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21/ 세계의 골목2/ 2018
여행칼럼니스트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 조선일보
2018.02.01
◆설국, 이곳에선 바람이 불지 않고 눈이 분다 - 일본
바람불 때 마다 꽃잎처럼 눈이 날아드는 곳, 비에이(Biei)
삿뽀로 북쪽… 집집마다 주소 대신 생년월일 붙여 놓은 시골
부디, 눈보라 속에 우뚝 선 한 그루 나무처럼 고요하자
▲크리스마스 카드만한 마을, 비에이. 골목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사진=변종모
바다 위를 날던 비행기가 홋카이도의 경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체가 자주 흔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긴장된 자세로 창밖을 보며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내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저 빨리 착륙하기만을 바라면서. 부정기적으로 편성된 아사히가와(旭川)행 티켓을 얻은 것만으로 행운이라 생각했기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흔들리는 비행기쯤이야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들어선 설국은 차갑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울처럼 신비롭게 산란되는 눈의 빛이 따뜻하게 여겨졌다.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로 겨울이면 일부러 따뜻한 나라를 찾아다니거나, 아예 여행을 접고 집 밖을 나서지 않던 내가 설국의 티켓을 손에 넣고 이렇게 즐거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겨울의 절정으로 치닫는 1월 말이었고, 50년 만의 폭설이라는 뉴스는 한국에서부터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국으로 이어진 작은 마을의 골목에 서서 손을 비비며, 호호 즐거운 입김을 분다.
◇ 삿포로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 반, 1년의 절반이 겨울인 일본 시골
비에이(Biei, 美瑛)는 그야말로 작은 시골마을이다. 작은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게 어울리는 마을. 과장을 하자면 크리스마스 카드만한 마을이다. 경사가 심한 지붕의 집들을 마주한 좁은 골목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겨,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쉽게 제자리며 숨을 곳이 없다. 여기서 길을 잃고 헤맬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에이역을 중심으로 낮게 펼쳐진 집들은 저마다 이마에 숫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다. 이 숫자는 주소가 아니라 집이 태어난 연도다. 적게는 몇 십 년부터 많게는 백년이 넘는 집들이 동화처럼 옹기
종기 모였다. 새하얀 눈에 덮인 집들이 백발의 마음씨 좋은 노인들처럼 다소곳하고 따뜻하다. 소박한 이 골목에는 높은 담도 없고 넓은 마당도 없다. 그저 눈이 쌓인 골목과 눈이 쌓여가는 골목이 있을 뿐이다.
▲눈이 내리거나 내리지 않는 날에도 언제나 겨울 동화가 펼쳐진다./사진=변종모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처럼 눈이 날아들었다. 여기서는 바람이 분다고 하지 말고, 눈이 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온통 겨울의 흔적뿐인데도 떨리지 않는다. 추운 건 사실이지만 견딜만했다. 반가운 카드처럼 단정히 접힌 골목 안의 사람들. 작은 우동가게 주방장의 선한 눈인사, 먼저 달려 나와 문을 열던 아주머니의 따뜻한 어깨는 오래된 친절이 배어있다. 약국이나 주요소에서도 그랬고 어느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자체가 마을을 닮았다. 작고 다소곳한 사람들. 집들이 이마에 자랑스럽게 제 생년을 떳떳하게 달고 있듯이, 사람들도 얼굴에 각기 다른 따뜻함을 달고서 환하다. 1년에 반 이상이 겨울인 이곳에서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뜻함을 지피는 마음의 간격이 아주 촘촘하게 박힌 골목. 겨울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내가 겨울의 가장 북쪽, 북쪽의 가장 안쪽 작은 마
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
◇ 혹독한 추위, 각기 다르게 따뜻한 이웃에 기대어 겨울 난다
덕분에 잠시 따뜻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골목의 바깥으로 펼쳐진 거대한 추위에 맞서기 전, 작은 마을의 골목에서 잠시 몸과 마음을 녹인다. 골목 안쪽에서 드문드문 인기척이 들리고, 다시 꽃잎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동안에도 훈훈한 풍경만 흩날린다. 이 순간만큼 눈이 아니라 꽃이라 생각한다.
한밤중에도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쌓여 갈 것을 목적으로 내리는 눈은 거대한 겨울의 욕망 같았다. 별도 달도 없는데 오래토록 환한 밤. 몇 번의 뒤척임 끝에 하얀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여전히 꿈처럼 하얗게 펼쳐진 세상이다. 고요히 잠든 사람들의 골목을 벗어나면 오로지 무채색의 풍경 뿐이었다. 겨울이 끝나면 이곳도 사람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각자의 색으로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흰 눈 뿐이다.
▲세븐스타나무. 줄지어 선 자작나무 언덕 역시 광고배경이 되어서 사람들 발길을 묶는다./사진=변종모
며칠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눈의 세상이다. 도시에 굴러다니는 눈이 아니라 한 번도 침범 당한 적 없는 순백이다. 내가 본 유일한 순백의 풍경이다. 며칠 째 꿈같은 세상에 놓여있다. 아니다 꿈과 현실을 동시에 걷고 있다. 사실,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눈의 언덕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 세월의 흔적을 감춘 듯 비밀스런 둥근 언덕, 표정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나무 한 그루. 새하얀 눈에 덮인 언덕은 음흉하지도 않고 발랄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눈의 언덕 가운데 홀로선 나무가 어떤 날은 거대하게 보였다가, 어떤 날은 하얀 케이크 위에 꽂힌 작은 장식품 같기도 했다. 그게 소설의 한 문장처럼 깊이 박혀 타게 된 비행기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무를 마주하고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다. 눈이 오는 날이기도 했고 해가지는 저녁이기도 했다. 마주하는 풍경은 사진에서 보다 깊고 거대했다. 수시로 달라지는 눈의 힘을 본다. 거대한 나무는 폭설에 잠시 사라지기도 했고, 커다란 그림자를 앞세우 고 성큼 다가오기도 했다.
◇ 홀로 굴파고 추위 먹으며 살던 우리들, 따뜻해지자 의연해지자
사진에서 알 수 없었던 나무의 일상을 대면하자니 비밀을 엿본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능선을 나타내는 표식처럼 간혹 한 그루의 나무가 서있거나, 어쩌다 숲을 이루어도 황량하고 휑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더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풍경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행복하고 포근한 웃음을 겨울하늘에 피워 올렸다. 사람들도 풍경처럼 보기 좋았다. 온통 새하얀 풍경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주인공이 되고 빛이 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새하얀 배경으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거나 아예 새하얗게 파묻혀도 그것대로 풍경이 되어 아름답다.
누가 가더라도 어떤 것들이 놓이더라도 말이다. 확실히 눈은 스스로 빛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빛내거나 함께 빛내는 일로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날카로운 겨울이 내 안에서 점점 무뎌지고 있다. 도착하고 보니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가 사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진 속의 나무를 닮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의 깨지고 상처 난 부분을 고요의 풍경에 담그고 해열시키기 좋은 곳. 걸리적거릴 것 없는 이곳에서 한 번쯤 고요하자./사진=변종모
안으로나 밖으로나 잠시의 고요도 없이 분주하게 사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살며 긁힌 마음 하나 위로하고자 홀로 추위를 파먹으며 굴처럼 은밀하게 살아도, 결국은 내 안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적막을 깬다. 자주 눈보라를 일으킨다. 쉽게 흔들리는 마음은 고요에 익숙할 틈이 없다. 어지럽고 복잡한 풍경 안에서는 내가 나를 잘 볼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 이곳의 겨울나무처럼 발을 묻고 서서 내 앞에 그어진 능선을 닮고 싶었다. 심하게 바람이 불거나 거칠게 눈발이 날려도 잠시 흔들릴 뿐 결코 심하게 넘어지거나 주저앉은 적 없는 저 나무를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엔 하늘과 하늘을 닮은 능선과 내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예컨대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함은 새롭게 써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당신의 깨지고 상처 난 부분을 고요의 풍경에 담그고 해열시키기 좋은 곳. 걸리적거릴 것 없는 이곳에서 한 번쯤 고요하자. 고요히 나만을 빛내어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하자. 어느 날 또 눈보라처럼 흔들리는 겨울이 오면, 나는 좁고 소박한 이 골목의 끝에 걸린 새하얀 눈의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러 올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싶을 것이다.
PS 작지만 꽉찬 눈의 나라로의 여행
▲비에이 대표적인 모델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홋카이도의 중심 삿포로에서 북쪽으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곳. 비에이. 우리나라에서 겨울철엔 부정기적으로 비에이와 가장 가까운 아사히가와 공항으로 직항편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날씨에 변동이 많은 편. 겨울이라도 렌트카를 신청하면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아름답게 펼쳐진 라벤더가 장관을 이루며, 시원한 날씨 때문에 내국인 여행객들이 많아서 오히려 호텔예약이 힘들 수 있다.
대부분 삿포로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오기도 하지만, 1박 2일 코스나 그 이상 며칠 여유롭게 머물며 순도 100%의 겨울 풍경을 만끽하길 권한다. 작은 도시지만 인터넷에 소개된 유명 맛집이나 카페가 생각 보다 많아서 찾아다니는 재미 또한 크다. 온천을 즐기거나 겨울 레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02.20 "뛰어도 좋아" 층간소음이 즐거운 마을, 이란 마슐레
이웃에게 내 지붕을 마당처럼 내어주는 곳, 예민하지 않고 긴밀한 사람들
“시끄럽냐고? 뛰면 좋은 일있나 싶어 나도 신나"
산비탈의 수평 아파트같이, 깎지 끼듯 연결된 마을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작은 마을 마슐레. 지붕이 골목이고, 골목이 곧 지붕인 이상한 마을이다. 부산항에서 바라보는 감천마을 혹은 전철역에서 바라보는 북악스카이웨이쪽 성북동 같다. ./사진=변종모
카스피해로부터 번져오는 겨울안개가 밥 짓는 굴뚝의 연기처럼 뭉근하게 밀려오는 아침이면 허기가 졌다. 심하게 허기지는 아침이면 간밤의 꿈이 길었을 것이다. 끝없는 골목처럼 얽힌 꿈들이 자주 안개처럼 찾아오던 나날들이었다. 이 산중에 여행자라고는 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어떤 경쟁도 두려움도 없는 환대 속의 나날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꿈을 꾸었다. 좋은 꿈을 꾸었다. 불안을 동반하지않는 낯선 곳은 아주 오랜만이다. 더군다나 이란의 북쪽 깊은 산중의 마을 마슐레(Masuleh)였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합류하는 국경에서 멀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란의 최북단에 가까운 곳이었다.
카스피해의 거친 겨울안개와 살을 촘촘하게 저미는 추위가 날마다 구름처럼 찾아오는 이유로 외부인의 발길이 뜸했다.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작은 마을은 지붕이 골목이고, 골목이 곧 지붕인 이상한 마을이다. 바깥으로 드러난 개미굴 같기도 하고, 조각가의 엉성한 작품 같기도 하다. 한밤중에 방문하게 된다면 거대한 빌딩이라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 산비탈 아래로 층층이 박힌 별빛 같은 불빛들을 무심하게 흘려보면 거대한 빌딩처럼 뭉쳐 있다. 집과 집의 간격이 없다. 그냥 길게 누워있는 아파트 같았다. 다만, 수직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늘어선 구조가 여러 단으로 산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마치 부산항에서 바라보는 감천마을 같거나 전철역에서 바라보는 북악스카이웨이쪽 성북동 같았다.
◇ 여행자 없어, 여기저기서 사랑받는 귀한 손님된 기분
오래된 역사와 전통생활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어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 이란의 10대 관광지다. 그런데도 여행자가 없다. 덕분에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나는 귀한 손님이 되었다. 이러다 버릇없는 여행자가 될까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겨울의 마슐레는 사랑하는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사랑받는 느낌에 가까웠다.
▲밝고 환한 마슐레의 아이들./사진=변종모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끌려오다시피 짐을 풀게 된 숙소는 겨울철에 문을 연 유일한 숙소였다. 숙소까지 도착한 배낭은 버스 뒷자리에 앉았던 학생이 한사코 자기가 메겠다며 들춰 업고 신나했다. 버스를 타고나서부터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내가 힘들여 한 일은 그들의 관심에 웃는 얼굴로 화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 방은 골목 위 구름다리처럼 방바닥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창문을 열면 앞집의 옥상이자 골목이었고, 지붕위로 아이들이 지나가거나 조그만 수레들이 분주히 오가기도 했다. 누군가의 실수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무심코 쌓아놓은 블록 같은 집들이 그런 식으로 이어져 결국 마을을 이룬다. 그것도 경사가 급한 산의 각도를 따라 아름답게 치장되었다.
산이 두꺼운 겨울외투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집들은 산의 액세서리처럼 투박한 흙이나 돌로 엉겨 따뜻하다. 골목의 아래 칸은 주로 상점이나 찻집이 팔짱을 낀 듯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빵을 굽는 집이 마을의 맨 위쪽에서 저녁 짓는 굴뚝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관공서나 예배당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전부다.
사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작은 마을이다. 딱히 볼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첩첩산중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할 뿐이다. 하지만 여러 날 이 골목을 떠나지 못했다.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아침에 차를 마시러 오라고 했고, 그 약속이 진심인 것 같아서 그러겠노라고 했는데, 대장간 잠시 들린 화가의 손에 이끌려 화실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는 식이였다.
▲깎지끼듯 옆으로 이어진 마을./사진=변종모
빵집 앞은 지나갈 때마다 끌려갔고, 찻집은 자진해서 들어갔다. 하릴없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불러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첩첩산중의 마을에서 예상외로 바쁜 여행자가 되었다. 골목이 깍지를 끼듯 결속된 것처럼, 사람들은 또 그렇게 살갑고 예스럽다.
◇ 지붕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200원짜리 빵(바르바리라고 불리는두꺼운 난)을 굽는 청년에게 물었다. 지붕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시끄럽거나 신경 쓰이지 않은지. 화덕처럼 벌겋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급하게 뛰어다닐 일 없고, 만약 사람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면 좋은 일이 있는 거니까 자다가도 뛰어나가고 싶어진다고.”
안개가 심한 날이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내가 본 골목의 표정들과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들을 그렸다. 대장장이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가 빵 굽는청년의 표정이기도 했다. 찻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내가 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차마 화가에게는 보여주지 못할 실력이지만 그들이 좋아했다. 마을의 지붕을 그리면 길이 되었고, 길을 그어나간 선들을 바라보면 어느 귀퉁이에서 누굴 만났는지 기억이 났다.
이것이 다시 꿈에 나타나거나, 어느 날 현실에서 꿈처럼 기억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안개처럼 희미해질 기억들을 선명하게 그어나갔다.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오래 마주하는 일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였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골목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란의 할머니. 이 골목과 평생 많은 것을 나누며 살았을 것이다./사진=변종모
“이란은 천사들이 사는 곳.” 오래된 여행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었다. 그 말을 가장 실감나게 하는 곳이 이 산중의 깊고 가파른 골목에 있다. 단지, 긴 시간만이 인연의 결속을 보장한다면,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과 내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좁은 골목처럼 쌓아 올린 것이 있다. 나란히 차를 나누어 마셨고,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당신의 고단한 생활에 대해서 말없이 여러 잔의 차를 비웠다.
◇ 낯선 곳의 다정함, 말은 달라도 잘 웃고 들어주는 사람들
낯선 곳의 다정함이 발을 묶는다. 판단력을 흐린다. 마음이 약해진다. 자꾸만 마음에서 변명이 생겨난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던 사람들. 잘 웃어주고 끝까지 들어주던 사람들. 말이 달라도 웃는 게 같아서 가능한 일들. 사람들의 관심이 결코 성가시지 않는 이유는, 좋은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에게 나의 지붕을 마당처럼 내어주고, 나 또한 이웃의 지붕을 나의 길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예민하지 않고 긴밀했다.
왜? 성가시지 않겠는가? 왜? 불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가시고 불편함 보다 더 내밀한 것이 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하게 되는 골목. 골목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으니 그만큼 가까운 일상. 골목이 이어 놓은 것은 길 뿐만 아니라 생활이거나 그 이상의 삶까지 연결시킨다. 함부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파트처럼 층층이 쌓아 올린 이 골목의 삶에, 한동안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포함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작은 마을이다. 딱히 볼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첩첩산중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할 뿐이다./사진=변종모
“샬람~” 겨울 골목을 따뜻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릴 수 없어도, 그리지 않아도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환한 얼굴들을 좁은 골목 어디에서나 만나는 곳. 어느 추운 겨울날, 낯선 손을 마주잡고 비탈진 골목의 안쪽을 걷는 꿈을 꾸게 된다면 분명 그곳일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려해도 그날의 기억들이 따뜻하게 찾아올 것이다.
PS 마슐레 찾아가기
북쪽에서 내려오거나 테헤란 쪽에서 올라가더라도 라쉿(Rasht)이라는 곳을 거치거나, 푸만(Fuman)에서 미니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올 수 있는 곳. 둘 다 비용은 아주 저렴하다. 합승택시나 미니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올 수 있는 곳. 둘 다 비용은 아주 저렴하다. 합승택시나 미니버스는 사람들이 다 차야 출발한다. 이란에서는 기다려야할 일이 기본적으로 많다
마슐레는 주로여름 휴양지로 각광받는 곳이라 겨울철 방문에는 마음의 준비가 적당히 필요하다. 반대로 비수기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저렴한 숙소지만 아파트형 원룸처럼 욕실과 TV, 가스레인지 가스난로가 있고, 무엇보다 이 풍경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압권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눈물 나게 춥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03.08 물감 ‘난장’으로 여자들 스트레스 푼다 - 인도
한 해의 마지막 보름달 뜨는 날, 홀리 축제 여는 인도
매 년 3월 초순, 물감 ‘난장’으로 여자들 스트레스 푼다
부자, 걸인, 동물, 종교인과 여행자 모두 한데 모여 컬러풀한 잔치
▲인도에서 열리는 홀리 축제. 비르사나 지역이 가장 격렬하다. 여자들이 라티라고 불리는 대나무막대기로 남자들을 때리거나, 물감을 뿌리며 옷을 찢기도 한다. 여성의 억압과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동시에 남자들의 액운을 씻어 낸다. 축복을 기원하는 사랑스러운 폭력이다./사진=변종모
새해가 시작되는 봄, 소년은 나에게 노란색 물감을 힘차게 불었다. 카메라 렌즈너머로 환하게 웃는 소
년은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난 듯 건강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능청스런 표정과 진지한 듯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다. “친구, 이리로 가면 온통 물감에 젖어서 카메라마저 못 쓰게 될지도 몰라.” 그가 가리킨 곳은 골목의 바깥이었다. 소년은 대단히 은밀하고 정요한 정보를 내게 넘겨준 듯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그 골목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축제의 골목에 도착하려고 15년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흰두력으로 그 해의 마지막 보름달이 뜰 때, 본격적인 새해가 시작된다. 이때 인도 전역에서 화려하게 열리는 홀리(Holi)축제는 이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고해도 과장이 아니다. 보통 양력으로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가 이에 해당하는데, 우리의 봄과 그들의 새해가 같이 시작되는 것이다.
홀리는 짧게 이틀에서 길게는 일주일 동안 인도 전역의 골목을 형형색색의 물감이 아름답게 물들인다. 화려한 색채의 나라 인도. 그 중에서 더욱더 화려해지는 홀리축제. 오래 전부터 인도를 자주 다녔다. 하지만 홀리기간에 여행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처음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처럼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흥분된 상태였다.
◇ 이웃에게 물감 던지며 행복 전하는 날
인도를 여행 한지 15년 만에 처음. 모든 처음은 그렇게 설레고 긴장되는 것일까? 도무지 몸과 마음 모두가 진정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인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아주 편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인도라는 나라는 매번 새롭기만 하다. 홀리의 발상지 바르사나(Barsana)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도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홀리축제를 본 적이 있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
고 있었지만 현지인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홀리는 짧게 이틀에서 길게는 일주일 동안 인도 전역의 골목을 형형색색의 물감이 아름답게 물들인다./사진=변종모
출발역에서부터 옆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얌전히 창밖을 보던 대학생이었다. 그냥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 보다 환하게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말문을 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홀리를 봤지요. 내가 태어난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이 홀리의 고향 바르사나예요. 굉장한 날들이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며칠간 계속 축제가 열리는데,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매일매일 즐거운 날들이지요.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하고, 이웃에게 물감을 던지며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날이기도 해요.”
왼손에 쥐고 있던 이어폰에서 축제의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년도 축제기간에 맞춰 가족들을 보러 집에 가는 길이라며, 혹시라도 길에서 만나게 되면 내게도 흠뻑 물감을 던져 축하해 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청년 보다 먼저 내렸고 청년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해피홀리(Happy Holi)”를 외쳤다.
축제가 시작되려면 며칠 남았지만 축복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배낭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작은 간이역을 빠져나오자 색색의 물감이 든 바구니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빨강, 노랑, 초록 등 대여섯 가지 색의 바구니들이 끝없이 반복되며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 바구니들만 제외하면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지만, 확실히 사람들은 먼 여행을 앞둔 사람들처럼 상기되고 더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인도의 새해가 열리고 봄이 되는 날이다. 한국에서도 막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차림으로 화려하게 피어날 꽃망울을 기다리는 봄일 것이다. 이미 인도의 온도는 우리나라의 한여름 보다 높은 열기를 뿜고 있었지만, 조금 더 뜨거운 인도의 한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물감으로 물든 길을 걸어가는 여인/사진-변종모
축제의 첫날, 이른 아침부터 쿵쾅거리는 음악소리 때문에 맞춰놓은 알람보다 일찍 잠이 깼다. 이미 축제가 시작된 것 같아서 서둘러 사원으로 향했다. 마을입구부터 사원까지 이어진 골목에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사방에서 총 천연색 물감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지붕 위에서부터 담장 위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부터인지도 모르게 물감들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고, “해피홀리”라는 축복의 인사도 끊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골목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감을 날리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 여자들은 라티라는 대나무 막대기로 남자들의 액운 쫓아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작대기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까지, 사원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모인 사람들 모두 한 몸이 되어 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는 축복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준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부자들과 사두들에게 공양을 하는 사람들, 구걸을 하는 걸인들과 그 사이를 열심히 오가는 개나 원숭이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나 같은 여행자들이 있다.
모두가 비슷한 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같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축복을 했다. 물감을 구하지 못한 여행자에게 자신이 가진 물감을 나누기도 하고 물감을 애써 피해 다니는 낯선 여행자들도 간혹 있지만,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그 골목 안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축복이다. 봄을 축하하고 새해를 축하하고 처음 보는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화려한 퍼포먼스다.
난드가온이 고향인 크리슈나와 이웃마을 바르사나에 사는 그의 연인 라다. 크리슈나가 연인 라다의 마을을 방문해 장난을 걸었고, 이를 라다와 친구들이 쫓아내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바르사나와 난드가온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홀리가 열린다. 여자들이 라티라고 불리는 대나무막대기로 남자들을 때리거나, 물감을 뿌리며 옷을 찢기도 한다. 여성의 억압과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동시에 남자들의 액운을 씻어 낸다. 그러니까 일종의 사랑의 매인 셈이다.
▲물감을 뒤집어쓴 남자들./사진=번종모
사랑으로 가하는 힘. 여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가하는 힘은 축복을 기원하는 사랑스러운 폭력이다. 이밖에도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홀리축제가 인도전역에서 이루어진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 밤, 신화 속의 마녀를 태우는 의식에서부터 사원 가득 꽃을 뿌리거나 물감을 뿌리며 가장행렬을 하는 곳도 있다. 지역이나 날짜에 따라서 다양한 축제가 만들어지지만, 한 해의 행복과 건강과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의미는 어느 지역이나 같다.
도시를 옮겨가며 일주일 내내 축제를 따라 다녔다. 각 지역의 집집마다 골목마다 시작되어 사원까지 이어지는 모두의 축제. 좁고 어지럽게 이어지는 골목 안에서, 태어나 가장 많은 축하의 말과 축복의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갚는 방법은 그들과 같이 “해피홀리”하고 외치며 함께 즐기는 일이 유일했다. 참으로 묘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열광적이고 광란에 가까운 시간도 있었다. 무질서와 아우성도 따라다녔지만 결국 서로에게 행복한 얼굴로 축하의 말을 전달하며 다가오는 1년의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은 같았다.
이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축하의 새해가 매년 인도에서 열린다. 한 번쯤 그 골목에서 총천연색의 물감으로 당신의 한 해를 축복받아도 좋을 일이다. 어쩌면 그 한 번이 살아가는 동안, 평생의 축복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봄, 누구도 축복을 피해갈 수 없었던 축제의 골목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이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축하의 새해가 매년 인도에서 열린다./사진=변종모
PS 홀리축제 즐기기
흰두력에 의해 결정되는 홀리는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므로 인도 관광청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인도 전역에서 크고 작은 홀리축제가 진행되므로 꼭 특정한 장소이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바르사나(Barsana)와 난드가온(Nandgaon) 그리고 브린다반(Vrindavan)과 마투라(Mathura)에서 열리는 일주일간 일정에 맞춰 돌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델리로부터 3~4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2018년 홀리축제는 3월 2일에 열렸다.
◆03.26 살구꽃, 배꽃이 지천에... 히말라야의 꽃밭 '훈자'
세계최고 장수 마을, 파키스탄 훈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배경이 된 곳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니 꽃처럼 순해졌다
▲방대한 히말라야의 꽃밭, 봄의 훈자./변종모
다시 파키스탄 훈자(Hunza)였다. 두 번의 여름을 지낸 이곳에 다시 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에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Nausicaa Of The Valley Of Wind, 1984)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 그야말로 그림 같은 마을. 아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그림 보다 아름다운 마을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림 속에는 내가 없기 때문에.
그림 보다 아름다운 봄의 훈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박 한 달간의 봄을 지냈다. 아니 살았다. 파키스탄의 최북단으로 중국과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북인도의 가장 깊은 히말라야를 경계로 우뚝 솟은 마을 훈자. 3월 말의 훈자는 봄이 아니다. 국가 간을 연결하는 도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 KKH(카라코람하이웨이, Karakoram Highway)를 관통하는 곳이니 봄이 더딜 것이다. 봄이라는 단어에 세상 모든 따뜻한 감정들이 다 녹아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 했지만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 눈발이 곧 꽃잎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 알고서 견디는 마음이 더욱 지루하지만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인 것처럼, 훈자의 봄도 그랬다. 세상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결재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새하얀 꽃의 세상이었다. 한 번 시작된 꽃의 속도는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이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더욱 짧은 봄날의 추억이 계곡처럼 깊다.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은 처음이었다.
▲한 번 시작된 꽃의 속도는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이 막무가내다./변종모
이곳이 고향인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문을 연 숙소도 몇 없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식당 때문에 불편의 날들이 많았지만, 꽃이 피기시작한 때부터 모든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매일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나도 꽃처럼 순해졌거나 조금 아름다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천지가 꽃이다. 때로는 꽃 속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꽃이었다가 흔들리는 꽃잎이 이웃집 아이의 얼굴 같기도 했다.
꽃이 가장 흔한데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꽃이다. 훈자의 주 수입원이 되는 살구꽃이 대부분이었고 체리나 사과, 아몬드나 배꽃들이 비슷한 시기에 어우러졌다.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튼실한 열매가 되는 날 또한 머지않아서 사람들도 꽃의 속도에 맞춰 움직인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일정은 자연의 변화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겨우내 묵었던 살림을 봄바람에 털어내도 지천으로 꽃잎 날리고, 부지런히 밭을 일구는 동안에도 늘 꽃밭이었다. 아이들은 꽃 속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머리 위에 꽃잎을 이고 햇볕 드리우는 담벼락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다. 그 풍경을 보는 마음이 꽃처럼 좋아졌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평화가 날마다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세상의 속도에서 밀려난 삶을 사는 이유로 천국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속한 삶. 이 척박한 산중이 세계 3대 장수마을에 속한 이유도 그게 전부가 아닐까. 대단한 음식도 없고 편리한 시설도 없으며 풍족한 것이라곤 오로지 자연이 주는 것뿐인 곳.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제 몸을 스스로 움직여 땀 흘리고 사는 삶이 보통의 삶으로 아는 사람들. 까마득히 솟아 오른 만년설의 히말라야와 눈이 녹은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땅.
▲꽃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곳. 그래서 나도 꽃이 되는 곳. 세계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변종모
유일한 공해는 새들이나 염소들이 우는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마을. 정전이 되는 밤이면 별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곳. 더러는 이곳의 누군가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희망을 품고 도시로 나가기도 하겠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이곳만의 정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나열할 수 있
는 곳. 그런 것들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 사계절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며 품는 삶은 표정으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꽃잎 같은 아이들도 많지만, 아이의 얼굴처럼 맑고 밝은 얼굴을 가진 노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곳. 그래서 이곳은 걷기만 해도 배움이 되고,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해도 교훈이 된다. 훈자를 다녀간 많은 여행자들이 경치에 대해서 말하지만 끝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사는 곳을 닮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다음 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기 해마다 꽃이 사태 지는 이곳이고 싶다.
깊은 산중의 봄은 길지가 않았다.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던 봄이 무참하게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가슴 속으로 금이 간다. 골목길에 뿌려지는 새하얀 살구꽃잎을 밟으며 잠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 사과 꽃이었는지 배꽃이었는지 무슨 꽃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에 어머니의 머리 위로 소복하게 내려앉던 그 꽃잎을 할머니가 이고서 간다. 골목을 돌아 텃밭을 지나 저 멀리 살구꽃이 사라지는 설산방향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다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또 금방 봄눈처럼 쌓인 꽃잎들.
▲히말라야의 설산을 배경으로 핀 꽃./변종모
바람아 불지마라, 누구도 이 꽃잎을 흔들지 마라.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생겼다. 그대, 세상에 지쳐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 싶으면 이곳을 천천히 걸으라. 걷다보면 느려질 수밖에 없는 골목들. 꽃과 같은 젊음이 인생의 짧은 한 때라면, 이곳에서의 젊음은 조금 더 길게 찾아온다. 꽃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곳. 그래서 나도 꽃이 되는 곳. 세계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로 꽃을 밟으러 가자.
PS 서울 벚꽃 필 때 훈자 살구 꽃 핀다
겨울의 끝이라 생각하며 준비해야할 것들이 있다. 난방이 열악한 이곳의 사정에 맞춰 방한 준비는 필수다. 이른 봄은 여행자들이 뜸한 시기라 문을 연 식당도 먹거리도 많지 않다. 그래도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의 대부분은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은 기본 24시간 이상을 생각해야하며 길기트까지 비행기가 있으나 장담할 수 없으므로 가장 많이 준비해야할 것이 시간과 인내다. 바랄 것이 있으면 행운이기도 하다. 친절하고 순한 훈자마을 사람들 사이를 꽃밭을 걷듯 예의바른 여행자의 마음가짐 또한 가장 먼저 챙겨야할 덕목이다.
◆04.16 "마음이 찜찜한 자, 물세례를 받으라" 라오스의 봄맞이
라오스의 가장 큰 명절, 서로 물양동이 뒤집어 씌우는 물축제
“늦어도 좋아” 4월에 새해 여는 느긋하고 시원한 방식
▲사람들은 축제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커다란 양동이와 대야 그리고 물을 담을 수 있는 각종 그릇들을 죄다 꺼내놓고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변종모
어릴 적 새해가 되면 아버지는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묵은 공기를 환기시키시며 가족들에게 대청소의 임무를 주었다. 내가 했던 일은 마당에 나가서 이불을 털거나 신발정리를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어떤 행위를 하든 하지 안 든 마음속으로부터 이미 시작되는 한 해. 그런 한 해의 시작을 뜨거운 4월의 어느 날 낯선 골목에서 온몸으로 찬물을 맞으며 시작한다.
◇ 일주일동안 펼쳐지는 4월의 물세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Vientien). 처음 도착한 날이 라오스의 전통 새해, 피마이(Pi Mai Lao)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라오스의 피마이는 매년 4월 13일에서 15일 3일간 거행되지만 사실상 축제의 전후로 치러지는 행사들을 포함하면 거의 일주일 가까운 축제의 나날들이다.
전날 밤부터 메콩강가에서 들려오는 신나는 음악 소리가 골목골목 깊숙이 파고드는 바람에 여행자들은 이유도 없이 자연스럽게 맥주잔을 높이 들고 4월의 새해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4월의 새해. 이미 대지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날씨는 한 밤에도 에어컨 없이는 잠을 이루기가 불편했다. 이 뜨거운 날들에 시원한 축배를 든다.
사람들은 축제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커다란 양동이와 대야 그리고 물을 담을 수 있는 각종 그릇들을 죄다 꺼내놓고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호수가 문밖으로 나오고 골목 안쪽까지 물을 채운 양동이가 즐비했다. 자칫 급수가 필요한 뜨거운 가뭄의 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곁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축제의 한가운데 들어선 얼굴이다.
▲어린 아이들은 공식적인 악동으로 변하는 날이기도 하다./변종모
낡은 오디오에서 이름 모를 가수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일제히 차가운 물을 뿌리며 새해를 외쳤다. “속 디 피 마이(Sok dii pi mai),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월의 새해이니 만큼 그 목소리가 더 뜨겁고, 물을 맞는 사람들은 시원한 마음으로 서로를 부추겼다. 누구도 그냥 피해갈 수가 없는 골목. 의도적으로 집밖을 나오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물세례.
◇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물을 뚝뚝 흘리며 웃는 날
처음 보는 사람이든 이웃이든 인사와 축복은 누구에게나 이루어지는 일들이 3일간 밤낮으로 계속 되었다. 잊어야할 일들은 모두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온몸을 씻고 새로 태어나는 날. 피마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 같은 여행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축제를 즐겼다. 그토록 뜨거운 4월의 한낮에 시원한 물줄기를 피해야할 이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집집마다 양동이를 채우는 것은 깨끗한 물 뿐만이 아니라 푸짐하게 담겨있는 술과 음료수들 그리고 알록달록한 여러 가지의 과일들이 누구에게나 제공되고 공유되던 골목. 서민들의 최대의 잔칫날일 수도 있겠다. 고요하고 얌전한 라오스 사람들이 가장 경쾌해지는 날일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누구나 어깨동무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지나가는 누구나 물세례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분명 가해자는 있지만 피해자가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공식적인 악동으로 변하는 날이기도 하다. 물을 뿌리거나 색소를 첨가한 물주머니를 던지기도하며 가루를 뿌려 난처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다만, 즐거운 비명을 주고받을 뿐이다. 이처럼 뜨거운 날이 또 있을까? 새해를 축하하기보다 더위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물을 뚝뚝 흘리며 환하게 웃는 날.
▲불교의 나라답게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스님에게 공양하는 탁밧(Taakbaath)으로 아침을 시작한다./변종모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이 축제는 이미 라오스의 가장 큰 명절이 되었다. 축제의 첫 날은 지난해의 마지막 날로 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준비의 날이다. 그리고 둘째 날은 집안 곳곳과 골목 구석구석을 물로 대청소를 하며 새해를 맞이한다고 한다. 오래 전 아버지께서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묵은 먼지를 걷어내던 날이 이곳의 둘째 날이기도 할 것 같다. 셋째 날은 새해의 시작이다. 불교의 나라답게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스님에게 공양하는 탁밧(Taakbaath)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 물로 온 집안의 묵은 때 털듯 마음의 먼지도 훌훌 털다
낯선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축제를 봤다. 낯선 어는 골목에서 차가운 물을 흠뻑 받으며 새로 태어나는 날. 살면서 누군가에게 큰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내가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거나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후회되는 지난 시간을 스스로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워지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찬란한 4월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니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물세례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낯선 골목들과 인사하며 좋은 마음으로 다시 배낭을 메는 일. 여행자가 맞이하는 제일 큰 위로이거나 행복이 아닐까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든 이웃이든 인사와 축복은 누구에게나 이루어지는 일들이 3일간 밤낮으로 계속 되었다./변종모
혹독하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한창이다. 다시 시작해야할 마음이 있다면 지금도 늦지 않다. 언제든 어느 계절에든 늦지 않다. 깨끗하게 주변을 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내 마음에 물을 적시는 일. 그것으로 언제나 그날의 축제를 즐기듯 반성도 하고 웃기도 한다. 봄이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봄이다.
PS 순박하고 친절한 불교의 나라, 라오스
우리나라에서 직항 및 인접국가 경유편으로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15일 도착 비자를 받을 수
있다. 한 달 짜리 비자를 받으려면 사진 1장과 30달러를 내면된다. 라오스의 핵심 여행지는 수도 비엔
티안(Vientiane)에서 북쪽으로 방비엥(Vang Vieng)과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이라 할 수 있다.
비엔티안은 크지 않은 도시로 박물관이나 승리의 문 등 유적 중심의 여행을 하는 편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수 있는 방비엥은 산속의 호수 블루라군과 동굴투어와 카약킹과 짚라인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라오스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루앙프라방이다. 식민지시대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된 작은 마을을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여행이 되지만, 이른 아침 탁발행렬과 밤마다 열리는 야시장의 활기찬 분위기는 더운 열대지방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메콩강에 둘러싸인 루앙프라방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푸시산과 에메랄드빛 꽝시폭포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도로 사정이나 전반적인 편의시설이 열악하긴 하지만 여행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숙소와 식당 등 생각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 그러나 라오스 여행 중 가장 많은 감동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풍경이상으로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환대다.
◆05.06 바람아 불어라!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깨끗한 풍차 마을 - 스페인
봄바람 따라 떠난 풍차의 언덕, 그곳에서 맛본 순한 바람
라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의 배경이 된 곳
▲콘수에그라의 풍차./변종모
“너, 또 봄바람 불었구나.” 그렇다. 바람이 들었다. 나로서는 바람이 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때쯤, 마음속 어딘가에 커다란 풍차가 돌며 자꾸만 따뜻한 봄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속에서부터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배낭을 꾸렸다. 바람을 잠재울 방법은 없다.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가거나, 바람 속을 오래도록 헤매다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자리를 걷는 것이다. 간혹 나만 아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도 어김없이 바람이 불었다. 대부분의 사람도 나처럼 마음속 어디에선가 봄바람이 자주 분다는 것을 안다.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다.
◇ 봄바람 불면 생각나는 풍차 마을, 콘수에그라
바람의 서식지 콘수에그라(Consuegr)를 찾아 나선 것은 마드리드(Madrid)에 도착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많은 여행자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러 간 저녁에도 홀로 숙소에 남아서 하얀 풍차의 사진들을 봤다. 거대한 네 개의 날개가 단단하게 하늘로 뻗은 풍차들이 줄지어 있는 평온한 언덕에서 순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시원한 사진이라 생각했다.
사진 속 바람이 회오리처럼 빨아들이는 시간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어릴 적 처음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 무모하고도 용감한 돈키호테가 좋았다기보다 이국적인 이름 자체가 좋아서였는지 모른다. 거대한 로봇이나 그 이상의 내가 본 적도 없는 어느 생명체의 이름 같았던 돈키호테가 용맹하게 한 판 승부를 걸었던 풍차. 그 풍차를 보게 된다면 나도 어떤 새로운 도전이나 희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배낭을 꾸렸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 속에 오래도록 돌고 있던 바람의 실체를 보러 간다는 마음에 무조건 긍정적이고 좋은 마음이 되어 길을 나섰다.
▲풍차 마을 콘수에그라는 낮은 집들이 이마를 맞댄 작은 시골 마을이다./변종모
버스가 마드리드 외곽으로 달린 지 정확하게 두 시간 만에 도착한 콘수에그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도시라고 하기엔 그물처럼 빈틈이 더 많은 곳이다. 하루에 겨우 서너 번의 버스가 지나가고, 그보다 드물게 여행자들이 텅 빈 정류장을 이용했다. 그래서 좋았다. 낮은 집들이 이마를 맞댄 오래된 마을은 차분하고 단정해서 낮잠이 저절로 올 것 같다. 실제로 잠꼬대 같은 어눌하고 수줍은 소리로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확연히 마드리드의 경쾌한 소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만난 마을의 골목 끝. 바람의 냄새가 났다. 그 끝에 걸린 바람의 표식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골목 끝으로 아련하게 보이는 거대한 풍차는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소설 속의 실체이자, 근거 없이 자주 불어대는 바람의 상징이기도 했으니 익숙하고도 반갑다.
바람을 엮어내는 거대한 날개는 하늘의 창문처럼 반듯하고 견고했고, 희고 둥근 몸체는 허공의 등대처럼 우뚝하다. 그 곁에 서고 싶어서 자주 내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오래된 마을 언덕 위로 펼쳐진 바람의 집들. 마치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바람이 잉태되어, 몇 개의 대륙을 떠돌다가 끝내 너와 나 사이를 시원하게 통과할 거라 상상했다. 그때마다 너는 내게 웃어주었을 것이고 나도 너를 닮은 모습으로 웃었을 것이다.
◇ 풍차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순한 바람
답답한 마음이 자주 찾아올 때마다 이런 풍경들을 떠올리며 위로했던 시간의 실체에 나는 발을 딛고 있다. 한낮의 뙤약볕도 깊은 밤의 별들도 이 바람을 맞고서 자라듯 이곳을 스치는 모든 것이 막 태어난 공기처럼 신선했다. 마을의 성당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도 하릴없는 카페의 빈자리에도 순한 바람처럼 부드러운 공기가 흐르던 곳.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아름다운 풍차의 언덕이 깨끗한 눈과 밝은 마음이게 한다. 잘 왔다고 생각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바람을 엮어내는 풍차들./변종모
꽉 막힌 진공의 나날들. 지친 밤이거나 피곤한 오후에도 우리가 끝내 주저앉지 않는 이유는 내 안의 선선한 바람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믿는 것들. 그 방향으로 부는 바람을 생각하며 천을 짜듯 바람을 엮을 것이다. 은밀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바람의 깃발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든, 나만 아는 곳에 거대하게 세워둔 풍차를 보러 가는 날까지 바람 속을 걷듯 걷는다. 조금 흔들리거나 잠시 멈춰도 상관없다.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에 언젠가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콘수에그라의 풍차 언덕에 있는 낡은 성에서 내려다본 목가적인 풍경./변종모
PS 마드리드에서 풍차의 풍경 라만차까지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곳은 마드리드(Madrid)다. 수도 마드리드는 모든 건축, 예술, 스포츠를 막론하며 지리적으로 중심부에 위치한 관계로 도시 간의 연결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3대 미술관에 속하는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박물관과 왕궁들 역시 빼놓을 수 없으며, 운이 좋다면 세계적인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다. 근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다양한 분위기의 소도시들이 많은데 중세도시의 면모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톨레도(Toledo)와 절벽 위의 도시 쿠엥카(Cuenca), 스페인 최대의 로마 유적지 메리다(Merida)와 세고비아(Segovia) 등 마드리드에 짐을 풀고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다.
풍차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마드리드의 톨레도(Toledo) 근교 라만차(La Mancha) 지역에 세 곳이 모여 있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엘 토보소(El Toboso), 콘수에그라(Consuegra)는 서로 멀지 않은 곳이라 자동차를 이용한다면 하루 만에 충분히 둘러볼 수도 있다. 기차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는 하루에 한 곳 정도를 목표로 여유 있게 방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각 지역별로 풍차의 개수나 분위기가 다르다. 콘수에그라는 풍차 언덕에 있는 낡은 성에서 내려다보는 목가적인 풍경을 놓치지 말자. 그리고 엘 토보소는 돈키호테를 떠올리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박물관 관람도 좋은 볼거리다.
◆05.14 딱 한 곳만 여행할 수 있다면 여기 - 포르투갈
앉은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되는 곳, 포르투갈 포루투
해리포터 서점부터 맥도널드까지, 평범한 모든 것이 특별한 도시
▲동루이스 1세 다리에서 바라본 포르투./변종모
“꼭 일주일만 여행해야 한다면 어디를 가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시간은 많지 않으나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들렸다.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많은 분량의 일에 파묻혀 항상 피곤함을 달고 사는 이유로, 함부로 약속을 잡기도 미안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떠오른 곳이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였다. 사실 거리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나라 포르투갈. 도시 자체가 아름다운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느 골목을 걷더라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의 삶을 잠시라도 살아보고 오라 하고 싶었다.
◇ 구스타포 에펠의 제자가 설계한 동루이스 1세 다리
2천 년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고 오롯이 걸음마다 남아 있는 포르투는 언덕의 도시다. 수많은 언덕과 언덕의 굴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순한 건물들과 거리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여겨지는 곳. 하나의 언덕과 하나의 골목마다 다른 색깔의 노을이지는 곳. 바다와 강이 만나 항구가 되고, 부드러운 사계절이 있어 언제 가더라도 좋을 곳이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닌다면 하루에도 가능한 그런 곳에서 일주일이라면 누구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단연 동루이스 1세 다리다. 도시를 크게 끼고 도는 다로강(Rio Douro)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이 다리는 에펠탑을 연상케 한다.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보 에펠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가 설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다로강가의 오래된 도시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아스라한 골목들을 살피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하다. 나는 다로강 위에 걸쳐진 이 거대한 다리에 올랐다가 하루를 온통 강가를 배회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나 아닌 누구나 그럴 것으로 믿는다.
▲에펠탑을 만든 구스타보 에펠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에 의해 설계된 동루이스 1세 다리./변종모
다리의 남쪽 끝으로 내려오면 유명한 포투와이너리가 밀접한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이곳에서 거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대부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저렴하게 추천받을 수 있는 와인 한 잔이 다로강가의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혹자는 포투 와인 때문에 이곳에 머물며 매일매일 와인 투어를 하는 사람까지 있을 지경이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와이너리 투어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가 있는 곳
둘째 날부터는 그야말로 걷는 일이 전부여야 한다. 알고 걸어도 좋고 모르고 걸어도 상관없지만 시작은 상 벤투 중앙역이다. 수도원이었던 이 건물 내부에는 포르투 역사를 화려한 아줄레주 장식으로 꾸몄는데 타일에 정교하게 표현된 거대함에 압도된다. 역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과한 장식이 아닐까 할 정도로 정교한 표현들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역 안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여러 커플을 만나기도 할 만큼 인기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아줄레주 장식이 돋보이는 상벤토 중앙역./변종모
역을 빠져 나와서 가장 큰 중심가인 도스 알리아도스(Av. Dos Aliados)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를 만난다. 이 흔하고 흔한 프랜차이즈는 여기서 만큼은 각별하고 심지어 귀해 보이기까지 한다. 같은 값의 패스트푸드를 이곳에서 만나니 지금까지 내가 지불한 돈들이 어찌나 아깝게 느껴지던지. 아무것도 아닌 것들마저 특별하게 여겨지는 거리를 만난다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패스트푸드처럼 흔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시장도 있다. 시청 앞 골목에 자리 잡은 볼량시장(Mercado do Bolhao)은 100년이 넘은 곳이다. 아트리움 구조의 우아함이 있는 2층 건물은 화려하지 않아서 편하고 복잡해서 살갑다. 시장 어귀 꽃집에서 꽃 한 송이라도 사서 숙소의 창가에 꽂아두는 날이면, 당신은 이곳을 떠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 해리포터 서점이 된 동네 서점… 평범한 모든 것이 특별한 도시
오래된 골목으로 이어진 언덕들과 언덕들을 공룡처럼 덜거덕거리며 기어 다니는 트램을 따라 걷다 보면 점점 더 살고 싶어지는 거리.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아름다운 서점 이르마우(Livraria Lello & Irmao)는 1906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보존이 잘 되어 놀랍지만, 이곳에선 그냥 동네서점 같은 곳이다.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영롱함에 빠져, 책보다는 우아하게 디자인된 실내장식들을 살피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다. 이 밖에도 모든 평범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곳이 골목마다 이어진다.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고풍스러운 이루마우 서점./변종모
포르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언덕에 세워진 대성당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동루이스 다리 밑으로 이어지는 강가 카페의 거리.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사람들까지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귀한 풍경이 되는 곳. 큰마음 먹고 하는 외출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라는 점이 그저 부러웠다.
화려한 장식의 기차역을 통해 출퇴근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패스트푸드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며, 백 년이 넘은 서점에서 오후를 즐기며 골목골목마다 버릴 수 없는 감정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사람들. 그것을 느낄 때쯤이면 곧 떠나야할 당신도 잠시 살아본 것은 아닐까 착각할 만큼 부담 없는 도시. 강이 있어서 강을 즐기고 언덕이 있어 언덕을 즐길 뿐, 어디든 앉은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되던 일상. 이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즐기며 산다는 것이다.
사실, 여행은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여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여러분도 이곳에 다녀왔으면 좋겠다.
▲밤이 오는 다로강변의 아름다운 집과 카페들./변종모
PS 풍경에 취했다면 와인에 취할 차례
포르투에 도착한다면 꼭 한 번은 경험 해봐야 할 포트 와인. 영국인들은 이곳 포도의 산미를 줄이고 브랜디를 첨가해 숙성시켰다. 포트 와인은 달콤하고 진한 풍미 때문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아주 저렴한 와인부터 빈티지 100년을 훌쩍 넘기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 다양함을 한 번에 즐길 방법은 와인투어를 하는 방법이다.
1880년에 오픈한 와인 박물관과 매장을 겸하는 하무스 핀투(Ramos Pinto)는 Jardim do Morro역(주소: Avenida Romos Pinto, 380 전화: 223-707-000)에서 가깝다. 가장 오래된 와인 회사 크로프트(Croft)는 1588년에 세워진 회사로 15분 동안 무료 투어까지 가능하다. General Torres 역 근처(주소: Rua Barao de Forrester, 412 전화: 223-742-800)에서 가까운 거리다. 이 밖에도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와이너리가 많은데 현지 카페나 숙소에 문의하면 더욱 다양한 포트 와인을 만날 수 있다.
포르투는 작은 도시라 걸어 다녀도 충분하지만 낡은 트램을 타고 도시 외곽으로 이어진 해안을 즐기는 방법 또한 꼭 추천하고 싶다. 구시가에서 18번 트램을 타고 종점에 내려 천천히 산책하다 보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각종 해양 스포츠와 해안으로 펼쳐진 식당에서 만나는 해산물은 기대해도 좋다.
◆05.31 세상의 한 점이 되어…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
볼리비아의 광활한 소금사막...100억 톤이 넘는 소금 매장 땅
지프차를 타고가며 할 일이라고는 놀라고 또 놀라는 일뿐
고요 속에 길을 잃으면 하늘을 헤매고… 밤별들은 물 속에 고이고
▲지프를 타고 달리는 사막투어, 척박한 환경은 피곤함을 동반하지만 만나는 모든 풍경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변종모
새하얀 사막 위에 파란하늘. 그마저 밤이 되면 경계가 사라진다. 이 풍경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하얀 소금사막과 파란하늘. 실제로 이것이 전부다.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쉬운 풍경.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풍경. 하늘아래 덩그러니 펼쳐진 광활한 소금사막 하나를 설명하기엔 마음을 준비할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숫자만큼 각기 다른 설명을 해도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단순한 풍경 앞에 잠시라도 서 있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에, 어느 복잡한 대도시의 풍경을 설명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풍경에 익숙하지 않는 나는 이 풍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설명하기란 늘 그렇다.
◇ 100억 톤 넘게 매장된 소금을 딛고 서다
우유니 소금사막을 가기 위해선 주변 도시 어디에서 출발하더라도 대여섯 시간에서 족히 한나절 이상은 걸려야 가능하다. 비포장 도로를 구불구불 달려 도착한 시골마을 우유니는 마치 서부영화 세트장처럼 간소하고 황량하다. 사람들이 우유니로 모여든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밖에 없다. 소금사막. 새하얗게 펼쳐진 소금사막으로 달려 나가는 상상하나로 대륙을 건너거나, 세월을 기다렸거나, 드물게는 삶을 바꾸기도 한 사람들.
모두가 같은 목적으로 모여든 지구상의 유일한 동네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그곳엔 사막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사막을 지나 칠레 방향으로 넘나들 수는 있지만, 투어를 위한 개인적인 출발이 흔하지 않은 곳.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으로 투어를 알아보는데 온 신경을 다 쏟는다.
▲우기가 끝난 거울같은 호수./변종모
사막투어는 적게는 두어 명부터 많게는 대여섯 명 또는 그 이상까지 지프 한 대에 올라타고 합숙을 해야 하지만, 이 또한 아무런 불만의 요소가 못된다. 비좁은 지프를 타고가면서 오로지 해야 할 일은 창밖을 바라보며 놀라거나, 차가 멈추면 내려서 또 놀라거나이다.
그저 놀라고 놀란다. 세상이 이렇게 하얗다는 이유로. 하얗게 펼쳐진 소금사막 위로 파랗게 펼쳐지는 하늘만 존재해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마음은 마치 또 다른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 나도 점, 너도 점… 순백의 세상에서 원근감을 잃다
사막이 시작되면 드문드문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대신 세상의 모든 빛이 몰려온다. 어느 한 방향에서 몰려오는 게 아니라 어디서나 밀려든다.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라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그 눈부신 광경을 색유리를 투과해서 본다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지만 이내 그마저 얼마나 감사한 풍경인지를 깨닫게 된다.
차가 소금사막을 달리기 시작한지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섬이 하나 있다. 일명 ‘물고기 섬(Isla del pescado)’이라고 불리는 바위섬이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소금사막이 바다라면, 처음 닿을 수 있는 육지가 이 물고기 섬이다. 물고기를 닮았다고 해서 물고기 섬이다. 사실 몇 만 년 전 이 소금은 실제로 바다였으니 이 작은 섬은 그날로부터 한 번도 변함없이 섬이었을 것이다.
▲물고기 섬에서 바라본 광활한 사막./변종모
섬은 온통 바위와 바위틈의 선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천 년을 살아왔다는 선인장은 밖으로 드러난 물고기의 뼈처럼 날카롭고 견고하다. 망망대해 새하얀 사막에서 유일하게 떠 있는 물고기. 그 뼈처럼 돋아난 선인장 사이로 사막을 내려다보면 잠시 원근감이 사라지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비현실적인 느낌이라 말할 테지만 전라남도의 크기 만큼이나 넓은 공간에 얕게는 몇 미터에서 백 미터가 넘는 두께의 소금이 100억 톤 넘게 매장 되어 있는 소금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저 멀리 사막 속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떨어뜨린 점처럼 버티고는 있지만 걷는 것인지 그냥 서서 지평선을 응시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점 같은 존재가 나일 것이며 너이기도 할 것이고 우리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그야말로 하나의 점이다. 이 거대한 풍경 속에 너와 나는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 그러니까 또한 이 풍경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가. 몇 만 년을 변함없이, 변할 수도 없는 풍경으로 살아도 이리도 아름답다.
고작 마음의 작은 점 하나가 흔들려도 시시각각 아우성인 나를 보자면 반성하고 반성해야할 일이다. 내가 세상의 전부이고 유일하다 여기는 많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다 모으면 이 사막일까? 그렇다면 이 섬에 데려와 잠시 말없이 앉아 멀리 사라져가는 하얀 지평선을 보게 하고 싶다.
▲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인간은 작은 점일 뿐이다./변종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은 섬에 도착해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저 놀랍다고 잊혀지지 않는다고들 말하는 이유를 알겠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 속에 온전히 드러나는 나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곳이 여기 아니겠나.
◇ 고요해서 몽롱해지는 곳… 여기서 길을 잃으면 하늘을 헤매는 격
우유니 사막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장 좋은 시기는 이곳의 우기가 막 끝난 1월에서 3월 사이다. 소금사막의 절반을 벗어나면 빗물이 고여 거대한 하늘을 그대로 반영하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막을 달리면 달릴수록 헷갈린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을 달려도 자꾸만 마음에 쌓여드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보지만 역부족이다.
잠이 밀려왔다. 고요함에 익숙하지 않은 몸은 자꾸만 몽롱하다. 이미 꿈속을 걷는 듯 하지만 다시 현실의 꿈을 꾸게 된다. 만약 여기서 길을 잃는 다면 하늘을 헤매는 것이다. 잠시 다른 세계로 잘못 발을 디뎌 빠져나간 곳이 하늘인 것이다.
우기가 막 끝난 소금사막은 갑자기 하늘이다. 수면에 비친 하늘의 투명도가 너무나 선명해서 그냥 하나의 하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수면을 달린다. 말하자면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달리거나 걷는다.
▲우기가 끝난 소금사막, 수면을 달리다 보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든다./변종모
그렇게 온종일 새하얀 세상에 갇히거나 지상의 하늘에서 배회하다가 밤이 되면 그 역시 밤하늘이다. 수많은 별들 중 사소한 밝기의 별 하나까지도 고스란히 수면 위로 내려앉는 곳. 세상의 절반이 하늘이었다가 세상 모두가 하늘이 되는 곳. 그 속에서 잠을 청하는 일. 자꾸만 좋아하는 사람을 별처럼 떠올리거나 그리운 사람을 별빛처럼 건져대던 곳. 고작 하루를 달려 내가 이리도 밝아졌다면 여기서 멈추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도 좋겠다.
사막에서 하루를 지내고 칠레 국경 방향으로 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전날 봤던 새하얀 풍경 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이 칠해지는 풍경을 만난다. 두 가지 색의 풍경에서 총천연색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붉은 호수와 지구의 속살이 드러난 듯 여러 가지 물감들을 쏟아 놓은 듯한 황무지 산들과 신비한 연기를 피어 올리는 온천 그리고 가끔 만나게 되는 순한 짐승들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무리지어 춤추는 홍학들. 이 모든 것과 생생하게 마주한다.
▲홍학들의 서식지 붉은 호수/변종모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 되는 곳. 내가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 존재 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알려주던 곳.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걸으며 여러 명의 나와 만나게 되는 곳.
내가 나 사이를 걸으며 새로운 내 안의 수많은 골목들을 만나게 되는 곳. 내 마음에 평온한 지평선을 긋는다면 복잡할 일 없는 세상 아닐까. 아름다운 것을 경험한 사람은 끝내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PS 소금사막을 즐기려면
우유니 투어는 다양한 상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우유니에 도착하면 여러 군데의 여행사를 돌면서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의 가격과 혜택들을 잘 알아본 뒤 결정해야 한다. 밤하늘의 별과 일출만 보는 프로그램부터 일일투어와 1박 2일 그리고 가장 인기가 높은 2박 3일 투어로 칠레 국경을 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썬크림과 썬글라스는 필수겠지만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한 곳이라 방한장비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무엇보다 사막투어 중에 전기 충전할 곳은 많지 않다. 그나마 숙소에서도 잠시 전기 혜택을 받지만 이른 시간에 소등이 된다. 숙소에서 샤워비용까지 따로 받는다. 가능하다면 2박 3일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실제로 지루할 틈이 없다. 우유니에서 출발해서 칠레로 넘어가는 일정 안에 다양한 볼리비아의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다. 사막을 벗어나 각종 화산지역과 아름다운 호수들과 동식물 특히 홍학의 무리를 관찰하거나 온천에서 수영을 즐기는 일은 꼭 한 번 경험할 만하다. 아주 척박한 곳을 지나는 일이라 피곤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만나게 되는 모든 풍경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06.07 아바나와는 다른 진짜 일상의 '쿠바'를 원한다면 이곳
총천연색 아름다움 간직한 작은 시골 마을
가장 쿠바적인, 일상의 쿠바를 만날 수 있는 ‘트리니다드
▲마요르 광장에서 보는 일몰은 사진도 그림도 말로도 대체가 불가한 색을 선사한다./변종모
쿠바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단어들이 있다. 혁명이라든지 체 게바라, 아바나 방파제 그리고 헤밍웨이와 모히토(Mojito),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이 단어들은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나 가능한 상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쿠바에서 아바나를 제외하고, 단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어디를 가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 1초도 망설임 없이 ‘트리니다드’라고 대답할 것이다. 쿠바를 대표하는 아바나는 말할 것도 없이 다시 가고 싶은 곳이지만, 아바나를 제외하고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트리니다드다. 사실은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하게 트리니다드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트리니다드는 쿠바의 중앙 남부 해안에 위치한 곳이다. 지도상으로 아바나가 왼쪽 상단의 북부 해안 도시라면, 대각선으로 선을 그으면 짧은 선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비교적 버스 노선이 잘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트리니다드 행을 결정했다.
▲형형색색의 집이 모인 트리니다드의 골목에선 ‘진짜 쿠바’를 만날 수 있다./변종모
아바나를 제외하면 쿠바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시간 때우기 정도로 생각하고 찾은 도시. 그래서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생각도 계획도 없이 찾았기에, 더욱 짙은 인상이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첫인상을 말하자면 이렇다.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로 펼쳐진 형형색색의 골목들. 이 골목들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집집마다 다른 색으로 치장을 한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간격도 없이 기차의 객실처럼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집의 구분이 간격이나 담이 아닌 색깔로만 이어져,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그림처럼 서툴지만 정겨웠다. 둥근 돌들이 깔린 바닥은 유난히 성격 좋은 사람의 웃음처럼 부드러웠다. 화면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마저 거의 모델급 표정을 지니고 있다.
◇ 마요르 광장에서 본 노을, 잊을 수 없어
트리니다드 역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장 중심이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산따 아나 광장(Plaza Santa Ana), 까리히요 광장(Plaza Carrillo)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사실 마요르 광장만 지키고 있어도 트리니다드의 거의 모든 여행은 해결된다고 할 수 있다. 마요르 광장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트리니다드를 대변하면 소식의 장소다.
▲트리니다드의 모든 길은 마요르 광장을 통해 이뤄진다./변종모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을 한 번이라도 지나가게 된다. 그늘에 모여 앉은 노인들이 고요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고 하굣길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하며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을 관찰하는 낯선 이들의 학습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마을 뒷산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위치한 이곳에서 보는 일몰은 사진도 그림도 말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누군가 트리니다드를 간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노을이 끝나도 당신은 움직이지 말라.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밤이 짙어질 때까지 노을의 흥분을 가라 앉혀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의 트리니다드가 총천연색의 움직이지 않는 그림 같다면, 밤의 트리니다드는 화려하게 움직이는 한 가지의 색이다. 열광이라는 색.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색. 광장은 순식간에 무대가 된다. 흥이 전부인 쿠바인들 중에서도 이곳은 더욱 깊은 쿠바다.
카페에 펼쳐진 식탁 어느 곳에나 자리 잡고 잠시 있어 보시라. 광장의 오케스트라가 풀어 놓는 쿠바뮤직은 밤하늘 아래 가장 빛나는 소리로, 밤하늘 아래 가장 경쾌한 동작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시원한 맥주 한 병들고 신나게 열광할 수 있는 쿠바의 밤이 이어진다. 쿠바 중에서도 가장 쿠바적인 곳, 그곳이 트리니다드다.
▲밤의 트리니다드는 열정의 무대가 된다./변종모
PS 아바나 만큼 사랑하게 될 트리니다드
트리니다드 도시 자체는 작은 시골 마을을 떠올리는 수준이기 때문에 큰 재미를 바라고 가는 곳은 아니다. 그러니 트리니다드에서 짐을 풀고 가까운 해안을 찾는 방법으로 여행을 한다면 더 다양한 여행이 되겠다. 쿠바하면 떠오르는 카리브 해를 만끽해보는 일.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앙꽁 해변(Playa Ancon)이다. 길고 긴 해변 어디나 자신이 정하기만 하면 그곳이 휴양지가 된다. 해변이 워낙 길어서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국적인 푸른 풍경이 이어진다. 더군다나 퍼블릭비치이므로 무료로 드나들 수 있다.
한 번쯤 근교 잉헤니오스 농장(Valle de Ingenios)을 방문하는 것도 좋겠다. 트리니다드 남쪽 승강장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 도착하는 역에 있는 잉헤오니오스 농장의 상징은 거대한 45m 노예감시탑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100년 된 철교 등 6시간 동안 천천히 이동하면서 곳곳에 세워주는 기차여행이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 마요르 광장의 밤 공연이 주체되는 카페 ‘까사 데 라 뮤지카(Casa de la Musica)’는 춤을 추며 놀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입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근처 계단에서도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06.22 산 중의 '푸른 바다’... 그 곳에선 모두 열대어처럼 골목을 헤엄친다 - 모로코
파란 집들로 가득한 ‘산중의 바다’…마치 바닷속을 걷는 듯
해가 지면 더 짙은 젊음으로 거듭나는 파란 마을, 쉐프샤우엔
▲모로코 북쪽 리프 산맥 근처에 자리한 쉐프샤우엔은 마을 전체가 파랗게 물든 ‘산속의 바다’다./변종모
여름이 오고 있는데 왜 바다가 생각나지 않고 깊은 산중의 풍경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걸까? 분명 산속의 작은 마을인데 왜 내게 깊은 바다로 출렁거릴까? 그날 눈 앞에 펼쳐지던 파란 골목들이 마음속 깊이 푸른 물길을 내고 있다. 한 번쯤 나를 잘 믿는 착한 친구들에게 지중해처럼 푸른 바다로 가자며 그 산속으로 데려가고 싶어진다.
◇ 어느 계절에도 변함없이 푸른 ‘산속의 바다’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북쪽 모로코(Morocco). 모로코에서도 북쪽에 은둔한 쉐프샤우엔(Chefchaouen)은 리프 산맥의 언저리에 앉아있다. 도시라고 불리기엔 겸연쩍은 크기의 산중마을이다. 산중의 작은 마을에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마을 전체가 파랗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회벽에 파란 페인트를 칠한 것이지만, 한두 집이 아니라 골목까지도 온통 파란색으로 치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하얀 회벽의 집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풍경은 푸른 파도의 하얀 물거품처럼 느껴져 더욱 청량감을 더했다. 덕분에 어느 계절에 가더라도 변함없는 바다처럼 푸른 마을. 만약 아주 높은 창공에서 슬쩍 내려다본다면 산중의 호수라 착각할 수도 있겠다.
▲집도, 계단도, 골목도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다./변종모
쉐프샤우엔은 베르베르어로 “뿔들을 보라”라는 뜻이다. 마을 뒤로 삐죽하게 솟아난 두 개의 산봉우리 때문에 그리 지어졌다. 그래서였는지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은 어린 염소 뿔처럼 철없고 맹랑했다. 반대로 노인들은 뿔처럼 뾰족한 모자가 달린 전통의상 젤라바를 입고서 요정처럼 파란 골목을 오갔다.
산비탈의 작은 성곽 안에 담긴 마을은 처음부터 파란색을 입힌 마을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남부 그라나다에서 기독교의 박해를 받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건너와 정착을 했을 때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회벽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었다. 이후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유대인 이주자들이 생겨나면서 푸르게 칠해지기 시작했다.
모로코 북쪽의 항구도시 탕헤르(Tangier)에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이면 다시 만나게 되는 산중의 바다. 작고 푸른 물방울 하나가 모여서 거대한 바다를 이루듯이 마을로 들어서면서부터 바닷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지중해의 어느 섬에서나 볼법한 파란색 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방금까지 걸어온 마을 바깥의 풍경이 오히려 낯설다.
▲온통 파란색으로 물든 산속의 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바닷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변종모
골목 끝으로 열린 하늘도 머리 위의 하늘도 모두가 파란색이니 헤엄치듯 걷는 형형색색의 여행자들이 열대어처럼 경쾌하다. 온종일 경쾌한 마음으로 골목을 뒤지고 다녀도 별 소득 없이 비슷한 풍경이지만 아마도 마음속 한구석이 푸르게 멍들 것이다. 아픈 게 아니라 아름답게 멍들 것이다.
◇ 조금만 더 천천히... 나를 싱그럽고 파랗게 적셔 보자
크기로만 따지자면 쉐프샤우엔은 아무리 천천히 돌아다녀 봐도 반나절이면 족하다. 성격 급한 사람들은 그냥 골목 한 번 휙 둘러보고서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서둘러 식사를 하고 기념품 몇 개를 챙겨서 다음 도시로 이동을 해버릴 만큼 파란색 골목 이외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마을의 중심 우타엘 하맘(Uta el-Hammam)광장 주변으로 이슬람사원을 비롯한 몇몇 볼거리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여행자들은 파란 골목을 보러왔으니, 골목이 끝나면 여행이 끝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산속의 바다에 빠져 오래도록 허우적거리는 여행자들 또한 많이 있다. 이곳은 모로코에서 가장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니까. 아우성을 치며 달라붙는 호객꾼도 없고 피곤하게 거짓말을 하는 장사치도 없는 곳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투명한 파랑. 오래된 여행자들은 이 파랑에 매료되어 날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파란색에 대해서 말하거나 말하지 않고서 조용히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일로도 하루가 짧다는 것을 안다.
▲호객꾼도 장사치도 없는 평화로운 마을의 파란 벽에 등을 기대고 여유를 찾아보자./변종모
마을 전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산비탈에 고요하게 자리한 스페니쉬 모스크(Spanish Mosque)다. 작은 냇가를 지나 수심을 벗어나듯 오르막을 오르면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하얀색 모스크. 바다 위의 등대처럼 우뚝한 그곳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맑은 그림 같다. 누군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정성스럽다.
나는 날마다 그 언덕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한낮의 투명에 가까웠던 푸른빛이 변해가는 시간을 조우하기 위해 매일 저녁 언덕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푸른 마을은 해가 지면서 붉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짙은 인디고블루가 된다. 파랑이 젊은이라면, 낮이 청춘이라면 기울어가는 밤은 빛을 잃고 돌아 앉아야 할 일인데, 더욱 짙고 푸른 젊음으로 거듭 태어나는 이상한 풍경이다. 이도록 청춘은 뜨겁고 강렬한 것일까? 아마도 이 마을은 먼 미래에도 오늘처럼 계속 젊어 있을 것이다.
▲푸른 마을은 해가 지면 더 짙은 인디고블루로 물든다. 더 짙고 푸른 젊음으로 거듭나는 이상한 풍경이다./변종모
천천히 세상의 모든 파랑과 그 파랑에 뒤지지 않는 지금 현재 당신의 가장 젊은 순간을 만나보시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나도 다시 한번 그곳으로 가서 그때 가장 젊었던 나와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나를 만나 골목처럼 푸르고 싶다. 바다로 가자며 산으로 데려간 친구들과 오래도록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가며 그날 봤던 파란 골목처럼 싱싱한 기억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아직도 나는 여름이 오면 바다가 생각나는 일보다 산중의 파란골목이 더욱 자주 생각난다.
PS 산중의 파란 도시, 쉐프샤우엔
주변 대도시에서 주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가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 유명세 덕분에 차편은 부족하지 않다. 대부분 숙소는 메디나 안쪽에 몰려있으며 모로코 전통방식의 숙소를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도시 크기에 비해 비교적 숙식이 양호한 편이다. 직물이나 카펫 같은 수공예 특산품이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할 것은 없다. 겨울철만 피해서 간다면 날씨 역시 아름다운 곳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전통 복장을 한 소수부족의 장이 열리는데 꼭 볼만하다. 여행자가 많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주변 도시 이동 며칠 전에는 반드시 버스표를 예매해 두는 것이 좋다. 아니면 비싼 값을 치르고도 낡은 택시마저 구하기 힘들 때가 있다.
◆07.05 왕가위 영화 ‘해피투게더'로 유명한 그곳, 부에노스아이레스 - 아르헨티나
골목 어디서나 ‘탱고’의 매혹적인 선율이 흐르는 곳
오페라 극장 개조해 만든 서점이 압권… 객석은 서가로 무대는 카페로
▲형형색색의 건물이 인상적인 데펜사 거리는 원래 가난한 노동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칠하면서 형성됐다./변종모
“지금 사는 나라를 제외하고 다른 한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넌 어디에서 살래?”하는 유치한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면 난 주저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말한다. 아르헨티나라고 말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말한다.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다지 공기가 좋지 않지만, 진득한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그 날의 골목들을 떠올리게 한다.
◇ 탱고 한 번 추실까요?
노래도 못하지만 춤은 더 못 춘다. 그래서 노래와 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맨 뒷자리이지만, 자주 눈을 크게 뜨고 가장 격렬한 박수를 보낸다.
이 말을 왜 먼저 하냐면 이곳에서 탱고는 좋은 공기와 같으니까. 태양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벌건 대낮에도, 벌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어두운 밤에도 어디서나 음악이 흐르면 모든 것이 멈춘다. 열광의 장벽 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탱고 선율을 밟던 골목. 골목이거나 골목 밖의 일이거나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음악이, 춤이 가장 흔한 일상이 되는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골목 어디를 가더라도 탱고를 만날 수 있다./변종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면 가장 먼저 걸어야 할 골목이 산텔모(Santelmo) 지역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이곳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마침 일요 시장이 열리는 데펜사(Defensa) 거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5월의 광장에서 시작되는 이 자유로운 거리는 식민지 시절 부유층들이 살았던 덕에 우아하고 기품 있는 건물들이 많다.
이 거리에서 처음 탱고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곳뿐만 아니라 산텔모 지역에서 파생되는 골목의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길거리 탱고 공연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는 데펜사 거리 중간에 나타나는 도레고 광장(Plaza Dorrego)에서 생애 첫 탱고 공연을 봤다. 현란한 기교의 춤사위보다 더 시각적이던 음악. 숨어 지내는 사람이라도 끌려 나올 수밖에 없다. 탱고엔 19세기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말하지 않고 움직임으로 들려주는 춤에서 삶의 애착과 고민이 느껴진다.
◇ 가난한 노동자가 칠한 색색의 골목, 그 자체가 예술
여기, 이 바다 근처의 술집과 사창가에서 태어난 춤. 하지만 길거리 공연에서 보지 못한 근사함을 밤의 클럽이나 밀롱가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거리의 끝에 개관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모던 아트뮤지엄과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하지만 여행자들에겐 전시보다 공연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여행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시민들./변종모
역사박물관이 있는 레시마 공원(Parque Lezama)에서 바로 이어지는 거리가 라보까 지역이다. 이 지역의 상징은 까미니또(Caminito) 골목.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채색된 낡은 건물들은 건물의 값어치를 떠나 예술적 깊이가 엿보인다.
데펜사 거리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이 골목은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칠하기 시작하면서 골목 자체가 거대한 스케치북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몰려와 현란하게 반짝거린다. 2층 난간에서 손을 흔드는 조각품이나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화려한 담벼락마저도 모두가 예술품 같다.
◇ 객석은 책장으로, 무대는 카페로… 오페라 극장 개조해 만든 서점에 박수를
처음 걸었던 산텔모 지역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 도시의 가장 번화한 플로리다 거리가 있는 센트로다. 여기서 이어지는 레꼴레타(Recoleta)와 팔레르모(Palermo)지역이다. 레꼴레타에는 여성 운동가 에바 페론이 잠든 묘지가 있다. 에비타(Evita)로 불리던 그녀의 영화적 삶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 시간에도 묘지 앞에는 붉은 장미가 놓여 있을 것이다. 1800년대 정원을 개조해 조성한 묘지는, 저명인사들이 안치된 곳으로 각 묘지가 저마다 다른 건물형식으로 지어져 마치 죽은 자의 거대한 도시 같다.
▲에비타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여성 운동가 에바 페론의 묘지./변종모
이 지역에는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건축과 예술을 가늠해볼 수 있는 각종 미술관이 이어진다. 그리고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 서점이 있다. 최초로 유성영화가 상영되었던 거대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서점이다.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객석은 수많은 서적이 진열된 책장이며, 한때 공연이 이루어졌던 무대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로 변신했다. 오래전, 공연이 시작되면 테라스에서 망원경을 쓰고 공연을 보던 자리에 앉아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도시. 낡은 것은 무조건 허물고 거대한 신식 건물 올리기에 혈안이 된 도시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디어다.
낡고 오래된 도시에는 없는 게 없는 듯하다. 가장 화려한 것과 가장 평범한 것들이 한군데 몰려 탱고 춤사위처럼 빈틈이 없다. 누군가 말하길 정식 탱고 공연에 서기 위해 한 곡의 춤사위를 몇 년 동안 연습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어느 것 하나 외면하지 않고 존중되어 온 것이라 가능하지 않을까?
▲거대한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엘 아테네오 서점. 아르헨티나 최초로 유성영화가 상영됐던 역사적인 곳이다./변종모
아르헨티나 안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 아르헨티나와 그 이상의 모든 나라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공기란 어쩌면 호흡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로 흡수하는 일, 그것이 내게 자연스러워지면 가장 이상적인 공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PS 왕가위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이 되었던 ‘바 수르(Bar Sur)’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즐기기 위해선 최소 5일은 잡아야 한다. 대형 공연장과 작은 바에서 이뤄지는 탱고 공연은 꼭 관람할 것./변종모
적어도 5일은 잡아야 대략이라도 마음에라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도착한 날이 주말이 아니라면 5월의 광장이 랜드마크가 되는 센트로 지역(대통령궁, 대성당, 근현대사박물관 비센테나리오, 콜론 극장, 국회의사당, 67m 높이의 오벨리스크 등)부터 시작하면 좋다. 숙소 역시 어느 지역이라도 예산에 맞춰 정할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 교통도 불편하지 않은 도시다. 152번 버스만 잘 이용해도 어지간한 볼거리는 만날 수 있다. 유명 탱고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숙소에 부탁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매하는 것이 좋다. 특히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이 되었던 ‘바 수르(Bar Sur)’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공연으로 예매가 치열하다. 대형 공연장과 작은 바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이렇게 두 번 정도는 기본으로 권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소고기와 와인도 꼭 즐겨보시길.
◆07.19 아르헨티나 최남단, 세계의 끝에서 만난 등대
아르헨티나 최남단,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마을
만년설 아래로 이어진 땅끝 골목
공기도 시간도 반대로 흘러… 모든 곳의 끝이 아닌 시작이 되는 곳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니아가 있다./변종모
지구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지구의 끝이라는 말 보다 더 절박해 다소 암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세상의 끝이라는 곳이 어떤 신비로운 지점 같기도 해 오래도록 궁금함을 지니고 있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만나는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한 번쯤 눈으로 보고 직접 두 발로 디뎌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그곳은 아르헨티나의 남쪽. 더 이상 이어질 대륙이 없는 곳. 비탈진 만년설 아래로 이어진 골목에서 땅이 끝나는 지점이다. 검은 구름이 바람처럼 바삐 움직이고 고요한 바닷바람이 밀려들던 곳. 세상 끝의 골목에 걸려 있던 아득한 풍경들. 이 말을 듣는 순간 당신도 어쩌면 멀고 먼 지구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마음이 먼저 하는 일들에 끝내 몸도 닿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끝이라는 말은 그토록 절실하다.
◇ 세상의 단 한 곳
혹자는 그곳까지 가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세상의 끝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단지 세상 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뿐이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마음은 이미 세상 끝에 서 있다. 손쉽게 비행기로 날아갈 방법이 있지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경비행기는 정확히 떠날 수 있는 날을 알려주지 않기에 버스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짧은 비행시간으로 갑자기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기 싫기도 했다.
엘 칼라파테(El Calafate)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르헨티나를 잠시 벗어났다가 칠레에서 다시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넘는 과정을 거쳐 22시간 만에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았다.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그때 멈춘 곳. 땅의 끝이었다. 스산한 밤바다의 소리가 세상을 오래 경험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나의 의지로 흘러온 땅끝의 밤은 오히려 덤덤하고 뿌듯했다.
▲띠애라 푸에고 국립공원 설산이 지붕처럼 펼쳐진 우수아니아, 이곳에선 공기도 시간도 모두 반대로 흘러가는 듯하다./변종모
땅끝 전체를 둘러싼 띠에라 푸에고 국립공원(Tierra del Fuego National Park)의 설산이 지붕처럼 펼쳐진 곳. 드문드문 빗방울이 날리던 작은 마을은 내가 살던 세상의 반대편이다. 내게서 모든 것이 가장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도 공기도 시간도 모든 것이 반대로 흘러가는 곳. 갑작스러운 한여름 밤은 사무치게 추웠고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고요하고 과묵하다. 겨울이라는 생각을 잠시 잊었었다.
낯선 첫날 밤을 지내고 난 아침. 전날 밤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다. 창 너머 가느다란 골목 끝으로 펼쳐진 세상 끝의 바다. 계절과 상관없이 청정한 공기는 그야말로 세상 끝에서나 가능한 청량감이라 기억되던 아침. 나를 만류하던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행이란 역시 직접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누구의 권유도 만류도 경험을 이길 수 없다.
◇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온 세상 끝의 등대
실망도 희망도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 세상 끝의 골목을 걷는다. 땅이 존재하는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이나 남극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라는 목적성을 제외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와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어딜 보더라도 바다가 풍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바다와 마주한 설산의 장엄함 풍경은 환상적이다.
산 아래로 유럽식의 아름다운 집들이 낮게 군락을 이룬 모습은 한겨울에 핀 꽃처럼 귀하다. 세상 끝 추운 겨울에 이런 따뜻한 그림이 걸려있을 줄이야. 젊은 여행자들은 몇 날 며칠 국립공원 트래킹을 하며 세상 끝의 풍경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주 환상적인 트래킹 코스가 다양하게 꾸며져 있어서 이곳만을 고집하며 몇 번이고 다시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비글 해협의 작은 섬엔 세상 끝의 등대가 있다. 붉은 등대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와 유명해졌다./변종모
트래킹을 하지 않는 나머지의 사람들은 항구에서 보트를 타고 비글해협 위의 작은 섬으로 간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왔던 붉은 등대를 보기 위해서이다. 바다사자와 가마우지가 사는 이 섬은 왕가위 감독 덕분에 등대가 더 유명해져 버렸고, 이제 우수아이아의 상징이 됐다. 실제로 어느 식당 주인이 내게 세상 끝의 등대는 다녀왔냐고 묻기도 했다.
세상 끝의 식당 주인과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독특한 박물관 하나를 만났다.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위치에 있기도 하거니와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사내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누구나 알아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마리티모 박물관(Museo Maritimo)이다. 1920년에 감옥으로 지어졌다가 해군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현재는 세상의 모든 감옥에 대한 다양한 전시품이 갖춰진 박물관이다.
실제로 예전 감옥 그대로 보존된 건물에 들어가 체험할 수도 있다. 세상 끝에 와서 잠시 그곳에 갇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 잠시 감금되기를 자처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순간 세상에 지은 잘못의 죗값을 치르고자 갇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 갇혀야 할까? 설령 잠시 갇혔다가 풀려난다고 해도 세상 끝의 일은 나만 아는 일이니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세상 끝에서 잠시 용서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감옥에 대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마르티모 박물관의 외벽./변종모
◇ 세상의 끝, 모든 곳의 끝이 아닌 시작이 되는 곳
이 밖에도 이곳 역사가 고스란히 설명된 세상 끝의 박물관(Museo Fin del Mundo)과 남부 아르헨티나에 거주했던 야마나 족의 원시문명을 소개한 야마나 박물관(Museo Yamana)을 둘러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세상의 제일 끝에 매달린 것들이다. 사람도 집도 차도 카페도 구멍가게도 당신마저도 모두가 세상 끝의 존재들이다. 허나 모든 관계나 존재들의 끝이 이곳의 풍경만큼 아름답게 끝난다면 그것보다 좋은 삶이 있을까. 산으로 트래킹을 간 청년은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오래도록 설산을 걸었고, 붉은 등대를 보러 간다던 젊고 발랄한 여학생은 하던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 세상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등대를 보러 갔다.
▲세상의 끝은 사실 끝이 아니라 시작점일 수도 있다./변종모
한 사람이 하나씩 품고 온 마음들이 쌓여 거대한 설산이 되었을까? 그 마음들을 안고 세상 끝으로 온 사람들. 그것은 끝이라는 절망이 아닐 것이다. 끝에 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아픈 부분을 부러뜨리고 잘라내는 것. 두고 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두고 가자. 나만 아는 나의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것들을 대륙의 맨 마지막에 놓고 가자. 그리고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 세상 끝에 우뚝 선 깊은 산도, 세상 끝에 펼쳐진 바다의 붉은 등대도, 다시 등을 돌리면 마주하는 모든 풍경이 시작인 것이다.
이 둥근 지구에 끝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끝이 되기도 하고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사람들이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 부르는 것은 그토록 소중해서 일 것이다. 늘 마지막은 한 번이니, 그래서 마지막은 귀한 것으로 남아야 하므로.
PS 세상 끝에 가시거든
▲우수아이아까지 가는 여정은 쉽지 않다. 국내선 비행기가 있지만, 날씨로 인해 결항이 잦아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 여행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아르헨티나의 환상적인 풍경을 담을 수 있다./변종모
우수아이아까지 가는 길은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면 가장 쉽지만, 날씨에 따라서 결항이 잦으므로 자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우수아이아 공항에서는 출국세를 받는다.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버스를 이용해서 칠레 남부나 아르헨티나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면 환상적인 풍경을 챙길 수가 있겠다. 국립공원 트래킹과 비글해협 보트투어 모두 시내의 여행사에서 친절하게 안내받을 수 있지만, 여유를 두고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체류 시간이 길지 않은 사람은 트래킹보다 마르티알 빙하 산책 정도의 프로그램이 낫다. 항구 근처에 있는 일명 100년 카페에 방문하면 우수아이아의 오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으며 음식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시내의 인포메이션 센터에 비치된 세상의 끝 방문기념 도장을 여권에 찍어 가는 사람도 꽤 많다.
◆08.06 환상적인 초콜릿 언덕, 귀여운 안경원숭이가 있다는, 그 섬 - 필리핀
더 낭만적이고 고요한 필리핀을 보고 싶다면... 보홀섬으로
손바닥만 한 안경원숭이와 반딧불이를 만나는 찬란한 밤
▲섬의 중심엔 은박 포장지의 초콜릿을 닮은 1268개의 언덕이 있다. 로맨틱한 이름을 가졌지만, 아고로라는 거인이 사랑하던 여인과 이뤄지지 못해 흘린 눈물이 굳어져 만들어졌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변종모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잠자리에 들면서 자주 상상한다. 내 작은 침대가 고요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떠다니는 쪽배가 되어 어느 섬의 구석구석을 떠다니는 상상. 필리핀의 남쪽, 보홀이 겹쳐진다. 날마다 푸른 파도의 소리를 들으며 그날 본 달콤한 풍경들을 회상하며 잠이 들면, 내가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그날처럼 좋은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날마다 작은 섬 안의 골목들을 따라 꿈속을 걷듯 걷는다. 헤맨다. 헤엄친다.
◇ 세부보다 달콤한 섬 보홀… 초콜릿 언덕은 커플 인증 필수 코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운 섬이 있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휴양지 세부(Cebu) 바로 아래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곳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화려한 것들의 이면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편리하고 깨끗한 휴양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세부에서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부에 비하면 보홀은 그야말로 자연에 가까운 섬이다. 계획되고 정비된 곳이라기보다 원래 섬의 형태가 잘 보존된 곳이다.
바다를 보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비행기가 보홀의 탁빌라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초콜릿 힐(Chocolate Hills)에 달려갔다. 배낭을 내려놓기도 전에 다 늙은 남자가 초콜릿 언덕이라니. 누군가 초콜릿 언덕에 대해서 말했을 때부터 목구멍으로 군침이 돌았으며 홀로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자연에 가까운 아름다운 섬 보홀./변종모
섬의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1268개의 언덕. 누구나 잘 아는 은박 포장지의 그 초콜릿과 닮았다고 해서 초콜릿 언덕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많은 사람을 유혹한다. 언덕을 보기 위해 오르는 전망대의 계단도 발렌타인데이의 의미를 담아 214계단이다. 이 정도의 상술 정도야 귀엽게 여겨야 하지 않겠나. 부드럽고 둥근 능선이 송곳 같은 더위도 잠시 무디게 만든다.
이 둥근 언덕들은 200만 년 전에 바다로부터 솟아난 표면의 산호층이 부식되면서 아름다운 초콜릿 군락을 만들었다. 일부러 만들기에도 버거운 크기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 같은 형태로 앉아 있다.
거대한 초콜릿 상자를 열어 보는 듯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상당히 로맨틱하고 슬픈 사연이 있다. 아고로라는 거인이 사랑하는 여인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수천 년간 굳어져 이 언덕이 되었다고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수많은 커플이 인증샷을 남긴다.
◇ 귀여운 안경원숭이와 찬란한 반딧불이 있는 보홀의 밤
초콜릿 힐에서 울창한 밀림을 끼고 남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면 이번에는 달콤함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귀여운 원숭이를 만날 수 있다. 일명 안경원숭이라고 불리는 원숭이 보호구역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보홀의 안경원숭이, 귀여움이 실존한다면 바로 이 녀석이 아닐까?/변종모
초콜릿 힐만큼이나 보홀의 유명세를 알리는데 한몫한 이 원숭이는 손바닥 보다 작다. 고작 10~12센티의 작은 몸에 얼굴에 얼굴이 반이다. 맑고 투명하게 튀어나온 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귀엽다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결국 이 작은 안경원숭이가 될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 밤에만 활동하기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는 않고 잠을 잔다. 덕분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고요함으로 만나야 한다. 원숭이와 함께 잠을 자듯 고요히 바라보다 보면 정말 살아있는 생명인지 인형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렇게 달콤함과 귀여움에 정신을 잃고도 힘이 남아 있다면, 이제 찬란하게 움직이는 별들을 보러 가자.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곳에서만 서식한다는 반딧불을 보러 가는 것이다. 보홀이라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당연히 봐야 한다.
밤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둘씩 켜지는 별들. 가난한 사람들이 오두막에 촛불을 켜듯 아득한 하늘에 별을 달듯 동화 같은 밤이다. 간혹 피곤한 사람들은 조용하게 날아다니는 별들을 보며 잠이 들 수도 있겠다. 꿈처럼 날아오르는 수많은 반딧불. 말로 설명할 길이 없는 잔잔한 이 풍경은 사진에 담을 수도 없는 빛이라 오로지 눈으로 인화되는 일만이 유일한 저장법이다. 푸른 바다보다 먼저 만난 달콤한 풍경. 하루 만에 나는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거나 부드러워졌다고 자부한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은 보장된 아름다움이라면 스스로 만드는 달콤한 추억의 하루가 될 수 있겠다고 여긴다.
◇ 만만하고 살가운 외딴섬, 팡라오
충실하게 숙제하듯 첫날을 보낸 덕에 깊고 아름다운 꿈을 꾼 듯하다. 둘째 날이 밝았고 바로 섬의 섬을 건너 팡라오(Panglao)로 갔다. 보홀에서 작은 다리로 이어진 섬이다. 그러니까 걸어서 건너는 섬이 되겠다. 보홀에도 아름다운 해변이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팡라오로 건너온다. 보홀은 필리핀에서 10번째 큰 섬이니, 그것에 비한다면 보홀이 흘린 초콜릿 한 알 같은 작은 섬이 팡라오다. 혹은 안경원숭이처럼 작은 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홀은 화려한 치장도 없고 볼만한 건축물도 없다. 그래서 걷기 좋은 해변. 낮에도 밤에도 고요하고 평화롭다./변종모
화려한 치장도 없고 거대한 건물들도 없는 알로나 비치(Alona Beach)를 중심으로 펼쳐진 해안들은 그야말로 걷기 좋은 해변. 다이빙에 열을 올리는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산소통을 메고 나가는 보트 뒤로 새하얗게 물거품이 부서진다.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것들이 여기서도 이루어지지만, 이곳은 좀 더 낮고 고요한 느낌이다.
종일 해변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과 뭔가를 열심히 파는 사람들과 산책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구분 없이 오가는 해안에 번잡함이란 없다. 유명세를 치르는 섬에 비한다면 외딴섬이라 하겠다.
작은 섬이라 오히려 곁에 바짝 당겨 앉은 느낌이다. 만만하고 살갑다. 그래서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는 부담 없는 섬. 택시 대용으로 팡라오 전체를 돌아다니는 오토바이는 하발하발이라고 부른다. 이름처럼 뭔가 허술한 느낌이지만 오토바이를 운전사가 데려다준 히낙다난(Hinagdanan) 동굴은 천연 석회암 동굴로 한가운데 작은 호수가 있다.
섬에서 섬으로 건너와서 섬 안의 또 다른 작은 바다를 만나는 것처럼 여겨졌다. 운전사의 과장된 설명에 비한다면 볼 것이 없는 곳이었지만 잠시 더위를 피한다는 생각이면 좋겠다며 나무랄 마음은 없었다.
▲깨끗하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좋은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은 달콤한 섬 보홀./변종모
섬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축물이라고는 성 어거스틴 성탕과 근처의 종탑이 전부다. 하긴 누가 휴양지에 와서 공부하듯 유적지를 다니겠는가? 작은 섬의 안쪽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걷거나, 그저 이곳은 자신이 정한 날짜 동안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여행이다.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바라보며 조금씩 닮아가는 일.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배낭을 꾸리는 것이 아닐까?
PS 보홀의 일상
휴양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다. 숙소의 규모에 따라서 지내는 동안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맞는 숙소를 정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보홀도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즐길 수 있는 해양 스포츠들이 많다. 또 각종 투어가 있는데, 육상투어와 해상투어를 하루씩 경험하는 것도 좋겠다. 모든 투어나 스포츠 역시 숙소에 의뢰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다. 환전은 알로나 비치보다 보홀 시내에서 하는 편이 더 좋다.
◆08.17 지그재그로 올라간 천국의 언덕...해발 2400m, 페루 마추픽추
해발 2400m의 산중에 올라앉은 잉카 시대의 마을
인간의 흔적인지, 신의 손길인지…신비한 공중도시
▲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신비의 도시 마추픽추./사진 변종모
해발 2400m의 산중에 아스라이 올라앉은 잉카 시대의 마을.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 탐험가이자 예일대 고고학자인 하이럼 빙엄이 존재의 포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늘은 갈 수 있나요?” 숙소 주인은 아침마다 같은 질문을 하던 내게, 자신도 알 수 없다며 빙긋이 웃었다. 그때마다 실망의 한숨을 쉬면 그래도 한 번 더 알아보고 오겠노라 던 사내는 나보다 훨씬 점잖고 어른스러웠다. 그 때문에 그가 출발 일을 일러주기만 기다리는 학생처럼 얌전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내 상상의 어디쯤에서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던 신비의 도시 마추픽추로 향하기 위해 꾸스꼬(Cusco)에서 일주일을 넘게 기다렸다.
하지만 페루 대부분 도시에서 파업이 이어졌고 마추픽추로 향하는 기차 역시 언제 파업이 중단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 때문에 몇몇 여행자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겪게 되는 이변이지만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며 서성거리던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 낡은 자동차로 1박 2일, 마추픽추로 가는 길
“꼭 기차를 타고 갈 필요는 없잖아? 어때 같이 가볼까?” 곁을 서성이던 일본 여행자였다. 언제 파업이 풀릴지 모르니 힘들더라도 사설 차를 섭외해보자는 거였다. 희망이 없던 까만 밤에 잠시 커다랗게 별이 빛났던 것도 같고 주인이 부추기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천국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너는 포기할 거야?”라는 말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냥 오기가 생겨서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갈 수 있는 천국이 있다면 그곳이 아니겠나?
▲해발 2400m의 산중에 아스라이 올라앉은 잉카 시대의 마을, 마추픽추./사진 변종모
스페인 군대를 피하기 위한 피난처 또는 대항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군사 요새였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도시라는 등 많은 학설이 있지만, 그곳은 누군가에게 천국이었을 것이다. 평화롭기 위해 경쟁에서 멀어지기 위해, 높고 은밀한 곳으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낡은 자동차에 착한 운전사를 포함해 다섯 명이 타고 가는 1박 2일의 여정. 기차로는 1시간 30분 남짓이면 되지만 곳곳에 길이 끊겨 있었고, 해발 4000m가 넘는 거대한 산들을 넘어야 했다. 깊은 계곡을 아스라이 지나고, 산허리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동안 정작 힘든 것은 낡은 자동차였다.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을 위로 삼아 견디는 동안 공중의 도시는 분명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과 피곤함을 바꿔가며 흥분된 마음으로 달렸다.
확신을 가지고서 견디는 일은 힘들지 않다. 조금 급한 마음이 될 뿐이었다. “천국은 쉽지가 않지, 함부로 가까워지지 않지.” 몇 번을 그렇게 다짐하고 나서야 차는 멈췄다. 차가 멈춘 곳으로부터 다시 계곡을 끼고 철길을 따라 2시간을 더 걸어서 공중의 도시를 품고 있는 아구아 깔리엔떼(Aguas Caliente)에 도착했다.
뭔가 혹사를 당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먼 길을 돌아왔다는 억울함이 있었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손바닥만 한 마을 뒤, 구름 속으로 솟은 거대한 산. 구름에 가려져 있지 않았더라도 불 수 없는 공중의 도시가 거기에 있다.
▲여행자를 보고 미소 짓는 페루인./사진 변종모
◇ 완벽히 보존된 공중도시의 건물과 광장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첫차를 탔다.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천국의 길. 아침 안개인지 구름인지 자욱하게 시선을 가로막은 공기 사이로 마추픽추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을 달려와 가장 공기가 좋은 아침에 만나고 보니 거룩한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추측들로만 이름 붙여진 건물이나 시설들, 그러나 광장들은 깨끗하고 거의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숨어있던 공중의 도시는 건실하고 든든하게 인사한다. 입구에서 가까운 지역으로부터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신전지역(Temples Zone)을 걷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골목을 걷는 마음이기도 하고 박물관의 어느 부분을 경험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작은 광장에 세 개의 창문이 남아 있는 무너진 건물과 우뚝 솟은 해시계가 놓여있었다. 분명 인간의 흔적이었으나, 신들의 손길이 아닐까 의심한다. 세 개의 창문으로 아침의 구름이 늦은 시간까지 커튼처럼 걸려 있다. 모든 것은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간혹 멀리 초가지붕들이 보인다
▲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신비의 도시 마추픽추./사진 변종모
신전지역 뒤편으로 돌계단을 따라 우뚝 솟은 지역 인티와타나(Intiwatana)는 마추픽추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커다란 돌이 놓인 장소로 이 돌의 역할은 태양을 묶어 놓는 기둥이라고 한다. 그들이 신성시하던 태양이 궤적을 바꾸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의 절반은 구름이고 나머지는 구름 아래 까마득히 펼쳐진 계곡들이다. 그 입체감과 거리감이 상당해서 다큐멘터리 속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 하루 400명만 갈 수 있는 와이나픽추
마추픽추 곁에 우뚝 솟은 와이나픽추(Wayna Picchu)는 구름에 허리가 감겨 또 다른 공중의 성처럼 보인다.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서둘러 인티와타나를 내려갔다. 하루에 400명 만 갈 수 있다는 제한에 이미 나는 흥미를 잃었다. 여기서 만이라도 경쟁에 합류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중의 언덕에서 내가 도시에서 자주 바라보던 그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정작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이어서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오래도록 천국의 골목을 서성였다. 구름이 스치고 간혹 무지개가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하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그대로 누군가의 천국이 될 수도 있겠다.
▲마추픽추는 많은 비밀을 담고 있는 신비의 도시다./사진 변종모
그때 이 골목길을 걷던 잉카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해져 오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활의 흔적뿐이다. 간혹 실체는 없고 이야기만 무성한 경우는 많지만, 이곳은 오롯이 공중 위에 지어진 실체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여기는 정말 천사들이 살던 천국이었을까?
가끔 지치고 힘 들 때, 그날의 허공을 생각한다. 구름 속으로 몰려들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처럼 그럴 거라 여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에게나 자신만의 천국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누군가에겐 이 공중의 도시기도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종교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그대의 힘든 어깨를 위로할 수 있는 현실 속의 천국이라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지 않겠나. 그렇다면 그런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지 않겠나. 그대, 지금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대만의 천국을 하늘 아래 어딘가에 놓아두고 수시로 바라보자.
PS 공중의 도시로 가는 법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마추픽추가 있는 마을 아구아 깔리엔떼까지는 꾸스꼬에서 기차로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페루 레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 및 예약할 수 있다. (https://www.perurail.com/) 꾸스꼬 근교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여행하면서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 또한 많은 사람이 택한다. 트래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2박 3일이나 3박 4일 등 다양한 종류의 트래킹을 통해 이루어지는 잉카 트레일을 경험할 수도 있겠다. 마추픽추 안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매표소에서 비싼 요금을 내고서라도 미리 해결해야 한다. 마추픽추를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와이나픽추와 몬타나는 하루 입장자 수가 제한적이며 개인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전에 예약 및 체력 등을 잘 고려하자.
◆08.28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 뮌헨 '옥토버페스트'에 가다 - 독일
왕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시작해 200년째 이어진 맥주 축제
무거운 맥주잔과 빠르게 사라져가는 거품…700여만 명이 모여 600만 리터 맥주 마셔
▲세계 3대 축제로 꼽히는 뮌헨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사진 변종모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는데 후끈한 열기가 먼저 느껴졌다. 뮌헨 중앙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은 대부분 바이에른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멜빵이 달린 반바지에 스타킹의 레더호젠(Lederhosen)을 입은 남자들과 발랄하게 머리를 땋고서 앞치마를 두른 풍성한 치마차림의 드린딜(Drindil)을 입은 여자들 모두가 동화책에서나 보던 것처럼 귀여운 느낌이다.
전철이 도착할 때마다 끊임없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한 곳으로 향한다. 어떠한 비장한 각오도 없고 결의도 없는데 모두가 한 방향이다. 모두가 축제의 장소로 흘러가는 것이다.
◇ 모두 그곳으로 간다… 세계 최대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
브라질 리우의 삼바축제, 일본의 삿포로 눈 축제에 이어 뮌헨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는 세계 3대 축제로 꼽힌 지 오래되었다. 매년 9월 15일 이후의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열리는 맥주 축제다. 이를 위해 독일 전역 또는 세계 각지에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 내가 있었다.
▲축제의 거리에 이르면 한 방향으로 향하는 엄청난 인파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떠밀리듯 축제의 장소로 간다./사진 변종모
세계 최대 규모의 맥주 축제. 한국에서 출발 전 친구에게 "술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겠지?"하고 물었더니 "맥주가 술이냐?"고 반문하며 이미 술 취한 사람처럼 훈계를 했다. 그렇다. 독일 어딜 가나 물처럼 흔한 것이 맥주다. 물은 안 마셔도 살 수 있지만, 맥주는 마셔야 한다던 말 또한 자주 들어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수많은 사람이 이렇듯 한 방향일 수가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취기가 오른다. 중앙역에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부드러운 맥주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행사장으로 이어지는 15분 정도의 거리를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떠밀려서 쏟아진 맥주처럼 흘러들어 왔다. 나도 사람들처럼 마시기 전에 이미 취했을 것이다.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들이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 그 안에 온통 맥주가 거품을 날리며 매 순간 건배 되고 있다. 축제가 이어지는 기간 동안 천 개가 넘는 맥주 브랜드가 참여하는데 7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600만 리터 이상을 소비한다고 했다. 700만 명은 대충 짐작하겠으나 600만 리터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갈수록 이 숫자는 커지고 있다고 한다.
◇ 루비히 1세와 테레제 공주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시작…200년째 이어져
춤을 춘다. 반짝이는 전구가 대낮에도 일찍 뜬 별처럼 반짝이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미 취한 사람들은
▲축제 기간엔 천 개가 넘는 맥주 브랜드의 텐트가 설치된다. 매년 700만 명 이상이 방문해 600만 리터 이상의 맥주를 소비한다./사진 변종모
잔을 받아들고 거리로 나왔다. 아니다. 골목이다. 텐트가 맥주를 즐기는 은신처라면 텐트와 텐트 사이는 골목이 된다. 그 골목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빨리 취한다. 돌처럼 무거운 맥주잔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거품과 거품 너머로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낯설다. 마치 서커스공연장 같은 텐트 속에서 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건배 소리와 파도 타듯 출렁이는 사람들의 함성. 그야말로 텐트 안은 뜨거운 용광로 같다. 그랬기 때문에 맥주로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즐기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함이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다.
1810년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비히 1세와 테레제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생긴 축제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결혼식 피로연이 200년 가까이 해마다 거행되는 것이다. 축제가 열리는 이곳 테레지엔비제 역시 왕비가 된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이 광란이 사랑스럽다고 했다. 사랑의 결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람들을 흥분하게 한다.
▲바이에른의 전통 복장 레더호젠(Lederhosen)을 입은 남자들./사진 변종모
◇ 1년에 한 번, 세계에서 가장 얼큰한 축제의 골목
수많은 맥주회사가 설치하는 텐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루의 친구이며 가족이 될 것이다. 그 힘은 맥주에서 오는 게 아니라 독일인들의 기질처럼 여겨졌다. 아니다. 그 모임에 항상 맥주가 있었을 테니 역시 맥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할만하다. 축제 기간 중 이틀을 부러움의 눈으로 그들과 건배를 했다. 맥주가 부르는 게 아니라 맥주를 마시자 청하는 사람의 건배가 불러 모으는 것이다.
1년에 한 번 세계에서 가장 얼큰하고 후끈한 골목. 거대한 천막들 너머로 울려 퍼지는 건배의 골목. 갑자기 생긴 놀이공원의 아이들과 늦은 밤까지 테이블을 지키던 현지인들과 텐트와 텐트 사이를 오가는 이방인들. 낯선 모든 풍경이 그렇게 점점 좋아지던 시간. 휘영청 달이 뜨고 하루가 깊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사소했던 모든 날에 건배를. 사람아! 사랑아! 생활아! 삶아! 아무리 부딪히고 흔들려도 우리의 잔은 쉽게 바닥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리 취해도 용서받을 일이다. 우리는 조금 더 자주 잔을 부딪쳐도 나쁠 것 없는 삶이다.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는 오늘도 역시 수고했다. 우리 그곳으로 가서 잔을 들자! 잘 살아온 자신을 위해.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축제의 열기./사진 변종모
PS 맥주를 마시러 갑시다.
매년 9월 15일 이후에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거의 3주간 진행되는 뮌헨의 가장 자랑거리다. 일반 맥주보다는 도수가 조금 높다. 마스라고 불리는 1L의 가격은 대략 10유로 내외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텐트 안의 뜨거운 분위기를 서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여기게 된다. 축제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으며 개막과 폐막식 날 이루어지는 퍼레이드 또한 볼만하다.
◆08.31 이토록 우아한 바위 동굴을 보았나...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군락, 터키 카파도키아
90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신비로운 땅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거대한 고목처럼 군락 이뤄
▲카파도키아의 독특한 지형은 90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졌다./사진 변종모
담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골목처럼 느껴지던 흔적들이 쉽게 발견되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도착했더라면 아마도 몇 배는 더 놀라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흔적이 유일한 골목이 되던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거대한 고목처럼 자리 잡은 도시. 아직도 여전히 바위 속에서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물론 비어 있거나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바위가 대부분이다. 집들은 동굴처럼 입만 벌리고 말이 없다.
카파도키아는 900만 년 전부터 오랜 세월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땅의 변화다.
자연의 변화가 만든 건축물들이기도 하고, 그대로 발전을 멈춰버린 원시적 풍경이기도 했다. 강한 것은 남았고 여린 것은 사라져 지금의 바위가 숲처럼 군락을 이루었다. 바람과 비가 만들었지만 가장 큰 힘은 역시 세월의 힘일 것이다.
◇ 척박하고 단단한 풍경…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일까?
터키의 정중앙 카파도키아. 드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신비한 풍경은 지상의 풍경이라 믿기 힘들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분리되어 잘못 자리 잡은 것이라 여겨질 만큼 척박하다. 척박한데 아름답다. 건조하고 단단한 풍경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 잡은 사람들의 일상이 있어서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한다.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군락을 형성해 만든 카파도키아의 풍경./사진 변종모
카파도키아는 어느 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괴레메, 우츠히사르, 네브세히르, 카이세리, 위르굽, 아바노스 등 여러 개의 도시가 어우러져 만든 풍경이다. 나 같은 여행자라면 겨우 바위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가면 다행이다 싶다. 매시간 달라지는 풍경이나 풍경 곳곳에 숨어있는 종교적 가치들을 한 번에 다 보기는 힘이 든다. 터키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을 외곽으로 비스듬히 줄지은 바위 동굴 숙소 중 하나를 택해 짐을 풀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더니, 실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늑하다. 숙소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동화책에서 보던 난쟁이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다. 동굴 안쪽으로 길게 들어선 침실과 맞은편의 공동 샤워장, 그리고 그사이의 작은 창으로 신선한 하늘이 열려 있다. 대부분 풍경이 척박하고 단단한지라 하늘은 더욱 부드럽고 푸르다.
◇ 박해받은 기독교인들의 은신처…기독교적 가치 높아
기원전 1900년쯤 아시리아 상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로 시작된 이곳은 히타이드 제국의 첫 번째 수도로 전해진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외침의 역사를 고스란히 맞으며 마지막으로 로마의 속국이 되는 것으로 카파도키아 왕국은 멸망했다고 한다. 이때 로마로부터 박해받은 기독교인들의 은신처가 되어 준 바위. 현재까지 보존된 기독교적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많은 종교인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노선 안에 지하도시 방문이라든가 수도원들이 포함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곳의 바위들은 로마로부터 박해받은 기독교인들의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사진 변종모
실제로 거대한 지하세계에 잘 보존된 벽화나 유물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가이드가 필요 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기독교의 역사 체험이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를 기리는 예배당의 오래된 프레스코화를 시작으로 네 개의 원기둥이 돔형태를 이룬 사과교회에도 최후의 만찬과 예수를 비롯한 벽화들이 선명히 남아 있다. 이 밖에도 괴레메 박물관 근처의 성 바실리오 예배당 등 어렵지 않게 기독교 문화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종교보다 단단하고 믿음보다 거센 삶의 터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바위 동굴 하나하나가 모두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희망이었다.
◇ 일출 보며 하늘 나는 열기구관광 추천
▲해가 뜰 무렵 열기구에 올라 내려다본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사진 변종모
카파도키아의 여러 도시 중 어디를 가더라도 아침과 점심, 오전과 오후 그리고 몇 날 며칠의 밤을 경험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그리고 그 무엇도 하지 않더라도 해가 뜨기 전 공중의 풍경을 경험하라고 강요하고 싶다.
푸른 새벽이 붉게 옷을 갈아입을 시간, 열기구관광(Balloons Tour)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사막 지역에 조각상처럼 서 있던 바위들이 해가 뜨면 하나하나 자신의 그림자를 딛고 기상한다. 열기구는 그 풍경들 위를 날아오른다. 바위 마을의 난쟁이로 살다가 날개를 달고 요정이 되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정면으로 마주하던 모든 풍경을 발아래 두고 공중을 떠다니는 일. 내가 봤던 모든 것들이 각도를 바꿀 때 조금씩 바뀌던 생각들. 비행기를 타고 신속하게 대륙을 건너는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다. 누구나 한 번쯤 그 마음을 가져보면 좋겠다. 비록 세상의 작은 일부분이지만 천천히 떠다니며 몇 만 년의 잠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일.
천천히 천천히 자신의 아래에 깔린 풍경들을 보면서 스스로 위대하고 장엄해지는 순간들. 태양보다 높이 떠오르는 아침의 풍선 하나하나가 모두 희망이 될 것이다.
▲열기구에서 내려다본 카파도키아의 전경./사진 변종모
PS 카파도키아의 이해
카파도키아를 작은 지면에 소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방대한 자연이 여러 도시를 끼고 있는 카파도키아는 자신의 여행 스타일에 맞춰 한 도시 또는 두 도시 정도를 정하고 계획하는 것이 좋다. 괴레메에서 지냈다고 카파도키아를 전부 봤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여행자가 괴레메에 짐을 푸는 것은 비교적 다양한 가격대의 경험을 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카파도키아를 조금이라도 빨리 깊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투어가 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을 묶은 생태관광, 카파도키아와 괴레메의 주요 포인트를 묶어 놓은 레드투어 그리고 로즈벨리 트래킹 투어가 있다. 직접 ATV를 운전하며 경험하는 카파도키아도 인기가 많지만, 아침 일출의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열기구관광은 추천할 만하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는 것보다 숙소나 여행사를 통해 직접 예약하는 편이 현명하다.
◆09.14 두 개의 보름달이 뜬 밤,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 - 인도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이 죽은 부인을 기리며 지은 타지마할
어디서 봐도 완벽한 대칭형 건물…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려
▲타지마할을 보지 못했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사진 변종모
◇ 영원한 사랑의 징표 타지마할
어린 시절 어느 유명 사진가의 사진에 반해 처음 타지마할을 찾았다. 첫 인도 여행에서 뭄바이에 도착한 나는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꼬박 27시간의 기차를 탔다. 새하얀 사랑의 증거.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뛰는 듯했다. 그러나 첫인상은 정말 경악스러웠다.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의 전경./사진 변종모
사실 아그라뿐만 아니라 17년 전 첫 인도 여행에서는 인도 어디를 가나 그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중에서도 아그라는 정말 최악의 도시라고 생각을 했었다. 단지, 타지마할을 보러 온다는 열망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타지마할을 향해 뻗어 있는 혼란스러운 골목들과 난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시절의 숙소는 시설이랄 것도 없었다. 물론 그때도 아주 값비싼 호텔은 있었지만, 배낭여행자의 신분으로 몸을 맡겼던 숙소는 태양의 열기를 있는 대로 다 받아들이는 허름한 벽과 돌아가지 않는 선풍기뿐이었다. 여러 날을 잠들지 못했었다. 마치 두꺼운 담요를 쓰고 찜질방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첫인상은 그랬다.
◇ 밤하늘을 장식한 두 개의 보름달
그러던 어느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옥상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스치듯 미미한 작은 별들과 커다랗게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골목들과 밤의 열기를 뿜고 있는 지붕 위로 거대한 또 하나의 달. 그렇게 두 개의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타지마할을 봤다. 사람들은 잠이 들고 밤의 원숭이들이 배회하는 담벼락 뒤로 뜬 하얀 대리석.
그것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의 이틀 동안 기차를 타고 내린 곳에서 잔뜩 품은 열기를 그대로 받은 몸은 이미 내 몸이 아닌 듯했고, 그런데도 그 밤의 하늘은 이상하게 아름답기만 했다. 모든 것이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나지막한데 커다란 감동이 밀려들었다.
깊은 밤 아무도 몰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보고 싶었던 풍경을 홀로 식을 땀을 흘리며 본다. 때로는 사랑이란 것이 홀로 시작하였다가 홀로 끝을 맺기도 하는 거라 여겼으므로 그다지 서럽지는 않았던 밤. 허공에 뜬 달과 지상의 달이 직선을 이루던 시간까지 오래도록 서성였다.
◇ 어느 곳에서 봐도 완벽한 대칭형 건물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의 부인 뭄타즈 마할 왕비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 그리움에 사무친 샤자한은 온 백성과 함께 2년 동안의 애도 기간을 가지고도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다. 죽도록 그립던 그 마음의 표상이 지금의 타지마할이 되었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자한이 세상을 떠난 부인을 기리며 지은 타지마할. 애달픈 사연을 가진 이 건물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불가사의한 건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사진 변종모
그러나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 엄청난 국고 손실이 있었으며, 제정을 낭비한 왕은 아들에게 폐위당한다. 후문에 따르면 샤자한은 누군가 이 건축물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게 될까 봐 공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손목을 잘랐다고 한다. 마음이 한 번 기울면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의 힘은 그만큼 거세고 일방적이다.
이토록 애달픈 사연으로 현재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타지마할에서도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꼭 사진을 찍는 포인트가 있다. 1992년 영국 다이애나 왕비가 앉았던 ‘다이애나 의자’는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타지마할의 정원과 분수를 배경으로 기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다.
타지마할은 어느 방향에서 나누더라도 정확한 대칭형의 건물로 유명하다. 네 개의 첨탑과 거대한 정사각형의 정원이 수로를 따라 또 네 개로 분리된다. 둥근 첨탑 안의 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다. 타지마할의 본 건물에 들어서면 자세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문양들과 대리석 창살로 쏟아지는 빛의 그림자가 황홀하다. 대리석을 잘라내고 다른 색의 대리석을 메워 넣는 상감기법의 정교함은 실로 감탄할 만하다.
▲타지마할 내부, 대리석 창살로 쏟아지는 빛의 그림자만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사진 변종모
실제 1층의 묘실에는 가짜 석관을 두었고 직선으로 바로 아래의 지하에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바깥이 아무리 열기에 이글거려도 묘지가 놓여 있는 돔 안은 그곳이 묘지라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청량한 울림이 있다. 매일 2만 명의 인부와 1000마리의 코끼리가 22년 동안 동원된 상상을 초월하는 건축물이다.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놀랍도록 정교하고 세밀한 문양들이 양탄자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 무굴제국의 요새 아그라포트도 장관
2007년 세상의 새로운 불가사의에 등극한 건물 타지마할을 좀 더 서정적인 느낌으로 바라보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타지마할을 끼고 도는 야무나강 건너편의 무굴식 정원 메탑 박(Mehtab Bagh)과 아그라 포트(Agra Fort)다. 개인적으로는 아그라 포트에서 보는 타지마할을 좋아한다. 아들에게 폐위당한 샤자한이 이곳에 갇혀 바라봤을 부인의 묘지. 야무나강을 따라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곳에 홀연히 아름답게 앉아 있다.
아그라 포트는 무굴제국의 요새이다. 타지마할 못지않게 아름다운 정원과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2.5Km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엔 힌두와 아프간 건축 양식이 혼재 된 제항기르궁전과 왕의 접견지였던 디와니암 그리고 포로의 탑이란 뜻으로 지어진 하얀 대리석의 무삼만 버즈 또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사실 많은 사람이 타지마할과 아그라 포트를 보러 이곳 아그라에 모여들지만 내가 아그라를 세 번이나 찾은 이유는 따로 있다. 지긋지긋한 더위와 불편함을 각오하고 견뎌야 하는 아그라의 미로 같은 골목들 때문이다.
▲여행자를 보고 해맑게 웃는 아그라의 소녀./사진 변종모
여전히 변하지 않는 신분과 삶이 지난하게 이어져 오는 골목 위로 비치는 거대한 묘지는 신기루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얽혀 있는 골목. 저 멀리 새하얗게 떠 있는 오래된 사랑의 상징. 그것을 바라보며 사는 보통의 사람들. 사랑이 영원한가? 삶은 또 영원한가? 거대하지 않아도 아름답지 않아도 사랑이리. 골목 안에서 소박하게 작은 별로 반짝여도 좋으리.
PS 타지마할은 한 번쯤 봐야 한다.
타지마할을 입장할 때는 가급적 이른 시간에 입장하거나 아예 늦은 시간에 방문하길 권한다. 정원이 잘 꾸며져 있지만 막강한 태양의 열기를 피할 길이 없다. 금요일은 휴무일이며 입장 시간은 일출에서 일몰까지다. 이왕이면 일출 시각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묘지 안으로 쏟아지는 대리석 창살의 실루엣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카메라를 제외한 소지품을 될 수 있는 대로 소지하지 않는 게 좋다. 입구에서 소지품 하나하나를 다 검색하기 때문에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온다. 타지마할 티켓을 소지하고 당일 날 아그라포트를 방문하면 약간의 할인이 있다. 요즘은 비교적 저렴한 숙소에도 냉방시설이 잘되어 있는 편이라 타지마할 근처 여행자의 거리 ‘따지 간즈’에서 묵으며 숙소나 카페 옥상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 풍경도 권할 만하다.
◆10.15 “지구의 나이테를 따라 걷는다” 베트남 산골마을 사파
‘신이 만들어낸 듯’…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이 장관
삶의 깊이처럼 층층이 쌓인 논둑길, 마치 어머니의 뒷모습 같아
▲사파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판시판을 마주한 산골마을이다./사진 변종모
여기는 베트남의 북쪽 산중,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풍경으로 선을 긋는 곳 사파. 모든 풍경을 밟고서 내려다보면 간혹 나의 지난 시간이 보이기도 하는 곳. 가자, 가을이 먼저 깊어가고 있다.
◇ ‘베트남의 지붕’ 판시판을 마주한 산골마을 사파
하노이에서 밤기차를 타고서 온 밤을 흔들리며 새벽을 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나와 비슷한 나이를 먹은 듯한 기차는 무성영화처럼 낡았었다. 격렬하게 쾌도를 달릴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곤 했지만 10시간의 밤은 고요했다. 337Km를 북으로 달려 도착한 라오까이(Lao Cai)역 광장에는 사파로 올라가기 위한 미니 버스들이 사람들을 살갑게 맞이했다.
해발 1650m의 산골마을 사파.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버스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몽환의 아침풍경. 고도를 높이며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더욱 커지는 심장소리. 지친 밤을 가만히 두지 않는 아름답고 피곤한 아침의 인사. 엷은 구름 사이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흐몽족(H’mong People)의 화려한 옷차림이 때 아닌 꽃송이처럼 반갑다.
여행을 실감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풍경보다 현지를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행색에서 찾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야 나는 멀리 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 것이지만 그들이 나를 멀리서 당긴 것처럼 고마움을 실감하는 아침. 덕분에 모든 흑백의 풍경들이 천연으로 실감되는 순간이다.
해발 1650m에 위치한 산골마을 사파에 이르면, 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사진 변종모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사파는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이다. 거대한 파노라마, 베트남의 지붕이라 불리는 판시판(Pansipan, 3143m)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판시판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이유로 신선한 날씨와 베트남 변방의 여러 소수부족들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인기 여행지가 되고 있다.
◇ 신이 만든 듯…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
사파의 중심이자 만남의 장소, 중앙광장 근처에 서있는 사파교회는 1930년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다. 식민지 시절 휴양 온 프랑스인들을 위해 지어 놓은 교회 앞에 화려하게 장식된 전통복장을 입은 부족들이 마스코트처럼 사람들을 반긴다. 교회를 기점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지만, 누구든 약속이나 한 듯 판시판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산 아래를 둘러보는 일로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을 깟깟(Cat Cat). 흐몽족의 생활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안내하는 사람 없이도 혼자서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도 저절로 만나게 되는 기본 코스라 할 수 있다. 사파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니 만큼 큰 기대 없이 가야한다.
즐비하게 이어진 기념품 가게 사이로 펼쳐지는 계단식 논들은 멀리서 보던 풍경과는 다르다. 벼들이 익어가는 층층의 계단식 논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과 폭포가 옛날 엽서에 나오는 풍경처럼 반긴다.
▲계단식 논은 얼핏 보기 단순해 보이지만, 그 풍경은 볼 때 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그래서 한번에 이를 다 보기는 어렵다./사진 변종모
사실 사파의 볼거리는 계단식 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순한 풍경은 시간이나 날씨,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도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수백 개의 계단이 그늘을 만들고 높낮이를 달리하며, 위와 아래의 색깔이 다르며 지루하지 않은 곡선들로 평화롭게 누워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사파에서 판시판산 꼭대기로 이어진 케이블카를 타고서 한 번에 다 보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직접 걷는 것만큼 좋은 여행이 없기 때문이다.
◇ 층층이 쌓인 논둑길 걷다 보면, 어머니의 포근함 느껴져
거대한 계단식 논을 가장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마을은 라오차이와 타반(Lao Chai & Ta Van)마을이다. 사파에서 6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계속 낮아지니 걷기도 더없이 좋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들과 층층이 쌓인 그 풍경들은 모두가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땀이다. 손마디가 굽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시간을 보내는 논둑길의 곡선들 전부가 그들의 것이다. 자세히 살펴야 겨우 발견되는 한 평생이 이곳에 수백 계단으로 놓여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들과 층층이 쌓인 그 풍경들은 모두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땀으로 만들어졌다./사진 변종모
애초에 산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산을 따라 삶을 짓듯 논을 일구었을 텐데 논을 일구어 산을 만든 것처럼 정교하다. 보고도 믿지 못할 것들은 모두가 신들의 공으로 돌린다. 지구상에 또 하나의 풍경이 마음속 길을 내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의 북쪽 산골마을 사파.
▲사파의 논둑길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사진 변종모
PS 오르락내리락 쉴 새 없이 즐거운 자연의 골목
베트남의 북쪽 사파는 하노이에서 하루 여러 편의 버스와 여행사에서 운행하는 사설 버스를 손쉽게 탈 수 있다. 만약 기차를 탄다면 밤기차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다. 사파의 관문 라오까이역에 도착하면 미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사파까지 올라 갈 수 있다. 사파 시내는 생각 보다 다양한 할 거리가 있다. 당일치기부터 여러 날을 걷는 트래킹을 통해 소수부족 방문이나 주변지역에 분포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사파 시내에서 판시판 정상까지 케이블카로 손쉽게 오르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상을 밟는 일도 사파에서 꼭 한 번쯤 해봐야 할 일이다. 사파에서 제일 큰 건물인 썬프라자 안에 안내소와 매표소가 있으며, 그곳에서 출발한다.
거의 모든 숙소는 가격대비 훌륭하므로, 전망이 좋은 숙소를 고르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식당 역시 선택이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메뉴가 기다린다. 광장에서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여행자의 거리엔 밤마다 부족들의 공예품이나 특산품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린다. 주말이 끼여 있다면 당일치기로 박하 일요시장 방문을 추천한다.
◆11.07 흔들리며 말아먹는 국수…살아 숨 쉬는 메콩강의 아침
티베트의 산속에서 시작된 강물, 동남아의 젖줄이 되다
새벽의 메콩강… 쪽배 위에서 파는 천원짜리 뜨끈한 국수가 일품
▲퐁디엔 수상 시장의 국수 팔이 배./사진 변종모
푸른 새벽을 떠다니며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사람들은 강물 위에서도 위태롭지 않다. 배를 타고 드나드는 일상이 마치 어느 지표면보다 단단하고 안전한 길처럼 의심하지 않는 새벽. 거대하게 흘러가는 강물 위,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배들은 새벽 새처럼 바쁘다.
언제나 부지런한 사람들의 아침을 여는 속도는 이리도 빠르다.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새벽 골목을 걷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니까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걷는다는 말이 맞겠다.
◇ 출렁이는 메콩강 위의 일상…배 위는 정원, 강물은 마당
5월에서 11월은 거의 모든 날마다 잠시라도 비가 내린다고 했다. 우기의 절정을 맞아 강물은 철없는 소년의 꿈처럼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과하게 넘실대고 있다. 오토바이들이 굉음을 내며 달리는 도로 면과 거의 대등한 높이로 흐르는 생경한 풍경들을 보고 걷자니, 자칫 강물이 도로 같고 도로가 강물 같아서 정신이 번쩍 드는 새벽.
껀터선착장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한 작은 배는 한참을 달려 까이랑 수상시장(Cai Rang Floating Market)에 도착했다. 푸른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니 검은 강물도 누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땅 위의 아침보다 강물 위의 아침이 먼저 열리는 것 같다. 배 위의 사람들은 강물을 길어 올려 세수를 하고 청소를 하며 먼 강물 위의 허공으로 기도를 했다.
▲어둠이 걷히자 사람들은 강물을 길어 올려 세수를 하고 청소를 하며 아침을 맞았다./사진 변종모
아득히 멀고 먼 티베트의 어느 산속에서 시작된 이 강물의 발원은 중국과 미얀마,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으로 왔다. 사람들은 이것을 메콩강이라 부른다. 어머니의 젖줄, 동남아시아 최대의 강. 그중 메콩삼각주(Mekong Delta)는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걸쳐 비옥한 강물로 천혜의 곡창지대를 만들었고 수많은 수산물의 보고가 되었다. 그 모든 감사의 기도가 날마다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먼 곳으로 향할 것이다.
◇ 흔들리며 말아먹는 국수…물 위의 아침 식사
그렇게 아침이 열리고 강의 일상은 시작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를 끓이는 배가 다가오고 총천연색의 열대과일을 실은 배가 지나친다. 아침부터 열심히 짐을 옮겨 싣는 사람들이 있고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배 위를 정원처럼 거니는 사람도 있다. 강아지가 배 위에서 남의 집 마당을 내려다보듯 강물을 바라보고, 꽃을 심는 소녀와 늦잠을 자는 소년이 있다. 이 풍경들이 나를 재운다.
강물의 속도와 반비례하는 온화한 미소를 가진 노인이 있고, 그 곁에 어린 손자가 손을 흔들어 깨우는 아침. 많은 여행자가 이 새벽 강의 풍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강 위의 일상들을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흔들린다.
사공은 까이랑 수상시장을 거쳐 조금 더 가까운 거래가 이루어지는 퐁디엔 수상시장(Pong Dien Floating Market)으로 배를 몰고 갔다. 퐁디엔까지 가는 뱃길은 도심을 빠져나온 외곽의 풍경처럼 또 다른 평화가 있다. 강과 강을 건너는 바지선에 수많은 오토바이가 실리고 더러는 자전거를 싣고 건너편으로 학교에 가는 학생들도 눈에 띈다.
거의 모든 일상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치 집 앞 골목을 돌 듯 몇 번의 좁은 수로와 큰 강을 번갈아 가며 배를 몬다. 강가의 야자수와 이른 아침의 새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가 잠 깨는 소리와 배 뒷전의 강렬한 모터음.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아침.
▲흐르듯이 걷고, 걷듯이 흘러가는 메콩강의 풍경. 강물 위의 아침은 땅 위보다 먼저 열린다./사진 변종모
퐁디엔 수상 시장의 아주머니들은 배가 들어오자 황급히 국수를 삶아내고 아침의 허기를 부추긴다. 흔들리며 국수를 먹고 흔들리며 과일을 나눈다. 천원짜리 국수를 받아들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웃음들을 함께 말아 먹는다. 훌륭한 아침 식사다.
◇ 흔들리고 흔들려야 겨우 제자리
대부분의 집은 강을 최대한 가까이 두었고 울창한 숲과 소박한 정원을 이루고 있다. 강물이 넘쳐 때로는 마당을 가두고, 군데군데 길을 막아서지만 아랑곳없다. 강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강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과 나란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무심한 생활이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식민지 시대에 정비된 관개수로로, 세계 그 어디도 부럽지 않은 곡창지대를 가졌던 곳이었다.
과거의 영화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그들의 곁에는 메콩강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강이 마르지 않는 한 여전히 그들의 일상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선 흔들리며 국수를 먹고 흔들리며 과일을 나눈다./사진 변종모
PS : 메콩델타 투어를
메콩강을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호치민에서 관광상품을 이용해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이나 그 이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투어 상품에는 방문하고 싶지 않은 곳까지 들러야 하는 경우가 있고, 출발과 돌아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여유롭지 못하거나 여행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것을 피하고 싶다면 미토 또는 컨터 등지의 메콩강 유역의 도시에 숙소를 잡고 문의하면 된다. 가격도 더 저렴하고 오롯이 메콩델타의 풍경을 보는 데는 이 방법이 유용하다. 출발 시각과 포인트를 아주 자세하게 안내받을 수 있고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특히나 껀터는 호치민이나 대도시로 연결되는 버스노선이 다양해서 여행하기에 적당하다. 껀터에서 투어를 이용해서 캄보디아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11.21 코끼리와 나, 처음 만나는 사이... 이리 살가워도 되는 건지 - 캄보디아
‘타는 게 아니라, 함께 걷는 것’…밀림 속 야생 코끼리를 만나는 시간
마을 끝 전망대에선 거대한 ‘숲의 바다’ 볼 수 있어
▲’숲의 바다’, 그곳에 사는 코끼리를 만나기 위해 캄보디아 북쪽 몬돌끼리에 간다./사진 변종모
캄보디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방향을 잡은 것은 북쪽이었다. 그냥 북쪽. 앙코르와트의 유적도 아니고 톤레삽 호수도 아니다. 그냥 북쪽이라고 마음먹고 지명을 몇 번이나 확인해 가며 묻고 물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름. 숲의 바다. 바다로 가기 위해 다시 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 ‘매우 기쁘다’라는 뜻을 가진 도시, 센모노룸
몬돌끼리는 캄보디아의 밀림지대 동북부의 주 이름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면 10시간 이상 달려야하는 곳이지만 거리상으로는 서울과 부산보다 가깝다. 그만큼 쉽지 않은 곳이다.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은 아니라 조금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단 모든 것은 도착하고 나서 판단할 문제다. 15인승 버스에 22명이 타고서 흔들리고 덜컹거리며 도착하는 동안 이미 예감했다.
이곳으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숲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좁은 공간을 이방인에게 조금이라도 편히 앉으라고 나눠주는 살가운 마음들. 아무리 넓혀도 서로의 어깨가 떨어지지 않는 우리는 모두가 같은 여행자 같았다.
▲수도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10시간 이상 달려야 만날 수 있는 몬돌끼리, 살가운 현지인들 덕분에 힘든 일정도 부담스럽지 않다./사진 변종모
몬돌끼리주에서 여행자들이 비교적 쉽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센모노룸(Senmonorom)이다. 몬돌끼리는 크메르어로 ‘만다라의 산’이라는 뜻을 가졌고, 센모노룸은 ‘매우 기쁘다’를 뜻한다. 세상에! 도시 이름이 매우 기쁘다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베트남과 라오스를 끼고 깊숙하게 들어간 캄보디아의 푸른 정원. 한 때 캄보디아 밀림의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코끼리 보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다. 코끼리를 타고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밀림의 야생코끼리들을 보호하며 사람과 동물을 이어주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 야생 코끼리를 만나는 시간 "우리 이렇게 살가워도 될까"
작은 산을 따라서 빼곡하게 들어선 숲은 빈틈이 없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낮은 나무들이 이중삼중으로 얽혀있어 시원한 산 속 공기가 산소통처럼 밀폐되는 느낌이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야생동물이 워낙 많아서 현지인들의 사고가 많이 나던 곳이라는 말에 발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트래킹을 좋아하거나 산을 자주 찾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쉬운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캄보디아의 밀림에 들어서면 코끼리들이 그림처럼 슬며시 등장한다./사진 변종모
제 아무리 산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숨은 그림처럼 슬며시 나타나는 코끼리.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동물. 작은 집만 한 코끼리가 얌전하게 코를 흔든다. 이미 코끼리를 발견 했다면 서로가 도망갈 수도 없는 거리다.
거대한 녀석이 얌전하게 눈을 껌뻑이며 코를 내민다. 그마저 순한 아이 같다. 가이드가 준비한 사탕수수를 툭툭 잘라서 주면 순식간에 삼키고 언제 줬냐는 듯 다시 기다란 코로 악수를 청한다. 너와 나,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리도 살가워도 되는 건지. 아무런 격식도 절차도 준비도 없이 만난 아무렇지 않은 관계가 있을 수 있다니. 가이드에 의하면 냄새에 예민한 동물이라 그 앞에서 화장하지 말고 향수 뿌리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할 마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그 시간을 매우 기쁘게 보낼 수 있다. 그 숲에서는 그렇다. 코끼리는 우리에 가두거나 올라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순한 아이처럼 사람들을 대하는 코끼리, 그저 바라보고, 먹을 것을 주고, 함께 걸으며 코끼리와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사진 변종모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그렇다. 말없이 다가가 어루만져 주며 대화하는 것. 먹을 것을 주거나 잠시 함께 걷는 것. 그리고 숲 속 냇가에서 함께 목욕을 하거나 각자의 영역에서 휴식하며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전부다.
◇ 숲이 바다를 이루는 진풍경, 도크로몸산의 전망대
센모노룸에서 지내는 동안 자주 그 숲속의 코끼리가 생각이 났다. 사방으로 펼쳐진 숲의 파노라마들을 볼 때마다 순진하게 껌뻑이던 눈과 커다랗게 팔랑거리던 귀와 슬며시 내밀던 코가 자꾸 생각이 나서 웃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자주 숲을 걷게 된다. 센모노룸의 가장 인기 있는 전망대라 할 수 있는 곳. 마을 끝 도크로몸산(Dohkromom Mountain) 뒤, 숲의 바다(Sea Forest)다.
말 그대로 숲의 바다. 숲이 바다를 이루는 곳.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숲은 정말로 바다 같다. 끝없이 펼쳐진 부드러운 밀림의 곡선들이 물결이었다가, 구름들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에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숲의 바다라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멀리서 바라보는 밀림은 ‘숲의 바다’ 같다. 구름이 바뀌는 순간에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한다./사진 변종모
숲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곳 캄보디아의 동북부에 장황하게 펼쳐져 있다. 그 숲 속에는 당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기다린다.
PS 몬돌끼리에서 해야할 일들
센모노룸에 내리면 편의시설은 숙소 주변의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걸어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모든 것은 거의가 주변에 흩어져 있어서 투어에 참여하거나 툭툭을 하루 대절(30달러)해서 다니는 것이 현명하겠다. 코끼리를 만날 수 있는 당일 코스 1인당 40달러, 1박 2일 코스 75달러이다. 잠시 방문하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오토바이를 빌려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5월에서 12월 사이에 방문하게 된다면 우기철의 특혜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보스라폭포(Bousra Waterfall)를 꼭 가보자. 그리고 베트남 국경 쪽의 길도 매우 아름다우며 돌아오는 길에 닥담(Dakdam) 폭포까지 들린다면 좋겠다. 이 밖에도 이국적으로 펼쳐진 목초지대와 붉은 흙길의 초원과 밀림을 어느 방향으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12.05 아슬아슬한 풍등...태국에선 밤하늘을 수놓는 환상의 축제
12월 보름날 열리는 태국 치앙마이 ‘로이 끄라통’ 축제
도시 전체를 감싼 촛불과 오색등…"꿈속의 꿈같아라"
▲로이 끄라통(Loi Krathong)은 태국력으로 12월의 보름날에 이뤄진다. 특히 하늘로 커다란 풍등을 날려 보내는 이뼁(Yi Peng)이 유명하다./사진 변종모
치앙마이는 이제 더 이상 작은 도시가 아니다. 많은 비행 편수가 생겼고, 하루에도 수십 차례 성능 좋은 버스들과 기차들이 대도시로 이어지는 태국 북부의 최대 도시로 성장 중이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편리하게 축제로 향할 수 있다.
◇ 소원을 작은 배에 실어 보내자, ‘로이 끄라통’ 축제
아스텔리아 1213 오픈베타
로이 끄라통(Loi Krathong). 태국력으로 12월의 보름날에 이루어지는 행사로 태국 전역에서 펼쳐지는 행사지만, 이곳 치앙마이가 가장 유명하다. 대게 11월 중에 열린다. 태국의 모든 축제 중에서 하반기의 가장 성대한 축제라고도 할 수 있다.
로이(Loi)는 소원을 일컫는, 끄라통(Krathong)은 작은 배를 말한다. 즉 소원을 작은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행사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뼁(Yi Peng) 행사가 더해져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치앙마이로 몰려든다. 이뻥은 커다랗고 하얀 풍등을 하늘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의미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풍등의 환상적인 연출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며 환호한다.
▲11월 치앙마이 구도심 주변은 촛불과 등불로 환하게 밝혀진다./사진 변종모
"로이 끄라통에 참여할 거야"라는 말은 풍등을 날리는 이뻥 행사에 참여할 거란 말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치앙마이에 몰려드는 대부분 사람은 이 풍등을 날리는 이뻥 행사가 로이 끄라통이라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상관없는 일이다. 모두가 같은 날에 이루어지고 같은 뜻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고 축하한다.
◇ 도시 전체를 감싼 촛불과 오색등…"꿈속의 꿈같아라"
축제는 성곽 안에 조성된 구도시와 주변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보름날 전후 하루씩, 그러니까 3일간의 절정이 되겠다. 이 중에는 외국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로이 끄라통 만들기와 전통댄스 관람, 퍼레이드 등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3일이라는 시간이 정말로 짧다.
축제의 서막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촛불과 오색등들이다. 작은 촛불이 촘촘하게 놓여 온 거리를 밝히고 오색등들이 하늘에 창연히 매달리면 축제의 신호가 된다. 사람들은 밤늦도록 거리에 나와 사진을 남기거나 촛불이 놓인 길을 걷는다. 이 정성스러운 수고를 치앙마이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도맡아 하는데, 그마저 수고스러워 보이지 않고 즐거워 보인다.
▲행사 기간에는 사원들도 각기 다른 모양의 등을 달고 사람들을 맞는다./사진 변종모
구도시 안에는 편의점보다 사원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사원들에서도 각기 다른 모양의 등을 달고 사람들을 맞이하기 때문에, 사원들만 둘러봐도 충분히 축제의 분위기를 실감한다. 이 중 왓 판 따오(Wat Phan Tao) 사원은 축제 기간에 꼭 한 번쯤 들러봐야 할 곳이다. 사원 한쪽 커다란 나무 아래 금불상이 놓여 있고, 그 나무에 나뭇잎만큼 많은 오색등이 달린다. 작은 동산을 감싸는 연못 위로 비치는 오색찬란한 불빛들과 동자승들의 고요한 자태는 종교를 떠나서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연출이 되겠다.
어떤 사람들은 풍등을 날리는 것보다 이 장면을 담고자 오래도록 공을 들인다. 얼마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인가. 꿈도 아닌, 꿈속의 꿈같은 곳에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곳뿐 아니라 이 기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연출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축제의 하이라이트 핑강(Ping River)으로 가자. 아니다. 내가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따라 저절로 걷게 되는 것이다. 원래 알고 있던 길처럼. 마치 자주 다니던 길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강물처럼 흘러 강으로 가자. 모두가 그 방향으로 향한다.
◇ 보름달이 선명해지면, 소원 담은 풍등을 하늘로
치앙마이 구도시 외곽으로 흐르는 커다란 강 위로 걸쳐진 여러 개의 다리에서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이루어진다. 밤이 시작되고 보름달이 선명해지면 검은 강으로 환한 꽃배를 띄우거나 하늘로 풍등을 날려 보내려고 사람들이 이곳으로 향한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꽃배를 띄우는 사람들과 다리 위에서 풍등을 날리는 사람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까만 밤에 흔들리는 불빛들이 찬란한 혼돈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애틋하고 간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도심을 밝히는 일은 치앙마이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도맡아 하는데, 그마저 수고스러워 보이지 않고 즐거워 보인다./사진 변종모
세상의 모든 소원이 다 모이는 밤은 이리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각자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을 스스로 꺼내놓고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다.
PS : 축제 준비는 미리미리
태국력에 따라서 매년 축제의 시기가 달라지므로 태국 관광청이나 치앙마이 관광청 사이트에서 미리 확인하고 계획해야 한다. 태국의 성수기가 11월부터 시작되는 데다 축제가 이즈음 시작되기 때문에 왕복 교통편과 자신이 원하는 숙소를 선택하는 일 또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나 숙소는 가격이 많이 올라가기 때문에 꼭 구도시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조금 벗어난 곳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더 이로울 수도 있겠다. 치앙마이 자체가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충분히 있고 곳곳에 밤마다 열리는 야시장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숙소와 구도시를 오가는 동안 더 좋은 여행이 될 수도 있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것이며 가지고 갔던 소원을 잊지 않는 것이다.◎
◆2019.01.04 여행자의 대합실, 카오산 로드 - 베트남
야시장, 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는 배낭 여행객의 성지, 카오산 로드
작은 골목마다 마사지 가게, 맛집 많아 여행 피로 푸는 데 그만
▲동남의 여행의 출발지이자 종착지가 되는 카오산 로드./사진 변종모
방콕이다. 그리고 카오산 로드다. 방콕과 카오산 로드는 한 몸이면서 전혀 다른 앞과 뒤가 있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남아 여행의 모든 출발지가 되고 거의 모든 종착지가 되는 곳. 그곳에 다시 왔다. 여권에 찍힌 태국 도장은 거의 다 방콕으로 표기되어 있고, 다른 국경에서 넘어와도 나는 결국 방콕, 또 카오산 로드에 짐을 풀고 만다. 지긋지긋하지만 지긋지긋하게 신나는 곳. 징글징글하다면서 그렇게 표현한 여행자 대부분이 꼭 다시 찾게 되는 곳. 마치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로 갈 수 없는 듯. 그야말로 방콕은 여행자의 대합실이다.
◇ 카오산 로드, 하나의 골목에 모인 온 세상
방콕은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곳이라 함부로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는 더욱더 힘들다. 그래서 오랜 여행자들의 골목 하나만 소개하기로 한다. 짜오프라야(Chaophraya)강과 방람푸 운하를 끼고 있는 카오산 로드는 방람푸 시장 가까이에 자리한 곳으로, 저렴하게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다. 예전에는 배낭여행의 종착지 또는 여행의 첫 시작점이 되어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어울려 같은 방향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방법은 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하다. 많은 여행사가 몰려 있어 이곳에서 태국 어디든, 이웃 국가 어디든 갈 방법이 생긴다. 여행자가 구하고 싶은 것은 그곳에 다 있다.
▲카오산 로드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왕궁./사진 변종모
카오산 로드가 만만한 이유는 부담 없이 즐길 거리가 많은 것 외에도 다양한 문화유적과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경 1~2Km 내에도 갈 곳이 너무나 많다. 우선 카오산 로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은 동남아에서 몇 안 되는 다량의 소장품이 전시된 곳이다. 이곳에 태국 미술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걷는 모습의 불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도보로 5분이면 왕궁(Grand Palace)과 왓 프라깨오(Wat Phrakaew) 즉 에메랄드 사원을 만날 수 있는데 역대 국왕들이 기거했던 왕궁과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원의 본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상,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웃 나라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 가져온, 차크리 장군의 전리품으로 전해져오는 이 불상은 국왕의 수호신으로 숭배받을 정도며 참배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방문하는 첫 관문이 되기도 한다.
◇ 밤이면 야시장이자 클럽 골목이자 카페촌이 되는 골목
바로 근처에 있는 사원 왓 포(Wat Pho). 수많은 불두와 석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방콕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사원의 백미는 와불이다. 방콕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불상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정도는 있을 것이다. 거대한 황금 불상(길이 45m, 높이 15m)이 누워 있는데 5m 길이의 발은 자개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왓 포에 있는 거대한 와불, 5m 길이의 발은 자개로 정교하게 세공됐다./사진 변종모
경내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사원은 왓 아룬(Wat Arun)이다. 이 사원은 짜오프라야강 건너에 있어서 대게는 카오산 로드의 방람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유람하듯 다녀올 수 있다. 왓 포 가까운 곳에도 선착장이 있다.
아룬은 태국어로 새벽이라는 뜻으로 새벽 사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동틀 무렵이나 일몰에 그 아름다운 빛이 최고조를 이룬다. 선착장 입구에서부터 멋진 경관을 느낄 수가 있어 방콕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원에 속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카오산 로드에 짐을 푼다면, 문화유적지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카오산 로드 자체의 매력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모든 여행자가 카오산 로드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만만하고 편한 이 거리엔 간혹 여행자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일삼는 호객꾼들이 여행의 피로감을 올리기도 한다.
태국 여행에서 가장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태국식 마사지일 텐데, 카오산 로드의 작은 골목에도 수많은 곳의 마사지 가게가 있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더운 오후나 이른 저녁에는 이곳에 누워 마사지로 피로를 푼다. 또한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 방콕에 오래 머물다 보면 체중이 저절로 늘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카오산 로드 주변의 음식점들이 한국 TV에 방영되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밤이 되면 카오산 로드의 매력은 극에 달한다. 색색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야시장이자, 클럽 골목이자, 카페촌이 된다./사진 변종모
밤이 오면 카오산 로드의 매력은 극에 달한다. 온갖 카피 제품들이 골목에 진열되고 색색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진정한 골목이 된다. 야시장 같기도 하고 클럽 골목 같으면서도 카페촌이기도 하다. 최신 유행하는 음악부터 60년대 전 세계를 떠돌던 유행가들이 뒤섞인 밤. 시원한 맥주잔을 나누며 친구가 된다. 그 밤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로 비슷한 단어들로 여행을 채워 나간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는 만만한 곳 한 곳 정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거기가 바로 방콕일 것이며 카오산 로드가 될 수 있겠다. 거대하지도 넓지도 않은 골목 하나에 날마다 세상 모든 여행이 진행된다. 한 번쯤 그 골목을 걸었다면 자주 생각날 것이다. 그때마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그 거리의 모든 것들이 당신을 유혹할 것이다. 그래도 걱정 없다. 방콕은 언제나 당신을 환영하고 카오산 로드는 오늘도 누구나 한 번쯤 쉬었다가 맥주 한잔하기에 부담이 없는 곳이니까.
PS. 카오산 로드의 나날들
카오산 로드에 머물고 싶다면, 카오산 로드를 살짝 비껴간 곳에 숙소를 알아보는 것이 더 쾌적함을 보장할 수 있겠다. 카오산 로드 근처의 방람푸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면 태국 서민들의 일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고 생각보다 다양한 곳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카오산 주변을 다 둘러봤다면 방콕 시내를 공략하거나 방콕 주변으로 나가는 일이 일반적인데, 모두 숙소에서 알아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근교의 아유타야와 메끄렁 수상 시장 또는 파타야로 가거나 꼬창으로 잠시 다녀오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02.10 메콩강에는 돌고래가 산다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 사천 개의 섬, 라오스 시판돈
해가 뜨고 지는 일을 보는 게 전부, 그래서 모든 걸 느낄 수 있는 곳
▲라오스의 국경, 메콩강에 사는 이와라디 돌고래./사진 변종모
◇ 외롭지 않은 이웃의 섬, 씨판돈
씨판돈은 사천 개의 섬이라는 뜻이다. 라오스의 최남단.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사천 개의 섬이 있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아주 작은 모래톱부터 제법 큰 규모의 섬까지, 다양한 크기의 섬들이 살가운 간격으로 이웃해 있다. 가느다란 쪽배를 타고 섬들 사이를 배회하면 섬 하나가 한 채의 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돌아앉은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들이 아니라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 이웃의 섬들이다.
사천 개의 섬 중 한 곳에 안착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렸다. 씨판돈에서 가장 큰 섬은 인구 1만5천여 명이 거주하는 돈콩(Don Khong)섬이다.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배낭여행자들은 가장 남쪽의 돈뎃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쪽배를 타고 작은 섬 사이 골목을 누빈다./사진 변종모
돈뎃은 히피들의 성지, 배낭여행자들의 집합소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2009년 후반에 겨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마저 아쉬워하며 촛불 밝히던 예전을 그리워한다. 그만큼 문명과 상관없이 살던 섬은 여전히 느리게 고여 있다. 어쩌면 도시를 살던 사람들은 이곳의 생경한 불편함을 즐기러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섬의 북쪽, 보트가 정박하는 근처에 숙소와 카페들이 몰려 있지만, 대부분은 섬을 떠날 때까지 숙소 안에서 뒹굴거나 섬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산책하거나 책을 읽거나 간단하게 배를 채우는 일 아니면, 날마다 뜨는 태양과 날마다 지는 태양을 비교하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여긴다. 메콩강 위로 지는 석양은 누가 보더라도 부정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강 위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야자수의 실루엣,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피곤한 발걸음까지 경쾌하게 느껴진다.
◇ 사원보다 인기가 좋은 리피폭포
간혹 지루해지면 자전거를 빌려 돈콘(Don Khon)섬을 다녀오기도 한다. 두 섬은 프랑스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158m의 콘크리트 다리로 연결돼 있다. 섬의 규모에 비해서 너무 큰 다리가 아닌가 싶지만, 섬을 옮겨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으니 고마운 다리이기도 하다.
섬 북쪽엔 왓 콘따이(Wat Khon Tai) 사원과 1894년에 건설된 철도를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쓰러져가는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여행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강 쪽으로 흐른다. 리피폭포(Lipi Waterfall)는 여행자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강 위의 폭포, 강을 흐르던 물이 계단처럼 떨어지는 곳이다. 거대한 폭포가 아니라서 실망도 하지만 물살의 힘은 대단하다. 우기의 리피폭포는 무서우리만큼 거대한 소리를 낸다.
▲돈콧에 사람이 가장 몰리는 곳 리피폭포, 거대하지 않지만 물살의 힘이 대단하다./사진 변종모
강의 폭포를 경험했다면 이제 강의 돌고래를 만날 차례다. 자전거를 타고 낮은 숲들을 지나 곡식들이 익어가는 논밭을 건너 캄보디아 국경을 맞이하는 곳에 비밀스럽게 흐르는 강을 만난다. 같은 메콩강이지만 왠지 비밀스럽다. 단지, 돌고래가 산다는 이유로 그렇다.
◇ 메콩강에 사는 이와라디 돌고래
"우리 돌고래를 보러 갈까?" 그 제안을 받은 건 아주 오래전, 라오스의 북쪽 루앙프라방의 어느 일본 여행자에게서였다. 그때 처음 강에 돌고래가 산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지 돌고래를 보기 위해 남쪽 국경까지 가야 한다는 말에 손사래를 쳤었다.
숨소리보다 고요한 강 위에서 이라와디 돌고래를 기다렸다. 1970년대에는 천 마리가 넘게 서식했지만, 지금은 백여 마리에 불과해 쉽게 볼 수 없다고 했다. 포기할 쯤에 작은 파도처럼 매끄럽게 수면 위로 등을 보이는 돌고래를 목격했다. 태평양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돌고래와 달리 좀 더 은밀하고 고요했다. 그 시간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다 보니 간절해진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씨판돈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걸 관찰하는 일이 중요하다. 매일 뜨고 지는 해도 이곳에서는 달리 보인다./사진 변종모
사람들은 간혹 불편을 자처하며 자신의 행복을 깨닫기도 한다. 사천 개의 섬들이 모인 곳. 씨판돈. 그중에 두 개의 섬에 잠시 살았을 뿐인데 오래도록 기억에서 비밀스럽게 강물 소리를 낸다.
PS. 섬의 수칙
대부분 여행자는 소개한 두 곳의 섬 중 한곳에 머물며 섬을 오간다. 강이 주는 즐거움이 가장 큰 곳이므로 강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레포츠를 만끽할 수 있다. 좀 더 고급 숙소를 원한다면 돈콩에서 지내는 것이 낫지만, 씨판돈의 묘미는 이 두 섬을 오가면서 생기는 것이다. 숙소를 잡을 때는 강을 마주하는 방갈로를 추천한다. 모기나 벌레를 대비한 방충 시설이 잘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필수. 이곳에서 캄보디아로 국경을 건널 수 있다. 섬을 빠져나와 남쪽 국경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02.18 달에 가 본 적 없지만, 달의 표면에 온 듯한 이곳 - 칠레
칠레 북쪽 국경 마을, 사막지대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
태초의 모습처럼 척박한 아름다움 간직한 곳, 마치 달의 표면 같아
▲칠레의 북쪽, ‘달의 계곡’이라 불리는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 마을이 있다./사진 변종모
◇ 달의 출입문,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
6400km가 넘는 긴 해안선을 가진 나라 칠레의 가장 북쪽.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이 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넘으면 처음으로 만나는 국경 마을. 산 페드로데 아따까마는 아따까마 사막 한 가운뎃점처럼 찍혀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잉카 시대 이전의 마을로, 원주민이 아직도 생활한다. 이 척박하고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순전히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때문이었다. 남미를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여행자가 달의 계곡을 이야기했다.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넘어오는 마지막 밤에는 실제로 커다란 보름달이 떠서, 그 밤을 지내고 나면 정말로 달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아따까마 사막지대는 해발 2438m가 넘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덕분에 첫인사가 뜨거운 열기였다. 그리고 열기를 온전하게 시각적으로만 식혀주는 하얀색 집들이 있다. 어도비 양식의 흙집들은 척박함과 상관없이 동화적이다
▲새하얀 산 페트로 교회는 1544년 지어졌다가 18세기 증축됐다. 소박한 외형이지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 1001’에 선정되었을 만큼 아름답다./사진 변종모
여행객을 맞이하는 여행사와 숙소, 식당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네는 한낮이면 인적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 칠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다. 산 페드로 교회는 아르마스 광장 옆에서 가장 빛나는 건물이다. 154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모습은 18세기에 다시 증축됐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모양의 이 교회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 1001’에 선정되기도 했다. 커다란 후추나무 곁의 새하얀 교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위로 향한 십자가가 달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건물처럼 성스럽다. 나는 자꾸만 이 척박한 마을이 아름답기만 하다.
◇ 태초의 풍경을 담은 ‘사막의 사막’
해가 한풀 꺾인 오후. 드디어 달의 계곡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이지만, 스치는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지구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새하얀 건물들이 사라지고 사막의 사막으로 들어간다. 부드러운 사막이 아니라 날카롭고 단단한 사막이다.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 태초의 풍경이 이럴까 생각한다.
차가 멈춘 곳에서 얼마 걷지 않았다. 하늘이 순해지기 시작하는 그 시간에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달의 표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 누구도 달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달의 표면이라 여길 것이다. 여기는 달의 계곡. 달의 표면에 닿았다.
▲바람과 비와 태양이 만들어 낸 흔적들, 달의 표면이 이러할까?/사진 변종모
바람과 비와 태양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시간의 흔적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태고의 자연이 지구의 한 부분을 이토록 척박한 아름다움으로 유지시켰다. 거대한 협곡 사이로 펼쳐진 달의 표면에 많은 사람의 시선이 닿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달이 되었다.
◇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달이라 믿을 수밖에
전망대를 내려와 소금 동굴로 향했다. 바다였던 자리가 솟아나 대륙이 된 곳에는 시간이 흘러도 바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소금의 결정들이 바위 위로 하얗게 올라앉았고 물결무늬로 협곡을 이룬다. 눈 앞에 펼쳐진 소금 바위들이 곡선과 직선, 때로는 굴처럼 음산했다가 태양의 온도에 따라 경쾌하게 맑은 소리를 낸다.
해가 소금사막 쪽으로 넘어가는 시간. 기울어지는 태양을 보기 위해 아따까마 사막을 오른다. 그림자는 길어질 대로 길어져 희끗희끗하게 솟아난 소금 바위들이 달의 주민들처럼 서성거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죽어있는 달의 계곡에서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는 태양을 마주한다.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암석들은 초 단위로 색을 바꾼다. 무채색 바위가 분홍이 되었다가 오렌지빛으로 익었다가 붉게 타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태양이 사라지면 달의 계곡도 온통 암흑이다. 대신 머리 위엔 별들이 아주 가깝게 내려앉는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거대한 암석들은 초 단위로 색을 바꾸어 간다./사진 변종모
PS. 달의 표면을 돌아보는 일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 넘어오거나 반대로 칠레에서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도중에 거쳐야 할 마을이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에서는 수많은 투어 상품을 판매한다. 투어의 종류에 따라 시간이 다르므로 일정에 맞게 계획한다면, 하루에 많은 지역을 볼 수 있다. 꼭 추천하고 싶은 투어 타띠오 간헐천(Geyser Del Ratio)은 해발 4500m에서 끓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간헐천인데, 여기서 수영을 하거나 온천을 즐길 수도 있다. 체력이 된다면 새벽에 간헐천 투어를 끝내고 오후에 달의 계곡 투어를 해볼 것. 밤과 낮의 기온 차가 크기 때문에 투어 때는 꼭 가벼운 점퍼를 챙겨야 한다. 특화된 관광지로 비교적 물가가 비싸다. 숙소와 식당은 마을 규모에 비해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03.08 벼랑 끝 아슬아슬하게 걸린 '황금바위'의 정체는 - 미얀마
간절한 믿음이 만든 걸까? 낭떠러지에서도 흔들림 없는 미얀마 황금바위
일생에 한 번 이곳에서 기도하는 게 희망인 사람들
▲미얀마 남부 짜익티요의 황금바위. 미얀마 3대 성지로 불린다./사진 변종모
짜익티요로 떠나기 며칠 전, 숙소를 청소하는 소년에게 물었다. 황금바위를 본 적이 있냐고. 소년은 수줍게 웃으며 두 개의 손가락을 폈다. 한 번은 엄마와, 한 번은 온 가족이 함께 갔었다며 웃는다. 소년에게 양손의 엄지를 추어올리며 최고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내가 아니라 숙소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는 꼭 황금바위를 보러 갈 거라며 소년처럼 웃었다. 그리고 차편과 숙소를 알려주고, 아침과 저녁에 두 번을 다녀오면 더욱 좋다고 조언했다.
◇ 거대한 바위 하나가 모두를 불러모았다
미얀마 남부에서 양곤행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린 짜익티요는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지 않은 12월의 정오였다. 관리인이 일러준 기억을 더듬을 새도 없이 어디선가 검은 얼굴의 청년이 나타나 "골든 락(Golden Rok)?"하고 묻는다. 황금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짜익티요산 아래 있는 킨푼(Kinpun)으로 먼저 가야 한다. 얼마나 걸리는지 어느 방향인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모두 그 방향이니.
얼마 달리지 않아서 내린 킨푼은 사거리 모두가 상점과 식당들로 꽉 차 있었다. 온 가족이 삼삼오오 손을 잡고 산 아래로 몰려들었고, 외국인들 또한 두리번거림 없이 같은 행동이다. 얼른 숙소에 짐을 풀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킨푼 네거리 귀퉁이에는 황금바위로 올라가는 전용 트럭 주차장이 있다. 안내원의 손짓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철제계단을 오르고 트럭 안으로 구겨졌다. 구겨졌다는 말이 맞다. 짐이나 건축자재들이 실려야 할 트럭에는 사십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다란 철제의자에 앉아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정원이 다 차지 않으면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서서히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힘든 표정의 사람들은 없었다.
▲벼랑 끝에 걸쳐있는 거대한 황금바위는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사진 변종모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또 다른 놀라움의 연속이다.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을 거침없이 오른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려도 아랑곳없이 차는 계속 전진한다. 군대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절대 즐거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어 버틴다. 다 같이 흔들리는데 그중 내가 제일 많이 흔들리는 느낌은 또 묘한 경험이다.
그렇게 30분을 넘게 달려 도착한 정상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구름이 안개처럼 신비롭게 몰려들고 사람들은 신발을 벗어 예의를 갖추어 천천히 바위 쪽으로 걷고 있었다. 점점 급해지는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폭우가 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서히 맑아지는 하늘. 검은 구름 아래 태양의 희미한 빛이 바위를 드러낸다. 순간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금바위로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새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바위. 그곳에 모인 모두가 바위의 후광처럼 서성이며 오래도록 떠날 줄 모른다. 이 바위 하나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산과 구름과 새들까지.
◇ 낭떠러지에서도 흔들림 없는 황금바위…미얀마 3대 성지
짜익티요의 황금바위는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만달레이의 마하무늬 파야(Mahamuni Paya)와 더불어 미얀마의 3대 성지라 불린다. 황금바위 사원은 미얀마의 순수불교라기보다 정령신앙에 가까운 ‘낫’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산꼭대기의 낭떠러지에 비스듬하게 걸쳐진 7m 크기의 거대한 바위를 미얀마 사람들은 불가사의라고 믿는다.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분명 떨어져야 마땅하나, 현재까지도 미동 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황금바위 옆에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사진 변종모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수도자가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얻어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숨겨와 왕에게 자신의 머리를 닮은 바위를 구해 사원을 짓고 그곳에 머리카락을 안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왕은 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깊은 바다에서 둥근 바위 하나를 건져 올려 이곳에 올려놓았다.
바위 근처에는 밤낮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의 기도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바위를 만지거나 곁에 앉아 기도할 수 없다. 여자들이 만지면 바위가 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울타리 안의 바위를 만지거나 금박을 붙이며 기도를 하는 일은 오로지 남자들의 몫이다.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불러준 황금빛 바위에 간절히 마음을 연다. 하늘은 여전히 급하게 움직이는데, 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자세는 미동이 없다.
오래도록 그들의 모습을 본다. 오로지 거대한 바위 하나가 불러들인 이 풍경을 나는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세상에는 설명 가능한 것들보다 설명하지 못 하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꿈이나 희망 말이다. 그것을 믿어야 살기 때문에 저 거대하게 빛나는 바위는 누군가의 위로가 될 만하다. 일생에 한 번 황금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일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자체로 소원을 이룬 셈인지도 모른다. 그들 곁에서 조용히 내가 바라던 일들을 저 찬란하게 빛나는 바위 위에 슬쩍 올려 본다. 아마도 저 벼랑 위의 바위는 앞으로도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설명하지 못 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믿어야 살기 때문에, 거대하게 빛나는 바위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사진 변종모
PS 거대한 황금바위 곁으로
미얀마의 첫 도시가 양곤이라면, 아웅밍글라 버스터미널에서 짜익티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킨푼으로 가는 차가 있다. 소요 시간은 4시간 이상 걸린다. 그 밖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짜익티요에서 내려 킨푼으로 다시 가야 한다. 킨푼에는 마땅한 숙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양곤 근교의 바고(Bago)를 여행한 후 당일로 다녀오는 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황금바위 사원 입장료는 외국인의 경우 2018년 12월 현재 1만 짯(약 7380원)이며, 킨푼에서 정상까지 트럭 요금은 편도 2000짯(약 1480원)이다. 미얀마 대부분 사원에는 맨발로 출입할 수 있으며, 여자들은 짧은 치마나 민소매를 허용하지 않는다. 남자들 역시 반바지 차림은 예의가 아니다.
◆03.22 발밑으로 까칠한 석회층, 종아리엔 따뜻한 온천수가 스친다 - 터키
1만4천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석회 욕조, 터키 파묵칼레
석회층 한 개가 한 개의 욕조…종아리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천수
고대 귀족들의 온천 휴양지, 질병 치료에도 효과적
두 번의 대지진 이후 발굴된 고대도시, 도시 곳곳이 유적지
▲터키 남쪽 석회층 온천지대로 유명한 파묵칼레가 있다./사진 변종모
파묵칼레는 터키의 남쪽에 있는 석회층의 온천지대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을 뜻한다. 목화의 성이라니. 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가.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훈훈한 온기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석회층의 온천수 때문이겠지만, 마을 뒤로 이어진 새하얀 언덕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유 없이 따뜻한 감정이 생기고 만다.
◇ 석회층마다 온천수가 흘러넘치면 세상의 모든 노을이 그 속으로 진다
마을광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석회층(Travertine Terraces)을 만나게 된다. 티켓을 내자마자 신발부터 벗는다. 석회층은 탄산염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칼슘탄산염으로 침전되고, 세월의 힘으로 단단해져 눈부시게 빛이 난다. 매년 1mm씩 커지는 석회층은 1만4천년을 넘는 시간을 언덕으로 만들었다. 발밑으로 까칠한 석회층이 닿고, 종아리엔 따뜻한 온천수가 스친다. 언덕 아래 멀리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소담스러운 풍경까지. 여기는 과연 신들의 휴식처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석회층 보호를 위해 일부 구역만 들어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석회층 하나가 한 개의 욕조였다. 아무리 좋은 호텔의 욕조라도 그런 경관은 연출할 수 없으리라. 많은 곳에 석회층이 형성되어 있지만, 이처럼 온천수가 고이는 곳은 드물다고 한다. 사진에서 익히 봐왔던 그 풍경이지만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도 따뜻한 온천이 발밑을 간지럽히는 촉각까진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침묵하고 걷거나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석회층을 감상하는데 온 시간을 쏟는다.
▲석회층 하나는 한 개의 욕조나 다름없다. 하얀 물 빛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붉은 장미로 변한다./사진 변종모
아침에 만난 석회층은 그 빛이 하늘을 그대로 담아내 푸르고, 정오의 물빛은 하늘이 더욱 깊어져 제각기 석회층의 방향에 따라 다양한 바다가 펼쳐진다. 석회층에서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열대의 바다를 만나는 기분이다. 어떤 곳은 얕고, 어떤 곳은 깊고 넓으며 둥글게 휘어지다가 그 끝이 매끄럽거나 거칠게 도드라져 꽃송이처럼 놓여있기도 했다. 그러다 해가 기울면 온통 노을을 받아들인 석회층이 붉게 번진다.
새하얀 목화꽃이 붉은 장미가 되는 순간이겠다. 주홍빛으로 시작해서 붉게 끓다가 보랏빛으로 가라앉는 하얀 석회의 연못들.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시간이다. 석회층마다 온천수가 흘러넘치면 세상의 모든 노을이 그 속으로 진다. 직접 발을 담그고도 믿지 못할 이 풍경들엔 인간의 수고가 1mm도 개입되지 않았다.
◇ 로마극장과 아폴론 신전…도시 전체가 고대 유적지
사실 파묵칼레는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를 빼고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석회층 정상에서부터 평원으로 이어지는 곳에 전설이 아닌 과거의 도시가 현재에 우뚝 서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자리했던 그때의 파묵칼레는 페르가몬 왕국의 첫 도시 히에라폴리스, 즉 성스러운 도시로 통했다.
파묵칼레란 이름은 셀주크 제국의 지배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하지만 1세기경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가 재건립되었고, 이후 귀족들과 고위층들의 온천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질병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그 위상이 더없이 높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번영하던 히에라폴리스는 1354년 다시 대지진으로 사라지게 된다.
▲1만4천년이 넘는 시간이 만들어낸 새하얀 석회층 언덕./사진 변종모
현재의 모습은 독일의 고고학계에서 1887년에 발굴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덕분에 과거의 유적들이 새하얀 목화의 성 위에 아무렇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새하얀 석회석에 갇힌 푸른 물에 반해 거대한 고대 유적을 잊곤 한다. 석회층에서 따뜻하게 담근 발로 과거를 걷다 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시간의 흔적들. 개인적으로 유적지에서 가장 존재감에 크게 다가왔던 곳은 원형으로 된 로마극장이었다. 무대를 향해 아래로 이어지는 객석에서 바라보는 파묵칼레의 전원은 로마시대처럼 아련했다.
또 다양한 형태의 석관들이 즐비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유적지의 북문에서부터 시작되는 네크로폴리스는 ‘죽은 자의 도시’라는 뜻이다. 히에라폴리스 사람들이 묻힌 엄청난 규모의 공동묘지로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묘지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도 1200기가 남아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에 온 사람들이 생을 마감한 곳. 그리고 이어지는 로마 욕탕(Roma Bath)과 거대한 기둥들이 도열해 있는 열주로와 아고라를 지나노라면, 점점 깊이 과거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도시 곳곳에서 고대 유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로마극장./사진 변종모
마치 신들의 휴양지처럼 믿고 여기던 이곳에 그날과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입장료를 내면 이용할 수 있는 유적 온천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둥이나 유적들이 온천탕 바닥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수영하며 고대의 시간 위를 떠다닌다. 그 모습을 보면 시간을 해체시키는 듯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 밖에도 아폴론 신전을 비롯해 방대한 유적들이 그 언덕에서 빛난다. 이처럼 작은 마을에 새하얗게 빛나는 석회층과 유적들이 찬란한 파묵칼레는 진정 신의 은총으로 생겨난 곳이 아닐까?
PS : 파묵칼레라는 작은 마을 큰 볼거리
파묵칼레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교통편이 좋지 않다. 비행기나 기차, 버스 모두 주변 도시를 이용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데니즐리에서 돌무쉬(미니버스)를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면 데니즐리 짐 보관소에 짐을 맡겨두고 파묵칼레를 저녁까지 둘러본 후 다음 여행지로 가는 방법도 있다. 마을 광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석회층 입구가 있다. 석회층을 지나서 히에라폴리스 유적군을 둘러보고 난 다음 다시 석회층으로 내려오는 것이 기본 루트지만, 히에라폴리스를 자세히 보려면 시간과 체력이 생각 이상으로 필요하다. 여유가 된다면 유적지는 따로 시간을 내어 보길 바란다. 석회층을 갈 때는 신발을 담을 비닐주머니는 꼭 챙기는 것이 좋다.◎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