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7/ 세계의 분쟁史2/
■러시아 편
◆초대 러시아 해군무관 윤종구 제독의 한·러 군사교류 비망록
“소련 붕괴 직후 북한, 골프급 중고 잠수함 도입해 SLBM 발사에 활용”
⊙ 중국, 소련 항모 바랴크 헐값 구입해 랴오닝으로 개조
⊙ 1997년 11월 ‘한-러 정부 간 군사기술·방산·군수협력협정’ 체결
⊙ 러시아 무기, 투박하지만 견고성과 야전성 우수해도 편리함이나 쾌적성은 없어
▲ 러시아의 SU-27 전투기가 ‘러시아 무기 엑스포(Russia Arms Expo 2013)’에서 기동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1995년 5월 23일, 김홍래(金鴻來·공사 10기·예비역 대장) 공군참모총장이 이억수(李億秀·공사 14기·예비역 대장) 공군본부 인사참모부장(소장)과 함께 모스크바 근교 쿠빈카 공군기지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러시아 파일럿 복장이었고 비행을 위한 신체검사를 마친 직후였다. 김홍래 총장은 수호이(SU)-27 전투기, 이억수 부장은 미그(MIG)-29기에 탑승했다.
6·25전쟁 배후지원, KAL 007기 격추사건 같은 앙금이 남아 있는 적대국 러시아의 최신예 전투기에 한국 공군 수뇌부가 탑승한다는 자체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이들을 수행한 윤종구(尹鍾九·69) 당시 해군무관(해사 24기·예비역 준장)은 “당초 비행 참관이었으나 러시아 측은 실제 탑승・비행까지 허락하여 모두가 깜짝 놀랐다.
러시아측은 한국이 2002년 기종을 결정하는 40대(5조8000억원) 규모의 차기전투기(F-X) 사업을 추진하자 한국 공군 수뇌부에 파격적인 비행기회까지 준 것이다. F-X 1차 사업에서 한국 정부는 최종적으로 미국 보잉사의 F-15K를 결정했지만 당시 보잉의 F-15K를 비롯해 프랑스 다소사의 라팔, 유럽 4개국 컨소시엄의 유로파이터, 러시아의 SU-35가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다.
SU-27은 기동성이 매우 뛰어나다. 코브라 기동은 초음속으로 날다가 순식간에 초저속으로 몸체를 세워 비행하기 때문에 피격 확률이 낮다. 김홍래 총장이 탄 SU-27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 급제동하며 기수를 쳐들고 ‘코브라 기동’을 선보이자 지상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부인 김규영(작고)씨는 발을 동동 굴렀다.
20분간의 비행을 마친 김홍래 총장과 이억수 부장에게 《이타르타스통신》, 러시아군 기관지 《레드스타(赤星)》 등 러시아 언론들이 몰려들었다. 윤 제독은 “한국 공군 총장이 항공기 성능이 좋다고 기자들 앞에서 언급하면 ‘SU-35가 유력하다’고 보도할 것 같았다”며 “총장께 ‘좋은 경험이었다’고 짧게 답변하시라고 조언드렸다”고 했다. 다행히도 러시아 언론은 김 총장의 비행 기사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불곰사업’의 시작
▲대러시아 차관 상환용으로 1996년 9월 19일 서울공항에 도착한 러시아 최신예 기계화 보병용 전투장갑차 BMP-3를 군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불곰사업은 한국이 구 소련에 빌려준 경협차관을 상환받기 위해 러시아에 빌려준 차관의 일부를 러시아산 방산물자 등으로 돌려받는 사업이다.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은 수교를 했다. 당시 외화부족에 시달리던 소련은 한국 정부에 30억 달러의 경협차관을 요청했고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1991년부터 3년간 소련에 14억7000만 달러(현금 10억 달러, 소비재 차관 4억7000만 달러)를 빌려줬다.
소련이 붕괴하자 채무를 승계한 러시아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고 1999년까지 돌려주기로 한 차관상환은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윤종구 제독은 “1993년 8월 러시아는 한국에 현금 대신 러시아가 보유한 군사장비 등 현물상환 방식의 차관상환을 제안했고 한국은 이를 수락했다”고 했다.
1995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러시아 옐친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1차 불곰사업을 시작했다. 김병관(金秉寬) 대령(당시 합참 무기체계기획과장) 등 국방부 군수국과 합참이 주동이 돼 러시아를 들락거렸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1차 불곰사업으로 총 4종의 군사장비를 도입했다. T-80U 전차, BMP-3 장갑차, 메티스(METIS)-M 대전차유도탄, 이글라(IGLA)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등 4개 군사장비가 1995년 7월부터 한국에 들어왔고 러시아는 1차 불곰사업을 통해 2억1000만 달러를 상환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남은 차관 상환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2003년부터 2006년까지 2차 불곰사업을 추진했다. T-80UK 지휘용 전차, BMP-3 장갑차, METIS-M 대전차유도탄, 무레나(Murena) 공기부양정, 일류신 IL-103 훈련기, Ka-32 탐색구조헬기 등 도합 6종이 이때 들어왔다. 특히 산림청이 민수용으로 도입한 Ka-32 카모프 헬기가 속초 낙산사 화재진압에 큰 활약을 보였다.
2차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는 5억3400만 달러를 상환했다. 이 중 2억6000만 달러는 러시아 경협차관으로 상환을 받고 나머지 금액은 한국이 현금을 냈다. 2013년 11월 푸틴 대통령이 방한해 차관상환 문제를 논의하면서 불곰사업 3차 협상을 추진했으나 차관 전액을 방산물자로 제공하려는 러시아와 절반을 현금으로 받으려는 한국의 이견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윤종구 제독은 “우리도 미국과의 작전운용성과 도입대수의 부담 등 공군측 반대 때문에 MIG-29나 SU-27을 도입하지 못했다”며 “불곰사업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무기체계 운용 및 적성국의 작전교리를 다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북한의 42년 공든 탑 무너뜨려
▲1997년 12월 17일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 총참모대학원에서 윤종구 무관(오른쪽 둘째)이 북한 무관 노승일 대좌(윤종구 무관 우측), 부무관 민병철 상좌(좌측), 박순홍 공군무관과 함께 건배를 하고 있다. 김정찬 소장 후임인 노 대좌는 매사에 적대적 태도와 불만이 가득했던 인물로 언어문제로 모든 행사에서 늘 외톨이였다.
윤 제독은 “1, 2차 불곰사업 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장비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수리온, K-2 흑표 전차처럼 상당 부분 국산화했기 때문에 현물상환은 의미가 없어졌다”며 “3차 불곰사업은 현물상환보다는 군사기술 이전이나 한·러 FTA, 북극항로, 시베리아 개발, 시베리아 대륙횡단 초고속철도 건설 등 다양한 21세기 신규 사업 아이템을 협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1차 불곰사업이 진행되던 1997년 11월 20일 한·러 군사관계에 이정표가 될 사건이 이루어졌다. 이정린(李廷麟) 국방부차관이 러시아를 방문, 국방부 회의실에서 미하일로프 러시아 제1국방차관과 ‘한・러 정부 간 군사기술·방산·군수협력협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1992년 옐친 대통령을 수행해 방한한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한·러 군사교류 계획’에 서명하면서 인적교류에 물꼬를 튼 데 이어, 1997년 이 협정 체결로 러시아 무기 도입 등 본격적인 한·러 군사협력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당시 국방무관 윤 제독은 “북한이 1949년 소련과 42년간 공든 탑을 쌓아 왔던 것을 우리는 1991년 무관부 설치 후 6년 만에 달성했던 것”이라며 “당시 협정체결 소식을 들은 북한대사관 대사와 무관은 분통을 터뜨렸다고 들었다”고 했다.
▲2000년 3월 28일 스몰렌스크의 러시아 방공대학(Air Defense University)을 방문한 윤종구 무관이 S-300 지대공 미사일을 살펴보고 있다. S-300방공미사일은 한화탈레스와 LIG넥스원이 개발해 2016년 배치한 천궁미사일의 모체다. 사진=윤종구 제독
윤 제독은 “지금도 후배 무관들에게 일본 첩보공작의 전설인 옛 주 프랑스 및 러시아 무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 대좌(대령)를 롤모델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했다. 아카시는 러시아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100만 엔의 공작금을 대면서 러일전쟁 승리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아카시 혼자 일본군 10개 사단의 일을 해냈다”고 칭송했다.
1994년 9월 러시아는 “핵무기를 제외한 어떤 무기든 한국에 제공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한국 국방부는 방산 협정 직후, 지대공 미사일 S-300, 20t급 쌍발엔진 전투기 MIG-29, 3000t급 킬로급 디젤잠수함 등 3가지 무기체계에 관심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MIG-29기의 경우 적어도 1개 편대 수량은 되어야 한다는 등 전술단위의 대량 구매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체계들을 일단 도입하면 추가 도입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미국제 일색인 한국 무기체계가 흔들릴 수도 있어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윤 제독은 “미국은 경협차관 상환용으로 한두 대의 연구용 도입과 국내개발은 몰라도 대규모 러시아제 수입은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 적극적으로 전략무기체계 도입에 나섰더라면 2016년 배치한 천궁 지대공 미사일(사거리 40km), 쌍발엔진 전투기 KFX, 3500t급 디젤잠수함 KSS-III 사업 등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킬로급 잠수함 도입했다면
▲만재배수량 4000t급의 러시아 킬로급 디젤 잠수함. 사진=위키피디아
북한은 소련 붕괴 와중에 골프(Golf)급 등 러시아 잠수함 4~5척을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88년 소련 측이 무기구입 대금의 경화결제를 요구하면서 중단했다가 소련 붕괴 이후 1994~95년 중 러시아제 중고 잠수함을 구입한 것이다. 지난 4월 23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북한 군부는 골프급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KN-11·북한명 ‘북극성-1’)을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소련 붕괴 과정에서 러 태평양함대는 어려운 재정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역 킬로급 잠수함도 고철로 팔려 했다. 킬로급(4000t)은 당시 디젤잠수함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이즈였다. 현재 우리 해군이 추진하는 장보고Ⅲ 사업(3500t)에 해당하는 크기로 수직발사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은 러시아 잠수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북한의 잠수함 전력을 파악하고 기술이전에 소극적인 독일 HDW(하데베)에 경고를 주자는 목적으로 킬로급 잠수함 도입사업을 고려했다.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을 한두 척 확보하면 북한 해군력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항군(對抗軍)으로 활용이 가능해 우리 해군의 대잠전 능력을 획기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마침 경협차관 현물상환의 일부로 잠수함까지도 거론 중이었다.
1996년 윤종구 제독은 한국 해군장교로는 처음으로 발틱함대 소속의 러시아 KILO급 잠수함에 승함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작전과 수리를 위해 두 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원했다”고 한다. 윤 제독은 “태평양함대는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면서 ‘해군기지에 정박한 잠수함 가운데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제의할 정도였으나 우리 해군은 탐탁지 않아했다. 유저(user)들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것으로 KILO급 잠수함 도입 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국영무기수출공사(로스보론줴니에) 사람들은 러시아 무기체계가 성능면에서 서방무기에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러시아 무기들은 서방무기처럼 깔끔하고 매끄럽지는 못하나 대체로 견고성과 야전성 면에서 우수하다. 칼라슈니코프 소총이 대표적 예다. 신형 KA-50 공격헬기도 복엽회전식으로 단좌인데 무장도 아파치 헬기에 못지않고 몸체도 작은 데다 유사시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다. 헬기의 조종사 탈출 장치는 세계 유일이다.
윤 제독은 “F-X 1차 사업 때 모스크바 항공기 합작제작사(MAPO)에서 젊은 한국의 유저들인 전투기 조종사들이 너희들 무기는 팬시한 점이 없다고 했더니 ‘작전용 항공기를 사러 왔느냐 유람용 항공기를 사러 왔느냐’며 비아냥댔다”며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국민차 ‘쥐굴리’를 벤츠의 ‘쥐굴리데스’로 희화화하듯 러시아 무기 체계들은 한결같이 쾌적함과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t당 170달러의 고철가격으로 구입
▲고철로 팔려와 해체되기 전 경남 고성의 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의 키예프급 항모 민스크호. 사진=조선일보
윤종구 당시 대령은 해군무관을 마치고 귀국해 1995년 10월 안기부장 정보보좌관으로 2년가량 일하면서 김영삼 정부하에서 러시아 항모 도입과 해체 과정을 지켜본 실무자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한국의 무역회사인 영유통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대형함정들을 무더기로 도입했다. 항모 민스크(Minsk)와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 2척을 포함해 총 259척의 함정을 도입, 이 가운데 34척을 국내로 들여와 해체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경제사정이 극도로 나빠지자 러시아는 연간 1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유지비를 댈 수 없다는 이유로 함정 매각을 결정했다. 한국의 중소 무역업체 영유통은 러시아로부터 키예프(Kiev)급 항공모함 민스크와 노보로시스크 매입에 나서게 된다. 노보로시스크호와 민스크호는 1979년과 1984년 각각 러시아 태평양함대에 배치됐던 항모였다. 당시 러시아는 1993년 7월 민스크호의 퇴역을 결정하고 노보로시스크호마저 화재로 기능 불능에 빠지자 매각을 추진한다.
1994년 1월 그로모프 해군사령관은 민스크 등 함정수출 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10월 6일 한국의 영유통은 해군 퇴역 장성들로 구성된 러시아 콤파스사(社)와 항공모함 2척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세계 33개 업체가 참가해 치열한 매수경쟁을 벌였다. 민스크호는 함령 15년, 노보로시스크호는 11년으로 통상 배의 수명을 30년이라고 할 때 비교적 쓸 만한 함정이었다.
윤 제독은 “영유통 조덕영(趙德英) 회장이 ‘함정이 큰 것들은 가져오는 것 못지않게 해체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말하며 안기부에 협조를 요청하면서 알게 됐다”고 했다. 당시 영유통이 인수한 민스크호의 가격은 460만 달러(당시 환율로 한화 약 37억원), 노보로시스크호는 430만 달러(약 34억원) 등 총 71억원이었다. 국산 K2(흑표) 전차 1대 가격이 50억원 넘는 것을 감안할 때 항공모함 1척이 전차 1대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팔린 것이다. 러시아가 항모의 주요 부분을 제거하고 t당 170달러의 고철 가격으로 팔았기 때문이다. 윤종구 제독은 “노보로시스크와 민스크는 3만8000t급의 항모(러시아어로 아비아노세츠)지만 항공순양함(아비아크레이세르·aviation cruiser)이라고 부른다”며 “러시아는 항모를 우크라이나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를 거쳐 지브롤터로 나와야 하지만, 흑해협약에 의해 항모는 보스포러스 해협 통행을 못해 명칭을 ‘항공순양함’으로 변경한 것”이라고 했다.
바랴크를 랴오닝으로 탄생시킨 중국
▲중국의 항공모함 랴오닝호. 러시아 항모 입찰경쟁에서 실패한 중국은 우크라이나가 건조 중이던 바랴크호를 인수해 랴오닝호로 탄생시켰다. 사진=조선일보
1994년 11월 러시아 국방부는 항모 2척의 한국 판매를 승인했다. 이때부터 《도쿄신문》과 NHK 등 일본의 언론 플레이가 시작됐다. 《도쿄신문》은 “한국이 들여올 퇴역 항모 2척이 사실상 현역 함정”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목적은 러시아를 움직여 항모 매각을 원점으로 돌리려고 한 것이다. 1995년 3월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가 연방보안국, 세관국에 폐항모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면서 한국의 러시아 항모 도입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 군사방첩국과 극동세관국이 조사에 착수했다.
극동세관국이 “민스크호와 노보로시스크호는 중앙지휘센터 장비와 레이더(R/D), 방공정보시스템, 미사일발사대와 지휘시스템, 표적탐지시스템 등이 방치돼 있었다”고 보고하자 러시아 정부는 민스크와 노보로시스크의 해당 설비들을 수류탄으로 폭파하거나 제거했다. 1995년 11월 우리나라에 온 민스크와 노보로시스크는 고철덩어리에 가까웠다.
1995년 10월 영유통은 소비에츠카 가반 항구에서 러시아 태평양함대 전용 예인선으로 닷새 만에 두 척을 한국으로 예인해 왔다. 이번에는 환경단체들이 민스크호의 해체 과정에서 기름 유출, 방사능 오염 가능성 등을 제기하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1995년 11월 포항시 양포항 입항 시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들이 항모에 소변을 보고 돌을 던지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콤파스사 소속으로 특수예인선을 인솔하고 온 이고르 마호닌 제독(78, 해군참모차장 역임)은 부두에 나가 웃통을 벗고 “다 덤벼라”고 했다. 극동함대의 주력항모가 어느날 갑자기 밧줄에 묶여 한국땅에 끌려와 갈매기와 박쥐의 소굴이 된 것도 서러운데, ‘로스케들 꺼지라’고 하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96년 8월에서 10월에 걸쳐 영유통은 러시아 국방부와 재협상을 시도, 주민들의 반발로 해체가 어려워진 민스크호의 용도변경 허가를 받아 냈다. 온갖 풍파 끝에 노보로시스크를 해체하고 두 번째 항모인 민스크를 해체하려니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윤 제독은 “조덕영 회장은 ‘한국 해군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던 애국적 기업인”이라며 “항모가 정박할 곳이 없어 하루 1억원씩 까먹으면서 동해와 남해, 그리고 서해바다를 유랑하는 항모를 보며 ‘차라리 동해바다에 수장시키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일 때는 정말 안타까웠다”고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닥치면서 투자자를 찾지 못한 영유통은 결국 1998년 제3국 매각을 추진했다. 민스크를 독도에 해상관광호텔로 가져다 놓는 아이디어도 무위로 끝났다.
민스크호는 1998년 8월 중국에 “고철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매각했다. 중국에 팔린 민스크호는 이후 중국 광저우에서 16개월 동안 내부수리와 개조작업을 거쳐 3만m²의 공간을 자랑하는 관광 테마파크로 다시 태어났다. 윤종구 제독은 “중국은 우리와 같은 시기에 우크라이나 니콜라이예프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있던 바랴크호를 300만 달러 헐값에 도입해 랴오닝함으로 탄생시켰으나, 우리는 환경단체들의 집요한 반대로 항모 2척 가운데 한 척을 중국에 팔아넘겼다”며 “굴러들어온 좋은 기회들을 차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월간조선 8월호 / 글=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17.01.09 309명을 죽음으로 이끈 전설의 여성 스나이퍼
소련군 여성 스나이퍼,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인기게임 '오버워치'의 여성 스나이퍼 <위도우메이커>
▲그리고 또 다른 오버워치 여성 스나이퍼 <아나 아마리>
▲두 캐릭터는 인기게임 '오버워치'의 스나이퍼 캐릭터로 여성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여성 스나이퍼가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출처 : waralbum.ru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 309명을 저격시킨 기록을 가지고 있는 소련군 여성 스나이퍼
'죽음을 이끄는 숙녀' 루드밀라 M. 파블리첸코 (Lyudmila Mikhailovna Pavlichenko)
"사사삼... 309명??"
▲출처 : waralbum.ru
1916년 7월 그녀는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 벨라야 체르호프에서 태어났습니다.
14살이 되던 해 그녀의 가족 모두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키에프의 조병창에서 일하며 그곳의 사격 클럽에 가입하여 사격 훈련을 받았고,
이때부터 그녀는 저격수로서의 재능을 키웠습니다.
이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소련군에 자원 입대를 하게 됩니다.
소련군 제25보병사단에 배치된 파블리첸코는 1941년 8월 벨리아예프카라는 마을의 방어전에서 2명의 적을 사살하는 첫 전과를 올리죠.
▲SVT-40 저격 라이플을 든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 출처 : waralbum.ru
그후 파블리첸코는 독일이 흑해의 군항이자 요충지인 <세바스토폴 작전>에 투입되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전설이 쓰여졌습니다" 세바스토폴에 투입된 파블리첸코는 두달 반 동안
187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사살하고 1942년 6월, 당시 날아온 독일군의 포탄에 의해 부상 당하기 전까지
10개월 간 309명을 사살하는 경이로운 전과를 세웁니다. 아래는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러시아 영화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입니다.
전쟁 속 그녀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소련군은 부상 당한 그녀를 구조하기 위해 흑해의 잠수함까지 동원하여 후송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영웅,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소련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중요한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소련 시민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연설한 그녀의 영상 루드밀라 파블리첸코의 저격기록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성별 및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스나이퍼들을 포함한 저격수 랭킹에서 23위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깁니다.
▲출처 : waralbum.ru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교관, 연구원 등 활발하게 활약하다가 1974년 10월 58세의 이른 나이에 일기를 마치고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됩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기념 우표 / 출처 : 위키미디어
유용원의 군사세계 ◎
■미국 편
◆2016년 01월 08일 FBI 기밀해제 문서 - “히틀러 자살은 조작…아르헨서 천수 누렸다”
▲ 【서울=뉴시스】독일 제3제국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은 2차대전 패전과 함께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공식적인 사실과는 달리 히틀러가 스스로의 죽음을 조작한 뒤 북아프리카 스페인령인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으로 도망을 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대중지인 ‘더선‘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 짜리 미 연방수사국(FBI) 자료를 미국 수사관들이 검토한 결과 이같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출처: 더선
1945년 4월 30일 오후 3시,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젊은 아내 에바 브라운은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방공호에서 청산가리가 든 앰플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이상이 그동안 알려진 히틀러 최후의 순간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히틀러가 스스로의 죽음을 조작한 뒤 북아프리카 스페인령인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으로 도망을 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대중지인 ‘더 선’과 ‘익스프레스’ 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 짜리 미 연방수사국(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두 신문은 7일(현지시간) 히틀러 연구로 유명한 존 센시치의 말을 인용하면서 히틀러와 브라운은 햇빛이 쏟아지는 카나리아 제도 해변에서 한 동안 보내다가 얼마 후 아르헨티나로 옮겨 여생을 마쳤다고 보도했다. 센시치는 히틀러 연구 뿐만 아니라 유엔 전범 수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 등 구 유고 전범들의 범죄행위를 조사하는 팀을 이끌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센시치은 FBI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군대가 작성한 기록은 히틀러 시신이 히틀러보다 5인치(약12.7cm)나 작다고 주장했다. 또한 머리에 난 구멍 역시 총탄 흔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은 것이라고 말했다. 센시치는 또 히틀러와 브라운 두 사람 모두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대역(double)들을 두고 있었다면서 이들이 대신 희생을 당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센시치는 또 영국군과 미군이 히틀러의 벙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시신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시신과 관련해서는 자살 직후 측근들이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실제로는 죽지 않고 벙커를 탈출했다는 주장은 그동안 끊임없이 일종의 ‘전설’처럼 제기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군이 히틀러의 시신을 본국으로 가져가 비밀리에 매장했으며, 그의 유해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70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의 명령에 의해 다시 파내져 화장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화일보
◆2016.01.29 KAL기 격추에 화를 낸 레이건이 역사를 바꾸었다!
"전시하(戰時下)의 국가가 불의와 적을 보고도 화 낼 줄 모르는 지도자를 가졌다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다"
1983년 9월1일 269명을 태운 KAL 007편 점보기(보잉747)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추락, 전원(全員)이 사망하였다. 그때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주의 산타 바바라에 있는 목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안보보좌관 빌 클라크가 워싱턴에서 전화를 걸어 이 참극을 보고하였다. 레이건은 '빌,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기도하세'라고 하였다. 탑승자중 61명은 미국인이었고 래리 맥도널드 하원의원도 희생자였다.
후속 보고를 받은 레이건은 '그들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닌가. 망할 놈의 러시아인들! 그들은 민간 여객기라는 사실을 알고도 쏘았음이 분명해!'라고 말하였다. 당시 상황은 불투명하였다. 한때는 KAL기가 강제착륙당하였다는 오보(誤報)도 나왔다. 소련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천안함 침몰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대로 한다면 레이건은 '소련이 발표할 때까지 기다려. 아무런 증거가 없잖아'라고 신중론을 펴면서 초기 대응의 타이밍을 놓쳤을 것이다.
레이건은 그러나 자신의 분노와 확신을 즉시 정책화하였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강경 대응을 지시하였다. 사고 발생 20 시간도 안 되어서 슐츠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소련이 민간여객기를 알고도 격추시켰으며 이는 학살행위이고 아주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쏘아붙였다. '스핑크스'라는 별명대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로선 아주 이례적인 감정 표출이었다. 이런 자세가 더욱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레이건의 감정을 대리 표현한 것이기도 하였다. 레이건의 즉각적 반응과 슐츠의 감정이 실린 기자회견이 그 뒤 이 사건을 다루는 미국 정책의 기조(基調)를 형성하였다.
미국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대응하였다. 일본 나카소네 총리의 협력을 얻어, 북해도의 일본 자위대 기지가 녹음한, KAL기 격추 소련 조종사와 지상 관제사의 대화를 공개, 소련이 민간여객기임을 알고도 쏘았다고 주장하였다. 레이건도 특별 방송연설을 통하여 대소(對蘇) 공격에 가세하였다. 그는 소련 조종사가 민간여객기임을 알았고 그래도 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미국의 선전전(戰)이 세계 언론을 덮는 바람에 KAL기가 항로(航路)를 이탈, 소련 영공에 들어간 사실은 축소되고 소련이 민간여객기를 격추, 269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만 부각되었다.
소련은 미국의 선제공격에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소련 정부는, 침묵을 지키다가 9월6일에야 타스 통신을 통하여 소련 조종사의 실수로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소련이 말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격추는 고의라고 반박하였다. 소련은 KAL기가 미국과 일본이 합작한 스파이 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으나 먹혀 들지 않았다.
레이건은 마드리드에서 열린 유럽 안보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슐츠 국무장관에게 특명(特命)을 내렸다.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을 몰아세우라는 것이었다. 슐츠는 시키는대로 하였고, 화가 난 그로미코는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동댕이 쳤다. 미국 보수진영의 기수이던 진 커크페트릭 주(駐)유엔 대사도 대소(對蘇) 공격에 앞장섰다.
이런 선전전에 당황한 것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였다. 그는 휴가중이던 주미(駐美) 대사 도브리닌을 불러 '장군들이 바보짓을 하였다. 빨리 귀임하여 사태를 수습하라'고 지시하였다. 도브리닌은 상황 파악을 위하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우스티노프는 사무실에서 호출되어온 극동지역 관할 장성들을 세워놓고 혼을 내고 있었다.
KAL 007 사건은 세계적으로 반소(反蘇) 감정을 확산시켰고, 소련 권부(權府)의 내부 갈등을 증폭시켰다. 소련의 몰락은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도브리닌도 자신의 회고록 '비밀로(IN CONFIDENCE)'에서 '소련 정부가 미숙하게 대응함으로써 장기적 국익(國益)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고, 서방세계에서 잠재하고 있던 반소(反蘇)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
미국은 그해 9월8일 소련 국영(國營) 항공사 에어로플로트의 미국 내 사무실 폐쇄와 취항금지령도 내렸다. 미국 정부의 이런 성공적 선전戰은, 사건 보고에 접하였을 때 레이건이 터뜨린 분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2010년 3월26일 밤 천안함(天安艦)이 침몰하여 46명의 해군(海軍)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레이건처럼 화를 냈던가? 북한과 중국이 짜고 치는 '한반도의 핵게임'에 말려든 박근혜 대통령은? 전시하(戰時下)의 국가가 불의와 적을 보고도 화를 낼 줄 모르는 지도자를 가진 것만큼 큰 불행은 없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2.19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도면이 사라졌다"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작자를 수소문했다. 전쟁과 관련한 책은 대부분 1만부 이상 팔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만, 영화는 잘만 되면 몇 백만에서 금세 천만이다. 이렇듯 영향력을 가진 영화라는 매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를 사전에 확인하고 사실과 다른 부분을 고쳐 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전쟁사 연구자에게 보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 제작자부터 가요 작곡가들까지 전화를 다 돌렸다. 수소문 끝에 영화감독의 전화번호를 확인했으나 나의 문자메시지에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사료열람실에 낯선 남녀가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럴 수가. 그들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조감독들이었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화의 시놉시스와 대본을 먼저 받았다. 대본의 각 장에는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수령인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워터마크 처리되어 있었다. 이후로 제작부장, 각 팀장과 조감독들을 차례로 만나 영화 조언을 시작했다. 촬영장에 나가 있는 이들과는 주로 SNS 메신저와 이메일을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담당분야는 군사 전반에 관한 고증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작전, 전술과 같은 교리분야는 물론이고 한국 해병대 단추의 색깔까지도 함께 토의해야 했다. 미술, 의상팀의 연락도 종종 왔다. 국내 군사고증 분야에 전문가가 없는 데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내용들은 영상이나 사진이 희귀하여 고증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여기에 싣는 사진과 글, 설명들은 상당수가 최초 발굴이자 최초 공개임을 미리 밝힌다.
상륙戰團은 어떻게 인천으로 들어왔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원수 역할을 맡은 할리우드 액션 배우 리엄 니슨.
인천상륙작전의 고증이 어려운 이유 중 첫째는 당대 D데이 H아워의 영상,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기습이 관건인 비밀작전이었기에 군사작전 이외의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5분 내외의 영상 한 컷과 5장 내외의 사진이 전부다.
둘째는 인력 부족, 편제 미편성을 들 수 있다. 즉, 영상, 사진을 찍을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다. 1945년 9월 9일까지만 해도 미군은 강하고 컸다. 제2차 세계대전의 관성이었다. 전투 및 전투근무 지원부대가 완편 상태였기 때문에 항공사진 촬영 등이 가능했다. 그러나 곧 동원이 해제되고 국방 관련 인력과 예산이 감축되면서 미군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극동군사령관이 운용할 수 있었던 사단이 24사단 겨우 하나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의 상륙장면을 촬영하기로 했을 때 영화 〈진주만〉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처럼 현장감 넘치는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원천소재가 없어 제작진의 고민이 컸다. 영화촬영 과정에 수차례 문의가 와서 KBS와 국방홍보원 자료실까지 탐문하였으나 결국 못 찾았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부대의 편성과 진입 순서는 어떠했는지, 맥아더 장군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었는지 어디에도 그 기록이 없었다.
그렇기에 여기에 제시하는 사진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할 당시의 기록들이 유용하고 귀하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RG59 국무부 파일과 RG338 육군 파일에 관련 문서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1945년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남진하는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날 인천으로 들어온 미군의 편제, 진입루트는 인천상륙작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 사진(〈사진1, 2〉)을 제작진에 전달했을 때 시각효과(VFX)팀은 만세를 불렀다.
김대식 대령의 단추 이야기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상륙전단의 규모, 대형, 방향과 같은 요소는 스케일이 굉장히 큰 것으로, 제작진은 영화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표현할 것이다. 크고 시원시원한 상륙전단의 기동에 비하면 해병 제1연대장 김대식(金大植) 대령의 단추 모양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추 하나에 담긴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 보면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의상팀장과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군 해병대의 복장과 관련한 세부 고증을 하고 있을 때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배우들에게 뭘 어떻게 입혀야 할지 난감했다. 1950년 9월에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급히 제주도에서 약 3000여 명의 신병을 모아 1개 연대 규모의 편성을 막 마친 참이었다. 그래서 관련 사진이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중 사용하지 않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창고를 정리하다가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사진 뭉치를 발견했다. 열어 보니 처음 보는 자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연유로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유일본, 희귀본의 6·25전쟁기, 1960년대 국방관련 사진들이었다. 다음 〈사진3〉부터 보자.
이 사진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뒤편의 지형과 기존 해병대 전투사를 비교해 보면 이 사진은 부산항에 집결한 한국 해병대를 찍은 것이다. 상륙작전 훈련을 받기 위해 부산에 집결한 9월 6일로 추정된다. 당연히 최초 발굴, 최초 공개다.
〈사진4〉도 함께 있었다. 뒤편의 배경을 보면 이곳은 인천항이다. 상륙작전 부대가 지상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뒤 육지에 오르고 있는 한국군 해병대의 모습이다. 방탄철모에는 부대와 직책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시를 해 놓았다. 이것 역시 최초 발굴, 최초 공개다. 보물상자가 열린 것이다.
이제 다음 〈사진5〉를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 속의 인물은 제2대 해병 1연대장이었던 김대식 대령이다. 물론 이것 역시 최초 공개되는 사진이다.
복장은 미 육군 복장이다. 왜 육군 복장인가. 한국 해병대가 이때 막 생겨서 그에 맞는 복제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왼편 가슴에 ‘해병대’라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이름표 대신 왼쪽 가슴 상단에 펜으로 삐뚤빼뚤 ‘김대식’이라고 써 놓았다.
이 사진 한 장으로 6·25전쟁 당시 한국군의 물자와 장비의 실정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타전한 전문 제1호의 내용이 ‘한국군에 총기와 탄약을 보내 달라’였을 정도다.
그런데 김대식 대령의 전투복을 확대한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단추(〈사진6〉)다. 아주 특이하다. 단추 구멍은 보이지 않고 가운데 문양이 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단추들일까. 왜 이 단추를 달았을까.
원래 미 육군 전투복에 달려 있는 단추는 구멍 4개짜리의 평범한 플라스틱 단추(〈사진7〉)다.
이것은 실밥이 겉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단추는 뭍에 오름과 동시에 땅바닥을 포복해야 하는 해병대에 맞지 않다. 얼마 가지 못해 마찰에 의해 실이 헤어지면 단추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병대는 실밥이 안쪽에 묻히는 특수 단추(〈사진8〉)를 전투복에 사용한다.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한국 해병대는 미 육군 전투복을 지급 받았다. 다른 것은 임시방편으로 모양을 내거나 없으면 없는 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추는 문제가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가 미 육군이 가진 물자 중 외출복 단추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다. 미 육군 외출복 단추는 아래의 〈사진9〉처럼 실밥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김대식 대령이 전투복에 달고 있던 단추와 그 문양이 똑같다. 안에 하얗게 칠한 부분은 초기 미국의 13개주를 뜻한다.
맥아더는 파이프로 담배를 피웠을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상징 중 하나인 파이프. 이것을 어떤 모양으로 제작할 것인가. 맥아더는 이 파이프를 어떻게 물고, 또 어떻게 쥐고 다녔는가, 그것으로 흡연을 했는가 등도 제작진의 고민이었다.
필자는 2009년 버지니아 주 노폭(Norfolk)시의 미 합동참모대학에서 미군들과 군사작전과정을 수료했다. 노폭에는 맥아더기념관이 있다. 단체로 관람을 간 날, 동해가 ‘Sea of Japan(일본해)’으로 기재된 것을 발견했고, 3주 정도 설득하여 ‘East Sea(동해)’로 바꿔 놓았다. 그 3주 동안 전시되어 있던 맥아더 장군의 각종 소장품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꼼꼼히 읽어 외우다시피 했다. 맥아더 장군의 파이프에 대해 답을 줄 수 있었던 이유다.
6·25전쟁기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맥아더 장군의 파이프는 일종의 장신구였다고 보면 된다. 그는 이 기사 첫 장의 사진처럼 콘 파이프를 물거나 들고 다녔다. 〈사진10〉처럼 옥수수대와 수수대로 만든 크고 긴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지시봉, 지휘봉과 같은 역할도 했다. 흡연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제작진이 “미국의 리엄 니슨(Liam Neeson,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역)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지휘용 말채찍을 준비해 달라”면서 “고증이 맞느냐”고 했다. 참고로 군대에서는 지휘관이 되면 선물로 말채찍을 주는 전통이 있다. 나는 “고증에 맞지 않다”고 알려주었다. 맥아더 장군의 젊은 시기,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말채찍을 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진을 찍기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제작진은 리엄 니슨 측을 설득해 본다고 말했는데, 영화에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맥아더 장군은 파이프를 들고 다니기만 하고 흡연은 하지 않았을까? 그도 흡연을 했다. 그때는 진짜 파이프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찍은 것이다. 이 사진(〈사진11〉) 말고 실제로 담배연기가 나오는 희귀 사진도 한 장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진을 보면 알다시피 파이프가 손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미술팀이 제대로 된 모양을 보고 제작하기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노폭의 맥아더기념관에 전화를 했더니 모델명과 구입할 수 있는 사이트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덧붙이길 아직도 판매되고 있는 모델이라고 했다. 다음의 〈사진12〉가 그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피우던 것과 같은 파이프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다.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당일 작업복 차림이었던 까닭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고증은 중요하다. 해당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틀린 사실을 보게 되면 영화에 곧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이 분야 역시 디테일을 알고 지적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
〈사진13〉은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맥아더를 제대로 묘사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쓴 모자의 퀄리티다. 처음 보는 분들에겐 ‘도대체 저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손때 묻고 불에 그을린 구겨진 모자. 태평양전쟁에서 그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한 필리핀 총독의 정모(正帽)다. 맥아더는 필리핀의 총독을 역임했었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에서 적시적으로 알려준 것은 선글라스의 색깔이다. 그동안 대부분 흑백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것으로 묘사한 영화, 드라마가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진한 녹색 렌즈를 즐겨 썼다.
이 사실을 알려주자 제작진은 신이 났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은 줄곧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리엄 니슨 특유의 눈빛 연기를 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의 움직임이 드러날 수 있는 녹색 렌즈라니,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방법이 나온 것 아닌가.
〈사진14〉는 인천상륙작전 재연행사 때의 것이다. 다른 건 많이 틀렸지만 와이셔츠를 제대로 입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맥아더 장군은 편한 실내 근무복 차림으로 일본 여기저기를 순시하다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한반도로 출항했다. 비밀이 새나갈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군복이 아니라 작업복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 군용 가죽잠바를 입고 있는 것이다.
〈사진15〉는 맥아더 장군의 작전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진이다. 연합군사령부가 주둔한 도쿄 다이이치빌딩 내 회의실에서 주요 참모들을 모아 놓고 작전 브리핑을 하는 모습이다. 큰 모형을 만들거나 벽에 거대한 지도를 걸어 놓은 것이 아니라, 휴대용 지도에 직접 그려 가며 설명했다. 맥아더는 이런 방식을 좋아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도면이 사라졌다
〈사진16~20〉은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 작전계획(Operation Chromite, X Corps Op. Order No. 1) 원본을 촬영한 것이다. 전체 페이지 중 앞 다섯 장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주력부대는 미 10군단이었다. 6·25전쟁의 지휘체계는 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미 8군사령부→ 미 9군단이었고, 1950년 9월 한반도의 낙동강 전역(Campaign)에서 방어작전을 지휘한 것은 월튼 워커 장군의 미 8군사령부였다.
다시 말해 미 10군단은 인천상륙작전과 장차 작전을 위해 새로 창설한 부대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오랜 전우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 에드워드 앨먼드(Edward Almond)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지휘관으로 삼았다.
입수된 인천상륙작전 작전계획을 보면 ‘별지 #2. 작전투명도(Operation Overlay)’가 없다. 즉, 작전계획의 도면이 없다는 말이다. 작전투명도는 작전에 관련된 아군부대의 위치, 규모, 기동, 화력계획 등을 군대부호와 전술적 통제수단을 사용하여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필요시 적 부대의 위치와 예상되는 이동경로를 표시할 수 있으며, 통상 대대급 이상 제대에서는 부록으로 작성하고 있다.
이것을 찾기 위해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과 워싱턴의 육군군사연구소(US Army CMH)를 모두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 도면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우연히 노폭에 있는 미 합동참모대학 지도함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계획 도면과 함께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오는 3월 경 그곳을 방문해 찾아볼 생각이다.
조선일보 글 |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2016.10.12 美 루스벨트 대통령을 속인 국무부 엘리트 간첩 엘저 히스 이야기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외고 다니는 간첩은 없다
▲非미국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한 앨저 히스. 1948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가 IMF와 유엔이다. IMF뿐 아니라 유엔도 소련에 포섭된 미국인 간첩이 창립을 실무적으로 지휘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親蘇化(친소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소련 정보기관이 2차 대전 때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IMF 창설의 미국 측 책임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유엔 창립의 미국 측 실무 책임자 엘저 히스의 正體(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위터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중 黨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 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소련으로 불려가 숙청될까 겁이 났다. 1938년 4월, 그는 미국 공산당을 탈퇴하고 타임에 취직하였다.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챔버스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1939년 8월,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관련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챔버스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전향, 의회에서 미국에서 활동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急死(급사)한 전임자 루스벨트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美蘇(미소) 관계도 악화되던 시기였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개시하였다.
히스가 소련에 넘겨준 文書
1948년 8월3일, 전향한 간첩 챔버스는 미 하원 非미국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면서 엘저 히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8월17일 캘리포니아 출신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 두 사람을 조사위원회로 불러 대질 신문하였다. 히스는 챔버스를 약간 아는 사이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남겼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 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조직을 위한 준비 회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內査(내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提訴(제소)하였다.
1948년 11월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 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物證(물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등 미국인 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肉筆(육필)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된다. 챔버스는, 이것은 히스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하였다.
유죄(有罪) 선고 44개월 복역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僞證罪(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時效(시효)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점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히스는 이것을 1937년 12월에, 즉 챔버스가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날짜 이전에 家政婦(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이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월8일,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11월17일에 시작된 재판에서 검사는 히드 매싱이란 증인을 내세웠다. 매싱은 소련 간첩이던 시절에 히스가 자신의 조직원이던 노엘 필드라는 또 다른 국무부 간첩을 그의 조직으로 빼내 가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두 번째 재판에서 히스는 유죄 선고를 받고 44개월간 복역한 뒤 1954년에 석방되었다. 히스 사건은 이게 1막이었다.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 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 판 드레퓨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은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美 의회 조사위원회와 법정 자료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억울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한 역사연구가의 추적
히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反證(반증)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世論(세론)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사추세츠 주 변호사회는 히스를 다시 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이 무렵 알렌 바인스타인이란 역사 연구가가 등장한다. 그는 히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챔버스와 히스를 잘 아는 80명을 인터뷰하였다. 東歐(동구)와 이스라엘에 가서 전직 소련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히스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히스의 변론자료를 얻어 읽어보니 검사에 의한 증거 조작설을 부정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76년에 ‘僞證(위증)’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히스를 틀림없는 소련간첩이라고 못 박았다.
이 책을 둘러싼 左右(좌우) 진영의 논쟁도 뜨거웠다. 바인스타인이 워낙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면밀한 구성의 책을 낸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좌파의 반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책 이후엔 히스 편을 드는 출판이 끊어졌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反共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冷戰 종식 뒤 결정적 자료들 나와
1990년을 前後하여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히스 논쟁은 再燃(재연)하였다. 히스가 선수를 쳤다. 1992년 5월, 러시아 군사자료실의 책임자이고 평판이 높은 역사학자인 디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써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장군은 히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자료는 없으며 히스에 대한 비방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스는 좋아했으나 바인스타인과 다른 역사연구가들이 볼코고노프가 과연 제대로 자료를 검색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볼코고노프는 곧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자신이 KGB 자료만 뒤졌다고 했다.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의 정보기관(GRU)을 위하여 간첩질을 하였으므로 엉뚱한 검색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히스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헝가리 역사연구가는 노엘 필드(미국에서 東歐로 도망친 국무부 간첩)에 대한 헝가리 비밀경찰의 신문 조서에서 히스가 필드를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고 진술한 부분을 찾았다. 1996년 10월 미국의 CIA와 NSA(국가안보국)는 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게 결정타였다.
1945년 3월30일자의 소련 암호 電文(전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알레스(Ales·암호명)는 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 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 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를 수행한 이가 엘저 히스였다. 히스의 正體(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1996년 11월24일 클린턴 대통령이 CIA 국장 후보로 지명한 앤서니 레이크(전 대통령 안보 보좌관)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신은 히스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레이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나는 두 서너 개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스파이였을 것이라는 心證(심증)을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파가 레이크의 애매한 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 결국 그를 낙마시켰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자발적 民權(민권)운동 단체인 것처럼 변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이 자진하여 소련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李承晩이 소련 비판하자 화를 낸 히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하던 李承晩(이승만)은 이 히스와 惡緣(악연)이 있었다. 1941년 12월22일에 워싱턴을 방문한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만나 전쟁협력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1일에 연합국 선언이 나왔는데 망명정부를 포함한 26개국이 서명하였다.
李承晩은 헐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임시정부도 이 선언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 하였다. 국무부에 갔으나 헐은 만날 수 없었고, 극동국장 스탠리 혼벡과 그의 보좌관 히스를 면담했다. 孫世一 선생이 월간조선에 연재중인 ‘李承晩과 金九’에 따르면, 히스는, 李 박사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시베리아 교역의 거점이 될 不凍港(부동항)을 한국에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여 점령하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스는 李承晩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미국의 중요한 戰時(전시)동맹국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히스는 한국에 관한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히스는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면서 정보를 열심히 건네주고 있었으니, 李 박사의 소련 비판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얄타 회담의 최고 비밀 관리
히스는 1996년에 죽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소련 간첩임이 확정된 뒤에도 히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활동중이다. 2007년 4월엔 뉴욕 대학에서 ‘엘저 히스와 역사’란 제목의 회의를 열었다. 끈질기게 히스를 비호해온 좌익 잡지 ‘더 네이션’의 편집장 빅터 나바스키가 기조연설을 하고, 히스의 養子(양자) 티모시 홉슨도 참석하였다.
수년 전엔 미국 국방부 정보국의 소련 분석관 출신 크리스티나 셀턴이 쓴 ‘엘저 히스: 왜 그는 반역을 선택하였나’라는 책이 나왔다. 히스가 얄타 회담에서 한 역할이 언급되어 있다. 2차 대전 후의 세계 질서를 결정한 이 역사적 회담에서 히스는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참여, ‘블랙 북’을 관리하였다. ‘블랙 북’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처칠과 논의할 주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정리한 최고 기밀의 자료집이었다. 소련 간첩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담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관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국무부의 모든 회담 준비 자료는 히스에게 전해졌다. 당시 국무부는 소련에 일본 영토 쿠릴과 사할린을 넘기는 데 반대한다는 메모를 작성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용 브리핑 자료집에선 빠져 있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국무부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고 회담에 임해 두 지역을 終戰(종전) 뒤 소련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히스 등 미국 내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얻은 정보로 미국 측의 얄타 회담 전략을 미리 알고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서 보관소에서 쿠릴의 양도에 반대하는 미 국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著者(저자)는 이 문서가 히스에 의하여 제공되었다고 썼다. 히스는 극비 문서를 루스벨트에겐 보고하지 않고, 소련에 건네주었다는 뜻이다.
양식 있는 교양인 행세를 한 히스는 왜 그토록 오래 거짓말을 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하여 미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 편집국장 출신 루이스 부덴즈는 히스가 黨(당)을 위하여 소신 있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히스의 양심은 ‘당의 이익을 위한 무한한 봉사’에 있으므로 그런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당의 명령이란 것이다.
한국의 從北(종북)인사들이 보여주는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진실된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히스를 부렸던 소련군 정보기관 GRU의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히스의 비밀은 몸통이 아직 密封(밀봉) 상태이다. 한국에도 히스처럼 북한정권을 위하여 봉사한 고급간첩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는 공산주의자이다" "나는 주사파이다" "나는 빨갱이이다"라고 외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영국 편
◆2016.11.09 거트루드 벨, 영국군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
⊙ 여류 탐험가로 이름 떨쳐… 1차 대전 때에는 영국군 정보장교로 활동
⊙ 이라크 관련 백서 작성, 이라크 국경 획정, 헌법 제정, 국립박물관 설립 등 참여
⊙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중동 지역을 탐험하고 이라크 건국에 기여한 거트루드 벨.
199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보면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던 영국 군인들이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행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 중 한명이 “저 산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자 다른 군인이 “벨의 지도에 길이 나와”라고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벨의 지도는 거트루드 마거릿 로디안 벨(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이 만든 지도를 말한다. 벨은 여자였다. 영국 정보장교로 아랍군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와 싸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여성판, 사막의 여왕 등 다양한 별명을 지닌 벨은 영국이 이라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관리이자, 정보원, 고고학자, 탐험가다.
벨은 1868년 7월 14일 더럼 지방의 워싱턴 뉴 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제철업자이자 자유당 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자본가였다. 할아버지가 준남작(baronet)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아버지가 작위를 세습하였기에 경(sir)으로 불리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런던 퀸스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1888년 20세 때 여성 최초로 현대사를 전공하여 학사 취득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당시 옥스퍼드는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기에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다.
벨은 옥스퍼드를 떠나 당시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벨은 6개월간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후 1892년 주이란 대사로 봉직하고 있던 이모부를 만나기 위해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젊은 외교관 헨리 카더건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였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벨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알프스에 이름을 남기다
▲1900년 레바논 쿠벳 두리스 유적지 앞의 거트루드 벨.
이란에서 귀국한 후 벨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등산을 즐겼는데, 여성 등산복이 없던 시절, 치마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등정을 할 정도였다. 1899년 프랑스 알프스 라메주 정상에 올랐고, 스위스 알프스 엥겔호른 지역 9개 봉우리 중 7개 정상에 올랐다. 그중 봉우리 하나는 벨의 등정을 기념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 ‘거트루드봉’으로 부른다.
벨의 강인함은 1902년 4274m 높이의 핀스터아르호른 등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상을 수백 미터 앞두고 눈보라를 만나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무려 53시간 동안 밧줄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다. 손발에 동상을 입긴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2년 후 마터호른 등반에 성공하였다.
1900년 벨은 다시 중동(中東)을 여행하였다. 테헤란에서 사귄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재 독일 영사의 부인인 니나 로젠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아랍어, 히브리어, 터키어를 공부하였고 승마를 배웠다.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종교를 경멸하였던 그녀는 시리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드루즈 지역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여타 서구인들과 달리 지역민들을 존중하고 아랍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벨은 어려움 없이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6월 영국으로 돌아온 벨은 1903년 인도에 갔다. 훗날 이라크에서 상관으로 모시게 될 퍼시 콕스 영사를 만나게 된다. 콕스로부터 중동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천성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아라비아 반도 여행을 결심한다.
영국군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당시 영국인들은 리처드 버튼 경, 찰스 다우티, 기포드 팔그레이브, 윌프리드 블런트의 아라비아 여행기에 매료되었는데 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벨은 거의 2년에 한 번씩 모두 다섯 차례나 중동을 드나들었다. 고고학에 매료된 벨은 발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꼼꼼하게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죽을 때까지 그녀가 남긴 편지와 일기는 1600여 개, 사진은 7000여 장에 달한다. 이 귀중한 역사자료는 현재 뉴캐슬 대학에서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아라비아 여행을 통해 벨은 믿을 수 있는 아라비스트, 즉 아랍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벨을 스파이로 의심했다. 벨이 험한 곳을 홀로 다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는 무장경비병, 하인, 요리사가 동행하였다. 1914년 벨은 2400km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 사막 지역을 낙타를 타고 탐험하여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장창립자 메달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군은 아라비아를 잘 아는 벨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로써 벨은 영국군이 채용한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가 되어 카이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없지만, 만일 처칠이 성급하고도 무모하게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벨 소령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독일과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한 처칠은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1915년 4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약 9개월간 이스탄불로 진입하는 바닷길인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오스만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벌인 전투는 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남긴 채 영국과 프랑스의 후퇴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벨이 사랑하는 남자 리처드 다우티-와일리 중령이 전사했다. 다우티-와일리 중령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벨은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남았다.
9개국에서 사용하는 아랍 삼색기
▲1921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거트루드 벨, T.E.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만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더라면 영국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대항하라고 아랍인들을 선동하여 규합하는 데 벨이 아랍전문가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무력(無力)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제국 지배 아래에 있던 아랍인들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아랍인들이 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하는 데 선봉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국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영국을 도와 아랍 항쟁을 이끈 히자즈 지방 메카의 아랍 지도자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도 그중 하나였다. 파이살은 12세 아랍 소년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것을 보다 울분을 토하며 튀르크 상관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잔혹함에 분노한 파이살은 영국의 도움으로 반(反)오스만 아랍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랍 항쟁군은 영국인 마크 사이크스가 만들어준 적색, 흰색, 검은색으로 된 삼색기를 들고 싸웠다. 이 깃발은 오늘날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을 포함하여 아랍 9개국의 국기의 바탕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독립국의 범위는 영국의 계획과 달랐다. 아랍 전 지역을 독립국 영토로 생각한 아랍인들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항쟁 이전인 1916년에 러시아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영향권에 둘 지역을 나누어 정하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약’이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국제 공동관리 구역으로 두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그 외 아랍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로 했다. 영국이 아랍인에게 약속한 아랍 독립국은 영국의 힘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정됐으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은 애초부터 제외된 상태였다.
바스라를 거쳐 1917년 바그다드로 돌아온 벨은 총영사로 근무 중이던 콕스를 보좌하여 중동문제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그다드는 벨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벨은 모든 아랍인이 하나가 되는 아랍국을 생각한 적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여러 개의 아랍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사이크스가 프랑스의 피코와 협의한 것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한 셈인데, 정작 사이크스는 벨을 싫어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을 이렇게 평했다.
“오만하고, 과장이 심하고, 밋밋한 가슴을 지녔고, 남자 같고, 세계여행이나 하고 다니고, 엉덩이나 흔들고, 실없는 말이나 하는 바보같이 멍청한 수다쟁이, 이 빌어 처먹을 것!”
그도 그럴 것이 벨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두고 사이크스가 무능하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사이크스는 극심한 반아랍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벨은 사이크스를 1905년 하이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이크스는 아랍인을 “겁 많고 병들고 게으른 동물”로 비유하여 벨을 크게 놀라게 했다. 벨은 사이크스와 달리 아랍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아랍 지역을 여러 국가로 나눴다는 점에서 벨과 사이크스는 초록동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아랍인에 대한 감정은 사뭇 달랐다.
시아와 수니
▲1921년 바스라에 있는 영국대표부에서.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1), 퍼시 콕스(2), 거트루드 벨(3).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예감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가를 세울 것을 계획하였고, 1920년 11월 11일 국제연맹은 영국에 이라크를 보호통치령으로 위임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랍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라크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새로운 이라크는 북부까지 포함한 국가가 되었다.
벨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 지역의 통치자는 수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니를 시아보다 더 문명인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시아는 종교적 광기를 지닌 사람들로 위험하고 전(前)근대적이라고 보았다. 1920년 10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벨은 시아파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행사하여 매 순간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가정해 보신다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황과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단지 바보 같은 노인네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아직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벨은 결론적으로 시아보다 소수인 수니파 무슬림이 실권을 갖는 새로운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수니 무슬림들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神政)국가가 설 것입니다. 이는 진정 사악한 일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다
▲파이살 이라크 국왕(오른쪽에서 두 번째)과의 피크닉에 나선 벨(가운데).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가 문명국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대중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내부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벨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백서(白書)를 쓴 여성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라는 제목의 백서는 당시 런던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소포타미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노력보다 “개가 뒷다리로 섰다”면서 여성이 백서를 썼다는 데 놀라는 언론의 반응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921년 8월 23일 영국 정부는 벨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벨은 새로운 나라 이라크를 위한 헌법을 쓰는 데 일조하면서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국경선을 그었다. 벨은 이라크의 국경을 정할 당시 모습을 1921년 12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무실에서 하일에서 온 신사와 아니자 부족의 지도자 파하드 벡의 도움으로 이라크 남쪽 사막지대 국경선을 그리며 아침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파하드 벡이 사막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다고 믿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콘월리스가 그에게 부족의 경계를 묻자 그는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그녀가 잘 아오’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파하드로부터 아니자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모두 알아내고 하일에서 온 사람에게서는 샴마르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전부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리저리 꽤 합리적으로 국경을 확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2015년 벨의 삶을 영화화한 〈사막의 여왕(Queen of Desert)〉 개봉에 앞서 벨로 열연한 니콜 키드먼은 “벨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을 획정하였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라크를 만들고 아랍인들에게 ‘여왕’으로 불린 벨이 이라크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국립박물관이다. 당시 서구 고고학자들은 중동에서 발굴한 유물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벨은 고고학 유물이 전부 고고학 발굴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법으로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왕에게 간청하여 고대 유물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26년 6월 16일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벨 이후의 이라크
▲1921년 카이로회의. 둘째 줄 왼쪽이 벨(원 안), 앞줄 가운데가 윈스턴 처칠
벨은 1926년 7월 11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살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라크 건국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할 일이 없었고, 1923년 자신의 상관이자 후견인이었던 콕스가 떠난 이후 런던이나 주변의 영국 관료들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우울증을 앓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1년 8월 28일 일기에서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라크를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이라크는 지금 아랍 수니, 아랍 시아, 쿠르드 세 파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 1921년부터 2003년까지 80여 년 동안 이라크는 소수 수니가 다수 시아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벨은 셋 중 둘이 힘을 합하여 하나를 제어하는 영국의 통치 원칙에 충실하였다. 아랍 수니와 쿠르드 수니가 연합하여 수니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아랍 시아를 다스리고, 아랍 수니와 시아가 아랍이라는 이름 아래 힘을 모아 쿠르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아랍이라는 언어적 정체성도 수니와 시아라는 종교적 정체성도 이라크를 평온한 국가로 만들지 못하였다. 이라크 지방과 메카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당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자즈 출신 파이살을 굳이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한 것 또한 패착이었다. 왕정은 1958년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이라크는 벨의 실패작이라기보다는 벨의 말마따나 시민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권력만을 탐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1921년 2월 17일 벨이 파하드 벡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파하드 벡은 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관료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영국과 같다고 생각하나 봅니다만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이 나라는 당신 나라처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벨은 이에 “그래서 저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길 바라는 겁니다”라고 하자 파하드 벡은 “예. 그러나 당신이 돌보아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벨이 옆에서 서서 지켜보겠다고 하자, 영국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한 파하드 벡의 모습에서 스스로 결연한 의지 없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다.
80여 년 동안 권좌를 무력으로 지키다 아랍 시아에 권력을 빼앗긴 아랍 수니가 IS 극단주의자로 되어버린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바그다드의 바브 알-샤르지에 묻혀 있는 벨이 그토록 싫어했던 시아가 장악한 이라크는 어떻게 될까?⊙
[월간조선 2016년 11월호 / 글=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2017.09.15 굴욕도 좋다. 대화·협상으로 평화만은 지키려 했다. 그 결과…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인가” -윈스턴 처칠
굴복·양보로 전쟁 피하려 했던 1938년 체임벌린
히틀러 야욕 키워 1년 만에 2차대전 대참화 터져
‘평화는 평화의지 아닌 전쟁의지로 지킨다’ 교훈
2차대전 이후 평화 수호와 협상장의 금과옥조로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오는 30일로 뮌헨협정(Munich Agreement)이 체결된 지 79주년이 된다. 1938년 9월30일 독일의 뮌헨에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및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합의해 서명한 협정이다. 서명은 4개국이 했지만 내용은 협상장에 초대받지 못한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주데텐란트(독일계 다수 거주지역)를 나치독일에 넘기는 굴욕적인 내용을 담았다.
자정을 넘긴 30일 새벽에 협정문에 서명한 체임벌린 총리는 해가 밝자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은 환영객에게 협정문을 흔들어 보인 다음 자랑스럽게 읽었다. 체임벌린이 이날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다”라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는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불과 20년 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했다.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약소국 희생, 그리고 동맹 배신이란 딱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 부른다. 사실 당시 영국 여론도 이를 지지했다. 체임벌린이 재임중 기사 작위를 받는 첫 총리가 되거나 다음 노벨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줄을 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신국제질서인 ‘베르사유 체제’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36년 3월 독일 서부 라인란트가 첫 목표였다. 철과 석탄이 풍부한 공업지대인 라인란트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군 진입이 허용되지 않은 비무장지대로서 프랑스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병력이 10만 이하로 제한됐으며 대형군함·항공기·전차 보유도 금지됐다. 라인란트 점령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한 일’로 다시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국제사회의 무기력을 확인한 히틀러는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히틀러는 이어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 역시 베르사유 체제가 금지한 것이지만 거리낌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은 휴지가 됐으며 힘과 행동을 수반하지 않은 국제사회의 항의는 무의미했다.
▲뮌헵협정 조인 직후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왼쪽부터)
히틀러는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독일계 주민이 다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내놓고 요구했다. 히틀러는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 등과 여러 차례 대화를 한 끝에 뮌헨에서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고 압박해 이를 얻어냈다. 주권국가 체코슬로바키아는 협상장에 초청받지도 못한 채 영토를 잃어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패싱’이자 강대국들의 ‘뮌헨 배신’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지만 국익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의 어떤 정치인도 자국 젊은이들에게 동맹국을 위해 피를 흘려야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영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만들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생시킨 당사국으로 도덕적인 책무가 있었다. 하지만 동맹이나 도덕은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뮌헨협정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두아르트 베네스 대통령이 항의하자 “영국은 주데텐란트 건으로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잘라말했다. 베네스는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는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참화를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나치 앞에 유화정책으로 일관했다.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only talk, no action) 유화정책은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개입을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던 히틀러의 간만 키워놓았다.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자극했다. 유화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임벌린의 ‘우리 시대의 평화’는 유효기간은 짧았고 대가는 엄청났다. 독일이 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서방세계가 절대 손잡을 수 없다고 믿었던 공산국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함께 침공해 영토를 나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체임벌린은 전시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당이 체임벌린이 주도하는 전시내각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유화정책으로 전쟁을 막을 역사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체임벌린과 같은 보수당 소속인 리오 애머리 의원은 하원에서 체임벌린의 리더십 한계를 지적하는 따끔한 연설을 했다. “전시 상황이 됐으므로 이제 과거의 평화체제를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다. 토론 재능, 상황 파악 능력, 정책의 인기를 내다보는 통찰력, 타협 능력, 심사숙고는 평화시기 지도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품성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에는 치명적이다. 승리의 핵심은 비전·대담함·신속함, 그리고 결정의 지속성이다. 전시에는 이젠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
▲대화를 위해 히틀러와 만나고 있는 네빌 체임벌림 영국 총리(왼쪽).
체임벌린은 그 연설 직후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체임벌린에게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총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인가”라고 쏘아붙였던 윈스턴 처칠이 후임을 맡아 전시 거국내각을 꾸렸다. 처칠은 초지일관 독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바람에 의회에서 뒷전으로 밀렸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도 유화정책을 앞세워 아무런 조치를 취하치 않는 체임벌린에 반발해 외무장관을 사임했던 앤서니 이든도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그는 뮌헨협정 이후 하원에서 "영국이 불명예스럽게 행동했다"라고 비난했다. 그나마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인물이 있었기에 영국은 신속하게 전시 거국내각을 꾸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냉전시기 서방세계는 뮌헨의 교훈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평화는 평화의지가 아닌 전쟁의지로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이다. 싸울 태세가 된 상대에겐 누구도 쉽게 달려들지 못한다. 이런 상대에겐 협상장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은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결성해 집단으로 대응했다. 그결과 소련은 약소국을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됐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해 ‘제2의 체임벌린’으로 비난받고 싶어하는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던 덕분이다. 적대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도 이 교훈을 되새기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며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는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으로 남았다. 북핵 도발로 얼룩진 2017년 9월, 절실하게 되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18.03.29 스파이 독살 시도로 본 영국과 러시아 애증의 역사
영국에서 ‘007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파이 살해 시도 사건이 일어나 떠들썩하다. 그것도 러시아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건이다. 냉전시대 영국 작가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중스파이 독극물 살해 시도가 백주에 터져나왔다고 난리다.
지난 3월 4일 영국 서남부 도시 솔즈베리시에서 66세인 세르게이 빅토르 스크리팔과 딸 율리아 부녀가 슈퍼마켓 앞 의자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행인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둘 다 중태이다. 스크리팔은 러시아 군사정보기관(GRU)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외교관으로 위장한 채 이중스파이로 일했다. 1995년부터 영국 해외정부기관 MI6에 유럽 각국에서 암약 중인 러시아 스파이 명단을 넘겨주다가 2006년 발각되었다. 러시아에서 13년 형을 받고 수형생활을 하던 그는 2010년 미국과 러시아의 스파이 교환 때 풀려나와 그동안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이번 그의 살해 시도에는 독극물이 사용됐는데 러시아에서 1970~1980년대 개발된 ‘노비촉’이라는 엄청난 독성의 군사용 살상 물질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의심의 손가락은 사건 발생 즉시 러시아를 향했다. 영국 정부는 바로 러시아 정부에 전대미문의 강력한 어조로 책임 추궁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극물은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영국이 벌인 자작극이라고 반박하면서 외교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사건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각각 런던과 모스크바대사관의 외교관을 추방했는데 양쪽 모두 23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다. EU 28개국 외상들은 영국의 입장에 ‘무조건의 지지(unqualified solidarity)’를 표명하면서 러시아 정부를 몰아세우는 데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영국에서 이런 식의 러시아 스파이 살해사건이 벌어진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6년에도 러시아에서 망명한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방사성물질인 폴로늄 210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 정보기관 FSB(KGB 후신) 요원이었던 리트비넨코는 러시아의 마피아 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살해에 FSB가 개입됐다고 폭로하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됐었다. 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영국 국적을 획득한 후에도 살해 위협을 늘상 느껴왔다. 그는 “러시아 내에서 일어난 각종 테러 사건이 KGB 자작극이었다”는 등 폭로를 계속하다가 2006년 46세의 나이로 살해당했다.
리트비넨코가 KGB의 자작극이었다고 주장한 테러 사건 중에는 실로 엄청난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1999년 9월 293명이 사망한 모스크바 중심 아파트 폭파 사건, 2002년 모스크바 극장을 체첸반군이 점거해서 850명을 인질로 잡은 뒤 버티다가 결국 170명이 사망한 사건, 2004년 9월 초등학생 777명을 포함한 학생 1100명을 인질로 삼다가 결국 334명이 살해된 배슬란 학교 인질사건, 2006년 체첸반군 관련 기사를 계속 터뜨리면서 푸틴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던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 살해사건 등이다. 이런 사건들이 모두 KGB 자작극이라는 그의 폭로가 진실이라면 푸틴 정부의 운명은 물론 KGB 생존마저 위협받을 만했다. 리트비넨코의 폭로는 서방 언론에서도 집중 보도되었기에 러시아 정부가 그를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살해 현장에서 찾은 방사능물질의 흔적은 전직 KGB 요원 두 명(그중 한 명은 현 러시아 의회의원 안드레이 루가보이)의 신원을 밝혀주었으나 이미 두 명은 러시아로 돌아간 후였다. 당시 영국 언론은 영국 정부가 사건을 추적해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지적했었다. 현 총리인 테레사 메이가 당시 사건 담당인 내무장관이었다는 사실도 최근까지 계속 강조돼왔다.
영·러 비난전
그래서인지 이번 부녀 독극물 살해 시도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언론조차 ‘전대미문(unprecedented·unheard)’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총리를 비롯해 외무장관까지 나서 비외교적 언사를 써가면서 비난전을 벌이고 있다. 메이 총리는 “러시아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결론을 전혀 내릴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면서 24시간 내에 러시아 정부가 입장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증거도 나오기 전에 먼저 단정을 지어버린다(rush ahead of the evidence)”며 메이 총리를 비난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대사를 소환한 자리에서 악수도 하지 않고 바로 “영국 땅 안에서 영국인은 물론 다른 주거인 누구라도 공격을 하는 행위는 도저히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존슨 외무장관은 의회의 한 보고에서 “러시아는 한 번은 ‘독극물 노비촉을 만든 적도 없다’고 하다가 바로 뒤에는 ‘노비촉을 만들긴 했지만 모두 폐기했다’고 말을 바꾸고 또 ‘모든 노비촉을 파괴하긴 했지만 어떤 경로인지 모르게 스웨덴,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미국으로 유출되었다. 심지어는 영국으로도 나갔다’는 말도 안 되는 부인을 계속 해대고 있다”고 비난했다. 거기다가 존슨 장관은 거의 셰익스피어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는 비판도 쏟아냈다. “내 생각에는 진실이라는 바늘을 거짓말과 혼란의 건초더미 속에 집어넣어 숨기려고 하고 있는(conceal the needle of truth in a haystack of lies and obfuscation) 러시아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본다. 12년 전에 알렉산더 리트비넨코를 런던에서 살해한 이후 이제는 누구도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정직을 사회 철학으로 삼고 있는 영국에서는 사적 언쟁에서도 기피 용어인 ‘거짓말’이라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러시아를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는 점잖은 영국 국방장관 가빈 윌리엄슨조차 “러시아는 입 닥치고 꺼져라(Go away and shut up)”라고 거의 욕설을 할 정도이다.
물론 러시아도 가만있지는 않고 있다. 4기 임기를 시작하는 대선에서 압승한 푸틴은 당선 첫 연설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난센스”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국 정부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면서 충분히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일은 비극이지만 만일 두 사람을 오염시킨 독극물이 군사용이라면 분명 두 사람은 즉사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소식을 듣고 든 첫 생각은 만일 독극물이 진짜였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그런 독극물을 가지고 있지 않고 제일 먼저 파괴했다. 러시아 내에서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은 아무도 없고 더군다나 대선과 월드컵이 임박한 지금 그런 일을 감히 할 수 있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러시아 망명자 14명 사인 재조사
러시아 언론들 역시 ‘영국의 자작극’ ‘영국과 러시아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제3국의 행위’ 등의 주장을 내놓고 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지난 20년간 영국에서 죽은 14명의 러시아 망명자들의 사인을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
사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유난히 스파이 사건이 많아 간단하게 서술해도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이다. 위에서 언급한 망명 러시아 스파이 사건 말고도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 사건 등 몇 개가 더 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 러시아 스파이들은 대개 물질적인 대가나 영국으로의 망명을 조건으로 영국을 위해 일한다. 반면 영국인 중 러시아를 위해 일한 스파이들은 대개 사상적으로 경도된 인물이 많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일하는 영국 스파이들은 중산층 지식인 출신 확신범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케임브리지 링 5인(Cambridge Ring Five)’ 사건은 특히 유명하다.
이들 5인은 영국 정보부 소련담당 국장 킴 필비를 비롯해 외교부 미국담당 국장 도널드 매클레인, 워싱턴 영국대사관 이등서기관 가이 버제스, 왕실 미술사가 앤서니 블런트 경, 외교관 존 카이른크로스 등으로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겨 놓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을 배신하고 러시아를 위해 일했다. 이들 중에서도 거의 두목 격인 필비는 한반도와도 얽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워싱턴 영국대사관에 주재할 때 ‘한국전에 중국이 참전하더라도 미국은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정책을 소련에 넘겨준 인물이다. 이로 인해 중국이 마음놓고 한국전에 참전했을지 모른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는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영국대사관 부영사로 있던 MI6 요원 조지 블레이크는 한국전 중 포로가 되어 러시아 스파이가 된 인물이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애증의 관계’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애증의 관계다. 러시아를 유럽의 열강으로 만들고자 1697년부터 2년간 유럽 순방을 한 피터 대제는 항해술, 조선술을 비롯해 많은 지식을 영국에서 습득해 러시아의 선진화를 꾀했다. 10월혁명이 일어난 후인 1921년 레닌 정부와 가장 먼저 통상협약을 맺은 국가도 영국이다. 영국은 1924년 2월 1일 전 세계에서 첫 번째로 소련을 국가로 인정했다.(러시아는 지금도 구소련을 인정한 국가 순서대로 외교관 차량 번호판을 준다. 그래서 영국의 러시아대사관 외교관 차량 번호가 1번이다. 독일, 캐나다, 미국, 일본이 그 다음 순서이고 한국은 124번이다.)
1918년 러시아혁명 때 볼셰비키가 살해한 니콜라이 2세는 영국 왕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전 가족을 살해한 소련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국가로 승인한 셈이니 영국도 별로 할 말은 없다. 니콜라이 2세 부인은 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고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니, 영국 왕가에는 할머니뻘이다. 그래서인지 니콜라이 2세 살해 이후 영국 왕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1994년 10월 27일 국빈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때까지 76년간 러시아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러시아 방문 때 러시아 국민과 언론은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에는 이 방문이 우리가 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는 최고의 인정”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유럽인, 특히 영국인은 1차·2차 대전 때 우방으로 이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러시아를 자신과 동등하게 여겨본 적이 없다. 러시아인을 표현하는 가장 유명한 말은 처칠이 남겼다. 그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의 기운이 유럽 대륙을 휩싸던 때 러시아의 향후 행보를 묻는 질문에 “러시아는 신비 속에 싸여 불가사의 안에 들어앉은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때문인지 “러시아인의 얼굴을 벗기면 바로 타타르인(몽골인)이 나온다(If you scrub any Russian’s face skin enough, you would see a Tatar underneath)”는 말도 듣는다. 영국인들은 러시아인을 비하할 때 이 말을 잘 쓴다.
두 나라 사이의 묘한 관계는 필자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필자는 영국에 주재하던 1984년 한국과 수교도 없던 소련에 자주 출장을 갔었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는 아예 소련에 주재 발령을 받았다. 그때 소련에 살면서 느낀 인상은 한마디로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어떤 잡지에 ‘러시아인은 머리로는 유럽인처럼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동양인처럼 느낀다’고 쓰기도 했다. 필자는 아직도 러시아인을 유럽인처럼 이해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유럽인들도 러시아인을 유럽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럽인들은 러시아 사원과 궁궐의 황금 돔을 보고 환성을 지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들의 문화는 유럽인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유럽의 ‘루소포비아’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 무시’ 심리에는 ‘러시아를 향한 공포’도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루소포비아(Russophobia·러시아 혐오증)’와도 일맥상통한다. 몽골인이 러시아를 거쳐 폴란드까지 무너뜨리고 서유럽을 휩쓸기 직전 유럽인들이 느꼈던 엄청난 공포가 유럽인의 의식 밑바닥에 있다. 그런데 ‘루소포비아’라는 말 역시 유럽인들이 러시아를 유럽의 하나로 보지 않고 동양의 일원, 특히 몽골인의 후예로 여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스스로를 유럽의 일원으로 여기면서 ‘유럽인들의 인정(認定)’에 목말라했다. 피터 대제의 잠행을 통한 유럽 학습과 ‘유럽을 향한 창’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도 결국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구애였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러시아를 결코 동료라고 여기지 않고 무식한 시골뜨기로만 취급했다. 이런 유럽인의 무시를 러시아인이 모를 리 없다. 결국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짝사랑이 반작용을 일으켜 유럽을 향한 호전적이고 도전적인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구소련이 무너지기 전 고르바초프가 유럽순방을 하고 있을 때 세계 언론은 ‘러시아라는 거지가 구걸 다닌다’고 조롱했다. 이때 러시아의 한 역사학자는 ‘이제 유럽제국이 러시아에 진 빚을 내놓을 때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그들로부터 빚을 받아내야 한다’는 글을 썼다. 실제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위기를 세 번에 걸쳐 몸으로 막아냈다. 바로 몽골, 나폴레옹, 히틀러의 침공인데 러시아의 역할이 없었다면 아마 유럽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만일 고르바초프 시절 유럽이 러시아를 조롱하지 않고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진심으로 도와줬더라면 지금과 같은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냉전 2.0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유럽과 러시아의 대치는 유럽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러시아와, 러시아를 몽골과 동일시하면서 유럽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럽과의 밀당으로 이해하면 그림이 그려진다. 러시아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유럽제국을 향한 신경질적인 태도 역시 이해할 법하다. 자신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던 과거 위성국가들이 EU와 NATO 국가가 되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밤잠이 안 올 듯도 하다.
이번 스파이 살해사건을 접한 주위 러시아 지인들의 반응은 양극으로 갈린다. 러시아의 또 다른 시대착오적 실수라는 평과 함께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자작극이라는 평으로 엇갈린다. 이들 중 영국과 미국 기관의 자작극이라고 말한 사람은 런던에 20년 이상 살면서 영국 국적을 획득한 러시아인이다. 러시아 고위 관리를 부인으로 둔 한 지인은 “구미 제국들의 각종 봉쇄로 인한 위기의식으로 러시아인들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필자가 10년간 러시아에서 생활한 경험에 비춰 보면 러시아의 변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러시아 지식인과 기업인들이 요즘에는 술을 자제하고 있고 관공서 공무원들도 주말 근무를 한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출처 | 주간조선 2500호 글 |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일본 편
◆2015.12.31 60년 전 日, 반성은커녕 '이승만 타도' 외쳤다
"한국이 배상을 요구한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민둥산을 녹색으로 만든 것, 철도를 깐 것, 항만을 건설한 것, 수전(水田)을 조성한 것, 대장성의 돈을 매년 1000만~2000만엔이나 갖고 나와 한국 경제를 배양(培養)한 것을 반대 이유로 제출하고, 한국 측 요구와 상쇄할 것이다."
1953년 10월 한·일 회담 당시 일본의 수석 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궤변을 노골적으로 쏟아냈다. 사실상 '일본의 식민 통치를 은혜로 생각하라'는 식의 망발이었다. 이른바 '구보타 망언'이후 4년간 한·일 회담이 중단됐을 만큼 파장이 컸다. 하지만 구보타의 진짜 망언은 그다음에 있었다. 회담 결렬 직후 구보타는 극비 문서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종래의 반일(反日) 사상을 그대로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공개적으로 발표해 자신의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며 '우리(일본) 측으로서는 이승만 타도를 위한 노력을 개시해야 한다'고 썼다.
이 문서는 50여년간 비밀로 분류됐다가 일본 외무성이 2006년부터 한·일 회담 관련 외교 문서를 순차적으로 공개하면서 드러났다. 2010년부터 일본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관련 자료집' 발간 작업에 편집자로 참여했던 이동준 일본 기타큐슈대(北九州大)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대대로 일본 정부의 본심이 과거사 반성보다는 '구보타의 망언'에 가까웠다는 점에 한·일 관계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측 자료집은 지금까지 50권이 발간됐으며, 총 100권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최근 이 자료집에 실린 일본 외교 문서와 일본 외교 대표의 인터뷰·수기(手記)를 추려 '일·한(日·韓) 국교 정상화 교섭의 기록'(삼인출판사)으로 펴냈다.
▲1961년 11월 방일(訪日)한 박정희(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오른쪽) 일본 총리와 만나 양국 현안을 논의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박정희·김종필과 밤샘 술자리서
나는 정신을 잃고 뻗었다
이세키 日 외무성 국장
한국어판으로 1200쪽에 이르는 이 책에 실려 있는 '한·일 회담'의 막후(幕後)는 생생하기 그지없다. 1962년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일본 자민당 부총재는 서울을 방문,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회담을 마친 뒤 용산 안가(安家)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김종필 부장, 오노 부총재, 이세키 유지로 일본 외무성 국장 등 4명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세키 국장은 '오노씨는 혈압도 높고 이런 자리에서 마시고 쓰러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일찍 들어간다고 해 먼저 침실에서 쉬게 했다. 나는 박정희와 김종필 2명을 상대로 마셨다. 두 사람이 술이 강해서 많이 마시게 되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침에 보니 나는 거기서 자고 있었다. 재미있었다'고 자료집에서 회고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전후 김종필 부장의 역할은 논란이 됐다. 김씨의 형인 김종락 당시 한일은행 상무의 '밀사설' 역시 그중 하나다. 김종락씨가 1964년 11월 정일권 당시 총리를 대신해 방일(訪日),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국무대신의 방한을 요청하는 등 '물밑 교섭'에 나섰다는 일본 측 기록이 책에는 실려 있다. 하지만 별도의 창구가 생기자 양국의 공식 외교 라인과 혼선이 생겼다. 결국 김종락씨가 개입했던 '막후 라인'은 서너 달 뒤인 1965년 2~3월쯤 외교 라인으로 단일화됐다. 김종락씨가 막후에서 활동한 건 분명하지만 사실상 '단명(短命)'한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정 총리는 "외무부·농림부 장관과 의논하지 않고 내가 비밀리에 연락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부인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김종락은) 은행의 평이사로 이사장도 될 수 없는 놈이 그런 이야기를 할 리 없다"고 발언한 내용이 일본 외교 문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일본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곧바로 '일·한 국교 정상화 교섭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백서 발간에 착수했다. 이세키 국장 등 한·일 회담을 담당했던 외무성 관료 19명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해서 공식 기록은 물론 일본 측 대표 30여명의 수기·인터뷰 자료를 모두 백서에 담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일 정치인과 외교관만 600여명에 이른다. 한국의 경우 1965년 6월 한·일 협정 체결 직전에 국교 정상화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백서를 발간했지만, 체결 이후에는 한국 대표단의 인터뷰와 수기를 공식 자료로 남긴 적이 없다. 이 교수는 "당시 한·일 회담은 양국의 외교 역량을 모두 동원한 '총력전'이었다"면서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성급하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비판하기에 앞서 과거의 기록부터 치밀하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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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편
◆2015-05-26 덩샤오핑,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결혼 직접 허가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이자 한•중 핑퐁 커플로 유명한 안재형(50)-자오즈민(52)의 아들인 안병훈(24)이 25일(한국시각) 잉글랜드 서리주 웬트워스클럽 웨스트코스(파72·7302야드)에서 막을 내린 유러피언투어(EPGA) 'BMW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슈퍼 루키로 탄생했다.
2009년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역대 최연소 나이(17세)로 우승해 주목을 받았던 안병훈은 2년 뒤 프로로 전향, 유럽 2부 투어 챌린지 투어에서 뛰며 실력을 길러오다 올 시즌 정규 투어에 진입한 후 고대했던 첫 승을 신고했다.
아버지 안재형은 지난해까지 아들의 캐디로 직접 따라다니며 오늘의 성공을 일궜고, 사업가로 변신한 어머니 자오즈민은 모바일 콘텐츠 서비스업체 '옴니텔 차이나'의 대표로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왔다.
안병훈의 이번 우승을 계기로 한•중 커플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덩샤오핑의 허락을 얻기까지의 과정 등 숨은 비화를 소개한다.
8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22년이 되는 날이다. 수천 년간 긴밀한 관계였던 한중 양국은 냉전(冷戰)시대에 관계를 끊었다가 1992년 수교하면서 관계를 복원했다. 지난 22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수교 당시만 해도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대한민국을 선망(羨望)의 눈으로 바라보던 중국은 이제 G2의 한 축(軸)으로 우뚝 섰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으로 한풀 기세가 꺾이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형국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한중수교 과정에서 작은 역할을 했다. 이제 그 이야기의 일부를 공개할까 한다. 새삼 옛날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은 ‘지난날 내가 이런 큰일을 했노라’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중수교 과정을 돌아보노라면 안갯속 같은 동북아(東北亞)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데 참고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대한공론사 홍콩 주재원 시절
나와 중국의 인연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홍콩 주재원이었다. 대한공론사는 영자지(英字紙) 《코리안 리퍼블릭(Korean Republic)》을 발간하던 공보처 산하 기관이었다. 홍콩 주재원은 나를 포함해 두 명이었는데, 《코리안 리퍼블릭》을 보급하고 기사를 쓰는 게 임무였다.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해외 주재원을 둔 것은 그게 최초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서는 ‘코리아’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던 시절이었다. 홍콩에서도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얼마 전 전쟁을 치른 나라 있지 않으냐?”고 하면 그제서야 “아, 한국전쟁(Korean War)”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당시 홍콩에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대공보(大公報)》였고, 다른 하나는 《문회보(文匯報)》였다. 전자(前者)는 정치, 후자(後者)는 경제에 밝았다. 《문회보》의 사장은 주(駐) 이집트 중국대사를 지낸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대공보》의 주필이었다. 부부가 홍콩의 언론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셈이다.
먼저 접촉을 해 온 것은 중국측이었다. 《문회보》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코리안 리퍼블릭》을 30부나 구독해 가더니, 이어 한국의 다른 신문들도 공급해 달라고 했다. 다른 국내 신문을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한국 신문들을 들여다가 그들이 지정하는 홍콩 내 서점을 통해 공급해 주었다. 그 신문들은 《문회보》를 통해 베이징(北京)으로 갔을 것이다.
《문회보》 관계자들과는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자주 만났다. 그들은 특별히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저우 총리는 프랑스 유학을 한 엘리트지만 일본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귀국한 분”이라고 했다. 그들은 “장 선생이 중국에 오면 언제든 저우 총리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도 했다. 6・25 당시 국군 장교로 참전했던 나는 “이보시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중공군과 총을 겨누었던 사람인데 그게 가능하겠소?”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냉전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있던 시절, 홍콩에서의 경험은 내게 중국을 비롯한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생각한다.
세지마 류조의 권유로 중국측과 접촉
이후 나는 1966년 고려합섬을 창업,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우리 회사는 일본의 이토추(伊藤忠)상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토추상사는 우리나라 경제개발 초기에 큰 기여를 했다. 삼성이나 SK 등 굴지의 한국 기업들이 이토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토추상사의 파트너는 간바야시(上林)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부회장을 알게 되었다. 세지마 류조 부회장은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의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주인공 이키 다다시의 모델로 유명한 인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본영(大本營) 작전참모로 태평양전쟁을 기획했고, 전후(戰後)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후에는 이토추상사에 들어가 기업인으로 활약했다.
세지마 류조 부회장과 친해진 나는 해마다 정초면 일본으로 건너가 그와 만났다. 때로는 “일본은 도대체 왜 미국에 대들었느냐?”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당시의 비화(秘話)들을 들려주곤 했다. 1960년대 후반인지, 1970년대 초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박정희(朴正熙) 정권 중반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남을 주선해 준 적도 있다. 세상에서는 세지마 류조와 박정희 대통령의 인연이 박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시작한 걸로 아는데, 잘못된 얘기다.
세지마 류조는 타고난 전략가(戰略家)였다. 국수주의(國粹主義)와도 거리가 멀었다. 아시아 전체를 보면서 아시아 각국이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번영하자는 꿈을 갖고 있었다. 1984년 경,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장 회장, 이제 한국도 중국과 접촉을 갖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어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노선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본은 이미 1972년에 중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한국도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세지마 회장은 그렇게 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토추상사의 중국통(中國通)인 후지노 실장을 소개해 주었다. 후지노 실장은 나를 중국국제우호연락회와 연결해 주었다.
수수께끼의 사나이 金黎 부회장
▲1988년 4월 왕전 중국 국가부주석을 예방했다. 왼쪽부터 나, 왕전 부주석, 진리 국제우호연락회 상근부회장, 웨펑 부회장.
중국국제우호연락회는 미(未)수교 국가와의 교류 등 외국과의 우호증진 활동을 펴는 ‘민간외교’ 담당 기구였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성격상 공산당의 관리하에 있는 단체였다. 이는 이 단체의 역대 회장단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왕전(王震) 당시 국가부주석, 황화(黃華) 전 외교부장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명예회장을 지냈다. 덩샤오핑의 막내딸인 덩용(鄧榕), 중국 군부(軍部) 원로(元老) 예젠잉(葉劍英)의 아들 웨펑(岳楓) 등이 부회장으로 포진해 있었다.
국제우호연락회에는 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옌안(延安) 시절에 마오쩌둥(毛澤東)의 비서를 지냈지만 그때부터 덩샤오핑의 숨은 직계였다는 인물이었다. 머리가 좋고 일본어가 유창했다. 그가 바로 국제우호연락회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진리(金黎) 상근 부회장이었다.
1988년 1월 28일~2월 10일 나는 중국을 방문, 진리 상근부회장, 웨펑 부회장 등과 만났다. 그리고 그해 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리 부회장 등이 한국을 방문했다. 일행 중에는 《문회보》의 기자도 있었는데, 30여 년 전 홍콩에서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진리 부회장 일행의 방한(訪韓) 명분은 서울올림픽 실태를 살펴본다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지하철, 공업단지(공단)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진리 부회장은 전북 군산(群山)에 무척 가 보고 싶어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시 군산에 특별히 그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군산 방문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진 부회장이 그렇게 군산에 가 보고 싶어한 이유는 내게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수수께끼가 어렴풋이나마 풀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진리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말을 토해 냈다고 한다. 바로 한국어였다. 나는 이를 근거로 그가 한국인이었다고 확신한다. 짐작이지만 그는 옌지(延吉), 룽징(龍井) 같은 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마오쩌둥의 비서로, 덩샤오핑의 숨은 측근으로 활약했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자신이 한국인(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던 것 아닐까. 나를 만날 때를 비롯해서 한국인들과 만날 때도 그는 주로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가 1988년 방한했을 때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군산에 가 보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도 그곳이 선대(先代)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덩샤오핑은 진리의 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중수교의 기초공사가 이뤄진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진리 부회장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덩샤오핑에게 대한(對韓)정책과 관련된 종합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내가 사후에 들은 골자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은 성공한 나라다.
둘째, 박정희 대통령은 통제정치와 자유시장경제를 접목(接木)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셋째, 남한은 이제 학생들의 데모나 지하 정치공작 같은 것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중국도 마땅히 남한과 수교하고, 남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톈안먼 사태를 ‘이해’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1989년 6월 중국에서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얼마쯤 지났을 때, 박철언(朴哲彦) 대통령정책보좌관(그해 7월부터 정무장관)이 나를 찾아왔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인척인 그는 당시 북방외교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박 보좌관은 염돈재(廉燉載·전 국정원 1차장)씨와 함께 왔는데, 인상이 좋고 성실해 보였다. 박 보좌관이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덩샤오핑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베이징 시장 등을 통해 루트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안 됐습니다. 회장님께서 중국측에 인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진리・웨펑 부회장을 통해 중국측에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인만큼 덩샤오핑이 직접 봤을 것이다. 그날 저녁 진리 부회장은 노 대통령의 친서 내용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노 대통령은 친서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군대를 동원해서 수습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특수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친선국가들(미국, 일본 등을 의미)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당시는 톈안먼 사태 유혈(流血)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여론이 높을 때였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들어갔고, 중국은 일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그런 시기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 정권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진리 부회장은 “외국의 정상(頂上)이 그런 입장을 밝힌 것은 노 대통령이 유일하다. 덩샤오핑이 친서를 접하고 감격해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결혼 직접 허가
▲중국 국가대표 탁구선수를 지낸 자오즈민(오른쪽)은 1989년 10월 23일 안재형 선수와 함께 입국, 결혼을 발표했다
친서 전달 관련 임무가 끝난 후, 박철언 장관은 내게 다른 문제를 하나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로 중국 국가대표 탁구선수 자오즈민(焦志敏)과 우리나라 국가대표 탁구선수 안재형(安宰亨) 두 사람의 결혼문제였다. 두 사람은 1984년 파키스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사랑을 키워 오고 있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지 여부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과 국교(國交)가 없던 터라 두 사람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탁구 국가대표였던 현정화 선수는 박철언 장관의 사촌처제였다. 현 선수는 박 장관에게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맺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박 장관의 부탁을 받은 나는 진리 부회장에게 부탁했다. 진 부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 부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덩샤오핑이 자오즈민의 결혼을 직접 승인했다는 소식이었다. 자오즈민이 출국(出國)하기 전 진리 부회장은 그녀를 불러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너는 단순히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두 나라 간에 역사적 역할을 하기 위해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오즈민은 그해 10월 22일 안재형 선수와 함께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그해 12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1989년에 내가 박철언 장관과 함께 중국을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자오즈민의 출국 약속을 받아낸 얘기는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박철언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도 이때의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 대통령 친서 전달과 같은 민감한 얘기를 다 털어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박 장관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고록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朴哲彦의 회고
▲1990년 9월 박철언 장관과 함께 웨펑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부회장을 만났다. 왼쪽부터 웨펑 부회장, 나, 박철언 장관.
< (1990년) 4월 26일 일본에 도착한 직후, 오후 2시에 진리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중국국제우호연락회-편집자 주) 부회장을 만났다. 당시 중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 중이던 고려합섬그룹의 장치혁 회장이 적극 주선하였다. 진리 부회장은 장치혁 회장과 특별히 가까운 친분관계가 있는 듯했다. (중략)
나는 진리 부회장과 조속한 한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극비를 전제로 두 가지를 제안했다. 9월에 열리는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노 대통령이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것과 노 대통령이 참석할 경우, 아시아평화와 공동번영을 함께 토의할 수 있도록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이나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와의 회담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책임 있는 당국자와 이 두 가지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6, 7, 8월 중에 나의 중국 방문도 주선해 달라고 했다.
진리 부회장은 “중국방문은 환영합니다. (중략) 나는 최고위층과는 즉각 연결되는 관계이며, 이 제의도 즉각 보고하겠습니다. 5월 중에 장치혁 회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 1차적인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 1990년 6월 10일, 12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신라호텔 1521호에서 서동권 안기부장을 만났다. (중략)
나는 “(전략) 각하의 특별한 지시도 있고 해서, 각하의 베이징 방문과 정상회담의 추진은 이미 진리-장치혁 회장, 리루이환(李瑞環) 정치국 상무위원, 차오스(喬石) 전인대 상무위원장·첸차우 변호사, 이병호 변호사 라인을 통해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 (1990년) 9월 23일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의 진리 부회장과 웨펑 부회장을 만났다. (중략) 나는 “톈지윈 부총리가 선경그룹의 이순석 사장을 통해 우리 부에 알려온 바에 의하면,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와 선경이 통로가 되고, 나와 장치혁 회장이 우호촉진협회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두 개의 통로뿐입니다”라고 정리해 주었다. (중략) 그러자 진리, 웨펑 두 사람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통로가 너무 많아 곤란합니다. 더 이상의 통로는 필요 없다고 노 대통령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우리와 박 장관이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순석, 장치혁 두 통로만 인정하겠습니다. 상부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접촉 라인의 정리를 부탁했다.>
톈지윈 부총리, 92년 1월 韓中수교 의사 밝혀
▲1992년 1월 만난 톈지윈 중국 부총리(오른쪽)는 내게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1991년이 되자 중국측 인사들로부터 “내년에는 한중수교가 꼭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우리나라 관계 요로에 전달했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기부(현 국정원)의 국장은 “한중수교는 아직 요원한 일이니,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92년 1월 23일 웨펑 부회장이 톈지윈(田紀雲) 부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톈 부총리는 “중국 정부는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심했다”면서 “이제부터는 정부 간 접촉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이 사실을 개인 채널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에서조차 이런 상황을 못미더워했다. 안기부 한 모 국장은 “아니다. 한중수교를 하더라도 1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중 양국 간 수교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중국은 국내외에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북한에 대해서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중국측 관계자들에게 “북한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덩샤오핑과 김일성 주석은 서로 존경하는 사이다. 김 주석을 설득할 수 있다”면서 “한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곤 했다.
친북(親北) 성향이 강한 중국 군부를 설득하는 일은 국제우호연락회 명예회장을 지낸 왕전 국가부주석이 맡았다. 당시 중국 군부 내에는 산둥(山東)성 인맥(人脈)이 주류(主流)였는데, 왕 부주석이 바로 그들의 대부(代父)였기 때문이다.
수교과정에서 중국측이 우리나라에 요구한 것은 대만(臺灣)과의 단교(斷交)와, 서울 명동에 있는 주한 대만대사관 건물의 양도 문제였다.
드디어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중수교가 덩샤오핑이 1988년 이후 한국과 수교한다는 기본노선을 설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검토를 거친 끝에 성사되었다는 사실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리 부회장 일행이 방한한 것은 그러한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한중수교에 열심이었던 것은 한국보다는 중국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수교를 성사시킨 것 또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노 대통령을 보좌했던 외교안보 라인도 훌륭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수고를 인정해, 한중수교 후인 1992년 11월 내게 수교훈장 숭례장(崇禮章)을 수여했다.
중국측에서도 한중수교 과정에서 내 역할을 기억해 주고 있다. 덩용 부회장은 2001년 7월 19일 내게 보내온 편지에서 <장 회장님은 선견지명이 탁월하신 분으로, 한중수교 당시에도 노고를 마다않고 전심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장 회장님의 이런 위대한 공적을 중국 인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덩샤오핑, “한국식 모델이 중국 현실에 적합”
▲1992년 9월, 중국 외교의 거두 황화 전 외교부장과 함께. 황 전 부장은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1990년대 내내 한국 등으로부터 경제발전에 필요한 노하우를 배우는 데 주력했다. 나는 생전에 덩샤오핑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지인(知人)들을 통해 그가 평소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나의 메모를 토대로 옮겨 본다.
첫째, 미국·일본의 제도는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정치의 경제화’에 성공했던 한국의 사례다. 우리는 한국식 모델을 택해야 한다.
둘째, 공산주의는 인류가 잘하면 300~400년 후에나 실현될 수 있다.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셋째,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당시 리스린(李士林) 소장 등이 무력(武力)으로 집권하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으나,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무력으로 집권하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전쟁이 터져 중국은 내전(內戰)상태에 빠질 것이다”라고 반대했다. 덩샤오핑이 군부의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이러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군사독재는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넷째, 따라서 중국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전체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결합한 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경제는 평화를 만드는 도구이다.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것은 바로 경제이다. 그러니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부강해져야 한다.
여섯째, 중국 국민은 미국으로부터 앞으로 70년간은 경제운영 기법 등에 대해 배워야 한다. 중국은 주한미군 문제나 한미관계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 한반도 통일 이후 한국은 중립국이 될 수 있겠지만, 그때에도 동북아 안정을 위해 미군의 계속 주둔은 필요하다.
나는 덩샤오핑의 이러한 견해를 ‘위대한 덩샤오핑 노선’이라고 부른다. ‘덩샤오핑 노선’ 가운데 상당 부분은 1988년 방한했던 진리 부회장의 보고서 내용과 통한다. 덩샤오핑은 진리 부회장의 건의를 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특히 한국식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소책자를 제작해 당과 정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배포하고 네 번 이상 읽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성공은 덩샤오핑 노선, 특히 그가 채택한 박정희식 모델의 성공이다. 중국 경제발전 과정에서 동남아(東南亞) 화교(華僑)의 대중(對中) 투자와 싱가포르·홍콩에서 선진적인 무역·금융제도를 배워 온 것도 도움이 되었으나, ‘정치의 경제화’라는 한국의 교훈은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의 이런 노선으로 볼 때, 그가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무력으로 사태를 수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즈양(趙紫陽)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에 호의적이었지만, 덩샤오핑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덩샤오핑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준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가 무척이나 고마웠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베이징에 가 보면, 톈안먼에는 여전히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는 중국이 여전히 공산당이 영도하는 전체주의와 시장경제의 혼합체제를 유지할 것임을 보여준다. 덩샤오핑 노선은 의연히 살아 있는 것이다.
中, 94년 장쩌민 보내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 설득
▲덩용 여사가 내게 보내온 편지. 한중수교 과정에서 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덩샤오핑은 북한에 개혁·개방을 촉구했다. 덩용에 의하면, 1994년 제1차 북핵(北核)위기 당시에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북한으로 보내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도록 김일성을 설득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비록 김일성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1993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는 미국(지미 카터 전 대통령)뿐 아니라 중국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내게 덩용을 통해 덩샤오핑과의 회담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남북관계 개선에 중국이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덩용은 덩샤오핑과 회담에 대해서는 “아버지는 외빈 접견을 안 한 지 이미 2년이 지났으며, 김일성 주석도 불가(不可)하다”고 했다. 남북관계 개선에 중국이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는 그러한 뜻을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보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면서 “중국은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 모두와 좋은 친구이다. 중국은 (양쪽 모두를 설득하기에) 위치가 좋다”고 했다.
덩용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에 대해 얘기해 주기도 했다. “원래 아버지에게는 세 개의 카드가 있었다. 첫째가 후야오방(胡耀邦), 둘째가 자오즈양, 셋째가 장쩌민이었는데, 앞의 두 카드를 다 써 버리는 바람에 장쩌민을 쓰게 된 것이다”라는 얘기였다.
“中, 덩샤오핑 노선으로 복귀할 것”
▲2000년 7월 덩샤오핑의 딸 덩용 여사와 함께.
한중수교 이후 22년 동안 중국이 남북한 관계개선에 얼마나 유익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것이 아니냐, 중국은 왜 북한정권을 지탱해 주고 있느냐 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중국의 국력이 급속히 커 가면서 중국은 대외(對外)관계에서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덩샤오핑이 얘기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시대는 갔고, 이제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중국측 인사는 “무능한 지도자는 아랫사람에게 흔들린다”고 했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지난 13년 동안 북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괴물을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날뛰는 이상한 나라 북한을 만든 것은 과거 중국 지도부였다”고 개탄했다. 그의 말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10년과 덩샤오핑 사후(死後) 3년 동안 중국의 대북(對北)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나에게 들렸다. 그는 “시진핑(習近平)은 훌륭한 지도자”라면서 “시진핑은 덩샤오핑 노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덩샤오핑 노선’이란 멀리 저우언라이-류샤오치(劉少奇)-후야오방-황화로 이어지는 경제중시-온건외교 노선을 말한다. 그는 중국이 대외정책에서 균형을 잡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며, 남북한에 대한 정책도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원래 덩샤오핑·류샤오치 등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을 반대했다. 덩샤오핑은 스탈린의 요구로 마오쩌둥이 한국전 참전을 주장한 결과 수많은 중공군이 전사하고 수 십 년간 중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한국전쟁 때 중국이 먼저 휴전을 제안한 것이나 중국이 미국과의 수교를 꾸준히 갈망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황화는 주 유엔대사로 있으면서 키신저와 상통(相通)하여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성사시킨 바 있다. 덩샤오핑·황화 등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개방과 세계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한중수교도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당장 북한 김정은 정권을 고사(枯死)시키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북한에 공급하는 기름을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서서히 북한의 목을 조일 것이다. 북한을 목졸라 죽이는 수순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북한이 말을 듣게 풀기도 하고 조이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중국식’으로 말이다.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덩샤오핑 시대의 외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가 공존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나는 중국이 균형을 잡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세계화(世界化)’에서 찾고 싶다. 지금 세계는 ‘경제 우선’의 시대이다. ‘정치의 경제화(經濟化)’가 지금 세계의 추세다.
대한민국, 동북아 5强으로 나아가는 길
그런 관점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머리를 써서, 두 나라 중 이리 붙을까 저리 붙을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을 게 없다. 강대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망한 대한제국을 상기하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경제는 우리가 잘만 활용하면 역사상 유례 없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장기적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비록 북한이 지금은 개혁·개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결국은 남북통일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1980년대에 한중관계 개선을 위해 열심히 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미동맹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 한미동맹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고집하면 중국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연히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덩샤오핑 계열의 중국 지도자들도 이런 우리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더 큰 꿈을 꿔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북아 5강의 하나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동북아 4강을 넘어서 5강을 만드는 것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이다. 나는 김영삼 정권 시절 <동북아 4강 시대 소멸과 5강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의견서를 낸 적도 있다.
5강체제 구축으로 가는 길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 내부의 분열이다. 남북간, 동서간, 남녀간, 세대간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지금처럼 갈등하고 대립해서는 지금까지 어렵게 일군 것들마저 다 잃어버릴 수 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독립정신을 얘기할 때 가장 강조한 것도 화합과 단결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가리더십이다. 영화 <명량>이 개봉 12일 만에 관람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왜 그렇게 많은 관객들이 몰렸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국민들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기리는 것은 국민들이 그만큼 비전을 가진 리더십의 부재(不在)와 국가위기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로벌 경쟁시대다. 우리는 비록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지 않고, 인구도 많지 않지만,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얼마든지 있다. 이제 R&D(연구개발)를 넘어 C&D(Connect & Development)의 시대다. 이미 우리는 ICT(정보통신기술) 경영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더해 통일, 유라시아 개발, 해양진출 등은 대한민국에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세계는 중국보다 더 넓다.
동북아 5강 형성을 국가적 비전으로 세우고, 스스로 살아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다. 내가 새삼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이다.
출처 | 월간조선 2014년 9월
◆2016.08.19 패전한 일본군에게 아량을 베푼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 이야기
▲1945년 10월 항복한 일본 천황을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맥아더 사령관.
많은 사람들이 8.15 천황의 담화 방송과 9.2 항복문서 조인식으로 일본의 항복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수도에서 뭐라 그러건 전장(戰場)에서는 총과 대포와 전차와 비행기로 무장한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앙의 명령으로 일사분란하게 무기를 버리고 백기투항한다는 보장은 없다. 현장 지휘자의 독단적 판단으로 무력사용이 얼마든지 가능한 긴장 상태는 항복조인식 이후에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전장의 일본군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킬 때까지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전투지구(戰區)별로 일본군의 완전한 항복 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해 9.2 항복조인식 당일 연합군 사령부는 제1호 일반명령을 발동한다. 일본군대와 일본 지배하의 군대는 즉각 현위치에서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지정하는 미, 영, 소, 중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지휘관에게 무조건 항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同) 명령에서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화태(사할린) 등지의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과 일본 본토, 필리핀 등의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 육군총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중국(만주 제외), 대만, 베트남 북위 16도 이북의 일본군은 중국 전구(戰區)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하였다.
하여튼, 이번에는 중국전구 항복 얘기를 하려고 한다.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항복은 9월 9일 남경(南京)에서 일본측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와 장개석의 위임을 받은 중국전구최고사령관 특별대표 하응흠(何応欽) 사이에 이루어진다.
당시 지나파견군의 중국 전선에서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100만이 넘는 최정예 부대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지는 일이 별로 없고, 점령지 통치에 신경쓰며 버티는 지구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런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인 오카무라에게 항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카무라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사항전하는 것이 신민의 도리임을 주군이 알아달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주전파(主戰派)의 핵심으로 알려지게 된다.
히로히토 천황은 8.15 담화 이후 각 전장의 군지휘부가 항복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황족을 파견하여 이들의 항복을 촉구하였다. 서열상으로는 남방군이나 관동군 사령관이 지나파견군보다 위였으나, 강경파로 알려진 오카무라에게는 히로히토도 배수의 진을 치고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아사카노미야야스히코오(朝香宮鳩彦王) 육군 대장을 특별히 파견하여 항복을 설득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카무라는 천황의 수락 담화가 있은 후, 마음을 고쳐먹어 “承詔必謹(승조필근 : 조칙을 받들어 반드시 섬김)”을 예하 부대에 바로 전달했다고 한다.
오카무라가 항복문서를 제출한 상대인 하응흠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일파였다. 오카무라와는 구면이었다. 1933년 국민당 정권이 공산당 토벌(초공작전)에 전념하기 위해 일본의 만주 기득권을 인정하는 당고협정 체결 당시 하(何)가 중국측 전권대표였고, 오카무라는 일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며 뼈속까지 반공주의자인 하응흠에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는 별개로 공산 세력과의 대결이 더 큰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부대를 검열하는 장개석 총통.
장개석은 8.15 히로히토 천황의 담화가 방송되기 한 시간 전, 당시 수도였던 중경(重慶)에서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전을 맞아 ‘이덕보원(以德報怨)’, 즉 덕(德)으로서 원(怨)을 갚는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다. 일본이 일부 지배층의 잘못으로 전쟁의 길에 들어섰지만,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조속히 일본국민이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일본인들에게 노예적 굴욕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히며, 관대한 대일전후처리 입장을 밝혔다.
장개석은 이처럼 중국내 일본군에 대하여도 동양도의(東洋道義)를 베풀어 승자로서 패자에게 굴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고, 실제 그러한 견지의 처우가 이루어졌다. 오카무라는 항복에 따르는 모든 조치를 성실히 이행했고, 중국측은 일본군에 대해서 비교적 (특히 소련군에 비해서) 예의를 갖추고 가혹하지 않게 전후 조치를 취했다.
오카무라는 남경군사법정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1949년 일본으로 무사 복귀한다. 전선의 지휘관으로 A급 전범으로 처벌될 수는 없으나, 최고사령관이 통상의 전쟁범죄에 대한 B급 전범으로도 처벌받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 하겠으나, 당시 중국 국민당 정권은 민간인 등을 대상으로 잔혹행위를 벌인 악질 일본군에게 사형의 극형을 내려 처벌을 집중시키면서도(사형 149명, 무기징역 83명, 유기징역 272명), 그 범위를 제한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중국 민중의 지지도 얻고 일본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보여주는 식으로 전범재판을 운영하였다.
조선일보 글 |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폴란드 편
◆2017.05.02 나치로 부터 유대인 어린이 2500명의 목숨을 구한 이레나 센들러
From the Nazi death Irena Sendler saved 2,500 Jewish children
▲이레나 센들러 - 1943년 2월
▲이레나 센들러와 나치로 부터 목숨을 구한 유대인 어린이들
▲생전의 이레나 센들러 - 2008년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은 유럽내 유대인 인종말살 정책에 따라 바르샤바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강제수용소에 격리를 시켰다. 당시 바르샤바 시청의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던 센들러는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수용소 내에 장티푸스가 창궐하자 위생검사를 빌미로 2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어린이들을 탈출시켰다.
수용소를 빠져나온 어린이 2500여 명은 이름을 바꿔 폴란드인 가정과 고아원·병원·수녀원 등에 맡겨 학살을 피했다. 센들러는 유대인 아이들이 언젠가는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이들의 본명을 적은 명단을 집에 감춰 뒀다.
2차 세계대전 중반기 근 2년 동안 나치 독일군으로 부터 이레나 센들러가 구출한 유대인 어린이들은 2500명이었다. 이레나 센들러의 작전 코드명은 졸란타였는데 졸란타 작적은 성공적이었다.
1942년 10월 독일 비밀경찰 게쉬타포와 같이 투입된 독일군 병사 11명은 그녀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집안에 숨어 있던 그녀는 2시간후 결국 게쉬타포에게 체포되었다. 이레나 센들러가 나치 경찰에 체포되자 동료 한 명이 명단을 숨겼다.
악명 높은 파위아크 감옥으로 연행된 이레나 센들러는 게슈타포의 모진 고문을 수차례 받았으나 동료와 어린이의 신원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폴란드 저항세력의 노력으로 감옥을 탈출한 센들러는 비밀 명단을 항아리에 넣어 친구의 집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밑에 묻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오스카 쉰들러와는 달리 센들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왔다. 센들러는 2007년 뒤늦게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폴란드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당시 노벨평화상의 유력한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대학살로부터 유대인 어린이 2500명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폴란드의 쉰들러로 알려졌던 이레나 센들러는 2008년 5월 12일 98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작성자: 슈트름게슈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