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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토리8/ 세계의 분쟁史3/ 중동 분쟁 1400년 - 탈무드 이야기 - 노석조의 이슬람

상림은내고향 2022. 11. 12. 20:56

글로벌 스토리8/ 세계의 분쟁史3/

■중동 분쟁 1400년

◆2016.01.05  수니파·시아파 1400년째 분쟁

수니파·시아파 왜 싸우나
사우디 등 수니파는 능력주의… 이란 등 시아파는 혈육 앞세워
인구비율은 수니 85 對 시아 15

중동 분쟁의 근원인 수니·시아파 갈등은 1400년 전부터 계속돼 왔다. 이들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여기고 하루 다섯 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하는 똑같은 무슬림이지만,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전쟁을 거듭했다.

수니·시아파로 쪼개진 건 632(추정)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면서부터다.

이슬람 공동체는 스스로 후계자를 정해야 했는데, 무함마드의 혈육을 후계자로 해야 한다는 시아파, 공동체 합의를 통해 적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수니파로 의견이 갈렸다.

 

 

무함마드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파는 무함마드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하 알리)을 초대 칼리프(후계자)로 추대했다. 하지만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丈人)인 아부 바크르를 추대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오른팔이었고, 둘째 딸을 무함마드에게 시집 보내 영향력도 셌다. 결국 수니파 의견이 채택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가 됐다. 이후 시아파는 공동체 내의 큰 불만 세력이 됐다.

갈등이 노골화한 것은 시아파의 알리가 어렵게 제4대 칼리프에 올랐다가 곧 암살되면서부터다. 그 뒤 알리의 장남 하산마저 수니파 꾐에 넘어간 그의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차남 후세인도 수니파와 치른 전투에서 숨지면서 두 종파는 원수가 됐다.


1400
년 전의 원한에서 비롯한 분쟁은 지금까지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2011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은 시아파 정권(알아사드) 대 수니파 반군, 작년 터진 예멘 내전은 수니파 정권 대 시아파 반군의 대결 구도다. 종파 전쟁 성격이 강한 내전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분쟁을 확산시킨다. 현재 이슬람 신자는 수니파가 85%로 다수, 시아파가 15%로 소수이다.
조선일보 예루살렘=노석조 특파원

 

◆2016.06.08  '라마단' 참뜻을 뒤튼 이슬람의 배교자들

라마단이 시작됐다. 이슬람력()으로 9번째 달, 금식 성월(聖月)이다. '자힐리야'라 불린 긴 어두움의 시대를 깨고 이 땅에 전파된 알라[]의 계시를 기념하는 달이다. 라마단 한 달 동안 무슬림들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일절 취식을 금한다. 물도 마시지 않으며, 몸을 즐겁게 하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낮 동안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경건하게 신의 뜻을 되새기는 구별된 시간이다. 단 노약자나 병자,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은 금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이슬람교도, 즉 무슬림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는 행동 규칙을 평생 지켜야 한다. 신앙고백·기도·성지순례·금식,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휼(救恤)의 의무다. 그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이 규칙이 주어졌다고 믿는다. 이슬람에서 인간은 어원상 '망각하는 존재'. 사람은 본래 백지처럼 흠결 없이 태어났지만 진리를 자꾸 잊고 죄를 범하면서 구원과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신이 인간에게 일상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를 구체적으로 명령하여 진리를 잊지 않도록 붙들어 놓았다고 믿는다. '망각 방지'를 위한 장치들인 셈이다. 라마단 금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다섯 기둥 중 금식을 빼고는 모두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면 금식은 먹지 않는 것, 즉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다. 금식의 덕목은 이처럼 육체의 소진을 통해 내면의 영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사람들은 한 달 내내 낮 끼니를 거르고, 갈증을 참아내면서 인간의 무기력을 다시 기억해낸다. 신의 도움과 자비가 필요함을 기억해낸다. 따라서 제대로 된 금식은 인간을 겸손으로 이끈다. 라마단의 본령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뿐 아니다. 라마단 금식의 의미는 개인 성찰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적 기억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 연대(連帶)의 의식(儀式)이라고나 할까? 배고팠던 긴 하루가 저물면 일몰 예배를 드리고 매일 함께 이프타르 만찬을 나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구분없이 둘러앉는 밥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라마단 달이 끝나는 날(이둘 피트르), 큰 잔치판이 벌어지고 온 공동체가 며칠간 성대한 축제를 함께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무슬림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아픔을 기억해낸다. 나아가 그들과 불가분리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이렇듯 라마단은 이슬람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사람마다 열정이 다르고 신심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무슬림은 굶는 시늉만 하며 라마단 달을 지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새벽에 폭식을 하고, 종일 소화불량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위해 개인과 공동체의 순수한 기억을 왜곡시키는 극단주의자들이 도처에 있다. 폭력을 먹고 사는 이들이다. 기다렸다는 듯, 라마단 첫날인 6일부터 요르단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 단체 이슬람국가(ISIL)는 라마단 기간에 미국과 유럽을 공격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라마단을 뒤틀었다. 환각에 사로잡혀 배타적인 기억만 편의적으로 끄집어내어 분노를 강요한다. 이들이야말로 배교자다. 자기를 성찰하고 약자를 보듬어 돌아보는 라마단이 아니라, 타자를 살상하는 피의 축제로 만들려 한다. 이 혼돈의 시대, 2016년 라마단을 맞아 정작 다수의 선량한 무슬림들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사람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이 땅에 없고, 평화를 위해 한길 가야 한다는 것, 그 진리를 애써 기억해내야 하지 않을까?

조선일보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라마단 [Ramadan]

음력인 이슬람력()에서 아홉번째 달인 라마단은 타는 듯한 지열(地熱)과 건조함을 뜻하는 아랍어 ‘라미다’에서 유래해,‘타는 듯한 갈증의 감각’ 또는 ‘이 기간 중에 죄를 좋은 행위로 태워 없앤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슬림들은 1400년 전 라마단 때 코란이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처음 계시됐다고 믿는다. 라마단 기간 중 무슬림들은 일출(日出)부터 일몰(日沒) 때까지 일체의 음식과 물을 입에 대지 않고, 성관계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군인·병자·어린이들은 예외다.

라마단은 공식적으로는 ‘육안으로’ 초승달이 목격된 밤의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해 다음 초승달이 뜬 날 밤에 끝난다. 그러나 날씨나 지역에 따라 최초의 초승달 목격일이 달라지고, 나라마다 이해 관계가 엇갈리면서 하루 정도 차이가 난다.

조선일보

 

◆2016.06.22  '라마단'이라면 禁食만 떠올리셨죠? 먹고 마시고, 화려한 밤 축제랍니다

20(현지 시각) 오후 8시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가. 해가 지자 낮에 썰렁했던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상점들은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손님을 맞았다. 식당들도 닫았던 문을 열고 하얀 연기를 피우며 양고기 케밥(중동권 꼬치구이)을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3차선 도로는 차량으로 뒤엉켰다.

 

▲20일 낮에는 문을 닫았던 요르단 암만 도심의 상점들이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 무슬림은 라마단 때 낮에는 금식(禁食)하지만 해가 지면 평소보다 더 푸짐하게 음식을 먹고 가족과 친구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노석조 특파원

식품 20%·전자제품 30%
한 달간 소비량 크게 늘어나
무슬림 지갑 여는 열쇠인 셈

지난 6일부터 전 세계 이슬람 신자(무슬림)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禁食)을 하는 라마단에 들어갔다. 라마단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코란의 계시를 받은 날을 기려 한 달 동안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기간을 말한다. 얼핏 경건하고 엄숙할 것 같지만, 해가 지면 무슬림들은 금식을 중단하고 축제 분위기에 들어간다. 스포츠 의류 판매장 직원인 아부 유세프는 "라마단이 진행되는 한 달 동안 16억 무슬림의 낮밤 생활이 완전히 바뀐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라마단은 무슬림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해가 진 뒤 밤을 새우며 더 풍성한 식사를 즐기고 가족·친구끼리 선물을 교환하기 때문에 관련 품목 특수(特需)가 생긴다. 무슬림 5대 의무 중 하나인 '자카트(기부)'도 많이 이루어진다. 재력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식 후 먹는 첫 식사인 '이프타르'를 성대하게 베풀기도 한다. 서양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 "이슬람권에서는 라마단 때 TV 광고 단가가 오르고 전화·인터넷 사용량도 급증한다" "백화점도 대대적 상품 홍보와 사은품 행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요르단타임스는 "시리아 내전 여파로 중동 국가들의 경기가 침체에 빠져 있지만, 라마단 때만큼은 일시적으로 시장이 살아난다"고 했다. 2011~ 2015 5년간을 평균해보면 라마단 기간 아랍권에서는 식품은 20%, 통신 서비스는 10% 정도 소비가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날 오후 10시쯤 늦은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전자제품 쇼핑 등을 즐겼다. 노철 코트라(KOTRA) 암만 무역관장은 "중동 부자들은 라마단 때 상대적으로 선선한 암만이나 이집트 카이로에 별장을 마련하고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별장을 새로 단장하느라 백색 가전 매출이 크게 늘어난다" "라마단이 끝나고 3일 동안 이어지는 이슬람 명절인 '이드 알피트르' 기간에는 결혼식을 많이 올려 혼수품 시장도 대목을 맞는다"고 했다.

다만 이란에선 라마단 특수 현상이 거의 없다. 이란은 새해 명절인 노루즈를 더 중요하게 여겨 그때 주로 가구나 가전제품 등을 장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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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이란-사우디의 패권경쟁과 중동 갈등

이란과 아랍은 처음부터 화합할 수 없는 앙숙이었다. 650년 이슬람화된 아랍의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인도-유럽 계통인 이란인들은 아랍인들과는 민족도 언어도 문화적 배경도 완전히 달랐다

 

두 민족 간 비극의 뿌리는 680 10 10(이슬람력 1 10) 이라크 중부도시 카르발라에서 시작되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적통 후계자였던 후세인과 생후 몇 개월 된 그의 어린 아들 알 아스가르마저 아랍군대의 공격으로 무참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혈통 승계를 무시한 아랍왕조에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이것이 시아파가 형성되는 결정적 단초였다. 지금도 매년 1 10일이 되면 시아파들은 그날의 참극을 기리며 자해를 통해 후세인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재현하는 통곡의 추모제를 치른다

두 번째 비극은 1802 4 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우디 왕정의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통치 시기에 와하비라 불리는 교조적 이슬람 집단들이 12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시아파 추모일에 카르발라를 침공하여 수천 명의 시아파들을 살육하고 성지인 후세인의 묘당을 훼손한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이란과 이라크 8년 전쟁(19801988)으로 이란과 아랍은 다시 한 번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더욱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집권한 이란 정권이 강력한 반미노선을 표방하자, 석유산업에 국가 운명을 걸고 있던 사우디는 미국과 손을 잡았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두 국가는 영원한 경쟁자이자 적대적 당사자였다

따라서 사우디가 주도한 아랍권 8개국의 카타르 단교는 충분히 예상되었던 시나리오다. 시아파를 거의 이단으로 보는 사우디 와하비파와는 달리 카타르는 수니파와 시아파는 물론 오만의 이바디파까지 수용하며 이슬람 종파 간 상생과 화합을 강조해왔다. 이란과도 좋은 관계다. 또한 자국 소유인 아랍 최대의 방송 매체인 알자지라 채널을 통해 가감 없는 비판 정보까지 송출하면서 기존 아랍 왕정이나 주변 독재 국가들에 눈엣가시가 되어 왔다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지난 70여 년간 두 가지 원칙을 단단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종교적 연대와 이스라엘에 부당하게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의 독립이라는 절대 명제였다. 최근에는 이 축마저 무너져 버렸다. 팔레스타인 투쟁단체인 하마스와 레바논 최대 정파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정권과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등을 두고 이들을 지원하는 이란과 반대하는 아랍 진영이 갈라지고,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를 두고도 커다란 온도차를 보였다 

최근 발생한 아랍권 8개국의 카타르 단교와 IS의 이란 테러를 보면, 사우디-이란의 패권경쟁이 사태의 본질이다. 굳이 종파 요소를 든다면 수니-시아파 갈등보다는 와하비-시아 종파 간 반목이 문제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이란의 확장정책이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의 20%에 달하는 시아파 주민들에게 도달한다면 사우디로서는 생명선이 위협받게 된다. 더욱이 강경한 이란 압박정책을 펴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도 중동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결국 주변 국가들과 카타르의 외교관계는 중도 성향의 터키 쿠웨이트 오만 이라크 등의 중재를 통해 파국보다는 현실적인 공존으로 나아가겠지만, 사우디와 이란 관계의 악화로 사우디가 이란보다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시리아 이란 러시아 중국의 대응축이 공고화되면서 중동 전체의 역학구도는 근원적인 변화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2중동 붐을 준비하는 우리도 그만큼 복합적이고 정교한 전략이 절실해졌다.
동아일보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17.07.08  출구 안 보이는 ‘사·카’ 치킨게임, 아시아 경제 위기 부르나

카타르 단교 사태 후폭풍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 아랍권 4개국은 지난 5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지난달 5 카타르에 단교를 선언하고 육해공 수송로까지 봉쇄한 아랍권 국가들이 전달한 13개항의 요구를 카타르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랍권 언론에는 경제제재 강화, 걸프협력회의(GCC) 퇴출, 카타르 침공, 카타르 왕실 교체 다양한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중동판을사보호조약
이란과 단교, 알자지라 방송 폐쇄
사우디, 사실상 카타르 주권포기 강요
뾰족한 해법 없어 사태 장기화 조짐

아시아 에너지 라인 막히나
LNG 36%
카타르서 오는 한국
공급선 다변화 대책 서둘러야
원전 포기 된다는 목소리도

▲세계 속으로 7/8

 

표면적인 이유는 카타르가 테러리즘과 극단주의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의 진짜 의도는 사뭇 달라 보인다. 이는카타르 외교위기 중재자로 나선 쿠웨이트를 통해 카타르에 전달했다는 13 요구사항을 살펴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AP통신에 따르면 사우디의 1 요구는 중동 패권을 두고 경쟁해온 이란과 국교는 물론 인적·물적 교류까지 끊으라는 것이었다. 주권국가의 외교에 간섭하는 행위는을사보호조약같은 강요나 다름없다. 카타르는 페르시아만 해저의 가스전을 이란과 공유해 이란과 단교하면 서로 타격이 불가피하다. 결국 카타르 외교위기 사태의 본질은 사우디와 이란 간의 갈등에서 찾을 있다. 사우디는 숙적 이란에 타격을 주려고 약소국 카타르를 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없다.
 

사우디의 속내를 드러낸 다른 억지는 카타르의 알자지라 방송과 아랍어 온라인 매체들에 대한 폐쇄 요구다. 1996 카타르 왕실에 의해 설립된 아랍어 영어 위성방송 채널인 알자지라는 중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편집권이 정치에서 독립된 방송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에는 다양한 채널을 운영하면서 여러 언어로 방송과 인터넷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때문에 아랍 세계의 유일한 글로벌 주류 매체로 인정받는다. 2011 튀니지·이집트·리비아·바레인 등에서 벌어졌던아랍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세습 왕가나 군부 독재자에 대한 비난 여론도 가감 없이 전해왔다. 이에 반감을 품은 세력은 알자지라가 카타르 왕실의 정치적 선전도구라고 공격해왔다. 따라서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넷 폐쇄 요구는 자유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라는 지적이다.

 

사우디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카타르에 주둔하고 있는 터키 병력과 기지를 철수하고 군사 협력도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카타르는 260 인구 자국민이 313000명에 지나지 않는다. 16800 정도의 군병력 자국민은 30%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25개국 출신의 잡다한 계약군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의 터키군 철수 요구는 무장해제 권유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군대 해산까지 강요하는 셈이다. 주권을 포기하고 사우디의 속국이 되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더욱 황당한 것은 무슬림형제단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다. 사우디는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2011 빈라덴 사망으로 힘이 빠진 알카에다, 지난 2 해체된 시리아의 알카에다 분파인 알누스라 전선,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 관계를 정리하라고 요구하면서 무슬림형제단도 슬쩍 끼워 넣었다. 사우디는 이들을 테러단체로 규정하지만 다른 데는 몰라도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1928 이집트에서 결성된 범아랍권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이슬람 규범인 순나를 개인과 가족, 공동체 국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자는 운동을 펼쳐왔다. 2011 아랍의 이후 이집트에서 정치력을 확대해 2012 무함마드 무르시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기여했다. 무르시는 1 시위와 군사쿠데타로 쫓겨났는데 과정에서 이집트 군부가 사우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이집트의 군사정권이 사우디를 지지하고 무슬림형제단을 뱀처럼 여기는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사우디·바레인·UAE 물론 내전 중인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와 러시아 등에서 불법화되고 테러조직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수단·팔레스타인 의회에서 무슬림형제단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당당한 집권세력이다. 튀니지·인도네시아·예멘·아프가니스탄 등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의석을 차지 중이다. 결국 사우디는 카타르를 테러국가로 몰기 위한 프로파간다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서로 자존심을 이런 상황에서 사태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보인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불똥이 아시아와 한국으로 튀는 일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석유와 가스 수송선이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은 잊으라 "사우디와 카타르가 진짜 일합을 겨룰 장소는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5500 떨어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믈라카 해협이라고 지적했다. 통신은 "최근 글로벌 경제는 물론 석유시장의 무게중심이 아시아로 옮겨진 오래라며 "과거 중동 에너지 수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미국·유럽의 비중이 이제는 3분의 1 정도로 떨어졌으며 한국·일본·인도·중국·대만·필리핀·태국의 수입이 늘고 있다 설명했다. 이에 따라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수출의 65.3% 차지하는 이들 아시아 국가가 사우디가 주도하는 카타르 경제봉쇄의 피해를 가장 크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 블룸버그의 지적이다. 카타르 사태가 자칫 아시아에 경제위기를 몰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일본은 호주·말레이시아 등으로 가스 공급선을 다변화해 전체 17% 카타르에서 사온다. 카타르 가스의 공급이 끊겨도 타격은 입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원유 수입의 40% 사우디에 의존하고 있어 중동이 불안정해지면 타격받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인도와 대만은 전체 LNG 수입의 50% 정도를 카타르에 의존해 사태가 악화하면 화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36% 중간에 해당한다. 에너지 수급이 불안정해질 경우에 대비해 공급선 다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사우디와 이란·카타르의 대결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시로 반복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 원유 수출을 재개한 미국 등에서 에너지 수입을 늘리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미 흑자를 효과적으로 줄여 미국의 무역보복을 피하는 일석이조 효과도 있다는 지적이다. 준국산 에너지원인 원자력을 포기해선 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카타르 사태는 닌자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타격을 있는 잠재적 위협이다.
 

[S BOX] ‘왕좌의 게임 이긴 사우디 국왕 장남, 카타르 강경 압박 주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82) 국왕의 장남인 무함마드 빈살만 알사우드(31) 국방장관은 지난달 21 1왕위계승권자가 됐다. 살만 국왕은 정치적 성향이 일치하는 강경파 피붙이에게 힘을 실어줬다.
 
MBS
라는 영문 약칭으로 불리는 무함마드 빈살만은 힘을 앞세워 사우디 왕실의 권위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다.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국내외 세력에 특히 단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타르 압박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서방 세계에도 친미정권과 이슬람주의자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것을 강요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2015 29세에 국방장관에 올라 세계 최연소 기록을 세운 그는 카타르 압박에 운명을 수밖에 없다. 물러설 경우 권위에 도전할 인물이 주변에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타밈 빈하마드 알사니 국왕(37) 자리를 걸고 MBS 맞서는 중이다. 2013 6 부왕 하마드 빈칼리파 알사니의 양위로 국왕에 오른 그는 현재 세계에서 최연소 군주다. 이번 사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자리가 위험할 있다. 무함마드와 타밈의 치킨게임은 중동은 물론 세계 경제마저 위협하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탈무드 이야기

2017.12.09  유지훈  중앙일보

탈무드 이야기 #1

 

탈무드란 무엇인가?

 

탈무드תַּלמְוּד 는 ‘가르침’ 혹은 ‘배움’이란 뜻으로 어원은 라마드LMD에서 파생된 것으로 유대교 랍비의 중심 문헌을 일컫는다. 전통적으로는 “샤스ש״ס ”라고도 한다. 샤스는 “쉬샤 세다림(여섯 가지 체계six orders)”의 약어이며 미쉬나의 여섯 체계(6)를 가리킨다.


예루살렘 탈무드(혹은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일찍 기록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탈무드”는 바벨론 탈무드(탈무드 바블리)를 가리킨다.


탈무드는 유대교 랍비의 구전토라를 집대성한 미쉬나(서기 200), 구약성경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토론한 게마라(서기 500)로 구성되어 있다. “탈무드”는 미쉬나 본문과 게마라의 통칭으로 쓰이나 때로는 게마라만을 지칭할 때도 있다.


탈무드 전권은 63권이며 6,200페이지가 넘는다. 기록 언어는 탄나임(랍비)이 구사하던 히브리어와 고대 아람어이며 여기에는 기원전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랍비 수천 명의 가르침과 소견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율법(할라하)을 비롯하여 유대교 윤리와 철학, 관습, 역사, 설화 등, 주제도 다양하다. 탈무드는 랍비 문헌에 널리 인용되며 유대교 율법의 근간을 이룬다.
 

 

여후다 하나시는 누구인가?

 AD 135년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인 시므온 벤 가말리엘 2세에게서 태어났다. 미드라쉬(구약성서 주석)에 따르면, 그는 랍비 아키바(성경을 가르치다 로마당국에 잡혀 순교한 랍비)가 순교한 당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후다 하나시는 통칭 "랍비" 혹은 "라베이누 하카도쉬(우리의 거룩한 랍비)"였고 기원후 2세기경 탈무드(미쉬나) 본문을 집대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가 유대(팔레스타인 남부)땅을 점령할 때 유대인 공동체를 이끈 핵심 리더였다. 탈무드에 따르면, 그는 다윗의 혈통인 까닭에 직함에 "군주Prince" 나시가 붙었다고 한다. "나시"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에게 붙인 호칭이다. 여후다 하나시는 기원후 217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피르케이 아보트』란 무엇인가?

“선조의 장Chapters of the Fathers”인 피르케이 아보트는 모세가 랍비들에게 전수한 윤리적 가르침과 격언을 모은 책이다. 책에 담긴 의미를 반영하여“ 선조의 윤리학Ethics of the Fathers”으로 옮기기도 한다. 미쉬나 4(너지킨) 중 아홉 번째 책인데 마지막 6장은 나중에 추가되었다. 아보트는 윤리|도덕에 입각한 원칙은 기록되어 있으나 율법(할라하)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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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피르케이 아보트』중에서

  

탈무드 이야기 #2

 

『피르케이 아보트』의 유명한 구절

랍비 힐렐이 쓴 시가가 널리 회자되는 구절로 꼽힌다.

내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살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나는 무엇이겠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
피르케이 아보트 1:14)
 


친절을 베풀라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서있다.
(1)
토라 (2) 예배 (3) 선행(1:2)
“너희 집을 활짝 열라. 가난한 자를 네 식구로 삼으라(1:5).
“반가운 표정으로 모든 사람을 맞이하라(1:15).


이웃을 존중하라

“사람이 자신을 위해 선택해야 할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 명예가 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이면 된다(2:1)
“너희 돈이 소중하듯 남의 돈도 소중히 여기라(2:12).
“악한 눈과 악한 본성 그리고 사람들의 증오는 사람을 세상 밖으로 내몬다(2:16).
 


신을 경외하라

“그의 뜻이 너희 뜻과 같이 되게 하라. 그러면 그도 너희의 뜻을 당신의 뜻 같이 만들 것이다. 그의 뜻 앞에서 너희의 뜻을 포기하라. 그러면 그분도 너희 뜻 앞에서 타인의 뜻을 무색케 하실 것이다(2:4). 


화평을 도모하라

“아론의 제자가 되라. 평화를 사랑하고 이를 도모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토라로 인도하라(1:12). 


죄를 피하라

“토라 주변에 울타리를 치라(1:1).
“악한 이웃과는 거리를 두라. 사악한 사람은 친구로 삼지 말라. 심판에 대해 절망하지 말라(1:7).
“세 가지를 명심하라. 그러면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고 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책에 기록되어 있다(2:1).
 


겸손하라

“일을 사랑하고 통치권을 혐오하라. 네가 정부에 알려져선 안 된다(1:10).
“명성을 찾는 자는 명성을 잃을 것이다(1:13).
“공동체를 위한 활동에 전력하는 사람은 모두 하늘을 위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선조의 공로가 그들을 돕고 그들의 의로움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2:2).


기도에 집중하라

“기도할 때, 기도가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앞에서 동정을 위한 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2:18).


토라 연구와 일을 병행하라

“토라 연구는 데레흐 에레쯔(생업)를 동반해야 바람직하다. 두 일에 몰두하면 죄가 파기되기 때문이다. 일이 동반되지 않는 토라는 결국 그만두게 되거나 죄의 자취를 남기게 될 것이다(2:2). 


말을 조심하라

“실천이 중요하며 말이 많으면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1:17).
“적게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1:5).
“현인이여, 말을 신중히 하라. 그러지 않으면 강제 추방으로 악한 강이 흐르는 곳에 이르고, 너희를 따르는 제자는 물을 마시고 죽을 것이며 결국에는 하늘의 이름마저 훼손될 것이다(1:11).
 


정답보다 질문이 더 많은 책

몇 해 전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집대성한 탈무드가 현대 히브리어와 영어 및 불어 등으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간은 무려 40년이 넘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랍비 아딘 스타인살츠. 이제 그 이름은 탈무드 번역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탈무드는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책입니다. ... 정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은 책이랄까요. 탈무드의 문을 열었으니 들어오십시오. 그건 제가 대신해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아딘 스타인살츠).
 
탈무드가 한낱 우화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만 치부하다가 원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으며 한 번 읽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는 사실은 안 지 얼마 안 된다. 게다가 이제 탈무드 한 권을 번역한 터라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방대한 탈무드를 수십 년에 걸쳐 완역했을 때, 탈무드 속에 담긴 유대인 선현의 가르침을 몸소 배웠을 때 나의 신앙과 사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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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피르케이 아보트』중에서

 

탈무드 이야기 #3

 

 

Moshe received the Torah from Sinai and transmitted it to Yehoshua, and Yehoshua to the Elders, and the Elders to the Prophets, and the Prophets transmitted it to the Men of the Great Assembly. They said three things: Be deliberate in judgment, raise up many disciples and make a fence for the Torah.

모세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아 이를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여호수아는 장로에게 [전했고] 장로는 선지자에게 [전했으며] 선지자는 이를 위대한 모임의 공회원에게 전했다. 그들은[위대한 모임의 공회원은]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1) 판결에 앞서 인내하라.
(2)
많은 제자를 세우라.
(3)
토라 주변에 울타리를 쳐라
(
피르케이 아보트 1:1)

토라(성경)는 사유재산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아 여호수아에게 주었다gave.”라고 기록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전했다transmitted’는 어구를 썼을까?

 

토라는 사유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라의 지식을 습득하고, 토라를 받아 전수할 수는 있어도 ‘준다’고 하여 개인의 소유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토라는 전수할 뿐이다


여호수아는 남달랐다

미쉬나에 따르면,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토라를 전했다고 하나, 오경은 “모세가 우리에게(모든 유대인) 토라를 명령했다( 33:4)”고 증언한다. 아울러 토라는 개인의 유산이 아닌 “야곱의 총회가 받은 유산”이었다고 한다.


모세는 개인이 능력껏 이해할 수 있도록 전 백성에게 토라뿐 아니라, 계명의 세부조항과 학습의 원칙 및 율법의 판결 등을 다룬 구전토라도 가르쳤다.


이때 총체적인 하나님의 지식과 이를 정확히 해석하는 비결을 터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였다. “젊은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 33:11). 40년간 대필자 겸 조수로 모세를 충직히 섬기며 토라를 검토한 까닭에 그에게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나 사소해 보이는 항목도 빠뜨려선 안 된다는 책임의식이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의지할 권위자로 안성맞춤이었기에 모세가 그에게 토라를 온전히 전수한 것이다.

 

탈무드 이야기 #4

 

 

Hillel and Shammai received from them. Hillel says, "Be of the disciples of Aharon, loving peace and pursuing peace, loving the creatures and bringing them closer to Torah."

힐렐과 샴마이가 그들에게서 [전통]을 받았다. 힐렐이 이르기를 “아론의 제자가 되라. 평화를 사랑하고 이를 도모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토라로 인도하라.
(
피르케이 아보트 1:1)


“아론의 제자가 되라”

모세와 아론은 탈무드 전체 중 절반을 대변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이들의 역동성은 수세기 후 샴마이와 힐렐 학파의 가르침에 자주 반복되었다.
 
아론의 성품은 각 족속에게 모세가 축복한 바와 같이(신명기 33:8) 평화를 사랑하고 인정이 넘쳤다. [아론은] 화평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했다(말라기 2:6).


반면, 모세는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사람이다[‘진실’과 어원이 같다](민수기 12:7).” 즉, 모세는 진실했고, “하나님의 정의를 행했다(신명기 33:21)”는 점으로 미루어 의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이집트에 있는 동족에게 돌아가 아론과 상봉했을 때 “[아론의] 자애와 [모세의] 진실이 만났고, [모세의] 정의와 [아론의] 평화가 입을 맞추었다(시편 85:11)(얄쿠트 쉬모니, 슈모트 174)”고 한다.

모세는 공의와 법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세운 반면, 아론은 사랑과 유대감을 심어주었다.


모세는 주저하지 않고 책망했지만 아론은 “네가 잘못했다”며 허물을 지적한 적이 없었다.논쟁이 벌어질라치면 아론은 당사자의 품위를 지켜주는가 하면, 양측이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모세가 죽을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슬피 울었다(신명기 34:8)”고 했지만, 아론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여성과 아이를 포함하여)이 슬피 울었다(민수기 20:29)”고 한다.

힐렐은 아론의 성품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쉬나에서 아론을 거론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론이 아니라 “아론의 제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까닭은 무엇일까? 아론에 버금가는 인물이 된다는 것은 실현할 수 없는 포부에 불과하다(미드라쉬 슈무엘).


아론에게서 배우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데 힘쓰라”하지 않고 아론을 거론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힐렐은 지론을 밝히기 위해 시편(34:15)을 인용했을 뿐이다.

 

라비 알레자르 아즈카리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평화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가 쉽다고 한다. 그러면 힐렐은 아론의 제자 중 하나의 성품을 닮으라고 가르칠 것이다. 광야에서 생활했던 유대인이 아론의 제자라고 생각했듯이 모든 유대인(어디에 있든) 또한 아론의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세페르 하레이딤, 1 8:2).

힐렐이 특히 아론을 꼽은 또 다른 이유는 일반적인 논쟁을 보면 자신은 옳고, 상대방의 소견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치부하기 십상인데, 이때 힐렐은 아론을 닮지 않으면 평화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한다(미드라쉬 슈무엘).

또한 아론은 항상 평화를 지향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테면, 그는 화기애애한 대인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역할을 잠시 제쳐두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도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어야 할 때라면 하던 일을 제쳐둘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학문의 상아탑에 머물기를 선호하는 토라 학자들이라면 더더욱 아론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이웃을 돕고, 사소해 보이는 분쟁이나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시간을 쪼갠 아론처럼 말이다(야베쯔).

 

탈무드 이야기 #5

 

 

He [Rabbi Hillel] used to say: If I am not for me, who will be for me? And when I am for myself alone, what am I? And if not now, then when?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내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살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나는 무엇이겠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바르테누라의 랍비 오바댜는 위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즉, 젊을 때가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늙은 나이에 할 것인가? 한창 힘을 쓸 때인 지금 행하지 않는다면 다 늙어, 수전증에 거동도 온전치가 않은 데다 눈도 침침하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할 때 인생을 바꿀 인내력과 열정을 함양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솔로몬 왕은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고 역설했다. 현인들은 곤고한 날을 노년의 때라고 설명한다(샤보트 151b).


토라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32).”라고 명령한다. 조하르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흰머리가 되기 전, 젊을 때 일어나 창조주를 섬기라.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노년에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경건하고 탁월한 공적을 세운 사람이 성전시대 물축제the Water Festival에서 “노년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젊은이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수카 53a).”라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듯이 말이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12:1).”에 대한 탈무드의 해석이기도 하다. 열정이 극에 달한 때에 죄를 회개하고 악한 본성을 극복하려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다.

활력이 왕성할 때의 회개는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노년의 회개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람밤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온전한 회개란 무엇인가? 온전한 회개는 과거에 죄를 지었던 때와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더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두렵다거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기력이 쇠하는 노년에 이르고 나서 죄를 뉘우치는 것은 아주 칭찬을 받을 만하진 않지만 진실로 회개했다면 그로도 충분하다. 사실, 평생 죄를 범하고 임종 당일에만 회개해도 모든 죄는 용서될 수 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즉 임종의 날(전도서 12:2)’에라도 창조주를 의지한다면 그는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테슈바 2:1). 


한 페이지, 한 사람, 한 날

랍비 이스라엘 살란테르는 연구를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1. 토라는 모두 한 페이지로 되어 있다.
2.
지상에는 한 연구자밖에 없다.
3.
오늘이 그의 임종일이다.

탈무드를 연구할라치면 악한 본성이 “그 단락은 너무 어려우니 다음으로 넘어가라”며 속삭인다. 하지만 단락이 어렵다는 이유로 건너뛰면 연구에 몰입할 수가 없다. 또한 악한 본성이 탈무드의 방대한 문헌을 내세워 그를 억누르고 내면에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토라가 한 페이지뿐이라고 간주한다면 이를 온전히 습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질 것이다.

물론 악한 본성은 다른 관점에서 그를 공격해올 수도 있다. “토라를 다 연구할 필요는 없잖아. 돈 버느라 바쁠 테니 토라는 학자에게 맡기렴. 혹시라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랍비를 찾아가면 되잖아. 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니?


따라서 그는 지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토라를 연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말이다. 그러면 학당에 결석할 유혹은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탈무드는(키두쉰 40b) 면도날이 받치고 있는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데, 이때 균형은 선행이 좌우할 것이다.

 

끝으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각오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피곤하고, 분주하고,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닌 데다, 내일 해도 된다는 생각에 언제든 연구를 건너뛸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라는 신조가 확립되어 있다면 그는 랍비 엘리에제르 벤 후르카노스의 말마따나 “죽기 전에 잘못을 뉘우칠 것이다(2:10).” 즉 (언제 세상을 떠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날뿐 아니라 매일 토라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현인들에 따르면, 랍비 하니나 바르 파파는 죽음의 천사를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토라를 다시 훑어볼 수 있도록 30일간의 유예기간을 당부했다. “지금껏 연구한 것을 잊을까 두렵기도 하고, ‘토라를 터득하고 하늘에 온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하늘의 뜻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페사힘 50a).


그러나 죽음의 천사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계획을 모르는 우리라면 마땅히 매일 회개하고, 날마다 토라를 습득하는 데 전념해야 할 것이다.

 

#6  01.13

 

 

Shammai says, "Make your Torah fixed, say little and do much, and receive every person with a pleasant countenance."

샴마이가 이르기를 “토라를 영원히 연구하라. 적게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 반가운 표정으로 모든 사람을 맞이하라. 


샴마이와 힐렐이 세운 학파

샴마이와 힐렐은 인생의 대소사를 서로 다른(혹은 보완적인) 관점에서 조망했지만 할라하(율법)라면 세 가지 사례에서만 달랐을 뿐, 놀라우리만치 마음이 통했다(샤보트 15a, 에두요트 1:1~3). 설령 견해가 달랐다손 치더라도 논쟁은 “하늘을 위해 벌인 것으로 영원한 보전에 그 목적을 두었다고 현인들은 강조했다(5:20). , 토라를 영원히 보전하기 위한 논쟁이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샴마이와 힐렐은 “세상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에두요트 1:4). 그들이 전수하고 확립한 유산 및 학구적 역동성은 수세대를 거쳐 이스라엘의 눈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라야 이름을 딴 학파가 숱한 논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곁에서 스승을 섬기지 않았던 제자가 늘어나자 논쟁도 빈도가 높아지면서 토라는 두 개로 양분되고 말았다(산헤드린 88b).

물론 두 학파가 토라의 근본적인 사상에 의견을 달리했다는 뜻은 아니다. 계명 이면의 추론을 둘러싼 견해가 다른 까닭에 힐렐과 샴마이의 관점에 근거하여 계명을 준행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항목에도 차이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혼인에 적합한 계층과 더불어 이견이 많았지만 “샴마이와 힐렐 학파는 상대의 자녀에 대해서는 결혼을 주저하지 않았다. 두 학파는 애정과 우애가 돈독하여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라(스가랴 8:19)’는 말씀을 몸소 실천했다(여바모트 14b). 


“토라를 영원히 연구하라”

현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천상의 재판소에 서서 답변해야 할 두 번째 물음은 “토라를 연구하는 데 고정된 시간을 떼어 두었는가?”라고 한다(샤보트 31a).


“토라를 영원히 연구하라”는 샴마이의 권고가 이 물음과 관계가 깊을 듯싶다. 토라를 연구하는 데 고정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핵심 목적인 토라 연구에 투자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너무 분주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세상적인 염려가 들어올 틈이 없는 ‘시간의 섬an island of time’을 가지고 있다면 토라를 연구할 여유가 있으리라 확신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샴마이는 그 점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지적한다. 그는 토라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라’고 주문했다. , 토라를 존재의 핵심인, 삶의 중심에 두고 이를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유가 있을 때 토라를 연구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토라 연구는 최우선순위이므로, 연구하지 않을 때는 다른 의무를 준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토라 연구에 전념할 수 있으며 시간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이 말씀을 강론해야 할 것”이라고 토라는 명령하는데(신명기 6:7) 현인들은 이에 대해 “말씀만 강론해야 할 뿐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풀이했다(요마 19b). 랍비 아하는 “말씀을 강론하되, 이를 평생 정기적인 일로 삼으라”고 덧붙였다(ibid).

토라가 열정을 지배할 때만이 이를 제대로 연구하고 발전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토라가 적힌 두루마리를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8)”고 말씀하셨다.


인생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토라에 투자한 시간이 아니라 연구와의 관계다. 토라를 인생의 중심적인 목적으로 삼는다면 다른 것은 자연히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 


본업과 부업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본업을 부차적인 노력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자각하고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결국에는 토라뿐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도 습득할 수 있다.

랍비 여후다 베랍비 일라이는 “전 세대는 토라를 본업으로, 생업은 부업으로 삼았음에도 둘에 모두 성공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생업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토라 연구가 부차적인 일로 전락하자 둘 다 성공하지 못했다(버라호트 35b)”고 역설한 바 있다.


토라 연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속세의 일을 하는 사람은 거룩한 후광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토라의 신성을 흡수하여 예배로 연결되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현인들에 따르면, 이 지침은 “토라의 근본적인 원리가 모두 담겨 있는 소소한 가르침”이라고 한다(버라호트 63a). 랍비 요시가 언급했듯이, 사람의 행동은 모두 “하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2:11).


토라를 영원히 연구하라 

물론 모든 사람이 토라 연구에 대다수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토라에 대한 열정적인 마음을 일상의 공백에 채워 이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매일 고정된 시간에 토라를 연구하겠다는, 불굴의 결의를 다지는 것도 쉽고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인생의 만사를 토라의 보조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순간조차도 선용하여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토라 연구에 대한 의지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슐한 아루흐』도 “사람은 모름지기 토라 연구를 위한 시간을 정해두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연구는 평생 지속되어야 하며, 생각 같아서는 다른 일을 하면 천금을 벌 수 있을지라도 이를 바꿔서는 안 된다(오라흐 하임).


이런 맥락에서 라쉬는 “매일 시간을 정해 4, 5장씩 연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미쉬나 본문 주석, 라쉬).

“빈부나 건강, 노소를 떠나 사람은 누구나 토라를 연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동냥으로 생활하든, 처자식이 있든 주야로 연구할 시간을 정해야 한다. 성경에 ‘주야로 말씀을 연구하라(여호수아 1:8)’고 했으니 말이다. 유대인 중 위대한 유대 현인들은 맹인도 있었고, 나무를 베고 물을 기르며 생활했지만 주야로 토라를 연구했기에 모세에서 이어진 전통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수할 수 있었다.” 람밤의 주장이다.

람밤은 더 나아가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하기도 했다. “연구는 셋으로 구분해야 한다. 3분의 2는 각각 성문토라와 구전토라를 연구하고, 마지막 3분의 1은 묵상의 시간으로 활용하라(탈무드 토라 1:8~12).” 람밤의 가르침에 근거하자면, 하루의 3분의 2는 각각 생업과 다양한 의무를 실천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토라를 연구하는 데 선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노석조의 이슬람

주간조선 노석조 국제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2018.08.13 주간조선

2520중동에 부는 女風 히잡 벗길까

중동 여성들이 기지개를 켜는 것일까? 여성 인권 후진 지역으로 꼽히는 중동에서 최근 희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먼저 튀니지의 첫 여성 시장 탄생 소식이다. 지난 7 3일 선거에서 튀니지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의 후보 수아드 압델라힘(54)이 튀니스 시장에 당선됐다. 여성이 시장이 된 것도 처음인데, 작은 도시도 아닌 수도 튀니스의 시장에 당당히 선출됐다. 그는 당선연설에서 “이 승리를 튀니지 모든 여성에게 바친다”고 했다. 이날 승리는 그의 개인적인 성취나 한 도시만의 뉴스가 아니었다. 튀니지 그리고 더 나아가 아랍·중동·이슬람세계를 향해 ‘이제 변할 때가 됐다’는 메시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가 시장이 되는 과정은 중동 여권 발전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964년 중부 작은 마을 마투이아에서 태어났다. 튀니지를 비롯해 아랍 전역에선 아랍민족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때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 반정부 학생 운동을 했다. 아랍인이자 무슬림(이슬람 신자)으로서 그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세속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위를 하다 체포돼 보름간 감옥생활도 했다. 하지만 열렬 학생이던 그도 결국 운동을 접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튀는 여성’이 차지할 자리는 운동권 내에도 없었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약사가 됐다. 결혼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렀다. 의약품 도매업을 하며 중산층 이상의 삶을 일궜다. 여성이 정치인이 되긴 어려웠지만, 전문지식이 있으면 학계나 비즈니스 분야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20여년을 살았다.
   
   
그가 정계에 발을 들인 건 ‘재스민(튀니지 국화 이름)혁명’이 일어나면서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선 공권력의 괴롭힘에 시달린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나라 전역으로 퍼져갔고, 결국 이듬해 초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이 물러났다. 20년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렸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은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줬다. “우리도 독재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이 리비아·이집트·예멘 등으로 퍼져갔다. 아랍권 전역에서 연쇄적인 반독재 대규모 운동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그해 무바라크(이집트), 카다피(리비아) 등 여러 아랍 독재자가 거짓말처럼 모두 축출됐다.  

   
   
여성 정계 진출 크게 늘어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쾌거를 이룬 각국 아랍 국민들은 정치·사회 개혁 의지에 불탔다. 특히 튀니지는 ‘아랍의 봄’의 발원지로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개혁 공감대가 컸다. 튀니지는 민주 선거를 치러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정계 진출이 크게 늘었다. 재스민혁명 시위에 참여해 철옹성 같던 독재자를 직접 끌어낸 경험을 한 여성들은 스스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바뀐 세상’을 직감한 기존 정당들도 여성 인사 영입을 서둘러 추진했다. 개혁 분위기에서 여성 인권 신장은 정치제도 개혁과 함께 주요 이슈였고, 각 정당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여권을 강조했다. 게다가 여성 유권자의 표를 얻는 데 여성 후보만큼 좋은 전략은 없었다. 그간 독재 정권의 튀니지에서 선거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하지만 민주 선거를 실제로 치르면서 여성의 존재감이 커졌다. 여성 유권자의 1표도 남성의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엔나흐다당은 2011년 여성 의원 후보 대표주자로 압델라힘을 스카우트했다. 약사이자 사업가로서 살아온 그는 진취적 여성상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압델라힘은 히잡(머리카락을 가리는 무슬림 여성용 스카프)을 쓰지 않고 세련되게 손질된 단발머리에 잘 다려진 고급 정장을 입고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세장에선 남성 정치인들과 나란히 서서 연설을 했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여성들과 젊은층이 크게 환호했다. 그가 특히 주목받은 건 그가 속한 정당이 그동안 반여성적이란 비판을 받아온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였기 때문이다. 의원이 되고 여풍(女風)을 이끈 그는 정치 입문 7년 만인 이번에 튀니스 시장에 당선됐다. 앞으로 그가 시장으로서 그리고 그 이후 어떤 활동을 할지 주목된다.
   
   
또 하나의 희소식은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드디어’ 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사우디 정부는 지난 6월 여성에게도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도록 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운전할 수 없는 나라가 이제 사라진 것이다. 1932년 건국한 사우디는 지금까지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으로 여성의 운전 금지를 비롯해 여성의 각종 사회활동을 제한해왔다. 이슬람 율법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사우디의 국교인 이슬람의 경전 코란에 여성의 운전을 금지해야 한다는 구절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코란이 쓰일 당시에 차는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코란에는 당시 주요 이동수단인 낙타를 여성은 탈 수 없다는 구절도 없다. 오히려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는 낙타를 즐겨 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에서 여성의 운전이 금지된 이유는 이슬람 ‘와합주의(와하비즘)’와 왕권 유지를 위한 사회 통제 정책이 꼽힌다. 사우디는 건국 당시 아라비아반도의 부족을 통합하기 위한 사상과 이념이 필요했고 이에 일반적인 이슬람 교리와는 차이가 있는 ‘와합주의’를 채택했다. 엄밀히 말하면 와합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와합주의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배척하고, 7세기 선지자 무함마드의 시대와 이슬람이 가장 번영했던 중세시대의 생활양식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런 사상이 사우디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각종 시대착오적 정책이 나왔던 것이다. 거기다 1979년 사우디에선 “왕가는 타락했다”며 왕가를 부정하는 무력시위가 이슬람 유력 성직자 가문 세력 주도로 벌어졌다. 이들은 성지(聖地) 메카의 대()사원을 점거하고 사우디 왕실은 “세속적”이라며 퇴진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해 이란에선 이슬람 성직자를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란 혁명’ ‘메카 무력시위’에 깜짝 놀란 사우디 왕실은 ‘신앙의 신실성’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더욱 종교화하고 사회 통제 수준을 높였다. 국민의 자유는 제한됐고, 약자층인 여성의 자유 박탈 정도는 남성보다 더 커졌다.   
   

   미스터 에브리싱, 30대 빈살만의 등장

이런 사우디에 변화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건 2017년 무함마드 빈살만이 실세 왕세자로 떠오르면서다. 1985년생인 빈살만은 2017년 자기보다 서른 살 많은 사촌형의 왕위 계승권을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빼앗으며 권력을 움켜쥐었다. 노쇠한 살만 국왕은 그의 아들인 빈살만에게 사실상 국정 운영의 전권을 줬고, 이에 빈살만은 ‘미스터 에브리싱(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이라 불렸다.
   
   
사우디에서 30대 초반이 정권을 장악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사우디 왕은 그간 최소 50세 이상이었다. 초대 국왕이 1953년 숨을 거두며 왕위를 자신의 아들 형제들끼리 나눠 가지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형이 왕이 됐다 죽으면 그의 동생이 왕이 되는 식이다. 왕위가 지난 60여년간 초대 국왕의 아들 세대 안에서 돌고 손자 세대로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왕의 나이가 점점 많아졌다. 2대 국왕 사우드가 취임할 때 나이는 51세였는데, 3대 파이살은 58, 4대는 62, 5대는 61, 6대는 81세에 왕좌에 올랐다. 왕이 되기를 기다리다 먼저 죽는 왕세제가 나왔다. 사우디 왕실에 ‘노인 정치(gerontocracy)’라는 별칭도 붙었다.
   
   
빈살만의 등장은 사우디 왕위 계승권 전통을 깼다는 점에서도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혈기왕성한 그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혁파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무엇보다 그가 직면한 세계 흐름은 지금까지 사우디가 살아온 방식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석유 시대가 갈수록 빨리 다가오는 상황에서 ‘오일머니’에만 기댈 수 없었다. 산업을 다각화해 ‘오일머니’ 없이도 국민들이 먹고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사우디 인구 2000(외국이민자 포함 총 3000) 50%인 여성을 일하게 만들어야 했다.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도 ‘우먼 파워’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구의 절반을 아무 수익활동 없이 방치해놓는 것도 이들에게 보조금을 줘야 하는 정부에 큰 부담이 된다.
   
   
또 빈살만은 시대착오적 정책에 대한 불만이 여성과 젊은층 사이에 가득 차올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유행하는 영화·공연을 보기 위해 이런 것들을 금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나라 사우디를 떠나 두바이 등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사우디 왕정은 이웃한 이집트 등 이웃나라를 휩쓴 ‘아랍의 봄’을 지켜보며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해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그 책임을 정부가 지게 된다는 점을 학습했다. 새로 권력을 잡은 빈살만은 정치적 지지를 받을 목적을 염두에 두고 여성 운전 허용, 영화·공연 관람 허용 같은 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면허 신청 6개월 대기

   사우디 여성 운전 허용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 6월 이 정책이 시행되자마자 수많은 여성이 운전면허 시험장을 찾아가 응시 신청을 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면허증을 취득한 여성은 이것을 국내 면허증으로 교환했다. 면허 신청자가 급증해 현재 신청 후 최소 6개월은 기다려야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면허를 따려고 ‘원정’을 간다고도 한다. 그간 이들이 운전의 자유를 얼마나 누리고 싶었는지가 느껴진다. 세계 자동차 회사들도 사우디 여성 운전자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전담팀을 꾸리고 사우디 여성 맞춤 광고를 제작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여전히 사우디에선 ‘남녀칠세부동석’ 제도가 살아있다. 가족·친척이 아닌 성인 남녀는 식당 등 실내 공간에 같이 들어갈 수 없다. 사우디 내 맥도날드를 가보면 남녀 전용 출입구가 따로 있고 내부 공간도 남녀로 분리돼 있다. 은행이나 관공서도 마찬가지다. 성인 남녀의 부적절한 만남을 막겠다는 의도인데, 이 또한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구시대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선택이 아닌 의무로 히잡을 착용토록 하는 것도 사우디·이란 등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이슬람 사회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2014~2017년 각종 극단적 행위로 세계를 경악게 한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사태가 하나의 계기가 됐다. IS로 반무슬림 정서가 확산하자,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이슬람은 테러·반여성 종교’라는 편견과 오해를 받지 않도록 비이슬람적 악습을 없애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의 상징적인 나라이고, 사우디는 세계 18억 무슬림이 하루 5번 엎드려 절하는 방향인 메카가 있는 성지의 나라다. 두 나라 여성들이 이끄는 변화에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2522호 죽기 전 한 번은 오르는 이슬람 최대 행사 하즈

그들은 왜 카바신전을 7바퀴 돌까?

이슬람교의 최대 연례행사 ‘하즈(Hajj·성지순례)’가 지난 8 19일부터 시작해 24일 막을 내렸다. 하즈는 이슬람 신자(무슬림)라면 지켜야 하는 ‘다섯 기둥(의무)’ 가운데 하나로, 7세기 선지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 아라비아반도(현 사우디)에서 행한 순례를 답습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해 신자들은 종파·국적·인종과 상관없이 ‘이슬람 아래 우린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신앙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즈가 5대 의무라고는 하지만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다. 순례지인 사우디 도시 ‘메카’까지 여행할 체력과 금전적 여유가 없다면 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가난하거나 병들어 하즈를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신자도 많다. 하지만 다수는 어떻게든 ‘다섯 기둥’을 모두 지키고자 평소 건강을 관리하고 차곡차곡 돈을 모아 죽기 전 최소 한 번은 순례길에 오른다.
   
   
하즈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슬람력으로 12번째 달인 ‘둘힛자’ 8~12(또는 13)일에 맞춰서 해야 한다. 지난 8 19일이 올해 둘힛자 8일이었다. 이슬람력은 음력 체계라서 매년 하즈 시작과 종료일은 국제표준인 그레고리력으로 봤을 때 조금씩 달라진다. 하즈 기간도 보통 5일이지만 달의 모양에 따라 6일째 끝나는 경우도 있다.
   

   사우디, 하즈 비자 200만명에게 발급 

   매년 둘힛자 8일이 다가오면 성지 메카를 관할하는 사우디 정부는 세계 무슬림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해진다. 사우디는 안전 등의 이유로 하즈 허용 인원을 대략 200만명으로 제한하고, 이에 맞춰 ‘하즈 비자’를 발급해주고 있다. 하즈 비자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는 매년 거의 변함없이 인도네시아다. 무슬림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2억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올해에도 약 22만명의 인도네시아인에게 하즈 비자를 발급했다. 사우디는 외교관계도 없는 적대국 이란에도 85000명분의 하즈 비자를 내줬다. 정치적 문제를 잠시 뒤로하고 ‘성지 관리국’으로서 중립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성탄절) 행사도 전야제가 있듯, 하즈에도 전날 행사가 있다.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둘힛자 8일 이전부터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하즈 시작일 전날부터 종료일까지 순례를 어떻게 하는지 정리했다.

 

시작 전날 - 카바신전을 돌다  

   순례객은 목욕재계를 하고 바느질이 되지 않은 하얀 천 두 쪽을 각각 몸 위아래에 둘러 입는다. 국적·인종·지위 등에 상관없이 모든 무슬림 남성이 이 같은 복장을 동일하게 입는다.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다’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여성 무슬림은 남성처럼 하얀색 옷을 입지는 않지만, 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 ‘히잡’은 둘러야 한다. 평소 히잡을 쓰지 않는 무슬림 여성도 순례할 때는 히잡을 써야 하는 것이다. 순례 기간 부부는 성관계를 하지 않고 면도와 이발도 하지 않는다. 손톱도 깎지 않는다.
   
   
의복을 갖춘 순례자는 메카의 대()사원에 찾아간다. 이어 사원 중앙에 있는 ‘카바신전’을 반()시계방향으로 7바퀴 걸어서 돈다. 카바신전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2m·10m·15m 정도다. 이 카바신전의 위치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제단을 쌓은 곳으로 알려져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일부 순례자는 카바신전에 가까이 다가가 신전의 동쪽 모서리 아래에 박혀 있는 직경 약 30㎝의 검은 돌을 손으로 만지거나 입을 맞춘다. 이 돌이 오래전 천사가 신의 뜻을 받아 특별히 내려준 것이라는 설이 있어서다.
   
   
카바신전을 도는 건 이슬람 공동체가 하나가 돼 신을 예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바퀴 또는 100바퀴도 아닌 굳이 7바퀴를 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동에서 ‘7’이라는 숫자가 ‘완벽’ ‘온전함’ ‘많음·꽉 참’을 의미한다는 점과 관련 있다. 즉 신을 ‘온전히’ ‘완벽하게’ ‘꽉 차게’ 예배하겠다는 바람과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상에서 천국까지 가는 데 7단계를 거친다는 이슬람의 믿음 때문이다. 7바퀴를 도는 의식은 신과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전을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라고 구전됐기 때문에 이를 따르는 것이라 한다.
   
   
대사원 순례를 다한 이들은 인근의 두 언덕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7번 왕복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이 갓난아기 이스마엘에게 먹일 물을 찾기 위해 헤맨 심정을 체험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대사원과 두 언덕 순례는 이슬람력 둘힛자 8일인 하즈 첫째 날 전날에 하지만 그보다 며칠 더 미리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첫째 날 - 미나계곡의 텐트촌  

   순례자들은 메카에서 동쪽으로 5㎞ 떨어진 미나계곡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경전 코란을 읽고 기도하면서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머문다. 과거엔 순례자들이 직접 텐트를 쳤지만, 요즘엔 사우디 정부가 순례자의 편의를 위해 미리 냉방 시설이 갖춰진 ‘신식 텐트’를 설치해 놓고 있다. 10만개가 넘는 텐트가 계곡 사이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둘째 날 - 아라파트산으로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 순례자들은 미나계곡에서 동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아라파트산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소리 내 신을 찬양하거나 묵상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라파트산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 곳이자, 무함마드가 생전 마지막 설교를 한 곳으로 알려졌다. 해가 지면 이들은 아라파트산과 미나 사이의 무즈달리파 평원에 가 밤을 새운다. 이들은 이곳 바닥에서 돌멩이 여러 개를 주워 챙겨놓는데, 이는 다음날 쓰기 위해서다.      


   
셋째 날 - 돌멩이 7개를 던지다

   아침이 되면 다시 미나계곡으로 돌아가 자마라아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돌기둥(장벽 같기도 하다)을 향해 돌멩이 7개를 던진다. 악마를 내쫓는다는 의미다. 돌기둥의 위치는 사탄(악마)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곳이라 여겨진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에 따라 아들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사탄이 나타나 그러지 말라고 유혹하자 물러가라며 돌을 던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신자들이 몸소 따라하며 종교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 다음, 순례자들은 양이나 염소 또는 소나 낙타를 번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치른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는 순간, 신이 이를 막고 준비해둔 양을 번제물로 쓰라며 아브라함에게 준 코란 일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일화는 이슬람뿐 아니라 기독교·유대교의 경전에도 나온다. 차이는 있다. 기독교·유대교 경전에는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드리려 한 아들이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으로 나온다.
   
   
희생제를 마치면 순례자는 머리를 박박 면도하거나 일부 머리카락을 자른다. 하얀 옷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하즈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 3일간의 일정을 마쳤다는 의미다. 이후 이들은 메카 대사원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카바신전 돌기를 한다. 그리고 미나계곡으로 가 하룻밤을 보낸다.      


   
넷째·다섯째 날 - ‘하지’가 되다  

   미나계곡에 머물며 셋째 날 했던 것처럼 자마라아트 돌기둥을 향해 돌 던지는 의식을 반복한다. 휴식을 취하고 함께 순례한 이들과 식사를 하며 공동체 의식을 다진다. 카바신전에 가서 7바퀴 도는 의식을 더 하기도 한다.
   
   
하즈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하지’라는 호칭을 얻는다. 종종 한국에서 순례인 하즈를 하지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것이다. 하지는 아랍어로 ‘하즈를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인들은 “하지!”라고 반복해 부르며 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존경심을 보인다. 하지는 스스로 종교 의무를 다한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신께 감사한다는 뜻으로 가난한 이웃이나 지인들에게 양고기 등 음식을 대접한다.     


   
압사 등 순례 중 수백 명 사망 

   간단한 일정인 것 같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다니다 보니 순례자 사망 사건도 빈번하다. 이번에도 이집트인 30여명 등 총 수백 명이 순례를 하다 사망했다. 노인들이 저혈압 쇼크로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지병이 순간적으로 악화해 숨을 거두면 신께서 불러 하늘나라로 갔다며 종교적으로 긍정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전사고로 인한 사망 사건은 유족을 큰 슬픔과 분노에 빠지게 한다. 실제로 2015년 하즈 때는 미나계곡에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무려 700여명이 압사했다. 이 사건은 하즈 기간 발생한 사고로는 1990 1426명의 목숨을 앗아간 압사 사고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인명 피해가 큰 참사로 기록됐다. 1997년에는 미나계곡의 텐트촌에 화재가 발생해 343명이 숨지고 150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인재(人災)였다.
   
   
사우디 정부는 세계 이슬람 공동체를 대표해 하즈를 관리한다는 자긍심을 누린다. ‘하즈 비자’를 많이 좀 발급해달라고 부탁하는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을 상대로 ‘갑질’도 한다. 사우디가 지금의 위상을 가진 건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점뿐만이 아니다. 이슬람 성지를 가진 ‘종교적 자원 강국’이라는 점도 큰 몫을 한다. 사우디 국왕은 ‘성지의 수호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국내외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왔다.
   
   
하지만 성지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책임은 고스란히 사우디 왕가가 져야 하기 때문에 성지가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2015년 압사 참사 때도 사우디 국왕은 ‘성지를 수호할 능력이 모자란 자’라는 소리를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작년 사실상의 왕세자에 오른 무함마드 빈살만도 욕을 안 먹으려고 이번 하즈 행사 때 안전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2524호  ‘스타트 예루살렘 한국대회’ 통해 본 ‘스타트업 네이션’ 이스라엘

의사·변호사보다 해커! 취업보다 창업!  

전쟁과 분쟁의 나라로 각인된 이스라엘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지 변신을 했다. ‘스타트업 네이션(startup nation·창업국가)’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뜬금없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인구가 800만명밖에 되지 않고 여전히 툭하면 전쟁이 터졌지만, 창업 성공 신화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이런 기현상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창업 정신은 해외에 수출됐다. 이스라엘은 면적이 한국의 25%밖에 되지 않은 작은 나라다.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흙수저 국가’다. 이런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머리만 잘 굴리면 얼마든지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들의 스토리는 더욱 매력적으로 포장됐다. 이스라엘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세계 큰손들을 불러모았다. 거액의 외국 투자금은 사막에 내리는 단비였다.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현재 이스라엘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 37000달러( 4120만원). 38000달러인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27500달러인 한국보다 한참 앞서 있다.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주변 아랍국가들마저 이들의 창업 육성 성공 비결을 알려고 몰래 요원을 보내 현장 조사하고 벤치마킹했다. 얄밉지만 배울 건 배워야 했다.

   

   이스라엘은 빈사(瀕死) 상태였던 한국의 창업 정신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한때 한국도 ‘스타트업 네이션’이었다. 1990년 말 ‘닷컴 붐’ ‘벤처 시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창업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정보통신기술(ICT) 벤처들이 쉴 새 없이 등장했다. 과학 수재들이 이 물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실패를 용납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파산하는 벤처가 하나둘 생겨나고 투자했던 이들의 금전적 피해 사례가 부각되자 닷컴 붐은 금세 사그라졌다. ‘괜히 창업했다가는 집안이 쫄딱 망한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커졌다. 과학 수재들은 대학 졸업장을 들고 월급 꼬박꼬박 주는 회사를 찾아가기 바빴다. 그렇게 15년간 창업 정신을 잃어가던 한국은 ‘스타트업 네이션’으로 우뚝 선 이스라엘에 자극을 받았다. ‘우리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여전히 한국은 철밥통 공무원, 번듯한 대기업 직원을 최고의 직업으로 삼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 같은 청년 창업가들이 점점 느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손길도 있다. 한국 창업진흥원과 주한(駐韓) 이스라엘대사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스타트 예루살렘 한국대회’가 하나의 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유망한 한국 스타트업을 선발해, 오는 11월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국제창업경진대회인 ‘스타트 예루살렘’에 출전시키는 것이다. 한국 스타트업들이 세계 유명 기업들로부터 투자를 받거나 이스라엘 스타트업과 교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 8 31일부터 9 13일까지 대회 참가 신청을 받고 있다. 양국 청년 창업가 사이에 다리가 놓인다니 희소식이지만,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서울이 ‘창업의 성지(聖地)’가 될 수는 없는 걸까? 한국 청년의 머리가 이스라엘보다 뒤지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든 걸까?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처음 가보곤 적잖게 놀란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과 달리 도시의 풍경은 모던하지 않다. ‘유대인은 세계 금융을 잡고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정작 현지 은행을 가보면 이런 구닥다리가 없다. 통장 개설 같은 단순 업무를 보려 해도 한두 시간 기다리기 일쑤다. 직원들은 불친절하고, ‘뭘 이런 걸 달라 하나’ 싶은 문서들을 요구한다.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한국의 친절하고 편리한 서비스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이스라엘은 이런 자신들의 ‘불친절함’을 잘 안다. 적의 로켓이 언제 날아올 줄 모르는데 도시 겉모습을 가꿔봤자 쓸모없다는 것도 잘 안다. 아랍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이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안다. 실제로 유럽 등지에선 ‘메이드 인 이스라엘’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독보적인 기술적 우위를 갖지 않고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른 나라와 기업이 안 쓰고는 못 배기는 기술로 승부를 봐야 했다. 1945년 건국했을 때부터 농산물 자급자족을 위해 총력전을 벌였던 것도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수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따 국가’는 살아남으려면 사막에서라도 경작을 해내야 했던 것이다.

   

   기술 개발의 절박함이 남달랐던 이들은 1969년 경제부에 수석과학실을 세웠다. 안보와 직결되는 농업을 살리는 신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 특별 조직이다. 얼마 뒤 사막에서 망고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농업 안보’ 문제를 해결한 수석과학실은 1990년 무렵 다음 미션에 착수했다. 산업 육성이다. 어떤 산업을 키워야 할까? 제조업은 아니었다. 내수시장이 작고 수출 가능한 나라가 얼마 되지 않았다. 오토바이·자동차·선박을 만들 공업용수 확보도 어려웠다. 작지만 값비싼 기술 상품을 만들어야 했다. 마침 ICT 산업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나 배로 나르지 않고도 해외에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ICT 기술과 제품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ICT 시장을 뛰어다닐 ‘선수’가 필요했다. 기술전문 업체를 길러내기로 한 것이다. ‘스타트업 네이션’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수석과학실은 국가 자금과 민간 자금을 한데 모았다. 이걸로 창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청년들이 과감하게 창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치하진 않았다. 기술·법률 전문가들을 고용해 창업에 필요한 각종 행정 업무를 도왔다. 참신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돈이 되도록 다듬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해외 진출의 길을 터주고 좋은 투자자를 소개했다. 창업의 씨앗을 뿌리고 이 씨앗에서 싹이 틀 수 있도록 땅에 거름을 주고 바람막이를 쳐준 것이다.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창업 인큐베이터’라고 불렀다.

   

   싹이 파릇파릇하고 줄기가 튼실하더라도 토양의 영양분과 일조량이 부족하면 금세 시들기 마련이다. 수석과학실은 스타트업이 잘 커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창업 생태계’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대학 등 학계는 기술력의 저수지다. 민간 투자업체는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우고 기술력을 상업화하는 데 필요한 돈의 공급처다. 정부 부처는 스타트업 성장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를 재정비하는 수리공이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창업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효율성은 극대화했다. 이 같은 창업 생태계와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창업 붐이 지속가능한 이유다.
   


      해커 키우는 군대

   비결은 하나 더 있다. ()이다. 지난 2월 기자가 이스라엘에 스타트업 취재를 갔을 때다. 10여일간 현지 20개의 스타트업 대표와 직원들을 만났다. 인터넷 보안 업체부터 차량 내비게이션 개발사까지 업종이 다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 자신들이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군 복무 경험을 꼽는 것이 아닌가! 군에서 배웠던 통신·컴퓨터 프로그램 기술 또는 군에서 쌓은 인맥이 창업의 밑천이 됐다고 했다. “군대 가면 썩는다”는 말을 대통령이 할 정도로 군 복무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한국과는 딴판이다.
   

   이스라엘은 징병제 국가다. 남자는 3, 여자는 2년 동안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한다. 특이한 건 거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점이다. 3 때 대입(大入)이 아닌 입대(入隊) 준비를 한다. 대학은 제대 후 시험 준비를 해 들어간다. 10대 시절부터 군대에서 전우로 만난 이들은 평생 친구가 되고 훗날 사회인이 돼서도 어떻게든 연결된다. 사업 파트너가 되는 경우도 많다.

                                                        

군에서 창업할 카드 하나씩을 챙겨 나올 수 있는 건 이들 군이 기본적으로 분야별로 전문화해 있기 때문이다. 상대할 적국·적대 단체는 많은데 병력은 얼마 없는 이스라엘은 정예군을 지향했다. 군 조직은 전문화·세분화했다. 부대마다 특징이 뚜렷해졌다. 병사들에게 삽질보다는 고급 기술을 익혀 이를 전쟁에 활용할 방편을 궁리했다. 2~3년간 이런 부대에 있다 보니 사회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뭐라도 하나 배워 나올 수 있게 됐다. 군 복무는 창업의 능력을 기르는 시간이 된 것이다.
   

   쉬모네메타임(히브리어로 8200) 부대 출신이 최근 이스라엘 스타트업계를 주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쉬모네메타임은 사이버 첩보부대로 최첨단 해킹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부대에 들어갔다가 제대할 때면 유능한 해커가 돼 있는 것이다. 이 부대 출신은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세계 유수 IT업체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최고의 명문대에 들어가는 데도 유리하다. 이에 고3들은 대입 경쟁이 아니라 좋은 부대 가려는 ‘입대 경쟁’을 한다. 자연스럽게 군은 실력 있는 병력으로 채워진다. 선순환이 일어나 군 복무자와 군 조직 모두 이득을 챙기게 된다. 수준 높은 군으로 인해 산업도 덩달아 수준이 높아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창업을 존중해주는 사회

   “의사, 변호사보다 해커!” 얼마 전 만난 60대 이스라엘인이 “요즘 이스라엘의 최고 직업이 뭔지 아느냐”며 한 말이다. 그는 해커 사위를 두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결혼할 적만 해도 결혼 상대로 인기 있는 직업은 변호사나 의사였지만, 지금은 해커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커가 이제 웬만한 변호사·의사보다 돈을 잘 벌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세상만사가 인터넷과 컴퓨터로 연결되고 돌아가는 이 시대에서 해커는 창업해서 대박을 터트릴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이라 할 수 있다.
   

   해커를 남의 컴퓨터를 침투하는 부정적 존재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반대로 적의 침투를 사전에 방어하는 ‘좋은 기술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해커가 사이버 안보 업체를 창업해 기업과 정부 시스템의 안전을 책임지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발간된 이스라엘 정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이스라엘에 사이버 안보 관련 스타트업은 166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16개사는 5000만달러( 560억원) 이상의 투자금을 확보했다. 5000만달러 미만 3000만달러 이상의 투자를 받은 업체도 18개사나 된다.

   

   ‘의사·변호사보다 해커’라는 말은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이 사회에서 창업의 인식이 어떤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창업을 멋진 도전이자 성공의 첫걸음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진짜 실력 있는 젊은이들은 취업보다 창업을 우선으로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얄밉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이 나라에선 매일같이 뉴스로 보도되고 있다.
 

 

2527“위구르 탄압 못 참겠다” - 이슬람 공적으로 떠오른 중국

중국이 전 세계에 18억명 신자를 둔 이슬람교의 ‘공적(公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무슬림(이슬람 신자) 민족 위구르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이 날로 거세지자 세계 이슬람권 국가와 단체들이 중국 정부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동안 경제적 갑을(甲乙) 관계 탓에 화나도 꾹 참았던 파키스탄 같은 나라들까지 들고일어났다. 위구르 탄압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 강도가 부쩍 심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유엔이 고발한 ‘위구르 100만명 수용소’ 논란은 세계 무슬림의 분노의 도화선이 됐다. 유엔에 따르면, 중국 거주 위구르인 전체 1100여만명 가운데 약 100만명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다. 위구르인 10분의 1이 감옥 신세라는 것이다. 이에 세계 이슬람 공동체에서 “중국이 위구르 민족을 말살하려 한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위구르 문제로 이슬람권과 중국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이슬람권, 중국산 제품 불매운동  

   방글라데시에선 지난 9 7일 오전 대규모 반()중국 시위가 열렸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방글라데시는 무슬림 인구가 15000명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열혈 무슬림들은 이날 수도 다카의 대형 모스크(이슬람사원) 앞에 모여 “중국 정부는 비밀 수용소에 갇힌 위구르 형제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석방하지 않으면 중국산 제품 불매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이날 시위 규모는 오후가 되자 더 커졌다. 다카 전역 모스크에서 금요 예배를 마친 무슬림들이 합류했다. 시내 도로는 수천 명에 달하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사회운동조직 ‘이슬람 안돌란 방글라데시’는 트위터에 “이슬람을 모욕하는 세력인 미얀마·이스라엘 그리고 중국에 대해 침묵하지 마라”면서 “무슬림 공동체는 이들에 맞서 목소리를 높여라”라고 했다. 미얀마는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를 학살한다며 국제사회의 맹비난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으로 지난 70년 내내 이슬람 공동체의 원수(怨讐) 같은 존재다. 이런 타도 대상 반열에 중국도 오른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반미(反美)·반()서방이 아닌 경제·군사적 협력국인 중국에 대한 비난 시위는 이례적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반중 정서는 빠르게 퍼지고 있다. 다카 시위 일주일 뒤인 9 14일 인접국가인 인도의 최대도시 뭄바이에서도 위구르 수용소 운영을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규모는 150~200명으로 다카보다는 작았지만, 참석자들이 이슬람 학자·모스크 성직자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는 무슬림에 대한 잔혹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중국 제품을 쓰지 말자”고 외쳤다. 이 시위를 주관한 무슬림 사회운동 비영리단체 ‘라자아카데미’의 사이드 누리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무슬림에게 신앙 포기를 강요하고 있다”면서 “이는 반드시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라자아카데미는 이슬람 연구·사회개선 운동 활동을 하면서도 종종 반이슬람 단체나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벌이는 단체다. 지지세력은 수십만 명에 달한다.   

   
   수용소 구금 파키스탄인의 아내 300      

파키스탄 반중 여론은 더 심각하다. 신장위구르인 여성과 결혼한 파키스탄 남성이 많기 때문이다.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 구금된 아내를 둔 파키스탄 남자만 최소 300명일 정도다. 파키스탄과 신장위구르는 사돈지간인 셈이다. 또한 양측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데다 이슬람을 주요 종교로 삼는 공통점 때문에 예부터 교류가 활발했다. 이런 이유로 여론이 악화하자 누룰 하크 카다리 파키스탄 종교부 장관은 지난 9 19일 현지 주재 중국대사를 만나 공식적으로 위구르 탄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중국에 항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드문 일이다.
   
   파키스탄은 현 시진핑 국가주석의 핵심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신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주요 협력국이다. 중국은 파키스탄 전역에 철도·고속도로·송유관·통신망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에 돈을 대는 등 깊이 관여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중국이 국력을 바다로 확장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에 빠진 파키스탄에 중국은 빼놓을 수 없는 경제 파트너다. 이런 이유로 파키스탄을 비롯해 많은 이슬람권 국가들이 그동안 위구르 문제가 심각한 걸 알면서도 당장 챙겨야 할 국익 때문에 눈을 감았다. 국제인권단체·유엔은 물론 미국 정부와 의회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중국이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우군 파키스탄의 항의는 뼈아팠다.
   
   카자흐스탄 신문·방송에서도 연일 위구르 문제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무슬림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은 현지 중국 대사관을 찾아가 항의하고, 정부 관계자도 만나 “중국 정부를 압박하라”면서 로비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신장 지역 접경국으로 위구르인을 친인척으로 둔 가정이 많은 나라다. 전체 인구가 약 1800명인 카자흐스탄의 위구르 인구는 20여만명이다. 이 나라에서 7번째로 큰 민족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작지 않다. 게다가 무슬림 인구는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이웃나라의 위구르 민족이 이슬람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현실을 카자흐스탄 정부와 시민단체가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세계 무슬림 공동체의 중국 압박이 거세지면서, 탄압 현실을 고발하는 위구르인의 증언도 속속 나오고 있다. 수용소에 수개월간 수감됐던 한 위구르 남성은 인권단체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갑자기 아무 말도 없어 잡아가 수용소에 처넣었다”면서 “하루 보통 2시간, 어떨 때는 3~4시간씩 시 주석·공산당 찬양가를 큰소리로 부를 것을 강요받았다”고 했다. 그는 또 불시에 수용소 조사실로 끌려가 공안으로부터 ‘이슬람을 왜 믿느냐’ ‘집에 코란(이슬람 경전)은 있느냐’ ‘신이 진짜 있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반복해 답해야 했다. 수용소에선 이슬람의 다섯 기둥(의무)인 신앙고백·기도·금식·기부·순례 그 어떤 것도 지킬 수 없도록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수개월 뒤 공산당 찬양가를 줄줄 외워 부르며 성실한 인민인 척을 한 뒤에야 수용소에서 출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를 통해 위구르인들의 ‘이슬람 물’을 빼고, 정부 말을 잘 듣는 인민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여성·아이까지 잡아가   

   공안 당국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어린아이까지 잡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인 무역업자 바샤 칸은 올해 봄 해외 출장을 마치고 중국 서북부 신장에 있는 그의 집에 돌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위구르인인 그의 아내와 자녀 셋이 집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집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칸은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너무 황당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수소문해보니 아내와 자녀들은 체포돼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는 공안 사무실에 찾아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졌지만,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다. 그런 여성과 자녀를 잡아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교화 대상’인 위구르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공안 당국은 현재 “수용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당국은 사진 촬영 등으로 확인된 수용소 의심 시설에 대해선 “범죄자들을 위한 직업훈련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공안은 위구르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낙태 강요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굴나즈(가명)라는 위구르인은 최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기고에서 “이웃에 사는 파티마가 임신 6개월인데도 공안에 의해 강제 낙태 수술을 받고, 결국 수술 도중 사망했다”면서 “이 사건을 옆에서 보고선 어떻게 해서든 이 나라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굴나즈는 “지금 다행히 런던에 살고 있지만, 과거 공안의 감시에 시달린 기억 때문에 여전히 주위 사람에게 나의 정체를 알리길 꺼리게 된다”고 했다.
   
   중국은 2015 35년 동안 고수해온 ‘한 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두 자녀 출산을 허용했다. 위구르인도 두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이를 어겼을 때 다른 어떤 지역 주민·민족보다 철저하게 처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지역·소수민족은 몰래 출산하기도 하지만, 위구르는 철통감시를 받아 셋째 임신 사실을 숨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위반 시 벌금을 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공안은 이들이 벌금 낼 여력이 없다고 간주하고 ‘낙태를 하라’고 떠민다. 수술은 위험천만하다. 제대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의료진이 수술을 맡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중국 여러 곳에 흩어져 살지 않고 99%가 신장 지구에 밀집해 산다. 정부는 수적으로 절대다수이자 주류·기득권 민족인 한족(漢族)을 신장에 이주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위구르는 이들과 섞여 살기보다는 어떻게든 자기네끼리 모여 살려고 한다. 이에 중국 정부는 수년 전부터 이들의 ‘단일대오’를 흐트리기 위해 ‘한족과 결혼시키기 전략’을 쓰고 있다. ‘결혼 시 1만위안( 162만원)을 준다’는 인센티브를 내걸어 양측 간 결혼을 유도하는 것이다.
   
   중국 연간 1인당 GDP(국내총생산) 8100달러( 907만원)이다. 경제적 낙후지역인 신장의 1인당 GDP는 평균 이하인 6700달러다. 게다가 이 수치는 신장의 부유층 한족을 포함해 계산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위구르의 연간 1인당 GDP 5000달러도 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들에게 1450달러 정도인 1만위안은 상당히 큰돈인 것이다. 정부는 돈뿐 아니라 주택, 건강보험, 취업, 교육 등 다양한 혜택을 아낌없이 제공하며, 한족 남성과 위구르 여성의 결혼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 정책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많은 여성이 한족 집안에 시집을 간다. 이렇게 이뤄진 부부의 자녀는 한족이 된다. 한족 사위를 들인 위구르 집안은 자연스럽게 한족에 동조·동화한다. 결혼을 통해 피같이 진한 위구르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노력으로 신장 전체 거주민 중 위구르인 비율은 계속 줄어 현재 45%까지 떨어졌다. 거의 제로(0)에 가까웠던 한족 비율은 39%까지 치솟았다.     


   모스크 900여곳에 안면인식 CCTV 설치   

   세계 이슬람권의 반대에도 중국이 위구르 탄압을 거두지 않는 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위구르를 가장 위험한 민족으로 여긴다. 다른 민족은 한족과 피부색이 거의 같고 한자를 쓰는 등 유사점이 많지만, 위구르는 투르크족 계열이다. 외모도 아랍인처럼 털이 많고 눈이 크다.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를 쓴다. 문자도 한자가 아닌 아랍어 알파벳을 쓴다. 여느 소수민족보다 중국스럽지 않은, 매우 이질적인 존재다. 분리독립의 명분이 가장 확실하다 할 수 있는 민족이다.
   
   위구르는 744년 제국을 건설하고 758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줬을 정도로 부강한 민족이었다. 비록 1세기 만인 840년 내부 갈등으로 제국을 잃고 분열됐지만, 이후로도 현 신장 지역을 중심으로 고창왕국( 850~1280)을 이루며 명맥을 이어갔다. 청나라의 지배에 들어간 적도 있으나, 16세기 민족이 이슬람화한 지 300년 뒤인 1933년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 1944년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잠시나마 세우기도 했다. 1949년 중국에 편입된 뒤에도 이들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했다. 1990~2001 10년 사이에만 독립 세력의 무장 공격 사건이 200여건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혹여나 이들이 분리독립할 경우 다른 소수민족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독립의 ‘싹’을 자르려고 강도 높은 탄압정책을 펴는 것이다. 더불어 신장은 중국 육지 전체 면적의 6분의 1, 육지 국경선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데다 주변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정부가 확실히 장악해야 하는 지역인 것이다. 또 신장에는 석유·천연가스·석탄 등 지하광물 자원이 풍부해 경제·산업 그리고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중국은 첨단기술까지 동원해 신장 일대를 감시·통제하고 있다. 예컨대 고성능 드론 정찰기를 띄워 요주의 인물을 미행 감시하고, 집집이 도·감청 장치를 설치해 놓고 있다. 정부 시설을 겨냥해 폭탄 테러 공격 등을 모의하지 않는지도 모니터하기 위해서다. 조만간 정부는 신장 모위(墨玉)현 전체 967개 모스크 입구에 안면인식 카메라도 설치할 예정이다. 공안에는 안면인식 기능을 장착해 범죄 여부를 바로 감별하는 이른바 ‘터미네이터 안경’을 보급하고 있다. 공안은 이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각국 수사 당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위구르 체포 작전을 확대하고 있다. 예전엔 국외로 탈출만 하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안 되는 것이다.
   
   위구르 수용소 건으로 불붙은 이슬람권과 중국의 갈등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중국이 경제적 협력 관계를 내세우며 논란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가능성이 크다. 세계 넘버 2인 중국의 힘을 무시하기란 어느 나라에나 쉽지 않다. 실제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이집트 같은 나라는 인구의 90%가 무슬림으로 명실상부한 이슬람권 국가다. 그런데도 위구르 건과 관련해 함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슬람권 내에서 이집트같이 국익 때문에 ‘무슬림 형제’를 외면하는 나라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전문매체 ‘미들이스트아이’에는 최근 ‘위구르를 돕기 위해 무슬림 세계는 연합해야 한다’는 제목의 기고가 실리기도 했다. 세계 40여개국에 100여만명의 회원을 둔 국제 이슬람 정치조직 ‘히즈붓 타흐리르’도 최근 “중국의 신장 통치를 반대하고 이들의 투자를 기피하라”고 촉구했다. 미얀마의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 탄압과 함께 위구르 사태가 이슬람 공동체에 “이대로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초승달(이슬람 상징)의 일격이 언제든 판다(중국 상징)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2529 언론인 토막살해? 태풍의 눈이 된 ‘카슈크지 사건’

삼류(三流)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황당한 범죄 사건이 백주 대낮에, 그것도 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외교 공관에서 벌어졌다. 자말 카슈크지라는 나이 예순의 사우디 프리랜서 기자가 지난 10 2일 오후 1시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돌연 실종된 것이다. 그는 이날 재혼 준비를 위해 전 아내와 이혼했다는 증빙서류를 받으려고 영사관을 찾았다. 사전에 문의했더니 영사관에서 “10 2일에 오라”며 기일을 잡아 통보했다. 그의 약혼녀는 “카슈크지가 정부 비판 언론인이라는 이유로 변을 당한 것 같다”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실종 나흘 만인 지난 10 6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터키 당국이 “카슈크지는 영사관에서 토막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1차 수사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터키는 카슈크지가 영사관에 들어가는 CCTV 화면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가 나오는 CCTV 화면은 찾을 수 없었다”면서 사우디 측에 “카슈크지가 영사관을 무사히 나갔다면 증명해보라”고 했다.
   
   
사우디 정부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지만, 암살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0 11일 “미 정보 당국은 사우디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이 공안 당국에 ‘카슈크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터키 당국은 사건 당일 오전 시신 해부 전문가가 포함된 15명의 ‘사우디 암살단’이 입국했고, 그들이 사우디 영사관에서 카슈크지를 토막살해했으며, 이를 입증할 음성·영상까지 확보했다고 밝혔다.
   
   
사우디와 우방인 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는 이런 정황이 조작된 것이라 했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은 사우디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특히 빈살만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여성 운전 허용 등으로 개혁가 이미지였던 그가 사실은 자기에 대한 비판엔 조금의 관용도 용납지 않는 역대 어느 사우디 국왕보다 난폭한 독재자가 아니냐는 물음표가 커진 것이다. 이에 그의 개혁 정책에 기대하며 거액을 투자하려던 글로벌 기업들이 하나둘 발을 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 증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연일 폭락했다. 언론인 암살 의혹 사건 하나로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경제와 빈살만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가 휘청대는 것이다. 카슈크지는 자신으로 인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줄 예감은 했을까? 빈살만은 왜 그를 그리도 싫어했던 걸까?
   
   
카슈크지는 사우디 왕실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언론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무함마드 카슈크지는 사우디의 국부(國父)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다. 그의 삼촌은 1970~1980년대 세계 무기 시장을 주름잡은 사우디의 전설적 무기거래상 아드난 카슈크지(일명 카쇼기)였다. 아드난 카슈크지는 록히드마틴 같은 미국 방산업체들과 사우디 정부를 연결해주는 로비스트였다. 웬만한 유력 왕자보다 재산이 많았다. 1980년대 초 그의 재산은 40억달러( 45000억원)에 달했다. 절대왕정인 사우디에서 그 정도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건 정치력 또한 막대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삼촌을 둔 카슈크지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사우디 왕가와 친하게 지냈다.
   
   
카슈크지는 스물여덟이던 1985년 사우디 일간 오카즈 기자로 입사했다. 알샤르크알아우사트·알마잘라 등 여러 매체를 옮겨다닌 그는 일간 알메디나에서 1991~1999년 중동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프가니스탄·알제리·쿠웨이트·수단을 돌며 각국 고위 외교관·정보요원과 인맥을 쌓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훗날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창립자 오사마 빈라덴과 친구가 됐다. 당시 빈라덴은 9·11테러를 일으키기 전으로 아프간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무자히딘(이슬람 성전 전사)이었다. 이슬람권의 전사 영웅인 빈라덴을 카슈크지는 수차례 단독 인터뷰해 스타 기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9·11테러 이후 빈라덴과 친분을 끊었다.
  

 

 왕실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자 

   카슈크지는 특파원 시절 그의 사촌 도디 알 파예드 덕에 영·미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파예드는 영국 런던 번화가 헤로즈백화점을 소유한 거부 무함마드 알 파예드의 장남이다. 도디 파예드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과 밀애를 나누는 사이였으며, 1997년 다이애나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인물이다. 사우디 유력 가문 출신 기자라는 배경에 영국 유명 인사 도디 파예드를 사촌으로 둔 카슈크지는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외 특파원 근무를 마친 1999년 사우디 유력 영어신문 아랍뉴스의 부국장이 됐다.
   
   
그는 정부에 호락호락한 언론인이 아니었다. 2003년 일간 알와탄의 편집국장직을 맡았는데, 13~14세기 이슬람학자 이븐 타이미야를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실었다가 공안 당국에 불려갔다. 그 일로 그는 단 두 달 만에 편집국장 자리를 내놔야 했다. 이븐 타이미야의 코란(이슬람 경전) 해설집은 사우디 건국이념인 ‘와합주의(또는 와하비즘)’의 근간이 됐기 때문에, 이븐 타이미야에 대한 비판은 금기(禁忌) 중의 금기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이븐 타이미야 비판 칼럼을 실었다는 건 그가 상당히 진보적 성향을 지녔으며 배짱 또한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런던으로 도피했다. 기자 일도 잠시 그만뒀다. 대신 그간 친하게 지냈던 투르키 빈파이살 왕자의 보좌관이 됐다. 빈파이살은 1964~1975년 재위한 파이살 국왕의 아들이다. 그는 1979년부터 2001 9·11테러가 벌어지기 10일 전까지 약 23년간 사우디 중앙정보부를 지휘했다. 현대그룹 등 한국 기업과도 사이가 좋아 서울도 여러 차례 찾은 바 있다.
   
   
빈파이살은 카슈크지가 정부에 찍힌 인물인 걸 잘 알았지만,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받아준 것이다. 빈파이살은 2005년 주미(駐美) 대사로 임명돼 2007년 미국에서 근무할 때도 카슈크지를 자신의 언론 담당 보좌관으로 옆에 두고 지냈다.
   
   
카슈크지는 2007 4월 알와탄 편집국장에 임명되며 화려하게 언론계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인 2010년 사표를 써야 했다. 그해 그가 또다시 사우디의 경직되고 호전적인 이슬람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의 칼럼을 신문에 실어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아예 정부 눈치를 안 봐도 되는 독립 언론 매체를 세웠다. 그는 친구인 사우디 억만장자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의 투자를 받아 바레인에 알아랍이라는 위성방송 매체를 만들었다. 그는 또 영국 BBC, 카타르 알자지라 등 여러 방송 매체에 출연해 사우디 왕실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절대왕정인 사우디에서 정부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왕실은 매우 폐쇄적인 조직이다. 그 안에서 어떤 권력싸움이 벌어지고, 어느 왕자와 왕자 사이가 좋고 나쁜지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도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집안 대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던 카슈크지는 왕실의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여러 유력 왕자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카슈크지의 ‘펜’은 2017년 들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해 그는 서른두 살 빈살만이 ‘궁중 쿠데타’로 사촌형 무함마드 빈나예프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자, 이를 강력 비판했다. 신변이 위험해진 걸 직감한 그는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며 빈살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빈살만의 예멘 전쟁 개입, 카타르에 대한 단교·봉쇄 조치로 사우디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빈살만이 왕실 주요 인사 300여명을 부패 명목으로 일거에 체포하자, ‘이런 폭정은 전례를 찾을 수 없다’며 맹비난했다. 유력 왕자 등 왕실 인사를 대거 체포한 빈살만의 의도는 표면적으론 ‘부패 척결’이지만, 사실은 ‘정적 숙청’이라는 해석이 주류다. 궁중 쿠데타를 통해 왕세자가 된 빈살만은 권력 강화를 위해 기득권층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빈탈랄 같은 왕자들이 빈살만의 ‘숙청 리스트’에 포함된 이유다. 카슈크지는 자기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빈살만이 휘두르는 숙청의 칼에 희생되자 더욱 날 선 비판을 했을 수 있다. 빈탈랄은 감금 83일 만에 풀려났으나, 고문을 당한 것이 의심될 정도로 극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으며, 석방 대가로 수십억달러를 빈살만에게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살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  

   빈살만의 숙청 작업, 그리고 여성 운전 허용 같은 개혁 정책은 겉으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올 3~4월 약 4주간 사우디를 떠나 미국·유럽 순방을 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였다. 사실 많은 걸프 아랍국가의 왕들이 나라를 떠나 해외 방문 중에 측근의 반란에 뒤통수를 맞고 권력을 빼앗겼다. 타밈 현 카타르 국왕의 아버지인 하마드 전 국왕은 1995 6 27일 자신의 아버지 칼리파 당시 국왕이 스위스를 방문 중일 때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이런 위험이 있는데도 빈살만은 장기간 외국을 돌았던 것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빈살만의 개혁 정책은 살얼음판 위에 올려진 돌덩이처럼 아슬아슬하다. 보수·기득권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 종교계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빈살만이 전통을 깨고 이슬람 성직자·율법학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며, 이들의 권력을 약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살만으로서는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선 보수·기득권이란 산을 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기득권층과 밀접한 관계이면서 개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거의 유일의 언론인 카슈크지는 빈살만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이 녀석’만 없으면 보수층 여론을 잡는 데 유리할 거란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방인 사우디를 두둔하고 나서며 일단락되려는 분위기다. 적극적으로 수사하던 터키 정부도 갑자기 ‘카슈크지는 사우디 실무자의 과실치사로 숨졌고 빈살만은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화폐 가치 폭락 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터키는 이렇게 사우디와 미국의 ‘편의’를 봐주고 경제적 이득을 챙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994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제목이자 싸구려 잡지소설을 말하는 ‘펄프픽션(pulp fiction)’ 같은 일이 21세기 세계 최강국 미국과, 중동의 두 패권국 사우디·터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우디판 ‘펄프픽션’의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2532 장기 판매자 줄 잇고 생필품값 폭등하고

미국이 이란의 심장 동맥에 커다란 집게를 물렸다. 미국은 지난 11 5일 이란산 원유 거래 등을 전면 금지하는 대()이란 에너지·금융 제재에 돌입했다. 원유 수출은 이란 연 수출액의 63%, 세수의 80%(2016년 기준)를 차지한다. 인구 8000만명의 대국 이란을 움직이는 ‘피’ 같은 존재인 ‘오일’의 수출 통로가 막힌 것이다.
   
   
미 국무부·재무부는 이날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테러 지원 의혹에 책임을 물어 2016 1월부로 중단했던 대이란 제재를 210개월 만에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는 전임 오바마 정부가 체결한 이란핵협정(JCPOA)을 “최악의 협정”이라 평가하며 JCPOA에서 전격 탈퇴했다. 이로부터 90일 뒤인 지난 8월 이란의 달러화·자동차·귀금속 거래를 금지하는 1차 제재를 시행한 데 이어 다시 90일이 지난 이번에 2차로 핵심 제재를 풀가동하기로 한 것이다.
   
   
제재는 이란 경제·산업 혈맥의 정곡을 찔렀다. 이들의 대표적 수출품인 석유와 천연가스, 석유화학 제품의 국제 거래를 차단하고, 이란의 에너지·선박·조선 관련 회사, 이란중앙은행(CBI) 등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한 것이다. 제재 리스트에 오른 이란 기업·개인은 총 700곳이 넘는다. 이들과 거래하는 외국 정부나 기업, 개인은 미 정부의 벌금을 부과받고, 미국과 금융·실물 거래가 금지되며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된다. 대북(對北) 제재처럼 ‘세컨더리 보이콧(제재 대상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개인까지 제재)’이 적용되는 것이다. 다만 미 정부는 “한국 등 8개국에 대해선 일시적 제재 면제 자격을 줬다”면서 앞으로 180일이란 제한된 기간만큼은 이번 제재와 상관없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란 처벌이 주목적인데, 부수적으로 이란산 원유에 의존도가 높은 다른 나라들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한 조치다.      


   
70% 폭락한 리알화   

   제재로 나라의 ‘혈관’이 꽉 막히면서 이란인들의 삶은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트럼프가 제재를 재개할 것이란 우려로 일찌감치 이란 리알(Rial)화 가치가 최근 1년 새 70% 폭락한 데 이어, 제재가 실제 발표된 뒤 화폐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달러당 45000리알이던 리알화 환율이 올 10월 말 145000리알까지 치솟은 데 이어 11 5일 제재 시행 직후엔 148000리알을 찍었다. 2년 만에 화폐가치가 반 토막도 아닌 3분의 1토막 났다. 1998년 ‘IMF 시기’ 한국 원화가치가 반 토막이 나 달러당 1900원대가 됐을 때 기업 부도가 속출하고 대량 실업 사태로 멀쩡한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현재 이란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리알화가 ‘똥값’이 되면서 덩달아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둔 모슬렘씨는 BBC 방송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쓰는) 요실금 팬티가 올해 3월에는 한 묶음에 20만리알이었지만 지금은 50만리알( 4000)을 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생리대, 의약품 등 기초 생활필수품 가격이 2~3배 폭등했다. 외화 유출을 저지하기 위해 올 들어 이란 정부는 외화로 수입 물품값을 지급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수입 허가제’를 실시하는 극약 처방을 도입했다. 이 때문에 생필품 수입이 중단되거나 수입하더라도 통관에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테헤란에서 47년간 공구점을 운영해온 헤이다르 페크리(70)씨의 가게 진열장은 거의 텅 비었다. 지난 8월 미국이 이란에 대해 1차 경제제재를 재개한 이후 수입선이 끊겨 물건을 가져다놓지 못해서다. 페크리씨는 AFP 인터뷰에서 “반년 사이 매출이 90% 줄었다”면서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생계형 장기매매 속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도 속출하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 테헤란특파원에 따르면, 최근 테헤란의 병원 앞 벽이나 병원 내 화장실 등에는 “내 장기를 사달라”는 벽보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생활고가 심해지자 장기(臟器)를 팔아서라도 가족 생계를 책임지려는 사람들이 느는 것이다. ‘이란 신장재단’에 등록해 이식 허가를 받으면 신장 제공자에게 기증 후 18000만리알( 140만원)이 지급된다. 하지만 신장이식 적절성 검사를 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고 이 검사를 통과하기도 쉽지 않아, 장기 암시장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다. 벽보 같은 쪽지 광고나 인터넷을 통해 장기를 밀거래하면 별다른 검사 없이 속전속결로 장기를 팔 수 있어 여기에 돈이 급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술 중 목숨을 잃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장기이식 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자파드 밀살림(23)씨는 “병원 안팎에 나붙은 장기판매 쪽지를 매일 떼는데도 다음날이면 다시 덕지덕지 나붙는다”고 했다. 최근 ‘3억리알에 신장을 팔겠다’는 광고를 스스로 냈다는 전기판매상 베블스 아흐마디(44)씨는 “수입이 줄어 고리로 돈을 빌렸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면서 “11월 말까지 원금을 갚지 못하면 기소돼 철창 신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외국 기업들은 서둘러 이란을 떠나고 있다. 독일의 지멘스·다임러와 프랑스 알스톰·토탈 등 유럽계 대기업들이 이란에서 사업을 중단했다. 에어버스는 이란에 더 이상 여객기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페르시아제국의 후예 이란은 ‘제재 쇼크’로 아픈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미국을 비난하고 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의 제재 발표가 나오자 수도 테헤란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미국은 제재로 우리를 말려죽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란은 미국이 일으킨 ‘경제 전쟁’을 극복해낼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정부는 전임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 타결한 핵합의는 “최악”이라면서 지난 5월 이를 파기했다. 오바마가 맺은 합의로는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제한할 수 없고, 합의 만료 시점인 2025년 이후엔 이란이 다시 군사 목적으로 핵 개발을 할 우려가 있다는 걸 문제 삼았다. 이에 트럼프는 이란에 다시 협상을 하자고 했지만, 이란은 이를 단칼에 거부했다. 다시 제재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굴욕적인 협상은 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인 것이다.
   
   
테헤란 시내에서는 19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났을 때를 방불케 할 만큼 대규모의 반미(反美)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들은 “마르그 바르 아메리카(미국에 죽음을)” 구호를 외치고 성조기와 트럼프 모양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발로 밟았다. 고위 권력자인 무함마드 알리 자파리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집회 연사로 나섰다. 그는 “미국 군인은 이란 병사를 만나면 겁에 질린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통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초강도 제재에도 이란이 미국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란은 원유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폐쇄 경제 체제인 북한에 비해 제재에 충격이 크다. 그럼에도 이란이 버틸 수 있는 건 지난 30여년간 구축해놓은 자립 경제 시스템인 ‘저항 경제’ 때문이다. 이쑤시개부터 컴퓨터까지 웬만한 물건을 자체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갖추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물건을 들여오지 않아도 필요한 건 이란 내에서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에 외화가 부족해도 당장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저항 경제’와 제국의 자부심

   이란이 그동안 제재를 피해 원유 수출 통로를 만들어놓은 것도 이들이 미국에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다. 이란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제재와 상관없이 중국과 러시아 등에 원유를 계속 팔아왔다. 공식 확인되진 않았지만, 북한 또한 중국을 거쳐 이란산 원유를 들여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1980년대 이란이 이라크와 8년간 전쟁을 치를 때 이란에 군사 지원을 해주며 ‘혈맹’을 맺었다. 어차피 중국·러시아·북한 등은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제재도 크게 개의치 않고 암암리에 이란산 원유를 싼값에 수입하며 잇속을 챙긴다는 것이다.
   
   
이란 특유의 민족적 자존심도 큰 몫을 한다. 이란은 한때 중동의 패권을 거머쥐고 번영을 이룩한 페르시아제국의 후예다. 또 이들은 오늘날 이슬람 양대 종파 중 하나인 시아파의 맹주다. 현 이란의 정권을 쥔 ‘이슬람혁명 세력’들에겐 미국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페르시아제국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동()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西)로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북으로는 흑해와 카스피해, 남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중동 전역을 200년간 지배했다. 이후 기원후 3세기에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부흥시키려는 사산 왕조가 부상해 7세기 중엽까지 중동 지역을 통치했다. 사산 왕조는 특히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더 나아가 한반도까지 교역을 활발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는 중국은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전파됐다. 7세기 이슬람교가 생기고 이란 지역이 이슬람교의 양대 종파인 시아파의 본거지가 되면서 현대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또 하나 이들의 정신세계를 뒷받침하는 게 있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다. 이 혁명은 단순히 친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렸다는 의미를 넘어 이슬람 정교(政敎)일치의 국가를 실현했다는 정치·종교적 상징성을 지닌다.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는 친미 팔레비 왕조를 타락한 세속주의 왕정이라며 강력 비난하며 이슬람 율법을 근간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슬람 법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 이란은 이러한 호메이니의 사상과 이상이 실제로 이뤄진 ‘기적 같은’ 나라로 인식한다. 이란 정권의 결집력이 남다른 이유다. 이들에게 미국은 ‘사탄의 국가’이며 미국에 굴복하는 것은 신을 배신하는 것과 다름없는 금기 중의 금기라 할 수 있다.
   
   1980
9월부터 1988 8월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쟁 또한 이란의 저항의지를 강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화학무기까지 동원하며 이란을 공격했지만, 이란의 혁명 정부는 죽기 살기로 싸우며 전쟁을 버텨냈다. 이란 혁명 정권은 이라크가 자신들의 침공한 배경엔 미국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한다.
   
   
지금도 테헤란뿐 아니라 지방도시인 이스파한이나 야즈드 등에 가면 이라크전쟁 전사자의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들이 이 전쟁을 얼마나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려 노력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란 정부는 국민에게 이라크와의 군사 전쟁도 이겨냈는데, 미국과의 경제 전쟁은 왜 못 이기겠느냐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2534 적의 적은 동지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해빙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흑흑” 소리를 내던 그녀는 끝내 “엉엉”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리 레게브(53)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장관은 지난 10 28일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열린 국제유도대회 시상식에서 이스라엘 국가(國歌) ‘하 티크바’가 울려퍼지자,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몸을 들썩들썩하다 눈물을 쏟아냈다. 순간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는 금메달을 딴 이스라엘 유도선수에서 레게브 장관으로 일제히 쏠렸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왕따 국가다. 중동 대부분의 나라가 1948년 팔레스타인을 제치고 건국 선언을 한 이스라엘을 적대시하고 외교 관계도 맺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요즘도 툭하면 팔레스타인과 무력 충돌을 하고, 아랍·이슬람권 세계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는다. 그런 ‘적성국’ 이스라엘의 국가가 아부다비 공식 행사장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레게브 장관뿐 아니라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세계의 유대인들이 그간의 설움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하기에 충분했다. ‘하 티크바’는 히브리어로 ‘그 희망’이란 뜻이다. 2000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언젠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란 유대인의 염원이 담긴 노래로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불렸다.      


   
아부다비에 울려퍼진 이스라엘 국가  

   아부다비에서 울려퍼진 ‘하 티크바’는 이스라엘이 지난 70년간 왕따 생활의 끝을 알리는 ‘희망’의 서곡인 걸까? 최근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의 관계가 해빙(解氷)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만한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오만 방문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0 25~26일 오만을 방문해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78) 술탄(오만의 국왕 명칭)을 만났다. 이번 방문에 국외 첩보기관 모사드의 요시 코헨 국장도 동행했다. 이스라엘 총리의 오만 방문은 1996년 시몬 페레스 총리 이후 22년 만에 처음이다. 오만은 ‘중동의 스위스’라 불릴 정도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나라이지만, 이스라엘과는 국교(國交)를 맺지 않았다. 오만도 결국은 아랍·이슬람권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아랍 강경파인 비비(Bibi·네타냐후의 별칭)가 걸프 아랍국가 오만의 술탄을 웃는 얼굴로 만나 두 손을 꼭 잡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면서 “생각하기도 어려운 장면이 연출됐다”고 했다. 이스라엘 일간 예디옷아흐로놋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며칠 뒤 또 하나의 이례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스라엘 교통부의 이스라엘 카츠 장관이 지난 11 7일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열린 국제철로운송대회에 참석해 이스라엘의 지중해 항구 도시 하이파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의 예닌, 요르단 수도 암만, 사우디 수도 리야드를 지나 오만의 무스카트까지 2500여㎞에 달하는 거리를 하나의 철로로 잇는 ‘평화 철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카츠 장관은 “각국이 이미 갖추고 있거나 새로 건설하려는 철로에 국경을 넘는 철로만 추가 건설하면 ‘평화 철로’ 프로젝트를 어렵지 않게 실현할 수 있다”면서 “걸프 아랍국가들은 이 철로를 통해 지중해와 바로 연결될 수 있다”고 했다. 서로 손을 잡으면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며 양측 관계 개선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아라비아반도·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어 국경이 열리면 허브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다. 주변 아랍국가들도 육로를 통한 국가 간 이동이 수월해진다. 이스라엘은 ‘평화 철로’가 완성되면 2030년까지 이 철로로 2500억달러( 2821250억원) 규모의 물동량이 지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자리에서 아랍국가들이 ‘평화 철로’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이 같은 제안에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거부하는 의사도 밝히지 않았다. 이대로 해빙 무드가 계속되면 ‘평화 철로’ 이상의 프로젝트도 얼마든지 추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선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아카바만 일대 홍해 연안을 공유하는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사우디가 공동으로 대규모 복합 휴양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이스라엘·아랍 관통 2500㎞ 평화 철로  

   이스라엘과 아랍은 과거 4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UAE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고, 이라크·시리아의 핵시설들을 전투기로 기습 폭격·파괴하는 등 온갖 첩보·군사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데도 왜 아랍국가들은 이런 과거사까지 덮어가며 이스라엘과 잘해보려는 걸까?
   
   
실마리는 이스라엘과 손잡은 대부분의 아랍국가가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시아파 가운데 수니파 국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UAE·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세력이 정치·종교적 원수인 시아파의 맹주 이란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역시 이란과 앙숙인 이스라엘을 아군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란을 ‘공동의 적’으로 둔 수니파 세력과 이스라엘의 이해(利害) 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대이란 공동 전선(戰線)’이 빠르게 형성됐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속담이 이들 사이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란을 싫어하는 걸까? 하필 왜 지금 대동단결(大同團結)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타결한 이란 핵협상에 주목한다. 당시 오바마는 미국의 전통적인 중동 우방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의 반대에도 이란 핵협상을 밀어붙였고, 결국 성사시켰다. 이에 2016 1월 이란은 30여년간 묶여 있던 경제제재라는 ‘그물망’을 벗어던지고 중동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했다. 동결(凍結)된 거액의 해외 자산을 되찾을 수 있게 됐으며, 제한됐던 석유 수출도 자유로워졌다. 인구 8000만명의 대국 이란이 30여년간의 결박에서 풀려나 크게 기지개를 켜고, 마음대로 손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란이 제재받을 때도 상대하기 버거웠던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와 이스라엘로서는, 오바마의 이란 핵합의는 대()재앙과 같았다. 그간 이란은 반이스라엘 정책을 통해 국내외 정치 세력을 규합하고, 레바논 시아파 무장 정치조직 ‘헤즈볼라’를 ‘대리인’ 삼아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공격을 직간접적으로 주도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국경과 인접한 레바논 남부 일대를 실질 점유하고 있는데, 이곳을 거점 삼아 미사일 공격을 하는 등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했다. 제재 해제로 ‘오일머니’가 넉넉해진 이란이 헤즈볼라 지원과 이스라엘 공세를 가속할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이란·헤즈볼라에 의한 안보 위협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선 오바마의 이란 핵협상 타결·제재 해제로 그 위협이 더 심각해졌다고 판단했다.
   
   
사우디는 이란 제재 해제로 세계 석유 시장의 주도권을 이란에 빼앗길 뿐 아니라 중동의 정치·종교적 패권 싸움에서 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최첨단 무기를 수입하는 등 국방력 증진에 힘을 쏟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구가 2000만명으로 이란의 25%에 불과해 지상 병력도 규모 면에서 밀린다. 또 이란은 1980년대 8년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버텨낸 전쟁 유경험 국가지만, 사우디는 사실상 전쟁 경험이 없다. 사우디는 현재 우방인 예멘 정부를 지켜주기 위해 예멘 내전에 개입하고 있지만, 재래식 무기 외엔 별다른 장비도 없는 후티 반군을 상대로 이들이 점령한 예멘 수도 사나를 3년째 탈환하지 못할 정도로 전쟁 수행 능력이 낙제생 수준이다.
   
   
이란의 부상(浮上)은 무엇보다 사우디 왕실에 정치적 위협이 된다. 이란은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시아파 성직자가 주동한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혁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선 나라다. “신()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이슬람 성직자(율법학자)가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호메이니 사상’은 이슬람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사우디 정권을 흔들었다. 사우디는 이슬람 성직자도 아닌 일개 가문이 세습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이란을 싫어하고 근본적으로 이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친구 더 늘려갈 듯  

   이런 와중에 사우디·이스라엘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2016 11월 미 대선에서 오바마의 후임으로 힐러리 클린턴이 아닌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트럼프는 앞뒤도 안 재는 대이란 강경파였다. 사우디·이스라엘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트럼프의 힘을 빌려 이란을 완전히 제압하기로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이들 사이에 훈풍이 부는 또 하나의 요인은 경제다. ‘석유 시대’에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은 ‘오일머니’가 넉넉했기에 기술 산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저유가·탈석유 시대가 도래하면서 아랍 산유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석유 없이도 부를 유지할 미래 먹거리 발굴이 시급해진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인구 800만명으로 내수시장은 작지만, 최첨단 인터넷 기술을 보유한 미래산업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나라다. 양측이 손을 잡으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등 협업의 효과를 누릴 여지가 많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랍 산유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을 뿐 아니라 미개척지였던 아랍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더 나아가 아랍·이슬람권 국가가 주도하는 ‘이스라엘과 거래하지 말기 운동’을 중단하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운동으로 유럽 국가는 물론 아시아 국가에 각종 상품·기술을 수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스라엘 저명 외교·안보 전문기자 로넨 베르그만은 “이스라엘 총리의 공식 오만 방문은 세계 다른 나라들을 향해 ‘이거 봐라, 이제 아랍국가 반대가 겁나서 우리(이스라엘)랑 교류하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간 사우디 눈치를 보는 바람에 이스라엘에 정상 국빈 방문을 하지 못했던 나라들이 이제 하나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확대할 수 있다.
   
   
아랍·이스라엘의 해빙 무드가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예단할 수 없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이슈는 아랍 어느 나라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주요 현안이다. 팔레스타인 강경세력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무장충돌이 툭하면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양측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1 11~13일에도 하마스는 로켓·박격포 400발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은 헬기·탱크·전투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아랍권 전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하지만 2017년 말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라고 선언하는 친이스라엘 정책에도 사우디 등이 거센 반발을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팔레스타인 이슈가 아랍과 이스라엘의 해빙 무드를 중단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져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이슈는 이제 웬만해선 국제사회의 시선을 끌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2539 2018.12.31 쿠르드족의 눈물 배신의 역사로 점철된 독립의 꿈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라크 정규군은 이들과 싸워보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다. 누구도 이들과 맞서 싸울 배짱이 없었다. 그렇게 일개 테러리스트인 IS 2014 6월 이라크 제2도시 모술을 손에 넣었다. 시리아 동부 유전(油田)지대도 그들에게 넘어갔다. IS는 ‘영토를 가진 테러리스트’로 등극했다.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이때 IS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들이 있다. 시리아군도 이라크군도 아닌, 독립국가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중동의 집시’ ‘중동의 방랑자’ 쿠르드족()이었다. 나라가 통째로 테러리스트 손에 넘어갈 지경이 되자, 쿠르드가 ‘의병(義兵)’이 돼 나선 것이다. 평소 나라로부터 ‘3등 시민’ ‘반역 세력’ 취급받던 이들이 구국 용사가 됐다.   


   IS
는 당황했다. 쿠르드는 강했다. 시리아·이라크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쿠르드 민병대는 IS와의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했다. 사방으로 뻗던 IS의 기세가 단박에 꺾였다. 하지만 IS도 만만한 녀석들은 아니었다. 사담 후세인·아사드 등 아랍 독재자들의 철권통치에서도 아득바득 버티며 잔뼈가 굵은 조직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당시 서방 기자·구호대원 등을 ‘비스밀라(신의 이름으로)’ 운운하며 잔인하게 살해하는 만행으로 악명이 높아져, 세계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막대한 테러 자금을 지원받았다. 고성능 무기로 금세 무장했다. 이라크 정규군이 버리고 간 탱크 같은 무기도 이들 것이었다. IS 화력은 쿠르드보다 앞섰다.   

   
   IS 탱크에 몸을 던진 두 아이의 엄마 

    걸었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은 몸을 내던졌다. 2014 10 5일 시리아 북부 코바니의 미쉬타누르 고지(高地) IS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IS는 탱크로 고지의 쿠르드 진지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대로 있다간, 고지를 버리고 퇴각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여성 대대장 아린 미르칸은 수류탄을 들고 적진으로 침투해 IS 탱크로 뛰어들었다. 그는 수류탄을 탱크 밑에서 터트리며 산화했다. 미르칸의 육탄전은 미쉬타누르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기폭제가 됐다.
   
   
이 소식은 쿠르드 전군에 알려졌다. 세계 언론들도 이 사실을 확인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뒤늦게 알려지기로, 미르칸은 그의 군용(軍用) 이름이었고, 본명은 데일라 겐즈 카미스였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의 사연은 쿠르드가 2014년부터 2017년 말까지 이어진 IS 전쟁에서 얼마나 열심히 싸웠고 큰 역할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미스가 두 아이까지 뒤로하고 적진으로 뛰어들어간 건 민족을 위해서였다. 카미스는 부하들에게 항상 ‘독립의 꿈’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쿠르드가 애초 전쟁에 나선 건 이들 마을까지 IS가 쳐들어와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위기를 민족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 쿠르드는 사태 초기 IS를 마을 밖으로 밀어내고 난 뒤에도 다른 지역 IS 격퇴전에도 계속해 참전했다.
   
   
이들에게 ‘IS 격퇴전’ 참전을 독려한 건 미국이다. IS는 중동 지역만의 골칫덩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지에서도 테러를 일으켰다. 테러로 ‘서방 제국주의’ 국민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은 IS와 이들에 종속된 극단주의 단체들의 세력엔 ‘희소식’이었다. 미국과 서방·중동 동맹국들은 어떻게든 IS라는 암 덩어리를 하루빨리 도려내고 싶었다.
   
   
미국은 직접 메스를 들고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암 제거 수술을 해줄 외과의사 같은 지상 전투병력이 필요했다. 전투기·미사일 공습만으로는 시리아·이라크 마을 주민과 뒤섞여 있는 IS를 격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전쟁 때처럼 대규모 미군 병력을 파병하는 건 부담이었다. 앞서 미국은 2001년 탈레반을 없애기 위해 아프간에 수만 명의 병력을 파병했지만, 천문학적인 전비(戰費) 지출과 2300명의 미군 전사자라는 큰 손해를 보고도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아프간의 늪’에 빠지는 쓰라린 경험을 한 미국은 또다시 ‘시리아의 늪’에 빠지는 걸 피해야 했다. 이에 미군 지상군은 소수만 보내고 IS 격퇴전 주력군으로 쿠르드 민병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쿠르드는 ‘독립의 꿈’에 부풀었다. 모처럼 미국의 기대와 국제사회의 관심을 한껏 받게 된 이들은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실제로 중동 외교가와 전문가 사이에서 쿠르드가 IS 격퇴 임무만 잘 마치면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독립국가를 세울 가능성이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나왔다.
   
   
쿠르드의 활약에 미군 주도 연합군은 2017 7월과 10 IS의 양대 점령 도시인 이라크의 모술과 시리아 락카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IS는 막판까지 탱크가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미로같이 복잡한 모술과 락카의 주택가에 배수진을 쳤다. 이런 이들을 치려면 육탄전을 벌여야만 했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그 역할을 쿠르드가 도맡았다. 그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IS 격퇴전 승리의 주역은 단연 쿠르드였다.
    

  트럼프의 토사구팽

   IS 점령지를 거의 탈환하며 격퇴전이 마무리 수순에 들어가자, 쿠르드는 드디어 ‘꿈’ 실현에 돌입했다. 우선 이라크 내 쿠르드가 이라크 중앙정부에서 분리 독립하겠다고 나섰다. 독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를 강력 반대했다. 하지만 이라크 쿠르드는 미국 등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내심 기대하며 독립을 외쳤다.
   
   
미국의 반응은 어땠을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미국은 단합된 이라크를 지지한다” “우리는 쿠르드와 이라크 정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실상 이라크 정부 편을 든 것이었다. 쿠르드는 버림받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시리아 내 쿠르드는 이라크 쿠르드 형제들의 비보(悲報)에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미국이 이라크 쿠르드는 저버렸어도, 시리아 쿠르드의 손만큼은 잡아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일리가 있었다. 미국이 이라크 쿠르드를 독립시킨다는 건 이라크 정부의 등에 칼을 꽂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라크 정부는 미국이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파트너다. 미국 입장에선 이라크 정부를 잃으면서까지 쿠르드를 독립시킨다는 건 밑지는 장사였다.
   
   
하지만 시리아는 사정이 다르다. 시리아 정부는 반미(反美). 거기에다 트럼프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나라 이란과는 단짝이다. 트럼프 정부가 시리아 정부와의 관계를 위해 쿠르드를 외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리아 쿠르드는 이런 판세를 읽고, 2018년 미국의 지시에 따라 시리아에 남은 IS 세력을 해치우는 전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시리아 쿠르드의 ‘독립 꿈’은 커져만 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컸다. 지난 1219일 이들의 꿈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 19일 트위터에 “우리는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를 격퇴했다. 내 임기 동안 그곳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유일한 이유(가 사라졌다)”라며 철군 방침을 밝혔다. 미국은 시리아에 약 2000명의 병력을 두고 쿠르드와 같이 IS 격퇴전을 치렀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주둔 미군을 전원 철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졸지에 시리아 쿠르드는 외톨이가 됐다. 미국이 ‘사냥개’로 삼은 쿠르드를 ‘사냥’(IS 격퇴전)이 끝나자 버린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따로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이 결정은 터키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라 분석한다. 쿠르드의 독립을 가장 싫어하는 나라 중 하나가 터키이기 때문이다. 터키는 자국 내에도 분리독립을 원하는 쿠르드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인접한 시리아에서 쿠르드의 영향력이 세지는 걸 원치 않는다. 덩달아 터키 쿠르드의 독립 목소리도 커지기 때문이다.   

   
  
 “열강이 필요에 따라 휘두르는 채찍” 

   쿠르드는 4000여년 전 지금의 이란·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 살던 고대 민족 ‘구티(또는 쿠티)’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페르시아(현 이란) 민족과 같은 아리안계 인종으로 약 3000년 전부터 중동에서 이들 고유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지키며 살아왔다.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인 쿠르드이지만, 이들은 한 번도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항상 어느 나라에 종속돼 살아왔다. 오늘날 이들 전체 인구는 4000만명에 달하는데, 한데 다 뭉쳐 살지 않고, 터키(1540만명)·이란(680만명)·이라크(430만명)·시리아(130만명) 등지에 흩어져 있다.
   
   
쿠르드는 그동안 여러 차례 ‘내 나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세계 1차대전(1914~1918)으로 오스만제국이 무너질 무렵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이후 터키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쿠르드는 뒷전으로 밀렸다. 터키는 서구에 “쿠르드를 독립시켜주면 안 된다”면서 이들을 터키공화국에 편입되도록 했다.
   
   
쿠르드에 다시 기회가 찾아온 건 1972년 이란과 이라크가 분쟁을 벌일 때다. 친미 팔레비 왕조의 이란이 접경국 이라크와 국경선을 놓고 싸울 때 쿠르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동맹인 팔레비 왕조를 돕기 위해 쿠르드에 무기와 자금을 대며 이라크와 싸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3년 뒤인 1975년 이란과 이라크 관계가 급개선되자, 쿠르드는 버려졌다. 미국은 ‘용도 폐기’된 쿠르드에 손을 뗐다. ‘작아도 좋으니 우리 민족만의 나라를 세워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외면했다.
   
   
이들의 희망과 좌절은 반복됐다. 1980~1988년 이라크는 이란과 전쟁을 벌이면서 쿠르드를 꼬여 자기 편에 서도록 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1988년 전쟁이 끝날 무렵 쿠르드가 독립하거나 이란 편으로 돌아설지 모른다고 우려해 이라크 쿠르드 주민들을 화학무기로 대량학살하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3년 뒤 쿠르드는 또다시 열강의 싸움에 휘말렸다. 후세인이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이를 규탄하며 미국이 걸프전쟁을 일으켜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때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흔들기 위해 쿠르드에 반후세인 무장투쟁에 나서달라고 부탁했고, 쿠르드는 ‘내 나라’ 꿈을 기대하며 전쟁터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후세인의 군대에 진압됐다.
   
   
다행히 쿠르드는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영국 등의 도움으로 이라크 동부 유전(油田) 지역에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자치정부라 해도 이라크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만, 소기의 성과는 올린 것이다. 서구와 중동 열강 사이에서 이렇게 이용됐다 저렇게 버려지는 쿠르드는 지금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터키 쿠르드 언론인인 알파고 시나씨는 “쿠르드는 열강이 필요에 따라 휘두르는 ‘채찍’과 같은 존재였다”면서 “일제강점기를 극복하고 독립을 한 한국처럼 쿠르드도 지금의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도 쿠르드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