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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6/ [201] 무르익음과 문드러짐 - [220]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상림은내고향 2022. 12. 2. 17:42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

2022.07.22 

[201] 무르익음과 문드러짐

 

 ‘난상(爛商)’에 ‘토론(討論)’을 덧대 ‘난상토론’이라 함은 ‘역전(驛前)’에 ‘앞’을 붙여 ‘역전 앞’이라 부르는 꼴이다. ‘난상’이라는 말 자체가 ‘충분할 때[爛]까지 의논하다[商]’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조선시대 영조(英祖) 이후에야 쓰임이 잦아진 것으로 나온다.

 

한자를 함께 썼던 중국이나 일본에는 용례가 없다. 앞 글자 ‘爛'는 ‘무르익다’ ‘흐드러지다’ 등의 새김이 먼저다. 사물의 기운이 최고에 이를 때를 가리킨다. 찬란(燦爛), 현란(絢爛), 천진난만(天眞爛漫), 능수능란(能手能爛)의 우리말 쓰임새가 적잖다.

 

그러나 극성(極盛)은 쇠락(衰落)을 내비치는 조짐이다. 무르익어 흐드러질 정도의 단계를 넘어서면 문드러지다가 썩는다. 글자는 그런 뜻도 품는다. 바둑의 한 별칭인 ‘난가(爛柯)’가 그렇다. ‘도끼자루[柯] 썩는데도[爛] 그 재미에 몰두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썩어 문드러진다는 뜻의 부란(腐爛), 궤란(潰爛) 등의 단어도 뒤를 잇는다.

 

이 글자는 요즘 중국의 사회현상을 대변한다. ‘난미(爛尾)’라는 단어로서 말이다. ‘제대로 끝내지 않아 썩어 문드러지다’의 뜻이다. 짓다가 만 아파트를 일컬을 때 흔히 사용한다. 아울러 관료의 부패, 은행의 부실 등 총체적인 사회적 난맥도 지칭한다.

 

짓다가 만 아파트에 돈이 물린 매입자들이 단체로 주택담보 은행 대출금 상환 거부에 나섰고, 은행의 부실을 우려한 예금자들은 예금 인출에 나섰으나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 그에 맞물려 지방정부의 재정 파탄 가능성도 입에 오른다.

 

지난 40여 년의 개혁·개방으로 왕성한 분위기를 보였던 중국이다. 그러나 부패와 탐욕, 자만 등으로 구조적인 부실에 빠졌다. 무르익어 흐드러지다가 급기야 썩어 문드러지는 꼴이다. 찬란과 현란이 어느새 부란과 궤란으로 바뀌었다. 한자 ‘란(爛)’으로 읽는 요즘 중국이다.

 

[202] 통치의 ‘질서’

 

 ‘작(爵)’이라는 글자는 본래 복잡하며 우아하게 만든 청동(靑銅) 술잔의 지칭이다. 그런 여러 술잔을 공적 많은 사람에게 내려주면서 생긴 단어가 작위(爵位)다. 과거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다섯 등급을 나눠 부여하던 최고위 벼슬 뒤에 붙었던 글자다.

 

‘질서(秩序)’라는 단어도 흐름이 그렇다. 지금은 순서나 차례 등을 지칭하지만 본래 출발점에서는 벼슬의 높낮이[序]에 따라 곡식[秩]으로 지급하던 봉록(俸祿)을 가리켰다. 따라서 관질(官秩)은 공무원의 서열인 관등(官等), 질미(秩米)는 곧 그들이 받는 봉급(俸給)을 뜻한다. 흔히 녹봉(祿俸)으로 통칭했던 옛 공무원의 급여는 봉질(俸秩), 녹질(祿秩)이라는 단어로도 적는다.

 

또한 대개는 달을 기준으로 지급하는 까닭에 월급(月給), 월봉(月俸), 월전(月錢), 월향(月餉) 등으로도 부른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생활의 필수품을 땔감, 쌀, 기름, 소금[柴米油鹽]으로 묶는다. 거기다가 장(醬)과 초(醋), 차(茶)를 덧붙여 ‘생활에 필요한 일곱 가지 물건(開門七件事)’으로 치부한다. 그 맥락에서 중국인이 ‘급여’를 통칭하며 쓰는 말이 ‘신수(薪水)’다. 본래는 땔감을 구하고, 물을 길어오는 일에서 유래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인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때 일찌감치 등장해 오늘날까지 어엿하게 쓰이는 말이다.

 

그 급여를 줄이는 일이 ‘감신(減薪)’인데, 요즘 해외 중국어 매체들이 자주 언급한다. 중국 여러 지방 공무원들의 급여 감축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다. 절반에 가까운 급여를 줄이거나, 아예 지급을 미루는 곳도 나오는 모양이다. 지방재정의 파탄을 암시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급여를 제때 주지 못하면 말 그대로의 ‘질서’가 무너지는 법이다. 공산당 통치의 근간인 지방 공무원 체계를 뒤흔들지 모를 위협이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203] 도마에 오른 고깃덩이

 

 우리는 보통 ‘도마’라고 풀이하지만 본래는 제기(祭器)였던 물건이 있다. ‘조(俎)’라는 글자로 적는 기물(器物)이다. 제사를 지낼 때 편평한 윗면에 고기를 올려놓도록 한 그릇이다. 나중에는 칼질할 때 밑에 받치는 ‘도마’의 뜻을 얻기도 했다.

 

그 위에 올린 어육(魚肉)을 ‘조상육(俎上肉)’으로 부른다. 제사상 그릇에 오른 희생(犧牲), 도마에 놓인 물고기나 가축의 신세를 일컫는다. 속뜻은 ‘어쩔 수 없이 남에게 휘둘리는 상황’이다. 자칫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하는 처지다.

 

흐름이 비슷한 성어가 많다. 우선 연못에 갇힌 물고기를 지중어(池中魚)라고 부른다. 작은 새집 속에서 지내는 새는 농중조(籠中鳥)다. 둘을 한데 묶으면 지어롱조(池魚籠鳥)다. 인신의 자유를 남에게 구속당한 사람을 일컫는다.

 

항아리 속의 자라도 마찬가지다. 한자로는 옹중별(甕中鼈)로 흔히 적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아먹혀야 할 운명인 존재를 가리킨다. 주머니에 있는 물건이라는 뜻의 ‘낭중물(囊中物)’도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이다.

 

당하는 쪽은 속절없이 남의 먹거리 등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결과를 이끈 행위자는 상황을 마음껏 쥐락펴락하려는 ‘장악(掌握)’, 대상을 제 의도에 따라 묶으려는 ‘제인(制人)’으로 보는 듯한 언어다.

 

달리 이르자면 싸움을 다루는 병법(兵法)의 시선이자 사유다. 길고 모질게 이어온 전쟁의 역사에서 중국인들이 키운 사고의 뚜렷한 패턴이다. 그런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드센 대외 확장 정책을 펼친 결과가 요즘 나타난다.

 

중국의 자금을 받은 여러 나라가 중국에 꼼짝 못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소식이 잇따른다. 도마 위 어육, 연못 물고기, 주머니 속 물건 등의 신세란다. 중국의 노련한 속셈에 말려든 결과다. 그러나 누구를 먼저 탓해야 할까.

 

[204] 중국 진면목

▲/일러스트=박상훈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인 ‘서유기(西遊記)’를 읽을 때 개인적으로 눈에 가장 많이 걸리던 글자는 ‘변(變)’이다. 주인공 손오공(孫悟空)이 서역으로 나아가다 마주친 요괴(妖怪)들을 물리칠 때 늘 외치던 글자다.

더 강한 존재로 변신해 상대인 요괴를 제압하고자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글자다. 아울러 손오공은 무궁무진한 변신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능력을 ‘72변’으로 부르고, 일행인 저팔계(豬八戒)는 ‘36변’으로 적는다. 요괴들 또한 변신술의 쟁쟁한 실력자들이다.

 

책에 숱하게 등장하는 이 ‘변’이라는 글자는 풍파(風波) 잦았던 세상의 수많은 변수(變數)를 잘 헤아려야만 했던 중국인의 심정적 맥락을 담았을 듯하다. 아울러 상대를 누르고자 눈속임을 포함해 기만(欺瞞)이 주조(主調)를 이뤘던 전통적 중국 병법(兵法) 사고의 반영일 수 있다.

 

따라서 속임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 대상의 ‘본래 모습’에 주목하는 습속 또한 중국에서는 발달했다. 자주 쓰이는 말은 우선 진면목(眞面目)이다. 본래 불가(佛家)의 화두였으나 이제는 ‘꾸며지지 않은 진짜’의 뜻이다. 유명한 홍콩 누아르 ‘영웅본색(英雄本色)’의 ‘본색’ 또한 마찬가지의 흐름이다.

 

무언가로 가렸다가 결국 들통이 나는 상황을 일컫는 말도 풍부하다. 성어 원형필로(原形畢露)는 모습이 다 까발려진 경우다. 물이 말라 바위가 드러난다는 뜻의 수락석출(水落石出)은 숨겼던 진상(眞相)이 죄다 밝혀질 때다. ‘마각을 드러내다(露出馬脚)’도 흉측한 의도와 실체가 알려지는 상황을 지칭한다.

 

개혁·개방으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했던 중국이다. 그러나 이제는 물이 말라 바위가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을 맞았기 때문일까. 힘을 쌓은 중국의 ‘원형 회복’ 흐름이 거세다. 대만을 군사력으로 마구 밀어붙이는 중국의 요즘 얼굴이 그 진면목일까 싶어 세계의 관심이 아주 뜨겁다.

 

[205] 속임수의 자업자득

 

 상대를 속이고 또 속여서라도 꼭 이겨야 한다는 싸움 심리는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에 빛을 발했다. 우선 2500년 전의 여러 기록이 그 점을 말해준다. “너도 속이고 나도 속인다(爾虞我詐)”는 ‘좌전(左傳)’ 유래의 성어가 대표적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손무(孫武)는 일찍이 “싸움은 곧 속임수(兵者, 詭道也)”라고 단정했다. 뒤를 이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법가(法家) 한비자(韓非子)도 “싸움에서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다(兵不厭詐)”고 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헤아림’에 능할 수밖에 없다. ‘계산(計算)’이라는 속성이다. 마음속으로 헤아리는 일이어서 심계(心計), 심산(心算)으로도 부른다. 계략(計略), 책략(策略), 모략(謀略), 모계(謀計) 같은 표현도 있다.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싸움에서 살아남아 이기려면 피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문화의 큰 근간으로 그를 끝없이 키워왔다면 생각해 볼 문제다. 중국은 그런 병법의 오랜 전통을 삶 속으로 고스란히 이어온 자취가 뚜렷하다.

 

‘가짜’와 ‘짝퉁’은 아직 이어지고, 돈 없고 힘 약한 사람은 ‘(구덩이) 빠뜨리기, (눈) 가리기, 협박하기, 속이기[坑蒙拐騙]’에 늘 당한다. 병법의 ‘헤아리기 전통’을 남 속이는 ‘못된 꾀’의 형편없는 수준으로 줄곧 내려앉힌 결과다.

그래서 요즘 중국 인터넷에선 ‘속지 않기 지침(防騙指南)’이 성행한다. ‘양로(養老) 사기(詐欺)’부터 ‘대학 신입생 사기’ 등 수많은 속임수가 횡행하자 나온 대응법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다 사기가 벌어지지만 중국은 그 점에서 아주 화려하다.

 

그러나 남들로 하여금 ‘뭘 또 속이려고…’ 하는 의구심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 점은 큰 부담이다. 긴장감 넘치는 병법 전통을 어둡고 불길한 사술(詐術)로 연역(演繹)한 문명 퇴행의 자업자득이다.

 

[206] 심상찮은 시절

 

 심상(尋常)이라는 단어는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본래는 길이나 면적을 나타내는 글자 둘의 합성이다. 그 길이나 면적 등이 짧거나 좁아서 이 단어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범상(凡常), 평상(平常) 등의 단어가 같은 새김이다. 이들 단어 뒤의 ‘상’이라는 글자는 쓰임새가 많다. 바지가 달리 없던 시절 늘 입었던 치마[裙]를 가리켰다. 그 모습 등에 큰 변화가 없어 결국 ‘변치 않는 무엇’을 지칭했다는 설명이 있다. 상도(常道), 상례(常例) 등의 말로 잘 쓰인다.

 

큰 변화가 닥칠 때 흔히 쓰는 단어가 이상(異常), 비상(非常), 수상(殊常)이다. ‘수상’은 반공(反共)의 기운이 왕성하던 1970년대 무렵 “수상한 사람 신고하자”의 구호로 귀에 익다. ‘수상쩍다’는 말도 곧잘 쓴다. 기상(氣像)의 영역에서 큰 변화가 따르면 흔히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적는다. 옛 사람들은 이를 재이(災異), 재앙(災殃)이라고 표현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즉 ‘하늘이 내린 재난’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맥락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천견(天譴)이다. 풀이하자면 ‘하늘[天]의 꾸중[譴]’이다.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해서 천벌(天罰), 또는 천주(天誅)라고도 적는다. 이런 재난이 닥치면 땅 위의 최고 권력자는 ‘자아 반성’을 한다. 제왕(帝王)이 내는 반성문이 ‘죄기소(罪己詔)’다. ‘스스로를[己] 책망하는[罪] 공고[詔]’의 뜻이다.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했던 최고 권력의 뉘우침이다.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성찰(省察)과 점검(點檢), 개선(改善)의 의미가 담겼다.

 

미국과의 갈등, 경기의 하강, 지방 재정 고갈 위기에 접어든 중국에 세계적인 가뭄과 고온 현상까지 겹쳤다. 그 피해가 ‘심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모양이다. 이 ‘비상’의 시기에 중국의 집권 공산당은 어떤 반성문을 쓸지 궁금하다.

 

[207] 다시 쌓는 만리장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쌓는 담의 대표 지칭은 성(城)이다. 글자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 흙을 가리키는 ‘토(土)’와 무기로써 무언가를 지켜내는 ‘성(成)’의 합성이다. 무기를 쥐고 싸우는 행위에 흙이 따랐다. 전쟁을 상정한 건축이라는 얘기다.

 

중국은 이런 담과 울타리의 문명을 오래 이어왔다. 그 땅에 들어섰던 왕조는 줄기차게 ‘성’을 쌓았다. 그 종합적 상징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줄여서 장성(長城)이라고도 하는 이 담에 관한 규정은 사실 여럿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베이징(北京) 인근 만리장성은 약 600년 전인 명대(明代)부터 지어졌다. 당초 6300㎞라고 알려졌으나 중국 당국은 2009년 그 길이를 8800㎞로 고쳤다. 그에 앞서 중국이 쌓았던 장성의 모든 길이까지 합치면 2만1196㎞에 이른다.

 

따라서 중국 장성은 ‘만리[3900㎞]’가 아니라 ‘5만4000리’라 불러야 옳다. 그러나 이 ‘축성(築城)의 전통’은 근대 이후 줄곧 가치를 의심받았다. 자기 만족, 정체와 폐쇄에 따른 무능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뒤를 따랐다.

 

최근 중국이 관영 사회과학원 산하 연구소의 역사 해석을 통해 과거 왕조 시대의 폐관(閉關)과 쇄국(鎖國)을 옹호했다. “유럽 중심주의로 볼 일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관문 출입을 스스로 제한한 것[自主限關]”이라며 기존 해석을 번복했다.

 

‘폐관’과 ‘쇄국’은 성의 출입문을 닫거나, 성으로 둘러싼 국가를 외부와 격리하겠다는 뜻의 단어다. 따라서 이는 개혁·개방을 지양하고 내부 결속을 우선시하겠다는 새 선언과 같다. 공산당이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관례를 볼 때 그렇다.

 

개혁·개방으로 ‘광장(廣場)’에 나서는가 싶던 중국이 어느새 문을 닫고 ‘밀실(密室)’에 또 숨어들려는 형국이다. 굳게 닫은 문, 높게 쌓은 담 안에서 또 어떤 변수를 만들까. 세계가 지켜보는 중국의 동향이다.

 

[208] 깊어지는 중국의 가을

/일러스트=박상훈

 

가을[秋]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색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전통 관념에 따라 가을의 색조를 말할 때는 보통 하얀색, 즉 백(白)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인위적 가름에 따르자면 그렇다. 그래서 하얀 가을, 소추(素秋)라고도 한다. 가을은 따스함이 자리를 비키고 쌀쌀함이 찾아오는 큰 길목이다. 따라서 만물이 움을 틔우는 봄과 곧잘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맞이했다가 곧 보내는 한 해나 사람의 나이를 춘추(春秋)라고도 적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가을의 형용은 풍부하다. 먼저 방위(方位)로는 서쪽[西]이다. 서늘한 기운이 머문다고 해서 쇠[金]로 여긴다. 소리로는 중국 옛 오음(五音) 중 쓸쓸한 음조인 상(商)으로 적는다. 따라서 ‘백(白)’ ‘소(素)’ ‘금(金)’ ‘상(商)’ 등은 가을의 한자들이다. 그래서 가을을 금추(金秋), 금상(金商), 금소(金素), 상추(商秋), 상소(商素), 백상(白商), 소상(素商) 등으로도 적는다. 한 계절은 보통 맹중계(孟仲季)로 나눈다. 그에 따라 초가을은 맹추(孟秋)다. 달리 수추(首秋)와 상추(上秋)로도 부른다. 가을의 복판이 중추(仲秋)다. 다른 표현은 중상(仲商)이다. 추위를 부르는 늦가을은 계추(季秋), 그 별칭은 모추(暮秋)나 말추(末秋)다. 농사를 지어 키운 것을 거둔다는 뜻에서 가을은 수성(收成)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봄의 기운은 식생이 움을 틔운다고 해서 발생(發生)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해 가을의 기운을 대표하는 말은 숙살(肅殺)이다. 쌀쌀함이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인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많은 것이 성장했던 개혁·개방을 ‘발생’의 봄에 비유하자면, 이제 그 흐름을 되돌린 요즘은 완연한 ‘숙살’의 가을이다. ‘쇄국(鎖國)’에 이어 ‘계급투쟁 유효’ 주장도 나온다. 바야흐로 깊어지는 중국의 가을이다.

 
 

[209] 거국적 동원체제의 부활

 

국가 전역을 일컬을 때 요즘은 보통 전국(全國)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옛사람들의 표현은 그보다 더 다양했다. 성(城)으로 둘러싼 정치 권력의 소재지[朝]와 그 바깥 지역[野]을 통틀어 지칭했던 조야(朝野)가 우선 대표적이다.

 

경향(京鄕)이라는 말도 그렇다. 통치 권력이 자리를 튼 서울[京]과 시골[鄕]을 병렬해 ‘전국 모든 지역’을 가리킨다. 전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때론 경향각지(京鄕各地)로 적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썼던 말이다.

 

방방곡곡(坊坊曲曲)이라는 말도 예전에는 쓰임새가 많았다. 성 내부 민간 거주 지역 구획 단위였던 방(坊)과 그보다 외진 곳, 또는 작은 골목을 가리켰던 곡(曲)의 결합이다. ‘사람 사는 모든 곳’이라는 뜻이다.

 

거국(擧國)이라는 단어도 그와 같은 흐름이다. 앞의 거(擧)라는 글자 초기 꼴은 여러 사람의 손이 뭔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다. 그로써 ‘들다’라는 새김을 먼저 얻었지만, 여럿의 손이 모여 있어 ‘모두’라는 의미도 획득했다.

 

그런 맥락의 단어로는 거조(擧朝)가 있다. ‘조정(朝廷)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거세(擧世)라는 말은 ‘온 세상’을 뜻한다. ‘거국’이나 ‘거조’는 국가나 왕조의 힘을 모두 동원할 때 자주 쓰는 단어다. “거국적으로 대처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중국 집권 공산당이 그런 ‘거국’의 수사를 다시 꺼냈다. 자신을 압박하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형거국체제(新型擧國體制)’라는 방침을 얼마 전 확정해 발표했다. 핵심 산업기술 영역에서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나서겠다는 선언이다.

 

조야의 힘, 경향의 역량, 방방곡곡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미국에 총력전을 펼치겠다는 뜻이다.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와 결별도 감수할 분위기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거국적 동원체제의 그늘로 회귀하는 중국의 거동(擧動)이 심상찮다. 

 
 

[210] 대만해협에 부는 바람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듣기에 좋으며 정겹기까지 하다. 우리 기상청에서 분류하는 각종 바람의 이름도 쉽고 편한 표현이어서 역시 듣고 부르기에 좋다.

 

바람이 없는 상태를 고요, 가벼운 상태를 실바람, 그보다 조금 강하면 남실바람으로 적는다. 이어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으로 차츰 급을 높인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무풍(無風), 연풍(軟風), 경풍(輕風), 미풍(微風), 화풍(和風), 청풍(淸風), 강풍(强風)으로 적는다.

 

이 정도의 바람이면 우리가 생활하는 데 달리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센바람(near gale), 큰바람(gale) 등급으로 들어서면 사람이 걷기조차 곤란해지거나 아예 걸을 수가 없을 정도에 이른다. 중국의 표기는 질풍(疾風)과 대풍(大風)이다.

 

이보다 더 급수가 높아지면 재난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큰센바람(strong gale)은 중국에서 ‘매서운 바람’이라는 뜻의 열풍(烈風)으로 적는다. 건축물에도 다소 손해가 미치는 정도다. 노대바람은 한자로 광풍(狂風)이라고 적는다. 일부 건물이 위험해지고, 약한 나무는 뿌리째 뽑히는 정도다.

 

왕바람(storm)은 중국에서 폭풍(暴風)으로 표기한다. 그 다음은 싹쓸바람이라고 해서 허리케인과 태풍(颱風)급의 바람이다. 더 높은 단계도 있지만, 그들을 표현할 때는 강(强)이나 초강(超强)이라는 수식을 허리케인과 태풍 앞에 붙이는 형식이다.

 

요즘 들어 중국이 무력 침공 가능성을 자주 내비쳤던 대만해협에 긴장감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급기야 ‘중국의 대만 침공 때 무력 개입’을 공식 확인하면서 더욱 그렇다. 센바람, 큰바람 정도가 이제는 노대바람과 왕바람으로까지 거세졌다. 잠잠했던 대만해협에 이제는 격랑(激浪)이 일렁인다.

 

[211] 눈보라 치는 산신각

 

유명 소설 ‘수호전(水滸傳)’의 전반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물이 임충(林冲)이다. 80만 병력 금위군(禁衛軍)의 우두머리 교관[敎頭]이던 그는 아내가 고위 관리의 아들에게 겁탈당한 뒤 끝내 자결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그 관리의 음모에 말렸던 임충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관리는 시골에서 마구간과 건초를 돌보던 그의 목숨까지 넘본다. 몇 명의 킬러들을 유배지로 보내 그의 숙소에 불을 질러 죽이려 한다. 마침 임충은 술을 마시러 외출한다.

 

돌아와 숙소가 눈에 무너진 모습을 보자 임충은 조금 떨어진 곳의 산신각(山神閣)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그때 킬러들이 숙소에 불을 질렀고, 임충은 방화 뒤 산신각으로 온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울화통이 터진 임충은 그들을 모두 살해한다.

 

소설 제 10회 ‘임충의 눈보라 몰아치는 산신각(林敎頭風雪山神廟)’이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눈 흩날리는 밤, 불타오르는 집, 번뜩이는 칼날, 파고드는 음모(陰謀), 복수와 살해 등의 요소가 긴장감 높게 펼쳐져 소설의 백미(白眉)로도 꼽힌다.

 

임충은 그로써 끝내 몸담고자 했던 왕법(王法)을 버리고 반란자들이 모인 양산박(梁山泊)으로 향한다. 정부의 핍박이 민간을 결국 반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는 중국의 사회 현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중국 정치권 분위기는 늘 눈이 휘몰아치는 밤의 그 ‘산신각’을 닮는다. 권력 교체기마다 흑막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음모 때문이다. 엊그제는 공식 석상에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최고 권력자의 동정을 두고 쿠데타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그에 비해 근거 없는 말들이 소란만을 거듭 부르는 우리 정치는 이전 개그 코너 ‘봉숭아 학당’과 비슷하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나을까. 밀려오는 경제 불안의 커다란 위기를 각자 어떻게 헤쳐 가는지 두고보면 알 일이다.

 

[212] 황제가 돌아왔다

/일러스트=박상훈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이런 가사로 큰 인기를 얻은 1960년대의 ‘회전의자’라는 우리 가요가 있다. 이른바 ‘자리’의 높고 낮음에 따른 세상 행태를 풍자한 노래다.

 

그래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것이 세상 최고 권력자 자리다. 한자 세계에서는 그 자리 또한 일반적 경우처럼 대개 ‘위(位)’라고 적는다. 그러나 권력자가 마침내 정상에 오를 때의 즉위(卽位), 천위(踐位) 등 표현은 일반인이 감히 쓸 수 없다.

 

그런 흐름의 단어가 제법 많다. 임금이 자리에 있는 경우는 재위(在位)다. 선대의 그 자리를 새 제왕이 이으면 계위(繼位) 또는 사위(嗣位)라고 한다. 그 반대로 후대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이 선위(禪位), 손위(遜位)다.

 

권력이 새로 탄생할 때는 세간의 관심이 특히 뜨거워진다. 관련 단어는 그래서 더 많다. 우선 ‘나라의 근간[根基]에 올라서다’라는 뜻의 등기(登基)다. 세상 가장 높은 곳[極]에 오른다고 해서 등극(登極), 어극(御極)으로도 적는다.

 

임금이 제사 등을 치를 때 서야 하는 섬돌[阼]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우선 즉조(卽阼)가 있다. 혹은 그곳을 밟고 있다고 해서 천조(踐阼) 또는 이조(莅阼)라고도 적었다. 반대로 최고 권력의 자리를 뺏는 일은 찬위(簒位)다.

 

시진핑(習近平) 현 공산당 총서기가 이달 연임에 성공할 모양이다. 아울러 권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듯하다. 따라서 이달 공산당 대회가 바로 ‘즉위’ ‘등극’ 이벤트에 해당할 분위기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처음인 권력의 초강력 집중이다.

 

그러나 “출발점의 아주 미세한 착오가 나중에는 천 리 넘는 오차로 나타난다(差之毫釐 謬以千里)”는 경구가 있다. 권력이 세질수록 오류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고 들어도 좋을 말이다. 중국의 변화가 또 큰 굽이를 돌아서고 있다.

 

[213] 중국의 새 ‘양반’

▲일러스트=박상훈

 

왕을 중심으로 양옆에 길게 늘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쪽에는 문관(文官)의 문반(文班), 서쪽에는 무관(武官)의 무반(武班)이다. 이 둘을 합쳐 부르는 말이 문무양반(文武兩班)이다. 줄여서는 그저 ‘양반’이라고 불렀던 과거 조선 시대 상류층이다.

 

그 ‘반(班)’이라는 글자는 본래 옥돌 두 개 사이에 칼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다. 옥을 칼로 쪼개는 행위의 지칭이었다는 설명이 따른다. 그로써 이 글자는 ‘나누다’의 동작을 우선 뜻했고, 나중에는 그 결과로 나뉜 그룹을 일컫는 말로도 발전했다고 한다.

 

‘양반’은 엄격한 계급과 서열의 가혹한 차별 의식을 품은 말이다. 관련 단어가 우선은 반상(班常)이다. 문무양반에 드는 신분의 양반[班]과 그에 끼지 못한 일반인[常]을 차별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다. “상X 주제에 어딜 감히…”라는 대사가 요즘도 TV 드라마에 곧잘 등장한다.

 

비슷한 맥락으로는 그 ‘서열’을 직접 가리키는 반열(班列), 반차(班次) 등이 있다. 때로는 왕의 동쪽에 선다고 해서 문관 집단을 동반(東班), 서쪽에 서는 무관을 서반(西班)으로도 적었다. 학반(鶴班)과 호반(虎班)은 그 문무양반의 또 다른 별칭이다. 국가를 이끄는 정치권력의 가장 높은 서열을 한때 수반(首班)이라고 곧잘 적었다.

이런 예제(禮制)를 모두 만들었던 중국에서는 요즘도 정치권력의 가장 높은 서열에 있는 사람들을 영도반자(領導班子)라고 적는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 또는 그 상위에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 등 중국 최고 서열의 권력 그룹이다.

 

이달에 개막하는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중국의 새 권력자들이 곧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인선(人選)에 이어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주요 방침도 확정할 모양이다. 공산당 최고위 권력 집단을 이룰 새 ‘양반’들이 과연 어떤 면면일지 세계가 큰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보고 있다.

 

[214] 바람이 휩쓸고 간 省察

/일러스트=김성규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람이 일고 물결이 넘쳤다. 지난 16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20차 당 대회 이야기다. 풍랑(風浪) 또는 풍파(風波) 등을 곧 마주칠 ‘위기’로 읽는 그 오랜 중국인의 습성은 대회 시작과 함께 이어진 ‘정치보고(政治報告)’에서 곧장 주조(主調)를 이뤘다. 일찌감치 소개했듯 중국인의 관념 속에서 ‘바람과 물결’은 위기 또는 그 전조(前兆)를 가리킬 때가 많다. 전쟁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벌어지고 재난이 다시 그 뒤를 잇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다져진 뿌리 깊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대회에서 정치보고를 낭독한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먼저 내세우며 “매우 어려운 사명이라 높은 바람에 거센 물결[風高浪急], 심지어는 어마어마한 격랑[驚濤駭浪]을 견뎌낼 준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강의 추세에 접어든 경제, 미국의 집요한 대중(對中) 제재와 압박, 서방세계와의 소원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 등을 다 염두에 둔 발언이다. ‘바람과 물결’은 그런 국내외의 여러 환경을 위협하는 요소로 다시 또 각광을 받았다.

 

그 위기를 넘어서는 방도의 하나는 바람에 올라타 격랑을 헤쳐 가는 일[乘風破浪]이다. 기상 조건이 스스로 좋아져서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가라앉는 상태[風平浪靜]를 맞이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이번 정치보고를 보건대, 중국 집권 공산당은 그 위기의 요소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데 힘을 집중할 듯하다.

 

늘 그렇듯 야무진 현실 인식과 위기의식으로 무장한 전략가의 풍모다. 그러나 요즘 들어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숱한 위기의 상황은 과연 누가 불렀을까. 지나친 대외 확장 정책이 자초한 결과는 아니었나. 그렇다면 공산당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省察)의 힘을 잃은 듯하다. 이번 당 대회에서 또 두드러진, 공산당의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215] 心腹이 부르는 우환

 심복(心腹)이나 복심(腹心)은 다 마찬가지 뜻이다. 가슴[心]과 배[腹]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에 해당한다. 그로써 ‘믿을 만한 주변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발전했다. 우리는 보통 측근(側近), 중국에서는 흔히 친신(親信)이라 잘 적는다.

 

막료(幕僚)라는 단어에서 ‘막’은 일반 텐트가 아니다. 본래 전쟁터에 나선 장수가 기거하는 천막을 일컬었다. 그 안팎을 드나들며 온갖 일을 상의하는 사람들이 ‘막료’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니 장수에게 막료는 측근 중의 측근이다.

 

/일러스트=박상훈

 

식객(食客)의 맥락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거느리다가 필요할 때 그들의 힘을 빌리는 사례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이래 숱한 권력자들이 제 휘하에 참모들을 키우고 이용했던 전통은 현대 중국에까지 면면히 이어진다.

 

그래서 요즘 중국의 주요 권력자들 또한 막강한 측근 그룹을 이끈다. 일종의 비서(祕書)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이다. 정치·경제적 이해를 치밀하게 조율하는 측근들이다. 이들이 성장해 나름대로 권력을 쥐면 비서당(祕書黨) 또는 비서방(祕書幫)이라고 한다.

 

권력자에게 기대 살았던 이들은 문제를 일으킬 때가 많다. 따라서 곱지 않은 호칭도 많이 따른다. 개의 뒷다리라는 뜻의 구퇴(狗腿), 남의 앞잡이라는 의미의 주구(走狗) 등이다. 거세한 남성의 대명사인 태감(太監)도 그 하나다.

 

최근 3연임(連任)을 확정한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이 권력 주변을 그의 비서 또는 측근 그룹으로 채웠다. 모든 권력을 시진핑 총서기가 한 손에 움켜쥔 모습이다. 그로써 더 과감한 집중과 선택을 할 모양이다.

 

그러나 ‘심복’으로 주변을 감싸면 합리적 의사 조정은 불가능하다. 내부 깊은 곳에서 병증이 도져 매우 위험해진다. 그 경우를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고 한다. 그 정도쯤이야 중국 공산당이 충분히 헤아렸겠지….

 

[216] 君臣 관계의 부활

▲/일러스트=양진경

 

퍽 두드러지게 사람의 눈[目]을 표현한 한자가 있다. 신하(臣下), 대신(大臣) 등 단어의 ‘신(臣)’이다. 이 글자의 본래 꼴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 눈이 위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래서 초기 뜻은 ‘노예’였다고 추정한다.

 

그에 비해 ‘군(君)’은 원래 제례(祭禮) 속 제사장 정도의 존재를 지칭했던 글자다. 상고시대에서는 제사를 진행하는 제사장이 사실상의 권력자였다. 이런 연유로 글자는 마침내 ‘임금’ ‘군왕(君王)’ 등의 의미를 획득한다.

 

왕조시대 권력자와 그 추종자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 위의 둘을 합친 군신(君臣)이다. 여러 설명이 있지만 본질은 주종(主從), 즉 주인과 하인의 사이다. 엄격해서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위계(位階)가 그사이에 존재한다.

 

위가 명령하면 아래는 꼭 따라야 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이 가장 큰 틀이다. 신하 중에는 현명한 현신(賢臣), 훌륭한 양신(良臣), 충성스러운 충신(忠臣) 등도 분명히 있었으나 대개는 노비처럼 주인 앞에 늘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야 했던 신세다.

 

권력자의 집안 또는 내부의 사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그룹인 가신(家臣), 내신(內臣), 정신(廷臣) 등은 특히 그렇다. 이들에게 따르는 흔한 성어가 노안비슬(奴顔婢膝)이다. 노비의 얼굴, 낮게 살살 기는 비굴함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번에 새로 출범한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는 황제를 방불케 하는 1인 권력의 주변을 6명의 비서나 참모 출신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옛 ‘군신’과 ‘주종’ 관계의 부활이다. 따라서 지도부 내의 견제와 균형은 더 이상 어려울 듯하다.

 

옛것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은 늘 진지하다. 그래서 문화 근저에는 그를 품고 닮으려는 회고(懷古)와 의고(擬古)의 취향이 강하다. 공산당은 급기야 옛 권력 질서의 복고(復古)까지 마쳤다. 새 황제와 그 총신(寵臣)들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217] 가는 길이 다른 사람

 

길을 나서는 중국인은 곧잘 긴장한다. 갈리는 길인 기로(岐路)에서는 늘 생각에 잠긴다. 좁아지는 길인 애로(隘路)에서는 몸을 뺀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를 피하고, 온전히 살아 돌아가는 길인 활로(活路)를 항상 갈구한다.

 

길에서 만나는 타인은 두렵기조차 하다. 밭두렁 등 작은 길[陌]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生]를 향한 경계감은 ‘맥생(陌生)’으로 적어 아예 ‘생소함’으로 푼다. 그에 비해 제가 잘 아는 사람, ‘숙인(熟人)’ 그룹은 중국인의 사회생활 네트워크인 ‘관시(關係·관계)’의 원천이다.

 

옛 중국인들이 ‘인생의 4대 기쁨(四大喜事)’ 중 “먼 타향에서 고향 친구 만나기(他鄕遇故知)”를 둘째로 꼽은 정서적 토대다. 일찍 소개한 내용이다. 생사(生死)를 보장할 수 없는 멀고 긴 여행길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숙인’은 중국인에게 그만큼 중요했다.

 

그래서 같이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중시(重視)는 대단하다. 한 배에 올라타 함께 거센 물을 건넌다는 뜻의 ‘동주공제(同舟共濟)’ 식 성어는 풍성하다. 마음과 힘을 한데 모은다는 동심협력(同心協力), 뜻과 길이 일치하는 지동도합(志同道合) 등의 강조가 각별하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나와 다른 남, 이기(異己)에 대한 지독한 배척을 낳을 수도 있어 문제다. “같은 무리들과는 한데 뭉치고, 나와 다른 남은 없애자”는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섬뜩한 사고와 관념이 태동한 인문적 배경이기도 하다.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의 권력 앞에 당내 유력한 파벌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이 거의 궤멸(潰滅)했다. 이로써 견제와 균형은 사라지고 전제(專制)의 틀만 더욱 강고해질 전망이다. “가는 길 다르면 함께 도모치 말라(道不同不相爲謀)”던 공자(孔子) 가르침을 무척 편협하게 연역한 중국이다. 그나저나, 우리는 그런 중국과 먼 길을 함께 갈 수 있을까.

 

[218] ‘황제 스트레스’

▲일러스트=박상훈

 

‘황제(皇帝)의 귀환’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한자 세계에서는 그 현상을 ‘복벽(復辟)’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권력을 잃었던 임금이 제자리를 찾는 일, 또는 왕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주(君主) 제도의 부활 등을 가리킨다.

 

단어 ‘복벽’의 풀이가 궁금해진다. 앞의 ‘복(復)’은 ‘되찾다’의 뜻이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뒤 글자 ‘벽(辟)’은 제법 낯설다. 초기 꼴에서 이 글자 왼쪽 부분[𡰪]은 꿇어앉은 사람 형상이다. 오른쪽 부분[辛]은 칼 모습이다.

 

초기 한자의 많은 글자처럼 이 ‘벽’ 또한 무시무시하다. 칼 등의 무기로 사람의 신체를 자르는 행위였다는 설명이다. 이어 이 글자는 형구(刑具)를 사용해 사람을 처단하는 일, 더 나아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력자인 임금의 뜻을 얻었다.

 

중국 역사 속에서는 대개 권력을 잃었던 제왕이 그 자리를 되찾는 복위(復位) 과정이나 결과를 설명할 때 ‘복벽’을 자주 썼다. 또한 쿠데타 등 정변(政變)을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일도 곧잘 지칭했다.

 

민간의 심성에서 왕조 권력의 통치자인 ‘황제’는 멀리하고 싶은 대상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山高皇帝遠)”는 속언은 엄격하고 강고한 황제의 권력 자장(磁場)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염원도 담고 있다.

 

최근 진단 기준치를 정상화했더니 중국인 고혈압 환자가 전체 인구 3명 중 한 명꼴인 5억명(36%)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왔다. 같은 진단 기준의 한국 4명당 한 명(26%)에 비춰볼 때 퍽 높은 수치다.

 

마침 공산당 최고위 권력은 옛 황제의 그 틀을 더 닮아가고 있다.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해지면서 고혈압의 큰 원인인 중국인 스트레스는 더욱 높아질지 모른다. 봉쇄와 격리 일변도의 ‘제로 코로나’ 방역이 펼쳐지면서 요즘 그 삶 속 피로감은 부쩍 커지는 듯하다.

 

[219] 다시 무릎 꿇는 중국인

▲/일러스트=김성규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하던 장소 바닥에는 좀 특별한 곳이 있었다. 두드리면 소리가 잘 나는 부분이다. 궁중에 머물며 일하는 내시(內侍)들은 ‘뒷돈’ 준 고관을 이곳으로 이끈다. 이어 황제에게 무릎 꿇은 그 고관들의 머리 찧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고 한다.

 

‘무릎 꿇고 머리 찧는’ 이 인사법이 삼궤구고(三跪九叩)다. 청대(淸代) 관원들이 황제에게 행하던 인사다. 세 번 꿇고[跪], 매번 세 차례 머리 찧는[叩] 방식이다. 황제의 충실한 하인, 즉 “노재(奴才)”라며 신하들이 스스로를 낮췄던 청나라 문화 풍토의 인사법이다.

 

본래 무릎 꿇고 자신의 엉덩이를 겹친 발 위에 두고 앉는 궤(跪)는 흔한 예법이었다. 중국에 의자(椅子) 등 입식(立式) 생활 조건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입식 생활이 일상화하면서 무릎 꿇고 절하는 궤배(跪拜) 인사법은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는 ‘하궤(下跪)’다. ‘남에게 무릎 꿇다’가 우선의 뜻이지만 속으로는 ‘잘못 인정’ ‘사죄(謝罪)’, 더 나아가 ‘복종(服從)’ 또는 ‘굴종(屈從)’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중국 민간에서는 “훌륭한 사내는 하늘, 땅, 부모에게만 무릎 꿇는다”는 말도 나왔다.

 

평범한 예법이었던 꿇어앉는 자세가 몽골의 원(元)이나 만주족의 청나라를 거치면서 오욕이나 굴욕 등의 의미를 더 얻었다는 설명이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 건국 직전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인민이 일어섰다(中國人民站起來)”는 선언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중국 당국이 펼치는 강압적인 봉쇄와 격리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항의하던 중국 시민들이 붙잡혀 무릎 꿇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한 여성의 관련 사진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중국인의 기립(起立)을 선언했던 공산당에 의해 중국인이 다시 무릎 꿇는 장면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12.02 

[220]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일러스트=김성규

 

성을 내지 않고 속으로 마음 다잡는 일을 우리는 보통 ‘참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 의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자는 ‘인(忍)’이다. 그러나 그 초기 글자꼴은 참 사납다. 날카로운 칼날[刃]이 사람 심장[心]을 후벼파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고스란히 반영한 단어가 잔인(殘忍)이다. 본래는 창[戈] 두 개가 엇갈려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을 가리켰던 앞 글자 ‘잔’과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의 ‘인’이 합쳐진 단어다. 싸움의 그악함, 심각한 폭력성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뒤의 글자 ‘인’은 살이 잘리는 아픔까지 견뎌야 한다는 뜻을 키우다가 마침내 ‘참다’라는 새김을 더 얻은 모양이다.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 너그럽게 참아주는 용인(容忍), 굳게 견디는 견인(堅忍) 등의 단어로 우리에게 친숙한 글자다.

 

살아가는 환경이 모질수록 참는 일은 많아진다. 전쟁과 재난이 자주 닥쳤던 중국의 인문 환경이 특히 그랬던 듯하다.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교훈이 퍽 발달했다. 속으로 꾹 참는 일은 은인(隱忍), 물러설 줄 아는 일은 인양(忍讓), 욕됨을 이겨내는 일은 인욕(忍辱)으로 적었다.

 

살아가며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를 병법이나 무술 영역의 한 항목인 ‘인공(忍功)’으로 키웠고, 경전(經典)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에서 ‘인경(忍經)’으로도 적었다. 끝없는 인내심으로 대가족의 화목을 이뤘다는 ‘백인당(百忍堂)’의 일화도 꽤 유명하다.

 

잘 참고 견디는 중국인이 이제 일어나 불만과 억울함을 외친다. 강압적인 봉쇄와 격리의 ‘제로 코로나’ 때문이다. 살을 저미는 아픔은 누구라도 끝내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을 가리키며 공자(孔子)가 내뱉은 한마디가 생각난다. “이것을 참는다면, 어떤 일인들 못 참겠는가(是可忍, 孰不可忍).” 요즘 중국인들의 고초(苦楚)를 대변하는 말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