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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이야기13-2022/ 08.05 [단독] 실제 전투 담겼다, 6.25 때 개봉 영화 ‘낙동강’ 70년 만에 발굴 - 12월 02일 “가수로 번 돈은 나눔에 쓰며 보답 … 90살 돼도 노래하며 살고파”

상림은내고향 2022. 12. 22. 16:58

딴따라 이야기13-2022/

08.05 [단독] 실제 전투 담겼다, 6.25 때 개봉 영화 ‘낙동강’ 70년 만에 발굴

▲영화 낙동강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주인공(이택균)이 연인을 향해서 경례하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6·25전쟁 중인 1952년 개봉했던 영화 ‘낙동강’의 원본 영상이 70년 만에 발굴됐다. 전쟁 당시 제작된 44분 분량의 흑백 유성(有聲)영화인 이 작품은 실제 낙동강 전투 장면이 담겨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동안 영화 장면이 담긴 흑백 사진 10여 장이 남아 있었을 뿐, 원본 영상은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영화계에 따르면 한국영상자료원(원장 김홍준)에서 원본 영상을 확보한 뒤 디지털 복원 작업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6·25전쟁 당시 제작한 한국 영화는 26편 안팎이지만,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과 극영화 ‘태양의 거리’ 등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낙동강’은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청년이 귀향해서 연인인 여교사와 함께 살기 좋은 고향을 일구려고 앞장선다는 내용의 계몽 영화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전시(戰時)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먼저 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보여준 뒤 남녀 주인공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놈들은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단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각본·연출은 전창근 감독, 남녀 주연은 배우 이택균·최지애가 맡았다. 영화는 낙동강 일대를 따라서 안동 도산서원, 양산 통도사와 을숙도 갈대밭 등 문화유산과 자연 풍경을 담았고, 전쟁 당시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서 낙동강 전투 장면도 삽입했다. 1951년 40여 일의 촬영과 3개월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서 이듬해 부산에서 개봉한 뒤 경남 지역 학교와 마을 등에서 상영했다.

 

▲영화 낙동강의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택균, 최지애.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는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향토문화연구회’가 경남도청 공보과 후원으로 제작했다. 일제 당시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한형석(1910~1996) 선생이 영화 기획·재무에 참여했다. 개봉 당시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이었던 윤이상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삽입곡 ‘낙동강’도 인기를 모았다. KBS교향악단 초대 상임 지휘자를 지낸 임원식이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은 “전시의 악조건과 혼란 속에서도 당시 영화인들이 쏟은 노력은 전후(戰後) 한국 영화계가 빠르게 재건될 수 있었던 든든한 기반이 됐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08.08 ‘회장님 배역 전문’ 원로 배우 김성원씨 별세

성우로 데뷔해 드라마 '파리의 연인', '웃어라 동해야' 등에서 회장 역을 주로 맡아온 배우 김성원이 8일 별세했다. /연합뉴스

 

드라마 ‘파리의 연인’ ‘웃어라 동해야’에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 김성원(85)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김성원은 8일 0시 30분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올해 초 방광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고인은 1957년 CBS 성우 2기로 데뷔해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다. TBC 외화 ‘도망자’ 시리즈에서 리처드 킴블 역과 외화 ‘석양의 무법자’의 투코 역으로 목소리를 알렸다.

 

이후 TBC(동양방송) 개국 당시 배우로 스카우트됐다. 사극 드라마 ‘여보 정선달’(1971∼1974)에서 주연을 맡으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2000년대에는 SBS드라마 ‘완전한 사랑’(2003), ‘파리의 연인’(2004),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 ‘브라보 마이 라이프’(2007), KBS드라마 ‘웃어라 동해야’(2010) 등에 출연했다. 주로 회장, 사장 역을 맡아 회장님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김성원은 뮤지컬 1세대 배우로도 활약했다. 한국 최초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1966)에 출연했다. ‘해상왕 장보고’, ‘두 번째 태양’ 등으로 공연을 다니며 해외동포를 만났다.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과 서울뮤지컬진흥회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빈소는 쉴낙원 김포장례식장 특2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5시다.

조선일보 최혜승 기자

 

08.26 “수연아, 넌 품위와 긍지를 아는 큰 배우였단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서 故 강수연 추모
공로패 전달한 배우 김지미 단독 인터뷰

 ▲배우 김지미(왼쪽)와 강수연이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손을 잡고 함께 입장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시대를 대표한 배우이자 여걸이었다. 김지미는 25일 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에서 고(故) 강수연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마음이 아파요. (강)수연이는 큰 배우였어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땐 ‘괴롭다’며 저한테 여러 번 상의를 했어요. 조언하고 위로하면서 잘 견디길 바랐는데···. 오늘(25일) 저녁에 추도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도 가슴이 떨려요.”

 

25일 밤 개막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는 배우 김지미(82)가 후배 강수연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수상자는 지난 5월 고인이 돼 유족이 대신 받았다. 김지미는 이날 오후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공식적인 무대에 서는 것은 2019년 이후 3년 만인데 이런 자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강수연 같은 여배우가 대한민국에 필요한데 너무 일찍 떠나 안타깝다”고 했다.

 

김지미는 1957년 열일곱 살에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역대 출연작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등 700여 편에 이른다. 강수연과는 한 시대를 대표한 여배우이자 여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수연은 생전에 “김지미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그 아우라와 카리스마에 놀라 접근조차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 김지미 역시 세계적인 배우로 영화 행정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후배 강수연을 아끼고 응원했다.

 

 ▲지난 5월 11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배우 故 강수연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있다. 고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고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 배우 안성기 등과 함께 장례위원회(위원장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고문으로 참여했다. /뉴스1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손자, 손녀, 딸 등 가족과 함께 편안히 지냈어요. 코로나 때문에 오랜만에 한국에 왔지요. 지난 5월에 별세 소식을 접하고 너무 놀랐어요. 그땐 꽃만 보내고 이제야 왔네요.”

 

–두 분은 어떤 사이였습니까.

“한국에 올 때마다 따로 만났어요. 수연이가 저한테 많이 의지했어요. 아역 때부터 영화를 같이 했거든요.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고, 저는 ‘인기만 좇으면 배우 생명이 짧다.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격려하곤 했어요.”

 

–강수연 배우는 무엇을 힘들어했나요.

“부산국제영화제를 맡았을 때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수연이를 이용하고 배제하려고도 했지요. 제가 ‘중간에 나가면 모든 책임이 너한테 올 거다. 끝까지 버티고 감당해야 한다’는 말을 해줬어요. 수연이는 현명한 사람이에요. 고통을 다 감수하면서 견뎠으니까.”

 

 ▲2019년 부산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토크쇼에서 배우 전도연(오른쪽)과 이야기 나누는 김지미. 아래 사진은 1965년 출연작 ‘불나비’의 한 장면.

 

–옆에서 본 강수연은 어떤 배우였습니까.

“명예를 값싸게 팔아먹고 다니지는 않았어요. 큰 배우라 제가 좋아했지요.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 너무 흥행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난폭한 영화, 흥미나 끄는 영화가 대부분이잖아요. 옛날에는 교육, 문화, 청소년을 위한 영화가 다양하게 나왔어요. 이런 구조에서는 좋은 배우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도 보셨나요.

“다 봤어요. 세계적인 상도 받았으니 저도 인정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작품들의 소재가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에요.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는지 묻자) 글쎄요.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없어요. 저는 자극적인 영화보다는 서정적인 영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를 더 좋아해요.”

 

–강수연이 지금 옆에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배우는 배우로서 품위를 지켜야 하고,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하고, 기자는 기자로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수연아, 너는 그 기준에서 어긋나지 않은 좋은 배우였다. (여성 영화인들에게 조언을 청하자) 끝까지 잘 버텨서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남성 영화인들한테 지지 말고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배우 김지미.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휘지 않고 부러진다. 적당히 타협하는 걸 잘 못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동환 기자

 

–영화인 김지미를 돌아본다면.

“당당하게 살았지요. 돌아보면 흐뭇하고 행복해요. 단 하나, 내가 그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을 돌보지 못한 미안함이 있어요. 그 빚을 이제야 갚아 나가고 있지요.”

 

–말년은 어떻게 보내실 계획인가요.

“지금 이대로 아주 좋아요. 다만 골프는 ‘썸’이 맞아야 하는데 미국에는 마음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새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는 오래된 사람을 잘 간직하는 게 현명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제작도 하고 행정도 경험했지만 제일 편안한 건 배우더라고요.”

 

 ▲배우 김지미는 1957년 열일곱 살에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해 700여편에 출연했다. 전성기이던 1960~70년대에는 한 해에 30여편씩 영화에 출연했다. 하루에 여러 영화를 나눠 찍는 식이었다. "이 촬영 현장에서 ‘철수’라 불렀던 사람을 다른 촬영 현장에서 ‘민우’라고 불러야 하는데 잘못 부른 적도 있어요. 후시녹음을 하던 시절이라 그런 실수들은 더빙 때 바로잡았지요."

 

–출연 계획은 없나요.

“이 나이에 영화를요? 저는 방송은 안 해요. 드라마는 해본 적이 없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극장에 와서 입장료 내고 즐겨야 하는데, 안방에서 편하게 앉아 있는 분들에게 내 연기를 서비스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대중의 관심이 많아 피곤하셨을 텐데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실까요?

“안 할 것 같아요. 배우는 자기 관리가 너무 힘든 직업이에요. 수연이도 그걸 못 한 게 마음 아파요. 다음 생에는 배우 안 하고 평범하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자식 기르고 행복하게 사는 주부이고 싶습니다. 그게 가장 편안한 삶인 것 같아요.”

 

김지미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김지미는 “제가 제일 감사하는 분들은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이라며 “그분들이 있어 김지미가 있었고 한국영화가 오늘날까지 왔으니까”라고 답했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09.01 그녀 안에 개구쟁이도 있고 어른도 있다... 김신영, 송해 후계자 된 이유

전국노래자랑 새 MC 김신영

개그우먼 김신영(39)이 KBS 전국노래자랑의 새 MC로 선정됐다. 34년을 진행한 고(故) 송해의 후임이다. 후임자로 거론되곤 했던 이상벽, 이상용, 엄영수, 임백천 등 구수한 입담과 쟁쟁한 실력을 갖춘 선배들을 제치고 젊은 여성 희극인이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을 맡은 것. 김신영의 어떤 매력이 ‘국민 MC급’ 자리로 그녀를 이끌었을까.

 

KBS 제작진은 ‘친화력’ ‘성실성’ ‘순발력’ 세 가지를 꼽았다. 이 세 요소야말로, 56년 세월을 뛰어넘어 송해(1927년생)와 김신영(1983년생)을 잇는 공통점이라는 것. KBS 김상미 CP(책임프로듀서)는 “송해 선생은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서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친화력, 30년 넘게 매주 이어진 녹화를 한 번도 펑크 내지 않는 놀라운 성실성을 보여줬다”며 “그 연세에 무대에서 헤드스핀을 시도할 정도의 순발력까지 있었죠”라고 했다. 그런데 연예계를 둘러보니, 이 모든 요소를 갖춘 김신영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20년 차 개그우먼 김신영은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 KBS 전국노래자랑을 맡아 국민 MC로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작은 사진은 위에서부터 김신영의 부캐 ‘다비이모’(2020), SBS ‘웃찾사’의 한 코너인 ‘행님아’(2007), MBC ‘무한걸스’(2008)에 출연하던 시절 모습. /KBS·MBC·SBS·스포츠조선DB

 

# 친화력

김신영이 그간 창출한 캐릭터는 묘하게도 항상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생활인’의 모습이다. 2003년 SBS ‘웃찾사’ 한 코너인 ‘행님아’에서 코흘리개 소년을 연기했던 김신영은 성(性)과 나이를 벗어난 캐릭터로 변신을 거듭했다. 무한도전의 여성형 버전인 ‘무한걸스’를 비롯해 각종 예능 프로에서 백반집 아줌마, 목욕탕 아줌마, 동네 노는 언니 등 중년 여성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한 즉흥 생활 연기로 정평이 났다. 2020년엔 이른바 빠른 45년생인 ‘다비이모’라는 부캐(부캐릭터)를 만들어 가수 데뷔까지 했다. 그녀 스스로도 말했던, “나는 전국 어디에 갖다 놓아도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설명에도 부합한다.

 

이는 유년 시절 경험한 삶의 굴곡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지난 7월 유재석이 진행하는 케이블 채널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아버지 사업이 계속 안 좋아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만 8번 전학을 갔고, 비닐하우스를 포함해 이사만 60번을 다녔다”고 털어놓았다. 외할머니에게 배운 목포 사투리, 청도에서 살 때 익힌 경상도 사투리는 친근함을 더해주는 요소. 시청자들 사이에선 “신의 한수”라는 반응도 많다.

 

#성실성

전국노래자랑은 KBS의 공영성을 상징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빼놓지 않고 지방을 찾아가 녹화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공영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단순히 웃음을 주는 능력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까지 보았을 것”이라면서 “김신영이 그간 보여준 자기 극복의 태도는 성실성의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공개 프로필에 따르면, 현재 김신영은 52킬로그램이다. 이른바 ‘여성 외모 개그’가 아무렇지도 않던 시절을 통과해온 김신영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체중 감량을 시도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웃음을 포기한다”는 말까지 들었고, 이로 인해 꽤 심한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당시 “난 이제 한물간 것 같다”는 그녀에게 전유성이 “한물가고 두물가고 세물가다보면 나중에 보물 된다”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정 평론가는 “틀에 박힌 그림을 요구하는 연예계에서 자기를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순발력

군(郡) 단위까지 찾아가 매주 녹화를 진행하며 매번 일반인 출연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전국노래자랑 녹화는 흔히 야전(野戰)에 비유된다. 늘 보는 카메라 앞에서 늘 만나는 작가들과 작업하는 방송과는 전혀 다르다. 김상미 CP는 “국민과의 약속이기에 스케줄 조정도 불가능하고, 무대에서 매일 바뀌는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면서 “송해 선생은 후임자의 조건으로 ‘희극인’을 언급하셨는데, 각종 행사부터 공개 코미디까지 무대 경험이 많은 희극인의 특성을 감안하신 것 같다”고 했다. 팔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개구쟁이 소년부터 이모에 할머니까지 성과 나이, 지역 등을 뛰어넘으며 변신해온 김신영은 이제 국민 MC로 도약을 앞두고 있다.

조선일보 신동흔 기자

 
 

09.13 이정재 주연상, 황동혁 감독상… 오겜, 非영어 첫 에미상 휩쓸다

한국 드라마가 다시 한 번 전인미답의 영토에 발을 디뎠다.

 

넷플릭스 한국 제작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은 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배우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황동혁 감독이 드라마 시리즈 부문 감독상을 받았다. 미국 방송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방송의 오스카’ 에미상에서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것도, 수상한 것도 ‘오징어게임’이 비(非)영어 드라마 최초다.

 

기대를 모았던 남우조연상 부문의 오영수, 박해수 배우와 여우조연상 부문의 정호연 배우는 아쉽게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간 대부분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과 주요 부문 상을 놓고 경쟁했던 미 HBO 시리즈 ‘석세션’이 황동혁 감독이 후보로 올랐던 드라마 시리즈 각본상(제시 암스트롱)과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을 모두 가져갔다.

 

◇이정재, 아시아 국적 배우로도 최초 에미상 남우주연상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정재가 트로피를 들고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AP 연합뉴스

 

배우 이정재는 ‘오징어게임’에 마지막 456번 참가자 ‘황기훈’으로 출연했다. 일자리를 잃은 뒤 이혼하고 경마 도박에 빠져 사는 하류인생이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주변의 선한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끝내 오징어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는 캐릭터였다.

 

이정재의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은 아시아 국적 배우로도 최초 기록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에서 네 번째로 들어 올린 연기상 트로피로, 앞서 이정재는 미국배우조합상, 스피릿어워즈, 크리틱스초이스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9월 12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러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이정재가 미국 여배우 안젤라 바셋(오른쪽)과 아리아나 드보스(가운데)로 부터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받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이정재는 ‘석세션’의 제레미 스트롱과 브라이언 콕스, ‘세브란스: 단절’의 아담 스코트, ‘오자크’의 제이슨 베이트먼, ‘베터 콜 사울’의 밥 오든커크 등 할리우드의 쟁쟁한 유명 배우들과 경쟁해 당당히 수상자가 됐다.

 

이정재는 영어로 말한 수상 소감에서 “TV 아카데미, 넷플릭스, 황 감독께 감사하다”며 “황 감독은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탄탄한 극본과 멋진 연출로 스크린에 창의적으로 옮겨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말로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시는 국민 여러분과 친구, 가족, 소중한 팬들과 기쁨을 나누겠다”고 했다.

 

◇황동혁 감독상 “오징어게임이 에미상 받는 마지막 비(非)영어 드라마 아니길”

황 감독은 무대에 올라 적어온 메모지를 보며 “저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며 “비영어 시리즈의 수상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희망한다”고 영어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 상이 제 마지막 에미상이 아니길 바란다. 시즌2로 돌아오겠다”라고 덧붙였다.

 

비(非)영어 드라마 최초의 에미상 감독상 수상자가 된 황동혁 감독은 ‘세브란스: 단절’의 벤 스틸러, ‘석세션’의 마크 미로드, 캐시 얀, 로렌 스카파리아, ‘옐로우 재킷’의 캐린 쿠사마, ‘오자크’ 제이슨 베이트먼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쳤다. 감독상은 작품 단위가 아니라 에피소드를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어 ‘석세션’ 감독 3명이 각각 다른 에피소드로 이름을 올렸다.

 

‘오징어 게임’은 앞서 4일(현지시간) 열린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 시상식에서는 게스트상(이유미)과 시각효과상, 스턴트퍼포먼스상, 프로덕션디자인상 부문을 수상한 바 있어 올해 에미상 총 6관왕에 올랐다.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블랙&화이트 맞추고 손깍지… 이정재, 임세령과 에미상 레드카펫 섰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이정재(왼쪽)와 그의 연인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 /AP 연합뉴스

 

 배우 이정재가 8년째 공개 열애 중인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과 나란히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시작 전 레드카펫 행사에서는 손깍지를 낀 다정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이정재는 12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연인인 임 부회장과 등장했다. 이정재는 금속 장식이 들어간 블랙 수트를, 임 부회장은 화려한 넥장식의 화이트 롱드레스를 입었다. 레드카펫에 오른 두 사람은 손깍지를 낀 채 섰고 각국 취재진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이정재와 임 부회장은 2015년 1월 교제를 정식 발표하고 8년째 공개 열애 중이다. 둘은 여러 공식 행사에 함께 참석하는 등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LACMA 아트+필름 갈라’ 행사에 동반 참석했었고, 지난 5월 이정재의 첫 감독 연출작 ‘헌트’가 제75회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았을 때도 프랑스를 함께 찾은 바 있다.

 

▲이정재와 임 부회장. /AP 연합뉴스

 

한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배우 반열에 오른 이정재는 이날 시상식 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있다. 이는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이며 비영어권 작품을 통해 에미상 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 사례다.

 

앞서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배우조합상(SAG),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크리틱스초이스, 할리우드 비평가 협회 TV 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오징어 게임이 지난해 9월 공개 후 한국 드라마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워온 터라, 외신들도 이정재의 수상을 유력하게 점치고 있다.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오징어 게임' 배우들과 황동혁 감독(왼쪽에서 세번째). /AP 연합뉴스

 

연예 전문 매체 버라이어티는 “이정재가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첫 아시아 국적 배우가 될 것”이라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이정재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배우 중 한 명이자 SAG 상을 받은 배우로, 에미상 수상이 유력하다”고 전했다. LA타임스 역시 “이정재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징어 게임은 이번 시상식에서 이정재의 남우주연상 후보를 비롯해 6개 부문 7차례 후보에 올라 있다. 남우조연상에 오영수와 박해수, 여우조연상에 정호연 등이다. 이날 이정재와 정호연은 시상자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09월 14일  한류의 세계 지평 더 넓힌 ‘오징어 게임’ 에미상 6관왕

 영화와 대중음악에 이어 드라마도 한국의 세계 경쟁력이 미국 최고 권위의 상(賞)을 통해 확인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12일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감독 황동혁(51)과 배우 이정재(50)가 각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지난 4일 애니메이션·다큐·예능과 제작 부문 시상식에서 게스트여배우상·미술상·특수효과상·스턴트 퍼포먼스상 등도 차지한 ‘오징어 게임’이 6관왕에 오른 것으로, 한류(韓流)의 세계 지평을 더 넓혔다.

 

 비(非)영어 드라마의 첫 에미상 수상이어서 의미는 더 크다. 2020년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지난해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아메리칸뮤직어워즈 수상 등과 함께 ‘한류의 트라이앵글을 완성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인류 보편의 주제를 신선한 창의력으로 흥미롭게 재가공해 언어의 차이를 넘어 공감할 수 있게 표현한 결과다. 인터넷 시대의 국제적 영상 투자·유통 채널인 넷플릭스와 손잡은 것도 큰 성공 요인이다.

“올림픽이 아닌데 국가대표가 된 느낌”이라는 황 감독은 “대본 절반을 완성한 단계인 ‘오징어 게임 시즌2’로 에미상 작품상도 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이 이뤄질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한류가 세계 전역에서 더 큰 물결로 흘러 인간 사회의 문화적 풍요를 이끌기를 기대한다.

문화일보  사설 

 

09.15  낭랑좌(娘娘座)에서 소녀시대까지

최근 걸그룹의 행보가 활발하다. 뉴진스, 블랙핑크, 아이브, 있지, 트와이스 등이 신보를 내고 활동을 시작하더니 음원 순위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중 ‘소녀시대’도 눈에 띈다. 2007년 데뷔해 15주년을 맞이한 소녀시대가 5년 만에 정규 7집 ‘포에버 원(Forever1)’으로 돌아왔다. 제시카가 탈퇴한 후 8인 체제로 바뀐 소녀시대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이제는 각자 소속이 다른 그들이 의기투합해서 신보를 낸 것은 놀람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소녀시대’ 데뷔 당시 10대였던 소녀들은 어느덧 30대 숙녀가 되었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간 소녀시대 멤버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각자 가수로, 배우로, DJ로 활동하며 성숙과 성장의 시간을 보냈다. 데뷔곡이었던 ‘다시 만난 세계’는 이번 음반의 제목이자 타이틀곡인 팝 댄스곡 ‘포에버 원(FOREVER 1)’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곡의 작곡가가 소녀시대의 여러 곡을 작곡한 켄지(KENZIE)여서 음악적으로도 연결되고, 공감과 연대를 표현한 노랫말이 중첩된다.

 

걸그룹의 계보를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녀가극단 ‘낭랑좌(娘娘座)’를 만날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 11일자에 “유행 가수로서 예명(藝名)이 날리던 나선교를 비롯하여 박옥초, 김소파, 마현숙, 조영숙, 권서추, 권보추 등은 금번 낭랑좌라는 악극단을 조직하고 4월 11일 경에 제1회 공연을 한다는 바, 이 극단의 특색은 단원을 여자에게만 한하는 것으로 조선에서는 첫 시험인 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는 낭랑좌 이전인 1920년대에 이미 다국적 소녀가극단이라 할 수 있는 ‘대련소녀가극단’을 비롯해 ‘여자동광단’ ‘개성소녀가극단’ 등이 있었다. 이 시절의 소녀가극단은 춤·노래·연극을 모두 아울렀던 단체이긴 하나, 여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오늘날 걸그룹과 연결된다.

 

‘낭랑좌’가 중요한 것은 여성 구성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소녀가극단에서 노래와 춤을 배워온 나선교는 당시 인터뷰에서 ‘춘향전’과 ‘방아타령’같은 고전 예술을 악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 시절의 소녀가극단이나 오늘날의 걸그룹을 ‘인형 되기’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다. 작사와 작곡 등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새 이야기를 써 나가는 ‘소녀시대’에 기대를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소녀여, 소녀시대여, 영원하기를.

조선일보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10.10  70년 만에 고향 돌아온 영화 ‘낙동강’

6·25 전쟁 중 개봉했던 ‘낙동강’ 원본 찾아 부산영화제서 상영
현재 한국 영화의 눈부신 飛上도 당시 예술인의 분투 덕에 가능

 1952년 영화 '낙동강'이 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음악 칼럼니스트 김원철씨가 작품의 의미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영화가 있다. 6·25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1952년 개봉했던 영화 ‘낙동강’이다. 전쟁 중에도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낯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제작한 한국 영화는 20여 편에 이른다.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과 극영화 ‘태양의 거리’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낙동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 장면이 담긴 흑백사진 10여 장이 남아 있었을 뿐, 원본 영상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근 ‘낙동강’의 원본 영상을 확보한 뒤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쳐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 상영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70년 전에 부산에서 개봉했던 전쟁 영화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영화제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70년 전의 흑백 유성(有聲) 영화를 보는 심정은 살짝 묘했다. 우선 초반 화면에 나오는 자막부터 ‘낙동강’이 아니라 ‘낙독강’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 형식이 섞여 있어서 요즘 관객들의 시선에서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의 정상에 오른 현 시점에서 ‘낙동강’의 완성도를 오늘날의 작품들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화는 양산 통도사와 을숙도 갈대밭 같은 문화유산과 자연 풍경, 낙동강에 뛰어드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그 뒤 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고발하고 남녀 주인공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전시(戰時) 계몽 영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남녀 주인공은 “놈들은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단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서 낙동강 전투 장면도 삽입했다. 전시의 열악한 상황과 절박한 심경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의 고향을 부산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낙동강’은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향토문화연구회’가 경남도청 공보과의 후원을 받아서 제작했다.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한형석(1910~1996) 선생이 영화의 기획·재무에 참여했다.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이었던 윤이상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영화 삽입곡 ‘낙동강’도 인기를 모았다. 전후(戰後) KBS 교향악단 초대 상임 지휘자를 지낸 임원식이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다. 전쟁 당시 한국 문화 예술인들의 역량이 총결집한 결과물이 ‘낙동강’인 셈이다. 이날 영화제에서 ‘낙동강’을 관람한 한형석 선생의 아들 한종수(62)씨는 “말로만 듣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선친과 가족들도 함께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동안 1950년대는 한국 영화사에서도 ‘잃어버린 고리’이자 공란(空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시의 악조건과 혼란 속에서도 당시 영화인들이 쏟아부은 노력은 전후 영화계가 빠르게 재건될 수 있었던 든든한 발판이 됐다. 현장 취재를 하다 보면 간혹 가족사와 현대사가 만나는 예외적 순간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낙동강’이 그런 경우였다. 부산·경남 지역 음악사 자료에는 기자의 조부가 ‘낙동강’에서 합창 지휘를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 중에도 ‘낙동강’을 만들었던 6·25 세대의 분투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한국 영화의 눈부신 발전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다시 겸허해졌다. 올해 부산에서 역사를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월간조선 11월 호 

근대 옛 가수의 궤적을 밝힌 이동순 교수 

“짐짝처럼 방랑하던 악극단 추억을 전설로 복원해”

 

⊙ 어머니 일찍 돌아가신 뒤 트로트에 심취해 눈물짓기도… 중3 때 500곡 외워
⊙ 시인 김지하와 노래 대결… 새벽 5시 반쯤 김지하 벌러덩 쓰러져
⊙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
⊙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돼
⊙ 이애리수의 ‘황성(荒城)의 적(跡)’은 발매 1개월 만에 5만 장 팔려
⊙ 천재 음악가 집안 김용환·김정구 가족

李東洵
1950년생.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마왕의 잠, 문학평론 당선 / 안동간호대 교수, 충북대 교수, 영남대 교수 역임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사진=조선DB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가요연구가인 이동순(李東洵·1950~) 영남대 명예교수는 오랫동안 ‘번지 없는 주막’을 찾아왔다. 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기 위해 자료 수집과 정리 및 연구에 몰두해왔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가요는 ‘번듯한’ 번지를 갖게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트로트 광풍에 휩싸여 있다. 이 광풍의 한 자락에 이 교수의 땀방울도 있으리라.

이 교수가 최근 벽돌 한 장(700쪽) 두께의 책 《한국 근대가수 열전》(소명출판)을 펴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손으로 책을 들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9월 초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공교롭게도 서울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어느 80대 할머니 팬이 귀한 근대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약속을 해뒀다는 것이다. 며칠 뒤 지하철 4호선 숙대역 앞에서 만난 박남수 할머니(가명·84)는 곱고 가냘파 보였다. 박 할머니는 지금까지 변사(辯士) 김덕경(金德經·?~1934)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김덕경. 그는 일제 시대 단성사(團成社·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극장) 전속 변사로 활동한 유명한 인물이다. 유창한 어조로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은 물론 웅장한 대장부의 호통에도 능했다. 간혹 대포 소리까지 들려주며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도왔다. ‘활동사진 해설가’ ‘화면 해설가’ ‘달변가’ ‘변인(辯人)’ 등으로 불렸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제가 딸도 아닌데, 어쩌다 이분 제사를 지금껏 지내고 있어요. 이분이 자손이 없으셨어요. 40대에 가셨는데 어쩌다가 평생을 모시는데….”

이동순: “어디다 모셨습니까.”

박 할머니: “묘는 없어요. 돌아가실 때 이분이 《현대공론사》 지부장(?)으로 계셨고, 그때 신문사를 운영하시려고 재산을 다 탕진해가며 (조선)총독부에 드나드셨는데 그게 잘 안 되어….”

박 할머니는 낡은 스마트폰에 담긴 서화 몇 점을 보여주었다. 실물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 “전화로는 한 90점 된다고 하시더니….”

박: “사실은 그렇게 많이 없어요.”


변사 김덕경의 조카 할머니

이동순 교수 얼굴에 일순 당황한 빛이 감돌았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김덕경 선생이 냉면을 드시다가 그게 잘못되어서 한 3년을 고생 고생하시다가 신문사 한답시고 재산 다 집어넣고 불쌍하게 집도 없이 셋방에서 돌아가셨어요.

이분이 잘나갈 때 여러 가수를 먹이고 재우고 입혔는데 의리가 없더군요. 제 생각에 이분이 무슨 실수를 많이 하셨는지….”

 

이: “당시 변사는 장안의 명사였어요. 김영환이란 변사가 있었는데 서울 장안에 승용차가 몇 대 안 되던 시절에 캐딜락을 타고 다녔대요. 금으로 된 장신구도 많고, 기생 인력거에 노상 납치도 되고…. 그러나 토키(Talkie·유성영화) 시대가 도래(到來)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죠.”

이: “김덕경 선생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박: “말년에 왕십리 오간수다리 근처에서 사셨는데 처참하게 가셨어요. 그분 아내도 함께 모시고 있어요. 아들을 못 낳아서 굉장히 죄스럽게 생각하셨죠. 실은… 김덕경 선생의 아내가 제 고모입니다.”

그러니까 박 할머니는 고모부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이 교수가 “기일(忌日)이 언제냐”고 묻자 박 할머니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음력으로 8월 27일. 그날 제가 태어났대요. 저는 생일이 없어요. 생일날, 두 분 제사를 모셔야 해요.”

박 할머니는 KBS 라디오 〈세월 따라 노래 따라〉를 가끔 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DJ가 이 교수여서 “염치 불구하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고 했다.

그녀가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모습을 보니 마치 흘러간 옛 노래처럼 슬프고 아련한 무엇이 느껴졌다.

박 할머니를 바래다 드리고 돌아온 이 교수는 “폐허에 방치된 낡은 편린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어 깁고 짜 맞추어 옛 가수의 생애사를 회복시켰다”면서 저서 《한국 근대가수 열전》을 탁자 위에 내놓았다. 기자는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가수들이 낡은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전국을 방랑하던 악극단 추억을 전설로 복원한 것이다.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들입니다. 그들이 발표했던 가요 작품들과 가수로서 딛고 간 생애의 발자취를 추적 정리하는 일은 자못 의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와 관련된 문제의 구체성이 가수들의 행적에 반영되어 있으니까요.”

이 교수에 따르면 ‘가요황제’ 남인수(南仁樹·1918~1962년)의 생애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펼쳐지고 마감되었다. 백년설(白年雪·1914~1980년)도 희곡을 습작하던 문학청년으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지만 일제 말 가혹한 환경의 굴레에 압도당하고 만다. 가수 이난영(李蘭暎·1916~1965년) 역시 식민지 침탈 초기의 빈곤과 고난, 그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붕괴, 6·25전쟁을 겪으며 마침내 생의 파멸에 이르는 참혹한 과정을 겪는다. 이 교수는 “식민지 시대, 어떤 가수를 막론하고 그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가요황제’로 불린 가수, 남인수

가요황제 남인수

 

이동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 가수 가운데 거의 절규와 통곡에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한 가수가 남인수라고 한다. 그는 40여 년 가까운 생애 무려 1000곡가량의 노래를 불렀다. 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팬들에 의해 ‘가요황제’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고향은 알려진 것과 달리 경남 진주가 아니라 하동이다. 첫 이름은 최창수(崔昌洙). 부친 사망 후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의 강씨 문중으로 들어가 강문수(姜文秀)가 되었다.

1936년 강문수는 18세 나이로 ‘눈물의 해협’을 취입한 후 남인수라는 예명을 썼다. 이듬해 ‘애수의 소야곡’이 엄청난 인기를 얻어 곧장 최고의 가수 지위에 올랐다. 이른바 공전의 대히트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남인수의 노래 ‘애수의 소야곡’ 1절

당시 언론은 남인수에 대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 탄생’이라 보도했다. 그러나 1943년은 ‘가요황제’ 남인수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따위와 같은 소름 끼치는 군국가요를 부르게 되는 일에 강제동원됐던 것이다.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갑자기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와 무대가 아수라장이 된 일도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해군 정훈국 제2소대 소속 문관으로 종군했고 위문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53년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최대의 히트곡 하나를 발표하는데 그 곡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다. 이 교수의 말이다.

“1950년대 말 남인수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 무대에 스스로 오르기조차 힘들어졌다. 결핵 환자 남인수에 대한 이난영의 헌신적 간호는 참으로 각별했다고 한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병실 침대 마이크 앞에 앉아 부른 노래가 ‘무너진 사랑탑’(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이다.”

이 곡은 사실상 ‘가요황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그야말로 남인수의 생명과 바꾼 노래였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소근 소근대는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탑아
-남인수의 노래 ‘무너진 사랑탑’ 1절

 

김덕경, 복혜숙, 그리고 ‘째즈쏭’

▲《조선일보》 1982년 10월 30일 자에 실린 〈고 복혜숙 여사의 문화훈장 추서〉 기사다.

 

―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배우 복혜숙(卜惠淑·1904~1982년)은 어떤 분인가요.
“강원도 산골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복혜숙은 그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나머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 서울로 무작정 올라오게 됩니다. 두 번째 가출인데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 임지로 떠났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 인기 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속 포부를 밝힙니다.

김덕경은 복혜숙에게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1891~1921년)을 소개해줍니다.”

복혜숙은 1926년 영화 〈농중조(籠中鳥)〉, 1927년 〈낙화유수〉, 1928년 〈세 동무〉 〈지나가(街)의 비밀〉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다졌다.

“배우 복혜숙이 1929년 첫 음반을 냈는데 영화극이란 장르를 단 《장한몽》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영화극 음반을 발표했고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가요음반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라는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합니다.”

― 미국 흑인음악 재즈를 말하는 것인가요.
“째즈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미국식 정통 재즈라기보다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이 음반에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운데 어쨌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습니다.”


강석연의 ‘방랑가’

 가수 강석연의 앨범. 옛 가요 사랑모임인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 발매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강석연(姜石燕·1914~2001년)의 노래 ‘방랑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쩌면 한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답답하던 숨통이 트이는 듯했을지 모른다. 이 교수의 말이다.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애리수, 고운봉, 명국화 등 많은 가수가 다시 불렀지요.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이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누가 알거나
-가수 강석연의 노래 ‘방랑가’ 1절

이 교수는 “강석연의 ‘방랑가’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되어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방랑가’를 검색하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 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강석연과 관련한 놀라운 에피소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언젠가 국가대표 농구감독을 지낸 방열 감독(현 가천대 명예교수)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여러 해 전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강석연 여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며 그분이 자기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 깜짝 놀랐어요. 일제 말 언론인이었던 부친 방태영(方台榮·1885~?) 선생이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고 그 험난했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강석연은 오로지 가족 부양과 자녀 양육에만 전심전력을 쏟은 것이죠.

방열씨의 회고에 따르면 소년 시절 다락방에서 물건을 뒤지다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풀어보려 하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그 물건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버렸다고 해요. 아들은 끝내 그 내용물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가수였던 사실 감춘 강석연·이애리수

 1930년대 인기 여가수들의 일본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근하신년(謹賀新年)’ 푯말을 한 글자씩 들고 새해 인사 포즈를 취한 강석연, 이애리수와 신원 미상의 가수, 김선초(왼쪽부터). 사진=이동순 제공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1절

우리 대중음악사에 ‘황성(荒城)의 적(跡)’ 한 곡으로 기억되는 ‘살뜰한 이름’의 가수 이애리수(1910~2009년)가 있다. 이 교수는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이라면 단 한 곡만이라도 그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극 공연의 막간(幕間)에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는데 전국의 가요팬들이 ‘황성의 적’이 담긴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었다고 합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 창가나 영화 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겁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만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애리수는 2009년 3월 31일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순 교수는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洪性宇·1938~2022년)의 안내로 이애리수의 장남 배두영씨를 만난 일을 떠올렸다.

“배두영 선생에 따르면, 자신의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전 가수 출신 어머니들은 자신의 과거 경력을 일절 비밀에 부쳤는데 그 까닭은 자녀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천재 음악가 집안

▲천재 음악가 집안의 장남 김용환.

 

한국 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와 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다. 당장 손꼽을 수 있는 인물로는 천재 음악가 김해송(金海松·1910~1950년) 정도다. 여기에다 한 사람을 더 들라면 이동순 교수는 주저하지 않고 김용환(金龍煥·1909~1949년)을 꼽는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면은 하나같이 작곡과 가창을 겸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뛰어난 독보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 교수의 말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희귀한 천재 음악가였던 김용환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으로 예수의 제자인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했던 아우 김정구(金貞九·1916~1998년), 피아니스트였던 아우 김정현(金貞賢·1920~1987년), 소프라노 가수였던 누이동생 김안라(金安羅·1914~1974년) 등이 있는데, 자체로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鄭德德·?~1950년) 또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하지요.”

― 유명한 음악 가족이군요.
“4남매와 형수가 원산에서 주거할 시절, 가족연주단을 조직해 동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금강산 온정리 마을까지 두루 다녀가며 공연을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들 형제는 교회 음악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키워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마을과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죠.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능통했다고 해요. 그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 노래는 언제나 탁 트인 목소리로 걸쭉하고도 능청스러우며 시원한 서민적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이 교수는 김용환을 ‘서민적 창법의 원조가수’라 불렀다.

“김용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의 소탈하고도 호방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정겹고 구수한 향취마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

 

김용환의 동생 김정구도 한국 가요사에 있어 ‘눈물 젖은 두만강’ 하면 떠오르는 가수다.

‘두만강’은 예부터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흐르는 강이라 하여 일명 ‘도망강’이라 불렸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작곡가 이시우(李時雨·1913~ 1975년)가 신파극단 ‘예원좌(藝苑座)’ 소속으로 만주의 투먼에서 공연을 마치고 두만강 부근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던 밤, 여인의 처절한 통곡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시우는 이튿날 그 통곡의 사연을 물었고,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떠난 여인의 남편이 불과 1년 전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에 맞고 세상을 떠난 내력을 전해 들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조선족 시인 한명천(韓鳴川)에게 들려주었더니 즉석에서 가사 1절이 나왔고 여기에 이시우가 두만강 물소리를 들으면서 작곡한 곡이 바로 ‘눈물 젖은 두만강’입니다.”

며칠 후 예원좌 무대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관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순회공연 후 이시우는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고 김정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한명천이 쓴 가사는 1절뿐이었는데 작사가 김용호(金用浩·1908~1967년)가 여기에 2절과 3절 가사를 새로 붙이고 전체의 균형을 조화롭게 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 1절의 작사가는 한명천이고, 이를 완성시킨 작사가는 김용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1절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이런 와중 6·25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김정구는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내려와 떠돌이 빵장수, 지게꾼, 무대 출연 등으로 몹시 고달픈 실향민의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노래가 조명암(趙鳴岩·1913~1993년), 박영호(朴英鎬·1911~1953년) 등 월북 작사가의 작품이었기에 부를 노래가 없었지만 오로지 ‘눈물 젖은 두만강’만큼은 어떤 금지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는 정부가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도 가수로서 맨 처음 김정구가 받았지요. 가는 곳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만을 불러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이 노래는 김정구 고유의 상징이자 단골 레퍼토리가 됐습니다.”


전쟁 중에 세상 떠난 어머니

 이동순 교수는 팔방미인이다. 어느 가을문학제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이동순

 

 이동순 교수가 이처럼 우리 가요에 깊이 천착한 데는 아픈 이유가 있다. 어쩌면 ‘잃어버린 번지’를 찾기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운명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6·25 발발 무렵 그는 어머니 배 속 불과 8개월의 태아였다. 경북 김천 구성면 상좌원 마을에 북한군이 들어온 때는 그해 8월 초순.

어머니는 마을에서 약 8km가량 떨어진 나실(羅室)이라는 문중(門中) 종산(宗山)을 향해 걷고 또 걸어서 당도했다. 그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도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맹렬히 쏘아대는 대포, 기관포 소리가 종일 하늘을 찢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부터 몸이 회복되지 않은 채 시름시름 자꾸 나빠져만 갔다. 아기는 배고픔으로 줄곧 악을 쓰며 울어대기만 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어린 막내 생각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저 윗목의 어린것은 금방 저를 따라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계모 설움 안 받도록 제발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1953년 봄, 아버지는 어미 잃은 4남매를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어떠한 삶의 방책이 있을 리 없는 고달픈 이농민(離農民) 가족의 초라한 행색이었다. 대구 시민운동장 부근 자동차정비공장 내부 허름한 방 한 칸이 새 보금자리였다. 백방의 노력 끝에 아버지는 전매청 창고지기로, 형은 행정서기 보조로, 큰누나는 권련을 생산하는 현장 노동자로 일자리를 얻어 이름 그대로 전매가족이 되었다. 이 덕분에 그의 가족은 대구의 수창초등학교 뒤편 전매청 관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소년 시절의 애달픔은 이루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형, 큰누나가 출근하고 없는 집에서 나는 작은누나랑 함께 지냈습니다. 그저 적막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황금심·이난영에게서 어머니를 찾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간혹 진공관 라디오에서 〈정오의 음악〉 프로가 흘러나왔는데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곤 했다. 여성 가수의 노래가 나올 때면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이러할 것으로 생각해 더욱 라디오에 매달렸다.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난영, 장세정, 백난아, 이화자, 백설희, 송민도, 금사향 등의 노래가 나올 때면 가슴이 마구 달아올라 황급히 공책을 들고 와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한창 총기가 있을 때여서 받아 적으며 바로 외웠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구 인교동 부근에 친구 집이 있었는데 철공소를 하며 잘살았습니다. 친구 엄마가 사내들을 잘 다루더군요. 덩치가 산만 한데도 삿대질하고 때리고…. 하지만 그렇게 강하던 친구 엄마도 안방 전축을 틀어놓고 때로 울더라고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서인지,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를 틀어놓고….

친구 엄마가 안 계실 때 그 전축은 내 것이었죠. 레코드 재킷에 있던 가사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어요. 두 권에 걸쳐 빽빽하게 다 적고 다 외웠어요. 그것 가지고 있다면 보물인데….”

그렇게 3절 가사까지 익힌 노래가 중학교 3학년 때는 무려 500곡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참 맹랑한 소년이었겠지요. 어머니 때문에 이런 집착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에게 늘 부족한 어머니를 채우느라고 형성된 버릇이지요.”

― 트로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군요.
“노래에 심취해서 눈물짓기도 하고…. 다른 친구 엄마들도 날 불러가지고 ‘라면 끓여줄게. 몇 곡만 불러다오.’ 그래서 부르고…. 고교 때는 반 대항 노래자랑 대표로 나가 노래하고, 군 시절에도 노래 사역(事役)을 얼마나 했는지…. 나중엔 ‘나도 가수가 되어볼까’ 이런 생각도 했다니까요. 하하하.”


청주大戰·김지하와의 노래 대결
 

 이동순 교수가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정년퇴임 후 가요연구가로 활동 중이다.

 

 대화가 어느새 김지하(金芝河· 1941~2022년) 시인과 가졌던 ‘세기(世紀)’의 노래 대결로 이어졌다. 그가 충북대 교수로 있을 때니까, 1985년 무렵이다.

종강을 앞두고 기분이 느슨하던 어느 날, 철학과 윤구병(尹九炳) 교수가 찾아와 서울의 유명한 선배 한 분이 청주로 내려오니 같이 보자고 했다. 장소는 불문과 전채린[田彩麟·수필가 전혜린(田惠麟)의 아우] 교수네 주공아파트 거실.

약속한 날, 청주로 내려온 이는 다름 아닌 김지하였다. 최근 작고한 소설가 김성동(金聖東), 채희완(蔡熙完) 교수(당시 청주사대 교수), 윤 교수 등이 좌우시종으로 배석했다.

― 어떻게 해서 노래 대결이 이뤄진 겁니까.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로 투옥됐다가 풀려나 전국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할 때였어요. 숱한 유린과 상처, 피멍으로 얼룩진 심신을 술과 노래로 달랬지요. 시인을 거두고 시중한 후배들은 이런 술 상무를 하느라 고초가 많았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하나가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놓았죠.

‘형님! 형님보다 노래 잘하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 청주에 있는데 이 아무개라고.’

‘뭐? 그놈을 꺾으러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명색이 시합이니 규정이 없을 수 없어서 머리를 짜내어 마련한 규정은 실로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었다고 한다. 이 교수가 설명한 당시 규칙은 이렇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① 모든 노래는 2절까지 불러야 기본이다. ② 3절 가사까지 완창 하면 플러스 1점. ③ 만약 가사를 잊어서 1절만 부른다면 감점 1점. ④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실격. ⑤ 동요, 가곡, 팝송, 찬송가류는 절대 안 됨. ⑥ 상대방의 가창 후 3분 이내에 즉시 이어받을 것.〉


김지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김지하 시인. 2009년 10월의 모습이다.

 

 대결에 앞서 이 교수는 나름의 대비책을 만들었는데, 명함 크기의 백지 앞뒷면에 그가 알고 있는 노래의 제목을 줄여 깨알같이 적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면 ‘고모령’ ‘홍도야 우지 마라’는 당연히 ‘홍도’로.

이 방법은 그날 시합 중 크게 도움이 되었다. 초저녁 8시경부터 시작한 노래 시합이 이튿날 새벽 5시 반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그야말로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곡 끝나면 바로 이어받아 또 한 곡, 아마도 추정컨대 200곡은 충분히 불렀을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

“오랜 시간 줄기차게 이어가니 멀쩡히 알던 노래가 첫대목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메모를 슬쩍 꺼내 보며 다음 부를 곡을 찾았죠.

처음엔 장난기를 머금고 시작한 시합이 자정을 지나 새벽 두세 시가 넘었을 땐 방 안이 팽팽한 초긴장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이 교수는 내심 이기겠구나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한다. 앉음새 하나 고치지 않고 낭창하게 소리의 결도 시종일관 잔잔하고 차분히 펼쳐가니 김지하의 얼굴에 점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해지더라는 것이다.

“기어이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잔인한 시합이 계속되었는데, 새벽 5시 반쯤 됐을 무렵 김지하 시인이 뒤에 쌓아놓은 이불에 등을 기대고 뒤로 벌러덩 쓰러지면서 ‘에잇, 누가 이따위 시합을 하자고 했나. 징그럽다 징그러워~’ 하더군요.”

이렇게 옛 가요 청주대전(大戰)은 장엄한 막을 내렸다.

― 김지하 시인이 그 ‘청주대전’에 대해 말을 했을까요?
“시인 이재무가 인터뷰한 글 하나가 유일한데요, 가요대전 패배에 관한 소감을 묻자 ‘그는 노래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 당할 도리가 없었지’라며 웃어넘긴 것이 다였습니다. 하하하.”


莫上莫下 김장실과 이동순

 김장실 전 차관과 이동순 교수.

 

그때 김장실(金長實) 전 문화부 차관이 동석(同席)했다. 우연히 이 교수와 통화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즉석 만남’이 성사됐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재미있게 쏟아냈다. 대화 중 김 전 차관은 트로트를 부르기도 했다.

김 전 차관은 문화부 차관(재임 2008년 3월~2009년 4월)과 예술의전당 사장, 국회의원(19대 새누리당 비례대표)을 지냈고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 국민통합초청위원장을 맡았다. 최근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됐다.

그는 조갑제닷컴에 연재하던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트롯의 부활: 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380쪽)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를 건너려면 어른도 장난감이 필요하다. 저에겐 ‘트로트’가 장난감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트로트를 사랑한다.

김장실: “제가 제일 하고 싶은 게 이동순 교수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 한 곡 부르고, 또 이야기하다가 노래 부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동순: “하하하. 좋죠.”

김: “이걸 전에 한 번 했었는데 언제 했느냐 하면, 2001년 문화부 예술국장 시절이었어요. 그때 연예인협회장이 남진이었는데 둘이 점심을 먹었어요. 종로구청 앞 복집에서 ‘우째(어떻게) 가수가 됐습니꺼’로 시작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제가 남진 노래를 한 곡 불렀죠. 가수 남진씨도 자기 노랠 부르고,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2시간 반 동안 불렀지 뭡니까. 종업원들이 우리 방 밖에서 빼곡히 모여 노랠 듣고 있더라고요. 하하하.”

이: “얼마나 아시는 게 많으시고 경험이 많으시면 이야기가 책 읽듯이 술술술~.”

김: “하하하. 제가 정치학을 전공했기에 대중가요를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을 내고 싶어요. 그래야 인문학을 하시는 분과 차별이 있지. 인문학 하신 분들은 감수성 잘 드러내는 데는 천재시거든요.”


악마가 된 가수 이야기

이: “나도 꿈을 꾸고 있던 건데 우리 김장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냥 너무너무 성원하고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확 드네요. 최고의 전문가니까. 이번에 제가 쓴 《한국 근대가수 열전》 중에 탁성록(卓星祿·1916~?) 작곡가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 유심히 한번 봐주이소.”

김: “어떤 내용인지 조금만 맛 좀 보여줄래요?”

이: “(탁성록이) 경남 진주 사람인데 상경해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작가가 됐어요. 하지만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밀려나 탄식에 빠져 아편쟁이가 됐어요.”

김: “아이고 저런. 어쩌나….”

이: “점점 몰락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아편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써주질 않았어요. 그 시절, 음반을 낸 게 있는데 원곡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번안한 ‘어두운 세상’이란 곡입니다. 원곡은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레조 세레즈(Rezso Seress)가 1933년 발표한 노랩니다. 그 원곡을 형편없는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한 기분만 꽉 차 있는 노래로 만들었어요.”

김: “저런….”

이: “해방이 되고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 고향 선배가 탁성록을 발탁, 군악대장이 됩니다. 이후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가 되었고 제주 4·3사태가 일어나자 제주로 파견되었죠. 그곳에서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당시 탁성록 손에 죽은 자가 15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너무 악랄하게 구니까 진주로 쫓아 보냈을 정도예요. 한데 그곳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800명가량 죽여버렸네…. 완전히 살인마가 되어버렸어요.”

김: “내면을 양극단으로 달리게 만든 것이 마약일 겁니다. 사람의 인성이 이렇게까지 파괴가 안 되는데 마약을 했을 때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고 그것이 떨어지면 극단적으로 우울해하고….”


조지훈의 탄식

이: “트로트를 좋아하시게 된 사연이 있습니까.”

김: “제가 어렸을 때, 마을 라디오를 가진 집에서 유선으로 각 집마다 스피커를 연결했어요. 사용료로 1년에 쌀이나 보리 몇 말씩을 냈는데 주로 음악 프로를 틀었어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행가를 알았어요. 그 시절, 배고픔의 한도 있고, 주변 불행한 것도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노래들을 부르면서 속으로 많이 울고 그랬어요. 트로트 노랫말을 보면 대중이 누구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가사 전달력이 세계 최고입니다.

제 지인이 한양대 대학원 시절에 목월(朴木月·1915~1978년) 선생에게 배웠다고 해요. 목월을 따라 청록파 시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주 참석했는데 한번은 조지훈(趙芝薰·1920~1968년) 선생이 탄식을 하더랍니다.”

이: “왜요?”

김: “‘평생 시를 썼지만,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대중가요의 작사가보다 훨씬 못하다’고. 그 말을 듣고 지인이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하니까, 지훈 선생은 ‘아니네, 이 사람아. 아무리 해도 그 사람들을 못 따라간다’고 했답니다. 그 시절 가요엔 구구절절 대중의 마음을 살피는 노랫말이 담겨 있었어요.”

이: “말씀하시는 게 녹음해서 트는 것처럼 술술 나오네요. 하하하.”

김: “하하하.”


트로트와 BTS, 韓流

김장실 전 차관이 떠나고 기자는 이 교수와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말이다.

“트로트 공부를 쭉 해보니까, 우리 가요의 뿌리라는 게 단순하게 일본 색조의 흐름에 압도되어 이뤄진 산물이 아니더군요. 일본적인 것들이 우리 문화에 충격을 주고 세례를 주려 애썼지만, 일본이 결국 압도하지 못했어요. 일본이 조선어 사용을 막았지만 결국 실패했듯이 말이죠. 강점기 36년으론 어림도 없었던 것입니다.”

― 트로트 속에 우리 전통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든다면….
“판소리 사설과 잡가, 민요, 그리고 시조, 가사와 같은 전통과 흐름, 골격들이 식민지 시대가 펼쳐진 뒤에도 우리 가요 속에서 이어져 왔어요. 물론 일본 가요와 서양 가요의 영향, 기독교 영향도 있었고 그런 세례에 아부하는 노래도 꽤 많았거든요. 완전히 일본식 노래도 있었고요. 그러나 보다 더 굵은 줄기는 손상되지 않은 채 이어져 왔어요.”

― 신(新)민요는 어떻게 보십니까.

근대에 등장한 새로운 민요를 의미하는 신민요는 1930년대에 트로트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 민요풍의 대중가요를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요와 유행가의 비빔밥’으로 인식될 만큼 혼종적 요소가 강했다.

“가요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신민요를 일본에 동화된 기형적인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신민요 안에 든 어떤 본연의 것을 지키려는 용트림이나 어떤 보수(保守), 즉 보전하여 지키려는 힘이 굉장했거든요.

그래서 신민요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사랑스럽고 애착이 가죠. 그런 굵은 뿌리가 상당히 손상됐지만 멸실(滅失)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았고, 이후 미국적인 것이 혼합돼 흘러온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가요는 나름의 고유성을 유치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봅니다.”

― 한류(韓流)로서 트로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BTS의 등장 이면에 옛 가요, 우리 가요가 발아(發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지 돌연변이나 느닷없이 생겨난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11.30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영웅들을 위해 불렀습니다”

TV조선 창사 특집 콘서트 ‘이미자…’ 내일 밤 10시 방송

▲‘신이 내린 음색’이란 평가를 받는 가수 이미자는 “오버하지 않고 높지도 낮지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순수한 그대로를 노래해야 오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번 콘서트를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들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영웅들을 떠받들고 대접해드리진 못할망정,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만이라도 알아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참전 용사 등을 모시자는 기획을 하면서 기와집을 일흔 번이라도 헐고 또 새로 지을 듯한 각오로 임했습니다.”

 

다음 달 1일 방송하는 TV조선 창사 기념 ‘이미자 특별 감사 콘서트 오랫동안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대에 오르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81)는 “가수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진정한 영웅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콘서트는 파독 광부 150명과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여한 6·25 참전 용사, 월남 파병 장병, 천안함 유가족, 목함 지뢰 피해 군인, 제2 연평해전 참전 용사 등을 초청해 국민들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콘서트. “그분들은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융성할 수 있게 한 뿌리이자 얼입니다. 국내외에서 우리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움직임이 많지 않습니까. 더 늦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저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뒤 ‘동백 아가씨(1964)’ ‘흑산도 아가씨(1965)’ ‘섬마을 선생님(1966)’ ‘아씨(1970)’ 등의 히트곡이 담긴 음반만 500여 장, 곡(曲) 수로는 2000곡 이상을 발표한, 최다(앨범), 최장(활동 기간), 최고 등 ‘3최’ 기록을 가진 가수다. 지난 2019년 노래 인생 60년을 맞아 TV조선을 통해 기념 콘서트를 선보였던 그가 MC 임성훈이 진행한 이번 콘서트를 통해 3년 만에 TV 무대에 다시 오른다.

 

▲1일 방송될 콘서트에서 가수 이미자가 무대 밑에서 참전 용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TV조선

 

이미자는 이번 콘서트 출연료를 전액 기부했다. 의상도 모두 자비로 준비했다. 또 코로나 기간 손수 뜬 수세미 2000장을 판 수익금 역시 모두 기부한다. “이번 콘서트는 단순히 히트곡을 부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노래로 부르는 대한민국 현대사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TV 프로그램에 붙는 ‘쇼’라고 명칭을 붙이지 말아달라고 제작진에게 부탁했지요.”

 

그와 오래 함께 일한 작가 등과 합심해 6개월 이상 걸려 각종 자료 조사도 거쳤다. “6·25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를 전부 뒤졌어요. 국가 기록원 자료부터 신문, 영상 등 한 분 한 분, 혹시 놓치는 것이라도 있을까 봐 잠도 잊었습니다.” 파독 광부·간호사를 비롯해 파병 장병, 참전 용사들을 위로하고자 숱한 노래를 부른 그였지만 자료를 보는 동안 그의 노랫말처럼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독일 지하 갱도에서 트랜지스터로 노래를 듣던 광부들, 목청 터져라 노래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베트남전 장병들, 모두 지금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합니다. 장병들이 너무 울기에 ‘위문하러 왔는데 너무 울게 만들어 위문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니, ‘이렇게 펑펑 우니까 응어리가 풀린다’며 목소리를 높여 앙코르를 외치더군요. 한 곡, 두 곡이 어느 덧 열 곡이 됐는데도 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콘서트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참전 용사등의 당시 모습과 현재 인터뷰를 담은 VCR을 보여주면서 이미자의 노래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의 히트곡뿐 아니라 ‘황성 옛터’(이애리수) ‘전선 야곡’(신세영) 등 우리 현대사의 한 시대를 위로하는 곡들도 준비했다. 또 ‘뿌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전통 가요의 명맥을 잇는 가수 조항조와 김용임이 이미자와 함께 목소리를 맞춘다. ‘미스터트롯’ 결승전에서 인생곡으로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을 부른 영탁 등도 등장해 이미자와 함께 노래 불렀다.

 

그는 이번 콘서트를 진행하면서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저절로 몸이 향했다. “참전 용사들과 악수하다 목함 지뢰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위를 보는데, 안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을 보면서, 가수가 함부로 ‘은퇴’라는 말을 쓰면 더더욱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력이 있는 동안엔, 나라가 필요로 하면,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쉬지 않고 노래하겠습니다.”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

 

12월 02일 “가수로 번 돈은 나눔에 쓰며 보답 … 90살 돼도 노래하며 살고파”

▲하춘화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조선팰리스 24층 1914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90세까지 짱짱하게 노래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강조했다. 문호남 기자 

 

■ M 인터뷰 - 신영균재단 예술인 선행 대상 받은 가수 하춘화

‘봉사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 실천
누적 기부액 200억원 넘어

‘최장수 가수’ 기억되고 싶어
매일매일 연습해 자기관리
이달 서울 · 대구 · 부산 디너쇼

예술철학 등 학업도 열중
국내 가수 최초 박사학위
남편과 함께 주말엔 등산
평범한 결혼 생활에 행복

 

1년 입어도 10년 입은 것처럼 친근하고, 10년 입어도 새 옷처럼 느껴지는 옷.’


오래전 어느 유명 의류회사 홍보 카피다. 올해 데뷔 61주년을 맞은 ‘트로트의 여왕’ 하춘화를 보면 그 카피가 떠오르고, 늘 새 옷 같은 느낌이 든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절차탁마의 자세로 신인처럼 무대에 서는 그를 데뷔 연륜만 보고 70대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61년 여섯 살의 나이에 데뷔한 그는 이제 ‘6학년 7반’이다. 다섯 살에 데뷔한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 세계 최연소 가수 데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춘화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조선팰리스 24층 1914룸에서 진행했다. 그와의 만남은 세 번째였다. 첫 만남은 1970년대 중반 초등학생 시절 경북 예천군에 있는 한 극장에서 열렸던 리사이틀 공연에서다. 당시 그의 나이 10대 후반으로 기자의 눈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눈동자에 싱그러운 모습은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는 지난 10월 20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제12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 행사에서다. 그는 이날 굿피플예술인 부문(선행상) 대상을 받았다. ‘일생을 두고 실천해온 기부활동은 대표적인 선행 예술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 수상자로 선정된 사유다. 지금까지 누적 기부액이 2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상 소감이다.

“선행은 남모르게 해야 하는데, 잘한다고 상까지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 말씀을 잘 들으니 칭찬이 저에게로 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데뷔할 때부터 아버지께서 늘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그게 가장 복된 삶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항상 머릿속에 그 말씀을 새기며 살았습니다. 이 상은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주신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래도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춘화는 이날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서 수입을 내 돈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돈은 나누기 위해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돈”이라며 “쓰는 즐거움보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이 훨씬 더 크고 뿌듯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부친(하종오)은 부산에서 손꼽히는 사업가였다. 하춘화의 타고난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부친은 부모의 역할은 자식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으로 생각해 2019년 101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니저를 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하춘화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효녀 심청이 되오리다’ 음반을 내고 데뷔했다. 1971년 16세 때 발표한 ‘물새 한 마리’가 히트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고봉산과 듀엣으로 부른 ‘잘했군 잘했어’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 가수상을 받았다. 10대 나이에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이 120장, 노래는 2500여 곡, 공연 횟수는 8500회로 1991년 세계기네스북에 최장 공연 부문으로 등재돼 있다. 지난 2011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노래와 함께 학업에도 열중해 공부하는 가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79년 경남대에 입학해 전문 학사를 취득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에 편입해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에는 동국대에서 공연예술 석사학위를, 2006년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사회 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학위를 마쳐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결혼 생활은 행복한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요. 특별나지 않아요. 다른 부부들과 똑같아요. 일이 있으면 못 보기도 하고, 일이 없으면 둘이서 막걸리도 마시고 떡볶이 먹으러도 가요. 종로에 유명한 생선구이 집에 가기도 해요. 또 영화도 보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부부싸움도 하고 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요. 주말에 시간이 되면 등산도 가요. 우리나라에서 높은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 봤어요. 남편도 등산을 좋아해요. 그래서 같이 다녀요.”

언니의 친구가 KBS PD였는데 그의 소개로 KBS 기획조정실에 근무하던 6살 연상의 현재 남편과 1995년 결혼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노력하는 가수, 자기관리에 철저한 가수로 알려져 있다.
“연습이 가장 중요해요. 노력 없이는 절대로 롱런할 수가 없어요. 현재 50년 이상 가수 활동을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피나는 노력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도태하게 돼 있어요. 몸이 건강해야 건강한 소리가 나오고, 머리가 살쪄야 감정도 풍부해져요. 머리를 살찌우기 위해선 책과 신문을 많이 읽어야 해요. 16세 때 ‘물새 한 마리’를 부르기 시작해 지금까지 수만 번을 불렀잖아요. 그래도 무대에 오르게 되면 그 노래를 또 연습해요. 처음 신곡을 발표하는 심정으로요. 연습 안 하고 무대에 올라가면 절대로 안 돼요. 제 사전에는 대충이란 없어요. 코로나19로 공연이 없었어도 연습을 매일 했어요. 매일 평균 한 시간, 많게는 3시간 정도 연습을 해요. 오늘 점심때도 어느 분과 식사를 했는데 제가 TV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대요.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느냐’고요.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후배 가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고 말로만 하지 말고 인정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해요. 나 스스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죠. 그렇지만 남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려면 피나는 노력 없인 안 돼요. 먹을 거 다 먹고, 잠잘 거 다 자고,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예요. 일할 때는 올인해야 해요. 가수가 노래할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푹 빠져 버려야 해요. 그래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거든요.”


―요즘 트로트가 국민에게 새롭게 사랑받고 있다. 최근 TV조선에서 ‘하춘화 가요제’도 열리고 있다. 감회가 어떤가.
“트로트가 지금 다시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한국 사람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만 먹다가 스테이크를 먹고, 다시 김치·된장찌개가 그리워진 거예요. 난 그런 현상이라고 봐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인간적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코로나19에 갇혀서 우울증에 걸려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트로트 가요를 들으니까 위안이 된 거죠. 외국 음악이었다면 위안이 됐을까요? 김치·된장찌개에 끌리는 것처럼요. 그게 이번에 증명이 됐잖아요. 잘나갈 때는 저속하다고 외면하다가 세상이 어려워지니까 찾는 거예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우면 고향 가서 부모님 뵙고 오면 없던 힘도 생기잖아요. 그와 같아요.”


―앞으로 공연 계획은.
“지난해 연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했다가 코로나19로 취소했어요. 오는 7~8일 대구와 부산에서, 2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디너쇼를 준비하고 있어요. 2026년에는 데뷔 65주년 기념공연을 거창하게 하고 싶어요.”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대한민국에서 히트곡을 가장 많이 남긴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가수에게 히트곡은 그 가수의 역사거든요. 그래서 찬란한 역사를 만들고 싶어요. 저는 그냥 오래 사는 건 바라지 않아요. 건강하게 내 할 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오래 살고 싶어요. 나의 바람은 90세까지 짱짱하게 노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피나는 연습과 노력을 통해 최장수 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욕심이 많죠? 하하하.”

하춘화의 부친이 101세에 돌아가셨고, 현재 모친은 101세에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장수 DNA를 이어받아 그의 꿈은 충분히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하춘화는 꿈을 이루고 나서 몸이 쇠약해지면 사전(死前)에 지인들을 초대해 장례파티를 열어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자신의 히트곡을 들으며 안락사 등으로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는 게 희망 사항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정치적인 얘기라서 조심스럽다며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정치는 잘 몰라요. 하지만 나라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노래로 어떡하면 국민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누가 됐건 정치하시는 분들이 우리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정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훈아 씨도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역대 왕이나 대통령 중에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요. 맞는 말이잖아요.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다 민초들이 이 나라를 지켜왔어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아주 우수한 국민이에요. 이 와중에도 한국 가요와 영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정치만 잘해 주면 국민은 각 분야에서 더욱 잘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제발 국민이 나라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달라는 거예요.”

 

▲1970년대 고 이주일과 쇼 공연 무대에서. 하춘화 제공

 

극장 붕괴사고서 목숨 구해준 이주일 … 가족보다 오랜 시간 함께 보내

■ 하춘화의 특별한 인연

하춘화를 얘기하면서 코미디언 고 이주일(본명 정주일·전 통일국민당 국회의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연은 197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명이었던 이주일은 ‘하춘화 쇼단’에서 진행을 맡고 있었다. 전북 이리시(현재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 이리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났다. 이때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여 명이 사망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날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해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생전 이주일은 한 방송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 하춘화 씨는 참 좋은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인정을 베풀고, 특히 부모에게 효도한다. 그리고 참 검소한 사람이다. 또 대단히 노력하는 가수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다.

하춘화는 지난달 28일 인터뷰에서 “이주일 씨는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가까운 분이었다. 8500회 공연 중 7000회 이상을 함께했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만약 살아계셨더라면 저랑 함께 공연, 사회봉사 등 더 좋은 일을 많이 했을 텐데 너무 그립다”며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주일은 하춘화 부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나중에 인기를 얻어 유명해지면 꼭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가며 살겠다”. 결국 이주일은 이 약속을 지켰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