리를 확보했지만 1983년 거듭 도난당한 뒤 종적을 감췄다.
쥘리메컵의 후신인 FIFA컵은 이탈리아의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가의 작품이다. 지름 15㎝의 녹색 공작석 받침대 위에 두 명의 선수가 지구를 떠받치는 형상이다. 높이 36㎝, 무게 4.97㎏이며, 쥘리메컵과 달리 18K 도금으로 제작했다. 우승국과 연도를 받침대 아래에 새길 수 있다.
쥘리메컵 도난 사건을 계기로 우승 횟수와 상관없이 FIFA가 영구 보존한다. 결승전 시상식에 잠깐 진품을 꺼내 활용한 뒤 행사를 마치면 우승국에 모조품을 전달한다. FIFA컵 이후부터는 우승을 경험한 선수 또는 해당 국가 수장만 손댈 수 있다는 까다로운 규칙이 만들어졌다. 5만 달러(약 6500만원)를 들인 트로피는 현재 2000만 달러(258억원)를 호가한다.
FIFA컵의 진정한 가치는 4년에 한 번, 오직 월드컵 우승국만 품을 수 있다는 희소성에서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35·파리생제르맹)가 우승 직후 SNS 계정에 FIFA컵을 품에 안고 마테차를 즐기는 사진을 올린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의 매력은 언제나 뜨겁고 또 치명적이다.
송지훈 스포츠부 차장
12.23(금) 어린이 보호구역
스쿨존(어린이 보호구역)은 어린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95년 도입됐다. 학교 정문에서 반경 300m(최대 500m) 이내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전국에 1만6698곳이 스쿨존으로 지정돼있다. 유치원(6923곳), 초등학교(6282곳), 어린이집(3211곳), 특수·외국인학교(191곳), 학원(91곳) 등의 순이다. 스쿨존 안에서는 주차는 물론 정차할 수 없고, 시속 30㎞ 이하로 달려야 한다.
지난해 10월부터 스쿨존 내 주·정차 전면금지가 시행되면서 경찰청 전화기는 불이 났다. 스쿨존 내 거주자 우선주차 구역도 폐지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기존 거주자 우선주차 구역 배정자들은 “시골에서 엄마가 김장김치를 담가 보내줬는데 어떻게 옮기란 말이냐”부터 “택배기사인데, 손수레로 가구마다 택배를 옮겨야 하느냐”고 민원을 넣었다. 당연히 어린이는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일’이 되면 이중적인 잣대를 보이는 것이다.
스쿨존 속도 제한도 마찬가지다. 왕복 8차로도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으면 주행 속도는 시속 30㎞로 제한된다. 운전자들의 불만이 잇따르며 등하교 시간대를 제외하고 속도 제한을 시속 40㎞로 완화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야간에만 50㎞로 올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경찰의 속이 편한 건 아니다. 덜렁 속도를 높였다가 사고가 나면 뒷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등학교 후문 부근 스쿨존에서 9살 난 초등학생이 차에 치어 숨졌다. 스쿨존 대부분이 골목길로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안 된 곳이 많다. 사고가 난 언북초 후문도 일방통행로를 만들어 달라는 학부모들 요구가 있었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 집을 한참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한 차로가 3m, 골목길에선 2.75m까지 배정된다고 한다. 폭이 4~5m인 언북초 후문은 일방통행으로 하면 2.75m는 차도로 쓰고 2.25m는 인도로 쓰는 게 가능해진다. 강남구는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언북초 인근 도로를 일방통행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운전자, 경찰, 구청을 원망하기보다 제가 왜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았는지… 이 후회를 가장 많이 한다”며 자신을 가장 크게 자책하는 어머니의 말이 가슴 아플 뿐이다.
위문희 사회부 기자
12.26(월) K팝의 이상한 정산
마이너스 417만2461원.
걸그룹 멤버는 아니지만, ‘이달의 소녀’ 소속사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의 정산 공식을 내게 적용해 본 결과다. 지난해 기준, 중앙일보에서 받을 돈은 없고 오히려 회사에 빚을 지게 된다. 전체 매출액의 30%를 받지만 제작비의 50%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원 수대로 가져갈 몫을 정리하면 모두 공평하게 빚을 지게 된다. 이 이상한 계약대로 할 경우 어지간한 매출을 올리는 기업에선 집으로 돈을 가져가는 직원이 나오긴 힘들다.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는 이런 조건의 계약서를 10대 후반의 멤버 12명에게 사인하게 했다. 2018년 완전체로 데뷔한 이달의 소녀는 그동안 단체 음반 4개, 개인 음반 12개 등을 내면서 끊임없이 활동해왔다. 이제서야 불만이 터져 나온 게 신기할 정도다. 문제를 제기하고 탈퇴한 멤버 츄(김지우)가 그나마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대중적 인기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11명에겐 어떤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당장 다음 달로 예정됐던 컴백 계획은 무기한 연기됐다. 활동이 중단되면 연쇄적으로 매출이 줄고 이들의 정산 통장이 플러스로 돌아서는 날도 점점 멀어져 간다는 의미다.
K팝 산업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바로 이런 불투명한 시스템이다. 혹자는 데뷔 이후 몇 년간 ‘열정페이’를 견디는 것을 근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맑은 음악과 완벽한 군무, 아름다운 뮤직비디오를 보다가도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생긴다. 일부 기획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음악 이면에 누군가의 고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잠재적 불안이 존재한다.
18년차 베테랑 방송인이자 가수인 이승기와 전 소속사의 분쟁에서도 주먹구구식 정산 시스템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일할 때 어떤 대가를 받는지, 비용이 왜 발생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와 갈등을 빚은 전 소속사 후크엔터테인먼트는 2002년 설립 이래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 온 대표적인 매니지먼트사다. 지난해 말엔 코스닥 상장사인 초록뱀미디어가 거액(440억원)을 투자해 100% 자회사로 편입되기도 했다. 이 정도 규모의 기업에서조차 기초적인 투명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고의이건 미숙함이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문제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12.27 한국판 서브프라임의 그림자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에 돈을 걸었어. 우리가 옳으면 사람들은 집을 잃고 직장도 잃고 은퇴 자금도 잃어. 실업률이 1%포인트 증가하면 4만 명이 죽는다는 거 알고 있나.”
영화 ‘빅쇼트’(2016)의 한 대목이다.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간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전말을 다뤘다. 미국 부동산·금융 시장 붕괴에 베팅한 ‘초짜’ 펀드사 대표 찰리와 제이미가 큰돈을 손에 쥐게 됐다며 기뻐하자, 이들을 도운 전직 트레이너 벤 리커트는 이렇게 소리친다.
한국 부동산 시장이 한없이 미끄러지는 중이다. 바닥까지 아직 닿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을 꺼트린 금리가 어디까지 더 오를지, 높은 금리가 얼마나 더 갈지 아직 안갯속이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방아쇠’ 역할을 한 것도 금리였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연 1%까지 내렸던 정책금리를 5.25%까지 끌어올렸다. 치솟는 물가 때문이었다. 초저금리에 가려져 있던 주택대출 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금융시장 붕괴로 이어졌다. 제대로 된 직장도, 소득도 없는 사람에게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을 해주고 집을 사라 부추긴 게 화근이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판박이다. 물가 상승→금리 인상→부동산 가격 하락. 차분히 단계를 밟아가는 중이다. 다른 점도 있다. 한국의 가계부채 상황이다. 2007년 3분기 68.2%였던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올해 3분기 105.2%로 튀어 올랐다(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 한해 국가 전체가 번 돈을 다 쏟아부어도 가계빚을 다 갚지 못한단 의미다.
그런 와중 정부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같은 대출규제가 있어 은행이 연달아 무너지는 ‘시스템 리스크’ 가능성은 작다고 거듭 강조한다. ‘영끌’해서 산 집값이 반 토막 나든, 갭투자 사기로 전세 보증금을 날리든 은행은 오른 금리에 맞춰 또박또박 대출이자와 원금을 걷어갈 테니 문제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다시 ‘빅쇼트’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위기를 예측했던 헤지펀드 매니저 마크 바움의 대사다. “결국 사기는 들통나고 실패한다. 종국엔 일반 국민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늘 그래왔으니까.”
조현숙 경제부 차장
12.28 연금개혁 속도전
시중의 그 어떤 연금 상품도 국민연금보다 실질 수익이 높은 건 없다. 일단 물가상승률을 반영한다. 가입 당시가 아니라 수급 시점에 환산한 소득을 기준으로 연금을 준다. 수익비도 좋다. 2.2 정도인데 보험료 대비 받는 연금이 2배 이상이란 뜻이다. 수익비는 나이가 많을수록 높다. 1988년 국민연금을 도입할 땐 많은 가입자가 본인과 부모의 노후를 함께 책임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기엔 보험료를 적게 내고, 차츰 보험료율을 높여가도록 설계했다. 실제 3%로 시작한 보험료율은 1993년 6%, 1998년 9%로 올랐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경제성장, 연금재정 등을 고려해 보험료율을 높이는 건 연금 선진국이 보편적으로 쓰는 방식이다. 우리도 계획대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번번이 묻혔다. 표 계산이 중요한 정치권에서 ‘미래를 위해 더 내자’는 입바른 소리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렇게 24년이 지났다. 보험료율을 높여 부담을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이 기간 연금을 납부한 세대는 상대적으로 혜택을 본 셈이다.
예측대로면 국민연금 기금은 2057년 고갈된다. 곳간을 다 털어먹고 나면 그해 걷어서, 그해 지급하는 부과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때 근로 세대의 보험료율은 약 35%로 뛴다. 나는 9%를 내고 받는데, 내 자식은 4배를 내고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개혁의)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책 최고 책임자의 결연한 의지는 반갑다. 하지만 개혁의 각론은 지난한 작업이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령 시점, 연금 통합까지 복잡한 산식을 풀어야 한다. 논의가 길어질수록 이견은 늘고, 실타래는 꼬일 것이다. 2024년엔 총선도 있다. ‘더 내고, 더 받자’는 분위기로 흘러갈 여지가 충분하다.
다 할 수도 없지만, 다 할 필요도 없다. 다행히 보험료율 인상은 전문가 사이에도 큰 이견이 없다. 3%포인트만 올리면 기금 고갈을 8년가량 늦출 수 있다. 그만큼 미래 세대의 부담도 줄어든다. 현 정부가 보험료율 단계적 인상을 확정하고, 이후 시나리오만 내놔도 성공한 개혁으로 볼 만하다. 그러니 대통령 말대로 ‘이번 정부 말 또는 다음 정부 초’까지 갈 일이 아니다. ‘더 내자’고 설득할 용기만 있다면 내년에도 끝낼 수 있다. 개혁은 방향만큼 속도도 중요하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12.29 소셜미디어와 거리두기
“2024년이면 민주주의는 와해할 것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59)의 경고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의 반(反) 인권적 폭력성과 언론 탄압을 비판해온 그는 지난 9월 한국을 방문해 “민주주의를 지킬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2년 내 민주주의가 몰락할 거란 그의 예언엔 단서가 붙었다. ‘소셜미디어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이다. 그는 페이스북 등에서 가짜정보가 사실보다 6배 빠르게 퍼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가짜정보는 분노·혐오 감정을 증폭하고, 사실을 외면한 채 감정에 들끓게 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권력과 소셜미디어의 야합’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기존 언론사를 상대하지 않고 팬덤에 기반한 댓글부대를 이끈다고 했다. 정치인들은 사실 대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맹목적인 지지자들을 여론전의 무기로 활용한다.
레사는 소셜미디어가 지금처럼 작동할 경우, 민주적 절차로 민주주의가 종말을 맞을 거라 우려했다. 권력자 입맛대로 왜곡된 정보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민주적 선거로 독재자가 당선되고 다수결에 의해 파시즘이 도래한다는 얘기다. 지난 5월 필리핀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 대해 “기성 언론과 담쌓고 소셜미디어 여론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의 저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권력자가 더 크고 명백한 거짓말을 할수록 지지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을 입증하려 하고, 그 결과 잘못된 권력을 더욱 열성적으로 옹호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달콤한 거짓’이 ‘불편한 사실’을 무력화한 사례는 한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올 한해만도 거짓 정보로 상대를 공격하고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반성하지 않는 정치 권력자, 그들의 거짓과 뻔뻔함이 강력할수록 더욱 공고히 뭉치는 지지세력을 숱하게 봐왔다. 레사의 주장대로라면 한국에서도 민주주의의 종말이 걱정되는 요즘이다.
스나이더는 “참된 것과 매력적인 것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때 권위주의가 시작된다”고 했다. 새해엔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유혹을 떨쳐보면 어떨까. 소셜미디어와의 거리두기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12.30(금) 새해와 나이
윤석열 정부의 ‘만 나이 통일’에 국민적 공감이 모이고 있다. 해넘이를 앞두고 “내년에는 한 살 안 먹는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매년 꼬박꼬박 늙는 게 아쉬웠던 많은 이가 내심 기뻐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법제처는 지난 27일 사법 관계와 행정 분야에서 만 나이로 표시방식을 통일하는 내용의 민법·행정기본법 개정안을 내년 6월부터 시행하겠다고 공포했다.
법을 두 건이나 개정했으니 공무(公務) 체계가 대대적으로 변할까 싶기도 하지만 답은 ‘아니오’다. 무려 110년째 만 나이가 법제·행정상 표준 나이로 쓰이고 있어서다. 일제가 1912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에 ‘연령은 출생일부터 기산한다’고 공포한 게 시작이다. 1958년 제정된 현행 민법이 이를 그대로 따랐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도 동사무소·법원 사무나 부동산 거래 등 공무 처리 때 자신의 만 나이를 기재해왔다. 은행 등 금융거래나 병원 진료도 마찬가지다. 금융감독원은 27일 유관 협회 점검회의 결과 “이번 법 개정이 금융소비자에게 미칠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이번 법률안 개정은 조문 변화 자체보다도 국민에게 주는 ‘상징 입법’ 성격이 컸다. 법률을 두 건이나 바꾸고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을 노출함으로써 오랜 사회 관습인 ‘세는 나이’, 즉 한국식 나이 사용을 중단하자는 메시지를 강하게 남긴 것이다. 개정 전·후 법조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령계산에는 출생일을 산입한다’(민법 158조)를 ‘나이는 출생일을 산입하여 만 나이로 계산하고, 연수(年數)로 표시한다. 다만 1세에 이르지 아니한 경우에는 월수(月數)로 표시할 수 있다’로 아주 상세히 바꿔 기술한 정도다. 그러면서 혼인(18세)이나 유언(17세)을 할 수 있는 나이를 규정할 때는 ‘만’ 표기를 아예 없애버렸다.
새 기준을 세웠으니 굳이 ‘만’자를 거추장스럽게 달아 쓰지 않겠다는 취지다. 돌이켜보면 정부는 1962년 1월 1일 송요찬 내각수반이 “국민의 연령 계산을 만 나이로 통일한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국민 협조를 당부했다. 60년 만의 캠페인 성공 조짐인 셈이다. 가는 세월 잡을 수야 없겠지만, 새해에는 정부와 국민이 이렇게 함께 기분 좋은 일이 많으면 좋겠다.◎
심새롬 정치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