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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중국문화 이야기/ 2014.10.15. 8년 8월 8일 8시 8분 8초 - 중국인의 숫자개념 - 2015.06.30 중국의 팔대 명주(八大名酒) 이야기

상림은내고향 2022. 10. 27. 16:59

◆김성민의 중국문화 이야기

1966년 부산생
중문학 석사

중국문화연구소 소장
중국어 교육 사이트 "김성민의 중국어 세상(www.0487.co.kr)" 대표
소리연 중국민족악기 연구회 이사
부산광역시 명예통역관
동서대학교 창원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외래강사
인터넷 종합 교육 사이트“홍익TV(www.hongiktv.com)”동양학부 전담 강사

영원한 사랑의 연가《첨밀밀》편저(송산출판사)
8822중한사전》편집위원(송산출판사)
HSK 단번에 만점따기》시리즈 번역(송산출판사)
HSK 8급을 잡아라(문법편)(독해편)(종합편)》번역(송산출판사)
등 번역서 다수

2014.10.15. 8 8 8 8 8 8 - 중국인의 숫자개념

▲2008년 8 8일 저녁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성대히 펼쳐진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조선DB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 순간 시간은 2008 8 8일 저녁 8 8 8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왜 이리도 8이라는 숫자에 집착했을까? 나라마다 민족마다 나름대로 미신적 문화가 존재하는데 수리학이 발달했던 중국에서 숫자에 대한 여러 가지 민간적 개념을 발견하기는 쉽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말할 것도 없이 '8'이다. 이는 발음에서부터 생긴 개념인데, 현대 중국어의 팔()은 발음이 발()과 흡사하다. 아마도 근대 이전에는 같은 발음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글자 그대로의 '발달' 외에도 속칭 '인생이 피었다.' '팔자가 피었다.' 내지는 '횡재했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그것이 바로 금전에 밝은 그들이 8이라는 숫자에 주목하는 이유이리라.

 

8888-8888이라는 전화번호가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재수 좋기로 소문난 8이라는 숫자가 여덟 번이나 나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게다가 낙찰된 경매가가 우리 돈 수십 억이 넘어서 다시 한 번 중국인들의 8에 대한 사랑이 증명되는 사건이었다. 그 번호를 낙찰 받은 여행사의 앞으로 사업이 어떠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사업상 비밀일 수도 있겠지만 20년째 중국과 무역을 하는 한 지인은 물건 단가에 개별 단가이든 총액이든 가능하면 8이라는 숫자를 넣으려고 고심을 한다. 금전을 돌리는 사업가로서 8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눈이 반짝이며 운이 따르는 듯한 쾌감을 느끼게 하여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심리적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아마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마디는 '파차이러! (發財了!) - 횡재했네!' 였을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던 그 시각에 8이라는 숫자는 몇 개가 나왔을까? 100분의 1초까지 계산하자면 8번이 되겠지만, 이는 무리수가 있고, 초 단위까지 여섯 번이 나왔다고 함이 통념적일 것이다. '6'이라는 숫자가 바로 중국인들에게는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숫자가 된다. ()의 발음이 유()와 같기 때문이다.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린다.' 내지는 '막힘이 없이 일사천리로 해결된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어 선물용 포장도 6각형이 많고, 차를 마시는 다기의 잔도 6개가 한 세트다.

 

우리네 다기의 잔은 오행을 갖추었다 하여 5개인데 반해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6개의 잔을 사용한다. 홀수는 짝이 맞지 않아 가능한 한 짝수를 선호함도 한몫 했으리라. 우스갯소리지만 다기의 잔이 하나 깨어지면 5개가 되고 짝이 맞지 않아 일부러 하나를 더 깨어 4개를 만들었는데 사()의 발음이 사()와 같아 싫어서 다시 하나를 깨어 3개가 되면 또 짝이 맞지 않아 하나를 떠 깨고 결국 2개의 잔이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짝을 지은 조합에서 6이라는 숫자의 매력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리라.

 

추석이 되면 먹는 월병도 결코 홀수로는 파는 법이 없다. 짝 없이 외로이 달구경을 함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그래서 월병의 포장은 일반적으로 2개 한 세트 혹은 6개가 한 세트가 된다.

 

세 번째로 환영받는 숫자는 예상외로 '9'인데, 양수로서는 의외의 선전이다. ()의 발음은 완벽하게 구()와 같다. '오래간다.' '변치 않는다.' '장수한다.' 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색다른 의미로 환영받는 숫자다. 변함 없이 오래간다는 의미를 부여한 탓에 2009 9 9일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유례 없는 가정법원 공무원들의 밤샘 근무가 있었다. 결혼 신고를 하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특히나 오전 9시와 오후 9시 게다가 한술 더 떠서 9 9초에 맞추어 신고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시간대 웃돈이 붙기도 했다는 사실은 의외이기도 하다. 우리네 아홉수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주지 않는다. 이는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인데 양인 남자가 가장 센 양수인 9를 보면 칼이 칼을 보는 격이라 흉하다 하여 장가도 못 가는 아홉수의 비운이 생긴 것으로, 여자에게는 아홉수 머피의 법칙이 없다. 중국도 고대로부터 음력 9월 초아흐레는 9가 중첩되었다고 중양절이라 부르며 수유를 머리에 꽂고 액을 피하라 했거늘 현대 중국에서는 영원한 사랑과 장수의 상징이 되었다.

  

끝으로 환영받는 숫자는 10이다. 중국어의 '십전십미(十全十美)' '완벽함.' '모든 것을 갖춤.'의 의미로 성공의 정점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인다. 그래서 2009년의 결혼신고 대란을 겪은 가정법원은 2010 10 10일 다시 한번 밀레니엄 주기의 밤샘근무를 해야 했고, 전년보다 더 많은 신혼부부가 혼인신고를 했다.

 

어느 하나 필요 없는 숫자가 있을 수 있으랴. 우리네가 터부시하는 남자의 아홉수 여자의 열수도 중국인들은 색다른 해석으로 행운의 숫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도 다들 싫어하는 죽음의 상징 4라는 숫자가 있다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알아두자. 나쁜 일이 생기고 병이 생기고 고민이 생기면 4라는 숫자를 반복해 쓰는 문화도 있다. 나쁜 고민이 죽어 버리니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숫자가 다 우리네 개개인처럼 쓰일 곳이 있는 법이다. 그래도 4보다는 8이 더 호감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2014.10.21 중국인들에게 절대 선물해서는 안되는 물건은? - 중국인에게 선물하고 뺨 맞고 (1)

중국 현지의 한 공장과 합작 사업을 하던 사람이 현지 공장에 새로 증축한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한국에서 자주 선물하던 방식으로 멋진 벽시계 위에다 한자로 '축 발전' 이란 문구까지 더해서 가져갔다. 선물을 공개하는 그 순간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만 보던 중국 공장 사장의 눈빛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 날로부터 소원해진 두 회사 간의 관계는 결국 계약파기까지 가게 되었다.

 

유학 시절 한 중국 여성을 사귀게 된 남학생이 데이트 도중 길거리 과일상에 파는 배를 하나 사서 한국에서 힘자랑을 하듯 두 조각으로 쪼개어 나누어 먹자고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표정이 어둡고 험악해진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고는 가버리고 두 사람의 애정사는 파국을 맞고 말았다.

 

상기한 예의 두 사람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원망하겠지만, 언어만 배우고 문화를 알지 못한 것이 그 죄목이다. 중국인들과의 교류에서 선물할 일이 있을 때 몇 가지 금기사항을 기억해야 하는데, 첫 번째로 손꼽는 것이 시계를 선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말하는 시계는 중국어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손목시계나 회중시계 등을 '뱌오(錶)'라고 하고 괘종시계나 탁상시계 등을 '()'이라고 부르며 별개의 것으로 본다. 그 중 특히 ''은 결코 선물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끝나다.' '죽다'는 의미로 쓰이는 '()'과 발음이 같기도 하지만 선물한다는 의미의 동사 '()' 이 붙어 '쏭쫑'이라는 말이 임종을 맞아 장례를 치른다는 의미의 '쏭쫑(送終)'과 같기에 가장 금기시되는 행위이다. 종을 치며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준다 하여 벽시계를 종탑의 종과 같은 한자를 쓴 것이니 당연히 종을 선물함은 더 큰 실례다.

 

▲영화 <쿵후 허슬>의 한 장면

 

홍콩 영화 <쿵후 허슬>에서 죽은 주민의 복수를 하고자 범인을 찾아간 부부가 종을 선물로 가져가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너를 죽이려고 왔다.'라는 의미인데 영화도 문화를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법이다.

 

요즘 세상에 괘종시계도 아니고 종을 선물하는 일이 있겠느냐마는 필자가 통역관으로 일할 때 중국 측의 예방이 끝나고 한국 측에서 선물로 '시민의 종'이라는 모형을 내놓았을 때가 생각난다. 아찔하고 당황스러운 순간 중국 측 인사들의 묘하게 변하는 표정은 한국 측이 행한 지금까지의 환대를 모두 무너뜨리는 역전패 점수와 같았다. 수차례에 걸쳐 오해하지 말라며 한국의 문화일 뿐 이 종소리를 들으면 평화가 오고 복이 오며……. 온갖 미사여구로 주절대며 포장해 보았지만, 결코 그 사람들은 밝은 표정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손목시계의 경우는 무난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역시 '위험하다' 가 답이다. 발음이 매춘부를 나타내는 '뱌오(婊)'와 같기 때문인데 특히 여성에게 손목시계의 선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품목이다. 물론 고가의 명품이라면 싫어할 여성이 얼마나 될까마는….

 

과일 선물은 우리나 중국인들이나 자주 하는 것인데 중국인은 과일 중에서 배만은 결코 선물하는 일이 없다. 배는 중국어로 '()'라고 하는데 이 발음은 이별을 나타내는 '()'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배를 나누어 먹거나 선물하면 한 사람이 죽거나 생이별을 한다는 미신 때문에 선물로 적당하지 않으며, 특히나 연인 사이에는 최고의 선물 금기 품목이다.

  

한편의 중국 영화를 감상하던 중 배고픈 두 형제가 어렵게 구해온 배를 나누어 먹는 장면이 있었다. 배경에 깔리는 슬픈 음악에 주목하지 않아도 다음 장면이 충분히 상상이 되는 복선이 아닌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아이고 한 명이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편의 드라마에서는 두 남자 주인공이 처음 만나 배를 먹는 장면이 나오면 드라마 후반에 가서 두 친구가 서로 총구를 겨누는 사이가 되리라는 사실은 드라마 작가가 아니어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사악함을 뜻하는 발음의 신발, 헤어지고 흩어진다는 의미의 우산, 곧 필요 없어 폐기되고 잊힐 것이라는 의미의 부채, 도검류, 잘 깨어지는 거울,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선물해서는 안 되는 거북이 형태의 물건이나 녹색 모자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2014.10.29  중국인들에게 가장 지독한 욕설은? - 중국인에게 선물하고 뺨 맞고 (2)

사람이 2세를 낳으면 자식을 낳았다고 말하고 짐승의 경우에는 새끼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욕을 할 때에 인간비하의 최고 단골 메뉴로 짐승의 2세를 지칭하며 '너는 사람이 아니다'는 주장을 그리도 즐겨 쓰는가 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개가 주로 그 대표선수로 등장하지만, 중국에서는 거북이가 선두 주자이다. 교미대상 무절제 성의 대표로 인식되어 사람의 2세가 아니며 게다가 부모도 알 수 없다는 의미로 하는 욕인데, 심지어 '새끼'라는 용어도 한술 더 떠서 ''이라고 불러 중국 최고의 욕은 '거북이의 알' 이 되었다. 비단 거북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형태의 자라까지도 그 오명을 같이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인에게 선물할 때에 거북이의 형태나 문양은 절대 피함이 좋다. 한국에서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는 갖가지 선물의 형태로 나오는 물품이 많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만 생각해도 이미지가 나쁜 것이 아닐 터인데, 서해를 건너는 순간 신분하락이 처참하기 그지없는 수준에 이른다.

 

한 민간단체가 중국과의 교류방문에 준비해서 간 선물로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길하다고 하여 벽조목으로 만든 거북 목걸이를 상대 회원들에게 나누어 걸어준 일이 있었다. 환영식장에서 줄줄이 나와 목에 거북이를 하나씩 걸어주었으니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상황적 황당 지수가 최고 레벨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목에다 그 치욕의 상징을 두르고 함께 단체 사진을 찍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들이 가관이기도 했겠지만, 애꿎은 통역자만 잠시 행사를 뒤로하고 무대 뒤에서 빌다시피 하며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때 받은 선물을 아직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올인할 자신이 있다

 

물 속을 드나드는 오래된 거북의 등은 이끼가 앉아 마치 녹색의 모자를 쓰고 있는 듯 하다. 힘들었던 근대 초기 수도의 팔대호동(八大胡同)이라 불리는 주택가는 아편굴로 변하고 생존을 위한 사창가가 되었을 때 옆방에서 부인이 벌어오는 아편 값을 기다리는 남정네들은 손님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녹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녹색 모자는 쓰지도 선물하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 현대 중국어의 관용구로도 쓰이는 말이다. 영화의 한 대목을 들어보자 "저 사람 표정이 왜 저리 안 좋아요?" "글쎄 녹색 모자를 썼데요." 무슨 말일까? 바로 '부인이 바람났다'는 말이다.

 

이상의 시계, , 거북 문양, 녹색 모자를 사대 금기품목으로 삼고, 그 외에도 신중을 기해야 할 선물을 알아보면 언어적 발음에서 기인한 물품들이 많은데, 이러한 습관은 일본이 종주국이라 할 수 있다.

 

중국어로 신발은 '시에'라고 하며 한자로는 '()' 자를 쓴다. 이 발음은 사악, 액기 등 나쁜 것의 대명사인 '()' 와 같아서 저주의 선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리고 발음이 헤어지다, 흩어지다, 깨어지다, 망하다 등 '()'을 연상시키는 우산과 부채가 비가 그치면 구석에 내팽개쳐지고, 더위가 가면 잊혀지는 물품이라 하여 인간관계의 악화를 의미하는 선물로 알려져 있다.

 

깨어지기 쉬운 데다 이름도 금하고 꺼린다는 '()'을 연상시키는 '징쯔(鏡子)' 즉 거울을 선물로 고를 때는 조심해야 하겠다. 물론 살상무기인 도검류를 선물하지 않는 것과 초상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국화를 선물하지 않음은 상식으로 알아 둘 일이다.

 

선물 하나 하는데 무슨 이리도 미신적 요소가 많으냐고 반문하며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다. 중국인이 즐겨 쓰는 군모나 길거리에서 파는 인민 모자는 다 녹색이요. 요즈음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너를 보호해 준다는 의미로 우산을 즐겨 선물하고,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는 거울을, 시시각각 당신을 생각해요 라며 손목시계를 선물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문화에서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문화란 알고 이해한 다음의 일탈은 해명과 컨트롤이 되겠지만, 무지로 인한 오해와 모순은 피함이 능사리라.

 

2014.11.02  중국인들에 주는 선물 봉투의 색깔은? - 꼭 알아야 하는 중국인들의 붉은 색 집착 관행

▲2013년 2월 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 본점에서 직원들이‘홍빠오(紅包)’를 들어보이고 있다. 홍빠오는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에 세뱃돈 등을 넣어 선물하는 빨간 봉투. 현대백화점은 춘절 기간 중국인 관광객에게 여권케이스, 커피 쿠폰 등을 넣은 홍빠오를 증정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DB>

 

한 사업가가 중국 거래처 사장의 딸 결혼식에 초대받아 참석한 연회에서 본인이 준비해 간 두둑한 축의금 봉투에 '축 결혼' 이란 문구를 달필로 써서 전해 줄 기회를 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봉투를 보고는 순간 안주머니 속 봉투를 쥐고 꺼내던 동작이 멈칫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내미는 봉투는 하나같이 새빨간 봉투였고 자신만이 한국에서처럼 흰 봉투를 준비해 간 것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서둘러 지인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여 부랴부랴 붉은 봉투로 바꾸어 축의금을 전달했는데, 그 순간 순발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진땀이 흐른다고 한다. 중국에서 휜 봉투에 돈을 넣어 주는 경우는 장례식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남의 성스럽고 기쁜 결혼식에 문화의 무지로 하얀 고춧가루를 뿌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중국인만큼 붉은색을 좋아하는 민족은 드물다. 모든 경사에는 붉은색이 빠질 수 없는데, 결혼식 신부의 의상도 붉은색, 태어난 아이의 속옷도 붉은색, 달걀도 붉은색으로 물들여 기쁨을 표시하고, 축의금이나 세뱃돈도 붉은 봉투에 넣으며 심지어 국기도 붉은색이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혁명과업의 상징인 붉은색은 전진과 투쟁을 표시해야 하는데 교통 신호등이 빨간 불에 멈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여 빨간 불에 운행, 파란 불에 멈춤이라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체계를 만든 적이 있었다.

 

혼란과 사고는 뻔한 일이었고 원래의 체계로 돌아오는데도 오랜 기간 혼란을 겪었었다. 이렇게까지 중국인이 사랑하는 붉은색은 타오르는 불처럼 피어나고 발달하고 흥함을 상징하여 그야말로 중국의 대표색이 되었다. 아마도 중국의 축구가 수준이 상당했다면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는 일찌감치 중국이 선점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좋아하는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면 불길하다는 우리네 통습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붉은색으로 이름 쓰기를 좋아할까? 역시 그네들도 싫어한다 가 정답이다.

 

고대에 학자, 철학가들이 기() 2차원적 평면에 옮길 때 즉 글씨 따위에 기운을 추가하는데 가장 좋은 매개체로 찾아낸 것이 역시 붉은색의 주사(朱砂)이다. 화학적으로는 산화수은인데, 수은이 300년 이상 우주의 정기를 받으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어 글씨를 쓸 때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색상이 변치 않는 최상의 잉크(?)로 여겨져 왔다. 지금은 수은 성분임이 밝혀져 사용되지는 않지만, 한약재로도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 통일 제국을 세운 진나라의 시황제는 도량형, 화폐의 통일 등 많은 개혁과 동시에 유통을 제도화하며 개인적으로 이 붉은 잉크에 반하여 주사를 독점했다. 주사를 이용한 인주도 만들어지고 황제의 인장도 붉게 찍히기 시작한 것이다.

 

시황제의 주사 독점으로 민간에서는 기를 옮겨 적을 차선책의 물품으로 먹을 상용화했다는 설도 있다. 황제의 트레이드마크인 귀한 붉은색으로 사사로이 개인의 이름을 쓰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기에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인데 역사학자도 알기 힘든 상식이라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그만큼 붉은색의 기운을 귀하고 높게 본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예가 아닌가.

 

사형수의 이름을 붉은색으로 표기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 옛날 귀한 주사로 사형수의 이름을 치장해 주었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중국인의 통념 속에 붉은색으로 쓰인 이름은 묘비에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아마도 이승을 떠나서만큼은 황제가 부럽지 않게 붉은색을 만끽하며 내세의 신분상승을 꿈꾼 것이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상상도 해 본다. 주사를 갈아 개어 멋진 글씨로 작품 한 점 써 보려고도 마음먹어 보지만 금값과 맞먹는 주사를 어떻게.....하여 대신 먹을 갈면서 역시 붉은색은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하고 쓴웃음 짓는 게 서민들이 아니었을까?

 

2014.11.19   중국 오성급 호텔은 왜 이빠진 접시를 내는가? - 물진기용(物盡其用)-'모름지기 사물은 그 용도를 다하여 쓸 것이다'

중국을 방문한 한 사업가가 최고급 호텔에 투숙하여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온 그 재수 없고 복이 나간다는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놓는 것이 아닌가.

 

 

이런 최고급 시설에서 이런 서비스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도 않았거니와 기분도 나빠진 그 사람은 종업원에게 접시를 바꿔 달라는 말을 손짓 발짓 섞은 영어로 한참 설명을 하자 영어에 서툰 듯한 그 종업원은 한참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듣고 난 후 본인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갸우뚱거리며 접시를 바꿔 주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라고 새로 내어 온 접시는 본인의 집에서는 화분 밑에나 자리 잡고 있을 듯한 (그조차 도 손님이 볼까 봐 깨진 부분은 항상 뒤로 돌려놓은) 더 흉하게 이가 빠진 접시인 것이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일찍이 빠른 경제 성장기를 거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보통 이 빠진 접시를 주면 본인 비하감에 젖거나 재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던지 만사 조심병과 깔끔병에 빠져 혹시 깨진 조각이 음식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빠진 접시나 그릇은 음식을 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만큼 이 식당이 오래되었고 대대로 고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전통의 점포인 라오쯔하오(老字號)라는 증거의 하나로 생각한다. 역사와 세월의 흔적으로 자랑스러운 것이고, 세척되어 나온 그릇에 음식을 새로 담았으니 깨진 조각이 음식에 들어갔을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슷한 예를 고급 찻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역사를 지닌 고급 찻집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그 할아버지가 와도 내놓지 않는다는 세월이 묻은 오래된 다기를 내어준다. 처음 보는 순간 한국인들에게는 세월의 흔적이라 하기보다는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은 물론이요. 찌든 때와 지저분함으로 점철된 듯한 느낌을 주는 찻잔을 보고 당황하는 사람이 많다. 속으로 혼자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 집 네발 달린 가족도 더 좋은 그릇을 쓰는데… '라고. 사실 오랜 세월 찻물을 부어 닦아내고 색깔이 배어들게 한 그 다기들은 가게의 자부심이요 역사의 증명이니 보통은 진열장 속에서 자태를 뽐내며 휴지기를 맞는 그릇들이다. 그런 그릇을 내어놓으며 손님에 대한 최상의 예우를 했는데, 놀라며 인상 쓰는 이방인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고급 찻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한 외국 유학생이 나름 열심히 한다고 일찍 가게에 나와 자신의 눈에는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그 때 묻은 그릇들을 세제를 부어 수세미로 박박 닦아내어 반짝이는 새 그릇으로 만들어 놓고 칭찬을 기대했다가, 출근한 사장의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간 광기어린 비명과 '거북이', '자라'를 총동원한 욕설을 듣고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 사장은 청천벽력을 맞은 기분이었겠지만 그 외국 유학생의 입장에서도 황당 지수는 디지털로 기록해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문화는 역사와 세월의 명함이라는 이유 말고도 상고시대부터 뿌리내린 '물진기용(物盡其用)'의 사상도 크게 한몫 한 바가 있다. 주나라 건립 이후 기자가 제시한 홍범구주에 나오는 '물진기용'이란 말 그대로 '모름지기 사물은 그 용도를 다하여 쓸 것이다.'라는 의미로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반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접시란 음식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고 이가 좀 빠져도 음식을 담는 데는 아무런 하자가 없으니 계속 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그 시기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겠지만, 현재의 우리네들에게는 아무래도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 이 빠진 그릇을 쓰면 복이 나가는지는 어떤 이론으로 증명될지 궁금하기도 한데, 처음에 이런 문화를 접했던 필자도 적이 놀란 바 있지만, 지금은 친구들과 식당에 앉아 누가 가장 흉하게 깨어진 접시를 받는가 내기하며 걸린 사람은 재수가 좋다고 치하하는 식으로 즐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문화대로 즐기는 것이 진정한 문화 체험이 아니겠는가.

 

 2014.12.09  중국인들이 대화할 때 표창처럼 던지는 것은? - 허공을 가르며 비수처럼 날아오는 담배

 이미지=www.heybrian.com
 

이야기 도중 잠시 침묵이 흐르자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품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내는 사나이... 품속에서 꺼낸 것이 무엇인가 살필 틈도 없이 상대를 향하여 던져 날리는데...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작은 물체.

 

무협 소설 소리비도의 한 대목이 아니다. 중국인과의 대화중이나 식사 중에 자주 등장하는 한순간일 뿐이다. 비수처럼 날아오는 물체의 정체는 바로 담배.

 

중국은 흡연에 있어서는 아직 자유로운 국가 중 하나로 그들에게 담배란 사교 석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흡연의 욕구를 느낀 사람이 자신의 담배를 꺼내어 붙이는 단순한 동작이 매우 복잡해지는데, 상대방에게 먼저 담배를 권하지 않고 피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전에 좌중의 사람들에게 먼저 담배를 권함이 오랜 세월 배어있는 생활 습관이다. 만나서 처음 인사 할 때는 물론이요 대화중에도, 차를 마시다가도, 주석에서도, 식사 중에도, 회의 중에도, 상담 중에도, 잠시 쉼표가 등장하면 으레 등장하는 최상의 분위기 전환 도구가 바로 이 담배인데, 거의 악수하듯 담배를 권하는 일이 많다 보니 금연 중인 사람의 중국 출장은 뼈를 깎는 지옥훈련이라는 농담도 나왔다.

 

한 술자리를 예로 들면 좌중에 흡연자 5명이 본인의 흡연 욕구가 동할 때마다 나머지 네 사람에게 먼저 담배를 돌려 권하고 피워야 하니 한 번의 흡연에 5개피의 담배가 소요된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흡연 시에 돌아가며 권하니 상관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권하는 담배를 피우다 보면 흡연량이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흡연량을 물어보면 이상한 대답을 자주 듣는다. “하루 세 갑 피우는데 두 갑을 제가 피워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머지 한 갑은 접대용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답게 담배의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저가형도 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 담배가 수두룩한 곳이 중국이다. 한 갑에 한화로 10만 원 이상이나 하는 담배도 있으니 상대방에게 마구 권하기가 정말 손 떨릴 일이다. 그래서 많은 중국인이 담배를 자주 선물로 주는데, 이를 받은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담배를 선물로 주다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담배를 선물한 마음을 먼저 이해하면 자신에 대한 예의 지수가 달라 보인다. 물론 가격을 알고 나면 지수가 상한가로 더 치솟겠지만.

 

식당 같은 곳에서 자리를 잡아 앉고 나서 바로 담뱃갑을 올려놓는 사람들을 쉬이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자신 있는 명품 핸드백의 역할을 함이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지위를 추측하게 하는 명함이 되기도 한다. 철 지난 이야기이지만 청탁을 목적으로 담배를 두 보루 정도 선물한 것을 보고 뇌물로 생각하여 추궁을 해도, 단지 소소한 담배 선물을 한 것뿐인데 왜 그러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실물은 그러한데 가격 상으로는 기백 만원이 전해진 것이니 이를 어찌하랴. 그래서 한때는 뇌물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었던 존재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허물없는 친구사이도 아닌데 표창처럼 담배를 던져 주는 것만은 익숙해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거래처를 방문해 칙사대접을 받는 분위기 속에서 느닷없는 담배 표창을 받으면 보통 아연실색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날아오는 표창을 어찌 손으로 받아내랴 십중팔구 표적 주위를 때리고 떨어진 담배는 바닥을 구르게 마련이고, 바닥에 떨어진 놈을 집어 털어내고 입에 물려니 애물단지 같아 보임은 당연지사요, 체면이 씹다 버린 껌처럼 구겨지는 순간이다.

 

그들 생활문화의 한 부분이라 이해하기에는 유가 사상에 오랜 세월 절어온 우리네들에겐 힘든 부분인데, 알아두고 대처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으려면 날아오는 잔돈들을 받아내는 신기가 필요했다. 어찌 그리 돈들을 던져대는지. 한 외국의 국가원수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영부인이 쇼핑하던 도중 던져주는 거스름돈을 보고 항의를 하며 외교 문제로 커질 뻔한 사건도 있었다. 많은 노력을 거쳐 지금은 거스름돈을 던져주던 문화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데 담배만은 아직도 무협세상 속 암기들처럼 날아다닌다.

 

뭐 어떠랴 문화가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있나. 그들이 활을 잘 쏘는 동이족이라 지칭한 민족인데, 화살의 속도를 표창이 따라잡을 수야 있으랴. 고대의 궁술도 최고지만 현대의 양궁도 종주국이 우리인데 비수같이 날아오는 작은 원통형 표창을 번개처럼 낚아채는 기술이야 금방 익혀낸다. 다음번엔 나도 활로 쏘듯 날려주마 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간단한 중국어 한마디 익혀둠이 아닐까? 시에시에 워부처우 (감사합니다만 저는 담배를 안 피워요) 라고 말이다.

 

2014.12.24   중국에 갈 때 '부사장'이 돼야 하는 이유는? - 우리나라 과장 부장 전무 상무에 해당하는 모두가 부사장이라는...

 중국인들과 사업을 하려면 명함에 직책명을 부사장쯤으로 상향하는 것도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업무차 중국으로 출장을 간 한 사람의 예를 보자.

 

현지 회사나 기관의 중국 측 담당자가 친히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서 자신을 부사장이라고 소개하고는 따뜻한 환대를 해 주어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2인자인 고위직 사람이 친히 나와서 환영을 해 주니 어찌 으쓱해지지 않으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회의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른 아침 방문한 회사에서 실무자가 나와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며 자신을 소개하기를 부사장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어제 마중을 나온 사람은 도대체...

 

혹시 놀랄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기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진짜 부사장이란 말인가? 또다시 한 사람이 등장하자 모두 그에게 사장님 하며 인사를 한다. 오호라 드디어 실세의 등장이구나 하고 성의를 다해 악수하고 명함을 주고받는데 이게 웬일 명함 위에는 분명히 부사장이라고 쓰여 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에 명함을 받은 진짜(?) 부사장을 쳐다보는데 그저 무덤덤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고, 설상가상 주위의 직원들이 그에게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사실 마중을 나온 사람부터 세 사람 모두가 부사장이다. 중국에서는 한 기관이나 단체 내에 자가 붙은 직함이 많다. 회사의 경우 사장 밑에 부사장이 5명이면 별로 큰 회사 축에 들지도 못한다.

 

가내 수공업을 하는 2인 회사의 경우를 보자. 사장 1명과 직원 1? 아니다. 사장 1명과 부사장 1명이 정답이다. 3인 회사의 경우는 사장 1명과 부사장 2명이 일반적이다. 웬만한 시청에는 1명의 시장 밑에 부시장이 10인 이상 되는 곳도 많고, 대사관 영사관에도 부영사가 10명이면 많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딜 가나 부사장이 한사람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직제는 일본식 계장 과장 부장... 으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단계를 이루고 있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답게 부서의 분할이 심하지 않고 아직 모두가 노동인민이라는 개념이 남아있어 소위 상사라는 직책의 사람들은 대부분 부사장이라는 그럴싸한 직책을 달게 된다. 각 부서의 장이 부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되니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 회사의 과장 부장 전무 상무에 해당하는 모두가 부사장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사장이 몇이나 될지. 아무리 많아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직함에 대한 과시욕으로 인해 그러하다는 말도 많다. 그래서 필자가 아는 한 무역업을 하는 지인은 국내용 명함과 중국 출장용 명함을 따로 가지고 있다. 국내용에는 과장 이라고 적혀 있지만, 중국 출장용에는 부사장이라 적혀 있어 출장 갈 때마다 초고속 승진의 쾌감을 맛본다. 거래처 간에 피 말리는 흥정이 오가는데 상대 선수의 체급이 헤비급이라 밴텀급으로 맞상대하려니 기죽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실 상대의 실 체급은 주니어급인 경우도 많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데 부사장 대 과장이면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기가 죽을 판이 되니 어찌 큰소리치며 좋은 거래조건을 쟁취하겠는가.

 

중국어로 사장이란 직함은 쫑징리(總經理)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을 앞에 붙여 이사장의 경우 간단히 리쫑(李總)이라 부른다. 그런데 부사장의 경우... 아니 부사장들의 경우도 모두 성과 총 자를 붙여 양쫑(楊總)-양 사장 왕쫑(王總)-왕 사장 불리고, 심지어는 팀장 내지는 조수격인 쭈리(助理) 나 줄반장만 해도 으로 불리니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저 인사격 호칭으로 장기 두는 영감님들끼리 김 사장 이사장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되어버려 사람들의 호칭을 듣고서 진짜 사장을 찾아내기란 쌀가마니 속에 섞여 들어간 찹쌀 골라내기와 같다.

 

서열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그 많은 부사장 속에서 서열의 고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석에서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문서 상의 명단순서나 공석에서의 좌석 위치로 대강의 순차 판단이 가능할 뿐이다. 앞에 자가 붙은 수장들이 많은 나라. 모두가 사장으로 불리는 나라. 사장이 꿈인 사람은 중국을 가보라. 점심 회식 책임자만 되어도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한때 필자도 단지 취미생활 동호회에서 회장도 아닌 기수 반장이란 말 한번 했다가 여태껏 진쫑(金總) 김 사장으로 불리고 있다.

 

2014.12.30 역사가 놓친 중국의 무릉도원 파촉(巴蜀)

▲사천성 아미산(四川省 峨眉山)/ 이미지 출처=바이두

 

중국은 행정구역을

() 단위로 나뉘는데 23개의 성(타이완을 포함해서) 중에서 정말 특이한 지역으로 쓰촨을 손꼽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사천요리로 인해 어느 정도 일반적인 인지도만 지닌 곳인데, 민족이나 문화의 이질적 측면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아야 할 지역이라는 것이다. 쓰촨 지역은 지금의 쓰촨 일대를 촉(), 지금의 충칭시 일대를 파()라 하여 파촉이라는 명칭으로 불려 왔는데, 험난한 분지 형태로 인해 과거에는 외부로부터의 교통편이 아주 열악했었다. 오죽했으면 육지 속의 섬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시선(詩仙)이라 불린 이백은 그의 시 <촉도난(蜀道難)>에서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험난하여라.라고 읊지 않았던가. 그 험난함과 격리성은 유배지로 이용되어 초 패왕 항우는 유방을 촉에 몰아넣고 발을 묶었었다. 그 험하디험한 잔도를 타고 나와 진공 해오리라고는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으리만큼 험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안사의 난에 당나라 현종은 촉을 피난처로 이용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가 되기도 했기에.

 

쓰촨 성은 중국의 23개 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충칭을 포함하면 1억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니 웬만한 나라 하나와 맞먹고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크기 또한 우리나라의 다섯 배나 되며 가장 많은 종류의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한 고조 유방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기에 삼국시대 한 왕실의 후손인 유비는 이곳에 촉한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삼국정립의 한 발이 되었던 곳이다. 실크로드로부터 전해지는 서역의 문화와 설산을 넘어들어오는 티베트 지역의 문화를 받아 가장 먼저 불교가 유입된 지역이고, 그 이전에 도교의 본거지격이었던 온갖 전설과 로망이 가득 찬 땅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대 역사상에는 그 험난한 지역적 고립성 때문인지 기재된 바가 별로 없는데, 2000년에 부동산 개발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던 중 고대 문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유물들이 고대 은허 유적의 것을 앞선다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에 쓰촨 지역을 추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역사책을 새로 편찬해야 할 판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네 개의 큰 강이 교차하는 곳이라 하여 사천이라 하였으니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5대 강 유역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그만큼 미지의 땅이었다는 말이다.

 

1970년대에 아무도 살지 않고 발을 들인 적도 없는 미개척지에서 벌목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해발 3000m 고도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엄청난 규모의 부락을 꾸미고 살아오던 그들은 그 어느 역사에도 등장하지 않았기에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몇천 년간 외지인을 들이지 않았던 그 아름다운 지역이 지금은 구채구 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고, 전설 속의 무릉도원과도 같은 그 매력은 수많은 영화제작자의 힘을 빌려 오색찬란하게 비치는 맑은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협객들도 스크린을 통해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지역의 독자적 문화 또한 여타 어느 지역에도 뒤지지 않는다. 베이징에서만 행해지던 경극의 역사는 몇백 년에 불과하지만, 쓰촨의 천극은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다. 게다가 영웅호걸 시인 묵객들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문학만 예로 들어봐도 시선 이백의 고향이요, 시성 두보가 초당을 짓고 시를 쓰던 곳이요, 중국 최고의 문인 팔방미인 소동파의 고향이며, 여류시인 설도, 혁신 시인 백거이 등의 활동무대가 쓰촨이다.

 

중국은 동서 문제라는 큰 숙제를 안고 있다. 발달하고 경제적 부를 누리는 동부와 열악한 환경의 서부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문제 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지역이 대부분 동부 연안에 위치하기에 우리에게도 실제적으로는 조금 생소한 지역이지만 4대 시 중 동부의 베이징 상하이 톈진 과 함께 충칭은 든든히 서부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지진으로 인한 큰 비극을 겪었던 땅이지만 고대 역사가 놓친 전설의 무릉도원답게 다시 일어서 대륙 서부지역의 주인공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2015.01.05   요절복통! 중국 한글 간판들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기 직전 1987년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았을 때 여권의 첫 장에는 이렇게 기재가 되어 있었다.

 

위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해외의 출입을 허락한다. 단 다음의 대상국가는 제외한다. 대상국가 1.북한 2.중공 ....

 

우리나라가 중국과 국교를 맺은 것이 1992년이니 양국의 교류 역사는 그리 길지가 않다. 필자의 학창시절 중국이라는 국명이 없었었다. 당시는 보도자료 조차도 중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불렀고, 그 중공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간략형이라기 보다는 중국 공산당의 축약식 표현처럼 느껴졌고, 중국이라고 하면 당시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의 타이완을 지칭하는 말로 알았었다. 중국어를 공부하던 시절 평생가도 만리장성을 실제로 볼 수는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세계정세의 변화가 이리도 창해상전이다.

 

국교수립의 기간이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서로 간에 많은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국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 이제 중국 어디를 가나 한국어로 된 안내문이나 표지판을 쉽게 볼 수 있어 가까워진 양국관계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초기의 한글 표지판들은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들 계실까.

 

1996년 유학 중인 후배를 찾아간 학교에서 교실 구경을 하던 중 벽에 한국어로 붙어 있는 놀라운 글을 발견했다.

 

수업 중 모이를 먹지 마시오

 이게 무슨……. 학생들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렇지 졸지에 모두가 새나 닭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복도에 붙어있는 끌신을 끌지 마시오.라는 문구는 다시 통역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전설의 고향이 되어 어디 그런 글이 있을까만 그 당시는 정말 곳곳에서 이런 코미디를 발견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 한국사람의 출입이 동부에 비해서 비교적 적은 서쪽 내륙을 방문했는데, 마치 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한 문구들이 곳곳에서 대거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화장실이 분명한데 한국어로는 욕실 이라 적혀있으니 이를 어찌하랴 옷을 벗고 들어가야 할지.

 

 

 

▼나가는 출구를 나타내는 표지판에는 당당히 한글로 수출이라고 적혀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럼 입구는 수입인가?

 

 

▼계단을 조심해라고 반말로 이야기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통해 마시오는 역시 재통역 수준으로 보인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라 이제 어느 정도 반말에 익숙해지려는데, 자세히 보니 일본어가 가관이라 아무리 번역해 봐도 조심해서 미끄러져라 로 보인다.

 

 

▼‘애림 방화 각자 책임이 있다. 네네 잘 알겠습니다만 방화는 불내는 걸로 들리는데 어떡하나요.

 

 

▼‘조심해. 물에 빠진 도치법으로 강조를 한 것일까? 새로운 축약형 문구일까?

 

 

▼경탄케 할 만한 절경인가 본데 한곳에는 기상천외다. 또 한 곳에는 큼직 이라고 했으니 경치보다 안내 문구가 더 볼거리다. 세속의 먼지 홍진을 씻어준다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빨다 먼지 라고 소개하면 너무 격이 떨어지는 것 같잖아요.

 

 

▼구천 폭포 라고 해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명칭인데 굳이 아흐레 폭포라고 할 것까지야

 

 

▼마치 시를 읊는 듯한 소개 글은 분위기가 더 있어 보이기도 한데….

 

너무나 넓고 광활한 대륙, 이런 벽지 산간의 코미디 문구도 눈 깜짝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베이징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한국어 안내 표지판으로 바뀔 것은 분명한데, 서툰 안내 문구가 왠지 더 호감 가고 친근감이 있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래도 한국어가 당당히 적혀있는 사실이 양국의 가까워진 관계를 실감하게 하는 건 아닐까. 이 또한 추억거리라 훗날 그 시절 그랬지 하며 미소 지을 한담 거리로 남겨본다. 웃지 마라. 바꿔 빠르게  

 

2015.01.10  중국에서 남파와 북파의 차이는? - 친링산맥과 그 연장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은 문화가 사뭇 다르다

▲중국 북쪽의 만리장성과 남쪽의 운하.

 

사람들은 필자에게 중국에 관한 많은 질문을 하는데 모두가 중국 사람들은 그런다면서요 중국에서는 그런 습관이 있다던데…. 식으로 단답형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은 단답형으로 설명되는 문화 풍습 습관이 드물다.

 

첫 번째로는 대륙의 크기 때문인데, 대한민국 경내 땅의 백배에 달하는 큰 나라다. 유럽을 하나의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을 수는 없는 일과도 비슷하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같은 문화 풍습을 가진 나라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만큼 중국이 크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 마치 다른 나라를 보는 것처럼 또 다른 문화의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는 민족 구성원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그러하다.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민족 체제를 실감 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중국에는 주 구성원인 한족(漢族) 외에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살아 모두 56개 민족이 함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민족이 다른데 어찌 그 문화와 관습이 같을까. 간단히 조선족의 예만 들어봐도 그들의 생활방식은 중국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우리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푸른 눈의 서양사람이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문화는 똑같아서 그게 그거다라고 말하면 누가 동의하겠나. 그만큼 복잡한 형태를 보이는 중국의 문화를 모두 한마디로 된 모범답안을 요구하니 난감할 뿐이다.

 

그런데 중국의 문화를 아주 간단하게 양분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남과 북을 나누는 것인데, 험하기로 유명한 친링산맥과 그 연장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은 문화가 사뭇 다르다. 험난한 지리적 격리와 역사적으로 고대 국가들의 경계, 심지어는 기후대까지 남방의 아열대와 북방의 온대기후 지역으로 나뉜다. 고대문명은 항상 강을 끼고 발달했는데, 북방은 4대 문명의 대표지인 황하가 중심이 되고, 남쪽은 장강이 그 젖줄의 역할을 한다. 남방은 따뜻한 기후에 수로가 많고 식물이 잘 자라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했고 북방에서는 험준한 산지가 많아 농사보다는 수렵문화가 주가 되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항상 중국은 남파와 북파의 구분이 있어왔던 것이다.

  

평상 생활에서만도 음식의 경우 북방은 기름진 고기가 주류며 남방은 채소와 갖은 양념이 어우러진 요리가 많은데, 마시는 차도 북방은 발효도가 높고 남방은 맑은 청차가 주로 많다. 의복의 색깔만 봐도 염색이 발달한 남쪽의 것이 더 다양한 색상을 보이며, 형태도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북방의 옷은 기마족의 그것처럼 무수(武袖)라고 불리는 좁은 소매에 타이트하게 매여있고, 남방은 문수(文袖)라고 불리는 넓은 소맷자락을 휘날린다. 여성의 머리 모양도 뒤로 혹은 양 가로 모아 묶은 북방의 호방한 여인과 구름처럼 치장한 남방의 아리따운 여인은 달라 보인다.

  

어디 그뿐이랴 의식주로부터 생활방식 습관이 모두 차이가 나니 모든 분야에 구분이 지어졌다. 험한 산지에서 말을 타며 수렵하던 북방의 무술은 동작이 크고 파워풀함에 비해 수로가 많은 남방의 무술은 좁은 배나 방 안에서도 시전이 가능한 동작이 크지 않고 절제된 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가끔 북한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본 듯한 빠른 음악과 격렬한 절도 있는 무용 동작이나 고성의 노랫가락이 북방의 것임을 알 수 있고, 부드러운 선율과 감성적인 음악에 차분한 동작의 무용이 남방 문화를 느끼게 한다. 언어는 물론이요 사용되는 어휘와 문법도, 그림을 그려도, 서예 작품에도, 악기의 형태에도 거의 모든 분야가 남파와 북파라는 이름으로 구분되고 있다.

 

그렇게 큰 문화권을 어찌 남과 북으로 양분할 수만 있겠느냐마는 각 지역 연구에 들어가기 전 첫 단계로 남북의 구분은 기본상식이 된다. 중국 문화에 대한 일관성 있는 단답은 힘든 것이니 중국 진출의 계획이 성립되면 먼저 남북을 구분하고 그런 다음 해당 지역 연구를 통한 조사를 거쳐야만 문화적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015.01.15 중국인들이 한국인 욕할 때 뭐라고 할까?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인기 화장품 브랜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조선DB

 

별별 희한한 일만 생기면 중국이 자주 거론된다

 

중국으로 여행 가는 사람마다 필자에게 중국은 위험하다던데 라며 질문을 시작하는 것도 표준코스며 마치 사건 사고의 백화점처럼 기상천외한 작태들이 소개되고 역시 중국은...이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재고할 문제가 많은 부분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백배에 해당하는 넓은 땅에 토지비율로 대비하자면 한국에서 사건 사고 기행이 한 건 발생하면 중국에서는 백 건이 발생해야 정상이다. 다음으로 인구 오천만의 한국과 14억에 육박하는 중국을 인구비율로 대비하면 한국의 엽기행각이나 사고 한 건당 중국은 28건이 정상이 아닌가.

 

중국에 가면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자주 듣는 기분 나쁜 이야기들이 많다.

 

“백화점이 무너지기 쉬우니 가지 말라던데요?

 

“멀쩡한 다리도 잘 무너진다던데 건물들은 안전해요?

 

“인신매매를 하는 위험한 나라라면서요?

 

“남편이 부인을 때린다면서요?

  

“한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 여자를 살해 암매장했다던데 겁나는 나라네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상식 밖의 질문도 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말은 “그 작은 나라에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별난 사건들이 나나요?” 라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개혁 개방이 우리보다 훨씬 늦었고, 경제체제의 자율화 또한 얼마 전에 시작된 바다. 그런 중국의 현재 변화 속도는 우리네가 경제 기적을 일으키던 그 시절의 속도를 열 배 이상으로 내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의 상품이 저가품의 대명사였던 시절 오늘날처럼 세계인이 우리 상표가 붙은 차를 타고 우리 기업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리라는 생각은 희망이자 꿈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중국의 변화 속도라면 몇 년 안에 우리를 앞지르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국에서 무슨 신기한 사건 사고만 나면 ‘역시 중국답다.’ 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일까 반문해 봄이 필요하겠다.

  

상품의 질은 일단 무시하더라도 중국제품의 세계시장 잠식도는 이미 촘촘한 멸치포획망을 구축했는데, 한 경제 전문가의 말을 들어본바 일본의 상품 제작은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마무리 작업을 완벽하게 하기로 유명하여 이를 100으로 보았을 때 한국은 80, 중국은 50이 안된다고 한다. 기술이 없어서일까?

 

기초공학은 세계의 선두요, 핵보유국에 세계 경제의 핵심을 화교 상권이 지니고 있고, 우주개발을 하는 나라다. 사회주의의 나태 경제에서 깨어나는 순간 일본의 제품도 순식간에 몰락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한 무역인이 한국에서 온 바이어들은 이상하다며 한 말이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 물품의 가격대가 폭이 매우 넓다. 바이올린의 예를 들어보면 수 억 원대의 명품으로부터 인민들이 배우려고 하면 쉽게 배울 수 있어야 하기에 우리나라 돈으로 단돈 만 원도 하지 않는 바이올린도 있는 곳이 중국이다. 이렇게 제품의 등급이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있으면 한국의 수입상들은 견본은 1등급을 보면서 수입은 15등급을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조차도 시장에 내놓기 곤란하다는 말도 소용없이 가격만 싸면 된다는 한국의 수입상들 때문에 자신들이 들어도 황당한 저가품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국가적 제품 이미지 실추가 심히 염려된다고 했다.

  

중국인들이 자주 하는 한국인에 대한 평가를 잘 새겨보며 반성하고 고쳐가며 또 미래를 대비함이 좋겠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다들 너무 멋지고 다정다감하고 기분파며 친근감이 넘쳐요……. 술만 마시면 다리가 네 개가 되고 안하무인으로 사람 무시하고 멸시하며 제멋대로고 폭력적이에요...

  

오죽했으면 한국 사람을 욕할 때 ‘까오리 빵즈(高麗棒子) - 몽둥이 들고 설치는 고려인이라고 할까

  

2015.02.03 중국은 왜 福자를 거꾸로 붙이나

▲전통 가옥에 붙은 춘련(春聯).

 

새로운 한 해가 오고 만물이 소생함을 상징하는 입춘이 오면 중국인들은 집 앞 대문에 ‘춘련(春聯)’이란 것을 붙인다.

 

‘춘첩(春貼)’ 혹은 ‘문대(門對), ‘대련(對聯), ‘대자(對子)’ 라고 부르기도 하는 우리나라에서 입춘에 ‘입춘대길’의 춘련을 써서 붙이는 것과 비슷한 문화인데, 고대로부터 중국 한족은 이 춘련을 써 붙여서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역할을 하게 해왔다.

  

요즈음은 입춘에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춘절 즉 새해 첫날에 붙이는 경우가 더 많아 중국인들의 설날 즉 춘절 새해맞이의 중요한 풍습으로 자리 잡은 문화다.

  

새해를 맞아 집안 가장은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중국인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붉은색의 종이에 새로운 한해의 염원을 댓구로 써서 문의 양쪽에 붙이고, 위에는 가로로 ‘횡비()’ 라고 부르는 일종의 제목 같은 의미로 글을 붙이는데, 한가운데는 보통 한 글자로 ‘복()’이나 ‘춘()’을 붙여 마무리한다.

 

▲표준 스타일 춘련. 福자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그런데 가운데 자리 잡은 이 福자나 춘 자가 바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붙은 것이 대부분이라 설마하니 한자를 쓰는 나라에서 싯구를 대련으로 써서 붙이는 수준의 사람이 한자를 잘 몰라서 거꾸로 붙인 것은 아닐 테고 문화권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이다.

  

혹자는 福이 뒤집혀서 쏟아지라고 그리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福이 하늘로 올라가지 말고 내 집에 내 땅에 뿌리박기를 염원하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언어유희에서 기인한 습관이다. 중국어로 ‘뒤집혔다.’ 라는 말은 ‘따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도착하다’ ‘와 닿았다’ 는 의미의 ‘따오()’와 발음이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이 뒤집혔다’ 는 말이 ‘복이 왔다’ 라는 말로 들리기에 어서 오라는 염원을 담아서 글을 거꾸로 붙이는 것이다. 사람을 찾는 광고나 구인 광고도 사람 인()자를 거꾸로 붙여놓았음은 사람을 찾는 광고에서는 어서 오라는 바램이요 구인광고상에서는 ‘급구’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풍습으로 인하여 매물 전단도 거꾸로 붙어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서 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관문에 춘련을 붙이는 어느 가장.

  

춘련을 붙여야만 새로운 한해의 운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대문에만 붙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 대문에 붙이는 ‘가문대(街門對)’ 외에도 집안 경내의 건물 입구에 붙이는 ‘옥문대(屋門對)’까지 붙이는데, 지금은 이도 모자라 현대식 구조물의 가정 내 방문마다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근자의 중국 춘절에는 직접 쓴 글씨보다는 인쇄된 춘련을 사서 붙여놓은 것이 대부분이라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2015.02.17. 28억 중국인들의 목숨 건 귀성전쟁 - 춘윈(春運)

 귀성차표를 구하려는 사람들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 문화권이라 명절이 비슷하기도 하다. 전통적인 5대 명절을 꼽으라면 새해의 시작인 설날에 해당하는 춘제 –한자로는 춘절(春節)-, 대보름인 원소절(元宵節),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은 굴원을 기리며 종즈를 만들어 먹는 음력 5월 초닷새 단오절(端午節), 우리네 한가위인 월병을 먹는 것으로 유명한 중추절(仲秋節), 음력 9월 초아흐레 양수 중의 제일 센 양이 두 개 겹쳤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중양절(重陽節)은 수유나무를 머리에 꽂고 액을 피하며 국화를 감상한다. 이 중양절 하루 간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가 <황후화>이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로 명절이란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역시 얼마나 쉬느냐가 관건이라 법정 공휴일이 가장 긴 춘제와 51일 노동절, 101일 국경절이 더 반겨지는 명절이 되었다. 법정 공휴일이 사흘이라고 해도 지키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기업이나 기관도 실제로는 상당한 휴일을 더 주고 있기에 중국과 사업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이 기간에는 연락에도 상당히 애를 먹기도 한다.

  

전통 명절이던 현대적 의미의 명절이던 춘제는 양쪽에서 최고 순위를 지키고 있는데, 실제로는 1주일 이상의 휴일을 가지는 곳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중국인의 사고방식 속에는 대보름까지 보름은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할 정도다. 그래서 보름 정도는 국가 기능이 마비된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귀성 행렬을 실감 나게 볼 수 있는 것이 이 춘제이기도 한데, 올해 예상으로 28억 명의 이동이 있을 거라고 하니 총인구의 두 배가량의 이동이라는 말이다. 중국어로 설날 귀성행사를 '춘윈(春運)' 이라고 하는데, 가히 전쟁이라는 표현을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부분이다

 

손에 손에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지고 메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모습은 마치 피난길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열차표를 사기란 하늘의 별 따기요, 표를 구하려면 춘제 전 일 이주를 다시 허비해 가며 노숙을 해야 구할까 말까다. 오죽했으면 열차 매표소 여직원이 최고의 며느릿감이라는 말이 기정화 되었을까.

 

중국의 열차는 크게 네 가지로 좌석이 구분되는데 2층 침대가 두 개 있고 문이 달린 4인실 롼우오(軟臥), 복도에 늘어선 3층 침대로 채워진 잉우오(硬臥), 우리네 열차같이 좌석으로 된 롼쭈오(軟座), 입석 칸을 겸한 잉쭈오(硬座) .

 

고달픈 서민 노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 잉쭈오는 표를 구했다 하더라도 못 탈 수도 있는 희한한 열차다. 개찰과 동시에 그 무거운 짐들을 들고 달려 열차 앞에 도착하면 일단 짐부터 차창으로 던져 넣고 올라탐이 기본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몰리는 승차문 보다는 차창으로 올라타지만…. 평상시에는 열차승무원과 공안들이 창으로 올라오는 승객을 몽둥이로 밀어내지만 춘제만은 어쩔 수 없는 듯 차창으로 승객들을 밀어 올려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나마 요즘은 법이 강화되어 열차 지붕에 올라가는 사람은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1990년대만 해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열차에 올라타도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공간 속에서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고향까지 공중부양으로 가야만 한다.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40여 시간을 가는 것은 그나마 가까운 거리라 하니...

  

늘어난 자동차로 인해 자가용 귀성객도 엄청나게 늘었는데 도대체 차가 얼마나 늘었는지 도로도 주차장이 되는 건 매한가지라, 시내의 왕복 24차선 도로가 막히는 것을 보면 어안이 벙벙하다.

  

요즘은 오토바이를 이용한 귀성객이 늘어나고 있는데 편해는 보이지만 산더미 같은 짐을 싣고 가족들을 태우고 멀리는 10여 일 간의 장정길에 오름이 결코 편할 리가 없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고향에 도착하면 오죽 기쁘랴. 인지상정이라고 보름 정도 고향의 따스함을 맛보고 나면 다시금 그 전장과도 같은 일자리로 복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편히 함께 살자는 말 한마디라도 듣게 되면 여지없이 그로기 상태가 되어 휴일 후 복귀율이 떨어지게 된다.

 

이를 춘제 이직이라고 하는데, 춘제 기간이 끝나도 미복귀 인원들로 인한 일손이 모자라 당분간은 제대로 된 생산이 힘들다 하여 중국과 사업하는 사람들도 춘절 기간을 전후해서는 물건 주문을 꺼리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춘윈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의 설날 귀성길은 나들이 정도로 웃어넘겨도 될 것 같다.

 

▲대합실 풍경

 

▲고향가는 길인데 짐이야 뭐 그리 무거우랴

 

▲최고의 결혼대상자 열차 매표소 직원

 

▲개찰구가 열리면 일단은 달려야 한다

 

▲승차문으로 타기가 더 어려운 열차

 

▲문보다 더 편한 창문 승차

 

▲춘제에는 승무원도 창으로 올라타도록 돕는다

 

▲운행중 열차안의 풍경

 

▲늘어난 차량으로 도로도 막히기는 마찬가지

 

▲늘어나는 오토바이 귀성족

 

▲늘어나는 오토바이 귀성객

 

고향만 갈 수 있다면 이런 방법도

 

2015.02.27 중국의 화폐단위는 원()인가 ()인가

▲중국과 교류가 늘어나는 가운데 서울 명동거리에 사설 환전소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주변을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조선DB


이제 경제적으로 한중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밀접한 경제대상국이 되고 말았다.

 

달러나 엔화를 능가하는 위안화의 공세에도 필자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실수를 하는 대목이 있다. 중국의 화폐단위를 물어보면 그 한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폐단위는 우리나라와 같은 원(圓)이다. 이를 중국어로 발음하면 yuan.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면 ‘위엔’이 되겠지만 제대로 된 중국어 표기방안이 없는 터라 ‘위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이 화폐단위 ‘圓’을 ‘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의 화폐단위를 나타내는 한자는 ‘元’이 아니라 ‘圓’이 맞다. 모든 중국 화폐에 분명히 ‘圓’ 이라고 적혀있다.

 

이 런민삐(人民幣)라고 불리는 중국의 화폐는 RMB 혹은 세계시장에서는 CNY 로 표기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달러를 $, 우리나라 화폐단위를 ₩, 일본 엔화를 ¥로 표시하듯 화폐단위 표시 기호가 필요하게 되었다.

 

발음상 위안화는 ¥가 적당하겠지만 일찍이 세계 환율시장에서 일본이 이를 선점한지라 사용할 수가 없는고로 중국다운 한자를 이용한 표시기호로 같은 발음의 원(元)자로 표기하게 되었다. 비록 한자이지만 여타 화폐단위의 기호와 어딘지 모를 동질성이 느껴지고 해서 무난히 사용되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한국사람이 중국의 화폐단위가 기호로 등장한 元을 원래 화폐단위로 오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元자는 서구권 문화에서는 여전히 요상한 기호로만 보였는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자 경제초대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이 과감하게 일본이 선점하고 있는 ¥를 자국화폐단위 기호에 元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국제 환율시장에서 일본의 엔화와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圓인지 元인지도 헷갈리지만 발음은 같아 별 무리가 없겠다 싶은데도 실제 언어를 말할 때는 중국인들은 화폐단위를 위안이라고 하지 않고 고대에서 사용해오던 방식으로 콰이(塊)를 사용하니 표기와 실생활에서의 용어는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폐에 적혀있기로는 100圓이라 되어있고, 글로 쓸 때는 100元이라 쓰고, 말을 할 때는 100콰이(塊)라고 하는데, 상품에 붙어있는 가격표는 100¥로 표기되어있는 복잡성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영어의 cent처럼 전 단위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1원은 100전이라 10진법으로 나가다 갑자기 100진법으로 둔갑을 하니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상당히 힘든 단위가 되었다. 그래서 물건 가격표에 100원을 100.00¥라고 표기한 뒤의 두 자리는 전 단위가 된다. 이 전 단위 또한 복잡해서 10전 단위를 지아오(角)이라 적어놓고 말할 때는 마오(毛)라고 하며 단 단위인 전 단위를 펀(分)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머리가 깨질 단계에 접어들지만, 중국의 갑작스러운 급속경제발전으로 불과 몇 년 사이 전 단위는 거의 사라지고 우리나라 1원짜리 만큼이나 역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기껏해야 쇼핑을 하며 따로 지급하는 봉투 가격이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요금으로 50전에 해당하는 5마오가 가끔 사용될 뿐이다. 앞으로 몇 년이면 이마저도 보기 힘들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태환권이라 불리는 외화와 바꾼 화폐가 따로 있었지만, 자유경제체제의 도입으로 이도 사라진 지 오래니 중국과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간단한 중국어 조금 익혀 중국여행을 가 중국어를 구사하며 쇼핑을 해보려고 상점에서 중국어로 뚜오사오치엔? 이라며 가격을 물어보면 어이없게도 한국말로 답변이 날아오던지 가격을 찍은 계산기를 들이밀 정도로 경제문제에 있어서 중국은 최고의 교역대상국이 되었다. 결국 익혀놓은 몇 마디 중국어는 차라리 명동에 가서 쓰는 게 더 편한 세상이니 말이다. 

 

2015.03.17 중국의 러브스토리 '양산백과 축영대'

나라마다 오랫동안 구전되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미오와 줄리엣, 우리나라의 이몽룡과 성춘향처럼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는 세계인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중국은 넓은 대륙을 자랑하듯 수많은 러브스토리가 전해지는데 우리도 잘 아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 항주 서호를 무대로 펼쳐지는 허선과 천 년 백사 백소정의 이야기를 다룬 백사전,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맹강녀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인 누구나가 제일로 손꼽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있다.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사랑 이야기를 중국인들은 줄여서 양축(梁祝)고사라고 하는데 이 양축은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만큼 그 인기와 매력을 자랑한다.

 

오래전부터 민간설화로 구전되어오던 이야기로 당나라 때 <십도사번지(十道四蕃志)>를 시작으로 여러 서적에 그 기재가 보이는데 지금은 그 내용과 무대도 여러 가지 판본으로 나뉘어 여남판본, 항주판본, 미산판본, 제성판본 등... 유명한 판본만도 7가지 이상이 전해진다.

 

소설 속의 삽화
 

중국의 서진 시대 상우현에 학문에 뜻을 둔 축영대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월주에 있는 한 유명한 스승을 찾아 수학을 하려 하였다. 하지만 아녀자에게 수학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그 시절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장을 하여 사내 행세를 한다는 조건으로 어렵사리 수학의 길로 떠나게 되는데 가는 여정길에서 동창이 될 선비 양산백을 만나고 몇 달에 걸친 여정에서 영대는 산백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월주에 도착한 두 사람은 동문으로 생활을 하게 되고 여러 차례에 걸친 아녀자의 신분이 들통 날 위기를 모면해가며 공부하는 3년 동안 영대의 마음은 이미 산백을 사랑하게 된다.

 

3년 후 급히 귀향하라는 집의 전갈을 받고 떠나는 영대를 귀향길 중간까지 산백이 전송을 하게 되는데 그 기간 내내 영대는 한 쌍의 꾀꼬리, 물속에서 쌍쌍이 노니는 잉어들을 자신들에 비유하며 계속되는 암시를 주지만 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산백은 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헤어질 무렵이 다가오자 급해진 영대는 자신과 닮은 여동생과 혼인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게 되고, 이에 흔쾌히 승낙하는 산백과 영대 자신이 여동생을 대신하여 사당에서 함께 향을 피우고 혼약을 맺는 절을 올리는데 한사람밖에 모르는 비밀 혼약이 성사되는 순간이다.

 

중간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다시 몇 달이 흐른 후 서로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고 학당으로 돌아온 산백에게 스승의 부인인 사모는 영대가 사실은 여자임을 밝히고 어서 축가로 떠나도록 종용한다.

 

짐을 풀지도 못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 축가로 가는 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영대가 암시를 했던 바를 뒤늦게 깨달은 산백은 스스로를 멍청한 소라고 자책하며 어렵사리 축가에 당도한다.

 

여인의 복장을 한 영대와 재회한 산백은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축가에서 영대를 마씨가문의 자손과 정략결혼을 시키기 위하여 귀향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로 헤어진 그는 그 충격으로 병을 얻게 되며 결국 죽고 만다.

 

출가하는 날, 영대를 태운 꽃가마는 마가로 떠나는 길에 산백이 묻힌 묘가 있는 남산을 지나게 되고, 영대는 행렬을 잠시 쉬게 한 뒤 가마 속에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산백의 무덤 앞에서 남편을 잃은 부인의 곡을 한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폭풍이 몰아치며 산백의 무덤이 갈라져 영대는 그 무덤 속으로 뛰어들고 무덤은 다시 닫혀버리고 만다.

 

안정을 되찾은 후 시종들이 산백의 무덤을 살펴보니 아가씨의 옷자락 끝만 보이는지라 그것을 잡아당기니 한 쌍의 나비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다.

 

▲나비로 변하는 두 사람을 조각한 작품

 

 

▲기념지에 조성된 산백묘 갈라진 흔적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 이야기는 민간설화로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남방지역에서는 월극으로, 서쪽 내륙에서는 천극으로 공연이 되어왔고, 중국의 전통 그림자극인 피잉시(皮影戱)로도 전해졌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극, 영화, 드라마, 무대극, 무용, 애니메이션,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로 소개되고 있다.

 

▲그림자 극 피잉시(皮影戱) 양축

 

▲오페라로도 공연되는 양축

 

▲현대무용으로 공연되는 양축

 

▲뮤지켤 양축 중에서

 

1962년 이한상 감독은 황매희극의 스타일로 뮤지컬식 영화를 만들었는데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감동적이며, 영화 전반에 걸쳐 노래로 이루어진 황매희곡들은 사람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59년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 양축은 중국에서 유사 이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곡으로 인정받으며 거의 모든 악기로 즐겨 연주되는 명곡이다. 색소폰 연주가 케니. G 도 그 곡에 매료되어 독주를 한 바가 있다.

 

▲이한상 감독의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

 

여러 판본이 전해지는 관계로 중국의 각 지역마다 양축의 본고장이 자기 마을이라며 앞다투어 기념지를 만들고 행사를 하는데 양축기념 우표의 발매를 두고 지역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오간 적도 있으며 심지어는 양축이라는 술도 만들어 상술에 이용하고 있다.

 

▲여남의 양축문화공원

 

▲양축 이야기의 고향임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

 

▲술로 등장한 양축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세계를 휩쓸자 이에 대항할 중국전통의 애니메이션으로 양축이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국내에서는 그 인지도가 약해서인지 보기가 힘들다.

 

▲애니매이션 양축

 

그러나 사실 이 양축의 이야기에 한국은 오래전부터 그 영향을 받았었고 조선 시대에는 한국식으로 쓰인 작자 미상의 양산백전이라는 소설도 있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똑같지만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이 너무나 가슴 아팠는지 그 뒷이야기를 멋지게 꾸며놓았다. 한 쌍의 나비로 변해 승천한 두 사람의 사랑에 옥황상제가 감동하여 그들을 환생케 하고 부부로 생활하게 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양산백이 큰 공을 세우며 영웅이 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나라마다의 문화유적지나 문물들은 외국인들에게 큰 매력임이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무형의 설화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위력을 자랑하는, IS가 아무리 망치를 휘둘러도 물질적인 파괴가 불가능한 멋진 문화재가 아닐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러브스토리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2015.04.09  ! 부처님과 예수님이 나란히? - 중국의 먀오() 문화와 만신교

그 옛날 70년대, 무협소설에 빠져 있을 무렵,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부상을 당하고 위기에 봉착하면 항상 몸을 피하는 곳이 낡은 묘라는 곳이다. 그 시절 상식으로 묘란 무덤으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주인공으로 어찌 무덤 속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는 말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만 생각되었다.

 

타이완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길거리 곳곳에 자그마한 절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신기했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것은 절이 아니라 바로 무협지 속의 주인공 협객들이 위기를 피하던 단골집인 묘라는 일종의 사당이다.

 

특정 종교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그 옛날 동네 어귀마다 자리 잡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던 칠성당이나 서낭당 같은 사당의 일종으로 조상신을 비롯하여 온갖 군신들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다. 불가의 여래보살로부터 삼국시대의 무장 관운장, 송나라의 충장 악비, 그리고 공자, 서왕모, 한나라말의 명의 화타 등 분야를 따지지 않고 총망라된 성인이나 명인들의 집합 사당 형태를 이룬다.

 

▲사진01) 마을 한 귀퉁이의 작은 먀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성공을 기원할 때도 어김없이 먀오를 찾아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원하는 바의 답을 신에게 묻는다. 딱히 염원 거리가 없다 하더라도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먀오를 찾아 조상신들에게 하루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며 빠이빠이(拜拜)를 함이 일과의 시작이 된다. 그 순서로는 먼저 향을 사서 (좋은 향을 준비해 가는 경우도 많다) 전체 군신들에게 절을 하고 향을 올리고 개인적으로 찾는 신을 다시 찾아 향을 올리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사진02) 빠이빠이를 하며 향을 올리는 사람들

 

그 소원에 대한 신의 답을 듣고 싶으면 쟈오뻬이(筊杯)라고 불리는 반달형의 나무조각 두 개를 던져 답을 듣는데, 윷놀이에 사용되는 윷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두 개의 쟈오뻬이가 음양으로 하나씩 나오면 성배(聖杯)라고 하여 소원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고, 평면이 두 개 나오면 소배(笑杯)라고 하여 간단히 말하면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 다시 점쳐보라는 말이다. 윷의 모가 나오듯 두 개가 다 볼록한 면이 나오면 내 소원에 대한 신의 거부로 여기는데 그렇다고 낙심할소냐 신이 OK라는 답을 줄 때까지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런 다음 치엔통(籤筒)에 가서 대나무로 만든 괘를 하나 뽑고 거기에 적혀진 번호대로 풀이를 보며 빠이선(拜神)의 과정을 끝내는 것이다.

 

▲(사진03) 쟈오뻬이

 

어떠한 특정 종교의 의식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하기가 힘든데 먀오 안에 모셔진 수많은 불가의 부처상들을 보고 불가의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다분히 도교적 의식에 해당된다. 이렇듯 민중의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문화센터이다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찰처럼 심산유곡이나 인적 없는 산상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생활의 편의상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는 것이 이 먀오다. 자연적으로 먀오의 앞은 온갖 사람들과 장사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고 중심가가 아닌 중심가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맛있는 먹거리를 먹으려면 먀오제(廟街)로 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사진04) 번화가가 되어버리는 먀오 앞 거리

 

굳이 먀오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가정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두고 향을 올리는 코너가 있는 가정이 많은데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위패 앞의 향로에 향을 올리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된다.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위 그 위패를 모신 코너를 볼 수가 있었는데 조상의 위패 뒤로 돈을 벌어다 준다는 재신(財神)의 그림과 삼국연의의 세 주인공 유현덕, 관운장, 장익덕의 화상도 붙여져 있었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자그마한 석가모니의 불상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영문을 묻자 태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고행의 길에 들어서 득도를 한 부다는 성인이요, 내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며 목숨까지 내어준 예수 또한 성인이라 조상들과 함께 기도를 올린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부다와 예수의 동석 신단이 어찌나 그리도 신기했던지.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 옆에 붙어있던 액션 스타 브루스 리의 사진에 더 관심이 갔지만 말이다.

 

▲(사진05) 가정집의 간단한 신단

 

▲(사진06)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작업장에 조상신의 보호가 없을소냐

 

한국인은 신상명세를 물어볼 때 종교는 무엇인가요? 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는데 중국 사람들에게 한국에서처럼 이런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대답에 너무나 곤혹함이 드러난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다는 대답으로 필자가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아마도 도교가 아닐까요?” 라는 말이다. 도교라는 답보다 그 앞에 붙은 아마도 라는 말로 대답이 대신 되는 것 같았다. 모든 성인이 성인으로 추앙받고 상호 간의 갈등이 없는 이러한 형태의 중국인들의 종교 심리를 종교학자들은 만신교(萬神敎)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사진07) 신년맞이 빠이선 인파 (홍콩 대공보)

 

종교백화점이지만 항상 시끄럽기 그지없는 한국사회에서는 자숙해야 할 부분도 있지는 않을까

 

교류가 빈번해진 한중관계로 양국 국민 간의 접촉기회는 끊임없이 많아지고 지금도 끊임없이 한국인들은 별 생각 없이 “니신 선머 쟈오?” 라고 상대의 종교를 물어보고 어디 한 두 번 당했느냐는 투의 표정으로 또 시작이다 라며 관심 없다는 대답으로 “수이쟈오(睡覺-잠자요 잠)” 이라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볼 때 한국 사람들이 그네들에게 종교질문으로 참 많은 고문을 하고 있나 보다. 

 

2015.05.08 중국에서 만두 주문했다가 낭패를... - 만두는 만두가 아니다?

중국에 가서 중국어는 잘 몰라도 한자는 잘 안다며 식당에서 ‘만두(饅頭)’ 란 한자를 찾아내고 시킨 사람. 종업원이 얼마나 드릴까요? 라는 반응을 보이는듯하여 손가락을 두 개 펴고 20개를 달라고 하자 한참 뒤 가져온 만두는 달랑 두 개밖에 되지 않았다. 항변을 해야함이 정상이나 그럴 엄두를 못 내는 이유가 있었으니 우리가 평상시 보고 먹던 만두가 아니라 만두 두 개를 합치니 사람 얼굴 크기가 되는데 어찌 주문이 잘 못되었다고 다시 18개를 더 달라고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설상가상 이 만두란 놈을 아무리 베어 먹어도 안에 소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어쩌랴. 급기야 반으로 갈라보니 그래도 보이는 것이라곤 하얀 밀가루로 만든 빵과 같은 구조라 혹시 주방에서 실수로 소를 넣지 않은 불량품인가도 생각해 보지만 그것이 바로 만두다.

 

 만터우

 

우리나라에서도 만두는 이미 우리 음식의 하나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상식(常食)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 만두와 관련된 음식이 현재 중국에서는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우리와는 명칭이 상당히 다른 것이 문제다.

 

원래 만두란 삼국시대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맹획을 칠종칠금했던 그 당시 촉한의 군대가 노수(瀘水)를 건너가려 하자 강물에 파도가 일며 귀곡성이 울리니, 원혼들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는데 산 사람의 머리를 바칠 수 없어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음식이다. 안에 고기를 다져 넣고 둥글게 피를 말아 위에 상투처럼 머리 모양을 만든 이 만두가 송나라 때에 북방 사람들이 쓰던 포자(包子)로 이름이 변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원래 제갈량이 만든 만두에 소를 넣지 않고 간단히 빵처럼 쪄서 만든 것을 백만두(白饅頭)라고 하여 식사대용이나 건량으로 사용하던 것을 지금은 만두라고 부르니 원래의 만두는 포자가 되고 엉뚱한 것이 만두라 불리게 된 것이다.

 

 빠오즈

 

그리고 또 고대로부터 중국의 북방에서는 새해가 되면 먹는 명절음식으로 중국 동한 시대의 의성 장중경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교자(餃子) 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고기 등을 다져 소를 만들고 우리네 송편처럼 반달 형태로 피를 싸서 먹는 음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새해 음식이라는 점. 형태의 유사성. 북방의 전래음식이라는 점 등이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을 추리해 보기도 한다. 이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만두라고 부르니 음식 이름 하나가 심히 혼란스럽게 되어 버렸다.

 

 쟈오즈

 

정리해 보자면,

 

찐빵의 형태로 안에 소가 없이 크게 만들어 식사대용이나 건량으로 사용하고 제사에 올리는 것을 만두(중국어로 만터우)

 

제갈량이 만든 원형에 가까운 둥근 사람 머리 모양의 만두를 포자(중국어로 빠오즈)
우리가 흔히 보는 반달 형태의 만두를 교자(중국어로 쟈오즈) 라고 부른다.

 

만터우의 경우는 쉽게 구별이 되지만 빠오즈와 쟈오즈가 뭐가 다르냐고 의문을 가지기 쉬운데 첫째는 원형과 반달형의 형태 차이가 있고, 빠오즈는 쪄서 먹기만 하는 음식이지만 쟈오즈는 쪄 먹어도, 구워 먹어도, 물에 넣어 삶아도, 국을 해먹어도 된다. 그리고 기술적 차이로는 피가 다른데, 쟈오즈의 피는 얇고 갈분을 주로 하여 익혀도 부풀지 않고, 빠오즈의 피는 밀가루 성분이 많으며 익히면 두껍게 부푸는 것이 요리상 구분법이다.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1800여 년 전에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음식을 그 명칭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라 전통 고수에는 원조국가가 놀랄 일이다. 

 

2015.05.14  한중일 삼국의 한자(漢字) 삼파전 - 韓中日 漢字비교

▲김홍도의 서당도


동양의 한·중·일 삼국은 모두 공식적으로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다. 이 한자의 종주국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사용되는 삼국의 한자는 그 형태가 달라졌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한자의 간략화 작업을 거쳐 이전과는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고,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한자인데, 전통을 깨지 않으려는 민족성과 실제 사용의 빈도가 삼국 중 가장 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자는 복잡한 표의문자이기에 간략화 작업은 이미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고대의 전서가 진대에 예서로 간략화되었는데,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노역군과 죄수들을 통솔하던 한 관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사람의 인명을 복잡하기 그지없는 전서로 기록하려니 힘도 들지만, 시간적 낭비에 재촉되는 완공 압박에 견디다 못해 전서를 간략화시켜 쓰기 시작한 것이 예서가 되었다. 그래서 노예의 예자를 따 온 것인데, 글씨체의 우아함과는 다르게 예쁜 이름을 얻지 못한 연유다. 이후 해서 또한 전서의 간략화로 보며 이를 빠르게 속기하기 위한 행서와 초서가 등장하였듯 한자의 간략화 시도는 당나라 때부터 이미 기록된 바가 보인다.

 

현대에 와서 어려운 한자로 인해서인지 문맹률이 높았던 중국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35년 처음 한자를 간략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국민당의 반대로 무산되는 듯하였으나 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간략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956년 기존의 정자를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의미의 번체자라고 지칭하고 이를 간략화한 간화자인 간체자를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한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91,251자까지 집계된 바가 있는데, 이 많은 한자를 다 익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일상생활에서 실제 사용되는 한자는 2000여 자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에 대규모의 간략화를 시도하여 통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현재 중국대륙의 모든 서적이나 매체는 이 간체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자에 능숙한 한국인이라도 기존의 한자지식으로 읽어내기가 어려운 글자들이 상당수다.


일본 또한 기존에도 이러한 시도가 계속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실용주의의 대두와 함께 상당수의 한자를 자기네 식으로 간략화시켰는데, 중국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소박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의 형태를 바꾼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사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의 간략화 된 한자를 상당수 혼용하고 있는데, 약자, 속자, 통속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글자들의 상당수가 그러하다
.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뉜 한자의 형태가 일본식 한자는 일본에서, 원래의 정자는 한국, 타이완, 홍콩, 동남아 화교권에서, 중국식 간체자는 중국대륙과 싱가포르에서 사용되고 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인에게 한국식으로 한자를 써서 보이면 젊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떻게 젊은 사람이 옛 고자(古字)를 다 아느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대중매체의 발달이 크게 한몫하여 상호 간에 읽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통용이 되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중국어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의 간체자를 보면 여전히 신기한 글자일 뿐이다.

 

각자 나름의 세 가지 한자 형태가 존재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산의 발달로 전산 언어에 대한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중·일 삼국의 대책회의도 있었지만 별 성과 없이 필요성만을 확인하는 자리로 끝이 났다. 공식적인 한자의 사용도가 삼국 중 가장 낮은 우리나라의 원형태가 전산 통용자에서 불리한 입장이지 않을까 걱정은 되는데, 현대사회에서 국제화 인력이 되려면 세 가지를 다 익혀야 하는 고충이 생기고 만 것일까?

 

2015.05.27  중국의 바이올린...'얼후' 이야기 - ‘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

▲얼후.

‘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

 

그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음악의 특색이 살아 있는 음색과 선율의 대표로 이 호궁이란 악기가 가장 큰 인상을 남겼나 보다. 사실 호궁은 호금(胡琴)이란 악기의 별칭이 전해진 것인데, 우리나라의 해금과 원류가 같은 찰현악기이다. 호(胡) 라는 명칭은 한족(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이나 외래족을 지칭하는 말이기에 그 시발점은 중국이 아니었다. 몽골 대초원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북방의 악기인데, 모린호르(마두금)과 함께 호치르 라고 불린 초원 악기로 칭기즈칸의 대제국을 따라 세계 곳곳으로 퍼져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모린호르는 서양 음악에 영향을 주어 첼로의 탄생을 도왔다고 하며, 아시아권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호치르와 같은 형태의 악기를 볼 수가 있다.

 

당 나라 시기에 그 악기에 대한 기록이 보이기 시작하고 송말 원초에 그 형태가 정립되어 해금(奚琴) 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우리나라에 전해진 해금은 아직까지도 그 명칭과 함께 원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중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개량을 통해 호금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뉘었다. 저음부의 중호, 고음부의 고호, 경극반주용의 경호, 경이호, 이천금 등이 있는데, 그중 대표격이 되는 중음부의 악기를 지금은 이호(二胡), 중국어로 얼후라고 부른다.

 

중국의 바이올린이라는 소개와 함께 이미 세계 전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얼후라는 외래 악기가 중국을 대표하게 된 것에는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리우티엔화(劉天華)라는 근대 음악가가 서양음악의 음계와 형태를 가져와 1900년대에 들어 명주실을 꼬아 만든 현을 쇠줄로 바꾸고 지금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후 이야기를 하면 빠질 수 없는 민간 예술가 화옌쥔(華彦鈞)이 있다. 화엔쥔은 그 이름보다 예명이라 할 수 있는 아빙(阿炳)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도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으나 20대에 병으로 인해 실명한 시각장애인 음악가이다. 그의 대표작인 이천영월(二泉映月)은 지금도 얼후의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곡이며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한 이천이호(二泉二胡), 일명 이천금(二泉琴)이란 악기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단 한 곡의 음악을 위한 악기가 따로 존재함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일일 것이다. 리우티엔화의 개량과 정립에 아빙의 명곡전파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얼후를 음악교육의 주인공으로 만든 정책에 힘입어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통악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얼후는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이 있으며 밀도가 높은 홍목이나 오목, 단목등으로 만드는데, 흑단 혈단 자단 등이 고급재료이며 옛 홍목 고가구를 깎아 만든 노홍목 얼후를 최고로 친다. 중국의 전통악기 중 가장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와 흡사한 음색을 지닌 것으로 소개되는데 그 가죽은 망피(아나콘다나 왕구렁이의 가죽)를 사용한 것이 상품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그 음색의 애절한 매력 때문인지 엔카 반주 악기로 점차 인기를 얻고 있고, 우리나라를 방문해 공연을 하기도 했던 여자십이악방의 연주곡이 오리콘 차트에서 연속 1위 행진을 하며 대중화된 인기 악기 ‘니코’ 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화에 있어서 야생동물보호법으로 인하여 뱀 가죽이 문제가 되어 사슴 가죽을 이용한 일본식 얼후를 만들고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얼후의 음색에 반한 사람들이 모여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가요 곡에서도 반주 악기로 사용되고, 우리 국악인이 작곡한 얼후 협주곡이 있을 정도로 이미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악기가 되었다.

 

얼후를 배우고 연주하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왜 하필 중국 악기를 배우냐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에게 왜 하필 이탈리아(독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악기를 배우냐는 질문은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위에 오카리나를 부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어느 나라 악기냐고 물어보면 모두 꿀을 먹었는지 대답을 못 한다. 음악에 국경이 어디 있으며 음악은 세계인이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가 아닌가. 인도의 시타르를 배워도,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온을 배워도, 러시아의 바랄라이카를 배워도, 인디언 플룻을 배워도 세계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하다. 문화의 주요 부분을 하나 쥐고 나아가 이해하면 더 깊은 교류가 가능하니 악기 또한 교류와 세계화의 멋진 도구가 되지 않을까. 차 한잔을 마셔도, 커피를 마셔도, 위스키나 막걸리를 마셔도 이천영월이라는 곡 하나가 멋진 분위기를 연출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얼후경연대회 우승자 왕잉.

 

▲우한의 얼후 연주가 후즈핑.

 

▲악기상에 진열된 얼후들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한 얼후명인 지앙커메이.

 

 2015.06.06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남은 누구? - 미인계는 여자만   있나? 사대미남

미인계라는 병법의 예를 보면 하나같이 미모의 여성을 이용한 이야기만 등장한다. 그러면 미녀계라고 하지 않고 왜 미인계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미남계란 통하지 않는 술수가 되는 것일까. 희대의 미녀 스파이는 자주 등장해도 미남의 전형이라고 하는 루돌프 발렌티노 같은 남성의 전략적 이용 실례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제임스 본드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마도 남성의 용모가 절색이 되기에는 부족해서일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고구려의 낙랑국 침공에 왜 자명고는 울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일국의 공주가 스스로 자국의 군사 레이더망을 파괴하는 행위까지 저지르게 되었는지. 훤칠하게 잘생긴 호동이라는 남정네의 제비행각(?)에 나라 하나가 망한 예다. 이쯤 되면 마타 하리는 애교급이 아닐까.

 

미모를 이용한 전략에서는 항상 미녀의 경우가 예가 많은 것일 뿐 효과 면에서는 미남을 이용한 결과물이 더 큰 효과를 가져왔다. 선화 공주를 꾀어 달아난 서동이 미남이었는지는 기록이 확실치 않지만, 유랑자의 신분으로 일국의 공주까지 얻지 않았는가. 분단 시절 구 동독의 첩보기관에서 시행한 이른바 ‘로미오 작전(Operation Romeo)’ 이 처음 건의되었을 때 황당하고 유치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멋지고 건장한 남성 스파이들을 매너 넘치는 훈남으로 교육해 서독의 각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여비서들에게 접근시켜 정보를 빼낸다는 만화 같은 작전이었는데, 웬걸 몇 년도 걸리지 않아 혁혁한 성과를 올린 성공적 작전이 되어 지금도 첩보 역사에서 자주 거론된다.

  

중국의 고대 역사에서 사대미녀는 잘 알려져 있지만 사대미남은 금시초문이라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용모의 뛰어남이 사서에 기록된 남성 캐릭터도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역사 기록상 미남으로 손꼽히는 인물로는 반안(潘安)송옥(宋玉)조식(曹植)심약(沈約)난릉왕(蘭陵王)위개(衛玠)주유(周瑜)손책(孫策)용양군(龍陽君) 등 그 수가 미녀들 못지않게 많은데, 그중에서 사대미남의 타이틀을 획득한 주인공은 반안 송옥 난릉왕 위개 네 사람이다.

 

▲현대 작가의 상상 복원도 좌로부터 반안 송옥 난릉왕


가장 선두는 반안 인데, 서진 시대의 문학가인 그는 한번 외출을 하면 그를 따라다니는 여성들이 주는 과일과 꽃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온다 하여 “척과영거(擲果盈車)” 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래서 반안은 미남의 대명사가 되어 잘생긴 남자를 표현할 때는 항상 “모사반안(貌似潘安)” 즉 “용모가 마치 반안과도 같구나.”라고 했었다. 그런 뛰어난 용모의 반안이었지만 결코 얼굴값을 한답시고 풍류를 즐기지는 않았다. 부인을 지극히 사랑한 자상한 남편으로 소문났고, 부인이 죽은 후에도 애도의 문장을 남기는 등 인품에서도 칭찬을 받았다. 물론 반역죄로 처형은 됐지만...

 

▲반안상

 

▲척과영거

 

송옥은 굴원의 제자로 알려진 초사의 명인으로 특히 그의 작품 <구변(九辨)> 은 굴원의 <이소> 와 함께 이대 초사 걸작으로 칭해진다.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아름답기가 송옥과도 같구나!” 라는 ‘미여송옥(美如宋玉)’ 의 문구를 볼 수 있고, 그는 용모에 재기(才氣)를 겸비한 인물로 사랑받고 있다.

 

▲송옥상

 

▲송옥도

 

▲난릉왕상

 

마지막은 진나라의 현학자 집안의 선비 출신인 위개인데 그는 마치 보석이 주위를 감싸고 빛나는 것과 같다는 평을 들은 절세미남이었다

 

외출을 하면 그의 용모를 보려고 몰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결국 그를 구경하려고 둘러싼 사람들에게 시달려 2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만 비운의 미남자이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이 ‘간살위개(看殺衛玠)’ ‘구경하느라 위개를 죽였다.’ 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뛰어난 용모와 지략, 학문에 예술적 소양도 뛰어났지만, 제갈량이라는 인물로 인하여 이인자로 여겨지며 그 용모에 빛이 바래고만 주유, 용모에 문학적 천재성을 띄었지만, 왕위 다툼에 묻혀버린 조식 등 소위 재주 많은 꽃미남들은 절세미녀만큼이나 많았다. 대부분의 최후가 미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아름다운 바가 아니라 미인박명이란 말이 나왔겠지만, 그래도 조금은....아니 많이 부럽다.

 

▲위개도

 

2015.06.08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은 누구? -  사대 미녀는 누구일까?

중국 역사 속에는 수많은 미녀가 등장한다. 사서에 기록될 정도의 미모를 지녔던 인물로만 간단히 세어 봐도 백 단위는 가볍게 넘어간다. 그러한 미녀들의 미모에 대한 칭송은 현재에까지 이어지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역할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의 캐스트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미인을 일컫는 대표 성어로 경국경성(傾國傾城), 즉 나라도 성도 무너뜨리는 미색이라고 표현했을까. 미녀들이 등장하며 좋은 일보다는 나쁜 결과가 많았다는 말이다.

 

▲사대미녀도

 

사실 대부분의 미녀는 왕조의 멸망에 즈음하여 등장하면서 왕조의 종지부를 찍는데 크게 한몫을 해왔다. 최초의 왕조 하나라를 멸망케 한 말희(), 상나라를 무너뜨린 달기(妲己), 서주 시대를 끝내고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스타트 시킨 포사() 등등.


그러나 역사는 역사고 오로지 관심은 미모였던지, 누구의 미색이 더 뛰어난가 하는 논란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시도

 

그 많은 미인들 중에서 중국인이 손꼽는 만년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미인을 들라면, 춘추 말기 오월대전에서 오왕 부차로 하여금 미색에 빠지게 하여 월나라의 침공을 도운 서시(西施)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제 눈의 안경’이라는 뜻의 속담으로 ‘연인의 눈에는 서시만 보인다.’ 라는 말을 쓸 정도다.

 

▲왕소군도

 

그 뒤를 이어 주지육림의 말희와 달기, 웃음 한 번에 천금을 들인 포사, 초상화 한 장 때문에 오랑캐 땅으로 팔려간 왕소군(王昭君), 당나라의 최후에 불을 붙인 양귀비로 알려진 양옥환(楊玉環), 전설 속의 인물로 불사약을 먹고 달로 간 항아라고도 불리는 상아(嫦娥),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다는 조비연(趙飛燕), 실존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럽고, 후대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가상으로 만든 인물로 추정되는 후한 말기 동탁을 양아들 여포에게 죽게 만든 초선() 등이 여전히 최고 미녀의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귀비도

 

▲초선도

 

중국은 항상 베스트를 뽑으면 네 가지를 자주 거론한다
 
그래서 사대기서, 사대 자객, 사대신화, 사대천왕이라는 말들이 많은데, 중국 최고의 미녀라고 일컫는 소위 사대미녀
 
네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는 서시, 왕소군, 초선, 양옥환 이다. 이들 네 사람은 매란국죽의 사군자처럼 화폭에 옮겨지는 단골들로 미인을 나타내는 대표어휘 네 가지를 하나씩 꿰차고 있다. 
 
서시가 냇가에서 수건을 씻는 모습에 물고기가 그 미모를 보고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浸魚). 
 
변경을 나서 흉노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의 비파소리에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졌다 해서 ‘낙안(落雁). 
 
초선이 달을 쳐다보면 달이 그 미모에 움츠려져 구름 뒤로 숨었다 하여 ‘폐월(閉月).

술에 취한 양옥환이 화원에서 꽃을 만지면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 이야기의 ‘수화(羞花)

 

▲침어낙안 폐월수화

 

그래서 경국경성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그 미모에 대한 최고의 찬사어로 ‘침어낙안 폐월수화’ 가 절세가인을 대표하는 말이 된 것이다. 오천 년 역사 속의 챔피언급 미모인 침어낙안 폐월수화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인지상정인데 타임머신이 있지 않고서는 그 자태를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고, 초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포함된 것으로 볼 때 상상으로 만족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역사 속 수많은 미인들의 기록을 볼 때 지금도 그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래도 해외토픽에서조차 하늘을 날던 새가 미인을 보고 떨어졌다는 말은 안 들리네.
 

2015.06.30  중국의 팔대 명주(八大名酒) 이야기

중국은 요리문화에서만큼은 세계최강을 자랑하는데 그에 어우러져 차도 종주국일 뿐 아니라 술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술 문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세계 3대 명주라 하면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프랑스의 브랜디, 그리고 중국의 마오타이를 꼽는다. 그래서 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한국인들이 중국에 가면 중국 술을 맛보는 것은 필수코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술 문화성. 술도 관광 자원이다

 

▲쓰촨의 주류 제조 공장

 

중국 술은 일반적으로 백주(白酒)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주를 지칭하듯 그리 부르는 것인데 많은 사람이 술이 투명한 색상이라 백주라 부르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재료에 의한 명칭을 붙이자면 고량주라고 해야 하겠지만, 중국 역사를 통틀어 술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당대의 시선 이백(李白)이다. 시에서 일인자임은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지만 술에 있어서 일인자임은 단 한 사람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한 그의 이름을 따서 일반평민들이 누구나 쉽게 접하고 마시는 중국인의 술이라는 뜻으로 백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백의 조각상. 술잔이 트레이드 마크다

 

이 백주는 지역마다 그 이름이 있는데 그 명칭을 다 알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리 전산화가 되어도 중국 전역에서 생산되는 술의 종류와 명칭은 집계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의 소주가 각 지방별로 상표화된 이름을 가지듯 중국의 매 지역마다 고유명칭을 가진 술이 나오고 그 종류 또한 기백이 넘는 곳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바이다

 

▲상점에 전시된 중국술들

 

수도 베이징의 경우, 남편을 여읜 과부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새 남편을 들이자 마을 사람들은 옛 베이징 방언으로 재가한 여자, 즉 이과두(二鍋頭)라고 불렀고 생계가 어려웠던 그녀는 빚어 팔던 술의 맛이 가히 일품이라 뒤에서는 험담을 해도 그녀의 술을 얻어 마시려면 그녀 앞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이웃 행세를 해야만 했다 한다. 물론 사실은 제조법의 솥 운용법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그러한 이야기에서 연유되어 베이징의 고유 백주를 이과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베이징의 백주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산둥 지역의 백주는 이름이 백건(白乾), 중국어로 ‘바이깐’ 인데 현지 방언의 마지막 어미 얼()이 첨가되어 보통 ‘바이깔’ 로 발음하던 것이 한국에 전해져 지금도 빼갈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통용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중국의 술 들 중에서 1952년 최초로 중국 명주 콘테스트를 거쳐 마오타이를 비롯한 사대 명주를 선출했는데 그 이후 1963, 1979년에는 8대 명주를, 1984년에는 13대 명주를, 1989년에는 17대 명주를 선출한 바 있다. 보통 항간에서는 8대 명주가 통칭되고 있는데 수상경험이 있는 모든 술이 서로가 8대 명주라고 우기는 통에 종류는 많아졌지만, 현재의 순위별로 볼 때 한국인들 누구나가 한 번쯤 들어본 구이저우의 마오타이(茅台), 그리고 동주(董酒), 행화촌의 명주인 펀주(汾酒), 우량이에(五粮液), 역사를 자랑하는 루저우라오치아오(瀘州老窖), 맛으로는 최고라고 하는 지엔난춘(劍南春), 상나라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시펑주(西鳳酒), 안후이 성의 구징꽁(古井貢)등이 현재 8대 명주로 통용되고 있다.

 

▲팔대명주

 

일본의 통치하에 50년간을 지낸 타이완에서 중국 술과 일본의 청주를 결합하여 만든 죽엽청같은 술도 명주대열에 가끔 끼기도 하나 전통술이 아니라는 개념으로 인하여 8대 명주에는 들지 못했지만 각 술의 제조상마다 자신의 술을 8대 명주에 넣어서 소개함은 어딜 가나 일반화되어버렸다.
  
특히 마오타이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여 국빈주로 이용되는 것은 물론 구이저우 공장의 생산량이 모자라서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베이징 근교에 제2공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동일한 공정을 거쳤는데도 그 술맛이 너무 차이가 나자 재료의 문제로 여기고 모든 재료와 물까지 구이저우에서 공급해 와서 다시 생산해 본 결과 여전히 향미의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에 학자와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그 원인을 찾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구이저우의 기후 습도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환경을 갖추지 않고서는 동일한 맛을 내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왔고, 그래서 지금도 소위 꾼들은 마오타이만 보면 제조공장을 확인한다. 구이저우의 것인지 베이징의 것인지를. 하지만 그 유명세만큼 가장 가짜가 많은 술이라는 오명도 갖게 되었다.

 

▲마오타이

 

중국 술은 일반적으로 그 도수가 높아 독하기로도 이름나 있는데 보통 백주는 30도대와 40도대, 50도대, 60도가 넘는 원장주 등으로 구분되는 것이 많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모두가 두주를 불사하였는데 시선 이백은 한 말의 술로 시 100편을 썼다 하고, 진나라의 시인 도연명도 사서에 단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다 하였으니 그 주량이 놀랍다. 수호전의 양산박 호걸 중 무송은 일반 술잔도 아닌 밥사발만 한 술잔으로 술 석 잔을 마시면 언덕을 넘지 못한다고 하는 경양강을 18그릇을 마시고 올라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으니 웬만한 우리네 주당들이 넘보지 못할 주량이었나 보다. 예술적 에너지도 육체적 파워도 술의 힘을 이용했다는 농담도 일반화되었다.

 

▲시인 묵객의 음주도

 

▲무송타호도

 

단지 한국 사람들이 중국으로 가 그 유명하다는 술들을 다 마셔보고 싶은 욕심이었는지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로 이름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10여 년 전이지만 한 중국인 교수로부터 한국인에 대한 평을 들은 바가 아직도 가슴을 찌른다.
 
“한국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꾸밈이 없고 기분파며 친근감이 넘쳐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멋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술만 마시면 모두가…….” 라고 고개 저으며 한 말이.◎