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19/
■역사기행 - 세계 제국의 1000년 수도 이스탄불
배진영 월간조선 2018.07월 호
⊙ 아야 소피아 사원, 발렌스 수도교, 예레바탄 사라이, 술레이마니에 사원,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리… 곳곳에 비잔틴제국·오스만튀르크 제국 유적
⊙ 재작년 불발 쿠데타 이후 소피아 사원, 탁심광장, 이스티크랄 거리 등에는 무장경찰 배치
⊙ 곳곳에 아타튀르크 동상… 4월 23일 국회개원기념일 맞아 시내 곳곳에 국기와 아타튀르크 초상 걸려
▲아야 소피아 사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기독교 성당으로 건립됐으나, 오스만튀르크에 정복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탄 지 30여 분. 왼쪽으로 적갈색 성벽이 나타났다. 비잔틴제국 시절의 성벽이다. 반갑다. ‘드디어 다시 이스탄불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스탄불을 찾은 건 5개월 만이다. 작년 11월에는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석차 출장을 왔었다. 그때 알았다. 이스탄불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최고의 관광지라는 것을!
터키는 물가가 싸다. 특히 지난 수년간 정치・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터키 리라(1TL=약 230원)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 파리 같은 곳에서 낡고 좁은 3성급 호텔에 묵을 비용이면 이스탄불에서는 유서 깊은 5성급 럭셔리 호텔에서 묵을 수도 있다.
볼 것 또한 엄청나게 많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튀르크의 유적(遺跡)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1000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답다.
아야 소피아와 술탄 아흐메드 사원
▲이스탄불 舊시가지의 중심 히포드럼에 배치되어 있는 경찰 장갑차. 뒤에 보이는 것이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이다.
이스탄불 관광의 시작은 아야 소피아 사원이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립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동로마제국 시절의 성화(聖畵・아이콘)들을 회칠을 해서 덮었고, 성당 바깥에는 미나레트(무에진이 올라가 예배시각을 알리는 첨탑)를 만들었다. 터키공화국이 들어선 후인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성화들을 복원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 사원에서 이슬람교건 기독교건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지난 3월 31일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소피아 사원에서 열린 비엔날레 개회사를 하면서 코란의 첫 구절을 암송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작품을 유산으로 물려준 모든 영혼, 특히 이스탄불의 정복자(메메드 2세)에게 이 기도를 바친다”고 했다.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사원을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처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아야 소피아를 찾는 건 조만간 옛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소피아 사원 인근 히포드럼에는 경찰 장갑차가 지키고 있다. 히포드럼은 비잔틴제국 시절 전차경주장이 있던 곳.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오벨리스크 등 유적들이 많이 있다.
이스탄불의 명동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이스티크랄 거리나 탁심광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과 경찰 장갑차들을 볼 수 있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들 얘기로는 재작년 군부(軍部)의 불발 쿠데타 이후 계엄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그렇다는데, 덕분에 치안은 오히려 좋아진 측면이 있다고 한다.
▲4세기 동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가 건설한 발렌스 수도교. 이스탄불 서북쪽으로 19㎞ 떨어진 상수원에서 물을 끌어 왔다.
소피아 사원 맞은편 술탄 아흐메드 사원은 17세기 초 술탄 아흐메드 1세가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건물을 짓겠다고 세운 사원이다. 통상 이슬람 사원(모스크・터키에서는 ‘자미’라고 함) 주위에 세우는 미나레트가 4개인데, 이 사원은 미나레트가 6개나 되는 데서도 아흐메드 1세의 호승심(好勝心)을 엿볼 수 있다. 푸른색 타일을 많이 사용해 흔히 ‘블루 모스크’라고 한다.
아야 소피아 사원 옆에는 ‘지하궁전’ 예레바탄 사라이가 있다. 사람이 살던 궁전은 아니고 비잔틴제국 시대에 만든 지하저수조이다. 동로마인들은 이스탄불 서북쪽으로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나오는 물을 발렌스 수도교(水道橋)를 통해 끌어다가 이곳에 저장했다. 폭 70m, 길이 140m, 넓이 9800m2에 달한다. 이 지하궁전에서는 전시회나 연주회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미술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인페르노〉의 마지막 결전장으로도 유명하다.
갈라타의 구두닦이
▲중세 제노바 상인들이 거주했던 갈라타 지구에 있는 갈라타 타워.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갈라타 지구이다. 중세 제노바 상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이다. 언덕 위에 있는 갈라타 타워는 이스탄불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갈라타 타워를 향해 올라가는데 앞에 가는 구두닦이가 구둣솔을 떨어뜨린다. 그걸 주워줬더니 “땡큐”라고 인사를 한다. 우리를 앞서 올라가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신발을 닦아주겠다고 한다. 사양했지만 기어코 닦아주겠다고 신발을 내밀라고 한다. 고맙다고 저러는데 마냥 사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신발을 내밀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코리아,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오! 코리아!”라며 반색을 한다. 터키에 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환영받는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싶어서 흐뭇했다. 그는 계속 수다를 떤다.
“나는 앙카라에서 왔다.”
작년에 앙카라에 가봤다고 했더니 더 반가워한다.
“앙카라에는 가족이 있다. 가난해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
내 신발을 다 닦은 그는 아내 신발도 닦아주겠다고 한다. 아내는 사양했지만 막무가내. 결국 아내도 발을 내민다. 구두닦이의 수다는 계속된다. “나는 닥터다.”
놀라웠다. 닥터가 구두닦이를 하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정말이냐?”고 묻자 그는 히죽 웃으며 말한다.
“슈즈 닥터다.”
아내 신발을 다 닦은 후, 그가 말한다.
“18리라.”
헉! 공짜가 아니었다!
“고마워서 닦아준 게 아니었냐?”라고 따져도 그는 “18리라”만 되풀이한다. ‘오죽하면 그러랴’ 싶어서 15리라를 꺼내준다. 아내는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
며칠 후, 다시 같은 길을 지나게 됐다. 앞에 가던 구두닦이가 구둣솔을 떨어뜨린다. 가만히 보니 바로 그 녀석이다. 우리 부부는 물론 모른 척한다. 우리 뒤로 한 무리의 관광객이 몰려온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솔을 주워줄 생각을 안 한다. 솔을 주워든 구두닦이는 몇 걸음 올라가다가 다시 솔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다. 아마 미리 가이드에게 주의를 받은 것 같다.
에르도안에게 숨죽인 언론과 군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술레이마니에 사원. 오스만의 천재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다.
현지 식당에서 조우한 교민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깔깔거리며 말한다.
“그거, 여기 구두닦이들의 상습적인 수법이에요.”
그들은 모두 터키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한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터키는 지금 개판입니다. 한국은 개판 5분 전이고, 베네수엘라는 개판 5분 후입니다.”
그에게 터키 정정(政情)에 대해 물어보았다.
― 에르도안 정권이 오래갈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터키인들에게는 유목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누군가 힘이 있다고 하면 그리로 몰려가는 습성이 강해요. 민주화니 정의니 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대신 에르도안이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싶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 언론은 어떤가요?
“사실상 정부가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관영언론은 물론 민간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뉴스시간에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이 나오자, 직접 방송사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해당 기자를 자르라고 말했어요. 두 사람의 대화내용이 인터넷에 공개됐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난이 나오기는커녕 ‘정말 대통령이 힘이 세구나’ 하면서 언론이 더 움츠러들었어요.”
― 곳곳에 경찰이 쫙 깔려 있던데요.
“불발 쿠데타 이후 계엄상태입니다. 에르도안 정부는 군부의 힘을 빼는 대신 경찰력을 군대에 준하는 수준으로 키우고 있어요. 군부대 출입도 경찰이 통제하고 있어요. 국가 건설의 주역이던 군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죠. 적폐세력으로 몰린 군부는 과거 3차례 쿠데타를 했던 것도 모두 잘못한 일이었다고 자아비판(自我批判)하고 있어요.”
―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이슬람화(化)는 어디까지 진행될까요?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화를 추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 때문이지, 그가 종교적으로 신실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이슬람화 속도가 다를 겁니다. 만일 국내정치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이슬람화를 급속하게 밀어붙이겠지요.”
아타튀르크박물관
▲이스탄불 시슬리 거리의 아타튀르크박물관 앞에 휘날리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초상 깃발. 국회개원일인 4월 23일 ‘국민주권의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世俗主義)’ 노선, 즉 서구화·근대화 노선으로부터 일탈해서 이슬람주의를 강화하고,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아타튀르크에 대한 기억이 계속되고 있다. 여행 기간 내내 시내 곳곳에서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얼굴을 담은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알고 봤더니 4월 23일이 국경일 중 하나인 ‘국민주권의 날’이자 ‘어린이날’이었다. ‘국민주권의 날’은 1921년 터키의 대국민의회(국회)가 개원(開院)한 날이다. 대국민의회 초대 의장은 아타튀르크였다. 이날을 기리는 ‘4월 23일 행진곡’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은 아타튀르크로부터의 선물,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노예가 되었을 거라네.”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에 해당하는 시슬리에 있는 아타튀르크박물관을 찾았을 때에도 거리 곳곳에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초상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오스만베이지하철 역에서 나오면서 지나가던 젊은 여성에게 “아타튀르크박물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면서 지하철 입구의 경찰관에게 물어보았다. (이스탄불의 모든 지하철 개찰구 앞에는 보안검색대가 설치되어 있고 경찰이 지키고 서 있다.) 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보니 모두 “이 근처에 박물관이 있다고? 금시초문(今時初聞)이네” 하는 눈치였다.
경찰관이 자신 없어 하면서 가르쳐주는 대로 지하철역을 나왔다. 다시 지나가는 노인에게 “아타튀르크박물관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반대방향을 가리키면서 “저기 두 번째 터키 국기가 걸려 있는 곳”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는 ‘외국인이 아타튀르크박물관을 다 찾고, 기특하네’라는 듯 내 등짝을 쳤다.
아타튀르크박물관은 군인 시절 아타튀르크가 세 들어 살던 곳이다. 지금은 건물 전체를 그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입던 군복, 신사복, 그가 쓰던 권총과 수류탄, 칼, 독립전쟁을 그린 그림들, 아타튀르크의 초상과 흉상, 밀랍인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슴이 뭉클했다. 국가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감동스러웠다. 호우와 산사태로 유물이 상한 후 텅 비어버린 이화장, 진짜 유품은 하나도 없는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사저(私邸)…. 에르도안 정권 아래서 많이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터키공화국은 자기의 뿌리는 잊지 않고 있다.
‘짝퉁 근대화’의 상징 돌마바흐체
▲압둘메지드 1세가 지은 돌마바흐체 궁전. 베르사유 궁전 등 서구 궁전 양식을 모방했다.
해변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등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모습을 갖춘 서양식 궁전이다. 철책 너머로 보이는 마르마라해의 모습은 일품이다. 1843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세웠다.
터키가 한창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즉위한 압둘메지드 1세는 종전의 낡은 궁전을 화려한 서양식 석조궁전으로 다시 지었다. 19세기 중반 오스만튀르크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근대화는 실질은 따르지 않는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1877년 3월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최초의 의회가 개원(開院)했지만, 몇몇 의원이 술탄의 실정(失政)을 비판하자 채 1년도 되지 않아 해산됐다. 궁전은 서구식으로 화려하게 지었어도 술탄의 의식(意識)은 여전히 전(前)근대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의회는 30년 뒤 청년튀르크당의 쿠데타가 있은 후에야 다시 열렸다.
돌마바흐체 안에 있는 하렘도 이 시기 오스만튀르크의 전근대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톱카프 궁전에도 하렘이 있지만, 하렘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소굴은 아니었다. 하렘은 술탄과 관련되는 모든 여인의 거처였다. 황후나 후궁은 물론, 황태후도 이곳에 살았다. 3대륙에 걸친 대제국 황제의 여인들이 사는 곳답게 화려하기 짝이 없다. 복도에 걸린 전기시설과 수세식 화장실, 복도에 걸린 서양화들은 ‘서구’를 따라가려 발버둥 치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만튀르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의회의 견제를 견뎌내지 못했던 술탄은 여성을 자신의 종속물로 보는 사고(思考)에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스만튀르크의 근대화는 ‘절름발이 근대화’였다.
돌마바흐체에도 아타튀르크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궁벽한 시골이던 앙카라를 신생 터키공화국의 수도로 삼았지만, 이스탄불에 머물 때에는 이곳 하렘의 방들을 침실과 서재, 집무실로 사용했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이곳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묵었던 방의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각인 오전 9시5분에 멈춰져 있다. 그의 침실, 그의 서재 등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지만,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쉬웠다.
돌마바흐체를 돌아보는 내내 덕수궁 석조전을 생각했다. ‘짝퉁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돌마바흐체와 석조전은 닮은꼴이다.
고종과 오스만튀르크의 술탄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극동의 작고 가난한 나라 대한제국의 군주였던 고종은 간신히 석조전 하나 짓는 데 그쳤지만(그나마 석조전이 완공되었을 때는 나라가 이미 망한 후였다),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의 주인이었던 압둘메지드 1세는 그래도 유럽 여러 나라의 왕궁 못지않은 번듯한 돌마바흐체를 남겼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돌마바흐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츠라안 궁전, 이을드즈 궁전 같은 새 궁전들을 짓고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런 궁전 짓기 도락에 나라는 점점 더 기울어져 갔다.
귤하네 공원의 이즈미르 행진곡
▲400년 가까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궁전이었던 톱카프 궁전. 입구에 대포를 배치해 놓았던 데서 ‘톱카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반면에 아야 소피아 사원과 붙어 있는 톱카프 궁전은 1478년부터 400년 가까이 제국의 정궁(正宮)으로 군림했다. 톱카프는 ‘대포’라는 뜻으로, 입구에 대포를 배치했던 데서 유래했다. 군사국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톱카프 궁전은 술탄과 그 가족의 거성(居城)일 뿐 아니라, 총리와 각료들이 근무하는 정부종합청사였고, 친위대가 주둔하는 요새이기도 했다. 지금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도자기관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중국의 청화백자, 일본의 아리타자기들도 있다. 유럽인들에게 중국은 물론 일본도 얼마나 일찍부터 문명국으로 인식되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조선백자는 없다.
톱카프 궁전을 나오면 귤하네 공원이 있다. 원래 톱카프 궁전 부설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공원이 되어 있다. 1839년 11월 술탄 압둘메지드가 탄지마트 개혁을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명물 미니 트램. 이스티크랄 거리는 쇼핑센터와 역사적 유적, 거리의 악사들이 어우러진 ‘이스탄불의 명동’이다.
종래 역사에서는 19세기 중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은 ‘실패한 개혁’이라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 시기부터 양성된 군인과 관료들이 후일 청년튀르크당의 혁명, 그리고 터키공화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는 데 주목해 탄지마트 개혁을 재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에 단절은 없는 법이다.
이런 역사의 연속성을 웅변하듯이 귤하네 공원에는 아타튀르크의 좌상(坐像)이 있다. 공원 입구가 시끌시끌해서 돌아보니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다. 어딘지 귀에 익은 노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즈미르 행진곡’이다. 아타튀르크가 그리스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노래다.
젊음의 거리 이스티크랄에서도 거리의 악사가 ‘이즈미르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스티크랄 거리가 시작되는 탁심광장에는 아타튀르크가 이끈 독립전쟁과 국가건설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음식점에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대형 마트에서는 아타튀르크의 대형 초상도 팔고 있다. 이런 식으로 국부의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부러웠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침략의 전진기지로 세운 루멜리 히사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대교가 보인다.
루멜리 히사리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대교 옆에 있는 성채다. 메메드 2세는 1451년 즉위한 후 바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나섰다. 당시 비잔틴제국은 이미 콘스탄티노플 주변부로 줄어들어 있는, 사실상 오스만튀르크의 속국이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총리 할릴 파샤는 비잔틴제국과 공존하면서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즉위하자마자 총리에게 말했다.
“저 도시를 내게 주시오!”
젊은 정복자의 야망 앞에서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1452년 건설된 루멜리 히사리는 콘스탄티노플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루멜리는 ‘로마’라는 뜻으로 당시 오스만튀르크가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메메드 2세는 세 명의 중신에게 하나씩 탑을 짓도록 경쟁을 시켜 넉 달 만에 루멜리 히사리를 완공했다.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이 눈앞으로 닥쳐와도 비잔틴제국은 당쟁(黨爭)으로 날을 지새웠다. 당쟁의 가장 큰 쟁점은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구 가톨릭 국가들과 손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 전제조건으로 그리스정교회가 가톨릭 밑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그리스정교회는 물론 백성들, 조정 대신들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총리 노타라스는 “교황의 삼중관(三重冠)을 보느니, 터키인들의 터번을 보는 게 낫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튀르크군에게 함락됐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분전(奮戰)하다가 장렬히 전사(戰死)했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내려다보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름답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해협 건너편은 아시아다. 멀리 아나톨루 히사리가 보인다. 루멜리 히사리를 만들기 60여 년 전 바예지드 1세가 비잔틴 정복을 염두에 두고 세운 전초기지다.
이렇듯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비잔틴제국은 설마 설마 하면서, 그리고 ‘돈으로 평화를 사는’ 미봉책(彌縫策)으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멸망당하고 말았다.
어린 소녀가 요새 안에 전시해 놓은 오래된 대포 위에서 놀고 있다. 평화롭다. 흑해로 향하는 커다란 화물선이 지나간다. 작은 배들이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흔들린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신명문가의 조건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 2018.
04.04
[1] 괴테와 로스차일드 家門의 '결정적 차이'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자녀 교육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회자된다. 여관업을 하던 아버지로부터 거액을 상속받은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는 명예직인 황실고문관을 재력으로 얻었지만 평생 직업을 갖지 못했다. 신분적 지위에 콤플렉스를 느낀 아버지는 아들 괴테에게 가정교사를 두고 문학과 예술, 외국어, 종교 등 전 과목에 걸쳐 과외를 받게 했다.
괴테의 어머니인 카타리나는 독일어를 겨우 해독할 정도였지만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베드사이드 스토리텔링'으로 아들 괴테의 교육에 일조했다.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왼쪽)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
이렇게 '만들어진 천재' 괴테는 25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천재 탄생을 알렸고 33세에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로부터 귀족 칭호(von)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는 지금도 세계적인 자녀 교육의 '성지(聖地)'로 꼽힌다.
정작 괴테 본인은 어땠을까. 괴테는 네 아이를 사산(死産)한 끝에 41세에 늦둥이 외아들 아우구스트를 두었다. 그런데 괴테는 그를 늘 과잉보호했다. 아들의 학습, 대학 진학, 취직, 여행, 군 입대 문제까지 직접 챙겼다. 전쟁 기간에는 상부에 청탁해 아들을 전투에서 빼돌리고 대신 후방에서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
괴테 역시 요즘 일부 부모처럼 자녀 문제에서는 이기적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평범한 아들은 천재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에 빠졌다. 결국 이탈리아 여행 중 41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도 자신처럼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영감(靈感)을 얻고 '제2의 탄생'을 하기를 바랐지만 괴테의 이 꿈은 물거품이 됐다.
괴테 전기(傳記) 작가에 따르면 괴테는 26세에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바이마르로 간 이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냉담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 카타리나를 3번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외면했고 어머니의 마지막 11년간은 혼자 살 정도로 방치하다시피 했다.
괴테는 아내와 39세에 동거를 시작해 18년 후에 결혼식을 치렀다. 그럼에도 70세를 넘긴 말년까지 여성 편력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임종은 아내도 아들도 없이 손자·손녀가 쓸쓸히 지켰다. 괴테 가문은 손자 발터 볼프강에서 끝나 1885년 3대 만에 막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영광의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그의 처신도 한몫했다.
괴테의 명성이 자자하던 시기에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사채업을 시작한 유대인이 있었다. 훗날 '국제금융 황제' 로스차일드를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였다. 그가 세운 금융 제국은 지금까지 8대, 250년에 걸쳐 명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로스차일드가(家)는 자녀들에게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장려했고, 자녀들은 여행이 주는 모험과 도전, 자유와 해방감을 즐겼다. 다음 세대를 맡을 '젊은 로스차일드'들을 여행을 통해 단련한 것이다. 가족 간 끈끈한 결속력도 유지했다. 마이어 암셸은 "형제간에 화합하라. 흩어지면 번영은 끝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관통하는 철칙(鐵則)이 됐다.
비슷한 장소와 시기에 도약을 시작한 괴테가와 로스차일드 가문은 21세기 가족 해체 시대에 가족의 중요성과 자녀들의 여행·도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족 결속력에서 두 가문은 판이했고, 두 가문의 운명도 정반대로 달라졌다. 때로 사소한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데 두 가문이 그랬다. 아울러 대문호 괴테조차 어쩌지 못했던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누구나 경계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06.27
[2] 샤토브리앙과 루소 가문, 부성애의 명암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1768~1848).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 작가인 그는 두 번의 장관과 영국 대사를 지내며 80세까지 정·관계와 외교가, 문화계를 누볐다. 하지만 브르타뉴 지방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그가 태어났을 당시 집은 파산한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노예 매매까지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 인근의 성(城)을 사고 백작 지위까지 얻었다. 그러나 무리한 행동의 업보로 아버지는 프랑스대혁명 중 혁명 세력에 의해 묘가 파헤쳐졌고, 형은 단두대에서 죽었다. 샤토브리앙 역시 영국에서 혹독한 망명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우울감에 젖었고 제대로 공부도 못 했다. 큰 숲과 음산한 늪에 둘러싸여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아내는 공포 속에서 방황했다.
▲샤토브리앙, 루소
샤토브리앙이 변신한 것은 그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막연한 충동으로 미국 여행을 떠나려는 샤토브리앙에게 아버지는 육군 소위 사령장을 얻어주었다. 궁정 등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다양한 세상을 경험한 샤토브리앙은 그제야 강한 열망과 모험심을 가득 품은 젊은이가 돼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23세에 떠난 이 여행에서 그는 웅대한 자연에 매혹됐고 큰 영감을 받았다. 미국 체류 때 접한 인디언들의 삶의 무대를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 '나체즈족'이 탄생했다.
샤토브리앙은 아버지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에 비극적인 가족사와 소년기의 악몽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문인의 길을 걷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샤토브리앙처럼 될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고가 말했을 정도로 당대 젊은이들과 후대에 많은 감화를 준 영웅이 됐다.
샤토브리앙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론 '나쁜 인간'이었으나 아버지의 역할을 잊지 않고 아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는 부성애를 발휘했다. 그것이 작가와 정치인·외교관으로 샤토브리앙이 족적을 남긴 원동력이 됐고, 그의 가문은 폐족에서 기사회생했다.
샤토브리앙의 소년 시절 유럽 사상계를 풍미하던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정반대였다. 루소는 교육사상서인 '에밀'을 썼지만 엽기적인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면서 5명의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겨 나중에는 아이들의 행방조차 모르게 됐다.
스위스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죽었고,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져 심부름을 하며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불행을 자녀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부성애를 망각한 아버지 루소의 이기심(利己心)은 당연히 가족 해체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주는 사람이다"고 했다. 부성애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 명문가의 시작은 부성애에서 출발한다.
"너무 바빠서 도저히 아들을 돌볼 수 없다고 말하는 부유한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여! 돈으로 아이에게 아버지를 사줄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그릇된 부성애를 질타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글귀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다. 부성애는 결코 돈으로 살 수도, 대신할 수도 없다.
08.29
[3] 재물보다 더 값진 '아버지의 원칙'
'내 삶의 가치를 키워준 첫 번째 영웅은 나의 아버지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중 한 명인 워런 버핏(88) 미국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한 말이다. 그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은 근면한 증권 세일즈맨이었지만, 버핏이 만 한 살 때(1931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됐다. 하워드는 주식중개인으로 재기해 버핏이 열세 살 때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 DC로 이사했다. 버핏은 이듬해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재학 중 신문 배달 회사를 세워 1만달러를 저축했다. 이 돈을 주식에 투자한 게 부(富)의 발판이 됐다.
하워드는 버핏이 여섯 살 때 주식 통장을 선물해 돈에 눈뜨게 했다. 또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인구 억제와 핵 갈등 회피 문제를 다루는 기구에 기금으로 모두 냈다. 아버지의 이런 처신 때문인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게, 버핏은 거의 모든 재산의 기부를 약속했다. 지금도 2014년 중형 캐딜락을 타고 1958년 구입한 2층짜리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
▲피터(왼쪽), 딸 수잔. 오른쪽 사진은 홍콩 청쿵그룹 창업자 리자청(오른쪽)과 그의 아들 리처드 리. /게티이미지코리아·AFP
그는 여덟 살 때 아버지의 회사 사무실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이라는 책을 처음 보고 매료돼 수차례 반복해 읽었다. 버핏이 '투자의 귀재'가 된 데는 아버지와 책 영향이 크다. 지금도 그의 사무실에는 아버지의 사진과 '증권분석'이 꽂혀 있다.
버핏은 3남매를 모두 평범하게 키웠다. 학교도 공립학교를 다니게 했다. 딸 수잔은 어릴 때 자기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몰랐으며 신용카드 결제 대금이 없어 쩔쩔맨 적도 여러 번이다. 버핏은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전 재산은 사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이 때문에 자녀들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생각을 접고 인생 설계를 했다. 장남 하워드는 농장을 운영하고, 막내 피터는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올 7월 회장에서 물러난 홍콩 청쿵그룹 창업자인 리자청(90·중국 표준어 발음)은 '아시아의 버핏'으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 리윈징(李雲經)은 초등학교 교장 출신으로 평생 검소하고 자급자족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부친이 유산도 없이 결핵으로 세상을 뜨자, 4남매 중 장남인 리자청은 가족 생계를 위해 중학 1학년을 중퇴하고 시계 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22세 때 홍콩에서 플라스틱 회사인 청쿵실업을 세워 이를 기반으로 거상(巨商)의 길로 들어섰다.
리자청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남들을 위한 사업을 하기로 원칙을 정하고 지금까지 행동에 옮기고 있다. 단적으로 그는 리자청기금회(재단)를 '셋째 아들'이라 명명하고 개인 재산의 3분의 1을 쏟아부었다. 대학·병원·빈곤촌 등에 기부한 다음 직접 현장 확인을 한다. 자녀들에겐 엄한 아버지였다. 두 아들은 미국 유학 시절 맥도널드 가게와 골프 연습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의 소중함을 몸으로 익혔다. '책에서 길을 찾으라'고 아들들에게 강조하며 그 스스로 책을 늘 가까이했다.
오늘날 버핏과 리자청이 위인(偉人)이 된 데는 검소하며, 돈에 엄격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미국 심리학자 스테판 폴터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미치는 이런 영향을 '아버지 요인(father factor)'이라고 불렀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라도 자녀 성장에 아버지보다 더 크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0.31
[4] 케네디를 美 대통령으로 만든 건 스무 살 때의 60일 유럽 여행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하버드대 졸업반이던 1940년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제목의 논문을 책으로 냈는데 그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영국의 군사적 무방비 상태를 꼬집은 이 책은 그가 스무 살이던 1937년 여름, 두 달 동안 유럽 각지를 속속들이 답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유럽 여행 동안 케네디는 나라별 특색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日記)를 썼다. 프랑스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주요 격전지들을 찾았고 로마에선 뉴욕타임스 특파원을 만나 전쟁 발발 가능성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존 F 케네디(왼쪽) 미 대통령은 20세 때 두 달간 유럽 여행을 한 뒤 쓴 논문을 책으로 펴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에게는 인도 순례 여행이 삶을 바꾼 변곡점이 됐다.
그는 이를 통해 외교 문제에 대한 식견을 더 깊게 다졌고 전운이 감도는 국제정세를 생생하게 이해했다. 유럽 여행 후 케네디는 23세 때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미 합중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44세인 1961년 그 꿈을 이뤘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에게는 인도 순례 여행이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리드칼리지를 중퇴한 그는 열아홉 살 때 7개월 동안 인도 여행을 하면서 서구의 이성적 사고에선 매우 낯선 직관(直觀)의 힘에 눈떴다고 했다. "직관에는 대단히 강력한 힘이 있어 지력(知力)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깨달음은 제 일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는 21세 때 프랑스를 거쳐 알프스까지 도보로 여행했다. 걸으면서 시(詩)를 썼고, 시를 쓰면서 걸은 그는 '발로 시를 쓴 시인'으로 불렸다. 그 당시 도보여행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도보객들을 노린 범죄가 극성을 부린 탓이다. 이때 겪은 숱한 체험은 워즈워스가 문호(文豪)가 되는 자양분이 됐다.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을 '점'에 비유하며 "'점'을 잘 이어야 한다(connecting the dots)"고 했다. 케네디와 잡스, 워즈워스에게선 공통적으로 젊은 날의 여행이 의미 있는 '점'이 됐다. '낯선 세상을 많이 여행하고 체험할수록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 명문가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명제도 가능하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유행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랜드 투어는 당시 볼테르 같은 명사들을 찾아가 사교와 매너를 배우는 기회였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게 흠이었다. 그래서 워즈워스처럼 막 태동한 철도를 이용해 도시나 자연 속을 주로 걸으며 여행하는 '프티 투어(petit tour)'가 등장했다. 케네디가 부모의 재력(財力)으로 그랜드 투어를 했다면,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워즈워스와 잡스는 배낭여행 같은 프티 투어를 한 것이다.
미지(未知) 세계로의 여행, 그리고 직 접 발을 땅에 대고 걷는 행위야말로 인공과 도시, 기계문명으로 가득한 세계에 붙들려 있는 자아를 해방시키는 수단이자, 사람들이 타고난 재능과 소명을 깨달아 명문가로 성장하는 통로이다.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더 강건하게 키우는 '최고의 공부'이기도 하다. 젊은 날 여행에서 얻은 경험들은 잡스의 말처럼 훗날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2019.01.02
[5] 쑨원과 장제스를 사위로 둔 '宋家王朝'… 가족이 '合心'해 내린 '전략적 결정'의 힘
쑹아이링(宋靄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등 이른바 송씨 세 자매를 배출한 쑹자수(宋嘉樹·1861~ 1918) 가문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고 명문가로 꼽힌다. 그의 본명은 한차오쑨(韓喬孫)인데, 미국에 살고 있던 외종숙인 쑹씨(宋氏)의 양자로 들어가 쑹자수로 개명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제1세대 중국 유학생인 쑹자수는 6명(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쑹아이링은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거부 쿵샹시(孔祥熙)와, 쑹칭링은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과, 쑹메이링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각각 결혼했다. 세 자매는 각각 돈, 나라(중국), 권력을 상징한다. 또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남(쑹자원)은 31세 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부장과 외교부장을 지냈다.
▲1915년 10월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쑨원과 쑹칭링 부부.(왼쪽 사진) 미국 유학 시절의 세 자매, 왼쪽부터 쑹칭링, 쑹아이링, 쑹메이링.
쑹자수가 명문가를 이룬 데는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 기독교 수용, 차별 없는 혁명을 꿈꾼 쑨원과의 만남, 이 세 가지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 그는 결혼도 대학 졸업 후 상해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다가 했다. 부부 모두 독실한 감리교도였는데 아무리 바빠도 밥상머리 자식 교육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에게 꼭 필요한 선진적인 자질, 즉 시간 엄수와 솔직한 대화 태도, 효율적인 일 처리, 인맥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능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자세를 키워주려 했다.
또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큰딸 아이링을 1904년 중국 여성으로 처음 미국 유학을 보내 웨슬리언여대에 입학시켰다. 1908년에는 열다섯 살의 칭링이 열두 살짜리 동생 메이링을 데리고 도미 유학하도록 했다. 지성과 미모, 부를 겸비한 세 자매는 유학 후 귀국해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존재가 돼 '송가왕조(宋家王朝)'라는 말이 회자됐다.
이들보다 앞선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충신이자 당대의 경세가인 쩡궈판(曾國藩·1811~1872) 가문은 후난성 상향(湘鄕)에 명나라 때부터 살았다. 그러나 농업에만 종사했고 학문이나 과거로 이름을 남긴 이는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건달이었고 아버지인 쩡린수(曾麟書) 때에 과거 시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쩡린수는 아들 쩡궈판이 과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직접 가숙(家塾)을 열어 가르쳤고 아들과 함께 시험공부를 했다. 그는 17번의 시도 끝에 43세 때 동생시에 합격해 아버지의 체면을 세웠고 쩡궈판은 이듬해 합격했다.
과거 시험을 보려고 상경해야 했던 쩡궈판은 여비(旅費)가 없어 친구들이 갹출해 준 돈으로 겨우 시험장에 갈 수 있었다. "이런 궁핍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급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한 그는 27세에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 합격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학문 탐구를 전문으로 하는 관직)에 임명됐다. 증자(曾子)의 70세손인 쩡궈판 가문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 목표를 이루려면 '전략적 결정'을 잘 내려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게 관건이다. 쑹자수는 자녀들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인 재로 키우기 위해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쩡궈판 가문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기투합해 가난 탈출을 위해 과거시험 합격을 목표로 정하고 이를 관철했다. 중국의 이 두 가문은 새해 벽두에 좋은 가풍(家風)을 꿈꾸는 이들에게 부모와 자녀 또는 최소한 부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이 '합심'해 내린 '전략적 결정'이 명문가의 요체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