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5]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2.08.09
[41]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다” 아픈 역사 딛고 뭉친 비결
유대인 부모, 자녀 유치원 보낼 때 첫마디는… “험담하지 말라”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해주는 말이 있다.
“네가 이제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을 만나게 될 텐데, 두 가지를 명심해라. 첫째, 네가 말하는 시간의 두 배만큼 친구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사람은 누구나 단점과 허물이 있단다. 그러니 친구의 단점과 허물에 개의치 말고 친구 속에 숨어 있는 장점과 강점을 찾아보거라.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보다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친구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친구 험담을 하지 말아라. 유대 경전 미드라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남을 헐뜯는 험담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곧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파괴되고 상류층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포로들의 이동’을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위키피디아
공동체 정신, 이스라엘 키부츠로 연결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에 성전과 성벽이 파괴되고 멸망당해 하층민들은 추방되고 상류층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 이를 ‘바빌론 유수’라 부른다. 이후 성전이 없어진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 ‘배움의 종교’로 바뀌게 된다.
그로부터 50년 뒤 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이 기발한 발상으로 강 상류에 둑을 쌓아 물줄기를 바꾸는 전략으로 강 한가운데 건설된 난공불락의 바빌론을 정복했다. 그는 ‘키루스 실린더’라 부르는 점토에 “세계 최초 인권 선언”을 발표하여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유대인을 아무 조건 없이 해방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왕. 유대인들은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왕을 자신들을 구원한 메시아로 여겼다. /위키피디아
이때 유대인들은 키루스왕을 자기들을 구원한 메시아로 보았고, 그가 믿고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는 선악의 이분법적 개념이 강화되고 일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진화하게 된다. 이후 유대인들은 3차에 걸쳐 가나안으로 돌아가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다. 하지만 더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에 남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 곧 종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감으로써 이때부터 유대 민족의 방랑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를 ‘1차 이산’(離散)이라 부른다. 이때 가나안으로 귀국한 유대인 후손마저도 훗날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해 서기 70년 나라가 없어진 이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다. 이것이 ‘2차 이산’이다.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남의 나라, 다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끼리 똘똘 뭉쳐야 했다. 디아스포라 수칙의 요점은 “모든 유대인은 그의 형제들을 지키는 보호자이고,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디아스포라의 운영 방식은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사상이었다. 여기서 ‘능력껏 번다’는 것은 돈 벌 때는 효율을 중시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방식을 택했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것은 분배를 중시하는 공산주의 방식을 따랐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공동체 내에 각종 복지 제도가 완벽히 구비되어 운영된다는 점이다. 디아스포라는 이러한 유대인 고유의 공동체 정신으로 역사의 험난한 굽이굽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 이러한 공동체 정신이 흩어져 사는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어 유대 사회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게 이스라엘의 키부츠다. 키브츠는 구성원들의 노동 수익금은 물론 개인들이 바깥에 나가 번 돈조차도 공동체에 내놓아 공동 운영비로 쓰는 대신 마을 회관의 세 끼 식사를 포함한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이 무료로 배급된다. 한마디로 대가족 생활이다. 공동체는 육아와 교육도 책임진다. 생후 3개월부터 합숙 육아를 시작으로 18세까지 합숙 교육을 한다.
고대부터 이러한 삶의 방식을 추구한 유대인들에게 자연히 공동체 구성원 간의 단결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렇게 등장한 게 ‘유대인의 고리론’이다. 이는 유대 신앙이 강조하는 생활 철칙으로 자리 잡아 유대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살게 되었다. 이는 나 하나가 아니고 동족이 다 같이 잘살아야 함을 강조해, 유대인은 모두가 한 가족으로,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유대인이라는 대가족으로 뭉쳐져 있음을 뜻했다.
하지만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한 개만 부러지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탈무드의 경고가 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 구성원 간의 고리, 곧 신뢰를 깨는 것이 험담이다. 곧 히브리어로 ‘악한 혀’를 뜻하는 ‘라손 하라’(lashon hara)이다. 험담은 인간관계를 파괴해 공동체 사슬마저 끊어 놓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를 극도로 경계했다.
성서의 레위기 19장 16절은 “너는 네 백성들 가운데로 험담하며 돌아다니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한 미드라시에는 ‘라손 하라’를 살인 이상의 죄로 여기고 이를 어기는 자는 입을 더럽혀 토라의 말씀과 기도의 말씀까지도 더럽힌다고 했다. 유대 현자들은 ‘라손 하라’에 대한 형벌이 ‘나병’이라고 믿었다.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같이 살 수 없듯이 험담하는 사람도 공동체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도 “험담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혀는 화살… 한번 쏘면 되돌릴 수 없어
사람들은 험담하는 것은 나쁘지만, 부정적일지라도 사실인 경우,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유대 율법은 이런 관점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사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이 또한 ‘라손 하라’로 규정하고 있다. 유대 윤리는 심지어 은근히 남의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도 ‘아박 라손 하라’(Avak Lashon hara) 곧 ‘라손 하라의 먼지’라 칭해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한다. 교묘히 비꼬는 말투나 말 이외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행동 곧 특정인 이름이 거론될 때 인상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흔들거나, 눈을 굴리거나, 입을 삐죽거리며 부정적 속내를 내비치는 표정도 잘못된 행동에 속한다.
하물며 있지도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무고’나 중상모략인 ‘모치 셈 라’(motzi shem ra)는 율법 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이다. 유대인들은 혀를 화살에 비유한다. 왜냐하면 한번 쏜 화살은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의 기본 덕목은 “혀를 지키는 것”이라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오늘날 SNS상의 공격성 글이나 악플성 댓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악플은 심리적 살인 행위이다. 실제로 악플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 청년들이 ‘로시 하샤나’(히브리어로 ‘한 해의 머리’라는 뜻)라고 불리는 유대교 새해 명절을 앞두고 종교 문헌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모습.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토론을 할 때 비판은 존중하되 인신공격적 비난과 비방은 금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토론에 강한 유대인들, 왜?]
건설적 비판 권장하되 비난·비방 엄하게 금지… 가정·학교서 철저 교육
유대인의 토론 문화가 성숙한 것은 비판은 존중하되 인신공격적 비난과 비방은 엄격히 금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이를 단단히 가르치며. 이에 입각한 토론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를 인성과 교양의 중요한 척도로 삼고 있다. 그들의 토론 문화에는 ‘토론이 건설적인 비판이어야지 파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유대인들은 토론할 때 ‘비판(批判), 비난(非難), 비방(誹謗)’을 엄격히 구분한다. 우선 ‘비판’이란 한자가 말해 주듯 비(批) 자는 비평한다는 뜻이고 ‘판’(判)은 바로잡는다는 의미다. 곧 상대의 오류를 명확히 지적하며 그에 대한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를 ‘비판’이라 한다. 유대인들이 토론에 강한 것은 바로 이 비판 정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편 ‘비난’의 비(非)는 비방한다는 뜻이고, 난(難)은 힐난한다는 의미다. 곧 상대방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 힐난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악의가 있다. 또 ‘비방’의 비(誹)와 방(膀) 모두 헐뜯는다는 의미다. 곧 무조건 상대방을 헐뜯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괴적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라손 하라’로 규정하여 엄격하게 금한다. 반면 ‘비판’은 건설적 설득력과 대안 제시가 있어 양식 있는 사람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토론에서 비판은 권장하되 비난과 비방은 금하는 이유다.
(42) 인류 최고의 과학자는 어떻게 역경 극복했나
지진아 아인슈타인 깨운 3가지… 나침반·바이올린·토론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말 배우는 것이 늦어 세 살까지 한마디도 못 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독일어가 어눌하고 약간의 자폐 증상이 있어 왕따가 되었다. 다섯 살 무렵 입원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무료해하는 아들에게 ‘나침반’을 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움직임을 관찰하며 바늘을 끌어당기는 우주의 힘이 숨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우주의 힘이 어떻게 자기한테까지 오는지 궁금했다.
아인슈타인은 학업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지진아로 분류되었다. 담임은 성적기록부에 ‘이 아이는 나중에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했다. 이를 본 어머니는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너는 세상의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는 훌륭한 장점이 있단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너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아들을 격려했다.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 바이올린 연주하며 알게 됐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1932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1년쯤 바이올린을 배우다 그만뒀지만, 몇 년 뒤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다. 스스로 원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집중력은 훗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명성을 얻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넌 특별하단다” 어머니의 믿음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이 남보다 잘하길 바라지 않았다. 무언가 남과 다른 특출한 재능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아들에게서 ‘Best’가 아닌 남과 다른 ‘Unique’한 재능을 찾으려 노력했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여섯 살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배우기 싫어해 1년쯤 배우다 그만두었다. 이때 어머니는 강요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다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기가 원해 다시 시작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에게 놀라운 집중력이 발견되었다. 그는 어느 날 모차르트 음악이 수학적 구조로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에 진리가 숨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깨닫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장점 찾아준 어머니 코흐 -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올리네 코흐.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아들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격려했다. /위키피디아
독서를 즐기는 아버지 덕에 아인슈타인도 책 읽기를 좋아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가난한 신학생을 대접하며 자녀를 돌봐주게 하는 대신 학비를 지원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열 살 때 부모는 막스 탈무드라는 의대생을 목요일마다 초대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자연의 움직임’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각종 과학책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21권짜리 자연과학 시리즈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12세가 되자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이끌어 함께 읽고 질문을 던져 스스로 원리를 깨우치도록 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기하학의 규칙성과 논리에 빠져들었다. 유대인 교육에 있어 이처럼 ‘호기심’ 자극과 ‘답을 스스로 찾는 해결법’은 가장 중요한 학습 방법이다. 이후 막스는 아인슈타인의 관심을 철학으로 넓혀주어, 뉴턴,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책들을 섭렵하게 했다. 13세 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한 구절, 한 구절 같이 읽으며 몇 시간씩 토론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토론의 즐거움에 빠져들면서 토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가족은 1895년 뮌헨에서 밀라노로 이사했다. 막스도 의대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위해 혼자 뮌헨에 남았으나 주입식 교육이 싫었다. 결국 역사·지리·어학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갔다. 16세 때 독학으로 미적분을 뗐고, 17세 때 ‘나는 평생 술 대신 인문학에 취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전 읽기에 빠져들었다. 아인슈타인은 밀라노에서 대학을 가려 했으나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가 없어 불가능했다. 그러다 취리히 연방 공대는 입학 시험에 졸업 증명서가 필요 없음을 알게 되어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이때 그의 탁월한 수학 성적에 주목한 학장의 배려로 아인슈타인은 페스탈로치가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1년간 더 공부하는 조건으로 이듬해 입학했다.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은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여러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하며 즐겁게 보냈다.

▲학교의 평가는 “뭘해도 성공할 수 없음” -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 모습. 말 배우는 것이 또래들보다 한참 늦었고,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렸다. 병원에 입원했던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선물한 나침반을 보며 우주의 힘의 기원을 궁금해했다. 이 같은 호기심은 그를 성장시킨 중요한 힘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인 두뇌 계발의 비밀은 ‘호기심과 상상력’이다. 아인슈타인도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상대성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나’와 같은 추상적 의문에 매달렸다. 열여섯 살 어느 여름날, 공상에 잠겨 길을 걸으며 ‘인간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상상한 것이 상대성원리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성적이 좋지 않아 취직이 힘들었다.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가 잘린 뒤 물리학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신문 광고를 냈다. 이때 배우러 온 유대인 솔로비니에게 가르치기보다 함께 토론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 모임에 수학자 하비 히트가 합류했다. 그 뒤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1902년 스위스 특허청에 취직했다. 직장 상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근거한 사고 훈련을 받았다. 이에 자극받은 아인슈타인은 토론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로 이름 짓고 퇴근 후 토론에 열중했다. 칼 피어슨의 ‘과학 문법’,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 등을 읽으며 토론했다. 책의 중요한 부분은 며칠씩 토론했다. 이때 의견들이 부딪치면서 불꽃 튀는 창의성이 발현되곤 했다. 이것이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토론으로 단련된 그의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에 상상력이 더해졌다. 오로지 머릿속 실험으로 우주의 진리에 다가갔다. 1905년 26세의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상력이 발견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독일 물리학연보에 논문 다섯 편을 연달아 발표한 것이다.
머릿속 실험으로 우주에 다가가
3월에 ‘광전 효과’, 5월에 ‘브라운 운동’,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 7월에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8월에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설’(E=mc2)을 게재했다.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주제였다. 1905년은 ‘기적의 해’였다. 그는 ‘광전 효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중력 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해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이론에서 “강한 중력장 속에서 빛은 구부러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옳은지는 개기일식 때 태양 바로 옆 별의 위치를 측정하면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별은 평소 위치에서 어긋나 보일 것이다. 1919년 5월 개기일식 때 영국 관측대에 의해 이것이 확인되어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가설들은 가히 혁명적이어서 아인슈타인에게는 ‘위대한 천재’라는 환호가 쏟아졌다. 오늘날 우리가 위성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서 한 번쯤은 아인슈타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게끔 인류에게 우주의 길을 열어준 과학자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이 본 교육의 목적]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 지식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을 감싼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교육의 비결은 상호 존중의 묘미를 알게 하는 데 있다. 일정한 틀에 짜여진 교육은 유익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교육자 최고의 목표이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을 감싼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말로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그런 다음 말로 표현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했다.
창조란 ‘상상력’을 통해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이 21세기의 화두이자 가장 중요한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상상력(想像力)이란 글자 그대로 ‘생각(想)한 것을 그려내는(像) 능력(力)’이다. 창조는 상상력과 꿈으로부터 나온다. 탈무드도 “당신의 꿈은 당신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최고의 옷”이라고 가르친다.
[43] 유대인 최대의 명절… 한국과 비슷한 초막절
유대인도 추석 쇤다… 고향 찾아 성묘하고 차례 지내
이번 주에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며, 조상을 기려 차례를 드리며 성묘 길에 오른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에는 햅쌀로 밥을 짓고, 술을 빚으며, 송편을 만들어 조상의 제사상에 올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돼지를 잡아 천지신명께 올리며 추수 감사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한바탕 신명 나게 놀았다.
그런데 우리와 비슷한 풍습을 지키는 민족이 있다. 유대인이다. 그들의 초막절이 우리 추석과 아주 흡사하다. 성인 남자들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해 조상의 묘를 찾아뵙고, 성전에서 예물 제사를 드렸다. 이때 여호와에게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고 성의껏 예물을 드렸다. 이것이 매년 한 번씩 조상과 고향을 찾는 그들의 전통이 되었다.
“여러분은 모든 곡식을 타작하고 포도즙을 짜서 저장한 후에 7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은 지정된 예배처에서 7일 동안 이 명절을 지키면서 여러분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농사와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신명기 16:13, 15)

▲초막절 맞아 함께 모인 유대인들 -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은 한민족의 추석과 아주 비슷하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수확한 곡물로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베푼다. 두 민족은 전통적으로 음력을 지켜왔다는 공통점도 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맞아 전통 음식을 장만하고 한자리에 모여 동포의 정을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강강술래처럼 여성은 ‘15계단 춤’ 놀이
초막절 기간에 유대인들은 집 마당이나 베란다 또는 시나고그(회당) 앞뜰에 초막을 짓고 전 가족이 그곳에서 먹고 자며 7일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그들은 초막 지붕을 종려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만들어 밤에 별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는 그들 조상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던 고난의 40년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8일째 날에는 함께 모여 성회를 마치고 난 뒤 초막을 헐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성경이 지시하는 날짜대로 절기를 지키지만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3대 절기를 하루씩 더 길게 지킨다. 그것은 달력이 불분명하던 시절에 생긴 관습으로 만약 달력이 부정확하여 절기를 어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집 앞마당의 가족용 초막 - 초막절 기간에 유대인들이 집이나 회당 앞에 설치하는 작은 초막. /플리커
초막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들의 조상이 애굽(이집트)을 탈출해 시나이 광야에서 보낸 40년간의 고난 시기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이 광야 생활에서 쳤던 장막의 형태로 초막을 짓는 것이다. 레위기 23:43에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쓰여 있다.
둘째, 그러한 40년간의 광야의 고난 가운데서도 여호와는 매일 ‘만나’라는 먹거리를 내려주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차가운 날씨를 덥혀줬다. 이렇게 여호와의 보호로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농사짓고 추수할 수 있도록 살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신명기 29:5절을 보면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지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씀처럼 정말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사실 초막절뿐 아니라 유대인의 3대 절기, 곧 유월절(애굽 탈출), 칠칠절(시내 산에서 율법 받음), 초막절(광야의 40년)은 모두 조상의 고난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동시에 3대 절기 모두는 감사절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추수한다. 유월절(무교절)에는 추수한 첫 보리로, 칠칠절(맥추절)에는 첫 밀로, 초막절(수장절)에는 첫 포도와 올리브, 무화과, 대추야자, 석류 등 과일로 제사드린다. 세 절기 모두 추수 감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한민족과 유대인은 모두 달을 중심으로 하는 음력을 세는 민족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이 천지창조 첫날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대인의 하루는 달이 뜨는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 날 해 떨어질 때 끝난다. 안식일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끝나는 이유이다. 다만 여호와께서 절기를 지키라 명하시어 유대인들은 음력을 지키면서도 태양의 절기를 맞추기 위해 19년 사이에 윤달을 7번 끼워 넣음으로써 이를 해결했다. 이를 ‘태음태양력’이라 부른다.
달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보니 유대인에게는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이 중요했다. 초막절 행사는 저녁에 일곱 가지 촛대의 촛불로 성전을 밝히는 일로 시작하여, 그 촛불 밑에서 함께 횃불 춤을 추었다. 여자들은 계단마다 시편 노래 한 곡씩 부르며 내려가는 15계단 춤 놀이를 즐겼다. 유대인들은 공동체를 중시하다 보니 함께 모여 춤추는 걸 좋아한다. 이런 행사가 7일 동안 밤을 지새우며 계속되었다.
서로 돌아가며 농사일을 돕는 두레와 품앗이 등 공동체 정신이 강했던 한민족도 함께 모여 춤추는 데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추석날 저녁에 마을 잔치를 벌이며 달맞이 놀이도 함께했다. 보름달 아래서 횃불놀이를 했다. 부녀자들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강강술래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다 차츰 빨라져 춤도 빠른 속도로 경쾌하게 추게 되어 흥을 돋우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단체 놀이는 저녁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추석이 가을 추(秋) 자와 저녁 석(夕) 자로 이름 지어진 모양이다.

▲광야의 고난 묘사한 그림 - 모세가 이끌던 유대인들의 광야 생활을 담은 이탈리아 화가 그레고리오 라차리니(1655~1730)의 그림.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보낸 시련의 40년은 오늘날 초막절의 기원이 됐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레위기 23:22에서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여호와이니라”라고 쓰여 있다. 또 신명기 16:14절에 보면 “절기를 지킬 때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웃을 위한 나눔이 초막절을 빛나게 했다. 이러한 나눔 전통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일례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에는 유대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상품을 봉투에 싸서 가게 앞에 내어놓는 풍습이 있다.
초막절 시기도 음력 8월 15일과 같아
우리 조상들도 추석에는 잔치를 베풀어 어려운 이웃들은 물론 거지들도 실컷 먹게 하였다. 당시 빈자들을 위해 만든 떡, 곧 ‘빈자떡’이 오늘날의 빈대떡이 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나눔의 정이 깊이 배어 있는 속담이 유래된 이유이다. 이러한 ‘정(情)’ 개념을 이해하는 건 두 민족뿐이라고 한다. 영어에는 정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유사한 개념이 있다. ‘라하마누트(Rahamanut)’라는 단어는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마치 형제자매의 일처럼 공감하고 아파하는 감정이다.
추석과 초막절은 달력상 날짜는 다르지만 절기상 날짜는 동일하다.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이다. 이 날짜가 음력 8월 15일의 추석과 같은 시기이다. 유대력이 우리 음력보다 한 달 늦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과 초막절은 날짜가 일치한다. 다만 어느 한쪽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 차이가 난다. 올해가 그런 해이다. 우리 추석은 9월 10일로 추석 연휴가 9일에 시작하여 12일까지이나 초막절은 10월 10일에 첫날이 시작하여 17일까지 계속된다. 추석이 한민족 최대 명절이듯 초막절 역시 유대 민족 최대 명절이다.
[초막절 마지막 날엔]
“1년간 모세 5경 완독” 축하 의미로 예식 열고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
초막절의 마지막 날인 제8일(티시리월 22일)은 히브리어로 ‘심카 토라(Simchat Tora)’라 부른다. ‘토라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토라는 구약성서의 도입부 5편을 뜻하는데 이를 모세가 썼다고 하여 ‘모세 5경’이라고도 부른다. 이날은 토라 전체를 1년 동안 완독했음을 기념하는 날로 초막절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에 1년 중 가장 엄숙한 회당 예식이 거행된다. 저녁 예배가 끝나면 토라 두루마리를 궤에서 꺼내어 이를 들고 회당 주변을 7번 이상 행진한다. 이날은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13세 이하 어린이들도 행진에 참여해 깃발을 들고 노래를 부른다. 행진이 끝나면 춤과 노래를 즐기는 축제가 벌어진다.
다음 날 아침 예배에서 토라의 마지막 편인 신명기 마지막 장을 읽은 뒤 곧바로 창세기 첫 장을 읽게 되는데, 이로써 유대인들은 토라의 연속성이 계승되었다고 믿는다.
[44] 아담·이브 창조한 날이 유대인 설날… 월스트리트도 쉰다
유대력 5783년째 새해… 오는 25일 ‘로쉬 하샤나’

▲순결 상징하는 흰옷 입고 새해 자축 - 미국 뉴욕 일대에 거주하거나 주변을 여행 중이던 유대인들이 유대력 새해인 로쉬 하샤나를 맞아 한자리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새해맞이를 즐기고 있다. 로쉬 하샤나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 무렵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는데, 색깔은 대개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번 달 25일 일요일 저녁이 유대인의 새해 명절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이다. 유대력으로 5783년째 새해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이틀간 지키기 때문에 25일 해 질 때부터 27일 해 질 때까지 계속된다. 반면 개혁파 유대인들은 첫째 날 하루만 지킨다. 이날 회당에서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쇼파·Shofar)을 불어 ‘나팔절’이라 부른다. 유대인이 많이 사는 뉴욕시는 로쉬 하샤나를 비롯한 유대인의 절기를 아예 공휴일로 지정했다. 월스트리트 금융가가 유대인 절기에 어김없이 쉬는 이유다.
로쉬 하샤나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로쉬 하샤나는 ‘해의 머리’ 곧 한 해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둘째,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다. 셋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력의 첫날인 ‘로쉬 하샤나’에 여호와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셔서 천지창조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이 인류 역사의 시작으로 인간의 새해가 되는 것이다. 신년 행사는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믐달에서 초승달로 바뀌는 때 나팔을 100번 분다. 이후 기도문을 낭송한다.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너의 행위를 생각해보라.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에게 용서를 구하라. 악한 길에서 벗어나 주께 돌아가라. 그가 자비를 베푸시리라.” 이렇게 나팔을 부는 것은 유대교 전통에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탄을 내쫓을 때, 회개를 촉구할 때, 왕의 취임식 때, 전쟁이 나서 백성들을 소집할 때 행하던 관습이었다. 곧 신년 나팔은 여호와가 우리의 왕이라 선언하는 날이다. 유대인들은 이때 가장 좋은 옷을 입는다. 대개 순결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경축한다.
우리가 설날 아침에 떡국을 먹듯 유대인들은 사과를 꿀에 찍어 서로 먹여주면서 “주님, 당신 뜻대로 우리를 행복하고 즐거운 새해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는 새해가 사과처럼 향기롭고 꿀처럼 달콤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사과 대신 석류를 먹기도 하는데 석류 알맹이 수만큼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이자 석류 알맹이 수와 비슷한 율법 613가지를 잘 지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생선 대가리를 먹으면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도록” 빌기도 한다. 또 이날 강가에 모여 빵가루나 돌멩이를 강물에 던지는 ‘타실리크’ 의식을 거행하며 기도문을 읽는다. 타실리크는 ‘던지다’라는 뜻이다. 죄를 상징하는 누룩으로 만든 빵 부스러기를 강물에 던져버리듯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죄를 강물에 다 던져버려 달라는 기도이다.

▲유대인 설날 음식인 사과·석류와 꿀 - 유대력 새해인 로쉬 하샤나의 전통 음식은 사과와 석류이다. 꿀에 찍어 서로 먹여주면서 새해를 축복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교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여호와와 맺은 관계가 단절된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한 선행 조건이 있다. 먼저 회개하고, 기도하고, 죗값에 합당한 구제(자선)금을 내놓아야 한다. 이렇듯 죄지은 인간이 먼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 나팔을 불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로쉬 하샤나’는 ‘여호와가 심판하는 날’이다. 여호와는 그날에 각 사람 행실에 따라 책 세 권에 기록한다고 한다. 세 책이란, ‘의로운 자, 악한 자, 중간에 속한 자’를 기록하는 책이다. 의로운 자는 ‘생명책에 옮겨 적혀 영원히 살 것이라’ 기록되어 봉인되고, 악한 자는 사망록에 기록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책에도 기록되지 못한 어중간한 사람들에게 여호와는 10일 유예 기간을 준다고 한다. 10일 뒤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와 욤 키푸르(대속죄일) 사이의 열흘을 “참회의 10일”이라 부른다. 이 기간에 유대인들은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나팔절에서 대속죄일까지 열흘 중 아흐레는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여 그들과 화해해야 한다.

▲설날은 '나팔절'…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100번 불어 - 유대력 새해인 로쉬 하샤나를 맞아 한 유대인 남성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고 있다. 유대인들은 종교 의식이나 왕의 즉위, 전시 병력 소집 등 중요 순간에 나팔을 활용했다. /플리커
유대인은 이 기간에 지켜야 할 계명과 전통이 있다. 첫째, 새해에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묵상한다. 이를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따로 정해 놓는다. 둘째, 나팔절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는 ‘고백의 기도문’을 읽는다. 이후 유대인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가족, 친지, 친구들을 찾아가 구체적으로 용서를 구한다. 마음의 빚뿐 아니라 빌린 돈이나 물건도 이 기간에 다 갚거나 돌려주어야 한다. 셋째, 잘못한 사람이 찾아와 용서를 빌면 받아주어야 한다. 탈무드는 “용서할 때는 삼나무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갈대처럼 부드러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남에게 용서받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중세의 유명 랍비 마이모니데스도 “율법은 사람이 고집이 세거나 완고해서 화해하지 못하는 것을 금한다”고 가르치고, “사람은 가볍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넷째,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전에 구제(자선)금을 따로 떼어놓는 전통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이렇게 모든 인간과 화해를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대속죄일에 여호와께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탈무드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요청하신다’고 가르친다. 여호와를 사랑한다면 자기 주변의 인간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적 지혜를 담고 있다.
유대교 신년 로쉬 하샤나는 인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자, 인간이 죄를 씻어 새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다.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가 함께 연결되는 이유이다. 매년 회개와 용서로 시작되는 새해는 유대인의 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그들을 거듭나게 만든다.
로쉬 하사냐 전날과 대속죄일 전날에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은 유대인이 꼭 지켜야 하는 종교적 의무다. 깨끗이 몸단장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로쉬 하샤나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도 새로운 세상이 다시 창조되기를 원한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로쉬 하샤나에 울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메시아가 온다고 한다. 지금도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를 굳게 믿고 있다.
여기서 유래되어 기독교 역시 로쉬 하샤나 때 오실 예수의 재림을 믿고 있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은 로쉬 하샤나에 ‘휴거’가 찾아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휴거는 기독교 종말론의 하나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올 때 선택받은 기독교인들이 공중에 들어 올려져 그분을 영접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그들은 휴거 현상이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의 징조로 나타날 것이라고 선전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고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욤 키푸르 전쟁]
구약성서 레위기 23장 29절을 보면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날은 속죄일 곧 주 너희의 여호와 앞에서 속죄 예식을 올리는 날이므로, 이날 하루 동안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 누구든지 이날에 어떤 일이라도 하면, 내가 그를 백성 가운데서 끊어 버리겠다. … 이것은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너희가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
이렇듯 대속죄일에 유대인들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25시간 음식과 물을 금하는 절대 금식을 하고 가슴을 치며 여호와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구한다. 1년 중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날이다.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도로 위의 모든 차량이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 욤 키푸르 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 군대와 온 국민이 쉬는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에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두 전선에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동시에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 열일곱 여단이 전멸하다시피 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파멸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조국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일선 병사들이 강한 애국심으로 사투를 벌이면서 반격에 성공하고 전세를 역전시켰고 마침내 유엔, 미국, 소련의 중재로 휴전을 맞았다.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지상군과 전차가 이제는 쓸모없음을 깨닫고 컴퓨터와 인공위성으로 제어하는 첨단 무기 개발에 주력해 군사용 드론과 무인 항공기, 그리고 미사일 방어 체계 ‘아이언 돔’을 완성했다.
[45] 이스라엘의 國父,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
1차 대전 때 영국 구하고, 이스라엘 건국 지원 받아냈다
1차 대전 당시 거의 모든 나라가 화약 원료로 칠레산 초석을 수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은 칠레로부터 초석을 들여오지 못하게 됐다. 영국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화약과 포탄을 만들 수 없으니 꼼짝없이 전쟁에 지게 생긴 것이다. 초석 없이 화약을 만드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아세톤이 있으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아세톤은 쿠바에서 설탕을 만들고 난 사탕수수 찌꺼기를 발효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원료조차 얻기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영국은 밤나무 등을 밀폐 용기에 넣고 끓이면서 그 증기를 모아 아세톤을 만들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아세톤 양이 너무 적었고 나무도 무한정 베어낼 수 없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문에 목재 수입도 어려웠다.
이때 영국을 구한 이가 유대인 생화학자 차임 바이츠만이다. 1915년 군수부 장관 로이드 조지로부터 연구 의뢰를 받은 그는 산소 없이도 증식하는 미생물을 이용해 녹말로부터 아세톤과 부탄올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3만t의 아세톤을 생산함으로써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 공로로 로이드 조지는 이듬해 수상 자리에 올랐으며 바이츠만은 일약 영국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1921년 4월 시오니스트 운동 기금 마련 활동을 위해 뉴욕에 도착한 차임 바이츠만(오른쪽에서 둘째)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에서 둘째), 벤-시온 모신슨(왼쪽), 메나켐 유시슈킨 등 동지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1차 대전에 휘말린 영국에 결정적 도움을 주며 밸푸어 선언의 초석을 다진 바이츠만은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지금까지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러시아서 1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1874년 러시아 서부의 촌락에서 15명 중 셋째로 태어난 차임 바이츠만은 고등학교 졸업 후 독일로 떠나 베를린 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그의 지도교수가 1897년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으로 옮겨가자 그를 따라가 유기화학 박사 과정을 계속했다. 바이츠만은 이듬해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2차 시오니즘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 전에 교육기관부터 설립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바이츠만은 1901년 스물일곱 살에 스위스 제네바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해에 열린 제5차 시오니즘 회의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에 고등교육기관을 먼저 설립하자며 특히 이공계 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바이츠만의 아이디어가 나중에 테크니온 공대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1904년에 영국으로 건너와 맨체스터대학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후 바이츠만은 110개에 달하는 특허를 취득할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1910년 바이츠만은 설탕을 인조고무의 원료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박테리아를 찾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히 설탕을 아세톤으로 바꾸어주는 박테리아 ‘클로스트리듐 아세토부틸리쿰’을 발견했다. 그는 박테리아 발효를 통해 아세톤, 부탄올, 에탄올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바이츠만 공정’ 기술이 아미노산, 비타민, 항생제 등을 대량생산하는 발효 산업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기존 화학적 합성에 의해 생산되었던 물질을 생물학적 방법으로 생산하는 합성 생물학 시대를 열었다. 이후 유전자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생명 현상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합성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바이츠만이 생명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로이드 조지 총리는 바이츠만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보답하려 했다. 그러나 바이츠만은 개인적 보상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상은 바이츠만이 제안한 문제를 외무부 장관 아서 밸푸어와 의논했다. 마침 밸푸어도 라이어널 로스차일드로부터 이 문제를 집요하게 요청받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1917년 ‘밸푸어선언’을 이끌어냈다. 영국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1930년 함께한 바이츠만(오른쪽)과 밸푸어 전 영국 외무장관.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 나오자마자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과 하이파에 각각 대학을 세운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 전쟁의 폐허로 인구도 몇 안 되는 황량한 예루살렘과 하이파에 미래를 내다보고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를 세운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고작 5만6000명이었다. 유대인들은 대학이 먼저 만들어져야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고 그래야 국가도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국가 건설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시오니즘 운동의 강렬한 불씨가 되었다.
1920년 시온주의기구 의장이 된 바이츠만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돌며 대학 설립 기금을 모금했다. 히브리 대학은 처음에는 연구기관으로 시작해 1923년부터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등이 이곳에서 가르쳤다. 아인슈타인은 최초로 히브리어로 강의했다. 1925년 캠퍼스가 완공되어 화학, 미생물학, 유대민족을 연구하는 3개 연구기관으로 정식 개교했다. 개교식에는 밸푸어 외무장관 등 영국의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그 뒤 히브리 대학은 4곳에 캠퍼스를 두고 아인슈타인을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 8명과 총리 4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성장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설립을 주도한 테크니온 공대는 1924년에 개교해, 4차례 중동전쟁 기간 무기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창업 국가로 발전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하이테크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바이츠만은 과학이야말로 장래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단으로 보았다. “나는 과학이 평화와 젊음의 갱신을 모두 이 땅에 가져와서 새로운 영적, 물질적 삶의 샘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과학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 1934년 예루살렘에서 53㎞ 떨어진 르호보트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주로 유기화학 분야를 연구했다. 이후 연구 분야를 넓혀 1954년에는 세계 최초 컴퓨터 중 하나인 ‘WEIZAC’을 제작했으며, 1958년에는 연구소 내에 파인버그 대학원을 설립해 이스라엘 최초로 컴퓨터 과학을 가르쳤다. 컴퓨터와 위성으로 제어되는 무인항공기와 미사일방어체제 아이언돔 개발의 토대가 이때부터 마련됐다. 오늘날 바이츠만 연구소는 화학, 물리, 컴퓨터사이언스, 생물학, 수학 등 5개 기초과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바이오산업 분야에 강하다.
▲이스라엘 국기를 배경으로 서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차임 바이츠만. 그는 건국 이듬해인 1949년 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취임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박테리아 이용한 생명공학의 아버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바이츠만은 이듬해 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73세의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답신에서 “내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 제안을 받고 나는 깊은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객관적인 문제만을 다루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적절히 다루고 공적인 직무를 수행해나갈 타고난 재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합니다”라며 사양했다. 이스라엘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 건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이 재임 3년 만에 78세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과학이야말로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바이츠만의 믿음이 오늘날의 과학 강국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유대인 박해가 시온주의로] 유럽서 설 자리 좁아져 “유대인 국가만이 살 길”
1880년대 러시아에는 전 세계 유대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881년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후 매년 5만여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를 탈출해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 향했다. 특히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프랑스에는 12만 명의 유대인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다. 무고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당시 헝가리 태생 유대인 헤르츨이 빈 ‘신자유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때 그는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유럽 사회에 완전히 동화 흡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을 목도한 헤르츨은 1896년 ‘유대인 국가’라는 책을 발간해,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민족 국가 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시온주의의 태동이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다.
[46]영원한 리더 시몬 페레스 [上]
이스라엘 독립 지키려… 탱크·비행기·군함까지 밀수했

▲밀수무기로 싸운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군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포 후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이라크 등 주변 국가들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네게브 사막을 지나던 이스라엘군 군용 차량 행렬이 적진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누고 경계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군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지만 독립을 준비하며 은밀하게 무기를 들여와 비축하고 유대인들이 앞다퉈 전장으로 달려가는 등 빼어난 전략과 사기로 맞섰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끝내 승리를 거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네게브 사막의 키부츠를 이끄는 청년 리더 시몬 페레스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시몬에게 1년만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랬던 벤구리온은 시몬을 가까이에 20년 잡아두며 그에게 의지했다. 그런 벤구리온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 청년을 그토록 믿지요?”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지. 그 청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청년은 다른 사람 흉을 보지 않아. 그리고 그 청년은 내 방에 올 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와.”
그랬다. 시몬 페레스는 70년 정치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진실을 앞세워 정면 돌파했으며, 정적에 대해 네거티브 전략을 펴지 않았고, 평생 새로운 아이디어와 원대한 꿈을 갖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기질은 어렸을 때 형성됐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을 활기차게 이끄는 목재상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학을 사랑하는 도서관 사서였다. 어머니는 도서관 책을 빌려 와 시몬과 함께 읽으며 토론을 즐겼다. 시몬은 어머니에게 지지 않으려 책을 열심히 읽었으며, 토론에 대비해 책 내용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공동체 지도자인 랍비였다. 그는 시몬에게 토라와 유대 역사를 가르쳤다. 덕분에 시몬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유대교인이 되었고 유대 민족의 앞날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가 살았던 폴란드 변방 유대인 마을에는 가족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시몬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1934년 열한 살 시몬이 고향을 떠나 텔아비브로 이주할 때 할아버지와 약속했다. 어떤 경우에도 유대인으로 남겠다고. 몇 년 후에 나치군이 유대인 마을에 쳐들어와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시나고그에 몰아넣고 산 채로 불태웠다. 시몬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되살렸다. 시몬은 고등학생 때 청소년 운동 단체에 가입했으며 열다섯 살 때 청년 지도자를 양성하는 ‘벤쉐멘 농업학교’의 장학생으로 뽑혀 전학 갔다. 그곳에서 낮에 배우며, 농사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밤에는 총 들고 보초 서며 때때로 쳐들어오는 아랍인들에게 맞서 싸웠다. 그곳 마을에서 평생 반려자인 소냐를 만났다. 당시 시몬은 신기술 농사법을 배워 팔레스타인 땅의 60%인 네게브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 여겼다.
그 무렵 학생들은 유대 국가의 정치 체제에 대해 두 파로 나뉘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소련식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유대 국가는 유대교를 기초로 유대 민족 특유의 정치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설득하곤 했다. 그는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향력 있는 행동인지를 깨달았다. 시몬은 연설 능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청소년 운동 리더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벤구리온은 시몬을 눈여겨보았다.

▲페레스를 키운 집단농장 키부츠 - 키부츠에 소속된 젊은이들이 1950년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나무를 심고 물을 주는 녹화 작업을 하고 있다. 1948년 건국 선포 뒤 이스라엘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주변 아랍국들의 침공을 막아내며 국가 안보를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는 황량한 국토를 녹화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1년 벤쉐멘을 졸업한 후 시몬은 게바 키부츠(집단농장)에 파견되어 농사와 청소년 운동을 이끄는 일을 병행했다. 이후 시몬은 몇몇 동지와 함께 알루못에 새로운 키부츠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시몬은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조차 그에게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시몬은 목자 처지가 아닌 양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양 떼와 소통해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시몬은 알루못 키부츠의 책임자가 되어 1945년 소냐와 결혼했다. 당시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키부츠에서 빠져나와 청소년 운동에 전념하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방안에 대해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싸워서라도 옛 영토를 전부 찾아 ‘온전한 이스라엘’을 건국하자는 강경파와, 현실적으로 건국 시도부터 실패하지 않도록 유엔이 추진하는 ‘아랍과 유대 국가 분할 건설’안을 받아들이자는 현실파가 그것이다. 1945년 시몬은 텔아비브에 있는 청소년 운동 본부로 옮겨가 전국 청소년 지부를 돌아다니며 벤구리온과 자신이 주장하는 ‘이스라엘 분할 국가 건국’안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어 전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1947년 5월 24세에 시몬은 벤구리온의 요청으로 지하 유대인 군대 ‘하가나’에서 복무하는 군인이 되었다.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이스라엘을 건국하면 필연적으로 아랍 국가들과 전쟁이 일어날 텐데 무기를 최대한 빨리 은밀히 준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소련은 아랍 국가들에 무기를 팔았으나 서방 국가들은 중동에서 전쟁을 원치 않아 이스라엘에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금수 조치를 피해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해 몰래 들여오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권을 위조해 비밀리에 전 세계 디아스포라(유대인 공동체)를 돌며 무기상들을 접촉했다. 시몬은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 분해해 몰래 팔레스타인에 보내 다시 조립했다. 무기 구입 자금도 해외 유대인 공동체를 접촉해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연결되어 6개월 만에 상당량의 무기를 비축할 수 있었다.
1947년 11월 유엔에서 두 국가 분할 건국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유대인들은 환호했고 아랍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듬해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같은 날 벤구리온은 기습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건국 당시 유대인 인구는 80만명이었다. 예상대로 다음 날 사방에서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군대가 쳐들어왔다. 비축해두었던 무기 덕분에 어렵게나마 방어해낼 수 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무기 수입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유대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전쟁 시작 무렵 이스라엘 군인은 3만5000명이었으나 이듬해 끝날 무렵 10만 명이 돼 세 배로 불어났다. 새 이민자들이 입대하고 해외 유대인들이 신생 조국을 지키려 많이 자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1차 전쟁이 끝난 뒤 시몬은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미국 가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벤구리온에게 미국 유학 의사를 밝혔다. 벤구리온은 흔쾌히 허락했다. 시몬은 뉴욕 야간대학에 다니며 낮에는 무기 거래 암시장에 뛰어들어 뒤이을 전쟁에 대비했다. 시몬은 콜롬비아에서 영국제 구축함 두 척을 사들였고, 미국에서 탱크와 비행기를 구입해 분해한 뒤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시몬을 돕는 미국 내 유대인들이 캘리포니아 외진 곳에 비행기 비밀 격납고 겸 정비 공장을 만들어 밀수출을 도왔다. 아예 그들은 폐기된 비행기 부품들을 사들여 비행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시험 비행을 마친 비행기는 다시 분해해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어떤 때는 영화 촬영하는 것처럼 위장해 비행기를 이륙시켜 그대로 이스라엘로 날려 보냈다.
이후 시몬과 그들은 야심 찬 계획에 착수했다. 비행기 제작 공장을 아예 이스라엘에 건설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시몬은 공부를 계속하여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마치고 귀국해 1953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캘리포니아 비행기 제작 회사가 1954년 이스라엘로 옮겨와 베덱항공을 설립해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국방의 첫걸음이었다. 1959년 6일 전쟁 때는 프랑스 전투기를 복제해 이스라엘 기술로 만든 전투기들이 출격했다. 그 뒤 베덱항공은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으로 확대되어 이스라엘을 위성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위성 산업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돔을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만든 영원한 청년, 시몬 페레스
시몬 페레스는 22세 때 다비드 벤구리온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얼추 70년 동안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그 사이 장관만 10번을 했다. 총리도 70, 80, 90년대 한 차례씩 세 번을 지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군사적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군대에 컴퓨터와 위성을 도입해 현대전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시켰다. 이어 이스라엘을 창업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생을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92세까지 8년간 일했다. 93세에 젊은이들을 위해 쓴 회고록 탈고 일주일 뒤에 영면했다.
[47] 영원한 리더 시몬 페레스 [下]
시몬 페레스, 각료 반대에도 원전 도입… 이스라엘 핵기술 보유국 만들었다

▲1994년 12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수상자로 참석한 시몬 페레스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가운데)이 공동 수상자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왼쪽)과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나란히 서서 노벨평화상 메달과 수상증서를 내보이고 있다. 조국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일취월장시킨 뒤 페레스는 평화 정착에 주력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에 앞장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시몬 페레스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입한 사실을 알았다. 무기 조달 책임자인 시몬은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맞서 필사적으로 군사 동맹국을 찾아 나섰다. 그는 당시 알제리와 전쟁 중인 프랑스를 눈여겨보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원하는 이집트와 반목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시몬은 혼자 프랑스로 날아가 집권당 인사들과 야당 대표를 만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프랑스는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합의한 상태라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몬은 프랑스 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비밀리에 프랑스 무기 구입에 성공했다. 이집트가 1956년 7월 프랑스와 영국이 관리하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전격 선언하고 점령해버려 전운이 감돌자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와 2차 중동전쟁을 치러 승리했다.
시몬은 전쟁에서 이기는 게 능사가 아니라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절대적 군사 강국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어렵게 프랑스와 원자력 기술 도입 협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각료들이 모두 이 계획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며 반대해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시몬은 혼자서라도 원전을 짓겠다는 각오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쌓은 유대계 인맥들에게 호소하여 일단 건설 자금의 절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과학자들로 팀을 꾸려 일을 밀어붙여 마침내 이스라엘을 원전과 핵기술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1963년 민간자본으로 ‘시몬 페레스 네게브 원자력연구센터’라 불리는 원전을 완공했다. 원전은 강우량이 워낙 모자라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어 농사짓고 식수로 쓰는 해수 담수화 공장의 전력 공급원이 되었다. 그 뒤 외형적으로는 핵 보유 여부를 시인도 부인도 않는 ‘핵 모호성’을 유지하며 ‘전쟁 억지력’을 확보했다.

▲1985년 총리로 재직 중이던 시몬 페레스가 전투기 격납고로 시찰을 나와 조종석에 직접 탑승해 설명을 듣고 있다. /페레스센터
시몬은 1963년 바이츠만 연구소가 만든 컴퓨터를 보자 이 놀라운 기계가 군대에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시몬은 며칠간 달라붙어 컴퓨터 기술자들로부터 작동법과 쓰임새에 대해 배웠다. 컴퓨터 도입에 대해 군부는 반대했다. 장군들은 도대체 컴퓨터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몬은 컴퓨터를 처음에는 전투준비 향상하는 데 썼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이제 재래식 무기는 현대전에 더 이상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군부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에 중앙 컴퓨터 처리부대 ‘맘람’이 창설되었고, 정보부대 ‘8200′은 사이버 보안부대로 특화되었다. 그리고 1979년 영재들을 모아 IT 장교로 탈바꿈시키는 ‘탈피오트’가 창설됐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위성들로 운용되는 드론과 무인항공기 그리고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이 이스라엘 군의 주력 무기체계가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은 주로 IT와 방산 분야에 근무했던 군인들이 전역 후 창업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군대의 수준 높은 IT와 방산 기술이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의 원천이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탄생 자체가 집단농장(키부츠)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사상을 갖고 살았다. 이는 2000년 이상의 디아스포라 방랑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의 생활 수칙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설립된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생산시설의 공유와 배급 생활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 방식에 가까웠다. 정부 역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주도자이자 통화정책 결정자였다. 1980년대 들어 세계화 물결 속에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자 더 이상 계획경제가 먹혀들지 않았다. 시몬이 총리가 되던 해인 1984년 인플레이션이 무려 400%까지 치솟았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있는 도시 디모나에 세워진 원전. 시몬 페레스가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건설에 앞장선 원전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국방력과 첨단 산업의 상징이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이스라엘의 경제 체제와 체질을 전면 개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대규모 차관을 이끌어냈다. 이후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시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해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노동당 당수인 시몬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들에게 임금 동결 등 큰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노사 양측의 반발이 컸다. 시몬은 노동조합, 고용주연합, 경제학자들과 재무장관을 불러 모아 ‘노사정 위원회’를 만들어 협상을 계속했다. 시몬은 정부가 먼저 뼈를 깎는 솔선수범을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24시간 끝장 토론’으로 각 부처 예산을 삭감한 ‘경제 회생계획’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물러서지 않았다. 시몬은 이들과 2주간 협상 끝에 마침내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1985년 말 인플레이션은 기적처럼 1.5%로 떨어졌다. 지도자의 집념과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역사적 업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인구 934만, 경상도 크기의, 석유도 자원도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러기에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 시장을 겨냥한 창업이 매우 중요했다. 시몬은 이스라엘을 창업 천국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군대의 IT와 방산 기술을 활용해 특유의 ‘군산학’ 연계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 뒤 시몬은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제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2년 외무장관 시절 주요국들을 방문하여 투자 유치 특히 벤처투자 유치에 열을 올려 세계 유명 벤처펀드들이 이스라엘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했다. 이듬해 정부의 창업지원 프로그램 ‘요즈마 펀드’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Fund of funds’(모태펀드)다. 요즈마 펀드가 외국 벤처펀드들에 투자하고 이들이 이스라엘 벤처기업들에 투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투자 금액을 10배 이상으로 늘렸다. 이로써 벤처 캐피털 황무지였던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혁명을 일으켰다. 정부는 ‘청년들이여 도전하라, 책임은 정부가 진다’는 자세로 창업을 지원했다.
2007년 대통령에 선출된 시몬은 재임 8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창의와 상상력을 갖고 창업에 도전하도록 꿈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대학 졸업생 40%가 창업에 도전해 1인당 창업 비율이 세계 1위이다. 7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활동 중이며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유니콘만 30개다. 글로벌 대기업 400여 개사의 R&D센터가 들어와 스타트업을 사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스타트업 100여 개가 나스닥에 상장되어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이다. 글로벌 대기업 하나 없이 1인당 GDP가 5만5000달러(IMF 2022)가 넘는 강소국이 되었다.
시몬은 “인생의 참된 교훈은, 삶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비관주의나 환멸이나 분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처럼 짧은 것이니 그것을 가시로 보지 말고 꽃인 양 바라보라. 거기에는 맛과 향기와 형태가 있다. 나는 삶이 언제나 나를 혹독하게 다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감사할 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더 큰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년에 회고했다.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다
1993년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경내에서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서명했다. 서명식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왼쪽 두 번째는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함께했다.
강경 매파였던 시몬 페레스가 핵기술을 보유한 이후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평화였다.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를 포함한 아랍권과의 협상을 통해 영구히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시몬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내어 평화를 정착시키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국내 극우파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시몬 역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비록 극우파에 의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한 아랍권이 다시 적대관계로 바뀌었지만, 중동 지역의 영원한 평화를 추구했던 시몬 페레스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48] “방위산업에 國運 걸려” 軍에서 대학보다 먼저 컴퓨터 가르쳤다
[상] 사막의 이스라엘이 세계적 창업국가로

▲방산업체 찾아 첨단무기 들여다보는 이스라엘 대통령 - 2014년 9월 당시 이스라엘 국가원수였던 레우벤 리블린 대통령이 이스라엘군수산업체(IMI)에서 운영하는 한 공장을 시찰하며 현장에서 제조한 첨단 군사 장비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1948년 건국 직후부터 주변 국가들의 공세에 직면했던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방위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했고, 국방 분야는 향후 이스라엘이 첨단 산업과 창업 분야에서 선도국이 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됐다. /이스라엘정부 공보국
1881년 3월 러시아 황제가 암살되었는데, 암살자들에게 유대인 처녀가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러시아는 이듬해 반유대법을 공포해,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일정 지역과 게토에 갇혀 살게 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약 4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이를 ‘포그롬(Pogrom)’이라 불렀다. 당시 유대인들이 서유럽과 미국으로 많이 탈출했다. 런던에 15만, 빈에 7만 명 등의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서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본고장 프랑스에서조차 무고한 유대인 장교를 간첩으로 모는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취재하던 테오도어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면서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차일드는 1887년 팔레스타인 땅을 비밀리에 사들여 유대인들이 농사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이주민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80%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군대가 곧 기술 인재 양성의 요람
그러나 유대인 이주자들에게 아랍계의 테러와 공격이 가해졌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09년 집단농장 키부츠를 창설하고 한 손에는 곡괭이,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농사와 전투를 동시에 수행했다. 키부츠 구성원들은 모든 결정을 전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키부츠 내 모든 재산과 생산수단은 공동 소유로, 대신 필요한 모든 것이 배급되었다. 공산주의 방식이다. 공동 육아와 공동 교육이 시행되었다. 자녀들은 영유아 때부터 또래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부한다. 그 무렵 키부츠 구성원들은 이스라엘이 건국되면 스탈린식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1921년에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녀를 가정에서 양육하는 협동조합 성격의 집단농장 모샤브가 출현했다. 이후 키부츠와 모샤브가 수백 개 규모로 커지면서 이들이 건국 운동의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은 계획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출범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건국 이전에 대학을 먼저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1912년 항구도시 하이파에 테크니온 공대의 초석을, 1917년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고작 5만6000명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개교 전부터 히브리대학에서 히브리어로 강의했다. 두 대학이 1925년 같은 해에 캠퍼스를 완공하고 개교하자 그는 테크니온 공대의 초대 학장도 맡았다. 이후 테크니온 공대 졸업생들은 건국 후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 비밀리에 집과 직장 지하에서 무기를 제작하여 키부츠와 모샤브에 공급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당시 인구는 80만6000명이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지 2011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건국 선언한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아랍 5국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이스라엘군 2만7000명과 예비군 9만 명이 결사 항전으로 맞서 싸웠다. 여자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20일 넘게 벌어진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나라를 지켜냈다.

▲점적 관수 기술로 황무지에 핀 꽃들 - 물이 작물 뿌리에만 스며들도록 한 점적 관수 기술로 물을 대는 이스라엘의 한 농장에서 다양한 색깔을 한 꽃과 작물이 자라고 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최첨단 기술을 발전시키며 거친 땅을 비옥한 농토로 바꿔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방위산업 육성에 국운을 걸었다. 1952년에 첩보부대부터 설치했다. 그리고 유대인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 군수산업체(IMI)를 세웠다. 1953년 이스라엘은 항공산업체(IAI)을 설립하여 6년 만에 비행기를 생산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산업은 방위산업과 궤를 같이했다. IMI는 다양한 무기를 생산하며 위성 발사에 성공해 이스라엘 최대 하이테크 산업체가 되었다. 그중 무인 원격조종 소형비행기가 유명하다. 배낭에 넣고 다닐 정도의 초소형 무인비행기는 GPS 시스템을 이용해 원격조종 된다.
이집트와 2차 중동전쟁 뒤 이스라엘은 군을 ‘기술 전문조직’으로 바꾸어 나갔다. 군이 1959년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대학에 컴퓨터학과가 생긴 것은 이로부터 10년 후였다. 그만큼 군이 앞서 나갔다. 1959년 병기개발청 ‘라파엘’은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공대공 미사일을 개발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1963년 민간자본으로 원전을 완공해 핵기술 보유국이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민간 컴퓨터 기업들이 라파엘의 미사일 제조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능동형 레이더, 암호화 시스템, 해킹 기술 등을 탄생시켰다. 그 뒤 미사일 기술은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었다. 일례로 바이오벤처 갈릴메디컬은 미세 침으로 전립선암 수술을 순식간에 끝내는 의료제품을 개발했다. 그 핵심 기술이 바로 미사일 발사 후 발사대를 급랭시키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그 뒤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패는 제공권 장악에 있다고 보고, 미국이 제공하기를 거부한 관성유도장치, 대용량 컴퓨터, 우주로켓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은 물 때문에 벌어졌다. 사막성 기후의 이스라엘은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물 관리가 가장 중요한 국가 전략 목표였다. 그들은 건국 이전인 1937년 수자원 회사부터 설립했다. 이스라엘 최대 수자원인 갈릴리호수와 요르단강은 국민의 목숨 줄인데, 시리아가 갈릴리 호수로 내려오는 물길을 막는 댐을 골란고원에 건설하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수심이 얕아지는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물길을 막는 댐 건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이집트는 5월 시나이반도를 침공해 인도양으로 나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해상로 아카바만을 봉쇄했다.
나세르가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겠다는 강박 심리가 작용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6월 5일 레이더망을 피해 초저공 비행으로 지중해를 멀리 우회하여 이집트 전투기 410대와 이튿날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 공군력을 초토화했다. 그 뒤 이스라엘은 기갑부대를 투입해 골란고원 수원지 일대를 정복하고 전쟁을 끝내 이를 ‘6일 전쟁’이라 부른다.
3차 중동전쟁도 물 때문에 발발
이스라엘은 1965년 전국 수도망을 완성했다. 그러나 농업용수는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였다. 한 키부츠가 같은 해 ‘네타핌’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히브리어로 ‘물방울’이란 의미의 이 회사는 ‘점적 관수(Drip irrigation)’ 기술을 개발해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나갔다. 호스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조금씩 나오도록 컴퓨터로 제어해 물이 작물 뿌리에만 스며들게 했다. 이를 개발한 사람은 이스라엘 수자원공사 엔지니어였던 ‘심카 블라스’다. 그는 어느 날 이웃집 수도 파이프가 새는 걸 보고 이를 알려주려고 방문했다가 그 집 마당의 나무들이 물을 주지 않는데도 잘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에 힌트를 얻어 이 기술을 개발했다. 물에 대한 집념은 이후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기술의 경제성도 확보했다. ㎥당 평균 1~1.3달러였던 해수 담수화 비용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50센트로 낮추어 모자라는 물 문제를 해결했다. 또 하수도 물을 농업용수로 바꾸는 폐수 재활용률도 75%에 달해 광야를 옥토로 바꾸는 녹색혁명도 이루어 식량 자급률이 무려 95%다. 이스라엘에는 7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있다. 이 중 700여 개가 수자원 이용의 효율 개선 방안을 찾고 있다. 물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이다.
[세파라디·아슈케나지]
같은 유럽 유대인이라도 스페인·독일계로 나뉘어… 피부색도 중동인과 달라

▲복장도 다른 세파라디·아슈케나지 랍비 - 2014년 5월 전몰장병추모행사에 참석한 세파라디 랍비(왼쪽)와 아슈케나지 랍비. 세파라디와 아슈케나지는 상이한 역사·전통만큼 복장도 다르다. /이스라엘정부 공보국
유대인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세파라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아슈케나지이다. 중세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은 이베리아반도이다. 이들을 세파라디라고 불렀다. ‘스페인계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 대륙 내 물류의 수송 경로였던 라인강 변에 상업과 유통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이들을 아슈케나지라 불렀다.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이 라인강 변을 타고 진군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아슈케나지들이 대부분 동구와 러시아로 피난 가서 슬라브 민족과 같이 살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슬라브 민족과 함께 살면서 피가 섞여 피부색이 검붉은 중동인에서 하얀 피부로 변해 세파라디와 쉽게 구별된다. 19세기 말 무렵 세계 유대인 인구 1127만 명 중 러시아에 가장 많은 390만 명이 살았고, 다음으로 폴란드에 131만 명, 헝가리에 85만 명이 거주했다.
[49] ‘스타트업 천국’ 된 이스라엘… 시작은 소련 붕괴였다
[하] 사막의 이스라엘이 세계적 창업국가로

▲“이스라엘에 온 걸 환영합니다” 소련 이민자 맞는 라빈 당시 총리 - 소련 붕괴 뒤 이스라엘 이주를 결심한 러시아 유대인들을 태우고 1994년 4월 러시아에서 이스라엘로 향하는 여객기에 동승한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승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환영 인사를 하고 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한 뒤 수년간 100만명의 고학력 러시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기술·창업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위키피디아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부르는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날은 유대인의 ‘속죄일’로 모든 국민이 온종일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단식하며 그동안 지은 죄를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용서를 청하는 날이었다. 방송국 등 나라 전체가 고요히 쉬는 날로 거리에는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병영을 떠나있어 기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이를 이용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래위에서 동시에 기습했다. 이집트는 75만 명의 병력과 탱크 3만2000대, 소련제 미사일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기습당한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시나이 전선의 모래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골란고원이 점령당했다. 특히 지난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주었던 이스라엘 전차부대와 전투기는 이집트군이 쏘아대는 성능 좋은 소련제 미사일 공격에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스라엘은 결국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게 된다. 다급해진 건 미국이었다. 어떻게든 핵전쟁은 막아야 했다. 미국은 사방으로 포위된 이스라엘에 무기 등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 작전을 펼쳤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기 지원으로 개전 6일 만에 시리아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여 골란고원을 되찾았다. 그 뒤 시나이반도로 이동해 수에즈시를 점령했다. 10월 25일 유엔군 긴급 파견이 결정되어 4차 중동전쟁은 마무리되었다.
4차 중동전쟁서 ‘소련제 미사일 쇼크’
이스라엘은 패배 직전까지 갔던 4차 전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보병과 전차는 미사일 공격 앞에 무용지물임을 깨달았다. 이후 이스라엘은 방위산업 전략을 180도 바꾸어 전차 등 재래식 무기 개발이 아닌, 적의 공격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체제로 바꾸어 갔다. 이를 위해 제일 먼저 1952년 창설된 첩보부대를 ‘8200′ 인터넷보안부대로 바꾸고 엘리트 과학기술 전문 장교 집단 ‘탈피오트’를 창설했다. 방위산업도 이들을 중심으로 군사용 정보통신기술 위주로 발전시켰다. 곧 인터넷 첩보활동이 강화되었으며, 방위산업도 IT 정보산업과 인공위성, 그리고 인터넷을 활용한 ‘레이더, 미사일, 미사일 방어망 아이언돔, 무인비행기, 드론’ 등이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첨단 방위산업 기술이 전역 후 이들의 창업 아이템이 되었다. 8200부대와 탈피오트는 이후 국가 스타트업 육성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8200 출신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이 1000개가 넘으며 그중 사이버보안 기업만 400개에 이른다. 인터넷 방화벽 시장 세계 점유율 1위인 `체크포인트` 설립자 길 슈웨드 역시 8200부대 출신이다. 이러한 추세는 탈피오트도 마찬가지다.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돔’도 탈피오트 사관후보생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어 병기개발청 라파엘이 생산에 성공했고, 라파엘은 우리나라 연평도에 배치된 4세대 스파이크 미사일도 개발했다.

▲가자지구 인근에 배치된 아이언돔 발사대 - 이스라엘 첨단 방위산업의 상징인 미사일방어시스템 ‘아이언돔’ 발사대가 가자지구와 인접한 항구도시 아슈켈론에 베치된 모습. /이스라엘군 플리커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가의 성격과 경제 방향을 바꾼 나라이다.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던 이스라엘은 1980년대 후반에야 자본주의를 접목하여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이런 신생 자본주의 국가에 1991년 12월 26일 소련의 붕괴로 국경 봉쇄가 풀리면서 약 100만 명의 고학력 러시아 유대인들이 물밀듯이 이스라엘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500만 명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실업률이 높은 시절이라 이는 국가의 운명을 가를 정도의 중차대한 일이었다. 이들 중 약 23%가 과학자로 대부분 소련 국립 연구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수석과학관실은 이들의 높은 과학 수준과 기술력을 상업화시키기로 하고, 미국 유대인 단체의 협조를 받아 이스라엘 전역에 24개의 기술 인큐베이터를 설립하고 기술창업보육사업을 전개했다. 될성부른 아이디어에 최소 2년간 80만달러까지 지원했다.
그리고 이들을 본격 지원하기 위해 1993년에 ‘요즈마 펀드’를 설립해 해외 벤처캐피털과 글로벌 기업의 R&D센터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투자 수익에 대한 비과세, 투자 후 5년 내 요즈마 지분을 싼값에 되살 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 인센티브로 대성공을 거뒀다. 초기 스타트업들이 매년 20개 이상씩 성공을 거두자 전 세계 벤처캐피털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1억달러로 시작한 요즈마 펀드는 크게 성장해 5년 후 민영화되었으며 10년 후에는 규모가 40억달러로 커졌다.
세계 약품 매출 25%가 이스라엘 기술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또 다른 배출구는 대학과 연구소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30여 년 전에 설립한 대학들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해왔으며 또 이를 토대로 기술 혁신과 하이테크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들 연구소와 대학들은 그들이 보유한 기술을 민간기업에 접목시키기 위한 기술 이전 조직을 별도로 만들었다. 바이츠만 연구소의 ‘예다’, 테크니온 공대의 ‘T-3′, 히브리대학의 ‘이슘’, 텔아비브대학의 ‘라못’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의 기술사업화 실적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59년에 설립된 바이츠만 연구소의 기술 이전 조직인 ‘예다’에 따르면, 세계 약품 시장 매출액 중 약 4분의 1은 이스라엘 과학자들의 기술을 이용해 개발되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1380명인 바이츠만 연구소의 기술사업화 성과가 200여 미국 대학 성과의 절반에 필적한다. 1964년에 설립된 히브리대학 ‘이슘’의 경우도 기술 이전을 통해 연 매출 20억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들의 설립 연도만 보아도 이스라엘 연구소와 대학이 일찍부터 연구 결과의 실용화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창업 길 찾는 이스라엘 대학생들 - 이스라엘과 미국에 캠퍼스를 둔 유대계 예시바대학교 학부생들이 지난 2018년 이스라엘의 창업진흥기관 ‘아워크라우드’를 찾아서 스타트업 육성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졸업전부터 스타트업에 관한 다양한 현장 실습 기회를 갖는다. /예시바대 플리커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4차례 중동전쟁과 100만 명의 러시아 유대인 유입으로 특이한 구조를 갖게 된다. 스타트업의 요람이 군대와 산업계와 대학의 연합 전선인 ‘군·산·학’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로부터 매년 1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탄생해, 한 해에 창업하는 스타트업 수가 유럽 전체의 스타트업 수를 능가한다. 현재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수는 7000개가 넘다 보니 이들의 젊은 피를 수혈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세워진 다국적 기업들의 R&D센터가 무려 400개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형태로 연구소를 시작했고 관련 하이테크 연구와 병행해 지금도 유망한 스타트업을 사냥하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의 매각과 합병이 잦은 이유이자 이들이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돕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세계가 탐내는 스타트업들이 넘쳐나고 있어 전 세계가 투자를 줄이는 팬데믹 기간에도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변변한 글로벌 대기업 하나 없이 스타트업들과 방산 기업들이 국내총생산(GDP) 증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난 10월 발표한 IMF 자료에 의하면, 2022년 이스라엘 1인당 GDP가 5만5358달러에 달한다. 이는 팬데믹 상황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독일조차 뛰어넘은 수치로 2020년 4만4181달러, 2021년 5만1449달러를 훌쩍 뛰어넘어 2년 만에 25.3%가 껑충 뛴 비약을 보여주고 있다. 스타트업이 이룬 경제 기적이다.
[헤세드 정신]
“보상 안받고 도와준다” 실리콘밸리 선배들이 이스라엘 벤처들 발굴
이스라엘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육과 기술 개발,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스타트업 진흥에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 그 결과 군·산·학 복합체로부터 스타트업이 쏟아져 나와 인구 1400명당 스타트업이 하나씩 탄생해 스타트업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내는 일은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유대인 기업가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될성부른 새싹을 조기에 발굴하여 투자했을 뿐 아니라 ‘정보 제공, 인맥 연결, 글로벌 마케팅 지원과 상장(IPO) 지원’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헌신적인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헤세드 정신’이라 한다. 히브리어로 ‘긍휼’, ‘자비’라는 말로, ‘보상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돕는다’는 뜻이다. 이는 유대인 공동체가 지향하는 최고 단계의 체다카(돌봄, 나눔) 정신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스타트업 수는 100여 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이다.
[50]핀테크 시대를 활짝 연 우크라이나 출신 레브친
페이팔 만들어 20대에 억만장자로… “게으름은 죄” 창업 또 창업

▲해커 공격 피하는 시스템까지 개발, 올해의 발명가상 받은 레브친 - 2002년 5월 페이팔의 최고기술이사였던 맥스 레브친이 MIT에서 발행하는 기술 비평지 ‘테크놀로지 리뷰 매거진’ 선정 올해의 발명가상을 받은 뒤 상패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레브친은 해커들의 공격으로 페이팔과 후발 업체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을 주도해 세계 IT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페이팔은 이해 나스닥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상장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실리콘벨리에서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의 명성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개발자가 있다. 바로 핀테크 시대를 연 맥스 레브친이다. 동시에 그는 ‘페이팔 마피아’의 탄생 주역이기도 하다.
레브친은 1975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물리학자인 그의 어머니는 사고의 심각성을 알고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레브친은 일리노이 공대에서 컴퓨터 보안을 전공하던 시절에 이미 3번 창업 경험을 쌓았다. 이 가운데 자동화 마케팅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렸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는 더 큰 무대인 실리콘밸리에 가서 제대로 창업해보고 싶었다.
레브친은 1998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에 헤지펀드 매니저 피터 틸의 강의를 들었다. 신출내기 강사라 학생은 겨우 6명이었다. 레브친은 틸과 점심을 먹으며 본인이 창업할 소형 기기에 암호화된 정보를 저장하는 보안 기술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틸은 투자 의사를 밝혀 공동 창업을 했다. 레브친이 ‘개발’을 맡고 28만달러를 투자한 틸이 ‘경영’을 맡았다. 그들은 6번 실패 끝에 정보를 암호화해서 보낼 수 있다면 돈도 암호화해서 송금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아이디어가 페이팔의 전신이 되어 세상을 바꾸게 된다. 이로써 이메일 주소만 알면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컨피니티’를 탄생시켰다.
체르노빌 사고 후 우크라서 미국 이민
‘컨피니티’는 편리하고 안전한 온라인 계좌를 제공해 개도국 사람들도 인플레이션에 휘둘리는 자국 통화 이외에 선진국 통화를 쉽게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글로벌 디지털 화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흥분했다. 게다가 컨피니티의 송금 방식이 혁신적이었다. 한 번만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언제든지 이메일을 이용해 송금할 수 있어, 개인 정보가 유출되지 않았다. 환율도 알아서 해결해준다. 이른바 금융과 IT의 결합인 ‘핀테크’의 본격 시작이었다.
레브친과 틸이 회사를 키우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기준은 하나였다. 같이 즐겁게 일하며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단결력’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대학 시절 친구들을 페이팔에 합류시켰다. 그들은 지금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창업자의 성향을 최우선적으로 본다.

▲페이팔 창립 초기의 머스크 - 일론 머스크 현 테슬라 CEO가 페이팔 창립 초기이던 2000년 10월 미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본사에서 페이팔 로고가 붙은 컴퓨터 모니터 옆에 앉아 미소짓고 있다. 페이팔은 맥스 레브친과 피터 틸이 함께 만든 ‘컨피니티’와 머스크가 세운 ‘X.com’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AP 연합뉴스
그 뒤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이베이는 ‘빌포인트’를 내놓았고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가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론 머스크의 ‘X.com’이었는데 송금 방식이 ‘컨피니티’와 똑같았다. 두 회사는 치열한 경쟁 끝에 2000년 3월 50대50 합병을 단행해 ‘페이팔’이 탄생했다. 당시 창업 주역 15명 중 9명이 유대인이었다. ‘페이팔’은 창업 초기 유대인 케빈 하츠에게 엔젤 투자를 받았다. 그 뒤 골드만삭스 등 투자자들에게 1억달러 투자를 끌어냈다. 이후 페이팔이 이베이에 서비스를 제공하자 입점한 사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온라인 송금 업계에 큰 사건이 터진다. 해커들이 허위 정보로 돈을 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해커들 공격으로 힘들기는 페이팔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1000만달러를 손해 보기도 했다. 페이팔의 최고기술이사 레브친에게는 절체절명 위기였다. 그는 인턴이던 가우스벡과 해커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기계나 컴퓨터가 아닌 사람 눈으로만 판독이 가능한 숫자판 형태의 테스트다. 그리고 컴퓨터가 스스로 거짓 정보를 식별해 내는 설루션도 발명했다. 이 공로로 MIT는 올해의 발명가로 막스 레브친을 선정했다.
이후 회사는 빠르게 성장해 직원이 220명까지 늘어났다. 2000년 들어 IT 거품 붕괴로 주식시장이 무너졌음에도 페이팔은 2002년 2월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당시 이베이의 맥 휘트먼은 통 큰 유대인답게 페이팔을 15억달러에 사들였다.
▲페이팔 초기 창업 멤버들 - 페이팔 창업 초기 운영진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공동 창업자인 맥스 레브친(맨 뒷줄 왼쪽에서 둘째)과 피터 틸(레브친 앞 푸른 상의 입은 사람)은 돈을 암호화해 송금한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해 핀테크의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리노이 공대 홈페이지
이렇게 페이팔 매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젊은 창업가들은 편안히 지내는 길을 택하기보다 다시 새로운 창업에 뛰어들었다. 레브친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괴로웠던 시기가 페이팔을 매각해 거금을 손에 쥔 뒤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면을 찾는 생활을 하자며 1년간 멋진 해변에서 여자 친구와 놀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놀기에는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게으름은 죄’라는 유대인 고유의 죄의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 회사에 취직했다가 다시 창업의 길로 나섰다.
레브친은 2004년 사진과 동영상 공유 사이트 ‘슬라이드닷컴’을 창업해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그는 또 자기 생일을 맞아 페이팔 동료 16명이 모였을 때, 제러미 스토플먼만이 창업하려는 ‘옐프’(Yelp)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바로 다음 날 100만달러를 투자해 맛집 검색 어플을 탄생시켰다. 레브친은 이 밖에도 핀터레스트, 유누들, 위페이 등 10곳이 넘는 회사에 투자했다. 슬라이드닷컴은 2010년 구글에 1억8200만달러에 팔렸다. 그는 2011년부터는 실리콘밸리에 HVF라는 테크 인큐베이터를 세워 스타트업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페이팔이 선불 결제 시스템이라면 레브친은 2012년 특이한 후불 결제 시스템을 선보였다. 곧 신용카드 없이도 물건을 살 수 있는 ‘어펌’(Affirm)을 창업했다. 인공지능 기반 어펌의 플랫폼은 5초 이내에 고객의 신용을 간단히 체크해 소액 대출을 제공하여, 먼저 물건을 사고 나중에 할부로 갚는 방식이다. MZ세대에게 선풍적 인기인 어펌의 시가총액은 40억달러가 넘는다.
다 준비하면 늦는다, 일단 시작하라
페이팔 창업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한 형제처럼 서로 도왔다. 페이팔 출신들은 바쁜 틈을 쪼개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놓고 질문과 토론을 거듭했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으면 즉석에서 투자를 결정해 지원했다. 이렇듯 페이팔 문화의 특징은 속전속결의 ‘기민함’에 있었다. 일단 먼저 추진하고, 아니다 싶으면 시장에 민첩하게 대응함으로써 결말을 보았다. 완벽하게 갖추고 나서 시작하면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끈끈한 조직력을 보이자 2007년 11월 경제 전문지 ‘포천’은 페이팔 창업 멤버들을 조명하면서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렀다. 서로 도와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결속력이 마치 마피아 같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세운 회사 가운데 10억달러 이상 가치를 가진 유니콘이 무려 8곳이나 된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와 ‘스페이스X’,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의 ‘유튜브’, 리드 호프먼의 ‘링크드인’, 제러미 스토플먼, 러셀 시먼스의 ‘옐프’, 데이비드오 색스의 ‘야머’, 피터 틸의 ‘팰런티어’, 막스 레브친의 ‘어펌’이 그것이다. 그간 페이팔 마피아가 투자한 기업이 646곳이 넘는다.
[중국의 미국 페이팔 모방]
온라인결제 눈뜬 중국, 마윈의 알리페이 포함 전자상거래 폭발적 성장
페이팔은 쉽게 말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중개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escrow)’ 서비스로,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지불하면 페이팔은 상품이 안전하게 구매자에게 도착한 걸 확인한 뒤 그 돈을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형식이다. 이를 ‘제3자 결제’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에스크로 서비스가 정작 꽃을 피운 곳은 아직 신용 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중국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금융 환경이 열악한 후발 개도국이었다. 사기 사건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돈을 먼저 보내고 물건을 나중에 받는 신용 거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용카드조차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에스크로 서비스가 시작되자 비로소 서민들의 온라인 거래가 늘어났다. 이로써 중국은 신용카드 사회를 건너뛰고 곧바로 모바일 결제 시대로 직행할 수 있었다.
2003년 마윈이 이베이와 페이팔을 모방해 ‘타오바오’ 쇼핑몰과 ‘알리페이 결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금융 후진국 중국에서 신용 결제 시스템이 완성되자 자영업자들이 플랫폼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로, 알리페이는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알리페이 성공 이후 위페이, 유니언페이, 라카라 등 제3자 결제 서비스 회사들이 생겨나 중국이 세계 최대 핀테크 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