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雜事(세계사) 2022-2
◆10.11 DNA와 치아가 알려준 고대 전쟁의 비밀
2500년전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 전쟁서 활약한 용병의 존재
‘위대한 그리스’ 그린 역사가들이 지웠지만, 과학적 분석으로 밝혀
돈과 계약으로 산 평화는 영원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 일깨워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심금을 울리는 돌 조각이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8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위스 호수 도시 루체른에서 본 ‘빈사(瀕死)의 사자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조각은 1792년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16세를 마지막까지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傭兵) 786명을 기리기 위해 1824년 만들었다. 심장을 찔린 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사자의 압도적인 모습에는 스위스의 슬픈 과거가 비춰진다.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의 유서에는 “신의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후손이 용병으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난한 스위스인들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용병이었다.

▲그림=이철원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런 용병들이 전쟁 판도를 바꾸며 활약했다는 증거를 과학자들이 찾아냈다. 역사의 진실을 말해준 것은 유전자(DNA)와 치아 에나멜이었다. 미국·독일·오스트리아 국제 공동 연구진은 지난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논문에서 “기원전 두 차례에 걸쳐 고대 그리스 히메라에서 벌어진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전투에서 용병이 광범위하게 활약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상 통상으로 번영한 카르타고는 바다로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현재의 시칠리아에 있던 히메라는 카르타고의 영역 바로 옆에 있는 이 지역 유일의 그리스 도시였다.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침략했다. 이 전투에서 병력 5만의 그리스는 카르타고군 30만에 대승을 거뒀고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도 숨졌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위대한 그리스인의 승리’로 기록했다. 하지만 연구진이 최근 히메라 서쪽 집단 무덤에서 발굴된 이 시기 시신들을 DNA 분석한 결과는 전혀 달랐다. 군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몸에 박힌 창과 같은 폭력적 외상의 성인 남성 시신만을 조사하자 그중 3분의 2는 당시 현지인과 관련이 없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오늘날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불가리아인의 조상이었다. 이번 연구진은 작년에도 당시 전사한 히메라인 시신의 치아 분석을 통해 용병의 존재를 주장한 바 있다.
치아의 에나멜층은 사람이 10대 중반까지 살아온 기후 환경과 식생활에 따라 각기 조성이 다르다. 거꾸로 특정인의 치아 에나멜에서 스트론튬과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란 환경과 식습관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먼 곳에서 나고 자란 용병의 치아 에나멜층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 연구에서는 이번 연구와 마찬가지로 히메라군 시신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그리스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용병의 존재와 활약은 왜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을까.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고 밀집 대열을 이뤄 전진하는 중무장 보병 이른바 ‘호플리테스(hoplites)’는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까지 이어진 고대 그리스식 역사 서술의 핵심이다. 특히 호플리테스를 구성한 그리스 시민들은 직접 무장을 준비해 스스로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고귀한 존재로 그려졌다.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는 용병의 존재는 이런 영웅담의 순수성을 망치는 요소로 인식되면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재침공했다. 하밀카르의 손자 한니발 마고는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인근 도시를 모두 파괴했다. 히메라를 지키던 용맹한 용병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연구진은 또 다른 집단 무덤에서 2차 전쟁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의 시신만을 골라냈다. DNA와 치아 분석 결과 2차 전쟁에서 그리스인이 아닌 용병은 4분의 1로 줄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카르타고군이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2차 히메라 전쟁에서 대규모 용병을 동원했다고 본다. 누가 더 용병을 많이 썼느냐에 따라 전쟁 판도가 갈렸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왕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단은 혁명이 끝난 뒤 곧바로 프랑스 공화정과 계약을 맺는다. 이후 황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도 참전한다. 유럽 각국이 충실한 스위스 용병을 앞다퉈 고용하자 스위스 용병끼리 싸우는 동족상잔까지도 일어났다. 2500년 전의 그리스 땅에서 발굴된 시신들이, 스위스 용병들의 역사가 일깨워준다. 돈으로 맺어진 계약, 또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 어느 쪽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10-15 ‘1000년 족쇄’ 벗은 그녀들은 왜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나무로 만든 전족 모형(윗쪽)과 전족용 신발이다. 아랫쪽 사진은 19세기 후반 전족을 한 중국 여성(오른쪽)이 아동용 같은 작은 신발을 신고 불편하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 저자는 “전족에 대한 욕망은 남성들의 환상에서 시작됐다”며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유행은 그의 사회적 지옥을 결정짓는다”고 일갈했다. 글항아리 제공
1860년 중국의 항구도시 샤먼(廈門).
영국 선교사 존 맥고언 목사의 부인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웃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뛰어가니 어머니가 딸의 발을 조여 매고 있었다. 발을 헝겊으로 싸매 인위적으로 작게 만드는 전족(纏足)이었다.
맥고언 부인은 말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크게 화를 냈다. “전족은 우리가 과거부터 물려받은 기구한 운명”이라며 “만약 전족을 하지 않는다면 딸은 비웃음을 당하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강변했다. 충격을 받은 부인은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를 알렸다.
15년 뒤인 1875년 맥고언 목사는 이른바 ‘반(反)전족 운동’을 펼쳤다. 전족은 낡은 관습이고, 여성을 옭아맨다며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전족은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차츰 사라져 갔다. 물론 1999년에야 중국에 전족 신발을 생산하는 마지막 공장이 폐쇄됐을 정도로 그 고통의 역사는 길고 지난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초점을 맞춘 건 바로 이 시점부터다. 홍콩계 미국인인 그는 전족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되, 1000년 가까이 보편화됐던 전족 문화가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담담하게 추적한다.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신문이나 정부 문서, 서양인의 회고록 등을 두루 훑으며 퍼즐을 맞춰 간다.
전족은 참혹한 전통이지만, 반전족 운동이 성공한 배경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아편전쟁 후 문호를 개방한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세력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며 전족을 대표적인 중국의 악습으로 규정한 것이다. 반전족 운동에 앞장선 선교사들은 전족의 반대 개념으로 ‘천족(天足)’이란 신조어도 만들어낸다. “하느님이 준 자연스러운 발”이란 뜻으로 자신들의 기독교적 가치가 옳다는 의도다.
이 과정에서 전족에 반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행동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보기에 그들은 서양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대표적 중국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1858∼1927)는 1898년 상소문을 올려 전족을 국가에서 금지하길 촉구해 다른 지식인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족의 진짜 피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전족을 옹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작은 발이 아름답다는 그릇된 환상은 권력자였던 남성들이 만든 ‘에로티시즘’이라 정의했다. 옛 중국의 남성 문인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할 때 늘 애첩의 작은 발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양갓집 규수들도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소족회(小足會)’를 운영했을 정도다. 모든 게 남성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반 전족 운동 이후 여성들의 삶이다. 중국 명절인 청명절(淸明節)이면 정성껏 작은 발을 단장해 내보이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이들. 전족이 폐지되며 그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갑자기 전족을 없애자 이미 작아진 발은 기형적으로 변했다. 전족을 할 땐 힘들어도 걸을 수 있었지만 전족을 풀자 걷기 힘들 정도로 발이 뒤틀려 버려 더욱 고통을 받았다. 전족이란 관습도, 반전족 운동도 여성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인 ‘신데렐라의 자매들(Cinderella‘s Sisters)’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왕자는 예쁜 구두를 찾은 뒤 거기에 ‘발이 맞는’ 신데렐라를 찾아 헤맨다. 이젠 발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왕자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아야 할 때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0월 31일 100년前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 수립 … 21년 집권후 실각

▲1922년 10월 28일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운데 허리에 양손을 얹고 있는 남자)가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 모습. AP 연합뉴스
이탈리아의 첫 여성 총리이자 ‘여자 무솔리니’로 불리는 극우 성향의 조르자 멜로니 신임 총리가 지난 22일 취임했다. 1922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지 꼭 100년 만이다.
무솔리니는 1883년 사회주의자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던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전진)’ 편집장이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연합국 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반전을 주장하는 논조를 뒤집고 참전을 지지한다. 아반티에서 쫓겨나고 사회당과도 결별한 그는 좌파 언론인에서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전쟁은 연합국이 승리해 이탈리아는 승전국이 됐지만, 전후 보상에서 소외됐고 심각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불안하던 시기에 무솔리니는 1919년 ‘파시 디 콤바티멘토(전투단)’를 조직했다. 여기서 사용된 ‘묶음(단결)’을 뜻하는 ‘파쇼(fascio)’에서 파시즘이 유래했다.
1921년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개편해 총선에서 35석을 얻었고, 이듬해 사병 조직인 ‘검은 셔츠단’ 4만 명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가 10월 28일 로마에 입성하자 겁먹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총리직을 제의했고, 쿠데타에 성공한 무솔리니는 10월 31일 39세의 나이로 총리에 오르며 정권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말했다.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였다. 그의 선동적인 연설은 큰 힘을 발휘했고, 언론을 탄압하고 반대파를 모두 몰아내며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동맹을 맺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탈리아군은 전선에서 패배와 후퇴를 반복했고 급기야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두체(Duce·지도자)라 불리며 21년간 장기 집권했던 무솔리니는 곧바로 실각했다.
1945년 4월 28일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해외로 탈출하려다 파르티잔(빨치산)에 붙잡혀 총살당했고 시신은 훼손돼 로레토 광장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무솔리니의 죽음 이틀 뒤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두 독재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독일과 달리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이탈리아는 파시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11월 06일 황금 찾아 몰려든 이민자들이었지만 … 다양성 · 자유 · 관용이 넘쳐났다
‘골드러시 상징’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엔 거대한 고층 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동시에 다채로운 빅토리아풍 건축물이 줄지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1848년부터 유럽 · 중국인 대거 이주 ‘캘리포니아 드림’ 전진기지 … 은행 · 철도 등 들어서며 40년만에 ‘상전벽해’
1906년 대지진으로 ‘잿더미’ 됐다 재건, 랜드마크 금문교 건설 … 히피 문화 · 실리콘밸리 혁신 꽃피워
“어떤 사람은 계급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영웅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신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돈을 숭배한다.”
풍자소설 ‘도금시대’에서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1873년에서 시작해서 1893년까지 미국은 ‘골드러시’라는 이름으로 서부 개척이 활발해지는 동시에 급격한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농민적 청교도의 세상에서 자본주의 기업가의 나라로 변신,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발전의 열매는 소수에게는 달콤했으나 다수에게는 쓰디썼다.
탐욕스러운 부동산 회사들은 빚에 허덕이는 농민들한테서 닥치는 대로 땅을 몰수했고, 무자비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러운 공장에 몰아넣어서 개돼지처럼 부렸다. 샌프란시스코의 광적인 토지 투기에 놀란 사회사상가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을 통해 빈부 격차의 원인이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후대의 부동산 정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람이 처음 거주한 것은 약 5000년 전이다. 미국 원주민들이 작은 촌락을 이루어 살아가던 이 땅에 유럽인이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769년 스페인 탐험대부터다. 1776년 스페인 정복자는 이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할 때 넘겨줬다. 183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인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날 무렵, 인구 1000명이 거주하는 황무지는 미국 영토로 편입됐고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얻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해 만에 인구가 2만5000명으로 불어났고, 그다음 해에는 10만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항구에 내린 후, 배를 버리고 선장과 선원까지 모조리 황금을 찾아서 황야로 떠났다. 배들은 방치돼 썩어 가다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1859년 은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밀집했다. 트웨인은 말했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이 도시는 장차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될 것이다.”
예언대로였다. 바다 건너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직접 건너오고, 중국에서 모집한 노동자들이 밀려와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다국어 도시로 변해 갔다. 이민자 중에는 청바지의 발명자인 리바이 스트라우스와 초콜릿 제조업자인 도밍고 기라델리도 있었다.
‘운명의 딸’에서 이사벨 아옌데는 엘리사의 삶을 통해서 여성 이민자의 삶을 조명한다. ‘영혼의 집’에 나오는 클라라의 딸인 그녀는 골드러시에 홀려 캘리포니아로 떠난 애인 호아킨을 찾아 밀항을 감행한다. 중국인 의사 타오치엔의 도움을 받아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녀는 남자에 얽매인 수동적 운명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회복한다. “난 남자가 벌어다 준 돈으로는 절대 살지 않을 거야.”
넘치는 황금을 노려 은행이 문을 열고, 항구와 철도가 들어서면서 도시 꼴이 갖추어졌다. 1870년엔 세계 최대급 도시공원인 골든게이트가 계획됐다. 1873년 해안가 항구와 내륙의 언덕을 잇는 트램이 세계 최초로 설치돼 사람을 실어날랐고, 태평양 연안을 방어하고 호령하는 미국의 핵심 군사 기지가 들어섰다. 이 모든 일이 4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그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골드러시를 미국의 타락으로 보고 도덕적으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운 좋은 사람이 운 없는 사람들을 마구 부리는 수단을 얻는다니! 그게 사업이라니! 나는 직업의 부도덕성이 골드러시보다 더 놀랍게 발달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금 캐는 사람은 정직한 노동자의 적이다. 금을 캐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마도 열심히 일한다.”
1906년 물질에 홀린 마음에 대한 징벌처럼 재앙이 닥쳐왔다.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치면서 엄청난 화재를 일으켜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레베카 솔닛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이 놀랍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골든게이트에 모여서 텐트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고 밤마다 모여서 서로를 위로했다. 재난이 우애와 사랑, 협력과 연대를 낳는다. 화재 후 도시는 빠르게 재건됐고,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37년 도시의 상징인 금문교도 건설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절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금문교(골든게이트브리지). 게티이미지뱅크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 드림, 즉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낙원이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의 전진기지였다. 한적한 바닷가 황무지에서 순식간에 황금이 넘쳐나는 대도시로 변신한 샌프란시스코는 다양성이 넘치고 배타성은 적었다. 모두 황금에만 정신이 팔려 나머지엔 무신경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관용과 자유, 도전과 낭만, 공생과 평화가 이 도시의 정신적 기풍을 이루었다. 이 도시에서는 늘 다양성이 공존하고 차이가 존중받았다.
뉴욕의 타락과 허영에 염증을 느낀 펄떡이는 영혼들이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에 와서 가식을 벗어던지고 표현의 자유를 만끽했다. 비트 문학이 시작되고, 히피 문화가 꽃피우고, 성 소수자들의 아지트가 생겨나고, 사이키델릭 음악이 탄생했다. 또 앨커트래즈섬을 점거함으로써 현대 미국 원주민의 저항이 일어선 곳이기도 하다. 1950년대 이후, 샌프란시스코는 억압에 저항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반체제 문화운동의 성지이자 전위가 되었다. 최근에는 쓰레기 제로 운동이 이 도시에서 일어섰다.
스콧 매켄지는 통기타 음률에 맞추어 노래했다.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머리에 꽃을 꽂는 걸 잊지 마세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무얼 해도 용인됐고, 어떤 자유도 금지되지 않았다. 한 가수의 노랫말처럼, 비둘기 나는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차별 없이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는 일, “그건 정말 멋진 얘기”였다. 실리콘밸리 혁신도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토양을 이루는 저항과 자유, 공유와 개방의 정신을 이어받아 탄생했다. 자유는 언제나 창조의 촉매였다.
1955년 식스 갤러리에서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이 처음으로 공개 낭송됐다.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로 파괴되고 굶주리며 광란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가 음란죄로 기소되면서 비트 운동은 미국 전역에 청춘과 반항, 자유와 저항의 열풍을 일으켰다. 1957년 잭 케루악은 비트 세대의 서사시인 ‘길 위에서’를 발표해 열풍을 이어갔다.
재즈 선율을 연상시키는 즉흥적 문체가 특징인 이 작품에서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청년 딘 모리아티의 열정에 감염돼 네 차례에 걸쳐 무작정 길을 나선다. “우리의 모든 혼란과 헛소리를 뒤로하고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고귀한 행위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즉, 움직이는 것. 우리는 움직였다!”
히치하이크로 북미 전역을 종횡하면서 그들이 만나려 하는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내게는 오직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는, 절대 하품이나 진부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길의 흐름에 따라서 드러나는 다채로운 풍경들, 그 안에서 전개되는 사람들의 삶은 정해진 일상에 결박된 채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가식적 도덕, 물질적 타락과 대비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별문제 되지 않는다. 길은 삶이니까.” 진정한 삶은 밥을 버는 사무실과 나태한 영혼을 달래는 안락의자에 있지 않다. 파라다이스는 길 위에 있다.
자유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인종 차별과 여성 억압에서도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도시에서 자랐던 한국계 여성 작가 차학경은 성폭행을 당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여덟 살 때 성폭행을 당하고 실어증에 걸렸던 흑인 여성 작가 마야 엔젤루는 자전 소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에서 질문한다. “백인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미워하는 거죠?”
인종과 성과 계급이라는 삼중 철망에 갇힌 어린 새인 작가는 해방의 열망을 담아서 노래한다. “새장에 갇힌 새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리로 노래하네. 알 수 없으나, 여전히 열망하는 것에 대해/ 그 노랫가락은 먼 언덕 위에서도 들을 수 있다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노래하니까.” 과연 이 이방인 여성들은 캘리포니아 드림 속에서 자유를 얻었을까. 머리에 꽃을 꽂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백인들만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면서 물어본다.
■ 용어설명
강도귀족
이 말은 본래 중세 독일에서 불법으로 높은 통행료를 징수한 영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선 악덕 자본가들을 풍자하는 비유로 쓰였다. ‘강도귀족’은 경쟁자를 짓밟고 시장을 조작하며 정부를 부패시키는 거대 독점 자본을 가리켰다. 1934년 매슈 조지프슨의 ‘강도 귀족들’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비트 세대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잭 케루악이었다. 1944년 루시엔 카가 윌리엄 버로스,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를 서로에게 소개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진정제 맞은 환자’처럼 평온하게 살아가는 기성세대에 맞서서 이들의 소비주의, 군비 경쟁, 검열 등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다. 모여서 함께 재즈를 듣고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작품을 낭송하곤 했다. ‘길 위에서’, ‘벌거벗은 점심’, ‘미국의 송어낚시’ 등이 대표작이다.
문화일보 장은수 문학평론가
◆특별한 흔적들 - 조선일보
- 2022. 11.07 옮김 -
★2017.01.25 아픔과 반성의 현장, 아우슈비츠
독일어로 아우슈비츠(Auschwitz)로도 불리는 오시비엥침(Oświęcim)은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키(Małopolskie)주에 위치한 도시다. 독일어 이름인 아우슈비츠(Auschwitz)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도시의 인구는 약 45,000명이며, 크라쿠프(Krakow)에서 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 이하, 수용소 지칭과 구분을 위해, 도시명을 말할 때는 오시비엥침이라 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조선 DB
오시비엥침(폴란드 명)은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했다. 폴란드 분할시대인 1772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18년 폴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39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독일이 도시명을 오시비엥침에서 아우슈비츠로 고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시비엥침에는 강제 수용소의 대표격으로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가 있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의 대거 학살을 그 목적으로 하는 '최종적 해결'이라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세운 여섯 군데의 대표 수용소 중 그 본부 격이며,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원래는 1940년 나치 독일 점령군에 의해 처음에는 폴란드인, 이후에는 소련군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곧 여러 다른 민족들을 모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나치가 강제노역을 미화한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이 글귀를 제작했던 유태인들은 'B'글자를 왜곡된 형태로 만듦으로써 저항심을 몰래 담았다. /조선 DB, 블룸버그
이곳은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본격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아우슈비츠 1'이라는 이름의 최초 수용소는 본래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가두기 위한 곳이었으나,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2'(비르케나우)는 중심적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8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3'(모노비츠)은 특수 노동 수용소로, 유대인들이 이게 파르벤(IG Farben) 합성 고무 공장과 석유 추출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다.
* 폴란드 등 나치의 점령지 전역에 크고 작은 강제 수용소들이 수십 개 세워졌고, 이후 6개의 대수용소로 통합되었다.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체계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수감자들이 늘어나고 계속 지어나가, 나중에는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1),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2), 모노비츠(아우슈비츠3)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대량 학살'의 시대
나치는 히틀러(Adolf Hitler)의 과격한 반(反)유대주의를 고취하여 1933년의 정권획득 후 유대인 박해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자, 점령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살해하고 게토나 강제 수용소에 격리하여 열악한 환경하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1941년 이후 수용소에서의 가스 살해나 이동 말살대에 의한 총살 등으로 유대인 말살작전을 전개했다. 이때의 사망자 수는 60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수용소에서 학살된 사람의 90%가 유대인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된 살해 도구로 사용된 것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으나, 과도한 노동, 굶주림, 구타, 이유 없이 행해지던 사격, 생체실험 등으로 인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쇼아 기념관 (Mémorial de la Shoah)
◇독일
사죄… 사죄… 또 사죄
반성에 앞장서는 리더
독일이 선진국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끊임없는 사죄가 함께 했다. 리하르트 슈뢰더 훔볼트대 교수는 "독일은 끊임없는 과거사 반성을 통해 이웃과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며 "독일이 전후 70년 만에 유럽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의 리더들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메르켈 독일 총리도 재임 기간동안 끊임없는 반성과 사과를 통해 과거사 업보를 털어내고 있다. 이스라엘과 나치 강제 수용소까지 찾아가 '과거사 반성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고, 이런 모습은 국민은 물론 세계인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전범국 출신의 총리인 그는 유럽의 리더를 넘어 세계의 리더가 됐다.
적극적인 처벌과 성숙한 용서
지금까지 독일은 나치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따로 없고, 예외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2015년 9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처형을 도운 혐의로 90대 노인이 '71년 만에' 독일 검찰에 기소됐고, 앞서 그해 7월에 독일 법원은 나치 정권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했던 오스카 그뢰닝(당시 94세)에게 학살 방조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뢰닝은 당시, 평결을 앞두고 마지막 진술을 통해 "아우슈비츠는 어느 누구도 협력해야 할 곳이 아니었다"며 "그 사실을 좀 더 일찍이 깨달아 단호하게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뉘우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고 결과가 나오자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70명의 공동 원고 중의 한 명이었던 에바 모제스 코르(당시 81세)는 자신의 페이스북 등을 통해 "독일 법원의 이 같은 판단에 실망했다"며 그뢰닝을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앞서 코르는 재판 도중 "나는 그를 진심으로 용서한다"며 그뢰닝과 진심어린 포옹과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폴란드 (feat, 독일)
나치에 600만 희생 폴란드…
진정한 반성에 마음 열어
폴란드는 이웃 강대국 독일에 1000년 가까이 시달린 민족이다. 120여 년간 나라를 빼앗겼고, 2차대전 중 600만 명 이상이 나치에 학살당했다. 하지만 독일의 끝없는 반성은 피해국 폴란드의 마음을 열고 있다.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에서 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2차대전 발발 75주년' 기념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문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25년 전 콜 총리의 '화해의 미사'에 대한 헌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화해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며 "미래 세대와 유럽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맺었다.
폴란드·독일 두 나라의 현대사는 반성이 상대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1965년 폴란드 천주교계는 '천주교 폴란드 전래 10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며 서독 종교인에게 초대 서한을 보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 독일 나치의 만행을 용서할 테니 폴란드가 2차대전 후 독일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피해국이 가해국에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이 서한은 서독의 여론을 움직였고 1969년 서독 총리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이스라엘(feat, 독일)
이스라엘-독일 두 나라 대사
"과거사 극복은 기적적인 일"
우리 구트만 주한(駐韓) 이스라엘 대사는 2015년 6월 4일, 서울 용산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독일·이스라엘 수교 50년 기념식 연설에서 "나치 독일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50년 전 두 나라의 역사는 어두웠지만, 50년간 화해했고, 이제 이 화해의 빛으로 미래를 밝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 대사는 기념 연설에서 "양국의 과거사 극복은 기적적인 일"이라며 "종종 많은 사람이 우리 관계를 별것 아닌 것처럼 보는데, 1965년 이전 상황을 보면 지금처럼 우호국이 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기적의 시작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결단에서 시작됐다"면서 "수교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와 레비 에쉬콜 이스라엘 총리, 그리고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가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인 독일의 반성과 피해자인 이스라엘의 용서가 요원해 보이던 화해를 이뤘다"면서 "이건 정말 기적"이라고 했다.
◇세계
독일이 사죄하게 만든 힘, 여기서 나왔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추모 단지 '야드 바솀'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로 붐빈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전시실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사료관과 홀로코스트 연구 국제학교 건물에는 자료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사료관 안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이 학살한 유대인 명부를 비롯,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대인의 일기장 등 1억 2,500만 건의 문서와 10만 건의 영상 자료가 보관돼 있다.
홀로코스트 연구 국제학교에는 세계 각국에서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러 온 연구자로 가득하고, 각국의 국제학교 교사들을 초빙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을 해주는 과정도 있다. 이 교사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게 된다. 야드 바솀은 추모관이자 역사 연구소 겸 학교다.
역사의 진실은 거저 드러나지 않는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
매년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이다. 1945년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유대인들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날로, 2005년에 유엔(UN·국제연합)에서 지정했다. 유대인 대학살 국제 추모의 날이라고도 불린다. (이스라엘에서는 1월 16일, 유엔 및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1월 27일로 지정하고 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완전히 타버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holokauston'에서 나온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 혹은 '번제물(燔祭物)'이란 뜻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엄청난 대재앙' 혹은 '파괴', '대학살'이란 의미로 쓰인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쓴다.
* 번제(燔祭): 과거 유대인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을 불로 태웠던 방식
제노사이드(genocide)
홀로코스트와 거의 비슷한 뜻이나,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하는 행위로, 보통 종교나 인종ㆍ이념 등의 대립으로 발생한다.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집단학살'을 뜻한다. 1944년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이 국제법에서 집단 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홀로코스트 혹은, 제노사이드 문제가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유대인(Jew)
BC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보통 히브리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왕국이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리고,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양하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전체 수상자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 천재인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의 세계 분산을 가리킨다. 오늘날 이 개념은 유대인들과 같이, 어떤 특정 장소를 준거로 결집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강한 정서적·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현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윗의 별(star of David, magen David)
'다윗 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Magen David'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를 상징하는 표식이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과 유대를 통합한 후 다윗의 별을 유대 왕의 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때문에 다윗의 별은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에 그려져 있다. 나치는 유대인을 감금하고, 노란색 다윗의 별을 달도록 해 사회에서도 격리했다. 안네 프랑크는 안네의 일기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엾게 보았지만, 노란색 별을 단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했다"라고 썼다.
나치스(Nazis)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1945년 정권을 장악한 독일의 파시즘 정당으로, 정식 명칭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다. 흔히 나치(Nazi) 또는 나치스(Nazis·나치의 복수형)로 불린다. 나치스는 정식 당 명칭이 아니라 히틀러 반대세력이 얕잡아 부른 비칭(卑稱)이다.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 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중심이론은 독일 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 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환경을 부패시키려 하므로, 우수한 민족은 그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하거나, 멸종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나치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는 학창시절에 인종이론이나 반유대주의 등을 공부하며 정치사상을 형성했다. 독일 민족지상주의자가 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았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반(反)유대주의적인 군소 정당에 가입했는데 이는 나치스(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신이다. 그는 탁월한 웅변능력을 통한 선전활동으로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정치활동을 하게 되고, 1921년 7월 29일 마침내 당내(黨內)의 독재적 지위를 가진 당수가 된다.
여기서 나치스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중, 1933년 1월 30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히틀러는 1933년 7월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했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이때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승승장구 하던 독일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져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부터 '사라의 열쇠'까지
▲(왼쪽부터)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피아니스트, 사라의 열쇠 /영화 스틸컷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작품에서 이전까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사실적인 톤으로 참극의 현장을 생생히 스케치했다. 흑백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초기에는 유대인의 노동력을 이용한 돈벌이에만 관심 있었던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인간애에 눈뜨고, 유대인들을 구해내려 애쓰는 과정을 다뤘다. 리암 니슨이 쉰들러 역을 맡았다.
이 밖에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1997)', 마크 허만 감독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질스 파겟-브레너 감독의 '사라의 열쇠(Sarah's Key, 2010)' 등 많은 영화가 그 때의 참상을 다뤘다.
도서
■ 내용 참고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리처드 카벤디쉬 외
쇼아 기념관 (Mémorial de la Shoah)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특별한 흔적들 - 조선일보
★08.20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탈출 작전'의 그곳


됭케르크(Dunkerque· 영어명Dunkirk*)는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Nord-Pas-de-Calais) 레지옹의 노르(Nord)데파르트망에 있는 해안 도시다.파리 북쪽270km,벨기에 국경에서14km지점에 있다.네덜란드 서플라망어에서 모래 언덕을 뜻하는'됭(dune)'과 교회라는 의미의'케르크(kerque)'를 합성한 명칭으로'사구(砂丘)의 교회'정도로 풀이된다.
*영어로는 던커크(Dunkirk)지만,최근 개봉된 영화 제목처럼 양국 발음을 섞은'덩케르크'로 더 알려졌다.

프랑스 북부의 해안 도시됭케르크는 벨기에 국경과도 가깝고,영국을 마주 보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14~16세기 부르고뉴,오스트리아,스페인이 차례로 이곳을 영유했다가, 1658년 프랑스령으로 복속됐다.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점령하지 못한 됭케르크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락했다.전쟁사에 영원히 기록될'됭케르크 철수 작전'은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는 과정에서 전개됐다.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반인1944년9월 됭케르크를 포위해 이듬해5월 수복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탈출 작전"
1940년5월,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을 뚫었다.구데리안과 롬멜의 기갑사단이 아르덴 삼림 지역을 기습했고,배후가 뚫린 연합군은 둘로 갈라졌다.영국군과 프랑스군40만 명이 포위됐다.이들이 고립된 지역이 됭케르크였다

▲그래픽=신현정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고,또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영국군은 흩어진 전투함들을 급히 모았으나 턱없이 부족했다.그러자 여기저기서 민간 선박들이 몰려왔다.화물선부터 유람선,고깃배까지 달려왔다.상류층은 레저용 호화 요트를 몰고 합류했고,청소년들까지 학교 실습용 보트를 끌고 오는 바람에 돌려보내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이렇게 모인 배 수백여 척으로 민간함대가 구성됐다.선체의 크기는 보잘것없지만 정신은 스페인 무적함대와 같다고 해서'모기함대(mosquito armada)'라고 불렸다. (모기함대 중 가장 작은 배의 길이는 고작4.5m였다.)이들과 함께 대형 구축함을 포함한 철수 선단 약900여 척이 도버 해협을 건넜다.

▲국방부 블로그
'작은 배들의 기적'
파도가 높고 모래가 많아 큰 배는 접근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었다.처음에는 작은 구명정으로 병사들을 태워 날랐지만 역부족이었고 이때부터 모기함대의 활약이 시작됐다.한 보트는 정원의30배를 태우고 아슬아슬하게 영국에 도착했다.해안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다 모래톱에 좌초되자 그걸 역이용해 다른 선박을 접안시키고 임시 부두 역할을 맡기도 했다.해협을7번 왕복하며7000여 명을 구한 유람선도 있었다. 9일간 계속된 이 작전으로 구출된 병사는 모두33만8000여 명.모기함대가 구한 인원만6만7000여 명으로 전체의20%였다.
됭케르크 철수 작전은 거의34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을 불과9일 만에 바닷길로 구출한 대규모 작전이었고,문헌으로 남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였다.(다이너모(Dynamo)작전으로도 불린다.)또 민간인이 적진 앞까지 침투해 군인을 구한 작전이기도 했다.전쟁 초반,연일 격퇴당해 절망에 빠졌던 유럽 연합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전의를 끌어올려 반격할 수 있었다.지금도 이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리는 기념 항해가5년 마다 한 번씩 도버 해협에서 펼쳐진다.
전쟁기념관에서 희생정신 기리는 오늘날
현재,됭케르크에는 전쟁기념관이 있다.샹티에 드 프랑스 거리(Rue des Chantiers de France)에 있는 낡은 건축물을 박물관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이 건물은1874년경 세워진 방어용 요새로1940년경에는 프랑스 군대와 연합군 측의 본부로도 쓰였다. 2000년'됭케르크 전쟁 기념관(Mémorial du souvenir de Dunkerque)'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처음 문을 열었다.명칭 그대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벌어진 됭케르크 전쟁(Bataille de Dunkerque, 1940. 5. 26 ~ 1940. 6. 4)에서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군인,지역민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전쟁의 고통을 상기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됭케르크 전쟁기념관 페이스북,남프랑스 관광청
전시관 입구에는 전투에 참가했던 연합군 국가들의 국기가 나란히 걸려있다.총700m²에 이르는 전시관 내부에는 됭케르크 전쟁과 관련된 사진,그림,문헌 기록 등이 진열되어 있다.방문객들은 작전 구상에 사용했던 지도와 프랑스 군인들이 보유했던 소총 무기,대포,군복,독일군의 오토바이,군함 모형,비행기 조각 등을 볼 수 있다.
흥남 철수 작전
6·25전쟁을 겪었기에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보고 흥남 철수 작전을 떠올리는 한국인들은 많다.흥남 철수 작전은1950년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진했던 미군과 한국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선박으로 철수했던 작전이다.
중공군의 공세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군 사령부는1950년12월8일 동부전선에서 북진에 나섰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의 병력에 대해 철수 명령을 내렸다.미 제10군단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철수해서 흥남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약10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한국군이 흥남에 집결했으며,그곳에서12월15일에서12월24일까지 열흘에 걸쳐193척의 선박을 타고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훈터',영화 스틸컷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도38선 이남 지역으로 내려왔다.당시 미 제10군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현봉학의 요청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특히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SS Meredith Victory)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는 화물을 버리고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이송해주었다.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한때 가장 많은 난민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지금도 이 일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거제시의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영화로 제작된 역사
'덩케르크' (2017년), '덩케르크 디 오리지널' (1958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철수 작전의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막강한 독일군의 진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연합군의 후퇴작전을 놀랄 만한 현장고증으로 당시의 경험을 훌륭하게 되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놀런 감독은"됭케르크 작전은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작전이고,영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덩케르크'는1958년에도레슬리 노먼 감독의영화로 만들어진 선례가 있다.
이 밖에 영화'어톤먼트(2007)'에서도 됭케르크 해안 장면이5분간의 롱테이크신으로 이어진 바 있어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영화는 전의를 잃고 좌절감에 빠진 병사들의 모습을재현해냈다.

▲영화'덩케르크'스틸컷

▲영화'어톤먼트'스틸컷
◆11.16 지중해와 인도양 통하는 관문… 中, 해협 눈앞 지부티에 군 기지 만들어
아덴만 바브엘만데브 해협

▲낙타에 짐을 싣고 홍해 바닷가를 따라 이동하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행렬을 화폭에 담은 19세기 화가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왼쪽 사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홍해의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문명의 교차로이자 해상 교역로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열강이 패권 경쟁을 벌이는 전략적 요충 지역이다. 미국과 글로벌 패권을 다투는 중국도 해협에 면한 아프리카 국가 지부티에 해군 기지를 만들었다. 2017년 7월 지부티에 배치된 중국군 2명이 입항하는 자국 군함을 지켜보고 있다(오른쪽 사진). /미 의회도서관·AP 연합뉴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겐 덜 알려져 있다. 이 해협의 별칭은 아라비아어로 ‘눈물의 문’이다. 동쪽 예멘, 서쪽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남쪽 소말리아가 해협에서 마주 본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 홍해를 거쳐서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하면 아덴만에 당도한다. 아덴만을 벗어나면 아라비아해가 펼쳐지는데 크게 보면 모두 인도양이다.
위험도가 높은 해협이다. 2011년 1월 주얼리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아덴만의 여명’ 작전으로 인질 구출이란 쾌거를 이루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바다다. 소말리아인을 국제사회가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어찌 보면 가난에 찌든 그들 처지에서 해적은 엄연히 하나의 직업이자 비즈니스일 뿐이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홍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홍해는 유럽 문명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교차로였다. 오늘날 지중해에서 홍해로 넘어가려면 수에즈 운하를 이용한다. 수에즈는 1869년 개통하였으니 불과 153년 됐다. 긴 인류사에 비한다면 최근의 일이다. 수에즈 개통은 희망봉 여정이 생략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수에즈 지협(地峽)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해야 비로소 지중해와 인도양이 이어졌다. 지협과 해협이 동시에 작동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수에즈 운하는 일찍이 고대부터 시도되었다. 수에즈 근처에서 분홍색 화강암 비석 파편이 발견되었다.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이집트어 등 다국적 언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대제가 명령하여 나일강에서 페르시아가 시작되는 바다까지 운하를 파고, 이집트에서 출발한 배가 이 운하를 통해 페르시아로 왔다고 기록했다.
다리우스의 운하를 통과하여 홍해를 거쳐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항해한 흥미로운 인간이 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그리스인 스킬락스는 다리우스 1세의 명으로 인더스강까지 항해했다. 인도 정복을 위한 일종의 ‘스파이 탐사’였다. 실제로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까지 인도 아대륙 북서부를 정복했다.
고대 세계에서 지중해와 인도양이 연결되는 데 홍해가 절대적이었다. 홍해는 일종의 기다란 파이프처럼 북쪽으로 수에즈 지협, 남쪽으로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창구로 하여 서로 다른 문명 세계를 연결했다. 통시적으로 볼 때 이 지협과 해협을 하나의 유기적 연동장치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한쪽의 긴장은 다른 한쪽에도 영향을 주면서 지협과 해협의 지정학적 연계성을 알려주는 중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니 동방박사가 찾아왔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몰약과 유향은 소말리아, 수단, 에티오피아, 소코트라 등 아프리카 동부와 아라비아 남부에서 산출되었다. 카라반에 실려 북상하거나 배에 실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했다. 이집트 문명도 끊임없이 홍해를 이용하여 동방과 소통했다. 핫셉수트 여왕이 원정대를 ‘황금의 나라’ 푼트까지 보낸 기록이 벽화에 남아있다. 푼트는 소말리아로 비정된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 해협을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홍해에는 유수의 국제 무역 항구 베레니카가 있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하여 아라비아 남부와 인도, 스리랑카를 연결하는 국제 거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그리스 상인은 해협을 통과하여 인도까지 여행하고 ‘에리트레아해 항해서’란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에티오피아에는 강력한 해상 왕국이자 기독교 왕국이었던 악숨이 있었다. 악숨의 홍해 항구 아둘리스에서 출발한 상선이 해협을 통과하여 멀리 스리랑카까지 출현했다. 심지어 스리랑카에 에티오피아 용병이 다수 존재했을 정도로 ‘인력 수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하여 인도의 향신료가 로마까지 수입되었다. 소말리아 상인도 국제 무역 시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오늘날 소말리아인이 해적이란 오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천부적인 해상 상인의 후예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이 물려받은 해양력을 엉뚱한 해적질에 쓰는 중이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벗어나자 만나는 ‘아프리카의 뿔’ 소말리아 반도가 위험 좌표가 된 지 오래다. 소말리아 건너편 예멘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총포를 날리고 있다. 후티 반군과 이란이 모두 시아파에 속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수니파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멘 땅에는 한때 시바의 여왕 왕국이 있었다.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홍해와 지중해를 오고 간 비화는 성경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바 왕국은 ‘황금의 땅’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국제 무역이 왕성했다. 해협을 건너온 물산이 ‘천년의 항구’ 아덴에 집결했다. 중국 상선도 아덴으로 속속 들어왔다.
오늘날 중국은 지부티에 항구 조차권을 획득했다. 일대일로의 동아프리카 교두보를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설정한 것이다. 소말리아는 여전히 악순환을 겪고 있고, 예멘의 내전은 그칠 줄 모르는 등 불과 26㎞의 좁은 해협은 언제나 뜨겁다. 이제는 몰약과 유황 대신에 석유를 실은 유조선이 흘러가는 전략적 수로다. 한국 해군이 작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우리와 무관한 해협이 아니다. 모카항에서 선적한 모카커피와 에티오피아의 커피도 한국인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 중이다. 우리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관심을 돌려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도 넘는다.
조선일보 주강현해양문명사가, 전 제주대 석좌교수
◆11.18 노예 해방됐어도 인종차별은 1960년대까지 남아
미국 남북전쟁, 남부 변명은?

김기협 역사학자
노예제도는 문명의 발생과 함께 나타났다. 생산력 증가에 따른 사회 분화의 일환이었다. 고대문명이 번영한 곳마다 노예제도가 운영되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로마의 경우다.
로마제국의 노예제는 동로마제국에서 계속되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노예제가 시행되었다. 7세기 이후 이슬람권의 노예제도는 두 제국의 유산을 아우른 것이었다.
노예제 전통이 미약했던 서유럽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 기독교권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으나 동방에 비해 그 역할이 작았다. 로마제국의 고전문명이 서유럽 지역에 잘 전승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었다. 동로마제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서유럽은 사회분화가 부진한 단계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링컨 당선에 남부 7개주 연방탈퇴
전쟁 후에도 ‘빼앗긴 정의’에 집착
공화당 부패가 반동 분위기 조장
‘옛날 남부’ 그리며 흑인에 화풀이
노예해방 의미도 구호에 그친 꼴
전쟁서훈 1500여명 중 흑인 32명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미국 남북전쟁의 한 광경. 남부연합의 깃발이 보인다. 근대적 살상무기가 대거 동원된 최초의 ‘산업화된 전쟁’이었다. [사진 유튜브 캡처]
프랑스에서는 루이 10세가 노예제 금지령(1315)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재정 확충을 위해 농노가 속전(贖錢)을 내고 자유민이 되도록 한 것인데, 노예제가 부각된 후세에는 노예에게 적용되었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는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이 제도에 따라 프랑스인이 되고, 최초의 흑인 군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1315년의 금지령이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도 노예제가 법제화되어 있지 않았다. 두 나라에 노예 비슷한 신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법률로 뒷받침할 필요까지는 없는 사소한 요소였다. 18세기 후반 계몽사상의 유행과 함께 노예제 비판이 일어날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럽 내의 노예제 시행이 아니라 식민지와 관련된 노예무역이었다.

▲미국회의사당 장식에 남아 있는 제임스 오글소프의 모습. 조지아주를 세운 오글소프는 ‘노예 없는 식민지’를 표방하며 원주민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15세기에 유럽인은 마데이라·아조레스 등 아열대지역 섬들을 점령한 후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대거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발견 후 카리브지역으로 플랜테이션이 확장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북아메리카 본토에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제는 이슬람권에서 널리 시행돼 온 노예제와 달랐다. 이슬람권에서 노예의 역할은 가사노동에서 군대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노예와 일반인의 접촉면이 넓었는데 16세기 이후 플랜테이션과 광산 등 집단노동에 동원된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들은 일반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사회와 격리된 위치 때문에 노예를 ‘인간 아닌 존재’로 보는 경향이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예의 실제 모습은 사회마다 달랐다. 본국에 비해 식민지 노예제는 억압이 강했다. 식민지라도 프랑스령 퀘벡이나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억압이 덜했던 것은 집단노동의 비중이 영국령 아메리카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령 아메리카 내에서도 플랜테이션이 적은 북부 식민지 주민들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남부와 달랐다.
‘노예 없는 식민지’로 출발한 조지아

▲북군은 1863년부터 해방노예 모병에 나섰다. 종전 당시 병력의 10분의 1에 이르렀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임스 오글소프(1696~1785)의 ‘조지아 실험(Georgia Experiment)’이 노예제를 둘러싼 영국 본국과 식민지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준다. 조지아는 미국 13주가 될 식민지 중 가장 늦게(1732) 남쪽 끝에 설치된 식민지였다. 박애주의자로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오글소프는 캐롤라이나 남쪽에 ‘노예 없는 식민지’를 만들 것을 국왕에게 청원해서 인가를 받았다.
이 청원이 인가를 받은 것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와의 사이에 완충지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플로리다에도 노예제가 있었으나 기독교에 입교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 쉽게 자유민으로 풀어주는 개방적 운영이었다. 스페인과 사이에 긴장이 일어날 때마다 노예들에 대한 스페인 측 선동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이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조지아에 바란 것이다.

▲1790년과 1860년의 미국 노예 분포도. 점 하나가 노예 200명을 나타낸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글소프는 채무죄인(dept prisoners) 등 본국의 빈민을 데려와 소규모 자영농으로 재활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래서 노예 소유를 금지하고 한 가구에 50에이커(약 6만 평) 한도의 땅을 나눠주는 정책을 취했다. 노예 소유와 함께 음주를 금지한 데서도 ‘조지아 실험’의 도덕주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자영농을 바라보는 빈민만으로는 플로리다 방면의 위협에 대응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명 이하의 노예를 데려오는 이주민에게 500에이커까지 땅을 제공하는 타협적 방식을 병행하게 되었다. 이 방식으로 합류한 노예제 농장주들은 조지아 실험 전복을 위해 본국 의회에 로비활동을 벌였다.
오글소프가 1743년 조지아를 떠나며 조지아 실험은 힘을 잃고, 조지아 노예 금지령은 1750년 영국 하원에서 폐기되었다. 1776년까지 조지아의 노예 인구비율은 다른 남부 식민지들과 비슷한 45%까지 늘어났다.
수세에 몰린 남부의 피해의식
미국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평등사상은 확장되고 있었고, 독립의 명분 또한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진했다. 독립은 노예제 지역인 남부와 비-노예제 지역인 북부의 합작으로 이뤄졌으나 독립 후의 정책 결정에서는 남북 간의 입장이 갈라졌다. 노예제 해소를 향한 시대적 조류 앞에서 남부는 수세에 처해 있었다.
영토 확장 때마다 남북 간의 입장 차이가 불거졌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과 1846~1848년 멕시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정치적 위기가 거듭되었다. ‘미주리 대타협’(1820)과 ‘1850 대타협’ 등 고식책으로 봉합해 나가다가 남북전쟁에 이르렀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사진 위키피디아]
1860년 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 여러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는 가운데 또 하나 ‘대타협’의 제안이 나왔다. 헌법 개정을 통해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보장하자는 취지였지만, 새 영토의 노예제 채택 범위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노예지역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의 고사(枯死)를 획책한다는 남부의 피해의식이 걸림돌이었다.
1861년 3월 링컨 취임 전에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있었다. 링컨 정부가 이에 대해 바로 적대행위를 취하지 않은 것은 15개 노예주 중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있던 8개 경계주(border states)를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4월 12일 전쟁이 터지자 경계주들은 4개씩 갈라져 남북으로 붙었다. 1863년 1월의 노예해방선언에서도 북부에 가담한 메릴랜드·델라웨어·켄터키·미주리의 노예제는 예외로 남겨졌다. (전쟁 후의 헌법개정으로 곧 사라질 예외였다.)
‘재건’ 명분, 노예제 금지에 반발

▲링컨에 반대한 남부연합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난 후 남부연합 지역은 ‘재건(Reconstruction)’이란 이름의 계엄통치에 들어갔다.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고 지방정치가 재개되자 노예제를 금지한 13차 수정헌법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남부를 휩쓸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각 주의 입법과 사법, 그리고 민간의 폭력으로 거부한 ‘짐 크라우(Jim Crow)’ 시대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남부의 반동적 분위기를 격화시킨 것은 공화당 정권의 정치실패였다. 극심한 부패로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선거에서 위기에 몰렸다. 개표가 끝나갈 시점에서 민주당 틸든 후보는 184인 선거인단을 확보해 놓고 1명만 더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재건’을 서둘러 끝내주는 대가로 의회에서 확정할 남은 20명을 모두 공화당 헤이즈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그래서 총투표에서 3% 뒤진 헤이즈가 선거인단투표에서 한 표 이기는 결과가 되었다.
공화당 정권의 타락은 전쟁의 명분까지 퇴색시켰다. 북부의 야욕만 부각되면서 남부에서는 ‘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깔린 ‘옛 남부(Old South)’에 대한 그리움은 끈질긴 흑백차별의 동력원이기도 했다.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이 편의적인 구호에 그친 사실은 흑인의 군사적 역할이 약소했던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긴박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입대는 많지 않아서 종전 때까지 북군에서 흑인 비율이 10분의 1에 그쳤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 통계도 이 전쟁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전쟁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남북전쟁 관련 서훈자 1500여 명 중 흑인은 불과 32명이었다. 여성은 단 1명이었다. 그나마 1917년에 취소되었던 메리 워커의 훈장이 1977년 회복되지 않았다면 미국 명예훈장은 지금까지도 ‘남성훈장’에 그치고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11월 22일 1901년 노벨상 시상 시작… 개인 959명 · 단체 30곳 수상 영예

▲지난 2019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서 97세로 역대 최고령 수상자인 존 구디너프(왼쪽) 미국 텍사스대 교수가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로부터 노벨 화학상을 받고 있다. AP 연합뉴스
■ 역사 속의 This week
“내 전 재산으로 기금을 마련해 매년 인류에 가장 큰 공헌한 사람에게 국적을 가리지 말고 상을 수여해주시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기업가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에 서명함으로써 노벨상이 제정됐다.
1900년에 설립된 노벨재단이 기금을 관리하고 첫 시상식은 1901년 노벨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열렸다. 이후 매년 같은 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며 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세계적 권위의 노벨상은 6개 부문(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경제학, 문학, 평화)의 선정기관이 다르다. 전해 9월부터 부문당 1000여 명의 전문가들에게 추천을 의뢰하고 엄격한 절차를 거쳐 수상자를 정해 10월에 발표한다. 올해까지 959명의 개인과 30개 단체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 이 중 5명이 상을 두 번 받았고 단체 중에는 유엔난민기구가 두 번,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세 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여성은 61명이고 역대 최연소는 17세에 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 최고령은 97세로 화학상을 수상한 존 구디너프다.
상을 다섯 개나 가져간 가족도 있다. 퀴리 부인은 남편과 함께 물리학상을 받은 뒤 화학상을 단독 수상했고, 딸과 사위가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수상자를 최다 배출한 국가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고 우리나라는 2000년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마하트마 간디는 생전에 다섯 차례나 평화상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했고,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을 비롯해 레프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안톤 체호프, 마르셀 프루스트 등 위대한 작가들도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다.
수상자에게는 상금과 금메달이 주어지는데 올해 상금은 1000만 크로나(약 13억 원)로 공동 수상의 경우에는 수상자들이 나눠서 받게 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상금을 주로 주택구입이나 자녀교육, 연구, 기부 등에 사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전액을 전 부인에게 양도했는데 이혼 당시 노벨상을 타면 상금을 위자료로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는 2021년 언론 탄압에 맞선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경매에 내놓은 메달이 노벨상 메달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350만 달러(약 1390억 원)에 낙찰됐다. 그는 “이 메달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내 나라 러시아로 인해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피란민과 어린이들에게 메달의 가치를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조선일보
◆11월 28일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서 열린 ‘나폴레옹 대관식’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 1세가 황후에게 관을 씌워주고 있다. 자료사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가로 길이가 10m에 달하는 압도적 스케일로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다.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황제의 대관식을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다.
그런데 왜 황후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일까. 사실 이날 나폴레옹은 교황이 씌워줘야 하는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자기 머리 위에 올렸다. 자신이 교황의 권위를 초월하는 존재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충성심 강한 궁정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혹시나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이 장면 대신 나폴레옹이 부인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순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그려냈다.
프랑스령 코르시카섬 출신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15세에 입학한 파리 육군사관학교에서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포병 소위로 임관해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냈고, 27세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돼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인기가 치솟았다. 1799년 쿠데타로 제1통령에 올랐고, 5년 뒤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35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참패하며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1814년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파리가 점령당한 뒤 엘바섬으로 추방당했다가 이듬해 탈출해 재집권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백일천하에 그쳤고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됐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며 유럽을 제패했던 영웅은 1821년 52세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국민으로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꼽히는 나폴레옹의 사망 200주년을 맞아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그의 공과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나폴레옹 법전’을 펴내 법률적 토대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등 교육제도와 금융시스템을 정비하는 등의 업적이 있지만,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했고 노예제도를 부활시키고 성차별주의자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했다. 승리와 패배, 진보와 퇴행을 오갔던 나폴레옹의 인생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엇갈린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12월 12일 1911년 아문센 탐험대,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점에 꽂은 노르웨이 국기를 바라보고 있다. 왼쪽부터 아문센, 헬메르 한센, 스베레 하셀, 오스카르 비스팅. 자료사진
1910년 8월 9일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1872∼1928)의 프람호가 힘차게 출항했다. 원래 목적지는 북극이었지만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문센은 목표를 미지의 땅 남극으로 비밀리에 변경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뱃머리를 돌렸다. 이미 남극을 향해 가고 있던 영국 탐험가 로버트 스콧과의 경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찍이 북극항로를 개척하며 북극을 경험한 아문센은 그때 만났던 이누이트(에스키모)족으로부터 극지에서의 생존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보온성이 뛰어난 순록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준비하고 이동 수단으로 추위에 강한 개들이 끄는 썰매와 스키를 선택했다. 그래서 대원을 선발할 때 세계 개썰매선수권대회와 스키대회 우승자도 뽑았다.
아문센 탐험대는 장비와 물품 등을 썰매견들에게 맡겨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는데 불필요한 물건은 과감히 버려 무게를 최소화했다. 식량도 현지화의 원칙에 따랐다. 페미컨(고기를 말린 뒤 과실, 지방을 섞어 빵처럼 굳힌 것) 같은 극지방의 전통적인 보존식품으로 채우고 바다표범을 사냥해서 보충했다. 또 일정 간격으로 깃발을 높게 설치해 멀리서도 지나간 위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는데 이는 돌아오는 길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반면 스콧 탐험대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영국제 최고급 모직 방한복은 남극 추위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주된 식량인 통조림도 얼어서 터지기 일쑤였다. 최신식 장비인 설상차는 혹한에 고장 나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짐을 실은 만주산 조랑말도 얼어 죽는 바람에 결국 대원들이 썰매를 끌어야 했다. 앞서 조랑말을 이용해 남극 탐험에 실패한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의 사례를 답습한 결과였다.
천신만고 끝에 스콧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착했지만, 눈앞에는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한 달 전인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에 상륙한 지 11개월,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55일 만에 먼저 남극점을 밟은 것이다. 아문센은 대원들과 무사히 귀환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악천후까지 만난 스콧과 대원 4명은 연료와 식량 부족, 동상 등으로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철저한 준비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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