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9/ 세계의 분쟁史4/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1
월간조선 2015. 08월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2016. 08월 호 IS테러 당한 터키 IS 묵인하다가 자충수에 빠진 에르도안
⊙ 쿠르드족 견제, 시리아 아사드 정권 타도 위해 IS 묵인하다 반(反)IS 연합군에게
공군기지 제공해 틀어져
⊙ 이슬람 종교 교육 강화, 히잡 허용 등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도전
⊙ 대통령 권한 강화하는 개헌 추진하다가 반대하는 총리 축출
▲지난 6월 28일 IS의 테러가 발생한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이용자들이 공포에 질려 있다.
지난 6월 28일 3명의 자폭테러범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폭탄을 터뜨렸다. 45명이 죽고 200명이 넘게 다쳤다. 터키는 IS를 테러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터키 당국에 따르면, 3명의 범인은 러시아(체첸 또는 다게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국적자로, 약 한 달 전에 시리아의 IS 근거지 라까에서 터키로 잠입했다고 한다.
이스탄불 공항 테러는 IS가 칼리파 국가 선포 2주년을 기념하여 벌인 테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에는 1주년을 맞아 프랑스, 튀니지, 쿠웨이트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이번엔 터키 외에도 이라크 바그다드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형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올 들어 국제연합군의 공세로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자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터키의 관문인 아타튀르크 공항 테러는 IS 건재 과시용을 넘어 평소 IS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인 터키 당국이 불러온 참화로 보는 게 더 옳다.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한 에르도안 대통령과 여당인 정의개발당이 쿠르드족을 견제하려 IS를 지렛대로 쓰다가 자충수에 빠진 꼴이라는 말이다.
터키와 IS의 밀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 반군이나 단체에는 예외 없이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쓴다. IS에 대해서는 테러리스트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때가 있다. 말실수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IS를 묵인하는 듯한 분위기가 터키 핵심 권력 내에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IS 가담자들이 주로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들어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임에도 그동안 국경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아 방조한다는 의심을 샀고 IS가 밀매하는 석유를 터키가 사들였다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미국의 지원 아래 IS 격퇴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YPG(시리아 쿠르드 민방위대)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자국 내 쿠르드족의 독립 열기를 고취할까 봐 터키 정부의 심사가 편치 못하다. 터키는 IS가 수세에 몰릴수록 득의양양하는 YPG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형국이다.
터키는 YPG가 터키 국경 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공습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이에 대해 쿠르드족은 미국 주도의 반(反)IS 연합에 가담한 터키가 IS는 공격하지 않고 터키와 이라크의 쿠르드 반군 PKK(쿠르드 노동자당)와 시리아의 YPG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시리아 쿠르드가 IS를 수세로 몰면 몰수록 터키가 그토록 싫어하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가 살아난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해 외국의 IS 추종자들이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들어갔을 때 터키 정부는 눈을 감았다. IS가 살상행위를 저질렀을 때도 터키는 시리아 정권교체를 위해 침묵을 지켰다. IS 역시 이러한 상황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활약지로 터키를 적극 활용하였다. 터키와 IS는 이처럼 상호이익에 바탕을 둔 암묵적 밀월을 즐겨왔다.
작년 7월 터키가 미국 주도의 반IS 연합군에게 자국 공군기지 인시르릭(Incirlik)을 개방하면서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터키 내, 그것도 시리아 국경 인근 기지를 확보함으로써 미군 주도 반IS 연합군이 비행거리를 1000km 이상 줄여 효과적으로 IS 거점을 공습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IS는 영문기관지 《다비끄(Dabiq)》 11호 표지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실었다. 이 잡지는 기사에서 ‘터키의 배교자(背敎者) 정권과 군대’를 비난하면서 “IS 전사들이 적들을 무찔러 칼리파 국가의 깃발이 이스탄불에 휘날릴 수 있도록 신께서 도와주시길 간구한다”라며 적의감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동영상에서는 에르도안이 “이슬람법에 따라 통치하지 않고, 미국인, 유대인, 십자군, 무신론자 PKK,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들, 시리아 반정부군, 배교자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친구”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IS는 터키에 대한 테러를 감행, 4차례에 걸쳐 150여 명의 목숨을 앗았고, 이번에 자신들이 그동안 즐겨 이용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을 공격한 것이다.
케말리즘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던 케말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의 이름은 터키공화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에게서 따온 것이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의 군인이던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제국이 붕괴하는 와중에 민족주의에 입각해 터키공화국을 세웠다. 그는 이슬람 때문에 튀르크의 민족적 열정이 마비되었고, 아랍 정치에 휘말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도덕적인 아랍인들의 신학인 이슬람은 죽은 것이다. 사막의 부족들에게나 어울릴 것이다”라면서 “근대 진보적인 국가에는 소용이 없다. 신의 계시! 신은 없다!”고 외쳤다.
이슬람을 사적인 신앙 영역으로만 인정한 아타튀르크는 터키가 지닌 이슬람, 아랍 유전자를 모두 새로운 유럽 유전자로 바꾸려고 했다. 여성들에게서 히잡을 벗기고, 챙이 없는 전통적인 남성용 모자 페스(Fez)를 금지했다. 이슬람과 관련된 법을 모두 유럽식 법으로 바꾸고, 이슬람력은 서양력으로 교체했다.
터키어 표기를 아랍 알파벳 대신 라틴 알파벳으로 바꿨고 신을 아랍어 알라가 아니라 터키어 탄르(Tanrı)로 부르게 하였으며, 하루 다섯 번 하는 예배도 모두 터키어로 하게 했다. 종교 학교를 모두 폐쇄, 교육도 전적으로 교육부가 관장했고, 수피교단을 축출, 모스크와 이맘(이슬람 예배 인도자)도 국가가 관리했으며, 금요일 합동 예배 때 하는 설교도 국가가 하달해 모스크는 터키가 지향하는 세속주의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교육장으로 변모했다. 이후 일부가 수정되기는 했지만, 아타튀르크가 제시한 세속주의 정책은 지난 100년 가까이 케말주의(Kemalism)라는 이름으로 터키공화국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이슬람학교 출신 대통령 에르도안
2002년 집권한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줄곧 반(反)아타튀르크라는 안경을 쓰고 케말주의 대신 신(新)오스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안으로는 이슬람 문화를 살려 전면에 내걸고, 밖으로는 과거 오스만제국처럼 주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여기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는 종지부를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르도안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아타튀르크가 종교와 정치 사이에 구축한 방화벽을 하나하나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좋은 예다.
에르도안은 신앙심 깊은 젊은 세대를 양성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그는 헌법이 규정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반한다는 비난에 귀를 막고 종교 교육 실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앙심을 지닌 신세대 양성을 위한 이맘과 무에진(이슬람 예배를 알리는 사람)을 주로 양성하는 공립 이맘 하티프(Imam Hatip) 학교 증설이 그것이다. 이맘 하티프 학교에서는 주 40시간 교육 중 13시간을 종교 교육에 할애하여, 코란, 아랍어,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과 같은 과목을 가르친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1447개 공립 고등학교가 이맘 하티프 학교로 바뀌었다.
이 기간 동안 이맘 하티프 학교는 73%가 늘었다. 물론 이맘 하티프 학교는 여전히 소수다. 전국 중·고등학교 수 대비 8.44%와 10%에 머문다. 그러나 에르도안 집권 초기인 2004년에 9만명의 학생이 이맘 하티프 고등학교에 다녔던 것에 반해 10년 후인 2014년에는 47만4000명으로 무려 5.3배나 증가했다.
세간에서는 “터키에 그렇게 많은 이맘이나 무에진은 필요하지 않다”며 에르도안의 정책을 비판한다. 하지만 자신이 이맘 하티프 학교 출신인 에르도안은 “죽은 자를 염(殮)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는 염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종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희망자들만 이맘 하티프 학교로 진학한다면 또 모른다. 문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맘 하티프 학교에 학생들이 배정된다는 사실이다. 유대교 랍비의 손자가 그리스도교인 학생들과 함께 이맘 하티프 학교 입학 통지를 받은 사례도 있다. 2014년 가을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생 13만4000명 중 4만명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이맘 하티프 학교 입학을 통보받았다. 다니기 싫으면 인근 학교로 전학 가면 되지만, 자리가 나지 않으면 이맘 하티프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히잡 착용 허용
또한 2014년 9월 공립학교 히잡금지령을 완화하여 5학년 나이인 10세부터는 여학생들이 히잡 쓰는 것을 허용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반드시 머리를 보여야 하고, 머리카락은 청결하고 염색을 하면 안 되며, 화장을 하거나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기를 수 없다”는 기존 공립학교 규정에서 머리를 보여야 한다는 조문을 삭제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이미 2013년 10월에 터키 정부는 대학과 공공기관에 히잡을 쓴 여성이 다닐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렇게 국부 아타튀르크의 정책을 정면으로 뒤집으면서 에르도안은 “어두운 시대가 마침내 끝났다”고 선언했다. 히잡 착용이 허용되자마자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 소속 여성의원 4명이 히잡을 착용한 채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교육의 변화는 히잡으로 그치지 않는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종교를 필수로 가르치고, 36~72개월 유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천국과 지옥, 알라에 대한 사랑과 같은 종교적 가치를 가르치는 안(案)을 채택했다. 또 현재 그리스도교인, 유대인만 의무적인 종교 교육 과목을 듣지 않아도 될 뿐, 이외의 종파나 종교에 속한 학생들이나 종교가 없는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이슬람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알레비(Alevi) 종파에 속한 학생이 유럽인권재판소에 터키 정부의 종교 교육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소송을 걸었다. 재판소는 터키 정부의 종교 교육이 유럽 인권헌장 2조의 교육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터키의 교육제도가 학부모의 신념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이다.
신오스만주의
▲2002년 이후 총리로 재직해 온 에르도안은 2014년 8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에르도안은 외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구현하여 터키를 다시 전통의 강자로 만들고자 한다. 아타튀르크가 구축한 세속적 교육체계 아래에서는 오스만제국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에르도안은 오스만제국을 세계를 호령했던 영광의 제국으로 보고 있다. 그는 아타튀르크가 버린 오스만문자를 다시 살려 교육시키려고 할 정도로 오스만제국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에르도안은 서구화를 오스만제국 몰락의 원인으로 보면서 서구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에르도안의 외교정책을 세운 이가 바로 다부톨루 전 총리다. 전직 대학교수로 자신의 저서 《전략적 깊이(Strategic Depth)》에서 펼친 생각을 ‘이웃국가와 문제없이 지내기(Zero Problems with Neighbor Countries)’라는 외교정책으로 집대성하였다.
다부톨루는 중동(中東) 지역 내 문제는 서구 열강이 조장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복잡해 보이나 오스만제국 영향권에 있던 역내 국가들이 공유하는 문화유산을 고려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며, 이러한 변화를 오스만제국의 후손인 터키가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서구나 국제사회는 ‘신오스만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외교정책이 ‘신오스만주의’보다 ‘범(汎)이슬람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본다. 터키 주변 국가를 시아파인 이란을 제외하고 수니 이슬람으로 묶으려 한다는 말이다. 특히 터키 정부가 보여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원과 집착은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이슬람주의 이념의 틀 안에서 터키의 외교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신오스만주의든 범이슬람주의든 간에 이웃국가와 문제없이 지내며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터키의 의도는 ‘아랍의 봄’과 함께 산산조각났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다가 현 이집트 정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리비아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에 맞서는 바람에 터키 기업들이 리비아와 맺은 계약이 줄줄이 취소됐다.
무엇보다도 터키는 9000km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의 정권교체를 추진하면서 헤어나기 힘든 늪에 빠져버렸다. 터키는 이슬람 정부를 목표로 하는 과격 이슬람주의 단체 아흐라르 알-샴(Ahrar al-Sham)을 후원하여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했다. 2000명 이상의 터키 국민이 IS 깃발 아래 아사드 정권과 싸우러 시리아로 들어갔다. 시리아 내전의 끝은 보이지 않고, 국제사회는 IS 격퇴에 미온적인 터키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2010년 가자사태 때 봉쇄된 가자 지역 주민을 위한 터키 구호선을 이스라엘군이 격침한 이래 이스라엘과는 냉전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시리아에서 작전 중이던 러시아 공군기를 격추해 러시아와도 불편한 사이다.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과 러시아에는 화해하고 싶다는 신호를 조심스레 보내고 있다.
터키 야당 지도자는 “터키공화국이 생긴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역내 4개국 수도에 대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해 대사를 못 보내고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 예멘, 리비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로 모두 7개국에 달한다. 레바논, 이란과도 관계가 껄끄럽다. ‘이웃과 문제없이 지내자’는 외교정책을 걸어놓고, ‘친구가 없는 터키’가 되어버렸다.
터키, ‘제2의 파키스탄’ 되나
더욱이 에르도안은 더 많은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크다. 그는 다부톨루 총리가 이에 협조하지 않자 사실상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언론에는 재갈을 물리고 있다. 종교 간 공존을 표방하는 페툴라 귈렌과 같은 이슬람 지도자는 정권의 도전자로 여겨 ‘테러분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탄압한다.
지금 터키는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규탄하며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싸운다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조용히 도왔던 파키스탄의 전철(前轍)을 밟고 있다. 어쩌면 터키에는 ‘신오스만제국’이 아니라 ‘제2의 파키스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2011년 ‘아랍의 봄’ 때만 해도 민주주의와 이슬람이 조화를 이룬 ‘중동민주국가의 모델’로 칭송받던 터키는 지금 사라져가고 있다.⊙
2016.09월 호
◆ 에르도안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한 귈렌은 누구인가?
세속국가·민주화 긍정하는 ‘이슬람 프로테스탄트’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불발 쿠데타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귈렌.
“모든 국가기관에서 바이러스를 박멸하겠다.” 7월 15일 밤 10시에 발생해 6시간 만에 터키군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주도세력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냥 바이러스가 아니라 “암처럼 퍼져 간다”며 그가 정리하겠다고 지목한 이는 펫훌라흐 귈렌(Fethullah Gu¨len)과 그 추종자들이다.
귈렌은 현재 미국 영주권자로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다. 에르도안은 미국에 ‘쿠데타를 주도한 범죄자’ 귈렌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귈렌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미국 정부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면 인도를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터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귈렌은 에르도안과 함께 힘을 모아 세속주의 국시(國是) 때문에 위축된 무슬림들의 종교생활에 활로를 트고 현(現) 정권을 창출한 주역이다. 그런데 왜 에르도안은 귈렌과 귈렌 추종자들을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내려 한 쿠데타의 주역이라고 단언하면서 없애고자 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 받으며 자라
귈렌은 에르도안보다 13년 앞선 1941년 터키 동부의 도시 에르주룸(Erzurum) 인근 코루죽이라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이자 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귈렌은 정규 학교 교육을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녔다. 국가가 발령한 지역의 모스크에 부임해야 했던 아버지의 직업상, 학교가 없는 곳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귈렌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집은 항상 학자들로 붐볐다. 아버지가 학식 있는 이들과 종교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겼다. 귈렌은 “나는 아동, 청년 시절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있어 본 적이 없으며 대신 나이 든 사람과 자리를 함께하며 마음과 가슴을 채워 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종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이 금지된 시기에 가정에서 이슬람을 배운 것이다.
귈렌은 중등교육 과정을 시험으로 마치고 1959년에는 국가시험에 합격해 이맘이 됐다. 살아 온 환경을 되짚어 보면 가정 내에서 이루어진 이슬람 교육과 함께 민족주의는 귈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에르주룸은 동부 국경지대로 터키의 안녕을 위협하는 카프카스 지역과 이란과 같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도발을 차단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귈렌은 청년시절에 공산주의에 맞서 ‘반공산주의터키협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터키가 오스만제국과 같이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터키인들이 신실하게 이슬람적인 삶을 살면서 신(神)을 공공장소에서 인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가 이맘의 설교 내용 지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을 완화하려다가 군부쿠데타로 실각한 후 처형당한 멘데레스 전 총리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늘날 터키 땅인 아나톨리아에 자리를 잡게 된 때는 11세기 말이다. 10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견고하게 지배하던 비잔틴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튀르크에 1071년 터키 동쪽 끝 만지케르트(오늘날 말라즈기르트)에서 패하면서 무슬림이면서 튀르크어를 쓰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4세기 후인 1453년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의 심장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다. 오스만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아나톨리아에는 이슬람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속주의 기치 아래 터키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공화국 터키를 세우면서 이슬람은 공적인 영역에서 퇴출되었다. 이맘으로 불리는 예배 인도자이자 종교지도자는 국가가 통제하고 이들이 예배 시간에 하는 설교는 국가가 써 준 대로 해야만 했다.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 역시 금지했다.
군부는 세속주의를 철저하게 수호했고 정치인들이 세속주의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여지없이 쿠데타로 철퇴를 가했다. 1960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사형을 당한 멘데레스(Menderes) 총리는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느슨하게 풀어 모스크를 열고 터키어 대신 아랍어로 예배를 알리는 것을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학교를 새로 열도록 허용했다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이슬람을 공공연하게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폐기 처분된 오스만제국이 이슬람 덕분에 위대했기에 터키가 다시 그런 나라가 되려면 이슬람 신앙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위험했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차이점
귈렌은 그런 소리를 공공연히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귈렌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칼리파를 두고 무슬림들을 규합하려 했던 오스만제국의 정치적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오스만이 지녔던 문화적 가치와 관습이다. 구체적으로 대화의 정신, 오스만제국이 다국어·다종교·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여성존중, 19세기에 시작한 오스만제국과 서구(西歐)의 지적(知的)·문화적 화해다.
귈렌이 에르도안과 다른 점은 바로 오스만제국이 남긴 유산에 대한 이해다. 귈렌은 오스만제국의 문화적인 가치를 높게 산 반면 에르도안은 제국의 정치적 업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귈렌은 이슬람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권력을 잡는 에르도안의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둘 다 세속주의로 위축된 이슬람 신앙생활을 부활하는 데 노력했지만 방식은 크게 달랐다. 에르도안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개혁을 꿈꿨다. 이를 위해 권력을 잡고 권력을 취한 후에는 터키를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바꾸는 것을 지향한다.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과거 오스만제국처럼 터키가 쥐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연맹국에 아랍연맹 대신 이슬람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까지 했다.
귈렌은 하향식 개혁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개인적 변화 없는 체제 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귈렌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이 내적으로 성숙하여 안에서부터 질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슬람과 과학의 결합을 추구하고 법치와 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하며 자유시장 경제와 교육을 통한 구원을 지향한 사이드 누르시(1876~1960)의 영향 아래 귈렌은 현대화한 세계에 발맞추어 무슬림들이 내적으로 변화하여 진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슬림이 당면한 문제를 무지, 가난, 분열로 요약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 봉사, 대화를 제시한다.
‘국가 안의 국가’ ?
▲터키는 아타튀르크 이후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을 제한해 왔다. 사진은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
터키 내에서 귈렌의 사회개혁 운동은 교육에서 시작했다. 대학진학이 소수에게만 가능하던 시기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양질의 교육기회를 교육 소외층에게 제공했다. 1982년에는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 자신의 교육철학에 근거한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이후 수백 개에 이르는 학교가 터키뿐 아니라 해외에 개교하였고 이곳 졸업생들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하여 귈렌의 사상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귈렌의 뜻에 동참하는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가난 퇴치를 위해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99년 터키 지진을 계기로 만들어진 방송 프로그램 ‘킴세욕무(거기 누구 없어요)’가 2002년 구호단체로 결성되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도 귈렌이 주창한 가난 퇴치를 위한 봉사정신의 일환이다.
귈렌은 열심히 일하여 부(富)를 축적하고 나누는 것을 권장한다. 이 때문에 귈렌 운동을 종종 ‘이슬람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보기도 한다.
분열 극복을 위한 대화는 주로 종교문화 간 대화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터키 내 소수 종교인과 공동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이 귈렌의 추종자들이다. 귈렌은 개개인의 차이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인정하고 이러한 차이를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여 평화를 추구한다. 이와 같이 ▲교육을 통한 무지 타파 ▲부의 축적, 나눔·봉사를 통한 가난 퇴치 ▲대화를 통한 통합을 추구하는 귈렌 운동을 터키어로 ‘봉사’를 의미하는 ‘히즈멧(hizmet) 운동’이라고 한다.
히즈멧 운동에 동참한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1982년 최초로 귈렌 사상에 기반을 둔 학교가 설립된 이래 히즈멧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교육계, 법조계, 언론계, 군, 경제계 등 터키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즈멧 운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귈렌과 추종자들이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를 비밀스레 결성했다고 본다. 에르도안이 바로 그렇다. 그는 귈렌의 히즈멧 운동을 이번 쿠데타의 주역으로 몰아붙이면서 국가를 해치는 바이러스로 정의 내리고 박멸 작전에 들어갔다.
쿠데타의 배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귈렌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가능성도 없다. 다만 귈렌 스스로도 밝혔듯이 귈렌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담했을 가능성은 있다.
쿠데타 발발 이전에 에르도안 측에서 숙청 대상자 명단을 작성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쿠데타가 실패한 지 하루도 채 안돼 수많은 사람을 그렇게 빨리 검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151명의 장군을 포함해서 1만명 이상의 군인과 3000여 명에 달하는 경찰을 체포했다. 약 4만명에 달하는 교육부 산하 공무원, 1577명의 대학 학장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1043개의 사립학교, 15개의 대학교, 109개의 기숙사가 문을 닫았다. 공격의 칼날이 귈렌 사상의 보급처인 교육기관에 집중된 것을 보면 에르도안이 귈렌 운동을 뿌리 뽑으려고 작심했음을 알 수 있다.
10년형 구형 받기도
귈렌이 에르도안과 생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귈렌 추종자들이 에르도안과 2002년 정의개발당을 함께한 것은 에르도안이 정치권력을 통한 터키 사회 변화가 아니라 개개인의 내적 변화를 지향하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귈렌은 에르도안과 철학이 달랐기에 1998년 쿠데타로 해체된 이슬람정당 복지당(Welfare Party)과도, 1998년 결성돼 2001년 세속주의 헌법 위반으로 인해 다시 당 간판을 내린 미덕당(Virtue Party)과도 함께하지 않았다.
귈렌은 1998년 도미(渡美)한 이래 단 한순간도 미국 땅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표면적인 도미 이유는 신병(身病) 치료였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껴 떠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터키 국내 TV방송은 귈렌이 추종자들에게 이슬람국가를 세울 기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방영했다. 이후 검찰은 세속주의 국가를 파괴해 신정(神政)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귈렌에게 10년형을 구형하였다.
귈렌은 자신이 이슬람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방송 내용은 편집된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2006년 에르도안 정부 아래에서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지만 귈렌은 방송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그는 “고국이 그리우나 언론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고 하면서 망명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에르도안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정부 깊숙이 침투한 귈렌 세력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해 귈렌의 교육운동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을 운영하던 귈렌 운동을 표적으로 삼아 2013년 폐쇄령을 내렸다.
그러자 에르도안과 에르도안의 아들이 불법 자금에 대해 통화하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정부의 도덕성이 심판대에 올랐다. 에르도안은 이를 귈렌 측의 반격으로 여겨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터키 내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자만(Zaman)》 신문을 위시한 친 귈렌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귈렌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언론은 정부가 소유권을 빼앗고 관련 언론인은 투옥했다.
세속국가의 합법성 인정
▲지난 8월 7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쿠데타 규탄 대회에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에르도안 대통령.
에르도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현실에서 귈렌과 귈렌을 따르는 사람들이 에르도안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귈렌 지지자들은 오히려 이번 쿠데타가 실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쿠데타가 법치(法治)에 근간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귈렌의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독재자 에르도안이 영원히 영웅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향후 터키 정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에르도안의 무한질주가 이어질 것이다. 에르도안은 귈렌과 추종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만 귈렌은 한결같이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무슬림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왔다. 테러를 비난하면서도 테러의 원인을 서구의 침탈에서 찾는 대다수의 무슬림 지도자와 달리 보기 드물게 테러의 원인이 무슬림 사회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귈렌 운동이 정치적인 이유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에서 만일 성공했더라면 어떤 모습일까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귈렌이 이슬람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한 점을 상기하면 모두가 모범으로 생각한 그대로의 터키였을 듯싶다.
에르도안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쿠데타군을 막으려 거리로 나온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대다수가 수염을 길렀고 “민주주의” 대신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시다)”를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를 두고 “미나렛은 방망이, 둥근 지붕은 헬멧, 모스크는 병영의 막사, 신자는 군인”이라고 한 에르도안의 지지층답다. 술탄이 되고픈 에르도안과 “모든 믿음과 철학에 똑같이 거리를 두는 세속국가를 수용한다”고 하면서 이슬람국가가 아니라 민주화를 대세로 여기는 귈렌과의 차이는 크다.
귈렌을 따르는 필자의 지인은 늘 면도를 해서 수염 없는 말끔한 얼굴인데 쿠데타 직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귈렌 선생이 조금이라도 쿠데타에 개입했다면 저는 귈렌 선생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정치가가 아니라 종교지도자입니다. 종교지도자가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2016.10월 호
◆쿠르드 독립, 가능할까?
이라크와 터키가 쿠르드 독립의 가장 큰 걸림돌
▲지난 9월 3일 독일 쾰른에서는 수천 명의 쿠르드인이 모여 터키가 투옥하고 있는 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AP/뉴시스
2015년 9월 2일 3세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가 터키의 지중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이의 가족은 IS를 피해 시리아에서 터키로 들어왔다가 보드룸(Bodrum)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고스섬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높은 파도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아버지만 살고 아이와 아이 엄마, 5세 된 형이 익사했다.
출발지 보드룸 해변으로 밀려들어 와 잠자는 듯 모래에 얼굴을 묻고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알란 쿠르디(Alan Kurdi)의 최후 모습은 터키 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난민 수용을 놓고 격론을 벌이던 유럽의 여론이 기울어 많은 시리아 난민이 새 삶을 찾았다.
아이의 성은 쿠르디가 아니라 셰누(Shenu)인데, 쿠르드(Kurd)족이기에 쿠르드 사람이라는 뜻인 쿠르디로 불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쿠르드족의 슬픈 역사도 계속 진행 중이다.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터키·이라크·이란 등 4개국에 걸쳐 살고 있지만 세계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약 3000만명에 달하는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쿠르드, 그들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인가?
터키에서는 ‘산사람들’이라고 불러
쿠르드라는 말은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의 점토판에 카르다카(Kardaka)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두 단어의 관계는 정확하게 규명하기 힘들다. 쿠르드인은 언어적으로 이란어계에 속하는 사람들로 주로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거주했다. 쿠르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터키가 쿠르드라는 말 대신 ‘산(山)사람들’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다.
쿠르드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7세기 이후 이슬람 시대에 들어서다. 쿠르드인들의 땅이라는 뜻인 쿠르디스탄(Kurdistan)이라는 표현은 셀주크튀르크의 마지막 술탄인 산자르(Sanjar, 1157년 죽음) 시대에 처음 쓰였다. 산자르는 바하르(Bahar)를 수도로 하는 쿠르디스탄주를 만들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로레스탄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후 시대에 따라 쿠르디스탄의 면적은 부침을 거듭하다가 16세기에 들어서는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다툼 속에 영토의 통일성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됐다. 오늘날 쿠르디스탄이라는 말은 쿠르드인이 사는 국가 중 이란에서만 공식적인 주명으로 쓰고 있다. 현대 이란어로는 코르데스탄(Kordestan)이라고 부르고, 주도는 사난다지(Sanadaj), 면적은 2만9137km2로 경기도의 3배 크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된 승전국들은 1920년 8월 10일 프랑스 세브르(Se、vres)에서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완전히 해체하는 내용을 담은 조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남쪽에 쿠르드인만의 영토를 획정하여 쿠르디스탄 독립국 설립 가능성을 열어두었는데, 오늘날 시리아나 이라크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시리아는 프랑스가, 이라크는 영국이 이미 차지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가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술탄은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에 반대하여 앙카라에 정부를 세우고 2년간 터키 독립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켰다. 그 결과 세브르 조약은 폐기되고, 로잔 조약이 1923년에 맺어졌다.
3000만명의 나라 없는 사람들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에 3000만명이 흩어져 사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이다.
이에 따라 1914년부터 쿠르디스탄 독립을 위해 오스만튀르크에 맞서던 쿠르드인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쿠르드인을 위해 땅을 떼어 독립국을 세워주리라 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라는 나라를 만들면서 영국은 쿠르드 지역을 이라크에 붙여버렸고, 프랑스 역시 시리아를 다스리면서 쿠르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가는커녕 자치권마저 확보하지 못한 쿠르드인들은 새로이 만들어진 여러 근대 국가 안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터키에 약 1500만명, 이란에 약 600만명, 이라크에 약 600만명, 시리아에 약 200만명 등 무려 3000만명에 달하는 쿠르드인들이 서로 다른 국적을 지니게 되었다.
터키는 1990년대 초까지 국민의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였다. 1991년까지 쿠르드어를 금지하였고, 2003년까지 쿠르드식 이름을 쓰지 못하게 막았으며, 쿠르드 문자 역시 2013년까지 불법이었다.
시리아는 쿠르드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아랍식 이름을 쓰지 않으면 출생신고도, 학교 입학도, 사업도, 출판도 불가능하였다. 쿠르드어 교육이 금지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2011년 4월 하사카 지역 쿠르드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대통령이 서명하기 전까지 이들은 외국인으로 살았다.
이라크 쿠르드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몰락한 후에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인 1988년 3월 16일 아침 쿠르드 반군을 토벌한다는 목표 아래 이라크군이 북부 이라크 쿠르드 마을인 할랍자에 생화학가스를 살포했다. 순식간에 5000여 명이 살해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망자는 1만2000명으로 더 증가하였다. 무자비한 범죄였다. 또한 1991년 쿠르드인들의 항거 역시 무참히 진압했다.
이에 비하면 이란의 쿠르드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을 유지한 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직후 쿠르드인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며 항거를 하다가 진압된 이래 표면적으로 쿠르드인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래 민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족은 세속적인 개념으로 이슬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민족을 모른다.
잠잠하던 쿠르드 문제가 최근 중동 정세의 변화를 타고 똬리를 틀고 있다. 북부 이란에서 쿠르드 반정부 조직인 이란쿠르드민주당이 이란 혁명수비대 군인을 사살하면서 거의 20년 만에 투쟁에 나섰다. 이란 정부가 쿠르드인 지역에서 쿠르드인들의 정치활동을 갈수록 더 탄압하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쿠르드 지방정부
현재 유일하게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쿠르드 공동체는 이라크 쿠르드 지방정부(이하 KRG·Kurdistan Regional Government)다. 2003년 사담 후세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래 KRG의 도약은 놀랍다. 지난 8월 방한한 팔라 무스타파 바키르 KRG 대외관계장관은 “이라크 쿠르드인들이 자이툰 부대가 보여준 봉사정신, 친절, 우의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라크 쿠르드인들의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위대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강조했다. 그는 “쿠르드 지방정부는 세속 정부이기에 종교적 도그마에서 자유로우며, 주변 국가의 쿠르드 공동체와 별도로 개별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면서 이라크라는 지역의 한계를 벗어난 쿠르드 민족국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정답이라는 말이다.
KRG의 목표는 한국처럼 발전하는 것이다. 한국에 바라는 것은 쿠르드인들이 자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달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쿠르드인들은 집안에서 아주 훌륭한 치즈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표준화된 공정을 통해 품질을 유지한 채 대량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법을 모르기에 그러한 법을 한국인들이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인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거듭 강조했다. KRG는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조하며 이견을 대화를 통해 하나씩 해결하고 있다.
쿠르드 지방정부가 독립을 원한다 해도 현재 국제정세는 독립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지난 3월 중동의 유력 일간지 《알-모니터》와 가진 인터뷰에서 바르자니 쿠르드 지방정부 대통령은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한 뒤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독립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1월에 독립국가 건립 국민투표를 제안하기도 한 바르자니는 쿠르드 독립국가 수립에 국제정세가 우호적이라고 강조했다.
어려운 독립의 길
▲작년 9월 2일 터키 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알란 쿠르디는 쿠르드족 어린이였다. 사진=AP/뉴시스
쿠르드 독립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쿠르드 지방정부는 예산을 중앙정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고, 대형 국책사업도 중앙정부의 뜻을 거슬러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 국제정세 역시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쿠르드 독립에 묵묵부답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이란이다.
특히 이란은 공개적으로 쿠르드 지방정부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는 이란의 우군이다. 이라크는 테헤란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란은 쿠르드 지방정부가 이라크 헌법을 준수하여 이라크 안에 남길 강력히 원하고 있다. 이라크의 분열은 중동 역내 및 국제안보를 해치고 IS와 이스라엘만 이롭게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란의 입장은 사실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터키는 독립을 꿈꾸는 쿠르드 반군 PKK(쿠르드노동자당), 이와 연계된 것으로 간주하는 시리아의 YPG(시리아 쿠르드민병대)를 IS와 다를 바 없는 테러리스트로 규정, 응징하고 있다. 그러나 KRG와는 밀접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은 터키의 친(親)이라크 쿠르드 정책을 시아파 이라크 정부와 이란을 의식한 행보로 여기고 있다. 터키가 전통적으로 수니파 이슬람에 속하는 쿠르드와 연계하여 수니 세계의 맹주가 되고자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란은 터키의 쿠르드 문제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국내 쿠르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KRG를 후원하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KRG는 이란과 터키 사이에서 경제를 통한 상생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터키가 KRG에 우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석유를 공급받고 있고 터키의 대(對)이라크 수출의 상당부분이 쿠르드 지역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또 터키 기업이 수도 에르빌에서 각종 사업을 벌이며 경제이익을 거두고 있다.
터키, YPG의 작전 방해
▲시리아의 쿠르드족 민병대 YPG 병사들. 터키는 YPG의 약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KRG는 이란과도 원유 거래를 하고자 하나 현재 파이프라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현실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유조차를 통해 거래하는 것은 도로 기반이 열악하여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는다. 파이프라인이 건설된다면 양측의 관계도 현재보다 더 가까워질 것이다.
자국과 이웃 국가 쿠르드에 대한 터키의 정책은 자국 내 쿠르드 반군 세력 제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터키로서는 반(反)IS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미국의 든든한 아군인 시리아의 YPG의 선전(善戰)이 몹시도 껄끄럽다. 특히 YPG가 터키 국경과 맞닿은 시리아 도시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것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훼방까지 놓고 있다.
가장 도드라진 예가 바로 코바니(Kobani) 전투다. 코바니는 시리아 쿠르드 지역으로 터키 국경에 가까운 도시다. 이곳을 IS가 공격해 오자 코바니와 가까운 터키의 국경도시 지즈레(Cizre)의 쿠르드인들이 국경을 넘어 코바니 쿠르드인들을 돕고자 하였으나 터키 정부가 막았다.
이에 분노한 터키 쿠르드인들이 터키군과 무력 충돌을 벌여 2014년 10월에만 35명이 사망하였다. 터키의 PKK 지도자 오잘란은 1999년 투옥됐다. 그는 옥중 메시지를 통해 PKK 동지들에게 유혈 투쟁을 멈출 것을 당부하면서 터키 정부에 휴전을 제안하였고, 한동안 잘 지켜졌으나 IS로 인하여 현재는 사실상 평화가 깨진 상태다.
터키, 시리아 쿠르드인들 간 내분 조장
▲아유브왕조를 창건한 쿠르드족 출신 이슬람의 영웅 살라훗딘. 19세기 프랑스 판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이다
터키의 최대 관심은 IS가 아니라 PKK와 함께 PKK와 연계된 시리아 쿠르드의 약진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시리아 쿠르드 PYD(민주통일당)와 PYD의 무장조직인 YPG가 터키 국경 인근 시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IS를 공습하겠다던 공군기가 IS와 전투를 벌이는 YPG를 공격한 것도 그런 이유다.
PKK, PYD, YPG는 모두 좌파 조직이다. 같은 쿠르드인이지만 이라크 지방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코바니 전투 시 PKK 소속 전투원들이 시리아로 들어가 싸우는 것을 막는 대신 이라크 쿠르드군 조직인 페시메르가(Peshmerga)가 터키를 거쳐 시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것도 쿠르드의 사상적 차이를 계산해서다.
시리아 쿠르드는 시리아 내전이라는 기회를 살려 쿠르드 자치정부를 세우고자 미국의 아군이 되어 반IS 전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터키 정부는 이를 막고자 12세기 십자군 전쟁의 무슬림 영웅으로 쿠르드 출신인 살라훗딘(살라딘)의 이름을 딴 새로운 시리아 쿠르드 군사 조직 ‘살라훗딘의 후손들’을 후원하여 IS에 맞서게 하고 있다. 터키는 더 나아가 이들에게 같은 시리아 쿠르드인인 YPG를 공격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살라훗딘의 후손들’ 사령관 마무드 아부 함자는 자신의 조직은 600여 명의 전사(戰士)로 구성되어 있고, 터키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YPG는 아랍인과 쿠르드인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해 분열을 일으키고 쿠르드인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IS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쿠르드 자체 분열의 참극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살라훗딘은 십자군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집트 카이로를 건설한 이스마일, 시아파, 파티마조를 몰아내고 아유브(Ayyub)조를 세운 무슬림의 영웅이자 3000만 쿠르드인의 자랑이다. 쿠르드인들은 그의 군대와 아유브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유브조가 쓰러진 후에도 쿠르드인들은 시리아 지역에서 쿠르드 정권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의 이름을 딴 후손들이 터키의 전략에 동조하여 시리아 내 쿠르드 세력을 공고하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고민
미국은 터키가 YPG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YPG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터키 때문에 러시아와 밀착한다면 시리아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렇지 않아도 YPG는 바샤르 정권과 암묵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적대적 우호관계다. ‘살라훗딘의 후손들’이 YPG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이 성사되었더라면 쿠르드는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현재 3000만 쿠르드인이 시리아, 이라크에서 독립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187년 살라훗딘이 십자군의 항복을 받아 예루살렘에 승리자로 입성하였듯 쿠르드인이 기나긴 슬픈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과거보다 위대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까? 역사가 타바리의 말마따나 오로지 신만이 잘 아시리라(알라후 아을람)!⊙
2016.11월 호
◆거트루드 벨, 이라크를 만든 여인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중동 지역을 탐험하고 이라크 건국에 기여한 거트루드 벨.
199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보면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던 영국 군인들이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행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 중 한명이 “저 산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자 다른 군인이 “벨의 지도에 길이 나와”라고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벨의 지도는 거트루드 마거릿 로디안 벨(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이 만든 지도를 말한다. 벨은 여자였다. 영국 정보장교로 아랍군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와 싸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여성판, 사막의 여왕 등 다양한 별명을 지닌 벨은 영국이 이라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관리이자, 정보원, 고고학자, 탐험가다.
벨은 1868년 7월 14일 더럼 지방의 워싱턴 뉴 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제철업자이자 자유당 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자본가였다. 할아버지가 준남작(baronet)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아버지가 작위를 세습하였기에 경(sir)으로 불리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런던 퀸스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1888년 20세 때 여성 최초로 현대사를 전공하여 학사 취득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당시 옥스퍼드는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기에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다.
벨은 옥스퍼드를 떠나 당시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벨은 6개월간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후 1892년 주이란 대사로 봉직하고 있던 이모부를 만나기 위해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젊은 외교관 헨리 카더건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였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벨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알프스에 이름을 남기다
▲1900년 레바논 쿠벳 두리스 유적지 앞의 거트루드 벨.
이란에서 귀국한 후 벨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등산을 즐겼는데, 여성 등산복이 없던 시절, 치마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등정을 할 정도였다. 1899년 프랑스 알프스 라메주 정상에 올랐고, 스위스 알프스 엥겔호른 지역 9개 봉우리 중 7개 정상에 올랐다. 그중 봉우리 하나는 벨의 등정을 기념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 ‘거트루드봉’으로 부른다.
벨의 강인함은 1902년 4274m 높이의 핀스터아르호른 등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상을 수백 미터 앞두고 눈보라를 만나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무려 53시간 동안 밧줄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다. 손발에 동상을 입긴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2년 후 마터호른 등반에 성공하였다.
1900년 벨은 다시 중동(中東)을 여행하였다. 테헤란에서 사귄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재 독일 영사의 부인인 니나 로젠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아랍어, 히브리어, 터키어를 공부하였고 승마를 배웠다.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종교를 경멸하였던 그녀는 시리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드루즈 지역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여타 서구인들과 달리 지역민들을 존중하고 아랍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벨은 어려움 없이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6월 영국으로 돌아온 벨은 1903년 인도에 갔다. 훗날 이라크에서 상관으로 모시게 될 퍼시 콕스 영사를 만나게 된다. 콕스로부터 중동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천성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아라비아 반도 여행을 결심한다.
영국군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당시 영국인들은 리처드 버튼 경, 찰스 다우티, 기포드 팔그레이브, 윌프리드 블런트의 아라비아 여행기에 매료되었는데 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벨은 거의 2년에 한 번씩 모두 다섯 차례나 중동을 드나들었다. 고고학에 매료된 벨은 발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꼼꼼하게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죽을 때까지 그녀가 남긴 편지와 일기는 1600여 개, 사진은 7000여 장에 달한다. 이 귀중한 역사자료는 현재 뉴캐슬 대학에서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아라비아 여행을 통해 벨은 믿을 수 있는 아라비스트, 즉 아랍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벨을 스파이로 의심했다. 벨이 험한 곳을 홀로 다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는 무장경비병, 하인, 요리사가 동행하였다. 1914년 벨은 2400km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 사막 지역을 낙타를 타고 탐험하여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장창립자 메달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군은 아라비아를 잘 아는 벨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로써 벨은 영국군이 채용한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가 되어 카이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없지만, 만일 처칠이 성급하고도 무모하게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벨 소령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독일과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한 처칠은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1915년 4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약 9개월간 이스탄불로 진입하는 바닷길인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오스만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벌인 전투는 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남긴 채 영국과 프랑스의 후퇴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벨이 사랑하는 남자 리처드 다우티-와일리 중령이 전사했다. 다우티-와일리 중령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벨은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남았다.
9개국에서 사용하는 아랍 삼색기
▲1921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거트루드 벨, T.E.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만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더라면 영국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대항하라고 아랍인들을 선동하여 규합하는 데 벨이 아랍전문가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무력(無力)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제국 지배 아래에 있던 아랍인들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아랍인들이 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하는 데 선봉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국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영국을 도와 아랍 항쟁을 이끈 히자즈 지방 메카의 아랍 지도자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도 그중 하나였다. 파이살은 12세 아랍 소년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것을 보다 울분을 토하며 튀르크 상관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잔혹함에 분노한 파이살은 영국의 도움으로 반(反)오스만 아랍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랍 항쟁군은 영국인 마크 사이크스가 만들어준 적색, 흰색, 검은색으로 된 삼색기를 들고 싸웠다. 이 깃발은 오늘날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을 포함하여 아랍 9개국의 국기의 바탕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독립국의 범위는 영국의 계획과 달랐다. 아랍 전 지역을 독립국 영토로 생각한 아랍인들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항쟁 이전인 1916년에 러시아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영향권에 둘 지역을 나누어 정하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약’이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국제 공동관리 구역으로 두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그 외 아랍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로 했다. 영국이 아랍인에게 약속한 아랍 독립국은 영국의 힘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정됐으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은 애초부터 제외된 상태였다.
바스라를 거쳐 1917년 바그다드로 돌아온 벨은 총영사로 근무 중이던 콕스를 보좌하여 중동문제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그다드는 벨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벨은 모든 아랍인이 하나가 되는 아랍국을 생각한 적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여러 개의 아랍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사이크스가 프랑스의 피코와 협의한 것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한 셈인데, 정작 사이크스는 벨을 싫어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을 이렇게 평했다.
“오만하고, 과장이 심하고, 밋밋한 가슴을 지녔고, 남자 같고, 세계여행이나 하고 다니고, 엉덩이나 흔들고, 실없는 말이나 하는 바보같이 멍청한 수다쟁이, 이 빌어 처먹을 것!”
그도 그럴 것이 벨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두고 사이크스가 무능하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사이크스는 극심한 반아랍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벨은 사이크스를 1905년 하이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이크스는 아랍인을 “겁 많고 병들고 게으른 동물”로 비유하여 벨을 크게 놀라게 했다. 벨은 사이크스와 달리 아랍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아랍 지역을 여러 국가로 나눴다는 점에서 벨과 사이크스는 초록동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아랍인에 대한 감정은 사뭇 달랐다. 주 추천!
시아와 수니
▲1921년 바스라에 있는 영국대표부에서.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1), 퍼시 콕스(2), 거트루드 벨(3).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예감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가를 세울 것을 계획하였고, 1920년 11월 11일 국제연맹은 영국에 이라크를 보호통치령으로 위임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랍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라크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새로운 이라크는 북부까지 포함한 국가가 되었다.
벨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 지역의 통치자는 수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니를 시아보다 더 문명인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시아는 종교적 광기를 지닌 사람들로 위험하고 전(前)근대적이라고 보았다. 1920년 10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벨은 시아파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행사하여 매 순간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가정해 보신다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황과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단지 바보 같은 노인네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아직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벨은 결론적으로 시아보다 소수인 수니파 무슬림이 실권을 갖는 새로운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수니 무슬림들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神政)국가가 설 것입니다. 이는 진정 사악한 일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다
▲파이살 이라크 국왕(오른쪽에서 두 번째)과의 피크닉에 나선 벨(가운데).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가 문명국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대중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내부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벨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백서(白書)를 쓴 여성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라는 제목의 백서는 당시 런던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소포타미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노력보다 “개가 뒷다리로 섰다”면서 여성이 백서를 썼다는 데 놀라는 언론의 반응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921년 8월 23일 영국 정부는 벨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벨은 새로운 나라 이라크를 위한 헌법을 쓰는 데 일조하면서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국경선을 그었다. 벨은 이라크의 국경을 정할 당시 모습을 1921년 12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무실에서 하일에서 온 신사와 아니자 부족의 지도자 파하드 벡의 도움으로 이라크 남쪽 사막지대 국경선을 그리며 아침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파하드 벡이 사막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다고 믿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콘월리스가 그에게 부족의 경계를 묻자 그는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그녀가 잘 아오’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파하드로부터 아니자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모두 알아내고 하일에서 온 사람에게서는 샴마르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전부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리저리 꽤 합리적으로 국경을 확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2015년 벨의 삶을 영화화한 〈사막의 여왕(Queen of Desert)〉 개봉에 앞서 벨로 열연한 니콜 키드먼은 “벨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을 획정하였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라크를 만들고 아랍인들에게 ‘여왕’으로 불린 벨이 이라크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국립박물관이다. 당시 서구 고고학자들은 중동에서 발굴한 유물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벨은 고고학 유물이 전부 고고학 발굴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법으로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왕에게 간청하여 고대 유물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26년 6월 16일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벨 이후의 이라크
▲1921년 카이로회의. 둘째 줄 왼쪽이 벨(원 안), 앞줄 가운데가 윈스턴 처칠.
벨은 1926년 7월 11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살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라크 건국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할 일이 없었고, 1923년 자신의 상관이자 후견인이었던 콕스가 떠난 이후 런던이나 주변의 영국 관료들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우울증을 앓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1년 8월 28일 일기에서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라크를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이라크는 지금 아랍 수니, 아랍 시아, 쿠르드 세 파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 1921년부터 2003년까지 80여 년 동안 이라크는 소수 수니가 다수 시아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벨은 셋 중 둘이 힘을 합하여 하나를 제어하는 영국의 통치 원칙에 충실하였다. 아랍 수니와 쿠르드 수니가 연합하여 수니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아랍 시아를 다스리고, 아랍 수니와 시아가 아랍이라는 이름 아래 힘을 모아 쿠르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아랍이라는 언어적 정체성도 수니와 시아라는 종교적 정체성도 이라크를 평온한 국가로 만들지 못하였다. 이라크 지방과 메카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당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자즈 출신 파이살을 굳이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한 것 또한 패착이었다. 왕정은 1958년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이라크는 벨의 실패작이라기보다는 벨의 말마따나 시민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권력만을 탐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1921년 2월 17일 벨이 파하드 벡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파하드 벡은 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관료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영국과 같다고 생각하나 봅니다만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이 나라는 당신 나라처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벨은 이에 “그래서 저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길 바라는 겁니다”라고 하자 파하드 벡은 “예. 그러나 당신이 돌보아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벨이 옆에서 서서 지켜보겠다고 하자, 영국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한 파하드 벡의 모습에서 스스로 결연한 의지 없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다.
80여 년 동안 권좌를 무력으로 지키다 아랍 시아에 권력을 빼앗긴 아랍 수니가 IS 극단주의자로 되어버린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바그다드의 바브 알-샤르지에 묻혀 있는 벨이 그토록 싫어했던 시아가 장악한 이라크는 어떻게 될까?⊙
2016.12월 호
◆여성차별과 무슬림 세계의 여성 지도자들
오늘날 ‘이슬람’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테러’와 함께 ‘여성 차별’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슬람 신봉자들이 다수인 국가마다 여성의 지위에는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사회활동 면에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앞서가는 나라도 있다. 얼굴 가리고, 남자에 복종하고,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우리보다 훨씬 먼저 여성 국가 지도자를 배출한 나라가 한두 곳이 아니라면 놀랄 것이다.
파키스탄의 4대 대통령(1971~1973)과 9대 총리(1973~1977)를 역임한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1953~2007)는 1988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슬림 세계 최초의 여자 총리이며, 현재 여성 국가 지도자도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Mauritius)의 대통령 아미나 구립-파킴(Ameenah Gurib-Fakim), 방글라데시의 총리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Sheikh Hasina Wazed), 코소보의 대통령 아티페테 자흐자가(Atifete Jahjaga) 등 모두 3명이다.
여성 지도자에 대한 긍정과 부정 공존
▲아자르미도흐트는 630년부터 1년간 이란을 다스린 여왕이었다.
이슬람에서 여성 정치 지도자에 대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부정적인 전승은 다음과 같다. 한국 무슬림들이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유일신 알라가 인간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선택하여 직접 전한 말을 담은 책이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이다. 《코란》 4장 34절은 남성이 여성을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자는 여자를 책임진다. 하나님께서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우월하게 만드셨기에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써야 한다. 따라서 좋은 여성은 복종하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을 은밀하게 잘 보호한다. 항거하는 여성은 혼을 내고 침대를 따로 쓰고 때려주어라. 그러나 복종하면 그렇게 하지 마라.”
《코란》 외,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Hadith)》도 있다. 무슬림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하리(Bukhari·870년 죽음)의 하디스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온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호스로(Khosrau)의 딸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는 말을 듣고 예언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를 지도자로 삼은 나라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왕은 호스로 2세의 딸로 630년에서 631년까지 1년간 페르시아를 다스린 여왕 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를 지칭한 듯하다. 또 《부하리의 하디스 모음집》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자의 말을 전한다.
“남자는 집안을 보호하고 책임을 진다. 여자는 남편의 집과 아이들의 보호자로 책임을 진다. 남자의 노예는 주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책임을 진다. 분명히 여러분 모두가 보호자로 각기 책임을 지고 있다.”
시바의 여왕에 대한 찬미
▲《성서》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을 《코란》도 찬양하고 있다.
《코란》과 《하디스》에는 확실히 남성 우월적인 표현이 도드라지지만 여성 지도자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 또한 담고 있다. 《코란》은 27장에서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처럼 시바의 여왕(Queen of Sheba)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서》에서는 시바지만, 《코란》의 아랍어로는 사바(Saba)다. 《코란》은 사바의 여왕을 이렇게 표현한다.
“보라! 모든 것을 지닌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니. 그녀는 위대한 옥좌에 앉아 있노라."
강력하고 성공적으로 국가를 다스린 사바의 여왕 이야기를 《코란》이 담고 있다는 것은 이슬람이 여성 지도자를 인정한다는 생생한 증언이라고 현대 무슬림들은 입을 모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사바의 여왕이 솔로몬과 혼인했다는 말도 있지만, 《코란》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위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코란》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코란》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표현이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코란》이 그러한 문맥을 전해주지 않기에 해석 작업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면밀히 잘 검토하지 않으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내 논에 물 대기 식 해석이 난무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실제로 현재 IS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코란》을 해석하여 여성에 대한 잔악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외에도 과거에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여성들이 다스린 시대가 적잖게 있었다. 이스마일리 시아였던 아르와 알-술라이히(Arwah al-Sulayhi)는 1067년부터 1138년까지 예멘을 다스렸다. 금요일 합동 예배 때 예배 인도자는 그녀의 이름을 지도자로 늘 거명하였다. 인도를 지배하던 델리(Delhi) 술탄국의 라지아 술타나(Razia Sultana·1236~1239 재위), 이집트의 맘루크(Mamluk) 시대를 연 샤자라트 알-두르(Shajarat al-Durr·1250~1257 재위)와 더불어 인도네시아 아체(Aceh) 술탄국 역시 첫 여성 통치자가 1400년에서 1427년까지 27년간 다스린 후 1641년부터 1699년까지 58년 동안 4명의 여성 지도자가 술탄국을 통치하였다.
방글라데시의 두 여걸
현대 무슬림 세계는 두 번의 총리를 역임한 파키스탄의 부토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1명의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군사정권에 의해 처형된 베나지르 부토는 파키스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1988년 독재자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후 실시된 민주총선에서 압승, 35세의 나이로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지도자가 됐다. 그녀는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Asif Ali Zardari·1955~)를 비롯한 측근들의 부패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자르다리는 각종 이권사업의 10%를 떼어간다고 해서 ‘미스터 10%’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1990년 부토는 총선에서 패해 권력을 넘겨주어야 했다. 1993년 재집권했지만, 다시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1996년 사임했다. 19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 정권 시절 해외망명을 했던 부토는 2007년 10월 귀국해 정치활동을 재개했지만, 두 달 후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미스터 10%’ 자르다리는 아내의 후광에 힘입어 현재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다.
부토 다음으로 무슬림 국가의 지도자가 된 여성은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 칼레다 지아(Khaleda Zia)다. 그녀는 군인 출신으로 쿠데타로 집권, 7대 대통령(1977~1981)을 지낸 지아우르 라만(Ziaur Rahman)의 미망인이다. 남편이 암살당한 후 야당인 방글라데시 민족당에서 정치가로 활동하다가 2차례에 걸쳐 10년간(1991~1996, 2001~2006)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칼레다 지아의 최대 라이벌은 이슬람 세계 네 번째 여성 지도자인 방글라데시 현 총리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다. 칼레다 지아에 이어 1996년 방글라데시 역사상 두 번째 총리가 된 셰이크 하시나는 현재를 포함하여 모두 3번에 걸쳐(1996~2001, 2009~2014, 2014~현재) 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고 있다.
와제드는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이끈 국부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초대(初代) 대통령의 딸이다. 1975년 지아우르 라만(칼레다 지아의 남편)의 쿠데타 때, 부모와 3명의 남동생, 2명의 삼촌 등을 잃었다. 당시 서독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는 6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 에르샤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정치활동에 뛰어들었다.
와제드와 지아는 에르샤드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연대(連帶)하기도 했지만, 1991년 이후에는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치열한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1991년 칼레다 지아를 시작으로 3년(2006~2009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무려 22년간 두 사람의 여성이 총리직을 수행해 왔다. 두 여인의 정치적 역정을 보면 아마도 방글라데시가 무슬림 세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성의 정치력이 가장 돋보이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아와 와제드 모두 재임 중 부패 스캔들에 휩싸이는 등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위기관리에 성공한 키르기즈의 로자 오툰바예바
▲탄수 칠레르 전 터키 총리
세 번째 여성 지도자는 현재까지 터키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인 탄수 칠레르(Tansu Çiller) 30대 총리다. 1993년 터키 대통령이 사망하자 총리이자 정도당(正道黨) 당수였던 데미렐이 대통령이 되면서 총리직이 공석이 되자 당내 경합이 치열해졌다. 이때 칠레르는 유력 후보가 아니었지만, 3명의 남성 후보와 각축전을 벌였고, 1차 투표에서 11표가 모자랐지만 경쟁하던 후보들이 사퇴함에 따라 터키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언론인으로 시작하여 터키 동북부 빌레지크(Bilecik)주 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탄탄한 집안 출신으로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 경제학자 칠레르 총리는 중도좌파 공화인민당과 연정을 이끌면서 1996년까지 3년간 국정 책임을 졌다.
칠레르가 총리로 선출된 데에는 여성이라는 이유가 작용하였다. 당시 언론은 그녀를 지지하였는데, 대외적으로 여성이 총리가 됨에 따라 터키가 현대에 어울리는 진보적인 국가라는 이미지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어린 기대가 컸다. 여성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총리가 된 것이다.
다섯 번째 지도자는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세네갈 최초의 여성 총리 맘 마디오르 보이(Mame Madior Boye)다. 2001년 3월부터 약 20개월간 국정을 이끌었다.
여섯 번째 여성 지도자는 세계에서 가장 무슬림이 많은 나라인 인도네시아의 8대 부통령(1999~2001)과 5대 대통령(2001~2004)을 역임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다. 메가와티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이다.
그녀는 수하르토 정권 시절 인도네시아민주당과 민주투쟁당을 이끌면서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후인 1999년 10월 대선에서는 무슬림 세계 특유의 반(反)여성 정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통령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는 2001년 7월 와히드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탄핵을 당해 물러난 후 대통령직을 승계, 2004년까지 재임했지만, 눈에 띄는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일곱 번째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의 로자 오툰바예바(Roza Otunbayeva)다. 외교관 출신으로 2010년 4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약 20개월간 대통령으로 재임한 오툰바예바는 4월 혁명으로 바키예프 대통령이 물러나자 후임으로 국정 중단의 위기를 관리하였다.
여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남성 일변도의 키르기스스탄 정계에서 오툰바예바의 존재는 국내외에서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위기를 관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고, 이를 실현해 냈다. 특히 그녀가 라마단 단식월에 국민들에게 인내와 용서를 강조하면서 평화적 공존을 이슬람의 인본주의적 가르침으로 강조한 것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코소보에서도 여자 대통령 탄생
▲자흐자가 코소보 대통령
여덟 번째 인물은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으로 말리키 법학파를 따르고 수피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 말리 공화국의 시세 마리암 카이다마 시디베(Cissé Mariam Kaïdama Sidibé)이다. 그녀는 2011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1년간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재임하였는데,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아홉 번째 여성 지도자는 3개월이 채 못 되는 단명으로 끝나긴 했지만 시벨 시베르(Sibel Siber) 북키프로스 총리다. 이르센 퀴 정부가 2013년 6월 13일 불신임 투표로 붕괴되자 9월 2일까지 최초의 여성 총리로 국정 위기를 관리하였다.
지금까지 거론한 9명의 여성 지도자 중 네 번째 인물인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 현 방글라데시 총리와 함께 지금 현재 현직 국가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인물은 아티페테 자흐자가 코소보 대통령과 아미나 구립-파킴 모리셔스 대통령이다.
1975년생인 자흐자가는 코소보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2011년 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최연소 대통령이자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는 발칸반도 최초의 여성 국가수반이며 남동 유럽 국가 내 최고위직 여성이라는 신기원을 세웠다. 그녀의 꿈은 신생 코소보 공화국을 유럽연합과 국제연합의 회원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국가수반이 된 아미나 구립-파킴 모리셔스 대통령은 생물다양성을 연구하는 과학자 출신으로, 2015년 6월 5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비록 상징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국가 행정에 관한 정보를 모두 보고받고 5년 임기로 연임이 가능하다.
이처럼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에서 많은 여성이 지도자로 국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슬람을 단순히 여성 차별의 종교로만 보았던 기존의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이란의 변화
▲이란의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여사
한계도 있다.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거나 국가수반으로 선택한 나라들이 이슬람 문화의 중심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슬람 문화가 제일 먼저 태동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종교적 문화가 강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아라비아 반도 국가와 이란에서는 아직 여성 최고 지도자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였던 시린 에바디(Shirin Ebadi) 여사는 이슬람 혁명 직후 판사직에서 쫓겨나 법원 말단 행정 일을 해야만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의 상속액을 여성의 두 배로 규정한 《코란》 4장 11절의 계시를 확대해석하여 여성의 지적(知的) 능력이 남성의 반밖에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 이란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인 마수메 엡테카(Masoumeh Ebtekar)는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명의 여성 장관을 임명하였고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에서도 여성이 장관에 임명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성 국가수반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또 하나, 이슬람 국가의 여성 지도자들 중에는 파키스탄의 부토, 방글라데시의 지아와 와제드,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등에서 보듯, 부친이나 남편의 정치적 후광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집권했지만, 재임 중 부패 스캔들이나 무능으로 빛이 바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감에 따라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면서 남성 중심의 무슬림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변화의 바람은 비(非)무슬림 국가의 무슬림 사회에서도 분다. 2015년 캐나다 총선에서 11명의 무슬림이 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이 중 적어도 4명이 여성이고, 이들은 모두 히잡을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