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2-11/ 동아일보
11-01(화) 룰라의 귀환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오시네요.” 2009년 영국 런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오찬장에 들어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당시 브라질 대통령을 보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주변의 정상들에게 던진 소개말이다. 집권 2기 후반부, 전례 없는 경제 성과에 힘입어 룰라의 지지율이 80%를 넘어설 때였다.
▷해외 정상들도 부러워한 록스타급 인기 속에 대통령궁을 떠났던 그의 퇴임 후 추락과 재기 과정은 롤러코스터급이다. ‘세차 작전(Operation Carwash)’으로 불린 검찰의 부패 수사에서 수백억 달러의 뇌물과 돈세탁 혐의가 드러난 그는 2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절차적 문제로 2019년 재판 무효 판정을 이끌어낼 때까지 부패 정치인 딱지를 달고 580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77세 나이에 선거판에 다시 뛰어든 그는 그제 대선에서 브라질의 첫 3선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며 12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브라질의 정권 교체는 라틴 아메리카 ‘핑크 타이드’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 등 7개 주요국 중 6개국이 이미 진보 정권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악화한 빈부 격차와 실업이 좌파 물결을 일으킨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브라질의 경우 ‘열대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심판론도 작용했다. 그의 극우 정권을 받쳐온 농업 자본과 보수 기독교, 군부의 이른바 ‘3B(beef, bible, bullet)’는 힘을 쓰지 못했다.
▷룰라가 완성한 중남미 제2의 ‘핑크 타이드’는 2000년대 초반의 첫 번째 물결과는 많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핑크 타이드’는 저금리 기조 속 경제 붐으로 정부가 부담 없이 재정 지출을 늘리던 시기였다. 반면 지금은 미국발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으로 정책적 여력이 크게 줄어든 데다 팬데믹 여파도 지속 중이다. 사회적 불안과 양극화 심화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좌파의 물결이 과거보다 훨씬 짧고 불안정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룰라는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리지만 집권기 그의 정책은 실용주의를 앞세운 중도에 가까웠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나는 ‘걸어 다니는 변형 동물’이 되고자 한다. 바뀌는 사실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걸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외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 ‘룰라노믹스’에 대한 국민의 향수가 미래 기대치까지 한껏 높여 놓은 시점이다. 룰라가 집권 3기 정책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국부를 키웠던 그의 화려한 과거 성과까지 한순간에 흔들릴지 모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02 한국판 ‘말뫼의 눈물’

스웨덴은 조선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 1885년에 어뢰를 탑재한 잠수정을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업을 주도하던 최남단 항구도시 말뫼는 1970년대 일본, 한국의 조선업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말뫼의 대표 조선소인 코쿰스에 1973년 세워졌던 높이 140m의 골리앗 크레인은 1987년 조선소 파산 후 오랫동안 무용지물로 남아 있다가 2002년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가격은 단돈 1달러였다.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넘어간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이 골리앗 크레인을 해체해 울산행 배에 싣던 날 스웨덴 국영방송은 레퀴엠을 튼 채 중계방송을 했다. 조선업 붕괴로 인한 실업 증가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던 말뫼의 시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름하여 ‘말뫼의 눈물’이다.
▷2010년 전북 군산시에 세계 최대 규모 독과 골리앗 크레인을 갖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준공됐다. 준공식도 열기 전에 배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조선업 장기 불황으로 2017년 7월에 결국 가동이 잠정 중단됐다. 근로자 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협력업체 90%가 문을 닫거나 군산을 떠나면서 ‘한국판 말뫼의 눈물’이란 말이 나왔다. 다음 해인 2018년에 한국GM 군산공장까지 폐쇄돼 지역경제는 더 황폐해졌다. 그랬던 군산조선소가 지난달 28일 5년 3개월 만에 재가동 선포식을 열었다.
▷당초 계획보다 2개월 앞당겨진 이번 재가동은 수주 풍년 덕에 가능했다.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올해 들어 31조4500억 원(184척)에 이르는 선박 주문을 받았다. 연간 목표를 26.5% 웃도는 수치이고,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초과 수주다. 올해 9월 현재 세계에서 발주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82%를 우리 업체들이 수주했을 정도로 한국의 조선업이 다시 살아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 운송용 선박 수요가 늘어난 데다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 기술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크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말뫼 스토리’는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업 붕괴 후 절치부심한 말뫼시는 1998년 버려진 조선소 땅에 말뫼대를 세우고 벤처 창업을 지원했다.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470km의 자전거 길도 만들었다. 고급 인재와 함께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 본사 등 유럽연합(EU)의 주요 기업이 몰리면서 말뫼는 지금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군산이 조선소 재가동에서 멈추지 않고 말뫼처럼 국내외 청년들이 몰려드는 활력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03 112 녹취록

2012년 20대 여성이 112 신고를 하고도 흉악범 오원춘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신고가 15초에 불과했고, 구체적인 장소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한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경찰은 결국 112 녹취록을 공개해야 했다. 실제 신고 시간은 7분 36초였다. 경찰의 당초 해명과는 달리 장소도 분명하게 언급됐다. 여기에 피해자가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경찰이 듣고만 있었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2 신고 시스템은 완전히 바뀌었다.
▷신고 접수는 생활안전과, 현장 출동은 경비과가 각각 담당하던 운영체계를 하나의 컨트롤타워 아래 통합했다. 시도경찰청에 24시간 긴급 신고를 접수하는 112종합상황실을 만들었고, 신고 내용은 전자시스템으로 일선으로 하달했다. 112 신고는 자동 녹음된다. 다만 텍스트 변환은 하지 않는다. 신고자 측이 방문하면 녹음 파일을 재생해 주지만 녹취록을 제공하지 않는다.
▷지난달 29일 경찰에 접수된 이태원 참사 관련 11건의 112 녹취록이 1일 공개됐다. 국회의 요구에 따라 경찰이 녹음 파일을 듣고 임의로 발췌 정리한 것이다. 녹취록 전문이 아닌 녹취 요약본인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참사 4시간 전에 “압사당할 것 같다”는 첫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경찰의 부실 대응 의혹이 커졌다. 문제는 전체 녹음 파일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녹취록에 ‘비명소리’로 적힌 부분을 육성으로 듣게 되면 상황이 또 달라질 수 있다.
▷한때 전화 응대 교육조차 받지 않은 신참들이 신고를 접수해 논란이 되자 요즘은 전문 교육을 받은 베테랑 경찰이 아니면 종합상황실 근무가 어렵다. 전문요원은 신고 유형에 따라 대응의 수준을 가장 위급한 ‘코드0’부터 긴급성이 전혀 없는 ‘코드4’까지 5단계로 입력한다. 코드0은 광역 단위로 대규모 인원이 필요하고, 코드1은 강력범죄처럼 위해가 곧 가해질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을 뜻한다. 11건 중 코드0은 1건, 코드1은 7건이었다. 그런데도 대규모 경찰력의 신속한 출동이 왜 없었는지 의문이다.
▷과거 20개가 넘었던 위급 상황 신고 전화 창구는 지금은 경찰과 소방(119), 민원상담(110) 등 3곳으로 통합됐다. 경찰과 소방은 시스템도 연계되어 있다. 이태원 참사 관련 11건의 신고 중 2건을 경찰은 소방에도 전달했다. 112 녹취록은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날의 상황을 복원할 수 있는 디지털 증거들을 모아 참사의 원인이라는 진실에 최대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1-04 이태원 의인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타이태닉호 침몰이나 9·11테러와 같은 재난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사람들은 배가 가라앉고 빌딩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약자들을 보호하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위기의 순간 이기심에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 돕는 이타적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재난이 닥치면 등장하는 ‘의인’들이 그 증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목숨 건 의인들이 있었다.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준 고교생,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탈출을 도운 교사, “승객들 먼저”라며 끝까지 배에 남은 승무원들이다. 2020년 경기 군포 아파트 화재 때는 ‘사다리차 의인’이 주민들을 살렸다. 2016년 서울 서교동 원룸 건물 화재 땐 ‘초인종 의인’이 집집이 초인종을 눌러 대피시키느라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2017년 경북 군위군에 사는 스리랑카 남성은 불난 집에 뛰어 들어가 할머니를 구해냈다. “평소 마을 어르신들이 따뜻하게 보살펴 준 게 고마워서”라고 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발생한 죽음의 골목길에서도 외국인들이 귀한 목숨을 살렸다. 골목길엔 대피할 수 있는 건물 난간이 있는데 청재킷을 입은 남성이 “밟고 올라가라”며 어깨를 내주고 가죽재킷을 입은 남성이 도와준 덕분에 여럿이 난간으로 올라가 살았다. 덩치 좋은 흑인 남성이 동료 2명과 나타나 인파에 깔린 사람 30여 명을 ‘밭에서 무 뽑듯’ 빼냈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이들은 경기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 근무하는 미군들로 밝혀졌다.
▷경찰의 부실 대응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참사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경찰관에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태원파출소 소속 김백겸 경사(31)다. 김 경사는 단순 시비 신고를 받고 동료들과 출동했다가 참사 현장을 발견한 뒤 “사람이 죽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고 외치며 인파를 통제하고 구조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시민들이 경찰관보다 먼저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달려 나와 환자들을 둘러업고 이송했다”며 “더 살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말이 있다. 공감하고 연대하는 힘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뇌도 덩치도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은 인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이타심은 전염된다. 군포 ‘사다리차 의인’은 예전에 어느 사다리차 기사의 구조담을 듣고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이태원 의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재난이 닥쳤을 때 또 다른 의인이 되어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05(토) 봉화 광산의 기적

정호승 시인이 강원도의 한 탄광에서 작업 중이던 광부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건 땅 위의 직업을 갖는 거지예.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모릅니더.” 그만큼 광산 작업은 힘들고 위험하다. 한 번 갱도에 내려가면 먼지로 가득 찬 좁고 깊은 지하에서 가쁜 숨을 참아가면서 사투를 벌여야 한다. 이보다 더한 것은 자칫하면 갱도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공포다.
▷지난달 26일 오후 6시쯤 경북 봉화의 한 아연광산 갱도 안으로 모래와 흙이 쏟아졌다. 지하 30m와 90m 지점에 있던 5명은 빠져나왔지만 가장 깊은 140m 지점에서 일하고 있던 조장 A 씨(62)와 보조 작업자 B 씨(56)는 9일 동안 구조되지 못했다. 이들은 지하 170m 지점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대는 옆 갱도를 통해 내려간 뒤 진입로를 뚫어나갔다. 당초 사흘이면 매몰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단단한 암석이 많아 작업 속도가 늦어졌다.
▷구조대는 이들이 있을 만한 곳까지 관을 뚫는 작업도 병행했다. 내시경 카메라와 음향탐지기 등을 이용해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음식과 약품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가족들은 “힘들겠지만 힘내라”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손편지를 써서 관을 통해 내려보내기도 했다. 어두운 지하에서 내시경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10m 안팎에 불과해 두 사람을 찾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통상 매몰 사고에서 골든타임을 72시간으로 본다. 하지만 물과 공기가 충분하면 구조 가능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2010년 칠레 산호세 구리 광산에서 33명의 광부들이 매몰됐다가 69일 만에 모두 생환하는 ‘세기의 기적’이 벌어졌다. 구조대가 지하 700m까지 드릴로 구멍을 뚫어 생필품을 공급했고, 광부들은 가족을 생각하며 긴 시간을 견뎌냈다. 한국에서도 1967년 충남 청양 구봉금광에 갇힌 광부 김창선 씨가 16일 만에 구조된 사례가 있다. 그는 “갱도 한편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셨다”고 했다.
▷다행히 봉화 광산에 매몰된 두 사람은 물 10L와 커피믹스 등을 갖고 들어갔고, 갱도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4일 오후 11시경 마침내 두 사람 모두 걸어서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 모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한다. 가족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구조대의 노력과 가족들의 염원, 국민의 응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뤄낸 ‘봉화 광산의 기적’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07(월) 美 빅테크 감원 한파

‘당신 회사는 해고를 통보하고 있나요’ ‘부서를 줄였나요’.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선 데이터 엔지니어들이 서로 안부를 물으며 각 회사 사정을 파악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정보기술(IT) 기업 직원들로 해고될까 봐서 떨고 있는 이들이다. 출근이 취소됐다는 신규 직원부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해고를 당했다는 기존 직원까지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팬데믹 동안 승승장구했던 빅테크들이 경기 침체에 대비해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빅테크들은 지난해 최대 실적과 넉넉한 현금 주머니를 바탕으로 고용과 투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2분기 실적이 기대를 밑돌고 3분기 실적이 ‘어닝 쇼크’로 이어지자 구조조정에 나섰다. 아마존은 직원들에게 고용 동결을 공지했고 애플 역시 연구개발 부서 외에는 채용을 중단했다. 최악의 실적을 낸 페이스북의 모기업 메타는 앞서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넷플릭스는 올해 들어 500명 가까이 해고했다.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FAAMG)의 주가는 올해 무려 34.7%가 하락했다. “2000년 닷컴 버블 붕괴와 닮은꼴”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3월 정점에 이르렀던 나스닥 지수는 거품이 사그라진 2002년 10월까지 약 78% 하락했다. 당시 아마존 야후 구글 등 IT 기업들이 과열된 주가에 비해 형편없는 실적을 냈고, 투자자들이 이탈하며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직원을 내보내고 월급을 깎기 시작했다.
▷금리 인상 속도와 소비 감소 추세를 볼 때 빅테크들은 당분간 저조한 실적을 회복시킬 계기가 없다고 보고 있다. 앤디 재시 아마존 CEO는 “일부 사업을 정리하고 침체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경기 침체가 2024년 봄까지 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인수한 트위터는 전체 직원의 절반(3700명)을 감원한다. 지난주부터 문자와 이메일로 ‘날벼락’ 해고가 통보됐다. 특히 윤리경영 부서부터 해고하면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트위터에 “인권이 경영의 중심이어야 한다”며 이례적 경고를 할 정도다.
▷빅테크의 대규모 감원은 곧 사업 재편을 의미한다. 닷컴 버블 붕괴의 상징이었던 아마존이 그 시련을 딛고 빅테크로 성장한 것처럼, 기업들은 사업의 옥석을 가려가며 생존 전략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만 IT 산업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글로벌화된 것이 특징이다. 미국 빅테크의 경영 한파는 경쟁 격화든 위기 전염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곧 한국으로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 추운 겨울을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1-08 ‘CCTV는 보고 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350m가량 떨어진 골목길 폐쇄회로(CC)TV 카메라엔 참사 당일 오후 10시 59분 용산경찰서장이던 이임재 총경이 뒷짐을 진 채 걷는 장면이 찍혔다. 10시 20분 참사 현장에 도착했다는 상황보고서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같은 날 오후 8시 22분 이태원의 자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에 나왔다. 지방 출장을 다녀온 뒤 집 근처 골목을 2분간 걸었을 뿐이다. “8시 20분 거리 점검을 했다”는 용산구의 설명은 “퇴근길을 업무로 속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 부메랑이 됐다.
▷작년 말 기준으로 전국의 CCTV는 약 1600만 대로 추정된다. 인구 3.2명당 1개꼴이다. 구청이나 경찰이 설치한 것보다 민간 부문이 보유한 것이 10배 이상 많다고 한다. 이 총경과 박 구청장의 참사 당일 행적을 포착한 것도 옷 가게나 식당 등 상인들이 설치한 카메라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0년 감시 카메라 노출 빈도를 조사한 결과 하루 최대 110회, 이동 중에는 9초에 한 번꼴이었다. 대수가 그때보다 2배 이상 늘어난 만큼 노출 빈도 역시 크게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참사 현장 인근에는 최소 수십 대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과거엔 저해상도 노후 카메라가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설치된 지 5년 미만의 최신형으로 교체됐다. 고화질의 화면에 줌인 촬영도 가능해서 현장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감시 카메라의 화면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경찰은 사고 현장과 인근이 찍힌 157건의 영상자료를 확보했다. 이 중에는 수사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이른바 ‘스모킹건’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 CCTV를 실시간으로 통제하고, 볼 수 있는 관제센터는 구청에 있다. 구청이 관리하고, 경찰관들이 상황실에 파견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범죄나 재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작년 강원 강릉에서 초등학생 인질범의 동선을 구청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추적해 4시간 만에 검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 당일엔 용산구 관제센터는 위험 신호를 보낸 게 없다. 모니터링은 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감시 카메라의 천국’ 영국은 전국적으로 425만 대, 런던에만 62만 대의 CCTV가 있다. 카메라가 시민들의 행동을 24시간 내내 감시하는 곳이다. 서울도 8만 대의 공공 부문과 그 10배인 민간 카메라까지 합치면 런던 못지않게 감시망이 촘촘하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행적을 숨기거나 포장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따름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1-09 “100년 만의 최장 침체”

“영국 경제가 100년 만에 가장 긴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 지난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33년 만의 자이언트스텝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내놓은 전망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란은행이 예상한 침체 지속기간은 올해 3분기부터 내후년 중반까지 2년. 선진국들의 과거 평균 침체기간이 1년이 안 된 걸 고려하면 갑절 이상 길고 고통스러운 침체의 시작이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 후유증까지 겹쳐 유럽 선진국 중 물가 상승률이 최고 수준이고, 연말에는 11%까지 오를 전망이다. 이에 대응해 영란은행은 작년 말부터 8번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침체와 실업 증가를 감수하고라도 물가부터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이로써 올해 3%대인 영국의 성장률은 내년에 0%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코로나19가 터진 재작년 영국의 성장률(―9.9%)은 대혹한(Great Frost)이 발생한 1709년 이후 311년 만에 최악이었다. 작년에는 GDP가 7.5% 반등했는데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생산시설이 풀가동된 1941년 이후 최고였다. 올해는 리즈 트러스 전 정부의 설익은 감세정책으로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겪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롤러코스터 경제다.
▷경기는 이렇게 ‘확장-정점-침체-저점’ 사이클을 탄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GDP가 줄면 침체로 보지만 다른 요소도 고려하기 때문에 정점, 저점이 언제인지는 한참 뒤 알게 된다. 하지만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를 잡기 위해 ‘천천히, 하지만 더 오래, 더 높게’ 기준금리를 높이겠다고 밝히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내년은 물론이고 내후년까지 글로벌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2차 대전 후 12차례 미국의 경기순환에서 확장기간은 평균 64.2개월, 침체기간은 11.1개월이었다. 침체가 닥치면 정부가 재정을 풀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기 때문에 확장보다 침체가 짧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재작년 2월까지 128개월간 확장하던 미국 경기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단 두 달 주춤했다가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풀자 확장으로 돌아섰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오랜 경기확장이 결국 긴 침체라는 후유증을 불렀다. 최근 들어 세계경제 사이클과 ‘디커플링’이 심해진 중국도 사정이 좋지 않다. 수출 상대국 대부분이 침체에 빠지면서 한국의 내년 성장률도 1%대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진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동시에 몰아치는 긴 빙하기가 다가오고 있다. 혹한을 이겨낼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선진국 초입에서 다시 중진국으로 떨어질 수 있는 험로에 한국경제가 서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10 “웃기고 있네”

8일 대통령실 국정감사 도중 대통령실 수석 2명이 필담을 나누다 퇴장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야당 의원들이 질의하는 동안 강승규 시민사회수석과 김은혜 홍보수석이 메모장에 “웃기고 있네”라고 썼다가 지우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수석들은 “의원들 질의와 무관한 사적 대화”라고 해명했지만 야당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통령실 국감이었다. 문제의 메모를 포착한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통령실의 이태원 참사 대응을 질타하는 와중에 두 수석이 필담을 나눴다고 한다. 강 의원은 김대기 비서실장을 상대로 “역사가 김대기 비서실장을 소환할 수 있다”는 엄중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웃기고 있네”라는 메모가 등장한 것이다. 야당 의원의 질의를 조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 수석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도 “강 수석과 다른 사안들로 얘기”하던 중이었다고 해명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개국 156명의 젊은이가 깔려 죽은 초유의 참사에 대해 대통령실의 책임을 따지는 자리였다. 국민을 대신해 묻는 의원들 질의에 집중을 했어야 하지 않나. 두 수석은 국감장에서 소리 내어 웃다가 수감 태도를 지적받았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통령실 태도를 보여주는 것” “국회 모독이자 국민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메모 파동에 대해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들킨 게 잘못”이라고 했다. 설사 야당을 겨냥한 말이었대도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니 정색하지 말라는 뜻인가. 들키면 안 될 말을 하다 들켰으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정제된 말로 감추고 있던 오만과 저열함이 부주의한 메모로 드러났다. 원래 뒤통수를 맞으면 더 아프고 괘씸한 법이다. 김 수석은 어제도 공식 브리핑에서 거듭 사과하며 눈물을 보였다. 남이 듣는 줄도 모르고 내뱉은 다섯 글자로 얼어버린 민심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수석이 국회 운영위에서 “웃기고 있네”를 썼다 지우는 동안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강남역 인파’ 설화로 뭇매를 맞았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야당 의원이 ‘마약 단속하느라 이태원 경비 경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하자 “강남역 하루 통행 인원이 13만 명이 넘는다”고 답변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내뱉었다 사과하고 주워 담은 “우려할 만한 인파가 아니었다”는 말로 들린다.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어이없는 실언으로 될 일도 안 되게 하고 사람들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예삿일이 돼 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11 한국계 美 의원 파워

“서울역에서 깡통을 들었던 때 생각이 나서….” 앤디 김 미국 연방 하원의원의 아버지 김정한 씨는 아들의 후원회를 지켜보며 행사장 뒤에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 씨는 고아원 출신으로 한때 길거리 동냥을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신이 미국에서 유전공학박사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아들이 정치권에서 이뤄낸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소회는 남달라 보였다고 한다.
▷한국계 미국인 하원의원 4명이 11·8 중간선거에서 모두 연임에 성공했다. 앤디 김의 경우 26년 만에 탄생한 한국계 3선 기록이다. 지역구 관리를 넘어 주요 법안을 발의하고 각종 위원회에서 보폭을 넓히며 입법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되는 단계다. 공화당의 영 김, 미셸 스틸 박 의원과 민주당의 매릴린 스트리클런드 의원도 재선 고지를 가뿐히 넘었다. 한국명 ‘순자’인 스트리클런드 의원이 2년 전 첫 취임식에서 선보인 한복을 이번에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의회의 문턱은 높다. 특히 백인 남성이 주류인 공화당에서 비(非)백인 이민자들은 발붙이기가 쉽지 않다. 200명이 넘는 공화당 하원의원 중 흑인과 아시아계는 단 2명씩뿐이다. 이 중 아시아계 두 자리를 모두 한국계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 김과 미셸 스틸 박은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 범죄에 맞서 싸우던 지난해 CNN에 함께 출연해 “우리는 독종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타적이고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공화당 내에서 이들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영 김은 차기 하원의장으로 유력한 케빈 매카시 공화당 원내대표가 직접 챙기는 의원으로 소문나 있다. 당내 넘버 3였던 리즈 체니 의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지도부에서 축출됐을 때 영 김은 후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초선이었지만 21년간의 의회 보좌관 경력을 지닌 그의 체급은 3, 4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앤디 김은 향후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원장 같은 의회 주요 직책에 오를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국계 의원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작지 않다. 영 김은 북한 인권 및 비핵화 관련 법안과 결의안을 지속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외교위, 국방위 소속인 앤디 김이 청문회에서 진행하는 북한, 한미 동맹 관련 질의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미셸 스틸 박과 스트리클런드는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키우고 한미 양국 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계의 ‘매운맛’을 보여주고 있는 의원들의 더 많은 활약을 기대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12(토) ‘양파껍질’ 용산구청장

“참사 충격과 트라우마로 경황이 없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당일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행적에 대해 용산구가 내놓은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이다. 용산구는 박 구청장이 지난달 29일 오후 8시 20분에 한 번, 9시 반경에 또 한 번 참사 현장 인근 퀴논길을 둘러봤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실제론 사고 전에는 한 번도 순찰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말을 뒤집었다. 박 구청장의 행적을 둘러싼 거짓말 논란은 이뿐이 아니다.
▷용산구는 참사 당일 오후 11시부터 박 구청장이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후 11시 반 무렵 박 구청장이 구청이 아닌 참사 현장 근처에 있었던 장면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다. 또 박 구청장은 사고 이틀 전 구청에서 열린 ‘핼러윈 긴급대책회의’에 불참했다. “부구청장이 관례대로 주재했다”는 게 박 구청장의 설명이다. 그런데 용산구가 핼러윈 대책회의를 열었던 것은 2020, 2021년에는 모두 구청장이 주재했다. 앞뒤를 따져보지 않은 채 전례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구청장이 참사 당일 경남 의령에 다녀온 이유도 석연치 않다. 당초 용산구는 “의령에서 축제가 있었고 초청 공문을 받아 다녀온 것”이라고 했다. 마치 지역축제에 공식 참석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박 구청장은 이날 의령군수를 30분 면담했을 뿐이다. 그러자 용산구는 “군수 면담 일정이 잡혀 시제(時祭·음력 10월에 지내는 제사) 참석을 최종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군수를 만나기 위해 차로 5시간 거리를 달려갔고, 간 김에 집안 행사에 들렀다는 것인가. “하나의 거짓말이 많은 거짓말을 낳는다”란 서양 속담이 떠오른다.
▷박 구청장이 참사 당일 오후 9시 반경 권영세 통일부 장관 등이 있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인파가 많이 몰려 걱정된다”는 메시지를 올린 것도 상식 밖이다. 구청과 경찰·소방에 사고 위험을 알리는 대신에 용산 지역구 의원인 권 장관에게만 연락한 것이다. 또 그는 행안위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라면서도 “마음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지자체장은 주민 안전에 도의적 책임이 아니라 실질적 책임을 지는 자리다. 어떻게든 처벌을 모면하려는 심산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경찰은 박 구청장을 7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한 데 이어 11일 출국금지했다. 핼러윈을 앞두고 안전사고 예방 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않은 이유 등이 중심 수사 대상이다. 박 구청장이 이 사건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직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현재로선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형사 처벌과는 별개로 이미 공직자로서의 품위와 신뢰를 잃은 박 구청장이 설 자리가 있는지 의문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14(월) ‘코인계 워런 버핏’의 몰락

플로리다주 비스케인만 해변에 위치한 미국프로농구(NBA) 마이애미 히트 안방구장의 이름은 ‘FTX 아레나’다. 거래량 세계 3위, 미국 1위 가상화폐 거래소 소유주 샘 뱅크먼프리드(30)가 작년에 1억3500만 달러를 주고 명명권을 구입해 간판을 고쳐 달았다. 코인 투자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화폐로 돈을 벌어 현실 세계에 꿈의 구장을 사들였다”고 환호했다.
▷이 곱슬머리 청년은 재작년 포브스 선정 미국 400대 부자 중 32위를 기록했다. 20대로는 유일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월가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2019년 FTX를 세운 지 2년 만이었다. ‘코인계의 워런 버핏’이란 명예로운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FTX 파산 사태로 1주 전 160억 달러(약 21조1000억 원)에 달했던 그의 재산은 이제 0원이 됐다.
▷FTX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설립 목표에 따라 수수료 수입의 1%를 기부해 왔다. 공식 석상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수더분한 MZ세대 가상화폐 스타에 청년세대는 열광했다. 이런 면모도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사석에서 무례한 말투를 썼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급성장 비결이 정치권 로비라는 말도 나온다. 최근 미국 중간선거 직전 그는 정치후원자 순위 6위에 올랐는데 그의 회사는 500억 달러(약 66조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밖에선 코인의 제왕으로 추앙받았지만 업계 안에서는 미운털이 박혔다. 정부의 가상화폐 통제 강화에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파산의 직접 계기도 업계에서 시작됐다. 1위 거래소 바이낸스는 지난주 FTX 자체 발행 코인의 신뢰성을 문제 삼아 모두 처분했다. 미국 출생인 뱅크먼프리드는 바이낸스 최고경영자 자오창펑이 중국계란 걸 조롱하곤 했는데 파산 직전 자오는 그의 지원 요청을 뿌리쳤다.
▷이번 사태로 테라·루나 폭락 사태도 재소환됐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31)는 알고리즘으로 가치 하락을 막는다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거물이 됐다가 5월 가치 폭락으로 투자자들에게 400억 달러(약 53조 원)의 손실을 끼쳤다. “실패와 사기는 다르다”며 ‘폰지 사기꾼’이란 비판을 반박했던 권 대표는 현재 해외 잠적 상태다.
▷가상화폐 가격은 투자자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폭락하곤 한다. 뱅크먼프리드는 고객자금 일부를 착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FTX에 투자한 글로벌 금융회사가 많아 ‘코인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가능성도 제기된다.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꾀하면서도 투명성,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재무 상태, 자산 건전성을 재점검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15 ‘요즘 애들’의 고통지수

0원으로 일주일 살기, 냉파(냉장고 파먹기) 요리법, 무지출 데이트…. 요즘 인터넷상에는 ‘무지출 챌린지’ 성공기와 실패기가 넘쳐난다. 치솟는 물가에 생활비를 줄이려고 아예 지갑을 닫아버린 청년 자린고비들이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식사는 회사에서 해결한다. 보고 싶은 친구는 온라인으로 만난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치맥(치킨과 맥주)을 시키려다가도 “내 마음만 상하고 내 돈만 쓰는 일”이라며 꾹 참고 화를 다스리는 영상도 있다.
▷유독 궁상맞아서가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올해 상반기(1∼6월) 세대별 체감경제고통지수를 산출했더니, 20대가 25.1로 모든 연령대 가운데서 가장 높았다. 체감실업률과 체감물가상승률을 합산한 체감경제고통지수는 그 숫자가 커질수록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뜻이다. 주된 원인은 인플레이션이다. 20대 체감물가상승률은 5.2%였는데 유일하게 5.0%를 넘긴 연령대였다. 청년들의 지출 비중이 높은 음식·숙박, 교통, 식료품의 물가가 평균보다 많이 올랐다.
▷경제위기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체감경제고통지수는 60대(16.1)가 20대 다음으로 높았고, 모든 연령대에서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경제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소득이 적을수록 부담이 된다. 취업 준비 중이거나 이제 막 취업해 소득이 적은 청년들은 생활비 상승이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세계적으로 청년 세대에 인플레이션 고통이 집중된다는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20대가 겪는 경제난이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20대 체감실업률은 19.9%에 달한다. 고학력자는 늘었는데 그에 맞는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해서다. 노동개혁 같은 구조적인 해법이 있어야 이 문제가 해소될 것이다. 20대의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29.2%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다. 주로 전세나 월세 보증금인데 고금리의 직격탄을 맞게 생겼다.
▷‘인턴 신분의 황은채와 나는 백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매일 아홉 시 반부터 이르면 저녁 여덟 시, 늦으면 열한 시 정도까지 일했다. … 점심과 저녁 식대가 따로 나오지 않아 식비나 출퇴근 교통비를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박상영의 소설 ‘요즘 애들’은 사회초년생인 20대에게 매몰찬 노동시장의 실상을 그렸다. 주인공은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20대가 겪는 경제적인 고통은 결국 일자리 문제에서 비롯된다. 노동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이고 올라서는 사다리를 차버리면서 ‘요즘 애들’ 탓만 해선 안 될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1-16 ‘각 그랜저’의 귀환

‘그랜저’는 과거 한때 부(富)의 상징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성공한 회장, 사장들이 타고 다닌다고 해서 ‘회장님 차’로 불렸다. 1986년 출고 당시 가격이 최고 2000만 원대 후반으로 소형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었다.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폭 두목들이 타는 ‘형님 차’로도 알려졌다. 부유층 자제들이 “건방지게 그랜저를 가로막는다”며 차선 변경으로 시비가 붙은 다른 차 운전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세대 그랜저는 모서리가 네모난 박스에 바퀴를 달아놓은 듯한 디자인 때문에 ‘각 그랜저’라고 불렸다. 곧은 직선의 디자인이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대형 차체에 강인하고 단단한 이미지를 심어줬다. 현대차가 어제 새로 선보인 7세대 그랜저는 36년 전의 이 모델 디자인을 곳곳에서 차용했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량의 외관에 복고풍의 레트로 감성을 덧입혔다. 그랜저를 고급 국산차의 대표 모델이자 성공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향수를 소환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다. 개인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아이콘이자 한 시대의 경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랜저가 출시된 해는 한국이 아시아경기를 치러내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굵직한 국제 행사 개최를 앞둔 때였다. 가파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부가 팽창하던 시기, 고층 아파트의 숲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컬러TV가 놓였다. ‘마이카’의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자동차로 재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욕구가 치솟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5000달러에 육박하는 2022년, 자동차가 반영하는 시대상도 변했다. 운전기사가 모는 시커먼 대형차보다는 성공한 젊은 사업가가 모는 컬러풀한 고급 세단이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더 주목받는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브랜드의 진화도 계속된다. 6세대를 거치며 대중화돼온 그랜저의 주 소비층 연령은 5060세대에서 3040세대로 낮아지고 있다. 젊어진 감각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 중인 럭셔리 외제차들과의 경쟁이 치열하다.
▷30여 년 전의 자동차 콘셉트를 되살리는 시도는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파워와 성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세계시장을 누비는 한국 차의 품질은 변변한 자체 기술 하나 없어 일본 기업과 손잡아야 신차를 개발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는 급이 달라졌다. 그래도 자율주행을 비롯한 첨단기술 개발의 길은 여전히 멀다. 과거 유산에 바탕을 둔 복고 열풍 속에서도 자동차 업계의 시선은 더 앞선 미래에 박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17 트럼프의 대선 재도전 선언

“이겨라. 이기고, 이기고, 더 이겨라. 더, 더. 무엇을 하건 승자가 돼라.” 부동산개발업자 아버지는 늘 아들에게 ‘킬러가 돼야 한다’면서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그의 인생 사전에 ‘패배’나 ‘실패’는 있을 수 없다.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은 더더욱 그렇다. 4년 임기 중 두 차례나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 부정선거를 외치며 지지 세력을 의사당 난입 폭도로 내몰아 평화적 정권 이양의 전통을 깨뜨린 대통령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그의 정치 행보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탄핵도, 패배도 그에겐 사기당하고 탈취당한 것일 뿐이다.
▷“미국의 귀환이 지금 바로 시작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15일 세 번째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11·8 중간선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면서 트럼프 측근들은 적어도 조지아 상원의원 결선투표가 끝날 때까지 출마 선언을 미루자고 했지만 그를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화당 내부 경쟁자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선 서둘러 나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계산이 크게 작용했고, 자신을 향한 사법당국의 칼날을 피하려면 지지층의 정치적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트럼프의 발길을 재촉했다고 미국 언론은 분석한다.
▷트럼프에게 중간선거 결과는 위기의 신호다. 민주당에 상원 다수당을 넘겨준 데다 트럼프의 ‘대선 사기론’에 동조한 극우 후보들마저 줄줄이 고배를 들었다. 당장 공화당 내에선 트럼프 책임론이 일었고,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도 ‘리틀 트럼프’로 불리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에게 뒤처졌다. 그런데도 트럼프 측은 당내 경선에서 반(反)트럼프 경쟁자들이 표를 나눠 먹으면 무난히 본선 티켓을 따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정작 당내에선 트럼프가 경선에 패배하면 그에 불복해 열성 트럼프 지지층을 공화당 반대세력으로 만들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트럼프 출마에 민주당이 신났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도 백악관을 떠났다가 다시 도전한 몇몇 사례가 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22, 24대)는 1888년 재선 도전에 나서 전체 득표수에선 이겼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져 낙선했다가 4년 뒤 재출마해 성공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는 1908년 불출마하고 4년 뒤 나섰다가 낙선했다. 그는 공화당 경선 문턱을 넘지 못하자 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민주당에 어부지리를 줬다. 트럼프가 제2의 클리블랜드가 될지, 제2의 루스벨트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미국 정치는 또 한 편의 흥미진진한 막장 드라마를 예고하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1-18 ‘미스터 에브리싱’의 방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즐겨 읽는다. 왕좌의 권력 다툼 과정 등에서 부딪힌 역경을 이점으로 바꾸는 방법을 고전 병법서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늘상 자정 넘어서까지 일한다는 그는 경제부터 외교안보, 문화까지 전방위로 발휘하는 영향력 때문에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린다.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부인을 한 명만 둔 이유도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네옴시티’ 건설은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사우디의 핵심 사업이다. 야심 찬 30대 개혁군주가 추진하는 지구 역사상 최대 도시 프로젝트다. 그는 네옴시티를 구상하면서 “나만의 피라미드를 갖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사막 위 도시의 하이라이트는 100% 친환경 에너지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다. 더 이상 원유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래 에너지 개발에 나서겠다는 젊은 지도자의 뜻은 확고해 보인다. 한 외신 인터뷰에서는 “유가가 30달러든 70달러든 신경쓰지 않는다”며 “그 싸움은 내가 나설 싸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야심 찬 프로젝트에는 한국 기업들이 대거 참여한다.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도심항공교통(UAM) 같은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수조 원대 사업들이다. 그린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의 협력도 눈에 띈다. 한-사우디 ‘수소 동맹’이라는 표현이 벌써 등장했다. 1970, 80년대 ‘1차 중동 붐’이 한국 건설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일군 것이었다면, 이제는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된 ‘2차 중동 붐’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는 최고 60도의 더위 속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자국의 고속도로와 항만을 지어준 한국 노동자들을 잊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건설 사업들이 줄줄이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사우디의 고위당국자들이 “한국인들이 다시 와서 마무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 사실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한국 기업들을 극찬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우디는 신도시 계획을 세우면서 판교 테크노밸리를 참고 사례로 검토했다.
▷사우디가 2019년 해외 가수들의 콘서트를 처음으로 허용한 이후 가장 먼저 초청한 그룹이 BTS다. 빈 살만 왕세자의 자녀들이 K팝에 갖고 있는 관심이 작용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했던 자원 빈국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저력을 높이 사고 있다고 한다. 경제 협력에 더해진 사회, 문화적 관심이 50년 만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의 문을 더 활짝 열어줄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1-19(토) 경기버스 입석 중단

“광역버스 입석 중단 후 매일 지각이다. 오늘도 버스 3대를 그냥 보냈다.” “몇 정거장 거슬러 올라가도 자리가 없어 아예 반대 방향 종점까지 가서 탄다.”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가 입석 승차를 중단하면서 도민들이 출퇴근길 승차난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125만 도민은 버스 승차난이 지하철까지 확대될까 노심초사다.
▷경기도 광역버스의 절반을 운행하는 KD운송그룹은 18일 성남과 남양주 등에서 서울 광화문과 사당 쪽으로 운행하는 버스의 입석 승차를 전면 중단했다. 나머지 버스업체도 올 7월부터 입석 승차를 줄줄이 중단했다. 이로써 경기지역 220개 노선 광역버스 2000여 대의 입석 승차가 거의 모두 제한된 상태다. 올 1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최근에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안전 우려가 커지자 이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의 입석 승차는 불법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한해 허용해 왔다. 이 버스 놓치면 서서 가기도 어려울까 45석 버스에 70명 이상이, 74석 이층버스엔 120명 이상이 1, 2층은 물론이고 중간 계단에까지 빽빽이 몸을 구겨 넣었다. 밀도가 위험 수준인 m²당 5명을 훌쩍 넘는다. 운전석 시야를 가릴 때도 많다. 2018년엔 추돌 사고로 70명 넘게 태우고 달리던 광역버스에서 28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특히 이층버스 승객들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코너를 돌다 사고가 날까 아찔하다”고 했다.
▷2014년 세월호 사태 때도 정부는 국민안전 대책으로 광역버스 전 좌석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하고 입석 승차를 금지한 적이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에 입석 승객을 태우다간 언제 대형 참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100m 넘게 줄서서 1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를 타지 못한 도민들은 “탁상행정을 한 공무원들 모아서 광역버스로 출퇴근시켜 보라”며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입석 승차 단속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한 달 후 출퇴근길 입석 승차를 허용했다.
▷입석 승차 전면 중단 첫날인 어제는 전세버스 투입으로 큰 불편은 없었다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경기도는 정규 버스를 대폭 늘리겠다고 했는데 새 차 출고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 버스 운전사들마저 코로나 이후 배달업계로 옮겨가 기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세월호 사태 이후 8년간 무얼 하다 이태원 참사가 터지니 근본 대책 없이 입석 승차 중단부터 하나. 안전 문제가 불거질 때만 반짝 대책을 내놨다 흐지부지되니 안전해지지도 않고 승객들만 매번 큰 불편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21(월) 80억 돌파한 세계 인구

1970년대 중반 인도에서는 경찰이 마을을 봉쇄한 뒤 주민들을 끌고 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정부는 이들에게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행했다. 1975년에만 600만 명이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인구가 폭증하며 6억 명을 넘어서자 가혹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둘만 낳자”는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지만 매년 1000만 명 이상씩 인구가 늘어난다. 내년에는 인도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인구 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15일 다미안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돌파한 순간이다. 1974년 40억 명을 넘어선 지 48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세계 인구는 2080년경 104억 명을 기록한 뒤 2100년부터 줄어들 것으로 유엔은 예측한다. 하지만 의료 수준과 농업 기술의 발전 등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인구 증가 속도가 식량 증산보다 빨라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라던 맬서스의 예측도 이런 변수들을 고려하지 못해 빗나갔다.
▷근래 세계 인구 증가는 저개발 국가들이 주도하는 추세다. 인도, 나이지리아 등 8개국이 그 중심에 서 있다고 유엔은 분석한다.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인구 성장세가 가파르다. 현재 11억 명 선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인구는 2050년까지 2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높은 출산율과 보건 수준 개선이 맞물리면서 영아 사망률은 낮아지고 기대수명은 높아져서다. 이들 국가에서는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가 감당하지 못해 빈곤층이 양산되는 상황이다.
▷생산이 인간의 노동에만 의존했던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경제에서 인구 규모는 중요한 요소다. 출산율 저하는 인구 고령화로 이어져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이유로 인구 증가보다 ‘인구 절벽’을 더 걱정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30여 년간 강력한 ‘한 자녀 정책’을 실시했던 중국도 인구가 정체되고 고령자의 비중이 늘어나자 출산을 장려하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인구 증가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지구촌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결과 사망자보다 출생자가 많아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더 빨리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할 위험성은 더 높아졌다. 국가 차원에서는 경제와 국방에 필요한 규모의 인구를 보유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보건과 복지 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좌우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22 월드컵 문 연 BTS 정국

카타르 축구 월드컵을 앞두고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의 뉴스가 많이 나왔지만 흘려들어서인지 개막식에 BTS가 초청받은 줄 알았지 정국만 간 줄은 몰랐다. 21일 개막식을 보고서야 정국이 혼자 간 사실을 알았다. 막상 보고 나니 BTS가 다 있을 필요도 없었겠다 싶었다. 정국은 혼자서도 마이클 잭슨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감으로 메인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러고 보니 BTS는 스타(Star)가 아니라 스타들(Stars)이다. 멤버 각각이 하나의 별이다. 비틀스에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 등의 별이 있듯이, 롤링스톤스에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등의 별이 있듯이 그렇다. 별들이 한데 몰려 있어서 팬이 아닌 일반인은 각각의 별을 구별해 보지 못할 뿐이다. 팬들은 각각의 별이 가진 개성과 능력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BTS의 팬일 뿐 아니라 각각 진 슈가 제이홉 RM 지민 뷔 정국의 팬이기도 하다.
▷막내 정국은 BTS의 메인보컬로서 곡의 첫 부분을 도맡아 부를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 게다가 리드댄서이기도 하다. 날렵한 몸매에 숨겨진 강인한 근육을 바탕으로 정석대로 추는 춤이어서 동작 하나하나가 힘 있고 깔끔한 데다 안무의 포인트를 살리는 능력이 뛰어나 임팩트를 넣어야 할 때 정확히 넣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이 다 월드클래스이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처럼 무대를 압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을 기준으로 보면 그리스로부터 동쪽은 근동(Near East)이거나 중동(Middle East)이거나 극동(Far East)이거나 다 동양이다. 일본 한국 중국 등 극동에서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린 게 여러 차례이지만 근동이나 중동에서는 올림픽이 열린 적이 없고 월드컵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역사적인 대회의 개막식 메인무대에 카타르 자국 가수와 함께 주인공으로 선 사람은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었고 그 동양인은 한국인이었다.
▷BTS는 과거의 한류와 다르다. 과거의 한류는 한국에서 유행한 뒤 중국 일본 등 인접국으로 퍼져 나가고 다시 중동 등 아시아와 서양에서 인기를 얻는 순으로 전파됐다. BTS는 그렇지 않다. BTS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인기를 얻은 뒤 마침내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 깃발을 꽂고 그 뒤에 오히려 한국으로 역류해 기성세대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BTS는 에드워드 사이드 식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뛰어넘은 현상이다. 정국은 한국인이어서도 아니고 동양인이어서도 아니고 세계인이 사랑하는 가수여서 노래하고 춤췄다. 그것이 감격스러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23 문 닫는 GM 부평공장

1962년 우리나라에 운행 중인 차량은 6만여 대에 불과했다. 현재 2500만 대가 넘는 차량이 등록돼 있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나마 폐차된 외제차를 분해한 뒤 부품을 다시 조립한 허접한 차량이 많았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5년 안에 국산차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설립했다. 1962년 8월 문을 연 이 공장이 현 한국GM 부평2공장의 모태가 됐다.
▷그동안 부평공장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새나라자동차가 문을 닫은 뒤에는 신진자동차가 부평공장을 운영했다. 신진자동차 부도 이후 이름을 바꾼 새한자동차를 대우가 인수하면서 부평공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우자동차가 1986년 부평1공장을 새로 지으면서 기존에 있던 시설들은 부평2공장이 됐다. 프린스, 레간자 등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세단들이 부평2공장에서 생산됐다. 2002년 GM이 대우차를 인수할 당시 부평공장은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결국 2005년 GM으로 넘어갔다.
▷자동차업계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GM 부평공장도 타격을 받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자동차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부평공장의 가동이 한동안 중단됐다. 지난해에는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부평공장의 가동률을 절반으로 낮추기도 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사 갈등이었다. 한국GM이 2014년 이후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데도 노조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면서 사측과 충돌했다.
▷2016년 한국GM 노조는 임·단협이 진행되는 도중에 싱가포르를 찾아가 GM 본사 경영진을 만났다. ‘해외 원정 투쟁’까지 벌인 것이다. 노조가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며 한국GM 사장실을 점거한 적도 있다. 2018년에는 임·단협 갈등 끝에 사측이 ‘법정관리 신청’ 카드를 꺼내들면서 파국 직전까지 몰렸다. 한국GM 경영진은 “미국 본사의 시각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평2공장에 신차 생산을 배정하지 않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국GM은 26일 트랙스, 말리부의 단종과 함께 부평2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부평1공장은 운영되지만 60년간 명맥을 이어온 ‘원조 부평공장’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GM은 근래 ‘테슬라를 누르고 전기차 1위 업체가 되겠다’며 전기차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이에 국내에서는 ‘부평공장에서 전기차를 생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GM 본사는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내심 ‘노조 리스크’를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부평공장이 폐허로 남지 않도록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길을 찾아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24 천재로 포장된 사기꾼들

“처음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바뀐다.” 바이오벤처 테라노스 창업자인 엘리자베스 홈스(39)는 그의 기술을 의심하는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달랐다. 피 한 방울이면 250개의 질병을 진단한다는 키트는 엉터리였고, 최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홈스가 ‘여자 스티브 잡스’로 추앙받았다면 샘 뱅크먼프리드(30)는 ‘코인계의 워런 버핏’으로 불렸다. 그가 창업한 FTX가 파산을 신청했다. 한때 천재로 불렸던 두 기업가의 몰락이 실리콘밸리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이들이 쓴 성공 신화에는 공식이 있다. 우선 ‘천재’로 포장할 수 있는 명문대 간판을 달았다. 홈스는 스탠퍼드대를 중퇴했고 뱅크먼프리드는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했다. 젊은 혁신가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해 미디어 달링(Media Darling·미디어가 선호하는 유명 인사)으로 불린 것도 같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여성인 홈스는 잡스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냈다. 알고 보니 금발은 염색이었고, 목소리는 연기였다.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후줄근한 반바지 차림을 한 뱅크먼프리드는 정보기술(IT) 업계 괴짜 천재의 전형이다.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계와 문화계 슈퍼스타와 밀착했던 행보도 공통점이다. 테라노스의 이사회는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거물들로 구성됐다. 공교롭게도 홈스의 사기행각은 슐츠 전 국무장관의 손자이자 전 직원이었던 타일러 슐츠의 내부 고발로 드러났다. 뱅크먼프리드는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농구선수 샤킬 오닐 등과 공개적으로 친분을 과시했다. 포장을 벗겨낸 이들의 모습은 악독했다. 홈스는 회사의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들을 위협하거나 해고했고, 뱅크먼프리드는 털털한 이미지와 달리 미팅에서 욕설을 참지 않았다는 폭로가 이어진다.
▷홈스와 뱅크먼프리드의 대범한 사기극은 성공에 집착했던 개인적 특성과 성공을 강요하는 실리콘밸리 문화가 결합한 결과다. 지난해 재판에서 홈스의 변호사는 “테라노스는 실패로 끝났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홈스에게 사기 혐의를 인정해 11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뱅크먼프리드의 FTX는 내부 회계 부정 사실이 속속 드러나 ‘제2의 엔론’ 사태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실상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나 다름없는 데다 피해자도 많아 홈스에 비해 죄가 가볍지 않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뱅크먼프리드에게는 어떤 단죄를 할지 주목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1-25 ‘타조걸음’ 조롱의 대가

23일 열린 카타르 월드컵 독일-일본전. 독일 수비수 안토니오 뤼디거가 일본 공격수 아사노 다쿠마와 경합을 벌이며 볼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아사노 앞에 끼어들어 겅중겅중 뛰면서 골라인까지 막아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출신인 뤼디거의 키는 190cm로 아사노보다 17cm나 크다. 아사노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자신의 타조걸음을 못 쫓아온다고 조롱한 것인데 자칫 특정한 신체적 조건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뛰었던 디트마어 하만 씨는 그날 독일축구연맹 트위터에 이 장면에 대해 재미있어 하는 글들이 올라온 걸 보고 “수치스럽다”며 분노를 토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상대를 깔보는 행동은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 밤 누구라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뤼디거만이 아니다. 프로 정신에 흠결이 있다. 그렇게 하는 건 오만이다”는 글을 올렸다.
▷정작 일본인의 반응은 그리 격렬하지 않다. 일본어로 된 유튜브를 보면 “뤼디거는 원래 뛰는 방식이 저렇다” 혹은 “빨리 달리다가 속도를 줄이려면 저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아는 체하는 댓글이 적지 않게 달려 있고 그런 댓글에 대체로 가장 많은 ‘좋아요’ 반응이 달려 있다. 자신들이 조롱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특이한 심리라고밖에 할 수 없다.
▷뤼디거는 그 자신이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인종차별 피해를 호소해온 선수다. 그는 이번 시즌부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지만 첼시에서 뛰던 2019년 12월 토트넘 홋스퍼와의 경기에서 손흥민과 몸을 부딪친 적이 있다. 손흥민은 일어서면서 그의 복부를 발바닥으로 가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퇴장 판정을 받았다. 그때 토트넘 팬들이 항의해 관중석에서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는 등 인종차별적 행위를 했다고 뤼디거가 주장했다. 당시 손흥민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 것이 손흥민의 활약상을 질시해온 일부 일본 축구팬들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자체 조사 결과 원숭이 울음소리는 없었고 캔 던지기 같은 것이 조금 있었을 뿐으로 밝혀졌다.
▷뤼디거가 아사노를 조롱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 후반 19분경이다. 그러나 후반 38분경 바로 그 아사노가 뤼디거가 보는 앞에서 골키퍼와 골포스트 사이의 좁은 틈을 뚫고 지나가는 면도날 같은 슛으로 독일을 2 대 1로 격파하는 역전골을 만들었다. 독일은 경기에서만 진 것이 아니다. 매너에서도 졌다. 하만 씨가 지적했듯이 뤼디거만이 아니라 독일의 축구팬들은 그것을 더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26(토) 비혼 축의금

“친구들 결혼 때마다 꼬박꼬박 내왔다면 본인이 ‘비혼(非婚)주의’를 선언하고 요구할 경우 당연히 줘야 한다.” “축하하려고 낸 거지 순번 정해 타려고 곗돈 부은 건 아니잖나. 돈 아까워 회수하겠다는 심보다.” 몇 년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비혼 축의금 논란의 찬반양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중장년 세대에겐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공정’을 중시하는 MZ세대 솔로 청년들은 정색하는 문제다.
▷작년 1월 PD 겸 방송인 재재가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비혼식(式)’ 경험을 공개했다. 친구들을 모아 비혼을 선언하고 축의금도 받았다고 했다. 올해 4월에는 한 인터넷 동호회에 ‘비혼이니까 축의금 안 내겠다는 친구’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가 첫 번째로 결혼하는데 다른 친구가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축의금을 내지 않겠다. 결혼식 참석은 하되 밥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번거롭게 비혼 선언하고 축의금을 돌려받느니 아예 처음부터 안 내겠다는 거다.
▷결혼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통계청의 ‘2022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결혼 안 한 여성은 22%, 결혼 안 한 남성은 37%뿐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남성의 35%, 여성의 22%가 ‘결혼 자금 부족’을 들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주변 사람들의 결혼에 부담스러운 축의금을 내는 게 부당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LG유플러스가 내년 1월부터 비혼 직원에게 기본급의 100% 축의금, 유급휴가 5일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회사는 근속 5년 이상, 만 38세 이상 직원이 사내 경조 게시판에 ‘비혼 선언’을 등록하면 결혼하는 직원과 동일한 혜택을 주기로 했다. 다만 ‘먹튀’를 막기 위해 축의금 등을 받고 2년 안에 이직하면 페널티를 준다. 다른 직원과 형평성을 고려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결혼하더라도 중복 지원은 하지 않는다.
▷롯데백화점도 올여름 만 40세 이상 결혼 안 한 직원에게 경조금과 휴가를 주는 제도를 도입했고, 결혼식 화환 대신 반려식물을 보내주기로 했다. 매년 ‘비혼 선언의 날’을 정해 신청한 직원들에게 유급휴가와 축의금을 주는 외국계 화장품 회사 한국지사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기업들까지 독신자를 ‘아직 결혼 못한’ 미혼(未婚)이 아니라 ‘결혼 안 하기를 선택한’ 비혼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 비혼 축의금에 거부감을 드러냈다간 ‘꼰대’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28(월) 대만 민진당 지방선거 참패

26일 실시된 대만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진당이 참패했다. 단체장을 뽑은 21개 현·시 가운데 국민당 승리가 13곳이었고, 민진당 승리는 5곳에 그쳤다. 대만 언론은 “1986년 민진당 창당 이래로 지방선거 사상 최대의 참패”라고 평가했다. 집권세력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 지방선거 패배의 파장은 컸다. 선거 직전 “민진당 찍는 것은 나를 찍는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던 차이잉원 총통은 겸직하는 민진당 주석직을 사퇴했다. 2년 뒤 총통 선거에서 정권 재창출을 노려온 민진당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대만 지방선거에선 대체적으로 거대 담론보다는 민생·지역 이슈가 쟁점이었다. 이번에도 코로나19 방역 문제 등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중국 변수도 부상했다. 중국이 8월에 대만을 겨냥해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자 대만도 포사격으로 맞대응했다. 중국이 대만 무력통일을 강조하자 미국은 대만 사수를 약속했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고조되자 중국과 대만 양안(兩岸)관계 파국을 우려하는 민심이 민진당 심판에 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서 양당은 한국의 거대 양당처럼 지지 기반이 확연히 갈라져 있다. 국민당은 국공 내전 전후로 대륙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핵심 지지층이다. 그래서 중국 본토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교류·협력을 하자는 입장이다. 민진당은 대만 본토 출신들이 든든한 우군이다. 이 때문에 당 헌장에 ‘대만 독립을 지향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반중 독립 의지가 강하다. 집권당의 중국에 대한 태도에 따라 양안 사이에 긴장과 협력 분위기가 교차하는 이유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졌다고 해서 집권 민진당 정책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등 돌린 민심을 의식한다면 민진당의 친미-반중 노선은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것 같다. 중국도 대만 선거 결과에 대해 “이번 선거 결과는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고 잘살아야 한다는 대만 주류 민의가 반영됐다”며 민진당 정권을 비판했다. 민진당의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전쟁 위기를 부추기기보다는 대만 내 친중 분위기를 확산하는 여론전에 집중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그러나 선거 민심은 여전히 유동적이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진당은 참패했지만 이후 홍콩의 민주화 시위 등으로 반중 여론이 고조되자 반중 독자 노선을 명확히 한 결과 2020년 총통선거에선 승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과 중국에 대한 여론 등 선거 변수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만으로 2024년 총통선거를 앞둔 민심의 ‘추’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1-29 불붙은 中 백지 시위

2020년 7월 6일 홍콩 중심가 IFC몰에 모인 시민들이 조용히 흰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같은 달 1일 홍콩보안법이 발효되면서 반중 구호가 적힌 피켓만 들어도 처벌받는 일이 속출했다.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긴 홍콩 시민들이 최후의 저항 수단으로 백지 시위를 선택한 것이다. 2년여가 흐른 지금, 이번엔 중국 전역에서 ‘제로 코로나’ 정책에 반대하는 백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24일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화재로 10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방역 때문에 아파트가 봉쇄돼 있어서 진화가 늦어졌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됐다. 3년 가까이 이어진 제로 코로나에 피로감이 누적돼 있던 중국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상하이의 위구르인 거주지에서는 26일 밤부터 수천 명이 봉쇄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도 베이징을 비롯해 우한, 청두, 광저우, 난징 등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열리면서 중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공안은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고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백지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고 주민들이 속속 가세하고 있다.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백지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 준다”는 이유에서다. SNS에는 #백지혁명’ ‘#A4혁명’ 등 해시태그도 퍼지고 있다. 체코의 벨벳혁명, 조지아의 장미혁명처럼 민주화 시위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트위터에는 “카타르 월드컵 관중들이 시위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백지를 들어 달라”는 글도 올라왔다.
▷실제 이번 시위는 반정부 시위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진핑은 퇴진하라” “투표를 원한다” 같은 노골적인 구호도 나왔다. 제로 코로나 정책 등의 영향으로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목표치인 5.5%에 한참 못 미치는 3%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중국 코로나 신규 감염자는 최근 닷새 연속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칫 경제도, 방역도 모두 실패하는 일거양실(一擧兩失)의 위기 상황이다.
▷시 주석은 지난달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권력 집중을 위해 사회 통제를 강화하면서 정작 주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향후 당국이 시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1989년 톈안먼 시위의 주역인 왕단은 “시위를 무력 진압하거나 발포한다면 세상을 바꿀 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중국 지도부가 민심을 외면하고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고집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30(수) 바이든, SK 美 공장 방문

요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업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혹은 ‘미국에서 만드는 미래’ 같은 글귀가 카메라에 잡힌다. 제너럴모터스와 지멘스, IBM 등의 생산 현장이 모두 그랬다. 연설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뒤로 이 글귀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어김없이 걸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메릴랜드주 볼보자동차 공장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두 번 연속 외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간) 미시간주에 있는 SK실트론CSS 공장을 방문한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첨단기술 기업의 생산 시설을 돌아다니며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일자리 창출 성과를 강조해온 행보의 연장선상이다. 그렇다 해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공장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날 일정은 참모들의 아침 브리핑만 빼면 SK실트론CSS 방문 및 비행기 이동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짧게는 10분 단위로 짜여지는 빡빡한 대통령 스케줄을 감안하면 상당한 시간 투자다.
▷미시간주는 한때 활발했던 자동차, 철강 산업이 쇠락해 버린 ‘러스트 벨트’ 중의 하나다. 주요 선거 때마다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이런 최대 경합지의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는 공화당 후보를 두 자릿수 차이로 누르며 재선에 성공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미시간주를 찾아 격려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녹슬었던 지역을 미래의 첨단 산업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반도체 공장은 최적의 연설 장소다.
▷SK가 공들여 높여온 백악관 내 인지도는 이번 방문 성사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고 한다. SK그룹이 현재까지 밝힌 대미 투자 규모는 520억 달러에 달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SK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 회장들에게 공개적으로 “생큐”를 연발했고, 특히 최태원 회장에게는 영어 이름인 “토니”라고 부르면서 수차례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올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0주년을 맞아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방문한 곳이 SK실트론CSS 공장이다.
▷이렇게 쌓인 신뢰는 ‘21세기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미 간 경제안보 협력을 다지는 바탕이 될 것이다. 점점 빡빡해지는 미국의 대중 기술 규제와 투자 제한 속에서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숨 쉴 여지가 생길 것이란 기대감도 커진다. 제조업 시설을 빨아들이는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동시에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양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협력의 최적점을 찾는 숙제가 남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