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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2-2/특별한 흔적들/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깃든 곳, 서대문형무소 - 왕은 무릎을 꿇고… 무능한 정권의 '굴욕'이 서린 곳

상림은내고향 2022. 11. 8. 16:48

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2-2/

◆특별한 흔적들(한국사) - 조선일보

 

★2017.03.01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깃든 곳,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당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는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감옥인 '서대문형무소(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가 있다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대한민국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만든 시설로, 1908년 경성감옥으로 만들어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후 1998년 사적(史蹟) 324호로 지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조선 DB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18541908), 이강년(18581908), 이인영(18671909) 등 후기 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했다. 1908 10월 당시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 폭동죄 44, 강도죄 710, 절도죄 314,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을 세웠다.

 

▲서대문형무소 전경, 서대문형무소 감옥(오른쪽) /조선 DB

 

식민 지배와 저항의 시대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조선인 수용시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18791944), 유관순(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른 것은 잘 알려져있다. 이 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문서로 확인된 것만으로 독립운동가 165명이 숨졌으며,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갖은 핍박과 고문, 사형까지…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형편은 처참했다.

 

▲서대문형무소 /조선 DB

오늘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보면, 일제의 잔혹한 고문 흔적, 사형장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탄 물을 콧속으로 넣었던 물 고문실, 손톱 밑을 날카로운 금속으로 찔렀던 손톱 밑 찌르기 고문 현장 등이 재현돼 있다.

1945
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역사공원으로 조성돼, 독립운동가 기리는 교육현장으로

이곳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곳이다. 1945년 해방 때까지 국권을 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와 1970년대 민주화 인사가 수감되는 등 굴곡을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왼쪽부터) 지하 고문실 전경, 고문실, 벽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1992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8년에는 역사관을 개원하여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역사관은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 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돼 독립정신과 자유·평화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대문독립공원과 역사관을 방문하면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옥사와 작업장과 함께 전시관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김구·안창호·여운형·한용운 등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있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담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다.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한 각종 행사가 열려온 서대문형무소 /조선 DB

역사 반성 없는 일본

과거일본은 식민 지배와 함께 제암리 학살, 731부대 생체 실험, 도쿄 한인 대학살 등 수많은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역사적 사실에도 일본 정부와 일부 우익 세력은 과거사를 부정하고 있다. 한국이 일제의 불의에 항거했던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등의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强占)하에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 시기. 우리 민족의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

 

1904 2, 러시아와 전쟁중이던 일본은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키고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들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1906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펴 외교권을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이어 1907 7월에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또한, 정미 7조약을 강제하여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쥐도록 했으며, 한국인 대신(大臣)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현했다. 또한 '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했으며, 이어 한국군대를 해산하였고, 한·일 경찰관을 통합해 한국 경찰관을 일본 관헌의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마지막 단계로 1910 8 22일 합병조약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식민화 침략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친일파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 내각, 이용구·송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했고, 미국·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한국 병합을 달성한 뒤,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지배를 강행했다.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시대에 따라 다소 정책의 변동이 있었으나, 일관된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固有性) 말살 및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제1기 무단통치 시기(19101919), 2기 문화통치(민족분열통치) 시기(19191931), 3기 민족말살통치(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시기(19311945) 3시기로 구분된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조약이었지만, 일본은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의 동의 없이 강제로 조약을 맺었다. 그 증거로 을사늑약 문서에 제목이 없었고, 고종의 사인이나 옥새가 찍히지 않았으며, 일본 천황의 도장조차 찍히지 않았다. (강제로 맺은 조약이므로 여기서는 '늑약'이라 썼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포츠머스 조약, 일본과 미국 사이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일본과 영국 사이의 제2차 영 · 일 동맹 등으로 일본은 조선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05년 일본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하여 을사늑약 인준을 강요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은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이들을 '을사5'이라고 한다.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대한 제국의 정치·외교권을 행사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1910년 경술국치으로부터 1945년의 광복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의 통치기관.

 

1910 8 29일 경술국치를 단행한 일본은 이로부터 대한제국을 '조선'이라 개칭하고,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했다. 칙령 제319호로 보다 강력한 통치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 설치령을 공포한 데 이어, 그해 9 30일에는 총독부 관제 및 소속관서 관제를 공포하고 10 1일부터 이를 실시했다. 일본 왕의 직속으로서 조선을 통괄하는 조선 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 선임하고,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육·해군의 통솔과 조선방위를 담당했다. 또 모든 정무를 통괄하여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일왕에게 재가를 받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 총독으로는 앞서 통감으로서 경술국치를 성립시켰던 육군 대장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취임해 동화정책을 시정방침의 기본으로 삼고, 민생의 생활개선·식산흥업의 진흥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먼저 치안 확보를 제일의 과제로 삼고 강력한 무단정치로 한민족을 탄압했다.

1918
7월부터 경복궁 구내에 새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여 1926 10월에 대리석 건물의 청사를 완공했다. 일제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때까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탄압과 착취·민족말살 정책의 수행기관으로 존속하다가 1945 8 15일 일제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3·1운동

1919 3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이자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ㆍ천안 아우내ㆍ정주 곽산ㆍ남원 광한루ㆍ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3
·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해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ㆍ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 '흑수선'부터 '밀정'까지

서대문형무소 일대는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도 그 배경이 됐다. '밀정'은 경성과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1920년대 의열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밖에도 '흑수선' '광복절특사' '한반도' '아가씨' 등 수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영화 '밀정', '흑수선', '한반도', '광복절특사' 스틸컷

각종 기관에서 추천하는 여행지로도 꾸준히 소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소개한 '전국 걷기 좋은 길 10'에 포함된 안산 자락길 코스와 함께많은 매체에서 추천한 광복절 기념 여행지에 필수 코스로 등장한다.

 

 

 

■ 내용 참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 북스

 

★04.14 일본의 학살로 참혹했던 그 곳, 제암리

 

제암리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농촌 마을이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두렁바위 또는 제암이라 한데서 '제암()'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3·1운동 이후, 일본 군경이 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어 놓고,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금 이곳에는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과 기념탑, 순국선열합동묘 등이 있다. 1982년에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1985년의 제암리 교회 모습 /조선 DB

 

일제강점기, 민족의 저항과 일본의 보복 만행

 

1919년에 3·1운동과 함께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제암리 일대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발안장날 시위일본 경찰은 총칼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는 등 시위를 계속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본은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했다. 이때 1차 검거반의 보복에서 수촌리·화수리, 2차 검거반의 보복에서 화수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 그리고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방화와 학살 등이 자행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1919 3 31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본이 자행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다. 3 31, 4 5일 발안장날 시위와 4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한 것은 4 13일이었다.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했다.

 

▲일본에 의해 파괴된 제암리 마을(왼쪽), 파괴된 제암리 교회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홈페이지,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1919 4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만세 시위 때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한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잔인하게 희생되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여성들(왼쪽), 제암리 학살사건 사망자 명단 /독립기념관, 연합뉴스

※ 참고
제암리 사건은 제암리·고주리 사건이라 불러야 합당하다.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는 비록 면 단위는 달랐지만 경계를 맞대고 이웃해 있는 마을들로서 발안장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학살만행 또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선상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ㅡ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1970년 일본인들의 모금으로 다시 지어진 제암리 교회(왼쪽), 1982년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_/제암리 3.1순국기념관 홈페이지, 조선 DB

 

유해 발굴과 기념관 건립… 기억하자는 노력

사건 63년이 지난 1982 9 25, 23구의 시체가 발굴되고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유해 발굴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한 달여간 유해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고, 마지막에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해 발굴한 곳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1983년 이곳에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이 들어서며 23인 순국묘지, 23인 상징조각물, 전시관, 시청각 교육실, 제암 교회, 3·1정신교육관, 3·1운동순국기념탑 등이 조성되었다.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왼쪽), 제암리 교회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홈페이지, 조선 DB

기념관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사건이 일어난 제암리 교회 자리에 지어졌다. 이곳은 사진과 증언을 통해 제암리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경기지역과 전국의 만세운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

 

일본의 은폐와 왜곡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을 봤을 때, 신빙성이 부족하다.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대장

 

조직적 은폐 드러난 일본군 사령관 일기(2007년 발견)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공식 명칭은 '조선군') 사령부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을 보여주는 당시 사령관의 일기가 2007년 초에 발견됐다. 일기의 주인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대장이었다발견된 15년분의 일기 등 사료 중에는 독립운동의 진압 실태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회유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당시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우쓰노미야는 1918 7월부터 1920 8월까지 약 2년간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1919 4 15일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그의 일기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둬 놓고 아기까지 죽이고 방화했지만 일본군이 거짓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한다.

우쓰노미야는 그해 4 18일자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한 끝에 '저항을 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앨버트 테일러

3·1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제암리 학살사건 첫 보도한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왼쪽),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씨가 2016 2, 자료 사진을 모은 책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진한 기자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아들 브루스(1919~2015)가 태어난 1919 2 28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다. 당시 의료진은 3·1운동을 앞두고 일본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외국인 병실 침대 밑에 숨겼는데, 마침 앨버트가 이를 보도해 3·1운동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후에도 테일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해 처음으로 보도했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됐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해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했다. 1948 6 29일 미국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유해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학살의 참상, 세계에 알렸던 선교사

 

"나는 강하고 굳센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 ..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로도 유명한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16년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2016년은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던 그는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학살의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해 세계 곳곳에 폭로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인근 건물로 올라가 일본군이 만세를 부르는 한국인을 총·칼로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고, 일본의 고문과 3·1운동에 대한 보복행위를 고발하는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The Massacre of Chai-Amm-Ni)'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 등을 썼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그가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사진들을 비밀리에 해외에 보내 언론에 투고했고,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열망과 일본의 잔혹한 진압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했다.

,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듣고 제암리 현장 답사 후, 캐나다 선교본부에 일본의 만행을 기록한 '꺼지지 않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이라는 298쪽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2부를 작성해 한부는 캐나다로 강제 출국됐을 때 가져갔고, 다른 한 부는 훗날을 위해 세브란스 지하실 바닥에 숨겼다. 일부(15)를 구입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독립선언서, 독립탄원서, 3·1운동 때의 시위 행렬 광경, 감옥 경험담, 일본 경찰에 고문당한 한국인들을 치료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이후, 일본의 살해 위협을 받고 1920년 한국을 떠난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는 내가 죽거든 한국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 4 12일 한국 땅에서 영면,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동상 /연합뉴스

학살 피해자 아들이 제작한 영화 '두렁바위'

▲영화 '두렁바위' 스틸컷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는 제암리 사건으로 숨진 독립운동가 안종후 씨의 아들 고() 동순(1912년생)씨가 1971년부터 2년에 걸쳐 제작했다제작 37년 만인 2009년에 공개된 이 영화는 사실과 허구가 복합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1919 3·1운동을 전후해 화성 제암리의 종교인들과 젊은이들이 벌인 독립운동, 이어지는 일제의 보복, 23인을 교회에 가두고 학살하는 제암리 사건을 1시간여 동안 그리고 있다.

 

기념관에서 열리는 '끝나지 않은 역사'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은 2017 4 15일부터 2018 2 28일까지 제2전시실에서 '한·불·중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어 당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관련 사진과 그림, 서적 등을 소개한다.

전시회에서는 제암·고주리 순국열사 29명 가운데 안종락 선생의 사진 원본과 순국열사의 후손인 故 안용웅 전 유족회장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일본에서 재판을 추진하며 작성한 편지도 볼 수 있다. 편지에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당시 일본군의 안내자였던 사사카와 아들이 재판 청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고 안용웅 회장에게 돈 봉투를 전달했다 거절당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 참고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한국관광공사

 

★06.23  지름 800m… 남도 북도 아닌 일촉즉발의 땅

 

판문점은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에 있어 주로 회담이 개최되는 건물을 포함한 그 주변의 장소를 말한다. 6·25전쟁 때 1951 10월부터 1953 7월까지 UN군과 공산군 간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긴 지름 1km, 짧은 지름 800m인 타원형 구역이며, 한복판에 휴전선이 있다. 남한의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과 북한의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소재한다.


* 판문점은 이 지역의 이름이며 공식명칭은 공동경비구역(JSA)이다.

▲사진=통일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한반도는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됐다. 한반도의 독립은 약속되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남과 북의 분단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래픽=이은경

 

1950.6.25 한반도 역사의 최대 비극

1950 6 25일 새벽 4시경북한의 공격으로 발발(남침)한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자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었다. 한쪽에는 미군과 UN군의 지원을 받는 남한군, 다른 한쪽에는 소련군과 중국군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포진해 거의 전 국토를 교대로 점령했으며 엄청난 규모의 폭탄과 네이팜탄을 투입해 모든 것을 불태웠다. 북한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우리는 미군과 UN군의 도움으로 1950 9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서울을 되찾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 1년 만에 전선은 최초의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1950 10, 6·25전쟁 당시, 38선 넘는 미군 고사포 대대(왼쪽), 1950 8, 6·25전쟁 당시, 영천의 피난민 행렬 모습 /육군 제공

3 1개월 2, 1129일간의 뼈아픈 민족 전쟁

이후 2년 동안 휴전회담이 이루어지면서 1953 7월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현재까지 38선은 휴전선으로 남아 있다. 3 1개월 2일 동안 지속된 이 전쟁으로, 한반도에는 450만 명 이상의 희생자와 수많은 이산가족, 전쟁고아들이 발생했으며 한반도는 황무지처럼 황폐해졌다.

 

▲1953 6·25전쟁 당시, 고지에서 전차사격하는 모습(왼쪽), 1953 6·25전쟁 당시 진지 내 사격하는 8사단 장병 /육군 제공

휴전회담(1951 10월부터 1953 7)이 끝나자, 휴전협정을 위해 약 200평의 목조건물(북한은 이곳을 '평화의 전당'이라 부름)을 마을 부근에 세웠는데, 이곳이 두 번째의 판문점 회담 장소다. 협정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 세번째의 장소이다. 최초의 장소인 널문마을과 두번째 장소인 '평화의 전당'은 지금의 판문점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북한측 비무장지대에 있다.

 

 

지금의 회담장소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으나, 휴전이 장기화면서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 건물로 바뀌게 되었다. '자유의 집'(1965) '판문각'(1968) 등 콘크리트 건물도 세우게 되었다.

1980
년대에 이르러 남북 대화의 빈도가 잦아지자 '평화의 집'(남쪽) '통일각'(북쪽) 등 남북 대화용 건물도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 판문점은 냉전 대결의 산물인 군사정전위원회와 화해·교류협력을 위한 남북대화가 공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JSA 
어느 쪽 영토도 아닌 긴장감 흐르는 그 곳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JSA(공동경비구역 · Joint Security Area)이다. UN 측과 공산 측(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53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 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이다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해당한다.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북한의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개성시로부터는 10Km 떨어져 있다. 판문점은 이 지역의 이름이며, 공식명칭은 공동경비구역이다.

 

평화의 집, 통일각…
회담을 위해 지어진 판문점 내 남북의 건물

판문점 북쪽 지역에 세워진 남북회담 시설용 건물로, 북한이 지난 1985 8월 지하 1, 지상 1층에 연건평 460평 크기로 지었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측의 '자유의 집'과 북측의 '판문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통일각' '판문각' 뒤쪽 1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 지역 '자유의 집' 뒤쪽에 위치한 '평화의 집'에 대응하는 건물이다. 쌍방 대표는 북쪽의 '통일각'과 남쪽의 '평화의 집'을 번갈아가며 회담하는 것이 관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자유의 집, 평화의 집, 판문각, 통일각 /조선DB

 

 DMZ 
국제조약이나 협약에 의해서 무장이 금지된 지역 또는 지대

▲DMZ(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에는 모든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된다. 한국은 휴전협정에 의해서 휴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의 지대가 비무장지대다. 이같은 비무장지대에 관한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서 국제감시단이 파견되는 것이 상례다.

한국에서는 6·25 전쟁 때 UN군과 북한 공산군이 휴전을 전제로 남북 각 2km씩 너비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할 것을 합의하고, 동년 11 27일 확정, 발표했으나 30일 이내로 휴전이 성립되지 않아 무효화되고 말았다. 그 후 1953 7 27일에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며 군사분계선이 확정, 이에 따라 현재의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

 

도끼만행사건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 장교를 도끼로 죽인 사건

1976 8 18일 오전 10 45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 측 제3초소 앞에서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 한국군 장교 1명 사병 4명으로 이루어진 11명의 장병이 한국인 노무자들의 미루나무 가지치기 절단 작업을 호위하던 중 2명의 북한군 장교와 수십 명의 사병이 나타나서 가지치기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도 UN 측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자동차로 증원된 북한군 30여 명이 미리 준비한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러 2명의 미군 장교를 죽였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합동작전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뜻을 스틸웰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UN군은 한국과의 협의 끝에 문제의 미루나무를 8 21일에 잘라버리기로 했다. 미군은 만일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대응해올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국지전 계획을 세워놓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을 끝마쳤다. 이후, 군사정전위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가 도끼만행사건 관련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UN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구두전달로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판문점에 있는 다리로 군사 경계선이 지나는 공동경비구역의 서쪽을 흐르는 사천(砂川)에 놓여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 다리는 원래 널문다리라고 했는데, 1953 7월 휴전협정 조인 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포로 교환을 비롯해,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 등 많은 사건들이 이 다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참전용사
국군·소년병·미군·UN군… 수많은 영웅들

 

 

 

 

 

 

전쟁 시대상 그린 한국 문학

한국 문학에는 전쟁의 시대상을 그린 것들이 많다. 조정래의 대하 장편 소설 '태백산맥'은 해방,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중요시기를 총체적 관점에서 그려낸 명작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한국 아동문학의 고전, 권정생의 '몽실언니' 부터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하근찬의 '수난이대' 등 많은 장단편 문학들이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그리고 있다.

 

 

6·25 전쟁 다룬 수많은 영화, 그 중 판문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고지전' '인천상륙작전' 6·25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그동안 수없이 많았다. 그 중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남북 병사의 총격사건을 추리극 형식으로 그려 흥행했고, 많은 사람에게 판문점에 대해 알게 해준 대표적인 영화다.

 

 

국가적 명소 된 전쟁기념관

개관 23주년을 맞은 전쟁기념관이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에게 인기다. 2015년 세계 최대 여행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가 뽑은 대한민국 명소 1위에 올랐다. 2016년에는 '아시아 랜드마크 톱(top) 25'에 대한민국 최초로 경복궁(20)과 함께 선정(25)됐다.

 

▲캐나다 6·25 참전 용사들이 고왕산(355고지) 전투 기록화를 보고 있다. 이들은 2013 6·25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이 기록화를 만들어 서울 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연간 관람객 200만 명 중 외국인은 10%가량으로 추산된다. 6·25 참전국(16개국)과 의료 지원국(5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다. 전쟁기념관 관계자는 "중국 관광객의 경우 6·25 때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맞서 싸웠다고 으스대는 부류와 6·25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는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 그래픽
이은경, 신현정

■ 참고
국가보훈처
한국관광공사
전쟁기념관
'JSA-
판문점' (이문항, 2001)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김육훈, 2011)

 

★2017.07.24  "배가 고파요"… 눈물과 한(恨) 서린 작은 섬

 

섬의 모양이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軍艦島·군칸지마)'라고 불리며 일본어로는 '하시마(端島)'라고 한다하시마 섬은 본래 현재의 3분의 1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여울이었다. 그 작은 여울과 주위의 암초 등을 1897년에서 1931년까지 6회의 매립 공사를 통해 확장한 것이 현재의 하시마 섬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 면적은 약 6.3ha, 해안선의 전체 길이는 약 1,200m.

 

 

하시마 섬은 189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이 소유하게 됐다. 석탄 채굴을 위한 공사가 진행됐고, 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됐다.

하시마 탄광에서는 좋은 품질의 '강점탄'이 채굴돼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탄광이 전성기를 맞았던 1941년에는 석탄 약 41만 톤을 캐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거주자도 계속 늘어나 1960년에는 인구밀도가 당시 도쿄의 9배나 됐다. 이후, 에너지원이 석유로 전환됨에 따라 1974 1 15일 폐산했는데,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들이 결국 모두 섬을 떠나 무인도가 되었다

 

▲그래픽= 이은경

 

조선인 강제 노역, 탄광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

19세기 후반 일제 강점기, 섬 내부에 개발된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었다.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약 800여 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강제 노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 캡처

 

'감옥섬' '지옥도'라고 
불리던 곳

탄광 안은 매우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나들었다.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며, 가스 폭발 사고에도 노출되었고 공간이 좁아 노동자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곳이었다게다가 작업 도중 해수가 쏟아져 들어오는 혹독한 환경과 노동조건 때문에 일명 '감옥섬'으로도 불렸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하시마 섬의 땅속 1,000m까지 파고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강제 노역을 했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작업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탄광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으며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일본이 하시마 섬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한다는 사실이 한국에는 2012년에야 알려졌다. 국무총리실 산하 민간위원회가 반대 입장을 밝히고 강제징용 사료를 공개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사이 일본은 3,000쪽이 넘는 방대한 보고서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 제출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지난 2014 10월 실사를 거쳐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유산'에 적합 판정을 내렸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인 하시마 섬은 2015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강제노역' 표기 끝까지 거부하던 일본
국제무대서 강제노역 동원 첫 인정

일본은 하시마 섬이 산업혁명 성과를 보여준다고 홍보하면서, 조선인 강제노역과 관련된 사실은 부정하거나 표기를 거부해왔다. 논란이 계속되자 일본은 2015 7 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 회의에서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사실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본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해당 시설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안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일본의 발표 내용은 메이지 산업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결정문에 주석(註釋) 형식으로 포함됐다. 위원회는 또 2017년까지 일본이 해당 시설에 이 같은 조치를 한 뒤 관련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2018년 회의에서 그 이행 상황을 검토하기로 했다.

 

▲조선인 강제징용자 공양탑 가는 길 /다음 스토리펀딩

조선인 강제징용자 공양탑* 폐쇄한 일본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나가사키 시()에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누구나 조선인 강제징용자 공양탑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해왔다.

 

하지만 나가사키 시는 인근 사찰인 금송사가 모든 유골을 이전해 공양탑 밑에는 더 이상 조선인 유골이 없다는 주장만 펼쳤다. 이에 서 교수는 금송사 측에도 연락해 "모든 유골이 다 이전된 게 맞느냐"고 재차 확인했지만, 금송사 측은 "미쓰비시 측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만 답했고, 또 미쓰비시 측에 연락하면 "나가사키 시에서 알지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서 교수는 "다카시마 공양탑 밑에 묻힌 유골 중 군함도(하시마) 탄광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옮겨져 와서 함께 안치되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 이 공양탑은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탄광에서 사고로 죽은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무연고자' 묘지다. 이 곳에 묻힌 사람들은 대부분 하시마 섬에서 목숨을 잃었거나인근에 있는 다카시마 섬의 다카시마 탄광에서 사고로 죽거나 바다에서 조난사고로 사망한 경우다. 특히 하시마 섬에 있던 희생자 유골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각 유골에 사망자의 이름, 출신, 사망원인이 적힌 위패가 사라지게 돼 현재는 누구의 유골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건설된 탄광·항만·제철소 등 23

 

일본 정부는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건설된 탄광·항만·제철소 등 23곳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라 이름 붙이고, 이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하시마 섬이 등재된 2015년까지 14년간 공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ICOMOS에 제출한 보고서만 3,000쪽 분량에 달한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하시마 섬 등 23곳의 유적이 모두 1910년 이전에 건설됐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혁명 성과를 보여준다고 홍보하며 식민지배나 침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해왔다

 

▲그래픽= 신현정

미쓰비시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기업

 

미쓰비시 그룹(三菱グルプ · Mitsubishi Group) 1870년에 창립된 복합기업이다. 현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해체된 '미쓰비시 재벌'의 계보에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미쓰비시항공, 미쓰비시전자, 미쓰비시부동산,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항운, 미쓰비시자동차 등) 재벌의 연장선에 있는 기업 연합 중 가장 결속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조직의 미쓰비시'라고도 불린다.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재벌 그룹이다.

미쓰비시는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기업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군수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연행한 조선인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현재도 극우단체와 정치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극우 언론 '산케이 신문'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성향 왜곡 교과서 '제국주의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후원하고 있다.

현재 한국 강제 노역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미쓰비시는 전쟁 당시 강제 노동에 동원됐던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포로와 가족들에게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오히려 상고장을 내는 등 역사 문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서 등장, 많은 사람들이 알게된 곳

▲MBC 무한도전 캡처

 

지난 2015,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편에서 유재석과 하하 그리고 서경덕 교수가 하시마 섬에 방문한 모습이 방송됐다. 당시 방송에서는 하시마 섬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당시 하시마 섬에서 강제노역했던 할아버지는 "16살 때 끌려왔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옹벽 바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제작진이 "일본이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 섬에?"라고 말하며 복잡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어 눈길을 끌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군함도'

▲/영화 '군함도' 스틸컷과 포스터

 

영화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해저 탄광에서 노동을 착취당한 채 끔찍한 삶을 이어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를 만든 류승완 감독은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이런 일에 대해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사적인 책임감과 무게감보다는 본능적이었다. 그곳에 카메라가 가고 배우들이 가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많은 일들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래서 시작된 영화다"라고 설명했다.

 

★08.14  도심 뒷골목·허름한 건물, 애국자들의 본거지가 있다

 

"국내에는 한 조각의 땅도 확보할 곳이 없고, 국외로 말하자면, 중국의 동삼성(東三省)과 노령 시베리아가 우리 한인 교포들이 가장 번성한 지역이지만 현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며, 또 미국령의 각지는 본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역시 적합한 위치가 아니다. 오직 중국의 상해는 동양의 교통요지로서, 비록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지역보다는 나은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은 1920년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하이에는 외국이 관할하는 조계(租界)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간섭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전국서 모인 사람들

1919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즈음, 상해에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상해에는 300명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기 전 고국을 떠난 이들과 3·1운동의 함성을 들으며 망명을 선택한 이들이 섞여 있었다. 장년층부터 스물이 안 된 앳된 청년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출신지는 서북(평안도·함경도)과 기호(경기도·충청도) 출신이 많았지만 전국에 걸쳤다. 명문 양반과 평민이 뜻을 같이한 동지가 되어 함께 어울렸다. 신분과 지역, 연령, 종교의 차이가 문제 되지 않았다. 망국(亡國)의 비애를 겪으며 독립이란 목표를 함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래픽= 이은경

초기 임시정부를 주도한 지도자는 안창호·이승만·이동휘였다. 안창호는 연통제를 시행하고 특파원을 국내에 파견하는 등 국내 선전 활동과 자금모집을 주도했다. 그가 미주에서 가져온 자금은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는 바탕이 됐다. 통합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서북파의 중심이던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맡았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대미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기호파 명망가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전보와 편지로 정부를 운영했다. 이승만은 1920 12월부터 6개월간 상해에 머물렀지만, 임시정부의 단합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왼쪽)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오른쪽)3·1운동 후 상해·연해주·한성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통합된 직후인 1919 9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안창호, 둘째 줄 오른쪽 끝이 김구. /국가기록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동휘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편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921 1월 국무총리를 사임했다. 임시정부 안에 사회주의 동조자를 확보하려고 한 이동휘와 이승만은 크게 대립했다. 이동휘의 참여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이 공존하는 정부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그의 이탈 이후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좌우합작이 가능했다.

이승만·이동휘·안창호의 세 지도자가 끌던 임시정부는 1921년까지 유지됐다. 이동휘와 안창호가 사임한 뒤에도 여전히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1925 3월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대통령에서 면직됐다. 이렇게 초기 세 지도자는 퇴장했지만, 임시정부는 건재했다.

 

임시정부의 대표 주역들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김구는 이때 경무국장이었다. 그는 내무총장에 취임한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원했다가 일본이나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이 궂은 역할을 5년이나 맡았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의 전원위원장으로 참여했지만, 위임통치 청원안을 제출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다.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도 독립신문 사장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그래픽= 이은경

독립운동 노선 차이와 이념 갈등도…

임시정부는 점차 외교론과 무장투쟁론 같은 독립운동 노선 차이에 따른 대립과, 출신 지역이나 이념에 따른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이나 만주지역의 무장세력을 통괄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자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늘어났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혁과 독립운동의 방침을 통일하자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제기되었는데, 안창호도 이에 호응하여 1921 5월 임시정부를 사임했다.

이후, 일본의 계속된 감시와 탄압으로 독립투사들은 1945 8 15일 광복까지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난징(南京),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충칭(重慶등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노선이나 지역·이념의 차이에 따른 대립과 다툼은 남아 있었으나, 이동녕·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정을 지킨 지도자들의 독립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임시정부를 27년 동안 지켜낼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일대는 상하이 구()도심의 중심 지역으로, 루완구가 2003년부터 재개발 계획을 세웠고 지금은 명품 거리로 탈바꿈했다. 이 일대는 전체 면적이 66000㎡ 전후로 상하이 시내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로 통하는 '신천지(新天地)'가 인접해 있다.


2015년 재개관된 청사, 中정부가 비용 전액 부담

1993·2001년 두 차례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는 지난 2013 6월 한·중 정상회담 당시 우리 측이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새 단장에 들어가 2015 9 4일 재개관했다. 황푸(黃浦)구 마당(馬當) 306()에 위치한 3층짜리 벽돌 연립주택의 길게 이어진 12호 중 4호가 1925년부터 1932년까지 7년간 청사로 사용됐는데, 현재는 4호뿐 아니라 3호와 5호가 전시 공간으로 추가로 사용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 (위 왼쪽, 오른쪽)청사 1층 회의실 모습. 안쪽에는 '한국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 협회'가 기증한 김구 선생의 동상이 전시돼 있다. (아래 왼쪽)청사 1층에 위치한 부엌과 식탁의 모습. (아래 오른쪽)청사 3층에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오종찬 기자

청사는 5호 건물 3층에 '중국의 지원' 코너를 신설하는 등 중국과의 연대(連帶)를 강조했다.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 간 공문뿐 아니라, 공산당과의 공조를 강조한 자료도 이번에 발굴·전시됐다. 중국 '신화일보'에 실린 김구 선생의 '중국 항전과 한국 독립'이라는 글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당·정·군으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고 있다. 한·중 두 민족이 긴밀히 합작하면 일제 도둑(日寇)을 타도하고 중국 항전 승리와 한국 독립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재개관 비용 약 7억 원을 전액 부담했다.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명의로 된 '임시정부 외교 활동을 알리는 성명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사진, 러시아 기자가 촬영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영상도 처음 전시됐다. 국무위원회 회의실로 쓰였던 4호 건물 1층에는 김구 선생의 흉상이 들어섰다. 3호 건물 영상실에 있던 것을 태극기와 함께 재배치한 것이다.

 

3·1 운동

▲화성시 공식 블로그

1919 3 1,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들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후 2, 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만세 삼창을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인근의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이어갔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5월 말까지 전국 218개 군()에서 200만 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번졌다. 지식인·청년·학생·종교인은 물론, 농민·노동자·상인 등 계층을 뛰어넘어 민족 전체가 참가한 운동이었다. 참가자들이 많은 만큼 시위 양상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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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치른 대가는 컸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그해 5월 말까지 3개월간 집회가 1542, 참가자가 2023098, 사망자는 7509, 부상자 15961명이고 46948명이 체포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런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독립신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호(1919.8.2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나라 안팎의 독립투쟁 상황을 보도하는 한편, 사설이나 논설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독립신문은 사장 겸 주필 이광수, 출판부장 주요한, 기자 조동호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창간 직후 주 2~3회 발간됐으나 자금난 등으로 1925년 제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제호도 창간 당시 '독립(獨立)'에서 1919 10 25일부터는 '독립신문'으로, 1924 1 1일자 제169호부터는 다시 ‘독립’으로 변경됐다.

 

독립운동 단체들

▲()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한국광복군. /우리역사넷, 국가 보훈처 공식 블로그 '훈터'

임시정부의 초기 무장 독립투쟁은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측면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구가 1931 10월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잇단 의거로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됐다. 임시정부는 1940 9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임정의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 멕시코 등 해외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지원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

광복을 맞이하자 1945 11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일부

그동안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특히 1969년에 개봉된 영화 '상해 임시정부'는 일제 강점기의 상해를 그리고 있다.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등의 독립투사들의 활동과 일본에 대한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다. 이 밖에도 '아나키스트(2000)', '암살(2015)', '밀정(2016)' 등 최근에도 상해를 배경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개봉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각 영화 스틸컷

 

★09.30  왕은 무릎을 꿇고… 무능한 정권의 '굴욕'이 서린 곳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사진= 남한산성 북문 /박종인 기자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인 성벽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 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었다.

 

한양의 남쪽 지킴이, 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 해동지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시대 한양을 지키는 남쪽 산성이었던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해 1624년에 축성했다.(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의 성터였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 시대에 후금의 위협을 받고 이괄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해 이서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1623년 인조반정
광해군이 지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다

1623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금을 배척하고 명과 친하게 지내는 '배금친명' 정책을 취했다. 또 후금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해 평안북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명나라와 경쟁 관계에 있던 후금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때마침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가 '지금이야말로 조선을 칠 때다.'라며 조선을 칠 것을 부추겼다. 후금은 이러한 것들을 구실 삼아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3만 군사를 앞세운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입했고, 인조는 할 수 없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 인조반정: 1623 4 11(음력 3 12)에 이서ㆍ이귀ㆍ김유 등 서인(西人)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
이괄의 난: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1624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한때 한양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반란군 내부의 분열과 관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관군의 대대적인 진압에서 벗어난 몇몇 반군들은 조선을 떠나 후금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후금에 가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잘못한 일이라며 조선의 상황을 알렸고,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던 후금은 이를 트집 잡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영화 '남한산성' 스킬컷

1636년 한겨울, 47일간 벌어진 병자호란

1636,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중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 태종은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도로 가려 했지만 이미 한양 가까이 밀고 들어온 청군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인조는 한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남한산성에는 50여 일분의 식량과 1 3천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실 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있는 청 태종에게 갔다. 그곳에서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3 9고두'를 해야 했다. 이것을 하다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렇게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냈다.

* 3 9고두: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절하는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청의 인사 방식.

 

* 척화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약을 맺고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팽팽히 대립했다. 결국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한 가운데,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현재, 남한산성 일대는 트래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성남시·하남시·광주시에 걸쳐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에 들머리가 있고 중간중간 거미줄처럼 얽힌 길을 조합하면 다양한 코스로 걸을 수 있다. 성남시 쪽 산기슭까지 지하철이 다니고 산성 안까지 노선버스가 운행해 당일 등산코스로 다니는 등산객들이 많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한산성 동문·서문·북문·남문 /문화재청, 조선 DB,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세계문화유산이 된 산성

2014 6, 카타르 도하에서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렸다40건의 세계유적 심사대상 가운데 세계유산심의위원들은 12번째로 남한산성에 대한 심의를 벌여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내렸다. 심의위원들은 남한산성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고, 서양식 무기에 대응한 다양한 군사 방어기술을 집대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 /문화재청 제공

 

"7~19세기 시대별 산성축성술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유산의 전형"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와 무기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 주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호평했다. 이와 함께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권고했다.

 

남한산성,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삼전도(三田渡)

▲삼전도비(왼쪽)와 삼전도비 동판에 묘사된 삼전도의 치욕(오른쪽) /조선DB

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47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했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했다.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이경석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삼학사(三學士)

▲삼학사전 - 1671(현종 12)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의 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참형 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세 명의 학사(學士)를 가리킨다.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다.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는 청나라와 화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는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를 점했다. 이에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했고, 홍익한 등 세 사람은 척화(斥和)의 주모자로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선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참형 당했다. 조정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 추증(追贈): 관료의 사후에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

 

세계유산

▲유네스코(위쪽)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왼쪽), 해인사 장경판전(오른쪽) /유네스코 홈페이지, 문화재청, 조선DB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1972년부터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으로,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나뉜다.(이 가운데 특별히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은 별도로 지정된다.)

문화유산은 유적·건축물·장소로 구성되는데, 대체로 세계문명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사찰·궁전·주거지 등과 종교 발생지 등이 포함된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세계유산기금(World Heritage Fund)으로부터 기술적·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11건이 문화유산으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1건이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만든 스님들

경북 김천의 비구니 사찰 청암사(주지 상덕 스님)는 남한산성 축성(築城)과 수성(守城)에 얽힌 스님들의 노고를 그린 '남한산성의 소리'를 지난 2015년 완성했다.

 

▲외부 전문가의 도움 없이 애니메이션 ‘남한산성의 소리’를 만든 김천 청암사 비구니 스님들/고운호 기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을 스님들이 지었고, 병자호란과 그 이후에도 270년 동안 스님들이 지켰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불자(佛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쉽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린 거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상덕 스님)

인조 2(1624)에 시작돼 3년간 계속된 남한산성 축성에 조선 조정은 전국의 스님들을 동원했다. 품삯과 식량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공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스님들은 승군으로 동원됐고, 270년간 남한산성 수비에 동원됐다. 주인공 '국행 스님'의 일생에 남한산성의 역사를 오버랩시키는 스토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남한산성, 스님들이 지었다는 아세요?"

 

영화로 만들어진 역사

 

남한산성이 겪은 역사는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2011에 개봉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병자호란 속 남한산성이 등장하고, 이번 10월 개봉 영화는 제목부터 '남한산성'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영화 '최종병기 활' 스틸컷/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