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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1/ 이태훈의 여행 칼럼/ 그리스 산토리니 - 네팔 솔로 쿰부 - 티베트 라싸

상림은내고향 2022. 12. 9. 19:54

지구촌 여행1

■이태훈의 여행 칼럼  2014.08

◆영원한 제국, 아틀란티스의 환생… 그리스 산토리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토리니의 저녁 풍경은 황홀함 그 자체이다.

 

BC 9500년에 포세이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틀란티스 제국은 아내 클레이토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아들이 여러 지역을 통치했다. 수도는 아름답고 신비한 과일이 나며 금, , 등 온갖 귀금속이 풍부하게 묻혀 있고, 왕궁을 중심으로 3개의 육환대와 바닷물을 끌어들인 3개의 클리크대가 동심원상으로 에워싸고 있는 도시였다. 풍부한 산물과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들어오는 무역품은 대륙을 크게 번영시켰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탐욕스러워지고 부패해지기 시작한다. 이에 신이 노하여 아틀란티스 사람들에게 큰 재앙으로 대지진과 홍수를 일으켜 하루 밤낮 사이에 거대한 제국을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했다.

 

▲평온함과 삶의 여유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토리니.

 

이글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 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 2편에 나오는 잃어버린 제국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거대한 제국이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아틀란티스 제국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 지중해에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루머가 시대를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은 그리스 최남단에 위치한 산토리니(Santorini) 섬을 아틀란티스의 제국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는 산토리니 섬이 생성되는 지리학적 과정이 제국의 멸망 때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 산토리니는 기원전 15세기 몇 차례의 대규모 화산 폭발로 섬의 중간부분이 바다로 가라앉으면서 섬 모양이 마치 초승달처럼 예쁜 모양을 하게 됐다고 한다. 검게 그을린 화재로 인해 섬은 온통 검은 빛을 띤다.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지중해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자리해 해마다 수천 명의 관광객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파도소리 새소리 이외 아무것도 들지 않는 섬, 산토리니

 

보통 유럽에서는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그리스에서는 ‘씨라(Thira)'라고 한다. 씨라는 미코노스 섬과 함께 그리스를 대표하는 섬이다. 미코노스 섬이 다소 예쁘고 여성스런 분위기를 가졌다면, 씨라는 면도칼로 잘라 놓은 듯 깎아지른 절벽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웅장하고, 장엄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매년 환상의 섬인 산토리니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은 제각기이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 혹은 신혼여행지로, 혹은 결혼장소로 산토리니를 선택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된다. 산토리니 섬은 지름이 3km가 넘는 분화구 연못인 카델라를 마주대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가파른 절벽에 작은 마을이 마치 하늘에 매달려있는 것 같은 놀라운 풍경이 산토리니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몇 줌에 가슴에 묻어 둔 옛사랑을 그리워한다.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원한 에게 해의 바다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갈매기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다 보면 발길은 어느새 아틀란티스 제국 안으로 들어선다. 산토리니 선착장으로 서서히 다가갈수록 적갈색의 단애가 벽처럼 가로막는다. 섬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여행자들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 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높이 300미터 단애 꼭대기에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빽빽이 들어서 있는 마을이 잃어버린 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바람도 바다도 사람도 순수함을 품고 있는 산토리니

 

  그러나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부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방법은 모두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시간과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문명 이기를 이용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고, 낭만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당나귀를 타고 올라가면 된다. 이것도 저것도 싫은 사람은 그냥 등산을 하듯 300미터 높이의 계단을 쉬엄쉬엄 오르면 산토리니가 가진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숨 가쁘게 정상에 이르면 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한 자연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원히 파란 하늘만큼이나 푸른 바다와 검은 화산섬 위에 지어진 하얀 집들은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평온함과 고요함만이 흐르는 섬, 산토리니

 

산토리니 섬의 대표적인 마을은 피라(Fira)와 이아(Oia)이다. 선착장에 내려 580여 개의 계단을 열심히 오르면 이 섬의 중심인 피라에 도착한다. 사실 산토리니는 미코노스와 함께 휴양 섬으로 알려져 그리 볼거리가 많은 여행지는 아니다. 다만 지중해의 따스함과 영원히 자유로운 바람에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곳이 바로 산토리니다. 하지만 휴양지라고해서 산토리니가 너무 무기력하거나 심심한 곳은 아니다. 이 섬의 중심 도시인 피라에는 카페, 레스토랑, 호텔, 선물가게, 버스 터미널 등이 몰려 있어 수많은 사람들로 언제나 거리가 활기로 넘쳐난다. 뜨거운 태양이 걸려있던 낮에는 관광객들이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서늘한 기운이 되살아나는 밤이면 네온사인과 음악을 찾아 피라 중심지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지중해의 말간 바람이 머무는 산토리니의 작은 교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흐르고, 오렌지 빛깔의 네온사인이 춤을 추는 밤은 언제나 낭만 그 자체이다.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피부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 즐기는 시간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뜨거운 열기가 카페 안을 서서히 가득 매울 즈음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흔든다. 이곳이 카페인지 공연장인지 착각할 만큼 분위기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음악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고, 산토리니라는 공통  분모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평생 잊히지 않을 좋은 추억을 서로 가슴에 새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시원한 샴페인 한 잔에 지중해를 마음 껏 누리고 싶다

 

▲지구별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산토리니의 이아 마을

 

◆히말라야의 정기를 가득 받을 수 있는 곳, 네팔 솔로 쿰부 여행

▲남체 바자르 초등학교 전교생의 모습이 왠지 우리의 60~70년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태평양이 가장 넓다면 가장 높은 곳은 어딜까?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에베레스트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답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히말라야 산군에 우뚝 솟아오른 에베레스트다. 히말라야의 신은 1951년 뉴질랜드 출신의 힐러리 경에게 비로소 길을 열어주었다.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산봉우리였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투어를 즐길 만큼 이곳의 여행은 대중화 된 지 오래다.

 

굳이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육체만 있다면 누구나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다. 다만 비행기가 아닌 튼튼한 두 발로 히말라야 산군을 보기 위해서는 적당한 체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전문 산악인처럼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네팔은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가 다양하게 개발돼 있다. 자신의 체력에 맞게 산을 선택해서 트레킹을 하면 눈부신 히말라야를 바로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6천 급의 콩대와 비탈진 언덕에 자리한 남체 바자르 마을 전경

 

좋지 않은 연료 사용으로 인해 분지인 카트만두는 자욱한 매연과 스모그로 인해 도시의 시정이 나쁘다. 히말라야 산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카트만두에 왔지만 일 년에 몇 번 정도만 하얀 만년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카트만두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눈으로 믿을 수 없는 히말라야 산군이 눈에 들어온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산마다 머리에는 하얀 눈을 뒤집어 쓴 히말라야는 일생에 꼭 한 번은 봐야할 그런 여행지다.

 

하얀 눈이 늘 산마루를 덮고 있는 자연의 최고봉 히말라야! 산스크리트어로 `히마(Hima)` `하얀 눈`을 뜻하고, `라야(laya)` `머무르는 곳, ` 등을 의미한다. 결국 히말라야의 뜻은 `하얀 눈이 늘 머무르는 곳`, 즉 만년설이 있는 곳이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땅에서 높이 솟아오른 히말라야 산군이다. 높디높은 히말라야 산군 중에서 가장 으뜸은 8848m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다. 이곳을 보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을 걷고 또 걸어야 볼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체력이 허락하는 한 히말라야 트레킹은 일생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여행이다.

 

▲에베레스트 뷰 호텔 커피 숍에서 바라다 보면 사진처럼 히말라야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크게 세 가지다. 세계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포카라 호수의 안나푸르나 지역, 멋진 빙하계곡을 가진 랑탕 리웅 지역,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루 쿰부 지역이다. 한국 여행자들은 대부분 등반이 쉽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안나푸르나 지역을 선호한다. 그러나 코스는 다소 어렵지만 셰르파족의 마을과 드넓게 펼쳐진 고산들을 경험하고 싶은 트래커들은 점점 솔로 쿰부 지역으로 모여들고 있다.

 

지구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는 솔로 쿰부는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아주 색다른 경험을 안겨준다.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로체(8516), 아마다블람 등 히말라야 고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솔로 쿰부의 풍경은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멋진 자연의 신비를 선사한다. 다만 미증유한 모습을 보기위해서는 카트만두에서 꼬박 7일 이상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경비행기를 타고 해발 2800m 루크라까지 올라갈 수 있어 시간을 절반 이상으로 줄일 수 있다.

 

▲세르파족은 티베트의 후손답게 티베트 불교를 믿으며, 매일아침 코라의식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카트만두에서 20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루크라까지 올라간 뒤 루크라를 기점으로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시작한다. 8000m 이상의 고산들을 바라보며 걷는 트레킹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뿌듯한 감동을 준다. 솔로 쿰부 지역 관문인 루크라에 올라서면 하얀 만년설로 덮인 고봉들과 히말라야의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시골 간이역만큼 아담하고 소박한 루크라 비행장을 빠져나오면 셰르파족을 비롯해 여러 부족 출신의 포터(짐을 머리로 운반하는 사람)들이 서로 짐을 들어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셰르파`라고 하는 가이드 한 명과 포터가 한 팀을 이루어 산행을 시작한다. 히말라야 산행의 가장 큰 매력은 만년설을 지겨울 정도로 구경할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가까이 갈수록 변하는 산 모양을 보는 것도 즐겁다. 특히 산 속엔 어둠이 일찍 내리기 때문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에서 며칠 푹 쉬며 문명사회를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멋진 히말라야 산군이 펼쳐진 솔로 쿰부는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그런 여행지다.

 

큰 마을인 남체 바자르(3440)를 제외하고는 어느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칠흑 같은 밤이 소리 없이 찾아오면 로지(산장) 안에는 삼삼오오 모인 트레커들이 각자 손전등과 호롱불을 밝히며 여행의 환담을 나누거나 카드놀이로 밤을 지새운다. 이때 주인아저씨는 로지 한가운데 모닥불을 지피고 옥수수로 만든 전통 술 ``까지 내놓으며 여행자들을 더욱 흥겹게 해준다.

 

루크라, 팍딩, 몬조, 조살레를 거쳐 쿰부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인 남체 바자르에 도착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남체는 고산에 적응하기 위해 트레커들이 하루 이틀 푹 쉬어 가는 그런 마을이다. 하지만 솔로 쿰부 일대에서 가장 번성하고 규모가 크다. 무엇보다 티베트 상인들이 고산 넘어 이곳까지 물건을 팔러 온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남체 바자르`. 가파른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집들이 들어선 남체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이 사는 마을이다. 남체에서 경사가 70도 넘는 가파른 고갯길만 넘으면 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히말라야 산군이 눈앞에 펼쳐지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가 눈 속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해발 3000미터에서는 이동수단이 주로 야크라는 동물이다. 이 동물은 짐을 나르기도 하고, 밭 가는데도 쓰인다.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를 사람들에게 준다.


동이 틀 무렵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히말라야 일출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하얗게 덮인 정상 부근에 붉은 태양이 비추기 시작하면 높은 봉우리는 저마다 노랗게 물들다가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면 다시 하얀 만년설로 변한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노란빛이 하얀빛으로 바뀔 땐 또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하다. 히말라야 신성함과 셰르파 사람들의 순수한 영혼 때문인지 트레커들의 심신은 정말 맑고 상쾌해진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일에 심이 지친 이들에게는 마음의 정화를 안겨주는 히말라야 여행은 도시인들에게 많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찾아 마음의 안식을 찾고, 때 묻은 영혼을 히말라야 신에게 정화를 부탁한다. 텅 빈 마음에 충만한 히말라야 기운을 가득 담을 수 있는 솔로 쿰부 여행은 지구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맑은 영혼이 바람이 되어 호수에 머물다. 미얀마 인레

▲맑은 정기와 맑은 공기가 일 년 내내 머무는 미얀마 인레 호수의 아침 풍경.

 

순박함과 소박함 그리고 순수함이 일 년 내내 머무는 땅, 미얀마. 그 중에서도 해발 900미터에 위치한 인레 호수 주변은 미얀마에서 가장 평온한 삶이 이뤄지는 파라다이스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야 하는 인레 호수는 잡지나 TV 등에서 미얀마를 대표하는 순수한 영혼의 장소로 소개되고 있다. 미얀마의 독특한 시스템인 셔틀 비행기를 타고 인레 호수가 있는 혜호 지역으로 가면, 거기서부터 문명의 이기에서 몇 발짝 물러선 인레 호수까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꼬박 두 시간 달려가면 ‘호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인따족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호수를 만나게 된다.

 

▲붉은 빛으로 물든 인레 호수의 아침 풍경은 황홀함 그 자체다.

 

고원 지대에 위치한 인레 호수는 아름다운 산들과 바다같이 펼쳐진 호수가 어우러져 독특한 비경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이곳이 자연의 소나타만을 감상하는 그런 곳이라면 세계 여행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이외에도 인레는 호수 위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인따족들의 삶의 자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을 찾는다.

 

▲인레 호수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곳이다. 고기도 잡고 수경 농사도 짓고.


11, 길이 22㎞ 엄청나게 큰 호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바다 같은 호수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면 도저히 호수라고 부르기에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하다. 바다 같은 호수 주변으로 17개의 수상 마을이 있고, 호수를 중심으로 어업과 농업으로 삶을 영위하는 인따족과 고산지대에 사는 빠다웅족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10만여 명이 호수를 중심으로 물 위에 집을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인따족의 생활상을 좀 더 깊숙이 볼 수 있다. 원래 이들은 바닷가 근처에서 살다가 수 백여 년 전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지구상에 수상 가옥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많다.

 

▲수경 재배를 하는 연 줄기에서 가늘게 실을 채취해 옷을 만들어 입는 인레 호수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수상가옥을 짓고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지만 인따족들은 호수에서 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고, 학교와 사원을 짓는다. 일반 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양한 부족의 편의 시설도 바로 나무 위에 짓는 것이 다른 수상가옥과 차별이 된다. 특히 인따족은 작은 배를 이용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독특한 삶의 문화를 보여준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노를 저을 때 손이 아닌 발로 젓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노를 발로 저으며 호수를 여기저기 누빈다. 고기도 잡고, 어린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시장갈 때도 작은 나무배를 타고 발로 저으며 다닌다.

 

▲인레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의 모습.

 

이처럼 인따족에 있어 배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로 인레 호수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도구인 셈이다. 그리고 인레 호수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바로 인따족들이 야채를 물 위에서 재배하는 수경 농업이다. 땅이 아닌 물 위에서 농사를 짓는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레 호수로 가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싱싱하고 맛있는 야채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들은 호수 위에 대나무나 티크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호수에 떠 있는 수초를 거둬 밭으로 만든다.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에서 갈대를 만들어 집을 짓고, 배를 만드는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인따족들은 집과 배를 만드는 것에 한발 더 나가 수초와 호수 바닥에서 건져 올린 진흙을 이용해 수경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비옥한 호수의 진흙과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토마토, 토란, 양배추 등 맛있는 야채를 재배하며 어업이외에 가계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인레 호수 주변에는 목과 발목에 링을 차고 있는 빠다웅족들이 모여 산다.

 

아시아보다 유럽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지상의 낙원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인레 호수는 뜨거운 여름철만 빼고는 언제나 서양인들로 넘쳐난다. 저렴한 숙소에서 수상 방갈로까지 다양한 호텔이 있고, 호수 위에 세워진 인따족의 집과 수상 밭(쫀묘), 그리고 자연이 선사한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매혹시킨다

 

6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기다란 배를 빌려 인레 호수 여기저기를 여행하다보면 한 발로 노를 저으며 물고기를 잡는 어부에서부터, 작은 배를 타고 학교나 마을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육지와 달리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문화적 관심거리가 없는 대신 인따족이나 목이 긴 빠다웅족의 삶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인레 호수 여행의 백미이다. 배를 타고 수상가옥에 오르면 이색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이곳의 원주민들과 만난다.

 

▲맑은 영혼도 바람이 되어 머무는 인레 호수.

 

연에서 얻어낸 가느다란 실로 옷감을 짜는 사람, 공예품, 은공예품 등 손재주가 좋은 인따족들의 생활모습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온하다. 이 중에서도 연에 실을 뽑는 모습이 아주 이채롭다. 누에나 양이 아닌 연에서 아주 가느다란 실을 뽑아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드는 인따족의 지혜를 잠시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인레 호수에도 불심이 강한 미얀마 사람답게 불교사원도 볼 수 있다. 호수 밖에 있는 쉐양삐 사원, 인레 호수 한 가운데 있는 파웅도우 파고다, 그리고 고양이 점프 묘기를 여행자들에게 보여주는 고양이 사원 등이 있다. 양곤에 있는 엄청나게 큰 사원들과 비교하면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신앙심만큼은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배이지만 인레 호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나룻배.

 

신이 내린 선물, 인레 호수와 그 안에서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소수 민족. 부처와 같은 엷은 미소로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원주민들이 있어 인레 호수 여행은 평생 잊히지 않는 여행지가 된다. 바람이 물고 새가 우는 이른 새벽녘에 호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사하라 사막에서 만난 알퐁스 도데의 ‘별’  - 리비아

보드라운 햇살만큼이나 부드러운 사하라 사막과 푸른 창천은 여행자들의 눈과 마음을 매혹하기에 충분하다.

 

국토의 면적 90%가 모래사막으로 이뤄진 리비아는 사하라 사막을 체험하기에 아주 적합한 나라다. 아프리카에서 4번째로 크고 한반도의 8배나 되는 광활한 대지를 가진 리비아는 40년 동안 독재정권을 휘둘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나라 이름만큼 유명한 곳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을 제국주의 국가라 칭하며 오랫동안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한 채 오롯이 알라만을 숭상하던 나라가 바로 리비아.

 

▲영원히 파란 하늘과 오렌지 빛의 모래가 빚어내는 자연의 소나타를 작은 카메라에 담고 있는 여행자

 

하지만 21세기 들어와 리비아는 지중해를 따라 로마제국시절에 세워진 사브라타, 렙티스 마그나 고대 로마유적과 사하라 사막에서 발견된 세계문화유산 아카쿠스 암각화 그리고 광활한 사막투어 등 다양한 관광자원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리비아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사하라사막과 사막화가 되기 전에 살았던 선사유민들이 남긴 암각화다. 아마 사막과 세계문화유산이 공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하라 여행은 우리에게 흥분과 설렘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사하라 원주민인 베르베르 족의 미소는 수줍고 너무나 소박하다

 

우선 낮에는 4륜구동차를 타고 광활한 사막과 오아시스를 질주하고, 밤에는 별과 달 이외는 그 어떤 빛도 볼 수 없는 사막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사막투어는 평생 잊히지 않는 여행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사막 투어는 우리에게 조금 낯선 여행임은 틀림없다. 차에 짐과 텐트 그리고 먹을 양식을 싣고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사막을 여행한다는 것이 어쩌면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선진국이나 일본에서는 사하라 투어가 대중화 된 지 꽤 오래다. 낙타대신 차로 이동하지만 사막에서 먹고 자면서 느끼는 자연의 원시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화려하고 세련된 호텔은 아니지만 텐트에서 보낸 사막 여행은 이른 아침 차 한 잔으로 더욱 행복해 진다.
 

지도도 없는 광활한 리비아 사막투어를 하기 위해서는 수도 트리폴리에서 1000km 이상 남서쪽으로 달려가야 한다. 모래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트리폴리에서 셉하(Sabha)까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850km 정도 달려간 다음 거기서 튼튼한 4륜구동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400km 이상 달려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래사막과 조우할 수 있다. 이처럼 사하라 사막과의 만남은 긴 나긴 여정과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눈을 뜨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이 펼쳐진 사하라는 분명 오지를 좋아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여행지다.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사하라는 아랍어로 불모지를 뜻하는 ‘사흐라(Sahra)’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미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사하라는 몇 개의 오아시스를 제외하고서는 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하고 가장 일교차가 심한 사하라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자연의 비경을 모래 속에 꽁꽁하게 숨겨 놓았다. 아프리카 동쪽의 이집트 나일강에서 서쪽의 모로코 대서양 연안까지 약 5,600km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지중해의 아틀라스산맥에서 나이저 강·차드 호수까지 대략 1,700km 정도가 사하라 사막의 사전적인 경계이다.

 

▲아침 햇살을 가득 품은 모래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사막여행을 즐겨본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발자국은 없어진다. 우리의 삶처럼.

 

하지만 사막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점점 더 사바나 지대로 사막화가 이뤄지고 있어 사하라의 전체적인 면적은 수치로 표시하기 어렵다. 경계가 어떻게 됐든 사하라 사막투어의 진수는 문명에서 완전히 벗어나 TV라디오컴퓨터핸드폰 등 일체 가전제품은 사용이 불가능하고, 자동차 배터리에서 만들어진 작은 전구와 촛불이 유일한 문명의 도구일 정도로 오지 중에 오지다. 그래서 사막투어는 바쁜 일상으로 잠시 잃어 버렸던 자신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보통 사막투어는 2 3일이나 3 4일 정도로 이뤄진다. 기간에 따라 사막 깊숙이 들어갈 뿐 보이는 풍경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히 모래사막만 매일 달린다고 생각하면 지루한 여행이 되지만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서 1만 년 전의 선사유민들이 바위에 새긴 암각화가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198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카쿠스 암각화는 사하라 사막에 뻗어 있는 타드라르트아카쿠스 산맥에 있는 암석에 그려진 것이다.

 

▲자동차 밀러를 통해 광활한 사막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사암에 새겨진 암각화는 단순히 동물 형상만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채색이 되어 인류학적으로 소중한 자료가 된다. 암각화에 새겨진 다양한 동물들은 암각화가 그려진 시대를 말해주는데 코끼리와 코뿔소 그림은 BC 12,000BC 8,000년에 그려졌고, 기원전후로는 낙타의 그림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아카쿠스의 암각화에는 목축시대를 뜻하는 소 그림, 전차를 끄는 말 등 인간의 수렵과 농경생활이 함께 표현된 것으로 보아 과거 수천 년 전에는 이곳이 황량한 사막이 아니라 풀과 나무가 자라는 사바나 지대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이처럼 사하라는 사막화로 인해 죽음의 땅으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선사유민들이 살았을 만큼 비옥한 토양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자연의 비극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된다. 주로 암각화가 있는 아카쿠스 지역은 사암모래자갈 등이 있어 진정한 사하라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차를 타고 몇 시간만 달리면 정말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란 모래 사구가 눈앞을 가로 막는다. 달리고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의 모습은 하얀 눈밭이나 푸른 바다를 달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특히 한낮을 달궜던 붉은 태양이 모래사막 너머로 사라지면 밤하늘에서는 별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알폰소 도테의 ''이라는 수필이 떠오를 만큼 낭만적인 사막의 별들의 향연.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처럼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가득 차 한 폭의 명화를 연상케 한다.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별 하나를 딸 정도로 밤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화이다. 시간이 새벽을 향해 곤두박질칠수록 별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빛을 발산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별들의 잔치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낮에는 푸른 하늘과 누런 사막이외에는 그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던 황량한 사막이 밤에는 은하수, 북두칠성, 오리온 등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별과 함께 독특한 사막의 밤풍경을 그려낸다. 비록 살갗을 에는 찬 기운이 모래사막을 휘감지만 침낭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밤새도록 별을 봐도 지겹지 않다. 이것이 진정한 사하라 사막의 매력일 것이다.

 

언제부터가 사하라는 인간이 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었다. 나무와 동물 그리고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만 인식되었던 사막이 극한의 오지로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 21세기 현실이다. 끊임없이 탐험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욕구에 거대한 사하라는 조금씩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며 사막의 작은 모래밭을 내준다. 무엇보다 바람이 빚어낸 부드러운 모래곡선은 붓으로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신비감을 안겨준다. 바람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어진 사구이지만 실제로는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 자연의 예술적 영혼이 아로새겨진 것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무슬림(남자 이슬람교도).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모래를 맨발로 걷는 상상만으로도 사하라가 가진 매력은 엄청나다. 거의 무릎까지 빠지는 고운 모래밭은 해변의 백사장을 걷는 것과 아주 색다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이 남긴 발자국이 바람에 의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바람만 불만 새롭게 그림을 그리는 사하라 사막의 위대함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대적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다.

 

◆프랑스 풍의 아름다운 도시, 스위스 프리부르

▲하얀 눈과 중세 시대 건물이 인상적인 프리부르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를 등지고 슈피탈 거리에서 버스로 20분만 가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이지만 중세도시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또 다른 중세도시 프리부르를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는 프리부르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1년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한 영화 ‘만추’가 이 영화제에서 청년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고, ‘집으로’,‘친절한 금자씨’,‘똥파리’ 등이 초청되어 한국영화의 위상을 알린 곳이 바로 프리부르다.

 

유럽에서 아시아와 제 3세계 영화를 주로 소개해 온 프리부르는 베른보다 34년이나 앞선 1157년에 체링겐가의 베르톨트 4세가 세운 천년 도시다. 이곳은 스위스 중앙고지에서 흘러내리는 사린 강을 끼고 제법 가파른 언덕 위에 철옹성처럼 지어졌다. 체링겐가는 아레 강과 사린 강 근처에서 자신들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도시를 건설했다.

 

▲도시 인구가 만 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만 프리부르는 중세의 고색창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베른과 도시 모양이 비슷한 프리부르는 스위스 가톨릭 중심지로서 종교 도시다. 또한 베른이 독일 문화권이라면 프리부르에는 프랑스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고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계다. 그래서 프리부르는 인구가 4만 명밖에 되지 않지만 베른보다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풍긴다. 중앙역에서 언덕을 내려가 구시가지로 들어가면 13세기에 지어진 목조다리, 성모리스성당, 성 니콜라스성당, 그리고 세월이 먼지를 뒤집어쓴 시청사 등이 중세 이미지를 한껏 뽐낸다.

 

특히 중세 기품과 종교적인 향기가 자욱한 성 니콜라스성당은 프리부르의 종교 아이콘이다. 14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지어진 성 니콜라스대성당은 프리부르 시청사 동쪽에 위치해 있다. 성당 앞쪽에는 높이 76m짜리 탑이 서 있고 출입구 위에는 14~15세기에 제작된 사제들 조각상이 설치돼 있으며, 14세기에 만들어진 남쪽 문에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수백 년 묵은 종교 향기가 우리 마음을 적시고, 기품 있는 중세 독서대, 세례반(1498), 성가대석과 일반석 사이 칸막이(1474), 성가단(15세기, 앙투안 페네 작품)과 조세프 드 메호퍼가 제작한 현대식 스테인드글라스, 알로이 무저가 제작한 오르간 등이 중세 박물관을 연상하게 한다.

 

▲감자만한 함박눈이 아름다운 프리부르를 더욱 더 로맨틱하게 만든다.

 

프리부르 구시가지 한복판에 자리한 시청사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1501~1522년에 질리안 펠더와 한스 펠더 형제가 지은 시청사는 프리부르 역사와 삶의 궤적을 함께한다. 시청사 출입구에는 아치 모양 띠 장식이 눈길을 끌고, 내부에는 루이 16세 스타일 장식과 후기 고딕 양식 창문이 시청사를 아름다운 중세 건축물로 빛나게 한다. 그러나 프리부르 여행의 진수를 느끼고 싶다면 도시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올라야한다. 구시가지 맞은편에 위치한 언덕길을 20여 분 오르면 발 아래로 프리부르의 전경이 펼쳐진다.

 

▲멋과 낭만이 일년 내내 흐르는 프리부르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도시를 향해 쏟아지는 모습과 수백 년이 지난 건축물에서 뿜어져 나는 세월에 깊이가 추운 겨울을 더욱 아름답게 빛낸다. 함박눈이 소복하게 도시를 완전히 감싸면 프리부르의 진정한 겨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비록 볼거리는 많지 않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 도시 사람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게 된다. 스위스 속에서 만나는 작은 프랑스와 같은 프리부르에 머무는 동안 여행자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마치 중세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알제리 제밀라에서 만난 까뮈의 영혼\

▲로마제국 시절 식량지로 유명했던 제밀라는 주변에 넓은 밀밭이 인상적이다.

 

지중해 북부를 장악한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現이스탄불)로 천도 한 후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이 점차 쇠퇴하게 이르렀고, 한 개의 하늘 아래 두 개의 로마 제국의 분열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이른바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분열이 시작될 무렵 분열 직전의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는 장남인 17세의 아르카티우스에게 동로마제국을, 6세의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에겐 서로마제국을 맡기고 떠난다. 이때부터 로마는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고, 서로마제국은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를 지배하였고,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중심으로 이집트, 중동(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등을 지배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침입으로 인해 도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교회와 예배당이 추가 되었다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 지중해를 끼고 있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서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근근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버텨왔지만 게르만인의 한 갈래인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는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로마 유적들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유적지가 바로 알제리에 있는 제밀라 유적이다. 물론 이 지역 출신이자 그 유명한 알베르 까뮈의 ‘제밀라의 바람’이는 에세이를 통해 이 도시가 세상 밖으로 소개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제밀라는 지중해 바람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아스라한 로마제국의 식민도시이다

 

반달족에게 무참하게 부서진 로마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밀라는 트리야누스 황제가 제3군단 아우구스투스의 퇴역 군인을 위해 건설한 식민 도시이다. 이곳은 농산물 시장으로 부유해졌고,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원래 로마 군 진영의 설계를 본 떠 사각형 모양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 쯤은 알베르 까뮈의 에세이집을 읽어봤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콘스탄틴에서 태어난 그는 귀거머리였던 어머니와 조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열정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조국은 그의 문학성을 한 층 성숙시켜주는데 일조를 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하게 만난 그의 에세이 ‘제밀라의 바람’과 그의 고향 콘스탄틴은 한국에서 아주 머나 먼 땅으로 떠나는데 충분한 자극제가 되었다.

 

▲까뮈의 말처럼 해가 지고나면 제밀라에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친다.

 

"새들이 우는 소리, 세 구멍짜리 플루트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발 구르는 소리, 하늘에서 나는 소리, 그 많은 소리가 그 곳의 침묵과 황폐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 가는 길마다 집들의 폐허 사이에 난 소로들이며, 광택 나는 기둥과 돌로 포장된 대로들이며, 개선문과 언덕에 선 신전 사이의 거대한 광장이며, 모두가 끝없는 하늘에 벌여 놓은 카드처럼 도시는 사면팔방에서 경계 짓는 협곡들과 통하고 있었다. " 이글은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까뮈가 쓴 '제밀라의 바람'이라는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콘스탄틴에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보이지 않는 바람과 누렇게 농익은 밀밭을 달리면 어느 새 고대 로마도시 제밀라를 만나게 된다. 굽이치는 협곡 사이에 누르스름하게 머리를 내민 이곳은 까뮈가 한 줌의 바람이 되어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물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고대 도시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까뮈가 이곳을 찾았을 땐 황폐한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였다.

 

▲까뮈가 태어나고 자란 그의 고향, 콘스탄틴의 전경

 

콘스탄틴에서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이곳에서 까뮈는 예술적인 영감을 얻어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실제로 이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낯선 이방인을 맞는 것이 바로 바람이다. 해발 950m에 위치한 이유 때문인지 바람은 도시를 향해 끊임없이 불어온다. 왜 로마인들이 이렇게 높은 지대에 도시를 건설한 이유와 까뮈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 위해 온종일 바람이 되어 이곳을 헤맨다. 1세기 말에 번성하기 시작한 제밀라는 로마의 다른 식민도시와 마찬가지로 로마건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의 침입으로 인해 도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교회와 예배당이 추가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제밀라 유적지 주변은 밀레의 풍경화가 연상될 만큼 아름다운 밀밭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 재배된 밀은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 로마로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러니 제밀라는 로마 군대의 식량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원래 도시 이름은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아랍어 제밀라이고, 라틴어로 ‘퀴쿨(Cuicul)’이었는데 로마제국이 쇠퇴할 때 반달족과 7세기 경 아랍인들의 침략 때 도시가 파괴되고 이름도 현재의 ‘제밀라’로 바뀌었다.

 

▲터번과 콧수염이 인상적인 제밀라의 할아버지의 모습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제밀라. 이런 바람을 좋아했던 까뮈는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이곳에 머물며 로마가 남긴 흔적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감성과 철학적 이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처음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사람이 길을 멈추고 또 거쳐 가는 도시가 아니다. 어디로도 길이 나 있지 않았고 아무데도 트이지 않았다. 사람이 들렀다가는 다시 돌아와야 되는 그런 곳이다."

 

그의 말처럼 제밀라는 거쳐 가는 도시도 아니고 왔던 길을 되돌아 와야 다시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을 만큼 산 속에 있는 작은 요새와 같은 철옹성이다. 심지어 바람도 이곳에 들어오면 소용돌이가 될 정도로 협곡 사이에 똬리를 튼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까뮈의 글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제밀라를 보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독특하다. 거의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듯이 도시는 펼쳐져 있다.

 

▲B.C111년 現알제리를 지배하던 누미디아 왕국의 유구르타 왕은 로마와 벌인 전쟁에서 패하고,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산마루에 위치한 제밀라 입구에서 비탈진 언덕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제밀라 여행은 시작된다. 알제리의 숨겨 놓은 보물인 제밀라는 세계문화유산답게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도시는 2-3세기에 군대에서 퇴직한 사람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유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황제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헌정한 셉티미우스 신전과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다.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알제리에서 가장 큰 규모다.

 

그 이외에도 로마시대에 지어진 신전, 포럼, 집회와 재판에 사용됐던 바실리카,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문, 목욕탕, 세례당, 시장 등 로마도시가 가져야 할 모든 건물들이 바람과 더불어 늠름하게 서 있다. 다소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로마 돌덩이 위에 머물지만 제밀라의 영원한 친구인 산과 들판 그리고 하늘은 이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아마 우리가 보고 느낀 제밀라의 영화로움과 신비로움 그 이외 모든 감성들을 이곳을 찾았던 까뮈도 느꼈을 것이다. 시대는 틀리지만 똑같은 공간에서 느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은 그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는 부서진 기둥의 잔재들.

 

주변의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했던 까뮈처럼 우리도 제밀라에 머무는 동안 바람 한 줌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늘이 붉은 석양을 토해낼 즈음 바람은 이방인들을 내려가라고 어깨를 떠민다. 해가 진 이후에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친다. 그러나 제밀라의 바람은 매섭고 차가운 느낌보다는 바람에 묻어있는 연민과 따스한 감성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주변의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했던 까뮈처럼 우리도 제밀라에 머무는 동안 바람 한 줌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늘이 붉은 석양을 토해낼 즈음 바람은 이방인들을 내려가라고 어깨를 떠민다. 해가 진 이후에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친다. 그러나 제밀라의 바람은 매섭고 차가운 느낌보다는 바람에 묻어있는 연민과 따스한 감성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부서진 벽과 녹슨 철 등이 할머니를 쓸쓸하게 만들고, 이들은 제밀라를 더욱 슬프고 애달프게 만든다.

 

◆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천재의 도시, 잘츠부르크 - 오스트리아

▲영화 'Sound of Music'의 무대로도 유명한 잘츠부르크. 이곳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고향이다.

 

‘음악의 신동’, ‘천재 작곡가’ 등의 수식어가 붙은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그가 죽은 지 2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루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 환승역에서 작품번호 ‘kv525 세레나데 3악장’이 울려 퍼지고, 종착역엔 ‘피아노 소나타 11번’이 이별을 알려준다. 소설가이자 출판편집자인 필립 솔레르스가 쓴 ‘모차르트 평전’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차르트 음악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그의 말처럼 모차르트 음악이 우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마술피리’를, 성장하면서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와 ‘피아노 소나타’를, 연인이 생기면서 피가로의 결혼 K.494 중 ‘사랑의 그리움 그대는 아는가’를, 죽음을 앞에 두고 ‘레퀴엠’의 선율을 듣는다.

 

노란 단풍과 모차르트의 선율을 따라 달려가면 한 폭의 수채화나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도시, 잘츠부르크에 이른다. 모차르트의 고향이자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영혼의 울림이 일 년 내내 울려 퍼지는 땅, 잘츠부르크. 도시 한가운데로 잘자흐 강이 가로지르고, 삼면의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체코의 프라하와 함께 ‘북쪽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중세의 건축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에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배경지로 잘 알려져 있어 도시 분위기를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사이로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하며 아름다운 정원을 걷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소금의 산’이라는 뜻의 잘츠부르크는 소금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와 예술이 화려하게 꽃피었다. 무엇보다도 잘츠부르크가 세계 역사의 중심지가 된 것은 모차르트라는 걸출한 천재 음악가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소금의 도시’라는 명성보다 ‘음악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이 도시의 이미지를 말해준다. 실제로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티셔츠, , 열쇠고리, 라이터, 골프공, 맥주잔, 초콜릿 등 웬만한 기념품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모차르트의 브랜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7조 원으로 평가한다. 가난과 궁핍으로 말년을 보낸 그의 삶과 아주 대조적이다.

 

구시가지에 발을 내딛으면 여행자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도시는 그리 크지 않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볼거리들이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매혹하기에 충분하다. 잘자흐 강을 중심으로 북동쪽에는 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미라벨 정원이 있고, 강 건너편에는 대성당, 호엔 잘츠부르크 성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구시가지의 중심은 모차르트 부자가 작곡가로 근무했던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다. 도시의 터줏대감처럼 늠름하게 버티고 있는 성 밑으로 중세의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골목길과 바로크, 고딕, 르네상스식의 독특한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시작될 때 첫 장면을 장식하는 호엔 성은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독일의 공격을 대비하여 만든 것으로 17세기에 완성되었다. 모차르트는 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궁정작곡가로 일하며 이곳에서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한 적한 벤치에 앉아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그는 자신의 누나 난네를에게 쓴 편지에서 “꼬마 볼프강은 작곡할 시간이 없어, 사실은 작곡할 게 아무것도 없거든. 벼룩과 씨름하는 개처럼 방안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그가 이곳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의 강요로 성을 떠날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싫은 내색 없이 음악을 작곡했지만 뜨거운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주의 명령에 따라 음악을 작곡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질 때마다 마을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꿈과 음악에 대한 상상을 펼쳤다.

 

이처럼 성은 모차르트의 고민과 방황이 묻어 있어, 이곳에 들어서면 가엾은 볼프강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성 위에서 내려다본 잘츠부르크의 풍경은 모차르트 음악만큼이나 아름답고 평생 잊히지 않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도시를 쉼 없이 가로지르는 잘자흐 강, 모차르트의 선율이 배어있는 대성당, 봄부터 가을까지 황홀한 꽃향기를 피워내는 미라벨 정원, 수천 년 동안 이곳 사람들의 역사적 숨결이 녹아있는 구시가지 등 그야말로 잘츠부르크가 가진 모든 것을 성 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성벽 한 귀퉁이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자신도 모르게 모차르트를 만나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고풍스러운 성을 등지고 구시가지로 내려오면 닫혔던 작은 골목길이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그 길이 닫힐 즈음이면 또 다른 길을 내놓으면서 사람들을 점점 더 중세시대로 빠져들게 한다.

 

▲붉은 단풍으로 물든 미라벨 정원의 오후 풍경

 

무엇보다 모차르트가 25세까지 살았던 도시를 걷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흥분될 것이다. 더욱이 구시가지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에 들어서면 이 도시의 활기가 느껴지고, 카푸치노 한 잔에 모차르트 음악을 감상하노라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아마 모차르트도 이 거리에서 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의 모든 근심과 음악에 대해 밤새 토론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점, 호텔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여행자들의 발길을 묶어두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거리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게트라이데 9번지의 노란색 건물이다. 이곳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영화 속에 주인공처럼 살다간 모차르트의 생가다. 어쩌면 잘츠부르크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천재 음악가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게트라이데 거리의 중심인 이곳을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가에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줄을 잇는다.

 

12세기에 지어진 생가건물의 3층에서 1756 1 27일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모차르트는 25세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는데 그 중 17년을 이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1917년 국제 모차르테움Mozarteum협회에서 이곳을 인수한 후 그의 생가는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1층에서 4층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이 사용했던 바이올린, 피아노, 그가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 침대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간판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그가 태어난 3층과 오페라 <마술피리>를 초연할 때 사용했던 소품을 모조품으로 만들어 전시한 2층이다. 그 외에도 중세시대 중산층이었던 모차르트 가족이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 도구들, 복도 중간에 수북이 쌓인 여행 가방 등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모차르트와 그의 부모님, 모차르트의 부인이었던 콘스탄체와 아들의 초상화가 인상적이다.

 

9번지 생가를 나와 모차르트의 흔적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면,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고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던 대성당, 1767년 열 살의 나이로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아’를 연주하고 열두 살에 그의 첫 오페라가 공연된 레지덴츠, 1783년 ‘C단조 미사곡’을 지휘한 성 페테 성당, 그리고 열일곱 살에 생가를 떠나 1777년부터 빈으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모차르트 하우스’가 있다. 이 집은 그의 가족이 생가를 떠나 새롭게 마련한 집이고,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1995년에 복원된 이곳에서는 모차르트의 음악, 가구와 악보 등이 전시돼 생가와 함께 모차르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생가와 모차르트 하우스를 천천히 둘러보면 그가 남긴 다양한 음악과 유물을 통해 잠시나마 모차르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와 모차르트의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잘츠부르크.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모차르트의 영혼과 잠시 만났다. 1791 12 5일 자신이 좋아했던 겨울날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모차르트. 그는 미완성의 작품을 남겼지만, 우리와 완전한 이별을 고하지는 않았다. 잠시 그는 하늘로 여행을 떠나 언젠가 다시 돌아와 레퀴엠을 완성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과 함께 모차르트의 음악은 영원히 푸른 하늘 밑을 맴돌 것이다.

 

▲글을 읽기도 전에 작곡을 했던 세계 최고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였던 모차르트.

 

“나는 내 재능을 다 펼치기 전에 생을 마치게 되었다.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내 생애는 무척이나 전도유망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이제 나의 생을 마감한다. 여기 내가 미완으로 남겨서는 안 되는 ‘레퀴엠’이 있다.

 

◆중국 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중국, 복건성 토루(福健省 土樓)

복건성의 토루는 아시아 특유의 씨족문화와 높은 건축기술 그리고 독특한 건축구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하늘에서 보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도넛 모양의 토루들이 집인지 아니면 미사일기지인지 착각할 만큼 이색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광활한 대륙에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중국이지만 토루만큼 건축구조와 생김새가 독특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가옥 구조다.

 

지정된 46채의 토루를 만난다. 토루는 저마다 xx()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성()이 서로 다른 하나의 집성촌으로 이해하면 된다. 중국 5대 민가 건축양식 중에 하나인 토루는 769년 당나라 시대 때부터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해 송·원(宋·元)을 거쳐 복건성 남서부에 우우죽순처럼 들어섰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토루는 명나라 때 건축된 것이고, 지역에 따라 1000여 년이 넘는 토루도 있다.

 

▲토루 한 가운데 우물이 있기 때문에 적들과 싸움에서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토루.

 

그럼 무슨 이유로 복건성에 이처럼 많은 토루가 들어섰을까? 토루에 사는 사람들은 한족(漢族)에서 갈라진 객가(客家)족인데 이들은 南宋 시절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고향을 떠나 복건성 산속으로 이주해 동그란 모양의 토루를 짓고 살았다. 해발 300-600미터에서 차밭을 일구며 살아 온 객가족은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과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토루는 외벽의 형태에 따라 원형, 방형, 반원형, 사각형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보통 원형이 많다. 원형 토루의 직경은 40-60미터이고, 둘레는 수백 미터에 이르고 토루 하나에 250-800여 명이 거주하였다. 외부는 두터운 흙벽으로 구축됐고 내부는 우리의 한옥처럼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짜 맞춰 지었다.

 

▲초계의 여경루(餘慶樓)의 내부모습이다. 한 가운데 건물이 조상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고, 그 다음 건물이 학교 등이 들어선 공공건물.

 

보통 3-5층 구조로 건축된 토루는 1층에는 부엌과 식당이 있고, 2층에는 창고, 3층 이상에는 주거를 위한 침실이 있다. 토루 내부 한 가운데는 씨족의 제반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학교와 사당 그리고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객실 등도 마련돼 있다. 토루에서 특이한 요소는 방위를 목적으로 외벽을 견고하게 구축하여 하나의 철옹성처럼 만든 것이다. 그래서 토루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침실에는 환기와 밖을 감시할 수 있는 창문이 있는데 이것은 적이 침입할 때 활을 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군사시설 같지만 토루 안에 들어가면 의식주가 모든 것이 해결 되었을 만큼 객가족들은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영정 토루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승계루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한족의 갈래인 객가인들이 복건성으로 내려와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특이한 형식의 집단 가옥을 짓고 산 것은 그 자체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자신들의 고유한 민족성과 생활습관 그리고 사회구조를 오롯이 지키기 위해 출입문을 하나 밖에 만들지 않은 객가인들의 삶의 철학이 인상적이다. 하늘을 통하지 않고서는 개미 한 마리도 출입할 수 없는 토루의 특이한 건축구조는 현대건축사에 획을 긋는데 의미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심사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만장일치로 토루를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선정한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분명하다. 특히 토루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지만 마당 곳곳에 우물이 있는 것이 놀랍다. 외부와 전쟁을 치르더라도 우물이 있기 때문에 쉽게 적에게 토루를 내 주지 않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집체인 셈이다. 지금도 객가인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가축을 기른다.

 

▲초계 토루의 진복루 입구에서 주민들이 상인의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

 

1969년 미국의 인공위성이 처음 발사된 후 촬영한 중국 토루. 그 때부터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토루지만, 이미 중국에서는 객가인들의 삶의 지혜가 수백 년 동안 중국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남정(南靖)영정(永靖)초계(初溪)화안(華安초) 등 복건성에 자리한 수많은 토루군들 중에서 영정은 토루 여행의 백미가 되는 곳이다. 14세기 즈음 건축된 영정의 유창루는 5층 건물로 3층과 5층 기둥이 각각 반대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어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설계 자체가 복잡하다. 일반 여행자들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고 있는 유창루에서 하룻밤 잠을 청해 보는 것도 좋다.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쓴 고색창연한 고택아래서 잠시 머물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명·청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영정의 유창루 이외도 원형의 모습이 아름다운 진성루와 영정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승계루 등 크고 작은 토루들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토루가 산악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주로 차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400여 개의 방이 있는 승계루는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입에서 절로 날 만큼 아름답다. 단순히 사람들이 기거하는 중세시대의 아파트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3층부터 살림집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토루는 객가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사수하는데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의 작은 집성촌 사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는 물론이고 교육과 혼례 등 모든 것이 토루 안에서 이뤄졌다. 혼례는 3  이상 지나야 같은 성끼리 혼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근친상간에 대해서도 지혜를 발휘했다. 중국 속에서 또 다른 중국을 만날 수 있는 토루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장소가 될 것이다.

 

▲토루 안에는 사람도 살지만 가축도 함께 살아간다

 

단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보증수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객가인들이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토루는 건축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살 지 않는 집이 아니라 현재에도 차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세계문화유산인데 어떻게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 혹시 문화재가 파괴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지만 이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폐허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야 깨끗하게 유지관리 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르지만 토루는 분명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독특한 건축과 문화를 보여준다. 

 

▲일반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고 있는 복유루. 100여 년이 넘었지만 건물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가는 길=우리나라에서 토루가 있는 중국 푸젠성까지는 샤먼을 통해 들어간다. 대한항공이 샤먼까지 주 3(화ㆍ목ㆍ토) 운항한다. 샤먼 버스터미널에서 푸젠성 융징까지 버스로 4시간 소요.

 

◆캐나다 밴프국립공원 Lake Louise 루이스 호수

▲유네스코 지정 세계 10대 절경에 속하는 루이스호수 앞에서 한 여성이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설산과 호수와 포즈가 잘 어울린다

 

▲위에서 내려다본 세계 10대 절경인 루이스호수의 환상적인 모습.

 

▲호수를 둘러싼 분지 중앙에 호텔이 있고, 주변 풍광은 끝내준다.

 

▲로키의 봉우리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정상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다

 

▲루이스 호수 위에 빙하들이 붕붕 떠다닌다.

 

◆아드리아 해의 보석, 두브로브니크 - 크로아티아

시인 릴케는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 해海의 보석’이라고 불렀다. 그가 어떤 이유로 달마티아 지방의 두브로브니크를 사랑했을까?  100여 년 전 릴케는 사랑하는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아드리아 해에 숨어 있는 두브로브니크를 찾아와 사랑을 나누며, 이곳의 매력에 빠졌다. 바람과 구름처럼 발길 닿는 데로 흘러 다녔던 이들은 철옹성으로 둘러싸인 두브로브니크를 처음 보는 순간 매료되어 몇 달간 이곳에 머물며 시를 썼다고 한다.

 

또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세계에서 지상 낙원을 찾는다면 두브로브니크에 가서 중세의 거리를 걸어보라”고 말하며 이 도시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그동안 우리에게 ‘발칸 반도의 화약고’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이곳은 1991년에 발발한 내전 때 세르비아인들에게 3년간 폭격을 받아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30만 명의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그 당시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를 보호하기 위해 UN 이사회가 열릴 정도로 세계는 이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아드리아 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는 시인 릴케가 사랑했던 도시였다

 

천해의 해변 도시 두브로브니크는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계단식으로 집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바다와 바로 접해 있는 도시는 반도 끝에 두터운 성벽을 둘러쌓아 도시를 형성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슬라브어로 ‘참나무 숲’을 뜻하는 두브라바Dubrava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다. 중세시대 이전에는 도시의 이름이 ‘절벽’을 뜻하는 ‘라구사Ragusa’로 불렸는데, 가파른 돌산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과거 로마인들은 두브로브니크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가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7세기부터다.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함께 아드리아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무역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9세기부터는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중심지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고,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성했으며, 1516세기에는 무역의 전성기를 이루어 아드리아 해안의 보석으로 성장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철옹성 같은 성벽에 의해 완벽하게 둘러싸여 있다. 높이 15m, 두께 6m. 그리고 총 둘레가 2km에 달하는 성벽은 세 면이 바다와 면하고, 나머지 한 면만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철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3개뿐이다. 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진 성벽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현재 이 성곽 안에는 4,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자동차는 한 대도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중심 대로에는 여러 종류의 상가가 들어서 있고 그 뒤로 일반 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구조가 꼭 이탈리아 폼페이 같다.

 

▲와인 한 잔과 맛있는 요리는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 대리석과 돌로 지어져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건축물들이 돌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기 이주자들은 풍부한 목재 자원을 석재와 적절히 섞어 건물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1520년부터 1667년에 걸친 수차례의 지진으로 많은 건축물이 파손된 이후, 두브로브니크는 지진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고 또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모든 건물을 석재로 짓게끔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16세기 이후에 재건축 된 것으로 대략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곽 서쪽의 필레 게이트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면 이 도시에서 가장 넓고 긴 플라차 거리와 연결된다. 도시의 중심부 역할을 하는 이 거리를 따라 로마 스타일의 건축물들이 마치 야외 박물관처럼 즐비하게 들어 서 있다. 이 건축물들은 대체로 400여 년의 역사를 가져 중세의 멋스러움과 귀족적인 우아함이 고스란히 묻어있어 여행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를 여행하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15세기 중반 나폴리 출신의 건축가가 지은 렉터 궁전, 고대 필사본과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프란체스코 수도원, 이탈리아 건축학자 버팔리니의 설계로 1713년 완공된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등 고대에서부터 중세까지의 다양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좁은 골목길과 마을을 둘러싼 성곽을 따라 걷는 순간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지붕들은 온통 오렌지 빛이다. 이 도시는 1991년 세르비아의 폭격으로 일부분이 파괴되었다가 시민들의 힘으로 재건되었다

 

직각으로 이뤄진 건물 사이사이로 난 골목길은 낭만적이면서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른 아침에는 골목길 한 곳에서 작은 재래시장이 열리고, 낮이 되면 어린 아이들이 축구를 즐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로맨틱한 분위기의 노천카페들이 밝히는 불빛으로 도시는 새로운 세상이 된다. 한낮에 아무리 강한 햇살이 이 도시를 달구어도 골목길의 그늘진 곳에서는 언제나 현지 사람들의 웃음이 피어나고, 여행자들에게는 시원한 음료 한 잔과 여행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이곳의 골목길에는 사람의 인정이 돌 틈에 배어있고, 거리에 깔린 박석마다 삶의 희로애락이 스며있다.

 

목적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보면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와 피자 가게도 만나고, 고대와 중세시대 때 만들어진 석상이나 문양 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다 인심 좋은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기념촬영도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버나드 쇼의 ‘세계에서 지상 낙원을 찾는다면 두브로브니크에 가서 중세의 거리를 걸어보라’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처럼 골목길이 낭만과 가끔 우리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높은 성곽 위를 걷는 길은 도시의 진면목을 감상하는 계기가 된다.

 

이 도시에서 여행의 백미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도보로 성곽 위를 걷는 것이다. 성벽은 수천 년이 넘은 도시를 아이를 감싸 안은 어머니처럼 도시 전체를 보호하는 최대의 방어벽으로 그리고 중세시대 찬란한 아드리아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버티고 있다. 바다와 육지를 경계로 설계된 15m에 이르는 성벽은 이곳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어머니의 태반과도 같은 것이다.

 

▲성 벽에서 내려다 본 플라차 거리의 전경

 

성곽에 오르면 발아래로 울긋불긋한 지붕들이 붉은 빛을 받아 더욱 빨갛게 빛나고, 성벽 너머에는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가 넘실넘실 춤추며 얕은 바람에 살랑거린다. 사각형 모양의 성곽 모서리 부분에는 높다란 망루가 있는데 이곳에 서면 도시의 생김새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어른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성곽 길을 따라 가면 세월에 무뎌진 낡은 벽돌집, 이끼 낀 대포, 바람에 춤추는 빨래, 창문 밖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좁은 골목길을 질주하는 강아지, 작은 분수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 그늘진 성당 밑에서 낮잠을 자는 할아버지 등을 볼 수 있다. 망루 밑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작은 가게가 있고, 커피를 파는 노천카페와 바다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벤치들이 있다. 돌담이나 벤치에 앉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대략 1~2시간의 성곽 탐험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구시가지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특히 땅거미가 도시를 서서히 삼키기 시작할 무렵 도시의 중심이 되는 플라차 거리에 들어서면 오렌지 빛의 백열등이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수십 개의 노천카페와 성당 앞은 더위를 식히는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가득 찬다. 한 여름이 뜨겁게 무르익어가는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는 세계 전역에서 모여 든 예술가들의 축제가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여름에만 펼쳐지는 두브로브니크의 예술 문화 축제는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가파른 좁은 골목길은 이 도시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이자, 시민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축제가 열리는 5주 동안 구시가지의 크고 작은 광장과 공원은 오페라, 콘서트, 연극, 전시회,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바뀐다. 수백 년 묵은 건물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첼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마음은 행복감으로 넘친다.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간에도 사람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길바닥, 대성당의 계단, 카페 등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두브로브니크의 밤을 즐긴다. 까만 하늘의 별들과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이 도시는 지상 낙원이 된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가 이들이 떠나간 자리를 대신하고, 릴케의 아름다운 시 한 수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전쟁의 상흔 때문에 이 도시가 다소 어둡고 폐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두브로브니크에서 1분만 머물러도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아드리아 해처럼 도시는 영원히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느림의 미학을 꿈꾸는 사람들, 티베트 라싸

가장 낮은 자세로 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있는 티베탄

 

하늘 아래 첫 땅인 티베트 라싸(Lhasa)엔 이른 새벽이 되면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향연기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한 햇살만큼 눈부신 라마 신도들의 신앙심이 도시 전체를 불교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걸린 오색찬란한 룽다(Rum Dal, 하양ㆍ빨강ㆍ초록ㆍ파랑ㆍ노랑 다섯 가지 색으로 구성된 사각형 천에 불경을 새겨놓은 깃발)가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휘날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누리에 퍼지고, 사원 앞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마음속엔 부처님에게 향한 열정이 가득 찬다.

 

▲고원설역의 척박한 땅에서도 인간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티베탄의 삶

 

윤회와 환생, 삶과 죽음, 끝없는 수행 등 형이상학적인 세계가 펼쳐진 곳이 바로 티베트다. 하지만 살갗을 에는 삭풍이 휘몰아치는 사원 한가운데에 서 있노라면 이성적 고민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단지 동물적 본능, 즉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머리를 자극할 때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버려야 모든 것이 다 내게로 돌아온다는 철학적 깨달음으로 배를 채우고, 텅 빈 영혼 속에 순수한 티베탄들의 마음 몇 조각만이라도 담아올 수 있다면 티베트 여행은 인생의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험준한 히말라야 기슭에 똬리를 틀고, 순수한 영혼을 꿈꾸며 사는 티베탄

 

중국 쳉두(成都)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정도 장엄하고 험준한 대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면 티베트 여행의 관문인 라싸 ‘공가 공항’에 도착한다. 만약 쳉두에서 장거리용 2층 버스를 타고 간다면 꼬박 4일이 소요된다. 3,500미터에 위치한 공가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맑고 상쾌한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게으른 우리의 영혼에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는다. 한편으로는 갑작스런 고도 상승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4천 미터가 넘는 산맥들로 둘러싸인 티베트는 산소가 부족하고 토양이 척박해 인간이 적응하며 살기엔 다소 어려운 자연환경이다. 그러나 티베탄들은 스스로 티베트를 ‘포(Poe, 자연의 나라), ‘캉첸(Kangtsen, 눈 덮인 나라)’이라 부르며 자연 속의 일부분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티베트의 옛 수도인 라싸는 그리 크지 않은데, 이 작은 도시 안에 티베트를 대표하는 불교사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라싸의 공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서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포탈라 궁전이 엄청난 규모와 위용을 드러내며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그러나 라싸는 중국에 의해 너무 빨리 문명화가 진행되어 과거의 예스러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라싸에는 순수한 영혼들의 메카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포탈라 궁과 티베탄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조캉 사원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장엄하고 위용 있는 모습의 포탈라 궁

 

세계 불가사의 건축물 중에 하나인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기 이전까지 겨울 궁전으로 사용한 곳이다. 가로 400m 세로 117m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포탈라 궁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 라싸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궁 내부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공간과 불상을 모셔 놓은 백궁과 홍 궁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부는 어둠침침할 뿐만 아니라 야크 기름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냄새가 이방인들의 코를 자극해 머리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부처님을 대신해 미천한 중생들을 살피는 포탈라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꿈꾸는 티베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자 이들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아름다운 외형을 갖춘 포탈라는 조캉사원 옥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제일 좋다. 금빛의 금동상들 사이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포탈라 궁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지금은 달라이 라마가 인도 다람살라로 명치 망명을 떠나기에 포탈라 궁은 그 어느 때보다 티베탄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는다.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곧 불교인 티베트.

 

반면 바코르 광장 한 귀퉁이에 있는 조캉 사원은 포탈라 궁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티베트 최초의 불상이 모셔져 있어 티베탄들에게게는 불교의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왕실 직영 원찰인 조캉 사원은 티베탄들에게 가장 신성한 최고 성지이다. 사원 앞 드넓은 광장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오체투지를 하고 코라(시계방향으로 걷는 불교의식)를 도는 티베탄과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여기만큼 활기차고 동적인 느낌을 주는 곳을 만나긴 어렵다.

 

사원 입구에서 머리, 양 팔꿈치, 양 무릎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린 티베탄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티베트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사원의 문고리와 바닥은 사람들의 손길, 발길에 의해 덧입은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1300년 동안 부처의 신심이 돌바닥에 누운 채로 있다. 그래서인지 오체투지는 인간이 가장 낮은 자세로 부처에게 다가서는 모습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아낌없이 주는 부처지만 그 전에 예를 갖추고 종교적 의식을 통해야만 조금 다가설 수 있는 부처님 손바닥이다.

 

▲히말라야의 맑은 바람에 삶의 찌꺼기들을 말리고 있는 티베탄

 

조캉이란 티베트어로 `부처의 집`이란 뜻이다. 이 사원은 7세기 중엽(647)에 창건된 티베트 최초의 목조건축으로, 본전에는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시집올 때 가져온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거기에다 티베트를 통일하고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송첸감포 왕과 그의 부인들인 중국의 문성공주, 네팔의 브리쿠티 공주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오목하게 들어간 정문은 순례자들이 오체투지를 하는 장소로, 해가 떠 있는 동안 티베탄들의 불심으로 가득 메워진다. 티베탄들의 성지순례 마지막 여정이 바로 조캉에서 마무리된다.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길을 묻게 되는 티베트

 

광활한 티베트 땅 곳곳에서 몇 년에 걸쳐 오체투지로 찾아온 티베탄들과 순례자들이 사원 앞을 끝없이 바닷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무엇을 위해 사람들은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일까?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중국에 빼앗긴 자신의 조국을 찾기 위한 것일까? 어떤 것이든 간에 부처님을 향한 이들의 모습에는 진정성을 떠나 그 이상의 힘이 느껴진다.

 

▲광활한 사막에서도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어린 목동

 

티베탄들에게 불교는 삶의 일부분이다. 가족 중 한 명 정도는 라마승이 되거나 불교 공부를 하는 학자가 된다고 하니 그들에게 있어 불교는 두 개의 삶이 아닌 하나의 삶인 것이다. 또한 성지순례를 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아침에 일어나면 향을 피워 부처에게 하루 인사를 드리고, 라마승들은 저마다 수도를 통해 새로운 부처를 만난다. 라싸에서 흐르는 모든 시간과 공간은 오직 불교 신도와 승려들의 몫이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도 부처의 자비와 부처를 향한 불심이 자리한다. 야크 버터로 만든 양초의 불꽃이 쉴 새 없이 춤을 출 때, 손톱에 낀 검은 삶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염주알을 삼키고,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향 연기 사이로 온 몸을 던져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탄들. 붉은 가사를 두른 라마승의 엷은 미소는 마치 부처와 같다

옴마니반메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